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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믐인 18일·라마단 시작 19일 유력/美 이라크공격 언제할까

    ◎속전속결 처리땐 내일도 가능/일부선 항공모함도착 23일 예측 【워싱턴 崔哲昊 특파원】 미국은 언제 이라크를 공격할까. 유력하게 거론되는 D데이는 14일,18일,19일,23일,26일 정도. 작전을 속전속결로 처리할 것이라는 대목에 비중을 두는 전문가들은 14일을 꼽는다. 11일 유엔 사찰단마저 모두 철수해 언제든지 공격이 가능해진 상태이나 화력을 보충하려면 시간이 촉박하다는 점에서 다소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믐인 18일은 통상 군사공격 작전일 달이 없을 때 상대가 다른 곳에 신경쓰는 시기를 택하기 마련이어서 가능성이 높다. 91년 걸프전때도 달이 기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첫 공격이 감행된 바 있다. 작전에 가장 중요한 것이 적의 동태라는 측면에서도 18일은 19일과 함께 유력한 D데이로 꼽힌다. 19일은 회교국가들의 가장 중요한 연중행사인 라마단(금식행사)이 시작되는 날. 회교국가는 전쟁중에도 라마단 행사는 거르지 않는다. 일부에서는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가 걸프지역에 도착하는 23일쯤으로 짐작한다. 그러나 군사력 이동은 예정보다 앞당겨지기 마련. 전문가들은 엔터프라이즈호는 1주일이면 도착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군의 파견군 병력 및 장비가 모두 도착하는 26일은 이라크에 너무 많은 시간을 준다는 측면에서 비효율적이라는 지적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18일과 19일이 유력시되고 있다.
  • 日軍 학병서 광복군까지(항일독립군 장정따라 6천리:中)

    ◎삼탑진의 ‘노병’들 숙연한 묵념/“외롭게 죽어간 김학규 장군” 눈시울 붉혀/의연하고 용감했던 그날의 동지들 추모/옛 서안 사령부 터엔 재개발 앞둔 건물만 광복 투쟁의 발자취를 찾아나선 독립유공자협회 일행들의 여정은 장쑤성(江蘇省)쉬저우(徐州)에서 안후이성(安徽省)푸양(阜陽)으로 이어졌다.베이징(北京)출발 4일째인 10월10일이었다.푸양까지는 400리 남짓.당시 푸양은 쉬저우에 주둔하던 일본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중국군의 최전방 거점.적진 깊숙이 뛰어들어 병력을 교란시키고 갖가지 정보를 모으는 일은 광복군의 몫이었다.산타쩐(三塔鎭) 샤오자오쭈앙(小棗庄)마을.제법 번화한 푸양시 도심에서 승용차로 1시간 거리.반세기전과 다름없는 중국 농촌 그대로였다.‘마지막 독립군’들의 지하공작 본부가 이곳에 있었다.노 광복군들의 눈시울은 금세 붉게 젖었다.누가 먼저랄 것 없이 숙연한 묵념이 이어졌다.“지하공작을 벌이다 일본경찰에 살해된 韓聖洙 동지의 명복과 독립운동의 영웅이면서도 쓸쓸한 말로를 맞았던 광복군 제3지대 사령관金學奎 장군을 위해” “금방이라도 ‘이 사람들!’하고 외치며 나타날 것만 같은 옛 동지들…”.일본군에서 탈출,광복군에 합류했던 일본 專修大 졸업생 韓聖洙씨는 상하이에서 정보를 캐다 희생됐다.“韓동지는 체포된 뒤에도 일본말을 쓰지 않아 통역을 거쳐 심문받았다.난징(南京)형무소에서 목이 잘려 죽을 때까지 일본인들을 꾸짖으며 의연함을 잃지 않았답니다” 이곳서 주로 활약했던 광복군은 20여명.일행중엔 광복회 부회장을 지낸 金祐銓 회원,全履鎬 회원 등 학병 출신과 일본 점령지역을 탈출해 광복군에 가담했던 金國柱 부회장,金九 선생 비서로 일했던 鮮于鎭 선생 등이 끼어있었다. 43년부터 해방때까지 지하공작 활동을 벌였던 金國柱 부회장은 “산둥성(山東省)의 칭다오(靑島)와 지난(濟南) 등 일본 점령지역을 오가며 정보를 캐고 거주 한국인들을 광복군에 합류시키는 일을 했다”고 회고했다.일본 헌병에게 불심검문 받고 유창한 중국어로 딴전 피웠던 기억,가까스로 마련한 군자금 등 이들의 기억은 끝없이 이어지는듯 했다. 일행은 당시윈난성(雲南省) 쿤밍(昆明)의 미국 첩보기구 전략사무국(OSS)을 오가며 광복군과의 군사협력 등 연락업무를 맡았던 金祐銓 회원의 무용담을 들으며 산시성(陝西省)의 시안(西安)으로 향했다. 시안은 광복군이라면 영영 잊을 수없는 대일 항전의 聖地.충칭에 이어 두번째로 광복군 총사령부가 터 잡았던 곳이다.사령부 건물은 시안시 중심부 난위엔먼(南院門) 부근에 있었다.지금은 ‘시안시 공산당 위원회’ 건물과 번화한 상점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광복군 시안시대의 본거지였던 얼부지에 4호는 간이건물에 음식점들이 빽빽히 들어선채 재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안 역시 쉬저우나 푸양,린촨(臨泉)에서 처럼 광복군의 자취가 하나하나 사라져 가고 있었다.“표지석이라도 하나 세워 다음 세대들에게 독립군의 투쟁 정신과 역사를 전할 수 있었으면…” 이 다음 누가 이곳을 찾아올 것이며 독립투쟁의 역사가 어린곳을 어떻게 알아볼 것인가….시안을 뒤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직전 광복군 총사령부가 있던 충칭(重慶)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노 광복군들은 안타까움을 떨치지 못했다. ◎광복군 총사령부/1940년 重慶서 발족 두달만에 西安으로 옮겨 광복군 총사령부는 광복군들에겐 따스한 고향이요 용기의 원천이었다.총사령부의 운명은 조국의 처지만큼 순탄치 않았다.총사령부가 발족된 것은 40년 9월 쓰촨성(四川省) 충칭(重慶)에서 였다.나라 잃은 군대에게는 편안한 나날이 없었다. 태어난 지 두달여만인 그해 11월말에는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으로 옮긴다.시안은 중국군이 일본군의 공세를 막아내던 전략 거점지.본격적인 대일항쟁을 위해서였다.일본군 점령지역이 가까워 정보수집과 한국인 포섭 등이 가능했다. 총사령부라고 해야 시안시 난위엔먼 지역과 얼부지 부근의 허름한 주택이 고작이었다.그나마 42년 9월에는 비워 주어야 했다.일본군의 공세가 거세지고 중국이 광복군의 행동을 통제하려했기 때문이었다. 2년여의 시안시대를 마감하고 다시 충칭으로 돌아가 광복을 맞았다.충칭시 쩌우룽로(鄒容路)에는 총사령부로 쓰였던 건물이 있다.의혈 남아들의 집결지였던 그 곳은 지금도 허름한 음식점으로 쓰이고 있다. ◎白波 金學奎 장군 광복군 제3지대장/일군 맞서 눈부신 전과울린 광복군 대부 광복군 제3지대장 白波 金學奎 장군은 총사령관 李靑天,참모장 李範奭과 함께 광복군의 대부였다. 李範奭 참모장이 지대장으로 지휘한 제2지대가 유격전을 주로 폈다면 金學奎 장군의 제3지대는 정면에서 맞서 싸웠던 광복군의 최정예 부대였다. 장군이 항일전선에 투신한 것은 1919년.19살의 나이로 만주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면서 부터였다.32살이 되던 32년까지 만주에서 항일 무장투쟁으로 혁혁한 전과를 올렸고 40년 광복군 총사령부가 발족하자 핵심 참모로 참여한다. 그러나 사령부에만 안주하지 않았다.중국군 인맥을 활용,일본군서 탈출한 젊은이들을 린촨(臨泉)의 중국 중앙군관학교로 모아 주도록 했다.그들을 모아 한국광복군 간부 훈련반에서 독립의 간성으로 양성했고 제3지대를 창설했다. 광복후 白波는 평생 몸바쳐 싸웠던 조국에 돌아 왔지만 李承晩 정권과 불화를 빚으며 옥고를치렀다.67년 돌보는 이도 없이 67세를 일기로 서울의 모래내 한켠 판자집에서 숨을 거뒀다. ◎광복군 OSS/미국식 훈련… 한반도 상륙 준비 정예부대 OSS는 한때 전략사무국이란 이름으로 운영됐던 미군의 최정예 첩보기구.적진 깊숙이 고도의 훈련을 받은 첩보요원을 침투시켜 군사 정보를 탐지하고 적의 후방을 교란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광복군 OSS’는 미국식 OSS요원 훈련을 받은 40여명의 정예 광복군들.45년 3월부터 광복될 때까지 중국에 파견된 OSS의 지원을 받아 특수훈련을 받았다. 태평양전쟁 막바지 미군 등 연합군은 한반도 상륙작전을 준비했고 한반도 사정에 밝은 광복군 OSS요원들을 침투시켜 교두보를 확보하게 할 계획이었다. 훈련장은 광복군 제2지대 사령부를 겸해 시안에서 남쪽으로 100여리 떨어진 뚜취쩐(杜曲鎭) 쓰포춘(寺坡村)에 있었다.일행들이 현장을 찾았을때 훈련장 터는 농촌마을을 이루고 있었다.이곳서 가까운 終南山 산기슭위에는 반갑게도 신라시대 당나라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원측법사의 사리탑이 마을을 굽어보고 있었다. 젊은날 ‘지옥 훈련’을 마다하지 않으며 조국 광복의 염원을 아로새기던 곳.“살아남을 가능성은 없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언제나 밝은 모습으로 훈련을 받았다”고 金柔吉 부회장과 광복회 사무총장으로 일하는 石根永 회원은 회고했다. 광복군 OSS 요원의 활약은 갑작스런 일본의 항복으로 실현되지 못했다.광복군들은 조국 광복을 감격과 함께 회한을 안고 맞았다.스스로의 힘으로 찾지못한 광복이었기에 자결권 제약이 올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쓰포춘의 OSS 훈련장을 뒤로 하며 발걸음을 옮기는 일행들은 “광복군의 한반도 상륙이 성사됐다면 역사가 달라질 수도 있었을 텐데”라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 印尼軍­시위대 유혈 충돌

