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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3)대원위대감의 생각 (下)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3)대원위대감의 생각 (下)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옥양봉 절골에 있던 가야사 터에다 아버지의 무덤을 옮겨쓴 지 12년 만에 둘째아들 명복을 낳은 것이 풍수설의 힘이라는 증거는 없다.또한 명복이 태어난 지 12년 뒤에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것도 풍수설의 예언이 적중한 것이라는 증거도 없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대원위대감의 그 해괴한 행동이 명복을 왕이 되게 했다고 여겼다.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일수록 민중들은 오래된 전통과 관습을 따르게 마련인가보다.풍수지리설은 조선 민중들에게 부정할 수 없는, 이상향을 향한 꿈이었다. ●백성들, 부친묘 옮겨서 덕본 것이라 믿어 이하응이란 파락호(破落戶),궁도령(宮道令)의 둘째 자식이 왕위에 오르고,아비는 대원위대감이 되는 좀체로 일어나기 어려운 일을 두고 민중들은 마치 자신들의 옹색한 신세가 훤히 펴지기라도 한 듯이 좋아했다.대리만족의 한 극치였다. 대원위대감은 세상의 그런 민심을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집권 초기부터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여 조선 민중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당색과 문벌을 초월한 인재 등용,탐관오리의 숙청,양반 토호의 면세토지 조사와 세금의 징수,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것,복식의 간소화 등 후기 조선 사회가 안고 있던 여러 폐단들을 혁명적으로 개혁해 나갔다. 집권 초반의 개혁 정치가 성과를 거두자 이를 발판으로 삼아 쇠미해진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정책을 폈다.경복궁 중건을 강행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경복궁 짓는 일로 대원위대감은 그동안 쌓아온 정치적 성과와 지지를 상실하게 되었고,사회 모든 부문에서 지탄받기에 이르렀지만 한 번 권력의 맛을 본 그는 난세의 정략가답게 저돌적으로 일을 밀어붙였다. 그의 저돌성에 희생된 대표적인 경우가 속리산 법주사에 모셔져 있던 청동 미륵장륙상을 헐어다 녹여서 건축자재로 사용하게 한 것이었다. 그의 정치 역정에는 대외적 위협과 난관도 만만치 않았다.천주교와 관련된 외세들과의 갈등이었다. ●정권유지 위해 천주교 탄압으로 급선회 집권 초기 그는 천주교에 대해 나름의 이해를 보였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그랬던 그가 장기간에 걸쳐 천주교 박해를 감행한 것은 서양세력의 침략적 접근에 따른 국가적 위기의식과 정치적 반대세력의 비난에서 벗어나 정권을 계속 장악하기 위한 목적이 감춰져 있었다. 대외적인 첫 위협은 러시아였다.두만강이 러시아와의 국경으로 바뀌게 되자 러시아의 통상요구는 대원위대감을 비롯,정부고관들에게 위기의식으로 다가왔다. 이때 천주교인이자 정부 관리인 김면호(金勉浩),홍봉주(洪鳳周) 등이 오랑캐를 이용하여 오랑캐를 물리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방어책을 대원군에게 건의했고 대원군은 이를 정치적으로 고려하기 시작했다. 이같은 분위기는 승지를 지낸 남종삼(南鍾三)이 대원군으로 하여금 한불조약(韓佛條約)을 체결하여 나폴레옹 3세의 위력을 이용,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는 정책을 펴도록 건의하기까지 이르렀다.숨막히는 긴장의 나날이었다. 이같은 정책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조선에 체류중이던 베르뇌(Berneux) 주교와의 만남을 주선하게 되었고,그때 대원군은 만약 러시아를 물리칠 수만 있다면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허락할 수도 있다는 암시를 주어 천주교인들은 자못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1866년 1월에 북경사신이 보내온 편지가 도착했다.청나라는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이 분위기에 편승한 국내의 반 대원군 세력들은 대원군이 천주교와 불순한 정치적 흥정을 한다며 공세를 취했고 대원군은 정치적 생명에 위협을 느껴 천주교 탄압 정책으로 급선회하게 된 것이다. 1866년 2월 베르뇌를 비롯해 홍봉주,남종삼,김면호를 포함한 수천 명의 천주교인들이 서울과 그밖의 여러 지역에서 체포되어 순교했는데,이때 베르뇌,다블뤼 등 9명의 프랑스 신부들은 서울 새남터와 충남 보령의 갈매못에서 순교하였다. 병인박해로 불리는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그 이후 프랑스 군대와 대원위대감의 지휘를 받은 조선군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대원위대감은 국가적 위기의식을 고조시키면서 천주교인들을 외국의 적들을 불러들이는 무리로 규정하여 거듭되는 박해로 맞섰다. 서양오랑캐의 발자국으로 더럽혀진 땅은 그들과 내통하는 천주교 무리의 피로 씻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처형지는 주로 서울과 해안지방으로 정해졌다.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이 계속되자 프랑스는 대원위대감을 기필코 굴복시켜 그들이 겪은 수모를 되갚아주겠다며 방법을 모색했다. 그때 프랑스 신부 페롱(Feron)이 묘안을 내놓았다.그는 1866년 8월 프랑스 제독 로즈가 조선을 공격할 때 뱃길을 안내했던 인물이다.또한 그는 조선의 사정에도 밝아서 대원위대감을 꺾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그는 독일의 무역상인인 오페르트(Oppert,E.J)라는 인물을 끌어들일 궁리를 했다.오페르트는 1866년 3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친 조선과의 통상교섭에서 모두 실패한 뒤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런 사정을 간파한 페롱은 오페르트를 책임자로 하여 대원군과 정치적 교섭을 벌이면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묘책을 마련했다. 이 묘책을 강구하는 데는 조선인 천주교인도 가담했다.묘책이란 다름 아닌 대원위대감의 아버지 남연군이 묻혀 있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가야사 옛터의 무덤을 파헤친다는 것이었다. 묘를 파헤쳐 시체와 부장품을 미끼로 내걸고 대원군과 통상문제,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흥정하자는 것이었다.조선은 조상의 무덤에 대하여 특별한 관습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역이용하자는 극단적인 방법을 내세웠다. 오페르트는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그는 자금을 담당할 인물로 미국인 젠킨스를 끌어들였다.통상교섭이 성공하면 이익을 배당하겠다는 조건이었다. 도굴단이 결정되었다.오페르트,젠킨스,페롱,선장 묄레,조선인 안내자 2명,유럽·필리핀·중국인 선원 등 모두 140명으로 이루어졌다. ●오페르트, 남연군묘 도굴에 실패 1868년 5월 차이나(China)호,그레타(Greta)호 등 1000t급 기선 두 척을 이끌고 일본 나가사키에서 무기와 도굴용 장비를 구입한 다음,5월10일 충남 덕산군 구만포에 상륙했다. 도굴단은 자신들을 러시아인이라고 말하면서 조선인의 안내를 받아 남연군 묘소로 직행했다.덕산 군청을 습격하여 군기를 탈취하는가 하면 민가들을 습격하면서 고의적인 난동을 부렸다. 절골의 남연군묘까지 온 그들은 도굴을 시작했으나 묘광이 워낙 견고하여 그들이 준비해온 도구로는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대원위대감은 마치 이런 날이 오리라고 예측이나 했던 듯 성능이 매우 좋은 폭약을 사용하지 않는 한 묘를 파헤치기 어렵도록 만들어 둔 것이었다. 결국 남연군묘 도굴은 실패했다.오페르트는 돌아가는 길에 인천 앞 영종도에서 프랑스 제독 알리망 명의로 된 협박장을 대원위대감에게 보냈다.남연군의 시체와 부장품이 그들 손아귀에 있으니 교섭에 응하라는 내용이었다.그러나 이 협박문을 접수한 영종첨사는 도굴행위가 인간의 짓이 아니므로 대응할 가치가 없다며 협박문을 되돌려주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젠킨스는 같은 미국인에 의하여 파렴치범으로 고발당하였고,페롱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소환당하였다. ●대원군의 박해로 8000명 이상 순교 대원위대감의 분노는 컸다.조선은 조상숭배 사상이 유별하여 묘를 신성시하는 데다,국왕의 할아버지며 자신의 아버지 묘를 파헤쳤으니 그의 생각은 극단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대원위대감은 덕산군 내포지방 천주교인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했다. 내포지방은 천주교회 창설기부터 천주교가 전파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많은 희생자를 내었고,부근의 지방까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렇듯 대원군에 의하여 감행된,이른바 병인박해는 6년에 걸쳐 8000명 이상이 순교하는 불행을 낳았다. 한 정치가의 무모한 권력욕구가 불러온 결과는 조선의 세계사 합류를 지연시켜 근대화의 길을 막음으로써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는 비극을 초래했고,나쁜 지도자로서의 선례가 되었다. 그같은 대원위대감은 1871년 무슨 생각에선지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서원산 남쪽 기슭에 자신이 불태웠던 가야사의 3층석탑을 옮기면서 보덕사(報德寺)라는 절을 지었다.아들이 보위에 올랐으므로 보은(報恩)의 뜻으로 절을 지은 대원위대감의 생각은 오늘날 한국 정치지도자들처럼 혼란스럽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3)대원위대감의 생각 (下)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옥양봉 절골에 있던 가야사 터에다 아버지의 무덤을 옮겨쓴 지 12년 만에 둘째아들 명복을 낳은 것이 풍수설의 힘이라는 증거는 없다.또한 명복이 태어난 지 12년 뒤에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것도 풍수설의 예언이 적중한 것이라는 증거도 없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대원위대감의 그 해괴한 행동이 명복을 왕이 되게 했다고 여겼다.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일수록 민중들은 오래된 전통과 관습을 따르게 마련인가보다.풍수지리설은 조선 민중들에게 부정할 수 없는, 이상향을 향한 꿈이었다. ●백성들, 부친묘 옮겨서 덕본 것이라 믿어 이하응이란 파락호(破落戶),궁도령(宮道令)의 둘째 자식이 왕위에 오르고,아비는 대원위대감이 되는 좀체로 일어나기 어려운 일을 두고 민중들은 마치 자신들의 옹색한 신세가 훤히 펴지기라도 한 듯이 좋아했다.대리만족의 한 극치였다. 대원위대감은 세상의 그런 민심을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집권 초기부터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여 조선 민중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당색과 문벌을 초월한 인재 등용,탐관오리의 숙청,양반 토호의 면세토지 조사와 세금의 징수,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것,복식의 간소화 등 후기 조선 사회가 안고 있던 여러 폐단들을 혁명적으로 개혁해 나갔다. 집권 초반의 개혁 정치가 성과를 거두자 이를 발판으로 삼아 쇠미해진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정책을 폈다.경복궁 중건을 강행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경복궁 짓는 일로 대원위대감은 그동안 쌓아온 정치적 성과와 지지를 상실하게 되었고,사회 모든 부문에서 지탄받기에 이르렀지만 한 번 권력의 맛을 본 그는 난세의 정략가답게 저돌적으로 일을 밀어붙였다. 그의 저돌성에 희생된 대표적인 경우가 속리산 법주사에 모셔져 있던 청동 미륵장륙상을 헐어다 녹여서 건축자재로 사용하게 한 것이었다. 그의 정치 역정에는 대외적 위협과 난관도 만만치 않았다.천주교와 관련된 외세들과의 갈등이었다. ●정권유지 위해 천주교 탄압으로 급선회 집권 초기 그는 천주교에 대해 나름의 이해를 보였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그랬던 그가 장기간에 걸쳐 천주교 박해를 감행한 것은 서양세력의 침략적 접근에 따른 국가적 위기의식과 정치적 반대세력의 비난에서 벗어나 정권을 계속 장악하기 위한 목적이 감춰져 있었다. 대외적인 첫 위협은 러시아였다.두만강이 러시아와의 국경으로 바뀌게 되자 러시아의 통상요구는 대원위대감을 비롯,정부고관들에게 위기의식으로 다가왔다. 이때 천주교인이자 정부 관리인 김면호(金勉浩),홍봉주(洪鳳周) 등이 오랑캐를 이용하여 오랑캐를 물리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방어책을 대원군에게 건의했고 대원군은 이를 정치적으로 고려하기 시작했다. 이같은 분위기는 승지를 지낸 남종삼(南鍾三)이 대원군으로 하여금 한불조약(韓佛條約)을 체결하여 나폴레옹 3세의 위력을 이용,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는 정책을 펴도록 건의하기까지 이르렀다.숨막히는 긴장의 나날이었다. 이같은 정책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조선에 체류중이던 베르뇌(Berneux) 주교와의 만남을 주선하게 되었고,그때 대원군은 만약 러시아를 물리칠 수만 있다면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허락할 수도 있다는 암시를 주어 천주교인들은 자못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1866년 1월에 북경사신이 보내온 편지가 도착했다.청나라는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이 분위기에 편승한 국내의 반 대원군 세력들은 대원군이 천주교와 불순한 정치적 흥정을 한다며 공세를 취했고 대원군은 정치적 생명에 위협을 느껴 천주교 탄압 정책으로 급선회하게 된 것이다. 1866년 2월 베르뇌를 비롯해 홍봉주,남종삼,김면호를 포함한 수천 명의 천주교인들이 서울과 그밖의 여러 지역에서 체포되어 순교했는데,이때 베르뇌,다블뤼 등 9명의 프랑스 신부들은 서울 새남터와 충남 보령의 갈매못에서 순교하였다. 병인박해로 불리는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그 이후 프랑스 군대와 대원위대감의 지휘를 받은 조선군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대원위대감은 국가적 위기의식을 고조시키면서 천주교인들을 외국의 적들을 불러들이는 무리로 규정하여 거듭되는 박해로 맞섰다. 서양오랑캐의 발자국으로 더럽혀진 땅은 그들과 내통하는 천주교 무리의 피로 씻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처형지는 주로 서울과 해안지방으로 정해졌다.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이 계속되자 프랑스는 대원위대감을 기필코 굴복시켜 그들이 겪은 수모를 되갚아주겠다며 방법을 모색했다. 그때 프랑스 신부 페롱(Feron)이 묘안을 내놓았다.그는 1866년 8월 프랑스 제독 로즈가 조선을 공격할 때 뱃길을 안내했던 인물이다.또한 그는 조선의 사정에도 밝아서 대원위대감을 꺾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그는 독일의 무역상인인 오페르트(Oppert,E.J)라는 인물을 끌어들일 궁리를 했다.오페르트는 1866년 3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친 조선과의 통상교섭에서 모두 실패한 뒤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런 사정을 간파한 페롱은 오페르트를 책임자로 하여 대원군과 정치적 교섭을 벌이면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묘책을 마련했다. 이 묘책을 강구하는 데는 조선인 천주교인도 가담했다.묘책이란 다름 아닌 대원위대감의 아버지 남연군이 묻혀 있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가야사 옛터의 무덤을 파헤친다는 것이었다. 묘를 파헤쳐 시체와 부장품을 미끼로 내걸고 대원군과 통상문제,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흥정하자는 것이었다.조선은 조상의 무덤에 대하여 특별한 관습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역이용하자는 극단적인 방법을 내세웠다. 오페르트는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그는 자금을 담당할 인물로 미국인 젠킨스를 끌어들였다.통상교섭이 성공하면 이익을 배당하겠다는 조건이었다. 도굴단이 결정되었다.오페르트,젠킨스,페롱,선장 묄레,조선인 안내자 2명,유럽·필리핀·중국인 선원 등 모두 140명으로 이루어졌다. ●오페르트, 남연군묘 도굴에 실패 1868년 5월 차이나(China)호,그레타(Greta)호 등 1000t급 기선 두 척을 이끌고 일본 나가사키에서 무기와 도굴용 장비를 구입한 다음,5월10일 충남 덕산군 구만포에 상륙했다. 도굴단은 자신들을 러시아인이라고 말하면서 조선인의 안내를 받아 남연군 묘소로 직행했다.덕산 군청을 습격하여 군기를 탈취하는가 하면 민가들을 습격하면서 고의적인 난동을 부렸다. 절골의 남연군묘까지 온 그들은 도굴을 시작했으나 묘광이 워낙 견고하여 그들이 준비해온 도구로는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대원위대감은 마치 이런 날이 오리라고 예측이나 했던 듯 성능이 매우 좋은 폭약을 사용하지 않는 한 묘를 파헤치기 어렵도록 만들어 둔 것이었다. 결국 남연군묘 도굴은 실패했다.오페르트는 돌아가는 길에 인천 앞 영종도에서 프랑스 제독 알리망 명의로 된 협박장을 대원위대감에게 보냈다.남연군의 시체와 부장품이 그들 손아귀에 있으니 교섭에 응하라는 내용이었다.그러나 이 협박문을 접수한 영종첨사는 도굴행위가 인간의 짓이 아니므로 대응할 가치가 없다며 협박문을 되돌려주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젠킨스는 같은 미국인에 의하여 파렴치범으로 고발당하였고,페롱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소환당하였다. ●대원군의 박해로 8000명 이상 순교 대원위대감의 분노는 컸다.조선은 조상숭배 사상이 유별하여 묘를 신성시하는 데다,국왕의 할아버지며 자신의 아버지 묘를 파헤쳤으니 그의 생각은 극단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대원위대감은 덕산군 내포지방 천주교인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했다. 내포지방은 천주교회 창설기부터 천주교가 전파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많은 희생자를 내었고,부근의 지방까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렇듯 대원군에 의하여 감행된,이른바 병인박해는 6년에 걸쳐 8000명 이상이 순교하는 불행을 낳았다. 한 정치가의 무모한 권력욕구가 불러온 결과는 조선의 세계사 합류를 지연시켜 근대화의 길을 막음으로써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는 비극을 초래했고,나쁜 지도자로서의 선례가 되었다. 그같은 대원위대감은 1871년 무슨 생각에선지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서원산 남쪽 기슭에 자신이 불태웠던 가야사의 3층석탑을 옮기면서 보덕사(報德寺)라는 절을 지었다.아들이 보위에 올랐으므로 보은(報恩)의 뜻으로 절을 지은 대원위대감의 생각은 오늘날 한국 정치지도자들처럼 혼란스럽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13)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법(상)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13)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법(상)

