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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자도 낚시 어선 전복] “서로 뺨 때리며 저체온증 견뎠는데 해경은 우리쪽으로 불도 안비췄다”

    “온 힘을 다해 버텼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살 가망이 없는 것 같았다. 해경 함정이 멀리 보이기는 했으나 우리 쪽으로 빛을 비추지도 않고 그냥 지나가고 그랬다.” 제주 추자도에서 돌고래호가 전복되기 직전에 탈출해 가까스로 11시간 만에 어선에 구출돼 생존한 이모(49)씨는 처절했던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이씨와 함께 전복된 배 위에서 간신히 몸을 버티며 의지했던 박모(38)씨는 “배에서 잠들어 있었는데 배의 시동이 꺼지면서 선장이 밖으로 나가라고 했고 그 와중에 배에 물이 들어왔다”면서 “내가 맨 마지막으로 배에서 빠져나가자 동시에 배가 뒤집혔다”고 긴박했던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돌고래호 탑승객 21명(해경 추정) 가운데 생존자는 이씨와 박씨, 김모(47)씨 등 3명뿐이다. 이들은 현재 제주한라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다. 병원 측은 이들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밝혔다. 이씨는 지난 5일 오전 2시쯤 인터넷 사이트 등을 통해 만난 일행 등과 전남 해남군 남성항에서 돌고래호에 올랐다. 제주 추자도로 향하는 뱃길은 순탄했다. 2시간여 뒤인 오전 4시쯤 이씨 일행은 추자도 신양항에 도착했다. 추자도 인근 섬에 내린 이들은 씨알 굵은 돔을 잡는 등 낚시 삼매경에 빠졌다. 추자도 해역은 강태공에게 최고의 어장으로 알려져 있다. 황해와 남해의 지형상 특징으로 난류와 한류가 교대로 지나면서 플랑크톤 등 물고기의 먹이가 풍부해 가을과 겨울철에 특히 어종들이 몰려드는 지역이다. 그러나 오후 들어 빗발이 거세지면서 오후 6시에는 빗줄기가 시간당 20㎜가 넘는 폭우로 변했다. 1박을 하려던 일정을 바꿔 철수하기로 했다. 선장 김모(46)씨는 오후 7시쯤 낚시꾼들을 태우고 신양항을 출발해 해남으로 향했다. 2m가 넘는 파도가 치면서 배가 심하게 요동쳤다. 같은 시간대 다른 낚시꾼을 태우고 추자도를 출발한 돌고래1호(5t)와 자주 통화하며 안전 운항 여부를 확인했다. 파도와 바람이 더 심해지자 돌고래1호 선장 정모(41)씨는 돌고래호 선장 김씨에게 전화를 걸어 추자도 북쪽 끝 횡간도 옆 무인도인 녹서에서 만나자고 했다. 당시 풍랑특보는 발효되지 않았지만 기상은 더 나빠졌고 돌고래1호는 추자도로의 회항을 결정했다. 이후 오후 7시 44분부터 김씨에게 2분 간격으로 전화를 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시간 이씨 등은 선수 쪽 아래 선실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9명가량이 선실에 있었다. 갑자기 배가 ‘쾅쾅’ 소리를 내며 옆으로 뒤집히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완전히 전복됐다. 깜깜한 밤에 해상에서 배가 순식간에 뒤집히자 낚시꾼들은 크게 동요했다. 생존자 박씨와 이씨는 사고 이후 줄곧 전복된 배 위에서 버텼다. 선장 김씨 등 다른 4명가량도 뒤집힌 배 위에 같이 있었다. 나머지 낚시꾼들은 구명조끼를 허겁지겁 입거나 꺼내 든 채 바다에 뛰어들어 주변 해상에 둥둥 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살아 있는 것으로 보였다. 선장 김씨는 “배가 항해를 하면 무선통신이 해경과 연결돼 있어 해경이 반드시 구조하러 온다”며 모두를 안심시켰다. 시간이 흘러도 구조의 손길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급기야 탈진하고 힘이 빠진 사람들이 바다로 떨어져 나갔다. 선장 김씨도 시야에서 사라졌다. 생존자 3명은 밧줄 한쪽을 배 스크루에 묶고 한쪽으로 서로의 몸과 손등을 감았다. 저체온증으로 죽는 것을 막기 위해 서로의 뺨을 때리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오후 9시 3분쯤 사고 연락을 받은 해경은 7분 정도 지나 긴급 출동해 수색에 나섰으나 야간인 데다 기상 상황이 좋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 돌고래호는 11시간이 흐른 뒤인 6일 오전 6시 25분쯤 추자도 남쪽 무인도 섬생이섬 남쪽 1.1㎞ 해상에서 뒤집힌 채 발견됐다. 인근을 지나던 어선이 신고하고 생존자 3명을 구조했다. 해경은 추가 생존자를 애타게 찾아 나섰다. 실종자 수색에 참여한 대물호 최기훈(43) 선장은 “추자에는 42개 부속 섬이 있어 생존자들이 섬으로 피신했을 가능성이 크다”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허강 중부대 교수 대전서 설치미술전

    ‘금강에서 러시아·유럽까지 달빛으로.’ 대전시립미술관은 다음달 4일까지 설치미술가인 허강 중부대 교수의 ‘달빛드로잉’ 전시회를 연다고 3일 밝혔다. 전시회에는 허 작가의 작품 50여점이 전시된다. 이 작품들은 허 작가가 지난 7월 금강 출발점인 용담댐에서 금강하굿둑까지 뱃길 400㎞ 여정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일 베를린까지 1만 4400㎞를 열차로 이동하면서 자연 속에 설치했던 모형 달과 설치 장면을 사진과 영상으로 촬영한 것이다. 허 작가는 “사람은 원래 유목민”이라면서 “먹이를 찾아 다시 떠도는 신유목민의 현실을 거대한 대륙의 자연 속에 아름답고 풍부한 인문학적 이야기와 유토피아 이미지를 담은 달빛으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허 작가는 대한민국미술대전, 한국수채화협회 공모전 등 심사위원으로 활동했고 2007년 모스크바 자연미술공원 조성, 2010년 한강 난지 생태설치미술 갤러리 등에 참여했다. 대전 이천열 기자 sky@seoul.co.kr
  • 뱃길따라 되살아나는 양화진 근대사

    뱃길따라 되살아나는 양화진 근대사

    2일 서울 마포구 잠두봉선착장에서 양화진 근대사 탐방 ‘뱃길을 열다’에 참석한 사람들이 출발하기 전에 손을 흔들고 있다. 이 행사는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 문화재를 중심으로 절두산 순교성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의 유적 답사와 밤섬, 선유도 일대를 탐방하는 역사 문화 체험 프로그램이다. 이언탁 기자 utl@seoul.co.kr
  • 제주~전남 우수영 바닷길 2시간40분에 주파한다

    제주도는 제주항과 전남 우수영 항로에 쾌속 여객선 퀸스타2호가 취항한다고 2일 밝혔다. 씨월드고속훼리 소속의 500t급 이 여객선은 450명을 태우고 제주항에서 우수영까지 2시간 40분 이내에 주파하며 이달 중순부터 본격 운항에 들어간다. 이 항로를 운항하던 로얄스타호는 지난해 12월부터 기관 수리 등으로 장기 휴항한 상태다. 또 제주~전남 여수 항로에도 ㈜한일고속 소속 1만 5000t급 한일골드스텔라호가 20일부터 정기 취항한다. 한일골드스텔라호는 승객 810명과 승용차 77대, 트럭 219대 등 모두 296대를 실을 수 있으며 항해 시간은 편도 5시간 정도다. 이 항로는 2004년 12월 남해고속 카페리가 폐항한 이후 11년 만에 다시 여객선이 운항하게 됐다. 서귀포항에는 크루즈 관광 유람선 운항이 추진 중이다. ㈜신세계해운은 크루즈 선박을 활용해 마라도 등 서귀포항 주변을 순회하는 유람선 운항을 추진, 최근 해상운송사업 면허를 신청했다. 이 선사는 서귀포 앞바다에 1928t 규모의 크루즈 유람선을 띄운다는 계획이다. 서귀포항은 2000년 8월 서귀포~부산을 왕래하던 여객선이 운항을 중단한 이후 육지와의 뱃길이 완전히 끊겼다.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11] 서산 부석사 관음보살이 있던 자리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11] 서산 부석사 관음보살이 있던 자리

    충남 서산에서 안면도에 가려면 두 가지 길이 있다. 서산 부석면을 거쳐 천수만을 막은 부남호 방조제를 지나 안면도 연육교를 건너는 방법과 태안 읍내와 태안 남면을 거쳐 연육교를 건너는 방법이다. 보통은 서산에서부터 줄곧 도로표지판이 안내하는 대로 태안를 거치는 길을 택하게 마련이다. 지금 태안 읍내와 안면도 사이에는 2차로를 4차로로 확장하는 공사가 마무리 단계이니, 공사가 끝나면 앞의 길을 택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좁고 구불구불한데다 조금은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부석면을 지나는 길을 택하는 사람들에게는 기분좋은 일이 있다. 지나는 인지면과 부석면 일대는 서산생강한과의 주산지로, 공장과 판매장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한번쯤 들러 맛을 보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 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부석사를 알리는 팻말이 나타난다. 큰 길에서 자동차로 10분 남짓 도비산 산길을 오르면 부석사 일주문이 보인다. 흔히 ‘서산 부석사’라고 부르는 것은 경북 영주에 같은 이름으로 훨씬 역사가 깊고, 규모가 큰 절이 있기 때문이다. 미술사학자 최순우 선생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글로 더욱 유명한 영주 부석사다. 최근에는 서산 부석사도 영주 부석사 만큼이나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일본 쓰시마의 관음사에서 훔쳐온 금동관음보살좌상의 고향이 바로 이곳이다. 부석사가 자리잡은 도비산은 천수만이 내륙으로 깊숙히 파고 드는 끝 부분에 자리잡고 있다. 도비산은 그저 높지도 낮지도 않지만, 일대에서는 가장 높이 솟은 봉우리다. 산 중턱에 자리잡은 가람은 멀리서도 알 수 있는데, 절에 오르면 천수만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간척공사가 벌어지고, 부남호를 막기 전에는 아마도 절 앞의 드넓은 평야도 모두 바다였을 것이다. 전형적인 관음도량의 입지다. 관음보살이 살고 있다는 전설의 산 포탈라카(Potalaka)는 스리랑카에서 멀지 않은 인도 남동쪽에 자리잡은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관음도량은 이런 상징성을 최대한 살리면서 지어지게 마련이고, 실제로 영험있는 관음성지도 대부분 바닷가 산중에 자리잡았다. 이른바 3대 관음성지라는 강화 보문사, 양양 낙산사, 남해 보리암이 모두 그렇다. 관음보살은 중생이 고통과 고뇌에 시달릴 때 마음을 모아 이름만 불러도 풀려나게 해주는 존재다. 큰 바다에 들어선 배에 태풍이 몰아닥쳤을 때도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고난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서산 부석사의 관음보살 역시 천수만 일대의 어부와 그 가족 사이에서는 가장의 안전을 보살피는 ‘생명의 아이콘’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한자 이름도 같은 서산과 영주의 부석사(浮石寺)는 이름만큼이나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영주 부석사는 676년 의상대사가 신라 문무왕의 명을 받아 창건했다. ‘삼국유사’에도 나오는 창건 설화는 중국에서 돌아오는 의상의 뱃길을 선묘라는 낭자가 바다의 용이 되어 보살폈다는 내용이다. 상대적으로 조촐한 서산 부석사에도 677년 의상대사 창건설이 전하는데, 창건 설화 역시 영주 부석사와 같은 선묘 설화라는 것은 흥미롭다. 실제로 두 절은 닮은꼴이다. 우선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주재한다는 아미타부처를 주존으로 모셨다. 영주는 무량수전, 서산은 극락전으로 큰법당의 이름은 다르지만 알고보면 무량수전의 주존인 무량수불(無量壽佛)은 아미타불의 다른 이름이다.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 앞에는 안양루가 자리잡았는데, 서산 부석사에도 같은 자리에 안양루가 세워졌다. 서산 부석사 관음보살의 내부에는 ‘고려국 서주 부석사 당주 관음’을 주조한 내용을 담은 결연문이 들어 있었다. 서주(瑞州)는 고려시대 서산의 지명이고, 불상을 조성했다는 천력 3년은 고려 충선왕 즉위년인 1330년이다. ‘당주(堂主) 관음’이라고 한 것은 의미가 있다. 이 불상은 높이가 50.5㎝ 정도지만, 독립된 법당의 당당한 주존이었다는 뜻이다. 결연문에 부석사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고리시대에 이미 이런 이름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주 부석사를 모범으로 삼았다면 당시에도 서산 부석사의 큰법당은 극락전일 가능성이 크다. 극락전이 큰 법당이었다면 ‘당주 관음’이라는 표현은 별도의 관음전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하지만 지금 서산 부석사에서 관음전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대신 지금 극락전에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좌우에서 아미타불을 협시하는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서산 부석사에는 대신 선묘각, 산신각, 용왕각의 세 편액을 나란히 달고 있는 작은 전각이 보인다. 영주 부석사에도 무량수전 뒤편에 한칸짜리 선묘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서산 부석사는 영주 부석사의 다양한 상징성 가운데 특히 ‘해상 안전’의 상징성을 이식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영주 부석사의 선묘가 그저 의상의 안전한 귀국을 도운 존재라면 천수만 바다와 싸워 삶을 이어나간 사람들에게 선묘는 관음보살과 다름없는 존재였을 것이다. 서산 부석사는 아마타도량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관음도량의 성격이 매우 짙은 절이다. 그런 만큼 일본에서 돌아온 금동관음보살은 이 절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을 것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런 불상을 외국의 작은 절에 선물로 주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동철 수석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씨줄날줄] 조운선 침몰과 운하, 안면도/서동철 수석논설위원

