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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삼웅 칼럼] 언론의 길, 정도(正道)냐 사도(邪道)냐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정도냐 사도냐가 생명이라는 것을 명기하여야 한다” 오늘(26일) 서거 52주년을 맞는 백범 김구선생의 말씀이다. 백범은 오랜 망명에서 귀국하여 반성을 모르는 채 날뛰는친일·분단정부 수립 세력을 지켜보면서 ‘정도·사도론’을 폈다. 결국 백범은 ‘사도세력’에 피격되고 이땅은 사도가 지배하는 길고 긴 역설의 현대사가 전개되었다. 우리는 20세기에 봉건왕조-식민지-해방과 분단-동족상잔-군사독재-근대화-민주화로 이어지는 독특한 역사적 경험을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형 선진모델을 찾지 못하고 국가적 내홍(內訌)에 시달리고 있다. 역사는 길어도 역사의식이 희박하고,민주제도는 훌륭해도민주질서가 취약하고,학벌 좋은 지식인은 많아도 참된 지성이 드물고,언론기관은 넘쳐도 정론이 빈약한 것이 현실이다. 여기에 분단구조의 민족모순, 영호남의 지역갈등, 보수와진보의 이념대결, 자본과 노동의 계급격차, 남녀 성차별에이르기까지 비동시적인 것들의 동시적 대립과 갈등상을 보이고있다. 이렇게 모순과 갈등이 나선형식으로 겹친 원인과 책임의상당 부분은 언론에 있다. 족벌언론의 특권의식과 식민성에서 기인한다. 정치가 패거리 싸움이고 공직자가 복지부동하고 기업이 부실하고 집단이기주의가 판치더라도 언론이 여론을 선도하고 정론을 편다면 우리 사회는 건강성을 회복할수 있다. 온 세상이 모두 취하고 혼탁한데 언론만 깨어있겠는가, 할지 모르지만 세상을 취하고 혼탁시킨 언론의 책임과 역할을 피하기 어렵다. ■비판 비켜간 마지막 성역 비판받지 않는 권력은 타락하고 부패한다. 과거 비판에서성역화된 청와대권력이 타락하고 부패한 것이 이를 입증한다. 그동안 언론사처럼 무오류의 성역으로 남은 곳이 없다. 오만과 타락은 필연적이다. 남을 비판하면서 내부적으로는탈세·외화도피·자금세탁등 ‘비리 백화점’을 방불케 한다. 정권이 바뀌고 군벌이 심판받고 재벌이 해체돼도 언벌(言閥)은 철옹성을 지키고 삼권 위에 군림한다. 친일 반민족과권·언유착에도 심판받지 않았고 ‘황제사주’의 전횡도 단죄되지 않았다. 지난 정권때까지도 청와대의 ‘위스키와 캐시(cash:현금)’로 상징되는 1급 로비 대상은 족벌언론사주와 간부들이었다. 청와대팀은 안기부 돈까지 끌어다 로비자금으로 쓴 것이 최근 드러났다. 이렇게 성역화되고 특권화된 언론이 민족의 진로나 민중의 아픔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정권을 만들고 북한과는 적당한 위기를 조장하면서 국민의 관심을 외부로 옮기고 지역갈등을부추겨 손쉽게 기득권을 지켜온 것이 족벌언론의 실상이다. 신라가 반도 통일을 하고도 대륙진출은커녕 고구려영토를수복하지 못한것은 골품제 때문이라 한다. 골품제로 얽힌기득권세력이 울타리를 치고 경주를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6·15선언의 민족사적 성과도‘골품세력’에 발목이 잡히고 북한상선에 총쏘지 않는다고, 안보에 구멍이 뚫렸다고, 퍼준다고, 남북화해의 발목을잡고 대결국면으로 여론을 몰아간다. ■국민이 지켜본다 국세청이 23개 언론사에 5,056억원의 세금추징을 발표하자어느 족벌신문이 “그 세금 받아 북한 대주려고?”라 썼다. 이 한마디에,반성은커녕 전통적 매카시즘과 특권의식, 기지촌 언론의 식민성이 집약된다. 자신들의 범법을 매카시즘으로 환치하려는 수법이다. 건국 이래 최초의 ‘언론정화’는 가능할까. 족벌언론의필사적 저항이 따르고 야당의 정략적인 비호와 여당 대권주자들의 기회주의가 문제다. 그러나 ‘언론인 100인 선언’에 참여한 용기있는 언론학자들과 깨어있는 국민이 지켜보고 있다. 시민단체들의 언론개혁의지와, 과거를 청산하고거듭나려는 양심적 언론사들이 존재한다. 국세청의 세무조사를 언론탄압이라고 몰아세웠던 일부 족벌언론이 비리 사주를 검찰고발 대상에서만 빼주면 논조 변경과 간부교체도 가능하다고 로비를 벌인다고 한다. 그야말로 ‘갈대논조’이고 ‘하루살이 간부’신세 아닌가. 김대중정부와 모든 언론에 묻는다.“정도냐, 사도냐!” [김삼웅 주필 kimsu@]
  • 백범 김구 영문편지 첫 공개

    백범 김구 선생이 해방 이듬해 미국과의 통상관계 수립을위해 한독당 관계자를 미국에 파견,당시 미 상무장관에게 보낸 편지(영문)가 새로 발견됐다.당시 임정세력과 미국 정부간에 정식 외교라인이 없었던 상황에서 백범이 미국정부 각료에게 통상 관련 서한을 보낸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1946년 8월 31일자로 작성된 이 편지는 발신지가 당시 한독당 본부가 자리잡은 운현궁으로 돼 있다.편지의 발신자는 한독당 위원장(Chairman Independence Party)인 백범,수신자는 미 상무장관 아브렐 해리먼(1891∼1986)이다.또 이 편지를가지고 미국으로 건너간 사람은 전경무(田耕武·1900∼1947)당시 재미한족국내파견대표단 외교위원이었다.백범은 편지에서 전씨를 워싱턴 주재 한독당 특별대표로 소개하고 전씨가미국정부에 한미 양국의 통상관계 수립을 요청할 것이라고밝히고 있다. 노경채 수원대(사학과) 교수는 “46년 2월 백범이 미군정자문기구인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의 총리를 맞고 있어서 미국과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고 전제하고 “백범이 한독당위원장 자격으로 특사를 통해 미국측에 편지를 전달한 것은이승만과의 정치적 역학관계 등을 감안,미국과 독자적인 유대관계를 맺기위한 시도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편지 수신자인 해리먼은 제2차 세계대전과 전후의 냉전기간 동안 외교관으로서 미소간의 외교관계를 주도한 인물로 루스벨트 대통령시절 소련대사,영국대사를 지냈으며 케네디 대통령시절 국동문제담당 국무차관을 지낸 인물이다. 한편 이 편지는 재미사학자 안형주씨(安炯柱·65)가 미국 LA에 거주하는 전씨의 사촌여동생으로부터 입수한 것으로,편지 하단에는 백범의 한문 서명,낙관과 함께 ‘K.Kim’이라는 영문서명이 부기된 점이 이채롭다.백범의 비서를 지낸 선우진 백범기념사업회 상임감사는 “미군정초기 백범이 미국정부 각료에게 편지를 보낸 경우는 희귀한 사례”라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백범편지 전달 전경무씨는. 백범의 편지를 휴대하고 미국으로 건너간 전경무씨는 1906년 사탕농장 노동자로 하와이로 건너간 재미한인 이민1세대의 후손이다.미 본토로 건너가 미국인에게 입양돼 미시건대를 졸업한 전씨는 임시정부 후원단체에서 외교·선전활동을 벌였다.1941년 재미한인들의 통합단체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 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1944년 임정에서 새로 구성한 주미외교위원부의 외교위원장 비서로 활동하였다. 해방후 올림픽대책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임된 그는 한국올림픽위원회의 IOC가입을 위해 다양한 외교활동을 전개했다.1947년 5월 스톡홀름에서 열리는 IOC총회 한국대표로 참석차미 군용기를 타고가던 그는 일본 후지산 부근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타계했다. 지난 95년 정부는 뒤늦게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건국훈장 애국장(4등급)를 추서했다.그의 묘소는 서울 도봉구 우이동에 있었는데 돌보는 이가 없어 도시개발 과정에서 유실된것으로 알려졌다.
  • 박은식선생 호적 발굴

