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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의 비스마르크”헬무트 콜 총리

    ◎결단력 갖춘 “통일의 설계사”/12월 전독총선서 압승 확실 통일독일의 초대 총리자리를 차지한 헬무트 콜(60)에게 세계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불과 1년전까지만 해도 별다른 인기를 얻지 못하던 콜은 20세기 후반 최대의 사건으로 일컬어지는 통독을 솜씨있게 요리해 냄에 따라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에 비견되고 있다. 비스마르크가 1871년 분열된 독일을 힘으로 통일시킨데 반해 콜은 분단된 독일을 빈틈없는 외교능력으로 통일시킨 것이다. 독일이 통일된 요인으로 소련에서 고르바초프가 등장한 이후 무르익은 동서 데탕트와 지난해 가을 동구를 쉽쓴 민주화혁명 등 외부적인 요소를 물론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호기를 놓치지 않고 통독으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콜 총리를 중심으로 한 서독 지도자들의 능력 때문이었다. 콜은 동독이 지난해 11월9일 베를린장벽을 민주화의 열풍으로 붕괴시킨 뒤 곧 통독 10개항을 발표,통독을 국제무대에 핫이슈로 부각시키면서 기정사실화 했다. 또 콜은 독일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던 미ㆍ소ㆍ영ㆍ불 등2차대전 전승국 지도자들을 설득시키기 위한 외교노력을 겐셔 외무와 함께 강화했다. 그는 지난 7월16일 소련을 방문,고르바초프로부터 『통일독일의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 허용』이라는 양보를 얻어냄으로써 통독에 대한 최대의 걸림돌을 제거할 수 있었다. 콜은 지난 82년 총리가 된 것도 행운이었다. 당시 집권사민당과 연정을 이룬 자민당의 일부 의원들이 슈미트 전총리의 정책에 대한 반발로 콜 진영으로 합세,불신임안을 제출함으로써 13년간의 중도 좌파연정을 붕괴시켰기 때문. 그러나 지난 47년 기민당에 입당한뒤 69년 라인란트 팔츠주의 최연소 지사,73년 기민당 최연소 총재 등 화려한 기록을 세우기도 한 역사학박사인 콜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그는 지난 76년 총선에서 총리에 도전했으나 실패했으며 80년에는 동맹관계에 있는 기사당의 슈트라우스에게 총리후보를 빼앗겼으며 76년ㆍ83년 총선시에는 출신지역구에서 탈락,비례대표로 구원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었다. 신장 1백92㎝ 체중 1백30㎏의 거대한 체구를 지닌 그는 경제ㆍ국방전문가인 슈미트 전총리에 비해 특별한 전문분야도 없으며 정치력도 부족하다는 혹평을 받았다. 그의 인기는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30%선을 밑돌아 집권기민당 내에서도 비판의 소리가 높았었으나 통독을 이룸으로써 그의 위치는 확고해져 57년만에 치러지는 오는 12월2일의 전독총선에서도 라이벌인 라퐁텐 사민당 총리후보(46)를 물리치고 승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 새 「역사의 장」여는 통독의 현장에서/이기백특파원

    ◎“이제 독일은 하나”… 거리마다 샴페인 축제/“우리는 자랑스런 독일인”… 얼싸안고 환호/통일 알리는 종소리에 목메어 국가합창/동ㆍ서베를린 잇는 마라톤엔 2만5천명 참가 그것은 새 역사의 장을 여는 감격적인 축제였다. 성당과 교회의 종이 일제히 울려 퍼지면서 거리를 메운 시민들은 저마다 「아인하이트 아인하이트」(통일)를 외쳐대며 민족재결합의 기쁨을 만끽했다. 분단의 상징이었던 브란덴부르크 문 주변에 몰려든 시민들은 손에 손을 잡고 자유ㆍ평화ㆍ정의를 강조하는 국가를 목이 터져라고 불렀으며 통일을 축복하는 폭죽이 밤하늘을 현란하게 수놓았다. 이제 독일은 하나,통일축제가 시작되는 2일 자정부터 4일까지 베를린 시내에서는 기념행사가 다채롭게 펼쳐지며 금세기들어 3번째 세워지는 새 독일의 탄생을 축복하고 밝은 미래를 기원했다. ○…통일축제의 서막을 알리는 성당과 교회의 종소리가 2일 0시 일제히 울려퍼지자 축제행사가 중점적으로 진행되는 운텐 덴린덴거리와 6월17일 거리에 나와 있던 시민들은 주먹을 공중으로 치켜올리며 환호했으며 각 가정에서는 샴페인을 터뜨려 이 순간을 축복했다. 운텐 덴 린덴 거리에 부인ㆍ여동생과 함께 나온 지그마 캡슐씨(35)는 『통일이 이같이 빨리 이뤄질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감격스럽고 독일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럽다』며 가족들과 얼싸안고 기뻐했다. 동베를린에 산다는 에버린 쾨러양(22)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하늘을 수놓은 폭죽의 섬광처럼 우리는 빛을 발할 것입니다』며 감격스러워했다. 10월3일이 「통일의 날」로 국경일이 됨에 따라 독일국민들은 매년 이날 휴무하게 되며 지금까지 동서독이 별도로 통일을 기원하던 기념일은 폐지된다. 동독은 지금까지 건국일인 10월7일을,서독측은 동독에서 공산정권에 항거해 시민들이 일제히 궐기했던 6월17일을 기념해 공휴일로 지정했었다. ○인산인해 교통마비 ○…베를린은 역사적인 백림마라톤대회가 때마침 통일축제 직전인 30일 열려 축제분위기를 더욱 돋웠다. 60여개국에서 2만5천여명의 선수가 참가한 이번 대회의 코스는 독일통일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서베를린 샤로텐부르크문을 출발,6월17일 거리를 지나 동베를린지역인 칼 막스거리를 거쳐 브란덴부르크 문과 통일전 체크 포인트였던 찰리 검문소를 통과하는 등 반세기만에 전 베를린 시가지를 질주해 시민들을 열광시켰다. 이 때문에 독일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과 각국의 취재기자ㆍ외국관광객으로 숙박난ㆍ교통난을 가중시켰으며 도심은 거리를 나다니기조차 힘들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호텔과 여관이 초만원을 이루자 베를린시당국은 TV방송을 통해 시민들에게 민박을 강조하는 계몽을 펼치고 있으며 축제기간중 지하철을 24시간 운행하는 한편 역주변과 광장등에서 노숙하는 행위를 당분간 단속하지 않기로 해 텐트족의 천국을 이루기도. ○…통일축제의 절정은 몸퍼 서베를린 시장이 2일 상오 9시 시의회에서의 통합을 선언하는 행사. 몸퍼시장은 이 자리에서 독일과 독일인은 영원히 하나이며 세계평화에 기여할 것임을 다짐. 이어 몸퍼시장은 연합군 사령관들에게 베를린의 자유수호에 기여한 노고를 치하하고 연합군 사령관의 고별사에 이어 곰을 상징하는 베를린기가 시장에게 되돌려 진다. 이에 앞서 독일분단 이후 베를린 시정을 담당했던 연합군 사령관 레이먼드 하드도크(미국),로버트 콜베트(영국),프랑세스 샹(프랑스)장군 등은 1일밤 마지막으로 브라보검문소에서 간단한 철수기념식을 갖고 장병들을 위문. ○일부선 통일반대 시위 ○…통일축제가 시작되고 있는 가운데 브란덴 부르크문 광장에서는 「우리는 통일 반대한다」는 플래카드를 든 3백여명의 전동독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여 눈길. 이들은 통일이 된 뒤 사회주의 국가에서 누려온 정부 복지시책의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된다는 「불이익」과 불확실한 통일후의 생활을 우려해 연일 이곳에서 통일반대시위를 벌여왔는데 이날도 축제가 시작되기 전부터 광장의 한 귀퉁이에서 시위를 강행. 그러나 통일을 환영하는 군중들의 환호에 이들의 주장은 더욱 초라하게 보였으며 1일로 독일 경찰에 편입된 전동독경찰관들이 이들의 데모를 보호. ○「통일의 횃불」기념촬영 ○…역사적인 통일이 이루어짐에 따라 지난 40여년동안 독일 통일의 열망을 불태우던 테오도르 호이스 광장의 횃불도 꺼지게 된다. 서독 초대대통령 테오도르 호이스(Theodor Heuss)가 취임하면서 독일국민의 통일염원을 북돋우기 위해 광장 한가운데 마련됐던 통일횃불은 냉전시대의 파란만장했던 베를린의 과거를 지켜보며 베를린 시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일깨워온 명소. 「Freiheit(자유)ㆍRechts(정의)ㆍFrieden(평화)」라고 새겨진 대리석 받침대 위에서 꺼질 줄 모르고 타오르던 희망의 횃불이 꺼지는 것을 아쉬워하는 베를린시민들은 연일 이곳에 몰려들어 헌화를 하고 기념사진을 찍기도. 1일 가족과 함께 통일횃불을 배경으로 가족들과 사진을 찍던 헬무트 센켄씨(52)는 『호이스의 염원은 드디어 성취돼 우리에게 기쁨을 안겨주었으나 횃불이 소멸되는 것은 슬픈 일』이라며 통일의 횃불은 독일인들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표시. ○동독군복등 기념판매 ○…독일의 신문들과 방송들은 대부분 차분한 자세로 베를린의 분단에서 통일에 이르는 과거를 재음미하며 통일행사와 관련한 프로그램을 시민들에게 소개. TV는특히 통일이후의 국내ㆍ세계정세를 논의하는 좌담회를 방영하는 가운데 ARDㆍZDF 등 전국적인 방송망을 갖고 있는 TV는 60년대초 케네디 전 미국대통령이 베를린을 방문,『이히빈 베를리너(나는 베를린시민)』이라고 연설하며 소련과 동독의 봉쇄로 고난을 겪고 있던 베를린시민들에게 용기를 북돋웠던 기념비적인 장면을 보여줘 감회를 새롭게 하기도. 또 통일축제기간동안 재빠른 상업주의가 극성을 부려 2차대전때 파괴된 상흔을 간직한채 도심 한가운데 을씨년한 모습을 하고 서 있는 카이저 빌헬름교회 주변 광장에는 상인들이 전 동독군인의 모자와 제복,계급장을 기념품으로 팔고 있는가 하면 베를린의 한 회사는 베를린 봉쇄때 시민들의 생필품을 공수했던 C46수송기를 임대해 축제기간동안 프랑크푸르트에서 베를린 템펠로프 공항까지 기념비행을 광고하면서 손님들을 끌기도. ○교민무용단 공연도 ○…이번 행사에는 우리나라 교민여자 무용단인 「아리랑무용단」이 참가,2일 하오 11시부터 동베를린 오페라하우스 앞 베벨프라츠에서 공연을 할 예정이어서눈길. 무용단 관계자들에 따르면 베를린시 당국에서 축제참가 초청장을 보내와 2차대전으로 인한 마지막 분단국인 한국이 참가하는 것이 큰 의의를 가질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 참가를 결정했다는 것. 20여명으로 구성된 한국무용단은 이날 공연에서 한복으로 차려입고 30여분동안 우리나라 전통춤을 공연할 예정인데 통일의 현장에서 「통일기원춤판」이 한바탕 벌어질 것으로 보여 관심이 집중. ○…통일축제는 승전 4대국 수뇌들이 참석하지 않게됨으로써 당초 계획과는 달리 순수한 독일인 자체의 축하행사로 진행될 전망. 통일축제의 공식행사는 2일 하오 5시 동서베를린시 의회가 개최됨으로써 시작되며 4일 상오 9시 베를린에 있는 라이흐스탁(국회)에서 동서독 합동의회가 열림으로써 끝을 맺으나 기념공연 등 각종 행사는 시내 곳곳에서 잇따라 열린다. 축제의 절정은 3일의 동서베를린 경계선에서 펼쳐질 시민잔치와 국회건물의 통일독일기 게양식. 국회에 통일독일기가 게양되는 것과 동시에 동서베를린의 모든 공공건물과 대형건물,차량들에도 독일기가 게양되거나 꽂혀진다.
  • 동서독 통합일지

