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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金총리 日서 귀국 “내년초 자민련 복귀”

    오사카 이도운특파원 김종필(金鍾泌)국무총리는 5일 “올 정기국회를 마친 뒤 내년 일찍 자민련으로 돌아가겠다”고 밝혔다. 김 총리는 일본 공식방문을 마치고 이날 오후 귀국하기에 앞서 오전 오사카 뉴오타니호텔에서 수행기자들과 조찬간담회를 가진 자리에서 이같이 밝히고 “공동정권의 뒷사람(후임 총리)이 누구인가는 여기서 얘기할 문제가 아니다”고 덧붙였다. 김 총리는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합당과 관련,“그런 희망이 여기저기에 있을 수 있지만 자민련은 갈 길을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총리는 간담회 뒤 백제인으로 일본에 천자문을 전한 왕인(王仁)박사의묘를 참배한 뒤 오후 서울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dawn@
  • [대한시론] 새로운 천년과 국가의 기초

    히노마루와 기미가요. 일장기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일제(日帝)’의 국기가 히노마루이고 그패전 직전까지 우리의 소학교 조회 때마다 불린 노래가 기미가요이다.일본을떠올리게 하는 이 두 상징물은 전쟁을 체험한 일본인들에게조차 침략전쟁의상징물로 각인되어 있다. 이 히노마루와 기미가요가 ‘법률’의 수준에서 ‘일본(日本)’의 국기와국가로 인정될 것 같다. 지난 6월29일 정부·여당이 제출한 ‘국기·국가법(안)’에 대한 첫번째 심의가 중의원에서 있었고 7월8일까지 그 통과를 공언하고 있다.법안이 의결돼시행되면 권장 사항에 불과하던 국기게양과 국가제창이 학교 등에서 구속력을 갖게 된다. 기미가요를 국가로서 제창케 하는 일은 헌법에 위반된다는 것이 일본에서도중론이다. 기미가요의‘기미(君)’는 주권을 총람하는 천황을 상징하는데,이는 상징적인 천황제하의 국민주권국가인 일본국 헌법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점이 지적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위헌의 법리 이상으로 이를 강제하는 정부와 받아들여야만 하는 국민간의 틈새 또한 커질 것이라는 점이다. 일본 정부는 이를 모를까. 지난 2월28일,히로시마현(縣)의 한 고등학교 교장은 졸업식에서 국기를 게양하고 국가를 부르도록 강제한 현의 직무명령에 항의하면서 자살하였다. 정부는 당황하였다. 하지만 대응은, 오히려 이러한 혼란의 재발을 막기 위하여법 제정을 서두르겠다고 한 것이었다. 그 속뜻(本音)은 무엇일까. 1947년 제정된 현재의 일본국 헌법은 맥아더 헌법을 별칭으로 하고 평화 헌법을 그 미칭(美稱)으로 한다.이는 일본의 헌법이 완전한 주권성에 기반하여얻어진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그렇지만 일본은 이미 10여년 전,자위대를 평화유지군이라는 명목으로 캄보디아에 파병하여 군대의 보유의 금지를 규정한 헌법 제9조를 위반했다는 논란을 불렀다. 핵 물질인 플루토늄을 프랑스로부터 굳이 해상으로 가져오면서 대서양,인도양을 건너 현해탄에 이르기까지의 주변 국가들에게 현시하기도 했다.일본은사실상 이때 맥아더 헌법 체제로부터 벗어났다고 할 것이다. ‘국기·국가법안’이 통과된다면 일본국 헌법 체제는 실질적으로 변천되었다고 해야 한다. 거창한 구호 없이 일본은 패전국가에서 거대국가의 터를 완벽하게 닦고 새로운 천년을 항해할 채비를 끝낸 것이다. 일본이 패전으로부터 경제국가로서의 자립을 마련한 것은 한국전쟁의 덕분이라고 한다. 일본이 미국 흑선(黑船)의 함포에 놀라 개항을 하여 칼을 버린대신 대포가 있는 배를 구하고,그렇게 하여 명치유신을 이루어 기른 ‘근대’국가의 힘을 시험해 본 곳 역시 조선이었다. 더 멀리 일본이라는 이름도 갖지 아니한 ‘야마토’(倭)시기 ‘고대’국가의 터전을 마련하여 준 것도 백제인들을 중심으로 한 우리의 3국인들이었다. ‘일본서기’를 통하여 일본이라는 국호를 갖게 하여 준 것 역시 백제계의도래인이었다고 말해진다. 옆 나라는 이미 새로운 국가의 터를 닦았다.항진하려고 한다.우리는 또 보조자의 역할에 머물 것인가.그 한 바로미터가 우리의 국기인 태극기와 우리의 국가인 애국가에 대한 자세이다. 헌법에서 이를 정하는 프랑스나 독일은 그렇다 치자.그렇지만 법률에서 이를 정하겠다는 일본의 그 속뜻을 우리는 유의하지 못하고 있다.대통령령으로‘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을 두고 행정자치부의‘정부의전편람’이라고하는 내규로써 국가를 정하는 현실에 우리는 둔감하다. 새로운 천년의 직전에 우리는 행사성·일회성 이벤트에 정신을 맡기고 있다. 국가 성격의 전환기임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기능은 거대한 빙산의 유유한 흐름을 놓치고 있다. 새로운 국가를 위한 ‘국가 인프라 스트럭처’를 기초부터 짤 때이다. 姜 京 根 숭실대 교수·헌법학
  • [해양한국 장보고에서 21세기까지](8)남부해상권 장악한 백제

