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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4 을지포커스 훈련/한미,어제부터 돌입

    한·미연합군 도상지휘소연습인 「94 을지­포커스렌즈 연습」이 22일 개시돼 다음달 4일까지 2주동안 실시된다. 해마다 여름철에 정부기관과 한·미 연합군의 참여 아래 실시되는 이 훈련은 병력과 장비를 실제로 동원하지 않은채 컴퓨터 워게임만으로 진행되는 지휘소방어연습이다.
  • 장태완씨 소환 조사/12·12사건 수사

    12·12사태 고소,고발사건을 수사중인 서울지검 공안1부(장윤석부장검사)는 19일 당시 수경사령관이었던 장태완씨를 소환,조사했다. 검찰은 당시 3공수여단장 최세창전국방부장관등 8명이 내란·반란혐의로 장씨를 맞고소한 것과 관련,장씨를 상대로 육본측 병력을 동원해 보안사와 30경비단을 공격하려한 경위등에 대해 조사를 벌였다.
  • 「을지포커스」 22일부터/4년만에 재개

    한·미연합 도상지휘소 연습인 「94 을지포커스렌즈 연습」이 오는 22일부터 내달 4일까지 2주간 실시된다고 국방부가 17일 발표했다. 매년 하절기에 정부기관과 한·미 연합군의 참여하에 실시되는 을지포커스렌즈 연습은 병력과 장비를 실제로 동원하지 않고 컴퓨터 워게임을 활용하여 진행되는 지휘소 방어연습이다. 올해 연습에는 시·군·구이상 전 행정기관과 한국군의 군단,함대사,비행단급이상 부대 그리고 주한미군사령부및 미8군사령부 예하부대등이 참여한다. 정부는 76∼89년 정부 차원의 을지연습과 군사연습인 포커스렌즈 연습을통합,실시하다 90년 한해를 쉰뒤 91∼93년에는 남북대화 분위기 조성 등을 이유로 분리 실시해 왔다.
  • 개통 80주년 파나마 운하/철군후에도 미에 매력적 존재

    ◎미 전체 수출입물량의 30%가 거쳐가/2천년 인도… “정치개입 없이 운영” 밝혀 파나마운하를 통해 첫 배가 횡단한후 80년이 지난 오늘 이 운하는 이제 미국에 군사적 중요성을 상실했으나 경제적 중요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파나마운하는 지난 15일로 개통 80주년을 맞았는데 분석가들은 미국이 이 운하를 파나마에 인도한 후의 일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태평양과 카리브해를 잇는 길이 64.5㎞의 이 운하는 10년동안의 공사끝에 1914년에 개통되었다.이 운하의 개통으로 선박들은 멀리 라틴아메리카의 남단을 돌아 우회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4억달러의 예산이 든 이 운하의 공사에는 7만5천명의 인부가 동원되었다. 파나마에 주둔해 있는 1만병력의 미군은 1977년 당시 지미 카터 미국대통령과 파나마지도자 오마르 토리요사이에 조인된 협정에 따라 오는 2000년전에 떠나고 이 운하는 파나마에 인도될 예정이다. 파나마운하위원회 부위원장과 외무장관을 지낸 카를로스 오조레스씨는 이 운하가 오늘날의 대형선박들을 수용하기에는 너무나 협소하지만 그래도 이 운하는 여전히 미국에 중요하다고 말했다. 미해군함대에서 가장 큰 선박은 이 운하를 통과할 수 없고 멀리 우회해야 한다. 오조레스씨는 지난해 이 운하를 통과한 1억5천8백만t의 화물가운데 21.2%가 미국 동해안으로부터 극동으로 운반되는 옥수수·콩·보리와 같은 곡물이었다고 밝혔다. 현재 미국의 민간수출과 수입의 약30%가 이 운하를 이용한다. 이러한 숫자를 놓고 볼때 파나마운하는 파나마에 있는 미군기지들이 폐쇄된다해도 미국에 계속 중요한 역할을 하게될 것이라고 오조레스씨는 말했다. 그는 또 미군이 철수한후 파나마는 이 운하를 「정치성없이 효율적으로」 운영할 것이라고 말했다.
  • 최세창 전국방 등 8명/장태완씨 등 둘 맞고발/12·12사태 관련

    12·12사태 고소·고발사건을 수사중인 서울지검 공안1부(부장검사 장륜석)는 16일 이 사건으로 피소된 최세창전국방부장관 등 8명이 장태완전수경사령관과 김진기전육본헌병감 등 2명을 내란 및 반란 등 혐의로 맞고발해옴에 따라 조사에 착수했다. 검찰은 이에 따라 이날 하오 최전장관을 소환,조사했으며 나머지 고발인들도 금명간 불러 조사할 예정이다.이들은 『장씨 등은 12·12당시 합수부가 10·26사건과 관련이 있는 정승화육참총장을 수사하기 위해 대통령께 보고하고 합법적으로 연행했는데도 병력을 동원,보안사 및 30경비단을 공격하려 했다』며 『이는 명백한 반란행위』라고 주장했다. 검찰은 이와 함께 차규헌 당시 수도군단장과 박희모 당시 30사단장 등 2명이 각각 지난 3일과 지난달 28일 정전육참총장 등 22명을 무고 등 혐의로 맞고소했다고 밝히고 이 사건도 병행해 조사중이라고 말했다.
  • 「범민족대회」 이틀간 폭력사태/서울대서 어제 폐막

