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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무부대서 동원훈련’ 반발에 내놓은 대책은…

    ‘복무부대서 동원훈련’ 반발에 내놓은 대책은…

    국방부는 현역 시절 복무했던 부대에서 동원 예비군 훈련을 받는 제도를 내년부터 시행하되 입소시간을 2시간 늦추기로 했다고 24일 밝혔다. 국방부 관계자는 “현역복무 부대 동원지정 제도를 적용하는 부대의동원훈련 입소 시간을 현재 오전 9시에서 오전 11시로 조정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지금도 수도권 거주 예비군이 강원도 지역에 지정되어 훈련하고 있으며 강원도에 있는 예비군 자원이 부족해 수도권 지역에서 충원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국방부는 그러나 현재 서울과 경기에서 동원돼 강원도에 보충되는 예비군의 출신 부대별 분석자료는 내놓지 않았다. 새 제도대로 복무 부대별로 분류해 동원하다보면 예비군 병력이 부족할 수 있어 서울 서부뿐 아니라 인천 지역 예비군까지 먼 거리인 강원도로 동원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는 반론이 가능한 부분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서울 북부나 경기 북부에 거주하는 예비군을 지금까지는 무작위로 배치했지만 내년부터는 현역 시절 복무했던 부대로 먼저 배치하는 개념”이라고 말했다. 홍성규기자 cool@seoul.co.kr 1) 데이트 강간을 위한 ‘악마의 술잔’ 한모금에 블랙아웃…24시간내 검사 못하면 미제사건 2) 죽음의 性도착증 ‘자기 색정사’ 혼절직전의 성적 쾌감 탐닉…‘질식에 중독되다’ 3) 친구와 함께 차안에서 아내에 몹쓸짓 한 남편 …사고로 위장한 최악의 선택 4) 살해당한 아내의 눈속에 담긴 죽음의 비밀… 흔해서 더 잔인한 위장 살인의 실체는 5) 강간 후 살해된 여성, 그리고 부검의 반전 죽을 때까지 여성이고 싶었던 여성의 사연 6) 천안 母女살인범, 현장에서 대변만 보지 않았더라도… ‘미세증거물’ 속에 숨은 사건의 진상 7) 정자가 수상한 정액…씨없는 발바리’ 과학수사 얕봤다가 정관수술까지 한 연쇄 성폭행범 8) 변태성욕 30대 살인마의 아주 특별한 핏자국 혈흔속 性염색체의 오묘한 비밀 9) “그날 조폭은 왜 하필 남진의 허벅지를 찔렀나?”… 칼잡이는 당신의 ‘치명적 급소’를 노린다 10) 소변 참으며 물 마시던 20대女, 갑자기 몸을 뒤틀며… 생명을 앗아가는 ‘죽음의 물’ 11) 자살한 40대 노래방 여주인, 살인범은 알고 있었다 생활반응이 알려준 사건의 진실 12) 불탄 시신의 마지막 호흡이 범인을 지목하다 화재사망 속 숨어있는 타살흔적 증거는 13) 車 운전석에서 질식해 숨진 그녀의 주먹쥔 양팔 14) 백골로 발견된 미모의 20대女, 성형수술만 안 했어도… 가련한 여성의 한 풀어준 그것 15) 무참히 살해된 20대女…6년만에 살인범 잡고보니… 274만개의 눈이 잡은 연쇄살인범의 정체 16) 이태원 옷집 주인 살인사건…20대 여성이 지목한 범인은? 찢어진 장부의 증언 17) 물속에서 떠오른 그녀의 흰손…토막살인범 잡고보니 바다에서 건진 시신 신원찾기 18) 헤어드라이어로 조강지처 살해한 50대의 계략… 몸에 남은 ‘전류반’은 못 숨겼네 19) 자살이라 보기엔 너무 폭력적인 죽음…왜? 가해자·피해자는 하나였다 20) 아파트 침대 밑 女 시신 2구…잔인한 ‘진실게임’ 결과는? 누명 벗겨준 거짓말 탐지기 21) 자다가 갑자기 세상을 뜨는 젊은 남자들…누구의 저주인가? 청장년 급사증후군의 비밀 22) 70% 부패한 시신 유일한 증거는 ‘어금니’ 억울한 죽음 단서 된 치아 23) 살인현장에 남은 별무늬 운동화 자국의 비밀 60대 노인의 치밀한 트릭 24) 택시 안에서 숨진 20대 직장女 살인범은 과연… 돈 버리고 납치한 이상한 택시 강도 25) 그녀가 남긴 담배꽁초 감식결과 놀라운 사실이 살인 현장에 남은 립스틱의 반전 26) 목졸리고 훼손된 60대 시신… 그것은 범인의 속임수였다 ‘파란 옷’ 입었던 살인마 27) 40대 여인 유일 목격자 경비 최면 걸자 법최면이 일러준 범인의 얼굴 28) 소리없이 사라진 30대 새댁, 알고보니 들짐승이… 부러진 다리뼈가 범인을 지목하다 29) 살인자가 남기고 간 화장품 향기, 그것은 ‘트릭’이었다 강릉 40대女 살인사건의 전말 30) 동거女 잔혹하게 살해한 30대, 시신이 물속에서 떠오르자… 살인후 물속으로 던진 사건 그후 31) 최악의 女연쇄살인범 김선자, 5명 독살과 비참한 최후 청산염으로 가족, 친구 무차별 살해
  • “北 서북도서 추가 도발시 미군 신속 증원 연합대응”

    정부와 군은 북한의 추가 도발을 억제하기 위해 미국과의 군사 동맹 수준을 한 단계 더 올려 놨다. 특히 군은 북방한계선(NLL)의 실질적 가치에 대한 미국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국지 도발에 대비한 공동 작전 계획을 만들기로 미국과 합의하면서 연합 대응 태세를 갖추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관진 국방장관과 리언 패네타 미국 국방장관이 지난 10월 28일 서울 용산 국방부 청사에서 가진 제43차 한·미안보협의회(SCM) 회의가 이런 연합 대응 태세의 기틀이 됐다. 연합군사령부의 주축을 이룬 미군이 NLL의 실질적 가치를 인정함에 따라 앞으로 북한이 NLL 인근에서 추가 도발할 경우 국제 연합 군사력을 동원해 응징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한 셈이다. 올 연말쯤이면 북한의 국지 도발에 한·미 양국이 공동 대응하는 ‘공동 국지 도발 대비 계획’도 완비할 예정이다. 북한의 소규모 국지 도발은 한국군이 작전을 책임지고, 전면전에 대해서는 미국이 주도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기존의 방위태세 전략이 국지 도발 단계부터 한·미 공동 연합 전력 대응 방식으로 전환되는 셈이다. 더구나 첩보위성 등을 통한 미군의 정보 자산을 보다 폭넓게 공유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공군력 동원에 대한 부담도 경감될 것으로 우리 군은 기대하고 있다. 국방부가 최근 북한이 서북도서 지역에서 추가로 도발해 올 경우 긴급히 증원될 미군 병력을 위한 병영생활관을 2013년까지 백령도에 짓기로 한 것도 서북도서 방어를 위한 공동 대응 전력의 일환인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지난해 천안함·연평도 사태 이후 우리 군 내부에서 검토됐던 ‘미군 연락단의 서북도서 상주안’과도 연계된 조치로 읽힌다. 군 관계자는 이에 대해 “북한이 서북도서 일원에 대한 군사적 도발을 감행할 경우 이를 격퇴하기 위해 미군이 신속히 증원될 것”이라면서 “증원될 미군 병력을 위한 병영생활관 마련이 그 준비의 첫 단계”라고 설명했다. 홍성규기자 cool@seoul.co.kr
  • 해병 1000명 증강… 방어작전서 도발지 응징 거점으로

    해병 1000명 증강… 방어작전서 도발지 응징 거점으로

    “단 한 뼘의 영토, 풀 한 포기도 내줄 수 없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 1주년(23일)을 앞두고 김관진 국방장관이 18일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1주년에 즈음하여’라는 제목의 지휘서신 8호를 전군에 시달하며 이처럼 결연한 의지를 강조했다. 김 장관은 “그동안 피땀 흘려 훈련해 온 대로, 철저하게 준비해 온 대로 제대별 전력과 합동 전력을 총동원해 도발 원점은 물론 지원세력까지도 응징해야 한다.”면서 “다시는 도발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와 군은 북한의 추가 도발을 허용치 않겠다는 의지로 그동안 서북도서를 중심으로 한 전력 증강을 통해 방어 태세를 보완했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이후 우리 군의 가장 큰 변화는 서북도서방위사령부(서방사)의 창설이다. 해병 6여단이 서방사 예하로 재편되며 연평부대 등에 병력 1000여명이 추가 배치됐다. 그동안 서북도서에 대한 작전 개념이 북한의 기습상륙 저지 등 방어적이었다면, 서방사 창설을 중심으로 한 전력 증강은 김 장관이 수차례 강조한 대로 도발 원점 및 지원세력에 대한 공격 거점 개념으로의 전환을 뜻한다. 작전지침 유형도 제1, 제2 연평해전 때의 서해 북방한계선(NLL)에서의 해상 작전 중심에서, 포격 도발에 의한 영토 침범에 대응한 육·해·공군 합동작전 체제로 바뀌었다. 즉시 대응을 위해 서북도서 내륙과 인근 해역에 관한 작전권도 서방사를 책임진 해병대사령관이 주관하도록 했다. 해상, 육상 등 북한의 도발 형태에 따라 작전권한이 나뉘어 혼선을 빚을 수 있었던 문제를 보완하고 합동화력 지원을 위한 보고라인을 간편화했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군은 서방사 창설과 함께 화력을 대폭 보강했다. 전차와 다연장포, 신형 대포병레이더 아서 등 8개 전력이 백령도와 연평도 등 서북도서로 전환 배치됐다. K9 자주포, K10 포탄운반차, AH1S 코브라 공격헬기, 링스헬기 등도 새로 배치됐다. 연평도만을 놓고 보면 K9 자주포의 전력이 3배쯤 증강된 것으로 전해졌다. 기존의 105㎜나 81㎜, 벌컨포 등은 최대 사거리가 13㎞에 불과해 북한의 방사포가 몰려 있는 황해 개머리기지를 직접 타격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최대 사거리가 40㎞인 K9자주포와 155㎜ 견인포는 북한 해안까지 직접 타격이 가능하다. 여기에 공군력을 이용한 원점 타격 작전, 갱도 속에 숨겨진 북한 해안포를 직접 때릴 수 있는 정밀타격 무기(스파이크 미사일)를 이용한 작전 등도 새로 추가될 예정이다. 해병 6여단이 있는 백령도는 서방사의 화력거점으로 탈바꿈했다. 30㎜ 다연장 로켓(구룡)은 사거리 23~36㎞에 달하는 직경 130㎜ 로켓 발사관 36개를 한 다발로 묶어 트럭에 탑재하고 다니며 발사하는 무기로, 북한의 122㎜ 방사포보다 위력이 강하다. 백령도에 새로 배치된 AH1S 코브라 공격헬기는 대전차 미사일인 토를 장착하고 있어 북한의 공기부양정 부대를 이용한 상륙 시도에 1차적인 대응 전력이 될 것으로 평가된다. 아서 레이더와 함께 음향표적 탐지 장비 ‘할로’도 추가 배치됐다. 군은 내년까지 903억원을 들여 전술비행선과 전방관측(FO)용 주야관측장비, 고성능영상감시체계, 해군 정보함의 무인정찰기(UAV) 등 여섯 가지 탐지 장비를 전력화한다는 계획이다. 군 관계자는 “북한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 넘는 기습적인 도발을 항상 준비하고 있다.”면서 “전력 보강과 반복적인 훈련을 통한 내실 있는 준비로 맞서 도발의 대가를 뼈저리게 느끼도록 해 주겠다.”고 강조했다. 홍성규기자 cool@seoul.co.kr
  • ‘김진숙 체포영장’ 勞반발… 찬반투표 무산

