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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이 美대통령이면 어떻게 하겠냐”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13일(현지시간) 북한 강제수용소의 실상을 담은 수기의 저자이며 탈북 후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고 있는 강철환(37)씨를 백악관 집무실로 초청,40분간 환담했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스콧 매클렐런 백악관 대변인은 “부시 대통령은 강씨의 책 ‘평양의 수족관-북한 강제수용소에서 보낸 10년’을 대단히 흥미로운 이야기라고 말했으며 이 책을 읽으면서 북한의 인권 상황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고 초청 배경을 설명했다. 당초 일본에서 살던 강씨 가족은 북한으로 이주했다가 할아버지가 정치범으로 몰려 9세때부터 함께 10년간 강제수용소에서 살아야 했다. 이후 부인, 딸과 함께 북한을 탈출해 현재 서울에서 살고 있다. 강씨는 부시 대통령이 “당신이 미국 대통령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첫질문을 해서 “중국을 설득해 탈북자들의 강제북송을 막고 두번째로 북한의 수용소를 철폐하기 위해 노력하겠다. 핵문제는 이 문제가 풀린 뒤 해결하겠다.”고 답했다고 밝혔다. 그러자 부시 대통령은 “공감한다.”며 “북한인권문제가 매우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주변사람들은 아직 잘 모르는 것 같다.”고 말했다고 설명했다.강씨는 부시 대통령이 상당히 신앙심이 깊고, 굶주리는 북한주민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연합
  • [CEO 칼럼] 섬기는 리더십/기옥 금호폴리켐 사장

    [CEO 칼럼] 섬기는 리더십/기옥 금호폴리켐 사장

    지난 4월2일 세계 11억 가톨릭 신자들의 지도자이며 종교의 벽을 넘어 전 인류의 정신적 지주였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선종(善終)했다. 선종이라 함은 “선하게 살다 복되게 끝마친다.”는 뜻의 선생복종(善生福終)의 준말이라고 한다.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삶의 이치를 가르쳐준 셈이다. 그는 지병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사제의 본분과 인간적 매력을 잃지 않았던 사랑과 화해의 교황으로 평가받고 있다.USA투데이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토대로 요한 바오로 2세가 남긴 리더십의 교훈으로서 일곱가지를 선정했는데 여기에는 희생, 진실성, 용기, 솔선수범, 지식, 소통능력, 영감이 포함됐다. 이 가운데 솔선수범의 선정 이유가 특히 눈에 띈다.“교황은 타인에 대한 공감, 신뢰, 자기절제를 솔선수범했다. 그는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남에게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실행하는 사람이었지 바티칸에 앉아서 지시나 하는 행정가가 아니었다.” 이는 많은 이들이 마음속에 요한 바오로 2세를 진정 ‘위대한 리더’로 기억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새로운 패러다임의 리더십, 즉 ‘섬기는 리더십’에 관련된 책들이 번역 출판되었다. 이들 책은 거의 대부분이 실용적으로 리더십 개발 훈련에 활용될 수 있도록 쓰여졌는데, 로리 베스존스가 지은 ‘최고경영자 예수’, 제임스 C 헌터의 ‘서번트 리더십’, 알렉산더 버라디의 ‘서번트 리더의 조건’, 캔 블랜차드와 필 하지스가 공동으로 저술한 ‘섬기는 리더 예수’ 등이 대표적이다. 로리 베스존스는 그의 저서에서 남성적이며 권위적인 힘의 내용에 기초한 ‘알파 리더십’, 여성적이며 상호 협조적인 힘의 사용에 기초한 ‘베타 리더십’, 그리고 이 두 경영스타일을 상호 연계시키고 고양시키는 ‘오메가 리더십’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세계의 경영환경이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고, 여러 유형의 다양한 사람들이 최고경영자와 각계각층의 리더 자리에 앉게 됨에 따라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리더십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이 세계가 분열이 아니라 총화를 목적으로 삼고, 착취보다는 능력을 함양시키고, 지배하기 보다는 받침대가 되거나 상대를 고양시키는 그러한 리더들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독창적인 오메가 리더의 전형으로 ‘자아극복의 강점’ ‘행동의 강점’ ‘인간관계 형성의 강점’을 갖춘 ‘예수’를 들었다. 그러한 리더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 세가지 범주의 총체적인 결합이 요구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한편, 캔 블랜차드와 필 하지스는 ‘섬기는 리더십’의 완성을 위해서는 위의 세가지 강점 이외에 비전을 제시하고, 이에 따르도록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를 정리해 보면 ‘섬기는 리더십’의 본질과 그 원형을 2000년 전에 보여 주었던 예수의 리더십에서 찾을 수 있고, 최근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우리에게 그 리더십의 실체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주변 가까이에서도 이러한 리더십을 보여준 지도자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얼마전 타계한 금호아시아나그룹의 박성용 명예회장도 그러한 리더의 한 사람으로 평소 자신에게는 엄격하였고, 주변사람들에게는 꿈과 비전을 심어주었던 선각자였다. 2년반 후에는 우리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새로운 지도자를 뽑아야 한다. 진정으로 국민을 섬기고, 후손들에게 희망찬 미래를 물려줄 수 있는 지도자를 뽑을 수 있도록 지금부터 착실하게 준비를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기옥 금호폴리켐 사장
  • 예나 이제나 박람회엔 복권

    예나 이제나 박람회엔 복권

    안내 : 김화진(金和鎭) 옹 특등, 천원짜리 자동차 한대 1915년 공진회(共進會) 120만 인파 제1차 한국무역박람회가 서울 영등포구 구로동에서 열리고 있다.「내일을 위한 번영의 광장」이라는「캐치·프레이즈」그대로 믿음직한 구경거리로 날이 날마다 사람의 물결이 밀려들고 있다. 한데 이번 무역박람회를 계기로 궁금증이 하나 더 늘었다. 우리 나라에는 언제부터 박람회가 있었으며, 그 옛날 박람회의 풍경은 어떠했나 하는 것이 그것이다. 옛날의 박람회는「가관(可觀)」투성이었고 일정 때였으므로 말 못할 울분도 많았다. 사실 우리에게는 우리 손으로 마련한 박람회가 없었다. 1906년의「기차박람회」, 이듬해의「경성박람회」, 1915년의「물산공진회」, 29년의「조선박람회」등이 다 일정이 그들의 식민지정책을 선전하기 위한 선전장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공진회」때,「공진회는 무엇인가, 시정 5년 기념일세. 천황폐하 덕택으로…」운운하는 노래를 주입시켜 가르친 것으로 보아도 당시의 사정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먼저 1906년「기차박람회」의 그 기차를 김화진옹(74)과 함께 타 보자. 이동시장 - 물건이 싸대요 박람회기차는 전국 35구(區) 돌고 돌아… 『물건이 싸대요. 광목을 좀 사야겠어』 마을에 기차가 들어오자 아낙네들의 입에서는『물건이 싸대요』가 사방에서 튀어나왔고, 순식간에 소문이 퍼졌다. 아낙네들, 남정네들은 앞을 다투어 기차로 덤벼들었고, 광목, 옥양목, 비단 등의 옷감을 사들였다. 아마 2할쯤 싸게 살 수 있었던 듯. 그러나 기차 안에 진열해 놓은 물품은 별로 볼 것이 없었다. 대한매일신보 광무(光武) 10년(1906년) 11월 8일자 기사에 의하면「기차박람회」는 상품을 진열한 기차가 각 지방을 순회한 이동식 박람회. 낡은 상품진열차 3대와 화차 1대를 3천 5백원에 구입, 내부를 개조해서 진열장을 만들었다. 전국 35구(區)에서 출품했는데 1구 진열청원금은 1백원, 열차에서 먹는 식비는 각 출품인이 스스로 부담했다. 이「박람기차」가 순회한 곳은 남대문, 영등포, 수원, 대구, 김천, 부산, 마산, 인천, 대전, 평양, 신의주, 정주, 선천, 황주 등. 이해 8월 15일부터 12월 15일까지 전국을 돌았다. 이 기차는 이동시장의 역할도 겸한 셈이어서 각 지방에서는 다른 지방의 특산물들을 앉아서 살 수 있었다. 「덕맥(德麥)」과 고치안주로 진탕 일녀(日女)의 교태 - 경성박람회 다음이 1907년의「경성(京城)박람회」. 지금의 내무부 자리에서 열렸던 듯하다. 당시 통감부의 일방적인 계획으로 열린 것인 만큼 일본 물건 전시장. 요정이 있었고. 기생들이 술을 따르는 등 애교와 수작으로 손님을 끌었다. 술은「덕맥(德麥)」(독일맥주)과 일본 약주(정종), 그리고 안주는 고치안주. 13세 소년 김화진은 국수와 떡을 얻어 먹었고, 초밥을 보고는 주먹밥이라고 불렀다. 일본 기생들은 삼미선(三味線:사미센)을 뜯으며 관객을 유인했고, 여자 관객을 위해「부인의 날」을 따로 두어 부녀자만 입장케 했다. 남녀유별, 여인들은 쓰개치마와 장옷을 쓰고 입장했는데 그런 식으로나마 구경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로서는 상당한 관용과 개화였을 터. 진열품은 여자 화장품, 그릇, 견직물, 완기 등 7만 6천여 점에 달했고 관람자 수는 20만 8천여 명. 한 집에 한 사람 강제징발(徵發) 「공진회 보따리」는 명월관행 1915년「물산공진회(物産共進會)」. 물론 일본의 시정(施政)선전장이었으므로, 시골 사람들을 강제로 징발, 한 집에 한 사람씩 서울로 와야 했다. 기차값도 할인해 주고, 서울에 여관을 정해 주고, 개인 집도 임시 여관으로 쓰게 했다. 군수나 면장의 인솔로 서울에 온 시골 사람들은 한결같이 보따리들을 들고 있었는데, 이것이 유명한「공진회 보따리」라는 것. 새까만 보따리에서 갖가지 역겨운 냄새가 났는데, 그 뒤 무슨 나쁜 냄새를 풍기는 물건이 있으면『공진회 보따리냐?』빈정거렸다. 「공진회」는 경복궁에서 열렸는데, 당시 총독부에서「공진회」장소로 사용한다고 경복궁을 몰수했다. 진열품도 질이 나쁜 것과 좋은 것을 나란히 놓고, 나쁜 것은 조선 것, 좋은 것은 일제의 시정(施政) 때문에 잘 된 것이라고 선전했다. 경복궁 안에는 야외극장, 요정, 대중식당 등이 갖춰져 있었고 야외극장에서는「서커스」, 노래, 춤 등으로 관객의 흥을 돋우었다. 요정이라는 것은 서울의 유명한 요정들의 임시 출장소. 명월관(明月館) 출장소, 장춘관 출장소, 혜천관(惠泉館) 출장소 등이 나와 있었다. 대중식당에서는 장국밥, 설렁탕, 추탕 등을 팔았고 식권도 나누어 주었다. 농산물, 견직물, 농기구, 원서, 고서 등이 진열되었고 농악대가 장내를 돌아다니며 꽹과리와 피리를 불어댔다. 관람자수 1백 16만 4천여, 출품인원 1만 8천 9백여 명. 변사(辯士)의 신명에 넋 잃고 경복궁의 호화판 조선박람회 1929년의「조선박람회」. 가장 크고 호화로운 박람회였다는 이 박람회는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경복궁의 작은 건물들을 헐어버리고 진열했다. 그때도 지금처럼 복권을 팔아서 관객을 모았다. 특등이 자동차(「호로)형 자동차) 그리고 광목, 소, 유성기, 사진기, 과자,「아사히」(朝日)담배 등의 상품이 구미를 돋우었다. 이만규(李晩珪)라는 사람이 자동차를 탔는데, 그것을 1천원에 팔아서「실컷 두들겨 먹고」집도 한 채 장만했다. 박람회 사무실에서는 신문기자들에게 2천원씩 주었고, 어떤 기자는 그 돈을 기금으로『삼천리』라는 잡지를 내기도 했다고. 장내에는 야외 영화관이 있어서 서양영화(주로 서부활극)를 상영. 무성영화였으므로 서상호(徐相昊), 성동호(成東鎬) 등 일류 변사들이 열을 올리고 있었다.『앞에 가는 자동차는 악당의 자동차, 뒤에 가는 자동차는 순사의 자동차…』또는『그때였다, 바람처럼 나타난 사나이가 있었으니…』 그밖에『춘향전』,『심청전』,『배따라기』등,「구식연극」을 했고,「무도장」이라는 데서는 칼을 휘두르며 소리치는 일본 무사춤 등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농악과 함께 볼만했던 것은 봉산탈춤, 산대놀이 등의 가면무(假面舞). 당시『배따라기』와『항장무(項壯舞)』를 춘 조선 기생 백운선(白雲仙)은 지금도 7순의 나이로 살아있다. 8·15를 4년쯤 앞둔 1941년께에 동대문 밖 제기동 벌판에서 소규모의 박람회를 열기도 했으나, 그때는 소위 대동아전쟁 이후 일본이 피곤했을 때이므로 빈약했다. 그 후 우리 손으로 연 박람회가 1962년 4월부터 6월까지 열린 군사혁명 1주년기념「산업박람회」. 그리고 지금의「무역박람회」에 이른다. <宗> [ 선데이서울 68년 9/29 제1권 제2호 ]
  • 7억원 어치 황금의 배를 몰고 온 사나이

