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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설선생 서거 93주년 추모식

    배설(裵說)선생기념사업회(회장 陳採鎬)는 항일민족지인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배설(영국명 베델) 선생의 서거 93주년을 맞아 15일 서울 합정동 외국인묘지공원에서 추모식을 거행했다.영국에서 태어난 선생은 일제 침략이 본격화한 1904년 양기탁·박은식·신채호 선생 등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창간,항일 언론투쟁을 벌이는 한편 국권회복투쟁 및 의병활동 지원에 나서는 등 항일투쟁에 앞장서다가 36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했다. 추모식엔 이종찬 전 국정원장,이현희 성신여대 교수,크리스토퍼 로빈스 주한 영국 부대사 등이 참석했다. 임창용기자 sdragon@
  • 부 음/ 조요한 전 숭실대총장

    ■조요한 전 숭실대총장 학술원 회원인 조요한(趙要翰) 전 숭실대 총장이 4일 오전 3시30분 서울 중앙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76세. 함경북도 경성 출신인 조 총장은 독실한 신앙인이자 꼿꼿한 선비로서 격조높은 예술 철학자의 자세를 잃지 않았던인물이었다. 조 총장은 서울 동작구 흑석동 베델교회 장로로서 고(故)김재준 안병무 목사 등과 가깝게 지내며 한국교회의 앞날을 늘 걱정했다.서울대 문리대 철학과를 졸업한 조 총장은국내 학계에 예술철학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개척자이기도하다. 1954년 숭실대가 서울에 재건되던 초기에 교수로 부임하면서 숭실대와 인연을 맺은 고인은 두 번에 걸쳐 총장에선임될 정도로 동료 교수들의 신망을 얻었다.숭실대 철학과 초대 학과장을 맡았던 그는 1986년 이사회에서 총장으로 선임됐지만 당시 군사정권의 반대로 총장에 취임하지못했다.1980년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 회장으로 지식인 선언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5년간 해직됐던 경력이 문제가 됐기 때문이다.그러나 1989년 숭실대 교수협의회에서 다시총장으로 선출됐고 1993년까지 재직했다. 한국철학연구회장과 한국방송공사 이사,경실련 통일협회이사장,정부공직자윤리위원장을 역임했다.유족으로는 경진(耕眞·서울시립대교수) 경덕(耕德·서울대교수)씨 등 2남.빈소는 서울 풍납동 중앙병원,영결예배는 6일 오전 9시.(02)3010-2291김성호기자 kimus@
  • 대한매일 민영화/ 발자취와 다짐

    관영언론의 대명사였던 대한매일(옛 ‘서울신문’)이 57년만에 ‘권력의 품’에서 벗어나 ‘공익언론’의 기치를 내걸고 새해부터 힘찬 나래짓을 시작한다.이는 한국언론사에 신기원을 이룩하는 동시에 한국언론이 한 단계 성숙했음을 보여주는 일대 사건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올해로 창간 98년을 맞는 대한매일의 뿌리는 구한말 영국인 베델에 의해 창간된 항일민족지 ‘대한매일신보’였다.그러나 이 신문은 일제강점기에는 ‘매일신보’,해방후에는 ‘서울신문’으로 개제된 뒤 집권세력의 기관지로 전락,정권홍보와 여론조작에 앞장섰다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이는 근본적으로 권력집단이 대한매일을 소유하고 인사와 편집을 제멋대로 좌지우지한 데서 비롯한 것이다. 대한매일의 독립신문으로서의 소유구조개편,즉 민영화는 대한매일 내부적으로는 물론 한국 언론계로서도 하나의 숙원이었다.일부 사회주의권 국가를 제외하고는 국가가 언론사를소유하고 있는 사례를 찾기도 힘들 뿐더러 최근 독자들의 의식수준 향상으로 정부소유 언론사는 설 자리를 잃게됐다.특히 지난해 언론개혁운동이 사회적 의제로 설정되면서 대한매일 민영화 문제 역시 언론개혁 차원에서 사회적 논의대상으로 부각됐었다. 대한매일의 민영화 문제는 80년대 후반 사회전반의 민주화운동과 함께 언론노조가 출범하면서 내부적으로 태동됐다.그러나 이 문제는 한동안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지난 1999년 중반 주무부서인 문화관광부와 다시 논의되면서 본격적으로 공론화되기 시작했다.2000년 6월 대한매일은 노사합의로 ‘회사발전연구위원회’를 발족,우선 사내에서 이에대한 연구검토를 시작하였으며,그해 10월 편집국장 직선을위한 노사합의서를 체결했다.독립언론으로 출범하는 기틀이마련된 것이다.이 해 말 국정감사에서 여야의원들도 대한매일의 소유구조개편 문제를 처음으로 언급하면서 지원을 약속하고 나섰다. 2001년 연초부터 민영화 작업에 박차가 가해졌다.당시 김한길 문화관광부 장관은 대한매일과의 인터뷰에서 “소유구조개편의 큰 방향에 공감한다”며 주무부처 장관으로서 처음으로 이 문제에 대한 공식입장을 표명했다.4월에는 본사 주무팀이 문화부와 ‘소유구조개편 실무협상 기구’를 설치하였으며,6월 국회언론발전연구회(회장 고흥길)는 ‘정부소유 언론사 개혁방안’토론회를 통해 대한매일 민영화 문제를 심도있게 다루기도 했다. 이어 6월 대한매일은 외부기관에 경영컨설팅을 의뢰,‘감자후 유상증자’가 적절한 민영화방안이라는 자문을 얻어냈는데 이에 대해 문화부 측이 “재경부와 협의해 (민영화를)추진하겠다”고 화답,민영화 안건이 급류를 타기 시작했다.8월 문화부는 이 방안을 토대로 관련부처간 협의에 착수했고,한 달 뒤인 9월 대한매일은 소유구조개편을 전제로 ‘상여금 500% 삭감’이라는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키로 하고 노사간단체협약을 체결했다. 마침내 10월 11일 임시주총에서 민영화의 첫 조치로 자본금 53.4% 감자(減資)가 결의됐다.이로써 대한매일 자본금은 544억원에서 254억원으로 축소됐다.감자후 유상증자는 기본적으로 기업의 워크아웃 원칙을 준용한 것으로,주주와 임직원이 각자 고통을 분담하는 형태인 것이다.즉 1대주주인 정부는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부실을 신속히 처리하되 주식의실질가치를 산정해 그에 해당하는 비율만큼 감자하는 고통을,대한매일 임직원은 임금삭감·퇴직금 누진제폐지는 물론 유상증자시 언론개혁에 부합하는 외부 ‘클린머니’ 유입이 불가능할 경우 ‘비인기 주식’이랄 수 있는 대한매일 주식의증자에 참여하는 짐을 각각 부담한 것이다. 11월 대한매일은 우리사주조합을 결성했으며,이사회는 100. 4% 유상증자를 결의했다.기존 대주주인 정부의 증자 ‘불참’원칙에 따라 실권주가 발생하였으며,우리사주조합 및 제3자가 실권주를 배정받는 절차가 뒤따랐다.기업체 등 각종 단체를 상대로 증자 유치작업과 함께 금년 1월중 주식대금 납입 및 자본변경(증자) 등기가 끝나면 1단계 소유구조개편은완료된다.대한매일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정부지분를 완전히 해소하는 2단계 민영화 작업에 박차를 가해 완벽한 독립언론으로 거듭날 각오이다. 정운현기자 jwh59@
  • 남영기·이정진씨 美서 화촉

    [로스앤젤레스 연합] 20대 한국 여성이 뇌성마비 중증장애인인 재미교포와 e-메일로 사랑을 주고받은 끝에 결혼식을 올려 교포사회의 화제가 되고 있다. 주인공은 남영기(27)씨와 장애 1등급 뇌성마비자인 이정진(29.미국명 애덤 브라운)씨.이들은 15일 오후 4시 로스앤젤레스 남부 어바인의 베델한인교회에서 가족·친지 등300여명의 축복을 받으며 백년가약을 맺었다. 남씨는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부”라며 “사람들에게 돈과 권력,명예보다 더 소중한 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지난 3월 남씨가 기독교 웹사이트인 ‘호산나(Hosanna.net)’ 채팅 사이트에서 이씨의 프로필을우연히 접하고 전자메일을 보내면서 시작됐다.2개월간 수십여통의 메일을 주고 받으며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키워나갔다. 한때 부담을 느낀 이씨는 자신이 뇌성마비에다 고아로 17살때까지 서울의 고아원에서 지내다 미국인 가정에 입양됐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교제를 중단하자고 했다. 그러나 남씨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남씨는 “일단 교제를 결정하고 나니까 장애인과 사귀는 것이 대단한 것이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 감사원 완전독립 시급하다

