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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상연 특파원 워싱턴 저널] ‘파티맘’ 앤서니 파문 백인이라 관심?

    퀴즈 하나. 다음 중 당신이 뉴스에서 접한 아이 이름은? ①아자 ②카이아 ③태티아나 ④브리트니 ⑤케일리 대부분 케일리를 꼽을 것이다. 케일리는 2008년 ‘파티맘’ 엄마 케이시 앤서니에게 살해된 것으로 검찰에 간주돼 미국 사회가 경악했고, 최근 무죄 평결이 나오자 다시 발칵 뒤집혔다. 그런데 케일리가 죽은 그 해 워싱턴DC에서는 더욱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었다. 36세의 흑인 엄마 배니타 잭스가 자신의 딸 아자(5), 카이아(6), 태티아나(11), 브리트니(16)를 한꺼번에 살해한 것이다. 같은 친자 살해 사건이었지만, 대중과 언론의 관심은 천양지차였다. 앤서니 사건은 신문과 잡지를 도배했고 황금시간대 방송 뉴스를 장악했으며, 쟁쟁한 전문가들의 논쟁거리가 됐다. 반면 잭스 사건은 언론으로부터 외면당했고, 논란거리가 되지 못했다. 200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케일리를 찾기 위해 나섰지만, 4명의 흑인 소녀를 찾겠다고 나선 자원봉사자는 없었다. 구글에서 앤서니 사건은 7300만건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했지만, 잭스 사건은 2만 6000건의 조회에 그쳤다. 이유는 무엇일까. 인종과 계층적 편견 때문이 아닐까. 지난 10일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미디어 비평가들은 “만약 케일리가 흑인이었다면 사건은 결코 관심을 끌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 케일리와 4명의 흑인 소녀들은 프로필이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케일리는 백인에 중산층이었고 화려한 디즈니월드 근처에 살았다. 반면 잭스의 딸들은 흑인에 저소득층이었으며 마약과 범죄에 둘러싸인 슬럼가에 살았다. 앤서니 사건은 법원 앞에 시민과 언론이 몰려 재판 추이에 관심을 쏟았다. 반면 잭스 사건은 재판 결과(징역 120년 선고)가 나왔을 때 일부 지역 언론만 법원을 찾았고, 중앙 언론은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 LA폭동 기폭제된 로드니 킹, 연이은 체포의 나날

     19년 전 ‘LA 폭동’의 기폭제가 됐던 로드니 킹(46)이 또다시 경찰에 체포됐다.  12일(현지시간) 오후 미국 남부 캘리포니아 모레노밸리 인근 프레데릭 거리를 지나가던 킹이 음주운전 혐의로 체포됐다고 모레노밸리 경찰이 밝혔다. 경찰은 1994년산 미쓰비시 차량을 몰고 가던 킹이 체포되기 전 여러 차례 신호를 위반하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1991년 LA에서 과속 운전을 하다 백인 경찰 4명에게 구타를 당했으며, 이 장면을 담은 동영상이 KTLA 방송을 통해 공개되면서 흑인 인종차별의 상징적 인물이 됐다. 이듬해 폭행 경찰이 무죄평결을 받으면서 격분한 흑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4일간 55명이 숨졌다.  현재 캘리포니아주 리알토에 거주하고 있는 킹은 LA폭동 이후 가정 폭력과 약물 남용 등 범법행위로 여러 차례 체포되는 수난의 나날을 이어왔다.  1991년 5월에는 할리우드에서 매춘부와 함께 있다가 그를 발견한 경찰을 승용차로 치려 한 혐의로 체포됐다. 하지만 기소되지는 않았다. 1992년에도 음주운전으로 체포됐으며, 이듬해인 1993년에는 LA 도심의 한 담벼락을 차로 들이받았다. 당시 혈중 알코올농도가 법적 기준치의 2배가 넘어 보호관찰 대상이 되면서 알코올 중독자를 위한 재활프로그램에 들어갔다.  그는 2년 뒤 펜실베이니아에서 또다시 음주운전으로 체포됐으나,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같은 해에는 승용차에 함께 있던 부인을 때리고 맨땅에 쓰러뜨려 90일간 징역을 살기도 했다.  그는 2001년 환각제의 일종인 PCP를 복용한 혐의로 체포됐으며, 2005년에는 자신의 딸과 전 여자친구를 위협해 또 수갑을 찼다. 지난해에는 LA 경찰 폭행 재판 당시 배심원이었던 여성 신시아 켈리에게 청혼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굿모닝 닥터] 한여름의 光노화

    한국인 등 동양인 피부는 서양인에 비해 진피가 두껍고 멜라닌 색소에 의한 보호효과가 크다. 그래서 백인보다 잔주름이 적고 더 젊어 보인다. 반면 백인보다 기미와 색소 침착의 빈도가 높은 특징도 있다. 이 기미와 색소침착이야말로 ‘빛의 그림자’라 할 수 있다. 확실히 햇볕은 건강에 중요한 환경요인이다. 문제는 지나친 햇볕 노출이다. 화상은 물론 광민감성 피부염, 피부 노화와 피부암 등이 과도한 햇볕 노출에서 비롯된다. 햇볕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문제는 자외선이 만든다. 바로 ‘광노화’(Photoaging)로, 주로 여기에서 미세주름·반점·색소침착·기미 등이 생성된다. 자외선에 오래 노출된 피부는 건조하고 거칠며 색소침착에 주름도 굵고 깊다. 그렇다고 대책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런 광노화도 얼마든지 늦추거나 치료할 수 있다. 가장 좋은 예방법은 일광 노출을 피하는 것이다. 특히, 자외선이 강한 낮 12시부터 오후 2시 사이에는 외출을 삼가되 불가피하다면 외출 전에 미리 SPF15 이상의 자외선 차단제를 꼼꼼히 발라주는 게 좋다. 그러나 이미 진행된 광노화나 자연노화라면 약이나 화장품보다 전문적인 치료를 권하고 싶다. 최근 들어 수술 없이 주름을 치료하는 방법들이 속속 제시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치료법이 ‘울세라’다. 울세라는 주름제거 수술인 안면거상술과 동일한 SMAS층에 작용하는 최초의 비수술적 치료로, 고강도의 집속초음파를 깊은 근육층까지 조사해 효과적으로 피부 탄력을 개선하고, 잔주름과 골깊은 주름을 치료한다. 또 피부 타이트닝 효과도 좋아 인체 어느 부위라도 뛰어난 탄력 회복력을 보인다. 물론 치료보다 좋은 약은 건강한 생활습관이다. 밝은 생각과 함께 단백질이 풍부한 식품, 보습에 효과적인 견과류와 생선, 과일에다 규칙적인 식사, 적당한 운동과 숙면이 무엇보다 좋은 명약임을 기억하자. 이상준 아름다운나라 피부과·성형외과 원장
  • [씨줄날줄] 여론조사/곽태헌 논설위원

    현대적 의미의 여론조사는 미국에서 발달했다. 대통령선거 결과를 예상하는 모의투표가 시초였다. 리터러리 다이제스트지(誌)의 여론조사가 특히 유명했다. 리터러리 다이제스트는 1916년부터 전화와 자동차 등록명부를 이용, 많은 모의투표 용지를 보낸 뒤 이를 회수해 결과를 예측했다. 하지만 1936년 대통령선거 때 결과와는 정반대의 예측결과를 발표해 오점을 남겼다. 당시 갤럽 등 신흥 여론조사 기관은 비례할당법에 의한 소수 표본조사를 도입해 정확한 예측결과를 내놓았다. 리터러리 다이제스트가 사용했던 많은 표본이 중요한 게 아니라, 표본의 선택방법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일깨운 사건으로 기록된다. 이를 계기로 여론조사 기법은 보다 발달하게 됐다. 요즘에는 연령, 지역, 소득, 성별 등에 따른 정교한 여론조사가 일반화됐지만 치밀하게 한다고 해도 결과는 정확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선거를 치르고 나면 여론조사 결과가 엉터리였다는 게 드러나고 있지만 여론조사의 원조인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1982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였던 흑인인 토머스 브래들리는 사전 여론조사와 출구조사에서는 앞섰으나 실제 결과는 딴판이었다. 백인 유권자 중 일부가 백인 후보를 지지한다고 하면 인종적 편견을 가진 것처럼 보일 수 있어 거짓 응답을 했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사회적 문제, 정책, 쟁점 등에 관한 입장을 알기 위해서도 여론조사를 자주 이용한다. 의미 있는 것도 많지만, 하나마나한 것도 적지 않다. 표본에 문제가 있는 경우도 있고, 설문 자체에 잘못이 있는 경우도 있다. 정교하게 해도 어려운 게 여론조사인데, 애초 표본이나 설문에 문제가 있다면 신뢰가 높을 수 없다. 정부 쪽이든, 정부에 비판적인 쪽이든 마찬가지다. 그제 한 신문은 “국가재정을 투입해 대학등록금을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비율이 74.5%라고 보도했다. 공짜를 싫어할 사람은 없다. 돈이 많아 ‘돈병철’로 불렸던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은 캐디에게 넉넉한 팁을 주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골프장에 떨어진 깨끗한 골프 티를 주울 때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돈 많은 재벌도 공짜는 마다하지 않는다. “국가재정을 투입해 등록금을 낮추면 매년 가구당 평균 50만원씩 세금을 더 내야 하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결과는 어떨까. 군 입대를 앞둔 남학생에게 “군대 가는 것을 찬성하십니까.”라고 묻는다면 그 결과는 불문가지(不問可知)다. 곽태헌 논설위원 tiger@seoul.co.kr
  • 美 동화작가 “입양자녀 눈높이 맞춰 한국문화 소개”

    美 동화작가 “입양자녀 눈높이 맞춰 한국문화 소개”

    한국인 어린이 2명을 입양한 미국인 부모가 자녀들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도록 돕기 위해 한국 문화를 소개하는 책을 펴냈다. 화제의 주인공은 지난 4월 ‘한국에 관한 모든 것’이라는 책을 펴낸 17년 경력의 초등학교 교사 출신 앤 마틴 볼러(55).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 인근에 사는 볼러는 한국에서 각각 생후 5개월 때 입양한 세라(19·여)와 제이컵(13)을 포함해 모두 5명의 자녀를 둔, 어린이 책을 쓰는 전업 작가다. 이 책은 볼러의 14번째 작품으로 총 64쪽 분량이다. 한국의 역사와 종교, 전래동화, 각종 놀이와 전래동요, 전통의상과 음식, 명절 풍습 등을 친근한 삽화와 함께 소개하고 있다. 특히 제기나 연, 탈 등 놀이기구 만드는 법과 불고기와 김치, 김밥 등 한국 요리 조리법까지 수록하고 있어 친밀감을 더한다. 세밀한 기획과 친근한 삽화 등으로 완성도가 높아 아마존닷컴과 반스앤드노블 등 미국 온라인, 오프라인 서점에서 인기가 높다. 볼러는 26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세라와 제이컵을 입양할 때는 이미 3남매를 두고 있어 어떻게 길러야 할지 걱정하지 않았다.”면서 “하지만 친구들이 눈과 머리카락이 왜 갈색 또는 검은색인지, 다른 동양계 아이들처럼 수학은 잘하는지 등을 묻는다는 세라의 말을 듣고 이들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주변에서는 세라와 제이컵이 김치와 젓가락 사용법 등 한국 문화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어 이런 것들을 알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에서 책을 쓰게 됐다. 그래야만 아이들이 백인사회와 한국계 사회 모두에서 편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볼러는 두 아이들이 한국 문화에 친근해지고 한국에 대한 뿌리를 잃지 않도록 어릴 때부터 ‘한국의 친구들’이라는 주말학교에 보냈다. 이번 책을 기획한 2년 전부터는 한인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도 하고 아이들과 함께 한국을 두 차례 방문했다. 이번 책은 미술에 관심이 많은 제이컵이 삽화에, 요리에 관심이 많은 세라가 한국 음식 부분 제작에 참여한 가족들의 공동작품이라고 소개했다. 김균미기자 kmkim@seoul.co.kr
  • ‘한국학자’ 마이클 페티드 뉴욕주립대 교수, 한국을 말하다

