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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면 구성(다시 태어난 ‘대한매일’:14)

    ◎면별 특화 등 근대신문 편집틀 개척/국한문·국문·영문판 1만3,256부 발행/논설­투고란 등 특색있게 꾸며/雜報기사엔 ‘4字 한문제목’ 달아 창간 이후 영문,국한문,국문 등 발간 판형을 다양화해온 대한매일신보는 지면 구성에서도 날로 근대적 면모를 갖춰갔다. 대한매일은 기사 싣는 단수를 착실하게 늘려간 뒤 마침내는 신문지 크기자체를 키운다. 영문과 한글판을 합쇄한 초창기 때는 단수가 4단이었으나 1905년 8월 국한문판을 분리해 발간한 중간(重刊) 때 6단으로 늘렸다. 2년이 채 못 되는 1907년 4월부터 7단이 되었는데 이때 타블로이드 판인 신문이 1.4배 가량 큰 대판(大版) 크기로 확장됐다. 대한매일은 국내 독자와 관련하여 한글과 한문 중 ‘독립신문’처럼 한글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1년 후 국한문판 발행과 함께 튼튼한 기반을 닦았다고 할 수 있다. 대한매일은 독자가 한정될 수밖에 없는 영·국문 합쇄의 한계를 깨닫고 분리 발행을 심각하게 고려한 중간 때 한글 아닌 한자 위주의 국한문을 선택했다. 언듯 후퇴처럼 보이는 이 결정은대한매일을 크게 전진시킨다. 대한매일은 1907년 4월 국한문 신문이 4,000여 독자를 확보해 국내 ‘最占多數’임을 알렸으며 며칠 뒤 국문판 추가 발간을 선언했다. 국한문판의 성공이 한글판을 부활시킨 셈이다. 이미 확고해진 명성은 판 추가 발행을 독자 및 사세 확장의 좋은 계기로 만들어 대한매일의 국한문판,국문판은 경쟁적으로 급성장했다. 1년 뒤인 1908년 5월 ‘주한 일본공사관 기록’은 대한매일신보가 현재 1만3,256부 발행되고 있다고 쓰고 있다. 국한문판이 8,200여부,국문판이 4,600여부,영문판이 400여부였다. 당시 국내 신문들의 판매부수가 1,000∼3,000부였던 사실과 크게 대조된다. 이렇듯 대한매일신보를 중흥시킨 국한문판은 지면 구성 등과 관련해서도 주목받는다. 고답적인 한문투라는 외형에도 불구하고 한국 신문발달사에서 편집체재에 근대적인 틀을 엮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한매일은 제1면 제호 바로 밑에 매일 논설을 실었다. 여론 조성을 위한 신문의 주장을 담는 자리로서 대한매일의 배일,반침략,애국계몽 논조가 확연히드러나는 곳이었다. 대한매일 논설에는 익명의 필자를 보다 가깝게 느끼게 하는 “本記者”라는 구절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며 “영국인인 본기자”란 구절로 배설의 의견임을 명확히 한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대한매일은 가끔 국내외의 다른 신문에 난 한국관련 논설을 전재했으며 특히 보통 3면에 게재하는 ‘寄書’를 이 자리로 옮겨 논설 대신으로 삼기도 했다. 독자들이 신문사에 보내는 편지를 뜻하는 기서는 말이 현재의 독자 투고이지 논설 못지않게 중량감있는 내용이었다. 기서를 보낼 때 성명과 주소를 요구한 대한매일은 신문에 게재할 때는 필자의 호나 유학생이라는 등 비실명으로 내보내 보다 많은 참여를 유도했다. 논설 다음에 관리의 서임과 사령에 관한 관보를 실었고 외국에서 일어난 일을 외국 신문 등에서 번역 소개하는 외보가 이어졌다. 2면은 관청 동정과 시정잡사에 관한 단신보도인 잡보 차지였다. 지금의 사회면 성격이 강한 잡보는 모든 기사가 “하였다더라” “說이 있다더라”로 끝맺음되고 있으며 단신이지만 글을 잇대어 써 꽤 상세한 내용을 담기도 했다. 통감부의 움직임과 의병활동을 동시에 소화하고 있는 대한매일의 잡보는 특히 모든 기사를 4자의 한문제목으로 압축한 뒤 소개한다. 잡보는 1면 하단과 3면 상단까지 펼쳐지곤 하지만 황실에 관한 기사는 언제나 2면 맨 첫 자리에 올라있다. 반면 신랄한 풍자의 시사만평이 2면 잡보란을 마감한다. 이 풍자만평은 칼처럼 날카로운 내용을 운문체로 경쾌하게 소화하고 있어 최고의 애독란이었다. ◎인기 있었던 2면 잡보란/친일파 행각 등 신랄하게 풍자/“日人고문 초빙후 형벌 혹독 이것이 개명국의 형벌” 대한매일의 2면 잡보란 하단은 시사만평란이란 이름은 붙이지 않았지만 부정,부패,만행 등을 신랄하게 풍자해 큰 인기를 모았다. 풍자의 주대상은 친일파와 한국에 온 일본인이었다. 일본인 풍자 기사를 몇개 골라본다. ▲어제 오후 서울 북서 누각동 뒷산 기슭에 사람들이 다수 모였다 하기로 일 순사가 순검 십여인을 데리고 쫓아가 탐문한즉 모두 피서하는 사람이라 하니 요새는 일인이 무슨까닭으로 한층 의구하는지 한국 인민은 피서도 못하겠소. ▲관립 일어학교 한인 학도가 일인 교사 백정에게 구타를 당한 이후로 퇴학을 원하는 학생이 다수라고 하니 원래 학도가 교사에게 학술만 수업함이 아니라 교사에 품행을 모방하나니 백정 같은 교사에게 무슨 품행을 본받을 것이오 퇴학하는 것이 좋지. ▲근래 일본 인민이 미국 지방에 가서 백인의 구타나 능욕을 받은 것이 날로 심하다 하니 이는 일본 인민이 한국 지방에서 한인을 압제박해한 보복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늘의 뜻은 무심치 않소. ▲경무청과 감옥서에서 일인 고문과 경부 경시를 초빙고용한 후로 죄인에게 형벌이 혹독하고 구금이 엄중하야 전일의 한국 형률보다 몇배 심하다 하니 이것이 개명국의 형률인지. ▲의주 등지에 일본군용지 내의 가옥과 분묘를 월내로 철거하라는 독촉이 심해 지역 인민이 서로 모여 호곡하는 소리가 도로에 끊이지 않다고 하니 인민은 어느 곳으로 이거하며 백골은 어느 곳에 옮겨 묻을 것이오 하늘의 땅에 오르는 수밖에 백계가 무책이로다. ▲일본 박람회장에 한인 남녀 2명을 2개 동물로 꾸며 넣어놓고 일반 유람자에게 완상케 하니 미주의 흑인은 노예로 팔리고 한국의 황인은 동물로 팔렸은즉 한인의 가격은 흑인 지위보다 한층 추락하였거니와 일인은 이웃나라의 동종인을 금수로 대하는구려.
  • 성인영화 전용관 내년 허용/규제개혁위

    ◎문화관광부 규제 202건 폐지 101건 개선/종합유선방송국간 통폐합도 가능/방송프로그램 사전 심의제도 폐지 규제개혁위원회(공동위원장 金鍾泌 국무총리·李鎭卨 안동대 총장)는 성인 영화·비디오를 상영하는 성인전용 영화관을 설치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문화관광부 관련 규제 404건 가운데 202건을 폐지하고 101건을 개선하기로 했다. 규제개혁위는 또 종합유선방송국이 다른 종합유선방송국을 겸업할 수 없도록 한 규정을 폐지,종합유선방송국간 통·폐합의 길을 열어주기로 했다. 위원회는 이와 함께 종합유선방송국이 프로그램 공급업을 겸업하거나,프로그램 공급업자가 방송국을 함께 운영할 수 있도록 허용키로 했다. 아울러 프로그램 공급업을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전환,요건을 갖춘 업체는 신규 프로그램 공급업체로 방송위원회에 등록할 수 있도록 하고,프로그램 공급분야 지정제도도 폐지해 다양한 채널이 생길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로 했다. 위원회는 또 방송 프로그램이나 방송물에 대한 방송위원회의 사전심의제도도 폐지키로 했다. 위원회는 영화관의 문화영화 동시상영 의무도 없애고,4개 등급으로 나뉜 비디오 대여점의 비디오 진열 규정도 개정해 ▲청소년 대여가능 ▲청소년 대여불가 등 2가지로만 구분하도록 할 방침이다. 위원회는 이밖에도 정기간행물 발행 때 외국인,외국 정부·단체로부터 기부금,찬조금,재산상 출연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외국자본의 유입을 허용하기로 했다. □문화관광부 관련 규제정비계획 ▲공연 ­공연자 등록제 폐지 ­영화를 제외한 공연신고제 폐지 ­공연장 설치 허가제를 등록제로 전환 ­공연장의 타목적 사용제한 폐지 ­공공기관,교육기관 등의 공연일수 제한 폐지 ­연소자 관람대상 공연 및 외국인의 국내공연 사전심의제 폐지 ▲영화·음반 비디오 ­영화,비디오의 등급부여 보유제를 폐지하고 완전등급제로 전환 ­영화업 등록제를 신고제로 전환하고 등록시 예탁금납부제도 폐지 ­영화관 문화영화 동시상영의 의무 폐지 ­외국과 공동영화 제작 신고의무 폐지 ­독립제작 영화업자 영화제작 신고제폐지 ­비디오물 판매,대여장소의 영업시간 제한 폐지 ­비디오 감상실의 조도제한이나 자판기를 이용하지 않는 음료수 판매금지 등의 영업자 준수 사항 개선 ­음반판매업 등록제 폐지 ­외국 음반수입 추천제를 원칙적으로 폐지하되 청소년 유해물에 한해 추천제 유지 ▲출판 정간물 ­간행물 납본제를 폐지하되 잡지,만화,사진첩 등 청소년 유해물은 납본제 유지 ­외국간행물 수입 등록제를 폐지하고 외국 간행물 수입 추천제도도 잡지,만화,사진첩 등 청소년 유해매체물 폐지 ­정기간행물의 일정 발행실적 유지 의무 폐지 ▲방송 ­종합유선방송국의 다른 종합유선방송국 겸업 허용 ­종합유선방송의 유선방송국,프로그램 공급업,전송망 사업 상호겸업 허용 ­방송프로그램 및 방송물에 대한 사진심의제 폐지 ­종합유선방송 프로그램 공급업 허가제를 등록제로 전환,방송 프로그램 공급분야 지정제도 폐지 ­방송법인 주식소유 상한규제 원칙적 폐지 ­지상파 방송법인 주식 5%이상 소유자의 종합유선방송 보도프로그램 공급업 참여 제한 폐지­종교단체의 종합유선방송국 경영 금지규제 폐지 ­외국방송 프로그램 수입 추천제 폐지 ­방송편성 책임자·광고책임자·공표의 폐지 및 월별 방송실시 결과 제출의무 폐지 ­국내 방송국의 외국지사,지국 및 외국방송국의 국내지사·지국 설치 승인제 폐지 ­종합유선방송국의 1%이상 공익광고 방송의무 폐지 ▲관광 ­호텔 등 관광사업장의 식당,유흥업소 등 부대시설 임대 허가제 폐지 ­관공호텔 등급을 민간단체에서 자율 결정 ­관광숙박업소의 등급표시 의무 부착제 폐지 ­휴양 콘도미니엄의 분양가 자율화 ▲체육 ­종업원 1천명이상 사업체 1종목 이상 운동부 설치의무 폐지 ­회원제 골프장에 대한 대중골프장 병설 또는 대중 골프장 조성비 예치 규제 폐지 ­종업원 5백인 이상 사업체 생활체육지도사 배치의무제 폐지 ­골프장내 숙박시설 허용 ­테니스장,볼링장,골프연습장,탁구장,롤러스케이트장,체력단련장,에어로빅장,당구장,썰매장 등 설립신고제 폐지 ▲도서관 ­사립도서관·전문도서관 설립때 등록제 폐지
  • 한국영화의 현주소(제3회 부산국제영화제:Ⅱ)

