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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사회주의 고수/대서방 접근 병행/독지보도

    【베를린 연합】 북한은 남북대화 재개의 전제조건으로 조문파동에 대한 김영삼대통령의 사과와 함께 국가보안법 철폐를 요구하고 있다고 독일유력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가 14일 보도했다. 신문은 이날 평양발 1면 머릿기사에서 김영남 외교부장의 말을 인용,이같이 말하고 북한은 사회주의 체제를 굳게 유지하면서 대서방 접근정책을 병행한다는 노선을 취해나간다는 방침을 견지하고 있다고 전했다.
  • 「트라비」의 설움(통독 4년의 명암:4)

    ◎동독출신/정신병 25%/「첨단」 까막눈/자본주의·경쟁 적응못해 정신질환 급증/“폐쇄 북한주민 통일후유증 더 심각할것” 「트라비」는 통일후 동독출신 독일인의 설움을 상징하는 동독산 소형차 「트라반트」의 애칭이다.작센주에서 생산되던 이 동독의 유일한 승용차 트라비는 이제는 더이상 생산되지 않는다.통일후 동독출신마저 앞을 다퉈 서독제 벤츠와 BMW·폴크스바겐,그리고 일본차나 한국차를 구입했지 수준이하인 트라비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날 스타일의 이 조잡한 2기통엔진 트라비 생산라인은 2년전 폴크스바겐 조립공장으로 바뀌는 수모를 겪었다.또 동독지역 길거리에 아직 굴러다니는 매연 뿜는 트라비는 서독 부자들이 취미로 수집하는 값싼 골동품신세가 돼버렸다. 이런 식으로 「용도폐기」돼버린 동독인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더구나 적정인원보다 30∼50% 많은 인력을 고용하고 있던 동독의 국영회사들이고 보면 신탁청(트로이한트)의 생산·효율성 점검을 거치면서 실업률 15%(재교육자 포함하면 25%추정)의무더기 실직사태를 빚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동독 같은 사회주의국가에는 실업이란 개념 자체가 없어 콤비나트에 적만 걸어놓고 놀고 먹는 사람이 많았다). 30∼40년대에 제작된 낡은 기계로 자동차를 생산하던 동독기술자가 느닷없이 컴퓨터화된 최신기계를 마주하게 되니 까막눈이 될 수밖에 없다.젊은이들은 그나마 재교육으로 기술을 습득,재취업을 하지만 40∼50대는 실직연금신세를 지는 낙오자가 돼버리기 일쑤다. 『갑자기 「돈이 최고」 「돈 가진 자가 권력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게 가장 힘들었습니다』 동베를린 신문이었으나 통일후 서독자본가가 인수한 일간 베를리너 차이퉁(32만부 간행)의 국제정치담당 데스크 볼프강 게오르그씨는 일생을 사회주의아래 살았는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자본주의로 머리를 바꿀 수가 있겠느냐며 현실의 어려움을 털어놓는다. 『전에는 공산당중앙위의 지시와 보도통제를 받았지만 그대로 따르면 됐어요.통일이 되고 서독에서 새 사주가 오더니 「뭐든지 써도 좋다.다만 신문이 팔려야 한다」고 하더군요.경쟁을 하다보니 신문은 선정적이 되고 일은 서너배 늘고 또 동료와의 인간적이던 관계는 소원해졌습니다.35%의 기자가 능력부족으로 잘리고 서독출신들이 보충됐어요.옛날엔 자재부족·흉년 같은 기사도 사회불안을 초래한다며 보도통제하는 답답한 일도 있었지만 그래도 불만이 있으면 윗사람에게 불평은 할 수 있었습니다.그런데 지금은 사장이 마치 왕 같아서 불만을 말하면 집에 가라고 합니다』 생소한 자본주의·경쟁사회에 적응하느라 아직도 애를 먹고 있는 눈치였다. 동독지역 라이프치히에서 열차로 30분거리에 있는 할레시의 루터교 사회봉사단체소속의 조그만 병원을 찾아갔다.정신분석 및 치료의 권위자인 한스 요아힘 마즈 박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동독지역 주민의 25%가 갖가지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통계가 있죠.정밀조사는 안돼 있지만 동독당시 권력상층부나 그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실직자가 됐는데 그들 가운데 「서독삶과 비교해 동독의 삶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됐다.내가 일생동안 추구한 것이 무엇이냐.물거품이로다」하는 극도의 상실감·불안·우울증에 빠져 자살을 기도하는 사례가 부쩍 늘고 있습니다』 동독시절 반체제·민주인사로 탄압을 받은 마즈 박사는 『요즘 동독사람들 가운데는 부모의 과보호를 받던 어린이가 갑자기 부모를 잃을 경우 나타나는 것과 같은 정신질환(패닉·정서불안·무기력증)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권위주의적 정권이 시키는대로만 살다가 갑자기 울타리가 없어지고 자기 삶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게 되니까 세상이 무섭고 불안해진 것이지요』 마즈 박사는 반대로 자본주의 민주사회에 지나친 환상을 가졌던 사람들 가운데서도 현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데 따르는 정신병증세가 적잖이 발견되고 있다고 설명했다.물질적 부유가 곧 행복이 아닌 현실 때문에 갈등하다 정신이상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분야별로 적잖은 교류가 있던 동서독과는 달리 완전폐쇄된 북한주민이 통일후 어떤 증세를 보이게 될 것으로 진단하느냐는 질문에 마즈 박사는 다만 『심각한 증세일 것』이라고만 했다.
  • 동독군의 「백기통합」(통독 4년의 명암:3)