    ‘한국학자’ 마이클 페티드 뉴욕주립대 교수, 한국을 말하다

    “‘엄마를 부탁해’ 같은 현대소설만 가능성이 있는 게 아닙니다. ‘홍길동전’ 같은 옛소설도 얼마든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세계의 고전이 될 수 있습니다.” ‘한류’ 바람이 거세다. K팝이 유럽을 뒤흔든 사이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로 대표되는 한국 소설은 서풍을 타고 미국으로 건너가 반향을 일으켰다. 한국 고전문학을 전공한 마이클 페티드(52) 미국 빙엄턴 뉴욕주립대 교수는 누구보다 한류를 주의 깊게 바라본다. 그는 미국 학생들을 상대로 문학 외에 한국사와 대중문화 등도 가르치고 있다. 다음 달 6일부터 나흘간 열리는 ‘한국국제교류재단 어셈블리(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그를 서울 상암동 숙소에서 만났다.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가 미국에서 호평 받고 있다고 한다. 뉴욕에서 한국 문학의 인기를 실감하나. -물론이다. 문화적 ‘한류’와 한국문학은 세계적 유행을 탔고 뉴욕도 예외가 아니다. 학생들도 한국 문학에 익숙해져 가고 한국 소설이나 영화가 나오면 찾는 이가 늘었다. 소녀시대, 원더걸스, 비, 보아 등 K팝도 호응을 얻는다. 한국 문학을 대상으로 한 문단의 비평도 활발해졌고 우리 대학 도서관에 한국소설 번역본이 갈수록 늘고 있다. 미국 대학생들은 문학 작품을 좀처럼 안 읽는데 수업시간에 100쪽 넘는 한국 소설을 주면 단번에 읽는다. →한국 문학의 주요 소비층은 유학생이나 교포 아닌가. -물론 유학생이나 재미교포가 먼저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들이 학교 등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백인, 흑인 등 ‘순수’ 미국인이다. 입소문을 통해 전파된다. 2008년 우리 대학 한국어 과정의 전공자 95%가 한국계였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 1, 2학년은 거의 다 백인과 흑인, 다른 외국인들이다. →미국에서 신경숙 외에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한국 작가가 있나. -김영하 등 젊은 작가들에 대한 평가가 좋다. 김영하는 지난해 미시간에서 만나기도 했는데 젊은층의 삶에 대한 이해가 뛰어난 작가다. 예컨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I have right to destroy my self) 같은 소설이 좋은 평가를 받는다. →동양적 정서를 담은 한국 소설이 서양에서 통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미국인이나 한국인이나 살아가면서 겪는 고난은 똑같다. 부모에 대해 느끼는 애틋함, 대학생이 느끼는 혼란 등 피차 같은 고민을 한다. 미국 대학생도 등록금 걱정을 하고 사랑 때문에 힘들어하고 높은 실업률 탓에 백수가 될까 봐 스트레스를 받는다. (삶의 진실을 찾아 나선 대학생의 방황을 그린) 강석경 작가의 소설 ‘숲 속의 방’ 같은 작품에는 미국 대학생들이 느끼는 것과 같은 문제의식이 녹아 있다. 6년 전 현대문학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이 소설을 읽혔는데 반응이 좋았다. →한국 소설의 세계화를 위해 가장 시급한 일은 무엇인가. -좋은 팀을 이뤄 번역하는 일이 중요하다. 한국어 원어민 1명과 영어 원어민 1명이 협동해 번역해야 말맛과 느낌을 살릴 수 있다. 세심하게 작업하지 않으면 뜻만 통할 뿐 느낌을 살릴 수 없다. 그런데 여전히 혼자 일하는 번역가가 많다. 내 친구인 (대표적 한국문학 번역가) 브루스 폴톤 브리티시컬럼비아대(UBC) 교수는 한국인 아내 윤주찬씨와 함께 번역한다. 그래서 질이 높다. 나도 한국인인 내 아내와 함께 고전 ‘운영전’을 번역했다. →한국 기관들의 번역 지원 사업에 불만은 없나. -번역을 지원해 주는 기관이 3~4곳 있다. 그런데 번역작품 선정위원이 모두 한국인이다. 서양사람도 들어가야 한다. 현지에서 통할 작품을 선정하는 일에 현지인의 시각이 들어갈 필요가 있다. →한국인들은 노벨 문학상에 대한 갈증이 심하다. 왜 여태 못 받았다고 생각하나. -노벨 문학상은 상당히 정치적이다. 아시아에서는 대표적으로 일본이 2명의 노벨상 수상 작가를 배출했는데 그 배경에는 태평양전쟁이라는 특별한 상황이 있었다. 이 전쟁을 아는 서양인들이 일본 소설에 담긴 메시지를 읽고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물론 (노벨상 수상자인) 일본의 오에 겐자부로 같은 작가는 천재다. 하지만, 한국에도 그에 못지않은 작가들이 있다. →한국인이 수상한다면 누구일까. 고은 시인 수상 가능성은 매년 점쳐지는데. -내 생각에는 시인보다 소설가가 더 가능성이 있다. 요즘 사람들이 시를 많이 읽지 않는 데다 시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그 나라의 문화를 잘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서양인들에게 어려운 일이다. 특정 작가를 꼽기 어렵지만 앞서 말한 김영하 같은 작가가 후보가 될 수 있겠다. 서양인들이 한국 소설을 읽고 ‘틱’하는 (깨달음의) 순간이 오면 노벨상도 같이 찾아올 것이다. →한국 고전문학이 전공이다. 우리 고전이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세계의 고전이 될 가능성이 있나. -(될 수 있다고) 100% 확신한다. 작품 머리글에서 역사적 배경을 잘 설명하고 번역만 잘한다면…. 한국 고전에는 홍길동전이나 임경업전 같은 영웅물, 구운몽 같은 판타지물, 옛 여성들의 어려운 삶이 담긴 규방소설까지 장르가 다양하다. 예컨대 아랍권 여성들이 규방소설을 보면 어떨까? 감정이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고전은 한문장 한문장 깊이가 깊다. →K팝의 성공 비결은 어디에 있다고 보나. -화려한 퍼포먼스 덕분인 것 같다. 한국 댄스 가수들이 무대에서 공연하는 걸 보면 라스베이거스에 와 있는 것 같다. 중국의 후한서나 삼국지를 보면 고대 한국인들도 춤과 음악, 술을 즐겼다고 나와 있다. 그만큼 특유의 ‘끼’가 있다는 것이다. 또 한국 사람들은 노래방 가서 부끄러움 없이 연습한다. 한국인 피가 섞인 내 딸은 고작 5살인데 노래를 잘한다. →주제를 바꿔 보자. 왜 한식은 세계화에 어려움을 겪나. -(전략적) 초점을 잘 맞추지 못하는 것 같다. 예컨대 영부인 김윤옥 여사가 몇 년 전 뉴욕에서 파전을 만들며 홍보했다. 파전은 맛있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이 아니다. 떡볶이도 엑스포까지 열어 수출에 열을 올리는데 이 또한 대표 음식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식 바비큐도 미국에서 인기는 있지만 채식 위주로 구성된 전통적 한식과는 차이가 있다. 일본의 초밥, 인도의 커리처럼 한국 하면 떠오르는 ‘얼굴’을 만들어야 한다. →당신이 생각하는 한국의 대표 음식은 뭔가. -‘밥상’ 그 자체다. 한국식 밥상에는 밥, 국, 김치, 마늘, 들기름 등이 한꺼번에 올려지고 다양한 맛과 냄새, 질감 등이 혼합돼 음양오행의 조화를 이룬다. 주의할 점은 음식을 너무 현지화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현지화가 일정 부분 될 수밖에 없지만 원래 맛 그대로를 찾는 서양인이 많다. 태국음식도 매우 맵지만 원래 맛 그대로 미국에서 판매해 인기를 얻는다. 미국 사람들이 일본식 생선회를 처음 접했을 때 ‘날생선을 어떻게 먹느냐.’고 했지만 지금은 잘 먹는다. 글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사진 손형준기자 boltagoo@seoul.co.kr
  • “OJ 심슨, 전처 내가 죽였다”…보도 진실 논란

    지난 1994년 미국사회를 뒤흔들었던 ‘OJ 심슨 사건’이 다시한번 미국사회를 강타하고 있다. 지난 23일(현지시간) 미국 연예지 내셔널 인콰이어러는 “심슨이 조만간 오프라 윈프리가 진행할 프로그램에서 전처인 니콜 브라운 심슨을 살해 한 것은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또 “심슨은 니콜이 자녀 앞에서 마약을 복용하고 다른 남자를 끌어들여 화가나 칼로 그녀를 찔렀다고 인터뷰 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내셔널 인콰이어러의 이같은 단독 보도는 오보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O J 심슨을 인터뷰를 했다고 언급된 프로듀서가 “보도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부정했기 때문. 해당 보도를 인용한 다른 매체의 기사도 속속 지워지고 있다. 1994년 사건 발생 직후 ‘O J 심슨 사건’이 미국사회에 던진 화두는 컸다.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심슨은 화려한 변호인단을 구성, 결국 무죄를 받아냈기 때문. 당시 변호인단은 “수사 경찰이 백인우월주의자” 라며 인종 차별을 강조하며 흑인 위주의 배심원단을 구성하는데 성공해 미국식 재판제도에 대한 회의론도 불거졌다. 한편 OJ심슨은 현재 2008년 라스베이거스에서 무장 강도를 저지른 혐의로 네바다주 러브록 교정센터에서 복역 중이다. 서울신문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6·25전쟁 당시 1사단장 백선엽 장군