    1945.5=연합군,베를린 점령. 1948.6=소련,동베를린 봉쇄. 1949.5=독일연방공화국(서독)수립. 1949.10=독일민주공화국(동독)수립. 1951.9=동서독 교역을 공식규정하는 베를린협정 체결. 1955.5=서독,나토가입. 1955.5=동독,바르샤바조약기구 가입. 1961.8=동독,베를린장벽 구축. 1969.10=빌리 브란트 서독총리,무력불사용 조약체결 제의. 1970.3=양독 첫 정상회담(서독 브란트,동독 슈토프). 1972.12=양독 기본조약체결,관계정상화. 1973.9=양독 유엔동시가입. 1974.3=상주대표부 설치합의. 1981.12=슈미트 서독수상 동독방문 1987.9=호네커 동독서기장 서독방문 1989.10.18=호네커 동독서기장 사임. 1989.11.9=베를린장벽 붕괴. 국경전면 개방. 1990.2=콜(서독),모드로프(동독)총리 정상회담. 1990.3.18=동독총선 1990.5.14=콜(서독),메지에르(동독)정상회담 7월1일 경 제ㆍ사회통합 합의. 1990.5.18=경제ㆍ사회통합 협정조인. 1990.7.1=경제ㆍ사회통합. 1990.7.16=소련,통일독일 나토가입 허용. 1990.8.23=동독,10월3일을 통합일자로 하는 통독결의안 가결. 1990.8.31=동서독 통일조약 체결. 1990.9.12=통독 「2+4」협정 체결.
  • 동서독 내일 통일/41년 만에 공산동독 소멸

    【베를린 연합】 10월3일 0시(한국시간 상오 8시) 독일 방방곡곡의 교회탑마다에서 종소리가 울리면서 45년간에 걸친 독일 분단의 시대는 공식으로 막을 내린다.〈관련기사 5면〉 그리고 동독이라는 국가가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히틀러의 제3제국이 무너진 뒤 미국과 소련·영국·프랑스 등 4대국이 누려왔던 베를린 점령권도 상실된다. 이날 베를린의 구제국의회 의사당 앞에서는 바이츠제커 서독 대통령,헬무트 콜 총리,발터 몸퍼 베를린 시장 등 국가요인 및 정치지도자는 수많은 시민들과 함께 독일국가가 연주되는 가운데 역사적인 통일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이에 앞서 2일 하오에는 동독 인민의회와 로타르 드메지에르 총리가 이끄는 정부가 해산식을 가지며 이로써 지난 49년 10월 소련에 의해 세워진 동독국가는 만 41년 만에 완전히 소멸,점차 망각 속에 파묻혀 버릴 것이다. 통일 기념 행사를 갖고 하나가 된 독일은 4일 제국의회 의사당에서 통합의회의 첫회의를 가지며 이 자리에서 콜 총리는 통독 정부의 새 출범을 공식 선언한다. 이로써 독일은 지난 1871년 비스마르크에 의해 사실상 최초의 통일을 이룬 이래 역사상 2번째로 민족통일을,그리고 1차대전 후의 바이마르공화국,1949년 냉전의 절정기에 수립된 동서독에 이어 금세기에 들어서 3번째의 새 국가를 성취하게 된다.
  • 벤트기사와 트라비기사/이기백 정치부차장(오늘의 눈)

    지난 29일 저녁 베를린 중앙역에 도착한 즉시 역앞에서 벤츠택시를 타고 동베를린지역으로 향했다. 사회주의 체제가 조금이라도 남아있을 때 그 색깔을 또렷이 기억해 두고 싶은 충동때문이었다. 그러나 장벽이 두껍게 서있던 포츠담광장 한쪽에는 그 잔해가 일부 남아있을 뿐 나름대로 판문점을 넘는 감회를 기대했던 것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5분여 불도저가 정지작업을 하고 있는 건너편 모퉁이까지 갔다오니 30대 벤츠택시기사가 『벤츠회사가 최근 건물을 지으려고 장벽이 서있던 지역일부를 사들여 공사를 하고 있는 중』이라고 담담하게 설명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조국은 하나」라는 높은 목청과 통일열기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통일의 현장이 너무나 싱겁게 느껴져 은근히 화가 나기까지 했다. 무언지 모를 착잡함을 누르며 그들의 표현대로 「재결합」(Die Wiedervereinigung)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벤츠기사에게 물었더니 『지 마흐트미히니히츠』(나와는 상관없다)라고 말했다. 동베를린 지역을 몇군데 돌아보았으나 지난해 11월장벽이 제거되던 때 충천했던 환호의 함성은 어디서도 들어볼 수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동독제 트라비택시를 이용해야만 했다. 40대중반의 동베를린 택시기사에게 요즘 생활이 어떠하냐고 물었더니 한동안 고전을 금치 못하다가 두달전 동서 양쪽 택시조합에서 자기 지역에서 손님을 태우고 상대지역까지 갈 수는 있으나 상대지역에서는 손님을 태울 수 없도록 약정을 한 이후 종전 수준을 회복했다고 설명했다. 손님들이 벤츠택시만 선호하는 바람에 서쪽 기사들은 한동안 호황을 누렸지만 상대적으로 동쪽 기사들은 수입이 줄어 고전을 금치 못했으나 상대방 기득권을 존중하는 약정으로 통일 후유증을 현명하게 해결한 것이다. 그러나 동독기사는 「재결합」이후의 상황은 전혀 예측할 수 없다고 담담히 말했다. 그들에게 통일은 열망이 아니라 이제 현실이었다.
  • 「분단 41년의 벽」누가 허물었나(새 독일 탄생:2)

