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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세대 ‘각 그랜저’ 소환… 연속적 브랜드 경험·스토리텔링 입힌다

    1세대 ‘각 그랜저’ 소환… 연속적 브랜드 경험·스토리텔링 입힌다

    ‘헤리티지’(heritage). 우리말로 흔히 ‘유산’으로 번역되는 이 영어 단어는 최근 불경기 속에서도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현대자동차 ‘디 올 뉴 그랜저’를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한다. 우리 기억 속 ‘각 그랜저’로 남은 1세대 그랜저의 헤리티지를 십분 계승했다는 게 현대차의 설명. 하지만 둥그렇고 미래적인 디 올 뉴 그랜저의 모습에서 중후한 각 그랜저의 유산은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 어디에 숨었을까. 그리고 전동화를 통해 미래 모빌리티 회사로 거듭난다는 현대차는 왜 지금 굳이 과거를 돌아보는 걸까.그랜저는 36년간 총 7세대를 거쳤다. 1986년 ‘L카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일본 미쓰비시와 공동으로 개발한 것이 우리가 아는 1세대 각 그랜저의 시작이다. 현대차에 따르면 9만 2571대나 팔리며 당시 국내 대형 승용차 시장의 수요를 모조리 빨아들였다고 한다. 그러다 1992년 2세대 ‘뉴 그랜저’가 나오며 한층 부드러워진 곡선미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후 3세대 ‘그랜저XG’(1998), 4세대 ‘그랜저TG’(2005), 5세대 ‘그랜저HG’(2011), 6세대 ‘그랜저IG’(2016)로 이어진다. 현대차는 보도자료에서 역대 그랜저의 유산을 “존중한다”는 표현을 썼다. 포인트는 크게 네 가지다. 우선 ‘엠블럼’이다. 현대차의 영문 앞 글자인 ‘H’를 타원형 모양으로 디자인한 엠블럼을 처음 사용한 모델이 2세대 그랜저다. 디 올 뉴 그랜저는 이를 계승하고 있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2세대에서는 엠블럼이 차량 전면 보닛 위에 은색으로 장식돼 고급스러움을 더했지만 이번에는 알루미늄 소재로 두께는 얇게, 면적은 넓게 다시 디자인해서 부착했다. 조금 더 미래적인 인상을 준다. 둘째, 셋째 요소는 차량 측면부에 있다. 바로 ‘오페라 글라스’다. 뒷좌석과 트렁크 사이의 공간을 ‘C필러’라고 표현하는데, 여기에 달아 놓은 창문이 바로 오페라 글라스다. 이는 1세대 그랜저의 상징으로 차량 전반의 강인한 이미지와 어우러지는 느낌을 준다. 차량 문을 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요소로 ‘프레임리스 도어’도 있다. 이는 3세대 그랜저를 계승한 것인데, 창문의 위쪽을 잡아 주는 틀이 따로 없는 디자인을 채택했다. 차량의 옆쪽 인상을 깔끔하고 단정하게 정리해 준다. 마지막 요소는 디 올 뉴 그랜저 운전석에 탑승하면 단번에 알 수 있다. 운전자의 시선을 잡아끄는 커다란 ‘원 스포크 스티어링 휠(운전대)’이다. 실제로 현대차 디자이너들이 1세대 그랜저의 헤리티지를 어떻게 계승할지 고민하면서 가장 신경 쓴 부분으로 전해진다. 운전대는 손으로 잡는 부분인 ‘림’과 중심축을 뜻하는 ‘스티어링 허브’ 그리고 이를 연결하는 ‘스포크’로 구성돼 있다. 차량의 목적에 따라 림의 형태, 스포크의 개수는 천차만별이다. 자동차가 발전하면서 스포크는 단순히 연결하는 기능을 넘어 차량 내 다양한 기능을 조작할 수 있는 버튼들이 탑재되기 시작했다. 디 올 뉴 그랜저의 스티어링 휠은 마치 외적으로는 1세대 그랜저에 적용됐던 것처럼 하나의 스포크가 있는 형태로 보인다. 하지만 단순히 베낀 것이 아니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운전자를 위한 편의 사항도 놓치지 않았다는 게 현대차의 설명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단순히 형태를 오마주한 것을 넘어 휠 주변 좌측엔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 차간 거리 설정, 차로 유지 보조 등의 기능과 우측에는 음성 인식, 전화 통화 등 다양한 인포테인먼트 기능을 쉽게 제어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고 전했다. 현대차의 ‘뿌리 찾기’는 비단 이번 그랜저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앞서 지난 7월에는 수소하이브리드차량 ‘N 비전 74’를 선보였는데, 이는 1974년 제작됐었다가 지금은 사진만 덩그러니 남은 ‘포니 쿠페’에서 직접적인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차이기도 하다. 현대차의 첫 번째 전용 플랫폼(E-GMP)이 장착된 전기차 ‘아이오닉5’ 역시 현대차가 한국 자동차 사상 처음으로 양산에 성공했던 ‘포니’의 디자인 요소를 계승한 차이기도 하다. 현대차는 아예 유산을 철저하게 남기기 위해 포니를 디자인했던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에게 포니 쿠페의 복원을 맡기기도 했다. 이는 단순히 ‘레트로’(복고풍) 디자인이 유행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차원으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이어지는 연속적인 브랜드 경험과 스토리를 치밀하게 구축하기 위한 디자인 전략이다. 현대디자인센터장을 맡은 이상엽 부사장은 최근 주지아로와 만난 ‘디자인 토크쇼’에서 ‘앞으로도 과거의 헤리티지를 계승한 디자인의 신차를 내놓을 것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다양한 말이 체스판에서 활약하는 게 우리의 기본적인 디자인 전략이다. 헤리티지야말로 체스에서 가장 중요한 ‘킹’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유산을 계승하는 디자인은 매우 어렵다. 공학적 한계를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형 그랜저에서도 그러했듯 앞으로도 우리는 여러 한계를 극복하고 과거를 계승하는 디자인을 계속 선보이겠다고 약속한다.” 
  • 엔데믹 시대, 가까워진 사람들… ‘관계’에 대한 모색 돋보였다

    엔데믹 시대, 가까워진 사람들… ‘관계’에 대한 모색 돋보였다

    “갑과 을의 위계, 권력관계로써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시가 많았다.”(신해욱 시인) “반려동물, 혼자 살기, 주택 문제를 소재로 한 소설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듯하다. 이태원 참사를 소재로 한 시의성 있는 작품도 눈에 띄었다.”(김이설 작가) 지난 2일 마감한 2023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많은 이들이 소중한 꿈을 품은 작품을 보내왔다. 응모 인원은 모두 1648명으로, 1347명이었던 지난해와 비교할 때 무려 301명이나 늘었다. 편수는 4145편이었는데, 지난해 3453편에 견줘 692편 증가했다. 부문별로는 시가 3001편, 소설이 524편, 시조가 365편, 동화가 175편, 평론이 16편, 희곡이 64편이었다. 시조를 제외한 모든 부문에서 전반적으로 응모작이 늘었다. 세계 문단이 한국 작가들을 주목하고 국내 출판물의 해외 번역 출간이 늘어나는 등 문학 시장이 전체적으로 성장하는 추세와도 이어진다. 코로나19가 주춤하면서 이를 소재로 삼은 작품도 줄어드는 경향을 보였다. 마스크를 멀리하면서 사람은 가까워졌고, 이에 따라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를 조명한 작품이 많아졌다고 심사위원들은 입을 모았다. 시에서는 인간관계에 대한 낙담이나 사회에 대한 분노 같은 감정들이 엿보였다. 오은 시인은 “세상이 달라지고 내 삶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보다 낙담하는 식의 진술로 끝나는 시가 많았다”고 했다. 정끝별 시인은 “사랑을 믿지 않고 기본적 관계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짙다. 정념이 아닌 정욕만 드러낸 시들이 눈에 띄었다”고 평했다. 사회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작품이 많아졌고, 나아가 유명 정치인을 소재로 한 시도 있었다. 단편소설에서는 배경 변화가 눈에 띈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윤해서 작가는 “제주도 여행과 관련한 작품이 제법 있었다. 코로나19로 외국에 못 나가는 상황을 반영한 게 아닐까 싶다”고 했다. 김미정 평론가는 “외국을 배경으로 하거나 외국인들이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내용의 작품도 늘었다. 이주에 관한 얘기들도 다양해졌다”고 했다. 노태훈 평론가는 “장르적 성격을 띠는 작품은 예전보다 줄었다. 장르소설 관련 공모전이 활발한데 그쪽으로 이동한 게 아닐까 싶다”고 분석했다. 작품 수준은 전체적으로 상향 평준화했다. 그러나 김 평론가는 “대체로 글쓰기 훈련을 차근차근했구나 싶은 안정적인 느낌을 주는 작품이었고, 파격적인 작품은 눈에 띄지 않아 아쉬웠다”고 밝혔다. 희곡에서도 인간관계를 고민하는 작품이 많았다. 송한샘 쇼노트 부사장은 “상대에게 직진하지 못하고 이루지 못하는, 그래서 우회하는 안타까운 청춘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다”고 했다. 성종완 연출가도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고 끊어 내는 일에 대한 ‘포비아’(공포)를 다룬 작품이 많았다”고 덧붙였다. 동화 부문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박숙경 아동문학평론가는 “전반적으로 기운을 북돋우려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좋은 작품을 골라 보니 확실히 씩씩한 느낌들이 강했다”고 소개했다. 유영진 아동문학평론가도 “구태의연하지 않으면서 인상적인 동화가 많았다. 아무래도 청년 세대가 동화 부문으로 많이 도전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심사위원들은 도시 중산층이 아닌 소외된 아이들에게 시선을 돌리려는 시도들을 높이 평가했다. 작품 수는 줄었지만 시조에서는 전통 형식을 고수하면서도 한결 편한 분위기가 느껴졌다고 했다. 이근배 시인은 “고리타분한 시조가 줄고 자유로움이 한껏 늘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무언가를 깨닫고, 인간으로서 성찰하게 하는 작품이 대다수였다”고 했다. 한분순 시인도 “언어가 쉬워진 게 전반적인 경향이다. 여기에 운율까지 잘 맞춘 표현 방식 역시 좋았다”고 평했다. 평론에서는 젊은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이경수 평론가는 “황석영이나 김훈, 성석제와 같은 작가들 대신 황정은을 비롯해 젊은 작가들을 탐구하려는 경향이 뚜렷하다”면서 “특히 필자가 주제를 선정해 여러 작가를 끌어와 세팅하는 식으로 쓰는 방식이 주목할 만한데, 평론 자체가 하나의 완결성 높은 읽을거리처럼 보여 반가웠다”고 부연했다. 유성호 평론가는 “여전히 작가론이 대세지만 여러 작가나 작품을 끌어와 우리 시대의 징후나 의제를 도출하려는 경향이 뚜렷해졌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문예창작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대학원에 진학해 평론을 쓰는 사례가 많아졌고, 여러 잡지에서도 평론을 적극적으로 다루면서 나타나는 경향”이라고 분석했다.
  • 영국 手語 이제야 성경 표준안 동영상으로, 미국은 40년 걸려