    ‘김진숙 체포영장’ 勞반발… 찬반투표 무산

    근로자 정리해고 문제로 11개월 가까이 끌어온 한진중공업 사태가 노사 잠정 합의안을 마련하고도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있다. 한진중 노조는 이날 찬반투표를 실시할 예정이었지만 고공 농성을 하고 있는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에 대한 체포영장 집행 문제로 찬반투표를 무기한 연기했다. 9일 부산 영도조선소에서는 한진중 노사가 정리해고자 문제에 대한 잠정 합의안을 놓고 의견을 나눴다. 일부 해고 근로자들은 잠정 합의안에 반대하며 사장실 진입을 시도하기도 했다. 노조 관계자는 “조합원들에게 잠정 합의안에 대해 설명하고 찬반투표를 할 예정이었으나 경찰의 무리한 체포영장 집행으로 조합원 총회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결론을 짓지 못했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상경 투쟁을 하던 해고자들도 찬반투표를 위해 부산 영도조선소로 속속 복귀했다. 이날 오후 3시 조합원 찬반투표가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경찰이 10개 중대 병력을 동원해 김씨 등에 대해 체포영장을 집행하려 하자 찬반투표를 무기한 연기했다. 찬반투표는 조합원 714명과 해고자 94명 등 총 808명을 대상으로 실시될 예정이었다. 또 오후 4시 30분쯤에는 해고 근로자 30여명이 본관 정문에서 진입을 막는 경비용역들을 뚫고 건물 내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경비원들과 거친 몸싸움을 벌였으며 건물 내 시설이 일부 파손되기도 했다. 영도조선소 크레인에서 308일째 농성 중인 김씨 등 4명도 조합원 찬반투표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노조는 잠정 합의안이 가결되면 김씨 등이 농성을 풀고 크레인에서 내려올 것이라고 밝혔다. 한진중은 지난해 말 경영 악화를 이유로 생산직 근로자 400명의 희망퇴직(구조조정)을 노조에 통보했다. 이에 노조는 총파업으로 맞섰고 김씨는 고공 농성에 들어갔다. 사측은 희망퇴직을 거부한 생산직 290명에게 정리해고를 통보한 데 이어 영도조선소와 울산공장, 다대포공장 등 3곳에 대한 직장 폐쇄까지 단행했다. 이런 가운데 시민단체와 노동운동가 등으로 구성된 희망버스가 노조에 힘을 실어주면서 노사 양측의 팽팽한 줄다리기는 계속됐다. 노사는 지난 6월 24일 노사협의회를 열고 사흘간 끝장협상에 들어갔고, 같은 달 27일 금속노조 한진중공업 지회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총파업 철회와 조합원 현장 복귀를 선언했다. 그러나 강성 노조원들이 강하게 반발했고 한진중공업 사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노사 협상은 지난달 7일 조남호 한진중 회장의 국회 환경노동위 권고안 수용으로 물꼬가 트였다. 그러나 근로자 재고용 시점을 놓고 노사가 좀처럼 입장 차이를 좁이지 못했다. 이후 노조는 사측과의 끈질긴 협상을 벌여 9일 잠정 합의안을 마련했다. 부산 박정훈기자 jhp@seoul.co.kr
  • 中 ‘흉기난자’ 위구르인 4명 사형선고

    중국 법원이 지난 7월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 허톈(和田)과 카스(喀什)에서 발생한 일련의 흉기난자 사건에 연루된 위구르인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허톈지구 중급인민법원과 카스지구 중급인민법원이 각각 지난 7월 발생한 테러사건을 주도하거나 적극 참여한 위구르인 4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고 신장자치구 관영 매체인 천산망(天山網)이 15일 보도했다. 허톈에서는 지난 7월 18일 위구르인들이 파출소에 난입해 보안요원 등 4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공안 당국은 현장에서 ‘폭도’ 14명을 사살했다. 이어 같은 달 30일과 31일에는 카스 시내 번화가에서 위구르인들의 흉기 난자사건이 발생, 범인 5명을 포함해 19명이 목숨을 잃었다. 중국 공안 당국은 두 사건을 조직적인 테러로 규정했으며 특히 카스 사건의 배후로 파키스탄에 근거지를 둔 위구르 분리독립운동 세력인 동투르키스탄 이슬람운동(ETIM)을 지목했다. 신장자치구 정부는 잇따른 폭력사태를 계기로 병력 등을 대거 동원해 위구르인 밀집지역 등을 24시간 밀착 감시하는 등 ‘철권통치’를 강화하고 있다. 베이징 박홍환특파원 stinger@seoul.co.kr
  • 美·日과 합동해양군사훈련 러 “中 섰거라”

    美·日과 합동해양군사훈련 러 “中 섰거라”

    최근 들어 중국이 군사력을 확장하면서 이에 대항하는 주변 강대국들의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다. 러시아는 군사력을 키우고 있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 일본과 합동 해양 군사훈련을 실시한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이 1일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러시아는 이달 초순부터 미사일 순양함인 바랴크함을 투입해 일본, 미국과 합동 훈련을 할 계획이다. 러시아가 미국과 태평양에서 군사훈련을 하는 것은 2006년 마셜제도에서의 훈련 이래 5년 만이며, 일본 해상자위대와의 훈련은 2008년 이후 3년 만이다. ●미사일 순양함 투입… 동해·괌서 훈련 러시아의 미사일 순양함인 바랴크함은 우선 일본 해상자위대와 동해에서 해난 구조활동 훈련을 실시한 뒤 교토의 마이즈루에 기항할 예정이다. 이어 괌에서 미국과 훈련을 실시한 다음 캐나다 밴쿠버를 경유해 12월 귀국한다. 러시아 정부의 고위 관계자는 “(이번 훈련이) 러시아, 미국, 일본 등 3개국에 의한 안전보장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교두보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호주 정부도 최근 군사력을 확장하고 있는 중국을 의식해 국방비를 크게 증액하는 한편 미국, 일본과 군사 동맹을 강화하고 있다. 호주는 이미 중국의 라이벌인 일본과 안보 협약을 맺고 일본과 함께 매년 미국과 안보대화를 갖고 있다. 이 때문에 동아시아에 미-일-호주로 이어지는 ‘신삼각 동맹’을 구축해 중국을 봉쇄하려 한다는 중국의 비판을 받아왔다. ●美와 5년·日과 3년 만에 실시 주변 국가들의 잇따른 견제에 중국도 몇 년째 러시아와의 합동 군사훈련을 지속하는 등 대비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중국은 매년 ‘평화사명’이라는 이름으로 짝수 해에는 상하이협력기구 회원국들과, 홀수 해에는 러시아와 합동 군사훈련을 하고 있다. 2005년 8월 실시된 러시아와의 첫 평화사명 훈련은 중국의 북해함대 사령부가 있는 산둥성 칭다오(靑島) 부근 해역과 랴오닝(遼寧)반도 등의 지역에서 육·해·공군 첨단 무기와 1만여명의 대규모 병력이 동원돼 실전을 방불케 했다. 구축함 등을 동원해 해상 봉쇄 훈련까지 실시했다. 2007년과 2009년에도 양국 접경 지역에서 공격형 헬리콥터 기동사격 등 대대적인 합동훈련을 벌였다. 올해 합동훈련은 당초 8월 말 동해 북부해역에서 양국 해군이 참여한 가운데 진행될 것으로 알려졌지만 아직 실시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도쿄 이종락·베이징 박홍환특파원 jrlee@seoul.co.kr
  • 경찰 ‘희망버스’ 서울 집회에 물대포