    ◎군경 3만명 비상경계… 野黨 조기선거 촉구 【자카르타 외신 종합】 인도네시아 군이 11일 의사당 진입을 시도하던 2,000여명의 학생 시위대를 향해 경고성 발포를 가했다고 목격자들이 전했다. 또 군과 시위대가 충돌,수명이 부상당했으며 경계를 서던 군인들에게 시위차량이 돌진,한 명의 군인이 중상을 입고 9명이 부상하는 등 시위가 폭력사태로 격화되고 있다고 경찰관계자들이 밝혔다. 이날 군은 최고 입법기구인 국민협의회(MPR) 개최에 항의하기 위해 의사당 진입을 시도하던 시위학생들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허공을 향해 경고 사격을 가했다. 목격자들은 군이 곤봉 등 폭력을 사용했다고 전했다. 학생 등 야당측은 MPR이 개혁요구를 외면하고 수하르토 전 대통령의 추종세력의 온상이 되고 있다면서 회의 개최를 반대해 왔다. 야당측은 정부에 조기 선거실시를 촉구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10일 개막된 MPR회의에 대해 학생 등 재야세력의 반대가 높아지자 수도 자카르타 일원에 1만6,000명 등 전국적으로 3만명의 군·경 병력을 동원,비상경계에 들어갔다.
  • 조계종 승려들 폭력 충돌

    ◎총무원장 선출싸고 月珠 지지­반대파 몸싸움/‘반대’측 총무원건물 점거… 선거 파행 불가피 11일 오후 5시30분쯤 서울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에서 宋月珠 총무원장의 3선출마를 반대하는 月誕 스님 등 승려 200여명이 5층짜리 총무원 건물을 완전 점거했다.宋총무원장을 지지하는 승려들은 건물 밖에서 밤새도록 대치했다. 이에 따라 宋총무원장과 月誕 스님 등 7명이 출마,12일 실시될 예정인 총무원장 선거는 연기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宋총무원장은 이날 밤 조계사 옆 수성빌딩에서 기자들과 만나 “선거는 예정대로 치르겠다”고 밝혔다. 반대파 승려들은 이날 조계사 경내에서‘종단 제2정화를 위한 전국 승려대회’를 마친 뒤 宋총무원장을 지지하는 승려 30여명과 격렬한 몸싸움을 한 끝에 총무원으로 들어갔다.이 과정에서 승려와 신도 20여명이 다쳤다. 이들은 ‘정화개혁회의’의 출범과 함께 종단의 입법·행정·사법 권한을 한시적으로 위임받았다고 선언했다. 개혁회의 상임위원장인 月誕 스님은 기자회견을 통해 “종정의 교시를 무시한 종무행정은 인정할 수 없다”면서 “종정의 권위를 폄하(貶下)하고 3선출마를 강행하려는 宋원장에게 제동을 걸기 위해 물리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열린 개혁회의 상임위원장단 공동기자회견에서 智源 스님(전국불교운동연합 부회장)은 “종단 내부의 불합리한 제도 개혁과 불교의 위상을 실추시키는 일부 세력에 대한 경고 차원에서 제2정화 불사를 결의했다”고 밝혔다. 반대파 승려들이 점거를 시도하자 건물 안에 있던 총무원측 승려 30여명은 소화액,폐유와 물을 뿌리고 화분과 먹물주머니를 던지며 격렬히 맞섰다. 이 과정에서 건물 1층 현관문과 유리창 대부분이 파손됐다. 반대파 승려들은 이날 승려대회에서 ●宋月珠 총무원장 해임 ●총무원장 선거 일시유보 ●종단의 입법,행정,사법권한을 한시적으로 위임받는 정화개혁회의 출범 등을 결의했다. 경찰은 조계사 주변에 1,500여명의 병력을 배치했으나 경내에 투입하지는 않았다.94년에도 조계종의 ‘개혁승려’들은 徐義玄 총무원장의 연임을 반대하다 徐원장측과 충돌했었다.
  • 美,23일 이라크 공격 가능성/航母 ‘엔터프라이즈’ 걸프만 급파

    【워싱턴 崔哲昊 특파원】 미국의 이라크에 대한 공격이 가시권으로 접어들었다. 미국은 10일 동부해안에 머물던 제2항모전단인 엔터프라이즈호와 일본에 배치된 수륙양용 공격함 벨로우 우드호를 걸프만에 급파했다. 이에따라 엔터프라이즈 항모전단은 당초 예정보다 3일 빠른 오는 23일 걸프만에 도착,현지에 배치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항모전단과 합류한다. 공격형 헬기와 해병대원 2,000명 이상을 실은 수륙양용 공격함 벨로우 우드호도 26일 걸프만에 도착한다. 이번 조치로 걸프지역의 미 군사력은 2개 항모 소속 순양·구축함 등이 20척 이상으로 늘고 전투기와 토마호크 크루즈 미사일도 크게 늘어나는 등 군사력이 2배 가까이 증강된다. 이와 함께 아드리아해에 배치된 미사일 순양함 안지오호도 이번 주말쯤 걸프만에 도착,토마호크 미사일 발사능력을 갖춘 전함은 모두 8척으로 늘어 난다. 미군 병력도 2만3,000명선에 이르게 된다. 공격은 엔터프라이즈호가 현지에 도착하는 이달 23일과 미사일 순양함 안지오호가 합류하는 26일 사이일 가능성이높다. 그러나 군사 전문가들은 휴일이 끝난 뒤인 월요일인 23일에 더욱 무게를 두고 있다. ◎선회 배경/유엔의 경제제재 이미 한계 도달/물리력 자제가 후세인 입지 강화/美 국내·외 사정도 유리한 상황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는 쪽으로 결심을 굳힌 것은 세가지 이유에서 비롯됐다. 우선 미국은 유엔의 경제제재가 한계에 도달했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라크는 군사력 제거를 위한 경제제재에도 불구 여전히 위력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 지난 91년 걸프전때 이라크 육군과 공군력이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지만 값싼 무기인 세균·원자무기가 여전히 위협적인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둘째는 물리력 사용 자제가 오히려 사담 후세인의 입지를 강화했다는 지적때문이다. 이라크는 경제제재에 따른 국민들의 고통을 강조하면서 한편으로는 유엔특별위원회의 무기사찰을 이라크에 대한 ‘간첩행위’로 몰아세우며 내부단속을 강화해 왔다. 마지막으로는 미국 국·내외 사정의 변화다. 우선 빌 클린턴 대통령은 중간선거에서의 ‘승리’로 무력사용에 따른 비난의 짐을 덜 수 있게 됐다. 미국은 아랍권이 무력사용을 찬성하지는 않지만 미 항공기의 자국 공항 사용을 허용하는등 암묵적 동의를 하고 있고 무력사용에 반대해온 프랑스와 러시아도 반대의사를 표명하지 않는 것도 무력사용쪽으로 급선회하게 된 배경이다. ◎이라크의 대응/아랍권 17개국에 지원 호소/“무모한 짓” 美·英에 경고 이라크는 아랍권에는 지원을 호소하는 한편 미국측에는 강도높은 ‘위협사격’에 나섰다. 또 무력공격에 회의적인 국가들과는 잇따라 접촉하며 사태해결의 실마리를 모색중이다. 무하마드 사이드 알 샤하프 이라크 외무장관은 10일 카타르의 아랍위성 방송인 알­자이라와 가진 인터뷰에서 미국과 영국의 군사공격 위협은 ‘무모한 짓’이라고 경고하면서 “무력사용은 지역 불안정만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들과 사태의 정치적 해결을 위해 연쇄협의를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아랍권 17개국 등이 참여한 바그다드 무역박람회에는 무하마드 메흐디 살레 상공장관이 참석,이라크에 대한 아랍권의 지지 분위기를 띄웠다.
  • 日軍 학병서 광복군까지(항일독립군 장정따라 6천리:上)