    7억원 어치 황금의 배를 몰고 온 사나이

    자유를 보상 받은 방진호(方震昊)「총좌(總佐)」의 현주소는 전쟁이 한창 막바지에 이른 1950년 10월 14일 새벽 - 인천 앞바다에는 자욱한 아내를 헤치면서 북괴기가 펄럭이는 50「톤」급 발동선 한 척이 소리없이 미끄러져 들어왔다. 갑판 위에는 괴뢰군 총좌(대령급) 한 사람을 둘러싸고 20명의 북괴장교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대한민국 만세」를 목청이 터져라 소리쳐 부르고 있었다. 자유를 찾아 남하한 조그마한 발동선. 그러나 이 발동선에는 시가 7억원 상당의 금괴 1「톤」반이 실려 있는 황금의 배였다. 18년 전 영웅, 오늘은 왕초(王草) 거부(巨富)의 꿈 대신「평애원장(平愛院長)」 괴뢰군 방진호 총좌. 부하장교 20명과 황금덩어리를 싣고 자유를 찾았던 이 영웅은 자기와 자기 부하가 자유를 찾은 대신 황금은 몽땅 대한민국 정부에 바쳤다. 그러나 정부는 이 영웅의 값진 행위에 보답하기 위해 1억 3천만환(현화 1천 3백만원)을 보상금으로 지급했다. 1억 3천만환의 거액을 쥐고 거부의 꿈을 지닌 채 한때 군에서 문관으로 있다가 53년 가을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 버린 지난 날의 영웅 방진호 총좌는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오늘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경기도 평택군 송탄읍 신장(新場)리 경부선철도 연변에 30채의 집이 오밀조밀하게 들어서 있는 평애원. 고아원겸 양로원인 이곳에서 넝마주이 왕초라는 별명을 가진 50대의 허수룩한 한 사나이가 조용히 과거를 되씹으며 살아가고 있다. 평애원 원장인 이 사나이 - 이 사람이 바로 황금의 배와 부하장교 20명을 데리고 자유를 찾았던 지난 날의 영웅 방진호씨(49)이다. 1억 3천만환의 보상금 태풍 사라호로 일장춘몽 한때 거부의 꿈을 지니고 전남 목포 근해에서 간석지를 막아 염전을 만들었지만 예기치 않았던 「사라」호 태풍으로 방대한 염전을 하루 아침에 잃어버린 채 알거지가 되어버린 방씨. 그 후 이곳에서 넝마주이들을 모아 스스로 넝마주이 왕초로 전락(?)해버린 이 사나이의 기구한 운명은 글자 그대로 파란만장의 연속이다. 평안북도 신의주가 고향인 방씨는 해방 전 만주국 안동현(安東縣)에서 측량학원을 수료한 뒤 집안현(輯安縣)의 건설국 기사로 취직, 기구한 운명의 첫발을 내디뎠다.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누렸던 방씨는 그곳 요릿집에 자주 드나들면서 요릿집 종업원「요리명」이라는 중국 사나이와 친히 사귀기 시작했다. 타향에서의 고독도 풀 겸「요리명」과 술자리도 같이하여 손님과 종업원의 관계가 아닌 서로의 심금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친구가 되어버린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이국땅에서 해방을 맞은 방씨에게는「요리명」을 사귄 덕분으로 하루 아침에 큼직한 감투가 굴러들어왔다. 며칠 전까지 요릿집 종업원 행세를 하던 중국 공산당의 거물「요리명」이 집안현 수석(首席)의 자리에 있으면서 방씨를 집안현 평양변사처장(平壤辯事處長:영사)으로 임명한 것이다. 벼락감투를 뒤집어 쓴 방씨는 46년 2월 평양에 부임했다가 그 해 11월에는 소위 북조선인민위원회 조직에 관여, 평양철도경비사령부 총책 유경수(柳慶洙)중장(김일성의 매부)의 부책(副責)으로 중용되었다. 그 후 괴뢰정권의 내무성 정치보위부 직속기관인 진남포(鎭南浦)제련소 총책으로 영전한 방씨는 6·25 동란을 이 자리에서 맞았다. 원래부터 투철한 공산주의 사상자가 아닌 방씨는 차차 자유에의 향수를 느끼기 시작, 기회만 있으면 남하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뜻이 같은 부하장교 20명을 포섭한 방씨는 이왕이면 당시 진남포제련소에 보관되어 있던 백금 3「톤」, 금 1「톤」반, 수은 70「톤」까지 같이 싣고 자유를 찾기로 결심했다. 드디어 50년 10월 한창 패주에 정신 없던 괴뢰정권은 방총좌에게 진남포제련소의 금과 수은을 만주 여순(旅順)으로 운반하라는 긴급지시문을 띄웠다. 이 지시문을 받은 방총좌는 때가 왔다고 느꼈다. 3개월 전부터 탈출 모의를 진행해오던 부하 20명과 비밀회의를 거듭한 끝에 D「데이」를 10월 10일 밤 11시로 정했다. 10월 10일 밤 11시. 칠흑같이 어두운 진남포 부두에는 50「톤」급 발동선 2척이「엔진」소리마저 죽여가며 조용히 와 닿았다. 북괴 경비병 10여 명의 엄중한 감시 아래 한 척에는 황금 1「톤」반이 실려지고는 또 한 척에는 백금 3「톤」과 수은 70「톤」이 실려졌다. 방총좌와 부하장교 20명은 황금이 실린 앞배에 탔다. 배 두 척이 진남포항을 벗어나 망망한 서해에 들어서서 한 시간쯤. 선수를 중공방면으로 막 돌리려는 찰나. 방총좌는 선장의 뒷머리에 권총을 갖다 대고 조용히 그러나 엄숙하게 명령했다. 『선수를 남쪽으로 돌려라!』 이 때 경비병 10여명이 반항, 조그마한 발동선에선 교전이 벌어졌다. 20분만에 싸움은 방총좌의 승리로 끝나고 10여명의 경비병은 서해에 수장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해전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총격 소리를 들은 북괴경비정 한 척이 추격, 또다시 해상총격전이 벌어졌다. 간신히 경비정의 추격을 벗어나 연평도 앞바다에 도달했을 때 수은과 백금을 실었던 뒷배가 총탄에 구멍이 뚫려 애쓴 보람도 없이 바다 깊숙이 수장되어 버렸다. 진남포를 떠난 지 나흘 만에 방총좌는 수은과 백금은 바다에 수장되었지만 부하장교 20명과 황금 1「톤」반을 이끌고 무사히 목마르게 그리던 자유를 찾은 것이다. 53년 봄 1억 3천만환의 거액을 쥔 북괴총좌가 아닌 민간인 방진호씨는 거부의 꿈을 안은 채 전남 목포 근해에서 간석지를 막아 염전을 만들었지만 4년간의 피땀나는 노력도「사라」호 태풍으로 일장춘몽 빈털터리가 되어버렸다. 수장(水葬)한 백금 3톤 수은 70톤 꼭 찾고 말겠다는 게 소원 돈하고는 인연이 없는 방씨. 이때부터 인생을 덤으로 생각한 방씨는 남을 위해 살기로 작정했다. 57년 가을 무작정 찾아온 것이 지금 그가 살고 있는 경기도 평택군 송탄읍 신장리 일명「쑥고개」라는 미(美)기지촌 주변이었다. 방씨는 우선 손수 흙벽돌을 찍어 경부선 철도연변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거리에서 방황하는 걸인 20명을 수용했다. 1개월이 지난 뒤 평애원이라는 간판이 내걸리고 식구도 1백여 명으로 불어났다. 11년이 지난 오늘날 평애원은 30채의 집이 들어섰고 식구도 372명으로 불어났으며, 평택과 방성(彭城) 두 곳에는 분원도 마련됐다. 그 동안 이곳을 거쳐간 원생 중에는 현역 육군대위가 있는가 하면 수백만원을 치부한 어엿한 실업가도 10여명이나 된다는 것. 원장으로 보다는 넝마주이 왕초로 더 알려진 방씨. 방씨의 유일한 소원은 자유를 찾아 남하하던 당시 연평도 앞바다에 아깝게 수장되어버린 백금 3「톤」을 꼭 찾고 말겠다는 것이다. <수원 = 한의교(韓義敎)씨> [ 선데이서울 68년 10/13 제1권 제4호 ]
  • 美 작전계획 포기? 정상회담 미봉책?

