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병보석
    2026-04-18
    검색기록 지우기
  • 112 신고
    2026-04-18
    검색기록 지우기
  • 마돈나
    2026-04-18
    검색기록 지우기
  • 신뢰도
    2026-04-18
    검색기록 지우기
  • 팬 응원
    2026-04-18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13
  • ■鄭泰守씨 입 연 배경뭘까

    ‘모르쇠’가 트레이드 마크였던 鄭泰守전한보그룹총회장이 지난 4일 태도를 180도 바꾼 배경은 복합적이다. 국민회의는 ‘공식적’으로는 확실한 물증을 주요인으로 꼽는다.金元吉정책위의장은 “97년의 한보청문회에서도 ‘鄭전총회장이 300억원을 金泳三전대통령의 대선자금으로 건넸다’는 지적을 했었다”면서 이번에 대어(大魚)를낚은 게 우연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당시에는 금액만 대충 알았지만 이번에는 정치자금을 건넨 시기,장소,금액을 확실히 파악한 데다 수표번호까지 알았기 때문에 鄭전총회장도 부인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金의장은 “그때 문간까지 갔는데 확인하지 못한 게 억울해 계속 추적해왔다”면서 “2년간 정성을 들였다”는 말까지 했다. 그의 말대로 정권교체로 확실한 물증을 확보한 게 굳게 닫힌 말문을 연 중요한 요인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국민회의는 청문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정권교체로 확실한 물증을 갖고 있다”고 자신감을 보였다.이 요인 외에여권의 설득작업도 한몫을 했다.공소시효가지난 데다 처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직·간접적으로 전달했다.金元吉의장은 직접 鄭전총회장을 만나지는 않았지만 다른 의원들이 접촉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자민련 李健介의원은 鄭전총회장을 지난달 28일 직접 안양병원에서 만나 설득하기도 했다. 국민회의는 鄭전총회장의 3남인 鄭譜根전한보그룹회장과 처제를 연결통로로 활용했다.수표번호를 확보했다는 것을 알려 정치자금 제공사실을 인정하라는 뜻도 전했다. 鄭전총회장이 사업에 대한 미련 때문에 사실을 폭로했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그가 “3,000억원만 있으면 한보철강을 정상화시킬 수 있다”면서“내기를 해도 좋을 것”이라고 큰소리를 친 것을 이런 맥락에서 풀이하기도 한다.鄭전총회장은 사실을 인정하면서 사면이나 병보석 등을 물론 기대했을 수도있다. 정치권에서는 빅딜설과 사전 교감설도 나돌지만 국민회의는 물론 부인하고있다.金의장은 “(이러한 오해를 받을까봐) 鄭전총회장을 면회한 적이 없다”면서 “근처에도 간 적이 없다”고 말했다.
  • ‘모르쇠’ 鄭씨 심경변화 이유는

    ‘모르쇠’ 鄭泰守전한보그룹총회장이 심경변화를 일으킨 이유는 뭘까.그는 4일 金泳三전대통령에게 92년의 대선자금으로 150억원을 전달했다고 폭탄선언을 했다.97년 4월의 한보청문회에서는 정치자금 얘기만 나오면 일관되게“모른다” “공식적인 자금 외에는 한푼도 주지 않았다”고 부인해왔다.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모르쇠’다. 鄭전총회장이 심경변화를 일으킨 데는 국민회의·자민련 특위위원들의 집요한 설득이 큰 몫을 했다는 후문이다. 정권교체라는 환경변화도 그의 입을 열게 하는 여건을 제공했다.이날 국민회의 金元吉정책위의장이 질의에 들어가기 전 “97년 4월 당시에는 우리가세(勢)가 약해 많은 것을 밝혀내지 못했지만 지금은 정권도 바뀌었다”고 운을 뗀 데서도 감지된다.金의장은 “사실을 밝혀내는 데 도움이 된 연결고리가 있다”고도 말했다.정권교체로 정보와 제보도 당연히 폭주했다는 뜻이다. 청문회를 앞두고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鄭전총회장에게 사실대로 증언하라는 뜻을 직·간접적으로 집요하게 전달하기도 했다.金의장은 鄭전총회장을 직접 만나지는 않았지만 ‘확실한 물증을 갖고 있느니 사실대로 밝히는 게 좋다’는 뜻을 전했다. 자민련 李健介의원은 지난달 28일 안양병원에서 鄭전총회장을 만나 공소시효도 끝났고 처벌하려는 게 목적이 아니므로 진솔하게 사실대로 말하도록 권유하기도 했다.이 자리에서 鄭전총회장은 농담반 진담반으로 “요즘 같은 풍토에서는 사업을 못하겠으니 정치나 해야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鄭전총회장의 진술을 빅딜로 해석하기도 한다.정치자금 제공 사실을 인정하면 건강이 좋지 않은 鄭씨를 병보석으로 풀어줄 수도 있다는 뜻을 제시했을것이라는 설도 나돈다.야당가 주변에서 그럴싸하게 떠도는 설이다.
  • 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8회)