    ◎臨泉 軍訓地서 ‘광복꿈’ 회상/銅山路 日 부대터에 中軍병영/연병장·단층막사 ‘옛 그대로’/끌려간 日 병영탈출 감행 뿌듯 한국 독립유공자협회 회원들이 조국 광복을 꿈꾸며 젊은 날 이역만리에서 피 흘렸던 중국땅을 찾았다.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韓光班) 출신 광복군 초급장교들로 흔히 광복군 마지막 세대로 분류된다. 일본군의 학병으로 끌려왔다가 탈출,독립을 위해 싸웠던 이들이 항일투쟁의 족적을 찾아 나선 것은 광복의 참뜻을 지금의 시대 정신으로 승화시키기에 충분했다. 중국 중부 장쑤(江蘇)성 쉬저우(徐州)에서 쓰촨(四川)성의 충칭(重慶)까지 장장 6,000리길. 일본군 탈출부터 광복군 훈련장,항일 지하공작 거점 등 열하루간 동행했던 이들의 답사 행로를 3회에 나눠 소개한다. ‘마지막 독립군’들의 첫 현장 답사는 장쑤성(江蘇省) 쉬저우(徐州)에서 시작됐다. 베이징(北京)서 814㎞. 기차로 8시간. 54년전에 거쳐온 길을 더듬기 위해 1시간 남짓한 비행기편도 마다했다. 1944년 2월초. 평양을 출발,기차에 강제로 실려 닿은 곳은 일본군과 중국군이 대치하던 최전방 쉬저우. 7월까지 쉬저우와 슈저우(宿州),푸양(阜陽)일대 전선에 배치됐던 이들은 그해 3월부터 7월까지 하나둘 일본병영을 탈출했다. “일본군이 되어 동포들의 가슴에 총을 겨누느니 차라리 탈출하다 죽기로 했다”고 50여년전 결의를 회상했다. “상당수는 우선 충칭에 있던 임시정부를 찾아가기로 했었습니다” 회고담은 이어졌다. 당시 쉬저우 주변에선 일본군이 밀집해 있었고 중국으로 끌려온 ‘조선학병’ 3,000여명의 대부분도 부근에 배치됐다. 때마침 텐진(天津)에서 시작된 진푸선(津浦線)철로가 쉬저우를 지나 상하이(上海),푸둥(浦東)쪽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며 노 광복군들은 눈시울을 적셨다. 일본군은 철도와 주변을 점령,광대한 중국대륙을 ‘선’과 ‘점’으로 연결하는 전략을 펴고 있었기 때문에 끌려갔던 학병들은 대부분 철도역 주변에 주둔해 있었단다. 밤을 틈타 3m가 넘는 철책을 넘었다. 짧게는 2∼3일에서 일주일이상을 풀잎이나 과일로 연명하며 낮에는 수수밭에 숨어 있다가 밤이면 들판을 달렸다. 대개는 중국 유격대와 조우했고 당당한 광복군이 되었다. 44년 6월 ‘宿縣부대’ 제4중대에서 탈출했던 金柔吉 부회장과 全履鎬 회원은 슈저우역에서 2㎞쯤 떨어진 곳을 찾아 헤맨끝에 당시의 탈출지점을 찾아냈다. 지금은 ‘宿縣 付小樓 村庄’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2∼3층의 주택들이 병영을 대신하고 있었다. 이에 앞서 5월에 같은 부대 보병중대에서 津浦線을 넘어 탈출했던 石根永 회원도 슈저우에서 50㎞ 떨어진 구쩐(固鎭)역부근에서 병영터를 찾아냈다. 일본군은 철도가 파괴되거나 공격받으면 주변의 중국인을 몰살시켜 보복했다고 악몽같은 50년전을 떠올렸다. 중국 유격대원이 생포되기라도 하면 총검술 연습의 표적으로 삼아 살해하기도 했단다고 치를 떨었다. 대부분의 병영들은 푯말하나 남지않고 촌락 등으로 바뀌는 등 사라졌지만 尹慶彬 회장과 金永錄 회원이 탈출했던 쉬저우시 통산로(銅山路)의 부대터는 지금도 ‘중국 인민해방군’ 주둔지로 사용되고 있었다. 부대안을 돌아본 尹慶彬 회장 등은 연병장앞의 3층 본부 건물,검은 벽돌과 돌로 지어진 단층 막사가 옛 그대로라며 회상에 젖었다. 높은 천정의 막사안에는 시멘트바닥에 철로 만든 2층 침대 10여개와 간단한 사물함이 눈에 띄었다. 張俊河 선생 등과 함께 尹회장 일행 4명이 44년 7월7일. 일본군의 이른바 ‘중국침략 기념일’로 경계가 느슨해 틈을 타 ‘취침전 15분의 자유시간’을 이용했다. 일본군을 벗어난 이들은 이틀밤을 앞만 보고 달리다 먼저 탈출해 중국 유격대에 와 있던 金俊燁(전 고대 총장)씨와 해후했다. “중국의 여러 유격대에 흩어져 있던 탈출자들은 린촨(臨泉)로 모였지요. 린촨에서 군사훈련을 받으며 광복의 꿈을 키워 대일항전의 장정(長征)을 시작했습니다” 노 독립군의 회고는 덜컹거리는 비포장 도로를 따라 어느새 50년전의 린촨에 닿고 있었다. ◎독립유공자협회/항일전 참가 175명이 결성… 현 회원 220명 한국독립유공자협회는 광복회와 함께 항일투쟁의 일선에 섰던 독립운동가들의 양대 산맥. 81년 독립운동가 175명에 의해 발족됐다. 초대회장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趙擎韓 선생. 한국전력 사장을 지낸 朴英俊 회장에 이어 尹慶彬 회장이 3대 협회를 이끌고 있다. 회원은 220명. 광복회가 독립지사의 유가족까지 포함하고 있는데 비해 항일투쟁을 벌였던 본인만이 가입할 수 있다. 회원 모두 건국훈장을 받았다. 일제말기 학병 등으로 중국전선에 끌려갔다가 탈출,광복군에 합류했던 독립운동의 마지막 세대가 협회의 주축. 金九 선생을 보좌,충칭(重慶) 임시정부서 일했던 마지막 생존자들이기도 하다. 대부분 70대후반에서 80대초반. 색이 바라가는 독립정신을 드높이기위한 연구,탐사 등 학술사업과 사회사업,독립운동 사적에 대한 복원운동을 벌여왔다.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80주년이 되는 내년 충칭시 광복군 총사령부건물 표지석 건립작업 등 후세에게 민족애국정신을 일깨우기 위한 각종 사업을 추진중이다. ◎광복군/임정 정규군… 美와 對日 공동작전 활약 광복군이 정규군으로 발족한 것은 40년 9월. 무력으로 조국을 되찾겠다며 중국으로 온 젊은이와 일본군에 끌려왔다가 탈출한 학병이 주축이 됐다. 총사령관은 李靑天 장군이었고 참모장 李範奭 장군.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 한편 지하활동 등 갖가지 군사활동을 감행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였다. 3개의 직할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李範奭 장군이 지휘하는 2지대는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을 거점으로 일본군 전력을 교란시키는 활동에 주력했다. 최전방에서 일본군과 필사의 전투는 3지대의 몫. 안후이성 푸양에 본부를 두고 산둥성(山東省) 등 화북지역에서 지하공작 활동도 병행했다. 44년부터는 일본군에서 탈출한 학병들이 합류하면서 미국 첩보기구인 전략사무국(O.S.S)과 함께 일본군에 결정타를 가하기 위해 한반도침투 등 특수공작을 준비하기도 했다.해방직전 광복군은 700여명. 광복이 될 무렵에 중국에 거주하는 교포들로 30만여 군병력을 조직하는 계획에 착수하기도 했다. ◎임천사관학교/日軍 탈출한 한국인 광복군 간부 양성소 안후이성(安徽省) 린촨(臨泉)에 있던 ‘광복군 사관학교’. 더 정확히 말하면 44년 7월 린촨 중국 중앙군관학교 제10분교안에 설치됐던‘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일명 한광반(韓光班)’. 중국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일본군서 탈출한 한국인을 광복군 간부로 양성하던 곳이다. 44년 7월에 들어온 첫 입학생들은 48명. 33명은 대학졸업후 일본군으로 징병돼 중국전선까지 끌려왔다가 탈출한 학병. 15명은 조국광복을 꿈꾸며 중국으로 건너왔던 애국청년들. 5개월 과정을 마친뒤 白正甲 등 25명은 6,000리 길을 걸어서 쓰촨성(四川省)충칭(重慶)의 임시정부를 찾아가 광복군본류에 합류한다. 나머지 8명은 최전방 안후성에 남아 정보수집 등 대일투쟁을 벌인다. 25명중 尹慶彬은 임시정부 경위대장으로,鮮于鎭은 金九 선생비서로 白凡 선생을 최후까지 보좌하게 된다. 또 張俊河,金俊燁,金柔吉 등 일부는 한·미군사협력으로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으로 가 한반도진입을 위한 특수훈련을 받는다. 현재 한광반 첫 수료생 가운데 국내엔 11명이 생존해 있다.
  • 경제파탄 책임자 처벌 촉구

    ◎‘98민중대회’ 60개 단체 2만여명 참석 민주노총과 참여연대 등 60개 시민·사회단체가 공동으로 주최한 ‘98민중대회’가 회원 2만5,000여명(경찰 추산)이 참석한 가운데 8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강시민공원에서 열렸다. 참석자들은 이날 대회에서 ‘민중 10대 요구’를 통해 △경제파탄 관련 재벌총수·정치인·관료 처벌 △부당한 IMF협약 철폐 및 외채탕감 실현 △정리해고 중단과 주 40시간 근무 실현 △군비축소로 실업기금 확보 △농가부채 해결과 농축산물 가격 보장 △무주택 철거민 주거권 확보와 노점상 합법화 실현,장애인 생존권 보장 △교원노조 법제화 등을 정부에 촉구했다. 대회에는 민주노총을 비롯해 전국농민회총연맹,전국빈민운동연합,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한국청년연맹,전국철거민연합회,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등 노동,인권,법조,의료,학계 등 각 분야의 사회단체들이 대거 참여했다. 범국민운동본부 李昌馥 상임대표는 개회사를 통해 “개혁을 부르짖고 나선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지 8개월이 지났지만 개혁은 후퇴하고 노동자 등 민중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지고 있다”면서 “정부가 진정한 개혁을 바란다면 경제파탄 책임자를 처벌하고 부정하게 모은 재산을 환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참석자들은 결의문에서 “정부의 사회개혁 약속에도 불구하고 재벌은 구조조정이란 미명 아래 부실채권을 국민에게 떠넘기고 부패정치인들은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다”면서 “개혁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는다면 각계 민주세력들은 생존권 확보와 경제주권 회복운동을 펼치겠다”고 밝혔다. 이들은 이날 오후 5시 행사를 마친 뒤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까지 가두행진을 했으나 경찰과의 충돌은 없었다. 이에 앞서 각 사회단체 소속 회원 7,000여명은 7일 오후 서울 보라매공원에서 대회 전야제를 가진 뒤 이날 아침 여의도 행사장까지 거리행진을 했다. 한편 경찰은 대회장 주변에 86개 중대 1만여명의 병력을 투입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한편 교통 소통 및 질서 유지를 지원했다.
  • 북한 미사일 공격 대비/공동방어체제 강화를/오부치 日 총리 촉구

