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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시 올해 외국인 관광객 300만명 유치…글로벌 관광도시 조성 등 담은 부산관광진흥계획 마련

    부산시가 글로벌 관광도시 조성 등을 담은 부산관광진흥계획을 마련했다. 부산시는 외국인 관광객 300만명 유치를 목표로 하는 ‘2018년 부산 관광진흥종합계획’을 수립하고 5대 전략 62개 세부 과제를 추진한다고 7일 밝혔다. 5대 전략은 관광산업 지속 성장 기반 강화, 매력있는 관광콘텐츠 개발 확대, 관광객 유치전략 다변화, 국제적 수준의 관광매력물 개발, 수요자 중심의 맞춤형 관광서비스 제공 등이다. 관광산업의 지속성장 기반을 강화하고자 관광통계와 빅데이터를 활용한 마케팅 전략을 마련하고 조선통신사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기념 후속 사업을 발굴한다. 이기대 인공동굴 활용한 체류형 관광상품을 개발하고 서부산에 제2컨벤션센터 건립을 추진한다. 매력있는 관광콘텐츠 개발을 위해 해양레포츠를 대중화하고 관광 특화상품 개발 등 고부가가치 관광콘텐츠를 육성한다. 어묵과 밀면 등 지역 음식을 주제로 하는 부산음식관광을 활성화하고 영화관광 특화상품도 개발한다. 관광객 유치 다변화를 위해 일본과 홍콩·대만 등 중화권, 동남아 무슬림 국가 등을 새로운 관광시장으로 개척하고 외국 드라마와 영화 등의 부산 로케이션 지원을 확대한다. 이밖에 태종대와 용두산공원 등 역사문화자원 관광벨트를 조성하고 낙동강 뱃길 복원 등 서낙동강 생태관광상품도 개발한다. 부산시 관계자는 “16개 구·군, 관광공사, 관광협회 등 민·관이 참여하는 협의체를 구성해 부산관광의 체질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말했다.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정부 “만경봉호에 식자재ㆍ유류 제공”… 김여정은 北예술단 배웅

    정부 “만경봉호에 식자재ㆍ유류 제공”… 김여정은 北예술단 배웅

    6일 현송월 삼지연관현악단 단장이 이끄는 북측 예술단 본진을 태운 만경봉 92호가 국내 해역을 6시간 30분 동안 항해해 강원 동해 묵호항에 들어왔다. 동해의 파고가 2~4m로 높아 여객선의 항해에는 다소 거친 상황으로, 예술단원들의 피로도가 높은 여정이었다. 예술단원들은 이날 배에서 숙식을 하며 국내와의 접촉을 피했다. 극소수의 정부 관계자만 선박에 드나들었을 뿐 특별한 일정도 없었다.정부는 이날 오후 4시부터 묵호항 일대를 헬기, 드론 등의 비행을 금지하는 비행금지구역으로 임시 설정했다. 만경봉 92호는 오후 4시 30분쯤 방파제에 모습을 드러냈고, 30분 뒤 해경선 2척의 인도와 예인정 2척의 도움으로 정박했다. 전날 밤부터 정부 관계자들은 묵호항 연안여객선터미널의 전력 설비를 점검했다. 통상 선박이 항구에 정박할 때 육지 전력을 연결해 사용하는 점을 감안하면 이 설비로 만경봉 92호에 전력을 공급할 가능성도 있다.만경봉 92호의 마스트에는 인공기 문양이 있고 선체 오른쪽 면에 붉은색 글씨로 ‘만경봉-92호’라고 적혀 있었다. 객실 창문은 대부분 커튼으로 가려져 내부가 보이지 않았고 일부 객실에서 붉은색 외투를 입은 예술단원들이 서서 창밖을 내다봤다. 검은색 옷을 입은 일부 북측 남성이 선실 윗부분 밖으로 나와 손을 흔들었다. 일부 보수단체들은 만경봉 92호의 입항에 인공기, 한반도기,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사진을 소각하며 소동을 빚기도 했다. 정부는 만경봉호 정박 과정에서도 대북 제재 위반 논란이 발생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고 있다. 통일부 관계자는 “미국 제재 대상이 아니지만, 미측과 협의해 제재 대상이 아님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이 선박에 제공하는 식자재에 미국산이 포함되지 않도록 할 방침이다. 지난해 9월 미국 재화 및 서비스 등의 대북 이전을 제한한 미국 독자 제재를 고려한 것이다. 또 만경봉 92호의 정박 중 난방과 귀환 시 사용할 유류를 지원하게 될 경우에 대비해 미국 및 유엔 등과 긴밀히 협의할 방침이다. 유엔은 대북 정유제품 제공 상한을 ‘연간 50만 배럴’로 제한하고 있는 만큼 추후 유엔 대북제재위원회에도 보고할 계획이다. 이날 북한 대내용 라디오방송인 조선중앙방송은 “평양역에서 박광호 동지, 김여정 동지를 비롯한 당 중앙위원회 간부들과 문화성 일꾼들이 예술단을 전송했다”며 “예술단은 열차로 원산까지 이동한 후 만경봉 92호를 타고 남조선을 방문하게 된다”고 보도했다. 통일부 관계자는 “김여정이 박광호 당 선전선동부장과 (환송에) 나온 것으로 봐서 선전선동부 부부장으로 분석된다”고 말했다. 한편 평창동계올림픽에 참가하는 북한 선수단 46명 중 전날까지 45명이 입국했는데, 마지막 한 명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선총련) 선발대 중 한 명으로 이날 도착했다. 강윤혁 기자 yes@seoul.co.kr
  •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충절의 표상이자 외교 선구자… 고려 향한 ‘일편단심’ 오롯이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충절의 표상이자 외교 선구자… 고려 향한 ‘일편단심’ 오롯이

    지방화 시대를 맞아 해당 지역과 관련된 역사 인물을 대상으로 각종 문화행사가 열린다. 그 가운데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를 위한 행사가 눈에 띈다. 포은은 어느 지역에서 어떤 행적을 남겼을까. 그가 남긴 시 작품을 통해 포은의 자취를 따라가 보자.언양에서의 귀양살이 나그네 마음 오늘따라 더욱 서글퍼져서 외딴 바닷가 산에 올라 시냇물 바라보네 뱃속의 글은 도리어 나라를 그르쳤고 주머니엔 목숨 부지할 약 하나 없구나 용은 세밑에 시름 겨워 깊은 골짝으로 숨었고 학은 맑은 가을 기뻐하여 창공을 날아오르네 국화꽃 꺾어다 한껏 취하고 보니 옥같이 고운 임금 구름 너머 계시누나 포은이 울산의 언양에서 귀양살이하던 1376년에 지은 ‘언양에서 맞은 중양절’(彦陽九日有懷)이란 시다. 예전에는 중양절인 9월 9일이 큰 명절 중 하나로, 그날 산에 오르거나 국화꽃을 술잔에 띄워 마시는 풍속이 있었다. 포은은 39세부터 41세까지 이곳 언양에서 1년 남짓 귀양살이를 했다. 남들은 중양절을 맞아 한껏 들떠 있었지만, 자신은 귀양 온 신세다 보니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그래서 언양 대곡천에 있는 반구대(盤龜臺)에 올라 술을 마시며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달랬다. 당시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개혁 정책을 펴던 공민왕이 시해되고 이인임을 중심으로 한 친원파가 원나라 사신을 맞이하려고 할 때, 포은은 이를 극력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이곳으로 귀양을 왔다. 1971년에 선사시대 암각화가 발견되면서부터 암각화가 새겨진 그 절벽이 반구대란 이름으로 세상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사실 원래의 반구대는 그곳에서 대곡천을 따라 상류로 1㎞쯤 떨어진 곳이다. 예전 사람들은 이곳을 포은이 노닐던 곳이라 하여 포은대(圃隱臺)라고 부르고, 그 옆에 포은을 모신 반구서원을 세워 추모했다.#사신이 되어 명나라와 일본을 오가다 명나라가 원나라를 북쪽으로 밀어내고 중원을 차지하자 고려 조정은 친명파와 친원파로 나뉘어 대립한다. 이때 포은은 이성계, 정도전과 함께 친명을 주장했고, 명나라와의 중요한 외교적 사안이 있을 때마다 명나라로 사신을 갔다. 36세 때인 1372년에 간 것이 첫 번째 사행이다. 당시 북쪽의 육로는 원나라에 막혀 있어 뱃길로 바다를 건너 다녀와야 했는데, 거친 풍랑을 만나 일행이 익사하는 일까지 겪었다. 포은은 복잡다단한 국제 관계 속에서 누구도 맡기 싫어하던 사신의 임무를 1388년까지 모두 여섯 차례나 맡아 명나라와의 관계 개선에 큰 역할을 했다. 포은은 명나라뿐만 아니라 일본과의 외교에서도 활약을 펼쳤다. 1377년에는 일본에 건너가 왜구에게 포로로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귀환시켰고 왜구의 근절을 강력히 요구하기도 했다. 그때 지은 시 ‘고국에서는 소식이 없는데’(故國無消息)의 한 구절이다. 사신 되어 일본 땅 유람하다가 사람들에게 이곳 풍습 물어보니 이를 검게 물들여야 귀한 사람이요 신발 벗고 맞이해야 공경한다 여기네 일본을 칠치지국(漆齒之國)이라고도 한다. 이는 예전에 시집간 여자가 치아를 옻칠처럼 까맣게 물들이는 풍습에서 유래한 말이다. 포은은 일본에서 현지인들에게 그곳의 풍습을 물으며 관심을 보였는데, 이를 검게 칠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신발을 벗고 맞이해야 상대방을 공경하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이를 시로 남긴 것이다.#이성계와의 만남과 결별 포은은 24세 때 과거에 장원 급제해 벼슬을 시작했다. 그리고 관직 생활 초기인 28세(1364)에 이성계의 종사관이 돼 여진 정벌에 참가했다. 이를 인연으로 이성계가 남으로는 황산대첩이라 불리는 운봉전투에서 왜구를 격파하고, 북으로는 함경도 길주에서 여진의 추장 호발도(胡拔都)를 대파할 때 그를 수행했다. 이 지역은 옛날에 잃어버렸다가 선왕께서 다시금 개척하신 곳 백성 많아 여러 풍속 뒤섞여 있고 지세 좋아 걸출한 인재 많이 나네 길은 해변 따라 감돌아 가고 산은 말갈(靺鞨) 땅에서 뻗어 나왔네 용맹스런 원수 모습 바라보느라 한 해가 저물도록 돌아갈 줄 모른다네 ‘홍무 임술년에 이 원수의 동북면 정벌 길을 따라가며’(洪武壬戌從李元帥東征)란 시다. 포은은 이 시에서 남북을 오르내리며 외적을 무찌르는 이성계의 모습을 존경 가득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성계의 초상화를 보고서 지은 화상찬(畵像讚)에서는 “조정에서 정책을 결정하거나 군막에서 작전을 펼치는 능력 면에서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역사상 이만한 분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최고의 찬사를 올리기까지 했다. 이성계도 기득권 귀족 세력이 아닌 지방 향리 출신에다 정치적, 외교적 식견을 갖춘 포은 같은 인재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라 두 사람은 오랫동안 동지적 관계를 유지했다. 적어도 두 사람이 1389년 공양왕을 추대하고 그 공으로 좌명공신(佐命功臣)에 함께 책봉될 때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고려를 유교 국가로 다시 일으키려는 포은의 생각과 달리 이성계의 또 다른 파트너인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세력들은 신왕조 건설이라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결국 포은은 자신이 평생 지켜 온 유교적 신념에 따라 그들과 결별할 수밖에 없었고, 최후까지 고려 왕조를 지탱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고려가 망하기 100일 전인 1392년 4월 4일 세상을 떠난다.#사후 추숭, 서원 건립과 문집 간행 조선이 건국된 지 10년째 되는 1401년에 자신을 죽게 한 태종 이방원에 의해 학문과 충절의 인물로 공식적인 인정을 받는다. 영의정 벼슬을 추증하고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린 것이다. 그리고 세종은 그의 문집을 가져오게 하여 읽어 본 뒤 아들 정종성(鄭宗誠)을 발탁해 관직을 내리고 문집을 간행하도록 지시했다. 조선 중기에는 포은을 제향하는 서원이 전국적으로 건립됐다. 1555년에 고향 영천의 임고서원을 시작으로 활동지 개성의 숭양서원, 묘소가 있는 용인의 충렬서원, 관향인 포항의 오천서원, 귀양지 언양의 반구서원이 대표적인 서원들이다. 각 지방 사림들은 서원을 건립해 포은을 기리는 행사를 열어 충신의 고장이라는 자부심을 고취하고, 정몽주·길재·김종직·이언적·이황으로 내려오는 성리학의 학통을 자신들이 계승하고 있음을 과시했다. 아울러 포은의 문집 간행에도 경쟁적으로 뛰어들었는데, 특히 영천과 개성이 가장 적극적이어서 영천에서 다섯 차례, 개성에서 세 차례 간행했다. 이 두 지방의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문집 간행 주도권을 놓고 심한 갈등을 겪기도 했다. 최근에 영천과 포항, 용인과 울산에서는 포은과 관련한 행사뿐 아니라 학교, 도서관, 도로 등에 ‘포은’이란 이름을 사용해 이곳이 포은의 고장임을 알리고 있다. 오늘날 포은을 추앙하는 의미는 또 무엇일지 생각해 볼 일이다. 최채기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사업본부장 ■ 포은집(圃隱集)은 포은집(圃隱集)은 정몽주의 시문집이다. 포은에 대한 태종의 사후 복권 조치가 이루어지자 그의 아들 정종성 형제가 각지에 흩어져 있던 포은의 유문을 수집해 모두 303수의 시를 편집했다. 내용은 명나라와 일본에 사신을 다녀온 사행시(使行詩), 전투에 참여할 때 지은 종군시(從軍詩), 중국 사신, 일반 친지, 승려들과 주고받은 수작시(酬酌詩), 일상의 감회를 표현한 영회시(詠懷詩)로 구성됐다. 이 가운데 사행시가 138수나 되는데, 명나라와 일본 사이의 외교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포은집은 그 후 유문과 부록의 증보를 거듭하면서 조선 말까지 14회나 간행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판본을 가진 문집으로 자리매김했다. 1985년에 영일정씨포은공파종약원에서 국문으로 번역했다.
  • [사설] 이번엔 밀양… 참담할 뿐이다

