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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발전이끈 50인

    1945년 광복 이후 지금까지 50년 동안 어떤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이끌어 왔는가.서울신문이 광복 50년을 이끌어온 각계인사 50인을 선정,소개한다.북한사람과 외국국적을 가진 사람은 선정대상에서 제외했다. ▷이승만◁ 1875.3.26∼1965.7.19.황해도 평산출신.배재학당졸업·미국 프린스턴대학 철학박사·초대∼3대 대통령,독립협회등의 간부로 개화운동.일제때 상해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하는등 광복때까지 해외에서 독립운동.해방직후 미국에서 귀국해 민주진영 최고지도자로서 건국준비에 매진.48년 제헌의회의 국회의장에 이어 초대 대통령에 당선.장기집권을 위해 불법적 개헌을 감행한끝에 60년 4·19혁명으로 하야 한뒤 하와이로 망명했다. ▷김구◁ 1876.8.29∼1949.6.26.황해도 해주출신.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장 국무령 주석·한국독립당 집행위원·민주의원 총리·국민의회 부주석.일제때 신민회 황해도총감을 시작으로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바친 민족주의자.한인애국단을 조직해 이봉창의사 등으로 하여금 일본왕등에게 폭탄을 던지게 했다.임시정부 주석으로 광복군을 창설했으며 해방뒤 남북분단을 막기 위해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김병로◁ 1887∼1964.전남순창출신.1913년 일본메이지대졸업.일제시절 경성법전·보성전문교수 거쳐 변호사로 활약하면서 광주학생운동,6·10만세운동,원산파업사건 등 민족운동관련사건 무료변론.항일단체인 신간회중앙집행위원장역임.46년 남조선과도정부사법부장을 맡았고 건국후 초대·2대 대법원장을 거치며 우리나라의 사법제도의 기틀을 다졌다. ▷조병옥◁ 1894.3.21∼1960.2.15.충남 천안출신·미국 콜럼비아대 대학원 수료·1929년 광주학생사건으로 3년 복역·조선일보 전무·37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복역.해방뒤 우익의 한국민주당을 창당하고 미군정아래서 경무부장을 역임했으나 이승만정권의 독주에 반발,52년 반독재구국선언을 주도.54년 보수야당을 묶은 민주당을 창당,60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입후보했으나 신병으로 선거 한달전에 미국육군병원에서 사망했다. ▷신익희◁ 1894.6.9∼1956.5.5.경기도 광주출신.한성공립외국어학교졸·1919년 상해 망명·임정 내무총장·법무총장·48년 초대 국회의원·국회의장·대한국민당 위원장을 역임.54년 자유당정권이 4사5입 개헌등 횡포를 부리자 야당세력을 묶어 민주당을 창당.56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한강 백사장유세에 수십만 인파를 모으는등 지지를 받았으나 이틀뒤 전주유세장으로 가던 야간열차에서 사망했다. ▷최현배◁ 1894.10.19∼1970.3.23.호 외솔.경남 울산출신.일신학교·한성고등학교·일본 히로시마고등사범·경도제국대학졸업.연희전문 교수·문교부 편수국장·한글학회 이사장·학술원 회원역임.국어학 연구·국어정책의 수립·국어운동 추진에 공헌.「우리말본」으로 20세기 전반의 문법연구를 집대성.한글전용을 주창해 각종 교과서에 한글 가로쓰기 체제를 확립했다. ▷백낙준◁ 1895∼1985.평북 정주출신.22년 미국 파크대졸.27년 연희전문교수.46∼60년 연세대총장을 역임한 것을 비롯,대한소년단총재·문교부장관·국사편찬위원·국토통일자문회의장·외솔회이사장과 학술원 명예회원 역임.교육자로서 후진 양성에 헌신하면서 한국기독교 발전을 위해 「한국개신교사」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유일한◁ 1895∼1971.평양출신.19년 미미시건대 졸업.26년 제약회사인 유한양행 창설.42년 미육군성고문.44년 로스앤젤레스·뉴욕한미상공회의소회장을 역임.해방 이후에는 대한상공회의소회장을 맡아 우리나라의 산업부흥에 기여했다.또 전재산을 털어 한국고등기술학교를 설립한데 이어 유한학원을 설립,기업이윤을 사회에 환원하는 본보기가 됐다. ▷윤보선◁ 1897.8.26∼1990.7.18.충남 아산출신.영국 에딘버러대 졸업.대한임시의정원 의원·대한적십자사 총재·제4대 대통령·신민당 총재.이승만대통령 시절 비서실장·서울시장과 상공장관을 지냈으며 「4·19」로 60년 대통령에 취임.그러나 1년만에 「5·16」에 성공한 박정희에 의해 하야당했다.3대국회 이후 야당에 몸담으며 반독재·반군정투쟁을 벌였다. ▷최규남◁ 1898.1.26∼1992.4.27.황해 개성출신.연희전문 수물과·미웨슬리안대·미시건대학원졸.서울대교수·서울대총장·문교부장관·민의원·학술원회원 등 역임.국내 물리학계의태두이자 교육행정가로 큰 업적을 남김.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시건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 취득.서구의 신물리학을 국내에 도입,한국 물리학계의 초석을 다졌고 원자력발전과 과학기술교육의 기초를 다졌다. ▷우장춘◁ 1898.4.8∼1959.8.10.일본 도쿄태생.동경제대 농학과졸(1919).세계적인 육종학자로 채소종자의 육종합성에 성공하고 씨없는 수박을 개발하는 등 해방후 국내 농업발전에 기여.대학졸업후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에서 18년간 근무하면서 육종학연구.36년 종의 합성설로 동경제대에서 박사학위 취득.50년 정부 초청으로 귀국.농업연구소장·학술원회원 등을 역임했다. ▷장면◁ 1899.8.28∼1966.5.14.인천출신.미국 맨해튼 가톨릭대 졸.제헌의원·초대 주미대사·60년 부통령입후보 낙선·60년 4·19로 제2공화국 국무총리·60년 당시 민주당 신파의 영수로 이승만정권의 부정선거결과로 촉발된 「4·19」로 총리에 취임.그러나 구파출신 윤보선대통령과 권력암투를 벌인데다가 불안정한 정치로 5·16정권에 쫓겨났다. ▷김활란◁ 1899∼1970.인천출신.이화여전·미웨슬리언대학졸.25년 이화여전교수로 임용돼 해방직후부터 61년까지 이화여대총장을 역임.대학을 운영하면서도 한국여자기독교청년회 연합회재단이사장·공보처장·대한적십자사부총재 등을 역임하며 우리나라 개화기와 해방이후 신여성 교육에 헌신하고 기독교를 통한 사회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함석헌◁ 1901.3.13∼1989.2.4.평북 용천출신.동경고등사범졸.28∼38년 오산학교교사.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 대표위원.교육자·종교인·언론인등으로 활발하게 사회참여를 하며 성서와 노장철학을 바탕으로 비폭력 저항운동을 편 사상가.자유당 및 군사정권시대에는 반독재자유민권투쟁에 앞장.「뜻으로 본 한국역사」등 저서와 「씨알의 소리」등을 발간했고 민권운동에도 헌신했다. ▷한경직◁ 1902.12.29.평남 평원출신.숭실대·미국 프린스턴대졸.영락교회 목사·숭실대학장·기독교1백주년 기념사업협의회총재·대한예수교 잘로회 총회장 역임.종교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템플턴상 수상.한국 개신교 부흥에 불을 당긴 성직자.평생을 자신의 이름으로 된 집이나 저금통장 하나없이 청빈한 삶으로 일관하면서 세계적인 기독교 지도자로 활동해왔다. ▷이상백◁ 1904∼1966.서울출신.일본 와세다대학 사회철학과 졸업.서울 대학교 문과대교수(47).한국사회학회장(57).국제올림픽위원회(IOC)위원.서울신문사 체육공로상 수상.일제시대에 일본 농구협회를 창립하고 제11회 올림픽 때는 일본선수단 총무로 참가.광복직후 조선체육동지회를 결성해 대한체육회 발족에 디딤돌을 놓았으며 64년 대한올림픽 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64년 한국의 제2대 IOC위원으로 한국체육의 근대화를 이루었다. ▷유진산◁ 1905.10.18∼1974.4.28.충남금산 출신.보성고보졸.일본와세다대학 정경학부중퇴.만주에서 중경임정 연락원활동.46년 대한청년단 창립·자유당정권의 사사오입개헌파동뒤 민주당 창당에 참여.신파로 출발했으나 뒤에 구파로 변신,민주당 원내총무를 거쳐 분당뒤 신민당 간사장·대표위원을 지내는등 정통야당의 맥을 이었다.너무 타협적이라는 비판도 있었으나 현실을 감안한 정치력의 달인이었다는 평가가 높다. ▷이병철◁ 1910.2.12∼1987.11.19.경남 의령출신.중동 중학 4년 수료.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과 2년 수료.38년 삼성상회 서립.삼성물산·제일제당·제일모직 설립.61년 한국경제인협회(전경련 전신)초대 회장.삼성그룹의 창업주로 해방 이후 궁핍했던 시절 소비재산업 중심으로 한국 경제를 일으킨 경제계의 선구자다. ▷이범석◁ 1900.10.20∼1972.5.11.서울 출신.운남육군강무학교기병과졸.만주 청산리전투사령관·한국광복군참모장·초대국무총리·주중국대사·원외자유당부당수·내무부장관·참의원·국민의당 최고위원.항일독립투사로서 해방이후에도 활발한 정치활동을 했다.초대 국무총리로서 국방부장관을 겸임하면서 건국과 건군에 큰공.52년에는 이승만대통령의 「러닝 메이트」로 부통령에 입후보하기도 했다. ▷윤석중◁ 1911.5.25∼.서울 출신.일본 상지대졸.새싹회 회장·난파기념사업회 이사장·한국문인협회 아동문학분과위원장·방송윤리위원회 회장·한국방송협회 회장 역임.예술원회원.일제하 소학교시절 일본말 노래가 싫어 우리말 동요에관심을 가진후 평생을 어린이 운동에 몸바친 아동문학가.「초생달」「굴렁쇠」「바람과 연」등 20여권의 동요·동시·동화집을 냈다. ▷성철스님◁ 1912.4.10∼1993.11.4.속명 이영주.경남 산청출신.진주중학 졸업.35년 지리산 대원사에서 수행.68년 해인사 초대방장,81년 조계종 종정 취임.수행의 깊이와 경전의 섭렵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지로 한국 불교계의 정신적 사표가 됨.16년간의 생식과 8년간의 눕지않는 수행자세,「중답게 산다」는 생활철학등으로 원효 이래 한국불교의 최대 거목이라고 칭송받고 있다. ▷김용기◁ 1912∼1988.경기도 양주출신.농촌계몽등을 통한 민족운동을 위해 40년 양주군에 봉안이상촌 건립.52년 광주군에 가나안 농장을 설립한데 이어 62년 가나안농군학교 설립.73년 강원도 원성군에 신림 가나안 농군학교설립,82년 가나안 농군사관학교설립 등을 통해 농촌의 젊은 일꾼을 양성하고 농촌발전에 큰 업적을 세웠다. ▷김동리◁ 1913.11.24∼.경북 경주출신.경신중 중퇴.청년문학가협회회장·예술원회장·한국문인협회 이사장·서라벌예술대학장·국정자문위원 역임.예술원회원.3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화랑의 후예」당선으로 등단.단편소설「무녀도」「바위」「황토기」「밀다원시대」「등신불」과 장편 「사반의 십자가」「을화」등 발표.신·인간·자연을 주제로 삼아 특유의 순수문학 세계를 가꾸어 온 한국문단의 대부(대부)이다. ▷김기창◁ 1914.2.18∼.호 운보·서울출신.1930년 승동보통학교 졸업 및 김은호 문하입문.31∼36년 선전 연입선.37∼40년 선전 연4회 특선.69년 국전 심사위원 부위원장.71년 3·1문화상.예술원 회원.근대 한국화의 추상화작업 선도,전통수묵산수를 뛰어 넘어 특유의 바보산수와 청록산수로 한국화의 새로운 미술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서정주◁ 1915.5.18∼.호 미당.전북 고창 출신.고창 고보 중퇴·중앙불교전문학교 명예졸업.동아일보 사회부장·문교부 예술과 초대과장·한국문학가협회 시분과위원장·동국대 부교수 역임.대한민국 예술원 회원.「귀촉도」「신라초」등 시집 14권,「서정주 문학전집」「서정주 시선집」등에 시8백수 수록.「동천」을 비롯,수많은 절창을 통해 민족어를 연마하고 민족심성을 계발한 한국 서정시의 대가이다. ▷정주영◁ 1915.11.25∼.강원도 통천 출신.송전소전학교 졸업.