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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달 4일 런던서 중동평화회담/블레어 英 총리 중재

    ◎美서 이·팔 초청형식 【가자지구·워싱턴 AFP AP 연합】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 다음달 4일 런던에서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과 각각 별도의 회담을 갖고 중동평화협상을 진전시키기 위한 방안을 논의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순방중인 토니 블레어 영국총리는 20일 가자지구에서 아라파트 수반과 만난 뒤 이같이 말했다. 미국무부는 이와 관련,교착상태에 빠진 중동평화협상을 타개하기 위해 미국이 제의한 이스라엘 병력의 요르단강 서안 철수 문제가 런던회담의 주요 의제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스라엘의 한 고위관리는 런던회담이 토니 블레어 총리의 후원 아래 열리는 아라파트­네타냐후­올브라이트 3자회담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아라파트 수반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미국의 초청으로 이뤄지는 이번 런던회담에 대해 적극적 찬성 입장을 보였으며,네타냐후 총리도 앞서 19일 블레어 총리와의 회담에서 수락의사를 밝혔다.
  • 獨 ‘적군파’ 해산 선언/언론에 “테러 종료” 서한

    【카를스루에 AFP 연합】 독일의 극좌 테러단체인 적군파(赤軍派)는 20일자진 해산할 것을 선언했다.적군파는 이날 한 언론기관에 보낸 서한에서 “오늘로서 우리의 과업을 종료했다.적군파의 도시 게릴라 전투는 이제 역사가 되버렸다”고 밝혔다. 독일 연방 검찰청은 적군파가 언론 기관을 통해 해산을 발표했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나 이 서한의 진위여부가 아직 확인되지는 않았다고 전했다.독일 적군파는 지난 70년대에 급진파 학생들에 의해 결성돼 지난 92년 4월13일테러 활동 중단을 선언할때까지 미군 시설 및 병력,경제인,법조인들을 목표로 삼아 크고 작은 테러를 자행한 바 있다.
  • 국군의 발자취(대한민국 50년:15)

    ◎軍 정치적 중립 5·16구데타로 무너져/65년 월남 파병 계기로 환골탈태/軍장비 현대화­전투력 강화 한몫/6·25 직전 10만서 69만 大軍으로 한국전쟁 발발 직전 대한민국 국군의 총병력은 10만5천여명이었다.이 가운데 지상군이 9만6천여명,해군 7천여명,공군 2천명가량이다.참고로 북한 인민군은 총 19만8천명 규모였다. 국군은 6·25를 거치면서 미국의 원조와 지원 아래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엄청나게 성장했다.전쟁중에는 최고 80만에 이르기도 했지만 종전 무렵에는 60만 대군으로 자리잡았다.게다가 사회 각 부문의 성장이 더딘 상태에서 군은 미국식 교육·관리제도를 도입,운영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앞서가는 조직이 되었다. ○李承晩의 정치이용 거부 그러나 덩치가 커지긴 했어도 군은 정치적인 영향력을 벗어나지는 못했다.제1공화국 시절 李承晩 대통령은 자신의 취약한 정치적 기반을 보완하고 집권을 연장하는 도구로 군을 이용하려 했다.이에 따라 정치권이 인사에 개입하고 부정선거를 강요했으며,정치자금 조달을 요구하기도 했다. 갓 독립한신생국가에서,4억달러쯤에 이르는 미국의 군사원조와 국가예산의 40%가량을 이용하는 군만큼 재정능력이 풍부한 집단은 없었다.따라서 정치권으로서는 군이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의 대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자유당 정부 때의 군이 일방적으로 정치에 끌려다닌 것만은 아니다.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발생한 ‘부산 정치파동’ 당시 이종찬 장군은 육군훈령을 내려 군의 정치개입을 공식적으로 금지했다.60년 4·19가 일어났을때도 군은 질서유지에만 나섰을뿐 정치적으로는 철저하게 중립을 지켰다. 그러나 나름대로 정치권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던 군의 자세는 5·16군사쿠데타가 터지면서 일시에 무너진다.인사문제를 비롯한 군 내부의 부정부패가 누적되고 정치불안이 야기한 사회혼란이 이어지자 이를 빌미삼아 朴正熙 소장과 일부 영관급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5·16은 朴正熙 집권 18년에 이어 全斗煥·盧泰愚로 연장되는 군사정권 시대의 출발점이 됐다.이 기간 군출신 정치세력은 특유의 기획력과 추진력으로 일정부분 경제성장을 이룬 것이 사실이다.그러나 ‘경제발전’이라는 미명아래 민주주의 발전은 억압됐고 인권탄압이 공공연히 자행됐다.국민의 군대여야 할 군은 국민에게 사랑받기 보다는 경원의 대상이 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특히 1980년 5월 ‘광주의 비극’은 군에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게 됐다. 한편 대한민국 국군은 월남파병을 거치면서 다시 한번 환골탈태한다.1965년 1월8일 朴正熙 정부는 국무회의를 열어 월남에 국군 2천명을 파견하기로 결의했다.다음달 24일 비둘기부대장병 583명이 첫 전투부대로 파병됐다.이에앞서 64년 9월11일에는 의료진과 태권도 사범 164명이 부산항을 떠나 열하룻만에 월남 사이공(현 호지명시)에 도착했다. 한국군의 월남 파병은 1961년 11월 朴正熙 당시 최고회의 의장과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 사이에서 처음 논의됐다.파병의 명분은 ▲한미 양국은 자유우방으로서 아시아의 집단안보에 공동책임이 있고 ▲월남의 안전은 한국의 안보와 직결되며 ▲한국으로서는 6·25때 우방 16개국의 도움을 받았으므로 이제 빚을 되갚아야 한다는것 등이었다. ○8년간 31만2천명 파병 하지만 파병이 쉽게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우리 정부로서는 파병에 따른 제반조건을 보다 유리하게 얻어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한미간의 줄다리기는 월남전 내내 계속됐고,이같은 상황은 65년 5월17일 미국에서 열린 朴正熙 대통령과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전후의 사정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여하튼 65년 6월14일 월남공화국 수상이 우리 정부에 1개 전투사단 지원을 공식요청한 것을 계기로 국군의 월남 참전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그해 10월16일 첫 전투사단인 맹호부대가 부산항을 떠났고 이어 백마부대·백구부대·청룡부대가 속속 파병대열에 합류했다. 1973년 3월23일 마지막 부대가 귀국하기까지 8년동안 대한민국 국군은 모두 31만2천여명을 월남에 파견했다.그땅에서 국군은 대대급 이상 작전만 1천100회를 실행했고,민간지원 사업으로는 3천500여채의 건물을 지어주고 1천700㎞의 길을 닦아주는 노력을 기울였다. 월남파병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종적으로 내리긴 아직 이르지만 국군장비 현대화와 전투력 강화라는 측면에서만 따질 때 크게 기여했음을 부인하기는 힘들 것이다.아울러 국군이 국제사회에서 위상을 드높이는 데도 한몫을 했다. 최근 국군은 UN평화유지활동(PKO)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다.93년 7월 소말리아에 공병대대를 파견한 것을 시발로 그동안 앙골라,서부사하라,인도·파키스탄,그루지아 등지의 분쟁지역에서 평화유지군 활동을 벌였으며 이에 따른 국제사회는 그 증거라 할 만하다. 6공화국에서는 헌법에 군의 정치적 중립을 명시했다.이어 문민정부는 하나회 조직을 정비하는 등 군의 정치개입을 용납하지 않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했다.군도 국방백서를 발간,군의 실상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군내 민주화를 이루고자 군인복무규율을 개정하는 등 국민의 군으로 거듭 태어나려는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 국군은 지상군 56만,해군 6만7천,공군 6만3천 등 총 69만병력에 이른다.이에 견줘 북한군 규모는 1백14만7천명이다. ◎朴正熙­존슨 대통령 65년 월남 파병 담판/“전투병력 추가 파병 안하면 주한美軍월남으로 빼겠다”/“對韓 경제원조 확대 한국 군장비 현대화 해달라” 65년 5월 미국에서 만난 朴正熙 대통령과 존슨 미국 대통령은 한미 양국의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확인한 뒤 동아시아 안보에 관해 깊이있는 논의를 나누었다.그러나 실질적인 초점은 단연 한국군의 월남 증파 건에 맞춰졌다. 존슨은 공산주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한국군의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이어 한반도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데 한미상호방위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가를 역설했다.이때는 한국이 전투부대로 비둘기부대 2천명을 파견한 정도였기 때문에 존슨의 치하처럼 월남에서 큰몫을 담당하지 못한 상태였다.존슨의 언사는 결국 한미상호방위에 더욱 관심을 가질테니 한국도 월남에 병력을 더 많이 보내라는 정치적 요구에 다름아니었다.이 자리에서 존슨은,한국이 병력 파견을 늘리지 않으면 주한미군을 월남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는 암시도 함께 했다. 두 정상은 이 만남에서 미국의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와 한국군 현대화를 추진하는 군사원조를 늘이기로 합의했다.또 주월한국군 유지비용의 인상과 주한미군 유지 약속 등에도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다음해 3월7일 브라운 주한 미대사는 국군의 월남 추가파병에 따른 미국측 보상조치를 약속한 14항목의 문서를 한국정부에 전달했다.주요 내용은 ▲추가파병 비용은 미국이 부담 ▲한국 육군 17개 사단과 해병대 1개 사단의 장비 현대화 ▲월남 재건 및 구호사업에 한국업체 참가 ▲미국의 차관·군사원조 계속 및 신규차관 제공 등이다. 이 각서이후 곧바로 국군은 2만여명을 월남으로 보냈고,월남전이 끝날 때까지의 병력 31만여명은 월남전 참전국 가운데 미군에 이은 두번째 규모 였다.또 민간업체의 월남에 대한 수출액 할당도 연 6천만달러로 늘어났으며 건설사업 등에의 참여도 활발해져 우리 사회는 ‘월남특수’를 노렸다.그러나 월남에서 숱한 한국청년들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하였다든지,참전용사와 그 자녀들이 고엽제 후유증으로 시달리는 일따위는 월남파병에 따른 손실이기도 하다.
  • “6월 선거 필승” 강력한 야당 기치/전당대회 이모저모

