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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트남전 참상 한눈에… ‘지포라이터’ 3700만원 낙찰

    베트남전 참상 한눈에… ‘지포라이터’ 3700만원 낙찰

    40여년 전 베트남전의 참상을 한눈에 보여주는 지포 라이터가 최근 미국 신시내티에서 열린 경매에 나와 무려 3만 5250달러(3700만원)에 낙찰됐다. 한때 군인들의 ‘친구’ 였던 총 282개의 이 라이터는 실제 베트남전에서 미군들이 사용했던 것이다. 다소 녹슬어 오래된 것 임을 드러내는 이 라이터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참전 군인들이 직접 새겨넣은 문구들. 이름모를 한 군인은 라이터에 ‘내가 죽으면 천국에 갈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지옥에서 살고있기 때문’(When I die I’ll go to heaven because I‘ve spent my time in hell)이라는 글귀를 남겨 당시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도 했다. 이 라이터들은 미국인 예술가 브래드포드 애드워즈가 지난 1990년대 베트남 호치민 길거리에서 구매해 모아온 것이다.    애드워즈는 “애초 이 라이터들은 내 예술 작품의 재료로 사용하기 위해 수집했다” 면서 “그러나 라이터 하나하나에 (그들의) 삶이 담겨있었다”고 밝혔다. 이어 “이 라이터를 보면 당시 생사를 넘나들었던 군인들의 마음과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은 55만 3000명의 군 병력을 파견, 그 중 5만 8000명이 사망했으며 우리나라 또한 약 5000명의 군인들이 전사했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베트남전쟁 영웅 채명신 장군, 사병 옆에 잠들다

    베트남전쟁 영웅 채명신 장군, 사병 옆에 잠들다

    28일 오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사병 묘역 고 채명신 장군(작은 사진)의 묘를 현충원 관계자가 정리하고 있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 초대 사령관을 맡았던 고인은 “파월 장병이 묻혀있는 묘역에 묻어달라”는 마지막 유언대로 이날 3.3㎡(1평) 면적의 사병 묘역에 영면했다. 장군 묘지보다 8배 작은 묘지에는 이름이 적힌 비석만 세워졌다.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 “생사고락 함께한 파월 장병 1평 사병 묘역에 묻어 달라”

    “나를 파월 장병들의 묘역에 묻어 달라.” 지난 25일 작고한 채명신 초대 주월남 한국군 사령관은 베트남전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전우들이 묻힌 사병 묘역에 묻어 달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국방부는 27일 “장군 묘역 안장 혜택을 포기하고 죽어서도 월남전 참전 전사자와 함께하겠다는 고인의 숭고한 뜻과 월남전에서의 공적을 높이 평가해 국립서울현충원 사병 묘역 안장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당초 국방부는 장례를 육군장으로 치르고, 관례대로 대전현충원의 장군 묘역(26.45㎡·8평)에 안장할 계획이었지만 고인의 뜻을 존중해 28일 발인을 마친 뒤 서울현충원의 사병 묘역(3.3㎡·1평)에 안장키로 한 것. 김형기 서울현충원장은 “고인의 묘지와 비석 크기는 일반 사병과 같다”면서 “고인이 베트남참전 유공전우회 회장 시절 추모행사를 진행해 왔던 2번 사병 묘역에 안장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관진 국방부 장관은 이날 고인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아산병원을 찾아 유족에게 정부의 결정을 공식 전달했다. 국방부에 따르면 장군이 사병 묘역에 안장되는 건 현충원 설립 사상 처음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문정인씨와 1남 2녀가 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故채명신 장군 “사병 묘역에 묻어달라” 현충원 첫 사례

    故채명신 장군 “사병 묘역에 묻어달라” 현충원 첫 사례

    ”나를 파월 장병이 묻혀 있는 사병 묘역에 묻어달라.” 지난 25일 별세한 채명신 초대 주월남 한국군 사령관이 생전 이 같은 유언을 남긴 것으로 전해졌다. 청와대와 국방부는 27일 고인이 남긴 이 유언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그 결과를 유족에게 통보했다고 국방부 관계자가 밝혔다. 별세한 장군은 현충원에 마련된 장군 묘역에 안장된다. 그러나 고인은 별세하기 전 유족에게 사병 묘역에 묻히길 희망했다. 국방부 관계자는 “장군이 자기 신분을 낮춰 사병 묘역에 안장되길 희망한 것은 현충원 설립 사상 최초”라면서 “숭고한 고인의 뜻을 받들어 서울현충원 사병 묘역에 안장하는 방안을 확정했다”고 전했다. 고인이 묻히게 될 묘지 크기는 일반 사병과 같은 3.3㎡이다. 김형기 서울현충원장은 “고인의 묘지와 비석 크기는 일반 사병과 같다”면서 “파월참전자회장을 맡아왔던 고인이 추모행사를 해왔던 2번 사병 묘역에 안장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관진 국방장관은 이날 고인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아산병원을 방문, 유족들에게 정부의 결정을 공식 전달할 계획이다. 베트남전의 영웅인 고인은 1949년 육군사관학교(육사 5기)를 졸업하고 이듬해 6·25 전쟁에 소위로 참전했다. 1953년에는 미 육군보병학교를 졸업했다. 육군 5사단장과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을 거쳐 1965년 주월사령관 겸 맹호부대장에 임명돼 1969년까지 4년 가까이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군을 지휘했다. 이후 육군 2군사령관을 거쳐 1972년 중장으로 예편했다. 군 복무기간 전투에서 세운 공로를 인정받아 태극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 등의 훈장을 받았다. 전역 후에는 스웨덴, 그리스, 브라질 대사를 역임하며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대한태권도협회 초대 회장과 월남전참전자회 명예회장도 역임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문정인 씨와 1남2녀가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별이 된 ‘베트남의 별’

    별이 된 ‘베트남의 별’

    ‘영원한 무인’으로 평가받는 채명신 전 주월 한국군사령관(예비역 중장)이 25일 별세했다. 87세. 고인은 황해도 곡산에서 항일운동가였던 아버지와 독실한 크리스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진남포 소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지만, 소련군 주둔 이후인 1947년 공산주의를 피해 가족들과 생이별하고 홀로 월남했다. 모태신앙을 지닌 그는 목사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1948년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 제5기로 임관했다. 1948년 제주 4·3사건 때 9연대로 발령받아 토벌작전에 가담했다. 6·25전쟁 때에는 육군 중령으로 한국군 최초의 유격대로 불리는 ‘백골병단’을 이끌고 신화적인 전공을 세웠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황이 급박해진 1951년 1·4후퇴 무렵, 대구에서 단 3주간 교육을 받고 전선에 투입된 백골부대는 정식 군번도 없이 적 후방으로 침투해 교란작전을 벌였다. 인민군 중장이자 빨치산 총사령관인 길원팔을 육박전 끝에 생포하기도 했다. 악전고투 끝에 1951년 4월 강릉으로 귀환했을 때 살아남은 병력은 647명 중 283명밖에 되지 않았다. 휴전 후 9사단 참모장이던 박정희 당시 대령과 인연을 맺었다. 백골병단 생존자들과 강릉을 찾은 그를 박정희 대령은 ‘죽을 줄 알면서도 이북에 들어가 게릴라전을 하니 대단하다’며 고깃집으로 데려가 위로해 주었다고 한다. 그때의 인연으로 5·16 군사쿠데타에 가담했다. 5사단장이던 그는 휘하 병력을 이끌고 동대문 근처까지 진출, 박정희 당시 소장을 도왔다. 당시 혁명 5인 위원회와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참여했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그에게 3차례에 걸쳐 자신을 도와 정치를 같이하자고 했지만, 군복이 더 좋다면서 과감히 돌아섰다. 1965년 8월 맹호부대장 겸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을 맡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기 직전인 1969년 4월 헬리콥터로 이동 도중 베트콩의 공격을 받고 국군 28연대 주둔지역인 투이 호아에서 헬기가 추락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1969년 귀국한 이후 2군사령관으로 부임했다. 1972년 박 대통령은 그를 불러 유신의 뜻을 내비치며 군부 내의 지지를 이끌어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반대했다. 결국 대장 진급에서 탈락하고 같은 해 6월 전역했다. 사실상 강제 예편이었다. 군 복무기간 6·25전쟁과 베트남전에서 세운 공로로 태극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 등의 훈장을 받았다. 베트남 최고2등훈장, 미국 공로훈장, 타이완 공로훈장, 필리핀 명예훈장, 태국 왕관훈장, 브라질 문화훈장 등 외국 훈장도 다수 받았다. 2000년 베트남 참전 전우회 회장과 2004년 사단법인 6·25참전유공자회 회장을 거쳐 같은 해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 총재 등을 맡아 활동했다. 저서로는 ‘베트남전쟁과 나(회고록)’, ‘사선을 넘고 넘어’ 등이 있다. 유족으로는 부인 문정인 여사와 1남 2녀가 있다. 장례는 육군장으로 치러지며, 28일 발인을 거쳐 대전현충원에 안장된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0호실. (02)3010-2631. 김문 선임기자 km@seoul.co.kr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별이 된 ‘베트남의 별’