    ◎꾸준한 교류가 조기통일의 길 열어/동구변혁을 양독 재결합 호기로 이용/대소 경원등 통해 주변국의 우려 불식 불과 1년 전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독일보다는 한반도의 통일이 먼저 이루어질 것이란 생각을 했다. 독일이 통일되는 것을 원치않는 주변 국가들의 입장을 지나치게 염두에 둔 생각이었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독일의 통일은 하루 아침에 누구도 거스릴 수 없는 대세가 돼 버렸다. 이렇게 거센 통일의 큰 흐름을 이루어낸 원동력은 과연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독일통일의 원동력을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한다. 하나는 소련을 시발로 동유럽 전역을 휩쓴 개혁과 개방의 흐름이 통독의 외적 장애요인들을 제거함으로써 독일통일의 움직임들이 비로소 가능케됐다는 설명이다. 또다른 하나는 통독을 기본적으로 동서독 국민들의 계속된 통일노력의 결과로 보는 시각이다. 물론 외적 환경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동독 국민들의 공산정권에 대한 저항,그리고 서독경제력에 대한 매력,여기에 덧붙여 양쪽 국민들이 꾸준히유지해온 민족적인 동질의식 등이 통독을 가능케한 주 원동력이었다는 것이다. 역사적인 베를린장벽 개방을 단행한 에곤 크렌츠 전 동독 공산당서기장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당시 소련이 자신의 장벽개방조치를 전혀 반대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이 통독을 기본적으로 「유럽공동의 집」이란 큰 테두리안에서 받아들이겠다는 입장이었다는 것이다. 소련의 이러한 입장변화가 없었다면 통독은 사실 극히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외적 환경의 변화를 감안하더라도 독일국민들이 한 역할이야말로 통일을 이루어낸 결정적인 원동력이었음을 부인키 어려울 것 같다. 제일 먼저 꼽을 수 있는 공로자들은 지난해 5월부터 반년여에 걸쳐 서방으로 탈출해나간 수십만의 동독시민들이다. 전재산과 생활기반을 하루아침에 버리고 떠남으로써 이들은 가까이는 베를린 장벽을 허물어냈고 멀리는 흡수통합이라는 독일형 통일방식의 기틀을 잡은 셈이 됐다. 이들의 탈출은 동독의 사회주의 40년이 실패했음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준 드라마였다. 10월과 11월 동베를린,라이프치히 등 동독 전역에서 벌어진 반정부 시위 또한 통독과정의 큰 분수령이었다. 수많은 반정부 단체들이 지하활동을 계속했고 동베를린의 알렉산더광장에서는 매주 월요일이면 공산당 타도집회가 개최됐었다. 반정부 집회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히 통일을 외치는 분위기로 바뀌어 갔다. 길거리에서 공산당 타도와 통일을 외치는 국민들의 요구는 동독정부는 물론 주변국 누구도 대항키 힘든 큰 힘을 보여주었다. 역사는 소수의 지배층이 아니라 국민의 힘에 의해 움직인다는 사실을 동독국민들은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동독국민들은 지난 3월 분단 이래 처음 실시된 자유총선에서 조기 통일을 슬로건으로 내건 우파연합에게 50%에 가까운 압도적인 지지를 보냄으로써 통일과정을 다시 한번 앞당겨 주었다. 당시 우파연합의 압승에 대해 장벽개방 후 날로 악화되는 경제사정에 지친 동독국민들이 서독 마르크화를 선택한 것이라는 분석들이 많이 나왔었다. 동독 마르크를 가능한한 1대1의 비율로 서독 마르크로 바꾸어 주고동독경제의 조속한 부흥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콜 서독총리의 지원유세가 크게 주효했다는 설명도 나왔다. 그러나 동독 유권자들이 공산정권을 몰아내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재야세력까지 제치고 우파연합에게 표를 몰아준 데는 이러한 경제적인 고려뿐만 아니라 당시 국내외 정세의 호기를 놓치지 않고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민족적인 공감대가 그들 사이에 널리 퍼졌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통독과정에서 동독국민들이 보여준 이러한 적극적인 역할을 근거로 어떤 학자들은 통독을 동독이 서독에 「흡수」된 것이 아니라 「가입」했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민족자결의 원칙에 입각해 장기적인 안목으로 통일을 위한 제도적인 뒷받침을 꾸준히 마련해온 서독정부의 노력도 크게 돋보인다. 서독은 독소 불가침조약,1975년 헬싱키 선언,그리고 동서독 기본조약 등에서 이 원칙을 관철,국경선이 민족자결 원칙에 입각해 평화적으로 변경(통일)될 수 있다고 명시했다. 이로 인해 통일은 서독 기본법 23조에 의거,동독이 서독으로의 편입을 선언함으로써 자동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게 됐다. 인적ㆍ물적 교류를 통해 사회적인 통합을 이루고 그 다음 경제통합,마지막으로 정치ㆍ군사통합을 이룬다는 서독의 기능주의적 통일정책이 결실을 맺었다고도 할 수 있다. 초기 서독정부의 통일정책은 이산으로 인한 양쪽 국민들의 인간적인 고통을 줄이기 위한 인적 교류에 모든 역점을 두어 왔었다. 동방 정책입안자들은 일찍이 동독정부는 통일을 원치 않지만 동독 국민들은 통일을 원한다고 판단,이같은 인적교류를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72년의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 이후 이러한 인적,물적교류는 꾸준히 증가돼 왔다. 물적교류는 사실상 서독의 동독에 대한 경제원조의 성격이 강했다. 서독은 주택,도로건설,환경보호 등 앞으로 동독의 재건에 소요될 수천억 달러 상당의 소위 통일비용도 선뜻 부담하겠다고 나섰다. 동독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서독의 튼튼한 경제력 또한 통독의 무시못할 공로자인 셈이다. 독일의 분단은 지난 40여년간 동서냉전의 상징같은 성격을 같고 있었다. 이 냉전이 와해돼가는 과정에서 서독은 끝까지 소련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엄청나게 신중한 자세를 유지했다. 소련의 경제재건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고 동독 주둔 소련군의 철수비용까지 부담하겠다고 했다. 중부유럽에서 거대 독일의 등장에 대해 불안한 시선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 주변 국가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배려도 돋보인다. 폴란드에 대해서는 현 독일­폴란드 국경을 준수키로 약속했다. 독일의 분단이 그랬듯이 독일통일도 넓게 보면 유럽 내지 세계질서의 큰 테두리 안에서 그 단서가 잡힌 것임을 부인키 어렵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역시 돋보이는 것은 이 주변 정세의 호기를 놓치지 않고 통일로 연결시켜낸 독일민족 내부의 힘이다. 이 힘을 바탕으로 앞으로 이루어낼 독일민족의 「제2의 도약」에 전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 역사속으로 사라진 동독 41년

