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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토리노동계올림픽] 라이히 무관의 한 풀었다 알파인男대회전 ‘金 역주’

    벤야민 라이히(28·오스트리아)가 올림픽 무관의 한을 풀었다. 라이히는 20일 이탈리아 세스트리에레에서 열린 토리노동계올림픽 알파인 남자 대회전에서 2분35초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라이히는 월드컵과 세계선수권에서는 챔피언 자리에 올랐지만 그동안 올림픽과는 인연이 없었다. 지난 2002솔트레이크시티대회에도 회전과 복합 경기에서 각각 동메달을 따는데 그쳤다.8년만에 올림픽에 복귀한 ‘스키황제’ 헤르만 마이어(34·오스트리아)는 대회 첫 금메달에 도전했지만 동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마이어는 슈퍼대회전에서도 은메달에 머물러 자칫 노골드의 수모를 당할 처지에 놓였다. 공동 6위에 머문 ‘스키지존’ 보드 밀러(29·미국)는 회전 경기만 남아있는 이번 대회에서 단 한개의 메달도 건지지 못하고 있다. 한국 김형철(25·강원랜드)은 28위에 그쳤다.박준석기자 pjs@seoul.co.kr
  • [송두율칼럼] ‘짝퉁 시대’에 생각나는 것들

    [송두율칼럼] ‘짝퉁 시대’에 생각나는 것들

    자주 듣는 단어지만 나에게는 그 어원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 가운데 ‘짝퉁’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의 어원을 여러 곳에 수소문해 알아보았으나 확실한 답을 아직 나는 듣지 못했다.‘가짜’를 거꾸로 해서 ‘짜가’가 ‘짝’이 되었고 여기다 ‘퉁(同)’이라는 중국어 발음을 덧붙인 한국식 조어(造語)라는 설명을 들었다. 재미있는 해석이라고 느껴졌다. 베이징 거리는 물론, 뉴욕의 차이나 타운, 바르셀로나의 뒷골목, 심지어는 지중해의 작은 섬 몰타의 조그마한 재래식 장터에도 세계적 명품을 그대로 복사한 중국산 ‘짝퉁’이 버젓이 손님을 유혹하고 있다. 이미 가짜라는 사실을 알고 부르는 값을 민망할 정도로 흥정해서 싸게 살 수 있으니 나중에 사기 당했다고 분통을 터뜨릴 일도 없다. 가짜지만 ‘애교 있는’ 가짜 정도로 보여서 그런지 ‘짝퉁’시장들은 대개 관광 코스에 속할 정도로 유명해졌다. 물론 상표를 도용해 위조품을 생산, 유통시키는 범죄행위에 대해서 국내법은 물론, 국제법적인 제재가 날로 심해지고 있지만 이른바 ‘짝퉁’과의 전쟁의 끝은 아직도 요원하게만 보인다. 장인(匠人)들이 높은 기술과 온 정성을 들여 만든 제품을 복제한다는 것은 결코 간단치 않았다. 상품의 대량생산체제가 본격적으로 들어서면서부터 복제생산의 기술도 일반화되었고 이에 따라 특허권이나 소유권에 근거한 법적인 대처도 집요해졌다. 특히 우리의 경제활동에서 지적 소유권이라는 무형자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는 조건에서 원형(原型·Original)과 복제(複製·Copy), 또는 진짜와 가짜의 싸움은 갈수록 치열해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도 아날로그 시대는 원형과 복제의 차이를 쉽게 알아낼 수 있는데 디지털 시대에 와서는 이 둘 사이의 차이가 사라졌기 때문에 문제는 더 복잡해지고 있다. 복사기로 책을 복사하다 보면 그래도 복사본과 원본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데 디지털 카메라로 잡은 사진은 원본과 복사를 아예 구별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래서 디지털시대에 걸맞은 지적 소유권 보호를 앞세운 이른바 ‘디지털권(權)경영·DRM’이라는 새로운 체제도 도입되었다. 물론 신자유주의 반대운동은 이러한 체제가 앞으로 더욱 심각하게 소비자의 정보자율권과 의사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전지구적 범위에서 문화생활의 하향 평준화를 낳는다는 논지를 펴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과학과 기술 그리고 정보의 시대는 어떤 의미에서 ‘짝퉁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복제양 돌리의 탄생으로부터 시작해서 지금 온 한국사회를 달구고 있는 황우석교수팀의 줄기세포 연구가 보여준 인간복제의 가능성도 따지고 보면 신이나 자연만이 지닐 수 있는 원형을 그대로 모방하고 싶어하는 인간적 욕망의 한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적 욕망 없이는 사실 과학과 기술은 물론, 예술작품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찍이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라는 저서 속에서 발터 벤야민(W Benjamin·1892∼1940)은 예술작품은 바로 그 일회성(一回性)으로 인해 공간과 역사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비록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먼 곳에 있는’ 유일무이한 ‘숨결(Aura)’이 깃든 것이 예술작품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기술복제 시대에 이르러 ‘이곳에서 그리고 지금’ 숨쉬는 진정성의 의미는 계속 퇴색되었으며 아무 곳에서나 또 아무 때나 이루어지는 복제는 그저 ‘흔적(Spur)’만을 남길 뿐이라고 그는 지적했다.‘흔적’은 ‘숨결’과는 반대로 ‘멀리 있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가까이 있는 환영(幻影)’일 뿐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그렇다면 ‘짝퉁의 시대’에는 살아 있는 ‘숨결’ 대신에 죽은 ‘흔적’만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닌지. 살아 숨쉬는 ‘원형’에 대한 갈증이나 갈망은 사라지고 너나 할 것 없이 진짜처럼 보이는 ‘짝퉁’으로 요란스럽게 온몸을 휘감고 있지는 않은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는 이 디지털 시대에 인간의 원형과 그의 숨결마저도 사라지는 그러한 황량한 시대를 우리 모두 함께 보내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모두 한번 돌이켜볼 때다.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 대중독재2/임지현·김용우 엮음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가 지난해 1권에 이어 ‘대중독재’ 2권을 도서출판 책세상에서 냈다. 알려졌다시피 임지현 교수가 주도하는 비교역사문화연구소의 포인트는 ‘억압적인 전체주의 권력vs이에 저항하는 민중’이라는 이분법적 도식화에 도전하는 것이다. 대신 ‘매혹적인 권력’과 이에 ‘유혹당하는 민중’이라는 그림을 그려낸다. 파시즘은 홀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대중의 동의 위에 서있었다는 것. 이를테면 박정희는 마구잡이식 깡패가 아니라 일정 정도 지지를 얻었다는 설명이다. 이런 틀에서 1권은 대중독재의 개념화 그 자체에 주력했다면 2권은 구체적으로 대중독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풀어서 설명한다. 대중독재의 작동방식은 ‘정치의 신성화’다. 신성화는 종교화·신비화·시각화의 방식으로 추진된다. 이런 방식은 사실 발터 벤야민 같은 이들이 이미 지적한 바 있다. 벤야민은 예술과 정치의 관계를 논의하면서 사회주의 국가는 예술의 정치화가 문제이고, 자본주의 국가는 정치의 심미화가 문제라 했다. 사회주의는 이념과잉으로 예술을 망치는 데 반해, 자본주의는 정치에서 합리적인 그 무엇을 제거해 버린 채 상징조작으로 치달아 버린다고 비판한 것이다. ‘대중독재’2권은 바로 이 상징조작을 들춘다. 이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미 컬럼비아대 사학과 찰스 암스트롱 교수의 북한 분석. 암스트롱 교수는 가족주의 정권 북한이 최근 선군정치와 경제개혁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는 “1930년대 일제,1970년대 박정희 정권을 떠올리게 한다.”면서 “북한이 어쩌면 좀 더 일반적인 종류의 군사독재로 향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물론 “이것이 북한인민에게 이로울지”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한다. 1·2권이 나왔음에도 대중독재론이 한국에 적합한가라는 의문은 여전하다. 단적으로 대중독재 2권에 참가한 서양학자들은 모두 파시즘·나치즘·공산주의 등을 집중 분석하고 있다. 이를테면 과거를 청산하고 정리하는 데 있어서 가해자의 입장에서 더 깊은 반성을 한다는 차원에서 연구가 이뤄진다는, 연구의 ‘방향성’과 ‘목표의식’이 돋보인다. 그런데 이를 우리에게 적용하면 정작 힘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한 우리가 외려 우리 스스로를 채찍질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래서 파시즘을 역사적 개념, 즉 ‘역사적 파시즘’으로 보지 않고 일반화하는 것이 의미있는 것이냐는 반론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다. 참고로 대중독재2권에서 200여 페이지 분량에 달하는 3장 ‘한국의 대중독재 논쟁’은 그간 계간지나 전문지에 소개됐던 대중독재론을 둘러싼 반론과 재반론을 싣고 있다. 대중독재론에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버릴지는 이 논쟁을 지켜본 뒤 판단해도 될 듯하다.2만 7000원.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벤야민의 ‘미완성 프로젝트’ 마무리

    벤야민의 ‘미완성 프로젝트’ 마무리

    발터 벤야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일원, 흉내낼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를 뜻하는 ‘아우라’ 예술이론을 만들어낸 문예비평가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러나 많은 전문가들은 벤야민을 비평가보다 일급 문화사학자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런 차이는 벤야민이 생전에 제대로 된 저작물은 남기지 못한 데서 온다. 문화작품 등에 대한 단편적인 글만 남아 있다 보니 ‘비평가’로서만 비춰졌던 것. 그러나 벤야민의 진면목은 문화를 보는 시선을 넘어, 그 시선 자체에 대한 분석을 통해 역사에 대한 통찰을 남겼다는 데 있다. 그 기획이 바로 ‘파사젠 베르크(Passagen Werk)’. 파사젠은 회랑을 뜻하는 불어 파사주에서 온 단어다. 영어로는 ‘아케이드’다. 그러나 벤야민은 끝내 이 프로젝트를 마무리짓지 못했다. 유태계 독일인에게 2차대전은 너무도 버거운 짐이었고 그는 독일을 탈출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남긴 것은 프로젝트의 완성을 꿈꾸며 남긴 메모 뭉치들뿐이었다. ●아케이드와 쇼윈도-‘몽타주’로써의 역사 1층에는 화장실이 없다, 창문이나 시계를 달아놓지 않는다, 카트 바퀴가 너무 잘 굴러가서는 안 된다 등등. 백화점이나 할인마트들이 매상을 올리기 위해 짜낸 갖가지 묘안들에 대해 듣다보면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다. 자본주의는 저 산 너머 대형공장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발밑에 깔려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벤야민은 자본주의의 원형을 19세기 중엽 프랑스 파리의 파사주에서 찾았다. 벤야민이 살던 20세기 초만 해도 이미 파사주는 백화점에 밀려 한 물 간 곳. 그럼에도 둥근 유리천장 아래 복도를 거닐며 양 옆에 늘어선 가게들에 진열된 상품을 쇼윈도를 통해 두루두루 둘러볼 수 있었던 파사주는 소비자를 유혹하는 자본주의 시대의 원체험, 그 자체였다고 봤다. 그래서 상품과 유흥과 요리와 매춘부 등이 넘쳐나는 파사주의 전성기,19세기 중엽의 파사주가 남긴 기억의 편린들을 집요하게 모은다. 그런데 완성된 원고가 아니라 메모의 모음이다보니 내용이 굉장히 파편적이다. 이런 저런 얘기가 단락별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가 하면, 상관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얘기들과 인용문이 줄줄이 나열되어 있다. 영화에서 말하는 일종의 ‘몽타주 기법’이다. 내가 아니라 사물 그 자체로서 말하게 한다. ●과거를 구성하고 이해하는 방식으로서의 역사 몽타주 기법은 벤야민을 문화사가로 자리매김하는 중요한 포인트다. 자본주의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쇼 윈도에 전시된 제각각의 상품들이 모두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이미지 그 자체가 이미 자본주의라는 것. 어떤 목적이나 계획으로 역사를 설정하고 설명하는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늘어놓고, 있는 그대로를 봐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벤야민은 역사를 다음의 두 가지 측면에서 구분했기에 이런 접근을 했다. 사실 그대로의 역사와 받아들여지고 이해하는 역사. 벤야민은 사실 그대로가 아니라 받아들여지고 이해하는 역사가 더 중요하다고 봤다. 그것은 인과관계로 묶은 사건의 나열이나 흐름을 풀어헤친 뒤 모든 것을 아무렇게나 던져 놓는 수법이었다. 어찌보면 ‘진보’의 역사관으로 너무나도 충실했던 파시즘 시대에, 벤야민 같은 이들이 생각해낼 수 있는 저항방법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라는 평가도 가능하다. ●부활하는 벤야민 벤야민은 그동안 다른 학자들에 비해 가려져 있었다. 파사젠 베르크는 1980년대 들어서야 출간됐다. 그러나 이런 파편적이되 정밀한 서술 때문에 외려 문화사의 한 표준으로 올라설 수 있는 역설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해 문학동네에서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라는 책을 선보였다.‘파사젠 베르크’를 프랑크푸르트학파 연구자인 미 코넬대 수전 모스 교수가 자신의 방식대로 정리해서 풀어냈다. 이로서 벤야민에 다가갈 수 있는 한 다리가 놓여진 것이다. 원본 그대로를 번역해 놓은 ‘아케이드 프로젝트-발터 벤야민’(새물결 펴냄)의 출간은 이런 디딤돌 덕분이기도 하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유대인의 역사1, 2, 3/폴 존슨 지음