    영국 手語 이제야 성경 표준안 동영상으로, 미국은 40년 걸려

    수어(手語)에 대한 관심이 몇년 사이 부쩍 늘어났다. 지난해 청각장애 여배우 로스 에일링엘리스가 ‘스트릭틀리 컴 댄싱’에 출연해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고, 청각장애인 가정에서 유일하게 들을 수 있는 10대 소녀 얘기를 그린 영화 ‘코다(CODA)’가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일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이런 대중의 관심을 발판삼아 영국 수어(BSL)가 야심찬 기획을 시작했다. 바로 성경을 수어로 옮기는 작업이다. 리버풀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청각장애 성공회 신부인 한나 루이스는 성경을 잘 이해한다고 늘 생각했다. 그는 22일 영국 BBC 라디오4의 선데이 프로그램 인터뷰를 통해 “영어와 BSL 모두를 능통하게 하는” 인물에 자신이 빠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영어로) 성경을 읽을 수도, 이해할 수도, 강론할 수도 있다. 하지만 BSL로 성경을 읽으면 결코 영어로 읽는 방법으로 얻을 수 없는 감정적으로나 영적인 감동을 맛보게 된다. 아무리 통역이 훌륭해도 그 맛이 사라진 성경을 받아들이게 된다”고 털어놓았다. BSL은 한나가 처음 익힌 언어라 그 자체로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현재로선 성경을 BSL로 옮기는 표준안이 없다. 대신 각자 통역들이 알아서, 그날의 기분에 따라 옮긴다. 몇 주 뒤, 다른 통역이 완전히 다른 성경과 그 의미를 청각장애인에게 들려주는 일이 곧잘 일어난다. 해서 BSL 성경 번역 프로젝트는 이를 바로잡으려는 것이다. 기독교 자원봉사자들이 역사학자, 성서학자들과 힘을 합쳐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텍스트를 BSL로 옮겨 이를 동영상으로 담고 있다. 20명 정도가 프로젝트에 함께 하고 있으며 하루 1000 파운드씩 드는 비용을 후원받아 운영하고 있다. 학문적인 해석과 사람들이 쉽게 정확하고 자연스럽게 BSL을 소화할 수 있도록 균형을 잡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제 마가복음을 옮기는 작업을 마무리했고, 창세기 대목을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의 홈페이지(https://bslbible.org.uk/)를 찾으면 볼 수 있다. BBC 기사는 청각장애를 뜻하는 ‘Deaf’ 단어 첫 글자를 대문자로 계속 표기했다. 청각장애인과 BSL를 쓰는 이들이 자부심을 느끼고 자신만의 언어임을 보여주기 위해 이렇게 한다는 것이다. 소문자 ‘d’를 쓰는 이들은 듣는 능력에 결함이 있다고 여기거나 영어를 제1 언어로 여기는 이들로 구분한다는 것이다. 흔히 수어는 비장애인의 언어와 달리 “역동적인 설명”이 풍부하며 단어와 단어를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와 의미를 연결해 의사를 전달한다. 조사나 전치사, 관사인 ‘for’, ‘of’, ‘the’, ‘with’를 생략하고 감정과 명사를 이어 붙인다.40년 동안 BSL를 해 온 비장애인 캐넌 질 베헨나 성공회 신부는 마가복음 4장(마태복음 13장)의 한 구절이 영어로는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인데 BSL로는 손으로 바구니 모양을 만들고 씨를 뿌리는 동작을 취해 “씨 바구니를 든 사람이 있다”고 옮긴다. 다시 말해 BSL은 그림을 만들어내며, 영어는 단어들로 그림을 만들어내는 식이다. 베헨나는 “성경을 읽을 때 때때로 한 문장이나 한 얘기를 떠올리게 된다. 해서 나는 하느님과 내자신이 통째로 소통한다고 느낀다. 청각장애인도 똑같이 되길 원한다”고 말했다. 그는 나아가 청각장애인들은 거의 모두 두 언어를 구사하지만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단어들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단언했다. 영국의 이 프로젝트는 언제까지 마치겠다는 마감 시한이 없다. 미국 수어의 경우 이 작업을 40년 걸려 마쳤다고 방송은 전했다. 재니스 실로는 기다릴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청각장애인들은 항상 설명을 구하거나 통역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성경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을 영어로 옮긴 윌리엄 틴데일은 누구나, 심지어 아둔한 시골청년(lowly plowboy)도 읽을 수 있도록 하길 원했다. 나 역시 청각장애인들이 그렇길 원한다.”
  • [열린세상] 산타 없는 크리스마스/박산호 번역가

    [열린세상] 산타 없는 크리스마스/박산호 번역가

    카페에 앉아 일을 하고 있는데 캐럴이 흘러나왔다. 아, 벌써 크리스마스 시즌이구나. 하나밖에 없는 딸도 이제는 성인이 돼서 ‘올해는 또 무슨 선물을 준비해야 하나’라는 고민에서는 해방된 지 꽤 오래다. 그런데도 이 무렵엔 괜히 마음이 복잡해진다. 이 증상은 아무래도 크리스마스의 상징인 산타 할아버지 때문인 것 같다. 나는 한 번도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을 받아 본 기억이 없다. 혼자 두 딸을 키우는 엄마는 사느라 늘 바빴고, 무엇보다 장사하는 엄마에게 크리스마스는 일 년에 몇 번 안 되는 대목이었으니까. 크리스마스에는 산타 할아버지가 찾아와 선물을 준다는 걸 몰랐던 나는 주위에 있는 친구들이 크리스마스 전날 밤 머리맡에 양말을 놓고 잤으며, 다음날 아침 바라던 선물을 받고 기뻤다는 이야기에 뒤늦게 박탈감을 느꼈다. 인간은 원래 유치한 이유로 상처받고, 비교하며 결핍을 느끼는 존재다. 그래서 내 아이의 산타 선물은 매년 꼬박꼬박 챙겼지만, 그런 한편으로는 굳이 이런 연극을 왜 해야 하는지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더불어 아이에 대한 애정과 믿음과 관심이 선물이라는 물질로 치환되는 이 시대에 산타에게 아무런 선물도 받지 못한 아이들의 마음은 어떨까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아이가 5학년 겨울에 산타를 더는 믿지 않는다고 선언했을 때 나는 속으로 몰래 안도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산타 할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전통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글을 읽었다. 박신영이 쓴 ‘고양이는 왜 장화를 신었을까’라는 책에서 크리스마스 선물은 왜 산타클로스가 주는지 알려주는 대목을 발견한 것이다. 대부분의 전통이 알고 보면 그렇듯 의외로 싱거운 사연이었다. 사연인즉 이렇다. 유럽 중세의 도제 시스템에서 점점 수가 늘어나는 도제와 직인들을 다 고용할 수 없어 수업 기간이 끝난 직인들이 장인 승인 심사를 받기 전에 1년에서 7년 정도 각지의 길드를 찾아다니며 경험을 쌓는 제도가 만들어졌다. 그것을 편력이라고 불렀고. 한 집안의 가장이기도 한 장인이 직인들을 크리스마스 무렵에 내보낼 때(그러니까 해고할 때) 새로 지은 옷 한 벌을 선물로 줬다. 마찬가지로 장자 상속 시스템이 정착된 서구 사회에서는 맏아들이 아닌 자식이 집을 떠날 때도 부모는 약간의 보상, 즉 선물을 줬다. 그런데 크리스마스에 어린 자녀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던 부모들이 아이가 그걸 받고 집을 나가라는 뜻으로 오해해서 가출해 버리지 않을까 고민이 깊었다고 한다. 그 고민의 해결책이 부모가 아니라 대리인이 주는 선물이라고 속이는 거였다. 그 대리인의 시초가 성 니콜라우스였고 세월이 흘러 백화점 상술과 결합된 전통이 널리 퍼져 “산타클로스는 매년 크리스마스에 전 세계 아이들의 가출을 막느라 바쁘신 몸”이 됐다. 그랬다. 몇백년 전 아이들의 가출을 막기 위해 산타 할아버지가 가공됐다면, 이제는 산타 할아버지가 왜 우리 집에는 오지 않느냐고, 왜 내가 바라는 선물은 주지 않는 거냐고 화가 난 아이들이 집을 떠날 지경인 것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세상 모든 부모가 아이들의 선물을 사서 몰래 포장하고 크리스마스이브에까지 들키지 않으려 전전긍긍하지는 않는다. 세상에는 ‘울지 않고, 어른들 말 잘 들으며 착하게 지냈는데 왜 올해도 나에게만 산타 할아버지가 오지 않았지’ 궁금해하는 아이들이 여전히 많다. 그런 아이들을 기쁘게 해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는 것. 춥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그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마음을 전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크리스마스 정신이 아닐는지.
  • 퇴계 선비정신 깃든 성리학 교육 성지… ‘참다운 앎’ 깨우치다 [이동구의 서원 산책]

    퇴계 선비정신 깃든 성리학 교육 성지… ‘참다운 앎’ 깨우치다 [이동구의 서원 산책]

