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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국의 달’ 전쟁 특집프로 풍성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케이블 채널에서 전쟁 관련 특집프로그램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슈퍼액션은 6일부터 한달 동안 매주 월요일 오후 8시30분 ‘전쟁영화 특집’을 편성했다. 6일에는 올리버 스톤 감독의 베트남 3부작 가운데 첫 편인 ‘플래툰’(1986)이 방영된다. 미국 우월주의 시각에서 벗어나 인간 내면의 고통과 파괴되는 인간성에 초점을 맞춰 87년 아카데미상뿐 아니라 베를린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 13일에는 멜 깁슨이 미국 독립전쟁의 투사로 나오는 ‘패트리어트:늪속의 여우’(2000)가 이어진다.20일에는 오우삼 감독, 니컬러스 케이지 주연의 ‘윈드토커’(2002)를 방영한다.27일에는 영국 특수부대 SAS 대원의 실화를 영화화한 ‘브라보 투제로’(1999)가 준비됐다. 영화오락채널 XTM은 우리 민족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을 골랐다.7일부터 4일 동안 매일 오후 10시 ‘대한민국을 지켜라!’는 주제로 한국 영화 4편을 내보낸다. 첫날에는 신라와 백제의 전투를 소재로 걸쭉한 사투리 대결로 인기를 모은 ‘황산벌’(2003)을, 이후 중국 대륙을 무대로 고려 무사들의 이야기를 그린 김성수 감독의 ‘무사’(2001),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는 청년들의 이야기 ‘아나키스트’(2000),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고 있다는 가상의 미래를 소재로 한 ‘2009 로스트 메모리즈’(2002)를 차례로 방영된다. 다큐멘터리 전문채널 내셔널지오그래픽은 다양한 시각으로 세계 2차대전을 조명한 테마기획 ‘D-데이’를 마련했다.6일부터 5일 동안 매일 오후 10시 방영한다. 이 다큐멘터리는 나치의 악몽에서 벗어나기 직전 열흘 동안 10명의 특별한 인물들이 겪었던 전쟁의 마지막 순간을 담은 ‘승리의 카운트다운’ 1·2부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전쟁 설비·도구들의 활약을 파헤친 ‘비밀병기’ 1·2부, 제2차 세계대전의 전세(戰勢)를 뒤집은 날 활약했던 영국 전투기의 잔해를 찾아 발굴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잊혀진 전투기’ 등으로 구성됐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식민지배 잘못’엔 공감 강제병합 여부엔 이견

    ‘식민지배 잘못’엔 공감 강제병합 여부엔 이견

    한·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의 성과는 양측의 뻔한 기존 주장 재확인에 그쳤다. 위원회 탄생 자체가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를 앞두고 양국간 정치적 흥정의 결과물이었고, 양국 모두 민족주의적 시각을 밑바탕에 깔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미 예견됐던 일이었다. ●임나일본부설 고대사를 다룬 1분과의 주요 쟁점은 왜군이 한반도 남부에 지배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임나일본부설’이었다. 한국측은 4∼6세기 왜군은 백제나 가야의 원군 수준에 그쳤다고 주장한 반면, 일본측은 왜군이 한반도 남부에서 군사활동을 했고 동시에 이 지역에 대한 지배의사를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양측 모두 치열한 사료전쟁을 벌였지만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일본서기’에 기초한 임나일본부설은 부인됐다고 공동위원회는 밝혔다. 그러나 연구기간이 짧아 고대 한·일관계사에 대한 연구가 충분치 못하다는 단서가 붙었다. ●조선시대 한·일외교와 임진왜란 중·근세사를 다룬 2분과의 쟁점은 임진왜란을 포함한 조선시대 한·일 관계였다. 한국측은 조선전기에는 왜구에 대한 징벌이 있었고 후기에는 ‘통신사’를 통해 어느 정도 물꼬를 터주었다고 주장했다. 임진왜란에 대해서는 양국간 인식 차이가 있는 만큼 전쟁의 참혹함을 경계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일본측은 조선전기에 이미 동아시아 교역권이 존재했고 후기에는 ‘통신사’가 있었는데 일본은 이를 조공사절로 이해했다고 반론을 폈다.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에 대한 정벌욕구와 조선에 불리하게 돌아간 정보의 실태를 규명하는 데 초점을 뒀다. ●식민시기 전후사 한국과 일본 연구자 모두 식민지배가 잘못됐다는 점에는 동의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내용은 달랐다. 한국측은 자주국 조선이 강제적으로 일본에 병합당했다는 점을 강조했지만 일본측은 조선은 청나라의 조공국에 불과했고 청일전쟁의 승리로 동아시아에 근대적 질서가 도입됐다고 주장했다. 또 병합 과정의 각종 조약 역시 합법적인 데다 국제적으로 승인도 받았다고 밝혔다. 연장선상에서 일본측은 식민지배에 따라 조선에 근대적인 측면들이 나타났다는 점을 강조하는 반면, 한국측은 근대적 측면이 일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수탈이 뼈대를 이룬다고 반격했다. 따라서 한국측은 독립운동을 강조하지만 일본측은 한국의 저항은 미미했다고 봤다. ●65년 국교정상화와 북·일 관계 현대사 분야의 쟁점은 국교정상화와 북·일관계였다. 국교정상화에 대해 일본은 배상·보상 문제가 마무리됐다는 기존 주장을 되풀이한 반면 한국측은 위안부 문제 등이 빠진 채 논의됐기 때문에 배상·보상의 책임은 여전하다고 주장했다. 북·일관계에 대해서도 일본측은 일본인 납치문제를 거론했고 한국측은 일본의 우경화가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대통령·총리 직속 위원회 4곳은 3년 넘게 회의 안열어

    대통령·총리 직속 위원회 4곳은 3년 넘게 회의 안열어

    대통령이나 국무총리 직속의 각종 위원회 가운데 상당수가 업무 중복으로 예산 낭비 소지가 높거나 아예 회의조차 열지 않아 유명무실하게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지적됐다. 특히 대통령 자문기구인 동북아시대위원회가 최근 파문을 일으킨 행담도 개발사업 의혹에 간여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현 정부 들어 더 늘어난 각종 위원회를 둘러싸고 논란이 증폭될 전망이다. 30일 한나라당 박형준 의원이 국회예산정책처에 분석 의뢰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현재 대통령 소속 27개 위원회 가운데 업무가 중복되거나 예산을 낭비할 우려가 높은 위원회가 전체의 37% 안팎인 10여개에 이르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 국무총리실 소속 원자력위원회·보건의료정책위원회·접경지역정책심의위원회·백제문화권개발위원회 등 4개 위원회는 지난해부터 회의를 한 차례도 열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국무총리실 소속 위원회 56개 가운데 회의를 한 차례도 열지 않거나 서면으로 주요 안건을 처리하는 위원회도 상당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업무·예산 중복 위원회 수두룩 예산정책처는 대통령 자문기구인 과학기술중심사회추진기획단과 과학기술부의 과학기술자문회의, 국방발전자문위와 국가안전보장회의도 예산 및 기능이 중복될 우려가 크다고 분석했다. 아울러 대통령 자문위인 문화중심도시조성위의 예산도 문화관광부의 광주문화중심도시조성사업예산과 구분없이 편성된 것으로 나타났다. 앞서 감사원은 최근 정부혁신·지방분권위와 지방이양추진위가 비슷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한편 청년실업대책특별위, 국방발전자문위, 사법제도개혁추진위, 사람입국일자리위원회 등의 예산은 올 예산에 반영되지 않아 관련 부처 예산으로 집행될 수밖에 없어 각 부처의 예산집행에 혼선을 줄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됐다. ●9개 위원회는 안건 서면처리 국무총리가 위원장으로 있는 37개 위원회 가운데 물관리정책조정위·중앙민방위는 지난 3년 동안 한 차례도 회의를 열지 않았다. 심지어 4년(국가표준심의회),6년(거창사건등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 동안 회의가 열리지 않은 위원회도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정보통신기반보호위, 광주민주화운동관련자보상지원위 등 9개의 위원회는 지난해 안건을 모두 서면으로 처리해 업무 효율성에 의문이 제기됐다. 예산정책처측은 “장기간 구성되지 않았거나 운영실적이 극히 저조한 위원회 및 서면으로 안건을 처리하는 위원회 등은 현황을 파악하여 도입취지를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박형준 의원은 “이로써 ‘위원회 공화국’의 실상에 대한 구체적 증거가 밝혀진 셈”이라고 설명했다. 같은 당 나경원 의원은 “31일 공청회 개최 등을 거쳐 국회가 자문위원회의 설치 및 활동을 관리·감독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정부 자문위원회법안’을 다음달 임시국회에 제출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종수기자 vielee@seoul.co.kr
  • [부고]

    ●최임상(전 대한통운 전무이사)씨 별세 승철(아주대 공동기기센터 소장)영철(연세의대 신경과 교수)씨 부친상 윤석형(전 조흥은행 지점장)전명욱(노비안 한국지사 이사)고현기(사업)김재미(건국대 음악교육학과 교수)씨 빙부상 25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7일 오전 9시 (02)3410-6917 ●김승종(전 서울은행 부지점장)인종(삼성전기 상무)씨 모친상 민경래(자영업)김규배(엔-BZ 대표)김춘호(대한주택공사 과장)이요한(코위버 〃)씨 빙모상 26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8일 오전 7시 (02)3410-6916 ●박정배(프로야구 두산베어스 투수)씨 부친상 26일 충남 백제장례식장, 발인 28일 오전 9시 (041)853-4444 ●이은삼(아노커뮤니케이션 대표)씨 모친상 김남철(안양우편집중국 과장)씨 빙모상 26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8일 오전 8시 (02)3410-6918 ●이선화(서울대왕초등학교 교사)씨 별세 임채윤(SG신용정보 상무)철재(삼보컴퓨터)철기(한국개인신용)씨 모친상 26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8일 오전 7시 (02)3410-6908 ●원현주(세원산부인과 원장)씨 별세 민병진(배재대 화학과 부교수)씨 상배 원용준(하나은행 심사역)씨 누님상 25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8일 오전 7시30분 (02)3010-2266 ●이맹표(전 미도파 판촉실장)씨 별세 충돈(재미 사업)씨 부친상 26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8일 오전 10시 (02)3010-2269 ●김세진(전 미쓰비시 한국지사장)씨 별세 영윤(롯데마트 예다실장)재우(야신디자인 대표)씨 부친상 김주흥(뉴스폴물산 대표)김준헌(유천식품 상무이사)서광헌(Airtech Korea 대표)이상구(파믹스상사 〃)씨 빙부상 25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8일 오전 5시 (02)3010-2237 ●안희신(경진상역 부장)씨 모친상 26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8일 오전 5시30분 (02)3010-2265 ●김종구(한국씨티은행 성수동지점장)종선(서울지방국세청 역삼세무서 세무주사)씨 부친상 송창주(사업)김동인(한국도로공사 현풍김천건설사업소 공사부장)씨 빙부상 25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8일 오전 8시 (02)3010-2293 ●이경재(자영업)씨 부친상 오성록(과학기술부 서기관)이형광(조흥은행 백마지점장)이중재(LG필립스LCD 부장)윤상훈(자영업)씨 빙부상 26일 한양대병원, 발인 28일 오전 10시 (02)2290-9462 ●김경찬(성천양행 대표)씨 부친상 26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8일 오전 8시30분 (02)3010-2268
  • [빌딩 X파일] 방이동 올림픽파크텔

