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병력
    2026-07-02
    검색기록 지우기
  • 앨런
    2026-07-02
    검색기록 지우기
  • 채무
    2026-07-02
    검색기록 지우기
  • 체온
    2026-07-02
    검색기록 지우기
  • 산촌
    2026-07-02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4,544
  • [병자호란 다시 읽기] (87) 최명길 국서를 쓰고, 김상헌 그것을 찢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87) 최명길 국서를 쓰고, 김상헌 그것을 찢다

    시간이 흐르면서 청과의 교섭은 조선의 ‘항복 조건’을 논의하는 과정으로 변해갔다.1627년 정묘호란 당시 맺은 ‘형제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졌다. 홍타이지는 사실상 ‘항복’이나 마찬가지인 신속(臣屬)을 요구했다.‘오랑캐’를 황제로 섬겨야 하는 ‘현실’을 코앞에 두고 신료들은 통곡했다. 하지만 ‘신속’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홍타이지는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올 것, 자신들과의 화의를 배척한 척화파(斥和派)들을 묶어 보낼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홍이포(紅夷砲)을 발사하는가 하면, 강화도를 함락시킬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참담한 사신들 이렇다 할 ‘카드’가 없는 상황에서 협상을 위해 청군 진영을 왕래하는 조선 사신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청군 진영에서는 홍타이지의 ‘노여움’을 풀고, 항복 조건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아부와 상찬(賞讚)을 늘어놓아야 했다. 자연히 산성의 척화파들로부터는 ‘오랑캐에게 고개 숙인 자’,‘대의명분을 저버린 자’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1월13일 청군 진영에 갔을 때, 조선 사신들은 청 측의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최명길은 ‘황제는 참으로 관대하고 도량이 넓은 분입니다. 진실로 남한산성을 공격하여 도륙(屠戮)하고자 한다면 청군 또한 상하는 사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임금과 신료들은 저항하다가 힘이 미치지 못하면 자결할 것이니 그대들이 입성하는 날, 눈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시체 더미뿐일 것입니다. 그대들이 죄를 뉘우치는 조선을 용서한다면 영원히 은인이 되는 것이니 또한 좋은 일이 아닙니까?’ 라고 청군 지휘부를 달래려고 시도했다. 홍서봉(洪瑞鳳)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시 그들의 감성에 호소했다. 홍서봉은 직접 마른 풀을 집어 태우면서 청군 지휘관들에게 ‘이 풀이 비록 바짝 말랐지만 하늘이 비와 이슬로써 적셔준다면 반드시 살아날 것이오. 오늘 조선이 그대들로부터 허물을 용서받는다면 황제는 하늘이 되고, 그대들은 비와 이슬이 되는 것이오.’라고 말했다. 눈물겨운 노력이자 몸짓이었다. 산성에 대한 포위를 풀어달라고 요청하기 위한 호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청군 지휘관들은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1월17일에 보내온 회답서에서 무조건 항복하고 신속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청의 신속(臣屬) 요구를 받아들이다 1월18일, 논란 끝에 최명길이 청 태종에게 보낼 국서의 초안을 완성했다. 비변사 신료들이 그것을 돌려보며 문구를 수정했다. 신료들은 초안 가운데 홍타이지를 ‘폐하(陛下)’라고 호칭한 것을 지웠다. 내용은 당연히 지난번 보냈던 것보다 더 공손해지고, 스스로를 더 낮추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소방은 10년 동안 형제의 나라로 있으면서 오히려 대국의 운세(運勢)가 일어나는 초기에 죄를 얻었으니, 후회해도 소용없는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원하는 것은 단지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구습(舊習)을 말끔히 씻고 온 나라가 명(命)을 받들어 여러 번국(藩國)과 대등하게 되는 것뿐입니다. 진실로 위태로운 심정을 굽어살피시어 스스로 새로워지도록 허락하신다면, 문서와 예절은 당연히 행해야 할 의식(儀式)을 따를 것입니다.’ ‘여러 번국과 대등하게 되는 것뿐입니다.’라는 구절이 내용의 핵심이었다. 아직 ‘신(臣)’이라는 글자를 쓰지 않았지만 사실상 홍타이지를 ‘황제’로, 청을 ‘황제국’으로 섬겨 군신(君臣) 관계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었다. 정묘호란 당시 맺었던 형제관계를 고수하겠다는 의지를 조선 스스로 접는 대목이기도 했다. 사실상 ‘항복’하겠다고 했지만 아직 포기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인조가 성을 나가는 것만은 면제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최명길은 이렇게 썼다.‘성에서 나오라고 하신 명이 실로 인자하게 감싸주시는 뜻이긴 합니다만, 생각해 보건대 겹겹의 포위가 풀리지 않았고 황제께서 한창 노여워하고 계시는 때이니 이곳에 있으나 성을 나가거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용정(龍旌)을 우러러 보며 죽음의 갈림길에서 스스로 결정하자니 그 심정 또한 서글픕니다. 옛날 사람이 성 위에서 천자에게 절했던 것은, 대체로 예절도 폐할 수 없지만 군사의 위엄 또한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남한산성을 나가서 항복하는 대신 청 태종이 회군하는 날, 성 위에서 요배(遙拜)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나마 인조의 체면과 위신을 마지막까지 지켜보려는 몸짓이었다. ●김상헌 국서 내용 보고는 통곡 국서의 최종본을 완성하기 위해 최명길은 비변사에 머물면서 내용을 가다듬었다. 이 때 예조판서 김상헌이 들어와 내용을 보고는 통곡하면서 찢어버렸다. 김상헌은 인조에게 달려갔다.‘저들과의 명분이 정해지고 나면 우리에게 군신의 의리를 요구할 것이니, 성을 나가는 일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일단 성문을 나서면 북쪽으로 끌려가는 치욕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예로부터 적군이 성 밑에까지 이르고서 그 나라와 임금이 보존된 경우는 없었습니다. 정강(靖康)의 변(變)을 다시 볼까 두렵습니다.’ ‘정강의 변’이란 1126년 금군(金軍)이 송(宋)의 수도인 개봉(開封)을 함락시킨 뒤, 태상황(太上皇) 휘종(徽宗)과 황제 흠종(欽宗)을 붙잡아 간 사건을 가리킨다. 휘종은 금의 오지인 만주로 끌려가 눈이 먼 상태에서 객사했고, 흠종 역시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당시 조선이 처한 상황은 ‘정강의 변’ 때 송이 처한 상황과 여러모로 흡사했다. 더욱이 성을 포위하고 있는 청군은 금군의 후예였고, 조선은 중국의 어느 왕조보다도 송을 존모(尊慕)해 왔다. 김상헌은, 신속하겠다고 약속할 경우 분명 성을 나가야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인조와 왕세자 또한 휘종과 흠종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김상헌은 일단 군신의 명분을 받아들이면 그나마 남아 있는 성 안의 결전 의지는 급속히 해체되어 되돌릴 수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군신 관계’에 반대하는 대다수 신료들의 의견도 비슷했다. 이식(李植)은 ‘우리가 끝까지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굳게 보이면, 저들이 도륙하여 입성한 이후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임을 깨달아 포위를 풀고 물러갈지도 모른다.’는 예측을 내놓았다. 국서를 바로 보내지 말고 하루 정도 시간을 두고 내용을 다시 수정하자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인조는 반문했다.‘양식이 지탱하기에 충분하고, 병력이 적을 막을 만큼 강하다면 어찌 이런 일을 하겠는가?’ 그러면서 인조는 일찍 죽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며 탄식했다. 주변에 있던 신료들이 일제히 눈물을 떨구고, 인조 옆에 앉아 있던 소현세자의 통곡 소리가 서글프게 흘러나왔다. ●청군, 무력 시위를 벌이다 최명길이 다시 나섰다. 이제 신속을 할 것인지, 하지 않을 것인지 빨리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했다. 그는 국서를 보내는 것을 늦추자는 주장도 일축했다. 늦추자고 주장하는 신료들에게 ‘그대들이 사소한 것에 매달려 일을 이 지경으로 끌고 왔다.’며 이것도 저것도 아닌 몽롱한 상태에서 국사를 논할 수는 없다고 일갈했다. 1월18일, 논란 끝에 완성한 국서를 갖고 청군 진영으로 갔다. 하지만 청군 지휘부는 국서 접수를 거부했다. 인조의 출성(出城)을 거부하는 내용 때문이었다. 사신들이 하릴없이 돌아오자, 비변사는 삭제했던 ‘폐하(陛下)’라는 글자를 추가하여 다시 보냈다. 1월19일, 홍이포 포탄이 성 안으로 날아들었다. 인조의 출성을 요구하는 무력시위였다. 처음으로 포탄에 맞아 죽은 사람이 나타났다. 산성은 공포 속으로 빠져들었다. 홍타이지는 또한 강화도를 공략할 준비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조선 왕실의 가족들과 고관들의 처자식들이 피란해 있는 강화도를 먼저 함락시키면 남한산성의 ‘결전 의지’는 결정적으로 꺾일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부하들에게 이미 강화도를 공략할 배를 만들어 두라고 지시해 놓은 상태였다. 인조가 나오지 않으면 항복을 받아줄 수 없다며 병선(兵船)을 건조하고 있던 청군의 압박 속에서 남한산성의 운명은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불교도 ‘反종교차별’ 대규모 시위

