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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범 김구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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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록… 광복 50년전」 개막/희귀문서·사진 5백여점 전시

    ◎서울신문 후원/오늘부터 12월10일가지 총무처서 광복 50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기획된 「기록으로 본 광복 50년」전이 10일 총무처 정부기록보존소 1층에서 개막된다. 이에 앞서 총무처는 9일 이홍구 총리 박영식 교육부장관 주돈식 문화체육부장관 김기재 총무처장관 손주환 서울신문사장 김광일 국민고충처리위원장 조용직 의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개막식을 가졌다. 총무처가 서울신문사와 한국방송공사의 후원을 얻어 오는 12월10일까지 3개월간 개최하는 이번 전시회에는 문서와 사진등 5백여점의 자료가 전시된다. 이번 전시회에는 특히 ▲고 백범 김구선생 장의에 관한 건등 정부수립 직후의 국무회의록 ▲4·19혁명때 비상계엄 선포및 공민권 제한 심사기록 ▲62년 1월6일 공표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철 ▲포항종합제철 건설 관련문서가 포함되어있어 눈길을 끈다. 또 일제시대 자료 가운데는 ▲1922년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가 작성한 1920년대의 서울(경성) 전도 ▲1932년 일제의 조선군사령부 배치도 ▲1930년대말 조선총독부의 군 단위 일선기관이 작성한 미곡·면화 공출문서 ▲일본 후생성에서 수집한 것을 지난해 외무부가 이관받은 징용자명부 ▲1941년 1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작성한 수양동우회 판결문 등 희귀자료가 있다. 정부기록보존소는 전시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갑오개혁 직후부터 국권상실 직후까지 내려진 판결문을 「국권회복운동 판결문」이라는 제목으로 영인본으로 발간했다. 전시회가 열리는 정부기록보존소는 서울 종로구 창성동 117 경복궁 서문(영추문) 맞은편에 있으며,전화는 (02)720­4415이다.
  • 「기록으로 본 광복 50년전」 10일 개막

    ◎징용자 명부 등 희귀자료 5백여점 전시 정부는 광복 50주년을 맞아 민족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자긍심 함양,기록보존문화에 대한 국민의식을 높이기 위해 오는 10일부터 12월10일까지 정부기록보존소에서 「기록으로 본 광복 50년」전을 개최한다. 총무처가 서울신문사와 한국방송공사 후원으로 개최하는 이 전시회에는 문서와 사진등 5백여점의 자료가 멀티슬라이드와 멀티미디어등 첨단 영상기법을 활용해 입체적으로 전시된다. 특히 ▲고 백범 김구선생 장의에 관한 건등 정부수립 직후의 국무회의록 ▲4·19혁명 때 비상계엄 선포및 공민권 제한 심사기록 ▲62년 1월6일 공표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철」 ▲포항종합제철 건설 관련문서등 처음 공개되는 문서가 포함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또 일제시대의 자료 가운데는 ▲1922년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가 작성한 1920년대의 서울(경성)전도 ▲1932년 일제의 조선군사령부 배치도 ▲1930년대말 조선총독부의 군 단위 일선기관이 작성한 미곡·면화 공출문서 ▲일본 후생성에서 수집한 것을 지난해 외무부가 이관받은 「징용자명부」 ▲1941년 1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작성한 수양동우회 판결문등 희귀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총무처는 이와 함께 전시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갑오개혁 직후부터 국권상실 직후까지 내려진 판결문을 「국권회복운동 판결문」이라는 제목으로 영인본으로 발간했다. 이번 전시회는 「건국의 여명」 「조선조의 사고(사고)」등 6군데의 특별코너와 「시련에 선 왕조」 「광복의 환희」등 11군데의 일반코너및 시청각실로 구분되어 있다. 특히 「조선조의 사고」에는 국보 제151­2호인 태백산본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태조본등 자료를 조선시대의 사고 사진과 함께 전시해 우리 선조들의 훌륭한 기록보존문화를 과시하고 있으며,북한에서 발행한 번역본인 「이조실록」까지 전시해 흥미를 더하고 있다.
  • 외언내언

    지금은 「독립공원」으로 바뀐 서대문구 현저동 101 「서대문감옥」.그곳은 우리민족에게 수난의 현장이자 민족정기의 발원지로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성지다. 일제 강점기에 얼마나 많은 우리 독립투사가 이곳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마침내 처형까지 당했는가.19 08년 「경성감옥」으로 문을 연 이후 악명 높은 「서대문감옥」에서 사형당하거나 옥사(옥사)한 애국지사는 1백여명을 헤아린다. 원한의 대상이었던 서대문형무소가 폐쇄되고 독립공원으로 조성되면서 김구·안창호·손병희선생등 수많은 독립지사가 수감됐던 옥사와 유관순열사가 모진 고문끝에 순국한 여옥사,애국투사들이 처형된 사형장등이 고스란히 복원됐다.1백동의 건물중 일제때부터 있던 9­13호 감방(5동)과 고문장소이던 보안과 건물,사형집행장도 퇴락한 판잣집 그대로 남겨두었다. 우리의 후손에게 역사의 산 교육작으로 남겨주기 위해서다. 91년 복원공사를 위해 발굴작업중 발견된 보안과청사 지하감방은 유관순열사가 일경의 모진 악형끝에 숨진 비밀감방.옥중에서 밤마다 만세를 불렀던 열여섯 처녀의 그 드높은 기상은 얼마나 장한 것인가.백범 김구선생도 35세때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우려다 검거돼 17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 수감됐었고 이승만박사도 구한말 만민공동회사건으로 이곳에 갇힌 적이 있다. 광복의 성지인 이곳 독립공원에서 5일 「광복 50주년 서대문감옥 순국선열위령 추모대회」가 순국선열유족회 주최로 열린다. 이 추모대회에 일제의 죄과를 참회하기 위한 1백여명의 일본인도 참석할 예정.이들은 일제치하에서 많은 한국의 애국지사가 투옥과 고문으로 희생되었음을 사죄하면서 『일부 몰지각한 일본 정치인의 범죄사실은폐·미화에 통분을 느낀다』고 참회한다는 것.종전후 줄곧 사죄와 망언을 되풀이해온 일인들이다. 이제 진정한 참화와 사죄가 나올 때가 아닌가.
  • 8월의 문화인물/김구 선생