    ◎1만1천여명 참석… 여당 연합공천 등 비난/요란한 행사 생략… 對與 투쟁 영상물 이채 한나라당이 4·10 전당대회를 통해 강력한 건전야당의 기치를내걸었다.당직자,대의원 등 1만1천여명이 참석한 이날 대회에서 한나라당은합리적 견제와 비판적 협력으로 국정의 한 축을 이끌겠다는 각오를 다졌다.새로 출범한 총재단은 당내 결속과 단합을 통해 4·2재보선 압승의 여세를 6월 지방선거 승리로 몰아갈 것을 다짐했다. 행사의 절정은 趙淳총재와 李會昌 명예총재가 재추대되고 5명의 부총재가지명되는 순간이었다.이들은 趙총재와 李명예총재를 중심으로 손을 맞잡고 대의원들의 환호에 답했다. 趙총재는 취임사에서 “여권이 연합공천이라는 허울좋은 미명아래 국민회의 자민련 국민신당 3당 야합을 획책하는 것은 망국적인 신(新)지역감정의 조장이며 지역 분할통치의 음모”라고 통렬히 비판했다.李명예총재는 치사에서 “정부 여당이 북풍이다 정계개편이 다하여 구시대 권력정치에만 열중하면 민주주의도 경제회복도 국민대통합도 실종될 것”이라며 정부여당의 독선과 독주를 견제했다. 李漢東 부총재는 “총재를 중심으로 뭉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金潤煥 부총재는 “국익을 위해서는 협력을 아끼지 않겠지만 정권에 대해서는 야당의 자세를 확고히 지키는 건전하고 건강한 야당으로 태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李基澤 부총재는 “백범 김구 선생이 ‘광복된 조국에서 중앙청 수위라도 하고 싶다’고 했던 정신으로 당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겠다”고 열변을 토했다.辛相佑 부총재는 “허탈감과 좌절감을 벗어 던지고 집권여당과 당당한 경쟁을 통해 성장하자”고 촉구했다.金德龍 부총재는 “야당다운 야당을 만들기위해 새 출발을 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趙총재의 가필로 논란을 일으킨 당헌당규개정안 부칙2조에 대해서는 金榮馹 제1사무부총장이 제안설명을 통해 “趙총재가 당무운영위에서 부칙2조가 대의원의 전대소집 요구를 배제한 의미가 아니며 ‘소집한다’는 ‘소집하여야 한다’는 뜻이란 점을 분명히해 조문상 오해를 완전 해소했다”고 보고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여당때 연예인이 동원된 요란한 식전행사가 간단한 난타공연과 ‘선구자’합창으로 대체됐다.현 정부 출범뒤 대여(對與)투쟁 상황을 담은 영상물을 방영,야세(野勢)를 과시하기도 했다.특히 玄敬大 헌정수호비상대책위원장과 李圭正 제2사무부총장이 金鍾泌 총리서리 체제의 위헌성을 공박하고 현 정부의 실정(失政)을 고발하는 성명을 각각 낭독,열기가 고조됐다. 4·2 재보선에서 당선된 朴槿惠 의원 등이 소개될 때는 승리를 자축하는 박수가 울려 퍼졌다.그러나 경제난을 감안,팡파레·축포 등 특수효과는 사용하지 않았다.여당때처럼 엄격한 출입통제나 경비병력도 눈에 띄지 않았다.
  • 創軍(대한민국 50년:14)