    경북 안동은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라 자부한다. 한국국학진흥원이 있고 2014년부터 한국정신문화재단이 국제 행사인 ‘21세기 인문가치 포럼’을 개최하고 있다. 특히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문과 정신세계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도산서원(陶山書院)이 정신문화의 근원이 되고 있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서원은 조선시대의 사설 교육기관이라고 하지만 도산서원만큼은 21세기에도 사시사철 문도(門徒)들의 발길과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질 않는 연유일 것이다.●일반인 교육생 올 1월 100만명 넘어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서원 영역의 입구를 지나 낙동강 서쪽 강변에 난 오솔길을 따라 10분가량 걷다 보면 도산서원이 나타난다. 서원 앞뜰에는 이황 선생이 직접 이름 지은 우물 열정(洌井)이 방문객의 마른 목을 적셔 주는 듯하다. 서원 앞 반대편 강 건너 남쪽을 바라보면 시사단(試士壇)이 “도산서원에는 왜 왔는지” 묻는 듯하다. 서원 인근에 마련된 ‘도산서원 선비문화 수련원’에서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인성교육을 하고 있는데 이미 올 1월 4일에 100만명을 돌파했다. 지금도 평일에는 400~500여명, 주말이면 하루 2000명 넘는 사람들이 도산서원을 찾아 인성과 인문학 공부에 관심을 쏟는다. 코로나19가 확산하기 전인 2019년에는 무려 18만명이 교육에 참여하기도 했다. 퇴계를 알기 쉽고 깊이 있게 설명해 주기 위한 지도위원만 160여명에 달한다. 이들은 대부분 학교장이나 교육장 출신의 유학자들이다. 인근 시민 80여명이 참가하는 거경대학을 비롯해 일반인들이 퇴계의 삶과 학문세계를 체험하는 각종 프로그램들도 마련돼 있다. 매년 4월부터 11월까지는 도산서당과 전교당, 옥진각 등에서 하루 3차례씩 1시간 동안 ‘도산서원 즉석공부’가 진행돼 방문객이나 일반인들이 퇴계의 발자취를 쉽고도 편하게 배울 수 있다. 이 밖에 의례체험, 알묘례 등으로 퇴계 선생의 제자가 돼 보는 도산서원 탐방도 있다. 유복을 입고 서원을 관람할 수도 있다. 야간에는 별빛 속 퇴계명상길 산책을 통해 소중한 사람들과의 추억 남기기도 가능하다. 퇴계 선생 묘소 탐방, 활인심방, 선성수상길 걷기(안동선비순례길) 등 일반인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마련돼 있다. 매년 4월이면 ‘퇴계 선생 귀향길 재현행사’도 열린다. 참가자(20~50여명)들은 13박 14일 동안 270여㎞를 걸으며 1569년 음력 3월 4일 한양도성을 떠나 안동의 도산으로 낙향해 후학들을 양성한 퇴계 선생의 큰 뜻을 되새긴다. 유생의 학문과 퇴계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교수, 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활발하다. 퇴계학을 전공하는 학생과 연구교수 34명은 2개월에 한 차례씩 1박 2일 동안 ‘참공부’ 프로그램에 참가해 수업과 강의를 통해 퇴계 연구를 이어 가고 있다. 이들은 현재 퇴계의 ‘언행록’을 번역하고 있다. 제유사와 지도위원 등 30~40여명은 격주간으로 화상강의를 통해 퇴계를 배우고(줌 박약재) 별유사와 강독유사 등은 도산잡영과 성학십도 등을 교재로 성독, 홀기(제례 진행을 알리는 발성) 등을 배우고 있다. 퇴계의 14대손 이태원(李泰源) 도산서원 별유사는 “일반 시민이든 학생, 학자든 도산서원을 찾는 사람에게는 서원의 기능과 퇴계의 발자취 등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고 있다”면서 “향사 시간을 낮으로 옮기고, 여성의 알묘를 허용하는 등 현대인에게 맞춘 개혁에 앞장서고 있지만 서원 본령에 어긋나는 것은 일절 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한국 서원의 으뜸이자 성지 도산서원은 1574년에 퇴계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그의 제자와 지역 유림들이 건립한 성리학 교육의 성지 같은 곳이다. 이황 사후 4년 뒤의 일로 퇴계가 직접 학생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을 모태로 건립됐다. 1575년(선조 8년)에 왕이 현판을 내려주어 사액서원이 됐다. 도산서원은 18세기 이후 영남을 넘어 전국의 으뜸 서원으로 떠오른다. 영조와 정조가 탕평책을 쓰며 정계에 오랫동안 소외된 영남인의 불만을 수습하는 방안으로 이황에게 각기 2차례씩 치제(왕이 신하의 제사를 지원)가 내려진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특히 정조는 치제를 내리면서 도산서원에서 과거를 실행하게 했는데 7000여명이 응시했을 정도이다. 퇴계는 성균관 대사성 등 여러 관직을 거친 후 고향으로 돌아와 도산서원의 근간이 된 도산서당에서 성리학을 조선에 정착시키고 체계화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소수서원)에 사액을 청원하는 것을 시작으로 임고서원, 이산서원, 역동서원, 천곡서원 등 초기 서원의 건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서원이 새롭게 성장하는 사림세력들을 교육하고 길러내는 가장 적합한 교육기관이 될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는 서원을 통해 유학의 도학주의, 즉 성인을 향한 참다운 길로 가는 공부 방법이 이 땅에 뿌리내릴 수 있을 것으로 봤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서원교육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서원을 운영하는 사림들이 독자성과 자율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사액을 청원하면서도 서원 운영에는 외부의 힘이 관여하지 않도록 당부하기도 했다. 서원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은 천명을 깊이 이해하고 그 속에서 아무런 구애 없이 노니는 정신의 높은 경지를 획득하는 것이다. 참다운 인간, 사람다운 사람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 서원교육의 목표인 것이다. 경(敬)공부를 가장 중시한 것도 이 때문이다. 경이란 마음을 투명하게 두어 어떤 순간에도 사심이 개입되지 않도록 하는 마음공부를 의미한다. 퇴계는 일방적인 가르침, 즉 주입식 공부가 아니라 제자들과의 질의응답을 통해 스스로 깨우치게 하는 교육법을 실천했다고 한다. 이 별유사는 “기대승과의 사단칠정론 외에도 제자들과 무려 1791번이나 질의응답한 경우도 있었다는 게 문헌에 남아 있다”고 말했다.●다섯 가지 보물을 품다 도산서원의 건물 배치는 퇴계가 살아 있을 당시의 기본 틀을 반영해 지어졌다. 서원의 출입문인 진도문(進道門)에 들어서면 맞은편에 강당인 전교당(典敎堂)이 서 있고, 좌우에는 유생들이 기거하던 동재와 서재가 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전교당 정면에는 선조가 하사하고 당대의 명필이었던 석봉(石峰) 한호(韓濩·1543~1605)가 쓴 도산서원 사액편액이 걸려 있다. 강당 대청 뒤쪽으로는 쪽마루가 있고 전면 뜰 아래에는 정료대(庭燎臺)가 설치돼 밤에 불을 밝힐 수 있게 했다. 서원의 제향 공간인 상덕사(尙德祠)는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퇴계 이황과 제자 월천 조목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상덕사 남쪽 아래에는 문집 판목이 보관된 장판각이, 상덕사 서남쪽 아래에는 향사 때 향례를 보조하며 제수를 마련하는 전사청이 있다. 서원을 지키고 관리하는 고직(庫直)이 거처하던 고직사가 두 채 있고 1970년 보수할 때 지은 유물전시관 옥진각에는 이황이 생전에 사용하던 각종 물품과 서책 그리고 출판물이 전시돼 있다. 도산서원에서는 책방(冊房), 상재협실(上齋夾室), 광명실(光明室)로 이어지는 별도의 서책소장 공간을 마련해 서책을 관리했다. 관리자가 교체될 때 전임자와 후임자가 함께 참여해 점검하고 서명한 후 인계인수했다. 1969년의 전적조사에서는 모두 907종 4338책이 조사됐는데 동광명실에 195종 2136책, 서광명실에 712종 2202책이 있었다. 도산서원에는 국가가 지정한 보물이 5가지나 된다. 전교당(보물 제210호), 상덕사 및 삼문(보물 제211호), 강세황의 도산서원도(보물 제522호), 도산서당(보물 제2105호), 농운정사(보물 제2106호) 등이다. 이 밖에도 사도세자 추존만인소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시아 태평양 지역 목록에 올라 있고 시사단은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33호, 안동서원은 사적 제170호로 지정돼 있다.
  • [알기 쉬운 우리 새말] 하락 전환과 피크 아웃

    [알기 쉬운 우리 새말] 하락 전환과 피크 아웃

    어려운 외국어 신조어를 우리말로 다듬는 새말 모임의 성과물을 이 지면에 소개한 지 어느덧 1년이 돼 간다. 그간 스무 개가 조금 넘는 우리말을 이 지면을 통해 선보였다. 그런데 이번처럼 언론에서 우리말 설명을 각양각색으로 덧붙인 외국어는 없었던 것 같다. 그만큼 많이 쓰이고는 있으되 우리말로 표현하기는 까다로운 용어라는 얘기다. ‘피크 아웃’(Peak Out)이 주인공이다. ‘피크 아웃’이란 고점(peak)을 찍은 뒤 빠져나온다(out)는 뜻으로, 경기나 주식이 최고점을 찍고 하락 국면에 접어드는 상황을 일컫는다. 영어의 뜻 자체만으로는 경기나 주식 등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몸 상태나 운동 기량 등 여러 방면에서 최고 상태를 기록하고 내리막에 막 접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경제 용어로만 사용되는 편이다. 반대말은 ‘보텀 아웃’(bottom out). 흔히 ‘바닥을 쳤다’는 식으로 풀이되는 말이다. ‘피크 아웃’이 우리 언론에 처음 쓰인 시기는 2000년으로 해당 기사는 다음과 같다. “경기 주도 업종의 재고순환으로 볼 때 경기는 이미 정점에서 내려가고(Peak-Out) 있으며 늦어도 3분기 중에는 피크 아웃할 것으로 예상된다.”(머니투데이 2000년 8월) 우리말 설명 뒤에 영문으로 ‘peak-out’이라는 표현을 괄호 속에 제시하고, 다시 문장 뒤에서 우리말 발음을 반복해 배치한 셈이다. 이후 20년 동안 주로 경제지나 종합일간지 경제면에서만 주로 쓰였는데도 검색 수가 무려 5만번이 넘었으니 실로 많이 쓰이기는 했지만, 정착된 우리말 순화어는 없다. 그래서인지 앞서 말한 것처럼 정말 다양한 우리말 설명이 붙었다. ‘정점 통과 후 하락’, ‘고점 대비 하락’, ‘고점을 치고 둔화되는 것’, ‘정점을 지나는 것’, ‘고점을 친 것’, ‘하강 기미를 보이는 것’, ‘최고 시세까지 올라 더이상 오르지 못함’, ‘고점 후 하락세 돌입’ 등등. 가만 살펴보면 우리말 설명에 따라 미묘한 차이가 있다. ‘기업 이익이 정점이라는 피크 아웃’(연합인포맥스 2009년 10월), ‘정점에 이르고 있는 피크 아웃 상황’(뉴스토마토 2022년 11월)은 정점에 올랐다는 상황을 주로 강조하고 아직 하강 국면에 접어들지 않은 것처럼 표현한 설명이다. 그런가 하면 ‘추진력이 떨어지는 피크 아웃’(머니투데이 2010년 9월) 식으로 정점에 대한 언급 없이 하락 국면만 강조하는 표현도 있다. 한 개 혹은 두 개 단어로 이뤄진 우리말 표현만 살펴보아도 여러 가지 조합이 뒤섞여있다. ‘고점 도달’, ‘경기 정점’, ‘정점(고점) 통과’, ‘하락 전환’, ‘고점 후 하락’ 등이 그것이다. 한편 “반도체 업황의 고점(peak out) 우려”처럼 아예 한 단어로 대체한 경우(한국경제TV 2018년 7월)도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고점’ 혹은 ‘정점’ 같은 표현은 ‘벗어났다’는 뜻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다소 부적절한 쓰임으로 봐야 할 것이다. 새말모임 위원들도 ‘피크 아웃’이라는 용어가 품고 있는 여러 상황 중 어떤 성격을 강조할 것인가 고심한 끝에 ‘고점을 지났다’는 상태를 나타낸 ‘고점 통과’와 ‘탈정점’, 그리고 ‘내리막이 시작됐다’는 상황을 강조한 ‘하락 전환’이라는 세 개의 말을 후보로 정했다. 굳이 용어가 아니라도 ‘정점을 찍고 내리막이 시작됐다’는 문장으로 풀어 써 주는 것이 말 자체도 쉽고 뜻을 전달하는 데도 유리하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용어로서 다듬은 말의 실제 쓰임을 고려할 때 간결성도 중요하기 때문에 아쉬우나마 명사형 단어 조합을 찾아낸 것이다. 여론조사 결과 시민들은 ‘하락 전환’에 80%가 넘는 지지를 함으로써 이 같은 시도에 호응했다. ※ 새말모임은 어려운 외래 새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다듬어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언론, 통번역, 문학, 정보통신, 보건 등 여러 분야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모임을 꾸리고 있다.
  • [윤경희의 동네 서점에 숨다] 할인 판매 상자 속의 시/문학평론가

