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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린이 책] 져서 억울했던 토끼 “거북, 한 번 더 뛰자”

    [어린이 책] 져서 억울했던 토끼 “거북, 한 번 더 뛰자”

    토선생 거선생/박정섭 글/이육남 그림/사계절/52쪽/1만 3000원 토끼와 거북이 얘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여러 번외 버전도 존재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정설, 자신의 실력만 믿고 늦장 부리던 토끼는 결국 경주에서 패배하고 느리지만 꾸준한 거북이가 승리했다는 스토리를 들으면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그러고 토끼는 그냥 가만 있었을까. 억울해서, 다시 한판 붙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 그림책 ‘토선생 거선생’은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시작한다. 통한의 패배에 눈물 짓던 토선생(토끼)은 거선생(거북이)에게 다시 경주를 제안한다. 뜻밖에 거북이의 무거운 등딱지를 자신이 메겠다는 전제조건도 붙인다. 경주 중반, 아니나 다를까 제 버릇 개 못 준 토선생은 또 잠깐 쉬었다 가는 여유를 부리고 등딱지가 없는 거선생은 추위에 어찌할 바를 모른다. 등딱지를 돌려 달라는 거선생의 간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앞서 가던 토선생은 그만 구덩이에 빠지고 만다. 천둥이 치고 비가 억수같이 퍼부어 구덩이에 점점 물이 차오르는 가운데, 거선생이 다시 나타난다. 인물들 간 대사는 박진감이 넘치고 책 속 그림은 색 없이 먹의 농담과 강약만으로 표현돼 ‘예스럽다’. 토끼와 거북이가 족자 안에 그려진 표지부터 ‘이건 이야기’라는 전제를 자연스럽게 드러냈다. 중간 중간 ‘독자 양반’, ‘작가 양반’을 소환하는 마당극 변사 같은 화자가 등장하는 것도 예스러운 그림과 잘 어울린다. 그림 속에는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주막’, ‘우물가’, ‘씨름’과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도 있다. 아는 사람 눈에만 보이겠지만 이들 그림을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길섶에서] 기억, 옹이/박록삼 논설위원

    서울 광화문광장 한편에 있는 그 나무집 벽면에는 옹이가 빽빽하다. 옹이는 나무에 가지가 난 자리다. 튼튼한 목재로 써야 할 때는 잘 안 쓰곤 한다. 목재의 생채기로 다뤄지며 미관상 아름답지 않게 여기는 탓이다. 하지만 나무가 세월의 켜를 쌓아가며 둘레를 넓히는 동안 옹이 또한 많아질 수밖에 없다. 그만큼 성장했으며, 그만큼 많은 상처와 아픔을 간직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5년 남짓 한국사회 많은 국민들도 그랬다. 저마다 가슴에 옹이 몇 개씩 깊숙이 자람을 의식하며 지내 왔다. 고백컨대 그즈음 마침 한국에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실감이 안 났다. 눈물을 펑펑 쏟다가도 꿈속인 듯했다. 한동안은 가슴에 뭔가 얹힌 듯 시시로 울적했다. 주변사람들과 낄낄대며 술잔 기울이다가도 문득문득 그랬다. 시간이 더 흘러 잊고 지내다 몇 걸음 앞서가는 학생의 가방에서 노란 리본이 흔들거릴 때 다시 마음속을 들여다보니 옹이가 곳곳에 박혀 있었다. 고작 24평짜리 집 하나 짓는데 왜 그처럼 옹이 많은 목재로 지었을까. 잊지 말자는 다짐일 테다. 또 당신 안의, 내 안의 생채기 같은 옹이의 기억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일 테다. 기억과 빛의 공간이다. 훼손하지 말자. 부디 정치를 빼고 순수하게 바라보고 기억했으면 한다.
  • 또 무면허로 카셰어링…고교생, 시속 180㎞로 질주하다 ‘덜컥’

    또 무면허로 카셰어링…고교생, 시속 180㎞로 질주하다 ‘덜컥’

    무면허 고등학생 2명이 ‘카셰어링’(자동차 공유)을 통해 빌린 승용차로 고속도로에서 시속 180㎞ 속도로 질주하다 경찰에 붙잡혔다. 고속도로순찰대 제6지구대는 14일 고등학교 1학년 A(17)군을 무면허 운전, B(17)군을 무면허 운전 방조 혐의로 각각 불구속 입건했다고 밝혔다. A군은 운전자를 직접 만나 확인하지 않고 차를 빌려주는 ‘카셰어링’을 통해 빌린 코나 승용차로 지난 9일 오전 10시 13분쯤 남해고속도로 부산방면 냉정분기점 인근에서 약 30㎞ 구간을 평균 시속 180㎞로 달린 혐의를 받고 있다. A군이 운전한 차량에 친구 B군이 함께 타고 있었다. 경찰에 따르면 이 구간 제한속도는 시속 100㎞로 이들은 30㎞ 거리를 시속 80㎞나 초과해 달린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은 고속도로순찰을 하다 과속 차량을 발견하고 5㎞를 추격한 끝에 A군이 운전하던 승용차를 멈춰 세웠다고 밝혔다. 경찰조사결과 A, B군은 동네 친구 사이로 창녕과 창원에 있는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고, 운전면허 나이 제한으로 면허가 없는 상태였다. 경찰은 이들이 운전을 제대로 배운 적은 없고 주변사람들이 운전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것이 전부여서 자칫 대형 교통사고로 이어질 뻔 했다고 밝혔다. A군 등은 경찰조사에서 “아버지 명의로 카셰어링 서비스를 통해 차를 빌려 부산으로 바람을 쐬러 가다 기분이 좋아져 과속을 했다”고 진술했다. 경찰 관계자는 “카셰어링 서비스에 운전자 신원확인을 강화하는 등의 법률적 보완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창원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괴짜지만… 인간적인 과학자, 다윈

    괴짜지만… 인간적인 과학자, 다윈

    의학·신학보다 자연·생명에만 관심 집 뒷마당서 비둘기 사육 등 ‘바보 실험’ 7명 자녀·주변인들과 소통하며 연구 ‘종의 기원’은 새로운 시각에서 시작신이 자연을 설계했다는 자연신학에 맞선 진화론으로 근대 과학계를 뒤흔든 영국 생물학자 찰스 다윈(1809~1882). 사람들은 그를 ‘위대한 과학자’라 부른다. 심지어 미국 철학자 대니얼 데닛은 다윈을 뉴턴, 아인슈타인보다 더 위대한 사상가로 치켜세운다. 에든버러대에서 의학공부를 한 지 2년도 못 돼 낙향하는가 하면 케임브리지대에서 신학 공부를 하면서도 생명에만 관심을 가졌던 다윈. 그는 어찌 보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문제아이자 이단아였다. 미국 웨스턴캐롤라이나대 생물학 교수인 저자는 지금까지 알려진 다윈보다 더 솔직한 다윈을 추적했다. 오랜 천착의 결실인 이 책을 통해 다윈은 이렇게 정의된다. ‘끊임없이 관찰, 실험하고 주변사람들과 소통한 인간적인 과학자’.비글호에 몸을 싣고 5년여에 걸쳐 진행했던 남아메리카 탐방은 다윈의 인생 행로를 결정지은 단초임에 틀림없다. 다윈은 좁은 선실에서 우상인 찰스 라이멜의 저서 ‘지질학 원리’를 탐독했고 정박지마다 열대림과 해안의 온갖 동식물을 관찰, 채집했다. 19세기 과학계를 뒤집어놓은 진화론의 결정체인 ‘종의 기원’은 바로 갈라파고스를 포함한 그 탐험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종의 기원’을 비롯한 큰 업적이 어디서 발현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책은 다윈이 40년간 살며 위대한 발견을 도출해 낸 다운하우스의 시골집 뒷마당에 현미경을 들이댄다. 그 뒷마당 실험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어떤 이들과 교류하고 고민했는지를 세밀하게 소개한다. 다윈은 아버지로부터 외면당한 과학자다. 줄창 생명과 자연에만 관심을 쏟는 다윈을 향해 아버지는 ‘가족과 네 자신에게 부끄러운 존재가 될 것이다’는 폭언을 했다고 한다. 대신 다윈은 할아버지의 기질을 더 많이 받았다. 영국의 유명 시인 콜리지가 ‘다윈화하기’(darwinizing)라는 단어를 만들만큼 대담한 창의력을 지닌 의사 겸 시인이었던 할아버지 이래즈머스 다윈. 저자는 할아버지의 기질을 물려받아 평범한 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며 숨겨진 의미를 발견하려 한 것이 위대한 ‘종의 기원’의 시작이라고 잘라 말한다. ‘발견을 위한 진정한 항해는 새로운 풍경을 찾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새로운 시각을 갖는 데 있다.’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일갈처럼 다윈은 당대의 주류인 자연신학에 의심을 품고 자연의 진리를 밝히기 위해 실험을 멈추지 않았다. 바로 그 의심과 실험의 역사적 장소가 집 뒷마당 실험실이다. 종의 이동 실험을 위해 오리발로 만든 달팽이 사육장과 갖가지 농도의 소금물 항아리들, 실험용 씨앗을 얻기 위한 잡초 정원, 변이 실험을 위해 만든 따개비밭과 비둘기 사육장….그곳에서 다윈이 진행한 온갖 관찰과 실험 과정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전 세계에서 수집한 비둘기를 키우고 온실에서 덩굴식물을 키우며 아이들과 함께 벌들을 쫓아다닌다. 파리지옥에 손톱과 머리카락을 먹이로 주는가 하면 지렁이에게 합주곡을 들려주는 등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진화론이라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실험했다. 저자는 특히 그 기발하고 독특한 실험이 세상과 동떨어져 혼자만의 연구로 이루어진 게 아님을 강조한다. 7명의 자녀가 다윈 곁에서 언제나 기꺼이 조수 역을 맡았다고 한다. 사촌과 조카는 물론 집사와 가정교사까지 자신의 연구에 끌어들이는 데 능숙했으며 친구와 지인들을 동원해 표본을 구하거나 실험에 필요한 도움을 구했고 동료들에게도 수시로 조언을 받았다. 다윈 자신도 그 실험들을 가리켜 ‘바보실험’이라 부르곤 했다고 밝힌 저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다윈은 한때 새로운 풍경을 찾아 세계를 여행했지만 나머지 시간은 자신의 주변을 새로운 시각으로 살펴보는 법을 터득하면서 보냈다. 우리도 실험가 다윈을 알아 가다 보면 친숙함 속에서도 친숙하지 않은 것을 발견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 “애달픈 국민 위로한 변사, 문화재로 등록 않으면 크나큰 문화 상실”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 “애달픈 국민 위로한 변사, 문화재로 등록 않으면 크나큰 문화 상실”