    별이 된 ‘베트남의 별’

     ‘영원한 무인’으로 평가받는 채명신 전 주월 한국군사령관(예비역 중장)이 25일 별세했다. 87세.  고인은 황해도 곡산에서 항일운동가였던 아버지와 독실한 크리스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진남포 소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지만, 소련군 주둔 이후인 1947년 공산주의를 피해 가족들과 생이별하고 홀로 월남했다. 모태신앙을 지닌 그는 목사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1948년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 제5기로 임관했다.  1948년 제주 4·3사건 때 9연대로 발령받아 토벌작전에 가담했다. 6·25전쟁 때에는 육군 중령으로 한국군 최초의 유격대로 불리는 ‘백골병단’을 이끌고 신화적인 전공을 세웠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황이 급박해진 1951년 1·4후퇴 무렵, 대구에서 단 3주간 교육을 받고 전선에 투입된 백골부대는 정식 군번도 없이 적 후방으로 침투해 교란작전을 벌였다. 인민군 중장이자 빨치산 총사령관인 길원팔을 육박전 끝에 생포하기도 했다. 악전고투 끝에 1951년 4월 강릉으로 귀환했을 때 살아남은 병력은 647명 중 283명밖에 되지 않았다.  휴전 후 9사단 참모장이던 박정희 당시 대령과 인연을 맺었다. 백골병단 생존자들과 강릉을 찾은 그를 박정희 대령은 ‘죽을 줄 알면서도 이북에 들어가 게릴라전을 하니 대단하다’며 고깃집으로 데려가 위로해 주었다고 한다. 그때의 인연으로 5·16 군사쿠데타에 가담했다. 5사단장이던 그는 휘하 병력을 이끌고 동대문 근처까지 진출, 박정희 당시 소장을 도왔다. 당시 혁명 5인 위원회와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참여했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그에게 3차례에 걸쳐 자신을 도와 정치를 같이하자고 했지만, 군복이 더 좋다면서 과감히 돌아섰다. 1965년 8월 맹호부대장 겸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을 맡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기 직전인 1969년 4월 헬리콥터로 이동 도중 베트콩의 공격을 받고 국군 28연대 주둔지역인 투이 호아에서 헬기가 추락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1969년 귀국한 이후 2군사령관으로 부임했다. 1972년 박 대통령은 그를 불러 유신의 뜻을 내비치며 군부 내의 지지를 이끌어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반대했다. 결국 대장 진급에서 탈락하고 같은 해 6월 전역했다. 사실상 강제 예편이었다. 이후 스웨덴, 그리스, 브라질 대사 등을 역임했다.  군 복무기간 6·25전쟁과 베트남전에서 세운 공로로 태극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 등의 훈장을 받았다. 베트남 최고2등훈장, 미국 공로훈장, 타이완 공로훈장, 필리핀 명예훈장, 태국 왕관훈장, 브라질 문화훈장 등 외국 훈장도 다수 받았다.  2000년 베트남 참전 전우회 회장과 2004년 사단법인 6·25참전유공자회 회장을 거쳐 같은 해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 총재 등을 맡아 활동했다. 저서로는 ‘베트남전쟁과 나(회고록)’, ‘사선을 넘고 넘어’ 등이 있다. 유족으로는 부인 문정인 여사와 1남 2녀가 있다. 장례는 육군장으로 치러지며, 28일 발인을 거쳐 대전현충원에 안장된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0호실. (02)3010-2631.  김문 선임기자 km@seoul.co.kr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영웅에서 풋내기·바람둥이로… 케네디 신화 지워져도 향수 남아

    영웅에서 풋내기·바람둥이로… 케네디 신화 지워져도 향수 남아

    ‘조지 워싱턴(GW) 파크웨이’는 미국 수도 워싱턴의 포토맥 강변을 따라 나 있는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도로다. 이 도로에는 워싱턴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전설’이 얽혀 있다. 50여년 전 당시 백악관 주인이던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바람을 피울 때마다 부인 재클린이 울분을 풀기 위해 밤중에 이 도로를 홀로 드라이브했다는 얘기다. 암살 당시만 해도 ‘완벽한 대통령’으로 추앙받았던 케네디이지만 갈수록 그에 대한 새로운 증언이 쏟아지면서 부정적 측면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특히 케네디의 못 말리는 바람기와 숱한 염문설은 이제 정설이 되다시피 했다. 지난달 발간된 영국 작가 세라 브래드퍼드의 책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의 삶’에 따르면 케네디는 재클린에게 다른 여자와의 관계를 굳이 숨기려 들지 않았다.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의 비서이던 보비 베이커에게는 “매일 다른 여자를 만나지 않으면 두통이 온다”고 호소했다고 한다. 케네디에 대한 재평가는 이제 여성 편력 등 사생활을 넘어 그의 정책 전반으로 번지고 있다. 최근 케네디 암살 50주년을 앞두고 뉴욕타임스가 살펴본 미국의 24개 교과서에서 케네디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부분이 줄고 냉정한 평가가 늘었다. 1968년 고등학교 교과서에서는 케네디를 비극의 영웅이자 자신감과 희망으로 미국의 미래를 바꾸려 했던 대통령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1987년 교과서에서는 케네디가 미화된 부분이 있으며 재임 기간 동안 이룬 입법적 성과는 미미하다고 평가했다. 케네디의 업적으로 꼽혔던 ‘쿠바 미사일 위기 해결’과 관련, 1968년 교과서에서는 케네디의 강인함과 자제력, 힘의 사용에 대한 정확한 이해력의 결과로 기술했다. 하지만 1983년 교과서에서는 케네디의 승리가 아니라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소련 내 강경세력에 의해 축출된 데 따른 어부지리였다는 점에서 케네디의 업적이 공허하다고 평가했다. 베트남전과 관련해서도 1980년대 초반만 해도 베트남전에서 미국이 이길 가망이 없자 케네디가 미군 철수를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해제된 기밀문서에서는 케네디가 베트남전 확전 의지를 갖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케네디가 흑인 시민권을 보장한 연방 민권법 제정에 소극적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이러한 시류를 반영하듯 케네디는 암살 40주년이었던 2003년 CNN 여론조사에서 에이브러햄 링컨과 함께 ‘가장 위대한 대통령’ 공동 1위에 꼽혔으나 최근 뉴욕타임스 여론조사에서는 로널드 레이건, 링컨, 빌 클린턴에 이어 4위로 밀렸다. 워싱턴포스트(WP)는 “케네디에 관한 중앙정보국(CIA) 비밀문서 100만건 중 상당수가 2017년 10월 26일 이후 해제된다”며 ‘케네디 신화 벗기기’가 계속될 것임을 예고했다. 하지만 케네디에 대한 재평가와는 별개로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케네디가 미국인들의 가슴속에 강렬한 인상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은 일종의 미스터리다. WP의 한 칼럼니스트는 “케네디의 진보적 이상과 프런티어 정신이 갑작스러운 암살로 인해 미완으로 끝난 데 따른 아쉬움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젊고 매력적인 대통령이 충격적인 암살로 갑자기 곁을 떠난 데 따른 비극적 상실감과 연민 때문”이라는 보통 미국사람들의 분석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워싱턴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 영웅에서 풋내기·바람둥이로… 케네디 신화 지워져도 향수 남아