    ◎동톡무기 미그29만 남았다/동·서독군 같은 비율 감축… 동독군 6만/전비밀기관 밀고자 15% 가려내 예편 독일통일은 동서독간 대등한 통일협정 체결이라는 형식을 취했지만 실제로는 정치 경제 모든 면에서 서독에 의한 동독의 일방적 흡수통합이었다.이같은 사실은 시간이 흐르고 통일작업이 하나씩 추진돼가면서 더욱 분명해졌다.더욱이 동서독 군대의 통합과정을 보면 마치 동독이 서독에 「무조건 항복」을 한듯한 인상마저 받게된다. 통일직후 동독지역에 최고사령관으로 파견돼 동독군의 「민주시민군으로의 전환작업」을 완료한뒤 지난 10월 예편한 베르너 폰 셰벤장군(육군 중장)을 포츠담근교의 자택에서 만났다.2차대전후 포츠담선언으로 유명한 포츠담은 서베를린과 인접한 구동독지역으로 셰벤장군의 고향이었다. 『남북한 군대처럼 강하지는 않지만 동서독군 사이에도 적대감정이 있는게 사실이고 또 공산주의 사상교육의 영향도 있고해서 동독군의 강한 반발등 부작용을 예상했으나 의외로 평온하게 통합작업이 이뤄졌습니다』 물론 탈냉전시대라서 긴장관계가 심각하지는 않았다 치더라도 반세기 가까이 서방측 NATO(북대서양조약기구)군과 공산권 바르샤바조약기구군으로 대치해온 동서독군의 통합이 그의 말대로 그렇게 순조롭기만 했을까?셰벤장군의 2년에 걸친 동독군의 「서독군 편입」과정 설명을 듣고는 그같은 의문은 사라졌다.통합과정은 동독군의 해체절차로 진행됐지만 병력감축등이 양측에 비슷한 비율로 이뤄졌기 때문에 동독측이 반발할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현재 통일독일의 병력은 34만명.통일과정에서 전점령군이던 미·영·불·러시아와의 합의에 따른것이다(정원은 37만명). 통일직전 서독군은 약49만,동독군은 약17만명이었다.여기서 절반 가까운 감군이 이뤄진 셈인데 현재의 34만병력의 20%선인 6만여명이 동독군출신이고 28만여명이 서독군출신이다.결국 통일로 서독군 21만,동독군 11만명 가량이 군복을 벗게된 셈이다. 동독군이 의외로 규모가 작았던 것은 동서독 인구(서독 6천3백만,동독 1천7백만명)와 동독지역에 45만의 러시아군이 주둔했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해가 가는 일이다.94년말까지 철수키로 돼있던 러시아군은 일정을 앞당겨 지난8월 완전 철수했고 서베를린에 주둔했던 연합군도 지난9월 철수,독일은 비로소 완전한 독립국이 됐다. 현재 독일군 장비는 군복에서부터 장비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서독군당시의 것들이다.동독군의 「유품」으로는 구소련제인 미그29전투기가 유일한 예외로 현역에 남아있다. 『통일 이틀전 동독의 민선정부는 동독군 소속의 장성 전원을 예편조치했죠.통일후 대령이하 나머지 동독장교 3만2천명 가운데 2만4천명이 서독군에 편입됐는데 또 그중 절반이 90년말 군을 떠났습니다.여러가지 이유로 스스로 떠난 것이죠.그래서 1만2천명의 장교가 남은 셈이죠』 독일정부는 2년근무 조건의 계약을 맺어 이들을 개별적으로 서독군 기성부대에 6∼8주간 배치해 특별훈련을 하면서 성분과 자질검사를 실시했다.그래서 통일독일군으로 살아남게된 동독군출신 장교는 당초의 6분의 1인 5천명.청년층인 사병들은 8만여명이 제대하고 5만5천명이 군에 남았다. 『구동독당시 비밀경찰과 군정보기관의 신상관련 비밀문서를 관장하는 신설조사기관 「가우크」 조회결과 15%의 군인들이 동료를 감시·밀고하는 역할을 했더군요.이들을 찾아내 정리하는 일도 어려웠지만 과거 베일속에 가려 국민을 위압하던 군에서 민주시민군으로 체질을 바꾸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셰벤장군은 또하나의 문제로 다른 공무원이나 직장인과 마찬가지로 동독군출신은 생산성·효율성원칙에 따라 서독출신 동료들보다 20% 적은 봉급을 받고 있다. 예컨대 독일군은 NATO군의 일원이어서 반드시 공용어인 영어를 할줄 알아야 한다.그러나 동독출신은 영어는 모르고 러시아말을 배웠기 때문에 새로 영어교육을 받고 있었으며 이런 것이 모두 비효율로 지적되는 셈이었다.
  • 통일의 그늘(통독4년의 명암:1)

