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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부대·주민 갈등 빚던 원주 ‘탱크집결장’ 조성 해결책 찾다

    주민과 군부대간 갈등을 빚어 오던 강원 원주 부론면 ‘기계화 부대 집결 훈련장 조성’ 문제가 국민권익위원회 중재로 해결책을 찾게 됐다. 국민권익위원회(이하 국민권익위)는 기계화 부대 집결훈련장 조성사업과 관련, 주민 안전과 흥원창지 등 유적지 보호를 위한 대책을 마련해 달라는 지역주민들의 고충민원에 대해 11일 위원장 주재로 현장조정회의를 개최했다. 이번 현장조정을 통해 집결훈련장 부지 매입 예산 27억원을 절감하는 동시에 주민 안전사고를 예방하고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 등재신청 지역인 흥원창지, 거돈사지, 법천사지 등 문화 유적지도 보호하게 됐다. 7군단 사령부는 지난해 10월부터 27억원을 들여 강원 원주시 부론면 홍호리 일대 4만 9500㎡에 달하는 기계화 부대 집결부지의 매입을 추진해 왔다. 7군단 기계화 부대는 남한강 도하훈련 때 이 부지에 탱크와 자주포 등을 집결시켜 정비하기 위한 군사시설을 조성할 계획이었다. 현재 7군단 기계화 부대는 남한강 도하훈련을 위해 양평군에서 원주시 부론면 마을을 관통해 이동하고 있는데 주민들의 안전사고에 대한 불안감이 높았다. 또 집결훈련장 예정부지 인근에는 국가산업단지 등이 들어설 예정이어서 기계화 부대 이동은 산업물류 흐름에도 차질을 빚을 우려가 있었다. 특히 원주시는 집결훈련장 예정부지 인근에 위치한 흥원창지, 거돈사지, 법천사지 등 고려와 조선시대 유적지에 대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를 추진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같은 이유로 지역주민들은 군부대의 집결훈련장 조성을 강하게 반대해 오다 지난해 12월 국민권익위에 고충민원을 제기했다. 국민권익위는 올 1월부터 군부대, 원주시, 주민들과 수차례 협의를 거쳐 11일 오전 강원 원주시 부론면사무소에서 육군 제7군단장, 원주시장, 부론면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박은정 위원장 주재로 현장 조정회의를 열었다. 중재안에서 제7군단은 기계화 부대 집결훈련장 부지 매입을 철회하고, 대신 원주시가 관리하는 섬강교 아래 지점 하천변 국유지를 훈련 시에만 집결지로 사용하기로 했다. 또 이 부지가 국유지인 점을 감안해 집결지 내에 세륜장, 병사 화장실 등 영구적인 군사시설물을 설치하지 않기로 했다. 아울러 군은 주민 안전을 위해 탱크와 자주포 등 이동시 기존처럼 부론면 마을도로를 이용하지 않고 마을에서 10㎞ 떨어진 섬강 하천길을 이용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제7군단은 섬강교 아래 지점 하천변 국유지에 대한 점용허가를 원주시에 요청하고 원주시는 이를 허가하기로 했다. 이날 조정으로 군부대는 부지매입 예산 27억 원을 절감하면서 훈련을 위한 기계화 부대 집결과 이동 경로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게 되었고 주민들은 기계화 부대 이동으로 겪었던 안전사고 등 불편 사항을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 박은정 국민권익위원장은 “이번 조정결과는 민·관·군이 서로 조금씩 양보해 중지를 모아 이루어낸 성과”라며 “주민들의 안전사고 예방과 문화유적지 보호, 국토방위라는 세 가지를 한 번에 이룬 매우 바람직한 상생협력 사례”라고 평가했다. 원주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생불로 불린 선승 누운 자리에 화려하게 피어난 부도 예술

    [서동철 기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생불로 불린 선승 누운 자리에 화려하게 피어난 부도 예술

    부도(浮屠)란 고승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부도가 본격적으로 세워진 것은 선종(禪宗)의 전래와 깊은 관련이 있다. 선종은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라고 가르친다. 석가모니가 정각(正覺)을 이루어 부처가 된 것처럼 누구라도 같은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부처의 사리를 모신 것이 불탑(佛塔)이다. 곧 부처의 무덤이다. 처음에는 진신사리로 불탑을 세웠지만, 불교가 널리 퍼지면서 부처의 가르침을 담은 경전을 법(法)사리로 탑을 건립한다. 부처의 탑을 세우듯 깨달은 고승의 탑을 짓는 것은 선종이 보편화된 이후에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부도라는 이름부터가 붓다(Buddha)를 음역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부도는 양양 진전사 터의 도의선사탑이라는 공감대가 학계에는 형성되어 있다. 도의는 신라 선덕왕 1년(780) 당나라에 가서 선종의 종통을 이은 서당 지장으로부터 인정받고 헌덕왕 13년(821) 돌아와 진전사에서 수도한 한국 남종선(南宗禪)의 선구자다. 도의선사탑은 불탑과는 달리 팔각형의 탑신(塔身)을 갖고 있다. 하지만 탑 아랫부분은 석탑과 같은 두 단의 사각 기단을 하고 있다. 부도는 전(傳) 흥법사 염거화상탑(844년) 이후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이 대세로 정착한다. 지붕돌 위의 상륜부부터 맨 아래 바닥돌까지 모두 팔각이니 전체적인 평면도 팔각을 이룬다. 사각 가마모양으로 만든 법천사 터의 지광국사현묘탑 같은 예외가 없지 않지만 고려시대까지 부도란 곧 팔각형이었다. 고려 말이 되면 오랜 전형에서 벗어난 부도가 등장한다. 원구형, 석종형, 불탑형 등 다양한 양식의 부도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부도 양식 변화를 촉발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선승(禪僧)이 나옹 혜근(1320∼1376)이다. 나옹(翁)은 ‘게으른 늙은이’라는 뜻이지만 고려 사회에서 그는 생불(生佛)로 추앙받았다.부도는 고려시대까지도 국가에서 임명한 국사(國師)와 왕사(王師)의 지위에 오른 고승의 전유물이었다. 국사와 왕사에서 물러난 고승이 머물렀던 절인 하산소(下山所)나 입적한 절에 세우는 것이 보통이었다. 크고 화려한 부도와 주인공의 일생을 새긴 탑비(塔碑)를 세우는 데는 상당한 노력과 비용도 필요했다. 나옹의 부도는 금강산, 치악산, 소백산, 사불산, 용문산, 구룡산, 묘향산, 천보산, 봉미산 등 9곳에 세워졌다. 이른바 분사리(分舍利)가 이루어진 것이다. 석가가 입멸한 뒤 그 제자들이 사리를 여덟 나라에 나눈 것과 비견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나옹에 붙여진 생불이라는 표현은 높은 경지에 이른 고승에 대한 의례적인 찬사를 넘어선다. 글자 그대로 부처와 동일시한 것이라는 학계의 연구 결과도 있다. ‘나옹화상어록‘에는 이런 대목이 보인다. ‘다비를 마쳤으나, 두골(頭骨) 오편과 아치(牙齒) 사십은 모두 타지 않았다. 향수로 씻을 때는 구름도 없는데 비가 내렸다. 사리가 부지기수였고, 사중(四衆)이 재와 흙을 헤치고 얻은 것 역시 불가승수였다.’ 사람의 이는 32개다. 부처의 32상(相) 가운데 하나가 40개의 치아다. 철저히 나옹을 부처화(化)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분위기라면 불탑 모양으로 승탑을 조성하는 것도 어색할 이유가 없다. 양주 회암사는 나옹이 젊은 시절 4년 동안 용맹정진한 인연이 있다. 나옹은 원나라에서 인도선승 지공에게 배우고 돌아온 뒤 회암사 주지로 있으며 대대적인 중수에 나서기도 했다. 천보산 자락의 회암사는 지금 옛 터만 남아 있다. 절집은 사라졌어도 조화롭게 배치된 석재들의 기하학적 아름다움만으로도 전성기 회암사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들머리에는 절의 역사와 출토 유물을 보여주는 회암사터박물관이 2012년 세워졌다. 절터에서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회암사 이름을 딴 새절이 나타난다. 오른쪽으로 내민 산줄기에 세 기의 부도와 탑비가 줄지어 자리잡고 있다. 위에서부터 나옹, 지공, 무학의 것이다. 지공은 한때 고려에 건너와 설법을 하기도 했다. 나옹에 앞서 전국에 분사리 부도가 세워진 데서 보듯 당대에 높이 떠받들어졌다. 회암사의 나옹선사 부도는 통일신라 이후의 전통을 그대로 이은 8각원당형이다. 탑신부는 아직 완벽한 구형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구형을 염두에 두고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나옹이 입적하자 공민왕은 선각(禪覺)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나옹의 탑비인 선각왕사비는 부도 건너편의 높은 산등성이에 세워졌다. 특별한 존재에 특별한 대우를 했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런데 1997년 보호각이 불타는 바람에 선각왕사비도 크게 훼손됐다. 지금 이곳에서는 복제한 탑비를 볼 수 있다.나옹은 공민왕 시대 불교계 1인자의 위치에 올랐지만, 우왕이 즉위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우왕은 즉위 2년 나옹에게 회암사를 떠나 밀양 영원사로 가라고 명한다. 회암사 중수에 국고를 쏟아부은 것을 문제 삼았다지만 정치적 상황 변화에 따른 일종의 유배령이었다. 밀양이라면 충주까지 수로를 이용한 뒤 육로로 새재를 넘어야 했을 것이다. 이미 쇠약해진 나옹은 배편으로 남한강을 거슬러 오르다 결국 여주 신륵사에서 열반한다. 나옹의 시신은 신륵사 경내 남한강변 바위 위에서 화장됐다. 다비가 이루어졌던 장소에는 작은 삼층석탑과 강월헌(江月軒)이라는 정자가 세워졌다. 강월헌은 나옹이 살던 집의 당호(堂號)라고 한다. 당초 지어진 강월헌은 홍수에 떠내려 갔고, 지금은 콘크리트 구조의 튼튼한 정자가 자리잡고 있다. 신륵사의 극락전을 중심으로 서북쪽 언덕이 나옹의 부도 영역이다. 넓게 다진 터에 석재로 기단을 쌓고 가운데 돌로 깎은 종 모양의 부도를 올려놓았다. 보제존자 석종(石鐘)이다. 보제존자는 공민왕이 왕사로 임명하면서 내린 이름이다. 보제존자 석종은 양산 통도의 금강계단을 연상시킨다.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통도사 금강계단은 곧 부처의 무덤이다. 나옹의 사리를 모신 부도를 금강계단과 같은 모습으로 조성한 것은 그가 당대 부처와 다름없는 존재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보제존자 석종은 조선시대 크게 유행한 석종형 부도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또 다른 나옹의 부도인 영전사 터 보제존자사리탑은 삼층석탑 모양을 가진 부도의 유일한 사례다. 탑이 있었다는 원주 영전사는 같은 지역에 있는 영천사일 것으로 보고 있다. 쌍탑인 보제존자사리탑은 국립중앙박물관 마당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석종처럼 생불로 추앙받은 나옹이었기에 이런 형태를 가진 부도의 출현도 가능했을 것이다. 글 사진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신규 지정된 국보·보물 내년부터 연례 특별전