    ■세계감사원장회의 계기 위상점검. “4년 임기이지만 외부의 어떤 간섭없이 15년째 일해 오고 있습니다.” 최근 막을 내린 세계감사원장회의(INTOSAI) 서울총회에서 헤다 폰 베델 독일 감사원장이 ‘감사원의 독립성’에 대해 언급한 말이다. 감사원의 진정한 독립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보완이 시급히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INTOSAI 총회에서 행정 선진국의 감사기구 운영방안을 지켜본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한상범(韓相範)동국대 교수는 8일 “현행 감사원 조직의독립성이 심각하게 훼손돼 있지는 않다”고 전제하면서도“정치적으로 연관돼 있는 사안과 국정원 등 권력기관은언제나 감사대상에서 빠지거나 겉핥기식 감사를 받고 있어 이를 불식시키는 제도적 장치 마련이 우선돼야 한다”고말했다. 한 교수는 “노태우 대통령 시절의 수서사건,김영삼 대통령때의 한보비리사건 등에서 보듯 감사원이 능동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기에는 현재의 위상이 턱없이 낮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4년 임기로 중임제인 현 체계는 정권이 바뀔때마다 자리가 바뀌어 일관되고 소신있는 감사를 할 수 없는 실정”이라며 문제를 지적했다.행정 선진국이 12년 및4∼5년 단위의 연임,종신직 등 독립성을 갖춘 반면 우리감사원은 4년으로 50년 역사상 중임한 경우가 단 한번밖에없다.한 교수는 감사원장 및 감사위원회 위원(차관급)의임용시 인사청문회를 제안했다. 강경근(姜京根)숭실대 교수는 감사원의 독립과 관련한 법률적 독소조항의 개선을 제안했다.현행 국가안전보장에 관한 법률에는 국가기밀 사항에 대한 감사에 대해 국무총리가 소명을 하면 감사를 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강 교수는 이와 관련,“이회창 감사원장때 율곡비리 특감이 이규정에 의해 시작되지 못할 뻔했다”면서 “독소조항을 삭제하거나 구체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익명을 요구한 부처 공직자도 “건강보험특감 결과 등 최근 몇 건의 굵직한 감사를 보면 정무직인 장관 등 책임자는 빠져나가고 실무자급만 징계를 하는 모순된 구조가 돼있다”면서 “이는 곧 감사원의 독립된 감사체계가 제대로안돼 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정기홍기자 hong@. ■외국 감사원은. 국가최고감사기구는 미국·오스트리아는 입법부에,일본·독일·프랑스 등은 완전 독립돼 있다.우리나라는 입법부·집행부·독립형 등 세 분야의 장점을 원용했으나 집행부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선진 행정이 자리잡은 미국을 보면 의회 소속인 회계감사원(GAO)과 각 행정기관에 설치된 감찰관으로 이원화돼 있다.GAO는 연방정부의 예산집행을 점검하고 감찰관은 소속기관의 회계검사와 직무감찰에 나선다. GAO는 필요한 경우행정기관의 감찰관을 감사한다.감찰관은 연방정부 산하행정기관의 비리를 막기 위해 기관의 자체 감사기구를 폐지하고 만든 것이다.감찰관은 소속 기관장으로부터 독립돼있고,계좌조사도 할 수 있다. 프랑스는 좀 특이하다.대통령이 임명하지만 헌법기관으로독립돼 있다.정년은 68세로 종신직에 가깝다.검사관 이상은 법관의 신분과 같은 것이 특징이다.단 검사관이 직접감사를 하고 그 결과를 갖고 재판을 한다. 독일은 입법·사법·행정부로부터 완전 독립돼 있는 케이스.정년(65세)은프랑스와 같이 종신직으로 볼 수 있다.임명은 행정부 제청으로 의회에서 비밀투표로 선출하고 대통령이 임명하지만 임명을 거부할 수 없다. 감사 결과를 근거로 예산편성 과정에 개입,예산삭감을 권고하는 막강한 힘을 가졌다. 유럽연합(EU) 투자은행에 대한 투자예산이 감사원의 의견에 따라 전액 삭감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중국은 직무감찰은 감찰부에서,회계검사는 심계서(審計署)에서 한다.부정부패가 심한 편이어서 감사기구의 권한이매우 강하다. 두 기관의 장은 전국인민대표회의 인준을 거쳐 국가주석이 임명한다.그러나 군 기관에 대해서는 감찰 및 회계검사권한이 불가능하다. 정기홍기자. ■감사원 변천사. 감사원의 현 조직 및 역할체계는 박정희 전 대통령때인지난 63년 3월에 기본틀이 갖춰졌다.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감사원법을 제정,회계검사를 하던 심계원(審計院)과 감찰담당인 감찰위원회를 통합한 것이다. 70년대에는 두번에 걸쳐 소폭 개정했다.70년 말에는 9명의 감사위원이 많다는 지적에 따라 7명으로 줄였고,감사원의 시정요구에대한 조치결과를 대상기관이 통보토록 규정했다.73년 1월에는 정부가 임원을 임명한 단체에 회계검사를 하도록 했다.감사원이 파면을 요구한 건에 대해서는 재심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게 했다. 95년 1월에는 관련 규정이 대폭 개정됐다.감사원 조직 및 인사·예산에 독립성을 최대한 존중하는 ‘선언적’ 규정을 두었다.이때 감사교육기관을 감사교육원(1급)으로 승격시키고 복수 차장제(1,2차장)를 도입했다.감사청구를 행정소송의 사전절차로 규정해 시민·사회단체 등이 문제사안에 대해 직접 감사를 요구할 수 있게 했다. 지난해 4월에는 선출직 지방자치단체장의 방만한 예산집행 등이 사회문제가 되자 지방담당국(7국)을 한개 더 늘려지금에 이르고 있다.
  • 베델선생 92주기 추모제

    구한말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영국인 베델(1872∼1909·한국명 裵說)선생의 92주기 추모제가 베델선생기념사업회(회장 진채호)주최로 15일 서울 양화진 외국인묘지에서 열렸다. 1904년 러일전쟁 취재차 서울에 온 베델은 영어통역관으로 소개받은 양기탁 선생 등 민족진영 인사들과 교류하면서뜻을 모아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다.그러나 창간 6년만인 1909년 5월1일 그는 이역 한국땅에서 타계했고,‘신보’는 이듬해 한일병합으로 총독부 기관지로 전락하고 말았다.지난 68년 정부는 베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했다. 이날 추모제에는 윤경빈 광복회장,김병오 국회 사무총장,이원범 3·1운동기녑사업회장,짐 호어 북한주재 영국대사대리 등을 비롯해 독립유공자·유족 등 50여명이 참석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대한매일 신년특집/ 대한매일의 어제 오늘 내일