    ◎황병선정치2부장의 현장취재/통일 「신이 준 완성품」 아니었다/임금·생활수준 큰 차… 동,「2등시민」 설움/「동」실업률 15%… 「서」의 갑절/임금75%·생산성40% 불과/한해 75조원 투자… 15년 지나야 같은 수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지 5년,그리고 분단 45년에 역사적 종지부를 찍은 동서독 통일이 이뤄진지 만4년.그러나 독일의 통일은 어느 날 신이 완성품으로 내려준 선물은 아니었다. 오는 2000년 수도로 「복위」케 돼있는 베를린과 아직 수도기능을 하고 있는 본,그리고 구서독지역의 쾰른 프랑크푸르트 뮌헨,구동독의 드레스덴 라이프치히등 통독 4년의 현장을 2주간 취재하며 자연스레 얻은 결론은 통일이 90년 10월 3일 완성형으로 이뤄진게 아니라는 것이었다.통일이 선포된 그날은 다만 동구의 와해라는 세계사의 물결에 따라 89년 11월 9일 베를린장벽이 열리면서 시작된 독일 통일장정의 공식 출발을 알린 날이었다. 그후 4년,8천만 독일국민은 예상됐던,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예기치 못했던 과업들과 씨름해가며 통일을 완성시켜 나가느라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었다.그들은 통일직후의 환희와 낙관,혼란의 시기가 지나면서 마주치기 시작한 「통일의 그늘과 부작용」에 실망하고 있었다. 불만을 토로하는데는 동서독 출신의 구분이 없었다. 연방정부 관리와 주의회 관계자·언론인·전문가들을 인터뷰한 결과를 종합할 때 상이한 이데올로기와 체제아래 살아온 지난 반세기를 극복하고 통일을 완성시키기까지 게르만민족의 고달픈 장정은 십수년은 더 계속될 전망이었다.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이 어려움과 불만을 토로하고는 있지만 통일은 확고한 궤도에 진입해 있었다는 것이다.89년 10월 동독인들의 자유와 풍요 그리고 민주주의를 향한 염원이 10만 군중의 「월요시위」로 폭발,한달후의 베를린 장벽 붕괴를 촉발시킨 역사의 현장 라이프치히 중심가 카를 마르크스광장.이제는 아우구스투스 광장이란 동독공산당정권 이전의 옛이름과 평화를 되찾은 모습이었다. 광장을 바라보며 자리잡은 유서깊은 음악당 게반트하우스에선 연말 정기 교향곡연주회가 열리고 있었다.객석에는 주로 노부부들의모습이 많이 눈에 띄었고 공연장은 무덤덤 할뿐 음악을 즐기는 활기에 넘친 분위기는 아니었다.특히 생기없는 얼굴표정들 때문인듯 했다.또 음악당밖 분수대 곁의 침침한 가로등 아래선 청년 3∼4명이 가슴에 맺힌 불만의 표출인양 지나는 행인들을 향해 간간이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라이프치히시청의 볼프강 프링켈씨(시장 비서실장)는 동독지역에서는 경제적으로 가장 앞서가는 편인 라이프치히의 이런 어두운 얼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생각해보세요.새로운 정치체제 그리고 서독과 같은 생활수준향상이란 꿈에 잔뜩 부풀어있던 동독지역 사람들에게 돌아온 것은 갑자기 2등국민이 돼버렸다는 실망감이었습니다.좋은 상품이 있으면 뭘합니까.직장과 돈이 없는데.전체적으로 생활수준이 나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바로 행복을 보장해주진 않습니다.상대적 좌절감이 그들을 매우 우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지요』 프링켈씨는 무엇보다 예기치 못했던 「살인적」실업이 가장 큰 어려움이라고 설명했다.동독지역 전체로 보면 대략 9백90만의 일자리가 6백10만으로 줄어 3백80만명의 실업자가 생겼다는 것인데 94년 7월 현재 공식 실업률은 15.1%로 서독지역(7%선)보다 2배나 높은 것으로 돼있다(연방 재무부통계). 특히 실업은 경험이 없는 청년층,그리고 여성과 노년층에 집중돼 이들 세그룹은 「통일의 희생자들」로 지칭된다. 더구나 통일직전 동서독간에 합의를 본 협약의 「생산성 원칙」에 따라 동독지역 근로자들은 같은 일을 하고도 서독지역 동료들의 75∼80%에 해당하는 차별임금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이것도 4년전 60%에서 시작해 그동안 해마다 상향조정된 결과다. 라이프치히 거리는 도로포장 건물신축·보수공사등으로 외견상 대단한 활기를 띠고 있었지만 그 바닥에는 음악당에서 엿볼 수 있었던 노인 청년 여성층의 어두운 비애,2등시민의 서러움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서독출신들이 통일이후 더 잘살게 된 것도,더 만족스러워 하는 것도 아니다.일간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너 자이퉁의 외신담당 에디터 피터 스툼씨는 공무원들과는 달리 비교적 솔직하게 자신의 견해를 털어놓는다. 『동독출신들은 우리의 75%밖에 임금을 받지못한다며 불만이 많지만 자발적으로 일해본 경험이 없는 그들의 생산성은 사실 그 수준에도 못미칩니다.그들은 전보다 훨씬 살기 좋아졌는데도 계속 불만을 말합니다.동서독은 정신적 경제적으로 아직 분리돼있는 상태죠.한 15년후면 비슷한 수준이 될까요?』(연방정부의 93년말 현재 동독지역 생산성 공식집계는 서독의 40.2%다) 스툼씨는 서독지역 주민들 소득세에 통일세 성격의 「솔리대리티 택스」 7.5%가 추가돼 『아,동독용이구나』하고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동독지역보다 더 많은 세금을 내는 외에 서독지역은 통일에 따른 엄청난 재정·경제적 부담을 감당하고 있었다. 연방 재무부의 크리스티안 웅거씨는 94년 한해에만도 건설·설비부문에서 1천5백억 마르크(한화 약75조원상당,한국의 95년도 총예산은 54조 8천여억원)가 보내지는 등 지난 4년간 모두 5천8백억 마르크가 동독지역으로 보내졌으며 이는 통일후 해마다 연방예산의 4분의 1이 투자된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결국 서독지역 주민의 어깨에 25%의 짐이 얹혀진 셈이니 서독지역주민에게도 불만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최근 한 여론조사결과(디 자이트 신문이 94년 9월 9백80명을 대상으로 조사)에서도 나타났듯 동독지역 주민의 대다수인 69%가 통일후의 생활형편에 대체로 만족을 표하고 있다.(22%가 불만,8%가 매우 불만이라고 응답)그리고 장래를 긍정적으로 보는 주민이 계속 늘어나는 추세라는 현지 언론인의 설명은 통일 독일의 밝은 장래를 점치게 해준다.
  • 베제크리크 천불동/허세욱(서역 문화기행:4)