    어제 경남 밀양시의 세종병원에서 불이 나 37명이 숨졌다. 부상한 사람이 140여명이라니 사상자 규모는 차마 입에 올리기도 참담하다. 최악의 참사라고 했던 제천 화재보다 더 큰 인명 피해가 고작 한 달 만에 또 나고야 말았다. 악몽 속에서 온종일 국민은 망연자실했다. 이번 화재는 세 시간 만에 진화됐지만 유독가스가 심해 사망자가 속출했다. 불길과 함께 연기가 6층 건물의 위쪽으로 급속히 번지는 바람에 환자들이 속수무책으로 변을 당했다. 중풍이나 뇌질환 전문 병원으로 거동이 불편한 노인 환자들이 대부분이어서 피해 규모는 컸던 것으로 파악된다. 장기 요양 중인 환자들이 많아 대피 과정에서도 어려움이 더 컸다. 참사를 겨우 모면한 노인 환자들을 혹한 속에 업고 뛰는 현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정확한 사고 원인은 면밀히 조사해야 할 일이다. 병원 내 경보 시설과 스프링클러 등 소방 장비들이 제대로 작동했는지도 챙겨 봐야 한다. 하지만 이번 사고 역시 안전의식 부재에서 비롯된 인재(人災)라는 사실은 확실해 보인다. 응급실 옆 탈의실에서 불이 시작됐다고 소방 당국은 추정한다. 불길이 비교적 일찍 잡혔는데도 내장재 연기로 피해는 걷잡을 수 없었다. 건물 자체가 화재에 무방비 상태였을 가능성 또한 높다. 건물 내부의 안전장치들이 아예 없었다는 현장의 지적이 벌써 들린다. 어쩌다 한 번 있어도 끔찍한 재난이 일상처럼 반복되고 있다. 화재만이 아니라 어이없는 미개형 사고들이 도처에서 꼬리를 물고 터진다. 멀쩡한 뱃길에서 낚싯배와 유조선이 부딪쳐 십수 명이 사망했고, 타워크레인 붕괴로 인한 날벼락 참변이 올 들어서만도 수차례다. 안전하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유명 대학병원에서는 신생아들이 집단 사망했다. 사고도 사고 나름이다. 이런 후진적 재난으로 몸살 하는 나라에서 세계인을 불러모아 올림픽을 개최한다는 사실이 새삼 부끄러워진다. 문재인 대통령은 어제도 사고 직후 “안타깝다. 인명 피해가 최소화하도록 만전을 기하라”고 지시했다. 제천 화재 때와 토씨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사고 장소만 바뀔 뿐 판박이 수준의 대처와 경고, 매너리즘에 빠진 마무리 과정이 되풀이된다. 사고가 나면 내일 당장 전부 뜯어고칠 기세였다가도 며칠 지나면 그뿐이다. 소방관들한테 책임을 돌린 것 말고 제천 참사로 달라진 건 없다. 세월호 참사의 교훈을 운운하는 것조차 민망하다. 당국의 관리 부실 탓만 할 수도 물론 없다. 대형 참변의 불씨는 시민 안전불감증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돌아봐야 한다. 다중시설의 안전이 ‘밤새 안녕’이어서야 될 말인가. 문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대형 재난에 상시 대응이 가능하도록 시스템을 정비하겠다”고 했다. 당장 다중시설 소방안전 전수조사라도 하라. 특단의 범정부적 대책 없이 이번만큼은 한 발짝도 물러서서는 안 된다.
  • 박범계 “수자원 공사 4대강 자료 파기중”

    박범계 “수자원 공사 4대강 자료 파기중”

    박범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한국수자원공사가 이명박 정부 시절 진행된 4대강 사업과 관련된 문건을 대량으로 파기하고 있다는 제보를 받고 내용을 18일 공개했다. 박 의원은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한 용역 직원이 수자원공사에서 3.8t(운반전 총량계측), 1t 트럭 4대 분량의 4대강 관련 자료 파기를 진행하고 있다고 매우 구체적인 제보를 했다”고 밝혔다. 박 의원은 파기된 문건에 대해 “4대강 문건, 아라뱃길(관련 내용) 등이 많았다”며 모두 2009년, 2010년 이명박 정부 시기 문건이라고 전했다. 그는 또 “제보자가 본인을 포함한 용역업체 직원 5명이 도착하기 전부터 현장에 4명이 있었다고 설명했다”고 밝혔다. 제보 내용과 함께 공개한 사진에는 ‘수차발전기 승인도서 검토결과 송부’라는 한국수자원공사의 내부 문건, ‘4대강’이라는 제목의 문서파일, 4대강 사업 찬동인사 인명사전 발표 기자회견 자료집 등이 나와있다. 수자원공사 측은 “1997년 이후 모든 문서를 전자문서시스템에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무단파기는 없고 4대강 사업의 경우 관련 문서 등을 연구 보전 중”이라며 “이번에 파기된 문서에는 담당자가 출력해놓은 사본자료 일부가 포함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서유미 기자 seoym@seoul.co.kr
  • 꽁꽁! 동장군 물러가니…콜록, 미세먼지 몰려온다

    꽁꽁! 동장군 물러가니…콜록, 미세먼지 몰려온다

    주말 전국 미세먼지 농도 ‘나쁨’ 전망 나흘째 눈 내린 제주공항은 부분 운항 남부 37곳 우편물 120만통 배달 지연 지난 일주일 내내 전국을 꽁꽁 얼어붙게 만든 ‘냉동고 한파’가 주말에는 평년 기온을 되찾으면서 풀린다. 그렇지만 따뜻한 서풍을 타고 중국발 대기오염 물질이 함께 날아와 공기질은 나빠질 것으로 전망됐다. 기상청은 12일 “이번 추위는 오늘이 절정”이라며 “토요일인 13일 낮부터 비교적 따뜻한 서풍이 유입되면서 14일에는 평년 기온을 회복할 것”이라고 설명했다.13일 전국의 아침 최저기온은 영하 16도~영하 3도로 전날보다 3~10도 정도 오를 것으로 전망됐다. 낮 최고기온도 영하권을 벗어난 0~7도 분포로 예상됐다. 13일 지역별 아침 최저기온은 춘천 영하 16도, 서울·대전 영하 9도, 대구 영하 8도, 광주 영하 7도, 부산 영하 4도, 제주 2도 등이다. 13일 새벽부터 오전 사이에 서울, 경기 지역과 강원 영서, 충북 북부 지역에는 1㎝ 내외의 눈이나 5㎜ 미만의 비가 내릴 것으로 기상청은 전망했다. 올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씨를 보인 12일 강원도부터 제주도까지 한반도 전체가 꽁꽁 얼어붙었다. 이날 오전 7시 기준 강원도 횡성 안흥의 아침 최저기온은 영하 24.8도까지 떨어졌고 철원 영하 21.6도, 춘천 영하 18도, 서울 영하 15.1도, 부산 영하 8.6도, 제주 0.1도를 기록했다. 나흘째 눈이 내린 제주도는 이날 오전까지 하늘길과 바닷길, 출퇴근 도로까지 여전히 정상을 회복하지 못하고 한라산 입산도 통제됐다. 제주공항에는 난기류, 강풍, 저시정 특보가 발효되면서 항공기 운항 중단과 재개가 반복됐다. 최강 한파에 전국 곳곳에서 바닷물이 얼거나 갯벌이 얼어붙은 모습도 관측됐다. 경인아라뱃길 일부 구간이 얼어붙어 한국수자원공사가 쇄빙선을 투입해 뱃길을 열었다. 부산에서는 오륙도와 이기대 앞바다의 갯바위에 고여 있는 파도가 얼어붙어 햐얗게 변하기도 했다. 우정사업본부에 따르면 폭설로 인해 광주와 전남 등 남부지방을 중심으로 전국 37개 지역에서 우편물 120만통의 배달이 지연됐다. 한국가스공사에 따르면 난방 수요가 급증하면서 지난 11일 천연가스 일일 공급량이 역대 최대 기록인 20만 599t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달 12일 기록된 기존 일일 최대 공급량(19만 9463t)을 한 달 만에 경신한 것이다. 한편 냉동고 한파를 몰아내는 따뜻한 서풍과 함께 중국발 대기오염 물질이 한반도로 유입되고 안정된 고기압권의 영향으로 국내에서 발생한 대기오염 물질까지 빠져나가지 못하고 축적되면서 주말 내내 미세먼지 농도는 전국이 ‘나쁨’ 단계를 보일 것으로 전망됐다. 유용하 기자 edmondy@seoul.co.kr
  • 염태영 시장 3선 도전 선언…“더 큰 수원 완성 소명”