    ◎해외시장 진출 어디까지/작년 230만불 수출… 세계시장 3만분의 1/한국적 정서로 ‘문화의 벽’ 돌파엔 한계/합작·해외로케 등 다양한 시도 필요/국제영화제서 위상 제고… 앞날은 밝아 어느 제조업체가 지난해 230만달러(32억2,000만원)어치를 수출했다면 사람들은 그 회사를 중소기업쯤으로 여길 것이다.한 산업분야 전체의 수출액이 그 정도라면,‘아직도 그렇게 낙후된 분야가 있느냐’며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97년 230만2,000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린 영화가 바로 그 ‘산업’이다.반면 영화수입 규모는 대략 9,000만달러에 이른다. 한해 시장규모가 2,300억원을 넘어서 세계 10대 시장에 들고 할리우드 대작영화가 미국에 이어 전세계에서 두번째쯤 개봉되는 나라,대한민국 영화산업의 자화상이다.‘21세기 멀티미디어 시대의 총아’니 ‘문화상품 수출의 첨병’이니 영화산업에 쏟아지는 기대는 크고,국민의 정부 출범후 이에 따른 진흥책도 영화계·관변·정치권 등 여기저기서 활발하게 나온다. 그렇다면 한국영화 수출은 비약적으로 늘어날까.영화계내부의 목소리는 ‘단기간에는 힘들다’는 데로 모아진다.영화인들은 그 까닭으로 ‘문화적인 벽’을 가장 먼저 꼽는다.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상 한국의 정서,한국배우들 이 외국인에게 그리 어필하지 못한다는 것.예컨대 백인·흑인들은 ‘투캅스’를 보더라도 안성기와 박중훈을 구분조차 못하기 일쑤다. 한국영화 수출을 가로막는 장애는 국내 영화계에도 존재한다.외국 히트곡을 멋대로 삽입했다가 국제시장에서 저작권이 문제 되자 뒤꽁무니를 뺐다거나,음향을 국제규격에 맞게 처리하지 않아 벙어리 필름이 되는 바람에 12나라와의 계약이 취소됐다는 등 어처구니 없는 뒷얘기들이 나돈다. 그러나 이같은 열악한 환경과 시행착오 속에서도 많은 영화인들은 최근 ‘수출만이 살 길’이라는 자세로 적극 나서고 있다.좁은 국내시장만을 바라보고 영화를 만들기에는 제작비 규모가 이미 꽤 커졌기 때문이다.따라서 기획단계에서부터 수출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구상하는 영화사들이 늘고 있다.그 선두주자로 ‘기획시대’(대표 柳寅澤)를 꼽을 수 있다. 기획시대는 최근 2∼3년새 수출을 목표로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폴랜드와 합작으로 ‘이방인’을 제작,유럽시장을 노렸고 박중훈을 주연으로 한 코믹액션 ‘현상수배’는 호주 현지 배우들을 기용,올로케했다.‘현상수배’는 국내 흥행성적이 좋지 않았지만 50만달러에 수출,그 손해를 만회했다.이 영화사는 지금 프랑스와 합작으로 시대극 ‘이재수의 난’을 만드는데,합작이 유럽시장 공략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기대한다. 이런 가운데 지난 5월 프랑스 칸에서는 예기치 않은 낭보가 전해졌다.영구아트필름(대표 沈炯來)이 칸영화제 마켓에 내놓은 SF ‘용가리’가 272만달러에 사전판매되는 성과를 거둔 것.이는 지난해 한국영화 충수출액을 뛰어넘은 액수다.‘용가리’의 쾌거는 국내에서 개발한 토종 SF기술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결과라 할 만하다. 한국영화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 점도 장래를 밝게 한다.한국영화는 올해 각 국제영화제에서 한단계 높은 대우를 받았다.칸영화제에 ‘아름다운 시절’ 등 4편이 초청받은 것을 비롯해 베를린·몬트리올 등 큰 영화제에주요 초청국이 됐다. 영화가 어느날 갑자기 주력 수출품으로 떠오르지는 않을 것이다.한국영화를 외국관객들에게 친숙하게 만드는 과정도 멀고 험할 것이다.하지만 한국영화는 문화수출의 대표 품목으로서 그 출발선에 섰다.나머지는 영화계 스스로의 노력,정부의 적절한 지원,영화팬들의 끊임없는 사랑이 얼마나 탄력을 붙여주는가에 달려 있다.
  • 崔鍾伯 前 고충처리위원장/청부감사 관련 1억5천 수뢰

    ◎“金光一씨에 부탁해달라”/대구미래대 학장이 청탁 대구대 청부감사 사건을 수사중인 서울지검 동부지청 형사5부(李翰成 부장검사)는 23일 전 국민고충처리위원장 崔鍾伯 변호사(58)가 대구미래대 학장 李예숙씨(42·여·구속)로부터 대구대에 파견된 관선이사를 철수하도록 金光一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청탁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1억5,000만원을 받은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崔변호사는 지난 2월 李씨로부터 “일이 잘 안되고 있다”는 항의를 받고 1억원을 되돌려 준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李씨를 조사한 결과 지난 96년 5월 崔변호사가 운영하던 서울 서초동 백인종합법률사무소에서 “金光一 실장에게 부탁해 학교의 주도권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부탁과 함께 5,000만원을 주는 등 98년 1월까지 모두 4차례에 걸쳐 1억5,000만원을 崔변호사에게 전달했다는 진술을 확보하고 崔씨의 계좌를 추적하고 있다.
  • 親日의 군상:7­2/尹致暎家의 빛과 그림자(정직한 역사 되찾기)