    ◎화염산기슭 석굴 83개… 6세기 불교유적/위구르족 왕가 사원… 당시 생활상 벽화로 남겨/서유기의 무대… 삼장법사­손오공 등 3제자의 조각상 곳곳에 투루판은 그 동서를 관통하는 국도 312번에 놓여있다.그것은 신강의 최서단인 이닝(이령)에서 황하와 황해가 만나는 최동단의 상하이(상해)까지 장장 5천㎞,어쩌면 미국의 동서를 횡단하는 80번 하이웨이에 상당하다. 투루판에서 312번국도를 타고 동쪽으로 40㎞쯤 달렸을 때,갑자기 그 왼편으로 빨간 바위산을 만나는데 그 형상은 얼핏 한국전쟁당시 철의 삼각지,아이스크림고지를 방불케하는 타원형으로 마치 험상궂도록 쪼글쪼글한 노인의 얼굴 혹은,여름날 여인의 풍덩한 주름 치마같았다.한 포기의 폴도 없이 세로의 주름살은 차라리 빨간 폭포가 쏟아지는 형상이었다. 그것이 바로 화염산의 남쪽 기슭이었다.그 맹렬한 화염의 섭곡을 보자 놀랍고 반가웠다.그 명성을 들은지 너무 오래라서 그렇다.당나라의 고승 현장(602∼664)의 「대당서역기」를 비롯,당나라의 유명한 변새시인 잠참(715∼770)이 이곳에서 벼슬하는 동안 썼던 경화산」,「화산운가송별」등의 명작,그리고 중국4대기서로 꼽히는 오승은(1500?∼1582?)의 「서유기」등에서 익히 화염산,그 「팔백리에 걸친 불길」을 들어 왔었다. ○홍산에 풀한포기 안나 화염산은 「홍산」혹은 「화산」으로 불렸다.그보다 위구르말로는 「쿠즈로다고」즉 홍산이란 뜻이다.그것은 지구상에서 두번째로 넓고 낮은 동서 1백20㎞,남북 60㎞의 투루판분지에 동서 98㎞의 길이에 남북 9㎞의 폭으로 가장 높은 곳이라야 8백32m,평균 높이는 고작 5백m다.하지만 해발 이하의 분지라서 그 높이는 상당했다.연간 강우량이 겨우 16㎜의 초건조지역에 평균 기온이 섭씨38도 최고 기온이 49도나 된다.그래서 암석표면의 온도는 무려 80도를 넘는다.거기다 지층에 매장된 무진장의 석탄과 석탄에서 배출되는 가스로부터 폭발 연소도 적지 않다고 하니 「서유기」에 묘사한 대로 「화두 불길이 천길의 높이」란 형용도 결코 터무니 없는 말이 아니었다. 필자가 화염산을 처음 만났을 때의 충격은 지금부터 1천2백45년전인 기원749년,이곳에 당도했던 잠참의 「화산을 지나며」란 시에 잘 나타났다. 「화산금시견, 돌올포창동. 적염소로운, 염기증색공. 불지음양탄, 하독연차중? 아래엄동시, 산하다염풍. 인마주한류, 열지조화공」 (처음 만난 화염산은, 포창 동녘에 우뚝하여라. 화염은 오랑캐의 구름을 불지르고, 증기는 변방의 하늘을 찜질한다. 음양의 숯이, 어찌 여기서만 훨훨 타오르는가? 엄동설한에도 산밑엔 삼복의 열풍이. 사람도 말도 땀을 뻘뻘 흘리거늘, 누가 알랴? 자연의 조화를) 화염산 섭곡이 끝나는 승금구에서 312번 국도를 작별하고 좌회전하자 이윽고 빨간협곡이 열리면서 차는 화염산 북록을 휘돌았다.그 협곡의 정면에 보이는 둥근 모자모양의 홍산이 피라미드의 형세로 성큼 다가섰다.그것이 화염산의 주봉이었는데 주봉은 충격적 이라기보다 다소곳한 곡선으로 다만 풀 한 포기 없을 뿐 여느 동리앞을 지키는 안산의 크기였다.거기서 삼장의 길이 막히고 손오공이 파초의 부채로 재주를 부렸다는 곳이다. ○아래쪽 설수도 흘러 그 주봉아래로 기원6세기 고창왕국씨때부터 9세기까지 3세기에 걸쳐 위구르족들 왕가의 사원으로 건설한 석굴의 촌락 「베제크리크 천불동」이 있고 천불동아래로는 파란 설수가 콸콸 흐르는 목두구.그리고 천불동 입구 편편한 산기슭엔 최근 「서주천성원」이라는 작은 전시장을 개설 해 놓았다.그 안에는 「서유기」의 주연으로 삼장법사를 비롯,손오공·저팔계등을 조소한 외로도 「팔십일난」을 도해한 동굴,동굴밖 언덕위로는 잠참의 입상과 그의 대표작인 「화산운가송별」을 새긴 시비가 있었다.그 시비에 새겨진 첫 절은 이러했다. 「화산돌올적정구, 화산오월화운후. 수운만산응미개, 비조천리불감래」 화산이 우뚝 적정 어귀에 섰거늘, 오월이라 불꽃 구름 뭉게 뭉게. 불꽃 구름 엉긴 채 풀리지 않거늘, 천리길 나는 새도 얼씬할 수 없네) 필자가 찾은 때는 다행히 쾌청한 9월중순 이어서 인지 불꽃구름커녕 흰구름 한 조각도 보이지 않는 진하디 진한 쪽빛 하늘 뿐이었다.그 쪽빛에 적갈의 산빛,골짜기와 석굴,길가에 굴러가는 돌멩이조차 일색으로 빨갰다. 그런데 그토록 숨 막힌 빨간 모랫벌과협곡에도 서원의 의지는 굴을 파고 예술의 꽃을 피웠었다.바로 베제크리크 천불동이 그것이다. 화염산 주봉 동쪽 기슭엔 광장이 닦여 있었다.그 왼편엔 「서유기」의 일사삼도의 조상을 세웠는데 초입의 서주천성원에서 보았던 그것보다 규모가 큰데다 훨씬 정교하고 생동감이 있었다.그 바른편 계단으로 내려가면 황갈색의 가파른 벼랑이 무르토크강(목두구))을 굽어 보고 있었다.과연 「베제크리크」란 지명이 「산 허리」라는 위구르말을 딸만했다. 기록상으로 석굴의 수는 83개라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50여개이며 그중 벽화를 소유했던 것이 40여개요 벽화의 총면적은 1천2백㎡라고.그것들은 열차의 창을 방불케 일렬횡대로 늘어서 있었고,그 내부는 대체로 석굴의 길이 20m에 5m의 폭과 5m의 높이의 장방형,거기다 천장은 동그란 궁륭식이라 쿠차의 키질,돈황의 막고굴에 비해 훨씬 넓고 시원했다. ○일부 벽화 손실 아쉬워 기원6세기부터 13세기까지 지금 위구르족의 조선인 고창왕국씨들의 왕가 사원을 비롯,당시 불가의 승려·신도들의 승방,고승을 기리는은굴,혹은 그들이 좌선하던 비가라굴로 쓰였었다.당대의 문헌인 「서주도경」에 고창지역 불교의 승지로 소개한 「영융굴사」가 바로 베제크리크 천불동인 것이다. 여기 벽화는 비록 석가모니 전생의 사적을 선양하는 본생고사를 비롯,서원도·경변도·공양상·인연고사등 불가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거기에 등장하는 왕공 귀족과 공양 신도들의 복식·가옥·거마·기악등을 통해 당시 불교를 신앙하던 회골사람들의 생생한 생활과 문화를 볼수 있다는 점에서 특기할만했다. 특히 33호 석굴의 「왕자거애도」에 그려진 여러나라 왕자의 각기 다른 모습과 표정은 마치 오늘날 정상들의 모임을 발불케했고,39호 석굴의 커다란 공양 보살의 풍윤한 얼굴과 굵직한 청화의 무늬,그리고 31호 석굴의 설법도에 그려진 보살의 성장과 복식등은 생생한 역사와 문화가 묻혀 있음을 직감케 했다. 그러나 20호 석굴과 27호 석굴에서 만난 복사물의 대체와 훼손된 잔화를 대하면서 허탈과 울분을 참을 수 없었다.특히 20호 석굴의 서원도,회골국왕과 왕후의 형상은 10세기 당시 회골국 복식을 알수있는 증거임에도 절취된 채 지금 영인된 사진만 걸려 있음은 27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필자가 참관한 9호,37호등 석굴에서도 불상의 눈이 뭉개지거나 벽면을 도려낸 칼날의 선이 남아 여기 저기서 수난의 흔적은 완연했다. 베제크리크의 수난은 크게 두번 있었다.13세기말,몽골의 말굽 아래 처음 망가졌고,그를 전후해서 이슬람교가 흥성하면서 불교의 석굴은 쇠락을 거듭하였다.또 한번은 금세기초인 1902년,독일의 그륀베델과 로코크 등이 네차례나 답사를 빙자한 예술품의 절취가 있었다. 그 속에는 20호,27호 석굴의 것 말고도 회골귀족과 몽골인들의 복식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공양도」와 회골문자가 들어 있는 「본생고사도」등이 절취당한 것은 통석할 일이다.더구나 그중 베를린 박물관으로 납치되었던 벽화 일부가 2차대전의 전화에 소실되었다니 서역의 찬란했던 회골문화의 운명도 꽤나 기구한 것이었다.
  • EU,동구국가입 등 논의/정상회담 개막