    불교도 ‘反종교차별’ 대규모 시위

    정부의 종교 편향을 규탄하는 범불교도 대회가 27일 오후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대대적으로 열렸다. 대회 참가자들은 정부가 성의있는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추석 이후 전국 각지에서 범불교도 대회를 갖겠다고 밝혀 현 정부와 불교계의 갈등이 장기화될 조짐이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조계종·천태종 등 27개 종단의 승려와 신도 6만여명(경찰 추산·주최측 추산 20만여명)은 이날 서울광장에서 ‘헌법파괴·종교차별 이명박 정부 규탄’ 범불교도 대회를 가졌다. 불교 관련 집회로는 석가탄신일 연등법회를 제외하고는 사상 최대 규모다. ●“특정종교 편향 국민 분열 불러” 참가자들은 낮 12시 범패와 합창 등 식전행사에 이어 오후 2시부터 예불, 연설, 결의문 낭독 행사를 가졌다. 참가자들은 “이명박 정부의 특정 종교 위주의 국가 운영은 결국 종교 간의 갈등을 부추기고, 국민을 종교에 따라 분열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대통령 공개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 경찰청장 등 관련 공직자 파면 및 엄중 문책, 공직자 종교차별 금지 법제도화 추진, 시국 관련자 수배 해제 등을 촉구했다. 참가자들은 오후 4시부터 서울광장→세종로사거리→종각사거리→조계사까지 거리행진도 벌였으며 이 일대 교통은 통제됐다. 이에 따라 이날 오후 서울도심에서는 교통혼잡이 빚어졌다. 경찰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교통경찰 4개 중대 300여명과 전·의경 등 85개 중대 8000여명을 배치했다. 그러나 종교 행사인 점을 감안해 행사장 주변에 시위진압을 위한 전·의경 수송버스 등은 배치하지 않고 최소 경찰 병력만 투입해 교통정리에 나섰다. ●靑 “대통령 사과 등 수용 어려워” 청와대는 범불교도 대회에 대해 공식언급을 하지 않았다. 청와대 관계자는 “공무원의 종교편향금지 입법 등 법제화 노력은 가능한 한 서두르겠다.”면서 “어청수 경찰청장 퇴진, 이명박 대통령의 사과 등 불교계의 요구는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했다. 김승훈 윤설영 김정은기자 hunnam@seoul.co.kr
  • 인도 코시강 홍수 42명 숨져

    인도 북동부 비하르 주에서 폭우로 강둑이 터지면서 42명이 사망하고 200만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했다.441개 마을이 물이 잠기고 농경지 3만 6000㏊가 피해를 입었다. 처음 네팔에서 인도로 흘러드는 코시강의 둑이 터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일이다. 이후 매일 200m씩 네팔 쿠사하의 둑이 무너져 내렸다. 현지 뉴스전문 채널 NDTV는 26일(현지시간) “지금은 유실된 둑 길이가 3㎞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둑이 터지면서 강줄기를 벗어난 강물은 폭 13㎞의 새로운 강을 형성했다. 인도 정부는 이날 군 병력과 장비를 본격 투입해 구호작업에 나섰다.그러나 둑이 무너진 곳이 국경 너머 네팔이어서 근본 대책은 세울 엄두도 못 내고 있다. 당국은 “폭우가 지속되면 피해규모는 눈덩이처럼 계속 불어날 것”이라고 우려했다. 네팔과 티베트 접경의 히말라야 산맥에서 발원한 코시강은 갠지스강의 최대 지류 가운데 하나다. 매년 몬순 때면 엄청난 규모의 퇴적물이 강 하류에 쌓여 수시로 물길을 바꾼다. 지난 250년 동안 코시강의 위치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120㎞나 이동했다. 수시로 바뀌는 물길 때문에 강 하류의 비하르 주민들은 해마다 물난리를 겪고 있다. 이 때문에 코시강은 ‘비하르의 슬픔’이라고도 불린다.박창규기자 nada@seoul.co.kr
  • 러, 그루지야 자치共 2곳 독립 공식인정

    러시아가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 등 그루지야내 친러 자치공화국 두 곳의 독립을 공식 인정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은 26일 흑해 연안 소치에서 열린 국가안보회의 직후 TV 연설을 통해 “두 자치공화국에 대한 독립을 러시아가 공식 인정한다는 명령서에 서명했다.”고 말했다. 메드베데프는 이어 “신냉전 시대가 오는 것이 두렵지 않으며, 어떤 것에든 준비가 돼 있다.”면서 “그러나 새로운 냉전 시대가 오는 것을 원하지는 않으며, 현재 상황에서 모든 것은 상대편 국가들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프랑스와 영국 정부는 즉각 성명을 내고 유감을 표명했다. 프랑스 외교부는 “우리는 이것을 유감스러운 결정으로 보고, 그루지야의 영토 통합성을 지지한다는 점을 강조한다.”고 밝혔다. 영국 외무부도 대변인 서명을 통해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이는 카프카스 지역의 평화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야프 데 후프 스헤페르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사무총장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을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루지야 외무차관은 “러시아가 두 자치공화국을 합병하겠다는 뜻을 드러낸 것“이라고 비난했다. 앞서 러시아 연방의회(상원)와 국가두마(하원)는 25일 특별회의를 소집해 메드베데프 대통령에게 두 자치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한편 그루지야 사태를 둘러싼 러시아와 나토 간 힘겨루기가 아프가니스탄 등 아시아 지역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러시아는 아프간에 주둔 중인 나토 병력의 보급로 차단이라는 패를 빼들었다고 영국 일간 더 타임스가 25일(이하 현지시간) 전했다. 자미르 카불로프 아프간 주재 러시아 대사는 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러시아가 그루지야 지지를 이유로 지난주 나토와의 군사협력 중단을 선언한 만큼 보급로 제공 협정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말했다. 나토의 러시아 영공 사용 및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기지 설치 협정도 추가로 재고할 수 있다고 내비쳤다. 나토군은 지난 4월 나토 정상회담에서 중앙아시아로 통하는 북부 보급로를 제공받기로 러시아와 합의했다.이재연기자 oscal@seoul.co.kr
  • 남오세티야·압하지야 독립인정 ‘잰걸음’

    그루지야에 ‘평화유지군’을 남겨 두고 철수한 러시아가 친러 노선의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의 독립을 인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반면 서방이 러시아군이 평화유지군 잔류의 근거로 내세우는 ‘완충지대’를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군함을 흑해로 이동시키고 있다. 러시아 의회는 25일(이하 현지시간)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의 독립 인정 요청안을 심의한다. 러시아는 1990년대 초 그루지야와 전쟁을 치른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를 그 동안에는 독립국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러시아 리아 노보스티 통신은 23일 터키 해군 소식통을 인용해 “나토가 22일 회원국인 폴란드 호위함 1척과 미국 구축함 1척을 보스포러스 해협을 거쳐 흑해로 들여 보냈다.”고 보도했다. 이로써 그루지야 사태 이후 흑해에 머무는 나토 군함은 7척으로 늘어났다. 소식통은 “흑해에 있는 러시아 해군도 나토 군함 2척의 보스포러스 해협 통과 사실을 알고 있으나 개의치 않고, 압하지야 지원작전을 계속 펼치고 있다.”고 덧붙였다. 러시아는 “흑해에 나토 군함이 있으면 지역의 안정을 더 해친다.”면서 “나토 군함들이 러시아의 흑해 함대를 도발하면 즉각 대처할 것”이라고 경고해 왔다. 이에 대해 나토 관계자는 “폴란드 호위함과 미국 구축함에 앞서 스페인·독일·폴란드 군함도 흑해로 들어가 미 해군에 합류했다.”면서 “이는 1년 전에 이미 계획된 3주일짜리 작전”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아나톨리 세르듀코프 러시아 국방장관은 22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에게 “당초 계획대로 철군을 완료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미국 국방부는 “그루지야에서 러시아 병력의 움직임이 미미하게 있었다.”면서 “철군인지, 재배치인지는 불확실하다.”고 지적했다. 미 국무부 로버트 우드 대변인도 검문소와 완충지대 설치는 평화합의에 들어 있는 사항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 [한국인의 질병] (49) 간염