    지난해 태안 안흥 앞바다에서 발견된 ‘마도 4호선’이 조선시대 조운선으로 확인됐다는 소식이다. 배 안에서 발견된 목간에는 출발지인 나주와 종착지인 한양 광흥창을 뜻하는 ‘나주광흥창’(州廣興倉)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호남 곡창지대에서 걷은 세곡을 수도로 나르던 선박이다. 물품의 꼬리표로 많이 쓰인 목간은 오늘날의 문서처럼 정보를 적어 놓은 나무 조각이다. 발굴 조사를 벌이고 있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배가 1410∼1420년 침몰한 것으로 추정한다. 충남 태안은 삼국시대부터 백제와 중국을 잇는 수운의 요충이었다. 고려시대 안흥은 마도에 송나라 사신이 머무는 객관 안흥정이 자리잡은 국제항로의 일부였다. 조선시대에도 안흥 앞바다는 세곡을 포함한 호남과 영남의 풍부한 물산을 수도인 개경이나 한양으로 나르는 중요한 뱃길이었다. 안흥에 관한 기록은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1091~1153)의 ‘고려도경’에도 보인다. 그렇지 않아도 안흥 해역은 조석 간만의 차가 크고 조류가 빨라 선박의 침몰 사고가 빈번했다. 배를 타고 통과하기 어려워 난행량(難行梁)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서긍도 이곳을 지나며 ‘격렬한 파도는 회오리치고, 들이치는 여울은 세찬 것이 매우 기괴한 모습이어서 무어라고 표현할 수가 없다’고 적었다. 오늘날 안흥 앞바다가 우리나라 수중 고고학의 메카로 떠오른 것도 역설적으로 삼국시대 이후 수많은 선박이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난행량은 조운선에는 더욱 두려운 뱃길이었다. 상선이나 외교관이 탔을 정도로 전문적인 뱃사람들이 모는 선박이라도 위험에 빠지기 일쑤였는데, 각 지역에서 농사를 짓거나 고기잡이를 하다가 징발된 조운선의 일꾼들은 뱃길이 익숙지 않았고, 배에 실은 쌀도 감당이 안 될 만큼 무거웠으니 항해가 뜻대로 될 턱이 없었다. 그 결과 조운선을 일부러 뒤집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례도 없지 않았다. 안흥 앞바다에서 침몰한 세곡선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난행량에서만 한 해 40~50척이 침몰했다는 기록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 지금의 안면도 남쪽 쌀썩은여도 세곡선의 또 다른 무덤이었다. 조선 중기 한때는 두 곳을 피해 태안반도 구간은 육로로 세곡을 수송하는 고육지책을 쓰기도 했다. 위험 해역을 피해 태안반도를 관통하는 운하를 파는 계획은 고려 인종 시대부터 추진됐다. 태안반도 남쪽 천수만과 북쪽 가로림만을 잇는 굴포운하였다. 길이 12㎞ 남짓한 굴포운하는 조선 세조시대 줄기차게 추진했지만 실패했다. 이어 난행량이라도 피하겠다고 태안반도 서쪽의 의항운하를 팠지만 실제 사용하지는 못했다. 마지막 노력이 인조 연간((1623~1649)부터 추진된 안면곶 분리공사였다. 쌀썩은여라도 피해 가자는 뜻이었다. 반도였던 안면도는 이렇게 섬이 됐다. 서동철 수석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사설] 한강 개발은 정책의 일관성이 담보 돼야

    정부와 서울시가 그저께 내놓은 ‘한강 자연성 회복 및 관광자원화 추진 방안’에 대한 시민들의 기대가 크다. 한강을 크게 7개 권역으로 나눠 2030년까지 생태 환경을 복원하면서 문화와 교통이 어우러진 서울의 대표적인 관광자원으로 만들겠다는 내용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제6차 무역투자진흥회의에서 한강 및 주변 지역 관광자원화 추진 방침을 발표한 지 1년 만에 정치색을 달리하는 지방정부와 공동으로 마련한 종합적인 한강 개발 청사진이라는 것도 의미를 더한다. 한강은 그동안 많은 유동 인구와 빼어난 자연경관 등 엄청난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관광자원으로서의 역할에는 미흡했다. 우리나라를 찾은 관광객의 대부분이 서울을 찾고 있으나 시내 면세점, 명동과 동대문 등 쇼핑 위주의 관광에 그치고 있다. 지난해 서울을 찾은 외국 관광객의 77.6%가 명동을 찾은 반면 한강을 찾거나 유람선을 타고 경관을 즐겼다는 관광객은 12.5%에 불과했다. 이유는 한강이 변변한 볼거리와 먹거리, 즐길 만한 문화 인프라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2019년까지 4000억원에 가까운 자금을 투자해 한강의 이촌~여의도 권역에 문화, 관광시설과 수상교통 허브를 구축한다는 1차 추진 계획은 더욱 눈길이 간다. 특히 이 권역의 개발로 4000여개의 일자리가 새로 생긴다니 나머지 권역의 구체적인 개발 방안도 벌써 기다려진다. 남은 과제는 정부나 서울시가 추진 방안을 얼마나 충실히 이행하느냐에 있다. 한강 개발은 정권이나 단체장이 바뀔 때마다 변경과 취소를 거듭해 온 측면이 많다. 박원순 시장은 취임 초기 세빛둥둥섬을 비롯해 전임 오세훈 시장의 한강르네상스 개발 계획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경제성과 환경문제 등을 이유로 내세웠지만 전임 시장의 업적 지우기로 비친 것도 사실이다. 이번 1차 추진 방안이 박 시장의 임기에 맞춰진 것도 이를 의식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특히 700t급 유람선을 띄우겠다면서도 이명박 정부가 관광객 유치 등을 위해 2조 3000억원을 들여 완공한 경인아라뱃길의 유람선 운영계획이 빠진 것도 의구심을 자아낸다. 한강 개발은 정부와 자치단체가 일관성 있게 추진해야 할 국가적인 사업이다. 한강은 시장이나 장관이 마음대로 다룰 수 없는 우리의 영원한 자산이다.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10] ‘조운선의 무덤’ 확인된 태안 마도 앞바다-굴포운하와 안면도 낳은 이유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10] ‘조운선의 무덤’ 확인된 태안 마도 앞바다-굴포운하와 안면도 낳은 이유

    지난해 충남 태안 마도 해역에서 발견된 고선박 ‘마도 4호선’이 조선시대 조운선으로 확인됐다고 한다. 조운선이 발굴된 것은 처음이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정밀조사한 결과 ‘광흥창’(廣興倉)이라고 적힌 목간, ‘내섬’(內贍)이라고 쓰인 분청사기 등 유물과 견고한 선박 구조로 미뤄 조선 초기 조운선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조운선은 삼남지방에서 걷은 세곡을 싣고 한양에 있는 경창으로 운반하던 선박이다. 선박 안에서 발견된 목간 60여점에는 대부분 출발지인 나주와 종착지인 한양의 세곡창고인 광흥창을 뜻하는 ‘나주광흥창’(羅州廣興倉)이 적혀 있었다. 목간이란 오늘날의 종이 문서처럼 각종 정보를 적은 나무 판자 조각이다. 연구소는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이 배가 1410∼1420년 마도 해역에서 침몰한 것으로 추정했다. 현재 마도 4호선의 잔해는 대부분 마도 북동쪽 해역의 수심 9∼15m 지점에 파묻혀 있다. 태안은 삼국시대에는 중국을 오가는 수운의 요충지였다. 고려시대 태안 앞바다는 개경을 오가는 송나라의 사신이 머물다 가는 객관 안흥정이 자리 잡은 국제항로의 일부로 기능했다. 물론 세곡을 포함한 전라도와 경상도의 풍부한 물산을 수도인 개경이나 한양으로 나르는 중요한 뱃길이기도 했다. 안흥정에 관한 기록은 송나라 사람 서긍(1091~1153)의 ‘고려도경’에도 보인다. 안흥 해역은 조석 간만의 차가 크고 조류가 빨라 선박의 침몰 사고가 빈번했다. 배를 타고 통과하기 어렵다는 난행량(難行梁)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서긍도 이곳을 지나며 ‘격렬한 파도는 회오리치고, 들이치는 여울은 세찬 것이 매우 기괴한 모습이어서 무어라고 표현할 수가 없다’고 적었다. 침몰선의 흔적은 오늘날 이 뱃길의 역사적 중요성을 유물로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실제로 수중 발굴에서 건져 올린 유물의 시대와 국적은 매우 다양하다. 고려자기는 11세기 해무리굽 청자부터 14세기 후반의 상감청자까지 질과 양에서 풍부하다. 조선시대는 15세기 분청사기와 17~18세기 백자가 다채롭게 보인다. 중국 것은 송나라와 원나라 시대 청자, 15~16세기 명나라 시대 복건성 남쪽에서 만들어져 동남아시아로 많이 수출됐던 청화백자, 18~19세기 청나라 시대 백자가 망라됐다. 난행량은 조운선에 더욱 두려운 뱃길이었다. 상선은 그래도 전문적인 뱃사람들이 익숙한 뱃길로 오가는 만큼 사고 위험이 덜했지만, 각 지역에서 징발된 세곡선의 일꾼들은 뱃길이 익숙지 않았고, 화물도 무거웠으니 항해는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 조선시대 안흥 앞바다에서 침몰한 세곡선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태조 4년(1395)에는 경상도 조운선 16척이 가라앉았다. 태종 3년(1403)에는 5월에 경상도 조운선 34척이, 다시 6월에는 경상도 조운선 30척이 잇따라 피해를 입었다. 태종 14년(1414)에는 전라도 조운선 66척, 세조 원년(1455)에는 전라도 조운선 54척이 침몰했다. 많을 때는 전체 세곡선의 3분의 1 가까이가 안흥에서 사고를 당했다는 것이다. ‘평안하게 번성한다’는 의미의 안흥(安興)이라는 지명이 태어난 것도 조운선의 안전을 빌고자 난행량이라는 이름을 안흥량으로 고친 결과라고 한다. 고려시대에도 조운선이 이 일대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난행량을 피해 태안반도를 관통하는 운하를 파는 계획이 일찌감치 추진됐기 때문이다. 세곡선의 잇따른 침몰이 국가재정을 크게 위협할 정도였으니 운하 건설까지 궁리한 것이다. 고려 인종 12년(1134) 군졸 수천 명을 풀어 운하 공사를 벌였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의종 8년(1154)에도 운하 개착 시도가 있었다. 공양왕 3년(1391) 공사를 재개했으나 바닥의 화강암 암반이 나타나는 바람에 중단됐다. 당시 추진된 것은 태안반도 남쪽의 천수만과 북쪽의 가로림만을 잇는 굴포운하였다. 태안군 태안읍 인평리와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를 연결하는 12㎞ 구간이다. 갯벌이 8㎞ 정도로 난공사 구간인 육지 부분은 4㎞ 정도였다. 운하가 완성되면 세곡선이 난행량은 물론 난행량만큼이나 통과가 쉽지 않았던 안면도 남쪽의 ‘쌀썩은여’를 지나지 않고 개경이나 한양으로 북상 할 수 있었다. 쌀썩은여는 세곡선의 잦은 침몰로 쌀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굴포운하는 조선시대에도 태종과 태조에 이어 세조까지 줄기차게 추진했지만 실패했다. 대안은 태안군 소현면 송현리와 의항리를 잇는 의항 운하였다. 안흥에서 가까운 의항운하는 2㎞만 파면 난행량을 피할 수 있었다. 의항운하는 중종 32년(1537) 승려 5,000명이 동원되어 6개월만에 완성하지만, 토목기술의 한계로 둑의 흙이 계속 무너지는 바람에 다시 메워지고 말았다. 태안반도의 남쪽으로 길게 내민 작은 반도였던 안면도를 섬으로 만든 것이 마지막 대안이었다. 남쪽에서 북상하는 세곡선이 천수만으로 진입한 다음 안면도를 가로질러 다시 큰 바다로 나갈 수 있게 한 것이다. 난행량은 어쩔 수 없이 통과해야 하지만, 쌀썩은여는 피해갈 수 있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안면도 분리공사는 인조연간(1623~1649)부터 추진되어 17세기 후반 완성됐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마도 4호선은 조운에 대한 최초의 실증 자료로 해양사, 경제사, 도자사, 문화사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에 활용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조운선의 발견은 우리나라 해양문화의 중심지로 태안 지역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분명히 보여준다. 서동철 수석논설위원 dcsuh@seoul.co.kr    
  • [문화 유랑기] ‘악정’ 연산군의 마지막 길 48번 국도...창경궁-마포-교동

