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설」 일회성 대처론 못막는다/김병익 문학평론가(정경문화포럼)
◎청소년에 못팔게 성인용 등 표식화 시급/판별주체도 공권력아닌 시민단체여야
「즐거운 사라」의 파동을 지켜보던 우리의 눈은 결코 즐겁지가 않았다.그 작가를 옹호해야 할,그럼에도 많은 유보들을 두어야 하는 작가들의 견해처럼 그것이 문학의 이름으로 혹은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보호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씁쓸한 반성이 됐고 그렇다고 해서 증거인멸과 도주의 우려가 없는 문화적 사건에 대해 검찰이 반드시 구속 수사해야 했는가에 대해서도 물론 회의적인 반감이 일었다.더한 것은 체제비판적,이념적인 필화 사건들에 대해 항의하는 서명을 하던 일이 엊그제였는데 어느 사이 이제 외설문제로 그것이 바뀌었다는 금석지감의 이 사실에 대한 쓰디쓴 자의식이었다.기존의 시대착오적 도덕과 위선적인 풍속을 깨뜨리는 노력이 정치권력의 독재성과 이념의 보수성을 돌파하려는 노력들 못지않게 중요하고 진지하며 도전적인 용기가 필요하다는 점을 십분 이해하면서도 우리의 이 쓰디쓴 자의식은 그 짧은 시차 속의 변화에 쉽사리 적응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을 상품화하는 풍속,더구나 그것을 물신화하여 대중들의 삶의 가장 깊은 곳으로 스며들어 가도록 만드는 현대의 시장구조적 논리는 무리라고 해서 기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럴 추세는 더욱 심화될 소비 사회와의 삶의 탈규제화의 추세에 얹혀져 더더욱 강화될 것이다.이 한권의 소설에 대한 강경한 형사조치가 일시적으로는 그와 유사한 책들과 사진집,스포츠신문들로 하여금 주춤거리게 만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성의 노골적인 상품화와 그것은 외설물화라는 급한 물결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한 작품이 외설인가 아닌가,외설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라는 일회적이고 근시적인 논의로는 다가올 사태에 대한 근원적인 대처가 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문제는 보다 깊이,그리고 앞날에의 방법적인 전망으로 모색돼야 한다.
외설의 사회적 문제에 대해 가장 난감한 문제는 그것이 성 혹은 에로티시즘과의 구분이 모호하다는 데서 빚어지는데 우리에게 더욱 곤혹스러운 것은 그 구분이 모호하더라도 성은 보호하고 외설을 배제하자는 합의에도 불구하고 실제에 있어서는 그 구분을 공개적으로 지워 없애고 있다는 데 있다.그 구분선의 지우기는 가령 문학이나 영화나 TV,비디오 프로그램의 미학적 측면으로서도 그렇고,법이나 도덕이나 우리의 의식이라는 사유의 관습 체계에서도 그러하며,그것들의 생산과 유통과 소비의 사회경제적 구조에서도 그렇다.성행위를 묘사하기만 하면 그것이 곧 에로티시즘 미학을 창조한다고 믿는 예술가들의 경박한 주장과 그것들의 실제작품이 보이는 성의 상품화 방법은 성이 외설이 아니라 예술로 성숙하는데 요구되는 치열한 싸움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며 성적인 표현이 곧 외설이라고 단정하고 그것을 억압하는 우리의 고식적인 도덕관은 그 도덕의 기초가 성에 대한 제도적 고착과 새로운 윤리의 형성간의 갈등으로부터 발원한다는 문제성에 대해 맹목하고 있는 것이다.그것들은 외설을 에로티시즘으로 둔갑하거나 성에 관한 것 모두가 외설이라고 단정하는,그래서 그 구분선 지우기를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과 외설의구분선 지우기 작업이 가장 음험한 상업주의적 형태를 통해 공적 윤리의 체계를 유지하는 기제를 이루는 바로 기성의 공적 문화산업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 특히 심각한 문제다.외설에 가까운 선정적인 장면들이 공공의 TV프로로 방영되고 있으며 노골적으로 외설 상품들이 그것들에 의해 유행되고 있다는 것,만화와 콩트로 외설 산업을 가장 선동적으로 깊숙하게 전파하고 있는 스포츠신문과 주간지들이 퀄리티 페이퍼의 종합일간지사에 의해 발행된다는 것,또 그런 유의 책들이 지하의 것이 아닌,당당한 일반의 출판사에서 간행된다는 것,그 책과 신문과 잡지들이 누구나 들르고 찾는 서점들에서 팔리고 있다는 것 등등이 그렇다.이 위선적이고 혼란스런 생산유통 체계는 그 상품을 소비하는 사람들에게 성과 외설,윤리와 반윤리의 구분을 회피 혹은 호도하며,왜곡된 그리고 예외적인 성풍속이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양상의 것으로 오인하도록 이끈다.
이런 현실을 교정해가기 위해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외설 문화산업의 확장을 올바로 대응하기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결론적으로 말해 그 외설 작품들을 표식화하는 작업이다.이 책 혹은 영화는 성인용이며 청소년에게 매매되어서는 안된다라는 것을 그 상품에,가령 별표라든가로써 표시할 뿐만 아니라 그것의 유통선을 예컨대 미국의 것을 우리도 도입하자고 논의하기 시작한 성인 전용 영화관이나 포르노 상점으로 제한하도록 한다는 것이다.그럼으로써 그 외설 상품이 한정되어서,그러나 그 나름의 물꼬를 찾아 소비되도록 유도해야 한다.그것은 물론 청소년들의 흡연을 막기 위해 담배 자판기를 없애는 것처럼 실질적인 성과는 약할지도 모른다.그러나 그 작업은 외설이 성과는 다른 것이라는 구분을 공적으로 분명하게 가해줌으로써 그것의 즐김이 예외적이고 왜곡된 것임을 깨닫게 하고 건전하며 보편적인 도덕은 그것이 아님을 확인시켜주는 중요한 효과를 일구어준다.그럴 경우 범람을 막는 물꼬 안에서만 흐르게 될 것이며,문화산업기구도 홍등가에서 팔릴 것과 그렇지 않을 것과 구별하여 생산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래서 예술과 외설,도덕과 비도덕을그것의 상업적 구조안에서 갈무리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문제는 누가,어떻게,별표를 표시하고 성인용 영화관에서만 상영할 수 있도록,그러니까 외설의 표지화를 담당할 주체가 되는가이다.
종교나 예술단체 혹은 사회·교육 단체와 학부형의 조직들이 예상되지만 적어도 검찰과 같은 권력체여서는 안된다.그 판별은 권력에 대항적인,그러나 사회 체제의 유지에 책임을 지는,이른바 시민사회의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그럴수 있을때 성은 윤리의 기초로서 보호되고 그것의 왜곡된 표현으로서의 외설은 도덕과 사회의 무거운 규범에서 생겨나는 억압감의 배설구로 긍정적인 기능을 맡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