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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용철의 영화 만화경] ‘라임 라이프’

    [이용철의 영화 만화경] ‘라임 라이프’

    10대 소년 스콧은 어릴 적부터 친구인 애드리아나를 좋아한다. 속마음을 표현할 줄 모르는 순진한 소년에게, 선배가 취향인 소녀는 버거운 상대다. 스콧의 아빠인 미키(알렉 볼드윈·오른쪽)는 냉랭한 아내에 대한 불만을 엉뚱한 곳에서 푸는 남자다. 그는 애드리아나의 엄마 멜리사(신시아 닉슨·왼쪽)와 종종 밀회를 즐기는데, 그의 아내와 그녀의 남편은 물론 두 아이도 그들의 부정한 관계를 눈치채고 있다. 전쟁터에 나갔던 스콧의 형 지미가 잠시 귀향해 분위기가 바뀌는 듯하지만, 두 집안에 스민 눅눅한 기운은 가시질 않는다. 그 와중에 성인식을 맞이한 스코트는 어엿한 남자로 성장할 수 있을까. ‘라임라이프’는 1970년대의 끝자락인 1979년, 1980년 즈음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1979년은 마이클 치미노의 ‘디어 헌터’가 미국 아카데미상을 휩쓴 해다. ‘디어 헌터’는 베트남전 참전 전후로 사슴 사냥을 떠난 젊은이들을 통해 ‘신성한 제의, 순수한 시간, 우아한 전통, 신화적 이상’을 그린 시대의 만가다. 포스트 베트남전 시기의 미국을 다룬 ‘라임라이프’ 또한 사슴 사냥을 끌어온다. 그러나 ‘라임라이프’의 사슴 사냥에는 이상적인 의미가 없다. 제목의 ‘라임’은 사슴 진드기로부터 옮는 질병이다. 감독 데릭 마티니는 미국을 병든 삶이 이끄는 나라로 규정한다. 라임병에 걸려 집과 사회에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애드리아나의 아빠 찰리는 그 시대를 대표한다. 나머지 어른들도 속이 곪은 건 마찬가지다. 자유, 사랑, 혁명을 노래하며 1960년대를 통과했으나 시대의 패잔병으로 남은 그들은 아이들에게 역할 모델로 나서지 못한다. 가족 안에 파묻혀 시야를 넓히지 못하는 엄마는 신경증에 걸려 있고, 개인의 안락한 삶을 최고의 목표로 여기는 아빠는 돈벌이에 성공해 앞지르기만을 원한다. 그들은 아이들을 위해 힘겨운 현실을 돌파한다고 주장할 게다. 하지만 그들의 어긋난 몸동작이 거듭될수록 가족과 인간의 연결선이 지워질 뿐이다. 병든 자들이 지배하는 시간의 희생자는 아이들이다. 영웅이 존재하지 않는 시간에 아이들은 유사 영웅을 찾아 헤맨다. 나약한 소년은 전쟁터에서 돌아온 형이 힘센 영웅인 줄 착각하고, 어른에게 환멸을 느낀 소녀는 어른 흉내를 내는 남자 아이에게서 위안을 구한다. 그러나 가짜 영웅의 가면을 벗기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 없다. 형은 아버지의 폭력에 쉬 무너지며, 불량소년은 얄팍한 정체를 곧 드러내기 마련이다. 이제 아이들은 길을 잃어버린다. 성장영화로서 ‘라임라이프’의 맛은 알싸하다. 스콧이 거울 앞에 서서 ‘택시 드라이버’의 주인공처럼 구는 장면을 보자(‘택시 드라이버’를 연출한 마틴 스코세이지가 ‘라임라이프’를 제작했다). 감독은 시대의 불순함과 안타까움, 무력함을 그렇게 표현한다. ‘라임라이프’에 계속 삽입되는 예쁘고 단아한 ‘미니어처’ 장면은 잃어버린 이상향처럼 보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의 1980년대도 그런 모습으로 오지 않았던가. 같은 시대와 비슷한 주제를 다뤘다는 점에서 ‘라임라이프’는 이안의 ‘아이스 스톰’과 비교해 읽을 만한 작품이다. 신인 감독의 연출력을 이안의 그것에 댈 바는 아니지만, 마티니가 사랑스러운 연기 앙상블을 구사했음은 분명하다. 영화평론가
  • [경술국치 100년] “15년전 순종황제 날인 날조확인 순간 日人들도 탄식”

    [경술국치 100년] “15년전 순종황제 날인 날조확인 순간 日人들도 탄식”

    일이 벌어진 것은 1995년 어느 여름날. 일본 주오대(中央大) 강당에서 열린 을사늑약 90주년 학술대회장이었다. 연단에 자리한 수십명의 한·일 양국 학자들과 강당을 가득 메운 수백명의 일본인들은 호기심 어린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먼저 일본 통감부 직원 마에마 교사쿠가 남긴 글에서 따와 합자한 ‘척(坧)’자가 제시됐다. 조금 뒤 순종 황제가 일본과의 외교문서에 서명한 ‘척(坧)’자를 겹쳐 보였다. 딱 맞아떨어졌다. 대한제국 문서에 있는 순종 황제의 날인 서명이 실은 일본인 통감부 직원의 날조였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강당은 ‘아~’ 하는 낮고도 무거운 탄식으로 가득 찼다. 학술대회 뒷자리를 떠나는 학자와 청중은 물론 신문·방송 기자들까지 훌륭한 연구성과라며 악수를 청해 왔다. 건네받은 명함만 수백장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어느 신문이나 방송에서도 이 얘기를 찾아 볼 수 없었다. 경술국치 100년(29일)을 맞아 27일 서울 의주로 동북아역사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당시 기억을 이렇게 더듬었다. 이때의 주장은 차츰차츰 불어나 15년 만인 2010년 한·일병합 조약은 원천무효라는 ‘한·일 지식인 공동선언’을 끌어내기에 이르렀다. →어떻게 마에마 교사쿠의 필체라고 확신했습니까. -말하자면 ‘표적 수사’였어요(웃음). 근거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마에마가 쓰시마 출신으로 한국어에 능통했다는 겁니다. 또 하나는 그가 일본의 한국사 연구 1세대라는 점이었습니다. 마침 제가 학부 시절에 마에마가 남긴 서얼 제도나 훈민정음 연구논문을 많이 봤어요. 때문에 순종 황제의 위조된 친필 서명을 봤을 때 마에마 글씨 같다는 감이 확 오더라고요. 그래서 넌지시 마에마 유품을 볼 수 있는 곳이 어디냐고 일본인들에게 수소문해 보니 규슈대학에 있다는 거예요. 바로 날아가서 척(坧)자를 합자해 만들어본 뒤 비교했지요. 그 뒤 수사결과를 발표한 겁니다. →일본 반응에 변화가 있었나요. -주오대 때 반응이 워낙 열광적이었는데 다음날 언론보도가 하나도 없어서 이게 뭔가 했습니다. 나중에 들어 보니 우익 테러 같은 걸 두려워하고 있더군요. 그런데 요즘에 많이 바뀌었습니다. 지난해 10월 시민단체 초청으로 교토에 가서 설명했더니 모두들 “어떻게 이렇게 억지 조약을 맺을 수 있나. 부끄럽다.”고 하더군요 →그런 변화의 기미가 언제 감지됐나요. -2000년대 들어 8년 동안 을사늑약 원천무효 주장을 펼쳤습니다. 관련해서 국제학술대회를 열고 그 결과를 2008년 ‘한국병합과 현대’라는 책으로 일본에 내놨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지난해 나왔고요. 일본어판이 나오면서부터 일본 학자들 사이에 “이제 우리도 양심적으로 뭔가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목소리들이 나왔다고들 합니다. 학문적 사실만큼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본 학계의 높은 수준을 볼 수 있었습니다. →변화 원인이 어디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탈아론(脫亞論)에 대한 반성이지요. 일본은 뭔가 특별한 존재니까 아시아를 벗어났고, 미개한 한국과 중국은 우리가 이끌어 줘야 한다는 게 탈아론입니다. 그런데 최근 한국과 중국이 눈부시게 성장하면서 일본만 특별히 우월하다는 얘기를 하기 어렵게 된 것이지요. 결국 예전 탈아론은 침략주의에 불과하지 않았느냐는 반성이 나오게 된 겁니다. 이 같은 반성은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서 특히 광범위하게 공감대를 얻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논쟁을 하다 보면 지식인들이 더 답답해서 뭔가 큰 정치적 계기가 없으면 일본의 변화가 힘든 게 아닌가 싶기도 했는데 지금은 양심적 지식인들이 더 앞장서 주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연구가 고종 황제를 지나치게 미화한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고종이 결국은 전제군주 아니었냐는 것이지요. -그건 지금이 민주주의 시대다 보니 군주정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가령 민중사학적 시각에서는 고종의 근대화 계획보다는 동학혁명이 더 중요합니다. 동학혁명이 있었는데 고종 황제가 탄압했다, 그러니 전제군주는 나쁜 것 아니냐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주장은 머릿속으로 생각한 틀을 가지고 있을 뿐 구체적 사료를 세심히 보지 않았기에 나오는 겁니다. 당시 동학의 주장을 보면 고종을 비난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고종 역시 일본이 동학혁명을 핑계 삼아 개혁을 하라고 강요하자 농민군과 충분히 협상할 수 있으니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라고 반박합니다. 이런 구체적인 사료를 들여다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나도 한때 고종이 무능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료를 보면서 인식이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일제가 자신의 강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채색했던 논리가 너무 상식처럼 퍼져 있다는 말이지요. →탈민족론은 어떻게 보십니까. 그들 입장에서는 선생님의 연구가 결국 ‘강도’ 일본과 ‘피해자’ 조선이라는 이분법을 더 강화하는 것처럼 보일 텐데요. 얼마 전 내놓은 선생님 논문도 일본 정한론(征韓論)의 기원을 조슈(長州) 지역 파벌, 그러니까 결국 임진왜란 주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내용인데요. -메이지유신을 추진한 조슈 세력은 한마디로 천황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해서는 천황에게 조공을 바치는 국가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조선이라는 논리입니다. 정한론이지요. 사실 일본이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들인 엄청난 노력과 어쨌든 그걸 성공적으로 이뤄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그러나 정한론과 친근할 수밖에 없는 메이지유신의 근본적인 한계도 지적해 줘야 합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굳이 남들을 침략할 필요까지 있느냐는 소일본주의가 나옴에도 이걸 무시해 버립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피해자라서 더 정확하게 지적해 줄 수 있는 겁니다. →고종 시대사 연구가 얼마나 더 진행될 수 있을까요.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이 1995년 ‘무라야마 담화’ 이후 (한국 강제병합에 관한) 사료 공개 작업을 추진 중인데 국립공문서보관소의 목록상태가 아주 나빠요. (일본에) 장기체류하면서 눌러앉아 뒤져보지 않으면 뭐가 들었는지 잘 모를 가능성이 높습니다. 좀 더 정리가 되면 차근차근 둘러볼 여유가 더 많을 거예요. 요즘 들어 자료가 많이 올라오고 있으니 고종 시대사는 앞으로 분명 크게 바뀔 겁니다. →고종이 독살됐다고 보는 소신에도 변화가 없으신 거지요. -물론입니다. 얼마 전 (독살설 근거) 자료를 공개하지 않았습니까. 1905년의 을사늑약 유효성을 인정하라는 일본의 요구를 고종이 거부하자 독살한 겁니다. →간도 협약에 대해서도 기대와 우려가 교차합니다(일본이 간도를 청나라에 넘긴 간도협약은 1909년 체결됐다. 이 협약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대한제국 외교권을 일본에 넘긴 을사늑약 때문이다. 따라서 을사늑약이 원천무효라면 간도협약도 원천무효가 된다. 때문에 한쪽에서는 이번 기회에 간도까지 되찾자고 하는 반면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느냐는 우려도 나온다). -논리적으로는 무효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 책임을 묻는 것도 힘겨운 싸움인데 중국과 또 싸울 수 있을까요. 힘을 분산하지 않았으면 해요. 조선과 중국은 간도협약 이전부터 영토 문제를 두고 갈등을 빚었습니다. 그래서 맺은 게 1899년 한·청조약인데 이때 간도 문제를 빼버립니다. 고종은 중국과의 조공관계에서 벗어나는 것, 그래서 중국과 협상을 통해 대등하게 조약을 체결하는 것 자체를 독립국에 대한 하나의 징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간도 문제를 비워 두는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그런 원칙이 원용될 수 있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다른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일본 일각에서는 한국도 베트남전에 대해 털어낼 것은 털어내라고 요구합니다. -그쪽 연구자가 아니라 뭐라 말하기 어렵습니다만, 자세히 들여다보고 문제가 있다면 그렇게 해야지요. 다만, 일제의 한국 병합과 같은 수준의 문제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체였느냐, 어느 정도 피해를 끼쳤느냐는 문제도 있고요. 그런데 그런 주장은 일본 쪽에서 자신의 책임을 부정하기 위해 내놓는 성격이 짙습니다. 그런 부분은 조심해야겠지요. 글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사진 김명국기자 daunso@seoul.co.kr
  • 美 육군병원에 울려퍼진 ‘報恩의 선율’