    ◎조국독립에 평생바친 민족의 거인/저서 「백범일지」 「도위실기」 등 남겨 문화체육부는 8월의 문화인물로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1876∼1949년)선생을 선정했다. 황해도 해주 태생인 백범은 국내에서 항일운동을 벌이다 3·1운동 후에는 상해임시정부 주석으로 독립투쟁을 지휘했으며 해방후 귀국,통일정부 수립에 앞장섰던 민족주의자. 백범은 1884년 18세에 동학에 입교,이듬해 동학군 선봉장으로 활약하다 만주로 가 의병단에 가입했다.21세때 국내에 들어와 왜병중위를 살해한 혐의로 사형이 확정된후 고종황제의 특별사면으로 형집행이 중지됐지만 석방되지 않아 탈옥,공주 마곡사의 승려가 됐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해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내무총장,국무령을 지냈다.한국독립당을 결성,항일무력 활동을 전개했고 한인애국단을 조직 윤봉길·이봉창의거를 지휘했다.1934년 중칭(중경)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이듬해 임정 주석에 선임돼 일본군에 강제징집된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고 시안(서안)과 안후이성(안휘성)에 광복군특별훈련반을 설치,미육군전략처와 제휴해 한반도 수복 군사훈련을 지휘하던중 광복을 맞았다. 19 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신탁통치가 결의되자 반탁운동을 전개했고 48년 남한만의 단독총선을 실시한다는 유엔결의에 반대,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북한에가 정치회담을 가졌으나 실패했다.이후 정부수립에 불참한채 민족통일 원칙을 주장하다 49년 6월 안두희에게 암살당해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됐다.지난 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고 서울 남산공원에 동상이 세워졌다.저서로는 백범일지,도왜실기 등이 있다.
  • 「새로쓰는 한국현대사」 속의 두거인 재조명

    ◎이승만·김구의 우정과 갈등/황해도출신 한살산… 상해 임정활동 공통점/해방후 우남은 「군정」·백범은 「협상」을 추구 조선왕조 끝시기로부터 오늘날 남북대립시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정치지도자들이 배출됐다.그 가운데 우남 이승만과 백범 김구는 앞자리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우남은 18 75년에,백범은 18 76년에 태어났다.모두 황해도 출신으로 사실상 동년배지만 백범은 우남을 평생동안 형님으로 모셨다.어려서 한학을 공부한 우남은 성장하면서 서양문물에 눈을 떠 미국 조지워싱턴대학,하버드대학,프린스턴대학 등에서 국제정치와 국제법을 전공했다.그리고 일찍 기독교 정신문화를 받아 들였다.이와는 달리 토착적 성장의 길을 걸은 백범은 서당 글공부가 교육의 전부였다.또 토착종교 동학에 가담해 왜병과 싸우는 등 민족적 정열을 불살랐다. 두사람은 1919년 3·1운동 직후 시차를 두고 상해 임시정부를 통해 연결고리를 맺는다.우남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백범은 마지막 주석으로 선출되어 독립운동 일선에 나섰던 것이다.그러나우남과 백범은 임정과의 연결에서 질적 차이를 드러냈다.백범은 임정을 떠나지 않은 채 그 간판을 해방의 시점까지 지킨데 비해 우남은 미국을 무대로 외교 선전 측면의 독립운동을 벌였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들은 해방된 조국에 환국해서는 독립정부 수립운동에 앞장 섰다.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한반도 문제에 관한 미·소·영·중 4개국 외무장관 합의 의정서」가 발표되었을 때는 손을 맞잡고 싸웠다.그러나 두 지도자 사이에는 차츰 노선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다.우남은 강력한 반소·반공론에 입각해 남한의 단선·단정노선을 제기하고 나섰다.이 노선에 반대한 백범은 이데올로기보다 민족을 앞세웠다. 1947년에 공식화된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은 미국으로 하여금 우남이 주장해온 단선·단정론을 지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그리하여 미국의 주도아래 국제연합은 19 48년 5월10일 남한에서 총선거를 실시해 대한민국을 건국시키는 일을 서두르게 됐다.남한의 단선·단정은 분단체제의 고착은 물론 동족상잔의 비극을 불러 일으키게될 것이라고 비판한 백범은 남북협상을 추진했다.백범은 김규식과 함께 1948년 평양 남북정치지도자 연석회의에 참석한다.그러나 북한은 곧 세워질 공산정권의 합법성을 쌓는데 두 애국지도자의 충정을 이용했을 뿐이다. 5·10총선거에 따라 대한민국 제헌국회가 성립됐다. 국회의장에 선출된 우남은 헌법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초대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5·10총선을 거부했던 백범은 자신이 이끌던 한국독립당을 중심으로 통일운동을 벌였다. 백범의 통일운동은 고귀했으나 외로웠다.결국 1949년 6월26일 육군대위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지고 말았다.통일된 독립국가 수립을 꿈꾸던 그의 숭고한 사상은 오늘날 까지도 우리의 지표가 되고 있다. 우남은 건국 초기에 험난한 길을 걸었다.특히 1950년6월25일 북한의 전면 남침을 맞아 미국과 국제연합 지원아래 싸워서 국가를 수호했다.대한민국의 건국과 수호는 확실히 그의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그러나 사사오입개헌과 1960년 3·15부정선거는 그에게 오명을 안겨 주었다.그는 전 국민을 분노시킨 4·19혁명에 의해 하야할 수 밖에 없었다. 돌이켜 종합해 생각해 보건대 백범 두분 모두 우리 배달겨레에게 소중하게 기억된다. 우남은 건국과 국가수호라는 업적을 남겼으며 백범은 분단상황에서 민족의 통일을 잊지 않게 하는 정신적 자산을 남겼다.두분은 훌륭한 저술가이기도 했다. 우남의 「독립정신」과 「일본내막기」는 그의 뛰어난 국제정치 안목을 보여 주고 백범의 「백범일지」는 그가 민족의 자유와 자존을 얼마나 존중했는지 말해 준다.
  • 서울시에 변화 바람/강동형 전국부기자(현장)

    ◎첫 간부회의국정감사장 방불 조순 민선 서울시장의 「시정」에 변화의 조짐이 뚜렷하다. 지난 1일부터 잇따라 열리고 있는 삼풍사고 수습대책 회의.새 시장에게 복구상황을 보고하고 앞으로의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다. 지난 1일만 해도 사정이 사뭇 달랐다.새 시장이 처음 주재해 긴장감이 감돌았다. 관례대로 실·국장들의 보고와 시장의 지시 순으로 진행됐다.회의가 끝나고 추가 질문이 없느냐는 조시장의 말이 떨어지자 「사건」이 일어났다.주택국이 지상 16층 이상 또는 연면적 3만㎡ 이상 대형 건축물과 백화점·시장 터미널 등 다중 이용 시설에 대한 안전점검을 30일까지 마무리하겠다는 보고가 발단이 됐다. 이해찬 정무부시장이 문제를 제기했다.『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삼풍사고는 우연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입니다.안전점검을 한달내에 마무리한다는 것은 미봉책에 불과합니다』 국정 감사장을 방불케 하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주택국이 문제의 심각성을 못느끼고 있습니다』고 질타하고 법령과 조례개정 등 근본적인 대책을 다시 보고하라고 지시했다.종전에는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그러나 3일 회의가 끝난 뒤 이부시장이 『오늘 보고가 충실했다』고 격려했다. 1일 하오 성모병원 영안실.조시장이 들어서자 모두 15명의 희생자가 안치된 영안실은 온통 눈물 바다를 이뤘다.시장은 무릎을 꿇고 분향했다.2배를 하고 또다시 상주에게 정중한 예를 표했다.모두 45배. 『딸을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한 어머니의 손을 잡고 눈시울을 붉히는 시장에게 항의는 없었다.수행원들도,취재진들도 조시장의 행동을 담담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이어 처음으로 시청에 등청한 자리에서 간부들에게 무겁게 입을 뗐다.『세상이 달라졌습니다.유가족과 부상자 가족에게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중요한 것은 몇푼의 배상금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정성을 다하느냐는 것입니다』 조시장의 이러한 행동은 2일과 3일에도 이어졌다.4·9묘역 참배,백범 김구선생 묘소참배 등도 서울시정의 방향과 변화의 폭을 가늠케 하는 상징적 사례들이다. 그러나 「사고 현장에서 취임」한 조순 시정의 변화의 크기를 예상하기는 아직 이른 것 같다.
  • 「삼풍」수습현장 지휘후 국립묘지참배/조순 민선 서울시장 취임이틀째