    ◎국민소득 8천4백억불… 동구최강 공업국/73년 서독과 유엔가입,1백30여국과 수교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은 건국 41돌을 불과 나흘 앞둔 1990년 10월3일 0시를 기해 역사속으로 영원히 사라진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통일독일이 탄생함에 따라 동독은 지도상에서 다시는 찾아볼수 없게 된 것이다. 나치독일이 2차대전에서 패망한후 동독땅에 재빨리 진주한 소련군이 49년 10월7일 수립한 공산정권,동독은 40여년의 냉전시대를 살며 완고한 공산주의의 아성이었다. 정통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집착,사회 구석구석에 그림자를 드리운 비밀경찰 그리고 철저한 강압통치의 상징이었던 베를린장벽 등은 그동안 동독을 대표해오던 표상이었다. 엄격한 계획경제와 국민의 복종을 대가로한 동독경제는 한때 1천6백50만 동독인들의 생활수준을 동구 최고로 끌어 올렸고 국제스포츠무대에서는 스포츠 강국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국민총생산 1천7백49억달러,1인당 국민소득 8천4백달러로 생산성과 생활수준은 동유럽 제 1위. 동유럽에서 소련ㆍ체코와 더불어 가장발달된 공업국이며 세계 10대 강대국이기도 했던 동독은 86년 4월의 제11차 당대회에서 공업 22∼24%,실질임금 21∼22%등을 증가시키기 위한 경제 5개년계획(86∼90)을 채택하기로 했다. 마셜플랜의 원조로 자립기반을 닦은 서독과는 달리 프러시아적인 맹렬기질로 전쟁의 페허위에 공장을 짓고 아파트를 세웠던 동독은 59∼60년에는 다수의 숙련 노동자들이 서독으로 탈출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61년 8월 베를린장벽을 구축했다. 소련과의 밀착을 외교의 기본으로 삼아 동유럽 공산국가 중에서도 가장 소련에 충실한 나라였던 동독은 50년에는 코메콘에,55년에는 바르샤바조약기구에 가맹하여 유력 멤버로서의 소임을 다해왔다. 그러나 대 서독관계가 호전되기전인 71년 이전까지 국제무대에서는 외교적으로 겉돌았었다. 그후 73년 서독과 더불어 유엔에 가맹하였으며 지금까지 1백30여개국과 국교를 수립,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당당한 자리를 차지해왔다. 동독의 뿌리는 45년 나치가 연합군에게 항복하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련에서 교육을 받은 일단의독일공산주의자들이 전쟁중 베를린으로 들어와 임시정부를 수립하면서 비롯된다. 울브리히트는 49년 독일땅에 세워진 최초의 「사회주의노동자ㆍ농민국가」의 지도자가 됐으며 그는 토지개척과 주요공업의 국유화를 통해 전후동독을 부흥시켰으나 71년 실각됐다. 그후 에리히 호네커가 후임자로 당서기장에 피선돼 18년동안 집권했다. 동독에 반체제세력이 자라기 시작한 것은 오래전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화주의경제의 취약점이 드러나고 서독과의 현격한 격차가 생기면서 부터 였다. 그러한 국민의 불만속에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이 지난해 10월7일 동독건국 40주년에 즈음해 동독을 방문,호네커 서기장에게 「개혁」을 권고한것이 시민봉기의 도화선이 됐다. 시민봉기로 호네커가 실각하고 11월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역사적 순간을 맞는다. 후임자인 에곤 크렌츠서기장은 이어 베를린장벽을 포함한 전국경의 개방을 선언,동독은 스스로 소멸의 길을 택했다.
  • 유럽중심부에 거듭난 「게르만」

    ◎1990년 10월3일 통일… 새독일의 위상/인구 8천만ㆍGNP 1조3천억불의 부국/향후 10년간 국부 두배로… 「제2기적」 기대 1990년 10월3일 0시. 동서로 갈리어 반세기를 살아온 게르만민족이 45년만에 다시 하나가 되는 역사적 순간이다. 통독은 전후 미소를 축으로 한 냉전체제의 종언이자 새로운 탈냉전시대를 출범시키는 출발이기도 하다. 이제 독일 민족은 지나간 분단의 세월속에 쌓인 한과 고통을 라인강물에 띄워보내고 흑적황 3색의 독일깃발을 다시 유럽 복판에 세우는 환희의 순간을 맞고 있는 것이다. 통독은 유럽,나아가 세계질서의 재편을 불가피하게 하고 있다. 동구와 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들의 일당체제붕괴에 이어 바르샤바조약기구의 와해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으며 NATO의 기능도 군사조직에서 정치조직으로 변모할 기미를 보이고 있다. 이와 함께 「하나의 유럽」을향한 국제질서 재편작업이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렇다고 통일독일의 장래가 모두 장미빛으로 밝은 것만은 아니다. 아직도 넘어야할 고비가 많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진지 1년도 못돼,그것도 수십만명의 미국과 소련 군대가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통독을 실현시킨 패전 독일민족의 능력을 바라보는 우리의 감회는 실로 착잡하다. 이같은 역사적 순간을 맞아 서울신문은 김진천 파리특파원과 이기백 정치부기자를 역사의 현장에 특파,통독과정을 살펴보고 유럽의 새질서 태동을 점검해 보기로 한다. ▷인구ㆍ영토◁ 통일독일의 인구는 서독의 6천1백만명과 동독의 1천6백60만명을 합해 총 7천7백60만명. 1억명 이상의 10개국과 8천3백만명의 멕시코에 이어 세계 12번째 인구대국. 영토는 서독의 24만8천7백6㎢와 동독의 10만8천3백33㎢를 더한 총 35만7천39㎢로 한반도(22만1천㎢)의 약 1.6배 크기. 2차대전 패전으로 폴란드영토가 된 오데르∼나이세강 동쪽의 실레지아 등 10만3천㎢의 옛독일땅에 대해서는 통일후에도 영토권을 주장하지 않기로 약속된 상태. 수도는 베를린으로 결정됐으나 현재 본에 위치한 행정부가 옮겨갈지 여부는 추후 논의대상이다. 국기ㆍ국가ㆍ국명 등은 동독이 서독에 흡수통합되는 만큼 서독것을 그대고 쓰되 동독인들의 자존심을 고려한 추후변경여부는 미지수. ▷역사◁ 지난 4세기 발트해연안 및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살았던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독일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됐다. 그러나 독일민족은 중세에 들어서도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분열상태를 지속,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으며 철혈재상인 비스마르크가 등장,1871년 독일제국이 탄생됐다. 제1차대전의 패배로 제정은 무너졌으며 바이마르공화국시대(1919∼1933)로 들아갔으나 소당분립,정쟁격화 등으로 혼란이 계속되던중 1933년 히틀러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히틀러는 게르만 제1주의를 내걸며 사상최대의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으나 1945년 패전으로 독일은 동서독으로 분단의 길을 걷게 됐다. 서독은 동독과 수교한 국가들과는 외교관계를 맺지않는다는 냉전시대의 할슈타인원칙을 표방했었으나 브란트전총리는 지난 1969년 집권한 뒤 동방정책을 표방,상호교류를 확대시켜 오늘의 통일을 이룬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동서독은 72년 기본조약체결,73년 유엔동시가입,74년 상주대표부 설치를 거쳐 80년대에는 양국정상의 상호방문이 실현되기도 했다. 지난해 11월에는 동서 데탕트와 고르바초프의 개방정책,동구권의 민주화열기로 지난 61년 구축됐던 베를린장벽이 철폐됐고 지난 7월 통화통합으로 사실상 통독이 가시화됐다. ▷국내정치◁ 통일과 동시에 동독정부 및 의회는 소멸되며 오는 12월2일 전독총선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현서독정부가 계속 집권한다. 다만 총선전까지 동독지역의 대표성을 인정하기위해 메지에르 총리등 독독 지도자들이 서독 행정부에 무임소장관으로 기용되며 4백명의 동독인민의회의원중 인구비례에 따른 1백44명이 서독연방의회(하원)에 자동진출한다. 전독총선에서는 상원 56석(서독지역 41,동독지역 15)과 하원6백85석(서독지역 5백41,동독지역 1백44)의 임자를 가려 하원의 다수당이 통일독일의 명실상부한 초대 집권당이 된다. 동서독의 집귄기민당을 비롯,사민ㆍ자민당 등은 이미 전독총선에 대비해 정당통합절차를 마쳤다. 지금까지의 여론조사결과를 놓고 볼때 기민당을 주축으로 한 중도우파연정이사민당의 인기도를 훨씬 앞지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통독후 총선까지 2개월 사이에 극심한 경제혼란 등 이변이 없는 한 콜 서독총리의 초대 독일재상 꿈이 실현될 가능성이 높다. ▷경제◁ 통독을 가능케 한 주요인이 서독의 경제력 때문이라는 분석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만큼 막강한 서독의 경제력은 동독과의 통합으로 더욱 힘을 발휘하여 마르크화의 위력이 유럽을 강타하게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서독은 지난 89년 총GNP(국민총생산)에서 1조2천억달러를 기록,미국 소련 일본에 이어 세계 4위를 차지하고 있는 경제대국으로 통일을 계기로 경제전망이 더욱 밝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서독은 EC(유럽공동체) 총생산량 가운데 25% 정도를 점유하고 있으나 서독경제력의 10%수준인 동독을 흡수,30%선을 상회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통독은 단순합계로 현상태에서 유럽내 라이벌인 프랑스 영국보다 경제력에서 50∼80%를 능가하게 됐다. 서독은 EC의 대 동구 및 소련교역량 가운데 3분의1 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나 동구권내에서우수한 공업국인 동독을 흡수함으로써 이지역을 기반으로 하게될 경우 대 동구 교역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이로 인해 동구는 독일의 영향을 받아 위성국으로 전락할 가능성까지 있는 것으로 점쳐지고 있을 정도이다. 반면 서독은 통독으로 낙후된 동독을 희생시켜야 하는 책임을 맡게되어 통일에 대한 비용을 부담하게 됐다. 서독정부는 지난 5월 1천1백50억마르크(약 7백억달러)의 통일기금을 조성키로 했으나 동독을 서독의 수준으로 상향평준화시키기 위해서는 모두 1조∼2조마르크가 필요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서독정부가 앞으로 10년간에 걸쳐 집중적으로 동독의 철도 도로 전신 등 기간산업에 투자하고 동독의 실업자들에게 수당을 지급하려면 이와 같은 엄청난 재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동독의 8천여 국영기업 가운데 이미 20%가 서독과의 경쟁에서 도태됐으며 30%만이 살아남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또한 서독은 동독의 1백50억달러에 이르는 외채를 청산해야 하며 올 하반기에만 3백30억마르크의 예산적자가 예상되는 등 열악한 동독재정을 떠맡아야 할 입장이며 동독주둔 소련군의 철수비용 및 통일에 대한 보답으로 1백80억마르크를 지불키로 되어있다. 그러나 현 동독경제의 상태 및 막대한 투자재원부담이 통독의 앞날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서독은 지난 88년 7백억달러의 국제수지흑자를 기록하는등 외환보유고 세계 2위의 부국이기 때문에 이러한 재원은 별 문제가 될 수 없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갖고 있으며 대 동독투자로 1백여만명의 새로운 일자리가 생길수 있다는 분석이다. 동독이 90년대를 통해 연평균 7∼8%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현재의 GNP보다 배로 확대돼 제2의 라인강의 기적이 동독에서 만개하게 될 것이라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의 분석도 나오고 있다. ▷군사력◁ 서독의 48만8천7백명과 동독의 17만2천명을 합해 통일독일의 총병력은 66만명인 것으로 돼 있지만 민주화이후 동독군의 탈영이 속출해 실제병력수는 이보다 다소 적은 수준이다. 그러나 통일독일은 군대를 37만명이하로 유지하고 화생방무기를 생산하거나 보유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상태여서 통일후 절반 가까운 병력감축 조치가 뒤따를 것으로 예상된다.
  • “희망과 경계의 통일”… 엇갈린 시각(새 독일 탄생:1)