    ◎독립협회 회장 尹致昊/현실 비관… ‘대세 순응주의’ 빠져 민족 외면/日·中·美 유학한 대표적 선각자의 한사람/105인사건 연루뒤 ‘친일전향’ 조건 출옥/日 귀족원 의원까지 역임… 끝내 반성 안해 좌옹(佐翁) 尹致昊(1865∼1945년·창씨명 伊東致昊)는 개화기의 대표적 지식인 중 한 사람이다.그는 조선인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자 중국·미국에서 유학한,당시로선 드문 식견가였다.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 그는 조선(한국)의 잠재역량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 데다 식민지라는 ‘상황논리’에 빠진 나머지 결국 일제와 타협하고 말았다.그의 친일은 갑작스런 변신이 아니라 해외유학 경험을 통한 자기확신에서 비롯한 것이다.그의 친일 행적보다도 친일 논리에 눈길이 쏠리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尹致昊는 신식군대 별기군(別技軍) 창설의 주역 尹雄烈(1840∼1911년)의 장남으로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본관은 해평(海平).부친은 무관이었지만 일찍 개화에 눈뜬 사람으로 그의 진로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尹致昊의 첫 유학지는 일본.1881년 일본의 신문물 견학차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일원으로 파견된 것이 계기였다.그는 조사(朝士) 魚允中의 수행원으로 따라갔는데 당시 나이는 17세로 일행 62명 중 막내였다.3개월간의 시찰을 마친 후 그는 귀국치 않고 兪吉濬 등과 함께 일본에 남아 신학문을 공부하였는데 이들이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 된다. ○신사유람단 따라 日 시찰 그는 일본 외무경 이노우에(井上馨)의 소개로 중등 과정의 사립학교인 동인사(同人社)에 입학하였다.그는 여기서 일본어와 영어를 공부하였다.이 시절 金玉均 등 국내 개화파 인사는 물론 일본인 개화파 인사,재일 외국인 외교관들과도 교류하며 국제 정세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2년간의 일본생활은 그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아! 슬프다.조선의 현상이여,남의 노예보다 더 심한 처지에 있으면서 어찌 진작(振作)하려 하지 않는가” 당시 그의 눈에 비친 조국의 현실은 이러했다. 1883년 5월 그는 초대 주한 미국 공사(公使)로 부임하는 푸트의 통역관으로 귀국하였다.그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主事)로 임용돼 통역과 공문서 번역 일을 보면서 개화파 인사들과 친분을 쌓아갔다.하지만 개화파 인사들의 급진적 개혁론에는 찬동치 않는 입장이었다.그러나 이들과의 친분 때문에 갑신정변 실패 후 공모자로 몰려 상하이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1885년 상하이로 간 그는 현지 미국 총영사의 알선으로 중서서원(中西書院)에 입학하였다.이 학교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알렌이 설립한 미션 스쿨로 그는 여기서 3년반 동안 수학했다.그러나 원치 않았던 상하이생활 초창기 그는 한동안 술과 여자로 방황의 세월을 보냈다.망명객의 울분과 20대 초반 객지생활의 외로움이 겹친 것이었으리라.그의 방탕한 생활은 기독교를 수용하면서 막을 내렸다.상하이에서 3년반을 보낸 후 그는 청나라를 ‘더러운 물로 가득 채워진 연못’으로 비유했다.반면 일본은 그에게 ‘동양의 한 도원(桃 園)’이었다. 미국 유학은 그에게 또 하나의 자극이었다.선거로 대통령을 뽑는 미국의 ‘위대함’을 목격하고는 미국은 일본보다도 한수 위의 나라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이같은 생각은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로 깨지고 말았다.그가 강대국 미국·러시아를 제치고 친일로 나선 데는 미국에서 경험한 인종적 편견이 작용한 면이 없지 않다.러일전쟁 무렵 그는 ‘황인종단합론’을 들고 나오는데 이는 당시 일본의 대륙침략자들이 주창한 ‘아시아주의’‘동양평화론’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민족패배주의에 빠져 尹致昊가 친일로 나선 것은 ‘105인사건’(소위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이 계기다.한일병합 2년 뒤인 1912년 일제는 식민통치의 걸림돌인 민족운동세력과 기독교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이 사건을 조작했었다.그는 이 사건에 연루돼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15년 2월13일 친일 전향을 조건으로 출감했다.출감 후 첫 기자회견에서 그는 ‘일선동화(日鮮同化)’를 부르짖었다.“…이후부터는 일본 여러 유지 신사와 교제하여서 일선(日鮮)민족의 행복되는 일이든지 일선 양민족의 동화(同化)에 대한 계획에는 참여하여 힘이 미치는 대로 몸을 아끼지 않고 힘써볼 생각이다”(‘매일신보’,1915년 3월14일) 그가 변절한 직접적 요인은 가혹한 고문과 일제의 강요였다.그러나 그 내면에는 오랜 사상적 기반이 모태가 됐다고 볼 수 있다.‘개화기의 尹致昊 연구’의 저자 柳永烈(숭실대 사학과) 교수는 “개화기 이후 그의 의식 속에 잠재돼 있던 ‘민족패배주의’와 현실적으로 일본의 조선 통치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대세순응주의’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충량한’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 변신한 尹致昊의 친일 행보를 따라가보자. 1919년 ‘3·1만세의거’ 직전 그는 민족대표로 참여할 것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했다.그리고는 의거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강자와 서로 화합하고 서로 아껴가는 데에는 약자가 항상 순종해야만 강자에게 애호심을 불러일으키게 해서 평화의 기틀이 마련되는 것입니다”(‘경성일보’,1919년 3월7일)라며 약자인 조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제에 순종하는 길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일제가 선전하던 ‘조선독립불능론’‘투쟁무용론(無用論)’ 등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그의 친일논리의 한 축을 이루는 것이다. 1920년대 들어 그는 일제의 ‘문화정치’ 선전과 청년층의 반일 동향을 억제하는 데 이용된 교풍회(矯風會)의 회장을 맡는 등 각종 친일단체에서 일제의 식민정책 선전에 주력했다.당시 그는 민족개량·애국계몽운동을 펼치고 있었는데 이는 근본적으로는 일제 통치를 수용하는 범위 내에서의 타협적 민족운동이었다. ○학병 참가 전국 순회 강연 그의 친일은 중일전쟁 발발(1937년 7월7일)을 계기로 강도를 더해갔다.총독부 주최 시국강연반의 연사로 전국을 돌며 순회강연을 하는가 하면 이듬해 1938년 육군특별지원병제가 실시되자 이는 ‘내선일체(內鮮一體)에 합당한 조치’라며 환영하였다.또 그해 7월 ‘황국신민화’의 실천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상무이사로 선정돼 창립총회에서 ‘천황폐하 만세’를 삼창(三唱)하기도 했다. 1941년 ‘대동아전쟁’ 때는 전시결전단체인 임전대책협의회에 참가하여 ‘우리는 황국신민으로 일사보국(一死報國)의 성(誠)을 맹서하여 협력할 것을 결의함’이라는 결의문을 낭독하였다.징병제에 이어 1943년 학병 동원이 시작되자 ‘조선 학도들에게도내지(內地·일본)동포들과 어깨를 겨누어 싸움터로 나설 수 있는 영광스런 길이 열렸다’(‘매일신보’,1943년 11월18일)며 학도들의 출진을 촉구하였다.이같은 공로로 45년 2월 그는 일본 귀족원의원에 선출돼 부친에 이어 2대에 걸쳐 ‘일본 귀족’ 반열에 올랐다. “…(일제하)조선인은 좋든지 싫든지 일본인이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일본 속국의 상태에서 그가 한 일로 누군가를 비난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질 않습니다….”사망(1945년 12월16일) 2개월 전 그가 남긴 글의 한 구절이다.지식인으로서의 ‘반성’은 차치하고 기독교인으로서의 ‘참회’ 한마디도 없다.독립협회 회장과 ‘독립신문’ 사장을 지낸 그가 해방 후 남긴 ‘자기 고백’은 겨우 이런 모습이다. ‘일본의 스코틀랜드화(化)’가 조선이 살 길이라며 일제의 ‘우호적인 식민통치’를 기대했던 그의 나약한 역사관이 결국 그를 친일의 길로 안내하고만 것이다. ◎尹致昊 일기/60년간 쓴 일기 시대상 상세히 담아/사생활도 솔직히 기록 ‘윤치호 일기(尹致昊 日記)’는 한말의 선각자 尹致昊가 188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60여년간에 걸쳐 기록한 개인적 메모.초창기 일기는 한문·국문으로,1889년 12월 이후부터는 영문으로 기록돼 있다. 일본·청국·미국 등 해외유학 시기의 ‘일기’에는 당시 그 나라의 발전상과 시국 상황,그리고 그곳에 체류중이던 한국인들의 동정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국내 체류기인 1883∼84년 당시의 ‘일기’에는 자신이 목격한 갑신정변과 개화당의 활동이 소상히 기록돼 있다.특히 일제 강점기 그가 국내에서 활동할 당시의 ‘일기’에는 자신의 입장과 국내 지식인들의 동향 등도 담고 있다. 이‘일기’는 개화기와 일제강점기,특히 尹致昊 인물연구에서는 필수불가결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한 사람의 ‘일기’치고는 방대한 분량도 놀랍지만 자신의 행적도 비교적 솔직하게 기록했다. ◎‘尹致昊 일기’에 나타난 親日 어록 “만일 내가 살 곳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면 일본이 바로 그 나라일 것이다.…오,축복받은 일본이여!동양의 파라다이스여!세계의 정원이여!”(1893년 11월1일) “나는 국경일에 일장기의 게양을 반대하지 않는다.왜냐하면 우리가 일본의 통치하에 있는 한 우리는 그 통치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다”(1919년 10월1일) “일본은 동양에 있어서 백인 지배의 마력(魔力)을 깬 데 대하여 모든 황인종의 영원한 감사를 받을 만하다” (1941년 12월26일) “우리는 조선의 청년을 영광스런 일본 해군의 자랑스런 대열에 받아들인데 대해 감사하지 않으면 안된다” (1943년 5월12일)
  • 전직 언론인 양덕재씨 ‘최신 화장품학’ 출간

    ◎化粧의 역사는 약 1만년/이집트 목동 태양광선 차단이 효시/화장술·향수는 클레오파트라때부터/피부 구조·노화방지 등도 폭넓게 다뤄 화장은 우리 생활과 밀접히 연관돼 있는 생활예술이다.그러나 화장이 언제 생겼고 어떻게 발전했는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전직 언론인 梁悳才씨(59)가 ‘최신 화장품학’이라는 방대한 저서를 펴내 눈길을 끌고 있다.상,하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화장의 역사 뿐만아니라 인체의 피부구조와 노화방지,화장품과 피부관리 등 화장에 대한 전반적인 것을 담고 있다.일본 번역서 외에 변변한 관련서가 없는 우리 현실에서 볼 때 ‘화장품학’에 이론적 화장을 입힌 ‘화장학 총론’인 셈이다. 화장은 기원전 7,500년전 이집트에서 시작됐다.당시 사냥꾼과 목동들은 건조한 사막바람과 강렬한 태양광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야생나무 기름을 바르는 등 현실적 목적에서 화장을 했다.현대적 의미의 화장은 이집트 마지막 여왕 클레오파트라에서 유래된다.그녀의 화장술과 염색기술,향수등 화장의 기본 개념은 2,000년이 지난 요즘도 이어져 오고 있다. 화장품이 여성 필수품이 된 것은 20세기 초엽.여성들의 활발한 사회진출에 따른 것이다.화장품에 정부의 통제및 과학이 도입된 것은 1938년 화장품을 사용한 한 여성이 장님이 되는 사건이 계기가 됐다.미국정부는 의약품 및 화장품법을 전면 개정했고 화장품 제조방법에도 과학화가 시도됐다. 화장품사업이 다국적기업으로 성장한 것은 50년대 후반.전후의 베이비 붐과 여성 취업인구의 급속한 증가 때문이며 여성의 허영심을 이용한 고가의 판촉전략도 이때 등장했다.60년 미국의 에스테 로어더는 크림을 무려 115달러에 판매,무모하다는 일반 예상을 뒤엎고 대성공을 거둔다.그러나 20세기 내내 태평성대를 누려온 화장품 업계는 90년대 들어 미용수술이라는 복병을 만난다. 이 책은 또 세계 화장품의 감시자인 미국 FDA(식품의약국)의 불량 및 부정화장품에 대한 규제 및 리콜 시스템 등에 대해서도 소개,미국시장에 진출하려는 국내 업계에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저자 梁씨는 70년대 초반까지 서울신문등에서 기자를 지낸 전직 언론인.아내가 외국어로 된 화장품 설명서로 어려움을 겪는 것에 지적 호기심이 발동,화장품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91년부터 미국 대도시의 도서관과 대학도서관 등을 발로 뛰며 미술사,문학,역사,복장사 등 관련분야에 대해 폭넓게 공부했다.300여장의 귀중한 사진도 곁들여져 있다. ◎클레오파트라 美 비결/당나귀젖 목욕·화장시녀 수십명 이집트여왕인 클레오파트라는 동서 고금을 통털어 미인의 대명사로 불린다. 그녀는 백인이었을까,구리빛 중동여인이었을까. 정답은 백옥같이 흰 피부를 지닌 백인미녀다. 그녀는 이집트 태생이지만 원주민은 아니다. 그녀의 가계는 미녀가 많은 그리스 마케도니아로 거슬러 올라간다. 알렉산더대왕은 기원전 332년 이집트를 지배하고 있던 페르시아를 쫓아내고 프톨레메이어스 장군을 통치자로 보내는데 그녀는 프톨레메이어스의 13세 자손이다. 헬레니즘 문명을 만들어낸 그리스인들은 꾸밈없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강조했다. 완벽한 여성미의 상징으로 대변되는 미로의 여신상에서 그들의 탁월한 미적 감각을 엿볼수 있다. 그녀는 당나귀젖으로 목욕하고 화장전문가인 시녀들을 수십명씩 두었다고 전해진다. 이집트의 화장술과 그리스의 미적 감각이 결합했으니 그녀가 역사상의 미인이 된 것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고 하겠다.
  • 親日의 군상:3/3·1문화상과 皇國예술인(정직한 역사 되찾기)