    누군들 고통속에 머무르고 싶은 이가 있겠는가. 지금 이 고통스러운 삶에서 벗어나 고요한 평온을 누리고 싶지 않은 이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게 쉽지 않느니,아주 드물게는 이대로 영원했으면 싶을 때도 있었지만, 오,그때는 순간으로 짧은 것. 비록 짧게였지만 깊게 느껴졌던 그 순간을 맛본 사람은 자주 꿈을 꾸느니.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것에 대하여 꿈 꾸느니. 오늘은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법을 배우러 또 길을 떠난다.길은 경남 하동 섬진강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푸른 전설과 향기짙은 신화의 몸 위로 흘러간다.언제 걸어도 새로운 길이다.길에서 만난 바람에게 묻는다.하동의 옛 일과 옛 사람을 묻는다.옛 사람 가운데서 노랫말 없는 노래를 소리로 부르면서 근심걱정 많은 세상 사람들에게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법을 가르쳤던 쌍계사 혜소(慧昭,774∼850) 스님 소식을 묻는다. 그 스님이 말했던가,노래했던가.노래한다는 것은 뭍 새들 우는 소리,뭍 벌레들 우는 소리,바람소리 물소리 천둥소리 빗소리,아 서리내리는 소리 속으로,숨어 흐느껴 우는 외로운 사람 울음소리 속으로,입으로 소리내지 않고 마음으로 우는 사람 마음속으로 들어가 한몸이 되는 것이라고.가서 자연이 되는 것이라고.그리하여 모든 것과 함께 가는 것이라고.그것이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법이라고.그 스님은 쌍계사에 계실거라고 바람이 말했다.어쩌면 보고도 못 알아 볼지 모른다는 야릇한 말을 나그네 뒤에다 던지고는 숲으로 들어가버렸다. 하동 옛일이 아름답지만은 않았다고 송림(松林) 바람이 전해준다. ●자연에 동화돼야 고통 사라져 하동은 신라와 백제가 서로 뺏고 빼앗기는 두 나라의 변방이면서도 서울 못지않은 전략거점이었다.진주도 한동안 백제 땅이었다.신라에 진주를 내주고 하동으로 물러선 백제는 더 후퇴할 수가 없었다. 신라는 하동을 넘고 섬진강을 건너야 호남평야를 얻고 중국 가는 편리한 뱃길을 잡을 수 있었다.두 나라의 전투는 하동 땅 산과 들에서 자연 오래 끌고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젊은 사내들의 목숨이 서로 겨눈 창 끝에서,화살 끝에서,칼날 위에서 이슬같이 스러져 갔다.그 젊은 영혼들의 산화(散花)가 다시 이승으로 돌아와 지리산 철쭉꽃으로,차꽃으로 피고 졌다. 산화란 비록 꽃은 피었어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꽃이라는 식물학적 정의도 있으려니와 절집의 재식(齋式)에서 범패(梵唄)를 부르며 꽃을 뿌리는 일을 두고서도 일컫는 말이니,쌍계사에 살았던 저 혜소 스님이 범패를 세속으로 모셔 내려와서 민중으로 하여금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한가지 지혜로 응용하셨으니,하동의 옛일이야말로 이 땅의 향기 짙은 신화가 아니겠는가. 두 나라 전쟁의 참화가 오래 절규했던 하동 땅이었으므로 이 모진 아픔을 치유해 사람이 이웃하여 살게 하기 위해서는 비범한 사랑의 힘이 필요했을 것이다.그 사랑으로 두루 평온을 숨쉬는 공존의 미학이 생겨나도록 하동 사람들이 빌었을 것이다. ●영·호남이 하나된 공존의 미학 `花開洞天’ 기원은 마침내 이루어졌다.하동 말씨에 전라도 사투리의 억양이 자리잡았고,하동의 음식 맛에 전라도의 간과 향기가 배어 있음이 그것이다.둘이면서 하나가 된 공존의 미학을 완성시킨 전형적인 문화가 탄생한 것이다. 또한 그 문화는 전라도와 경상도 경계를 이루며 흐르는 섬진강 강물을 나눠 먹고 사는 사람들의 생활로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한 어머니 젖을 나눠먹고 자란 형제들인 것이다. 이같은 하동의 옛일은 이미 화엄사상이 만개할 토양이 되었고,화엄이 꽃 피는 화개동천(花開洞天)을 만들었다. 나그네는 송림을 지나 키낮은 차나무들의 높은 푸름을 쓸어안아 보면서 섬진강 기슭으로 난 그림 같은 길을 따라 걸어오른다.화개(花開)다.화개장터다. 화개 골짜기는 유난히도 절이 많았다.시대마다 예사로 쉰개가 넘는 절들이 화개천 물소리를 나누어 들으면서 이쪽저쪽 산자락마다 들어 앉아서는 고통의 바다 건너는 법을 묻고,대답하면서 한 천년을 좋이 살았다.절이 그토록 많았던 이유가 무엇일까? 어쩌면 하동 역사 속에 아프게 저며 넣어진 젊은 목숨들이 이승에 살아남은 자들을 향하여 왜 사느냐고 물어온 화두를 풀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그랬을 것이다.적어도 하동땅에서 삶을 곧추세우려는 이들이라면 한번쯤은 옛사람들이 던져 놓은 저 생사(生死)화두를 들고 밤을 지새워봐야 옳다. 참 무겁고 힘에 버거운 명제다.이같은 명제를 신명나게 풀어서 세상 사람들의 일상사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 세상 사는 지혜를 일러준 한 사람을 만나보면 세상살이가 지겹고,고통스럽고,후회스럽지만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나그네는 성큼 쌍계사 일주문을 들어선다.아직은 겨울의 품안이라 손이 시리다. 대웅전 오르는 돌계단 아래서 나그네가 물어 물어 찾아 온 혜소 스님의 그림자를 만났다. 국보 제 47호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다.신라 사람 고운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손수 썼다. 나그네가 찾는 혜소스님이 진감선사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분이다. 838년쯤엔가 민애왕이 혜소스님을 만나고 싶다는 간곡한 청을 넣었으나 그는 승려가 권력자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이유를 들어 완곡히 사양한 일이 있었다.왕은 나라를 생각하면 되고,승려는 그 나라의 백성을 생각하면 된다고 했다.백성을 생각하는 것은 하늘을 생각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왕이 다스리는 나라는 백성들의 나라이며,백성은 왕이 낳은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내신 것이니 왕은 백성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왕은 백성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야 정치하는 왕이 추구하는 것은 사람을 다스리는 일이지만 승려는 그 사람들을 섬겨야 하므로 비록 만난다 하더라도 아무 도움될 일이 없다고 했다. 인물 잘나고,좋은 옷으로 몸을 치장했으며,정치와 권세에 도움되는 학식과 경험을 두루 갖추어 왕에게 도움되는 사람은 세속에서 찾는 것이 옳다는 말도 했다. 민애왕은 존경심이 우러나서 존경의 뜻으로 사신을 보내면서 혜조(慧照)라는 법명을 내렸다. 지혜의 빛이 세상을 환하게 비춘다는 지극한 존경심을 담은 이름이었다. 이름을 가져온 사신은 민애왕의 간곡한 청을 다시 전했다.경주까지 한 번만 다녀가시라는 부탁이었다.그래도 응하지 않았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민애왕이 내린 이름의 비칠 조(照)를 부를 소(昭)로 고쳐버렸다.이 시대를 사는 스님들이 새기고 또 새겨봐야 할 옛일이다. 그는 고통받는 민중을 구원할 수 있게 되기를 목표로 정하고 수행을 시작했다.하지만 민중의 고통은 바다같이 넓고 커서 어떻게 하는 것이 구원이 될지 그것을 아는 것이 더 급했다. 민중을 구원한다는 일이 자칫 화려한 관념적 수사에 그쳐버리고 실제로는 민중에게 고통을 더하는 짓이 되기 쉽다는 것을 깨닫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중 속으로 들어가서 그 자신이 민중으로 살아가야만 민중의 고통을 절절하게 느끼게 되는 점이었다.깨달아야만 실천할 수 있는 것.그러자면 평상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나와 민중을 둘로 양립시켜서는 안 된다.하나가 되어야만 한다.그래야 하는 일이 즐겁고,즐거워야만 오래 계속할 수 있다.그는 자신이 큰힘 들이지 않고 즐겁게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헐벗고 굶주리는 고통이 가장 흔하고 큰 것이기는 하지만 남에게 줄 옷과 밥을 마련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능력으로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일을 계속하기란 불가능하고,어려운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자칫 자신을 자랑하게 되기 쉽다는 것도 알았다. 오랜 궁리 끝에 일감을 찾아냈다.몸이 불편하거나 가난하여 신발을 신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짚신을 삼아서 신겨주기로 했다. 짚신 삼는 솜씨는 자신도 갖고 있었다.짚을 장만하는 데는 큰돈 들이지 않고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짚을 구해 잘 손질하여 일을 시작했다.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다 보니 저절로 입에서 염불이 흘러나왔다.굳이 염불이라 할 것도 없었다.그냥 좋으니까 흥얼흥얼거리는 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13)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법(상)