    마지막 ‘변사’ 생활 30년 최영준이 말하는 ‘목소리 마술사’“인간문화재 등록요? 좋죠! 무성영화 변사가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로 인정받고 계승 발전의 터닝 포인트가 된다면 더 없이 반가운 일이죠. 나라잃은 설움에 가득찬 식민지 백성을 통곡하게 하고 목놓아 아리랑을 노래하며 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던 나운규의 무성영화 ‘아리랑’과 변사는 우리의 아픈 역사 속에서 찬란히 빛을 발했던 문화적 횃불입니다. 변사의 역사가 짧다고요? 제가 마지막 변사가 아닌 새로운 시작을 위한 초석이 될 수 있도록, 국가적으로 방법을 모색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30여년 전 무성영화가 단 한편밖에 남지 않던 시절 사명감 하나로 사재를 털어 변사공연을 이어왔습니. 100년 전통을 가진 무성영화와 변사를 하찮게 여겨 이 시대에 소멸시킨다면 크나큰 문화상실이자 후손에게 잘못이 될 것입니다.”변사, 일제시대 탄생한 광대… 무성영화, 관객에 전달애달픈 대사에 심금 올리는 목소리… 관객 울리고 웃겨 스마트폰으로 누구나 동영상을 만들 수 있고, 영화관에 들어서면 선명한 고화질 화면에 서라운드 음향이 펼쳐지는 디지털시대다. 이런 와중에 무성영화를 해설하고 연기하고 관객을 울리고 웃기는 변사(辯士)가 아직도 활동한다는 사실에 반가움이 끓어올랐다. 호기심으로 수소문한 최영준씨. 자신을 광대(廣大)라고 부르는 그는 한국에서는 유일한 ‘목소리 마술사’라는 변사다. 일제강점기에 시작된 한국영화 백년사에서 빠질 수 없는 무성영화 변사. 애달픈 스토리에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로 세파에 시달린 관객을 웃겼다 울리는 변사. 그러나 유성영화의 등장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변사가 전국을 다니며 전성기를 누리듯 공연을 이어 간다니 그의 애환과 비결을 듣고 싶었다. 지난 3일 최영준씨를 서울 동대문구 장안동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그는 “광대의 나이는 늘 철없는 열 살”이라며 굳이 나이를 밝히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30여년전 우연히 본 ‘검사와 여선생’에 꽂혀신파극 ‘이수일과 심순애’ 제작해 변사로 나서새로운 장르여서 ‘무성영화 변사극’이라 명명”- 변사극에 빠지게 된 계기는. “30여 년 전, 모노드라마 1인극 연극배우로, 인천에서 ‘약장수’, ‘팔불출’을 직접 제작하고 출연해 서울로 진출하였죠. 그 당시 연극의 중심이었던 이대입구 소극장에서 한 작품 당 2년씩, 장장 4년간 장기공연을 마치고 차기작품을 준비하다가…. 우연히 5년 전에 작고하신 변사 신출 선생의 무성영화 ‘검사와 여선생’을 보게 됐어요. 무성영화와 변사를 보는 순간 ‘아, 이거다’ 싶었죠. 제 눈에는 변사가 1인극 배우로, 무성영화는 훌륭한 무대장치로 보였던 겁니다.” 이걸 꼭 해야겠다 마음먹고 그 시절의 다른 흑백무성영화가 또 있는지 찾았다. 당시 한국에 ‘검사와 여선생’ 외에는 무성영화가 단 한편도 없었던 상황. 신파극으로 유명한 ‘이수일과 심순애’를 무성영화로 직접 제작해서 변사로 나섰다. 그때가 1986년. 그 때부터 전국 순회공연과 미국 공연도 갔다. 장르에 대한 구분이 필요해서 그는 직접 장르 이름을 ‘무성영화 변사극’이라고 붙였다. - 무성영화 변사극이란 뭔가요. “문화의 다양성 측면에서 시대를 주도하는 문화가 있다면 시대를 역행하는 문화도 있어야 합니다. 무성영화 변사극은 우리나라 식민지 시절의 아픈 역사 속에서 위로 받고 싶었던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신파극, 악극, 그 시절 대중가요, 흑백 무성영화, 그리고 변사를 새롭게 디자인하여 이 시대의 관객과 함께 어울리고 소통하는 마당극이라는 그릇에 담았습니다. 저의 연출기법이죠. 장르의 융합이랄까, 하이브리드 콘텐츠라고 할 수 있지요. 각기 독립된 장르의 장점을 섞어놓은 비빔밥 같은 장르이니 그 이름을 새롭게 붙인겁니다.” - 다양한 경험을 했는데, 변사 연기에 도움이 되나. “한 우물만 파라는 소리를 참 많이 들었죠. 장르를 넘나드는 ‘크로스 오버’라는 용어가 생소했던 시기에, 저는 늘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며 살아 왔죠. 극단의 허드렛일부터 시작해서 연극배우, 연출, 시나리오 작가, 영화배우, 작사, 작곡, 가수, 개그맨…, 라디오 DJ도 재작년까지 25년간 했습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노래 ‘한국을 빛낸 백명의 위인들’을 부른 가수가 바로 접니다. 글쓰기, 연기, 연출, 노래, 작사, 작곡…. 발표한 음반도 열장이 넘습니다. 음반 한 장에 제가 만든 신곡이 평균 10곡이니 거의 미친 듯이 열정을 쏟아 붓는거죠. 다양한 분야에 도전하는 것이 말이 쉽지 완전히 맨땅에 헤딩 하는거죠. 전사의 심장으로, 독학으로, 가시밭길을 헤쳐 가는 겁니다. 수많은 시행착오가 저의 학습이고 노하우를 터득하는 방법입니다. 파란만장한 제인생의 이런 모든 것이 자양분이 되어 ‘1인36역’의 변사를 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변사극 매력?…관객과 소통, 무성영화와 호흡마당놀이 형식… 관객 호응 일본 영화사도 놀라주 관객은 노령층… 노인 증가에도 콘텐츠 부족”- 무성영화 변사극의 매력은 무엇인가. “관객과 대화하고 함께 얼싸안고 울고 웃는, 접촉을 통한 소통입니다. 쇼도 보고 영화도 보고, 무성영화와 변사의 환상적인 호흡인거죠. 변사의 연기술과 웃음을 주는 애드립은 젊은 관객도 좋아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어르신을 위한 공연입니다. 또한 마당놀이 형식을 도입해서 관객의 적극 참여를 유도합니다. 지난 2월에 일본 마츠다 영화사를 방문하였는데 무성영화 1000편을 보유하고 있더군요. 그러나 변사는 5명 정도가 활동하고 있지만 대중의 주목도가 떨어져 정부의 지원사업에 의지하는 형편이라고 합니다. 제 공연 영상을 보더니 어떻게 이렇게 관객의 호응을 이끌어 내는지 놀라는 반응을 보이며 9월에 초청공연을 갖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일본의 무성영화 상영이 역사적인 콘텐츠의 재연이라면, 저의 무성영화 변사극은 변사와 관객이 함께 어울리고 즐기는 공연입니다. 제가 이렇게 지극히 한국적으로 변사극을 만들고 틀을 잡아 놓으면 후대에 누군가에게는 초석이 되고 디딤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문화 영역이 더욱 확장되는 것이죠.” - 변사극 공연, 지방에서 많이 하던데, 그 이유는. “아무래도 서울 보다 지방이 문화 소외지역이라고 해서 그쪽 문화단체나 지자체에서 많이 초청을 해줍니다. 이게 아날로그 콘텐츠이다 보니 관객층은 주로 저를 알아봐 주시는 어르신들이죠. 그런데, 사실 진짜 문화소외 지역민은 서울에 사는 어르신들이예요. 노인을 위한 구경거리가 없다면서 어쩌다 변사공연을 보시고는 ‘자주 보고 싶다, 많이 아쉽다’고 하시더군요. 우리나라도 노인 인구가 많아지지만 즐길 문화 콘텐츠가 부족하잖아요. 앞으로 방방곡곡 더 많은 공연으로 노인들을 즐겁게 해드리는 것이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좋은 일이고, 저의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시간 넘게 계속된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이 썼다는 미발표곡 ‘목포항’도 불렀고, 조금 뒤에는 ‘목포의 눈물’도 구성진 가락으로 읊조렸다. 아이들 같은 목소리로 동요도 여러차례 불렀다. 물론 변사의 역할을 소개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영화와 유독 인연이 깊다고 했다. 연극배우 시절 극장 개봉영화 ‘엘리베이터 올라타기’, ‘랏쉬’에 주인공으로 출연했고, 개그맨 데뷰 후에는 어린이 영화 십여편에 출연했다. “최근에는 어린이 영화 시나리오 두 편을 썼는데요, 한 편은 지난달에 경주에서 촬영을 마쳤고요, 또 한 편은 8월에 제주도에서 촬영할 예정입니다. 배우들의 대사는 전부 제주도 사투리입니다. 영화음악도 제가 다 작사 작곡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올해가 한국 영화 탄생 100년이 되는 해이다. “변사 배우러 오면 말려…엄청 노력에도 돈은 안 돼그래도 배우겠다면 1인극 ‘팔불출’ 공연하라면 안 와10년 노력해야 제대로 된 변사… ‘노랑목’ 나와야 해”- 변사, 하고 싶다는 사람이 혹시 있나. “가끔씩 찾아옵니다만 제가 말리죠. ‘변사극 쉽지 않다. 떼돈 버는것도 아닌데 노력은 엄청 많이 필요하다.’ 그래도 변사를 해보겠다고 하면 제가 30년 전에 공연했던 모노드라마 ‘팔불출’의 대본과 동영상을 주면서 ‘이 작품, 한번 공연하고 오라’고 합니다. 90분 동안 혼자 공연한 작품이거든요. 그러면 다 기겁을 하고 다시는 찾아오지 않더군요. 변사가 되려면 어느 정도 나이도 있고 타고난 재능에 연기가 익어야 합니다. 부단히 노력해서 한 10년은 해야 제대로 된 변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노랑목이 나와야합니다. 변사 연기의 신의 한수는 노랑목입니다.” - 노랑목?, 이게 뭔가요. “이게 뭐냐하면요, 이난영 선생의 ‘목포의 눈물’을 가만히 들어보시, 모기소리처럼 들릴 듯 말 듯 아주 가녀린 목소리로 노래를 하는데 이 소리가 애달프면서도 심금을 울립니다. 발성이 달라요. 노랑목 연습은 입을 작게 벌리고, 귓가에 속삭이듯 노래하고 말합니다. 그러자면 목구멍을 딱 막아야 합니다. 보통은 목을 열고 말하는데 이건 목구멍을 닫아야 해요. 그래야 비성, 두성 가성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게 됩니다. 변사는 흘러간 옛 노래도 불러야 되고, 모든 배역의 목소리를 연기해야 하는데, 특히 남자 변사가 여자 주인공 목소리를 예쁘게 구사해야 합니다. 노랑목이 가능해지면 실제 여성보다 더 여성스런 목소리, 변성기 이전의 어린아이 같은 예쁜 목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물론 오랜 연습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 언제부터 이런 엔터테이너 소질을 보였나. “제가 어릴 때부터 연극을 시작할 무렵인 20대 중반까지는 내성적이고 말도 없었습니다. 남 앞에 나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연극판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죠. 고등학교 다닐 때 잠깐 연극부에서 활동을 했지만, 처음 극단에서 연기를 시작할 때 연기는 모르고 자의식은 강해서 많이 힘들었죠. 더구나 대학을 조선공학과에 입학했는데 적성이 맞지 않아서 1년 다니다 그만두었으니, 전공이 완전 다른 연극 문외한 이었죠. 그래도 어떻게 하면 연기를 잘할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당시에 최고의 연극배우 이호재씨를 롤모델로 삼았어요. 그때 마침 그 분이 1인극 약장수를 공간사랑 소극장에서 공연했는데, 그 배우의 ‘약장수’ 대사를 전부 몰래 녹음해서 숨구멍은 어디인지, 억양은 어떻게 하는지, 소리는 어떻게 내는지 연구하고 따라했습니다. 그의 공연을 매일 봤고, 그의 대사를 전부 외웠습니다. 그 명배우의 모든 것을 그대로 벤치마킹 한 셈이죠. 그러다가 결국 제가 살던 인천에서 소극장을 만들어서 개관 기념공연으로 최영준 모노드라마를 무대에 올렸습니다. 그때가 20대 후반이었습니다. ‘약장수’에 이어서 ‘팔불출’을 했는데, 한 작품을 2년씩 하루 두번 계속 공연하니 그 작품에 대해서는 도가 트더군요. 그러던 어느날, 서울 서대문 푸른극장에 있는 공연기획사인 ‘태멘’으로 스카우트되어 모노드라마를 푸른극장 지하 말뚝이 소극장에서 계속 했습니다.” - 모노드라마 당시 반응은. “처음 인천에서 할 때는 객석이 텅 비다시피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관객 없이 연습도 하는데 …. 연기 공부를 한다’ 하는 심정으로 독하게 계속하니 나중에는 입소문이 나서 극장이 미어터졌습니다. 그래서 한달에 400만원 줄테니 서울의 말뚝이 소극장에서 하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고 서울로 진출했던 거죠. 당시 선배들이 저를 두고 ‘너같은 어린 놈이 무슨 일인극이야. 일인극은 베테랑들이 하는 거야’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형, 나이 먹으면 힘이 없어서, 체력이 딸려서 못하는 게 일인극이예요’라고 받아치면 선배들이 저보고 ‘저런, 당돌한 녀석’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 “연극배우 이호재가 롤모델…대사 몰래 녹음해 연습고 강계식 선생의 한마디 충고가 신의 계시처럼 꽂혀‘희극 배우는 웃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울릴 줄 알아야’전유성도 고마운 사람… 인맥 동원해 영화도 만들어줘”- 그래도 격려해준 선배는 없었나. “연극배우로 활동하고 계시는 이민재 형이 약장수 공연 당시에 연출을 봐 주셨는데, 저의 연기 개인지도 교사였죠. 연기에 눈을 뜨게 해주신 은인이죠. 변사를 체계적으로 누구에게 배운 적은 없습니다만 강계식, 고설봉 두 분이 생각납니다. 영화계에선 이향, 이런 분들과 신파극 작업을 함께 했습니다. 80년대 초반이니 당시 이분들이 70대를 넘겼거나 80대에 가까웠습니다. 이분들이 신파시대의 마지막 세대예요. 제가 빨리 같이 작업하지 않으면 이분들이 갖고 있는 신파극의 유산을 놓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저는 연기도 연출도 같이 하면서 그분들하고 여러 작품 신파극을 만들면서 ‘이건 뭐예요’, ‘저건 뭡니까’하면서 많이 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강계식 선생이 저보고 ‘여보게 미스터 최, 자넨 말이야, 희극배우야. 희극을 전문으로 연기를 하라는 거야. 근데, 희극배우는 웃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관객을 울릴 줄도 알아야 돼.’라고 하신 말씀이 신의 계시처럼 제게 팍 꽂혔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저는 하염없이 웃기다가 끝에는 관객을 반드시 울립니다. 슬픔으로 끝나야 그게 예술적이라는 거죠. 카타르시스도 있고. 그 당시 신파극에 대한 것을 많이 배우고 터득했죠. 또 한분은 개그맨 전유성씨예요. 어느 날, 저의 무성영화 변사극 계획을 들으시더니 감독을 맡아 주시고 당신의 인맥을 총동원해서 영화도 그럴듯하게 만들어 주시고 제가 변사로 나설수 있도록 해주신 결정적인 귀인이자 은인이죠.” - 우리나라에 변사극 레퍼토리가 많나. 무성영화가 있으면 변사극이 가능한가. “무성영화라고 해서 다 변사극이 될 수는 없습니다. 찰리 채플린의 무성영화는 변사가 없어도 상영할 수 있습니다. 변사의 개입이 필요 없는 그 자체로도 완벽한 영화입니다. 변사극의 무성영화는 반드시 변사가 개입해야 완벽한 조화를 이룹니다. 예컨대 ‘검사와 여선생’을 변사 없이 무성영화로만 상영한다면 이상하고 싱거운 상황이 될 것입니다. 변사는 영화와 관객을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합니다. 변사의 능력이 흥행을 좌우할 정도로 변사극의 핵심입니다. 현재 저의 변사극 레퍼토리는 세편입니다. 1948년작 ‘검사와 여선생(감독 윤대룡) 1986년작 ‘이수일과 심순애’(감독 전유성), 2002년작 ‘나운규의 아리랑’(감독 이두용) 입니다.” - 남기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올해안에 신파극 ‘홍도야 우지마라’를 제가 무성영화로 제작, 감독할 예정입니다. 이수일과 심순애 무성영화에서 시도했던 여러 가지 장치들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킬 생각입니다. 이수일과 심순애의 경우 예를 들면, 변사가 영화속 배우들의 싸움을 말린다. 영화 속 김중배 얼굴에 두루말이 화장지를 던진다. 이수일이 돈을 뿌리는 장면에서 변사도 같은 동작으로 돈을 뿌린다… 등등. ‘홍도야 우지마라’에서는 변사가 영화 화면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쁜놈을 때려주고 화면 밖으로 나오고, 비맞는 영화 속의 홍도에게 변사가 우산을 건네주고, 화면 속 홍도의 편지를 변사가 받아서 홍도 남편에게 건네주는 등의 가상현실 같은 장치를 할 생각입니다. 그러나 애수를 자아내는 장면을 그대로 살려낼 겁니다.” “올해 신파극 ‘홍도야 우지마라’ 무성영화 제작 예정제작비 구애없이 다음 세대 위해 작품 남기는 게 할일언젠가 무성영화 박물관 설립하고 변사 양성하고 싶어”- 무성영화 제작에 큰 돈이 들텐데 제작비 조달은 어떻게 하나. “1억원정도 예상하는데, 변사극 공연으로 벌어서 영화 제작할 돈을 모으고 있습니다. 제작비용이 부담이 되긴 하지만 한 번 만들어 놓으면 손익 분기점이 올 때까지 계속 울궈 먹을수 있으니 그렇게 무식한 투자라고 생각하진 않는거죠. 많은 분들이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면 좋겠다는 요구도 있고요. 다음 세대, 후학들을 위해 제가 살아있는 동안 여러 작품을 남겨놓는 것이 이 시대 마지막 변사로서의 할 일이죠.” -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은. “10년 전, 2009년에 미국 LA에서 공연기획을 하는 이광진씨 초청으로 미국 서부지역 한국교민들을 위해 순회공연을 떠났어요. 서울 촌놈이 샌디에고, 오렌지카운티, LA, 산호세, 샌프란시스코, 시애틀…. 태평양을 따라 죽 거슬러 올라갔죠. 가는 곳마다 대성황이었어요. 마지막으로 미국에서도 오지라는 알래스카에서 공연을 마치고, 공연장 출입구에 서서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하며 관객 배웅을 하는데, 나이 많으신 할머니 한분이 제 손을 꼭 잡으면서 20달러를 차비에 보태 쓰라고 주시는 거예요. ‘마음만 받겠다’고 해도 한사코 주시면서 ‘나, 집에 가고 싶어. 한국에 가고 싶어….’라며 눈물을 글썽이며 돌아가시던 그 할머니의 뒷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 분들에게는 저의 공연이 고국의 추억이며, 그리움이었던 거죠.” 부산에서 태어난 그는 여섯살 무렵 서울로 왔단다. 함경도가 고향인 부모님이 한국전쟁 통에 부산으로 피난 내려온 것이었다. 서울에선 휘문중고를 다니다 아버지의 실직으로 가세가 기울어 인천으로 이사하면서 인천에서 서울로 통학했다. 대학을 그만두는 바람에 배워야 한다며, 지금도 공부를 멈추지 않는 그는 늘 학생의 정신으로 살아간다. “언젠가는, 때가 되면 무성영화 박물관을 만들어 전 세계의 무성영화를 수집, 보관, 상영하고 변사학교를 만들어서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변사를 양성하고 싶습니다. 물론 무성영화 제작도 계속할 겁니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포토] ‘진심어린 위로’하는 추모객…이철규 열사 30주기