    경찰 ‘희망버스’ 서울 집회에 물대포

    경찰이 28일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를 촉구하는 제4차 ‘희망버스’ 행사에서 시위대를 향해 물대포를 쐈다. 물대포 사용은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이후 3년 만이다. 해군기지 건설을 둘러싼 제주도 ‘강정마을 사태’와 관련, 불법 집회·시위에 대해서는 현장 체포, 구속 수사라는 엄정 대응 방침을 내놓은 지 이틀 만에 이뤄진 조치다. 경찰은 낮 12시 17분쯤부터 서울 용산구 갈월동 한진중공업 본사 앞에 모인 제4차 ‘희망버스’ 집회 참가자 800여명(경찰 추산)을 해산시키기 위해 살수차 2대를 동원, 10여분 동안 4차례에 걸쳐 물대포를 발사했다. 경찰은 병력 700여명을 투입해 남영역에서 한진중공업 사옥 방면 4개 차선 70m를 점거한 시위대를 세 방향에서 에워쌌다. 이어 폴리스라인을 설치하고 시위대와 대치하다 12시 10분까지 자진해산하지 않으면 물대포를 사용하겠다고 경고했다. 처음엔 살수차 1대로 하늘을 향해 경고성으로 2차례 물대포를 쐈다. 12시 30분부터 경찰은 살수차 2대를 모두 이용해 집회 참가자는 물론 스피커 차량 등을 겨냥해 물대포를 쏘며 대응 수위를 높였다. 시위대는 우산과 비옷, 팻말 등으로 물줄기를 막으면서 행사를 이어갔다. 이후 경찰은 “(해산하지 않으면) 최루액을 살포하겠다.”고 경고 방송을 했으나 실제 사용하지는 않았다. 시위대는 ‘비정규직’ 등을 적은 스티로폼 팻말을 부수는 퍼포먼스를 펼친 뒤 오후 1시를 넘겨 자진해산했다. 경찰의 연행이나 보수단체와의 큰 충돌은 없었다. 행사 참가자들은 “집회를 합법적으로 신고한 데다 평화적으로 진행했는 데도 경찰이 ‘과잉 대응’을 했다.”고 반발했다. 경찰은 이날 집회에서 도로를 점거하는 등 불법 행위에 가담한 참가자들에 대해 검거 전담반을 편성해 추적하는 한편 신원이 확인된 주최자 등 11명에게 출석을 요구했다. 또 집회 현장을 취재하던 기자를 폭행한 시위대 김모씨 등 4명도 조사하고 있다. 경찰은 무단 점거, 공무집행 방해를 비롯한 집단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엄정하게 사법조치하기로 했다. 지난 26일 공안대책회의에서 밝힌 “불법 집회·시위에 대해 엄정 대응하겠다.”는 후속 조치인 셈이다. 실제 경찰은 강정마을 사태와 스티븐슨 주한 미 대사 차량의 물병 투척 등으로 공권력이 큰 도전을 받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 형국이다. 희망버스 참가자 10여명은 오전 7시 40분쯤 청와대가 내려다보이는 인왕산과 인근 안산 정상에 올라 ‘비정규직 철폐’ 등이 적힌 현수막을 펼치는 ‘산상 집회’를 열었다. 앞서 지난 27일 오후 6시부터 희망버스 참가자 5000여명(집회 측 추산 9000여명)은 서울 청계광장에 모여 전야제를 연 뒤 밤늦게 도심 행진을 시도하다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신진호기자 sayho@seoul.co.kr
  • “네스호에 UFO가 추락했다?”…놀란 英당국

    “네스호에 UFO가 추락했다?”…놀란 英당국

    호수 괴물 네시로 유명한 영국 네스 호수에 미확인비행물체(UFO)가 추락했다는 보고에 당국이 총출동하는 해프닝이 발생했다. 21일(이하 현지시간) 영국 BBC 뉴스 등의 보도를 따르면 지난 20일 영국 북부 스코틀랜드 네스 호수에 열기구로 추정되는 비행물체가 추락했다는 보고에 긴급 구조대가 투입, 야간 수색 작업이 진행됐다. 영국 국립구명기관(RNLI)을 비롯, 경찰과 군 병력이 투입된 이번 수색 작업에는 구조선과 구조 헬기까지 동원하여 호수 일대를 샅샅이 수색했지만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이날 수색 작업은 오후 8시께부터 진행됐으며, 목격자들은 “네스 호수 남쪽으로 푸른 빛의 비행물체가 떨어지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영국 경찰은 그 비행물체가 행글라이더나 초경량항공기로 추측했지만, 3시간에 걸친 수색 작업에도 그 어떠한 흔적도 발견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RNLI 네스호 담당 비비안 베일리는 “사고 현장에 빨리 도착하는 일은 극히 중요하다.”고 밝히면서 이번 신고는 시민의 진정한 우려에서 나온 것이며 앞으로도 이 같은 신고 조치가 잘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사진=스코틀랜드 STV 윤태희기자 th20022@seoul.co.kr
  • 대통령 질책 한마디에 洪대표 국방개혁 ‘총대’

    대통령 질책 한마디에 洪대표 국방개혁 ‘총대’

    홍준표(얼굴) 한나라당 대표가 지난 17일 상임위를 정무위에서 국방위로 바꾸기까지는 국회의 지지부진한 국방개혁법안 처리 과정에 대한 이명박 대통령의 질책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여권 핵심 관계자는 18일 “이 대통령이 최근 국방개혁법안에 여당 의원들이 반대하고 있는 실정을 질책하기도 했다.”면서 “이 사실을 전달받은 홍 대표가 국방개혁안에 반대하는 3성 장군 출신 한기호 의원을 국방위에서 빼고 자신이 직접 진두지휘에 나선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전날 홍 대표가 상임위 변경에 대해 “당초 정무위로 간 이유는 서민 대출을 은행 이익의 10% 이상 할당하는 정책을 펴기 위해서였는데, 목표를 달성해 국방위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밝힌 것과는 다른 설명이다. 홍 대표는 특히 국방개혁안에 반대하고 있는 김장수 의원과 한 의원을 대표실로 불러 상임위 교체에 따른 협조를 당부하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국방개혁안 처리의 열쇠를 쥔 것으로 지목되는 국방부 장관 출신의 김 의원을 국방위에서 퇴출시킬 경우 반대 여론에 맞닥뜨릴 수 있다는 우려도 고려됐다고 한다. 이와 관련, 한 의원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물러났다.”며 씁쓸해했다. 그는 “상부 지휘구조 개편은 국가 비상사태 때 물자·병력 동원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을 각 군 참모총장에게 작전지휘권까지 맡기는 것인데,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임무를 부여하는 격”이라고 비판했다. 김 의원도 “국가 안보는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다 함께 하는 것”이라며 충분한 협의와 검증을 강조했다. 당내 일각에선 여당 대표가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상임위까지 바꿔가며 국방개혁의 총대를 메는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지적도 흘러나온다. 국방위 소속 한 의원은 “홍 대표의 상임위 변경은 국가 안보와 직결된 국방개혁안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려는 인상을 남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다만 당 핵심 관계자는 “홍 대표의 상임위 변경은 저축은행 비리 등 하반기 정국 이슈가 정무위로 몰리는 상황에서 당 대표가 일일이 챙기기 힘든 사정 등이 고려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한편 국회 국방위는 19일 경기 용인 3군사령부와 대전 계룡대에서 군 상부구조 개편이 시험 적용되는 UFG 연습을 참관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국방개혁안의 처리 방향을 결정할 예정이다. 홍성규기자 cool@seoul.co.kr
  • 또 좌우로 찢긴 8·15

    또 좌우로 찢긴 8·15

    광복절이 또 둘로 찢겼다. 진보와 보수진영이 주최한 광복절 기념행사가 서울 도심 곳곳에서 따로 열렸다. 우려했던 충돌은 빚어지지 않았지만 광화문 일대 교통이 통제되면서 큰 혼잡이 빚어지는 등 시민 불편이 이어졌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등 진보진영의 80여개 시민·사회·노동단체와 야 5당은 15일 오전 11시 서울 청계광장에서 ‘광복 66년, 한반도 자주·평화·통일을 위한 범국민대회’를 열었다. 전날 여의도 문화광장 문화제에 이어 개최된 이날 집회에는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 조승수 진보신당 대표 등 야당 대표와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 시민 등 5000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정부에 남북대화 등 대북정책의 전환을 촉구한 데 이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등 주요 현안에 대해서도 날선 비판을 쏟아냈다. 오후 4시 청계광장에서는 전국등록금네트워크(등록금넷)와 한국대학생연합(한대련) 등이 주최한 ‘8·15 등록금해방 결의대회’가 열렸다. 대학생 등 1500여명의 참가자들은 하반기 대정부 투쟁 돌입을 선언했다. 비슷한 시각, 서울광장에서는 보수단체들이 모인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라이트코리아와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등 100여개 보수단체는 오후 2시 서울광장에서 ‘종북세력 척결 및 교육 바로 세우기 국민대회’를 가졌다. 5000명이 참석한 행사에서 각 단체들은 “진보를 가장한 종북세력은 북한 세습독재에는 한마디 비판도 못 하면서 ‘희망버스’ 운운하며 국민들 편가르기만 하고 있다.”며 ‘복지포퓰리즘 심판’ 등의 구호를 외쳤다. 집회 통제에 나선 경찰은 7000명의 병력을 동원해 허가받지 않은 거리시위 차단에 나서는 한편 보수·진보단체 간 충돌을 막기 위해 광화문 광장 등에 경찰력을 집중 배치해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시민 불편도 잇따랐다. 오전 11시 10분부터 낮 12시 55분까지 대한문~광화문광장 태평로 구간의 양방향 교통이 통제돼 큰 혼잡이 빚어졌다. 이 때문에 지하철을 이용하려는 시민들이 몰리면서 한때 1, 2호선 시청역과 5호선 광화문역이 크게 붐볐다. ‘이념 대결의 장’이 되어 버린 기념행사와 달리 온라인 공간에서는 네티즌들이 마음을 모아 ‘나라사랑’의 의지를 다졌다. 누리꾼들은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이용해 태극기 사진을 자신의 프로필에 추가하는가 하면 “국경일을 뜻깊게 기념하자.”는 글을 속속 올리면서 광복절의 의미를 되새겼다. 또 일본의 침탈에 맞선 ‘독도사랑’ 오프라인 플래시몹(정해진 시간과 장소에 사람들이 모여 일제히 약속된 퍼포먼스를 보여 주는 행위)도 전국 곳곳에서 열렸다. 백민경·신진호기자 white@seoul.co.kr
  • “아무리 퍼내도 흙탕물…” 복구중 폭우로 대피