    염태영 시장 3선 도전 선언…“더 큰 수원 완성 소명”

    염태영 경기 수원시장이 9일 3선 도전을 공식화했다.염 시장은 이날 시청 중회의실에서 신년브리핑을 열어 “제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수원의 도시경쟁력을 통해 한국사회 리모델링의 촉매제를 만드는 것”이라며 “저는 오랜 고민 끝에 수원에서 ‘더 큰 수원’을 완성하는 것이 소명이고 과제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지방분권개헌을 통해 시민의 정부를 완성해야하고, 새정부가 들어선 지금이 지방분권개헌을 이룰 호기”라며 3선 시장이 돼 지방분권개헌 실현을 위해 역할을 하겠다고 강조했다. 염 시장은 또 “수원시는 이제 인구 120만명이 아닌 130만명을 눈앞에 둔, 광역지자체보다 더 큰 (기초)지자체가 됐고, 이렇게 커진 ‘수원호’라는 배를 이끌려면 뱃길을 잘 아는 선장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 “7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수원의 완성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출마의 변을 밝혔다. 한편 민주당 후보군인 이기우 전 경기도 사회통합부지사도 이날 수원시장 민주당 경선 출마를 선언했다.이 전 부지사는 수원시의회 세미나실에서 출마 기자회견을 열어 “이 시대의 화두는 적폐청산이며, 이 목표를 위해 1700만 촛불의 힘으로 정권을 바꿨다”면서 “촛불이 중앙정부를 바꿨듯이 이번 6·13 지방선거에서도 지방정부를 새롭게 바꿔야 한다”고 출마의 변을 밝혔다. 그는 같은 당 염태영 시장이 이끈 수원시에 청산해야 할 적폐가 만연해 있다고 지적하면서 “지방적폐를 과감하게 도려내고, 희망의 새살을 돋게 해 새로운 수원을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이 전 부지사는 “저는 수원의 지역구 국회의원과 경기도의 부지사를 거치며 중앙정치의 넓은 시야와 행정을 경험했다”면서 “수원시장이 되면 문재인 대통령의 적폐청산과 정치개혁에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다. 민주당 내에서는 김영규 전 수원시청소년육성재단 이사장도 후보군으로 거론되고 있으며, 자유한국당은 염상훈 수원시의회 부의장, 국민의당은 노영관 수원시의원·김재귀 수원갑 지역위원장, 바른정당은 김상민 전 국회의원·이승철 전 경기도의원 등의 출마가 점쳐진다.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 제종길 안산시장 신년기자회견.. ‘안전도시’ 등 6대 목표 제시

    제종길 안산시장 신년기자회견.. ‘안전도시’ 등 6대 목표 제시

    제종길 경기 안산시장은 3일 “생명과 사람의 가치가 존중받는 안전한 도시,청년이 일하고 싶은 도시를 만들겠다”고 밝혔다.제 시장은 이날 안산시청 제1회의실에서 신년 기자회견을 갖고 이같은 내용이 담긴 올해 6대 핵심 목표를 소개했다. 6대 목표는 안전도시, 경제도시, 첨단 산업도시, 안산형 도시재생 사업, 성장동력 발굴 육성, 숲의 도시 내실화 등이다. 그는 또 지난해 “숲의 도시 자리매김, 생태관광 세계회의 개최, 에너지 비전 선포, 시화호 뱃길 복원 사업 추진, 방아머리 항만개발 등의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다”고 설명했다. 제 시장은 “2018년은 우리의 비전이 눈 앞의 현실이 되는 중요하고 의미있는 해”라며 “안산을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시민이 살기좋은 도시로 발전시키겠다”고 말했다. 특히 청년이 일하고 싶은 도시 조성을 위해 89블록(26만㎡)과 인근 한양대학교 에리카캠퍼스 부지(20만㎡)에 벤처타운, 연구개발센터, 창업지원센터 등을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89·90블록 연구개발단지, 안산사이언스밸리(한양대 에리카캠퍼스 등 9개 기관)를 정부의 연구단지특구로 지정받아 4차산업혁명을 이끌겠다”고 강조했다. 제 시장은 “4차산업혁명 기술 생산·집적으로 89·90블록, 사이언스밸리, 반월산업단지 입주 기업을 지원해 강소기업으로 육성하고 좋은 일자리를 늘리겠다”며 “관련 사업이 단계별로 실현되도록 올해 89블록 개발, 연구단지특구 지정 등의 계획을 구체화하겠다”고 했다. 청년예술인의 창업, 일자리 확대 사업도 본격화 한다. 제 시장은 “초지역세권을 예술도시로 조성해 청년예술인에게 활동 공간을 제공하고, 예술·문화산업을 육성하겠다”며 “예술도시에서 청년의 창업·취업이 실현되도록 각종 지원계획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그는 “청년이 오고 싶은 도시, 일하고 싶은 도시를 만들기 위해 예술창작소 사업도 추진한다”면서 “올해 안에 설계를 마친 뒤 내년 6월까지 안산문화예술의전당에 100개 안팎의 컨테이너로 청년예술창작소를 만들어 예술인 등 안산지역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겠다”고 덧붙였다.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 [In&Out] 여객선 공영제 도입하라/강제윤 ㈔섬연구소장

    [In&Out] 여객선 공영제 도입하라/강제윤 ㈔섬연구소장

    ‘섬 왕국’ 전남도의 섬 관광객은 연간 1000만명에 육박한다. 연안여객선 이용 승객도 늘고 있다. 2006년 1157만명이었던 전국 연안여객선 승객 수가 2016년에는 1542만명으로 증가했다.하지만 툭하면 끊기는 뱃길 때문에 섬으로 가는 길은 여전히 험난하다. 해사안전법에 따르면 파도가 잔잔한 평수구역 바다의 경우 풍랑주의보가 내려도 선장의 판단에 따라 여객선을 운항할 수 있다. 주의해서 다니라는 것이지 다니지 말라는 규정은 아니다. 그런데도 세월호 참사 이후 풍랑주의보만 내렸다 하면 파도가 없어도 여객선사들은 무조건 배를 안 띄운다. 10t짜리나 1999t짜리나 똑같이 안 띄운다. 선장들도 재량권이 없다. 주의보 때 운항해서 사고가 나면 선사와 선장이 책임지라 하니 누가 나서겠는가. 정부가 여객선 운항 여부를 선사에 맡기고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무책임 행정이다. 대안이 없지 않다. 여객선사들이 아니라 정부가 주체가 되어 여객선 현대화와 대형화, 전천후 여객선 도입 등을 통해 해상 교통 여건을 개선하면 된다. 하지만 정부는 여전히 안전과 무관한 신분증 검사나 강요하면서 여객 안전이나 해상 교통 불편 해소에는 뒷짐을 지고 있다. 여객 안전보장과 해상 교통 불편의 해소를 위한 대안은 여객선 공영제다. 그러나 국정기획위는 예산 부족을 이유로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이기도 했던 여객선 공영제를 무산시키고 실효성 없는 준공영제로 대체해 버렸다. 이미 전체 여객선의 25%인 27항로 26척이 준공영제인 낙도보조항로로 운영되고 있다. 운항 선사들은 경비 절감을 앞세워 안전관리에 소홀하고 날이 좋아도 온갖 핑계를 대 배를 안 띄운다. 그래도 제재할 방법이 없다. 한국 사회간접자본(SOC) 투자액 14조여원 중 연안여객에 투자되는 것은 117억원(0.08%)에 불과하다. 전국 60개 업체가 167척의 여객선을 운항 중인데 이 중 63%인 38개 업체가 자본금 10억원 미만이고 60%가 보유 선박 2척 미만의 영세 업체다. 선령 20년 이상의 노후 여객선도 29%나 된다. 노후 여객선들의 경우 안전이 우려되고 위생이나 편의시설도 엉망이다. 그런데도 운임은 다른 대중교통에 비해 터무니없이 비싸다. 내항여객선의 1㎞당 운임은 KTX의 2.2배, 고속버스(일반)의 6.6배나 된다. 섬 관광 활성화를 저해하는 큰 장애물이다. 요금도 낮춰야 한다. 섬은 이미 거주민뿐만 아니라 많은 국민의 휴식처이기도 하다. 언제까지 영리 추구가 우선인 여객선 업자들에게 국민의 생명을 맡겨 둘 것인가. 세월호 참사 이후 섬으로 가는 길은 더욱 어려워졌고 여객선의 안전은 나아진 것이 없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재발 방지다. 국정기획위의 잘못된 결정을 정부가 나서 바로잡아야 마땅하다.
  • 섬과 섬, 그리움이 다리 되어