    [포토] ‘진심어린 위로’하는 추모객…이철규 열사 30주기

    6일 오전 광주 북구 5·18망월묘지(민족민주열사묘지)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던 중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된 고(故) 이철규 열사의 30주기 추모제가 열린 가운데 한 추모객이 이 열사의 어머니를 위로하고 있다. 연합뉴스
  • 69세 남성 집에서 전라 시체로 발견된 28세 여성

    69세 남성 집에서 전라 시체로 발견된 28세 여성

    28세의 일본인 여성이 어느 부유층 남성의 집에서 전라의 시체로 발견됐다. 28세의 이가라 시유리는 최근 69세의 남성의 집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발견 당시 전라의 상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변사체가 발견된 곳은 유명 부동산 회사의 간부로 일하고 있는 이시하라의 자택. 경찰의 수사 결과 숨진 여성의 몸에서는 치사량의 1000배에 달하는 마약 성분이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가라 시유리는 부유층 남성과 젊은 여성의 만남을 주선하는 속칭 ‘데이팅 클럽’에서 이시하라를 만난 것으로 알려졌으며, 숨진 당일 사망 직전 친구들에게 ‘마약이 섞인 술을 억지로 먹어 어지럽다’등의 메시지를 친구들에게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둘이 만난 것은 회원제 사교클럽을 표명하는 회원제 데이팅 클럽으로 이가라는 도쿄의 고급 환락가인 긴자에서 호스티스로 일해 왔으며 2017년 남성 접대부인 호스트로 일하고 있는 남성과 결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의 언론들은 이시하라가 이가라에게 억지로 마약을 먹여 환각 파티를 벌이려고 하던 중 지나친 마약 복용으로 숨진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일본의 사법 당국은 현재 이시하라를 체포하여 범행을 추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 = 서울신문DB 뉴스부 seoulen@seoul.co.kr
  • 73년 만에 개인 지하실서 찾은 필름… 변사·음악·악극 결합 ‘이색 공연’으로 재탄생

    73년 만에 개인 지하실서 찾은 필름… 변사·음악·악극 결합 ‘이색 공연’으로 재탄생

    원판 9롤 중 1롤은 유실…7롤만 복원돼 英영화협회 특별전서 전세계 관객 만나우리가 1934년작 ‘청춘의 십자로’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소장자는 해방 이후 6·25전쟁 직후까지 단성사를 경영한 사장의 유족이었는데, 그는 모친을 통해 이 필름을 전해 받은 후 줄곧 지하실에서 보관해 왔기 때문이다. 당시 무성영화는 인화성이 강한 질산염(Nitrate) 필름으로 제작되었다. 이러한 필름이 온습도를 적절하게 제어할 수 있는 필름 아카이브의 보존고가 아닌 공간에서 70년 이상 버틴 것이다. 2007년 필자를 포함한 한국영상자료원 조사단은 소장자의 자택에서 이 필름을 처음 만났다. 모두 9롤이었다. 1롤은 ‘끝(完)’ 표시만 있는 자막이었고, 본편인 것으로 추정되는 또 한 롤은 밀가루 반죽처럼 엉겨붙어 검색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른바 백화현상이 발생한 이유는 누군가에 의해 필름 캔이 개봉되어 필름이 밀봉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공기와 만났기 때문이다. 결국 나머지 7롤만 복원에 착수해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버전이 되었다. 유실된 롤에는 줄거리상 영복과 영옥이 시골에서 떠나는 장면이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2012년 ‘청춘의 십자로’의 원판 필름은 등록문화재(제488호)로 지정되어 국가의 문화유산으로 특별히 보존되고 있다. 하지만 ‘청춘의 십자로’의 가치는 보존에만 머물지 않았다. 1930년대의 무성영화 상연 방식을 재현한 변사공연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변사와 음악, 악극이 결합된 ‘청춘의 십자로’ 무대는 2008년 처음 공연된 이래 가장 최근에는 2019년 2월 BFI(영국영화협회)에서 열린 초창기 한국영화 특별전의 개막식 공연까지 50차례 이상 이어지며 전 세계의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청춘의 십자로’의 발굴과 이를 활용한 이색적인 공연은 무성영화의 존재 가치가 과거에만 머물지 않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 ‘흉가 체험’ 유튜버 또 시신 발견…이번엔 울산