    전날 사상 최악의 폭우와 산사태로 18명의 생명을 앗아 간 서울 우면산 일대는 28일에도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오전 8시쯤 방배2동 전원마을은 가구와 가재도구 등이 떠밀려온 토사와 나뭇가지 등으로 뒤엉켜 폭격을 맞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낮은 지대인 전원말2길 쪽 주택가에는 진흙과 쪼개진 나무조각들이 가득 들어차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었다. 마을 위쪽 우면산 자락에서는 거센 흙탕물이 콸콸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주민들은 섣불리 복구작업에 나서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막막하다고 했다. 산기슭 아래 쪽에 사는 최기숙(58·여)씨는 새벽 6시부터 4시간이 넘도록 반지하 주차장에 가득 들어찬 진흙을 걷어내던 중이었다. 5명의 소방대원이 양동이를 들고 힘을 보탰지만 흙탕물 수위는 좀체 낮아지지 않았다. 최씨는 “이 마을에서 20년을 살았는데 이런 난리는 처음”이라면서 “작년 여름 태풍 때 위태위태하던 나무들을 뽑아달라고 했는데 그냥 둬 이렇게 화를 불렀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 27일 오전 이 마을 주민 엄모(33)씨는 출근길에 나서다 토사와 나무에 휩쓸려 숨졌다. 임시대피소인 남태령 마을회관은 성토장이 됐다. 마을주민 손모(49·여)씨는 “산을 가만두질 않고 계속 깎아대니 안 무너지고 배기겠느냐.”면서 언성을 높였다. 이에 대해 서초구청 관계자는 “지난해 태풍 곤파스로 뽑힌 나무가 많아 지반이 완전히 안정되지 못한 상태에서 집중호우가 쏟아져 산사태가 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오전 9시쯤 방배3동 래미안아트힐 아파트에서는 경찰·소방·군 병력 600여명이 동원돼 아파트 1~4층을 뒤덮은 진흙을 퍼내고 있었다. 한 삽씩 일일이 퍼내야 해 속도가 더뎠다. 우면산 쪽에 가까운 103·104동의 피해가 가장 컸다. 주민 홍윤상(56)씨는 “지난해에도 우면산 계곡쪽 토사가 남부순환도로 위로 넘어온 적이 있다.”면서 “이 때문에 구청이 배수로와 맨홀을 넓히는 공사를 하고 있던 것으로 알았는데 여름이 다 돼서 하면 뭘 하느냐.”고 지적했다. 이 아파트를 마주 보고 있는 예술의전당도 복구작업이 더디긴 마찬가지였다. 오전 내내 내린 비에 흙탕물 계곡은 전날에 비해 줄지 않았다. 오락가락하던 빗줄기가 오전 10시쯤 점차 굵어지자 복구작업 지원을 나온 공무원 20여명은 결국 삽을 놓고 버스정류장 밑으로 들어가 비를 피했다. 한편 27일 방배동 윗성뒤마을에서 산사태로 실종됐던 김모(67·여)씨가 이날 오전 10시 20분쯤 자신의 집에서 250m 떨어진 곳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또 방배동 전원마을에 매몰됐던 이모(68·여)씨와 우면동 송동마을의 김모(77·여)씨의 시신이 발견되는 등 사망자 수는 전날에 비해 3명 늘었다. 윤샘이나기자 sam@seoul.co.kr
  • 황석영 작가가 해병대 후배들에게…다시 전우를 생각한다

    황석영 작가가 해병대 후배들에게…다시 전우를 생각한다

    요즈음 해병대에서 일어난 몇 차례의 군기 사고에 대하여 너무도 뻔하고 상투적인 여론이 들끓는 것을 보며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나는 한국의 젊은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병역의 의무를 해병대원으로 치러냈고 베트남 전쟁에까지 참전했던 노병으로서 이번 사태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원래가 해병대는 제국주의 시대에 자국의 영토를 벗어나서 바다 건너 다른 나라를 공략하던 시기에 조직된 군사 편제이다. 한국 해병대의 창설은 한국전쟁이 치열하던 와중에 낙동강 교두보에 몰리면서 인천 상륙작전을 준비하던 미군 사령부의 주도로 제주도에서 급조되었던 것이다. 이들 초기 기수의 해병 대부분이 4·3 항쟁을 겪고 살아남아 가족과 자신의 사상적 알리바이를 온몸으로 보여야 했던 제주도의 청년들이었던 것은 분단에서 비롯된 국군의 태생적 아픔을 상징적으로 안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지금도 유명한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말도 창설되자마자 부산 방어선을 위한 최초의 상륙작전이던 통영 작전을 취재한 미국 기자의 기사에서 시작되었고, 이후 베트남 전쟁에 이르기까지 한국 해병대는 한국군 내부에서는 독자적으로, 그러나 내용으로 보면 미국 해병대의 작전 편제 안에서 그 특수성을 견제 혹은 격려받으면서 성장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남베트남이나 태국, 필리핀 등 동남아의 경우를 보면 육·해·공 지휘 체계의 외곽에서 비정규적 작전권을 갖고 있던 해병대가 언제나 군사정변에 동원되었고 한국의 5·16 쿠데타에서도 역할은 비슷한 것이었다. 따라서 육군이 주도했던 당시의 군사정부는 해병대의 애매한 위치에 대하여 고민을 했던 흔적이 여러 가지 자료에 보인다. 베트남 전쟁 이후 한국 해병대는 해군의 지휘 체계에 들어가면서 예산·진급·작전 모든 면에서 그 독자성을 상실한다. 아무튼, 우리 군대의 아픔이었던 일제 군대의 잔재는 다른 무엇보다도 하급 병사들에게는 내무반에 뿌리 깊게 남아 있었다. 모든 병영 문화의 출발이 내무반에서 시작되기 마련이었다. 겉으로는 미 해병대 캠프에서 훈련받은 젊은 장교 하사관들이 병사들을 교육했지만 일본 육전대의 전통이 내면화되었다. 베트남에서 겪은 일이지만 미군은 전선에서 싸우는 병사 한명에게 거의 열 배에 가까운 군수, 병참, 화력 지원의 역량을 투입했다. 아무리 조건이 나쁜 하급 부대에서도 병사들은 따뜻한 식사와 온수 샤워를 할 수 있었다. ‘민주 군대’의 토대는 결국 경제적 역량이었던 셈이다. 전 국민이 보릿고개를 넘던 시절에 군대에서 밥이라도 먹였던 것은 만연한 부패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일이었고, 이른바 ‘빳다’를 맞고 기합을 받아도 견디어 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이제 나는 그야말로 ‘기수 열외’라는 생소한 용어에 당황한다. 해병대의 기수란 한 달에 한 번씩 자원한 젊은이들을 부대원으로 받아들이는 모병제의 다른 이름이다. 같은 시기에 입대한 젊은이끼리는 서로 ‘동기생’이라고 부른다. 병력의 최소 단위가 되는 소대에서 분대로 나뉘는 편제를 모르면 어째서 기수가 중요한지 이해할 수가 없다. 소대장 아래 분대장인 하사관들이 있고 일개 분대는 스무 명쯤 되며 이는 다시 화기를 중심으로 조장 사수 부사수 소총수로 내려간다. 병장이 부분대장쯤 되고 그 아래로 상등병과 일등병, 이등병이 제 역할을 한다는 얘기다. 기수는 이러한 편제를 맞추어 나가기에 알맞게 되어 있다. 베트남 전쟁터에서 작전을 나가는 모든 병사는 수통을 두 개씩 허리에 차고 나가도 절약해서 마시지 않으면 어느 때는 오후에 텅 비게 된다. 이때 누군가가 다른 병사에게 물 한 모금 먹자고 하면 계급의 상하를 막론하고 ‘내 피를 달라고 하라’는 핀잔을 듣는다. 그러나 동기생이 달라고 하면 하는 수 없이 내준다. 당시만 하여도 얼차려를 줄 때에도 상급자는 엄동설한에 병사들을 발가벗겨 구보를 시키면 자신도 발가벗었고 얼음물에 처박으려면 자신도 함께 처박혀서 구령을 붙였다. 기수란 체력이나 요령이 부족한 동료를 낙오시키고 내버리고 왔을 때 모든 동기생에게 책임을 묻는 그런 것이었다. 이런 일을 ‘전우애’라고 부른다. ‘기수 열외’란 언젠가부터 극단적인 경쟁을 당연하게 내세우는 우리네 학원의 청소년 문화가 되어버린 ‘왕따’가 병영에까지 스며들었다는 충격을 주는 용어이다. 누군가를 지목하여 병사 모두가 그를 묵살하거나 엄정하게 주어진 계급 따위를 무시하게 한다는 것은 내막적으로는 군기를 어지럽히는 일이다. 나는 이번 사태의 책임에 대하여 하급병사들에게만 엄중하게 묻는 것을 개탄한다. 사실 변죽을 울리면서 한참 동안 해병대의 유래와 특수성을 말했지만 내가 보기에 이는 일종의 ‘조직 피로’ 증후군이다. 천안함 이래 그리고 연평 포격 사건에 이르기까지 사건의 중심부에 있던 해병대를 온 사회와 정치권이 그리고 지휘 상층이 얼마나 쪼아댔을까. 만만한 게 뭐라고 하급 병사들이 겪는 스트레스와 압력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이다. 미군식 ‘민주 군대’란 병사 개개인에 대한 막강한 지원 능력과 높은 ‘노임’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우리는 최소한 ‘이만큼 살게 되었으니’ 군대에 안 가면 거의 폐인이 되어 버릴 정도의 강압적 징병제를 책임질 만한 내무반을 창출해 낼 국가적 의무가 있다. 군기를 지키되 장군에서 이등병에 이르기까지 ‘전우’라는 너무도 당연한 생각이 뿌리를 내려야만 한다. 그리하여 자기 직책과 책임에 관한 것만 예외로 하고 모든 사사로운 특권을 철폐해야 한다. 소대장은 당번병을 없애고 자기 구두는 자기가 닦아야 하며 하사관 병장은 제 양말을 빨고 상등병은 자기 식기를 설거지하며 일등병 이등병은 근무 이외에 하인 노릇을 하지 않아야 한다. 지금도 우리가 ‘광주’를 말하며 당시의 신군부를 교훈으로 삼는 것은 ‘국민의 군대’는 정치권력의 사병(私兵)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거의 모든 대한민국 남자가 군대를 다녀왔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민간인이 버젓하게 군복을 입고 거리에 나와 특정한 정치적 집회에 동원되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 손자는 그의 유명한 저작인 병법에서 전쟁을 피치 못할 최후의 수단으로 규정하면서, 무엇보다도 우선 되어야 할 것은 국가와 백성의 평화를 지키는 것이 진정한 힘이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본다면 전쟁과 군대는 국가를 위한 최후의 필요악이라는 말이 된다. ●황석영1943년 만주 출생. 고교 재학 중 단편 ‘입석 부근’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1966년 해병대에 입대해 청룡부대 제2진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장편소설 ‘무기의 그늘’에 이때의 경험이 녹아 있다. 1969년 제대한 뒤 ‘객지’ ‘한씨연대기’ ‘삼포 가는 길’ ‘장길산’ 등을 잇따라 내놓았다. 1989년 방북 후 독일·미국 등지에서 머물다가 1993년 귀국해 5년여 복역했다. 지난달 신작 소설 ‘낯익은 세상’을 발표했다.
  • [특별기고]다시 전우를 생각하며