    [윤경희의 동네 서점에 숨다] 할인 판매 상자 속의 시/문학평론가

    한 권의 책으로 한 사람의 삶의 행로가 극적으로 결정되는 사건은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캐나다의 시인, 고전학자, 번역가인 앤 카슨의 경우도 그렇다. 자전적인 글, 강연, 뉴요커나 가디언 같은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를 종합해 카슨의 청소년기의 한 자락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카슨은 1950년 온타리오주 토론토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여러 도시로 이사를 다녔다. 열다섯 살 무렵에는 포트호프의 고등학교에 다니며 선택과목으로 타자기 사용법 대신 라틴어를 배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서 먼 다른 도시의 서점에 들러서 할인 판매 도서만 담아 둔 상자를 뒤지다가 책 한 권을 집어 든다. 기원전 6세기의 여성 시인 사포의 시집으로 왼쪽에는 그리스어 원문이, 오른쪽에는 영어 번역문이 실려 있었다. 사포의 시는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에 지어져 노래로 전해지다가 수백 년이 지난 다음에야 파피루스에 기록됐다. 파피루스는 습기에 취약하고 벌레와 곰팡이에 금세 삭는다. 그래서 사포의 시 중에서 오늘날까지 온전히 보존된 것은 극히 드물고, 몇 줄이나 몇 마디 파편으로만 남은 게 대다수다. 학자들은 시 파편에 번호를 매겨 정리했다. 사포의 시를 읽을 때는 이처럼 바스라진 말들이 내뿜는 여전히 강렬한 기운을 느끼면서 그 주변의 공백에 어떤 목소리와 곡조가 있었을지 적극적으로 상상해야 한다. 사포의 시 38번은 그리스어로 두 단어짜리 파편인데, 번역하면 ‘너는 나를 태운다’에 가깝다. 카슨은 말한다. 열다섯 살에 ‘너는 나를 태운다’는 말을 처음 마주친 순간 그리스어를 알고 싶고 그리스어로 향하는 길을 찾고 싶어졌다고. 카슨은 그리스어를 배울 방도를 찾아다닌다. 라틴어 교사 앨리스 코완이 점심시간을 할애해 카슨에게 그리스어를 가르쳐 주기로 한다. 카슨의 회고를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우리는 같이 사포를 읽었는데요. 선생님 댁에서 찾아낸 오래된 고대 그리스어 교본으로 차근차근 공부했어요. 그게 내 삶을 바꾸었답니다. 선생님께는 언제나 셀러리 향기가 났어요.” 좋아하는 시인의 하루를 상상해 본다. 잦은 이사와 전학으로 먼 거리를 피로하게 떠도는 사춘기 소녀. 어느 날 서점에서 여러 사람의 손을 타서 낡았을 책 한 권을 집어 들고는 왼쪽과 오른쪽의 모르는 말 두 마디와 아는 말 세 마디 사이, 무지와 지를 가르면서도 견고하게 잇는 종잇장의 아득한 틈에서 보았을, 우발적이고도 결정적인 삶의 길이 열리는 그 순간. 고전과 시와 번역이라는 직업의 소명. “너는 나를 태운다.” 네가 나를 태울 때 나는 너로 인해 완전히 사멸할 수도 있고 너로 인해 뜨겁게 활생할 수도 있다. 나를 태우는 너의 정체는 무엇인가. 뜨거움이라는 강렬한 감각의 근원으로 돌파해 진입하고 싶다. 죽을지도 모르는 무서움을 무릅쓰고. 그러려면 익히 아는 말 너머 모르는 말 가까이에 닿아야 한다. 서점은 이러한 시적 사건이 발생하는 장소로 언제든 우리를 기다린다.
  • [열린세상] 이상한 나라의 노동자/조이한 아트에세이스트

    [열린세상] 이상한 나라의 노동자/조이한 아트에세이스트

    직장에 매이지 않은 프리랜서 노동자지만 아파서 쓰러지지 않는 한 새벽 다섯 시면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 강의 하고, 논문이나 원고를 쓰고, 번역을 하느라 하루 여덟 시간, 때로는 13시간을 일한다. 그렇게 일해도 수입은 중소기업 대졸 신입사원 초봉에도 미치지 못한다. 강사, 작가, 번역자 중에서 그래도 한시적이지만 정기적으로 수입이 들어오는 데가 강사라서 직업을 시간 강사로 쓸 때가 많다. 그런데 특강을 가거나 원고를 보냈을 때 내 직업은 수시로 교수로 바뀌어 있다. 게다가 많은 경우 대학에서는 시간 강사를 겸임 교수, 초빙 교수라는 말로 바꿔 부른다. 임금도, 처우도 시간 강사와 똑같은데 앞에 ‘교수’자를 붙여 계약한다. 하지만 강사료를 지불할 때, 특히 공공기관에서는 교수와 시간 강사를 명확하게 구분한다. 나는 그들 마음대로 교수가 됐다가 강사가 됐다가 한다. 그런 일은 다른 노동자에게도 비슷하게 일어난다. 화물연대 노동자들은 노동조합도, 파업도 불가능한 개인 사업자라고 했다가 정부가 강제 업무개시 명령을 내릴 때는 노동자라고 한다. 국민 대다수가 노동자이지만 스스로를 노동자로 인식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는 노동자라는 말을 쓰는 사람을 빨갱이로 여기던 시절을 지나왔고, 지금도 노동자보다는 근로자라는 말을 자주 쓴다. 유럽에서는 어려서부터 배우는 노동권을 성인이 돼서도 배운 적 없고, 노동자들의 파업에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며, 자식이 노동자가 되지 않기를 바라고, 노사 분쟁이 생기면 자본가에게 감정이입을 한다. 툭하면 귀족노조를 들먹이지만 우리나라가 노동 인권에 있어서 국제적으로도 최하등급에 속한다는 건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것도 쉽지 않았다. 1960년대 전태일 열사가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당시에는 하루 14시간씩 주 80시간 넘게 일했다. 주 5일 근무에 68시간 노동이 가능해진 건 2000년 김대중 정부 들어서다. 2018년이 돼서야 주 52시간이 됐다. 그렇게 되기까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다. 놀라운 건 그렇게 힘겹게 얻어낸 성과도 실제 노동 현장에서는 무용지물이더라는 것이다. 주변의 노동자 중에서 주 52시간만 노동하는 사람이 없다. 그들은 수시로 야근을 하고, 주말에도 출장을 간다. 이번에 총파업을 한 화물연대 노동자들은 하루 16시간씩 일했다. 그들은 법은 법이고 현실은 다르다고 말한다. 그런데 주 52시간 법정 노동시간이 시행된 지 겨우 4년 만에 윤석열 정부는 ‘노동시간 유연화’라는 말로 다시금 노동시간을 늘리려 한다. 외려 개정되기 전보다 한 시간이 늘어 ‘주 최대 69시간 제도개혁안’을 발표했다. 우리의 노동 인권 시계는 거꾸로 간다. 살기 좋아졌다고들 한다. 이제는 누구도 굶어 죽지 않는다고도 한다. 대한민국은 개발도상국에서 벗어나 세계 10대 부국에 들어간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여전히 노동자는 안전 규칙과 상관없이 혼자 일하다가 떨어져 죽고,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죽고, 장시간 운전하다 죽고, 감정 노동에 시달리다 자살하고, 상사의 갑질에 시달리고, 공사 현장에서 불타 죽고, 깔려 죽고, 손가락이 잘리고, 암이나 희귀병에 걸리고, 하루아침에 해고돼 길거리에 나앉는다. 그런 현실을 알리기 위해 허구한 날 75m 공중에 매달리고, 굶고, 삼보일배를 한다. 법적으로 권리가 보장된 노동자들의 저항 방법인 ‘파업’이라는 수단을 써도 검찰이 업무방해죄로 노조 간부에게 실형을 선고하고, 막대한 금액의 손해배상을 청구한다. 그런데 우리의 젊은이들은 정말로 노동할 곳이 없어 노동자가 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노동자가 없어져야 나라가 산다는 사람이 대통령 자문 역할을 하는 나라에서 우리는 정말로 괜찮은 것일까.
  • 낮은 데서 태어나 낮은 데서 자란 예수… 낮은 곳에 찾아온 성자