    한·미 양국은 북한 내 급변사태시 대응 방안을 담은 ‘개념계획 5029’를 ‘작전계획’으로 격상시키지 않고, 개념계획 차원에서 보완·발전시켜 나가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개념계획을 발전시킬 경우 부대의 전개나 병력 이동 등 작전계획에 포함되는 내용도 다룰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오는 11일로 예정된 양국 정상회담을 앞둔 ‘미봉책’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개념계획으로만 보완·발전’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아안보회의에 참석한 윤광웅 국방장관과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은 4일 국방장관 회담을 갖고, 한반도 우발상황에 대비한 개념계획 5029를 작전계획으로 격상시키지 않고 관련 규정과 절차에 따라 보완·발전시켜 나가기로 했다. 이에 따라 국방부는 이달 안에 우발상황에 대한 전략지침을 한·미 군사위원회(MC·Military Committee)에 전달하기로 했으며, 양국 합참의장을 수석 대표로 하는 군사위에서 구체화해 나가기로 했다. 일단 양국 간의 합의는 한국측의 제안을 미국이 수용한 형국이다. 한국 정부는 그동안 북한 급변사태시 연합사의 대응 방안을 담은 개념계획을 작계로 바꾸려는 미측의 계획이 한국의 주권을 침해할 요소가 있다며 반대 입장을 분명하게 밝혀 왔다. 북한의 남침이 아닌 내부 소요사태나 정권 붕괴, 대규모 탈북사태 등 북한 내부의 문제에 연합사가 개입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양국은 이같은 우발상황 발생시 신속하게 실행할 수 있는 수준까지 개념계획을 발전시키기로 의견 접근을 이룬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신속한 대응을 위해서는 군사력 운용 방안 마련이 필수적인 만큼, 이 과정에서 미측과의 갈등이 재연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에 따라 일각에서는 양국이 정상회담을 앞두고 이견을 봉합한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양국 정상이 최대 현안인 북핵문제 해결에 전념할 수 있도록 다른 문제는 일단 접어뒀다는 해석인 것이다. ●개념계획, 작전계획 뭐가 다른가 작전계획(OPLAN)은 특정 상황 발생시 각급 부대의 군사력 운용 방안까지를 담고 있는 군사적인 시나리오다. 즉 개념계획(CONPLAN)을 좀더 구체화한 것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작전계획으로 발전시키지 않고, 개념계획으로만 유지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북한을 미수복지역이 아닌 연합사 관할지역으로 인식하고 있는 미측의 입장을 감안할 때, 신속한 대응을 위해서는 군사력 운용 방안 마련이 필수여서 북한 내부 급변사태에 대한 한·미간의 입장 차가 완전 해소됐다고 보기에는 미흡하다. 조승진기자 redtrain@seoul.co.kr
  • 美·日, 中겨냥 ‘공동작전’ 짠다

    |도쿄 이춘규특파원|주일미군 재배치 문제를 협의 중인 미국과 일본 정부가 일본 유사시를 대비한 ‘공동작전계획’과 일본 주변사태의 발생을 상정한 ‘상호협력계획’ 작성에 본격 착수할 방침이라고 아사히신문이 12일 보도했다. 공동작전계획과 상호협력계획은 한반도 유사시와 중국-타이완간 양안전쟁 발발 등 일본 주변사태 발생시 일본 정부가 미군에 제공할 공항과 항만, 민간시설 지정이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고 신문은 전했다. 양국 실무진들은 이같은 방침에 이미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미국의 군사전략에 본격 참가함으로써 예상되는 미군 지원에 대한 부담 증가와 중국의 반발 등을 의식해 소극적으로 대처해 왔으나, 지난 2월 양국 외무ㆍ국방장관회담인 안전보장협의위원회(2+2)에서 공통전략 목표에 합의한 이후 빠른 진전을 보이고 있다. 양국은 미군 재배치 문제를 공통전략 목표 설정→역할 및 임무분담→개별기지 재배치 등 3단계로 나눠 추진하기로 했으며 현재 2단계인 역할 및 임무 분담을 협의 중이다.6월에 열리는 안전보장협의위원회에서 공동문서를 교환한 후 공동작전계획과 상호협력계획을 본격 추진할 계획이다. 그러나 양국이 타이완 사태에 대한 군사작전계획을 수립한 것은 처음이어서 중국의 강한 반발이 예상된다. 리자오싱 중국 외교부장은 최근 “일본은 군사·안보면에서 타이완 문제에 말려들지 않기를 희망한다.”고 경고한 바 있다. 양국은 한반도 유사시에 대비해 이미 ‘5055’라는 작전계획은 작성해 놓고 있다. 미·일 양국이 이처럼 계획 작성을 서두르는 데는 북한 핵문제의 악화가 깔려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물론 미·일 양국간에 이견도 예상된다. 일본 정부는 유사시 미군이 사용할 수 있는 시설을 미리 정해 놓아 미군기지 부담을 경감하고, 기지 수도 줄일 생각이지만 미국측은 오키나와 주둔 미군 해병대기지를 포함, 기지 축소는 어렵다는 입장에 변함이 없다. taein@seoul.co.kr
  • [기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게 하자/최원호 한국교육상담연구원장·명예논설위원

    우리나라 학부모의 최대 관심사는 물을 것도 없이 자녀의 진학문제이다. 한국사회의 구조적 병폐 중 하나가, 학벌지상주의라는 사실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요즘 들어 거의 종교적 신념에 가깝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어느 분야에서든 자녀가 1등이 되기를 바라는 ‘신념’은 최근 내신 반영비율 강화로 부정적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그대로 말해주고 있다.1등을 위해 발버둥치다가 채 꽃을 피워보기도 전에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아이들이 잇따르는 것은 성적제일주의의 교육사회가 낳은 기형적인 현상이다. 통상적으로 자녀가 대학을 진학하는 시기는 부모의 중년기와 맞물린다. 그리하여 대학진학은 부모의 인생을 중간평가하는 객관적인 요인이 되기도 한다. 자녀가 일류대학에 입학하면 부모로서는 영광이요 주변 사람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며, 자녀가 하위권 대학에 입학하거나 아예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면 무슨 죄인이나 된 것처럼 풀 죽어 있어야 하는 것이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그러나 진심으로 자녀의 장래를 염려하는 부모라면 아이의 관점에 서서 최소한 10년 후의 인생을 그려볼 줄 알아야 한다. 자녀의 적성과 흥미가 배제된 명문대학 입학은 대학에 진학했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것은 자녀의 입장에서 보자면 몸에 맞지 않는, 당장이라도 벗어던지고 싶은 재킷을 걸쳐 입은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자녀의 적성과 흥미가 철저히 배제된 진학은 언젠가는 삶의 본질을 빗나가게 하는 걸림돌이 되어 다양한 부정적 현상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자신의 적성과 흥미위주의 진로결정이 아닌, 수능시험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교육제도의 불합리와 명문대학을 강요하는 부모의 기대는 가치관의 위협으로 여겨진다. 로봇과 같은 삶은 경쟁적이고 기계적인 생활 속으로 빠져드는 자신의 모습에서 정체감의 혼란을 초래한다. 삶의 존재 이유와 의미를 상실하고, 주변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한 데 따른 심리적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여 최후의 현실도피를 선택하게 된다. 자신에 대한 가치평가의 기준을 높이기보다, 이제는 더 이상의 어떤 가치조차 발휘할 수 없다고 하는 자기부정적인 이미지를 대체할 만한 자신감을 높여주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변사람들의 지나친 기대를 줄여주는 대신, 자기가 가장 즐거워하며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할 수 있도록 진로선택의 비상구를 마련해 줘야 한다. 자녀의 성격이나 능력은 어느 누구보다도 부모가 더 잘 알고 있다. 직업이 요구하는 직업적인 성격이 있듯이, 자녀가 가장 잘할 수 있고 또한 하고 싶어하는 능력에 맞는 그 일은 자녀의 성격과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죽어도 일등인 사회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기뻐하고, 삶의 보람을 느낄 줄 아는 사람으로 길러내기 위한 우리 모두의 교육혁신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최원호 한국교육상담연구원장·명예논설위원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6) 정감록, 언제 누가 썼나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6) 정감록, 언제 누가 썼나