    ◎전경·학생 충돌… 182명 부상/쇠파이프 휘두르며 투석/학생/헬기 5대서 최루액 살포/경찰 14,15일 이틀간 치러진 범민족대회에서 학생들이 대회를 저지하려는 경찰에게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투석전을 벌이는 등 남총련학생들의 최근 홍익대집회에 이어 폭력시위가 재연됐다. 학생들 및 재야단체들은 14일 서울대에서 제5차 범민족대회를 강행한데 이어 15일 보고대회와 폐막식을 가진뒤 일부 학생들이 가두진출을 시도,헬기를 동원해 해산에 나선 경찰과 한때 충돌이 빚어지기도 했으나 하오 6시쯤 학생들 대부분이 학교를 빠져나가 이틀째 행사는 별다른 사고없이 끝났다. 이날 경찰은 교내에 병력을 투입하는데 따른 충돌사고를 줄이기 위해 이례적으로 경찰헬기 5대를 동원,공중에서 최루액 6천ℓ를 폐막식이 열릴 예정이던 서울대 본관 잔디광장에 살포해 불법집회 저지에 나섰다. 경찰이 교내 불법집회를 막기 위해 헬기를 동원한 것은 운동권 학생들의 불법 난동집회에 강력히 대응한다는 방침에 따른 것이며 86년 건국대사태이후 처음이다. 경찰은 앞으로 운동권들의 불법 난동시위에는 헬기 등을 동원해 공중진압을 하겠다고 밝혔다. 경찰은 이날 보고대회와 폐막식을 저지하기 위해 하오 1시20분부터 경찰헬기를 동원,대학본부앞 잔디광장 상공에서 최루액을 뿌리며 해산을 유도했으나 참가자들은 하오 2시쯤 약식으로 10분간 폐막식을 강행했다. 학생들은 경찰의 최루액 살포에 맞서 교내 소방호스를 끌어내 공중으로 물을 뿌리거나 헬기를 향해 돌을 던지는등 격렬하게 저항했다. 경찰은 이날 서울대 주변에 70개 중대 8천여명을 배치했으나 학생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빚어질 사고를 우려,경찰병력을 교내에 투입하지 않았다. 일부 학생들은 폐막식을 마치고 쇠파이프와 돌 등으로 무장하고 학교밖 진출을 시도,경찰과 대치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범추본·상임본부장 신창균)는 폐막식에 앞서 기자회견을 갖고 ▲미북 3단계회담의 일괄타결 ▲남북정상회담의 조속한 개최 ▲연방제통일방안 수립 ▲민간통일운동에 대한 탄압중단 ▲국가보안법철폐 및 양심수석방 등을 촉구했다.범청학련남측본부도 이날 하오 3시 서울대에서 연방제 통일방안 등을 안건으로 총회를 열고 북측본부 및 해외본부 공동명의로 합의문과 투쟁결의문을 채택했다. 이에앞서 범추본 회원과 한총련소속 학생 1만5천여명(경찰추산)은 14일하오 경찰의 저지망을 뚫고 집결한 서울대에서 대회를 강행,이를 저지하기 위해 2차례 교내에 진입한 경찰과 밤새 공방을 벌였다.이과정에서 쇠파이프 등으로 무장한 학생과 경찰이 몸싸움을 벌여 학생 75명,경찰관 1백7명등 1백82명이 부상했으며 경찰 페퍼포그 차량 1대가 전복됐다. 경찰은 범추본이 대회를 강행하자 이날 하오 9시40분쯤 최루탄을 쏘며 45개중대 5천4백여명을 투입,쇠파이프와 돌 등으로 격렬히 저항하는 대회 참가자들을 교내로 분산시킨뒤 1시간만에 학교에서 철수했다. 경찰은 그러나 교내에 흩어져 있던 학생들이 하오 11시30분쯤 대학본부앞에 재집결,대회를 계속하자 15일 0시30분쯤 병력을 투입시키는 등 밤새 학생들과 대치했다. 경찰은 이틀간 시위과정에서 67명을 연행했다. ◎90년 베를린서 태동/당국 불법행사 규정 ▷범민족대회◁ 90년11월 독일 베를린에서 남북한과 해외인사 9명이 이른바 「3자회담」을 갖고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을 결성하면서 태동된 것으로 올해 다섯번째 치러진 행사다. 범민족대회를 주관하는 상설기구인 범민련은 당초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부위원장 윤기복을 본부장으로 하는 북측본부,재독교포인 작곡가 윤이상씨를 위원장으로 하는 해외본부,한국의 남측본부등 3개 소기구로 구성됐으며 한국을 제외한 북측과 해외본부는 91년1월 출범됐다.남측에서는 그러나 당국이 이 기구를 불법으로 규정짓는 바람에 상설화되지 못하고 처음 모습대로 여전히 「추진」상태에 머물고 있다. ◎폭력 주동자들 전원 구속수사/대검 지시 대검 공안부(최환검사장)는 15일 서울대 범민족대회장에서 있었던 「한총련」소속 대학생들의 난동시위와 관련,주동자를 모두 가려내 구속수사하라고 서울지검과 서울경찰청에 긴급 지시했다. ◎불법과격시위 관련/최내무 오늘 회견 최형우내무부장관은 16일 하오 기자회견을 갖고 이번 범민족대회강행 및 한총련 소속학생들의 일련의 불법과격시위와 관련,정부의 공식입장을 밝힐 예정이다. ◎8년만에 헬기동원 시위해산/2시간 23분동안 최루액 6t 뿌려/학생들,소방호스로 물뿌리며 저항 경찰이 대학내 불법집회 참가자들을 강제해산시키기 위해 이례적으로 헬기를 동원해 관심을 끌고있다. 경찰이 대학가 시위에 헬기를 동원한 것은 지난 86년 10월 학생 1백여명의 대량구속사태를 빚은 건국대 「애학투사건」이후 처음이다.그러나 경찰은 지난 89년 현대중공업 노사분규와 최근 금호타이어 노사분규 현장에 지휘통제용 헬기를 동원한 사례는 있다. 15일 하오 1시22분 범민족대회 폐막식이 열리고 있던 서울대 본관앞 잔디밭 상공에 경찰헬기 1대가 선회하면서 빨간색 최루액을 쏟아붓기 시작했다.이에 놀란 한총련소속 학생과 대회참가자들은 영문을 모른채 혼비백산,도망가기에 바빴다. 이어 4대의 헬기가 약3분 간격으로 하오 3시45분까지 모두 12차례에 걸쳐 최루액 6천ℓ(6t)를 살포했다.이 최루액은 물과 최루가스를 80대 1로혼합한뒤 여기에다 빨간색 물감을 넣은 것으로 최루냄새가 분말보다는 덜 독하나 성능은 비슷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경찰의 뜻하지않은 공중진압에 대해 놀랐던 학생들중 일부는 본관에 설치된 소방호스를 빼내 하늘을 향해 물대포를 쏘며 저항하기도 했다. 이날 동원된 헬기는 경찰청항공대 소속 15인승·7인승 헬기2대와 경남·경북·전남경찰청에서 지원한 5인승 헬기 3대등 모두 5대. 이날 헬기를 동원한 경찰은 『서울대의 경우 진입로가 워낙 비좁은데다 전날 두차례에 걸쳐 병력을 투입했으나 쇠파이프 1천5백개 등으로 무장한 학생들이 격렬히 저항하는 바람에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며 『부상자의 수를 줄이고 시위대를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해 불가피했다』고 밝혔다.
  • 전씨,「별도해명」 준비/12·12서면조사/“병력동원 적법”주장할듯

    전두환전대통령은 「12·12사태」와 관련한 검찰의 서면질의에 답변하는 것과는 별도로 그 때의 상황 전반에 대해 독자적으로 해명하는 방안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전대통령의 민정기비서관은 13일 『어떤 방식이든 이번 기회에 12·12에 대해 잘못 알려진 바를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 전전대통령의 뜻』이라고 밝히고 『질의서에 대한 답변여부와 관계없이 별도의 수단을 통해 견해를 밝히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전전대통령의 별도 해명에서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이 「12·12사태」의 원인을 제공했으며 「12·12사태」 때 합동수사본부측의 병력동원이 법적으로 하자가 없다는 주장과 함께 이에 대한 근거를 제시할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노태우전대통령측은 답변시한 전이라도 답변서 작성이 마무리되면 곧바로 검찰에 전달할 계획이며 별도의 설명서는 준비하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 새 전대통령 서면조사 배경과 전망

    ◎「12·12」 계획·실행경위 규명 초점/총리공관 보고·재가과정 답변 관심/진상 밝히되 기소유예 처리 가능성 검찰이 12·12 고소·고발사건과 관련,전두환·노태우·최규하전대통령에 대한 서면조사에 나섬으로써 수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 들었다. 이에 따라 다음달 안에 이 사건의 법적성격 규명이 끝나고 전·노전대통령 등 이 사건 주모자로 고소·고발된 37명에 대한 사법처리 여부도 지난해 7월 고발된지 1년 2개월만에 판가름 날 전망이다. 검찰이 이번 사건을 수사하면서 가장 고민했던 대목은 바로 이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조사여부및 조사방법.이들 3명을 조사하지 않고서는 이번 사건을 마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서울지검 김영철 1차장검사도 12일 『이들 3명의 전직 대통령은 당시 대통령,국군보안사령관겸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및 육군 제9사단장으로 12·12사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분들이기 때문에 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이들의 진술을 반드시 들어야 한다고 판단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검찰은 이들을 조사하기 위해 ▲소환조사 ▲방문조사 ▲서면조사 등의 3가지 방안을 놓고 저울질을 벌인 끝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등을 고려,서면질문서를 전달하고 답변서를 제출받는 형식의 「서면조사방법」을 채택한 것.지난해 「평화의 댐」건설 감사때 전·노대통령에게 서면질의방식을 택했던 감사원의 전례도 이번 결정에 고려됐다. 검찰은 이들에게 보낸 서면질의서의 질문사항및 분량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한채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확인이 필요한 사항은 빠짐없이 정리,상세한 내용의 질문서를 보냈다』고만 귀띔했다. 검찰은 전·노전대통령을 상대로 10·26사건 당시 상황및 수사상황,12·12사건 계획 수립과정및 실행경위 규명등에 초점을 모으고 있다.이들 2명은 당시 두 사건의 핵심중의 핵심인물이기 때문이다.최전대통령은 누구보다 이번 사건의 진상을 밝혀줄 수 있는 핵심 참고인이어서 그의 답변내용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사건 당시 총리공관에서의 합수본부장 보고및 재가 경위가 이번 사건의 성격 규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이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조사가 본격화 됨으로써 피고소인들의 기소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검찰이 지금까지 조사를 마친 사람은 이 사건 고소·고발인 22명을 포함,피고소·고발인 35명,참고인 70여명 등 모두 1백30여명에 이르고 있다. 지난해 7월 정승화전육군참모총장등 이 사건 고소인들이 피고소인들을 고소하면서 적용했던 죄목은 군형법상의 반란죄및 형법상의 내란·내란목적살인죄등 모두 9개 죄목.이 죄목들은 공소시효가 15년으로 피고소인들의 혐의사실이 인정될 경우에는 「중형」이 불가피한 실정이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사법처리는 ▲구속기소 ▲불구속기소 ▲기소유예등 3가지 가운데 기소유예 쪽으로 결말이 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관측된다. 김영삼대통령이 지난해 이미 쿠데타적 사건으로 규정하고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고 말한 바 있어 사건의 진상은 전 국민앞에 소상히 밝히되 법적처리는 관대하게 결론을 내리지 않겠느냐는게 법조계의 일반적인 분석이다. ◎「서면조사」 세 전대통령측 반응/오래전부터 법적대응 깊이 검토/“정면대응외 방법 없다” 판단한듯/전·노씨측/최 전대통령측은 묵묵부답… 불응 가능성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측은 12일 검찰이 「12·12사태」와 관련,서면조사를 하겠다고 발표하자 지체없이 『당당하게 응하겠다』고 자신있는 반응을 보였다.일련의 상황으로 미루어 검찰수사에 정면으로 대응할 수 밖에 없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것으로 여겨진다.그러면서도 검찰주변에서 나오는 기소유예설에 신빙성을 두는 듯한 분위기도 감지되고 있다. 전전대통령의 한 측근은 『잘못된 진상을 바로 잡고 명확한 역사평가의 자료를 남기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에 적극 협력하겠다』고 밝혔다.노전대통령의 윤석천비서관도 『질의서에 답변하겠다는 게 노전대통령의 뜻』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참고인 자격으로 역시 서면질의서를 받게될 최규하전대통령은 여전히 말문을 열지 않을 것 같다. ○…전두환전대통령은 이미 오래전부터 검찰조사에 대비,측근인 이양우변호사등과 함께 관련 자료를 정리하며 법적 대응방안을 깊이 있게논의했다고 한 측근이 전했다.또 그 과정에서 전전대통령측은 지금까지 「불법」으로 인식되어온 「12·12사태」 때의 병력동원에 대해 법률적 논쟁의 소지가 있다는 이론을 정립한 것으로 알려졌다.전전대통령의 측근인 장세동전안기부장이 최근 이례적으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 응해 「역사의 정리」를 강조하거나 검찰에 출두,『12·12사태의 원인제공자는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다』는 성명을 낭독한 것은 당당하게 맞서겠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 관계자가 설명했다. 노전대통령은 지난해 율곡사업에 대한 감사과정에서 서면조사 문제를 놓고 감사원과 실랑이를 벌이다 여론만 더 악화된 경험이 있어 불필요한 신경전은 하지 않겠다는 태도다.관계가 소원했던 전전대통령측과 이 문제 만큼은 긴밀하게 협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비해 「12·12」의 상황을 푸는 한쪽 열쇠를 쥐고 있는 최규하전대통령은 여전히 가타부타 말을 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최전대통령은 이날 지방에 내려갔다 돌아오는 길에 승용차에서 뉴스를 듣고 조사사실을 알았으나 아무런 언급도,표정변화도 없었다고 최흥순비서관이 전했다.최전대통령의 측근들은 『최전대통령이 아직은 입을 열 시기가 되지 않았다고 느끼고 있으며 이번에도 참고인이므로 조사에 응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12·12사태」와 관련,검찰에서 조사를 받은 민자당의 박준병·허삼수·허화평의원과 무소속의 정동호의원등도 적극적으로 상황을 설명하며 정당론을 개진하고 있다. 이 문제로 검찰에서 조사를 받은 한 의원은 『12·12가 사법적 문제가 된다면 지난 5공과 6공 10여년 동안의 국가행위,통치행위는 무엇인가』라는 매우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 뒤 『그렇기 때문에 세계 역사상 성공한 쿠데타를 사법처리한 전례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의원은 『정승화전총장등 고소인측이 지난 세월동안 상대적으로 불우한 처지였고 그들의 얘기를 먼저 들으니 우리측에 문제가 있다는 선입견을 검찰과 국민이 갖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서·남해안 농경지 곳곳 침수/태풍 더그 영향