    [김문이 만난사람] 6·25전쟁 당시 1사단장 백선엽 장군

    톨스토이가 쓴 명작 ‘전쟁과 평화’를 잠시 기억해본다. 마지막 부분이다. 주인공 안드레이 청년이 죽어가면서 ‘시베리아의 하늘도 파랗구나’라고 읊었다. 평화로운 파란 하늘을 진작 봤으면 전쟁을 할 일도 없을 텐데 죽어갈 때 누워서 하늘을 보니 ‘왜 피 흘리면서 전쟁을 했을까’라는 물음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6·25전쟁은 왜 했을까. 평화를 위해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했고, 세월이 지난 지금도 눈물겹도록 아프게 하는 역사를 왜 만들어야 했을까. 참으로 비통하고 영원히 기억을 할 수밖에 없는 우리 민족의 큰 상처이기에 해마다 6월이면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다. 1950년 6월 25일 아침 7시였다. 젊은 장교의 일성은 이랬다. “사단장 각하, 전방에서 적이 전면적으로 침공해 왔습니다. 개성이 대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개성은 벌써 점령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서울과 개성 등 전방을 지키는 보병 제1사단 작전참모 김덕준 소령의 숨가쁜 목소리를 들은 것은 당시 백선엽 1사단장이다. 우리 역사에서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을 알리는 제1보였다. 백선엽 장군은 시흥에 있던 육군보병학교에서 10일 전부터 3개월 과정의 고급간부교육을 받고 있던 중 급거 귀대하여 1사단을 지휘했다. 이후 낙동강까지 후퇴한 1사단은 한국군 부대 중에서 유일하게 미1군단에 배속돼 지원 나온 미군 2개 연대와 함께 경북 칠곡의 다부동 전투를 치렀다. 전투 중 한국군 병력의 후퇴와 무단이탈이 심해지자 함께 다부동을 지키던 미군 27연대장 마이켈리스(Michaelis) 대령이 “전선 좌측의 한국군 부대가 무단 이탈하고 있다.”며 다급하게 전황을 알려왔다. 백선엽 장군은 후퇴하는 국군을 막으며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다. 저 사람들(미군)이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이럴 순 없다. 내가 앞장설 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도 좋다.”며 싸울 것을 호소했다. 이후 1사단은 평양 입성을 가장 먼저 했다. 백선엽 장군은 최근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라는 제목으로 6·25 전쟁 당시 1128일의 기억을 책으로 펴냈다. 6·25전쟁 얘기만 나오면 누구보다 또렷이 기억하는 살아 있는 역사로 여긴다. 6·25전쟁 61주년을 앞두고 지난 20일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에서 백선엽 장군을 만났다. 6월이어서 그런지 강의를 해 달라는 손님들이 분주히 드나들었다. 약속 시간보다 20분 뒤에야 자리에 마주 앉았다. 1920년생이면 우리 나이로 92살. 그런데도 전쟁의 기억은 분명했다.. 차 한 잔을 마시더니 백 장군이 “고향이 어디요.”라고 물었다. 제주도라고 답을 드렸다. 그러자마자 나오는 얘기는 이러했다. “제주도 무척 많이 갔지. 6·25때 모슬포에 보충대가 있었어. 16주 동안 교육을 시키고 전쟁터에 보냈거든, 그래 육군 제1 훈련소야. 20살 전후의 청년들 10만명 정도가 훈련을 받았어, 내 동생(백인엽 장군)이 훈련소장도 했고. 태풍도 많이 왔어. 미군부대에서 지원 받은 천막을 치고 훈련했지. 하루에 상륙함정(LST) 두 척이 오고 가면서 훈련병들을 실어 날랐어. 그 병사들이 전쟁터에 많이 죽었어.” 백 장군의 눈이 잠시 감긴다. 그들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전쟁상황에서 지금의 5~6주 교육보다 더 긴 16주 교육을 했던 이유에 대해 물었다 . “미군의 2차대전 방식을 그대로 따랐거든. 미군은 100개 사단이 있었는데 대부분 16주 동안 훈련을 받고 전쟁터에 보내졌어. 2차대전때…. 제주도 훈련소는 일제때 썼던 비행장이야, 그러니까 일본군들이 중국의 난징(南京) 폭격을 위한 중간 기지였지. 훈련소에는 미군 고문관들이 많았어.” 백 장군은 왜 제주에 자주 갔을까. “내가 육군참모총장을 했었거든. 훈련소에 물이 부족했어. 그걸 해결하기 위해 LST나 미군 비행기를 이용해서 여러 번 갔어. 아마 수십 차례 될걸. 또 동생이 1년동안 훈련소장으로 있었거든. 장도영 장군도 훈련소장을 했었지.” 백 장군은 잠시 4·3사건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1948년 4월 3일이야. 내가 부산 3여단 참모장을 했어. 제주 관할이니까 부대 시찰차 갔었지. 그때는 제주읍이야. 4월3일 아침에 비행기를 타려고 하는데 김익열 연대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가 왔어. 김달삼(金達三)이 이끄는 폭도들이 제주지역 11군데 지서를 습격했다고 말야.” 잠시 관련 자료을 들여다본다. 김달삼은 사회주의 혁명가로 제주 4·3 사건을 주도한 남조선로동당원이다. 그의 본명은 이승진이며, 고향은 대구. 일본에서 중학교와 대학을 나왔다. 1945년 1월 일본에서 강문석의 딸 강영애와 결혼했으며 김달삼이란 이름은 원래 강문석이 쓰던 가명이다. 1946년 말 제주도 대정중학교 사회과 교사로 재직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쳤다. 그는 교사로 재직 중에 남로당 대정면 조직부장을 맡았으며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책이자 군사부 책임자가 됐다. 화제를 다시 돌려 6·25 전쟁때 제1보를 보고한 김덕준 소령에 대해 물었다. “그날 아침 7시였어. 지금도 그 목소리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 전화를 받는 순간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북한이 탱크와 전투기를 갖고 있는거 알았거든. 전쟁을 대비해야 한다는 것도 수차례 얘기했고…” 백 장군은 이 대목에서 “이승만 대통령도 미군에게 북한의 남침 예상을 얘기했고 나도 미군 고문단과 만날 때마다 전투기와 탱크, 대포를 달라고 수차례 말했다.”고 술회했다. “우리야 그때 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지. 미군에게 그렇게 여러번 얘기해도 귀담아 듣지 않았어. 희생을 줄일 수도 있었는데 말야. 북한군은, 나중에 노획문서를 보니 깨소금까지 준비할 정도로 매우 치밀하게 전쟁을 계획했어.” 백 장군이 얘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북한군이 왜 6월 25일을 택했는지 알 수 있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북한군은 남한에서 먹을 것이 많은 계절인 6월부터 9월까지를 정했지. 3개월이면 부산까지 싹 쓸어버릴 작정이었어. 이 시기는 들판에 가면 먹을 것들이 많거든. 전쟁에서 먹거리는 매우 중요해. 북한은 추수때까지 전쟁을 끝낼 계획을 짰어.” 그렇다면 우리 군사들은 무엇을 먹고 싸웠을까. “낙동강까지 후퇴하면서 농협창고에서 쌀을 얻었고 밭에 가면 파와 배추가 있었지. 그걸 먹었어. 또 우리 선량한 아주머니들, 국민들이 갖다주는 음식도 먹었어. 아주 훌륭한 분들이야. 다부동 전투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도 우리 주민들이 갖다주는 음식이 있었기 때문이지.”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북진할 때는 어땠을까. “김일성 군대는 낙동강에서 완전히 녹았어. 북진을 하면서는 시장에서 먹을 것을 사 왔고 군에서 나오는 건빵을 먹었지. 고지 전투에서는 배가 고파 이탈하는 군인들도 더러 있었어. 북진할 때는 하복을 입었는데 나중에 동복으로 갈아 입었고…. 북한 주민들이 우리를 보더니 많이 환영했어. 먹을 것도 주고….” 백 장군은 평북 운산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과 맞닥뜨린다. “중공군은 장개석 군대 출신들의 최정예 부대야. 일본군과 10년을 싸운 군사들이었지. 전쟁경험이 아주 많아. 그런 군사 100만명이 압록강을 넘어와 매복을 하고 있었으니 우리 군이 당할 수밖에 없지. 그래도 우리 1사단을 덜 당했어. 운산 일대에 중공군 30만명이 매복하고 있다는 것을 하루 전에 알 수 있었지. 하루 밤새 싸우다가 도저히 안 되더라구. 결국 후퇴하고 말았지만….” 그러면서 백 장군은 북한군의 변화상에 대해 여러 번 강조했다. “남북한은 여전히 휴전 상태이며 두 세대가 지나는 동안 북한은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120만명의 지상군과 20만명의 특공대를 갖고 있다.”면서 “지난 61년 동안 북한은 청와대도 습격하고 천안함을 폭침하고 연평도를 포격하는 등 별 장난을 다했다.”고 말했다. “우리 젊은이들이 경계를 잘해야 돼. 대부분 고등학교 이상 출신들이 군대를 가잖아. 자원이 아주 훌륭해요” 백 장군은 군사영어학교 출신이다. 전체 110명이었는데 지금 만나는 동기들은 겨우 15명 내외에 불과하다. 건강이 어떠냐고 했다. “아픈 데 없어. 병원도 안 가. 동기들과 만나 옛날 얘기하는 재미로 살고 있어.” 맥아더 장군이 얘기했다.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 백 장군은 “너무 오래 살았어.”하면서 껄껄 웃는다. 편집위원 km@seoul.co.kr >> 백선엽 그는 누구인가 1920년 평안북도 강서군 덕흥리에서 태어났다. 1940년 3월 평양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교사로 재직하다가 만주 봉천(奉天) 군관학교에 진학하면서 군인의 길을 걸었다. 1942년 12월 제9기로 졸업하고 견습군관을 거쳐 1943년 4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했다. 해방 직후에는 잠시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1945년 2월 월남했다. 이후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학했고, 1946년 2월에 임관했다. 그해 1월 창설된 국방경비대에서 제5연대장을 맡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국방경비대가 정식으로 국군으로 재편되면서 제5연대장과 육본 정보국장을 거쳐 1950년 4월에 개성을 관할하는 국군 1 보병사단 사단장(당시 계급 대령)으로 부임했다. 1951년 겨울에는 지리산의 빨치산 소탕을 위한 ‘백(白) 야전사령부’를 구성했으며 이 사령부를 모태로 이듬해 4월에는 한국군 최초로 근대화된 2군단을 창설했다. 1952년 7월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된 후 군 훈련체계의 개혁, 보급체계 개편, 상이군인들에 대한 복지 향상 등에 힘썼다. 이때 10개 상비사단 창설(11~20사단), 10개 예비사단 창설 등을 추진했다. 퇴역 후에는 외교관 생활을 한 뒤 교통부 장관을 지냈다. 대한민국 최초의 원수계급에 해당하는 예우를 받고 있다.
  • 백선엽 “깨소금까지 준비한 북한군 6월 25일 도발한 것은”

    백선엽 “깨소금까지 준비한 북한군 6월 25일 도발한 것은”