    ◎병원들러 부상자·유가족 일일이 위로/“국무회의서 서울 살림살이 관련 건의” 조순 서울시장은 취임 둘째 날인 2일에도 동작동 국립묘지를 참배하는 등 바쁜 일정.그는 지난 1일 0시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에서 시장 직무를 시작했다. ○…조시장은 이 날 삼풍백화점 현장에서 한 시간 가량 구조작업을 지휘한 뒤 9시쯤 김의재 기획관리실장 등 간부들과 동작동 국립묘지를 참배했다.점퍼 차림으로 도착한 조시장은 준비한 양복으로 갈아입고 현충탑에 헌화 분향.이어 효창동 백범 김구 선생 묘역과 수유동 4·19 국립묘지도 차례로 참배. 조시장의 측근은 『취임 첫날 국립묘지를 참배하는 것이 관례이나 삼풍 사고로 어쩔 수 없이 하루를 늦췄으며 김구 선생 묘소와 4·19묘지 참배는 민선 시장으로서 새로운 관례를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시장은 4·19 묘지의 영정이 모셔진 유영봉안소에서 아산 현충사에 있는 「취의정충 광어단성」(의로움으로 정성을 다 해 충성을 다하는 것은 단군성인보다 거룩하고 빛난다)이라는 문구로 묘역을 찾은 심경을 피력. ○…조시장은 광화문 부근 대중 음식점에서 간부 및 기자들과 오찬을 함께 하며 전날 김영삼 대통령과의 대담 내용에 화제가 모아지자 『별 얘기는 없었다』며 『국무회의에 참석해 서울시의 살림살이와 관련해 건의할 것이 있으면 하겠다』고 말했다. 조시장은 음식점에서 김두한 전 의원의 딸로 동대문구에서 시 의원에 당선된 탤런트 김을동(여)씨를 우연히 만나 기념촬영을 하기도. ○…하오에는 전날 김영삼 대통령의 사고현장 방문 안내로 취소한 중대부속병원과 순천향병원에 들러 부상자와 사망자 유가족을 일일이 위로한 뒤 사고 현장을 또다시 방문하는 등 사고 수습에 안간힘. ○…그는 취임 첫 날인 1일 하오 5시 쯤 법적으로 시장이 된 지 17시간 만에 시장 집무실에 도착.시청 직원들은 『넥타이를 매지 않은 노 타이 차림에 모자를 쓴 모습으로 부임한 시장은 아마 처음일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
  • 고려대 민족문화연 「신명심보감」 출간

    ◎개인·가족·국가간 윤리의 새 모델 제시/한­중 선현·고전서 가려뽑은 글 수록/현대사회에 맞게 재편… 환경문제도 언급 지난 5백여년동안 한국인의 인생 교과서 노릇을 해온 「명심보감」이 현대사회에 걸맞는 새 내용,새 체제로 탈바꿈해 선보였다.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소장 홍일식 총장)는 최근 「신명심보감」을 펴냈다. 「명심보감」이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생활윤리와 처세술,도교적인 양생법까지를 다룬데 비해 「신명심보감」은 사람사이의 관계를 인간화·도덕화하고 사람과 자연을 일체화하는데 목적을 두었다.따라서 새 명심보감은 개인윤리인 「도덕적 주체의 정립」에서 시작해 가족·타인·공동체·공인·국가와의 관계로 범주를 넓혀나가며 결국은 「자연에 대한 윤리」로 마무리짓는다. 이같은 윤리체계를 뒷받침하는 정신이 「불인지심」,곧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다.각 개인의 불인지심이 발전해 가정에서는 부모에 대한 효,부부간의 사랑과 의리로 나타나며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예절로 구현된다.특히 자연에대한 윤리에서는 자연을 정복대상으로 삼는 서양의 관점과는 달리 인간과 자연은 일체임을 강조해 환경문제 극복의 지혜를 보여준다. 체제가 다른만큼 수록된 글도 「명심보감」과는 다르다.중국의 공자·장자,우리나라의 정약용·신채호·김구 선생 등 양국의 선현 1백27명이 적접 쓴 글,또는 그들의 행적을 담은 글을 양국의 고전 1백41권에서 가려뽑았다.비율은 중국 고전과 우리 고전이 절반씩이며 한문이 대부분이지만 국한문혼용체도 여럿 실었다. 예를 들어 제6장 「나라를 위하여」에는 정약용의 「목민심서」,유성룡의 「징비록」,황현의 「매천야록」,김구의 「백범일지」 등에서 발췌한 글들을 주로 수록했다. 고려대가 「신명심보감」을 펴내게 된 것은 지난해 10월 발표한 「바른 교육,큰사람 만들기 위한 교육선언」에서 학생들에게 「명심보감」을 필수과목으로 가르친다고 밝힌데서 비롯됐다.당시는 「지존파 집단살인사건」「온보현 연쇄살인사건」들이 잇따라 터진 뒤끝이어서 고려대의 「명심보감」교육 방침은 사회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고려대는 이후 「명심보감」을 집중검토한 결과 그 내용 가운데 현대사회의 윤리와는 동떨어진 부분이 적지 않은데다 환경문제 등 새로운 가치관을 요구하는 부분을 보완할 필요성이 있어 아예 새 명심보감을 편정하기로 했다.이에 따라 이동환 교수를 비롯한 한문학과 교수·강사 8명이 편찬위원회를 구성,「신명심보감」을 펴냈다. 「신명심보감」이 「명심보감」과 내용·체제가 전혀 다른데도 그 명칭을 이은 까닭을 편찬책임자 이교수는 『명심(마음을 밝게 함)의 뜻이 깊은데다 「명심보감」이란 이름에 독자들이 깊은 친근감을 갖고 있어서』라고 밝혔다.이교수는 「신명심보감」을 강의교재로 만들었기 때문에 한문 원문만 싣고 해석을 따로 붙이지 않았다면서 『그러나 현대어법에 따라 토를 붙이고 주를 세밀하게 달아 일반인도 큰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명심보감」은 일반서점(주로 대형서점)에서도 판매한다.
  • 광복후 민족사 「통일 독립」 관점서 정리