    ‘흉가 체험’ 유튜버 또 시신 발견…이번엔 울산

    흉가 체험 등 공포를 소재로 다루는 유튜버가 영상을 찍으려고 수년간 비어있던 건물에 들어갔다가 진짜 시신을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4일 울산 울주경찰서에 따르면 이날 오전 3시쯤 “시신이 있는 것 같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신고자는 인터넷 개인방송을 하는 1인 미디어 활동가(BJ) A(36)씨로 이날 공포체험 생중계 영상을 찍으려고 울주군 상북면에 있는 한 폐쇄된 온천숙박업소 건물 3층 객실에 들어갔다가 시신 1구를 발견했다. 이 건물은 1999년 건축됐으나 부도가 나 이듬해부터 유치권을 행사 중인 곳이다. A씨가 발견한 시신은 백골 상태였다. 인근에서는 변사자의 것으로 보이는 신분증, 날짜(2014년 12월 2일)와 짧은 문장을 적은 메모도 나왔다. 경찰은 이 메모와 신분증 등을 토대로 변사자 사망 당시 50대 후반이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신고를 받고 현장으로 가보니, A씨가 벌벌 떨고 있었다”며 “실제 영상이 생중계되지는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2월에도 30대 유튜버가 흉가 체험을 하다 시신을 발견해 경찰에 신고한 사례가 있다. B(30)씨는 광주 서구의 한 요양병원을 찾았다가 60대 남성 시신을 발견했다. 오래전부터 운영하지 않아 폐건물로 방치된 이 요양병원에는 외부인이 출입할 수 없도록 병원 건물 주변에 철망이 쳐져 있었다. 병원에 풍기는 스산한 분위기는 흉가 체험 방송을 진행하기에 제격이었다. 철망을 넘어 몰래 병원으로 들어간 B씨는 손전등을 이리저리 비추며 비어있는 병원 내부를 돌아다니다 2층 입원실 문을 연 뒤 크게 놀랐다. 입원실 입구 쪽에 내복을 입은 60대 남성이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찰은 이 남성의 시신에서 외부 충격 등 타살 혐의점은 발견하지 못해 노숙하다 사망한 것으로 결론내렸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공포체험 영상 찍던 유튜버, 폐건물서 백골시신 발견

    유튜버가 공포체험 영상을 찍으려고 폐건물에 들어가 진짜 시신을 보고 경찰에 신고했다. 4일 울산 울주경찰서에 따르면 인터넷 개인방송을 하는 1인 미디어 활동가(BJ) A(36)씨가 이날 오전 3시쯤 울주군 상북면의 폐쇄된 온천숙박업소 3층 객실에서 시신 1구를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A씨는 이날 공포체험 영상을 찍으려고 폐건물에 들어간 것으로 확인됐다. 이 건물은 1999년 지어졌으나 부도가 나 이듬해부터 유치권 행사 중인 곳이다. 경찰 조사결과, A씨가 발견한 시신은 백골 상태였다. 인근에서는 변사자의 것으로 보이는 신분증, 날짜(2014년 12월 2일)와 짧은 문장을 적은 메모도 나왔다. 경찰은 이 메모와 신분증 등을 토대로 변사자 사망 당시 50대 후반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신고를 받고 현장으로 가보니 A씨가 벌벌 떨고 있었다”며 “실제 영상이 생중계되지는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울산 박정훈 기자 jhp@seoul.co.kr
  • 부실수사투성이, 묻힐 뻔한 장자연

    부실수사투성이, 묻힐 뻔한 장자연

    배우 장자연씨가 극단적 선택을 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의혹들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당시 5개월에 걸친 검경의 수사가 미진했기 때문이란 지적이 나온다. 수사 착수 당일 진행된 경찰의 압수수색부터 검찰의 최종 처분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의문점들이 발견된다. 사회 유력 인사들이 연루된 사건에서 유독 약한 모습을 보이는 수사 당국이 이 사건을 키운 것 아니냐는 비판이 검찰 과거사 진상조사 결과에 담길지 주목된다. ●57분 압수수색으로 끝나 초기 증거확보 실패 3일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실 등에 따르면 경찰은 2009년 3월 14일 장씨 사망 사건을 자살로 결론 낸 지 6일 만에 재수사에 착수하면서 그날 저녁 대대적인 압수수색을 벌였다. 경기 분당의 장씨 자택도 포함됐다. 법원으로부터 발부받은 영장에는 ‘변사자 장자연의 집’으로 적시돼 있었지만, 경찰은 장씨의 침실만 뒤진 것으로 드러났다. 장씨 집과 차량을 압수수색하는 데 걸린 시간은 57분으로 1시간이 채 안 됐다. 이 과정에서 장씨가 자필로 기록한 수첩, 명함 등 주요 증거들이 누락됐다. 초기 증거 확보 여부가 수사 성패를 좌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셈이다.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 조사 35분에 그쳐 경찰이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하기 직전, 피의자 신분인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을 방문 조사한 것도 논란이 되고 있다. 통상 형사 사건으로 입건된 피의자는 경찰서에 소환돼 조사를 받는데, 지나치게 특혜를 준 것 아니냐는 것이다. 조사 시간도 35분가량으로 형식적 조사에 그쳤다는 지적도 나왔다. ●사라진 1년치 통화기록, 검경 책임 떠넘겨 결정적 단서가 될 수 있는 장씨의 1년치 통화기록도 수사 단계에서 사라졌다. 검찰은 “경찰이 장씨의 5만여건 통화 내역 중 일부만 기록에 첨부했다”고 주장하고, 경찰은 “검찰에 송치하면서 별권(책자)으로 통화 기록을 넘겼다”며 서로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뒤늦게 당시 수사 검사가 통화내역 파일을 갖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지만, 원본 파일과는 달라 증거물로 쓰일 수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피의자들 무혐의 처분… 목격자 진술 배척 경찰이 장씨에 대한 술접대 강요, 방조 혐의를 적용해 기소 의견으로 송치한 피의자들은 검찰 단계에서 전부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검찰은 증거 불충분 등의 이유를 댔다. 하지만 당시 검찰은 일관성 있는 목격자 진술마저 배척한 채 일부 피의자의 허위 진술을 받아들인 것으로 대검찰청 진상조사단의 조사 결과 드러났다. 결국 지난해 5월 공소시효가 남은 사건에 대한 재수사가 있었고 ‘혐의 없음’ 처분을 받았던 기자 출신 조모씨는 한 달 만에 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됐다. 진상조사단 관계자는 “고의로 수사를 축소하거나 미진한 측면도 조사 중”이라고 말했다.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 “범인은 성도착증”…포천 여중생 살인사건, 단서는 빨간 매니큐어

    “범인은 성도착증”…포천 여중생 살인사건, 단서는 빨간 매니큐어

    2004년 2월, 경기도 포천시 도로변 인근의 배수로의 지름 60cm 좁은 배수관 안에서 변사체가 발견됐다. 입구로부터 1.5m 안쪽에 알몸으로 웅크린 채 처참하게 발견된 시신은 석 달 전 실종된 여중생 엄 양이었다. 집에 다 와간다고 엄마와 마지막 통화를 했던 엄 양은, 5분이면 집에 도착할 시골길에서 흔적 없이 증발했고, 96일 만에 차가운 주검으로 돌아왔다. 장기 미제 사건이 된 ‘포천 여중생 매니큐어 살인사건’. 엄 양의 시신은 심한 부패 때문에 사인과 사망 시각을 특정할 수 없었다. 알몸으로 발견됨에 따라 성폭행 피해가 의심됐지만 정액반응은 음성이었고, 눈에 띄는 외상이나 결박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현장에서 나온 유일한 단서는 죽은 엄 양의 손톱과 발톱에 칠해져 있던 빨간 매니큐어였다. 평소 엄 양이 매니큐어를 바르지 않았다는 가족과 친구 진술에 따라 이는 엄 양 사후에 범인이 칠한 것으로 추정됐다. 범인은 엄 양 손톱에 매니큐어를 칠한 후 깎기도 했다. 범인이 남긴 유일한 단서인 붉은 매니큐어. SBS ‘그것이 알고싶다’는 30일 방송을 통해 사건이 벌어진 시기 화장품 매장에서 근무하던 한 여성을 만났다. 이 여성은 당시 자신이 근무하던 매장에서 빨간 매니큐어를 구매한 남성이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한 남성이 매장을 정리하던 자신에게 빨간 매니큐어를 두 개 보여주며 “언니, 뭐가 더 진하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여성은 “아내나 여자 친구의 심부름으로 사갔다면 그런 식으로는 말하지 않았을 거다. 그래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3년 정도 거기서 일을 했는데 그 이후로 빨간색 매니큐어를 사간 남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라고 증언했다. 당시 부검의였던 김윤신 조선대 의대 법의학교실 교수는 “이렇게 어린 여학생의 손톱과 발톱에 아주 빨간 색 매니큐어가 칠해진 사건은 평생 처음”이라며 “상당히 가지런하고 깔끔하게 발라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전문가들은 손·발톱에 빨간색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었다는 점, 유류품 중 교복과 속옷이 발견되지 않은 점 등을 통해 범인이 성도착증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비틀어진 욕망이 굉장히 많이 반영된 시신 같다. 몸 안에서 제삼자의 정액이 나오지 않았다 하여 성범죄가 아니라는 공식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프로파일러 출신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처음부터 의도한 범행의 목적은 성폭행이 아니고 성적인 유린 행위가 아니었을까 싶다. 성적인 쾌감이나 만족감을 얻는 형태의 도착증일 가능성이 점쳐졌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수정 교수는 “이름표를 뗀 것을 보면 여러 가지 가설이 가능하다. 지인관계였기 때문에 피해자를 알 수도 있고 부모님이 알 수도 있고 발견이 쉽게 되지 않도록 위한 노력이었을 수도 있다. 또 피해자 물품을 수집하는 살인범일 수도 있다”라며 면식범이거나 연쇄살인범이라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방송은 성도착증 범죄자 특성상 단독범행 가능성과 초범이 아닐 가능성이 있고, 겉으론 매우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생활을 할 것이라고 추정했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비극과 활극의 만남… 조선인 가슴에 저항정신 불 지르다

