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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인 강계식씨(이세기의 인물탐구:26)

    ◎“무대를 신앙으로” 외길인생 50년/열과 성으로 완벽하게 배역 소화 “관객 매료”/“40∼50년대 최고 명우” 「춘향전」 등서 불꽃연기/진실일념으로 삶 일관… 고 이해랑씨 “진정한 연기자” 칭송 햄릿이나 위대한 줄리어스 시저는 눈부신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관객의 감동과 갈채를 한몸에 받는다.하나의 연극에서 주역으로 발탁된 이들은 종횡무진 무대를 누비며 자신의 기량을 활기차게 펼친다.관객은 그때마다 환호하며 주인공의 희비에 침몰하듯 매료된다.그때도 이를 희생적으로 뒷받침하는 단역배우들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그들은 있는듯 없는듯 미미하게 존재할 뿐,모든 영광과 기쁨은 주인공의 차지다. 원로 연극배우 강계식씨의 연극인생은 언제부턴가 단역에 머물러있다.흥분한 어조로 「정의」와 「불의」에 대하여 「사랑」과 「미움」에 대하여 열렬히 외치는 극중 주인공은 이미 아니다. 역할이 크든 작든 대사가 짧든 길든 한마디의 대사가 없을 때라도 그의 역할은 작품전체를 구성한다는 사명감에 투철하다.따라서 어떤 배역이 돌아와도 그 역할에 완벽하게 용해되어 한낱 연기가 아닌 무대의 한 모습처럼 형형하게 서있다.그리고 확실한 목소리와 움직임과 형상을 보여준다.그의 나이에서는 연극속의 각 배역과 그 배역들이 하나같이 살아 숨쉴 수 있도록 섬세하게 보조하는 위치다. 어차피 하나의 역할은 무대에서 창조될 뿐 현란한 조명과 불꽃같은 연기는 폐막과 함께 속절없이 소멸된다.주역의 영광도 단역의 비감도 일순간에 지나지 않아 또다른 다음 역할을 위해 새로운 삶속에 곤두박질치듯 파고들어야 한다. ○자신의 역할 예감 연극에 몸담은지 50년이 넘었건만 강계식씨는 지금도 첫무대에 서는 듯한 긴장과 설레임을 떨치지 못한다.무대는 그에게 있어 고통이자 환희다.삶이자 희망이며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이다. 대본을 받아든 순간부터 그는 자신의 역할을 귀신처럼 예감한다.그것이 누구의 작품이며 연출자가 누구냐에 따라 인물이 갖는 사회적 시대적 환경과 성격,인품과 직업,체질과 용모를 몸속에 형성한다. 동네노인으로 나와 서성거리는 역에 불과할 때도 자신의 움직임이 어떤 모양새로 연극을 바쳐주느냐.연극의 흐름을 어떻게 이끌 것인가를 자연스럽게 몸짓해준다.번뜩이는 열기와 광기,돋보이는 개성을 어필시킬 기회란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다만 다른 연기자의 대사와 동작을 효과적으로 살려내고 대사와 대사사이,동작과 동작사이의 침묵을 묵시적인 연기로 다음 장면에 연결시킨다.그에게 있어서의 연극은 「신앙이자 종교」다.역할을 맡을 때마다 「내 생애 최고의 역할」로서 최선을 다하는 자세다. 연습시간에도 언제나 남보다 일찍 나온다.두시간 공연에서 맨 마지막 장면의 한 동작을 위해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연극의 흐름에 호흡을 맞추고 있다.무대를 떠나지 않는 그를 가리켜 연출가 오사양씨는 「선생이 창출하는 역은 항상 진실과 신뢰가 뒤따르고 높은 격조와 깊은 함축을 시사하고 있다」고 존경해 마지않았다.그의 연극초기시절부터 연극활동을 함께 해왔던 고 이해랑씨는 「작은 역이라도 열과 성을 다해 몰두하는 진정한 연기자」가 있음을 언제나 자랑삼았다.그리고 「그의 나이와 그의 성격에 맞는 역할로 그의 노년을 빛내주고 싶다」고 별러왔으나 숙제를 마치지 못하고 먼저 길을 떠났다. 물론 그는 처음부터 조역·단역배우는 아니었다.40년대와 50년대 우리 연극사에서 그는 단연 뛰어난 주역배우의 한사람이었다. ○토월회극 보고 꿈꿔 특히 유치진작 서항석연출의 「춘향전」에서의 이도령은 유치진씨가 살아생전에 「40년대 강계식의 춘향전은 지금까지 최고」였다고 손꼽던 무대다.그는 당대 명우였던 유계선 김양춘을 상대로 수차례의 「춘향전」앙코르 무대를 탄생시켰고 당시의 극단 현대극장 극단 민예와 청포도·신지극사·신청년·창조·상록극회에 이르기까지 각 극단의 간판배우로서 관객을 매료했다. 강계식씨가 연극을 하게된건 보통학교시절 고향인 충남 온양에 지방공연왔던 토월회의 연극 「디아블로」를 보고나서다.삭막하고 쓸쓸한 어둠을 가슴속에 뿌렸던 이 연극을 보고 그는 막연히 연극의 주인공이었던 이백수같은 배우를 꿈꾸게 되었다. 후에 서울로 올라와 경성실천상업학교에 다닐때도 연극구경에 미쳐있었고 북경에 있는 일인회사에 다니다가 연극을 포기할수없어 39년에 귀국,같은해 유치진 함대훈 이해랑씨가 주축이 된 극단 현대극장의 부설 연기자 양성소인 국민연극연구소에 들어갔다.3백명의 응시자중 10대1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합격하여 본격적인 연기수업 받는동안에는 꿈에 그리던 토월회의 이백수씨와 「흑룡강」을 공연,연구소 수료후 41년 유치진작 서항석 연출의 「대추나무」에서 주인공인 「동욱」역을 맡아 부민관 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했다.그때 광화문 네거리까지 길게 늘어섰던 구경꾼의 행렬은 지금 생각해도 잊을수없는 감격이다.충청도 양반다운 예절과 겸손이 몸에 밴 그는 말과 행동이 한결같이 의연하여 연출자·선배들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모든 공연에서는 주인공을 도맡았다.남부럽지않은 주인공시대를 마음껏 누린 황금기였다. 그러나 50년 극단 창조를 창립하고 「황진이」지방공연중 6·25를 만나 가족을 고향에 남겨둔채 부산으로 피란,피란지에서 영화배우 조미령의 남편인 이철혁을 비롯,변기종 김승호 최남현과 함께 박동근 연출의 중국고전인 「추해당」공연을 갖기도 했다.주인공엔 그와 유계선이 캐스팅됐다. ○전례없는 흥행 기록 다른 사람들은 단칸방이나 판잣집이라도 제집이 있었지만 그는 국제시장이나 남성여고 교실에서 합숙으로 새우잠을 자던 때여서 도무지 연극연습을 할수가 없었다.그는 몸이 달아 뜬눈으로 밤을 밝혀야했다.공연이 임박하자 이를 보다못한 유계선씨가 연출자에게 『연극을 살리기위해선 배역을 바꿀수밖에 없다』고 제의했다.그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이말에 눈앞이 아찔했다.배우가 배역을 뺏긴다는 건 바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단한번도 선배들을 거역해본적이 없던 그는 「죽을 결심」으로 연출자인 이철혁씨를 찾아갔다. 『개런티는 안줘도 좋다.연습할수있는 방만 해결해달라.나는 죽어도 이 연극을 해내고야 말겠다』고 사정했다.이렇게해서 남포동 해변가에 하숙방을 얻어 1주일을 앞두고 동작연습 대사연습에 들어갔다.이 연극은 부산극장에서 상연되어 전례없는 흥행을 기록했고 사람들은 『그의 진실한 몸짓은 바위라도 뚫을수 있다』고 호평해주었다.자존심을 굽힌것이 결국자존심을 지킨 결과임을 경험한 순간이다. 그는 충분한 연습으로인해 무대에서 실수한 적은 없다.동랑청소년극단의 「방황하는 별들」에서 손주뻘의 어린 연기자들과 공연할때도 충실하게 자신의 할바를 지키면서 미숙한 연기자들을 말없이 감싸주었다.「일체의 영합을 배격하며 연극의 공리적 속념을 거부하고 진실일념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자세」를 잃지 않은 것이다. 인생을 관조하는 노년의 노련미와 진실의 모순속에 방황하는 지성인,삶의 무게가 힘겹게 느껴지는 스산한 서민층,숱한 인생을 재현하고 체험하면서,그가 연극에서 확인한것은 인생은 「무상」이며 「고통이 할퀴고 간 사랑이라야만 진실하다」는 진리다.그리고 『언제 어느장소에서 어떤 모습으로 서있건 그것은 그에게 있어선 연극을 위한 터득이었으며 연극은 그의 인생을 터득케해준 바로미터였음을 술회한 바 있다. 그는 극단 현대극장시절의 동료였던 이용남여사(68)와의 사이에 4남3녀. 『7남매의 등록금을 대느라고 돈도 많이 꾸러다녔고 울기도 많이 했다』『세 아이가 한꺼번에 대학에 다닐 때는 다른아이는 시험에서 떨어져으면 한적도 있으나』7남매가 모두 대학에 합격하여 장남(희열씨·47)은 서울대공대 졸업후 현재 미국 컴퓨터회사에 근무,6남매가 모두 출가하고 지금은 노부부가 이대미대를 졸업한 막내딸과 도봉동아파트에 살고있다. ○“연극인생 후회없어” 주역의 뒷자리,그의 생애가 헤아릴수 없는 시련과 고통 가난의 슬픔으로 얼룩졌다해도 그는 결코 자신의 인생을 후회하지 않는다.황금이 정신을 지배하는 시대에서 그의 연극은 황폐한 인간사이에 구원의 빛을 뿌리고 있음을 굳게 믿기 때문이다.이제 더이상 자기자신이 적나라한 정오의 햇살이 아님을 그는 알고있다. 『이로스야!이 갑옷을 좀 벗겨다오.하루일이 끝났다』연극 시저에서의 마지막 대사처럼 어느날 그도 무대위에서 연극의상을 벗게 될지 모른다. 오로지 정직하게 천직을 지켜온 이 노 예술가의 가슴은 값지고 아름다운 금빛훈장으로 현란하게 장식되어도 다하지 못할것 같다. □연보 ▲1917년 4월21일 충남 온양출생(호 화방) ▲1937년 경성 실천상업학교 졸업 ▲1938년 지방 관리 양성소 수료 ▲1940년 극단 현대극장부설 국민 연극연구소수료(연수기간중 유치진작 서항석연출 「순정해협」「흑룡강」 함세덕작 허집연출 「전설」출연) ▲1941년 극단 현대 극장입단 유치진작 서항석연출 「대추나무」 정식대뷔,지방공연외 「청춘」「봉선화」「맴도는 남편」「춘향전」「에밀레종」「산적」「낙화암」「무장선샤먼호」외 ▲1945년 극작가 이광래와 극단 민예 극장 창단 「카츄샤」「젊은그들」「민족의 전야」「백일홍 피는집」「동학군」「피는 물보다진하다」「피어린 역사」「지옥과인생」외 ▲1946년 연출·극작가 이상백등과 극단 청포도 창단,「초원의 발전」 ▲1947년 극단 신지극사 창단 「태양의 그리워」「언덕에 꽃은피고」 ▲1947년 중앙극장 전속극단,극단 신청년 창단 「오남매」「혈맥」「사랑의 가족」「상해야화」「골든보이」「어머니와아들」「여죄수의 고백」「공작부인」「송화강의 애수」「반역자」「사육신」외 ▲1950년 극단 창조극단 창단「황진이」지방공연중 6·25 ▲1951년 상록 극회창단 ▲1953년 극단 신협 창단멤버입단 「빌헬름텔」「햄릿」「오델로」「맥베드」「줄리어스 시저」「붉은장갑」「마의태자」「원술랑」「맹진사댁경사」「나도 인간이 되련다」「한강은 흐른다」외 ▲1957년 국립극단입단 「인생차압」「딸들자유연애를 구가하다」「가족」「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뜨거운 양철지붕의 고양이」「대수양」「카라마조프의 형제들」「성웅 이순신」「죄와벌」「손탁호텔」「마을의 봉팔이」「순교자」 80년대까지 70여편 ▲1980년∼현재 극단 배우극장 소속 「천일의 앤」「정복되지 않는여자」「분노의 계절」「신장한몽」「어머니」외 「그래도 우리는 볍씨를 뿌린다」「이대감 망할대감」「붉은 카네이션」「밤주막」「출세기」등 타극단 공연 참가 ▲1986년 고희기념공연 윤정선작 주요철 연출「나는 어이 돌이되지 못하고」 등 2백여편 1946년부터 영화 「청춘의 행로」「쌍룡검」외 TV드라마등 1백여편. ▲국립극단 부단장·총무역임. 86,동아연극상 특별공로상 87,백상연극상 특별상 92,문화훈장 옥관장 서훈·고희기념문집 발간
  • 불 관객 배꼽 빼는 코미디영화 「손님」