    ◎해방 직후 좌우익 군사단체 60여개 난립/“치욕 되풀이 말자” 강력한 군사력 국민적 열망/미군정 견제속 육군·해군·해병대·공군 순 창설 대한민국 국군은,1948년 9월5일 남조선경비대가 육군으로 개편됨으로써 정식 출범했다.정부 수립 21일만이었다.해군도 곧이어 발족했고 해를 넘겨 49년에는 4월15일에 해병대가,10월1일 공군이 창설돼 초창기 4군체계를 확립했다. 나라를 세운 뒤 곧바로 창군(創軍)에 나서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그러나 대한민국 국군이 탄생하기까지에는 간단치 않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해방이 되자 우후죽순처럼 난립한 것은 정치단체만이 아니었다.각종 사설·유사 군사단체가 곳곳에서 깃발을 올렸다.이에는 까닭이 있다. 먼저 35년만에 국권을 되찾은 한민족에게는 ‘다시는 치욕을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다짐과 함께 강력한 군사조직을 갖추어야 한다는 열망이 불타올랐다.아울러 해방정국에는 독립군 출신을 비롯해 일본군·만군·학도병·공산군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군을 경험한 인적 자원이 풍부했다.좌우 이념대립에따라 군을 선점하려는 양쪽의 경쟁이 작용한 것도 군사조직 난립에 큰영향을 미쳤다. ○사설 군사단체 끼리 충돌 해방 이틀 뒤인 45년 8월17일 서울 교동국민학교에서 귀환장병대(후에 국군준비대로 개편)가 발족한 것을 필두로 그달 말에는 일본 육사출신들이 주축이 된 조선임시군사위원회(위원장 李應俊)가,9월1일에는 좌익 성향의 학병동맹(위원장 王益權)이 잇따라 조직됐다.이밖에 학병단·학도대·광복군국내지대·보안대·한국혁명군·장병대·장총단·조선국군학교·대한민국 군사후원회·육해공군 출신 동지회·한국장교단 등 수많은 군사단체가 등장해 나름대로 활동을 벌였다. 45년 11월 현재 미군정청에 등록한 군사단체는 30곳을 넘어섰으며 비등록조직을 합하면 60여 단체가 존재했다. 이같은 군사조직의 난립에 당황한 미군정은 한국군 창설을 가시화하는 작업에 바로 착수했다.45년 11월13일 군정법령 제28호를 공포해 창군 기본계획 수립을 맡는 국방사령부를 설치한 데 이어 12월5일에는 군간부 양성을 목표로 군사영어학교를 세웠다. 그럼에도 군사단체들의 발호는 그치지 않았고 무력충돌도 적잖게 발생했다.46년 1월18일 학생동맹은 서울 도심에서 반탁전국학생총연맹 시위대를 습격했다.이에 따라 경기도경은 張澤相 부장의 지휘아래 다음날 새벽 학생동맹 본부를 기습해 해체시켰다.이날 金斗漢이 이끄는 우익단체 대한민청은 좌파그룹인 조선국군준비대(총사령관 李赫基)에 총공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미군정은 결국 46년 1월20일 사설군사단체해체령을 내려 강력한 단속에 들어갔고 그에 따라 각종 군사조직은 점차 퇴색했다. 한편 창군작업은 남조선국방경비대와 조선해안경비대를 중심으로 차근차근 진행됐다.국방경비대는 병력 600명으로 제1연대 제1대대를 편성,46년 1월15일 서울 태릉에서 입대식을 갖고 출범했다.2월7일에는 국방경비대 사령부를 구성했으며 그해 4월까지 병력을 8연대로 늘렸다. 국방경비대 사령부는 국방부를 거쳐 통위부로 이름을 바꾸었고 남조선국방경비대도 국방경비대­남조선경비대 순서로 개칭하면서 대한민국 육군의 모태로 자리잡았다.정부 수립 직전 남조선경비대의 규모는 5여단,15연대에 장교 1천403명,사병 4만9천87명이었다. 육군에 비해 해군 창설작업은 훨씬 순조로웠다.해방된지 며칠 지나지 않은 8월21일 孫元一을 중심으로 해사대가 조직됐다.孫元一은 중국 남경 중앙대농학원 항해과를 나와 외항선에서 선원생활을 한 인물로,뒤에 초대 해군참모총장과 제5대 국방장관(53∼56년)을 역임한다. 해사대는 그해 11월11일 해방병단(海防兵團)으로 확대되면서 100t급 2척과 40t급 1척 등을 갖고 미약하나마 해안경비에 나섰다.46년 6월15일에 군정법령 제86호에 따라 조선해안경비대로 개편된 뒤 전국 주요항구에 기지를 건설하고 총사령부를 서울에 두는 등 위치를 확고히 했다. 해병대는,여순반란사건을 겪으면서 그필요성이 인정돼 49년 4월15일 해군에서 차출한 병력 400여명으로 경남 진해 덕산비행장에서 출범했다. ○공군 연락기 20대로 창설 공군은 가장 늦은 49년 10월1일 조직됐다.해방직후 국내외 항공계 인사들이 모여 한국항공건설협회로 출발했으며 48년 5월15일 육군항공부대로 탈바꿈했다.육군 예하 항공군으로서 기틀을 닦은 공군은 창설 당시 1천600여 병력과 연락기 20대를 보유했다. 창군을 전후한 시기에 군은 숱한 시련을 겪었다.근본적으로 한미간에 시각차가 있었다.정부수립에 앞장선 정치 지도자들은 내심 북진통일을 바래 강력한 군대를 원한 반면 전쟁을 원치 않은 미국은 일정수준 이상의 군사력 확보를 견제했다.군맥(軍脈)에 따른 내부갈등이 있었고,‘여순반란사건’‘대구 6연대 사건’ 등 군에 침투한 좌익세력에서 비롯된 상쟁도 여러차례 발생했다. 그러나 가장 큰 위기는 창군 2년이 채 안돼 발발한 6·25였다.소련의 강력한 지원아래 압도적인 군사력을 갖춘 북한 인민군의 공격에 국군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다.그럼에도 이 위기를 극복하면서 대한민국 국군은 짧은 세월에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게 됐다. ◎“美는 李承晩의 北侵을 경계했다”/초대 주한대사 무초의 진술서 첫 확인 대한민국이 처음 군을 조직할 때 한국과 미국 정부사이에는 적지 않은 갈등이 있었다.한국은 당연하게 강력한 군대를 갖기를 원한반면 미국은 상당히 견제하는 태도를 보였다.이는 ‘한국이 강한 군대를 보유하면 38선을 넘어 북진하는 통일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미국의 이같은 의혹에는 당시 한국정부 고위인사들의 경솔한 언행도 크게 작용했다.李承晩 대통령이 1949년 9월30일 자신의 개인적인 정치고문인 로버트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는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李承晩은 이 편지에서 “나는 지금이 북한에 있는 우리의 충성스러운 지지자들과 합세해 평양에 있는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공격하는데 가장 좋은 기회라고 강하게 느끼고 있다.우리는 金日成의 부하들을 산악지역으로 몰아내 거기에서 굶어죽게 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면 두만강과 압록강을 따라 우리방위선이 강해질 것이 틀림없다”고 했다. 6·25 발발 아홉달전쯤에 쓴 이 편지는,李承晩의 ‘남한 단독정부 극복’이라는 통일의지를 드러낸 동시에 미국이 한국군 전력강화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질 근거가 있었음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 편지는 1950년 가을 유엔에서 공산측에 의해 ‘북침의 증거’로 제시되기도 했다.당시 미 정부는 편지가 가짜라고 주장했지만 후에 올리버는 진짜임을 확인해 주었다. 李承晩의 편지가 한국의 입장을 나타낸 것이라면 미국의 판단을 보여주는 자료로 무초의 진술이 있다.대한민국 주재 첫 미국대사인 무초는 1973년 12월 트루만 대통령도서관의 기록담당자에게 재임 때 경험을 토로했다. 현재 문서로 남아 있는 이 진술에서 무초는 “한국인들이 국토를 자체방위케 하는 한편 북한 진격이라는 그들의 열망을 억제해야 했다”고 회고했다.그는 “미국은 매우 어렵고 미묘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왜냐하면 우리가 李承晩과 한국군에게 원하는 것을 주었다면 그들은 북진을 개시했을 것이고,북한도 동일하게 남진했을 것이기 때문이다.그리고 오명은 우리몫이 됐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무초 대사의 진술서는 국내에서 처음 공개되는 귀중한 자료이다.
  • 한총련 大邱 집회 유보/孫晙赫 임시의장 밝혀

