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백범 김구
    2026-02-02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196
  • 구국의 뜻 되새기자/ 대한매일 어제와 오늘

    ◆민족 정론의 기수 96년. 이땅에 고고(呱呱)의 성(聲)을 울린 지 아흔여섯 돌,민족정론의 기수로 거듭난 지 두 해.대한매일이 오늘 또 한번의 생일을 맞았다.지난 98년 11월11일새로운 제호로 재탄생한 ‘대한매일’은 그동안 90년을 넘긴 경륜에 새내기의 열정을 뒤섞어 시대적 소명을 다하고자 온힘을 기울였다.대한매일의 어제와 오늘을 되짚는다. 지난달 14일 남북정상이 만나 제2차 단독회담을 하다 휴식을 취하는 시간에북한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은 남쪽의 신문더미 속에서 대한매일을 집어들었다. 김위원장은 “옛 ‘서울신문’이 제호가 바뀌었다면서요”라고 물었고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곧 “대한매일로 바뀌었다”고 답했다.김정일위원장이서울신문과 대한매일을 줄곧 애독했음을 보여주는 이 에피소드는 항간에 화제가 됐다.하지만 이 ‘실화’는 어쩌면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질는지도 모른다.남북정상회담이 실현되기 전,아직도 냉전논리에 젖은 사람들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기존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지난 5월19일 대한매일은‘내가본 김정일 총비서’란 제목으로 특집을 내 4·5면을 펼쳐 그를 소개했다. 필자는 재미언론인 문명자(文明子·71)씨와 북한문제 전문가인 서대숙(徐大肅·69)미 하와이대 정치학 석좌교수.이들은 김위원장을 “전혀 건강에 이상이 없으며 통이 크고 사나이답다”“박력 있고 한번 한다면 하는 성격”(문명자)이라거나 “정치지도자로서 아버지보다 더 배짱이 있다”(서대숙)고 평가했다.이같은 보도가 나가자 대한매일 편집국에는 그를 의도적으로 미화했다는 비난전화가 빗발쳤다.서방 관측통이 김위원장을 “내성적이며 대인관계를 기피하는”“성격이 괴팍한 영화광”쯤으로나 묘사해 온 탓이었다. 그러나 보름여 지나 김위원장이 TV에 등장했을 때 그 모습은 대한매일이 특집에서 보여준 그대로였다.북한,그리고 북의 지도자와 주민의 삶을 제대로이해한다는 것은 통일을 향한 길목에서 가장 기초적인 요소이다.대한매일은이 시대가 안은 최대의 과제인 민족통일을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이제그 결실을 하나씩 맺어가고 있다. 아울러 대한매일은 재창간후 ‘역사 재정립’과 ‘사회 개혁’에도 힘을 기울였다.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직결되는 근현대사에서 왜곡된 부분을 바로잡고 가려진 사실을 발굴했다. 98년부터 2년여동안 ‘친일의 군상’ ‘민주열사 열전’ ‘제2공화국과 장면’ ‘의열 독립투쟁’ ‘문명자 회고록’ 등 잇따라 지면을 장식한 ‘정직한 역사 되찾기’시리즈는 국민에게 오늘의 삶을 되돌아 보게 하고 내일의 방향을 정하는 나침반 구실을 했다. 또 지면에서의 노력말고도 지난해 창간 95주년 역점사업으로 ‘백범 김구전집’(전12권)을 간행했다든지,북한 지도층에 관한 유일한 인물정보사전인 ‘북한인명 사전’을 거듭 개정해 출간한 일들은 우리 사회에서 언론이 할 일을 더욱 확대한 기념비적 사업으로 인정받고 있다.이밖에도 대한매일이 다른매체와 구별해 독자에게 전하는 정보서비스는 적지 않다.신문사상 최초로 신 문의 첫 면과 마지막 면을 동시에 1면처럼 활용해 마지막 면은 행정뉴스로 특화했다.정부 정책과 이를 수립·집행하는 공무원 사회의 움직임을 빠르게,정확하게,깊이 있게 보도함으로써 독자들에게 다른 매체에서는 접할 수 없는귀중한 뉴스를 제공했다. 동시에 정책을 국민에게 올바르게 이해시키는 반면 잘못된 정책은 즉각 고치게끔 하는,국민과 정부 사이의 가교 노릇도 톡톡히 했다. 강만길(姜萬吉)고려대교수 조동걸(趙東杰)국민대명예교수 고은(高銀)시인 등당대의 지성이 번갈아 지면을 장식하는 오피니언 페이지,언론의 자기 성찰과반성을 담은 매체비평,어느 신문보다 애정과 정보가 가득 담긴 지역뉴스면도 대한매일의 자랑거리다. ◆항일운동의 구심점.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이하 대한매일)는 1904년 7월18일 창간됐다. 발행인은 영국인 배설(裴說·Ernest Thomas Bethell),총무는 양기탁(梁起鐸)이었다.일간으로 영문판 4면,국문판 2면을 발행했다. 당시는 한반도를 집어삼키려는 일본의 야욕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때였다.그해 2월8일 러일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이어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해 한반도에 주둔하면서 자유롭게 군사활동을 하는 권한을 얻었다. 7월20일에는 ‘군사경찰 훈령’을 공표해 ‘집회나 신문이 치안을 방해한다고 인정되면 그 정지를 명령하고 관계자를 처벌할 수 있다’는 규정을 마련했다. 한마디로 병탄을 앞두고 언론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착착 옥죄어나가는 시절이었다.이같은 상황에서 창간한 대한매일은 ‘한민족과 대한제국의 편에서서 일제침략에 맞선다’는 태도를 분명히 해 민족에게 한줄기 빛처럼 희망을 주었다.발행인이 외국인이라서 일제의 검열을 피할 수 있는 이점을 십분활용,대한매일은 ‘배일호국’(排日護國)운동을 앞장서 이끌었다.이는 양기탁을 비롯해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장도빈(張道斌)같은 독립운동의거목들이 직접 신문제작에 참여한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양기탁은 배설이라는 보호막을 둘러친 채 실제로는 신문제작과 경영을 도맡다시피했다. 민족주의 사학자로 우뚝한 이름을 남긴 박은식 신채호 장도빈 등 3인은 잇따라 주필 직에 올라 예리하고 품격 높은 논설과 선조의 위업을 찬양하는 소설을 실어 민족정기를 벼리어 나갔다. 이들의 노력을 바탕으로 대한매일이 이루어놓은 성과는 거대했다. 1907년 11월18일자에는 전날 체결된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만천하에 밝혔다.고종황제가 끝까지 조약체결에 반대했으며 따라서 이 조약은 강제로 맺어진 늑약(勒約)임을 명확히 한 것이다. 이후에도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고 전국적인 의병항일투쟁기에는 ‘처처의병’이란 고정란을 만들어 매일 보도했다.산업진흥과 자주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워 민족기업·사립학교 설립을 적극 유도했다. 이같은 대한매일의 업적은 민족의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대한매일을 누르고자 일제는 갖은 간계를 부렸지만 당시 발행하는 신문 부수를 전부 합쳐도 대한매일의 절반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대한매일신보가 일본의 제반 악정(惡政)을 반대하여 선동함이 끊이질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한탄할 정도였다. 그러나 국운이 결정적으로 기울면서 대한매일도 위기를 맞는다.1908년 4월신문지법이 개정돼 외국인 발행 신문도 발매금지 및 압수가 가능해졌다.다음달에는 발행인이 배설에서 만함(Alfred W Marnham)으로 바뀌었고 7월에는 양기탁이 누명을 쓰고 구속됐다. 배설이 1909년 5월1일 타계하자 영문판 발행이 중단됐다.1910년 5월21일 일제는 만함에게서 대한매일신보사를 사들였다.그리고 국권을 빼앗긴 8월29일대한매일은 종간했다.지령(紙齡)은 1,651호였다. 대한매일은 일제강점기에 ‘매일신보’로,해방후에는 ‘서울신문’으로 명맥을 유지했다.1998년 새 시대가 전개되면서 민족정론지의 뿌리를 되찾고자 신문 이름을 ‘대한매일’,회사명을 ‘대한매일신보사’로 해 재탄생했다. 새로 태어난 대한매일은 이제 ▲공공이익을 앞세우는 신문▲국민복지에 앞장서는 신문▲민족화합을 앞당기는 신문▲2000년대에 앞서가는 신문이라는 네가지 다짐을 묵묵히 실천하며 민족통일과 국가사회 개혁이라는,21세기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용원논설위원 ywyi@
  • 구국의 뜻 되새기자/ 해외 항일유적 현황·실태