    비극과 활극의 만남… 조선인 가슴에 저항정신 불 지르다

    한국 사람이라면 나운규(1902~1937)라는 존재와 ‘아리랑’(1926)이라는 영화 제목을 들어보지 못한 이가 없을 것이다. 한국의 무성영화 시기를 대표하는, 아니 한국영화사 전체를 관통해서도 가장 무게 있는 영화인과 영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리랑’의 필름은 사라졌다. 우리 대부분은 처음 개봉한 지 90년도 훨씬 지난 이 영화를 보지 못했고, 그저 여러 매체를 통해 얼마나 위대한 영화인지 전해들었을 뿐이다. ‘아리랑’은 왜 훌륭한 영화인가. 어쩌면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원로 영화인들의 증언이 쌓여가는 과정에서 신화화된 결과가 아닐까.‘아리랑’을 걸작으로 칭송하는 이유는 바로 일제에 대한 저항 정신을 담아낸 민족 영화라는 평가 때문이다. 어쩌면 이 관점은 맞는 말일 수도 있고 틀린 말일 수도 있다. 애초 나운규가 이 영화를 만든 이유는 조선영화도 미국영화처럼 한번 재미있게 만들어보자는 목적이었다. 당시 조선인들은 더이상 활동사진에 신기해하는 초창기 관객이 아니라 할리우드 영화의 활극적 볼거리와 속도감에 열광하는 영화 팬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리랑’은 개봉하자마자 조선인 관객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고 6·25 전쟁 시기까지 수십 차례 반복 상영되며 영화 자체가 가진 힘을 넘어 사회 현상이 되어버렸다. 과연 ‘아리랑’은 어떤 영화였을까.●일본 신파를 극복하다 먼저 1920년대 전반기 조선영화계를 살펴보자. 조선 극영화의 시작은 ‘월하의 맹서’(1923)를 만든 윤백남의 역할이었지만 이후 조선영화를 주도한 감독은 윤백남의 조감독을 맡았던 이경손(1905~1977)이었다. 그는 고대소설을 영화화한 ‘심청전’(1925)으로 감독 데뷔해 이광수의 동명 원작을 영화화한 ‘개척자’(1925)로 인정받았다. 이 시기 조선영화 제작은 초창기의 활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춘향전’(1923), ‘장화홍련전’(1924), ‘운영전’(1925) 등 고대소설을 영화화하는 것으로, 즉 조선 사람이 조선 옷을 입고 활동사진에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관객이 몰려들던 시기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 이경손은 일본영화를 모델로 삼아 상업적인 노선을 모색하는데 일본 신파 ‘곤지키야샤’(金色夜叉)를 번안한 ‘장한몽’(1926), 일본 시대극 영화를 참조한 ‘산채왕’(1926)이 그것이다. 두 영화는 당시 일본 신파소설을 번안하던 조중환과 이경손이 함께 설립한 계림영화협회가 제작했다. 이 시기 조선은 일본 문화의 강력하고 직접적인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조선영화 역시 ‘나의 죄’(己が罪)가 원작인 ‘쌍옥루 전후편’(1925), ‘새장 속의 새’(籠の鳥)를 각색한 ‘농중조’(1926) 등 일본 신파의 조선적 번안이 대세였다. 이처럼 연애비극이나 가정비극을 다루는 신파 서사는 식민지 조선영화의 기본적 설정으로 안착하게 된다.나운규의 ‘아리랑’이 특별한 점은 일본 신파영화의 화법을 받아들인 시기에 등장한 영화였지만 그 영화들과는 다른 방향을 찾았다는 것이다. ‘아리랑’이 어떤 의도로 만든 영화인지는 나운규의 운명 전 해인 1936년 그가 남긴 기록을 통해 파악해 볼 수 있다. 바로 ‘조선영화감독 고심담 아리랑을 만들 때’(‘조선영화’ 제1집)라는 글이다. “그 당시에 조선에 오는 양화(洋畵)를 보면 수(數)로는 서부활극이 전성시대요 또 대작연발시대다. 그리피스의 ‘폭풍의 고아들’(1921)을 보던 관중은 참다 못하여 발을 굴렀고 더글러스의 ‘로빈 후드’(1922)는 조선 관객의 손바닥을 아프게 하였다.” 나운규가 미국영화의 “대작연발시대”를 강조한 것처럼, 당시 조선인 관객들은 화려한 볼거리와 물량 공세, 또 스케일 큰 액션 장면이 긴장감을 자아내는 할리우드 영화에 열광했고, 이에 익숙해지면서 영화의 감식안도 높아져갔다. 관객들의 취향을 포착한 나운규는 ‘아리랑’을 만들기 직전 선배 감독 이경손에게 “화나는데 서양사람 흉내를 내서 한 작품 만들어봅시다”라고 말했고, 어떻게 하면 “하품 나는 조선영화”를 탈피할 수 있을까, 조선영화를 다시 살려낼 수 있을까 고민을 거듭했다. ‘아리랑’이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서구영화의 창조적 수용 연출의 기회를 잡은 나운규는 할리우드 활극 스타일을 연출 방향으로 잡고, 어떻게 하면 서구식의 활극 장면을 경제적으로 연출할 것인지에 집중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조선 사람들의 감정을 쥐락펴락하는 스토리까지 고안해냈다. 대중적 화법인 신파 양식을 기반으로 비극과 활극을 직조한 동시에 조선의 식민지적 상황을 상징과 비유가 담긴 이야기로 녹여 민족적 감정을 건드린 것이다. 가장 핵심은 ‘아리랑’이 나운규의 오리지널 스토리라는 점이다. 당시 “전 조선영화를 통하여 가장 우수한 장면”(‘동아일보’ 1926년 10월 7일자)으로 기록된 사막 장면은 단연 영화의 압권이다. 한 나그네(나운규)가 여자(신일선)를 취하려는 악마 같은 상인을 살해한 장면은 주인공 영진(나운규)이 여동생 영희(신일선)를 겁탈하려는 지주의 하수인 기호를 환상 속에서 살해하는 것으로 정확히 반복된다. 광인의 내면세계를 일그러진 세트로 시각화해 보여준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20) 같은 독일 표현주의 영화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나운규는 할리우드 활극뿐만 아니라 유럽 예술영화 등 동시기 서구영화의 여러 요소를 포착하고 자신만의 것으로 소화해 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또 작품의 인물 구도도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영화 속 지주도 그 하수인도 조선인이라는 설정이지만 돈으로 민중을 괴롭히는 자본가 계급의 폭압적 행태를 당시 조선인 관객들이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는 짐작 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아리랑’은 민족영화가 되었고, 조선 무성영화의 대표작으로 한국영화사의 신전에 올랐다.●아리랑의 실제 감독은 누구일까 ‘아리랑’ 개봉 당시 이 영화의 감독은 쓰모리 슈이치(한국 이름 김창선)라는 일본인으로 기록되었다. 이 영화의 실제 감독에 대한 논란을 일으킨 결정적인 부분이다. 하지만 우리는 당 시 재조선 일본인의 자본과 기술 그리고 조선영화인의 협업으로 구축되었던 조선영화 제작현장을 감안해야 한다. ‘아리랑’을 제작한 영화사는 일본인 흥행사 요도 도라조의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인데, 그의 조카 사위 쓰모리 슈이치가 실질적인 운영을 맡았다. 현대 영화의 프로듀서 역할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는 조선키네마의 첫 번째 영화 ‘농중조’와 ‘아리랑’ 개봉 당시 감독 크레디트로 이름을 올렸다. 흥미로운 점은 이후의 문헌들은 두 영화의 감독으로 각각 조선영화인 이규설과 나운규를 기록하는 것이다.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당시 제작 현장에서 일본인이 감독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조선인 관객들을 위한 각본을 쓰고, 무성영화이지만 동작 연기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던 배우들의 조선어 대사 연기를 지도한 것은 조선인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무성영화의 논리상 그들의 입에서 발성되어야 할 대사는 변사의 음성에서 들리게 된다). 다시 ‘아리랑’으로 돌아가면 쓰모리가 설령 크레디트상의 감독직을 맡았더라도 각본을 쓰고 실질적인 연출을 진행한 나운규의 공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후 나운규는 계속해서 요도 도라조의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을 통해 ‘풍운아’(1926), ‘야서(들쥐)’(1927), ‘금붕어’(1927)라는 활극멜로드라마를 그의 이름으로 연출했다. 그리고 나운규프로덕션을 세워 ‘사랑을 찾아서’(1928) 등 자신의 감독 및 주연작을 이어 나간다. ●조선 무성영화 황금기 이끌다 마지막으로 ‘아리랑’이 이후 조선 무성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점을 언급해야 한다. 먼저 지주와 소작민, 그 사이 희생양이 되는 젊은 여성이라는 계급구도에 기반한 서사와 활극이 더 선명하게 앞으로 나서는 스타일이 이후 조선영화의 상업적 기준이 된 점이다. 또 일제 치하의 식민지적 현실을 드러내고 저항의 관념을 싣는 수단, 즉 계급 운동으로서의 영화를 지향하는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진영의 영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카프 진영과는 거리를 두었지만 소설가 심훈의 감독 데뷔작 ‘먼동이 틀 때’(1928)는 단연 ‘아리랑’의 적자라고 할 수 있다.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 조선인 손으로 만든 ‘장화홍련전’… 첫 상업영화 시대 열다