    낮은 데서 태어나 낮은 데서 자란 예수… 낮은 곳에 찾아온 성자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누가복음 2장 12절) 베들레헴의 목자들이 천사들로부터 예수의 탄생 소식을 들었다는 곳을 기념해 세운 목자들의들판교회. 이곳에서 30분 정도 걸어가면 예수 탄생을 기린 예수탄생교회가 있다. 한밤중에 천사들의 계시를 따라 들판을 걸어간 목자들이 아기를 보고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갔다는 기록이 누가복음 2장에 나온다.목자들이 찾아가 경배했을 장소에는 지금 은색 별로 치장된 표지가 있다. 531년 동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불탄 교회를 재건해 세월을 견뎌 온 이곳에 별이 들어선 것은 1717년. 가톨릭교회가 마태복음에서 예수의 계보를 14대로 구별한 것을 따라 14각형의 형태로 제작했다. 별이 있는 지하로 가는 입구에서는 세계에서 온 순례객들이 2000년 전의 목자들처럼 경배하기 위해 줄지어 기다린다. 낮은 곳에 임한 예수를 상징하듯 낮게 무릎을 꿇어야 별에 다가설 수 있다. 순례객들은 별을 만지고 입을 맞추며 예수 탄생의 의미를 되새겼다. 조금이라도 더 머물고 싶은 마음과 조금이라도 더 일찍 보고 싶은 마음이 긴장감을 주는 작은 공간에는 모두의 영혼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신성한 힘이 있다.예수탄생교회에서는 가톨릭교회 4대 교부로 꼽히는 성인 예로니모(영어명 제롬)의 흔적도 만날 수 있다. 그는 이곳에 머물며 신구약 성경을 모두 라틴어로 완역했고 이 덕분에 기독교 역사가 오늘날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제롬이 성경 번역으로 자신만의 구도의 길을 걸어간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제롬은 죽기 전 성경 번역에 몰두했던 지하 동굴에서 잠들기를 바랐고, 이 동굴 안에 묻혔지만 성인을 더 가까이서 보기 원했던 이들의 뜻에 따라 시신은 가톨릭의 본산 로마로 옮겨졌다. 예수탄생교회와 나란히 붙은 캐서린교회 입구에는 “당신이 이곳에 여행자로 들어왔다면, 나갈 때는 순례자로 남게 될 것이다. 당신이 순례자로 들어왔다면, 나갈 때는 더 거룩한 이로 남게 될 것이다”라는 말이 있어 순례객들의 마음을 재정비하게 한다. 예수가 세상에 온 현장, 성경이 더 많은 이에게 전파될 수 있게 된 현장에 오고 가는 순례객들은 더 경건한 마음으로 교회를 나서게 된다.예수의 탄생과 공생애 사이에는 기록이 거의 없어 어떤 성장기를 보냈는지 자세히 알기 어렵다. 지난달 29일 한국 취재진에 특별 공개된 ‘요셉의 동굴’은 이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해 주는 곳이다. 1914년 성요셉교회가 세워지면서 요셉의 동굴은 지하 동굴 형태로 남았다. 사람이 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허름한 이곳은 바티칸이 예수가 성장했던 곳으로 공인한 장소다. 좁고 낮은 통로를 지나면 나오는 33㎡(약 10평) 남짓한 동굴은 높이가 2~2.5m 정도로 들쭉날쭉하다. 구석에는 5m 높이의 구멍이 있는데 현지 안내를 맡은 이강근 박사는 “지상으로 연결되는 구멍을 통해 빗물을 받아들인 뒤 동굴 바닥의 물 저장고에 보관했다가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동굴 내부에는 간이조명만 설치돼 있을 뿐 별다른 소품이 없어 예수가 어린 시절 살았을 공간 자체에 더 주목하게 한다.성요셉교회 바로 옆에는 마리아가 천사로부터 예수의 잉태 소식을 들었다는 동굴 위에 세운 수태고지교회가 있다. 수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준 사건답게 수태고지교회 옆에는 세계 각국의 언어와 그림체로 표현된 마리아 성화가 벽에 걸렸다.예수가 탄생하고 성장한 장소는 모두 낮고 허름한 곳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성경 속 예수의 행적은 실제 그가 나고 자란 성지를 보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의사이자 목회자로서 성지순례에 동행한 이재훈 목사는 “누가복음에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라는 구절이 있는데, 예수의 성장하는 모습에 대해 의사인 누가가 썼다는 점에서 더 깊이 다가온다”며 성경 구절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겼다. 취재진과 함께 동행한 소강석 새에덴교회 목사도 예수가 나고 자란 곳을 둘러 보며 여러 감정에 젖은 모습이었다. 소 목사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낮은 삶을 사신 게 가슴 아프다”며 “요즘 교회는 너무 부자인데, 낮아지고 비우는 삶을 생각해 본다”고 전했다.
  • 아마존·유튜브 먹여살리는 AI의 검색+추천, ‘써제스트’

    아마존·유튜브 먹여살리는 AI의 검색+추천, ‘써제스트’

    코로나19가 불러 온 ‘비대면 시대’에 우리는 유튜브, 넷플릭스, 아마존, 네이버 등 수많은 플랫폼을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하게 된다. 이들 플랫폼 매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기능은 ‘검색’과 ‘추천’이다. 과거 인터넷 콘텐츠나 상거래 플랫폼에서 사용자가 원하는 정보나 상품을 찾기 위해선 검색어를 직접 입력해 찾아내야 했다면, 이젠 인공지능(AI)이 다양한 방법으로 검색을 돕거나 아예 사용자 취향에 맞는 추천 콘텐츠를 첫 화면에 노출시킨다. 이처럼 개인의 데이터와 취향을 기반으로 상품이나 콘텐츠를 찾고 추천하는 AI 기술인 ‘써제스트(Seargest, search+suggest)’ 개발에 글로벌 플랫폼 기업들이 박차를 가하고 있다. 상품 검색에 AI를 적용하면 오타 수정과 번역은 물론이고 자연어 처리를 기반으로 모호한 검색어도 의미를 추론, 가장 적합한 검색 결과를 도출한다. 한 예로 아마존 검색창에 상품명이 아닌 ‘쌀쌀할 때’라는 단어를 입력하면 AI는 검색어를 영어 ‘chilly’로 번역해 내의나 시원한 향이 포함된 화장품 등을 노출시킨다. 아마존은 써제스트 기술로 전체 매출의 35% 이상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알려졌다.유튜브나 넷플릭스 등 콘텐츠 플랫폼은 정확한 검색 결과보다, 사용자가 검색하기 전에 원하는 상품을 추천해주는 기술에 더 중점을 둔다. 유튜브는 딥러닝을 활용해 시간과 장소, 기기 등 상황을 효과적으로 통합해 추천 정확도를 20% 향상했고, 넷플릭스는 개인화 추천 기술로 미국 오버더톱(OTT) 만족도 1위를 놓치지 않고 있다. 두 회사는 지난해 기준 유료 구독자 수가 각각 2억 2000만명, 5000만명에 이른다. 써제스트 기술을 서비스에 적용해주는 솔루션 전문 기업들도 속속 등장한다. 직접 AI를 적용하기 힘든 기업들이 이들 솔루션 기업들의 서비스를 사용하는 것이다. 써제스트 솔루션 대표 기업은 미국 아마존의 클라우드 서비스인 아마존웹서비스(AWS)다. 플랫폼에서 발전한 AI 기술을 기반으로 지능형 검색 서비스 ‘아마존 켄드라’와 개인화 추천 서비스 ‘아마존 퍼스널라이즈’를 출시했다. 국내 대표 커머스 플랫폼인 와디즈, 무신사 등이 AWS의 AI 추천 기능을 사용하고 있다.국내 스타트업 업스테이지는 더 쉽게 써제스트 기술을 도입할 수 있는 노코드 기반 ‘AI팩’을 개발했다. AI 전공 지식이 없는 개발자 1~2명만 있어도 사용이 가능하며, 수억원대 이상의 구축 프로젝트가 필요 없이 솔루션 사용료만으로 AI를 도입해 유지할 수 있어 기업들이 선호하고 있다. 국내에서 LG유플러스, 아모레퍼시픽 등이 업스테이지와 협업을 하고 있다.
  • 소설 ‘1984’ 우크라이나 전쟁 계기로 러시아서 베스트셀러

    소설 ‘1984’ 우크라이나 전쟁 계기로 러시아서 베스트셀러

    한때 금지된 책이었던 조지 오웰의 소설 ‘1984’가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러시아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러시아 관영 타스통신은 지난 13일 러시아 온라인 서점 ‘리트레스’의 집계를 인용해 올해 ‘1984’의 매출이 전년보다 45%나 늘어 소설부문 베스트셀러 1위, 전체 2위에 올랐다고 보도했다. ‘1984’는 영국 작가 오웰이 소련의 스탈린 체제를 풍자한 우화 ‘동물농장’에 이어 1949년 출간한 책이다. 작가는 ‘1984’ 출간 다음해 숨을 거뒀고 책은 1988년까지 소련에서 금서였다. 오웰은 ‘1984’에서 스탈린의 독재체제를 모델로 삼아 빅브라더라 불리는 권력자가 ‘전쟁이 평화이며 자유는 노예제도’란 생각을 주입시키는 내용을 그렸다. 1999년 총리로 권력을 잡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정치적 반대나 비판적 언론을 근절한다는 점에서 스탈린 시대와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 2월 푸틴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 정부는 ‘전쟁’이란 단어 대신 ‘특별군사작전’이란 용어를 쓴다고 CNN은 지적했다. 게다가 크렘린궁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어떤 악의도 없고, 이웃을 공격하지도 않았으며, 우크라 영토를 점령하거나 합병하지도 않았다고 강변한다. 크렘린궁 대변인은 민간을 대상으로 한 어떤 공격도 없었다고 주장했다.지난 주 야권인사 일랴 야신은 러시아 병사들이 우크라이나 부차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을 언급했다 가짜 정보를 퍼뜨렸다는 혐의로 8년 6개월 형을 받고 수감됐다. 러시아 독립언론 ‘모스코바 타임스’는 ‘1984’가 전쟁 반대주의자들을 대변하고 있으며, 수도 광장에서 이 책을 나눠주던 변호사가 수감됐다고 전했다. 하지만 ‘1984’를 러시아어로 번역한 다랴 첼로발니코바는 “오웰은 서구 사회에 ‘전체주의적 자유주의’가 올 것이란 악몽을 그린 것”이라며 상반된 해석을 내놓았다.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 미라야 자라보라 역시 러시아가 ‘1984’ 속의 세상과 닮았다는 주장을 반박하며, 오히려 서방 자유주의의 종말을 그린 것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러시아측의 주장은 오웰이 1941년 쓴 에세이 ‘문학과 전체주의’에서 “자본주의는 종말을 맞을 것”이라고 썼다는 점을 근거로 한다. 하지만 오웰이 자본주의의 종말을 언급한 문장의 바로 앞에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의 전체주의를 경고했던 부분은 러시아 학계가 의도적으로 빼먹는 지점이다. 
  • “태극전사들, 벤투에게 감사 메시지”…벤투 통역사가 전한 뒷이야기