    [빌딩 X파일] 방이동 올림픽파크텔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파크텔은 그야말로 88올림픽의 산실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하다. 주소에서부터 ‘88’이라는 번지가 달렸다. 물론 88올림픽을 상징한다. 무엇보다 빙 둘러싼 올림픽공원의 경관이 아주 빼어나 숲속 유스호스텔에 온 듯한 기분을 자아낸다. 공원 안 생태자원인 성내천, 인공호수 몽촌해자와 88호수에는 천연기념물 제324호인 소쩍새를 비롯해 딱따구리, 왜가리, 쇠백로, 흰뺨검둥오리, 검은댕기해오라기, 꾀꼬리, 꿩, 다람쥐, 개구리, 청서, 밀잠자리 등 동물들이 살고 있다. 대지 1만 1570㎡(3500평)에 지하 1층, 지상 18층인 파크텔은 다양한 규격의 온돌방 등 238개의 객실을 갖췄다.10∼30명 수용 규모의 소연회장 8개,70∼120명 수용 규모의 중연회장 5개, 한꺼번에 500명이 행사를 가질 수 있는 대연회장도 있다. 대연회장인 올림피아홀에는 5개 국어 동시통역 시설과 이동무대 등 최첨단 장비를 두루 갖춰 대규모 국제행사를 치르기에 전혀 손색이 없다. 청소년에게도 좋은 환경이다. 백제 초기의 역사를 정립해주는 사적지 몽촌토성과 움집터가 곁에 자리했다. 특히 1000여평에 이르는 88마당과 지구촌광장, 음악분수대 등 4개의 야외 이벤트 무대는 어린이들에게 사생대회 및 야외공연장으로 알맞다. 달마다 갖가지 행사로 넘쳐난다. 오는 29일엔 최근 인기몰이에 성공한 ‘SG워너비’ 라이브콘서트 등 6개 행사가 마련된다. 다음달에는 ‘참살이 바비큐 페스티벌’ 등 4개의 굵직굵직한 프로그램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1층에 위치한 양식당 겸 커피숍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아름다운 올림픽공원을 바라볼 수 있는 안쪽은 감미로운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200여권의 스포츠 관련 서적 및 다양한 읽을거리를 비치해 다른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 심심풀이로 보도록 배려한 게 특징이다. 입구 쪽은 밝고 활기찬 분위기로 간단한 개인모임이나 사교모임에 좋다. 오전 7∼10시엔 웰빙 트렌드에 맞춰 채소를 위주로 식단을 짜 야채 코너와 디저트 등 뷔페를 싼 값에 맛보는 즐거움도 주어진다. 갈비 우거지국과 북어국 등 한식도 있다. 180개 좌석의 웨딩홀은 사용료가 20만원으로 비교적 싼 편이다. 예식 시간도 하객이나 결혼식을 올리는 가족들이 쫓기지 않게 3시간을 배정, 여유로움 속에 새 출발을 하도록 돕는다.(02)410-2114.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0)인천 제물포, 천년의 역사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0)인천 제물포, 천년의 역사

    중국을 겨냥하여 ‘서해안 시대’를 부르짖고 있지만 그 보다 훨씬 이전부터 인천은 서해안의 대중국 창구이자 교두보였다. 강화 고인돌과 단군의 유향(遺香)이 전해지고, 기원전 1세기로 추정되는, 미추홀과 비류백제로 상징되는 해양세력의 거점으로도 주목을 받았다. 오늘날 인천시의 남동갯벌, 도장리에서 승학천을 따라 이어지는 저지대는 바닷물이 들어오거나 습지였기에 문학산과 승학산이야말로 지리·환경적으로 초기국가 단계의 도읍지로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다. 백제시대에는 대외 창구로 기능하여 오늘날 인천시 연수구 옥련동의 능허대를 거점으로 해 중국과 넘나들었다. 한강 하류인 인천을 출발하여 덕적도를 거쳐 산둥반도 등주에 이르는 등주항로야말로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칠때 이용한 바로 그 항로이다. 오늘날 능허대는 아파트촌에 뒤덮이고 말았으나 조선 후기 읍지에 ‘백제조천시발선처(百濟朝天時發船處)라 하였듯 역사의 현장이 아닐수 없다. 그러나 인천이 한반도 역사에서 본격적으로 ‘뜬’ 것은 역시나 조선시대가 아닐까. 수도 한양에 이르는 입구, 이른바 인후지지(咽喉之地)로 온갖 역사의 영욕을 지켜보았다. 서해 뱃사람들에게 ‘행주참을 댄다.’는 말이 전해진다. 조수, 즉 밀물이 몰려들면 바닷물은 강물 위로 뜨고 바다로 내려가는 강물은 밑으로 깔리는 원리를 적절하게 이용하여 인천쪽에서 한강을 거슬러 행주나루를 거쳐 마포까지 직행하는 뱃길 노정을 이르는 말이다. 바로 그 뱃길을 따라서 열강들이 빈번하게 침범을 강행했으니, 지금도 남아있는 수많은 포대가 이를 웅변해준다. 대개의 개항장이 시련을 겪으며 탄생했지만 인천만큼 열강들의 침략의 손길이 가장 강력하고도 직접 뻗친 곳이 또 있으랴. 한반도에 세워진 최초의 등대인 팔미도등대는 바로 이런 개항의 역사를 잘 설명해주는 증거물이다. 조선에 진출하려는 열강들은 인천 해역에서 군사적 충돌을 일으켰다.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가 그것으로, 선조들은 이들의 도래를 온몸으로 싸워 막았다. 그러나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에 조선 진출의 기선을 제압하고자 운요호(雲揚號)사건(1875)을 감행했고, 끝내 조일수호조약(강화도조약·1876)으로 문을 열게 되었음은 교과서적 상식이다. 구미 열강과도 수호통상조약을 맺게 되니 은둔국 조선은 갑자기 봇물 터진 외압을 직접 받게 된다. 한적한 어촌에 불과하던 제물포는 하룻밤 새 개항장으로 둔갑하여 1883년에 인천해관과 감리서가 설치되고, 각국 영사관과 외국인 조계들이 설치되기에 이른다. 청일전쟁, 노일전쟁 등 일본의 전쟁을 위하여 조선땅을 내준 꼴이 됐으니, 이후 일본군의 군화발이 인천항을 자기 땅처럼 짓밟았다. 1892년,‘일본 밖에서 일본인 손에 의해 이루어진 가장 완벽한 일본책’으로 자평하는 ‘인천사정’이란 책자는 당시 ‘일본 영사관이 일장기를 아주 높게 휘날릴 수 있는 좋은 위치에서 장엄하고 수려하게 인천항을 삼킬 듯 바라보고 있다.’고 썼다. 정말 그들은 인천항을 강제로 개항시키고, 삼켜버렸다. 그 후 우체국, 경찰서, 일본거류지의회, 인천상법회의소, 무역상조합, 잡화상조합, 영어소학교, 공립소학교, 교토의 본원사(本願寺), 공립병원와 강제병원, 정미소, 제물구락부, 조선신보, 활자소, 그리고 제일국립은행, 제18국립은행, 제58국립은행, 일한무역상사, 우선주식회사의 일본지점 등이 속속 들어섰다. 대불호텔과 이태호텔, 수월루 등의 여관도 들어섰다.‘근래 불경기라는 소리가 인천항의 온 시가를 뒤덮는 데도 꽃은 붉고 버들은 푸르러(花紅柳綠) 흥청대기 이를 데 없으니 술집에는 어린 소녀들도 많았다.’고 한 기록도 있다. 이로써 유곽이 번창하여 도심까지 집창촌이 뻗어 나가 항구를 드나드는 뭇사내들을 유혹하였다. 교회도 빠질 수 없었으니 영국 성공회를 필두로 답동성당, 내리교회 등이 속속 들어섰다. 수출입세를 관장한 해관(海關)만큼은 조선정부 관할이었다. 물론 해관 운영에 ‘왕초보’였기에 대대로 영국, 독일, 일본인 등이 도맡아 했고 그들은 그야말로 ‘엿장사 마음대로’ 개항장을 농락하였다. 일본인들이 잘못된 협약서를 근거로 세금을 내지 않고 부를 축적했던 수탈 과정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당시 수입된 면직물은 대부분 영국제로 일본인이 수출을 독점했는데 영국도 저렴한 세금을 관철시켰다. 제국주의 경제침탈의 전형적인 모습이 인천항에서 관철되었다. 개항 당시 서울은 ‘좋지 않은 분위기였기’ 때문에 일본에서 인천에 들어와 사는 사람이 적었고, 총인구 2649명 중 쓰시마, 나가사키 사람들, 그리고 시모노세키가 위치한 야마구치(山口), 규슈의 오이타(大分)사람들이 주류였다. 일제침략기를 통해 대개 한반도에서 가까운 규슈 등지에서 집중적으로 건너왔음을 말해준다. 그래서 그쪽 방언들이 즐겨 쓰였으며, 도쿄, 오사카, 쓰시마 등 여러 곳의 언어가 섞인 것을 ‘인천어’라 부르기도 했다. 이후 인천에는 관리 세관원 은행원 회사원 무역상 중개인 운수업 하역업 여관 요리점 목욕탕 음식점 양주집 일본주점 약국 의사 사진사 이발업 재봉업 활판인쇄업 세탁소 양조장 대장간 오락실 과자점 창고업 고용직과 잡상 목수 석공 농업 등 온갖 직종 종사자들이 모여 들었다. 이들은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장차 식민지가 될 조선에 진출했기 때문에 러일전쟁·청일전쟁 등이 터졌을때는 자발적으로 전선구호와 간호 등에 힘을 보탰으며 스스로 무장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즉, 개항장에 나와 있던 일본거류민들을 순수한 의미로만 볼 일이 아니다. 일본의 관민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식민지 개척의 첨병으로 움직였다.‘생돈’이 생기는 만큼 화려한 의복과 음식으로 사치를 부렸다. 웅장한 반양반일(半洋半日) 가옥들이 앞다퉈 들어섰다. 개항장은 일본거류지, 각국거류지, 중국거류지로 삼분되었고 지금도 그 흔적이 확연하다. 은행건물 등이 남아있는 일본인 거리, 음식점이 즐비한 중국인 거리가 그것이다. 각국 거류지라고는 해도 19세기말에는 영국인 7명, 독일인 13명, 미국인 4명, 프랑스인 3명, 이탈리아인 1명 등이 거주했을 뿐이고 대개 일본·중국인들이었다. 그런데 각국거류지 회의는 인구비례가 아니라 국적별로 참여하도록 했으며, 서양인들이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다. 게다가 회의조차 영어로 진행하니 일본인들로서는 못마땅한 일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결국 일본인들은 대대적인 간척을 통해 땅을 확보, 도심을 불려나갔다. 오늘날 인천항 주변이 대부분 간척지인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그렇다면 조선인들의 대응은 전무하였던가. 인천 출신의 역사학자 임학성(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교수는 “인천객주협회를 모체로 1897년에 설립된 인천항신상협회는 민족 상인의 상권을 옹호·신장하였다.”고 지적한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에서 역주한 ‘인천개항25년사’(1907)를 보면, 조선인들은 오늘로 치면 송월·전·복성·인현·경·신포·답·신생·사·유·신흥·선화·도원동 등에 몰려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개항 초기에는 중국인과 일본인의 상권 경쟁이 치열했다. 중국인들은 특유의 근면과 상업적 재기를 토대로 일본에 맞섰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패하면서 결국 중국 상권도 몰락했다. 그럼에도 일정 시간이 지나자 중국인들은 다시금 성실하게 상권을 챙기기 시작했다. 오늘날 인천시가 중국인거리를 대대적으로 조성할 수 있는 터전은 이같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 사람들은 중국인들이 중국집이나 운영하고 살았을 것으로 짐작하지만 그들은 옥양목 같은 옷감장사에 남다른 재주를 발휘하여 상권을 장악해 ‘비단장사 왕서방’이란 별칭까지 얻었다. 조선의 쌀을 싸게 사들여 일본에 되팔아 엄청난 돈을 거머쥔 자들이 생겨났으며, 경인철도가 부설되자 서울을 오가는 보따리장사는 물론이고 석유장사 등으로 일본인들 역시 큰 돈을 벌어들였다. 군인들이 자주 부르는 ‘인천의 성냥공장’이란 노래도 당시 이후 첨단 공장인 성냥공장이 인천에 많았음을 방증하며, 그만큼 선진적 공장이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의 하나였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이제 인천은 일본인 대신 중국인들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길목이 되었다. 역사는 돌고 돈다는 사실을 확인시키거니와 산둥반도 등지를 오가는 페리에서 사람과 짐을 쏟아내고 있는 중이다. 중국인 거리에 가면 대하소설 삼국지를 연작 벽화로 그려놓아 길거리를 걸으면서 책읽기를 끝낼 수 있게 해놨다. 게다가 원조자장면집을 아예 자장면 박물관으로 개관할 예정이라니 다른 것은 몰라도 그 박물관만큼은 ‘대박’이 예감된다. 하고많은 박물관 중에 자장면 박물관은 특이성도 돋보이지만 인천에 딱 어울리는 까닭이다. 김춘선 인천해양수산청장은 “거대한 대중국 서해시대의 거점이기도 하지만 대북 통일시대의 거점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실제로 남포, 해주 등지를 오가는 화물선들이 끊임없이 사람과 물건을 실어나르고 있다. 북핵문제 등으로 긴장이 조성되고 있지만 바닷길만큼은 항상 열려 있어 민족화합에도 이바지하는 셈이다. 인천항의 고민이 없는 것이 아니다.1970년대에 대대적으로 건설된 파나마식운하의 물을 가두었다 풀어 놓는 갑문이 낙후해 머잖아 막대한 재원을 투입해야 할 형편이다. 갑문으로 가보니 5만t,10만t급의 거대한 선박들이 오가는 모습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그러나 인천항도 이제는 외항시대로 접어들었다.“인천항도 북항 등을 대대적으로 건설,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는 설명이 뒤따른다. 돌이켜 보면, 일제시대의 인천은 그야말로 동아시아의 중심이었다. 고베와 나가사키 쓰시마 부산 원산 톈진 블라디보스토크 등을 잇는 정기연락선이 오고갔으니 지금보다도 훨씬 바다를 통한 국제간 교역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러시아와의 교류가 근자에 이뤄졌음을 감안할 때, 바다를 통한 교류는 무려 반세기나 묶여 있다가 재개된 셈이다. 당시 인천은 ‘완연한 한국의 요코하마’로 불렸다. 국제 첨단 신도시로 개발되는 송도신도시가 완공되면 인근 인천공항과 더불어 인천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 분명하니 돌고 도는 역사의 변화가 다시 온 몸으로 느껴진다.
  • [Zoom in 서울] 산은 하나인데…