    ◎석달새 4백만 몰려… 10년내 대히트/중세인,현대 출현 실수연발에 “폭소” 「손님」이라는 프랑스영화가 이 나라에서 4백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이것은 과거 10년동안 어느 프랑스 코미디영화도 못따르는 기록이다.그야말로 프랑스인이 곧잘 영어로 표현하는 「빅 뱅」(대폭발)이다. ○제작비 6천만프랑 재미있다는 말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개봉한지 석달이 지난 현재도 영화관들은 여전히 손님들로 만원이다.43세의 제작자 알랭 테르지앙이 『프랑스영화의 어쩔수 없는 퇴조란 천만의 말씀이란 증거』라고 뻐길 만하다.이 작품은 막강한 할리우드영화들에 눌려 빈사지경에 빠져있는 프랑스영화의 자존심을 되찾게 했다. 특히 희극영화가 이런 히트를 친 것은 놀라움으로 받아들여진다.코미디라면 TV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기 때문이다. 「손님」은 제작비를 적게 들이고도 재미를 보았다.테르지앙은 『관객을 끌려면 적어도 1억프랑(약 1백60억원)은 들여야 한다고 하지만 이 작품제작엔 6천만프랑도 채 들지 않았다』고 밝혔다.그는 54번째의 작품인 이 영화에서 마침내 노다지를 캐낸 것이다. ○자동차와 칼싸움 중세의 기사 고드프루아와 그의 하인자크누이유는 마법사가 지어준 약을 먹고 아스팔트길과 자동차,송전탑과 전등불 따위의 괴물이 그득한 20세기의 세계에 갑자기 떨어진다.칼을 빼들어 자동차와 싸우고 화장실 변기에 손을 씻는 등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연발한다.기사는 우연히 자신의 직계후손과 상봉하며 또한 마법사의 후손과도 만난다.선대의 유언을 지켜 약의 비방을 대대로 물려받아온 마법사의 후손은 기사를 다시 중세로 돌아가게 해준다. 타임머신같은 착상의 이 영화는 미국영화 「백 투 더 퓨처」처럼 재미있다.얼핏 보기엔 「백 투 더 퓨처」와 크게 다를 것도 없다. 그런데 왜 이토록 대성공을 거두고 있는가.영화잡지 「영화노트」에 따르면 「프랑스식 코미디」이기 때문이다.프랑스 감독과 배우가 프랑스의 역사를 배경으로 프랑스인의 감정에 잘 맞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장 마리 푸아레감독은 이 영화에 역사와 가족의 가치,문명발달과 환경파괴,인권문제 따위를 양념처럼 얹음으로써 단순히 웃고마는 코미디에 그치지 않게 했다.천년의 세월을 사이에 둔 조상과 후손의 해후는 프랑스인들에게 역사와 가족의 뿌리를 생각하게 한다. 등장인물의 성격에 맞게 배역을 잘 캐스팅한 것도 성공의 한 원인으로 꼽힌다.기사역을 맡은 르노는 희극배우같지 않고 웃지도 않지만 그의 진지한 표정때문에 사람들은 웃는다.클리비에는 원래 유명한 코미디언이고 기사의 후손 베아트리스역을 맡은 여배우 발레리 르메르시에는 유달리 이 영화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대사흉내내기 유행 베아트리스는 『오케』(OK)라는 말을 자주 쓰며 기사가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 때마다 『미치겠군』하고 내뱉는다.요즘 고등학생들 사이에서는 이 두 마디 말의 흉내가 대유행인데 누군가가 이를 흉내내면 모두 허리를 잡는다.이런 유행어도 관객동원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 이사철/집안청소대행업체 성업/세척·탈취 등 전문장비로 “새집처럼”

    ◎맞벌이부부 가정에 인기 높아/30평아파트 이용료 18만원선 집집마다 봄철 대청소가 한창인데다 본격적인 이사철이 겹쳐 각 가정의 청소를 대신해주는 가정청소대행업체들이 인기를 끌고있다. 요즘은 1주일전에 예약을 해두어야 할정도인 가정청소대행업은 집안청소에 많은 시간을 낼수 없는 맞벌이 부부가정에 특히 인기가 높다. 일단 청소대행을 의뢰하면 일반주부들이 쉽게 청소하기 힘든 천장과 내·외벽,싱크대등의 엉겨붙은 때와 기름 청소,카펫·소파등의 세탁,탈취,방충등 전반적인 소독도 동시에 할 수 있어 지난해말부터 중산층이상의 가정을 상대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현재 가장 많이 알려진 곳은 서울에서는 「닥터클리너」(544­9988)「코리아하우스클리닝」(516­4680)「클린코리아」(420­5771)「모던리빙사」(575­5900)등 4개업체. 이들 전문업체는 주로 20∼30대의 전문훈련을 받은 청년 3∼4명을 집중 투입,5∼7시간안에 집안을 말끔히 청소해낸다. 세척과 동시에 건조가 되는 진공청소기,광택기,각종 약품·세제등 전문적인 청소장비를사용해 화장실 변기에서 부터 현관 거실 싱크대 창틀 장롱위아래 샹들리에등 구석구석을 닦아낸다. 에이컨·TV등 일반인들이 만지기 어려운 가전제품의 먼지제거및 청소도 해주는데 작업도중 집안 구조물이나 기구등의 파손·탈색등이 발생한 경우 모두 변상해주는 규정도 마련돼 있다. 이러한 이점도 있는 만큼 가격은 비싼편.업체마다 서비스내용에 따른 가격차이가 약간씩 있는데 대부분 청소할 집의 평수를 기준으로 삼는다. 병원과 기업체등 대형건물의 청소대행과 가정청소를 겸하고 있는 「닥터클리너」는 아파트기준 30평이하는 20만원,30∼40평이 25만원,40평∼50평까지가 35만원이며 그이상은 10평당 5만원을 추가한다. 이곳은 집환경상 청소를 자수 해야하는 사람을 위해 회원제를 운용,좀더 싸게 하기도 하고 작업절차에 따라 유동적인 가격을 제시하고 있다. 「코리아하우스클리닝」역시 평수를 기본으로 하는데 아파트기준 20평이하 15만원,30평이하 18만원,30평이상인 경우 평당 6천∼8천원의 추가비용을 받고 소파·카펫의 경우 크기에 따라 3만∼5만원의 별도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클린코리아」는 30평기준 15만∼20만원으로 집안의 구조물 정도에 따라 다르게 책정되며 평당 5천원의 추가 요금이 계산된다.카펫과 소파는 별도. 단독주택의 경우 집구조가 천차만별,평수로 구분할 수가 없기 때문에 모든 업체들이 가정을 방문해 견적을 뽑은후 가격을 책정한다. 파출부를 고용하는 것이 신경이 많이 쓰여 지난해 10월부터 회원제로 월2회 청소대행을 의뢰하고 있다는 맞벌이 주부 이명화씨(39·청담동 현진빌라)는 『가격이 비싼편이나 세탁비가 많이 드는 소파·카펫등을 지속적으로 관리 해줘 오히려 3일에 한번씩 파출부를 부르는 것보다 이익이 된다』고 말한다. 이처럼 기준 가격이 있기는 하나 소비자들이 계약할 때는 집안의 구조및 설치물에 대해 상세히 설명,이에따른 각 업체의 정확한 서비스내용을 확인,비교한뒤 가격을 명확히 해두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대기업 업종 전문화…초일류기업으로/신경제 5개년계획 작성지침 내용

