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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범 김구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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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료전 13일부터 새달12일까지

    광복회는 임정수립 80주년 기념사업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료전을 개최합니다. 이 자료전에는 임정요인의 활동상과 백범 김구선생의 겨레사랑·자주독립정신을 담은 화보 및 유물·유품이 전시됩니다.또한 임정 2대 대통령 白巖 朴殷植,독립운동가 石洲 李相龍,友堂 李會榮,趙素昻,石吾 李東寧선생의 친필휘호 자료등이 함께 공개됩니다.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람 바랍니다. 기 간 4월 13일∼ 5월 12일 1개월간 장 소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기획전시실 문 의 전쟁기념관 안내 709-3139 관람시간 오전 9시 30분∼오후 6시(매주 월요일 휴관) 입장료 무 료
  • [정직한 역사 되찾기]친일의 군상(29)

    반민특위 ‘검거 제1호’ 박흥식(朴興植)이 특위로 잡혀온 것은 1949년 1월8일 오후 4시30분.특위 부위원장 김상돈(金相敦)의 지시를 받은 조사관 김용희(金容熙)와 서기관 박희상(朴喜祥)은 특경대원 7명을 데리고 서울 종로 네거리 화신백화점 사장실을 급습하였다.당시 특위가 박흥식을 첫 검거대상자로 지목한 것은 그가 미국도피를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특위 조사관 일행이 화신 사장실을 급습할 당시 박흥식은 외무부 관계자들과 미국여행권(여권번호 00130호)관계로 대화를 나누고있었다.신분을 밝히고 동행을 요구하자 박흥식은 영국제 고급담배를 꺼내 조사관들에게 권하며 “정리할 서류가 좀 있으니 5분만 시간을 주시오”라며지연작전을 폈다.‘독안에 든 쥐’라고 판단한 조사관들이 이를 허락하자 박흥식은 옆방으로 들어가더니 10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그새 비밀문을 통해 박흥식은 다른 방으로 가서는 모처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그의 구원요청은 허사로 돌아가고 그의 양손에는 마침내 수갑이 채워졌다. 한 때 ‘조선 제일의 부자’로 불리던 박흥식(1903∼1994)은 평남 용강군에서 소농의 자식으로 태어났다.그곳에서 소학교를 졸업한 그는 가족 부양을위해 진남포에서 미곡상을 시작으로 사업에 첫 발을 내디뎠다.천부적인 상술과 뛰어난 친화력으로 그는 1924년 고향에서 불입자본금 10만원으로 선광당인쇄소를 시작하였다. 2년 뒤 그는 사업무대를 서울로 옮겨 선일지물을 창립하였다.그때 그의 나이 26세였다.자본금 25만원인 이 회사에 그는 6만5,000원을 불입하였는데 이 돈은 토지를 담보로 식산은행에서 대출받은 5만원과 나머지 일부를 그가 부담한 것이었다.그는 주로 총독부 당국과의 친교를 바탕으로 식산은행·한성은행 등의 은행돈을 최고 수 천만원까지 끌어다가 사업자금으로 활용하였다. 당시 금융가에서 그는 최고대우를 받고 있었다. 한편 종로 네거리에서 공동경영하던 금은방·잡화상을 매수,1931년 화신백화점을 설립하였는데 이 회사가 그의 모기업이 되었다.화신백화점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으로 사은경품판매,연쇄점 운영 등의 경영기법을 도입,승승장구하였다.이어 1936년에 설립한 화신연쇄점은 최고 번성기를 구가하던 37년경에는 전국에 연쇄점 수만 350개가 넘었다. 당시 그는 총독부의 도움으로 식산은행에서 3,000만원을 대부받았는데 그로서는 자본과 신용만 중요할 뿐 자본의 성격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화신의 자본을 두고 ‘매판적 상업자본’으로 규정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자본의 성격과 함께 사업방식도 그렇다.화신백화점과 함께 화신연쇄점은 일본 오사카(大阪)의 영업소를 통해 일본상품을 다량 수입,국내에 살포함으로써 국내시장을 일제상품의 소비처로 전락시켰는데 이는 당시 일제의 대표적인 식민지 지배정책이었다.이 때문에 그는 총독부로부터 은행대출과 관련,하등의 통제도 받지 않았었다. 한편 반민특위에 검거된 그는 제3조사부의 예비조사를 마치고 특별검찰부로 송치되었다.검거된지 47일만인 3월22일 기소되었는데 검찰측 조사기록은 무려 6,000 페이지에 달했다.그의 기소장에 나타난 죄명은 반민법 제4조 7항(비행기·병기·탄약 등 군수공업을 책임경영한 자)·제7조(범죄자 옹호·도피 협조자)위반이었다. 반민특위에서 지목한 그의 대표적인 반민족행위는 일제말기 비행기공장을만들어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조한 점과 각종 친일단체에서 활동한 점이었다. 태평양전쟁이 결정적인 단계에 이르렀을 때인 1944년 2월 그는 일본의 항공전력 증대를 목적으로 조선비행기공업(주) 설립허가를 총독부와 일본내각에제출하였다. 수차례 일본을 다녀온 끝에 자본금 5,000만원으로 회사 설립허가를 받은 그는 그 해 10월 자신이 대표가 되어 주식을 공모하였다.그는 총독부의 힘을빌어 조선직물회사와 동양방적 안양공장을 접수하였고 인근 토지를 몰수하여비행기공장을 건설하였다.비행기 생산시설은 조선군사령부 병참부의 중개로관동군의 지원을 받았는데 대가로 조선의 해산물·직물 등을 송출하였다. 공장의 노무인력은 전적으로 징용자였다.44년 11월부터 총4회에 걸쳐 1,717명을 선발한 후 1개월간 경기도 광주에서 조선군의 지도로 기본훈련을 시킨후 다시 일본 나고야(名古屋)나 만주로 보내 실습을 시킨 다음 안양공장이나만주비행기공장으로 보내 비행기 제조에 종사시켰다. 흔히 박흥식의 조선비행기(주)는 비행기를 만들려다 일제 패망으로 그만둔것으로만 알려져 있다.그러나 특위의 조사내용에 따르면,45년 5월 당시 제1호기의 주익(主翼)·동체를 위시하여 대부분의 작업을 마치고 8월에 시험비행을 하였으며 2·3호기도 부분품 제작중에 있었으며 9월말 작업을 완료할계획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박흥식은 자신이 경영하던 광신상업학교를 조선비행기공업학교로 개편,비행기 기술공을 양성하려 했던 사실도 조사과정에서 새로 밝혀졌다.실제로 전장에 투입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비행기제조계획은 거의 완성된 단계였다. 일제패망후 그는 조선군사령부로부터 조선비행기에 투자한 금액과 격려금까지 받았으나 이중 일부를 주주들에게 나눠주고는 대부분 착복하였다. 한편 그의 친일은 각종 친일단체 활동에서도 두드러졌다.30년대 후반 그는조선총독부 주최 산업경제조사회와 시국대책조사회에 조선대표로 참여하여일제의 시국대응책에 대해 자문역할을 하였다.또 각종 전쟁협력행위에 가담하였는데 국민정신총동원연맹 이사·배영동지회 상담역을 비롯해 임전대책협의회·조선임전보국단의 간부로 활동하였다. 특히 임전대책협의회 발족시 민규식(閔奎植) 김연수(金秊洙) 등과 함께 각각 20만원씩을 기부하였으며 전시채권 가두판매에 나서기도 했다.징병제 찬양이나 학병 권유에 나선 것은 물론이다.총독부 고관을 비롯해 군부 경찰 금융계 등 광범위한 권력층과 사귀면서 이들의 비호를 받던 그는 제6대 조선총독 우가키(宇垣一成)와 각별한 사이였는데 특위 조사과정에서 우가키를 ‘숭배’하였다고 실토한 바 있다. 바로 우가키가 총독으로 재임하던 시절 화신백화점·화신연쇄점이 최고의전성기를 누린 점은 두 사람의 친분관계와 무관치 않다.미나미(南次郞)총독과도 유착관계가 남달라 그가 조선총독에서 이임,귀국하자 ‘영원히 못잊을자부(慈父)’라는 담화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발표하기도 했다. 한편 특위가 그를 ‘검거대상 1호’로 지목한 것은 그의 미국 도피음모 이외에도 그가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려 했기때문이었다.특위의 활동개시가 예견되자 그는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할 목적으로 장직상(張稷相) 등과만나 모종의 음모를 꾀하였다.그는 당시 수도청 수사과장으로 있던 친일경찰 최란수(崔蘭洙)에게 수사비 명목으로 10만원을 지원한 사실이 특위 조사과정에서 밝혀졌다. 기소 1주일만인 3월 28일 반민특위의 첫 공판이 서울지방법원 대법정에서열렸다.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그의 재판은 구속 103일만인 4월20일 그의 병보석으로 다시 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특별재판부가 병보석으로 그를풀어주자 당시 특별검찰부 검찰관 9명은 전원 사표로 이에 맞섰고 사회·정당단체에서도 격렬한 성명으로 특별재판부를 비난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해 9월26일 그는 ‘공민권정지 2년’이라는 가벼운 구형에이어 당일로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났다.이유는 그가 군수공장을 경영하였지만 실질적으로 비행기를 제작,일제에 지원하지는 않았고,또 각종 친일단체에서 활동한 것은 피동적으로 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특별재판부가 이같은 어처구니없는 판결을 내린 데는 속사정이 있었다.친일경찰의 반민특위습격사건(일명 ‘6·6사건’)에 이어 ‘국회프락치사건’으로 특위의 중심인물이었던 소장파 의원들이 대거 제거된데다 6월29일 백범 김구선생의 피살로 친일파척결의 정신적 기둥마저 상실한 상태였다.법적으로 그는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역사의 법정에서 그는 여전히 ‘유죄’로 남아있다. 해방후 그는 사업재기를 노렸지만 80년 화신산업의 부도로 마침내 막을 내렸다.부채청산을 위해 자신이 수십년간 살아오던 집까지 내놓았지만 ‘물길’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종로 네거리 옛 화신백화점 자리에는 어느새 새 임자가 나타나 그의 부(富)를 되살리려는듯 현재 빌딩공사가 한창이다. 정운현
  • 石吾 李東寧선생 오늘 59주기 일대기