    구한말 항일·민족언론의 필봉을 드날린 대한매일신보는 격동의 한세기를 지나오면서 우리 현대사만큼이나 질곡과 영욕의 역사로 얼룩져 왔다.일제하에서는 총독부 기관지로 친일보도에 앞장섰으며,해방후 독재정권 하에서는 권력의 대변지로 충실했다.그러나 반세기만의정권교체를 계기로 창간 당시의 제호를 되찾고 다시 태어났다.소유구조 개편을 통한 공익정론지로의 변신을 꾀하는 대한매일의 어제와 오늘,그리고 내일을 정리한다. *어제. 대한매일은 구한말 대표적 민족지인 대한매일신보의 항일정신을 계승한 국내 최고(最古)의 공익 정론지다.1904년 7월18일 영국인 베델(한국이름 裵說)과 애국지사 양기탁(梁起鐸)선생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는 잘 알려져 있듯이 구국항일운동의 구심점이었다.일제가 강제로 체결한 을사보호조약이 무효임을 만천하에 밝혔고,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으며,‘처처의병(處處義兵)’이란 고정란을 두어 항일의병투쟁을고무했다.암울한 시기에 국권수호의 보루이자 민족자존의 희망이었던 것이다.그러나 대한매일신보는 1910년 8월일제가 이 땅을 강점하면서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가 되는 치욕을 겪었다. 해방후 매일신보는 미군정청을 거쳐 정부로 귀속돼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바꾸었다.이후 서울신문사의 주주총회 및 간부 인사는 공보처의 직접적인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1952년 4월 정관개정에 따라공보처장이 공식적으로 서울신문사 회장에 앉게 되었다.이처럼 어처구니 없는 일은 1960년 자유당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계속됐다. 이승만 독재정권 시기 서울신문은 우리 현대사와 영욕을 같이 했다. 이승만 정권 초창기 한때는 좌경·진보적인 성향을 보였다.특히 제헌국회가 친일파 처단을 목적으로 구성한 반민특위의 활동을 극구 지원·옹호하는 등 민족문제에 관해 여타 어느 신문보다도 열의를 보였다. 그러나 이승만 독재정권 하에서 정권의 대변지로 전락한 이래 역대정권의 ‘홍보지’노릇을 해왔다.이런 연유로 ‘4·19’당시 성난 시위군중에게 사옥이 불탔으며,민주화운동이 불붙기 시작한 80년대 후반에는 한동안 대학가·재야진영으로부터 취재거부를 당하기도했다. 이로 인해 서울신문의 구성원들은 만성적인 정체성 위기에 시달려 왔으며,해바라기성 언론의 전형으로 불리기도 했다.결국 집권자가 경영진을 임명하는 구조하에서 언론 본연의 비판·감시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신문사 경영 역시 악순환을 거듭하였다.이는신문 판매·광고에 바탕을 둔 신문사 경영원칙이 시장논리보다는 정부의 계도지 보급정책에 주로 의존했기 때문이다. *오늘. 이러한 서울신문이 50여년 굴절의 역사를 접고 새로 태어났다.1998년 11월11일 서울신문은 ‘대한매일’로 제호을 바꾸고 재창간을 선언했다.▲공익을 앞세우는 신문 ▲국민복지에 앞장서는 신문 ▲민족화합을 앞당기는 신문 ▲2000년대에 앞서가는 신문이라는 다짐을 실천해가며 대한매일은 새로운 시대를 힘차게 열어가고 있다. 제호를 회복하며 다시 태어난 대한매일은 지난 2년여동안 공익 우선의 민족정론지로서 언론의 소임을 다했다.그것은 먼저 지면을 통해나타났다.특히 근현대사의 왜곡을 바로 잡고 민족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일련의 장편 기획기사들은적극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일제하 친일파들의 반민족 행각을 자료와 증언으로 고발한 ‘친일의군상’,독재정권과 맞서 민주·인권투쟁을 벌이다 민주제단에 몸을바친 민주투사들의 투쟁사를 조명한 ‘민주열사 열전’,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시민들이 세운 장면 정권을 재조명한 ‘제2공화국과 장면’,일제하 단신으로 침략자를 처단하거나 총독부 등 일제 침략기관에 폭탄을 던지고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의·열사들의 항일투쟁기를 복원한 ‘의열 독립투쟁’,재미언론인 문명자씨의 40년간에 걸친 극비 취재파일을 단행본 출간에 앞서 발췌연재한 ‘문명자회고록’,그리고 중국 러시아 미국 일본 등지의 항일유적지를 현지답사·증언을 통해 재조명한 ‘해외 항일유적지를 찾아서’등은 최고의 민족정론지에 값하는 뜻깊은 시리즈였다고 할 수 있다. 재창간 이후 거듭된 일련의 ‘정직한 역사 되찾기’작업은 각종 출판사업으로도 구체화했다.지난 99년 창간 95년과 백범 김구선생 서거 50주년을 맞아 펴낸 ‘백범 김구전집’(전12권)이 그 대표적인예이다.백범 암살 반세기만에 나온 이 전집은 백범에 관한 국내외 문헌자료를 총망라한 역작으로 꼽힌다. 대한매일의 또 하나의 얼굴은 ‘행정뉴스’면이다.공직사회의 소식을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전하는 ‘행정뉴스’면은 맨 뒷면에 넣어,1면과 같은 체제로 편집해 ‘1면이 둘인 신문’으로 자리잡았다. 특화된 내용이 돋보여 지난 98년 5월 선 보인 이래 열독률이 꾸준히높아지고 있다. 행정뉴스 면은 단순히 공직사회 소식을 전하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공직사회의 구조적 문제점과 애환·비리 등을 낱낱이 짚어 건전한공직사회를 선도하는 지면으로 평가받았다. *내일. 지난 한세기 동안 ‘영욕의 역사’를 밟아온 대한매일은 이제 새로운 한 세기를 맞아 제2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우선 ‘원죄’와도 같은 공적 소유매체로서의 틀을 벗고 ‘독립언론’‘공익언론’으로 거듭나고자 몸부림 치고 있다.99년 12월30일 자매지 ‘스포츠서울’이분사되어 21세기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이끄는 ‘스포츠서울21’로 새 출발한 데 이어 지난 10월에는 편집국장을 편집국 기자들이 직선하는 등 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본사 편집국장은 편집인을 겸한,신문편집의 실질적인 총책임자로 편집국장 직선은 공정보도를 가능케 하는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편집국장 임기는 1년으로,임기가 끝난 뒤에는 중간평가를 통해 연임할수 있도록 해 편집권 독립의 제도적 기틀을 마련했다. 편집국장 직선제를 관철한 대한매일은 이제 위상 재정립 작업의 핵심이라 할 소유구조 개편을 위해 지혜를 모으고 있다.‘균등 무상감자후 유상증자’등을 골자로 한 소유구조 개편안은 언론개혁 차원에서범사회적으로 공감대를 점차 넓혀가고 있다.민주주의를 표방한 국가가운데 정부가 언론사를 소유한 곳은 없다.정부의 언론사 소유는 시대에도 맞지않을 뿐더러 오히려 후진성을 드러내는 것이다.연합뉴스와 대한매일의 정부소유 구조개편 문제는 현정권의 공약사항으로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 안에 가시적인 성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한편 대한매일은 소유구조 개편을 통해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과감한 지면혁신을이뤄나갈 계획이다.그동안 대한매일 지면이 독자들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반영하지 않은 제작자 위주의 ‘일방적 제작방식’이었다면,앞으로는 독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아내는 ‘쌍방향식 제작태도’로의 일대전환을 가져올 것이다.특히 남북관계 개선으로 종래의 적대적 대북보도 태도는 일대 전환을가져왔다.아울러 지방화시대와 시민사회의 성장으로 인한 지면의 다양화 역시 시대적 요청으로 부각되고 있다. 대한매일은 98년 재창간을 계기로 ‘공익정론지’를 지면제작의 모토로 표방했다.이는 국내 대다수의 언론이 사주나 정치권 등 언론사 내외의 압력으로 인해 공익을 대변하지 못한다는 자성에서 나온 것이다.향후 소유구조 개편을 계기로 대한매일은 명실공히 공익정론지로 거듭나 시대를 이끌고 독자에게 사랑을 받는 고급지로 발돋움할 것이다. 정운현 김종면기자 jwh59@
  • 동아일보 ‘신문박물관’ 개관

    한국신문 100여년의 역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신문박물관이 국내 처음으로 문을 열었다.동아일보사는 15일 서울 광화문 사옥에서신문박물관(프레시움·Presseum·www.presseum.org·관장 권오기) 개관식을 가졌다. 동아미디어센터 3·4층에 자리잡은 신문박물관은 1883년 창간된 국내최초의 일간지 ‘한성순보’원본 등 600여점의 전시품을 포함, 총5,000여종의 신문관련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소장자료 가운데는 구한말 민족지 ‘대한매일신보’의 사장 베델이 1909년 사망했을 때 국내 언론인들의 추도문을 모은 만사집(輓詞集)과대한매일신보사 사옥에 걸었던 태극기 등 언론사적 가치가 우수한 유물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이 자료들은 언론학자인 외대 정진석 교수가 영구임대한 것이다. 신문박물관은 크게 신문역사관·기획전시관·미디어영상관 등 3개 전시관으로 구성돼 있다. 신문역사관(3층)은 근대 이후 한국신문·신문인이 걸어온 발자취와신문제작 과정을 창간호·호외(號外)·신문만화 원본·윤전기 등 다양한 실물자료를 통해 생생히 보여준다. 4층의 기획전시관은 주로 동아일보사 관련 내용들을 갖췄다.미디어영상전시관에서는 첨단신문 제작시스템과 미래신문의 모습을 영상물로담아냈다. 개관식에는 김병관 동아일보 회장을 비롯해 이한동 국무총리,채문식전 국회의장,김한길 문화관광부 장관,고건 서울시장,김상하 대한상공회의소 회장,금창태 중앙일보 사장,윤세영 SBS회장,장상 이화여대 총장,정진석 외대 교수,안병훈 조선일보 부사장,남시욱 전 문화일보 사장,강인섭 국회의원 등 정·관·학·언론계 인사 200여명이 참석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해외항일전적지를찾아서](7)丹東 臨政 교통국과 쇼우의‘이륭양행’