    [한국인의 질병] (49) 간염

    에이즈와 더불어 인류가 정복하지 못한 대표적인 바이러스성 질환 ‘간염’. 치료제가 개발되어 있지만 이 병을 완치하는 것은 현대의학으로는 아직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세대 신촌세브란스병원 내과 김도영(37) 교수를 만나 B·C형 간염에 대해 들어봤다. 80년대만해도 국내 B형 간염 환자는 전 국민의 8%에 달할 정도로 감염률이 높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예방접종을 하면서 지금은 감염률이 4%대로 낮아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반면 C형 간염 감염률은 현재 전국민의 1%에 못 미치는 수준이지만 진단 기술이 발달하면서 병원을 찾는 환자가 계속 늘고 있다. ●B형 간염 출산전에 치료받아야 자녀 감염 예방 B형 간염이 생기는 대표적인 원인은 ‘수직감염’이다. 만약 B형 간염 바이러스를 갖고 있는 산모가 아무런 치료를 하지 않고 출산하면 아기의 90%가 만성 간염 환자가 된다. 수혈로 감염되는 환자도 있지만 대부분의 환자는 부모로부터 병을 물려받은 수직감염 환자다. C형 간염은 주로 수혈과 비위생적인 의료기기를 사용할 때 생긴다. 이런 이유로 몽골 등의 국가는 전 국민의 10% 이상이 C형 간염 환자로 알려져 있다.C형 간염은 B형 간염과 달리 성인일 때 감염되면 만성 간염으로 진행될 위험이 더 높아진다. 어릴 때 C형 간염에 감염되면 저절로 완치되는 사례가 많다. “B·C형 간염을 치료하지 않고 방치하면 간이 딱딱하게 굳는 ‘간경변’이 생깁니다. 바이러스가 간으로 침투해 끊임없이 염증 반응을 일으키고 결국에는 간이 딱딱하게 굳는 증상이죠. 만성 B형 간염 환자 4명 중 1명이 10년 후에 간경변으로 진단된다고 합니다.” 20년 뒤에는 B형 간염 환자의 절반이 간경변을 경험한다. 간경변 환자의 4%는 간암으로 진행돼 더이상 손쓸 수 없는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또 간경변 환자도 뱃속에 물이 차거나 위(胃)출혈 등의 합병증으로 사망하는 사례가 많다. ●B·C형 간염 놔두면 간경변으로 B형 간염을 예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예방접종이다. 만약 산모가 감염돼 수직감염 위험이 높다면 아기가 태어날 때 곧바로 항체와 예방백신을 주입하면 된다. 예방백신은 초등학교 입학 이전에 맞는 것이 가장 좋다. C형 간염은 감염자의 혈액과 접촉하지 않는 방법 외에는 예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문신 시술이나 소독되지 않은 의료기기를 사용하는 무허가 시술은 피해야 한다. “간염 환자는 주로 평소에 피로감을 호소합니다. 간경화가 진행되면 눈과 얼굴이 노랗게 변하는 ‘황달’ 증상이 나타나기도 해요. 간경화 증상이 악화되면 뱃속에 물이 차고 위출혈이 심해져 피를 토하는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치료제를 복용하면 간경화로 진행되는 것을 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과거에는 ‘인터페론’이라는 면역제제가 주로 사용됐지만 최근에는 바이러스를 직접 죽이는 항바이러스제를 사용한다. 인터페론은 탈모와 체중감소, 골수억제 등의 부작용이 많고 치료효과도 그리 높지 않다.90년대 초반부터 ‘제픽스’‘헵세라’ 등의 B형 간염치료제가 잇따라 개발돼 간염 환자의 시름을 덜었다. 항바이러스제는 당뇨약이나 항고혈압제처럼 장기간 복용해야 하기 때문에 임의로 복용을 중단해서는 안된다. 임의로 약을 끊으면 내성이 생겨 다시 약을 먹어도 치료가 잘 되지 않는 환자가 많다. 또 술은 간경변은 물론 간암을 일으키는 중요한 원인이기 때문에 반드시 끊어야 한다. 약을 먹으면 바이러스 숫자를 줄일 수 있지만 완치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술과 약을 함께 먹는 것은 위험한 행동이다. 건강기능식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간염을 식품으로 치료하려는 환자가 많다. 그러나 아쉽게도 식품으로 간염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아직 개발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건강기능식품을 잘못 복용하면 간기능을 악화시켜 치료에 방해가 될 뿐이다. ●건강식품 복용 땐 의사와 상의해야 따라서 인진쑥, 상황버섯 등 간염에 대한 효과가 입증되지 않은 건강식품은 함부로 복용해서는 안된다. 꼭 먹어야 한다면 의사와 상의한 뒤에 신중하게 결정하는 것이 좋다. 간염 환자는 음식을 특별하게 조절할 필요가 없다. 다른 질환과 마찬가지로 모든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하는 것이 가장 좋다. 또 과식하면 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되도록 조금씩 먹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만 간경변 환자는 ‘소금’을 멀리해야 한다. 소금을 먹으면 뱃속에 물이 찰 위험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감기약 정도는 그냥 먹어도 되지만 오랜 기간 복용해야 하는 약이 있다면 의사와 상담한 뒤에 먹는다. 항바이러스제는 간염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지만 많이 복용하면 내성이 생기기 때문에 곧바로 다른 약으로 교체해야 한다. 많은 환자들이 내성을 경험해 여러가지 약을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최근 1∼2년 사이에 개발된 약들은 보험 범위가 넓지 않아 환자들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주고 있다. “새로 나온 약은 한달 약값이 25만원에 이릅니다. 부담이 만만치 않죠. 특히 간염 환자는 경제적으로 사정이 어려운 사람이 많기 때문에 정부가 하루빨리 보험적용 범위를 늘려 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정현용기자 junghy77@seoul.co.kr ■ 간염 극복기 - 술 반드시 끊고 약 지속 복용해야 연세대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만난 김명진(가명·27)씨는 “2년 6개월간 계속된 치료를 모두 마쳐 홀가분하다.”고 말했다. 그는 드물게 만성 B형 간염을 완치한 행운아였다. 3년 전만 해도 김씨는 B형 간염이라는 병명조차 모르고 살았다. 직장에 다니면서 항상 피곤하다고 느꼈지만 과로 탓으로 돌렸다. 하지만 곧 불운이 닥쳤다. 어느 날 날아든 건강검진표. 간효소치(GPT/GOP)가 1000에 가깝게 나왔다. 간효소치는 정상이 40미만이다. 간기능에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곧바로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청천병력 같은 진단을 내렸다. “난치병인 만성 B형 간염에 걸렸으니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열심히 인터넷을 뒤지고 정보를 수집했지만 ‘완치’라는 단어는 찾을 수 없었다.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하지만 김씨는 죽을 때 죽더라도 치료를 받아 보자고 결심했다. 의사가 처방한 항바이러스제를 복용하고 난 뒤 6∼9개월이 지나자 간수치가 정상으로 회복됐다. 자신감이 생긴 그는 의사가 챙겨주는 대로 약을 끊지 않고 꾸준히 복용했다. 물론 좋아하던 술도 끊었다. 어느 날 검진차 병원을 찾은 그는 “e항원이 음전(음성전환)됐다.”는 말을 듣게 된다. 당시에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다. 쉽게 말해 바이러스가 완전히 소멸됐다는 뜻이다. 그는 “딱 2년 만에 정상으로 돌아왔다.”면서 “매일 보는 의사가 잔소리를 많이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완치시키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말했다. 현재 그는 주기적으로 병원을 다니면서 간수치 검사만 받고 있다. 바이러스가 소멸됐다는 판정을 받았지만 아직 안심하기에는 이르다는 생각이다. 그는 “스트레스, 술, 과로가 간염을 일으키는 3대 요인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면서 “몸관리를 잘하는 것이 간을 보호하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말했다. 정현용기자 junghy77@seoul.co.kr ■ A형 간염 증상 - 감염 4주후 구토·설사·피로감 느껴 알파벳 순서를 놓고 보면 A형 간염이 가장 치명적인 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A형 간염은 한번 완치하면 항체가 생겨 다시 걸리지 않기 때문에 치명적인 병은 아니다. 예방백신도 개발돼 환자수도 90년대 이후 감소하는 추세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 20∼30대를 중심으로 A형 간염 환자가 급격하게 늘고 있다. 위생환경이 개선되면서 간염 바이러스와 접촉할 기회가 줄었고, 이는 바이러스를 막아내는 역할을 하는 항체 생성 기회를 감소시켰기 때문이다.20∼30대 청년층 가운데 A형 간염 항체를 갖고 있는 사람은 50% 미만이다. A형 간염은 다른 간염과 마찬가지로 바이러스가 간을 침범하는 병이다. 식중독처럼 바이러스에 오염된 음식을 섭취할 때 감염된다. 감염자의 침과 대변을 통해서도 전염될 수도 있다. A형 간염은 B·C형 간염과 달리 증상이 곧바로 나타난다. 감염된 지 4주가 지나면 식욕부진, 오심, 구토, 설사 등의 소화기 증상과 피로감, 무력감, 발열, 두통 등 감기와 유사한 증상도 나타난다. 붉은색 소변이 나오거나 안구가 노랗게 변하는 황달이 생기기도 한다. 유·소아기에는 감염되어도 별다른 증상없이 지나가지만 청소년기로 갈수록 전형적인 증상을 보인다. 환자 1만명 중 1명은 간부전으로 사망한다. A형 간염 바이러스는 섭씨 85도 이상의 물에 1분간 끓이면 죽는다. 따라서 기온이 상승하는 봄, 여름철에는 음식, 옷 등에 대한 개인 위생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아직까지는 치료제가 개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예방접종을 통해 면역력을 얻어야 한다.A형 간염백신은 만 1세 이상에서 접종할 수 있으며, 초기 접종 후 4주가 지나면 항체가 형성돼 효과를 나타낸다. 총 2회 접종해야 하며 초회 접종 후 6개월 뒤에 1회 더 접종한다. 백신이 개발된 지 오래되지 않아 구체적인 연구결과는 없지만 전문가들은 면역력이 20년 이상 지속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정현용기자 junghy77@seoul.co.kr
  • 美·이라크 “2011년까지 미군철수”