    [문화 유랑기] ‘악정’ 연산군의 마지막 길 48번 국도...창경궁-마포-교동

    -4박 5일 동안 간 연산의 마지막 행로 연산군 하면 당장 떠오르는 단어 하나가 ‘폭군’이다. 조선조 27대 왕 중에서 반정으로 축출된 군왕은 광해군과 연산군 둘뿐이다. 특히 연산군은 광해군과는 달리 무엇 하나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것이 없는 그야말로 ‘폭군’의 전형으로 취급된다. 말하자면 조선의 네로라고나 할까. 하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도 있듯이 그대로 믿을 것이 못되는지, 연산군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역사 동네에 일고 있는 모양이다. 어쨌든 나이 열아홉에 보위에 오른 연산이 재위 12년 만에 중종반정으로 왕좌에서 축출되어 하루아침에 귀양길에 올랐는데, 창경궁에서 출발, 강화를 지나 교동도의 적소(謫所)로 들어가기까지 한 인간의 극적 반전의 전모를 보여주는 4박5일 마지막 행로를 따라가본다. 연산은 악정으로 인심을 잃었다. <조의제문> 사건과 연산의 생모인 폐비 윤씨 문제로 빚어진 무오, 갑자 두 차례의 사화에서 수많은 사림들이 죽어나갔고, 쇄골표풍 등 형벌 또한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뿐 아니었다. 자신을 꾸짖는 할머니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 죽게 하고, 자신은 팔도의 미녀들을 흥청이란 이름으로 뽑아올리게 하여 주지육림 속에 나날을 보냈다. 연산 12년(1506) 9월 초하루 밤, 성희안과 박원종의 반정군은 경복궁을 에워싸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이윽고 경복궁을 접수, 거사를 성공시켰다. 이후 거사의 마무리 수순이 진행되었다. 실록은 이렇게 전한다. “전왕을 폐위, 연산군으로 강봉하여 교동(喬桐)에 옮기고, 왕비 신씨를 폐하여 사저로 내쳤으며, 세자 이황 및 모든 왕자들을 각 고을에 안치시키고, 후궁 전비(田非)·녹수·백견(白犬)을 그날로 군기시(무기제조창. 현 프레스센터 자리) 앞에서 목을 베었다.” 폐위 당시 연산군의 나이는 31세였고, 자녀는 4남 2녀로, 폐세자 이황을 비롯, 장녹수의 딸인 영수옹주 등이었다. 아버지를 잘못 만난 죄밖에 없는 이들 앞에는 참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폐세자와 세 왕자는 연산이 폐위된 직후 뿔뿔이 나뉘어 각처로 귀양갔다가. 9월 24일 모두 사사되었다. 연산의 장남인 황의 나이가 10살이었고, 나머진 그보다 다 어렸다. 한 살짜리도 있었다. 이날 연산의 행적은 어떠했는가? 그는 먼저 박원종의 반정군에게 옥새를 빼앗기고 동궁에 연금당했다. 곧 강화 교동에 위리안치하라는 영이 떨어졌다. 위리안치란 가시울이 쳐진 집안에다 죄인을 가두고 밥만 구멍 안으로 넣어주는 형벌이다. 그런 연유로 위리안치처는 '산 자의 무덤'이라 했다. 폐주는 궁궐에 하룻밤도 머물 수 없는 법. 연산은 그날로 궁을 나서야 했다. 귀양길에 오르기 위해 연산은 갓을 쓰고 분홍 옷에 띠를 띠지 않은 모습으로 내전 문 앞으로 나와 땅에 엎드려 말했다. “내가 큰 죄를 지었는데도 특별히 임금의 은혜를 입어 무사히 가게 되었습니다.” 연산은 시인이었다. 모두 125편의 시를 남겼는데, 그중 무려 108편이 집권 마지막 3년 동안에 씌어졌다. 그만큼 그의 심사도 파국으로 치달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그가 남긴 시 중에는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쓴 것 같은 시도 있다. 바람 부는 강에 배 타고 건너길 좋아 마오(莫好風江乘浪渡)배 뒤집혀 위급할 때 그 누가 구해주리(飜舟當急救人唯) 아침만 해도 왕으로 눈을 뜬 연산이지만, 그날 오후에는 죄인의 몸으로 궁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그나마도 언제 반정군의 칼날이 자기 목에 떨어질지도 모를 일이라, 얼굴은 백짓장이다. 그토록 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자신의 생사관은 돌보지 못한 모양이다. 부인 신씨는 남편의 유뱃길에 따라나서려 울부짖으며 발버둥쳤지만, 반정세력은 허락하지 않았다. -백성들에게 손가락질 받으며 가시 집으로 해는 서녘으로 기울고 있다. 서산낙일이다. 교동이라면 나라땅의 서쪽 끝이다. 뱃길 험한 바다를 두 번이나 건너야 한다. 폐주는 하룻밤도 궁에서 머물 수 없다. 해가 설핏할 무렵, 연산이 어가가 아닌 평교자를 타고 창경궁 동남문인 선인문을 나올 때 갓을 숙여 쓰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거리에 몰려나온 백성들이 다투어 손가락질하며 폐주를 욕했다. 그날은 이미 저물어 먼 길을 떠날 수 없는 터라 서쪽 이궁인 신촌의 연희궁에서 하룻밤 유숙하기로 한다. 연산이 연회를 자주 열었던 장소다. 거기서 하룻밤 보내는 연산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하루아침에 왕좌에서 내쫓기고 어린 자식들을 다 사지로 몰아넣은 회한에 거의 실성하지 않았을까. 연산의 유배 행로를 추측해보면, 연희궁을 떠난 평교는 마포로 접어드는 길을 따라가 양화나루에서 한강을 건넜을 것으로 보인다. 이 일대의 한강은 서강(西江) 또는 서호(西湖)라고도 하며, 연산이 즐겨 찾던 놀이터였다. 연산으로서는 참 사연 많은 양화나루인 셈이다. 이 서강을 건너 그 다음 짚어갔을 노선은 김포, 통진, 강화, 교동으로 이어진다. 대체로 지금의 48번 국도를 따라갔을 것이다. 네 명의 교꾼이 메는 평교는 그리 속도를 못 내 이튿날 밤은 김포에서 유숙하고, 다음은 통진, 강화에서 각각 묵었다. 4박 5일의 여정이다. 통진에서는 관아에서 묵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통진에서 묵은 연산은 다시 길을 떠나 강화가 빤히 보이는 염하강 나루에 닿았을 것이다. 구 강화대교가 있는 자리다. 이름은 강이나 기실은 해협이다. 폭은 좁으나 물살이 세어, 고려를 침공했던 몽고군도 끝내 건너지 못했다는 해협이다. 이곳을 건너 다시 강화 관아에서 하룻밤 묵은 후 연산의 평교는 어느 길을 따라 교동도로 들어가는 배를 탔을까? 교동으로 건너가려면 창후리 선착장이 가장 빠른 길이다. 연산의 평교도 틀림없이 창후리 포구에서 배를 탔을 것이다. 2014년 교동대교가 놓이기 전 교동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은 모두 여기서 그룻배를 탔다. 그날은 특히 파도가 사나워 배가 뒤집힐 뻔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차라리 연산에겐 그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4박5일 동안 뭍길, 물길 합해 80km, 2백리 길을 짚어 교동 고을 관아 뜰에 들어선 연산은 장졸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땅에 엎드린 채 진땀을 흘리며 감히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이제 곧 죽임을 당하는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다. 대신 탱자나무 울타리가 처마 밑까지 바짝 쳐진 가옥 안에 갇혀졌다. 작은 문 하나로 음식만 들일 수 있을 뿐, 해를 구경할 수 없는 감옥이다. 적소에 안치되기까지 연산의 모습을 <중종실록>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안치한 곳에 이르니, 위리한 곳이 몹시 좁아 해를 볼 수 없었고, 다만 한 개의 조그마한 문이 있어서 겨우 음식을 들여보내고 말을 전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폐왕이 위리 안에 들어가자마자 시녀들이 모두 목놓아 울부짖으면서 호곡하였습니다. 신등이 작별을 고하니, 폐왕이 말을 전하기를, ‘나 때문에 멀리 오느라 수고하였다. 고맙고 고맙다’라고 하였습니다.” 교동도는 조선 초부터 왕족의 단골 유배지였다. 연산군을 비롯해 세종의 3남 안평대군, 선조의 첫째 서자 임해군, 인조의 동생 능창대군 등이 교동도로 유배당했다가 풀려나거나 사사되었다. 이처럼 왕족들을 주로 교동에 유배시킨 것은 도성에서 가까워 감시하기가 좋다는 점, 그러면서도 사나운 조류로 인해 완전한 격리가 가능하다는 이점들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동도의 야트막한 화개산 기슭에 자리한 유배지는 그야말로 산속 적막한 곳이었다. 위치가 산의 서사면이어서 한양 쪽 하늘은 뵈지도 않는 곳이다. 묏자리로 쓰기에도 적막한 감이 드는 여기서 연산은 그 회한의 말년을 보냈던 것이다. 연산이 숨진 절기는 겨울이다. 적소의 산봉과 바위들은 아마 그때 시녀들의 호곡소리와 연산의 고음을 들었을 것이다. -유폐 두 달 만에 숨져 연산의 귀양살이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위리안치된 지 두 달 만인 11월 6일, 물도 못 마시고 눈도 뜰 수 없는 역질에 걸려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숨지기 전 연산이 시중드는 시녀에게 한마디 말을 남겼다. “중전이 보고 싶구나.” 연산이 역질로 죽었다는 데 대해 의문을 갖는 사람도 없지 않다. 11월(음력)이면 겨울인데 무슨 역질인가, 필시 독살이다는 의혹이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왕좌와 처자식들을 모두 잃고 31살 나이에 가시울타리 집안에 갇힌다면 독을 먹지 않아도 죽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의 시신은 교동땅에 묻혔다가 몇 년 후 폐비 신씨의 탄원으로 경기도 양주(지금의 도봉구 방학동)로 이장되었다. 반정으로 남편과 두 아들, 두 오라비를 모두 잃어버린 신씨는 연산보다 31년을 더 살다가 연산 묘 옆에 나란히 묻혔다. 살아 있을 때 그토록 많은 여인들을 거느렸건만, 죽어서 끝까지 그의 곁에 남은 여인은 폐비 신씨 한 사람이었다. 숨지기 전 연산이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신씨가 마침내 자기 옆에 유택을 마련해 들어왔을 때, 지하의 연산은 생전의 부인 모습을 떠올리며 다음과 같은 자작시를 되뇌어 보지나 않았을까. 인생은 초로와 같아서​(人生如草露)만날 때가 많지 않은 것(會合不多時) 이광식 통신원 joand999@naver.com
  • [문화 유랑기] 연산군의 마지막 길 48번 국도 ‘창경궁-신촌-마포-통진-강화-교동’

    [문화 유랑기] 연산군의 마지막 길 48번 국도 ‘창경궁-신촌-마포-통진-강화-교동’