    ‘정감록’이 수백년 동안 인기를 누려왔다는 점은 이미 여러 차례 말했다. 그런데도 막상 언제, 누가 정감록을 썼냐고 물으면 딱 부러지게 대답하는 사람이 없다. 정감록은 조선왕조의 멸망을 예언한 책자라 왕조 말까지 금서(禁書)였고, 그래서 저작에 관해 참조될 만한 기록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럼, 우리는 정감록의 저자와 출현 시기를 하나도 알 수 없단 말인가? 여러 해 전부터 나는 이 문제를 풀어보려고 고심했다.‘조선왕조실록’,‘비변사등록’,‘승정원일기’ 등 조선시대의 정사를 샅샅이 뒤지며 여러 가지로 궁리해보았다. 이제는 정감록이 언제, 어디서 나왔는지를 답할 수 있게 됐다. 이 글에선 정감록의 기원에 관해 다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가졌는지를 먼저 살펴보고, 이어서 그 문제에 대한 내 생각을 말해보겠다. ●선조22년 정여립 역모사건이 기원? 처음으로 정감록을 학문적 연구대상으로 삼았던 이는 이능화다. 그는 선조 22년(1589)에 발생한 정여립의 역모 사건을 ‘정감록’의 기원으로 간주했다. 이능화의 저서 ‘조선기독교급 외교사(朝鮮基督敎及 外交史)’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정여립은 뜻을 잃고 나라를 원망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계룡산에 갔다가 반란할 마음을 적은 시(反詩)를 지어서 자기의 뜻을 보였다. 그리고 장차 나무 아들(木子, 즉 이씨)이 망하고 전읍(奠邑, 즉 정씨)이 일어난다는 노랫말을 지어서 퍼뜨렸으며, 스스로 그에 응하였다. 이것이 정감록에 관한 주장의 시초가 된다.”요컨대 정여립이 계룡산에서 지은 ‘반시’에서 정감록이 시작됐다는 말이 된다. 일제시기엔 정감록의 기원을 좀 더 분명하게 밝히려고 노력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애써 찾아낸 답도 근거가 불명확하기는 마찬가지였다.1923년 도쿄(東京)에서 간행된 ‘정감록비결집록(鄭鑑錄秘訣集錄)’을 보면 그 사정이 다음과 같이 요약되어 있다. “그 저자에 대하여도 항간의 주장은 구구하다. 어떤 사람은 삼봉 정도전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승려인 무학(無學, 또는 舞鶴)이라고도 한다. 무학은 고려 말의 뛰어난 승려였다. 조선의 태조가 무학을 존경하고 숭배하였던 것은 고려의 태조가 도선(道宣 또는 道詵이라고도 함)을 대우한 것과 비슷하였다. 조선 태조는 도읍을 한양에 정하였는데, 사실은 무학의 결정을 따른 것이었다. 무학의 비석은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에 있다. 결국 오늘날에 와서는 그것이 누구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인지를 입증할 수 없다.” 정감록의 작자와 출현 시기에 관한 논의는 최근까지도 별로 진척되지 못했다. 오리무중(五里霧中)이라고나 할까.1973년 안춘근은 현재 남아 있는 정감록의 이본들을 대대적으로 수집 정리하여 ‘정감록집성(鄭鑑錄集成)’을 간행했다. 그는 정감록의 저자를 확인하기가 곤란한 사정을 이런 식으로 요약했다. “작자에 대한 확증은 그것이 사회적으로 파란을 일으키면 일으킬수록 알 수 없게 숨겨질 것이기 때문에 당대는 말할 것도 없고, 시일이 경과할수록 더욱 알기 어려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이 정감록과 같이 허황하면 그럴수록 또 작자는 미궁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전해지고 있는 이른바 술서(術書) 또는 그 밖의 미신과 관련 있는 저작들의 작자는 밝혀지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요, 그것이 밝혀졌다고 하더라도 과학적으로 논증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이 말대로 정감록을 언제, 누가 썼는지를 정확히 알아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조선시대에 금서로 낙인 찍혀 있었던 책이라서 그 사본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베끼는 사람의 개인적인 목적이나 학식에 따라 변형됐을 것은 틀림없다. 내 자신의 연구결과 확인된 사실이지만 역사상 여러 기록에 나와 있는 정감록의 내용은 현재의 정감록과 많은 점에서 달랐다. 어떤 연구자는 정감록이 등장한 시기를 16세기 말 또는 17세기 전반으로 보기도 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사회가 어지러워지자 정감록이 등장했다는 주장이다.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이 주장 역시 뒷받침할 증거는 뚜렷하지 못하다. ●‘정감록’은 고구려 때 나왔다? 학자들의 생각은 그렇다 치고 정감록을 애독한 민중들은 그 저자를 누구라고 생각할까? 1979년 서울시 도봉구 수유동에 살던 강성도(조사 당시 69세) 노인은 정감록의 유래를 이렇게 말했다. “정감록이라고 하는 사람이 상고(上古)에, 뭐라더냐. 고구려 때, 그 때쯤 되었던 모양이라. 응 그 때쯤인데 어디 사람인가 하니 평안도 사람이야. 나면서부터 이 양반은 참 특별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어. 그래서 중국 땅을 한번 시찰로 나갔는데. 이 정감록은 남방의 화직성(火直星, 화성임) 정기를 타고난 사람이야. 이 재주를 당할 재주가 없어. 미래를 다 알고 앉았으니 말이야. 뭐 요새 정감록비전(鄭鑑錄秘傳)이 그런 소리가 있지? 그 정감록이 남긴 책이 그렇지.” 강성도 노인은 정감록의 저자를 고구려 사람 정감록으로 보았다. 정감록을 평안도 출신이라고 못 박은 점도 재밌다. 젊었을 때 누구 못지않게 ‘정감록비전’을 자주 읽었다고 하는 강 노인의 이런 확신이 무엇을 근거로 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강 노인의 견해가 일반의 인식을 대표하는지도 솔직히 의문스럽다. 하지만 구비 전승의 근본적인 성격을 고려해 볼 때 노인의 주장을 완전히 억지주장이라 매도하기도 어렵다. 강 노인 역시 어디선가 그 비슷한 이야기를 읽었든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에게서 전해 들었을 것이다. 말을 바꾸면, 한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정감록’이 삼국시대 고구려에 살던 정감록이란 사람의 저작으로 알려져 왔다는 뜻도 된다. ●‘정감의 참위한 글’을 서로 널리 전하였다 정감록이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것은 언제, 어디서였을까?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보았다. 영조 15년(1739) 음력 8월6일(경진)이었다. 그 날짜 실록엔 정감록의 성격과 그 책에 대한 당시 조정의 입장을 알려주는 중요한 구절이 실려 있다. 정감록에 관해 워낙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어 몇 줄만 그대로 옮겨 보겠다. “이때 서북변방(평안도와 함경도)의 사람들이 ‘정감의 참위한 글’(鄭鑑讖緯之書)을 서로 널리 전하였다. 그래서 조정의 신하들이 그 책을 불살라 금지시키기를 청했다. 아울러 소문의 뿌리를 캐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임금은 말하기를,‘그것이 어찌 진시황이 서적의 소유를 금지한 것과 다르겠는가? 바른 기운(正氣, 유학을 숭상하는 기풍)이 충실하면 나쁜 기운(邪氣)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바른 기운을 북돋우는 데 학문이 아니면 무엇으로 하겠는가?’ 이어서 왕은 수백 마디 말로 훈시하였다.” 방금 읽은 실록 기사는 정감록에 관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것을 한꺼번에 다 거론하기는 어렵겠기에 우선 한 가지 사실만 특히 강조해 둔다. 정감록은 1739년경 황해도, 함경도 및 평안도 지방에 유행했다는 점이다.“이 때 서북 변방의 사람들이 ‘정감의 참위한 글’을 서로 널리 전하였다.”라는 구절로 보아 명백하다. 만일 그 때 ‘정감록’이 전국에 널리 퍼져 있었다면 특히 서북지방이 심하였다는 식으로 기술되었어야 할 것이다. 이미 앞에서 인용한 강 노인의 진술에서도 예언서의 작자가 평안도 사람 정감록이라고 했다. 물론 노인의 이야기를 글자 그대로 다 믿을 수는 없지만 그가 전한 말 가운데는 정감록이 평안도를 비롯한 북부지방에서 처음 등장한 역사적 사실이 반영돼 있다. ●문제의 인물 조유제는 누구? ‘정감록’이 1739년 서북지방에서 출현했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은 또 다른 자료인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실록보다 약 두 달쯤 앞선 그 해 6월15일자 기록에 정감록의 유행에 대해 새로운 단서가 포착된다. “우의정 송인명이 또 아뢰었다.‘정감록(鄭鑑錄), 역년(歷年) 등에 관한 일은 조사에 있어 철저를 기해야 하고 또 엄히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려면 함경감사에게 명령해서 조사 결과를 보고하게 하는 게 옳습니다. 그런데 본사(비변사)에 있는 서류를 살펴보니 조유제(趙裕齊) 등이 아주 밀접하게 관련돼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이름을 차례로 적어가지고 비밀리에 함경도로 내려보내서 수사에 도움을 주면 어떨까 합니다.’ 임금은 그 말대로 하라고 말했다.” 문맥으로 보아 정감록이나 역년은 모두 예언서가 틀림없다. 이들 예언서의 전파에 직접 관여한 이는 조유제로 밝혀져 있다. 전후 관계로 보아 함경도에서 중앙에 보고한 문서 가운데 언급된 사항은 아니다. 함경도 관찰사는 미처 모르고 있는 정보를 비변사가 입수했다는 뜻으로 봐야 된다. 어쩌면 조유제란 이는 예언서나 괴문서를 조작한 전과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만일 그런 사실이 있었더라면 함경도 측이 몰랐을지 의문이다. 내가 짐작하는 마지막 가능성이 하나 더 있다. 당시 서울에 머물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 함경도 사정에 정통한 사람이 있어 비변사에 조유제를 밀고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내 짐작이 옳다 해도 조유제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미해결로 남아 있다. 나는 조유제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고 싶어 실록 등을 검색해 보았으나 도무지 정보가 없다. 좀 더 추측해 보면, 서울의 비변사가 그의 행적을 자세히 파악할 수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어떤 사건에 연좌돼 함경도로 유배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혹은 본래 함경도 사람으로 볼 수도 있다. 이 경우 그 지방에선 이름이 다소 알려진 식자층에 속했을 것이다. 예언서를 저술할 정도라면 상당한 학식을 갖추었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실록에 조유제란 이름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점으로 볼 때, 그의 정치적인 비중은 대단하지 못했다고 여겨진다. ●하필 서북지방에서 ‘정감록’이 출현한 이유는? 조선 왕조는 오랫동안 북부 지방 출신을 차별했다는 것이 큰 문제점으로 지적될 만하다. 조선 왕조를 개창한 이성계가 함경도 출신이었고, 개국공신(開國功臣)들 중에는 함경도와 평안도 출신의 무인(武人)들이 다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왕조는 초창기부터 이들 무인을 박대하였다. 게다가 서북 사람들은 본래 상무적(尙武的) 기질이 강해 문과를 비롯한 과거 시험에서도 성적이 부진했다. 결과적으로 서북인들은 중앙 정계로부터 더욱 소외되었다. 자연히 서북 사람들은 조선왕조에 대한 원망이 컸는데, 이 점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 긴말이 따로 필요 없을 것이다. 새로운 사실을 위주로 간단히 정리해 보면 이러하다. 서북 출신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대우는 20세기 초까지도 서북 출신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돼 있었다. 박은식은 광무 10년(1906)에 창립된 서우학회(西友學會)의 기관지 ‘서우(西友)’ 창간호에서 그간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기술할 정도였다. “여러 백년 동안 이른바 서토(西土 평안도와 황해도)의 출신이 우리나라 사람들로부터 어떠한 대우를 받았던가. 책 읽는 선비는 재상 집안의 심부름꾼이요, 일반 평민은 모두 관리배들의 희생물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잘 되었다는 이가 이른바 진사(進士)니 급제(及第) 등으로 붉은 대문(재상의 집)에 찾아가서 종일토록 머리를 숙이고 손님(벼슬을 구하기 위한 비굴한 행동을 말함) 노릇을 하면서 서울의 여관에서 세월을 보내다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수염과 머리카락이 하얗게 새지 않았던가. 이렇게 하여 평생을 그르쳤으니, 뜻을 이루지 못한 이는 진실로 안타깝다 하려니와 설사 뜻을 이루었다고 하는 이라 한들 만족할 만한 지위를 얻은 이가 있었던가.” 또 한 가지. 정감록이 하필 서북지방에서 출현하게 된 데는 서북지방이 악명 높은 유배지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16세기 말부터 시작된 당쟁이 점점 치열해지자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중앙 정객들은 산간 오지가 많은 평안도나 함경도로 유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지금도 우리들에게 익숙한 속담 중에 “내일은 삼수(三水, 함경남도) 갑산(甲山, 함경남도)을 갈지라도.” 라는 표현이 있다. 함경도의 삼수나 갑산 같은 곳으로 유배를 당할망정 지금 당장은 뜻대로 하고 싶다는 말이다. 이 속담이 웅변하듯이 서북지방의 유배지는 누구에게도 최악의 거주 장소였다. 권좌에서 축출돼 서북 변경으로 쫓겨온 정객이라면 현실 정치에 대해 불만이 컸을 것이 당연하다. 그렇지 않아도 지역 차별 정책으로 말미암아 국가에 대한 반발심이 컸던 서북지역에 다수의 불만 정객들이 원한을 품은 채 지내는 실정이었다. 서북지방은 조선왕조의 입장에서 볼 때 일촉즉발의 화염병이었다. 따라서 ‘정감록’처럼 “민심을 현혹시키는” 예언서가 서북 지방에서 출현하게 된 것은 역사적으로 보아 필연이 아니었을까? 앞에서 나는 비변사등록에서 정감록 사건의 관련자로 거론된 조유제를 유배객 또는 지방 양반으로 추정했다. 바로 그와 같이 불우한 인사들이 예언서를 조작하고 유포하였을 것이다. ●나라를 원망하는 뜻이 꺾인(怨國失志) 사람들 손에서 탄생 정감록이 실제 출현한 시기는 1739년보다 앞섰는지도 모른다. 예언서란 것이 민간에 남몰래 유행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조정에서 문제로 삼기 전에 이미 항간에 유포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다만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점은 정감록이 역사기록에 처음 등장한 것이 1739년이었다는 사실이다. 달리 말해, 그 때부터 조선왕조는 정감록을 문제의 책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우리가 읽어본 실록 기사를 되새겨 보면, 정감록은 “참위(讖緯)”라고 했다. 이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왕조의 정치적 운명에 관한 예언서란 뜻인데, 왕조의 뜻에 반하는 예언서라서 문제가 된 것이다. 이런 예언서는 당시의 정치적 현실에 불만을 가진 세력들이 조작하고 유포했다고 봐야 한다. 일찍이 이능화는 그 점을 아주 적절하게 표현했다. “정감록은 나라를 원망하는 뜻을 잃은 무리(怨國失志)의 손에서 나온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당쟁에서 실패한 사람들과 애써 관직을 구하던 선비들이 조선 왕조를 전복시키고자 할 때면 반드시 정감록의 예언에 의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감’은 가공인물인가 역사적 인물인가 이 지점에서 나는 한 가지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싶어진다. 실록에선 ‘정감록’을 “정감의 참위한 글”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당시 조정은 정감이란 사람을 예언자 또는 정감록의 저자로 인식하였다는 뜻이 된다. 정감은 과연 누구였을까? 그는 가공인물인가 또는 역사적 인물인가? (푸른역사연구소 소장)
  • [클릭 이슈] ‘작계 5029’ 한미 최대 갈등요인 부상