    이라크 주둔 미군이 오는 2011년까지 모두 철수한다. 워싱턴포스트(WP)는 22일(현지시간) “미국과 이라크가 이라크 주둔 미군 전투병력을 2011년 말까지 모두 철수시킨다는데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WP는 양국 관리들의 말을 인용,“철군 협상의 걸림돌이었던 ▲구체적 철군시한 설정 ▲이라크 내 미군 범죄인의 관할권 ▲미군 면책권 부여 등 일부 핵심 쟁점에서 양측이 의견 접근을 이뤘다.”며 이같이 전했다. 이라크 협상대표 모하마드 하무드는 “미군이 2009년 6월30일 도시와 마을에서 철수하고,2011년 12월31일 전투병력이 이라크를 떠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미국과 이라크 정부는 미군의 장기주둔을 위해 지난해 11월부터 주둔군지위협정(SOFA) 협상을 계속해 왔다. 그러나 미군 면책권 부여 등 미국의 요구사항이 이라크 주권을 침해한다는 반대여론에 부딪혔었다.또 미군 철군 일정을 둘러싼 논란으로 협상 타결이 늦어졌다. AFP통신은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이 합의안을 승인했으며 이제 이라크 핵심 지도부의 최종 합의만 남았다.”고 전했다. 그러나 2011년 이후에도 미군이 계속 주둔할 가능성도 여전히 열려 있다. 하무드는 “미군 철군은 2011년 이전이 될 수 있고,2011년을 넘길 수도 있다.철군은 그때 그때 이라크 상황에 달려 있다.”고 했다.그러면서 “일부 미군이 이라크군 훈련을 위해 2011년 이후에 남아 있을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WP는 “지원 명목으로 이라크에 계속 남게 될 가능성이 있는 병력은 수만명 규모로 합의가 이뤄졌다.”고 전했다.현재 이라크 주둔 미군은 14만 4000명이다.박창규기자 nada@seoul.co.kr
  • KBS사장 김은구씨 유력

    KBS 이사회는 21일 파행 속에서 강행한 임시이사회를 통해 사장후보를 5명으로 압축했다. 이사회는 이날 “사장 후보자 공모에 지원한 24명에 대한 서류심사를 모두 끝내고 후보를 5명으로 압축했다.”면서 “25일 이들 5명에 대한 면접을 실시한 뒤 최종 후보자 한 명을 선정해 임명제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사회는 서류심사에서 뽑힌 후보 5명의 신상에 대해서는 일절 공개하지 않고 있으나 김은구 전 KBS 이사, 이병순 KBS비즈니스 사장, 김성호 전 KBSi 사장, 안동수 전 KBS 부사장, 심의표 전 KBS비즈니스 감사 등 KBS 출신 인사 5명으로 압축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 가운데 특히 김은구(현 KBS 사우회장) 전 이사가 가장 유력한 사장 후보로 거론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은구 전 이사는 조선일보, 서울신문, 경향신문을 거친 신문기자 출신으로 1973년 KBS보도국으로 자리를 옮겨 부산방송본부장, 기획조정실장, 경영본부장 등을 역임했다. 이날 이사회는 당초 오전 9시 여의도 KBS본관 제1회의실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공영방송 사수를 위한 KBS 사원행동’과 노동조합의 저지로 역삼동 노보텔앰배서더 호텔로 장소가 변경돼 개회됐다.그러나 호텔측이 경찰병력 배치 등을 이유로 “나가달라.”고 요청하자 이사회는 다시 KBS 본관 제3회의실로 옮겨 속개했다. 이 과정에서 친여당 성향 이사 6명은 지난 13일에 이어 또다시 나머지 5명의 이사들에게 장소 변경을 사전 통보하지 않았다. 야당 추천인 남윤인순, 이지영, 이기욱, 박동영 이사는 뒤늦게 연락을 받은 뒤 KBS 본관에서 재개된 회의에 합류했지만, 회의 진행에 문제를 제기하며 중도 퇴장했다.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85) 남한산성의 나날들(Ⅳ)

    [병자호란 다시 읽기] (85) 남한산성의 나날들(Ⅳ)

    조선이 청군 진영에 보낸 국서에서 처음으로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라는 호칭을 쓰고, 과거의 ‘잘못’을 사과했지만 청군 진영에서는 회답이 없었다. 조선 조정은 초조해졌다.‘황제’로 인정하고 ‘잘못’을 사과하면 화친이 쉬이 이루어질 것으로 알았던 예상이 빗나갔기 때문이다. 청군의 입장에서는 바로 답장을 해 줄 필요가 없었다. 더욱이 조선의 국서 내용이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었다.‘황제’로 불렀으되 심복(心服)하겠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시간은 청군 편이었다. ●그 많던 닭들은 어디로 갔을까? 청측의 회답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1637년 1월6일, 강원도관찰사 조정호(趙廷虎)와 함경도관찰사 민성휘(閔聖徽)가 올린 장계가 들어왔다. 조정호 휘하의 군병이 용진(龍津)에 머물며 대오를 수습하고 있다는 것, 함경도의 병력이 김화(金化)에 도착하여 산성을 구원할 채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 내용이었다.1월7일에는 도원수 김자점, 황해병사 이석달(李碩達), 전라감사 이시방(李時昉)이 보낸 장계도 도착했다. 하지만 모두 ‘남한산성을 구원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내용만 있을 뿐 언제, 어떻게 산성 쪽으로 진군해 온다는 내용은 빠져 있었다. 1월8일, 답답해진 인조는 영의정 김류 등을 불렀다. 인조는 신료들에게 비변사에서 마련한 대책이 있느냐고 물었다. 신료들은 할 말이 없었다. 김류가 나섰다.“밤낮으로 생각해 보아도 뾰족한 대책이 없습니다. 그저 바깥의 구원을 기다릴 뿐입니다.” 김류는 그러면서 적진에 사람을 다시 보내 회답을 독촉하자고 건의했다.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신료들의 이야기에 인조도 할 말이 없었다.“병졸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져 성을 굳게 지키는 것이 급선무일 뿐이다.”라고 말했지만 도무지 힘이 실리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병사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지는 것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식량을 비롯한 물자들은 하루하루 떨어져 가고 있었다.‘병자록(丙子錄)’‘양구기사(陽九記事)’ 등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자료들을 보면 예외 없이 ‘닭다리’ 관련 이야기가 나온다.“이때 전하께서도 침구가 없어 옷을 벗지 않고 주무셨다. 밥상에도 반찬으로 다만 닭다리 하나를 놓았다. 전하께서 전교하시기를,‘처음에 들어왔을 때에는 새벽에 뭇 닭의 울음소리가 들렸는데, 지금은 그 소리가 전혀 없고 어쩌다 겨우 있다. 그것은 필시 나에게 닭을 바쳤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닭고기를 쓰지 말도록 하라.” 인조의 수라상에 올라가는 반찬이 닭다리 하나뿐인 처지에서 어느 겨를에, 또 무엇으로 장졸들을 어루만질 것인가? ●참혹한 소식들 산성 안에서는 추위와 물자의 고갈을 걱정하고 있었던 데 비해 산성 바깥의 백성들은 청군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청군의 포위망을 뚫고 들어와 바깥소식을 전했던 사람들의 증언 내용은 참혹했다. 적진에는 포로로 잡힌 부녀자들이 무수히 많고, 적진 바깥에는 어린 아이들의 시신이 수도 없이 버려져 있다는 것이다. 병자년 연말 이후 몽골병을 비롯한 청군의 겁략(劫掠)이 본격화되면서부터 나타난 참상이었다. 당시 청군은 서울 주변에서 포로를 획득하는 데 열중했다. 그 와중에 성인 남자들에 비해 기동력이 떨어지는 부녀자와 아이들 상당수가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청군은 특히 젊은 여자들을 사로잡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다시 서술하겠지만, 인조에게 항복을 받고 심양으로 귀환했던 청군 지휘부 내부에서 나중에 문제가 되었던 것이 ‘조선 여성 포로’와 관련된 사안이었다. 청군의 대소 지휘관들 사이에서, 조선에서 포로로 잡아 끌고 온 젊은 여성들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뺏고 빼앗기는 갈등이 벌어지고 있었다. 젊은 부녀자를 데려가려는 그들에게, 여자에게 딸린 아이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다. 어미는 진중으로 끌고 들어가고 아이는 죽이거나 바깥에다 유기하는 참혹한 상황은 이런 배경에서 비롯되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아무리 참혹해도 포위된 산성에서 조정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적과 결전을 벌일 능력도, 화친을 이룰 전망도 불투명한 처지가 되자 신료들은 다른 곳에서 돌파구를 찾아보려고 시도했다.1월8일, 예조는 온조왕(溫祚王)에 대한 제사를 다시 지내자고 청했다. 이미 한 번 지냈지만 정성이 부족했다며 중신을 보내 성의를 다하여 온조왕에게 가호(加護)를 빌자고 청했다. 예조는 또한 원종(元宗·인조의 生父 定遠君)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숭은전(崇恩殿)에도 신료를 보내 제사를 지내자고 했다. 인조는 숭은전에서 올리는 제사는 자신이 직접 주관하겠다고 나섰다. 포위된 성에서의 곤경이 길어지자 이러저런 이상한 행동을 벌이는 자들도 나타났다. 어영별장(御營別將) 김언림(金彦琳)이 보인 행태가 대표적이었다. 그는 1월9일 밤, 청군 진영을 습격하여 적의 수급(首級)을 베어오겠다며 성을 내려갔다. 이튿날 새벽, 그는 수급 두 개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다. 인조는 그가 세운 공을 가상히 여겨 면주(綿紬) 세 필을 상으로 내렸다. 그런데 그가 들고 온 수급 하나가 이상했다. 수급의 살은 얼어 있었고, 피를 흘린 흔적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수급의 모양이 청군의 머리처럼 보이지 않았다. 모두 의아해하고 있는데 출신(出身) 권촉(權促)이 수급 앞에서 통곡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형 권위(權偉)의 수급이라는 것이었다. 권위는 며칠 전 북문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했는데, 당시까지 시신을 찾지 못한 상황이었다. 권촉은 형의 수급을 자신이 모셔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애걸했다. 주변의 장졸들은 경악했다. 김언림은 청군의 수급이 아니라 조선군 시신에서 목을 베어 왔던 것이다. 조정에서는 김언림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놓고 논란을 벌이다가 결국 ‘효시경중(梟示警衆·목을 베어 매달아 군사들을 경계함)’하기로 결정했다. 이렇다 할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성안의 장졸들에게는 여전히 용맹함이 강조되고 있던 분위기에서 빚어진 참혹한 ‘해프닝’이었다. ●다시 ‘재조지은’을 강조하다 1월 초 남한산성의 동문(東門) 부근으로 진출하여 탐색전을 벌이던 청군은 1월11일까지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농성 중인 조선 조정의 의도와 예상되는 향후 동향을 분석하는 한편 강화도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청군은 1월11일부터 산성 주변에 대한 압박을 다시 강화하기 시작했다. 헌릉(獻陵)과 탄천 일대에 있던 병력 가운데 1만여명을 차출하여 수원과 용인, 여주와 이천 방면으로 각각 다시 배치했다. 근왕병이 남한산성으로 접근하는 것을 더 확실하게 차단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동시에 산성의 북문과 서문 앞에 병력을 증강 배치했다. 상황은 더 엄혹해졌다 1월12일, 최명길 등이 국서를 들고 다시 청군 진영으로 갔다. 앞서 전달한 국서에 대한 회답이 없던 상황을 타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다시 써서 들고 간 국서의 내용 또한 공순했다.‘소방은 바다 구석에 위치하여 오직 시서(詩書)만 일삼았지 전쟁은 몰랐습니다. 약국이 강국에 복종하고 소국이 대국을 섬기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데 어찌 감히 대국과 맞서겠습니까? 잘못을 용서하고 스스로 새롭게 될 수 있도록 허락하신다면 대국을 받들고 자손 대대로 잊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머리를 숙였다. 문제는 명과 관련된 사항을 언급한 부분이었다.‘일찍이 임진년의 환란으로 소방이 곧 망할 뻔했을 때 명의 신종황제(神宗皇帝)께서 천하의 군사를 동원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소방의 백성들은 그 은혜를 깊이 새겨 차마 명나라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조선은 ‘명이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베풀었듯이 청도 그렇게 해 달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청은 이미 ‘명=천하’라는 인식을 팽개쳐 버린 지 오래였다. 어렵사리 고쳐 쓴 국서 속에 담긴 ‘재조지은’을 해석하는 문제를 놓고 조선과 청은 새로운 실랑이를 벌이기 시작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그루지야 철군 두고도 공방