    중국 상해를 방문하는 한국인들의 필수 방문코스 가운데 하나는 홍구공원이다.이는 1932년 4월 29일 이곳에서 있은 천장절 기념식 행사장에 폭탄을 던져 주중 일본공사와 일본군 수뇌 수명을 폭살시킨 윤봉길 의사의 애국혼을느껴보고자 함이리라.윤의사 의거는 단순히 일제의 고관 수 명을 살상한 정도에 그친 게 아니라 당시 임시정부에 대해 미온적이던 장개석 정부의 마음을 돌려놓아 물심 양면의 지원을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일제강점기 항일세력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러시아·미국 등지에본거지를 잡고 항일투쟁을 전개했다.이들이 활동근거지로 삼은 항일유적지는생생한 ‘민족혼의 현장’이라고 할수 있다.낯선 이국땅에서 접한 선열의 이 름이나 묘소,항일전적지는 후대들에게 애국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정부차원에서 이를 보존해야 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수십권의 항일운동 관련 홍보책자보다 선열의 얼이 서린 ‘흔적’ 하나가 민족정신을 고취하는데 훨씬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1910년 한일병합으로 국권을 상실하자 항일세력들은 국내·외에서 국권회복투쟁을 전개하였다.이들은 1919년 전 민족이 궐기한 ‘3·1의거’와 같은 비 폭력 투쟁은 물론 안중근·윤봉길 의사로 상징되는 의열투쟁,그리고 청산리·봉오동전투와 같은 대규모 무력항쟁도 전개했다.국내외에서 다양한 형태로 전개된 항일투쟁은 곳곳에 그 애국혼의 ‘흔적’을 남겨두고 있다.그 가운데 임시정부 청사 등 일부는 정부의 복원·보존 노력으로 상태가 양호한 것도 있으나 아직도 많은 유적들이 방치돼 있는 실정이다. 최근 보훈처가 전문가들의 조언과 자체 현장조사를 통해 집계한 결과에 따르면,해외독립운동 관련사적(시설물 포함)은 모두 317개소로 파악됐다.이들중 244개소는 중국지역에 소재하고 있으며,흔히 ‘만주’로 불리는 동북3성일대에 163개소가 밀집돼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중국을 제외한 아시아 지역에서는 러시아 36,일본 4,카자흐스탄 4,대만 2곳 등 총46개소이며,그밖에 미주지역 24개소(미국 22,멕시코 2),유럽지역 3개소(프랑스 1,네덜란드 2)등이다. 중국내 항일전적지는 동북3성 가운데 하나인 길림성에집중돼 있으며 그 가운데서는 용정(龍井)일대가 단연 으뜸이다.90년대 들어 중국관광이 늘어나면서 한국인들이 가장 즐겨찾는 곳 가운데 하나가 바로 용정이다.이곳은 우리귀에 낯익은 가곡 ‘선구자’의 고향으로 비암산,일송정을 비롯해 민족시인윤동주의 생가와 묘소가 있어 더욱 한국인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이밖에도인근 교외에 위치한 ‘3·13반일의사릉’을 비롯해 서전서숙·명동촌교회와‘봉오동전투’ 전적지도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인근 화룡현에는 3·1의거 이듬해인 1920년 10월 독립군이 일본군 3,000여명을 궤멸시킨 ‘청산리전투’ 현장과 대종교 3종사의 묘소가 남아 있다.흑룡강성 하얼빈에는 안중근의사의 의거현장을 비롯,경박호·사도하자 전투지가 남아있고,영안(寧安)에는 김좌진장군의 묘소와 김 장군이 운영했던 정미소,그리고 신민부 군정파본부,고려공산당 북만지부 건물 등이 남아있다.또요령성 봉천에는 편강렬의사의 전투현장,신빈현에는 양세봉장군 순국지·서로군정서 본부,단동에는 이륭양행(怡隆洋行)건물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이륭양행은 당시 영국식민지인 아일랜드출신 무역상 윌쇼가 경영하던 건물로 임시정부는 그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 교통국을 두고 국내와 연락거점으로 활용했었다.집안현,장백현 일대에는 독립군의 유적이 곳곳에 산재해있다.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돼 10여년을 머문 상해에는 임정 청사를 비롯해 임정기관지 독립신문사 터,윤봉길의사의 의거현장인 홍구공원(현 노신공원),애국지사 다수가 묻혀 있는 만국공묘(외국인 묘지),인성학교 등이 남아있다.북경에는 단재 신채호,우당 이회영 선생이 활동했던 흔적과 신한혁명단본부 자리가 남아있고,1932년 윤의사의거후 피난길에 오른 임시정부가 머물다간 진강,가흥,기강,장사,항주 등지에도 백범 김구 선생의 피난처를 비롯해 임정청사 이전지가 더러 남아있다.강소성 남경에는 의열단원들의 합숙지이자 민족혁명단의 본부였던 호가화원이 있다.서안에는 OSS훈련지와 광복군 2지대주둔지가,임정 마지막 정착지인 중경에는 임정 청사를 비롯해 광복군사령부본부건물(현 미원식당 건물) 등이 남아있다.국토 전역에 걸쳐서 항일투사들의 피와 혼이 서려있는 중국은 ‘항일전적지의 진열장’이라고 할만하다. 중국 다음은 러시아로 모두 36개소의 항일독립 유적지가 있다.일제 당시 연해주로 불린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최초의 한인거주지를 비롯해 신한촌,해조신문사 터 등이 남아있고,크라스키노에는 안중근 의사가 동지들과 ‘단지동맹’을 맺은 커리마을이 있다.하바로프스크에는 한인사회당 창당지와 지금은시민휴식공원으로 변한 독립군 전투지,그리고 1937년에 사망한 한인들의 무덤이 남아있다. 또 리르쿠츠크에는 고려공산당 창당대회지(현 레닌거리 23번지 인민의 집)와 이범윤 유배지 등이 남아있다.89년 소련붕괴후 러시아에서 분리된 카자흐스탄에는 ‘봉오동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의 옛집과 동상,묘소(크질오르다시 공원묘지)가 있으며,계봉우 선생의 묘소도 여기에 있다. 미국에는 한인 이민들이 처음 정착한 하와이를 비롯해 샌프란시스코·로스앤젤레스·뉴욕 등에 민족세력들의 활동무대가 남아있다.하와이에는 당시 한인들의 구심체 역할을 했던 한인기독교회·한인기독학원을 비롯해 조선국민단 사관학교,하와이국민회관 등이 남아있다.샌프란시스코에는 전명운·장인환 두 의사가 친일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한 현장인 페어부두,스티븐스가 투숙했던 페어호텔이 90년이 넘는 세월속에서도 여전히 옛 모습을 지키고 있다. 이곳엔 대한국민회의 기관지 신한민보의 발간지(페리스트리트 232)도 여전히 남아있다.로스앤젤레스에는 애국지사이자 대표적 재미한인 지도자였던 도산 안창호 선생의 고가(남가주대 구내소재)와 흥사단중앙회관이 남아있다.이밖에도 캘리포니아 클로세트 윌로스에는 계원 노백린 장군의 한국비행단 설립지가,네브래스카주에는 박용만의 한인소년병학교 설립지(현 헤이스팅스 네브래스터니 농장)가 남아있다.구미위원회 관련 유적은 뉴욕에 있다. 그밖에 프랑스 파리에는 평화회의 대표관과 임시정부 파리통신국,네덜란드에는 ‘헤이그밀사’ 가운데 한사람인 이준 열사의 묘역과 데용호텔이 항일관련 유적지로 기록할 만하다.일본에는 2·8독립선언의 현장인 도쿄기독교청년회관과 김지섭·이봉창의사의 의거현장인 도쿄 궁성의 앵전문과 이중교 일대,즉 일본의 최심장부가 바로 항일유적지인 셈이다. 정운현기자 jwh59@
  • 이현희교수 ‘임시정부의 숨겨진 뒷이야기’서 밝혀

    백범 김구는 잘 알려져있다시피 1949년 서울 경교장에서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백범은 암살당할 때도 1938년 중국 장사에서 이운한이 쏜 총탄을 몸안에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백범은 1943년에도 중경에서 임시정부의 주도권을 놓고 좌우익이 대립하는과정에서 박수복과 황민 등 좌파세력에 의해 암살될 뻔 했었다.중국쪽 수사기록을 뒤져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린 사람은 이현희 성신여대교수이다. 이교수는 백범 암살기도가 한차례 더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중국 재판기록등에서 찾아냈다. 이 내용은 최근 펴낸 ‘임시정부의 숨겨진 뒷 이야기’(학연문화사 펴냄)에 담겼다. 이교수에 따르면 백범을 암살하려던 기도가 처음있었던 때는 1920년이다.일본 밀정 황학선의 교사로 나창헌과 김의한 등 ‘십수명’이 당시 경무국장을맡고 있던 백범을 살해하기 위해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를 습격했다. 황학선은 한때 백범의 신뢰를 받기도 했으나,일본공관을 오가며 임시정부의동태와 국내연락 및 자금조달 방법 등을 낱낱이 보고하며 큰 돈을 얻어쓰다발각되자 일을 벌였다. 수사 결과 이들은 백범을 암살하기 위해 나창헌이 경성의전 학생이던 것을이용하여 3층 양옥을 세낸 뒤 병원간판을 붙이고 그를 유인하여 암살할 계획까지 세웠다. 한편 백범은 임정청사 습격 사건을 전후하여 한차례 위기가 더 있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었다.경무국장 시절 박모라는 청년이 면회를 청하여 만나니 권총 한자루와 수첩 한권을 내놓더라는 것이다.그는 일본 영사관으로부터 협박반 회유반으로 백범암살을 명령받았다고 했다.거리에서 백범과 몇차례 마주치는 등 결정적 기회도 있었으나,실행할 수 없었다며 눈물을 뿌렸다. 이처럼 백범은,일본의 사주가 없지않았다지만 모두 한국인에 의한 5차례나암살위협에 시달렸다.이 때문에 백범의 어머니 곽락원도 장사사변(1938년 백범이 총에 맞은 일)이 있자 “동포의 총에 맞다니 크나 큰 수치”라면서 “왜놈 총에 맞아 죽는 것 보다 오히려 못하다”고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서동철기자
  • [대한광장] 통일시대 역사인식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보면서 11년 전 1989년 3월의 문익환 목사를 생각해 본다.당시 언론에 나타난 문익환 목사의 방북에 대한 기사제목을 보자.“실정법을 어겼다,” “밀행에 충격과 경악,” “성급한 행동,” “혼란이 우려된다,” “통일창구를 깬 무분별한 행동,” “그는 대한민국을 무시했다”등으로 비판 일색의 기사였다. 그러나 바로 전 1월에 있었던 정주영 회장의방북에 대해서는 “민족경제공동체건설을 위한 첫걸음”,“남북화해 교류의큰 이정표요 크나큰 노력”이라고 긍정적인 보도를 했다.기업인이 정부에 미리 알리고 간 경우와 민간단체의 통일운동가가 알리지 않고 간 차이는 있지만,문목사를 밀행의 입북으로,정회장은 방북으로 표현하였다.한쪽은 실정법위반이며,한쪽은 남북 경제교류의 물꼬를 튼 민족역량 과시로 그 성과를 강조했다.이러한 기사는 북한을 우리의 적이며,체제 경쟁에서 이겨야 할 대상으로 보는 냉전적 시각에서 비롯됨이다. 또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1995년 국방부는 한 6·25포스터를 시중에 배포했다.당시 냉전시대보수언론의 대표격인 한 신문은 그 포스터에 대해서 6·25를 도발한 북한의 침략성과 불법성을 외면한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국방부에반공적 색깔논쟁을 제기했다. 이 포스터는 6·25를 맞아 국방부가 공모한 작품 중 당선작이었는데,태극기를 바탕에 깔고 국군 장병과 인민군 사병이 서로 껴안고 있는 도안이었다.그림 밑에는 “형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어야만 했던 아픈 기억 6·25”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그 신문은 이 문제의 포스터가 6·25를 왜곡하고 북의 전쟁도발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이에 대해 국방부는 국군으로 참전한 형과 인민군으로 징집된 동생이 전장에서 총부리를 겨누고 만나야했던 비극적 실화를 형상화 한 것으로 민족의 비극을 극복하고 통일을 지향한다는 뜻에서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고 해명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냉전적 사고방식을 가진 언론은 남북이 같은 동포이고 형제라도 이념을 달리하기 때문에 보듬고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것조차 수용해서는 안된다는 관점이었다. 문익환 목사는 남북의 동족이 피로써 피를 씻는 참담한 비극을 방지해 보고자 백범 김구 선생이 북행을 나섰듯이 자신도 그로부터 41년 후 “통일에 대한 온 겨레의 염원을 이 이상 방치해 둘 수 없는 상황이 방북을 결행하게 했다”고 말했다.남북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반세기에 걸친 분단의 치욕을 씻을 수 없고,인권·민주화·경제발전의 궁극적 해결이 있을 수 없다는확고부동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그는 다섯 번째 수감되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민족사적 최대의 과제인 통일운동에 매진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11년이 지나 남북정상의 만남으로 통일민족주의의 새 역사가 열린것이다. 7,000만 민족과 500만 해외동포가 지켜보는 가운데 일어난 기적이다.두 남북 정상의 만남은 민족적 자주성의 상징이요,우리의 불행의 역사를 청산하는 민족사적 쾌거이다. 이제 적대의식에서 동족의식으로,국민들의 대북한인식을 바꾸는 통일환경을조성해야 한다. 분단시대의 모든 제도적 유제,극우적 보수의식은 청산되어야한다. 북한을 돕는 일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동포애적 시각에서통일시대의 관건이 된다. 북한을 더 이상 적국이 아니라 동족의 나라로 보는 새로운 민족관이 요청되는 시기이다.역사적 변화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대립에서 화해로의 바뀜이다.대북 동족의식이 자리잡게 되는 날 남북 평화통일론,남북 대등 통일론이 확실히 정착되리라 믿는다. 徐紘一 한신대교수·국사학
  • 신간 맛보기