    美 육군병원에 울려퍼진 ‘報恩의 선율’

    “올해는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한국 전쟁 때 한국을 도와주고, 지금도 우리가 안전하게 지낼 수 있도록 지켜 줘서 감사합니다.” 20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월터리드 미육군보훈병원에서는 작지만 뜻 깊은 공연이 열렸다. 1909년 설립된 월터리드 육군병원은 1·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 베트남전, 이라크전, 아프가니스탄전 부상 미군들을 진료해온 최고의 미 육군병원이다. 미 버지니아주 패어팩스카운티의 한인 중·고생으로 구성된 음악자원봉사단체인 컴패션 뮤직 벌룬티어(Compassion Music Volunteers)는 부상당한 참전 군인들과 병원 직원들을 위해 구내식당에서 1시간여 동안 ‘보은’ 콘서트를 열었다. 병원 공보과 직원 데이비드 디킨슨은 “전문 연주단의 위문 공연은 더러 있지만 어린 학생들의 공연은 전례가 없었다.”면서 “특히 한국 학생들이 병원에 들어와서 공연을 한 것은 특별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관용(16·토머스제퍼슨고)군은 “태어나기도 전 일이지만 한국전 때 도와준 미군에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연주회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서예현(14·토머스제퍼슨고)양은 “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어린이이기 때문에 전쟁이 없어졌으면 하는 마음도 담았다.”고 말했다. 점심 식사를 하면서 공연을 즐긴 환자들과 병원 관계자들은 한 곡 한 곡 연주가 끝날 때마다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아버지가 한국전에 참전했었다는 간호부 소속 데니스 히긴스 소령은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고, 병원 직원들에게는 잠시나마 휴식을 주는 시간이었다.”고 고마움을 나타냈다. 2008년 5월 결성된 ‘컴패션 뮤직 벌룬티어’는 매월 한 차례 지역 양로원에서 자원봉사 공연을 해오고 있다. 구호단체들과 연계한 에티오피아 아동돕기, 아이티 지진재해돕기 기금 마련 공연과 독도 알리기 공연도 펼쳤다. 글 사진 워싱턴 김균미특파원 kmkim@seoul.co.kr
  • [기획 한국군 무기 55] 베트남전의 상징, UH-1H 헬기

    [기획 한국군 무기 55] 베트남전의 상징, UH-1H 헬기

    많은 사람들이 ‘베트남전’하면 정글 위를 날아다니는 헬기부대를 떠올리곤 한다.  이 모습은 베트남전을 다룬 수많은 영화에서 반드시 나오는 장면으로, 그만큼 베트남전과 헬기는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정비되지 않은 도로망과 울창한 정글, 땅굴을 통해 전후방을 가리지 않고 출몰하는 베트콩(Vietcong)과 북베트남군 때문에 육로 수송은 큰 피해를 감수해야 했고, 수송기가 착륙할 수 있는 활주로를 건설할 수 있는 지형이 항상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 때문에 한국전쟁 때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됐던 헬기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베트남전은 헬기가 대규모로 투입된 최초의 전쟁이었으며 동시에 헬기가 전투의 승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전쟁이었다. 몇 배에 달하는 대규모의 적에게 포위된 부대가 손바닥만한 헬기착륙장을 통해 부상자들을 후방으로 실어나르고 보급품과 지원병력을 공급받으며 몇 날 며칠 동안 전투를 치른 사례는 베트남 전사(戰史)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다. 그리고 베트남전 전 기간을 통틀어 활약하면서 개량을 거듭해 ‘공격헬기’라는 새로운 모습까지 갖춘 헬기가 있으니, 흔히 ‘휴이’(Huey)라 부르는 ‘UH-1 이로쿼이즈’(Iroquois)다. ◆ UH-1과 시작된 공중강습 UH-1 헬기를 논하는데 있어 ‘공중강습’을 빼놓을 순 없다. 공중강습부대란 비행 중인 수송기에서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리는 공수부대와는 다른 개념으로 헬기를 타고 다니며 필요한 병력이나 물자를 투입시키는 부대를 말한다. 헬기는 수송기보다 느리긴 했으나 병력이나 물자를 적재적소에 정확히 투입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한번 투입하면 재보급이나 철수가 힘들었던 공수부대와 달리 공중강습부대는 비교적 쉽게 재보급과 철수가 가능했다. 미 육군은 베트남전 초기, ‘UH-21’등 초창기 헬기를 수송임무에 제한적으로 투입하면서 많은 성과를 이끌어냈는데, 이에 고무된 미 군은 전쟁이 한창이던 1965년 7월 최초의 공중강습부대인 ‘제1기병사단’을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제1기병사단은 말을 타고 다니는 ‘기병’이란 명칭과 달리 작게는 소대 단위에서 크게는 수백 명에 이르는 병력 전체가 헬기를 타고 다니며 전투에 투입되는 부대였다. 이 부대는 새롭게 만들어진 것은 아니며 기존의 부대를 공중강습부대로 재편해 만들어졌다. 당시 이 부대는 420여대의 헬기를 보유했으며, 이중 절반이 넘는 280여 대가 UH-1 헬기로 구성됐다. 전쟁 초기에는 로켓탄과 기관총을 장착한 무장헬기(Gunship) ‘UH-1B’와 수송용 ‘UH-1D’가 주로 쓰였으나 1967년에는 탑재량을 늘리기 위해 동체를 확장하고 이에 맞춰 엔진 출력도 향상시킨 ‘UH-1H’가 등장해 주력으로 쓰였다. 제1기병사단 뿐만 아니라 베트남전에 참가한 거의 모든 부대는 헬기를 이용해 병력과 물자를 수송했으며, 단지 규모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 UH-1을 통해 공중강습에 눈을 뜬 국군 우리나라는 1964년 9월 베트남전에 의료진을 파병한 이래 1966년 4월까지 4차례에 걸쳐 최대 4만 8000여 명의 병력을 파견했으며 1973년 3월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연인원 32만여 명이 베트남에 파병됐다. 이는 당시 미군 다음으로 많은 파병 규모였으며 파병비용과 보급 일체를 미국이 지원하면서 미군과 같은 장비를 사용했다. 이 과정에서 미군을 통해 공중강습이란 전투방식을 접하게 되고 그 효율성에 주목하게 된다. 한반도 역시 산악지형이 많아 헬기가 매우 유용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첫 전투병력인 해병 청룡부대가 처음 파병된 1965년 10월 이후인 1967년부터 소수의 UH-1D 헬기를 도입한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에는 개량형인 UH-1H 헬기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는 도입분과 미군이 철수하며 넘겨준 기체 등 모두 130여 대의 UH-1H를 도입했으며 이 중 퇴역한 노후기체와 사고로 손실된 기체를 제외한 나머지가 육군을 비롯해 해군에서 운용 중이다. 해군에서 운용 중인 UH-1H 헬기는 바다 위에 착수했을 때를 대비한 부유장비와 소금기 방지처리가 되어 있다. ◆ 1만 6000여 대가 생산된 UH-1 UH-1 헬기는 세계 최초의 공격헬기인 ‘AH-1G 코브라’(Cobra)의 개발에도 영향을 끼쳤을 만큼 헬기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걸작 헬기였다. 이 헬기는 군용과 민수용을 통틀어 약 1만 6000여 대가 생산됐으며, 이 수치는 지금도 깨지지 않은 최고 기록이다. 우리나라가 운용 중인 UH-1H 헬기는 1400마력 터보샤프트 엔진을 장착해 최대 속도가 204㎞/h에 이르며, 최대항속거리는 약 510㎞ 수준이다. 무장한 병력 9명을 실어나를 수 있으나 보통 2명 기관총 사수가 동승하기 때문에 7명이 탑승한다. UH-1H 헬기는 우리나라와 일본 자위대를 비롯해 여전히 많은 나라에서 운용 중이지만 도입된지 40년이 넘은 만큼 서서히 퇴역이 진행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UH-1H 헬기는 한국우주항공(KAI)이 개발 중인 ‘수리온’ 헬기가 배치되는 대로 퇴역할 예정이다. 한편 미군은 지난해 10월 주 방위군에서 운용하던 마지막 UH-1H를 퇴역시켰으며, 현재는 엔진을 쌍발로 개량한 ‘UH-1N’ 정도가 미 해군과 공군, 특수용도로 사용 중이다. 지난 2008년에는 이 헬기의 엔진과 로터를 교체하고 최신 전자장비를 탑재한 ‘UH-1Y 베놈’(Venom )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 헬기는 기존의 UH-1H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헬기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많은 부분이 개량된 모델이다. ◆ UH-1H 헬기 제원 길이 : 12.5m 높이 : 4.4m 중량 : 2.2t 최대 이륙중량 : 4.3t 무장 : M-60D 7.62㎜ 기관총 2정 엔진 : Lycoming T53-L-13(1400마력) 1기 속도 : 204㎞/h(최대) 항속거리 : 510㎞(최대) 최대 상승고도 : 약 4100m 최대 비행시간 : 약 2시간 50분 승무원 : 2명(조종사, 부조종사) 탑승인원 : 기관총 사수 2명 + 무장병력 7명 서울신문 M&M 최영진 군사전문기자 zerojin2@seoul.co.kr
  • 위키리크스, 아프간전 추가 폭로 임박?