    영웅에서 풋내기·바람둥이로… 케네디 신화 지워져도 향수 남아

    ‘조지 워싱턴(GW) 파크웨이’는 미국 수도 워싱턴의 포토맥 강변을 따라 나 있는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도로다. 이 도로에는 워싱턴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전설’이 얽혀 있다. 50여년 전 당시 백악관 주인이던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바람을 피울 때마다 부인 재클린이 울분을 풀기 위해 밤중에 이 도로를 홀로 드라이브했다는 얘기다. 암살 당시만 해도 ‘완벽한 대통령’으로 추앙받았던 케네디이지만 갈수록 그에 대한 새로운 증언이 쏟아지면서 부정적 측면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특히 케네디의 못 말리는 바람기와 숱한 염문설은 이제 정설이 되다시피 했다. 지난달 발간된 영국 작가 세라 브래드퍼드의 책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의 삶’에 따르면 케네디는 재클린에게 다른 여자와의 관계를 굳이 숨기려 들지 않았다.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의 비서이던 보비 베이커에게는 “매일 다른 여자를 만나지 않으면 두통이 온다”고 호소했다고 한다. 케네디에 대한 재평가는 이제 여성 편력 등 사생활을 넘어 그의 정책 전반으로 번지고 있다. 최근 케네디 암살 50주년을 앞두고 뉴욕타임스가 살펴본 미국의 24개 교과서에서 케네디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부분이 줄고 냉정한 평가가 늘었다. 1968년 고등학교 교과서에서는 케네디를 비극의 영웅이자 자신감과 희망으로 미국의 미래를 바꾸려 했던 대통령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1987년 교과서에서는 케네디가 미화된 부분이 있으며 재임 기간 동안 이룬 입법적 성과는 미미하다고 평가했다. 케네디의 업적으로 꼽혔던 ‘쿠바 미사일 위기 해결’과 관련, 1968년 교과서에서는 케네디의 강인함과 자제력, 힘의 사용에 대한 정확한 이해력의 결과로 기술했다. 하지만 1983년 교과서에서는 케네디의 승리가 아니라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소련 내 강경세력에 의해 축출된 데 따른 어부지리였다는 점에서 케네디의 업적이 공허하다고 평가했다. 베트남전과 관련해서도 1980년대 초반만 해도 베트남전에서 미국이 이길 가망이 없자 케네디가 미군 철수를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해제된 기밀문서에서는 케네디가 베트남전 확전 의지를 갖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케네디가 흑인 시민권을 보장한 연방 민권법 제정에 소극적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이러한 시류를 반영하듯 케네디는 암살 40주년이었던 2003년 CNN 여론조사에서 에이브러햄 링컨과 함께 ‘가장 위대한 대통령’ 공동 1위에 꼽혔으나 최근 뉴욕타임스 여론조사에서는 로널드 레이건, 링컨, 빌 클린턴에 이어 4위로 밀렸다. 워싱턴포스트(WP)는 “케네디에 관한 중앙정보국(CIA) 비밀문서 100만건 중 상당수가 2017년 10월 26일 이후 해제된다”며 ‘케네디 신화 벗기기’가 계속될 것임을 예고했다. 하지만 케네디에 대한 재평가와는 별개로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케네디가 미국인들의 가슴속에 강렬한 인상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은 일종의 미스터리다. WP의 한 칼럼니스트는 “케네디의 진보적 이상과 프런티어 정신이 갑작스러운 암살로 인해 미완으로 끝난 데 따른 아쉬움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젊고 매력적인 대통령이 충격적인 암살로 갑자기 곁을 떠난 데 따른 비극적 상실감과 연민 때문”이라는 보통 미국사람들의 분석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워싱턴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 [2013 국정감사] “교학사 교과서 특혜” vs “기존 교과서 반미친북”

    [2013 국정감사] “교학사 교과서 특혜” vs “기존 교과서 반미친북”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첫날 일정인 14일 교육부 국정감사는 ‘역사 교과서 국감’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이 문제에 천착했다. 국감장 주변에선 ‘역사 교과서가 국감을 들었다 놨다 한다’는 총평이 나왔다. 우편향 논란을 빚은 교학사의 고교 한국사 교과서 집필진을 증인으로 채택할지를 놓고 오전 내내 다투던 여야 의원들은 오후 3시에 가까스로 국감을 시작하는 데 합의했다. 국감용 노트북에 ‘친일독재 미화하는 교학사 교과서 검정취소’(야권) 또는 ‘좌편향 왜곡교과서 검정취소’(여당)란 시위성 스티커를 붙인 채 여야는 국감 내내 역사 교과서 문제를 놓고 첨예하게 대치했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논란의 중심에 섰던 교학사 교과서를 제외한 나머지 고교 한국사 교과서 7종이 좌편향됐다고 주장했다. 이학재 새누리당 의원은 “역사 교과서들이 오직 반이승만, 반박정희, 반미, 친북 등 네 단어를 강조하고 있다”면서 “6·25전쟁으로 인한 참상에 대해 남북한 공동 책임을 묻거나 베트남전에서 국군이 범죄를 저지른 듯 묘사하는 교과서가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이 의원을 비롯해 새누리당 의원들은 “국가적으로 통일성이 필요하니 한국사를 국정 교과서 체제로 바꾸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교과서 7종의 좌편향성 지적에 대해 서남수 교육부 장관은 “일부 좌편향이 있다”고 동의했다.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으로 발행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검인정이 아닌 국정 발행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야권은 교학사 교과서를 둘러싼 친일 논란과 교육부의 교과서 8종 전체에 대한 재검토 작업의 부당함을 집중 제기했다. 우원식 민주당 의원은 “‘친일’의 반대말은 ‘항일’이 되어야 할 텐데, 이 국감장에선 ‘친일’의 반대말로 ‘종북’을 꼽는 것 같다”고 말했다. 우 의원은 “우리 사법부가 친일 행적을 인정한 김성수에 대해 교학사 교과서는 민족 기업가 측면만 부각시키고 명백한 친일 행위를 다루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국정 교과서 전환 주장에 대해 유기홍 민주당 의원은 “뉴라이트 계열 현대사학회의 고문이자 이승만 옹호자인 유영익 국사편찬위원장에게 교과서 편찬을 맡기려는 음모”라고 일축했다.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권 폄하 발언’을 했는지를 놓고 야권의 잇따른 질문에 유 위원장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응수하자, 안민석 민주당 의원은 국감장 퇴장을 요구하기도 했다. 한편 이날 본질의가 끝날 무렵인 오후 7시쯤 여야 의원들 사이에 고성이 오갔다. 김희정 새누리당 의원이 “한 역사 교과서가 ‘출처 불명’이라며 인용한 사료가 북한 책과 연관성이 있다”고 언급하자 야당 의원들이 항의하는 과정에서다. 소란 속에서 박창식 새누리당 의원이 “북한 책이 나오니 난리네”라고 하자, 야당 의원들이 항의한 끝에 박 의원의 사과를 받아냈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 전직 美 정보요원들 스노든에 ‘내부 고발상’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무차별적인 개인 정보 수집 활동을 폭로한 뒤 러시아로 임시 망명한 전직 중앙정보국(CIA) 직원 에드워드 스노든(30)이 미 샘애덤스협회가 주는 내부 고발자상을 수상했다. 10일(현지시간)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전직 미국 정보요원들이 만든 샘애덤스협회는 지난 7월 스노든을 올해의 ‘샘애덤스 어워드’ 수상자로 선정한 데 이어 스노든에게 직접 상을 주기 위해 관계자 4명을 모스크바로 파견했다. 베트남전 당시 내부 비리를 고발한 전직 CIA 요원 새뮤얼 애덤스(1934~1988)의 이름을 따서 만든 이 단체는 정보보호 및 정보윤리 강화를 위해 힘쓴 정보 관련 전문가를 선정해 매년 상을 수여하고 있다. 2010년에는 폭로 전문 웹사이트 ‘위키리크스’를 설립한 줄리언 어산지가 이 상을 받았다. 스노든에게 직접 상을 건넨 협회 관계자들은 지난 9일 모스크바의 한 호텔에서 스노든을 만나 약 5시간 동안 작은 규모의 시상식을 치르고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대화를 나눴다고 말했다. 이들은 스노든의 상태가 좋아 보였고 현재 스노든이 러시아어와 문학을 공부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아들을 만나기 위해 10일 모스크바에 도착한 스노든의 부친 론 스노든이 이날 아들과 상봉했다고 BBC 방송 러시아어 인터넷판이 11일 전했다. 방송은 안전 문제로 인해 현지 언론이 스노든 부자의 상봉에 대해 보도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앞서 공항에서 열린 즉석 기자회견에서 론은 “지금까지 아들과 직접 접촉한 적이 없어서 아직 그의 생각을 모른다”면서도 “확신하는 것은 에드워드는 반역자가 아니며 (정보기관의 불법 활동을 공개한) 폭로자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부고] 베트남의 ‘붉은 나폴레옹’ 보응우옌잡