    ◆소설 백범 김구(홍원식 지음,구사 펴냄) ‘민족의 큰스승’에게도 가슴뛰는 첫사랑이 있었다.동학군을 진두지휘하던 청년 접주(장교) 김창수(백범 김구의 어린시절 이름)는 스승 고능선의 손녀를 사랑했다.‘백범서거 50주기경교장 추도식’ 사무처장 등을 지낸 저자가 백범의 일대기를 서정넘치는 소설로 전개했다.백범사상을 일반인들이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소설기법을 빌렸지만,철저히 문헌자료들에 근거했다.이야기를 시대별로 펼쳐 격동의역사를 알리는 데도 힘썼다.백범의 숨겨진 일화도 발굴 소개했다.전2권 각권7,000원. ◆나는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리처드 브랜슨 지음,하서 펴냄)영국 버진그룹의 창설자이자 회장의 자서전.최하위 성적으로 간신히 고교를 졸업한 열등생이 영국 제일의 기업가가 되기까지 독특한 사고방식과 도전정신,생존전략을 담았다.사업을 시작하면서 회사이름을 ‘버진’(처녀)으로 정했다.1970년음반을 통신판매해 히트친데 이어,항공 철도 영화 소매·금융업 등 200개자회사를 거느리고 있다. 전문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고객들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거나 착취당하는 독점적인 시장에 뛰어들어 황금같은 기회를 포착했다. 1만1,000원. ◆땅의 눈물 땅의 희망(최창조 지음,홍성담 그림,궁리 펴냄)우리 민족의 전통지리사상인 풍수학을 현대적으로 접목하는 데 몰두해온 저자의 풍수에세이.풍수학은 신라때부터 우리 역사에 등장한 민족지형학이다. 그러나 일부 세속적으로 타락한 이기적 술법풍수가 득세하면서 풍수는 점점나락의 길을 걸어왔다.저자는 우리의 자생풍수가 중국풍수와는 구별되는 고유의 민족사상임을 일깨우며 상식에 의해 자연을 자연 그대로 바라볼 것을주문한다.‘풍수무전미(風水無全美)’,즉 완전한 땅이란 없다는 전제에서 우리 국토의 풍수적 병통을 살폈다.1만3,000원. ◆역사에 지고 삶에 이긴 사람들(송광룡 지음,풀빛 펴냄)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치열한 삶을 살았던 조선 선비들의 사상과 철학을 다뤘다.기묘사화 이후낙향해 소쇄원을 짓고 평생을 처사로 살았던 양산보,기축옥사(송강 정철이날조한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돼 억울하게 죽은 당대의명유 정개청,정약용·김정희 등과 교류하며 조선불교의 도통을 이었던 초의선사 장의순 등 11명이 등장한다.자신의 이상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권력의 중심에서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삶을 재생, 역사의 진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1만3,000원.
  • 김대통령 “北韓 현실적 통일방안 접근”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26일 “남북의 정상이 처음 만나 대화를 나누고 민족의 문제를 풀어가는 기본원칙에 합의한 것은 반세기 우리 민족의 분단사에 큰 진전이 아닐 수 없다”면서 “특히 북한이 그동안 고수해오던 주장을 양보하고 훨씬 현실성 있는 우리의 통일방안에 접근해온 것은 매우 중요한 성과”라고 밝혔다. 김대통령은 이날 오전 서울 효창공원에서 열린 백범 김구(金九)선생 기념관 건립식에 참석,“55년 동안 갈라졌던 민족의 마음을 다시 하나로 합치는 데는 성의있는 노력과 기다림 그리고 국민의 단합된 의지와 성원이 무엇보다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이어 “백범 선생이 통일을 위해 노력하던 당시의 어려웠던 상황에 비해 지금 우리 민족은 천재일우의 기회를 맞고 있다”고 지적한 뒤 “민족의 화해협력과 공존공영의 기틀을 튼튼히 구축해서 장차의 통일에 대비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단법인 백범기념관건립위원회(위원장 李壽成) 주관으로 백범 서거 51주년인 이날 열린 기공식에는 이만섭(李萬燮)국회의장, 서영훈(徐英勳)민주당대표, 고건(高建)서울시장, 최규학(崔圭鶴)국가보훈처장,윤경빈(尹慶彬)대한광복회장 등 정부 및 각계 주요인사, 광복회원, 일반시민 등 600여명이 참석했다.150억원을 들여 효창공원내 3,500여평의 부지에 들어설 기념관은 연면적 1,600평 규모의 지하 1층,지상 2층 건물로 2002년 12월 완공된다.기념관 건물은 정방형의 기념마당이 사각형 건물을 떠받들고 있는 형태로 평화와 화합의 백범정신을 상징한다.지하에는 전시실과 영상전시실·연구자료실·회의실 및 강의실이 마련되며 지상1층은 공연을 위한 기념마당, 2층은 전시공간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양승현 임창용기자 yangbak@
  • 백범 김구선생 51주기 추모식

    백범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회장 김신)는 김구선생 서거 51주기 추모식을 26일 오전 8시 30분 효창공원 소재 선생의 묘소 앞에서 거행한다.지난 1948년선생은 이념을 초월한 자주적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평양을 방문,남북협상을 벌이는 등 통일역정에 선구자적 업적을 남긴 바 있다. 추모식 행사에 이어 10시에는 효창공원내 백범기념관 건립 예정지인 테니스장에서 기공식이 거행될 예정이다.행사에는 김대중 대통령을 비롯,3부 요인,애국지사,각계 인사,시민 등이 참석한다.
  • ‘백범’ 발자취 따라가 보자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민족화해와 대단결을 외친 백범(白凡)김구(金九)선생을 추모하는 역사기행 행사가 18일 열린다.광주·전남 백범 김구선생기념사업회(회장 안종일)는 이날 ‘청년 김구와 민족운동,문화유산’이란 주제 아래 백범의 발자취를 돌아보기로 했다고 13일 밝혔다. 이번 기행은 백범 서거 51주년(6월26일)을 앞두고 선생의 나라사랑 정신을되새기기 위한 것이다. 기행단 70명은 백범이 22세가 되던 해 일본인 육군장교를 살해하고 몸을 숨겼던 전남 보성 일대를 중심으로 답사한다. 답사장소는 백범이 40여일간 숨어지내던 득량면 송곡리를 비롯,항일 의병운동 격전지였던 문덕면 죽산리 대원사와 서재필 선생의 생가가 있는 문덕면용암리,민족음악가 채동선 선생의 기념비가 있는 벌교읍 세망리,대종교 초대 교주인 나철 선생의 생가터가 남아있는 벌교읍 칠동리 등이다. 광주 남기창기자
  • 韓中 교류연구센터·역사문화 자료실