    [클릭 이슈] ‘작계 5029’ 한미 최대 갈등요인 부상

    북한의 소요 등 급변사태 등을 상정한 한·미 연합사령부의 ‘작전계획 5029’문제가 한·미 양국간 최대 갈등 요인으로 부상하고 있다. 한·미연합사가 업그레이드시켜 오던 이 작전계획에 대해 한국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제동을 걸면서, 작계 수립작업은 중단된 상태이다. ●北급변 대비 非전시 군사작전 계획 북한 내부에 급변사태가 발생할 경우에 대비한 한·미 양국군의 군사 작전계획이 ‘작계 5029’다. 미국이 갖고 있는 수 개의 작계 가운데 유일한 비(非)전시 대비계획이다. 일종의 ‘전쟁 이외의 군사작전(MOOT W)계획’에 속하는 셈이다. 대체로 4∼5가지의 시나리오를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의 군부 쿠데타는 물론 주민들의 폭동, 내전 등이 발생할 경우 한·미 양국 군은 북한에 진입하지 않되, 북측의 소요가 남으로 확산되지 않도록 ‘봉쇄’에 주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북한내 반군 등이 대량살상무기(WMD)를 탈취해 유사시 사용하겠다고 위협하는 상황이나, 대량 탈북난민 등에 대한 대책 등도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함께 북한이 북한지역 내 한국인들을 인질로 잡을 경우 구출작전을 펴는 방안과 북한에서의 인도주의적 지원 방안도 담겨져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정부 관계자는 전했다. ●미군에 군사작전권 넘어가 전쟁이 아닌 급변사태때 한·미 연합사의 역할에 관한 사항이 견해 차의 핵심이다. 현재의 작계 5029는 북한지역에 혼란상황이 발생해 한국군이 북한에 들어가야 할 경우 연합사가 이 문제를 결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는 것. 하지만 이 규정에는 엄연한 주권침해적 요소가 있다는 게 NSC 입장이다. 남침이 아닌 상황에서 연합사의 개입은 법적 근거가 약하다는 것. 이와 함께 군 일각에서는 기본적으로 양국간 북한지역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차도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즉 한국군은 북한지역을 ‘미(未)수복 지역’으로 보는 반면, 미군측은 ‘연합사 관할지역’으로 본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작계는 북한에서 정변이 발생하면 한국군은 방어준비태세인 ‘데프콘 3’을 발령하게 돼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데프콘 3 이상의 준비태세가 발령되면, 전시 대비체제로 전환돼 군사작전권도 미군으로 자동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 경우 미수복 지역인 북한지역에서 미국 정부와 미군이 연합사 관할지역이라는 합법적인 작전 근거를 갖고 전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NSC측은 주권 침해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미측은 한국의 이런 입장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작계는 양국이 1990년대 중반부터 논의해 왔으며,1999년 ‘개념계획(CON-PLAN) 5029’를 완성했다. 이어 2003년엔 양국 합참의장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한·미 군사위원회(MCM)에서도 합의했다. 당초 미군의 관여를 어느 정도 인정했다가 뒤늦게 왜 입장을 바꾸냐는 게 미측의 의구심인 셈이다. 이를 인식한 듯 윤광웅 국방장관은 최근 국회 국방위 답변에서 ”필요하다면 미 국방부와 이 문제를 다시 논의할수 있다.”고 언급했다. 미측은 이와 함께 극도의 보안이 요구되는 군의 작전계획이 대외에 공개된 경위에 대해서도 한국 정부에 불만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주말 윤 장관을 방문한 리언 J 러포트 한·미연합사령관도 미측의 불편한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국방부는 NSC의 이같은 기조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 논의가 어렵다며 미측과의 실무협상도 사실상 중단한 상태이다. ●한반도 관련 작계들 작전계획의 경우 내용은 물론 존재여부도 군사 기밀사항으로 다뤄진다. 하지만 그동안 작계의 존재 여부나 내용에 대해 부분적으로 공개돼 왔다. 지난 2003년 미국의 군사전문 웹사이트인 글로벌 시큐리티(www.globalsecurity.org)는 미국이 한반도 전쟁을 가상해 수립한 작전계획을 요약해 공개한 바 있다. 특히 그해 3월엔 북한이 남침할 경우, 격퇴 후 전면전을 벌인다는 계획을 공개해 파문이 일기도 했다. 한반도와 관련된 미국의 작전계획에는 한반도를 의미하는 미군의 암호인 ‘50’으로 시작되며, 이들 작전은 모두 미 태평양사령부가 주관한다. 대부분의 작계는 1∼2년마다 수정·보완된다. 예컨대 ‘5029-05’의 ‘05’처럼 작계 뒤에 붙는 두 자리 수는 수정·보완된 연도를 의미한다. 미측은 북한과 관련해 공중전(5026)과 전면전(5027), 전쟁 예비단계로의 교란작전(5030) 등 몇몇 상황을 가상해 작계를 수립해 둔 것으로 알려진 상태이다. 조승진기자 redtrain@seoul.co.kr
  • 尹 국방 카자흐 방문 전격 취소한 까닭은?

    尹 국방 카자흐 방문 전격 취소한 까닭은?

    국방부가 오는 18∼20일로 예정됐던 윤광웅 장관의 카자흐스탄 방문 일정을 느닷없이 취소해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盧대통령에 월북어선 보고위해” 국방부는 15일 “해외 순방 중인 노무현 대통령에게 최근 월북한 어선 ‘황만호’ 사건에 대한 현안 보고를 위해 18일부터 예정됐던 카자흐스탄 방문을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이어 “현지 우리 대사를 통해 카자흐스탄측에 방문 연기에 대한 양해 서신을 보냈다.”며 “카자흐스탄에 이어지는 러시아 방문은 20∼23일 당초 일정대로 이뤄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같은 국방부의 결정은 외교 관례상 큰 ‘결례’로, 쉽게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이와는 별도로 군 일각에는 윤 장관이 한미 연합사의 ‘작전계획 5029(북한 급변사태시 군사적 대처 방안)’ 등 한·미 양국간 안보 현안 때문에 해외출장을 취소한 게 아니냐는 관측도 있다. 작전계획 문제의 경우 워낙 폭발성이 큰 사안이어서 자칫 잘못될 경우 한·미간 갈등이 최고 위험수위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진짜이유는 한·미작전계획 갈등” 특히 터키를 방문 중인 노무현 대통령이 17일 국내 친미주의자들이 지나치게 편향된 사고를 갖고 있다고 ‘쓴소리’를 해 미묘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대통령의 발언이 작전계획 5029를 비롯, 전쟁예비물자 폐기,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등 현안을 놓고 한·미간에 첨예한 이견이 불거진 상황을 겨냥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의 발언과 리언 J 러포트 주한미군사령관이 지난주 말 윤 국방장관 등 한국군 수뇌부를 잇달아 방문한 사실 등 몇가지 이례적 움직임이 윤 국방의 돌연한 카자흐스탄 방문 취소와 무관치 않다는 관측이다. 조승진기자 redtrain@seoul.co.kr
  • 盧대통령 “미국인보다 더 친미적 사고 문제”

    盧대통령 “미국인보다 더 친미적 사고 문제”

    터키를 공식 방문 중인 노무현 대통령은 17일(한국시간) “한국사람이면 한국사람답게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이스탄불에서 동포간담회를 갖고 “한국 국민들 중 미국 사람보다 더 친미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는 게 내게는 걱정스럽고 가장 힘들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노 대통령의 이같은 언급은 한국의 동북아 균형자론, 북한의 급변사태에 대비한 ‘작전계획 5029’ 등과 관련해 최근 한·미간에 이상기류가 일고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나왔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노 대통령은 “한국과 미국은 이전에 비해 관계가 약간씩 바뀌고 있는 건 사실이나 한·미동맹에는 전혀 이상이 없다.”면서 “(한·미동맹이)조정되고 있고 한국의 발언권이 조금씩 높아져 가고 있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한·미동맹을 이끌어 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미국 사람이 보는 아시아 질서와 한국사람이 보는 의견이 잘 조율돼야 한다.”면서 “합리적인 판단을 해야 하고 판단이 비슷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것을 위해 끊임없이 미국측과 대화를 하고 있다.”면서 “다를 수밖에 없는 조건이 있지만 의견일치를 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무조건 한국이 하자는 대로 기대하기 어렵고, 미국이 하자는 대로 하는 게 우리에게 맞지도 않는다.”면서 “북핵문제와 한·미동맹은 대단히 정치적인 문제인 만큼 제게 맡겨달라.”고 당부했다. 노 대통령은 8박9일 동안의 독일 터키 방문 일정을 마치고 18일 오전 서울공항으로 귀국한다. 박정현기자 jhpark@seoul.co.kr
  • 형소법에 또 막힌 수사권조정