    【경산=韓燦奎 기자】 영남대에서 열릴 예정이던 제6기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대의원대회가 잠정 유보됐다. 한총련 임시의장 孫晙赫씨(26 영남대 총학생회장)는 9일 하오 “경찰이 원천봉쇄에 나서 평화적인 행사가 어렵다고 판단해 10일로 에정됐던 대의원대회를 유보키로 했다”고 밝혔다. 한편 검찰과 경찰은 한총련의 대회유보선언이 원천봉쇄작전을 혼란시키기 위한 전술의 하나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34개 중대의 경찰병력을 영남대 주변 진입로 등에 집중배치,검문검색을 강화하고 있다.
  • 이,레바논 주둔군 철수 승인/유엔결의안 20년만에 공식 수용

    【예루살렘 AFP AP 연합】 이스라엘 내각은 1일 자국 병력의 레바논 철수를 촉구한 유엔 결의안 425조를 승인했다고 이스라엘 라디오 방송이 보도했다. 이스라엘 각료 18명 가운데 안보관련 장관 9명으로 구성된 ‘안보내각’은 레바논이 반이스라엘 게릴라들의 공격으로부터 이스라엘 북부 국경지역의 안보를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이 결의안을 이행하자는 이츠하크 모르데차이 국방장관의 제의를 만장일치 표결로 승인했다. 이번 승인은 이스라엘의 대(對)레바논 정책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스라엘정부가 레바논과의 공식 평화협정없이 철군에 동의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며 지난 78년 채택된 유엔결의안을 20년만에 처음으로 공식 승인한 것이다. 이스라엘 내각은 오는 5일 전체회의를 열어 이번 결정을 표결에 부칠 예정이다. 안보내각은 성명에서 “이스라엘은 유엔결의안을 수용하고 적절한 보안조치를 취한 뒤 레바논에서 철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 빨치산 토벌(대한민국 50년:13)

    ◎49년 ‘레드 킬러 작전’ 3,400여명 사살·생포/군검,지리·오대·태백산일대 주민 90% ‘적색’ 분류/48년부터 6·25휴전후까지 산악지대서 ‘소탕전투’ ‘낮에는 대한민국,밤에는 인민공화국’. 빨치산의 점령지역을 일컫는 표현이다.낮에는 군경의 치안아래 있으나 밤만 되면 빨치산의 점령구로 바뀌었다.대한민국 영토이면서도 한국의 통치권에서 벗어나 있었던 곳.48년부터 50년 사이 일부 남한지역은 이처럼 사실상‘무정부 상태’였다. 봄바람이 북풍을 녹이기 시작하던 49년 3월.1백여명의 빨치산은 전남 곡성군에서 군경과 대대적인 전투를 벌였다.경찰 사망자 수는 1백여명이고 통신도 파괴됐다.보성 화순 순천 나주 함평 구례 영광 등에서도 비슷한 전투가 잇따랐다.그해 8월 전남 화순도 더위와 피비린내로 뒤덮였다.3백여명의 빨치산은 광부들과 연합해 철로,통신시설을 차단한뒤 건물을 불태우고 경찰관을 무참히 학살했다.호남지역 빨치산 활동의 중심은 역시 험준한 산세를 갖고있는 지리산 일대. ○48년 ‘여순사건’서 촉발 경상북도도 빨치산 활동이 활발했던 지역이다.빨치산이 은신해 있던 산의 이름을 딴 ‘일월산 부대’의 지휘자는 유명한 金達三이었다.일제 또는 미제 소총으로 무장한 빨치산은 경찰서와 군부대를 습격했다.국군 1개 중대는 빨치산의 공격으로 41명이나 사망하기도 했다.경북지역 가운데 봉화 영덕 영주 등의 동북지역에서 빨치산은 발호했다. 대중과 연계해 무장투쟁을 벌이는 게릴라를 일컫는 빨치산은 48년 10월의 여순사건으로 촉발됐다.토벌 군경에 쫓겨 지리산으로 들어간 반란군들은 소규모 유격전을 벌였다.49년 6월에 접어들면서 빨치산은 더위 만큼 날뛰었다.조국전선을 결성한 북한이 게릴라를 대거 남파했기 때문이었다.북한은 게릴라 전문양성기관인 ‘강동정치학원’을 설치해 게릴라들을 훈련시킨뒤 남으로 내려보냈다.때로는 남한에서의 투쟁을 독려하고 고무하기 위해 남한내 빨치산을 북으로 불러 올려 교육시켰다.강원도지역도 38선을 넘어온 북한군이 빨치산들과 어울려 유격활동을 했지만 남쪽지역에 비해 그다지 심하지는 않았다. 빨치산의 활동은 49년 9월들어 절정에 달했다.정규군 편제인 병단을 만드는가 하면 중대 소대 분대도 편성됐다.심지어 여단으로 편성되기도 했다.무기와 탄약은 북한으로부터 보급받았으며 생활은 현지보급에 의존했다.산악을 근거지로 한 빨치산들은 이즈음해서 산을 내려온다.경찰서와 군부대를 공격하는 ‘아성(牙城)공격’이다.목포형무소에서는 폭동이 발생해 1천4백여명의 죄수 가운데 4백여명이 탈옥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에 따라 李承晩 정부는 대대적인 빨치산 토벌작전에 나선다.전국을 지리산,오대산,태백산 지구로 나눠 빨치산 토벌 동계 대공세를 벌였다.38선에서의 대치와 충돌 못지 않게 남한 내부의 산악지대는 ‘전장(戰場)’이었던 것이다.빨치산의 수는 1만여명.하지만 빨치산과의 전투보다 추위와 눈보라와의 싸움은 토벌을 더욱 힘들게 했다.빨치산은 지리산이나 일월산처럼 산세가 험하거나 외진 곳을 주 근거지로 삼았던 탓이다.빨치산을 추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로 당시 관계자들은 회고하고 있다.군경은 주민 가운데 90%가 공산주의자라고 의심했을 정도로 주민들은 빨치산 편으로 분류됐다는 점은 중요한 대목이다.주민들은 빨치산에 대한 정보를 군경에 제공하기를 거부했다.빨치산의 보복과 경찰에 대한 반감·증오가 얽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12월 6일 李承晩 대통령이 방송에 모습을 드러냈다.“최단시일에 공비소탕작전을 끝내고 명년 초에 후방치안문제로 유보해오던 지방자치단체의 선거및 국회의원 보궐선거를 실시한다”고 빨치산 소탕작전을 독촉하는 발언을 했다.토벌군은 마을을 불살라 유격대를 주민들과 분리시키는 ‘소진(燒盡)소개(疎開)작전’으로 빨치산의 끈질긴 저항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이현상 체포로 “작전 끝” 정부군의 진압에 49년 겨울을 지나면서 게릴라들은 차츰 소멸돼 갔다.12월 15일 지리산에서 벌어진 빨치산 토벌작전인 ‘레드 킬러’로 1천7백여명의 빨치산이 사망했고 1천7백여명이 생포됐으며 132명이 귀순했다.이에 앞선 그해 10월 좌파에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던 남로당에 대한 등록취소령도 남한내 빨치산 활동에 조종(弔鍾)을 울리는데 일조를 했다.50년 봄으로 접어들면서 빨치산의 활동은 잠잠해졌다.마치 6월의 한국전쟁을 앞둔 폭풍전야의 고요함이었다. 빨치산 토벌작전은 한국전쟁이 끝난후까지도 여전히 계속됐다.53년 5월17일 빨치산 소탕 작전사령부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틀림없이지리산 벽점골 비트에 잠복중입니다”.작전과장의 설명에 장교들은 침을 삼켰다.남한내 빨치산의 총지휘자이자 충청 경상 전라도를 넘나들며 경찰서와 관공서를 습격했던 남부군단 사령관 李鉉相.종적을 감춘지 3년만에 그의 은신처를 알아낸 것이다.여순사건의 지휘자였던 金智會 등을 체포해서 밝혀낸 쾌거였다. 치밀한 작전계획 아래 포위망을 좁힌 것은 그로부터 5개월뒤.李鉉相을 체포하기 위해 동원된 병력은 4개 연대였다.9월 18일의 새벽바람을 가르며 1연대는 운봉을 출발해 남원군 산내면을 경유해 반성리에 포진했으며 3연대는 노고단을 경유에 반야봉으로,5연대는 함양을 경유해 백무동 능선을 압박해 나갔다. 2연대는 돌격대 역할을 맡았다.바스락 소리에 돌격대는 숨을 멈췄고 수십미터 앞에는 잡초를 헤치는움직임이 포착됐다.빨치산 3명이 조금씩 움직였고 거리가 5m 앞으로 좁혀졌을때 돌격대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숨진 빨치산가운데 한명이 李鉉相.이로써 기나긴 3년동안의 빨치산과의 전쟁은 끝났다.당시 李承晩 대통령이 완전히 성공을 거둔 유일한 것이 빨치산 토벌이었다. ◎약간의 마을 파괴” 미 반공시각 파악/일부 국내학자들 “지금이라도 진산규명” 주장/“민족사 정립 차원 특별법 제정해야” 빨치산은 한국전쟁과 마찬가지로 아직도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있다.빨치산진압작전은 ‘모조리 죽이고,모조리 태우고,모조리 빼앗는(殺光,燒光,槍光)’다는 ‘삼광(三光)작전’.일본군이 만주 및 한만 국경지역에서 조선과 중국의 항일 게릴라들을 토벌할 때 사용하던 전술이었다. 일부 마을에서는 게릴라가 아닌 민간인을 대량으로 죽여 물의를 빚기도 했다.군경의 초토화 정책에 따른 것이다.49년 경남 하동과 경북 문경에서는 국군이 마을사람 수백명을 모아놓고 집단적으로 살해했다는 것이다.국회에서도 “민중들의 삶의 근거지를 빼앗고 좌익으로 몰고 있다”는 비난이 제기됐다.李靑天 국방위원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진상조사단까지 구성돼 현지 조사활동을 벌였으나 ‘빨갱이 소탕’이라는 지상명제에 밀렸다. 당시 주한미대사관의 드럼라이트 영사가 본국에 타전한 보고서는 “별로눈에 띠지 않는 약간의 마을 파괴가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드럼라이트영사의 보고서는 다분히 반공논리에 의해 작성된 측면이 많다.“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한 유일한 대답은 비공산주의자 청년들을 가려 뽑아 그들을 좌익과 같이 견고하고 무자비한 행동에 맞설 수 있도록 조직화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40여년이 흐른 지금 일부 학자들 사이에는 이제라도 진상규명을 벌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특별법을 제정해 ‘민족사 정립을 위한진실규명 국민위원회’같은 기구를 설치하자는 것이다.제주 4·3사건의 피해자·유가족 명예회복을 위해 국회가 요즘들어 진상규명특별위원회를 구성키로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4·3사건과 빨치산은 아직도 우리의 가슴에 응어리져 50년동안 슬픔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 아주안보에 미군 주둔 불가피(해외사설)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은 이달 본지와의 회견에서 주한·주일미군의 존재가 동북아시아의 안정과 평화에 불가결하다고 말했다.김대통령은 그 뒤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도 같은 취지로 연설했다. 주한미군이라는 안정장치를 풀면 지역의 안전보장 환경이 유동화해 불안정해질 수 밖에 없다는 인식을 보여준 것이다. 오키나와에 주둔하는 해병대를 포함한 주일미군과 주한미군은 아시아 태평양지역에 있어서의 미군 전방전개병력 10만명 체제의 주요부분을 점한다. 아시아에 있어서의 미군의 병력배치 규모는 물론 고정적인 것은 아니다.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미군은 냉전종결시 13만5천명 규모.삭감이 시작됐지만 10만명 규모에서 멈춘 것은 북한의 동향 여하에 따라서 발생할지도 모르는 사태를 고려한 때문이다.아시아에서도 다국간 안전보장 메카니즘의 싹이 보이고 있지만 안보체제의 실체는 여전히 미국을 핵심고리로 하는 한미,미일등 2국간 동맹에 있다. 김대통령이 안보의 현실적 기반으로서 주둔미군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동맹의 신뢰관계를 견지하는 자세를 보인 것은 국가 최고책임자로서 당연하다. 지난 1월 코언 미국방장관이 동남아시아 4개국과 중국·한국·일본을 순방했다.장관이 강조한 것은 아시아에 있어서 미군의 전방전개야말로 지역의 안정성을 담보하는 것이라는 점과 이를 받쳐주는 2국간 안보협력 체제의 중요성이다.그의 순방이 커다란 관심을 모은 것은 종래부터의 우려 대상인 한반도 정세에 더해 아시아의 경제적 혼란이 정치적 사회적 혼란으로 연결돼 안보환경에 나쁜 영향을 주지 않을까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일본이 명심해야 할 것은 우선 미일동맹의 신뢰관계를 동요시키지 않는 것이며 이와 병행해 한국·중국·러시아등과의 2국간 관계를 깊게 하며 그 가운데 안보대화도 행하는 노력이다.이것이 아시아 안보에의 실질적인 기여가 될 것이다.
  • 북 대규모 무장 시위