    섬과 섬, 그리움이 다리 되어

    딱 하나가 덧붙여졌습니다. 섬과 섬 사이에 다리 하나가 새로 놓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풍경은 몇 곱절 넘게 확장됐습니다. 전남 완도의 장보고대교. 완도 끝자락의 신지도와 고금도를 잇는 다리입니다. 길고 외로운 다리는 고즈넉했습니다. 더이상 갈 수 없을 것이라 생각됐던 섬에서 새로운 여정이 시작되는 듯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그렇게 새로 놓인 다리를 따라 완도와 강진을 돌아봤습니다. 갯마을 위주로 돌다 보니 얼추 마름모꼴의 궤적이 그려지더군요. 그러니 이를 ‘다이아몬드 드라이브’라 불러도 좋겠습니다. 어디 코스의 형태뿐이겠습니까. 길 주변에 매달린 풍경들도 보석처럼 반짝였습니다.장보고대교는 완도 고금도와 신지도를 잇는 다리다. 길이는 1305m. 2010년 공사가 시작돼 지난 6일 완공됐다. 이로써 완도 아래 섬들이 약산대교(약산도~고금도), 신지대교(완도읍~신지도), 고금대교(강진~고금도)와 함께 4개 교량으로 모두 연결됐다. 다이아몬드 드라이브 여정의 들머리는 완도다. 강진 쪽에서 짚어오는 게 거리상 더 가깝지만, 어딘가 불공정한 느낌이다. 완도의 다리를 방문하겠다면서 강진부터 찾다니 말이다. 게다가 강진만으로 쏟아지는 해거름의 금빛 물비늘과 마주하려면 강진을 날머리로 삼는 게 낫다.●완도 끝길서 신지도·고금도로 새로운 길 시작 완도타워부터 찾는다. 일대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완도타워는 읍내 뒤편의 야트막한 산자락에 조성됐다. 높이는 76m. 차로도 오를 수 있지만 관광 모노레일을 타고 오르는 맛도 각별하다. 타워에 오르면 인근의 섬 등 어지간한 관광명소는 죄다 눈에 담을 수 있다. 완도타워 아래는 산책로다. ‘미소정원’, ‘바다정원’, ‘꽃비가든’ 등이 조성돼 있다.완도타워에서 꼬박 십리 떨어진 곳에 구계등(명승 3호)이 있다. 모래로 이뤄진 여느 해변에 견줘 구계등은 둥근 갯돌로 이뤄졌다. 바다에서 해안 언덕까지 갯돌의 층이 아홉 개의 계단으로 이뤄졌다 해서 구계등(九階燈)이다. 갯돌은 젖먹이 손바닥만 한 것부터 무등산 수박만 한 것까지 다양하다. 크기는 달라도 파도와 바람이 깎아낸 모양새는 하나같이 둥글다. 그 때문에 보는 방향이 조금만 바뀌어도 눈여겨보던 갯돌의 위치를 잃기 일쑤다. 늘 같은 건 없고, 늘 다른 것도 없다. 바닷물이 들고 날 때마다 갯돌들이 소리를 낸다. 차르르~. 낮고 고른 소리다. 귀를 씻어 주고 마음까지 정화시키는 듯하다. 완도는 통일신라 때 동아시아의 바다를 지배한 해상왕 장보고의 고장이다. 장좌마을 일대에 장보고공원, 장보고기념관, 청해진 유적(사적 308호) 등이 있다. 장좌마을에서 연도교를 건너면 청해진 유적이 있는 장도다. 내성문과 외성문, 고대, 사당, 굴립주 등이 복원돼 있다. 성벽을 따라 한 바퀴 도는 데 30분 정도면 충분하다. 유적지 가장 높은 곳의 망루에 서면 외남문 너머로 고금도와 신지도, 더 멀리 강진의 섬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성벽 아래엔 약 1200년 전의 흔적도 남아 있다.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운 목책이다. 1959년 태풍 사라가 지날 때 거센 바람이 갯벌을 깎으면서 발견됐다. 제대로 보려면 날물 때 찾아야 한다. 장좌마을엔 한켠에 장군샘이 있다. 사각형의 우물이다. 당시 성 안의 주민들과 병사들이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물물은 여전히 맑다. 직사각형의 빨래터는 요즘 주민들이 파래 등을 씻는 장소로 쓰인다. 완도에서 신지대교를 건너면 신지도다. 이 섬에 신지명사십리 해수욕장이 있다. 명사(鳴沙)는 모래가 운다는 뜻이다. 모래밭이 파도에 쓸리면서 내는 소리가 십리 밖까지 퍼진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곱디고운 모래가 가득한 해안은 길이가 4㎞에 이른다.●4㎞ 길이 모래사장, 파도소리에 마음도 씻기네 신지도 끝에서 장보고대교를 건넌다. 차창 너머로 일대의 풍경들이 주렁주렁 매달린다. 다리를 건너면 곧 고금도다. 읍내 곳곳에 작은 현수막이 나붙었다. 현수막엔 ‘면민 여러분!! 그동안 고마웠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현수막을 내건 이들은 ‘50년 동안 뱃길 지킨 (주)풍진해운 직원 일동’이다. 풍진해운은 신지 송곡항에서 고금 상정항을 오가던 철부선을 운항했던 회사다. 50년 동안이나 섬 주민을 실어 날랐으니 뱃전에 얼마나 많은 기억들이 새겨져 있을까. 그 철부선의 명맥이 장보고대교의 개통으로 끊긴 것이다. 철부선만 사라진 게 아니다. 고금터미널에서 철부선을 타고 바다 건너 완도군청까지 다녀오던 군내버스도 사라졌다. 이제 배를 타고 목적지를 오가던 독특한 군내버스는 다시 볼 수 없게 됐다. 동전에 양면이 있듯, 세상에 다 좋은 것은 없는 거다.●이순신 장군 묻혔던 곳에서 다도해 굽어보며… 고금도는 이순신 장군의 최후가 선연히 새겨진 섬이다. 당대의 흔적이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사적 114호)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시계추를 당대로 돌리면 영화 같은 장면들이 스쳐 지나간다. 이순신 장군은 명량해전(1597)에서 대승을 거둔 뒤 고금도에 수군 본영을 설치한다. 당시 조선 수군과 합세해 기세를 떨쳤던 이가 명나라 장수 진린이다. 진린은 1598년 7월 전함 수백척과 2만여 수군을 이끌고 이순신 장군의 진영 옆 해안에 주둔한다. 승리를 빌기 위해 바다 바로 옆에 관왕묘도 세운다. 삼국지의 명장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다. 그러나 이해 11월 19일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다. 이순신 장군의 시신은 관왕묘 바로 앞의 작은 섬에 안치된다. 당시 장군의 가묘가 있던 자리가 바로 현재의 월송대다. 장군의 유해는 소나무 아래에서 83일간 안식한 뒤 충남 아산으로 운구된다. 그러다 한국전쟁 뒤 관왕묘는 옥천사로 옮겨졌고, 1959년 이순신 장군의 영정이 모셔지면서 이 충무공의 사당인 ‘충무사’로 이름을 바꾼다. 충무사는 이듬해 사적 제114호로 지정된다.고금도에서 약산연도교를 건너면 약산도다. 제법 너른 섬이다. 다리 인근의 전망대에 오르면 다도해 풍광이 한눈에 잡힌다. 고금도에서 고금대교를 건너면 한국의 대표적인 미항으로 꼽히는 마량항이다. 후박나무가 무성한 까막섬(천연기념물172호) 등 볼거리가 제법 많다. 강진 땅은 여기부터 시작이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입간판이 선 도로를 따라 드라이브를 이어 가면 곧 가우도다. ‘강진만의 여의도’라고 불리는 섬이다. 여의도가 대방동, 마포와 다리로 연결됐듯 가우도 또한 도암면과 대구면 방향으로 각기 다른 연륙교로 이어져 있다. 차는 갈 수 없는 도보 전용 다리다. 걸어서 너른 강진만을 횡단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연륙교가 생기기 전엔 무인도처럼 썰렁했던 섬이 이젠 제법 번다해졌다. 강진의 명소로 확실히 발돋움한 결과다. 가우도 옆은 하저마을이다. 저두바닷길이 이 마을에 조성돼 있다. 너른 갯벌, 찰랑대는 바다는 지친 가슴 안길 만큼 늘 넉넉하다. 드넓은 갯벌에선 삶의 체취도 짙게 묻어난다. 고깃배 타고 나간 아버지와 갯일하는 어머니의 묵묵한 삶이 응어리진 공간이다. 저물녘이면 갯벌은 잊지 못할 풍경을 선사한다. 달이 바닷물을 끌어당겨 생긴 웅덩이마다 금빛 햇살이 담긴다. 그 모습이 꼭 반짝이는 보석을 보는 듯하다. 글 사진 완도·강진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여행수첩(지역번호 061) →가는 길: 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남해고속도로 강진 나들목으로 나오면 된다. 어느 방향으로 도느냐에 따라 국도 선택도 달라진다. 완도 쪽으로 돌겠다면 강진에서 해남 방면 18번 국도, 강진 쪽을 먼저 보겠다면 23번 국도를 타야 한다.→맛집: 완도 읍내에 먹거리 타운이 조성돼 있다. 고금도에선 요즘 석화 채취가 한창이다. 도시의 수산시장에서는 구경조차 어려운 굵은 씨알의 굴을 싼값에 맛볼 수 있다. 강진 쪽에선 바지락회무침을 맛봐야 한다. 칠량면의 청자식당(435-1515)이 유명하다. 읍내에 오감통 먹거리장터가 있다. 다양한 한정식집이 밀집돼 있다. 읍내에서 다소 멀긴 해도 병영면의 수인관(432-1027), 설성식당(433-1282) 등은 관광 삼아 찾는 게 좋다. 달달한 돼지불고기로 이름났다. →잘 곳: 완도읍내에 완도관광호텔 등 다양한 등급의 숙소가 밀집돼 있다. 강진 주작산 자연휴양림(430-3306)도 좋다. 적요한 숲속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 있다.
  • 착공 7년 9개월 만에… 얼굴 드러낸 월드컵대교

    착공 7년 9개월 만에… 얼굴 드러낸 월드컵대교

    서울 마포구 상암동 증산로와 영등포구 양평로를 연결하는 한강 다리인 월드컵대교가 착공된 지 7년 9개월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성산대교와 가양대교 사이에 짓고 있는 왕복 6차로, 길이 1980m의 이 대교는 28번째 한강다리로 2020년 8월 개통될 예정이다.서울시는 월드컵대교의 주탑 60m와 15개 수상 교각을 설치하고, 각 교각을 연결하는 교량 상부구조물(대블록 거더) 9개 중 3개를 설치·완료했다고 12일 밝혔다. 12월 현재 공정률은 46%다. 월드컵대교 교각 상판을 구성하는 블록은 모두 전남 신안에 있는 공장에서 만들어 배로 운반했다. 길이 14m, 폭 31.4m, 높이 3m, 130~290t의 블록은 서해~경인아라뱃길을 거쳐 한강에 들어와 가양대교 인근에서 조립됐다. 시 관계자는 “교량 품질을 높이고, 현장 도장 때 발생할 수 있는 환경 문제와 안전사고 위험도를 낮추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월드컵대교는 국제현상설계공모를 통해 당선된 ‘전통과 새 천년의 만남’이라는 콘셉트로 국보 2호인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형상화한 비대칭 복합사장교로 지어진다. 강교의 전체 면적은 2만 3550㎡로 축구장 면적의 약 3.7배에 이른다. 총중량은 약 1만 3000t이다. 한강 선상에서 이뤄지는 최대 규모 공사다. 올 8월에 이어 이달 말 북단연결로가 개통되면 병목현상이 해소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10t 낚싯배 들이받은 336t 급유선