    서울 강북구가 우리나라 대표 명산 ‘북한산’의 명칭을 ‘삼각산’으로 바꾸자며 강력하게 대시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산 국립공원과 인수봉 등 3개 주봉(主峰) 영역을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경기도 고양시는 “졸속 명칭변경은 안된다.”며 제동을 걸고 있다. ●강북구 지난 2003년 북한산 백운대·인수봉·만경대 봉우리 일원 27만 3000㎡를 환경부에서 ‘삼각산 명승지’로 지정받고 산 명칭 변경을 추진해 왔다. 당시 강북구는 ‘서울 삼각산 명승지’ 지정을 희망했으나 “삼각산(북한산)이 왜 서울 산이냐.”는 고양시의 반발로 서울 명칭 삽입은 무산됐다. 강북구는 시민 서명운동과 함께 지난달 18일 북한산국립공원(78.45㎢)이 관내에 걸쳐 있는 경기도 양주·의정부·고양과 서울의 은평·종로·성북·강북·도봉 등 9개 자치단체가 참가한 포럼도 열었다. 이 포럼에서 강북구는 “북한산은 예부터 삼각산으로 불려왔다가 일제때 ‘창지개명’(創地改名)에 따라 북한산으로 바뀐 것”이라고 주장, 독도영유권 문제로 격앙된 국민정서를 업고 고양시장을 제외한 타 시·구 자치단체장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강북구가 이처럼 ‘삼각산’에 집착하는 것은 다분히 정치적이고 실제적인 이유가 배경이다. 북한산에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등 관광자원화해 지역개발에 활용하고, 국립공원관리공단과 지역주민들의 입장료 징수 등 마찰을 이유로 공원관리권을 장기적으로 이관받으려는 포석이다. 여타 자치단체들도 공원관리권 이관에는 강북구와 의견이 일치한다. ●고양시 ‘북한산’ 명칭이 일제의 잔재라는 강북구 주장을 부인한다. 삼국사기·삼국유사 등에도 삼국시대부터 삼각산과 북한산이 혼용돼 온 것으로 나타나고, 최근 정동일 고양시 문화재전문위원이 서울대 규장각에서 찾아낸 조선조 숙종때의 ‘북한지’에도 북한산군(郡)이란 명칭이 나온다는 것이다. ‘북한지’는 백제 개로왕때인 서기 132년 최초로 축성된 북한산성을 1711년 재축성하고 이때 북한산과 관련한 문화·역사·지리를 상세하게 정리한 문헌이다. 정 위원은 “‘북한산’이 ‘삼각산’에 비해 산성(山城)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더 쓰인건 사실이지만 일제의 잔재는 분명 아니다.”고 말했다. 고양시는 또 북한산국립공원 영역중 고양시 땅이 가장 많고, 봉우리가 서로 삼각뿔 모양을 하고 있어 ‘삼각산’의 유래가 된 세 봉우리중 백운대·인수봉 정상이 고양땅이고 만경대는 강북구와 경계인 점을 들어 강북구의 일방적 명칭 변경을 반대한다. 삼각산 명승지 면적 27만 3000여㎡ 중 92%는 고양시에 속해 있다. 세 봉우리의 지번은 모두 ‘고양시 북한산동 1의 1’로 시의 자존심도 걸려 있다. 등산객들이 서울쪽에 입장료를 내고도 북한산 정상에 서면 고양쪽을 향해 “야호”를 외치고 쓰레기와 환경문제를 야기하면서 이름을 삼각산으로 하겠다는 건 응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북한산 기슭에는 서울쪽에도 주거지가 일부 있으나, 산속에서 사는 500여명은 모두 고양시 북한산동 주민들이다. 혼란을 야기할 북한산 명칭변경에 응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고양시는 강북구의 지명 변경 시도가 다시 재연돼도 강력히 반대의견을 낸다는 입장이어서 단위면적당 등산객수가 세계에서 가장 많아 기네스북에 오른 우리나라 대표 명산의 이름을 둘러싼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고양 한만교기자 mghann@seoul.co.kr
  • 총리실 위원회 대폭 축소

    총리실 위원회 대폭 축소

    지난 1976년 설치된 중앙민방위협의회가 기능상실 등의 이유로 30년 만에 해체되는 등 국무총리실 산하 63개 위원회 가운데 19개가 폐지되거나 직급이 낮아지는 등 정비된다. 국무조정실은 3일 이같은 내용의 총리실 산하 위원회 정비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국무총리가 위원장인 45개 위원회 가운데 4개가 폐지되고,5개 위원회가 장관급으로 격하된다. 국무조정실장이 위원장인 18개 위원회도 3개가 폐지되고 1개는 위원장 직위가 한 단계 낮아진다. 폐지되는 위원회는 총리 산하 물관리정책조정위와 백제문화권개발자원위 등 7개다. 총리가 위원장인 접경지역정책심의위와 정보통신기반보호위 등 6개 위원회는 위원장이 소관부처 장관이나 차관으로 한 단계 낮춰진다. 광복60년기념사업추진위와 APEC준비위 등 6개 위원회는 관련사업이 종료되는 대로 자동 폐지된다고 국무조정실은 밝혔다. 이번에 폐지되는 위원회의 경우 설치목적이 달성됐거나 운영실적이 저조하고, 행정여건 변화로 존치 필요성이 감소했기 때문이라고 국무조정실은 설명했다. 실제로 중앙민방위협의회는 1976년 설치된 뒤 평균 5년에 한번꼴로 열려 유명무실한 상황이고, 정보화책임관협의회는 2001년 이후 한번도 개최되지 않았다고 국무조정실은 밝혔다. 한편 참여정부 들어 총리 산하에 신설된 위원회는 주한미군대책위, 일자리만들기위, 한·일수교회담문서공개대책위 등 21개에 이른다. 진경호기자 jade@seoul.co.kr
  • [세계인-우리는 이렇게 산다] 아시아 삼바축제… 日 마쓰리에 산다