    매카시즘적 풍조가 문학인의 창작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현실적으로 보여준 구체적인 사건이 발생한 것은 1953년 휴전 직후였다.주인공은 나환자시인으로 명성을 올린 한하운이었고,사건 전말은 일부 언론매체가 그의 시집 ‘한하운시초(詩抄)’를 ‘적기가(赤旗歌)’같은 선동시로 몰아치면서 “민족적인 미움을 주자” 고 매도한 데서 발단됐다.‘빽’도 돈도 없었던 이 문둥이 시인은 졸지에 언론이 만든 ‘문화 빨치산’으로 취급 당해 관련 기관으로 불려 다니며 고초를 겪은 뒤 자신의 시를 고쳐쓰지 않으면 안될 딱한처지임을 절감하게 되었다.그는 원작에 되도록 손이 덜 가도록 몇 행을 빼고는 마지막에 한 줄을 첨가한 뒤 시 뒤에다 주(註)를 붙여 창작 배경을 변호해야만 되었다. 그날 이후 한하운이란 이름으로 나와있는 각종 시집이나 연구논문,각종 전집이나 시선집에도 원작은 간 데 없고 빨갱이로 몰려 부득이 고쳐 쓸 수 밖에 없었던 시작품을 고스란히 얌전하게 옮겨쓰고 있다.시에 못지 않게 문둥이라는 신체적인 조건에다 애달픈 로맨스로 더유명했던 한하운은 문학사의이채로운 존재로서 삽화적으로만 다뤄지면서 정작 그의 사회인식이나 역사적 활동은 도외시 당해왔다.바로 그 단적인 예가 시 ‘데모’ 개작 한 편에 축약되어 나타난다. 우선 현존 시집에 실린 시 ‘데모’(1)와 발표 당시의 원작(2) 전문을 소개한다. (1) ‘데모-함흥학생사건에 바치는 노래’“뛰어들고 싶어라/ 뛰어들고 싶어라.// 풍덩실 저 강물 속으로/ 물구비 파도 소리와 함께/만세 소리와 함께 흐르고 싶어라.// 모두들 성한 사람들 저이끼리만 /아우성 소리 바다 소리.//아 바다 소리와 함께 부서지고 싶어라/죽고 싶어라 죽고 싶어라/ 문둥이는 서서 울고 데모는 가고.//아 문둥이는죽고 싶어라.” (2) ‘데모’ “뛰어 들고 싶어라/뛰어 들고 싶어라.// 풍덩실 저 강물 속으로/ 물구비파도소리와 함께/ 만세 소리와 함께 흐르고 싶어라.// 물구비 제일 앞서 핏빛 깃발이 간다/ 뒤에 뒤를 줄대어/ 목 쉰 조선사람들이 간다.// 모두들 성한 사람들 저이끼리만/쌀을 달라! 자유를 달라!는/아우성 소리 바다소리.//아 바다소리와함께 부서지고 싶어라/죽고 싶어라 죽고 싶어라/문둥이는 서서 울고 데모는 가고.” (1)은 현재 시판 중인 시집에 실린 것으로 부제는 1946년 3월 13일 함흥 학생시위 사건이다.한하운 자신도 이를 구경하다가 연행 당해 병보석으로 출옥했으나 다시 반국가 사범으로 투옥,역시 병세 악화로 석방,나병 치료약을 구하러 월남했다가 귀향 중 피체 당했다. 그리고 이감 중 원산에서 탈옥하여월남한 것이 1947년 8월이었다고 자전적 시 해설서인 ‘황토길’에서 밝힌다. (2)는 해방직후 최대의 종합월간지였던 서울신문 발행 ‘신천지’ 1949년 4월호에 월북시인 이병철의 추천사와 함께 실린 등단 당시의 작품이다.이것은 정음사에서 같은 해 5월30일에 낸 시집 ‘한하운 시초’에 그대로 실렸고,이어 1953년 6월 30일 재판본에도 그대로 게재되었다. 한편 ‘서울신문’은 1953년 10월 17일 ‘하운 서울에 오다-레프라왕자 환자 수용을 지휘’란 제목의 기사를 작품 ‘보리피리’와 함께 게재했다.사회부 오소백(吳蘇白)부장과 문제안(文濟安)차장의 사임으로까지 비화되었던 이 사건이야말로 매카시즘이 문학만이 아니라 언론계에도 암적으로 작용했음을 엿보게 한다.문제의 기사는 “4만5천명의 나병환자를 지도하는 문둥이의 왕자가 서울에 나타나서 서울 거리를 방황하는 나병환자들을 시 위생과의 협조아래 수용하기 시작했다”를 서두로 시인이자 나환자로서의 그의 각종 사회봉사활동을 간략히 소개한 뒤 “더욱이 한하운 시집으로 말미암아 문단에 여러 가지 파문이 던져지고 더구나 일부 신문에서는 마치 한하운이란 사람은유령과 같은 가상인물이라고 까지 말하고 있는 지금 한씨의 출현은 나병환자들에게는 물론 문단과 일반에게도 크나 큰 센세이션이 아닐 수 없다.”고 그특종성을 부각시켜 사진까지 게재했다. 任軒永문학평론가
  • 정직한 역사되찾기-친일의 군상(20회)

    ■친일 고문경찰 盧德述 지난 8월 정부기록보존소가 건국 50주년을 맞아 공개한 ‘이승만관계 문서 철’(1949년 1월분) 가운데는 이런 내용의 기록이 있다. ‘반민특위(反民特委)의 무분별한 난동은 치안과 민심에 중대한 영향을 주 는 터이므로 헌법 범위 내에서 단호한 대책을 강구하신다는 유시(諭示)에 대 하여 법무장관은 노덕술을 반민특위 조사관 2명이 반민특위 사무실내 금고에 2일간 수감하였다는 보고가 유(有)하고 대통령 각하는 차(此) 불법 조사관 2명과 그 지휘자를 체포하여 의법처리하며 계속 감시하라 지령하시다’(‘시 정 일반에 관한 유시의 건’중에서) 위 내용은 이승만 대통령이 49년 2월 12일 국무회의에서 일제때 고등계 형 사 출신이자 수도청(서울시경 전신) 수사과장을 지낸 노덕술을 체포한 반민 특위 조사관들을 체포,감시하라고 지시한 내용이다.그동안 이 대통령이 반민 특위의 활동을 못마땅해 했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 대통령이 친일경찰 출신인 노덕술을 체포한 반민특위 조사관과 그 지휘관을 체포하라고 직접지시한 사실은 처음 밝혀진 내용이다.즉 이 대 통령이 친일파를 비호했다는 주장이 문서로 공식 확인된 셈이다.전 국민이 친일파 처단을 부르짖던 그 시절,대통령까지 나서 비호한 노덕술은 대체 어 떤 인물인가? ▲제1사단 헌병대장 시절의 노덕술(당시 계급은 소령임) 盧德述(1899∼?·창씨명 松浦鴻)은 일제때 대표적인 친일경찰 가운데 한 사 람이다.해방무렵 그는 조선인으로서는 불과 수 명에 불과한 경시(警視·현 총경계급에 해당)까지 승진한 극소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특히 그는 일제하 27년간 사상관계 사건,즉 독립운동 관련 사건만 취급한 고등경찰 출 신으로 일제로부터 훈7등 종6위의 훈장까지 받았다.그의 친일성을 보여주는 몇 가지 사례들이다. 1949년 1월 9일 화신백화점 사장 朴興植에 대한 검거를 시작으로 반민족행 위자 검거에 돌입한 반민특위는 보름만인 1월 25일 새벽 2시경 마침내 노덕 술을 검거하였다.그를 체포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반민특위는 1월초 부터 ‘노덕술 체포대’를 편성,그의 행방을 수소문했으나 좀처럼그의 은신 처를 찾을 수가 없었다.이유는 간단했다.경찰이 그의 신변을 보호해주면서 비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중 특위는 노덕술이 그의 애첩 金花玉의 집(관훈동 29번지)을 들락거 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곳을 급습,그의 은신처를 알아냈다.체포대는 곧바 로 그가 은신해 있던 李斗喆(당시 동화백화점 사장)의 집(효창동 소재)을 덮 쳐 그를 체포하였다.체포 당시 노덕술은 권총 여섯 자루와 도피자금 34만 1 천원이 든 가방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체포후 서울형무소에 수감중이던 그는 3월 30일 특별검찰부 徐成達 검찰관에 의해 정식 기소돼 재판에 회부됐다. 이로써 친일경찰에 대한 단죄가 시작된 것이다. 노덕술은 경남 울산출생으로 울산보통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일본인이 경영 하던 잡화상의 고용인 노릇을 하기도 했다.1920년 경남 순사교습소를 졸업한 후 경남 경찰부 보안과 근무를 시작으로 친일경찰의 길에 들어섰다.20년대 에 그는 주로 경남지방의 여러 경찰서에 근무하였는데 당시 그의 직책은 사 법경찰이었다.그러나 그는 고등계 경찰의 소관업무인 사상사건(독립운동 관 련사건)을 자발적으로 취급하면서 일제에 충성을 과시하였다. 1929년 金圭直이 회장으로 있던 비밀결사조직 ‘혁조회(革潮會)’를 탄압, 김규직 외 1명을 사망케 하고 그 관계자들을 2∼3년간 복역케 하였으며 동래 경찰서 사법주임 시절에는 ‘동래고보 맹휴(盟休)사건’에 관련된 학생들의 사찰과 검거에 앞장선 것으로 밝혀졌다.또 1929·30년 여름 조선인 일본유학 생들이 하계휴가를 이용,귀국하여 강연회를 개최하자 이들이 일본정치를 비 난했다는 구실을 들어 강연자 수 명을 검거,취조하였다. 1932년 통영경찰서 사법주임 시절에는 반일단체인 M·L당(黨) 조직원 金載 學이 메이데이 시위행렬에 참가하였다는 이유로 그를 직접 검거하여 혹독한 고문 끝에 송국(送局),벌금형을 받게 하였다.이같은 공로로 그는 1934년 평 남 보안과장으로 승진,출세가도를 달렸다.일제말기인 1944년 평남 경찰부 보 안과장 재직시에는 화물자동차 다수를 직권으로 징발하여 군수품 수송에 제 공케 하는 등 일본의 침략전쟁 수행에 협력한사실도 있다.조선인이라는 신 분과 빈약한 학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고위직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일제 에 대한 그의 남다른 충성심 때문이었다. 한편 반민특위가 그를 체포할 당시 그의 죄목은 ‘반민법 위반’ 하나만이 아니었다.그는 이미 ‘수도청 고문치사사건’의 피의자였으며 체포후에는 다 시 ‘반민특위요원 암살음모사건’ 피의자 죄목이 추가되었다.소위 ‘수도청 고문치사사건’은 張澤相 저격용의자 林和가 수사도중 사망하자 경찰은 임 화가 조사도중 도망했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경무부 수사국장 趙炳^^이 담당경찰관을 조사한 결과 고 문치사로 밝혀졌고 그 배후에는 노덕술과 崔雲霞 두 사람이 있었다.그러나 당시에는 장택상이 수도청장으로 있으면서 노덕술 일파를 비호하고 있어 수 사를 못하고 있다가 48년 9월 金泰善이 새 수도청장으로 부임하면서 노덕술 에 대한 체포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김태선 역시 “당시 공산당 타도에 공이 많은 선배를 경찰의 손으로 체포할 수 없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어서 그의 신변보호를 위해경찰관 4명을 그의 궁정동 자택에 파견했다”고 밝힌 바 있다.(‘국립경찰 창설’ 51회, 중앙일보·74.12.11) 한편 노덕술이 반민특위에 검거된 직후 극우 테러리스트 白民泰(일명 鄭民 泰로 해방전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했다는 주장도 있음)가 놀랄만한 사실 하 나를 폭로하였다.구속된 노덕술이 주동이 돼 서울시 경찰국 수사과장 崔蘭洙 ·부과장 洪宅喜 등이 자신에게 반민특위의 중견요원인 盧鎰煥·李文源 등 간부 7∼8명에 대한 암살을 부탁했다는 것.노덕술 등은 백민태에게 이들을 시외 모처로 납치해 강제로 ‘우리는 이남에서 살 수 없으니 이북으로 가겠 다’는 내용의 유서를 받은 후 암살해버리면 뒷처리는 경찰이 알아서 하겠다 고 했다는 것이다. 특위요원들에 대한 암살음모가 공개되면서 특위와 친일경찰 진영은 극한대 립으로 치달았다.당시 친일경찰 세력을 정권의 한 축으로 삼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노덕술의 석방을 요청하지만 반민특위는 이를 묵살하였다.49년 6월 6일 발생한 친일경찰들의 반민특위습격사건(소위 ‘6·6사건’)은 이때부터예견된 사건이었다. 노덕술을 비롯해 이 사건 관련자 4명은 검찰에 구속돼 재판에 회부됐다.49 년 5월 29일 열린 제7차 공판에서 “피고인들이 수사의 권위자로 많은 공로 가 있으나 증거가 충분한 만큼 만행을 묵과할 수 없다”고 하여 각각 징역 4 년을 구형받았다.그러나 반민특위 습격사건 후 특위가 무력해진 가운데 열린 선고공판에서 노덕술은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인정받았고 최난수·홍택희 등은 각각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노덕술은 당장 석방되지는 않았다.‘반민법위반’ 사건처리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이 역시 그리 오래 끌지 않았다.반민법 개정으로 공소시효가 8월 31일로 단축돼 반민특위는 껍데기만 남은 형국이었다.반민피 의자로 기소된 자 가운데 극소수만 재판을 받았으며 이들도 대부분 공민권 정지나 집행유예·병보석 등으로 풀려났다.또 실형선고를 받은 자들도 재심 청구를 통해 대부분 석방되었다.김태선의 증언에 의하면,노덕술 역시 병보석 으로 출감돼(일자 미상)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반민특위가 해체되면 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한다. ‘한국헌병사’에 따르면 그는 9·28수복 당시 제1사단 헌병대장(소령)을 지냈다.이후 부산CID(육군범죄수사단)와 서울 15CID 대장을 역임한 그는 金 昌龍 특무대장이 모종의 비리사건 관련자로 그를 구속시키면서 역사의 무대 에서 사라지고 말았다.경찰청 조회결과 그의 생사에 대해서는 아무 기록도 남아있지 않았다.흔적도 없이 사라질 한 생애를 그는 악행(惡行)만 쌓다가 간 것이다.
  • 국난 극복을 위하여/金承均 남북민간교류협의회 이사장(서울광장)