현대그룹 회장·명예회장·대한체육회장·전국경제인연합회장·명예회장·국회의원·국민당 대표.47년 맨손으로 출발,기발한 아이디어와 불도저같은 추진력으로 현대를 국내 최대의 기업군으로 키운 「현대신화」의 주역.92년 국민당을 창당,대통령선거에 나섰다 실패하고 그룹경영에서도 손을 뗐다. ▷장기영◁ 1916.5.2∼1977.4.11.서울출신.선린상고졸.한국은행 부총재·한국일보 사장·IOC위원·한국일보 회장·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남북조절위원회 위원장대리·국회의원.금융계 언론계 정계등 여러방면에서 활약,「불도저」로 불리기도 했다.54년 한국일보를 창간했으며 초창기 한국체육을 궤도에 올려 놓았다.경제기획원장관으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워 고도 경제성장의 기반을 구축했다. ▷박정희◁ 1917.11.14∼1979.10.26.경북 구미 출신.대구사범·육사졸.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제5∼9대 대통령.61년 「5·16쿠데타」를 일으켜 제2공화국을 종식시키고 군사통치.64년 공화당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72년 10월 유신을 거쳐 79년 10·26으로 유명을 달리하기까지 18년동안 장기집권.몇차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한국경제의 기적」을 창출하고 자주국방의 기틀을 마련했다. ▷정일권◁ 1917.11.21∼1994.1.18.연해주 추풍출신.만주국 군관학교·일본 육사졸업.육군총참모장겸 육해공군 총사령관·육군대장·육군참모총장·국무총리·국회의장·해방직후 국방경비대 창설에 참여.경비대가 국군으로 개편된 뒤에는 군요직을 두루 역임했다.박정희대통령 시절 국무총리·국회의장으로 장기재직하면서 영향력을 발휘했으나 「얼굴마담」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김소희◁ 1917.12.1∼.본명 김순옥.전북고창출신.전남여고보 2년 수료.송만갑 정정렬 신호렬로부터 창악 가야금 서예 배움.한국국악협회 이사장 역임.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예능보유자.감성에만 치우치지 않는 품위있는 소리로 판소리의 격을 끌어올렸다고 평가받는 살아있는 최고의 명창.전통 국악의 맥을 오늘에 잇고 많은 해외공연으로 전통예술이 국제적으로평가받는데도 기여했다. ▷김승호◁ 1918.7.13∼1968.12.1.서울출신.보성고등보통학교졸.39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로 영화배우 생활 시작.59년 서울시 문화상 수상.63년 제10회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시집가는 날」「박서방」「역마」「혈맥」등 2백5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중년의 서민적 아버지상을 탁월하게 연기,한국영화 붐을 조성하는데 공헌했다. ▷장준하◁ 1918.8.27∼1975.8.17.평북 의주출신.44년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중국에서 탈영한뒤 광복군에 가담.45년 김구 비서로 귀국.53년 「사상계」창간.67년 국가원수모독죄로 투옥.제7대 국회의원에 옥중당선.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적 논조의 「사상계」가 폐간된 뒤 75년 등산중 의문의 실족사.62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막사이사이상(언론부문)을 받았다. ▷김수환◁ 1922.5.8∼.대구출신.일본 상지대 철학과·성신대학 신학부졸.51년 천주교 신부서품,69년 47세로 최연소 추기경에 서임.아시아주교회의 상임위원장·서강대 재단이사장 역임.천주교 서울대교구장·70년대 유신독재체제하에서는 민주화와 인권운동,80년대에는 인간성회복과 제도의 민주화를 외치면서 양심의 대변자 역할을 맡아 명동성당을 「한국민주화의 성지」로 만듦.천주교는 물론 한국사회의 정신적 지도자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조남철◁ 1923.11.30∼.전북 부안출신.국수 9연패·패왕 4연패·최고위 7연패등 50∼60년대 각종 기전 석권.83년 9단·37년 도일,바둑수업을 받은 뒤 43년 귀국해 걸음마단계의 현대바둑 보급에 힘쓴 한국바둑의 선구자.84년 일본 대창상,89년 은관문화훈장수상.현재 한국기원 명예이사장으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남덕우◁ 1924.10.10∼.경기 광주출신.국민대 정치학과.미국 오클라호마 주립대(경제학박사)졸.서강대 교수·재무장관·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국무총리·무역협회 회장.69년부터 10년간 경제각료로 일하며 부가가치세를 신설하는 등 경제개발정책의 기틀을 다짐.71년의 외환위기와 74년의 오일쇼크를 극복,연10%의 고도성장을 이룬 주역이다. ▷김대중◁ 1925.12.3∼.전남 신안출신.목포상고졸업.6선 의원.신민당 대통령후보.80년 내란혐의로 사형선고.87·92년 야당 대통령후보.아시아 태평양평화재단 이사장.70년대와 80년대 20년동안 낙선과 투옥을 거듭한 강력한 반정부운동 지도자.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으며 92년 대통령선거에서 패한뒤 정계를 은퇴.아태재단을 통해 평화·통일을 연구하며 「야당의 후견인」역할을 하고 있다. ▷김종필◁ 1926.1·7∼.충남 부여출신.육사 졸.초대 중앙정보부장·6대 국회의원·공화당 의장·국무총리·공화당 총재·민자당 대표최고위원.「5·16」의 막후 실력자로 중앙정보부및 공화당의 산파역할과 한·일 회담의 주역을 맡았다.박정희의 장기집권을 위한 3선개헌에 반대해 공직을 사퇴하고 외유에 나서면서 「자의반·타의반」이란 말을 남겼으며 반대세력에 밀려 실각도 했지만 결국 박정희의 18년 장기집권을 도왔다. ▷김준◁ 1926.4.25∼.전남 영광출신.49년 서울대농대졸.전남대 농대교수를 역임,62년 재건국민운동 경북지부장,64년 농협대교수 등을 맡으며 새마을 운동의 선구자로 활약.입법회의의원·새마을운동중앙본부회장·명예회장 등을 역임.건국이래 최대의 국민운동을 이끌며 「잘살아 보자」는 기치아래 피폐된 농촌 부흥과 사회발전에 기여했다. ▷박경리◁ 1926.10.28∼.경남 충무출신.진주고등여학교 졸.56년 현대문학에 단편 「흑흑백백」이 추천완료돼 등단.작품집 「불신시대」「환상의 시기」,장편 「시장과 전장」「김약국의 딸들」등.69년 「현대문학」에 연재하기 시작한 5부16권의 대하소설 「토지」를 26년만인 지난해 완결.치열한 작가정신으로 격동기 우리민족의 삶을 다양한 인물묘사와 섬세한 필치로 표현한 이 작품으로 한국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 ▷박태준◁ 1927.9.29∼.경남 양산 출신.일본 와세다대.육사졸.최고회의 비서실장.대한중석 사장.포항제철 사장·회장·명예회장.민정당 대표위원.민자당 최고위원.황량한 모래벌판이었던 포항에 세계 2위의 조강능력을 지닌 포항제철을 건설한 「포철 신화」의 주인공으로 「철의 사나이」로 불린다.민자당의 민정계 관리자로 정계에 나섰다가 실패,포철에서도 손을 뗐다. ▷김영삼◁ 1927.12.20∼.경남 거제출신.서울대 철학과 졸.3대 국회의원에 당선된뒤 9선·신민당 원내총무·신민당 총재·제14대 대통령.최연소·최다선 의원이며 최연소 제1야당 총재.93년 31년만의 문민 출신 대통령으로 취임.한때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와 정계에 파문을 일으켰고 84년 전두환대통령시절 4주일동안 민주화를 요구하며 단식투쟁.대통령취임후 특유의 결단력과 정면돌파로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전두환◁ 1931.1.18∼.경남 합천출신.육사졸.예비역 육군대장.국보위상임위원장.제12대 대통령.79년 국군 보안사령관으로 「12·12 사태」를 주도.박정희대통령 서거이후 공백상태이던 권력의 중심부를 장악.80년 「5·18」로 권력의 정상으로 등장한 뒤 그해말 대통령에 취임.재임 7년동안 엄격한 물가관리로 경제안정성장 주도.1인당 국민소득 2배이상 상승.평화적 정권교체 실현. ▷김운용◁ 1931.3.19∼.서울출신.미국 텍사스웨스턴대·연세대 정치외교과 졸.미국 메리빌대 법학박사.주미대사관 참사관(63),IOC부위원장·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세계태권도연맹 총재·국제경기연맹 총연합회 회장.국제 스포츠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세계 스포츠계의 제2인자.태권도를 2000년 시드니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도록 막후 조정해 한국 스포츠의 이미지를 세계 정상으로 끌어올렸다.현 사마란치 IOC 위원장의 유력한 후임후보로 꼽히고 있다. ▷노태우◁ 1932.12.4∼.대구출신.육사졸.예비역육군대장.제13대 대통령.「12·12」를 주도.권력핵심부에 진입.제5공화국 때 체육·내무부장관 역임.87년 「6·29선언」으로 민주화의 물줄기를 텄고 그해말 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렀고 「북방외교」로 공산권국가들과 국교수립.지방자치제 일부 실현.90년 여소야대 국면에서 3당통합으로 안정기반 구축. ▷임권택◁ 1936.5.2∼.전남 장성출신.광주 숭일고 중퇴.61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영화감독 데뷔.「만다라」「씨받이」「길소뜸」등 90여편 연출.89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보관장.93년 「서편제」로 제1회 상해국제영화제 최우수감독상.94년 「태백산맥」을 베를린 영화제 본선에 진출시킴.우리영화의 세계화와 한국영화 중흥에 크게 공헌했다. ▷김우중◁ 1936.12.19∼.서울출신.연세대졸.축구협회 회장·한국기원총재·대우그룹 회장·전경련 부회장.샐러리맨(한성실업)에서 연간 매출 35조원의 재벌 총수로 성장.기업인의 노벨상인 국제 기업인상(84년)수상.발로 뛰는 비즈니스로 아프리카등 수출 사각지대를 개척.기업 인수와 부실기업 재건의 명수로 알려져 있다. ▷김지하◁ 1941.2.4∼.전남 목포출신.서울대졸.64년 「서울대한일굴욕회담반대투쟁위원회」일원으로 학생운동에 참여.6·3사태 관련 첫구속자가 됨.이후 80년대 초반까지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질곡에 맞서 「오적」「타는 목마름으로」등 문제 시를 잇따라 발표하며 투사 시인으로 활동.최근엔 생명의 본질에 대한 통찰과 함께 생명왜곡 현상을 염려하며 「생명사상」에 몰두하고 있다. ▷이미자◁ 1941.10.30∼.서울출신.문성여고졸.67년 무궁화훈장 받음.대중가수로는 최초로 세종문화회관 공연.59년 데뷔이래 1천6백여곡을 부르고 이 가운데 4백여곡을 히트시켜 「엘레지의 여왕」으로불림.왜색시비에도 불구하고 60년대부터 30년 가까이 대중의 정서를 트로트 노래로 대변하며 한국 가요계를 대표해 왔다. ▷김수현◁ 1943.3.10∼.본명 김순옥.충북 청주출신.고려대 국문과졸.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87년∼).67년 라디오 드라마 「저 눈밭에 사슴이」로 데뷔한 이후 「새엄마」「사랑과 야망」「배반의 장미」「사랑이 뭐길래」「작별」등 수많은 TV드라마 집필.솔직담백한 표현과 인간심리를 꿰뚫는 듯한 대사처리로 안방극장을 휘어잡은 「언어의 마술사」이자 대중문화시대의 선두주자였다. ▷황영조◁ 1970.3.22∼.강원도 삼척출신.삼척 근덕중·강릉 명륜고·고려대.91유니버시아드(쉐필드).92바르셀로나 올림픽대회.94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마라톤 1위.한국 마라톤을 세계 정상으로 끌어올린 주인공.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씨의 우승 이후 56년만인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우리 국민들에게 큰 자긍심을 심어주고 마라톤 재건의 계기를 만들었다.
  • 영욕의 세월 역사에 묻고/1994년에 사라진 인물들