    【에센·베를린 AFP UPI 연합】 유럽연합(EU) 정상회담이 9일 독일 에센시에서 개막,동유럽국가들의 EU가입문제·보스니아사태 해결방안 등 주요현안에 대한 이틀간의 논의에 들어갔다.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이와함께 경기호전에도 불구,여전히 유럽내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실업해결을 위한 국경도로 및 철도건설 등 고용창출방안등이 주의제로 토의된다. EU 12개회원국 정상들은 특히 이번 회담에서 폴란드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루마니아등 동유럽 6개국가들의 EU 가입에 관한 전략보고서를 채택할 계획이나 이들 국가의 정식가입을 위한 구체적 일정은 논의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 동유럽 6개국 지도자들은 폐막일인 10일 정상회담에 초정되는 형식으로 합류하게 된다.
  • “김정일 내년 3월께 승계/기업인 방북 승인 주내결정”

    ◎방독 이부총리 【베를린 연합】 독일을 방문중인 이홍구부총리겸 통일원장관은 5일(현지시간)『북한은 내년 3·4월쯤 최고인민회의를 열어 김정일 국가주석선출등 권력승계절차를 마무리지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이부총리는 이날 상오 베를린시내 인터콘티넨탈호텔에서 수행기자단및 특파원들과 가진 조찬간담회에서 이같이 말하고 『북한정보수집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내년부터 중국·일본·러시아 등지에도 통일연구관을 파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부총리는 특히 『통독이전 북한과 밀접한 관계를 가져온 옛동독출신 북한전문가들과의 교류도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국내기업인의 방북승인문제와 관련,그는 『이번주중 남북교류협력추진위원회 실무협의회를 열어 방북 승인여부를 최종 결정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이부총리는 이날 베를린시 고위관계자들과 만나 통일이후 베를린시 재건계획등을 청취했다.
  • 대사급 관계 수립/북,독에 강력 요구

    【베를린 연합】 북한은 최근 독일의 수도 본에 베를린 이익대표부 요원 3명을 상주시킨 채 독일과의 공식수교를 적극 추진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특히 항공협정·무역 및 상호원조협정·과학기술협정 등 구 동독과 맺은 협정의 전면 복원을 끈질기게 요구하면서 독일기업의 투자유치에도 적극 나서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독일주재 한국대사관의 한 관계자는 3일 『북한은 최근 본에 베를린 이익대표부요원 3명을 파견,외무부 관계자 등과 잇따라 만나 구 동둑과 맺은 협정들이 유효하다고 주장하면서 대사급 외교관계의 수립을 요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 북,한국형경수로 거부/북경 전문가회담/미선 “대안없다”

    【북경=이석우특파원】 북한은 30일 경수로원자로 건설지원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북경에서 열린 북·미전문가회의에서 한국표준형인 울진 3,4호기를 받아들이는 데 강한 반대의사를 표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은 이날 코리아에너지개발기구(KEDO)와 북한간에 체결될 경수로 공급계약을 위한 기본조건·인도조건 등을 집중논의하는 가운데 한국형 경수로는 국제적으로 안전성이 입증되지 않은데다 수출실적도 없다는 이유로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으며 경수로건설이 유상으로 이뤄지는 만큼 북한이 건설업체를 선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북한의 경수로를 건설하는데 한국형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북한이 주장하는 건설업체선정권도 북한이 직접 비용을 대는 것이 아니라 KEDO가 비용을 조달하는 것이어서 공개입찰권을 북한이 가져야 한다는 주장은 억지이며 입찰권은 KEDO가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비공개로 진행된 이날 회의는 북한측은 베를린회담 당시 수석대표이던 김정우 대외경제위원회부위원장 등 10명이,미국측에서는 갈루치 핵대사의 보좌관인 게리 세이모아 핵비확산담당과장을 수석대표로 7명이 참석했다. 한편 한국에서는 박인국 외무부 군축원자력과장과 한국전력 원자력연구소 관계자 등 4명이 29일 북경에 도착,미국과 회담의 진전사항에 관해 협의했다.
  • 딱정벌레차 재생산/폴크스바겐사 결정

    【베를린 연합】 독일 폴크스바겐사는 독일은 물론 전세계 자동차 애호가들로부터 60년 가까이 사랑을 받아온 「딱정벌레차(비틀)」를 현대식으로 바꿔 다시 생산하기로 했다. 히틀러 통치당시인 30년대에 국민차로 개발된 딱정벌레차를 새로 디자인,올해초 미국 디트로이트 모터쇼에 출품했던 폴크스바겐사는 열화와 같은 생산요청이 전세계에서 답지하자 시장성이 충분하다고 판단,생산을 결정하게된 것이다.
  • 핵동결 감시방안 북한과 합의 못봐/IAEA

    【베를린 연합】 북한과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핵동결 감시방안에 대한 완전합의를 아직 보지못해 주말을 넘기고 다음주에도 협의를 계속하게될 것으로 25일 전해졌다. 한스 마이어 IAEA 대변인은 『평양을 방문중인 IAEA 협상단과 북한당국과의 핵동결 협의가 다음주에도 계속될 것』이라고 밝히면서 『협상은 건설적으로 진행중』이라고 덧붙였다.
  • 파 음악당에 화재/관객 2백명 사상