    누군들 고통속에 머무르고 싶은 이가 있겠는가. 지금 이 고통스러운 삶에서 벗어나 고요한 평온을 누리고 싶지 않은 이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게 쉽지 않느니,아주 드물게는 이대로 영원했으면 싶을 때도 있었지만, 오,그때는 순간으로 짧은 것. 비록 짧게였지만 깊게 느껴졌던 그 순간을 맛본 사람은 자주 꿈을 꾸느니.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것에 대하여 꿈 꾸느니. 오늘은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법을 배우러 또 길을 떠난다.길은 경남 하동 섬진강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푸른 전설과 향기짙은 신화의 몸 위로 흘러간다.언제 걸어도 새로운 길이다.길에서 만난 바람에게 묻는다.하동의 옛 일과 옛 사람을 묻는다.옛 사람 가운데서 노랫말 없는 노래를 소리로 부르면서 근심걱정 많은 세상 사람들에게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법을 가르쳤던 쌍계사 혜소(慧昭,774∼850) 스님 소식을 묻는다. 그 스님이 말했던가,노래했던가.노래한다는 것은 뭍 새들 우는 소리,뭍 벌레들 우는 소리,바람소리 물소리 천둥소리 빗소리,아 서리내리는 소리 속으로,숨어 흐느껴 우는 외로운 사람 울음소리 속으로,입으로 소리내지 않고 마음으로 우는 사람 마음속으로 들어가 한몸이 되는 것이라고.가서 자연이 되는 것이라고.그리하여 모든 것과 함께 가는 것이라고.그것이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법이라고.그 스님은 쌍계사에 계실거라고 바람이 말했다.어쩌면 보고도 못 알아 볼지 모른다는 야릇한 말을 나그네 뒤에다 던지고는 숲으로 들어가버렸다. 하동 옛일이 아름답지만은 않았다고 송림(松林) 바람이 전해준다. ●자연에 동화돼야 고통 사라져 하동은 신라와 백제가 서로 뺏고 빼앗기는 두 나라의 변방이면서도 서울 못지않은 전략거점이었다.진주도 한동안 백제 땅이었다.신라에 진주를 내주고 하동으로 물러선 백제는 더 후퇴할 수가 없었다. 신라는 하동을 넘고 섬진강을 건너야 호남평야를 얻고 중국 가는 편리한 뱃길을 잡을 수 있었다.두 나라의 전투는 하동 땅 산과 들에서 자연 오래 끌고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젊은 사내들의 목숨이 서로 겨눈 창 끝에서,화살 끝에서,칼날 위에서 이슬같이 스러져 갔다.그 젊은 영혼들의 산화(散花)가 다시 이승으로 돌아와 지리산 철쭉꽃으로,차꽃으로 피고 졌다. 산화란 비록 꽃은 피었어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꽃이라는 식물학적 정의도 있으려니와 절집의 재식(齋式)에서 범패(梵唄)를 부르며 꽃을 뿌리는 일을 두고서도 일컫는 말이니,쌍계사에 살았던 저 혜소 스님이 범패를 세속으로 모셔 내려와서 민중으로 하여금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한가지 지혜로 응용하셨으니,하동의 옛일이야말로 이 땅의 향기 짙은 신화가 아니겠는가. 두 나라 전쟁의 참화가 오래 절규했던 하동 땅이었으므로 이 모진 아픔을 치유해 사람이 이웃하여 살게 하기 위해서는 비범한 사랑의 힘이 필요했을 것이다.그 사랑으로 두루 평온을 숨쉬는 공존의 미학이 생겨나도록 하동 사람들이 빌었을 것이다. ●영·호남이 하나된 공존의 미학 `花開洞天’ 기원은 마침내 이루어졌다.하동 말씨에 전라도 사투리의 억양이 자리잡았고,하동의 음식 맛에 전라도의 간과 향기가 배어 있음이 그것이다.둘이면서 하나가 된 공존의 미학을 완성시킨 전형적인 문화가 탄생한 것이다. 또한 그 문화는 전라도와 경상도 경계를 이루며 흐르는 섬진강 강물을 나눠 먹고 사는 사람들의 생활로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한 어머니 젖을 나눠먹고 자란 형제들인 것이다. 이같은 하동의 옛일은 이미 화엄사상이 만개할 토양이 되었고,화엄이 꽃 피는 화개동천(花開洞天)을 만들었다. 나그네는 송림을 지나 키낮은 차나무들의 높은 푸름을 쓸어안아 보면서 섬진강 기슭으로 난 그림 같은 길을 따라 걸어오른다.화개(花開)다.화개장터다. 화개 골짜기는 유난히도 절이 많았다.시대마다 예사로 쉰개가 넘는 절들이 화개천 물소리를 나누어 들으면서 이쪽저쪽 산자락마다 들어 앉아서는 고통의 바다 건너는 법을 묻고,대답하면서 한 천년을 좋이 살았다.절이 그토록 많았던 이유가 무엇일까? 어쩌면 하동 역사 속에 아프게 저며 넣어진 젊은 목숨들이 이승에 살아남은 자들을 향하여 왜 사느냐고 물어온 화두를 풀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그랬을 것이다.적어도 하동땅에서 삶을 곧추세우려는 이들이라면 한번쯤은 옛사람들이 던져 놓은 저 생사(生死)화두를 들고 밤을 지새워봐야 옳다. 참 무겁고 힘에 버거운 명제다.이같은 명제를 신명나게 풀어서 세상 사람들의 일상사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 세상 사는 지혜를 일러준 한 사람을 만나보면 세상살이가 지겹고,고통스럽고,후회스럽지만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나그네는 성큼 쌍계사 일주문을 들어선다.아직은 겨울의 품안이라 손이 시리다. 대웅전 오르는 돌계단 아래서 나그네가 물어 물어 찾아 온 혜소 스님의 그림자를 만났다. 국보 제 47호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다.신라 사람 고운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손수 썼다. 나그네가 찾는 혜소스님이 진감선사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분이다. 838년쯤엔가 민애왕이 혜소스님을 만나고 싶다는 간곡한 청을 넣었으나 그는 승려가 권력자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이유를 들어 완곡히 사양한 일이 있었다.왕은 나라를 생각하면 되고,승려는 그 나라의 백성을 생각하면 된다고 했다.백성을 생각하는 것은 하늘을 생각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왕이 다스리는 나라는 백성들의 나라이며,백성은 왕이 낳은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내신 것이니 왕은 백성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왕은 백성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야 정치하는 왕이 추구하는 것은 사람을 다스리는 일이지만 승려는 그 사람들을 섬겨야 하므로 비록 만난다 하더라도 아무 도움될 일이 없다고 했다. 인물 잘나고,좋은 옷으로 몸을 치장했으며,정치와 권세에 도움되는 학식과 경험을 두루 갖추어 왕에게 도움되는 사람은 세속에서 찾는 것이 옳다는 말도 했다. 민애왕은 존경심이 우러나서 존경의 뜻으로 사신을 보내면서 혜조(慧照)라는 법명을 내렸다. 지혜의 빛이 세상을 환하게 비춘다는 지극한 존경심을 담은 이름이었다. 이름을 가져온 사신은 민애왕의 간곡한 청을 다시 전했다.경주까지 한 번만 다녀가시라는 부탁이었다.그래도 응하지 않았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민애왕이 내린 이름의 비칠 조(照)를 부를 소(昭)로 고쳐버렸다.이 시대를 사는 스님들이 새기고 또 새겨봐야 할 옛일이다. 그는 고통받는 민중을 구원할 수 있게 되기를 목표로 정하고 수행을 시작했다.하지만 민중의 고통은 바다같이 넓고 커서 어떻게 하는 것이 구원이 될지 그것을 아는 것이 더 급했다. 민중을 구원한다는 일이 자칫 화려한 관념적 수사에 그쳐버리고 실제로는 민중에게 고통을 더하는 짓이 되기 쉽다는 것을 깨닫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중 속으로 들어가서 그 자신이 민중으로 살아가야만 민중의 고통을 절절하게 느끼게 되는 점이었다.깨달아야만 실천할 수 있는 것.그러자면 평상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나와 민중을 둘로 양립시켜서는 안 된다.하나가 되어야만 한다.그래야 하는 일이 즐겁고,즐거워야만 오래 계속할 수 있다.그는 자신이 큰힘 들이지 않고 즐겁게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헐벗고 굶주리는 고통이 가장 흔하고 큰 것이기는 하지만 남에게 줄 옷과 밥을 마련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능력으로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일을 계속하기란 불가능하고,어려운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자칫 자신을 자랑하게 되기 쉽다는 것도 알았다. 오랜 궁리 끝에 일감을 찾아냈다.몸이 불편하거나 가난하여 신발을 신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짚신을 삼아서 신겨주기로 했다. 짚신 삼는 솜씨는 자신도 갖고 있었다.짚을 장만하는 데는 큰돈 들이지 않고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짚을 구해 잘 손질하여 일을 시작했다.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다 보니 저절로 입에서 염불이 흘러나왔다.굳이 염불이라 할 것도 없었다.그냥 좋으니까 흥얼흥얼거리는 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 [문화마당] 독도는 우리 땅

    우리가 아무리 협동심이 부족한 민족이라지만,독도 이야기만 나오면 우리는 모두 한마음이 된다. ‘한국 휴대전화가 되는 곳은 한국 땅이고,일본 휴대전화가 되는 곳은 일본 땅입니다.독도는 한국 휴대전화가 되는 우리 땅입니다.’ 이런 휴대전화 광고 문구를 빌리지 않더라도 독도는 우리 땅이다. 일본이 찍지 말라고 제동을 걸어온 독도 우표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고 한다.1983년 박인호 작사 작곡에 정광태 노래로 우리에게 알려진 ‘독도는 우리 땅’처럼 생명력이 긴 가요도 드물 것이다.독도 시비가 일어날 때마다 그 노래는 우리 민족을 하나로 엮어주는 벅찬 리듬으로 가슴속을 파고든다.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이 백리(중략)/그 누가 아무리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도 독도는 우리 땅….” 그 노랫말을 듣는 순간만큼은 쩍하면 싸워대는 국회의원 나리들도,매일 다투는 게 일과인 앞집 부부도 한 마음이 될 것이다.1983년 당시 이 노래가 금지곡이었다는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다.도대체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명백한 사실이 위협받지 않도록 만드는 대찬 대통령 하나가 없었다는 것도 슬픈 일이다.우리나라 국민 중 독도로 본적을 옮긴 사람들이 900명이나 된다고 한다.그 중 한 사람이 독도는 우리 땅을 부른 가수 정광태이다.그는 1984년 독도를 다녀온 뒤 독도에 반해 미국 영주권을 포기하고 지난 90년 본적을 독도로 옮긴 후 독도 지킴이 역할을 하고 있다. 어찌 우리가 일본을 잊을 수 있겠는가? 유대인들은 작금에 이르기까지 독일 정부로부터 유대인 학살 개인 보상금을 철저히 받아내고 있다.몇십년 동안 남미로 도망가 숨어있는 홀로코스트 전범을 찾아내 재판에 회부하기도 한다.미국 곳곳에 유대인 학살 박물관이 세워지고 있다.뼈아픈 역사를 절대 잊지 말자는 유대인들의 역사 인식은 무서울 정도이다.그에 비하면 우리는 뼈 없는 오징어 같다. 일제시대 국외 강제동원 피해자는 150만 명 이상,국내 징용 피해자는 6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렇게 용서할 수 없는 상처에도 불구하고,그나마 독도 운운할 때나 잠시 반짝 그 분노의 기운을 함께할 뿐 몇 달 지나면 또 모두 잊어버린다.일제라면 되게 좋아하는 우리,같은 물건이면 국산이 아니라 일제를 사고 마는 우리,종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기막힌 사연을 남의 집 할머니 얘기처럼 귓전으로 흘려버리는 우리,도대체 우리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한국사를 폄하하고 역사를 맘대로 왜곡하는 일본 교과서로 배우고 자란 미래의 일본인들과 우리의 후손들은 앞으로 어떤 식으로 대화를 할 것인가? 고양이와 개의 울음소리를 영어와 일어로 번역해주는 기계를 내놓아 세계적으로 주목을 끈 일본의 얄미운 한 완구제조업체가 이번에는 꿈 만드는 기계를 선보인다고 한다.자신이 원하는 꿈을 꾸게 해주는 이 기상천외한 기계에다 꿈꾸고 싶은 사진과 배경음악을 고른 뒤,원하는 꿈의 줄거리를 녹음한 다음 잠이 들면 자신이 원하는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이다. 기억 이식이라는 놀라운 주제를 다루었던 영화 ‘토탈 리콜’이 생각난다.그 영화 속에서 사람들은 기억이식을 통해 화성도 갔다 오고 달나라도 갔다 온다.꿈 만드는 기계로 독도는 당연히 우리 땅이라는 꿈을 만들어,일본인들의 꿈 속으로 찾아가고 싶다.아니 한일병합 이전으로 필름을 돌려 영화 찍듯 우리의 위대한 역사를 다시 한번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황주리 화가
  • 한화갑의원 수도권 출마 공식 선언/민주 ‘호남 물갈이’ 신호탄