    형소법에 또 막힌 수사권조정

    검찰이 경찰의 수사를 지휘하는 근거 조항인 형사소송법 195,196조를 놓고 검·경이 공청회에서 설전을 벌였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1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검·경 수사권 조정에 관한 공청회’에는 김종빈 검찰총장과 허준영 경찰청장 등 검·경 관계자 500여명이 참석, 불꽃튀는 공방전을 펼쳤다. 공청회장은 주장이 첨예하게 맞서 한때 고성이 오가는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다. 검사의 수사지휘권을 명시한 형소법 개정 문제는 검·경 수사권 조정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사항이다. 검·경은 그동안 내란과 외환·살인 등 12개 중요범죄와 사회적 이목을 끄는 사건 등은 검찰이, 기타 사건은 경찰이 맡기로 합의했지만 형소법 개정에서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태세다. ●경찰 “일제의 유물 개정은 시대적 요구” 김학배 경찰청 기획수사심의관은 “검·경 관계를 지휘와 복종관계로 규정한 형소법을 그대로 두는 것은 근본 해결책을 회피하는 것”이라면서 “일제의 유물인 형소법을 개정하는 것은 더 미룰 수 없는 시대적 요구”라고 말했다. 경찰측 조정자문위원인 서보학 경희대 교수는 “범죄 수사의 97%를 경찰이 처리함에도 경찰이 검찰에 종속돼 있는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없다.”면서 “한 기관이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하는 것은 권력 비대화의 측면에서 득보다 실이 많다.”고 주장했다. ●검찰 “경찰의 편파·청탁수사 감시해야” 그러나 검찰은 관련 조항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경찰이 절도·강도·살인 등의 수사를 전담하는 대신 인권 침해 등 문제가 발생했을 때 검찰이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제발표자로 나선 서경대 정웅석 교수는 “‘지존파 사건’이나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은 경찰이 단순 교통·변사사건으로 끝내려던 것을 검찰이 적극적으로 수사, 진실을 밝혀냈다.”고 지적했다. 그는 “수사를 맡는 사법경찰은 전체의 10%인 1만 6000명에 불과하다.”면서 “검사의 수사지휘권을 완전 배제하면 행정 경찰인 간부들이 인사권 등을 빌미로 부당한 압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주덕 변호사도 경찰의 수사 오류와 인권침해 문제를 지적했다. 김 변호사는 “2003년 경찰 의견이 검찰에서 바뀐 경우가 8.8%인 16만 9390건이고, 경찰이 피의자를 긴급체포하고도 영장을 청구하지 않은 비율이 33.1%에 이른다.”면서 “검찰이 계속 경찰의 편파 수사를 감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검 수사정책기획단장 김회재 검사는 “경찰 수사권 독립의 실체는 ‘치안’과 ‘사정’을 독점, 검사를 배제해 사법경찰이 행정경찰을 장악하려는 의도”라면서 “이는 국민을 도외시한 경찰의 이기주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맞서 경찰측은 “권력에 기생해 인권을 탄압하는 수사를 한 것은 검찰도 만만찮다.”고 되받아쳤다. 이 과정에서 방청석에서는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합의안 대통령령으로 우선 시행하자” 현실적인 타협점을 마련하자는 의견도 제시됐다. 서울대 조국 교수는 “수사권은 헌법이 아니라 법률상의 문제”라면서 “형소법이 개정되지 않는다면 합의사항을 대통령령으로 시행한 이후 앞으로 형소법을 개정하는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이미 여러 부분에 합의했는데도 형소법 문제로 시간만 끌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자문위는 이달 18일 한번 더 회의를 연 뒤 권고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유영규 정은주 이효용기자 whoami@seoul.co.kr
  • [클릭 세상속으로] 시각장애우에 TV읽어주는 사람

    [클릭 세상속으로] 시각장애우에 TV읽어주는 사람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면서 5분만 눈을 감아 보세요. 시각장애인들의 심정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겁니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TV를 ‘읽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휴대전화로도 어디서든 고화질 화면을 감상할 수 있는 시대라지만, 시각장애인들에게는 TV조차 여전히 ‘그림의 떡’이기 때문이다. ●시각장애인에게 실감나게 화면 설명 정년:“성. 매복이야.” 장보고:“물때가 바뀔 때까지 최대한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성우:“해안은 순식간에 피와 살점이 튀는 치열한 싸움터로 변한다. 많은 호위무사가 상처를 입거나 죽어 넘어진다. 해적의 공격은 잔인하고 위협적이다. 장보고가 출중한 검 실력으로 몇 명의 해적을 베어 나가는 사이 염장도 호위무사들의 숨통을 끊어 놓는다. 그러던 장보고와 염장은 어느새 간격을 좁혀 서로에게 칼날을 들이댄다.” 25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KBS 본관 4층 녹음실. 모니터에서는 인기 드라마의 결투장면이 비치고, 장면마다 설명을 덧붙이는 성우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일제시대 유랑극단의 변사처럼 동작 하나하나에 토를 다는 것이 우스꽝스럽게 들릴지 모르지만, 성우의 내레이션이 없다면 시각장애인들에겐 긴박한 결투신도, 애틋한 러브신도 ‘침묵의 연속’일 뿐이다. 화면 해설방송 작가 서수진(30·여)씨는 “3분이 넘는 전투신은 일반 시청자에겐 멋지고 박진감 넘치는 장면이지만, 시각장애인에겐 비명소리와 칼소리, 말발굽 소리만 들리는 지루하기 이를 데 없는 시간”이라고 설명했다. ●한 장면 설명위해 사흘밤 새기도 화면 해설방송이란 시각장애인을 위해 화면의 내용을 음성으로 제공하는 서비스를 말한다. 기존의 방송분에 음성신호를 추가하기 때문에 별도의 수신기(DVS·Descriptive Video Service)를 설치해야 한다. 이미 만들어진 방송에 단순히 설명만 덧붙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작업은 그리 녹록지 않다. 사물에 대한 정보가 없는 시각장애인에게 화면 내용을 실감나게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대본 작성에서부터 애를 먹는다.70분짜리 드라마 한 편의 해설원고를 쓰는 데 7시간 이상 걸리기 일쑤다. 작가 겸 성우인 장현정(35·여)씨는 가장 어려웠던 작품으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꼽았다. 장씨는 “마지막 전투장면에서 이성을 잃은 형(장동건)이 동생(원빈)을 알아보지 못하고, 몇 분 동안 괴성을 지르고 싸우는 장면이 계속되는데 정말 난감했다.”고 털어놨다. 장씨는 이 장면 하나를 설명하려고 사흘 밤을 새웠다고 한다. 완성된 대본으로 화면에 맞춰 녹음하는 작업도 쉽지 않아 며칠씩 밤샘작업을 해야 한다. 꼭 설명이 들어가야 하는 화면이 있지만 장면전환이 빠르거나 대사 간격이 짧을 때는 몇 차례씩 수정을 반복해야 한다. 스튜디오를 제공하는 KBS 미디어 홍유선(52) 차장은 “지나치게 설명이 잦아도 드라마 감상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설명의 양과 길이를 적절히 조절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대사가 없는 5∼6초 사이에 3초 정도의 해설을 넣는 과정은 마치 칼로 재단을 하는 것처럼 정교함이 필요한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1주일에 드라마 7편 서비스…내달부터 추가 편성 국내 화면 해설방송은 아직 걸음마 단계다. 사단법인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음성정보센터가 2001년 4월 행정자치부의 지원을 받아 ‘전원일기’를 방송하기 시작했지만 재정적 어려움으로 2년 만에 중단됐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4월 방송위원회의 도움으로 서비스를 재개,1주일에 3개 방송사 드라마 7편을 내보내고 있다. 새달부터는 방송 3사가 매달 영화 1편, 매주 드라마 또는 비드라마 1편씩을 추가 편성한다. 낮시간대 재방송이 대부분이다. 시각장애인연합회가 국고지원을 받아 전국에 무료 보급한 수신기는 3300여대에 불과하다. 시각장애인이 30만명 이상으로 추산되는 현실에 비하면 턱없는 수준이다.PD 역할을 하는 황유선(35·여)씨는 “미국 등에서는 일반 방송시간에 화면 해설방송을 주당 4시간 이상 방영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면서 “장애인들이 문화를 누릴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지원을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신기 보급 문의는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02)9500-114.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서울대 법대 백충현 명예교수 인터뷰 전문