    베트남의 전쟁·독립 영웅인 보응우옌잡이 4일(현지시간) 수도 하노이의 군 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고 베트남군 관계자가 밝혔다. 102세. 잡 장군은 1954년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지배에 종지부를 찍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디엔비엔푸 전투를 지휘했다. 특유의 끈기와 기동력으로 프랑스군을 전멸시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 됐다. 그러나 제네바평화협정에 따라 북위 17도 선을 경계로 베트남이 남북으로 갈리면서 잡 장군은 이후 미국을 상대로 한 20년간의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을 지휘해 승리로 이끌었다. ‘붉은 나폴레옹’으로 불리는 잡 장군은 베트남전에서 패한 미국 언론조차 ‘생존하는 20세기 최고의 명장’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문화마당] 책, 아날로그적 감성 속으로/이애경 작가

    [문화마당] 책, 아날로그적 감성 속으로/이애경 작가

    일본 도쿄 서부에 시모키타자와라는 동네가 있다. 아기자기한 카페와 레스토랑이 많고 후루기라고 불리는 구제 옷과 액세서리를 파는 상점들이 한 집 건너 하나씩 장사를 하고 있는 개성 넘치는 동네다. 역 출구를 중심으로 남쪽과 북쪽 지역이 확연히 분위기가 다른데, 우리나라로 치면 홍대와 가로수길을 조합해 놓은 곳이라고 할까. 며칠 전 시모키타자와에 있는 한 북카페에 들르게 되었다. 음료를 마실 수 있는 서너 평 되는 작은 도서관인데 작가, 사진가, 문화예술가 등 스무 명의 지각 있는 지식인들이 뜻을 모아 토론과 문화 활동을 하기 위해 마련한 아지트다. 이곳에는 인종차별문제, 베트남전쟁, 공해문제 등이 중요시되던 1960~70년대의 대항문화(counter culture)에 관한 책들을 모아놓았는데, 당시 출간된 책들부터 현재 출간된 것까지 다양한 책들이 작은 공간의 세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조금 열린 문을 살짝 열고 들어가니 열띤 토론을 하던 두 여인의 시선이 내게 향한다. 학생으로 보이는 한 명은 2층 다락에서 열심히 골라놓은 책들을 읽고 있었다. 영업시간은 저녁 6시부터라 커피를 판매할 수는 없지만 책은 마음껏 읽어도 좋으니 구경하라고 하면서 주인으로 보이는 여성이 다시 조곤조곤 말을 섞는 토론에 들어간다. 잠시 뒤 다락에 있던 청년이 내려와 다시 책을 고르기 위해 손가락으로 책 목록을 훑는다. 우리나라에 있는 북카페를 몇 번 가봤고, 북카페로 포장된 프랜차이즈 카페들도 가봤지만 책들은 카페의 분위기를 우아하고 클래식하게 만들어주는 장식품의 역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해 언제나 안타까웠다. 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책을 읽기보다는 노트북을 켜놓고 공부를 하거나 업무에 관계된 일을 한다. 우리나라 한 지자체에서는 시민들을 위해 야심차게 북카페를 만들었지만, 관리가 되지 않아 정작 시민들에게는 외면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카페에 있던 운영인에게 물으니 이곳에는 책을 읽으러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토론하고, 새로운 출판 아이템을 찾아가기도 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요새 일본 젊은이들이 책을 많이 읽지 않고 스마트폰에 허비하는 시간이 많아져서 참 큰일이라며 일본의 독서 풍토 변화를 심각한 투로 내게 전달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눈에 비친 일본은 여전히 책을 읽고 있었다. 동네마다 소형서점이 살아 있고, 간다 지역의 중고서점가는 활기를 띠고 있으며, 지하철에서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을 서너 명씩은 볼 수 있다.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어 가고, 책이 사라져 가는 대한민국의 현실과 비교해볼 때 일본에는 아직도 책이 사람들 손에 살아 숨쉬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찰스 엘리엇은 ‘책은 가장 조용하고 변함없는 벗이자, 가장 쉽게 다가갈 수 있고 가장 현명한 상담자, 가장 인내심 있는 교사’라고 했다. 완연한 가을로 접어드는 요즘, 마음을 풍요롭게 만들어줄 친구 한 명을 만들면 어떨지. 책장에 꽂힌 지 몇 년이 넘은 베스트셀러도 좋고, 최근 친구에게서 추천 받은 책도 좋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차가운 액정이 아니라 손가락에 착 안기는 아날로그 종이의 향기와 감촉이니 말이다.
  • 송승헌 멜로영화 ‘인간중독’ 주연

    송승헌 멜로영화 ‘인간중독’ 주연

    배우 송승헌이 멜로영화 ‘인간중독’의 주인공을 맡기로 했다고 영화 투자배급사 뉴(NEW)가 23일 전했다. 베트남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69년, 엄격한 위계질서와 상하관계로 맺어진 군 관사 안에서 벌어지는 남녀의 비밀스럽고 파격적인 사랑 이야기를 그린다. 송승헌은 용맹함과 통솔력으로 모두의 신임을 받는 대령 ‘김진평’ 역을 맡는다. 부하의 아내를 만나 금지된 사랑에 빠져들며 흔들리는 인물이다. ‘인간중독’은 ‘음란서생’, ‘방자전’의 각본과 연출을 맡은 김대우 감독의 신작으로 10월 촬영에 들어가 내년 상반기 개봉 예정이다.
  • ‘가교 리더십’ 빛났고 ‘세일즈 외교’ 큰 성과