    ◇ 남부해상권 장악한 전성기의 백제 백제는 정복군주인 근초고왕때에 고구려의 남부를 쳐서 경기만을 내해로 삼고 황해를 건너 동진(東晋)과 교역하면서 해외진출을 시작하였다.그리고 남으로는 전라도해안까지 영역을 넓혀 일본열도로 가는 출해구로 삼았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응신(應神)천황때에 백제등 삼국으로 부터 많은 선진문물이 들어와 문화성장에 활력소가 되었다.또 아직기(阿直岐)와 왕인(王仁)이유교문물을 전해주었고,‘한인지(韓人池)’라는 저수지도 파고, 수로를 만들고 제방을 쌓았다.백제인은 좋은 말을 데려다 사육을 했다.모두 배를 타고온 것들이다. 이와 같은 이주(移住)성격의 비조직적인 진출은 5세기 들어 조직적이 되었고,중국에서 일본에까지 이르는 국가적인 대 진출사업으로 확대되었다.고구려 장수왕에게 한성을 점령(475년)당하는 등 국난을 겪기도 했지만 수도를웅진(공주)으로 옮기고 나서 백제는 금강을 출해구로 삼아 황해로 진출하면서 국가재건을 도모하였다. 중흥군주인 동성왕은 외교적인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양자강이남의 남제(南齊)와 교섭을 시도하였다.484년에는 사신선이 서해 한 가운데에서 고구려수군에게 저지당하였으나, 곧 해양력을 회복하고 황해 남부의 신항로를 개척,양(梁) 진(陳)에 이르기까지 외교 교역 문화교류 등을 활발히 하였다. 그래서 수서(隋書)에는 백제에 왜와 중국사람이 많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해양교류를 통해서 국제화가 되고, 수준높은 다양한 문화를 발전시킨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와 ‘자치통감’에는 바로 이 시대에 북위가 백제를 쳤으나 패했다는 기록이 나온다.남제서(南齊書)에는 490년에 위가 기병 수십만으로 백제를 공격했다가 크게 패했으며,이에 동성왕은 큰 공을 세운 백제의장군들에게 북위지역의 왕이나 후(侯)등 관작을 줄 것을 남제에 요구한다.남제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오던 백제가 남제와 적대관계에 있던 북위를 물리친 대가를 요구한 것이다.이 전쟁에서도 수군끼리 싸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특히 목간나(木干那)라는 백제의 장군은 성과 배를 부순 공이 있다고나오는데 이로 미루어보아 대규모의 해전이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 북위는 화북지방에 있었다.그렇다면 백제의 위치와 해양능력은 어떠했을까?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거기다가 일부 사서에는 백제가 ‘양자강 좌우에서 활동하였다(據江左右)’고 기록하고 있다.좀 더 연구가 필요하지만백제는 당시에 해양을 무대로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던 국가임이 분명하다.또498년에는 공물을 바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탐라국(제주도)을 정벌하러 남진하다가 영산강 지역에서 중지했다.백제의 해군력을 익히 아는 탐라가 겁을먹고 항복했기 때문이다. 제주도는 황해와 남해,동중국해를 연결하는 해상네트워크의 접점으로 남중국 한반도 일본열도로 이루어진 삼각형의 중핵에 위치해 있다.백제는 이곳을 장악함으로써 광범위한 해양활동망을 구축했고,일본열도로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규슈의 서북쪽,아리아케해(有明海)에서 기쿠치(菊池) 천을 거슬러 올라가면후나야마(船山)고분이 있다. 120여년 전에 발굴되었고, 한참 후에 무엇이 나왔는지 발표되었다.집 모양의 돌관에서는 청동거울과 금동 관,금동 제관모,많은칼,금동 신발,말 재갈,갑옷,토기 등 많은 유물이 나왔다.그런데 충격적이게도 금동관모는 전북 익산군 입점리에서 발굴된 것과 모양은 물론 뒷꼭지에 달린 방울장식도 똑 같았다.신발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입점리고분이나공주의 무령왕릉에서 나온, 바닥에 침이 박힌 스파이크형이었다. 청동거울과 금제 귀고리도 삼국의 유물과 유사하다.길이 85㎝의 대도(大刀)에는 국화무늬, 말의 은상감과 함께 서치대왕(瑞齒大王),그 칼을 제작한 장인의 이름까지 칼 제작에 관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그러나 중요한 글자들은 마모되었는데,현재는 5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백제 개로왕이 하사한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물론 백제인들의 거주지였던 현재의 오사카지역의고분에서도 300여개의 철제 칼들이 한 군데에서 발견되기도 했다.동성왕에서,무령왕, 의자왕에 이르기까지 백제는 줄기차게 해양으로 진출하였다. 그렇다면 전성기의 백제인들은 어느 정도의 해양능력을 보유하였고,또 어떤 항로를거쳐 중국 남부와 일본열도로 진출했을까? 일본서기에는 백제의 배와 신라의 배에 대한 기록이 꾸준히 나온다.응신천황때에는 길이 10장(丈,약 33m)의 배를 만들게 했다.그 후에도 우수한 배의상징으로 백제 선(船)이 등장하는데 645년에는 왕명으로 백제선을 만든다.일본고분에서는 당시에 사용했던 배를 표현한 유물들이 많이 나온다.후쿠이현의 대석(大石)유적에서 출토된 동탁(銅鐸)엔 마스트와 노가 18∼20정,길이가15m에 달하는 대형 배가 나온다. 특히 미야자키현의 니시도바루 고분에서는배 모양의 부장품이 발견됐는데 좌우에 6개의 노가 달려 있다.백제에는 이보다 우수한 먼거리 항해용 배를 가지고 동아지중해 남부를 항해하였다. 일본항로는 전라도 해남을 포함한 남해 서부,서해 남부를 출발해 규슈 서북부에 도착하는 것이다.제주도를 우측으로 바라보면서 고토(五島)열도에 도착한 다음 규슈 서쪽지방으로 상륙하였다.이어 아리아케해 근처로 들어와 나가사키와 구마모토,사가현의 서부에 정착한 다음 강을 거슬러 내륙으로 진입해들어갔다. 그래서 규슈 서부지역에 후나야마고분과 같은 백제계 유적들이 있는 것이다. 한편남중국항로는 고구려의 해상권 통제와 북위의 견제 때문에 난이도가높은 항로였다.금강하구와 영산강하구 해역 등에서 출발하여 먼 거리인 황해남부를 횡단하다가 회하(淮河)해역의 먼바다에서 남진하거나,아니면 바람을이용해 곧장 사단(斜斷)으로 남진한 다음 양자강 하구로 진입해 갔다. 이렇게 백제는 해양력을 바탕으로 해외로 진출하면서 다시 강국이 됐고,점점 더 일본의 고대국가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尹明喆 동국대 겸임교수
  • 백제의 숨결 춤으로 느낀다…국립극장서 ‘백제 춤’ 공연

    “막막했습니다” ‘한국,천년의 춤Ⅲ’을 통해 백제춤을 무대에 올리는 국립무용단 국수호단장의 말이다.지난 97년 조선시대 민중의 춤,지난 해 신라시대의 몸짓에 이어 세번째 시리즈다. 그가 고민한 것은 전북 익산 미륵사지의 반쪽탑 하나만 빼고는 백제춤을 상상할 자료가 거의 없었기 때문. 백제의 자취를 찾기 위해 공주·부여·광주 등지를 샅샅이 훑었다.박물관을 비롯 많은 절과 유적지를 누비며 ‘백제의 숨결’을 느끼려 애썼다.동작 하나라도 있으면 찾아서 건져야 했다.그걸로도 모자랐다.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백제 문화예술이 건너간 원형이 보존되어 있는 아소카(飛鳥)지역의 마을과 호오류지(法隆寺) 등의 발굴지를 찾아 기록을 뒤지고 다녔죠.1,300여년전 백제인이 세운 석가여래상,아미타불상,사천왕상 등을 본 뒤에 ‘백제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고 몸짓을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사천왕상 등 불상의 몸짓에서 작품의 틀을 따왔다.또 새의 날개모양이 ‘백제의 선(線)’이라고 결론짓고 작품에 많이 도입했다.양쪽 무대장치도 새날개를 닮은 ‘망새’(집의 합각머리나 너새 끝에 얹는 용머리처럼 생긴 장식)로 꾸몄다. 백제인들의 해맞이 의식춤을 다룬 ‘해오름춤’을 비롯,무속 요소가 강한‘오기무’,불교의 정신을 가득 담고 있는 ‘향’,강강술래인 ‘대동무’와농민들의 춤 ‘탁무’ 등을 보여준다.마지막은 인간문화재 이매방이 직접 나와 오고무(五鼓舞)를 추는 ‘땅의 울림’으로 장식한다. 한편 1부에서는 조선시대의 정재(呈才)를 재현한다.‘춘앵무(春鶯舞)’‘무산향(舞山香)’‘일무(佾舞)’ 등의 정확한 춤사위를 그리기 위해 무형문화재 김천흥 박숙자 김영숙의 자문을 받았다.아울러 ‘최승희 춤의 계승자’백향주가 특별출연해 눈길을 끈다.이번엔 최승희 춤이 아니라 ‘논개’(1부)와 ‘공후’(2부)라는 독무를 보여준다.22일부터 25일까지 국립극장 대극장. (02)2274-1173이종수기자 vielee@
  • 연대 나일성교수 이름 딴 소행성 탄생