    ◎환경설비산업에 금융·세제지원 강화/단순 의료행위 공정가격제 도입 검토/대중화된 물품 과세 낮추고 유류특소세 높여/사범대·교직과정학생 산업체 실습을 의무화/다주택합산과세 95년부터 시행 신경제 5개년계획지침은 새 정부의 경제정책 방향과 추진방안에 대한 청사진이라 할 수 있다.정부가 이를 제시한 것은 경제활동의 불확실성을 없애고 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창의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아울러 국민들에게 약속한 경제개혁을 치밀한 전략 아래 일관성 있게 추진하기 위한 것이다.신경제는 우리 경제의 성장잠재력 확충을 통해 물가상승을 유발하지 않으면서 경제의 활력을 높여 성장과 안정을 조화시켜 나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신경제 5개년계획 지침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제제도 개혁◁ ◇직접세 기능의 강화 ▲개인소득세=과세베이스를 넓혀 세수증대를 꾀한다.면세점을 조정해 근로소득 과세자비중(92년 46%)을 높인다. 양도소득세와 특별부가세의 비과세 감면대상을 대폭 줄인다.이자및 배당소득에 대한 비과세및 저과세 비중을 낮춘다. 이자·배당소득·부동산 양도소득 등의 종합과세방안을 마련한다.종합소득세의 최고 한계세율(50%)을 점차 낮춘다. ▲법인세=조세감면 대상을 줄이고 세율을 낮춰 나간다. 종합소득세액에서 공제하는 법인세액의 범위를 점차 늘린다.공공법인의 범위를 줄여 세부담의 형평을 꾀한다. ○공공법인 범위 축소 ▲상속세및 증여세=고액자산가의 자산변동 상황을 계속 관리하는 행정체계를 뿌리내린다.「공익법인 설립에 관한 법률」을 보완한다.공익법인에 출연한 재산관리를 감독관청과 국세청이 함께 한다. ▲토지세제=종합토지세의 체계와 행정체계를 단순화하고 과표기준을 공시지가로 바꾼다. 건물분 재산세와 종합토지세를 합쳐 종합재산세 체계로 만든다. 땅값과 부동산투기가 사라지면 토초세를 포함한 토지관련 세제를 취득·보유·이전 단계별로 종합적으로 개편한다. ◇간접세제의 개편 ▲부가가치세=과세특례자 대상과 면세대상을 줄여 과세대상을 넓힌다. ▲특별소비세=소비가 대중화된 물품의 과세범위와 세율은 점차낮추고 지나치게 세금이 높은 일부품목도 세율을 내린다.휘발유(1백%)·경유(10%)·액화석유가스(LPG·10%)등 유류의 특별소비세율은 높인다. 경유와 LPG 등에 대한 세율은 더 높인다. ▲자동차관련 세제의 보완=자동차의 이용시 부담을 높이는 대신 취득및 보유단계의 세부담을 낮춘다. ▲증권거래세=증권거래세를 현행 0.2%에서 0.5%로 정상화한 뒤 점차 주식양도 차익에 대해 종합과세해 나간다. ◇조세감면제도의 전면 재검토=5년단위 한시법에서 개별지원 방식으로 바꿔 적용시한을 명시한다. ◇관세제도의 개선=연구개발,환경오염방지 부문에 대한 관세감면을 계속한다.반덤핑,상계관세제도의 활용을 높인다. ◇재정지출구조의 개선=정부 부서의 총원을 동결하는 선에서 내부조정으로 인원을 충원한다.일반 행정비 등도 점차 줄인다.양곡의 과잉 재고를 줄여 농어촌 투자재원으로 쓴다. 재원은 사회간접자본시설,기술개발,인력양성,산업구조조정등에 중점적으로 쓴다. ○과세특례자를 확대 ◇재정의 역할제고와 규모의 확충=재정규모를 경제성장률보다 빠르게 증대시켜 국민총생산에서 재정이 차지하는 비중(올해20.2%)을 높인다.공공자금의 예탁과 국채발행 등을 통해 조세수입을 올리고 세외수입도 확대한다.공공자금의 여유자금을 재정자금으로 활용해 나간다. ◇예산제도의 개편=특별회계및 기금을 단순체계로 바꾼다.정책자금을 일원화한다. 재정운용을 5년간의 중장기계획 아래 일관성있게 추진한다. 대형사업 선정시 기준과 절차를 구체화하고 공개한다. ◇중앙과 지방의 역할과 책임의 조화=지역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중앙정부가 지원한다.지방재정 조정제도를 바꾼다. ◇예산의 생산성및 성과제고=대형 신규사업은 기존사업이 끝난뒤 착수한다.예산단가를 현실화하는 대신 집행부서에 책임과 권한을 준다. ◇금융기관의 경영자율화=자율성과 공공성이 조화되는 시중은행장 선출방안을 마련한다.금융기관을 대형화하고 부실채권을 정리한다. 정책금융을 축소하고 특수금융기관의 역할을 재조정한다.여신관리제도를 편중여신 해소와 기업의 재무구조개선 위주로 손질하고,경제력집중 완화와 부동산투기억제기능은 공정거래법으로 대체한다. ◇금리자유화 계획의 수정보완=금융시장개방계획과 금융제도개편계획과 연계,수정한다.2단계 금리자유화를 올해중에 실사하며 3단계는 94∼96년에 실시한다. ◇통화신용정책의 효율화=공개시장을 활성화하고 한은재할인을 줄이는등 간접관리방식으로 바꾼다.통화관리 지표를 바꾸고 금리와 환율과의 연계성을 높인다. ◇금융산업구조의 선진화=금융기관의 대형화및 전문화를 유도한다.금융기관의 업무영역을 조정한다.기업과 금융기관간의 소유구조를 개선한다.특수은행의 기능을 조정한다. ◇금융기관의 건전성 강화=사전적 감독기능을 강화하고 경영부실에 대한 제재강도를 높이며 감독기준을 통일한다.금융기관의 부실에 대비,예금자보호제도를 도입한다. ◇금융의 국제화 추진=외환의 자유화 및 원화의 국제화를 추진하며 환율변동폭을 넓힌다.대내외 직접투자에 대한 규제를 완화한다. ◇금융실명제의 실시=시행여건을 조성해 나가며 실시방안을 마련한다. ◇경제적 규제완화=개방업종에 유통업을 허용하는등 진입규제를 완화한다.중소기업의 창업과 공장입지,민간공단 설립절차를 간소화한다.특허관련,기술도입을 간소화한다. 기존의 가격규제를 대폭 줄이고 경쟁을 통해 가격안정을 꾀한다.서비스요금은 자치단체가 자율관리토록 하고 의료수가 등은 이해당사자가 협상해 결정한다. 성금과 기부금등 준조세를 점차 없앤다. ○대형사업 절차 공개 ◇사회적 규제의 합리화=환경규제를 오염물질 배출정도나 피해사실에 근거해 실시한다.단순의료행위에 대한 공정가격제를 도입한다. 사전규제를 사후규제로 바꾸되 부담금·부과료 등을 부과하는 경제적 제재를 강화한다. ◇행정절차의 정비=중복규제를 간소화한다.근거가 없는 행정지도를 철폐하고 시민단체의 참여를 높인다.신설될 규제는 경제기획원과 사전협의한다. ◇경제행정조직의 개편=지시·통제보다 정보제공·봉사기능으로 바꾼다.부처간 유사 중복업무를 조정한다.정책조정 기능을 강화한다. 지방정부의 기능을 경제행정 중심으로 바꾼다.국제기구와의협력을 강화한다. ◇공기업의 민영화=민영화로 효율성을 높인다.민간부문에 적합한 정부기능을 민간에 이양한다. ▷경제의식 개혁◁ ◇의식개혁 세부 추진방안=민간인의 의식교육은 사회교육·학교교육·제도개혁을 통해 추진한다.경제5단체·노동단체·경실련등 시민운동단체·소비자단체 및 여성단체·YMCA등 지역사회단체·교육단체등 기존의 민간단체들이 참여,의식개혁 운동을 주도하도록 한다.교과서 내용을 수정보완하고 학교교육용 교재의 개발보급,교사에 대한 교육등을 실시한다.의식개혁의 장애가 되는 각종 경제제도를 개선하고 관련단체 및 시민의 건의를 정책담당 부서에 효과적으로 전달하도록 제도를 개혁한다.공직자들은 윗물 맑기운동의 지속적 실시와 각종 교육을 실시한다. ◇추진 전담기구의 구성검토=민간 부문의 의식개혁 추진을 위해 학계·종교계·언론계·예술계·경제계 인사 20명 내외로 구성된 전담기구인 「신경제 의식개혁 추진위원회」(가칭) 설립을 검토한다.각 민간단체가 참여하는 의식개혁 추진기구인 신경제 의식개혁 추진협의회 구성을 검토한다.공직자를 대상으로 한 의식개혁 추진은 경제기획원과 총무처에서 주관한다.민간 추진기구는 7∼8월 마련하고 심층연구(8∼12월) 결과에 따라 94년 1월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한다. ▷성장잠재력 확충◁ 산업의 비젼과 단계별 발전목표를 제시한다.기업의 투자결정과 정부 및 금융기관의 지원 우선순위를 정하고 대기업의 업종전문화를 유도,세계 일류기업으로 키운다. 업종별 주요 2백개 기업을 선정,투자애로 등을 해결해 주는 펌 닥터제(설비투자 애로점검반)를 운용한다.수출증대를 위해 수출보험의 기금을 올해 1천억원으로 늘리고 무공에 「자기상표 제품 마케팅 지원센터」를 설치한다.민관 공동으로 다음과 같은 업종별 발전전략을 세운다. ◇자동차산업=대형 승용차와 상용차의 독자모델을 개발하고 대학의 자동차학과를 늘린다.환경규제에 대비,탈유류 자동차를 개발하고 2∼3개사의 생산규모를 국제 경쟁수준인 1백만대로 확충한다.95년까지 5백50만평의 자동차전용 공장부지를 추가 조성하고 설비자금 15조원을 차질없이 지원한다.부품표준화를 확대하고 자동변속기,에어백 등 핵심부품을 개발한다. ◇조선산업=설계와 절단,용접 등 전 생산공정의 자동화와 전산화 시스템을 조기 개발하며 카페리선,LNG선 등 고부가가치 선박의 설계와 건조기술을 자립화한다.초전도 선박과 자동운항시스템 등 차세대 첨단 조선기술의 기반을 조성한다.조선사 업무영역을 선박 외의 분야로 다각화하고 국산 기자재의 규격화와 표준화를 추진한다. ◇자동화기기=자급도를 97년까지 70%까지 높이고 새로 개발된 자동화기기를 실습용으로 확대,보급한다. ○탈유류 자동차 개발 ◇환경설비산업=환경개선 부담금의 일정액을 기술개발 자금으로 활용하고 생산기술연구원에 공해방지사업 추진체를 설립,공해방지 기기의 연구개발을 유도한다.환경설비산업의 육성을 위해 환경설비 산업의 지원대상을 늘리고 금융·세제상의 지원도 강화한다. ◇반도체=메모리 반도체를 세계 최고수준으로 키우고 2백56MD 램의 핵심 기반기술을 개발한다.반도체 장비와 재료의 국산화를 추진,95년까지 장비국산화율을 50%까지 높인다.장비·재료분야에서 미국과 일본의 전략적 협력을 강화한다. ◇가전=고화질 TV의 개발을 내년 6월까지 완료하고 미니 디스크,디지털 콤팩트 카세트등 신제품 기술을 공동개발한다.96년까지 스피커 콘덴서 등 2백개 부품을 표준화해 원가절감과 생산성 향상을 유도한다. ◇컴퓨터=고속 중형컴퓨터 개발을 93년까지 마치고 산·학·연 공동으로 대형 컴퓨터 개발을 추진한다.휴대용 PC의 주기판을 공동 규격화하고 멀티미디어 관련기술을 표준화한다.관련업계 공동으로 단체표준화 추진위원회를 구성,메모리카드와 보조기억장치 등 PC 중간재의 단체표준화를 추진한다. ◇화학=CFC 대체물질을 개발하고 산업폐기물 공동처리와 환경보전을 위해 정밀화학 공업단지 3개를 조성·분양한다.국산 나프타의 구입가격을 내리고 기초원료의 관세지원을 계속한다. ◇섬유=신소재 신합섬을 개발하고 염색단지를 더 조성한다.섬유자동화 관련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보급하고 자동화 시범업체를 선정,지원한다. ◇철강=소량다품종 주문체제를 갖추고 생산원가 절감이 가능한 혁신적인 철강기술을 개발한다.동남아 지역의 수출을 늘리고 고철의 유통구조 개선을 위한 지원방안을 마련한다. ◇비철금속=에너지비용 절감을 위해 열병합발전소의 건설을 늘리고 경쟁력이 확보되는 납·아연등의 제련과 정련시설을 늘린다. ◇항공우주=50인승 중형 항공기를 90년대 중반에 개발하고 항공우주산업 사업을 종합기획할 수 있는(가칭)항공우주산업 개발기획단을 설치한다. 개인용 컴퓨터의 핵심부품을 국산화하는등 13개 중간 핵심기술의 개발방안을 세운다.우수 기술개발자나 팀에 대한 포상제를 마련하고 미국 일본 EC 러시아 중국과의 기술협력 체제를 갖춘다. 산업의 미래경쟁력을 갖추도록 11개 핵심 선도기술의 개발을 추진하고 목표관리제를 도입,투자의 효율성을 높인다.한국과학기술원의 정원을 단계적으로 늘리고 광주과학기술원을 95년 3월에 연다. ○지방중기 세제지원 자동화 초기진단부터 완료까지 단계별로 연계지원 체제를 갖춘다.대기업의 중소기업 지분참여를 늘리고 연계보증을 통해 실질적인 동반관계가 되도록 한다. 지방으로의 이전기업,지방공단 조성 및 입주업체에 대한 세제지원을 강화하고 중소기업 고유업종의 해제예시제와 단체 수의계약의 경쟁개념 도입등 보호제도를 단계적으로 없앤다. 휴대용 정보기기,컴퓨터 주변기기 등을 중점 개발하고 고도 정보통신망,무선 위성통신망,광대역 통신망의 기술개발에 대한 추진계획을 마련한다.정보산업 관련 전문리스회사를 설립하고 정부와 공공기관의 국산 컴퓨터 및 소프트웨어 구입을 늘린다. 대규모 공공사업 투자계획 수립때 정보화관련 투자 사전심사를 할 수 있게 하고 국산기기 사용권장이나 지적재산권 보호,개인정보 보호 등을 정보화촉진기본법에 반영한다.지식산업 단지의 입지와 관련시설의 확보방안도 강구한다. 공업계 고교를 늘리고 산업현장 훈련을 제도화한다.공고의 교육과정을 기업체에서 1년까지 훈련받는 체제로 개편하고 산업인력 양성을 학교와 기업이 공동으로 담당하기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한다.비공업계 실업고를 정보고교 등으로 특성화,발전시키는 방안도 강구한다. 대기업 훈련시설을 97년까지 1백개 신설하고 2백여개 기존 훈련원을 확충한다.이를 위해 4천억∼5천억원의 융자재원을 마련한다.사범대·교직과정 학생의 산업체 실습을 의무화하고 산업계 전문가를 교사로 활용한다.
  • 흡입식 위생채편기 개발/중환자가 간단히 조작… 불편 덜어