    지금도 눈물겹도록 아프게 하는 역사를 왜 만들어야 했을까. 참으로 비통하고 영원히 기억을 할 수밖에 없는 우리 민족의 큰 상처이기에 해마다 6월이면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다. 1950년 6월 25일 아침 7시였다. 젊은 장교의 일성은 이랬다. “사단장 각하, 전방에서 적이 전면적으로 침공해 왔습니다. 개성이 대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개성은 벌써 점령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서울과 개성 등 전방를 지키는 보병 제1사단 작전참모 김덕준 소령의 숨가쁜 목소리를 들은 것은 당시 백선엽 1사단장이다. 우리 역사에서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을 알리는 제1보였다. 백선엽 장군은 시흥에 있던 육군보병학교에서 10일 전부터 3개월 과정의 고급간부교육을 받고 있던 중 급거 귀대하여 1사단을 지휘했다. 이후 낙동강까지 후퇴한 1사단은 한국군 부대 중에서 유일하게 미1군단에 배속돼 지원 나온 미군 2개 연대와 함께 경북 칠곡의 다부동 전투를 치렀다. 전투 중 한국군 병력의 후퇴와 무단이탈이 심해지자 함께 다부동을 지키던 미군 27연대장 마이켈리스(Michaelis) 대령이 “전선 좌측의 한국군 부대가 무단 이탈하고 있다.”며 다급하게 전황을 알려왔다. 백선엽 장군은 후퇴하는 국군을 막으며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다. 저 사람들(미군)이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이럴 순 없다. 내가 앞장설 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도 좋다.”며 싸울 것을 호소했다. 이후 1사단은 평양 입성을 가장 먼저 했다. 백선엽 장군은 최근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라는 제목으로 6·25 전쟁 당시 1128일의 기억을 책으로 펴냈다. 6·25전쟁 얘기만 나오면 누구보다 또렷이 기억하는 살아 있는 역사로 여긴다. 6·25전쟁 61주년을 앞두고 지난 20일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에서 백선엽 장군을 만났다. 6월이어서 그런지 강의를 해 달라는 손님들이 분주히 드나들었다. 약속 시간보다 20분 뒤에야 자리에 마주 앉았다. 1920년생이면 우리 나이로 92살. 그런데도 전쟁의 기억은 분명했다.. 차 한 잔을 마시더니 백 장군이 “고향이 어디요.”라고 물었다. 제주도라고 답을 드렸다. 그러자마자 나오는 얘기는 이러했다. “제주도 무척 많이 갔지. 6·25때 모슬포에 보충대가 있었어. 16주 동안 교육을 시키고 전쟁터에 보냈거든, 그래 육군 제1 훈련소야. 20살 전후의 청년들 10만명 정도가 훈련을 받았어, 내 동생(백인엽 장군)이 훈련소장도 했고. 태풍도 많이 왔어. 미군부대에서 지원 받은 천막을 치고 훈련했지. 하루에 상륙함정(LST) 두 척이 오고 가면서 훈련병들을 실어 날랐어. 그 병사들이 전쟁터에 많이 죽었어.” 백 장군의 눈이 잠시 감긴다. 그들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전쟁상황에서 지금의 5~6주 교육보다 더 긴 16주 교육을 했던 이유에 대해 물었다 . “미군의 2차대전 방식을 그대로 따랐거든. 미군은 100개 사단이 있었는데 대부분 16주 동안 훈련을 받고 전쟁터에 보내졌어. 2차대전때?. 제주도 훈련소는 일제때 썼던 비행장이야, 그러니까 일본군들이 중국의 난징(南京) 폭격을 위한 중간 기지였지. 훈련소에는 미군 고문관들이 많았어.” 백 장군은 왜 제주에 자주 갔을까. “내가 육군참모총장을 했었거든. 훈련소에 물이 부족했어. 그걸 해결하기 위해 LST나 미군 비행기를 이용해서 여러 번 갔어. 아마 수십 차례 될 걸. 또 동생이 1년동안 훈련소장으로 있었거든. 장도영 장군도 훈련소장을 했었지.” 백 장군은 잠시 4·3사건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1948년 4월 3일이야. 내가 부산 3여단 참모장을 했어. 제주 관할이니까 부대 시찰차 갔었지. 그때는 제주읍이야. 4월3일 아침에 비행기를 타려고 하는데 김익열 연대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가 왔어. 김달삼(金達三)이 이끄는 폭도들이 제주지역 11군데 지서를 습격했다고 말야.” 잠시 관련 자료을 들여다본다. 김달삼은 사회주의 혁명가로 제주 4·3 사건을 주도한 남조선로동당원이다. 그의 본명은 이승진이며, 고향은 대구. 일본에서 중학교와 대학을 나왔다. 1945년 1월 일본에서 강문석의 딸 강영애와 결혼했으며 김달삼이란 이름은 원래 강문석이 쓰던 가명이다. 1946년 말 제주도 대정중학교 사회과 교사로 재직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쳤다. 그는 교사로 재직 중에 남로당 대정면 조직부장을 맡았으며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책이자 군사부 책임자가 됐다. 화제를 다시 돌려 6·25 전쟁때 제1보를 보고한 김덕준 소령에 대해 물었다. “그날 아침 7시였어. 지금도 그 목소리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 전화를 받는 순간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북한이 탱크와 전투기를 갖고 있는거 알았거든. 전쟁을 대비해야 한다는 것도 수차례 얘기했고?” 백 장군은 이 대목에서 “이승만 대통령도 미군에게 북한의 남침 예상을 얘기했고 나도 미군 고문단과 만날 때마다 전투기와 탱크, 대포를 달라고 수차례 말했다.”고 술회했다. “우리야 그때 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지. 미군에게 그렇게 여러번 얘기해도 귀담아 듣지 않았어. 희생을 줄일 수도 있었는데 말야. 북한군은, 나중에 노획문서를 보니 깨소금까지 준비할 정도로 매우 치밀하게 전쟁을 계획했어.” 백 장군이 얘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북한군이 왜 6월 25일을 택했는지 알 수 있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북한군은 남한에서 먹을 것이 많은 계절인 6월부터 9월까지를 정했지. 3개월이면 부산까지 싹 쓸어버릴 작정이었어. 이 시기는 들판에 가면 먹을 것들이 많거든. 전쟁에서 먹거리는 매우 중요해. 북한은 추수때까지 전쟁을 끝낼 계획을 짰어.” 그렇다면 우리 군사들은 무엇을 먹고 싸웠을까. “낙동강까지 후퇴하면서 농협창고에서 쌀을 얻었고 밭에 가면 파와 배추가 있었지. 그걸 먹었어. 또 우리 선량한 아주머니들, 국민들이 갖다주는 음식도 먹었어. 아주 훌륭한 분들이야. 다부동 전투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도 우리 주민들이 갖다주는 음식이 있었기 때문이지.”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북진할 때는 어땠을까. “김일성 군대는 낙동강에서 완전히 녹았어. 북진을 하면서는 시장에서 먹을 것을 사 왔고 군에서 나오는 건빵을 먹었지. 고지 전투에서는 배가 고파 이탈하는 군인들도 더러 있었어. 북진할 때는 하복을 입었는데 나중에 동복으로 갈아 입었고?. 북한 주민들이 우리를 보더니 많이 환영했어. 먹을 것도 주고?.” 백 장군은 평북 운산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과 맞닥뜨린다. “중공군은 장개석 군대 출신들의 최정예 부대야. 일본군과 10년을 싸운 군사들이었지. 전쟁경험이 아주 많아. 그런 군사 100만명이 압록강을 넘어와 매복을 하고 있었으니 우리 군이 당할 수밖에 없지. 그래도 우리 1사단을 덜 당했어. 운산 일대에 중공군 30만명이 매복하고 있다는 것을 하루 전에 알 수 있었지. 하루 밤새 싸우다가 도저히 안 되더라구. 결국 후퇴하고 말았지만?.” 그러면서 백 장군은 북한군의 변화상에 대해 여러 번 강조했다. “남북한은 여전히 휴전 상태이며 두 세대가 지나는 동안 북한은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120만명의 지상군과 20만명의 특공대를 갖고 있다.”면서 “지난 61년 동안 북한은 청와대도 습격하고 천안함을 폭침하고 연평도를 포격하는 별 장난을 다했다.”고 말했다. “우리 젊은이들이 경계를 잘해야 돼. 대부분 고등학교 이상 출신들이 군대를 가잖아. 자원이 아주 훌륭해요” 백 장군은 군사영어학교 출신이다. 전체 110명이었는데 지금 만나는 동기들은 겨우 15명 내외에 불과하다. 건강이 어떠냐고 했다. “아픈 데 없어. 병원도 안 가. 동기들과 만나 옛날 얘기하는 재미로 살고 있어.” 맥아더 장군이 얘기했다.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 백 장군은 “너무 오래 살았어.”하면서 껄껄 웃는다. 편집위원 km@seoul.co.kr
  • “저변 확대랍시고 마구잡이 변형한 한복은 안되지요”

    “저변 확대랍시고 마구잡이 변형한 한복은 안되지요”

    오는 10월 3일 세계 패션의 중심지인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처음으로 한복 패션쇼가 열린다. ‘조선의 왕, 뉴욕에 가다’라는 제목으로 패션쇼를 여는 주인공은 28년간 한복 디자이너의 외길을 걸어온 김혜순(54)씨. 김씨는 오는 17일 서울 한남동 하얏트호텔에서 ‘뉴욕 패션쇼’를 미리 선보일 예정이다. 서울에서 여는 쇼는 그에게 한복을 소개한 외삼촌 허영(1947~2000) 선생의 10주기 추모 의미도 담았다. ●18세기의 한복 충실히 재현해 한복 ‘붐’ 패션쇼 준비로 분주한 김씨를 지난 8일 서울 역삼동 작업실에서 만났다. 그는 아직도 외삼촌의 인형에 새 한복을 지어 입히고 있었다. “저에게 한복 디자이너의 길을 열어준 분이 바로 외삼촌입니다.” 허영은 KBS 연기자 출신으로 전통인형작가와 한복연구가로 활동했다. 김씨의 작업실에 전시된 허영의 한복 인형은 고운 아미와 섬세한 연지 화장이 살아있는 미인의 모습이다. “나는 인형에게 한복을 입히지만 너는 움직이는 사람에게 한복을 입혀라.”라는 외삼촌의 한마디가 그를 한복의 세계로 이끌었단다. ‘김혜순 한복’이 사람들에게 알려진 가장 큰 계기는 2006년 방송된 하지원 주연의 드라마 ‘황진이’였다. 당시 드라마를 통해 선보인 화려한 한복 디자인(작은사진)은 지금까지 아이들의 돌 한복에 사용될 정도로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 커다란 붉은 꽃이 박히거나 서양의 드레스처럼 속이 비치는 저고리 등은 우리 한복에도 저런 디자인이 있었나 하는 반응을 끌어냈다. “모두 18세기 말의 옷을 충실히 재현한 것”이라는 게 김씨의 거듭된 설명이다. ●패션쇼 모델은 송일국·채시라·윤석화 화제를 뉴욕 패션쇼로 돌렸다. 지난해 그는 책 ‘왕의 복식’을 출간했다. 실제로 왕이 입었던 옷을 보고 다시 만들어서 소개한, 조선 왕실 의복의 백과사전과 같은 책이다. 이 책이 계기가 되어 조선 왕의 행렬을 재현한 초대형 한복 패션쇼 ‘조선의 왕, 뉴욕에 가다’를 준비하게 됐다고. 그가 참여하고 있는 한국복식과학재단의 최인순 이사장이 쇼를 기획하고, 문화체육관광부 등이 후원한다. 패션쇼가 끝나면 ‘왕의 수라’란 제목으로 한식이 제공되어 전통적인 옷과 음식을 함께 체험할 수 있게 된다. 패션쇼 모델로 왕은 송일국, 왕비는 채시라, 왕의 어머니는 윤석화가 나선다. 뉴욕 패션쇼에는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시장, 반기문 UN 사무총장, 한국계 미국 배우 샌드라 오, 미국 프로풋볼 선수 하인스 워드, 미국에서 활동한 배우 김윤진 등이 참석할 예정이다. 지난해 뉴욕의 유명 디자이너 캐롤리나 헤레라는 한복을 변형한 드레스 패션쇼를 열어 큰 화제를 모았다. 이 패션쇼를 봤다는 김씨는 “큰 숙제를 받은 기분이었다. 한복 디자이너로서 가야 할 길이 겁이 났다.”고 털어놓았다. 갓을 변형한 검은색 모자를 쓴 백인 여성 모델의 모습이 한편으로 우스꽝스럽다는 반응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똑같은 걸 보더라도 해석이 다르구나. 우리 옷을 보고 어떤 생각으로 저런 옷을 만들었을까. 전통에 안주해서도 안 되지만 생각 없이 변화를 줬다가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뉴욕 유명 디자이너 ‘변형한복’ 보고 책임감 한복 디자이너 이혜순씨가 한복을 입고 신라호텔을 찾았다가 문전박대를 당한 일도 그에게는 또 다른 숙제를 안겨줬다. “신라호텔에서 열린 도올 김용옥 선생의 자제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우연히 신라호텔 사장을 만났는데 한복 사건에 대해 사과를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이름이 같아 저를 이혜순씨로 착각한 줄 알았지만 그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어찌됐든 우리 옷을 입고 갔는데 쫓겨났다는 현실 앞에서 한복하는 사람으로서 더 책임감이 들었습니다.” 그가 한복을 통해 꿈꾸는 한류는 어떤 것일까. “옷에는 그 나라의 정신이 부여되어 있죠. 우리가 싫어하지 않으면서 많이 입고 보여줘야 합니다. 하지만 저변 확대랍시고 아무렇게나 입는 것은 반대합니다.” 이명박 대통령 부인 김윤옥 여사가 대통령 취임 축하연에 입고 나온 황금색 한복을 만들었던 김씨는 정상 외교에서 더 자주 한복을 볼 수 있길 바랐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정상외교에서 한복 더 자주 봤으면…”

    ”정상외교에서 한복 더 자주 봤으면…”