    역사상 가장 많은 위인을 배출했으면서도 가장 많은 적대자들을 만났던 사람들은 누구일까? 장구한 세월 세계 각지를 떠돌며 박해를 받았으면서도 가장 강력한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이 정도 질문만으로도 보통 상식의 소유자라면 ‘유대인’이란 답을 찾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예수, 마르크스, 프로이트, 스피노자, 하이네, 샤갈, 아인슈타인, 벤야민, 나치, 홀로코스트, 록펠러, 모건,GE, 이스라엘, 중동분쟁…. 사람이든, 사건이든, 기업이든, 과거든, 현재든 모든 분야에서 유대인의 역사는 세계사의 가장 큰 줄기를 이루고 있다는 것도 새삼스럽지 않은 상식이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도대체 무엇이 유대인들로 하여금 2000년이 넘는 세월동안 고통과 핍박을 견디며 위대한 성취를 거둘 수 있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대부분 너무 무지하거나 피상적인 이해에 머물고 있지 않나 싶다. 영국의 지성 폴 존슨의 ‘유대인의 역사1,2,3’(김한성 옮김, 살림 펴냄)은 그에 대한 비교적 충실한 답을 찾을 수 있는 저작이다. 폴 존슨에 따르면 유대인의 역사는 아주 특별한 세계사다.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무시무시한 적대자들을 만났으면서도 자신들만의 고유한 동질성을 잃지 않고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20세기 이스라엘 건국에 이르기까지 4000년에 걸친 이들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피해자의 입장에서 조망되는’ 새로운 시각의 세계사를 만나게 된다. ●피해자 입장서 조망된 새로운 세계사 폴 존슨은 옥스퍼드 대학을 나와 ‘뉴 스테이츠먼’ 편집장 등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인문·종교·역사 분야에서 왕성한 저술활동을 해왔다. 그가 유대인의 역사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게 된 시초는 앞서 나온 그의 저서 ‘기독교의 역사’를 저술하면서부터다. 기독교가 유대교에 커다란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이 강한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인류 최초로 인격적 유일신 개념을 창조했다. 그리고 신의 뜻을 헤아리기 위한 ‘지적 통찰’에 몰두하게 된다. 훨씬 뒤에 시작된 기독교가 오랜 역사를 가진 유대교라는 유일신교에 새로운 해석을 첨가한 종교라는 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유대교의 교훈과 교의신학, 각종 의식, 성물, 그리고 근본적인 개념들을 공유하고 있는 것도 유대인들의 지적 통찰 덕분이라는 것이 지은이의 생각이다. ●인류 최초로 인격적 유일신 개념 창조 중요한 것은 이같은 지적 통찰이 신에 대한 사상에만 머무르지 않고 학자(랍비)에 의해 다스려졌던 유대인 공동체사회를 통해 다양한 지성인 배출의 장이 됐다는 점이다. 유대인들은 중세에 자신들을 강제 격리시키기 위해 만든 게토 안에 거주할 때도 오히려 자신들의 신앙과 전통을 지켜가며 지성의 탑을 쌓아올렸다. 19세기 게토에서 해방되자 이들은 끊임없이 지성의 거인들을 쏟아냈다. 마르크스, 프로이트, 아인슈타인이 대표적 인물들. 인간을 바라보는 인류의 시각을 전복시켰던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이론들도 사실은 천재들의 독창적 사유라기보다는 유대적 전통에 기인한 바 크다고 폴 존슨은 말한다. 이를테면 마르크스의 경우 진보개념에 관해 헤겔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의 역사관은 기본적으로 유대적인 것이었고, 그의 공산주의 천년왕국론도 유대인의 종말론과 메시아주의의 변주였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끊임없는 박해 속에서도 정체성을 잃지 않고 경제적 번영이 가능했던 것에 대해 지은이는 ‘장소의 이동’이 주는 혜택이라고 설명한다. 유대인들은 역사적으로 언제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하거나 재산을 몰수당할지 모르는 위험을 안고 살았다. 때문에 이주에 있어서 전문가들이었고, 그 와중에서 특히 부에 집중하는 기술 습득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유가증권, 무기명채권 등 새로운 방식의 유동재산 제도를 만들어냄으로써 그런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고 현대 자본주의에 가장 쉽게 적응해갈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반유대주의의 실체는 무엇인가? 지은이는 유대인들이 단순히 세상을 떠도는 이주자들이 아니라 선택받은 민족으로서 이방인들과 스스로를 구별하게 되면서 거꾸로 그들로부터 격리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분석한다. 복합적인 인종과 민족들로 구성된 사회를 중시했던 그리스인들에게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고집하는 유대인들은 ‘사람을 싫어하는’ 민족으로 보였으며, 중세에도 음식과 도살, 할례 등 독특한 율법으로 인해 비정상적인 사람들로 간주되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유대인들은 ‘꼬리를 감춘채 살아간다, 하혈로 고생한다, 악마를 섬긴다, 중세시대 흑사병은 유대인들이 마실 물에 독을 탔기 때문이다.’ 는 등의 루머와 음모에 시달려야 했다. 이같은 음모는 20세기에 이르러 유대인들이 세계정복을 꾀하고 있다는 내용의 ‘시온의정서’에서 그 절정에 달했다. 지은이는 ‘역사가 하나의 목적을 지니고 있고, 인류는 하나의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유대인들만큼 강력하게 주장한 민족이 없다고 말한다. 처음부터 자신들이 신의 계획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과 인류에게 그 계획에 대한 안내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명 아래 갖은 고난을 뚫고 살아왔다는 것이다. 사실 이같은 사명감 때문에 어느 시대, 어느 영역에서나 유대인들의 통찰력은 그 빛을 발했다. 지은이는 전 인류적 관점에서 이들의 노력이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무익한지에 대한 답을 내지는 않는다. 이는 결국 유대인들의 역사를 추적한 이 책을 읽고 독자가 스스로 찾아야 할 몫이다. 각권 1만 5000∼1만 8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베네딕토 16세 중고차 팝니다

    |파리 함혜리특파원|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추기경 시절 타던 중고차 가격이 인터넷 경매에서 계속 치솟고 있다. 지난 25일 오후 7시30분(현지시간) 인터넷 경매업체 이베이의 독일 사이트에 오른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이 타던 중고차 ‘폴크스바겐 골프Ⅳ’는 1999년산 수동형 2000㏄급 휘발유차로 주행거리 7만 5000㎞를 기록하고 있다. 중고차 시세는 1만유로 정도. 9900유로의 최저 입찰가격에서 출발한 이 회색 중고차는 경매 시작 만 3일째인 28일 오후 6시 현재 14만 5050유로(약 2억원)까지 치솟았다. 경매 종료시점인 5월5일까지 얼마나 더 오를 지는 알 수 없다. 이 차의 소유주는 서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 사는 공익 근무요원인 벤야민 할베로 지난 1월 지겐시(市)의 중고차 업자로부터 이 차를 샀다. 할베는 “매입 당시 업자가 ‘차를 모는 동안 영혼의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으나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나중에 서류를 보고 알았다.”고 밝혔다. 그는 “이 차는 마치 하늘을 나는 것처럼 멋지게 달린다.”고 말했다. 서류에 따르면 이 차는 요제프 클레멘스 주교의 비서 게오르그 기센바인이 1999년에 구입해 이탈리아로 가져가 라칭거 추기경 이름으로 등록했다. 외교관 차량으로 수입면허를 받았으며, 서류상 소유주는 라칭거 추기경이 처음이자 유일하다. 기센바인은 2003년 라칭거 추기경의 개인 비서가 됐다. 그러나 이 차를 라칭거 추기경이 직접 운전했을 가능성은 없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가톨릭 관계자들에 따르면 라칭거 추기경은 운전면허를 따지 않았기 때문이다. lotus@seoul.co.kr
  • [책꽂이]

    ●조선의 마음:문학으로 읽는 조선왕조사(신봉승 지음, 선 펴냄) 누구나 접근이 쉽도록 문학적인 감성으로 조선의 역사를 풀어낸다. 창업부터 대한제국의 궤멸까지 철저한 실록을 바탕으로 한 56편의 이야기를 통해 조선의 내면을 들여다본다.1만 5000원. ●세계의 역사교과서(이시와타 노부오·고시다 다카시 편저, 양억관 옮김, 작가정신 펴냄) 일본의 두 역사학자가 배타적 내셔널리즘을 조장하는 자국의 교과서와 이를 만든 이들의 왜곡된 역사관을 정면 비판하기 위해 쓴 책. 전쟁과 식민지 지배란 테마를 중심으로 한국·중국·싱가포르·독일·미국 등 11개국의 역사교과서를 비교분석했다.1만 3000원. ●산다는 것의 의미(김형석 지음, 마음향기 펴냄) 원로 철학자이자 연세대 명예교수인 지은이가 인생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대화를 나누듯 쓴 철학 에세이. 삶의 의미, 친구, 사랑과 결혼, 성공, 돈, 죽음 등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삶의 비전을 이야기한다.9000원. ●목수(신응수 지음, 열림원 펴냄) 열여섯 살에 목수의 길에 들어서 46년째 대목장의 길을 걷고 있는 외길 장인의 나무와 고건축 이야기. 나무의 생과 나무를 다루는 업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가는 목수의 생을 진솔하게 담았다.1만 800원.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그램 질로크 지음, 노명우 옮김, 효형출판 펴냄) 20세기의 독창적 사상가로 인정받고 있는 지은이가 나폴리, 모스크바, 베를린, 파리 등 전 생애에 걸쳐 겪은 대도시의 매혹과 경험을 명쾌하게 풀어냈다.1만 6000원. ●김정일 코드:브루스 커밍스의 북한(브루스 커밍스 지음, 남성욱 옮김, 따뜻한손 펴냄) 한국 근·현대사에 정통한 석학으로 평가되는 미국의 정치학자인 지은이는 6자회담을 둘러싸고 불거진 북·미 양자간 갈등의 근원이 이미 오래전의 한국전쟁에 있음을 설파한다.1만 4500원. ●패션의 유혹(조안 핑켈슈타인 지음, 김대웅·김여경 옮김, 청년사 펴냄) ‘패션’을 사회현상으로 파악하고, 사회학, 문화연구, 젠더, 미디어 문화인류학, 역사학, 미술, 복식사, 기호론에 이르기까지 거시적인 시각에서 패션 전체를 조망한다.1만 5000원. ●대한민국은 받아쓰기중(정재환 지음, 김영사 펴냄) 우리말 지키기 운동에 앞장서온 방송인 정재환이 생활현장속의 생생한 사례를 엮어 낸 우리말 교양서. 상점 간판에서부터 게시판, 광고판, 자장면집 차림표, 인터넷, 방송 자막까지 자주 만나게 되는 왜곡된 언어·문자환경을 고발한다.9900원.
  • ‘양태영 오심’ 심판 3명 최고 연말까지 자격정지

    지난해 아테네올림픽 남자 체조에서 양태영의 평행봉 연기에 대해 점수를 잘못 줘 금메달을 놓치게 한 심판 3명이 징계를 받은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독일 DPA통신은 국제체조연맹(FIG)이 지난달 27일 집행위원회에서 조지 벡스테드(미국), 벤야민 방고(스페인), 오스카르 부트라고 레예스(콜롬비아) 등 3명의 심판에 대해 올림픽 개인종합 결승 평행봉에서 저지른 오심의 책임을 물어 자격정지 처분을 내렸다고 14일 보도했다. 이로써 벡스테드와 방고는 올해까지, 레예스는 오는 7월까지 국제심판으로 활동할 수 없게 됐다.
  • [스포츠 라운지] 한국 스키의 ‘보랏빛 희망’ 강민혁

    [스포츠 라운지] 한국 스키의 ‘보랏빛 희망’ 강민혁

    해발 600m 높이의 알파인스키 슈퍼대회전 출발대. 밑으로는 2㎞가 넘는 슬로프가 아찔하게 펼쳐져 있다. 시속 70㎞에 육박하는 무서운 속도로 중간중간 박힌 기문을 피해 미끄러지듯 내려온다. 아뿔사, 넘어지기라도 하면 실격보다 목숨을 걱정해야 한다. 국제무대에서 미미한 존재였던 한국스키가 드디어 알프스의 험준한 슬로프를 정복할 가능성을 열었다.‘세계 10강’의 꿈도 부풀린다. 강민혁(24·용평리조트)이 한국 스키를 ‘보랏빛 희망’으로 물들였기 때문이다. 스키만큼 아이러니한 종목도 드물다. 동호인 400만명을 자랑하는 겨울철 최고의 인기스포츠지만 정작 ‘스타’는 없다. 선수들은 “차라리 비인기 종목이라면 상대적 박탈감이라도 덜할 것”이라며 탄식할 정도다. 악조건에서 떠오른 샛별이기에 강민혁의 존재는 더욱 빛난다.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슬러 24일 개막된 2005동계체전에 출전한 강민혁의 질주는 계속된다. ●동계유니버시아드 15위… 한국 최고 성적 그의 이름이 국제 무대에 알려진 것은 지난 1월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에서 열린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부터. 회전 경기에서 15위에 오르며 한국 스키 사상 국제대회 최고의 성적을 거뒀다. 금메달을 쏟아낸 간판종목 쇼트트랙의 그늘에 가렸지만 ‘아시아의 지존’을 자처하던 일본 선수들을 능가한 데다 내년 2월 토리노 동계올림픽 출전 티켓까지 확보하는 값진 결과였다. 게다가 강민혁은 지난 13일 이탈리아 보미오에서 열린 세계스키선수권에 첫 출전해 회전 25위에 오르며 또다시 신기원을 열었다. 종전 한국 최고 성적은 2001년 허승욱이 거둔 32위였다. 강민혁은 특히 최근 2개월 동안 용평컵 3관왕, 서울컵 우승, 협회장배 4관왕 등 3개 국제대회를 잇따라 석권, 가파른 상승세를 타고 있다. ●“세계 1위 라이히 결국 나를 알아볼 것” 세계선수권 당시 강민혁은 자신의 우상이자 회전 세계 1인자인 벤야민 라이히(오스트리아)와 함께 연습할 기회를 가졌다. 강민혁은 라이히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지만, 라이히는 강민혁을 몰랐다. 사실상 선수와 선수의 만남이 아니라 선수와 팬의 만남이었다. 우승자 라이히와 강민혁의 기록차는 8초.15초 이상 벌어졌던 차이를 많이 좁혔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강민혁은 “라이히가 나를 경쟁자로 보는 날이 곧 올 것”이라며 야망을 감추지 않았다. ●2014년 영그는 올림픽 메달의 꿈 그의 스키 인생의 절정은 2014년 동계올림픽이 될 전망이다. 만약 고향인 평창에서 올림픽이 개최된다면 올림픽 금메달의 꿈은 그만큼 실현 가능성이 높다. 체력보다는 기술이 우선인 스키의 특성상 전성기가 30대 전후여서 지금 같은 발전 속도라면 기대해 볼 만하다. 눈밭에서 자라며 5살 때 처음 스키를 탄 강민혁은 외국 대회를 마치고 귀국한 당일에도 곧바로 무산소 훈련에 돌입할 정도로 무서운 노력파다. 또 목숨을 건 난코스에 도전하다 2차례나 어깨에 철심을 박을 정도여서 ‘독종’으로 불린다. “출발선을 떠난 이상 멈출 수 없는 게 스키”라는 강민혁의 철학대로 그의 스피드가 빨라질수록 한국 스키의 미래도 한층 밝아질 것이다. ■ 강민혁은… ▲1981년 10월29일 강원도 평창 출생 ▲횡계초-도암중-강릉고-단국대-용평리조트 ▲초교 3년 전국대회 첫 우승 ▲고교 2년 국가대표 선발 ▲2004년 동계체전 4관왕 및 MVP ▲2005년 인스브루크 동계유니버시아드 회전 15위, 보미오 세계선수권 회전 25위, 용평컵 국제알파인대회 3관왕(회전 대회전 슈퍼대회전), 서울컵 국제대회 회전 우승, 협회장배 국제대회 4관왕 글 이창구기자 window2@seoul.co.kr 사진 평창 이언탁기자 utl@seoul.co.kr
  • [여담여담] 불법복제시대의 예술/김소연 문화부 기자