    ◎일 롱라이프 메디컬사 몸의 거동이 불편한 환자가 있을때 가장 어려운것이 배편문제의 해결이다. 환자 자신이 배편이나 배뇨 의사를 간호하는 이들에게 밝히는 것을 가장 어려워한다.그러나 이것은 스트레스가 된다. 최근 일본에서는 고령화사회로 들어가는 추세속에 이렇게 몸의 거동이 불편해 배편을 수월하게 할 수 없는 이들을 위한 흡인식채변기가 연구개발되어 관심을 끌고있다.이 채변기는 환자자신의 스트레스 요인을 없애고 인간으로의 존엄을 지킬 수 있게하는 것은 물론,간호하는 이들의 심리적·물리적·경제적 부담을 크게 줄여 점차 각광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 롱라이프 메디컬이라는 회사가 개발한 이 흡인식채편기는 흡인 압력 7백40밀리/Hg의 진공펌프를 사용,환자 자신이 조작할 수 있다.즉 배출구를 환자의 국부에 장착시키고 작동을 시작하면 높은 압력으로 빨아내어 호스를 통해 오물탱크로 보내고,비데가 있어 주위를 깨끗이 씻어준다.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15)

    ◎광복과 함께 새출발/오욕의 역사 청산… 공공지로 재탄생/「서울신문」으로 제호바꿔 11월22일 창간/지령 13738호… 대한매일신보정통성 계승/사장 오세창·주필 이관영 등 새 진용 포진 군국주의 일제의 패망은 한국언론계에 일대 혁명을 불러일으켰다.제도적 탄압장치였던 출판법등 언론계 악법이 미군정에 의해 폐기된데 이어 허가제였던 신문 출판물이 등록제로 바뀌어 갖가지 출판물과 신문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간부진 사표 수리 일제치하 36년동안 총독부의 기관지 역할을 하던 매일신보(이하 매신)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닥쳤다.오욕으로 얼룩진 지난날의 역사를 청산하고 「해방조선의 대변기관」으로서의 「서울신문」으로 거듭나기위해 대대적인 개편수술을 받게된 것이다.개편작업은 1945년9월8일 한반도 진주후 이남지역에 대해 군정을 실시하던 미군정청이 해방전 영업국장이던 이상철 임시관리인으로 임명(10월2일),매신의 간부중 일부를 개편토록하는 조치로부터 시작됐다.매신처리 실무를 위임받은 그는 10월9일 매신중역회의를 열었다.이 회의에서 사의를 표명한바 있는 사장 이성근과 상무 정인익의 사표를 정식 수리하는 한편 10월25일 신문사의 명칭변경이며 새중역진 선임문제등 주요사항을 토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매신의 자치위원회는 신문사의 처리문제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자치위원회란 9월23일부터 경영간부가 없는 상태에서 매신의 운영을 장악,신문을 만들어온 편집국과 공무국등 사원 6백명이 결성한 단체였다.위원장은 문화부기자 윤희순으로 적지않은 발언권을 행사했다.자치위는 10월23일자 지면에 「매신은 어디로」라는 성명을 통해 이 신문은 『특정 정당의 기관지나 개인의 소유가 절대로 될수는 없고 공정한 민중의 기관으로 개편되어야 한다』는 요지의 견해를 피력했다.이는 자치위가 『불편부당 엄정중립의 보도기관으로 새롭게 발족할것』을 앞서 선언했던것과 일관된 논리였다. 자치위의 이러한 반응속에 주총은 예정대로 10월25일 개최됐다.주총에서 사장에 오세창이 추대됐고 부사장은 이상협,전무취체역 김형원,상무 이상철,주필겸 편집국장 이선근등 간부진용이 결정됐다.그러나 자치위의 강력한 반대의사에 부딪혔다. 주총의 결정이 자치위와 사전협의를 거치지 않았다는것이 표면적 주장이었으나 실상은 간부진용에 우익인사들이 너무 많은데 불만을 품은 때문이었다. 양측의 막후교섭이 시도됐으나 타협점을 찾기는 어려웠다.이에따라 개편실무를 맡았던 이들은 모두 사퇴하게 됐고 매신은 표류할수밖에 없었다. 매신이 자치위와 개편실무자 사이에 이처럼 표류하고 있을 무렵 매신의 처리문제는 국내 각정당과 사회단체는 물론 언론계 전체의 집중적인 이목을 끌기도 했다.단순한 호기심의 시선이 아니라 차제에 완벽한 인쇄시설을 갖춘 이 신문사를 접수하려는 직·간접의 암중모색이 여러차례 시도된것이다.천도교세력을 뒤에 업은 공진항이 10월초 매신접수를 시도한데 이어 동아와 조선 양지가 매신인수를 한차례씩 꾀한바 있다. ○개편안 싸고 대립 이러한 상황속에 놓이게된 매신에 대해 그동안 관망상태에 있던 미군정청은 새로운 갈래의 매신개편작업의 필요성을 느껴 본격적인 중재를 결심하게 된다.11월10일재산조사를 이유로 매신에 대해 정간명령을 내렸다.그리고 이관구에게 「공정한 언론을 펴는 참다운 신문」을 만들도록 부탁하기에 이른다. 매신에 대한 정간명령은 자치위에게 여간 큰 충격이 아니었다.그래서 정간되던날 자치위는 「3천만 민중의 정당한 공기로서의 신문이 새롭게 출현해야 한다」는 종래의 입장을 재확인한채 일단 한발 물러서게 됐다.증폭된 갈등속에 난항을 거듭하던 매신의 개편작업은 이로써 순조롭게 진행하게 됐다. 매신개편의 대권을 위임받은 이관구는 내외에서 모두 수긍할수있는 인사들로 경영 편집진용을 구성하는등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했다.우선 사장에 위창 오세창을 추대했다.근대 신문계의 선구자이자 3·1민족대표 33인중 하나인 지조높은 항일민족주의자로서 그의사회적 덕망과 이미지는 새롭게 선보일 서울신문에 걸맞는 인물이었다. 위창과 함께 역시 민족대표 33인중 한분인 권동진과 당시 문단의 원로 홍명희를 상징적인 고문의 위치에 영입함으로써 그 진용을 더욱 강화시켰다.이관구와 함께 매신개편작업에 참여한 하경덕이 부사장에 내정됐다.그는 저명한 교육자요 사회학자로서의 깨끗한 이미지와 함께 탄력있는 자유주의 신념의 소유자였다.중후하고 사려깊은 논조를 감당해 나갈 주필에는 이관구가 선임됐다.일제하 독립운동사에서 귀중하게 평가받고있는 민족주의자와 좌파계열의 연합체인 신간회에 참여한바있어 좌우 어느 편에서도 무난히 받아들여질수 있는 인물이었다.특히 해방전 동아와 조선에서 항일언론의 선봉에 섰던 논객으로서의 경력은 금상첨화였다. 당시 최고의 언론인들을 각부 데스크에 앉히고 이를 지휘할 편집국장에는 어문학계의 권위자인 홍기문이 내정됐다. 그리고 신문경영에 오랜 경험을 가진 원로 이원혁과 조중환이 상무에 실업가 김동준이 전무에 내정,안정된 신문운영을 기할수 있는 진용이 구성됐다. 제호는 이관구의 제의를 간부진이 숙의끝에 받아들여 「서울신문」으로 확정했다.제호의 글씨는 서예가이자 취체역인 김무삼이 썼다. 그리고 매신으로부터의 인수재산 확인도 마무리지어졌다. 우선 자치위산하에 있던 사원 6백명의 인원을 고스란히 흡수하기로 했다.인수받은 재산과 시설은 현 프레스센터 자리에 있던 연건평 1천8백30여평 규모의 4층 콘크리트 건물인 구사옥과 그 부속건물을 비롯,부산등 지방에 산재해 있던 당시 35만3천원 상당의 부동산과 독일제 알버트윤전기 4대등 최우수 인쇄설비 일체,지사 지국의 배급망까지를 포함하는 것이었다.이 규모는 신문사로서 해방전후 유일무이한 것이었다. 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를 개편,서울신문으로 거듭나기 위한 이 모든 준비작업은 11월21일 하오2시 5층 옥상에서 오세창초대사장의 취임식을 가짐으로써 매듭을 지었다.그리고 이튿날인 22일 독립한 이 민족의 진실된 언론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자임하면서 서울신문이 마침내 그 첫지면을 이땅에 드러냈다.발행일자는 1945년11월23일이었다. 당시 사회적 관심의 열도를 반영하듯 미군정장관 아놀드를 비롯,조선인민당위원장 여운형,국민당당수 안재홍,한국민주당수석총무 송진우등의 인사들이 언론정세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최대의 경의와 기대를 보내오는 가운데 혁신된 속간호를 내놓게 된것이다. 『「서울신문」으로 「매신」이 경생』이라는 5단 크기의 컷(1면 중앙)과 함께 속간 첫호의 모습을 선뵌 서울신문의 이날짜 지령은 제13738호로 기록돼 있다. 이는 대한매일신보­매일신보­매일신보 지령을 그대로 계승한것으로서 서울신문의 계보가 어디에서부터 출발했는가를 한눈에 보여주는 것이었다.
  • 권투위의 직무유기/고두현 체육부 국장급기자(오늘의 눈)

    『양변기에 머리를 박고 괴어 있는 물을 마시려고 했다.그러나 인간으로서의 자존심 때문에 차마 그럴수는 없었다.감량중에는 그렇게 목이 마르다』 65년부터 68년까지 프로복싱 밴텀급세계챔피언을 지낸 일본의 파이팅 하라다의 말이다. 『감량을 하고 있노라면 꿈에서도 음식이 보인다.게다가 신경이 곤두서서 사소한 일에도 화가 나게 된다』는 것이 66년부터 68년까지 주니어미들급 세계정상에 올랐던 김기수의 설명이다. 체급경기인 프로복싱에서 계체량통과는 링에 오르기 위한 첫번째 관문인 셈이다.그래서 엄청난 감량고를 견뎌내야만 한다. 중남미같은 곳에 우리나라나 일본의 프로복서가 원정을 가면 먼저 계체량에서 속을 때가 적지않다.이쪽은 성실하게 감량을 하고 나갔는데 상대방선수는 저울에 오르자마자 이쪽에서 눈금을 읽어볼틈도 주지않고 뛰어내리고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주스를 벌컥벌컥 마셔버린다. 뻔히 부정계체량인줄 알면서도 이미 주스를 마셔버렸으니 다시 저울위에 올려놓아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다. 무리한 감량을 하지않은 쪽이보다 체력을 지니고 있을 것은 다시 말할나위도 없다. 그래서 KBC(한국권투위원회)경기규칙 제13장 「게체량」제56조에는 「출전선수는 본회 또는 지회에서 지정한 시간에 지정한 장소에 출두,본회 또는 지회의 역원입회하에 계체량을 해야한다」라고 규정함으로써 계체량의 공정성 보장을 못박아 놓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4일하오 문화체육관에서 열릴 예정이던 OPBF(동양태평양권투연맹)주니어페더급 타이틀매치,챔피언 최재원과 도전자 바라하마(인도네시아)의 메인게임과 오픈게임등이 KBC직원의 계체량 입회가 안돼 유산되고 말았다. 이 경기를 위해 땀을 흘려 준비했던 선수들,적지않은 투자를 한 프로모터들에게 피해를 입혔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망신을 초래했다는 점에서 KBC는 마땅히 그책임을 져야한다. 일부에서는 마치 프로복싱계의 내분이 이번 사건의 원인인 것처럼 이야기되고도 있지만 그전에도 프로복싱계의 내분은 있어왔으나 이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던 점을 감안한다면 이번 사건만은 변명의 여지없이 KBC의 잘못이라 여겨진다.
  • 비염·결막염 알레르기성/“한 병원서 장기치료 바람직”