    ◎해일에 방파제 유실… 대피 소동 태풍 「더그」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든 제주와 전남 목포등 서·남해안지역 곳곳에는 10일부터 강한 비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방파제가 유실되고 많은 농경지가 침수되는등 피해가 잇따랐다. 특히 전남 완도와 해남,충남 서산앞바다등에서는 11일 상오까지 최고 7m의 파도가 일고 초속 29m의 강풍이 불어 양식장시설등이 큰 피해를 입었다. 또 제주와 전·남북,충남과 경기도 서해안일대의 곳곳에서 도로가 파손돼 태풍 「더그」가 우리나라를 완전히 빠져나가는 12일쯤에는 재산피해액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분석됐다. ○…제주지방은 이날 아침 순간 최대풍속 29m가 넘는 강한 비바람이 몰아치고 부근 바다에는 6∼9m에 이르는 높은 파도가 밀어닥쳤다.이로 인해 남제주군 대정읍 동일1리 어항방파제 30m가 유실되고 서귀포시 천지연폭포 하류에 있는 해안석축 30m가 무너져 내렸는가 하면 곳곳의 가로수가지가 꺾이고 간판이 떨어져 나갔다. 해일이 예상되는 남제주군 표선면 토산1리와 서귀포시 법환동등 해안주민 17명은이날 새벽 인근 노인회관으로 긴급 대피했다. ○…목포와 신안·해남·진도등 해안지역에는 이날 하오 순간 최대풍속 18m가 넘는 비바람이 불고 부근 바다에는 10m안팎의 높은 파도가 이는 가운데 해일로 인한 방조제붕괴사고가 발생했다.이날 상오5시 신안군 도초면 만년리 도락방조제 5m가 해수위가 만조위에 이르면서 붕괴돼 염전 포강이 바닷물에 침수됐다. 또 이날 새벽 2시쯤 진도군 고군면 금호도 김병래씨(58)의 멸치건조시설 3채가 파손되고 15평규모의 건조장이 높은 파도에 파손됐으며 고군면 벌포 물양장 10m와 임회면 강계리 도로 호안축대 20여m가 무너졌다.목포에서는 서산동 서산수협어판장앞 도로등 3개소와 충무동 달리도 남부방조제 20m가 침수되거나 유실됐다. ○…이날 상오 5시쯤 고창군 심원면 용기리 등 4개마을의 방조제 5곳 1천1백50m가 높은 파도로 유실되고 농경지 15㏊가 침수됐다. 고창군은 이에따라 군병력과 공무원 주민 등 1백여명의 인력과 포클레인 9대 등 장비를 동원,긴급복구작업을 벌였다.
  • 피서객 23만명 긴급대피/태풍 더그 북상 상보

    ◎피해막게 7개부처 철야근무/남해안 22개항로 전면 통제/한라산 등반·남해 해수욕장 출입금지 중앙재해대책본부(본부장 내무부장관)는 8일 제13호 태풍 「더그」가 북상해 옴에 따라 내무부를 비롯 국방부,건설부,경찰청,항만청등 재해관련 7개부처 합동 24시간 비상근무체제에 들어갔다. 대책본부는 또 9일 새벽부터 태풍의 영향권에 들것으로 예상되는 제주등 남해안일대 시·군의 재해대책요원들이 비상근무토록하는 한편 남해안의 1백7개 항로 가운데 22개에 대해 연안여객선 출항을 통제했다.대책본부는 이날까지 유원지,계곡등의 행락객 23만7천여명을,남해안의 각 항·포구에는 원양어선 23척을 비롯 1천7백86척의 조업중인 어선들을 대피시켰다. 내무부는 이날 전국 소방공무원 및 민방위대원을 활용해 가뭄극복을 위해 파헤쳤던 5천1백38곳의 들샘,웅덩이,제방등을 일제히 정비토록 각 시도에 지시하는 한편 재해우려시설등에 대해 사전 점검토록했다. 국방부는 조난어선과 인명구조를 위해 병력,함정및 헬기등 지원체제를 검검했고 건설부는 공사현장과 사고 취약지역에 대해 안전관리,다목적댐등의 저수량 관리등을 강화토록 했다.농림수산부는 어선 출항통제및 대피조치와함께 농작물과 수산 양식시설에 대한 관리를 중점지도토록 했다. 한편 가장 먼저 태풍의 영향권에 들 제주도는 이날 상오부터 제주∼목포·부산간 카페리여객선 운항이 전면 중단돼 제주공항에는 예약자이외에 긴급 투입된 81편의 특별기에 탑승하려는 2천여명의 피서객이 몰려 대혼잡을 이뤘다.또 포항∼울릉간 여객선의 운항이 중단돼 피서객 1천여명의 발이 묶였다. 전남지방에서는 연근해 여객선은 운항은 계속됐으나 목포∼홍도,목포∼서거차간등 장거리 3개 항로의 여객선 운항이 전면 중단됐다.경남의 마산,충무,거제항등을 기점으로 운항되는 연안여객선 24척과 유·도선 8백여척의 운항이 9일 새벽부터 전면 통제됐다. 부산해운항만청은 이날 하오 부산항 외항에 정박중인 선박 1백80여척에 대해 경남 거제군 고현만과 진해만으로 피항토록 지시하는 한편 9개 항로 연안여객선 18척의 운항을 전면 중단시켜 태풍에 대비했다. 또 제주도 재해대책본부는 이날부터 한라산등반과 해안및 도서지역에서의 낚시행위등을 전면통제하고 10개 해수욕장의 피서객 5천여명과 해수욕장주변의73개 계절음식점등도 모두 철수시켰다.전남도도 피서객 긴급 대피유도에 나서 해수욕장,유원지,계곡등에 몰려 있는 8만여명의 피서객들을 안전지대로 피신시키는 한편 해마다 태풍으로 많은 인명피해를 낸 새우잡이 어선 (일명 멍텅구리배) 89척을 가까운 항구로 예인,육지로 끌어 올렸다. 지리산을 끼고 있는 경남도는 태풍으로 인한 인명피해를 예방하기위해 경찰과 산림청소속 헬기를 긴급 동원,등산객들의 하산을 유도했고 부산시는 이날부터 태풍이 완전히 통과할 때까지 해운대등 해수욕장의 출입을 당분간 중단할 것을 검토키로 했다.
  • 러­체첸자치공 “끝없는 승강이”(특파원 코너)