    【베이징 연합】 북한은 22일 상오 수도 평양에서 대규모 무장시위행진을 벌였다고 중국 관영 신화통신이 평양발로 보도했다. 신화통신은 시위대열이 20여대의 탱크를 비롯해 40여대의 장갑차,15대의 병력수송차 등 100여대의 차량으로 이뤄졌으며 그외에 자주포와 로켓포 등도 동원됐다고 전했다.
  • 권씨 비난 여론…검찰 ‘강경’/북풍 수사 새국면­검찰·병원 표정

    ◎자해 상관없이 철저 규명… 관련자 엄발/소지품 검사 미흡 지적엔 곤혹감 역력/권씨 상태 파악에 ‘영장청구 임박’ 긴장 검찰은 22일 권영해 전 안기부장이‘자해소동’에 상관 없이 ‘북풍공작’ 사건의 전모를 철저히 규명하고 추가 관련자들을 처벌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권씨의 행위에 대해 동정보다는 비난여론이 압도적인 사실을 의식한 듯 강경분위기가 주류이다. 권씨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여부를 23일 결정하고 권씨의 신병을 일반인의 접근이 어려운 국군통합병원이나 경찰병원으로 옮기는 방안도 검토하기로 했다. 다만 권씨의 소지품 검사 등 조사과정에 문제가 많았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곤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서울 강남성모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권씨는 가끔 두통을 호소하지만 회복이 빨라 23일쯤에는 식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병원측은 전했다. ▷검찰◁ ○…검찰의 고위관계자는 권씨를 국군통합병원으로 이송하는 문제와 관련,“감시 및 보안유지를 철저히 하려면 경찰병력을 추가로 투입해야 하는데다 병원측에도피해를 줘 고민”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검찰은 권씨가 자해한 서울지검 11층 특별조사실에 대한 현장보존 조치를 내렸지만 수사팀에 대한 내부감찰은 가급적 신중히 한다는 방침이다.서울지검장으로 자리를 옮기는 박순용 대검 중수부장은 “수사팀이 흥분한 상태임을 고려해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조용히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병원◁ ○…22일 상오 7시10분쯤 권씨의 병실에 들어가 X선 촬영과 심장 및 폐기능검사를 마친 의료진은 “권씨가 잠들기 전 복통과 두통을 호소해 안정제가 투여됐고,밤새 2∼3번 깨어나 뒤척이기도 했으나 부인 김효순씨와 처제의 간호를 받으며 비교적 숙면을 취했다”고 전했다. ○…권씨가 입원 중인 6010호 병실에서 ‘11시쯤 김인철 과장,영장청구될 경우 본인한테 문제가 있을 것인지.영장청구 가족 및 기자 접근금지’라는 내용의 메모가 발견됐다. 권씨 가족 등 친지들은 이 메모가 감찰측이 권씨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의료진에게 전달한 것으로 알려지자 가족 등 주변사람들은 영장청구가 임박한 것으로보고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권씨의 변호인단은 보수·우익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오제도 변호사(81)와 언론인 출신 정영일 변호사(53),육본 검찰부장·국방부 법무관리관(소장)출신의 전창렬 변호사(58)등 5∼6명으로 구성될 것으로 알려졌다.
  • 여순반란사건(대한민국 50년:12)