    조선인 손으로 만든 ‘장화홍련전’… 첫 상업영화 시대 열다

    1920년대 전반, 드디어 조선 영화는 무성영화 시대의 막을 올렸다. 연쇄극 ‘의리적 구토’로 조선 영화의 첫발을 뗀 1919년부터 조선 무성영화의 대표작 ‘아리랑’이 개봉한 1926년 이전의 시기, 조선 영화계는 어떤 영화들을 만들면서 무성영화 시대를 개척해 갔을까. 주목할 부분은 식민지와 제국 구도에서 조선인들만으로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 수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일제강점 아래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당국의 정책뿐 아니라 재조선 일본인의 자본과 끊임없이 협상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물론 조선인 관객들을 위한 영화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은, 조선의 이야기를 다루는 조선인 감독의 연출과 조선 사람을 연기하는 조선인 배우들의 연기였다. 이 지점이 조선의 무성영화가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었던 셈이다.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서’(1923), 일본인 흥행사가 제작한 최초의 상업영화 ‘춘향전’(1923), 조선 영화인들의 손으로 제작된 ‘장화홍련전’(1924) 등의 작품을 통해 당시의 무성영화 제작 현장을 살펴보도록 한다.●조선인이 감독한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서’ 1923년에 공개된 ‘월하의 맹서’는 온전한 극영화의 형식을 갖춘 최초의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영화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다. 야외의 활극 장면만 영화로 표현했던 이전의 연쇄극과 달리, 기승전결의 스토리를 모두 필름 촬영으로 소화한 극영화라는 점 그리고 각본, 감독, 출연 모두 조선인의 손으로 이뤄낸 점이다. 당시 언론인이자 연극인으로 활동했던 윤백남(1888~1954)이 각본과 감독을 맡았고, 그가 이끌어 온 민중극단의 단원 이월화, 권일청, 문수일, 송해천 등이 출연했다. 신파극 무대에서 활약하던 이월화(1904~1933)는 이 영화를 통해 조선 영화 최초의 스타 여배우로 등극한다. 한편 영화 매체를 성립시키는 기술 파트까지 조선인이 해결하기는 힘들었는데, 촬영과 편집은 일본인 오타 히토시가 맡았다. 사실 이 영화는 영화관에서 개봉한 극영화가 아니라 조선총독부 체신국이 저축 장려를 목적으로 제작한 계몽영화였다. 다시 말해 영화관용 상업영화가 아니라 당국의 선전영화였다. 1923년 4월 9일 경성호텔에서 처음 상영했고, 이후 순회영사로 각 지역에서 공개되었다. 당시 매일신보 기사는 ‘월하의 맹서’의 분량을 ‘전 2권’, ‘2천척의 긴 사진’으로 기록하는데, 이를 상영시간으로 환산해 보면 33분 정도에 해당한다. 중편 길이의 영화였던 것이다. ‘월하의 맹서’ 제작 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의 무성영화는 자본과 기술의 제공, 연출과 배우의 역할이 분리되어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영화 제작은 무엇보다 큰 자본이 필요한 작업이고 촬영, 현상 등의 근본적인 기술이 해결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반면 조선인 관객을 대상으로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각본, 연출 그리고 출연 영역에서 조선 영화인들의 역할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렇게 조선 무성영화는 첫발을 뗐다.‘월하의 맹서’ 공개 이전에도, 일본인 영화제작사가 만든 ‘국경’(1923)이 상영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나리키요 다케마쓰 등 재조선 일본인을 중심으로 한 극동영화구락부가 제작한 영화로, 촬영은 일본에서 온 나리키요 에이가 담당했다. 물론 출연은 박순일 등 조선인 배우들이 맡았다. 이 영화는 중국 국경 지대의 마적을 토벌하는 일본국경수비대의 활약을 묘사한 내용으로 전해진다. 흥미로운 점은 1923년 1월 13일 단성사에서 개봉한 첫날, 조선인 학생들의 야유로 영화 상영이 중단되었고, 이후 다시 상영되지 못한 것이다. 당시 ‘조선공론’의 문예담당 기자 마쓰모토 데루카가 “아무리 영화가 형편없는 것일지라도 직접적인 야유를 보내 중지시키는 것은 심히 좋지 않은 일이다”고 기록한 것에서, 조선인 관객들의 과격한 반응을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학생들 야유로 하루 만에 상영 중단된 ‘국경’ 이 영화의 상영이 하루 만에 중단된 사정을 현재로서는 자세히 파악할 수 없지만, 당시 조선인 관객들이 모욕감을 느꼈던 것이 결정적인 이유로 알려진다. 조심스러운 추정이지만, 조선인 관객들의 입장에서는 영화에 등장하는 마적들이 만주에서 활약하던 무장독립군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 결론적으로 관객과 만나지 못한 ‘국경’은 상업영화로서 실패했지만, 조선인 관객들이 영화를 거부한 사건으로 영화사 기록에 남게 되었다. 조선 영화계가 본격적인 상업영화의 시대를 연 것은 일본인 흥행사 하야카와 마스타로가 설립한 동아문화협회의 ‘춘향전’(1923) 그리고 조선인 영화관 단성사가 영화제작을 위해 설립한 촬영부의 ‘장화홍련전’(1924)이 등장하면서이다. 하야카와는 1913년 경성의 일본인 거리에 고가네칸을 설립하며 조선 흥행계에 뛰어든 인물이다. 그는 조선부업공진회 개최에 맞춰 고전 소설 ‘춘향전’의 영화화를 추진하며, 하야카와 고슈라는 이름으로 직접 연출까지 나섰다. 영화는 전북 남원 현지에서 로케이션 촬영을 진행했고, 조선인 관객들을 위해 당대 최고의 인기 변사 김조성이 이몽룡으로, 기생 한명옥이 춘향으로 출연했다. 하지만 동아문화협회의 간부였던 김조성이 배우의 역할로만 머물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인 자본주가 감독에 나선 작품이지만, 조선 고전의 각색과 연출 과정에서 조선인 관객들의 취향을 파악하고 있던 그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완성된 ‘춘향전’은 조선부업공진회가 개최된 1923년 10월 5일 서울 단성사에서 개봉해 조선인 관객들의 큰 관심을 받았고, 18일부터 전북 군산의 군산좌에서, 21일부터 공진회 내의 활동사진관에서 연이어 상영되었다. 이 작품은 조선의 영화관에서 상영된 최초의 상업영화로 평가할 수 있다. 이후 하야카와는 ‘춘향전’의 성공을 기반으로 1924년 7월 인사동의 조선인 상설관 조선극장을 인수해 단성사의 라이벌로 나섰다.●‘장화홍련전’ 흥행에 日 ‘춘향전’ 재개봉 응수 당시 ‘춘향전’은 “이건 한 개의 슬라이드지, 영화에 대한 몽타주가 아무것도 없다”고 평가받기도 했다. 이러한 기술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조선인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고 흥행에 성공하자, 조선 영화계는 크게 두 가지 반응을 보였다. 첫 번째는 조선 흥행계의 유일한 조선인 경영자였던 박승필 역시 단성사에 촬영부를 만들고 조선 영화인들의 손으로 만든 ‘장화홍련전’으로 응수한 것이다. 두 번째는 극장 자본이 주도한 영화제작을 넘어 본격적인 영화사 설립이 추동된 점이다. 바로 부산에 설립된 조선키네마주식회사였다. 조선인 주도의 영화 제작은 바로 이듬해에 이어졌다. 하야카와의 행보에 자극 받은 단성사의 박승필이 1924년 7월 단성사 내에 촬영부를 설치하고, 역시 고전 소설인 ‘장화홍련전’을 극영화로 제작했다. 배우는 장화와 홍련 역에 기생 김옥희와 김운자, 원님 역에 인기 변사 우정식을 출연시켰다. 앞선 ‘춘향전’의 성공 요인을 기반으로 삼은 것이다. 하지만 이쪽은 연출 인력이 보강되었다. 각색은 단성사의 변사로 유명한 김영환이, 감독은 우미관 출신의 영사기사로 단성사의 전체 운영을 맡고 있었던 박정현이 나섰다. 훗날 감독이 되는 이구영도 당시 단성사 직원으로 각본과 연출에 관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실 무성영화 현장은 지금의 프로듀서와 감독처럼 그 역할이 엄밀히 구분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가장 주목할 부분은 촬영 역시 조선인이 맡았다는 점이다. 조선 최초의 촬영기사로 기록되는 이필우(1897~1978)가 이 영화로 데뷔하게 된다. ‘장화홍련전’의 영화사적 의미는 제작, 연출, 출연 그리고 초창기 영화매체의 가장 중요한 성립 조건인 기술에서도 전부 조선인의 손으로 이루어진 점이다. “경성 천지의 키네마 팬이 한결같이 손꼽아 기다리던” ‘장화홍련전’이 1924년 9월 5일 단성사에서 개봉하자 조선에 영화상설관이 생긴 이후로 처음 맞는 대성황을 이뤘고, 이에 하야카와의 조선극장은 ‘춘향전’의 재개봉으로 응수한다. 이후 동아문화협회는 하야카와가 다시 감독으로 나선 ‘비련의 곡’(1924), 김조성이 감독으로 나선 ‘흥부놀부전’(1925)을 조선극장에서 개봉한 후, 경영난으로 해산했다. ●무성영화 개척해 간 조선영화인들 초창기 조선 영화계에서 극장의 산하가 아닌, 영화제작사로 처음 등장한 조직은 조선키네마주식회사다. 1924년 7월 11일 일본인 사업가들에 의해 부산에서 설립됐다. 촬영소는 복병산에 있던 러시아 영사관 건물을 임대해서 사용했고, 회사의 중심인물은 부산 묘각사 주지였던 승려 다카사 간초였다. 그는 왕필렬이라는 조선 이름으로 회사 창립작 ‘해의 비곡’(1924)과 원제가 ‘암광’이었던 ‘신의 장’(1925), ‘동네의 호걸’(1925)을 직접 연출했다. 촬영기사는 작품마다 일본에서 불러왔다. 동아문화협회에서 김조성의 역할처럼,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서도 조선 영화인의 역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훗날 무성영화 감독으로 이름을 날리는 이경손, 안종화 등 당시 무대예술연구회 단원들이 합류했기 때문이다. ‘해의 비곡’의 경우 안종화, 이월화, 이채전 등 조선인 배우들이 출연했을 뿐만 아니라, 이경손이 조감독을 맡았다. 실질적인 감독 역할이었다. 규모를 키운 2회작 ‘운영전’에서는 ‘월하의 맹서’를 연출한 윤백남이 감독으로 초빙되었다. 조선키네마 역시 조선 영화인들의 적극적인 가담으로 제작이 진행되었다. 한편 무성영화의 스타 나운규가 조선키네마의 연구생이던 당시 ‘운영전’에서 처음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1923년부터 1925년까지의 무성영화 전기에 모두 12편의 조선 영화가 제작되었다. 1923년 2편, 1924년 3편, 1925년 7편이다. 이 작품들 중 다수는 일본인 제작자가 만들고 연출도 겸했다. 그리고 그 제작 현장에서 조선인 감독과 기술 스태프들이 성장했다. 다른 한편으로 단성사가 제작한 ‘장화홍련전’처럼 연출과 출연은 물론이고, 조선인 촬영기사가 전면에 나선 작품도 있었다. 이처럼 무성영화 시기, 제작, 연출 그리고 촬영 등의 기술 파트에서 일본인과 조선 영화인이 만들어내는 도제, 경합, 협업 등의 관계가 역동적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 일본인 극장 몰려 있던 충무로… 조선 영화관 각축장 된 종로

    일본인 극장 몰려 있던 충무로… 조선 영화관 각축장 된 종로

    1903년 6월 한성전기회사가 주최한 동대문 기계창에서의 활동사진 상영회가 문전성시를 이뤘다. 이 공간은 동대문활동사진소로 자리잡는다. 한국에서 관람료를 내고 들어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영화를 상영했다는 가장 첫머리의 기록이다. 그리고 1919년 10월 조선인 거리의 영화 상설관 단성사에서 연쇄극 ‘의리적 구토’를 상영해 조선인 관객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이는 한국 최초로 만들어진 영화가 다중이 모인 극장에서 공개된 가장 첫 번째 사건이다.이번 주제는 활동사진이 상영됐던 공간, 바로 ‘영화관’에 관한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처음 활동사진을 보기 위해 동대문활동사진소에 운집했던 1903년부터 조선인 거리의 연극장 단성사가 영화 상설관으로 새롭게 태어난 1918년까지 서울 도심에는 어떤 영화관들이 생겨났고, 영화관 거리는 어떤 모습으로 형성됐을까. 우리가 이 시기 영화관의 설립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제작·배급·상영으로 이어지는 영화산업의 기초적인 형태가 구축되기 시작했음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영화관 설립 이전의 상영 공간 한성전기회사가 운영하던 동대문활동사진소는 1908년 흥행 단체인 광무대(光武臺)가 인수하며 ‘광무대’라는 이름으로 재출발한다. 전통 연희 공연을 중심으로 활동사진까지 상영했던 공간으로 1914년까지 이어졌다. 운영은 조선인 흥행사 박승필이 맡았는데, 이후 그는 단성사를 경영하고 연쇄극을 제작하는 등 초창기 한국 영화의 기반을 만든다. 아직 본격적인 영화 상설관이 설립되지 않았던 시기 활동사진을 상영하던 공간은 또 어디에 있었을까. 서대문 정차장 근처 프랑스인 마르탱이 운영하던 호텔 애스터하우스에서 1907년 프랑스에서 가져온 필름들을 상영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즈음 영화 상설관은 아니지만, 무대 공연을 중심으로 한 극장들이 생겨났다. 상설 극장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902년 대한제국 황실이 국가 경사를 위해 설립한 ‘희대’(戱臺)다. 지금의 서울 종로구 새문안교회 자리에 있었다. 사실 이전의 조선은 건물 안에서 공연하는 극장문화가 없었으므로 최초의 근대식 극장으로 기록되는 곳이다. 희대는 협률사(協律舍) 또는 원각사(圓覺社)로도 불렀는데, 이곳을 빌려 연희를 하던 단체의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불렀다. 가장 먼저 협률사가 운영했던 희대는 1904~1905년 러일전쟁 때 폐지됐다가 1907년 2월부터 관인구락부(官人俱樂部)라는 이름의 사교회장으로 활용됐고, 1908년 7월부터 작가 이인직이 ‘원각사’라는 이름의 연희장으로 운영하며 연극과 영화를 비롯해 다양한 볼거리들을 상연했다. ●북촌과 남촌의 극장가 일제강점기 서울 장안은 청계천을 경계로 북한산 아래 북촌의 조선인 거주지와 남산 아래 남촌의 일본인 거주지가 분리돼 있었다. 자연스럽게 극장가 역시 민족별로 구분해 형성됐다. 조선인 극장들은 조선인들의 전통적인 상권인 종로통을 중심으로 들어섰고, 일본인 극장들은 지금의 충무로인 본정(本町)의 일본인 상권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북촌에는 한국 최초의 근대식 공원인 종로 2가의 탑골공원을 중심으로, 1907년부터 단성사(團成社), 연흥사(演興寺), 장안사(長安社)와 같은 민간 극장이 설립됐다. 조선인들을 위해 전통 연희, 신파극, 활동사진 등 다양한 볼거리가 상연됐던 공간들이다. 조선인 극장의 형성과 프로그램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남촌의 일본인 극장들이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대한제국 시기 한국으로 많은 수의 일본인이 건너왔고, 자연스럽게 일본인 거류민들을 위한 극장이 생겨났다. 1907년을 전후한 시점 욱정(旭町) 1정목 쪽의 가부키자(1906년 설립·이하 설립연도), 본정 2정목의 혼마치자(1906년쯤), 본정 3정목의 고토부키자(1907년쯤), 본정 4정목에 이르면 게이조자(1906년쯤)가 있었다. 명동 방향으로는 나니와부시(浪花節)를 공연하는 나니와칸(1909년), 그리고 남대문 앞에는 신파극을 공연하는 이나리자(1910년)가 있었다. 영화 상영을 중심으로 하는 첫 활동사진 상설관은 1910년 지금의 을지로인 황금정 2정목에 세워진 경성고등연예관이다. 목조 건물로 1층에는 긴 의자, 2층에는 다다미를 배치해 600여명이 앉을 수 있었다. 당시 개관 광고를 보면 프랑스 파테사의 영사기를 도입해 세계 각국의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주는 ‘세계 제일 활동사진관’임을 거창하게 선전한다. 당시 관객은 조선인과 일본인이 각각 절반 정도였다. 초창기 영화감독 이구영의 기록에 따르면 서양인 권투선수와 일본인 유도선수가 겨루는 단편영화를 상영하던 중 조선인 관객들이 서양 선수를 응원하는 바람에 일본인 관객들과의 싸움으로 번지기도 했다. 이후 일본인 거리의 황금정 3정목에는 다이쇼칸(1912년), 고가네칸(1913년)이 들어섰다. 본정의 가장 번화가인 1정목과 2정목의 교차점에는 1915년 유라쿠칸이 설립돼 남촌의 대표적인 활동사진관으로 자리잡았다.●서양 영화를 상영한 조선인 영화관 북촌에는 1912년 우미관(優美館)이 영화 상설관으로 처음 등장한 후 1907년 설립된 단성사(團成社)가 1918년 영화관으로 재개관했으며, 1922년 조선극장이 설립되면서 조선인 영화 상설관으로는 3대 극장이 각축전을 벌이게 된다. 종로통에 세워진 우미관은 조선인을 대상으로 처음 설립한 영화관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주로 유니버설의 연속영화(serial film·지금의 텔레비전 드라마처럼 20분 분량의 필름을 1주일에 1편씩 상영하는 방식)와 유니버설의 자회사인 블루버드와 레드페더 등에서 제작한 5권 분량의 장편 영화를 상영한 서양 영화 전문관이었다. 1907년 세워져 복합 연희장으로 운영되던 단성사는 조선인이 소유한 유일한 극장이었다. 1914년 1월 안재묵이 수용 인원 1000명의 대형 극장으로 신축했으나 1년 만에 화재로 소실된 후 1917년 2월 고가네유엔(黃金遊園)의 소유자 다무라 기지로가 인수했다. 다무라는 조선인 흥행사 박승필에게 단성사의 운영권을 주었고, 그는 1918년 12월 활동사진관으로 신축해 흥행했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조선인 영화 상설관이 서양 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외화전문관’이었고, 일본인 영화 상설관은 일본 영화를 기본으로 상영하는 ‘방화관’(邦畵館)이면서 서양 영화를 함께 상영하는 ‘병영관’(映館)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점이다. 1920년대 들어 경성의 영화관 거리는 조선인 영화관의 경우 조선인 변사가 해설하는 서양 영화를 상영하고, 일본인 영화관은 일본인 변사가 해설하는 일본 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구도가 굳어졌다. 이즈음 서울 장안 극장가에서 상영하는 영화들은 활동사진 수입 초기에 선보이던 뤼미에르 형제나 미국 바이타스코프의 백 피트짜리 짧은 필름이 아니었다. 움직이는 사진을 보고 신기해하고 달려오는 기차를 피하던 구경꾼들은 이미 지난 얘기였다. 이야기 전달을 위한 구성력을 갖추어 가는 미국과 유럽의 장편 극영화들은 활동사진을 좋아하던 ‘애활가’(愛活家)들을 본격적인 ‘영화관객’으로 훈련시켰다.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 배우보다 몸값 높은 조선 최고의 변사는?