    ‘가교 리더십’ 빛났고 ‘세일즈 외교’ 큰 성과

    박근혜 대통령이 7박 8일간의 러시아 및 베트남 방문 일정을 마치고 11일 오후 귀국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 5~6일(현지시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선진국과 신흥국을 잇는 ‘가교의 리더십’을 발휘하며 다자외교 무대에 데뷔했다. 쯔엉떤상 국가주석의 초청으로 이뤄진 베트남 국빈 방문에서는 자유무역협정(FTA)의 조속한 체결에 합의하고 원전 등 인프라 사업 협력을 강화하는 등 적극적으로 세일즈 외교를 펼쳤다. 취임 후 첫 다자무대인 G20 정상회의에서는 정상선언문과 부속서에 창조경제와 ‘원칙이 바로 선 시장경제’ 등 이른바 ‘근혜노믹스’를 담아내고 러시아와 독일, 이탈리아, 카자흐스탄 등 4개국 정상과 양자회담을 하는 등 인상적인 활동을 펼친 것으로 평가된다. 박 대통령은 또 최근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 등 출구전략과 관련, 선진국과 신흥국 사이에 놓여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을 감안한 적절한 해법을 제시해 반영시키는 등 일종의 가교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의장국인 러시아의 요청에 따라 ‘선도발언’을 맡았고 일자리 창출을 통한 ‘포용적 성장’ 등 향후 G20이 지속적으로 다뤄야 할 의제를 제시, 주목을 받았다. 선진국과 신흥국 간 정책 공조의 장으로서 G20 기능을 강화시키는 데 박 대통령이 상당한 기여를 했다는 것이 청와대의 설명이다.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10개국 가운데 처음으로 국빈 방문한 베트남에서는 원전 수주 가능성을 높이고 내년까지 FTA를 체결키로 하는 등 세일즈 외교에서 적지 않은 성과를 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국을 ‘사돈의 나라’로 지칭하며 친근감을 나타냈던 상 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2020년까지 양국 무역액을 700억 달러까지 높이고, 각종 에너지인프라 사업에 대한 한국 기업의 참여 확대 등 세부 경제협력 방안에 합의했다. 권력서열 1∼4위 지도자들과 잇따라 회동했고 1800여개의 우리 기업이 진출한 ‘경제수도’ 호찌민시를 찾아 우리 기업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고 현지에서 겪는 애로 사항을 청취해 시 정부에 해결을 요청하기도 했다.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베트남전 파병이 빚어낸 양국 간의 ‘아픈 과거사’를 치유하기 위한 행보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베트남의 국부로 추앙받는 호찌민 전 주석의 묘소에 헌화하고 집무실을 찾음으로써 상징적으로 과거와의 ‘화해’를 시도했다. 박 대통령은 또 한복·아오자이 패션쇼에 모델로 참여하는 등 베트남인들의 마음을 얻는 ‘문화 외교’를 통해 경제협력을 극대화하는 ‘박근혜식 세일즈 외교’를 선보이기도 했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베트남은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로서의 중요성이 있다”며 “베트남이 아세안의 거점이라는 차원에서 대(對)아세안 외교를 본격 시작했다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오일만 기자 oilman@seoul.co.kr
  • [韓·베트남 수교 21년] 정상급 회담만 14차례… 전흔 딛고 경제·문화 동반자관계 확고

    [韓·베트남 수교 21년] 정상급 회담만 14차례… 전흔 딛고 경제·문화 동반자관계 확고

    ‘적국에서 사돈의 나라로….’ 한국과 베트남은 베트남 전쟁에서 서로 상대에게 총을 겨눴던 과거를 넘어 1992년 12월 수교 후 21년 동안 강력한 우방국으로 발돋움했다. 양국 교역 규모는 1992년 4억 9300만 달러에서 지난해 216억 6500만 달러로 43배나 확대됐다. 베트남에 설립된 한국 법인은 2532개사로, ‘메이드 바이 코리아’의 글로벌 생산 기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특히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베트남 결혼 이주 여성들은 양국의 상징인 동시에 우리의 다문화 사회를 이끄는 주인공이 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베트남 국빈 방문을 계기로 양국 관계의 현재와 미래를 조명해 본다.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초 미국·중국·러시아 등 일본을 제외한 4강 외교를 마무리짓고, 첫 방문지로 베트남을 선택한 것은 그만큼 전략적 핵심 거점국으로서 베트남의 위상이 크기 때문이다. 베트남은 정치적으로 동맹국인미국, 중·러에 이어 우리와 네 번째로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맺고 있는 국가다. 경제적으로는 신흥경제권인 ‘포스트 브릭스’(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중심국이고, 동남아시아 한류 열풍의 대표적인 진원지 가운데 한 곳이다. 양국은 1992년 수교를 계기로 교류 협력을 비약적으로 확대해 왔다. 한·베트남 관계는 2001년 8월 쩐득르엉 국가주석 방한 때 21세기 포괄적 동반자 관계를 수립했고, 2009년 10월 이명박 대통령과 응우옌민찌엣 국가주석의 정상회담을 통해 양국은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격상됐다. 2011년 이후 양국 외교·안보 차관 전략대화도 매년 열리고 있다. 1960~70년대 미국의 베트남전에 참전해 서로 총부리를 겨누며 무수한 사상자를 냈던 과거의 아픈 기억이 무색할 정도다. 애증의 양국 관계인 셈이다. 수교 후 정상급 회담만 총 14차례, 장관급 교류는 100차례를 넘었다. 베트남은 개혁·개방인 ‘도이모이’(쇄신) 정책을 추진하며 한국을 성장 모델로 삼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박 대통령과 9일 정상회담을 갖는 쯔엉떤상 베트남 국가주석은 세 차례나 한국을 방문했던 대표적인 ‘지한파’로 알려져 있다. 베트남은 우리의 주요 ‘사돈국’이기도 하다. 한국인과 결혼한 베트남 여성은 올해 1월 기준 3만 9000여명으로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베트남 내 한인 규모가 10만여명, 한국에 거주하는 베트남인도 12만명에 달한다. 한국과의 수교를 주도했던 부콴 전 베트남 부총리는 양국 관계를 “적으로 만나 친구가 됐고, 이제 사돈으로 한가족이 됐다”고 말했다. 베트남은 한반도 문제에 대해 중립 기조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비핵화에 대해서는 우리의 강력한 지지국이다. 베트남은 지난해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하는 등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사회주의 국가와 전통적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베트남 외교의 기본 기조에 따라 북한과는 제한적인 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 베트남은 2008~2009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 이사국을 수임할 정도로 국제 분쟁에 대해서는 유엔의 역할을 중시한다. 양국의 주요 현안은 무역 불균형 해소, 원전 등 대형 플랜트 사업 진출, 베트남 결혼이주 여성 지원 및 근로자 송출 등이다. 베트남과의 교역 규모는 수교 후 40배 이상 확대됐고, 우리의 여섯 번째 수출 시장이 될 정도로 입지가 탄탄하지만 무역 역조 현상도 두드러졌다. 지난해 한국의 베트남 수출액은 159억 달러, 수입액은 57억 2000만 달러로 격차가 100억 달러를 넘으면서 베트남 사회의 불만이 고조되는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이를 상쇄하기 위한 유·무상 원조가 확대되는 추세다. 우리의 무상 원조는 1987년 이후 지난해까지 2억 4000만 달러를 넘어섰고, 유상 원조는 한국의 47개국 대외경제협력기금(EDCF) 원조 대상국 중 비중이 21%를 차지할 정도로 최대 대상국이다. 1995년 이후 지난 7월까지 베트남에 대한 우리의 유상 원조 규모는 1조 9230억원에 이른다. 이번 박 대통령의 국빈 방문에서 최대 관심사는 원전 수주다. 베트남 정부는 2030년까지 원전 10기를 건설할 계획이고 우리는 5, 6호기 수주를 목표로 하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세일즈 외교는 당장의 구체적인 성과보다는 상대국 경제 인프라를 지원하며 물과 거름을 주는 중장기적 접근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류는 K팝, 영화 및 드라마, 게임, 애니메이션, 한식 등 전방위적으로 베트남 사회에 확산돼 왔다. 베트남은 K팝의 주요 시장이다. 베트남 TV의 한국 드라마 방영 비율이 10%로, 해외 프로그램 중에서는 70%를 넘고 있다. 한국 온라인 게임의 시장 점유율은 50%를 상회하고 있다. 정부는 베트남의 미래를 이끄는 젊은 층이 한류팬이라는 점에서 양국의 미래 관계 발전에 큰 지원 세력이 되고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10)도심재개발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10)도심재개발