    [특별기고]다시 전우를 생각하며

     요즈음 해병대에서 일어난 몇 차례의 군기 사고에 대하여 너무도 뻔하고 상투적인 여론이 들끓는 것을 보며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나는 한국의 젊은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병역의 의무를 해병대원으로 치러냈고 베트남 전쟁에까지 참전했던 노병으로서 이번 사태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원래가 해병대는 제국주의 시대에 자국의 영토를 벗어나서 바다 건너 다른 나라를 공략하던 시기에 조직된 군사 편제이다. 한국 해병대의 창설은 한국전쟁이 치열하던 와중에 낙동강 교두보에 몰리면서 인천 상륙작전을 준비하던 미군 사령부의 주도로 제주도에서 급조되었던 것이다. 이들 초기 기수의 해병 대부분이 4·3을 겪고 살아남아 가족과 자신의 사상적 알리바이를 온몸으로 보여야 했던 제주도의 청년들이었던 것은 분단에서 비롯된 국군의 태생적 아픔을 상징적으로 안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지금도 유명한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말도 창설되자마자 부산 방어선을 위한 최초의 상륙작전이던 통영 작전을 취재한 미국 기자의 기사에서 시작되었고, 이후 베트남 전쟁에 이르기까지 한국 해병대는 한국군 내부에서는 독자적으로 그러나 내용으로 보면 미국 해병대의 작전 편제 안에서 그 특수성을 견제 혹은 격려받으면서 성장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남베트남이나 태국, 필리핀 등 동남아의 경우를 보면 육해공 지휘 체계의 외곽에서 비정규적 작전권을 갖고 있던 해병대가 언제나 군사정변에 동원되었고 한국의 5·16 쿠데타에서도 역할은 비슷한 것이었다. 따라서 육군이 주도했던 당시의 군사정부는 해병대의 애매한 위치에 대하여 고민을 했던 흔적이 여러 가지 자료에 보인다. 베트남 전쟁 이후 한국 해병대는 해군의 지휘 체계에 들어가면서 예산 진급 작전의 모든 면에서 그 독자성을 상실한다.  아무튼, 우리 군대의 아픔이었던 일제 군대의 잔재는 다른 무엇보다도 하급 병사들에게는 내무반에 뿌리 깊게 남아 있었다. 모든 병영 문화의 출발이 내무반에서 시작되기 마련이었다. 겉으로는 미 해병대 캠프에서 훈련받은 젊은 장교 하사관들이 병사들을 교육했지만 일본 육전대의 전통이 내면화되었다. 베트남에서 겪은 일이지만 미군은 전선에서 싸우는 병사 하나에 거의 열 배에 가까운 군수 병참 화력 지원의 역량이 투입되는데 아무리 조건이 나쁜 하급 부대에서도 병사들은 따뜻한 식사와 온수 샤워를 할 수 있었다. ‘민주 군대’의 토대는 결국 경제적 역량이었던 셈이다. 전 국민이 보릿고개를 넘던 시절에 군대에서 밥이라도 먹였던 것은 만연한 부패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일이었고, 이른바 ‘빳다’를 맞고 기합을 받아도 견디어 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이제 나는 그야말로 ‘기수 열외’라는 생소한 용어에 당황한다. 해병대의 기수란 한 달에 한 번씩 자원한 젊은이들을 부대원으로 받아들이는 모병제의 다른 이름이다. 같은 시기에 입대한 젊은이끼리는 서로 ‘동기생’이라고 부른다. 병력의 최소 단위가 되는 소대에서 분대로 나뉘는 편제를 모르면 어째서 기수가 중요한지 이해할 수가 없다. 소대장 아래 분대장인 하사관들이 있고 일개 분대는 스무 명쯤 되며 이는 다시 화기를 중심으로 조장 사수 부사수 소총수로 내려간다. 병장이 부분대장쯤 되고 그 아래로 상등병과 일등병 이등병이 제 역할을 논다는 얘기다. 기수는 이러한 편제를 맞추어 나가기에 알맞게 되어 있다.  베트남 전쟁터에서 작전을 나가는 모든 병사는 수통을 두 개씩 허리에 차고 나가도 절약해서 마시지 않으면 어느 때는 오후에 텅 비게 된다. 이때 누군가가 다른 병사에게 물 한 모금 먹자고 하면 계급의 상하를 막론하고 ‘내 피를 달라고 하라’는 핀잔을 듣는다. 그러나 동기생이 달라고 하면 하는 수 없이 내준다. 당시만 하여도 얼차려를 줄 때에도 상급자는 엄동설한에 병사들을 발가벗겨 구보를 시키면 자신도 발가벗었고 얼음물에 처박으려면 자신도 함께 처박혀서 구령을 붙였다. 기수란 체력이나 요령이 부족한 동료를 낙오시키고 내버리고 왔을 때 모든 동기생에게 책임을 묻는 그런 것이었다. 이런 일을 ‘전우애’라고 부른다.   ‘기수 열외’란 언젠가부터 극단적인 경쟁을 당연하게 내세우는 우리네 학원의 청소년 문화가 되어버린 ‘왕따’가 병영에까지 스며들었다는 충격을 주는 용어이다. 누군가를 지목하여 병사 모두가 그를 묵살하거나 엄정하게 주어진 계급 따위를 무시하게 한다는 것은 내막적으로는 군기를 어지럽히는 일이다.  나는 이번 사태의 책임에 대하여 하급병사들에게만 엄중하게 묻는 것을 개탄한다. 사실 변죽을 울리면서 한참 동안 해병대의 유래와 특수성을 말했지만 내가 보기에 이는 일종의 ‘조직 피로’ 증후군이다. 천안함 이래 그리고 연평 포격 사건에 이르기까지 사건의 중심부에 있던 해병대를 온 사회와 정치권이 그리고 지휘 상층이 얼마나 쪼아댔을까. 만만한 게 뭐라고 하급 병사들이 겪는 스트레스와 압력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이다. 미군식 ‘민주 군대’란 병사 개개인에 대한 막강한 지원 능력과 높은 ‘노임’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우리는 최소한 ‘이만큼 살게 되었으니’ 군대에 안 가면 거의 폐인이 되어 버릴 정도의 강압적 징병제를 책임질만한 내무반을 창출해낼 국가적 의무가 있다. 군기를 지키되 장군에서 이등병에 이르기까지 ‘전우’라는 너무도 당연한 생각이 뿌리를 내려야만 한다. 그리하여 자기 직책과 책임에 관한 것만 예외로 하고 모든 사사로운 특권을 철폐해야 한다. 소대장은 당번병을 없애고 자기 구두는 자기가 닦아야 하며 하사관 병장은 제 양말을 빨고 상등병은 자기 식기를 설거지하며 일등병 이등병은 근무 이외에 하인 노릇을 하지 않아야 한다.  지금도 우리가 ‘광주’를 말하며 당시의 신군부를 교훈으로 삼는 것은 ‘국민의 군대’는 정치권력의 사병(私兵)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거의 모든 대한민국 남자가 군대를 다녀왔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민간인이 버젓하게 군복을 입고 거리에 나와 특정한 정치적 집회에 동원되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  손자는 그의 유명한 저작인 병법에서 전쟁을 피치 못할 최후의 수단으로 규정하면서, 무엇보다도 우선 되어야 할 것은 국가와 백성의 평화를 지키는 것이 진정한 힘이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본다면 전쟁과 군대는 국가를 위한 최후의 필요악이라는 말이 된다. 소설가 황석영
  • ‘권력실세’ 아프간 대통령 동생 피살

    ‘권력실세’ 아프간 대통령 동생 피살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의 배다른 동생이자 아프간의 대표적인 권력자 아메드 왈리 카르자이가 피살됐다. 아프간 남부 칸다하르주(州)의 잘마이 아유비 대변인은 12일 “아메드 왈리가 집에서 경호원의 총격을 받고 살해됐다.”고 말했다. 칸다하르주 보건당국 관계자와 아메드의 경호 담당자도 그의 사망 사실을 확인했다고 AP통신 등이 보도했다. 탈레반 대변인은 자신들이 아메드 왈리의 암살을 지시했다고 주장하며 이번 사건이 탈레반의 가장 큰 업적 가운데 하나라고 밝혔다. 2005년 칸다하르 주의회 의장으로 선출된 그는 여러 언론 매체들이 ‘군 지도자’, ‘군벌’로 묘사할 정도로 강력한 권력을 지닌 실세로 군림해 왔다. 특히 아프간 마약 밀수와 돈 세탁 등 각종 범죄에 깊숙이 연루돼 있는 것으로 미국과 영국 정부는 의심하고 있다. 2006년 양국 정부가 카르자이 대통령에게 동생을 추방할 것을 요청했으나 카르자이 대통령은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라.”며 거절했다. 아메드 왈리는 아프간 ‘부패의 상징’으로 일컬어져 왔다. 아메드 왈리는 주의회 의장으로 선출된 이후 두 차례를 포함해 여러 차례 암살 시도에 노출된 바 있다. 그의 정확한 사망 경위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프간 내무부 소속 대테러부대 관계자는 아메드 왈리가 본인의 경호원에게 살해됐으며, 이번 사건에 외부인이 개입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확인했다. 아메드 왈리가 사망하자 칸다하르 시 일대에는 대규모 경찰 병력이 동원됐다. 검문이 강화됐으며 그의 시신이 옮겨진 병원으로 통하는 도로는 완전히 차단했다. 아프간 뉴스 통신 TOLO를 소유하고 있는 아프간 최대 미디어 그룹의 편집장인 사아드 모세니는 트위터를 통해 “칸다하르 지역을 하나로 하는 일을 도와 온 (그의 죽음은) 대통령에게 큰 손실”이라고 전했다. 카르자이 대통령의 이복 동생이자 대통령을 버텨주는 유력한 지도자인 아메드 왈리의 사망으로 카르자이의 국정운영이 타격을 받게 됐으며 남부 지역의 주요한 거점을 상실할 위기에 놓였다. 아프간 사태도 더욱 혼미를 거듭할 전망이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베트남, 32년만에 ‘징집령’ VS 중국, 해병대 상륙훈련…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긴장고조