    ◎신체리듬격변기 4월에 잦은 질병 관리법/과민성 대장/스트레스 풀고 찬 음료·술 삼가야/지루성피부염/직사광선 피하고 비타민B 섭취 사람의 건강은 나이 뿐만 아니라 생활환경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환절기엔 감기가 유행하고 여름엔 식중독과 전염병,겨울엔 고혈압과 뇌졸중등의 질병이 눈에 띄게 늘어난다.특히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의 경우 어떤 질병이 특정시기에 발생하는 확률은 질병에 따라 보통때의 20배까지 높아진다는 연구결과도 있다.따라서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월별·계절별로 발생가능성이 높은 질병과 대응법을 미리 체크할수 있는 「건강캘린더」를 작성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한 해의 건강을 위해 연초의 계획이 중요하듯이 월별·계절별 질병관리 세부지침을 세워 실천하면 건강의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봄철로 접더드는 4월은 한마디로 신체의 변혁기.신진대사및 생체리듬의 갑작스런 변화로 인해 평소 앓던 질환이 악화되거나 새로운 질병을 얻게 되는등 만성질환자나 허약자들에게는 말 그대로 적신호의 계절이다. 고려대의대 박승철교수(내과)와 울산의대 김영식교수(가정의학)의 도움말로 4월에 많이 발생하는 질병과 대책을 알아본다. ▷과민성 대장◁ 설사나 변비,복통이 만성적으로 계속되는 질환.젊은여성이나 갱년기 여성에게서 흔하게 나타나지만 최근들어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두뇌노동자나 수험생,취학아등 사이에서 점차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특히 인사철을 맞아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직장인에게도 흔한 질환. 대장을 자극하는 차가운 주스나 우유,알코올은 삼가는 것이 좋다.증세가 나타나면 내과,특히 위장전문의의 진찰을 받도록 하며 신경성인 경우 정신요법으로 다스려야 한다. ▷알레르기성 질환◁ 4월에는 꽃가루·먼지등이 바람에 날려 코난 눈에 알레르기성질환을 많이 유발한다.대표적인 것이 알레르기성 비염과 결막염. 재채기·콧물·코막힘의 세가지 증세로 설명되는 알레르기성 비염은 외부자극에 의해 코점막의 자율신경균형이 깨지고 코점막의 혈관이 비정상적으로 확장되어 일어난다.만성화되면 코막힘과 콧물만나오고 재채기는 별로 일어나지 않는다.재발의 가성성이 매우 크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꾸준히 치료를 받아야 한다.따라서 도중에 병원을 바꾸지 않는 것이 좋으며 부득이한 경우 치료기록을 작성,새 병원의사에게 제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편 먼지나 꽃가루로 인해 결막(눈 흰자위)에 과민반응이 일어나는 알레르기성 결막염은 눈이 가렵고 따끔거리며 눈곱이 나오는 질환. 학령기 아동에게서 빈발하며 합병증으로 각막궤양을 유발할 수도 있다. ▷지루성피부염◁ 이 질병은 머리·안면·겨드랑이등 피지선이 잘 발달된 부위에 각질층이 형성되는 증세를 보인다.봄철 탈모증의 주범으로 알려져 있다.직사광선을 피하고 비타민 B₂ B□를 복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이밖에도 겨울에 많은 뇌졸중(중풍)도 통게적으로 4월에 흔하게 발생하기 때문에 고혈압환자는 혈압관리에 신경을 쓰고 과로하지 않도록 해야한다. 또 날씨가 풀리면서 홍역,수두,풍진등 전염병이 돌기 시작할때이므로 부모들은 어린이건강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 과기부문 호암상 탄 과기원교수 김충기씨(인터뷰)

    ◎캠토더 핵심소자 개발… 세계가 인정/“현장응용·미래예측 기술 함께 연구 바람직” 삼성복지재단(이사장 이건희)이 제정한 제3회 호암상(상금 1억원) 시상식이 지난25일 서울 호텔신라에서 열렸다. 이날 과학기술부문을 수상한 한국과학기술원 김충기교수(50)는 20여년동안 반도체 소자,집적회로분야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로 국내외적으로 반도체 관련분야의 기술향상에 많이 이바지해 온 중견과학인. 김교수는 지난70년부터 5년동안 트랜지스터와 집적회로를 생산하는 미국의 페어차일드회사에서 최근 캠코더의 핵심기술로 사용되는 전하결합 선형영상감지소자를 개발,세계적인 평가를 받았다. 즉 비디오카메라인 캠코더뒤에 필름 대신에 쓰이는 이 소자는 영상을 기억해 전기신호로 바꾸는 반도체로 기존에 필름을 사용해야만 했던 인공위성이나 정찰기등의 지상촬영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던 것이다. 그밖에 최근 고속열처리공정에 관한 연구를 통해 16M DRAM이상의 고집적기억소자에 사용할수 있는 접합형성기술을 확보하기도 했다. 『연구자의 길은미지의 세계를 처음개척,길을 가는 탐험가처럼 스스로 선택,결정해야하는 일이 많으므로 이를 회피하거나 꺼리지 말고 순간 순간 판단을 내려가며 도전해야한다』는 말로 연구에 임해온 태도를 들려주었다.최근 어려움을 겪는 반도체 업체들에 대해 『국내의 반도체업체들도 이제 소프트웨어의 개발과 더불어 컴퓨터의 주변기기나 생산기계등에도 눈을 돌려 힘을 써야 할때』라며 그렇게 할때 치열한 세계의 반도체시장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근 강조되는 산학연협동은 장기적인 계획아래 추진되어야한다』고 지적하는 그는 산업 현장에서 실제응용되는 연구와 함께 미래를 내다보는 연구가 알맞게 조정 시행되어야 하며 특히 G7기술등 미래 예측을 위한 기술도 등한히 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 을지로 건축자재상가(전문상가)

    ◎세면기서 타일·도료까지 총집합/국내최대규모… 실용위주 국산품 주류 건축과 이사철인 봄을 맞아 건물을 새로 짓거나 수리하는 경우가 많다.이때쯤 한번쯤 찾아보는 곳이 건축자재상가다.각종 건축재료상들이 한군데에 모여있는 건축자재상가는 집을 짓거나 수리하는 사람들의 불필요한 걸음을 덜어주는 곳이다. 이중 서울 을지로2∼3가 청계천쪽 일대는 국내 최대규모의 건축자재상가로 다양한 제품들을 갖추고 있다.이곳에서 취급하는 물품은 세면기 양변기 욕조등 위생도기에서부터 타일 천장재 합판 철물 현관문 도료에 이르기까지 집을 짓거나 꾸미는데 들어가는 각종 건축재료들.위생도기만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상점만도 90여개에 이른다. 주로 일반소비자를 상대로 고가제품을 산매하는 서울 논현동 건축자재상가와는 달리 주택건설업자와 일반소비자를 고루 상대로 도매와 산매를 병행한다.따라서 값비싼 외산제품보다는 품질을 인정받는 다양한 가격대의 국산제품을 많이 갖추고 있다.대부분 국내 메이커의 대리점이거나 대리점으로부터 물건을 납품받고 있다. 을지로건자재상가의 장점은 30년에 가까운 전통을 지닌곳으로 각종 건축자재를 빠짐없이 구비하고 있다는 것.가격도 도매를 겸하고 있어 다른곳보다 약간 싼편이다. 그러나 주차시설이 없는데다 고급화 추세로 차츰 손님을 논현동 쪽으로 빼앗기고 있다.게다가 최근까지도 건축경기가 풀리지 않아 매기가 없어 이곳 상인들은 울상이다. 될수록 싼 가격의 물건을 찾는 주택업자와는 달리 일반소비자들의 구매경향은 고급화가 뚜렷해지고 있다.위생도기의 경우 자주색 분홍색등 화사한 색조를 선호하고 디자인과 소재도 고급을 많이 찾는다.최근에는 인조대리석 위생도기,원터치 싱글레버식 수도꼭지,강도높은 컬러알루미늄 소재의 철문 등에 대한 선호도 늘어나는 추세다.그러나 고급품과 외산제품은 일반제품에 비해 가격이 매우 비싸 과소비의 우려가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이곳에서 거래되는 국산제품들의 가격을 보면 욕조 5만5천∼9만원,세면기 4만5천∼9만원,양변기 8만∼11만원,샤워기 3만∼8만원,주방수도꼭지 2만5천∼5만원으로 가격대가 형성돼있다. 좋은 물건을 고르려면 외형이 화려한 것보다는 실용적인 전문업체의 제품을 골라야 한다는 것이 이곳 상인의 조언이다.또 고려도기의 장상욱씨는 『각 점포마다 크게 취급하는 대리점의 제품이 값이 싸고 애프터서비스도 잘된다』고 귀띔한다. 이곳 상가의 영업시간은 상오8시부터 하오6시30분까지며 일요일은 휴업한다.
  • 「안가 공원」 발표에 “열린 정치 실감”