    ◎「경제ㆍ군사대국」의 강풍이 분다/세계질서 재편의 축으로 부상/6번째 유엔상임국 확실… 영향력 신장/“제국출현” 우려속 “유럽통합 가속” 기대 10월3일 0시. 동서독이 공식 하나로 통일되는 이 시각,독일 전역에는 일제히 폭죽이 터질 것이다. 거리를 메울 시민들은 전통적인 뿔피리를 불어대며 밤이 새도록 게르만민족의 하나됨을 경축할 계획이다. 특히 냉전체제의 상징이었던 베를린에서는 브란덴부르크문 주변과 운텐 덴 린덴가를 중심으로 2일부터 4일까지 밤낮으로 이어질 통일축제가 벌어져 반세기 분단의 아픔을 씻어버린다. 독일은 지난 7월1일 경제ㆍ사회통합에 이어 동서독이 8월31일 체결한 「통일조약」에 따라 3일 0시에 독일민주공화국(GDRㆍ동독)이 독일연방공화국(FRGㆍ서독) 헌법 제23조에 의해 정치적으로 FRG에 흡수통합 됨으로써 내부적인 통일과정을 모두 마무리 짓게 된다. 이로써 지난 45년동안 사회주의를 추구해온 동독이라는 국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같은 기간동안 시장경제로 힘을 키워온 서독을 모태로 한 통일독일인 「독일연방공화국」이 유럽중심부의 새로운 국가로 등장,유럽의 새 질서를 추구하여 세계정세에 커다란 영향력이 발휘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동안 분산되었던 독일의 국력은 통일을 계기로 동유럽을 포함한 유럽 경제권의 중심으로 부상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12개국으로 구성된 EC내에서 서독은 지난해 총 수출의 30%,자동차 생산의 35%,철강생산량의 26%,발전량의 30%를 차지하는 등 전체적으로 대략 25%를 점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여기에다 동독 편입으로 성장잠재력이 가세될 경우 통일독일의 EC내경제점유율은 33∼35%까지 올라가게돼 「경제패권주의」가 등장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이같은 독일경제력의 팽창은 EC국가들 뿐만 아니라 동구의 각국에도 기대감과 더불어 우려감을 동시에 갖게 하고 있다. EC국가들은 92년을 목표로 하고 있는 유럽단일시장화에 구동독이 합류함으로써 2차대전 후 지속되어온 동서의 냉전상태가 종식되었고 유럽내에서 동구라는 블록이 와해되었으므로 대유럽통합이라는 궁극의 목표를더욱 조속히 달성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 소련을 비롯한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들은 경제초강국 독일로부터 그들의 피폐한 경제를 재건하기 위한 지원을 기대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80년대 중반이래 동구의 민주화물결 이후 이들 국가들은 사회ㆍ정치적으로 커다란 발전을 해왔지만 경제적으로는 더욱 피폐해져 독일의 경제적 지원을 고대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동독국민들의 서독으로의 탈출을 계기로 독일통일이 가속력을 붙게 한 것도 미ㆍ영ㆍ불ㆍ소 등 승전 4개국중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소련이 경제적인 측면에서 이를 승인한 것이 가장 큰 요인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소련은 그동안 콜 서독총리와의 독일통일협상 과정에서 38만여명에 이르는 동독주둔 소련군의 철수비 명목으로 1백20억마르크(76억달러)를 받아내기로 한데 이어 지난주 30억마르크를 추가로 지원받기로 하는등 경제적인 실리에 중점을 두고 있는 분위기다. 소련은 최대의 실리를 추구하기 위해 당초 통일독일의 나토잔류를 반대하다 나토와 바르샤바조약기구에의 동시가입으로 물러섰으며 결국은 나토가입만을 허용하기에 이르는등 협상과정에서 모든 것을 내주면서 최대한의 실리만을 추구해왔다. 물론 독일이 통일을 이룰 수 있게 된 내부적 원동력은 서독의 민주주의의 실현과 경제적 성공,그리고 국민들의 잠재적인 통일열망 등을 기반으로 해 80년대 초반 폴란드의 자유노조운동에서 싹튼 동구권의 민주화운동이 동구제국에서 연속적으로 일당독재체제를 붕괴시키면서 결국 동독공산당의 몰락에 다다른 것이 큰 계기였다. 이같은 일련의 과정에서 볼때 사회주의가 이상적인 측면이 많긴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비대한 관료조직과 더불어 비현실적인 중앙집중식 계획경제에 의해 너무나 허약하게 무너진다는 교훈을 남겼다. 사회주의국가중 가장 모범적인 국가로 알려졌던 동독의 경우 그동안 생산관리나 품질향상 등 경제의 기초개념보다는 완전고용과 균등배분에만 주력,실업이 전무하다시피 했으나 결국 그것이 모양새만 그럴싸한 허수아비임이 드러났다. 한편 세계대전을 두차례나 저지른 독일의 재통일에 대한 주변국들의 의구심도 만만치 않은 것이 현실이다. 독일은 이같은 주변국의 우려와 불신을 불식시키기 위해 통일독일이 나토와 EC의 틀안에 남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진정한 EC의 정치적 통합에 기여하겠다는 점을 다짐하고 있다. 이 때문에 독일은 오는 3일의 통일에 이어 14일 동독지역에서의 주의회 선거를 실시해 사회주의 국가시절 폐지됐던 5개주 주의회를 다시 만들어 연방정부에 가입하는 한편 오는 12월2일 총선거를 실시해 연방의회(Bundestag)를 구성하는 등 정치일정을 차분히 추진해 나가는데 주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20세기 말까지는 사회주의 체제에서 상대적으로 낙후된 동독지역 재건에 국력을 총집중 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통일독일의 첫 총리가 유력시 되는 헬무트 콜 서독총리가 전승 4개국 수뇌들과 주변국 수뇌들에게 기회있을 때마다 『통일독일이 평화와 자유의 나라가 될 것이며 제4제국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 약속을 지켜 나갈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독일은 EC와 나토,그리고 유럽안보협력회의(CSCE)등 국제협렵체제의 테두리 안에서활동할 것이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6번째 상임이사국으로 가입돼 국제적인 중요한 문제의 결정에 이성적으로 행동할 것으로 보인다. 독일이 상임이사국이 돼야 하는 이유에 대해 소련은 『독일이 다른 강대국들과 마찬가지로 세계적인 위기를 조정하는데 동일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통일독일의 국제적인 부상과 책임분담은 이제 마지막 냉전의 산물로 남아 있는 한반도문제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이며 그 방향은 긍정적인 쪽일 것이라는 것이 전체적인 평가이다.
  • 통독 사민 총리후보/중도파 라퐁텐 선출