    베트남이 1979년 중국과의 국경전쟁 이후 32년 만에 처음으로 ‘징병 명령’을 발동했다. “응 웬 떤중 총리가 군부의 요청으로 지난 13일 전시 징병 기준을 정한 징병 명령에 서명했다.”고 중국 언론들이 15일 일제히 보도했다. 오는 8월1일부터 발효되는 징병령은 전시에 징병에서 제외되는 주요 국가기관 공무원, 독자 등의 범위를 규정하고 있다. 당장 전면적인 동원령이 내려진 것은 아니지만 베트남의 징병령 발동은 다분히 중국을 겨냥한 조치다. 시사(西沙·파라셀)군도와 난사(南沙·스프래틀리)군도에서 중국과의 영유권 분쟁이 고조되면서 군사적 마찰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어 예비적 조치로 징병령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32년 만의 첫 발동이라는 점에서 베트남의 긴박감이 엿보인다. 중국과의 대결에서 더욱 강경한 입장을 주문하고 있는 자국내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화답’ 성격도 짙다. 응 웬 떤중 총리 스스로 여러 차례 “베트남의 모든 정당, 국민, 군대는 우리 해역의 주권을 보위하겠다는 가장 강한 결심을 표출해 달라.”고 역설하기도 했다. 2009년 발표한 베트남 국방백서에 따르면 베트남의 현역 군인은 45만명, 예비역은 500여만명에 이른다. 베트남이 남중국해에서 실탄 사격훈련을 강행하고, 징병령을 발동한 데 이어 다음 달 미국과 합동 해상훈련을 실시키로 하는 등 강경으로 치닫고 있는 가운데 중국 역시 한치도 밀리지 않겠다는 입장이어서 충돌 가능성은 한층 높아지고 있다. 중국은 특히 이달 초부터 남중국해의 한 섬에서 해병대 여단 병력이 상륙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베트남과의 충돌에 대비한 훈련이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실제 중국 해병대의 남중국해 훈련 사실은 군 기관지 해방군보가 공개함으로써 베트남 등에 대한 경고의 의미를 감추지 않았다. 중국 해군 해병대는 약 2000㎞를 이동, 남중국해의 한 섬에 주둔한 채 낙하 훈련, 상륙 훈련, 야간침투 훈련 등 실전 훈련을 전개하고 있다. 여단장 천웨이둥(陳爲東)은 해방군보와의 인터뷰에서 “20여개 항목의 각종 해병대 실전훈련을 실시하고 있다.”면서 “해안 상륙, 해안 교두보 확보 등의 작전능력이 크게 배양됐다.”고 말했다. 남중국해 분쟁은 이달 말로 예정된 필리핀과 미국의 합동훈련, 다음 달 실시될 베트남과 미국의 합동훈련, 8월에 시작되는 중국 시추플랜트의 남중국해 작업개시 등 ‘악재’가 즐비해 앞으로도 상당기간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베이징 박홍환특파원 stinger@seoul.co.kr
  • 가계 부담·학생 좌절… 학부모도 “반값”

    가계 부담·학생 좌절… 학부모도 “반값”

    “학부모 입장에서도 반값 등록금은 절실합니다. 아들을 따라 집회에 나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대학생 자녀 두 명을 둔 직장인 강모(51)씨. 그는 5일 오후 서울 광화문에서 열리는 ‘반값 등록금 촛불 집회’에 나간다는 아들을 “고생하고 조심해라.”라는 말로 배웅했다. 강씨는 1980년대 민주화 시위 때도 “짱돌 한번 던져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2008년 대학교 1학년이던 아들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에 나간다고 할 때도 철없는 짓이라고 나무랐다. 하지만 ‘반값 등록금 집회’를 바라보는 강씨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지난 2월 두 자녀의 등록금 1300만원을 마련하기 위해 800만원을 대출받았다.”면서 “비싼 등록금 때문에 가계가 흔들리고 학생들이 좌절한다. 나라에 대책을 마련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4일 반값 등록금 촛불 시위를 하던 대학생 24명이 경찰에 연행됐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아이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저녁에 잠시라도 광화문 쪽으로 나가 봐야겠다.”고 말했다. 교문 밖을 나온 반값 등록금 촛불 집회가 심상치 않다. 갈수록 기세가 거세지고 규모는 확대되고 있다. 이제까지 촛불 집회라면 냉소를 보내던 40~50대 ‘학부모 세대’가 호응과 지지를 보내고 있어서다. ●“40~50대가 거리에 나선 것은 이례적” 반값 등록금 집회는 지난달 29일 시작돼 5일로 8일째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예전의 촛불 집회와는 다른 모습이다. 대학생들의 촛불 집회를 방관하거나 부정적인 시선을 보냈던 중장년층의 참여율이 높다. 학부모들 입장에서도 대학 등록금은 줄이고 싶어도 줄이지 못하는 절실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4일 열린 촛불 문화제에서는 참가자 1000여명 가운데 절반가량이 일반 시민이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100~200명이 40~50대의 학부모였다는 점이다. 집회에 참가한 대학생 이모(26)씨는 “아버지나 삼촌 나이로 보이는 분들이 100명 넘게 참여했고 간식거리를 사주시고 격려해 주는 경우도 많았다.”면서 “촛불 문화제에서 이렇게 많은 40~50대를 본 것은 처음”이라고 전했다. 40~50대가 거리로 나서게 된 것은 등록금 문제가 서민·중산층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집회에 참가한 은행원 최모(49)씨는 “학부모로서 1년에 1000만원이 넘는 등록금은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면서 “솔직히 퇴직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이들 등록금 1000만원, 2000만원 내고 나면 노후 준비도 제대로 못 한다.”고 말했다. 김삼호 대학연구소 연구원은 “자녀들의 등록금 문제가 서민뿐만 아니라 그나마 여유가 있는 중산층 학부모들도 압박하면서 사회의 중추 세력인 40~50대가 대안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일각에서는 중장년층의 공감과 지지를 받고 있는 반값 등록금 집회가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안진걸 참여연대 민생팀장은 “이제까지 집회나 시위에 회의적이었던 40~50대가 거리에 나선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면서 “학부모 세대가 나온 이상 반값 등록금 촛불이 더 커질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경찰 7~10일 ‘촛불대회’ 금지통보 5일 밤에도 광화문 일대에서는 학생과 시민 4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반값 등록금 촛불 문화제가 진행됐다. 촛불 문화제는 오후 10시쯤 마무리됐지만 일부 학생들이 트위터를 통해 연락, 명동 일대에 모여 집회를 이어갔다. 경찰은 1200여명의 병력을 동원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한편 경찰은 7~10일 서울 도심에서 열겠다고 신고해 온 ‘반값등록금 국민촛불대회’에 대해 집회금지통보를 내렸다. 김동현·윤샘이나기자 moses@seoul.co.kr
  • 백호가 나타났다?…실제크기 인형에 놀란 英경찰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라는 속담처럼 영국에서 실물 크기의 호랑이 인형을 실제 야생동물로 착각해 대규모 경찰력이 동원되는 해프닝이 발생했다. 21일(이하 현지시간) 오후 영국 햄프셔 사이스햄튼 헤지앤드 인근 지역에 살아 있는 백호를 목격했다는 주민들의 신고로 위와 같은 사태가 발생했다고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 등 외신이 보도했다. 백호로 추정된 그 야생동물이 발견된 곳은 인근에 골프장이 있어 경찰 측은 무장 병력과 헬기를 출동시켰으며 인근 동물원의 전문가들도 동원했다. 또한 인근 지역 주민을 긴급 대피 시키고 야생동물이 도주 가능한 고속도로도 차단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처럼 많은 인원이 참여한 대규모 생포 작전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무장 경찰이 백호로 추정되는 생포 대상에 접근했지만 그 야생동물은 꼼짝도 하지 않았고, 헬기에 장착된 열화상감지 센서에도 어떠한 열원이 감지되지 않았다. 이는 목표물이 실물 크기의 호랑이 인형이었던 것. 이에 대해 경찰 대변인은 “헬리콥터로부터 발생한 하강기류에 호랑이가 뒤집어지면서 실물 크기의 인형임이 밝혀졌다.”면서 “당시 촬영된 CCTV 영상을 보면 우리 모두가 진짜 호랑이로 착각할 만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우리 대원들이 미소를 띠고 되돌아가는 사건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며, 이번 사건은 우리가 다루는 다양한 사건 중 한 사례를 보여주는 것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경찰은 이번 해프닝을 일으킨 호랑이 인형의 실제 주인을 찾기 위해 조사 중이며, 해당 인형은 분실물 처리돼 보관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5·16 50돌] 5·16을 말한다