    일제하 항일투쟁 대열에 섰던 독립운동가 가운데는 국내외에 거주하던 외국인들도 적지 않았다.구한말 항일 필봉을 드날린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사람은 영국인 베델(한국명 裵說·6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이었고,영국인 스코필드(한국명 石虎弼·68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박사는 3·1의거와 일제의 ‘제암리만행’을 전세계에 폭로했다. 또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한국명 訖法·50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박사는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을 지원한 주인공이다.베델과 헐버트 박사는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스코필드 박사는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잠들어 있다.헐버트 박사 묘비에는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는 박사의 유언이 적혀 있다. 한편 한국독립을 도운 외국인 가운데 G.L 쇼우(1880∼1943·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라는 인물이 있다.그가 한국인들에게 잘 알려져있지 않은 이유는 해방 전에 사망한데다 그의 후손도 한국과 왕래가별로 없었으며,또 그동안 그에 대한 학계의 연구가부족했던 탓으로생각된다.그가 활동했던 1920년대초 당시 국내 일간신문을 펼치면 그의 행적이 곳곳에 남아있다.그러나 국내에선 그의 ‘흔적’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그를 만나려면 지금은 중국땅이 된 남만주로 찾아가야 한다. 백두산에서 발원해 중국과 국경을 이루며 황해로 흐르는 압록강 하류의 신의주땅 건너편에는 단동(丹東,옛 지명은 安東)이라는 도시가있다.심양(沈陽)에서 아침 7시45분발 기차를 타면 점심때인 낮 12시10분에 도착하는 거리다.취재팀은 일행의 안내차 역으로 마중을 나오신 박문호(朴文鎬·65)선생과 먼저 점심식사를 한 뒤 답사에 나서기로 했다.취재팀이 첫 답사대상으로 삼은 곳은 ‘이륭양행(怡隆洋行)’건물이었다.이 건물은 쇼우가 경영하던 무역회사 겸 중국의 태고선복공사(太古船輻公司) 대리점이었다.70년 세월이 지났건만 놀랍게도아직도 옛 모습을 간직한채 취재팀을 반겼다. 단동시내 육도구(六道口) 흥륭가(興隆街)25번지에 위치한 이 건물은 현재 단동시 건강교육소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세월의 풍상을 겪은낡은 모습이었다.겉에서 보면 2층 건물처럼 보이나 실지로는 3층 건물로,현재 이 건물은 1층만 건축 당시 그대로이며 나머지는 신축됐다고 한다.주민들에 따르면,인근에 헌 건물들이 많아서 이 건물도 곧헐릴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 건물의 주인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운 이방인 쇼우는 어떤 인물인가? 영국인들의 생몰기록을 보관하고 있는 영국의 ‘제너럴 레지스터 오피스’에 보관된 자료에 따르면,쇼우는 1880년 1월 25일 파고다 아일랜드에서 해양조사원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1908년 부친사망 당시 그는 중국 남동부의 항구도시 복주(福州)에 살고 있었다. 1912년 당시 상업에 종사하고 있던 그는 단동에서 일본여인 후미 사이토(당시 28세)와 결혼하였는데 이듬해 장남이 태어날 당시 그는 일본 고베에 머물고 있었다.그가 한국의 독립을 돕기로 결심한 것은 이때의 경험에서 비롯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쇼우가 한국의 독립운동을 돕기로 한 배경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첫째는 그의 출신과 가족구성.그는 영국 식민지인 아일랜드태생으로 자신의 고국이 식민지하에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처지나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입장을 잘이해하고 있었다.특히 모친과 부인이 모두 일본인이라 일본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더욱이 그의 사무실(이륭양행)은 안동(현 단동)구시가지에 위치해 있어서 일본영사관의 영향이 미치지 않아 한국인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기에 좋은 장소였다. 바로 이곳 2층에 상해 임시정부 교통부 산하 ‘안동(安東)교통국사무국’이 들어있었다.교통국은 임정초기 정보수집과 재정모금,인물소개 등을 담당하였는데 국경지역에 위치한 이곳은 교통부 산하 7개 교통국 가운데서서도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그는 단순히 장소만 제공해준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가들을 숨겨주기도 하고,상해를 오가는 독립운동가들에게 배를 제공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편의를 제공해주었다. 1920년 그가 소위 ‘이륭양행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되었을 때 일본 외무성에서 작성한 그의 행적자료에 의하면,그는 봉천(奉天) 주재영국 총영사가 일본당국의 요청으로 수차례 주의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대동단사건 지원 ▲독립군 무기수송 ▲독립운동 근거지 제공 ▲임정 비밀문서 전달 등을 한 것으로 나와 있다. 1920년 7월 오학수(吳學洙) 등이 국내로 무기를 들여오기 위해 그가 소유한 계림환(桂林丸)에 숨겨두었다가 발각되자 그도 이들과 함께일경에 구속되었다.1924년 단동을 떠나는 조건으로 영국 측의 도움을 받아 석방된 그는 복주(福州)로 거주를 옮겼는데,그해 11월30일 63세로 타계하였다.그의 사후 57년이 지났건만 우리는 그에게 건국훈장 추서한 것이 전부일 뿐 그의 묘소에 꽃 한송이 바치지 못했다. 항일투쟁 끝에 단동에서 최후를 마쳤으나 일반인들에게는 쇼우처럼거의 무명(無名)에 가까운 독립투사 한 분이 있다.바로 편강렬(片康烈·1892∼1929) 의사다.17세때인 1907년 이강년(李康秊)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이듬해 13도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에 참가한 편 의사는 이후 1911년 ‘105인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여,1919년‘구월산주비단사건’으로 해주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하였다.출옥후만주로 건너가 양기탁(梁起鐸) 등과 의성단(義成團)을 결성,단장에취임한 편 의사는 이듬해 3월 장춘 일본영사관을 습격하였으며,다시1개월 뒤에는 봉천(현 심양)에서 일경과 백주에 시가전을 벌여 적 다수를 사살하였다. 1924년 길림과 하얼빈에서 각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다가 일경에 체포된 편 의사는 국내로 압송돼 7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척추염이 발병,안동 적십자병원에서 순국하였다.불과 37세였다.구한말 의병전쟁에서 부터 독립군 투쟁에 이르기까지 청춘을 항일투쟁에 몸바쳤으나 이름을 아는 이가 적음은 물론 그의 묘소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생전에 편 의사는 ‘나라가 광복되기 전에는 내 유체를 고국에 이장하지 말라’고 유언했다.지금도 단동 진강산(鎭江山) 기슭 공동묘지 어디엔가 누워있을 편 의사를 생각하면 후손된 자로서 몸둘 바를 모르겠다. 단동은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한 압록강이 마지막 모습을 감추는 곳이자 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땅과 마주하고 있어 우리 민족에겐 ‘비원의 땅’이라고 할수 있다.또애국선열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조국광복을 위해 몸을 의탁하던 곳이자,살 길을 찾아 만주땅으로 향하던 유민들의 한숨이 배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금강산(錦江山)공원(구 진강산공원) 옆에 있는 안동주재 일본영사관 건물은 아직도 그 화려한 건축미를 간직한 채 지금은 단동 경비사령부 건물로 사용되고 있었다.압록강을 가로지르는 두 철교 가운데 6·25때 끊어진 철교를 중국의 모 회사가 매입,관광용으로 꾸밀 계획이라고 한다.단동은 우리 근·현대사의 현장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중국의 경제개방 열풍속에서 나날이 변모하고 있었다. 정운현기자 jwh59@
  • 구국의 뜻 되새기자/ 대한매일의 내일

    ‘이제는 통일을 본격 논의할 때’ 2004년 7월18일 창간 100주년을 맞은 대한매일의 1면을 장식한 김정일 북한국방위원장의 특별 인터뷰 헤드라인이다.2000년 6월15일 사상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으로 화해 및 협력 분위기가 조성된 뒤 경제·문화 등에서는 교류가활발하게 이루어져 왔으나, 통일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슈는 다른 분야에비해 진전이 더뎠던 것이 사실.그런 면에서 통일에 관해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최초로 공식 언급한 것은 엄청난 의미가 있다.또 남한 신문들의 거듭된인터뷰 요청을 거절해 온 김 위원장이 인터뷰에 응한 것도 대단히 이례적이다.공정하고 객관적 시각에서 북한을 바라보고,민족 동질성 회복 및 교류를선도해 온 대한매일이 북한 주민들로부터 높은 신뢰를 얻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한매일은 21세기 들어 독립·공익 언론으로 다시 태어났다.소유구조 개편을 통해 서울신문 때부터 이어져 온 정부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 언제든지,어떤 사안에 관해서도 당당하게 자기 주장을 펼칠 수 있는 진정한 언론으로 자리매김했다.권력 뿐 아니라 자본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소유구조 때문에누구의 눈치도 살필 필요가 없다.사주(社主)나 특정 주주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도구로 전락한 족벌언론과 재벌언론과 확연히 구별되는 언론의 새로운전형(典型)으로 재탄생한 것이다.내용에서도 다양한 정보와 재미있는 읽을거리,미래에 대한 명쾌한 비전,그리고 빛의 속도로 변하는 세상을 꿰뚫어 보는 예리한 분석과 무게있는 칼럼 등 지면이 20세기의 그것과 비교해 혁명적으로 달라졌다.소유구조 상의 문제 때문에 과거 부도덕한 정권들을 거치면서독자들로부터 따가운 질책을 받기도 했으나,이제는 근대화 초기 영국인 베델이 발행하던 ‘대한매일신보’가 일제의 압제에 맞서 주창했던 독립정신으로 무장하고 있다.국내 언론 가운데 가장 먼저 창간 100년을 맞는 대한매일이 창간 당시의 초심(初心)으로 완전히 되돌아 온 것이다.그리고 이처럼 달라진 모습은 독자들로부터 이미 검증을 받은 상태.대한민국 사람들은 대한매일을 봐야 한다는 ‘대한사람 대한매일’이라는 표어는 독자들에게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 됐다. 대한매일은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도 남한의 여러 언론 매체 가운데 가장 인기가 좋다.북한 주민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통일을 거부하는 논조를 고수하는 반통일적 수구(守舊)언론,북한 시장 석권을 염두에 둔 재벌의 입장을대변하는 다른 신문은 믿지 않아도 대한매일만은 신뢰한다. 그래서 대한매일평양지사에는 북한 주민들의 제보 및 격려 전화가 줄을 잇는다. 대한매일은 디지털시대에 어울리는 ‘비주얼 페이퍼(visual paper)’라 더욱 인기가 높다.대한매일이 스포츠서울과 공동으로 제공하는 다양한 콘텐츠로 구성된 뉴스넷도 서버 용량이 부족할 정도로 네티즌들의 접속이 폭주한다.특히 신문 지면 전체를 다운로드(download·내려받기)할 수 있는 PDF서비스가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다.집이나 직장에서 신문을 구독하지 않고도 인터넷을 통해 신문에 난 1단 짜리 기사까지 모두 검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호영기자 alibaba@
  • [황석영의 맛따라 추억따라](3)잃어버린 먹거리