     오는 10월 3일 세계 패션의 중심지인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처음으로 한복 패션쇼가 열린다. ‘조선의 왕, 뉴욕에 가다’라는 제목으로 패션쇼를 여는 주인공은 28년간 한복 디자이너의 외길을 걸어온 김혜순(54)씨. 김씨는 오는 17일 서울 한남동 하얏트호텔에서 ‘뉴욕 패션쇼’를 미리 선보일 예정이다. 서울에서 여는 쇼는 그에게 한복을 소개한 외삼촌 허영(1947~2000) 선생의 10주기 추모 의미도 담았다.   ‘황진이’ 하지원·김윤옥 여사 한복 디자인  패션쇼 준비로 분주한 김씨를 지난 8일 서울 역삼동 작업실에서 만났다. 그는 아직도 외삼촌의 인형에 새 한복을 지어 입히고 있었다. “저에게 한복 디자이너의 길을 열어준 분이 바로 외삼촌입니다.”  허영은 KBS 연기자 출신으로 전통인형작가와 한복연구가로 활동했다. 김씨의 작업실에 전시된 허영의 한복 인형은 고운 아미와 섬세한 연지 화장이 살아있는 미인의 모습이다. “나는 인형에게 한복을 입히지만 너는 움직이는 사람에게 한복을 입혀라.”라는 외삼촌의 한마디가 그를 한복의 세계로 이끌었단다.  ‘김혜순 한복’이 사람들에게 알려진 가장 큰 계기는 2006년 방송된 하지원 주연의 드라마 ‘황진이’였다. 당시 드라마를 통해 선보인 화려한 한복 디자인은 지금까지 아이들의 돌 한복에 사용될 정도로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 커다란 붉은 꽃이 박히거나 서양의 드레스처럼 속이 비치는 저고리 등은 우리 한복에도 저런 디자인이 있었나 하는 반응을 끌어냈다. “모두 18세기 말의 옷을 충실히 재현한 것”이라는 게 김씨의 거듭된 설명이다.   패션쇼 모델은 송일국·채시라·윤석화  화제를 뉴욕 패션쇼로 돌렸다. 지난해 그는 책 ‘왕의 복식’을 출간했다. 실제로 왕이 입었던 옷을 보고 다시 만들어서 소개한, 조선 왕실 의복의 백과사전과 같은 책이다. 이 책이 계기가 되어 조선 왕의 행렬을 재현한 초대형 한복 패션쇼 ‘조선의 왕, 뉴욕에 가다’를 준비하게 됐다고. 그가 참여하고 있는 한국복식과학재단의 최인순 이사장이 쇼를 기획하고, 문화체육관광부 등이 후원한다.  패션쇼가 끝나면 ‘왕의 수라’란 제목으로 한식이 제공되어 전통적인 옷과 음식을 함께 체험할 수 있게 된다. 패션쇼 모델로 왕은 송일국, 왕비는 채시라, 왕의 어머니는 윤석화가 나선다. 뉴욕 패션쇼에는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시장, 반기문 UN 사무총장, 한국계 미국 배우 샌드라 오, 미국 프로풋볼 선수 하인스 워드, 미국에서 활동한 배우 김윤진 등이 참석할 예정이다.  지난해 뉴욕의 유명 디자이너 캐롤리나 헤레라는 한복을 변형한 드레스 패션쇼를 열어 큰 화제를 모았다. 이 패션쇼를 봤다는 김씨는 “큰 숙제를 받은 기분이었다. 한복 디자이너로서 가야 할 길이 겁이 났다.”고 털어놓았다. 갓을 변형한 검은색 모자를 쓴 백인 여성 모델의 모습이 한편으로 우스꽝스럽다는 반응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똑같은 걸 보더라도 해석이 다르구나. 우리 옷을 보고 어떤 생각으로 저런 옷을 만들었을까. 전통에 안주해서도 안 되지만 생각 없이 변화를 줬다가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호텔서 한복 쫓겨나는 현실에 책임감 더 생겨”  한복 디자이너 이혜순씨가 한복을 입고 신라호텔을 찾았다가 문전박대를 당한 일도 그에게는 또 다른 숙제를 안겨줬다. “신라호텔에서 열린 도올 김용옥 선생의 자제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우연히 이부진 신라호텔 사장을 만났는데 한복 사건에 대해 사과를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이름이 같아 저를 이혜순씨로 착각한 줄 알았지만 그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어찌됐든 우리 옷을 입고 갔는데 쫓겨났다는 현실 앞에서 한복하는 사람으로서 더 책임감이 들었습니다.”  그가 한복을 통해 꿈꾸는 한류는 어떤 것일까. “옷에는 그 나라의 정신이 부여되어 있죠. 우리가 싫어하지 않으면서 많이 입고 보여줘야 합니다. 하지만 저변 확대랍시고 아무렇게나 입는 것은 반대합니다.”  이명박 대통령 부인 김윤옥 여사가 대통령 취임 축하연에 입고 나온 황금색 한복을 만들었던 김씨는 정상 외교에서 더 자주 한복을 볼 수 있길 바랐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인사]

    ■대법원 ◇법원이사관 승진 △부산고법 사무국장 안병일◇법원부이사관 승진 <법원행정처>△정책지원심의관 이정준△인력운영심의관 이용선△윤리감사제2심의관 심재금<서울중앙지법>△사무국 이정근△형사국장 조범제<사무국장>△춘천지법 이승재△대구지법 서부지원 양희선△부산가정법원 김은숙△부산지법 동부지원 정보창◇법원서기관 승진 <법원서기관>△인천지법 마승봉△대전지법 백인규 황의성△청주지법 이상환△부산지법 이상권 최제록△울산지법 배홍기△창원지법 이성철 김문성△제주지법 김종오<사법보좌관>△인천지법 김성식△춘천지법 한은희△대구지법 최재광 이덕구△울산지법 박헌호△광주지법 정병문 이점욱 배만규△전주지법 이미영◇법원이사관 전보△광주고법 사무국장 최진영◇법원부이사관 전보 <사무국장>△서울행정법원 송광회△서울북부지법 이을수△의정부지법 권오복△대전지법 배봉현△대구지법 배호근△부산지법 조동섭△울산지법 이주용◇법원서기관 전보 <법원서기관>△법원행정처 이희복 진준오△서울고법 김갑수△부산고법 최용환△서울중앙지법 나채찬 추연희 전선자 김동민 박성배△서울행정법원 박종국△서울동부지법 곽재순 김학수 김영선△서울남부지법 박채규△서울북부지법 김상찬 김태용△의정부지법 장성수 강은선 정경환△인천지법 김윤중 박종복△수원지법 박상우 박정언△춘천지법 김명성△대구지법 김년구 정용이△울산지법 하재성<사법보좌관>△법원행정처 채기훈△서울남부지법 유경중△서울북부지법 정헌△서울서부지법 안호창△인천지법 서태석△수원지법 김정환 김익재 김창남 엄내영△춘천지법 박경식 김광수△대전지법 박장희△청주지법 이병찬△대구지법 송기선△부산지법 백운수△광주지법 조영훈△전주지법 이제혁△제주지법 홍승표 (7월 1일 자)■행정안전부 ◇전보 △차관보 이삼걸△지방행정국장 이재율△국제행정발전지원센터장 김원진 ■지식경제부 ◇과장급 △전기위원회 사무국장 김종호△유통물류과장 박동일△신재생에너지〃 박대규△산업물류투자팀장 이홍열△오송첨단의료산업진흥재단 파견 유동주△지역발전위원회 〃 염동관△국무총리실 〃 제경희△마산자유무역지역관리원장 방효민 ■고용노동부 ◇과장급 전보 △안양지청장 김영수△홍보기획팀장 김유진△인적자원개발과장 정원호△천안지청장 오복수 ■근로복지공단 △산재보험급여이사 허원용 ■한국방사성폐기물관리공단 △경영기획본부장 우상인△사업〃 정기진△기술전략〃 윤호택△월성원자력환경관리센터〃 홍광표△신사옥추진단 강봉기 ■한국고용정보원 △감사 김덕현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 △상임감사 이종석 ■EBS ◇승진 <평생교육본부>△평생교육기획부장 직무대리 서준△교양문화부장 류재호△진로직업·청소년부장 직무대리 이정욱△라디오부장 〃 김준범<학교교육본부>△학교출판기획부장 이창용△창의인성〃 김경은<융합미디어본부>△제작기술2부장 직무대리 방규석△제작아트1부장 김진극△제작아트3〃 박희용△중계〃 이순경<정책기획센터>△홍보사회공헌부장 직무대리 박성호<콘텐츠기획센터>△외주제작부장 김한동<스마트서비스센터>△IT인프라관리부장 김문식△IT서비스운영〃 강태욱△운영지원〃 강경호<콘텐츠사업단>△콘텐츠사업부장 직무대리 김창용△외국어사업부장 〃 성기호◇실장 승진△비서실장 신삼수◇전보 <평생교육본부>△교육다큐부장 이연규△유아·어린이특임〃 이은정<학교교육본부>△수능교육부장 김봉렬<융합미디어본부>△디지털인프라부장 강남수△제작기술1〃 김길호△디지털영상〃 신영대△제작아트2〃 고승우<정책기획센터>△기획예산부장 전용수△뉴미디어기획〃 김광범<콘텐츠기획센터>△편성기획부장 김유열△글로벌콘텐츠〃 정선경△플랫폼운영〃 오한샘△교육리소스〃 송선자<스마트서비스센터>△고객서비스부장 김혜영△인적자원〃 김동순△재무회계〃 정봉식<콘텐츠사업단>△출판사업부장 강수용△광고문화사업〃 남형수<교육방송연구소>△부소장 노만기◇전보△심의실장 심효무△국제협력〃 정현숙△교육뉴스특임부장 김현△감사실 손홍선△디지털통합사옥추진단 부단장 이재용 ■한국씨티은행 ◇지점장 전보 △수원정자동지점장 최광선△(가칭)강남구청지점 개설준비위원장 김세영 ■코리안리 ◇신규 선임 △전무 원종규
  • ‘따로국밥’ 다문화주의 실패 ‘ 섞어찌개’ 혼종성이 답이다