    주중 한국대사관 산하에 최근 설치된 ‘한중교류연구센터’(韓中交流硏究中心)와 ‘한중역사문화자료실’이 두 나라 이해·교류의 깊이와 폭을 넓히고두텁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중국 당기관지 런민르바오(人民日報)가 최근자에서 소개했다. 런민르바오는 7일자 ‘문화대사 권병현(權丙鉉)’이란 제목의 특집기사에서주중대사관의 한중 두나라의 이해·교류 확대증진 방안과 ‘한중교류연구센터’등을 소개하며 이같이 보도했다. 특히 신문은 “대한매일신보사가 ‘백범(白凡) 김구(金九)전집’을 연구센터에 기증했다”고 이례적으로 소개하면서 그 사료적 가치와 의의를 강조했다. 또 현대중국의 대표적 지성이며 동양문화연구의 거두인 베이징(北京)대학지시에린(季羨林)교수가 이 연구센터의 활동을 참여하고 있다고 소개했다.“고대에서 근대에 이르는 두 나라 관계와 관련 각종 자료들을 발굴해나가면서두 나라 교류역사 연구에 기여해 나갈 것”이란 평가도 덧붙였다. 이와함께 주중 한국대사관이 주관하는 ‘한중수교기념 학술대회’ 등 학술대회와 연구지원활동을 지적하면서 “21세기 한중 두 나라의 협력동반자 관계를 추진하기위해선 두 나라 관계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화된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신문은 또 “98년 11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중국 방문은 두 나라관계를 ‘협력동반자 관계’로 격상시켰다”는 권대사와의 대담 내용도 소개했다. 이석우기자 swlee@
  • [오늘의 눈] 안중근의사 유해발굴 정부가 지원해야

    서울 효창공원 오른쪽 입구 언덕에는 윤봉길·이봉창·백정기 등 ‘3의사묘역’이 있다.묘역 한가운데는 태극기를 새긴 비석이 있고,제단 좌우로는‘고귀한 이름을 오래 후세에 전한다’는 의미의 ‘유방백세(遺芳百世)’ 네글자가 묘소 앞에 한자씩 새겨져 있다.그런데 제일 왼쪽 끝,‘世’자 뒤에있는 묘는 다른 묘소와 달리 비석도,묘비명도 없다.아직 묘소 주인의 유해을찾지 못해 임시로 마련해둔,이를테면 가묘(假墓)인 셈이다.최근 유해발굴문제로 온 나라가 떠들썩한 안중근 의사가 바로 이 가묘의 주인공임을 아는사람은 많지 않다. 해방후 환국한 백범 김구 선생이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이 순국한 동지들의유해 봉환사업이었다.1946년 5월 일본에서 3의사의 유해를 봉환,이곳에 유택을 마련한 백범은 미처 유해를 찾지 못한 안 의사의 유택을 이곳에 마련해둔것이다.항일운동의 화신이자 사사롭게는 사돈 간인 안 의사의 유해를 찾지못해 이곳에 가묘를 만든 백범의 당시 심정이 어떠했을까. 고향이 황해도 해주인 안 의사의 흔적을 남한땅에서 찾기란 쉽지않다.다만남산중턱에 있는,일제하 구 조선신궁(朝鮮神宮)터에 마련된 안의사기념관에서 안 의사의 ‘애국혼’의 한 자락을 겨우 느낄수 있을 뿐이다.한국인보다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더 즐겨찾는다는 이 기념관은 안 의사 의거일(10월26일)과 같은날 최후를 마친 박정희 전대통령이 재임시 세운 것이다. 기념관 왼편에는 안 의사가 태극기를 들고 서있는 동상이 있고 뒤로는 안 의사의 행적 등을 새긴 석판이 둘러져있다.그 가운데 안 의사의 ‘최후의 유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다오.나는 천국에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항일투쟁을 하다가 이국땅에서 순국한 애국지사 가운데 드물게 안 의사는조국이 독립되면 자신의 유해를 고국땅에 묻어달라고 유언하였다.그러나 우리는 해방 반세기가 지나도록 아직도 그 유언 하나를 제대로 받들지 못했다. 지금 국내외 민간단체에서는 안 의사의 유해발굴 및 봉환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정부는 이들 민간단체의 활동을 적극 지원,안 의사의 유해가 국내에 봉환될 수 있도록 국민적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정운현 특집기획팀 차장
  • 오늘 이동녕선생 60주기…되돌아본 업적

    지난 96년 5월17일 15대 국회 개원을 며칠 앞두고 여의도 국회의사당 중앙홀에서 한 역사적 인물의 흉상 제막식이 거행됐다.국회의사당 내에 특정인의 동상이 건립된 것은 처음있는 일이었다.흉상의 주인공은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현 국회)의 초대 의장을 지낸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1869∼1940)선생.국회가 선생의 동상을 의사당 내에 건립한 것은 상해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초대 의장을 맡아 의회민주주의를 도입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1919년 중국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부터 해방 때까지 선생은 임정의 ‘기둥’ 역할을 했다.임시정부 공식출범 직전인 1919년 4월10일 임시의정원의 초대 의장으로 선출된 선생은 국호 ‘대한민국’과 임시헌법·관제(官制)를 제정,3일 후인 4월13일 이를 만천하에 공포하였다.선생은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을 비롯해 의정원 의장 3회,주석(主席) 4회 등 무려 일곱 차례나 임정의 요직을 역임하였는데 이는 임정의 역사를 통틀어 유일한 기록이다. 1869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난 선생은 1897년 독립협회 활동으로 이준·이승만 등과 함께 7개월간 옥고를 치렀으며,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동지들과 결사대를 조직,대한문 앞에서 항의 연좌데모를 벌이다 또 2개월의 옥고를 치렀다.1907년 양기탁·유동열·안창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한 선생은 1910년 국권 상실 후 만주로 망명,신흥무관학교를 창립하여 초대 교장에 취임,군사교육을 통한 독립정신 고취에 진력하였다. 국내는 물론 만주·노령(露領)·중국 등 국내외에서 해방 때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한 선생은 일제의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끝내 지조를 지켰다.또 임정 내 이념·계파간 갈등 속에서도 별다른 ‘잡음’없이 요직을 중임한 것은선생이 공명정대한 업무처리와 온후한 인품으로 동지들로부터 존경을 한몸에 받은 때문이다.백범 김구(金九) 선생은 ‘백범일지’에서 “선생은 재덕이출중하나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를 도와서 선두에 내세우고,스스로는 남의 부족을 보충하고 고쳐 인도하는 일이 일생의 미덕이었다”고 평한 바 있다. 한편 선생의 여러 분야에 걸친 활동 가운데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언론계활동이다.1897년 ‘독립협회사건’으로 투옥,이듬해 출감한 선생은 당시 이종일(李鍾一)이 경영하던 ‘제국신문’의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사설을쓰기도 하였으며,1907년 신민회 조직 후에는 당시 구국항일지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을 지원하기도 했다. 정운현기자 jwh59@. *이동녕선생 60주기 추모식.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과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낸 석오 이동녕(李東寧) 선생의 60주기 추모식이 13일 오후 2시 선생의 묘소가 있는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서 열린다. 석오이동녕선생기념사업회(회장 姜英勳)가 주최하는 이 추모식은 상동교회이동학 목사의 추모기도를 시작으로 인하대 윤병석 명예교수의 약사 보고,추모·추념사,추모가 제창,헌화 분향 순으로 진행된다.추모식에는 최규학 국가보훈처장,고건 서울시장,윤경빈 광복회장,박유철 독립기념관장,유족대표 이석희 (주)대우 상담역을 비롯해 각계 인사 200여명이 참석한다. 정운현기자. *석오 이동녕선생 60주기에 즈음하여. 선열의 유지가 날로 퇴색되는 개탄스런 시기에 석오 이동녕 선생의 60주기를 맞음은 실로 감회가 새로울 뿐 아니라 나라와 겨레에 대한 의미가 남다르다 하겠다. 20대 젊은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여 앞날이 보장되었음에도 모든 영화를 버리고 독립운동이라는 가시밭길로 뛰어든 것은 선생의 혁명적인 기질이 짙었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선생의 독립투쟁은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눈보라치는 만주벌판,얼음땅 시베리아,연해주,그리고 황야의 중국대륙에 이르기까지 수륙(水陸) 수만리를 뛸 만큼 웅장하고 방대한 발자취에서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우리 민족운동사에서 선생의 높은 위상은 가난과 무지에서 방황하던 암울했던 구한 말 뛰어난 문필로 여성해방운동과 민권사상을 주창했던 선각자였다는 데서 더욱 그렇다.이같은 민족사상의 맥락은 이미 3·1의거 직전 만주땅길림성에서 이른바 ‘무오(戊午)독립선언’에 앞장섰던 기개에서도 찾을 수있다.1919년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임시정부 초기 선생은 초대 의정원 의장으로서 역사적인 민주헌법 제정에 앞장섰는데 이는 선생의 투철한 민주사상을 담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임시정부 주석 4차례,의정원 의장 3차례 등 총 7차례에 걸쳐 임시정부의 대임을 맡는 동안 선생은 항상 온화한 성품으로임시정부를 이끌었다. 독립운동의 열기가 한창이던 1910년대 선생은 국권회복을 위해 인재양성이시급함을 통감하고 남만주 해외망명기지에서 최초의 교육기관인 ‘서전서숙’에 손수 출자하여 동지들과 운영하였다.또 최초의 군사학교인 ‘신흥학교’를 세워 초대 교장에 부임해 후일 대한광복군의 초석을 다졌다.선생의 이같은 교육적인 열정은 멀리 노령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국군 사관학교를 세우려다 발각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선생은 평소 덕행과 예절로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받았다.당시 친러파와 친일파 간의 사상적 갈등,각 지방 파벌 간의 혼란 속에서도 선생은 초연한 입장에서 민족진영의 단합체인 임시정부를 처음부터 끝까지 사수한 ‘터줏대감’이었다.전해오는 얘기에 따르면,조선총독 사이토가 한국인 관리를 중국에 밀파,선생의 귀화를 적극 권유하였으나 일제의 유혹을 끝내 물리쳐 선생을두고 ‘불멸의 민족혼’으로 칭송하고 있다. 선생은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하는 자리가 혼란스러울 때마다 이를 중재하고 수습하였는데 이는 겸손과 높은 식견을 갖춘 선생의 영도력에서 비롯한 것이었다고 동지들이 증언하고 있다.선생을 두고 ‘민족운동의 선구자’이자‘임시정부의 총수’라고 일컬었던 것은 강직한 성품과 철두철미한 민족주의사상,그리고 애국철학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겠다.선생은 항상 남을 존중하고 남을 앞세우며 자신은 뒷전에서 도와주는 미덕의 소유자였다. 임시정부 시절 선생은 해외로 망명하기 전 서울 상동(尙洞)교회에서 기독교에 입교해 전덕기 목사를 알게 된 것을 늘 행복해 했다.또 그 시절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최초의 항일조직인 신민회를 창건한 사실을 몹시 그리워했다고전해오고 있다.1940년 선생은 조국광복을 불과 5년 앞두고 이역만리에서 향년 72세로 서거하였다.독립운동의 와중에서 참아왔던 지병인 급성폐렴이 악화된 탓이었다.선생은 유언으로 ‘민족진영의 대동단결과 정당의 통합’을남겼다.선생의 장례는임시정부 수립 후 첫 국장으로 예우하였으며 해방 후백범 김구선생의 지시로 유해가 봉환됐다.오늘 선생의 60주기를 맞아 선생의 영전에 향을 사르며 그 큰뜻을 되새긴다. 김석영 이동녕선생 기념사업회 상근부회장
  • 서대문형무소 역사 첫 고찰