    배우보다 몸값 높은 조선 최고의 변사는?

    무성영화 시대 외국어 자막 등 해설 필수변사의 입담에 흥행 좌우… 스카우트 싸움도무성영화 시대의 영화관 풍경을 떠올려 보자.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게 스크린 옆의 변사(辯士)가 영화를 해설하는 모습이 아닐까. 변사는 서양에서 발명된 영화라는 매체와 전통적인 동양의 공연 방식이 만나 빚어낸 독특한 산물이다. 물론 서구 영화관에도 영화를 설명하는 해설자 역할이 있었지만, 이는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영화의 줄거리를 소개하는 정도였다. 기본적으로 서구의 무성영화는 영상과 영상 사이 간(間) 자막 화면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영화 고유의 언어와 문법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일본과 조선 등지에서는 외국어 자막을 비롯해 등장인물의 대사를 관객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해 줘야만 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무성영화 시대 변사라는 직업은 일본 흥행 산업의 산물이다. 일본뿐만 아니라 식민지였던 조선, 대만 그리고 일본인 흥행업자들이 시장을 개척했던 태국과 만주에서도 존재했다. 조선에 변사가 전문직업인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1910년 경성고등연예관이 개관하면서인데, 영화 상영 전 조선인 변사와 일본인 변사가 번갈아 등장해 한국어와 일본어로 각각 영화에 대해 설명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이때 조선인 변사로는 서상호, 이한경, 김덕경이 활약했다. 이후 조선인 관객을 대상으로 한 우미관과 일본인 관객을 대상으로 한 대정관과 황금관이 속속 등장하면서 변사의 해설도 언어별로 구분됐다. 무성영화 시대의 흥행 성적은 오로지 변사의 입담에 좌우됐다고 할 정도로 변사는 스타 중의 스타였다. 보통 변사들은 70~80원의 월급을 받았다고 하는데, 당시 일류 배우가 40~50원의 월급을 받았고 고급 관리들의 월급이 30~40원 정도였음을 생각하면 변사들의 대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우미관의 주임 변사로 유명했던 서상호가 1918년 단성사가 활동사진관으로 개관하며 스카우트된 것처럼 변사는 무성영화 흥행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변사가 전성기를 구가한 무성영화 시기 단성사의 주임변사 서상호, 조선극장의 김조성, 우미관의 이병조가 3대 변사로 꼽혔고, 우정식·서상필·김덕경·성동호 등도 이름을 날렸다.
  • [씨줄날줄] 유대균과 세월호의 진실/박록삼 논설위원

    [씨줄날줄] 유대균과 세월호의 진실/박록삼 논설위원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던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바다. 꽃 같은 아이들은 왜 하필 그 세월호에 탔을까. 제주 수학여행에 들떠 있던 304명이 애꿎게 희생됐다. 그중 5명은 실종자로, 바닷속 심연으로 허위허위 들어가 끝내 돌아오지 않은 채 어미 아비의 가슴을 무덤으로 삼았다. 그해 4월 봄의 복판이었건만, 찬 바람 몰아치던 팽목항은 분노와 슬픔의 통곡으로 가득 찼다. 많은 이들이 팽목항을 찾아 흐느꼈고, 그보다 훨씬 많은 이들은 TV 화면 속 처연함만으로도 함께 눈물을 찍어 냈다. 참사 당시 국정원 유착설, 고의 침몰설, 유병언 비호 의혹 등을 비롯해 각종 음모론이 제기됐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세모그룹의 회장인 유병언과 그의 장남 유대균(48)씨에게 책임을 전적으로 물으며 각각 현상금 5억원, 1억원을 걸고 수배했다. 유병언은 그해 6월 12일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됐다. 죽음으로써 진실은 미궁에 빠졌고, 붙잡힌 장남 유씨는 횡령 및 배임 혐의로 징역 2년형 뒤 2016년 7월 만기 출소했지만 참사와는 어떤 연관성도 밝혀지지 않았다. 5년이 다 돼 가는 지금도 여전히 휴대전화와 가방에 세월호의 상징물인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니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이제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 세월호는 사라지고 있다. 참사의 원인은 여전히 안갯속이다. 박근혜 정부의 세월호특별조사위는 유명무실했다. 문재인 정부 선체조사위는 1년 넘는 활동 끝에 4명의 유해를 추가로 수습하고, 참사 원인 및 당시 상황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럼에도 조사 보고서는 ‘외부 충격설’과 ‘내부 원인설’ 두 가지 모두 담았다. 추가적인 진실 규명은 지난해 11월 출범한 2기 특별조사위 활동에 넘겨야 한다. 지엽적 소식도 있다. 정부가 장남 유씨에게 제기한 세월호 참사 수습비용 등 구상금 1878억 1300만원 청구 소송에서 1심·2심에 이어 대법원에서도 6일 패소했다. 대법원 재판부는 “유씨가 청해진해운의 경영에 관여하면서 세월호의 수리·증축 및 운항 등과 관련해 업무 집행을 지시하거나 가담했다고 볼 증거가 부족하다”고 밝혔다. 지난 5일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304명 세월호 희생자 설 합동 차례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은 다음달 중 광화문광장의 세월호 천막을 철거하고, 기억의 공간으로 재구성하겠다고 했는데 다소 섭섭한 마음이다. 누군가는 지겹다지만 그럴 수는 없다. 우리는 304명이 희생된 참사의 원인을 밝혀 사고 재발을 방지할 의무가 있다. 진실 없이 과거와 화해할 수가 있을까. 진실 없이 새로 바뀔 확 트인 광화문광장을 편안히 즐길 수 있을까. youngtan@seoul.co.kr
  • “친한파 두테르테 대통령은 인삼 애호가”

    “친한파 두테르테 대통령은 인삼 애호가”