    민주당 한화갑 전 대표도 텃밭을 떠나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호남의 대표적 정치인이자 당내 실세인 동교동계 좌장이 기득권 포기의 용단을 내림에 따라 앞으로 호남지역 물갈이의 신호탄이 될지 주목된다. 한 전 대표는 27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고향인 전남 무안·신안을 떠나 17대 총선에서 수도권에 출마하겠다.”고 공식 선언했다.출마 지역은 “당과 협의하고 당의 명령에 따르겠다.”고 밝혔으나 현재까지는 서울 양천, 관악구와 경기 안산, 일산 등을 놓고 저울질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양천·관악·안산·일산 저울질 그는 회견문을 통해 “나를 버리고 민주당을 살리겠다면 나도 살고 민주당도 살 것이나 자기의 이득만을 추구하고 현실에 안주한다면 나도 잃고 민주당도 잃게 될 것”이라며 다른 호남 중진들의 결단을 촉구했다.그러면서 “반드시 길이 있기 때문에 가는 것만은 아니고 새로운 길을 내서라도 가야 한다.”며 민주당이 처한 절박한 상황을 강조했다. 한 전 대표는 그러나 “(서울행은) 내 개인 판단에 의한것으로 누구에게 강요하거나 나를 따르라고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고 말해 호남 수성(守城)의 필요성도 지적했다.그는 “호남인들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가 보전되지 못했을 것)’라는 말씀에 무한한 자긍심을 느낀다.”면서 “호남의 정신을 대한민국의 정신으로 전국화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다짐했다. ●당내 일부선 “공동선대위원장 추대” 한 전 대표의 서울 입성을 계기로 당내에선 그를 공동선대위원장으로 추대,수도권 선거를 진두지휘하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실제로 당 지도부는 최근 이 문제를 몇 차례 논의하기도 했다.그러나 한 전 대표측은 “명예선대위원장이면 모를까 지역구 선거에 나서야 하는 상황에서 선대위원장은 적절치 않다.”고 부정적 뜻을 밝혔다. 한 전 대표는 목포에서 뱃길로 3시간 걸리는 무이도에서 태어나 37년간 김대중(DJ) 전 대통령을 보필하다 53세 때 늦깎이로 14대 총선에 출마,신안에서 내리 3선을 했다.이 때문에 그는 DJ의 복심(腹心)으로 통했다. ●“개혁 물줄기 이젠 전북으로” 조순형 대표의 대구 출마에 이은 한 전 대표의 서울행이 민주당 개혁공천의 견인차가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김영환 상임중앙위원은 “이제 백두준령을 하나 넘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앞서 순천을 떠나 서울행을 택한 김경재 상임중앙위원은 “이제 물갈이는 전북으로 옮겨갈 때”라며 “단수 후보로 확정된 정균환 전 총무는 전주 덕진에서 출마해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과 대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그러나 정 전 총무와 고흥에 내려간 박상천 전 대표는 한 전 대표의 선언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박정경기자 olive@
  • 설 연휴 뱃길 넓힌다/34개 항로 45척 880회 증선

    섬이 고향인 사람들은 귀향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운송수단이 한정된 데다 선박운항도 많지 않아 명절만 되면 ‘귀향·귀경 전쟁’을 치른다. 이런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각 지방해양수산청은 올해 설연휴 전후(20∼26일)를 특별수송기간으로 정하고,인천∼무의도 및 경남 통영∼매물도 등 34개 항로에 45척 880회를 증선·증편 운항하기로 했다. 섬이 가장 많은 전남 신안·목포·완도권은 여객선 운항 횟수를 기존 2450회에서 3010회로 560회 늘렸다.예상 수송인원은 신안권 6만 9000명,완도권 4만 8300명이다. 신안·목포권의 경우 39척이 목포시 여객선터미널과 북항에서 비금·도초·하의·흑산도 등 24개 노선에,완도권은 25척이 완도항에서 발두·당산·원동·여서도 등 16개 노선에 운항된다.신안·목포권은 평소 980회에서 1078회로,완도권은 1470회에서 1932회로 늘었다.문의는 신안권 (061)244-5300,완도권 (061)280-1642. 여수권은 12개 항로에서 매일 17척의 여객선이 편도 364회에서 504회로 140회 더 운항된다.수송객이 많은 여수∼연도 항로에는 금오고속페리호,신광페리5호,두둥실호 쾌속선이 투입돼 126회 운항된다.(061)660-9041. 전북 군산권은 군산∼선유도,부안∼격포 등 5개 항로에 하루 1∼2회씩의 왕복운항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승선수요가 크게 늘어날 것에 대비,예비선을 확보해 놓았다.(063)446-7171,(061)242-9542. 부산해양수산청은 여객선 추가 투입없이 부산∼거제도 고현항 간 여객선 2척 중 1척의 정원을 145명에서 160명으로 상향 조정했다.특별수송기간 중 평일에는 오후 5시부터 마지막 여객선이 부산항에 입항할 때까지,공휴일에는 오전 9시부터 마지막 여객선이 부산항에 들어올 때까지 비상체제를 가동한다.(051)660-0270. 인천지역 연안여객선사인 ‘우리고속훼리’는 오는 21∼25일 덕적·자월·이작·승봉도 등을 찾는 귀향객들에게 뱃삯을 20% 할인해 준다.이에 따라 인천∼덕적도는 편도 1만 3700원,왕복 2만 6700원으로 기존 1만 7500원,3만 3600원보다 3800∼6900원 싸게 이용할 수 있다. 선사측은 이와 함께 설연휴에 인천∼덕적·승봉도 항로에 하루 3차례 왕복,인천∼무의도는 2차례 왕복 등 현행보다 1차례씩 늘려 운항키로 했다.(032)880-6114. 마산해양수산청은 통영∼사량 항로에 여객선 1척과 예비선 2척을 추가 투입해 하루 왕복 68회 운항한다.(055)645-2457. 포항해양수산청은 유일한 관내 항로인 포항∼울릉도 간 여객을 증편하지 않는 대신, 안전하고 원활한 수송에 행정력을 집중키로 했다.터미널과 여객선 내 소화기 비치와 인화성 물질 방치 여부 등을 철저히 점검,화재 예방에 만전을 기하기로 했다.승객이 예상보다 많을 경우에 대비,예비선을 즉시 투입할 수 있는 운항계획을 마련해 놓았다.(054)245-1521. 대산해양수산청(충남)도 대천항∼장고도(하루 3회 왕복),대천항∼영목(5회 왕복),대천항∼외연도(1회 왕복),보령시 오천항∼초전∼안흥∼가의도∼구도∼고파도(2회 왕복) 노선의 승선 인원에 여유가 있어 별도로 증편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부족할 경우에 대비,여객선 추가 투입을 계획 중이다.(041)660-7632. 전국 정리 김학준기자 kimhj@
  • “실미도보다 더 지독했다”/북파 공작 ‘선갑도 특수부대’ 실상 공개 김동섭·김성락 씨

    “초하룻날과 보름날 저녁이면 ‘장백산 줄기줄기…’라는 음악이 부대 막사에 은은하게 울려퍼집니다.그러면 누군가 한두 명은 밤 사이에 튀어나와 아무도 모르게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현재 상영중인 영화 ‘실미도부대’가 1막1장이라면 ‘선갑도 특수부대’는 한차원 높은 3막3장의 최강부대다.비밀의 역사는 이렇게 쓰여졌다. 선갑도의 위치는 실미도보다 훨씬 떨어진,인천에서 뱃길로 4시간여의 무인지경인 서해상.실미도부대는 공군 소속이지만 선갑도부대는 육군 첩보부대(HID) 소속의 1급 비밀조직이었다.1968년 1·21사태 직후 박정희 대통령은 “임자,되로 받았으면 말로 갚아야지.한번 만들어봐!”라며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에게 대북(對北) 보복지시를 내렸다.곧바로 육군 HID와 중앙정보부가 중심이 돼 ▲현역은 일단 제외하고 ▲처자식·부모 등 가족은 일절 없어야 하며 ▲생사를 초월하는 건장한 사나이 등으로 선발 규정을 마련했다.우선 차출 대상은 전국의 교도소였다.이렇게 해서 68년 4월 실미도에 특수임무를 띤 부대(31명)가 가장 먼저 생겼고 4개월 후에는 무인도인 선갑도에서 50여명 규모의 특수부대가 비밀리에 출범했다.세월이 지난 지금 실미도 영화가 ‘엄청’ 뜨고 있지만 숨겨진 선갑도 요원들은 아직도 침묵을 지키고 있다. 지난 14일 오후 수소문 끝에 서울 송파구 수서동 국군특수임무유공자연합회 연구소에서 김동섭(사진 오른쪽·70·육사12기·예비역 대령) 전 육군HID공작처장과 김성락(사진 왼쪽·66) 대북참전전우회 부회장을 만났다.김 전 처장은 당시 실미도와 선갑도,설악개발단 등 특수부대의 창설 등 실질적인 운영에 깊숙이 간여했고 김 부회장은 선갑도부대에서 별동대 훈련을 직접 맡았다.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의 젊은 남자들로 모두 3개 팀이 구성됐습니다.주석궁 주변,함흥 수력발전소,북한 124군 특수부대 등 주요 시설 등의 위치를 그대로 본떠 실제상황처럼 훈련했습니다.” 영화로 알려진 이상 당시 훈련상황을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김 부회장은 인천첩보부대(당시 대위)에 근무하던 중 71년 1월 난지도팀장을 맡았다.난지도팀은 선갑도 본부의 별동대로 기초∼고급 등 3단계로 이루어진 고난도 훈련을 무사히 통과한 10여명이 마지막으로 침투 작전을 위해 대기했던 곳이다. 김 부회장은 “선갑도 요원들은 수소가스를 채운 직경 8.5m 크기의 풍선기구나 행글라이더 등을 타고 침투하는 훈련을 세게 받았다.”면서 “초하루나 보름날이면 출전명령을 기다리느라 다들 흥분했다.”고 술회했다.그는 또 “풍선기구 4∼5개가 1개 편대로 선갑도의 고공 1만피트에서 가상 북쪽인 백령도 방향으로 움직일 때는 한폭의 그림이었다.”면서 “훈련중 잘못 착륙해 물에 빠져 죽은 요원도 더러 있었다.”고 말했다.당시 여러차례 선갑도 특수부대를 방문한 김 전 처장은 “북파공작부대의 훈련교범은 일본의 특수정보학교와 영국의 MI5,미국 CIA의 교육과목을 모델로 우리 식에 맞게 종합적으로 만들었다.”면서 선갑도부대는 실미도부대보다 앞선 최정예 특수부대였다고 말했다. 김문기자 km@
  • 특별한 새해맞이 2선/선상에서 사찰에서 새해 소망 빌어요