    ▷국내◁ 올 한해에도 우리시대를 이끌었던 많은 인물들이 나름대로의 역사적 평가를 남긴채 우리곁을 떠났다. 새해 첫달인 1월18일 동갑나이로 각기 다른 길을 걸었던 정일권 전국무총리와 문익환 목사가 같은 날 별세함으로써 국민들의 색다른 관심을 끌기도 했다. 2월2일에는 국어학계에 큰 족적을 남겼던 이숭령박사(86)가,15일에는 코오롱을 창업한 이원영옹(80)이 세상을 떠났다. 정치인으로는 서수종의원(53)과 심명보의원(59)박상문 전국회사무총장(62)이 5월에,전례용 전공화당의장서리(84)가 7월에,한건수 전의원(73)과 김철 전사회당당수(68)가 8월에 각각 운명을 달리했다. 특히 세계적인 석학이었던 김호길포항공대총장(61)이 4월31일 사망,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학자였던 이영호 전체육부장관(59)의 죽음도 세인들을 안타깝게 했다. 올해는 안의섭씨(66)와 신동우(55)등 우리와 친숙했던 만화가들과 TV에서 사랑받던 탤런트 장학수(48)석광렬(24)강민호씨(52)등이 숨지기도 했다. 이밖에 서양화가 박영선(84)김원씨(82),시인 박남수(76)김남주씨(48),작곡가 이호씨(63),가야금산조명인 함동정월씨(77)등 예술·문화계인사들이 사망했다. 우리나라 최초로 화신백화점을 운영했던 박흥식씨(91)의 사망소식도 기억에 남는 일이다. 올해 유명을 달리한 국내 저명인사들을 재정리해 본다. △정일권 전 국무총리(77) 1·18 △문익환 목사(77) 1·18 △김상만 동아일보 명예회장(84) 1·27 △이숭령 국어학자(86) 2·2 △김남주 시인(48) 2·14 △이원영 코롱그룹 창업주(80) 2·15 △장학수 탤런트(48) 3·36 △이호 작곡가(63) 4·1 △김호길 포항공대총장(61) 4·31 △박흥식 전 화신그룹회장(91)5·11 △서수종 민자당의원(53) 5·15 △심명보 민자당의원(59) 5·24 △박상문 전 국회사무총장(62) 5·30 △박영선 서양화가(84) 6·17 △전례용 전공화당 의장서리(84) 7·4 △석광렬 탤런트(24) 8·1 △안의섭 시사만화가(66) 8·4 △한건수 전 국회의원(73) 8·5 △김원 서양화가(82) 8·6 △김철 전 사회당 당수(68) 8·12 △강민호 탤런트(52) 8·24 △박일경 전 문교부장관(74)9·7 △박남수 원로시인(76) 9·17 △전호연 전 극동프로모션 회장(77) 9·23 △이영호 전 체육부장관(59) 10·6 △함동정월 가야금산조 명인(77) 10·12 △신동우 만화가(55) 11·7 ▷국외◁ 94년에도 한시대를 풍미했던 인물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갔다. 올해 한반도를 강타한 최대 뉴스는 북한주석 김일성(82)의 사망.세계 4대 통신들은 7월9일 정오 김의 죽음이 발표되자 그의 사망뉴스를 일제히 급전으로 타전했다.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나온 김의 갑작스런 사망 소식은 정상회담에 이은 남북 관계개선을 기대했던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켰다. 베를린 장벽을 세우고 18년간 동독을 철권통치했던 에리히 호네커 전동독 서기장(81)도 실각 이후 국외를 전전하다 5월29일 칠레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권력무상을 실감케 했다. 케네디 전대통령의 미망인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여사(64)는 5월19일 임파선암으로 약혼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의 뉴욕 아파트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사임했던 리처드 닉슨(81) 전미대통령은 4월22일 뇌졸중으로 숨졌고존 스미스(55)영국 노동당 당수도 5월12일 사망,변호사출신의 젊은 정치인 토니 블레어가 그 뒤를 이었다. 배우출신의 그리스 여성문화장관 멜리나 메르쿠리(68),멕시코 집권당 대통령후보 루이스 도날도 콜로시오(44),만프레드 뵈르너 나토 사무총장(59),시아파 회교도의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아라키(106)도 올해 숨진 인물들. 예술·문화계 인사로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의 저자 칼 포퍼(92),희곡 「대머리 여가수」를 쓴 외젠 이오네스코(84),영화 「지상에서 영원으로」의 버트 랭커스터(80),「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오드리 헵번과 공연했던 조지 페퍼드(65),「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의 제시카 탠디((85),대머리형사 「코작」 텔리 사발라스(70),「콰이강의 다리」의 원작자 피에르 불(81),「문 리버」로 오스카상을 수상했던 영화음악작곡가 헨리 맨시니(70),「쇼군」의 원작자 제임스 클라벨(69),007 시리즈의 감독 테렌스영(79)도 94년에 떨어진 큰 별들이다.
  • 서울신문 창간50돌 기념/「95 신년국제음악회」 연다