    지난 96년 세종대왕 탄신 600주년을 기념해 ‘세종’이라는 이름이 붙은 소행성이 탄생한 데 이어 한국의 천문학자인 나일성(羅逸星·66) 연세대 명예교수의 이름을 딴 소행성이 생겼다. 국립천문대와 세종대 지구과학과 강영운교수 연구팀은 3일 국제천문연맹(IAU)의 중소행성 및 혜성을 담당하는 제20분과위원회가 일본 아마추어 천체관측가인 와타나베 가쓰오(渡邊和郞)씨가 95년 8월21일 삿포로과학관에서 발견한 소행성을 ‘(8895)Nha-1995 QN’으로 부르기로 했다고 밝혔다. 미국 스미스소니언 천체물리관측소에서 발행하는 IAU 제20분과위 ‘소행성회보’는 지난달 발행한 제34349호에서 이를 공식 발표했다. 제20분과위는 이 회보에서 나교수가 사재를 털어 6월 경북 예천에 건립하는 ‘나일성천문관’의 개관을 기념하고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같이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로써 한국 이름이 붙은 소행성은 93년 후루카와 기이치로(古川麒一郞)도쿄대 명예교수가 발견해 일본에 천문학을 전수한 백제인 관륵의 이름을 딴‘칸로쿠(KANLOKU)와 96년 와타나베씨가 발견한’세종(SEJONG)에 이어 세번째다.국내 생존자의 이름을 딴 소행성은 처음인 셈이다. 함혜리기자 lotus@
  • 소설로 파헤친 韓·日 고대사 수수께끼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에 관해서는 밝혀지지 않은 수수께끼가 너무 많다.고구려·백제·신라의 역사와 문화,언어에 대한 연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비롯한 몇몇 문헌과 유물 자료 등에 겨우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일본은 더욱 심각하다.일본 고대사 연구는 ‘고사기’와 ‘일본서기’ 정도를참고하고 있을 뿐이다.일본인들은 고대 일본국가의 형성은 한반도로부터 이주한 사람들과는 관계없이 이뤄졌다고 주장하며 일본 고대 국가는 야마토(大和) 왕조로부터 발생했다는 야마토 중심사관을 신봉하고 있다. 일본을 대표하는 전후세대 작가 가운데 한 명인 우다 노부오(宇田伸夫·48)의 소설 ‘백제화원(百濟花苑)은 바로 이러한 사관에 대한 의문에서부터 출발한다.지난 96년 일본에서 출간돼 화제를 모았던 이 소설이 국내에 처음 소개됐다.이연승 옮김 디자인하우스. 우다는 일찌기 소설의 제목처럼 “일본은 백제의 꽃밭이었다”고 선언,일본 고대국가가 한반도 이주민과는 전혀 상관없이 발생했다는 야마토 중심사관을 전면부인했다.일본의 고대사가곧 천황의 역사임을 고려할 때 우다의 이런 주장은 무척이나 파격적인 것이다. 작가는 일본이 최초의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추는 계기가 된 다이카(大化) 개신의 비밀을 소설 형식으로 재현한다.주인공 나카노 오에(中大兄)는일본의 제38대 덴지(天智)천황으로 정적을 죽이고 권좌에 오른 뒤 다이카 개신을 단행,통일국가체제를 정비한 인물이다.소설은 무식한 가쓰라기(葛城)황자가 나카노 오에 황태자가 된 다음 이루카(入鹿)천황을 제거하고 천황이 되는 다이카 개신의 극적인 상황을 생생하게 그려낸다.7세기경의 고대 일본 조정을 다룬 이 작품은 무엇보다 한일고대사의 비밀을 파헤쳤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일본 천황가와 소가(蘇我) 백제왕조의 형성과정,백제의 일본진출사를 재현하는 등 일본이 숨기고 싶은 부분을 과감히 들춰낸 것.아스카(飛鳥)지역을 본거지로 해 오사카(大阪)까지 영역을 넓혀간 소가씨들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백제의 후예로,백제궁을 짓고 백제대사(大寺)를 건축하는등 당시의 일본을 사실상 지배했다. 이들은 백제어가동아시아의 공통어가 돼야 한다며 황실의 국어로 공표했고왕의 명칭도 ‘대왕’에서 ‘천황’으로 바꿨으며 ‘일본’이라는 국호도 맨처음 사용했다.일본의 수도에서 가장 장대한 가람이 백제대사였고 곳곳의 절에 안치된 불상도 백제관음이었다는 점 등을 미뤄볼 때 백제인이야말로 일본의 지도자였다는 게 우다의 견해다. 우다는 또 삼국시대 언어와 일본어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는 다양한 장면도 보여줘 눈길을 끈다.일본 황실에서 가장 아름답고 품위있는 언어는 백제어였으며 그 다음이 고구려어,신라어였다는것.반면 왜어(倭語)는 아주 천박하고 저급한 언어로 간주됐다는 것이다.나아가 그는 한국인들이 쓰는 국어는 삼국을 통일한 신라어가 바탕이 됐으며 일본어는 일본고대국가를 건설한 백제어가 모태가 됐다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김용운 한양대 명예교수는 “이 소설은 일본의 국자(國字)인 ‘가나’가 한글보다 600년 이상 빨리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성을 사실적으로 밝혀주고 있다”며 “주인공인 나카노 오에,즉 덴지 천황은 한일 고대사의 전환점을 설명하는 데 매우 적절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 천황은 백제인인가/송기윤 지음(화제의 책)

    ◎‘고대일본국 건국’ 과정 밝힌 교양서 백제의 왕족과 귀족,백성이 왜열도로 건너가 고대 일본국을 세웠다고 밝힌 교양역사서. 고구려 장수왕의 침략을 받아 숨진 한성백제의 마지막 임금 개로왕,그의 동생인 곤지가 일본의 실질적인 시조인 응신천황이 됐다는 주장을 뼈대로 삼았다.응신(곤지)의 아들이 백제에서는 동성왕·무령왕,일본에서는 인덕천황으로 즉위했음도 설명했다. 백제와 왜 관계를 비롯해 한일고대사를 다룬 전문·교양서가 여럿 나왔지만 새 사료를 많이 발굴한데다 접근법이 독특해 눈길을 끈다.일본의 ‘16대’ 천황 인덕의 능에서 나왔다는 동경(銅鏡)과 환두대도(이상 미 보스턴미술관 소장)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유물.동경의 명문을 공개했고 국내 최초로 사진을 실었다.그와 쌍둥이처럼 닮은 무령왕릉 출토 동경,환두대도와도 비교했다. KBS PD인 지은이는 5년여의 준비 끝에 ‘천황은 백제인인가’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제작했지만 회사측 반대로 방영하지 못하는 바람에 그 내용을 이 책에 담았다. 대교출판 8,500원
  • 鄭夢準 축구협회장 외국어대 ‘월드컵의 도전’ 특강