    ◎민족 짓밟고 해방후 민족상까지 받아 ‘3·1문화상’이라는 상이 있다.1960년에 제정돼 올해로 39회째 수상자를 냈다.3·1문화재단(이사장 文仁龜)에서 주관하는 이 상은 대한유화 창업자 李庭林(작고)씨가 제정한 것으로 시상분야는 학술·예술·기술 등 세 분야.재단측이 밝힌 이 상의 제정취지는 “조국광복을 지향하여 거족적으로 발양된 위대한 3·1정신을 영원히 기념하여……”다.상 이름에도 ‘3·1’이 들어가고 또 매년 3·1절 당일 시상식을 갖는 것으로 봐 이 상은 3·1정신을 길이 계승할 목적으로 제정된 것이 분명하다.그런데 이 상의 역대 수상자·심사위원 중에는 일제 당시 친일 단체에서 활동했거나 친일 작품을 남긴 예술가 상당수가 포함돼 있다.예술분야 수상자중 13명,심사위원 중에는 20여명(일부 수상자와 중복됨)이 이에 해당된다.그들의 면면과 구체적인 일제시대 행적을 살펴보자. ◎상받은 예술인 13명의 친일행적은…/문인·화가 등 30여명 ‘위대한 3·1정신’ 왜곡/식민정책 전위대 역할… 청년 징병 내몰아 우선 예술분야 수상자가운데 문학가는 趙演鉉(13회)·安壽吉(14회)·白鐵(17회)·毛允淑(21회)·崔貞熙(24회)·李周洪(28회)등 6명,미술가는 李象範(4회)·金景承(5회)·金殷鎬(6회)·金仁承(9회)·朴泳善(10회)·金基昶(12회)등 6명,음악가는 金聖泰(22회) 1명이다. 문학 분야의 趙演鉉은 대학 재학시절부터 친일 잡지 ‘동양지광’에‘동양에의 향수’(1942년 5월),‘아세아부흥론 서설’(42년 6월)등 친일성향의 평론을 썼다.이중 아세아부흥론 서설은 ‘동양지광’이 현상공모한 ‘지상(紙上)결전 학생웅변대회’에서 3등으로 입선한 작품으로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을 찬양하고 이 땅의 청년학도들이 아시아부흥의 투사로 나설 것을 부추긴 내용이다.‘북간도’로 유명한 소설가 安壽吉은 친일 문학잡지 ‘국민문학’(42년 2월)에 발표한 ‘원각촌’ 이외에도 ‘벼’,‘북향보’등의 친일성향의 작품을 쓴 바 있다. 평론가 白鐵은 작품보다는 친일단체에서 활동이 두드러졌다. 그는 친일 문인단체인 조선문인협회(회장 李光洙) 상무간사,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를 지냈으며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학예부장 시절 친일 미술가 沈亨求(해방후 반민특위에 의해 구속됨)와 함께 조선미술가협회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여류문인으로 이 상을 수상한 사람은 毛允淑,崔貞熙 두 사람이다.이들은 모두 조선문인협회에서 활동하였으며 41년 2월27일 부민관(현재 서울시 의회 건물)에서 개최된 조선임전보국단 주최 ‘결전부인대회’에 참석해 강연을 했다. 아동문학가로 활동한 李周洪 역시 상당수의 친일 작품을 남겼다.그는 친일 잡지인 ‘동양지광’에 수필 ‘청년과 도의’(43년 7월)를 비롯해 단편소설·시 등도 남겼다.그는 유일하게 사후에 이 상을 수상했다. 미술계의 친일논쟁은 해방직후부터 시작됐다.문화예술인의 최초 조직이었던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산하 조선미술건설본부는 金殷鎬·金基昶·金景承·沈亨求·李象範·尹孝重 등을 친일 미술가로 규정,회원에서 제외시킨 바 있다.이들의 대다수는 41년 2월21일 결성된 조선미술가협회에서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황민문화’ 건설을 목적으로 조선문인협회·보도사진협회 등 11개예술단체와 더불어 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단체로 활동하면서 전람회 수익금을 국방헌금으로 내놓기도 했다.43년 1월9일∼17일 정자옥(丁子屋·일제 당시 현 미도파백화점 자리에 있던 백화점)에서 ‘애국백인일수(愛國百人一首) 전람회’를 열어 그 수익금을 국방헌금으로 내놓은 것이 그 예다. 미술가로서 첫 수상자인 李象範(4회)은 沈亨求와 더불어 국민총력연맹 문화부 문화위원을 지냈으며,金景承·金仁承 형제는 조선미술가협회에서 평의원을 지냈다. 특히 金仁承은 朴泳善과 함께 선일(鮮日)합작 미술단체인 단광회(丹光會) 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단광회는 43년 3월 징병제 실시를 앞두고 회원 21명이 4개월에 걸쳐 공동으로 ‘조선징병제 실시’(100호 규모)를 제작,제1회 단광회 유화전에 출품하였는데 나중에 이 그림은 조선군 애국부를 경유하여 군에 헌납되었다. 순종(純宗)의 초상화를 그린 金殷鎬 역시 조선미술가협회에서 활동하였으며 37년 중일전쟁 무렵에는 조선여성들이 당시 용산 사단사령부 모 일본군 장성에게 금비녀·금반지 등을 바치는내용의 ‘금채봉납도(金釵奉納圖)’를 그리기도 했다.金基昶은 최근까지도 친일논쟁이 있었던 인물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등의 친일성향의 그림을 그린 바 있다. 음악가로는 金聖泰가 유일하다.그는 玄濟明 등과 함께 ‘가창지도대’,‘경성후생실내악단’등 친일 음악단체에서 활동하였다.이 단체들은 ‘음악보국음악회’,‘비행기헌납 음악대연주회’등을 개최,황민음악을 보급하였다. ◎‘역사의 심사’받아야 할 심사위원은… 3·1문화상의 역대 심사위원 중에도 20여 명의 일제 식민정책 협력자들이 포함돼 있다.이들중 申奭鎬와 李丙燾는 총독부·조선사편수회에 근무하면서 조선역사를 왜곡하고 식민사관을 뿌리내린 장본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의료계의 鄭求忠과 尹日善도 학병권유 논설을 쓰고 시국강연회에 참석했다. 白樂濬은 친일 ‘기독교신문’의 산파겸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경제학자 高承濟는 ‘국민문학’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등에 수많은 친일 평론을 남겼다.언론인 高在旭은 경성배영(排英)동지회와 전조선배영동지회연맹에서 상무이사를 지냈으며 여류 교육가 高凰京은 金活蘭·毛允淑 등과 같이 각종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문인중에서는 金八峰·朴鍾和·兪鎭午·郭鍾元 등도 다소 차이는 있으나 모두 친일 논설·작품을 남겼고 극작가 柳致眞·徐恒錫,음악가 金元福(피아니스트) 등도 모두 친일 예술활동을 한 적이 있다.柳致眞의 경우 친일 행적이 문제가 돼 고향 충무에 세워졌던 그의 흉상이 95년 주민들에 의해 철거됐다. ◎“아니! 이럴수가…” 독립유공자 심사까지/‘식민학자’ 등 10여명 18년간 활동 독립유공자에 대한 정부차원의 포상은 지난 62년 군사정부가 6·25 전상자를 위한 ‘군사원호법’을 제정하면서 시작됐다.정부는 독립국가로서의 면모를 세우고 독립유공자들의 공로를 후세에까지 전한다는 취지에서 매년 광복절 등 역사적 기념일에 이들에 대한 포상을 실시해 왔다. 현재까지 독립유공 공로로 포상을 받은 국가유공자는 모두 8,514명(외국인 40명 포함)이다. 그런데 그동안 정부의 독립유공자 포상을 둘러싸고 이런 저런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역대 독립유공 서훈자 가운데 ▲친일 기관·단체 등에서 활동한 사람이 포함돼 있다거나 ▲가짜 독립운동가에 대한 포상 ▲서훈자가 서로 뒤바뀐 경우 ▲형평에 어긋난 포상 등의 논란이 있어 왔다.또 이들중 일부 친일 경력자가 국립묘지에 안장돼 민족정기를 훼손하고 있다는 주장과 함께 역대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중에도 친일 단체나 기관 등에서 활동한 인사가 일부 포함됐었다는 지적도 있다. 첫 포상이 실시된 62년도 이후 80년까지의 역대 심사위원 중에는 10여명(일부 중복자 포함)의 일제 식민정책 협력자가 포함돼 있다. 1962년 문교부 산하 독립유공 공적조사위원회의 위원 7명(위원장 포함)가운데 申奭鎬·李丙燾라는 이름이 들어 있다.申奭鎬는 1930년∼37년의 총독부수사관보(修史官補)를 거쳐 37년부터 수사관으로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했으며,李丙燾는 1925년∼27년에 총독부 수사관보,이후는 촉탁으로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했다. 1963년에는 내각사무처 독립운동유공자 상훈심의회에서 심사를 맡았는데 심사위원 22명 중에는 4명의 친일인사가 들어 있다.高在旭·申奭鎬·柳光烈·李甲成 등이 그들이다.高在旭은 1937년 7월 12일 결성된 경성배영동지회와 같은 해 8월5일 결성된 전조선배영동지회에서 상무이사를 지냈다.柳光烈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편집국장과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조선언론보국회 이사 등을 역임하면서 친일논설 및 친일 시국해설 다수를 발표한 언론인이다.李甲成은 상해서 밀정노릇을 했다는 주장이 있다. 1968년에는 총무처 독립유공자 상훈심의회가 심사를 맡았는데 심사위원 21명중 高在旭·白樂濬·申奭鎬·柳光烈·李丙燾·李瑄根·洪鍾仁·金聲均 등 8명의 친일 기관·단체 등에서 활동한 인사가 들어 있다.白樂濬은 친일 ‘기독교신문’의 산파겸 편집위원을,李瑄根은 만주국 협화회의 협의원을,洪鍾仁은 ‘매일신보’의 사회부장과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이사를 지낸 사람이다.金聲均은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언론·출판 검열담당)에서 근무한 기록이 있다. 1977년 원호처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회의 심사위원 11명 가운데도 柳光烈·李殷相 등 2명이 포함돼 있는데 李殷相은 만주에서 발행되던 친일지 ‘만선일보’에 몸담았던 인물이다.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에 포함된 친일 경력자 논란은 1980년까지 계속됐다.이 해 원호처의 독립유공자 심사위원 11명 중에는 申奭鎬가 ‘끈질기게’ 포함돼 있다.그는 62년 첫 심사부터 63년,68년,80년도에 걸쳐 독립유공자 심사에 참여했었다. 친일파연구에 일생을 바친 고(故)林鍾國씨는 “독립운동가의 공적을 논하는 자리나 대일(對日)외교 무대 등에는 친일파들이 나서서는 안될 자리”라고 강조한 바 있다.
  • 日 차기총리 외교·역사관 ‘우려’/自民 총재 3후보 분석