    ◎20개월 앞서 치른 ‘6·25 리허설’/진압에 미군 고문단 관여… 한국전 미 개입 레일 깐셈/주한미군 철수 연기·국가보안법 제정 촉발한 효과/좌파세력의 투쟁방식 게릴라전으로 전환한 계기로 “경찰이 쳐들어 오고 있다” 1948년 10월19일 여수시 신월동 국군 제14연대.늦가을의 어둠이 짙게 깔린 하오 8시쯤 14연대의 연병장에서는 고함소리가 적막을 갈랐다.연대 인사계 지창수 상사의 목소리였다. “경찰을 타도하자.조선인민군이 남조선해방을 위해 38선을 넘어 남진중에 있다”.지상사의 선동에 연병장에 모여든 장병들은 “옳소”를 연발했다.반대한 하사관 3명은 즉석에서 사살됐다.연병장에 모인 2천5백여명의 병력은 순식간에 무장하고 시내로 뛰쳐나갔다.여순사건은 이렇게 일어났다. ‘경찰이 쳐들어 온다’는 선동으로 일어난 여순사건은 당시의 시대상황 탓이다.해방 5개월뒤인 46년 1월부터 각 시도별로 연대 창설 및 모병업무가 시작됐다. ○병력 절반 이상이 좌익 이른바 ‘향토경비대’.14연대는 여순사건 5개월전에 창설됐지만 당시의 경비대는 경찰의 보조기관에 불과하다는 게 일반인들의 인식이었다.특히 경찰은 허술하게 조직된 경비대원들을 오합지졸로 간주하는 시선을 감추지 않았고 군인들은 일제의 주구였던 경찰이 자신들을 폄하하는 것이 못마땅했다.게다가 무기·장비·복장·급식 등 모든 처우에서 경찰에 비해 크게 뒤떨어져 불만은 팽배해 있었다. 46년부터 48년 사이에 많은 젊은이들이 군에 지원했다.새 조국의 건설을 위해,친일경력의 면죄부를 받기 위해,또는 공산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군을 선택했다.향토경비대 입대과정에서는 신원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처우 등의 불만때문에 군을 그만두거나 탈영하는 이가 적지 않아 충원작업은 어려움을 겪었다. 14연대가 여순사건의 진원지였던 까닭은 병력의 절반이상이 좌파였기 때문이다.미군정의 무장단체 해산령과 남로당의 조직적 침투로 군은 적화돼 있었던 것이다.군정의 해산령은 좌익계열의 분열을 가져왔으며 좌파들은 경찰의 추적을 피해 군대로 물려들었다.남로당은 사병들에게 ‘반경의식’을 고취시켜 미군정의 물리적 기반인 경찰과 군의 반목을 조장하려 했다.다시말해 군을 정치투쟁의 공간으로 활용하려 했다는 것이다. 지창수 상사가 연병장에 서기 직전,당세포 40여명과 함께 무기고를 미리 점령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좌익세력때문에 가능했다.좌익은 비상계엄령이 발령된 제주치안 확보를 위해 연대가 출동하기 전날밤에 여순사건을 일으켜 좌익반란을 본토에 확대하려 했다는 게 당국의 시각이다.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인 이범석은 여순사건 진압 직후 “공산주의자들은 여수에서 반란을 일으켜 제주사태를 남한 각지에서 전개하려 했다”고 지적했다. 거리로 뛰쳐 나간 반군들이 여수시가지로 진입한 것은 5시간여 뒤인 20일 새벽 1시20분.이들은 여수읍내 좌익단체와 학생단체에 무기를 지급했고 상오 3시쯤에는 여수경찰서를 점령했다.반란군은 이어 주요기관을 완전 장악했으며 거리에는 온통 인공기의 물결을 이뤘다.여수 인민위원회가 복구됐고 인민재판소는 체포된 경찰,국군장교,지주,그리고 우익인사들을 처형했다.이 때숨진 경찰관은 5백여명.반란군은 식량창고를 개방해 쌀배급을 실시했으며 창고에서 흰 고무신을 꺼내 주민들에게 나눠줬다.이런 인민행정은 14연대 병력이라기 보다는 남로당과 연계된 토착 좌익세력에 의해 이뤄졌다.보복정책과 동시에 선심정책이 이뤄졌던 것이다. ○식량창고 탈취 쌀 배급 반란군은 상오 8시 순천행 통근열차를 타고 북상하기 시작해 순천읍을 장악했다.이어 광양,곡성,구례,고흥 등 동부 전남지역을 손아귀에 넣었고 경찰은 반군이 오기도 전에 도망하는 일도 벌어졌다.군인들의 봉기는 토착 좌익세력들과 어울려 거대한 민중봉기로 발전했다. 반란군이 순천에 진입할 즈음 서울에서는 긴급히 비상회의가 소집됐다.국방장관 이범석,주한미군 임시군사고문단 로버츠 준장,경비대총사령관 송호성 준장 등이 참석한 회의는 작전지도부를 광주에 급파하기로 했다.21일에는 송호성 사령관이 반군토벌사령관으로 임명됐다.전군 지도부가 총력대응 태세로 대응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토벌군은 반란 사흘째인 22일 계엄령을 선포한 가운데 진압작전에 나섰으나 초기에는 별다른 성과를얻지 못했다.군 자체가 지휘불능과 병력 붕괴상태가 나타나기도 했다.가까스로 순천 탈환작전에 성공한 토벌군은 23일 여수 진압에 나섰다.송호성 사령관은 부산에서 급파된 병력 지원을 받아 바다에서 박격포 포탄을 쏟아 부었다.하지만 박격포 포사격의 미숙과 반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엄청난 사상자만 낸 채 실패하고 말았다. ○AP통신기자도 사망 송사령관은 24일 2차 여수진압작전을 직접 폈으나 오히려 자신이 반군의 기습으로 부상만 입었다.AP통신기자가 총탄에 맞아 숨진 것도 이 때였다.두차례의 실패를 맛본 토벌군은 반란 8일째인 26일 대대적인 여수 탈환작전에 나섰다.이날 정오쯤 경비정 6척이 여수반도를 포위한 채 배위에서 엄청난 박격포 포격을 가했다.여수시내는 불바다로 변했고 5분의 3은 잿더미로 바뀌었다.하지만 토벌군의 작전이 개시될 즈음 반란군들은 모두 시내를 빠져나간 뒤였으며 학생들과 좌익단체 회원들만 남아 있었다.27일에야 여수 시내를 완전 탈환함으로써 9일동안의 여순사건은 진압됐으나 2천3백여명의 목숨을 앗아갔다.2천8백여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여순사건으로 국가보안법이 제정됐으며 주한미군 철수도 연기됐다.전남 동부지역을 휩쓴 여순사건은 좌파세력의 투쟁방식이 대중투쟁에서 게릴라투쟁으로 바뀐 것 뿐이었다.지리산으로 들어간 반군세력 주력들은 벌교 등지에서 유격전으로 빨치산 투쟁을 벌였다.해방후 좌우익이 반란과 진압으로 대규모 충돌한 여순사건은 2년뒤 한국전쟁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다.다시말해 여순사건은 한국전쟁의 리허설이었고,전쟁은 사실상 이미 시작됐던 것이다. 50년이 지난 오늘도 여순사건의 상흔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고 여수·순천주민들에게 남아 있다.여수·순천 시민들은 여순사건을 ‘여순병란’으로 바꿔 불러주기를 바라고 있다.시민들의 봉기가 아니라 ‘향토 경비대 14연대’의 반란이라는 것이다. ◎미군기 정찰­진압 병력 수송 참여/주한 미 24군 ‘G­3보고서’ 입수 확인 여순사건에서 미국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주한 미군의 보고서는 당시의 상황을 사태발생과 진압 등 5개 분야에 걸쳐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기록자는주한 미24군 G­3.제목은 ‘여수와 대구 등지에서의 반란사’로 돼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주한미군은 이승만 대통령의 승인없이는 사건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워 놓고 있었다.주한미군 임시군사고문단(PMAG)의 로버츠 단장은 미국인들이 직접적인 전투에 참여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따라서 미군은 지휘역할을 맡았다. 주한미군 군사고문단 G­3의 제임스 하우스만 대위,G­2의 존 리드 대위 등은 미군의 직접 개입없이 가장 빠른 시일내 반란군을 포위·진압할 수 있는 작전을 수립했다.이에따라 하우스만 대위와 리드 대위 등은 송호성 경비대총사령관,육본 정보참모부장 정일권,정보국장 백선엽 등과 함께 광주로 직접 내려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미군의 C­47 수송기는 한국군 병사,무기,기타 물자를 대구에서 실어 날랐으며 주한미군 군사고문단의 정찰기들은 반란기간 내내 여순지역을 감시했다. 미군 비행사들은 여수의 반란 세력이 2개의 군 중대와 1천여명의 민간인으로 구성돼 있는 것으로 보고했다.여순사건이 2년뒤 한국전쟁의 리허설이었듯이 미군의 한국전 참전 조짐도 이때부터 시작됐던 것이다.
  • 클린턴,코소보 무력 개입 시사