    미군 수사당국과 연방수사국(FBI)의 수사가 진행 중인 가운데 내부고발전문 웹사이트인 ‘위키리크스’의 미군 군사기밀 2차 폭로가 임박했다는 관측이 나돌면서 미 국방부가 바짝 긴장하고 있다. 미국의 IT잡지인 와이어드는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위키리크스의 아프가니스탄전 군사 기밀문서 폭로 이후 홈페이지의 ‘아프간 전쟁 일지’에 ‘인슈어런스 파일(insurance file)’이 업로드됐다고 전했다. 1.4GB 용량에 암호화된 정체불명의 이 파일은 위키리크스가 추가 폭로를 예고한 기밀문서 1만 5000건이 포함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다른 폭로전문 웹사이트 크립톰은 추정했다. 일부에서는 아프간전쟁뿐 아니라 이라크전쟁 관련 군사기밀과 미군내 성적 학대행위 등이 포함됐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크립톰은 미 수사당국이 위키리크스를 급습하거나 호주 출신의 위키리크스 설립자로 아프간전에 반대하는 줄리언 어샌지의 신변에 위험이 닥칠 경우 언제든지 공개되도록 기밀 자료들을 미리 배치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1970년대 베트남전 관련 국방부 기밀문서 폭로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보전의 양상을 띠고 있다. 현재 미군 수사당국은 아프간전 군사기밀 유출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인 브래들리 매닝(22) 일병을 쿠웨이트에서 미 버지니아주 콴티코 해병기지 교도소로 이감해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수사당국은 공범이나 친구가 관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연고지인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와 보스턴 등에 수사관을 파견해 수사중이다. 수사당국은 매닝 일병이 지난 1월 휴가 때 보스턴의 친구들을 만난 사실을 밝혀내고 군사기밀이 담긴 CD를 미국내 제3의 인물에게 전달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과정에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이나 보스턴대학에 다니는 매닝의 친구들이 개입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미 언론들은 보도했다. 매닝을 수사당국에 고발한 컴퓨터 해커 출신인 아드리안 라모는 뉴욕타임스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위키리크스가 부분적으로 매닝 일병이 기밀정보를 다운로드받도록 사주하고, 기술적인 지원을 했을 개연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라모는 최소한 한 명 이상의 공범자가 있을 것이며, 암호화된 비밀 소프트웨어를 설치하는데 위키리크스와 연관 있는 사람이 도움을 줬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FBI 등의 수사에도 불구하고 속이 타는 쪽은 백악관과 팬타곤이다. 미 행정부가 군사기밀의 추가 유출을 막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조치라고는 위키리크스측에 기밀문서의 추가공개 중단을 요청하는 것 말고 뾰족한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은 1일 ABC방송 대담 프로그램인 ‘디스위크’에 출연, “군사기밀 자료 폭로로 아프간 정보원들과 미 군사요원들이 위험에 처했다.”고 주장하고, 아프간전 기밀자료 폭로는 부도덕한 일이라고 맹비난했다. 그는 이어 “군사기밀들이 제한적으로 공개돼 있는 것은 이라크와 아프간에 투입된 미군 병사들이 현지의 안보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하고 다운로드 등 외부 유출방지책을 강화할 뜻임을 내비쳤다. 워싱턴 김균미특파원 kmkim@seoul.co.kr
  • ‘12·12 쿠데타’ 맞선 참군인

    ‘12·12 쿠데타’ 맞선 참군인

    26일 79세를 일기로 별세한 장태완 전 국회의원의 빈소에 신군부 인사들이 찾아와 ‘화해의 손길’을 건넸다. 27일 오후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종구 전 국방장관 등이 찾아와 장 전 의원을 조문했다. 투병 중이라 거동이 불편한 노태우 전 대통령도 장례식장에 조화를 보내 조의를 표했다. 장 전 의원은 격랑을 헤쳐온 한국 현대사를 대표하는 군인 중 한 명이다. 지난 1979년 발생한 ‘12·12사태’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으로 군인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신군부 쿠데타에 맞서 싸운 꿋꿋한 참군인이었다. ●장세동·이종구씨 조문 ‘화해의 손길’ 경북 칠곡에서 태어난 고인은 대구상고를 다니던 중 6·25전쟁이 발발하자 육군종합학교에 지원, 사선을 넘나들었다. 특히 육군대학 졸업논문으로 보안사령부 해체를 주장했다가 베트남전쟁 참전 때 ‘사상 불순자’로 찍히기도 했다. 1971년 1월 장군으로 승진한 그는 수경사 참모장과 26사단장 등을 거쳐 10·26 직후 수경사령관에 올랐다. 이때부터 참군인으로 살아온 고인에게 불행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수경사령관 취임 불과 1개월 만에 신군부에 의해 ‘12·12사태’가 터졌다. 그는 이를 ‘반란’으로 규정, ‘지는 싸움’인 줄 알면서도 군인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진압에 나섰다. 생전 장 전 의원은 당시 상황에 대해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하나회원들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납치했을 때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며 “그러나 진압 책임을 맡은 내가 백기를 들 수는 없었고, 죽기로 결심하니까 마음이 편안해지더라.”고 고백했다. 신군부 진압에 실패한 장 전 의원은 곧바로 보안사령부에 체포돼 서빙고 분실에서 두 달간의 조사를 받고 풀려났으나, 30년간 입었던 군복을 강제로 벗어야 했고 2년간 가택연금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불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TV를 통해 보안사에 끌려가는 아들의 모습을 본 아버지는 곡기를 끊고 막걸리만 마시다가 세상을 버리고, 서울대에 다니던 외아들은 행방불명됐다가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왔다. 절치부심하며 통한의 삶을 살아오던 고인은 1993년 민주당 ‘12·12쿠데타 진상조사위’를 통해 공개증언에 나서며 ‘진실 알리기’에 나섰다. 군의 정통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12·12사태’에 대한 역사적 판단 이전에 사법적 처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지는 싸움인 줄 알면서도 진압 나서” 장 전 의원은 ‘12·12사태’가 역사적으로 재조명되고 정치드라마 ‘제5공화국’ 등에서 ‘12·12사태’ 당시 목숨을 던져 쿠데타를 진압하는 모습이 방영되면서 ‘참군인의 표상’으로 떠올랐다. 1994년 자유경선으로 재향군인회장에 취임한 고인은 2000년 민주당에 입당, 16대 총선을 통해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민주당 최고위원을 거쳐 2002년에는 노무현 대통령후보 보훈특보를 지내기도 했다. 그는 정계 은퇴 후에는 쿠데타를 막지 못한 ‘한’을 풀고자 쿠데타를 막는 국가시스템 연구에 매진하기도 했다. ‘12·12사태’가 발생한 지 31년이 지나 쿠데타군에 분연히 맞섰던 이 시대의 참군인은 이렇게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병호씨와 딸 현리씨, 사위 박용찬(인터젠 대표)씨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영결식은 향군장으로 29일 오전 8시30분 치러진다. (02)3010-2231.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길섶에서] 나잇값/구본영 수석논설위원

    얼마 전, 말을 잘 안 듣는 사춘기 아들 녀석을 심하게 혼내고 난 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린 마음에 상처를 줬을까 염려됐다. 물론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상처를 받게 마련인 게 인간사이긴 하다. 작고한 작가 정채봉도 “살아가는 우리 가운데 상처 없는 새가 어디 있으랴!”라고 토로하지 않았던가. “상처 없는 새들이란 이 세상에 나자마자 죽은 새들이다.”라면서. 하지만 못내 찜찜했던 마음을 작가 황석영의 신문 인터뷰를 보고 털어냈다. 그는 고교 자퇴 후 방랑생활, 베트남전 참전, 불법 방북 후 옥고 등 누구 못지않게 굴곡 많은 삶을 살았다. 그런 그의 고백 중 가장 가슴에 와 닿은 부분은 젊었을 때에 비해 달라진 게 무엇인가란 물음에 “좀 느긋해졌다. 그전엔 급하고 그랬는데 너그러워졌다.”고 답한 대목이었다. 그런 변화를 그는 ‘나잇값’이라고 정의했다. 그래서 아들이 나잇값을 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게 부모의 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경험과 시행착오를 거쳐 성숙할 때까지 말이다. 구본영 수석논설위원 kby7@seoul.co.kr
  • [서울광장] 거꾸로 가는 법치주의/최광숙 논설위원