    “태극전사들, 벤투에게 감사 메시지”…벤투 통역사가 전한 뒷이야기

    월드컵 16강 진출의 과업을 달성한 파울루 벤투 감독은 지난 13일 한국 축구와 함께한 여정을 마무리하고 조국 포르투갈로 떠났다. 4년간 벤투 감독의 입과 귀 역할을 한 통역사 김충환씨는 감사한 마음을 전하며 벤투 감독의 행복을 빌었다. 김씨는 지난 13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믿음과 존중. 4년간 함께한 감독님과 코칭스태프를 설명하는 단어들”이라며 “락커룸 대화, 팀미팅 때 가장 많이 말씀하신 단어가 아닌가 싶다”고 전했다. 이어 “여러 선수들이 월드컵 마지막 경기 종료 후 감독님과 작별인사를 하며 눈시울 붉혔다”면서 “귀국 후에도 장문의 감사 메세지들을 감독님께 번역해 전달해달라는 선수들을 보며 얼마나 좋은 사람들과 함께했는지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김씨는 4년간 함께 한 벤투 감독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며 “앞으로도 항상 행복하시길 진심으로 바라겠다”고 덧붙였다. 김씨의 글에 벤투 감독 부인 테레사 벤투는 “고맙다”며 “우리는 지난 4년 동안 성장하고 진화한 소년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봤다. 자랑스럽다. 당신은 항상 우리 가족과 함께 했다”고 댓글을 남겼다.한편 이날 출국한 벤투 감독은 대한축구협회를 통해 편지 글로 작별 인사를 남겼다. 그는 “먼저 지난 4년 동안 성원해주신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 드린다. 또 모든 지원 스태프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며 “선수들이 보여준 프로페셔널리즘, 자세와 태도에 특히나 감사하다. 선수들은 제 인생에서 절대 잊지 못할 가장 아름다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고 전했다. 이어 “좋은 순간도 또 어려운 순간도 동반한 환상적인 경험이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려운 순간에 대처하는 우리 선수들의 능력이었고, 이는 우리를 팀으로써 더 강하게 만들었다”며 “개인적으로 저는 대표팀에서의 이러한 놀라운 경험을 하는 동안 모든 분이 보여준 존경과 애정, 지원에 대해 여러분 모두에게 어떻게 감사의 말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벤투 감독은 “대한민국을 행복하고 자랑스럽게 만든 이 환상적인 여정에 함께하신 모든 분께 축하의 말씀을 드린다”며 “특히나 우리가 이루어낸 모든 것에 이바지한 선수들에게 더욱 진심으로 축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제 한국 축구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며 미래를 바라보며 떠나야 할 때”라며 “대한민국은 항상 제 삶의 일부일 것이며 우리 선수들은 항상 제 마음속에 함께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 [알기 쉬운 우리 새말] 예술과 꾸미기 그 어디쯤, 아쿠아스케이프

    [알기 쉬운 우리 새말] 예술과 꾸미기 그 어디쯤, 아쿠아스케이프

    두 개 이상의 단어를 결합해 만들어 낸 신조어 중에서 적잖은 경우가 그렇듯이 ‘아쿠아스케이프’(aquascape)는 참 여러모로 해석될 수 있는 표현이다. ‘Aqua’(물)와 ‘Landscape’(풍경)가 합쳐져 탄생한 표현인 만큼 이들 두 단어의 뜻을 다양한 맥락으로 이해한 풀이말들이 눈에 띈다. 우선 메리엄 웹스터 사전의 뜻풀이를 보면 “연못이나 분수 등 인공적으로 조성했거나 자연 상태의 아름다운 물가 풍경” 또는 “수초나 바위 등을 이용해 실제 물속 풍경같이 수조를 꾸미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한편 네이버 사전을 검색해 보면 “물속에서 그린 해양 생물 그림”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다소 엉뚱해 보이기는 하지만 ‘아쿠아스케이프’라는 단어 하나하나의 뜻만을 놓고 볼 때 아예 틀린 해석이라 할 수도 없다. 이 중 오늘 우리가 살펴볼 좁은 의미의 ‘아쿠아스케이프’는 바로 ‘수조 꾸미기’다. 예시를 보면 이렇다. “단순히 어항 속 물고기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수초와 자갈, 계곡과 폭포 그리고 조명까지 넣은 수조를 아름답게 꾸미는 ‘아쿠아스케이프’도 하나의 예술품으로 주목받고 있다.”(시빅뉴스 2020년 11월) 사실 수조 꾸미기는 현대인의 취미로 제법 오래전부터 자리 잡았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물속 정원 꾸미기’는 1930년대 네덜란드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한 취미라고 하며, 2000년대 들어서 예술적인 차원으로까지 발전하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국내에서 ‘아쿠아스케이프’라는 용어는 수조 꾸미기라는 뜻으로 쓰이지 않았다. 2006년 이데일리에서 ‘메리엄 웹스터 사전에 등재된 신조어’라며 ‘아쿠아스케이프’를 처음 소개할 때도 이 글 앞부분에서 예를 든 것처럼 ‘연못이나 분수 등을 갖춘 지역’이라고만 밝혔다. 2014년에도 ‘아쿠아스케이프’라는 말이 언론에 등장하는데, 이 역시 앞서 말한 세 번째 뜻, 즉 ‘바닷속 풍경을 그린 그림 전시회’의 뜻으로 사용됐다. 이번에 다룰 뜻으로 ‘아쿠아스케이프’가 소개된 첫 사례는 머니투데이 2019년 8월 19일자. 미술을 전공한 작가가 국제 수경 예술 콘테스트에서 입상하는 등 수조 꾸미기를 예술의 영역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다. 2018년 10월 스포츠경향 기사에서는 ‘아쿠아스케이프’라는 표현은 쓰지 않은 대신 같은 작가를 ‘아쿠아스케이퍼’(아쿠아스케이프를 하는 사람)라고 소개했고, 그의 작업을 ‘수경 예술’, 그리고 그가 상을 받은 대회를 ‘국제 수초레이아웃 콘테스트’라고 표현했다. 이후 ‘아쿠아스케이프’라는 용어는 거의 쓰이지 않다가 2020년 들어 사용이 조금 늘어 지금까지 국내 언론 기사에는 70여회 등장했다. 그 와중에 쓰임새에서 다소 혼동이 빚어지기도 했다. 브라보마이라이프(2022년 5월) 기사를 보면 “교육부에서도 올해 수산 양식, 수산업 경영 분야 등 아쿠아스케이프(수경예술)에 대한 기초 지식과 실무 능력을 익힐 수 있는 내용의 교과서를 개발”이라고 쓰였는데, 지금 우리가 검토하는 ‘수조를 예술적으로 꾸미기’라는 뜻에서 볼 때 ‘수산 양식’이나 ‘수산업 경영 분야’가 과연 연관 사업일까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새말모임에서는 ‘아쿠아스케이프’ 작가들이 모여 만든 단체 ‘한국수경예술학회’도 현재 운영되고 있는 데다 갈수록 수조 꾸미기의 예술성이 부각되고 있으니 다듬은 말로도 ‘수경 예술’이 가장 적절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래서 이를 일순위 후보로 올리며 그와 함께 ‘수조 꾸미기’, ‘수생 조경’ 등의 표현을 다듬은 말 후보로 함께 선보였다. 여론조사 결과는 뜻밖이었다. ‘수생 조경’이 응답자들한테서 가장 많은 선택을 받은 것이다. 아무래도 일정 수준의 기술과 전문 지식을 갖춘 이들이 전유하는 ‘예술’보다 일반인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취미로서의 ‘조경’이라는 표현에 좀더 친근함을 느낀 게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 새말모임은 어려운 외래 새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다듬어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언론, 통번역, 문학, 정보통신, 보건 등 여러 분야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모임을 꾸리고 있다.
  • “박기영 베드신 부러워” 조정치 실언 논란…정인도 ‘한숨’

    “박기영 베드신 부러워” 조정치 실언 논란…정인도 ‘한숨’

    선배 가수 박기영을 향한 조정치의 실언이 논란이 되고 있다. 조정치는 13일 인스타그램에 가수 박기영의 새 뮤직비디오 영상을 게재하며 “유부ㄴ 아니 뮤지션으로서 누나의 베드ㅆ 아니 고음이 부럽습니다. 박기영 ‘사랑이 닿으면’”이라는 글을 남겼다. 박기영의 신곡을 응원하려는 의도였겠지만 해당 발언은 선을 넘었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또 절친한 사이라 하더라도 모두가 보는 곳에서 선배 박기영에 대해 무례한 글을 남겼다는 비판도 나왔다. 이에 아내 정인은 “하아”라고 한숨을 쉬었고 래퍼 주비트레인은 “회초리를 한 번 들 때”라고 거들었다. 번역가 황석희는 “첫 스틸이 살색 잔뜩이라 깜짝 놀라서 아내 눈치를 봤습니다”라고 댓글을 남겼다. 당사자인 박기영은 “정치야… 미안해”라고 댓글을 남겼다. 한편 조정치는 2013년 가수 정인과 결혼해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 괴테 시의 80%를 8권에 수록, 임우영 번역으로 8년 만에 완간