    학창시절, 학교 근처엔 중고 희귀 LP 음반을 팔던 가게가 있었다. 하굣길마다 총총걸음으로 들른 그 곳엔 수입 원판들이 유리창 너머로 저마다 멋진 표지를 자랑하며 진열돼 있었다. 당시 기자는 미지의 땅을 처음 밟는 탐험가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음반들을 하나둘 훑어보며 행복한 상상에 젖어들곤 했다.10여년전 만들어졌을 음반에는 누군가의 정성스러운 손때가 묻었을 테다. 여러 사연을 품은 채 바닷길을 건너왔을 테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조심스럽게 살펴보는 눈빛은 ‘원본’에 대한 경이로움으로 빛났다. 하지만 한 장에 5만원을 훌쩍 넘겼던 그 음반들은 ‘그림의 떡’이었다. 그러다 욕심이 나는 원판이 생겼다.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았던 데다 두 장짜리 표지가 무척이나 탐이 났다. 힘들게 용돈을 모아 그렇게 처음으로 구입한 원판이 핑크 플로이드의 ‘더 월’이었다. 몇개월 뒤 라이선스로 발매가 됐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내 건 원판이었으니까.20년 가까이 흐른 지금, 이 모든 것은 아스라한 추억속으로만 남았다. 아마도 컴퓨터로 다운받아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는 세대들은 당시 기자의 노력과 마음을 이해하기 힘들 듯싶다. 이미 1930년대에 발터 벤야민이 논문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원본이 사라지는 시대의 변화를 정확히 감지했지만, 예술 마니아들은 자신들이 수집하는 복제 예술품에도 원본의 흔적을 새기려고 애써왔다. 하지만 화질이나 음질의 손상이 거의 없는 디지털 무한 불법복제는 이같은 원본의 흔적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극장이나 음반가게에 찾아가 정품에 돈을 지불하는 것조차 귀찮고 불필요한 일로 여긴다. 얼마전 회사 근처를 지나가다 최신 개봉작을 총망라한 불법 DVD를 파는 걸 본 적이 있다. 같이 있던 회사선배들은 영화담당인 기자에게 재미있는 영화의 추천을 부탁했다. 웬만하면 극장에 가라는 기자의 말에 “애가 있어서”라는 ‘편리한’ 이유를 대면서…. 문득 오래전 원판가게 앞에서 서성이던 나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불법복제의 편리함이 감동과 경이로움이라는 소중한 감정들을 빼앗아가 버렸다는 사실에 새삼 가슴이 저릿해왔다. 김소연 문화부 기자 purple@seoul.co.kr
  • [문화마당] 코엘료 붐/정은숙 시인·도서출판 ‘마음산책’대표

    요즘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고 있는 책이 무엇일까? 경영서? 자기계발서? 학습서? 아니면 떠들썩한 클린턴 회고록? 최근 4주간 서점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책은 다름아닌 파울로 코엘료란 독특한 이름을 가진 작가의 ‘연금술사’란 소설이다.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많지만 이 콧수염을 멋있게 기른 작가에게는 영 통하지 않는 모양이다.‘연금술사’뿐만 아니다.그의 신작인 ‘11분’도 우리나라에서 발간된 지 채 두 달이 안 되었는데,이미 수십만 부가 팔리는 놀라운 기록을 보여주고 있다.덩달아 그의 구간 소설 ‘베로니카,죽기로 결심하다’도 새롭게 베스트셀러에 랭크되는 등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파울로 코엘료 붐은 계속될 전망이다. 알려진 것처럼 그는 브라질 출신 작가이다.중남미 출신 작가들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로 그의 노벨상 수상작 ‘백년동안의 고독’은 노벨상 특수에 힘입어 수만 부 이상 팔렸다. 이 마르케스 이후 중남미 작가 출신 중에는 바로 코엘료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각광받는 작가로 자리매김하는 듯하다. 그런데 코엘료 붐은 중남미 작가라는 좁은 범주 안에서의 인기가 아니다.바로 보편성의 문제를 적확하게 건드린 데에서부터 그의 붐이 비롯된다. 마르케스의 성가는 소위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하는 새로운 문학적 패러다임의 공인과 함께 문학사적으로 주어졌지만,코엘료 붐은 다수의 우리 독자들의 선구안에 의해 밑에서부터 서서히 발화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이제 외국문학의 수용에 있어서도 어떤 자생적인 기운이 일고 있다고 느낀다면 글쓴이의 과민한 감식안 탓일까. ‘연금술사’가 한 소년의 성장과 지혜의 발견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면,‘11분’은 한 여성의 성적인 징후와 세상읽기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남성과 여성의 진리의 발견이 거리를 두고 지난하게 펼쳐짐을 예견하고 있는 소설이라고나 할까.처음 나는 ‘연금술사’를 보고 감동한 독자들이 왜 또 ‘11분’을 펼쳐드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니 여성과 남성의 소위 성차라고 하는 것이 그야말로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밀접하게 대응된 문제임을 알 수 있었다.남자든 여자든 이 곤혹스러운 현세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는,바로 그 문제에 있어 예외일 수가 없는 것이다. 코엘료 붐의 진정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오늘날 우리는 누구도 각박한 생존경쟁과 보이지 않는 삶의 중압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저 이 모든 것들이 욕망의 문제이므로 욕망을 비우고 마음을 비우고 살아라,이런 말을 따라할 수 있으면 종교적 의미의 해탈에도 육박할 수 있겠지만 미안한 말이지만 우리는 그럴 수가 없다.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정말 어렵다.범인이 꿈꾸기에는 어려운 경지이다.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어떤 완벽한 교의는 우리에게 생각하기를 멈추라고 강요하지만,예술 작품은 그렇지가 않다.위대한 예술 작품은 위안과 동시에 삶의 새로운 각성을 준다. 코엘료 붐이 말해주는 것 가운데 어떤 것은 저 20세기 30,40년대 위대한 문예학자인 발터 벤야민의 ‘범속한 트임’을 연상케 한다.일상적인 차원의,행동 가능한 차원의 비전의 제시,아마 독자들은 오늘의 작가 코엘료에게서 그것을 읽고 있는 듯하다. 정은숙 시인 · 도서출판 ‘마음산책’대표˝
  • 눈에 담긴 서양문화와 철학/임철규 교수의 ‘눈의 역사 눈의 미학’

    고대 그리스 문화는 ‘이미지의 문화’다.그만큼 고대 그리스는 시각예술의 요람이었다.구상예술인 조각 특히 남성의 건장한 나신을 재현한 조각이 발달했고,시각예술 최고의 형식인 연극이 꽃피었으며,과학에서는 광학과 기하학이 중시됐다. 이러한 현상은 그리스인들의 사유가 무엇보다 시각에 근거함을 보여주는 사례다.고대 그리스인들은 모든 감각 중에서 시각에 최고의 가치를 뒀다. 감각을 불신하는 플라톤조차 시각을 가장 고귀한 감각으로 여겼으며,“눈은 모든 감각기관 가운데 태양을 가장 많이 닮았다.”고 했다. ‘눈의 역사 눈의 미학’(임철규 지음,한길사 펴냄)에는 ‘눈’에 관한 흥미롭지만 ‘난해한’ 담론들이 담겼다.신화ㆍ역사ㆍ철학ㆍ신학을 넘나드는 사유의 지평은 넓고 깊다. 저자(연세대 영문과 교수)는 말한다.“눈이 있는 한 인간세계는 파멸을 면할 길이 없다.종교용어를 구사한다면 인간에게 구원은 없다.” 눈은 왜 파멸의 숙명을 상징하는가.“우리가 무엇을 ‘안다’는 것은 ‘본다’는 것을 전제로 하며,또 안다는 것은 알지 못하는 부분에 대한 배제를 뜻한다.그러니 이것은 눈의 작용에 의한 폭력이라 할 수밖에 없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저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테이레시아스의 이야기도 들려준다.테이레시아스는 소경이지만 제우스로부터 예언의 눈을 부여받았다.눈은 없지만 사실상 모든 것을 본다.이 섬뜩한 신화에 기대어 저자는 눈의 ‘측정’에 기반한 인간의 이성적 사유를 통한 앎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일깨워준다. 올해 정년퇴직을 앞둔 저자는 국내에서 고대 그리스어를 해독할 줄 아는 몇 안되는 학자 가운데 한 명이다.폭넓은 인문학적 교양을 바탕으로 저자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에서 바타유·벤야민·데리다 등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서양문화의 핵심을 파고든다.물론 ‘눈’이라는 모티프를 통해서다.2만 2000원. 김종면기자 jmkim@
  •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타원형 감옥의 외부-백민석 소설 목화밭 엽기전과 그 맥락