    “선생은 재덕(才德)이 출중하나,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를 도와서 선두에 내세우고, 스스로는 남의 부족을 보충하고 고쳐 인도하는 일이 일생의 미덕이었다. 최후의 한순간까지 선생의 애호를 받은 사람은 오직 나 한사람이었다.”김구선생이 ‘백범일지’에서 石吾 李東寧선생을 기리며 쓴 내용이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석오만큼 폭넓고 헌신적이며 종시일관 독립운동에 생애를 바친 분도 흔치 않다. 그에 비해 평가와 관심이 크게 뒤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실제로 임시정부는 석오의 애국심과 포용력으로 유지된 바 크다고 하겠다. 8·15해방까지 임정이 유지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 것은 석오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후계자’백범은 석오에 의해 발탁되고 지도되었다. 두사람은 7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혈맹의 義’관계에서 항상 석오가 백범을 발탁하고 지도하는 입장이었다. 석오가 아니었다면 백범의 존재는 나타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1904년 석오는 항일청년단을 만들면서 무명청년 백범을 상동교회 청년회에 가입시켰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혈맹의 동지가 되었다. 1919년 4월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된지 며칠후 백범은 임정의 문지기라도 하겠다고 석오를 찾았고 그의 노력으로 당시 내무총장이던 안창호 밑에서 경무국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이(利)를 보면 겸양을 생각하고 의(義)를 보면 위험을 무릅쓰는” 석오의 인품을흠모해온 백범은 항상 그와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해방후 백범은 아들 信을 시켜 중국땅에 외롭게 묻힌 석오의 유해를 고국으로봉환하여 서울 효창공원에 안치하였다. 석오의 생애는 국내에서 선각적 개화운동의 전기와 임정을 이끌면서 망명생활로 생애를 마친 후기로 나눌 수 있다. 만민공동회의 연사로 나서 잘못된정치를 탄핵하다가 이준·이승만과 함께 옥고를 치루고, ‘제국신문’논설위원, YMCA운동, 을사조약 반대 결사대로 대한문 앞에서 연좌시위, 안창호·양기탁등과 신민회조직, 안창호·이회영과 전국에 교육단을 조직하고 ‘대한매일신보’발행 지원, 상동학교 설립 등 37세때까지 국내에서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한일합병 뒤 만주로 망명,서간도에서 이회영·이시영 등과 한국인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와 신흥학교를 설립한데 이어 한국군관학교를 세우다가투옥되는 등 만주지역의 항일투쟁을 주도하다가 3·1항쟁후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으로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석오는 망명길에 나서면서 자식들에게“우리가 이제 합병의 참변을 당하였으니 왜놈들은 우리를 금수와 같이 다룰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도 아버지를따라 중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자. 나라없는 백성은 어디를 가나 서럽고 비참한 것이다. 만리타향 객지에서 고생할 각오를 한 몸, 그러나 내가 죽기 전에 조국이 광복되는 것을 볼 수만 있다면 나는 그 이상의 더 큰 소망이 없겠다.”고 당부하면서 다시 못올 고국을 떠났다. 석오는 임정의 내무총장, 대통령직무대행, 국무령, 주석 등 요직을 지내고 백범과 함께 임정을 이끌었다. 1935년에는 한국국민당을 조직, 당수로 추대되어 항일 구국투쟁을 지도하였다. 1940년 3월 13일 중국 사천성 기강현 임시정부 청사의 초라한 이층방에서한 많은 생애를 접을 때그의 나이 72세였다. 임정은 간소한 국장으로 그의장례를 치렀다. 해방은 그러고도 5년 뒤에야 찾아왔고 석오의 유해는 3년 뒤에야 그리던 고국에 안장되었다. 뒤늦게나마 석오선생의 독립정신과 애국혼이 선양되어 정직한 역사가 쓰였으면 한다. 김삼웅주필kimsu@- 李東寧선생 연표 ●1869년 충남 천안서 출생●1892년 국가고시 응제진사에 합격●1897년 독립협회 활동으로 7개월간 옥고 치름●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항의,연좌데모로 2개월 옥고치름●1907년 신민회 조직에 참여●1910년 만주서 신흥학교 설립,초대소장 취임●1919년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장,국무총리,내무총장 ●1926년 임시정부 국무령●1929년 한국독립당 이사장·의정원 의장●1935년 임시정부 세번째 주석 취임●1939년 임시정부 네번째 주석 취임,전시내각 구성●1940년 급성폐렴으로 치장서 타계,임시정부 첫 국장(國葬)지냄●1948년 유해봉환,사회장으로 효창원에 안장 - 손자 李奭熙씨 및 후손 근황 “어릴 때부터 조부님께서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치셨다는 얘기를듣고 자랐습니다만 그동안 기업경영에 전념하느라고 손자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해죄스럽습니다.이제는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으니 조부님의 기념·현창사업에 여생을 바칠 생각입니다.” 석오 이동녕 선생의 손자인 李奭熙(67)(주)대우 상담역은 석오 선생 기념사업에 관한 포부로 말문을 열었다.경기고·서울대 법대를 졸업(55년)후 중소기업체에 근무하다가 68년 대우실업에 입사한 그는 대우개발 사장·대우자동차 회장·대우 부회장·경총 부회장·대우증권 회장·대우통신 회장·대우일본법인 회장 등 대우그룹 주요계열사의 최고경영자를 두루 거친 ‘대우맨’이다. 그의 부친,즉 석오 선생의 아들 李義植씨(1900년생)는 유명한 내과전문의였다.일제때 보성전문학교의 교의(校醫)를 지낸 그의 부친은 미군정 당시 민주의원·한독당 조직부장 등 정계에서 활동하기도 했다.또 반민특위의 특별검찰관으로도 활동했으며 이듬해 6·25 와중에 납북됐다. 2남3녀의 형제 가운데 그는 차남이다.그의 형 喆熙씨(75년 작고)는 경기고·보성전문 출신으로 보사부장관비서관,문교부 편수국장·기획관리실장,서울교대 학장 등을 지냈다. 그동안 그는 석오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을 널리 알리기위해 소리없이 많은일을 해왔다.우선 그는 ‘이동녕연구’의 일어판(94년)·중국어판(98년)을사재로 출간했다.89년에는 ‘백범일지’의 필사본을 책으로 출간,앞서 출간된 ‘백범일지’가 원본의 상당부분을 누락시킨 사실도 밝혀냈다.또 작년에는 석오 선생이 상해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초대의장(현 국회의장격)을 지낸 사실을 토대로 국회의사당 내에 석오선생의 흉상을 건립하였는데 그는 이를 큰 보람으로 여기고 있다. 정운현- '臨政 의 거인' 李東寧 석오(石吾) 李東寧(1869∼1940) 선생은 임시정부 탄생의 주역이자 임정의‘기둥’이었다.임시정부가 공식출범하기 직전인 1919년 4월 10일 임시의정원의 초대의장으로 선출된 선생은 국호(國號)와 임시헌법·관제(官制)를 제정,3일후인 4월 13일 임시정부 수립을 만천하에 선포하였다.선생은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을 비롯해 의정원 의장 3회,주석(主席) 4회 등 무려 일곱 차례나 임정의요직을 역임하였는데 이는 임시정부사를 통털어 선생만이 유일한 기록이다. 석오 선생이 임정내 이념·계파간의 갈등 속에서도 별다른 ‘잡음’없이 요직을 중임한 것은 선생이 공명정대한 업무처리와 온후한 인품으로 존경을 한 몸에 받은 때문이다.이 때문에 선생은 임정이 내부갈등이나 일제의 탄압으로 난국을 맞을 때마다 중책을 맡아 임정을 위기에서 구하곤 했다.일제는 이러한 선생을 회유,이용하기 위해 조선인 관리 洪承均을 시켜 선생에게 추파를 던졌으나 이를 즉석에서 일축,이 일로 선생의 부친이 원산에서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뤘다. 합리주의자였던 선생은 출신지역·계급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다.기호(畿湖)지방의 양반출신들이 주축을 이루던 신민회(新民會)에 황해도 출신의‘무명인사’ 백범 金九를 추천하여 가입시킨 것이 대표적 사례다.이 일로두 사람은 남다른 ‘관계’를 맺게 되었다.백범은 ‘백범일지’ 곳곳에 선생의 행적과 개인적인 친분에 대해 언급해놓고 있는데 이는 평소 백범이 선생을 독립운동계의 선배 이상으로 예우한 것으로 보인다.48년 ‘남북협상’차북한을 다녀온 백범이 아들 信을 시켜 모친(곽낙원)과 처자(최준례·김인)의 유해를 봉환해오면서 이 때 같이 봉환해온 분이 바로 석오 선생과 임정 국무위원겸 비서장 출신 車利錫 선생이었다.62년 선생은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받았는데 이를 두고 적절치 못하다는 지적이 많다.임정 정부수반급은 대개 1등급을 받았으며 심지어 李承晩의 비서 출신 임병직씨도 1등급을 받았다. 임정요인 출신 趙擎韓 선생은 생전에 “선생은 지위나 돈 따위를 탐내지 않는 순결무구한 분으로 모든 독립운동가들의 으뜸이었다”고 회고했다. 정운현- 李東寧 선생 효창공원 묘소서 오늘 추모식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80주년을 맞아 임시정부 주석과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을 지낸 石吾 李東寧 선생의 ‘제59주기 추모식’이 13일 오전 11시 서울용산구 효창공원 석오선생 묘소에서 열린다. 석오선생 기념사업회(회장 姜英勳)가 주최하는 이 추모식은 추모기도와 석오선생 약사보고,추모사·추념사,추모가 제창,헌화분향의 순으로 진행된다. 행사 진행을 맡은 석오기념사업회 金錫營 부회장(69)은 “3·1독립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80주년을 맞아 거행하는 올해의 추모식은 감회가남다르다”고 말했다.60주기인 내년에는 추모 학술세미나를 개최하고 재정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장학사업도 추진할 계획이다. 추모식에는 崔圭鶴 국가보훈처장, 高建 서울시장,尹慶彬 광복회장,朴維徹독립기념관장,국민회의 張在植·李錫玄·鄭漢溶의원,자민련 李東馥의원,한나라당 李漢東·吳世應·徐廷和·朴明煥의원,李奭熙 석오선생 유족회장,李元範 3·1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李榮載 대종교 총전교,金信 백범선생기념사업회고문을 비롯한 각계 인사 30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이상록
  • 백범 추모공연 졸속 우려