    【베를린 AP DPA 연합】 합당한 동서독의 사민당(SPD)은 28일 3일간의 당대회를 끝내면서 오는 12월2일 33년 이후 처음으로 실시되는 전독일 선거에서 기민당(CDU)의 헬무트 콜 총리와 맞서 경선을 벌일 당 총리후보로 중도파 지도자 오스카르 라퐁텐(47)을 선출했다. 동서독의 사민당은 동서독 통일을 불과 6일 앞둔 26일 당대회에서 합당했으며 전독일 선거는 통일후 2개월만에 실시된다. 오는 10월3일 동서독이 통일되면 콜 현 서독총리가 자동적으로 첫 전독일 총리가 된다. 라퐁텐은 85년 서독 자르란트주 정부총리가 되었으며 87년 서독 SPD부의장에 임명되었다.
  • 통일독일 총리후보/라퐁텐 의원 지명/서독 사민당

    【베를린 AFP 연합 특약】 서독 사민당은 28일 오스카르 라퐁텐의원을 오는 12월2일 실시되는 전독총선의 총리후보로 지명했다. 27일 서독 사민당이 합당,4백82명의 대의원이 참석한 가운데 사민당 전당대회는 4백70표의 압도적 찬성으로 라퐁텐을 후보로 지명했다. 라퐁텐은 수락연설에서 콜총리가 통일을 서두르면서 경제적 부담에 대해서는 숨기고 있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 동독,바르샤바기구 탈퇴/어제 소와 문서서명 조약국 6개국으로 줄어

    【베를린 AFP 연합】 동독은 24일 바르샤바조약기구에서 공식 탈퇴했다고 동독관영 ADN통신이 보도했다. 이 통신은 동독의 라이너 에펠만 군축ㆍ국방장관과 바르샤바조약기구 총사령관인 소련의 피오트르 루셰프장군이 동독의 탈퇴를 확인하는 문서에 서명했다고 전했다. 동독의 바르샤바조약기구 탈퇴는 오는 10월3일로 예정된 나토회원국인 서독과의 통일을 2주 앞두고 이뤄진 것이다. 통일독일은 콜총리와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지난 6월 양해한대로 총 37만명의 군병력을 유지하도록 허용된다. 지난 55년 창설된 바르샤바조약기구의 회원국은 이로써 불가리아ㆍ폴란드ㆍ루마니아ㆍ소련ㆍ체코ㆍ헝가리 등 6개국으로 줄었으며 헝가리도 오는 91년말 탈퇴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 통일독일 수도 베를린 새 단장(세계의 사회면)

    ◎“통독의 상징” 브란덴부르크문ㆍ유서깊은 건물 등 복원… 시재건 착수 보기 흉한 장벽으로 오랜 세월 양분돼 있던 베를린시가 통일독일의 수도로서의 역사적 역할을 재개하기 위해 다시 완전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통일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문은 2년이 걸릴 보수공사에 들어갔다. 높이 솟은 브란덴부르크문 앞의 파리제르 광장에 미국 대사관 및 영국 대사관과 함께 삼각형을 이루면서 서있었던 아들론 호텔을 복원할 계획도 잡혀 있다. 히틀러의 고급장교ㆍ외교관ㆍ외국기자를 비롯,1930년대 베를린에서 내노라 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전설적인 아들론 호텔을 거쳐갔다. 동베를린의 지도급 도시계획자중의 한 사람인 보도 프라이어가 옛 베를린시 복원을 책임지고 있다. 지난해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까지 프라이어의 세계는 동ㆍ서베를린 경계선에 있는 파리제르 광장과 브란덴부르크문에서 끝났었다. 벽에 걸린 지도에서 하얀 공백으로 남아 있는 서베를린을 가리키며 그는 『그동안은 저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으나 이제 우리의 임무는 양쪽으로 단절됐던 시를 다시금 함께 성장토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장벽이 개방된지 약 10개월. 베를린은 동독인 1백30만명이 몰려들어 인구가 3백40만에 이르는등 활기를 띠고 있다. 도시계획자들은 베를린시 재건에 몇십억달러가 들지 어림조차 잡지 못하고 있으나 적어도 10년 정도의 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양차 대전 사이 베를린은 유럽의 가장 활기찬 도시중의 하나였다. 예술의 메카였으며 정치ㆍ금융의 중심지였고 공산 동구의 난민 집결지이기도 했다. 그러나 30년대의 나치득세로 위대한 도시 베를린의 모습은 영원히 바뀌었다. 유태인 지구의 대부분은 대학살로 폐허가 됐으며 세계는 베를린을 「악의 대명사」로 여겼다. 나치가 반대자들을 탄압하자 당시 베를린의 예술가들과 예속을 거부하는 지식인들은 도시를 떠나버렸으며 전쟁이 끝나자 황폐해질대로 황폐해진데다 분단까지 된 베를린은 침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서베를린은 공산주의란 바다에 떠 있는 민주주의 전초지였다. 서베를린을 에워싸고 있는 동독영토로부터 많은 난민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자 61년 동독정부는 급기야 장벽을 쌓아 이들의 탈출을 막았다.
  • 동독의회,통일조약 비준/서독의회도 곧 표결

    【동베를린 로이터 연합】 동독의회는 20일 서독과의 통일조약을 비준,오는 10월3일로 예정된 독일통일을 향한 길을 열었다. 동독의회는 이날 TV로 중계된 구두표결에서 찬성 2백99,반대 80의 압도적 표차로 서독 법률을 동독의 거의 모든 생활분야에 적용한다는 독일통일 수립에 관한 전문 1천페이지 분량의 통일조약을 수락하기로 의결했다. 한편 서독의회도 이날 역사적 통독에 대한 마지막 법적 장애물을 제거하는 이 조약을 비준할 예정이다. 이에 앞서 미국ㆍ소련ㆍ영국ㆍ프랑스 등 2차대전 전승 4개국은 지난주 통일독일에 완전한 주권을 부여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 통독,북한과 수교 추진

    【도쿄 연합】 동서독은 내달 3일 통일후 북한과 국교를 수립할 방침이라고 서독 연방의회의 슈텔겐 외교위원장이 19일 밝혔다. 기독교 민주동맹 소속인 슈텔겐 위원장은 이날 본에서 일본 교도통신과 가진 회견에서 이같이 말하고 자신과 서독 외무부 당국이 동베를린의 대사관을 통해 북한측과 이미 접촉을 개시했으며 통일독일은 이와 함께 행 삼린 캄보디아 정부와도 수교를 추진중이라고 말했다.
  • “미군철수 남북대화의 전제 못된다”