    【바르샤바 AP 연합】 24일 밤 폴란드의 그다니스크에서 열린 록 음악회에서 불이 나 2명이 숨지고 2백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고 경찰이 밝혔다. 불은 그다니스크 조선소 음악당에서 6백여명의 관중이 베를린에서 생중계된 M­TV 유럽음악상 시상식을 지켜보던 중 발생했으며 사망자 중 1명은 압사하고 나머지 1명은 불에 타 숨졌다. 목격자들은 불이 관중석에서 시작돼 지붕으로 옮겨붙었으며 지붕의 일부가 무녀졌다고 말했다.
  • IAEA 대표 20일 북경 도착/오늘 입북

    【베를린 연합】 북한 핵 동결감시 문제를 협의할 국제원자력기구(IAEA)협상단이 20일 평양으로 들어가기 위해 북경에 도착했다고 IAEA 관리들이 말했다. 4∼5명의 사찰 전문가들과 기술요원으로 구성된 협상단은 22일 입북할 것이라고 이 관리들은 전했다.
  • 베니스 비엔날레/베니스 영화제(유럽 문화산업 현장:중)

    ◎관광진층·경제활성화 동시 추구/현대미술·영화흐름 주도… 세계적인 축제로/권위에 안주 않고 끊임없는 개혁정신 발휘/비엔날레 한국관 기공계기,기업의 현지 투자 요청 베니스 비엔날레의 한국관 기공식이 열렸던 지난 8일 이민섭 문화체육부장관은 베니스시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한국은 5천년의 역사를 가진 문화국이며 중국이나 일본과 다른 독자적인 문화가 있으나 이를 세계에 선전하지 못해왔다.이런 기회를 베니스 시민들이 갖게 해주어 감사한다』 이에 대해 베니스의 시장인 마치모 카치아리씨는 『한국이 상설 전시관만 지을 것이 아니라 공단에 기업이 투자하고 현지인을 고용하며 많은 관광객을 보내 경제활동을 활발하게 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 대화는 베니스 비엔날레의 세계적 권위와 그 권위를 단순한 문화행사 차원에 국한시키지 않고 관광진흥과 경제활성화에까지 연결시키는 이탈리아의 적극적인 문화정책을 동시에 보여주는 상징적인 것이었다. 베니스 비엔날레와 베니스 영화제는 세계의 수많은 미술제전과 영화제중에서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한다.베니스 비엔날레에 독일관이 개관했을 때에는 히틀러가 참석했으며 일본관이 개관할 때는 국왕이 참석,개관 테이프를 끊었다. 1895년 이탈리아왕국과 베니스시는 베니스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전세계에 과시하고 미래에도 예술을 주도하기 위해 베니스 비엔날레를 창설했다.그해는 국왕인 움베르토1세와 사보이왕가의 마그리타왕비의 결혼 25주년 기념식이 있는 해였다. 베니스는 당시 세계최고의 예술도시로 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영국·미국등의 젊은 화가들이 그림을 배우기 위해 유학을 오던 곳이었다. 제1회 대회는 주로 라틴국가들의 화가 4백71명이 참가했으며 그후 1백년동안 베니스 비엔날레는 현대 미술의 흐름을 주도해 왔다. 2년에 한번씩 6월에 시작되는 베니스 비엔날레는 세계 각국의 화가·조각가·건축가·평론가·저널리스트·화상등 1만여명의 전문가들이 참석하는 세계의 미술 올림픽.미술인이라면 누구나 이곳에 자신의 작품이 전시되기를 꿈꾼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르디니 공원에 상설전시관을가진 24개국,주로 선진유럽국가들의 국제잔치로 치러져 왔다.따라서 이곳에 상설전시관,즉 국가관을 갖지 못한 나라들은 이탈리아관의 한쪽을 비좁게 빌려 쓰면서 국가관을 마련하기 위해 치열한 국제 로비전을 펼쳐 왔다. 선진국의 문화패권주의가 날카롭게 대결하는 이곳의 한정된 공간에서 마지막 국가관을 지을 수 있는 부지를 확보하고 건물 기공식을 올린 우리 정부는 「문민정부 최대의 문화외교 성과」로 이를 자부하고 있다.한국관이 들어서는 부지는 지난 20여년동안 중국과 아르헨티나 등이 상설전시관을 짓기 위해 탐내왔던 곳이다. 베니스 비엔날레의 권위는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미술관이자 박물관인 베니스의 미술전통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다.귀족적 권위에 안주하지 않는 끊임없는 개혁의 정신이 베니스 비엔날레의 명성을 지켜왔다. 이탈리아의 전위미술가였던 필리포 마리네티는 베니스를 20세기 미술운동의 하나인 미래파의 발상지로 만들었고 그의 미래파선언은 베니스 비엔날레에 전위적인 성격을 가미했다.그는 19 07년 『박물관과미술관은 수백년 전에 죽은 화가와 조각가들의 공동묘지이기 때문에 때려 부셔야 한다.운하의 물길을 터서 박물관과 미술관을 물에 잠기게 하라.오!영광에 가득찼던 캔버스들이 물위에 떠내려 가며 색이 바래고 갈갈이 찢겨지는 것을 본다면 얼마나 즐겁겠는가』라는 미래파 선언을 했다.그는 더 나아가 『엔진의 뚜껑을 커다란 파이프로 장식한 경주용 자동차가 「사모트라체의 승리」라는 낡은 그림보다 아름답다』고까지 말했다. 1968년에는 학생들의 데모로 베니스 비엔날레의 수상제도가 바뀌기도 했다.베니스대학 학생들이 베니스 비엔날레의 그랑프리 제도가 상업주의에 이용된다며 데모를 벌여 대상제도가 사라지고 「올해의 화가상」과 가장 훌륭한 작품을 출품한 국가관에 주는 상이 새로 만들어졌다. 한편 베니스영화제는 세계 최초의 국제영화제로 19 32년 만들어 졌다.당시의 통치자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의 첨단과학기술을 과시하기 위해 영화제를 창설했다.독재자의 광기와 과욕이 이탈리아의 영화 산업발전에 큰 기여를 하게 되고 독재자가 역사의 인물로 사라진 뒤에도 전세계 영화인들의 최고 영예가 되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겠다.칸영화제가 생긴 것은 이보다 7년 뒤인 39년이며 베를린영화제는 50년에야 창설됐다. 베니스 영화제는 32년 제1회대회때부터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감독상 작품상을 수상하고 34년에는 국내영화·국제영화 두분야로 나누고 36년에는 최고상인 무솔리니배가 추가되고 47년부터는 베니스의 수호신인 날개 달린 황금사자상이 주어진다. 38년도 베니스 영화제의 무솔리니배는 36년 베를린 올림픽의 기록영화를 만든 독일의 여류감독 레니 레펜슈탈에게 돌아가고 51년도에는 영화 후진국인 일본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라생문」으로 작품상을 받아 세계를 놀라게 했다. 구로사와의 부친은 일본 육사를 나와 평생동안 학교의 체육선생을 지낸 사람으로 구로사와는 그의 영향을 받아 일본 사무라이의 비정한 생활을 영화한 것이 일본문화 수출의 첨병이 되었다.일본의 영화산업은 베니스영화제의 수상을 계기로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7년에는 우리나라의 강수연양이 「씨받이」라는 영화로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여우 주연상을 받았다. 베니스 영화제는 해마다 여름철에 리알토섬(베니스의 주요 섬)의 남쪽 방파제 구실을 하는 리도섬에서 열린다.리도 섬에는 11㎞에 이르는 아름다운 해변과 경마장 골프코스 비행장 축구경기장 등이 있는 곳으로 영화제가 시작되면 세계적인 축제가 벌어진다. 이기주 주이탈리아대사는 『우리나라의 상품을 팔기 위해서라도 우리 문화를 선전하고 알리는 기회가 많아져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일본의 상품은 비싼 것이라도 이탈리아 사람들이 신뢰를 하면서 물건을 사는데 비해 한국 상품은 1만달러가 넘는 것은 보증서가 있는가,잘못되었을때 환불을 받을 수 있는가를 질문받게 된다』고 밝혔다.이대사는 상품을 팔기 위해서라도 한국을 알리는 대규모 문화 행사가 선행되어야 한다며 문화행사와 관광진흥을 적극적으로 연결시키고 있는 베니스에서 배울 점이 많다고 말했다.
  • 가장 무거운 새 원소발견/독연구소,납­니켈원자 충돌시켜