    “박정희 대통령은 1973년 1월 22일 내무부 연두 순시를 마치고 장관실에서 (정일권) 국회의장, (김종필) 국무총리, (김현옥) 내무장관 등과 함께 점심을 했다. 식사를 마친 박 대통령은 정부청사 14층 장관실에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도렴동·적선동·내자동·내수동·당주동·체부동으로 연결되는 일대에 빽빽하게 들어선 한옥 밀집 지대가 눈 아래 펼쳐져 있었다. 박 대통령은 한옥 지대를 손으로 가리키면서 ‘저런 곳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장차 무슨 큰일을 하겠느냐. 빨리 재개발을 추진해서 어떤 외국의 수도에도 손색이 없도록 하라’라는 지시를 내렸다. 약간 격한 어조였다고 한다. 지시는 그날로 (장예준) 건설부 장관과 (양택식) 서울시장에게 전달됐다.”(손정목의 ‘서울도시계획이야기’)1970년대 초 서울 도심은 낮고 낡았다. 5층 이상의 드문드문 있을 정도였다. 제1차 서울 도심부 재개발이 촉발된 요인은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박 대통령의 ‘조국 근대화 꿈’이 실현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대통령의 불호령이 떨어진 지 8개월 만인 1973년 9월 6일 소공동, 서대문, 무교·다동, 을지로1가, 장교동, 도렴동, 적선동, 동대문, 태평로2가, 남창동, 서린동 등이 재개발지구로 전격 고시됐다. 이후 80년대 중순까지 20층 안팎의 빌딩이 우후죽순처럼 솟아올라 스카이라인을 올려놓게 된다. 재개발되기 전 무교동과 다동은 환락가였다. 1976년 무교동 일대에는 최고의 나이트클럽 코파카바나를 비롯한 230개의 유흥업소가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무교동과 다동, 서린동 사이를 가로지르는 청계천로를 20m에서 50m로 넓히는 과정에서 유흥업소 64개가 헐리고 대형 오피스빌딩이 신축되면서 차츰 사양길에 접어들었지만, 한창 전성기 때에는 지금의 강남 유흥가를 방불케 했다. 소설가 이병주, 시인 구상 같은 문인들이 애용했던 서린여관은 1973년 20층짜리 서린호텔로 바뀌었다. 서린호텔도 재개발이라는 시대의 트렌드를 비켜 갈 수 없었고, 1992년 지금의 청계 11이라는 오피스빌딩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통기타 가수의 산실 세시봉이 있던 스타더스트호텔 자리에는 SK서린빌딩, 한국개발리스 등이 들어서 흥청망청하던 이 동네의 옛 영화를 짐작할 수도 없게 한다. 토지와 건물 소유자, 세입 상인의 격렬한 저항을 무릅쓰고 진행된 재개발에 따라 의주로 지구에 호암아트홀(JTBC), 삼도빌딩(에이스타워)이 들어섰고, 무교다동지구에는 프레스센터와 코오롱빌딩(더 익스체인지 서울), 을지로1가에는 삼성화재빌딩·두산빌딩(하나은행 본점)이 지어졌다. 을지로2가에는 내외빌딩·중소기업은행본점·한화본사, 도렴지구에는 변호사회관(광화문 변호사회관)·로얄빌딩이, 적선지구에는 적선현대빌딩·현대상선빌딩(노스게이트빌딩) 등이 자리 잡았다. 중소 상인들을 몰아내고 삼성, 현대, SK, 롯데, 두산, 한화 등 대기업에 도심을 상납하는 형태로 귀결됐다. 대통령의 머릿속에 도심 재개발의 필요성을 절감시킨 계기는 약간 거슬러 올라간다. 1966년 10월 31일 미국 제36대 린던 존슨 대통령이 베트남전쟁 참전 7개국 정상회담을 마치고 방한했다. 환영 행사에 학생 100만명, 시민 155만명, 공무원 20만명 등 모두 275만명을 동원한다는 어마어마한 계획이 세워졌다. 정부는 방한 당일 학교, 은행, 회사, 관공서의 임시 휴무를 결정했다. 서울 시민이 350만명이던 시대에 200만명 이상이 김포공항~한강대교~용산~시청 앞 연도에서 미국 대통령 일행을 환영한 것이다. 행사장인 시청 앞 광장에는 30만명의 시민, 학생이 대기했다. 한국전쟁을 치른 나라, 베트남전쟁으로 부흥의 기회를 잡은 나라 서울로 세계의 이목이 쏠렸다. 실황중계는 35분간 이어졌는데 존슨 대통령의 연설 13분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 동안 카메라는 시청 건너편 ‘추잡하기 이를 데 없는’ 화교촌(플라자호텔 자리)과 남창동·회현동의 판잣집과 창녀촌을 비췄다. 서울 도심의 슬럼가가 전 세계로 생중계됐다. 방송을 본 재미교포 10만명이 난리가 났다. 부끄러워 못살겠다는 탄원서가 쏟아졌다. 박 대통령은 이때 도심 재개발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화교 집단촌인 소공동에서 도심 재개발의 막이 올랐다. 1882년부터 서울에 들어온 화교는 1894년 한반도의 주도권을 놓고 일본과 다툰 청일전쟁 이전까지 3000명 넘게 거주했다. 1910년 519가구 1828명으로 줄었다가 다시 조금씩 늘었다. 1970년에는 서울 거주 전체 외국인 1만 463명 중 8262명이 중국인이었다. 대부분 소공동에 모여 살았다. 화교회관 건립 등 아이디어가 속출했지만, 사업은 3년 이상 지지부진을 면치 못했다. 감정가 평당 30만원 정도의 땅을 현금 107만원을 주고 몽땅 사들인 것은 한국화약(한화) 창업주 김종희였다. 화교가 서울 한복판 차이나타운에서 내쫓기는 세계 초유의 사건이 벌어졌다. 1978년 그 자리를 병풍처럼 가리는 프라자호텔이 준공됐다. 서울 도심 재개발사업 제1호였다. 오늘날 한화금융프라자 등 북창동 한화타운 형성의 기반이 됐다. 관망하던 대기업들이 뒤질세라 재개발 전선에 뛰어들었다. 삼성생명이 태평로2가 일대의 토지를 소리 나지 않게 사들였고, 1976년 지하 4층 지상 26층짜리 삼성 본관이 건립됐다. 이어 1984년 동방생명(삼성생명) 빌딩이 완공됐다. 광화문 교보빌딩이 1984년, 남대문시장 서쪽 입구 대한화재해상보험이 1980년 속속 들어섰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는 1980년대 초반 도심부 재개발에 또 한 번의 공간혁명을 몰고 왔다. 서울은 인구 900만명의 메트로폴리스답지 않게 시가지는 초라했다. 1982년 마포로, 태평로, 종로, 을지로, 한강로 등 주요 간선도로변 42개 지구와 종로·중구의 도심지구 등 모두 95개 지구가 재개발촉진지구로 지정돼 고도제한이 풀리고 호텔, 백화점, 극장 등 대규모 위락시설의 신축이 허용됐다. 김포공항~여의도~마포로~서소문~시청까지 속칭 ‘귀빈로’가 상전벽해를 이뤘다. 유행가 속 ‘마포종점’은 증권·금융오피스빌딩 벨트로 변했다. 서울시가 1989년 펴낸 ‘도심재개발사업 연혁지’에 따르면 당시 사업이 완료됐거나 추진 중인 126개 지구의 시행 주체는 80% 이상이 대기업이었다. 그룹별로는 삼성이 삼성본관, 삼성생명, 종로타워, 중앙일보사, 삼성화재 등 6건이었다. 현대와 옛 대우, 코오롱, 롯데가 각 3건을 기록했다. 관철동 삼일빌딩에서 청계천 길 건너 을지로와 청계고가 3·1로에 접하는 을지로2가와 장교동·수하동 일대에는 180개의 건물에 인쇄소 519개, 식당 71개 등 모두 830개의 가게가 빼곡한 인쇄소 골목을 이루고 있었다. 1987년 프렝탕백화점, 한화그룹 본사, 중소기업은행 본점 등 3개 건물이 준공돼 정리됐다. 서울역 앞 양동 재개발은 옛 대우그룹의 몫이었다. 남산 서쪽 기슭에 자리 잡은 양동은 슬럼가의 대명사였다. 60년대 말 대우센터빌딩(서울 스퀘어)에 이어 1979년 힐튼호텔이 들어서면서 서울역 앞의 풍경을 바꿨다. 1994년 CJ빌딩 등의 신축으로 양동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제 3차 도심 재개발은 이명박 시장 때인 2004년 8월 도심 고도제한이 기존 고도제한선인 낙산(92m)보다 낮은 90m에서 20m 더 높은 최고 110m까지 풀리면서 지구별로 추진된 것이 특징이다. 결과적으로 세종로 서쪽 내수동과 사직동 일대에 풍림 스페이스본 등 4000여 가구의 주상복합이 쏟아졌고, 신문로에도 금호아시아나빌딩과 흥국생명빌딩 등이 우뚝 솟았다. 수하동 일대에서는 미래에셋의 센터원 쌍둥이빌딩이 교보빌딩보다 더 큰 덩치를 자랑하게 됐으며, 동국제강 사옥인 28층짜리 페럼빌딩도 이에 못지 않다. 2008년부터 100m가 넘는 25층 안팎의 대형 빌딩 신축 붐이 불붙은 곳은 청진·도렴지구·세종로 지구다. 교보빌딩 바로 뒤에 대림산업의 D타워, KT 광화문 사옥 뒤편에 KT 신사옥 올레 플렉스, 옛 한일관 자리에 GS 그랑 서울, 신문로 초입 옛 금강제화 자리에 미래에셋이 디럭스급 포시즌호텔을 경쟁적으로 짓고 있기 때문이다. 설계 도면을 보면 이들 빌딩은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과 1호선 종각역으로 거미줄처럼 연결돼 있다. 흙만 파면 유적과 유구가 쏟아지는 서울 600년의 핵심 지역인데도 그 누구도 훼손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옛 서울 보전이나 복원은 안중에도 없다. 서울시가 추진 중이던 청계천 지천 백운동천(白雲洞川)이나 중학천(中學川) 물줄기의 완전 복원도 물 건너간 셈이다. 이들 빌딩 아래를 흐르는 백운동천은 인왕산에서 청계천을 거쳐 한강으로, 중학천은 북악에서 발원해 청계천으로 모였다가 한강으로 흘러가는 한강의 35개 지천 중 하나다. 좋든 싫든 이들 빌딩이 완공되는 2014년 이후 서울 도심은 또 한 번 개벽할 전망이다. joo@seoul.co.kr
  • [부고] 현장 누빈 더닝 前CBS기자