    K형. 담시 오적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형의 근무처인 민주전선을 찾은 것이 어제 같소 그려. 그때 민주전선 편집국장도 함께 구속되었기에,아니 김세영 선생이 특별히 사상계와 민주전선에 애착을 갖고 있어서 인사차 방문했었고,그때 K형은 감옥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불려가서 심하게 조사받고 오적시가 게재되어 있던 민주전선이 몽땅 압수되었다고 비분강개하던 것이 기억에 생생하오. 나는 그 후 천관우·함석헌·김재준·이병린 선생님을 모시고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일을 했지 않았소. 독재를 물리치려면 선거나마 공정하게 치러야 한다면서 선거참관단을 조직,전국에 파견하던 그 기개와 그 장엄함,살벌하던 독재에 항거하여 민주수호의 기치를 높이 들고 불호령하던 노지사들의 모습이 아련한데 그 분들은 모두 이 땅에 계시지 않는 구려. ○새로운 가치질서 확립 그 분들의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고결한 인품,해박한 지식,불굴의 기백,절절한 국가민족에 대한 사랑과 인류애는 후학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지의 어른들인데 소홀히 대접받고 있다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아쉬움을 털어내려는 듯 서울신문이 친일매국노를 단죄하고 민주열사들의 자서전을 연재하여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데 기여하겠다 하니 이 어찌 가슴 설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수백만에 이르는 실업자들과 고통을 분담하기 위하여 명망 높은 성직자들과 시민단체가 발 벗고 나섰다는 보도는 “우리는 아직도 희망이 있구나”라고 자위를 하게도 합니다. 그런데 정부가 성취해야 할 두 마리의 토끼,즉 개혁과 통합이 방향을 잘못잡았다는 우려가 못내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습니다. 국민의 정부는 개혁을 전제로 탄생한 정부입니다. 국가부도의 원인이 정경유착에 의한 부정부패,관치금융,기업의 버블과 불투명성,이로 인한 국제투기꾼들의 외화 인출에 의한 유동성 부족이었다고 볼때 개혁은 하지 않으면 안되는 엄숙한 명제입니다. 통합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통합을 지역적 안배 차원에서만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김영삼 정부 시절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온국민의 지지 속에 처단했던 최규하·전두환·노태우에게 면죄부를 쥐어주면서 통합의 상태로 끌어올릴 수 있겠습니까? 낡은 권위주의,부정부패 등 전도된 가치관을 과감히 청산하고 민족문화를 창달함은 물론 새로운 가치 질서를 세워야 합니다. 권위주의시대 방식의 명망가 운동은 이제 약효가 없습니다. 그러한 방식은 살벌한 군사독재 시절 국민이 숭앙하던 지조 높은 어른이 나서야 국민이 용기를 내어 감히 독재에 항거할 수 있었던 시절의 한 모습니다. 이제는 지역단위 중심의 실업자 구호운동이 필요한 때입니다. ○실업자 구호운동 펴자 K형. 우리는 4·19혁명을 일궈낸 세대입니다. 혁명의 와중에서 반공청년연맹이 불탔습니다. 만약 혁명정부가 반공청년연맹을 부활시키려 했다면 국민정서가 받아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새마을운동본부를 개조한다는 보도가 있습니다. 국민운동이 필요하면 새 운동을 일으키고 새마을운동 하던 사람들도 실사를 거쳐 구제하여 참여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새마을운동 하면 우선 전 아무개의 이미지와 독선·억압·부정부패의 온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국민정서에 어떻게 투영되어 있는지를 면밀히 고려해야 합니다. 단체의 정체성을 무시하면 게도 구럭도 잃는 결과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의식의 구조조정이 절실할 때입니다.
  • 한려대·광주예술대 첫 강제 폐쇄/교육부