    “마약과 부패 근절 위해 암살 위협도 감수해한진중공업 매각, 국격에 맞게 전략적 고려를” “한진 중공업 처리 문제는 국격에 맞게 전략적으로 처리해 나가야 한다. 경제적 논리뿐 아니라 정치적, 전략적 고려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 경영 악화로 매각 작업이 진행중인 한진중공업의 필리핀 수빅크만에 위치한 수비크조선소에 대한 그동안 필리핀 현지 은행들의 대여금 총액만도 최소 4억 2000만 달러(약 4699억원)를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한동만 주필리핀 한국대사는 지난달 23일 현안이 되고 있는 한진 중공업의 수비크 조선소 처리문제에 대해 이 같이 말하면서, 필리핀 정부 및 현지의 높은 관심을 지적했다.한 대사와의 일문일답의 주요 내용. 인터뷰는 필리핀의 ‘사회간접자본(SOC·인프라) 우선 정책’이 본격화되고 있는 가운데 지난달 22·23일 마닐라에서 한·아세안센터 주최로 열린 필리핀 인프라 투자간담회에 동행한 기자가 주필리핀 한국대사관을 방문해 이뤄졌다. → 한진 중공업 수비크조선소를 둘러싸고, 필리핀 정부와 중국이 인수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 필리핀 은행들이 한진 중공업 수비크조선소의 채권자다. 이에 대한 매끄러운 처리는 한국 기업의 신용과 이미지 등에 대해 적잖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필리핀 정부는 수비크만 지역 경제와 고용 문제에 대해서 우려를 갖고 있다. 이미 6500여명이 해고 됐고, 또 남아있는 3700여명의 현지 직원들이 고용불안을 겪고 있다. 그렇지만 한진 중공업의 수비크조선소에 대해 강하게 입질하고 있는 중국의 인수 문제에 대해서는 전략적으로 우려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 필리핀 당국에서는 한국 정부가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달라고 요청해 왔다. 채권단 등과의 소통을 통한 원만한 해결 방안 도출을 기대한다. →2016년 집권 이후,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은 SOC, 인프라 건설을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는 ‘빌트(건설), 빌트, 빌트 정책’, ‘BBB 정책’에 역점을 두고 있다. - 두테르테 대통령을 직접 여러 차례 만나 확인해 보니, 의지가 매우 확고했다. 제도개선에 대한 강한 의지와 인프라 건설을 통해 국가 발전을 이룩해야 겠다는 뜻이 매우 강했다. 외국기업들의 필리핀 투자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해외 기업의 현지 사업에 대한 지분 제한도 완화하겠다는 생각도 있다. 예외 조항을 늘려, 해외 자본 진입을 수월히 하려는 제도 개혁도 진행중이다. 우선, 두테르테 대통령의 BBB 정책은 외국기업들에게 많은 기회와 가능성을 준다. 불라칸 신공항 건설을 비롯해, 민다나오 순환철도, 클라크 그린 시티 개발 등은 전례없는 메가 프로젝트이고, 해외기업들에게도 큰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두테르테 대통령의 인프라 우선 정책으로 필리핀이 동남아시아 국가 가운데, 유망 투자지로서 부상하고 있는데. - 인구 1억 490만명에 전체 국민의 평균 연령이 24세인 넓은 시장을 가진 젊은 나라이다. 성장세를 타고 있는 6억 2000여명의 아세안, 동남아시아 시장의 주요 관문이자, 한국에서 거리상으로도 가장 가까운 동남아 나라이다. 우리 기업들끼리 서로 경쟁할 정도로 몰리고 있는 베트남에 대한 쏠림현상을 완화해 줄 수 있는 대안으로서도 의미가 있다. →필리핀의 가능성과 문제점은 무엇인가 국내총생산 가운데 높은 민간소비(73%), 해외 송금(10%) 및 콜센터 등 해외아웃소싱(8%)에 대한 의존 등 서비스업은 발달해 있는데 비해 제조업은 취약한 불균형한 산업 구조를 갖고 있다. 아시아최고 수준의 법인세(30%), 소득세(32%) 등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인프라 건설 우선 정책을 통해 제조업의 발전 기반을 닦고, 제도 개혁 및 해외 자본 유치 활성화 등을 통해 산업 경쟁력을 강화시켜 나가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다. 이런 정책 추진 과정 속에서 우리 기업들의 진출 기회도 많아 질 것이다. →오는 5월 총선 전망은 어떤가. 두테르테 대통령이 장기 집권을 위해 개헌을 단행 할 것이란 관측도 적지 않다. - 70%를 넘는 지지율을 볼 때 선거 압승이 예상된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현재 6년 단임제인 헌법을 연임이 가능한 중임제로 고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중임제 개헌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연임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2016년 취임이후, 마약 및 범죄와의 전쟁을 벌여왔다. 이와 관련, “자의적인 법집행과 대규모 민간인 살상을 저질렀다”는 그에 대한 국제적인 비난이 컸다. - 두테르데 대통령을 직접 만나보니, 범죄와 부패의 고리를 끊어내겠다는 강력한 신념과 의지가 확고했다. 검사 출신인 그는 “마약을 하는 사람은 자신뿐 아니라 가족과 이웃, 주변사람의 삶과 인생을 망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 문제의 해결없이는 필리핀이 빈곤과 부패, 저개발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보고 있었다. 이 같은 정책 때문에, 대통령이면서도 실제 암살 위협까지 받고 있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다. 여러 차례 만나보니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나의 임무는 마약과 부패에서 단절시키고, 조국을 근대화시키는 것”이란 의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한 대사는 취임 1년만에 5차례 두테르테 대통령을 접견하고, 별도의 직접 통화도 해 오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두테르테 대통령은 어떤 사람인가. - 국가 발전에 대한 강한 신념과 비전을 지닌 지도자이다. 한국과 인삼을 무척 좋아하는 친한파이기도 하다. 그가 민다나오섬의 다바오 시장으로 재임할 때 한국을 방문했고, 금산 인삼 축제 등에도 참석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인삼, 인삼차 등을 무척 좋아한다. 그는 “피곤할 때 인삼과 인삼 차를 마시면 힘이 났다”고 말하기도 했다. 인삼 엑기스 등도 자주 드시는 것으로 안다. 한국의 경제발전과 한국인의 노력과 능력을 높게 평가했고 더 가까운 관계로 만들어 나가고 싶어했다. 대사로서, 두테르테 대통령에게 직접 필리핀 주재 한국인들과 한국관광객들의 안전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그 때 그는 이 같은 요청에 “내가 책임지겠다”며 한국인의 안전을 재삼 강조한 바 있다.→ 올해는 한·필리핀 수교 70주년이 된다. - 오는 3월 3일이 수교 70주년 되는 날이다. 필리핀은 1949년 우리와 5번째 수교국으로, 지난 한 해 160만명이 넘는 한국인이 방문한 가까운 나라이다. 한국전쟁때에는 7420명의 군대를 파견한 오랜 우방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70주년 기념위원회를 만들었고, 한류 동호회 기념행사, 한국전쟁 참전 용사 대상 연주회, 문화 축제 등도 준비중이다. →양국간 현안이 있다면 - 무역균형에 대한 요청이 있었고, 필리핀산 바나나에 대해 관세를 내려달라는 부탁도 있다. 엠마뉴엘 피뇰 필리핀 농업부 장관 등도 나를 볼 때 마다 고향인 민다나오지역 등의 바나나와 두리안 등 필리핀산 농산물을 한국에서 더 수입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한 때 한국시장 점유 90%였던 필리핀산 바나나의 점유율은 베트남산과 남미산에 밀려 70%대까지 내려가 있다. 필리핀은 우리와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지 않아, 베트남과 남미 일부 국가들에 비해 한국 시장에 들어오려면 바나나에 대한 관세를 10% 정도 더 물고 있다. →방한하는 필리핀인의 수가 계속 늘고 있다. - 지난 2017년 기준으로 45만 9000여명, 지난해 50만명의 필리핀인이 한국에 왔다. 일본에 비해서도 비자 취득이 비교적 까다롭게 돼 있어 이를 완화하기 위해 보완 조치를 취했다. 대학교수, 주요 기업체 간부, 언론인 등에 대해서는 서류를 간소화하고, 10년짜리 복수 여권도 제도도 만들었다. 또,여행사가 비자 대행도 할 수 있도록 했다. 지난해 1월 부임해 보니, 매일 새벽 영사관 앞에 현지인들이 긴 줄 서고 있었다. 다가 가서 물어보니 “한국으로 가는 비자를 얻기 새벽 2시, 3시부터 줄을 서 있었다”고 대답하는 것을 듣고 여행사 비자 위탁 제도를 결심했다. 당시 새벽에 나와 영사관 앞에 줄을 서고도 하루 정해진 비자발급 쿼터때문에 비자를 얻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는 현지인들이 적지 않았고, 불만도 컸었다. 현지인들이 한국을 마음으로 좋아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할 일이 뭔지 찾아보고 있다. (한 대사는 포스코건설이 석탄화력발전소를 건설중인 마신록 지역을 비롯해 수빅, 블라칸 등 한국기업들이 공사를 벌이고 있는 현장들을 빠짐없이 찾아다니는 ‘현장 대사’로 현지에 소문이 나있다. 최근에는 마닐라에 본부를 둔 아시아개발은행(ADB) 등 국제기구, BDO 등 현지 주요 은행, 우데나 그룹 등 현지 재벌들을 돌아다니면서, 한국 대학졸업생 및 젊은이들의 인턴 자리 등 일자리를 물색하고 다니는 ‘일자리 대사’로도 현지인들 사이에 입소문이 올라 있다.) 글 사진 마닐라(필리핀)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 ‘댓글조작’ 드루킹 징역 3년 6개월 실형…드루킹 측 “즉시 항소”

    ‘댓글조작’ 드루킹 징역 3년 6개월 실형…드루킹 측 “즉시 항소”

    19대 대통령 선거 등을 겨냥해 댓글 조작을 벌인 혐의 등으로 기소된 ‘드루킹’ 일당이 1심에서 모두 유죄를 선고받았다. 이번 선고에 대해 드루킹 측은 즉시 항소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2부(성창호 부장판사)는 30일 김동원 씨에게 댓글 조작, 뇌물공여 등의 혐의에는 징역 3년 6개월의 실형을,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에는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함께 기소된 도두형 변호사 등 일당 9명에겐 각각 집행유예∼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경제민주화 달성에 도움을 받고자 국회의원이었던 김경수에게 접근해 그가 속한 정당과 대선 후보를 지지하며 온라인 여론조작 행위를 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를 통해 김경수는 2017년 대선에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여론을 주도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얻었다”고 설명했다. 또 “피고인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경제적공진화모임 회원인 도두형을 고위 공직에 추천해 달라고 요구하면서 김경수와 2018년 지방선거까지 활동을 계속하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이런 행위는 단순히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대한 업무방해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이용자들의 정치적 의사 결정을 왜곡해 온라인상의 건전한 여론형성을 심각히 훼손하고 공정한 선거 과정을 저해한 것”이라며 죄질이 불량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재판부는 김경수 지사의 선고가 오후에 예정된 만큼 드루킹 일당과의 공모 관계에 대해선 명확한 판단을 내리지는 않았다. 다만 김 지사가 이들의 범행으로 도움받은 점 등은 인정했다. 드루킹 일당은 19대 대선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당선시킬 목적 등으로 2016년 말부터 매크로(자동입력반복) 프로그램인 ‘킹크랩’을 이용해 댓글 조작을 벌인 혐의로 기소됐다. 드루킹은 도두형 변호사와 공모해 노회찬 전 의원에게 두 차례에 걸쳐 5천만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건네고, 이를 숨기기 위해 관련 증거를 조작한 혐의도 받았다. 재판부는 드루킹이 노 전 의원에게 정치자금을 전달한 부분 역시 관련 증거들을 통해 충분히 인정된다며 유죄 판단했다. 노 전 의원이 남긴 유서도 증거로 인정했다. 재판부는 드루킹이 인사청탁 등을 대가로 김 지사의 전 보좌관에게 500만원을 뇌물로 준 혐의도 유죄로 인정했다. 김 지사의 전 보좌관도 지난 4일 유죄 판단과 함께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받았다. 이날 선고에 대해 드루킹 측은 “정략적 수사에 불공정한 정치재판이었다”며 즉시 항소할 뜻을 밝혔다. 김씨 측 변호인 김형남 변호사는 이날 김씨의 1심 선고 직후 입장문을 내고 “피고인 측의 강력한 요구에도 노회찬 전 의원의 부인을 증인으로 소환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중요한 증거인 고 노 전 의원의 자살발표 관련 변사사건 수사기록이 법정에 제출되지 않았고, 자필유서를 유죄의 증거로 인정하면서도 그 전제 사실인 고 노 전 의원의 사망 여부에 대한 구체적인 판단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허익범 특별검사팀의 수사에 대해서도 “정략적 수사, 부실 수사”라고 비판했다. 김 변호사는 “김경수 지사에 대한 수사의 초점을 흐리기 위해 고 노 전 의원 사건을 언론에 부각해 물타기 수사를 했다”고 주장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사설]갈수록 커지는 손혜원 의혹, 수사로 철저히 밝혀야

    손혜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전남 목포 부동산 투기 의혹이 갈수록 가관이다. 목포의 구 도심 일대가 문화재거리로 지정되기 전에 그의 가족과 지인들이 최소 15채 이상의 건물을 매입했다는 의혹이다. 손 의원은 부동산 투기 목적이 아니었다며 “인생과 전 재산, 의원직을 걸겠다”고 펄쩍 뛰고 있다. 오히려 지역 회생을 위해 주변사람들한테 매입을 권유했다는데, 그 해명이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는 정황들이 고구마 넝쿨처럼 달려 나오고 있다. 해명과 동떨어진 정황들이 의혹 더 키워 손 의원의 친인척과 지인들은 문화재청이 지난해 8월 목포시 만호동, 유달동 일대를 근대문화역사공간으로 지정하기 전인 2017년 3월부터 1년 반 동안 해당 지역의 건물 10채를 집중적으로 사들였다. 그 건물들은 문화재거리로 지정된 이후에도 상업적 용도로 쓸 수 있는 등록문화재여서 단기간에 부동산 가격이 서너배나 올랐다는 데서 의혹은 커진다. 손 의원은 투기목적이 아니었으며 부동산 값이 오르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목포시는 부동산 투기 과열을 감지하고 토지거래허가구역 지정을 추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손 의원의 해명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인 셈이다. 목포시 구 도심 일대는 ‘손혜원 타운’이라고 불리는 모양이다. 2016년 국회에 들어온 초선인 손 의원은 문화재청의 업무를 감독하는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의 여당 간사다. 본인이 아무리 손사래를 쳐도 상식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대목들이 많다. 손 의원은 조카에게 1억원을 증여해 건물을 매입하게 했다지만, 정작 조카는 명의만 빌려줬을 뿐이라는 엇박자 해명을 했다. 이러니 진실을 확인하기도 전에 시중에는 “저런 고모가 있으면 좋겠다”는 우스개가 난무한다. “사재를 털어 구 도심을 살리려 했다”는 그의 말이 진실이라면 문광위 간사로서 그 취지를 알려 동참을 호소하고 홍보하는 의정활동은 왜 하지 않았는지도 참으로 궁금하다. 평소의 거침없는 언행과는 쉽게 연결이 되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與 섣부른 감싸기, 여론 반발 불러 이번 일은 어물쩍 넘어갈 사안이 아니다. 국회 상임위원의 지위와 정보를 이용해 부동산 개발이익을 노렸다면 내부정보에 따른 사익추구로 명백한 범법 행위다. 국민이 두 눈 부릅떠 지켜 보는데도 민주당의 태도는 안이하기 짝이 없다. 자체 조사를 해보기는커녕 손 의원의 해명을 전부 받아들이겠다는 제식구 감싸기 식의 대응에 여론은 부정적이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는 사태를 부를 수 있음을 민주당은 명심해야 한다. 논란이 커지자 손 의원은 의혹을 제기한 관련 단체들이 함께 응하겠다면 자신이 검찰 수사를 요청하겠다고 했다. 검찰 수사는 의혹의 당사자가 요청하고 말고 국민 앞에서 흥정할 사안은 아니다. 그의 주장대로 사재를 털어 목포를 살리려 했다면 손 의원에게 국민 포상을 해야 할 일이다. 털어도 한 점 먼지가 나지 않도록 철저한 수사가 그래서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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