    ◎국사편찬위원회 김광운 「통일독립의 현대사」 발간/백범 김구·김규식 등 좌우합작운동 분석/중간간부 권태양·강병찬 평화통일 뜻 되새겨 광복이후의 민족사를 「통일독립」의 관점에서 정리한 연구서 「통일독립의 현대사」가 나왔다(지성사 간).지은이인 국사편찬위원회 김광운 연구원(36)은 이 책에서 해방정국의 극심한 좌우대립 속에서도 통일된 민족국가 수립에 온힘을 쏟은 백범 김구,김규식 등의 좌우합작운동을 분석하는 한편 민족통일을 앞둔 현시점에서 이들의 평화통일운동이 갖는 의미를 조명했다. 『「통일독립」이란 백범선생이 처음 사용했고 이후 즐겨 쓴 말입니다.이데올로기의 선택보다는 민족의 통일과 자주국가 건설을 우선해야 한다는 정치노선을 뜻합니다.남북이 갈리면 전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예상하고 이를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의지도 물론 포함하고 있지요』 그러나 분단의 역사가 계속되면서 「통일독립」을 추구한 정치세력은 남과 북 양쪽에서 외면당했고 그들의 행적도 그늘에 묻혔다.따라서 「통일독립」을 주요 정치노선의 하나로 인정,그 개념을 확립하고 운동사로 정리한 학술서로는 「통일독립의 현대사」가 처음인 셈이다. 이 책에서 김연구원은 김구·김규식 등 명망가 중심으로 운동의 흐름을 파악하기보다는 권태양(1913∼66),강병찬(1910∼?)등 한 정치세력내에서 실무를 맡은 중간간부들의 활약에 초점을 맞추었다.그는 그 까닭을 『역사의 가르침을 현실에 적응하는 데는 이들의 역할이 실제로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김 연구원이 발굴한 권태양의 삶은 조국통일을 위해 여러차례 사선을 넘나든 험난한 것이었다.안동 출신으로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권태양은 『노동계급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인텔리 민족주의자』였다.그는 광복직후 김규식을 만나면서 통일정부 수립이 무엇보다 급하다는 것을 깨닫고 좌우합작운동의 최선봉에 선다.19 48년 4월8일 권태양은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는 우익측 실무대표로서 처음 38선을 넘는다.이후 「남북연석회의」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김구·김규식의 정치적 입장이 불리해진 뒤에도 그는 어떻게든 남북회담을 성사시키고자 단신으로 남북을 오간다. 권태양은 「6·25」때 김규식등 정치지도자들과 함께 북으로 끌려갔으며 공산정권은 그를 「대남 평화통일 공세의 앞잡이」로 활용하려고 한다.그러나 그는 이를 거부하고 진정한 평화통일운동 실현을 위해 단식투쟁을 하는등 항거하다 북에서 생을 마감했다.지은이는 권태양을 『시대의 과제인 평화통일운동에 생명을 바쳐 죽는 날까지 민족을 위해 노력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이 책은 좌우합작운동을 벌인 「중간파」의 궤적을 추적한 것말고도 해방정국의 역사전개를 보여주는 새로운 자료들을 풍부하게 실었으며 미공개 사진 30여점도 수록했다. 김광운 연구원은 『이제 냉전체제가 끝나고 우리땅에도 평화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어가는 만큼 「중간파」들의 고귀한 뜻을 되새겨볼 때가 됐다』면서 이 책이 광복 50주년을 맞아 역사의 교훈을 깨닫는데 도움이 되기를 희망했다.
  • 김구선생 실명소설「조국을 남기고…」출간/대검수사관 임인배(인터뷰)

    ◎“백범의 애국정신 청소년에 심어주려 집필” 『광복 5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에 민족독립과 통일운동의 선봉에 우뚝 섰던 김구선생에 관한 책을 내게 되어 기쁩니다』 3년여에 걸친 글쓰기작업 끝에 백범 김구선생의 일생을 조명한 실명소설 「조국을 남기고 님은 가셨습니다」(고려원)를 펴낸 임인배씨(41). 임씨는 경력 13년의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베테랑 수사관이다.어려서부터 백범을 가장 존경해 왔다는 그는 백범의 일생을 소설화하면 청소년들에게 많이 읽히리라는 생각에서 책을 내게 됐다고 밝혔다.임씨는 이 소설에서 「백범일지」등 김구선생에 관한 많은 자료를 토대로 선생이 동학운동에 뛰어든 때부터 안두희의 총탄에 쓰러지기까지의 생애를 사실에 충실하게 그려냈다. 『원래 2권짜리로 기획했던 소설을 한권으로 줄이는 바람에 김구선생의 어린시절이 빠져 아쉬움으로 남는다』는 그는 자신보다 훌륭한 사람이 나서서 김구선생의 어린시절까지도 소설화해주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임씨는 또 이 소설이 혼란한 시대에 백범의 애국정신을 되새기게 하는 한편 청소년들에게 삶의 이정표를 제시하길 기대했다.행정학 박사학위를 갖고 있는 그는 틈틈히 대학강단에 서는 한편 지역장학회를 운영하는 등 사회봉사활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 5공특위 간사 역임 강신옥민자의원(인터뷰)

    ◎12·12 “증원거부 명분 못된다”/역사 바로세우기 그런 방법 뿐인가 민자당의 강신옥의원은 일년째 국회도서관으로 출근을 한다.아예 의원열람실의 방 하나를 차지하고 들어앉아 책도 읽고 조사작업도 한다.국회도서관에는 간혹 들르는 국회의원들이 더러 있지만 상주하다시피 하는 의원은 강의원 뿐이다.도서관의 수위도 의원열람실이 어디냐고 물으면 『강의원을 찾느냐』고 되물을 정도다. 그런 그가 요즈음 매달리고 있는 것은 「백범 김구선생 암살 진상조사」작업이다.묵묵히 혼자서 한다.법사위의 진상조사위원장이기도 한 그는 이 작업을 「민족의 정기와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민주당이 12·12사건에 대한 역사를 바로잡겠다면서 국회 등원을 거부하고 있는 데 대한 생각」을 물었다. 그는 한마디로 『방법이 틀렸다』고 했다.또 「12·12」 문제에 대해 『정치적 판단은 지난 89년 5공청산으로 이미 끝났고 역사적 판단은 뒷날에 맡기는 것이지 지금 이 사건을 새로이 정치쟁점화해서 국회를 공전시킬 일은 결코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다만 그는 『현재 법률적 판단 때문에 공방이 있는데 이것도 지금 민주당이 하는 것처럼 정치투쟁으로 할 일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얼마든지 제도권 안에서 다룰 수 있는 문제를 거리에 나가서 떠드는 것은 국회의 도리가 아니다』면서 『투쟁에도 룰과 절차가 있는데 국회의원들이 의회를 공전시키는 것은 불법이자 직무유기』라고 비판했다. 지난 89년 「5공특위」의 통일민주당 간사로서 「12·12사건」등 과거청산의 일익을 맡았던 그는 『당시 여야 4당대표가 어려운 나라사정을 감안해 「과거청산이 밥먹여 주느냐」면서 정치적 대타협을 한 것』이라고 밝히고 『당시 5공특위위원장을 거쳐 원내교섭단체 대표인 원내총무를 맡았던 이기택대표도 참여했던 일』이라고 상기시켰다. 그는 민주당이 강경투쟁으로 치닫고 있는데 대해 『12·12가 모든 나라일을 제쳐놓고 승부를 걸 일이냐』라고 반문하면서 『싸울 때는 싸우지 않고 합의해 놓고는 이제와서 개인적인 이미지나 이해 때문에 태도를 바꾼다는 것은 정치인으로서는 문제』라고 꼬집기도 했다. 「12·12」때 김재규의 변호인을 맡았던 그는 『검찰이 12·12 관련자에 대해 범죄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기소를 하지 않은 것은 고뇌에 찬 결정으로 이해한다』면서 『다시 소모적인 논쟁을 하는 것이 국익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역사란 당리당략적인 정치투쟁으로 바로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흐르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정확한 진상을 규명해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비로소 바로세워지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듯 했다.
  • 차지철씨 「정치가 암살」 책 냈었다/강신옥의원,국회도서관서 발견