    ◎유혈사태 강경 비난… “어떤 선택도 배제 안해” 【워싱턴·베오그라드 UPI DPA 연합】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중국과 러시아의 반대로 유혈인종분규를 빚고 있는 신유고연방에 대한 제재조치 마련에 실패한 가운데 빌 클린턴 미대통령은 11일 가장 강경한 어조로 세르비아 코소보주 유혈사태를 비난하고 군사행동 가능성까지 시사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에서 코피 아난 유엔사무총장과 회담을 갖기전 기자들이 유혈사태가 일어난 세르비아 코소보주에 대한 군사행동 가능성을 질문받고 “현재로서는 어떠한 선택도 배제되어선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무기판매 금지 등 신유고연방에 대한 새로운 제재조치와 동맹국들의 일치된 행동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희망을 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유고연방(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로 구성) 인근 마케도니아에는 현재 350명의 미군을 포함한 750명의 유엔 평화유지군이 주둔하고 있는데 미국방부는 이들 병력이 당초 철수시한인 8월을 넘겨 계속 잔류할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한편 유엔안보리 15개 이사국은 이날 코소보사태 해결을 위한 첫회의를 갖고 미국과 영국 등 서방국들이 지지하는 무기금수 등 제재조치 방안을 논의했으나 코소보사태가 ‘국내 정치문제’임을 주장하는 중국과 러시아의 강력한 반대로 의장성명을 채택하지 못하고 폐회했다.
  • 코소보사태 국제분쟁 비화 가능성

    ◎세르비아군,알바니아계 인종청소 강행/“제2 발칸화약고” 미·영 등 오늘 대책회의 세르비아 병력이 7일 신 유고연방 코소보주 알바니아계에 대한 소탕작전을 강행,지난 이틀간 알바니아계 ‘테러범’ 26명이 사망했다고 보안군측이 발표했다. 세르비아 정부는 지난주 보안군의 소탕작전이 시작된 이후 사망자가 50명정도라고 주장했으나 알바니아계 소식통들은 세르비아 병력과의 충돌로 발생한 사망자 수가 최소한 75명이라고 전했다.알바니아계 정당인 코소보민주연맹은 알바니아계 주민 5천여명이 이 지역을 빠져나갔다고 주장했다. ‘발칸의 새로운 화약고’ 코소보주에서의 유혈사태가 악화되면서 국제사회의 개입도 두드러지고 있다. 제 2의 발칸분쟁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고 있는 미국 독일 영국 등 서방국가들은 세르비아 병력의 알바니아계 학살에 대해 강경대응을 경고하고 9일 런던에서 이 문제를 논의할 6개 접촉국 각료급 회의를 연다.그러나 접촉국회의 회원국인 러시아가 서방측의 개입 움직임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비난하고 나서 회의결과는 불투명하다.중국도 러시아측 입장에 동조하고 있다. 알바니아계 희생자가 늘어나면서 알바니아는 세르비아측이 ‘인종말살 정책’을 자행하고 있다면서 지난 6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긴급회의 소집을 요청했다.알바니아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국경수비대에 비상경계령을 하달했다. 미국 등 서방측 움직임도 빨라졌다.로마를 방문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무장관은 7일 알바니아계 주민학살을 중단시키기 위한 ‘결정적이고 단호한 조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알바니아계 난민의 대량유입을 우려하고 있는 독일의 클라우스 킨켈 외무장관도 유엔 평화유지군 파견을 검토할 것을 촉구,코소보 사태의 국제전 비화 가능성을 예고했다. 코소보 사태는 밀로세로비치 신유고 연방 대통령의 ‘세르비아 패권주의’와 알바니아계 민족주의 정면대결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따라서 실타래처럼 얽히고 설킨 인종분쟁의 성격을 띤 코소보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어떤 형태로든 국제사회의 개입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 중국이각종 제재조치에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유엔의 직접개입은 불가능하다.9일 접촉국 회의에 이어 소집될 것으로 보이는 안보리 이사국회의가 주목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 늑장·착각·안이… 총체적 허점/경찰 신창원 왜 놓쳤나