    고한 김일성 주석과 공개석상에서 또는 비공식으로 수십여 차례 만났던 얘기는 책 한권을 엮을만큼 많은 사연이 있지만,그동안 가장 미묘한 부분이기 때문에 한번도 제대로 써서 발표한 적은 없었다.몇 년 뒤의 회갑 때에 가서나회고록 안에서 정리를 해볼 작정이다. 맨 처음에 만났을 때에는 다 알려진 바와 같이 문익환 목사 일행과 동석한자리였다.접견 장소로 들어가는데 그가 집무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서있었다.체격이 크고 쇳소리가 나는 음성이었다.김 주석은 그의 젊은 시절의 사진들에서 보는 바와 마찬가지로 호남자의 인상이었다.완전한 백발은 아니고 회색의 반백 머리를 올백으로 넘겼는데 특히 인상적인 것은 눈썹이 짙고 길게 드리워져 있는 점이었다. 원형의 식탁에 모두 둘러 앉았는데 주석을 중심으로 오른편에 문목사가 왼편에 내가 앉고 수행원들도 함께 앉았다.그는 당시에는 살아 계시던 문목사 노모의 안부도 물었고 용정이나 북간도 시절의 추억도 말했다.문목사는 만주용정에 살 때 집에 독립운동가들이 수많이 묵기도 하고 드나들기도 했는데안중근 의사도 모친이 대접해드린 일이 있다고 말했다. 김주석도 만주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중국 항일군들과 연대할 때에 중국인부락을 지나다가 군량을 보급 받거나 숙박하고 나서 돈이 없으면 간단한 차용증을 써주고 ‘조선인민혁명군 김사령’이라는 글을 남기곤 하였는데,중국혁명 이후에 옛날 지주들을 척결하면서 김사령의 차용증을 지닌 지주들은 거의 다 사면했다는 말이 있더라고 중국정부의 간부들 가운데서 자신과 가장가까웠던 주은래가 전하더라면서 웃었다.그는 특히 옛날 중국의 시 속에서나 꺼우리 라는 만주 지역 사람들의 성씨에도 나타나듯이 만주는 고구려의 옛땅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국의 서안을 비롯한 예전 고구려 땅에서 남에서는 ‘식혜’라고 하는 감주를 담가 먹는다는데 등소평이가 감주를 썩 좋아한다면서,그 너르고 기름진 땅을 우리 조상들이 국토로서 보존해내지 못했다고 아쉬워 하였다.그렇지만 함경북도 일대에는 한때 여진족이 살았다고 하면서 아오지 탄광의 아오지는 ‘불타는 돌’이란 여진 말이며,주을 온천의 주을은‘뜨거운 물’이라는 여진 말이라면서 인민들 중에도 예전 여진의 성을 가진 사람이 간혹 있어서 모두우리 식으로 고쳐 주었다고 했다. 일행 중의 누군가가 느닷없이 주석님 어머님이 전도부인이 아니셨느냐고 묻자 그는 잘 못들었다는 시늉으로 귓가에 손을 갖다 대며 되묻고나서 측근이모친께서 교회에 나가시지 않았느냐 하는 말씀이라고 설명해주자 웃으면서대답했다. 우리 오마니는 살기 힘드시니까 교회에 가서 주로 주무셨디…. 사실 주석의 외조부는 장로교의 목사였고 외삼촌은 장로였으며 부친도 장로교단 소속인 숭실학교를 다녔으며 모친도 ‘강반석’이란 성명인데 그 뜻은‘베델’이란 세례명에서 왔다고 한다. 이같이 나도 일찍이 개화한 집안 분위기를 나도 아는 터이고 당시 이북의 개화 지식인이라면 반드시 기독교와 관련이 있는 게 흔한 일이었다.김주석의부친 김형직은 교회 식의 야학을 운영하면서 청년들을 모으고 민족주의적 독립운동을 하다가 나중에 러시아 혁명과 신문물에 접하면서 무산자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독립운동에 눈 뜨게 되는데 그때가 아마도 어린 김성주와 가족을 평양에 남겨두고 만주로 떠날 때가 아닌가 생각 되었다.북선지방의 근대주의자는 마르크시스트와 크리스천의 두 얼굴에서 비롯된다는 것은참으로 의미가 있어 보인다.나는 그 뒤에도 이미 작고했지만 당시에는 중국에 망명 중이던 캄보디아의 시아누크공 부처와 만찬을 함께했던 적도 있었고 개인적으로도 점심을 함께한 적이 몇번 있었다. 공식적인 만찬 자리에서 그는 언제나 활달하게 좌중에 음식을 권하고 설명을 해주기도 했다.한식과 중식이 서로 적당히 어우러진 듯한 정식이 코스로 나오곤 했는데 약주도 즐겨 들었다.만찬 술은 인삼주이거나 백두산 들쭉술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15도 짜리 들쭉술을 좋아했다.미테랑 프랑스 대통령 내외도 들쭉술을 좋아해서 열 두 상자나 비행기편에 실어 보냈다고 했다.들쭉은제주도의 멀구슬처럼 새까맣고 동그란 일종의 들딸기라고 하는데 고원지대에서만 자란다고 한다.요즘에는 남에서도 북한산 들쭉술을 먹을 수 있지만 한정된 야생의 열매로 그 많은 물량을 감당할 수는없을테니 혼합주로 맛을 낸 것이 분명하다.진품 들쭉술은 약간 쌉싸름하고 조금 떫은 것이 진한 적포도주 비슷하면서도 매우 향기롭다.전에는 담배를 하루에 두 갑씩 피웠지만 주위에서 하도 말려서 겨우 끊었다고 한다.그는 점심 뒤에 한 시간씩 집무실옆의 방에서 오침을 한다고 말했다. 가 깊은 인상을 받은 어느 점심은 매우 소박했다.작은 메추리 다리를 몇 개먹고나서 국수가 나왔다.주석은 자신이 국수를 제일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은 두 끼만 국수를 먹어도 곧 질린다고 하지만,자기는 한 열흘은 먹을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국수를 담은 유리 대접을 내려다보니 면이 그야말로새까만 색이었다.콩물국수인 셈인데 하얀 콩물에 검은 국수가 잠겨있는 모양이 이색적이었다.주석이 다른 날처럼 음식 설명을 내게 해주었다. 이거이 언 감자 국수라고 하는 거요.일전에 독일의 작가 루이제 린저 여사가 왔을 때 독일에 감자 음식이 많은줄 아는데 이렇게 조리하는 방법은 아느냐고 했더니,얼린 감자로 요리하는 건 세계에서 조선밖에 없다고 하더군. 검정색‘언 감자 국수’의 면발은 찰지고 쫄깃하면서도 부드러웠다.언 감자를 우려내어 녹말을 낸 다음에 끓는 물에다 국수를 뽑는다는데 차디찬 콩물에 말아 먹는다.위에는 검은 깨를 뿌리고 함경도식 갓김치를 얹어서 먹는다. 그가 음식의 유래를 내게 말해 주었다. 우리가 두만강 연안에서 항일 투쟁할 때에 인민들이 많이 도와 주었소.화전하는 인민들도 저이 먹을 것이 없는데 우리가 지나는 산길에다 표를 해두고감자를 묻어놓군 합네다.눈이 한 길이나 쌓이고 땅은 꽁꽁 얼어 붙어 있디. 감자를 파내면 시꺼멓게 얼어서 돌덩이야.근거지루 질머지구 가두,언 감자를 구워도 못먹고 삶아도 못먹어요.그때 왜놈들 청야작전이 철저해서 보급선을 멀리서 차단하고 있대서.얼어 죽거나 굶어 죽고 남은 빨치산들을 토벌하겠다는 소리요. 인민들이 준 것을 버려서는 안된다구 그때 함경도 출신 동무가 우려내서 국수 만드는 법을 생각해냈소.가난한 인민들은 다 살아갈 궁리를 하는 지혜가있소. 맹물에다 소금만 넣고 끓인 국수가 어찌나 맛이 있던지. 나중에 뉴욕에서 나는우연히 개마고원이라는 냉면 집에서 이 국수의 조리법을 듣게 된다.아는 사람에게 듣기로는 그 집의 물김치가 기가 막히게 시원하고 맛있다는 것이었다.그래서 찾아가 보니 북청에서 피난 나왔다가 미국으로 이민했다는 사람네 집이었다.과연 물김치가 일품이었다.무는 보통 물김치처럼 나박썰기가 아니라 길쭉 길쭉하고 얇게 썰었고 배추 잎도 그만한 크기로썰었는데 오이쪽이 간간이 떠 있다.얇게 채 썬 밤,대추,사과,배,쪽파,등속의 건더기가 알맞게 섞였고 역시 김치 국물이 한 대접이다.고춧가루를 채에 걸러서 탔는지 붉은 물이 들었지만,나중에 뉴욕에 왔던 한시해 부부장에게서들으니 진짜 개마고원 김치는 고춧가루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집의 할머니가 팔십이 다 된 분인데 ‘언 감자 국수’를 알고 있었다.함북지방의 화전민들이 곧잘 해먹는다는 것이다. 언 감자를 강판에 갈아 채에다 녹말을 내리는 것은 감자국수 해먹는 거나 다를 바가 없다.반죽을 하여 국수틀에 넣고 끓는 물에 국수를 뺀다.국수를 찬물에 우릴 적에 손가락으로 세심하게 끈기를 씻어내어야 찰기가 더 좋다고한다. 콩물 내는 것은,물에 담갔다가 위로 뜨는 콩을 버리고 골라내어 비린 맛이가실 때 쯤까지 끓이다가 설컹할 적에 건진다.그래야만 콩의 고소한 맛이 살아 있다고 한다.믹서에 갈 적에는 물을 조금 붓거나 편리한 대로 두유를 함께 넣어도 맛있다.콩국의 맛을 내려면 땅콩이나 잣을 갈아서 넣어도 좋고 들깨나 참깨도 좋다.검은 참깨를 뿌리고 위에다 함경도식 갓김치를 얹어 먹는다.함경도 산야의 들갓은 길이가 짧막하고 줄기도 여리다.여기 갓김치는 전라도 식으로 젓갈을 전혀 쓰지 않아서 깊은 맛은 없는 대신에 쌉쌀하고 향긋한 갓의 냄새가 싱싱한 것이 특징이다.
  • [오늘의 눈] ‘가장 오래된 조선일보’는 역사왜곡