    문화재청과 국립중앙박물관은 국보와 보물로 신규 지정된 문화재들을 소개하는 특별전을 내년부터 해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공동 개최한다고 19일 밝혔다. 첫 전시는 내년 하반기 열릴 예정이며, 올해 지정된 문화재들이 한자리에서 공개된다.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는 문화재는 한 해 30건 안팎이다. 문화재청은 “개인이나 사립 기관이 보유해 평소 접하기 어려운 국가지정문화재들도 감상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며 “소장자에게도 자신이 소중히 보관해 온 문화재의 의미와 가치를 국민과 함께 나누는 뜻깊은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두 기관은 문화재의 국외 전시 추진에 대한 협의, 박물관 소장품 지정 조사와 정보 공유 확대, 국가지정문화재 보존 처리 협력 등을 진행하기로 했다. 이 같은 조처는 국립중앙박물관이 2013년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사자상을 보존 처리한 뒤 제때 문화재청에 알리지 않아 드러난 문화재 관리의 허점을 보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문화재청은 국립중앙박물관이 관리하고 있던 보물 제6호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의 비신(碑身·비석 몸체)을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보물로 지정할 계획이다. 고려시대 만들어진 원종대사탑비의 비신은 1915년 쓰러져 8조각으로 깨졌고, 1963년 비신을 제외한 귀부(거북 모양의 받침돌)와 이수(뿔 없는 용을 새긴 비석의 머리)만 보물로 지정됐다. 현재 원종대사탑비에는 2014년 복제된 비신이 놓여 있고, 원본은 깨진 채로 여주박물관에 대여된 상태다. 2000년 고달사지 발굴 과정에서 나온 석제품 2점도 원종대사탑비 이수의 일부로 확인돼 제자리에 복원하기로 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신규 국가지정 문화재 내년부터 연례 특별전

     문화재청과 국립중앙박물관은 국보와 보물로 신규 지정된 문화재들을 소개하는 특별전을 내년부터 해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공동 개최한다고 19일 밝혔다. 첫 전시는 내년 하반기 열릴 예정이며, 올해 지정된 문화재들이 한자리에서 공개된다.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는 문화재는 한 해 30건 안팎이다. 문화재청은 “개인이나 사립 기관이 보유해 평소 접하기 어려운 국가지정문화재들도 감상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며 “소장자에게도 자신이 소중히 보관해 온 문화재의 의미와 가치를 국민과 함께 나누는 뜻깊은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두 기관은 문화재의 국외 전시 추진에 대한 협의, 박물관 소장품 지정 조사와 정보 공유 확대, 국가지정문화재 보존 처리 협력 등을 진행하기로 했다. 이 같은 조처는 국립중앙박물관이 2013년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사자상을 보존 처리한 뒤 제때 문화재청에 알리지 않아 드러난 문화재 관리의 허점을 보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문화재청은 국립중앙박물관이 관리하고 있던 보물 제6호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의 비신(碑身·비석 몸체)을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보물로 지정할 계획이다. 고려시대 만들어진 원종대사탑비의 비신은 1915년 쓰러져 8조각으로 깨졌고, 1963년 비신을 제외한 귀부(거북 모양의 받침돌)와 이수(뿔 없는 용을 새긴 비석의 머리)만 보물로 지정됐다. 현재 원종대사탑비에는 2014년 복제된 비신이 놓여 있고, 원본은 깨진 채로 여주박물관에 대여된 상태다. 2000년 고달사지 발굴 과정에서 나온 석제품 2점도 원종대사탑비 이수의 일부로 확인돼 제자리에 복원하기로 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남한강 차지하는 자 한반도를 가지리라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남한강 차지하는 자 한반도를 가지리라

    조세제도를 확립하고 나면 지방에서 걷은 세곡(稅穀)을 수도로 나르는 조운 제도를 구비하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배를 건조하고, 세곡을 운반해 배에 실을 수 있는 조창을 세워야 했다. 전국적으로 고려시대에는 13곳, 조선시대에는 12곳의 조창을 운영했다. ●영남 북부 세곡 남한강 조창 통해 운반 그런데 충청·호남 지역과 영남 서부에는 조창을 두었지만, 영남 북부에 조창이 없었다는 것은 흥미롭다. 이 지역 세곡은 어떻게 운반했을까. 한강의 수운은 지금 팔당댐과 4대강 사업에 따른 보(洑)에 막혀 두절된 상태다. 하지만 고려시대에는 덕흥창, 조선시대에는 가흥창이라고 불린 남한강 상류 충주에 설치된 조창이 있었다. 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을 잇는 조령은 그저 영남 선비들이 과거 보러 한양을 오가던 작은 길이 아니었다. 영남 북부 지역 세곡은 달구지에 실린 채 조령을 넘어 충주 조창으로 운반됐다. 충주에서 조운선에 실린 영남 세곡은 2~3일이면 한양이나 개경에 닿았다. 강원도 지역 세곡도 마찬가지였다. 원주 흥원창은 남한강과 섬강이 만나는 내륙 수운의 요지에 자리잡았다. 흥원창이 있었던 원주 부론면이라면 고려시대 거찰(巨刹) 법천사를 떠올리는 독자가 적지 않을 것이다. 법천사터에 있던 지광국사현묘탑은 우려곡절 끝에 경복궁 마당으로 옮겨졌고, 지금은 해체 수리 작업이 벌어지고 있다. 법천사와 지척의 거돈사, 섬강 상류의 흥법사, 그리고 남한강을 조금 내려간 여주의 고달사는 모두 고려시대 국사(國師)나 왕사(王師) 반열에 올랐던 고승들이 은퇴하고 머무는 하안소(下安所)로 지정됐다. 유사시에는 뱃길로 빠르게 개경을 오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신경림 시인의 ‘목계장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로 시작하는 유명한 시다. 충주 목계나루는 남한강 수운의 역사를 1973년 팔당댐 건설 이전까지 이었다. ‘목계장터’에도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라는 대목이 보인다. 장돌뱅이들을 태운 나룻배가 아니라 화급을 다투는 군선(軍船)이라면 아차산 아래 광나루에 닿는 시간은 훨씬 단축됐을 것이다. ●‘중원’ 충주, 삼국 각축 벌이던 요충지 고려·조선 시대 남한강 수운의 양상을 장황하게 나열한 이유는 삼국시대에도 결코 다르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흔히 중원(中原)으로 불리는 충주 일대는 고구려, 신라, 백제가 각축을 벌인 지역이다. 결국 진흥왕 이후 신라가 이 지역을 안정적으로 경영했고, 그것은 삼국을 통일하는 중요한 동력의 하나였다. 중원이란 매우 상징적인 표현이다. ‘중원을 차지하는 자가 천하를 차지한다’는 표현은 중국에서 시작되었다지만 지금은 사업가들도 흔히 입에 올린다. 최근까지도 충북에 중원군(中原郡)이라는 행정구역이 남아있었던 것은 진흥왕이 이곳에 설치한 국원경(國原京)을 경덕왕이 중원경(中原京)이라 개칭한 역사의 연장선상이다. 신라는 통일을 이룬 국토의 중심부라는 뜻에서 중원이라는 개념을 세웠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중원, 즉 충주 일대를 차지한 신라가 한반도 전체를 차지했다. ●충주 지배 세력 한강 유역 일대도 장악 삼국시대 중원의 주인과 서울 일대의 주인은 대부분의 기간이 일치했다. 충주를 지키고 있으면 한강 유역까지 쉽게 차지하고 지배를 이어갈 수 있었다. 반대로 충주를 잃으면 한강 하류 방어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한성백제가 한강 하류에서 명맥을 유지한 기간도 충주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던 기간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 백제가 서울을 버리고 공주로 천도할 수 밖에 없었던 것도 결정적으로 고구려가 충주 일대 지배권마저 확보함에 따라 더이상 버틸 여력이 없었기 때문으로 보고 싶다. 충주 고구려비는 건립 당시 중원 일대가 신라 영토이기는 했지만, 고구려군이 주둔해 사실상의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는 정황을 알려준다. 같은 차원에서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하고 통일에 이르기까지 지켜낼 수 있었던 것도 충주를 손아귀에 넣었기 때문이다. 충주에 병력과 군수품을 집결시킨 세력은 뱃길로 빠르면 하루에 보급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세력은 병력과 군수품 조달 속도에서 열세를 극복하기 어려웠다. 그만큼 남한강 수로가 가진 역사적 중요성은 엄청나다. 그럼에도 오늘날 그 역사성이 제대로 부각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dcsuh@seoul.co.kr
  • “38만점 유물 수장고 열어젖히겠습니다”

    “38만점 유물 수장고 열어젖히겠습니다”

    창고 묻힌 ‘지광국사탑 사자상’에 자성 “문화재청 미통보 잘못… 외부협력 강화 佛 장식 미술전, 상업성 있어도 재추진” “수장고도 전시실처럼 열어젖히겠습니다.” 이영훈(60) 국립중앙박물관장은 31일 서울 용산구 중앙박물관 내 한식당에서 가진 취임 후 첫 기자간담회에서 “구체적인 일자는 말할 수 없지만 수장고를 개방해 국민들이 발굴 당시 모습과 맥락을 그대로 볼 수 있도록 하겠다”면서 “중앙박물관뿐 아니라 13개 박물관의 수장고까지 개방한다는 각오를 갖고 있다”고 밝혔다.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도난, 반출된 것으로 알려진 국보 제101호 강원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사자상이 수십 년간 박물관 수장고에 묻혀 있었다는 보도<서울신문 3월 17일자 1·2면>에 대한 자성의 일환이다. 이 관장은 “예전엔 보안·관리상 문제도 있고 수장고 환경도 좋지 않아 일반에 개방하지 못했지만 중앙박물관이 2005년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수장고 환경도 좋아졌고 관리 능력도 향상됐다”면서 “이제는 자신감 있게 보여줄 수 있게 됐다”고 덧붙였다. 현재 중앙박물관 수장고엔 38만여 점의 유물이 보관돼 있다. 이 관장은 지광국사탑 사자상과 관련, “박물관 수장품의 출처가 모두 확인된 건 아니다. 사자상도 1957년 탑 복원 이후 수장고에 출처 미상으로 보관돼 오다 2010년에 일제강점기 사진을 토대로 사자상을 확인했다. 국가지정문화재이기 때문에 문화재청에 알렸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건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동안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인식을 불식할 수 있도록 열린 자세로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등 관계 기관, 학계 등과 협력을 한층 강화하겠다”고 강조했다. 김영나 전임 관장이 중앙박물관과 전시 콘셉트가 맞지 않다고 반대해 무산된 것으로 알려진 ‘프랑스 장식 미술전’과 관련해선 “애초 정부가 제안한 것이 아니라 2014년 1월 프랑스 측 조직위원장이 중앙박물관을 방문해 제안했고, 이후 중앙박물관과 프랑스장식박물관이 협의해서 추진해 왔다”면서 “올해는 일정에서 빠졌으나 전시 콘셉트를 다시 협의해 내년 상반기에 개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어 “상업적인 전시라고 무조건 배척해선 안 되고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관장은 지난 9일 김 전 관장 후임으로 발탁, 14일 취임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국보 지광국사탑 관리기관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전환”