    ◎오부치­신사참배 의원모임 회장 역임… 맹신자 수준/가지야마­한반도 통일 반대 시사… 미 인종차별 발언도/고이즈미­입각후 전범 사당에 제사… 셋중 진보적인 편 【도쿄=姜錫珍 특파원】 일본 열도가 차기 총리가 될 집권 자민당 총재 선거로 달아 오르며 이웃나라의 관심도 뜨거워지고 있다. 24일 치러질 선거에 출마한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외상,가지야마 세이로쿠(梶山靜六) 전 관방장관,고이즈미 쥰이치로(小泉純一郞) 후생상 등 3명의 후보가 저마다 서로 다른 외교정책을 펼 것이기 때문이다. 세 후보들의 행적과 발언들은 향후 일본의 외교정책을 가늠케 해준다. 가장 개혁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후보는 고이즈미 후생상.‘후생 국무대신’ 자격으로 태평양전쟁 전범들에 대해 제사를 지내는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했지만 입각 전에는 참배하지 않았다. 신사참배에 관한 한 오부치 외상은 맹신자격이다.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총리가 패전 50주년을 맞아 ‘반성과 사죄’의 뜻을 담은 총리 담화를 내던 95년 8월. 연립 정권이었던당시 자민당 부총재였던 오부치는 ‘모두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의 회장에 취임했다. 그러다 97년 9월 외상에 임명되면서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단지 ‘외국의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무장 투쟁파’,‘강경 보수’로 불리는 가지야마 전 관방장관은 오부치 외상보다 한술 더 떠왔다. 최근의 사례로 97년 8월 관방장관이던 그는 ‘타이완(臺灣) 유사 사태는 가이드 라인이 말하는 주변사태’라고 말했다. 타이완 문제에 일본이 개입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중국의 격렬한 항의를 받았다. 96년 8월에는 “남북한 통일되면 한국은 피폐해진다”,“(한반도가 통일되면) 일본에 영향이 없을 리 없다. 대량의 난민이 온다. 위장 난민도 있다. 거기에 무기가 공여되면 어떻게 되겠는가”라며 통일을 반대하는 듯한 발언을 내뱉었다. 급기야 당시 金太智 주일 대사에게 사죄했고 당시 한국의 집권당으로부터 ‘언동에 국제감각을 갖추라’라는 따끔한 질책을 받아야 했다. 특히 가이후 내각에서 법무상이었던 90년 9월에는 외국인의 불법 취업과 관련,“(미국에서) 검은 것(흑인)이 들어가 흰 것(백인)들이 쫓겨 나듯” 운운해 미국 언론의 혹독한 비판을 뒤집어 쓴 적도 있다.
  • 피카소가 사랑한 아프리카/양철준 지음(화제의 책)

    ◎왜곡된 아프리카의 실상 밝혀 아프리카 하면 우리는 흔히 로버트 레드포드와 메릴 스트립이 주연한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떠올린다. 카렌 블릭센의 동명소설을 토대로 한 이 영화는 아프리카에 대한 신비로움과 환상을 안겨준다.그러나 영화와 달리 소설에서는 아프리카 가정부나 요리사를 동물보다 못한 우둔한 개체로 묘사하고 있다.아프리카인들에 대한 이러한 왜곡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살았던 케냐 나이로비에는 그녀의 기념관이 들어서고 백인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있다. 스와힐리어를 전공한 지은이는 이처럼 서구 백인들의 시각에 의해 왜곡된 아프리카의 실체를 밝힌다. 고유 주술의인 음강가,밥 말리의 레게음악,짐바브웨의 석조유적,바오밥나무와 에티오피아의 커피에 얽힌 전설 등 아프리카 고유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줄만 것들을 모아 다뤘다.황금가지 1만2,000원.
  • “인종차별정책 남아공 백인정부 흑인 겨냥 생화학무기 개발 추진”

    ◎연구참여 학자 증언 【케이프타운 AP AFP 연합】 인종차별정책으로 악명을 날렸던 남아프리카공화국 백인정부가 흑인들을 겨냥한 것으로 보이는 생화학무기 개발계획을 추진했었다는 증언이 나와 파문이 일고 있다. 지난 81년부터 94년까지 진행된 남아공 정부 보안군의 생화학무기 개발계획에 동원됐던 얀 루렌스 박사는 7일 백인통치 시대의 인권탄압 등을 조사중인‘진실화합위원회(TRC)’ 특별청문회에서 이같이 증언했다. 루렌스 박사는 백인정부 보안군의 요청에 따라 자신은 80년대 말까지 독이든 특수반지,손잡이에 독을 주입할 수 있는 스크루드라이버,독처리가 된 우산 등을 만드는데 참여했으며 이같은 무기가 “사람을 죽이는데”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폭로했다. 그는 특히 당시 계획은 백인정부의 군 고위층이 승인했던 것으로 이 외에 우편폭탄,비누폭탄도 있었으며 인체 수정실험을 위해 군연구소에 장비를 보낸 적도 있다고 말했다.
  • 泰 실물경제 상황 악화

    ◎올 GDP성장률 -3%서 -4∼4.5%로 낮춰/국제공채 발행 늦추고 IMF에 추가지원 요청 태국의 타린 남마해민 재무부장관은 최근 올해의 국내총생산(GDP)성장률을 -3%에서 -4∼-4.5%로 낮추겠다고 밝혔다. 실물경제 상황이 기대했던 것보다 악화되고 있다는 고백인 셈이다.타린 장관은 이외에도 재정적자 규모를 당초 GDP의 1.6%로 상정했으나 3%로 높이겠다고 발표했다. 태국은 지난해 8월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172억달러를 긴급 지원받아 급한 불을 간신히 껐다.그리고 경제개혁과 구조개혁을 과감하게 실천에 옮겼다. 이에 따라 올해의 경상수지 흑자규모는 예상보다 많은 85억달러(GDP의 6.9%)에 이를 전망이고 외환보유고 역시 목표액(260억달러)보다 많은 280억달러수준에 달할 것으로 태국 정부는 내다보고 있다. 물가상승률 역시 연초에 세웠던 11.6%보다 낮은 10.5% 수준에 그칠 전망이다.그래서 연말쯤부터는 경제상황이 지금보다 훨씬 나아질 것이란 기대가 나오고 있다.실제 갖가지 경제 지표들도 이같은 기대를 뒷받침하고 있다. 지난 1월 바트화의 환율은 55바트수준.그러나 태국 당국의 경제 살리기 노력에 힘입어 요즘에는 38∼39바트 수준에서 안정되어 있다. 금융위기 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지난해 11월 금융부문 구조개혁위원회(FSRA)를 만들어 모두 56개의 부실 금융기관을 폐쇄시켰던 노력의 결과인 셈이다. 자동차 조립 및 철강 등 핵심산업 분야에 이르기까지 구조개혁을 단행해 외자유치에 각별히 관심을 쏟았던 것도 도움이 됐다. 그러나 총체적인 경제기반이 워낙 약하다보니 약간의 외풍에도 흔들리기 십상이다.상반기에 외환보유고를 늘리기 위해 국제공채를 발행하려 했으나 인도네시아 사태에 부딪혀 미뤄야 했다. 태국 정부는 현재 불안한 외부상황에 대비해 IMF에 8억달러의 추가 지원과 함께 대기성 차관규모를 늘려 달라고 요청해 놓은 상태다.
  • 개고기 먹는 문화와 동물의 권리/金箕洙 加메모리얼대 교수(기고)

    서양에서 살다 보면 곤혹스런 경우가 종종 있다.한국에서 흔히 ‘동물애호가’라 부르는 동물권리론자들이 한국인을 곱지 않은 눈매로 보기 때문이다.개 먹는 풍습 때문이다.내가 한국인인 것을 알면 대뜸 “당신도 개를 먹느냐”고 묻는 이가 있다.이런 경험이 어찌 나 하나에 그치랴.그러니 개 먹는 문화의 시각에서 정답을 한번 궁리해 보자. 비위가 약한 나는 개를 안 먹는다.개는 커녕 돼지도 안 먹는다.그러나 “나는 한국인이지만 개는 안 먹는다”는 말이 선뜻 안 나온다.아무래도 비겁하다는 생각 때문이다.그래서 역공으로 개 먹는 것이 어째서 나쁜가고 반문한다.소나 돼지는 먹으면서 개만은 먹지 말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고대부터 식용 동물로 사실 개는 인류가 일찍부터 식용으로 쓰던 동물 가운데 하나다.은허(殷墟)의 고고학적 발굴보고서를 보면 주거지에서 으레 개뼈로 그득한 독이 나온다.은대에 개를 일상적으로 먹었다는 증거다.또 은대에 생겨난 한자에는 먹는것과 관련된 글자에 흔히 개견(犬)자가 들어있다.그릇기(器)자는 개 한 마리를 사람 넷이 둘러싼 모습이고,향연의 향(饗)에는 본래 밥식(食)자 대신 개견자가 들어있었고,싫어할염(厭)자는 개고기를 잔뜩 먹어 실증난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이처럼 오랜 역사의 식용동물을 이제 와서 먹지 말라니 될 말인가. 그러나 이런 역사적 증거가 강력한 반론의 근거는 되지 못한다.은허의 주거지와는 달리 유목생활을 하던 백인의 주거지에서는 개뼈가 무더기로 나오지 않는다.중동의 농경문명을 꽃피운 수메르인의 주거지에서도 마찬가지다.개를 식용으로 쓰고 안 쓰고는 역사적 배경이나 문화의 차이를 반영한다고 하겠다.그러니 남이 안 먹는 것을 너희만 먹어야 할 이유가 뭐냐면 뭐라고 대답하겠는가.아마도 강력한 반론은 바로 이 질문을 뒤집어서 마련할 수 있지않을까 한다.자기 문화에서 개를 안 먹는다 해서 어찌 개 먹는 남의 문화를 나무랄 수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것도 역시 설득력이 충분하지 못하다.왜냐 하면 일반적으로 소나 돼지는 잡아먹을 목적으로 기르지만 개는 그러지 않는데,잡아먹기 위해 기른 것을 잡아먹는 경우가 개처럼 매일 품고 지내는 동물을 잡아먹는 경우와 어찌 같다고 보이랴.게다가 개는 유난히 주인을 따르고 주인에게 충직하다.그런 것을 어찌 잡아먹어도 좋다 하랴.그러나 말만 잘하면 여기에 대해서도 변명할 여지는 있다.한국인 가운데는 아무리 복날이라 해도 자기 집 개를 선뜻 잡아 잔치를 벌일 사람은 흔치않다.게다가 요즘은 개도 소나 돼지처럼 식용으로 사육한다.그리고 개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개의 주인에 대한 충직함이란 먹을 것과 주인이 원하는 행동을 결합한 조건반사적 반응에 불과함을 안다. ○문화상대주의의 옹호론 그러니 결국 개 먹는 문화에 대한 비난을 막아낼 길은 없지 않다고 하겠다.그러나 길러서 잡아먹는 ‘방법’을 트집잡으면 변명할 길이 막힌다.개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고통과 기쁨을 구별할 줄 안다.고통을 느끼면 낑낑거리고 기쁨을 느끼면 꼬리를 흔든다.그리고 지나치게 먹으면 비만증에 시달리고 고혈압이나 당뇨도 생긴다.이런 동물을 식용으로 기르기 위해 좁은 우리에 가둬놓고 목에 쇠줄을 매는 행위나,급속비만을 강요하는 행위,그리고 고기맛을 내기 위해 때려 죽이거나 불태워 죽이는 행위는 아무래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개를 길러 잡아먹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런 짓을 안 해도 된다. 활동의 자유를 크게 제한하지 않고도 사육할 수 있을 것이고,때리거나 불태우지 않고도 간단하게 목숨을 빼앗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불필요한 고통을 가하는 것은 잔혹한 행위라 할 수밖에 없다.(개의 목젖을 자르거나 불알을 까는 서양인도 잔혹하기는 마찬가지다.) ○잔혹 행위 피하는 지혜를 그런데 잔혹한 행위는 비인간적이다.동물권리론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결코 개나 다른 동물을 ‘사람을’ 대하듯 대하라는 뜻은 아니다.오히려그것을 ‘사람이’ 대하듯 대하라는 뜻이다.이것을 동물의 처지에서 보면 동물한테도 잔혹한 대접을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말이 된다.따지고 보면 인권론의 본질도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내 이익의 추구로 남이 겪게 될 고통을 이해하고 그것을 예방하려는 것이 인권론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내 입맛에 취해서­아니면 내 몸보신에 몰두해서­개나 다른 동물이 당하는 고통에 무감각한 분한테서 남의 고통에 대한 이해를 쉽사리 기대할 수 있을까. 올여름 보신탕집을 찾을 때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 아르헨의 한국인 차별/柳敏 국제부 기자(오늘의 눈)