    [세계인-우리는 이렇게 산다] 아시아 삼바축제… 日 마쓰리에 산다

    |도쿄 이춘규특파원|일본의 한 해는 마쓰리로 시작해 마쓰리와 함께 저문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사계절 내내 지역별 마쓰리가 계속된다. 일본인들은 마쓰리를 통해 사회통합을 이루고 문화전수도 한다. 큰 규모만도 6만개에서 30만개라는 설이 유력하다. 한사람이 하는 마쓰리에서 수 백만명이 참여하는 마쓰리도 있다. 마쓰리 행사를 위한 물품을 취급하고 행사를 기획하는 전문직업인도 많다. 마쓰리는 생활이요, 사업이다. 일본의 마쓰리는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가 시작될 때 오쇼가쓰(正月)마쓰리 등이 많이 열리고, 여름에서 가을로 바뀔 때는 전국적으로 오본(盆)마쓰리 등이 많이 개최된다. 이런 마쓰리 때 가장 신성한 존재는 마을이나 씨족의 신(神)이다. 신들에게 풍요, 행복을 비는 행위가 마쓰리의 기본적인 형태다. ●마쓰리로 시작돼 마쓰리로 끝나 마쓰리는 일반적으로 물과 꽃으로 신을 영접, 차린 술과 음식을 대접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신은 신사를 축소한 가마 형태의 ‘미코시’(神輿)나 손수레 위에 실은 ‘다시’(山車)로 옮겨져 모셔진다. 본격적으로는 이를 메거나 떠밀고 동네를 돌면서 “왓쇼이, 왓쇼이”를 외친다. 이런 것을 반복한 뒤 음식을 나눠먹는다.‘왓쇼이’가 한국어 ‘왔소’에서 왔다는 것은 통설이다. 미코시나 다시의 운반은 남성의 권리였다.2차대전 후 여성도 참여할 수 있게 됐지만 아직도 남성우위 전통이 여전하다. 홋카이도 출신 60대 자영업자 스즈키씨. 그녀는 고향마을에서 어릴 적 “여자는 미코시를 멜 수 없어.”라고 해 뒷전에 밀려 있었다. 도쿄에서 지금까지 살며 먼발치서 구경한 적은 있지만 아직도 참가경험은 없다. 하지만 일본은 1970∼80년대 지방분권이 강해지면서 지역 문화축제가 크게 팽창하면서 여성들의 참여도 늘고 있다. 이에 따라 지방으로 새로운 볼거리인 마쓰리를 찾아 원정다니는 흐름이 형성됐다. ●이틀간 7000명이 춤을 춰 마쓰리는 사회통합과 전통문화나 가치전수의 장이다. 지역 마쓰리는 한 해 마쓰리가 끝난 직후부터 다음 해의 마쓰리 준비를 위해 구성원들이 물품과 예산을 마련했다. 각종 이벤트성의 마쓰리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다. 도쿄시내의 상점가인 파루센터에서 매년 8월 열리는 마쓰리도 인근 ‘아사가야중학교’ 학생들이 마쓰리에 쓰일 장식품을 합동으로 만들며 ‘지역사회활동 참여’를 배우게 된다. 자동차·전기·전자업체 등 지역 기업·상점들과 자위대까지도 협찬 형식 등으로 직·간접적으로 참여한다. 100만명 이상의 관람객이 몰리는 도쿄 ‘고엔지 아와오도리’는 어린이부터 노인들까지 다양한 계층이 춤 대열에 참가한다. 지난해 8월말 이틀간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연인원 7000여명이 춤을 췄는데, 이들은 수십개 팀별로 수개월전부터 전통의상을 입고 춤을 익혀 열연했다. 교토의 기온 마쓰리를 구경했다는 한 외교관은 “일본 마쓰리는 단순히 축제가 아닌 것 같다. 중요한 사회 교육의 장이다. 지역사회의 전통문화를 훌륭히 전수한다. 한국도 참고했으면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전통 마쓰리의 소멸 위기 하지만 지금 많은 마쓰리가 존립위기를 맞고 있다. 아예 사라지는 지역 마쓰리도 적지 않다. 그 자리를 하나·춤·상가 마쓰리 등 이벤트성 마쓰리가 대체하면서 “신이 떠나버린 이벤트 마쓰리로 전락할 위험도 있다.”는 마쓰리전문가의 지적도 있다. 특히 지역사회 작은 신사가 중심이 돼 주민들이 참여하는 전통적 마쓰리들이 다수 존립을 위협받고 있다. 수백명씩이 참석, 미코시를 끌고 마을을 몇차례나 돌 때면 수천명이 길거리에서 호응했었지만 요즘엔 참가자가 수십명으로 줄어, 명맥만 유지하는 곳이 많다. 지방도시는 물론 도쿄도 마찬가지다. 실제 많은 도시인들은 마쓰리를 보지만 직접 참여하지 않는다.50대 이사카씨는 간사이 고향에서 어릴 적 마쓰리에 참가했던 적은 있지만 성인이 된 뒤 이런 기억은 없다. 도쿄에서 태어난 30대 회사원 아오노씨는 지난해 처음으로 도쿄 오모테산노 마쓰리에서 미코시를 한 번 멘 적이 있다. 그러나 “갑자기 사람이 없다고 간청을 해 참가했는데 메고가다 골목길에서 다칠 뻔했다.”며 앞으로 다시는 참가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일부 마쓰리가 수백만명이 관람하는 등 대성황을 보이는 이면에 전통적인 마을단위의 마쓰리들이 ‘개인주의 확산’ 등으로 인해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 마쓰리란 무엇인가 일본어 마쓰리는 우리말로는 축제로 해석할 수 있다. 원래는 무속신앙의 제사의례를 나타내는 말로 제단 위에 제물을 올린 모습을 본뜬 한자 제(祭)를 빌려서 표시했다. 제사를 올리거나 ‘혼령을 모시다.’는 뜻도 있다. 즉 떠받들거나 바치다는 의미가 강하다. 일왕이 영토나 국민을 다스리는 정치 행위를 ‘마쓰리고토’(政)라고 부른 것도 마쓰리에서 파생됐다. 일왕이 부족연합의 수장인 동시에 최고위 제사장이었던 제정일치 사회의 옛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말이다. 마쓰리는 이처럼 신에게 희생물을 바치고 제사를 올리는 집단제의에서 비롯한 축제다. 이런 신성한 축제이기 때문에 정해진 날짜에 정해진 장소에서만 행해진다. 참가자들은 일상으로부터의 해방을 경험하는 동시에 세속의 때도 씻어낸다. 다만 시대가 변하면서 이런 전통적 개념의 마쓰리의 형식과 내용이 변하고 있다. 특히 지방자치단체의 적극적인 주도로 마쓰리가 지역특산물 판매장으로 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 “마쓰리 원형은 가야·백제문화” |도쿄 이춘규특파원|한국과 일본의 지역축제 연구 전문가이면서 영화감독인 마에다 겐지 ‘하늘하우스’ 대표이사는 “마쓰리의 원형은 한반도, 중국남부 등 도래인들의 문화”라면서 “그 가운데 5세기 전후 가야와 백제의 영향이 가장 크다.”고 분석했다. 마쓰리의 기원은. -일본은 섬나라이다. 따라서 문화는 한반도, 중국남부, 인도네시아는 물론 호주, 그리고 퉁구스 등지서 건너온 ‘도래인(渡來人)’들이 자신들의 조상들을 섬기는 행사를 했다. 그게 마쓰리의 원형이다. 조상신을 섬기는 것이다. 특히 4∼6세기의 가야문화가 중심이다. 백제, 고구려, 신라도 마찬가지다. 마쓰리 행위의 원형은 무엇인가. -도래인들의 생활수단이 마쓰리 행위에 반영돼 전수중이다. 무당이나 광대, 남사당패 등의 문화가 대표적이다. 한자나 불교, 식생활도 반영됐다. 무엇보다 생활 범위를 확대한 도래인들의 ‘프런티어정신’이 마쓰리에서는 중요하다. 일본인들의 선조는 한반도와 깊이 연결돼 있다는 게 마쓰리에서도 확인된다. 마쓰리의 의식형태 등을 보면 어느나라에서 온 것인지를 알 수 있을 정도다. ●한국축제 식민지시대에 다 없어져 그런데도 한국에 지역축제는 적다. -한국에도 많았었지만 일본이 1920∼45년 식민지통치기간 한국에서의 ‘마쓰리’를 없앴다. 대신 일본계 신사를 지었다. 이 때 별신굿 등 한국의 전통 ‘마쓰리’들이 사라졌다. 마쓰리의 종류는 어느정도인가. -마쓰리는 혼자서도 한다. 보통 30만개라고 하지만 100만개 이상의 마쓰리가 있다고 봐야 한다. 마쓰리는 신사가 중심인데, 신사는 큰 것만 6만 9000여개다. 일년에 20회 이상 마쓰리를 하는 신사도 있다. 절이나 이벤트성 마쓰리는 여기서 파생됐다. 최근의 마쓰리 경향은. -풍류 마쓰리, 이른바 이벤트성 마쓰리가 늘고 있다. 대신 애니미즘적 마쓰리나 생활재현 마쓰리, 조상신 마쓰리 등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다. 마쓰리에 여성 차별이 존재하나. -여성이 배제된 마쓰리가 많고 그 시대가 길었다. 오르는 것이 여성에게 금지된 산이 있을 정도였다. 한국은 무당이 굿의 주역인데, 일본은 그렇지 않은 게 많았다. 물론 모심기 마쓰리 등에서는 여성이 주역이었다. 반면 신사를 중심으로 한 마쓰리는 여성의 주체적 참여를 금지하는 곳이 많다. 마쓰리의 장래를 어떻게 보나. -조상신을 모시는 마쓰리 자체는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증가될 수도 있다. 전통적인 마쓰리문화는 약화될 가능성도 있다. 지금은 과도기다. 자연재해극복과 마쓰리의 연관은. -지진과 관련은 적다. 하지만 자연재해의 공포를 극복하고, 힘을 모으기 위한 마쓰리는 많다. 일본사람 마음속엔 자연재해에 대한 공포가 스며들어 있다. 한국인들은 밝고 재해에 대한 공포심은 적다. 외국의 침략에 대한 공포가 크다는 것이 일본과의 큰 차이다. ●강릉 단오제 일본 왕실 마쓰리 모태 한국문화가 마쓰리에 남아 있나. -너무나 많다. 유명한 아사쿠사 산샤마쓰리의 경우 가장 큰 미코시에는 조선의 신이 탄다. 강릉 단오제는 일본 왕실 마쓰리의 모태다. 줄다리기, 광대, 굿 등의 영향도 크다. 시가현 비와호 주변에선 가야금과 유사한 2000년전의 악기가 발견됐는데 그게 지금도 많은 마쓰리에서 쓰인다. 이와 같이 마쓰리를 연구하면 한반도와 연관 사실이 부각되기 때문에 일본 정부 차원의 지원이 없는 것이다. 집단적 스트레스 해소책도 되나. -마쓰리는 개인이나 집단의 스트레스해소에 매우 좋다. 그래서 1년간 지역사회에서 마쓰리를 위해 돈을 모아 마쓰리에 쓰면서 스트레스를 발산하고, 감정을 폭발시키는 경우가 많다. 물론 지역사회 화합의 요소도 많다. 마쓰리와 ‘천황제’의 관련성은. -민속학과 마쓰리를 파고들면 일본인의 생활전체를 알 수 있다. 일본인의 정신성과 생활형식 등을 연결하는 구조다. 그런 일본인의 정신과 생활구조의 최상층부에 ‘천황’이 존재한다. 마쓰리의 학문적 연구는 적은데. -마쓰리 연구에 대한 지원이 적다. 조선(한반도)을 연구하는 게 많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마쓰리를 지원하는 단체도 없다.(상업적, 이벤트성 마쓰리는 많은 기업들이 지원)마쓰리를 통해 일본 문화의 기원을 알고, 동북아시아나 해양민족의 영향과 교류 등을 알아 거울로 삼으면 좋을텐데 정부차원의 지원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taein@seoul.co.kr
  • [씨줄날줄] 다카마쓰塚/이용원 논설위원