    ◎연방내 범죄단 운영… 항공기 납치 비난/러시아/“두다예프의 독립정책 저지에 혈안”/체첸공 경제난,각종 범죄등 산적한 국내문제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옐친행정부가 이번에는 중앙정부의 권위라고는 손톱만큼도 인정치 않는 체첸공화국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러시아는 지난 1일 정부성명을 통해 『체첸공화국이 러시아국경쪽에서 무력도발을 계속하고 있다』며 국경수비병력을 동원해 이를 즉각 응징하겠다고 밝혔다. 이보다 앞선 지난달 30일에는 세르게이 필라토프 대통령행정실장이 체첸공화국이 현지에서 활동중인 러시아정보요원 3명을 참수해 그 시신을 수도 그로즈니광장에 공개했다며 이를 『체첸인들이 얼마나 야만적이고 잔혹한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러시아남부 코카서스산맥 북쪽에 있는 체첸공화국은 인구 1백10만명의 소민족공화국으로 주민 대부분은 회교도인 체첸인들이다.지난 90년 소련방해체 기운이 한창일때 독립을 선포하고 91년10월 소련공군장성출신의 조하르 두다예프 현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선출했으며 그동안 연방정부의 지시를 자주 무시해 왔다. 옐친정부가 체첸을 눈엣가시로 여겨온 데는 정치적인 이유말고도 몇가지 이유가 더 있다.우선 체첸인들이 러시아내 범죄조직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특히 코카서스산맥을 넘나드는 체첸 밀수조직은 러시아경제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고 한다.지난달 29일 수류탄 폭발로 5명의 사망자를 낸 인질극을 비롯,최근 3개월 사이에 무려 5건의 항공기납치극이 체첸땅에서 일어났는데 러시아정부는 이같은 항공기납치극의 배후에 체첸이 있다고 비난했다. 한편 체첸측은 러시아의 이런 주장들을 『독립정책을 추구하는 두다예프대통령을 몰아내기 위한 날조극』이라며 맞섰다.비행기납치극도 모두 두다예프정부의 위신을 실추시키기 위해 러시아정부가 치밀하게 꾸민 사건들이라고 주장한다.게다가 참수당한 러시아정보요원 사진도 날조된 것이고 『한마디로 러시아가 두다예프정부를 무력으로 전복시킬 구실을 만들고 있다』고 공격했다. 체첸공화국은 대부분이 산악지대로 러시아정부가 군대를 투입하더라도 사실 효과적인 작전을펴기 힘든 곳이다.그래서 볼썽사나운 설전만 벌이고 있는지도 모른다.보다 심각한 것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뿐 중앙정부와 연방내 21개 민족공화국의 관계가 대부분 체첸의 경우와 대동소이하다는 점이다.그래서 일각에서는 러시아연방도 결국 소연방과 같은 해체의 운명을 피하지 못할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 이달의 독입운동가 양세봉장군/압록강 순시한 사이토총독 저격

    ◎조선혁명군 이끌고 만주서 항일투쟁/일군과 2백차례 혈전… 밀정에 살해돼 『나를 따라 생명을 각오하는 동지들은 손을 들어주십시오.조국광복군과 동만백만동포의 생명을 두 어깨에 짊어진 우리는…』 1932년 조선혁명군사령관 벽해 양세봉장군(1896년6월5일∼1934년8월12일)이 만주 흥경현에서 일제 관동군과 대회전을 갖기에 앞서 동료 독립운동가들에게 행한 연설의 일부다. 양장군은 이 전투를 포함,일제와 밀정들에게 붙잡혀 순국한 34년까지 2백여차례이상 혈전을 치른 신화적인 무장항일투사였다. 선생은 30년대 만주지역에서 활약한 최후의 독립군 명장으로 항일독립운동사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선생이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26세때인 22년부터.이전에도 3·1만세 시위운동을 펼치는등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나 이즈음부터 무장독립운동가로 본격 활약하게 된다.선생은 의주·삭주 경계의 천마산을 근거지로 해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무장단체 천마산대(대장 최시흥)에 가입,창성군 대유동 경찰서와 금광사무소·영림창을 습격하고군수물자를 빼앗는등 기염을 토했다. 5백여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천마산대는 유격전을 능숙하게 구사하면서 일제에 위협을 가하던 단체였다. 선생은 천마산대가 일제의 대대적인 「토벌」로 활동불가능 상태에 빠지자 여러 독립운동단체들이 연합해 구성한 대한통의부등에서 의용군으로 활약했다. 대한통의부 의용군이 발전해 참의부가 결성되자 제3소대장에 임명된 선생은 24년5월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평북 초산군·강계군에서 일경과 교전해 수명을 사살했으며 압록강을 순시하던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재등실)일행에 총격을 퍼부어 일제에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선생은 일제의 배후조종을 받은 마적단의 습격으로 통의부 신팔균총사령이 전사한뒤 통의부·대한군정서·의성단등이 정의부로 확대통합되자 정의부 의용군 중대장에 임명돼 일경·친일분자의 처단에 앞장섰다. 정의부는 김동삼선생을 의장으로 지역군사·재정·행정·교육·사법등 모든 부문을 국가체제에 맞춰 틀을 짰다. 선생은 이어 만주지역에서 벌어진 좌우합작운동의 영향으로 정의부를주축으로 여러 독립운동단체들과 연합해 민족유일당 조직동맹을 결성,이 동맹이 다시 조선혁명당으로 발전하자 소속 부대인 조선혁명군 부사령의 중책을 맡게 된다. 조선혁명군은 30년대 적기관을 습격하고 밀정을 처단하는 한편 대중조직및 거점확보를 위해 특수공작원을 국내로 특파하는등 독립운동사에 맹활약을 펼친 것으로 기록돼있다. 선생은 31년 일제가 중국 동북지방을 침략한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한·중 공동대응을 위해 중국인 실력자 왕동헌의 요령 농민자위군과 협의해 연합부대를 편성했다. 이런 가운데 32년 조선혁명당은 비밀간부회의를 열었으나 정보를 입수한 일경의 급습으로 간부 83명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선생은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혁명당의 총사령에 취임하는 동시에 혁명투사 양성을 위해 조선혁명당이 설립한 속성사관학교 명예교장에 추대된다. 선생은 또 중국 의용군 총사령 이춘윤과 요령 민중자위군 결성 협정을 체결,일제와 2백여차례에 걸쳐 혈전을 치렀다.32년3월 신빈현 남쪽에서 벌어진 일제 관동군과의 접전에서선생의 부대는 일군의 주둔지를 빼앗는 전과를 올렸다. 같은 달 하순 일제가 폭격기까지 동원해 반격전을 펼치자 선생은 한중연합군 1만여명을 투입,치열한 전투 끝에 일제를 물리치는 억센 투혼을 발휘하기도 했다. 한중연합군은 그러나 관동군이 두달후 세력을 재결집,대대적인 공세를 가해옴에 따라 10월까지 5개월동안 여러차례 전투를 치렀으나 일제 공군력에 밀려 주공격력을 잃게 된다. 선생은 이에 따라 다음해인 34년1월 조선혁명군 재건을 위해 총사령에 취임,같은해 5월 황해도 사리원경찰서를 습격하는등 유격전에 나선다. 조선혁명군은 이어 장개석의 국민군에 도움을 요청하는 한편 흥경현 진주령에서 일본군 병력수송기차를 습격,수십명을 사살하고 경기관총·대포등을 노획하기도 했다.또 1개 대대병력으로 기습해온 일군을 물리치고 오히려 추격전을 펼쳐 일군 80여명을 사살한다. 선생은 그러나 34년 평소 혁명군을 지원해온 중국인을 만나기 위해 환인현 소광구 골짜기로 나갔다가 일제 밀정등의 총격을 받고 장렬하게 순국한다.이 중국인은일제 밀정의 꾐에 빠져 변절하고 선생을 인적드문 골짜기로 유인한 것이었다. 일제는 후에 선생의 묘를 파헤치고 시신에세 목을 떼어 가져가는 만행을 저지르는등 잔악상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조선혁명군은 선생의 순국이후 급격히 세력이 위축돼 소규모 유격전으로 독립군의 명맥을 유지하는데 그쳤다. 선생은 동지는 물론 주민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은 명장이었으며 항일무장투쟁사에서 김좌진·홍범도등과 함께 3명장으로 손꼽히고 있다. ▷고침◁ 7월의 독립운동가 이준열사는 1859년1월12일 출생,1907년7월14일 순국했기에 바로 잡습니다.
  • “가뭄극복 앞장”장병들 연일 철야/병력·장비 총동원 대민봉사 현장