    【도쿄 AP AFP 연합】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총리는 1일 북한의 미사일공격에 대비한 방어체제 강화를 촉구했다고 교도통신이 보도했다. 오부치 총리는 도쿄 북쪽 아사카의 자위대 군사훈련 장소를 방문,4,000여명의 자위대 병력을 대상으로 한 연설에서 “북한의 로켓 발사는 일본의 안보와 동북아의 평화·안전의 관점에서 볼 때 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비난했다. 또 “북한의 로켓 발사로 인한 경험을 통해 앞으로 다양한 위기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탄도미사일 방어는 일본의 방어전략의 핵심”이라며 “일본은 미사일이 목표물에 닿기 전에 막기 위한 미국과의 공동 방어체제를 계속 연구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 87년 DJ 가택연금 진두 지휘/당시 마포경찰서장 재판 회부

    ◎서울고법,재정신청 수용 지난 87년 金大中 대통령에 대한 가택연금 사건과 관련해 당시 동교동 자택을 관할하던 경찰서장이 재판에 회부됐다. 서울고법 형사4부(재판장 宋基弘 부장판사)는 30일 姜喆善 변호사 등이 당시 민추협 의장이던 金대통령에 대한 경찰의 가택연금이 불법이라며 金相大 전 서울 마포경찰서장(64)을 상대로 낸 재정신청을 10년7개월만에 받아들였다.이에 따라 金 전 서장은 사건 관할법원인 서울지법 서부지원에서 불법감금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당시 경찰이 수백명의 병력을 배치해 가택을 봉쇄, 金 전 의장의 외부 출입을 불가능하게 하는 등 사실상 감금한 점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權福慶 전 서울시경국장에 대해 낸 재정신청은 “불법연금을 적극적으로 지시 또는 공모한 증거가 없다”며 기각했다.
  • 민주열사 열전:13/前경원대생 宋光永(정직한 역사 되찾기)

    ◎‘학원안정법 음모’ 온몸 항거 분신/학생운동 씨 말리려는 악법 제청 항의 선봉에/광주항쟁으로 촉발된 민주화 불꽃 확산 시도 “시상에 죽은 내 아들 광영이를 왜 이리도 무서워한당가.제 몸에 불을 지르고 뛰지도 못하는디.왜들 겹겹이 둘러싸고 문상도 못오게끄럼 막는당가.광영이 몸이사 이제 싸늘하게 식었지만 그 맴이사 어디 식겠어.어림 반푼 없는 소리제.이 에미 가슴 이리 불붙는디.그 맴이 어찌 식겠어…” 85년 10월 21일 서울기독병원 영안실.아들의 주검을 앞에 놓고 한 어머니는 이렇게 울부짖고 있었다.34일 전 학교에서 분신한 경원대 법대생 宋光永의 어머니 이오순 여사(당시 59세·94년 작고)였다.경찰은 한달 이상 1,000여명의 병력을 동원,병원을 두겹 세겹으로 에워싸고 출입자를 통제했다.그러나 그토록 삼엄한 경비와 장례 소동까지 불러온 송광영의 분신은 단 한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언론에 단 한줄도 보도안돼 그는 85년 9월 17일 오후 2시30분쯤 경원대 운동장에서 몸에 석유를 끼얹고 분신했다.그날은 학생총회가 열릴 예정이었으나 비로 연기된 상태였다.그러나 그는 시위를 주도하며 몸에 불을 붙였고,뛰어가며 외쳤다.“학원안정법 음모 철회하라”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나라” 인근 성남병원과 서울대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뒤 서울기독병원으로 옮겨져 한달 이상 사투를 벌이다 끝내 숨졌다. 그가 온몸이 불에 휩싸인 채 몇번씩 쓰러졌다 일어서며 전하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그것은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과 민주화의 희망이었다.그는 자신의 몸을 불살라 광주항쟁으로 촉발된 민주화의 불꽃을 확산시키려 했다.광주민중항쟁은 5공화국 내내 꺼지지 않는 민주화의 불씨로 남아 있었다.군사정권의 강요된 침묵을 깨고 80년 5월 30일 서강대생 김의기가 최초로 광주민주화항쟁의 실상을 폭로하기 위해 투신했다.그의 투쟁은 노동자 김종태의 이화여대 앞 분신과 또 다른 노동자 홍기일의 전남도청 앞 분신으로 이어졌다. 대학가에서도 5공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시위가 점차 가열됐다.위협을 느낀 군사독재정권은 아예 학생운동의 씨를 말리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바로 ‘학원안정법’ 제정 추진이다.골자는 학생의 좌경화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시위학생에 대한 처벌을 대폭 강화하고 일정 장소에 수용시켜 6개월 이내의 선도교육을 받게 한다는 것이었다. 독재정권은 비밀리에 법안을 마련해 국회에서 전격적으로 통과시키려 했다. 그러나 미리 그 내용이 새어나와 한 일간지에 폭로되면서 반대여론이 들끓자 일단 유보됐다.그럼에도 정권은 당시 손제석 문교부장관의 담화문을 통해 ‘학원소요가 계속되면 학원안정법을 연내에 제정하겠다’며 관철의 의지를 버리지 않았다.송광영은 어떻게 해서든지 학원안정법 음모를 깨뜨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는 분신의 가장 큰 직접적인 동기가 됐다.그는 유서인 ‘양심 선언’에서 ‘결코 총칼이나 학원안정법 따위의 악법으로 복종을 강요할 수 없음을 엄중히 경고한다’고 부르짖었다. 그는 70년대 노동운동의 싹을 틔웠던 전태일열사를 가장 존경했다.전태일에 대해 “소외된 민중의 대변인,억눌린 사회에서 참된 인간상을 제시해준 인물”이라고 항상 말했다고 한다.어려서부터 굶주림의 고통을 겪어온 그는 소외된 삶들의 아픔을 나눌줄 알았고 그들을 헌신적으로 사랑했다.중학교를 졸업한 뒤 평화시장 재봉보조원 생활,신문팔이,Y셔츠 장사,돗자리 장사 등 닥치는 대로 밑바닥 삶을 이어갔다.재봉보조원 시절엔 청계피복노조에 적극 참여했다.성격이 활달하고 발이 넓었던 그는 동료들을 취직시켜 주는 일로도 바빴다. 그는 81년 형들이 학교를 마치고 자리를 잡고 나서야 대학에 가기 위해 검정고시 준비를 했다.거기서도 동료학원생이 교통사고를 당하자 학원을 10일씩이나 빠지면서 사고차를 찾아내 보상금을 타 가족들에게 전해주고 초상까지 치르게 해줬다.또 학원에서 탄 장학금을 집에 오는 길에 구두닦이 소년에게 줘버린 자신을 호되게 야단치는 어머니에게 “그래도 우리는 집도 있는데”라며 설득했다고 한다. ○전태일 열사 가장 존경 송광영은 84년 27살의 나이로 경원대 법학과에 입학한다.법학을 선택한 것은 고시에 합격해 어머니에게 효도하고,법관이 돼 사회의 부정부패와 모순을 개선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시반에 들어가면 장학금을 탈 수 있는 것도 한 이유였다.그러나 그해 가을 어용교수 퇴진시위를 주도하면서 학생운동에 깊이 빠지게 된다.‘실존주의철학연구회’ ‘경제문제연구회’ 등의 학습모임을 만들어 이끌었다.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만둘 것을 설득하며 생활비를 끊어버리자 교내에서 구두를 닦으며 학교에 다녔다. 그는 학원악법이 통과되면 분신하겠다는 말을 했으나 후배들은 믿지 않았다.그러나 전세금을 빼 학교 등록을 못하던 친구를 등록시키고 분신 열흘 전에는 집에 들러 어머니에게 “호적을 정리하러 왔다”고 말하는 등 마지막 삶을 정리해 나갔다.누나 송영숙씨(49)는 “호적을 정리하려고 한 것은 그의 분신으로 형제들이 피해볼 것을 우려했기 때문인 것 같다”고 회고한다. ‘…난자당하고 처절히 유린된 순백의 종이들이 책상 위에서 울고 있다/이렇게 또 하나의 밤이 사라져가는데/여자는 이제서야 피곤한 육신을 벗어제치고 있다/아! 그날 아침은 교회 종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분신 얼마 전 써놓은 자작시 ‘에필로그 85’이다.송광영열사는 숨지는순간 그가 그토록 듣고 싶어하던 ‘민주의 종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연보 ▲1958:광주에서 출생 ▲74년:서울 경신중 졸업 ▲75∼76년:청계피복노조 활동 ▲82년:고등학교 검정고시 합격 ▲84년:경원대 법학과 입학 ▲84년:실존주의철학연구회 만듦 ▲85년:경제문제연구회 만듦 ▲85년:9월17일 “학원안정법 음모 철회” 외치며 분신 ▲85년:10월21일 서울기독병원에서 운명 ◎학원안정법 파동/5共 ‘시위학생 선도교육’ 등 골자 立法 기도/야당·재야 “제도적 폭력” 강력 반발 저지시켜 광주항쟁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가 점차 뜨거워지던 85년 여름,미국의 개입 의혹을 추궁하는 반미 시위가 거센 가운데 공안기관 주도로 중요한 음모가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었다.이른바 ‘학원안정법’ 제정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한 일간지가 공식 발표를 2주 앞두고 ‘학원안정법’ 음모를 폭로했다.시안 내용은 삼청교육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했다.학원소요 등과 관련,형사처벌을 받아야 할 대상자들을 형사처벌 대신일정한 장소에 수용시켜 6개월 이내의 선도교육을 시킨다는 것이 골자였다.대상자 선정은 문교부에 준사법적 성격의 ‘학생선도교육위원회’를 설치해 하도록 했다. 교육을 거부하거나 교육장소를 무단 이탈하는 경우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도록 해 학생들에게 극도의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정부는 일부 좌경·용공학생들을 격리시켜 학원의 오염과 소요의 본거지화를 막고 선도교육을 통해 건전한 학교생활을 도와주기 위한 것이라고 취지를 밝혔다.하지만 야당과 재야단체들은 학원에 대한 제도적 폭력이라고 즉각 반발했다.대다수 국민도 우려를 나타냈다. 반발이 점차 거세지고 여야 관계가 극도로 경색되자 정부는 ‘국민적 공감대가 아직 미흡하다’며 법 제정을 일단 유보했다.그러나 당시 이원홍 문공부,손제석 문교부 장관은 소요가 계속될 경우 언제라도 법안 제정을 추진하겠다고 공언했다.하지만 학원안정법은 결국 만들어지지 못했다. ◎분신대책위 김해성씨/“당국 협박속 유가족 설득/분신의 의미 찾고자 최선” 송광영 열사의 가족과 몇몇 민주인사들은 그의 입원 치료와 장례문제로 적지않은 고통을 겪었다.그가 입원하자 문익환 목사를 위원장으로 한 ‘송광영 동지 분신구명대책위원회’가 구성돼 진상규명과 모금활동을 펴나갔다.치료기간중 상태가 좀 호전되기도 했지만 경찰의 철저한 통제속에 가족 이외에는 면회가 금지됐다. 대책위 집행위원장이던 김해성 성남주민교회 전도사(38·현재 성남 외국인 노동자의집 소장)가 얼굴에 붕대를 감고 환자 시늉을 하며 겨우 2차례 송광영을 면회했다. “가족들을 설득해 당국의 회유와 협박에 넘어가지 말고 분신의 진상과 의미를 찾자고 했지요.비슷한 상황을 겪은 다른 가족들과 달리 그의 가족들은 저희와 뜻과 행동을 같이했습니다” 김소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송광영이 입원했던 서울기독병원은 79년 여공들이 독재정권과 독점자본에 저항했던 YH사건의 YH무역 건물이었다.송광영이 역사적 민주투쟁의 산실이었던 그곳에 다시 경찰을 불러모아 영혼을 태웠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송광영이 숨지자 대책위는 장례위원회로 바뀌어 사회장을 준비했다.그러나 경찰은 장례 전날 문목사 및 이해학 목사,김소장 등 대책위 관계자들을 모두 연행한 뒤 가족들에게 간결한 장례를 강요했다.또 일방적으로 시신을 강원도 춘성에 매장하려고 했다.그러나 누나 송영숙씨(49·대한생명 근무)가 스카프로 목을 매고 영구차 바퀴 앞에 눕는 등 가족들이 격렬히 저항했다.영구차는 오후 5시가 넘어서야 병원을 출발할 수 있었다.그는 횃불을 밝힌 가운데 금촌기독묘소에 안장됐다.
  • 명암/세계의 화약고/중동 또 화약 냄새 코소보 평화 문턱