    사학자·독립운동가이자 민족지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을 지낸 백암 박은식(朴殷植·1859∼1925)선생의 대한제국 당시의 호적이 처음 발굴됐다. 이 당시의 호적자료가 거의 남아있는 것이 없는 데다 대표적인 민족지사 가운데 한사람인백암의 가계·가족사항·생활상태 등을 소상히 보여주는 자료여서 사료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이 호적은 대한매일신보사가 지난 99년 간행한 ‘백범김구전집’에 이어 ‘박은식·양기탁전집’(전10권) 간행을 위한 자료수집 과정에서 전집편찬위원회(위원장 윤병석)가 발굴,공개한 것이다. 이번에 발굴된 호적은 광무10년(1904년) 6월 한성부(현 서울시) 북서(北署)에서 작성한 것으로,당시 백암의 집주소는가회방(嘉會坊·현 가회동)이나 통(統)·호(戶)는 상태불량으로 확인이 어렵다. 당시 백암은 호주로 나이는 48세,본(本·본관)은 밀양,부인은 연안 차씨 44세로 나와 있다.또 직업을 쓰는 칸에 백암의 직업을 전교관(前敎官)으로 적고 있다.백암은 1900년부터 경학원 강사와 한성사범학교 교수를 지냈다.호적에 직업을 적은 것은 ‘갑오경장’으로 신분제가 철폐되면서 호적에 신분을 명기할 수 없게 된 데 따른 것이다. 선조의 가계란에는 부(父·用浩)·조(祖·宗錄)·증조(鳳儀)·외조(外祖·盧允儉) 등은 물론 생부(生父)란까지 두고있는데 이는 당시 입양이 흔한 일이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윤병석 전집편찬위원장(인하대 명예교수)은 “백암 선생의부인·증조부·외조부에 대한 신상은 이번 호적에서 처음확인됐다”면서 “백암이 남긴 이력자료가 거의 없는 데다이번에 발굴된 호적은 공문서라는 점에서 사료가치가 매우크다”고 말했다.‘전집’은 대한매일신보사와 ㈜동방미디어가 공동주관으로 발행하며,올 가을 전10권(박은식 7,양기탁 3) 규모로 출간될 예정이다. 한편 전집편찬위원회는 백암의 저서 가운데 ‘한국통사’등 11종은 입수했으나 ‘동명성왕실기’‘발해태조건국지’‘명림답부전’‘대동민족사’‘이순신전’‘이준전(李儁傳)’‘발해사’‘금사(金史)’ 등 8종의 행방은 수소문 중이다.(02)2000-9008정운현기자 jwh59@
  • 2001 길섶에서/ 雅號쓰기

    석봉(石峯) 한호,퇴계(退溪) 이황,다산(茶山) 정약용,백범(白凡) 김구….조선조 최고의 명필은 한호라는 본명보다석봉이라는 호(號)로 더욱 익숙하고, 퇴계·다산·백범 같은 호 또한 본명 못잖게 친근하다.선조들은 지금의 이름에해당하는 명(名) 말고도 호를 사용했다.이름을 매우 소중히 여겼기에,성인이 된 사람의 ‘명’은 군·사·부(君師父)만이 부를 수 있었다.그래서 누구나 부르는 허물 없는이름으로 ‘호’를 따로 가진 것이다. 그러나 ‘호’의 의미가 ‘허물없이 사용’하는 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부모에게서 받는 ‘명’과 달리 ‘호’는스승·선배·친구가 지어주거나 스스로 짓기도 하는데,거기에는 주인의 이상·성격·기호 등이 내포된다.예컨대 백범은 백정(白丁)과 범인(凡人)에서 한 글자씩 따 “가장미천한 사람까지 나와 함께 애국심을 가졌으면”하는 바람을 담았다.‘이름값’을 하는 사람이 드문 세상이다.각자‘호’를 갖고 그 뜻으로 삶의 경계를 삼는다면 이 세상이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이용원 논설위원
  • 70년전 백범 자취 그대로

    백범 김구(金九) 선생의 피난처였던 중국 자싱(嘉興)시영안정(永安亭)이 경기도 성남시 모란민속시장 상인회가주도한 복원사업으로 보수,재건됐다. 5일 성남시에 따르면 모란시장 상인회(회장 전성배·50)는 중국 저장(浙江)성 자싱시의 영안정 개·보수공사에 바자회 수익금과 시민성금 등 1,400만원을 들여 복원공사를마치고 이날 중국 현지에서 준공식을 가졌다. 영안정은 1932년 4월29일 윤봉길 의사의 폭탄투척 사건이후 일본군에 쫓기던 김구선생이 자싱시에서 도피생활을하며 자주 들러 조국의 독립과 미래를 숙고하던 정자이다. 성남시 수정구 신흥동에 사는 독립운동가인 이용상씨(78)는 96년 김구 선생의 도피길을 답사하다 영안정의 존재를확인,전성배 상인회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상인회는 97년 이후 여러차례 바자회를 열고 담배자판기수익금 등을 모아 복원기금을 마련했다. 성남시도 성남여고·효성고 등 청소년사물놀이 축하공연단 등 준공식 참가자들의 여비 등을 지원했다. 준공식에는 이씨와 전 회장,김병량(金炳亮) 성남시장 등30여명이참석했다. 성남 윤상돈기자 yoonsang@
  • 박은식선생 ‘大東古代史論’ 첫 공개

    독립운동가·언론인이자 대표적인 민족사학자인 백암 박은식(1859∼1925)이 1911년 만주 망명시절 저술한 ‘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이 17일 처음 공개됐다.백암의 저서 가운데 상당수가,특히 만주시절의 저술 대부분이 현전(現傳)하지 않아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는 상태여서 이번 공개는 주목된다.‘한국통사(痛史)’‘한국독립운동지혈사’로 유명한 백암은 고대사에서도 단재 신채호에 버금가는저술을 남겼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의 주권을 강탈한 일제는 ‘황성신문’‘서북학회월보’ 등 항일언론을 탄압하면서 백암의 저서들을 ‘금서’로 지정,발행과 독서를 엄금했다.이에 백암은 이듬해 4월 국경을 탈출,서간도 환인현 소재 동지 윤세복의 집에 1년간 머물면서 ‘동명성왕실기(實記)’‘발해 태조 건국지’‘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명림답부전’‘천(=연)개소문전’ 등을 썼다.독립기념관(관장 박유철)이 공개한 ‘대동고대사론’도 이 시기에 저술한 사서 가운데 하나다. 이 자료는 그동안 학계 일부에 알려져 왔으나 일반에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지난 87년 독립기념관을 개관하면서 도산 안창호 소장자료가 일괄기증될 때 포함된 것이다.총 19쪽의 프린트본으로 한문으로 서술된 이 사서는 저자가 백암의 별명인 박기정(朴箕貞)으로 돼있으며,독립운동가이자 대종교 교주를 지낸 윤세복이 교열자로 돼 있다. 본문은 ▲박기정의 서(序)▲단군조선▲기자조선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됐다.백암은 이 책에서 단군 혈통관념을 강조하고 우리 역사의 무대를 만주와 한반도의 통합체로 이해하는 영토관념을 제시했으며,종교와 역사를 강조해 궁극적으로 독립정신을 고취하고자 했다. 이같은 역사관은 독립운동의 동지이기도 한 단재의 사관과 유사하다. 그러나 백암이 여진족까지 동족으로 설명한 반면,단재는 부여족을 주족(主族)으로 여진족을 객족(客族)으로 이해한 점이 다르다.숙명여대사학과 이만열교수(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장)는 “백암 선생이저술한 고대사 사서 가운데 드물게 실물이 남은 것으로 가치가 크다”며 “단군을 다룬 까닭은 대종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 자료는 올 가을 출간 예정인‘박은식전집’에 전문 수록된다.대한매일은 지난 99년 백범 서거 50주년을 맞아‘백범김구전집’(나남출판)을 출간한 데 이어 금년에는 동방미디어(회장 이웅근)와 공동으로‘박은식전집’(5∼6권 규모 예정)‘양기탁전집’(3∼4권 규모예정)을 출간할 예정이다.두 사람 모두 독립운동가로 큰 족적을 남겼으며,대한매일 전신인 ‘대한매일신보’에서 논설기자(주필)로 활동하면서 항일언론의 필봉을 날렸다. 지난 15일 구성된 박은식·양기탁전집편찬위원회에는 윤병석(위원장·인하대 명예교수)조동걸(국민대 명예교수)신용하(서울대 교수)이만열(숙명여대 교수)김삼웅(대한매일 주필)정진석(한국외국어대 교수)김필자(‘양기탁의 민족운동’저자)씨 등이 위원으로 참여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대한매일 신년특집/ 대한매일의 어제 오늘 내일