    ◎연인원 7만여명 투입,물대기 비지땀/헬기등 첨단장비 동원 군사작전 방불 「나라의 어려운 현장에는 언제나 국군장병이 있었다」 한달동안이나 계속되고 있는 지독한 가뭄의 현장에 뛰어든 군장병들의 불굴의 가뭄극복작전이 전국민적 가뭄극복의지를 불사르고 있다. 유사시에 대비해 평소 닦고 기름쳐 온 착정기등 특수장비나 헬리콥터를 주저없이 가뭄극복작전에 투입,타들어가는 논밭에 물을 대는 국군장병의 맹활약은 메말라가던 농민들의 가슴을 정으로 흠뻑 적셔주고 있다. ○…대부분이 섬으로 일찍부터 물이 말라 농민들의 애간장을 태워왔던 신안군 증도면 들녁에 「두더지작전」으로 명명된 군장병들의 가뭄극복활동이 26일로 연 3일째 계속되고 있었다. 증도면 우진리 들녘에서 「두더지작전」에 나선 육군 제8332부대 장병 70명은 하얗게 메말라 버린 개천모래밭을 밤낮없이 교대로 2m깊이로 파내고 있었다.삽으로 파내 생긴 웅덩이에 고인 물은 9곳의 수로를 통해 부근 18㏊ 논으로 흘러들어가 메말라 죽어가는 벼를 살려내고 있었다.현지작업을지휘하고 있는 중대장 이덕우 대위는 『이곳은 섬으로 엷은 모래층 수맥이 형성돼 서서히 물이 조금씩 괴어 나오기 때문에 시간대에 맞춰 일일히 흘러내리는 모래를 파내지 않을 경우 아예 수맥이 모래로 덮혀버려 밤낮없는 철야작업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이렇게해서 군장병들이 적신 농경지는 인근 59㏊가운데 6.7㏊에 불과하지만 이 지역 농민들의 가뭄극복의지의 버팀목이 되고 있었다. ○…전남에서도 가뭄피해가 가장 극심한 승준·보성군일대에서는 육군 충장부대 장병 8천여명이 헬기 4대,포클레인 41대등 각종 첨단장비 1백여대를 동원해 군사작전을 방불케하는 가뭄극복작전이 나흘째 이어지고 있었다. 충장부대 장병 1백여명이 공무원 주민 등 모두 3백여명과 함께 헬리콥터까지 동원해 가뭄극복작전을 벌이고 있는 이날 승주군 송광면 이읍리 들녘. 군헬리콥터가 5㎞쯤 떨어진 주암호에서 물을 퍼 이 일대 전체 논 97㏊ 가운데 타들어가는 64㏊(66%)에 쉴틈없이 물을 퍼붓고 있었다. 바로 그 현장에서는 포클레인 2대와 양수기30대가 동원돼 밤새워 강바닥을 굴착해 고인 물을 타들어가는 논에 대고 있었고 또다른 한편에서는 공무원·지역주민들과 함께 웃옷까지 벗어던진 군장병들이 하천굴착지에서 솟아나는 물을 양동이등에 담아 고추밭등을 적시느라 구슬땀을 흘렸다. ○…가뭄극복작전에는 공군장병들도 예외가 아니었다.공군 제5718부대 장병들은 이날 사천군 사남면과 곤양면일대에서 실전을 방불케 하는 「양수작전」을 전개. 이날 장병들은 곤명면 양월리와 장신리일대서 헬기와 포클레인·페이로더·불도저 등 중장비 20여대를 투입,이 일대 12◎의 논을 고사직전에서 구출.주민들은 HH­47시누크 헬기가 연평리 진양호를 오가며 한번에 물을 2t씩 공수,공중에서 쏟아붓자 『와』하는 탄성과 함께 박수. ○…전북 무주군 무주읍 가옥리 평촌마을과 가림마을에는 인근 부대 군장병 1백여명이 동원돼 하상굴착으로 고인 물을 릴레이식으로 인근의 논에 대느라 구슬땀. 특히 이들의 작업이 한창 진행중이던 이날 하오 3시쯤 하늘에서 약간의 비가 내리자 환호성을 지르며 비를 반겼으며 이내 비를 맞아가면서 작업을 계속. 이날 군인들을 인솔한 윤석천중령(50)은 『농촌이 이처럼 어려울때 인력지원을 하게돼 더할 나위 없이 가슴이 뿌듯하다』고 말했다.
  • 김일성이 스탈린에 보낸 친서(50.9.29)

    ◎“미의 인천상륙으로 인민군 고전”/무기·식량 공급 못받아 소련지원 필요 존경하는 이·브·쓰딸린 동지에게 조선해방의 은인이시며 전세계 근노인민의 수령이신 당신께서는 자기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하야 싸우는 우리조선인민을 항상고무격려하여주시며 우리의게 배려를 베푸러주시며 각방면으로 원조를 주시는데 대하야 조선로동당을 대표하야 우리는 충심으로부터의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미국침략자들을 반대하는 우리인민의 해방전쟁의 금일정황에 대하야 당신에게 간단히 말슴드리려고 합니다.미침략군이 인천에 상육하기 전에는 우리의 형편이 좋지않었다고 볼수없었슴니다.적들은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야 남조선의 최남부의 협소한 지역에 몰리어드러가게되어 최후결전에서 우리가 승리할 가능성이 많었고 미군의 위신은 여지없이 추락되였던것임니다. 이에 미국군은 자기의 위신을 만회하며 조선을 자기의 군사기지화하려는 본래목적을 기어히 달성하기위한 대책으로 태평양방면의 미국 육해공군의 거위 전부를 동원하야 구월십육일에 대병력을인천에 상육시켜 서울시에 침입하야 시가전을 진행하고 있읍니다.전황은 참으로 엄중하게 되었읍니다.우리인민군부대들은 상육침입한 미국군진공에 대항하야 용감히 싸우고 있읍니다. 그러나 전선에는 참으로 우리의게 불리한 조건이 있다는것을 말슴드립니다.적들은 약천대의 각종항공기를 매일주야를 구분하지않고 출동하야 전선과 후방할것없이 마음대로 폭격을 불절히 감행하고있읍니다.그러나 우리편으로부터는 대항할 항공기가 없는 조건하에서 적들은 참으로 공군의 위력을 충분히 발휘하고있는것입니다.각전선에서는 백여대편성의 항공부대의 엄호하에서 적의 기계화부대들은 활동하며 또한 특히 우리부대들을 저공비행으로서 다수살상합니다.후방에서 적의 항공기들은 교통·운수·통신기대들과 기타 시설들을 마음대로 파괴하며 적군들의 기동력이 최대한도로 발휘되는 반면에 우리인민군부대들의 기동력은 약화마비되고 있읍니다 는것은 각전선에서 우리가 체험한바입니다. 적들은 우리군부대들의 교통·운수·연락망을 차단하고 진격하야 인천방면으로서 상육한 부대들과 남부전선에서 진공하던 부대들이 연결함으로서 서울을 점령할수있는 현실적가능성을 가지게되고 남반부에 있는 우리인민군부대들은 북반부로부터 차단되고 남부전선에 있는 부대들도 여러토막으로 차단되였읍니다.그리하야 우리 군부대들은 무기·탄약과 식양등공급을 받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몃개부대들은 상호분산되어 있으며 그중일부는 적의게 포위되어있는 형편에 처하였읍니다. 서울시가 완전점령된다면 적은 삼팔도선을 넘어 북조선을 침공할겄입니다.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금일과 같은 불리한 조건을 계속하야가지고 있게되면 적의 침입은 결국성공할겄이라고 우리는 봄니다. 우리의 운수공급문제를 해결하고 기동력을 보장하자면 무었보다도 이에 해당한 공군력을 가저야 하겠읍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미 준비된 비행사들이없읍니다. 친애하는 이요시프 비싸리요노비치 시여! 우리는 여하한 난관에 봉착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하면서 조선을 미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와 군사기지로 내놓지않을겄입니다.우리의 독립·민주와인민의 행복을 위해서는 최후의 피한방울까지도 아끼지않고 싸울겄을 우리는 굳게 결심하고 있읍니다. 우리는 전력을 다하야 새 사단들을 많이 조직훈연하며 남반부에 있는 십여만의 인민군부대들을 작전상유리한 일정한 지역에로 수습집결하며 또한 전인민을 총무장하여서까지 장기전을 계속할 모든 대책들을 강구실시합니다. 그러나 적들이 금일 우리가 처하고 있는 엄중하고 위급한 형편을 이용하야 우리의게 시간여유를 주지않고 게속 진공하야 삼팔도이북을 침공하게 되는 때에는 우리 자체의 힘으로서는 이위기를 극복할 가능성이 없읍니다.그러므로 우리는 당신의 특별한 원조를 요구하지 않을수 없게 됩니다.즉 적군이 삼팔도선이북을 침공할 때에는 쏘련군대의 직접적출동이 절대로 필요하게 됩니다.만일 그것이 여하한 이유로써 불가능하게되는 때에는 우리의 투쟁을 원조하기 위하야 중국과 기타 민주주의국가들의 국제의용군을 조직하야 출동하도록 원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상과 같은 우리의 의견을 당신에게 감히 제의하오니 이에 대한 당신의 지시가 있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조선로동당중앙위원회 김일성 박헌영 일구오○·구·이구일
  • 가뭄극복 민·관·군 총력지원/한해지역 하루 6만병력 투입