    10t 낚싯배 들이받은 336t 급유선

    좁은 뱃길서 항로 제대로 안 살펴 인양된 낚싯배 후미 왼쪽 부서져 긴급체포 급유선 선장 “책임 인정” 인천 영흥도 인근 해상에서 소형 낚싯배가 대형 급유선에 선미를 들이받히며 뒤집어져 15명이 숨지거나 실종되는 참사가 일어났다.3일 인천해양경찰서에 따르면 이날 오전 6시 9분 인천 옹진군 영흥도 남방 2해리 바다에서 낚싯배 선창1호(9.77t급)가 영흥대교 인근의 좁은 수로를 지나다가 급유선 명진15호(336t)에 부딪힌 뒤 전복돼 22명의 탑승자(선장 1명, 선원 1명, 승객 20명) 중 13명이 숨지고 2명이 실종됐다.해경은 선창1호를 뒤에서 들이받은 명진15호 선장 전모(37)씨와 갑판원 김모(46)씨를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긴급 체포했다. 선장 전씨는 해경 수사에서 “낚싯배가 가까운 거리에서 같은 방향으로 운항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전방 주시 의무 미흡 등 이번 사고에 대한 책임을 인정한다”고 말했다. 해경은 명진 15호의 선박용 레이더와 GPS 기록 등을 분석하는 한편 선장 전씨 등 승선자를 상대로 정확한 사고 원인을 조사하고 있다. 사고 당시 선박에 타고 있다가 구조된 서모(37)씨는 “낚싯배(선창1호)가 목적지인 영흥화력발전소 근처 바다로 가는데 뒤에서 큰 배(명진15호)가 선명한 불빛을 비추며 따라오다가 갑자기 들이받았다”고 말했다. 해경 관계자는 “사고 선박들이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었고, 낚싯배 후미 좌현이 부서졌지만 정확한 사고 원인은 현재 구조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급유선 선장 등을 조사해야 알 수 있다”고 밝혔다. 해경은 낚싯배와 급유선이 진두항 남쪽에 있는 폭 0.2마일의 좁은 물길을 나란히 지나다가 부딪쳤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사고 직후 급유선 선장 전씨가 해경에 신고했고, 해경 영흥파출소의 고속단정이 신고 접수 33분 만인 6시 42분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했다. 생존자 7명 중 4명은 명진 15호 선원들이 구조했고, 3명은 전복된 배 안에 갇혀 있다가 오전 7시 36분 도착한 수중 구조팀이 구조했다. 낚싯배 선장 오모(70)씨는 실종됐고, 선원 이모(40)씨는 숨졌다. 이날 오후 사고 해역에 크레인 바지선이 도착, 선창1호를 인양했다. 이어 조명탄을 사용해 사고 해역 주변에서 밤새 실종자 수색 작업을 벌였다. 김학준 기자 kimhj@seoul.co.kr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김시습이 눌러앉고 싶다던 청평사… 맑은 기운에 근심 사라지네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김시습이 눌러앉고 싶다던 청평사… 맑은 기운에 근심 사라지네

    춘천 시내에서 청평사(淸平寺)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우선 시내를 남서쪽에서 동북쪽으로 휘돌아 나가는 46번 국도를 타고 소양6교를 건너고 배후령터널을 지난 다음 간척사거리에서 우회전해 배치를 넘는 자동찻길이 있다. 배후령에는 터널에 생겼다지만, 배치는 옛날 한계령보다 더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것 같다. 이 오봉산길의 막다른 골목이 소양호가 내려다보이는 청평리다.춘천 시내에서 멀지 않은 소양강댐 배터에서 유람선을 타는 방법도 있다. 청평사가 없었다면 소양호 유람선은 무척 심심한 뱃길이었을 것이다. 댐 건설 이전의 46번 국도는 수몰된 소양강길을 따라 양구로 이어졌었다고 한다. 46번 국도는 인천광역시 중구 북성동 인천역(驛)에서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을 잇는다. 수수부꾸미와 산채비빔밥, 그리고 소양호 빙어튀김이 유혹하는 사하촌(寺下村)에서 청평사까지는 2㎞ 남짓하다. 가벼운 마음으로 나선 관광객이라면 부담도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산길에 접어들면 청정한 기운에 몸과 마음이 모두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옛사람들은 이 계곡을 하나의 커다란 정원으로 인식했던 듯하다. 자연의 조화에 군데군데 인공(人工)를 더해 완벽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조경사(造景史)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청평사에 애착을 갖는 이유다. 평탄한 오리(五里) 산길을 기분 좋게 걷다 보면, 우뚝 솟은 바위 봉우리 아래 여러 단의 석축을 쌓아 조성한 청평사가 눈에 들어온다. 이제는 상당히 복원이 이루어져 제법 규모 있는 절집처럼 보인다. 한때는 221칸에 이르렀다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회전문(廻轉門)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모습이었다. 분단과 전쟁, 그리고 이념이 낳은 상처 때문이었다.청평사의 초기 역사는 1130년(인종 8년)과 1320년(충숙왕 14) 각각 세워진 청평산 문수원기(文殊院記) 비석과 청평산 문수사 장경비(文殊寺 藏經碑)의 비문이 탑본으로 전해지고 있어 알 수 있다. 문수원기에 따르면 청평사는 영현선사가 973년(광종 24) 백암선원(白巖禪院)으로 창건하고, 이의가 1069년(문종 23) 보현원(普賢院)으로 중창한 데 이어 아들 이자현이 1078년(문종 32) 문수원(文殊院)으로 삼창했다. 이의의 아버지, 곧 이자현의 할아버지 이자연은 세 딸을 문종비로 만든 당대 권신(權臣)이었다. 승려가 아닌 이의와 이자현이 중창을 주도했다는 것은 흥미롭다. 불교국가 고려에서 세도가(勢道家)가 사찰을 세우거나 중창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학계에서는 이의의 보현원 중창을 집안의 원찰(願刹)은 물론 별서(別墅)를 확보하는 차원이었을 것으로 본다. 이자현의 문수원 삼창 역시 원찰과 별서의 위상을 높이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장경비의 존재는 이전 어느 시기 절 이름이 문수사로 바뀌었음을 알려 준다. 장경비는 원나라 왕후가 보내 준 불서(佛書)를 절에 보관한 내력을 담았다. 청평산이라는 이름은 이자현이 은거하자 도적과 호랑이가 자취를 감추었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청평이란 곡절이 없어 근심이 없는 경지를 가리킨다.이후 청평사로 이름을 고친 것은 조선 명종시대 불교 부흥에 힘쓴 보우(普雨)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청평사지’(淸平寺誌)에도 ‘보우가 1557년 ‘경운산만수성청평선사’(慶雲山萬壽聖淸平禪寺)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적혀 있다. 일제강점기에도 회전문에는 이렇게 쓴 현판이 걸려 있었음을 보여 주는 사진도 남아 있다. 하지만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은 오래전에 ‘청평사’라는 제목의 시를 지어 ‘띠풀 베어 초가 짓고 높은 곳에 살고지고, 이제부터 다시는 이곳 떠나지 않으리’라고 노래했다. 그는 청평산 아래 세향원(細香院)을 짓고 한동안 머물렀다고 한다. 시대가 더 앞서는 여말선초의 문인 원천석(1330~?)의 ‘운곡시사’(耘谷詩史)에도 ‘청평사’라는 시가 실려 있다. 운곡이 춘천 일대를 여행한 때는 1368년이다. 청평사가 이고 있는 산은 오늘날 오봉산(五峰山)이라 부른다. 기기묘묘하게 솟은 봉우리가 다섯 개로 보인다고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경운산이라는 옛 이름은 지금 오봉산의 옆 봉우리가 차지하고 있다. 반면 청평산이라는 이름은 간 데가 없다. 이 산은 산림청의 ‘한국의 100대 명산’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청평사의 대표 문화유산은 아무래도 회전문을 들어야 할 것이다. 이름이 주는 호기심도 한몫을 한다. 회전문은 금강문이나 천왕문처럼 불법(佛法) 수호자를 봉안하는 전각이라고 한다. 윤장대(輪藏臺)의 존재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학계는 본다. 계곡 장유(1587~1638)의 시에는 ‘진락선옹(眞禪翁) 한번 떠나 돌아올 줄 모르고/ 암자 앞엔 전경대(轉經臺)만 외로이 남았구나’ 하는 대목이 있다. 청평사에 전경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진락공(眞公)은 이자현의 시호다. 전경대, 곧 윤장대는 돌릴 수 있게 만든 팔각형 불구(佛具)다. 불경을 넣어 돌릴 때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새겼다는 상징성을 부여한다. 예천 용문사에는 회전문과 짝을 이룬 윤장대를 볼 수 있다. 용문사 회전문은 사천왕상을 모시고 있다. 윤장대는 대장전(大藏殿) 내부에 있다.회전문 앞마당에 좌우로 놓여 있는 비석의 받침돌도 눈여겨봐야 한다. 바로 문수원기비와 장경비의 흔적이다. 문수원기비는 김부의와 혜소국사가 앞뒷면 글을 짓고 탄연이 글씨를 썼다. 김부의는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의 아우이고, 혜소는 대각국사의 제자다. 탄연은 서거정이 ‘김생 다음간다’고 했던 명필이다. 장경비는 앞뒷면 글은 이제현과 성징이 짓고 이암이 썼다. 이제현은 ‘익제난고’와 ‘역옹패설’로 널리 알려진 고려 후기 문인이다. 성징은 원나라 승려라고 한다. 이암 역시 ‘동국의 조맹부’라는 평가를 받은 명필이다. 문수원기와 장경비는 탄연과 이암의 글씨로 유일하게 남아 있다. 문수원기비는 일제강점기에도 손상되기는 했어도 상당 부분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1914년 대웅전에 옮긴 비석은 6·25전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완전히 조각나고 말았다. 이후 1968년과 1985년 발굴조사에서 비편의 상당 부분이 수습됐다. 청음 김상헌은 청평사를 찾은 1635년 ‘동쪽에 장경비가 있고, 서쪽에 문수원기가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런데 약헌 서종화(1700~1748)는 ‘청평산기’(淸平山記)에서 ‘문수원기’를 언급하면서 ‘서쪽 뜨락에 파손되어 읽을 수 없는 비석이 하나 더 있다’고 했다. 하지만 ‘장경비’는 이제 받침돌만 남아 있을 뿐이다. 문수원기비는 2008년 복원되어 옛 비석 받침돌 바로 곁에 세워졌다. 장경비도 복원이 추진되고 있다고 한다. 문수원기비 내용은 문헌에도 보이고 남아 있는 탑본이 적지 않음에도 읽지 못하는 글자도 있어 복원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장경비는 앞면의 경우 그런대로 자료가 남아 있지만, 뒷면은 문장을 재구성하기조차 어려운 상태로 알려진다. 그러니 소박하지만 옛 비석의 받침돌이 오히려 역사의 진정성을 보여 주는 청평사의 유산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경기도, 내년 개발제한구역 주민 지원에 294억 투자

    경기도, 내년 개발제한구역 주민 지원에 294억 투자

    경기도는 내년 국비 201억원과 시·군비 92억원 등 모두 293억원을 들여 수원시 등 18개 시·군 개발제한구역(GB) 내 주민 지원사업을 한다고 7일 밝혔다.이는 개발제한구역 지정으로 불편을 겪는 주민들을 위해 도로, 주차장, 공원, 하천 및 주거정비 등 지역민의 생활환경 개선을 위해 실시하는 사업이다. 대상 사업은 ?도로·상수도급수관 등 주민생활 개선을 위한 생활편익 개설 사업 ?산책로 조성 등 환경문화 사업 ?노후주택 개량 사업 ? LPG 보급 사업 등 4개 분야 41건이다. 상습 수해 지역인 고양시 덕양구 도내동 중모루천 정비공사에 5억2천500만원, 화성시 비봉면 쌍학리 주민을 위한 동학∼벌말 도로 확장 및 포장 공사에 2억7천만원 등 생활편익 사업 25건에 195억원이 투입된다. 또 부천시 고강동 고리울 여가 녹지 조성 사업에 7억원, 굴포천과 아라뱃길을 연결하는 산책로 조성 사업에 6억 5000만원 등 환경문화 사업 8건에 84억원을 투자한다. 이밖에 14억 7600만원을 들여 조안면 등 남양주시 내 6개 지역에 LPG 저장탱크를 설치한다. 김기세 도 지역정책과장은 “개발제한구역 거주민의 노령화 추세에 따라 찾아가는 건강검진, 찾아가는 영화관 등의 의료ㆍ문화ㆍ복지 사업을 적극 발굴해 추진한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면서 “개발제한구역 지정으로 불편을 겪는 거주민을 위해 신규 주민지원 사업을 도입하는 것은 물론 불합리한 제도개선 노력도 병행하겠다”고 강조했다. 도내에는 현재 21개 시·군 1170.6㎢가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돼 있으며, 지역 내에 2만 1735가구가 거주 중이다.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 밤의 뱃길 안내자 오륙도 ‘등대지기’ 81년 만에 굿바이