    강 경 석 1.기율과 충동의 사이 백민석의 소설들은 낯설다.그래서 그는 활동 초기부터 비상한 주목을 받아왔다.그러나 그런 만큼 오해와 풍문속에 내버려져 있기도 했다.그에 관한 논의들 대다수가 “긍정과 부정의 양 극단에 서”(하상일)있다는 지적은 여기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작가 백민석은 과장된 지지와 일방적 폄하 사이에서도 소설적 기율에 대한 자의식과 하위문화적 충동 간의 길항을 꾸준히 보여주고 있어 문제적이다.이는 그의 소설을 전위주의(avant garde)나 키치적 신세대론으로 소급하게 만든 흔한 실마리이기도 했다.그러나 이 길항이 가지는 가시적 면모들은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그보다는 하위문화소들의 무잡한 전경화 뒤에 작가가 무엇을 배치해 놓았는가 하는 점이 더 중요하다.그는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이 90년대적 공통감각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 혹은 “억지로 깨워 불러들여”(261면)진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작가이다.그의 소설들이 가시적이고 합리적인 범주로의 손쉬운 편입을 수락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이들은버려지고 배제된 것들(abjection) 말하자면 “병원 수술실에서 나온 적출물더미”(74면)의 잡종교배를 통해 태어났다.하위문화적 기시감으로 얼룩진 “적출물더미”들이 작중현실을 대신하면서 이들을 단순한 상징이나 알레고리로 보이게끔 만들지만,백민석의 서사전략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바는 비유적 세계의 너머에 있다. 우리가 길어 올리고자 하는 주제들은 모두 그의 네 번째 장편 ‘목화밭 엽기전’(이하 엽기전)을 경유한다.‘헤이,우리 소풍 간다’(이하 헤이)로부터 본격화된 백민석의 소설 작업은 자못 활력적이었다.그리고 그 도정의 옥매듭을 이루는 작품이 바로 ‘엽기전’이다.이후 출간된 소설집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이하 장원)이나 장편 ‘러셔’도 이 텍스트의 장력 바깥은 아니다.‘엽기전’은 백민석의 성공과 실패를 입체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창이다. 2-1.기생(寄生)과 평질변이의 공간들 벤야민은 카프카의 작품을 분석하면서 그것을 “멀리 떨어진 두 개의 초점이 있는 타원과 같다.”라고 썼다.이처럼 ‘엽기전’ 또한 두 개의 초점을지닌 타원 구조를 띠고 있다.그러나 카프카의 작품이 현대사회의 알레고리적 재현이라면 ‘엽기전’은 그 ‘재현’의 재현이다.은폐된 두 개의 초점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적절한 축척의 개략도 한 장을 준비하기로 한다. 주인공 한창림은 대학 강사이다.그에게는 수학과외 교사를 하는 아내 박태자가 있다.과천에 살고 있는 이들은 비교적 분명한 사회적 신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괴한 작업에 몰두한다.그것은 미소년들을 자신들의 집 지하실로 납치해 스너프필름을 찍는 일이다.이는 시종 “흰 연기”(281면)에 비유되는 공포스러운 존재 “펫숍삼촌”의 사주에 의한 것이다.‘펫숍의 영어표기 pet에’는 ‘성애의 개념도 포함되어’ 있으며 거기에서는 “도착적인 냄새”(128면)가 난다고 설명되듯 그가 한창림 부부에게 돈을 지불한 뒤 얻는 것은 관음증적 쾌락이다.이야기는 박태자의 제자이기도 했던 소년 윤수영이 이들 부부에게 납치·살해되는 과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생면부지의 한 회계사를 양담배를 피운다는 이유로 폭행하게 되고,그 때문에 오장근 형사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일이 “질서에서 어긋나”(188면)자 펫숍삼촌은 박태자를 살해한다.한창림은 오장근과 펫숍삼촌에 대해 복수를 꿈꾸지만 결국 실패하고 체포된다.이 파국의 막바지를 가파르게 추락하면서 그는 “모자이크 처리가”(280면)된 “목화밭”을 발견한다. 물론 이상과 같은 개략도만으로 우리의 목적지가 금세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도착적 수사들을 일단 괄호치고 나면 텍스트는 의외로 쉽다.그것은 실존공간에 틈입한 우발적 폭력이 파국의 빌미로 된다는,매우 익숙한 플롯을 배면서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같은 맥락에서 “햇빛 때문에” 한 아랍인을 살해했다는 뫼르쏘(‘이방인’) 이야기를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한창림과 뫼르쏘가 행사한 폭력은 부조리한 ‘충동’에서 비롯된 것이다.“양담배”나 “햇빛”은 사후에 조작된 것일뿐 폭력의 본질적인 동기는 아니기 때문이다.요컨대 ‘엽기전’은 지식인 주인공의 지리멸렬한 일상이 폭력적 충동 앞에 느닷없이 노출된 상황과 이질적이고 도착적인 수사들의 짜깁기로 구성되어 있다.이 발견을 열쇠로 삼아 텍스트에 좀더 가까이 가 보자. 우선 제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전(傳)이라는 이름의 작품 형식표지 때문이다.이것은 한 인물의 인생유전을 시간의 흐름에 입각해 서술하는,동아시아 고전문학의 대표적 형식 중 하나이며 다양한 방식으로 현대적 굴절을 거듭해왔다.인물의 궤적을 다룬다는 측면에서 그것은 ‘박씨부인전’‘홍길동전’ 혹은 ‘라울전’(최인훈)‘유자약전’(이제하)과 같이 인물 지시와 이어지게 마련이었다.필경 전 형식을 새롭게 전유하면서 그 스타일이 고안되었을 ‘한씨연대기’(황석영)도 사례에 포함시킬 만할 것이다.그러나 엽기(獵奇)는 인물이 아니라 어떤 사태를 지시하는 말이다.그로테스크(grotesque)의 일본식 번역어일 가능성이 높은 이것은,최근 폭발적인 유행과 함께 하나의 문화적 화두가 되기도 했다.그러므로 ‘엽기전’은 엽기라는 문화적 표상들의 탄생과 성쇠를 기록한 형식이다.그러나 텍스트에 파종된 엽기들은 발생·성장·소멸이라는 시간적 체험과는 무관하게비선형(非線型)적으로 뒤엉켜있다.이런 측면은 자연스레 공간적 상상력을 유도한다.텍스트의 문면에 돋을새김 된 모티프들이 “동물원”“펫숍 건물”“지하작업실”“서울랜드”“목화밭”“과천” 등의 공간 표상들임은 시사적이다.지하분묘(grotta)의 벽에 표현된 반인반수의 기괴한 신체들로부터 파생,매스미디어적 운반을 거치면서 그로테스크는 엽기로 굴절되었거니와 엽기는 먼 기원에서부터 이미 공간 자질(지하분묘/일그러진 신체)을 보유했던 것이다.그런 면에서 ‘엽기전’의 전(傳)은 교란부호 내지 착란이다.그것은 엽기가 전(傳)이라는 선형(線型)적 시간에 뿌리내리면서 빚어진 형질변이의 결과여서,결국 의식의 ‘적출물더미 하치장’을 표상하는 공간 기호로 작동한다.이것의 대표적 작중 용례는 일상의 표면에 묻힌 한창림 부부의 “지하작업실”일 것이다.이곳에서는 마치 무의식 속에서나 벌어질 법한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고 있다. 설정 자체는 나체의 주술사가,흰 피부의 사내애와 벌이는,섹스의 향연이다.신께 제를 올리는 것이다.제물은 섹스이고,체액이고,신체이다.(212면) 재갈과 가죽 끈으로 포박당한 희생자는 끊임없는 린치의 반복앞에 저항할 힘조차 잃고 있다.한창림 부부는 카메라를 설치하고 상황을 연출하면서 마치 마계의 제사장처럼 행동한다.악마숭배의 제의적 모티프는 하위문화의 단골 레퍼토리이기도 하다.헤비메탈 밴드의 라이브 공연장은 가장 적절한 참조 대상이다.이들은 “무시무시한 대형 두개골 모형이 놓여 있고,사방에 스티로폼으로 만든 시체 조각 뼛조각들”(‘장원’146면)이 널린 무대에서 연주하곤 했다.그들은 관중을 향해 “날엉덩이”까지 흔들어대는 퍼포먼스를 서슴지 않는다.작가가 여기에 깊은 공감을 보이는 이유는 “모든 가식을 뚫고 자신과 현실을 직시하는 추잡한 날엉덩이의 미학”(‘장원’ 147면)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비교(秘敎)적 무대공간은 한창림의 지하작업실과 유사한 공간 자질을 갖는다.성스러운 신의 전당들이 지상으로부터 영원을 향한 상승 이미지라면,엽기전적 공간은 지하로 숨어든 하강 이미지이며,그것은 서구 고딕(Gothic)소설들이 공간적 배경으로 흔히 채용했던 폐쇄공간들(외딴 성,숲속의 저택 등)과도 통한다.한창림의 지하작업실이 “서울랜드와 동물원이 지어질 때 고립”(18면)되었다고 진술되면서부터 이들과 일정한 상호텍스트성을 획득하기 때문이다.실제로 ‘오트란토 성’(H 월폴) 같은 작품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지하실이나 비밀통로,폭력적인 남성형상 등의 모티프들이 두루 겹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엽기전’이 일반적인 공포물이나 고딕소설로 분류되는 것은 아니다.그것은 소재주의에 함몰된 비약이다.상호텍스트성이 아무런 매개도 없이 동질성으로 전화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이를 과장하다보면 최인훈의 ‘웃음소리’나 박인홍의 ‘벽 앞의 어둠’,또는 이승우의 몇몇 근작조차 고딕소설의 일종으로 배분해야 지 모른다. ‘오트란토 성’이 봉건 이념의 종식을 징후적으로 포착한 경우라면,‘엽기전’은 근대 자본주의의 세포단위인 부르주아 핵가족의 내파(內破)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내력부터 다르다.이 앞뒤 사이에 가로놓인 역사의 심연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인데,그렇다고 텍스트에 드러난 고딕적 요소를 일방적으로 부정할 수만은 없다.그것은 ‘신체 상해’의 문학적 상관물들이 동시대의 한국문학에서 적지 않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이것이 도시 체험의 축적에서 유래하는 일탈의 감각과 깊이 연루된 것이고 보면 우리 사회 일각에서 나타나는 포스트모던 징후의 하나로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그런데 테리 이글턴 같은 경우는 여기서 더 나아가 포스트모던 자체를 오히려 “고딕의 뒤늦은 부흥”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그에 따르면 고딕이란,“편파적 시선에 의해 내던져진 괴기스러움의 그림자이며,허구 속에 안전하게 봉인된 팬터지이자 분노이기도 한,중간계급의 정치적 무의식”이다.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한국사회의 포스트모더니티를 과장하는 일도,서구적 맥락에서 고딕을 규정하는 일도 아니다.고딕환상물들이나 하위문화 양식들이 다양한 방향의 역사적 분절과 매체 전이를 경험하면서도 “중간계급의 정치적 무의식”이라는 기원적 동질성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앞에서 말한 ‘재현(가상)의 재현’이란 무엇이 될 수밖에 없고 또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더 중요하다.‘무의식”이라는 표현에서 예상되는 것처럼 하위문화적 충동의 1차적 재현이란 이미 “안전하게 봉인된” 저항에 불과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백민석이 수행하고 있는 ‘재현의 재현’ 전략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 것이다.버려지고 배제된 “적출물더미” 혹은 “쫓겨난 나쁜 냄새들의 익스트랙트들”(166면)은 “지하작업실”이나 “펫숍건물”에서 벌어지는 린치행위들(악마적 희생제의)과 함께 표면적으로는 위반의 정치학을 구사하면서도,내면적으로는 “사회체계”의 안전망 안에서 자기보존의 영속적 지위를 획득한 것들이다.그것은 또,하위문화 기제들의 비교(秘敎)적 무대공간과도 맥락을 같이 하는데,‘엽기전’은 이 점을 분명히 자각하고 있다.그리하여 텍스트는 반항의 에네르기를 통제하는 봉인,“과천의 위생 처리된 맨홀 뚜껑”을 해체하는 일대 모험을 감행한다.이때부터 텍스트 전개의 중심축은 지하작업실의 은폐된 사실들이 표층으로흘러넘치면서 발생하는,파국을 향해 이주한다.한창림이 지하작업실을 불태우는 장면(234면)은 그 전환점이다.이 상상적 봉인해체 작업을 통해 백민석은 중간계급의 이상(理想)이 얼마나 안일한 기초 위에 축조된 것인가를 묻는다.한창림은 이를 “몰락”(232면)이라고 말한다.이것은 그의 목소리를 빌려 미리 암시된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얼마나 세상의 위협적인 눈들로부터 폭넓게 노출되어 있는지 깨닫곤 놀랐다.사람들은 다만 망상증에 걸리지 않기 위해,자기가 안전하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 같았다.(68면) 첫 장편 ‘헤이’의 “퐁텐블로”나 ‘엽기전’의 “좋은 냄새가 나쁜 냄새들을 죄다 몰아낸 과천”은 중간계급의 이상(理想)을 외화시킨 인공낙원이다.그리고 이 공간들의 질서를 교란시키는 작업은,그 전제에서부터 “사회체계”의 기초를 탐색하는 작업과 함께 갈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그것은 ‘엽기전’의 전략을 논리적 비약에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럴 듯하다.이러한 종류의 탐색 작업은 늘 집 또는 가족의 문제와 관계 맺는다.근대문학의 전통이 끊임없이 물어왔고 또 동시대의 문학적 상상력들이 여전히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백민석 또한 가족이라는 공간에 대해 묻는다.그곳은 “우리의 지옥”(‘헤이’,244면)이다. 2-2.집의 포자(布子)들과 두 갈래의 초월 근대적 가족 이미지의 거처(topos)로 기능해온 ‘집’은 백민석에게 와서 다시 씌어진다.그는 가족 이념의 내파를 출산과 ‘배설의 이미지’를 오버랩시키는 실존주의 모티프를 통해 보여준다.임신 중인 박태자가 “가족 없이도(…)그럭저럭 결혼까지 하며 제법 꾸려져왔”(142면)던 자신의 삶을 강변하며 아버지의 방문을 거절하는 장면,그리고 화장실에서 사산(死産)하는 장면.이 두 장면의 연속배치는 결정적이다.자신의 기원을 부정하면서 재생산의 고리마저 끊어낸 ‘집’(또는 가족)이란 그 자체로 전복적인 하위문화 공간이자 “지옥”이다.이것은 매우 급진적인 강렬도에 의해 지탱되고 있어서 텍스트의 등장인물들은 아무도 이타카(Ithaca)의 회복을 욕망하지 않는다.이런 점에서 백민석의 인물들은 기억의 서사를 추구하는 윤대녕의 주인공들과 대조적이다.그곳에는 어떤 기억이나 회상도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부조리한 충동은 거의 언제나 우발적인,비가역적 동시성의 소산이기 때문이다.기억의 돌출은 기껏해야 한창림이 자기 어머니를 떠올릴 때처럼 파편적 이미지로 던져지거나(154면),박태자의 경우처럼 현실인지 꿈인지 모를 “암페타민의 환각”(99면)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주인공들의 성격이나 행위가 작가의 궁극적 주제를 직접 매개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이는 작가가 한창림과 박태자의 교차진술을 통해 작중 상황을 반복 객관화시키면서 더욱 뒷받침되고 있는 것이다.주인공의 욕망이 작가론의 직접적 상관물로 환원될 수 없다는,일견 단순한 사실이 지금껏 무시되면서 ‘엽기전’은 냉소나 허무주의적 저항담론의 일방통행로에 갇혀 버렸다.물론 ‘헤이’와 같은 초기작의 경우,하위-충동의 허무주의를 준거점으로 삼으면서 결국 세대론적 인정투쟁에 희생된 측면이 없지 않다.그러나 충동의 무정부적 방출을 일삼는 주인공이란 하나의 설정일 뿐이지 궁극은 아니다.이들을 다루는 작가의 시선은 마치 스크린 속에서 만난 괴기사건을 독자들에게 전달,‘재현의 재현’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하는 듯 담담하다.작중인물들에 대한 연민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근본적으로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우호적이지 않다.그러므로 허무주의적 세계관 또한 출발점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헤이’ 이후 작가에게는 단 두 가지 길밖에 없었다.출발점의 진화를 위해 망설임없이 밀고나가는 길,그리고 부조리한 충동들의 존재근거를 되짚는 길이 그것이다.앞의 것은 “목화밭”으로 가는 길이고 뒤의 것은 ‘내가 사랑한 캔디’,‘불쌍한 꼬마 한스’,‘이 친구를 보라’로 이어지는 자전적 소설의 길이다.그것은 단지 선택의 문제이다.“목화밭”으로 가는 길 끝에서 한창림 부부가 몰락한다는 것 또한 이를 뒷받침한다.자칫 이 끔찍한 존재들의 실패담이 무책임한 냉소로 비칠 수 있겠지만,하위문화의 봉인된 저항이 늘 그런 것처럼 그들은 자신들의 태생적 한계에 의해 몰락하는 것뿐이다.그것은 기원 혹은 자신의 존재근거(집)를 스스로 거절하면서부터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백민석은 이것을 “괴물들”의 숙명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그러나 그렇다고 해서,‘숙명’이라는 말에 이미 전제된 것처럼,한창림 부부의 몰락은 단지 기성질서나 사회체계의 견고함을 인정하고 확인하는 충격적 절차에 불과하다고 말해도 되는 것일까.아니 좀더 일반론적으로 말해서,주인공의 몰락은 늘 체제에 대한 굴복을 뜻하고 마는가.우리는 그 반대의 사례들을 분명히 알고 있다.쥘리앙 쏘렐((적과 흑))의 몰락이 단지 타락한 욕망의 몰락일 뿐이며 이동혁((객지))의 실패가 영웅주의의 실패에 불과한 것처럼,한창림의 파멸은 가상의 식민지 위로 흘러넘친 그 무정부적 충동의 패배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다.(엽기전)에서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결정적 토대는,기억의 환원작용을 철저히 단속하면서 “훗날,그의 기억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게끔”(234면) 집이라는 상징을 소각시켜 버린 데에 있다.그것은 다만 지하작업실의 끔찍한 린치와 패악들을 포장하는 초월적 가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위-충동의 공간으로 전락한 집(獵奇傳)은 단순한 상징이기를 멈추고 마치 암세포나 포자식물들이 그렇듯 확산 증식한다.지하작업실에서 “섹스”와 “신체”가 “제물”(212면)이 된다는 진술은 그래서 설명 가능해진다.근대적 주체 재생산의 전제가 되는 남녀간의 성적 교환을 악마적 제의로 탕진하면서,출산과 배설의 이미지를 등치시켰기 때문이다.이 공간이 지닌 능력은 통상적 상상을 넘는 것이어서,거의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에 필적한다.이 “지하작업실의 깜깜한 자궁”(91면)에서 길러져 나온 포자들이란 비정상적 과정을 통해 탄생한 비정상적 존재들이며 체계의 관리망 안에서 “도착적”으로 왜곡된 인공 “수컷성”의 담지자들이기도 하다.“학교 안의 새끼 수컷들”(69면)이나 “동물원의 독방에 갇힌 만드릴 육식원숭이”(175면),“정신병원의 조울증 환자들”(138면) 등은 바로 그 증식의 사례들이다.지하작업실의 포자들은 훈육시설 즉 사회체계의 관리 시스템에서 기생한다. 이것은 빅토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어두컴컴한 실험실이 괴물을 탄생시키는 하나의 자궁으로 기능한다는 지적(G 스피박)을 연상시킨다.그러나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1818년)이 여행(모험)의 구조를 통해 비정상적 존재(괴물)의 정신적 성숙 과정에 집중하고 있다면,‘엽기전’에는 성숙 혹은 교양(Bildung)의 과정이 삭제되어 있다.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조화로운 가족서사에 대한 강렬한 향수(괴물은 빅토에게 아버지의 역할을 요구하지만 거부당한다)를 지닌 반면 후자는 가족서사 자체를 히스테리에 부쳐버린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이것은 전(傳)이라는 시간적 형식이 왜 엽기라는 그로테스크의 변종과 만나면서 공간화 되는지를 부연한다.가족은 주체의 인큐베이터이며 성숙이란 그 시간적 진화 과정이다.텍스트는 전통적인 소설의 중심축이라 할 성숙의 문제를 수락하지 않음으로써 시간성의 장력으로부터 이탈하려 한다.이 텍스트가 읽기의 습속에 저항하는 것은,한편으로 비선형적이고 공간적인 그래서 공시적 사유방식에 의해 지탱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서사의 절연과 접합된 공시적 사유방식은 의미심장하다.근대적가족 이미지가 학교나 군대와 같은 훈육시설들의 이미지와 함께 자본주의에 의해 수행되는 상징조작의 일환(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이었다는 성찰과 맞닿으면서,90년대에 등장한 이른바 신세대 작가들은 가족의 문제를 자신들의 중심 과제로 삼았던 것이다.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집단적 주제로부터 ‘엽기전’은 그러나 조금 더 전진해있거나 약간 비켜 서 있다. 약간의 비약이 허락된다면,분단 이후의 한국소설사는 가족의 균열을 중요한 축으로 설정해왔다고도 할 수 있다.이것은 주로 결손의 문제와 연루되어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이데올로기 갈등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이는 아비부재에 집중되어 있었다.이것은 김소진에 이르기까지 승계되었다.이 전통은 근원적 실향의식과 친족관계를 형성하면서 다양한 스펙트럼을 발산해왔다.그러나 90년대의 풍속 주체들은 그것을 냉소와 조롱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린다.이들의 공과를 떠나서라도,가장 급진적인 작가로는 배수아가 적임일 것이다.그는 동요하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이미 파산선고를 내린 듯이,“어머니”를 새로운 해체대상으로 설정한다.그러므로 결손의 모티프를 구사하는 경우에도 그것은 아비부재가 아니라 어미부재로 나타난다.그러나 “어머니,나는 이제 죽을 때까지 어머니의 아이가 아니겠어요”(‘부주의한 사랑’)라고 외치는 배수아의 “아이들”마저도 기원에 대한 향수를 무의식적으로 드러낸다.강렬한 향수야말로 이 도저한 거부의 진정한 추동력인 셈이다.‘엽기전’을 동시대의 유사한 징후들 속에서도 분별하게 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텍스트는 가족서사의 부정적 연혁을 작성하면서도 기원에 대한 향수를 음각(陰刻)하고 마는 평균적 해체작업에 만족하지 못한다.그 거부의 의지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혹독한 양상을 띤다.텍스트는 가족서사에 대해 “너무나 흔해서 얘깃거리조차 안”(48면) 된다고 말하기를 서슴지 않는다.이미 논의한 바와 같이 주인공들의 이러한 진술 자체가 텍스트의 궁극적 주제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이것은 잠정적으로 오이디푸스적 환원이라 부를 만한,근대적 가족제도의 구체적 질곡을 겨냥하는 것으로 보인다.작가는 이것을 요약하기 위해 “수컷성”이라는 특유의 조어를 반복 사용하고 있다. 그 외피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오이디푸스적 환원이란 심층에서 남성적 지배질서를 지속시키려는 “사회체계”의 작동 방식을 함축한다.‘아버지와 아들의 경쟁’으로 상징되는 오이디푸스적 세계 안에서 성숙이란 결국 남성적 성숙에 다름 아니며,이는 근대적 가족 제도를 경쟁 이데올로기의 기초로 삼는 자본의 요구이자 동력이기도 하다.텍스트의 전반에 걸쳐 반복되는 “수컷성”이란 “영역싸움”“패권주의”“위계질서” 등으로 예시되는데 이것들은 경쟁 구조의 자기보존 양식을 말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이 질서에 붙들린 존재들은 어떠한 준거로도 윤리적 판단대상이 될 수 없다.이 세계에서는 선악의 이분 구도 따위가 처음부터 허락되지 않는다.충동적 가상들(수컷성)만이 거주하는 끔찍한 세계이기 때문이다.이는 전작(前作) ‘불쌍한 꼬마 한스’에서 오이디푸스적 성숙의 발생학을 탐사했던,백민석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다.잘 알려져 있다시피 꼬마한스는 프로이트의 주력 개념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전형적 사례이다.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아버지에 대한 공포를 낳고,그것이 다시 말(言)에 대한 공포로 전이되어 꼬마 한스의 신경증을 구성한 것이다.백민석의 주인공들도 공포의 기척 앞에서 실어증을 경험하곤 한다. 한창림은 공포에 전율할 때마다 “누군가 입 속에 비닐 빵봉지를 쑤셔박아넣은 것”같다고 느낀다.이 공포감은 “사회체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이는 백민석의 끈질긴 문제의식 중 하나인데,표현의 추상성을 넘어 은연중 역사적 환기력을 구체적으로 회복한 경우는 그에게 ‘엽기전’이 처음일 것이다.그는 ‘엽기전’의 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이 소설을 구상한 건 이곳 안양 평촌으로 이사오고 나서,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그게 94년이니까 벌써,칠 년 전의 일이다.(…) ‘뭔가 된’ 것은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97년의 일이다.그저 엮어 놓는 것만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함이 컸던 것이다. 97년은 국내 경제를 준 공황시대로 내몰았던 IMF 외환위기 사태 혹은 신자유주의의전경화가 본궤도에 오른 시점이다.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엽기전’은 자본주의 사회체계의 가공할 위력에 대한 충격적 확인을 내면화한,우리들의 보고서다.한창림 부부와 그 혈육들이 하나같이 실업자이거나 비정규직이라는 것과 “뷰티풀 피플”의 남편이 파산한 사업가로 등장하는 것은 흥미로운 예증이 된다.“퐁텐블로”나 “과천”이 보여주는 위장된 혹은 상상적 안온함은 생산자본이 투기자본에 압도된 ‘거품경제’ 만큼이나 “텅 빈”,그리고 아슬아슬한 것이다.그가 작중현실로 설정하고 있는 하위문화적 충동의 세계가 그러한 것처럼 그것은 파국의 예감을 이기지 못한다.작품 구상 단계의 모호함이 명료한 의지를 얻게 된 것도,무정부적 충동의 발산에 기울어 있던 작품세계가 일정한 전환점을 획득한 것도 모두 동시대 감각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엽기전’은 우리 시대의 집단신경증(부조리한 충동)이 자본주의의 세계적 관철 혹은 “수컷성”의 일방통행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이는 백민석이 의도적으로 성숙의 문제를 삭제한 결과이다. 그런데 성숙의 문제를 괄호치는 것은 근본적으로 가능한 일인가.하위문화적 충동의 무잡한 전경화 뒤에는 이런 의문들이 도사리고 있다.성숙은 블랙홀의 심처와 같이 끊임없는 소환의 인력을 발산한다.성숙의 저 끝 간 곳은 초월의 영역일 것이며 이것은 텍스트 내부에서 두 갈래의 길을 연다.하나는 수컷성의 최상층을 차지하는 “펫숍삼촌”을 제거함으로써 빅 브라더(‘1984’)에 필적하는 질서의 지배자 혹은 신적인 관람자(펫숍은 모든 것을 알고,또 본다)가 되는 길이며,다른 하나는 무정부적 충동을 끝까지 밀고나가 죽음에 이르는 길이다.편의상 앞의 것을 상승초월,뒤의 것을 하강초월이라고 이름 붙여 본다면,텍스트는 이 두 개의 극점을 지닌 일종의 타원 구조를 갖고 있다.텍스트의 등장인물들은 모두,두 개의 극점이 발산하는 인력 사이에서 진동하는 존재들이다.이는 일반적인 성숙의 서사와 그 음각인 ‘프랑켄슈타인’류의 ‘하위-충동’ 서사를 양 극점으로 삼는 구조이기도 하다.앞에서 벤야민의 카프카론을 예시했던것도 이 때문이다. 하위문화적 충동의 포자들은 소설적 기율(또는 성숙의 플롯)에 기생하면서 ‘엽기전’이라는 변종을 만들어낸다.이 변종의 변종성은 텍스트 내부의 공간 배치,확산에 의해 이루어지며 두 갈래로 나뉘어 각각 상승초월과 하강초월의 공간으로 작동한다.이들의 공동 거처는 “제2정부종합청사”“서울랜드”,“동물원”이 있는 공간 과천으로 설정되어 있다.이곳은 “수도권에서 가장 살기 좋은 시로 뽑힌”(165면) 곳이며 그 이유는 “좋은 냄새가 나쁜 냄새들을 죄다 몰아”냈기 때문이다.이곳은 그러므로 엄연한 실재이기를 그치고 ‘헤이’의 “퐁텐블로”처럼 중간계급적 이상의 재현물로 전도된다.“냄새”나는 “적출물더미”들을 은폐하면서 보편적 행복을 가장하기 때문이다.여기서 “나쁜 냄새”란 “수컷성”의 기화작용 혹은 확산을 말하는 것이다.이데올로기의 상징 조작이 최고의 효율성을 발휘할 때 “살기 좋은” 계획도시 과천의 지하에서는 배제의 프로그램이 가동 중이었던 것이다. 이 배제의 희생물이 되지 않으려면 초월적 수컷이 되는 수밖에 없다.실제로 “펫숍삼촌”의 수컷성은 배제 프로그램(사회체계)을 넘어서 있다.“세상의 눈은 그걸 볼 수가 없”(125면)는 상승초월의 영역에 놓이는 것이다.“어디에도 없으면서 어디에나 있는”(117면) “펫숍 공간”은 삼촌이라는 이름의 친숙성과 결탁하면서,체계로부터 자유로워진다.그에 반해 한창림의 엽기전 공간은 “뷰티풀 피플(사업실패로 와해된 가족 형상)”과 함께 프로그램의 희생물로 전락할 위기에 놓인다.그들의 충동은 태생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그들은 그저 “쫓겨난 나쁜 냄새들의 익스트랙트”(166면)들이다.영역 싸움과 경쟁에서 밀려난 패배한 수컷들인 셈이다.‘엽기전’은 “흰 연기”(281면)로 표상되는 “펫숍삼촌”의 신적인 수컷성(상승초월)과 결국은 거름이 되고 말,야수의 수컷성(하강초월) 사이에서 전율하고 있는 텍스트다. 2-3.타원형 감옥에서 목화밭으로 ‘야수적 하강’과 ‘비교(秘敎)적 초월’의 두 갈래 길은 서로 다른 방향을 갖고 뻗어나가는 듯 보이지만 결국 동일한 장소-표면에서다시 만나기도 한다.그것은 타원 구조의 양 극점이 자신의 몸을 뒤틀어 다시 만나는 뫼비우스의 띠이다.그 장소란 린치의 장소-표면이다.거기에서는 감시와 처벌,혹은 임의적인 폭력이 끊임없이 미끄러진다.등장인물들의 모든 탈출 기도가 수포로 돌아가는 이유는 텍스트의 세계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벗어날 수 없는 순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마치 버튼만 누르면 언제라도 반복재생되는 스크린처럼,그들을 둘러싼 세계는 거대한 하나의 감옥이자 부서지지 않는 벽들이다. 작중 공간에서 가장 높은 위치인 펫숍공간은 가까이 다가가 “정체를 머릿속으로 짜맞춰보다가는,금세 덩치나 안전문이 떠올라 스스로 사고를 정지해버리”(123면)도록 만들면서 영역침범을 가로막는다.이것은 감시의 내면화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태어나기 전의 공간”(122면)인 펫숍에 구체적 형상을 부여하는 것은 오로지 벽,“시멘트벽”이다.텍스트 내에서 하강의 경험적 한계인 한창림의 지하작업실 또한 피범벅의 벽들이다.거기서는 린치의 흔적이 끊임없이 번지고 미끄러지지만,벽면들에 안전하게 둘러싸인 채이다.그러므로 상승초월과 하강초월은 주인공들의 폭력적 도주를 이끄는 강한 유혹이자 인력의 중심이면서,동시에 막혀 있는 어떤 것이다.“사회체계”의 어두운 핵심으로 직핍하는 길은 아무 데도 없다.저항도 발악도 체계의 허가 범위 안에서 이루어질 뿐이다.이 출구 없음은 그들이 중심 혹은 주체가 아니라 ‘만들어진 존재’ 즉 “사회체계”로부터 호출받은 타자들이기 때문이다.그들은 한갓 게임속의 평면 캐릭터에 불과한 자신의 실존을 증언한다. 그도 아내도 이 사회에서,날 때부터 운명지어진 존재들이었다.(…)괴물스러운 위력이 얼마나 막강하든,바깥에 존재(타자성-필자)하는 한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가 없다…… 그래서 괴물은 장난감 수준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잠들어 있던 괴물을 억지로 깨워 불러들여 놓곤,재미로 쫓아다니며 괴롭히고,종국엔 괴물이 왔던 곳,사회 체계의 바깥으로 다시 쫓아보내는 악취미의 희생물로 전락하는 것이다.(261면) 그들이 줄곧 “내면 없는” 존재로 진술되는 이유가 그것이다.그들은 오직 표면만을 가질 뿐이며 마치 “뷰티풀 피플” 공간에 진열된 “웃는 플라스틱”(인형)들처럼 속이 텅 빈 존재들이다.신체상해 혹은 “린치”는 텍스트의 시작점에서 끝점까지 수도 없이 자행된다.“텅 빈 목소리” 혹은 “사색하지 않는”과 같은 수사들이 끈덕지게 달라붙는 린치 장면들.‘엽기전’의 등장인물들에게 있어 내면이란 기껏해야 히스테리나 조울증·분노 등으로 표면화된다.신체는 하나의 표면이고 그 내부는 또 다른 해부학적 표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참혹한 인식이 텍스트를 무심히 곁눈질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이 피비린내 나는 일상 어디에도 사색이란 물건은 없다.”(134면) 이것은 상승초월과 하강초월이 막힘 혹은 “육중한 안전문”,“지표면”과 같은 일종의 벽면(표면)으로 제시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이것들은 끊임없는 표면들의 연속체로 구성되어 있다.“펫숍의 공간 구조는 자연스레,네 번째 공간,다섯 번째 공간,여섯 번째(…)갈수록 안전문은 육중해지고 접근 불가능해”(123면)지는 것이며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바닥없는 심연으로 사라지는” 것이다.그것은 그들이 스크린의 격자에 갇힌 디지털 화소조합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견고한 감옥의 구조 안에서,한창림은 윤수영을 린치하고,펫숍삼촌은 한창림을 공포로 길들인다.여기서 초월의 전망은 ‘성숙한 깨달음’을 통해 생성되는 것도 아니고,절망적 추락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그것은 차라리 두 극단의 장력이 이루어내는 벡터 운동의 산물이다.실제의 공간 과천을 주무대로 배치하면서 실제의 실제성을 마음껏 왜곡하고 있는 ‘엽기전’은 표층 차원의 비현실성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현실주의의 산물이 된다.여기서의 현실은 고정된 무엇이 아니라,벡터운동이라고 했듯 생성과정 중인 어떤 것이다.그것은 근대적 가족이념의 이데올로기적 침윤 혹은 수컷성의 영역 분쟁으로 요약할 만한 자본주의 사회 시스템의 작동방식을 기괴하게 드러낸다.“현실을 직시하는 날엉덩이의 미학”은 여기서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그런 점에서 텍스트는 현실을 괄호안에 묶는 팬터지도 아니고 은연중에 독단적 현실을 들이대고 마는 낡은사실주의도 아니다.텍스트는 생성과정 중인 현실 자체이며 끊임없이 포자 증식하는 전경화된 공간 표면들의 연쇄이다.이것이야말로 비가역적 동시성의 산물이다.이 찢어지지 않을 것 같은 혹은 “육중한 안전문” 같은 표면들은 박태자가 늘상 바라보는 “텔레비전 화면”이기도 하다.이 표면들의 연쇄는 단지 화소조합에 불과했던 한창림이 스스로를 해방시키려들면서 파국을 맞이한다.이때 자신의 근원적 종속성을 지각한,이 불길한 주연배우의 두 눈 앞에 “목화밭”이 출현한다.“목화밭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3부 제목) 한창림은 파국의 절정을 가파르게 추락하면서 마치 우연인 듯,이 거대한 감옥의 바깥을 본다.그것은 초월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표면들의 완고함 앞에서,마치 자유의 계시인 것처럼 나타난다.그것은 언어적 해석의 대상이 아니다.너무나 낯설어서 오히려 공포감을 일으키는 어떤 것이다.텍스트는 그것을 “목화밭”이라고 부르지만,이미 통상적 기호로는 지시할 수 없는 대상이다.마치 최초의 인간이 자신의 세계에 대해 처음으로 입을떼듯,“목화밭”이라고 우연히 발음된 것뿐이다.그것은 숭고(崇高)한 대상이다.체계에 붙들린 어떤 의미도 허락하지 않은 채 그저 “거기 목화밭이 있었다.” 거기 목화밭이 있었다.(…) 그는 알 수 없었다.어째서 여기가 목화밭인가? 씨는 아직 뿌리지도 않았는데,언제부터 목화밭인가? 그는 볼 수도 없었다.둔덕 전체에 모자이크 처리가 돼 있었다.(…) 그는 목화밭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다.그는 삽을 놓고,두 손을 들어 눈을 가린 다음 울기 시작했다.누군가 그의 입 속에 비닐 빵봉지를 쑤셔넣은 것 같았다.커다란 쇠뭉치를 그의 입에 처넣은 것 같았다.(280면) 파멸의 순간에 우발적으로 그리고 모호하게 던져진 ‘그것’은 그러나 ‘엽기전’을 허무주의로부터 구원하면서 동시에 미래로 운반해간다.이것은 획기적이다.백민석은 언어적으로 지시하지 않는다.다만 하나의 자족적인 사물을 생성시키고자 한다.그는 텍스트 위에 어쩌면 자기 자신과도 전혀 무관한 자유를 창조하려한 것이다.그러나 이것은 어느 누구의 승리도 견인하지 않는다.우리는 모두 참패한 것이다.작가도 독자도 또 그 사이의 주인공들도 이 무시무시한 자유의 숭고한 출현을 그저 흔적의 형태로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그것은 “모자이크” 너머의 현실,진정한 현실이다.“목화밭”이라는 우발적이고도 가난한 기호가 ‘진짜 현실’의 숭고한 출현을 계시하고 있다.존재의 근본적 종속성을 깨닫는 순간 “아주 작은 한 구멍”으로 그것도 “모자이크”에 가려진 채로 그것은 나타났다.부서진 몸을 이끌고 나타난 벤야민의 “역사의 천사”처럼 자신의 가난함을 최대치로 드러내면서,이 타원형 감옥의 외부로부터 자유의 기억이 도래하는 것이다.그것은 “자유라는 이름의 형벌”(사르트르)일지도 모르지만,그 형벌은 해방의 약속과 함께 하는 형벌이다. 3.어쩌면 위험하기도 한 미래 이 스크린을 바라보는 우리들과 스크린 속의 괴물들은 서로를 되비추는 거울에 불과하다.‘엽기전’은 결국 한창림의 실패담이 우리 자신의 것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어쩌면 우리들 관객조차도 스크린의 표면에 붙들린 디지털 화소조합에 불과할지도 모른다.“인간은 누구도 예외없이,아직 자기 자신이 되지 못했다”는 아도르노의 말처럼,우리는 하나이면서도 여럿인,전지구적 자본주의·수컷성의 경쟁 이념·패악의 은폐전략인 가족로망스·안전처리된 저항의 초월적 가상들에 중독된 채로,우리 자신의 근본적 존재구속성을 망각한 것인지 모른다.이 중독성은 그 바깥을 사유하지 못한다.‘엽기전’은 바로 이 가상의 세계에서 가상을 껴안으며,동시에 가상의 근본적 존재구속성을 뛰어넘으려는,우리들 모험의 기록이다.동시대의 소비적 재현들이 보여주는 무분별한 질주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청신하게 환기시키는 것,이 거대한 감옥에 길들지 않은 ‘고통스러운 자유의 감각’을 회복하는 것.이것은 ‘엽기전’이 ‘재현의 재현’을 전략적 준거로 삼으면서 얻어진 결론이며,어떠한 질서에도 구속되지 않으려는 간고한 투쟁의 결실이다. 그러나 ‘목화밭 엽기전’이 도달한 자유의 가능성은 매우 아슬아슬한 역학 장(場) 속에 놓여 있다.그는 알레고리적 재현 전략이 갖고 있는 근본적 허무감과 형이상학적 환원주의를 힘들게 벗어나면서,90년대의 평균서사를 딛고 새로운 미학적 가능성 중 하나를 열었다.그러나 또 다른의 수준의 위험 앞에 자신을 노출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해체와 전도의 전략은 얼마든지 동어반복에 떨어질 수 있다.이제는 자신의 전제들조차 재구성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그가 출발한 전제들에 동의하지 않은 채로는 텍스트를 거의 읽을 수 없을 만큼 부자유스럽다.특히 그의 유난한 반인간주의가 그렇다.그가 그려내는 인간의 모습은 모두 알 수 없는 장력에 조종당하는 꼭두각시들이다.이것은 주체를 구조의 효과로 소급시키는,전형적인 구조주의식 사유법이다.반인간주의야말로 진정한 인간주의의 전제조건일 테지만,그것은 주장되고 선언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그것은 반인간주의가 지니는 미학주의적 성격 때문이다.계몽이성을 독단으로 몰아붙이면서,그 자리에 광기와 착란을 대신 들어앉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물론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숨쉬고 있는 n개의 가능성들을 하나하나 살려내는 가운데,그것은 소멸해갈 것이다.미래를준비할 시간은 아직 필요하지 않은가. 지면 관계상 당선자의 양해 아래 원고 일부를 줄였습니다. ■당선 소감 먼저 심사를 맡아주신 두 분 선생님께 감사드린다.그 분들은 내게 조그마한 오솔길 하나를 터 주셨다.다만 성실한 보행객이 되지 못할까 염려스러울 뿐이다.당선 소식을 접했을 때 당황했다.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세상을 보는 눈과 귀는 여태 어둡고 그것과 반드시 겹쳐져 있을 문학도,몸과 마음에서 아직 멀게만 느껴진다.그러나 이왕 엎질러진 물이니 헐거운 공부와 삶을 조금씩이라도 채워나가야 할 것이다.그것이 이 무책임을 모면하는 유일한 길이겠다. 이런 자리에서 문학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일은 내 깜냥도 깜냥이려니와 풋내기로서 주제넘은 짓이다.그러나 한 시대와 사회 전체가 참여하는 역동적 협업으로서의 ‘문학’이라는,큰 그림 하나는 잊지 않으려고 한다.이 협동작업의 작은 일원으로 미력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 돌이켜 보면 내게는 스승 아닌 분이 없다.은사님들은 물론이고 선후배 친구들,가족들까지도 모두 스승이었다.나는 그저 한 장의 백지가 된 것처럼 그들의 말없는 가르침에 어두운 귀를 기울였던 것뿐이다.그들의 빛나는 존재감이 나를 이리로 오게 했다.그래서 오늘의 이 고마운 자리는 영광이 아니라 갚지 못할 부채다.이 또한 잊지 않으려고 한다. 우선 고생하시는 부모님과 하나뿐인 내 여동생 경희에게 공을 돌린다.모자란 글줄이나마 더듬더듬 쓰는 법을 가르쳐준 인하대 국문과의 선생님들,선후배 동료 분들께는 소주라도 한 잔 올려야 할 것이다.학부 시절을 내내 함께 했던 청하 동인들에게는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지 아득하다.그리고 어려울 때마다 마음 뉠 곳을 마련해준 나의 든든한 후원자 금희에게는 사랑과 고마움을 함께 전해야 하리라. 약력 1975년 대구 출생. 인하대 국문과 대학원 재학 ■심사평 강정구씨의 ‘세상을 떠도는 목어들’은 차창룡의 시 세계를 풍자의 범주 안에 넣고 차창룡만의 특별한 풍자의 양식을 찾아내려고 애를 쓴 글이다.텍스트의 고유한 경험을 최대한 되살리는 방식으로 문학작품을 이해하는 것이 평론의 길이라면 강정구씨는 평론의 ABC를 안다고 할 수 있다.다만 문학의 고유한 경험은 무엇보다도 언어의 경험이지 주제의 그것이 아니다.주제를 가지고 경험의 세계를 휘젓다 보니 글이 겅중거리고 성길 수밖에 없다.김용하씨의 ‘비윤리적 세계의 재현과 윤리적 풍경의 기원’은 시적 직관을 통해 순간적으로 구현되는 창조적 공간으로서 시를 이해하고 그 창조적 공간에서만 가능한 인간 삶의 근원적인 조화의 경험을 읽겠다는 의욕이 두드러진 글이다.그러나 하나의 형식에 끈덕지게 매달렸다는 것이 개성의 표지가 될 수도 있지만,글을 도식적으로 만드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이원동씨의 ‘떠도는 가족,주변부 삶을 보듬는 결곡한 서사’는 공선옥의 소설을 길동무처럼 따라 읽으면서 공선옥 소설의 존재의의를 설득력있게 부각시킨 글이다.그럼으로써 이 글은 독자에게는 개안을,작가에게는 위안을,그리고 글쓴 이 자신에게는 텍스트와 더불어 살아보는 경험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텍스트에 충실한 것이 얼마나 큰 미덕일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글이다. 강경석씨의 ‘타원형 감옥의 외부’는 백민석 소설의 그로테스크한 세계를 통해 현대 사회의 문제와 미학적 경험 사이의 상관관계를 폭넓게 조망한 글이다.생의 적출물의 의미,폭력적 충동의 존재 형식,고딕의 정치적 무의식,가족 이념의 내파,세계의 남성적 지배와 타원형 감옥 구조,디지털 화소조합으로서의 삶의 경험 등등 현대성의 핵심적인 주제들을 망라하는 한편 문학의 글쓰기가 그 주제들과 동일체를 이루면서 또한 해체·변형을 행하는 가운데 도출되는 미학적 경험의 굴곡을 잘 보여주고 있다.당선을 축하하며 정진을 바란다. 김인환 정과리
  • 책꽂이