    ◎월드컵대회 경제도약의 발판 鄭夢準 대한축구협회장은 21일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에서 ‘2002년 월드컵의 도전’이라는 주제의 특강에서 “월드컵대회에 대한 투자는 내일의 희망에 대한 투자”라고 강조했다.다음은 특강의 요지. 2002년 월드컵대회를 유치한지 2년이 지났다.월드컵 유치를 계기로 국민들의 축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주경기장 선정 문제에서 보듯 월드컵대회가 무엇이며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에 대한 우리 내부의 합의는 아직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월드컵 시청자 연 410억명 월드컵은 단순한 축구 행사가 아니라 경제·문화가 망라된 지구촌 최대의 축제다.월드컵의 TV 시청자수는 올림픽의 3배에 이른다.92바르셀로나 올림픽 TV 시청자는 1백23억명이었으나 94미국월드컵은 3백12억명이었다.오는 6월의 프랑스월드컵 시청자는 4백10억명에 이를 전망이다.이것은 월드컵 자체가 거대한 비즈니스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TV 방영권료는 미국시장을 빼고도 11억달러나 된다. 흔히 21세기는 아시아의 시대라고말한다.하지만 눈부신 경제발전에도 불구하고 동북아시아의 정치구조는 안정적이지 못하며 군사적 긴장감도 여전히 높다.이런 상황에서 21세기를 여는 첫 대회이며 아시아 최초의 대회인 2002년 월드컵을 한국과 일본이 공동개최하게 된 것은 전세계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다. 안보나 경제분야의 국제관계가 ‘칼날이 선’ 이해 관계라면 문화와 스포츠분야는 의제(Agenda)가 없는 접촉이다.의제없는 접촉이 지정학적 구도를 변화시키는 긍적적 요인이 될 수 있다.국제사회를 연결하는 국방·안보,경제·무역,문화교류 등 3가지 가운데 문화교류의 중심을 이루는 것이 국제스포츠다.2002년 월드컵은 동북아시아의 안정과 평화를 가져오는 무대가 되어 지정학적 구도를 변화시킬 좋은 기회다. 월드컵이 열리기 전까지 5년동안 남북 관계가 어떻게 변화할지 정확히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2002년 월드컵은 남북관계 개선에 기여하고 통일의 촉매제가 될 것이다.다만 88올림픽 때처럼 우리가 먼저 서두르지 말고 북한의 태도에 따라 신중하게 대처해 나가야 할 문제다.한국과 일본은 기원전부터 교류를 해왔고 백제인들이 많은 역할을 하기도 했다.중요한 것은 두나라 사이에는 불행했던 시기보다 좋았던 기간이 휠씬 더 길었다는 사실이다.하지만 지난해 1월의 한 여론조사에서 한국인의 65%가 일본이 싫다고 대답했다.많은 사람들이 일본에서 ‘보수주의’가 되살아나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2002년 월드컵은 양국 국민들 사이의 감정의 골을 메우고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맺어 나갈 좋은 기회다. 요즘같은 ‘IMF시대’에는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 줄 계기가 필요하다.월드컵대회를 계기로 국민들은 목표와 비전을 함께 나누어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투자가치 있는 미래산업 축구가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문화나 산업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월드컵 개최의 의미가 새로워 질 것이다.‘IMF시대’를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사회전반의 낭비와 거품을 제거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거나 명백한 이익이 기대되는 분야에 대해 투자를 포기하는 것은 미래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월드컵 유치는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걸림돌이 아니라 도약의 발판이 될 것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월드컵에 대한 투자를 통해 경제도 살리고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주자는 것이다.월드컵은 미래의 희망에 대한 투자다.
  • 실험소재 인터넷 市場/이대실 생명공학硏 유전체사업단장(굄돌)

    소금은 식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전문연구와 산업현장에서도 널리 사용된다.소금이 주는 산업소재를 보자.비누의 재료인 가성소다,원자력발전소의 냉각매체인 금속소디움,수도물 정화에 쓰는 염소가스,표백제인 과산화염화소다,그리고 염산 등이 있다.또한 적외선을 통과하는 초순도 소금은 적외선 분광기의 분석소재로 사용한다.그런데 국내 소금의 질이 낮아 대학과 병원 등 모든 전문연구기관에서는 수입소금을 쓴다.단순히 소금의 경우이지만 다른 수많은 실험소재도 마찬가지다.우리 과학계의 역사가 짧고 그 하부구조가 열악한 탓으로 대부분 수입에 의존한다.IMF시대에 접어들어 모든 실험소재의 가격이 폭등하였고,수급에 차질이 생겼다.사실상 국가연구개발사업과 첨단과학산업에 심대한 지장을 초래한다.국가비상시 전략적인 필수소재를 자체생산할 능력이 없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타개책의 하나는 국내 전문과학인이 연구과정에서 손쉽게 만들어 쓰는 실험소재를 하나씩 모아놓고 거래하는 소재시장의 개설이다.그러나 기존형태의 시장으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다행히 최근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그 문제가 간단히 해결되었다.이러한 생각으로 생명과학연구소는 ‘실험소재의 인터넷시장’(http://www.kribb.re.kr)을 개설하였다.전문과학인들이 실험소재를 하나씩 인터넷시장에 등록하여 국내 공급이 가능한 실험소재를 집대성하고 상호 구입하자는 취지다.국가경제도 돕고 연구활성화를 꾀할 수 있어서 좋다.부차적으로 국가 소재생산능력의 파악은 정책수립에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성공여부는 전적으로 전문과학인들의 참여에 달려 있다.더 나아가 추가적인 생산체계를 구축한다면 의료제제와 첨단소재산업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정책적 유인책도 고려해 볼 만하다.그에 따른 새로운 고용창출은 또 다른개념의 ‘뉴딜정책’이라 할 수 있다.
  • 한나라 기행/시바 료타로 지음(화제의 책)

    ◎일 작가 시바 료타로 학국기행문 일본의 ‘국민작가’이자 논객인 시바 료타로(사마원태랑,1923∼1996)가 한국을 여행하면서 쓴 기행문. ‘일본의 국사’로 불리는 그는 왜인과 조선반도의 관계를 추적,일본인의 원형과 그 문화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살핀다.시바는 “왜는 중국이나 조선왕조의 체제원리인 유교의 바깥에 있는 민족”이라고 규정한다. 도쿄의 토박이인 에돗코(강호っ자)의 기질을 흔히 ‘맑게 갠 5월 날씨’에 비유하는 데,중세 말기의 왜의 기질이 바로 그렇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시바의 여정은 가야의 옛 터전인 김해 땅에서 출발해 오미(근강)에 있는 도래 백제인의 잊혀진 무덤을 찾는 것으로 끝난다.뚜렷한 목적지 없이 우왕좌왕하는 것 같지만 그는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끊임없이 대비시키면서 한민족과 왜,그리고 항왜인의 얽히고 설킨 관계를 용의주도하게 풀어간다.시바 료타로의 본명은 후쿠다 사다이치(복전정일).그는 후쿠다라는 일본 성씨를 버리고 중국 성씨인 시바(사마)를 택했다.또한 왜구가 자기네 조상이었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그가 친한적 인물인 것은 아니다. 역사를 천착해가는 그의 중도적 사관은 오히려 보수적인 일본의 시각을 가장 잘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시바는 그의 문학의 주요 모티프로 늘 역사를 끌어들인다.중화민족을 자부하는 한족이 북적 혹은 동이라고 깔보는 몽골족,만주족,조선족,일본족 등이 그 대상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의 작품에는 일본에 대한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애정이 깔려 있다는 점이다. 그런 만큼 동북아 3국의 역사와 문화를 바라보는 그의 시각이 반드시 엄정한 것만은 아니다.박이엽 옮김 학고재 9천500원.
  • 백제관음(외언내언)