    오는 6월21일부터 7일간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오를 ‘백범 김구주석 서거 50주기 추모 민족대가극’이 비틀거리고 있다.관련단체의 주도권 다툼이 법정으로까지 이어질 조짐을 보이면서 정작 공연에 필요한 준비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이에 따라 김구선생의 일대기를 그린다는 취지를 살릴 수 있는 공연이 될지 우려된다. 이 가극은 지난 해 8월15일 추모공연준비위원회(위원장 신창균)가 출범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됐다.당시 박인배 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기획실장이연출을 맡고 고은 시인이 극본을 쓰기로 계획됐다.그러나 준비위와 민예총의 극한 대립이 가속화되면서 이같은 구도가 백지화되는등 파열음이 증폭되고있다. 준비위는 공연이 석달 앞으로 다가와 한창 연습에 몰두해야 할 요즘 극본(차범석)과 연출(임영웅),음악(원일)등을 새로 섭외했다. 공연준비위의 김인수 집행위원장은 “민예총이 지난해 11월 국회 예결위를상대로 국고지원 신청 로비를 펼쳐 3억원의 예산을 책정받는 등 준비위의 주최권을 침해했다”면서 “준비위의 공연추진을방해하고 일정에 큰 차질을가져온 데 따라 지난 8일 박실장 등 민예총 관련 인사들을 ‘사기미수’혐의로 고소했다”고 밝혔다.그는 또 “새로운 인물이 어느정도 섭외된 만큼 민예총을 배제하고 공연을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실장은 “일일이 맞대응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면서 “공연 과정을 잘 모르면서 비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이와 관련,이승진 문화관광부 지역문화예술과장은 “양 단체가 서로 탓만하고 있다”면서 “준비위가 사업계획서를 내면 민예총 계획서와 비교하여결정할 계획이지만 끝까지 이들이 싸우면 제3의 단체를 물색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한편 공연계는 이같은 ‘이전투구’에 안타까움을 털어놓고 있다.뮤지컬 연출가 M씨는 “100여명의 출연진이 2시간30분가량 공연할 경우 적어도 6개월이상 준비해야 한다”면서 “현재 상태가 이어지면 공연 수준은 뻔하다”라고 개탄했다.다른 연극 연출가는 “백범 선생의 추모공연을 둘러싸고 잡음이 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며 “9월이나 내년으로미뤄 졸속 공연을 피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 3·1절 첫돌기념식 사진 찾았다

    3·1절 첫돌 기념행사의 감격과 당시 행사장의 분위기를 생생히 전해주는사진자료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백범 서거50주기를 맞아 본사 주관으로 백범김구선생의 전집을 편찬하고 있는 백범 김구선생전집편찬위원회(위원장 尹炳奭)는 지난 1월 대만의 중국국민당 당사위원회에서 임시정부 관련 자료를 조사하던중 1920년 3월 1일 상하이(上海)에서 열린 3·1의거 1주년 기념식 사진사본을 입수,28일 공개했다. 가로16㎝×세로12㎝ 크기의 이 사진은 3·1의거 1주년을 맞아 상하이 민단(民團)에서 개최한 기념식 장면으로 장소는 상하이시내 정안사로(靜安寺路)소재 올림픽대극장이다.79년 전에 촬영한 사진임에도 촬영·보존상태가 모두극히 양호하다.촬영자는 임정 관계자나 상하이거주 교민으로 추측되나 구체적으로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보도에 따르면,李東輝 국무총리를 비롯해임시정부 요인들이 대거 참석한 것으로 나와 있어 사실상 임시정부가 이 행사를 주관한 것으로 보인다.당일 오후 2시 상하이 대한민단장 呂運亨의 사회로 시작된 기념식은 독립선언서 낭독,국기게양에 이어 임정요인들의 축사가이어졌고 행사후에는 자동차로 상하이시내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날 행사장에는 ‘대한독립선언 기념’이라는 현수막과 대형 태극기를 교차로 내걸었으며 미국·영국의 국기와 함께 천장에는 만국기를 게양했다.또1·2층의 행사장 중 1층은 민단 관계자와 상하이거류 한국인들로 가득찼고,2층에는 외국인 수 백명과 ‘대륙보(大陸報)’등 영자지의 취재기자들도 참석했던 것으로 나와있다.당시 3·1절 기념식을 이처럼 성대하게 치를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 조계(租界)내에 있던 임시정부가 신변안전 등을 보장받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이며 최초의 3·1절 행사기록 사진인란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있다고 평가된다. 이날 상하이시내에서 한국교민들이 밀집돼 있던 프랑스 조계지역은 동포들이 내건 태극기가 물결을 이뤘고 ‘독립신문’은 이 날의 감격을 “우리민족의 부활일인 오늘 하루를 무한히 기쁘게 축하하자”고 적었다. 鄭雲鉉 jwh59@
  • [화제의 책] 백범 김구 연구I