    1972년 3월 말 일본 열도가 발칵 뒤집혔다. 나라현 아스카촌에 있는 다카마쓰(高松)총을 발굴한 결과 내부에서 극채색 벽화와 사신도·성수도(星宿圖·별자리 그림)등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채색 고분벽화가 나온 것은 처음이어서 언론은 ‘전후(1945년) 최대의 발굴’이라며 연일 1면 톱을 장식했다. 예컨대 아사히신문은 첫 보도(3월27일자)에서 제목을 ‘법륭사급 벽화 발견’이라고 뽑았으니 흥분의 정도를 짐작할 만하다. 고구려 승려 담징이 그렸다는 법륭사 금당벽화는, 프랑스의 지성 앙드레 말로가 일찍이 ‘모나리자’‘미로의 비너스’와 더불어 세계 3대 미술품으로 꼽은 작품이다. 최초의 흥분이 가라앉자 이 고분에 관한 학술 연구가 착착 진행됐다. 먼저 고분벽화의 인물군상이 주목 받았다. 벽화에 등장한 여인들은 빨강·녹색 등이 섞인 색동 주름치마를 입었고, 저고리는 치마 위로 길게 늘어뜨렸다. 헤어스타일도 앞쪽에서 추켜올려 뒤에서 묶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여인상이었다. 청룡·백호·주작·현무를 그린 네 벽의 사신도도 고구려 양식을 빼닮았다. 무덤을 조성한 시기는 고구려 고분과 비교해 7세기 말이나 8세기 초로 인정됐다. 아울러 벽화를 그린 이는 고구려에서 건너온 1세대 도래인이라고 보았다. 문제는 묻힌 이가 누구인가 하는 점이었다. 무덤의 형식은 전통문화 중에서도 보수성이 가장 강해 쉽게 바뀌지 않는 데다, 거대 고분을 조성해 벽화까지 그려 넣을 정도라면 강력한 지배력을 가진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다카마쓰총을 고구려 고분으로 인정하면 7∼8세기 나라현 일대에 고구려계 정치집단이 존재해야 한다. 이 때문에 일본 학계는 다카마쓰총을 고구려 고분으로 선뜻 규정하지 않고 고구려 출신 일본인이 묻혔다거나, 나라현 일대가 백제 도래인의 집단거주지였음을 들어 백제계 일본인일 것으로 보고 있다. 다카마쓰총을 발굴한 지 26년 뒤에는 그 남쪽으로 1㎞쯤 떨어진 기토라 고분에서도 성수도가 발견됐다. 연구 결과 그 성수도는 기원을 전후해 평양쯤에서 관측한 것으로 확인됐다. 쌍영총 벽화를 그린 안료가 다카마쓰총 벽화에 사용된 것과 같다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조사 결과는 다카마쓰총이 고구려 고분임을 다시금 확인시켜 준다. 이용원 논설위원 ywyi@seoul.co.kr
  • “고구려 日미술에 영향 증거”

    “고구려 日미술에 영향 증거”

    북한 남포지역에 있는 고구려 무덤 벽화인 쌍영총 기마인물상 벽화 밑그림에 백색 납안료인 연백(鉛白)이 사용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고대 일본의 한 무덤 벽화에서 최근 연백이 도포된 사실이 확인된 것으로 미루어 고구려와 백제 미술이 일본에 영향을 미쳤다는 추정을 강력히 뒷받침하는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쌍영총 벽화 기마인물상을 소장하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은 유물 전시를 위한 보존처리 과정에서 벽화 밑그림에 백색 납 안료인 연백(염기성탄산납·2PbCO3ㆍPb(OH)2)을 사용한 것을 확인했다고 21일 밝혔다. 박물관측은 새용산박물관 개관 준비를 위해 고고관 전시예정품인 이 벽화편을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이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조용섭의 산으路] 공주 계룡산

    [조용섭의 산으路] 공주 계룡산

    ‘산태극 수태극의 길지(吉地), 다가올 새세상의 중심이 될 곳’, 신령스러운 산으로 떠받들어져왔던 충남 공주의 계룡산(845m)에 늘 따라붙는 수식어다. 그래서인지 산자락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산신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계룡산은 동학사와 갑사를 기점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하지만 남서쪽 신원사 쪽은 상대적으로 사람의 발길이 뜸해 호젓한 산행을 함께 즐길 수 있다. 유적답사는 덤이다. 산길은 신원사에서 출발하여 고왕암-연천봉고개-연천봉-관음봉-자연성능-삼불봉-금잔디고개를 거쳐 갑사로 하산하는 코스로 잡았다. 신원사는 백제 의자왕 때 보덕화상이 창건한 고찰로(현재 조계종 마곡사의 말사). 조선시대 3악(상악-묘향산, 중악-계룡산, 하악-지리산)으로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중악단이 있는 곳이다. 신원사에서 산길 들머리가 있는 금룡암까지 도로가 이어진다. 힘차게 흐르는 계곡의 물길을 오른쪽에 두고 소림원, 금룡암을 지나면 이정표를 만나고 오른쪽 숲으로 들어서야 비로소 산길이 시작된다. 극락교를 지나 돌계단을 한발한발 올라서면 고왕암에 닿는다. 백제 의자왕의 아들 융이 피신해서 머물렀고, 태조 이성계가 머물렀다 하여 절 이름에 ‘머물 古’자를 썼다고 전한다. 법당 뒷쪽 절벽 아래에는 석간수가 있다. 산행시작후 약 40분 걸린다. 산자락에는 남보라의 현호색이 군락을 이루며 지천으로 피어있다. 보석 같은 풀꽃과의 만남은 봄산행의 즐거움이다. 큰 물길을 가르는 다리를 지나면 도치샘 이정표를 만나고, 길은 점점 가팔라진다. 어느덧 계곡의 물소리는 사라지고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나무계단을 만나면 연천봉 고개가 지척이다. 지금까지의 조용하던 산길과는 달리 연천봉 고개는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왼쪽으로 올라 10분여 진행하면 바위봉우리인 연천봉에 닿는다. 고왕암에서 1시간30분 소요. 연천봉 남동쪽 바로 앞, 하늘을 가르며 서있는 주봉 천황봉과 쌀개능선의 모습이 늠름하다. 다만 거대한 시설물을 이고있는 봉우리의 모습이 안쓰럽다.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동쪽) 문필봉이 가깝고 그 오른쪽 뒤로 관음봉과 전망대가 살짝 보인다. 남쪽 바로 아래로는 등운암이 내려다보인다. 이 곳으로도 신원사위 소림원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이 잘 나있으나 휴식년제 탓으로 입산이 통제된다. 다시 연천봉 고개로 내려와 관음봉으로 향한다. 가벼운 산행을 원하면 이 고개에서 갑사로 내려서도 된다. 관음봉 앞 고개에서 왼쪽(북쪽)의 돌계단을 오르면 관음봉에 닿는다. 전망대 앞, 철계단 놓여있는 곳이 자연성능으로 이어져 삼불봉으로 향하는 길이다. 계단과 암릉길은 조심해서 운행하고 암릉길에 자신이 없으면 옆으로 나있는 우회길을 이용한다. 힘들게 계단을 올라 닿은 삼불봉에서의 조망도 일품이다.5분여 가파른 계단을 내려서서 삼불봉 고개에 닿으면 왼쪽 금잔디고개로 진행, 갑사로 내려서며 산행을 마친다. 관음봉에서 금잔디고개까지는 약 1시간, 고개에서 갑사까지는 50여분 소요된다.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경부고속도로 천안IC에서 빠져나와 1번국도와 23번국도를 이용하면 된다. 갑사로 하산했을 경우 차량은 공주행 버스로 계룡에서 내려 신원사행을 갈아탄다. 택시 요금은 4000원.(041) 857-3982. 대중교통은 각 지역에서 공주로 이동한 다음 신원사행 버스로 이동한다. 공주시외버스터미널(041-854-4911), 고속버스(041-855-2319), 시내버스(041-854-3163)를 이용한다. 계룡산 산신제가 21∼24일 신원사 일대에서 열린다. 산신제 보존회(041-855-4933).
  • [이사람] 천년 전통 황칠공예 맥 잇는 구영국씨

    [이사람] 천년 전통 황칠공예 맥 잇는 구영국씨

    ‘그대 아니 보았더냐 궁복(장보고의 호)산 가득한 황금빛 액/맑고 고와 반짝 반짝 빛이 나네/껍질 벗겨 즙을 받기 옻칠 받듯 하네/아름드리 나무에서 겨우 한잔 넘칠 정도/상자에 칠을 하면 검붉은 색 없어지나니/잘 익은 치자나무 어찌 이와 견줄소냐‘ 정약용의 ‘황칠’이란 시다. 다산이 시를 지을 정도로 칭송한 황칠은 200년전 맥이 끊긴 우리의 전통 칠공예다. 황칠나무 수액에서 난 황금빛 도료를 칠하면 금박을 입힌 듯 은은한 황금색이 나고, 내수·내열·내구성이 강해진다. 좀과 녹이 슬지 않아 몇백년이 지나도 투명한 금빛이 유지된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원적외선과 마음을 안정시키는 안식향이 나오고, 전자파는 흡수한다. 삼국시대부터 쓰였으나, 맥이 끊어진 황칠, 이를 되살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 구영국(45)씨. 그는 황칠의 빼어난 화려함에 반해 26년째 변변한 스승과 참고서적도 없이 황칠공예를 연구해온 장인이다. ●황칠나무 수액에서 색을 뽑다 황칠은 황칠나무 껍질에 상처를 입혀 뽑아 낸 수액이다. 처음에는 유백색이던 액이 시간이 지나면 공기 중에서 서서히 황색으로 바뀌는데 이 진을 없애고 정제해 만든 것이 황칠이다. 황칠나무는 거제도, 완도, 보길도, 홍도, 제주도, 전남 고흥과 해남 두륜산 등 남서해안 도서지역에서 자란다.15년 이상 자라야 수액 채취가 가능하고, 채취량은 나무당 평균 8.6g에 지나지 않는다. 아예 황칠액이 나오지 않는 황칠나무도 많아 황칠은 원료 자체를 구하기 매우 힘들다. 황칠공예가 사라진 것은 수액 채취량이 극소량이었던 데다 장인에서 장인으로만 이어지던 비법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황칠은 그 희귀함 때문에 병자호란 이후 조선 왕실에서조차 사용이 금지되고 중국 베이징 자금성의 천장, 벽, 용상 등에 황제의 명예를 높이는 데만 사용됐다. 중국의 수탈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황칠나무에 구멍을 뚫고 호초를 넣어 나무를 말라죽게 하거나 밤에 몰래 도끼로 아예 베어내 버리기도 했다(목민심서 ‘산림’편). 중국에 황칠을 갖다 바치기에도 모자라자 조선에서는 치자물에 들기름을 발라 황칠을 대신했다 한다. ●우리 전통 황칠, 일본서 연구되는데… 그는 황칠보다 먼저 나전칠기에 마음을 빼앗겼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79년,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정말 사람 손으로 만들었을까 싶을 만큼 번쩍번쩍 빛나는 것을 봤다.“지독히도 화려했던 물건은 나전칠기였죠.”그 아름다움은 한 청년을 평생동안 칠공예에 입문하게 한다. 정계훈, 신강작, 이택영 선생 등 공예의 장인들에게 배우던 시절에는 밤잠을 잊고 전통공예 디자인에만 몰두했다. 선생의 집에서 먹고 자면서 1년 동안 학그림만 그리며 수련했다. 그렇게 나전칠기와 옻칠공예를 하던 구씨는 85년 더 좋은 칠이 없을까 고민하다 전북 김제의 금산사를 찾는다. 노스님은 “백제시대부터 전래된, 사람의 손으로 인위적으로 만들 수 없는 신비의 도료가 있다.”면서 황칠을 소개했다. 구하기 힘들고 돈이 많이 들어 힘들 테지만 한국 칠공예에 족적을 남길 마음이 있다면 도전해 보라고 덧붙였다. 스님이 알려준 황칠은 단박에 그의 맘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황칠을 아는 사람도, 구체적인 기록도 없었다. 혼자서 조약돌, 나무, 종이 등 온갖 물건에 칠해가며 황칠을 연구했다. 그러다 90년 일본 구주공대에 시찰을 갔다가 그곳의 일본인 교수가 황칠에 대해 체계적인 연구를 한 것을 보고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한다.“분명 우리나라에서 건너갔는데 한국에서는 맥이 끊긴 전통공예가 일본에서 자세히 연구된 것을 보니까 이건 아니다 싶더라고요.” 일본의 연구에 자극받은 그는 해외에 활발하게 우리의 황칠을 알리기 시작한다. 밀라노·네덜란드·벨기에·미국·브라질 등지에서 열린 박람회 등에 황칠(Gold Lacquer) 공예작품을 출품했다. 외국인들은 처음에 금을 입힌 줄 알다가 나무 수액이 황금빛을 내는 것을 알고는 놀라워했다.“금칠이 딱딱하고 답답한 느낌을 내는 데 비해 황칠은 은은하고 마음을 편하게 하며 보면 볼수록 질리지 않는 빛을 낸다.”는 것이 외국인들의 평. 황칠을 모르는 사람들도 황칠을 보면 한눈에 그 아름다움에 눈뜨게 된다. 구씨의 작품은 91년 청와대 신축본관 및 영부인 접견실 등에 문갑, 화장대, 이층장 등이 전시됐다. 지난해에는 육군박물관에 작품이 전시되고 감사장을 받을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올해 전국 순회 전시회를 준비중이며 ‘한국의 황칠공예’란 책도 발간할 예정이다. 지난 2월에는 일본 칠기계의 사장단이 작업실을 방문, 큰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전통공예가 외면받는 이유는 현대공예와 접목시켜 조화와 발전을 꾀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골프채, 지갑, 벨트 버클, 지팡이, 상, 차기, 만년필 등의 황칠 작품을 만들어 생활에 접목을 시도했다. 그동안은 작품을 거의 팔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작품 판매도 활발히 할 생각이다. 황칠도자기의 가격이 1000만∼1600만원, 황칠합죽선이 400만∼800만원으로 워낙 고가라 대중화는 힘들 것으로 보고 있다. 매일 오후 6시부터 새벽 4시까지 집중이 잘 되는 시간에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이물질이 떨어지지 않는 깨끗한 상태에서 황칠붓을 잡는다. 수십 수백번씩 목기로 된 찻그릇에 황칠을 하면 수백 수천가지 오묘한 색깔이 난다. 구씨는 “작가가 온힘을 바친 전통공예를 사랑하는 소비가 살아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구영국씨는 1978년 서울 문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예계에 입문하여 옻칠 명인 이상호 선생, 동양화의 거장 가향 허영 선생 등을 사사했다.2002년 신미술대전에서 대상을,2003년 대한민국 전통공예대전에서 특별상을 받았다.2002년 프랑스 파리 국제박람회, 벨기에 왕국 전통공예, 미국 세계예술페스티벌 등에 초대됐다.
  • [부고]