    그루지야에서 불안한 휴전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서방은 러시아의 지체없는 철군을 촉구하고 나섰다. 반면 러시아는 정부해산을 선언하고 비상사태를 선언한 남오세티야가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밝혀 그루지야 사태에서 발을 뺄 의사가 없음을 다시한번 내비쳤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18일(이하 현지시간)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및 북대서양이사회(NAC) 회의에 참석하고자 벨기에 브뤼셀로 가는 비행기에서 “러시아는 군사력을 이용해 힘과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위험한 게임을 하고 있다.”면서 “우리는 그들의 전략 목표를 부인할 각오가 돼 있다.”고 말했다. 라이스 장관은 “우리는 러시아가 전략적 비행으로 미국의 국경조차 도발하는 행위를 본 적이 있다.”면서 “이것은 위험한 게임”이라고 지적했다. 라이스 장관은 또 이번 회의에서 “나토는 회원국인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지원을 재확인하고, 러시아가 그루지야와 우크라이나와 같은 주변국들이 동맹에 참여하는 것을 막지 못하도록 할 것”이라면서 “우리는 러시아의 행동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결정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익명을 요구한 미국 국방부 관계자는 이날 “우리는 현재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있지만 그루지야에서 러시아군의 의미있는 이동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휴전협정에 조인했음에도 그루지야에서 철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언급한 것이다. 영국 일간 타임스 인터넷판은 이날 러시아군이 그루지야의 수도 트빌리시에서 40㎞ 떨어진 검문소와 방어진지에 계속 병력을 배치하고 있는 것이 목격됐다고 보도했다. 또 그루지야 최대 전략 요충지 고리에서는 러시아군이 도로를 통제하고 있으며, 폭발음이 잇따라 들려오고 있다고 전했다. 반면 아나톨리 노고비친 러시아군 부참모장은 이날 “평화합의안에 따라 러시아 장갑차가 그루지야에서 빠져나와 러시아 영토인 북오세티야로 향하고 있다.”며 철군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철군 여부로 신경전이 펼쳐졌던 고리에서도 러시아군이 떠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 [한국인의 질병] (48) 발기부전

    [한국인의 질병] (48) 발기부전

    남성이 중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걱정하는 것이 ‘발기부전’이다. 일부 남성들은 고혈압, 당뇨병 등 생명을 위협하는 병보다 발기부전을 더 많이 걱정하기도 한다. 서울아산병원 비뇨기과 안태영(55) 교수를 만나 우리가 잘 알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속설이 난무하고 있는 발기부전 치료법에 대해 들어봤다. 음경의 ‘발기’는 성적충동을 느꼈을 때 스펀지 모양의 ‘음경해면체’ 안에 혈액이 들어가 부풀어 오른 상태를 말한다. 음경해면체의 지주 평활근이 이완되고 정맥이 압박을 받으면 혈액이 빠져나가지 못해 발기가 지속된다. ●남성의 25%가 증상 경험 발기부전이란 여러가지 원인에 의해 음경해면체에 충분한 혈류가 공급되지 않거나 정맥 차단 기능이 원활하지 않을 때 생긴다. 성행위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발기가 충분히 되지 않거나 발기가 되더라도 일정 시간 동안 유지하지 못하는 발기부전 증상은 전체 남성의 25%가 경험한다. “최근 보고된 성에 관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발기가 되더라도 만족하지 못한다고 응답한 남성의 비율이 40대에 40%,50대에 50%로, 중년층의 비율이 매우 높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줄잡아 약 150만명이 발기부전을 걱정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발기부전은 원인에 따라 ‘심인성 발기부전’과 ‘기질적 발기부전’으로 구분된다. 심인성 발기부전은 심리적인 불안, 초조, 긴장, 공포, 불쾌감, 불화, 신경쇠약, 윤리적인 이유 등으로 생기는 증상이다. 특히 심리적으로 불안하거나 우울증, 인격장애 등 정신과 질환을 경험한 사람은 발기부전을 경험하기 쉽다. 성관계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죄의식을 갖거나 지나치게 상대방을 즐겁게 하는데만 관심을 쏟는 사람, 성적인 느낌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도 발기부전 증상을 경험할 수 있다. 기질적 발기부전은 신경계나 혈관계에 문제가 생긴 것을 말한다. 척추손상 등의 중추신경계 질환, 당뇨병 등의 말초신경질환, 동맥경화로 인한 혈류 장애, 음경해면체의 이상 등이 기질적 발기부전을 일으킨다. 심인성 발기부전과 기질적 발기부전 가운데 한가지만 나타나는 사례는 드물다. 두가지 원인이 함께 작용해 발기부전을 경험하는 환자가 대부분이다. “과거 첨단 진단장비가 개발되기 전에는 환자의 90%가 심인성 발기부전으로 진단됐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기질적 발기부전이 전체 환자의 50∼80%를 차지하죠. 최근에는 음경의 기형, 약물복용·수술 여부 등 병력 검사부터 시작해 기초혈액검사, 소변검사, 혈청검사 등 다양한 검사기법을 동원해 발기부전의 원인을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게 됐습니다.” 최근에는 검사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야간 수면중 음경발기검사, 시청각 자극에 의한 발기검사 등 첨단 기능검사도 동원한다. 이런 검사를 모두 받으면 일시적인 증상인지 심각한 병인지 쉽게 판단할 수 있다. ●PDE-5 계열 치료제 효과 커 발기부전의 치료는 약을 이용하는 내과적 치료가 기본이다. 최근 ‘PDE-5’ 계열의 발기부전 치료제가 개발돼 고개 숙인 남성들의 오랜 숙원을 풀었다.PDE-5 계열의 약은 음경에 몰린 혈액을 일정 시간 동안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 발기를 유지시킨다. 그러나 이 약은 성기능을 향상시키는 ‘정력제’가 아니기 때문에 무분별하게 복용해서는 안 된다. 기질적 발기부전 환자는 약물을 복용해도 일시적인 성욕 증가효과만 얻을 수 있다. 병의 원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근본적인 치료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혈관이 좁아져 음경으로 가야 하는 혈액이 부족하다면 혈관부터 넓혀야 한다. 발기부전 치료제를 무분별하게 복용할 경우 심혈관 부작용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관련 질환이 있다면 더욱 조심해야 한다. ●금연·절주·운동이 근본적 치료법 가장 근본적인 발기부전 치료법은 금연과 절주, 적당한 운동이다. 이 세가지는 발기부전 치료를 위해 필수적으로 지켜야 하는 사항이다. 흡연은 동맥경화를 일으키고, 음경 내부의 혈액순환에 장애를 불러온다. 따라서 발기가 잘 안 된다고 생각되면 우선 담배부터 끊어야 한다. 적당한 음주는 감정을 고조시키고 발기력도 높이지만 과음은 발기력을 감퇴시킬 수도 있다. 과음 후 성행위를 하면 발기가 되더라도 극치감이 없거나 성감이 저하될 수 있어 피해야 한다. 건강한 성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발기력을 높여야 하는데 척추와 하체 운동이 도움이 된다. 특히 항문에 힘을 줘 조였다 푸는 동작을 반복하면 성기능이 크게 향상된다. 적당한 부부관계도 발기부전을 예방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정기적으로 부부관계를 갖지 않으면 심리적으로 위축돼 발기부전이 생길 수 있다. 따라서 남성이 성관계를 시도할 때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배우자가 도와야 한다. “기러기 아빠 중에 발기부전 증상이 나타나는 환자가 많죠. 정기적으로 부부관계를 하지 못하다 보니 한번 시작할 때 과도하게 움츠리게 되고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적당한 성생활은 건강을 유지시키고 발기부전을 예방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발기부전은 부끄러운 병이 아니다. 남성의 평균 수명이 80세에 근접하면서 60세 이후에도 만족스러운 성생활을 원하는 남성이 늘고 있다. 가능하면 빨리 병원을 찾아 상담을 받고 발기부전의 원인을 찾는 것이 평생 건강한 성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최상의 비법이다. 정현용기자 junghy77@seoul.co.kr ■ 50대 환자 극복기 전국 돌며 ‘정력식품’ 섭렵 물거품 병원 처방+금연·금주로 새 생활 서울 구로구에 사는 직장인 박상용(가명·55)씨는 한달 전부터 발기부전 때문에 서울아산병원을 찾았다. 그는 “발기부전 증상이 1년 전부터 시작됐다.”면서 “당시에는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박씨는 어느 날부터 부부관계를 하다가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발기능의 기준이 되는 ‘아침(새벽) 발기’는 되는데 이상하게 부인과 성관계를 하려고 하면 힘이 빠진다는 것이었다. 부인도 갱년기 증상 때문에 남편을 멀리하기 시작해 각방을 쓰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후 박씨는 열심히 ‘정력식품’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곰 발바닥부터 해구신까지 닥치는 대로 섭렵했다. 발기부전이 곧 남성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병원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의료진은 그의 건강 상태를 점검한 결과 5년 전부터 항고혈압약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일부 항고혈압약은 발기부전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의료진은 곧바로 처방을 변경해 줬다. 또 발기부전 치료제를 적극적으로 복용할 것을 권유했다. 그는 “발기부전 치료제를 먹고 나서 술과 담배를 완전히 끊었다.”면서 “이후에는 자신감이 다시 생겨서 그런지 서서히 부부관계를 시작하게 됐다.”고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부부관계를 다시 시도하자 부인도 갱년기 증상을 이겨내고 성생활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됐다고 한다. 그는 “부부 관계가 좋아지니까 의욕도 생겼다.”면서 “회사생활도 적극적으로 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정현용기자 junghy77@seoul.co.kr ■ 음경보형물 삽입술 최후 수단… 증상 90%이상 치료 비팽창형보다 팽창형이 더 편리 발기를 가능하게 하는 여러가지 치료법이 있지만 효과를 보지 못하면 마지막 방법으로 ‘음경보형물 삽입술’을 시행하게 된다. 이 방법은 무릎 관절이 손상돼 못 쓰게 되면 인공관절을 삽입하듯 기능이 떨어져 쓸모가 없는 음경을 새로운 인공조직으로 대치하는 수술이다. 음경에 인공으로 만든 보형물을 삽입해 자신이 원할 때 발기상태가 될 수 있도록 조절할 수 있다. 인공 보형물은 기능에 따라 ‘팽창형’과 ‘비팽창형’으로 나뉜다. 비팽창형은 시술이 간편하고 시술비가 싼 장점이 있지만 평상시에도 발기상태로 놔둬야 한다는 것이 단점이다. 이와 같은 단점을 보완한 것이 팽창형으로, 평상시에는 접었다가 성교를 할 때나 소변을 볼 때 펼 수 있도록 돼있다. 국내에 도입된 보형물의 종류는 10여종에 이른다. 음경보형물을 이용한 수술법은 증상을 90% 이상 치료할 수 있다. 하지마비 등의 이유로 발기가 완전히 불가능한 환자에게 적당하다. 의료진은 중증 발기부전 환자라고 하더라도 무조건 음경보형물 삽입술을 권하지는 않는다. 스트레스 등의 심리적인 요인에 의해 잠시 발기부전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심리적인 원인에 의해 발기부전 증상이 나타난다면 약물을 통해 90% 이상 치료할 수 있다. 정현용기자 junghy77@seoul.co.kr
  • 경찰에 염산 투척 30대 구속