    백범 김구선생의 정치활동을 집중 연구한 ‘백범 김구 연구Ⅰ-정치활동과정치이념’이 최근 신지서원에서 출간됐다.부산 동의대 정경환(鄭京煥) 교수가 자신의 박사학위논문을 수정·보완,신지서원의 기획물 ‘한국인물총서’의 첫 권으로 내놓은 것이다. 이 책은 ‘독립운동가 김구’보다는 ‘정치인 김구’에 초점을 맞춰 구한말부터 해방정국까지의 전과정에 걸쳐 백범의 정치역정(歷程)을 분석하고 있다. 백범은 임시정부수립과 한국광복군 창설에 주도적으로 활동하였으며 특히 광복군 조직·활동을 둘러싸고 중국 국민당정부와 외교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중일전쟁 이후 백범은 중국측과 한중동맹군을 조직,일제를 타도해야한다는이른바 ‘한중연합론(韓中聯合論)’을 펴기도 했는데 당시 중국측 자료를 통해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해방공간과 남북분단 과정에서 ‘정치인 김구’의 역할은 시대적 사명이었다. 친일파 처리·토지개혁·신탁통치·좌우합작운동 등 당시의 시국현안에 대한 백범의 인식·대응전략을 당시 자료를 통해 분석한 것이 돋보인다. 백범의 정치이념을 ▒민족주의론 ▒민주주의론 ▒경제평등론 ▒문화국가론등 크게 네 갈래로 나누고 있는 저자는 “백범은 소년기부터 조선조 사회의신분계급구조와 인간불평등에 강한 의문을 가졌던 인물”이라며 “정치활동전 과정에서 그는 독재를 반대하고 자유민주정치를 신봉한 정치인이었다”고 평가했다.저자는 6월초 후속작업으로 ‘백범 김구 연구Ⅱ-정치사상의 재조명’을 출간할 계획이다.
  • [정직한 역사 되찾기] 친일의 군상 (25)

    ◆친일 미술가 金仁承·景承형제 작년 11월말 한 시민단체가 보낸 공문 한 통이 국가보훈처에 접수됐다.발신자인 신시민운동시민연합(의장 고경철)은 공문을 통해 “친일조각가 손으로세워진 애국선열의 동상을 방치하는 것은 민족사의 왜곡행위로 뜻있는 국민들의 성금으로 다시 세워 민족정기 회복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며 보훈처의조치를 촉구하였다. 이 공문에서 신시민운동연합측은 ‘친일조각가’로 김경승을 지목하고 “해방후 역대 정권과 결탁해 비호를 받으면서 조각계의 거목으로 변신한 김경승이 그 더러운 손으로 민족사에 길이 남을 애국선열과 역사적 기념물을 제작했다는 사실은 반만년 문화민족임을 자부하는 우리민족에게 견딜 수 없는 모멸감을 주는 반역행위”라고 지적하면서 “하루 빨리 친일반역자의 작품을철거하고 국민들의 정성을 모아 다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공문에서 김경승이 제작한 애국선열의 동상으로 광화문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1953년 제작),남산 안중근 의사상(1959년 제작),백범 김구 선생상(1969년 제작),도산공원의 도산 안창호 선생상(1973년 제작),서울 종묘공원의월남 이상재 선생상(1989년 제작)등을 들었다. 김경승(金景承,1915∼1992)은 우리 현대미술사에서 손꼽히는,유명한 조각가이다.그는 서양화가 김인승(金仁承,89·미국 거주)의 친동생으로 두 사람은형제 미술인으로도 유명하다.두 사람은 일제 강점기부터 80년대까지 한국 화단(畵壇)의 원로로 군림해온 사람들이다.이들은 일제 때는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미술전람회에서 상(賞)을 휩쓸었고,해방후에는 교단과 화단에서 다시명성을 날렸다. 특히 김경승은 국내의 대표적인 위인·애국선열들의 동상 제작을 거의 도맡다시피 했다.예인(藝人)으로서 이들 형제는 재능을 떨쳐왔지만 민족사에서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해묵은 미술사 한 페이지를 들춰 그 이유를 알아보자. 1915년 일본 메이지(明治)대학 법문학부를 나온 지주 김세형의 6남매중 장남과 차남으로 태어난 김인승·경승 형제는 어릴 때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여 학생미술전에서 수차례 입상했다.1932년 김인승은 재능을 살리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미술학교 유화과에 입학하였다.김경승도 2년 뒤 형을 따라 이 학교에 입학했는데 과(科)는 형과 달리 조각과를 택하였다. 1887년 일본 메이지정부에 의해 관립학교로 세워진 이 학교는 소위 서양미술을 가르치는 일본내 유일의 미술학교였다.이 학교는 일본인 외에도 조선·대만의 미술학도들을 청강생으로 받아 장학금을 주면서 미술교육을 시켰다. 이들 형제 외에도 조선인으로 심형구(沈亨求·1908∼1962)가 이 학교를 졸업하였다.김인승과 심형구는 선전(鮮展·조선미술전람회의 약칭)출품과 친일활동은 물론 해방후 이화여대에서 재직하는 동안 반평생을 단짝으로 지낸 사이다. 한편 김인승은 이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평균 98점이라는 학교 최고점을 기록하면서 우등생으로 졸업(1937년)하였다.재학시절 그는 이미 일본 문부성이 주최한 ‘황기(皇紀) 2000년(1940년)봉축기념전’에 출품,입선하면서 화단에 얼굴을 내밀었다.졸업하던 해인 1937년에는 제16회 선전(鮮展)에 ‘나부(裸婦)’를 출품하여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하였다. 3·1 만세의거 이후 소위 일제의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시작된 ‘선전’은 1944년까지 23회나 개최되었는데 초기 서예나 4군자를 제외하고는 모든부문의 심사위원이 주최측인 총독부가 위촉한 일본작가였다.따라서 선전에출품된 조선인 작가들의 작품은 일본인 심사위원들의 취향을 반영한,왜색(倭色)이 짙은 작품들이 주로 입선되었다. 바로 이 ‘선전’에서 김인승은 1937년부터 연속 4회 특선,1940년 선전의추천작가가 되었다.이 때 서양화 부문에서 추천작가로 오른 사람은 그를 포함해 심형구·이인성(李仁星) 세사람 뿐이었다. 형에 이어 동생 김경승 역시 ‘선전’에서 연속 입상하였다.1939년 ‘S씨상’(흉상),40년 ‘목동’(전신상)등이 특선으로 입상하였고 41년에는 남자 입상(立像)인 ‘어떤 감정’으로 총독상을 받았으며 이듬해에는 ‘여명’이라는 작품으로 총독상을 2회째 수상하였다.‘선전’에서 관록을 쌓은 그는 43년 마침내 추천작가가 되었다.44년 그는 ‘선전’에 ‘제4반’을 출품하였는데 이는 관변조직인 애국반(愛國班)의 반원인 조선여성이 전시하 후방에서근로봉사에 나선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김경승이 ‘선전’에 출품한 작품들은 추천작가로서 출품한 작품을 포함,다섯 점 모두가 강한 ‘시국색(時局色)’을 띠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일제침략전쟁을 후방에서 지원하기 위해 식량증산이나 근로에 동원된 조선인들을담은 것으로 이는 은연중에 전쟁협력을 부추기고 있다. 두 사람은 또 일제하 대표적인 친일미술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에서 간부로활동하였다.1941년 2월 22일 시국하의 ‘회화봉공(繪畵奉公)’을 맹세하면서 탄생한 이 단체는 당시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시오바라(鹽原時三郞)가 회장,학무국 사회교육과장 계광순(桂珖淳)이 이사장,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학예부장 백철(白鐵)등이 이사로 있던 관민합작 단체였다.두 사람은 각각서양화부(김인승),조각부(김경승)의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이 단체는 나중에 조선문인협회·선전미술협회·보도사진협회 등 11개 예술단체와 더불어 1943년 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의 예술가단체연락협의회를 구성하게 되는데 이들은 전람회를 열어 수익금을 국방헌금으로 바치기도 하였다. 한편 김인승의 대표적인 친일행위는 그가 단광회(丹光會)에 참여하여 활동한 점이다.이 단체는 ‘성전하(聖戰下) 미술보국(美術報國)에 매진한다’는취지로 1943년 2월 조선인·일본인 화가 19명으로 결성됐는데 ‘선전’ 추천작가 중심의 최고 엘리트화가 집단이었다. 이 단체는 1943년 8월 조선인 징병제가 실시되자 이를 기념하여 회원 전원이 4개월간 합숙하여 100호 크기의 ‘조선징병제시행기록화’(사진참조)를제작하였다.이 그림은 징집된 조선청년을 중심으로 조선군사령부 보도부장,지원병훈련소장,총력연맹 사무국 총장,경기도지사,친일파 윤치호 등이 등장해 징병으로 나가는 조선인 청년을 믿음직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내용이다.특히 이 그림은 인물 주위로 남산의 조선신궁(朝鮮神宮)과 병사들의 행진모습등을 곁들이고 있어 일본정신 고취와 성전(聖戰)출전의 분위기를 조장하고있다. 김인승은 이밖에도 1944년까지 3차례에 걸쳐 열렸던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에 운보 김기창(金基昶)·심형구·월전 장우성(張遇聖)등과 함께 추천작가로 참여하였다.그는 또 작품의 제작연대를 일본식 황기(皇紀)로표기하였으며 ‘선전’ 출품작에는 작가 사인을 ‘김인승’의 일본어 발음인 ‘Jinsho,Kin’으로 표기하였다.그의 친일의식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고할 수 있다. 해방후 이들 형제는 친일미술가로 낙인찍혀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제외당하는 수모를 겪었다.그러나 이들은 도쿄미술학교 출신,‘선전’ 추천작가등의 화력(畵歷)을 앞세워 다른 친일미술가들과 함께 승승장구 하였다.김인승은 47년 이화여대 미술과 교수로 부임한 것을 시작으로 49년 제1회 국전(國展)추천작가·심사위원,예술원 회원·목우회 창립주도,이화여대 미대 학장,미협(美協) 이사장 등을 지내면서 서양화 구상계열을 주도했다. 김경승 역시 국전 심사위원·예술원 회원 등을 비롯해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조각가로서 평통(平統)자문위원을 지냈다.특히 그는 충무공 이순신장군·백범 김구·도산 안창호 선생·안중근 의사 등 애국선열의 동상을 도맡아 제작하였다.이들 형제는 상복도 많아 문화훈장을 비롯해 ‘3·1문화상’까지나란히 수상하였다.남산의 백범 동상을 새로 만들자는 주장은 이래서 나오는것이다.
  • ■‘해방전후사의 인식’