    -4박 5일 동안 간 연산의 마지막 행로 연산군 하면 당장 떠오르는 단어 하나가 ‘폭군’이다. 조선조 27대 왕 중에서 반정으로 축출된 군왕은 광해군과 연산군 둘뿐이다. 특히 연산군은 광해군과는 달리 무엇 하나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것이 없는 그야말로 ‘폭군’의 전형으로 취급된다. 말하자면 조선의 네로라고나 할까. 하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도 있듯이 그대로 믿을 것이 못되는지, 연산군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역사 동네에 일고 있는 모양이다. 어쨌든 나이 열아홉에 보위에 오른 연산이 재위 12년 만에 중종반정으로 왕좌에서 축출되어 하루아침에 귀양길에 올랐는데, 창경궁에서 출발, 강화를 지나 교동도의 적소(謫所)로 들어가기까지 한 인간의 극적 반전의 전모를 보여주는 4박5일 마지막 행로를 따라가본다. 연산은 악정으로 인심을 잃었다. <조의제문> 사건과 연산의 생모인 폐비 윤씨 문제로 빚어진 무오, 갑자 두 차례의 사화에서 수많은 사림들이 죽어나갔고, 쇄골표풍 등 형벌 또한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뿐 아니었다. 자신을 꾸짖는 할머니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 죽게 하고, 자신은 팔도의 미녀들을 흥청이란 이름으로 뽑아올리게 하여 주지육림 속에 나날을 보냈다. 연산 12년(1506) 9월 초하루 밤, 성희안과 박원종의 반정군은 경복궁을 에워싸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이윽고 경복궁을 접수, 거사를 성공시켰다. 이후 거사의 마무리 수순이 진행되었다. 실록은 이렇게 전한다. “전왕을 폐위, 연산군으로 강봉하여 교동(喬桐)에 옮기고, 왕비 신씨를 폐하여 사저로 내쳤으며, 세자 이황 및 모든 왕자들을 각 고을에 안치시키고, 후궁 전비(田非)·녹수·백견(白犬)을 그날로 군기시(무기제조창. 현 프레스센터 자리) 앞에서 목을 베었다.” 폐위 당시 연산군의 나이는 31세였고, 자녀는 4남 2녀로, 폐세자 이황을 비롯, 장녹수의 딸인 영수옹주 등이었다. 아버지를 잘못 만난 죄밖에 없는 이들 앞에는 참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폐세자와 세 왕자는 연산이 폐위된 직후 뿔뿔이 나뉘어 각처로 귀양갔다가. 9월 24일 모두 사사되었다. 연산의 장남인 황의 나이가 10살이었고, 나머진 그보다 다 어렸다. 한 살짜리도 있었다. 이날 연산의 행적은 어떠했는가? 그는 먼저 박원종의 반정군에게 옥새를 빼앗기고 동궁에 연금당했다. 곧 강화 교동에 위리안치하라는 영이 떨어졌다. 위리안치란 가시울이 쳐진 집안에다 죄인을 가두고 밥만 구멍 안으로 넣어주는 형벌이다. 그런 연유로 위리안치처는 '산 자의 무덤'이라 했다. 폐주는 궁궐에 하룻밤도 머물 수 없는 법. 연산은 그날로 궁을 나서야 했다. 귀양길에 오르기 위해 연산은 갓을 쓰고 분홍 옷에 띠를 띠지 않은 모습으로 내전 문 앞으로 나와 땅에 엎드려 말했다. “내가 큰 죄를 지었는데도 특별히 임금의 은혜를 입어 무사히 가게 되었습니다.” 연산은 시인이었다. 모두 125편의 시를 남겼는데, 그중 무려 108편이 집권 마지막 3년 동안에 씌어졌다. 그만큼 그의 심사도 파국으로 치달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그가 남긴 시 중에는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쓴 것 같은 시도 있다. 바람 부는 강에 배 타고 건너길 좋아 마오(莫好風江乘浪渡)배 뒤집혀 위급할 때 그 누가 구해주리(飜舟當急救人唯) 아침만 해도 왕으로 눈을 뜬 연산이지만, 그날 오후에는 죄인의 몸으로 궁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그나마도 언제 반정군의 칼날이 자기 목에 떨어질지도 모를 일이라, 얼굴은 백짓장이다. 그토록 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자신의 생사관은 돌보지 못한 모양이다. 부인 신씨는 남편의 유뱃길에 따라나서려 울부짖으며 발버둥쳤지만, 반정세력은 허락하지 않았다. -백성들에게 손가락질 받으며 가시 집으로 해는 서녘으로 기울고 있다. 서산낙일이다. 교동이라면 나라땅의 서쪽 끝이다. 뱃길 험한 바다를 두 번이나 건너야 한다. 폐주는 하룻밤도 궁에서 머물 수 없다. 해가 설핏할 무렵, 연산이 어가가 아닌 평교자를 타고 창경궁 동남문인 선인문을 나올 때 갓을 숙여 쓰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거리에 몰려나온 백성들이 다투어 손가락질하며 폐주를 욕했다. 그날은 이미 저물어 먼 길을 떠날 수 없는 터라 서쪽 이궁인 신촌의 연희궁에서 하룻밤 유숙하기로 한다. 연산이 연회를 자주 열었던 장소다. 거기서 하룻밤 보내는 연산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하루아침에 왕좌에서 내쫓기고 어린 자식들을 다 사지로 몰아넣은 회한에 거의 실성하지 않았을까. 연산의 유배 행로를 추측해보면, 연희궁을 떠난 평교는 마포로 접어드는 길을 따라가 양화나루에서 한강을 건넜을 것으로 보인다. 이 일대의 한강은 서강(西江) 또는 서호(西湖)라고도 하며, 연산이 즐겨 찾던 놀이터였다. 연산으로서는 참 사연 많은 양화나루인 셈이다. 이 서강을 건너 그 다음 짚어갔을 노선은 김포, 통진, 강화, 교동으로 이어진다. 대체로 지금의 48번 국도를 따라갔을 것이다. 네 명의 교꾼이 메는 평교는 그리 속도를 못 내 이튿날 밤은 김포에서 유숙하고, 다음은 통진, 강화에서 각각 묵었다. 4박 5일의 여정이다. 통진에서는 관아에서 묵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통진에서 묵은 연산은 다시 길을 떠나 강화가 빤히 보이는 염하강 나루에 닿았을 것이다. 구 강화대교가 있는 자리다. 이름은 강이나 기실은 해협이다. 폭은 좁으나 물살이 세어, 고려를 침공했던 몽고군도 끝내 건너지 못했다는 해협이다. 이곳을 건너 다시 강화 관아에서 하룻밤 묵은 후 연산의 평교는 어느 길을 따라 교동도로 들어가는 배를 탔을까? 교동으로 건너가려면 창후리 선착장이 가장 빠른 길이다. 연산의 평교도 틀림없이 창후리 포구에서 배를 탔을 것이다. 2014년 교동대교가 놓이기 전 교동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은 모두 여기서 그룻배를 탔다. 그날은 특히 파도가 사나워 배가 뒤집힐 뻔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차라리 연산에겐 그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4박5일 동안 뭍길, 물길 합해 80km, 2백리 길을 짚어 교동 고을 관아 뜰에 들어선 연산은 장졸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땅에 엎드린 채 진땀을 흘리며 감히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이제 곧 죽임을 당하는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다. 대신 탱자나무 울타리가 처마 밑까지 바짝 쳐진 가옥 안에 갇혀졌다. 작은 문 하나로 음식만 들일 수 있을 뿐, 해를 구경할 수 없는 감옥이다. 적소에 안치되기까지 연산의 모습을 <중종실록>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안치한 곳에 이르니, 위리한 곳이 몹시 좁아 해를 볼 수 없었고, 다만 한 개의 조그마한 문이 있어서 겨우 음식을 들여보내고 말을 전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폐왕이 위리 안에 들어가자마자 시녀들이 모두 목놓아 울부짖으면서 호곡하였습니다. 신등이 작별을 고하니, 폐왕이 말을 전하기를, ‘나 때문에 멀리 오느라 수고하였다. 고맙고 고맙다’라고 하였습니다.” 교동도는 조선 초부터 왕족의 단골 유배지였다. 연산군을 비롯해 세종의 3남 안평대군, 선조의 첫째 서자 임해군, 인조의 동생 능창대군 등이 교동도로 유배당했다가 풀려나거나 사사되었다. 이처럼 왕족들을 주로 교동에 유배시킨 것은 도성에서 가까워 감시하기가 좋다는 점, 그러면서도 사나운 조류로 인해 완전한 격리가 가능하다는 이점들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동도의 야트막한 화개산 기슭에 자리한 유배지는 그야말로 산속 적막한 곳이었다. 위치가 산의 서사면이어서 한양 쪽 하늘은 뵈지도 않는 곳이다. 묏자리로 쓰기에도 적막한 감이 드는 여기서 연산은 그 회한의 말년을 보냈던 것이다. 연산이 숨진 절기는 겨울이다. 적소의 산봉과 바위들은 아마 그때 시녀들의 호곡소리와 연산의 고음을 들었을 것이다. -유폐 두 달 만에 숨져 연산의 귀양살이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위리안치된 지 두 달 만인 11월 6일, 물도 못 마시고 눈도 뜰 수 없는 역질에 걸려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숨지기 전 연산이 시중드는 시녀에게 한마디 말을 남겼다. “중전이 보고 싶구나.” 연산이 역질로 죽었다는 데 대해 의문을 갖는 사람도 없지 않다. 11월(음력)이면 겨울인데 무슨 역질인가, 필시 독살이다는 의혹이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왕좌와 처자식들을 모두 잃고 31살 나이에 가시울타리 집안에 갇힌다면 독을 먹지 않아도 죽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의 시신은 교동땅에 묻혔다가 몇 년 후 폐비 신씨의 탄원으로 경기도 양주(지금의 도봉구 방학동)로 이장되었다. 반정으로 남편과 두 아들, 두 오라비를 모두 잃어버린 신씨는 연산보다 31년을 더 살다가 연산 묘 옆에 나란히 묻혔다. 살아 있을 때 그토록 많은 여인들을 거느렸건만, 죽어서 끝까지 그의 곁에 남은 여인은 폐비 신씨 한 사람이었다. 숨지기 전 연산이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신씨가 마침내 자기 옆에 유택을 마련해 들어왔을 때, 지하의 연산은 생전의 부인 모습을 떠올리며 다음과 같은 자작시를 되뇌어 보지나 않았을까. 인생은 초로와 같아서​(人生如草露)만날 때가 많지 않은 것(會合不多時) 이광식 통신원 joand999@naver.com
  • [新국토기행] <40> 강원 속초시

    [新국토기행] <40> 강원 속초시

    설악산과 동해를 끼고 자리잡은 강원 속초시는 국내 최고의 관광·휴양도시다. 아름다운 산과 바다, 호수, 온천, 해변 등 청정 자연을 찾아 즐기려는 관광객이 해마다 1300만명에 이른다. 자연자원에 스토리텔링을 접목하고 외국인 관광객을 위해 전통시장을 활성화하는 등 관광자원의 진화가 한창이다. 6·25전쟁의 애환이 깃든 아바이마을과 청초호 갯배를 접목한 대단위 관광 활성화도 꾀하고 있다. 인근 고성을 지나는 금강산 관광과 양양국제공항이 재개되고 설악산 정상까지 케이블카가 놓이면 한층 업그레이드된 국제적인 관광지로 각광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항구를 통한 크루즈산업이 추진 중이고 오는 10월에는 일본, 중국, 러시아, 몽골 등 환동해권 지방정부와 기업인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광역두만강개발계획(GTI) 무역박람회’까지 열려 관광과 청정산업이 어우러진 도시로 변신을 꿈꾸고 있다. >>볼거리●기암괴석이 만든 절경 ‘설악산’ 설악산은 한라산, 지리산에 이어 남한에서 세 번째로 높은 산이다. 최고봉인 대청봉(해발 1708m)은 속초시와 양양, 인제, 고성을 나누는 꼭짓점이다. 험준한 산세 속에 잘 간직된 수려한 경관과 다양한 동식물 서식처로 가치를 인정받아 1982년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됐다. 마등령~공룡능선~대청봉을 잇는 주 능선을 중심으로 계곡이 발달한 서쪽을 내설악, 바위가 발달한 동쪽을 외설악, 한계령 정상부에서 오색약수터 일원까지는 남설악으로 불린다. 기암괴석이 장관인 설악산 지질은 대청봉 부근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여러 종류의 화강암으로 돼 있다. 설악산은 백악기의 화강암이 오랜 침식작용과 융기를 통해 땅 위에 노출됐고 태백산맥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높이 솟아올랐다. 화강암이 가진 절리(틈새) 영향으로 지금 같은 기암괴석이 생겨났다. 설악(雪岳)은 ‘한가위에 덮이기 시작한 눈이 이듬해 하지에 이르러서야 녹는다 해 설악이라 한다’는 동국여지승람에서 유래한다. 증보문헌비고에도 ‘산마루에 오래도록 눈이 덮이고 암석이 눈같이 희다고 해 설악이라 이름 짓게 됐다’고 기술돼 있다. 설악산은 계절마다 모습을 바꾸며 감흥을 달리한다. 봄에는 잔설과 신록이 어우러지고 여름에는 울창한 숲, 가을에는 붉게 타오르는 단풍, 겨울에는 눈꽃이 활짝 핀 모습을 연출하며 사람들을 황홀하게 만든다. 외설악에는 권금성으로 오르는 케이블카가 있다. 권금성 정상에 오르면 속초시내 모습과 시원하게 트인 동해, 웅장한 외설악 능선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외설악은 천불동 계곡을 끼고 기암절벽이 웅장하다. 병풍 모양의 울산바위, 한 사람이 흔들어도 열 사람이 흔들어도 똑같이 흔들리는 흔들바위, 비룡폭포, 비선대 등이 설악산의 절경을 이룬다. ●항구의 정감 가득한 ‘대포항·동명항·외옹치항’ 속초는 항구도시다. 큰 포구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대포항은 사계절 관광객이 넘쳐 나는 명소다. 동해안에서 가장 먼저 활어 난전을 이룬 곳이어서 해산물이 풍성하다. 어항을 따라 들어가는 500m 정도의 진입로에는 횟집과 건어물 가게, 어판장, 난전 횟집이 즐비하게 늘어서 항구도시의 정감을 흠뻑 느끼게 한다. 최근에는 현대화된 시설과 대규모 편의시설을 갖춘 동해안 최고의 관광항으로 탈바꿈 중이다. 동명항은 속초에서 일출이 가장 아름다운 항구다. 동명항은 속초항으로도 불린다. 주변에는 속초 팔경 중의 하나인 속초등대전망대가 있어 안전한 뱃길을 안내한다. 속초등대전망대 위의 하얀 등대는 동해안 5곳 가운데 하나인 유인등대다.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영금정 해돋이정자, 그리고 싱싱한 해산물이 가득한 활어센터가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재촉한다. 동명항 인근 영금정해안에는 넓고 큰 갯바위가 즐비하다. 큰 파도가 갯바위에 부딪칠 때마다 거문고 켜는 듯한 소리가 난다고 해서 영금정(靈琴亭)이라 불린다. 영금정해안은 겨울이 최고다. 풍랑주의보가 자주 발효되는 겨울철에는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정도로 위력적인 파도가 쉼 없이 밀려든다. 갯바위를 삼킬 듯한 기세로 밀려드는 파도는 짜릿한 전율과 가슴 뻥 뚫리는 상쾌함을 동시에 안겨 준다. 영금정해안의 아침 해는 혹한도 잊게 할 만큼 뜨거운 감동을 사람들에게 전해 준다. 갯바위 끝은 해돋이를 감상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외옹치항은 해안선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항구다. 장독처럼 생긴 고개 바깥에 있다고 해서 밧독재라고도 부른다. 끝으로 장사항은 속초의 맨 끝자락에 있는 항구다. 장사항에서는 매년 여름철이면 오징어맨손잡기 축제가 열려 인기를 끌고 있다. ●실향민들의 애환 깃든 ‘아바이마을’ 6·25전쟁의 애환이 깃든 아바이마을은 속초 지역 또 하나의 명소다. 마을은 1·4후퇴 당시 국군을 따라 남하한 함경도 일대 피란민들이 휴전선에서 가까운 바닷가 허허벌판에 집을 짓고 집단 촌락을 형성하면서 생겨났다. 고향과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 살고 싶은 마음에서, 또 정착할 곳도 마땅치 않은 까닭에 속초의 갈대 무성하고 황량한 모래벌판 근처에 하나둘 모여들어 살기 시작하며 만들어진 실향민들의 집성촌이다. 6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마을 풍경은 1960~70년대에서 멈춘 듯하다. 드라마 ‘가을동화’의 배경으로 등장해 관광명소로 급부상한 아바이마을은 아름다운 해변, 맛있는 먹거리, 역사적 상징성 등이 더해지며 연중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아바이마을로 들어가기 위해선 뱃머리가 없는 주황색 갯배를 타야 한다. 손으로 쇠줄을 잡아당겨 앞으로 나아가는 갯배의 모습에서 아날로그의 향수를 진하게 느낄 수 있다. 갯배는 대한민국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무동력선이다. 갯배와 아바이마을은 한류 붐을 타고 국제적인 관광명소가 됐다. 아바이마을 입구에서부터 늘어선 북한 음식 전문점도 인기다. 아바이순대, 오징어순대, 명태순대, 순대국밥, 가리국밥, 함경도식회냉면, 가자미식해 등 북한식 음식이 관광객들의 발길을 잡는다. 50년 전통을 이어 가는 북한 음식 전문점과 함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100대 음식에 선정된 가리국밥은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먹거리 ●칼슘의 왕 ‘도루묵·양미리구이’ 달콤하고 구수한 양미리, 도루묵구이는 겨울철 별미다. 해마다 11~12월이면 양미리, 도루묵 축제가 열릴 만큼 풍성하게 잡힌다. 통째로 구워 먹어 칼슘도 풍부하다. 도루묵과 양미리는 늘 붙어 다니는 이름이다. 잡히는 시기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숯불이나 연탄불에 구워 내며 즉석에서 통째로 먹어야 제맛이다. 알을 밴 양미리는 오도독거리며 알이 씹히는 소리가 어우러져 맛을 더하는데, 바다의 미꾸라지로 불리는 만큼 꼬리를 들고 뭉텅뭉텅 베어 먹는 맛이 그만이다. ●쫄깃·담백한 맛의 향연 ‘오징어순대’ 오징어를 통째로 다듬어 씻고 그 속에 찰밥과 무청, 당근, 양파, 깻잎을 넣어 쪄 먹는 오징어순대는 쫄깃하면서도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영양가가 풍부해 식사 대용으로도 충분하다. 찰밥은 소금물을 뿌리면서 미리 쪄 두고 찰밥과 채소 버무린 것을 오징어 속에 채울 때는 여유분을 둬야 찜통에 쪘을 때 밖으로 빠져나오지 않는다. 겨자 초장에 찍어 먹으면 톡 쏘는 맛이 산뜻하면서도 개운하다. 각종 채소와 찹쌀 등을 넣어서 만든 것이 아바이순대고, 돼지 창자를 구할 수 없어 오징어에 각종 주·부식을 넣어 만들기 시작해 탄생한 게 오징어순대다. 특히 아바이순대는 기존의 순대와 달리 채소가 많이 들어간다. 이북 실향민들의 음식으로도 유명하다. 예능 프로그램 ‘1박 2일’과 드라마 ‘가을동화’ 촬영지로 유명한 청호동 아바이마을과 갯배 건너 관광수산시장 인근에서 원주 오징어순대 맛을 볼 수 있다. ●싱싱함이 입안에 한가득 ‘물회와 홍게’ 한여름 시원하게 얼음을 넣어 만들어 내는 물회는 속풀이에 제격이다. 살아 있는 싱싱한 활어로 만드는 물회는 더위에 지쳐 있는 이들에게 입맛과 생기를 되찾아 주는 음식이기도 하다. 물회는 속초 항포구와 관광수산시장 등 활어를 판매하는 곳이면 어디서나 맛볼 수 있다. 설악항, 대포항, 외옹치항, 동명항, 장사항, 아바이마을 수산물회센터, 속초관광수산시장 등이 그곳이다. 영덕대게 못지않은 맛을 자랑하면서도 저렴한 가격으로 푸짐하게 맛볼 수 있는 붉은 대게 역시 빠뜨려서는 안 되는 별미다. 속초에서 나는 붉은 대게(홍게)는 게 속살만을 상품으로 만들어 수출하는 지역 대표 어종이다. 홍게찜 등은 전국 택배 배달도 가능하다. 속초 항포구 및 수산물활어센터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맛볼 수 있다. ●감칠맛의 대명사 ‘명란·창난·오징어젓갈’ 명태에서 나는 명란과 창난, 오징어 등 동해안에서 나는 어패류로 만든 젓갈도 인기다. 지금은 어자원이 고갈돼 속초 지역에서 명태가 잡히지 않지만 원양에서 잡아 올리는 명태 알과 창자 등으로 젓갈을 담아 상품으로 내고 있다. 숙성 기간에 자기분해효소와 미생물이 발효하면서 생기는 유리 아미노산과 핵산분해 산물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특유의 감칠맛이 일품이다. 속초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782억 쏟아부은 인천 경인항… 2만t급 선박 입·출항 실적 전무