    ◎“북한 군부에 반김파 늘어/중소 반대 속 남침은 자살행위”/예레멘코 주한 소 영사처장 간담 로엔그린 예레멘코 주한 소련영사처장은 19일 『북한은 단독으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며 북한군부도 전쟁을 원치 않는다』며 북한의 남침가능성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예레멘코처장은 이날 상오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열린 민자당 북방정책특위(위원장 김현욱의원)와의 간담회에서 이같이 말하고 『만일 북한이 중ㆍ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한다면 이는 자살행위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독일의 통일은 동독사람이 서구의 생활상을 잘 알고 있었는데다가 서독주민들처럼 살기를 원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지적하고 『그러나 북한주민은 외부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독일식 통일방식이 한국에는 적용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이어 『북한에도 김일성의 지도노선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늘고 있으며 군부에도 이같은 경향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히고 북한의 콘크리트장벽철폐 주장에 대해서는 『콘크리트 구조물이 베를린장벽과 같이 사람왕래를 막는 장벽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밖에 『주한미군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남북한간의 대화가 영향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해 미군철수가 남북 관계개선의 전제조건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 유엔의 새 위상과 남북한(사설)

    국제연합(UN) 제45차 총회가 18일 뉴욕에서 개막됐다. 지난해 베를린장벽 해체로 상징되는 전후체제의 재편과 미소 화해의 새 국제질서는 한동안 그 빛이 퇴색해가던 유엔의 존재와 의미를 다시 되새기게 해주고 있다. 역사의 평가는 어떻든 유엔이야말로 전후 냉전체제의 산파역이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전후 오랫동안 국제외교무대의 중심지로서 그때마다 화려한 각광을 받았던 유엔이었다. 그 유엔이 이제 다시 국제여론의 수렴과 국제분쟁의 조정,그리고 외교무대로서의 국제기구 고유기능과 위상을 회복해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유엔총회는 동서 냉전체제의 종식 이후 평화체제의 세계를 놀라게 했던 이라크의 쿠웨이트 강점 등 지역분쟁과 미소 화해체제의 보완 등 국제적 현안들을 중점 논의한다는 측면에서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유엔은 우리에게도 새로운 측면에서 그 위치가 부각되고 있다. 전후체제와 관련해서 유엔은 역시 한반도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지만 지금 남북한이 유엔가입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공식적인실무접촉을 벌이게 된 것이다. 18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한 실무접촉은 지난 9월초 서울의 남북총리회담에서 이산가족 재회를 위한 적십자접촉 재개와 함께 많지 않은 합의사항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도 중요한 대화이다. 현실적으로 남북한 모두 유엔 비회원국인 입장에서 민족문제 해결의 당사자들이 새삼 유엔가입문제를 논의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리 바람직하지는 않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북의 단일의석가입안과 남의 단독 또는 개별 동시가입안이 맞서 있는 상태에서 이번 접촉이 어떤 결과에 이르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다만 양측의 방안을 공론화하여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절충안을 모색하는 과정으로서의 의미는 있다. 새로운 국제질서 속에서 유엔의 위치가 새삼 부각되고 있듯이 남북한의 유엔문제 접근은 군축협상과 함께 민족문제 해결의 두 주제가 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유엔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함께 객관적인 시각을 가져야 할 때라고 보는 것이다. 즉 유엔이란 자격을 갖춘 모든 나라에 가입의 문호를 열어놓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유엔가입의 조건은 국제적인 평화의지와 유엔의 권능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또한 북한이 주장하는 것처럼 남북한의 유엔 동시 또는 개별가입은 두개의 한국을 영구화하는 것도,분단을 고착화하는 것도 아니다. 각각 개별의석으로 유엔에 가입했던 동서독과 남북예멘이 오늘날 세계의 경이속에 아무런 장애없이 통일을 실현해나가고 있음을 보면 알 수 있다. 남북한은 또한 유엔의 정식회원국만 아닐 뿐 몇개의 유엔 산하기구에는 동시에 가입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유의해야 할 것이다. 북한은 한반도에 존재하는 두 당사국의 한쪽으로서 유엔의 새로운 위상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국제사회의 변화를 감지해야 한다. 아울러 유엔을 체제경쟁이나 통일논리의 연장선으로 이용하려는 발상도 버려야 할 것이다. 유엔은 남북한이 함께 국제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외교무대일 뿐이다.
  • 「통독의 사법적 처리」/오페르만교수 강연 요지

    ◎통독,40년만에 다시 「국제법상의 주체」로/입법등 3권 새기구 구성까진 서독에/사실상 서독 연방가입… 동독조약 소멸/2차대전 교전국간 새조약 체결… 전쟁배상 매듭 통일독일의 완전한 주권을 보장하는 소위 「2+4」협정이 12일 체결됨으로써 통독을 둘러싼 외부적인 여건은 다 마무리됐다. 이제 10월3일이 되면 동서독은 40여년만에 다시 한 나라가 된다. 그러나 독일내부로 눈을 돌려보면 수십년 동안 서로 다른 체제와 법제도하에 유지돼온 두 나라의 통일은 결코 간단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주한 독일문화원은 13일 상오 서울 중앙대에서 독일 튀빙엔대 법대교수이며 바덴뷔르템베르크 헌법재판소 판사인 토마스 오페르만박사를 초청,통독의 법적ㆍ제도적인 문제를 주제로 강연회를 개최했다. 다음은 「독일통일의 정치ㆍ사법적 측면」이라는 제목으로 행한 오페르만박사의 이날 강연 요지이다. 동서독의 통합은 서독 기본법 23조에 따라 동독이 서독으로 흡수통합되는 것이다. 그러나 절대 간과돼서 안될 것은 이 과정에서 보여준 동독국민들의 통일에 대한 열정이다. 지난 3월 총선에서 동독유권자들은 조기통일을 공약한 우파연합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 따라서 나는 「통합」(Anschluβ)이라는 말보다는 동독이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의미에서 「가입」(Beitritt)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다. 서독기본법 23조에 따라 동독이 서독에 가입함으로써 통일과정은 완료되고 동독이라는 나라는 사라지고 서독의 영토는 그 지역 만큼 더 넓어지는 식이 된다. 1871년의 독일제국,1945년 패망 당시와 같은 단일 독일국가가 국제법상의 주체로 등장한다. 이에 따라 서독이 현재 체결하고 있는 국제법상 조약은 존속하고 동독의 조약은 소멸된다. 유엔등 국제기구에서 독일대표는 서독이 담당하고 동독이 안고 있는 외채도 서독이 떠맡는다. 동독의 모든 국가재산은 서독의 연방재산에 편입된다. 이와 함께 동독의 입법ㆍ사법ㆍ행정도 모두 서독으로 편입된다. 동독의 인민대회와 서독연방의회가 합쳐 통일독일 입법기구가 탄생된다. 그리고 서독의 11개 주와 동독의 5개 주를 묶어 새 연방회의(Bunmdesrat)가 구성된다. 그리고 서독의 현 연방법원이 독일전역에 최고 사법권을 행사한다. 예를 들어 동독 라이프치히시 지방법원의 최종심을 이 연방법원이 담당한다. 헬무트 콜 현 서독 총리를 최초 연방총리로 하는 새 독일정부가 출범한다. 이미 지금까지 많은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지난 5월18일 체결된 통화 및 경제사회통합을 위한 제1차 국가조약에 의해 7월2일부터 통화통합이 시행됐다. 12월2일 총선실시를 위한 선거조약도 중요한 합의였다. 10월3일부터 서독 기본법을 동독에 적용시키기 위해서는 법적장치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8월31일 동서독이 체결한 제2차 국가조약(통일조약)에 의해 마련될 「연결법(□berleitungsgesetz)」이다. 이 연결법에 의해 베를린이 새 수도로 정해진다. 그리고 통일의지를 담은 기본법 전문과 동독의 서독가입을 허용한 기본법 23조 개정,그리고 기본법에 위배되는 동독법률의 효력에 관한 구제 길이 명시된다. 연방을 구성할 각주의 재정 및 법제도 통일문제,동독이 체결한 국제법상 조약의 효력문제 등이 모두 해결되게 된다. 연결법의 설치 근거는 기본법 23조2항에 명시돼있다. 기본법개정의 폭을 둘러싸고 현재 집권 기민당(CDU)과 제1야당인 사민당(SPD)간에 견해차가 있다. 사민당은 헌법평의회를 구성해 완전히 새로운 헌법을 만들어 국민투표에 부칠 것을 제의하고 있다. 반면 기민당은 연결법을 통해 기본법을 최소한으로 손질만 하자는 주장이다. 지난 40년간 서독국민들이 이 기본법을 준수해 왔고 연결법을 통해 꼭 필요한 부분은 개정ㆍ보완할 수 있다는 논리다. 외부적인 측면에서도 몇 단계 더 거쳐야 할 과정이 남아 있다. 소위 독일조약(Deutschland Dokument)에 의거,연합국 지위동결과 독일 및 베를린시의 주권회복,통일독일이 속한 군사ㆍ경제동맹문제 등의 문제가 완전 해결돼야 한다. 10월1일을 기해 이 조약체결이 이루어질 예정이다. 오데르 나이세강을 국경으로 하는 독일ㆍ폴란드간의 최종 국제조약도 남아 있다. 통일독일은 오데르 나이세강을 국경으로 확정함으로써 패전 이전과 비교하면 영토가 줄어드는 셈이된다. 그러나 이는 독일의 나치즘이 주변국들에 행한 과거 죄과에 대한 당연한 대가라고 생각한다. 독일과 2차대전 교전국과의 평화조약도 앞으로 체결돼야 한다. 전쟁 배상문제도 이 과정에서 매듭지어질 것이다. 통일독일은 자동적으로 EC(유럽공동체)에 가입케 된다. 이를 위해 EC와 일련의 경과규정이 마련돼야 한다. 앞으로 기본법개정등을 둘러싸고 동서독간에 마찰이 예상되는 부문도 많이 있다. 특히 「낙태」등 윤리적인 문제들을 놓고 양측 국민들의 법감정에 격차가 크다. 서독에서 낙태는 불법이지만 동독은 현재 이를 인정하고 있다. 그 외에 환경보전ㆍ근로권리ㆍ사회보장권ㆍ건강권ㆍ교육권 등 양측의 견해가 다른 분야가 많다. 재산권 분쟁도 상당 기간 지속될 전망이다. 그러나 앞으로 3∼5년 뒤면 이런 문제들은 모두 해소되고 양쪽의 생활ㆍ의식수준이 비슷한 수준에 이를 것이라고 확신한다. 통일독일은 인구ㆍ경제력 등 여러 면에서 막강한 힘을 가진 국가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힘은 과거 나치때와 같이 「힘을 추구하는 힘」(Power­oriented Power)이 될 것이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 「2+4」통독협정 요지