    ●고대 세계의 70가지 미스터리(브라이언 M 페이건 엮음,남경태 옮김,오늘의책 펴냄) 에덴동산은 실제로 있었을까.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의 전설은 사실에 입각한 것일까.이스라엘의 사라진 10지파는 어떻게 됐을까.아틀란티스는 사실인가 허구인가.로마의 사라진 군단들은 어떻게 됐을까.이집트인은 아프리카 흑인이었을까.28명의 각 분야 전문가가 이러한 의문들에 답한다.3만원. ●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진중권 지음,아트북스 펴냄) 벤야민·하이데거·아도르노·데리다·푸코·들뢰즈·리오타르·보드리야르 등 8명의 미학이론을 풀이.‘미학전도사’인 저자는 대상과 언어가 일치했던 ‘아담 언어’의 타락이 역사와 개념을 촉발시켰다는 벤야민의 해석에서 출발,보드리야르의 역사의 종언으로 끝을 맺는다.저자는 숭고의 미학을 시뮬라크르(원본과의 일치가 중요하지 않은 복제)미학과 함께 현대미학의 핵심적인 개념으로 꼽는다.1만 2000원. ●우리 역사문화의 갈래를 찾아서-안동문화권(국민대 국사학과 엮음,역사공간 펴냄) 안동을 중심으로 보현산과 팔공산,퇴계학의 거점인 영덕 인량리,상주 우산리,군위 부계리 등을 하나의 문화권으로 묶어 다룬 역사문화 답사서.‘안동문화권’이라 명명된 이 지역은 조선시대 안동도호부 관할 지역으로 근검절약을 강조하는 생활규범과 대의를 중시하는 유교적 정서 등 나름의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형성해 온 곳이다.1만5000원. ●신현준의 WORLD MUSIC(신현준 지음,웅진닷컴 펴냄) 레게에서 아프로비트까지 ‘월드 뮤직’의 지형도를 보여준다.애수 짙은 아일랜드의 켈틱음악을 다루며,서아프리카 연안의 제도 카부베르데의 블루스를 포르투갈의 식민통치의 맥락에서 설명한다.‘집시 오케스트라’와 트란실바니아에 뿌리를 둔 농민음악인 ‘탄카즈’로 유명한 헝가리 음악,아말리아 로드리게스로 대표되는 ‘파두’의 포르투갈 음악,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의 쿠바음악 등도 소개된다.1만 5000원. ●일본 근대독자의 성립(마에다 아이 지음,유은경·이원희 옮김,이룸 펴냄) 일본 근대문학 공간에서의 독자의 탄생과 출판 변천의 정경을 보여주는 책.일본 근대화를 알린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인의 독서생활은 대변혁을 맞았다.릿쿄대 교수를 지낸 저자는 변혁의 내용을 ‘획일적인 독서에서 다원적인 독서’‘공동체적인 독서에서 개인적인 독서’‘음독에서 묵독’ 등으로 요약한다.1만 5000원. ●이중섭,편지와 그림들(이중섭 지음,박재삼 옮김,다빈치 펴냄) “지금까지 나는 온갖 고생을 해왔소.우동과 간장으로 하루에 한끼 먹는 날과 요행 두끼 먹는 날도 있는,그런 생활이었소.지난 겨울에는 하루도 옷을 벗고 잘 수가 없었고 최상복 형이 갖다 준 개털 외투를 입은 채 매일 밤 새우잠이었소.” 화가 이중섭이 아내 이남덕(마사코)에게 절절한 그리움과 애절한 사랑을 담아보낸 편지들을 모았다.편지 왕래는 1952년 이중섭의 아내가 지독한 가난을 견디지 못해 두 아들과 일본의 친정으로 떠나게 되면서부터 시작됐다.1만 2000원. ●담배를 피우게 하라(프레스플랜 편집부 지음,한종수 엮음,다나기획 펴냄) 지난 96년 국민건강증진법 시행 이후 금연돌풍이 부는 현실을 개탄하며 흡연자유권,흡연환경권,애연가의 행복추구권 등 ‘흡연3권’을 주창.담배 소비자의 기본권 선언과 예절바른 담배문화의 정착을 통해 애연가 스스로 자구방안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담겼다.8800원.
  • 피스컵 ‘킬러전쟁’/에인트호벤 케즈만·뮌헨 라우트·성남 샤샤·LA 존스·나시오날 알베스…