    괴테 시의 80%를 8권에 수록, 임우영 번역으로 8년 만에 완간

    들장미(Heidenr?lein) 한 소년이 보았네 들에 핀 장미화 그렇게 어리고 아침처럼 고와 가까이 보려 서둘러 달려가 너무나 즐겁게 쳐다보았네. 장미화야, 장미화야, 붉은 장미화, 들에 핀 장미화. 명심(BEHERZIGUNG) 아아, 인간은 무엇을 바라야 하는가? 조용히 있는 것이 더 나은가? 달라붙어 꼭 매달려야 하는가? 계속 실행하는 것이 더 나은가? 자신이 살 작은 집 지어야 하는가? 천막 아래 살아야 하는가? 바위 위로 감히 걸어가야 하는가? 그 단단한 바위들조차 떨고 있는데.독일의 시성((詩聖)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가 평생에 걸쳐 쓴 시 가운데 80%를 포함한 ‘괴테 시선’ 7권과 8권이 지난달 말 발간돼 8년에 걸친 기획이 모두 마무리됐다. 지만지(대표 박영률)가 내놓은 ‘괴테 시선’(전 8권)에는 괴테가 일곱 살 때 새해를 맞아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위해 쓴 ‘1757년이 즐겁게 밝아 올 때…’부터 1832년 3월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쓴 ‘시민의 의무’에 이르기까지의 주옥같은 시들이 시기별로 나누어 수록됐다. 특히 ‘베네치아 에피그람’과 에피그람 유고들 및 기타 에피그람, ‘크세니엔’이나 ‘온순한 크세니엔’은 국내 처음으로 완전한 형태로 소개한다. 저본은 함부르크판 괴테 전집(Goethe. Werke. Hamburger Ausgabe)을 기본으로 하되, 그 뒤 나온 여러 전집 판본을 참고해 보완, 교감했으며, 함부르크판에 누락된 ‘크세니엔’(괴테 시선 4), ‘서동시집’(괴테 시선 6), ‘온순한 크세니엔’(괴테 시선 8) 등은 바이마르 전집(Weimarer Ausgabe)을 참고했다. 한국괴테학회 회장을 지낸 임우영 교수(한국외국어대)가 번역을 맡아 시의 운율과 해학을 살렸으며 자세한 해설과 주석으로 작품을 좀 더 정확하고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임 교수는 “당시 시대 상황과 작품의 배경, 인간관계, 작품이 풍자하는 대상 등을 이해해야 괴테 시를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면서 문학은 물론 자연 과학, 정치, 철학, 의학 등 다방면을 깊이 모색했던 그의 삶과 사상이 시 안에 녹아 있다고 말했다. ‘괴테 시선’은 독일어와 우리말의 언어 차이로 시적 감성을 충분히 살려내지 못했던 번역본들의 한계를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임 교수는 ‘신’이라는 ‘형이상학적 존재’를 인간의 인식력으로는 완전히 알 수 없지만, 오로지 선한 행동을 통해서 보다 숭고한 존재인 ‘신’을 “예감”할 수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방대한 괴테 문학을 관통하는 메시지이며, 이런 메시지를 독자에게 전하려는 것이 괴테 시의 본령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한 번 읽어서는 그 깊은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면서 “시를 읽고 스스로 의미를 파악하려 시도한 뒤 해설을 읽고 다시 한번 읽어 보라”고 조언한다. 국내에서 괴테는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나 희곡 ‘파우스트’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세계 3대 시성으로 꼽힐 만큼 출중한 시 세계를 자랑한다. 괴테 문학의 진수는 시에 있다고도 할 수 있으며 그의 시는 슈베르트의 가곡 ‘들장미’를 비롯해 모차르트, 베토벤, 슈만, 멘델스존, 리스트, 브람스 등 수많은 거장들에 의해 음악으로 재탄생하기도 했다. 이번에 간행된 ‘괴테 시선 7’은 마지막 순간까지 후세들에게 유언처럼 남겼던 인생의 깊은 의미를 담은 시들을 담고 있으며, ‘괴테 시선 8’은 괴테가 죽은 뒤에야 정리됐던 격언 모음집 ‘온순한 크세니엔’을 수록하고 있다. 각권 288~948쪽, 1만 8000원~3만 2800원이며 한 질 가격은 19만 5480원이다.
  • [길섶에서] 고블린 모드/안미현 수석논설위원

    [길섶에서] 고블린 모드/안미현 수석논설위원

    영국 옥스퍼드 영어사전이 올해의 단어로 ‘고블린 모드’(Goblin Mode)를 선정했다고 한다. 고블린은 덩치가 작고 탐욕스러운 요괴를 뜻한다. 그렇다고 악마까지는 아니어서 우리말로는 ‘도깨비’ 정도로 번역된다. 코로나 방역 규제가 풀린 뒤에도 일상으로의 회귀를 원치 않는 사람들이 나태하고 지저분한 생활방식을 고수하면서 신조어로 등장했단다. 사회적 규범이나 기대를 거부하는 태도를 상징한다. 이 말에 시선이 머문 것은 이어진 설명과 댓글을 보고 뜨끔해서였다. “일주일 내내 잠옷을 입고 침대에 누워 넷플릭스를 보거나, 잠옷에 윗옷만 걸친 채 아무렇지 않게 집 앞 슈퍼에 물건을 사러 가거나, 새벽 2시에 부엌에서 이상한 간식을 만들고 있다면 당신도 고블린 모드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면서 고블린 모드에 빠져든 날이 많다. 사회의 미적 기준과 생활 규범에 저항하려는 ‘결기’는 전혀 없지만 의도치 않게 시대 흐름에 올라탄 형국이다. 반성해야 하나, 뿌듯해해야 하나.
  • 희망의 하늘도 절망의 고엽제도… 베트남 아이에겐 ‘무지개’였다

    희망의 하늘도 절망의 고엽제도… 베트남 아이에겐 ‘무지개’였다

    1945년 독립선언 이후 프랑스와 미국을 상대로 한 인도차이나 전쟁까지. 베트남 현대사도 우리만큼이나 굴곡졌다. 이 굵직한 역사 뒤편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고무나무 농장을 운영하는 알렉상드르와 이를 망가뜨리고자 일꾼으로 들어온 마이의 사랑,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떰이 미군의 습격으로 몸 파는 여인이 된 사연, 그가 낳은 홍과 그를 돌보는 흑인 혼혈아 루이가 가족을 이루기까지 ‘앰’(Em)은 베트남 현대사의 질곡을 맞닥뜨린 3대의 삶을 직조한다. 1968년 사이공(지금의 호찌민)에서 태어난 저자 킴 투이는 열 살 때 보트피플로 조국을 떠나 캐나다 퀘벡에 정착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변호사와 통·번역 일을 했고, 베트남 식당을 운영하다 마흔 살에 작가가 됐다. 퀘벡에 정착하기까지를 쓴 자전적 첫 소설 ‘루‘에 이어 베트남 요리에 대한 경험을 토대로 한 소설 ‘만’으로 국제적 작가로 부상했다. 이번 소설 역시 역사 속에서 상처 입은 사람들을 조명한다. 북베트남군의 은신처인 정글에 고엽제를 살포한 ‘랜치 핸드 작전’(1962~1971)을 시작으로 떰이 고엽제 후유증으로 숨을 거두기까지 주요 사건들 위에 보통 사람들을 세웠다. 구정 대공세 이후 미군이 민간인 수백명을 무차별 학살한 ‘미라이 학살’(1968), 전쟁고아들을 미국으로 데려오려 했다가 비행기 폭발로 아이들을 포함해 150여명이 사망한 ‘베이비리프트 작전’(1975), 베트남전 마지막 날 미국 대사관 옥상에서 미국인과 베트남인을 헬기로 철수시킨 ‘프리퀀트 윈드 작전’(1975) 등이 배경이다. 170여쪽에 50여년 현대사를 촘촘히 넣었다. “진짜 진실, 개인적인 진실을 직관적인 진실과 구분해 내는 법을 알았더라면 나는 기꺼이 엉킨 실을 풀어 정리한 뒤 다시 붙도록 했을 것”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이야기 구성이 전체적으로 성기다. 굵직한 뼈대에 실핏줄이 엉긴 불완전한 사람 같다.  그럼에도 단단한 느낌을 주는 이유는 저자 특유의 문체 덕이다. 앞선 소설들과 달리 3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등장인물 대사 없이 저자의 서술로만 이야기를 끌어간다. “지난밤 떰은 어린아이로 잠들었다. 이튿날 깨어났을 땐 가족을 다 잃었다. (중략) 단 네 시간 만에, 늘 길게 땋아 늘어뜨렸던 어린 소녀의 머리카락이 가죽이 벗겨진 머리들 앞에서 헝클어졌다.”(47쪽) 이처럼 구체적인 묘사 없이도 머릿속에 이미지를 그리게 한다.  “무지개는 희망, 기쁨, 완전함을 나타낸다. 그런데 미군이 베트남 땅에 쏟아부은 제초제들의 이름 역시 무지개(rainbow)였다. 어릴 때 떰은 무더운 건기와 몬순의 우기 사이에 난데없이 가을이 생겨나기라도 한 듯 농장의 나무들에서 잎이 떨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바로 그 무지개 때문에 암에 걸렸다.”(156쪽) 구구절절할 수 있는 묘사를 작가는 압축해 전한다. 그 문장 속에 날카로운 칼, 때로는 아름다운 꽃을 숨겨 놓는다. 소설이라기보다 서사시를 읽는 듯하다. 캐나다 총독문학상, 프랑스 에르테엘-리르 대상 수상, 그리고 대안 노벨문학상으로 불리는 뉴 아카데미 문학상 최종 후보에 오른 사실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유다. 문학은 때론 역사적 사실보다 더 강렬하고, 저자의 소설은 ‘문학의 힘은 이런 것’이라 당당하게 증명한다.
  • LG 초거대AI 엑사원, 항암백신 등 산업계 난제 해결 나선다