    ◎부랑아로 판단 착오… 신분확인도 어수룩/배낭속 권총 등 확인후 뒤늦게 발동동 경찰이 탈옥수 신창원을 다 잡았다가 또 놓쳐 경찰의 무기력한 모습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경찰이 신을 놓친 것은 4번째.이 번에는 잠복근무 중인 형사의 검문에 걸린 신을 권총까지 쏘며 검거를 시도했으나 또 다시 실패,늑장출동,판단착오,안이한 대처 등 경찰이 할 수 있는 문제점의 결정판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경찰이 주민 제보를 받은 것은 지난 5일 상오 10시쯤. 그러나 경찰은 5시간이 지난 하오 3시쯤 형사 20여명을 현장에 보내 저수지와 휴게소 일대를 탐문했으나 행적을 찾지 못했다. 신을 발견한 것은 이튿날 하오 8시15분쯤.7시부터 휴게소에서 잠복근무하던 형사 12명은 자전거를 타고 나타난 신이 휴게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8명은 휴게소 밖에 기다리고 4명은 안으로 따라 들어가 신의 거동을 살폈다.하지만 신을 알아보는 형사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아예 한 형사는 “저놈은 김제에서 집도 없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미친 놈”이라고 말하는 등 어처구니 없는 판단착오까지 했다. 긴장이 풀린 형사들이 취한 행동은 휴게소를 빠져 나가는 신에게 다가가 “신분증이나 한 번 보자”고 여유를 부린 것이 고작.신은 “금구에 사는 낚시꾼”이라고 자신을 소개 한 뒤 형사들의 방심을 틈타 배낭을 벗어 던지고 전주권 광역쓰레기 매립장 쪽으로 달아났다. 이 때 까지만해도 경찰은 도망자가 탈옥수 신창원이라는 사실은 까마득하게 몰랐다.경찰이 대어를 놓친 것을 안 것은 그가 벗어 던지고 간 배낭속에서 지난 1월11일 충남 천안에서 신에게 빼앗긴 권총을 발견하고 부터. 부랴부랴 상부에 보고하고 추가 병력을 요청하고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포위망을 구축했으나 신은 이미 포위방을 벗어난 뒤였다.
  • 신창원 또 검거 실패/어제 김제 출현… 경찰 공포 쏘며 추격

    ◎버린 배낭서 권총·차 번호판 등 발견 【전주=조승건 기자】 부산교도소 탈옥수 신창원(30)이 6일 하오 전북 김제시 금구면 부근에서 경찰의 검문을 피해 달아나 경찰이 추적에 나섰다. 이날 하오 8시20분쯤 전북 김제시 금구면 대화리 신선휴게소 부근에서 탈주범 신으로 보이는 남자가 나타나 출동한 경찰이 검문하자 등에 메고 있던 배낭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 남자는 휴게소에서 음식을 들고 나오다 출동한 경찰이 공포탄 1발을 쏘며 추적하자 1㎞ 가량 떨어진 완주군 이서면 전주권 광역쓰레기 매립장쪽으로 달아났다. 경찰은 도주범이 벗어놓은 배낭안에서 탈주범 신이 지난 1월11일 충남 천안시 광덕면 태화산 부근에서 경찰로부터 탈취한 것과 총번이 같은 22구경 권총 1정과 흉기,이모씨의 주민등록증,위조된 자동차 번호판 등을 찾아냈다. 이 남자는 발견 당시 검정색 파커에 빨간색 모자를 쓰고 있었다. 경찰은 도주범이 탈옥수 신으로 확정짓고 도로와 마을 입구 등에 병력 8개 중대를 배치,검문검색을 강화하고 있다.
  • 인니 대학생 수천명 사흘째 반정부시위/루피아화 1만2천대 폭락

    【자카르타 외신 종합 연합】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의 7선 연임을 위한 국민협의회선거가 4일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6일 대학생들의 반정부 시위가 계속됐다. 자카르타 남동쪽 110㎞에 위치한 반둥 공과대학생 2천여명은 이날 수하르토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며 사흘째 시위를 벌인뒤 가두진출을 시도했으나 진압병력의 제지를 받았다. 자카르타에 있는 인도네시아 기독대학에서도 이날 500여명의 학생들이 평화시위를 벌였다. 한편 국영 인도네시아수출입은행(EXIM)이 거액의 환차손을 입었다는 보도속에 루피아화가 이날 상오 한때 달러당 1만2천선까지 폭락하는 등 금융시장역시 혼란에 빠졌다.
  • 반 수하르토 시위 재발/인니 대학생 “하야” 요구

    【자카르타 DPA 연합】 인도네시아에서 4일 수하르토 대통령의 하야와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대학생 시위가 재발됐다. 자바 중부의 요갸카르트시에서 3천여 대학생들은 “수하르토 퇴진”을 외치며 가자흐 마다대에서 교내 시위를 벌였다. 사우스 술라웨시 주도 우중판당에서도 대학생 6천명 이상이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이스트 자바 주도 수라바야에서도 이날 학생시위가 벌어졌다. 당국은 시위 현장에 병력을 파견했으나 강제 해산하지 않았으며 이렇다할 불상사도 발생하지 않았다.
  • 인니 ‘체육관 선거’ 시작/선거위 11일까지

    ◎수하르토 단독 출마… 7선 확실 【자카르타 AFP AP 연합】 인도네시아의 차기 정·부통령 선출을 위한 선거위원회가 1일 개막됐다. 오는 11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회의에선 임기 5년(1998∼2003년)의 새 대통령에 7선을 노리는 수하르토 현 대통령의 당선이 확실시 되고 있으며 부통령엔 바차루딘 하비비 과학기술부장관이 선출될 것으로 보인다.수하르토 대통령과 하비비 장관은 정·부통령 후보로 단독 출마했다. 수하르토 대통령은 이날 90분간에 걸친 개막연설을 통해 경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새로운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자신은 루피아화의 가치를 고정시키는 통화위원회제도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선거위원회 개막을 전후해 수도 자카르타 전역엔 주요 도로가 봉쇄되고 수만명의 치안병력이 배치되거나 출동태세에 들어가는 등 삼엄한 경비가 펼쳐지고 있다. 1천명으로 구성된 대통령 선출기구인 인도네시아 국민협의회(MPR)는 2억2백만 국민을 대표하는 기구가 아니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어용 정당과 군부,지방및 비정치단체 등 5개 당파로 구성된 MPR은 정·부통령 후보 추천권을 독점하고 있으며 이미 수하르토 대통령과 하비비 부통령 지지 의사를 밝혀놓고 있다. ◎이번이 마지막 도전” 수하르토 아들 밝혀 한편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7선 임기가 끝나는 오는 2003년 이후엔 다시는 대통령직에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의 아들이 말했다고 자카르타 포스트가 1일 보도했다. 수하르토 대통령의 아들 밤방 프리하트모조는 “나는 아버지가 2003년 대선 출마의사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이번이 마지막이며 만일 아버지가 나중에 다시 재지명을 받아들인다면 우리 자녀들이 선출되지 못하도록 막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 ‘캄’ 훈센­라나리드 휴전 합의/일등 중재국의 평화안 수용

    【프놈펜 AFP DPA 연합】 캄보디아 훈센총리와 지난해 7월 그가 무력축출한 공동총리 노로돔 라나리드 왕자가 27일 수개월 간에 걸친 휘하 병력간의 교전을 중단한다고 각각 발표했다.양측의 휴전발표는 오는 7월26일로 예정된 캄보디아 총선의 공정한 실시를 목적으로 일본을 비롯한 중재국가들이 제시한4개항의 평화안 중 하나를 충족시키는 것이다.훈센과 라나리드 양측이 이미 수용한 평화안은 라나리드에게 ▲휘하병력에휴전명령 ▲불법화된 공산반군 크메르 루주와 군사관계 단절 ▲정부군에 휘하병력 편입등을 권고하고 있다. 평화안은 또한 훈센에게 ▲오는 3월로 예정된 라나리드에 대한 불법 무기반입 및 크메르루주와 결탁 혐의에 대한 군사 궐석재판들을 신속히 진행해 라나리드가 부친인 시아누크 국왕으로부터 사면을 받고 총선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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