    구한말 항일·민족언론의 필봉을 드날린 대한매일신보는 격동의 한세기를 지나오면서 우리 현대사만큼이나 질곡과 영욕의 역사로 얼룩져 왔다.일제하에서는 총독부 기관지로 친일보도에 앞장섰으며,해방후 독재정권 하에서는 권력의 대변지로 충실했다.그러나 반세기만의정권교체를 계기로 창간 당시의 제호를 되찾고 다시 태어났다.소유구조 개편을 통한 공익정론지로의 변신을 꾀하는 대한매일의 어제와 오늘,그리고 내일을 정리한다. *어제. 대한매일은 구한말 대표적 민족지인 대한매일신보의 항일정신을 계승한 국내 최고(最古)의 공익 정론지다.1904년 7월18일 영국인 베델(한국이름 裵說)과 애국지사 양기탁(梁起鐸)선생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는 잘 알려져 있듯이 구국항일운동의 구심점이었다.일제가 강제로 체결한 을사보호조약이 무효임을 만천하에 밝혔고,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으며,‘처처의병(處處義兵)’이란 고정란을 두어 항일의병투쟁을고무했다.암울한 시기에 국권수호의 보루이자 민족자존의 희망이었던 것이다.그러나 대한매일신보는 1910년 8월일제가 이 땅을 강점하면서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가 되는 치욕을 겪었다. 해방후 매일신보는 미군정청을 거쳐 정부로 귀속돼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바꾸었다.이후 서울신문사의 주주총회 및 간부 인사는 공보처의 직접적인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1952년 4월 정관개정에 따라공보처장이 공식적으로 서울신문사 회장에 앉게 되었다.이처럼 어처구니 없는 일은 1960년 자유당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계속됐다. 이승만 독재정권 시기 서울신문은 우리 현대사와 영욕을 같이 했다. 이승만 정권 초창기 한때는 좌경·진보적인 성향을 보였다.특히 제헌국회가 친일파 처단을 목적으로 구성한 반민특위의 활동을 극구 지원·옹호하는 등 민족문제에 관해 여타 어느 신문보다도 열의를 보였다. 그러나 이승만 독재정권 하에서 정권의 대변지로 전락한 이래 역대정권의 ‘홍보지’노릇을 해왔다.이런 연유로 ‘4·19’당시 성난 시위군중에게 사옥이 불탔으며,민주화운동이 불붙기 시작한 80년대 후반에는 한동안 대학가·재야진영으로부터 취재거부를 당하기도했다. 이로 인해 서울신문의 구성원들은 만성적인 정체성 위기에 시달려 왔으며,해바라기성 언론의 전형으로 불리기도 했다.결국 집권자가 경영진을 임명하는 구조하에서 언론 본연의 비판·감시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신문사 경영 역시 악순환을 거듭하였다.이는신문 판매·광고에 바탕을 둔 신문사 경영원칙이 시장논리보다는 정부의 계도지 보급정책에 주로 의존했기 때문이다. *오늘. 이러한 서울신문이 50여년 굴절의 역사를 접고 새로 태어났다.1998년 11월11일 서울신문은 ‘대한매일’로 제호을 바꾸고 재창간을 선언했다.▲공익을 앞세우는 신문 ▲국민복지에 앞장서는 신문 ▲민족화합을 앞당기는 신문 ▲2000년대에 앞서가는 신문이라는 다짐을 실천해가며 대한매일은 새로운 시대를 힘차게 열어가고 있다. 제호를 회복하며 다시 태어난 대한매일은 지난 2년여동안 공익 우선의 민족정론지로서 언론의 소임을 다했다.그것은 먼저 지면을 통해나타났다.특히 근현대사의 왜곡을 바로 잡고 민족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일련의 장편 기획기사들은적극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일제하 친일파들의 반민족 행각을 자료와 증언으로 고발한 ‘친일의군상’,독재정권과 맞서 민주·인권투쟁을 벌이다 민주제단에 몸을바친 민주투사들의 투쟁사를 조명한 ‘민주열사 열전’,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시민들이 세운 장면 정권을 재조명한 ‘제2공화국과 장면’,일제하 단신으로 침략자를 처단하거나 총독부 등 일제 침략기관에 폭탄을 던지고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의·열사들의 항일투쟁기를 복원한 ‘의열 독립투쟁’,재미언론인 문명자씨의 40년간에 걸친 극비 취재파일을 단행본 출간에 앞서 발췌연재한 ‘문명자회고록’,그리고 중국 러시아 미국 일본 등지의 항일유적지를 현지답사·증언을 통해 재조명한 ‘해외 항일유적지를 찾아서’등은 최고의 민족정론지에 값하는 뜻깊은 시리즈였다고 할 수 있다. 재창간 이후 거듭된 일련의 ‘정직한 역사 되찾기’작업은 각종 출판사업으로도 구체화했다.지난 99년 창간 95년과 백범 김구선생 서거 50주년을 맞아 펴낸 ‘백범 김구전집’(전12권)이 그 대표적인예이다.백범 암살 반세기만에 나온 이 전집은 백범에 관한 국내외 문헌자료를 총망라한 역작으로 꼽힌다. 대한매일의 또 하나의 얼굴은 ‘행정뉴스’면이다.공직사회의 소식을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전하는 ‘행정뉴스’면은 맨 뒷면에 넣어,1면과 같은 체제로 편집해 ‘1면이 둘인 신문’으로 자리잡았다. 특화된 내용이 돋보여 지난 98년 5월 선 보인 이래 열독률이 꾸준히높아지고 있다. 행정뉴스 면은 단순히 공직사회 소식을 전하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공직사회의 구조적 문제점과 애환·비리 등을 낱낱이 짚어 건전한공직사회를 선도하는 지면으로 평가받았다. *내일. 지난 한세기 동안 ‘영욕의 역사’를 밟아온 대한매일은 이제 새로운 한 세기를 맞아 제2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우선 ‘원죄’와도 같은 공적 소유매체로서의 틀을 벗고 ‘독립언론’‘공익언론’으로 거듭나고자 몸부림 치고 있다.99년 12월30일 자매지 ‘스포츠서울’이분사되어 21세기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이끄는 ‘스포츠서울21’로 새 출발한 데 이어 지난 10월에는 편집국장을 편집국 기자들이 직선하는 등 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본사 편집국장은 편집인을 겸한,신문편집의 실질적인 총책임자로 편집국장 직선은 공정보도를 가능케 하는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편집국장 임기는 1년으로,임기가 끝난 뒤에는 중간평가를 통해 연임할수 있도록 해 편집권 독립의 제도적 기틀을 마련했다. 편집국장 직선제를 관철한 대한매일은 이제 위상 재정립 작업의 핵심이라 할 소유구조 개편을 위해 지혜를 모으고 있다.‘균등 무상감자후 유상증자’등을 골자로 한 소유구조 개편안은 언론개혁 차원에서범사회적으로 공감대를 점차 넓혀가고 있다.민주주의를 표방한 국가가운데 정부가 언론사를 소유한 곳은 없다.정부의 언론사 소유는 시대에도 맞지않을 뿐더러 오히려 후진성을 드러내는 것이다.연합뉴스와 대한매일의 정부소유 구조개편 문제는 현정권의 공약사항으로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 안에 가시적인 성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한편 대한매일은 소유구조 개편을 통해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과감한 지면혁신을이뤄나갈 계획이다.그동안 대한매일 지면이 독자들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반영하지 않은 제작자 위주의 ‘일방적 제작방식’이었다면,앞으로는 독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아내는 ‘쌍방향식 제작태도’로의 일대전환을 가져올 것이다.특히 남북관계 개선으로 종래의 적대적 대북보도 태도는 일대 전환을가져왔다.아울러 지방화시대와 시민사회의 성장으로 인한 지면의 다양화 역시 시대적 요청으로 부각되고 있다. 대한매일은 98년 재창간을 계기로 ‘공익정론지’를 지면제작의 모토로 표방했다.이는 국내 대다수의 언론이 사주나 정치권 등 언론사 내외의 압력으로 인해 공익을 대변하지 못한다는 자성에서 나온 것이다.향후 소유구조 개편을 계기로 대한매일은 명실공히 공익정론지로 거듭나 시대를 이끌고 독자에게 사랑을 받는 고급지로 발돋움할 것이다. 정운현 김종면기자 jwh59@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 (19.끝)일본 도쿄