    송구영신(送舊迎新)의 계절.어디 특별한 분위기 속에서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할 데가 없을까.이른 새벽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남보다 한발짝 먼저 해를 맞는 선상일출은 어떨까.소복소복 눈이 쌓인 산사에서 하룻밤 묵으며 차분하게 새해를 설계해도 좋을 것이다.새해맞이 선상일출 및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소개한다. ◆선상 새해맞이 ●거문도,백도 다도해 해상국립공원 중에서도 제주도와 가장 가까운 섬.31일 송년의 밤과 새해 1일 아침을 맞이하는 1박2일 선상프로그램이 진행된다.31일 오후 여수항 출발,거문도에서 유람선으로 갈아타고 거문도 등대 및 낙조 감상,거문도 숙박,백도 앞바다 선상에서 일출제 행사 참여,거문도 육로관광 등이 포함돼 있다.2인1실 기준 11만 5000원.거문도관광여행사 (061)665-4477. ●정동진 골드코스트 유람선을 타고 정동진 앞바다에서 일출을 감상한다.강릉 금진항을 출발,아름다운 어촌마을인 심곡마을,모래시계공원 등 정동진 앞바다를 유람한다.시원하게 물살을 가르는 유람선을 따라 날아드는 갈매기를 벗삼아 관람하는 일출이 감흥을 자아낸다.일출 후엔 셔틀버스를 타고 정동진역,해돋이공원 등 인근 관광명소를 둘러본다.어른 1만 5000원,어린이 1만원.(033)644-5480. ●한려수도 유람선을 타고 한려수도의 빼어난 해안경치와 함께 일출을 감상한다.새해 1일 선상 해돋이를 위해 16척의 유람선이 모두 함께 바다로 나가는 대규모 행사를 연다.일출 조망후 연륙교,상족암,코끼리바위,동백섬 등을 유람하고 돌아온다.2시간 30분 정도 소요.어른 1만 5000원,어린이 8000원.삼천포유람선(055-835-0172·3). ●울산 간절곶 우리나라에서 해가 가장 빨리 뜬다는 간절곶 앞바다에 쾌속 여객선 돌핀호를 타고 나가 일출을 감상한다.현대호텔 숙박,돌핀호 해돋이 감상,떡국 조식 등을 포함해 2인 기준 15만원.현대호텔울산(052)251-2233. ●보길도 뱃길 1일 새벽 완도에서 출발해 남해바다에서 일출 감상,보길도 윤선도 유적지 답사로 일정이 짜여져 있다.선상에서 새해맞이 떡국 먹기,소원성취 풍선날리기 등도 진행된다.어른 2만원,어린이 1만5000원.소안농협(061)553-8188.◆새해맞이 템플스테이 서울 조계사,공주 마곡사,순천 송광사,양양 낙산사 등 전국 12개 사찰이 31일부터 새해 첫 날까지 템플스테이 행사 및 다채로운 새해맞이 행사를 진행한다. 마곡사는 한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할 수 있는 시간으로 자정 이전엔 한해의 반성을,이후엔 새해계획을 세우는 시간과 자신 및 가족,이웃에게 보내는 자비명상시간을 갖는다. 양양 낙산사에선 저녁 예불과 함께 새해 범종 타종 체험,발우공양,탑돌이,참선,다도 체험,촛불 행사 등이 이어지며,새벽엔 의상대에서 동해 일출 관람 시간을 갖는다. 경주 골굴사에선 동해안 문무대왕릉 앞 해맞이,선무도 기공 수련 등이 포함돼 있으며,서산 부석사에선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세상을 둘러보는 프로그램을 준비했다.(사찰별 프로그램은 표 참조).조계종 템플스테이 담당(02)732-9925,720-7060∼4. 임창용기자 sdragon@
  • [길섶에서] 대마도 뱃길

    대한해협 물살이 거칠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토록 사람 속을 뒤집어 놓을 줄은 미처 몰랐다.남에서 동북으로 흐르는 빠른 조류와 불규칙적으로 부는 해풍 때문에 예부터 왕래가 쉽지 않았다는 대한해협을 대마도(對馬島)에서부터 부산까지 배로 건넜다.뭣 모르고 앞에 탔던 승객들은 너도나도 입을 틀어막고 뒷자리로 급히 이동하는 소동을 벌여야 했다. 그러나 더욱 몰랐던 것은 그 험한 부산∼대마도 뱃길이 주 5회 이상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주로 한국 사람들이 대마도 땅을 밟는다.이곳의 최익현 선생 순국비 앞에선 한국인 방문자들을 두 그룹이나 만났다.한국인들은 부산이 바라다보이는 이 섬 최북단 마을에 ‘한국전망대’도 세워 놓고 있다. 배에 비치된 한 책자에 따르면 부산∼대마도 뱃길은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에 격분한 일단의 한국인들이 선박회사에 요청해 1999년부터 열게 됐다고 한다.이 책자의 제목은 ‘대마도는 우리땅’.이 뱃길의 험난한 파도는 상반된 주장을 갖고 평행선을 긋고만 있는 두 나라 국민에게 자연이 보내는 심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신연숙 논설위원
  • 내고향 밤섬 뱃길로 다시가요/내일 방문… 귀향제 올리기로

    철새들에게 고향을 내준 마포구 당인동의 ‘밤섬 실향 주민’ 200여명이 28일 밤섬을 찾는다. 이들은 마포구(구청장 박홍섭) 관계자들과 함께 이날 오전 11시쯤 한강시민공원 선착장을 출발,고향 땅 밤섬을 찾아 실향의 아픔을 달랜다.고향가는 뱃길은 그들 또는 고향의 조상들이 수백전부터 만들어 사용했던 전통적인 황포돛배와 바지선을 이용한다.밤섬에서 이들은 가장 먼저 옛 선착장(지금의 서강대교 밑) 부근에서 귀향제를 지내고 자신들의 방문을 조상과 마을 신(神)에게 알린다. 실향민 대부분은 34년째 강건너 언덕배기 마포구 창전동으로 옮겨 살고 있지만 1년에 단 한 차례만 이곳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밤섬이 세계적인 도심속 철새도래지로 알려지면서 생태보전지역으로 지정돼 사람의 출입이 금지됐기 때문이다. 긴 세월이 흘러 많은 주민들이 각지로 흩어졌지만 지금도 매년 음력 9월 초이튿날이면 창전동에 옮겨지은 부군당에 모여 조상과 부군신에게 섬의 안녕을 비는 제를 올리고 있다. 밤섬은 1968년 한강 물길을 곧게 하고 여의도 개발에 필요한 석재조달을 위해 폭파돼 당시 주민 62가구 443명이 강제 이주됐다. 이동구기자
  • [대한포럼] 남북경협의 두 얼굴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은 대북사업에 모든 것을 걸었고,그로 인해 모든 것을 잃었다.“대북사업을 강력히 추진해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생을 마감했지만 아직까지 그의 유서에 화답을 보내는 기업인은 없는 것 같다.지난 5일동안 빈소를 지켰던 현대가의 형제들조차도 이 문제에는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특히 정몽구 회장의 현대차그룹은 “대북사업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공식 발표하기까지 했다.돈도 구심점도 모두 잃고 무력해진 현대아산만이 외롭게 대북사업을 붙들고 있는 실정이다. 남북경협이 왕따를 당하고 있다.한때 ‘북한 특수’ 기대를 부풀리며 인기 상종가를 쳤던 남북경협이 요즈음에는 찬밥 신세로 전락했다.돈 가진 기업인들 어느 누구도 거들떠 보는 사람이 없다.이제 주식시장에서는 대북사업이 악재로 통한다.어느 기업이 대북사업에 참여한다는 소문이 나면 어김 없이 주가가 폭락할 정도다.남북경협이 본격화하기 시작했던 김대중 정부 초기와는 너무도 판이한 모습이다.그때나 지금이나 남북경협에 거는 국민들의 기대는 변함이 없는데 시장과 기업인들의 평가는 사뭇 달라졌다.무엇이 이런 변화를 가져왔을까.김대중 정부 초기 시절로 돌아가 보자. “단절과 대결 속에 반세기를 살아온 분단 상황에서 꿈에도 그리던 금강산을 관광할 수 있게 된 것은 획기적 사건으로 평가된다.남북화해와 협력의 역사적 전기를 마련하고 통일사업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민족적 기대가 크다.”(대한매일 1998년 11월18일자 사설) 5년전 현대 금강호는 이렇게 민족의 염원을 싣고 금강산을 향해 첫 출항의 닻을 올렸다.금강호로 열린 금강산 뱃길은 2000년 6월과 8월에 각각 정주영·몽헌 부자와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간의 면담을 성사시켰다.또한 금강산 종합개발과 개성공단 건설 및 개성관광 사업 합의로 이어졌다.금강산 관광 사업에는 단순한 비즈니스 차원을 넘어 남과 북이 분단을 극복하고 공존공영하자는 민족의 염원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돈이 문제였다.현대그룹은 남북경협 사업을 하면서 지난 5년간 1조원 이상의 손해를 봤다.사업 허가권자인 북한은 막대한 관광사업 대가를 챙겨가는 등돈만 밝혔고,걸핏하면 사업중단에다 번복·지연으로 현대를 궁지로 몰아갔다.게다가 서해교전,북핵 위기,사스 등의 외풍이 시도 때도 없이 불어닥쳐 30년 독점권을 획득한 철도·통신·전력 사업 등의 발목을 잡았다.삼성그룹의 한 관계자는 대북사업에 대해 “남북한 평화와 번영도 좋지만 개별기업이 떠맡기는 너무 큰 부담”이라고 말한다.한마디로 ‘밑 빠진 독’이라는 얘기다. 역사적 당위성과 수익성은 남북경협의 서로 다른 두 얼굴이다.중단 없이 계속돼야 할 민족적 과업이지만,그것이 사업인 한 수익을 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현대와 정 회장의 비극은 아무리 민족의 과업이라 하더라도 수익성을 외면한 사업 추진이 얼마나 무모한가를 잘 보여준다.현대아산이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대북사업을 계속한다고 하지만 돈도 구심점도 없는 상태에서 수익성 없는 사업을 얼마나 추진력 있게 해나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관광공사나 토지공사 등의 공기업이 일부 사업을 떠맡을 수는 있겠지만 총체적인 대북 창구 역할을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남북경협을 계속 추진하기 위해서는 먼저 개별 사업의 수익성을 높여주어야 한다.현대가 북한과 맺은 계약조건으로는 도저히 수익성을 맞추기 어렵다.따라서 재교섭을 통해 계약조건의 변경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북한은 경협사업이 안정적으로 추진될 수 있는 법적·제도적 환경 조성을 서둘러야 한다.우리 정부는 통일비용 부담이라는 관점에서 민간기업과의 역할 분담 및 재정지원 확대에 관한 장기 계획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염 주 영 논설위원 yeomjs@
  • [씨줄날줄] 남도대교

    지리산 맑은 물이 흘러 내려 섬진강과 만나는 곳에 화개장터가 있다.행정구역으로는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 곳은 우리나라 5대 시장의 하나로 꼽혔다.산과 강,바다가 만나는 천혜의 지리적 여건이 만들어낸 ‘섬진강의 보석’이었다. 이 곳에 5일장이 설 때면 내륙지방 사람들은 산나물과 곡식을 가져와 팔고,바닷가 사람들은 뱃길을 이용해 수산물을 가득 싣고 왔다.아랫마을 하동 사람 윗마을 구례 사람이 모여들고,산과 들 바다에서 나는 온갖 것들이 걸쭉한 사투리와 뒤섞여 닷새마다 장을 펼치던 곳이다.그러던 것이 언제부턴지 교류가 뜸해지면서 예전의 활기를 찾아볼 수 없게 됐다.강바닥이 높아져 물길은 끊어지고,강 양쪽을 연결해주던 나룻배도 멈췄다.수백년 ‘만남의 장’을 열어주었던 섬진강은 한동안 소통을 방해하는 단절의 장벽으로 변했다. 그 곳에 하동 사람들과 구례 사람들이 다시 모였다.두 지역 주민들은 지난 28일 전남 구례군 간전면 운천리와 경남 하동군 화개면 탑리 사이를 연결하는 남도대교의 개통을 축하했다.나룻배의 정취는 사라졌지만 그 대신 사람과 차가 건너다닐 수 있는 튼튼한 다리가 놓인 것이다. 다리는 통행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건널 수 있게 해주는 교통수단이다.하천뿐만 아니라 호수나 해협,만,운하 등으로 끊긴 길을 연결시켜 주는 물리적 구조물이다.그러나 다리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인류의 선조들은 다리를 물리적인 구조물로만 보지 않고 정신적인 구조물로 인식했던 것으로 추정한다.로마사람들은 다리를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상징’이라고 믿었다는 기록이 있다.실제로 로마시대에 세워진 많은 석조 아치교들은 신관들이 설계해 건설됐다고 한다.불교에서도 다리를 지어 중생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일이 현세에서의 세 가지 공덕 중 하나라고 가르치고 있다.경주 불국사의 청운교(靑雲橋)와 백운교(白雲橋)는 속세와 불국(佛國)을 연결하는 매개체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다리는 왕래와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만약 다리가 없었다면 인류는 아직도 원시적인 고립과 단절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남도대교가 동서로 갈라진 마음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마음의 다리가 되길 기원해본다. 염주영 논설위원
  • 올여름 가볼만한 서해안 섬 3곳