    ◎장비 6백대 동원,5만명 휴가/국방부/민방위대 동원령… 양수작업부축/내무부/농림수산부선 현지지도 주재관 파견 정부는 19일 장마전선의 소멸로 가뭄피해가 광역화·장기화될 것으로 전망됨에 따라 민·관·군이 가뭄극복을 위한 총력지원체제에 돌입키로 했다. 국방부는 군인력과 장비를 대규모로 농촌지역에 투입하기로 했고 내무부는 사상 초유의 광역민방위동원령을 내렸다. 농수산부는 가뭄이 극심한 지역에 현지지도 주재관을 파견,중앙과 지방의 실무협조체제를 갖췄다. 국방부는 이날 가뭄지역에 대한 군지원대책을 확정,가뭄지역 출신 장병 5만여명에게 이날부터 7일간 특별휴가를 주기로 했으며 다른 지역 장병들은 지휘관의 판단 아래 휴가를 갈 수 있도록 했다. 국방부는 또 가뭄피해지역의 예비군 훈련을 군부대 지휘관책임 아래 전면 중지토록 하고 피해를 입은 예비군에게는 훈련을 연기토록 조치했다. 국방부는 이와 함께 1일단위 지원가용병력을 현행 2천∼4천명 수준에서 5만7천여명으로 확대하고 포크레인·급수차·양수기등 각종 장비 6백87대를 가뭄피해 현장에 투입키로 했다. 내무부도 이날 전남과 경남·경북·제주도등 가뭄피해가 극심한 지역에 민방위대원 동원령을 발동,민방위대원들을 들샘개발 및 양수작업등에 적극 활용토록하라고 해당 시·도에 지시했다. 내무부는 또 가뭄피해가 확산되고 있는 중부지방 자치단체장도 민방위대원을 동원,가뭄대책을 실효성있게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내무부 관계자는 『이번 가뭄이 민방위기본법 22조 민방위대원 동원요건인 「민방위사태」에 해당한다』고 말하고 『이번 민방위동원령은 시·군단위로 실시되겠지만 필요한 경우 동원된 민방위대원이 다른 시·군의 가뭄극복활동에 지원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민방위대원 동원령이 이같이 광역지역에 내려지기는 민방위사상 처음이다. 농림수산부도 남부지방의 가뭄대책을 지원하기 위해 이날 「현지지도 주재관」을 파견했다. 1개반에 3명씩 전남·북반과 경남·북반 등 2개반으로 편성된 이들은 각 도청의 가뭄대책 상황실에 근무하며 중앙과 지방간의 업무협조를 맡는다. 한편국민은행은 20일부터 가뭄피해 지역의 농민들을 돕기 위해 양수기등의 구입자금을 최고 5백만원까지 대출해 주기로 했다. 이 대출금은 양수기 또는 양수발전기를 사려는 농민에 한해 최고 5년까지 융자하되 1백만원까지는 무보증으로,1백만원을 초과하면 각종 세금납부 실적자 1명의 보증만 세우면 신청 당일 지급된다.
  • 공중촬영·통신감청… 북동태 파악/한미연합사 정보수집 어떻게

    ◎첩보위성·유무선 통신채널 총동원/병력·장비이동 등 24시간 감시 가능/안기부도 우방국과 공조 구축,별도활동 우리 군은 북한내부상황에 대한 정보를 어떻게 수집할까.국방부가 김일성사망후 북한의 동정을 매일 브리핑 하고 있어 대북정보수집방법에 관해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현재 한미연합체제로 운영되고 있는 대북정보수집방법은 공중정찰과 통신감청등 크게 두가지로 나눠진다. 공중정찰은 지상 2백∼5백㎞ 상공에서 북한군의 움직임등 지상상황을 샅샅이 촬영해 보고하는 KH 9·11·12등 첩보위성이 핵심이다. 미국이 보내주는 이 위성의 사진은 잔디밭의 골프공을 구별할 정도로 정밀해 군장비와 병사들의 이동움직임은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또 휴전선근처에 U2R,OV1D,RF4등의 정찰기를 띄워 우리측 영공을 선회하며 북의 군사동태를 감시하고 있다. 하루 한차례이상 출동하는 U2R정찰기는 24㎞의 고공에서 휴전선에서 1백㎞ 북쪽의 북한후방지역까지를 샅샅이 훑고 적기의 교신을 잡아내 폭격에 이용하는 역할을 한다. OV1D정찰기와 국군의 전술정찰기인 RF4기도 휴전선일대를 비행하며 북한군의 동태를 파악한다. 유사시에는 일본 오키나와기지에 있는 공중조기경보관제기인 AWACS가 출동한다.이 정보수집기는 제주도상공에서 한반도전역을 커버할 수 있다. 통신감청은 RV1D,RC12H등 통신정보수집항공기와 전방지역의 통신감청소에서 맡는다. 통신감청은 공중촬영보다 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할 때가 많다.그러나 통신감청은 근본적으로 유선통신이나 육성은 감청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이번 김일성의 사망은 공중정찰로는 물론 확인이 불가능한 것이었고 통신감청이나 인적인 정보에 의해서만이 파악될 수 있었으나 이 또한 근본적으로 불가능했음이 밝혀졌다. 북한당국은 김의 사망을 극소수 상부인사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도록 극비에 부쳤고 사망에 관한 정보를 통신으로 누설하지도 않아 감청망을 통해 확인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국방부는 김일성사망이후 합동참모본부를 중심으로 한미양국군의 정보채널을 최대한 활용,북한의 동향을 파악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국방부 지하벙커에 있는 합참지휘통제실은 상황장교를 10여명 늘려 24시간 풀가동중이고 정찰기출격을 하루 4∼5회에서 11회로 늘리는 등 공중정찰활동을 강화했다. 또 전방관측과 해상초계활동의 강도를 높이는 한편 이 모든 정보를 종합해 2백60여개의 남침징후항목을 일일이 점검하고 있다. 군과는 별도로 대북정보를 수집·판독하고 있는 국가안전기획부에는 2∼3개 북한관련 전담부서를 두고 있다.특히 이들 대북관련 부서는 거의 인사이동이 없어 수십년씩 일해오고 있는 베테랑들만 모여있다는 것이 안기부의 설명이다. 안기부의 정보수집방법은 사람에 의한 수집,첨단장비에 의한 수집,다른 군정보기관과의 협조,우방국과의 정보공조체제등 크게 4가지로 나눠진다.최고급 정보를 얻는 수단으로는 사람에 의한 방법을 꼽을 수 있지만 아직은 가장 취약한 분야로 알려진다.또 자체 첩보위성통신이 없다보니 자연 미국에 정보를 의존하고는 있지만 최근들어 선진국수준의 감청장치를 확보,대미의존도가 상당히 줄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 북 군사체계 변화와 우리군의 대응