    1970~80년대 남한과 북한의 상황 및 베트남전쟁 등을 현장에서 생생히 취재했던 브루스 더닝 전 미국 CBS 기자가 지난 26일(현지시간) 뉴욕 한 병원에서 7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고 UPI가 27일 전했다. 도쿄·베이징 특파원 등을 지내며 아시아지국장으로 활동했던 그는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사건을 비롯,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1988년 서울올림픽 등 주요 이슈들을 취재하며 한국 소식을 전 세계에 알렸다. 1979년에는 미 방송기자단의 일원으로 처음 방북 길에 올라 북한 뉴스를 최초로 보도했으며, 1981년에는 베이징지사를 개설해 초대 특파원으로 활동하는 등 35년 기자 경력 대부분을 동북아 지역에서 보냈다. 그는 특히 베트남전이 끝난 1975년 여성과 어린이 등 월남 피란민들을 구조하기 위해 다낭 군 공항에 착륙한 월드에어웨이 항공사 소속 보잉 727기에서 벌어진 아비규환의 구조 현장을 생생하게 전하기도 했다. 이 보도는 최근 미 컬럼비아대 언론대학원이 선정한 ‘100대 기사’ 리스트에 올랐다. 김미경 기자 chaplin7@seoul.co.kr
  • [씨줄날줄] 이 아이들이 무슨 죄/안미현 논설위원

    1980년대 미국은 이란의 이슬람원리주의를 견제하기 위해 이라크를 지원했다. 불리해진 이란은 이라크 북부지역 할라브자를 점령한 뒤 쿠르드족 게릴라를 지원했다. 이라크 집권세력에게 저항해온 쿠르드족을 이용해 이라크를 압박하려던 전술이었다. 위기감을 느낀 당시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은 1988년 3월 16일 할라브자에 사린가스를 살포했다. 5000명 가까이 죽고 7000여명이 다쳤다. 쿠르드인들이 ‘피의 금요일’이라고 부르는 할라브자 학살이다. 1995년 3월 20일 일본 도쿄시민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을 서두르고 있었다. 관청들이 밀집해 있는 가스미가세키역에서 지하철 출입문이 닫히는 순간, 5개 전동칸에서 검은색 비닐봉지가 동시에 터졌다. 사린가스였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발작하며 쓰러졌고 지하철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12명이 목숨을 잃고 5500여명이 다쳤다. 신흥 종교집단인 옴진리교의 소행이었다. 도쿄 지하철 참사는 전쟁이나 분쟁이 아닌 평온한 출근길에 불특정 다수를 향한 무차별 살상이었다는 점에서 더 큰 충격을 주었다. 지난 21일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 인근에서 참사가 벌어졌다. 시리아 반군과 인권단체 등은 정부군이 사린가스 등을 장착한 로켓포를 쏘아 민간인 등 1300여명이 숨졌다고 주장했다. 현지 영상에 따르면 부상자들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거나 입에 거품을 문 채 발작을 일으켰다. 그중 상당수는 어린이였다. 의료진은 “사상자 대부분이 팔다리가 경직되고 눈과 코 주위가 회색으로 변해 화학무기 노출이 의심된다”고 밝혔다. 시리아 정부군은 “안 그래도 유엔이 화학무기를 조사하기 위해 다마스쿠스에 들어와 있는데 그런 짓을 했겠느냐”며 반군 소행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누가 살포했든 화학무기 사용은 그 어떤 경우에도 용서받을 수 없는 반(反)인륜 범죄다. 화학무기냐 아니냐를 두고 논란이 있지만 우리에게도 베트남전 고엽제의 참상이 남아 있다. 소량으로도 엄청난 대량살상이 가능한 독가스의 공포 앞에서 국제사회는 1993년 화학무기를 생산하지도 사용하지도 말자는 내용의 금지협약(CWC)을 만들었다. 1997년 우리나라를 비롯해 65개국이 비준함으로써 효력이 발생했다. 시리아는 CWC에 가입하지 않았다. CWC 가입 자체가 화학무기와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CWC에 가입한 러시아와 미국 등도 끊임없이 화학무기 사용 의혹에 시달리고 있다. 오랜 인류 비극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라도 시리아의 진상은 밝혀져야 한다. 또다시 의혹으로 끝나서도, 흥분과 규탄만 남아서도 안 된다. 안미현 논설위원 hyun@seoul.co.kr
  • [19대 초선 의원-정치와 도전] (4) 민주 서영교