    ◎새해 1월13일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송어」 「악마의 트릴」 「집시의 노래」 「나부코」 등 연주/헝가리 「코다이 현악4중주단」 불가리아 「플로브디프 합창단」/우크라이나 바이올리니스트 아나스타샤 체보타레바 출현 새해는 광복 50주년이자 서울신문 창간 50주년.이를 기념하는 「95 신년국제음악회」가 새해 벽두인 1월 13일 하오 7시30분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펼쳐진다. 이 음악회에는 헝거리의 코다이 현악4중주단과 올해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1등없는 2등을 한 우크라이나의 아나스타샤 체보타레바,불가리아의 플로브디브 오페라 합창단 등 동유럽을 대표하는 음악인·단체가 대거 출연해 새해를 맞은 즐거움을 청중들과 나누게 된다. 리스트음악원 출신들로 구성된 코다이 현악 4중주단은 19 68년 부다페스트 국제음악콩쿠르에서 1등에 입상한 이후 20년 넘게 호흡을 맞추어 오며 국제적인 명성을 쌓았다.이번 연주회에서는 하이든의 현악 4중주 작품 64의 5와 슈베르트의 현악 5중주 「송어」,모차르트의 현악 4중주 K465를 연주한다.「송어」연주에는 이화여대와 오스트리아 빈 시립음대를 졸업한 피아니스트 김정아가 참여한다. 체보타레바는 올해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바이올린 부문에서 한국 출신의 제니퍼 고와 1등 없는 공동 2위를 차지해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신예.1972년 우크라이나의 오데사에 태어나 6살 때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해 옛소련 체제에서 영재교육을 받았다.이미 17살 때 파가니니 국제 콩쿠르에서 입상했고 올해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입상으로 더욱 관심을 끌고 있다.이번 음악회에서는 헝거리 출신의 피아니스트 도나텔라 파이로니와 크라이슬러가 편곡한 타르티니의 소나타「악마의 트릴」과 사라사테의 「비제의 카르멘 주제에 의한 환상곡」을 연주한다.파이로니는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하는 런던심포니·베를린필과 협연하고 훙가로톤 레이블로 컴팩트디스크를 내기도 했다. 플로브디브 오페라 합창단은 1920년 불가리아 국립 합창단으로 창단된뒤 1954년 불가리아 제2의 도시 플로브디브에서 문을 연 플로브디브 오페라·발레 극장의 소속 단체가 됐다.중후한 저음을 바탕으로 한 동구권 합창단 특유의 음색으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생전에 해마다 이 단체를 잘츠부르크페스티벌과 빈음악제에 초청할 만큼 인기가 있다. 이번 음악회에서는 모차르트의 「아베 베룸 코르푸스」,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중 「집시의 합창」·「나부코」중 「노예들의 합창」·「나비부인」중 「허밍 코러스」,차이코프스키의 「에프게니 오네긴」중 「월츠」,보로딘의 「이고르 왕자」중 「폴로베치안 춤과 합창」을 들려준다. 지휘는 디미트로프 아트나스 마리노프.피아노는 반다 마잘린이 맡는다.문의는 721­5965.
  • 평양 구동독 대사관/미,임대가능성 타진/「연락소」설치 관련

    【베를린 연합】 미국은 평양에 연락사무소를 설치하는 문제와 관련,옛 동독대사관이던 독일이익대표부 공관의 임대 가능성을 타진해왔다고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가 21일 보도했다. 신문은 옛 동독정부로부터 물려받아 현재 독일이익대표부의 이름 아래 4명의 관리인원만이 상주하고 있는 초대형 옛 동독대사관의 현황을 소개하면서 이같이 밝혔다. 독일측은 약 1만6천㎡의 넓은 부지에 자리잡고 있는 옛 동독대사관의 관리부담을 감안,미국측이 실제 임대요청을 해올 경우 긍정적으로 검토할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관련,관측통들은 미국이 평양내 연락사무소건물을 신축하는 대신 기존건물 임대 가능성을 타진한 점으로 볼 때 사무소개설시기가 상당히 앞당겨질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 독,전후 첫 해외파병/보스니아에… 유엔군 철수지원

    【베를린 연합】 독일은 보스니아 주둔 유엔평화유지군 철수작전이 시작되면 첨단 토네이도 전폭기 등 해·공군 전투부대를 투입,유엔군 지원에 나서기로 방침을 굳힌 것으로 20일 DPA통신이 보도했다. 통신은 이날 헬무트 콜 총리 주재로 열린 각의에 참석한 한 소식통을 인용,이같이 말했다. 독일군이 전투임무를 띠고 해외에 파병되는 것은 2차대전 종전 이래 처음이다.
  • 「북한소멸」(외언내언)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한다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를 찾는것과 같다는 말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정치와 경제의 혼돈이 극심하던 때의 일이다.이 무렵 미국의 어떤 잡지는 세계의 미래지도를 그리면서 한반도를 붉게 칠해 충결을 준일도 있다.자유진영이 몰리던 시절의 이야기다. 2차대전을 마무리한 국제회의가 이른바 얄타회담이다.전승(전승)연합국들의 전후문제처리 정상회담이다.이 회담의 합의가 지난 50년의 세계를 지배해온 동서냉전의 얄타체제를 탄생시켰던 것.독·일(독·일)의 식민지 해방과 독일분단,새로운 국경선및 영향권설정 등이 내용이었다.한반도 분단도 이 얄타회담의 산물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극의 한쪽을 지배했던 공산주의와 그 종주국 소련의 몰락·붕괴는 얄타체제와 그에 의해 설정되었던 국경선및 영향권의 변경을 예고하는 것이었다.국경선변경은 89년의 베를린장벽 붕괴로 시작되었으며 동구권의 자유화와 동서독의 통일 그리고 소련의 소멸로 이어졌던 것이다.결과적으로 세계지도상의 붉은색도 거의 다 지워지고 말아믿. 그것은 불가피한 역사의 흐름이자 과정이다.강제로 분단되었던 독일은 민주화통일로 갔고 인위적으로 무리하게 통합되었던 유고와 체코는 민주화로 분열되었으며 발트3국등 스탈린에 의해 강제 병합되었던 구소련 공화국들은 자유독립의 길을 찾았다.체첸과 유고같은 경우는 지금도 분열의 진통을 계속하고 있다. 불합리와 모순이 자연과 순리를 회복한 것이며 그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세계사의 흐름이자 시대의 요구라 해야 할 것이다.같은 강대국들에 의한 인위적 분단의 한반도만 아직도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것은 우리의 불행이 아닐수 없다. 영국의 권위있는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95년에 소멸할 가능성이 있는 국가의 하나로 북한을 꼽았다고 한다.내년은 좀 빠를지 모르나 언젠가는 그렇게 되는것이 역사와 시대의 요구요 순리라 생각되지 않는가?
  • 북,사회주의 고수/대서방 접근 병행/독지보도

    【베를린 연합】 북한은 남북대화 재개의 전제조건으로 조문파동에 대한 김영삼대통령의 사과와 함께 국가보안법 철폐를 요구하고 있다고 독일유력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가 14일 보도했다. 신문은 이날 평양발 1면 머릿기사에서 김영남 외교부장의 말을 인용,이같이 말하고 북한은 사회주의 체제를 굳게 유지하면서 대서방 접근정책을 병행한다는 노선을 취해나간다는 방침을 견지하고 있다고 전했다.
  • 「트라비」의 설움(통독 4년의 명암:4)