    ◎주민들,“청와대 더 활짝 개방” 환영일색/70년대초 건립… 부지 1만여평/3개지역 12동 소재/“권부 회합 했던곳” 새 명소로 그동안 최고 권부의 비밀회합 장소로서 일반인들에게는 철저히 베일속에 가려져왔던 청와대 「안가」(안가·안전가옥)가 개방되자 시민들은 문민통치를 실감하며 환영했다. 문민정부의 출범과 함께 청와대 주변도로가 시민들에게 개방된데 이어 「안가」의 문까지 활짝 열림으로써 청와대는 이제 사실 그대로 국민들에게 다가서게 됐다. 청와대가 4일 개방키로 한 「안가」는 서울 종로구 궁정동 6개동(3천6백60여평)과 청운동지역 3개동(1천2백62평)삼청동지역 3개동(6천18평)등 본관및 부속건물 12개동 1만9백40여평이다. 이는 지난달 25일 김영삼대통령의 취임과 동시에 청와대 주변도로가 개방된뒤 일요일인 28일과 3·1절 연휴기간동안 하루 2만여명의 시민과 관광객이 방문했으나 화장실과 식수등이 부족,방문객들이 큰 불편을 겪은데 따른 것이다. 이날 개방된 「안가」가운데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으로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궁정동지역은 소공원으로 개발,시민들을 위한 편의시설로 활용된다. 청와대측은 이날 하오 궁정동 「안가」6개동가운데 본관건물인 「한국관」과 「영빈관」의 내부를 공개했다. 10·26사태가 일어났던 「한국관」가옥중 1동은 10·26이후 곧바로 철거돼 지금은 잔디와 나무만 심어진채 빈터로 방치돼있다. 나머지 한국관 가옥 1동은 1백20여평 규모로 대통령을 포함,7명이 앉을 수 있는 고급 양탄자가 깔린 응접실과 10여평 규모의 거실·화장실·부엌 등으로 내부가 꾸며져있다. 대지 1천여평규모의 「영빈관」은 2층짜리 3개가옥과 7백여평의 잔디 정원으로 이루어져있다. 「영빈관」본관 가옥은 50여평규모의 침실이 2층에 있고 1층에는 30여평규모의 대규모 온돌연회실과 10여평규모의 응접실이 있다. 2층 침실에는 일제변기가 설치된 화장실과 2인용침대·냉장고 등이 갖춰져 있고 10여평규모의 응접실도 딸려있다. 이 궁정동 「안가」는 박대통령시절인 70년대초에 만들어져 박대통령과 전두환전대통령이 「비밀스러운 비공식업무」를 위해 자주 사용해왔었다. 이번 청와대의 「안가」개방에 대해 시민들은 모두 청와대 앞길 개방에 뒤이은 문민정치시대의 또다른 상징으로 반겼다. 청와대앞길을 외국바이어와 함께 구경왔던 윤석영씨(37·사업·강남구 개포동)는 『어렸을 때 청운동에 살아서 궁정동안가 주변에서 자주 놀았는데 「안가」가 휴식공간으로 개방된다니 또 다시 가볼수 있게 돼 기쁘다』면서 『외국 바이어들에게 떳떳하게 안내할 수 있는 또다른 명소가 생긴 것 같다』고 흐뭇해 했다. 한편 이번에 개방되는 「안가」가운데 청운대지역은 모두 헐어 북악산기슭으로 복원되며 삼청동지역은 서울시와 협의,시민을 위한 시설로 활용된다. 「안가」에는 경비전화·군용전화·행정전화·특수기관과 연결된 특별전화·일반전화 등 다섯종류의 전화가 설치돼 있으며 경비는 청와대 경호실이,관리는 총무비서실에서 맡아왔었다.또 안가주변 길에는 감시용폐쇄회로카메라(CCTV)가 설치돼 있다.
  • 변기 위쪽에 물받이 설치/물낭비않고 언제든 세수(해외 신기술)

    ▷절수용변기◁ 변기의 저수로 뚜껑대신 설치된 이 물받이는 언제든 가외로 물을 사용하지 않고 손을 씻을 수 있다.물은 자동적으로 멎고 탱크속으로 순환된다.미국캘리포니아주 아나하임의 콘스셉트사 제품.값은 30달러. ◎하루에 180도 회전/에어컨료 30% 절약 ▷일식건물◁ 번쩍이는 햇빛을 막고 에어컨의 비용을 30%쯤 줄이기 위해 이 오피스빌딩은 하루에 1백80도를 회전,빌딩의 한쪽 가장자리만 태양을 향하게 된다.하셀그룹이 설계한 일식이라고 불리는 이 36층 구조물은 호주 시드니에 건설된다.
  • 「노」라고 말할수 있는 총리가…(김호준/정치평론)

    국무총리직을 가리켜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총리의 위상은 모호할 때가 많았던 것이 한국정치의 궤적이다.총리는 역대 대통령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제2인자가 되기도 했고 소모품이 되기도 했다.총리의 위상이 이처럼 가변적이었기 때문에 역대 총리에게는 당시의 시국이나 역할을 반영하는 독특한 수식어가 붙여졌다. 제3공화국의 첫 총리 최두선씨는 5·16혁명 주체들에 대한 국민적 비판을 떠맡으면서 「방탄총리」라는 별명이 붙었다.이어 등장한 정일권총리는 한일국교정상화등을 강행하여 「돌격총리」로 평가됐다.5·16혁명 주체세력의 한쪽 날개였던 김종필총리는 남북대화,유신등의 격변기를 거치는 동안 「정치총리」「후계자총리」로 불렸다.박정희대통령시해사건후 대통령에 오른 최규하씨는 총리 재임시 대통령 치사나 대독하는 역할에 그친 나머지 「대독총리」라는 별명을 얻었다.그후의 총리들도 시국과 역할에 따라 「위기관리총리」「경제총리」「얼굴총리」「학자총리」「행정총리」등으로 다양하게 지칭되다가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는 「중립총리」까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앞으로 새정부의 첫 내각을 이끌어 나갈 황인성총리(아직은 총리서리지만)에게 붙을 별칭은 문민시대의 총리 위상을 나타내는 시금석이란 점에서 주목된다. 권위주의시대에 군·관·정·재계의 요직을 두루 거친 황총리가 문민시대의 첫 총리로 기용되기엔 상징성과 신선미가 떨어진다는 주장을 부인할순 없을 것이다.그러나 가만히 들여다 보면 김대통령과 황총리 사이엔 절묘한 보완성이 발견된다.김대통령에겐 없거나 김대통령이 필요로 하는 요소를 황총리는 거의 다 갖고 있다.호남 출신에 육사 졸·예비역 소장으로 상징되는 군과의 관계도 그렇거니와 두차례 장관을 역임하면서 쌓은 행정경험,기업에서 익힌 실물경제 경험도 김대통령이 국가경영 차원에서 갖고자 하는 경력일 것이다.지난 대선을 통해 우리 정치사상 가장 하자없는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한 김대통령은 문민시대의 상징성은 자기 하나만으로 족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그래서 총리 인선기준으로 꼽아왔던 화합·개혁·능력·참신성 가운데 화합과 능력에 무게를 실어 황총리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 고명한 학자나 사회의 덕망가가 총리로 임명됐을 땐 행정업무 파악에만 수개월이 걸렸다.또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키는데 실패하여 국민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경우를 우리는 종종 경험했다.출범초부터 지체없이 개혁업무를 추진해야 할 새정부로선 시행착오를 염려하지 않아도 될 실무형 총리가 무엇보다 필요했을 것이다. 문제는 새 정부에서 총리의 위상이 어떻게 정립되느냐다. 문민시대의 국무총리는 수석장관 이상의 독자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인지,아니면 과거처럼 의전총리나 대독총리에 머물고 말 것인지는 새시대를 지켜 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관심사다.여론은 총리에 대해 대통령 치사나 대독하는 역할에 그치지 말고 국정운영의 실질적인 주체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예컨대 헌법이 총리에게 부여하고 있는 각료 임명제청권이나 해임건의권을 실제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그러나 대통령책임제 아래서,더구나 인사가 만사라고 강조하는 대통령 아래서 각료 인사권이총리에게 넘겨진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또한 그렇게 하는 것만이 진정으로 헌법 취지에 부합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총리의 새 위상과 관련하여 대통령은 국정의 큰 가닥을 잡아 나가고 행정실무는 과감하게 총리에게 맡겨서 대통령과 총리가 각기 독자성을 갖고 상호 보완관계를 유지하는 역할분담은 한번 시도해 봄직하다.특히 상호 보완성이 큰 김대통령과 황총리 사이의 그런 시도는 상상만해도 멋진 팀웍을 이룰것 같은 느낌이 든다.총리에게 독자적 영역이 보장되어야 그 위상도 제자리를 잡을 수 있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나라 총리는 자신의 비서실장도 자기 마음대로 쓰지 못했다.총리비서실장은 으레 청와대서 내려 보내는 것으로 돼있기 때문에 전임자의 비서실장이라도 청와대 쪽의 별명이 없는한 그대로 쓰는 걸 미덕으로 알고 참아야 했다.5공이후 총리는 12명이 바뀌었는데 비서실장은 8명 밖에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 속사정을 잘 말해 준다.총리의 위상 제고를 위해선 역할분담 못지않게 총리가 자기 밥그릇부터 제대로 챙기는 것이 중요하다.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통령에게 아첨하지 않고 『노』라고 말할수 있는 강직한 자세일 것이다.국민은 이제「예스 맨」이 지겹다.
  • 체코 컴퓨터분야투자 유망(해외정보)

    ■올해초 분리된 체코와 슬로바키아에서 가장 유망한 투자분야는 컴퓨터 및 주변기기이다. 프라하주재 미국대사관 조사에 따르면 제2의 유망 투자분야는 환경보호 기술로 꼽혔고 컴퓨터 소프트웨어 및 서비스,통신기술,신개발에너지 생산설비등도 유망분야로 분석됐다.
  • 골드콘전자(앞서가는 기업)

    ◎고품질/저가격/납기준수/「커넥터」 생산으로 일 제압/5년만에 수입품 몰아내고 정상에/첫 제품 개발때 미 안전규격 획득/매출 88년 2억서 올 40억원 전망 「고품질」「저가격」「납기준수」로 마치 차돌멩이처럼 야무진 일본 기업을 물리쳤다.국제 무대에서 세계 일류 기업의 제품들과 경쟁해서 이기려면 이 세가지 요소가 필수적이다. 경기도 양주군 남면 상수리에 자리잡은 골드콘전자산업(대표 이찬주·37)은 비록 규모는 작지만 대기업도 하기 힘든 엄청난 일을 해 냈다.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커넥터 생산에 뛰어든지 5년만에 일본 기업을 따돌리고 업계의 정상에 선 것이다.현재 1백50종의 각종 커넥터를 생산하고 있다. 컴퓨터,사무자동화기기,정보통신용 기기등을 주변기기와 접속하는데 쓰이는 커넥터는 그동안 일본 제품들이 국내 시장을 휩쓸다시피 했다.일본 기업들은 한국 제품이 없는 한국 시장에서 턱없이 높은 가격을 불렀다.그래도 국내 소비자들은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일제를 쓸 수 밖에 없었다.컴퓨터등 전자제품의 수출이 늘어나면 커넥터의 수입도 더욱 늘어났다. 골드콘이 이 사업에 뛰어든 것은 지난 87년6월.전자제품의 수출이 막 활기를 띨 때였다.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의 경동고로 유학온 이사장은 부친의 사업이 실패하자 1학년 도중 학업을 포기하고 친척이 경영하는 커넥터 가게에서 점원으로 밤낮 없이 일했다.추운 겨울에 손발이 튼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그래도 밤에는 TV학원에 나가 분해 및 조립기술을 배워 커넥터는 물론 TV에 관한 한 만물박사가 됐다. 커넥터 판매와 기술적 문제에까지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자부하게 된 이사장은 그때까지 모은 돈 3억원을 모두 투자해 골드콘을 설립했으나 금새 바닥이 났다.금형을 만드는데 생각보다 훨씬 많은 돈이 들어가 1억∼2억원이면 충분하리라던 당초 예상이 빗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쓴 보람이 있어 시제품의 가능성은 매우 커 보였다.한두달만 더 버티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확신이 섰다.은행 문을 여러 곳 두드렸으나 담보가 없어 지원을 받지 못했다.이사장은 자금을 마련하느라 동분서주하다 보니 머리칼이 빠지는 증상까지 나타났다. 천신만고 끝에 88년6월 1300시리즈 커넥터를 개발,첫 제품을 선보였다.개발과 함께 미국의 안전규격인 UL과 캐나다 CSA마크도 획득했다. 공들인 보람이 있어 제품을 내놓자 마자 선풍적 인기를 모았다.일제보다 가격이 싸면서도 제품의 질은 손색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일본 기업들은 즉각 수출가격을 내렸다.독점적 지위를 즐기며 비싼 값을 받다가 국산 개발품이 나오면 덤핑 공세로 개발업체를 위협하는 고전적 수법이었다. 그러나 골드콘은 이를 예상하고 개발 당시부터 이윤의 마지노선을 일제 가격의 50%로 정했기 때문에 덤핑공세가 두렵지 않았다.일본 기업들이 가격을 20%나 인하하자 이를 기다리던 골드콘도 즉각 가격을 내려 일본 제품보다 10%를 더 싸게 팔았다.일본 기업들은 또다시 10%를 내렸다.골드콘도 지지 않고 또다시 일본 제품보다 10%만큼 싸지도록 값을 내렸다.눈에는 눈,이에는 이였던 셈이다.결국 골드콘의 강력한 반격에 일본 기업들은 두 손을 들었다.그 뒤 일본 제품은 우리나라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있다.실력으로 이긴 것이다. 이 회사의 매출은 해마다 급성장한다.88년 2억원에서 지난해 20여억원으로 불어났고 올해에도 이보다 배가 증가한 40억원에 이를 전망이다.설비투자도 열심히 했다.지금까지의 투자액은 무려 50억원이다.직원임금,회사경비,금융비용을 제외한 전액을 재투자한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성실한 노력으로 성공한 젊은 사장의 앞날에 더 큰 기대를 해본다.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1)