    ‘축복의 땅’ 남미 아르헨티나에서 실시한 한 여론조사에서 ‘외국인중 한국인을 가장 싫어한다’는 결과가 나와 충격을 주고 있다. 이 나라 최대일간지인 ‘클라린’은 전국의 주요도시 주민을 대상으로 인종차별에 대한 여론을 조사,가장 혐오하는 아르헨티나 거주 민족으로 한국인(21.1%)을 꼽았고 다음으로 칠레인,볼리비아인 등의 순으로 들었다.한국인을 혐오하는 이유는 ‘폐쇄적’ ‘더럽다’ ‘노동력 착취’ ‘의류상권 장악’ 등이었다. 눈길을 끄는 조사결과는 응답자의 63%가 ‘아르헨티나인은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한다’며 스스로를 인종차별주의자로 당당히 ‘선언’한 대목이다. 97%가 백인인 아르헨티나에서 불고 있는 이같은 극우적 경향은 이해의 여지는 있다.정착에 성공한 적지않은 한국인이나 유태인등이 폐쇄적이거나 현지 주민들을 무시하고 경제적 착취를 한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만은 아닌 것같다.여론조사결과 혐오민족의 대상으로 같은 중남미국가인 칠레나 볼리비아,파라과이인등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민족도 있기 때문이다.조사결과는 맹목적인 백인우월주의 성향이 더 짙다는 요체다. 다른 한 측면에서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인종차별 감정을 극단적으로 갖는것은 인종문제 해결은 물론 양국관계나 나아가 국지적인 민족문제 해결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비슷한 시기에 아르헨티나의 우리교포 여학생이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대우를 받고 상심해있다는 뉴스가 우리를 슬프게 한다.부에노스아이레스 중학교를 수석졸업한 황모양은 학칙상 수석졸업자가 국기를 들고 졸업식에 입장하는 전통을 이으려다 외국인이어서 이행하지 못했다고 한다.그녀가 어른이 된 뒤 ‘제2의 고국’ 아르헨티나에 대해 갖게 될 감정을 생각해보라. 독일이 과거에 행한 인종차별정책 때문에 대전후 그들이 지금까지 얼마나 큰 대가를 치루고 있는 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동시에 한나라의 경제적 흥망이 이웃나라에 즉각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일깨운 IMF시대에 행여 우리도 외국인과 외국기업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하게 대응하고 폐쇄적이지 않나 되새겨 봄 직하다.
  • 보타 철권 11년 법의 심판대에/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 주역

    ◎흑인 판사 주재 오늘 역사적 재판 금세기 인류가 저지른 최대의 수치라 할 수 있는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 정책이 마침내 법의 심판을 받게 됐다.백인이 지배하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손가락 하나로 흑인인권을 좌지우지하던 P.W.보타 전 남아공대통령(89)이 14일 자신이 저지른 죄값을 따지기 위해 재판대에 서게 된 것이다. 그것도 지난 시절 흑인에 대해 판사임용을 거부했던 그가 빅터 루가주라는 흑인 판사 앞에 서게 돼 그에 대한 재판은 판결 자체보다도 더 극적인 시대상황 변화를 드러내고 있다. 보타는 1978년 백인통치시대의 남아공대통령직에 오른 뒤 무려 11년동안 자유를 부르짖는 흑인에 대해 무자비한 철권을 휘둘렀던 인물. 아파르트헤이트를 끝내고 흑백 공동정권 창출을 담당했던 데 클레르크 대통령에 의해 1989년 국민당수직에서 물러났던 보타는 남아공의 자유화 물결이 최고조에 달했던 80년대말 흑인들에 대한 폭행과 살인,고문 등 갖가지 만행을 저질러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남아공이 각종 제재조치를 받게 만들었었다. 그를 재판정에 세운,데스몬드 투투 주교가 이끄는 진실화해위원회는 보타가 지난 시절 국가안보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면서 자행한 갖가지 폭거를 묶어 3가지 혐의를 적용,개별적인 소환장을 발부했었다. 그러나 보타는 은퇴한 2명의 의사를 내세워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아 이 소환에 응할 수 없으며 “위원회가 백인들에 대해 마녀사냥을 하고 있다”는 내용의 1천700쪽에 달하는 답변서를 내면서 소환에 불응했었다. 검찰측의 프랭크 칸 검사는 “그의 신체적,정신적 상태는 재판을 받기에 아무 문제가 없다”며 이들의 주장을 일축,결국 심판대에 서게 만들었다. 혹독한 통치스타일로 ‘거대한 악어’(Big Crocodile)로 불리던 보타는 이제 세월의 흐름 앞에 몸을 가누지 못하는 가운데 만년을 보내던 고향에서 멀지 않은 케이프타운 동쪽 385㎞ 떨어진 조용한 도시 ‘조지’시에서 죄값을 받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 美 콜로라도州 메사 베르데(세계 문화유산 순례:67)

    ◎1,500년전 절벽위에 세운 ‘인디언 도시’/4,000개 공동주택·종교시설 23곳… 관개설비까지/전성기때 7,000명 거주… 암굴주거지 600곳 압권 【메사 베르데(美 콜로라도주)〓金在暎 특파원】 사막같은 황야에선 뭐니뭐니 해도 녹색이 가장 그리운 색이다.‘녹색의 대지(臺地)’란 뜻의 지명 ‘메사베르데’에는 불모의 땅에 지친 백인 개척자들이 불현듯 눈앞에 나타난 녹색 고원에 대고 지른 반가운 환호성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 백인들은 시적(詩的)인 땅이름만 남기고 금방 자리를 떠버렸다.반면 이곳의 원주민 인디언들은 이름 대신 800년의 손때가 절인 삶과 문명의 유산을 남겼다.백인들은 메사 베르데의 녹색을 눈에서 사막의 잔상을 씻어내는 청량제 쯤으로 여긴 셈이나 인디언들은 이 녹색 대지에다 사막의 살아있는 저쪽 피안(彼岸)을 세웠던 것이다. 미 콜로라도주 남서부 밑바닥에 소재한 메사 베르데 인디언 유적은 콜로라도,뉴멕시코,아리조나,유타 등 4개주 접경지역에 펼쳐졌던 아나사지(Anasazi)문명에 속한다.미국의 인디언 문화는 크게 태평양 연안,대분지,대초원,남서부 사막,동부 수목지 등 5개로 대별하며 남서부 문화 가운데 아나사지 문명은 부족의 명맥이 끊겼음에도 특히 강한 인상을 주고 있다. ○1888년 카우보이가 발견 반 불모지의 사막성 땅에 불쑥 솟아오른 암석대지인 ‘메사’는 몸체가 암석 절벽이고 위 봉우리는 평평한 고원으로 산 아닌 산이다.뉴멕시코,아리조나주에서 콜로라도주로 북상하는 도중에 많이 만나며 그중 뉴멕시코 북서쪽 끝 산 후안 분지에 많다.인디언 영화에 흔히 나오는 이 메사들은 특징은 막철분을 으깨 바른 것 같이 생생한 주황색 빛의 절벽인데 주변의 사막성 황무지와 어울려 위협적으로 보인다. 메사 베르데는 콜로라도주를 움켜쥔 록키산맥의 끝자락으로 조금만 더 북상하면 4천m 고봉들이 곳곳에 솟아있다.메사 베르데란 이름은 1600년대 중·남아메리카에서 북상해온 스페인 정복자들이 선사했다.메사의 치렁치렁한 녹색 뒷머리를 보고 영탄조를 발한 이들도 막상 북쪽의 전면을 보고는 이 고원에 오르는 것을 단념했다.해발 2천m의 고지대지에서 그대로800m 단층애를 이룬 메사 전면이 너무 가파라서 그 안엔 탐험하더라도 어떤 유적이나 고대사회가 있을 성 싶지 않았던 것이다. 소나무,전나무 등의 녹색 잎이 물결치고 있는 메사 베르데는 거대한 산악지형이다.북에서 남으로 기울어진 이 지형은 십여개의 가파른 협곡 사이 몇곳에 평평한 메사가 놓여 있다.면적은 서울 2배가 넘는다.1888년 12월,잃어버린 소를 찾아 메사를 헤매던 2명의 카우보이들에 의해 1300년 이후 600년동안 잠자고 있던 아나사지 인디언 유적이 발견됐다. 그러나 드넓은 메사에서 인디언의 삶터는 아주 조그만 부분에 불과했다.입구에서 10㎞는 족히 들어간 다음에 첫 흔적이 있고 35㎞는 더 가야 샤핀 메사의 주 근거지가 나온다.푸에블로 인디안의 메사 베르데 유적은 서기 500년부터 800년 동안 줄기차게 이어진 것으로 석기,역사기록 전무의 선사적 특징은 변동이 없으되 주거지 유형의 변화가 일목요연하게 잡혀진다.물을 담을 만큼 촘촘한 바구니를 유카 실로 엮었던 초기에는 지하에 방을 내고 나무잎과 흙으로 지붕을 인 움집에서살았다. 토기를 굽기 시작한 800년 무렵부터의 중기는 지상 가옥으로 변하면서 마을이 이뤄지고 집을 잇대어 짓는 단체구조로 발전했다.메사 베르데의 토기는 흰 바탕에 검은 무늬의 특이한 배합으로 눈길을 끈다.1100년부터는 진흙으로 겉마감한 ‘아파트형’ 아도비 흙집에 단체로 거주하는데 크게는 50개의 방이 갖춰져 있다. ○사다리 타고 창문 통해 출입 메사 대지의 대대적인 개간과 관개시설,공동주택,종교적 공동시설 등은 메사 베르데 문화의 절정기를 말해준다.전성기 때는 인구가 7천명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그러나 유적 측면에서는 단연 말기에 지어진 암굴(岩窟) 공동주택이 압권이다.메사 안에는 4천개소의 유적이 파악되고 있는데 그중 고원 밑 노천굴에 세워진 주거지만 600개에 달한다.굴의 벽을 천정,바닥 등으로 활용하는 암굴주거 시설은 대부분 방 수가 5개 이하지만 제일 큰 ‘클리프 팰리스(절벽궁전)’는 217개의 방에 종교적 의식이 거행되던 원형의 반지하실인 ‘키바’(Kiva)가 23개나 있다.바닥을 몇개의 테라스로 층을 나눴으며방도 다층구조를 가졌다.인디언 풍습대로 방은 1평 남짓 작은 것으로 창문과 나무 사다리로 출입했다. 롱 하우스는 방이 150개,스푸르스 하우스는 114개에 달하며 가파른 소다 협곡을 마주하고 있는 35개 방의 발코니 하우스는 10미터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 메사 베르데의 전체면적은 211㎢로 1906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됐으며 이 유적은 80년대 들어서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적인 문화유적으로 보존되고 있다. ◎여행 가이드/콜로라도 산맥 끝자락 4개주 교차점에 위치 메사 베르데는 콜로라도,뉴멕시코,아리조나,유타주 등 콜로라도산맥 하단부 4개주가 직각으로 만나는 교차점의 동북부에 위치하고 있다. 아리조나주 북부 그랜드캐년에서 연방국도 160번을 타고 350㎞ 북동쪽에 있으며 뉴멕시코 앨버커키에서는 300㎞,콜로라도 덴버에서는 550㎞ 떨어져 있다. 인근에 콜로라도주 남동부의 상당히 큰 도시인 코르테즈와 두랑고가 있다.
  • 국산­할리우드 수준작 대격돌