    ◎재단 공금횡령으로 정상운영 불가능/신입생 모집 중단… 재학생 졸업후 폐교/교원·시설 부족 서남·광양대 정원 감축 교육부는 3일 설립자의 비리 등으로 학내 분규가 계속되고 있는 한려대와 광주예술대를 폐쇄하기로 했다. 또 교원과 교사(校舍) 확보율이 현저히 낮은 서남대와 광양대의 정원을 각각 492명과 519명 줄이기로 했다. 교육부가 학내 분규를 이유로 폐쇄 조치를 내리기는 정부수립 이후 처음이다. 고등교육법은 정상적인 학사운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학교 폐쇄명령을 내릴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한려대와 광주예술대는 99학년도부터 신입생 모집이 중지되며 1년의 폐쇄 계고기간을 거쳐 재학생이 모두 졸업하는 2002년 또는 2003년에 폐쇄된다. 한려대는 95년 설립됐으며 학생수는 정원의 35%인 2,301명인 산업대학이다. 지난해 설립된 4년제 일반대학인 광주예술대에는 196명의 1,2학년생이 재학중이다. 李洪河씨(59)가 설립한 이들 4개 대학은 李씨가 지난 해 공금 횡령혐의로 구속되면서 학생과 교수들의 소요로 파행운영이 계속됐다. 이 때문에 한려대는 교원이 정원(307명)의 26.4%인 81명,교사확보율은 25.5%에 불과하다. 운영자금 잔고도 4만3,000원으로 바닥을 보일 정도로 극심한 재정난을 겪고 있다. 설립자 李씨는 지난 해 5월 등록금과 국고보조금 등 426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검찰에 구속돼 1심에서 징역 2년6개월을 선고받았으나 병보석으로 풀려난 뒤 항소심에 계류 중이다. 교육부 관계자는 “앞으로 사학 경영자의 부정·비리는 물론 열악한 교육환경에 대해서도 경영책임을 물을 방침”이라고 말했다.
  • ‘천안문 9돌’ 주역들 지금 어디에

    ◎王丹 등 학생지도자 대부분 美서 활동/시위대 동조 趙紫陽 실각후 ‘연금 족쇄’/진압 선봉장 李鵬 상무위원장에 취임 89년 천안문(天安門)사태의 주역들은 무엇을 하고 있나. 시위를 주도했던 학생지도자들과 강경진압으로 유혈참사를 일으켰던 국가지도자들.9년이 지난 지금 학생지도자들은 대부분 미국으로 빠져나와 평범하게 살고 있고 국가지도자들은 권력투쟁속에 영(榮)과 욕(辱)을 달리했다. 계엄령 선포를 강행하며 강경진압에 압장섰던 리펑(李鵬·71)은 올 3월 총리연임을 마치고 국회의장에 해당하는 전인대 상무위원장에 취임해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군개입을 반대하던 군지도자들을 설득해 유혈진압을 실질적으로 지휘했던 군원로 양상쿤(楊尙昆·92) 전 국가주석은 유혈참사 다음해에 鄧小平의 견제로 공직에서 밀려난뒤 국가원로로 말년을 보내고 있다.천안문광장에서 시위학생들을 만나 눈물을 흘리며 해산을 호소했던 자오즈양(趙紫陽·79) 당시 총서기는 ‘당을 분열시켰다’는 이유로 유혈진압직전 실각된 뒤 감시속에서 골프와제한된 외부 접촉만을 유지하고 있다.7년동안 수감생활을 한 바오퉁(66) 정치국 비서처럼 趙의 측근들은 정치적으로 거세되거나 옥고를 겪었다. 미국서 생활하고 있는 학생지도자들은 대중국 반체제활동에 가입해 있으나 의외로 활동은 활발치 않다.‘수배 1호’였던 북경대 사학과생 왕단(王丹·33)은 올 9월 하바드대에 입학할 예정이며 학업재개와 함께 자유아시아방송(RFA)에서 평론가로도 일할 계획이다.6년5개월동안 감옥에 갇혀있던 王은 지난달 중국과 미국의 막후 협상 끝에 병보석으로 풀려나 미국에 왔다. 96년 5월 홍콩으로 탈출한 뒤 미국으로 망명해 중·미 관계를 불편하게 했던 북경대 대학원생 리우캉(劉剛·36)은 뉴욕에서 머물고 있다.수배 2호였던 시위대대표 우얼카이시(吾爾開希·30)는 미국의 한 중국어방송서 일하며 대만여자와 결혼해 대만과 미국을 오가고 있다. 시들한 학생지도자들의 반체제운동과는 달리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팡리즈(方勵之·62) 전 합비(合肥)과기대 교수와 엔지아치(嚴家其·56) 전 사회과학원 정치연구소부소장은 미국대사관과 인권단체의 도움으로 무력진압직후 국외로 탈출,파리와 미국에서 ‘민주중국’ 등 잡지발간과 民聯 등 단체를 이끌며 강연과 집회로 활발한 민주화운동을 벌이고 있다.
  • 中‘천안문 주역’王丹 석방/병보석 허가… 신병 치료차 美로 떠나

    【베이징 新華·AFP·DPA 연합】 중국의 저명한 반체제 인사인 왕단(王丹.29)이 19일 병보석으로 석방돼 신병치료차 미국으로 떠났다고 중국 사법부가 밝혔다. 사법부의 한 대변인은 중국 관영 新華통신 기자의 질문을 받고 질병을 앓고 있는 王이 치료를 받기 위해 외국으로 갔다고 말했다. 앞서 王의 어머니인 王링연은 AFP 통신과의 전화통화에서 자신과 남편이 전날 랴오닝(遼寧)성 교도소로 가 그를 만나 보았으며 당국으로부터 그가 19일 아침에 비행기편으로 미국으로 떠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말했다. 지난 89년 톈안먼(天安門) 민주화 시위 당시 학생지도자로 알려진 王은 지난 96년 12월 정부전복혐의로 11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중이었다.
  • 위경생·블레어·카르도소/뉴스위크지 선정 올해의 인물

    ] 미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21일 국제판에서 ‘올해의 아시아인’에 중국의 지도적 반체제 인사 위경생(47)을, ‘올해의 유럽인’에 토니 블레어 영국총리를, 그리고 ‘올해의 라틴아메리카인’에 페르디난도 엔리케 카르도소 브라질 대통령을 각각 선정, 발표했다. 중국 민주주의 운동의 아버지로 간주되고 있는 위경생은 지난 11월 병보석으로 석방된 뒤 미국으로 건너가 망명생활을 하고 있다. 미국으로 망명한 뒤에도 미국정부에 대해 중국 내 인권상황을 향상시키고 있다는 중국측 주장에 현혹되서는 안된다는 촉구를 계속, 반중국 활동을 계속해 지난 미·중 정상회담에서 중국내 인권문제를 주요 의제로 다루게 하는 등 중국정부에게는 눈엣 가시같은 존재로 계속 남아 있다. 지난 5월 총선에서 보수당의 18년 집권을 종식시키고 노동당의 압도적 승리를 이끈 블레어 총리는 취임 후 수많은 국내외 정책을 성공시키고 있다고 찬양을 받아왔다. 카르도소 대통령은 라틴아메리카 최대의 브라질 경제를 안정시키는데 성공했으며 정치구조를 현대화했다는 평판을 받고 있다
  • 신명순 교수 변호사대회 심포지엄 주제발표 요지