    ‘따로국밥’ 다문화주의 실패 ‘ 섞어찌개’ 혼종성이 답이다

    프랑스 ‘부르카 금지법’(공공장소에서 무슬림 여성의 부르카 착용을 금지하는 법안)은 퍼주기 복지정책으로 경제가 거덜난 데 따른 우경화 때문인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유럽 각국 정상들이 다문화주의의 실패를 인정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그 좋다는 다문화주의를 폐기한다니 우경화도 보통 우경화가 아니다. ●“다문화주의는 관용 빙자한 방치” 그런데 이게 그렇게만 볼 문제는 아니다. 유럽 지식인들은 다문화주의를 미국식 인종 차별주의와 비슷하게 여기면서 본디 비판적이었다. 미국의 백인 주류층이 소수 민족에 ‘너희들은 너희들끼리 모여서 잘 살아라.’라고 얘기하는 것을 그럴 듯하게 포장한 것이 다문화주의일 뿐이라는 비판이다. ‘관용을 빙자한 방치’라는 얘기다. 때문에 비판론자들은 오래 전부터 ‘따로국밥’ 격인 미국식 다문화주의의 대안으로 ‘섞어찌개’인 혼종성(hybridity)을 강하게 주장해 왔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다문화주의 실패 선언과 부르카 금지법은 다문화주의에서 혼종성으로 유럽의 정책 기조가 본격 이동하는 징후로도 해석될 수 있다. 쉽게 말해 다문화주의라는 이름으로 이슬람계 이주민들이 도시 외곽 슬럼가에 옹기종기 모여 살게 내버려 둘 것이냐, 아니면 그들에게도 공화국 시민의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기 위해 이슬람 테두리를 일정 정도 벗겨내야 하느냐라는 질문이다. 그렇다면 혼종성 자체는 무조건 긍정적인가. 이런 논의에 관심이 있다면 이화여대 이화인문과학원이 오는 3~4일 서울 신촌 이대 LG컨벤션홀에서 여는 국제학술대회 ‘문화 혼종성과 유동적 정체성’(Cultural Hybridity and Migrating Identities)을 지켜볼 만하다. 가장 눈길을 끄는 논문은 클레어 알렉산더 영국 런던정경대 사회학과 교수의 ‘결혼 시장 : 젠더화되는 문화혼종성’이다. 알렉산더 교수는 3년에 걸친 실증연구 결과를 토대로 혼종성 자체는 중립적이라는 주장을 내놓는다. ●“혼종성 형성에도 전통의 힘 작용” ‘부르카 금지법’에 대한 비판은 간단하다. “신사적이고 합리적인 백인 남성이 황색 남성에게서 황색 여성을 구해주는 이미지”로 쓰일 위험성을 부각시킨다. 황색 인종들은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 백인 남성이 개입해야 한다는 논리는 백인 남성들에게 ‘문명화 사명’이라는 임무를 지운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식민주의적 발상이다. 그러나 이런 다문화주의적 비판은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 그렇다고 부르카에 여성 억압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억압받는 여성들이 스스로 발언할 때까지 마냥 기다려야 하나, 또 그렇게 나온 발언은 무조건 긍정적인가라는 것도 문제로 남는다. 자체적으로 만들어진 혼종성이라는 것도 정치적 역학관계에 따라 왜곡되기 마련이며, 이 왜곡된 혼종성조차 무조건 인정해야 한다는 것은 다문화주의의 잘못을 다시 한번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알렉산더 교수의 지적이다. 알렉산더 교수는 이 지점에서 결혼을 통해 영국으로 이주한 방글라데시 여성들의 다양한 모습을 실제 인터뷰 자료로 드러낸다. 이젠 영국에서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방글라데시 전통 문화로 되돌아갈 생각이 없다는 여성이 등장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영어를 못한다거나 바깥에서 나쁜 물이 들어올 수 있다는 이유로 집에 갇히거나 얻어맞는 여성도 여전히 존재한다. 혼종성의 형성에도 기존 전통의 힘이 여전히 작용한다는 얘기다. 이런 실증자료를 바탕으로 알렉산더 교수는 “그동안 혼종성은 종종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개념으로 각광받아 왔지만 혼종성 그 자체는 문화적 차이를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하며, 민족과 문화의 순수성이라는 본질주의적 개념을 강화하기도 하고 해체하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혼종성을 약한 버전과 강한 버전으로 구별하자.”고 제안한다. 약한 혼종성이 “단순히 문화가 뒤섞이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면, 강한 혼종성은 “문화적 만남이 발생시키는 논쟁적인 영역에 집중한다.”는 설명이다. 앞으로 깊게 논의해야 할 대목은 바로 이 강한 혼종성 영역이라는 얘기다. ●‘백색신화’ 로버트 영 기조강연 앞서 학술대회 기조강연은 ‘백색신화’(White Mythologies)라는 저서로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후기식민주의자 로버트 영 미국 뉴욕대 비교문화학 석좌교수가 맡는다. 기조강연 주제는 ‘혼종성과 문화 번역의 타자성’(Hybridity and The Otherness of Cultural Translation)이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미국 새로운 인종 차별?… “백인도 차별 느낀다”

    미국 새로운 인종 차별?… “백인도 차별 느낀다”

    아직도 많은 인종문제를 안고 있는 미국.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가 탄생했지만 오랜 기간 내려온 백인과 흑인의 뿌리깊은 차별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미국에서 새로운 인종 차별이 시작되고 있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새로운 차별은 그동안 많은 기득권을 누려왔던 ‘백인에 대한 차별’. 미국 하버드 대학과 터프츠 대학 사회학자들은 최근 백인 남녀 209명과 흑인 남녀 208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미국의 1950년대 부터 2000년대 까지 ‘백인과 흑인이 얼마나 차별받고 있을까’를 주제로 1점 부터 10점까지 숫자로 답하게 한 것. 조사 결과 백인과 흑인 모두 “흑인에 대한 차별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고 밝혔으나 “백인에 대한 차별은 점차 늘고 있다.” 는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숫자로 보면 ‘흑인이 생각하는 백인이 차별받는 정도’는 1950년대 1.4에서 2000년대 1.8로 완만히 상승했으나 ‘백인이 생각하는 백인이 차별받는 정도’는 1950년대 1.8에서 2000년대 4.7로 급격히 오른 것. 이번 연구를 진행한 마이클 노튼은 “많은 연구자들이 이번 결과에 대해 논의 중” 이라며 “지금까지 차별받아 온 그룹(흑인)이 여러 권리를 얻어가면서 상대적으로 백인들이 박탈감을 느끼는 것 같다.” 고 밝혔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11) 근대 일본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11) 근대 일본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

    근대 일본의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 불과 10년 전까지도 일본인들은 매일같이 1000엔권 속에 그려진 그의 얼굴과 만났다. 하지만 그가 소설을 발표한 기간은 1905년 그의 나이 38세부터 49세가 되던 1916년까지 불과 12년 동안이다. 그는 천부적 재능으로 글을 썼던 사람은 아니었다. 아래의 강연에서처럼 그는 자신의 가슴 깊은 곳에서 ‘자기’가 나아가야 할 길을 발견하기 위해 소설을 썼을 뿐이다. 작가에게는 소세키다움을, 독자들에게는 바로 그들 자신을 발견하기를 촉구하는 문학! 무엇이 소세키를 이런 자기 발견의 세계, 굴착(掘鑿)의 글쓰기로 이끌었을까. “여러분…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의 곡괭이로 광맥을 파낼 수 있는 곳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무엇인가에 맞닥뜨릴 때까지 나아가 본다고 하는 것은 학문을 하는 사람, 교육을 받은 사람의 평생의 임무로서 혹은 10~20년의 주요한 작업으로서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아아, 여기에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이 있다! 간신히 파낼 수 있는 광맥을 발견했다! 이와 같은 감탄사를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토해낼 때, …쉽게 무너뜨릴 수 없는 자신감이 그 외침 소리와 함께 문득문득 머리를 쳐들고 오는 것은 아니겠습니까?”(학습원 강연 ‘나의 개인주의’, 1914년 11월 25일) ●‘런던의 원숭이’ 두 개의 유령을 만나다 나쓰메 소세키는 1867년에 태어났다. 이 해는 일본이 천황제에 바탕을 둔 근대 국민국가 일본으로 거듭나던 해다. 소세키는 어려서부터 한문학을 좋아해서 두루 한서를 읽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은 제국주의 열강들에 뒤지지 않기 위해 서양의 과학 지식과 사상들을 중심으로 일본의 근대 고등교육을 시스템을 재편해 갔다. 이런 분위기 안에서 소세키는 평소 문학을 좋아했던 장기를 살려 영문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33세의 나이에 영국 유학을 떠나게 된다. 소세키는 처음부터 자신의 유학이 탐탁지 않았고 불안했다. 그가 받게 될 국비 유학은 청일전쟁(1895) 승리에 따른 배상금을 바탕으로 기획되었고, 일본 문부성은 유학생들이 최신의 제국주의 이론과 내셔널리즘을 습득해 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세키는 자신의 영국 런던 유학 역시 같은 맥락에서 추진되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의 불안은 적중했다. 소세키는 1900년 9월 런던에 도착해서 두 가지 유령과 마주치게 된다. 첫 번째는 영문학이란 유령이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대학의 영문학과 수업을 들으며 최신의 영문학을 연구하려 했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소세키는 영어로 쓰여진 문학작품을 진지하게 연구하려는 지식인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대학의 수업에서는 영문법과 문학가의 약력을 겨우 설명하고 있었다. 당시 영국인들에게 영문학이란 읽으면 알 수 있는 이야깃거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소세키가 오랫동안 생각했던 문학이란 한문학의 ‘좌국사한’, 즉 ‘춘추좌씨전’, ‘국어’, ‘사기’, ‘한서’처럼 국가의 성쇠와 역사, 그안에서 활약했던 인간을 둘러싼 담론이었다. 소세키는 런던에서 한문학과 영문학 사이에는 그 어떤 공통점도 없다는 것을, 어느 곳에도 영문학이 한문학보다 낫다고 주장할 만한 근거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동아시아 한자문화권과 유럽의 영국은 각자 다른 필요에 의해 다른 식의 문학을 발전시켜왔을 따름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문학을 신봉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바로 영국의 변두리, 영국의 식민지, 영국을 동경하는 비서구 지역 출신들뿐이었다. 영문학은 실체도 없으면서 이들 불쌍한 열등 민족들에 횡포를 부리고 있었던 셈이다. 두 번째는 ‘퇴화론’이라는 유령이다. 당시 런던의 학계와 신문기사들은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의 논리로 무장한 사회진화론을 철저하게 신봉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특히 영국인들은 퇴화의 공포에 떨고 있었다. 그가 떠나 온 일본에서는 오직 서양을 닮기만 하면 진화한다는 믿음이 있었지만, 이미 제국주의의 정점에 서 있던 영국에서는 몰락에 대한 두려움이 팽배했다. 막스 노르다우가 쓴 ‘퇴화론’이 1894년 영역되어 1895년에 크게 유행했는데, 이 책은 라파엘 전파나 상징주의 등의 세기말 예술이나 반기독교적인 사상을 인간종의 퇴화가 진행되는 징조라고 경고했다. 소세키는 강의실과 런던 거리 곳곳에서 자신을 흘겨보는 무수한 멸시의 눈길과 마주쳤다. 그들의 차가운 시선은 자신의 키 작고 노란 얼굴, 얽은 곰보자국을 퇴화의 증거로 보고 있었다. 소세키는 자신을 원숭이 취급하는 백인들 앞에서 서양의 최신 학문이란 특별한 지위에 있는 특정한 인종만을 위해 작동한다는 점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연구와 글쓰기 - 유령들과 싸우는 방법 소세키는 사회진화론이 낳은 이 두 유령을 물리치지 않고서는 절대로 소외와 열등감을 떨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런던의 하숙방 안에서 최신의 철학서와 과학서를 읽으면서 고민을 거듭했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다움을 찾는 것에 출구가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설사 그것이 세상에서는 인간사에서 퇴화의 증거로 받아들여질지라도! 소세키는 곧바로 두 개의 유령에 대적할 두 개의 전략 마련에 들어갔다. 첫째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철저히 연구하는 것이다. 그는 당대 최첨단의 과학, 심리학, 사회학 등이 달성한 성과에 비추어 근대 문학이 어떤 필요에 의해 생겨났고 발달했고 그리고 퇴화할 것인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남은 1년 여의 유학 생활을 오로지 하숙방 안에서 각종 과학, 철학 등의 서적을 읽는 데에 몰두했다. 덕분에 런던에 유학하던 다른 일본인들 사이에는 ‘나쓰메가 미쳤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소세키는 일본인들에게마저 퇴화의 상징이 된 것이다. 소세키는 이처럼 퇴화의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자기다움을 찾기 위해 애쓰는 태도를 ‘자기본위’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자신의 작품에서 이 태도를 강조했다. 둘째 전략은 자기본위의 길을 모색하는 문학 작품을 쓰는 것이다. 한문학도 영문학도 아니고 소세키만이 쓸 수 있는 문학! 그것에 자신의 인생을 걸기로 했다. 귀국 직후 발표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1905.1~1906.8)는 그가 품고 있던 위의 두 전략이 고스란히 표출된 작품이었다. 이 작품에는 이름 없는 고양이 한 마리가, 고등 교육을 받았지만 별반 하는 일도 없이 집안에서 소일하는 주인 선생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1905년은 러·일전쟁의 승리로 일본 열도가 들끓었던 해다. 신문 저널리즘은 날마다 일본의 제국주의를 찬미했다. 그 한가운데에서 소세키는 한가하고 찌질한 선생들이 세파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세계를 그려보임으로써 사회진화론의 승전보에 맞서려 했다. 1907년 5월 소세키는 ‘대학이 지식을 사고파는 것이나 소설가가 글을 사고파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라고 하면서 동경제국대학 영문학 교수직을 박차고 나와, 도쿄 아사히 신문사에 입사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쉬지 않고 장편을 연재했다. 대단한 집중력과 성실함을 요구하는 작업이었다. ‘그후’(1909), ‘피안 지날 때까지’(1912), ‘행인’(1912~13), ‘마음’(1914), ‘유리문 속에서’(1915), ‘미찌쿠사’(1915), 그리고 미완작인 ‘명암’(1916) 등 작품 안에는 진화론적 고등교육 안에 갇혀서 자기 마음의 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지식인들이 나온다. ●근대인의 마음을 파헤치다 때때로 인물들의 얼굴에는 곰보자국이 있고, 또 많은 경우에 주인공들은 연애 후에도 아이를 낳지 못한다. 모두 퇴화의 증거다. 소세키는 이들이 자기 마음의 진실을 질문하기를 유도하면서 결국 거짓된 욕망과 비겁한 자아를 직시하게 만들었다. 소세키에게 자기다움을 찾는다는 것은 사회가 칭찬할 만한 대단한 개성이나 새시대에 맞는 모범적 인간성을 구축하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각자 자기만의 인생을 살라! 그 무엇보다 자기답게 살라! 소세키는 우리 각자가 지금 갖고 있는 부와 명예, 우정과 사랑에 대해 갖고 있는 상식들을 철저히 점검하는 것, 자기본위를 위한 열정을 갖고 끊임없이 자신을 직시하는 일에 희망을 걸었다. 이후 그의 작품들은 제국주의와 같은 타인본위의 삶을 거부한 수많은 동아시아의 청년과 지사들에게 독립과 자유를 꿈꾸게 하는 원천이 되었다. 오선민 수유+너머 남산 연구원
  • 미국은 백인의 나라?…피부색이 바뀌고 있다