    [서울광장] 거꾸로 가는 법치주의/최광숙 논설위원

    “법치주의란 권력을 통제해 개인을 보호하는 것이 핵심인데 오히려 법을 어긴 국민들 혼쭐 낼 생각만 하더군요.” 진보 인사들의 쓴소리가 아니다. 지난해 말 청와대에서 열린 법무부, 권익위원회, 법제처의 대통령 업무 보고에 참석했던 이들은 가슴이 답답했다고 한다. 이날 장관들은 하나같이 법치주의를 강조했다. 그들의 법치주의에는 고위공직자들의 비리 엄단 등이 거론되긴 했지만 대부분 법을 지키지 않는 시민들에 대한 엄정한 법집행에 방점이 찍혔다. 법을 다루는 부처 장관들의 법치주의 인식에 참석자들은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고 한다. 불법파업을 엄히 다스리는 등 시민들의 법질서 확립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권력의 통제를 통한 국민 보호가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새뮤얼 헌팅턴도 ‘문명의 충돌’에서 “법치의 전통은 재산권을 포함한 인간의 권리를 권력의 자의적 횡포로부터 보호하는 제도”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총리실의 민간인 사찰 의혹 사건은 후진국에서나 일어날 일이다. 총리실은 법을 어겨 민간인을 사찰했다. 우리 사회에서 공무원은 권력층이다. 각종 규제와 인·허가권을 갖고 있어 부패·비리에 연루되기 쉽다. 공직감찰 활동을 통해 공직이라는 권력을 감시하라고 총리실에 권한을 준 이유가 거기 있다. 그런데 정부는 거꾸로 권력 남용으로 국민을 위협했으니 법치주의의 시계를 거꾸로 돌린 것이나 진배없다. 권력의 속성은 참으로 무서운 것 같다. 권력에 취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법과 제도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사람)에 의해 법과 제도가 무너지면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닉슨 미 대통령은 베트남전을 반대하는 정적을 도청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미 역사상 최초로 임기 중 물러나는 수모를 당했다. 도청은 명백한 불법이지만 권력의 최정점에 있던 닉슨은 변호사 출신인데도 권력을 남용해 법을 뛰어넘는 무모한 행동을 했다. 법치행정은 정부의 신뢰 차원에서 중요하다. 법치행정의 근간인 법을 제정할 때 ‘좋은 법’을 만들어야 한다. 만든 법은 잘 지켜야 한다. 그럴 때 국민들은 정부를 신뢰할 수 있다. 최근 정부가 추진하는 가칭 ‘행정규제 피해규제 및 형평보장을 위한 법률’ 제정을 놓고 법조계 안팎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이 법은 규제로 인해 피해를 입은 민원인이 권익위원회에 규제완화 신청을 하면 권익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해당 부처에서 규제를 완화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다. 국가경쟁력 강화 차원에서 재계 등의 어려움들을 반영, 규제를 완화해 주자는 취지야 이해 못할 바 아니다. 하지만 이 법은 형평성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이 법은 규제 내용이 담긴 시행령 등 현 규제 법령을 무력화하는 ‘법 위의 법’이다. 논란의 소지가 많은 것은 막강한 로비력과 짱짱한 법무실을 갖춘 대기업 등은 규제를 뚫고 나갈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반면 개인 영세업자 등은 여전히 규제에 발이 묶일 수 있다. 강자에겐 규제 완화를 둘러싼 특혜 시비가, 약자에게는 좌절감만 주는 법이 될 수 있다. 자연 규제를 푸는 과정에서 부패와 비리가 생길 가능성도 없지 않다. 정부 내에서조차 이 법을 규제 완화의 ‘요술방망이’라며 걱정이 많은 이유다. 특히 이 법은 규제완화의 기준과 잣대가 명확하지 못해 정부의 재량권 남용 시비를 불러올 수 있다. 규제완화 기준이 모호하면 법 자체가 불신의 대상이 된다. 나아가 그런 법을 만들고 마음대로 법 적용을 하는 정부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보통 친구들끼리, 아니면 동네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하는 말이 있다. ‘법대로 해’라는 말이다. 정부든 개인이든 법대로 하지 않아 문제가 생긴다.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법치다. 정부가 법에도 없는 일을 하면 국민들은 법이 있어도 지키지 않게 된다. 법을 지키더라도 정부에 코웃음치게 된다. 개인의 불법도 문제지만 국가 권력층의 불법은 그 파장이 더 크다는 사실을 정부는 알아야 한다. bori@seoul.co.kr
  • 美·라오스 35년만에 최고위급 접촉

    미국과 라오스가 지난 1960~75년까지 계속된 베트남전쟁 이후 처음 최고위급 접촉을 가졌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과 통로운 시수리드 라오스 외무장관은 13일 워싱턴 DC에서 만나 교류 확대를 핵심으로 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라오스 외무장관의 미국 방문은 1975년 라오스의 공산정권 수립 이래 처음이며, 최고위급이다. 공동성명은 “양국의 협력 증진이 상호이익에 맞고 역내 및 세계의 평화와 안정, 발전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실질적 협력의 표시로 항공자유화 협정(오픈 스카이)을 체결함에 따라 양국은 취항 항공사수와 노선, 횟수 등에 제한없이 자유롭게 항공 운송을 할 수 있게 됐다. 이에 따라 라오스는 관광산업의 활성화를 기대하고 있다. 통로운 장관은 클린턴 장관이 라오스를 방문해줄 것을 공식 요청했다. 미 국무장관이 라오스를 방문한 것은 입헌군주정 시절인 1955년 존 포스터 덜레스가 유일하다. 방문일정도 단 하루에 불과했다. 양국은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적은 없지만 베트남전 당시 미군을 도왔던 몽(Hmong)족에 대한 처형 및 강제송환, 실종 미군 문제로 오랜 세월 긴장상태를 유지해왔다. 현재 미국에는 25만여명의 몽족이 이주, 생활하고 있다. 미국은 2004년 라오스와 무역관계를 정상화했고 최근에는 베트남전 당시 사용된 폭탄을 제거하는 방안을 모색중이다. 라오스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북베트남군(월맹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려던 미국은 라오스에 수백만발의 폭탄을 투하, 지금까지 5만여명의 라오스인이 죽거나 부상한 것으로 알려졌다. 필립 크롤리 국무부 대변인은 “두 장관이 광범위한 분야에서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면서 “미국은 동남아시아 협력확대 노력의 일환으로 라오스와의 관계 구축에 전념하고 있다.”고 말했다. 워싱턴 김균미특파원 kmkim@seoul.co.kr
  • [씨줄날줄] 병역기피 논쟁/최광숙 논설위원

    “평안도의 양덕, 성천의 매 잡는 사람은 40호만 두게 하고, 그들에게는 병조에서 차첩(임명장)을 주게 했다. 첩이 없이 행세하는 자는 그 고을 관청에 군인으로 편입시키니 이 때문에 혁파된 시파지(매를 기르는 사람)가 수백호나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의 한 대목이다. 당시 매 사냥에 나선 임금의 수레 뒤를 따르며 보필했던 이들에게는 부역을 면제해 줬다. 자연 군역을 피하려는 이들이 청탁도 넣고 허위로 매 사냥 자격증도 위조해 사회문제가 됐나 보다. 조선시대에는 심지어 군역을 피하기 위해 승려가 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병역기피 논쟁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한 시기는 1997년 대선 때가 아닌가 싶다.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후보의 아들 정연씨의 병역 사유가 논란이 됐다. 키 179㎝의 정연씨가 45㎏의 체중미달로 병역면제를 받은 것이 여론의 집중 포화를 받은 것. 아들은 소록도의 봉사활동으로 참회했으나 그 아버지는 결국 낙마하고 말았다. 그 이후 공직사회에서는 ‘한 자리’ 하려는 아버지의 출세길을 막지 않으려는 공직자들의 아들들이 줄줄이 군입대를 자원하는 풍토가 생겨났다. 대통령은 군통수권자이다 보니 어느 나라에서나 대선후보의 병역문제는 민감할 수밖에 없다. 클린턴 전 미 대통령은 영국 옥스퍼드대로 유학가면서 병역의무가 면제됐다. 베트남전을 피하기 위한 병역기피가 아니냐는 의혹을 샀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도 대선전에서 한때 병역 논란에 시달렸다. 한 시민단체가 주 공군 방위군에서 복무했다는 부시의 병역기록을 증명해주는 이에게 5만달러를 주겠다며 의문을 제기하면서다. 전당대회를 앞둔 한나라당에서 병역문제가 또다시 도마에 올랐다. 당 대표경선에 나선 안상수 후보의 군 면제 사유는 ‘고령’. 홍준표 후보가 이를 문제삼고 나섰다. 20세 때 징병검사 기피로 시작된 병역문제는 입영연기, 기피, 입영후 귀가, 보충역으로 이어지다 32세에 병역에서 해방되는 과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에 안 후보는 “고시 공부하러 산에 가면서 통지서를 받지 못한 것이지 범법으로 입대를 기피한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날 선 병역기피 논란에 안 후보가 ‘좌파 주지’로 지목했던 명진 봉은사 주지 스님이 “병역기피는 할 수 있어도 진실을 기피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거들고 나섰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거론하며 병역의 의무를 강조하는 것보다 ‘진실’을 감출 수 없다는 말이 더 무섭게 들린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보고 듣고 즐기세요] 미술·전시

    ●판타지의 유희를 꿈꾸다 7~13일 서울 관훈동 인사아트센터. 투명하고 반사하는 특성을 가진 유리로 만든 글라스비드로 꿈과 같은 비물질, 비현실의 세계를 표현하는 위성웅의 10번째 개인전. (02)736-1020. ●박동인 자연의 소리 5~17일 서울 인사동 선화랑. 베트남전 참전때 본 노을, 바다, 야자수 풍경 등을 독자적으로 개척한 모자이크 회화로 선보이는 재미작가 박동인의 첫 귀국전. (02)734-0458. ●변숙경의 6번째 조각 개인전 7~12일 관훈동 인사아트센터 본 전시장. ‘철의 여인’ 변숙경이 1t이 넘는 철 조형물로 존재의 참을 수 없는 무거움을 표현했다. (02)736-1020.
  • [씨줄날줄] 택시 드라이버/최광숙 논설위원