    ◎동독출신/정신병 25%/「첨단」 까막눈/자본주의·경쟁 적응못해 정신질환 급증/“폐쇄 북한주민 통일후유증 더 심각할것” 「트라비」는 통일후 동독출신 독일인의 설움을 상징하는 동독산 소형차 「트라반트」의 애칭이다.작센주에서 생산되던 이 동독의 유일한 승용차 트라비는 이제는 더이상 생산되지 않는다.통일후 동독출신마저 앞을 다퉈 서독제 벤츠와 BMW·폴크스바겐,그리고 일본차나 한국차를 구입했지 수준이하인 트라비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날 스타일의 이 조잡한 2기통엔진 트라비 생산라인은 2년전 폴크스바겐 조립공장으로 바뀌는 수모를 겪었다.또 동독지역 길거리에 아직 굴러다니는 매연 뿜는 트라비는 서독 부자들이 취미로 수집하는 값싼 골동품신세가 돼버렸다. 이런 식으로 「용도폐기」돼버린 동독인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더구나 적정인원보다 30∼50% 많은 인력을 고용하고 있던 동독의 국영회사들이고 보면 신탁청(트로이한트)의 생산·효율성 점검을 거치면서 실업률 15%(재교육자 포함하면 25%추정)의무더기 실직사태를 빚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동독 같은 사회주의국가에는 실업이란 개념 자체가 없어 콤비나트에 적만 걸어놓고 놀고 먹는 사람이 많았다). 30∼40년대에 제작된 낡은 기계로 자동차를 생산하던 동독기술자가 느닷없이 컴퓨터화된 최신기계를 마주하게 되니 까막눈이 될 수밖에 없다.젊은이들은 그나마 재교육으로 기술을 습득,재취업을 하지만 40∼50대는 실직연금신세를 지는 낙오자가 돼버리기 일쑤다. 『갑자기 「돈이 최고」 「돈 가진 자가 권력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게 가장 힘들었습니다』 동베를린 신문이었으나 통일후 서독자본가가 인수한 일간 베를리너 차이퉁(32만부 간행)의 국제정치담당 데스크 볼프강 게오르그씨는 일생을 사회주의아래 살았는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자본주의로 머리를 바꿀 수가 있겠느냐며 현실의 어려움을 털어놓는다. 『전에는 공산당중앙위의 지시와 보도통제를 받았지만 그대로 따르면 됐어요.통일이 되고 서독에서 새 사주가 오더니 「뭐든지 써도 좋다.다만 신문이 팔려야 한다」고 하더군요.경쟁을 하다보니 신문은 선정적이 되고 일은 서너배 늘고 또 동료와의 인간적이던 관계는 소원해졌습니다.35%의 기자가 능력부족으로 잘리고 서독출신들이 보충됐어요.옛날엔 자재부족·흉년 같은 기사도 사회불안을 초래한다며 보도통제하는 답답한 일도 있었지만 그래도 불만이 있으면 윗사람에게 불평은 할 수 있었습니다.그런데 지금은 사장이 마치 왕 같아서 불만을 말하면 집에 가라고 합니다』 생소한 자본주의·경쟁사회에 적응하느라 아직도 애를 먹고 있는 눈치였다. 동독지역 라이프치히에서 열차로 30분거리에 있는 할레시의 루터교 사회봉사단체소속의 조그만 병원을 찾아갔다.정신분석 및 치료의 권위자인 한스 요아힘 마즈 박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동독지역 주민의 25%가 갖가지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통계가 있죠.정밀조사는 안돼 있지만 동독당시 권력상층부나 그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실직자가 됐는데 그들 가운데 「서독삶과 비교해 동독의 삶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됐다.내가 일생동안 추구한 것이 무엇이냐.물거품이로다」하는 극도의 상실감·불안·우울증에 빠져 자살을 기도하는 사례가 부쩍 늘고 있습니다』 동독시절 반체제·민주인사로 탄압을 받은 마즈 박사는 『요즘 동독사람들 가운데는 부모의 과보호를 받던 어린이가 갑자기 부모를 잃을 경우 나타나는 것과 같은 정신질환(패닉·정서불안·무기력증)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권위주의적 정권이 시키는대로만 살다가 갑자기 울타리가 없어지고 자기 삶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게 되니까 세상이 무섭고 불안해진 것이지요』 마즈 박사는 반대로 자본주의 민주사회에 지나친 환상을 가졌던 사람들 가운데서도 현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데 따르는 정신병증세가 적잖이 발견되고 있다고 설명했다.물질적 부유가 곧 행복이 아닌 현실 때문에 갈등하다 정신이상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분야별로 적잖은 교류가 있던 동서독과는 달리 완전폐쇄된 북한주민이 통일후 어떤 증세를 보이게 될 것으로 진단하느냐는 질문에 마즈 박사는 다만 『심각한 증세일 것』이라고만 했다.
  • 동독군의 「백기통합」(통독 4년의 명암:3)

    ◎동톡무기 미그29만 남았다/동·서독군 같은 비율 감축… 동독군 6만/전비밀기관 밀고자 15% 가려내 예편 독일통일은 동서독간 대등한 통일협정 체결이라는 형식을 취했지만 실제로는 정치 경제 모든 면에서 서독에 의한 동독의 일방적 흡수통합이었다.이같은 사실은 시간이 흐르고 통일작업이 하나씩 추진돼가면서 더욱 분명해졌다.더욱이 동서독 군대의 통합과정을 보면 마치 동독이 서독에 「무조건 항복」을 한듯한 인상마저 받게된다. 통일직후 동독지역에 최고사령관으로 파견돼 동독군의 「민주시민군으로의 전환작업」을 완료한뒤 지난 10월 예편한 베르너 폰 셰벤장군(육군 중장)을 포츠담근교의 자택에서 만났다.2차대전후 포츠담선언으로 유명한 포츠담은 서베를린과 인접한 구동독지역으로 셰벤장군의 고향이었다. 『남북한 군대처럼 강하지는 않지만 동서독군 사이에도 적대감정이 있는게 사실이고 또 공산주의 사상교육의 영향도 있고해서 동독군의 강한 반발등 부작용을 예상했으나 의외로 평온하게 통합작업이 이뤄졌습니다』 물론 탈냉전시대라서 긴장관계가 심각하지는 않았다 치더라도 반세기 가까이 서방측 NATO(북대서양조약기구)군과 공산권 바르샤바조약기구군으로 대치해온 동서독군의 통합이 그의 말대로 그렇게 순조롭기만 했을까?셰벤장군의 2년에 걸친 동독군의 「서독군 편입」과정 설명을 듣고는 그같은 의문은 사라졌다.통합과정은 동독군의 해체절차로 진행됐지만 병력감축등이 양측에 비슷한 비율로 이뤄졌기 때문에 동독측이 반발할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현재 통일독일의 병력은 34만명.통일과정에서 전점령군이던 미·영·불·러시아와의 합의에 따른것이다(정원은 37만명). 통일직전 서독군은 약49만,동독군은 약17만명이었다.여기서 절반 가까운 감군이 이뤄진 셈인데 현재의 34만병력의 20%선인 6만여명이 동독군출신이고 28만여명이 서독군출신이다.결국 통일로 서독군 21만,동독군 11만명 가량이 군복을 벗게된 셈이다. 동독군이 의외로 규모가 작았던 것은 동서독 인구(서독 6천3백만,동독 1천7백만명)와 동독지역에 45만의 러시아군이 주둔했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해가 가는 일이다.94년말까지 철수키로 돼있던 러시아군은 일정을 앞당겨 지난8월 완전 철수했고 서베를린에 주둔했던 연합군도 지난9월 철수,독일은 비로소 완전한 독립국이 됐다. 현재 독일군 장비는 군복에서부터 장비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서독군당시의 것들이다.동독군의 「유품」으로는 구소련제인 미그29전투기가 유일한 예외로 현역에 남아있다. 『통일 이틀전 동독의 민선정부는 동독군 소속의 장성 전원을 예편조치했죠.통일후 대령이하 나머지 동독장교 3만2천명 가운데 2만4천명이 서독군에 편입됐는데 또 그중 절반이 90년말 군을 떠났습니다.여러가지 이유로 스스로 떠난 것이죠.그래서 1만2천명의 장교가 남은 셈이죠』 독일정부는 2년근무 조건의 계약을 맺어 이들을 개별적으로 서독군 기성부대에 6∼8주간 배치해 특별훈련을 하면서 성분과 자질검사를 실시했다.그래서 통일독일군으로 살아남게된 동독군출신 장교는 당초의 6분의 1인 5천명.청년층인 사병들은 8만여명이 제대하고 5만5천명이 군에 남았다. 『구동독당시 비밀경찰과 군정보기관의 신상관련 비밀문서를 관장하는 신설조사기관 「가우크」 조회결과 15%의 군인들이 동료를 감시·밀고하는 역할을 했더군요.이들을 찾아내 정리하는 일도 어려웠지만 과거 베일속에 가려 국민을 위압하던 군에서 민주시민군으로 체질을 바꾸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셰벤장군은 또하나의 문제로 다른 공무원이나 직장인과 마찬가지로 동독군출신은 생산성·효율성원칙에 따라 서독출신 동료들보다 20% 적은 봉급을 받고 있다. 예컨대 독일군은 NATO군의 일원이어서 반드시 공용어인 영어를 할줄 알아야 한다.그러나 동독출신은 영어는 모르고 러시아말을 배웠기 때문에 새로 영어교육을 받고 있었으며 이런 것이 모두 비효율로 지적되는 셈이었다.
  • 통일의 그늘(통독4년의 명암:1)