    인천 경인항이 최대 2만t급 선박의 입·출항을 위해 준설 공사 등을 했으나, 개장 3년째 대형 선박의 입·출항이 전무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감사원은 19일 인천·포항지방해양수산청을 상대로 2012년 이후의 업무 전반에 대해 감사한 결과 10건의 문제점을 지적했다고 밝혔다. 특히 인천해수청의 경우 782억원을 들여 ‘경인 아라뱃길 접근항로 및 항만 부지 호안 건설공사’ 계획에 따라 2012년 5월 경인항을 개장했으나, 실적이 당초 계획에 크게 못 미쳐 예산을 낭비했다. 경인항은 2만t급 대형 선박까지 입·출항할 수 있도록 여유 수심을 ‘기본수준면(DL) 기준 해심 8m짜리’에 맞춰 주항로를 준설했다. DL이란 간조(干潮) 때 평균 해수면 높이로, DL 기준 해심이 깊을수록 대형 선박이 자유롭게 통항할 수 있다. 경인항은 레저보트와 요트 등이 다니는 DL 기준 해심 4m짜리 보조항로도 조성했다. 하지만 지난 3년간의 물동량은 처음 예측한 2039만t의 7.6%인 155만t에 불과했다. 특히 2만t급 선박은 입·출항 실적이 전혀 없었다. 경인항을 가장 많이 이용한 선박은 어선 수준의 1000t 미만 소형으로, 모두 191척이 드나들었을 뿐이다. 아울러 경인항은 기존 인천항보다 접근항로에 있는 모래의 퇴적 속도가 10배 이상 높은데도 항만 공사가 강행됨으로써 매년 준설에만 119억원이 소요될 것으로 분석됐다. 그럼에도 인천해수청은 기존 계획안 그대로 추가 예산이 투입되는 올해 하반기 공사의 발주 계획을 세웠다. 감사원 측은 경인항의 물동량, 항로의 퇴적 속도, 준설 비용 등을 종합적으로 재검토한 수정 대책을 마련하라고 인천해수청에 통보했다. 김경운 전문기자 kkwoon@seoul.co.kr
  • 제주 ~여수 뱃길 11년 만에 열려

    제주와 전남 여수를 잇는 뱃길이 11년 만에 다시 열린다. 18일 제주해양수산관리단에 따르면 ㈜한일고속은 1만 5000t급 한일골드스텔라호를 다음달 20일부터 제주~여수 정기항로에 취항할 예정이다. 한일고속은 이를 위해 여객선 운항 면허를 취득하고 선체 수리 등 취항에 필요한 준비를 대부분 마쳤다. 한일골드스텔라호는 승객 810명과 승용차 77대, 트럭 219대 등 모두 296대를 실을 수 있다. 여수항에서 오전 8시 20분 출발하고 제주항에서 오후 4시 50분 출발한다, 항해 시간은 편도 5시간 정도다. 운임은 5만 5000원에서 2인용 특실 33만원까지 다양하며 화물은 승용차 기준 11만 6000~12만 6000원 등이다. 제주∼여수 항로는 2004년 12월 남해고속 카페리가 폐항한 이후 11년 만에 다시 여객선이 운항하게 됐다. 도 관계자는 “제주~여수 여객선 운항 재개로 수학여행단 등 뱃길 관광객 유치에 큰 도움을 주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 자발적 해난구조 실비 보상 검토

    지난 9일 오전 9시 30분쯤 전북 부안군 위도 남쪽 4㎞ 해상에서 기관 고장으로 표류 중이던 어선(7.93t)이 민간해양구조대 소속 선박의 도움을 받아 벌금항으로 안전하게 예인됐다. 앞서 8일 낮 12시 36분쯤 인천 서구 세어도 선착장 앞에서 레저보트(0.5t)가 기관 고장으로 바다 위를 떠돌다 역시 민간해양구조대 선박을 따라 영종도로 무사히 예인됐다. 같은 날 11시 10분쯤 아라뱃길 서해갑문 앞에서는 한강으로 항해하던 세일링 요트가 갯벌에 얹혀 오도가도 못하다 민간 선박의 도움으로 구조됐다. 16일 국민안전처에 따르면 올해 1월 기준으로 민간해양구조대엔 모두 1763척이 참여하고 있다. 7만 2000여척에 이르는 전국 어선 가운데 2.4%를 차지한다. 특히 최근 3년(2012~2014년)간 서해지방해양본부 관할 해역에서 거둔 구조실적 3067건 중 민간구조대가 255건(8.3%)을 맡았다. 해경 2368건(77.2%), 일반 어선 245건(8.0%), 기타 199건(6.5%)이었다. 구조대에 지정되지 않은 어선까지 합치면 민간 구조실적은 전체의 16.3%나 된다. 그러나 최근 발효된 수상구조법(종전 수난구호법)에 따라 민간해양구조대로 지정되지 않거나 해양관서로부터 구조 협조를 받지 않고 스스로 결정해 구조활동을 한 경우 수당 지급 대상에서 제외돼 문제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지정 선박에는 유류비 외에 8시간 이하 5만원, 초과 땐 시간당 8000원씩 주도록 돼 있다. 안전처는 민간해양구조대 운영을 활성화하기 위해 개선 대책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지난해 세월호 사고를 계기로 지역 해역에 밝은 어선의 지원이 절실해져서다. 먼저 자발적으로 해난구조에 참여한 경우 사후 증빙을 통해 실비로 보상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해양구조의 위험을 감안해 의용소방대(기본수당 시간당 1만 160원) 수준 이상으로 수당을 인상하는 방안도 포함했다. 송한수 기자 onekor@seoul.co.kr
  • 해외여행 | Samoa 사모아에서 행복하지 않다면 유죄