    코소보는 상황 끝.중동은 아직 계속.최근 잇따른 평화협정 체결로 잠잠해지나 했던 세계 2대 화약고인 코소보와 중동지역에 명암이 크게 엇갈린다.보다 쉽게 평화에 합의했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은 다시 전운이 서서히 감돈다.반면 터지기 직전 시한폭탄이었던 코소보는 예상보다 빨리 평화가 깃들어 가고 있다. ◎중동/이·팔 매파 반발 유혈사태 가능성/협정이행 불투명 중동에 전쟁의 불씨가 되살아나고 있다.요르단강 서안의 땅과 평화를 교환하는 ‘와이 리버’ 협정 체결을 둘러싸고 이스라엘 및 팔레스타인 내 과격파 세력들이 거세게 반발,협정 이행이 불투명해지고 있다.협상 당사자간에도 불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으며 유혈사태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지난주 조인한 ‘와이 리버’협정을 29일 내각에 제출할 계획이었으나,팔레스타인측이 미국에 구체적인 테러방지책을 내놓을 때까지 내각의 협정 심의와 표결을 연기할 것이라고 밝혔다. 팔레스타인도 마찬가지.과격파 하마스(이스라엘 해방운동) 등 6개 팔레스타인 단체들은 협정에 반대하는 공동성명을 냈다.그들은 이번 협정은 팔레스타인을 무력화하려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음모라며 이스라엘의 완전한 철수없는 화해는 환상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유태인 정착민과 팔레스타인 주민들간의 보복 살해사건은 가장 큰 걸림돌이다.요르단강 서안 북부의 이타마르에서는 팔레스타인 주민 3,000여명이 27일 피살된 팔레스타인 노인의 장례식에 참석,피의 보복을 다짐했다. ◎코소보/나토 공습 유보 세르비아군 철수/戰雲 서서히 걷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가 27일 신유고연방 공습을 유보키로 결정,발칸반도 위기는 완전히 한고비 넘겼다.나토는 최후통첩일인 이날 유고정부가 코소보에서 4,000여 병력을 철수했다며 공습명령을 일단 접는다고 발표했다.유고연방 군과 경찰은 26일부터 코소보에서 철수를 시작했다. 유고 군과 경찰이 철수하면서 알바니아계 반군 코소보해방군(KLA)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20여개의 검문소를 해체했으며,코소보내 많은 도로 검문소에 배치됐던 중무장 경찰은 정규 경찰로 대체됐다.나토 사무총장 자비에르솔라나는 “검문소들이 해체돼고 있고 주둔 보안군수도 지난 2월 분리주의 봉기 이전 수준으로 돌아갔다”고 밝혔다. 하지만 낙관은 이르다는게 이곳의 분위기.밀로세비치 유고연방 대통령은 버틸만큼 버티다 데드라인을 하루 앞둔 26일 철군에 나섰다.철군개시 이후에도 일부지역에서는 총성이 오갔고 사상자도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나토는 전시편제명령을 계속 유지하기로 했다.나토가 언제라도 공습작전에 돌입할수 있다는 의미다.밀로세비치의 또다른 술수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서다.
  • 고독한 사령관 경찰서장:1(공직 탐험)

    ◎민생·시국치안 책임지는 핵심포스트/무궁화 4개 총경 전국에 225명/직원 인사·예산집행 등 권한 막강/경정 7∼8년 근무해야 총경 진급 경찰서장.지역의 민생치안,시국치안을 책임지는 치안 사령관이다. 거리에서,주택 골목에서,각종 행사장 등에서 주민들과 언제나 마주치는 일선 경찰관의 최고 사령관이다. 주민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드물지만 한시도 주민 곁을 떠나는 일이 없다. 관내 어느 건물에 도둑이 들어도,사고가 나도,불이 나도 그와는 무관할 수 없다.민중의 지팡이,지역치안의 파수꾼,투캅스…. 선과 악의 이미지를 동시에 연상시키는 경찰관과 동고동락하며 지역 치안을 이끌어 나가는 경찰서장은 그래서 늘 깨어있어야 하는 외로운 결단자다. 서장은 순경에서부터 치안총감까지의 11개 경찰계급 가운데 무궁화 4개짜리 계급의 총경이 맡는 자리다. 일반 행정직 공무원으로 치자면 4급(서기관)에 해당한다. 그러나 기능면에서 보면 최고급 간부다. 직원들의 인사권,재정권,그리고 경찰인력 운용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사권의 경우,서내 직원 대다수를 차지하는 순경 경장 경사에 대한 승진 전보 징계권을 행사하고 지방청장이 가진 경위 이상 인사에 대해서도 추천권을 행사할 수 있다. 기능직과 고용직 공무원 임용권도 갖고 있다. 경찰서 운영에 따른 예산집행권도 있다. 가장 큰 권한은 경찰병력 운용권. 경찰력은 기본적으로는 경찰청장이나 지방경찰청장의 복무방침에 따라서 운용하는 것이나 관할 지역실정에 맞게 서장이 경찰서 인력을 운용할 수 있다. 예컨대 국회와 여·야 당사에다 노사정사무실이 있는 여의도의 경우,관할 경찰서에서 경비에 치중을 해 병력을 운용할 수 있는 것이다. 경찰서장이 어떻게 경찰병력을 운용하느냐에 따라 15만 전체 경찰의 이미지가 결정된다. 경찰청장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서장은 전·의경을 제외한 경찰공무원 8만7,400여명 가운데 225명뿐이다. 총경은 모두 399명이나 서장자리는 한정돼 나머지는 본청이나 각 지방청 참모로 일하다 경찰서로 나간다. 서장이 되면 부하직원만 하더라도 전·의경을 포함해 적게는 200여명에서 많게는 1,000명까지거느리게 된다. 인건비를 제외한 경찰서 운영비도 한달에 2,000여만원 이상을 사용할 수 있다.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울산 등 7대 광역시에 있는 경찰서는 1등급 경찰서로 한달에 3,164만7,000원의 예산이 나온다. 도청소재지와 일반 시지역의 경우 2,487만9,000원이며 군지역에 있는 3급지 경찰서는 2,042만4,000원의 예산이 각각 지급된다. 서장 신분으로서 사용하는 지휘정보비,일반·특정업무비 등 이른바 판공비로 분류되는 업무추진비도 적지않은 규모다. 1등급 경찰서의 서장은 한달에 329만4,000원,2등급은 264만원을,3등급은 243만5,000원을 각각 받는다. 총경은 출신별로 분류해 보면 간부후보생이 207명으로 제일 많다. 순경,군 출신 등이 168명이며 고시출신은 24명이다. 이들이 총경으로 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보통 5∼6년. 일선서 과장이나 지방청 계장인 경정으로 5∼6년씩 근무해야 일선 기관장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 고종의 자금 지원(다시 태어난 ‘대한매일’:9)