    도쿄시내를 동서로 가르는 지하철 유라쿠초센(有樂町線)의 중간지점에는 사쿠라다몬(櫻田門)이라는 역이 있다.이 역의 3번 출구는 경시청 입구로,4번 출구는 사쿠라다몬으로 나온다.황궁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사쿠라다몬에서 바라보면 왼쪽으로는 고색창연한 법무성 건물이,오른쪽으로는 멀리 일본 의회의사당 건물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바로 정면,불과 80m 정도의 거리에는 일본 치안의 총본산인경시청 건물이 위압적인 모습으로 우뚝 서 있다.기자가 이곳에 도착한 시각이 마침 점심시간이었다.초겨울의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인근 관공서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지어 사쿠라다몬을 지나 황거(皇居·황궁)앞 광장에서 조깅을 하고 있었다.일본사람들이길조(吉鳥)로 여기는 까마귀는 떼를 지어 날아다녔고,그 아래로 일본의 상징 일황이 거주하는 황거가 적막에 갇혀 있었다. 일제하 항일 독립투사들의 의열투쟁은 조선 땅이나 중국·러시아 등망명지는 물론 적지의 중심부인 일본 본토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1932년 1월8일.일황 히로히토(裕仁)는 도쿄시내 서북부에 위치한 요요기(代代木)연병장에서 신년 관병식을 마치고 황궁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일황이 탄 마차가 황궁 입구의 사쿠라다몬에 다다를 무렵 난데없이 폭탄 하나가 날아들었다.폭탄은 일황이 탄 마차 뒷편에서 굉음을 내며 터졌다.순간 일장기를 든 기수와 근위병이 탄 말 두마리가거꾸러졌다.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폭탄의 위력은 일황에게까지 미치지는 못하였다.폭탄을 만든 김홍일(金弘壹·전 광복회장,작고)은 회고록에서 “군중과 일황의 거리가 100m 정도가 될 것을 고려하여 폭탄을 멀리 던지도록 가볍게 만들었다”고 했다.가볍게 만들다보니 상대적으로 위력이 약했던 것이다. 거사의 주인공인 이봉창(李奉昌·1900∼1932)의사는 의거후 현장에서 체포돼 그해 9월30일 도쿄 대심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0월10일 이치가야(市谷)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백범 김구 선생이 이끈 한인애국단 소속인 이의사는 의거에 앞서 “물품(폭탄)을 1월8일 방매하겠다(터뜨리겠다)”는 내용의 전보를 백범에게 보내 거사일을 미리 알렸다.당일 이의사는 일황이 관병식을 마치고 경시청을 지나 사쿠라다몬을 통과하여 황궁으로 들어가는 것을 알고 경시청 정문 앞에서 일본인으로 가장해 기다리다가 거사를 성공시킨 것이다. 의거후 일본은 발칵 뒤집혔다.식민지 백성인 조선인이 도쿄 중심부,그것도 일본 치안의 총지휘부인 경시청 앞에서 일황이 탄 마차에 폭탄을 던진 ‘사건’은 충격적인 일이었다.일본은 이 사건을 ‘사쿠라다몬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에 대해 최서면(崔書勉)국제한국연구원장은 “엄격히 말해서는 ‘경시청앞 사건’으로 부르는 것이 정확하나 ‘사쿠라다몬사건’역시일황과 관련된 표현이므로 크게 틀린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이의사의 의거현장인 경시청 정문 오른쪽에는 ‘경시청 창립 100주년 기념식수’라는 자그마한 기념표석이 서 있으나 이의사의 의거를 알리는기념물은 어디에도 없었다.일본 경찰로서야 ‘수치스런 기억’이겠지만 이는 또 하나의 역사은폐가 아닐까. 경시청 앞에서 사거리를 지나 황거를 에워싼 해자(垓子,궁성 주위에방어용으로 파놓은 연못)를 건너 사쿠라다몬으로 들어서면 황거의 분위기가 완연히 느껴진다.도쿄 시내 한가운데 위치하면서도 마치 외떤 섬과 같은 분위기가 든다.문 안으로 들어서면 거목과 잘 포장된 길이 황거로 안내한다.포도((鋪道)가 끝나는 지점에 작은 자갈이 깔린길이 나타나는데 넘실거리는 해자의 물결과 함께 황거가 모습을 드러낸다. 도쿄 시내 치요다(千代田)구에 위치한 이 궁성은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의 손자인 3대 쇼군 이에미쓰(家光)시대에 만든 것으로 해자가 이중으로 조성돼 있다.황거의 면적은 총30만평 규모로,제122대왕인 메이지(明治)가 황거를 교토(京都)에서 옮겨온 뒤 도쿄성으로불린다.자갈밭 중간지점 쯤에는 이중으로 된 돌다리가 나타나는데 흔히 이를 니주바시(二重橋)라고 부른다.바로 황거를 연결하는 다리로,길이는 약 29m,폭은 약 7m정도다. 지방에서 도쿄 관광을 온듯한 일본인들이 니주바시를 배경으로 무리를 지어 기념사진을 찍곤 했다.기념사진 촬영용으로 만든 계단식 간이의자가 있었고 전담 사진사도 두 명이나 됐다.이곳에서 관광객들에게 사진을 찍어주는 다나카 아키코(田中明希子·22·국제관광사진주식회사 소속)씨는 “관광객이 니주바시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즐겨찍는다”고 말했다.사진값은 2장 1세트로 2,100엔(송료 별도)이라고했다. 니주바시 입구에는 3명이 경비를 서는데 근처까지 관광객의 접근이가능했다.회청색이 감도는 황거 건물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이었다.사진 몇장을 찍고는 다시 기념사진 찍는 곳으로 내려와,잠시짬을 내 쉬고 있는 다나카씨를 찾아갔다. 기자는 일제강점기때 이곳에서 발생한 ‘조선인 폭탄투척’사건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봉창의사의 사쿠라다몬사건은 물론 김지섭(金祉燮·1884∼1928)의사의 니주바시폭탄투척 사건도 전연 몰랐다.학교에서 그런 내용을 배우지 않았다고 했다.더러 한국인 관광객이 찾아와 기념사진을 찍곤하지만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은 아직 없었다고 했다. 1924년 1월5일 오후7시쯤 한 조선인이 니주바시에 던진 폭탄사건으로 일본은 소용돌이에 빠졌다.신(神)으로 받드는 일황의 궁성에 조선인이 폭탄을 들고 뛰어들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내무차관견책에 이어 경시총감·경무부장·국성 경비책임 경찰서장 등 치안책임자가 줄줄이 파면되었다. 의열단 소속 김의사는 1924년초 도쿄에서 일본총리를 비롯해 조선총독 등이 참석하는 제국의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을 폭살할목적으로 23년말 상하이 포동(浦東)부두에서 일본으로 향했다.그러나 제국의회가 갑자기 연기됐다는 소식을 접한 김의사는 계획을 변경,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일황 궁성을 폭파키로 결정하였다.그러나 접근이 불가능하자 날이 저물기를 기다렸다가 궁성 입구인 니주바시에폭탄을 던진 것이다. 아깝게도 김의사가 던진 폭탄은 불발이었다.타고온 배가 습기 많은화물선이어서 도쿄로 오는 동안 폭탄이 모두 젖어버린 탓이었다.김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돼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복역중 고문 후유증으로1928년 2월20일 뇌일혈로 지바(千葉)형무소에서 순국했다. 76년전 김의사가 목숨을 내놓고 폭탄을 던진 니주바시 아래로 백조들이 무리를 지어 쌀쌀한 초겨울 날씨를 한가로이 즐기고 있었다. 도쿄 글 정운현기자 jwh59@. *연재를 마치며. 구한말 항일민족지 ‘대한매일신보’의 창간정신을 되살려 민족정론지로 거듭 태어난 ‘대한매일’이 금년 7월초부터 매주 수요일(일부화요일)자에 장기기획물로 연재한 ‘해외항일전적지를 찾아서’는 일제강점기하 선열들의 항일투쟁 현장을 관련자료와 현지 전문가들의도움을 받아,현장답사를 통해 생생히 복원한 점에서 평가할만 하다. 금년초 대한매일은 김삼웅 주필과 편집국 특집기획팀 소속 취재기자와 사진기자,외부전문가 등으로 특별취재반을 편성해 해외에 산재한항일유적지 실태를 파악한 뒤 구체적인 지역선정과 일정확정에 들어갔다.논의 끝에 최종 중국 러시아 미국 일본 등 4개국을 답사대상지로 선정했다. 무장투쟁 본거지인 중국의 동북3성을 첫 답사지로 결정했다.중국은지역이 광범위한데다 항일운동 주무대였다는 점에서 독립군이 무장투쟁을 벌인 동북3성과,임시정부·광복군의 활동무대인 관내지역을 2차로 나눠 답사했다.이어 미국 러시아 일본의 항일유적지 현장답사와취재 순으로 이어졌다. 이번 기획연재는 ‘청산리전투’등 항일투쟁사에서 찬란한 전과로 기록된 독립투쟁의 현장을 기자가 직접 답사하여 딱딱한 논문 형태가아닌,재미있고 현장감있는 신문기사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학계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그러면서도 관련자료와 현지 역사학자·주민 증언을 토대로 해 학술적 가치도 결코 적지 않다고 인정받았다. 특히 답사과정에서 보존가치가 크나 방치된 유적을 현장사진과 함께실감있게 보도함으로써 관계당국이 적극적으로 발굴·보존하는 방안을 마련토록 자극을 주었다.또 독자들에게는 선열의 위업을 현창하고애국심을 고취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음을 자부한다. 아울러 취재반은답사과정에서 북한 김일성주석이 소년시절 다닌,중국 길림시 소재 육문(毓文)중학을 남한 최초로 취재하였으며 박정희 전대통령의 만주군관학교 졸업 당시 사진을 발굴하는 등 과외의 성과도 거두었다.취재반은 이번 답사를 통해 취재·보도한 내용을 보완,내년초 이를 단행본으로 엮어 출간할 계획이다. 정운현기자
  • 경교장·돈암장등 50년이상된 건축물 ‘등록문화재’특별관리