    ▒8·15의 민족사적 인식=송건호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직책은 모두 당시의직책임)▒미군정의 정치사적 인식=진덕규 이대 교수▒분단의 배경과 고정화 과정=김학준 서울대 교수▒반민특위의 활동과 와해=오익환 경향신문 기자▒일제말 친일군상의 실태=임종국 저술가▒8·15직전의 독립운동과 그 시련=조동걸 안동대 교수▒김구의 사상과 행동의 재조명=백기완 백범사상연구소장▒이승만 노선의 재검토=김도현 영남일보 편집부장▒8·15를 전후한 여운형의 정치활동=이동화 성균관대 교수▒해방후 농지개혁의 전개과정과 성격=유인호 중앙대 교수▒미군정 경제의 역사적 성격=이종훈 중앙대 교수▒소설을 통해 본 해방 직후의 사회상=염무웅 문학평론가
  • 백범·단재 장손 정부기관에 특채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의 후손 두 명이 당국의 배려로 정부기관에 특채된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화제다.주인공은 백범 김구선생의 장손金振씨(50)와 단재 신채호선생의 장손 申尙原씨(28).金씨는 지난해 11월초주택공사 상임감사(차관급)로,申씨는 이달 18일 국가정보원 8급 직원으로 각각 특임(特任)된 것으로 확인됐다. 金씨의 경우 金大中대통령의 특별한 배려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金대통령은 백범가(家)와 남다른 사연을 갖고 있다.7대 총선때 목포에서 출마한 金대통령은 선거직전 상대후보가 백범암살사건 관련자라는 사실을 폭로,선거를 승리로 이끈 적이 있다.이를 계기로 金대통령은 해마다 백범 묘소를 참배해 왔으며 한동안 백범기념사업회 이사를 지냈다.14대 국회때 ‘백범시해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되자 위원회 사무실 운영비를 수차례 지원하기도 했다.특히 8대 총선때는 金대통령측에서 백범의 아들 金信씨(77·전교통부장관)를 야당후보로 영입하려 한 적도 있다.현정권 출범초기 여권 일각에서는 백범가에 대한 ‘배려’가 논의됐던 것으로 알려졌다.金振씨는 미국 남가주대학·대학원 졸업 후 귀국,국제종합건설 감사실장·부속실장과 외국인회사 국내지사장을 역임하고 최근까지 개인사업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단재의 손자 申尙原씨는 李鍾贊 국정원장이 특별히 배려한 케이스.李원장은 작년 8월 안기부의 개명작업을 추진하면서 집무실내에 백범과 단재선생의 사진을 내걸었다.이는 국정원의 연원을 단재의 의혈단,백범의 한인애국단에서 찾겠다는 취지였다.작년말 李원장은 사석에서 단재의 손자가 국정원에 원서를 냈다는 얘기를 듣고 申씨의 채용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는 것.李원장의 조부인 우당 李會榮선생과 단재 선생은 독립운동 동지이자 같은 무정부주의자(아나키스트)로 각별한 사이였다.지난해 성균관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申씨는 국정원 산하 국가정보연수원에 배치돼 국가관교육프로그램 제작 분야에 근무하고 있다.
  • 백범 전집 편찬위원회 모임/어제 본사회의실서

    ◎내년초 1∼3권 편찬 등 논의 서울신문사가 백범 金九 선생 서거 50주기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하고 있는 백범전집 발간을 위한 편찬위원회 모임이 16일 서울신문사 회의실에서 열렸다. 편찬위원들은 전집 발간 주체의 이름을 ‘백범김구선생전집편찬위원회’로 정하고,관련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국내외 기관 단체 등에 협조공문을 보내 연말까지 자료수집 작업을 끝내기로 했다. 편찬위원들은 또 전집의 전체 규모를 20권 정도로 정하고 백범일지 도예실기 등 백범 저작물과 그 번역본 및 동학 활동 때의 백범 모습을 담을 1∼3권 편찬 작업을 우선 내년 초까지 마무리하기로 했다. 발간은 원칙적으로 백범 서거 50주기인 내년 6월에 하기로 하되 시간이 부족할 경우는 2회로 나누어 하기로 했다. 이날 모임에는 尹炳奭 인하대·趙東杰 국민대 명예교수,愼鏞廈 서울대·李萬烈 숙명여대·金喜坤 안동대·韓詩俊 단국대·尹慶老 한성대·都珍淳 창원대 교수,崔起榮 서강대 강사,金三雄 서울신문 주필 등 편찬위원 전원이 참석했다.
  • 司正을 政爭으로 왜곡말라/金三雄 주필(時論)