    【베를린 AP 연합】 지금까지 합성된 원소들 중 가장 무거운 새로운 원소가 독일에서 발견됐다. 독일남부 다름슈타트소재 중이온연구센터는 18일 독일물리학자 페테 아름부루스터가 이끄는 국제연구팀이 원자입자가속장치에서 수십억의 납원자와 수십억의 니켈원자를 충돌시킨지 수일만인 지난 9일 하오 4시39분 (현지시각) 새로운 원소의 존재를 입증했다고 발표했다. 이번 연구에는 독일 과학자들외에도 러시아,슬로바키아,핀란드 과학자 12명이 참가했다.
  • 독 콜연정 재출범/하원서 총리 재선

    【베를린 연합】 헬무트 콜 독일 총리는 15일 분데스탁(하원)표결에서 차기 총리로 재선됐다. 이에따라 지난 82년 이래 12년간 집권해온 콜 총리 휘하의 기민­기사당(CDU/CSU)과 자민당(FDP)의 기존 3당 연정체제의 중도우파 정부가 공식 유지되게 됐다.
  • 윤이상씨 방북/음악연구소기념식 참석

    재독 교포작곡가이며 범민련 해외본부의장인 윤이상씨(77)가 12일 평양에 도착했다. 13일 내외통신이 수신한 북한 중앙방송 보도에 따르면 윤씨는 이날 평양 만수대언덕의 김일성 동상을 참배했다. 이에앞서 윤씨는 11일 하오 부인 이수자씨(69)와 함께 베를린 쇠네펠트 공항에서 북한 국적기인 고려항공 JS216편에 탑승,평양으로 떠났다고 소식통들이 전했다. 윤씨의 방북은 내달로 개관 10주년을 맞는 평양시내 윤이상음악연구소 기념행사 참석등을 위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공식행사일까지는 아직 한달이상 남은 점으로 볼때 계속 미뤄지고 있는 김정일의 주석직 승계행사와의 관련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 독일식 「청산경제」 채택 확실/경협 대금결제 어떻게 할까

    ◎일정기간 한번씩 차액만 주고 받기/환율·물건값·결제기간 등 협의돼야 남북 경협이 본격화될 조짐을 보임에 따라 물품의 반입·반출에 따른 대금결제 방식이 관심을 모으고 있다. 대금결제 방식은 물품 반출·입에 따른 대금 수령의 위험도와 교역 규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지난 92년 9월17일 남북이 서명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1조 8항은 「대금결제는 청산결제 방식을 원칙으로 하며,필요한 경우 쌍방의 합의에 따라 다른 결제방식으로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1조 6항은 「교류물자의 가격은 국제시장 가격을 고려하여 물자교류 당사자 간에 협의하여 정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남북간의 물자교류도 과거 동서독처럼 물자가 오갈 때마다 돈을 주고 받지 않고 일정 기간마다 한번씩(동서독은 매년 6월 말) 차액만 주고받는 청산결제 방식이 될 것이 확실하다.서독의 시장가격을 기준으로 삼았던 동서독과 달리 국제시장 가격이 기준이라는 점이 다르다. 앞으로 물품교류에 따른 대금결제가 이뤄지기까지에는 청산계정 설치 금융기관과 환율 수준,연도별 교류한도 및 물품 종류 등 남북간에 합의해야 할 사항들은 무수하다.이 세부 사항들은 앞으로 전문가들의 실무회의에서 결정될 것이다. 동서독의 경우에는 지난 51년 발효된 베를린협정에 따라 서독은 연방은행,동독은 국가은행에 각각 청산계정을 설정,매년 6월 말 서로 교역실적을 상계하는 방식으로 정산했다.서독에서 동독으로 물품을 반출하는 수출업자는 동독의 수입업자가 대금을 동독의 국가은행이나 청산위임 은행에 입금하면,동독의 국가은행으로부터 입금사실을 통보받은 서독의 연방은행이나 청산 위임은행에서 수출대금을 수령하는 식으로 대금을 주고 받았다. 연방은행과 국가은행은 각각 자국의 수출·입자에게 물품대금을 지급한 뒤 매년 6월 차액만 서로 주고 받았다.동서독 간의 교역 규모는 연평균 8%씩 늘어 지난 86년의 경우 1백52억마르크로 확대됐다. 청산계정은 철강제 등 중공업 제품은 계정 1,소비재 등 경공업 제품은 계정 2,용역거래는 계정 3,동독이 서독 마르크로 현금결제하는 계정 S 등 4개로 분류,운용됐다.독일내 거래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별도의 통화단위인 VE를 사용했다.1VE=1서독 마르크,4.4동독 마르크였다. 또 일시적인 무역불규형으로 인한 지불 불능사태로 교역이 중단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신용 청산제도(Swing)가 도입됐다.동독의 상환부담을 덜기 위해 일정 한도(75년 이후 매년 8억5천만 서독마르크) 내에서 서독이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제도이다.동독은 이 제도를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는 반면 서독은 정치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동서독 사례를 볼 때 앞으로 남북간의 대금결제는 양측의 중앙은행에 청산계정을 설정한 뒤 미국 달러화에 대한 재정환율을 기준으로 상대 환율을 결정할 것으로 예상된다.다만 북한이 고시하는 재정환율의 경우 지나치게 과대 평가된 측면이 있어 실무협의 과정에서 상당한 논란을 불러 일으킬 전망이다.
  • 항공 서비스의 질/김현철 경제부기자(오늘의 눈)