    ◎검찰 독립 없인 ‘권력형 부정’ 못막아 신명순 연세대 정치학과 교수는 최근 서울 인터콘티넨털호텔에서 열린 제9회 법의 지배를 위한 변호사대회 심포지엄에서 ‘권력형 부정·부패방지를 위한 방안’이라는 주제발표를 했다.주제발표 내용을 간추린다. 정치권의 권력형 부정·부패는 정부수립 이후 계속되어 온 현상이다.비리의 유형은 불법적 정치자금의 수수와 이에 얽힌 정치비리다.불법적 정치자금은 정치자금을 규제하는 법률에 위배되는 자금을 의미한다. ○정치권 눈치보기 허다 현행 정치자금법은 합법적으로 정치자금을 모금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있다.그런데도 불법적으로 자금을 수수하는 이유는 제공자에게 이권을 보장하거나 부정을 폭로하지 않는다는 묵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범죄를 사법처리하지 않고는 권력형 부정·부패를 막을수 없다.이 때문에 검찰의 역할이 중요하다. 권력형 부정·부패를 제어하려면 검찰이 권력으로부터 독립돼야 한다.특히 정치권의 부정·부패는 ‘정치적’이 아니라 ‘법적’으로 처리돼야 한다.역대 정권에서 검찰은 독립성을 갖춘 사법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집권세력의 하수인 역할을 하거나 정치권의 눈치를 보는 경우가 허다했다.검찰의 눈치수사는 정치인들에게 부정부패나 비리를 자행해 사법처리를 받더라도 정치적으로 잘 해결되리라는 인식을 심어줬다.권력형 부정·부패가 지속될 수 있는 풍토를 조성한 셈이다. 권력형 부정·부패의 근절을 저해하는 또다른 요인으로 사법부의 특별대우를 들 수 있다. 한보비리사건을 볼때 구속기소된 피고인들의 대다수가 병보석이나 형집행정지 등의 결정으로 형기를 마치지 않았다. 이런 관행으로 말미암아 권력형 부정·부패로 크게 한탕한 뒤 잠시 교도소에 가서 쉬다가 오기만 하면 된다는 잘못된 인식이 만연됐다.또 국민들에게는 권력형 부정·부패는 항상 용두사미로 끝낸다는 불신을 심어줬다. 변호사의 역할도 문제다. ○관련자 변호 거부해야 권력형 부정·부패에 연루돼 재판을 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유능한 변호사를 동원한다.비슷한 죄를 범한 일반 피의자에 비해 훨씬 낮은 형량을 받고 얼마후에는 출소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따라서 변호사들은 권력형 부정·부패 관련자에 대한 변호를 거부,준엄한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해야 한다. 제도적으로 고비용 정치풍토도 개선돼야 한다.선거비용을 대폭 줄이고 정당의 지구당조직을 폐지해야 한다.국회의원선출방식을 대선거구 비례대표제로 바꿀 필요도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권력형 부정·부패는 최고 권력자의 의지,검찰과 사법부의 법치주의 확립,언론과 시민사회의 계속적인 감시 등을 통해서만 해소될 수 있다.
  • 동경성의 대종교(송화강 5천리:27)

    ◎발해 도읍지서 꽃핀 민족종교/1930년대 본거지 구축… 동북3성서 독립운동/발해농장·이상촌 건립… 조선족에 살길 열어/단군섬이던 교인들은 일제탄압에 뿔불이/자금난 본떠 만든 궁궐터엔 깨진 기왓장만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은 해동성국으로 일컬었던 발해국에서 따온 지명이다.발해역사 229년동안 두 번이나 도읍지가 되었던 상경용천부는 바로 발해진에 있다.동경성이라고도 불리는 상경용천부의 도성은 당나라 장안성을 본떠서 조영했다는 것이다.장방형을 이룬 도성은 외성과 내성,궁성을 갖추었다. ○궁궐터를 밭으로 개간 오늘날 남아있는 외성에는 버드나무가 길길이 자라 숲이 되었다.북쪽 외성의 길이는 5.5㎞,남쪽 길이는 5㎞,동서 길이 3.5㎞에 달했다.외성안에는 마차가 다니는 80m의 거리가 질서정연하게 구획되어 당나라 장안을 방불케했다는 것이 학자들의 이야기다.그리고 내성 역시 장방형으로 그 둘레가 4.5㎞에 이르고 있다.당시 삼성육부가 자리잡았던 내성에는 성터와 금원자리가 그런대로 남았다.이른바 어화원이라고도 하는 2만㎡의금원 자리에는 인공못과 조산흔적이 아직도 보인다. 궁성의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있다.궁성의 남문인 오문은 그 흔적이 뚜렷하다.오봉루로 더 널리 알려진 오문은 누각만이 없을뿐 높이 6m,너비 20m 규모로 잘 복원되었다.오문 북쪽 5개의 궁전터에는 크나큰 주춧돌만이 잡초속에 묻혔다.16부 130개 현을 호령했던 왕실의 권력이 오간데가 없는 이 황성을 누가 자금성이라 했던가.가장 큰 궁전터 동쪽에는 팔보 유리정이 있다.왕이 마신 어수가 솟아올랐다는 이 샘의 석축에는 이끼가 창연하다. 용천부를 두루 밟노라면 허무한 생각이 가슴에 쌓인다.세월과 함께 모든 영화가 사라진 궁궐 옛 터전에는 깨어진 기왓장만 나뒹군다.그래도 누군가가 궁궐터를 밭으로 부쳐서 여름이면 옥수수가 검푸르게 자랐다.이 땅은 발해 이전에는 고구려 강토였고,더 올라가면 고조선의 영토였다.청나라때인 강희16년(1677년)에는 청조의 발상지라는 이유로 봉금구가 되어 인적이 끊기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의 변경민들이 사선을 넘나들었다.새벽에 강을 건너 농사를 짓다가 저녁에 돌아가는 조선인들을 더이상 막을수 없게 된 청조는 이른바 「혼춘영고탑초간장정」을 반포했다.이는 조선족을 달래기 위한 조치였는데,영고탑은 오늘날 행정구역상으로는 혼춘이 아니라 발해진에서 15㎞에 불과한 영안시에 있다.그래서 1889년께 이 일대에 조선개간민촌 고려영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고려영은 주로 영고탑성향으로 형성되었다. ○1889년에 고려영 형성 그 당시 조선인은 1천200∼1천400명이었다.이후 조선민은 더 늘어나 1930년에는 3천88명,1932년에는 1만2천767명을 기록했다.이들은 바로 중국 동북3성에서 독립운동을 거의 주도한 대종교의 기반이 되었다.그러다 대종교는 1911년 길림성 화룡시 용성향 청호촌을 거쳐 1920년에는 흑룡강성 밀산시 당백진 등으로 본거지를 옮겨다녔다.1928년에 다시 흑룡강성 영안시 남관으로 들어온 대종교 본부는 1934년 발해의 옛 읍지인 영안시 발해진 동경성으로 와서 자리를 잡았다. 대종교는 총본사를 동경성으로 옮기면서 조직과 기구를 정비했다.3·1학원을 세우고 발해왕궁터 바로 남쪽에 천진전을지었다.교주는 윤단애 선생이었다.그 무렵에 조만춘이라는 사람이 대종교 활동에 참여했다.그런데 조만춘이 만주국 사법과 밀정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그의 밀고로 대종교 요원들이 모두 체포되었다.이를 대종교에서는 임오교변이라 하는데,영안시 삼량향 남향촌의 이인희옹(70)은 당시 상황을 기억했다.그는 대종교 주요 멤버였던 이수원의 손자다. 『우리집은 대종교 총본사와 200m 밖에 떨어지지 않았디요.아침에 깨어보니 할아버지께서 본사에 다녀오신 모양입데다.그리고 나서 밖을 내다보았더니 일제가 동원한 경찰들이 떼로 몰려와 있었디요.할아버지께서는 옷을 챙겨 입으시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식구들이 울면서 만류했디 않았겠습네까.다 잡혀갔으니끼리 뒤에 수습을 하셔야 된다고….그래서 피신을 하셨디요.식구들은 대종교 서적과 서류를 마대에 넣어 한족집에 맡기는 것도 보았디요』 단군을 섬긴 대종교인들은 거의가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겼다.영안시 동신촌 이병조(72)의 부친 이련건도 그런 분이었다.일제의 주구 조만춘의 유혹도 뿌리친 그는 옥중에서 동지들한테 보낸 한시에서 이런 구절을 남겼다.「발해성터에서/무엇을 해야 할꼬/나라일 걱정에/하룻밤이 일년 같구나」.나라를 잃고 독립을 위해 망명지에서 어렵사리 살았던 우국지사들의 고뇌가 엿보였다. 백산 안희제선생은 1933년 동경성에 정착한 대종교 요인이다.동만농장 토지를 사서 발해농장을 꾸리기도 했다.당시 논을 개간하며 쌓은 둑은 지금의 아보저수지에 묻혀버렸지만,그가 「발해농장」간판을 걸었던 건물의 잔영은 남아있다.발해진 상경로 17호 발해진청사에 절반쯤 남은 건물이 그것이다. ○격변의 세월 한족촌 탈바꿈 안희제 선생은 임오교변으로 체포되었다가 이듬해 8월3일 병보석을 받았다.그러나 감옥문을 나선뒤 세상을 떴다.그는 동경성일대의 조선족들에게 살길을 열어주어 생전에 많은 추앙을 받았다.그와 더불어 추앙을 받았던 인물을 더 꼽으라면 김소래 선생이 있다.반일투사이자 교육가인 선생은 1928년 오늘의 영안시 와룡향 홍기임장에 이상촌을 건설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이 모두 바뀌어 한족들이 그 자리에 살고있다.김소래 선생을 아는 사람도 없거니와,본래가 조선족 이상촌이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를만큼 변해버렸다.지금 임장사무실로 쓰는 건물 뒤쪽으로 흐르는 실개천 건너의 언덕이 선생의 집자리였다고 한다.물론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었다.그보다 더 애석한 일은 선생의 유해가 묻힌 묘지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이다.아마도 묵묘로 남았다가 세상이 바뀌어 자취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김소래 선생은 1933년에 피살되었다.선생은 피살전에 죽음을 예견했는지 몰라도 책과 서류를 산속 동굴에 감추었다고 한다.그런데 광복후 사냥꾼 이기송이 집으로 가져왔으나,마을 사람들이 담배를 말아 피우는 종이로 사용했다는 것이다.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다.발해 도읍지의 독립운동사는 그렇게 역사 뒤안으로 사라졌다.
  • 중,왕단 병보석 석방결정