    “국보 지광국사탑 관리기관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전환”

    이영훈(60) 국립중앙박물관장이 국보 제101호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의 관리 기관을 오는 22일 탑 해체식 전후로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전환해 탑 복원 때 사자상도 함께 복원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17일 밝혔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도난당한 것으로 알려진 지광국사탑 사자상이 중앙박물관 수장고에 수십년간 묻혀 있었다는 서울신문 보도【3월 17일 1, 2면〉에 따른 후속 조치다. 이 관장은 이날 서울신문과의 전화 통화에서 “언론 보도 이후 파악해 보니 지광국사탑의 관리 기관이 아직 전환이 안 돼 있다. 탑 소유는 국유지만 관리는 중앙박물관에서 하고 있는데 관리 기관 전환은 기본이다. 문화재연구소에서 탑을 복원하는 것으로 합의했기 때문에 탑 해체식 전후로 관리 기관을 문화재연구소로 바꾸고, 관련 행정 절차를 밟으면서 사자상도 같이 넘기도록 (실무진에게) 지시했다”고 밝혔다. 이 관장은 “그렇게 되면 사자상도 문화재연구소에서 중지를 모아 탑과 함께 복원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화재청과 조속한 시기에 조율하겠다”고 덧붙였다. 이 관장은 김영나 전 관장의 후임으로 지난 9일 취임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사설] 중앙박물관 소장 유물 체계적으로 조사하라

    약탈당한 것으로 알았던 지광국사현묘탑의 사자상이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있었다는 어제 서울신문 보도는 허탈감을 느끼게 한다. 어떤 유물이 어디에 있는지 문화재 당국조차 알지 못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국보 제101호 지광국사현묘탑은 고려시대 고승인 지광국사 해린의 승탑이다. 애초 강원 원주 법천사터에 있었지만 일본으로 반출되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서울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 마당에 자리잡았다. 팔각원당형이 승탑의 대세를 이루는 가운데 화려하게 장식한 사각의 독특한 형태로 일찍부터 주목받았다. 이렇듯 중요한 문화재마저 관심권에서 벗어나 있었으니 문화재 행정의 문제가 크다. 중앙박물관도 할 말은 있을 것이다. 사자상의 존재를 확인해 보존 처리를 거쳤고, 지난해에는 학술지에 이 같은 내용이 담긴 논문을 실은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자상의 일제강점기 반출설(說)’이 학계에서 기정사실화되다시피 했던 마당에 그 존재를 확인하고도 공표 절차를 거치지 않은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오랫동안 수장고에 수많은 유물을 쌓아 놓고 있으면서도 기초적인 관리 카드마저 작성하지 않은 일종의 직무 유기를 숨기겠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또 이 같은 사실을 중앙박물관으로부터 통보받고도 인터넷 홈페이지의 ‘문화재 검색’ 코너에 슬며시 내용만 고쳐 놓은 문화재청도 비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문화재청은 6·25 전쟁 때 파괴된 것을 어설프게 복원한 지금의 지광국사현묘탑을 조만간 해체해 정밀 복원한다는 계획이다. 한편으로 지광국사현묘탑의 사자상이 알려진 것과 다르게 중앙박물관 수장고에 안전하게 보관되고 있었다는 소식은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중앙박물관이 어떤 박물관인가. 광복 70년이 넘도록 국가 대표 박물관조차 유물 소장 현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국가적 수치가 아닐 수 없다. 국립박물관의 유물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서 국제사회에서 품위 있는 선진 문화 국가로 대접받기를 원한다는 것은 욕심일 뿐이다. 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유물은 모두 30만점에 이른다고 한다. 유물 조사에는 많은 인력과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정부도 중앙박물관의 인력 확충에 인색하면 안 된다. 유물 정리는 꼭 정규직이 아니라도 좋을 것이다. 청년 실업 시대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방안이기도 하다.
  • 지광국사탑 복원 학계 관심 집중

    지광국사탑 복원 학계 관심 집중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도난당해 국내엔 없던 것으로 알려진 국보 제101호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사자상이 수십년 만에 실체를 드러내면서 지광국사탑 복원에 학계 안팎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영훈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지광국사탑 관리기관을 문화재청으로 전환하고 사자상도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로 넘기겠다고 밝혀 탑 복원에 탄력이 붙을 전망이다. 나선화 문화재청장은 17일 서울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지광국사탑을 복원할 때 사자상이 다 있어야 완형(完形)이 된다”면서 “복원을 위해선 중앙박물관 수장고 속 사자상을 토대로 어디까지 어떻게 복원할지 전문가들이 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지난해 6월 중앙박물관에서 발간한 정기간행물 ‘미술자료’ 제87호에 실린 논문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에 대한 기초적 검토-이전 건립 경과 및 보존처리 내용을 중심으로’(이하 ‘논문’)에는 사자상 복원 때 고려해야 할 첫 번째 조건으로 사자상의 위치 파악을 들었다. ‘논문’에는 ‘사자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는 동그란 원형의 홈이 있어 기존 연구에서는 이를 사자의 받침대 자리인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사자상의 바닥면은 모서리를 입체적으로 파낸 직각 형태이므로 원형의 홈에 맞게 끼웠다기보다는 오히려 모서리에 얹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기단부 모서리의 원형 홈에 끼우기 위한 별도의 고정 장치가 존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며 사자상의 위치가 전혀 다른 곳일 수도 있다. 현재 상태에서는 사자상의 위치를 단정할 수 없으며, 향후 사자상의 위치에 관한 면밀한 종합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적혀 있다. 중앙박물관 관계자는 “지광국사탑이 법천사에 있을 당시의 사진이 남아 있지 않아 사자상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고, 일제강점기 사진을 보면 여러 차례 이전하면서 사자상의 위치도 계속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미술·석조문화재 권위자 정영호 단국대 석좌교수는 “박물관 수장고에 사자상이 있다면 당연히 지광국사부도(탑) 복원 때 함께 복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영훈 국립중앙박물관장도 “탑 복원 땐 당연히 사자상도 함께 복원해야 한다. ‘논문’을 보면 사자상 복원 안이 그려져 있는데, 그것도 참고해서 복원하면 좋을 것”이라며 “사자상이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인도되면 연구소에서 주도적으로 처리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나 청장은 “‘논문’을 보면 사자상 얼굴이 하나만 제외하곤 다 마모되고 깨졌다”면서 “지금의 복원 기술도 고려하고 재료도 확정돼야 복원 방향이 잡힐 것”이라고 했다. 황평우 은평역사한옥박물관장은 “이번엔 우리 기술로 충분히 복원·보존처리가 가능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석조문화재 보존처리는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우수한데, 그런 나라들의 기술진과 협약을 맺고 기술 교류를 해도 좋을 듯하다”고 조언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단독] 약탈당한 줄 알았던 국보, 박물관 ‘창고’에 묻혀 있었다

    [단독] 약탈당한 줄 알았던 국보, 박물관 ‘창고’에 묻혀 있었다

    ■지광국사탑 사자상, 수십년간 국립박물관 수장고에 2013년 찾고도 보존 자문없이 방치… 허술한 관리 도마에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도난, 반출됐던 것으로 알려진 국보 제101호 강원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사자상이 수십 년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묻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14일 탑 주위에 가설 덧집을 설치하면서 전면 해체 및 복원 작업에 들어간 지광국사탑을 사자상까지 포함해 원형 그대로 되살려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16일 문화재 관계자들에 따르면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지광국사탑 전면 해체, 복원을 앞두고 지난해 8월 탑 이전 연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지광국사탑 사자상이 중앙박물관 수장고에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지난해 6월 간행된 중앙박물관 정기간행물 ‘미술자료’ 제87호에 실린 논문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에 대한 기초적 검토’에서 ‘2013년 사자상 보존 처리를 진행했다’는 구절을 본 것. 중앙박물관은 2013년 사자상을 수장고에서 찾았으면서도 문화재청을 비롯해 관련 전문가들에게 알리지도 않았고 보존 처리 과정에서 자문조차 구하지 않는 등 부실한 문화재 관리 실태를 드러냈다. 최근 사자상의 존재를 알게 된 일부 문화재 관계자들은 “그동안 사자상이 국내에 없는 걸로 알았다”면서 “정부는 물론 전문가들도 사자상을 말할 땐 도난·약탈됐다고 표현해 왔다”고 말했다. 내로라하는 복수의 문화재 전문가는 “사자상은 일제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일본으로 도난당해 반출된 이후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입을 모았다. 문화재청은 최근 국립문화재연구소로부터 보고를 받고 홈페이지 내 문화재 검색 소개란의 지광국사탑과 관련해 ‘기단의 네 귀퉁이마다 1마리씩 놓여 있던 사자상은 일찍이 도둑을 맞아 지금은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다’에서 ‘기단 네 귀퉁이에 사자상이 1구씩 배치돼 있었으나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로 바꾸었다. 중앙박물관 관계자는 “6·25 때 탑이 폭격을 맞아 훼손된 이후 사자상을 떼어내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했던 것 같다”면서 “‘미술자료’는 전공자나 궁금한 이들도 찾아보는 정기간행물이라 굳이 보도자료를 내지 않았다”고 밝혔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박물관, 사자상 ‘존재’ 알고도 공개 안해… 문화재 관리 난맥상 베일 벗은 지광국사탑 사자상… 학계 파장 클 듯 국립중앙박물관은 2013년 강원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사자상의 실체를 확인하고서도 3년간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다. 미술·석조문화재 최고 권위자들조차 사자상이 일제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도난당해 국내에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어 학계에 미칠 충격도 만만찮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6월 발간된 중앙박물관 정기간행물 ‘미술자료’ 제87호에 실린 논문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에 대한 기초적 검토-이전 건립 경과 및 보존처리 내용을 중심으로’(이하 ‘논문’)에는 ‘사자상은 한국전쟁 당시 폭격에도 불구하고 4개체가 모두 남아 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2013년 보존처리를 진행하였다. 보존처리와 3D 스캔을 한 사자상은 4개체로 구성돼 있으며 이 중 표면 풍화 상태가 심한 3개체의 사자상에 대한 세부 형상을 확인하였다’고 적혀 있다. 4개의 사자상은 크기와 무게가 다 다르다. 가장 큰 사자상은 가로 45㎝, 세로 25.5㎝이고 제일 작은 건 가로 28.5㎝, 세로 21.4㎝다. 무게는 20㎏부터 29㎏까지 다양하다. 이 ‘논문’으로 국내에서 수십 년간 자취를 감췄던 사자상이 그 존재를 드러내게 됐지만 박물관 내 일부 관계자들 외에는 이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 1962년 문화재 전문위원 1호로 위촉된 ‘미술·석조문화재 대부’ 정영호 단국대 석좌교수는 “사자상은 일제강점기 일본 사람들이 지광국사부도(탑)를 해체해 일본으로 가져간 이후 행방을 알 길이 없다”면서 “일본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사자상을 본 사람 중 살아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 사자상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자상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복원을 하느냐”고 덧붙였다. 또 다른 미술·석조문화재 권위자인 소재구 전 해양연구소장도 “일제강점기 사진에 보면 사자상이 있는데 중간에 사라졌다. 일본으로 반출됐는지,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탑 복원 때 사자상도 원칙적으로 복원해야 하지만 근거가 없기 때문에 복원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지광국사탑은 고려 문종 때 국사(國師)를 지냈던 지광(984~1067) 국사의 사리탑으로, 1085년 법천사에 건립됐다. 지광국사탑은 한국 문화재 수난사를 대표하는 탑으로 일컬어진다. 당초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국보 제59호)와 함께 원주 법천사 터에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인 1911년 일본인에 의해 해체돼 서울로 옮겨졌다가 1912년 일본 오사카로 반출됐다. 1915년 조선총독부 명령으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1990년 현재 위치인 경복궁 경내 국립고궁박물관 앞뜰에 세워지기까지 최소 9차례 옮겨 다녔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폭격을 맞아 상륜부가 1만 2000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졌고 1957년 시멘트 등 다양한 재료로 복원됐다. 최근 정기조사와 정밀안전진단 등 점검 결과 다수의 균열과 시멘트 복원 부위 탈락 등이 확인돼 전면 해체, 보존처리하기로 결정됐다. 문화재청은 오는 22일 탑 해체 공사 보고식을 갖고 다음달 2일까지 전체 부재를 해체한 뒤 6일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이송할 계획이다. 사자상은 언제, 어떻게 사라진 걸까. ‘논문’에 따르면 사자상은 1932년 탑 해체 및 재건립 때까진 존재했지만 한국전쟁 당시 탑 상륜부가 파괴된 이후 감쪽같이 사라졌다. 중앙박물관 관계자는 “57년 탑 복원 때 야외에 노출돼 있으면 도난 위험도 있고 사자상을 받치는 탑 부재도 약해 사자상을 떼어내 박물관 수장고로 옮겼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57년 탑 복원 현장에 있었던 이들 중 유일한 생존자인 정 교수는 “파손된 상륜부 1만 2000조각을 모아 복원에 관여했던 임천·양철수 선생은 돌아가신 지 오래됐고 복원 감독을 했던 황수영 은사께서도 돌아가신 지 5년 됐다. 이젠 나밖에 없다”면서 “나도 당시 사자상을 본 적이 없는데 일제강점기에 사라진 사자상을 누가 봤겠느냐”고 반문했다. 전문가들도 일제강점기에 도난당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지광국사탑 사자상이 중앙박물관 수장고에 수십 년간 묻혀 있었다는 건 과학적이고 체계적이지 못한 문화재 관리의 난맥상을 여실히 보여 준다. 문화재 관계자들은 “중앙박물관 수장고에는 유물이 엄청 많은데 수장고 내에 어떤 유물이 있는지,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단독] 박물관, 사자상 ‘존재’ 알고도 공개 안해… 문화재 관리 난맥상