    최근 멕시코와 동구지역을 돌아보며 취재하다 겪은 일이다.여러 국가를 다니다 보니 비행기를 9번 갈아탔는데,3차례나 말썽이 생겼다. 첫번째 사건은 지난달 29일 멕시코 아카풀코에서 생겼다.그곳에서 유럽으로 가려면 현지 국내선을 타고 멕시코시티로 가야 한다.미리 비행기표를 예매하고,출발 전에 두번이나 예약을 재확인했다.미리 점검하지 않으면 크게 낭패보는 사례가 심심치 않다는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나 당일 공항에서 탑승수속을 하려 하니 항공사측은 자리가 없다고 딴소리를 했다.『두번이나 확인했는데 무슨 소리냐』고 따졌으나 『전산착오인 것 같다』고만 되풀이 할 뿐이었다.미안한 기색은 커녕 오히려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이 재미있는 듯 농담을 해왔다.탑승 5분 전,생각 끝에 1백달러를 집어주니 기다렸다는 듯 자리를 만들어줬다.없다던 자리가 갑자기 생긴 것이다.멕시코 국영항공사인 에어로 멕시코 314편의 일이다. 두번째 사건은 1일 루프트한자 2531편에서 일어났다.뮌헨에서 이 비행기를 타고 베를린에 도착해보니 수화물로 부친 짐이 오지 않았다.황당했다.항공사에 신고하니 베를린에 묵을 숙소와 한국의 주소를 알려달라며 우선 호텔에 가서 기다리라고 했다.대단히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당시에는 이 항공사의 서비스가 어떻게 세계최고라고들 하는지 이해가 안됐다. 하지만 그날 저녁 짐은 호텔로 왔다.공항 포터의 실수로 짐이 비행기에 실리지 않은 것이다.이 과정에서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됐다.분실신고를 받은 항공사 여직원이 자신의 일할 시간이 끝났음에도 짐을 찾아주기 위해 퇴근하지 않고 조치를 취한 것이다.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교대근무자에게 넘기지 않고 해결해준 것이다.그러면서도 연신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세번째 사건은 4일 영국 브리티시 에어의 경우다.멕시코에서처럼 미리 확인했음에도 항공기좌석이 없었다.그러나 그들은 좌석의 등급을 높여서라도 좌석을 마련해주겠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물론 그 약속을 지켰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우리 항공사들의 서비스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 독/분단의 상처 아직도 남아/베를린장벽 붕괴 5주년

    ◎동·서지역간 정치·경제적 이질감 잔존/국제사회 「공룡」 부상… 유럽질서 격변 베를린장벽이 무너져내린 지 9일로 만 5년이 흘렀다.베를린장벽 붕괴로 동·서대결을 특징으로 하는 전후 유럽사,넓게는 세계사의 한장이 덮였고 유라시아대륙은 엄청난 변화를 겪어왔다. 베를린장벽 붕괴는 동·서독의 통일로 이어지면서 「기대」만큼이나 많은 후유증을 독일인들에게 떠안겼다.국제정치적으로도 동서간 세력구도에 공백이 생기면서 새 질서를 모색하려는 유럽국들의 노력이 계속되어왔지만 아직 완전한 틀을 잡지 못하고 있다. 독일에게 있어 베를린장벽 붕괴후 지난 5년간은 숨돌릴 틈도 없는 격변에 이어 새로운 자리매김을 향한 끊임없는 변화 그 자체였다.정치적으로는 동·서독일의 경제·사회통합에 이어 90년10월3일 동독이 소멸함에 따라 동독소속 5개주가 서독에 편입되는 이른바 흡수통일이 이뤄졌다. 지난달 16일 총선에서 동독재건문제가 크게 다뤄지지 않은 것은 독일인들이 그동안 통일후유증을 어느정도 수습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그러나 옛 동독공산당(현민사당)이 재기에 성공한 것은 동독인들의 불만을 대변하는 것으로 정치관측통들은 지적하고 있다.제도적으로 통일은 성취했지만 양독지역의 진정한 융합은 아직도 진행중인 사항이라는 시각이다.통일후유증 수습과정에서 서독인들의 불만도 커다란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무엇보다도 달라진 것은 외교·군사부문.지난 5년간 독일의 대외정책이나 국제정치학상 차지하는 위치변화는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지난 7월에는 독일군 해외파병지역제한을 철폐,2차대전 패전국의 멍에를 벗어던졌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사상 유례가 없는 경제통합의 거대한 실험장에 던져진 독일은 지난 5년동안 암흑천지를 벗어나 이제 터널의 한 끝에서 빛을 보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이 대부분의 경제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베를린장벽의 붕괴가 상징하는 냉전체제의 종식은 국제적으로 많은 과제를 새로 만들어냈으며 대부분의 부문에 있어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새로운 질서의 정착은 요원한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동구지역 대부분이 극심한 혼란을 거쳐 정치체제재편과 경제재건에 나서고 있으나 이른바 서구식 시장경제에 제대로 합류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 후유증으로 옛 세력들이 다시 힘을 얻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5년전 무너져내린 베를린장벽이 지금은 모습만 바꾼 채 독일내에서는 동·서독인들간 마음의 장벽으로,국제적으로는 민족주의의 장벽으로 다시 우뚝서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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