    ◎창간부터 각별한 후원… 항일 필봉 독려/배설에 특허장 하사 등 감시속 유일하게 지원/통감부 보고서 등 기록/자금지급 사실 뒷받침/이토 ‘궁금령’으로 훼방/돈끊겨 힘겨운 싸움 대한제국 황실과 대한매일의 관계는 각별한 것이었다. 고종 황제는 대한매일 창간 때부터 裵說 등 그 주역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졌고 은밀한 후원을 통해 독려,신문 논조가 지속적으로 강한 항일 색채를 갖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일제 강점기 거센 언론탄압 속에서 유독 대한매일이 황실 지원을 받았음은 당시 그 위상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다.고종은 발간 지원의 방편으로 배설에게 특허장을 써주기도 했으며,일제가 이같은 지원을 막고자 궁금령(宮禁令)까지 내린 것은 유명한 일화다. 황실이 창간 때부터 대한매일을 지원했음은 여러 기록에서 추측할 수 있다.토마스 코웬은 배설이 러일전쟁을 취재하려고 입국했을 때 동행한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지의 동료기자였다.그와 배설이 함께 해임된 뒤 두 사람은 영자신문을 공동창간하려고 했다. 코웬이 대한매일 창간 며칠 전인 1904년 7월10일 일본 저팬타임스 사장인 즈모에게 보낸 편지는 고종의 지원의사를 보여주는 자료다.“코리아타임스라는 신문을 창간해달라는 중요한 주문을 받고 있다.이 신문은 한국 궁정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을 것이고,반일적인 것이 돼야 한다”는 내용이다. 또 대한매일 창간 후인 그해 10월3일 주한 영국공사 조단이 본국에 보낸 보고서는 “이 신문이 孫澤이라는 독일 여인을 통해서 황제의 지원금을 쓰고 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를 갖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인쇄시설조차 갖추지 못해 인쇄소에서 신문을 찍고,불과 200여호를 발행한 뒤 휴간한 사정을 보면 창간부터 1905년 초까지는 고종으로부터 거의 지원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배설이 외부 도움 없이 신문을 계속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특히 1905년 8월11일부터 국문판과 영문판을 각각 4면으로 별도 발행했는데,이같은 확장과 인쇄시설 마련이 고종에게서 보조금을 받았기 때문임을 보여주는 자료가 많다. 1905년 10월11일 주한 일본군 헌병대가 한국 주둔군 참모장에게 보낸 보고서는 “白時鏞이 고종과 배설 사이에 중개를 주선한다는 사실을 확실한 소식통에게서 들었다”고 밝히고 있다.백시용은 당시 예식원의 회계과장으로 황제의 신임이 두터웠다.또 1907년 1월18일 경무고문 마루야마가 통감대리인 하세가와에게 보낸 보고서에서는 “대한매일이 한국 황실로부터 매월 500원을 지급받고 있다”고 액수까지 밝혔다. 1907년 8월27일 통감부의 경무 와타나베가 마루야마에게 보낸,궁내부 전무과 기사 沈雨澤에 대한 심문조서는 고종의 보조금지급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작년 손탁은 폐하에게 ‘대한매일은 유독 한국 및 황실에게 이익되는 것을 기재해 왔으나 유지곤란으로 이번에 일본에 매도한다는 소문이 있으니 폐하의 일고를 바란다’고 주상했다.폐하는 출판을 계속할 것을 희망하여 어느 정도의 금액을 지출하고 또 매월 1,000원 정도를 하사해왔다.” 대한매일 한글판이 재창간된 것은 이해 음력 4월이므로 고종은 대한매일 한글판 창간에 특별자금을 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또 신문발간에 편의를제공받도록 고종이 배설에게 특허장을 준 것이 1906년 2월10일자였으므로 고종이 재정지원을 적극적으로 해준 것도 이 무렵부터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고종이 끝까지 보조금을 지급하기는 어려웠다.이토 히로부미는 1906년 7월2일 고종을 만나 ‘궁중의 위엄과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드나드는 사람들을 통제할 특별병력이 궁중에 주둔해야 한다’고 강요했고 7월6일자로 궁금령을 공포했다.당시 각지에서 일어나는 의병들이 고종에게서 내밀하게 고무받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토가 고종을 고립시켜 두려는 속셈이었다.특히 반일적인 배설이 고종과 내통하는 것을 막기 위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결국 궁금령 공포와 엄격한 출입통제로 고종은 포로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1년 후 고종이 퇴위하고는 재량껏 쓸 수 있는 내탕금도 제한됐고,일본측 감시도 철저해졌다.이때부터 지원이 끊겨 대한매일은 더욱 힘겨운 싸움에 나서야 했다. ◎황실과 대한매일신보/극도보안속 재정지원 타언론 비해 자금난 덜해/헤이그·을사조약생생한 보도/강경한 항일노조 유지 큰 힘 고종 황제의 경제적 지원은 대한매일이 일관된 논조를 유지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 되었다.당시 대부분의 민족지들은 일제의 집요한 탄압 탓에 경영난에 허덕였고 논조도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이에 비해 대한매일은 황실 지원에 힘입어 상대적으로 재정 곤란을 덜 겪었다. 대한매일의 굽히지 않는 필봉의 원천은 물론 배설이라는 영국 발행인에게 있다.그가 치외법권을 인정받아 직접적인 탄압을 비켜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나 대한매일도 어려운 경영상태에 빠져 대중적인 지원을 호소하는 사태가 있었음을 감안하면 황실의 지원이 큰 힘이 됐음을 부인키 어렵다. 황실과 대한매일의 관계는 철저하게 베일에 쌓여 있었다.당시 일제가 정부 구석구석까지 완전히 장악한 사실을 볼 때 황실의 지원은 사적으로,극도의 비밀을 유지한 채 이루어졌을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대한매일의 고종 관련기사는 항상 강경하고 직접적인 상황을 여과없이 부각하는 생생한 것들이다.1905년 을사늑약(勒約)체결과이에 대한 고종의 완강한 거부를 공개한 1905년 11월18일자의 ‘칙어엄정(勅語嚴正)’,을사조약의 부당성을 만국에 알린 고종 친서를 전문게재하고 이와 관련해 쓴 1907년 1월23·24일자 논설,그해 6월 헤이그밀사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것 등 끝이 없다. 이는 고종의 대한매일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다른 신문들이 보도한 기사와는 큰 차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선 ‘칙어엄정’만 하더라도 을사조약 체결 과정을 일반에게 알린 최초 보도였다.또 고종친서사건과 헤이그밀사사건은 각각 고종의 입지를 좁히고 결국 폐위로 연결된 직접적 사건이었다.초기부터 황실과 대한매일의 관계를 끈질기게 추적해온 일제 입장에선 양쪽 관계를 더 이상 유지케 할 수 없다고 결정하는 데 결정적인 단초로 작용한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 중동평화회담 진통 거듭/이,보안문제 내세워 한때 결렬 위기

    【와이밀스 AFP AP 연합】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중동 평화회담이 어렵게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팔레스타인 협상대표는 21일 이스라엘 대표가 조지 테닛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의 중재로 회의를 갖고 회담장 철수의사를 철회하고 협상을 지속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요르단강 서안에서 군병력이 철수한 이후 보안문제에 대해 팔레스타인측이 태도를 바꾸지 않을 경우 이날 자정(한국 시간 22일 오후 1시)에 회담장을 떠날 것이라고 밝혔었다. 이스라엘측은 이에 앞서 회담장 철수 시한을 오후 5시·8시·10시 등 세 차례나 변경하면서 팔레스타인을 압박했다. 미국은 회담이 자칫 무산될 조짐을 보이자 이번 회담에서 처음으로 협상안 초안을 양측에 제시하고 결단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스라엘측은 이에 대해 미국이 팔레스타인측의 입장을 편파적으로 지지하고 있다고 주장했고 팔레스타인측은 이스라엘측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공갈 협박’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 地上 최고의 계급 대령:6(공직 탐험)