    [단독] 박물관, 사자상 ‘존재’ 알고도 공개 안해… 문화재 관리 난맥상

    박물관 정기간행물 논문에 게재… 사자상 4개 크기·무게 모두 달라 미술·석조문화재 권위자들조차 “사자상 국내 없다” 철석같이 믿어 박물관측 “1957년 수장고로 옮긴 듯” 당시 탑 복원 관계자 “사자상 못 봐” 국립중앙박물관은 2013년 강원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사자상의 실체를 확인하고서도 3년간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다. 미술·석조문화재 최고 권위자들조차 사자상이 일제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도난당해 국내에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어 학계에 미칠 충격도 만만찮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6월 발간된 중앙박물관 정기간행물 ‘미술자료’ 제87호에 실린 논문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에 대한 기초적 검토-이전 건립 경과 및 보존처리 내용을 중심으로’(이하 ‘논문’)에는 ‘사자상은 한국전쟁 당시 폭격에도 불구하고 4개체가 모두 남아 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2013년 보존처리를 진행하였다. 보존처리와 3D 스캔을 한 사자상은 4개체로 구성돼 있으며 이 중 표면 풍화 상태가 심한 3개체의 사자상에 대한 세부 형상을 확인하였다’고 적혀 있다. 4개의 사자상은 크기와 무게가 다 다르다. 가장 큰 사자상은 가로 45㎝, 세로 25.5㎝이고 제일 작은 건 가로 28.5㎝, 세로 21.4㎝다. 무게는 20㎏부터 29㎏까지 다양하다. 이 ‘논문’으로 국내에서 수십 년간 자취를 감췄던 사자상이 그 존재를 드러내게 됐지만 박물관 내 일부 관계자들 외에는 이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 1962년 문화재 전문위원 1호로 위촉된 ‘미술·석조문화재 대부’ 정영호 단국대 석좌교수는 “사자상은 일제강점기 일본 사람들이 지광국사부도(탑)를 해체해 일본으로 가져간 이후 행방을 알 길이 없다”면서 “일본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사자상을 본 사람 중 살아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 사자상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자상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복원을 하느냐”고 덧붙였다. 또 다른 미술·석조문화재 권위자인 소재구 전 해양연구소장도 “일제강점기 사진에 보면 사자상이 있는데 중간에 사라졌다. 일본으로 반출됐는지,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탑 복원 때 사자상도 원칙적으로 복원해야 하지만 근거가 없기 때문에 복원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지광국사탑은 고려 문종 때 국사(國師)를 지냈던 지광(984~1067) 국사의 사리탑으로, 1085년 법천사에 건립됐다. 지광국사탑은 한국 문화재 수난사를 대표하는 탑으로 일컬어진다. 당초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국보 제59호)와 함께 원주 법천사 터에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인 1911년 일본인에 의해 해체돼 서울로 옮겨졌다가 1912년 일본 오사카로 반출됐다. 1915년 조선총독부 명령으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1990년 현재 위치인 경복궁 경내 국립고궁박물관 앞뜰에 세워지기까지 최소 9차례 옮겨 다녔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폭격을 맞아 상륜부가 1만 2000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졌고 1957년 시멘트 등 다양한 재료로 복원됐다. 최근 정기조사와 정밀안전진단 등 점검 결과 다수의 균열과 시멘트 복원 부위 탈락 등이 확인돼 전면 해체, 보존처리하기로 결정됐다. 문화재청은 오는 22일 탑 해체 공사 보고식을 갖고 다음달 2일까지 전체 부재를 해체한 뒤 6일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이송할 계획이다. 사자상은 언제, 어떻게 사라진 걸까. ‘논문’에 따르면 사자상은 1932년 탑 해체 및 재건립 때까진 존재했지만 한국전쟁 당시 탑 상륜부가 파괴된 이후 감쪽같이 사라졌다. 중앙박물관 관계자는 “57년 탑 복원 때 야외에 노출돼 있으면 도난 위험도 있고 사자상을 받치는 탑 부재도 약해 사자상을 떼어내 박물관 수장고로 옮겼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57년 탑 복원 현장에 있었던 이들 중 유일한 생존자인 정 교수는 “파손된 상륜부 1만 2000조각을 모아 복원에 관여했던 임천·양철수 선생은 돌아가신 지 오래됐고 복원 감독을 했던 황수영 은사께서도 돌아가신 지 5년 됐다. 이젠 나밖에 없다”면서 “나도 당시 사자상을 본 적이 없는데 일제강점기에 사라진 사자상을 누가 봤겠느냐”고 반문했다. 전문가들도 일제강점기에 도난당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지광국사탑 사자상이 중앙박물관 수장고에 수십 년간 묻혀 있었다는 건 과학적이고 체계적이지 못한 문화재 관리의 난맥상을 여실히 보여 준다. 문화재 관계자들은 “중앙박물관 수장고에는 유물이 엄청 많은데 수장고 내에 어떤 유물이 있는지,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단독] 약탈당한 줄 알았던 국보, 박물관 ‘창고’에 묻혀 있었다

    [단독] 약탈당한 줄 알았던 국보, 박물관 ‘창고’에 묻혀 있었다

    2013년 찾고도 보존 자문없이 방치… 허술한 관리 도마에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도난, 반출됐던 것으로 알려진 국보 제101호 강원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사자상이 수십 년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묻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14일 탑 주위에 가설 덧집을 설치하면서 전면 해체 및 복원 작업에 들어간 지광국사탑을 사자상까지 포함해 원형 그대로 되살려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16일 문화재 관계자들에 따르면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지광국사탑 전면 해체, 복원을 앞두고 지난해 8월 탑 이전 연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지광국사탑 사자상이 중앙박물관 수장고에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지난해 6월 간행된 중앙박물관 정기간행물 ‘미술자료’ 제87호에 실린 논문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에 대한 기초적 검토’에서 ‘2013년 사자상 보존 처리를 진행했다’는 구절을 본 것. 중앙박물관은 2013년 사자상을 수장고에서 찾았으면서도 문화재청을 비롯해 관련 전문가들에게 알리지도 않았고 보존 처리 과정에서 자문조차 구하지 않는 등 부실한 문화재 관리 실태를 드러냈다. 최근 사자상의 존재를 알게 된 일부 문화재 관계자들은 “그동안 사자상이 국내에 없는 걸로 알았다”면서 “정부는 물론 전문가들도 사자상을 말할 땐 도난·약탈됐다고 표현해 왔다”고 말했다. 내로라하는 복수의 문화재 전문가는 “사자상은 일제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일본으로 도난당해 반출된 이후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입을 모았다. 문화재청은 최근 국립문화재연구소로부터 보고를 받고 홈페이지 내 문화재 검색 소개란의 지광국사탑과 관련해 ‘기단의 네 귀퉁이마다 1마리씩 놓여 있던 사자상은 일찍이 도둑을 맞아 지금은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다’에서 ‘기단 네 귀퉁이에 사자상이 1구씩 배치돼 있었으나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로 바꾸었다. 중앙박물관 관계자는 “6·25 때 탑이 폭격을 맞아 훼손된 이후 사자상을 떼어내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했던 것 같다”면서 “‘미술자료’는 전공자나 궁금한 이들도 찾아보는 정기간행물이라 굳이 보도자료를 내지 않았다”고 밝혔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경복궁 안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전면 해체·보수… 고향으로 돌아갈까