    해외여행 | Samoa 사모아에서 행복하지 않다면 유죄

    땅 위의 모든 것이 아름다운 남태평양의 섬나라 사모아. 이곳은 ‘낙원’의 기원이다. 세계 각지의 많은 곳을 ‘낙원’ 이라고 부를 때, 어쩌면 그 안에는 ‘사모아와 비슷하다’는 함의가 있을지도 모른다. 사모아에 다녀왔다. ‘그곳이 얼마나 좋으냐면’이라고 글을 쓰는 일은 기분 좋은 꿈에서 깨어 사랑하는 사람에게 꿈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달고도 아름답다. 사모아는 미지의 세계다. 잘 모른다. 낯설다. 수많은 여행지를 다니면서 여기만큼 이국적인 정취를 느낀 곳도 없었다. 이국적이고 낯설지만 오롯이 동화되고 싶은 마음은 열렬했다. ‘대체 이 알 수 없는 오묘한 매력은 뭐지?’ 싶었다. ‘남태평양 어디쯤에 사모아라는 나라가 있다더라’는 정보만 알고 있던 나는 사모아를 그리워하느라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신세가 됐다. 관계로 치자면, 밀당의 고수에게 낚여 넋이 나간 꼴이다. 사모아의 사바이섬과 우폴루섬을 돌아본 일주일은 다른 차원의 시간 혹은 비현실 같았다. 일정을 마친 후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나와 동행한 가장 친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마치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아.” SAMOA 무엇이 매력이냐 물으신다면 감동적이고 경이로운 자연경관과 이를 배경으로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관광지에 대한 설명은 일단 뒤로 미루자.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모아의 매력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 곳곳에서 발견된다. 수도 아피아를 제외한 우폴루Upolu섬의 곳곳과 사바이Savaii섬 전체를 둘러보는 것은 목가적인 풍경을 정성껏 스케치하고 예쁘게 채색한, 내용까지 감동적인 그림책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사모아는 전 국민의 취미가 정원 가꾸기라고 해도 믿어질 만큼, 모든 집의 마당이 단정하고 아름답다. 너른 마당 위에선 개와 고양이, 닭이 아이들과 함께 뛰논다. 더불어 어미 돼지가 새끼 돼지 여덟 마리와 일렬로 행진하거나 소와 말이 풀을 뜯는 모습도 일상의 풍경이다. 땅 위의 모든 동물과 식물은 사람들로부터 존중받는 느낌이다. 엄마는 꽃을 심고,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은 커다란 빗자루를 들고 떨어진 나뭇잎을 쓸어 모은다. 집 앞에는 먼저 떠난 가족의 무덤을 둔다. 무덤 위에는 꽃을 놓거나 그 위에서 빨래를 말린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나란히 묻힌 무덤의 비석 위로 손자들이 올라타고 뛰어내리기를 반복하며 까르르 신이 났다. 사모아에서는 죽음이 이별이 아닌 것만 같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아름다운 집들이 모인 마을은 대부분 집성촌이다. 옆집은 고모네, 뒷집은 삼촌네, 안집은 할머니네 대략 이런 식이다. 마을 곳곳에는 사모아 전통가옥 양식인 팔레fale가 있다.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얹으면 완공되는 신기한 건물이다. 지붕이 있는 거대한 평상이라고 상상하면 얼추 비슷할 것 같다. 팔레 안에는 침대도 두고, 식탁도 둔다. 비 오는 날에는 이 집 저 집의 빨래를 한데 모아 널기도 한다. 오며 가며 뻥 뚫린 기둥 사이로 안부를 전하고 옹기종기 모여서 사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식사 때가 되면 마을 곳곳에선 연기가 피어오른다. 연기가 나는 곳은 어김없이 시끌벅적하다. 사모아 전통 조리법인 ‘우무(땅을 파고 나무와 코코넛 껍질로 불을 지피고 그 위에 돌을 달군다. 달군 돌 위에 해산물, 고기, 타로, 빵 등의 식재료를 올리고 바나나 잎을 덮어 훈제하는 조리방법)’로 만들어낸 요리들의 맛있는 냄새와, 대가족인 모인 식사시간의 즐거운 소리들이 공기 중 가득하다. 일요일이면 가장 좋은 옷을 챙겨 입고 온 가족이 함께 교회에 간다. 일요일에는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는다. 사모아 국민의 반은 기독교도, 20%는 가톨릭신자다. 신앙도 깊다. 국가의 주요한 행사가 있을 때는 언제나 기도로 시작할 정도다. 낯선 동양인과 마주치는 많은 사람들은 어제 만난 친구를 오늘 다시 만난 듯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넨다. 어디서 누구를 만나건 자존감 높은 사람들 특유의 쿨하고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가득하다. 달뜨고 설레는 여정 동안 사모아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 바쁜 도시 생활자인 내가 놓치고 사는 중요한 게 무엇일까. 이곳은 삶을 살아가는 데는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고, 스스로 움켜쥔 많은 세속적 가치들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삶의 진정한 가치를 찾게 되는 구도의 땅인지도 모른다. 이토록 아름다운 화산섬, SAVAII 사바이섬에서 여정을 시작했다. 우폴루섬 서쪽에 위치한 물리파누아Mulifanua 항구에서 뱃길로 한 시간을 달리면 사바이의 살레렐로가 항구Salelologa Wharf에 닿는다. 사모아 전체 인구의 25%가 살아가는 아름다운 화산섬인 사바이는 폴리네시안 섬들 중 타히티, 하와이에 이어 크기가 세 번째로 큰 섬으로 우폴루섬에 비해 조금 더 목가적이다. 섬 중앙에는 열대 우림이 빼곡한 산이 있고 산자락과 해안선이 맞닿는 지점에 사람들이 터전을 이루고 살아간다. 해안을 따라 난 왕복 2차선의 해안도로가 마을과 마을을 잇는 유일한 길이며 섬을 관통하는 길은 없다. 사모아관광청의 훈남 앨비스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남태평양의 바람을 가르며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사바이섬에서 가장 매력적인 자연경관을 볼 수 있는 알로파아가 블로우홀Alofa’aga Blowholes이다. 사바이 남동쪽의 타가Taga 마을에 들어서자 파도 소리가 거세진다. 파도가 세게 몰아치는 이 마을의 해안 곳곳에는 바위 구멍이 있는데 이를 통해 바닷물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다. 분수공을 통해 솟아오르는 물기둥의 높이는 엄청나다. 웬만하면 10m 이상이고 아주 높을 때는 50m까지도 치솟는다. 믿거나 말거나 100m가 넘는 높이로 솟아오른 적도 있단다. 무엇보다 압도적인 것은 귀를 자극하는 소리다. 파도가 모여 구멍으로 솟아나기 전의 거대한 울림. ‘부욱부욱’ 하는 소리는 난생처음 들어 보는 자연의 소리인데다가 물기둥이 얼마나 클지 귀띔하는 듯해 긴장과 설렘이 배가된다. 타가 마을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이곳을 방문하는 여행객들을 위해 작은 이벤트를 선보인다. 바로 분수공 아래로 코코넛 던지기다. 어린 시절부터 쭉 봐 왔던 광경이라 마을의 어른들은 어느 구멍에서 가장 거센 분수가 솟구칠지 직감적으로 안다. 선택한 분수공에 코코넛을 던지면 어김없이 거대한 물기둥이 솟아오르며 코코넛이 산산조각 나는 진기한 풍경이 펼쳐진다. 관광객은 이 압도적인 풍경 앞에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마을 어른들은 어린아이처럼 신이 난 얼굴을 하고 깔깔 웃으며 또 다른 코코넛을 가지러 달려간다. 알로파아가 블로우홀에서 약 20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아푸 아아우Afu Aau’ 폭포다. 발음이 어려운 사모아의 지역 이름 중 유일하게 단번에 외운 이름이기도 하다. 소 주변의 수심은 얕은 편이라 수영을 못해도 물놀이는 즐길 수 있지만 소 중심으로 갈수록 수심이 깊어져 자칫하면 ‘아푸 아아우’ 할지 모르니 조심하는 게 좋겠다.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풍광이 마치 우리나라의 비둘기낭이나 삼부연 폭포를 연상케 한다. 열대 우림에 둘러싸인 바다 근처의 이 폭포는 사바이섬을 찾는 사람들의 피크닉 장소로 명성이 자자하다. 음식물 반입은 가능하지만 주류 반입은 불가능하다. 사바이섬은 화산섬이다. 1905년부터 1911년까지 섬 북서쪽의 마타바누Matavanu산에서 화산 활동이 있었고 융기했는데 이런 지질학적 특성을 온전히 관찰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라바필즈다. 제주 곶자왈의 열대우림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쉽겠다. 섬의 북서쪽, 살레아울라Saleaula 마을에 위치한 이곳은 1900년대 세워진 교회와 화산폭발 몇해 전 만들어진 무덤이 유명하다. 교회는 마그마로 덮여 폐허가 되었는데 그 자체로 경이로운 모습이다. 무덤은 성지로 여겨진다. 화산이 폭발한 후 용암이 무덤 주변을 피해 흘렀기 때문이라고. 신성한 기운 때문인지,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화산활동 이전의 식물군이 그대로 남아 있는 풍경은 신비롭다. 작열하는 남태평양의 땡볕을 현무암이 고스란히 받아 머금고 있는 만큼 라바필즈의 열기는 대단하다. 선크림과 모자는 꼭 챙겨 가는 게 좋겠다. 라바필즈에서의 뜨거움은 인근 사토아라파이Satoalepai 마을에서 시원하게 식힐 수 있다. 이곳에는 거북이와 함께 교감하며 수영을 즐길 수 있는 풀이 있다. 스무 마리의 거북이를 맛있는 망고로 유인한 후 물에 들어가 함께 물살을 가르는 진귀한 경험을 하고 싶다면 꼭 들를 것. 참고로 가장 나이가 많은 거북이는 무려 75살이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SAMOA 일상을 엿보다 여행의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 바로 재래시장 둘러보기다. 우폴루섬 북쪽의 수도 아피아Apia에는 두 개의 재래시장이 있다. 먼저 사바랄로 플리마켓Savalalo Flea Market은 특산품과 수공예로 만든 아기자기한 물건들을 파는 사모아의 쇼핑 메카다. 라바라바Lavalava라고 불리는 사모아 전통 살롱과 꽃핀, 액세서리, 나무줄기를 엮어 만든 가방이나 모자 등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 사모아 스타일의 기념품을 구입해야 한다면 꼭 들러야 할 곳! 더불어 이곳은 메인 버스 정류장과 연결돼 있어 빈티지한 매력이 돋보이는 사모아 버스를 실컷 구경할 수 있다. 열대 과일을 마음껏 먹어 보고 싶다면 거대한 팔레 안에 수십 개의 상점이 모여 있는 푸갈레이 마켓Fugalei Market으로 가면 된다. 바나나, 코코넛 등의 신선한 과일과 각종 야채, 꽃을 파는 청과 전문시장이지만 기념품을 파는 상점도 곳곳에 있다. 사모아 전통 음료 재료인 코코사모아는 100% 카카오 덩어리로 조리법은 간단하다. 따뜻한 물에 으깬 코코아 열매와 설탕을 듬뿍 넣고 호로록호로록 마신다. 기존의 가공품보다 훨씬 깊고 그윽한 맛을 즐길 수 있다. 시장 인근의 사모아 컬처럴 빌리지Samoa Cultural Village도 추천한다. 사모아 전통공예와 문화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웰컴 드링크를 선사하는 아바 세리머니, 전통 조리법인 우무, 타투의 기원인 사모안 타타우, 시아포라고 불리는 타파 프린팅과 사모아 전통 목공예, 바나나 잎으로 머리 띠와 바구니 등을 엮는 위빙 체험 등을 한자리에서 즐길 수 있다. 사모안 시바Samoan Siva라고 불리는 전통 춤 공연도 놓칠 수 없는 볼거리다. 힘껏 손뼉을 치며 절도 있는 동작을 이어 나가는 춤인데, 빠르게 이어지는 안무 하나하나를 따라가느라 눈 돌릴 틈이 없다. 따라 하고 싶다면 홀로 있을 때 조용히 할 것! 자칫 개그 프로그램의 마빡이처럼 보일 수 있다. 낙원의 풍경, UPOLU 사모아의 본섬인 우폴루는 1953년 제작된 영화 <리턴 투 파라다이스Return to Paradise>의 배경이 된 곳이다. 더불어 <지킬 앤 하이드Jekyll and Hyde>와 <보물섬>을 집필한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이 여생을 보내기 위해 선택한 곳이기도 하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오르내리며 깊고 고요한 열대우림과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의 풍경을 번갈아 마주하다 보면 이곳에서 오랜 시간을 머물며 온전한 안식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우폴루섬 남쪽 해안의 로토팡아Lotofaga 마을의 토수아 트렌치 앞에 서면 그 마음은 극에 달한다. ‘물이 있는 구멍’이라는 뜻의 토수아 오션 트렌치는 바닷물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수영을 즐길 수 있는 거대한 해구다. 사모아 최고의 자연경관이라는 찬사를 받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다. 발 디딘 지점에서 30m 아래로 에메랄드빛 바닷물이 깃든 거대하고 고요한 해구의 풍경은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답다. 있는 힘껏 사다리를 잡고 내려가 나무 데크에서 점프! “엄마 뱃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다”라는 혼잣말을 자주 하는데,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조수간만의 차이에 따라 수심과 유속이 달라지지만, 수영에 능하지 않아도 걱정은 없다. 데크에 연결된 밧줄을 잡고 동동 떠서 아늑하게 일렁이는 물결을 만끽할 수 있으니. 사모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곳을 꼽으라면 단연 우폴루섬 중북부 바일리마Vailima 지역의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뮤지엄이다. 병약하게 태어나 평생 동안 요양과 여행을 반복하며 안식처를 찾던 그가 아내와 정착해 살던 지역 이름과 동명의 집 ‘바일리마’를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했다. 스티븐슨은 이곳에 1888년 정착해 눈을 감은 1894년까지 5년밖에 살지 못했지만 사모아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행복한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뮤지엄 안쪽으로 난 트레킹 코스를 따라 한 시간을 오르면 산 정상에 그의 무덤이 있다. ▶travel info SAMOA 사모아는 열대우림기후의 화산 군도로 연중 덥고 습한 편이다. 11월부터 4월까지는 우기, 여행은 건기인 5월부터 3월까지가 적합하다. 동쪽으로 미국령인 아메리칸사모아가 있다. 언어는 사모아어와 영어를 공용어로 쓴다. 해가 가장 먼저 뜨는 나라로 한국보다 5시간 빠르다. 화폐는 탈라tala. 1탈라는 한화로 약 450원이다. Airline 한국에서 사모아까지 가는 직항은 없다. 가장 쉬운 방법은 이웃 섬나라인 피지의 난디공항까지 대한항공 직항을 이용한 후 피지 에어웨이즈를 타고 사모아의 수도 아피아까지 가는 것이다. 난디에서 아피아까지는 1시간 40분 거리다. Food 전통 조리방법인 우무umu로 만든 구이 요리들과 오카okq가 유명하다. 오카는 참치회를 코코넛 크림, 라임즙, 향신료, 각종 야채와 버무린 후 약간의 숙성과정을 거친 요리로 신선한 생선 러드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맥주도 맛있는데 유명한 현지 맥주로는 라거인 바일리마vailima와 타울라taula가 있다. hotel 코코넛비치클럽Coconut Beach Club 하와이의 유명한 세프였던 미카Mika가 리조트가 있는 해변에 반해 이곳에 바를 연 것이 리조트의 시작이다. 자연친화적이지만 고급스러움을 놓치지 않은 아름다운 리조트다. 사모아에서 유일하게 수상 방갈로를 보유하고 있다. 세프가 문을 연 리조트다 보니 음식 맛있기로 꽤 유명하다. 최근 CNN은 코코넛비치클럽의 레스토랑을 가장 예약하기 어려운 인기 있는 레스토랑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www.cbcsamoa.com 스티븐슨@마나세 리조트Stevenson Manase Resort 고급 휴양지를 꿈꾸고 떠났다면 다소 불편할 스탠더드 등급이다. 객실 상태, 레스토랑의 퀄리티 등이 많이 아쉽다. 그럼에도 이곳을 추천하는 이유는 사바이섬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을 소유한 리조트이기 때문이다. 사모아의 ‘팔레’ 형태로 만들어진 방도 있어 숙박이 가능하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인근의 마을 투어와 다양한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다. www.stevensonsatmanase.com 에디터 손고은 기자 글·사진 Travie writer 문유선 취재협조 사모아관광청 한국사무소 www.samoatravel.kr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 해외여행 | 뱃길 따라 유유자적 산둥성山東省 산책