    ◎여명기의 민족지/“항일구국” 염원안고 대한매일신보 탄생/국운 기울어 암울했던 1904년 창간/주권수호 앞장서며 숱한 고난/해방직후 서울신문으로 속간/초대사장에 오세창 취임… 권동진·홍명희 고문에 영입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그 시대는 고난으로 점철되었다.1904년 국운이 기울어가는 암담한 나라 운명속에서 한가닥 빛으로 창강된 대한매일신보.그 항일구국지가 1945년 서울신문으로 거듭 태어나기까지는 파란만장한 우리 근·현대사를 함께 살았다.당시 민족의 생존이 그렇듯 일제의 모질고 간교한 탄압에 쓰러진 대한매일신보의 맥락은 서울신문이 잇고있다.일제 강점기 사이에 변화도 없지 않았으나 서울신문의 뿌리는 분명히 대한매일신보에 두었다.그 위대한 항일구국지 창간 1세기를 불과 1년 앞둔 오늘,그 역사를 조명하여 서울신문의 연륜을 다시 헤아리고자 한다. 「대한매일신보」는 대한제국 말기 6년동안 항일언론의 최선봉에서 민족주권 수호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가히 전설적인 신문이었다.근대 언론사에서 「다시 없는민족의 대변기관」으로 평가 받는 이 신문은 나라 안팎이 매우 복잡한 시기에 발행됐다. 국제적으로는 동아시아의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일본이 한국의 지배권을 열강으로부터 승인받아 한국을 실질적으로 장악하던 때이기도 했다.그리고 국내정세는 일본의 한국지배를 반대하는 민족운동이 불길처럼 치솟던 시기였다. 특히 나라안에서는 일본의 한국 황무지 개간권을 막으려는 민중운동과 함께 의병 무장투쟁,국채보상운동,애국계몽운동등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대한매일신보는 이러한 격동의 시기에 창간되어 항일구국의 가시밭길을 걸었다.창간한 사람은 영국인 배설(Ernest Thomas Bethell·1702∼1909년)이다. 러·일전쟁때 취재차 한국에 왔던 런던의 데일리 크로니클 특별통신원인 그가 한글전용인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날짜는 89년전인 1904년7월18일로 돼있다.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도 동시에 창간했다. 창간에 참여한 인사들의 면모를 보아도 쟁쟁하다.당대의 언론을 주도했던 논객이자 우국지사였던 양기탁을 비롯,박은식·신채호·옥관빈등이 그 주역들. 나중에는 안창호·이갑등 구국운동조직인 서북학회의 인사들도 뛰어들었다. 창간호(타블로이드판)는 한호의 지면이 6면으로 4면은 영문,2면은 한글전용의 2개국어 신문체제였다.그러나 이듬해 8월에는 국한문 혼용판과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를 분리,2종을 발행했다.1907년5월에는 한글전용 「대한매일신보」를 새로 창간,3종의 신문을 한꺼번에 펴 냈다.국한문·영문·한글등 3종의 신문이 발행되기는 한국 언론사상 초유의 일이다. 황실(고종)의 은밀한 재정적 뒷받침과 민족진영의 도움을 받았다.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대한매일신보의 논조는 처음부터 반일구국일수밖에 없었다.그 첫 지탄공격은 황무지 개간권 요구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시작됐다.이를 시발로 황성신문의 「시일야방성대곡」전재,샌프란시스코의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 저격사건보도,영국의 트리뷴지에 실린 고종밀서사진 전재등 기사와 논설로 항일언론의 횃불을 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이 신문의 강력한 반일논조야말로침략정책을 수행하는데 있어 가장 큰 저해요인이었다. 일본은 이에 대응,「경성일보」(일어)「Seoul Press」(영어)등 통감부의 기관지를 직접 발행하여 언론대응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또 한편으로는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외교적 압력과 사법적인 탄압을 가했다.외교적 압력은 영국측에 대해 배설의 추방요구로,사법적 탄압은 통감부의 신문압수 형식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대한매일신보」의 항일언론 자세는 좀체 꺾이지 않아 국한문판 24차례,한글판 21차례의 압수를 당하면서도 여전히 지속됐다.민족진영의 언론보루로서 이처럼 항일언론을 펼칠수 있었던 것은 이 신문이 영국인 소유여서 치외법권을 누릴수 있었기 때문이었다.이 신문에 몸담고 있던 항일언론투사들의 민족사상과 구국정신이 그같은 논조를 주도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대한매일신보」가 남긴 족적중 또한 특기할만한 것은 이 신문이 주동이 되어 벌인 국채보상운동이었다.이는 을사보호조약이후 일본으로부터 얻은 나라의 빚 1천3백만원을 국민의 성금으로 갚아 일본의예속에서 벗어나려는 일대 구국운동이라 할 수 있다. ○우국지사 대거 참여 대한매일신보는 이 운동의 중심기관이 되던 시기에 사세를 크게 신장,발행부수가 1만부를 넘어섰다(1907년 9월3일 기준 국한문 8천,한글3천부).이같은 발행부수는 그때까지 한국언론사상 최고의 기록이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강경한 논조를 터뜨리던 이 신문은 일본 통감부의 집요한 탄압끝에 배설의 상해옥살이와 양기탁의 구속으로 물이 꺾이기 시작했다.그후 배설이 숨지면서 이 신문은 더욱 기울어졌으며 영국인 만성(Alfred Marnham)이 사장직을 인수받았다.그러나 영·일간의 외교문제를 꺼리던 주한 영국총영사 보나르(Bonar)와 통감부의 회유및 압력을 받아 1910년 5월21일 결국 통감부에 팔리고 만다.국권수호의 상징적 존재였던 「대한매일신보」가 마침내 비극적인 종언을 고한것이다.그때의 지령은 제1461호(국한문판)였다. 그리하여 「대한매일신보」는 한일합병 이튿날인 1910년 8월30일부터 제호가운데 국가를 상징했던 두글자 「대한」을 빼앗겨 버린다.「대한」이 없어진 「매일신보」는 결국 통감부의 기관지로 전락하는 것이다.그러면서도 「매일신보」는 그러나 「대한매일신보」의 국한문판 종간호인 제1461호(1910년 8월28일)의 지령을 계승,제1462호부터 국한문판을 발간했다.(한글판은 제939호부터) 이 날짜의 사설제목은 「동화의 주의」로 나온다.제국주의 36년간의 일본 전위역할을 이렇게 상징하고 일제 선전기관으로 얼굴을 바꾼 매일신보는 이틀만인 9월1일 대한제국의 기관지 성격이던 한양신문(전대한신문)까지 합병한다.국한문판과 한글판의 두가지 신문을 발행하는 유일한 한국어 신문이었지만 한국인이 만드는 한국의 소리는 담기지 않았다.이는 「일선융화와 세도인심의 감화유도」를 내건 일제의 어용언론활동의 전주곡이었다. 경영의 측면에서 경성일보사에 흡수통합,경일편집국의 한부서로서 철저하게 총독부기관지 역할을 수행한 매신은 그후 3·1운동의 결과로 일제의 무단정치가 표면상 문화정치로 바뀌면서 1920년 독립된 편집국으로 확대 승격됐다.그리고 1929년에는 한국인 편집국장이 임명된데 이어 1930년 한국인 부사장이 처음 기용되어 다소 편집제작의 재량권이 이루어지는듯 했다. 그러나 매신은 철저하게 일제의 입장에서 만들어져 편집방향은 「내선일체」를 고수했다.이러한 목적을 위해 총독정치의 선전과 홍보를 위주로 했으나 민족민간지들의 논조를 반박하거나 민족진영을 비난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일제의 비호속에 이같은 논조로 일관하던 매신은 기구를 확대,경성일보사에서 분리하게 됐다.1938년 4월16일 독립된 언론기관으로서 제호를 매일 「신」보로 고쳐 새로 출발한 것이다. 매신이 경일과 맞붙은 지금의 프레스센터 자리에 4층 콘크리트 사옥을 짓고 들어선 것은 바로 이때였다.하지만 경일은 매신의 주식 45%를 소유한 대주주로 남았고 여기에 총독부 소유의 주를 포함한다면 매신의 경일예속은 이전과 조금도 다를바 없는 셈이었다.매신의 일제옹호논조 또한 해방직전까지 변함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일제는 패망했다.1945년 8월15일 마침내 조국광복을 맞았다.매신은 이러한 오욕의 역사를 청산하고 「해방조선의 대변기관」으로서의「서울신문」으로 거듭나기위해 대대적인 개편수술을 받게됐다.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정청이 그해 10월2일 매신을 접수,매신 한인주주총회를 열어 새중역진을 구성토록 종용했다.이에따라 10월25일 주총이 열려 「서울신문」이라는 새로운 제호와 오세창을 사장으로하는 간부진용이 결정됐다.이 무렵은 사장 이성근이 지난날의 과오를 전사원에게 사과하고 자퇴한뒤 사원자치위원회에 의해 신문이 발행되던 때였다. 경영간부가 없는 상태에서 신문을 만들어오던 6백명의 자치위는 그러나 주총의 간부진용결정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다.주총결정은 자치위와 사전협의를 거치지 않은 것이라는게 그 표면적 이유였으나 실상은 간부진용에 우익인사가 너무 많은데 불만을 품은 때문이었다. 그동안 비교적 관망상태에 있던 미군정당국은 11월10일 재산조사를 이유로 매신에 정간명령을 내렸다.매신이 정간되던날 자치위는 「3천만 민중의 정당한 공기」로서 신문이 새롭게 출현해야 한다는 종래의 입장을 재확인 한뒤 일단 한발 물러섰고 이를 계기로 개편실무진과 자취위 사이에 얽혔던 매듭이 풀리기 시작했다. ○한때 총독부 기관지로 미군정당국으로부터 매신개편의 대업을 새로 위임받은 이관구와 하경덕은 재원확보문제와 함께 내외에서 모두 수긍할수 있는 권위있는 인사들로 경영·편집진을 구성하는 작업을 신속하게 추진했다. 초대사장에 위창 오세창이 추대됐다.근대 신문계의 선구자이자 지조높은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으로서 그가 지닌 사회적·정치적 덕망은 새롭게 등장하는 서울신문의 이미지에 걸맞는 것이었다.위창과 함께 역시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인 권동진과 당시 문단의 원로격인 홍명희가 고문에 영입됐다. 서울신문 탄생의 산파역을 맡은 저명교육자 하경덕이 부사장에,그리고 사려 깊은 논조를 감당할 주필에는 항일언론의 선봉에 섰던 이관구가 선임됐다. 이러한 일사천리의 준비작업은 21일 5층 옥상에서 가진 오세창사장의 취임식으로 그 결실을 보게됐다.해방의 감격과 함께 독립한 이 민족의 진실된 언론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자임하면서 서울신문이 마침내 그 첫 지면을 이 땅에 선보인 것이다. 이날이 1945년11월22일이었는데 신문은 11월23일자로 발행됐다. 이때의 서울신문 지령은 대한매일신보→매일신보→매일신보를 그대로 계승,제13738호를 기록하기에 이른다.그 고난의 역사를 마감하고 또 다른 시련의 역사를 향해 서울신문으로 거듭 태어난 것이었다. □연보 ◇대한매일신보(1904·7·18∼1910·8·28) ▲1904년 7월18일 창간 ▲편집겸 발행인 배설,총무 양기탁취임 ▲1910년 5월21일 통감부가 매수 ▲1910년 8월28일 국한문판 1461호,한글판 938호로 종간 ◇매일신보(1910·8·30∼1938·4·28) ▲경성일보에 흡수 통합,1910년 8월30일 매일신보로 개제발행(지령은 대한매신을 계승) ▲경성일보사장 길야태좌위문 취임(매일신보사장 겸임) ▲1912년 3월1일 국한문판과 한글판을 한글전용으로 합간 ▲1938년 4월28일 매신의 제호로 최종발행(지령11 012호) ◇매일신보(1938·4·29∼1945·11·10) ▲경일에서 분리독립,제호를 매일신보로 개제발행(지령은 매신을 계승) ▲사장 최린,부사장 이상협취임 ▲1945년 11월10일미군정에 의해 정간 ◇서울신문(1945·11·23∼현재) ▲1945년 11월23일 매신을 서울신문으로 개제발행(지령은 매신을 계승) ▲초대사장 오세창,고문 권동진 홍명희,부사장 하경덕,전무 김동준,주필 이관구취임
  • 정보산업 금융·세제지원 확대/「국가전략계획」 청와대보고