    지난 5일 창간 80주년을 맞은 조선일보는 서울시내 곳곳에 세워진 창간기념 선전물을 통해 자사 신문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근대 이후 수많은신문이 명멸한 우리의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조선일보가 80년의 역사를이어온 것은 대견스런 일이며 또 축하할 만하다.그러나 조선일보가 자사 신문을 ‘역사가 가장 오래된 우리신문’이라고 선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이는 엄연한 역사왜곡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신문은 1883년(고종 20년) 10월 1일(음력) 통리아문박문국에서 순간(旬刊)으로 발행한 ‘한성순보(漢城旬報)’다.이 신문은 1882년 수신사로 일본에 갔던 박영효가 돌아와서 고종에게 신문발간의 필요성을 역설,이듬해 고종의 허락을 받아 발행됐다.그러나 이 신문은 1884년 일어난 갑신정변때 사옥·인쇄시설이 모두 불타 발행 1년만에 막을 내렸다.1886년주간신문 ‘한성주보(漢城週報)’로 복간됐으나 이 역시 2년뒤 박문국 폐지와 함께 폐간된 이후 대를 잇지 못한채 끝나고 말았다. 문제는 현재까지 발행되고 있는 신문 가운데어느 신문이 가장 역사가 오랜신문인가 하는 점이다.조선일보는 자사 신문이 가장 역사가 오랜 신문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대한매일’은 올해로 창간 96년째를 맞고 있으니 조선일보보다 16년이나 역사가 더 오래 됐다. 대한매일은 1904년 7월 18일 영국인 베델(한국명 배설·裵說)을 발행인 겸편집인으로 창간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후신이다.대한매일신보는 영국인이 창간한 신문이긴 하지만 제작실무자는 양기탁 등 한국인 우국지사들이었다.또 구국항일의 논조에다 우리 땅에서 발행됐으니 ‘우리신문’이라는 점에서도 하자가 없다. 물론 대한매일신보가 한·일병합후 ‘매일신보’로 개제돼 총독부 기관지로 전락한 사실,또 해방 후에는 ‘서울신문’으로 다시 개제돼 역대 정권의 홍보지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그러나 이같은 것은 여기서 논할 사안은 아니다.문제는 대한매일신보가 맥을 이어왔느냐 하는 점이다.2년전 서울신문은전신인 대한매일신보의 창간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제호를 ‘대한매일’로 환원하였으며,작년에는 창간95주년 행사를 성대히 치른 바 있다.조선일보는 창간기념 선전물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우리신문’이란 문구를 거두기 바란다. 정 운 현 특집기획팀 차장
  • [대한매일 95년] 대한매일신보와 배설

    나라가 어려울 때 우리를 도와준 몇명의 외국인 중에는 본보 대한매일신보(대한매일)를 창간하여 항일구국 언론의 선봉이 된 영국인 배설(裵說·영국명 베델)과 일제 침략기에 언론인으로 한국에 특파되어 ‘대한제국의 비극’을 쓴 캐나다 출신의 매켄지(Mckenzie)그리고 고종황제의 밀령을 갖고 헤이그를 찾는 등 국권수호에 큰 역할을 하고 ‘대한제국멸망사’를 쓴 미국인 헐버트(Hulbert)를 빼놓을 수 없다. 잊을 수 없는 외국 벗들“나는 죽더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영생케하여 한국민족을 구하라”는 유언을남기면서 ‘대한매일’을 키우다가 이 땅에 묻힌 배설에 대해 매켄지는 이렇게 썼다. “일본인들은 갖은 수단을 다 부려 그의 생활을 위협했으며, 그의 사업을 방해하기 위해 온갖 수작을 부렸다. 그의 우편물은 하나도 거르지 않고 검열을 받았으며, 그가 거느리고 있는 하인들은 여러가지 구실로 위협을 받거나 체포되었으며, 그의 집 주위에는 첩자들이 그림자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그는놀라운 끈기를 보여주었으며 세월이 흘러도 굴복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대한제국의 비극’·신복룡 역주) 헐버트는 ‘대한제국멸망사’의 헌사에서 “지금은 자신의 역사가 그 종말을 고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지만 장차 이 민족의 정기(精氣)가 어둠에서깨어나면 ‘잠이란 죽음의 가상(假像)이기는 하나’죽음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대한제국의 국민에게 이 책을 드립니다”란 애정과 국권회복의 희망을 기대하였다.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는 “이 이토의 백마디 말보다 신문(대한매일)의 일필이 한국인을 감동케 하는 힘이 크다”는 개탄을 남겼다. 외국인 중에서 우리를 돕거나 해치는 입장이 이토록 달랐다.‘잊고 있는’잊어서는 안될 인물’배설이 우리 애국지사들과 손을 잡고 본보를 창간한 지 18일로 95주년이 된다. 20세기 마지막 생일을 맞아 배설의 일화와 유족 관계를 추적해본다. 배설생일과 한일 기념일 배설은 친한배일(親韓排日)을 ‘운명적’으로 하여 태어난 듯하다. 그의 생일 11월3일은 그가 그토록 증오한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과 같은 날이고 후일 한국에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던 날과 더불어 같은 날이다. 배설의 한국 사랑은 남달랐다. 일제의 농간으로 상해에서 3주간의 옥살이를 마치고 후일 그의 비문을 쓴 장지연과 통음을 한 다음날 서둘러 한국으로돌아와서 다시 항일의 붓을 들었다. 그리고 심장병을 얻어 한살 아래인 부인 모드게일(Maude Gale)과 와아들 허버트 오웬을 남긴 채 37세의 짧은 생애를 접었다. 모드 게일은 남편이 죽은 뒤에도 “나는 결코 망부(亡夫)의 사업을 계속 하겠다”면서 사재를 털어 ‘대한매일’의 경영에 바쳤으며, 어린 아들에게 부친의 뜻을 잇도록 하겠다면서 한복을 입히고 한글과 한문을 가르치는 열정을 보였다. 그러나 일제가 ‘대한매일’을 탈취하고 강제합병에 이르자 오웬을 데리고영국으로 건너갔다. 그녀는 영국에서 90세까지 살다가 1965년 7월2일에 사망하고, 아들은 어머니가 죽기 전에 런던에서 사망했다. 한국정부는 1968년 3월1일 배설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오웬은 첫 부인과 사별하고 도로시 여사와 재혼하여 딸 수잔과 아들 토미를낳고 1965년 사망하였다. 1968년 7월 주영 한국대사관이 배설 유족찾기에 나서 런던타임스의 도움으로 도로시 여사를 만났을 때 그녀는 시아버지가 ‘대한매일’사옥에 걸었던 낡은 태극기 등을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다. 그녀는 1995년 정부수립 50주년 기념 정부 초청으로 한국을 다녀갔다. 당대 최고의 논객 참여 국운이 풍전등화일 때에‘대한매일’에는 외국인 배설과 함께 양기탁·박은식·신채호·장도빈 등 당대 최고의 논객이자 항일 우국지사들이 모여 피끓는 항일논조를 펼쳤다.한국병탄 과정에서 ‘눈엣가시’와 같은 ‘대한매일’에 일제는 배설과 양기탁을 재판에 회부하는 등 온갖 탄압을 자행했지만, 열혈지사들은 이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기우는 국운을 지사 몇 사람이 버티기에는 힘이 겨웠다. 배설의 죽음에 양기탁의 조시는 지금도 후학들의 심금을 울린다. 대영(大英)남자가 대한에 와서 한 신문으로 깜깜한 밤중을 밝게 비추었네 온 것도 우연이 아니건만 어찌도 급히 빼앗아갔나 하늘에 이 뜻을 묻고자 하노라. 정명(正名)을 회복한 대한매일신보사는 금세기마지막 창간일을 맞아 삼가배설·양기탁·박은식·신채호·장도빈 선생 등 선각들의 애국혼을 기리며거듭 바른 글 정신을 다진다. 김삼웅 주필kimsu @
  • 언더우드목사 白骨되어 한국에