    정부는 구한말 이후의 근대 건축물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특별 관리해 나가기로 했다. 규제개혁위원회는 13일 근대화 과정 및 해방 전후에 형성된 근대 문화유산이 없어지거나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문화재보호법을 이같이 개정,내년 상반기 중 시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규제개혁위는 건축된 지 50년 이상 지난 건조물과 기념물 중 학계,지방자치단체,소유자로부터 문화재 등록 신청을 받아 문화재위원회의심의를 거쳐 등록문화재 지정,소유자나 별도의 관리자를 통해 집중관리토록 할 방침이다. 문화재청은 백범 김구(金九)선생이 서거한 경교장,이승만(李承晩)박사가 기거하던 돈암장을 비롯해 철원 노동당사,영국공사관 등 전국적으로 208건의 건축물을 등록문화재 지정 대상으로 검토하고 있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되면 내부 시설은 개조가 가능하나 외형은 원형대로 보존해야 하는 제약이 뒤따른다.그러나 등록문화재에 대해서는 관리 및 수리비용을 지원하는 한편 종합토지세,상속세 등 세금 감면 혜택을 부여한다는 방침이다. 규제개혁위는 또한 문화재발굴비용 지원 대상을 확대,건설공사를위한 발굴 조사 중 중요 유적이 확인돼 사업 시행이 불가능하게 된경우 등에 대해서도 문화재 발굴비용을 지원키로 했다.이와 함께 사유문화재 보호를 위해 필요하면 주변 토지와 건물을 국가 또는 지자체가 수용 또는 사용할 수 있도록 관련 규정을 개정하기로 했다. 이지운기자 jj@
  • 다시 살아난 ‘늦봄’

    민족의 지도자이기에 앞서,시인의 뜨거운 마음을 지녔던 고 늦봄 문익환 목사를 추도하는 헌정음반 ‘뜨거운 마음’이 나왔다.뮤지션을대상으로 한 앨범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존경받는 인물을 주제로 한헌정음반이란 점에서도 남다르다. 늦봄의 주옥같은 시 9편과 그 자신과 백범 김구의 북행 길에 읊어졌다는 서산대사의 시 등에 민중음악 진영의 이름난 작곡가 류형선이 1년동안의 작업 끝에 곡을 붙여 묶어냈다.‘눈오는 벌판을 가로질러걸어갈 때에 함부로 난삽하게 걷지 말지어다 오늘 내가 디딘 자국은드디어 뒷사람의 길이 되리라’(서산대사의 시)‘바위섬’의 김원중이 서산대사의 시 ‘오늘 내가 디딘 자국은’을,대중음악의 파수꾼 정태춘이 ‘고마운 사랑아’를,정열적인 노래꾼이정열이 ‘평행선’을,CCM 뮤지션 송정미가 ‘이 작은 가슴’을,젊은 소리꾼 김용우가 ‘비무장지대’를,노래마을 출신의 윤정희가 ‘서시’를,이 모든 노래를 작곡한 류형선이 10여년전 불렀던 ‘그대부르는 언덕’을 김원중이 차례로 목놓아 부른다. 좀더 공격적이었으면 좋았겠다고 평한 음악평론가 강헌은 이어 “이작은 음반은 살아남은 자들의 후일담이 아니라 온화했던 정의의 사표를 새로이 우리의 뇌리속에 자리매김하고 봉헌함으로써 ‘어떻게 살아있을 것인가’를 집요하게 질문하고자 한다.늦봄은 우리 겨레의 지나간 미래였다”고 덧붙인다. 임병선기자
  • 4월혁명회 회장 입건