    ‘현저동 101번지’. 서울 서대문구 무악재 왼편 언덕바지,현 독립공원 일대를 지칭한 지번이다. 조선왕조의 도읍을 한양(현 서울)으로 정한 무학대사는 일찍이 이 일대를 가리켜 “과연 명당중의 명당이나 한때 3,000명의 홀아비가 탄식할 곳”이라고예언한 바 있다. 무학대사의 말은 과연 적중했다.‘한일병합’ 2년전이자 ‘헤이그밀사사건’ 이듬해인 1908년 10월 이곳에는 당시로선 ‘동양최대·최신 규모’의 경성(京城)감옥이 들어섰다.당시 이미 조선병합을 꾀하고 있던통감부는 장차 일제에 항거하는 ‘죄인’들이 크게 늘어날 것에 대비,미리이곳에 대형 감옥을 만든 것이다.이후 이곳은 우리나라 감옥의 대명사로 불렸다.그러나 놀랍게도 서대문형무소의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집 한권이 없는 실정이다. 오랫동안 친일문제와 한국현대사를 천착해온 대한매일 김삼웅 주필(57) 이최근 출간한 ‘서대문형무소 근현대사’(나남출판)는 서대문형무소의 역사를처음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이 책은 김 주필이 순국선열유족회가 발행하는 월간지 ‘순국’에 97년 11월부터 금년 1월호까지 기고한 25회 분량의 연재물에 이승만 관련 부분을 보탠 것이다.저자는 집필과정에서 “관련자료의 절대부족이 가장 큰 애로였다”고 토로했다. 지난 88년 서울시가 옥사(獄舍)·담장·망루 등을 대거 철거,독립공원을 조성하면서 지금 이곳은 한낱 놀이터로 변모하였다.그런 이곳을 저자는 당시자료와 증언을 통해 이곳이 대표적인 민족수난사의 현장임을 입증해 보이고있다.백범 김구·이승만 등을 비롯해 3·1의거만세·105인사건·신간회사건·수양동우회사건 등 일제강점기 대형 독립운동사건에 연루된 애국지사들이이곳에서 옥고를 치렀음을 당시 재판기록과 관련문서를 통해 밝혀내고 있다. 64세의 노구로 사이토(齋藤實)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를 비롯해한말 의병장 허위·이강년 선생,유관순 열사,임시정부 노동국총판 김동삼 선생 등이 최후를 마친 곳도 모두 이곳이다.일제의 보복을 두려워한 나머지 김동삼 선생의 시신을 수습하려는 자가 나서지 않자 만해 한용운 선생이 “내평생 선생님의 시신만이라도 뫼실 수 있다면 큰 영광”이라며 김 선생의 시신을 수습한 것은 가슴 뭉클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단순히 독립운동가들의 행적만 살핀 것이 아니다.일제의 감옥정책,당시 일제가 사용한 형구(刑具),서대문감옥에서 애국지사들이 남긴 시·서한등을 비롯해 조선총독부 시정연보를 통해 당시 한국의 감옥실태 등 우리 행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들도 곁들이고 있다.부록으로 여기서 옥고를 치른독립운동가들의 신상기록이 수록돼 있다.해방이후 역사에 대해서는 후편에서다룰 예정이다. 저자는 “우리 학계가 독립운동사처럼 명분·명예가 따르는 연구에만 매달리다 보니 서대문형무소 같은 ‘어두운 역사’는 언제나 망각,또는 배척의대상이 돼 왔다”고 말했다.값 1만5,000원. 정운현기자 jwh59@
  • [데스크 시각] 공무원들의 ‘무심함’

    얼마전 폴란드 작곡가 헨리크 고레츠키의 교향곡 3번 일명 ‘슬픔의 노래(Symphony of Sorrowful Songs)’를 들은 적이 있다.나지막하게 시작하는 도입부에 이어 비장하면서도 격정적인 중간부와 곡 중에 나오는 소프라노,그리고 다시 나지막이 들릴듯 말듯 끝을 맺는,마치 거대한 산을힘들게 올랐다가내려오는 듯한 선율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음악을 들은 후 고레츠키와 그의 음악세계에 대해 보다 자세하게 알고 싶어 여기저기 수소문하였다.그러나 과문한 탓인지 별다른 정보를 얻을 수 없어주한 폴란드대사관으로 전화를 걸었다.자기 나라 사람으로 현재 살아있는 작곡가니까 잘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대사관측의 대답은 그런 사람이 있느냐,혹시 펜데레츠키(Penderecki:폴란드 작곡가로 그의 교향곡 제5번은 ‘코리아’이다)를 잘못 알고 얘기한 것이 아니냐는 등 엉뚱한 말을 하는 것이었다.결국 이름 철자까지 알려주는 등 우여곡절 끝에 며칠 후에야 그에 대한 아주(?) 간단한자료-그것도 폴란드어사전을 복사한 것이라 읽어볼 수도 없었지만-를 받고‘공무원들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저렇게 다 무심한가’하는 생각을 했다. 무심하기는 우리도 마찬가지다.지난해말 일본 시마네(島根)현 주민 몇 가구가 우리나라 독도로 호적을 옮겨 국내 여론이 들끓고 있을 무렵이었다.철도청은 우리의 ‘동해’가 영어로 ‘Sea of Japan(일본해)’으로 쓰인 ‘철도화물운송’ 책자를 제작,전국의 주요 역과 관련업계에 배포했다. 그러나 철도청 인터넷 홈페이지에 이를 비난하는 글이 실리자 그런 사실조차 모르고 있던 철도청은 뒤늦게 책자를 회수하는 등 소동을 벌였다.철도청은 그 책임을 디자인회사측의 부주의로 돌렸지만 실은 철도청 관계자의 ‘무심함’이 빚어낸 것이었다. 국가보훈처가 최근 제작,전국의 학교와 도서관 지자체,관광업계 등에 배포한 ‘길따라 역사탐방’이란 책도 ‘무심함’으로만 돌려버리기에는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상식 차원의 지식조차 없는 상태에서 빚어진 어처구니없는 내용들이 담겨있기 때문이다.이 책은 최근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문화유적답사와테마여행프로그램이 활발히 개발되고 있는 점에 착안,애국선열들의 항일 위업을 현창하고 그 유적지를 홍보하기 위해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전체적으로 일반 관광명소와 여행안내용 책자로는 별 문제될 것이 없다.그런데 정작 책의 제작목적에 따른 대상유적지와 인물선정에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이다.특히 ‘서울시편’을 보면 대표적인 애국선열들은 제쳐두고 친일행적 논란을 빚고 있는 인사들을 마치 독립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들인 것처럼 소개해 놓고 있다.또 서울 시내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관련 유적지인 남산을 비롯해 효창공원,장충공원,탑골공원,서대문형무소(현 독립공원) 등에 대한 설명은 단 한 줄로 언급되어 있다. 잘 알다시피 남산에는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 선생과 성재 이시영 선생의 동상과 안중근의사기념관 등이 있다.그리고 효창공원에는 백범,윤봉길·이봉창 의사 등 독립운동가 7인의 묘소,장충공원에는 유관순·이준 열사의 동상이 있다.또 탑골공원은 3·1 의거의 성지이며 서대문형무소는 애국지사들이 처형된사형장과 ‘유관순 굴’이 복원되어 있는,항일유적지 순례코스로는 빼놓을 수 없는 곳들이다. 아무리 관광여행관련 안내책자라고 해도 전문가의 감수는 받았어야 했다.그렇지 않고 외부 필자의 집필대로만 제작했다는 것은 단순히 담당공무원의 ‘무심함’으로만 돌려버릴 수가 없다.적어도 해당 부처의 담당공무원이면 상식으로라도 알고 있어야 할 사항들이기 때문이다.이 일은 사소한 것 같지만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자라는 청소년들에게 항일위업을 현창하고 그 유적지를 홍보하기 위한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박찬 특집기획팀장
  • 애국지사 유적지 홍보책자 파문