    해외여행 | 뱃길 따라 유유자적 산둥성山東省 산책

    인천에서 위동페리에 몸을 실은 지 17시간, 칭다오靑岛 국제여객터미널에 도착했다. 물길 따라 건너온 칭다오. 산둥성은 기다린 시간만큼이나 여유로웠다.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처음 가본 인천국제여객터미널, 이름도 생소하고 가는 길마저 낯설었다. 배에 오르기 직전까지 ‘배를 타면 이렇다, 저렇다’ 말했던 경험자들의 얘기가 머릿속에서 엉키기 시작했다. 배 멀미에 대한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오른 페리. 왕복 34시간을 바다 위에서 지내 본 소감을 말하라 한다면 한마디로 ‘예스’다. 화려하고 고급스럽진 않더라도 물 위에서 오고 가는 시간만큼은 바다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또 오랜 이동시간이 지루하지 않을 만큼 충분한 부대시설도 있다. 드디어 도착한 칭다오. 칭다오 주민들이 칭다오를 표현하는 여덟 글자가 있으니 藍天남천, 碧海벽해, 紅瓦홍와, 綠樹녹수. 푸른 하늘과 옥색 바다, 빨간 지붕 그리고 청색 나무라는 뜻인데 그만큼 위아래, 앞뒤로 볼 것 많고 자연이 아름다운 지역이라는 의미다.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칭다오는 40여 년간 독일의 식민 지배를 받으며 중국의 주요 무역항으로 변화했고 당시 지어졌던 독일풍 건물들이 대표적인 볼거리로 남았다. 붉은색 지붕을 갖춘 고풍스런 건물들은 그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지금은 중국 고위 간부나 부유층의 저택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독일 식민시대 당시의 옛 건물들은 칭다오 구도시에서 볼 수 있다. 구도시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 있는데, 샤오위산小魚山·소어산공원이다. ‘작은 고기를 말렸던 산’이라는 의미의 샤오위산은 중국 정부에서 공원을 조성하고 누각을 세운 덕분에 칭다오 주민들뿐 아니라 관광객에게도 전망 좋은 공원으로 알려졌다. 공원 곳곳에는 물고기 모양의 조각이 있으며 정상에서는 구도시의 전경은 물론 칭다오에서 가장 큰 제1해수욕장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주말이면 중국의 예비 신혼부부들이 웨딩촬영을 위해 찾아온다. 과거 칭다오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구도시와 다르게 신도시는 세련되고 깔끔하다. 새롭게 개발한 도시답게 깨끗한 도로와 높은 빌딩들은 또 다른 매력을 뽐낸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라오산 물이 좌우하는 맥주의 맛 칭다오에서 놓치면 안 되는 한 가지, 칭다오맥주靑岛啤酒다. 독일인이 남긴 또 하나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는 칭다오맥주는 독일의 맥주 양조법과 칭다오의 맑은 물이 결합해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덕분에 현재 칭다오맥주는 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 60개국으로 수출하고 있으며 칭다오에서는 매년 8월, 독일의 최대 맥주축제인 옥토버페스트Oktoberfest 못지않은 성대한 칭다오 국제 맥주축제青岛国际啤酒节를 개최한다. 아시아 최대의 맥주축제로 인정받는 것은 물론 세계 4대 맥주축제로도 꼽힌다. 칭다오맥주가 세계적인 맥주로 거듭날 수 있었던 이유는 맥주 맛을 결정짓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수원水原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칭다오맥주를 생산하는 공장은 중국과 타이완을 포함해 19개의 성省에 54개가 있는데, 산둥성에 무려 17개의 공장이 있다. 칭다오맥주가 처음 생산된 곳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물맛이 가장 좋다고 알려진 곳이 산둥성이기 때문이다. 맥주 맛의 근원은 칭다오맥주의 수원인 라오산崂山산맥의 지하수에서 찾을 수 있다. 라오산은 칭다오의 동북부에 위치한 산으로 당나라 시인인 이백이 “중국 동해바다 위에서 보는 라오산의 자주색 노을이 최고로다”라는 시구를 읊었을 만큼 경관이 아름다운 산이다. 지형이 복잡하고 하천의 길이가 짧은데다 물살까지 세지만 이곳의 지하수만큼은 중국 그 어느 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보다 맑다고. 덕분에 라오산의 지하수를 수원으로 만든 칭다오맥주는 다른 그 어떤 지역 맥주보다 시원하고 상쾌한 맛을 낸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칭다오맥주 박물관青岛啤酒博物馆 독일 식민지 시절 독일이 가장 처음1903년 세운 칭다오 맥주공장은 현재 ‘박물관’으로 재설계해 칭다오맥주의 역사를 기록했다. 100여년 전 첫 맥주를 생산할 때의 생산라인을 그대로 재현했고 당시 사용했던 당화糖化 기계 등을 전시했다. 맥주의 공정 과정은 물론 원액 그대로의 칭다오맥주와 생맥주, 두 가지를 모두 맛볼 수 있는 것이 특징. 1층 상점에서는 기념품도 구입할 수 있다. 56 Dengzhou Rd, TaiDong ShangQuan, Shibei, Qingdao +86 0532 8383 3437 www.tsingtaomuseum.com 염원을 담은 발걸음 칭다오까지 갔으니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중국 도교의 성지로 불리는 타이산太山까지는 가보는 것을 추천한다. 칭다오에서 타이산이 있는 타이안泰安시까지는 고속도로를 이용해 약 5시간. 대구 사투리를 섞어가며 구수하게 타이안에 대해 설명하던 가이드는 “5시간이면 가까운 거리”라며 일행을 다독였다. 산둥성 중부에 위치한 타이안은 평원이 발달해 곡류의 생산량이 풍부하다. 강수량도 적어 과일의 당도도 높다고. 그래서인지 길옆에서 돗자리를 펴고 앵두를 팔고 있는 상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어디에서 사 먹어도 상큼달달해 더운 날씨에 사라진 입맛을 돋우는 데 제격이다. 타이산은 타이안의 평원지대에 홀로 우뚝 솟아 있다. 중국 5대 명산을 칭하는 오악五岳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동악東岳으로, 웅장한 봉우리로 둘러싸인 자연경관과 도교의 문화유적을 품고 있다. 유네스코에서도 세계자연유산과 세계문화유산을 동시에 지정했다. 중국에서도 관광지 등급 중 최고 등급인 5A급 관광지다. 타이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외국인 관광객보다 중국인 관광객이 훨씬 많다. 평일인데도 발 디딜 틈이 없었으니, 그들이 생각하는 타이산의 의미를 다시금 실감할 수 있다. 중국인들에게 타이산은 쉽게 오를 수 없는 성스러운 산이다. 과거 황제들도 타이산의 봉선제封禪祭에서 제사를 지내야만 진정한 황제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을 정도. 때문에 진시황제를 비롯해 중국 역사상 72명의 황제가 타이산에 올라 봉선의식을 치뤘다고 한다. 공자, 사마천, 두보, 이백, 제갈량 등 수려한 역사 속 인물들도 타이산에 올라 경치에 감탄해 그 아름다움을 시로 표현해 남기기도 했다. 케이블카와 버스가 없었던 시기에는 1,545m의 높이를 7,000여 개의 돌계단으로 모두 걸어 올라야만 했다. 정상까지 최소 1박 2일은 소요되는 거리였기에 중국 사람들에게도 타이산을 한 번 오르는 것은 오랜 숙원이었다. ‘타이산을 한 번 등정할 때마다 10년은 젊어진다’는 말도 있다. 타이산을 오를 수 있는 코스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부분의 관광객이 이용하는 코스는 남천문南天門 코스. 가장 먼저 관광지로 개발된 코스로 산문의 매표소에서 표를 구매하고 순환버스를 이용하면 중간 지점인 중천문中天門까지 20분 남짓이면 도착한다. 중천문에서 정상에 가까운 남천문까지는 케이블카로 이동이 가능해 한결 쉽게 정상에 도달할 수 있다. 남천문에서 정상인 옥황정玉皇頂까지는 도보로 여유 있게 둘러봐도 채 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날씨가 맑은 날 옥황정을 오르면 타이산을 둘러싼 능선은 물론 타이안 시내까지 한눈에 담긴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물의 도시라 불러다오 산둥성에서 성도인 지난濟南은 ‘물의 도시’라고 불린다. 지난에만 크고 작은 샘물이 3,000개에 달하고 지난시 중심에만 140여 곳의 천이 흐르고 있다. 때문에 지난에는 지하철이 없고 지상으로 전기를 이용해 이동하는 전동차가 다닌다. 높은 건물이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워낙 물이 많이 흐르는 곳이라 지반이 높은 건물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서 대부분 낮은 건물이 줄지어 있다. 오전 8시가 채 되지 않은 이른 아침에 찾은 표돌천趵突泉은 이르다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활기 넘친다. 삼삼오오 모여 태극권으로 아침을 맞이하는 어머님들부터 아침 햇볕 아래 홀로 운동을 즐기는 어르신도 보인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돼요”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소리에 돌아보니 가방 한 가득 물통을 담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표돌천의 물맛이 달달해 청나라의 건륭제가 베이징의 옥천수玉泉水를 표돌천의 샘물로 바꿔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더니, 어르신들 역시 물을 담아 가기 위해 식수대 옆에 모여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의 수많은 샘물 중에서도 유명한 곳은 72개 정도. 그중 제일로 치는 샘물이 표돌천이다. ‘표돌趵突’이라는 한자 그대로 스스로 솟구쳐 오르는 샘이라는 의미로 중국에서는 ‘천하제일천天下第一泉’이라고도 불린다. 표돌천을 중심으로 공원을 조성했고, 공원 역시 5A급 관광지로 인정받았다. 물론 공원의 한가운데에 세 갈래로 올라오는 표돌천이 자리했다. 표돌천 물줄기는 평균 수온이 18도로 겨울이면 물 위에 수증기가 가득하다고. 공원 안에는 표돌천 외에도 금선천, 수옥천 등 20여 개의 천이 샘솟는다. ▶travel info SHANDONG FERRY 위동페리 뉴 골든 브릿지 V New Golden Bridge V 인천-칭다오 항로를 오가며 이동시간은 약 17시간. 선내에는 노래방과 레스토랑, 커피숍, 편의점, 면세점 등이 입점해 있다. 단체 여행객의 경우 미리 예약하면 시원한 바닷바람을 느끼며 칵테일을 즐길 수 있는 ‘선상 칵테일 파티’가 가능하고, 기존 식비에 1인 1만원씩 추가하면 별도의 레스토랑에서 신선한 회와 새우튀김 등 해산물을 재료로 한 편안한 식사도 즐길 수 있다. 승무원들의 다양한 이벤트는 덤이다. 인천에서 칭다오를 가는 길에는 바다 한가운데서 펼쳐지는 불꽃놀이를, 칭다오에서 인천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매직쇼와 노래자랑, 부채춤 등을 선보인다. 인천에서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 출발하고 칭다오에서는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 출발해 이튿날 인천항에 도착한다. 위동페리 www.weidong.com 032-770-8000 객실종류 딜럭스로열(2인실), 로열(2인실), 비즈니스(2층 침대, 4~8인실), 이코노미(2층 침대·다다미, 11~17인실), 이코노미침대(2층 침대, 50인실), 이코노미다다미(2층 침대·다다미, 64인실) HOTEL 칭다오 더블트리 바이 힐튼호텔Qingdao Doubletree by Hilton Hotel 칭다오를 여행하는 여행자의 피로를 확실하게 풀어 줄 수 있는 호텔. 세계적인 체인 호텔인 만큼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디자인은 물론 국제공항에서도 멀지 않다. 매일 오전 6시30분부터 오후 3시까지 호텔-공항 무료 셔틀 버스도 운행한다고. 수영장, 헬스클럽 등 부대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조식도 알차다. 객실에서 와이파이WI-FI 사용이 유료라는 점은 아쉽지만 로비에서는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 Yanqing 1st Class Hwy Jimo Section, Jimo, Qingdao doubletree.hilton.co.kr +86 532 8098 8888 RESTAURANT LINDEN BBQ炭火良田 지난에서 칭다오맥주를 양꼬치와 함께 즐길 수 있는 숯불구이 꼬치 전문 체인점. 실내의 벽은 아기자기한 그림으로 가득하고 깔끔한 디자인에 서비스 역시 만점이다. 양꼬치는 물론 닭날개, 생선꼬치 등 다양한 종류의 꼬치를 맛볼 수 있다. 여행자들을 위한 무료 와이파이WI-FI도 제공한다. 17 Longitude 11th Rd, Lixia, Jinan 11:00~01:00 +86 0531 8266 1548 글·사진 양이슬 기자 취재협조 위동페리 www.weidong.com 032-770-8000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 광복 70주년 한반도… 역사의 숨결 깃든 국토의 경계

    광복 70주년 한반도… 역사의 숨결 깃든 국토의 경계

    긴 시간 바람과 물결에 깎이고 사람들의 손에 다듬어지며 만들어진 국토의 경계는 과거 세대의 신산했던 삶과 미래 세대의 또 다른 희망을 이어주는 삶의 구체적인 단위가 됐다. 단순히 외부와 구분 짓는 경계가 아닌, 또 다른 곳과 교류하며 나아갈 수 있는 출발지점이기도 하다. EBS 1TV ‘한국기행’은 광복 70주년 특집으로 한반도 편을 준비했다. 바람의 전설이 깃든 한라산, 거기에서 내다보이는 국토의 최남단 마라도와 이어도, 또 동쪽 끝 독도는 물론 서쪽 끝에서 독도 못지않게 외로운 처지인 백령도, 그리고 155마일에 이르며 동서를 가로지르는 비무장지대까지 국토의 경계를 뚜벅뚜벅 밟았다. 지난 10일 한라산을 시작으로 14일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밤 9시 30분 차례차례 소개한다. 11일은 최남단 작은 섬 마라도 142명 주민의 삶을 만난다. 바람도 많고 파도도 높아 나무 한 그루 쉽게 자랄 수 없는 척박한 땅은 이제 매일 수백명이 찾아드는 관광지로 새롭게 변모했다. 여기에서 사는 해녀 네 사람은 평생 물질을 해왔고, 지금도 할망당에 예를 갖추며 무사안녕을 기원한 뒤 푸른 파도 속으로 몸을 던진다. 그들의 태왁 안에 가득 찬 것들은 그냥 바닷속 갖은 해산물이 아니라 질기고 질긴 삶의 에너지들임을 확인할 수 있다. 12일에는 현대사의 비극까지 고스란히 품고 있는 백령도를 찾는다. 한반도가 잠시 전쟁이 멈춰진 상황임을 다시금 체감시켜 주는 공간이다. 인천에서 북쪽으로 무려 178㎞, 뱃길 4시간 30분의 오지이지만 대부분 실향민으로 이뤄진 주민들은 이제나저제나 하면서 수십 년을 망향의 설움으로 보내온 이들이다. 13일 비무장지대 편, 14일 독도 편이 준비돼 있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 [이슈&이슈] 7년째 불편한 동거… “갑문 증설해야” vs “농·공업용수 모자라”

    [이슈&이슈] 7년째 불편한 동거… “갑문 증설해야” vs “농·공업용수 모자라”