    ‘머리에는 반원형의 꽃무늬 보관을 쓰고 가슴에는 크고 둥근 꽃판을 단 목걸이 장식.왼손은 목이 긴 정병을 쥐었으며 오른손은 그대로 내려서 천의를 잡고 있다.‘수직성과 숭고성의 미감’으로 고졸청아한 기품을 완성한 것이 백제의 금동관음보살입상이다. 프랑스정부가 제정한 ‘일본의 해’를 맞아 지난 10일부터 파리 루브르박물관 드농관 특별전시실에서 선보인 ‘구다라간논(백제관음)’의 모습이다.프랑스언론들은 일본미술의 정수를 알기위해 ‘절대 놓쳐선 안될 전시회’라고 선전하는 모양이다.‘구다라(백제)’란 이름 자체가 반증하듯이 ‘백제관음’은 6,7세기경 백제에서 만들어져 일본으로 옮겨졌다는 것과 아스카(비조)시대 일본에 온 백제인이 만들었다는 설등이 있다.일본 상지대 무토 마코도(무등성) 교수는 백제의 성명왕이 불상과 건축가를 보내와 그때 불상을 처음 본 일본인들은 단정하고 엄숙한 모습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고 밝히고 있다. 한국인보다 한국미술을 더 사랑하던 일본의 미술학자 야나기 무네요시(유종열)는 1922년 그의 저서에서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국보중의 국보들은 대부분 한민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이들은 일본의 국보라기보다 조선의 국보로 불리지 않으면 안된다”고 쓰고있다. 우리의 고미술에 대해 끈질기게 연구해온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존 카터 코벨 박사도 84년 ‘한국문화가 일본에 끼친 영향’이라는 책에서 “일본 법륭사 금당의 ‘백제관음’이 백제의 공예품임을 말해주는 불변의 단서는 머리에 장식된 ‘보관’이 백제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연화당초 문양과 똑같다는 점”을 예로 들고 있다.1천300여년간 ‘백제관음’이란 명칭이 고수됐다면 그처럼 이 불상과 백제간의 특수관계를 말해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 역사문제연 이이화 고문 ‘지역차별의 역사’ 발표

    ◎전라도 차별 “통일신라 초기부터 시작”/현대선 박정희정권 전략적으로 지역감정 유발 역사문제연구소가 23일 서울 종로구 계동 연구소 사무실에서 마련하는 ‘정치권력에 찢겨진 지역차별의 역사’라는 주제의 한국사교실에서 이 연구소 이이화 고문이 우리나라의 전라도 지역 차별의 시작과 역사에 대해 발표할 예정이어서 눈길을 끈다. 이고문에 따르면 이 차별의 뿌리는 신라의 삼국통일 초기단계로 거슬러 올라간다.신라는 삼국통일 초기단계에서는 전략적으로 백제유민을 우대했으나 고구려 복속후 당나라를 몰아내고 통일을 이룬 순간부터 백제인들을 푸대접하기 시작했다는 것.백제유민들은 통일후 결국 신라의 철저한 계급사회에서 소외됐고 이후 통일신라의 계속된 전라도차별은 고려 태조 왕건의 산수배역설에 의해 더욱 심각해졌다는게 이고문의 견해다. 왕건은 차령산맥이 백두대간에서 서쪽으로 뻗고 금강의 상류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형세를 들어 차령산맥과 금강아래 지역에서의 등용을 금할 것을 훈요십조에 남겼다.이로인한 차별정책은고려중기 이후 문벌귀족이 등장하면서 한때 누그러졌으나 조선 선조때인 1589년 정여립이 전라도 중심의 대동계를 만들고 반역을 시도하면서 다시 노골화됐다고 이고문은 피력했다.전라도지역 인사들은 임진왜란때 큰 공훈을 세웠는데도 집권세력이 차별정책을 멈추지 않았으며 영조의 경우 호남의 인재를 발탁하라는 특별 어명까지 내렸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는 것. 이고문은 특히 현대에 들어 호남의 차별정책은 박정희정권의 전략적인 지역감정 유발로 이어졌다면서 이 차별이 신분체계나 성차별과도 구분되는 것으로 건전한 경쟁을 외면하고 민주주의 방식에 역행한다는 점에서 하루빨리 뿌리뽑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 ‘주제가 있는 답사기’출간 바람

    ◎일본을 걷는다­일이 뺏어간 우리문화재/나의 문화유산3­4개 문화권에 서린 미학/주강현의 우리문화기행­‘쓰여지지 않는 문화’ 조명 ‘주제’가 있는 답사기가 여름 독서계를 풍성하게 하고 있다.최근 출간된 중국 선불교 답사기 ‘밥그릇이나 씻어라’‘한국의 묘지기행’ 등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가운데 세권의 역사·문화답사기가 새로 나왔다.‘일본을 걷는다’(한양출판)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3’(창작과비평사),‘주강현의 우리문화기행’(해냄). ‘일본을 걷는다’는 건축학자인 목원대 김정동 교수가 일본의 도도부현을 직접 돌아다니며 쓴 역사체험기다.모두 3부로 1부는 일본이 탈취해간 우리 문화재에 관한 기록을 담았다.조선시대 왕세자의 거처였던 자선당을 비롯,평양팔경 가운데 하나인 애련당,지금도 남아있는 관월당,데라우치 마사다케(사내정의) 총독이 탈취해간 박물관을 만들 정도로 많은 문화재들,조선을 사랑한 인사로 알려진 야나기 무네요시(유종열)가 수집해간 문화재로 가득한 일본 민예관 등을 소개한다.2·3부에서는 조선침략의 자취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현장들과 강제로 끌려가 노역에 동원된 조선인들의 한이 서린 장소들을 찾아간다.게이오 의숙,도쿄대학,오이소(대기)의 통감도,백제인이 지은 오사카의 진자(신사),조선총독부 청사를 설계한 독일인 기사 게오르그 데 라란데,일본의 기차역들,히비야(일비곡)공원,미츠비시 재벌의 상징 마루노 우치 빌딩,일본 국회의사당 등 일제침략의 현장을 낱낱이 살핀다. 영남대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3’는 서산 마애삼존불로부터 출발해 능산리 고분군이 있는 부여에서 끝난다.지난 93년 발간돼 인문학 책으로는 드물게 1백만부이상 팔려나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에서 문화유산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강조했던 지은이는 2권에서는 문화유산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보여줬다.이번의 3권에서는 우리 문화유산의 미학을 이야기한다.이 책은 답사장소를 네개의 문화권으로 나눠 접근한다.부여 공주 익산 서울 등지에 남아있는 백제 문화유산의 미학,경주 불국사가 보여주는 통일신라의 ‘조화적 이상미’,안동문화권에 서려있는 조선시대 양반문화의 미학,그리고 섬진강·지리산변의 옛 절집들에 녹아있는 산사의 미학 등을 다룬다. ‘주강현의 우리문화기행’은 그의 또다른 저서 ‘우리문화의 수수께끼’와 맥을 같이 하는 인문기행서.‘어디를 가면 무엇을 볼 수 있다’는 식의 답사기를 지양했다는 지은이가 이 책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고려청자처럼 보란듯이 번듯한 문화유산이 아니라 ‘쓰여지지 않은 문화’‘이름표 없는 문화유산’이다.외면도의 당숲에서부터 수원 화성에 이르기까지의 여로가 담겼다.
  • 문화유산의 역사성/황규호 문화부·부국장급 기자(서울논단)