    ◎한국영화 ‘강원도의 힘’ ‘남자이야기’/‘아이언마스크’ 스타 내세운 호화대작/드물게 소개되는 호주영화도 개봉 한동안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작들의 대리전 무대처럼 보이던 극장가가 4일 분위기를 일신한다.수상결과에 따라 일부 영화가 막을 내리거나 상영관 수가 줄면서 그 빈자리를 새 영화들이 채우게 된 것. 이에 따른 개봉작은 무려 7편으로 이중에는 한국영화로 ‘강원도의 힘’과 ‘남자 이야기’가 포함돼 있다.나머지는 스타를 내세운 전형적인 할리우드 작품(‘아이언 마스크’‘스피어’‘미스터 커티’)이거나 개성이 강한 독립영화(‘후드럼’),국내에 드물게 소개되는 호주영화(‘내가 쓴 것’)등이다. ‘강원도의 힘’(미라신코리아 제작)은 지난 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날’로 데뷔해 국내외 평단에서 격찬을 받은 홍상수 감독의 두번째 작품.90년대 말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30대 유부남 대학강사와 여대생의 엇갈린 사랑이라는 형태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영화는 같은 시간,같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따로 그려낸다.곧 ‘시공간 해체’라는 새로운 형식을 제시함으로써 결국은 관객 스스로 영화를 재구성해 해석하게끔 유도한다.흥행결과는 미지수이지만 충무로에서는 다음달 열리는 제51회 칸 국제영화제에 공식초청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는 작품이다. 할리우드 영화 ‘아이언 마스크’는 국내에서 인기절정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간판으로 삼고,제레미 아이언스·존 말코비치·제라르 드파르디유 등 연기파들을 조연으로 배치한 호화 대작이다.알렉상드르 듀마의 고전소설인 ‘달타냥 이야기’3부작 가운데 ‘철가면’(영어제목 The Man in the Iron Mask)을 영화로 만들어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스토리 전개가 흥미진진하고,선과 악을 함께 연기하는 디카프리오의 1인2역도볼 만하다. ‘스피어’도 ‘쥬라기 공원’으로 유명한 마이클 크라이튼 원작에 더스틴 호프만·샤론 스톤·사무엘 잭슨 등 톱스타를 동원한 점에서는 ‘아이언 마스크’에 뒤지지 않는다. 우피 골드버그가 주연을 맡은 ‘미스터 커티’는 여성의 성공담을 그린 코미디영화.여성(게다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승진에서 누락한 증권투자 상담가가 가상의 동업자인 백인남자를 앞세워 성공을 거머쥔다는 내용이다.참신한 소재에 성·인종차별을 깨부수는 주제여서 상당히 유쾌함을 줄 만한데도 줄거리에 사실성이 결여돼 가슴 후련한 웃음을 끌어내지는 못한다. 한편 ‘후드럼’은 지난 30년대 뉴욕 할렘가에서 실제 발생한 백인·흑인갱단의 세력다툼을 사실적으로 담았다.갱스터무비의 틀을 가졌지만 흑인들이 만들고 흑인의 눈으로 해석한 흑인영화이다.백인갱단의 흑인거주지 침입을 막아낸 주인공 ‘범피’ 존슨을 영웅이면서도 인간적 고뇌에 번민하는 인물로 그렸다. 이밖에 호주영화 ‘내가 쓴 것’은 예술 또는 예술가적인 삶과 인간심성의 연관성을 고급스럽게 포장했지만 응집력이 부족해 미스터리팬을 만족시키기 쉽지 않을듯.
  • “독립적인 딸로 키웁시다”/미 상담심리학자가 말하는 7가지 전략

    ◎가장 좋은 모델은 어머니/부모의 고정관념 버리고 편견 극복 안목 길러주길 딸은 이쁘게 키워 좋은 남편에게 시집 보내고,아들은 똑똑하고 씩씩하게 출세시켜야 하고….요즘 많이 달라지긴 했어도 끈질긴 유교문화속에서 한국 ‘보통’부모의 자식욕심이란 은연중 그렇다.키울 때부터 불면 날아갈세라 의존시킨 덕에 커서도 딸은 사회에서 가정에서 보조자,내조자로 그치기 십상. 가야미디어에서 나온 ‘딸 이렇게 키워라’는 부모들에게 딸을 아들과 다름없는 한 사람 몫의 독립된 성인으로 키우게 하는 7가지 ‘전략’을 일러주는 책.미국 가족생활 상담 심리학자 바바라 마코프의 저서를 여성학자 오숙희씨가 옮겼다.백인 인텔리 여성이니 함부로 급진적일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치부하지 말 것.골라 듣는 귀만 있으면 실제 딸 키우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도움을 받을 대목들도 많다. 1.딸이라서 그렇다는 생각을 버려라=장난감만 봐도 알 수 있다,남성 호르몬은 어쩔 수 없다 등등 딸과 아들의 차이를 강조하는 부모들이 많다.하지만 차이가 생래적인 것이라는과학적 검증은 어디에도 없다.딸을 대할때 부모가 먼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자. 2.딸의 말을 진심으로 믿자=딸을 믿어줘야 남의 눈에 맞추지 않고 스스로의 느낌과 생각에 당당할 수 있다.대화할 땐 아이의 마음을 거울에 비추듯 읽어 공감해 주는 말을 하라. 3.딸을 독립적으로 키워라=부모가 늘 해결해 주거나 노심초사하는 것은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심는 첩경.“그러면 위험하다” 대신 “이러이러해야 안전하다”고 말하라. 4.딸에게 멋진 여자들을 보여주자=딸은 대통령도 트럭운전수도 될 수 있다.주변에서 책속에서 개척하며 살아온 여성들을 일러주자.하지만 가장 좋은 역할 모델은 역시 어머니다. 5.딸에게 여성차별을 보는 안목을 길러주자=학교에서 돌아온 딸이 “남자애들이 여자들은 이런 것 안 시켜주더라”하거든 그게 ‘남녀차별’이라 일러주고 ‘편견’이란 말도 덧붙이라. 6.외적 아름다움은 두번째라 말하라=여성을 외모로 판단하는 문화속에 미의 신화에서 벗어나긴 쉽지 않다.어머니부터 스스로를 돌아보고 딸이 자신만의 개성을 행복해 하도록 돕자. 7.딸과 함께 첨단과학을 배우자=수학·과학은 남자애들 영역이라 치부하고 있다간 21세기에 낙후되기 십상.부모부터 컴퓨터와 친해지고 선생님도 깨닫도록 도울 것.
  • 선거제도:하(대한민국 50년:11)