    ●애국지사 박하규선생 광복군으로 활동한 애국지사 박하규(朴夏圭) 선생이 18일 오후 숙환으로 별세했다.81세.1924년 9월 경북 상주에서 출생한 박 선생은 일군정부대(日軍情部隊)를 탈출, 광복군 제1지대 제3구대에 편입돼 공작활동과 문서번역, 포로심문 등의 임무를 수행한 공로로 1982년 대통령 표창에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2남 2녀가 있다. 빈소는 천안 아산 장례식장이며 20일 발인,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제3묘역에 안장된다.(041)542-4465. ●이종희(모다정보통신 대표)철희(FAG상무이사)상훈(KT전무이사)씨 모친상 17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0일 오전 8시30분 (02)3410-6916 ●한성태(NSE 대표이사)씨 부친상 원주희(샘물호스피스선교회 회장)씨 빙부상 17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9일 오전 8시 (02)3010-2264 ●이강서(하남시청 공보감사담당관)씨 부친상 이근환(광제한의원장)씨 빙부상 덕재(현대건설 자재부 차장)성재(메디팜생활건강)씨 조부상 17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9일 오전 9시 (02)3010-2239 ●박진형(쌍용자동차 성동지점 차장)진희(새롬디자인 대표)씨 모친상 17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9일 오전 7시30분 (02)3010-2261 ●김태훈(에이캐시)재훈(AIG생명)씨 부친상 18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0일 오전 7시30분 (02)3010-2268 ●한요한(개혁총연총회 총무)씨 부친상 한만길(한서상재 대표) 빙부상 17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9일 오전 7시 (02)3010-2233 ●양은숙(서울대 간호대학 총동창회 명예회장·학교법인 초당학원 이사)씨 별세 김기운(백제약품 대표회장)씨 상배 동구(백제약품 회장)찬구(초당약품 부회장)승관(백제약품 부회장)씨 모친상 곽현수(법무법인 광장변호사)씨 빙모상 18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1일 오전 7시 30분 (02)3010-2270 ●양승진(CBS 문화체육부 차장)씨 모친상 18일 조선대학병원, 발인 20일 오전 8시 (062)220-3352 ●노찬식(씨에스유통 대표이사)씨 부친상 18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0일 오전 10시 (02)3010-2266 ●조남우(서울 북공업고등학교 교사)씨 별세 승연(학생)수연(〃)씨 부친상 18일 고려대 안암병원, 발인 20일 오전 7시 (02)921-5699 ●유연채(KBS 보도본부 취재1팀장)씨 조부상 18일 오후 3시 충남 홍성의료원, 발인 20일 오전 9시 (041)630-6242 ●이한수(승진에프앤씨 이사)씨 현수(시민약국 약사)씨 부친상 권영춘(자영업)씨 조우현(SK텔레콤 부장)씨 빙부상 18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0일 오전 8시 (02)3010-2235 ●박종화(조양물산 대표)씨 부친상 18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2일 오전 8시30분(02)3010-2295
  • [드라마세트장 유치 열풍(上)] 유치과열에 제작사 소품비도 떠넘겨

    일부 주민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자치단체들은 50억원이 넘는 예산을 세트장 건립비로 선뜻 드라마제작사에 내놓고 있다. 갈수록 지원금은 커지고 있다. 이들은 거액의 예산으로 세트장을 유치하고도 관리를 소홀히 해 세트장을 망가지게 하는 등 적지 않은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2회에 걸쳐 이를 짚어본다 자치단체들이 과열양상까지 보이자 드라마제작사들도 세트장 건립비용은 물론 소품비까지 이들에게 떠넘기고 있다. 충남 부여군은 지난달 29일 SBS자회사인 SBS아트텍과 드라마 ‘서동요’ 세트장 유치 협약을 체결했다. 부여군에서 세트장 건립비로 50억원을 지원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드라마에 쓰이는 각종 소품 구입비까지 포함돼 있다. ●50억원은 보통 부여군은 세트장 부지인 충화면 가화리 덕용저수지 주변 1만평을 매입하고 전기와 수도 등 기반시설을 갖춰주기 위해 10억원을 더 들일 계획이다. 모두 60억원의 예산을 쓰는 셈이다. 올해 군예산이 2227억원인 것을 감안하면 37분의 1이 넘는다. 세트장은 낙화암 등 백제유적이 있는 읍내에서 승용차로 30분 거리다. 부여군과 세트장 유치전을 벌였던 전북 익산시는 20억∼25억원을 들여 서동(무왕)의 유년시절을 그릴 세트장을 유치했다. 당초 익산시는 전체 세트를 유치하기 위해 95억원을 제시했었다. 두 자치단체가 서동요 세트장 건립비로 들이는 돈은 90억원 정도로 150억∼200억원으로 추정되는 드라마 제작비의 절반 안팎에 이르고 있다. 이 드라마는 ‘대장금’을 연출한 이병훈PD가 50부작으로 제작할 예정이다. 전남 나주시는 MBC드라마 ‘삼한지’ 세트장 건립비로 50억원을 지원키로 잠정 결정했다. 시는 전남도에 25억원 지원을 요청했다.70부작으로 제작될 이 드라마 세트는 공산면 신곡리 영산강변 건축물폐기장에 지어진다. 독도와 관련, 인기가 더 높아진 KBS의 ‘불멸의 이순신’ 세트장 건립비로 전북도와 부안군은 50억원을 지원했다. 세트는 부안군 하서면 청호리 석불산 영상랜드(왜관거리), 변산면 격포리 궁항과 격포항에 각각 전라좌수영과 군선세트 등 3곳에 설치돼 있다. 전남도와 완도군도 KBS드라마 ‘해신’의 세트장 건립비로 50억원을 지원했다. 강원도 횡성군은 SBS ‘토지’ 세트장을 건립하는 등 우천면 두곡리에 군비 39억원과 민자 30억원을 들여 횡성테마랜드를 조성했다. ●‘원조논쟁’까지 불러온 유치전 부여군과 익산시는 세트장유치 과정에서 ‘서동원조’ 논쟁까지 벌였다. 부여군은 “의자왕의 아버지 무왕은 백제의 수도 부여에 살았다.”고 주장했고, 익산시는 “무왕은 익산에서 태어났고, 왕이 됐을 때 천도를 해서 익산에서 살았다.”고 맞섰다. 익산시는 삼국사기,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역사적 서술을 근거로 들이댄 뒤 “호족들에 의해 왕이 된 무왕은 서자로 힘이 없자 수도를 익산으로 이전해 정사를 폈다.”고 반박하면서 유치에 전력을 기울였다. 결국 제작사측은 두 지자체 관내에 세트를 만드는 것으로 결정했다. 부안군도 ‘불멸‘ 세트장을 유치하기 위해 전남 여수시, 경남 통영군 등과 치열하게 다퉜다. 카메라 앵글잡기가 좋다는 이유로 부안군이 이겼지만 방송가에서는 서울과의 거리가 가깝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엇갈리는 주민반응 한창 방영중인 ‘불멸‘과 ‘해신’ 세트장에는 평일 수천명에서 주말에 1만∼2만명의 관광객이 몰리고 있다. 주말이면 읍내 숙박업소가 동나고 식당과 전복, 미역, 다시마 등을 파는 해조류 판매점도 때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다. ‘해신’ 세트장 주변에서 횟집을 운영하는 우길광(50)씨는 “해신 촬영후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가족단위 손님이 눈에 띄게 불어나면서 매출도 덩달아 늘어났다.”며 좋아했다. 반면 ‘토지’ 세트장이 있는 강원도 횡성군 주민 최모(57·농업)씨는 “일회성으로 끝날지도 모르는 드라마를 위해 재정도 열악한 군에서 도박을 하는 것이 아니냐.”고 걱정스러워했다. 부여군 부여읍에 사는 조모(54)씨는 “소년소녀가장이 얼마나 많은데 재정도 열악한 군이 ‘황금알’을 낳는다는 방송사에 세트장까지 지어 주느냐.”면서 “장소도 백제역사재현단지 등 읍내에 얼마든지 좋은 곳도 많은데 산골짜기까지 가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세트장 보수·관리비는 얼마나 들지 벌써부터 걱정”이라고 덧붙였다. 정리 대전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제작사에 사기당한 대구시 유독 영화나 TV드라마와는 인연이 없었던 대구시는 대구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만들겠다는 한 영화제작사에 사기를 당한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다. 지난 2001년 6월 이 제작사는 대구에 유명배우들을 데리고 나타나 영화 ‘나티’의 제작발표회를 갖고 대구시에 협조를 요청했다. 대구의 섬유업계에서 개발된 신소재 섬유를 탈취하려는 일본측 산업스파이와 이를 막으려는 한국 비밀 요원간의 대결을 그린 첩보액션물을 대구에서 만들겠다는 것. 특히 대구의 패션1번가인 동성로를 비롯 팔공산, 동화사, 대구월드컵종합경기장, 대구EXCO, 국채보상기념공원 등 영화의 대부분을 대구에서 촬영하겠다고 약속했다. 대구시는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왔다며 대구를 알리는 더 없이 좋은 기회인 것으로 판단,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이 제작사는 대구EXCO와 국채보상공원에서 곧 바로 촬영에 들어갔고 대구시는 촬영장소를 제공하고 촬영현장에 간부공무원을 보내 각종 편의를 제공했다. 그러나 대구에서 며칠간 영화를 찍는 흉내를 냈던 이 제작사는 그후 대구시민 등 전국에서 투자자 300여명으로 100여억원을 끌어 모은 뒤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대구시 관계자는 “자치제 실시 이후 자치단체마다 경쟁적으로 홍보에 매달리는 것을 교묘하게 이용한 사기행각에 대구시가 당한 것”이라며 “기억조차 하기 싫다.”고 말했다. 대구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 대박? 쪽박?넉넉지 않은 지자체들 드라마세트장에 수십억씩