    금강을 경계로 마주 보고 있는 충남과 전북이 금강하굿둑 해수 유통 여부를 놓고 7년째 갈등을 빚고 있다. 9일 각 지역에 따르면 충남은 금강하구 토사 퇴적을 방지하고 수질을 개선하기 위해 배수갑문을 증설해 바닷물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전북은 금강하굿둑에 해수를 유통하면 농업용수와 공업용수 공급에 차질이 빚어질 뿐 아니라 저지대 침수가 우려된다며 반대하고 있다. 금강하굿둑은 충남 서천군 마서면과 전북 군산시 성산면을 연결하는 제방이다. 1983년 공사가 시작돼 1990년 10월 준공됐다. 총사업비 1010억원이 투입됐다. 제방 길이는 1127m이고 둑 중앙부에 30m짜리 배수갑문 20개가 설치됐다. 하굿둑 건설로 총저수량 1억 3800만㎥의 호수가 조성됐다. 수자원은 충남과 전북 지역 농·공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농업용수는 충남에 연간 1억 6300만t, 전북에는 1억 9000만t이 공급된다. 공업용수는 전북에 3000만t이 공급된다. 또 금강하굿둑은 상류 지역 7000㏊ 농경지의 홍수 조절과 염해 방지 기능을 한다. 뱃길로 오가던 충남과 전북을 육로로 연결해 주민들의 교통이 대폭 개선됐고 관광산업 발전 효과도 거뒀다. 그러나 이웃사촌을 연결해 준 하굿둑이 20여년이 지난 오늘날 양 지역 갈등의 씨앗으로 전락했다. 충남도와 서천군은 2009년부터 ▲금강호의 토사 퇴적으로 인한 하굿둑 주변의 하상 지형 변화 ▲수질오염 ▲민물과 바닷물이 교차하는 하구언의 독특한 생태계 파괴 등을 지적하고 나섰다. 충남도는 서천 측 하굿둑 인근에 연간 80만t의 토사가 쌓여 물의 흐름을 막기 때문에 환경 문제가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수질이 나빠지고 어도 기능이 떨어져 생태계가 훼손된다며 해결 방안 마련을 요구하고 있다. 대전·충남 지역 환경단체들도 하굿둑 건설로 강과 바다가 만나는 기수역의 생태계가 심각하게 훼손됐다고 지적했다. 환경 변화, 수질오염, 어종 감소 등 부작용이 크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들은 기능을 상실한 하굿둑의 수문 개방과 생태계 복원 등을 논의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또 회유성, 회귀성 어류들의 산란 시기에 맞춰 하굿둑 수문을 개방해야 한다고 밝혔다. 해수 유통 방법으로는 현재 둑으로 막혀 있는 서천군 쪽에 배수갑문을 추가로 설치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와 함께 수문의 아랫부분을 열어 해수의 유입을 허용하면 금강호에 퇴적된 토사가 휩쓸려 나가면서 수질오염과 생태계 파괴 문제가 완화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서천군은 경기 시화호의 경우 1997년 화학적 산소요구량(COD)이 17.4이었지만 해수를 유통시키자 2006년에는 2.6으로 개선된 사례가 있다며 금강호 오염을 해소하는 데는 해수 유통만이 해답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전북은 충남의 이 같은 요구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못 박았다. 금강하굿둑에 해수를 유통할 경우 농업용수와 공업용수 공급에 차질을 빚게 된다며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다. 바닷물이 유입되면 금강 하류의 수위가 올라가 저지대 농경지 7000㏊가 침수 피해를 본다는 점도 내세우고 있다. 충남과 전북이 이같이 다툼을 벌이자 정부가 양측의 주장을 검증하는 용역을 실시했다. 당시 국토해양부는 2010년 3월~2011년 12월 ‘금강하구 생태계 조사 및 관리체계 구축 용역’을 실시해 충남도와 서천군의 요청에 대한 타당성 검토를 했다. 용역 결과 갑문 증설은 하굿둑의 홍수 예방 능력상 현재 상태로는 불필요하고 앞으로 홍수 예방 기능 강화가 필요한 시기에 검토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특히 해수를 유통하게 될 경우 용수원 확보 대안이 없고 대체 시설에 막대한 예산이 소요돼 타당성이 없다고 결론지었다. 해수를 유통하면 바닷물이 금강 상류 24㎞ 지점까지 올라가 염분이 확산되기 때문에 현재의 취수시설로는 농업용수와 공업용수 공급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또 염분의 영향이 없는 상류로 23개 취수장과 양수장을 옮기려면 7128억~2조 9512억원의 막대한 예산이 소요된다며 해수 유통 방안은 타당성이 없다고 밝혔다. 정부의 이 같은 용역 결과에 따라 금강하굿둑 해수 유통 문제는 일단락되는 듯했다. 하지만 올 들어 충남도가 연안·하구 생태 복원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용역을 실시해 또다시 불이 붙었다. 연안·하구 생태 복원은 간척 사업이나 하굿둑 건설로 생긴 제방과 토지를 이전 상태로 돌려놓는 역간척(逆干拓) 사업이다. 충남도는 도내 279개 방조제와 폐염전, 해안사구, 방파제 등을 대상으로 연안 및 하구 생태 복원 방안 용역을 실시하고 있다. 이 용역에서는 금강의 녹조 발생 등 오염 원인이 해수가 유통되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도 조사할 방침이다. 용역 발주와 함께 충남은 금강하구의 건강한 생태 환경을 위해 부분 개방이든 전면 개방이든 해수 유통이 필요하다고 다시 주장하고 있다. 금강 중하류의 재해 예방과 장항항 기능 회복을 위해서도 배수갑문 확장 등 하굿둑 개선 사업이 추진돼야 한다는 논리다. 이에 대해 전북은 금강의 수질 악화 원인은 하굿둑보다 상류에 있는 대전과 충남 지역 도시의 오염물질 배출에서 찾아야 한다고 반박했다. 전북도는 금강 상류의 미호천과 갑천의 유입 오염 부하량이 금강 본류 수질오염원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지적했다. 금강호 수질 관리를 위해 선행돼야 할 상류 오염원 차단 사업을 외면하고 해수 유통만을 주장하는 것은 본질을 왜곡한 것이라고 밝혔다. 국토부도 금강호 수질 악화를 방지하기 위해 미호천과 갑천의 수질 개선 노력이 필요하다는 용역 결과를 내놓았다. 실제로 충남의 하수관거 보급률은 65.2%로 전국 평균 73.4%보다 훨씬 낮고 전국 최하위권이다. 이같이 충남과 전북의 금강하굿둑을 둘러싼 대립은 양측이 서로 한발도 물러서지 않은 채 기존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어 해결 방안을 찾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취수 및 양수 시설을 상류로 이전하는 것만이 충남과 전북의 입장을 모두 수용하는 방안이나 정부는 타당성이 없다고 판단한 상황이어서 두 지자체의 불편한 동거는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특허 신기술로 호수 바닥 퇴적물 약품 안 쓰고 말끔히

    특허 신기술로 호수 바닥 퇴적물 약품 안 쓰고 말끔히

    강과 바다, 호수에서 대량 증식해 수질을 악화시키는 녹조류가 종종 큰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이같이 물에 뜬 녹조류나 물 아래에 침전된 오니 등을 친환경적으로 처리하는 전문기업이 있어 주목받고 있다. ㈜원준설 김원태(59) 대표가 주인공이다. 15년쯤 전, 준공된 지 몇 년 안 된 경기 고양 일산호수공원에서 악취가 나고 수질이 혼탁해지는 등 물이 썩는 현상이 나타났다. 수질을 악화시키는 오염퇴적물을 제거하지 못해 발생한 현상이다. ‘동양 최대 인공호수’라고 홍보해 온 한국토지공사(현 한국토지주택공사)와 고양시로서는 난감한 일이었다. 당시 오염된 45만t가량의 호수 물을 방류하고 깨끗한 새 물로 채우자는 의견 등 여러 가지 해법이 제시됐지만 모두가 수긍할 만한 마땅한 해답은 없었다. 특히 물 교체 방법은 많은 비용과 시간이 소요된다는 문제점도 있었지만, 물을 빼 봤자 수질을 악화시키는 오염퇴적물을 근본적으로 제거할 수 없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호수 바닥의 퇴적물은 물이 빠짐과 동시에 물속 자갈이나 흙속으로 스며들었다가 물을 채우면 다시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때 상하수도 준설 관련 업체를 운영하던 김 대표가 시 의뢰를 받고 호수공원을 찾았다. ‘어떻게 하면 호수를 저렴한 비용으로 맑게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가만히 물속을 들여다보던 그의 뇌리에 한 가지 묘안이 떠올랐다. 폴리에틸렌 재질의 원통형 브러시를 만들어 회전시키는 방법으로 호수 바닥에 쌓여 있는 퇴적물을 떼어 낸 뒤 이를 흡입 처리하는 공법을 창안하게 된 것이다. 노력을 거듭한 끝에 브러시와 혼탁 방지막, 흡입장치를 장착한 ‘수륙양용형 준설정’이 제작됐다. 처음에는 기계를 만들어 사용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김 대표의 기술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당시 고양시 공원관리사업소 담당 공무원이 특허등록을 하라고 권했다. 관급 일을 수주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2005년 5월 준설정의 핵심 흡입준설 장치인 수중 스크럽을 개발해 특허출원했다. 일산호수공원에서 시험준설을 한 결과 성공적이었다. 2003년 상용화에 들어가기 위해 오니 수거장치를 개발해 특허등록을 했고, 이듬해에는 궤도를 장착한 수면 부상형 오니 준설기까지 개발했다. 수심이 제법 있는 호수에서 시험운행을 한 결과 오염물 확산 없이 준설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면서 준설정의 대량생산에 들어갔다. 2005년에는 수심이 깊은 곳의 오니 제거를 위해 ‘수중 오니 제거 로봇’을 개발해 특허등록을 하고 국내의 여러 호수공원 오염퇴적물 제거에 나설 수 있게 됐다. 원준설의 가장 대표적인 공법은 20개 이상의 특허기술이 집약된 ‘저혼탁저면준설’이라 할 수 있다. 국내 유일한 공법이다. 이 공법으로 일산호수공원의 수질을 10여년간 위탁관리하고 있으며, 물 교체 비용보다 훨씬 적은 예산으로 3m 깊이 수심의 자갈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맑은 수질을 유지하고 있다. 입소문이 나면서 일산호수공원은 물론 송도 센트럴파크, 국회 연못, 국립중앙박물관 연못, 청라신도시 주운수로, 세종시 중앙호수공원 등 30곳 이상의 수질관리를 맡게 돼 이 분야에서 독보적 전문업체가 됐다. 최근에는 2020년 6월까지 유효한 환경신기술인증을 받아 지방자치단체나 국가기관 등의 관공서와 수의계약을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췄다. 김 대표 기술의 장점은 바닥을 손상시키지 않고 준설 또는 오염물질을 제거할 수 있다는 점이다. 브러시 덮개와 유연 덮개를 2중으로 활용해 오염물질이 주변으로 방출·확산되는 것도 최소화했다. 또 브러시의 회전속도, 흡입 압력, 작업 수심에 따른 궤도의 조절이 자동 및 수동으로 가능하다. 특히 오염물질을 뽑아내는 배사펌프도 장착돼 있어 수질이 개선된 물은 다시 친수공간으로 유입되고, 침전된 퇴적물은 건조해 녹화토로 재이용할 수 있어 환경친화적이다. 보유한 특허 신기술을 이용해 녹조류를 대량 제거하는 다양한 경험도 갖고 있다. 국내 도시공원 및 골프장 등에만 만들어지던 연못과 호수는 이제 우리 주변에 일반화됐다. 그러나 이들 수변공간이 체계적으로 관리되지 않아 매년 하절기만 되면 녹조류 등으로 경관을 저해하는 것은 물론 악취를 발생시켜 종종 민원의 대상이 된다. 2010년 말풀 및 녹조류, 가시파래 같은 처치 곤란의 오염물질을 제거하는 기술 개발에도 주력한 이유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송도의 대표적 명소인 센트럴파크에 해조류인 가시파래가 봄철만 되면 급증해 골머리를 앓았다. 인부들을 동원해 제거 작업을 펼쳐 왔지만 사람의 힘만으로는 최대 8만 3000㎡나 되는 면적을 관리할 수 없었다. 이때 원준설의 기술과 준설정이 빛을 발휘했다. 최근에는 해외에서도 호수 등에 대한 수질관리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김 대표는 “수질을 오염시키는 원인물질을 꾸준히 효과적으로 준설하면 약품을 사용하지 않고도 호수는 물론 팔당호, 4대 강, 경인아라뱃길 등도 본래 목적대로 깨끗하게 사용하면서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신명 나는 마을’ 다 같이 만들어 봅시다] 터치, 마포 알리는 파란눈

    “공덕시장엔 튀김 가게가 엄청 커 원하는 만큼 바구니에 담은 뒤 자리 잡고 막걸리를 주문하면 흥이 나지.”(사라, 마포관광 서포터스) 마포구에 애정을 가진 외국인 유학생들이 모였다. ‘마포 관광 글로벌 서포터스’다. 지난 4월 발족한 이들은 마포 곳곳의 관광자원을 체험한 뒤 그 후기나 느낌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한동안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로 주춤했다가 최근 다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서포터스는 중국, 대만, 미국, 스페인, 콩고 등 12개국에서 온 27명의 재한 유학생들로 구성됐다. 구에 대한 관심이 높고 SNS에 능통한 ‘스마트족’들이다. 이들은 개인적으로 SNS에 소식을 알리는 것 외에 서포터스 간 소통창구인 ‘네이버 밴드’를 통해 각자의 체험담과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 서포터스에게 주어지는 특전 중 하나는 각종 특별행사에 초대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양화진 근대사 뱃길 탐방’을 비롯, 난지 캠핑장과 공덕·망원 시장 등 체험 기회가 주어졌다. 특히 전통시장 체험 후기는 외국인들의 호응이 가장 높다. 홍콩의 위암 청이 올린 전통시장 체험 글은 페이스북 친구 180명으로부터 ‘좋아요’를 받았다. 그는 “홍콩, 대만 사람들 관심이 많아요~ 대박!”이라며 자랑하기도 했다. 구는 이달 중 서포터스와 함께 외국인 환대 서비스에 대한 모니터링을 실시할 계획이다. 또 올 연말까지 홍대 앞 거리미술전, 마포나루 새우젓 축제, 김장나눔 축제 등 초청 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최지숙 기자 truth173@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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