    박정희 전 대통령의 흉상 철거 사건을 수사중인 서울 영등포경찰서는 6일 4월 혁명회 회장 곽태영씨(64)를 강도상해 혐의로 입건했다. 곽씨는 민족문제연구소,민주노동당 관계자 등 20여명과 함께 5일 낮12시쯤 영등포구 문래공원에서 박 전 대통령의 흉상을 밧줄로 걸어철거하다 이를 말리던 공원 관리인 윤용덕씨(52)에게 왼손 약지 등에 전치 2주의 상처를 입힌 혐의를 받고 있다. 곽씨는 지난 65년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범으로 알려진 안두희씨를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친 경력을 갖고 있다. 한편 경찰은 30여명의 수사관으로 전담반을 만드는 한편 민족문제연구소 대표 김모씨(50)와 선임연구원 방모씨(27)에 대해 체포영장을신청했다. 경찰은 홍익대 학생회관과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해 법원으로부터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박 전대통령의 흉상 확보에 나섰다. 조태성기자 cho1904@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 (13)의열단 자취 남은 南京·廣州

    광복군 제3지대가 있던 안휘성 부양(阜陽)에서 침대열차를 타고 밤새 달려 강소성 성도 남경에 내렸다.중경·무한과 더불어 중국의 ‘3대 찜통’이라 부른다더니 아침부터 사우나실처럼 후꾼후꾼했다.양자강이 가까워 고온다습하기 때문이었다.남경은 수운의 이점이 있어 예로부터 강남의 중심 구실을 했고 삼국시대에 손권이 오나라를 세운이래 10개의 왕조가 왕도로 삼은 곳이다.근대에 와서도 태평천국의봉기군이 청나라 정규군과 서구열강에 대항해 싸울 때 거점으로 삼았으며 신해혁명 이후 손문도 중화민국의 임시수도로 삼았다.중일전쟁때도 임시수도였으며 일본군에 의해 양민 30만명이 학살당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국민당 정부의 임시수도 시절,우리 선열들의 항일운동도 이곳을 거점으로 삼았다. 취재팀이 먼저 찾은 곳은 남경대학.그곳에 항일전쟁사의 걸출한 인물 여운형(呂運亨)과 김원봉(金元鳳)이 다닌 금릉(金陵)대학 캠퍼스가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조국에서 3·1운동이 실패하자 무력항쟁 밖에 없다고 생각한 김원봉은 금릉대학을 중퇴하고 서간도로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갔다.그러나 그곳의 교육은 중국 명문대학을 다닌 그를충족시키지 못했다.그는 길림으로 가서 저 유명한 암살 폭파 비밀결사인 의열단을 만들고 수많은 테러공작을 감행해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이때 그의 나이는 약관 21세였다. 30대 장년이 되자 김원봉은 의열단의 테러공작을 지양하고 군대조직을 계획했다.뒷날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였다.그는 스스로 광동성 광주(廣州)로 가서 황포군관학교를 나와 조선혁명간부학교를 만들었다.이 학교출신으로 유명한 이는 뒷날 태항산에서 전사한 윤세주와 진광화,그리고 민족시인 이육사이다.김원봉의그런 활동은 거의 남경에서 이루어졌다.황포군관학교 동기생으로 중국의 첩보기관 삼민주의역행사(三民主義力行社)의 대표였던 등걸(騰傑)이 그를 도왔다. 남경대학은 우리 대학들과 달리 건물과 건물 사이 공간이 넓고 녹지가 많아 여유로워 보였다.플라타너스·팽나무가 지천이었다.시 인민정부가 발행한 백서를 보면 가로수가 40만 그루라던가.금릉대학 캠퍼스는 예스러운 품격을 지닌채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푹신한 네모꼴의 잔디밭을 두고 3동의 건물이 둘러앉아 있었다.그 앞쪽에 뚝 떨어져서 대례당(大禮堂)이란 간판이 붙은 회당 건물이 있었다.민족혁명당을 창당한 곳이 이 대학의 강당이라 했으니 이것이 틀림없을 듯싶은데 전면이 일부 개축되어 있다. 남경대학을 나온 취재팀은 얼음이 섞인 생수병을 들이키며 의열단원들이 묵었던 명양가(鳴羊街)와 화로강(花露崗)을 찾아나섰다.한상도교수의 논문 ‘재중한인군관학교연구’를 보면 조선혁명간부학교는 1932년 10월20일 남경교외 탕산(湯山)의 선사묘(善祠廟)라는 사원에서 개교했고,교관들은 남경성내 명양가 호가화원(胡家花園)에서 묵었다.골목을 더듬어 찾아가보니 명양가와 화로강은 이어진 골목이었다.김원봉에게 호의적이었던 부호 호대해(胡大海)는 자신의 장원 호가화원에 김원봉을 식객으로 묵게 했고,김원봉은 자신의 의열단 동지들을위해 근처 화로강에 머물게 하면서 혁명간부학교 교관들의 숙소도 마련했을 것이다. 어림짐작으로도 어마어마하게 컸을 듯한 호가화원은 퇴락된 채 빈민들이 살고 있었다.그 옛날 주인이 손님과 더불어 풍류를 즐겼음직한연못가의 팽나무 그늘에 앉아 땀을 식혔다.문득 ‘지절시인’ 이육사가 떠올랐다.그는 조선혁명간부학교 1기생 명단 26명 가운데 육사(陸史)라는 가명으로 실려있다.그가 이 연못에서 올곧은 의지로 시를 썼을 것 같은 생각에 이곳저곳 두리번거렸다.연못가에서는 얼굴에 여유로움이 가득한 노인이 낚시질을 하고,해오라기 한 마리가 긴 부리로우렁이를 찍어올리고 있었다. 남경에는 백범 김구가 만든 한국특무대독립군 본부도 와 있었다.‘김구구락부’로 더 알려진 테러공격 비밀결사였는데 목장영 고안리(木匠營 高安里)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호가화원의 연못에서 낚시를 하는 노인이 목장영이 가까운 곳에 있다고 일러주기에 찾아갔으나 새 아파트단지 입구에 붙은 ‘목장영’이라는 간판을 본 것만으로만족해야 했다. 취재팀은 저녁 비행기로 광동성 광주로 날아갔다.우리 항일투쟁사에 큰 몫을 한 도시이기 때문이었다.광주 백운(白雲)공항에서택시를타고 달리는 동안 필자는 중국의 도시라기보다는 유럽에 온 느낌이었다.네온사인이 현란하고 거리를 질주하는 깨끗한 중형차들이 질서있게 차선을 지키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도 세련되어 보였다.건물의 외형까지도 첨단화된 미를 뽐내고 있었다.하기야 북경,상해에 이어 중국 3대도시이며 1인 평균 생산액이 전국 1위인데다 백년전부터 중국내륙으로 들어가는 교통요지였고 홍콩과 가깝다보니 그럴 것이었다. 광주는 중국의 역사에서 혁명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손문이 혁명을일으켜 ‘호법(護法)정부’를 세웠고 공산주의자들은 광주봉기를 일으켰다.광주봉기를 배경으로 쓰여진 앙드레 말로의 소설이 ‘정복자’이다.우리의 항일투사들도 이곳에 와서 크고 작은 자취를 남겼다. 그 대표적인 것이 황포군관학교(본래의 이름은 육군군관학교)이다.수많은 우리 항일투사들이 이 학교를 졸업했다. 황포군관학교는 1924년 1월 손문이 국민당과 공산당을 합작한 결과탄생했다.국민당측의 장개석이 교장을,공산당 측의 주은래가 정치주임을 맡았는데 그로 인해 학생들도 양분되었고 그곳에 재학중이던 한인청년들도 뒷날 임시정부와 광복군,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으로갈라서는 결과가 되었다.그들의 입학은 1924년의 3기생들로 부터 시작되는데 유명한 이는 박효삼(朴孝三)·왕자량(王子良)·김원봉 등이다.그밖에 남경과 무한에 있던 분교를 졸업한 이도 많다. 황포군관학교에는 우리 교관요원들도 있었다.청산리 전투에 참가했다가 러시아 유학을 하고 돌아온 양림(楊林.본명 金勳),1922년 의열단원으로 상해 황포탄 의거를 일으켰던 오성륜(吳聲輪),뒷날 만주에서 동북항일연군 간부로 활동한 최용건(崔庸健),의열단원이었다가 조선의용대 간부로 활동한 박효삼,이빈(李彬),양달부(梁達夫),김원봉,채원개(蔡元凱)등이다.님 웨일즈의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金山. 본명은 張志樂)도 교관이었다고 하나 연구가들의 실증은 없다. 취재팀은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군관학교를 찾아갔다.광주시를 관통해 흐르는 주강(珠江)의 제방을 따라 보리수가 싱그럽게 가지를 뻗치고 있었다.대절한 자동차를 페리에 싣고 20분쯤 걸려 도시의 동남쪽에 있는 장주도(長州島)로 건너갔다.섬 거의 전체가 해군부대 주둔지였는데 황포군관학교는 옛날의 모습 그대로 보존,복원되어 있었다.우리나라의 중고생들이 극기훈련,야영훈련을 가듯 남녀 학생들이 입영훈련을 받고 있다.김원봉이 생도시절 중국인 생도 등걸과 우정을 쌓으며 토론을 한 곳은 어디일까.필자는 그런 상상을 하며 강의실,생도 숙사,강당,연병장 등을 돌아보았다.발길을 돌려 중산대학을 찾아갔다. 아나키스트였던 김성숙(金星淑)과 김산이 졸업한 중산대학은 필자가 돌아본 십여개의 전통있는 중국의 대학들 가운데 건축미가 가장 돋보였다.새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옛날 것들인데 깨끗하게 보존되어고상하면서도 웅장한 품격을 뽐내고 있었다. □광주(중국 광동성)■이원규(소설가·동국대 겸임교수)
  • 백범 中 피난처 복원 모금운동 전개