    연세대 설립자인 고(故) 언더우드(원두우·元杜尤) 목사가 83년만에 제2의고국인 한국에 돌아왔다. 오는 19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서울 외국인묘지공원에서는 각계 인사들이참석한 가운데 박사의 탄생 140주년과 이장(移葬)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린다.박사의 유해는 지난 5월20일 이미 이장됐다. 1916년 발진티프스병이 악화돼 요양차 미국으로 떠났던 박사는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그 해 10월12일 57세로 별세,뉴저지주의 작은 교회에 묻혔다.당시 박사의 시신을 한국으로 이장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지만 부인인 릴리아스 언더우드의 뜻에 따라 이장을 위해 준비해둔 비용을 유치원 건립비로 썼다. 이장보다는 한국의 교육시설 확충이 시급하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96년 박사의 80주기 기념예배에서 후손들은 박사의 부인과 외아들원한경(元韓慶)박사 부부,그리고 장손인 원일한(元一韓·82)박사의 부인이묻힌 서울외국인묘지공원으로 이장하기로 결정했다.이로써 언더우드가의 ‘가족묘’가 한국에 완성된 셈이다. 4세 때 선교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박사는뉴욕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인도로 가기를 희망했다.그러나 뉴브런스윅 신학교를 졸업한 1884년 주미대사였던 명성황후의 오빠 민영익(閔泳翊)을 통해 한국에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국행을 결심했다. 1885년 4월 인천에 도착한 박사는 이듬해 우리나라 최초의 고아원을 만들었다.1889년에는 ‘한국어 문법’과 ‘한영사전’을 편찬·간행했다.1897년에는 순 한글신문인 ‘주간 그리스도 신문’을 발행하기도 했다. 1887년에는 우리나라 장로교의 모체인 ‘새문안 교회’를 설립했다. 일제 초기인 1912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형으로부터 5만2,000달러라는 거금을 받아 세상을 뜨기 한해 전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했다. 언론에도 관심이 많았다.선교와 교육 활동을 널리 알리기 위해 여러 신문과 잡지에 기고를 했다.장손인 원일한 연세대 상임이사는 “할아버지는 특히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영국인 베델과 가깝게 지냈고 교육과 언론의 사명에대해 자주 의논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박사는 연세대 교정에 세워진 동상에 새겨진 글귀대로진정 ‘하나님의 사자(Messenger of God)’로 이 땅에 와서 ‘그리스도의 제자(Follower of Christ)’로 살다가 ‘한국인의 친구가 된 사람(Friend of Korea)’이었다. 이지운 김미경기자 jj@ - 언더우드家 3代 안장 서울 외국인 묘지공원(소장 李康泌)은 마포구 합정동 145 당산철교 근처에있다. 지난 1890년 고종황제가 장로교 선교회 소속 미국 의료선교사 존 해론박사의 장지로 이 땅을 기증한 것이 시초가 됐다.이때부터 미국을 비롯해 호주,벨기에,캐나다,프랑스,백러시아,독일 등 11개국 외국인 500여명이 묻혔다.선교사 뿐만 아니라 백러시아에서 온 피난민들,외교관 및 군 관련 외국인들도포함되어 있다. 공원 뒤쪽에 바로 언더우드 일가의 묘지가 있다.최근 이장한 언더우드 박사를 비롯해 부인 릴리아스,아들 원한경(元漢慶),며느리 와그너,손자 일한(一漢)씨의 부인 원성희씨가 묻혀 있다. 이외에도 지난 1904년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베델,최초의 미국감리교선교사로서 배재학당 창시자인 아펜젤러,고종의 밀사로 1907년 이준 열사와 함께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했던 헐버트,이화학당 창시자스크랜튼,세브란스 병원설립에 참여한 애비슨 등이 안장돼 있다. 이종락기자 jrlee@
  • 대한매일신보 초대사장 배설 삶 영화화

    국운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구한말 국권수호와 민족정기 고양의 기치를높이 들고 항일구국 운동에 나선 대한매일신보의 초대사장 배설(裴說·영국명 베델)의 활약상이 영화화된다.한맥영화사 김형준사장은 “외국인으로서항일운동에 목숨을 바친 배설의 삶은 해외에서도 충분히 관심을 끌 수 있는소재”라면서 “우리나라는 아직 구한말의 항일운동을 다룬 영화가 없어 새천년을 앞둔 시점에서 그같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그는 “배설이 영국인인 만큼 영국 영화인으로서 ‘마지막 황제’를 제작한 제레미 토머스와 이 문제를 협의중”이라면서 “미국 할리우드의 쿠쉬너 락사도 영국의 제작이 확정되면 참여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고 말했다. 그는 이 영화는 영국인이 시나리오를 쓰고 한국,영국,미국 등 3국이 합작하는 대작이 되도록 추진 중이라고 덧붙였다.이 작품에는 대략 360억원정도가투입될 것으로 예상된다.이는 구한말의 풍경이 대부분 사라진 탓에 많은 세트를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이 작품은 이르면 2001년제작완료될 전망이다. 한맥영화사는 현재 상영중인 ‘링’을 제작했으며 ‘가슴달린 남자’‘피아노맨’‘죽이는 이야기’‘사랑하기 좋은 날’등을 만들었다. 배설은 1904년 국내최초의 민족정론지인 대한매일신보의 창간때부터 1908년 일제의 술책으로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옥살이를 하기 전까지 사장을 맡았다.대한매일신보는 배설사장 시절 일본제국에 진 빚을 갚는 국채보상운동을주도했고 의병활동을 집중보도해 일제의 갖은 탄압을 겪었다.당시 대한매일신보에는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장도빈 선생등이 포진,우국의 기개를 떨쳤다. 배설은 옥고를 치른뒤 건강이 극도로 악화돼 1909년 36세를 일기로 세상을떠났다.그는 “한국을 위해 위험을 피하지 않는 것이 나의 직책인 만큼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신명을 돌아보지 않겠다”고 다짐한 대로 신명을 한국에바친 영원한 한국인의 벗으로 남아있다. 그는 현재 서울 마포구 합정동 외국인묘지에 안장돼있다.대한매일신보는 한일합방 이튿날인 1910년 8월30일 매일신보로 개제돼 일제의 기관지(매일신보)로전락하는 운명을 맞았다. 박재범기자 ja
  • 엘리자베스 英여왕 訪韓-”裵說 한·영 우호 주춧돌 놓았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20일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 내외를 환영하기 위한 청와대 국빈만찬에서 두나라의 오랜 역사적 유대관계를 얘기했다.그러면서 양국 우호관계에 주춧돌을 세운 한사람,한사람에게 경의의 뜻을 표시했다.누구보다도 외세에 밀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였던 19세기말 한국의 자주독립을 대변하던 대한매일신보(대한매일의 전신)를 창간한 어네스트 베델(한국명 배설)을 으뜸으로 꼽았다. 김대통령 만찬사는 지난해 11월11일 대한매일의 재탄생으로 더욱 의미가 깊었다는 지적이다.엘리자베스여왕의 방한에 앞서 한·영관계를 검토하면서 대한매일신보의 탄생과 영국인 베델과의 인연을 미리 파악했다는 후문이다. 엘리자베스 여왕도 만찬답사를 통해 “양국을 함께 묶는 것들 가운데 우리가 역사를 함께했던 시절”이라며 이에 화답했다.과거에 맺은 좋은 인연이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상기시켜 최초의 근대언론이었던 대한매일신보와 영국과의 인연을 더욱 뜻깊게 만들었다.
  • 3·1절에 보는 베델의 한국사랑

    1904년 창간된 순수 민족정론지 대한매일신보의 사장 베델(裵說)과 신채호등 항일언론인들이 펼친 구국운동이 TV영상을 통해 조명된다.3·1절 80주년을 맞아 KBS 1TV ‘역사스페셜’(토 오후 8시10분)은 ‘3일간의 재판-영국인 베델을 추방하라’를 특집으로 내보낸다.재판은 AP통신에서 특파원을 보낼정도로 국제적 화제를 모았다.이 프로는 90여년 전 서울 정동 주한 영국총영사관에서 3일동안 계속된 공판장면을 재현함으로써 시작된다.‘국내 최초의국제재판’이었던 당시 재판의 피고는 베델이었고 죄목은 ‘한국민 선동죄’였다. 이에 앞서 대한매일신보는 1905년 11월20일 을사보호조약이 강압적으로 체결된 직후 황성신문에 장지연의 명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이 실리자 같은달 27일 이를 영문으로 번역,호외를 발행하는 등 민족의 소리를 대변했다.당시 1만 3,256부로 최대의 발행부수를 자랑했고 영문판까지 있어 국내는 물론 국제여론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베델은 영국인이라는 점을 최대한 활용,신문의 치외법권적 지위를 확보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베델이 한국에 온 것은 1904년 2월.영국 데일리 크로니클지의 특별통신원자격이었다.‘경운궁의 화재’를 특종보도했던 그는 양기탁 신채호 박은식등 지사적 언론인들과 자주 접촉하다 스스로도 항일 정신을 갖게 됐다. 이런 사실은 일본과 영국의 외교문서에 기록된 베델의 흔적을 추적한 결과확인됐다.자료들은 베델의 ‘처리’를 놓고 영·일 간에 빚어진 외교적 마찰과 베델의 한국 밖 추방결정 과정 등을 알려준다. 담당연출자 김형석PD는 취재과정에서 베델의 한국사랑과 선각자들의 활동에 “감탄했다”면서 “프로그램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프로제작 때 가장 신경을 기울인 부분은 법정의 재현 장면.법정에서 시작해 법정에서 끝나기 때문에 자칫 ‘재미’를 잃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 였다. 이를 위해 버츄얼 스튜디오(가상공간)에서 진행자가 3자적 관점으로 재판을지켜보는 연극적 방식을 채택,시청자의 시선을 끄는 데 성공했다.피고석의베델은 사실감을 더하기 위해 연기자 대신 확대한 사진을 활용했다. 베델의 후손이 소장하고 있는 귀중한 자료도 공개된다.1909년 베델이 서울에서 숨지자 한국인들이 보낸 조문편지 묶음 등이 그 것.편지에는 유림과 농부,동경유학생 등 각계각층의 애통해 하는 마음이 절절이 배어있다. 취재 뒷이야기도 많다.베델의 며느리 도로시여사(82)는 시아버지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도로시여사는 당초 ‘촬영 절대불가’를 조건으로 취재에응했다. 이에 따라 김PD는 카메라 뚜껑도 열지 못했으나 이튿날 도로시여사의 자녀들이 찾아와 “할아버지를 많이 알지 못해 안타깝다”면서 도로시여사를 설득해 비로소 촬영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김PD는 “베델은 ‘한국의 쉰들러’라는 표현외에 달리 형언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許南周yukyung@
  • 故 보카사 황제 아들 노숙자로/파리서 역·공원 돌며 연명