    ◎해방후 정치지도자 테러경위·배경 분석/“백번암살에 자유당 관여”… 배후규명 시도 「10·26 사건」으로 숨진 차지철 전청와대경호실장이 백범 김구선생을 비롯,송진우 장덕수씨등 해방정국 정치지도자들의 암살경위와 배경을 분석해 저술한 책자가 발견됐다. 이 책은 특히 백범선생 암살의 배후에 당시 정권의 고위층이 관여했을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해 유신시대 정권 막후에서도 이 사건의 배후규명 작업이 시도됐음을 시사하고 있다. 국회 법사위의 「백범선생시해사건 진상조사소위」 위원장을 맡고 있는 강신옥의원(민자당·전국구)은 13일 차 전경호실장이 지난 78년 청와대경호실 이름으로 펴낸 「암살자」라는 3백여쪽짜리 단행본을 국회 도서관 금서목록에서 발견,공개했다. 대외비 표시가 돼 있는 이 책의 제본은 「5·16」거사자금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고 박정희 전대통령 통치 때 사실상 정부간행물센터 역할을 했던 광명인쇄공사가 맡았다. 차 전실장은 서문에서 육영수여사의 피격을 막지 못한 청와대 경호팀의 자괴감을 피력한 뒤 대통령과 주요인사의 경호에 만전을 기하려는 뜻에서 책을 발간했다고 밝히고 있다. 케네디 전미국대통령 암살사건등 각국의 암살·테러유형과 배경,경호의 문제점등을 분석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이 책은 해방후 정치지도자의 암살사건에 절반이상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백범선생 암살사건에 대해 이 책은 『사건배경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던 김구주석에 대해 정권욕에 사로잡힌 자유당정권 고위인사들이 조종한 사건으로 추측된다』고 밝히고 있다.특히 『이승만박사와 정견을 달리한 김구주석에 대해 장은산중령,김지웅 등을 사주하고 이들의 부하장교 안두희 한국상등 10여명의 행동대원들을 움직이게 한 정권 고위층의 개입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고 문제를 제기했다.경호문제에 대해서는 『사건 당일에도 암살정보가 있었으나 소지품 검색없이 권총을 허리에 찬 안두희에게 요인과의 면접을 허용한 것은 경호상 큰 실수』라고 지적했다. 송진우 전한민당당수 암살사건에 대해서는 『경호원이 부로닝권총으로 응사하려 하였으나 불발돼 범인들이 도주하는등 장비점검이 소홀했다』고 적고 있다.장덕수 한민당정치부장사건에 대해서는 『경호경비가 불완전한 일반 정치지도자에게 흔히 있을 수 있는 위장된 범인에 대한 경계가 소홀했다』고 지적했다. 결론부분에서 이 책은 해방정국 암살테러사건의 특징을 ▲배후규명 미흡 ▲테러범 다수가 유학 학병 등으로 일본과 연관을 맺은 점 ▲청년들의 범죄심리를 이용한 점 ▲범인들이 따르던 윗사람의 암시에 좌우됐다는 점 등으로 요약했다.
  • 백범묘소 찾은 일 국회의원/주병철 사회부기자(현장)

    ◎“「백범일지」에 감명… 참배 결심” 단풍을 시샘하듯 밤새 내린 가을비가 그치고 맑은 햇살이 내리쬐고 있는 16일 하오 3시 서울 용산구 효창원내 백범 김구선생 묘소. 『백범의 뜻을 기리기 위해 꼭 한번 참배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머리가 희끗희끗한 일본 자민당 중의원 8선의원인 시가 세스씨가 이곳을 찾은 동기를 말하고 묵념을 올리고 있었다. 올해 57세인 시가의원은 일본 현역 의원으로는 처음으로 항일 민족지도자 백범선생의 묘소를 찾은 것이다. 『얼마전 일본에서 활동중인 한일관계연구가 최서면씨로부터 받은 백범일지를 읽고 감명해 참배하게 됐습니다』 시가의원은 합장을 마친뒤 함께 온 한국인 일행이 비석을 가리키며 선생의 항일운동과 정신을 설명하자 숙연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미리 연락을 받고 나와있던 백범선생의 손자 김양씨(41)를 보고는 뜨거운 악수를 나누었다. 참배를 마친 시가의원은 백범선생에 대해 자기가 갖고있는 존경심과 느낌을 담담한 어조로 털어 놓았다. 『김구선생의 백범일지처럼 역사를 평가하는 포착법을 가르쳐 준 책은 없었습니다.바로 자신의 위치와 할 일을 깨우쳐 주고 있는 책이지요』마치 내년이면 패전 50주년을 맞는 일본인들에게 이 책 만큼 의미있는 가르침과 반성을 줄 책은 없는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가의원의 참배를 지켜보는 우리측 일행 역시 그의 행동이나 말을 단순한 겉치레로 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백범선생의 손자 김씨는 『일본 현역국회의원이 백범묘소를 찾은 것은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의미가 있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일본에서 같이온 최씨도 『이번 일본 현역의원의 백범선생 묘소참배를 계기로 하나하나 살아 숨쉬고 있는 우리 민족의 혼을 되살려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시가의원은 현재 부친의 상중이라고 한다.다시 안중근의사의 묘소를 참배하러 가야한다며 바쁘게 발걸음을 옮기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잊을만 하면 「망언」을 되풀이 하는 일부 일본 지도층과는 다른 면을 볼 수 있었다.
  • 이봉창의사 의거 기념/김구선생 추모시 발견

    광복투쟁의 선구자 이봉창의사의 순국 62주기에 때맞춰 백범 김구선생이 이의사를 기렸던 추모시가 공개돼 관심을 끌고 있다. 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회장 김재홍)는 10일 김구선생이 서거하던 지난 49년 자신이 의거를 지시했던 이의사의 32년1월8일 도쿄 사쿠라다문 일왕 히로히토 폭탄테러사건을 기념해 쓴 추모시가 최근 박삼중스님이 고서상을 통해 입수,발견됐다고 밝혔다. 한지에 쓰인 72자의 한문시는 작성일이 임시정부 수립 31년째인 1949년을 의미하는 「대한민국 31년 1월8일」로 끝부분에 『이봉창의사의 도쿄 사쿠라다문 의거를 기념하며』라는 말과 함께 친필 서명과 낙관이 찍혀 있어 이의사에 대한 추모시임을 입증하고 있다. 한편 기념사업회는 이날 상오11시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내 의열사에서 독립유공자와 사회단체관계자 등 5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봉창의사 순국 62주기 추모제전」을 갖고 이 시를 이의사 영정에 봉정했다.
  • 정상회담 기대 너무 부푼다/이중호(데스크 시각)