    ◎「정보화촉진 기본법」 제정/대학특약학과 확충·SW보호강화/2천년까지 광대역 통신망 상용화 정부는 정보산업을 오는 2000년까지 세계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방침아래 정보산업에 대한 금융·세제상의 지원 및 소프트웨어 기술에 대한 보호조치를 대폭 강화키로 했다. 또 기술개발·표준화·개인정보 보호 등을 내용으로하는 「정보화촉진기본법」을 제정하고 정보산업발전기금을 조성하는 한편,대학의 「특약학과」제도 확충과 「정보과학고교」의 신설을 통해 정보산업인력을 집중 육성키로했다. 2000년까지 전화·데이터통신·동화상정보 등을 광섬유를 통해 전달하는 「광대역종합정보통신망」(BISDN)을 상용화하는 한편 2005년에는 우리기술로 설계한 제2세대 무궁화위성을 확보,첨단방송망을 구축키로 했다. 최각규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은 14일 상오 청와대에서 재무·교육·상공·체신·과기처등 관계부처장관들과 함께 이같은 내용을 주요 골자로 하는 「정보산업발전국가전략계획」을 노태우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정부는 이를 위해 우선 정보기기 분야에서는 ▲핸디 터미널·전자수첩·펜입력 컴퓨터 등 휴대용 소형컴퓨터 ▲기억장치·프린터·모니터 등 컴퓨터 주변기기 ▲주문형반도체(ASIC)·화합물반도체 등 반도체 등을 중점 개발,보급하고 향후 3∼4년내에 2백56메가D­RAM을 개발하는 한편 개방형 중형컴퓨터 부문에서 국산컴퓨터의 비율을 현재의 3%에서 2000년대에 50%까지 높이기로 했다. 또 정보통신 분야에서는 고도전략통신망·광대역통신망의 구축과 함께 휴대용전화·무선호출 등의 무선통신망을 대폭 확충,90년대 중반부터 이동전화망을 디지탈방식으로 전환하고 제2세대 무궁화위성을 통해 고선명TV 등 첨단방송망을 구축키로 했다.
  • 여의도광장 최대수용인원은 70만/국민당유세 계기로 살펴보면

    ◎역대 대선집회때마다 “백만 운집” 주장/경찰선 “광장 가득차도 30만∼55만” 계산 대통령선거 종반전에 접어든 12일 국민당이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대규모 유세를 벌일 예정이어서 관심을 끌고 있다. 대규모 집회의 상징으로 알려진 「여의도 집회」는 그때마다 주최측은 1백만명을 장담하며 청중수에 신경을 쓰고 있다. 87년 대선 당시 노태우·김영삼·김대중후보 등이 2곳에서 유세를 하면서 1백만명이 운집했다고 주장했으나 여의도광장의 규모를 감안할때 1백만명이 모일 수 없다는 것이 경찰의 분석. 여의도광장의 순수광장면적은 7만2천평.광장내 녹지·기타도로 등을 모두 합하면 11만4천평이다. 경찰은 성인남자의 경우 1평(3.3㎡)당 수용능력이 6∼8명으로 보고 있다.따라서 여의도광장이 가득차면 30만∼55만명,외곽까지 포화상태가 된다 하더라도 70만∼90만명선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한편 여의도유세에 1백만명의 청중을 동원한다는 목표를 세운 국민당은 1주일전부터 대선특별지원단 산하에 여의도유세지원팀을 두고 각종 준비작업을 벌이고있다. 국민당은 이날 3종류의 선전전단 1백50여만장과 당보 등을 배포할 계획인데 유세가 끝난뒤 쓰레기를 처리하기 위해 청소대행업체와 10일전 계약을 맺었다.이 대형업체는 이날 선거홍보물·유인물등 각종 쓰레기가 2백여t가량 나올 것으로 보고 있는데 10t짜리 청소차 20여대를 동원,쓰레기를 치울 계획이다. 여의도 행사에는 또 이동식 화장실 임대대행업체가 이동식 화장실 3백여개,간이변기통 6백여개를 여의도 광장내 70여곳에 세우기로 했으며 또 장내정리를 위해 6백여명이 질서유지요원으로 동원된다. 이와함께 이날 유세장에는 모두 9백㎾용량의 스피커 2백여개가 광장 곳곳에 설치된다. 특히 여의도광장 동쪽끝 중앙에는 높이 1.5m,너비 50여m,4백여평 규모의 초대형 연단이 설치된다. 경찰은 이날 집회가 끝난뒤 가두행진을 벌일 경우 인도는 허용하나 차도로 진출할 경우 이를 막기로 했다.
  • 미,세계반도체시장 탈환 노린다

    ◎14개사,15억불 투자… 공동연구 박차/“뒤진 기술 배우기” 일사와 잇단 제휴/지적재산권 등 내세워 시장개방압력도 강화 미국의 반도체산업이 재도약을 시도하고 있다.이는 일본에 빼앗긴 실지를 회복하려는 몸부림으로 국가경제 차원의 사활이 걸린 싸움이기도 하다. 70년대만 해도 미국 컴퓨터산업의 지위는 절대적이었다.전 세계 생산의 절반을 차지했고 기술개발은 미국의 주도 아래 이루어졌다.71년 반도체 제조 「톱10」가운데 7개가 미국 업체였고 일본 회사는 3개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80년대 들어 일본의 컴퓨터산업이 급성장을 거듭,89년 이후에는 일본이 전 세계 생산의 40% 이상을 점하는 최대의 반도체 생산국으로 떠올랐다.90년의 반도체 톱10 중 미국은 3개사,일본이 6개사로 전세가 역전됐다.주변기기 분야에서도 한국·대만·싱가포르등 신흥공업국이 값싼 노동력을 무기로 미 컴퓨터산업의 목을 죄었다. 일본이 앞지르기 시작하자 미국은 85년부터 대일본 견제에 나섰다.85년 미 반도체산업협회(SIA)가 일본산 반도체를 대상으로 미 통상법 301조를 걸어 제소한 것을 필두로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사의 64KD램 제소,상무부의 2백56KD램 이상 제품에 대한 제소등 파상공세가 이어졌다.결국 협상을 거쳐 일본이 시장의 20%를 개방하고 자율가격 체제로 전환했지만 아직까지 일본의 우위에는 아무 변화가 없다. ○「왕컴」 파산에 위기감 최근 IBM이 적자를 내고 왕컴퓨터가 사실상 파산을 선언함으로써 위기감은 최고조에 달해 있다.미국 반도체산업의 이같은 입지상실은 수요와 공급 측면의 요인이 복합돼 일어났다. 수요 측면에서는 성장의 동인이던 내수가 격감한 것이 주요인이다.특히 국내 시장에서 경쟁이 치열한 개인용 컴퓨터와 주변기기등 성숙기 제품에 대한 해외생산을 추진한 것이 화근이 됐다.수출이 부진해지고 일부에서는 부메랑효과로 인한 역공세에 직면하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상업용 기술개발 및 생산능력에서 경쟁국에 뒤지는 것은 공급 측면의 문제점이다. 미국은 경쟁력을 만회하기 위해 주요 경쟁국에 대한 통상압력을 강화하는 한편 기술혁신과 경영효율화를 위한 자구노력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 ○경쟁력 강화가 관건 미국은 자국의 기술이 국제적인 모방과 복제에 이용됐다며 반덤핑 제소와 지적재산권 보호등 새로운 수단을 강구하고 있다.지적재산권과 반도체회로 설계의 보호문제를 이미 우루과이라운드 테이블에 올려놓고 있으며 다른 한쪽으로는 쌍무차원의 개방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와 함께 보다 근본적인 시도로 기술혁신을 도모하고 있다.대표적인 것이 SEMATECH계획.기술개발을 위해 88년부터 93년까지 정부지원등 총 15억달러를 투자하는 것으로 IBM등 주요 반도체업체 14개사가 참여하고 있다. ○IBM­도시바 협약 지난해 6월에는 IBM이 독일의 지멘스와 D램 공동개발에 관한 협약을 맺었고 올 7월에는 D램 시장점유율이 가장 높은 일본 도시바와의 연계를 통해 IBM­지멘스­도시바를 연결하는 2백56메가 D램의 3각개발체제를 구축하고 나섰다.또 지난 7월 미국 제5위의 AMD사와 일본 최대의 컴퓨터회사인 후지쓰사간에 체결된 협약은 양사가 일본에 3억5천만달러를 투자,플래시 메모리의 공동개발과 공동생산에 관한 사항 뿐 아니라 에프롬(반복사용이 가능한 ROM)도 생산하는 계획을 담고 있다. 최대의 마이크로 프로세서 제조업체인 인텔사도 지난 2월 일본 샤프사와 플래시 메모리의 개발과 관련된 협정을 맺었고 텍사스 인스트루먼트,마이크론 세미컨덕터사도 일본과의 기술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빅 블루」계획 단행 적자를 보여온 디지털 이퀴프먼트사의 최고경영자가 퇴진한 것과 매출부진이 조직내 매너리즘과 관료주의에 있다는 판단에 따라 지난해 12월 「빅 블루」라는 개혁조치를 단행한 것은 경영개선 노력의 하나다.이는 경쟁자가 없던 시절 하드웨어에만 집착한 것이 실수였다는 반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13개 분야별로 경영권을 이양한 것이 골자다. 이같은 노력들이 경쟁력 강화로 이어질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과거와 다른 모습으로 변신할 것만은 틀림없다.더욱이 기존의 컴퓨터개념을 뛰어넘는 획기적인 제품개발이 이루어지면 세계의 컴퓨터산업은 다시 미국 중심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높다.
  • 필리핀 항공기서 콜레라병균 검출

    보사부는 4일 필리핀 마닐라를 출발,지난 1일 입국한 필리핀항공기(PR416)기내 변기에 대한 콜레라균 검사결과 콜레라(엘토르,오가와형)균이 검출되어 국립보건원에서 최종 확인검사중이라고 발표했다. 보사부는 검역부문 조사결과 탑승객중 설사증세자는 없었으며 전체승객 47명중 통과승객을 제외한 추적대상자 35명(서울14명,지방11명,외국인10명)에 대한 추적조사및 채변검사를 실시중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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