    서울신문은 일본 시마네현 의회가 ‘다케시마의 날’ 조례안을 통과시킨 16일 국제법 전문가인 서울대 법대 백충현 명예교수로 부터 조례의 부당성,우리 영토인 독도의 법적 근거,향후 우리의 대응 등에 대해 인터뷰했다. 다음은 인터뷰 내용 전문이다. -영토 문제는 우리나 일본이나 내부에 서 쉽게 하나로 의견이 통일된다.그 러다보니 학술적으로는 국민 감정을 어떻게 할 수는 없다. -먼저 시마네현 조례안 통과에 대해서 말해보자.시마네현 영토편입 문제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지역 차 원에서 할 것이 아니다.시마네현 관할에 들어왔다는 조례를 만들 수 있는 전제는 독도가 일본정부의 영토이어야 하는 것이다.1905년 1월 28일 일본 중앙정부에서 독도를 영토에 편입했다.영토편입이라는 것이 무엇이 냐.이전에는 독도가 자신들의 영토가 아니었으니까 영토를 편입하는 것 아니겠느냐.즉 당시 1월 28일 영토 편입은 이전까지는 독도가 자신의 영토가 아니었다는 것을 얘기한다.그러므로 이 문제는 전제가 이미 모순이었고,때문에 시마네현이라는 한 지역에서 따질 문제가 아니다.예전에 일본의 한 학술회의에서 학자들이 당시 현대국제법에 맞게 고치기 위해서 일본 영토로 편입한 것이라고 주장하길래 “그럼 일본은 독도 말고 다른 섬은 없느냐.다른 섬은 왜 당시 영토편입을 논하지 않았느냐.”고 따지니 아무 대답도 못했던 적이 있다. -그럼 일본의 것이 아니면 누구의 것이냐는 문제를 따져보자.일본 것이 아니라고 해서 꼭 한국 것이라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먼저 최소한 제3국의 것은 아니어야 한다.이제까지 독도와 관련한 문제에서 일본과 한국을 제외한 나라는 영토권을 주장하는 나라가 없다.그래서 독도는 일본과 한국의 문제다. -다음은 한국의 영토인 근거에 대해 따져보자.먼저 고문서상의 문제다.서 기 512년 신라의 영토로 처음 독도를 포함한 우산국이 등장한 이후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면서 영토 승계가 됐다는 것이 실록이나 한·일 고지도에 적혀 있다.거기에는 양국 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다음은 무주지(無主地) 선점론이다.일본은 1849년 프랑스 선박에 의해서 독도가 발견됐을 때 ‘량꿔(liancourt·1849년 독도를 발견한 프랑스 포경선)도 영토 편입 및 대하원’이라는 문서를 만들었다.즉 당시 독도가 이제까지 어느 나라 땅도 아니었으며 먼저 선점하게 되었으니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것이다.하지만 앞서 말했던 고지도나 일본 문서에 이미 일본은 독도가 한국땅에 소속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다수 있다.즉 조선의 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영토를 편입한 것은 침략행위가 되고 이는 국제법적인 효력이 없다. -즉 한국의 영토인데 일본이 편입시켰다면 남의 나라 영토를 침략했다는 게 된다.그래서 국제법 위반이다.그럴 때 일본 측이 한국 땅인 줄 몰랐다고 나오는데 우리가 줄기차게 다녔고 지도에도 나왔으니 몰랐다는 건 말도 되지 않는다. -시마네현 영토에 관한 문제를 따져보자.일본에 과거 태정관이라는 우리 총리실에 해당되는 최고기관이 있었다.1877년에 일본 시마네현에서 어부들이 독도 쪽에 어업을 가려한다고 하자 태정관에서 ‘울릉도와 외 1도’는 조선에서 말하는 우산국의 일부이니 신라에 복속된 다음에 계속해서 조선의 영토다.그러니 일본 사람은 가지말라고 명령했다.이는 일본에서 맨 처음으로 유권해석한 것이다.그래서 통항금지시켰다.이는 일본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또 따져봐야 할 문제가 국가가 변할 때는 영토가 같이 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이는 발해가 우리 영토였지만 승계를 못 받아서 지금은 우리 땅이 아닌 것과 같다.하지만 독도는 고려 를 거쳐서 세종실록이라든지 연산군 왕조실록들을 보면 신라시대 때부터 울릉도와 우산이 다같이 우리 영토로서 승계됐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영토로서 증거력을 가지고 왕조실록을 가지고 있다.영토 문제 다루는 비변사에도 기록이 있다.그렇게 이해한다면 우리 조선왕조에는 계속 승계되어 왔다. -일본이 문제삼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1430년 세종 때부터 우리나라가 300년정도 동안 공도정책을 썼던 것이다.공도정책이란 전방에 있는 일부 섬이 조세 면탈자,병역기피자들이 가서 살면서 가끔 외적 침탈의 선봉 이 되기도 해서 아예 그 섬에 사람 들을 살지 못하게 했던 정책이었다.그래서 사람들을 살지 못하게 비워뒀다.당시에는 변방에서 별로 쓸모가 없는 지대였기 때문이다.그러다 1880년대 일본 사람들이 자꾸 거기로 가고 선박이 와서 지도도 만들고 하는 것을 보고선 방치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게 됐다.그러면서 다시 우리 주민들도 많이 들어갔다.우리가 비워 두는 사이에 왜구들이 나무도 베어가고 행패도 부리고 고기도 잡아가고 했었다.그래서 1882년 공도정책을 파기하고 직접 적극적인 관할을 하기로 한다.그래서 적극적으로 관할하려면 도감을 두는 수준보다 격상시켜서 1900년 칙령 41호로 울릉도를 울도로 바꾸고 도감이 관할하지 않고 군수를 두겠다고 한다.울진군과 격상시켜서 독립된 군으로 만든다.이때 독도인 죽도를 석도로 표현한다.일본은 이 공도정책 자체가 영유권 포기라고 주장하는 데 이는 터무니없다.공도정책이라는 정책을 실시했다는 자체가 바로 통치권 행사의 증거다. -또 고종 황제가 우리가 관할하는 지역이니 측량을 하자며 1898년 양지아문을 만든다.서양 지도 전문가를 불러서 지도 전문가 30명을 양성한 뒤 대한여지도와 대한전도를 만든다.1899년 나왔다.그 지도에 울릉도,우산 이렇게 섬이름까지 넣어서 조선 영역을 표시했다.우리 관에서 만든 영토 지도다.고종 황제가 직접 관할하려는 정책으로 전환한 것이다.그래서 우리의 땅을 법령상에 표기한 것이다. -1953년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망뀌에 및 에끄레 후(Minquiers and Ecrehos) 영토분쟁이 있었다.당시 영국의 영토로 결정됐는데 서로의 주장을 가른 근거는 국가가 영토로서 그 주권을 행사한 직접 증거로 입법을 했다든지 행정적 조치를 취했다든지 영토지도를 가지고 있다든지 등의 증거였다.우리에겐 대한전도가 대표적인 영토지도였으며,칙령 41호가 입법조치이다.군수 를 파견한 것이 행정조치이다.즉 우리는 이미 국제사법재판소에 가더라도 충분히 이길 수 있을만한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일본측이 자꾸만 감정적으로 자극하는 조치를 취하는 것은 영토분쟁 지역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키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일본은 1905년 영토 편입도 이미 언급했다시피 영토가 아니기때문에 편입한 것이므로 근거가 되지 못하고 고기잡으러 남의 땅에 간 것이 자기 네 땅이라는 증거도 아니므로 근거가 될 수 없다.일본 국가 기록이 있어야 한다.하지만 막부 시절 다카하시,이 노 등이 만든 지도도 독도가 일본의 영토에 포함된 것이 없다.오히려 적극적으로 조선의 영토라고 표기됐다.보통 일본의 기록 문서나 영토 지도를 볼 때는 독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거나 아예 조선의 영토로 표시되어 있다. -오늘 시마네현이 다케시마의 날을 조 례로 결정한 것은 중앙정부의 불법 조치를 합법조치로 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부당하고 불법하고 효력이 없다.시마네현 문제는 국내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일본은 문서 자료를 자꾸 감추고 있지만 우리 외교부는 25년전 일본 아세아 역사 자료센터에서 입수한 자료를 착실하게 갖추고 있다.결국 일본이 내심으로는 꿀리니까 큰소리치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국제사법재판소에 가면 우 리가 불리하다고 하는데 우리는 국제 사법재판소 가도 근거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그리고 시비건다고 다 국제사법 재판소 가지 않는다.우리는 국제사법 재판소 갈 일이 없다.우리는 100% 우리 것이라는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것 아니냐.일본이 센카쿠열도 등 은 죽어도 자기들 것이니까 국제사법재판소 가자고 말하지 않지 않느냐.일본이 독도 문제에선 유독 국제사법재판소에 가려고 의도하는 것은 결국 독도 문제에선 우리가 우월하다는 점을 인정 하는 것이다. -2차대전 끝나고 나서 대일평화조약 등에서 독도 문제가 거론된 것은 본질이 아니다.대일평화조약은 일본과 연합국과의 조약이지 한국과의 조약이 아니다.당사국인 우리나라가 관여되지 않은 조약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미국이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인식을 가졌다고 하는 건 문제가 없다.2차대전이 발발하지 않았더라도 독도는 우리 것이기 때문에 2차 대전 관련 평화조약과 독도 문제는 관계없다. -물론 지금 정세를 이해는 하지만 이번에 국회에서 너무 감성적으로 ‘독 도 이용 특별법’ 만든다고 하던데 사실 그럴 필요가 없다.우리 땅이면 그냥 갔다오면 되는 것 아니냐.변방 이니까 연평도 등과 같이 국방상의 이유때문에 못갈 수도 있지만 제주도 가는 데도 특별법이 필요하겠느냐.독도를 특별취급할 필요가 없다. -우리 국민정서는 당연히 이해한다.하 지만 이번에 외교부에서도 반기문 장 관이 독도 문제는 영토 문제고 주권 문제니까 거기에 도전하는 것은 한일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강경하게 천명하고 있어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고 봐야한다. -일본이 자꾸 한마디씩 던지는 것은 분쟁으로 이끌어 내려는 전략에 불과하다.일본 측의 한 마디만 나오면 주한 일본대사관에 가서 화형식하고 하면 NHK 등에서 몇 시간식 방영해서 일본 내에서 이용하는 경향도 있다. 물론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감정적으로만 대응해서는 안된다. -지금 국민적으로 감정이 격앙되고 있는데 물론 그 감정도 어느 정도 필요한 게 사실이다.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할 일만 해두면 된다.국제사법 재판소에 가게 될 경우를 대비해 아주 적극적으로 준비해야 할 필요가 있다.국가의 영유권에 관한 조사도 하고 충분히 준비하면 일본이 이길 수 있는 근거는 없다.
  • 지능형 방화 ‘트릭’을 찾아라

    “불길이 밖에서 안으로 들어왔다고 발화지점이 문 밖이라고 속지 마세요. 전선의 합선흔적이 피해자의 시체에서 불이 시작됐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 10일 춘천시 남산면 LG강촌리조트 대강의실에서는 화재 전문가 80명이 서울경찰청 형사과 이상준 경사의 강의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들은 화재 감식과 수사를 맡은 경찰과 손해보험업계 조사요원으로, 지난 7일부터 닷새간 일정으로 ‘보험범죄 아카데미’에 참석했다. ●‘단순변사’가 ‘살인’으로 판명 이 경사는 지난해 가을 서울에서 ‘단순 화재’가 ‘살인 방화’로 결론난 과정을 설명했다. 다세대주택의 옥탑방에서 불이 나 40대 남성이 사망한 이 사건은 정밀감식을 한 뒤에야 단서가 잡혔다. 큰 불길은 출입문에서 안을 향하고 있었지만, 출입문 근처의 전선에서는 합선된 흔적이 없고, 시체 옆의 전선만 합선된 점이 이상했던 것. 이 경사는 “시체 위에 옷가지와 이불 등이 많이 덮여 있었는데 윗부분의 옷은 타지 않았더라. 누군가 밖으로 나가 출입문 앞에서 한번 더 불을 질렀다.”고 결론지었다. ●양초 녹는 시간 이용해 알리바이 확보 서울 남부경찰서 권동현 경위는 양초로 불을 낸 뒤 녹는 시간을 이용해 알리바이를 조작한 사례를 소개했다. 지난 2003년 8월 관악구 봉천7동 의류제조공장에서 불이 난 뒤 주인이 공장을 폐쇄하고 보험금을 수령한 점에 보험사측이 의문을 제기했다. 처음에는 문이 잠겨 있고 출입자가 없어 단순 누전으로 결론났지만, 경찰 재수사 결과 바닥과 벽 진열장에서 양초묶음이 발견되면서 교묘한 알리바이 ‘트릭’이 드러났다. 주인이 24시간 남짓 탈 수 있는 직경 4㎝의 양초에 불을 붙인 뒤 주변에 실과 천 등을 모아놓고 문을 잠근 채 휴가를 떠난 것. 권 경위는 “2억 3000만원의 채무에 시달리던 주인이 보험금을 노렸다.”고 말하자 ‘수강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춘천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儒林(300)-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儒林(300)-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나는 표석에 새겨진 임방의 시를 묵묵히 읽어 보았다. 이처럼 두향의 무덤은 마치 계주경기에서 바통터치를 하듯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잊혀지지 않고 제를 올리는 것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표석 측면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으로 마무리 짓고 있었다. “…그밖에 영조 때 문인 월암 이광려, 퇴계 후손인 이휘재 등의 시가 있으며, 토정(이것 역시 오기이다) 이지번 선생의 아들 아계 이산해로 하여금 두향의 제를 지내게 하였다. 단성향토문화연구회건립(丹城鄕土文化硏究會建立)” 두향을 위해 추모시를 지은 이광려와 이휘재의 시는 이미 앞에서 전재하였고. 비문에 새겨진 내용으로 보면 향토문화연구회에서 해마다 두향의 추모제를 올려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놓이는 느낌이었다. 아슬아슬하게 맥이 끊어지지 않고 내려온 두향의 추모제가 마침내 향토문화연구회에서 계승하여 이를 지켜나가고 있다면, 그리하여 두향제가 온 마을의 축제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면 이는 다행스러운 일인 것이다. 나는 비닐백 속에서 구내매점에서 사온 소주 한 병을 꺼내들었다. 노산 이은상이 ‘내 비록 풍류랑은 아닐지언정 두향의 무덤 앞에 꽃 한 송이 못 놓고 가는 것이 얼마큼 서운한지 모르겠다.’고 탄식하였던 것처럼 나는 비록 풍류객은 아니지만 마땅히 두향의 무덤 앞에 술 한 잔 바쳐 제향을 올리는 것이 마땅한 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종이컵 속에 술을 한 잔 가득 따르고 나는 그것을 상석 위에 올려놓았다. 문득 송림 속 암벽 사이에 핀 붉은 철쭉꽃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천천히 다가가 활짝 핀 철쭉꽃 한 가지를 꺾어 상석 위에 함께 놓았다. 문득 내 머릿속으로 춘향전에 나오는 판소리 한마당이 기억되어 떠올랐다. 춘향이가 변사또에게 항의하던 노래였던가. 정확히 기억되지는 않지만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충효열녀에 상하 있소. 자세히 들으시오. 기생으로 말하나이다. 충효열녀 없다 하니 낱낱이 아뢰나이다. 해서(海西) 기생 농선이는 동선령에 죽어 있고, 선천 기생은 아이로되 칠거학문 들어 있고, 진주 기생 논개는 우리나라 충렬로서 충렬문에 모셔 놓고 천추향사(千秋享祀) 제사지내며, 청주 기생 화월이는 삼충각에 올라 있고, 평양 기생 월선이도 충렬문에 들어 있고, 안동 기생 일지홍은 생열녀문(生烈女門) 지은 후에 정경가자(貞敬加資) 있사오니 기생을 너무 없이 보지 마옵소서.…” ‘열녀춘향수절가’ 중의 한 구절인 이 판소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기생이라 할지라도 농선이는 우리나라 10대 절경 중 하나인 황해도 구월산 동선령에 묻혀 있고, 진주 기생 논개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이 함락되어 왜장들이 촉석루에서 연회를 베풀 때 왜장의 목을 끌어안고 몸을 던져 순국하였고, 안동 기생 일지홍은 살아있을 때 지은 열녀문에 문무백관 아내의 작호인 정경부인의 품계로 묻혀 있음을 드러내고 있음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두향의 무덤을 바라보며 생각하였다. 두향이도 퇴계를 위해 종신 수절하였다. 불과 9개월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두향은 퇴계만을 사랑하였고 퇴계만을 섬겼다. 퇴계가 풍기군수로 떠나자 신임 사또에게 기적(妓籍)에서 빼달라고 청원하였던 두향. 그리하여 마침내 두향은 관기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었다던가.
  • 시골처녀 억울한 죽음 3년만에 밝혀져…‘DNA의 힘’