    뉴욕 밤거리를 운전하는 외로운 택시 드라이버(운전기사). 영화 ‘택시 드라이버’의 남자 주인공인 트래비스는 빈민가 지역에서 택시를 몬다. 로버트 드니로가 열연한 주인공은 베트남전 참전 용사로 세상과 소통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작은 택시 공간에서 고립된 그는 오로지 사회의 악을 쓸어버려야겠다는 생각만 갖고 있다. 어느날 12살 어린 창녀 아이리스(조디 포스터)를 만나면서 그는 자신의 생각을 실행에 옮긴다. 어린 창녀를 구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아이리스의 포주를 총으로 쏴버린 것. 명감독 스코세이지는 택시 드라이버를 현대사회의 상처입은 영혼으로 설정했다. 우리나라든 미국이든 택시 운전기사를 통해 우리는 세상 돌아가는 온갖 이야기를 귀동냥할 수 있다. 세상 민심을 알려주는 ’세상 통신원’이 따로 없다. 우리 정치인들이 택시 운전을 ‘서민정치’ 실현의 홍보수단으로 할용하는 이유가 다 거기 있다. 일부에서는 정치 쇼라고 하지만 분명 배우는 것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민심 탐방을 내세워 택시 운전기사를 했다. 노태우 비자금 청문회 스타였던 박계동 전 의원도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마하자 택시 핸들을 잡았다. 송영길 인천시장은 변호사를 하기 전에 택시 운전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 하지만 과거 처음 택시가 거리에 등장한 1910년대만 해도 택시 운전기사는 남들이 선망하는 직업이었다. 1912년 서울 낙산 부자 이봉래가 일본인 2명과 함게 ‘포드 T 형’ 승용차 2대를 도입, 택시를 만들면서 등장한 최첨단 직업이 택시 운전기사다. 1920년대 쌀 한 가마 가격이 6~7원인데 택시를 전세내 서울시내를 한 바퀴 도는 운임이 6원. 택시운전기사의 월급은 쌀 스무 가마 가치였다고 한다. 택시가 귀하니 자연 운전기사는 고액 연봉을 받는 최고의 전문직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은 운전자격증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직업이 택시 운전기사다. 그들의 경력을 걸러주는 장치가 없다 보니 자연 범죄에 노출되기 쉬워졌다. 3명을 연속 살해한 택시 운전기사가 나오는가 하면 뒷좌석에 앉은 여성 손님에게 못된 짓을 하는 사례가 심심찮게 보도되고 있다. 급기야 정부는 최근 내년부터 성범죄 전과자들에게 택시 운전을 못하도록 했다. 강도 살인이나 마약 범죄 관련자도 5년간 택시운전을 할 수 없도록 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따뜻한 영혼을 지닌 택시 드라이버들이 더 많다고 믿는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한국전쟁 名著]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한국전쟁 名著]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전후 세대들에게 한국전쟁은 낡은 흑백사진이다. 호화찬란하지도, 역동적이지도, 극적 반전도 없는 재미없는 전쟁이다.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책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는 뉴스는 듣지 못했다. 이 모든 얘기들이 퓰리처상을 받은 언론인이자 쟁쟁한 역사가인 데이비드 핼버스탬의 ‘콜디스트 윈터’가 출판되기 전의 얘기다. 공병호경영연구소 공병호 소장은 이 책에 대해 ‘기념비적인 책’이라고 정의했다. 부연한다면 미국인의 눈으로 본 걸작 한국전쟁사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은 베트남전쟁보다 흥미가 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착각을 확실하게 불식시켜 준다. 방대한 문헌과 인터뷰를 통해 한국전쟁을 정공법으로 조명하면서도 소설처럼 읽는 재미를 보장했기 때문이다. 책은 2007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올랐으며, 지난해 한국에서 출간됐다. 4만 8000원이라는 가격보다 1082쪽이라는 분량 때문에 지레 질릴 수도 있다. 잠깐의 망설임만 극복하면 일사천리로 읽힌다.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전투와 작전묘사는 숨이 막힐 듯 생생하고, 전쟁의 막후에서 벌어지는 정치인, 고급 군인들의 권력투쟁은 손에 잡힐 듯 사실적이다. 60년 전 한국전쟁 발발을 전후한 시점에 한반도를 둘러싸고 진행된 국제정세가 60년이 지난 지금과 판박이라는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의 지적이 실감 난다. 학자들은 별로 환영하지 않는 눈치다. 흥미 위주의 문학작품이라고 보는 시각이 강하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잊혀진 전쟁’이 된 이유는 막강 화력의 미군이 중국 해방군에게 처절하게 패했을 뿐 아니라, 참전자들의 인간 스토리가 별로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측면도 돌아봐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한국전쟁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손색없다. 핼버스탬은 이 책의 출판을 30년 동안 구상했고, 10년 동안 집필했다. 참전용사들을 찾아 미국 구석구석을 뒤졌다. 책의 진가는 인터뷰 대상자 목록에서 나타난다. 그가 인터뷰했다고 이름을 밝힌 사람은 모두 130명이다. 이 중에는 알렉산더 헤이그 전 국무장관,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명예교수 등 유명인사도 있다. 대부분은 최전선에서 싸운 초급 장교이거나 사병들이었다. 저자는 후기에서 노스캐롤라이나 샬럿의 변두리에 사는 폴 맥기를 특별히 소개했다. 그는 지평리 전투 당시 소대장이었다. 저자는 “맥기는 55년 동안 내가 찾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린 사람 같았다.”고 했다. “일반대중이 얼마나 고귀한 이야깃거리를 가슴속에 숨겨두고 있는지 알았고, 그들을 깊이 존경하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한국전쟁을 기획하고 연출한 스탈린과 마오쩌둥, 두 공산 지도자는 물론 옛 소련 적군 소령계급장을 달고 평양에 나타난 김일성, 이승만 대통령의 미국에서의 행적, 대륙에서 쫓겨난 장제스 등 이야깃거리는 무궁무진하다. 책은 중국군과의 첫 교전으로 시작해 미국의 참전 배경으로 옮겨간다. 세계 최강의 부대 미군이 중국군에 얼마나, 어떻게 호되게 당했는지 낱낱이 알려준다. 미국인답게 워싱턴 내부 정가와 군부의 이야기가 압권이다. 한국전에서 동고동락한 맥아더, 리지웨이, 알몬드 등 세 장군의 애증 관계가 저자 특유의 저널리즘적인 서술을 통해 드러난다. 특히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의 갈등과 알력이 한국전쟁에 미친 영향을 읽노라면 소름이 끼친다. 인천상륙작전의 영웅으로만 알려진 맥아더의 야망에 대한 분석은 새롭다. 족보까지 파헤치면서 맥아더의 허상을 밝혔다. 전쟁이 발발한 1950년 겨울 한반도에는 100년 만에 닥친 추위가 기승을 부렸다고 한다. 책제목은 하복차림으로 투입된 미군들이 중국군이나 인민군보다 ‘동장군’ 때문에 고생했다는 데서 따왔다. 50년 동안 21권의 저서를 남긴 핼버스탬은 베트남전쟁에서 실패한 미국의 이야기를 주로 썼다. ‘최고의 인재’는 베트남전쟁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한 권이다. ‘콜디스트 윈터-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는 유작이다. 저자는 2007년 봄 마지막 퇴고작업을 마무리한 닷새 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미식축구에 관한 새로운 책을 준비하려고 캘리포니아로 가던 길이었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나는 왜 한국전쟁 연구 뛰어들었나”

    “나는 왜 한국전쟁 연구 뛰어들었나”

    박명림 연세대 교수와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는 24일 연세·삼성 학술정보관 장기원국제회의실을 가득 메운 80여명의 청중과 함께 한국전쟁 연구에 대한 개인적·사회적 경험을 나눴다. 특별강연은 한국전쟁 연구에 평생을 바친 세계적 권위자들이 이 연구에 뛰어들게 된 계기와 개인적 경험 등 진솔한 이야기를 듣는 자리였다. 사회자인 연세대 사회학과 김동노 교수는 “늦은 밤 술자리에서 나올 법한 얘기들이 학회 자리에서 나왔다.”고 말해 청중의 웃음을 이끌었다. 커밍스 교수는 야구선수로 대학에 입학해 심리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 진학해 비로소 한국전쟁에 관심을 갖게 된 사연을 말해 눈길을 끌었다. 커밍스는 “인디애나 대학에서 만난 김일평 교수와 1973년 도쿄에서 벌어진 ‘김대중 납치사건’을 계기로 한국에 관심을 두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또 1987년 북한 방문을 떠올리며 “개성에서 만난 북한군 병사 출신 주민은 1950년 6월25일 새벽의 일을 ‘이전에도 종종 있었던 38선 부근의 게릴라전’으로 기억하고 있었다.”면서 “한국전쟁은 이처럼 시작을 특정할 수 없는 역사 속에서 자라난 내전이었다.”고 주장했다. 와다 교수는 러시아 현대사 연구로 시작해 한국전쟁 전문가로 변모한 이력을 밝히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1968년 도쿄대 대학원에서 ‘현대 러시아 역사’에 대해 강연할 당시 세계적으로 베트남전 반전운동이 일었고 곧 베트남전과 한국전쟁에 대한 연관성을 연구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 자리를 마련한 박명림 교수는 “제주 4·3사건을 연구하기 위해 찾아간 제주도에서 망월동 묘지를 옮겨 놓은 듯한 희생자들의 수많은 묘를 보게 됐다.”면서 “그때부터 한 사람의 생명과 전체의 역사는 분리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가위에 눌려 가며 연구를 하게 됐다.”고 털어놨다. 박 교수는 “독재와 이념대결 등을 직접 겪지 않았기 때문에 순수한 자유와 이성으로 연구할 수 있는 젊은 세대들과 소통하기 위한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다.”고 강연 취지를 밝혔다. 윤샘이나기자 sam@seoul.co.kr
  • 문화계는 전쟁 중… 당신도 사정권