    [19대 초선 의원-정치와 도전] (4) 민주 서영교

    “국회의원이 되기 전에는 내가 잘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고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출마하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다.” 의정 활동 1년에 대해 서영교(49·여) 민주당 의원(서울 중랑갑)은 매우 자신 있게 말했다. 힘들지만 행복하다는 것이다. 요즘 서 의원은 몸이 두개라도 부족할 정도로 바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지난 14일만 해도 오전에 라디오인터뷰, 민주당 을지로(을을 지키는 길)위원회 회의, 베트남전 파병 용사 토론회, 위안부 수요집회 등 빡빡한 일정을 소화했다. 오후에는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자원재활용연대(고물상) 관계자들을 만나 고물상 유예기간 연장법안 처리와 재활용자원수집업 선진화촉진법 제정 문제 등을 논의했다. 그럼에도 서 의원은 “힘들다, 아프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국민들이 불편하게 느끼는 법과 행정을 편하게 바꾸는 일이 행복하고 좋다”고 말했다. 바쁜 의정 활동 가운데 당에 대한 나름의 평가도 내놨다. 서 의원은 “두번의 대선에서 패배한 민주당이 새누리당보다 지지율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라면서 “당이 하나의 주제에 집중하거나 시작한 일을 끝까지 뒷받침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당의 ‘체질’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서 의원은 민주당이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규탄 등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장외투쟁과 함께 민생을 챙기는 모습도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민과의 접촉면을 넓혀야 한다고도 했다. 그는 누구를 만나든 “서민의 영원한 다리, 서영교입니다”라고 말하고 다닌다. 입법 활동도 민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서 의원은 대기업의 어음만기일을 한 달 이내로 규제하는 어음법 개정안, 학교폭력 피해 학생이 상급학교에 진학할 때 가해 학생과 다른 학교에 배정되도록 한 학교폭력 예방과 대책에 관한 법률 개정안 등을 발의했다. 그는 “거래 대금으로 받은 어음을 ‘깡’을 할 수밖에 없다는 지역구 중소업체들의 하소연과 중학교에 가면 가해자들과 같은 학교에서 만나는 게 두렵다는 학교폭력 피해 학생의 고민을 듣고 만든 법안들”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중랑구에서만 43년을 살아 지역 사정을 속속들이 안다는 점도 유리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국회 입법정책개발 우수 의원상을 받는 등 가시적 성과도 내고 있다. 서 의원은 ‘갑을 논란’ 당시 대표적인 을(乙)이었던 남양유업대리점협의회로부터 받은 감사패를 다른 어떤 상보다도 소중하게 여긴다. 그는 “남양유업 사태처럼 결국 국회의원의 역할은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숨 쉴 구멍’을 만들어 주는 일”이라고 말했다. 서 의원은 “작은 변화만으로도 충분한 경우가 많다”면서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드는 것이 국회의원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김효섭 기자 newworld@seoul.co.kr
  • [글로벌 시대] 그리스의 한국전 참전 의의/정해문 한·아세안센터 사무총장

    [글로벌 시대] 그리스의 한국전 참전 의의/정해문 한·아세안센터 사무총장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고 갈파함으로써 인간 중심의 우주질서를 예견했다. 동시대 아테네 민주주의의 꽃을 피운 정치지도자 페리클레스는 ‘데모크라티아’라는 정치이념을 전 세계 인류에 선사했다. 그로부터 100년 후인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대왕의 동방원정 시작과 함께 인간 중심의 세계관인 헬레니즘이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민주주의와 인본주의로 대표되는 그리스 문명은 그가 정복한 페르시아에서부터 이집트, 인도 북부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대제국의 영토를 인문 고속도로로 삼아 세계 곳곳으로 전파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인류문명의 핵심가치로 자리 잡고 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민주주의와 인간 중심의 가치로 무장한 페리클레스와 알렉산더대왕의 후예인 그리스 병사 1만 581명이 한국전선에 투입되었다. 이 숫자는 2300년 전 알렉산더대왕이 4만명의 그리스 병사 호위를 받으며 페르시아 정벌에 나섰던 이후 지금까지 단일국가에 대한 그리스 파병 중 최대 규모의 병력이다. 당시 그리스 인구가 700만명 정도였음을 감안할 때 이 같은 규모의 파병 결정은 역사를 통해 면면히 이어내려온 민주주의 종주국으로서의 자부심과 이를 지키고 확산시켜야겠다는 확고한 국민적 합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2차대전 종전 이후 그리스는 1949년까지 5년간 공산세력과의 내란 와중에 국가 존망이 걸린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트루만독트린과 마셜플랜으로 대변되는 미국의 과감한 공산주의 봉쇄정책과 서유럽 재건지원정책에 힘입어 그리스는 발칸반도 전체가 공산화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있을 때 최후의 보루로서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아테네 시내 중심지 헌법광장에 서 있는 무명용사비에는 그리스군이 참전한 나라와 지역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중에 그리스어로 뚜렷이 부각되어 있는‘한국’을 만나면 잠시 숙연함에 숨을 고르게 된다. 아테네시 교외 파파고시에 2004년 세워진 그리스의 한국전 참전비에는 ‘병사에게는 어느 곳이던 무덤이 될 수 있다’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대의를 위해 전쟁터에 나가 장열하게 전사한 병사는 그 업적과 용맹으로 어느 곳에 묻혀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기억된다는 의미이다. 이 비문은 기원전 431년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 일어난 펠로폰네소스 전쟁 첫해에 희생된 아테네 병사의 장례식에서 페리클레스가 헌사한 추도사의 일부로 역사를 통해 두고두고 회자되는 말이다. 그리스 병사들이 한반도 창공에 높이 들어 휘날린 민주주의와 휴머니즘의 깃발은 전쟁의 상흔과 가난에 찌들려 있던 우리 국민들 가슴속에 희망의 불씨를 지펴주었다. 한국땅에서 지켜낸 민주주의의 승리는 그 후 동아시아 지역의 정치지형을 바꾸면서 세계를 향해 자유·민주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하고 확산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올해 한국전 정전 60주년을 맞아하여 민주주의 창조국 그리스의 한국전 참전이 가져다준 역사적 의의를 재조명해 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전은 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전 사이에서 더 이상 ‘잊힌 전쟁’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 신장과 창의력 창달이 어떤 꽃을 피울 수 있는지를 보여준 ‘명예로운 전쟁’으로 기념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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