    민족문화유산인 문화재는 역사 바깥의 사물이 아니다.반드시 역사성을 내포하고 있다.문화유산에서 역사성을 발견하지 못한다면,그것은 문화재라기 보다는 골동이나 자질구레한 물건 박물세고에 지나지 않는다.그래서 문화유산을 역사적으로 해명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니까 문화와 역사는 맞물려 있다.생활공동체안에서 여러 행동양식이 일정한 정형의 틀을 이루어 낸 것이 문화다.또 역사는 문화를 바탕에 깔고 살아간 사람들의 생활흔적이어서,문화와 역사는 서로 떼어놓을수 없는 상호보완의 관계인 것이다.문화활동의 소산인 문화재에서 역사를 보아야하는 까닭은 바로 이 점에 있다. ○문화·역사 상호보완 관계 우리는 그동안 문화재에 얼마만큼 역사성을 던져주었는가.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최근 중국 고고학자 원위청(온옥성)이 「백제금동대향로」를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한 글(서울신문 2월18일자 1·14면 보도)을 보면 더욱 그렇다.그는 금동향로에서 우리보다 더 정확히 백제역사를 읽었다.중국의 고고학전문 주간지 「중국문물보」에 실은 글에서 향로를 요지부동의 백제유물로 못박았던 것이다. 그는 1993년 충남 부여 능산리에서 향로를 발굴할 당시 붙인 이름 「금동용봉봉래산향로」가 무슨 소리냐고 반문했다.향로에 나온 날짐승은 백제의 세미계를 천계로 표현한 것이고,산은 백제건국 터전 금마산이라는 것이다.또 다른 형상 모두가 백제의 자연인 동시에 백제인이라는 주장도 곁들였다.한국과 중국의 고대사서 여러 책에 나오는 백제 이야기를 향로에서 다 끄집어 냈다. 그러면서 향로 이름을 지극히 백제적인 「금동천계금마산제대향로」로 바꾸자는 의견을 내놓았다.원위청의 논리는 정연하거니와,대단한 설득력을 지녔다.국내 학자들의 반론이 나올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금동향로라는 유물에다 역사적 생명력을 다시 불어넣었다.그래서 「백제금동대향로」가 더욱 윤택한 문화유산으로 다가왔다.영원한 세기적 보물이 국보의 위치를 확고히 굳힌 것이다. 국내 학자들은 향로의 시원에만 집착한 나머지 중국을 너무 의식했다.그러나 원위청은 문제의 글에서 「중국에는 봉래산을 상징한 박산향로가 있을 뿐,백제금동대향로 처럼 생긴 정교한 유물은 없다」고 단정해 버렸다.그럴수 밖에 없는 것은 필연적 현상이다.동아시아 문화전파 루트가 중국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이어졌다 해도,이식과정에 변하고 발전했다. 역사란 말 히스토리(history)의 본래 뜻은 탐구라고 한다.그러고 보면 우리 자신은 문화유산을 대상으로 한 탐구가 부족했는지도 모른다.영국의 사학자 L B 내미어의 말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윤곽이 아니면 내용이 보이는 미세한 부분」이란 그의 말은 사뭇 교훈적이다.우리는 금동향로에서 윤곽도,미세한 부분의 내용도 제대로 못 들여다 보았기 때문이다. ○미세한 부분까지 탐사를 그 책임은 우선 발굴을 담당하고 유물을 관리했던 고고학분야 종사자들에게 있다.우리나라 고고학계는 그동안 유물 자체에만 매달려 큰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오류나 저지르지 않았는지….유물만을 다루는 것을 목적으로 한 이른바 「기술의 고고학」을 어느 정도는 경계할 부분이 아닌가 한다.「기술의 고고학」도 고고학 연구에서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너무 기울다 보면 고고학이 무미건조한 학문으로 전락할 것이다. 우리가 홀로 서서 문화유적을 발굴한지도 반세기가 넘었다.광복 이듬해인 1946년 경주의 신라고분 호우총을 시작으로 50년동안 1천300여건의 유적을 발굴했다.지금 이 시간에도 경남 진주 남강댐 상류 등 여러 지역에서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역사를 생각할 줄 아는 고고학자가 아닌,단순한 발굴기술자 손으로 발굴이 이루어지는 지역은 없는지 궁금하다.
  • 고대 「제사유물」무더기 출토/서울대 발굴단,충남 천안 위례산성서

    ◎토마­철마 16점·세발토기 등 다량 “햇빛”/제단 구조물 석축 확인… 백제 유물 추정 충남 천안시 북면 운용리 산81 해발825m 위례산성에서 토마와 철마를 비롯한 고대유물이 무더기로 출토되었다.이 산성은 백제 건국기의 하남위례성이라는 주장도 제기되는 유적.그래서 출토유물에 대한 학계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서울대 인문학연구소 고고학발굴조사단(단장 임효재 교수)이 지난 9월1일 착수한 제2차 발굴에서 11일 현재 거두어들인 토마와 철마는 모두 16점.진흙으로 만들어 구워낸 토마 10점,쇠로 만든 철마 6점 등으로 되어있다.모두 같은 발굴지점에서 나온 이들 말모양 유물의 평균 길이는 8㎝.지난해 실시한 1차 발굴에서도 2점의 토마가 위례산성에서 나왔다. 이들 말모양의 유물이 나온 지점은 위례산성 정상 북쪽 낭떠러지 근처.유물과 함께 제단구조물로 보이는 석축 일부가 확인되어 말모양의 유물들은 제사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말은 고대인들이 신성시한 동물.특히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말은 큰 힘이 되었기 때문에 고대인들은 정복지에서 마제를 지냈다는 것이다. 토마와 철마는 백제계 산성에서 주로 출토되고 있다.지난 1986년 경기도 광주군 서부면 춘궁리 이성산성에서 토마와 철마 머릿부분을 포함한 말모양의 유물 4점이 나왔다.그리고 제사유적이 분명한 여러 흔적도 이성산성에서 찾아냈다.백제 건국집단의 뿌리인 부여족 신화에도 말이 영물로 등장한다.이같은 「삼국유사」 기록은 백제인들 심성에 깔린 말의 비중을 간접적으로 설명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위례산성 발굴에서는 말모양의 유물 말고도 백제 고유의 유물인 세발토기(삼족토기·삼족토기) 등 고대유물이 대량 출토되었다.이가운데는 원자가 들어있는 기왓장,멍석무늬토기,청색 대롱옥(관옥),당의 화폐 개원통보가 들어있다. 개원통보는 당에서 3차례에 걸쳐 주조되었는데,이번 출토유물은 크기와 무게(지름 2.5㎝·무게 2g)등으로 미루어 7세기쯤에 통용한 초기의 화폐로 보았다.따라서 위례산성은 백제 초기에 축성되어 삼국시대 말기까지 백제가 방어기지로 사용한 산성이었다는 것이 발굴단의잠정적 견해다. 발굴현장을 답사한 건국대 최무장 교수(전 부여문화재연구소장)는 『이 산성은 백제산성의 전통축조방식인 퇴뫼식과 포곡식을 절충했다는 점이 중요시 된다』고 말했다.그리고 『출토유물을 근거로 문헌사학이 풀지 못한 하남위례성 위치를 규명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천안=황규호 기자〉
  • 국빈 나들이(외언내언)