    서울지방경찰청은 지난 9일 촛불 집회가 끝난 뒤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 주차장에서 발생한 염산 투척 사건과 관련해 염산을 뿌리고 새총으로 쇠구슬을 발사한 혐의(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로 김모(33·무직)씨를 긴급 체포해 17일 구속했다고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당시 김씨는 경찰 병력 쪽으로 염산이 든 소형 드링크병 5개를 던졌으며,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병이 바닥에 떨어져 흰 연기가 발생했다.경찰이 병 조각 등을 수거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감정을 의뢰한 결과 병 속에 들어 있던 액체는 농도 5.2%의 염산으로 확인됐다.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100번째 촛불집회’ 사복 체포조 첫 투입

    ‘100번째 촛불집회’ 사복 체포조 첫 투입

    15일 밤 서울 명동 등 도심 곳곳에서 광우병 국민대책회의가 주최한 100번째 촛불집회가 열렸다. 시민 3700여명(경찰 추산·주최측 추산 1만 2000여명)은 애초 촛불집회 장소였던 서울광장과 청계광장을 경찰이 원천봉쇄하자 명동, 을지로, 종로 등으로 흩어졌다가 오후 7시30분쯤 명동 한국은행 앞으로 집결했다. 경찰은 집회 시작 40분 만인 오후 8시10분부터 파란 색소가 섞인 물대포를 쏘면서 진압을 시작했다. 이어 곧바로 등산복이나 반바지에 티셔츠 등 사복을 입은 ‘경찰관 기동대’가 투입돼 도로를 점거한 시민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특히 인도 위나 골목에 있는 시민들도 파란 색소가 묻은 이들을 골라내 연행했다. 사복 체포조가 촛불집회에 투입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시민들은 광복절을 맞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뿐만 아니라 ‘6·15공동선언 실천’,‘민족자주 실현’,‘국가보안법 폐지’ 등의 구호를 외쳤다. 유관순 복장(하얀 저고리·검정 치마)을 차려입은 100여명의 시위대는 한반도기를 흔들면서 통일을 염원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경찰의 진압이 시작되자 시민들은 인도로 올라가 시위를 계속했고, 경찰은 차도에 남아 있던 시위대를 포위했다. 경찰의 진압으로 9시쯤 시위대 중 일부는 해산했고,2500여명은 탑골공원 앞으로 장소를 옮겨 시위를 이어갔다. 하지만 곧바로 경찰의 진압이 시작되자 종로와 동대문 등지로 옮겨 산발적인 시위를 계속했다. 경찰은 이날 촛불집회와 거리행진을 불법시위로 규정하고 도심 곳곳에 217개 중대 2만여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경찰은 이날 시위대 150여명을 연행했다. 김승훈 장형우기자 hunnam@seoul.co.kr
  • 나이지리아, 카메룬에 바카시 반도 공식이양…30년 영토분쟁 ‘종지부’

    나이지리아, 카메룬에 바카시 반도 공식이양…30년 영토분쟁 ‘종지부’

    지구촌 곳곳에서 영토와 국경분쟁에 따른 무력충돌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서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와 카메룬이 30년이나 끌어온 바카시 반도의 영유권 문제를 협상으로 해결해 주목받고 있다. 14일 BBC, 로이터에 따르면 나이지리아는 이날 바카시 지방정부의 본부인 아바나에서 바카시 반도를 카메룬에 공식 이양했다. 이 자리에는 유엔 관계자도 참석했다.1981년과 1994년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전쟁 직전까지 치달았던 두 나라의 영토분쟁은 이로써 27년 만에 막을 내렸다. 기니만 동쪽 끝에 위치한 바카시 반도는 나이지리아가 1960년 영국 식민지에서 벗어나면서 영토로 삼았다. 그러나 나이지리아와 국경을 맞댄 카메룬이 이후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분쟁이 일어났다. 영국과 독일이 서아프리카 식민지를 분할할 때 국경을 해안선까지 연장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1000㎢ 넓이의 바카시 반도는 석유와 가스 등 천연자원이 풍부해 두 나라는 한치의 양보도 없는 신경전을 벌였다. 카메룬은 1994년 나이지리아가 이곳에 병력을 배치하면서 무력충돌로 34명이 희생되자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했다.ICJ는 영국과 독일이 1913년 체결한 조약을 근거로 2002년 카메룬의 손을 들어줬다. 이어 2006년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의 중재로 나이지리아와 카메룬은 그린 트리 협정을 체결했고, 이에 따라 나이지리아군이 철수했다. 하지만 바카시 반도 주민의 90%를 차지하는 나이지리아인들의 거센 반발로 이양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이들은 반환 결정이 헌법 위반이라며 제소했다. 지난해 11월에는 카메룬 정부군 병사 21명이 괴한의 습격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우마루 야라두아 나이지리아 대통령은 약속 이행을 거듭 밝혔다. 이날 행사는 주민들과의 마찰을 우려해 삼엄한 경비 속에 간소하게 진행됐다. 울세건 아데니이 대통령실 대변인은 “바카시 반도 이양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국제사회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임무”라고 말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국경분쟁을 협상을 통해 해결한 기념비적인 사건”이라고 환영했다. 한편 두 나라는 바카시 반도의 해저 석유시추 공동작업에 나설 것으로 알려졌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이라크 주둔 미군 3년내 철군