    ▲1항=통일독일은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영토 및 전체 베를린으로 구성되며 통일독일과 폴란드는 국제법상의 구속력을 갖는 협정을 통해 현재의 국경을 인정한다. 동서독은 통일독일의 헌법에 이같은 원칙에 배치되는 어떤 조항도 포함되지 않을 것을 보장한다. ▲2항=통일독일의 헌법에 국가간의 평화관계를 저해하려는 의도를 가졌거나 그러한 의도아래 수행된 특히 침략전쟁 준비와 같은 행위는 위헌이며 응징돼야 할 위반행위임을 명시한다. ▲3항=동서독 정부는 핵ㆍ생물ㆍ화학무기의 생산ㆍ보유ㆍ통제에 대한 포기입장을 재확인하고 통일독일의 정부도 이같은 약속을 준수할 것을 천명한다. 통독정부는 3∼4년내로 통일독일의 군병력을 37만명선으로 감축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한다. ▲4항=통일독일과 소련은 현 동독영토 및 베를린에 있는 소련군의 주둔 조건 및 기간,그리고 오는 94년을 시한으로 한 소련군의 철수완료 등의 문제들을 협정을 통해 해결한다. ▲5항=본협정 제4항에 따라 소련군의 철수가 완료될 때까지 현동독 및 베를린 이외지역의 독일군대가 동맹구조로 통합되지 않은 국토방위 부대만 통일독일의 군대로서 주둔할 수 있다. 현 동독영토 및 베를린에 소련군이 주둔하는 동안 프랑스ㆍ영국ㆍ미국의 군대는 독일이 요청하는 경우에만 베를린에 주둔할 수 있다. 현 동독영토 및 베를린에서 소련군이 완전 철수한 뒤 기타 독일 영토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동맹군 체제로 구성된 독일군 부대가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은 상태에서 소련군이 주둔하던 지역에 주둔할 수 있다. 이같은 원칙은 성능이 보완될 여지는 있으나 전통적인 역할을 위해 갖춰진,그리고 그같은 목적으로 고안된 재래식 무기체제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외국의 군대나 핵무기 또는 핵미사일은 현 동독영토 및 베를린에 주둔 또는 배치될 수 없다. ▲6항=전승국들에 귀속돼 있던 통일독일의 권리들은 그로부터 파생되는 모든 권한 및 의무와 더불어 본 협정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7항=프랑스ㆍ영국ㆍ미국ㆍ소련은 현시점부터 베를린과 전독일 영토에 대해 보유하고 있던 권리 및 의무발동을 중지한다.▲8항=본 협정은 가능한 빠른 시일내에(관련국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9항=본 협정은(관련국 의회의) 승인절차가 완료되는 날부터 효력을 발생한다. ▲10항=본 협정의 원문은 서독 정부가 보관한다.
  • “양독,평화통일의 「모범답안」보였다”/통독조약 조인… 각국의 반응

    ◎“통독여정에 새 이정표 세워” 서독/“전후시대 마감… 신 질서 구축” 소/“유럽통합 가속화될 것” 확신 불 헬무트 콜 서독총리는 12일 독일통일조약의 서명을 『통독으로 가는 길에 놓여진 또 하나의 새로운 이정표』라고 환영하면서 통독조약 승인에 대해 광범위한 만족의 뜻을 표명했다. ○콜 총리,만족 표시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은 통독조약이 서명된 모스크바에서 『우리는 2차대전의 결과를 넘어서게 됐다』고 말했다. 롤랑 뒤마 프랑스 외무장관은 『프랑스는 이제 프랑스와 독일이 함께 중심적인 위치에 서서 유럽통합을 가속화시키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콜 총리는 본에서 이날 미리 준비한 성명을 통해 『이번에 서명된 문서들은 우리 스스로가 협상에서 설정해 놓았던 목표들을 대폭 반영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 최종 합의문서는 또한 90년 독일통일이 우리의 모든 우방들과 이웃들의 합의아래 실시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 5월22일 있은 예멘의 평화적 통일을 간과하고 있는듯 『이것은 전쟁과 고통 그리고 분쟁과 새로운 쓰라림없이 평화적으로 이뤄진 근대역사상의 첫번째 통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동서 양독이 화생방 무기의 보유를 포기하고 통독의 군사력을 45% 삭감,37만명 수준으로 제한하기로 약속함으로써 협상과정을 가속화시켰다고 말했다. 한스 디트리히 겐셔 서독 외무장관은 『정말 행복한 날이다. 감사의 날이며 영원히 기억해야할 날이다』고 기쁨을 표시하고 『우리는 우리에게 지워진 책임을 알고 있으며 그 책임에 부응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소의 신사고 반영 그는 이어 『우리는 과거에 있었던 전쟁과 전제주의의 희생자들,특히 유태인들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면서 『통일된 새로운 독일은 평화를 위해 헌신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겐셔 장관은 또 미ㆍ소ㆍ영ㆍ불 2차대전 4개 전승국들이 동서독과 함께 서명한 통일독일조약이 관계 6개국의 의회에서 승인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기 보다는 오는 10월3일 독일의 전면적인 주권을 회복시켜 주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한편 최근 사임한 동독외무장관의 대행 자격으로 이번 조약에 서명한 로타르 드 메지에르 동독 총리는 『이번 조약이 냉전시대의 종식을 알리는 것이며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용기있는 페레스트로이카 정책과 신사고를 반영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동독 관영 ADN통신이 전했다. 또 베를린을 방문중인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통일독일이 이렇게 빨리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고 놀라움을 표시했다. 이번 조약은 모스크바시의 한적한 곳에 위치한 한 공산당 호텔에서 조인됐는데 언론에 보도가 별로 되지 않은 탓으로 이곳을 지나는 모스크바 시민들은 조약 서명 사실을 대부분 모르고 있었다. 이 조약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모스크바 시민들 대부분은 『그들이 원한다면 통일이 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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