    【홍콩 AFP 연합】 중국당국은 정부전복죄 등으로 11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인 반체제 인사 왕란(27)을 즉시 외국으로 떠나는 것을 조건으로 석방키로 결정했다고 홍콩의 성도일보가 19일 보도했다. 소식통들은 당국이 요령성 금주교도소에서 복역중인 왕의 건강이 악화되자 병보석을 결정했다면서,이같은 조치는 금년말 강택민 국가주석의 미국방문을 앞두고 중·미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 이철수 전 제일은행장/보석취소 재수감 검토/서울고법

    이철수 전 제일은행장의 수재혐의 사건에 대한 항소심 공판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2부(재판장 김명길 부장판사)는 27일 이씨가 한보부토사태와 관련,3일째 잠적했다는 언론보도에 따라 검찰에 이씨에 대한 소재파악 요청을 했다. 김 부장판사는 『지난해 10월 이피고인을 병보석으로 풀어주면서 자택으로 주거지를 제한했었다』며 『주거지를 벗어나 자취를 감춘 것으로 확인되면 즉각 보석을 취소하고 재수감할 것』이라고 밝혔다.
  • 수임료 개혁차원서 낮춰라(사설)

    대한변협이 외부 전문가들을 참여시킨 가운데 변호사 보수제도 개선작업을 벌이고 있다는 반가운 보도다.우리는 변협이 이번 개선작업을 모든 제도와 관행,윤리문제까지 재검토하여 새로운 변호사 풍토를 확립하는 개혁으로 확대 추진할 것을 기대하고 싶다. 과다한 수임료 등 변호사의 도움을 받는 일이 사회적 문제가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무전유죄,유전무죄운운하는 소리가 사회에서 현실감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실정이다.그 바탕에는 변호사라는 직종에 대한 불신·거부감이 깔려 있음을 보게 된다. 민사든 형사든 재판의 당사자가 되면 복잡한 절차와 생소한 법률용어 때문에 누구나 엄청난 심리적 부담을 갖고 당황하게 마련이다.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 잡듯 변호인에게 매달리게 되고 용한 의사 찾는 환자처럼 용한 변호사를 물색하게 된다.이 때문에 사법부의 구조적 문제인 재판의 지연,판결 결과 등 모든 불만이 억울하게 변호사를 향해 분출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극소수의 비리의 결과겠지만 법원주변에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들이 버젓이 통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구속피의자가 풀려나려면 「전관예우」 기간인 아무개나 형사담당 판사들과 개인적 유대가 있는 아무개 변호사를 「사면된다」는 구시대의 컴컴한 얘기들을 아직도 듣게 된다.용한 형사담당 변호사의 착수금은 통상의 3배인 1천5백만원,병보석 한건에 3천만원 하는 식이다. 직접 변호사 얼굴 한번보기 힘든 고압적 사무실 분위기,국선변호인의 불성실,민사사건 승소로 확보된 부동산 나눠먹기,수입에 비해 형편없이 적은 세금 등등 변호사를 겨냥한 사회적 불만은 끝이 없다.결국 뒤늦게 나마 법조·변호사 사회의 일대 개혁이 요구되는 상황이라는 중론인 것이다.차제에 변협은 수임료 문제만이 아니라 법조계 개혁차원의 획기적 개선방안을 마련,국민속의 변호사로 자리잡는 계기로 삼기 바란다.
  • 김종휘씨 「김천」 가명으로 입국/검찰 수사·안양교도소 이모저모