    ◎공군,연대장격 비행전대장이 핵심/“총자산 12조원 운용”/‘적기 마중’ 24시간 긴장/전역조종사 취업 현안 “대령 위에 대령 있고 대령 밑에 대령 있다.” 공군 조직을 두고 공군 내부에서 일컫는 말이다. 우리 군의 구성비는 육해공이 8대1대1. 공군은 조직·병력수 면에서 육군에 비해 워낙 열세이다 보니 준장 보직에 앉힐 장군이 부족해 대령을 대신 앉힌다. 예를 들어 합참의 처장이 육군은 준장인데 공군은 대령이다. 대령처장­대령과장의 ‘축소 지향’조직이 되다 보니 이런 자조섞인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공군 관계자들은 “같은 처장이면서도 계급에서 육군 처장한테 꿀릴 수밖에 없어 문제”라고 말한다. ‘육군의 꽃’은 사단장 소장이다. 공군에서 육군 사단장에 해당하는 직위는 준장인 전투비행단장이다. 역시 ‘공군의 꽃’이라 불린다. 여기서도 한계급 낮다. 육군 연대장에 버금가는 보직은 공군에서 비행전대장. 1개 비행단에는 비행전대장 외에 부단장·군수전대장·감찰전대장·정비전대장 등 4∼5명의 대령이 있다. 이중 적기를 직접상대하는 비행전대장이 단연 핵심이다. 비행전대장들은 “절대로 육군 연대장에게 꿀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서울근교 모 비행단의 비행전대장 Y대령은 농섞인 말로 “내가 운용하는 총자산이 12조원”이라고 했다. 우선 200만평이 넘는 부대 부지값이 있다. 여기다 주력기인 F5,팬텀기 값이 수천억원으로 계산됐다. 전투기는 민항기와 달리 보험도 안된다. 편대장을 기준으로 조종사 한 명 키우는 데 드는 비용이 팬텀기 110억원,F5는 50억원이라고 한다. 훈련에 든 유지비·연료비 등을 포함한 액수다. 공군을 흔히 ‘기술군’이라고 한다. 조종·정비·정훈·군수 등으로 한번 병과가 결정되면 대부분 전역 때까지 그대로 간다. 육군에서는 연대병력이 움직일 때 밑에 몇 사람 없어도 작전이 진행되지만 공군은 다르다. 조종사·정비사·탄약수 등 모든 요원이 마치 시계 부속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작전이 이루어진다. 핵심은 물론 조종사다. ‘기술군’ 전체가 조종사를 효과적으로 작전에 투입하기 위해 움직이는 보조 조직이다. 당연히 보직도 조종사우선이다. 한해 배출되는 전투기 조종사의 절반 가량이 대령으로 진급한다. 반면 20여개 되는 일반 병과는 병과별로 한해에 한 명의 대령만 배출한다. 그래서 일반 병과에서는 대령을 ‘장군’이라고 부를 정도다. 조종사는 군에서 특별대우를 받는다. 거의 매일 비행훈련을 하는 영관급 전투기 조종사의 경우 봉급과 별도로 비행수당을 월 85만원씩 받는다. 거기다 비상출동 때문에 의무적으로 관사생활을 하니 집 걱정도 없다. 이런 보상에 대한 대가는 24시간 내내 반복되는 긴장된 생활. ‘이웃간’인 북한기가 비무장지대(DMZ)를 넘으면 3∼5분내 서울상공에 도달한다. 최소한 DMZ 상공에서는 ‘적기 마중’을 나가야 한다. 항상 긴장 속에서 보내는 것은 가족도 마찬가지다. 수원비행단 관사에 사는 한 중령 부인은 “민간인 이웃들은 비행기 소음이 싫다고 하지만 나는 비행기 소리가 자주 들리지 않으면 오히려 불안하다”고 했다. 비행사고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다. 과거에는 진급누락,그리고 더 안정된 생활을 찾아 민간항공으로 옮기는 영관장교들이 많았다. 그러나 IMF체제 이후 민항 취업기회가 거의 끊기면서 이들 조기 전역 조종사들의 취업문제가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100억원이 넘는 돈을 들여 양성한 조종사들을 놀리는 건 사회적 손실”이라는 주장이다.
  • 地上 최고의 계급 대령:5(공직 탐험)

    ◎병력 운용의 핵심… 사단장의 그림자/戰時 실제 전투단위 지휘/요직 거치며 장군과 인연/군기 사고땐 진급 치명적 과거 군이 개입된 정변(政變)에는 어김없이 대령들이 주요 역할을 했다. 왜 그럴까.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군 조직을 아는 사람들은 한마디로 “대령이면 실병력을 움직이는 핵심 위치에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대령이 끼어야 거사가 되고 대령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정변은 성공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전시 군단,사단에서 전투지원 체제를 확립하면 실제 전투 기본단위는 연대와 대대가 된다. 특히 연대장은 지형에 맞게 병력을 적절히 배치하고 전투상황에 따라 그때 그때 부대이동,화력배치,진지이동,탄약,군수품 보급 등 전투의 모든 일을 총지휘한다. 전투부대장 외에 대령이 거치는 핵심 보직으로 사단참모장이 있다. 사단참모장은 사단급 이상 작전부대 지휘소에 설치되는 전술지휘소(Technical Operation Center)의 장(長)이 된다.작전시 사단장을 대신해 휘하부대에 대한 지휘연락을 책임지는 것이다. 참모장,연대장,육본 과장 등 소위 요직을 거치면서 대령은 장군들과 인연을 맺는다. 사단참모장은 사단 살림을 도맡으면서 사단장을 그림자처럼 수행한다. 그러면서 ‘어느 장군의 오른팔’로 분류되기도 하고 소위 정치적 운명을 함께 하는 관계로까지 발전된다. 군대의 인간관계는 민간 사회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끈끈한 데가 있다. 부대 울타리 안에서 동고동락하는 데서 생기는 현상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일반과 격리된 전방부대 관사에서 생활할 경우 자연히 가족끼리도 교류가 많을 수밖에 없고 ‘함께 고생했다’는 생각에 이후에도 밀어주고 끌어주며 끈끈한 관계를 지속하게 된다. 물론 군내 사조직이 해체되고 인사관리의 투명성이 강조되면서 이런 사적인 특수관계는 크게 줄어들었다. 요즘은 “사단장이 영관 장교 하나 마음대로 자기 사람 데려다 쓸 수 없다”는 게 육본 인사관계자의 말이다. 인사의 합리성이 강조되며 “인간관계가 점점 재미 없어진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드문 예지만 인사재량이 적어지니까 지휘관의 영이 잘 안서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군의인사관리제도는 일면 매우 과학적이다. 연봉제,계약제 도입추세로 가는 공무원,일반기업체에서 참고할 만할 정도로 인사평점제도 등이 세분화,과학화돼 있다. 장교 진급심사는 철저한 4심제로 운영된다. 대령 진급심사의 경우 중장이 위원장인 선발위원회가 최종 결정을 내리는데 4심 모두 심사위원 명단은 1급 비밀에 속한다. 예를 들어 진급평점 100점은 다음과 같이 항목별로 세분화돼 있다. 근무고과 55점,주요보직을 거쳤는지 여부 15점,교육점수 10점,상벌 5점,지휘관 추천 5점,자격증이나 학위증 등 가산점 10점 등. 지휘관이 되면 자기가 고과점수를 매기는 부하의 평점을 수시로 비망록에 기록했다가 인사자료로 제출토록 돼 있다. 진급과 관련,지휘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부대원들의 사고. 탈영,총기 사고,훈련중 인명사고 등이 일어난 기록이 있으면 진급심사에 치명적인 결함이 된다. 전방연대의 K대령은 “매일 휘하 대대 한두군데서 훈련이 실시되고 다치는 사람이 나온다. 그리고 우리나라 지형에서는 트럭이나 탱크를 굴리면 어디선가는 넘어지게 돼있다”며 24시간 내내 한시도 긴장을 풀 수 없는 게 지휘관의 생활이라고 토로했다.
  • 獨,赤­綠 연정 합의/녹색당 핵심정책 양보… 19일 각료 배분

    【베를린=南玎鎬 특파원】 사민당(SPD)과 녹색당의 차기 독일 연정 구도가 사실상 확정됐다. 사민당과 녹색당은 오는 27일 하원(분데스탁)에서 게하르트 슈뢰더를 총리로 선출하는 등 연정 출범에 관한 일정에 합의했다고 18일 밝혔다. 19일에는 내각체제 개편과 각료 배분을 협의하고 20일 연정 합의서에 최종 서명한다. 양당은 연정의 정책협상에서 녹색당의 안을 대부분 수용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해체,군 병력 대폭 감축,원자력발전소 조기 완전 폐쇄,에너지세대폭 인상,자기부상열차 건설계획 철회 등 녹색당의 핵심 정책이 차기 정권에서는 수용되지 않게 됐다. 대신 고용을 늘리기 위해 노·사·정 3자 연대를 조속히 추진키로 했다. ‘노사정 3자 연대’에서는 직업교육 보장,젊은층 고용 창출,시간제 근무규정개선 등을 논의한다. 앞으로 4년동안 소득세를 단계적으로 4.5∼6%포인트 내리는 방향으로 세제를 개혁한다. 세수 부족액은 녹색당의 정책을 일부 수용,에너지세를 올려 메우기로 했다.
  • 地上 최고의 계급 대령:4(공직 탐험)