    문화계는 전쟁 중… 당신도 사정권

    전쟁의 기억은 쉬 지워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1950년 6·25전쟁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기념’(紀念)이 아니다. 처참함에 대한 기억(記憶)이자 평화에 대한 갈망이다. 문화계도 연극, 영화, 미술, 출판 등 여러 분야에서 그 기억을 더듬으며 갈망을 달래고 있다.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고향 떠난 화가들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이응노, 이쾌대, 배운성, 권옥연, 김흥수, 도상봉, 박고석, 장리석, 최영림….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60년 전 포화 속에서 월북했거나 월남한 화가들이다. 이들의 작품과 당시 상황을 담은 그림을 모은 ‘고향을 떠나야 했던 화가들’ 전이 25일 경기 고양아람누리 아람미술관에서 열린다. 9월26일까지 계속된다. ‘태극기 휘날리며’, ‘돌아오지 않는 해병’ 등 6·25전쟁 소재 영화들도 함께 상영되며 ‘전선 야곡’ 등 당시 대중가요를 들을 수 있는 부대행사도 마련된다. 같은 날 개막하는 사진전도 있다. 서울 통의동 대림미술관에서는 6·25전쟁 60주년 기념 ‘경계에서? On the Line’ 전이 8월20일까지 계속된다. 주요 전적지와 전후 세대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해석했다. 공연예술 관점에서 전쟁을 재조명한 ‘6·25전쟁, 공연예술의 기억과 흔적’ 전도 새달 31일까지 장충동 국립극장 공연예술박물관에서 열린다. ●분단 주제 100페스티벌·윤이상 등 연극계도 가세 젊은 극단들이 주축이 된 ‘100연극공동체’는 27일까지 대학로 동숭극장에서 ‘100페스티벌 2010’을 연다. 주제가 ‘전쟁, 그리고 분단’이다. 베트남전을 소재로 한 ‘사이공의 흰옷’(임세륜 연출, 극단 다 제작) 등을 무대에 올린다. 같은 기간 대학로 우석레파토리극장에서는 ‘윤이상 나비이마주마’(이동준 연출, 극단 은세계 제작)가 공연된다. 간첩 혐의를 받았던 세계적 작곡가 윤이상의 삶을 다뤘다. 29일부터 새달 4일까지 대학로 행복한극장에 오르는 ‘인내의 돌’(이성구 연출, 극단 가변 제작)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투영된 한 가정의 불행을 다룬다. 출판계는 체험과 증언에 무게를 뒀다. 미국의 전쟁다큐 작가 존 톨랜드는 ‘존 톨랜드의 6·25 1, 2’(김익희 옮김, 바움 펴냄)를 통해 1950년 6월24일부터 포로 교환이 진행된 1953년 9월까지를 추적했다. 국군과 미군은 물론 중국·북한군의 증언까지 생생히 전달하며 객관성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불의 제전, 낙동강, 순교자 등 소설도 잇따라 6·25전쟁 때 남편을 잃은 여성들과 그들의 자녀를 인터뷰한 ‘전쟁 미망인, 한국 현대사의 침묵을 깨다’(이임하 지음, 책과함께 펴냄)도 나왔다. 전쟁이 남기고 간 삶의 궤적이 신산하다. 원로작가 김원일은 18년에 걸쳐 탈고한 대하소설 ‘불의 제전’(강 펴냄) 다섯 권을 13년 만에 새로 개작 출간했다. 자신이 직접 겪은 전쟁과 사람 이야기를 담은 자전적 소설이다.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김은국의 소설 ‘순교자’도 6·25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대중음악평론가 박성서씨의 ‘한국전쟁과 대중가요, 기록과 증언’(책이 있는 풍경)은 25일 출간 예정이다. ●체험과 증언으로 전하는 평화와 반전 메시지 일찌감치 포화 속으로 빠져들었던 영화·방송가는 포연이 자욱하다. 6·25전쟁 당시 학도병 71명의 감동 실화를 다룬 영화 ‘포화 속으로’는 개봉 5일 만에 120만명을 돌파하며 지난 주말 박스오피스 정상에 올랐다. 스무살 남짓의 앳된 군인들의 증언이 담긴 다큐멘터리 영화 ‘60년 전, 사선에서’도 24일 개봉한다. KBS는 1975년 인기리에 방영됐던 ‘전우’를 최수종, 이태란 주연의 동명 드라마로 리메이크해 내보내고 있다. MBC는 블록버스터 드라마 ‘로드 넘버 원’을 23일 첫 방송,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다. ‘내가 겪은 6·25’를 주제로 한 원로 만화가 29명의 작품전도 열린다. 박록삼·윤창수·조태성·이경원기자 youngtan@seoul.co.kr
  • [實錄, 한국전쟁] (4)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동상이몽