    LG 초거대AI 엑사원, 항암백신 등 산업계 난제 해결 나선다

    새로운 항암 백신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최적의 백신 후보 물질을 찾기 위해 무한대에 가까운 경우의 수를 놓고 직접 실험을 하거나 시뮬레이션 계산을 수행해야 했다. 당연히 시간과 비용 부담이 상당했고, 성공 확률도 높지 않았다. 하지만 LG 인공지능(AI) 연구원이 개발한 초거대AI ‘엑사원’의 모델은 환자의 유전 정보와 암세포의 돌연변이 정보를 이용, 암의 사멸을 유도하는 신항원을 예측한다. 기존 예측 모델에 비해 가장 우수한 성능으로 개인 맞춤형 항암 백신 개발 기간을 크게 단축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LG AI연구원은 현실 세계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최적의 의사결정을 돕는 ‘유니버설 AI’를 개발하겠다고 8일 밝혔다. 연구원은 이날 온라인으로 열린 ‘LG AI 토크 콘서트’에서 ‘전문가 AI 개발을 위한 도전과 혁신’을 주제로 기술 연구 성과를 공유했다. 특히 항암 백신 신항원 외에도 차세대 배터리인 리튬황 배터리 전해질 화합물 찾기, 차세대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고효율 발광 재료 성능 예측 등 산업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AI모델 개발에서도 성과가 나오고 있다. 엑사원은 논문·특허 등 문헌의 텍스트 뿐 아니라 수식과 표, 이미지까지 스스로 학습해 데이터베이스화하는 기술을 탑재하고 있다. 화학 구조식을 읽을 줄 알며, 분자를 구성하는 원자와 결합 유형도 인식할 수 있어, 데이터베이스화 효율성이 기존 모델보다 100배 이상 높다. 앞서 LG는 구광모 회장 취임 뒤 미래 사업 포트폴리오의 한 축으로 AI를 꼽았다. 기술 혁신과 인재 확보를 위해 앞으로 5년간 AI·데이터 분야 연구개발에 3조 6000억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이날 엑사원의 언어모델에 적용한 ‘AI 경량화·최적화 신기술’ 연구 성과도 공개됐다. 지난해 버전 대비 그래픽처리장치 사용량은 63% 줄이면서 추론 속도는 40% 빨라졌다. 정확도는 글로벌 최고 성능을 의미하는 ‘SOTA’ 이상으로 개선됐다. 한국어 성능은 분류, 번역, 기계독해, 요약 등 4개 영역 16개 평가지표 중 15개가 SOTA를 상회했다. 배경훈 LG AI연구원장은 “AI를 통해 인류의 난제를 해결하며 ‘기존에 없던 새로운 고객 가치’를 창출하겠다”며 “세상의 지식을 실시간으로 활용해 현실 세계의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최적의 의사결정을 돕는 전문가 AI 구현을 목표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 [알기 쉬운 우리 새말] 헤드라이너의 우리말 찾기

    [알기 쉬운 우리 새말] 헤드라이너의 우리말 찾기

    새말 모임에서 다듬을 말 목록을 받으면 일단 풀이를 보지 않고 외래 용어만 읽은 뒤 뜻을 가늠해 보곤 한다. 대중문화에 과문한 탓인지 이번에 다룰 ‘헤드라이너’(headliner)라는 단어를 보고는 공연문화와 관련된 표현이라고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신문 표제(headline)에 등장한 유명인사’ 혹은 ‘신문 표제 기사를 쓴 기자’ 정도를 떠올렸다. 영어사전을 찾아보니 절반만 맞았다. 위 두 개의 짐작 중 후자의 뜻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다듬을 말은 그 의미로 쓰인 게 아니었다. ‘행사나 공연 등에서 가장 기대되거나 주목받는 출연자, 또는 그 무리’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보통 공연의 최고조에 등장해 무대를 장식하거나, 공연을 홍보할 때 가장 크게 부각되는 출연자, 혹은 출연진을 일컫는다. 영어사전에서 ‘신문 표제를 쓴 기자’ 다음으로 소개된 우리말 해석이 바로 이 뜻이었다. ‘헤드라인’은 신문의 표제어라는 명사로 쓰이는 것 외에도 ‘공연 등에 주요 출연자로 나오다’는 뜻의 동사로 쓰인다. 여기에 ‘~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er’을 붙인 게 ‘헤드라이너’다. 공연을 소개하는 안내 전단지에서 제일 큰 글씨 혹은 제일 돋보이는 사진으로 실리게 되는 인물이니 매체만 신문이 아닐 뿐 ‘표제에 등장한 유명 인사’라는 뜻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이 표현이 우리 언론에 등장한 연혁은 제법 길다. 1999년 연합뉴스의 어느 록 음악제를 소개하는 기사에 처음 등장했다. 당시는 ‘주 공연자’라는 설명이 괄호 안에 붙었다. 이후 이 단어는 몇 년간 언론 기사에서 찾아볼 수 없었는데, 2004년 이후 자주 등장했다. 이때부터 기사에 나타난 우리말 번역은 다양하다. ‘주 공연자’라고 풀었다가 ‘주 공연팀’, ‘대표 가수’, ‘주역’, ‘대표 출연자’ 등 시기에 따라, 언론사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그 외 ‘간판 출연자’, ‘주요 출연진’, ‘대표 음악가’ 등의 표현이 등장하는가 하면 ‘가장 좋은 무대를 장식하는 팀’, ‘대형 공연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메인 밴드’ 등 문장으로 풀어서 설명해 준 기사도 보였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헤드라이너’라는 단어를 쓰면서 아예 아무런 우리말 설명을 붙이지 않은 기사가 대부분이었다. 이미 모든 독자가 이런 단어의 뜻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거나, 문맥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일까. 그런데 여론조사 응답자 중 68.9%가 이 단어를 쉬운 우리말로 바꾸는 데 동의했다. 모든 이들이 이 단어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도 않을뿐더러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고 해도 되도록 우리말 표현을 갈고 다듬어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다면 ‘헤드라이너’를 갈음할 수 있는 적절한 우리말은 무엇일까. 새말 모임의 우리말 다듬기는 외래 용어를 대신해 쓰이는 대체어가 있는 경우 그들 중 쓰임이 많거나 뜻이 가장 잘 전달되는 것을 골라내는 데서 출발하곤 한다. 대체해 사용한 표현이 없는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새로운 표현을 채택하기도 하지만, 이미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우리말이 있다면 이를 최우선으로 검토해 보는 것이다. ‘헤드라이너’의 경우 이미 앞서 예로 든 것처럼 많은 순화어 후보들이 사용된 터라 새말모임 위원들은 이들을 먼저 살펴보았고, 그 가운데 ‘대표 출연자’와 ‘간판 출연자’가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여기에 더해 새로운 후보로 ‘핵심 출연자’도 함께 제시했다. 그리고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82.5%가 가장 적절하다고 선택한 ‘대표 출연자’가 최종 다듬은 말로 결정됐다. ‘헤드라이너’를 구글에서 검색해 보면 메리엄 웹스터 사전에는 ‘신문 기사 표제를 쓰는 기자’라는 설명은 안 보이고 ‘자동차 지붕의 내부 천덮개’라는 뜻이 대신 나온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말 검색을 해봐도 신문 관련 용어는 거의 찾을 수 없고 자동차용품으로 심심찮게 검색된다. 한편 중국어에서 헤드라이너를 어떻게 표현하는지 찾아보면 ‘터우파이’(?牌)라는 번역이 자주 발견된다. 과거 중국에서는 고전극을 공연할 때 출연자 이름을 팻말에 써서 걸어 놓았는데, 그중 맨 앞에 걸어 놓은 팻말이 바로 ‘토우파이’이며, ‘주연’이라는 뜻으로 통한다. ‘맨 앞자리’라는 뜻에서 동서고금이 이래저래 비슷한 용어를 쓰는 셈이다. ※ 새말모임은 어려운 외래 새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다듬어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언론, 통번역, 문학, 정보통신, 보건 등 여러 분야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모임을 꾸리고 있다.
  • [정은귀의 詩와 視線] 그냥 하는 말인데/한국외대 영문학과 교수

    [정은귀의 詩와 視線] 그냥 하는 말인데/한국외대 영문학과 교수

    내가 먹었네요 아이스박스 안에 있던 그 자두를 그거 당신이 아마도 아침으로 먹으려고 아껴 둔 것일 텐데 나 좀 봐줘 자두 참 맛있었거든 무지 달고 무지 차갑던데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 ‘그냥 하는 말인데’ 시가 번역이 되냐고, 시는 번역이 불가능하다고들 한다. 그렇다. 그런데 그렇지는 않다. 시를 번역하고 들려주는 사람으로서 나는 번역 불가능한 시는 없다고 생각한다. 언어와 언어 사이에 극복할 수 없는 차이가 있지만 시는 번역 가능한 너른 영토다. 번역은 시와 시를 잇는 다리, 다른 언어 다른 문화 다른 시간 다른 공간 다른 느낌과 사유를 잇는 유일한 다리다. 번역이 없으면 소통과 감응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시를 읽고 번역하는 일이 재밌다. 번역은 언어의 내밀한 살을 어루만지고 시를 정밀하게 바라보게 한다. 번역은 시가 내게 주는 그 좋은 걸 널리 전하는 일이다. 슬플 때, 아플 때, 지칠 때, 상처 입을 때, 기쁠 때 시를 마주하면 내 슬픔과 기쁨, 상처를 다르게 보는 시선을 얻는다. 그렇게 시는 매일 나를 깨워서 매일 다른 나를 만든다. 이번에는 ‘그냥 하는 말’이 시가 되어 어떤 기쁨, 어떤 다름을 우리에게 주는지 본다.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 그는 의사였다. 의사와 시인의 공통점은? 대상을 면밀히 관찰한다는 거다. 그 관찰은 관심과 사랑에서 나온다. 이 시는 어느 아침 평범한 부부의 대화 같다. 부부가 아니라 친구여도 좋다. 식구 중 한 사람이 다른 이가 먹으려고 냉장고에 넣어 둔 자두를 먹어버렸다.(20세기 초엔 아이스박스형 냉장고가 있었는데 그 시절의 느낌을 살리려고 그냥 아이스박스로 옮겼다.) 그런데 시의 화자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좀 봐달라고 너스레를 떤다. 그러곤 덧붙이길 자두 참 맛있더라고. 무지 달고, 무지 차갑더라고. 이쯤 되면 너스레가 아니라 약을 올리는 것 아닌가. 달달하고 차가운 자두를 상상하면 입에 침이 고인다. 이 시는 흡사, ‘영감 왜 불러, 뒤뜰에 뛰어놀던 병아리 한 쌍을 보았소? 보았지 어쨌소 이 몸이 늙어서 몸보신하려고 먹었지’라는 우리 옛 노래의 미국 판이다. 우리 노래가 구수하다면 미국의 시는 새침하다. 그래서 밉냐고? 어쩌겠는가? 이미 먹은 자두를. 다들 이렇게 사는 것을. 동네 구멍가게에서 산 붕어빵을 혼자 다 먹어버린 어제의 내가 오늘의 식구에게 미안해서 이 시를 떠올린 건 아니다. 시는 밋밋한 일상의 결을 재밌게 확대한다. 그 시선은 쉬 지치는 우리를 다독다독 쓰다듬는다. 우리는 순하게 웃으며 꽃처럼 확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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