    장고도 충남 보령시 대천항에서 서북쪽으로 21㎞ 떨어져 있는 섬.섬이 장구처럼 생겼다고 해 장고도란 이름이 붙었다.100여가구 300여명의 주민들이 어업에 종사하는 전형적인 어촌으로,곳곳에 백사청송(白沙靑松)이 해안을 덮고 있다. 특히 장고도 마을 뒤편의 당너머해수욕장과 명장섬 해수욕장은 알맞은 수심과 고운 모래로 해수욕을 즐기기에 그만이다.당너머해수욕장의 백사장 끝에는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용굴이 있고,용굴 너머 북쪽으로 명장섬이 자리하고 있다.약 2㎞의 광활한 백사장이 펼쳐지는 모습이 장관이다.명장섬 주위엔 암초가 발달돼 있어 낚싯대를 드리우면 우럭,노래미 등이 심심치 않게 올라온다. 대천항 여객선터미널(041-932-3758)서 장고도까지 여객선이 1일 3회 운항되며,섬 내에선 걸어다녀도 충분하다.명장섬 인근에 바다사랑(041-931-3867),유리네가든(041-936-1484),당너머해수욕장 주변에 마도로스(041-932-3758)등 민박집이 있다. 백령도 서해안 해변은 경사가 완만하고 수온이 적당해 아이와 함께 해수욕을 즐기기에 알맞다.다만 펄층이 많아 물이 탁한 것이 흠.그러나 먼 바다로 나가면 청정한 물과 백사장,기암 절벽 등을 갖춘 섬이 수두룩하다.서해 최북단의 백령도와 충남 보령시 장고도,전남 신안군 임자도를 소개한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뱃길 240㎞.초쾌속선으로 4시간이 걸린다.하지만 먼 만큼 보람도 큰 곳이 백령도다.섬 북서쪽 끝자락에 자리잡은 두무진은 ‘서해의 해금강’으로 불릴 만큼 기암괴석이 아름답다.두무진 앞바다엔 심청이 공양미 300석에 몸을 던졌다는 ‘인당수’가 전해내려오고,섬 북동쪽 꼭대기에는 효녀 심청을 기리기 위한 ‘심청각’이 세워져 있다. 백령도(인천시 옹진군)의 대표적 해수욕장은 섬 남쪽의 콩돌해안과 용기포 선착장 아래의 ‘천연사곶비행장’.콩돌해안은 콩 모양의 작은 돌멩이가 해변을 이루고 있어 붙여진 이름.물속에선 콩알만한 것이 물에서 멀어질수록 크기가 크다.매끈한 콩돌을 맨발로 밟는 느낌이 상쾌하다.해안은 경사가 가파른 편.따라서 어린아이들이 해수욕을 즐기기에는 부적합하다. 길이가 4㎞에 달하는 천연사곶비행장은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 때 비행장으로 사용했던 해수욕장.지금도 비행기가 이착륙할 수 있을 정도로 백사장이 단단하지만 비행장으로는 쓰이지 않는다.경사가 완만하고 물이 맑아 아이들도 마음놓고 들어가 놀 수 있다. 인천 연안여객선터미널에서 하루 3차례 백령도행 배가 출발한다.배삯은 편도 4만 3300원. 섬에선 렌터카(032-836-7001),개인택시(032-836-0117)를 이용하면 된다. 면사무소 소재지를 중심으로 여관과 민박집이 많다.1㎏에 4만원이면 인근 해안에서 잡힌 싱싱한 우럭이나 노래미회를 맛볼 수 있다.문의 백령면사무소(032-836-1771). 임자도 예로부터 ‘임자도 처녀는 모래 서말을 마셔야 시집간다.’란 말이 있을 정도로 모래로 뒤덮인 섬이다.특히 섬의 북서쪽 대기리와 광산리를 잇는 길이 12㎞,폭 200m의 대광해수욕장에 서면 외국의 사막을 연상케 하는 엄청난 규모에 입이 딱 벌어진다.썰물때 백사장 너머 갯벌이 모습을 드러내면,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진흙을 온몸에 바르고 뒹굴다 바닷물에 뛰어들면서 해수욕을 즐긴다.해수욕과 함께 즐길 수 있는 것이 낚시.민어,우럭,돔 등이 주로 잡힌다. 임자도행 배는 신안군 지도읍 점암선착장에서 1시간마다 출발한다.임자면 진리항까지 20분 소요.배삯은 800원.승용차는 1만3700원.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서 지도읍까지 고속버스가 매일 오후 4시15분 한차례 출발한다.배편 문의 점암여객매표소(061-275-9448).대광해수욕장 뒤편으로 최근 개장한 썬비치모텔(061-275-8484) 등 여관과 남정선씨 집(061-262-0566) 등 민박집이 제법 많다. 글·사진 임창용기자 sdargon@
  • 제3세계 문화가 뜬다

    해외 문화교류의 양상이 변하고 있다.선진국 일변도에서 벗어나 제3세계가 교류국으로 떠오르고 있다.서양 문화 수입이라는 단계를 뛰어넘으면서,우리의 높아진 문화수준을 바탕으로 진정한 의미의 문화 다변화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미술교류의 시작 인도양에 떠 있는 섬나라 스리랑카의 대표적인 화가 세나카 세나나야케 초대전이 30일부터 5월6일까지 서울 인사동의 경인미술관과 공화랑에서 열린다.한국과 스리랑카가 국교를 맺은 1977년 이후 스리랑카 예술이 한국에 소개되는 것은 처음이다. 세나카는 스리랑카의 전통 미감을 현대적 조형언어로 다시 해석해냄으로써 국내외에서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는 작가.등장하는 인물이나 동물은 한결같이 후광을 두르고 있는데,실제로 불교적 윤회를 표현하려 했다. 그는 독일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20여개국에서 100여회의 개인전을 가졌다.작품은 미국 백악관,국제연합빌딩,베를린 주립미술관 등에 걸려있다.한국전에는 ‘도자기를 파는 여인들’‘코끼리와 여인’‘플라밍고’‘아침 요가’ 등 70여점을 출품한다. ●교류의 선두주자는 원장현 대금 및 거문고 연주자 원장현은 1992년부터 ‘한국과 아시아’라는 주제로 해마다 각국의 음악가들을 초청하여 연주회를 갖고 있다.그동안 인도와 이란·몽골 등의 전통음악가들과 연주했다.올해도 베트남 민속음악단을 불러 새달 1일 오후 8시 호암아트홀에서 베트남 민요와 민속악기인 단바우 독주 등을 선보인다.원장현은 “우리 음악도 세계 음악의 한 페이지”라면서 “주변과 대화하고 이해하는 공동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초대형 교류 추진하는 소리축제 전주세계소리축제는 올해 ‘미지의 소리를 찾아서-소리길 실크로드’라는 의욕적인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실크로드를 따라 융성했던 상업과 문화가 깃든 각 나라의 음악을 한 자리에서 감상해보자는 의도다. 유라시아 접경의 이탈리아 그리스 이집트 오만,서역의 터키 이라크 이란,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중국의 돈황과 우루무치,뱃길의 인도 스리랑카 미얀마 베트남 등 14개국 음악인 및 공연단을 초청한다는 계획이다.소리축제는 9월27일부터 10월5일까지 열린다. ●국가홍보를 위한 문화교류도 변한다 국립국악원은 지난 5일부터 15일까지 인도의 첸나이 뭄바이 뉴델리,방글라데시의 다카를 순회하며 연주회를 가졌다.스리랑카에서 한국전통음악이 연주된 것은 처음,인도에서는 두번째다. 그동안 국가홍보를 위한 해외연주야말로 몇몇 선진국에 집중됐던 것이 사실.이번 연주회는 제3세계 교류에 눈을 돌리는 신호탄이 됐다.무엇보다 인도는 전세계에서 서양음악이 발을 붙이지 못하는 유일한 나라.인도음악은 한국음악과 상당히 비슷한 형태를 갖고 있다. 김종면 서동철기자 jmkim@
  • 일본의 ‘구조개혁특구’