    3년 전 취업을 위해 상경했다 실종된 지 두달 만에 한강 하구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20대 여성이 불법 카드 대출업자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했던 사실이 DNA분석 등 첨단수사 기법에 의해 뒤늦게 밝혀졌다. 고모(당시 22세)씨는 충남 예산의 농가 출신으로 2002년초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같은 해 1월 16일 오후 3시쯤 고씨는 생활정보지의 ‘경리사원 모집’광고를 보고 마포구 상수동에 있는 홍모(42)씨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하지만 고씨는 홍씨 책상 위에서 불법 대출관련 서류를 발견하고 홍씨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미 사기사건 등으로 수배 중이었던 홍씨는 고씨가 경찰에 신고할 것을 우려해 사무실 직원을 소개시켜 주겠다며 승용차로 유인했다. 홍씨는 고씨가 차에서 “이런 회사는 다니지 않겠다.”고 말하자 이날 오후 8시쯤 경기 일산 자유로에서 조수석 안전벨트로 고씨의 목을 조르고 흉기로 손목까지 그어 살해한 뒤 개천변에 버리고 달아났다. 고씨의 사체는 실종 두달 만인 같은 해 4월말 경기 김포의 한강 하류에서 심하게 부패된 채 발견됐다. 3년 가까이 미궁에 빠졌던 이 사건은 지난 1월말 경찰이 변사자 고씨의 DNA와 고씨 언니(27)의 DNA가 같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실종 당일 고씨의 행적을 추적한 끝에 전모가 드러났다. 경찰은 당시 고씨가 봤던 생활정보지에 광고를 낸 사람들을 상대로 한달 넘게 탐문 수사를 벌인 끝에 홍씨를 붙잡았다.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는 8일 홍씨에 대해 살인과 사체유기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씨줄날줄] 29만원의 진실/우득정 논설위원

    2003년 4월28일 전두환 전 대통령은 서울지법 서부지원에 진돗개 등 재산목록을 제출하면서 예금채권은 29만 1000원뿐이라고 했다.“돈이 없는데 골프는 어떻게 치느냐.”는 판사의 추궁에 “전직 대통령은 무료”라면서 주변사람들과 자식들이 여행경비와 생활비를 도와준다고 주장했다. 그후 인터넷 포털사이트에는 전씨가 화폐 도안인물로 자리잡은 29만원권 지폐가 등장하고,‘내 전 재산은 29만원뿐’이라는 전씨의 주장은 2003년을 장식한 거짓말 랭킹 5위에 올랐다. 그렇다면 29만원은 어떻게 해서 나온 것일까. 당시 재산목록 제출시한을 앞두고 전씨 측근들이 대책회의를 가졌다고 한다. 어느 정도 ‘성의’를 표시해야만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겠느냐가 핵심 쟁점이었다. 대부분의 측근들은 ‘2억원’정도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씨의 법률대리인인 이양우 변호사가 강력히 반대했다고 한다.‘지금까지 한푼도 없다는 것이 공식 입장이었는데 느닷없이 2억원이 있다고 하면 공연히 의심을 사지 않겠느냐.’는 것이 반대요지였다. 그 결과, 전씨가 사용하지 않는 통장(휴면계좌)들에 남은 잔돈을 합친 29만 1000원이 예금채권의 총액으로 기재됐다는 것이다. 이것이 29만원의 실체다. 그러나 그후 전씨의 부인 이순자씨가 골프 홀인원 기념으로 수백만원짜리 기념식수를 하고 전씨가 연초 세뱃돈으로 100만원을 준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 재산이 29만원뿐이라고 했던 전씨가‘는 단골 수식어가 돼 버렸다. 이 말이 빌미가 되어 전씨의 둘째아들 재용씨의 괴자금 추적과정에서 전씨 비자금 의혹이 다시 불거지면서 이순자씨는 자신의 표현대로 ‘알토란’같은 130억원을 눈물을 쏟으며 남편 대신 헌납해야 했다. ‘배째라’식 대응을 주청했다가 ‘29만원’이라는 역풍을 불러들인 이 변호사에 대해 전씨가 심한 역정을 냈다거나, 이로 인해 이 변호사가 측근 그룹에서 ‘왕따’됐다는 소문도 있다. 하지만 전씨측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노년에 말벗 하나가 아쉬운 전씨가 수십년 측근인 이 변호사를 내치지는 못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검찰이 재산 허위 명시 고발에 대해 무혐의처분을 내렸지만 ‘29만원’은 전씨에 대한 분노를 되살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래서 판단이 중요하다. 우득정 논설위원 djwootk@seoul.co.kr
  • [내 인생의 등대] 서울 노인복지센터 관장 지완 스님

    [내 인생의 등대] 서울 노인복지센터 관장 지완 스님

    하루 3000명이 넘는 노인들이 찾는 종로구 경운동 서울노인복지센터 관장인 지완(48) 스님은 불가(佛家)에 귀의한 종교인답게 ‘지혜’와 ‘자비’라는 두 단어를 화제에 올렸다. 불교에서 말하는 지혜란 부단한 자아성찰을 통해 개인의 삶을 완성하는 것을 말하며, 자비란 주변사람들과 함께 지혜를 갖추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젊은이들은 노년의 모습이 젊은 시절의 행동들이 축적된 것임을 알아야 돼요. 때문에 끊임없이 자기를 반성하는 지혜를 갖춰야 하죠. 노인분들은 지금껏 얻은 삶의 경륜을 주변에 베풀 줄 아는 자비의 마음을 갖춰야 합니다.” 5년째 관장을 맡고 있는 지완 스님은 노인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노인들이 겪는 문제의 1차적 원인은 ‘역할상실’입니다. 이로 인해 고독을 느끼게 되고 경제적으로 열악해지며 결국엔 질병까지 얻게 되는 것이죠. 노인들에게 특정한 역할을 부여해 주는 일이야말로 노인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서울노인복지센터에서 이곳을 찾는 노인들에게 취업이나 자원봉사 알선 등 지속적인 사회참여를 독려한 것도 바로 지완 스님의 이러한 생각때문이었다. 지완 스님은 노인분들이 적극적으로 노년을 즐기고 활용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 조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적어도 서울노인복지센터만큼은 노인들이 의미있는 노후를 만들 수 있도록 최대한 도울 방침이라고 말했다. “불교적 시각에서 보면 노년기는 또 하나의 생명을 잉태해가는 출발점입니다. 노년에 행해지는 생각과 행동은 윤회로 인해 바로 다음 생을 향해 발현하게 될 소중한 유전인자가 된다는 이유에서다. 지완 스님은 센터의 프로그램 중 3세대가 함께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함께하는 자원봉사’를 예로 들며 마지막으로 지혜와 자비에 대해 설명하기도 했다. “가족끼리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프로그램이지만 사실 오히려 가족간의 유대감을 더욱 돈독히 하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젊은이와 노인이 함께 봉사를 하며 지혜와 자비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배우기 때문입니다.” 김기용기자 kiyong@seoul.co.kr
  • [씨줄날줄] 우울증/우득정 논설위원

    인기 여배우 이은주씨의 자살로 오프라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인터넷 블로그도 들끓고 있다.‘이은주’라는 단어가 인터넷 검색어 1위로 떠올랐는가 하면,‘우울함과 발랄함의 불협화음’이라는 등 자살 이유에 대해서도 추측이 무성하다. 우울증과 혈액형과의 함수관계를 묻는 설문조사가 이뤄지는가 하면,‘비상구없는 사회’에 대한 정신분석학적인 글도 게재되고 있다. 엊그제 우울증에 시달리던 20대 주부가 세살배기 아이와 함께 자살했다는 기사가 났을 땐 무덤덤하던 네티즌들이 이처럼 한꺼번에 덤벼드는 것을 보니 인기 연예인의 위력을 새삼 실감케 한다. 이씨가 최근 우울증 상담을 받은 사실이 밝혀지면서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의 90%가 우울증을 앓는다는 세간의 학설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정신과 전문의에 따르면 우울증은 인류를 괴롭하는 열가지 질병 가운데 네번째를 차지할 정도로 무서운 병이라고 한다. 게다가 평생동안 5명 중 1명이 걸릴 수 있을 정도로 발병률도 높다. 유전적인 요인 외에도 ‘IMF 증후군’이라는 용어에서도 확인되듯 후천적 요인도 강하게 작용한다. 결핍상태, 박탈감, 무력감, 분노 등이 인계선을 벗어나면 우울증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얘기다. 우울증을 앓는 환자의 15%는 자살로 생을 마감할 정도로 치사율도 법정 전염병 수준이다. 여성이 남성에 비해 우울증을 앓을 확률이 2배가량 높다고 한다. 우울증의 종류에 ‘산후우울증’‘주부우울증’과 같은 항목이 있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신빙성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정신분석학의 대가인 프로이트조차도 여성의 심리를 ‘미지의 대륙’에 비유하지 않았겠는가. 어느 시인은 인도 여행 중 인간 이하의 삶에도 절망하지 않는 최하층민들을 보면서 힌두교의 윤회설을 떠올렸다고 했다. 힌두교에서 인간이 다시 인간으로 태어날 가능성은 870만분의 1이라고 한다. 로또 1등 당첨확률(814만 5000분의 1)보다 더 낮은 셈이다. 너무나 소중한 인간의 삶이기에 저토록 애착을 갖는 게 아니겠느냐고 상상의 날개를 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1분30초마다 1명이 자살을 시도하고 48분마다 1명이 자살한다. 이유가 우울증이든, 생활고든 주변사람들이 좀더 따뜻한 관심을 갖는다면 ‘자살증가율 세계 1위’라는 오명을 벗을 수 있지 않을까. 우득정 논설위원 djwoot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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