    ◎“검찰서 밝히겠다” 조사실 직행­김 전수석/“설마 강제 급식까지 하겠느냐”­전씨 아들 검찰의 중간수사결과 발표 이후 소강상태에 빠진 듯했던 노태우 전대통령 비자금에 대한 수사는 11일 하오 「율곡비리」에 핵심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김종휘 전청와대외교안보수석이 미국 도피 2년8개월여만에 급거 귀국,검찰에서 철야조사를 받음에 따라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검찰은 이와 함께 12·12 및 5·18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수사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전두환 전대통령의 비자금 내역을 캐기 위해 재벌총수 등을 상대로 「보안수사」를 계속했다. ▷김종휘씨 수사◁ ○…김 전청와대외교안보수석은 이날 하오 4시50분 대한항공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한 직후 곧바로 검찰수사관들에 의해 대검청사로 연행.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대한항공 017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한 김 전수석은 「김천」이라는 가명을 썼으며 김씨의 부인(59)과 아들(28)도 「박영」「김승」이라는 가명으로 함께 입국. 검찰은 입국장에서 김씨를 연행,공항 대합실에 대기하고있던 보도진을 따돌렸다. ○…하오 5시59분쯤 검찰 호송차를 타고 대검청사에 모습을 나타낸 김전수석은 『전투기 기종변경은 노태우 전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것인가』,『F­16기를 선정한 대가로 얼마의 리베이트를 받았는가』 등 쏟아지는 질문에 입을 열지 않다가 『검찰에서 모든 것을 밝히겠다』고 짤막하게 답변. 지난 93년 4월 미국도피 이후 2년8개월여만에 귀국한 김 전수석은 검찰의 소환통보를 받고 귀국했느냐고 묻자 『자진해서 왔다』고 말한 뒤 굳은 표정으로 조사실로 직행. 김씨는 검찰청사 현관으로 들어서다 사진기자들의 「요구」에 몇걸음을 물러서 포즈를 취하기도. ▷12·12 및 5·18 수사◁ ○…12·12 당시 최규하 전대통령 경호실장 직무대리 정동호씨는 이날 상오 9시45분쯤 검은색 바바리 코트속에 목도리를 두른 모습으로 출두하면서 『그저 직무에 충실했을 뿐』이라고만 대답한 뒤 조사실로 직행. 10여분 뒤 도착한 주영복 전국방부장관도 질문공세에 침묵으로 일관. 반면 상오 10시에 도착한 이학봉씨는 승용차에서 내리자마자인터뷰를 자청,청사 계단 앞에서 정승화 전육참총장 연행의 정당성을 주장,허화평씨의 선례를 답습. 그는 『10·26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에게 살해되지 않고 살아있었다면 정전총장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라며 정전총장이 박전대통령 시해사건과 관련,김씨와 상당한 공모가 있었다고 주장. 또 『정총장이 의심을 받을 만한 행동이 아주 많았다』고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한 뒤 『모든 진실은 검찰 조사에서 다 밝혀질 것』이라고 강변. 이씨는 특히 『최전대통령으로부터 연행재가를 받았느냐』는 질문에 『쿠데타를 하면서 대통령의 재가를 받고 하느냐』고 반문,기자들이 『그렇다면 강압적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사실을 인정한다는 말인가』라고 묻자 얼굴을 붉힌 채 조사실로 황급한 발걸음. ▷안양교도소◁ ○…전씨 수감 9일째를 맞은 이날 둘째 아들 재용씨가 하오 1시50분쯤 안양교도소를 방문,전씨를 면회한 뒤 하오 3시15분쯤 돌아갔다. 재용씨는 『아버지가 얼굴 살이 많이 빠지는등 부쩍 수척해지셨다』면서 『그러나병보석은 생각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재용씨는 『검찰이 비자금을 수사하고 있는 것을 아버지가 알고 있느냐』는 질문에 『이미 구내방송을 통해 알고 계시며 나도 사실을 알려드렸다』면서 『내가 알고 있는 한 아버지는 비자금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재용씨는 또 전씨의 단식이 길어지면서 교도소측이 강제급식을 고려하고 있다는 보도에 대해서는 『설마 강제급식까지 하겠느냐』며 몹시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한편 전날 하오 2시부터 7시간에 걸쳐 검찰의 조사를 받은 전씨는 이날 상오 6시30분 초췌한 모습으로 기상한 뒤 역시 보리차만 마시며 단식을 계속하고 있다. 전씨는 단식이 길어지면서 피곤한 듯 자주 침상에 눕고 있으며 독거실 안에서 일어났다 앉았다 하는 운동을 반복하며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고 교도소측은 전했다. ○…이에 앞서 상오 9시15분쯤 면회를 한 이양우 변호사도 『어른이 계속 식사를 안하고 계신다』고 소개. 이변호사는 『재수사를 예상치 못하고 지난 93년 12·12와 5·18에 대한 검찰수사 때 준비했던 변호자료를 대부분 폐기처분했다』면서 『이제 다시 처음부터 자료정리를 해야할 판』이라고 토로. 이변호사는 『단식 9일째를 맞은 어른의 몸무게가 64㎏으로 10㎏이 줄었지만 아직 정통성 수호에 대한 의지가 뚜렷하다』고 전언.
  • “전씨 쓰러져도 병보석 신청 안해”/측근 이양우 변호사

    안양구치소에 수감돼 닷새째 단식하고 있는 전두환 전대통령의 핵심측근인 이양우 변호사는 7일 『만일 전씨가 쓰러지는 등 어떠한 경우에도 병보석을 신청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변호사는 이날 『12·12군사반란 당시 합수부장이던 전씨가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연행을 재가받는 과정에서 최규하 당시 대통령을 권총으로 위협했다』고 주장한 당시 하소곤 육본작전참모부장 보좌관 김광해씨(52·중령예편)를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혐의로 서울지검에 고발했다. 한편 전씨측은 이날 이변호사를 포함,전상석·석진강 변호사 등 3명으로 변호인단을 구성키로 했다고 밝혔다.
  • 전씨 단식의 자가당착/박찬구 정치부 기자(오늘의 눈)

    전직대통령의 옥중단식은 이유야 어떻든 우리 현대사의 비극으로 기록될 일이다.자신이 통치권을 행사한 5공의 정통성을 지키려 한다는 단식의 변에서는 사뭇 비장감마저 감돈다. 그러나 전두환 전대통령의 단식은 대다수 국민들에게 의아심을 갖게 한다.병보석이나 동정여론을 노린 위장단식이라는 비난도 일고 있다.12·12당시 목숨을 걸고 쿠데타에 항거한 선량한 군인들과 5공시절 민주화를 부르짖다 짓밟힌 시민·학생들은 그의 단식선언을 『웃기는 일』이라고 일축한다.『정쟁의 희생양이 되더라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며 「결연한 각오」를 밝혔다는 전씨의 자가당착과 자기모순에는 말문이 막힌다는 표정이다.김영삼 대통령이 지난 83년 재야시절 전씨의 폭압통치에 항의,상도동 집에서 23일간 단식할땐 지금처럼 언론의 조명조차 받을 수 없었던 기억도 떠올린다. 물론 전씨측에도 항변은 있다.『5공의 정통성을 부인하면 당시 모든 통치·외교행위도 정통성이 없어지는데 그로인한 나라의 혼란은 어떻게 할 것인가.과거청산과 한풀이의 역사가되풀이된다면 통일이후 김일성 집단도 전범으로 처벌해야 할텐데 통일협상에서 북한측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그러면서 『12·12가 계획된 쿠데타가 아니고 5·18도 전씨와 무관하다는 사실은 법정에서 밝혀질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전씨측의 상황인식에는 그러나 뚜렷한 한계가 엿보인다.도대체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쿠데타로 집권한 정치군인이 정통성 운운할 자격이나 있는가.무고한 시민들을 폭도로 몰아 인명살상을 지시,방관,승인한 세력들이 「우국」을 부르짖는 것은 무슨 경우인가.한 측근은 심지어 『3∼4년안에 (우리가)정권을 잡으면 언론특별법을 만들어 여론재판에 가담한 언론을 싹 쓸어버리겠다』는 망발도 서슴지 않았다.이것이 과연 통일과 외교문제를 걱정하는 +집단의 발상이란 말인가. 전씨가 과거의 멍에에서 벗어나는 길로 단식을 선택했다면 그것은 오산이다.정치인들의 정쟁을 탓하면서 속좁은 자기변명에 연연할 때도 아니다.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진실이다.진실로 목숨을 버릴 각오라면 진상을 털어놓고 참회하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일 것이다.
  • 병보석 전 상문고교장 미국으로 출국