    ‘지방발 경제회생’이라는 특별임무를 띤 일본의 구조개혁특구가 21일 가동에 들어갔다.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이날 기타큐슈(北九州)시의 국제물류특구를 비롯한 57건의 특구 인증서를 해당 지방자치단체장 등에 교부했다.고이즈미 정권의 야심작인 구조개혁 특구는 과감한 규제완화로 지방경제를 활성화한다는 데 주안을 두고 있다.기타큐슈 등을 통해 일본의 특구제도를 살펴본다. |기타큐슈·나고 황성기특파원|부산에서 뱃길로 3시간 반 거리 기타큐슈의 북쪽,동해와 맞닿은 매립지.길을 내고 땅을 다지고 건설하는 공사가 매립지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버려졌던 2000㏊의 광대한 매립지가 활기를 되찾고 있는 기타큐슈의 특구 현장이다. 지난 1월 중순 지방자치단체나 민간이 일본 정부에 낸 특구 구상의 상당수가 실체를 느끼기 힘든 무형의 제안이었다면,기타큐슈의 ‘국제물류 특구’는 아이디어와 그 아이디어를 실천하는 현장이 존재해 실감이 든다. 24시간 통관·검역을 목표로 하고 있는 히비키 컨테이너 터미널에서는 크레인 설치가 한창이다.기타큐슈시 항만국의 이마나가 히로시 기획과장은 “국제물류 특구의 중심지로 2004년 4월에 오픈할 예정”이라고 설명한다.터미널 바로 옆 바다에서는 초대형 컨테이너선의 입항도 가능하도록 수심을 15m로 고르는 바닥 퍼내기 공사가 진행 중이다. ●컨테이너 年 40만개 유치 목표 한해 40만개의 컨테이너 유치가 목표.한해 800만개인 부산항과 비교하면 적은 규모이지만 “기타큐슈 부흥의 메카로 삼는다.”(이마나가)는 꿈에 부풀어 있다. 터미널에서 승용차로 동쪽으로 이동하면 히비키나다 임해공업단지가 나온다.드문드문 공장이 들어서 있는 이곳도 매립지의 대부분이 공터이다. 기타큐슈시 기획정책실의 다니노부 마사오는 “규제에 묶여 매립지 지주들이 땅을 팔지 못하고 있으나 특구법 시행에 따른 규제 완화로 기업들이 싼값에 땅을 사들여 공장을 지을 수 있게 됐다.”고 특구의 장점을 강조했다.이곳에는 자동차부품,에너지산업과 함께 환경산업 등 30개사를 유치할 계획이다. 기타큐슈의 특구에서 엿보이듯 일본 정부의 구조개혁특구는 두 가지대원칙에서 진행되고 있다.첫째,보조금이나 감세 조치·재정 지원을 일절 하지 않고 둘째,국가가 아닌 지자체나 민간이 스스로 비즈니스 모델을 찾아내 특구의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다. ●지자체·민간이 특구모델 개발 일본 제1의 철강도시였던 기타큐슈는 2차대전 패전을 고비로 급격히 쇠퇴했다.철강의 중심이 동해권에서 태평양권인 지바나 가나카와로 옮겨가면서 한때 4만명이던 철강업 종업원이 지금은 4000명으로 줄었다. 퇴락의 길을 걷던 기타큐슈는 ‘환황해권의 허브 항구’라는 부흥 계획을 내걸고 재건을 꾀하던 중 때마침 일본정부의 특구 추진과 접합하게 된다. 특구의 중핵을 이루는 히비키 컨테이너 터미널은 기타큐슈가 창안한 PFI(Private Finance Initiative) 방식으로 운영된다.PFI는 공공시설의 건설·운영에 민간의 자금과 노하우를 활용해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이다.히비키 터미널의 경우 방파제 공사나 준설,터미널의 기초공사는 국가와 시가 맡고 지상의 크레인이나 하역기계,관리사무소는 민간운영회사가 맡는다. 38억 5000만엔의자본금 중 현재 싱가포르의 세계적인 항만관리회사 PSA가 34%를 출자하고 나머지를 신일본제철,미쓰이물산 등 16개사와 기타큐슈시가 분담 출자해 설립한다. “그동안 인천,홍콩 등을 경유해 오사카,도쿄를 거쳐 미국 서해안으로 향하던 ‘태평양 루트’가 주류였으나 아시아 경제발전에 의해 상하이나 부산,기타큐슈를 거치는 ‘동해 루트’가 중요해질 것”(이마나가)이라는 것이 국제물류특구의 전략이다. ●홍콩등 2개 금융기관 입주 ‘순조' 일본의 또 하나의 특구는 오키나와 나고(名護)시의 금융특구이다.돈을 들이지 않고 규제만을 풀어 경제 활성화를 노리는 구조개혁 특구와는 다르다.특구란 이름은 기타큐슈시와 다를 바 없지만 나고시의 경우 금융특구에 필요한 인프라 예산을 정부로부터 지원받고 세제면에서도 우대받는 ‘1국 2제도’를 취하고 있다. 나고시의 목표는 경제자립.전국 최고인 10%의 실업률,산업시설이라고 해야 종업원 200명의 맥주공장밖에 없는 나고시로서는 지방교부세에 의존하지 않는 자립이 숙원이다. 나고시의 다마키 쓰네미특구추진실장은 “올해 나고시 고교졸업자 60%가 취직을 못했다.파인애플 같은 농업은 국제경쟁에서 뒤지고 제조업도 중국을 따라잡지 못한다.남은 것은 금융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나고시의 모델은 아일랜드 더블린의 금융특구다.20%에 가까운 실업률로 유럽연합(EU) 권역에서도 빈국에 속하던 아일랜드는 1980년대 후반 금융특구로 생사의 승부를 걸었다.지금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프랑스를 제쳤다.금융 하나로 나라가 일어선 드문 사례이다.“더블린도 처음 7∼8년간은 고생을 했습니다.그런 면에서 나고시의 출발은 순조로운 편입니다.”(다마키) 입주하는 금융기관의 법인세 35% 감세,통신비 무료,저렴한 임대료 등의 특혜가 주어지는 나고시의 특구에 홍콩 등 2개 금융기관이 들어왔다.현재 고용은 60명 정도. “특구에서 10년간 고용 5000명이 목표”라는 다마키 실장은 “인구 5만 7000명의 나고시에서 5000명이라면 그 가족까지 쳐서 10%의 고용효과가 있으며 나고시의 자립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고 특구의 장래성을 평가했다. marry01@ ■특구 현황 일본 정부가 지난 1월 실시한 제2차 특구 모집에는 651건이 몰렸다.지방자치단체 외에도 기업이나 NPO(비영리조직)의 응모가 가능토록 한 탓에 1차 때보다 크게 늘었다.관광객 증대를 위한 한국인 무비자 특구,복권 특구,카지노 특구 외에도 주식회사의 학교·병원 운영이나 농업 참가 등이 눈에 띄는 특구 구상이다.이들 구상에 정부가 규제를 완화하겠다고 ‘긍정적’으로 응답한 것은 27%.한국인 무비자의 경우 “불법체류·범죄가 많다.”고 해서,카지노는 “도박죄에 해당된다.”는 등의 이유를 붙여 거부했다. 끝까지 쟁점이 됐던 NPO의 학교 운영,주식회사의 병원 경영,막걸리 제조 자유화 가운데 학교 운영은 “모집 학생을 등교 거부 학생이나 학습장애아로 한정한다.”는 조건을 붙여 막판에 통과됐다.막걸리 제조·판매 자유를 허용하는 특구도 통과됐으나 당초 요청한 제조등록제나 간이납세제도는 중앙부처에서 인정되지 않았다.주식회사의 병원 경영도 의사회의 맹반발로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특정진료에 한정해 허용했다.기득권을 지키겠다는 중앙부처나 이익단체의 저항에 당초 취지의 과감한 규제 완화는 실현되지 못했다는 평가이다.4월의 57건에 이어 5월에 추가로 50여건의 특구를 인증할 예정이다. ■기타큐슈 스에요시 市長 |기타큐슈 황성기특파원|“한국과 일본의 특구는 다릅니다.한 지역에 집중투자해서 지역 진흥을 하자는 것이 한국이라면 일본은 세금 우대도 안되고,새 예산이 들어가는 것도 안됩니다.규제 완화밖에 없습니다.” 국제물류 특구로 인증받은 기타큐슈시의 스에요시 고이치(68) 시장은 “새발의 피 같은 규제 완화이지만 그래도 숨통이 트인다.”고 강조한다.“(중앙)부처간 협의가 안 됐다거나 과장 지시라고 해서 안 되는 것이 일본에는 너무 많다.”는 그는 정부가 규제를 완화해 주고 지방은 특구 운용의 책임을 갖게 됨으로써 지방경제에 활기가 생겨날 것이라고 확신했다. 정부가 매립지 토지이용 규제를 다소 풀어준 것만으로도 “너무 고맙게” 생각한다.“불과 서너개의 규제를 푸는 데도 1년 반이 걸렸습니다. 어떤 규제를 어떻게 푸는가,민간은 어떤 완화를 원하고 있는지를 공부하고 정책화하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들었습니다만…” “기타큐슈에는 2000㏊의 광대한 매립지가 있고 기술이 있고,근대공업을 받쳐온 지역이라 전기,물,정보 같은 인프라가 있습니다.이런 지역 특성을 살려 저비용의 도시를 만들자는 것이 특구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철(鐵)의 도시’ 기타큐슈가 갖고 있던 유·무형 자원을 그대로 살리되 중앙의 규제로 꽉 막힌 부분을 특구법에 의한 지역한정의 규제 완화를 통해 앞으로도 풀어나간다는 전략이다. 스에요시 시장은 대담한 규제 완화,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이 뒤따르는 “한국,중국의 특구가 부럽다.”고 한다.한국 같은 특구를 해보라고 한다면 “모든 조직을 가동하고 지혜를 짜내 마음껏 하고 싶다.”고 덧붙인다. 기타큐슈가 구상하는 특구의 중핵은 ‘히비키 컨테이너 터미널’에 컨테이너 물량을 대량 유치하는 것이다.부산,광양항이나 중국의 상하이가 라이벌인 셈이다. 부산을 꺾을 묘책이 있냐고 묻자 “한국은 우리를 전혀 겁낼 필요가 없다.”고 웃는다. “컨테이너 800만개물량의 부산과 20분의 1인 기타큐슈(40만개)가 경쟁이 될 리가 없다.”며 경쟁보다는 한국,중국과의 협조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중국 물량이 향후 10년간 10배 늘어난다고 가정하면 중국으로 가는 컨테이너를 얼마나 기타큐슈로 돌릴 수 있을 것인지가 관건”이라는 그는 “물류만의 싱가포르가 아니라 배후에 산업거점도 가진 물류와 산업의 세트도시를 만들겠다.”는 것이 특구의 최종적인 목표이다.
  • [이색 패키지투어] 하동포구 드림 세일링

    섬진강 하류는 강변 풍치가 한 폭의 동양화처럼 아름답다고 해 예부터 ‘하동포구 팔십리’라고 불린다. 뱃길을 따라 전국 제일을 자랑하던 하동김 산지 갈사도와 소머리 모양의 두우산,지금은 광양시 마을이 들어선 중섬이 이어진다.또 섬진교와 섬진강 철교,그 밑으로 백사(白沙)가 그림처럼 펼쳐지는데,백사 뒤편으로는 노송림이 숲을 이루어 별경을 자랑한다. 강을 좀더 거슬러 오르면 다압나루를 지나 풍요로운 악양 평사리 들이 다가오고,마을 뒷산엔 고소산성이 우뚝하다.악양루 그늘이 동정호에 비치고,해질녘 멀리 포구를 돌아오는 모습과 떨어지는 낙조의 아름다움은 수많은 묵객(墨客)들의 시심(詩心)을 동하게 했다. 과거 범선이 오가던 이 뱃길은 산업화와 함께 끊어졌는데,최근 한 여행사가 이 뱃길을 오르는 여행상품을 내놓아 관심을 끈다.열차를 타고 여수에 도착,여객선터미널에서 유람선을 타고 오동도∼여천공단∼광양제철 코스를 지나 섬진강에 진입,섬진교 밑을 지나 하동포구공원에 상륙하는 크루즈 상품.한려수도와 하동포구 팔십리를 연계했는데,예의 돛단배보다야 못하지만 제법 운치를 느낄수 있다.거문도관광여행사(061-665-4477).
  • 금강산 육로관광 4월까지 예약 밀려

    금강산 육로 시범관광단이 1박2일과 2박3일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옴에 따라 본격적인 금강산 육로관광시대가 열리게 됐다. 오는 21일부터 2∼3일 간격으로 매회 400∼500명이 금강산을 찾을 것으로 전망되지만 금강산 관광이 상품으로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13시간에서 1시간대로 배를 이용하던 금강산 관광 초기에는 동해항에서 장전항에 도착하는데 13시간여가 걸렸다.이후 직선항로를 이용하면서 4시간 남짓으로 줄었지만 뱃길은 여러 면에서 불편했다.그러나 육로 시범관광단은 불과 1시간 20여분 만에 장전항에 도착했다.오가는 시간이 단축됨에 따라 요금도 25만원선으로 내려 금강산을 찾는 관광객이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금강산 육로관광객은 오는 4월까지 이미 예약이 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현대아산에서는 1∼2년 후에는 100여만명 가량이 육로로 금강산을 찾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남은 과제는? 셔틀버스가 30분단위로 운행돼 자유롭게 숙소와 온정각,금강산 등산로를 오갈 수 있게 됐다. 그러나쇼핑시설이나 골프장 등 놀이시설은 여전히 부족하다.관광객들은 돈을 쓰려 해도 쓸 곳이 없는 것이다. 북핵문제로 국내외에서 투자자를 모집하기가 어려운 것도 난제로 꼽힌다.김윤규 현대아산 사장도 “최근 사태로 해외투자를 기대하기가 쉽지 않다.”고 털어놓았다. 만약 투자가 이뤄지지 못하면 다양한 금강산 상품을 내놓기가 어려워진다.그만큼 관광상품으로서의 매력은 반감되는 것이다. 현대아산 관계자도 “육로관광이 금강산 관광사업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투자가 뒤따르지 않으면 큰 수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김성곤기자 sunggone@
  • 윤선도 ‘어부사시사’ 무대 ‘보 길 도’