    ◎황병선정치2부장의 현장취재/통일 「신이 준 완성품」 아니었다/임금·생활수준 큰 차… 동,「2등시민」 설움/「동」실업률 15%… 「서」의 갑절/임금75%·생산성40% 불과/한해 75조원 투자… 15년 지나야 같은 수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지 5년,그리고 분단 45년에 역사적 종지부를 찍은 동서독 통일이 이뤄진지 만4년.그러나 독일의 통일은 어느 날 신이 완성품으로 내려준 선물은 아니었다. 오는 2000년 수도로 「복위」케 돼있는 베를린과 아직 수도기능을 하고 있는 본,그리고 구서독지역의 쾰른 프랑크푸르트 뮌헨,구동독의 드레스덴 라이프치히등 통독 4년의 현장을 2주간 취재하며 자연스레 얻은 결론은 통일이 90년 10월 3일 완성형으로 이뤄진게 아니라는 것이었다.통일이 선포된 그날은 다만 동구의 와해라는 세계사의 물결에 따라 89년 11월 9일 베를린장벽이 열리면서 시작된 독일 통일장정의 공식 출발을 알린 날이었다. 그후 4년,8천만 독일국민은 예상됐던,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예기치 못했던 과업들과 씨름해가며 통일을 완성시켜 나가느라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었다.그들은 통일직후의 환희와 낙관,혼란의 시기가 지나면서 마주치기 시작한 「통일의 그늘과 부작용」에 실망하고 있었다. 불만을 토로하는데는 동서독 출신의 구분이 없었다. 연방정부 관리와 주의회 관계자·언론인·전문가들을 인터뷰한 결과를 종합할 때 상이한 이데올로기와 체제아래 살아온 지난 반세기를 극복하고 통일을 완성시키기까지 게르만민족의 고달픈 장정은 십수년은 더 계속될 전망이었다.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이 어려움과 불만을 토로하고는 있지만 통일은 확고한 궤도에 진입해 있었다는 것이다.89년 10월 동독인들의 자유와 풍요 그리고 민주주의를 향한 염원이 10만 군중의 「월요시위」로 폭발,한달후의 베를린 장벽 붕괴를 촉발시킨 역사의 현장 라이프치히 중심가 카를 마르크스광장.이제는 아우구스투스 광장이란 동독공산당정권 이전의 옛이름과 평화를 되찾은 모습이었다. 광장을 바라보며 자리잡은 유서깊은 음악당 게반트하우스에선 연말 정기 교향곡연주회가 열리고 있었다.객석에는 주로 노부부들의모습이 많이 눈에 띄었고 공연장은 무덤덤 할뿐 음악을 즐기는 활기에 넘친 분위기는 아니었다.특히 생기없는 얼굴표정들 때문인듯 했다.또 음악당밖 분수대 곁의 침침한 가로등 아래선 청년 3∼4명이 가슴에 맺힌 불만의 표출인양 지나는 행인들을 향해 간간이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라이프치히시청의 볼프강 프링켈씨(시장 비서실장)는 동독지역에서는 경제적으로 가장 앞서가는 편인 라이프치히의 이런 어두운 얼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생각해보세요.새로운 정치체제 그리고 서독과 같은 생활수준향상이란 꿈에 잔뜩 부풀어있던 동독지역 사람들에게 돌아온 것은 갑자기 2등국민이 돼버렸다는 실망감이었습니다.좋은 상품이 있으면 뭘합니까.직장과 돈이 없는데.전체적으로 생활수준이 나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바로 행복을 보장해주진 않습니다.상대적 좌절감이 그들을 매우 우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지요』 프링켈씨는 무엇보다 예기치 못했던 「살인적」실업이 가장 큰 어려움이라고 설명했다.동독지역 전체로 보면 대략 9백90만의 일자리가 6백10만으로 줄어 3백80만명의 실업자가 생겼다는 것인데 94년 7월 현재 공식 실업률은 15.1%로 서독지역(7%선)보다 2배나 높은 것으로 돼있다(연방 재무부통계). 특히 실업은 경험이 없는 청년층,그리고 여성과 노년층에 집중돼 이들 세그룹은 「통일의 희생자들」로 지칭된다. 더구나 통일직전 동서독간에 합의를 본 협약의 「생산성 원칙」에 따라 동독지역 근로자들은 같은 일을 하고도 서독지역 동료들의 75∼80%에 해당하는 차별임금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이것도 4년전 60%에서 시작해 그동안 해마다 상향조정된 결과다. 라이프치히 거리는 도로포장 건물신축·보수공사등으로 외견상 대단한 활기를 띠고 있었지만 그 바닥에는 음악당에서 엿볼 수 있었던 노인 청년 여성층의 어두운 비애,2등시민의 서러움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서독출신들이 통일이후 더 잘살게 된 것도,더 만족스러워 하는 것도 아니다.일간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너 자이퉁의 외신담당 에디터 피터 스툼씨는 공무원들과는 달리 비교적 솔직하게 자신의 견해를 털어놓는다. 『동독출신들은 우리의 75%밖에 임금을 받지못한다며 불만이 많지만 자발적으로 일해본 경험이 없는 그들의 생산성은 사실 그 수준에도 못미칩니다.그들은 전보다 훨씬 살기 좋아졌는데도 계속 불만을 말합니다.동서독은 정신적 경제적으로 아직 분리돼있는 상태죠.한 15년후면 비슷한 수준이 될까요?』(연방정부의 93년말 현재 동독지역 생산성 공식집계는 서독의 40.2%다) 스툼씨는 서독지역 주민들 소득세에 통일세 성격의 「솔리대리티 택스」 7.5%가 추가돼 『아,동독용이구나』하고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동독지역보다 더 많은 세금을 내는 외에 서독지역은 통일에 따른 엄청난 재정·경제적 부담을 감당하고 있었다. 연방 재무부의 크리스티안 웅거씨는 94년 한해에만도 건설·설비부문에서 1천5백억 마르크(한화 약75조원상당,한국의 95년도 총예산은 54조 8천여억원)가 보내지는 등 지난 4년간 모두 5천8백억 마르크가 동독지역으로 보내졌으며 이는 통일후 해마다 연방예산의 4분의 1이 투자된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결국 서독지역 주민의 어깨에 25%의 짐이 얹혀진 셈이니 서독지역주민에게도 불만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최근 한 여론조사결과(디 자이트 신문이 94년 9월 9백80명을 대상으로 조사)에서도 나타났듯 동독지역 주민의 대다수인 69%가 통일후의 생활형편에 대체로 만족을 표하고 있다.(22%가 불만,8%가 매우 불만이라고 응답)그리고 장래를 긍정적으로 보는 주민이 계속 늘어나는 추세라는 현지 언론인의 설명은 통일 독일의 밝은 장래를 점치게 해준다.
  • 베제크리크 천불동/허세욱(서역 문화기행:4)