    ◎회의·보고·훈련… 훈련… “24시간이 짧다”/자신의 철학 지휘에 반영/병사 인성교육까지 담당/권한 큰만큼 책임도 막중 전방부대 연대장인 L대령은 아침 7시 사무실로 출근한다. 숙소는 영내에 있는 연대장 관사. 간부식당에서 아침을 들고 사무실 주변을 한번 살펴보면 8시. 일직사령으로부터 밤사이 일어난 상황보고를 듣는 일로 일과가 시작된다. 야간경계 때 이상 징후가 없었는지,기상상황,헬기 비행에 필요한 시계,풍향 등이 빠짐없이 보고된다. 부대의 전방과 측후방의 동향,적진동향,사단에서 보내온 첩보사항도 포함된다. 이어 아침회의를 갖는다. 인사,정보,작전,군수 등 연대 참모들이 모두 참석한다. 오전 회의가 끝난 뒤 훈련중인 휘하 대대 한곳을 찾아가 훈련상황을 체크하고 다른 부대장들로부터 부대 상황을 보고받는다. 오후 2시에 오전에 종합한 연대 상황을 사단장에게 전화로 보고한다. 사단장 K소장은 고향선배다. 술자리에서는 ‘형님’ ‘아우’ 하는 사이지만 업무보고 때는 절대 그런 티를 못낸다. 사단장은 바로 자신의 1차 고과평가자이다. 일처리에 한치의 허점도 보일 수 없는 것이다. 오후에 월동준비를 하고있는 부대 한 곳을 방문한 뒤 훈련중인 대대 한 곳을 더 참관한다. 요즈음 L대령이 휘하 대대의 훈련에 특히 관심을 쏟는 것은 RCT(Regiment Combating Training)가 몇주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 육사 2년 선배기수가 이번에 장군 진급심사에 들어갔다. 자신의 연대장생활을 마무리하는 이번 RCT훈련에서 어떤 평가를 받는가는 몇년 뒤에 있을 자신의 장군 진급심사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좋은 점수를 받아야 아는 선배들 찾아 진급운동하기도 한결 수월해진다. 군인의 최고목표는 싸워이기는 것이다. RCT는 가상적을 상대로 실전과 똑같은 병력과 화기로 작전을 펴서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을 종합평가받는 자리다. 예를 들어 부대에 포탄 1만발이 있는데 1만5,000발이 소요되는 작전계획을 수립했다간 실격이다. 보통 5∼6개 연대가 참가해 순위가 매겨진다. RCT가 중요한 또다른 이유는 여기서 지휘관으로서 자신의 지휘방식과 철학을 펴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성격이 직선적인 L대령은 적진 돌파 때 우회보다는 정면돌파를 택한다. 그리고 포병보다는 보병에 더 의존하는 스타일이다. 이런 작전 스타일도 평가단에 의해 정밀분석돼 군기밀로 보관된다. 실병력이 많지 않은 후방의 동원사 연대장도 지휘관으로서의 중요성은 마찬가지. 서울 근교 동원사단의 Y대령은 자신의 생활철학을 부대운영에 100% 반영하는 지휘관이다. 소위 ‘갑종’ 간부후보 출신으로 임관 30년째를 맞은 그는 장군진급이 안될 경우 이번 연대장 보직을 끝으로 일선에서 물러난다. 그러면 사령부 연구원으로 옮겨 1년 남짓 있다 정년퇴직해야 한다. 정년퇴임이 가까워졌다고 지휘관 임무를 게을리할 수는 없는 일. 그의 신조중 하나는 휘하 장병들을 제대 후 ‘자식 군에 보냈더니 사람됐다’는 소리듣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는 휴가자들이 돌아올 때 돈을 3만원 이상 못 갖고 오게 한다. 군에서 주는 1만5,000원 내외의 월급으로 충분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트레이닝복도 군에서 지급하는 두벌 외에 병사들이 자기 돈으로는 못사입게 한다. 유명 메이커의 비싼 운동화를 신고 다니다 걸리면 불호령이 떨어진다. 흡연구역 밖에서 담배를 피우다 걸리면 영창이다. 그는 “질서를 지키고 돈 아껴쓰도록 가르치는 것도 훈련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얼핏 들으면 병사들의 자유를 너무 옭아매는 지침들 같지만 이도 연대장 마음이다. 계급사회니까 가능한 일이다. 물론 그는 “권한이 너무 커 함부로 쓰기가 두렵다”는 말도 한다. 이런 권한을 가진 사람이 대령이다.
  • 地上 최고의 계급 대령:1(공직 탐험)

    ◎‘임관후 첫 독립부대 지휘’ 자부심 충만/전투연대장·사령부 근무/장군 진급 절대 필수 코스/대통령되기도 ‘별따기’ 버금/육사 출신 절반 중령제대 우리 공직자들의 생각과 인생은 어떤 것일까.모두가 고통스러운 시기여서 공직사회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도 커지고 있다.그러나 열심히 일하는 대다수 공무원들의 모습은 여전히 아름답다.서울신문은 공무원 사회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일하는 공무원들의 생활과 애환을 심층보도하는 시리즈물 을 시작한다. “지상의 최고 계급이자 모든 병과의 장이며 지상과 하늘(장성)을 연결하는 위엄의 상징”­미군 교본에 나와있는 대령의 정의다.대령에게 독수리휘장을 달아주는 것이 바로 지상과 하늘을 연결한다는 의미다.교본을 빌리지 않더라도 논산에서 신병훈련을 받았거나 전방부대서 근무해본 사람이라면 연대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설명이 필요없다.그 연대장이 바로 대령이다. 육군에서 대령이 되면 정보,작전,인사,병참 등 모든 병과를 다 포괄하는 3,000여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자신의 ‘철학’까지 펼치며 부대를 지휘하는 이 연대장 보직을 맡게 된다. 30여년 이상 군에 몸담은 장성이나 고참 대령들에게 어떤 보직이 가장 기억에 남는지 물어보면 대부분 “소대장과 연대장”이라고 답한다.임관해 맡은 첫 지휘관인 소대장과 처음으로 완전한 독립부대 지휘관이 됐던 연대장을 꼽는 것이다. 물론 모든 군인이 선망하는 최고의 지휘관 자리라면 역시 사단장이다.1만5,000여명에 이르는 병력과 법무,병참 심지어 항공기 등 모든 병과를 지휘하며 비상사태시 위수사령관으로 입법,사법,행정권까지 장악하는 사단장은 한 마디로 ‘군인의 꽃’이다.하지만 이는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장군진급이 됐을 때 이야기다.별이 되기 전 ‘지상의 꽃’은 바로 연대장인 셈이다. 명예직이긴 하지만 대령이 되면 공무원 조직상 국장급에 해당하는 2급 이사관의 대우를 받게 된다.후방인 향토사단으로 갈 경우 대령은 비상시 위수사령관으로 최소한 2개시,5개군 이상의 방위를 책임진다. 육군의 경우 대령진급 뒤 거치는 보직은 ▲후방동원사단의 연대장 혹은 여단 참모장 ▲전방 전투부대 연대장 ▲군단급 참모,사단 참모장 ▲정책부서인 육본 등의 과장 ▲부사단장 등 모두 7단계로 나뉘어져 있다. 육군 보병의 경우 이중 전투연대장은 필수코스에 포함되고 정책부서인 사령부,육군본부,국방부 등의 과장은 앞으로 장군진급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출세보직으로 꼽힌다. ‘별따기’만큼은 아니지만 대령진급도 그 못지 않게 어렵다.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금년도 중령에서 대령진급 경쟁률은 20대 1이다.한때 사관학교 졸업생의 경우 대령은 80% 이상 무리없이 달았지만 이도 옛말이다.현재 육사졸업생의 대령 진출률은 50% 남짓.이도 조만간 50% 미만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게 육군 관계자의 설명이다.나머지 50%는 정년인 53세까지 중령 계급장 달고 군복을 벗는 분루를 삼켜야한다.육사 졸업생의 수가 70년대 이후 늘어 300명선을 유지하고 있고 지난 93년 문민정부 때 대령 정년이 56세로 늘어 인사적체가 심해졌기 때문이다. 군은 계급사회다.군인은 다른 직업과 달리 계급을 밖으로 보이게 모자,어깨에 달고 다닌다.일반직장의 ‘부장 대우’처럼 ‘대령 대우’‘준장 대우’도 없다.진급 못하면 그만인 것이다.어렵게 대령을 달고나면 그 다음은 장성 진급의 벽이 기다리고 있다.진급은 그냥 되는 게 아니다.영관 장교들 사이에선 ‘진급은 경쟁이고 보직은 전쟁’이라는 말이 있다.그만큼 무슨 보직을 차지하는지가 진급에 결정적인 변수가 된다는 뜻이다. 절체 절명의 과제인 진급,주요 보직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아니더라도 ‘지상의 꽃’ 대령을 울고 웃기는 난관들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 무장탈영 2명 대낮 강도짓/김해서 택시 턴후 도주

    ◎군·경 1천명 수색작업 소총과 실탄을 갖고 부대를 탈영한 사병 2명이 경남 김해에서 타고 가던 택시 운전기사를 위협,금품을 강탈해 달아나 군과 경찰이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다. 12일 오전 9시쯤 육군 00사단 예하부대인 부산시 영도구 모 대대 소속 李상훈 일병(20·충북 음성군 원남면 구암리 5)과 金한수 일병(21·대구시 달서구 이곡동 1308) 등 2명이 M16 소총 1정과 실탄 840발을 휴대하고 탈영했다. 이들은 영도구에서 朴모씨(53·부산시 영도구 동삼동)의 개인택시를 타고 김해공항으로 가던중 오후 3시30분쯤 김해시 한림면 신천리 덕촌마을에 도착한 뒤 朴씨를 흉기로 위협,현금 8만원을 빼앗아 달아났다. 군과 경찰은 이들이 택시에서 내려 덕촌교회 뒷산으로 달아났다는 朴씨의 진술에 따라 1,000여명의 병력을 배치,야산을 중심으로 집중적인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으나 날이 어두워 어려움을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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