    ◎세습반발 군부의 「우발적 도발」 경계/“대북자극 불이익” 판단,스피커방송 전면중단/U2기 등 정보수단 총동원 24시간 동향 탐색 북한 김일성이 갑자기 사망,한반도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서울에서 불과 40㎞거리에 휴전선을 두고 북한군과 대치하고 있는 한국군으로서는 북한상황이 어느 방향으로 전개되느냐가 초미의 관심거리다. 특히 북한은 수십만명의 병력과 무기체계를 휴전선에 전진배치,북한내부 권력승계 과정에서 돌출변수가 언제든지 제한전등의 형태로 표출될 가능성이 높아 우리군의 북한정세에 대한 관심은 더욱 각별하다. 이에 따라 우리 군은 공군정찰기등 정보수단의 운용등을 강화,북한 군동향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있다. 우리 군은 김일성이 사망한 현 상황을 지난 반세기 동안 남북관계에서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위기국면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군은 현시점에서 북한을 불필요하게 자극할 경우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전방 초소의 대북방송등 심리전활동을 중단하는등 한반도 긴장고조를 막으려 애쓰고 있다. 보나마나 내부적으로 엄청난 혼란에 빠져있을 북한을 괜스레 자극하면 북한이 내부분열끝에 탈출구로 돌발행위를 할 가능성이 있다는 예측인 것이다. 군의 정보관계자들은 온갖 권력이 집중되고 신격화돼있던 김일성이라는 기둥이 갑자기 쓰러진 현재의 북한은 권력중심이 일시적으로 진공상태를 이루면서 김일성­김정일로 이어지는 절대권력에 대한 북한군부의 도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북한문제에 정통한 강인덕 극동문제연구소장(62)도 『일단 권력은 김정일에게 넘겨질 것』이라면서 『그러나 북한군부의 움직임이 가장 큰 변수이며 김정일이 얼마나 군을 확고하게 장악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김정일은 김일성의 후광으로 지난해부터 국방위원장을 맡아왔으나 군부가 한번도 군생활을 하지 않은 김정일에 대해 거부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강소장은 이에 따라 『김정일이 권력을 잡더라도 2년 이상 견디지 못하고 북한에 집단지도체제가 들어설 가능성이 높으며 이 집단지도체제는 항일1세대와 김정일세대를 연결해주는 강성산정무원총리와 연형묵전총리등 60대 테크노크라트들로 구성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우리 군은 이 과정에서 북한의 내부권력 투쟁이 본격화되면서 자칫 일부 군부세력에 의해 쿠데타등 돌발적인 상황이 전개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전군에 경계령을 발령하는등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북한의 내부권력이 김일성 생존당시 김정일을 중심으로 짜여졌다는 점에서 김일성의 갑작스런 사망이 당장으로는 쿠데타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쿠데타 가능성도 높을 것이라는 것이 유력한 전망이다. 북한과 같은 폐쇄사회에서는 최고통치권자의 사망 이후 새로 권력질서를 편성하기 위한 권력투쟁이 심하게 벌어지며 그 권력투쟁의 결과가 장례위원의 서열로 드러나는 것이 중국과 소련등에서 나타난 전례이기 때문이다. 북한이 빠른 시간안에 김일성의 사망을 공식발표하고 김정일을 장례위원 서열 1번으로 정한 것은 김정일이 이미 북한의 권력을 실질적으로 장악했음을 의미한다는 해석이다. 이 경우 북한정세는 의외로안정국면을 유지,북한의 도발가능성은 그만큼 줄어든다는게 군사관계자의 분석이다. 북한연구소 김창순이사장(74)은 『김정일은 김일성의 보호아래 이미 당국방위원장·군최고사령관등 군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어 권력장악은 순조로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부 군관계자들은 그러나 북한언론의 보도와는 달리 김일성이 최근 미·북대화노력등 유화정책을 취하는 것에 반발한 군부등에 의해 제거됐을 가능성도 없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군은 이런 경우 김정일의 권력장악은 매우 불안한 상태로 조만간 북한내부의 소용돌이가 무력도발의 형태로 탈출구를 믿게될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군은 이에따라 한미연합방위체제 아래 한미양국군이 보유하고 있는 U2R기등 정보수단을 활용,북한군의 움직임을 24시간 주시하는 동시에 미·일·중등의 정보채널을 총동원,북한내부 분위기를 탐색하고 있다. 군의 한 고위관계자는 『북한의 상황은 변수가 너무 많아 섣불리 무엇이라고 점치기 힘들다』면서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군부의 태도이며 북한군부가 김정일 권력세습에 반발하는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무력도발을 벌일 가능성이 있어 우리군의 방위태세와 경계태세를 강화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 르완다반군 수도 키갈리 점령/국방부 청사 접수… 주민탈출 사태

    ◎불군,반군 서부총공세 저지 태세/전략요충 부타레도 장악 【키갈리·브뤼셀 로이터 AFP 연합】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가 4일 상오(현지시간)반군인 르완다애국전선(RPF)에 함락됐다고 목격자들과 RPF 지휘관들이 말했다. RPF반군들은 또 정부군과 치열한 격전끝에 르완다 제2의 도시이며 전략요충인 부타레를 장악했다고 프랑스 관리들이 전했다. 투치주인 RPF반군들은 그동안 포위망을 좁혀온 수도 키갈리에 박격포와 소화기공격을 펼친끝에 키갈리에 입성,정부군의 마지막 저항거점인 국방부 청사를 장악했다고 유엔감시단 대변인이 밝혔다. 현지 목격자들도 RPF가 지난 이틀간 키갈리의 정부군 진지에 대해 집중적인 포격을 가한데 이어 4일 새벽 지상군을 동원한 총공격에 나서 키갈리 중심가를 점령했다고 확인했다. 르완다 정부군은 반군들이 입성하자 수도를 빠져나간 것으로 보인다. 르완다 현지에 파견된 프랑스군의 장 클로드 장군은 이와 관련,『카갈리 함락과 함께 대규모 종족학살이 발생할 것이며,이에따라 난민들이 서부지역으로 이동할것』이라고 우려했다. 벨기에의 RTBF방송도 RPF의 수도 점령으로 주민들의 대량탈출사태가 벌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키갈리를 장악한 RPF반군들은 현재 마지막까지 저항하고 있는 친정부군 민병대병력들을 소탕하는 작전을 벌아고 있다고 현지 목격자들은 전했다. 수도 키갈리가 마침내 함락됨에 따라 RPF 반군들은 정부군의 마지막 저항거점인 서부지역에 병력을 집중,총공세를 펼칠 수 있게 됐다. 한편 르완다 서남부에 진주한 프랑스군은 4일 RPF군의 서방진격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 궁궐:3/“경복궁 싫다”태종이 창덕궁 창건(서울 6백년만상:40)

    ◎임진왜란·인조반정·순조때 대형화제/세임금 폐출된 곳… 후원으로 비원 조성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태종은 서울 천도를 결심한다.태종은 경복궁은 창건때부터 좋지 않은 일이 잇따라 정궁을 다시 지으려했다.그러나 선왕 태조가 창건한 경복궁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조준등 중신들의 반대여론에 밀려 이궁으로 지은 것이 창덕궁이다. 정궁은 아니면서도 가장 많은 임금이 정사를 살폈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리는등 수많은 궁중 비사를 간직한 창덕궁은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궐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태종 4년(1404) 10월 경기·충청·강원에서 군병력과 승려 농민들을 동원,공사에 들어간 창덕궁은 이듬해 10월 완공됐다.규모는 경복궁에 비해 작은 편이었다.태종은 창덕궁에 든지 6년만에 거처를 경복궁으로 옮긴뒤에도 계속해서 정전과 누각을 지어 12년에는 정문인 돈화문을 건립했다.그리고 세종 원년(1419) 인정전이 완공돼 비로소 궁궐의 모습을 갖출 수있었다. 단종과 연산군이 폐출되는 비사를 간직한 창덕궁은 임진왜란발발로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피란에서 돌아온 조정은 경복궁의 터가 불길하다고해 가장 먼저 창덕궁 중건에 착수,광해군 원년(1609)에 완공했다.이후 창덕궁은 경복궁이 중건(1867)될때까지 「조선의 정궁」으로서의 지위를 누렸다. 경운궁에 거처하던 광해군은 창덕궁이 완공된 뒤 「선왕의 상중」이라고 이런저런 핑게를 둘러대며 궁에 들기를 꺼려했다.그러나 마지못해 창덕궁으로 이어한 뒤 20일만에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당시 이의신이라는 술사의 말에 의존하던 광해군은 창덕궁에서 노산군(단종)과 연산군이 폐출됐기 때문에 창덕궁에 들기를 꺼려했던 것으로 「광해군 일기」는 전하고 있다. 중건 5년만에 중신들의 성화에 못이겨 창덕궁에 든 광해군은 8년뒤 인조반정으로 노산군·연산군과 마찬가지로 창덕궁에서 쫓겨나는 비운을 맛봐야했다. 광해군은 창덕궁을 창건하면서 조성됐던 후원을 재정비했는데 이곳이 오늘날의 비원이다.비원은 북악에서 뻗어나온 완만한 산기슭 6만여평에 정자와 연못을 만들어 이룩한 조선조 정원의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비원 연경당 뜰에는 괴석들이 석분에 담겨 눈길을 끄는데 이들 석분은 광해군 일기에 『기화·이목·괴석을 널리 모아 동산을 만들고 정자를 지어 소요해 그 화려함이 일찍이 없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광해군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조반정이 있던날 창덕궁엔 두번째 큰 불이 나 인정전등 몇 전각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소실됐다.이에 따라 인조 25년 6월 (1647) 광해군이 공들여 지었던 인경궁의 전각을 헐어 창덕궁 재건공사를 시작,그해 11월 복구공사는 완료됐다. 이후에도 크고작은 화재가 발생했으나중창은 없었다.그러나 순조 3년(1803)12월에 또 다시 대형화재가 발생,인조반정때 실화를 면했던 인정전등 주요전각이 모두 소실됐다.이듬해 완공된 인정전은 국보 2백25호로 지정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세번에 걸친 대화재로 중건과 재건을 거듭한 창덕궁은 19세기에 접어 들면서 역사의 거센 소용돌이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 인 국방부 「한국전포로 감시」 비록 입수 공개