    국가보훈처가 애국선열들의 항일위업을 현창하고 유적지를 홍보하기 위해제작,배포한 책의 내용 가운데 일부가 필자의 전문지식 부족과 당국의 감독부실로 오히려 선열들을 모독하고 항일투쟁사를 왜곡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국가보훈처는 국내 독립운동 관련 사적지를 찾는 일반인들에게 애국정신을현창한다는 목적으로 7,000만원의 예산을 들여 ‘길따라 역사탐방’ 3,000부를 제작,지난해말 전국의 학교·도서관·지자체·관광관련업계 등에 배포했다.이 책은 최근 들어 청소년을 대상으로 문화유적 답사와 테마여행 프로그램이 개발되고 있는 점에 착안,국내 567개 독립운동·전쟁 관련 사적지를 124개 권역별로 나눠 주변의 관광명소와 함께 여행안내용으로 제작한 것. 그러나 책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서울편’은 대상 유적지는 물론 항일행적을 두고 논란이 있는 인물을 부각시켜 선정배경에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동부편 첫장에는 어린이대공원에 대한 소개와 함께 고하 송진우 동상 사진을싣고 있다.이는 옆 페이지에 실린 남강 이승훈·유관순 동상 사진의 두 배가 넘는다. 또 북부편에는 망우산에 있는 13도창의군탑과 고려대 교정에 있는 인촌 김성수의 대형사진이 실려 있다.인촌의 경우 ‘전라북도편’에서도 생가 사진과 함께 생가내의 동상사진을 중복게재하고 있는데 대형 동상 사진을 실은경우는 두 사람뿐이다. 이에 대해 한 독립운동가는 “송진우와 김성수는 친일행적 때문에 그들이받은 건국훈장 박탈 여부를 놓고 논란이 됐던 인물”이라며 “이들을 마치독립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것처럼 편집한 것은 항일로 일관한 선열들에 대한 모독이자 역사왜곡”이라고 주장했다. 서울의 대표적 독립운동 관련 유적지인 남산과 효창공원·탑골공원·장충공원·국립묘지·구서대문형무소 등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도 문제.남산에는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와 성재 이시영 선생의 동상,안중근의사기념관이,효창공원에는 백범을 비롯해 윤봉길·이봉창 등 독립운동가 7위의 사당과 묘소가 있다. 또 탑골공원은 ‘3·1의거의 성지’이며,장충공원에는 유관순·이준 열사의 동상이 있다.국립묘지에는 국내 외에서 항일운동을 한 선열의 유해를 안장한 묘역이 있고 구서대문형무소(현 독립공원)에는 애국지사들이 처형된 사형장을 비롯해 ‘유관순굴’이 복원돼 있다.그러나 이 책에서는 이같은 유적지에 대해 서울편 말미의 ‘그밖에’ 항목에서 단 한줄로 언급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필자 선정과 책 내용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서울시편은 추가로 수정제작해 재배포하겠다”고 밝혔다. 정운현기자 jwh59@
  • 中 장편소설 ‘船月’ 번역출간

    상해 임시정부 시절 백범 김구 선생과 한 중국인 처녀와의 인연을 다룬 장편소설 ‘선월(船月)’이 지난해말 중국서 출간된데 이어 최근 범우사에서강영매 옮김으로 번역출간됐다.‘김구 선생의 가흥(嘉興)피난기’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이 소설은 1932년 4월 ‘윤봉길의거’후 일경의 수배를 피해 상해에 이웃한 가흥으로 피신한 백범이 장진구(張震球)란 중국인 행세를 하면서 5년여 숨어지내면서 맺은,‘피난지에서의 사랑이야기기’가 줄거리다.작가는 ‘가흥일보’의 편집인이자 중국작가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하련생(夏輦生·52).하씨의 형부의 부친은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유평파(劉平波·건국훈장 애국장 서훈·작고)씨로,하씨는 한국과는 인연이 깊다.이 소설에는 중국인 처녀뱃사공 주애보(朱愛寶)와 백범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일반인들에게는 다소 낯설게 들리겠지만 소설에서 백범의 동거녀로 등장하는 여주인공 주애보는 실제인물이다. “남경에서 출발할 때 주애보(朱愛寶)는 본향인 가흥으로 돌려보냈다.그 후 종종 후회되는 것은 송별할 때여비 100원밖에 주지 못하였던 것이다.근 5년 동안 한갓 광동인으로만 알고 나를 위하였고,모르는 사이 우리는 부부같이(類似夫婦)되었다.나에 대한 공로가 없지 않은데,내가 뒷날을 기약할 수있을 줄 알고 돈도 넉넉히 돕지 못한 것이 유감천만이다”(‘백범일지’·도진순 주해) 신분위장을 위한 것이긴 했지만 두 사람은 5년여 ‘부부처럼’ 지냈다.당시 백범은 부인과는 사별한 후 홀몸이었고 주애보는 갓 스물을 넘은 처녀였다. 5년여 같이 지낸 세월속에서 두 사람간에 인간적 정분이 없지는 않았다.60만원이라는,당시로선 거금의 현상금이 내걸린 망명정부의 지도자와 신분도 모른채 그와 5년여를 동거한 망명지의 이국처녀.두 사람의 이야기가 소설로 ‘부활’한 것은 뒤늦은 감마저 없지 않다.작가 하씨는 수 차례 백범의 차남김신 전교통부장관을 만나 백범에 관한 얘기를 들었고,또 중국에서 방영예정인 TV연속극 ‘김구’의 극본을 공동집필한 경험도 있다.하씨가 소설을 통해 그려내고 있는,백범일대기에서 야사(野史)로 기록되고 있는 주애보와의 ‘사랑얘기’는 상당부분 논픽션에 가깝다.다만 주애보의 순결한 마음씀씀이,백범의 애틋함 등을 표현하면서 소설적 기법을 가미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여느 애정소설이나 마찬가지다. 임시정부에서 문지기를 한 한 중국노인을 통해 백범이 귀국후 암살됐다는얘기를 전해듣고 주애보가 대성통곡하는 장면으로 끝맺음을 하는 이 소설의제목 ‘선월’은 ‘인생여선 수연득월(人生如船 隨緣得月·인생은 배와 같아 인연에 따라 달을 얻고)’에서 딴 것이다.‘민족지도자 백범 김구 선생’에서 ‘인간 김구’의 편린 하나가 소설의 ‘옷’을 입고 우리곁에 다가온 셈이다.값 12,000원정운현기자
  • [오늘의 눈] 오해부른 李재경의 은유법

    이헌재(李憲宰) 재정경제부장관은 평소 직접화법과 간접화법을 번갈아 사용한다.직접화법은 주로 재벌 구조조정 등 개혁적인 사안을 강조할 때 사용한다.반면 민감한 사안을 놓고 얘기할 때는 선문답(禪問答)식의 은유법 대화를 자주 쓰는 편이다. 그런 이 장관이 지난 14일 금융감독위원장직을 떠나면서 이임사에서 인용한 서산대사의 선시(禪詩)가 금융계의 화제다.‘踏雪野中去(눈덮인 들길을 걸어갈 제) 不須胡亂行(행여 이리저리 함부로 걷지말라) 今日我行跡(오늘 남긴 내 발자국이) 遂作後人程(마침내 뒷사람의 길이 되리니)’- 이 선시는 백범 김구선생이 지난 48년4월19일 분단으로 치닫는 우리나라를하나로 묶기위해 38선을 넘으면서 읊기도 했다.이 장관이 기업·금융구조조정 과정을 회고하면서 마치 백범 선생과 마찬가지로 선각자의 심정을 대변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많다.그런 의미에서 재경장관에 취임하기 전날 그가전경련 위상을 언급하면서 ‘해체’ 등 자칫 오해할 수 있는 표현들을 사용한 것은 야구로 말하면 에러를 낳은 것처럼 보인다.그러나 한꺼풀만 뒤집어보면 이 장관의 발언이 상당 부분 곡해돼 있음을 발견한다.이임을 앞두고 출입기자들과 자유로운 사담을 하는 자리였고,전체 취지를 생각하지 않은 일부 언론의 거두절미한 보도로 당초 농담처럼 한 발언이 진실처럼 보도됐다는 점이다.머리좋기로 소문난 이 장관은 평소에도 농담을 많이 한다.농담성 발언을 농담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발언할 때마다 설화(舌禍)를 입을 수밖에 없다. 이 장관은 금감위에서 이임사를 하면서 뜻밖에 눈물을 흘린 사람이다.지난2년간 ‘저승사자’로 불리면서 냉정하게 구조조정을 밀어붙였던 그가 흘린눈물을 가식의 ‘악어의 눈물’로 보는 사람은 적어도 주위에서는 없다.고교 선배에다가,자신이 낭인시절 신세를 졌던 김우중(金宇中)회장의 대우를 몰락케 한 사람도 이 장관이다.그만큼 자기자신에 철저한 인물이다. 그러나 이 장관이 민감한 사안을 언급하면서 좀 더 신중했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그가 이임식에서 행했다는 ‘눈덮인 들길을 걸어갈 제,이리저리 아무렇게나 함부로 걷지 말라…”는 말의 의미가 더욱 함초롬히 피어난다. 박선화 경제과학팀 차장 psh@
  • 백범 金九기념관 4월 착공

    민족의 지도자 백범 김구(金九) 선생을 기리는 기념관 건립 공사가 오는 4월 시작된다. 국가보훈처는 2일 서울 효창공원내 3,000여평의 부지에 연건평 1,200평에지하 1층,지상 3층의 백범기념관을 건립할 계획이라고 밝혔다.기념관은 2002년 6월 완공되며,백범 동상 및 기념 조형물도 세워진다.보훈처는 기념관 건립과 함께 해외 독립운동 사적지에 표지석과 위령탑을 건립할 방침이다. 우득정기자 djwootk@
  • [의열 독립투쟁] (15)이봉창 의사