    “억울한 욕을 당할 때는 낮잠만 자고 있다가 옳은 일을 해보려면 밤잠을 자지 않고 반대한다”­ 백범 김구 선생이 남북협상을 위해 북행(北行)을 떠나려 할 때 이를 한사코 반대하며 비방하는 사람들에게 남긴 쓸쓸한 독백이다. 여기서 ‘억울한 욕을 당할 때’란 송진우씨 암살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법정에 서게 된 일을 말한다. 결국 ‘밤잠을 자지 않고 반대’한 세력에 의해 백범의 통일정부 수립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정부의 정치권 사정과 관련하여 일부 언론이 훼방을 놓기 시작했다. 이유인 즉 경제를 살려야 할 때에 맨날 사정만 하느냐는 것이다. 정부의 사정을 정쟁으로 치부하면서 개혁에 제동을 걸고 있다. 얼마전까지도 정치부패를 척결하고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어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열을 올렸던 언론이다. 부패정치인을 ‘퇴출’시키라고 얼마나 촉구했던가. 그런 언론이 막상 부패정치인에 대해 사정이 본격화되자 엉뚱한 이유를 들어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부패의 ‘몸통’을 보호하려는 정치적 배경인지, 정치개혁을 좌절시키려는 의도인지는 모르지만, 이 기회에 부패정치를 청산하라는 국민의 뜻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주장이다. 엄격히 말해서 경제살리기와 정치인 사정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경제회생은 급선무이고, 사정은 후선책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부패척결이 선행되어야 한다. ○부패구조를 개혁해야 국난의 근본원인이 김영삼정부의 무능과 정경유착, 정치부패에서 기인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그런데도 불구하고 정치부패를 그대로 둔채 경제회생부터 하라는 것은 모래 위에 가건물부터 짓자는 주장에 다름아니다. 온몸에 퍼진 암세포를 그대로 두고 영양제나 계속 투여하자는 논리와 진배없다. 우리는 과거 몇차례 개혁의 기회를 잃었다. 오랜 일을 그만두고 13대 국회에서 5공청산 작업이 진행될 때도 일부 언론이 “언제까지 5공청산이냐”고 여론을 조성하여 ‘5공청산’이 중단된 적이 있었다. 그때라도 정경유착의 부패구조를 제대로 척결했었다면 오늘의 국난은 예방되었을 것이다. 분명히 말해서 나라를 이 꼴로 만든부패정치의 구조악을 그대로 두고 경제회생은 불가능하다. 구린내 나는 부패의 하수구를 묻어둔채 새로 시작하자는 논리는 구조개혁을 하지 말자는 것이며,이는 미래의 부패도 용인하자는 주장과 다름없다. 부패척결은 정치개혁의 전단계이며,이는 바로 깨끗한 정치를 통해 경제회생과 제2건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오늘 비록 수술의 아픔이 따르더라도 종양을 제거하지 않으면 생명을 지키기 어렵다. 일부 언론이 사정과 정쟁을 등식화시키면서 정부가 경제회생을 팽개치고 사정에만 매달리는 것처럼 비판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인식에서 출발한 단선적 사고의 전형이다. 정직한 언론이라면 국난의 책임을 묻고 부패척결과 정치개혁을 통해 새롭게 출발하자고 써야 한다. ○부패혐의 있으면 측근부터 비록 오늘의 아픔이 따르더라도 참고 견디면서 다시는 부실 국가가 되지 않도록 일부 성급한 국민을 위로하고 여론을 조성하면서 사정(司正)을 지원하고 개혁을 선도해야 옳다. 그리고 따져야 할 일이라면 편파적인 사정은 없는가,왜 거물급을 제쳐두느냐,결코온정주의가 작용해서는 안된다고 촉구해야 할 것이다. 정부는 결코 좌고우면해서는 안된다. 일부 기득권층의 여론이 마치 국민의 여론인 것으로 착각해서도 안된다. 이번에 정경유착의 고리를 단절하지 않으면 우리 정치,나아가서 국가의 희망을 찾기는 어렵다. 정부에 당부하고자 한다. 결코 사정에 여야 차별을 두거나 표적수사,정치보복이어서는 안된다. 공정무사하게,부패혐의가 있으면 측근부터 척결하는 단호함을 보여야 한다. ‘옳은 일을 해보려면 밤잠을 자지 않고 반대’하는 백범의 독백과 좌절이 두번다시 되풀이되어선 안되겠다.
  • 백범사상 실천운동연합,복원운동 전개

    ◎“민족의 얼 서린 경교장 살리자”/김구 선생 만년 자취 밴 곳/국가문화재 지정 요구/국회서 새달 안건으로 다뤄 백범(白凡) 金九 선생의 얼이 서린 경교장(京橋莊)을 복원하자는 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경교장은 선생이 해방 직후인 45년 11월 환국한 뒤 安斗熙에게 암살당한 49년 6월까지 3년7개월 동안 집무실 겸 거처로 썼던 곳.해방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민족 단결을 위해 고뇌하던 선생의 만년(晩年) 자취가 배어 있는 곳이다.이곳에서 임시정부 포고령을 선포하고 신탁통치 반대성명을 발표했으며 수백명의 대학생들이 선생의 북한 방문을 막기 위해 시위를 하기도 했다.선생이 흉탄에 쓰러진 곳도 이곳이다. 일제 때 광산 갑부였던 崔창학이 35년 2층 석조 건물로 지어 무상 임대한 경교장은 선생이 암살된 뒤 자유중국 대사관,미군 주둔지,베트남 대사관으로 쓰이다 68년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의 소유가 됐다.1층은 병원 사무실로,피살 현장인 2층은 의사 휴게실 등으로 쓰이고 있다. 백범사상 실천운동연합(상임대표 金仁壽)은 96년부터 대국민 서명,국회 청원 등을 통해 복원운동을 꾸준히 펼치고 국가문화재로 지정해줄 것을 요구해 왔다.한때 병원측이 철거하려는 사실을 알고 철회시키기도 했다. 지난 29일 뜻을 같이하는 시민단체·학계 인사와 일반시민 등 100여명이 방치된 경교장을 둘러보았다.이 단체를 중심으로 한 복원 요구를 받아들여 국회 문화예술소위원회는 다음달 정식 안건으로 다룬다. 金상임대표는 “겨레의 사표(師表)인 선생이 돌아가신 지 50년이 다 되도록 경교장이 방치되고 있는 것은 후손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라며 안타까워 했다.
  • 백범기념사업협회 李壽成 회장/“국민정성 모아 백범기념관 건립”

    ◎서울신문사의 전집 발간 적극 협력 李壽成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은 28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백범기념관 건립을 위한 범국민 모금운동을 연내에 시작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인터뷰 내용. ­백범기념관 건립 계획은. ▲백범기념관은 국민의 이름으로 건립돼야 한다. 사회 각 분야의 덕망있는 인사로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구체적인 방안을 논의할 생각이다. 건립 자금은 국민들의 모금운동으로 충당되는 것이 좋다고 본다. 민족의 중요한 자산인 金九 선생의 민족사랑과 애국심을 널리 전파하고 되새기기 위해서도 많은 사람들의 참여가 바람직하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지만 모금운동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돈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지금과 같이 어려운 때일수록 진정한 애국심이 필요하다. 백범은 민족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가졌던 지도자로 모든 국민이 그의 애국심에 공감할 것으로 믿는다. 기념사업협회는 연내에 모금운동을 시작하여 서거 50주기인 내년에 기념관이 준공되기를 바라고 있다. 장소는 金九 선생과 관련이 있는 곳으로 기념사업협회,전문가 등과 협의하여 결정할 예정이다. ○민족사랑·애국심 전파 ­백범기념사업협회 활성화 방안은. ▲과거의 정권이 백범을 견제했기 때문에 기념사업협회의 활동도 위축됐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백범 사상을 널리 전파하고 金九 선생의 올바른 평가 등을 위해 보다 적극적인 활동이 필요하다. 재정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협회 회원을 늘릴 예정이다. 현재의 회원은 140여명에 지나지 않는다. 청소년들에 대한 백범사상 교육도 보다 활성화할 방침이다. ○학술상 제정 반가운 일 ­서울신문사는 50주기를 맞아 백범 학술상을 제정하며 백범전집을 발간하기 위해 자료수집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서울신문사와 기념협회와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데. ▲백범이 서거한지 반세기나 지났는 데도 그의 전집이 발간되지 않은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서울신문사가 이번에 전집을 발간하고 학술상을 제정하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며 감사하게 생각한다. 전집 발간과 학술상 제정은백범사상,순수한 애국심,민족사랑 등을 국민들에게 전파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며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다. 협회는 전집발간을 위한 자료수집 등에 적극 협력할 것이다. 발간과 배포 등에도 가능한 최대의 지원을 하겠다.
  • 창무악 ‘백범 김구’ 작창 정철호 선생