    대박? 쪽박?넉넉지 않은 지자체들 드라마세트장에 수십억씩

    ‘대박을 위한 투자인가, 민선단체장의 업적과시용인가.’ 인기드라마 ‘겨울연가’로 드라마 세트장 유치경쟁이 일면서 자치단체가 혈세를 드라마 세트장에 쏟아붓는 것을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자치단체들은 표면적으로는 지역이미지 제고 및 지역경제활성화를 위해선 돈이 조금 들더라도 드라마 세트장 건립은 불가피하다며 투자로 봐줄 것을 주문한다.TV가 가진 막대한 전파력과 홍보효과를 염두에 둔 것이다. 이 때문에 드라마 유치전은 점점 치열해지고 비용도 올라가고 있다. 그러나 주민들은 넉넉지 않은 지자체 살림에 수십억에 이르는 거액을 성공 가능성이 불투명한 드라마에 투자하는 것은 무모하다며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광고를 유치하거나 시청료를 받아 살림이 넉넉한 방송국이 드라마 제작비를 지자체에 전가하는 것이 아니냐며 의혹에 찬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투자용, 홍보용 알쏭달쏭 자치단체들은 세트장 유치가 반드시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는 도박판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왜 드라마 세트장 유치에 혈안이 돼 있을까. 자치단체들은 우선 드라마 인기를 등에 업고 지역이미지를 높이고 관광객을 유치,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겠다는 이유를 내세우고 있다. 이들의 말대로 일부 이런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역이미지를 높이고 관광객들을 유치하는 것은 드라마가 방영될 때와 그 후 ‘반짝’ 나타나는 현상이다. 지역경제도 세트장 주변 상인들에게 한정될 뿐 주민이 고루 혜택을 보는 것이 아니다. 충남 금산군 ‘대장금’ 세트장 주변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신건택(52)씨는 “드라마를 촬영할 때 스태프들이 예약만 하고 늦게 오는 일이 잦아 다른 손님을 받지 못하는 바람에 장사가 영 신통치 않았다.”면서 “지금은 관광객 발길도 뚝 끊겼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자치단체들은 또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세트장을 유치하려 한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대형 세트장이 필요한 사극이 주로 지방에 집중되고 있지만 학술·문화재적 가치가 없는 ‘짝퉁’이 얼마나 상품가치를 보장해줄지는 의문이다. KBS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세트장이 있는 전북 부안군은 이순신 장군과 무관한 곳이다. 드라마 세트장 유치는 전 주민에게 골고루 주민편의와 행정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주 목적인 ‘행정행위’의 본래 기능과 어긋나는 측면이 많다. 상당수 사람들은 이것보다는 자치단체의 다른 속내가 도사리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최근 SBS드라마 ‘서동요’ 세트장을 유치한 충남 부여군 관계자는 남얘기하듯이 말했지만 “표를 먹고사는 민선 아니냐.”며 솔직한 속내를 내비췄다. 그는 “관선은 월급만 타면 그만이지만 민선은 다르다.”며 “문화시설, 이벤트 등이 모두 서울에 집중돼 있는데 지방에서 뭐 할 게(뭘로 띄우느냐) 있느냐.”고 되물었다. 이벤트성 세트장 유치를 통해 단체장을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있음을 족히 짐작케 한다. 김무환 부여군수는 “선거와 전혀 무관하다.”면서 “무왕은 백제 사비시대를 꽃피운 왕이다. 다른 자치단체에서 유치했다면 주민들이 얼마나 실망했겠느냐. 세트장 건립비 부담은 관례가 그래서 했다.”고 밝혔다. ‘서동요’의 경우 오는 9월 중순부터 반년간 방영, 종영된 이후 2∼3개월까지 그 효과가 지속된다면 내년 6월 치러질 지방선거 때까지 현직 군수는 그 덕을 볼 수 있다. 이같은 이유로 자치단체들이 앞다퉈 세트장을 유치하려 하고, 드라마제작사들은 이 점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성공률 10% 밑돌아 SBS가 박경리의 소설대로 최 참판댁을 건립해 놓은 경남 하동을 드라마 ‘토지’ 촬영지로 활용할 것이냐를 놓고 미적거린 것도 지자체에 세트장 조성을 떠넘기기 위해 그런 게 아니냐는 지적이 있다. 하동군은 세트장 유치를 위해 군비 19억 1500만원을 들여 최 참판댁이 있는 마을에 초가 18동·물레방아·초가장터 등을 추가로 조성해줬다. 운군일 SBS 드라마국장은 “한류문화가 왕성한 시기에 드라마 콘텐츠 업그레이드를 위해서는 지역에서의 노력도 필요하다.”며 “콘텐츠 업그레이드와 지역이익이 만나 만들어지는 지자체의 세트장 건립비 부담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러나 KBS 홍보실 관계자는 ‘시청료 받는 공영방송에서 세트장 건립비를 자치단체에 부담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외주제작사에 문제가 있다. 바쁘다.”며 전화를 끊었다. 부여군과 ‘서동요’ 세트장 유치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전북 익산시 관계자는 “드라마 세트장 유치는 성공률이 고작 5∼10%인 도박으로 지나가면 그만”이라면서 “대부분 재정이 열악한 자치단체들이 거액의 주민혈세로 세트장을 유치하는 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고 밝혔다.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양은경 교수도 “형편이 어려운 자치단체가 큰 재원이 있는 방송사에 지자체의 일부 이익이나 개인 홍보를 위해 비용을 지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면서 “들인 만큼 돈을 빼낼 수 있는지, 또 홍보효과를 거둘 수 있는지도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대전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씨줄날줄] 고구려碑/이용원 논설위원

    금석문(金石文)이란 금속이나 돌에 새긴 글·그림을 말하는데, 그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역사서를 비롯한 문헌사료는 대개가 후대에 정리된 데다(예컨대 ‘삼국사기’는 고려가 재통일한 뒤 200여년 지나 나옴) 왕조의 변동 등에 따른 사실관계의 왜곡, 편찬자·집필자의 취사선택 등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반면 금석문은 당대의 사람이 직접 새겨넣은 것이라서 정확성·진실성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3국시대의 금석문 가운데 유명한 것이 고구려에서는 광개토대왕비와 중원고구려비의 비문, 백제의 무령왕릉 묘지석문, 신라의 진흥왕순수비문 등이다. 일본이 소장한 칠지도와 스다하치만(隅田八幡)동경에도 각각 명문(銘文)이 있는데 백제와 일본의 관계를 파악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광개토대왕 비문과 관련해서는 아직도 한국·일본·중국 3국의 학자들이 전체 문맥은 물론 글자 하나하나의 해석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한 상태이다. 일본은 이 비문을 고대에 한반도 남부를 다스렸다는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라고 주장하는 데 반해, 한국 학자들은 한반도에 침입한 왜를 고구려가 즉시 토멸한 기록이라고 본다. 일부에서는 오히려 고구려 군대가 바다를 건너 일본을 복속시킨 내용이라고까지 주장한다. 금석문 중에서는 역시 비에 새긴 비문이 으뜸이랄 수 있는데, 고구려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벽비(壁碑)가 최근 발굴돼 14일 경기도 분당 한국토지공사 내 토지박물관에서 막 올린 ‘공사 설립 30주년 특별전’에 공개됐다.290여 글자가 새겨진 이 벽비에는 고구려 11대 왕인 동천왕 11년(서기 237년)이라는 연대가 들어 있어 제작연대를 가늠케 해준다. 만약 이 벽비가 진품 판정을 받으면 현존하는 고구려 비 20여기를 포함해 국내에 남아 있는 모든 금석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자리잡게 된다. 게다가 그 내용이 위(魏) 관구검의 침입과 이를 격퇴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어서 당시의 고구려와, 고구려의 대중국 관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갑자기 출현한 이 벽비를 놓고 지금 역사학계에서는 진위 판단이 엇갈리는 모양이다. 어쨌든 조급히 판정을 내릴 이유는 없다. 지금껏 사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 포함돼 있는 것은 거꾸로 진품이라는 증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용원 논설위원 ywyi@seoul.co.kr
  • “신사임당·황진이 우주에서 만나요”

    ‘별에 내 이름을 붙이고 싶다면 혜성을 찾아라.’ 천체에 이름을 붙이는 작업은 현재 국제천문연맹 천체명명그룹이 맡고 있다. 일반적으로 별자리 이름은 ‘Scorpius’(전갈자리) 등 라틴어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나 별자리에 속해 있는 별은 그야말로 무수히 많아 이름을 짓는데 한계가 있는 만큼 특정한 규칙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α,β 등 그리스문자의 소문자를 그 별이 속한 별자리의 라틴어 명칭 약어 앞에 붙인다. 또 24개의 소문자를 다 쓰면 다시 그 앞에 아라비아 숫자를 넣는다. 혜성의 경우 최초 발견자의 이름을 3명까지 붙일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한국인 가운데는 혜성을 발견한 사람이 아직 없다. 또 소행성은 발견자가 이름을 붙이지만, 자신의 이름을 넣지 않는 것이 관례이다. 이 때문에 한국천문연구원이 발견한 5개의 소행성은 각각 최무선·이천·장영실·이순지·허준으로 명명됐다. 일본인이 발견한 뒤 한국 이름을 넣은 세종·관륵(일본에 천문학을 전수한 백제시대 승려) 등도 있다. 여기에 천문학자인 연세대 나일성 교수와 전상운 전 성심여대 총장의 성을 딴 나·전 등의 소행성도 있다. 태양계 행성의 운석 구덩이에도 각각의 이름이 있다. 문학가나 예술가의 이름을 붙이는 수성에는 윤선도·정철, 여자의 이름을 따오는 금성에는 신사임당·황진이, 신들의 이름을 활용하는 목성의 위성에는 환인(위성 레다) 등이 있다. 화성의 경우 운석 구덩이에 도시이름을 붙여 진주·나주·장성, 계곡에는 낙동 등 강 명칭을 활용하고 있다. 한편 올 봄에는 태양계 행성 가운데 목성과 토성이 태양과 반대쪽에 위치, 천체망원경을 통해 관측하기가 쉬울 것으로 보인다. 관측시간은 목성의 경우 일몰부터 일출까지, 토성은 일몰부터 새벽 2시까지이다. 달과 화성은 지구와 거리가 가까워 지표면의 세부적인 모습까지 살필 수 있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백제 금동신발서 40대男 발뼈 확인