    20세기 전반기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 여러 나라들이 일제의 침략을받았다.일제의 침략을 받은 각 민족은 국가와 민족을 보존하기 위해 일본에저항해 싸웠다.그러나 한국민족만큼 강인하고 격렬하게 일제와 싸운 민족은드물었다.그 중에서도 침략의 괴수인 일왕 처단을 시도한 민족은 우리민족뿐이었다. 1932년 1월8일 일본의 수도 도쿄 한복판에서 일왕이 타고 가던 마차에 폭탄이 날아들었다.일왕을 처단하려는 조선인 애국지사가 던진 세번째 폭탄이었다.1924년 박열(朴烈) 의사가 히로히토의 결혼식에 폭탄을 던지려다 사전에발각되었고,1925년엔 김지섭(金祉燮) 의사가 일본궁성으로 들어가는 이중교에 폭탄을 투척한 바 있었다.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진 한국인 청년은 이봉창(李奉昌) 의사였다.이 의사는 1900년 서울 용산에서 태어났다.그의 집안은 수원의 철로부근에 있던 땅을 일본인에게 빼앗긴 탓으로 그는 어려운 환경속에서 자랐다.소년시절에는일본인이 경영하는 제과점에서 고용살이와 용산역에서 기차운전 연습생으로일하기도 했다.그리고일본 오사카로 건너간 뒤 6년여동안 나고야 등지를 떠돌며 노동으로 삶을 꾸려갔다. 청년으로 성장하면서 이 의사는 일본인과 분간할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일본말을 잘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습속도 잘알고 있어 겉모습은 일본인과 다를 바 없었다.그러나 일본인의 고용살이를 하면서,또 일본에서 막노동을 하면서도 그의 마음속에서는 한민족의 피가 끓고 있었다.스무살때 경험한 3·1의거를 계기로 그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조국독립에 대한 열의를 불태우고있었다. 1931년 1월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간 이 의사는 임시정부 인사들을 만나 “당신들은 독립운동을 한다고 하면서 일왕은 왜 못 죽입니까”라고 일왕의 처단을 촉구했다.일왕을 손쉽게 죽일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그를 임시정부에선 의심스럽게 여겼다.그의 행색이나 말투가 일본인과 흡사하였기 때문에수상히 여긴 것이다.김구(金九)는 직원을 시켜 이 의사를 은밀히 떠보도록하였다.어느 술자리에서 이 의사는 “작년에 도쿄에서 일왕이 능행(陵行)한다고 행인들을 엎드리라고 하기에 엎드려생각하기를 지금 나에게 폭탄이 있다면 쉽게 죽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라며 자신이 일왕을 죽일수 있다는 얘기를 또다시 꺼냈다. 그를 은밀히 살피던 김구가 이 의사를 직접 만났다.그는 “제 나이 이제 서른 한 살입니다.앞으로 서른 한 살을 더 산다고 해도 지금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0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을 대강 맛보았습니다.이제부턴 영원한 쾌락을 위해 독립사업에 몸바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라며 자신의 진심을 김구에게 털어놓았다. 당시 김구는 한인애국단을 조직,독립운동의 한 방법으로 의열투쟁을 모색하고 있던 때였다.일왕을 죽일 수 있다는 것과 독립사업에 몸바치겠다는 이 의사의 각오는 김구를 감복케 하였다.두 사람은 자주 만났고,마침내 일왕을 폭살시키기 위한 계획을 추진하기로 하였다.준비는 김구가 맡았다.김구는 중국군에 복무하고 있던 김홍일(金弘壹)에게 부탁하여 상해 병공창에서 폭탄을만들었다.준비한 폭탄은 두 개였다.하나는 일왕을 처단하기 위한 것이었고,다른 하나는 이 의사 자신의 자결용 폭탄이었다. 1931년 12월 13일 이 의사는 한인애국단에 정식으로 가입하였다.단장 김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 의사는 “나는 참된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국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괴수를 도살(屠殺)하기로 맹서하나이다”라는 선서를 했다.적국의 괴수,그것은 일왕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일본인으로 가장한 이 의사는 이 해 12월말경 일본 도쿄로 향했다.그는 일왕이 1932년 1월 8일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이 날을 거사일로 결정하였다.김구에게는 “물품은 1월 8일 방매하겠다”는 전보를 보내 거사일을 알렸다.이 의사는 거사장소로 일본궁성 근처에 있는 경시청 앞을 택하였다.일왕은 경시청을 지나 사쿠라다몬(櫻田門)을 통해 궁성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다. 1932년 1월 8일,예정대로 신년 관병식이 거행되었다.이 의사는 경시청 정문 앞에서 일왕을 기다리고 있었다.일왕이 탄 마차행렬이 앞을 지나자 이 의사는 뛰쳐나가며 손에 든 폭탄을 일왕을 향해 힘차게 던졌다.폭탄은 일왕이 탄 마차 뒤쪽에서 굉음을 내며 폭발하였다.순간 일장기를 든 기수와 근위병이탄 말 두필이 거꾸러졌다.그러나 안타깝게도 폭탄의 위력은 일왕에게 미치지 못하였다.폭탄을 만든 김홍일은 ‘회고’에서 군중과 일왕의 거리가 100미터 되는 것을 고려하여 폭탄을 멀리 던질 수 있도록 가볍게 만들었다고 했다.위력이 약했던 것이다. 이 의사의 일왕 저격의거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그중에서도 중국의 반응은 남달랐다.중국의 각 신문은 이 의사의 의거를 대서특필하면서 “한국인 이봉창이 일왕을 저격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적중하지 못하였다”고 하며,일왕을 폭살하지 못한 것을 매우 애석해 했다.일제는 이러한 중국의 보도에 반발,1932년 1월 상해를 무력으로 침공하는 ‘상해사변’을 일으켰다. 이 의사의 의거는 일본제국주의가 신격화해놓은 일왕을 폭살시키려 했다는점에서,그리고 일제의 심장부인 도쿄 경시청 앞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현장에서 체포된 이 의사는 그해 9월 30일 도쿄 대심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0월 10일 순국하였다. 해방후 김구는 일본에 있던 이 의사의 유해를 윤봉길·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봉환,효창원에 안장하였다.정부는 62년 이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하였다. 한시준 단국대 역사학과 교수 **이봉창의사 주변 일본제국주의의 총수격인 일왕에게 폭탄을 던지고 자신은 적지 일본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봉창 의사.순국 당시 이 의사는 32세로 미혼이었다.그런 이 의사에게 직계후손이 있을 리 없다.이 의사와 가장 가까운 혈손으로는 이복형의 딸인 질녀 은임씨가 유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은임씨는 이 의사가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전 일본서 노동자생활을 할 때 이 의사의 뒷바라지를 했다.거사를 앞두고 이 의사는 백범에게 질녀를 돌봐달라고 부탁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해방후 환국한 백범은 은임씨에게 집을 사주는 등 이 의사와의 약속을 지켰다.은임씨도 이미 수 년전 작고했다. 순국선열이나 애국지사 중에서도 번듯한 후손을 둔 경우는 그래도 낫다.기념관이나기념사업회를 운영하기도 하고 묘소를 돌보기도 한다.그러나 이 의사처럼 후사가 없는 선열들의 경우는 죽어서도 외롭다. 현재 이 의사를 기리는 기념사업회나 추모단체는 없는 실정이다.다만 효창원순국선열추모회가 4월 13일 합동추모제를 지내고 있을 따름이다.동상 역시 지난 95년에야 겨우 효창원에 건립됐다.이 의사처럼 일점 혈육도 남기지 못한채 청춘에 간 애국선열은 이래저래 마음이 아프다.당국이나 종친에서 ‘외로운 영혼’을 위해 양자라도 한 사람 세워주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싶다. 정운현기자
  • 張俊河선생 정신계승 심포지엄 발제·토론 요지