    【파리 AFP 연합】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황제였던 독재자 고(故)장 베델 보카사의 아들이 파리의 노숙자로 살고 있다. 보카사의 마지막 처인 조엘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올해 28살의 샤를마뉴 보카사.파리에 있는 다른 많은 노숙자들을 따라 전철역과 공원 등지를 정처없이 떠돌며 연명해가고 있다. 보카사 황제는 생전에 여러명의 처를 거느렸다.샤를마뉴의 형제 자매는 자그마치 30명에 이른다.파리를 비롯해 코트디부아르,가봉,중앙아프리카 등지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지만 교류가 거의 없다. 샤를마뉴와 같은 엄마에게서 태어난 장 르 그랑,장 세르주,마리 베아트리스,디안 카롤린과의 관계도 소원하다.친척들이 파리 서쪽 아르드리쿠르에 있는 아버지 소유의 성(城)을 횡령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샤를마뉴는 중앙아프리카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지 10년 후,그리고 군 참모총장이던 아버지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지 5년 후에 태어났다. 2살 때 아버지 보카사는 종신 대통령이 됐고 다시 5년 뒤에는 황제에 즉위했다.국민들의 가난을 외면한 채 프랑스의 지원을 받으며 화려한 궁전에서 살았다. 운명이 반전되기 시작한 것은 9살 때인 79년.보카사 황제는 권좌에서 내쫓겨 코트디부아르에서 4년간의 망명생활을 한다.그리고 2년 전 숨질 때까지 극도의 빈곤에 쪼들리다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한 채 최후를 마쳤다. 보카사의 몰락은 곧바로 가문의 전락으로 이어졌고 후손들이 파리의 알거지가 된 것이다.심지어 샤를마뉴의 이복 형 장 이브스는 강도사건에 연루돼 수감되어 있기도 하다.
  • 대한매일 재탄생은 경사/朴維徹 독립기념관 관장(특별기고)

    ◎우국지사 눈과 입 역할 의병활동 유일하게 고무/사회통합·번영·통일先導 국민사랑 받는 신문 되길 서울신문이 한말 민족언론의 정화(精華)‘대한매일신보’의 이름을 이어받아 ‘대한매일’로 새롭게 태어났다. 나라의 운명이 바람앞의 등불 같았던 1904년,러일전쟁의 소용돌이가 우리 강토를 휘몰아치던 그때,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언론검열을 뚫고 진실보도와 민족적 정론으로 다가오는 위기를 경고하고,국민의 애국심과 용기를 불러일으켜 국권회복이라는 절체절명의 과제앞에 참언론으로서 시대적 소명을 다했다. 그 신문의 총무로서 실질적인 발행인이었던 양기탁 선생과,주필로서 필봉을 휘두르던 박은식 선생이 필자의 처조부와 조부가 되는 까닭에 대한매일의 부활은 그분들의 부활을 보는 것같아 감회가 남다르지 않을 수 없다. 눈 감고 그분들의 환희를 생각해 본다. 그분들의 그토록 비참했던 생애와 희생이 헛됨이 아니었다는 외침을 느낀다.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된 시기는 일본이 러일전쟁 도발후 우리나라에 ‘한일의정서’를 강요,자국군대를우리 강토에 무단 진주시킬 때였다. 경향 각지에서 이에 항거하는 의병운동이 일어났고,일제는 우리 민간언론을 검열,통제하기 시작했다. 대한매일신보는 영국인 베델(裵說)을 발행인으로 했으나,실제적인 운영은 양기탁,박은식,신채호,장도빈 선생 등이 맡았다. 또한 국한문,한글전용,영문의 3종류로 발행한,90년전 한문을 해독하지 못하는 백성을 고려한 ‘민중신문’이었으며 세계를 염두에 둔 ‘국제신문’이었다. 당시 신문들은 의병(義兵)을 ‘의병’이라 하지 못하고 비도(匪徒)나 폭도(暴徒)라고 하도록 강요당하였는데도 대한매일신보만은 이를 ‘의병’으로 당당히 표현하고 그 활동을 고무한 유일한 신문으로 우국지사들에게 눈과 귀와 입의 역할을 다했다. 일제 통감부는 수없는 협박과 회유를 가하였으나 이에 굴하지 않았다. 참언론의 정신이 찬란히 빛을 발하였던 것이다. 1998년 국민의 정부 출범과 더불어 서울신문시대를 끝내고 88년간 권력에 짓눌려 그 이름조차 죽어 있었던 대한매일의 부활을 보게됨은 우리 언론사의 경사일 뿐 아니라,우리 정신사에 새로운 획을 긋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벌써 찾았어야 할 자랑스러운 뿌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1998년은 양기탁선생의 해인 듯하다. 선생은 1938년 중국 강소성의 아주 낙후된 외지에서 일생을 마치셨다. 필자가 유해를 찾기 위해 그곳을 찾았을 때의 느낌은 “이분이 어떻게 이런 오지에 무슨 인연으로 오셨는가”하는 의아함이었다. 마치 말년에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외로운 슬픔을 안고 찾았던 곳으로 느껴졌다. 10년 가까이 어렵게 수소문한 끝에 매립된 연못 속에서 유해를 찾아 금년 4월초 봉환,옛동지들이 영면하고 계신 동작동 현충원에 모셨다. 또 오늘의 대한매일 재탄생을 맞이하니 비록 저승에 계시지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으시리라 믿는다. 선생께서는 다시 태어나는 대한매일이 민족적이면서 국제적이고,선도적이면서 민주적이며,어떠한 압력에도 굴함이 없이 ‘사실’과 ‘정론’으로서 사회통합과 번영,민족통일과 세계속의 한국으로의 길을 밝히는 사명을 다하는,국민의 사랑을 받는 신문이 되어주기를 간절히 바랄 것이다. 후손들도 떨리는 두 손을 모아 무한한 발전이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 “구국언론 대한매일신보” 출간/제호변경·뿌리찾기 배경

    ◎항일의 역사 등 정리 서울신문이 11일자로 제호를 ‘대한매일’,사명(社名)을 ‘대한매일신보사’로 바꾸면서 새로운 비상의 날개를 편다. 이에 때를 맞춰 서울신문의 전신인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항일언론사를 정리한 책 ‘구국언론 대한매일신보’가 출간됐다. 엮은이는 현 서울신문 金三雄주필.251쪽,가격 8,000원. ‘구국언론 대한매일신보’는 한말 국난기에 태어나 국권수호를 외치다 일제의 강압으로 중절(中絶)된 대한매일신보의 항일 언론활동과 일제하 ‘매일신보(每日新報)’로 개제된 이후의 오욕의 역사도 담았다. 또 해방 후 미군정청에 의해 ‘서울신문’으로 재창간된 과정과 최근 ‘뿌리찾기’ 일환으로 ‘대한매일’로 다시 제호를 바꾸는 배경 등도 담고 있다. 총 4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제1장에서 ‘대한매일신보’연구의 권위자인 외대 鄭晋錫 교수(언론학)의 기고를 싣고 있는데 鄭교수는 이 글에서 ‘대한매일신보는 민족 언론의 정신사적 원류’라고 강조하고 있다. 제2장은 대한매일신보를 빛낸 4명의 논객(梁起鐸·朴殷植·申采浩·張道斌)의 일제하 항일구국운동과 약력을 정리한 것. ‘부록’으로는 이들이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논설기자)로 활동하면서 본지에 게재한 대표적 항일논설 몇편을 원문대로 싣고 있다. 제3장은 지난 93년 서울신문사가 ‘뿌리찾기’ 작업을 벌이면서 서울신문에 연재한 내용을 전재한 것. 이 연재는 초창기 대한매일신보의 창간 과정,‘한일병합’ 이전까지의 항일 언론활동,영국인 사장 베델(한국명 裵說)의 행적 등을 보도했다. 제4장은 11월3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대한매일의 역사성과 새 좌표’란 학술세미나에서 발표된 내용의 전문을 수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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