    ◎화염산기슭 석굴 83개… 6세기 불교유적/위구르족 왕가 사원… 당시 생활상 벽화로 남겨/서유기의 무대… 삼장법사­손오공 등 3제자의 조각상 곳곳에 투루판은 그 동서를 관통하는 국도 312번에 놓여있다.그것은 신강의 최서단인 이닝(이령)에서 황하와 황해가 만나는 최동단의 상하이(상해)까지 장장 5천㎞,어쩌면 미국의 동서를 횡단하는 80번 하이웨이에 상당하다. 투루판에서 312번국도를 타고 동쪽으로 40㎞쯤 달렸을 때,갑자기 그 왼편으로 빨간 바위산을 만나는데 그 형상은 얼핏 한국전쟁당시 철의 삼각지,아이스크림고지를 방불케하는 타원형으로 마치 험상궂도록 쪼글쪼글한 노인의 얼굴 혹은,여름날 여인의 풍덩한 주름 치마같았다.한 포기의 폴도 없이 세로의 주름살은 차라리 빨간 폭포가 쏟아지는 형상이었다. 그것이 바로 화염산의 남쪽 기슭이었다.그 맹렬한 화염의 섭곡을 보자 놀랍고 반가웠다.그 명성을 들은지 너무 오래라서 그렇다.당나라의 고승 현장(602∼664)의 「대당서역기」를 비롯,당나라의 유명한 변새시인 잠참(715∼770)이 이곳에서 벼슬하는 동안 썼던 경화산」,「화산운가송별」등의 명작,그리고 중국4대기서로 꼽히는 오승은(1500?∼1582?)의 「서유기」등에서 익히 화염산,그 「팔백리에 걸친 불길」을 들어 왔었다. ○홍산에 풀한포기 안나 화염산은 「홍산」혹은 「화산」으로 불렸다.그보다 위구르말로는 「쿠즈로다고」즉 홍산이란 뜻이다.그것은 지구상에서 두번째로 넓고 낮은 동서 1백20㎞,남북 60㎞의 투루판분지에 동서 98㎞의 길이에 남북 9㎞의 폭으로 가장 높은 곳이라야 8백32m,평균 높이는 고작 5백m다.하지만 해발 이하의 분지라서 그 높이는 상당했다.연간 강우량이 겨우 16㎜의 초건조지역에 평균 기온이 섭씨38도 최고 기온이 49도나 된다.그래서 암석표면의 온도는 무려 80도를 넘는다.거기다 지층에 매장된 무진장의 석탄과 석탄에서 배출되는 가스로부터 폭발 연소도 적지 않다고 하니 「서유기」에 묘사한 대로 「화두 불길이 천길의 높이」란 형용도 결코 터무니 없는 말이 아니었다. 필자가 화염산을 처음 만났을 때의 충격은 지금부터 1천2백45년전인 기원749년,이곳에 당도했던 잠참의 「화산을 지나며」란 시에 잘 나타났다. 「화산금시견, 돌올포창동. 적염소로운, 염기증색공. 불지음양탄, 하독연차중? 아래엄동시, 산하다염풍. 인마주한류, 열지조화공」 (처음 만난 화염산은, 포창 동녘에 우뚝하여라. 화염은 오랑캐의 구름을 불지르고, 증기는 변방의 하늘을 찜질한다. 음양의 숯이, 어찌 여기서만 훨훨 타오르는가? 엄동설한에도 산밑엔 삼복의 열풍이. 사람도 말도 땀을 뻘뻘 흘리거늘, 누가 알랴? 자연의 조화를) 화염산 섭곡이 끝나는 승금구에서 312번 국도를 작별하고 좌회전하자 이윽고 빨간협곡이 열리면서 차는 화염산 북록을 휘돌았다.그 협곡의 정면에 보이는 둥근 모자모양의 홍산이 피라미드의 형세로 성큼 다가섰다.그것이 화염산의 주봉이었는데 주봉은 충격적 이라기보다 다소곳한 곡선으로 다만 풀 한 포기 없을 뿐 여느 동리앞을 지키는 안산의 크기였다.거기서 삼장의 길이 막히고 손오공이 파초의 부채로 재주를 부렸다는 곳이다. ○아래쪽 설수도 흘러 그 주봉아래로 기원6세기 고창왕국씨때부터 9세기까지 3세기에 걸쳐 위구르족들 왕가의 사원으로 건설한 석굴의 촌락 「베제크리크 천불동」이 있고 천불동아래로는 파란 설수가 콸콸 흐르는 목두구.그리고 천불동 입구 편편한 산기슭엔 최근 「서주천성원」이라는 작은 전시장을 개설 해 놓았다.그 안에는 「서유기」의 주연으로 삼장법사를 비롯,손오공·저팔계등을 조소한 외로도 「팔십일난」을 도해한 동굴,동굴밖 언덕위로는 잠참의 입상과 그의 대표작인 「화산운가송별」을 새긴 시비가 있었다.그 시비에 새겨진 첫 절은 이러했다. 「화산돌올적정구, 화산오월화운후. 수운만산응미개, 비조천리불감래」 화산이 우뚝 적정 어귀에 섰거늘, 오월이라 불꽃 구름 뭉게 뭉게. 불꽃 구름 엉긴 채 풀리지 않거늘, 천리길 나는 새도 얼씬할 수 없네) 필자가 찾은 때는 다행히 쾌청한 9월중순 이어서 인지 불꽃구름커녕 흰구름 한 조각도 보이지 않는 진하디 진한 쪽빛 하늘 뿐이었다.그 쪽빛에 적갈의 산빛,골짜기와 석굴,길가에 굴러가는 돌멩이조차 일색으로 빨갰다. 그런데 그토록 숨 막힌 빨간 모랫벌과협곡에도 서원의 의지는 굴을 파고 예술의 꽃을 피웠었다.바로 베제크리크 천불동이 그것이다. 화염산 주봉 동쪽 기슭엔 광장이 닦여 있었다.그 왼편엔 「서유기」의 일사삼도의 조상을 세웠는데 초입의 서주천성원에서 보았던 그것보다 규모가 큰데다 훨씬 정교하고 생동감이 있었다.그 바른편 계단으로 내려가면 황갈색의 가파른 벼랑이 무르토크강(목두구))을 굽어 보고 있었다.과연 「베제크리크」란 지명이 「산 허리」라는 위구르말을 딸만했다. 기록상으로 석굴의 수는 83개라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50여개이며 그중 벽화를 소유했던 것이 40여개요 벽화의 총면적은 1천2백㎡라고.그것들은 열차의 창을 방불케 일렬횡대로 늘어서 있었고,그 내부는 대체로 석굴의 길이 20m에 5m의 폭과 5m의 높이의 장방형,거기다 천장은 동그란 궁륭식이라 쿠차의 키질,돈황의 막고굴에 비해 훨씬 넓고 시원했다. ○일부 벽화 손실 아쉬워 기원6세기부터 13세기까지 지금 위구르족의 조선인 고창왕국씨들의 왕가 사원을 비롯,당시 불가의 승려·신도들의 승방,고승을 기리는은굴,혹은 그들이 좌선하던 비가라굴로 쓰였었다.당대의 문헌인 「서주도경」에 고창지역 불교의 승지로 소개한 「영융굴사」가 바로 베제크리크 천불동인 것이다. 여기 벽화는 비록 석가모니 전생의 사적을 선양하는 본생고사를 비롯,서원도·경변도·공양상·인연고사등 불가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거기에 등장하는 왕공 귀족과 공양 신도들의 복식·가옥·거마·기악등을 통해 당시 불교를 신앙하던 회골사람들의 생생한 생활과 문화를 볼수 있다는 점에서 특기할만했다. 특히 33호 석굴의 「왕자거애도」에 그려진 여러나라 왕자의 각기 다른 모습과 표정은 마치 오늘날 정상들의 모임을 발불케했고,39호 석굴의 커다란 공양 보살의 풍윤한 얼굴과 굵직한 청화의 무늬,그리고 31호 석굴의 설법도에 그려진 보살의 성장과 복식등은 생생한 역사와 문화가 묻혀 있음을 직감케 했다. 그러나 20호 석굴과 27호 석굴에서 만난 복사물의 대체와 훼손된 잔화를 대하면서 허탈과 울분을 참을 수 없었다.특히 20호 석굴의 서원도,회골국왕과 왕후의 형상은 10세기 당시 회골국 복식을 알수있는 증거임에도 절취된 채 지금 영인된 사진만 걸려 있음은 27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필자가 참관한 9호,37호등 석굴에서도 불상의 눈이 뭉개지거나 벽면을 도려낸 칼날의 선이 남아 여기 저기서 수난의 흔적은 완연했다. 베제크리크의 수난은 크게 두번 있었다.13세기말,몽골의 말굽 아래 처음 망가졌고,그를 전후해서 이슬람교가 흥성하면서 불교의 석굴은 쇠락을 거듭하였다.또 한번은 금세기초인 1902년,독일의 그륀베델과 로코크 등이 네차례나 답사를 빙자한 예술품의 절취가 있었다. 그 속에는 20호,27호 석굴의 것 말고도 회골귀족과 몽골인들의 복식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공양도」와 회골문자가 들어 있는 「본생고사도」등이 절취당한 것은 통석할 일이다.더구나 그중 베를린 박물관으로 납치되었던 벽화 일부가 2차대전의 전화에 소실되었다니 서역의 찬란했던 회골문화의 운명도 꽤나 기구한 것이었다.
  • EU,동구국가입 등 논의/정상회담 개막

    【에센·베를린 AFP UPI 연합】 유럽연합(EU) 정상회담이 9일 독일 에센시에서 개막,동유럽국가들의 EU가입문제·보스니아사태 해결방안 등 주요현안에 대한 이틀간의 논의에 들어갔다.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이와함께 경기호전에도 불구,여전히 유럽내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실업해결을 위한 국경도로 및 철도건설 등 고용창출방안등이 주의제로 토의된다. EU 12개회원국 정상들은 특히 이번 회담에서 폴란드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루마니아등 동유럽 6개국가들의 EU 가입에 관한 전략보고서를 채택할 계획이나 이들 국가의 정식가입을 위한 구체적 일정은 논의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 동유럽 6개국 지도자들은 폐막일인 10일 정상회담에 초정되는 형식으로 합류하게 된다.
  • “김정일 내년 3월께 승계/기업인 방북 승인 주내결정”

    ◎방독 이부총리 【베를린 연합】 독일을 방문중인 이홍구부총리겸 통일원장관은 5일(현지시간)『북한은 내년 3·4월쯤 최고인민회의를 열어 김정일 국가주석선출등 권력승계절차를 마무리지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이부총리는 이날 상오 베를린시내 인터콘티넨탈호텔에서 수행기자단및 특파원들과 가진 조찬간담회에서 이같이 말하고 『북한정보수집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내년부터 중국·일본·러시아 등지에도 통일연구관을 파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부총리는 특히 『통독이전 북한과 밀접한 관계를 가져온 옛동독출신 북한전문가들과의 교류도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국내기업인의 방북승인문제와 관련,그는 『이번주중 남북교류협력추진위원회 실무협의회를 열어 방북 승인여부를 최종 결정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이부총리는 이날 베를린시 고위관계자들과 만나 통일이후 베를린시 재건계획등을 청취했다.
  • 대사급 관계 수립/북,독에 강력 요구

    【베를린 연합】 북한은 최근 독일의 수도 본에 베를린 이익대표부 요원 3명을 상주시킨 채 독일과의 공식수교를 적극 추진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특히 항공협정·무역 및 상호원조협정·과학기술협정 등 구 동독과 맺은 협정의 전면 복원을 끈질기게 요구하면서 독일기업의 투자유치에도 적극 나서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독일주재 한국대사관의 한 관계자는 3일 『북한은 최근 본에 베를린 이익대표부요원 3명을 파견,외무부 관계자 등과 잇따라 만나 구 동둑과 맺은 협정들이 유효하다고 주장하면서 대사급 외교관계의 수립을 요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 북,한국형경수로 거부/북경 전문가회담/미선 “대안없다”

    【북경=이석우특파원】 북한은 30일 경수로원자로 건설지원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북경에서 열린 북·미전문가회의에서 한국표준형인 울진 3,4호기를 받아들이는 데 강한 반대의사를 표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은 이날 코리아에너지개발기구(KEDO)와 북한간에 체결될 경수로 공급계약을 위한 기본조건·인도조건 등을 집중논의하는 가운데 한국형 경수로는 국제적으로 안전성이 입증되지 않은데다 수출실적도 없다는 이유로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으며 경수로건설이 유상으로 이뤄지는 만큼 북한이 건설업체를 선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북한의 경수로를 건설하는데 한국형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북한이 주장하는 건설업체선정권도 북한이 직접 비용을 대는 것이 아니라 KEDO가 비용을 조달하는 것이어서 공개입찰권을 북한이 가져야 한다는 주장은 억지이며 입찰권은 KEDO가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비공개로 진행된 이날 회의는 북한측은 베를린회담 당시 수석대표이던 김정우 대외경제위원회부위원장 등 10명이,미국측에서는 갈루치 핵대사의 보좌관인 게리 세이모아 핵비확산담당과장을 수석대표로 7명이 참석했다. 한편 한국에서는 박인국 외무부 군축원자력과장과 한국전력 원자력연구소 관계자 등 4명이 29일 북경에 도착,미국과 회담의 진전사항에 관해 협의했다.
  • 딱정벌레차 재생산/폴크스바겐사 결정