    사단법인 장준하(張俊河)기념사업회는 8일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실에서 ‘분단민족의 좌표와 평화통일의 길’이란 주제로 장준하선생 정신계승 심포지엄을 가졌다.1부에선 한국현대사의 재조명,2부에선 민족사의 새 지평(사회통합과 민족통일)을 소주제로 주제발표와 토론을 가졌다.참석자들은 새로운 세계질서에 대한 민족적 대안과 장준하선생의 항일독립·민주화·통일운동에 대한 역할및 선구적 의의에 대해 논의했다.다음은 주제 발표와 토론의 주요 내용. ■ 장준하와 박정희 비교연구(서중석 성균관대 교수) 집권 18년 동안 박정희(朴正熙) 전대통령은 많은 적을 만들었는데 그 중에서도 최대의 라이벌을 꼽는다면 장준하(張俊河) 선생(이하 호칭생략)이 가장먼저 떠오른다. 일제 시대건 60,70년대 건 박정희의 반민족성과 친일성을 부각하는데도,박의 민족주의가 얼마나 기만적인가를 알리는데 장준하만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장준하는 광복군에 들어가 활동을 할 때나 OSS 특별훈련을 받을 때나 해방후 김구주석 등 중경임시정부 요인들을 모시고 환국할 때나 ‘돌베개’를 광야에서 베고 자는 심정으로 임했다.장은 60년대 두번 투옥,옥중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됐고 유신체제에 대항하다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최고형인 15년형을 받았다.출소후엔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이후 박정희의 독재와 부패에대항하여 싸운 민주주의의 심볼로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반면 박정희는 오로지 일본 군인으로 입신하기 위한 일념으로 국민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갔고 만주군관학교 졸업식에서 최우등생으로 만주황제 부의(傅儀)로부터 금시계를,1942년 일본육사에 입학해 3등으로 졸업하여 육군대신상을 받았다.그후 다카키(高木正雄)란 이름으로 만주군에 배치,해방까지 항일부대와 싸웠던 인물이다.1979년 10·26 당시 일본의 한 외교관은 ‘국가와정보’라는 책에서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고 썼다.그의 정서적 고향은 죽을 때까지 일본제국의 군인정신 또는 군국주의였다는 지적은 정곡을 찌른 것이다. ■ 냉전문화 극복과 평화통일의 길(조민 통일연구원 연구위원) 남북간 군사적 대립구조를평화구조로 전환시키고 남북한 공존과 협력을 제도화하는 길은 한반도 냉전구조의 해체에 있다.냉전구조의 해체는 체제·제도·정책·관행 및 의식을 탈냉전의 세계사적 조류에 맞게 재편하는 것이다. 남북한 평화공존과 화해협력은 군사적 대립과 긴장이 상존하는 한 언제든지무산될 위험속에 있다. 냉전의식·냉전문화의 해소를 위한 노력은 통일후 남북한 사회통합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또 우리 사회내의 진보와 보수간의 입장 차이를 좁혀가는 국민화합의 과정이란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물론 북한을 공존·협력의 동반자로 삼는 과정에서 많은 이견의 분출을 피하긴 어렵다. 통일문제와 관련,‘하나의 민족,두개의 국가’라는 두 정치체제가 병존을이루는 아일랜드의 예에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이점에서 통일은 남북아일랜드처럼 서로 자유롭게 왕래하고 교류 수준을 높여가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바람직하다. 정치적 통합을 완전히 달성한 법적·제도적 통일로 여기기 보다는 사실상의 통일상태를 달성하자는 것이다. 20세기동안 국가이익과 민족이익의충돌속에서 언제나 민족이익이 제약되는 상황이 초래됐다.21세기의 과제는 국가이익과 민족이익이 하나되는 길에서찾아야 할 것이다.냉전문화의 극복은 그 중심에 있다. ■ 해방후 한국민족주의 성격과 의의(임지현 한양대교수) 운동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남과 북은 다같이 의장된 형태의 민족주의이다’라는 지적은 쉽게 이해된다.서로가 표방하는 체제 이념이나 정책의 대치선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은 사실상 권력담론으로서 민족주의적 코드를 공유하고있다. 새마을 운동이나 천리마 운동 모두 주민들의 근로의욕을 부추겨 생산성을향상시키려는 의도였다는 평가도 같은 맥락이다.‘한국적’ 또는 ‘우리 식’이라는 수식을 벗기면 10월유신과 주체사상이 동일한 권력축을 위해 짜여있는 것이다. 즉 분단상황을 이용하여 권력을 재생산하는 방식이 통일을 위한 동원에서 체제강화를 위한 동원으로 변화한 것이다.통일은 이제 수사로만 남게 되었다.민족주체성 확립이란 슬로건 아래의 국민교육헌장 반포,국기에 대한 맹세 등을 통한 국민의례 강화, 국학연구에대한 장려와 민족전통에 대한 강조, 국정교과서를 통한 국사교육 지배 등 가파르게 전진해온 남의 유기체적 민족주의는 10월유신으로 절정에 달했다. 북에서도 민족전통이 곧 혁명전통으로 대치됐고 민주화와 개혁에 대한 요구는 사대의와 교조주의로 비판받고 민족전통에 입각한 ‘우리식’ 사회주의가전면으로 등장했다.지도자에 대한 정과 존경이 북에서는 혁명적 동지애로 표현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남의 국가경쟁력 강화론이나 북의 강성대국론은 다시금 국가권력이 민족의 이름으로 민중을 전유하겠다는 의사표시로 받아들여진다. ■ 한국의 주요 갈등양상과 민주주의의 공고화 과제(이강로 전주대교수) 한국사회는 80년대 중반이후 다양한 갈등을 경험하면서 이를 풀어왔지만 지금도 여러갈등이 해결되지 않은채 진행되고 있다.노동과 자본의 갈등은 90년대 중반이후 이전에 비해 안정적인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그러나 여전히 제도적 절차에는 합의하지 못했다.정당이나 정치 지도력도 아직 민주주의의 공고화나 안정적 운영에 적합한 형태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다.‘내각제 개헌이냐,대통령제 고수냐’는 헌정주의의 제도화도 미발달·불안정 상태다.노동과자본의 관계·정치 지도력의 행사문제 등은 민주주의 공고화의 과제자의 기준이다. 민주주의 미래는 안정된 국민통합을 바탕으로 한다.지역갈등은 민주주의의안정을 위협한다.지역갈등은 정치세력간의 갈등에서 벗어나 일상생활에서도침투,사회생활의 주요 준거가 되며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한국정치에선 힘의논리가 여전히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더욱 더 민주적인제도와 과정을 통해 갈등을 풀어나가는 추세다. 신성불가침이던 권력의 영역들이 하나씩 노출되면서 국민의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도 긍정적인 변화다. 아직 한국사회에선 갈등을 처리할 수 있는 국민적 합의로 만들어진 제도적장치는 미약하다.그러나 많은 갈등 양상에도 불구,불안정하지만 민주주의를다지는 요인들이 늘고 있다. * 張俊河선생 정신계승 토론 이모저모 ‘장준하와 박정희연구’주제발표에서 토론자로 나선 서강대 박호성교수(정치학)는 “박정희 전대통령의 민족주의는 통치술·통치전략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면서 “민족주의가 국민의 민주주의적 토대로서 기능하지 않도록억누르면서 국민동원의 수단으로 교묘히 이용했다”고 말했다. 또 “박정희 전대통령은 통치전략적인 차원에서 과거지향적인 복고적 민족주의를 강조했다”고 밝혔다.이에반해 21세기의 민족주의는 통일·화해·형제애를 촉구하고 지향하는 민족주의이며 국가사회·민족내부의 갈등을 넘어서기 위해 존재한다는 점에서 겸허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한매일의 김삼웅(金三雄) 주필은 해방후 한국민주주의 성격등과 관련,“구한말·일제시대 등 어려웠던 시대의 양심적 선각자들이 지향했던 ‘한반도적인 민족주의’에 대한 조명이 이뤄져야 한다”면서 장준하,백범 등이 추구했던 ‘한국형 민족주의’에 대한 활발한 논의를 주문했다. 김 주필은 “평화적인 정권교체이후 많은 사회문화운동단체 등 자발적인 비정부기구(NGO)들이 생겨나 활발한 활동을 벌이면서 민족주의에 대한 논의도권력에 종속됐던 과거에서 벗어나 시민단체들에의해 자유롭게 이뤄지며 새로운 모습을 형성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성공회대의 김동춘 교수는 “장준하와 박정희를 같은 지평에서 평가하기 어렵다”면서 “박정희는 정치적 야심을 가진 직업군인으로서 현실적인 길을걸었다면 장준하는 도덕적 종교인으로서의 삶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경남대 심지연(정치학)교수는 “장준하가 젊은이 사이에서 잊혀져 가고 있다”면서 “그가 추구했던 이념과 이상,그리고 생애에서 젊은이들이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그러나 심 교수는 역사의 평가에 있어 선과 악에 대한 이분법적인 접근은 설득력을 얻기 어렵고 특히 젊은세대가 역사적인 삶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교훈을 주기도 어렵다고 강조했다. 정리 이석우 오일만기자 swlee@
  • [기고] 인간 白凡의 못다 한 사랑과 소망

    각종 여론조사에 의하면 ‘20세기 가장 존경받는 한국인’으로 단연 최선두에 서 있는 백범 김구 주석.그의 74년 인생은 파란만장했던 한국현대사의 압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년 백범은 동학·유교·불교의 노정을 걸으며 자신을 가다듬어가다가 기독교에 귀의하게 된다.29세 되던 해에 같은 기독교인이던 최준례씨와 결혼한 뒤 황해도의 저명한 교육가로 변신해 이준·이동녕·최재학 등과 교제하며구국운동의 대열에 서게 된다. 안중근 의사가 여순 감옥에서 서거한지 1년 뒤인 1911년 백범은 ‘105인 사건’으로 구속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며 수감생활을 하던 중 동학거사 실패 후부터 사용하던 김구(龜)라는 본명을 김구(九)로 바꾸고 호도 백범(白凡)으로 고친 뒤 일단의 명상을 ‘백범일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복역 중에 뜰을 쓸 때나 유리창을 닦고 할 때마다 나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창호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달라’고”.이때 그의 나이 서른일곱이었다. 백범은 1919년 ‘3·1 저항권운동’이 전개된 후 수립된 상해 임시정부를찾아 망명을 하여 경무국장(1919)·내무총장(1922)·국무령(1926)·단일지도체제하의 주석(1940∼45)직 등을 수행하였으니 그의 망명생활은 곧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해방후 순탄치 못했던백범의 인생역정은 익히 알려진 바 있다. 백범서거 1년 뒤 이 민족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치러야 했다.남북한이 단일정부를 수립하게 되면 체제유지를 위해 양측 모두 군대가 구성되게 되고,군대가 존재하면 동족간의 충돌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는통일정부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백범이 절규하였던 것은 6·25의 비극적 참상을 미리 예견한 데서 나온 게 아닌가 생각게 한다. 백범의 일생을 돌이켜보건대 그의 사상은 ‘자주독립’과 ‘민족통합’사상으로 응축된다.분단조국의 대통령보다는 통일조국의 문지기를 소원했던 그는 서거하기 3년 전인 1946년 부활절을 맞아 암살을 예측이라도 하듯 자신의‘통합사상’의 핵심을 담은 다음과 같은 유언을 미리 공표한 바 있다.“ 나는 그리스도인인 고로 거짓없는 내 양심은 죽음을 초월하여 나라를 사랑하였다…내가 만일 어떤 자의 총에 맞아 죽는다면 이 이상 기쁜 일이 없겠다…. 밀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같이 내가 죽은 후 나이상의 많은 애국자들이 많이 나겠는 고로다”.조국과 민족을 위해 한 알의밀알이 되어 자신을 낮추고 희생시킬 줄 아는 사상! 이것이 곧 백범사상(白凡思想)이요,이 사상이야말로 민족통합을 위한 생명선이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백범 서거 반세기에 들어선 금년,늦게나마 백범사상을 재조명하는 가극 ‘못다한 사랑’이 우여곡절 끝에 막을 올리게 되었다.이 공연이 갖는 역사적책무는 참으로 크다.천부적 자유를 침해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분단의 장벽을 녹이는 마그마의 역할을 해내야 한다.산은 산으로,물은 물로 하나되어 만나듯 갈라짐보다는 하나됨이 자연의 섭리요,하늘의 뜻임을 알리는 국민계몽단이어야 한다. 경제난 속에 국민의 피와 땀인 국민세금으로 시작 할 수있었던 만큼 상업적 성격을 철저히 배격해야 하며,6억원이나 되는 지원금은 향후 공연 준비기금으로 일부를 필히 적립해두어야 할 것이다. 또한 원하는 국민이면 누구나 관람할 수 있는 ‘국민적 공연’이어야 할 것이며,목적과 수단 일체가 백범 앞에서 부끄럽지 않아야 함은 물론이다. [홍원식 백범서거 반세기 특별공연준비위 대변인]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