    ◎67년 총선 131개 선거구 중 86곳 무효 소송/71년 대선선 지역감정 촉발 박 후보,94만표차 DJ눌러/80년 대선 ‘체육관통대선거’ 1표 기원 100% 찬성 기록도 그릇된 선거의 과정과 결과는 민주주의의 역사를 후퇴시키기도 제자리 걸음으로 남아있게도 한다. 60년 3·15 부정선거의 과정은 4·19혁명이라는 결과를 낳았다.또 4·19가 낳은 제2공화국은 허약한 권력기반으로 인해 5·16군사쿠데타를 낳았다.5·16은 유신체제를 낳았고 유신은 체육관 선거라는 기형적 선거제도를 잉태했다.유신은 필연적인 결과로 5·17이라는 사생아를 낳았다.87년 국민들의 욕구 분출로 대통령 직선제라는 정상적인 선거형태가 이루어지기까지는 30년가까운 세월이 흘렀다.이어 97년 대선까지 또 10년의 세월이 흘러 마침내 여야 정권교체,후유증없는 공명선거라는 민주발전의 결과를 얻게됐다.한번 잘못끼워진 단추를 바로잡는데 역사는 자그만치 40년 가까운 세월을 요구했다. ○‘한지붕 두가족’ 민주당 분당 60년 4·19혁명후 7월 29일,민의원과 참의원 선거가 실시됐다.이어8월 12일,민·참의원 합동 간접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구파인 윤보선이 당선됐다.그러나 8월 17일 민의원 본회의에서 구파인 김도연 국무총리인준동의안이 부결됐다.이틀뒤인 19일에야 신파인 장면 국무총리인준동의안이 가까스로 가결됐다.내각제의 제2공화국이 탄생되는 순간이었다.그러나 구파 대통령과 신파 총리의 갈등은 앞으로의 정국불안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한지붕 두가족’의 민주당은 끝내 민주당과 신민당으로 갈라섰고 몰락의길을 걷게 된다.당시 곽상훈 민의원의장이 당적을 떠나며 한 고별사는 다가올 상황을 극명하게 내다보고 있다.“민주당의 신·구파 지도자들은 파벌의성쇄에 앞서 당과 국가의 영고에 책임을 져야 한다.민족의 영웅이 될 수도있고 민족의 죄인도 될 수 있다.제1공화국은 이승만의 아집으로 망했다.제2공화국은 당신들의 아집과 파쟁으로 나라가 멸망할 수도 있고,당신들의 아량과협조로 욱일승천할 수도 있다”” 새벽 총소리와 함께 시작된 5·16은 왜곡된 선거문화의 새로운 시작이었다.이후 92년 대선 이전까지 정치권은선거가 끝날때마다 부정선거와 지역감정이라는 후유증에 시달렸다. 67년 5월3일 실시한 제6대 대통령 선거 결과 박정희 대통령이 신민당의 윤보선 후보를 1백16만여표차로 누르고 당선됐다.선거 결과에 대해 신민당은 관권,금권,투·개표 부정 등 사상 유례없는 부정선거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신민당은 이어 6월8일 실시된 7대 국회의원선거도 계획적 전면부정선거라고 주장하며 무려 8개월동안 선거무효 투쟁을 벌였다.전국 131지역구 가운데 당선 및 선거무효 소송이 제기된 지역은 3분의 2에 달하는 86개 지역에 달했다. 70년 40대 기수론과 함께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부상한 김대중은 여세를 몰아 공화당의 박정희 대통령을 압박했다.3선개헌으로 권력연장의 토대를 마련한 박대통령은 71년 4월 27일 실시된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를 94만여표차로 눌렀다.7대 대선은 전형적인 조직 대 바람의 선거였다.안보논쟁이 가열되고 선거 열기가 달아오르면서 영남과 호남사이의 지역감정이 선거이슈로 떠오르기 시작했다.여당의 지역감정 촉발에 김후보도대구 유세에서 “대중이가 대통령 자격은 있으나 전라도 출신이라서 못찍겠다면 그런 표는 안 받아도 좋다.63년 선거에서 박대통령은 전라도 지지표로 당선됐다“고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이후 김대중 후보는 73년 동경 납치에서부터 80년 내란 음모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미국으로 망명하는 등 엄청난 정치적 박해를 받게된다. 3선개헌을 하면서까지 힘겹게 권력을 연장한 박대통령은 드디어 72년 10월17일,그나마 유지되고 있던 헌정의 초시계를 원점으로 되돌리고 만다.이른바‘10월 유신’.비상계엄하에 국회는 해산되고 정치활동이 중지되는 헌정중단의 사태가 빚어졌다. ○85년 총선 신민당 돌풍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그해 12월15일 실시됐다.통대의원 후보자 선정은 해당지역의 경찰서장과 시장 군수,정보책임자 등으로 구성된 지역협의회의 자료를 토대로 관계당국이 결정했다. 72년 12월 23일 장충체육관.통대의원 2천359명 중 단 2표의 무효표를 제외한 전원이 박정희 대통령을 8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이후 통대의원들은 9대 박정희,10대 최규하,11대 전두환 등 세번이나 체육관 대통령 선출 거수기 노릇을 해야했다.79년 10월 26일.유신의 심장은 내부의 총격으로 무너졌다.이어 80년 ‘서울의 봄’은 신군부의 5·17확대 계엄과 함께 얼음장 밑으로 사라졌다.그해 8월 27일 통대의원들은 총투표자 2천525명 가운데 2천524명이 단독 후보인 전두환에게 찬성표를 던졌다.그나마 한명은 반대가 아닌 기권이었다.100% 찬성은 공산국가에서나 벌어지는 투표행태만은 아니었다는 기록을 남기게 됐다. 내연하던 민주화 바람은 85년 2월 12일 제12대 총선에서 ‘신민당 돌풍’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창당한지 불과 한달도 안된 김영삼과 김대중 공동지분의 신민당이 지역구 50석을 얻었고 전국구까지 합치면 67석의 제1야당으로 부상했다.다음날 조간신문들은 ‘신당태풍’‘신당바람’이라는 제목으로 머릿기사를 장식했다.민정당은 놀랐고 신민당은 환호했으며 여당의 1중대 2중대로 불리우던 민한당과 국민당은 침통했다.워싱턴타임즈,뉴욕타임즈,르몽드 등 외신들은‘신민당의 부상은한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대변한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이런면에서 ‘2·12총선’은 억눌려 있던 국민들이 깨어나고 있음을 보여주었고 또 ‘체육관 대통령’ 선출제도의 변화를 감지케하는 전환점이었다.멈춰버린 역사의 시계바늘이 제자리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이 역사의 시계바늘은 드디어 87년 정권이 국민에게 항복한 6·29선언으로 직선제대통령선거가 부활됐다.87년,92년 대선을 거쳐 우리 선거사는 97년에 이르러서야 여야정권교체라는 최초의 경험을 갖게된다. ◎선거관리 산증인 김유영 선관위 사무총장/“97년에 와서야 선거의식 성숙”/집권자의 확고한 공명의지가 관건 남조선 과도정부의 군정장관이었던 윌리엄 에프 딘 소장은 1948년 3월3일자 행정명령으로 ‘국회선거위원회’를 설치하고 위원 15명을 임명했다.이승복,백인제,이갑성 등이 15인 위원이었다.이어 치러진 5·10 총선이 대한민국최초의 선거였고 선거관리 역사의 시작이었다. 제2공화국은 헌법상 독립기관인 중앙선거위원회 필요성을 제기했다.이에따라 60년 6월17일 개별법률로서 선거위원회법이 공포됐고 헌법상 독립기관인 중앙선거위원회가 설치됐다.63년 1월 16일 선거위원회법은 선거관리위원회법으로 대체됐고 닷새후인 21일 역사적인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창설됐다.초대 위원장에는 사광욱대법관이 취임했다. 63년 창설때부터 지금까지 선거관리의 현장을 한번도 떠난적이 없는 김유영 중앙선관위사무총장은 현대 선거관리사와 개인사의 궤적을 같이한다.김총장은 “정부여당에 의한 조직적인 3·15 부정선거는 결과적으로 4·19와 5·16으로 이어져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았다”고 선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김총장은 “3·15 이후 60년대 선거는 조직적인 정부의 부정선거는 없었지만 탈법·관권·금권선거가 부정적인 선거풍토로 자리잡았다”면서 “당시는 여야 야나 가릴것 없이 선거법이 있어도 교통법규 정도로 여기는 경시풍조가 만연했다”고 당시의 선거풍토를 회고했다. 김총장은 88년 치러진 여소야대 4당체제하에서의 동해 국회의원보궐선거가 선거문화 발전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고 보고있다. 그는 “선거 사상 최초로 4당 국회의원후보와 사무장 전원이 고발되고 후보매수로 한 정당의 사무총장이 구속된 혼탁상은 선거풍토 개선의 계기를 제공했다”고 말했다.이후제정된 통합선거법에 따라 치러진 97년 12월 19일 대선은 선거사상 유례없는 공명선거로 평가했다.김총장은 “92년과 97년 대선을 제외하고는 한번도 부정선거 시비가 없었던 적은 없었다”면서 “97년 대선은 정당과 후보자가 결과를 깨끗이 승복했고 국민들도 자유스런 분위기에서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했다“”고 말했다.김총장은 “국민들의 선거의식은 이제 성숙단계에 접어들었다”면서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집권자의 확고한 공명선거의 의지”라고 강조했다.
  • 전임강사 미끼 1억 사취

    서울 관악경찰서는 15일 대학 전임강사 자리를 알선해 주겠다고 속여 1억여원을 가로챈 백인기씨(65·서대문구 창청동)를 사기 혐의로 구속했다. 백씨는 96년 7월 주식투자를 하면서 알게 된 D증권사 여직원 이모씨(30)에게 자신을 서울 Y대 명예교수라고 속인 뒤 “박사논문을 준비중인 이씨의 남편에게 지방 S대학 전임강사 자리를 알선해 주겠다”며 알선비 명목으로 지난해 12월까지 13차례에 걸쳐 1억8백여만원을 가론챈 혐의를 받고 있다.
  • “신장이식 면역억제제/한국인에 조금 써야 효과”

    ◎한양대병원 강종명 교수 연구/약물 체외배출 4시간 걸려… 백인의 2배/서양인과 동량투여땐 당뇨병 등 부작용 신장이식 수술을 받고 나면 거부반응을 막기 위해 평생 ‘면역억제제’를 복용한다. 국내에서 신장이식 수술을 받은 생존자는 5천324명(96년말 현재).통계에 잡히지 않은 사람까지 치면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에게는 지금까지 나이나 체격에 관계없이 서양인이 복용하는 똑같은 양의 면역억제제를 투여해 왔다. 하지만 면역억제제의 효과는 인종별로 다르기 때문에 한국인은 서양인보다 적은 양을 써야 부작용을 줄일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한양대병원 강종명 교수(신장내과 과장)는 최근 ‘면역억제제’ 가운데 하나인 ‘프레드니솔론(prednisolone)’을 환자 23명에게 정맥주사한 결과,한국인 환자의 반감기(약이 체외로 배설돼 반으로 줄어드는 시간)는 평균 4.08시간으로,흑인 3.07∼3.4시간,백인 2.1∼2.93시간보다 1시간 이상 긴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한국인 신장이식 환자는 이처럼 약효가 남아 있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길기 때문에 서양인들보다 적은 양을 써도 면역억제제가 일으킬 수 있는 당뇨병,백내장을 비롯,얼굴이 달처럼 동그래지고(월상안),뼈가 약해지거나 여드름이 생기는 부작용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신장이식술을 받은 사람들은 수술 뒤 면역억제제를 처음 100㎎을 복용하고 퇴원할 때쯤 20㎎,이후 7.5→5㎎식으로 줄여서 평생 복용하고 있다. 강교수는 “이번 연구결과는 장기적으로 검증이 필요하지만 지금처럼 서양인 기준에 맞는 양을 일률적으로 투여하는 방법보다는 인종별뿐만 아니라 간의 기능 등 개인차를 고려해 적정량의 면역억제를 투여해야 부작용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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