    밤의 뱃길 안내자 오륙도 ‘등대지기’ 81년 만에 굿바이

    불 밝히던 등대지기 3명 철수 부산 등대 11개 중 첫 사례얼어붙은 달 그림자가 물결 위에 차고 한 겨울의 거센 파도가 모이는 작은 섬에서 외로이 등대를 지켜온 부산 오륙도 등대지기가 80여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부산해양수산청 김동태 사무관은 31일 “오륙도 등대가 이르면 내년 말 무인화 공사를 마치면 등대지기가 철수해 무인등대로 전환된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인 1937년 오륙도 등대가 처음 불을 밝힌 이후 81년 만에 사람이 근무하지 않는 등대가 된다는 얘기다. 현재는 등대지기 3명이 2인1조로 근무하고 있다. 부산의 등대 11개 중 첫 무인화 사례로, 앞으로 등대의 무인화 추세가 가속화할 전망이다. 무인화되는 등대는 정보통신기술을 통한 원격제어로 등대 역할을 계속하게 된다. 정보기술의 발달이 등대에도 변화의 바람을 불러온 셈이다. 해양수산부는 오륙도 등대를 무인화하는 김에 그동안 연근해 선박의 안전운항을 돕는 데 한정됐던 등대의 역할을 영토수호와 불법조업 감시 등 다양한 기능으로 확대할 방침이다. 오륙도 등대는 1937년 11월 높이 6.2m의 등대로 건립됐으며 1998년 12월 개·보수 작업을 거쳐 현재의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높이 27.55m의 백원형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등탑, 동력실, 직원 숙소, 사무실과 등명기, 무신호기, 태양광 발전기 등을 갖추고 있다. 해수부는 오륙도 등대를 무인화하는 동시에 등대 옆에 소규모 해상호텔, 카페, 식당 등을 지어 관광자원으로도 활용키로 하고 현재 용역을 통해 기본조사를 진행 중이다.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려면 우선 오륙도와 등대를 태풍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수중 방파제 건설 등이 필요하다. 오륙도 등대는 육지에서 1.5㎞가량 떨어진 바다에 있는 데다 태풍이 한반도로 진입하는 길목에 위치해 크고 작은 태풍을 고스란히 맞는다. 최근 등대가 세워진 바위섬 곳곳에서 균열이 커지고 바위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또 상하수도 시설이 없어 새로 설치해야 하고 관광시설로 쓰기에 충분한 전기를 공급하는 시설도 갖춰야 한다. 관광시설이 순조롭게 완공되면 일반 시민도 오륙도 등대 밑에서 밤하늘을 보며 잠자리에 드는 꿈 같은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 그 관광객들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바다를 주시하며 등대를 지켰던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생각할까.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16세기 별 보던…세계 최초 ‘항해용 천체관측기구’ 발견

    16세기 별 보던…세계 최초 ‘항해용 천체관측기구’ 발견

    16세기 대항해시대, 포르투갈 탐험가 바스쿠 다가마(1469~1524)가 이끈 선단이 인도로 항해할 때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천체관측기구가 발견됐다. 영국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는 미국인 난파선 사냥꾼 데이비드 먼스는 24일(현지시간) 자신이 발견한 항해용 아스트롤라베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임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아스트롤라베’는 중세까지 아라비아와 그리스, 유럽 등에서 천체의 높이나 각거리를 측정하는 데 쓰이던 기구다. 항해용으로는 포르투갈 탐험가들이 태양과 별의 고도를 이용해 선박의 위도를 측정하기 위해 개발했다. 데이비드 먼스는 영국 해저선박잔해탐사 기업 ‘블루워터 리커버리스’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 회사는 1998년 중동에 있는 오만 인근 해저를 조사하던 중 난파선 한 척을 발견했다. 하지만 2013년이 돼서야 오만 문화유물부와 함께 발굴 조사를 시작, 이듬해인 2014년 천체관측기구로 추정되는 이 유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결국 최근 들어 영국 워릭대학의 마크 윌리엄스 교수가 이 유물에 레이저 스캔을 시행한 결과, 태양 고도를 산출하기 위해 각도가 5도 간격으로 새겨진 선들을 발견하면서 항해용 아스트롤라베임이 확인된 것이다. 지금까지 세계 각지에서 난파선을 탐사해온 먼스는 “유물 표면에는 포르투갈 왕실문장과 당시 포르투갈 국왕인 마누엘 1세의 개인 휘장이 새겨져 있어 보는 순간 매우 귀중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또 그는 “이 아스트롤라베는 1496년부터 1500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지금까지 발견된 항해용 아스트롤라베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임을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포르투갈인들은 항해용 아스트롤라베 개발의 최전선에 있었다. 해상에서 아스트롤라베를 쓰던 포르투갈인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480년쯤”이라면서 “지금까지 가장 오래됐다고 알려진 아스트롤라베는 1533년 배에 실려있던 것이지만, 이번에 발견된 아스트롤라베는 그보다 약 30년 더 오래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먼스에 따르면, 이번 아스트롤라베가 발견된 난파선은 포르투갈 탐험가 바스쿠 다가마가 1502년부터 1503년 사이 인도로 항해하던 두 번째 선단 중 그의 외삼촌 비센테 소드레가 선장을 맡았던 에스메랄다호(號)로 추정된다. 바스쿠 다가마는 1498년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뱃길을 통해 인도에 상륙했다. 그의 인도 발견은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식민지 정책과 교역 시대의 계기를 만들었다. 한편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번 아스트롤라베는 현재 오만의 국립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사진=AFP 연합뉴스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18㎞ 물길 따라…요트·자전거로 ‘도심 속 유람’ 떠나볼까

    18㎞ 물길 따라…요트·자전거로 ‘도심 속 유람’ 떠나볼까

    서해와 한강을 잇는 경인아라뱃길은 2012년 개통된 국내 최초이자 유일한 내륙 운하다. 사실 한강과 서해를 연결하려는 노력은 8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고종 당시 각 지방에서 거둔 조세를 중앙정부로 운송하기 위해 안전한 뱃길을 개척하려 했지만 인적·기술적 한계로 무모한 시도로 끝났다. 이후 1987년 굴포천 유역의 홍수로 대규모 피해가 발생하자 해당 지역 치수대책이 논의됐고 이를 계기로 경인운하 사업이 다시 타당성을 얻기 시작했다. 2009년 착공해 3년 만에 경인아라뱃길이 탄생했고 굴포천 유량을 조절함으로써 인천·경기 지역의 만성적인 홍수를 방지하고 있다. 함께 기대했던 물류 혁신의 꿈은 비록 미완의 과제로 남았지만 아라뱃길은 시민들의 쉼터이자 문화, 레저 생활을 향유하는 복합 문화체험 공간으로 새롭게 거듭나고 있다.●미완의 뱃길, 시민들 쉼터로 변신 아라뱃길에는 18㎞의 긴 물길을 따라 수향 8경이 조성돼 있다. 단어에서 알 수 있듯 수향은 물길이 아름다운 지역이나 하천 주변의 마을을 의미한다. 수향 8경은 아라뱃길을 대표하는 8개의 아름다운 수변 풍경을 거점 삼아 서해(1경)를 시작으로 한강의 파노라마(8경)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운치 있는 자연경관과 함께 8경까지 가는 길 곳곳마다 관광·레저 공간이 자리해 늘 사람들의 발걸음을 재촉한다. 거꾸로 서울 여의도에서 유람선을 타고 서해 앞바다 덕적도까지 향하면서 바닷길과 하늘길이 만나는 절경을 즐기는 것도 가능하다. 특히 물길을 따라 자전거 라이딩도 가능해 서울·수도권 내의 레저·스포츠가 접목된 관광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한국수자원공사(K-WATER) 관계자에 따르면 수향 2경에 있는 정서진 광장은 해넘이를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데이트족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장소다. 정동진은 귀에 익지만 정서진은 다소 생소할 수 있다. 정동진의 대척점에 위치한 정서진은 서해의 아름다운 일몰을 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꼽힌다. 가을 억새 사이로 넘어가는 붉은 해와 주변에 번진 붉은 노을은 마지막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황홀하기까지 한 일몰 광경 덕분에 정서진 광장은 멀리서 사진을 찍기 위해 방문하는 ‘출사족’들의 집결지로도 통한다. 정서진 광장에는 정서진의 상징인 노을종 조형물이 있다. 조형물 사이로 해가 쏙 들어가는 순간을 포착하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수향 4경에는 아라뱃길의 가장 높은 협곡을 이용해 인공적으로 만든 아라폭포가 있다. 높이 45m, 너비 150m인 2단 폭포로 방문객들에게 청량감을 제공한다. 특히 여름철 야간에는 경관 조명이 더해져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아라폭포는 아라마루를 통해 다른 각도에서 조망할 수 있다. 아라마루는 바닥이 투명한 강화유리로 된 원형 전망대다. 미국 그랜드캐니언의 스카이워크를 벤치마킹한 아라마루에서 발밑의 뱃길을 보고 있자면 아찔함마저 느껴진다. 수향 6경인 두리생태공원에는 오토캠핑장이 있다. 두리캠핑장은 도심 캠핑장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생태관찰시설, 산책로와 족구장, 배드민턴장 등의 체육시설은 다른 캠핑장에서는 볼 수 없는 두리캠핑장만의 특색이다. 최근 캠핑 열기 고조로 인해 성수기가 아니더라도 주말이면 캠핑족들로 예약이 꽉 찬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자전거 라이더의 천국, 아라자전거길 아라자전거길은 아라뱃길을 순환할 수 있는 자전거길로 인천 청윤교, 경기 김포 전호교를 따라 연결돼 길이가 41.3㎞에 달한다. 그중 뱃길 남측 한강자전거길과 연결되는 21㎞ 구간은 낙동강 하굿둑까지 총 633㎞로 이어지는 국토종주 자전거코스의 출발 구간이다. 인천에서 부산까지 이어지는 국토종주 길 곳곳에는 인증센터가 있다. 도장을 찍어 한국수자원공사에 제출하면 종주 인증서와 스티커, 메달 등이 수여된다. 이 때문에 인증수첩 구매가 가능한 아라서해갑문은 국토종주 도전을 시작하는 이들로 언제나 가득하다. 국토종주 목적이 아니더라도 자전거를 대여해 라이딩을 즐길 수 있다. 아라자전거길에는 모두 5곳의 자전거대여소가 있고 한강 여의도 원효 자전거대여소와 교차 반납이 가능해 인천에서 서울까지 국토종주 ‘맛보기’도 가능하다. 대여 요금은 시간당 4000원이다.●유람선 타고 아라뱃길 경관 감상도 하늘빛 물 위 하얀 요트는 해외나 남해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다. 아라뱃길 김포터미널에 조성된 복합 수상레포츠시설인 아라마리나에서도 요트를 즐길 수 있다. 아라마리나는 갑문 조작을 통해 사계절 일정 수위가 유지되는 안전한 수상환경을 제공한다. 덕분에 수도권에서 좀처럼 즐기기 힘들었던 요트, 카약, 수상자전거, 페달보트 등의 수상레저를 체험할 수 있다. 요트는 우리나라에서 대중적인 스포츠는 아니다. 하지만 초보자라고 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아라마리나에서는 요트스쿨을 통해 체험 코스부터 전문 과정까지 단계별 요트강습을 시행 중이다. 누구나 자신의 수준에 맞는 교육과정을 골라 요트를 배울 수 있다. 아라마리나 해양아카데미에서는 카약, 수상자전거, SUP보드 등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김포, 인천 계양구, 서구 시민의 경우 아라마리나에서 제공하는 교육 프로그램에서 교육비 면제나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수도권 시민들이 주말마다 요트를 즐기는 게 먼 이야기가 아닐 수 있다. 김포터미널부터 시천나루까지는 유람선이 운행돼 요트 등 전문 레포츠가 부담이 되는 사람들도 편안하게 배를 타고 아라뱃길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계절 따라 다양한 아라뱃길 문화행사 봄바람이 얼굴을 간질일 때면 나들이객들이 거리로 나온다. 아라뱃길은 지난해부터 시작된 봄꽃 페스티벌을 통해 시민들이 즐겨 찾는 새로운 봄나들이 명소로 주목받고 있다. 꽃이 만개하는 5월이면 아라뱃길 수변공원 곳곳에서 봄꽃을 즐길 수 있다. 아라 봄꽃 페스티벌에는 봄꽃축제뿐 아니라 카약축제가 동시에 진행된다. 약 7㎞에 걸친 코스에 카약 350여척이 뱃길을 따라 완주하는 비경쟁대회다. 그뿐만 아니라 귀가 즐거운 아라음악회도 개최된다.10~11월에는 야외활동을 하기에 최적인 날씨가 이어진다. 선선한 바람, 파랗고 높은 하늘, 하얀 뭉게구름. 경인아라뱃길은 이에 발맞춰 아라문화축제를 진행한다. 수상레저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이 축제에 주목해 보자. 이름부터 생소한 드래건보트가 이 축제의 메인 이벤트인데 국제대회 형식으로 진행돼 선수는 물론 관객들 사이에 긴장감이 배어 나온다. 뱃머리에 자리잡은 북잡이의 북소리에 맞춰 선수들이 노를 저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관객까지 신이 난다. 요트대회, 전국마라톤 대회, 자전거 대행진, 푸드트럭 페스티벌 등의 행사도 진행돼 식도락 여행도 즐길 수 있다. 최모(28)씨는 “아라뱃길은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있는 특별한 곳”이라면서 “일주일에 한번씩 찾는데 가기 전부터 마음이 설렌다”고 말했다. 김학준 기자 kimhj@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파란 눈 신부의 꿈… 저 곡식창고 위에 아름다운 성당을 세우리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파란 눈 신부의 꿈… 저 곡식창고 위에 아름다운 성당을 세우리