    경복궁 안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전면 해체·보수… 고향으로 돌아갈까

    탑 보수 후 어디로 갈지 ‘촉각’ 경복궁 경내 국립고궁박물관 앞뜰에 있는 국보 제101호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이 전면 해체된 뒤 보수 작업에 들어간다. 보수된 탑이 원래 있던 강원 원주시 법천사 터에 세워질지, 현재 탑 관리 기관인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갈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오는 14일부터 석탑 주변에 가설 덧집을 설치하고 다음달 2일까지 전체 부재를 해체한 뒤 6일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옮길 계획이라고 9일 밝혔다. 지광국사탑은 고려 문종 때 국사(國師)를 지냈던 지광국사(984~1067)의 사리탑이다. 높이는 6.1m이며 화강암으로 제작됐다. 통일신라 시대부터 유행했던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기단, 탑신 등이 팔각형으로 된 형식) 양식에서 벗어나 평면 사각형을 기본으로 하는 새로운 양식을 보여 준다. 탑 전체에 장식된 보살상, 봉황, 연꽃 등 정교하고 화려한 이국풍의 조각이 돋보이는, 고려 시대 사리탑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광국사탑은 정기조사와 문화재 특별 종합점검, 정밀 안전진단 등 그동안 진행된 점검 결과 다수 균열과 시멘트 복원 부위 탈락 등이 확인됐다. 특히 기단부와 시멘트로 복원된 옥개석(屋蓋石·덮개돌), 상륜부의 구조적 불안정까지 더해져 석탑의 추가 훼손이 우려돼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전면 해체·보존 처리하기로 결정됐다. 지광국사탑은 당초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국보 제59호)와 함께 법천사 터에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인 1911년 일본인에 의해 해체돼 서울로 옮겨졌다가 1912년 일본 오사카로 반출됐다. 1915년 조선총독부 명령으로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법천사 터가 아니라 경복궁에 놓였고 1990년 현 위치에 세워지기까지 최소 9차례 이전됐다. 한국전쟁 당시 폭격을 맞아 옥개석을 비롯한 상부 부재가 여러 조각으로 파손됐고 1957년 시멘트 등 다양한 재료로 복원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중앙박물관과 원주시는 탑 위치를 놓고 갈등을 빚고 있다. 중앙박물관은 박물관 내 별도 공간에 세워 많은 사람이 관람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견해인 반면, 원주시는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다보탑처럼 원래 장소에 세워야 한다는 입장이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사라지니 살아나는 곳

    사라지니 살아나는 곳

    옛 절터는 따사롭다. 봄으로 가는 길목, 잔설이 있어도 생채기 난 돌탑 위로 어느새 훈풍이 스친다. 그래서 폐사지를 찾아가는 여행은 시간을 거슬러 전혀 다른 세상과 만나는 독특한 경험이다. 한국관광공사에서 3월에 가볼 만한 옛 절터를 추천했다. ●고려 왕의 스승이 머문 자리-강원 원주 흥법·거돈·법천사지 원주엔 폐사지가 많다. 남한강 물줄기를 따라 흥법사지, 거돈사지, 법천사지 등 신라 시대 창건해 임진왜란 때 사라진 폐사지가 여럿이다. 특히 이 세 절집은 고려 시대 왕의 스승인 국사가 머물며 이름을 떨친 사찰이다. 비록 건물은 사라졌지만 탑과 탑비 등이 남아 옛 사찰의 규모와 고려 불교미술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다. 거돈사터는 이른바 ‘폐허의 미’가 가장 빼어나다고 평가받는 곳이다. 신라 후기인 9세기께 조성된 뒤 고려를 거쳐 조선 전기까지 명맥이 이어졌던 대가람이었으나, 지금은 너른 터와 석탑만 남아 당시 모습을 일러 주고 있다. 흥법사지는 다소 휑한 편. 법천사지는 여태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다. 폐사지를 돌아본 뒤에는 흥원창에서 갈무리한다. 강과 산을 물들이는 일몰이 아름답다. 원주시 관광안내소 (033)733-1330. ●조선 최대 왕실 사찰로의 시간 여행-경기 양주시 회암사지 양주 회암사지는 고려 중기에 지어져 조선 중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측되는 절터다. 관련 기록이나 여느 사찰 건축과 다른 궁궐 건축양식, 출토 유물 등으로 미뤄볼 때 조선 최대의 왕실 사찰이었으리라 짐작된다. 회암사는 오랫동안 왕실의 후원 아래 위세를 떨쳤다. 특히 태조 이성계는 스승으로 모시던 무학대사를 회암사 주지로 보낸 뒤 자주 찾았으며, 왕위에서 물러난 뒤에도 회암사에 머물며 수행한 것으로 전해진다. 회암사지 뒤 산길을 조금 오르면 중요한 문화재 여러 점을 만난다. 회암사와 인연이 깊은 지공선사, 나옹선사, 무학대사의 부도와 석등이다. 양주관아지와 조명박물관,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장흥아트파크, 청암민속박물관 등을 연계하면 좋다. 양주시 문화관광과 (031)8082-5664. ●고려 마의태자 전설 품은 절집-충북 충주 수안보면 미륵대원지 미륵대원처럼 이름 뒤에 ‘원’자가 붙은 곳은 대개 여행자가 숙식을 해결하던 곳, 즉 역원의 역할을 담당하던 절집이다. 조선시대엔 국가가 역원을 운영했지만 고려 때는 절에서 담당했다. 이런 절집엔 보통 ‘기골이 장대한’ 불상이 서 있기 마련인데, 미륵대원지에도 10.6m에 달하는 미륵불(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이 세워져 있다. 한데 대개의 불상이 남쪽을 바라보는 것에 견줘 충주 미륵불은 북쪽을 보고 있다. 미륵불을 세운 마의태자가 누이 덕주공주가 세웠다는 덕주사를 바라보게 했다는 전설이 있지만, 학계에선 옛 고구려 땅을 회복하려는 고려의 북진사상이 표현된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우세하다. 미륵대원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갯길인 하늘재 아래 자리잡았다. 걷다 보면 백두대간 산봉우리가 물결친다. 충주시 관광과. (043)850-6723. ●황매산 기암절벽 아래 신비의 절터-경남 합천 영암사지 합천 황매산 자락의 모산재 기암절벽 아래 영암사지가 있다. 여느 절터처럼 석탑과 석등 같은 문화유산이 올곧이 남았지만, 절집의 내력은 자세히 밝혀진 것이 없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쌍사자 석등이 꼽힌다. 영암사지에서 황매산이 지척이다. 황매산 정상 언저리까지 차로 올라갈 수 있다. 합천 읍내로 가는 길에는 합천영상테마파크가 자리잡았다. 근대의 역사를 담은 세트장으로, 실제라 착각할 만큼 사실적인 모양새가 일품이다. 합천은 가야국 연맹체인 다라국의 고장이다. 합천박물관에는 다라국 지배층의 고분군에서 발굴된 다양한 유물이 전시되고 있다. 박물관 뒤쪽에 사적으로 지정된 옥전 고분군이 있다. 가야산이 품은 해인사와 대장경테마파크, 두 곳을 잇는 해인사 소리길도 합천의 명소다. 합천군 관광진흥과 (055)930-4666. ●춘향이도 시기할 사랑 이야기 담은 터-전북 남원 만복사지 남원은 춘향과 판소리로 유명하다. ‘사랑의 도시’라 불릴 만큼 춘향전은 도시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단단히 자리잡았다. 한데 춘향전에 버금가는 러브 스토리가 있다는 걸 아는 이는 드물다. 바로 ‘금오신화’에 나오는 ‘만복사저포기’다. 노총각 양생이 만복사에서 만난 여인의 영혼과 사랑을 나누고 부부의 연을 맺은 이야기다. 고려 문종 때 창건된 만복사는 승려 수백 명이 머물렀을 정도로 번성했으나,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절집도 소실됐다. 전각은 모두 불타고 지금은 오층석탑(보물 30호), 석조대좌(보물 31호), 당간지주(보물 32호), 석조여래입상(보물 43호) 등만 남았다. 만복사지에서 시작한 여행은 춘향테마파크, 국악의 성지, 남원추어탕거리를 거치며 차츰 흥겹고 맛깔나게 무르익는다. 남원시 문화관광과 (063)620-6161. ●허물어진 절터에 남은 천년의 온기-충남 보령 성주사지 보령 성주사지는 크고 유서 깊은 절터다. 성주산 자락에 둥지를 튼 폐사지에는 백제, 통일신라, 고려, 조선 시대의 흔적이 골고루 묻어난다. 국보 1점과 보물 3점 등 귀한 유물이 허물어진 절터를 의연하게 지키고 있다. 성주사는 통일신라 선종의 대가인 무염대사(낭혜화상)가 크게 일으킨 것으로 전해진다. 선종의 큰절인 ‘구산선문’ 중 하나가 성주산문이며, 그 중심지가 성주사다. 낭혜화상탑비(국보 8호)는 무염대사를 기리기 위해 최치원이 비문을 지었으며, 보물로 지정된 오층석탑과 삼층석탑 등이 절터에 있다. 성주산의 남쪽 주봉인 옥마봉 전망대에 오르면 보령 시내와 대천해수욕장 등 서해가 아득하게 펼쳐진다. 성주산자연휴양림, 개화예술공원, 보령석탄박물관을 함께 둘러보면 좋다. 보령시 관광과 (041)930-4542.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지나온 내 삶의 흔적을 돌아본다, 절터에서