    【베를린 연합】 독일 폴크스바겐사는 독일은 물론 전세계 자동차 애호가들로부터 60년 가까이 사랑을 받아온 「딱정벌레차(비틀)」를 현대식으로 바꿔 다시 생산하기로 했다. 히틀러 통치당시인 30년대에 국민차로 개발된 딱정벌레차를 새로 디자인,올해초 미국 디트로이트 모터쇼에 출품했던 폴크스바겐사는 열화와 같은 생산요청이 전세계에서 답지하자 시장성이 충분하다고 판단,생산을 결정하게된 것이다.
  • 핵동결 감시방안 북한과 합의 못봐/IAEA

    【베를린 연합】 북한과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핵동결 감시방안에 대한 완전합의를 아직 보지못해 주말을 넘기고 다음주에도 협의를 계속하게될 것으로 25일 전해졌다. 한스 마이어 IAEA 대변인은 『평양을 방문중인 IAEA 협상단과 북한당국과의 핵동결 협의가 다음주에도 계속될 것』이라고 밝히면서 『협상은 건설적으로 진행중』이라고 덧붙였다.
  • 파 음악당에 화재/관객 2백명 사상

    【바르샤바 AP 연합】 24일 밤 폴란드의 그다니스크에서 열린 록 음악회에서 불이 나 2명이 숨지고 2백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고 경찰이 밝혔다. 불은 그다니스크 조선소 음악당에서 6백여명의 관중이 베를린에서 생중계된 M­TV 유럽음악상 시상식을 지켜보던 중 발생했으며 사망자 중 1명은 압사하고 나머지 1명은 불에 타 숨졌다. 목격자들은 불이 관중석에서 시작돼 지붕으로 옮겨붙었으며 지붕의 일부가 무녀졌다고 말했다.
  • IAEA 대표 20일 북경 도착/오늘 입북

    【베를린 연합】 북한 핵 동결감시 문제를 협의할 국제원자력기구(IAEA)협상단이 20일 평양으로 들어가기 위해 북경에 도착했다고 IAEA 관리들이 말했다. 4∼5명의 사찰 전문가들과 기술요원으로 구성된 협상단은 22일 입북할 것이라고 이 관리들은 전했다.
  • 베니스 비엔날레/베니스 영화제(유럽 문화산업 현장:중)

    ◎관광진층·경제활성화 동시 추구/현대미술·영화흐름 주도… 세계적인 축제로/권위에 안주 않고 끊임없는 개혁정신 발휘/비엔날레 한국관 기공계기,기업의 현지 투자 요청 베니스 비엔날레의 한국관 기공식이 열렸던 지난 8일 이민섭 문화체육부장관은 베니스시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한국은 5천년의 역사를 가진 문화국이며 중국이나 일본과 다른 독자적인 문화가 있으나 이를 세계에 선전하지 못해왔다.이런 기회를 베니스 시민들이 갖게 해주어 감사한다』 이에 대해 베니스의 시장인 마치모 카치아리씨는 『한국이 상설 전시관만 지을 것이 아니라 공단에 기업이 투자하고 현지인을 고용하며 많은 관광객을 보내 경제활동을 활발하게 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 대화는 베니스 비엔날레의 세계적 권위와 그 권위를 단순한 문화행사 차원에 국한시키지 않고 관광진흥과 경제활성화에까지 연결시키는 이탈리아의 적극적인 문화정책을 동시에 보여주는 상징적인 것이었다. 베니스 비엔날레와 베니스 영화제는 세계의 수많은 미술제전과 영화제중에서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한다.베니스 비엔날레에 독일관이 개관했을 때에는 히틀러가 참석했으며 일본관이 개관할 때는 국왕이 참석,개관 테이프를 끊었다. 1895년 이탈리아왕국과 베니스시는 베니스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전세계에 과시하고 미래에도 예술을 주도하기 위해 베니스 비엔날레를 창설했다.그해는 국왕인 움베르토1세와 사보이왕가의 마그리타왕비의 결혼 25주년 기념식이 있는 해였다. 베니스는 당시 세계최고의 예술도시로 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영국·미국등의 젊은 화가들이 그림을 배우기 위해 유학을 오던 곳이었다. 제1회 대회는 주로 라틴국가들의 화가 4백71명이 참가했으며 그후 1백년동안 베니스 비엔날레는 현대 미술의 흐름을 주도해 왔다. 2년에 한번씩 6월에 시작되는 베니스 비엔날레는 세계 각국의 화가·조각가·건축가·평론가·저널리스트·화상등 1만여명의 전문가들이 참석하는 세계의 미술 올림픽.미술인이라면 누구나 이곳에 자신의 작품이 전시되기를 꿈꾼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르디니 공원에 상설전시관을가진 24개국,주로 선진유럽국가들의 국제잔치로 치러져 왔다.따라서 이곳에 상설전시관,즉 국가관을 갖지 못한 나라들은 이탈리아관의 한쪽을 비좁게 빌려 쓰면서 국가관을 마련하기 위해 치열한 국제 로비전을 펼쳐 왔다. 선진국의 문화패권주의가 날카롭게 대결하는 이곳의 한정된 공간에서 마지막 국가관을 지을 수 있는 부지를 확보하고 건물 기공식을 올린 우리 정부는 「문민정부 최대의 문화외교 성과」로 이를 자부하고 있다.한국관이 들어서는 부지는 지난 20여년동안 중국과 아르헨티나 등이 상설전시관을 짓기 위해 탐내왔던 곳이다. 베니스 비엔날레의 권위는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미술관이자 박물관인 베니스의 미술전통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다.귀족적 권위에 안주하지 않는 끊임없는 개혁의 정신이 베니스 비엔날레의 명성을 지켜왔다. 이탈리아의 전위미술가였던 필리포 마리네티는 베니스를 20세기 미술운동의 하나인 미래파의 발상지로 만들었고 그의 미래파선언은 베니스 비엔날레에 전위적인 성격을 가미했다.그는 19 07년 『박물관과미술관은 수백년 전에 죽은 화가와 조각가들의 공동묘지이기 때문에 때려 부셔야 한다.운하의 물길을 터서 박물관과 미술관을 물에 잠기게 하라.오!영광에 가득찼던 캔버스들이 물위에 떠내려 가며 색이 바래고 갈갈이 찢겨지는 것을 본다면 얼마나 즐겁겠는가』라는 미래파 선언을 했다.그는 더 나아가 『엔진의 뚜껑을 커다란 파이프로 장식한 경주용 자동차가 「사모트라체의 승리」라는 낡은 그림보다 아름답다』고까지 말했다. 1968년에는 학생들의 데모로 베니스 비엔날레의 수상제도가 바뀌기도 했다.베니스대학 학생들이 베니스 비엔날레의 그랑프리 제도가 상업주의에 이용된다며 데모를 벌여 대상제도가 사라지고 「올해의 화가상」과 가장 훌륭한 작품을 출품한 국가관에 주는 상이 새로 만들어졌다. 한편 베니스영화제는 세계 최초의 국제영화제로 19 32년 만들어 졌다.당시의 통치자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의 첨단과학기술을 과시하기 위해 영화제를 창설했다.독재자의 광기와 과욕이 이탈리아의 영화 산업발전에 큰 기여를 하게 되고 독재자가 역사의 인물로 사라진 뒤에도 전세계 영화인들의 최고 영예가 되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겠다.칸영화제가 생긴 것은 이보다 7년 뒤인 39년이며 베를린영화제는 50년에야 창설됐다. 베니스 영화제는 32년 제1회대회때부터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감독상 작품상을 수상하고 34년에는 국내영화·국제영화 두분야로 나누고 36년에는 최고상인 무솔리니배가 추가되고 47년부터는 베니스의 수호신인 날개 달린 황금사자상이 주어진다. 38년도 베니스 영화제의 무솔리니배는 36년 베를린 올림픽의 기록영화를 만든 독일의 여류감독 레니 레펜슈탈에게 돌아가고 51년도에는 영화 후진국인 일본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라생문」으로 작품상을 받아 세계를 놀라게 했다. 구로사와의 부친은 일본 육사를 나와 평생동안 학교의 체육선생을 지낸 사람으로 구로사와는 그의 영향을 받아 일본 사무라이의 비정한 생활을 영화한 것이 일본문화 수출의 첨병이 되었다.일본의 영화산업은 베니스영화제의 수상을 계기로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7년에는 우리나라의 강수연양이 「씨받이」라는 영화로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여우 주연상을 받았다. 베니스 영화제는 해마다 여름철에 리알토섬(베니스의 주요 섬)의 남쪽 방파제 구실을 하는 리도섬에서 열린다.리도 섬에는 11㎞에 이르는 아름다운 해변과 경마장 골프코스 비행장 축구경기장 등이 있는 곳으로 영화제가 시작되면 세계적인 축제가 벌어진다. 이기주 주이탈리아대사는 『우리나라의 상품을 팔기 위해서라도 우리 문화를 선전하고 알리는 기회가 많아져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일본의 상품은 비싼 것이라도 이탈리아 사람들이 신뢰를 하면서 물건을 사는데 비해 한국 상품은 1만달러가 넘는 것은 보증서가 있는가,잘못되었을때 환불을 받을 수 있는가를 질문받게 된다』고 밝혔다.이대사는 상품을 팔기 위해서라도 한국을 알리는 대규모 문화 행사가 선행되어야 한다며 문화행사와 관광진흥을 적극적으로 연결시키고 있는 베니스에서 배울 점이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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