    백범(白凡) 김구(金九)선생의 피난처였던 중국 저장성(浙江省) 자싱시(嘉興市)의 정자를 사적지로 보존하기 위한 모금운동이 전개된다. 경기도 성남시 모란장 상인회(회장 전성배)는 10월1일 성남시청 앞광장에서 바자회를 열어 이익금 전액을 김구선생 피난처 복원에 사용하기로 했다고 29일 밝혔다.이날 바자회에서는 상인회 소속 화훼·잡곡·야채·의류 등 13개 분야 상인들이 참여할 예정이다. 이 기금모금운동은 시청,상공회의소,분당YMCA 등이 후원하는 범시민운동으로 확산될 전망이다. 김구선생의 피난처였던 저장성 영안정(永安亭)은 1932년 4월29일 윤봉길의사의 폭탄투척사건으로 일본군에 쫓기던 김구선생이 중국인 저부성(저輔成) 저장성 성주의 도움으로 도피생활을 했던 곳으로 독립운동가인 이용상(77·성남시 수정구 신흥동)씨의 현지답사로 존재가밝혀졌다. 성남 윤상돈기자 yoonsang@
  • [김삼웅 칼럼] 重慶에서 맞은 광복군 창설60년

    지난 17일 낮 중국 중경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중경(重慶)청사 재복원 개막식과 광복군 창설 60주년 기념행사가 조촐하게 거행되었다. 청사 2층에 마련된 항일군사활동자료전시관도 개막되었다.해방후 처음으로 광복군 창설 기념행사가 중경 현지에서 거행된 것이다. 60년전인 1940년 바로 이날 중경에서는 한국광복군 창군식이 거행되었다. 한민족은 나라를 잃고 세계각지를 유랑하면서 산발적으로 의열투쟁과 독립군의 항전을 계속하였지만 임시정부 산하에 ‘국군’인 광복군이 창설되기는 처음이다. 남의 나라에서 군대를 양성하는 일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임정의 지도자들은 중국정부의 협력과 미주 동포들의 성금으로광복군을 창설했다. 비록 창군날에는 병력이 30여명에 불과한 초라한모습이었지만 광복군의 사기는 충천하고 독립운동사적 의미는 각별하다. 광복군 창군의 날 중경의 날씨는 쾌청했다.행사장 가릉빈관(嘉陵賓館)에는 임정 국무위원을 비롯,내외귀빈 200여명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식장 중앙에는 대형 태극기가 게양되고“초나라는비록 세집만으로도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나무를 베히고 뿌리를 말리는 각오라면 끝내 우리는 고국에 돌아갈 날이 있을 것이다”는 등의표어가 식장을 자못 숭엄하게 하였다(조소앙, ‘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기록’). 나라 잃은지 30년만에 이역만리에서 조국을 되찾고자광복군을 창설한 임정의 애국지사들과 대부분 일본군을 탈출하여 참여한 젊은 군인들의 감격과 전의로 대회장은 흥분에 휩싸였다. 김구 주석은 “광복군은 1919년 임시정부군사조직법에 의거하여 중국 총통 장개석의 특별허락을 받아 조직되었으며 중화민국과 합작하여 우리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 저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국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는 ‘광복군선언문’을 발표했다. 임정의 광복군 창군은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것이었다. 당시 만주지역에 120만명으로 추산되는 한국인과 중국대륙 각지에 살고 있는 동포청년들,그리고 당시 중국관내 일본 육군 26개 보병사단과 20개 독립혼성여단의 병력 중에는 강제징집된 한인청년이20만여명에 이르는데 이들을 모아서 국토 수복작전으로 빼앗긴 조국을 무력탈환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이었다. 출범한 광복군은 연합군과 공동작전으로 대일전쟁에 참여했다. 인도·미얀마 전선에서 영국군과 연합하여 대일전쟁을 수행하고 국내진공작전을 위해 미국과 OSS특수훈련을 실시하였다. 시련도 많았다. 우선 중국정부는 ‘한국광복군 행동 9개준승’이란것을 만들어 중국 군사위원회가 통할지휘토록 하였다. 광복군은 중국군의 통제와 간섭을 받게 된 것이다. 나라없는 군대의 한계일 수밖에없었다. 그러나 끈질긴 교섭으로 4년만에 군 통수권을 회복하였다. 대한민국 국군 창설 반세기가 지나도록 작전지휘권이 외국에 넘겨진것과 크게 비교된다. 광복군의 국내진공작전은 일본의 항복으로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김구 주석이 통탄한 대로 임정은 발언권을 잃고 건국과정은 물론 그이후 군의 핵심은 일군과 만군출신들이 차지했다. 임정과 광복군은‘개인자격’으로 귀국하여 소외의 대상이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창설되어 일본과 나치독일에 선전을포고하면서 일군과 싸우고 중국 국부군과 협동하여 각처에서 항일전을 전개했으면서도 광복후에는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자리에 일군·만군출신이 올라섰다. 건국사의 첫자리가 이렇게 왜곡되었다. 임정 중경청사 재복원 행사에는 윤경빈 광복회장을 비롯,김우전 광복군동지회장, 박유철 독립기념관장, 홍순영 주중대사와 중국측에서는 진근은(陳根銀) 중경시 외사부주임등 관계자가 참석하고 행사후에는 광복군총사령부 유적지와 백범선생의 망명지 등을 돌아봤다. 대부분 20대 학도병으로 일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에 참여했던 이들은 이제백발이 성성한 80고령의 ‘노병’으로 변했지만 나라사랑의 열정은여전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1940년 9월17일 임시정부의 국군으로광복군이 창군한 날을 국군의 기념일로 지정하여 통일시대에 대비해야 한다”면서 60년전 그날의 감격을 되새겼다.광복군 회갑날의 중경하늘도 맑고 깨끗했다. ■중국 중경에서 김삼웅 주필kimsu@
  • [외언내언] 무대에 되살아난 丹齋