    남북한 정상회담에 온 국민의 관심이 쏠려 있다.관심을 넘어 뜨거운 열기까지 느껴진다.저마다 바라는 것도 많고 감 놓아라 배 놓아라 말도 많다. 국회에서도 마찬가지다.방북대표단에 야당의원을 넣어야 한다거니,통일방안에 대해 국민투표를 하자거니 주문도 많다.『65세이상 실향민들을 북한에 가서 살도록 하자』『남북의 가정주부들이 판문점에서 정기적으로 만나게 하자』『노동집약적 중소기업들을 북한에 진출시키자』는 등 기발한 아이디어가 난무한다.국가보안법을 폐지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정·관가 일각에서는 월드컵 축구대회의 남북공동유치를 정상회담의 의제로 올리자는 논의도 있었다고 한다.서울과 평양의 경평축구대회를 재개하고 문화예술사절단을 교환하며 문화재를 교환전시하자는 이야기도 나오는 모양이다. 여기서 우리는 잠깐 생각을 다시 해봐야 할 것 같다.과연 그리되면 얼마나 좋으랴.그러나 그것들이 정말 실현 가능한 일이며 우리가 그렇게 들떠서 되는지…. 며칠전 김영삼대통령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국민들이 남북정상회담에 무엇을 바라는 가를 듣고 지혜를 빌리기 위해 여러 사람을 열심히 만나고 있다.그런데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을 만났는데도 말이 서로 달랐다.한사람이 이런 식으로 회담에 임하시오 하면 바로 곁에서 그것은 안되니 이렇게 하시오 하는 것이다』­대통령의 고민을 짐작하게 하는 솔직한 고백이었다. 우리는 남북정상회담을 두고 아무래도 너무 흥분해 있는 것 같다.협상이나 회담이라는 것은 원래 상대가 있게 마련이다.이쪽에서 아무리 무엇을 바라고,또 무엇을 해주고 싶어도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모두가 쓸모 없는 일이 된다. 북한은 누가 뭐래도 이데올로기의 사회이다.그것 때문에 실상은 모르면서 그 사회를 동경하는 부류까지 있다.이데올로기의 사회는 모든 언어와 전략을 그 이데올로기의 목적에 맞추게 마련이다. 그들이 「민족」을 말할 때 그 뒤에는 「남조선은 미제국주의자들에게 강점돼 있다」는 주장이 숨어 있게 마련이다.스스로는 우리와의 대화 보다 미국쪽에 매달리면서도 그들은 그렇게 나온다.「군축」도 마찬가지다.10만을줄이든 10만을 남기든 그 속에는 「미군철수」가 깔려 있다.미군이 철수만 하면 남쪽은 제손 안에 있다는 꿈을 꾸는 것이다. 지금껏 공산주의자들과 협상을 해서 이긴 사례는 거의 없다.싱가포르의 이광요 같은 이는 몰라도.우리나라만 해도 그렇다.투쟁경력이나 지략에서 김일성을 훨씬 능가한다던 골수 공산주의자 박헌영이 무릎을 꿇었고 민족지도자 고당 조만식선생도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나야 했다.심지어 독립투쟁의 영웅 백범 김구선생도 실패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이른바 「적진아퇴 적퇴아진」과 「담담정정」란 모택동전략이 있다.앞의 것은 상대가 굳세게 쳐들어오면 나는 물러서고 상대가 후퇴할 때 그 약점을 친다는 전략이다.뒤쪽은 협상은 어디까지나 협상일 뿐이고 혁명투쟁은 투쟁으로서 계속된다는 뜻이다.물러서거나 협상을 하는 것이 모두 공산혁명투쟁을 완성하기 위한 한 과정일 뿐이다. 북한문제전문가들은 이번 평양회담에 나오는 북한쪽에 그런 저의가 전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오산이 될 것이라고 경고 하고있다.설사 그렇기까지야 하겠는가마는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가는 지혜가 필요할 것 같다.그것은 김일성이 남북분단의 단초를 제공한 장본인이라 해서가 아니고 민족상잔의 비극 6·25사변을 일으켰다 해서도 아니다.더더구나 1·21사태며 아웅산 만행를 논할 계제도 아니다.그런 것들은 정상회담이 열리는 마당에 우리가 문제삼을 일이 아니다.그들이 스스로 과거를 뉘우치고 진심으로 사죄하면 그뿐이다. 다만 우리 사회가 너무 들뜨거나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조급함을 보여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김대통령이 얼마나 어려운 회담을 하러가는지부터 생각해봐야 한다.마침 흥사단이 귀중한 성명을 냈다.『회담 날 정오 온 국민이 다 함께 회담의 성공과 통일을 축원하는 묵념을 올리자』.
  • 양기탁선생 묘소를 찾기까지/백범이 남긴 약도로 사후56년만에 확인