    지나온 내 삶의 흔적을 돌아본다, 절터에서

    여행지로서의 강원 원주는 사실 ‘캐릭터’가 불분명하다. 강원권 교통의 요지라거나, 산업도시라고 하기엔 뭔가 1% 부족한 느낌이다. 강원도청 소재지, 혹은 군사도시 사이 어디쯤으로 인식되기도 하는데 이는 사실 여행과는 거리가 먼 특징들이다. 그래서 둘러봤다. 원주엔 무엇이 있을까. 알려지지 않았을지언정 없지는 않을 터.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을 찾아 시내 구경부터 나선다. 원주는 한지의 고향이다. 예부터 그랬다. 조선시대 ‘세종실록지리지’에 닥나무가 원주의 특산물 중 하나로 기록돼 있다. 알다시피 닥나무는 한지의 주재료다. 닥나무 ‘저’(楮) 자를 행정명으로 쓴 지역도 있다. 현재 호저면은 1914년 이전엔 ‘저전동면’이라 불렸다. 지금도 호저면과 부론면, 흥업면 등에서 닥나무를 쉽게 볼 수 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원주엔 무려 15개 이상의 한지 공장이 전통을 잇고 있었다. 한지의 대량 소비처였던 법천사와 거돈사, 흥법사 등 대가람들이 부론면에 몰려 있었고, 강원 관찰사가 상주했던 강원감영 등 관청들도 멀지 않은 곳에 밀집돼 있었다. 한지 마을과 인쇄문화가 발달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원주 한지테마파크는 사라져 가는 우리의 옛 한지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한지문화 전용공간으로 조성됐는데 다양한 전시, 체험, 교육 등의 이벤트가 열린다. ●중앙시장서 허기 달래고 미륵산 풍광에 흠뻑 재래시장을 좋아하는 이에겐 중앙시장이 제격이다. 1970년 준공돼 얼추 50년 가까이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여느 재래시장과 마찬가지로 쇠락의 길을 걷다 최근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변신을 꾀하면서 점차 활기를 되찾고 있다. 시장 안엔 문화예술 시설과 맛집 등이 얽혀 있다. 2층은 골목미술관이다. 각종 적치물이 쌓인 버려진 공간이었는데, 최근 말끔하게 정비해 다양한 전시회를 여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1층은 고기골목, 만두골목 등 이른바 ‘먹자 골목’이다. 다양하고 맛있는 음식들을 비교적 싼 가격에 맛볼 수 있다. 미륵산(689m)은 덜 발품 팔고도 장쾌한 풍광과 마주할 수 있는 곳이다. 충북 충주와 경계를 이룬 산으로, 제법 웅장한 기암과 노송이 어우러져 있다. 경천묘를 들머리 삼아 두 시간이면 넉넉히 다녀올 수 있다. 주봉 암벽엔 미륵불이 새겨져 있다. 큼직한 얼굴과 상대적으로 작은 체구, 투박하고 토속적인 표현양식 등으로 볼 때 고려 전기에 조각한 것으로 추정된다. 들머리와 날머리 구실을 하는 경천묘는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일반인과 달리 왕의 위패엔 4번 절해야 한다는 걸 잊지 마시길. 원주 여정의 핵심은 옛 절터다. 원주에 남은 주요 폐사지는 거돈사지, 흥법사지, 법천사지 등 세 곳이다. 하나같이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탑, 탑비 등을 품고 있어 우리 석조미술문화의 저력을 잘 보여 주는 곳으로 평가받는다. 모두 남한강을 끼고 있어 찾아가는 데 어려움은 없다. 한데 돌아보는 순서는 고민이 좀 필요하다. 사람마다 폐사지에 두는 의미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목익상 원주시 문화관광해설사는 흥법사터, 거돈사터, 법천사터 순으로 돌아보라 했다. 절터에 남은 탑비의 조성 연대순으로 돌아야 탑비의 변천과정 등 역사를 알 수 있다는 뜻에서다. 흥법사터는 신라시대 절터다. 원래 1만평에 이르는 대찰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절터 대부분이 농가와 논밭으로 변했다. 남은 문화재는 흥법사터 삼층석탑(보물 제464호), 진공대사 탑비 귀부와 이수(제463호) 정도다. ●옛 절터엔 석조미술문화의 저력 오롯이 거돈사터는 이른바 ‘폐허의 미’가 가장 빼어나다고 평가받는 곳이다. 신라 후기인 9세기께 조성된 뒤 고려를 거쳐 조선 전기까지 명맥이 이어졌던 대가람이었으나, 지금은 너른 터와 석탑만 남아 당시 모습을 일러 주고 있다. 거돈은 ‘큰 깨우침을 얻다’는 뜻이다. 가람의 규모와 깨우침의 깊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알 수 없으나, 많은 이들이 거돈사를 찾아 깨달음을 구했던 건 분명해 보인다. 폐사지에 들면 삼층석탑(보물 제750호)이 눈길을 잡아끈다. 아담한 체구의 통일신라시대 석탑이다. 유홍준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탑이 있음으로 해서 거돈사터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차분하게 만들어 주며 폐사지의 쓸쓸한 분위기를 차라리 애잔한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다.”(‘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제8권) 석탑 오른쪽은 느티나무다. 수령 700년에 이른 노거수로, 몸 둘레가 7.2m에 이를 만큼 거대하다. 석탑과 나무 위로 세월이 더께로 쌓였다. 지치고 쇠락해 보여도 둘이 어우러지며 선사하는 풍경의 무게만큼은 더없이 무겁고 깊다. 삼층석탑 바로 뒤는 금당터다. 그 중앙에는 큼직한 철불이 앉았을 석조 대좌가 거대한 돌덩이처럼 덩그러니 남아 있다. 절터 동남쪽 끝자락엔 원공국사 승묘탑비(보물 78호)가 서 있다. 고려 현종 16년(1025)에 세워진 것으로 돌거북 받침대(귀부)와 용머리 지붕돌(이수)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탑비의 필획은 힘차고 아름다워 고려시대 비 중 서체가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듣는다. 법천사지는 발굴조사 작업이 한창이다. 지광국사 현묘탑(국보 101호)과 탑비(국보 59호)로 이름난 절터로, 두 작품 모두 고려 불교미술의 대표 걸작으로 꼽힌다. 특히 정교하고 화려한 조각이 새겨진 탑비는 나라 안에서도 가장 크고 아름다운 비석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제 흥원창터를 말할 차례다. 흥원창은 내륙의 쌀과 각종 물산들을 한양으로 실어 나르던 뱃길 위에 세운 창고다. 지금은 유적지이자 지명으로도 쓰인다. 조선시대 흥원창의 규모는 실로 대단했던 모양이다. 창고 앞 나루터에 정박하는 세곡 운반선이 20여척이 넘었다고 한다. 이처럼 수많은 배들이 오갔던 뱃길이 바로 삼도하(三道河)다. 충북 충주와 경기 여주, 그리고 강원 원주 등 세 도시가 만나는 접경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어디 마을뿐이랴. 물길도 합쳐진다. 충주 목계나루에서 흘러온 남한강과 원주를 관통해 온 섬강이 흥원창터 앞에서 몸을 섞은 뒤 여주로 흘러간다. 급히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흐르던 물길은 청미천을 받아 안은 다음 또 한번 몸을 뒤틀어 북쪽으로 급선회한다. 이른바 세물머리다. 그 자태가 유장하면서도 더없이 도도하다. 굽이쳐 흐르는 세 강줄기를 여유 있게 내려다보고 있는 자산의 풍채도 일품이다. 강변에서 만나는 철새들의 자태는 겨울 여행의 별미다. 흔히 ‘백조’라 불리는 큰고니(천연기념물 201호) 무리가 남한강 지류를 따라 유영하고, 청둥오리 등은 무시로 군무를 펼친다. 말똥가리 등 맹금류와도 어렵지 않게 조우할 수 있다. 흥원창 일대는 해넘이 명소로 꼽힌다. 낮은 산자락을 넘어가는 해가 일렁이는 물결을 붉게 물들인다. 큰 강 합쳐지는 곳이 낙조로 물드는 장면, 그야말로 장관에 장관을 더한 풍경이다. 그 강물에 올해의 시름 실어 보내는 것도 좋겠다. ●여행수첩(지역번호 033) →맛집: 원주 중앙시장 안에 맛집들이 많다. 특히 소고기 집들이 많은데, 주말이나 연말연시 등엔 예약조차 힘들 정도로 사람들이 몰린다. 그 가운데 푸른초원(742-7438)은 푸짐한 한우숯불구이로 발길이 끊이지 않는 집이다. 한우모둠 1인분이 2만 5000원이다. 이 집의 별미는 된장찌개다. 거무튀튀한 빛깔의 토속 된장으로 끓여 내는데, 짜지 않으면서도 된장 특유의 깊은 맛이 우러난다. 장터추어탕(735-2025)은 원주식 추어탕으로 이름난 집. 걸죽한 국물이 일품이다. 문막에 있다. 산정집(742-8556)은 ‘말이고기’로 이름난 집. 한우를 얇게 썰어 미나리, 쪽파 등과 함께 말아 만든다. →가는 길: 폐사지를 먼저 둘러보겠다면 영동고속도로 여주 나들목으로 나가는 게 낫다. 이어 37번 국도를 타고 점동사거리까지 간 뒤 좌회전, 84번 지방도로 갈아타고 단암삼거리에서 부론면사무소 방면으로 좌회전해 가면 된다. 미륵산은 영동고속도로 문막 나들목으로 나가 42번 국도(여주 방향), 49번 지방도, 404번 지방도 순으로 갈아탄 뒤 유현3거리에서 운교리 방향으로 우회전해 곧장 가면 된다. 한지테마파크(734-4739)는 원주 시내 한지공원길에 있다. →잘 곳: 가족 단위로 간다면 오크밸리 리조트(1588-7676)가 제격이다. 특급호텔로는 호텔 인터불고 원주(769-8114)가 있다. 원주 유일의 특급호텔로 원주역사박물관 옆에 있다. 글 사진 원주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격동의 한·일 70년] 문화재 반환

    [격동의 한·일 70년] 문화재 반환

    1993년 한·일 양국이 발칵 뒤집어졌다. 경복궁 안에 있어야 할 자선당 유구(遺構, 옛 건축물의 흔적)가 일본 도쿄의 오쿠라호텔에서 발견됐기 때문이다. 김정동 목원대 명예교수가 찾아냈다. 김 교수는 “건축문화재는 우리뿐 아니라 일본도 몰랐다. 1965년 한·일협정 때도 논의되지 않았다. 건물까지 뜯어서 갖고 갔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자선당은 세자와 세자빈이 머물던 전각이다. 일본은 1914년 식민통치 홍보 박물관인 ‘조선총독부미술관’을 세우기 위해 자선당을 철거했다. 당시 작업을 맡았던 오쿠라 기하치로는 데라우치 총독에게 자선당 반출을 부탁, 일본으로 뜯어갔다. 조선관으로 개명, 오쿠라슈코칸 전시실로 사용했다. 1923년 간토대지진 때 소실됐다. 기단, 주춧돌, 계단 등 석재들만이 남아 수십년간 방치됐다. 자선당 유구는 반출 81년 만인 1995년, 고국으로 돌아왔다. 경복궁에서 뜯어간 가마쿠라의 ‘관월당’, 벽제 또는 경복궁에서 옮겨간 것으로 알려진 이와쿠니의 ‘정자’, 이천에서 가져간 오쿠라호텔 경내 이천오층석탑 등 일본에는 아직 국내의 건축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김 교수는 “관월당, 정자 등은 일본에서 돌려줄 것처럼 얘기했는데 한·일관계가 경색되면서 대화 채널이 완전히 끊어졌다. 일본 측은 예민한 한·일문제 때문에 더 이상 대화할 수 없다고 했다”며 안타까워했다. 김 교수는 정년퇴직 뒤 우리근대건축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면서 건축문화재 반환에 힘을 쏟고 있다. 일제 강점기 일본으로 반출된 한국 문화재는 공식 확인된 것만 6만 7000여점에 달한다. 개인 소장 등 드러나지 않은 것까지 포함하면 20만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일본 소재 우리 문화재는 김 교수 사례처럼 민간의 노력으로 돌아온 게 많다. ‘김시민 선무공신교서’는 시민 모금으로 되찾았다. 1592년 10월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진주목사 김시민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1604년 전공 및 김시민과 그의 가족에게 내리는 포상 내용을 적은 임금의 글이다. 2005년 일본 도쿄 고서점가 경매에서 이 교서를 낙찰받은 한 일본인 고서적상이 재판매하려는 사실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국민 모금이 시작됐다. 2006년 7월 1400만엔(당시 환율로 약 1억 2000만원)을 주고 찾아왔다. 정부 협상으로 돌아온 문화재도 적지 않다. 1965년 한·일협정 부속협정에 의거해 고고유물, 도서, 도자기 등 1326점이 돌아왔다. 한·일 국교 정상화 회담을 앞두고 일본은 ‘외교적 제스처’로 1958년 4월 경남 창녕 고분군 출토 유물 106점을 반환했다. 1991년에는 한·일 정부 간 협상에 의해 복식류, 장식물, 장신구 등 ‘영친왕 일가 복식’ 333점이 환수됐다. 이는 이방자 여사가 소장했다 1957년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2002년 이토 히로부미가 무단으로 일본 황실로 반출했던 규장각 도서 숫자를 기재한 문서철이 발견됐다. 한·일협정 때 반환된 90책을 제외한 900여책에 대해 반환요구 움직임이 일었다. 2010년 11월 ‘도서에 관한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국 정부 간 협정’에 의거 이듬해 일본 궁내청에서 소장하고 있던 900여책과 조선왕실의궤 등 1205책이 반환됐다. 민관 협력도 빼놓을 수 없다. 북관대첩비는 남북 합작으로 반환이 이뤄졌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정문부가 함경도 길주, 쌍포, 단천 등지에서 왜군을 격퇴한 업적을 기리는 비로, 숙종 때 세워졌다.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무단 반출해 야스쿠니 신사에 세워 놨다. 일본 유학생과 학자에 의해 존재가 국내에 알려지면서 정부와 남북 불교단체가 환수에 앞장섰다. 2005년 국내에 돌아온 뒤 이듬해 북한으로 보내져 본래 자리에 세워졌다. 2006년에는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 가운데 47책이 되돌아왔다. 일제강점기 조선 연구를 명목으로 조선총독부를 통해 도쿄대학으로 무단 반출됐다. 1923년 간토대지진 때 대부분 소실됐다. 혜문 스님이 2004년 도쿄대학 도서관 귀중본 서고에서 발견, 반환 운동을 시작했다. 일제 강점기에 되돌아온 문화재도 있다. 국외 유출 문화재의 첫 환수 목록에 올라 있는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 등이다. 현재 국내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후쿠이현 조구진자(常宮神社) 소장 신라종, 도쿄 오쿠라호텔 경내 이천오층석탑,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오구라컬렉션 등 반환 운동이 이어지고 있다. 문제는 문화재가 반출된 지 100년이 넘으면서 일본에 흩어져 있는 우리 문화재들의 상태가 나빠지고 있다는 점이다. 의류, 문서, 목재 건축물 같은 건 보존이 시급하다. 조선왕조 도서 환수 공로로 훈장을 받은 박상국 한국문화유산연구원 원장은 “어떤 문화재가 어디 있는지 실태부터 파악하는 게 급선무”라며 “실태도 모른 채 반환 캠페인을 앞세워선 안 된다”고 조언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新국토기행] ‘다이내믹’ 원주… 인구 100만시대 앞둔 新교통허브