    지난 2003년 충남 공주시 의당면 수촌리유적에서 발굴된 5세기 백제시대 금동신발의 보존처리 과정에서 사람의 발뼈가 확인됐다.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수촌리 유적의 석곽묘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의 엑스선 촬영결과 오른발의 발뼈와 뒤꿈치뼈가 신발 내부에 남아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13일 밝혔다. 지금까지 신라와 백제를 중심으로 삼국시대의 금동신발이 여러 차례 발굴됐지만 사람의 발뼈가 확인되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무덤의 주인공이 금동신발을 실제로 착용했음을 보여준다. 문화재연구소의 의뢰를 받아 엑스선 촬영과 컴퓨터단층촬영을 통해 발뼈를 검사한 부여중앙병원 정형외과 박준용 과장은 “발뼈에서 퇴행성 변화가 있는 것으로 보아 40세 이상의 남성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부여문화재연구소 송의정 소장은 “금동신발을 실제 시신에 착용했음을 보여주는 자료로 고고학적 의미가 크다.”며 “신발이 큰 것을 보면 버선 같은 것으로 싸맨 뒤 신겼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가족과 함께 가볼만한 서울의 성곽

    가족과 함께 가볼만한 서울의 성곽

    압축성장의 표본인 서울의 국적은 한국이 아닌 ‘세계’다. 도심은 일부 고궁을 제외하고는 미국 뉴욕, 일본 도쿄와 마찬가지로 빌딩군과 아스팔트로 덮여 있다. 아파트숲으로 덮인 시 외곽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서울이 2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라는 거의 유일한 증거는 성곽들이다. 서울성곽, 남한·북한산성 등 서울의 도심과 외곽을 아우르는 인공 유산인 성곽은 오랜 역사의 질곡을 온 몸으로 견딘 채 오늘도 서울 시민들을 넉넉한 가슴으로 안고 있다. 꽃봉오리가 제 몸을 틔우는 완연한 봄날, 역사의 숨결이 초목들과 한데 어울려 넘실대는 ‘자연 역사 박물관’ 성곽으로 연인과 가족들과 함께 찾아가자. ●도심을 품고 있는 서울성곽 서울의 성곽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유적은 서울성곽이다. 조선 개국 뒤 한양을 방어하기 위해 축성한 석조성곽이다. 북악산을 주산으로 낙산·남산·인왕산을 이으면서 경복궁을 에워싸고 있다. 둘레는 18.127㎞에 이른다. 하지만 일제 침략과 도시계획,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까지 거치며 거의 모두 파괴됐다. 지금은 서울 토박이도 서울성곽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러나 지난 1976년부터 꾸준한 복원 결과 10㎞ 정도 제 모습을 찾았다. 원래 서울성곽의 관문이었지만 이젠 차량의 ‘섬’이 된 숭례문(남대문), 흥인지문(동대문) 등에서도 성곽의 흔적을 따라 올라가면 조선시대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원래의 모습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낙산을 중심으로 한 길. 지하철 1호선 동대문역에서 나와 흥인지문에서 낙산공원 이정표를 따라가다 보면 창신성곽길에 들어서게 된다. 이어 30분쯤 타락산을 따라 오르면 ‘서울의 몽마르트 언덕’이라는 낙산공원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는 서울의 풍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공원 주차장 쪽으로 내려와 이화장을 지나면 대학로 뒤쪽 혜화문(동소문)과 만나게 되고, 이어 성북지구까지 성곽이 연결돼 있다. 또 혜화동 서울과학고등학교 뒷길을 따라 응봉과 숙정문(숙청문)까지 이어지는 길에서도 서울성곽을 만날 수 있다. 인왕산 성곽길에서도 서울성곽의 운치를 접할 수 있다.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이나 사직공원에서 경사가 급한 인왕산길을 30분 정도 오르는 길에 기암괴석과 함께 성곽의 장중한 모습이 펼쳐진다. 자하문터널 위 창의문(자하문·북문)에서 올라갈 수도 있다. 이외에도 숭례문에서 남산의 백범광장과 팔각정·서울타워를 거쳐 타워호텔로 이어지는 길이나 장충체육관 뒤에서 신라호텔 뒤로 이어지는 길에도 서울성곽의 예스러운 풍치와 모습이 잘 보존돼 있다. ●서울의 요충지 남한·북한산성 서울의 외곽에서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성곽을 만날 수 있다. 남한산성은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일대에 해당한다. 송파구와 경기도 성남시·하남시·광주시 등에 걸쳐 있다. 본성 둘레는 8㎞, 외성은 12㎞에 달한다. 성 안에서나 바깥에서 죽 돌면 남한산성 전체를 볼 수 있다. 한양을 지키던 대표적인 군사적 요충지답게 많은 문화재도 품고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1호로 지정돼 있는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지휘 및 관측을 위해 지어진 누각이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을 모신 사당인 숭열전, 조선 시대 임금이 거둥할 때 머물던 별궁인 행궁 등도 눈길을 잡아 끈다. 관광객들이 애용하는 길은 송파구 마천동에서 올라오는 등산길이다. 지하철 5호선 마천역에서 출발, 공수부대를 지나 3㎞ 남짓한 등산로를 따라 1시간30분 정도 올라가면 서문에 도착한다. 혹은 지하철 8호선 산성역에서 버스를 타거나 승용차로 성남 복정·태평사거리를 거쳐 남문으로, 광지원 등을 지나 동문으로 들어올 수도 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에 자리잡고 있는 북한산성은 서울 은평구와 성북구, 강북구, 도봉구 등에 퍼져 있다. 백제 계루왕 때인 132년에 처음 축성된 뒤, 조선 숙종 때 수도 방위를 위해 돌로 쌓여졌다. 전체 둘레는 12.7㎞, 성벽을 둘린 체성(體城)의 길이는 8.4㎞에 이른다. 현재 대서문, 대남문, 대성문, 대동문 등의 문루가 복원돼 있다. 성곽을 따라 등산로가 이어져 있어 북한산을 산행하면서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밖에도 행궁, 창고, 장대 등 많은 유적지와 사찰문화재가 산재돼 있다. 교통도 편리한 편. 지하철 1호선 망월사역·도봉산역,3호선 구파발역,4호선 길음역·수유역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타면 된다. ●백제의 숨결 여전한 토성들 화려했던 백제 문화의 발상지답게 당시 성들도 송파구 지역을 중심으로 넓게 퍼져 있다. 대표적인 유적은 풍납리토성과 몽촌토성. 평지성 토성인 풍납리토성은 서북쪽으로 한강, 남쪽으로 성내천과 접해 있다. 성벽 둘레는 3470m로 풍납동을 감싸안고 있다. 광복 이후부터 꾸준히 발굴 작업이 계속돼왔고, 지금도 정비작업이 한창이다. 지하철 5·8호선 천호역이나 8호선 강동구청역에서 내려 도보로 5분 남짓 걸린다. 또 다른 백제 초기의 토성인 몽촌토성은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내에 있다. 크기는 남북 730m, 동서 540m이다. 성벽의 높이는 대부분 30m 정도로 지금은 넓은 잔디밭과 산책로로 조성돼 있어 운동이나 소풍을 즐기는 시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밖에 광진구 광장동의 아차산성, 경기도 고양시 행주산성, 종로구 홍지동 탕춘대성도 서울 경기에서 찾아갈 만한 성곽들이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서울의 성곽엔 무슨 사연이… 한강을 끼고 있는 서울의 성곽은 역사 이래 한민족의 숨결을 오롯이 담고 있다. 서울을 수도로 삼은 백제와 조선은 물론, 고려 시대의 문화까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일제와 한국전쟁, 무분별한 근대화라는 ‘괴물’은 전통 유산인 성곽을 제멋대로 파괴했다. 성곽이 역사교과서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백제의 도읍지로 출발 백제 왕성인 풍납리토성, 몽촌토성은 서울 문명의 첫 흔적이다. 이들 토성은 백제의 초기 도읍지인 위례성 가운데 하나인 하남위례성일 것이라고 추정된다. 지금까지 풍납리토성에서는 다양한 토기 조각과 가락바퀴, 우물터, 해자 등 백제 초기 철기시대 유물 등이 발굴됐다. 몽촌토성에서도 삼족토기, 벼루, 화살촉 등이 출토됐다. 이곳은 비록 백제가 475년 수도를 부여로 옮긴 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현재 진행중인 풍납리토성 발굴 조사 등을 통해 번성했던 백제 문명이 더욱 자세하게 드러날 전망이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도 아차산성, 이성산성, 대모산성, 행주산성 등 많은 성곽들이 서울에 쌓였다. 중국과의 교류가 가능하고 넓은 평야가 자리잡은 전략요충지로서의 서울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증거가 되고 있다. 개경을 도읍으로 삼았던 고려도 지리도참설의 영향을 받아 서울을 중시,3경 가운데 하나인 남경으로 삼았다. 창경궁 부근에 가궐이, 북한산에는 중흥산성이 지어졌다. ●일제 침략의 고통 떠안은 성곽 서울성곽과 북한산성, 남한산성은 모두 조선시대 때 수도 한양의 방위를 위해 축조됐다. 서울성곽은 태조와 세종 때인 14세기 말 15세기 초에 처음 만들어졌다.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 숙종 때 다시 축조됐다. 삼국시대 때 처음 토성으로 쌓여졌던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은 각각 광해군과 숙종 때 석성으로 개축됐다. 그러나 조선시대 성곽은 구한말부터 시작된 일제의 침탈로 크게 훼손됐다. 전차와 경부선 철도, 조선신궁 등의 공사로 대부분의 성벽은 물론 동대문과 남대문을 제외한 문들도 거의 다 헐렸다.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서울성곽은 광복 후 정치적 혼란과 한국전쟁 등 행정 공백기를 틈타 성곽 주변에 무허가 건물이 마구 들어섬에 따라 더욱 파괴됐다.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의 운명도 다르지 않았다. 일본은 북한산성에 헌병대를 주둔시켰고, 산성 안의 시설물을 대부분 불태웠다. 그나마 남아있던 유적도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초토화됐다. 구한말 의병운동의 거점이 됐던 남한산성도 일제 치하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거의 무너졌다가 복원됐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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