    ◎유족들,제자와 함께 정확한 위치 찾아/“유해봉환위해 정부차원 지원 있어야” 『대한사람에 우리들은요­산과 골이야 아무리 깁허도 우리마음은 당할수 없누나/대한사람에 우리들은요­물과 불이야 아무리 겁나도 우리마음은 해할수 없누나/대한사람에 우리들은요­달과 놀이야 아무리 발거도 우리마음은 빗칠수 없누나/대한사람에 우리들은요­총과 칼이야 아무리 무셔도 우리마음은 뚜룰수 없누나/…』(양기탁 「아해들 노래」 중에서) 독립운동가이자 문인이자 언론선각자로 평생을 민족에 대한 끝없는 사랑으로 일관한 우강 양기탁선생(1871∼1938)의 묘소가 중국 강소성 율양현의 한 시골마을에서 후손들에 의해 발견됐다. 상해에서 내륙쪽으로 7시간 이상 버스로 달려가는 강소성 남부의 작은 마을 대부진 남문두에는 아직도 우강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제자들이 생존하고 있어 그들의 증언을 통해 우강이 기거하던 고당암터와 묘소터를 확인할수 있었다는 것이다. ○상해서 7기간 거리 우강은 구한말 대한매일신보(서울신문 전신)를 창간하여 외세의 침입에 항거,「행동하는 필봉」으로 민족자존의 횃불을 드높였다.또 일제치하에서도 굴하지 않고 만주와 중국대륙을 무대로 민족적 자각과 독립을 위해 앞장섰던 인물이다.이번에 그의 묘소가 사후 56년만에 유족들의 노력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것은 오는 7월18일 대한매일신보 창간 90주년을 앞두고 더욱 뜻깊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동안 우강의 묘소는 정확한 소재가 파악되지 않아 가족들은 물론 애국선열들의 유해봉환을 추진해오고 있는 정부와 뜻있는 이들의 애를 태워왔다. 우강의 묘소를 찾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것은 백범 김구선생이 해방후 유족들에게 건네주었던 묘소의 약도였다.백범은 우강과는 5년 연하로 신민회 활동에 이어 상해 임시정부등에서 함께 활동해와 남다른 교분을 갖고 있었으며 해방후 우강의 유족인 장남 효손(6·25때 납북)에게 아버지의 묘소를 찾아보라며 현장의 위치를 그려 갖다 주었다는 것이다.이 약도는 우강이 말년에 기거하던 고당암과 주변의 뽕나무밭,묘소위치등을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난 3월 이 약도를 들고 묘소를 찾아나섰던 우강의 자부 최선옥씨(76)는 『납북된 남편의 뜻을 40여년만에 이루게돼 여한이 없지만 어서 유해를 모셔와 고국에서 편안하게 영원히 쉬시게 하는 일이 남아있다』며 울먹였다. ○농지개선작업때 이장 우강의 묘소를 찾는 작업은 독립운동가 박은식선생의 손자이자 최씨의 사위인 박유철씨(56·건설공무원교육원장)가 4∼5년전부터 모친(최윤신·77)의 중국에 사는 친척들을 통해 수소문하면서 시작됐다.그 결과 대략적인 위치가 파악됐으며 이번에 박씨가 모친·장모와 함께 현장을 답사,백범의 약도와 비교해보고 생존한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게 된것이다. 우강의 묘소는 원래 고당암 앞의 뽕나무밭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60년대 모택동이 대대적으로 전개한 농지개선작업때 4∼50ⓜ 남쪽으로 이장했으며 오늘날에는 밭 한가운데 거의 형체를 알아볼수 없게 방치돼 있다는 것이다. 유족들이 이 마을에서 만난 제자이자 이장을 역임했던 번정재씨(79·농업)는 『선생은 키가 크고 하얀 얼굴에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으며 학문이 높고 기공의 경지가 높아 많은 존경을 받았다』고 회상하고 『선생이 기거하시던 고당암에는 늘 기공을 연마하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덧붙였다. 우강의 유족측은 올 가을쯤 다시한번 강소성의 묘소를 방문,구체적인 유해봉환을 위한 절차를 현지정부와 협의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광복 50주년을 맞는 내년까지는 반드시 유해봉환이 이뤄질수 있도록 정부차원에서도 관심을 기울여 줄것을 강력히 촉구했다.◎양기택선생의 항일 족적/대한매일신문 창간… 국권회복 앞장/신민회 결성… 독립군 양성 등 무장투쟁 말 외세의 침략이 노골화돼가던 1871년 4월2일 평양에서 태어난 우강은 소년시절 한학을 배운뒤 15세때 상경,한성외국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웠고 25세때 부친과 함께 미국인 게일의 한영사전 편찬작업에 참여했다.그 과정에서 일본 미국등을 다니며 선진문물을 배울 기회가 있었다. 이어서 1898년 독립협회에 가담하였고 개혁당 당원으로 활약하는등 활발한 구국운동을 전개했다.러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에는 대한제국 황실의외교담당부서인 궁내부 예식원 직원으로 임명돼 영어통역을 맡기도 했다. 우강의 가장 큰 업적은 대한매일신보의 창간이다.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의 관할권을 내세우는등 침략을 노골화하자 이를 견제하고 국민을 교육시키기 위한 신문의 필요성을 절감했다.따라서 당시 영국 데일리뉴스의 임시특파원으로 서울에 와있던 어니스트 베델(1872∼1909)을 사장으로 하고 자신은 총무를 맡아 새신문을 창간했던 것. 국한문 혼용의 국내용 신문과 별도의 영문판도 발행한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잔혹한 통감정치 하에서도 전국각지의 의병활동을 상세하게 다루고 국채보상운동을 펴는등 국운이 쇠하여가는 절망적 상황에서도 끝까지 민족에게 항일의식과 애국계몽의식을 심어 국권회복운동의 불씨를 재우지 않으려 노력했다. 우강은 또 안창호·이동휘·이동령·노백린·이시영·김구등과 함께 신민회를 창립,해외독립기지 건설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대한매일신보 사무실내에 본부를 두고 활동을 벌이던 신민회는 1909년 전국대회를 열고 해외에 독립군기지를 세우고 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하는 한편 국내진입작전을 펼쳐 독립을 쟁취한다는 「독립전쟁전략」을 채택하기도 했다. 이어서 한일합방을 앞둔 1910년 3월에는 신민회가 만주 망명을 결정하고 서간도에 기지를 마련,자치기관인 경학사를 설치하고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이같이 신민회의 활동이 해외거점을 확보하자 일제는 1911년 7월 「양기탁보안법위반사건」을 날조,신민회 중앙간부 16명을 모두 체포하고 신민회를 해체해버렸다.이어 13년에는 총독암살사건(일명 「105인사건」)으로 6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했다. 4년만에 감형으로 출소한 우강은 16년 주거제한지인 평남 강남군 쌍용면 신경리를 탈출,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와 광복회에서 활동했다.그러나 2년뒤 18년에 천진에서 일본경찰에게 다시 체포돼 국내로 압송,전남 거금도로 유배됐다. 20년 4월 유배를 끝나고 서울에 와있던 우강에게 새로 창간된 동아일보가 고문및 편집감독으로 추대를 제의해 왔지만 언론을 통한 독립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있던 그는 거절했다. 34년 제26회 의정원 회의에서 우강은 김규식 조소앙과 함께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었고 이어 주석으로 선출되었다.그러나 그는 주석직도 얼마 가지 않아 사임했으며 모든 관직을 떠나 강소성 율양현으로 들어가 선도에 몰입하다 38년 4월,67세로 이국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았다. 우강은 이같은 공로로 62년 독립유공자중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수여받았으며 86년 독립기념관의 독립유공자 임정위원 42인에 추대됐다. ▷연보◁ △1871 평남 평양 소천출생 △1885 한성외국어학교 영어수학 △1895 게일의 영어사전편찬 도움 △1900 나가사키 유학 △1904 베델과 대한매일신보 창간 △1907 신민회 조직 △1913­5 「양기탁 보안법 위반사건」 및 「105 사건」등으로 투옥 △1916 만주로 탈출 △1918 전남 거금도 유배 △1922 만주에서 의성단 조직 △1926 임정 국무령 추대,거절 △1934 임정 주석 선출 △1938 강소성 담양현 고당암에서 선도연구중 사망
  • 백범 45주기 추도식/5백여명 참석

    백범 김구선생 제45주기 추도식이 26일 상오 이만섭국회의장과 이기택민주당대표등 여야 정치인과 이충길보훈처장,독립운동단체 관계자등 각계인사 5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효창공원 묘소에서 백범기념사업회(회장 장충식) 주최로 엄수됐다. 이의장은 추도사를 통해 『남북한 정상회담의 추진은 46년전 백범선생이 결행했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상기시켜준다』고 회상하고 『선생이 반세기 전에 세운 이정표가 그동안 외면당하다 김영삼문민정부에 들어와서야 마침내 구체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의장은 『통일이라는 민족의 최고지표를 밝힌 것으로 자신의 역할이 끝났다면서 정치에 어떤 미련도 보이지 않았던 선생의 행동은 진퇴가 분명한 정치인의 본보기였다』면서 『남북한의 허리가 잘려서는 안된다는 통일을 향한 선생의 외로운 절규도 재평가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 광복 50돌/방송3사 대형드라마 제작 경쟁