    “최고의 골잡이는 누구냐.” 5개 대륙 8개 클럽팀이 참가한 가운데 15일 개막하는 2003피스컵코리아축구대회에서는 세계적인 ‘킬러’들이 치열한 득점 경쟁을 벌일 전망이다.가장 돋보이는 득점왕 후보로는 네덜란드 PSV에인트호벤의 마테야 케즈만과 독일 1860뮌헨의 벤야민 라우트.홈팀 성남의 샤샤,미국 LA 갤럭시의 코비 존스,우루과이 나시오날의 가브리엘 알베스,프랑스 올림피크 리옹의 ‘삼바특급’ 주닝요 등도 만만치 않다. 네덜란드 ‘올해의 선수상’을 거머쥔 케즈만은 정규리그 33경기에서 35골을 넣은 특급 스트라이커.179㎝·72㎏의 체격에 스피드와 위치 선정이 탁월하고 1대1 능력도 뛰어나다.특히 위치를 가리지 않고 골을 터뜨리는 결정력이 돋보인다. 독일대표팀의 차세대 스트라이커로 꼽히는 라우트 역시 폭발력에서 케즈만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팀 전력이 약해 지난 시즌 33경기에서 13골을 잡는 데 그쳤으나 지난해 12월 처음으로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뛴 독일 국가대표와 분데스리가 외국인 올스타간의 경기에서 환상적인 오버헤드킥을 선보이며 두 골을 잡아내 ‘스타 탄생’을 알렸다. 중앙뿐 아니라 좌우를 넘나드는 폭넓은 플레이로 골 찬스를 엮어내는 능력도 상당히 뛰어나다. 샤샤는 외국인 선수로 한국프로축구 K-리그 정규리그에서 첫 100호골을 돌파한 역대 최고 용병.투톱을 이루는 2000년 득점왕 김도훈과 함께 화려한 콤비플레이로 안방에서 득점왕 등극을 꿈꾸고 있다. 월드컵에 3회 연속 출장한 LA의 존스는 지난 시즌 19경기에 출전,3골 13어시스트로 팀의 공격을 지휘하고 있는 대표적인 공격형 미드필더.A매치 통산 159경기 출전으로 미국 최다기록을 갖고 있으며 94·98년에 이어 지난해 월드컵에도 미국을 8강에 올려놓은 대들보다. 우루과이 리그에서 9골을 작렬시켜 소속팀을 정상으로 이끈 나시오날의 알베스와 리옹의 투톱으로 나서 13골을 뽑은 주닝요도 득점왕 후보에서 빼놓을 수 없다. 이밖에 12골을 터뜨린 리옹의 노장 스트라이커 안데르손,지난해 남아공리그에서 13골로 팀 최다득점을 올린 데이비드 라데베도 복병으로 꼽힌다. 곽영완기자
  • 월드컵 스타 그들이 돌아온다