    30여년전 프랑스의 작가이자 문화상이던 앙드레 말로가 일본방문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이런 말을 했다. 『만약 일본열도가 침몰한다면 나는 한점의 미술품을 가지고 나가겠다.그것은 호류지(겁강사)의 백제관음보살상이다』 목조로 된 이 백제관음은 천의자락 휘날리는 부드러운 몸매와 은은한 미소로 세계최고의 걸작조각품으로 꼽힌다.1천3백년전 백제인의 손끝에서 빚어진 조각품이다. 국내에는 가부좌를 틀고 오른쪽 손으로 턱을 고인 특이한 자세의 대형 불상이 둘 있다.국보 83호와 78호로 지정된 백제시대 금동반가사유상이다.그런데 똑같은 반가사유상이 일본 고류지(광강사)에 전해지고 있다.재질이 나무라는 점이 다를 뿐 신비하고 고졸한 천년의 미소는 너무도 똑같다.동일인의 작품이 아닌가 느껴질 정도다. 백제의 금동반가사유상은 불상으로나 조각으로나 세계최고의 걸작품이다.7세기 한반도 서안에 자리잡았던 작은나라 백제가 어떻게 이렇듯 최고수준의 예술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는지 불가사의다.『조선은 중국과 일본의 미술을 연결하는 고리다.그리고 서기 6백년경 조선의 미술은 찬연한 융성의 자리에 도달하였고 분명히 두 경쟁자인 중국과 일본을 능가했다』 이것은 동양미술사를 전공한 미국 페놀로사 교수가 1920년 그의 저서에서 밝힌 탁견이다.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은 1912년 당시 이왕가박물관에서 일본인 도굴꾼에게 거금 2천6백원을 주고 구입한 것이다.도굴품이라 출토지가 불명으로 돼 있어 아쉬움을 남긴다.경주근처에서 출토됐다고 하고 충청도 벽촌에서 수습했다는 설도 있다. 이 반가사유상이 애틀란타올림픽 문화예술행사에 선보이기 위해 6월에 나들이를 떠난다.79년 한국미술 5천년전에 이어 두번째.이 불상에 걸린 보험금은 5천만달러(4백억원)나 된다. 79년 나들이때 반가사유상 등 국보 46점을 포함,3백54점의 보험금이 1백20억원이었음을 생각한다면 엄청난 상승이다.우리 문화재가 해외에서 가치와 평가를 제대로 받게 된 것이다.〈반영환 논설고문〉
  • 백제 금동향로·석조사리감 국보로 지정

    문화재관리국은 17일 문화재위원회를 열어 지난 93년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고분군 서편 능산리 절터에서 발굴된 「백제김동용봉봉래산향로」를 국보 제286호로 지정키로 했다.또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가 발견된 지점에서 가까운 목탑지 심초석 윗면에서 출토된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은 국보제 287호로 지정키로 했다.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는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뒤인 7세기 전반기 만들어진 것으로 비약하는 용을 받침으로 봉래산의 여러 군상과 봉황이 어우러져 백제인의 정신세계와 예술적 역량을 드러낸 백제공예작품의 백미로 평가되고 있다. 또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은 567년 백제 성왕의 딸이자 창왕의 누이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한 것으로 사리를 봉안한 연대와 공양자가 분명하고 백제 절터로는 처음으로 절의 창건연대가 당대의 유물에 의해 밝혀져 당대 문화 사회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다.〈김성호 기자〉
  • “일 국보 상당수 한국인 작품”

    ◎일 전수대 객원연구원 홍윤기씨 「한국인이 만든 일본 국보」서 주장/4∼6세기 백제·신랑니이 문화형성 기여/법륭사 백제관음상·옥충주자가 대표적 일본이 일제강점기는 물론 임진왜란 등 우리나라를 침략한 때마다 숱한 문화재를 약탈해 간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그러나 그것말고도 일본이 현재 국보로서 떠받드는 많은 문화재가 우리 문화유산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일본이 이를 철저히 은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국보 중에서 그 옛날 우리 선조가 남긴 것들을 찾아낸 책 「한국인이 만든 일본 국보」가 최근 출간됐다(문학세계사 펴냄). 일본 문헌에 드문드문 나오는 기록을 추적,이같은 사실을 밝혀내 처음 집대성한 사람은 시인이자 일본문화연구자인 홍윤기씨.한국문인상·월탄문학상들을 탄 바 있는 이 중견시인은 지금 일본전수대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있으면서 한국어와 한국문학을 강의한다. 그가 이 책에서 공개한 「한국계 일본국보」는 주로 나라(나양)지방에 집중돼 있다.먼저 고구려 승려 담징의 「금당벽화」로 유명한 법륭사)에는 「백제관음상」「구세관음상」「석가여래삼존상」 등 불상들과,공예품 「옥충주자(비단벌레 불상궤)」가 있다.이 가운데 백제관음은 녹나무를 깎아 만든 입상으로 일본이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예술품. 「옥충주자」는 높이 2m30㎝의 칠공예품으로,비단벌레 2천5백63마리 분의 날개를 붙여 부처 설화를 표현했다.둘 다 백제인의 작품이다. 또 중궁사에는 백제·고구려 여인이 만든 자수 수예품 「천수국 만다라 수장」이,정창원에는 신라화가가 그린 「불상」이 각각 국보로 남아 있다.지난 72년 발굴돼 한일 양국을 떠들썩하게 한 다카마쓰총 고분도 나라에 있다. 국보 1호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 있는 교토(경도) 「광륭사(광륭사)」에는 나무로 조각한 「상투 미륵상」이 안치돼 있다.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 신라작품임을 일본측도 인정하는 것처럼,상투미륵상 역시 신라가 7세기 초 일본에 보내준 것이다. 이처럼 많은 우리 문화재가 일본국보로서 남게 된 까닭은 백제·신라·고구려 등 한국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고대 일본문화 형성에 결정적인작용을 했기 때문이다.지은이 홍씨는 『문화 선진국인 백제가 4세기쯤 문자가 없는 왜의 나라지방에 학자를 보내 유학을 편 것이 일본문화 발생의 바탕』이라고 해석했다.이어 6세기쯤 3국이 불교를 본격적으로 전해주면서 일본문화가 비로소 형성됐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 중고교 역사교과서에 화려하게 소개한 대표적인 국보들이 대부분 한국에서 보내준 것과,한국인이 일본에 건너가 만든 것들』이라면서 그런데도 유래를 알 수 없다거나,막연하게 중국 것인양 표현해 이를 바로잡으려고 연구에 나섰다고 밝혔다.
  • 「백마강 달밤에」 1천여 관객 “갈채”