    [5·16 50돌] 5·16을 말한다

    ■ “8기 JP가 주도했다고? 5기가 핵심 세력이었지” 주역 중 1인 김재춘 前중앙정보부장 ‘삼국지’ 첫 대목으로 기억된다. ‘창장(長江)강은 뒤 물이 앞 물을 밀치면서 도도히 흐른다.’ 역사의 물줄기를 의미하겠다. 꼭 50년 전 오늘은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긴박했던 하루였다. 도도히 흐르던 역사의 물줄기를 확 바꿔놓은 사건, 이른바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던 날이다. 최근 50주년을 맞아 5·16 그날이 새삼 관심을 끌고 있다. 당시 주체세력 중 한 사람으로 알려진 김종필(85·육사8기) 전 자민련 총재가 5·16에 대해 오랜만에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 전 총재의 인터뷰 내용에 대해 반박하는 논리도 만만치 않다. “육사8기생들이 혁명의 주체세력이라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아니 혁명을 주도하려면 병력을 거느리고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당시 그들에겐 따르는 휘하 병력이 거의 없었는데 뭘.” 김재춘(84·육사 5기) ‘재단법인 5·16민족상’ 이사장은 5·16 당시 6관구사령부 참모장(대령)이었다. 그는 거사 전야인 1961년 5월 15일 밤 육사 5기생 출신을 주축으로 30여명의 영관장교들과 대책회의를 주도했다. 나중에 박정희 소장도 참석, 부대를 진두지휘하는 등의 역사가 있어 6관구사령부 참모장실은 소위 ‘혁명의 산실’로 알려져 있다. “그때 6관구사령부 참모장실은 혁명의 발상지였어. 15일 밤 10시에 5기생부터 8기생까지 주요 보직에 있는 장교들이 많이 모였지. 그때 김 전 총리는 보이지도 않았어. 다들 목숨을 내놓고 온 장교들이라 긴 말이 필요없었지. 침묵으로 긴 밤을 새우고 이튿날 새벽 3시 혁명군들이 여러 시설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각자의 역할로 돌아갔지.” 6관구사령부 참모장실에 장교들이 모인 까닭에 대해 그는 “6관구사령부는 수도권을 포함, 전국의 부대를 통신축선상으로 장악할 수 있는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당시 5기생 출신들이 5·16의 주도세력이었음을 거듭 강조했다. “그때 말야. 5사단장 채명신 장군, 12사단장 박춘식 장군, 6군단 포병단장 문재준 대령, 1공수여단장 박치옥 대령 등이 5기생 출신이었는데 병력을 이끌고 앞장서 출동해 말 그대로 일등공신들이었지. 개인적으로 김 전 총재에 대해 왈가왈부할 마음은 없지만 당시 김 전 총재는 민간인 신분인 걸로 알고 있어.” 김 전 총재는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동원된 3700명 병력이 적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대해) 혁명은 숫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가 중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김 이사장에게 “당시 김 전 총재는 하극상 사건으로 민간인 신분인데도 권총을 차고 가담한 것으로 돼 있다. 이는 불법무기 소지가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자 “허허, 아마도 목숨을 내놓은 상황이라 다급하게 권총을 찼나 보지 뭐.”라고 했다. 다음은 김 이사장(이하 김 참모장)과의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긴박했던 그날의 참모장실 분위기를 개략적으로 재구성했다. 김 참모장은 5월 15일 저녁 9시 30분쯤 시내에서 6관구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특이상황 여부를 묻고 박정희 소장에게 연락을 취한 뒤 곧장 부대로 향한다. 잠시후 부대정문에 도착한 김 참모장은 대기 중이던 혁명군 장교 20여명과 합류하여 참모장 집무실로 들어갔다. 밤 10시쯤 되자 다른 장교들도 추가로 합류했다. 김 참모장은 장교들에게 무기를 분배하는 등 만약의 사태를 대비했다. 6관구사령부는 당시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에 위치해 있었으며 수도군단의 전신이다. 이 시간 박정희 소장은 경호책임을 맡았던 한웅진 준장(육군정보학교장)과 함께 청진동 소재 서울호텔에서 은밀하게 만나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평소 청진동 골목에서 막걸리를 즐기다 보니 비밀장소를 서울호텔로 정했다. 이날 6관구사령부 참모장실은 새벽 3시 6군단 포병단이 육본을 완전 장악했다는 사실이 알려질 때까지 기침소리마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적막과 긴장의 시곗바늘만 째깍째깍 돌아갈 뿐이었다. 특히 새벽 3시 무렵, 참모장실에 영어를 구사하는 낯선 목소리의 전화가 와 긴장과 초조함은 더했다. 백악관인지 미8군 관계자인지 영어가 짧아 되묻지는 못했지만 ‘거사의 주동이 박정희가 맞느냐.’고 묻는 것인지는 알 수 있었다. 김 참모장은 ‘맞다.’고 확실하게 대답했다. 새벽 4시 남산에 있는 방송국을 장악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김 참모장은 박정희 소장에게 미리 연락을 받았던 혁명 취지가 담긴 박정희의 친필 서신을 장도영 참모총장에게 인편을 통해 보냈다. 내용에는 ‘만약 일이 잘못될 경우 전원 자결키로 맹세한다.’는 뜻도 담겼다. 장 참모총장은 육본 군수참모 이·취임식이 있는 날이어서 필동의 한 음식점에서 회식을 마친 뒤 나중에 이철희 방첩부대장에게 종합적인 상황보고를 받았다. “5·16 아침 박정희 소장 등과 함께 청와대로 갔어. 윤보선 대통령한테 정확한 사정을 보고하기 위해서였지. 비서관이 먼저 나와 우리들에게 ‘각하를 어떻게 하실 겁니까.’라고 묻더군. 앞으로 잘 모시고 혁명과업을 수행해야 한다고 했더니 그제서야 안심한 듯 만나게 해줬어. 장면 총리는 수녀원으로 피신해 있어서 금남의 집이라 들어갈 수가 없었지.” 박정희 소장한테 거사계획을 언제 들었느냐고 하자 김 이사장은 “박정희 장군은 점조직을 통해 혁명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대부분 1대1로 만나 가담 여부를 타진했고 나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원래 거사일을 5월 12일로 했다가 연기된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고 술회했다. 또한 그는 “우리 5기생들은 육사 때 박정희 장군이 구대장과 중대장을 했던지라 거사 제의 같은 것은 거절할 수도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동안 5·16 관련 내용은 인터뷰나 자료 등을 통해 대부분 공개됐다. 이 중 거사의 발상지는 6관구사령부 참모장실이며 주축세력이 육사 5기생과 8기생 출신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그동안 왜 8기생 출신들의 역할이 더 부각됐느냐고 하자 김 이사장은 “아마 김 전 총재가 박정희 대통령의 조카사위여서 그랬나 보다.”고 하면서 웃는다. 김문 편집위원 km@seoul.co.kr ●김재춘은 1948년 육군사관학교와 1955년 육군대를 졸업했다. 1957년 연대장을 지낸 뒤 1961년 5·16 당시 5·16 군사정변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 6관구사령부 참모장을 맡았다. 이후 방첩부대장 겸 군검경합동수사본부장을 지냈으며 1963년 최고회의 문교사회위원장을 맡았다. 그해 육군소장으로 예편한 뒤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 이후 무임소장관, 자민당 최고위원 등을 거쳐 1971년 제8대 국회의원(김포·강화, 민중당) 1973년 제9대 국회의원(고양·김포·강화, 민주공화당)을 지냈다. 1974년 축산단체연합회 회장, 1975년 한·중예술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재단법인 5·16민족상 이사장을 맡고 있다. ■ “5·16前 JP가 찾아와 정치발언 하기에 내쫓아” 反혁명분자 몰렸던 김웅수 당시 6군단장 5·16 당시 육군 6군단장(소장)이었던 김웅수(88)씨. 수도권 요충지에 포진한 6만명의 예하 병력을 법을 어겨 가며 진압군으로 동원할 수 있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결국 반 혁명세력으로 몰렸고 1년 뒤 군사정권의 간접적 압력으로 미국으로 떠났다. 지난 13일(현지시간) 버지니아주 그레이트폴스시의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5·16은 혁명인가, 쿠데타인가.’라는 질문에 “쿠데타로 본다.”고 했으나, 답변에서는 ‘혁명’이라는 단어를 주로 썼다. →5·16 당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사단장급 이상 야전군 지휘관 회의가 5월 17일 강원 원주의 야전군사령부에서 예정돼 있었어요. 16일 열리는 체육행사에도 참석해야 했기 때문에 25~26명의 지휘관들이 15일 원주에 다 모였어. 16일 새벽 4시쯤 잠을 자고 있는데 이한림 야전군사령관이 관사에서 회의를 소집한다는 거야. 그래서 가 보니 이 사령관이 서울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면서 “각자 부대로 돌아가 병력을 장악해라. 병력 이동의 빌미가 될지 모르니 부대에 비상을 걸지 말라.”고 지시했어요. →6군단은 어떤 조치를 했습니까. -6군단의 작전지휘권은 내가 아니라 미 1군단장이 갖고 있었어요. 불법을 진압하려 불법을 저지르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 그때 북한군 교신이 급격히 늘어나기에 비상을 걸었지. 비상을 걸면 자동적으로 1개 사단이 완전무장해서 특정지구로 출동하게 돼요. 이 일로 나중에 나는 반 혁명세력으로 간주되게 되었죠. →미군에는 조치를 요구했나요. -18일 나의 매부인 강영훈 육사교장이 육사생도들의 혁명지지 행진을 불허했다는 이유로 구속됐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라이언 1군단장한테 “왜 1군단이 갖고 있는 서울 비상계획은 쓰지 않는가.”라고 따졌어. 그날 저녁 라이언 장군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매그루더 미 8군사령관이 이한림 장군을 찾아가 얘기했다는 거예요. 그랬더니 이 장군이 “I will do(하겠다).”라고 했다는 거예요. 실제 그날 저녁 이 장군이 나한테 전화를 걸어 와 “도와 달라.”고 하더라고. 다음날 아침 이 사령관이 소집한 군단장 회의에 가려고 횡성 비행장에 도착했는데 미군 대령이 “이 장군이 이미 체포돼 서울로 압송됐다.”면서 되돌아가라고 하더라고. →결국 미군이 묵인한 건가요. -매그루더 장군이 누구를 진압할 성격이 못 됐어요. 강직하지 않았어. →미국이 5·16을 사전에 감지했었다는 얘기도 있는데요.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17일 마셜 그린 미국 부대사가 ‘군은 헌정에 의한 정통 정부에 귀속하라.’는 서한을 보내 왔거든. →6군단장으로는 언제까지 근무하신 겁니까. -20일 대통령 특사가 온다기에 군단 비행장으로 나갔어요. 도착한 비서 2명이 건넨 윤보선 대통령의 서신에는 ‘대립을 피하고 쿠데타에 협력하라.’라는 취지의 짤막한 글이 있었어. 그날 장도영 장군이 21일 오후 1시쯤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만나자고 하더라고. 서울로 떠나려는데 집사람이 전화를 걸어와 불길하다는 거야.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헌병 차량의 호송을 받으며 중앙청 쪽으로 가고 있는데 어떤 여인이 달려들어 막아서기에 내려보니 집사람이더라고. 그래서 “군인의 아내이니 이 정도는 각오해야 한다. 아이들이나 잘 보살펴 달라.”고 말하고는 차에 올랐어. 아내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어. 의사당 앞에 도착하니까 어떤 장교가 다가오더니 권총을 옆구리에 대고 같이 가자고 해요. 차지철이었던 것 같아. 나를 마포 형무소에 집어넣더라고. →박정희 소장과 아는 사이는 아니었나요. -잘 몰랐어. 하지만 그 사람이 청렴하다는 소문이 자자해서 함께 일해 보고 싶었어. 그래서 1957년 내가 군수참모부장으로 있을 때 그를 군수기지사령관에 추천했어요. →직접 본 박정희 소장은 어떤 인물이던가요. -강직한 느낌이었어요. 