    15일 개막하는 대륙별 클럽 대항전인 피스컵코리아축구대회는 지난해 한·일월드컵 이후 대규모 국제대회에 목말랐던 축구팬들의 갈증을 풀어줄 전망이다.세계 클럽대항전 사상 최고액인 200만달러의 우승상금이 걸린 만큼 출전 8개팀 모두 우승을 장담하고 있다.전문가들은 A조는 성남 등 비유럽 3개팀이 프랑스의 올림피크 리옹을 추격하는 양상을 띨 것으로 점친다.B조는 에인트호벤과 국제대회에 유독 강한 나시오날의 대결구도로 압축될 전망이다. 곽영완기자 kwyoung@ ●성남 지난 1993년부터 K-리그 3회 연속 정상에 올랐고 95년 아시아클럽컵,96년 아프로-아시아 클럽컵을 비롯해 아시아 슈퍼컵까지 1위를 휩쓸며 그랜드슬램을 달성,아시아축구연맹(AFC)으로부터 최고클럽으로 선정되기도 한 ‘한국의 레알 마드리드’.이번 대회를 앞두고 60여억원을 들여 윤정환과 러시아 용병 데니스,김도훈 이기형 등을 영입했다.특히 2001년 입단과 동시에 타고난 순발력과 슛감각으로 13골을 터뜨리며 성남의 K-리그 2연패를 이끈 주역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리네의 활약이 기대된다. ●리옹 지난 50년 창단한 리옹은 89년 1부리그로 승격된 뒤 중·상위권을 유지하다 01∼02시즌 정상을 차지하는 감격을 맛봤다.올 시즌에도 물고 물리는 접전 끝에 19승11무8패(승점 68)를 기록,리그 2연패에 성공했다.투톱으로 호흡을 맞추는 노장 스트라이커 소니 안데르손(12골)과 프랑스 대표팀의 시드네 고부(7골)는 물론 조커로 나오는 페기 뤼앵뒬라까지 11골을 기록할 정도로 공격진이 막강하다.여기에 ‘차세대 지단’으로 불리는 왼쪽 날개 에릭 카리에르(6골)는 화려한 돌파가 돋보이는 테크니션. ●베시크타스 터키 최초의 스포츠 클럽으로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클럽 창단 100주년을 맞는 올시즌 26승7무1패의 경이적인 성적으로 8년 만에 우승하는 등 통산 10차례 1부리그 정상을 차지했다.브라질 출신의 자고와 호나우두가 버티고 있는 수비력이 막강하다.올시즌 정규리그 34경기에서 21실점(게임당 0.62실점)에 그칠 정도로 물샐 틈 없는 방어망을 구축하고 있다.공격은 2002월드컵 3위의 주역인 일한 만시즈와 타이푸루 하부트추,루마니아 출신의 다니엘 가브리엘 판쿠가 주도한다. ●카이저 치프스 지난 7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레나론을 연고지로 창단된 아프리카의 명문.국내 리그에서만 9차례나 정상에 올랐고,2000년에는 남아공 팀으로는 처음으로 아프리카 클럽 챔피언격인 위너스컵(만델라컵)대회 우승을 차지했다.지난 시즌에는 6위를 차지했지만 득점 순위는 3위(42골)에 올랐을 정도로 공격력이 돋보인다.시즌 13골을 기록한 다비드 라데베와 8골을 기록한 카밤바 무사사,미드필더 존 모슈가 공격진을 이끈다.이들 ‘삼각편대’는 이번 대회에도 그대로 출전해 공격축구를 선보일 예정이다. ●에인트호벤 우승후보로 꼽히는 에인트호벤은 거스 히딩크 전 한국대표팀 사령탑을 중심으로 이영표와 박지성이 뛰고 있어 많은 인기몰이를 할 전망.1913년 창단돼 지금까지 네덜란드 리그를 17번 제패했다.올시즌 87득점(3위) 20실점(1위)의 기록이 말해주듯 공수가 거의 완벽한 팀.최전방의 마테야 케즈만은 올시즌 팀 득점(87골)의 40%인 35골을 몰아넣어 득점왕에 오른 천부적인 골잡이며,그와호흡을 맞추는 헤셀링크도 191㎝의 장신을 이용한 고공 플레이가 위력적이다.박지성,렘코 반 데르 스하프 등 백업멤버도 풍부하다. ●나시오날 1899년 창단된 중남미 최초의 클럽팀으로 우루과이 리그에서 29회나 우승했다.2000시즌부터 3년 연속 정상에 올랐고 올 시즌도 선두를 달려 4연패 달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골키퍼 구스타보 무누아,수비수 아레한드로 렘보,구스타보 멘데스,미드필더 파비안 오닐,공격수 오라시오 페랄타 등 5명의 월드컵 멤버가 포진.무누아와 렘보,멘데스가 이끄는 탄탄한 수비가 강점.페랄타와 오닐,아브레우가 이끄는 공격진은 현란한 개인기와 빠른 스피드를 갖춰 단연 우루과이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뮌헨 팀명에서 알 수 있듯이 1860년에 창단돼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리그 18회 우승을 차지한 같은 연고지의 바이에른 뮌헨 그늘에 가려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지만 지난 시즌에도 10위(12승9무13패)를 차지하는 등 꾸준히 중위권 성적을 유지하고 있다.전통적으로 공격 위주의 축구를 구사하며,독일축구의 차세대 스트라이커 벤야민 라우트와 지난 시즌 14골(5어시스트)로 득점 6위에 오른 마르쿠스 슈로트가 팀을 이끌고 있다.이들 투톱이 얼마나 위력을 떨칠지 주목된다. ●LA 갤럭시 94미국월드컵의 영향으로 그해 6월 창단했으며,96년 미국 메이저프로축구(MLS) 원년 멤버로 서부 최고의 명문클럽이다.96메이저프로축구 원년을 비롯,99·2001년 준우승에 그쳤으나 3전4기 끝에 2002년 정상에 등극하는 기쁨을 맛봤다.‘영원한 리베로’ 홍명보가 이적,제2의 축구인생을 시작하면서 한국인들에게 친숙한 팀이다.지난해 월드컵에 미국대표로 출전한 미드필더 코비 존스를 비롯,알렉시 랄라스,디내 클래프 등 스타들과 미드필더 사이먼 엘리엇(뉴질랜드) 등이 주전이다.
  • ‘걷기의 역사’ 思惟를 따라 걸어본 적 있나요

    장 자크 루소는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했다.“나는 걸을 때만 명상에 잠길 수 있다.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나의 마음은 언제나 나의 다리와 함께 작동한다.” 걷기를 처음으로 신성한 이데올로기로 만든 루소에게 걷기는 곧 존재 방식이었다.홀로 산책하면서 그는 사유와 몽상에 잠긴 채 살아갈 수 있었고,자족적일 수 있었으며,자기를 배반한 것으로 여긴 세상보다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다.걷기와 사유에 대해 할 말이 많았던 또 한 명의 철학자는 쇠렌 키에르케고르다.“지금 거리 저 아래에서 풍각쟁이의 노랫소리가 들린다.멋지다.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우연하고 사소한 것들이다.”라고 한 그는 일기에서 모든 작품을 걸으면서 구상한다고 고백했다. 미국의 문화비평가이자 환경운동가인 레베카 솔닛이 쓴 ‘걷기의 역사’(김정아 옮김,민음사 펴냄)는 사유의 방편이자 영감의 원천인 걷기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다룬 인문교양서다.저자는 걷기와 생각하기,걷기와 문화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아내며 속도 위주의 현대인에게 걸을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걷기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보다 오래됐다.하지만 걷기를 의도적인 문화적 행위로 본다면 그 역사는 불과 몇 세기 전 유럽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저자는 헤겔이 걸었다는 하이델베르크의 필로소펜베크,칸트가 매일 산책했던 쾨니히스베르크의 필로소펜담,키에르케고르가 언급한 바 있는 코펜하겐의 ‘철학자의 길’ 등을 따라가며 걷기와 철학의 관계를 짚어나간다. 걷는 행위는 단순한 이동수단에서 산책이란 문화적 개념으로 발전했다.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걷기를 즐겼던 인물은 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걷기는 그의 삶과 예술의 중심이었으며 세상을 대하는 방식이자 시를 쓰는 방편이었다.그의 시는 대부분 길을 거닐며 친구나 스스로에게 큰 소리로 읊으면서 지은 것이란 얘기도 있다.워즈워스 이후 걷기는 19세기 낭만주의자들을 규정하는 징표가 됐다.그러나 18세기까지만 해도 걸어서 여행하는 사람은 야만인이나 기인 취급을 받았다. 걷기는 종종 내면의 투쟁을 상징적 행동으로 옮기는 방식이 되기도 했다.소금을 만들어 영국의 세제법을 이겨낸 간디의 ‘소금행진’이나 ‘마틴 루터 킹 암살 30주년 추모행진’,프란체스코 수도회가 이끈 ‘네바다 사막체험’,핵폐기물 처리장 건설을 반대하는 인디언 부족의 ‘영혼의 달리기 대회’,농민조직을 결성한 케사르 차베스의 탄생을 기린 ‘정의를 위한 행진’ 등에서 보듯 걷기는 다양한 문화적·사회적·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20세기 초는 걷기 클럽의 황금기였다.미국의 ‘시에라 클럽’은 생태계를 파괴하는 국가정책에 저항했고,오스트리아의 ‘자연의 친구들’은 귀족의 공유지 독점에 반대했다.그리고 중세의 방랑학자와 음유시인을 모방한 독일의 ‘소년 방랑 철새회’는 권위주의에 저항했고 포크송을 부활시켰다.정치색에 상관없이 걷기를 즐겼던 이들은 세상을 담장 없는 정원으로 만들었다.갈 곳을 잃은 사람들에게 사회적 결속감을,산업화로 인한 비인간적 흐름에 저항력을,사회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유토피아적 이념을 제공했다.이렇듯 자연에 대한 열정과 맞물린 걷기는 사회적 해방과 긴밀하게 연관돼 있다. 이 책은 각 도시를대표하는 작가들의 삶을 보여준다.그리고 도시의 역사와 걷기의 역사를 나란히 펼친다.19세기 영국엔 무기력한 군중이 넘쳐났다.당시의 도시 보행 문제를 철저하게 파헤친 작가가 찰스 디킨슨이다.뉴욕을 남성적인 도시로 간주하는 저자는 휘트먼,긴즈버그,오하라,보즈나로빅츠 같은 게이 시인들이 뉴욕 거리를 찬양한 것을 자연스러운 일로 본다.센트럴 파크엔 배회하는 길이 있었다.이곳은 게이들의 배회 장소로 ‘결실의 들판’이란 별명이 붙었다. 파리는 위대한 보행자들의 도시다.파리를 ‘19세기의 수도’라고 부른 발터 벤야민은 ‘만보객(漫步客)’을 학문의 주제로 삼았다.‘파리를 거니는 예민하고 고독한 남자’의 이미지를 풍기는 만보객의 특징은 여유.파리에선 거북을 데리고 산책하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다.1920년대 말 파리에 정착한 벤야민은 자신이 좋아한 문학작품의 한 조연처럼 일생의 대부분을 떠돌며 살았다.위대한 도시의 방랑가였다. 여성의 걷기는 사회적으로 적잖은 제약을 받았다.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은 그 정황을 생생히 보여준다.저자는 여성이 걷기 위해 치러야 했던 숱한 희생을 보여준다. 19세기 말 영국 여성들은 밤에 부적절한 거리를 걸어다녔다는 이유만으로 창녀로 몰려 경찰서에서 ‘의학검사’를 받았다.거부하면 감옥에 갇혔으며 검사 결과 처녀인 경우에만 풀려났다.당시 프랑스에서도 경찰은 노동계급의 여성을 임의로 체포할 수 있었다.체포된 여성들은 대부분 유죄판결을 받아 생라자르 감옥에서 혹사당하거나,매춘부로 등록해야만 풀려날 수 있었다. 현대에 들어서도 사정은 크게 달라진 게 없다.미국 시인 실비아 플래스는 열아홉 살 때의 일기에 “여성으로 태어난 것,그것이 나의 끔찍한 비극”이라고 적고 있다.저자는 제인 오스틴에서 버지니아 울프,실비아 플래스까지 여성 작가들이 남성작가들과 달리 협소한 주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같은 여성의 제한된 걷기와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오늘날 ‘걷기의 상실’을 안타까워한다.그저 러닝 머신 위에서 시시포스처럼 똑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현대의 군상.저자는 그 무기력한 ‘박제인간’의 모습을 떠올리며 다시금 걷기의 활력을 회복하자고 호소한다.1만 5000원. 김종면기자 jmkim@
  • 박홍규 영남대교수 ‘아나키즘과 예술’ 주제발표/“아나키즘은 현대예술의 밑거름”