    [實錄, 한국전쟁] (4)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동상이몽

    휴전협상을 앞두고 스탈린과 마오쩌둥 사이에 보이지 않는 균열이 있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지 일 년째 접어들자 기력이 쇠한 중국은 휴전을 꾀했다. 김일성도 정전을 원했지만, 스탈린의 생각은 달랐다. 유엔에 휴전을 발의하는 한편 남한 내 빨치산 활동 강화 등 적극적인 군사 반격을 재촉했다. ●“스탈린, 끝없는 마오요구에 짜증” 베이징은 휴전교섭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달라고 모스크바에 요구했다. 모스크바는 오히려 한 발을 뺐다. 마오쩌둥이 휴전을 주도하도록 권한을 위임했다. 토르쿠노프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 총장은 “소련이 전쟁의 주체자가 아님을 보여주려 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휴전협정 문제가 처음 거론된 1951년 6월5일부터 유엔주재 소련대표 말리크가 정전교섭을 제안한 6월23일까지 모스크바와 베이징 그리고 평양 간 비밀문서의 교환이 급증했다. 마오쩌둥의 정전제안에 대해 스탈린의 첫 반응은 신통찮았지만, 김일성과 가오강 중국 동북성 서기를 만나고 나서 태도가 달라졌다. 스탈린은 6월13일 마오쩌둥에게 “정전이 현시점에서 타당하다고 판단했다.”고 긍정적인 내용의 친서를 보냈다. 두 공산 거목이 주고받은 서신의 형식에도 변화가 엿보인다. 모스크바 주재 대사나 베이징 주재 대사를 거치지 않고 직접 주고받았다. ‘경애하는 스탈린 동지’ 같은 서두는 생략됐고, ‘볼셰비키적 경의를 표하며 마오쩌둥’이라고 꼬박꼬박 썼던 마무리도 ‘마오쩌둥’이라는 이름 석 자를 적는 것으로 끝냈다. 내용적으로도 마오쩌둥의 자기주장이 강해졌다. 휴전협정 장소가 개성으로 정해진 것은 마오쩌둥의 아이디어였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보낸 1951년 6월30일자 친서에서 “다음 몇 가지 문제에 관해 귀하에게 나의 의견을 전한다. 검토 후 김일성에게 직접 지시하시기 바란다.”면서 “회담 장소로 미국 리지웨이(유엔군 총사령관)는 원산항을 제안했지만, 북한 해군의 요새기지인 원산항에 적의 함정을 상륙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내 생각에는 38선 부근의 개성이 적당하다고 본다. 회담개시는 7월15일로 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같은 날 스탈린은 “한반도에서의 군사행동 중지와 휴전을 포함한 모든 평화적 제안에 우리는 동의한다. 회담장소는 38선 인근의 개성지구를 제안한다. 귀하가 동의한다면 7월10일부터 15일 사이에 귀측 대표단과 만날 것이다.”라는 내용의 유엔군에 보내는 회답문을 직접 작성해 마오쩌둥에게 보낸 친서에 동봉했다. 마오쩌둥의 의견을 100% 받아들였다. 스탈린은 또 이 친서에서 “모스크바가 휴전교섭을 지시해야 한다는 제안은 잘못된 생각이며 그럴 필요조차 없다. 교섭을 지휘할 사람은 바로 마오쩌둥 귀하 자신이다. 우리는 개별 문제에 대해 조언할 뿐이다. 우리는 김일성과 접촉할 수 없다. 귀하가 직접 김일성과 접촉해야 한다.”고 썼다. 스탈린은 휴전교섭 책임의 배턴을 마오쩌둥에게 넘겨버렸다. 이후 스탈린은 중국이 요청한 군사고문 파견과 6억루블의 군사차관에는 동의했지만, 추가 고문파견과 장비공급은 거부했다. 김일성과 스탈린 마오쩌둥 사이에 오간 1951년부터 1953년까지의 기밀문서를 분석한 토르쿠노프 총장은 “휴전교섭 과정에서 스탈린은 마오쩌둥의 끊임없는 지원요구에 짜증을 냈고, 분노마저 느끼는 듯했다.”고 말했다. 휴전교섭의 열쇠는 마오쩌둥이 쥐고 있었다. 스탈린에게 정기적으로 진행상황을 보고하고, 충고도 받았지만 형식적이었다. 김일성은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렀다. 박헌영은 “북한 인구의 10%가 기아상태에 있다.”면서 조기정전을 요청했다. 다급해진 김일성도 ‘유엔군 측의 요구를 다 수용하겠다.’고 나섰지만, 스탈린은 불리한 전쟁종결을 원치 않았다. 나약한 보습을 보여 정치적 불이익을 가져왔다고 김일성을 나무랐다. ●마오, 스탈린에 협상상황 형식적 보고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낸 1951년 7월20일자 전문에서 “휴전제안에 동의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전쟁종결을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썼다. 이 같은 견해는 스탈린이 사망한 1953년 3월까지 유지됐다. 3월5일 독재자가 죽자 소련 내각회의는 전쟁을 종결짓는 쪽으로 한반도정책을 바꿨다.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에도 휴전협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 대통령은 6월18일 반공포로 2만 7000명을 석방하는 초강수를 뒀지만, 전쟁을 종식하고자 하는 중국과 미국의 의사를 꺾을 수는 없었다. 한국전쟁은 미국과 러시아, 중국, 일본, 타이완에 각각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영어권 학자들은 한국전쟁을 ‘잊혀진 전쟁’ ‘원치 않은 전쟁’이라고 부른다. 미국의 서점에서 베트남전쟁에 관한 책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지만, 한국전쟁에 관한 책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콜디스트 윈터’를 쓴 퓰리처상 수상작가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책을 저술하던 2004년 미국 플로리다의 한 도서관 서가에 베트남전 관련 책은 88권이나 꽂혀 있었지만 한국전쟁 관련 서적은 4권뿐이었다.”고 술회했다. 영화도 그랬다. 미국이 만든 전쟁영화의 무대는 대개 베트남 정글이거나 사이공 거리였다.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중 인기를 끈 작품은 ‘M.A.S.H’ 정도에 불과했다. 그나마 80년대 이후에는 사라졌다. 한국전쟁에서 3만 3000명의 미군이 희생됐고, 10만 명이 넘는 상이군인이 발생했지만, 미국의 영광은 별것이 없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낳은 최고의 전쟁영웅 맥아더를 추락시킨 것도 한국전쟁이었다. 그래서 잊고 싶은지도 모른다. 한국전쟁을 총지휘한 스탈린의 나라, 옛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소련은 2차 대전 종식과 함께 38선 이북을 점령해 공산 이데올로기를 수혈시켰다. 항일무장 게릴라 지휘관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둔갑시켰다. 막대한 군수물자를 지원했다. 하지만 전쟁은 무승부로 종결됐다. 무엇보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부동항을 가진 북한에 대한 영향력이 중국으로 넘어간 것이 뼈아팠다. ●타이완 ‘戰禍’ 모면… 또 다른 수혜국 굳이 한국전쟁의 승자를 따지자면 중국을 거론할 수 있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마오쩌둥이었다. 냉전체제 아래에서 중국은 한국전쟁의 의미를 내전으로 축소했고, 마오쩌둥과 중국의 한국전쟁 관련성을 부인했다. 80년대 말까지 무려 40년 동안 감췄다. 중국과 마오쩌둥의 역할은 90년대 들어 냉전체제가 해체되면서 공개된 러시아와 중국의 비밀문서에서 속살을 드러냈다. 한반도를 무대로 치른 미국과 중국의 전쟁이었다. 중국은 한국전쟁에 한때 130만명의 대군을 일시에 참전시켰다. 3년간 연인원 500만명을 동원했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외파병이다. 갓 태어난 신생 사회주의국가 중국은 비록 미국을 이기지는 못했지만, 지옥을 보여줬다. 크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을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가고자 계획했던 연합군의 ‘크리스마스 공세’는 미국의 전쟁사에서 가장 처참한 패배 중 하나로 기록됐다. 한국전쟁 최대의 수혜국은 일본이었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학 명예교수는 “일본은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참전해 경제적 이익을 챙겼다.”고 분석했다. 전쟁 기간 중 일본은 군사기지 역할을 했으며,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미군 전차상륙함(LST)은 대부분 일본인 승무원에 의해 조정됐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알아차린 미국의 전후 복구자금은 대부분 일본으로 흘러들어 갔다. 한국경제는 일본 예속형으로 변했다. 일본의 경제부흥에는 한국전쟁의 공이 지대했다. 타이완도 수혜국으로 볼 수 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한국전쟁을 대체하는 또 다른 전쟁에 휩싸였을지도 모른다. 마오쩌둥과 중국은 한반도보다 타이완 점령을 최우선순위에 두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한반도에서 3년 동안 발이 묶였고, 힘을 소진하는 바람에 통일의 대업을 이루지 못했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1950년 6월27일 7함대를 출동시켜 타이완해협을 봉쇄한 것도 중국 참전의 한 요인이었다. 해군력과 공군력이 없다시피 한 중국의 처지에서는 불리한 양안(兩岸)전쟁을 치르는 것보다 한반도에서 보병으로 싸우기로 작정한 것이다. 미국은 1941년부터 1949년까지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를 재정적, 군사적으로 지원했다. 당시 워싱턴에는 중국의 공산화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다. 이른바 ‘차이나 로비’였다. 워싱턴 정가에 영향을 미치는 외국단체 중에서 가장 활발했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존재감은 중국보다 워싱턴에서 오히려 더 클 정도였다. 장제스의 희망은 미국의 지원을 얻어 공산당을 밀어내고 본토로 귀환하는 것이었다. 장제스는 군대를 한반도에 파견해 중국과 싸우겠다고 큰소리쳤다. 한국전쟁 덕분에 타이완은 호전적인 마오쩌둥과의 전화(戰禍)를 피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의 공산 측 두 주역,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같은 전쟁을 치르면서 다른 꿈을 꿨다. 상호 의견교환이 별로 없던 두 지도자 사이에서 한국전쟁이라는 공통관심사가 생기면서 교류가 활발해졌다. 그러나 목적은 달랐다. 스탈린은 전지전능한 영향력의 유지를 원했지만, 마오쩌둥은 한반도와 타이완, 베트남으로부터 가해지는 미국의 위협으로부터 신생 조국을 지켜내고 싶었다. 연합군의 파상공세로 궁지에 몰린 북한이 9월28일 노동당 중앙정치국 긴급회의를 열어 소련과 중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10월1일 아침, 스탈린은 마오쩌둥과 김일성에게 긴급 메시지를 타전했다. 김일성에게는 “중국의 동지와 협의하라.”고 했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에게는 “조선의 동지들이 절망적인 곤경에 빠졌다. 지원군을 보낼 수 있다면 속히 38선으로 보내야 할 것이다. 이 건에 관하여 나는 조선의 동지에게는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전할 생각이 없다.”라고 썼다. ●中 참전번복… 체면 구긴 스탈린 노회한 스탈린은 김일성에게는 ‘마오쩌둥에게 말하지 않겠지만’이라고 했고, 마오쩌둥에게는 ‘김일성에게 알리지 않겠지만’이라고 전했다. 도요가쿠엔 대학 주지안롱 교수는 “중국과 북한을 분리시켜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중국군을 출병시킨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중국의 참전결정이 두 번, 세 번 번복되면서 스탈린의 체면이 구겨진 것도 사실이다. 10월12일부터 14일까지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보낸 전보내용이 ‘중국이 참전한다.’ ‘참전을 거부했다.’ ‘참전이 최종 결정됐다.’는 식으로 계속 변경됐다. 비록 목적과 계산법은 달랐지만, 약속을 지킨 쪽은 마오쩌둥이었다. 독자적 참전 결단에 따라 스탈린은 중국과 마오쩌둥을 다시 보게 됐다. 중국은 공산주의국가의 ‘둘째 형’으로 당당하게 자리매김했다. 소련은 중국에 공군 사단을 배치해 본토방위에 대한 염려를 놓게 했다. 1953년부터 시작된 중국의 1차 5개년 계획에 소련의 전폭적인 지원이 이어졌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카트리나에… 원유유출에… 눈물과 분노의 루이지애나

    카트리나에… 원유유출에… 눈물과 분노의 루이지애나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주인공 검프(톰 행크스)는 베트남전에서 돌아온 뒤 미국 남부의 루이지애나를 찾는다. ‘새우잡이를 하자’던 전우 버바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검프의 새우잡이는 곧 대박을 터뜨렸고, 이때 세워진 ‘버바 앤드 검프’라는 회사는 훗날 검프가 쌓은 엄청난 부의 밑거름이 된다. 루이지애나는 영화 속 이야기처럼 황금어장을 가진 명실상부한 수산업의 본고장이다. 루이지애나 사람들은 새우와 그리츠(조로 만든 죽)로 아침식사를 하고 점심에는 굴 샌드위치를 먹는다. 저녁에는 루이지애나에서만 맛볼 수 있는 가재의 일종인 크로피시를 케이준 양념으로 즐긴다. 루이지애나의 수산업 규모는 24억달러(약 2조 9000억원)에 달하며 미국 전역에 새우, 생선, 굴, 게를 공급한다. 시사주간 타임은 16일(현지시간) 멕시코만과 더불어 살던 루이지애나인들의 삶이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와 지난 4월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의 원유유출 사건으로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집중 조명했다. 타임은 “루이지애나인들은 이제 그들이 점심에 먹는 굴 샌드위치가 안전한지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고 보도했다. 타임은 카트리나로 인해 수년간 연기됐던 뉴올리언스시의 ‘굴 축제’가 2주 전 처음으로 열렸지만 도시에는 음산한 회색 기운만 가득하다고 설명했다. 지난 10일에는 무려 134년간 뉴올리언스 음식점들에 저렴한 굴을 공급하던 선세리 집안의 ‘P&J 굴 컴퍼니’가 문을 닫았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주민들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원망하고 있다. 타임은 “주민들은 이미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멕시코만이 생물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해 버린 데 분노하고 있다.”면서 “뉴올리언스를 가로지르는 10번 고속도로에 늘어선 수많은 해산물 광고판을 보면 이들의 분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밝혔다. 루이지애나 사람들의 큰 걱정은 원유유출 사건으로 인해 ‘청정’으로 상징되던 이 지역의 이미지가 타격을 입고 있다는 점이다. 루이지애나 시푸드 컴퍼니의 대변인 애실리 로스는 “식품산업의 경우 한번 손상된 이미지를 회복하는 데 최소한 5년 이상이 걸린다.”고 우려했다. 타임은 “1만 3000명의 어부들은 유출 사건을 일으킨 석유회사 BP를 욕하는 대신 방제작업에 매달리고 있다.”면서 “루이지애나주도 이미지 회복을 위해 워싱턴 DC에 요리사를 파견해 루이지애나 음식의 우수성을 알리고, 올여름에는 프랑스 디종에도 크로피시 요리사를 보낼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전했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한국전쟁 名著] 주지안롱 ‘모택동은 왜 한국전쟁에 개입했을까’