    공세리성당은 아산호방조제와 삽교천방조제를 잇는 충남 아산군 인주면 공세리에 있다. 경기도와 충청도를 각각 대표하는 곡창인 안성평야와 내포평야가 둘러싸고 있는 곳이다. 일대는 공세곶으로 불렀는데, 곶(串)이란 바다로 내민 땅을 말한다. 이런 특성으로 조선시대 조창(漕倉)이 있었다. 세금으로 걷은 곡식을 뱃길을 이용해 도성(都城)으로 나르기 위한 창고이자 전진기지였다. 공세리(貢稅里)라는 땅이름도 여기서 유래됐다.1894년 당시 조선의 천주교 신자는 2만명 남짓했고, 이 가운데 3755명이 충청도 지역에 살았다고 한다. 파리외방전교회의 피에르 파스키에 신부와 장 퀴를리에 신부는 당시 신창과 덕산을 본당(本堂)으로 충청도의 동북쪽과 서남쪽을 맡고 있었다. 신창과 덕산은 오늘날에는 각각 아산과 예산 땅의 일부다. 같은 해 동학 농민봉기 과정에서 조조 신부가 피살됐는데, 파스키에 신부는 조선을 떠났고, 후임으로 에밀 드비즈 신부가 임명된다. 당시 충청도는 53곳의 공소가 있었는데, 공세리 골뫼마을도 그 하나였다. 이 마을에는 박해 이전부터 교인이 몰려 살았는데, 파스키에 신부는 이곳을 일찍부터 새로운 신앙의 거점으로 점찍어 두고 있었다. 그가 조선을 잠시 떠나기 전 조선교구장 구스타브 뮤텔 주교에게 보낸 사목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이 보인다.‘해변에 위치하고, 또 두 개의 큰 강이 삼각주를 이루는 지류 사이에 있는 이 마을은 땅이 매우 비옥하여 논농사가 잘됩니다. 마을 앞에는 아름다운 언덕이 있는데, 그것은 10리 떨어진 곳의 아산읍을 굽어보는 높은 산맥의 끝부분입니다. 언덕의 정상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일찍이 그 안에 정부의 곡식창고가 있었으나 지금은 황폐화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 높은 곳에 아름다운 성당을 세우면 멋질 것이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습니다.’ 파스키에 신부의 꿈을 현실로 만든 이가 공세리에서 34년 동안 사목 활동을 한 드비즈 신부다. 성일론(成一論) 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가졌던 드비즈 신부는 1871년 프랑스 남부 아르데슈에서 태어났다. 1894년 사제 서품을 받고 조선에 들어와 이듬해 공세리본당의 초대 주임신부가 됐다. 그런데 1년 만에 주교관의 경리인 당가(當家)신부로 임명됐다. 2대 본당신부는 기낭이었는데, 드비즈는 이듬해 3대 본당신부로 공세리에 돌아온다.공세리는 조선시대 공세지(貢稅地)로 불렸다. 1523년(중종 18) 80칸 규모의 창고가 들어섰지만 1762년(영조 18) 해운창이 폐지됨에 따라 무용지물이 됐다. 하지만 조창이 폐지됐다고는 해도 그 터는 국유지였다. 당연히 매매가 금지됐지만,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창립 주역인 최석우 몬시뇰에 따르면 당시 편법이 통하는 탐관오리가 없지 않아 사들일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문제가 됐음에도 드비즈 신부는 “정부가 관리를 잘못한 책임을 교회가 질 수는 없다”는 논리로 버텼고, 결국 토지 소유권을 인정받게 됐다는 것이다. 20대의 젊은 사제는 1897년 한옥식으로 성당, 사제관, 부속건물을 세웠고 1921년 지금의 성당을 지었다. 박물관으로 쓰고 있는 사제관 건물도 이때 함께 세운 것이다. 드비즈 신부의 아버지는 건축가였다고 한다. 드비즈 신부도 어린 시절부터 건축에 관심이 많았고, 그 결과 아름다운 공세리성당을 설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공세리성당 말고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 성당과 수원성당, 그리고 서울 혜화동성당도 설계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초기 충청도 서해안 지역의 세곡(稅穀)은 경양포, 공세곶, 범근내에서 수집해 세곡선에 실었다. 고려시대 하양창이라 불린 경양포는 안성천 하류의 평택 팽성의 조창이었다. 범근내는 삽교천의 다른 이름이라고도 하는데, 세곡 창고는 당진 면천에 있었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1454)에는 각 조창이 세곡을 걷은 지역적 범위가 적혀 있는데, 경양포는 직산과 평택뿐으로 조창으로서의 기능이 매우 제한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공세곶은 청주, 목천, 전의, 은진, 연산, 회덕, 공주, 천안, 문의 등 충청도 지역 15개 고을을 관할했다. 범근내에는 서천, 한산, 남포, 보령, 홍주, 청양, 태안, 서산, 예산 등 16개 고을 세곡이 한데 모였다.공세리 조창 폐지 이후 주변 해안에서는 간척 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지금도 공세리성당을 찾으면 이곳이 과거 바닷물이 넘실거리는 바닷가였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다. 드비즈 신부가 ‘이 마을은 땅이 매우 비옥하여 논농사가 잘된다’고 했던 것도 간척 사업의 결과였을 것이다. 천주교 탄압 이후 산골로 흩어졌던 신자들이 다시 모여든 것도 농사지을 땅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세리성당은 어느 때나 아름답지만 늙은 느티나무 이파리 사이에 감춰졌던 성당 건물이 낙엽과 함께 조금씩 드러나는 이맘때가 가장 정감 있다. 절을 찾는 사람이 모두 불교 신자가 아니듯 공세리성당을 찾는 사람들도 모두 천주교 신자는 아니다. 종교는 달라도 성소(聖所) 특유의 분위기를 즐기려는 탐방객도 많다. 공세리성당은 그저 한 번 거닐어 보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준다. 더불어 차근차근 주변을 돌아보면 적지 않은 역사 공부가 된다. 성당은 서양의 고딕 건축 양식을 바탕으로 지었지만, 입구에서부터 한국인들의 생활 습관에 이질감을 주지 않으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성당 건축으로는 드물게 신발을 벗고 들어가도록 했다. 지금의 공세리성당이 드비즈 신부가 설계한 당초의 모습은 아니라고 한다. 1971년 3000명 남짓으로 늘어난 신자를 수용하기 어려워지면서 13대 주임 김동욱 신부가 북쪽의 제대(祭臺) 부분을 늘리는 방법으로 증축해 오늘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공세리성당을 찾으면 옛 사제관을 개조한 박물관을 반드시 돌아봐야 한다. 순교의 역사를 포함한 이 지역 가톨릭 교회의 역사를 제대로 알 수 있다. 조창의 흔적을 살펴보는 것은 공세리성당 탐방의 덤이다. 성당으로 오르는 길 옆에는 이곳이 조창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표석이 있다. 작은 글씨로 길게 적혀 있지만 한 번쯤 읽어 보는 것이 좋다. 성당의 주출입구인 주차장 서쪽에서 조금만 바다 쪽으로 내려가면 언덕 주변에 성벽의 흔적이 보인다. 그 아래 밭에는 조창 시절 밥그릇이나 국그릇으로 썼음직한 조선시대 막사발 조각이 굴러다닌다. 공세리성당에서 아산 쪽으로 나가는 길가에는 치성(雉城)처럼 보이는 본격적인 성벽의 흔적이 있다. 그 아래는 조선시대 비석이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해운판관(海運判官)의 선정비다. 해운판관이란 충청도·전라도의 조창을 순회하며 세곡의 선적을 감독하고 경창까지 무사히 도착하도록 독려하는 임무를 맡은 관리다. 공세곶이 조창이었다는 직접적 증거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한강 물길 바뀌면서 생겨난 ‘석촌호수’ 송파나루 기억·병자호란 아픔 품었네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한강 물길 바뀌면서 생겨난 ‘석촌호수’ 송파나루 기억·병자호란 아픔 품었네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일대에서 유일하게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석촌호수는 예로부터 한성백제 시대 돌무덤이 있다고 해 ‘돌마리’의 한자 표기인 ‘석촌’으로 불려 왔다. 1971년 4월 잠실섬 서쪽 부리도의 북쪽 물길을 넓히고, 남쪽 물길을 폐쇄함으로써 섬을 육지화하는 한강 공유수면 매립사업이 시작됐고, 그때 폐쇄한 남쪽 물길이 바로 현재의 석촌호수로 남았다.한강의 본류였으나 이후 물길이 바뀌면서 생겨난 인공호수이자 서울에서 유일한 호수다. 매립공사로 생겨난 땅이 잠실동과 신천동이다. 호수의 면적은 21만 7850㎡(약 6만 5900평)이며 담수량은 636만t, 평균 수심은 4.5m다. 송파구의 남북을 가로지르는 간선도로 송파대로가 호수를 가로지르면서 동호(東湖)와 서호(西湖)로 구분됐다. 전체 호수 둘레는 2.5㎞에 달한다. 동호 남쪽에 옛 송파나루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송파나루터는 서울과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잇는 뱃길이었다. 정적인 분위기의 동호와는 다르게 서호 쪽에는 주말마다 송파산대놀이를 비롯한 민속무용·사물놀이·탈춤 등의 민속공연이 펼쳐지는 서울놀이마당과 롯데월드 야외놀이시설인 매직아일랜드와 수중분수대가 있어 생동감이 넘친다. 서호 옆에는 1639년 병자호란 때 세운 삼전도비가 있다. 청나라와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청태종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기린 항복 문서가 새겨져 있다. 본래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 글자, 오른쪽에는 만주 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적혀 있는 국내 유일의 비석이다. 17세기 만주어 및 몽골어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치욕적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동안 여러 차례 수난을 당했다. 1895년 청일전쟁 이후 강물에 수장됐지만 일제강점기인 1913년 일본에 의해 다시 세워졌다. 광복 직후 주민들이 다시 땅속에 묻었으나 1963년 홍수 때 모습을 드러냈다. 그 후 1983년 송파구 석촌동 289-3번지로 이전됐다가 고증을 거쳐 2010년 비석이 서 있던 원래 위치인 송파구 잠실동 47번지에 자리잡았다. 2007년에는 한 문화재 테러리스트에 의해 붉은 래커로 훼손됐다가 복원됐다. 석촌호수는 시시각각 변하는 계절의 정취를 그대로 만끽할 수 있는 공간일 뿐 아니라 시민들의 문화예술 공간으로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서울미래유산팀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말은 오고 사람은 가고… 한양과 제주 이어 주던 땅끝 마을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말은 오고 사람은 가고… 한양과 제주 이어 주던 땅끝 마을