    미국은 백인의 나라?…피부색이 바뀌고 있다

    미국의 얼굴이 바뀌어 가고 있다. 다민족 이민자들로 구성된 미국이라지만 200년 넘게 절대 다수를 차지했던 히스패닉을 제외한 백인 인구의 비중이 예상보다 빠르게 낮아지고 있다. 대신 히스패닉과 아시아계 인구가 급속도로 늘고 있다. 지난 10년간 늘어난 미국 인구 2명 가운데 1명이 히스패닉계일 정도다. 그런가 하면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전통적인 가정’도 점점 줄어 2010년에는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결혼한 부부가 소수로 ‘전락’했다. 26일(현지시간) 발표된 미국의 2010 인구 센서스 결과에 따르면 히스패닉 인구는 지난 10년간 43.0% 증가했다. 2000년 3530만명에서 2010년 5047만명으로 1517만명이 늘었다. 이는 같은 기간 늘어난 미국 전체 인구 2732만명의 절반 이상에 해당한다. 증가율도 전체 증가율 9.7%의 4배가 넘는다. 지난 10년간 백인 인구는 226만명이 늘어 1억 9681만명으로 집계됐다. 백인 인구 비중은 63.7%로 10년 전에 비해 5.4%포인트 낮아졌다. 백인 인구 증가율은 1.2%에 그쳤다. 아시아계 인구의 급증세도 눈에 띈다. 2000년 1024만명에서 2010년 1467만명으로 43.3%나 늘었다. 증가율만 놓고 보면 히스패닉계를 조금 앞선다. 한국 교민의 경우 현대차의 생산공장이 들어선 앨라배마에서 특히 많이 늘어났다. 2010년 현재 현대차 공장이 있는 몽고메리 일대에는 한국 교민 8320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는 10년전에 비해 102.1%나 늘어난 수치다. 미국에서는 결혼한 부부가 ‘소수’로 전락했다. 이날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2010년 미국 가구 중에서 결혼한 부부의 비율이 48%로, 처음으로 50% 아래로 떨어졌다. 1950년 78%와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다.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이른바 전통적인 가정이 빠르게 해체되고 있다. 2010년 부부와 자녀로 된 가정의 비율은 20%로, 다섯 가정 가운데 한 가정에 불과했다. 10년 전에는 네 가정 가운데 한 가정꼴이었고, 1950년에는 절반에 가까운 43%였다. 여성의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경제활동 참여가 늘어난 데다 동거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인식이 많이 사라졌기 때문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김균미기자 kmkim@seoul.co.kr
  • “북한은 한국 발전상 보면서도 왜 그렇게 군사력 증강하는지…”

    “북한은 한국 발전상 보면서도 왜 그렇게 군사력 증강하는지…”

    “토크쇼의 형식은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겁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새로운 매체가 아무리 많이 생겨나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것은 대화(對話)이기 때문이지요. 로봇 토크쇼나 전자 토크쇼 같은 것은 앞으로도 안 나올 것 같은데요.” ‘토크쇼의 제왕’ 래리 킹(77)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과 ‘대화’를 강조했다. 25일 서울 광장동 쉐라톤 그랜드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서울디지털포럼 2011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그는 “디지털 기술이 끊임없이 발전하더라도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만나는 것 만큼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라면서 “두려워하지 말고 끊임없이 사람들과 연결을 시도하라.”고 주문했다. ●“넬슨 만델라에게 가장 큰 영감” 1957년부터 53년간 방송인으로 활동한 그는 25년 동안 진행했던 CNN 시사대담 ‘래리 킹 라이브’에서 지난해 12월 하차했다. 그가 인터뷰한 유명인사들은 빌 클린턴·버락 오바마·블라디미르 푸틴 등 각국 정치인부터 경제인, 연예인에 이르기까지 5만여명에 이른다. “무수한 사람들 중에 저에게 가장 큰 영감을 준 사람은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입니다. 특히 만델라 대통령의 경우 25년간 감옥에 수감되는 고난을 겪었지만, 백인 사회에 반기를 들고 전쟁을 하는 대신 평화를 택한 사람이지요. 제가 남아공에 가서 직접 인터뷰를 했는데 어떤 종교지도자보다도 더 따뜻한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난해 말 자기 프로그램을 그만둔 뒤의 소회에 대해서는 “끔찍하다. 내가 이렇게 그리워할 줄 몰랐다.”면서 웃었다. “아이들과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그만뒀는데, 최근 오사마 빈라덴이 죽고 일본에서 비극적인 사태도 벌어지고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하야하는 등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걸 보면서 정말 방송을 다시 하고 싶어지더군요.” 그는 “디지털 기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는 방송을 통해 수많은 인간적 연결을 해왔기 때문”이라면서 “위성을 통해 연설을 할 수도 있었지만 한국을 직접 찾아온 것은 인간과 인간의 유대감을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한국인 중 단 한 명을 인터뷰하게 된다면 누구를 택하겠느냐는 질문에는 “아무래도 북한의 지도자가 될 것”이라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암시했다. “보통사람과는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 일반인이 생각하기에는 사악하다고 느끼는 사람을 인터뷰하고 싶어요. 북한 지도자들은 왜 그렇게 군사력을 증강하는지,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상을 보면서도 무슨 생각으로 현재의 방식대로 통치하는지가 무척 궁금하군요.” ●“고엽제는 어디서든 정당화될 수 없어” 그는 남북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 역시 연결이라고 강조했다. “남북은 한 핏줄로 이어져 있잖습니까. 북한이 먼저 남한에 연결을 시도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남한이 먼저 그들에게 다가가려는 시도를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주한미군의 화학물질 매몰에 대해서는 “화학물질은 물론 미군이 곳곳에 심어 놓은 지뢰에 대해서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고엽제는 언제 어느 곳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맹수열기자 guns@seoul.co.kr
  • [CEO 칼럼] 화합과 소통의 위대한 저력/장경작 현대아산 사장

    [CEO 칼럼] 화합과 소통의 위대한 저력/장경작 현대아산 사장

    지난 10일 불기 2555년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종교 간에 화합하는 모습이 눈에 띄어 우리를 즐겁게 했다. 이달 초부터 전국 각지의 성당과 교회 앞 길목에는 석가탄신일을 봉축하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지난 9일 명동성당에선 법정 스님을 추모하는 다큐영화 시사회가 열려 추기경이 직접 조계사의 주지와 동자승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이번 시사회는 지난 4월 부활절에 조계사에서 먼저 김수환 추기경 추모영화를 상영한 데 대한 답례로 이뤄졌다고 한다. 종교의 배타적 성향이 강했던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생전에 두 성직자의 교리를 초월한 인연이 아름다운 만남을 가능케 했고, 평화와 화합의 소중함을 다시금 되새길 수 있는 계기가 됐다. 화합은 말 그대로 화목하게 어울린다는 의미다. 세상 누구도 반목과 갈등을 원치 않듯이 화합에 대한 욕구는 이 시대 모든 사람들의 본성과도 같다. 하지만 과거에는 종종 화합과 통합보다는 분열과 갈등의 양상이 우세하게 나타났다. 이유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아서다. 진정한 화합은 서로를 알기 위한 노력과 더불어 서로의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소통이 전제될 때 가능하다. 최근 그 어느 때보다 화합과 소통이 사회 각계의 키워드로 자주 등장한다. 정치권은 물론이고 지역사회, 기업, 종교, 예술, 스포츠 분야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화합과 소통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 이는 그만큼 화합과 소통이 결핍된 현실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글로벌 경제위기 속의 기업경영은 기업 간, 조직원 간의 더욱 긴밀한 유대를 요구한다. 과거와 달리 복잡다기하게 얽힌 지금의 기업생태계에서는 기업들 서로가 협력의 대상임을 인식하고 지속적인 소통과 화합의 노력을 통해 동반성장을 이뤄내야만 상생할 수 있다. 기업의 생존과 직결되는 화합과 소통을 올바로 실현하기 위해 어떤 덕목들이 필요한지 생각해봤다. 첫째, 내가 먼저 말하지 않고 귀를 크게 열어 듣는 자세가 필요하다. 소통형 리더로 유명한 스타벅스의 하워드 슐츠 회장은 일방적 업무 지시를 최소화하고 직원들의 의견을 직접 청취해 의사결정에 반영한다고 한다. 스타벅스 매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인기메뉴 ‘프라푸치노’도 매장 종업원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라고 한다. 세계 커피시장을 평정한 스타벅스의 저력에는 ‘듣는 경영’이 숨어 있는 것이다. 둘째, 아무런 선입견 없이 상대를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논어 자로편에서 공자는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라고 했다. 군자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완전히 융화할 수 있지만, 소인은 같은 척 꾸밀 수는 있어도 진정으로 어울릴 수 없다는 의미다. 즉, 상대를 가감 없이 진심으로 인정할 수만 있어도 이미 화합은 이뤄진 것이나 다름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말로 그치지 않는 적극적인 실천이 필요하다. 행동하지 않는 화합은 공허한 슬로건에 지나지 않는다. 화합의 아이콘인 넬슨 만델라는 혹독한 인종차별의 벽을 넘어 남아공 대통령에 취임하고서도 백인 지배의 상징인 럭비팀을 해체하지 않았다. 오히려 럭비월드컵을 유치, 기적적인 우승을 일궈내 흑·백통합의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냈다. 이처럼 화합과 소통의 실현은 언제나 위대한 저력을 발휘한다. 우리는 1998년 외환위기 극복의 일념으로 350만명이 227t의 금을 모아 위기를 넘어섰고, 2002년 수백만명의 거리응원으로 월드컵 4강 신화라는 국민 대화합의 힘을 몸소 경험한 바 있다. 지금 대두되는 기업의 동반성장은 물론 집단·세대·양성·계층·지역 간 화합도 위대한 저력을 되살려 충분히 실현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또 장기간 성장통을 앓고 있는 남북관계도 민족화합이란 대승적 견지에서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는 견화동해(見和同解)의 노력을 지속한다면 반드시 개선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9)‘위대한 영혼’ 마하트마 간디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9)‘위대한 영혼’ 마하트마 간디