    문학 등 예술에서 아나키즘은 어떤 정체성과 표현양식을 갖는가. ‘우리 사회의 전위적이고 다양성을 함축하는 변화의 중심에 있는 사상’이라는 점에서 최근 들어 아나키즘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는 가운데 한국아나키즘학회(회장 김성국 부산대 교수)가 주최한 ‘2002 가을 학술세미나’가 최근 동국대에서 열렸다. 세미나에서 박홍규 영남대 교수는 ‘아나키즘과 예술’이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노래(팝)와 문학에서의 아나키즘을 소개하고 “아나키즘은 현대예술의 가장 특징적인 측면임에도 주목받지 못했다.”면서 “아나키즘으로 현대 예술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지만,아나키즘을 빼고 현대예술을 말하는 것도 부분적일 뿐”이라고 규정했다.그의 발표 요지를 정리했다. 존 레넌은 섹스 피스톨스나 클래시,첨바왐바처럼 아나키스트를 자처하지는 않았지만,그가 부른 ‘이매진(Imagine)'은 알려진 것처럼 단순한 사랑 노래가 아니라 자본주의를 부정한 명백한 아나키즘의 노래이다.그는 노래에서 ‘국가’와 ‘사유 재산’‘종교’를 부정하고 ‘모든 사람에 의한 세계의 공유’를 주장했다.‘민중에게 권력을(Power to People)’이라는 노래에서는 “우리가 믿는 민주주의는 민중이 주인 돼서 스스로 다스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1970년대 영국의 록그룹 섹스 피스톨스는 권위의 상징이라는 영국 여왕과 왕실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고 비아냥거리는가 하면,기성 제도권에 대해서는 ‘문제는 우리가 아니라 우리에게 일자리 하나 주지 못하는 너희’라고 성토했다.‘난 반(反)기독교도 아나키스트,내가 원하는 게 뭔진 모르지만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는 알아.’하는 식이다.인종차별과 자본주의의 본산인 미국에 대해 내놓고 저주와 모욕을 쏟아부은 펑크 록그룹 클래시도 있다.이들은 “난 미국이 지긋지긋하다.”고 반미감정을 노래했다. 8명의 혼성 그룹 첨바왐바는 결성 당시부터 아나키즘을 표방해 주목받았다.이들은 첫 앨범‘혁명(Revolution)’에서 “언제나 혁명으로 시작해서 언제나 자본주의로 끝나고,곤봉에 의해 묵살되며 이권 야합으로 팔려 나간다.”라고 노래하는 등 자본주의 체제를 극단적으로 냉소했다. 문학에서의 아나키즘은 현대 문명을 거부하는 아방가르드로 대표된다.톨스토이를 비롯해 보들레르,니체,에밀 졸라,제임스 조이스,프란츠 카프카,알베르 카뮈,조지 오웰,발터 벤야민,도스토예프스키와 랭보 등이 아나키즘 성향을 보였거나 초현실주의를 통해 아나키즘을 실현한 문학인들이다. 톨스토이는 1856년에 발표된 ‘지주의 아침’을 통해 사유재산권을 비판했으며,‘코삭’에서는 자연 속 노동을 문명생활에 대비해 문명의 비인간화를 성토했다.그런가 하면 ‘전쟁과 평화’에서는 카라타에프를 통해 민중적 기독교사상을 역설하기도 했다.카프카도 ‘변신’에서 인간성 타락과 이성의 말살을 경고했으며,‘아메리카’에서는 권력자와 하층민을 대비시켜 하층민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등 아나키즘적 성향을 드러냈다. 또 카뮈는 ‘페스트’에서 종교를 노골적으로 경멸했으며,‘정의의 사람들’에서는 아나키스트 테러리스트를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규정하는가 하면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테러리스트 입장을 적극 수용하는 면모를 보였다.베른하르트는 더욱 극단적인 아나키스트였다.그는 희곡 ‘영웅광장’에서 “국가는 악취를 풍기는 하수구이자 거대한 똥더미”라고 무정부주의적 발상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결국 아나키즘 시각에서 ‘국가’‘종교’‘사유재산’은 인간을 노예화하는 족쇄일 뿐이다.국가는 강제·착취·파괴적이다.또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게 하는 자본주의,권력과 결탁하거나 가부장적 권위의 상징으로 인간에게 체념을 강요하는 교회도 부정의 대상이다. 김성국 교수는 “아나키즘의 최고 가치는 개인적 자유와 사회적 해방이며,이를 가로막는 모든 기성 권위에 대한 저항과 도전을 행동으로 실천하고자 했다.”면서 “주류·지배문화에 저항하는 하위문화의 조직가로서 아나키스트들은 문화와 정치의 역동성을 극적으로 결합한 선구자들이었다.”고 말했다. 심재억기자 jeshim@
  • 책/ 폭력과 상스러움

    ‘지식게릴라’,혹은 ‘삐딱이’(아웃사이더)라는 신진지식인그룹의 중심에 서서 혈기방장하면서도 재기 넘치는글쓰기로 우리 사회의 극우 파시즘을 공격해 온 진중권이사회평론서 ‘폭력과 상스러움’(푸른숲)을 냈다.90년대베를린 유학시절,한국에서 벌어진 정치적,사회적 의제에대해 쓴 글들을 비롯해 ‘폭력’‘자유’‘공동체’‘성(性),‘지식인’‘정체성’‘민족’등을 주제로 한 담론들을 모았다. 책에선 우선,현대의 철학적 사유에 대한 그의 폭넓은 독해가 눈길을 끈다.가령 자신이 ‘잡글’을 쓰는 이유를 해명하는 ‘정의와 힘’이란 글을 보자.그는 하나의 담론은현실에서 생성되는 힘들의 관계의 표현이며,지배적인 담론이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이용하는 것은 대중들사이에 오가는 세론,혹은 대중들의 몸 속 깊숙이 주입돼있는 습속(아비투스)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이념비판은 담론,세론,습속 이 세가지 영역을 모두 포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그는 이 부분에서 하버마스의 소통이론과 푸코의권력이론을 비교 분석해 보이고 하이데거와 부르디외를 끌어온다.이어 그는 ‘민심’ 혹은 ‘여론’이란 이름으로악용되곤 하는 대중의 아비투스를 부수기 위해서는 대중과 함께 웃으며 과거와 결별할 수 있는 놀이적,충격적 글쓰기가 필요하다며 들뢰즈의 놀이 이론과 벤야민의 촉각에관한 이론을 동원하는 것이다. 다음으론,철학적 사유들을 현실에 연결시키는 적용력과상상력이 주목할 만하다.그는 “학문이 살아 있으려면 어느 심급에선 생동하는 현실의 운동과 매치되어야 한다.”며 실천적 학문을 자신의 소명으로 천명한다.그가 주요 실천작업으로 삼은 것은 ‘철학적 문제는 문법적 착각의 문제’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명제.그는 이를 이데올로기에 확장해 적용시키며 ‘말의 오용’을 공격하는 글들을 쓴다. ‘이문열과 젖소부인의 관계’는 이런 계열의 글. 그의 글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이념적 그림은 정치적 국가주의,경제적 자유지상주의,문화적보수주의의 세 축으로 이뤄져 있다.그는 이런 거시적 이념의 좌표가 우리 사회의 미세단위에까지 반복적으로 무수히 작용하고 있다면서 레드 컴플렉스,패거리정신,노조탄압,언론조작,소수자 인권침해,부당한 국가권력 행사 등의 폭력적 상황을 고발한다. 결국 그가 이런 작업을 통해 지향하는 사회는 ‘애국심’과 같은 텅 빈 관념이 아니라 분배정의,사회보장,약자및소수자에 대한 보호등 실질적인 사회적 연대를 통해 통합을 이루는 공동체로의 길이다.그는 개인 또한 집단주의에서 해방돼 개성과 주체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사회적 책임감과 연대의식을 가지는 개인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개성의 발로일까.그의 글들은 벤야민 등 철학자의 인용으로 시작돼 ‘문학적 몽타주’형태를 띠고 있고 ‘철학적 광대’를 자처한 그의 글쓰기는 웃음과 놀이,조롱으로 점철돼 있다.책제목 ‘폭력과 상스러움’은 르네 지라르의 ‘폭력과 성스러움’을 비틀었다.1만2000원. 신연숙기자yshin@
  • [대한광장] 길거리에 나부끼는 ‘기저귀’

    독일의 비평가 발터 벤야민은 ‘결코 쓰여지지 않은’ 파리의 거리에서 근대라는 한 시대의 정신을 읽었다.그러나서울의 거리에는 이미 쓰여진 게 너무 많다.도시 전체가 글자로 뒤덮여 읽을 게 너무나 많다.이미 건물 전체가 글자로뒤덮여 있고, 간판을 달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건물에는 위에서 아래로 대형 플래카드가 드리워져 있다.건물에서 건물로 시선을 옮길 때 혹시 눈이 심심할까봐 길의 양편을 가로질러 예외 없이 글자를 다닥다닥 박은 플래카드가 줄줄이걸려 있다.그리하여 길을 걸을 때 우리는 양 옆으로만이 아니라 위로도 글자를 보아야 한다. 얼마 전부터는 드디어 바닥에도 광고 스티커가 다닥다닥붙기 시작하더니 어제 보니 바닥에 영상을 쏴대는 최신 광고 기술까지 도입됐다.이제 3차원 공간 전체가 글자로 도배된 것이다.한국 사람이 독서를 안 하는 것은 평소에 읽을거리가 너무나 많기 때문일 게다.시내에 한번 나갔다 오면도대체 글자라는 게 보기 싫어진다. 우리 아파트 옆에는 짓다만 아파트가 골격만 남긴 채 휑하니 방치되어 있다.건설업자가 부도를 내는 바람에 공사가중단됐다고 한다.그 건물에는 위에서 아래로 족히 50m는 되어 보이는 기다란 플래카드가 걸려 있는데,민중의 생존권이걸려 있어서 그런지 어조가 살벌하다.‘우리는 죽음을 불사한다.’ 물론 그 딱한 처지야 이해가 가지만 그렇게 험악한 말을써붙인다고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까? 저기 길 건너편의 아파트에도 어김없이 대형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근린공원약속하고 상가가 웬 말이냐.’ 그나마 환경권을 주장하니가상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바로 옆에 걸린 플래카드가 이들의 속셈을 폭로한다.‘김포시청은 보상하라.’ 후쿠야마의말대로 우리 사회는 ‘저신뢰사회’인 모양이다.사회적 약속이 제대로 지켜졌다면 이 글자들이 공적인 공간에 배치되는 일은 없을 테니까.나를 가장 절망시킨 플래카드는 제주도의 어느 경치 좋은 마을에서 본 것이다.‘지역 개발 가로막는 환경단체 각성하라.’ ‘慶 대형 헤어숍 개업 祝’ ‘慶 태권도장 개장 祝’ ‘慶 피아노학원 개원 祝’입주를 앞둔 건물에 주렁주렁 걸려있다. 정말 황당하다.아니,가게는 자기들이 내는데 왜 아무이해관계 없는 우리가 그걸 더불어 경축해야 하나?‘대박터집니다.’ 여기저기 주유소에 걸려 있는 플래카드다.이표현을 볼 때마다 나는 흥부의 박처럼 생긴 주유소의 가스탱크가 하얀 연기와 함께‘펑’하고 폭발하는 장면을 연상한다.그밖에 기가 막힌 플래카드들을 많이 보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황당한 플래카드는 공항에서 내가 사는 김포로들어가는 길에서 본 것이다.‘전선을 표적 삼아 사격을 하지 맙시다.’ 누군가 전선에 공기총을 쏴대는 모양이다. 세상에,‘전선’이라는 낱말과‘사격’이라는 낱말이 결합되는 상황이 존재할 수 있다니.이 초현실주의적 상황이 벌어지는 이상한 나라.조국 대한민국이다. 정치적 주장을 담은 것들,사회적 요구를 담은 것들,경제적이권을 주장하는 것들.온갖 플래카드가 길거리에 난무한다. ‘…하라’ ‘…말라’는 명령형 플래카드는 그 존재로써우리 사회에서 계급·계층간의 의사 소통과 물질적 소통이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증명한다.물질적 욕구의 충돌이합리적으로 가공되지 못하면 이렇게 적나라한 감정을 담은글자가 되어 거리로 장외투쟁에 나서야 하는 것이다. ‘…합시다’ ‘…맙시다’라는 청유형으로 질서 의식을고취하는 플래카드는 우리 시민사회의 에토스가 아직 초등학교 어린이 수준에 있음을 폭로한다.그리고 ‘축하합니다’ ‘터집니다’라는 서술형 플래카드는 우리 자본주의의공격성과 그 천민성을 자백한다.우리 사회의 온갖 치부를고백하는 말들이 낱낱이 플래카드에 적혀 오늘도 길거리마다 똥싼 아기의 덜 지워진 기저귀처럼 자랑스레 휘날린다. ■진 중 권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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