    제주의 유배 역사는 이제 관광자원으로도 적지 않은 몫을 한다. 추사가 위리안치됐던 서귀포 대정에는 기념관이 세워졌다. 세 개의 유배길도 만들어졌는데, 추사 유배길과 성안 유배길, 면암 유배길이 그것이다. 제주시의 성안 유배길은 제주목 관아를 나서 제주읍성터를 따라 면암 최익현과 우암 송시열, 광해군, 성호 이익을 비롯한 유배인의 흔적을 만난다. 면암 유배길은 최익현이 유배에서 풀린 뒤 한라산에 올랐던 루트라고 한다.육지와 제주를 잇는 해로(海路)도 궁금하다. 뱃길은 유배인과 관리뿐 아니라 모든 문물(文物)의 통로였다. 제주의 양대(兩大) 항구는 화북포와 조천포였다. 송시열과 김정희, 최익현은 화북포로 제주에 들어갔다. 하지만 청음 김상헌은 해배(解配)되고 조천포에서 제주를 떠났다. 제주를 방문한 점필재 김종직도 조천관에서 순풍을 기다리다 한편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 한양을 오가는 관리들의 숙소였던 조천관은 터만 남았다. 하지만 조천 연북정(戀北亭)은 이른바 유배 문화가 각광받으며 인기 있는 탐방지로 떠올랐다. ‘궁궐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며 그리워한다’는 연북정의 이름부터 유배자의 정서와 맞물려 감회를 자아낸다. 물론 임금의 관심을 간청하는 마음은 벼슬아치들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화북리도 19세기에는 공북리(拱北里)라는 이름이었다고 한다. ‘공북’이란 임금을 향해 손을 모은다는 뜻이니 연북정의 작명원리와 일맥상통한다. 헌종시대 제주목사를 지낸 응와 이헌조는 연북정 주변에서 조천항 일대의 풍경을 묘사한 시를 남겼다. ‘바다 고을에서 제일 번화한 마을 /조천관 바깥에 깃발을 멈추었다 /이진(梨津) 사공은 바람을 타 배질하고 /선흘 사람들은 가랑비 맞으며 밭갈이하네’ 선흘은 조천의 마을이고 이진은 바다 건너 해남의 포구다. 조천으로 들어오는 육지 배가 출항하는 대표적 포구가 이진이었음을 짐작게 한다. 오늘은 바로 그 해남 이진포로 간다. 전남 해남군 북평면의 이진리는 오늘날 반농반어(半農半漁)의 한적한 시골 마을이다. 마을 앞 포구에 서면 왼쪽으로 달도를 거쳐 완도를 잇는 사장교인 완도대교의 주탑(主塔)이 있다. 이진에서는 땅끝도 멀지 않다. 그야말로 한반도 최남단이다.동네 초입에서는 지금 이진성을 복원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조선은 1588년(선조 21) 이진에 군진을 세운 데 이어 1627년(인조 5)에는 종4품 만호가 지휘하는 만호진으로 승격시킨다. 이 지역은 고려시대부터 왜구의 침범이 잦았던 데다 을묘왜변과 임진왜란으로 이진포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기 때문이다. 이진성은 방어를 위한 목책과 해자까지 갖추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몰려드는 적군으로부터 성문을 방어하는 옹성도 일부 남아 있다. 이진성 안팎에서는 최근에 세운 친절한 안내판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이른바 관방유적(關防遺蹟)으로 중요성을 알리면서 이순신 장군과의 인연을 강조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하지만 이곳이 한양과 제주를 잇는 간선로를 이루는 중요한 거점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알리는 안내판은 포구에서도 찾지 못했다. 조선시대라면 군선(軍船)이며 관공선(官公船)이 적지 않게 정박하고 있었을 이진항이지만, 지금은 1t에 미치지 못하는 작은 고깃배들만 한가롭게 떠 있다. 그런데 포구에서 가장 가까운 민가의 나지막한 돌담에 눈이 간다. 담장을 이루는 돌은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이 대부분이다. 마치 제주도의 담장을 연상시킨다.집주인 아저씨는 “이것들이 제주에서 싣고 온 돌이냐”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저기 언덕 위 동네로 올라가면 더 많으니 한번 가 보라”고 일러 준다. 현무암들은 제주말(馬)의 하역항으로 이진의 역사를 보여 준다. 먼바다를 항해하는 선박이 바람과 파도에도 중심을 잃지 않는 것은 평형수(平衡水)가 있기 때문인데, 과거에는 그 평형수 역할을 돌이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말이 내리면 제주에서 싣고 온 현무암은 더이상 쓸모가 없었으니 항구에 그대로 버렸음을 알 수 있다. 제주도는 고려시대 이후 군마(軍馬) 사육장이었다. 물론 제주말을 반입하는 항구가 이진이 유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강진 마량(馬梁)의 마도진(馬島鎭) 만호성 주변에서도 현무암이 발견된다고 한다. 땅이름으로 짐작해 봐도 마량은 중요한 제주말 반입항의 하나였을 것이다. 강진의 옛 이름인 탐진(耽津)도 탐라(耽羅), 곧 제주를 오가는 항구였기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렇다 해도 이진의 현무암은 마량의 그것보다 많다. 현무암의 많고 적음은 배에 실어 운송한 말의 숫자와 비례할 수밖에 없다. 이진은 말 수송선을 포함해 조선 후기 제주를 오가는 선박의 출입통제소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제주로 가는 또 다른 항구였던 강진 남당포를 출발한 배도 큰 바다로 바로 나가지 않고 완도 북쪽의 이진포를 거쳤다. 고산자 김정호(1804~1866?)는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이진진(梨津鎭)은 한양에서 950리 떨어져 있고, 성에는 해월루(海月樓)가 있다. 제주로 들어갈 사람은 모두 여기서 배를 타고 떠난다’고 기록했다. 조선 중기의 문인 임제 백호는 1577년(선조 10) 제주목사로 있던 아버지 임진을 만나고 돌아와 ‘남명소승’(南冥小乘)이라는 기행문을 남겼다. 임제는 12월 6일 강진 남당포를 출발해 저녁 늦게 이진보(梨津堡)에 이른다. 남당포는 간척이 이루어져 오늘날 옛 지형을 알 길이 없는데 강진읍 남포리로 추정하고 있다. 임제가 이진에서 배웅 나온 관리들과 작별한 것은 바야흐로 큰바다 항해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임제는 9일 밤 제주 조천포에 도착한다. 돌아올 때는 화북포에서 출발해 해남 관두포로 상륙했다. 해남반도 서쪽의 관두포는 고려시대 이후 오래된 제주 뱃길의 항구였다. 김정호가 ‘이진성에는 해월루가 있다’고 적은 대목은 사실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 해남군은 최근 해남 남창리에 달량진성과 해월루를 복원했다. 북평면 소재지인 남창리는 해남과 완도를 잇는 땅끝대로를 사이에 두고 이진리와 마주 본다. 달량진성은 수군 만호 주둔지였지만, 이진에 만호진이 설치되면서 군진이 아닌 환곡을 위한 곡식창고인 남창으로 바뀌었다. 이진과 남창리는 실제로 멀지 않다. 고산자가 착각한 이유일 것이다. 김정호는 ‘대동여지도’에도 해월루를 이진 동쪽이 아닌 서쪽에 두었다. 지금 해월루 아래는 해변 산책 데크도 만들어 놓았으니 달량진 유적도 찾아보면 좋을 것이다. 이진포 북쪽은 해발 498.6m 달마산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기기묘묘한 암봉이 인상적인 달마산은 ‘남도의 금강산’이라 불릴 만큼 수려하다. 하지만 반대편 이진에서 바라본 달마산의 표정은 조금 온화하다. 달마산이라면 아름다운 절 미황사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미황사는 달마산의 북서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이진포에서 달마산을 바라보고 있자니 미황사 창건 설화가 문득 생각났다. 신라 경덕왕 시절 황금빛 피부의 외래인이 범패 소리를 울리며 노를 저어 땅끝마을 사자포 앞바다에 나타나 경전과 불상 및 탱화를 의조화상에게 건네주었고, 싣고 왔던 바위를 부수고 나온 검은 소가 점지한 자리에 절을 세우니, 곧 미황사라는 것이다. 흔히 인도 불교가 바다로 직접 전래된 증거로 이 설화를 들기도 한다. 그 ‘사자포’는 미황사에서 최단거리 항구인 이진포로 상정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글 사진 dcsu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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