    이라크에 주둔하는 미국의 모든 전투병력이 앞으로 3년 동안 단계적으로 모두 철수한다고 호시야르 지바리 이라크 외무장관이 밝혔다. 지바리 장관은 14일 더타임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미국과의 안보협정이 이달 중 타결될 것”이라면서 “협정안에는 미군이 이라크에서 철수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고 말했다. 지바리 장관에 따르면 미군 철수는 내년 여름부터 시작된다. 이라크 치안이 안정될 경우 2011년까지 모든 전투병력이 철수한다. 협정이 타결되면 미군은 또 작전 수행에 앞서 미·이라크 연합사령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현장에서 체포한 이들의 신병은 새로 발족할 미·이라크 위원회에 모두 인도해야 한다. 이와 관련, 미 국방부와 주 이라크 미국 대사관은 그러나 “협상이 건설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밝힐 뿐 지바리 장관의 발언에 대해 사실 여부 확인을 거부했다.한편 유엔은 모두 22억달러(약 2조 2000억원)를 들여 이라크 재건 및 개발, 인권 보호를 지원키로 이라크 정부와 협약을 맺었다고 13일 밝혔다.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 경찰, 사복체포조 ‘촛불집회’ 투입…무더기 연행

    8·15 광복절에 맞춰 광우병국민대책회의가 주최하는 100번째 ‘촛불집회’가 서울 도심 곳곳에서 열렸다. 집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마자 경찰은 처음으로 사복체포조까지 투입해 강제해산에 돌입했다. 경찰은 이날 오후 8시경 신세계 백화점 사거리에 모인 1만여명의 시위대를 향해 파란색 색소를 섞은 물대포를 쏘며 해산을 명령했다. 물러서지 않고 “재협상을 실시하라.” “폭력 경찰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맞서던 시위대는 경찰의 체포조가 투입되자 인근 골목으로 흩어졌다. 인권단체 활동가들과 일부 시민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이들 체포조는 파란색 물대포를 맞은 시위대를 찾아 명동 골목 안까지 들어섰다. 투입된 체포조는 운동복이나 등산복 등 사복 차림이었다. 경찰은 8시 10분 경 첫 강제해산에 40여명을 연행한 것을 비롯해 산발적으로 진행된 집회에서 총 150여명을 연행했다. 한편 경찰은 이날 촛불집회와 거리행진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원천봉쇄를 위해 217개 중대 2만여명의 병력을 배치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TV 박성조기자 voicechord@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전의경 예비역 “진압거부, 용기없어 못했을 뿐”

    “나는 이길준과 같은 용기가 없었을 뿐이다.” 촛불집회의 폭력진압을 거부하고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한 이길준 이경을 지지하는 전의경 예비역들이 지난 4일 기자회견을 열고 전의경제도 폐지를 촉구했다. 시위 진압을 직접 경험했던 이들은 기자회견문 대신 ‘이길준 이경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했다. 이 이경이 구속수감 되기 하루 전인 지난 6일, 이 ‘편지’를 직접 쓰고 낭독한 최재완(29)씨를 만났다. 그는 “우리는 모두 ‘숨은 이길준’들이었다.”며 “이길준이라는 한 젊은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와 같이 용기없는 이들이 수 없이 많다.”고 강조했다. 그는 작전전경 2574기로 지난 2003년 전주 노동자 집회 등 대규모 집회현장에서 진압대의 자리에 있었다. ▶ 전의경 출신으로서 현재 병역거부 중인 이길준 이경 지지를 선언했다. 계기가 있었는지. 해봤으니 아는 거다. 이길준이라는 젊은이의 병역거부에 대해 “이제 겨우 이경이 뭘 아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나는 2년 동안 해봤다. 다 해봤는데 내 생각도 (이 이경과) 똑같다. 솔직히 나 역시 그런 행동을 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었을 뿐이다. ▶ ‘양심적’이라는 표현에 ‘현재 전의경 복무자들은 모두 비양심적이냐’는 말도 나온다. 양심이라는 개념부터 짚어야 될 것 같다. 양심은 규정된 도덕률이 아니라 개인적이고 선험적인 개념 아닌가. 누군가는 시위대와 맞서는 것보다 일반병 복무가 더 낫다고 생각할 수 있고, 누군가는 집총 자체를 거부하면서 대체복무를 원할 수도 있다. 특정한 선택이 양심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양심을 지킬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거다. ▶ 복무 당시에도 이 이경과 같은 생각을 했다고 밝혔는데. 어떤 점에서 그랬나. 육군은 전쟁을 ‘대비’하면서 훈련을 하지만 전의경들은 항상 실제 상황이다. 진압 나가서 뚫리면 패배한 거고, 패잔병처럼 취급받는다. 이 이경과 같이 나도 “보이지 않게 때려라.” “시위대는 너희의 적이다.”와 같은 말들을 들었다. 시위현장에 나가면 대부분 시위대와 대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옆에 가까운 사람이 맞기라도 하면 나도 모르게 ‘울컥’하기도 하고… 폭력이 내면화 되는 거다. 이 이경의 “인간성이 하얗게 타버리는 기분”이라는 말이 딱 맞는다. ▶ 개인의 양심에 따른 것이라면 시위 현장에서 폭력을 안 쓰면 되지 않나. 심한 폭력을 쓰느냐, 그냥 버티기만 하느냐는 것은 개인의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전진 명령이 나와서 전체가 밀고 나가는데 그냥 서 있을 수도 없고. 실제로 전쟁이 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집총거부를 하는 것처럼, 그런 조직에 몸 담고 있는 자체가 특정인들에게는 어려울 수 있다. ▶ 전의경제도 폐지만이 유일한 방법인가? 굳이 폐지를 주장하는 이유는? 오히려 반대로 묻고 싶다. 인권문제까지 거론되는 가운데 왜 ‘굳이’ 전의경제도가 필요한가? 현재 전경과 의경의 주임무는 각각 대간첩작전 수행과 치안업무 보조로 되어있다. 과연 그들이 그 임무를 수행하나? 4만~5만의 전의경 병력이 있는데 실질적으로 시위 진압만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단순히 치안 보조라는 의미로 시위 진압에 나서는 것이라면 이 규모를 유지하는 것이 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어제(5일, 부시방한)만해도 서울 한복판을 까맣게 뒤덮을만한 병력이 동원됐는데, 그 규모가 과연 필요할까? (5일 청계광장 주변에는 경찰병력 225개 중대 2만 4000여명이 투입됐다.) 서울신문 나우뉴스TV 박성조 기자 voicechord@seoul.co.kr / 서울여대 학생기자 권윤희 고유선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인권위 “정신병력 이유 보험가입 거부는 차별”

    국가인권위원회는 12일 정신장애 또는 정신과 치료병력을 이유로 우정사업본부가 상해보험의 가입을 거절한 것은 장애인차별금지법 위반이라며 개선을 권고했다.조울증으로 정신장애 3급인 윤모(39)씨는 “지난 1월 우체국에서 상해보험 상담을 받았는데, 정신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보험 가입을 거부했다.”며 지난 4월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다.인권위는 이날 “우정사업본부는 진정인의 장애와 보험사고 발생률에 대한 구체적인 계약심사를 하지도 않고 정신장애 및 정신과 치료병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상해보험 가입을 거절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인권위는 우정사업본부장에게 심신상실·심신박약자의 사망을 보험사고로 한 보험계약을 무효로 하는 상법 제732조의 적용과 관련해 구체적 기준과 심사절차를 마련할 것을 권고했다.장형우기자 zangzak@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84) 다시 화친을 시도하다(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 (84) 다시 화친을 시도하다(Ⅱ)