    해남 땅끝마을에서 보길도로 이어지는 뱃길.선창을 넘어 코 끝을 스치는 바람이 예사롭지 않다.보길도에선 벌써 ‘봄의 반란’이라도 시작되었나? 한겨울을 나며 맵디매운 북풍에 길들여졌던 서울 나들이객의 코에,남녘 봄바람은 갓 추수한 햇벼를 찧어 지어낸 밥 맛처럼 달콤하기만 하다. 땅끝 선착장을 출발,넙도에 잠시 들른 배가 1시간 만에 도착한 곳은 보길도 청별항.보길도를 처음 찾는 사람들은 섬의 아름다움에 취하기에 앞서 고산 윤선도에 대한 부러움이 앞서기 마련이다. 출사와 유배를 거듭했던 고산에게 보길도는 ‘은둔의 섬’이었다.그러나 그는 초가삼간에서 짚신을 삼기보다는 연못과 정자를 멋스럽게 꾸며놓고 사시사철 시를 읊던 풍류객이었다. 그는 스스로 ‘은인’(隱人)라고 하면서도,숨어 있지 않고 적극적으로 풍류적 삶을 즐겼다.보길도는 한국 시조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고산의 ‘어부사시사’(魚夫四時詞)의 무대다. 고산의 체취는 보길도 구석구석에서 느낄 수 있는데,그중 대표적인 곳이 ‘세연정’(洗然亭)이다. 연못에 비친정자의 선명함만큼이나 세연정엔 벌써 봄빛이 완연하다.정자를 세우며 심었다는 동백은 앞다퉈 꽃망울을 터뜨리고,연못가에선 파란 생명들이 담수를 자양분 삼아 고개를 내밀어 방문객을 반긴다. 세연정은 주인의 풍류를 그대로 드러낸다.고산은 계류(溪流)에 보를 막아 계담(溪潭)인 세연지(洗然池)를 만들고,그 옆에 인공연못인 ‘회수담’을 조성해 물이 흘러 들게 한 다음 세연지와 회수담 사이에 정자를 세웠다.그 정자가 바로 세연정이다. 고산이 ‘수석경’(水石景)이라고 이름붙였던 일곱 바위들과 고즈넉이 자리잡은 정자,동백나무 숲이 어우러진 자연과 인공의 조화가 절묘하다. 고산은 이곳에서 어부사시사를 지어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와 춤을 추게 하며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지금의 정자는 나중에 새로 복원한 것이지만,계류를 막은 보와 물가에 쌓은 석축은 상당 부분 당시의 것이 그대로 남아 있다.정자 옆의 노송도 그 굵기와 크기로 미루어 고산이 아끼던 친구였음이 분명하다. 고산의 ‘끼’는 부용리 뒷산인 안산 중턱에 지은 한 칸 정자 ‘동천석실’(洞天石室)에서도 드러난다.솔향 그윽한 산길을 15분 쯤 오르면 바위와 소나무숲 사이로 얼굴을 내미는 게 있는데,바로 동천석실이다. 고산은 여름철이면 이곳에 올라 마을을 굽어보며 글을 읽고 시를 읊었다.재미있는 것은 그가 마을의 집 마당에서 동천석실까지 밧줄을 매 필요한 것들을 올려보내게 했다는 사실.산 위에서 색깔이 있는 수기를 들어 색깔별로 미리 정해진 물건이나 주안상 등을 줄을 통해 올리게 했다고 한다. 발길을 돌려 보길도에서 가장 높은 격자봉(格紫峯·430m)에 올랐다.고산이 섬에 처음 들어왔을 때 섬의 형국과 혈맥을 파악하기 위해 올랐다는 산이다. 아침해가 떠오를 때 산의 전면이 붉은색으로 변한다고 해 적자봉(赤紫峯)이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산엔 동백과 소사,회양목,황칠,야생란,가시나무 등 난대식물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기암괴석들과 어우러져 절경을 연출한다.정상에 서면 바로 앞에 점처럼 떠 있는 복생도와 임금왕(王) 자 모양의 자지리섬이 한눈에 들어온다.복생도는 풍란향(風蘭香)으로 유명하다.자지리섬은 바로 그 옆의 복생도 때문에 구슬옥(玉)이 되어 대대로 큰 인물이 나지 않는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보길도에선 꼭 여름이 아니라도 예송리 해수욕장에 한번 들러볼 만하다.길이 1㎞,폭 150m의 해변은 가무잡잡하면서도 동글동글한 자갈,이곳 주민들이 ‘깻돌’로 부르는 청와석(靑瓦石)으로 뒤덮여 있다. ‘차르르 차르르’,파도에 밀려 오르내리며 내는 소리에 누구든지 홀딱 빠져들기 마련인데,이 매혹적인 소리 때문에 ‘흑명석’(黑鳴石)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해안엔 소나무,동백나무,후박나무,잣밤나무,생달나무,광나무 등 수백년 전 섬 주민들이 방풍림으로 심은 상록수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곳 상록수림은 한여름이면 피서객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선사해 준다. 보길도 글·사진 임창용기자 sdragon@kdaily.com ★여행가이드 ●가는길 해남 땅끝 선착장이나 완도 화흥포항에서 보길도행 배를 타야 한다.1시간 정도 소요.출항시간이 자주 바뀌므로 땅끝(061-533-4269)이나 완도(061-555-1010) 선착장에 미리 확인해야시간 낭비를 줄일 수 있다.또 출발할 때는 멀쩡하던 날씨가 변덕을 부려 배가 묶이기 십상이므로 완도 기상대(061-552-0131)에 날씨 상황을 미리 알아보아야 낭패가 없다.배삯은 6700원.1만 5000원을 내면 승용차를 싣고 갈 수 있는데,운전자는 배삯을 따로 내지 않아도 된다. 서해안고속도로 목포나들목를 빠져나와 2번 국도와 13번 국도를 차례로 갈아타면 해남에 당도한다.해남에서 13번 국도를 타고 계속 직진하면 완도,813번 지방도로 갈아타면 땅끝마을로 갈 수 있다.섬에선 총 3대가 운영중인 버스(061-553-7077)나 택시(061-553-6353)를 이용하면 된다. ●숙박·먹거리 보길도엔 대부분의 집들이 민박을 겸한다.요즘같은 비수기엔 예약 없이도 2만원에 방을 구할 수 있다.그러나 피서철엔 예약이 필요한데,세연정 인근에서 찻집을 겸해 운영중인 ‘동천다려’(061-554-0868)가 추천할 만하다. 먹거리는 특별히 내세울 만한 게 없다.대부분의 식당이 민박과 겸하면서 음식을 내는데,5000∼7000원 정도면 생선구이와 찌개,몇 가지 반찬을 올려준다. ●가볼 만한 곳 고산의 유적과 예송리 해수욕장 이외에도 목섬과 남은사,솔섬 등이 가 볼 만하다.안산 7부 능선쯤에 자리잡은 남은사는 100여년 된 작은 암자.암자 자체보다는 그곳까지 가는 길의 갈대밭과 나무터널이 아름답다. 통리 해수욕장에 가면 하루 두차례 썰물 때마다 목섬까지 바닷길이 갈라진다.길을 따라 섬에 들어가면 부안의 채석강을 닮은 기암절벽을 감상할 수 있다.정동리 앞에 있는 솔섬은 수백년 수령의 노송 수십그루가 심어져 있는 미니섬.이곳에서 보는 일몰은 고즈넉하고 한가로운 느낌을 준다.
  • [우리고장이 원조]땅끝마을

    한반도 최남단은 어디일까.백두산 천지에서 용틀임한 한반도 정기는 백두대간을 타고 힘차게 내뻗어 노령산맥 줄기가 다하는 곳에 똬리를 틀었다.민선이후 지방자치단체마다 관광상품 개발과 성과를 단체장 치적으로 내세우면서 ‘땅끝논쟁’에 불이 붙었다.전남 해남의 ‘원조 땅끝론’에 완도군이 ‘신 땅끝론’으로 맞받아치고 있다.뭔가 각오를 다지려는 사람들이 늘면서 이제 ‘땅끝’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자 출발점이 되고 있다.연말과 새해벽두면 국토순례단이 찾는 단골 출발점이자 수학여행단과 단체관광객이 몰려와 셔터를 눌러대는 물좋은 관광상품이다. ★해남 갈두마을 대한민국 전도를 펼쳐보라.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갈두(땅끝)마을은 보다시피 육지의 맨끝에 놓여 있다.각종 문헌에도 한반도의 땅끝으로 공인돼 있다.흔히 땅끝마을로 불리는 곳이 갈두마을이다.순 우리말로 칡머리라는 뜻이다.원님이 마을 진상품인 칡을 보고 이름지었다고 전해진다. 이 땅끝마을 끝에 있는 86년에 세워진 땅끝탑이 위도상으로 북위 34도17분21초로 기록돼 있다.한반도 뭍에서 이보다 더 낮은 위도는 없다.땅끝마을에서 12대째 사는 이장 김유복(55)씨는 “주민들이 국립지리원에 요청해 토말이란 한자말 대신 94년부터 순우리말인 땅끝으로 공인받았다.”고 말했다. 땅끝이 알려지게 된 것은 80년대 초반.윤선도 유적지인 완도 보길도를 찾는 사람이 급증함에 따라 땅끝마을이 뱃길(1시간)로 가는 최단항로로 개발되면서부터다. 땅끝에 가면 땅끝을 알리는 기념물이 3개나 버티고 있다.땅끝마을 바닷가에 서있는 땅끝탑(높이 10m)과 갈두산 사자봉 전망대 아래쪽에 땅끝비(1.2m)가 있다.삼각형의 땅끝탑에는 ‘우리나라 맨 끝의 땅,갈두리 사자봉 땅끝에서 서서 길손이여….’라고 새겨져 있다.사자봉 아래쪽에 묘비석처럼 생긴 땅끝비에는 ‘태초에 땅이 생성되었고 인류가 발생하였으니….’라는 시를 우록 김봉호선생이 남겼다. 군은 사자봉에 있던 기존 땅끝 전망대를 헐어내고 지난해 33억원을 들여 전망대를 새로 세웠다.남북통일을 염원하고 21세기 세계로 뻗어가는 대륙의 출발점을 지향,‘동방의 횃불’을 형상화한조형물이다.지하 1층 지상 9층에 높이 39.5m로 전망탑과 소망 새기기 판 115개가 부착돼 있다. 해남군은 86년 송호리에 460억원을 들여 2006년까지 20년 계획으로 ‘땅끝 관광지’를 만들고 있다.조금 떨어진 통호리 9만 8000㎡에는 100억원으로 2004년까지 조각공원을 조성중이다.기반공사를 마치고 올부터 장승 30점,조각작품 20점,미술관 1동을 설치한다. 해남군 공보계 조충범(50·6급)씨는 “지난해 땅끝에서 마련한 해맞이에 관광객 1만 5000명이 몰려와 소원을 빌었고 지난 한해동안 이곳을 찾은 관광객은 128만여명으로 집계됐다.”고 말했다. ★황도훈 해남 문화원장 1861년 고산자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에서 한반도 남쪽의 끝을 ‘갈두’로 표기했고 현재도 이 지명이 남아 있다.‘갈두’를 ‘토말’로 하다가 지금은 ‘땅끝’으로 부른다. 여기서 한양까지 1000리,한양에서 함북 온성부까지 2000리로 잡아 한반도를 3000리로 보았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만국경위도에서 남쪽 기점을 해남현으로 잡았다.육당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에서도 “3000리 금수강산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해남 땅끝에서 함북 온성까지로 잡아 3000리 금수강산이며,대륙에서 내려온 우리민족이 이곳에서 발을 멈추고 한겨레를 이루었다.”고 적었다. 반도의 끝이란 모름지기 대륙에 이어진 곳이라야지 바다를 건너서 땅끝이 있다면 제주도를 한반도의 땅끝으로 봐야 한다. 한마디로 완도가 땅끝이라는 주장은 그야말로 억지다.또 국민 정서적으로도 맞지 않다.다리가 연결된 섬이 육지라면 그런 육지는 얼마든지 많기 때문이다. ★완도 넉구지 지난해 광주와 전남 도심 곳곳에 내걸린 ‘신 땅끝 완도에서 해넘이와 해맞이를’이라는 플래카드가 눈길을 끌었다. 완도에서는 ‘원조 땅끝론’ 시대는 가고 ‘신 땅끝론’ 시대가 왔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주민들은 “시시각각으로 세상이 변하고 있다.바다가 육지가 되고,있던 섬도 사라진다.완도는 더 이상 섬이 아니다.”라고 입을 모은다. 완도읍 중도리 고갯마루인 넉구지는 북위 34도16분59초다.해남 땅끝보다 1분이상이 적으니까 말하자면 직선거리로 따져도 1850m나 아래쪽에 있는 셈이다. 2대째 고향을 지키는 중도리 이장 최광채(48)씨는 “70년대까지 넉구지에 5∼6가구 사람이 살았으나 간첩이 출몰한 이후 지금은 군부대 초소만 있다.”며 “2∼3년전부터 신 땅끝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지난 68년 섬과 뭍을 잇는 완도대교가 놓이면서 완도는 도서촉진법상 육지로 분류되고 있고 지도상으로도 맨아래쪽이다. 이 때문에 완도군은 정부로부터 도서개발비를 한 푼도 지원받지 못하고 있다. 97년 개정된 도서개발촉진법 시행령 제1항에 ‘도서(섬)는 만조시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곳을 말한다.’고 규정돼 있다.하지만 2항에서 방파제나 교량으로 육지와 연결된 때부터 10년이 지난 섬은 더 이상 해상의 섬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공박하고 있다. 완도군은 넉구지에서 3㎞ 떨어진 정주산 일대 5만 6000여㎡에 60억원을 들여 전망대와 진입도로,주차장,산책로,조각공원을 조성한다.다음달 공사에 들어가 내년까지 마무리한다. 전망대는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전망대 바닥 부분을 50.7m로 높여 총 높이는 57.7m로 한다.1층에는 특산품 판매장과 휴게실·식당·전시장 등을 갖추고 2층에는 망원경을 갖춘 전망실로 꾸민다. 완도군 경제정책팀 김승조(40·7급)씨는 “완도(청해진)는 장보고 대사의 찬란한 해양문화를 꽃피운 역사유적지가 산재하며 이를 신 땅끝 관광지와 연계해 해양역사의 체험 및 휴양 관광지로 개발하겠다.”고 말했다. 해남·완도 남기창기자 kcnam@kdaily.com ★김희문 완도문화원장 연륙이 된 뒤 완도는 지도상에서 한반도 최남단에 자리하고 있다.주민들은 해남 땅끝보다 아래쪽에 있으므로 당연히 완도가 새로운 땅끝이 돼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위도상으로 볼 때 ‘넉구지’는 왕두산 끝자락이다.한때는 넉구지를 산의 이름을 따 왕머리라고도 불렀다.그 옛날 바다를 항해하던 배들이 뭍이 가장 가까운 이곳 넉구지에 배를 대고 올라왔다는 기록이 있다. 1605년 가리포진(현 군청자리)의 방어를 책임진 최광 첨사가 완도 앞바다에서 왜구를 전멸했다.이후 한 많은 왜구의 시신이 밀려서 비가 오거나 궂은 날씨가 되면 떠올라이들의 넋이 운다고 해서 넉구진이란 이름이 붙었다는 전설도 있다. 지난해 군민들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신 땅끝인 이곳을 널리 알리고 관광상품으로 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아무튼 완도대교 개통 이후 이제 완도는 더 이상 섬이 아니다.옛날 사고방식대로 해남만이 땅끝이라는 고집은 접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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