    [新국토기행] ‘다이내믹’ 원주… 인구 100만시대 앞둔 新교통허브

    ‘다이내믹 원주’의 슬로건처럼 하늘길과 철길, 찻길이 거미줄처럼 이어져 교통의 허브 도시로 자리 잡는 강원 원주시가 용틀임하고 있다. 서울과 차량으로 한 시간 거리에 있고 국토의 동서와 남북을 잇는 중심에 있어 물류의 거대 거점도시가 되고 있다. 이런 이점으로 기업과 사람들이 모여들며 급속하게 팽창하고 있다. 강원 지역에서 규모가 비슷하던 춘천과 강릉을 멀찌감치 제치고 이제는 인구 33만명이 넘는 도시로 우뚝 섰다. 도시 속의 신도시인 혁신도시·기업도시가 수년 내 완성되고, 수도권과 이어지는 여주~원주 간 전철까지 개통되면 원주는 100만명 시대도 멀지 않았다. 원주는 예부터 국토 중심에 있는 군사·행정 요충지였다. 신라 때는 작은 경주 북원이라 불리며 국토 중앙을 다스리는 중심지 역할을 맡았다. 당시 도읍지였던 경주에서 멀다 보니 신라의 왕족과 귀족을 이주시켜 살게 했던 중부지방 중심지였다. 당시 융성했던 모습은 불교문화의 흔적에서도 엿볼 수 있다. 남한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법천사지, 거돈사지, 흥법사지의 거대 사찰 터가 원주 지역에 모두 있었다. 이들 사찰은 신라와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 초까지 번성하다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됐다. 이 같은 흐름은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도청 소재지인 강원 감영이 500년 동안 원주에 자리 잡았다. 조선시대까지 평창~영월~단양~충주~원주~여주~한양을 잇는 남한강 뱃길의 중심에 있어 조세를 거둬들이는 조세창을 두며 번창했다. 수도 한양과 가깝고 풍수해가 적어 사람 살기에 좋다 보니 한양 선비들이 낙향지로 원주의 남한강변을 꼽아 많이 내려와 살았다. 그래서 과거시험 초시 합격자를 많이 배출한 곳 중의 하나였다. 지금도 이곳은 수도권 은퇴자들의 별장 터로 인기가 있다. 원주는 토박이보다 외지인들이 유독 많이 찾아오는 도시이기도 하다. 원주가 군사 요충지로 자리 잡은 것도 오래전부터다. 원주의 주산인 치악산에는 영원산성과 금대산성, 해미산성 등 산성이 남아 있다. 현대에도 한국전쟁이 끝나자마자 1군사령부가 들어와 중부 지역 주요 군사도시 구실을 하고 있다. 대대로 전해지는 전통문화가 밑바탕이 돼 원주 문화도 꽃피우고 있다. 의료산업과 칠산업 등도 선조들의 맥을 이어 번성하고 있다. 원주는 조선시대 서울 경동시장, 대구 약령시장과 함께 3대 약령시로 유명했다. 당시에도 서울과 가까운 교통 여건이 약령시장 발달에 큰 역할을 했다. 이는 현재 의료기기산업 발전으로 맥을 이어오고 있다. 원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옻칠산업이다. 원주에서는 토양과 기후가 맞아 옻나무가 잘 자란다. 칠공예가 발달한 일본이 강점기 시절 착취 목적으로 옻산업을 발전시켰다. 일본은 당시 지역 젊은이들에게 징용까지 면제해 주며 옻나무 진액을 채취해 갔다. 해방 이후 옻칠 기술을 가진 토박이들이 1958년 현대식 공장을 세우고 일본 수출길을 열었다. 전국에서 인재가 모여들었다. 시 문화예술과 박종수 문화재담당은 “생명사상이 원주에서 태동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꿩과 구렁이에 얽힌 치악산 보은의 전설은 너무도 잘 알려진 얘기다. 내용의 전반에 흐르는 게 생명이고 보은이다. 얘기와 맥을 같이해 원주에서 기거하던 무이당 장일순 선생이 펼친 ‘한살림 운동’도 생명사상”이라고 귀띔했다. 이 같은 문화와 산업을 바탕으로 원주가 중부 내륙지역의 경제와 문화 중추 도시로 웅비하고 있다. 교통 여건의 발달에 따라 도시 규모도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여주~원주 간 1.4㎞ 전철 사업이 완공되면 원주는 수도권 시대를 맞게 된다. 문막 궁촌리 일대 33만여㎡에 조성되는 화훼특화관광단지도 원주의 지도를 바꿀 대규모 사업이다. 영동고속도로 인근으로, 어려운 농촌과 관광산업을 살리는 고부가가치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화훼 수출 등만이 아니라 연간 500만명 이상의 관광객을 끌어들이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도심 지역의 군부대를 외곽으로 이전하는 사업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미 태장동 미군부대 캠프롱은 이전을 끝냈고 학성동 인근의 1군지사도 이전을 서두르고 있다. 이들 자리에는 공원이 어우러진 쾌적한 신도시 개발이 추진된다. 특히 34만 4000여㎡에 이르는 캠프롱 터는 국비를 끌어들여 시민 문화체육공원으로 새로 태어나게 된다. 기업 활동에 좋은 환경 조성에도 나서고 있다. 입지 보조금과 설비투자 보조금 등을 대폭 늘렸다. 의료기기와 제약 관련 기업 수십 곳이 속속 입주하고 있다. 의료기기산업 지원을 위해 의료기기종합지원센터(MCC)도 뒀다. 수도권 공공기관이 이전해 오는 혁신도시도 탄력을 받고 있다. 반곡동과 관설동 일대 359만 6000여㎡에 들어서는 혁신도시는 13개 기관, 3만 1000여명의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일종의 신도시다. 혁신도시가 완료되면 원주의 품격이 한층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도로 확포장에도 나서고 있다. 판부~신림 간(15.9㎞) 국도와 태장~새말 간(12.7㎞) 국도, 문막~부론 간 국가지원 지방도 등의 건설이 완료되면 원주 동부와 남부 지역 발전에 기폭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기존 도심 지역의 슬럼화 방지에도 적극적이다. 원주 감영이 있고 전통시장, 상가들이 밀집해 있는 원일로와 중앙로, 평원로의 구도심권을 리모델링해 원일로·평원로는 교통 일방통행으로, 중앙로는 차 없는 문화거리로 깔끔하게 조성했다. 도로변은 상설공연장으로 만들었고 공영주차장을 늘려 쾌적한 도심권으로 재탄생시켰다. 흉물스러운 도심권 담장은 벽화를 그려 단장하고, 인도를 넓히고 숲과 벤치, 조형분수대, 가로수길 등을 설치해 시민 휴식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슬로건에 걸맞게 축제도 다이내믹하게 펼친다. 군사도시의 이미지를 살려 시작했던 군악대 공연 중심의 따뚜공연을 시민들이 함께 어울려 한판 축제로 승화한 ‘다이내믹 페스티벌’로 변경해 인기다. 브라질의 리우축제와 같은 형식으로 러시아 등 해외에서까지 참가하는 화려한 거리 춤 축제다. 이상분 시 홍보계장은 “국토 중앙의 중심도시로 빠르게 변모하는 원주시는 2030년대 인구 100만 시대를 바라보는 명품 도시로 거듭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원주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명인·명물을 찾아서] ‘마법의 종이’ 260여종 色한지로 진화… 전통의 맥 잇는다