    ◎서울신문·LG전자 주최 축제극/의자왕 혼 모셔오는 대동제 관객 숙연/“백제역사 깊이 생각 계기” 찬사 쏟아져 서울신문이 LG전자와 공동으로 백제인의 정신을 재조명하기 위해 마련한 축제극 「백마강 달밤에」가 11일 하오8시부터 공주문예회관에서 1시간30분동안 화려하게 펼쳐졌다. 제41회 백제문화제의 하나로 마련된 축제극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극작가 겸 연출가인 오태석씨가 작품을 쓰고 연출한 것으로,백제정신의 부활을 당집·별신제·돌다리가는 길 등 3장에 담았다.중견연극인 15명과 5명의 스태프가 어우러져 열연,백제문화제중 가장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극단 「목화」의 대표이기도 한 오씨는 이날 망국의 한을 안고 중국 고원에 묻힌 의자왕의 혼을 모셔오는 대동제에서 화려함과 웅장함을 연출,1천여명의 관객을 사로잡았다. ○…산신과 천신 등 무속신과 인간을 연결,충청도 어느 마을의 과거와 현재를 형상화한 「당집」이 시작되자 관객은 신비한 듯 숨을 죽이며 극 속으로 빠져들었다. 마을의 대소사를 돌보고,삼국시대 황산벌에서 신라군과 싸우다 숨진 병사의 넋을 위로하며,마을의 안녕과 주민의 무병장수를 빌어온 늙은 무당이 꿈에서 백제를 망하게 해꼬지한 수양딸 「순단」을 만나 갈등을 빚기 시작하자 객석에서는 한숨이 나왔다. ○…2장 「별신제」로 들어서면서 수양딸이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애첩 금화로 변신해 신위를 모신 제단에서 지전을 흔들며 의자왕의 혼을 위로하는 장면으로 이어지자 객석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러나 제단에 모신 신위가 왕이 아니라 계백장군으로 바뀌었다는 얘기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며 폭소가 터졌다.이어 가요 「백마강 달밤에」가 흘러나오자 관객이 모두 따라 부르며 흥겨운 축제분위기를 이뤘다. ○…애첩 금화로 변신한 수양딸이 우여곡절 끝에 중국 고원에 외롭게 묻혀있는 의자왕을 만나는 3장 「돌아가는 길」에서는 마치 나라를 잃은 의자왕처럼 가슴 아파하며 일부 관객이 눈물을 흘렸다. 의자왕이 무당에게 『어서 빨리 고국으로 데려다달라』고 간청하는 대목에서도 탄식이 터졌다.수양딸이 1천3백년동안 타국에 묻혀있는 의자왕을 모셔오겠다고 다짐하며 백제왕과 3천궁녀 및 병사의 넋을 위로하는 대동굿이 사물놀이와 펼쳐지는 피날레에서는 힘찬 박수가 터져나왔다. 박선희양(20·회사원)은 『이처럼 재미있고 웅장하며 백제의 역사를 깊이 있게 생각하게 하는 연극은 처음』이라며 『국민의 자부심을 심어주는 이런 연극이 자주 공연돼 역사의식을 바로잡아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백제 금동관세음보살입상(한국인의 얼굴:36)

    ◎점잖은 웃음… “백제인의 모습”/전래 서역의 흔적 벗은 7세기 작품/두터운 눈꺼풀·부드러운 콧날… 원만한 성품 엿보여 우리나라 불교에서 「관음경」만큼 널리 퍼진 불경도 드물다.「관음경」은 「법화경」의 「관세음보살보문품」을 별개의 경으로 만든 것이다.관세음보살의 영험은 현세의 이익적 공덕과 맞물려 많은 신도들로부터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이에 따라 관세음보살상은 삼국시대 이후 우리나라에 크게 유행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보물 195호 금동관세음보살입상은 그러한 신앙을 뒷자락에 깔았다.머리에 쓴 화관에 화불이 들어있기 때문에 관음보살이라는 사실이 금새 드러난다.7세기께 백제인들이 만든 작품인데,원만한 얼굴과 화관이 어울려 아주 보살다운 모습을 했다.이 보살의 얼굴과 화관은 바로 작품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얼굴에서 외래적인 요소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그래서 백제의 얼굴로 보아도 좋을 만큼 지극히 동양적이다.6세기말 관음신앙이 뿌리를 내렸으니까,7세기가 되면 그 경배대상으로서의 관음상은 백제화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가졌을 것이다.백제에 관음신앙이 들어온 시기는 백제승려 발정이 서기 502∼519년 사이 중국에 머물다가 월주의 관음도량을 참배하고 돌아온 이후로 보인다. 이 7세기의 백제보살상 얼굴에는 은근한 미소가 어렸다.부여 군수리 출토 6세기 후반의 백제금동보살입상(서울신문 5월19일자 13면) 웃음에 비해 퍽 점잖다.눈꺼풀이 약간 두텁고 눈자위는 꺼지지 않았다.이른 시기의 불상에 흔히 나타나는 서역의 요소가 없는 골상이다.코도 날카롭지 않다.더 작아보일 수도 있는 입이 웃음을 머금은 탓인지 좀 커졌다.이 보살상의 미소가 엷기는 하나 입과 눈에서 웃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보살이 몸에 걸친 윗옷(천의)과 치마(군의)는 곱고 부드럽다.구술을 꿰어만든 영락을 어깨로부터 길게 늘어뜨려 배에 와서 ×자로 교차시키고 나서 다시 늘어뜨렸다.팔꿈치를 굽혀올린 오른손의 엄지와 인지가락으로 큰 구슬(보주)을 쥐고 어깨위로 쳐들었다.왼손은 내려 어린 아이들이 마치 꼬까옷을 자랑하듯 율동적 자세로 천의자락을 잡았다.참으로 아름답고 섬세한 보살상이다. 이 금동관음보살입상은 충남 부여군 규암면에서 구한말인 1907년에 출토되었다.규암면은 부여읍 낙화암에서 바라다 본 백마강 대안의 땅이다.사비시대 백제의 영특한 군주 무왕(재위 600∼640년)이 즐겨 찾았던 왕흥사가 거기 있었다.야심만만한 정복군주로 불교에 심취했던 무왕은 서기 634년 2월 백마강 건너 오늘의 규암면 지역에 왕흥사를 세우고 몸소 찾아가 예불을 올렸다는 것이다. 일본쪽 사료를 보면 백제는 서기595년에 백제의 공장을 시켜 관음상을 일찍 만들어 주었다.그런데 규암면에서 1907년에 출토된 또다른 백제의 금동관음보살이 일본에 유출되었다고 한다.애석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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