    중국인의 눈으로 바라본 한국전쟁 발발의 배경을 알고 싶은 독자에게 권할 만한 책이다. 대미· 대소· 대북관계 그리고 중국 공산당 내부의 참전결정에 대한 여러 갈래의 분석이 자로 잰 듯 정교하고 때로는 통렬하기까지 하다. 공산당 지도부의 결정과정에 대한 추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 책의 초판이 일본에서 나왔을 때 중국 내외를 통틀어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문제에 대한 가장 앞선 연구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저자 주지안롱(朱建榮)은 선즈화, 천젠 등 다른 중국계 학자들과 함께 수준 높은 연구자로 소개됐다. 1991년 일본에서 첫 출판됐다. 일본어 판의 원제는 ‘모택동의 조선전쟁-중국군이 압록강을 넘을 때까지’이다. 중국출신으로 일본에 유학, 한국전쟁사를 연구한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답게 한국이나 일본, 중국의 연구자와는 다른 글로벌한 시각이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았다. 주지안롱은 상하이에서 태어나 명문 화동사범대를 나왔다. 1986년 일본으로 건너가 연구원 생활을 했다. 도요가쿠엔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마오쩌둥의 베트남전쟁’도 그의 작품이다. 주지안롱은 한국전쟁의 주역은 미군과 중국군이라고 규정하면서 “한국전쟁이라기보다는 한반도에서 벌어진 미국과 중국 사이의 미·중전쟁”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중국군의 참전은 국제관계뿐 아니라 중국 내부적인 영향이 컸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중국 외교정책의 방향이 미국을 주적으로 삼고, 사회주의 대 자본주의의 대결구도를 바른 것으로 간주하게 됐다는 분석이다. 저자는 “중국의 개입을 결정했던 최고 지도부의 대외인식과 반응의 양식이 중국의 현대사에 크게 투영됐다.”라면서 “한국전쟁 참전 정책결정의 과정은 그 후 중국 지도부 내외정책의 기본노선을 규정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최근의 천안함 사태처럼 국내정치가 동요하거나 대외관계의 위기가 발생하면 한국전쟁 당시부터 이어져 온 특정한 대외반응 양식의 흔적이 표면에 나타난다고 덧붙였다. 초판본도 의미가 있지만 진가는 개정판에 있다. 저자는 2004년 새로 발굴된 자료와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개정판을 냈다. 1990년대 들어 러시아와 중국의 극비문서가 속속 해제돼 공개되면서 한국전쟁 연구의 전기가 마련됐기 때문이다. 저자는 2002년 4월부터 6개월 동안 미국 조지 워싱턴대학에 머물면서 개정판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했다. 개정판에서 저자는 중국참전의 역사적 뿌리를 드러내는 데 주력했다. 1940년대 중국 공산당의 대미인식 변화에 대한 검증을 통해 역사적이고 실증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중일전쟁 이후 중국 공산당과 미국 사이에서 형성된 불신의 기억때문이다. 장제스 정권에 대한 미국의 일방적인 지지가 ‘목의 가시’였다. 베트남에 천겅 장군을 보내 대프랑스 항전을 도운 과정도 같은 맥락이다. 트루먼 대통령이 1950년 6월27일 제7함대를 보내 타이완해협을 봉쇄하자 폭발한 셈이다. 집단지도체제 아래 다른 지도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참전을 독단적으로 결정하다시피한 마오쩌둥의 생각은 ‘삼로향심우회(三路向心迂回)’로 정리된다. 미국이 한반도와 베트남, 타이완 등 3개 통로를 통해 중국본토를 침투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참전이 대국의 위신과 국제적 영향력을 갖고 싶은 마오쩌둥 개인의 야망, 국내정치에 미칠 이익을 치밀하게 따진 결과라는 여러 학자의 견해도 소상하게 소개하고 있다. 무엇보다 당시 540만명에 이르던 인민해방군의 처리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중국은 국공내전이 끝날 즈음 과다한 해방군의 처리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140만명 정도를 제대시킨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었다. 해방군 내 조선인 사단 3만 5000명을 북한 인민군에 선뜻 내어 준 배경이다. 참전결과 중국군 60만~90만 명이 한국에서 희생됐다. 공식 전사자는 36만 명이지만 그 밖의 이유로 숨진 병사의 수도 엇비슷하다는 점을 과감하게 밝혔다. 이 책의 가치와 저자의 균형감각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43년만에 배달된 전사한 아들 편지

    43년 만에 베트남전 참전용사의 편지가 가족의 품에 전달됐다. 편지를 쓴 주인공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가 꽝남성 추라이 지역에서 전사한 권순관(당시 17세)씨. 강릉에 살던 그는 1966년 12월 꽃다운 나이에 군에 입대, 해병대 청룡부대에 배치됐다. 권씨는 이듬해인 1967년 12월6일 추라이 지역에서 부모님 걱정과 가족에 대한 안부의 글이 담긴 편지를 썼다. 하지만 그는 이 편지를 쓴 날로부터 정확히 55일이 지난 1968년 1월30일 이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를 하다 숨졌다. 당시 권씨의 편지를 가족에게 전달하기로 약속한 강원 출신의 동료 소대원은 권씨의 전사 소식을 듣고 편지를 전해야 할지 고민하다 끝내 포기했다. 이제 백발 노병이 된 이 병사는 40여년간 후회와 자책에 시달리다 최근 강릉보훈지청에 ‘꼭 대신 전해 달라.’는 당부와 함께 권씨의 빛바랜 편지를 넘겼다. ‘부모님 전상서’라고 시작하는 편지에는 ‘하루에도 서너 번씩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고비를 잘 넘겼다.’면서 ‘걱정하지 마라.’고 권씨의 육필로 적혀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더했다. 우편으로 편지를 받은 강릉보훈지청은 전사한 권씨의 부친(87)이 서울 상계동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연락을 취했다. 43년 전 전사한 오빠의 편지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전사자의 여동생 순애(55)씨에게 편지가 전달됐다. 순애씨는 “오빠의 마지막 유품인 편지가 긴 세월을 넘어 이렇게 가족들의 눈앞에 배달될 줄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강릉보훈지청 관계자는 “43년 전에 쓴 아들의 편지에 아버지는 물론 가족 모두 긴 세월 동안 그리움과 가슴에 묻어 뒀던 한과 서러움이 교차한 듯 온몸을 떨며 놀라워했다.”고 전했다. 강릉 연합뉴스
  • 달구벌로 ‘뮤지컬 여행’ 떠나자!

    달구벌로 ‘뮤지컬 여행’ 떠나자!

    제4회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Daegu International Musical Festival)이 12일부터 다음달 5일까지 대구에서 열린다. 공식 초청작 9편을 비롯해 모두 26편이 무대에 오른다. 미국 브로드웨이, 영국 웨스트엔드 작품 뿐 아니라 다양한 국가의 뮤지컬을 맛볼 수 있다. 달구벌 관광과 뮤지컬 관람을 묶은 상품과 ‘2+1’ 등 실속형 패키지 상품도 다양하다. 개막작은 국내에 첫선을 보이는 멕시코 작품 ‘앙주’(13~20일·오페라하우스)다. 16세기 프랑스 종교 전쟁을 모티프로 팜므파탈인 카탈리나 여왕과 그 자식들간의 음모전을 스릴러 형식으로 풀어내 미국 뉴욕뮤지컬페스티벌에서 최우수 연기상을 받은 작품이다. 폐막작 역시 쉽게 접하기 힘든 호주 작품 ‘사파이어’(30일~7월3일·오페라하우스)가 선정됐다. 호주판 토니상인 ‘핼프먼 어워드’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작품으로 여성보컬밴드 사파이어가 베트남전 위문공연에 오른 경험담을 다뤘다. 시원한 보컬과 신나는 댄스 실력으로 인기를 끌었다. 미국 작품 ‘아카데미’(7월1~4일·수성아트피아)는 뉴욕뮤지컬페스티벌에서 최우수작곡상, 최우수앙상블상 등을 받은 뮤지컬로 사춘기 학생들의 심리적 갈등을 그려냈다. ‘바버숍페라Ⅱ’(30일~7월4일·문화예술전용극장CT)는 영국 웨스트엔드가(街) 작품으로 2008년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열광적인 호응을 이끌어냈다. 전직 투우사의 이발사 데뷔전을 주제로 아카펠라와 코미디를 버무린 작품이다. 국내 뮤지컬로는 올해 뉴욕뮤지컬페스티벌 무대에 오를 예정인 군대이야기 뮤지컬 ‘스페셜 레터’(15~20일·수성아트피아)를 비롯해 ‘이순신’, ‘올댓재즈’, ‘브레멘음악대’, ‘반디의 노래’ 등이 무대에 오른다. 페스티벌의 또 다른 축은 창작극 지원이다. 해외 유명작품이나 라이선스 작품만 선보이는 ‘번지르르한 돈잔치’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다. 드라마와 영화로 인기를 끌었던 ‘뮤지컬 풀하우스’, ‘번지점프를 하다’ 등이 공연된다. 이 가운데 최우수작은 뉴욕뮤지컬페스티벌과 맺은 협약에 따라 내년 뉴욕 무대를 밟게 된다. 이렇듯 대구에 대형 뮤지컬 작품이 오를 수 있는 것은 튼실한 인프라 덕분이다. 통상 서울에서 이름깨나 알린 공연이 지방무대에 서려면 규모를 줄여야 하지만 대구는 그렇지 않다. 계명아트센터, 영남대 천마아트센터, 대구오페라하우스 등 1000석 이상의 대극장이 여럿 있기 때문이다. 올해 특징은 여행 패키지 상품의 등장. 자유여행상품은 13만~16만원의 비용으로 호텔 숙박까지 제공한다. 가격은 따로 구입했을 때의 60% 수준이다. 기차여행상품은 경주나 대구 팔공산 등 인근 관광지를 둘러본 뒤 뮤지컬 1편을 감상할 수 있다. 1박2일 기준으로 1인당 17만원 수준이다. 2편 가격에 3편을 볼 수 있는 ‘2+1’ 할인상품도 있다. 남자라는 공통된 주제를 다룬 ‘아카데미’, ‘이순신’, ‘스페셜 레터’ 등 세 작품을 묶은 ‘진남세 패키지(진정한 남자들의 세상을 만난다!)’, ‘아카데미’, ‘바버숍페라Ⅱ’, ‘스페셜 레터’로 구성된 ‘세계 3개국 패키지’ 등이 대표적이다. 구체적 정보는 딤프 홈페이지(www.dimf.or.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페스티벌을 총지휘하는 강신성일 이사장은 7일 “딤프가 4회째로 접어들면서 해외 뮤지컬팀이 자비로 출전하겠다고 하는 등 아시아 유일의 뮤지컬 페스티벌로서의 위상이 부각되고 있다.”면서 “뉴욕페스티벌은 상업적 성격이 짙은 데 반해 대구페스티벌은 문화교류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더 다양한 무대를 선보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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