군수기지사령관 취임식 참석차 부산 동래에 내려가 있었는데 박정희가 숙소로 찾아와서는 “각하, 혁명이라도 해야지 나라가 이대로 되겠습니까.”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군인이 혁명한다고 나라가 잘 된다는 보장이 있나.”라고 했지. →김종필씨와는 인연이 있습니까. -5·16 전에 김종필 소령이 우리 집에 찾아와서 “부패한 장성들은 군대에서 나가야 한다.”고 하기에 내가 “부패한 장성이 누구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소문으로 알지 실제로는 모른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런 정치적 발언하려면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했지. →미국으로 떠난 이후 두 사람을 다시 만난 적은 없나요. -1972년인가 장모님이 위독하셔서 한국에 갔었어. 그 소식을 듣고 두 사람이 만나자고 연락이 왔더라고. →청와대로 갔나요. -청와대에서 박정희가 “언제 돌아오느냐.”고 묻기에 “이제는 사회 문제보다 개인사정이 더 중요하다. 막내 아들이 대학 들어가는데 3년은 더 있어야 나올 수 있다.”고 했어. 그랬더니 박정희가 “기업체를 순방하고 군부대도 순방해 달라.”고 그래요. 내가 “장모님 병 때문에 어렵다.”고 했더니 “나이 든 사람의 병이란 늘 그런 것 아니냐. 전화로 안부를 물으면 되지 않느냐.”고 해요. 그래서 포항제철하고 과학기술연구원인가 두 군데 돌아봤어. →김종필씨는 뭐라고 하던가요. -만났더니 “선배님이 오랜만에 오셔서 나라가 부패된 것 같은 인상을 받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미국에서 들었던 것보다 더 심각한 것 같다.”고 했지. →5·16은 필요했다고 보십니까,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까.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고 생각해. 그런데 오늘날 국민 전체가 수긍하는 느낌이 들어요. 그런 걸 보면, 5·16이 나라에 아주 나쁜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구나, 국민의 감정에 완전히 반대되는 정권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김웅수는 1923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다. 2살 때 청산리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할아버지 김조현의 거처로 옮겨 6살 때까지 중국 하얼빈 근처 독립군 부락에서 살았다. 일본 관동군 학도병으로 끌려간 뒤 일본 센다이 예비사관학교에 편입해 장교가 된다. 일본 야마가타 연대 소대장으로 임명된 지 몇 달 뒤 일본 패망으로 해방된 한국에 들어왔고, 국군 장교가 됐다. 5·16 당시 혁명재판에서 10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1년 뒤 집행유예로 석방, 미국으로 건너간다. 미국 워싱턴주립대 등에서 학사·석사 과정을 밟고 워싱턴 DC의 가톨릭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교수로 일했다. 여동생이 강영훈 전 국무총리의 부인이다.
  • “김종필, 육사 8기생들이 혁명 주체세력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김종필, 육사 8기생들이 혁명 주체세력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삼국지’ 첫 대목으로 기억된다. ‘창장(長江)강은 뒤 물이 앞 물을 밀치면서 도도히 흐른다.’ 역사의 물줄기를 의미하겠다. 꼭 50년 전 오늘은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긴박했던 하루였다. 도도히 흐르던 역사의 물줄기를 확 바꿔놓은 사건, 이른바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던 날이다. 최근 50주년을 맞아 5·16 그날이 새삼 관심을 끌고 있다. 당시 주체세력 중 한 사람으로 알려진 김종필(85·육사8기) 전 자민련 총재가 5·16에 대해 오랜만에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 전 총재의 인터뷰 내용에 대해 반박하는 논리도 만만치 않다. “육사8기생들이 혁명의 주체세력이라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아니 혁명을 주도하려면 병력을 거느리고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당시 그들에겐 따르는 휘하 병력이 거의 없었는데 뭘.” 5·16 당시 6관구사령부 참모장(대령)이었다. 그는 거사 전야인 1961년 5월 15일 밤 육사 5기생 출신을 주축으로 30여명의 영관장교들과 대책회의를 주도했다. 나중에 박정희 소장도 참석, 부대를 진두지휘하는 등의 역사가 있어 6관구사령부 참모장실은 소위 ‘혁명의 산실’로 알려져 있다. 이날 김 이사장은 박정희 소장의 지시에 의해 당시 장도영 참모총장에게 ‘거사의 취지’를 알리는 서신을 전달하는 등 여러 중요 역할도 했다. “그때 6관구사령부 참모장실은 혁명의 발상지였어. 15일 밤 10시에 5기생부터 8기생까지 주요 보직에 있는 장교들이 많이 모였지. 그때 김 전 총리는 보이지도 않았어. 다들 목숨을 내놓고 온 장교들이라 긴 말이 필요없었지. 침묵으로 긴 밤을 새우고 이튿날 새벽 3시 혁명군들이 여러 시설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각자의 역할로 돌아갔지.” 6관구사령부 참모장실에 장교들이 모인 까닭에 대해 그는 “6관구사령부는 수도권을 포함, 전국의 부대를 통신축선상으로 장악할 수 있는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당시 5기생 출신들이 5·16의 주도세력이었음을 거듭 강조했다. “그때 말야. 5사단장 채명신 장군, 12사단장 박춘식 장군, 6군단 포병단장 문재준 대령, 1공수여단장 박치옥 대령 등이 5기생 출신이었는데 병력을 이끌고 앞장서 출동해 말 그대로 일등공신들이었지. 개인적으로 김 전 총재에 대해 왈가왈부할 마음은 없지만 당시 김 전 총재는 민간인 신분인 걸로 알고 있어.” 김 전 총재는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동원된 3700명 병력이 적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대해) 혁명은 숫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가 중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김 이사장에게 “당시 김 전 총재는 하극상 사건으로 민간인 신분인데도 권총을 차고 가담한 것으로 돼 있다. 이는 불법무기 소지가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자 “허허, 아마도 목숨을 내놓은 상황이라 다급하게 권총을 찼나 보지 뭐.”라고 했다. 다음은 김 이사장(이하 김 참모장)과의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긴박했던 그날의 참모장실 분위기를 개략적으로 재구성했다. 김 참모장은 5월 15일 저녁 9시 30분쯤 시내에서 6관구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특이상황 여부를 묻고 박정희 소장에게 연락을 취한 뒤 곧장 부대로 향한다. 잠시후 부대정문에 도착한 김 참모장은 대기 중이던 혁명군 장교 20여명과 합류하여 참모장 집무실로 들어갔다. 밤 10시쯤 되자 다른 장교들도 추가로 합류했다. 김 참모장은 장교들에게 무기를 분배하는 등 만약의 사태를 대비했다. 6관구사령부는 당시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에 위치해 있었으며 수도군단의 전신이다. 이 시간 박정희 소장은 경호책임을 맡았던 한웅진 준장(육군정보학교장)과 함께 청진동 소재 서울호텔에서 은밀하게 만나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평소 청진동 골목에서 막걸리를 즐기다 보니 비밀장소를 서울호텔로 정했다. 이날 6관구사령부 참모장실은 새벽 3시 6군단 포병단이 육본을 완전 장악했다는 사실이 알려질 때까지 기침소리마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적막과 긴장의 시곗바늘만 째깍째깍 돌아갈 뿐이었다. 특히 새벽 3시 무렵, 참모장실에 영어를 구사하는 낯선 목소리의 전화가 와 긴장과 초조함은 더했다. 백악관인지 미8군 관계자인지 영어가 짧아 되묻지는 못했지만 ‘거사의 주동이 박정희가 맞느냐.’고 묻는 것인지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김 참모장은 ‘맞다.’고 확실하게 대답했다. 새벽 4시 남산에 있는 방송국을 장악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김 참모장은 박정희 소장에게 미리 연락을 받았던 혁명 취지가 담긴 박정희의 친필 서신을 장도영 참모총장에게 인편을 통해 보냈다. 내용에는 ‘만약 일이 잘못될 경우 전원 자결키로 맹세한다.’는 뜻도 담겼다. 장 참모총장은 육본 군수참모 이·취임식이 있는 날이어서 필동의 한 음식점에서 회식을 마친 뒤 나중에 이철희 방첩부대장에게 종합적인 상황보고를 받았다. “5·16 아침 박정희 소장 등과 함께 청와대로 갔어. 윤보선 대통령한테 정확한 사정을 보고하기 위해서여서지. 비서관이 먼저 나와 우리들에게 ‘각하를 어떻게 하실 겁니까.’라고 묻더군. 앞으로 잘 모시고 혁명과업을 수행해야 한다고 했더니 그제서야 안심한 듯 만나게 해줬어. 장면 총리는 수녀원으로 피신해 있어서 금남의 집이라 들어갈 수가 없었지.” 박정희 소장한테 거사계획을 언제 들었느냐고 하자 김 이사장은 “박정희 장군은 점조직을 통해 혁명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대부분 1대1로 만나 가담 여부를 타진했고 나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원래 거사일을 5월 12일로 했다가 연기된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고 술회했다. 또한 그는 “우리 5기생들은 육사 때 박정희 장군이 구대장과 중대장을 했던지라 거사 제의 같은 것은 거절할 수도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동안 5·16 관련 내용은 인터뷰나 자료 등을 통해 대부분 공개됐다. 이 중 거사의 발상지는 6관구사령부 참모장실이며 주축세력이 육사 5기생과 8기생 출신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그동안 왜 8기생 출신들의 역할이 더 부각됐느냐고 하자 김 이사장은 “아마 김 전 총재가 박정희 대통령의 조카사위여서 그랬나 보다.”고 하면서 웃는다. 김문 편집위원 km@seoul.co.kr
  • ‘쓰레기 도시’ 伊 나폴리, 군인 동원 수거 작전

    이탈리아 나폴리가 쓰레기 처리로 몸살을 앓고 있는 가운데 급기야 군대까지 동원해 쓰레기 수거에 나섰다. 지난주 이탈리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쓰레기 수거를 위해 군인 투입을 결정한 이래 10일(현지시간) 군인 170명을 동원, 쓰레기 수거 작전에 나섰다. ’미항’ 나폴리가 ‘쓰레기 도시’로 변한 이유는 쓰레기 소각장 건설이 늦춰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 앞마당에는 쓰레기 소각장을 들일 수 없다.”는 나폴리 주민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치고 있다. 이같은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쓰레기 수거 작전에 ‘선거용’이라는 야당의 비판이 뒤따르고 있다. 오는15, 16일 지방선거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 이탈리아 정부는 지난해 연말에도 군병력의 손을 빌려 거리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쓰레기를 치운 바 있다. 한편 4월 중순 이후 기온이 상승하면서 나폴리는 거리에 방치된 쓰레기들과 이를 무단으로 소각하면서 발생하는 다이옥신 등 유해 물질이 주민 건강을 위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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