    1637년 1월3일, 도성으로부터 가슴 아픈 소식이 전해졌다.12월 그믐과 정월 초하루, 몽골병들이 도성으로 몰려들어 사람들을 붙잡아가고 약탈을 자행했다는 내용이었다. 병자호란을 일으키기 전, 홍타이지는 휘하 장졸들에게 군기를 확립하고 함부로 약탈을 자행하지 말라고 지시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시’일 뿐이었다. 더욱이 몽골병들은 무엇인가 보상을 바라고 청에 귀순했고, 또 전쟁에 참여한 자들이었다. 군기를 강조하여 그들의 ‘욕구’를 언제까지고 묶어두기는 어려웠다. 자신들을 지켜 줄 군사도, 이끌어 줄 조정도 없는 상황에서 도성 백성들은 몽골병들의 분탕질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안쓰러웠지만 남한산성의 조정은 도성 사정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칭신(稱臣) 여부를 둘러싼 고민 1월3일, 화친을 다시 추진하기로 결정한 조정은 당장 홍타이지의 ‘조유(詔諭)’에 회답하는 문제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조유를 건네받는 자리에서 목숨을 바칠 각오로 거부하지 못한 이상, 조선은 이제 ‘오랑캐의 신하’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인조는 무거운 마음으로 대신들을 불러모았다. 회답서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영의정 김류가 입을 열었다.‘나라가 살아남은 뒤에야 명분을 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라가 망한 뒤에 장차 무슨 명분을 논하겠습니까?’ 김류는 자신이 총대를 메겠다고 나섰다. 청에 대해 ‘칭신(稱臣)’하는 문제를 자신이 담당하여 ‘천하 후세의 죄인’이 되더라도 피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김류가 울자 인조도 울기 시작했다. 죽지 못하고 살아남아 망극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탄식했다. 남한산성에 들어온 뒤 벌써 여러 차례 눈물을 보인 인조였다. 숙부 광해군을 몰아내고 용상에 오를 적에만 해도, 아니 정묘호란 직후까지만 해도 자신이 이렇게 막다른 골목까지 몰리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강화도로 들어가지 못한 것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하더니 이젠 오랑캐에게 신하를 칭하며 머리를 숙여야 할 판이었다. 눈물이 잦아질 만도 했다. 이홍주(李弘胄)는,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이상 ‘대청황제(大淸皇帝)’라는 호칭을 써야 한다고 했다. 홍서봉은 한 걸음 더 나갔다. 지금 상황에서는 군부(君父)를 보호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니, 저들의 지적대로 요금원(遼金元) 시절의 고사를 따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들에게 신속(臣屬)하는 것이 유일한 방도라는 주장이었다. 김신국은 두 사람의 의견에 동조하면서도 선을 그었다. 그들에게 칭신하는 것을 포함해 모든 것을 다 하더라도 인조가 직접 홍타이지를 대면하게 되는 상황만은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1월30일, 인조가 성을 나가서 항복할 때까지 조선 조정이 끝까지 피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 문제였다. 장유(張維)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일단 ‘조유’에서 홍타이지가 질책한 내용에 대해서는 사과하되,‘칭신’ 여부는 그들의 반응을 본 다음에 다시 논의하자고 했다. 이식(李植) 또한 ‘대청황제’라는 칭호는 그냥 사용하되 ‘칭신’은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료들은 답서의 서식(書式)과 시작하는 단어, 내용에 들어가는 글자 한 자 한 자를 놓고 논란을 벌였다. 외로운 성에 갇혀 버린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하지만 수백 년 동안 ‘오랑캐’로 멸시해 온 여진족 추장에게 ‘칭신’한다는 것은 생각하기조차 싫은 일이었다. 논란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황제’임을 인정하다 고민과 논란 끝에 홍타이지에게 보내는 답서를 완성했다. 답서의 맨 앞에 ‘조선국왕은 삼가 대청국관온인성황제(大淸國寬溫仁聖皇帝)께 올립니다.’라는 표현을 썼다. 조선에 보내는 서신을 ‘조유’ 운운하면서 ‘제국의 위엄’을 과시하려 했던 홍타이지와 청의 위상을 처음으로 인정한 표현이었다. 답서는 과거의 잘못을 사과하는 내용으로 채웠다.‘소방(小邦)이 대국에 잘못을 저질러 스스로 병화(兵禍)를 불렀습니다. 특사(特使)를 보내 정성을 드리려 했으나 병과(兵戈)에 막혀 통할 길이 없었습니다. 황제께서 궁벽한 구석까지 오셨다는 소식에 의심과 믿음, 기쁨과 두려움이 엇갈렸습니다. 지난해 봄의 일은 소방이 그 죄를 사과할 길이 없습니다. 소방 신민들의 식견이 얕고 좁아 대국의 노여움을 불러일으키고 말았습니다.’. 위기에 처한 조선의 고민이 형식과 내용 모두에 절절히 담겨 있었다. 눈앞에 닥친 망국의 위기를 벗어나려고 시도하되, 자존심을 최대한 살리려는 몸짓이었다.‘조유’ 속에 넘쳐나는 홍타이지의 ‘질책’ 내용을 대부분 사실로 인정하면서 사죄했다. 주목되는 것은 호칭이었다. 홍타이지를 ‘황제’라고 불렀지만 조선을 ‘소방’으로, 인조는 ‘조선국왕’이라 했다. 맨 마지막에는 의연히 숭정(崇禎) 연호를 사용했다.‘조선 국왕 신(臣) 모(某)’란 표현을 쓰지 않음으로써 ‘칭신’은 일단 거부했다. 또 청의 연호 대신 명의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명에 대한 충성 또한 쉽사리 포기할 수 없다는 의지를 담았다. 답서의 뒷부분은 홍타이지에게 선처를 호소하는 내용을 담았다.‘죄가 있으면 치고, 죄를 뉘우치면 용서하는 것이 대국의 도리입니다. 정묘년의 맹약을 생각하고, 생령(生靈)을 불쌍히 여기시어 소방에게 새로워 질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하지만 대국이 용서하지 않고 기어이 병력으로 추궁하려 한다면 소방은 스스로 죽음을 기약할 뿐입니다.’ 개과천선할 기회를 달라고 부탁하되, 여의치 않을 경우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하여 청의 감성에 호소하고 있다. 홍서봉(洪瑞鳳), 김신국(金藎國), 이경직(李景稷)이 답서를 들고 다시 청 진영으로 갔다. 황제는 만나지 못했다. 답서를 접수한 마부대는 상의한 뒤에 회답을 주겠다고 했다. ●비변사의 독주에 대한 반발 상황에 밀려 화친을 다시 추진하기로 결정하면서 반발 또한 만만치 않았다. 우선 비변사의 몇몇 신료들이 중심이 되어 비밀리에 화친을 추진하는 것이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비변사 신료들은 과거 척화·주화 논쟁 때처럼 논란이 빚어질 것을 우려하여 적진에 보내는 문서의 초안을 철저히 비밀에 부친 채 주고받았다.‘인조실록’의 사평(史評)에는 승지와 사관(史官)이 보지 못하도록 소매에 넣어 출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이 상소했다.‘우리는 참월(僭越)하게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는 오랑캐에 맞서 명나라를 대신하여 화란을 당하는 것’이니 ‘의열(義烈)에 당당하고 해와 달에 비춰도 부끄럽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청의 국서를 태워버림으로써 장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화친을 포기하라고 강조했다. 답서를 보낸 다음부터 삼사(三司)의 관원들은 다시 최명길(崔鳴吉) 등 비변사 당상들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최명길에 대해, 적의 세력을 과장하고 화친을 주도하면서 나라를 치욕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류에 대해, 하는 일 없이 겁만 많아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다고 몰아붙였다. 유백증(兪伯曾)은,‘칭신’한다고 해서 포위가 풀린다는 보장이 없다며 나라를 그르친 김류와 윤방(尹昉) 등의 목을 베라고 외쳤다.‘조유’에 대한 답변 여부를 놓고 논쟁이 다시 격화되고 있었다. 인조는 최명길 등을 감쌌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직전, 격렬한 논란이 벌어졌을 때 보였던 태도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신료들 사이의 논란을 다시 방치할 경우, 화친의 시도조차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1637년 1월 초, 청과 조선은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그것은 홍타이지의 ‘조유’와 조선의 답서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조선의 ‘꿈’은 청과의 형제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비록 홍타이지를 ‘황제’라고 불러주었지만 그를 ‘조선의 황제’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명목상 ‘홍타이지의 동생’이자 ‘조선국왕’으로 남아 명과의 관계도 그대로 유지하고자 했다. 홍타이지는 ‘조선국왕’이란 표현 대신 ‘신(臣) 이종(李倧·인조의 이름)’을,‘숭정’ 대신 자신들의 ‘숭덕(崇德)’ 연호를 원하고 있었다. 누구의 꿈이 실현될지를 알게 되기까지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남오세티야 독립 놓고 17년째 주도권 다툼

    남오세티야 독립 놓고 17년째 주도권 다툼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을 틈타 남오세티야에 울린 러시아와 그루지야 사이의 포성(砲聲)은 해묵은 주도권 다툼 때문이다. 그루지야 정부가 내놓은 병력 철수와 휴전 제안을 러시아가 받아들인다고 해도 불씨는 남는다.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는 1991년 옛 소련연방이 해체되면서 그루지야에 속한 자치공화국이 됐다. 그루지야는 자치·독립을 요구하는 남오세티야, 압하지야와 내전을 치른 뒤 러시아의 중재로 협정을 맺었다. 그 결과 오세티야에는 1992년, 압하지야에는 1994년부터 각각 2500명의 러시아 평화유지군(PKO)이 주둔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루지야에 2003년 ‘장미혁명’이라고 불리는 민주화혁명이 일어나 미하일 사카슈빌리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탈(脫)러시아, 친(親)서방 성향의 사카슈빌리 대통령이 나토 가입을 추진하면서 그루지야와 러시아의 갈등은 고조됐다. 사카슈빌리는 미국 컬럼비아 대학과 조지워싱턴 대학을 거쳐 뉴욕에서 법률회사를 경영한 인물인 만큼 러시아로선 ‘눈엣가시’가 아닐 수 없다. 사카슈빌리가 지난 1월 재선되자 러시아는 그루지야를 경제 제재로 압박하기 시작했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천연가스 공급을 중단했고,3월에는 그루지야 전체 수출액의 80%를 차지하는 포도주의 러시아 반입을 봉쇄하기에 이른다. 반면 남오세티야는 7만명 남짓한 주민 가운데 러시아 시민권자가 절반 이상일 정도로 정서적으로 러시아와 가깝다. 따라서 그루지야군과 러시아를 대리한 남오세티야군 사이의 충돌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전투는 지난 1일부터 벌어졌고, 올림픽을 하루 앞둔 7일 휴전협정을 맺었지만, 불과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루지야는 전격적으로 남오세티야를 공격한 것이다. 군 병력을 모두 합쳐도 3만 9000명 남짓에 불과한 그루지야가 러시아와 전면전을 생각하기는 처음부터 어려웠다는 지적도 많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