    ◎“임방울류 적벽가 문화재 지정됐으면”/국창 임방울 선생의 유일한 생존 제자/신판소리·신창극·신민요 2만곡 작곡 “전통예술의 꽃이라 불리는 판소리의 모든 유파가 그 가치를 인정받고 보존 혜택을 받고 있는 데 비해 명창 임방울 선생의 소리는 상대적으로 ‘홀대’를 받아온 것 같습니다. 지금이라도 선생의 소리정신을 계승하고 득음(得音)의 세계를 널리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면 합니다” 국창(國唱) 임방울 선생의 제자로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국악인 정철호씨(75·전남 도립남도국악단장).그는 임방울 선생의 판소리 유파를 계승·보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우리나라에서 무형문화재 지정제도가 처음 생긴 것이 1964년이기 때문에 61년 작고한 임방울 선생은 거기에 포함될 수 없었다.이런 현실에서 정씨는 스승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임방울류 적벽가를 완창,테이프를 내기도 했다. 국내 최고의 판소리 작창가이자 아쟁산조의 창시자로 중요 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고법(鼓法) 예능보유자인 정씨는 14세가 되던 해 목포에 공연온 임방울 선생을 처음 만났다. “선생의 소리를 듣다가 다른 사람의 소리는 못 듣는다고들 했습니다.선생의 목은 원래 ‘떡목’으로,십년을 하루같이 수련해 얻은 것이지요.선생은 소리하는 사람의 4대 요건이라 할 인물치레,사설치레,득음,너름새를 고루 갖추었습니다” 정씨는 판소리 명창이지만 그의 업적은 작곡 쪽에서 한층 빛난다 신창극·신판소리·신민요 등을 포함해 줄잡아 2만여개에 달한다.그 중 대표곡으로 꼽히는 것이 신작 판소리 ‘열사가’. “오늘날 회자되는 판소리 다섯 마당은 내용이 추상적일뿐 아니라 소재 또한 중국 것입니다.옛 것을 지키는 것도 좋지만 오늘의 조국이 있게 한 애국선열들의 이야기를 통해 민족정기를 일깨우는 것은 더욱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작창한 창무악 ‘백범 김구’도 그런 배경에서 나온 작품이다.그는 지금은 신작 판소리 ‘세종대왕’ 작창과 창무악 ‘춘하추동’ 개창(改唱)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소리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흥부가 아나? 춘향가 아는가? 심청가 아시는가? 적벽가 아십니까?”라는 말이 있다.적벽가는 부르기 힘들고,또 그런 어려운 곡을 부르는 소리꾼을 대접한다는 의미에서 생긴 말이다.적벽가는 임방울 선생의 대표창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정씨의 소망은 그 임방울류 판소리 적벽가가 널리 불리고 하루 빨리 문화재로 보호받는 것이다. “어떤 분야든 문화재로 지정이 안되면 제자로 입문해 배우려는 사람이 없어요.임방울 소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제대로 보존하지 못하는 인간문화재 제도라면 차라리 없느니만 못합니다.” 국창 임방울의 법통이 끊어져선 안된다는 것은 비단 그만의 생각은 아니다.
  • 長江日記/정정화 지음(화제의 책)

    ◎독립운동에 몸바친 할머니 일대기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각계에서 조명작업이 활발하다.대개 시대의 어려움을 극복하자는 캠페인을 담고 있다.앞으로의 결의를 다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묻혀있는 과거의 올곧은 삶을 조명하는 작업도 중요하다. 이 책은 백범 선생이 ‘한국의 잔 다르크’라 부른 정정화 할머니의 일대기를 다루었다.저자의 삶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상해 임시정부의 역사이자 우리 독립운동사에 대한 증언이다.1900년 태어나 독립운동가 집에 시집온 뒤, 20살 되던 해 시아버지와 남편의 뒤를 따라 중국 상해로 가면서 맺게된 임시정부와의 인연.독립운동 자금모집의 밀령을 띠고 여섯 차례에 걸쳐 국경을 넘나들었고,32년 윤봉길 의사 폭탄 투척 사건이후 상해를 탈출한뒤 김구·이동녕 선생등을 뒷바라지 하면서 10년간 망명정부의 궂은 일을 도맡은 과정 등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이 책의 내용은 23일까지 연강홀에서 ‘아,정민화’라는 연극으로 공연되고 있다.학민사.1만원.
  • 정부수립 50돌에 보는 태극기 옛모습

    ◎박영효 가옥·광주 등 3곳서 전시/김구 선생 서명 태극기 등 선보여 정부수립 50년을 기념하는 태극기 전시회가 남산골 한옥마을과 전쟁기념관 등 서울 2곳과 광주에서 열리고 있다.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한옥마을 내의 구한말 정치인 박영효 가옥(266­6937)에서 20일까지 계속되는 ‘태극기 옛모습전’에는 구한말,임정시대 독립운동,한국전쟁 등 중요한 역사의 고비 때 활용한 태극기 36점의 사진을 공개한다. 선열들이 품 속 깊이 간직하거나 목숨을 걸고 지킨 것들로 실물은 독립기념관에 보관돼 있다. 전시품 가운데 ‘김구 서명 태극기’는 백범선생이 1941년 도산 안창호의 딸 안수산에게 기증한 것이다.‘태극기 목각판’은 1919년 3·1만세운동 때 태극기를 대량으로 찍느라 만든 것이고,‘미국시위 태극기’는 같은 해 4월16일 재미교포들이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시위행진을 할 때 사용했다. 또 ‘박영효 태극기’는 1882년 당시 특명전권대신으로 임명된 박영효가 제3차 수신사로서 메이지마루호를 타고 일본으로 가던 중 만든 것이다. 대한민국 국기선양회가 전쟁기념관 2층 중앙홀에 마련한 ‘태극기 변천사전시회’는 15일까지 열린다. 갖가지 태극기 실물 35점을 전시했으며 기념관 입장료는 어른 2,000원,학생은 1,000∼1,500원 이다. 광주광역시 동구문화원에서는 30여명의 화가가 참여한 ‘제1회 우리 태극기 무궁화 대전’을 25일까지 연다.
  • 국립창극단 ‘백범 김구’ 무대에/창극으로 되새기는 백범 일대기

    ◎개인사·가족사 생생하게 재현/인간적 면모 보여주는데 역점 백범 김구 선생의 일대기를 다룬 대형 창극이 마련된다. 국립창극단은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창과 무용,관현악 등이 어우러진 가무악극 ‘백범 김구’(김병준 극본,김명곤 연출)를 14일부터 16일까지 국립극장 대극장 무대에 올린다. 14일 하오 7시30분,15·16일 하오 4시. 백범은 ‘행복을 가져다주는’ 문화의 힘을 유달리 강조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존을 풍족히 할 만하고,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이번에 공연되는 ‘백범 김구’는 백범의 일생을 우리 고유의 전통공연예술인 창극으로 재현,한국 문화의 힘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또한 김구의 개인사와 가족사를 예술무대를 통해 다시 한번 읽어볼 기회를 제공한다. 1막은 소년 김구가 일제의 탄압과 추적을 피해 길을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18세에 오응선을 찾아가 동학에 입도,이름을 김창수로 바꾼다. 따르는 무리가 수천명에 달해 ‘아기접주’별명을 얻은 그는 이듬해 최시형에게서 접주첩지를 정식으로 받는다. 황해도 15명의 접주가 모여 거사를 결정하고 백범은 팔봉접주로 선봉에 선다. 그러나 해주성 공격에 실패하자 신천,중국,만주 등을 떠돌게 된다. 2막은 23세의 백범이 인천감옥을 탈옥하면서부터 마침내 광복의 기쁨을 맛본 뒤 정적에게 암살당하기까지의 자취를 그린다. 연출자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백범의 내면과 개인사다. 연출자 김명곤씨는 “백범의 가족,특히 아내와 어머니의 관계를 보여주는 에피소드를 많이 삽입하는 등 백범의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는 데 역점을 뒀다”고 밝힌다. 이 작품은 기존의 창극 무대와는 여러 면에서 구분된다. 집단무 등에 마당극적인 요소를 도입한 것이나,극의 전개상황을 일러주는 도창(導唱)을 집단창화한 것 등이 대표적인 예다. 이번 공연에는 국립극장 소속 국립창극단,국립국악관현악단,국립극단,국립무용단,국립발레단 등 5개 단체가 참여한다. 작창은 정철호씨가,작곡은 박범훈씨가 각각 맡았다. 국립창극단원 왕기석씨가 김구로,국립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 안숙선씨가 김구 어머니로 나온다. 공연시간은 2시간30분.
  • 단재·백범 그리고 안기부(金三雄 칼럼)