    ◎“중공군 포로 송환 막아라”/대만공작팀 극비리 침투/반공교육후 “말 안들으면 처형” 위협/포로들 난동 잦아… 인 사령관 납치도 한국전쟁은 1953년7월27일 휴전협정조인으로 막을 내렸다.그러나 실제로 전쟁은 송환을 거부한 2만3천명 포로의 처리문제를 놓고 이른바 「총성없는 전쟁」으로 6개월간 처절하게 계속됐다.판문점일대 비무장지대에서 벌어진 유엔군진영과 북부군(북한인민군·중공의용군)진영의 치열한 설득전과 이들의 심판을 맡은 인도의 철저한 중간입장고수는 2차대전후 네루중립주의 첫실험의 성공이라는 현대사적 의미를 부여받기도 했다.서울신문은 한국전쟁발발 44주년을 맞아 당시 송환거부포로 설득작전에 관한 내용을 담은 책인 「주한인도관리군활동사」(History of the Custodian Force of Indiain Korea:1953∼54)를 최근 인도현지에서 입수,발췌소개한다. ▷인도군첫해외파병◁ 휴전협상이 한창 진행중이던 53년5월8일 미국이 인도측에 송환거부포로 관리를 위한 인도군 파병가능성을 타진해왔다.이미 인도는 이들을 지휘감독할 5개 중립국송환위(NNRC)의 의장국을 맡기로 돼 있었기 때문에 네루총리는 파병을 수락했다.8월5일 R K 네루외무차관,관리군사령관 토라트소장,사르다르 싱 인도적십자사무총장등 3명으로 구성된 선발대를 파견,도쿄의 유엔군사령부와 개성의 북부군사령부를 거쳐 구체적인 임무와 병력규모등을 협의했다. 인도군의 총규모는 6개 보병대대와 각종 부속대로 6천명.9월28일 제5진의 인천항 도착으로 이동을 모두 끝냈다.그러나 당시 이승만대통령은 인도군의 한반도상륙을 금지시켰기 때문에 유엔군측은 인천에서 판문점까지 헬기로 이동할 것을 제의했다.동아시아의 모든 미군헬기를 동원,5명씩 수송했는데 모두 1천3백회의 출격을 기록한 사상최대의 헬기작전에서 다행히 사고는 단 한건도 없었다. ○통정리에 텐트촌 ▷새 포로수용소◁ 통정리일대에 유엔군이 건설한 막사는 5백명을 수용할 수 있는 캠프 7∼10개씩을 1개구역으로 하는 7개의 구역으로 나눠져 중공군 3개,북한군 2개,송환희망자격리수용소 1개,병원용 1개소씩으로 할당됐다.캠프는 17개의 막사와 식당·목욕탕·화장실텐트등 모두 20개의 텐트로 구성됐다.냉난방은 물론 전깃불과 온수공급이 완벽했다. 미군측은 이곳에 3만명의 식수및 생활용수공급을 위해 50만갤런상당의 물탱크를 설치했고 임진강으로부터 모두 31㎞의 대형송수관을 매설했다.전기공급을 위해 발전소 12개를 건설했으며 전체 생필품공급을 위한 대형보급창고도 세웠다.또한 설득장및 설득자대기소,송환표명포로수용을 위한 막사등 설득관련막사 10여동이 별도로 건설되었다.이들 전체지역은 하나의 거대한 도시를 이루고 있었다. ▷포로수에의 의문◁ 포로의 숫자는 포로교환협정에 따른 것으로 인도군의 입장에서 관여할 바는 아니었다.그러나 양측의 휴전협상이 처음 시작된 51년7월26일당시까지 유엔군측은 12만1천명의 북한군과 중공군포로를 억류하고 있었으며 이 가운데 4만1천명이 송환을 거부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북부군측은 6만5천명의 유엔군 생포를 주장했으며 그 가운데 5만명이 자발적으로 북한인민군과 중공의용군에 합류했다고 밝혔다.이같은 주장은 유엔군측이나 공산군측모두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의 우월성에 손상을 입는 것이기 때문에 용납할 수가 없었다. 휴전협정조인후 33일간 양측은 포로교환을 실시,유엔군측은 7만5천8백명을,북부군측은 1만2천7백60명을 상대방측에 넘겨주었다.그리고 9월25일까지 인도군이 넘겨받은 포로는 유엔군으로부터 북한군 7천9백명과 중공군 1만4천7백4명,북부군으로부터 한국군 3백35명(여군5명 포함),미군 23명,영국군 1명등 모두 2만2천9백63명이었다. 유엔군으로부터 인도받은 숫자는 남한정부의 6·18 반공포로석방으로 1만7천여명이 도망간 상태여서 어느정도 타당성 있는 숫자로 받아들여졌다.그러나 북부군으로부터 인도받은 숫자는 터무니없는 것이었다.자발적으로 귀순해왔다는 5만명을 제외하고도 나머지 1만5천명중 유엔군측으로 송환되지 않은 수가 2천3백여명에 달하는데도 아무 설명이나 명단제시조차 없이 3백여명만 인계했던 것이다. ○총격사건 두차례 ▷포로들의 저항◁ 양측 사령부로부터 포로의 인계는 9월10일 시작돼 25일에 모두 끝났다.그들은 막사마다 리더를 선출,자치적으로 움직였으며 자체 취사를 했다.일과는 상오6시 기상하여 하오9시30분 취침에 들 때까지 대부분 운동과 오락으로 진행됐다. 첫날 중공군포로 가운데 7명이 대열을 이탈하여 송환을 요청해온 것을 비롯하여 밤에 철조망을 뚫고 번의를 요청해오는 포로들이 많았다.이같은 자발적 이탈자들의 증가로 포로측과 인도군측은 점점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설득작전은 포로 인계인수가 끝난 뒤 26일부터 시작될 계획이었다.그러나 문제는 마지막날인 25일 발생했다. 날이 밝자 각 캠프의 포로들은 인도군에게 「납치」해간 원추를 즉각 돌려보내줄 것을 요구하며 대규모시위를 벌였다.그들은 반인플래카드를 내걸고 돌을 집어던지며 강력히 저항했다.이 와중에서 토라트사령관이 포로들에게 억류되는 사태가 발생했다.먼저 억류된 그류왈소령의 구출협상을 벌이기 위해 캠프를 찾은 토라트사령관과 브두와르중령·싱소령등 12명이 순식간에 5백명에게 포위된 것이다. 부사령관 싱준장은 즉시 무장병력을 출동시켜 캠프전체를 에워싸고 사령관일행의 즉각석방을 요구했다.그리고 유엔군사령부에 협조를 요청하는등 순식간에 긴장이 감돌았다.그 사이 페인탈여단장은 특공대를 동원,극비의 구출계획도 세워놓고 있었다. 지루한 시간이 흘렀고 대화의 진전이 없는 가운데 마침내 토라트사령관의 기지로 포로대표를 설득,상황은 끝나게 되었다.그러나 그후에도 10월1일과 2일 두차례 총격사건이 발생,수십명의 사상자발생등 긴장상태지속으로 첫설득회는 10월15일에 가서야 가능했다.반면에 북부군측에 억류돼 있던 포로들은 규율이 잡혀 있었으며 공산주의에 몰입해 있는 듯했다. ▷대만의 선전전◁ 탈출해온 원추는 대만정부가 단 한명의 중공군포로도 대륙으로 송환시킬 수 없다는 장개석총통의 신념에 따라 조직적으로 포로설득에 개입했음을 폭로했다. 휴전협상이 진행중인 동안 중공군포로들이 수용돼 있던 제주도수용소로 대만정부는 포로들의 교육을 위한 두개의 공작팀을 침투시켰다.각각 12명과 6명으로 조직된 공작팀은 대만의 외교부·정보부·국민당등 각처에서 엄선된 심리전전문가들이었다. 이들은 포로막사로침투해 반공강연을 했고 누구든지 대륙으로 돌아간다면 공산당이 그를 죽여 사지를 절단한 뒤 반공에 대한 본보기로 삼을 것이라고 겁을 주었다.그들은 어떻게 공산당의 설득을 피할 것인가를 가르쳤다.한사람의 이탈도 막기 위해 8∼9명으로 소그룹을 조직,송환의사를 나타내는 포로들을 목졸라 처치해버리는 방법까지 가르쳤다. 송환위대표들로부터 질문을 받을 때는 오직 『대만으로 가고 싶다』는 말만 할 것을 강조했고 포로개개인들에게 「TAIWAN」이라는 영문글자도 가르쳤다. ○88명 제3국 선택 ▷설득완료◁ 12월23일까지 90일간 주어진 설득기간중 실제설득이 이뤄진 날은 10일에 불과했다.설득받은 포로는 전체의 15%에 불과한 3천4백69명이었으며 설득후 송환을 요청한 자는 모두 1백37명,그나마 공산군측 억류포로중에는 한명도 없었다.여기에 설득을 기다리지 않고 막사탈출등으로 송환을 희망한 2백38명(공산군측 포로 8명 포함)을 더해 최종적인 송환희망자는 모두 3백75명.결국 설득작전은 양측사령부와 송환위·인도군등이 엄청난 인원과 물량을투입한 작전치고는 별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90일간의 설득기간이 끝난 후에도 양측은 포로들의 추가설득을 위해 설득기간을 늘려줄 것을 요청했다.그러나 송환위측은 협정에 규정된대로 이 포로들은 30일간의 정리기간을 가진 뒤 54년1월22일자로 포로의 신분이 아닌 자유인의 신분으로 되돌아감을 다시한번 강조했다. 마침내 1월20일 상오8시부터 인도군은 포로들의 인계를 시작했다.다음날 새벽3시까지 모두 19시간 2만1천8백39명이 유엔군측으로,3백47명이 북부군측으로 인계됐다.이 가운데 북한군 74명,중공군 12명,남한군 2명등 88명은 제3국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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