    학교공금 등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기소돼 1심에서 징역4년을 선고받고 항소심 계류중 병보석으로 풀려난 전 상문고 교장 상춘식 피고인(53)이 법원으로부터 출국허가를 받아 지난 9일 미국으로 출국한 사실이 12일 밝혀졌다.
  • 미국판 「유전무죄」인가/나윤도 워싱턴 특파원(오늘의 눈)

    O J 심슨의 무죄평결을 보는 많은 미국인들은 우선 예상밖의 평결에 놀라고 다음에는 「유전무죄」 확인과 흑백간 「인종감정」의 위력에 더욱 놀라는 표정이다. 미국 최고의 풋볼선수로 엄청난 재산을 모았던 심슨은 체포직후 조니 코크란,로버트 샤피로등 당대 최고의 변호인단을 구성했고 또 살인범 체포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사람에게는 50만달러의 엄청난 상금을 준다고 광고하는등 일반인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물량공세를 폈다. 심슨이 체포되어 석방되기까지 4백73일 동안 심슨의 기소와 재판과정을 위해 관할지인 LA카운티 정부가 부담한 돈은 줄잡아 9백만달러(한화 약70억원).심슨측은 검찰측의 증거제시에 대한 반대논리 개발을 위해 이보다 훨씬 많은 돈을 썼을 것이라는 추측이 지배적이다. 따라서 이 재판에 대해 미국인들은 배심원 평결 직전 미국 사법제도의 공정성을 물은 한 여론조사에서 85%가 『가진자와 갖지않은 자에게 서로 다른 정의가 적용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재판』이라고 할 정도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왔다. 실제로지난해 경찰이 체포한 범인 75만명중 감옥행을 한 사람은 20%인 15만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배심원의 무죄평결에 의해 혹은 집행유예,하다못해 병보석이라도 얻어 석방됐다.돈있는 사람은 감옥에 살지 않는다는 요즘의 미국세태를 입증해준다. 이같은 유전무죄 현상과 함께 흑백간 갈등,즉 인종감정의 심화는 심슨사건이 남긴 또하나의 큰 후유증으로 돼있다.재판을 무죄평결로 이끌기 위해 심슨 변호인측이 인종감정에 호소했기 때문이다.특히 흑인인 코크란은 노골적으로 『심슨에 대한 유죄 주장은 인종차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강조했다.이같은 인종감정의 부추김은 흑인들에게 맹목적인 「심슨 무죄」를 외치게 했고 이는 12명중 흑인 9명이 포함된 배심원들의 의사결정에도 간접적으로나마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인종문제는 심슨 변호인단 진영내에서도 상당한 이견을 드러내게 했다.샤피로는 재판이 끝난후 바바라 월터즈와의 ABC대담프로에서 코크란의 지나친 인종차별 강조를 비난하면서 앞으로 더이상 코크란과 함께 일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다.결국 심슨사건은 지난 15개월동안 흥미진진한 드라마로 봐오던 미국인들의 발등에 큰 불씨를 떨구고 끝났다.
  • 101세 독립투사 김경하옹의 광복 50돌 기원

    ◎광복조국 밝은 모습 뿌듯/민족통일이 마지막 소원/“서대문 형무소 붉은 담장 아직도 눈에 선해”/김좌진 장군 딸등도 함께 감회 젖어 늙은 독립투사가 15년만에 다시 들러 바라다본 광복 50주년의 조국땅은 밝고 힘에 가득차 있었다.살아있는 최고령 독립투사인 김경하옹. 평북 강계가 고향인 김옹의 올해 나이는 1백1세. 그의 정확한 생년월일은 금세기가 아닌 19세기말인 1895년 3월 24일이다. 그러나 아직도 열혈청년의 정열이 남아있는 듯 김옹은 광복 50주년 기념식을 하루 앞둔 14일 상오 서울 독립공원에서 기자들에게 큰 소리로 소회를 피력했다.『70여년전 서대문형무소의 붉은 벽돌 담장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나라 잃은 청년의 비애같은 것이 느껴집니다.그러나 오늘 이 땅에 사는 청년학생들이 밝고 힘에 넘쳐 가슴 뿌듯합니다』 김옹은 조국이 자기를 잊지않고 광복 50주년 기념행사에 초청해 준 게 무척 흡족한 모습이었다. 김옹이 독립투사로 형극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3·1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진 기미년 4월8일 강계 장날.당시강계 영실중 교사로 재직중이던 김옹은 동료 교사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다 일본 기마헌병에 붙잡혀 징역 2년6월형을 받고 평양감옥에 수감된다.그러나 고문 후유증으로 병보석 되어 풀려나자 만주로 피신,선교활동을 통한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우연한 인연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40여년동안 목사로 활동을 해오고 있다.『조국사랑은 누구나 당연한 것이며 결코 자랑거리가 안되는데…』. 김옹의 곁에는 김옹처럼 국가보훈처의 초청으로 조국 땅을 밟은 김좌진 장군의 외동딸 김순옥(68·중국 연변)씨와 전명운 의사의 둘째딸 전경영(72·미국 로스앤젤레스)씨,그리고 외국인이면서 우리의 독립을 위해 고종황제의 밀사로 외교활동을 했던 호머 헐버트의 손자 리처드 헐버트(67·뉴욕 캐미컬뱅크 직원)씨가 자리를 함께 했다.그들의 표정도 김옹과 같이 감회에 젖어 있었다. 『우리의 아버지들이 이렇게 자랑스런 일을 한 줄은 몰랐어요.살면서 고생은 했지만 정말 자랑스러워요』 청산리전투의 영웅 김좌진장군의 딸 김순옥씨는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의얼굴조차 모른다.독립운동 뒷바라지에 고생만 하던 어머니는 그녀를 낳다 세상을 떠나 아버지의 부하였던 김기철에 의해 키워졌다고 했다. 『어떻게 소문을 듣고 일본경찰들이 찾아와 여러차례 매를 때리곤 했어요』.농사를 짓고 살면서 숱하게 죽을 고비를 넘기는 고생을 했다는 그녀는 이번에 장군의 외손녀인 위연홍(45)씨와 함께 처음으로 조국땅을 밟았다. 미국의 외교고문자격으로 친일 행각을 노골적으로 벌이던 스티븐스를 향해 총을 뽑았던 전명운의사의 딸 전경영씨는 『영원히 아버지를 사랑하고 자랑스러워 할 것』이라고 말했다.어릴적 부터 미국에서 자란 탓에 우리말은 서툴지만 사회사업을 하는 애국지사의 후손답게 힘차고 또렷또렷하게 얘기했다. 묵묵히 듣고있던 최고령 독립투사 김옹은 『이제 바라는 게 있다면 남이든 북이든 한자리에 모여 오래오래 사이좋게 번영하는 민족의 통일,통일을 이룩하는 것입니다』.이 말을 뒤로 김옹의 눈에는 「간절한 소망」의 이슬이 맺혔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