    “이성(理性) 말고는 어떠한 주인도 인정하지 않는 자유인의 세계에만 태양이 빛나는 시대가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폭군과 노예,성직자들과 그들의 우둔하고 위선적인 도구에 지나지 않는 종교의 신자들은 역사 속이나 무대 위에서밖에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인간의 이성과 진보를 위해 프랑스 혁명에 참가했다가 비참한 죽음을 당한 수학자이며 계몽사상가,그리고 혁명 사상가인 콩도르세는 ‘인간정신진보사’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콩도르세가 처형되고 20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 대체적으로 인류사는 이성과 진보의 과정을 거쳐왔지만 프랑스혁명이 반혁명과 나폴레옹 독재의 반동기를 겪었듯이 인류는 몽매와 압제에 시달려왔다. 우리 역시 이성과 진보의 과정보다 몽매와 압제의 기나긴 터널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중세의 어둠 속에서 프랑스혁명의 횃불이 근세의 여명을 열었듯이 우리도 광주항쟁,6월항쟁,그리고 새정권의 출범과 함께 이성과 상식이 통하는 변화의 시대를 열고 있다. ○의열단과 한인애국단 변화의 가닥에는 안기부도 포함된다. 군사정권의 모태에서 태어난 안기부(중앙정보부)가 새로운 역할,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려는 것은 만시지탄이지만 반가운 일이다. 비록 ‘국가정보원’으로 개명을 해놓고도 국회파행으로 개명신고조차 하지 못한 과정에서 추구하는 변화이지만 과거 어두웠던 시절 원부(怨府)의 이미지를 씻고 새롭게 환골탈태하려는 노력은 값지다. 안기부는 힘과 권력을 상징했던 조형물을 철거하고 내곡동 청사 진입로에 시야를 널리 해외로 돌리자는 뜻에서 광개토대왕비를 원형의 크기대로 세워 8·15광복절에 제막식을 갖는다고 한다. 안기부의 변화는 조형물의 교체만이 아니라 단재 신채호,백범 김구 선생의 존영을 이종찬 부장 집무실에 걸기로 했다는 점이다. 이는 상징성의 큰 변화를 의미한다. 흔히 안기부의 연원을 일제시대 고등계경찰이나 건국 직후 악명을 떨친 육군특무대를 연상하는 잘못을 씻고,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조직된 비밀결사인 단재의 의혈단이나 백범의 한인애국단에서 뿌리를 찾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단재의‘조선혁명선언’으로 잘 알려진 의열단은 1919년 11월 만주 길림성에서 조직된 항일운동단체다. 창단 직후‘공약 10조’와 뒤에‘5파괴’‘7가살(可殺)’이란 행동목표를 독립운동의 지침으로 채택했다. ①천하의 정의의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해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등 10개조와,파괴대상으로 ①조선총독부 ②동양척식회사 등 일제식민지 통치기관을 들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백범이 한인애국단을 창설한 것은 1926년 12월, 만주사변 이후 임정지도부는 중국인의 악감(惡感)을 해소하고 독립운동의 새로운 국면을 전개하기 위해 일제에 대한 파괴와 암살을 계획했다. 한인애국단은 바로 이런 목적으로 비밀리에 결성되고 이봉창 의사의 도쿄 사쿠라다문(櫻田門)의거,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공원(虹口公園)의거 등이 감행되었다. 항일무장투쟁에 빛나는 금자탑이다. 의열단과 한인애국단이 망국기 국권회복원동의 첨병이었다면 제2국난기로 불리는 오늘 안기부는 그 정신을 이어서‘정보는 국력이다’란 부훈에 걸맞는,21세기 정보화시대를 뒷받침하는 책임과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이다. ○단재·백범 정신으로 건국 반세기동안 이승만과 군사정권에 의해 단재와 백범정신이 굴절되었다. 이 분들의 애국사상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는다. 안기부가 구태를 벗고 이들의 애국정신으로 국난극복의 선두에 서고자 하는 자세는 바람직하다. 문제는 실천이다. 아무리 외양이 바뀌고 구호가 요란해도 본질이 바뀌지 않고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도 없다.“나는 우리나라의 청년 남녀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으라운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로 낙을 삼기 바란다”(백범일지) 기왕에 백범과 단재의 정신을 안기부의 정신으로 받들기로 했다니 과거의 ‘좁으라운’생각을 버리고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분발할 것을 당부한다. 그래서 이성의 시대를 열어가자.
  • 국민 곁으로 돌아온 白凡/49주기 추모제 의미

    ◎김 대통령 대북정책 백범 통일론과 공통점/이수성 기념사업회장 “정신 이어받자” 강조 “열매를 맺으려고 지는 꽃 어이리까.” 시인 李殷相의 추도가(追悼歌)와 같이 金九 선생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다.그의 큰 뜻과 정신은 민족과 역사와 함께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金九 선생을 죽인 집권세력은 그의 독립운동과 자주적 평화통일론을 국민들 로부터 유리시키려고 했다.그러나 그 집권세력들은 무대뒤로 사라지고 새정부에 의해 백범은 다시 국민의 곁으로 돌아오고 있다. 국민곁으로 돌아온 백범의 49주기 추모식이 26일 서울에 있는 효창공원에 서 열렸다.올해의 추모식은 여느때와는 다른 의미가 있다.권력과 국민이 함께 추모하는 의미있는 행사였다.과거의 추모식은 권력과 국민이 괴리된 상태 에서 열린 기형적 모습이었다.李承晩 정부와 군사정권은 국민이 가장 존경하 는 위대한 지도자에 대한 추모식을 외면했다.국민들만의 추모식이었다.국가 최고지도자로 金九 선생 묘소를 참배한 사람은 金泳三 대통령이 처음이었다.金大中 대통령도 이날 金九 선생 묘소를 참배했다. 金대통령의 참배에 이어 추모식이 열렸다.李壽成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은 추모식에서 “지금부터 우리가 반드시 추구해야할 일은 선생님의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 민족의 대통합과 자랑스런 통일국가를 이루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백범의 사상과 통일론은 金大中 대통령 정부가 들어서며 다시 빛을 보기 시작했다.서울신문이 ‘정직한 여가 되찾기’ 일환으로 6월에 집중 보도한 백범 재조명작업도 金九 선생을 올바로 보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기념협회의 홍소연 총무주임이 말했다. 백범의 통일론과 김 대통령의 대북정책은 민족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지향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백범이 넘었던 38선을 반세기만에 鄭周永 현 대명예회장이 최근 다시 넘고 금강산개발에 합의하는 등 남북관계가 화해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李殷相의 말대로 꽂은 졌으나 그 꽃이 열매를 맺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 金九 선생 큰뜻 기리며/어제 49주기 추모제

    ◎김 대통령 묘소 참배 金大中 대통령은 26일 상오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있는 金九 선생 묘소를 참배했다. 金대통령은 이날 백범 김구 선생 기념사업협회(회장 李壽成)가 주최하는 金九 선생 49주기 추모제에 앞서 백범 묘소를 찾아 헌화·분향하고 金信 전교통 부장관등 金九 선생 유족과 백범기념사업협회 간부들을 면담했다. 참배행사에는 李壽成 기념협회 회장과 張忠植 전회장,金信 전장관,金義在 국가보훈처장 등이 참석했다. 金대통령의 참배에 이어 이날 상오 11시부터 백범 묘소에서 49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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