    ◎K/김구 일대기 극화,「그날이 오면」 30부작으로/M/중앙아동포 파란많은 삶 조명… 20부작 기획/S/중국 CCTV와 함께 5부작 「안중근」 현지로케 내년은 우리나라가 일제식민지에서 해방된 지 반세기가 되는 뜻깊은 해. 방송3사는 광복 50주년을 맞아 격동의 세월에 독립운동의 무대이던 중국과 중앙아시아 등을 무대로 하는 대형드라마들을 특별기획,다음달부터 본격제작에 들어간다. KBS는 김구선생의 일대기를 그린 30부작 「그날이 오면」을 기획,오는 7월부터 본격적인 해외촬영에 들어간다.「그날이 오면」은 김구선생의 「백범일지」와 정정화여사의 「녹두꽃」,안두희사건에 얽힌 기록들,임정 및 해방이후의 정국기록 등 사실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해방을 전후로 숨가쁘게 펼쳐지는 정국을 그린다.이 드라마는 독립운동가 김의한의 아내로 상해 임시정부의 요인들과 가깝던 정정화여사의 회고형식으로 진행된다. 연출을 맡은 김충길PD는 『민족적 수난기에 태어나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바친 백범 김구의 생애와 사상,그리고 그가 남긴 불멸의 업적을 되짚어봄으로써 참된 애국의 실체를 정립하려 한다』고 기획의도를 설명한다. 극본은 「형사25시」 「청춘극장」 등 TV드라마를 쓴 이봉원씨가 맡았다.제작팀은 지난달 5일부터 27일까지 중국의 천진·북경·상해·항주·소주·남경·서안 등지의 답사를 마친 상태고 김구선생 이외에 이승만·안창호·이시영·박은식·여운형·김좌진·이광수·안중근 등 주요실존인물역할을 맡을 연기자 캐스팅에 들어갔다.「그날이 오면」은 95년3월1일부터 8월15일까지 방영될 예정이다. 한편 MBC는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는 한인동포들의 파란 많은 삶을 그린 「까레이스키」를 제작한다. 「까레이스키」란 한인들을 가리킬 때 쓰는 러시아말 「까레예이츠」의 형용사형.암울하던 일제말기 시베리아 연해주를 근거지로 하는 독립군의 활약상과 주인공들의 굴절된 인생을 통해 혁명기를 산 사람들의 아픔과 한이 생생히 묘사된다. TV드라마사상 처음으로 러시아유민사를 다루게 될 「까레이스키」(이상현 극본·장수봉 연출) 제작팀은 세차례의 중앙아시아와 연해주현지답사를 거쳐 다음달 10일부터 1백5일간의 해외촬영에 들어간다.중앙아시아에서 8월10일까지 60일간 촬영을 마치는 데 이어 9월5일부터 10월20일까지 연해주에서 촬영되는 이 작품은 11월말 60분물 22부작으로 선보인다. 연출가 장수봉PD는 이 드라마를 『19 37년 당시 어지러운 국제정세 속에서 역사의 희생양이 된 구소련의 한인들의 강제이주과정을 되짚어보고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사막을 옥토로 일구어낸 그들의 정착과정을 통해 한민족의 끈기와 근면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설명한다. 카자흐스탄공화국의 수도 알마아타에 있는 60여년 전통의 조선극장이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김희애·도지원·김병세·황인성이 출연한다. 또 SBS는 특집드라마 「안중근」을 중국 중앙방송국(CCTV)과 공동제작키 위해 가계약을 맺은 상태.60분물 5부작으로 제작될 「안중근」은 오는 6월 본계약을 거쳐 중국인 배우들을 대거기용하고 50%정도를 중국현지에서 로케이션할 계획이다.
  • 「백범일지」 중국어판 새달하순 북경서 출판(조약돌)

    ○…상해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선생의 「백범일지」가 중국 출판사에 의해 중국어로 번역돼 다음달 북경에서 출판될 예정이어서 화제. 백범기념사업회(회장 장충식 전단국대총장)는 11일 김구선생 암살 45주기를 맞는 오는 6월26일쯤 「대한민국 개국원훈 백범금구 자서전」이란 부제를 단 「백범일지」 중국어판이 중국의 「민주와 건설 출판사」에 의해 발간돼 7월초 북경의 인민대회당에서 출판기념회가 열릴 예정이라고 전했다.
  • 아마문인 2인 장편 서사시 발표

    ◎박영복씨 「동학농민전쟁」/사회개혁 차원서 접근/유홍렬씨 「백범 김구」/자료수집 3년의 역작 아마추어 문인들이 동학농민전쟁과 김구선생의 일생을 소재로한 장편 서사시를 나란히 발표해 화제다. 인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집행위원장인 박영복씨(46)가 펴낸 「동학농민전쟁」(학민사간)과 지난 91년 서울시 공무원으로 퇴직한 유홍열씨(52)가 발표한 「백범 김구」(자유지성사간)가 그것. 두 작품은 우리 역사상 큰 비중을 차지하는 동학농민전쟁과 김구라는 거물을 기성문인들조차 꺼리는 서사시로 엮어냈다는 점에서 일반인들뿐만 아니라 문단에서도 관심을 모으고있다. 박씨의 서사시 「동학농민전쟁」은 박씨가 고려대 산업공학과 졸업후 지난 89년부터 경실련에 몸담아오면서 틈틈이 습작한 수필등의 글솜씨를 토대로 동학농민전쟁을 사회개혁차원에서 접근한 작품. 1800년 홍경래의 난부터 전봉준이 처형된 1894년까지의 역사적 사실들을 객관적으로 풀어나가면서 동학농민전쟁을 농민이 주체가 된 사회개혁운동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는게 특징이다.특히 이기간동안 만연했던 농민의 수탈상이나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요즘의 부조리현상과 같은 선상에 올려놓고 당시의 농민전쟁을 부조리 척결차원의 자발적인 「시민운동」으로 엮어나간것이 눈에 띈다. 유씨의 「백범 김구」역시 과거 부조리척결등 의식전환측면을 강조한 서사시. 3년간에 걸친 자료수집을 토대로 김구선생의 행적과 사상등 일대기를 전기형식이 아닌 장시로 풀어내면서 그의 역사적 희생부각과 함께 친일파등 반민족행위자 처벌에 안이했던 역사적 과오를 넌지시 비추고 있다. 「문학예술」지를 통해 등단,시집 「삽상한 바람」을 내기도 했던 유씨는 『어릴적부터 문학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컸지만 형편상 문학일선에 나서지 못한게 아쉽다』면서 『그러나 공무원 재직중 내내 가슴에 담고있던 생각을 이렇게나마 표출하고나니 홀가분한 기분』이라고 귀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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