    [명인·명물을 찾아서] ‘마법의 종이’ 260여종 色한지로 진화… 전통의 맥 잇는다

    ‘하늘이 내린 오색 빛깔, 원주한지.’ 예부터 강원 원주는 한지(韓紙)의 고장으로 알려졌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한지의 원료인 닥나무가 원주 지방의 주산물이라고 기록될 정도다. 한지의 본고장답게 원주한지는 부드러우면서 질기고 오래 보존되는 강점을 지녔다. 최근에는 260여종의 색깔 있는 한지로 발전시켜 공예품 제작용으로도 인기다. 더구나 닥나무 껍질에서 나온 닥 섬유와 실크를 혼합해 뽑아낸 한지사(絲)를 생산해 친환경 고품질의 각종 직물을 짜내고 있다. 닥나무와 실크의 배합률에 따라 손수건이나 넥타이, 양말, 양복, 한복에 이르기까지 만들 수 있는 제품이 다양하다. 물빨래가 가능하고 친환경적이어서 고가 특산품으로 팔려나가고 있다. 닥나무를 원료로 하는 원주한지는 장인의 손으로 만들어 질기면서도 부드러울 뿐 아니라 장기간 보관이 가능하고 습기와 통풍 조절이 잘된다. 또 직사광선을 막아주고 사람의 품성까지 온화하게 만드는 마법의 종이로 평가받고 있다. 원주한지가 예부터 품질을 인정받아 지금까지 맥을 잇는 것은 중부내륙지역의 알맞은 기후에서 자란 닥나무와 치악산과 백운산 골짜기에서 흐르는 맑고 깨끗한 물로 종이를 만들고 있어서다. 특히 한지의 원료인 인피섬유는 닥나무, 삼지닥나무, 뽕나무 등에서 채취한 것으로 원주 지역의 산과 들, 논둑과 밭 어디에서나 자생한다. 닥나무가 특히 많이 나 마을 이름에 닥나무 저(楮)자가 들어간 곳이 바로 호저면(好楮面)이다. 1991년까지만 해도 단구동 주변을 중심으로 한지를 만드는 공장이 13~15개나 됐다. 지금도 호저면, 부론면, 흥업면 등 원주 일대에서 닥나무를 재배하는 풍경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원주는 사질양토로 햇빛이 많아 닥나무의 번식이 잘되는 지역이다. 역사적으로도 선사시대의 유적이 발굴되고 있는 부론면의 법천사와 거돈사, 지정면의 흥법사는 한지의 대량 생산지이자 소비처이기도 했다. 또 조선왕조 500년의 강원감영이 있던 곳으로 당시 행정 관청을 포함한 각종 기관에 종이를 공급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한지 마을과 인쇄문화가 번성했다. 원주한지의 역사는 곧 이 고장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또 한지를 만드는 데는 깨끗한 물이 필수다. 거둬들인 닥나무 원료를 깨끗한 물로 씻어야 부드럽고 질긴 한지가 만들어진다. 원주는 이 같은 자연조건을 갖추고 한지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원주한지는 1985년 한국공업진흥청으로부터 700년을 보관할 수 있다는 품질관리인증을, 2002년 10월에는 국제품질인증을 취득하면서 품질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닥나무를 한지로 만드는 공장은 현재 2개만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전국적으로도 전통한지를 만드는 공장이 많지 않아 현재 닥 생산은 국내 소비의 20%에 그치며 대부분은 중국과 베트남 등에서 수입해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원주한지는 오랜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힘겨운 노력을 쏟고 있다. 원주한지문화제위원을 중심으로 10여년 전부터 닥나무 심기에 열정을 쏟아 지금은 6만 6000㎡에서 닥나무가 생산된다. 지난해에는 닥나무생산자협동조합까지 결성됐다. 앞으로 66만㎡까지 재배 면적을 넓히는 게 목표다. 한지를 주제로 한 지역 문화제도 활성화되고 있다. 올해로 16회째를 맞는 원주한지문화제는 오는 25~28일 다채롭게 펼쳐진다. ‘아흔아홉 번의 손길-한지’를 테마로 한 문화제에서는 개막일인 25일 오후 대한민국한지대전 시상식과 한지패션쇼가 선보인다. 26일부터는 한지문화의 확산과 한지의 문화관광자원으로서의 활용 방안에 대한 학술토론이 한지테마파크에서 열리고 주민들이 참여하는 한지등(燈) 터널, 풀뿌리등, 오색한지등, 국화등, 장미꽃등 등 다양한 빛의 향연이 펼쳐진다. 이와 함께 원주 지역 특산물과 지역상인들이 만나는 공간, 한지 뜨기와 한지 체험공간도 마련된다. 김동신 한지개발원 기획홍보팀장은 “원주한지는 1984년 정부에 의해 프랑스국립도서관에 기록용 종이로 납품되는 등 국제적 명성도 얻었고 지금도 대통령 공식 표창장, 임명장 등에 사용되고 있다”면서 “원주한지를 널리 알리고 보존하는 데 더욱 힘쓰겠다”고 말했다. 원주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깨진 석탑·미생물 기생… 10년째 방치된 국보급 문화재

    깨진 석탑·미생물 기생… 10년째 방치된 국보급 문화재

    국보와 보물급 석조문화재 상당수가 구조 안정성 등에서 위험한 상태로 지적받았지만 문화재청과 해당 시·군·구의 무관심으로 10년 이상 방치돼 온 것으로 드러났다. 감사원은 최근 숭례문 단청 사태로 촉발된 문화재청에 대한 전면 감사에서 이 같은 사실을 포착하고 보수공사 시행 현황을 재감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5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감사원은 이달 중순부터 유형문화재, 천연기념물, 궁릉 등 문화재청 업무 전반에 대한 실질적인 감사에 들어갔다. 이 중 관심을 끄는 대목은 석탑, 석불 등 석조문화재의 보수공사 시행 현황이다. 26일 복원 착수식이 열리는 전북 익산시 미륵사지석탑(국보 11호)처럼 석조문화재들은 오랜 기간 방치돼 심하게 훼손된 경우가 많다. 1970년대까지 복구 과정에서 표면에 시멘트 등을 덧발랐던 관행도 한몫했다. 그러나 미륵사지석탑은 그나마 다행인 사례로 꼽힌다. 이날 서울신문이 확인한 결과, 감사 등을 통해 보수가 시급한 것으로 지적된 석조문화재의 대부분은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방치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의 석조여래입상(보물 96호)이 지난달부터 34억원의 예산을 들여 2016년까지 해체·보수 공사에 들어간 것은 드문 사례다. 그 밖에는 대부분 예산의 한계 등에 직면해 전면 보수·수리를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해 감사원이 공개한 감사결과보고서(문화재 보수 및 정비사업 집행실태)에 따르면 전국에 산재한 국보·보물급 석조문화재 533건 가운데 102건(2012년 기준)은 보수가 시급히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또 이 중 22건은 석조문화재가 자리한 기초자치단체에서 보수 예산조차 신청하지 않아 방치됐다. 문화재청도 예산신청서를 검토하면서 현장조사 때 보수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문화재의 누락 여부 등을 확인·점검하지 않아 문제를 키웠다. 감사원이 당시 언급한 문화재는 경북 고선사지삼층석탑(국보 38호), 강원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비(국보 59호), 강원 굴산사지 당간지주(보물 86호), 강원 진전사지 부도(보물 439호), 경북 경주석빙고(보물 60호) 등이었다. 이들은 풍화상태나 부식 등이 심하거나 구조 안정성에서 매우 위험하지만 보수 및 정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아울러 감사원 지적이 있은 뒤 1년 6개월여가 지난 현재까지 이끼 제거와 간단한 접합 등 표면 처리에 그친 것이 대부분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에 대해 문화재청 관계자는 “감사원 감사가 진행 중이라 정확한 보수공사 시행 현황을 밝힐 수 없다”고 해명했다. 전면 보수·수리에 들어가지 못한 석조문화재들의 현실은 참혹하다. 경주박물관 내 고선사지삼층석탑은 기단부와 탑신이 미생물인 지의류의 번식으로 오염돼 있다. 지의류는 석조물 등에 기생하며 산(酸)을 생산하는 성질이 있어 석재 내부로 침투해 유물의 재질을 전반적으로 약화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경주시의 단석산신선사 마애불상군(국보 199호)은 2001년 현지조사에서 4등급(풍화상태·생물영향·구조안정성)으로 조사됐으나 보수가 지연됐다. 이어 2011년 10월 경주국립공원사무소의 요청에 따라 이뤄진 안전진단에선 낙석 등의 위험이 있어 등산객 출입을 제한해야 한다는 평가가 나왔다. 석조문화재의 정상적인 관리·복구가 힘든 이유는 부족한 예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게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한 문화재 전문가는 “그동안 문화재 보수가 사찰·고택·향교 등 목조문화재에 치중됐던 데다 현 정부 들어서는 온통 반구대 암각화에 관심이 쏠린 탓도 크다”고 말했다. 또 국내에는 석굴암을 비롯해 화강암으로 만든 석조문화재를 복원할 전문가가 거의 없다는 것도 주요한 이유로 꼽힌다. 곽연천(불교문화재연구소) 문화재 전문위원은 “당국은 수천년간 불자들이 기도해 온 석굴암마저 불교계 인사들의 접근을 막고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만 한다”면서 “전국의 폐사지 5000여곳도 대부분 방치돼 있어 이곳에서 나온 석돌 등이 묘지나 화장실의 석재로 사용되는 형편”이라고 지적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800년만에 전통 탑비 양식 되살렸죠”

    “800년만에 전통 탑비 양식 되살렸죠”

    “우리가 다시금 알아야 할 전통 양식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중요성과 가치에 대해 잘 모르고 있지만 바로 그 점을 깨우쳐야 합니다.” 오롯하게 외길을 걸어 왔다. 그래서 호가 ‘외길’이다. 불교의 경전을 옮겨 쓰면서 수행하는 것 중에 하나가 ‘사경(寫經)’이다. 초창기 불교 전파는 그렇게 시작됐다. 우리나라에도 고려시대까진 나름대로 ‘사경수행’이 많았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공개적으로 중단됐다. 그런 세월의 흐름을, 700년간 잠들어 있던 사경을 다시 일깨운 사람이 바로 외길 김경호(47) 한국사경연구회 회장이다. ●초안선사 탑비 복원작업 완료 그는 최근 또 하나 전통의 맥을 이었다. 전통 탑비(塔碑) 양식, 그러니까 800년 만의 현대적인 복원작업에 나서 눈길을 끌고 있다. 탑비란 고승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는 부도곁에 세워지는 비석이다. 거기에는 주인공의 한과 삶이 맺힌 글이 빼곡히 적혀 있다. 김 회장은 최근 경기 양주의 사찰인 오봉산 석굴암에서 열반한 초안(속명 송만석·1926~1998) 선사의 탑비 복원작업을 완료했다. 이는 비문에 들어갈 글과 문양을 종이 위에 제작하는 작업이다. 남은 일은 석공이 그대로 돌에 옮기기만 하면 된다. 그는 “불교가 발전했던 옛날 국사나 왕사 등의 전통적인 탑비는 지금처럼 비신(비석의 몸체)에 행장을 기록한 글만 새겨진 게 아니다.”면서 800여 년 만에 전통 양식을 되살렸다는 자부심과 함께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아울러 “전통 탑비 양식은 1085년에 세워진 법천사 지광 국사 현묘탑비에서 볼 수 있다.”면서 비신의 테두리와 윗부분에 극락세계를 상징한 그림과 아름다운 무늬를 담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고려 말을 거치면서 상징은 도식화됐고 1150년대 이후에는 아예 찾아 보기 어렵다는 설명도 곁들인다. ●우주선·휴대전화 등 현대 상징물도 담아 그가 이번에 제작한 탑비는 옛날 양식을 살렸을 뿐 아니라 불교 경전인 아미타경(阿彌陀經)에 표현된 극락세계를 참조했다. 꽃, 악기, 우주선, 휴대전화, 폭죽 등 현시대의 상징물까지 반영했다. 그렇다면 전통 탑비 양식이 왜 주목을 받지 못했을까. 그는 “오래 잊혀 있던 문화이다 보니 심각하게 고민하지 못했다. 이번 탑비를 제작하면서 이제는 무엇인가를 제시해야 할 때가 됐다는 생각에 시도를 했다.”고 설명했다. 그가 사경과 인연을 맺은 것은 네살 때. 붓을 잡고 부친에게서 획과 결구를 배우기 시작하면서였다. 초등학교 졸업 후에는 중학 진학도 미룬 채 홀로 서예공부에 빠졌다. 중학교를 1년 늦게 진학한 그는 이후 각종 전국 학생서예대회에 출전, 최우수·우수상 등 대부분의 상을 휩쓸었다. 고교 시절에는 사경에 빠져 세번이나 부모 몰래 출가하기도 했다. 대흥사에서 행자생활을 하던 중에 가족들에게 붙잡혀 왔고, 두륜산에서는 토굴에서 지내기도 했다. 김문 문화부장 k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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