    간디! 흔히 ‘인도 독립의 아버지’, ‘힌두의 성자’라고 불리는 ‘위인’. 그러나 청년 시절의 간디는 조혼이나 카스트 제도를 부끄럽게 여겼고, 육식을 금지하는 힌두교 전통을 낙후된 것이라 생각했던 식민지의 젊은 문명론자였다. 그가 영국 런던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인도의 대개혁을 위해 성심을 다해 일하겠다.”고 다짐한 것은 당연한 일. 이 촌뜨기 식민지 유학생은 식민 본국에 도착하자마자 ‘영국 신사’의 꿈을 꾸면서 새 옷을 맞추고, 실크 모자와 야외복과 고급 넥타이를 사고, 그것도 모자라 댄스와 프랑스어와 웅변술과 바이올린을 배우고자 하는 열망에 빠진다. 물론 이런 부박한 충동은 금세 극복되었다. 그렇다고 ‘문명=개혁’에 대한 간디의 이상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간디는 귀국 후 집안에서 자녀에게 체조 교육을 시키고, 음식을 개량하고 의복을 서구화했다. 그에게 영국은 문명과 이성의 대명사였고, 인도는 교화시키고 개혁시켜야 할 대상이었다. 식민지 엘리트 청년은 스스로를 위대한 대영제국의 신민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이샤 계급 출신으로 인도 사회에서는 흔하디 흔한 ‘식료품상’이란 뜻의 ‘간디’란 이름을 가진 이 청년은 변호사 자격을 따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개업하기가 어려웠다. 집안의 꿈이었던 정치 관료로 출세하기란 더 난감해 보였다. 간디는 스물넷에 ‘잘나가는 변호사’를 꿈꾸며 남아프리카로 떠난다. 안타깝게도 날선 바지에 영국식 양복을 입은 변호사도 그곳에선 ‘갈색 피부’에 불과했다. 1등석 차표를 지녔지만 “같이 못 타고 가겠다.”는 백인의 말 한마디에 강제로 끌려나와 낯선 기차역에 버려진다. 최초의 충격! 그랬다. 간디는 당시 남아프리카에 5만명가량 존재했던 이주노동자, ‘쿨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쿨리들의 구심점이 되어 버린 간디. 이제 스물여섯 살 청년 간디는 ‘쿨리’들의 노동조건을 개선시키는 ‘인권 변호사’가 되었다. 결국 남아프리카의 나탈에서 인도국민의회를 결성하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정치가, 혁명가의 삶을 살게 된다. 이후 간디는 23년간 남아프리카에서 그리고 귀국 후 조국 인도에서 죽을 때까지 정치 지도자의 삶을 살게 된다. 간디는 자신의 자서전에 “나의 진리 실험 이야기”라는 부제를 붙였다. 이미 수차례에 걸쳐 대영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전국적인 정치 지도자가 자신이 해 왔던 것은 정치적 실험이 아니라 “정신적 실험”이며 ‘모크샤’(자기 구원)를 향한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징조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다. 학창시절에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한 기억이 없다.”거나 도둑질을 했을 때 깊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 속죄를 했다는 식의 자기 성찰은 진지하다. 그러나 이런 특징을 모든 위인이나 성인의 특징이라고 말해버리면 간디는 그냥 ‘본투비(Born to be) 성인’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나 간디의 삶은 그런 게 아니었다. 매번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던 낯선 상황, 낯선 사건에 놓였고, 매번 그 현장에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었다. 영국에 협력할 것인가 말 것인가 같은 정치적 문제에서부터 육식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같은 일상적인 문제에까지 간디에게 쉬운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처음에 그는 책을 통해서 진리의 길을 발견했다. 그가 자발적 채식주의자가 된 것은 유학 시절에 읽었던 책들의 영향이 컸다. 그러나 남아프리카 시절 이후 그가 생산해야 하는 진리의 길은 매번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었던 투쟁의 한복판에서였다. 그리고 그는 놀라울 정도의 윤리적 감수성으로 매번 창조적인 ‘진리 실험’을 한다. 소위 ‘비폭력 불복종’이라고 불리는 ‘사티아그라하’ 역시 그 과정에서 탄생했다. 따라서 ‘사티아그라하’는 단순한 정치적 불복종, 지문찍기를 강요하는 영국 지배에 대한 정치적 저항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고, 정신적 고결함을 파괴하며, 인간 관계의 평화를 깨뜨리는 모든 폭력에 대한 불복종이었다. 그것은 영국을 향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스스로에게 하는 ‘맹세’이기도 했다. 나부터 한없이 고귀해지겠다는, 나부터 한없이 낮아지겠다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맹세. 간디의 진리 실험이 더해질수록 그는 유명해졌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삶은 점점 더 간결해졌다. 그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입는 만큼만 입었으며(윈스턴 처칠은 그가 “반쯤 벌거벗은 몸으로 총독 궁전 계단을 올라가는 것”을 보자 기절초풍하며 “경악스럽고 역겹다.”고 했다), 가장 비천한 불가촉천민이 하는 일, 청소나 똥 푸는 일을 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가족과 친구들에게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간디의 아내는 때때로 절망하고 울부짖었으며, 아들은 아버지 곁을 떠났다. 맏아들은 마치 아버지 보란 듯이 공개적으로 말썽을 피우고 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투명하고 단호했다. 비록 때때로 좌절하고 비틀거렸지만 그는 단 한번도 ‘사티아그라하’, 모든 폭력과 지배에 대한 그 위대한 불복종을 멈춘 적이 없다. 간디의 물레! 그건 간디의 상징이고, 인도 독립의 상징이고, 나아가 모든 식민지 반제국주의 투쟁의 표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너무 익숙해서 진부하기조차 한 물레! 그러나 간디의 물레, 그것은 단순한 ‘국산품 애용’ 운동이 아니다. 흔히 자치로 번역되는 ‘스와라지’ 역시, 단순한 정치 체제를 일컫는 말은 아니다. 그건 사람들이 ‘절망을 이겨낼 수 있는 능력’, 인도에 사는 모든 사람이 서로를 ‘형제, 자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 나아가 그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리는’ 정신적 힘을 의미했다. 도대체 인도가 왜 식민지가 되었는가. 물론 동인도회사의 지배 때문이다. 그런데 단순히 그것 때문인가. 그 이면에는 돈을 벌기 위해 인도로 들어온 영국 상인만큼 단숨에 돈을 벌고자 했던 인도인의 욕망과 협력이 있었다. 수백 년 동안 인도인의 마음에 뿌리박힌 영국 문명에 대한 동경, 물질과 화폐에 대한 욕망. 독립과 해방은 영국 통치가 끝나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영국적 삶의 방식 전체, 근대 문명 전체가 종식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물레’는 도구가 아니라 비전이었다. 모든 사람이 자기 힘으로 노동하고, 그 노동의 힘으로 정신적으로 자립하고, 그 자립하는 정신들이 상호호혜의 관계를 맺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이상적인 꿈. 그걸 위해서는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나 대량생산 체제를 극복해야 한다. 오히려 다양한 수공업들이 리바이벌되는 작은 마을들의 연합. 간디가 꿈꾼 인도의 미래였다. 마을 스와라지에 모든 사람이 환호와 갈채를 보냈을까. 아니다. 타고르는 ‘실을 잣고 천을 짜는 것’이 과연 한 민족의 구루가 전하는 메시지로 적절한가에 대해 간디에게 물었고, 간디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고칼레조차 간디의 ‘스와라지’ 이상을 어리석은 짓이라 비웃었다. 간디는 대답했다. “나는 원시적 방법 자체를 위해 원시적 방법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원시적 방법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하는 것은 이 방법 말고는 할 일 없이 살아가고 있는 수백만 마을 사람에게 일자리를 줄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덧붙인다. “한 걸음으로도 나는 충분하다네.” 절대적 빈곤 속에서 술과 아편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존심과 고결함을 돌려주는 일. 상호 의존과 형제애를 일상에서 실감하는 일. 노동과 명상과 섬김이 함께하는 마을에서의 삶! 그건 어떤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간디가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인도의 비전, 아니 인류의 비전이었다. 1947년 의회를 통과한 인도독립법령에 따라 8월 15일 영국의 인도 지배가 종식되었다. 어찌 보면 간디의 이상이 실현된 날이기도 하다. 그러나 독립의 날, 그는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독립은 온갖 적대와 폭력 속에서 힌두와 이슬람이 결국 결별을 하는 분단 인도가 탄생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평생 간디를 추종했고 간디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네루는 간디의 스와라지 이상을 버렸다. 그는 중공업을 기반으로 한 ‘발전된 인도’를 열망했다. 간디의 머리에는 타고르의 시가 떠나지 않았다. “혼자 걸어가라!” 간디는 결국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기회는 오지 않았다. 얼마 못가 암살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투비 성인’으로 출발하지 않았지만 위대한 영혼’으로 잠들었던 간디를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간디의 출발점에 다시 서고 있는 게 아닐까. 혁명의 길과 구원의 길이 다른 게 아니라는 믿음을 갖고. 나 역시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이다. 이희경 문탁네트워크 연구원
  • 금발머리 백인 아기 낳은 흑인 부부…‘혹시 외도?’

    흑인 부부 사이에서 금발머리를 가진 백인 아이가 태어나 충격을 주고 있다. 16일 영국 데일리메일은 금발 머리에 하얀 피부를 가진 남자아이가 태어난 잉글랜드 레스터셔카운티 러프버러에 사는 콩고 출신의 흑인 가족인 치방구 일가를 소개했다. 남편 프랜시스(28)는 최근 레스터셔 왕립병원(Leicester Royal Infirmary)에서 아내 알네트(25)가 출산한 둘째 아이를 처음 보고 “와, 정말 내 자식이야?”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미 부부 사이에는 아프리카 출신을 나타내는 까만 피부의 첫째 아들 세스(2)가 있어 백인 아들이 태어나자 부모는 물론 의료진 모두가 놀랐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제 태어난지 11주된 아이의 이름은 다니엘이다. 한 때 해프닝을 샀던 이 아이는 알비노(백색증)는 아니지만 약간의 유전자 변이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남편 프랜시스는 당시 상황에 대해 “의료진과 서로 쳐다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간호사들도 처음에는 아내가 외도를 했다고 여겼다.”면서 “하지만 아내가 바람을 피웠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고 전했다. 아내 알네트 역시 “간호사가 내 팔에 아기를 안겨줬을 때 아기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나를 낳았던 어머니처럼 난 오직 아이가 건강한 지에 관심을 가졌을 뿐”라고 밝혔다. 아울러 이들 부부는 알네트의 조상 중에서도 백인 아기를 낳은 적이 있기에 백인 아기를 낳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한편 남편 프랜시스는 현재 사회학과 학생으로 지난 10년 동안 영국에서 살았다. 그는 지난 2007년 콩고를 방문해 지금의 아내 알네트를 만나 1년 만에 결혼했다. 아프리카에서 의사로 일했던 알네트는 현재 파트타임 점원으로 일하면서 영국에서 의학관련 일을 하기를 원하고 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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