    지난달 12일 KBS-TV의 인기 프로그램 ‘역사스페셜’이 ‘발굴!스티코프의 비밀수첩,김구는 왜 북으로 갔나’를 방영했다.백범(白凡)김구(金九)가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전말과 그의 자주통일 의지를 소개하는 내용이었다.이후 KBS 홈 페이지의 프로그램 시청평 난에는 “김구선생이 그처럼 훌륭한 분일 줄 미처 몰랐다.정말 존경한다”는 글이 수십건 올랐다.대부분 중고생과 20대가 쓴 글이었다.시청평들을 읽으면서 씁쓰레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우리 사회가 자라나는 세대에게 백범선생조차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구나’하는 생각에서였다. 우리는 일제에게 35년간 나라를 빼앗긴 참담한 역사를 갖고 있다.그렇다고 해서 그 역사가 마냥 부끄럽지만은 않은 까닭은 치열하게 항일독립투쟁을 벌인 선열들의 존재가 워낙 뚜렷하기 때문이다.그런데도 아이들에게 독립운동가 열 사람만 꼽으라고 주문하면 대체로 “이승만(李承晩)·김구·유관순(柳寬順)·안중근(安重根)·이준(李儁)”정도를 들고는 머뭇거린다.독립운동가 이름을열 손가락에 꼽지 못할만큼 우리 사회는 애국 선열들을 대중화해 친숙하게 만드는 일에 소홀했다. 지금 서울 종로5가 연강홀에서는 단재(丹齋)신채호(申采浩)를 주인공으로 한 연극 ‘꽃뫼연’공연이 한창이다.추석날 시작해 오는 17일까지 매일 오후 4시30분·7시30분 두차례 무대에 오르는 이 연극은사실 제목 자체가 생소하다.‘꽃뫼’는 단재가 태어난 충북 청원군낭성면 화산(花山=꽃뫼)마을이니,꽃뫼 연(鳶)은 결국 창공을 누비는연과 같은 선생의 높은 뜻과 쾌활한 기상을 상징한다. 단재가 역사를 “아(我=나)와 비아(非我=내가 아닌 것)의 투쟁”이라고 정의한 것처럼 연극도 단재와 ‘미리(미르)’의 대립구도로 진행된다.미리는 용(龍)의 옛말이지만 선생은 소설 ‘용과 용의 대격전’에서,미리를 민중을 억압하는 상징물로 형상화한 바 있다.따라서연극에서의 미리는 단재 내부의 욕망·나약함 같은 인간적 약점이자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같은 침략의 원흉,또 일본제국주의 그 자체로 변신을 거듭하며 사사건건 대치한다.아울러 을사조약·한일병합·고종황제 독살 등의 역사적 사건과 단재의 개인사가 씨줄·날줄로 얽혀 전개된다. 단재가 누구인가.그는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서 일제의 침략 야욕을 앞장서 파헤친 당대의 논객이요,민족주의사관을 정립한 역사학의 거목이자,1936년 여순감옥에서 숨지기까지 26년동안 이역을 떠돌며 온몸으로 광복을 추구한 애국지사이다.그 단재를 추석연휴 마지막 날연극무대에서 만나면서 “나는 아이들에게 선생을 가르쳤는가”라고자문했다.그리고 부끄러웠다. 이용원 논설위원
  • 방송사 ‘이산상봉·광복절’ 특집프로 다채

    오는 15일 역사적인 남북 이산가족 상봉과 55주년 광복절을 맞아 각 방송사마다 풍성한 특집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이산가족 상봉 KBS,MBC,SBS는 14∼18일 수시로 뉴스특보와 특집 프로그램을 통해 남북 이산가족 상봉 장면을 생중계한다. 생방송 외에 KBS는 15∼17일 특별 기획 ‘북녘땅 고향은 지금’을 마련했다.송도원 해수욕장,성불사,함흥냉면 등 조선중앙TV가 촬영한 원산,사리원,함흥의 명승지와 별미 등을 소개하고 각 지역 출신 실향민을 초대해 이야기를나눈다.또 이산가족 상봉을 총정리하는 ‘이산가족 교환방문 3박4일의 표정’(18일 밤10시)을 방송한다. MBC는 가수 현미와 코미디언 남보원이 북한에 살고 있는 동생과 누이를 만나고 돌아오는 과정을 동행 취재한 ‘현미 남보원의 이산가족 상봉’(14일밤11시5분)을 방송한다. 또 남북의 대중문화와 유행,패션 등의 비교를 통해 남북한 생활상의 변화를살펴보는 ‘서울 50년,평양 50년’(16일 오후7시25분),상봉을 앞둔 이산가족의 기쁨과 설렘을 담은 ‘그후 50년 어머니,내일 뵙겠습니다’(14일오후5시45분)를 내보낸다. SBS는 월북 이산가족들의 만남이 갖는 의미를 조명한 ‘묻혀진 반세기의 그리움-월북가족’(12일 밤10시50분),남북 이산가족들의 눈물겨운 사연과 뒷얘기를 듣는 ‘반세기 만의 망향가’(14일 밤12시5분)등을 방송한다. ■55주년 광복절 종군위안부 문제를 다룬 세 편의 다큐멘터리가 눈에 띈다.KBS는 종군위안부 문제를 세상에 이끌어냈던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의완결편인 ‘종군위안부 7년간의 기록-숨결’(13일 오후8시)과 미국 PBS가 제작한 한국인 종군위안부의 실태를 다룬 다큐멘터리 ‘침묵의 소리’(14일 밤11시30분)를 준비했다. EBS는 서울 ‘나눔의 집’에 살고 있는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의 사연을 통해우리나라의 뼈아픈 현대사를 담아낸 다큐멘터리 ‘어느 일본군 위안부의 잃어버린 55년’(15일 오후8시)을 방영한다. 이밖에 KBS는 백범의 통일관을 알아 보는 ‘발굴 스티코프의 비밀수첩,김구는 왜 북으로 갔나’(12일 오후8시),연해주에 사는 한민족의 모습을 담은 ‘연해주에서 만난 4개국 한민족’(15일 오전11시)를 방송한다. MBC는 20여년 동안 한국 정치범을 도운 일본 가즈꼬 여사의 이야기를 다룬‘가즈꼬 여사는 70에 한국을 보았다-한·일 인권의 가교’(14일 오전11시5분),일제 당시 부랑아 수용시설이었던 ‘선감원’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를고발한 드라마 ‘선감도’(15일 밤10시5분)를 방영한다. EBS는 일본 오사카시에서 일고 있는 재일 민족학급의 풀뿌리 민족운동을 소개한 ‘섬나라 속의 섬-재일 민족학급’(14일 오후8시),흥사단 국토탐험대어린이들과 중국의 독립운동 유적지를 돌아본 어린이 다큐멘터리 ‘특집 난할 수 있어요’(15일 오후5시50분)등을 준비했다. ■라디오 특집 KBS 1라디오는 15일 오전 7시15분 ‘안녕하십니까 김종찬입니다’를 통해 남북 이산가족 상봉의 의미와 문제점,앞으로 효과적이고 지속적으로 이산가족 상봉을 추진할 수 있는 방안을 알아본다.EBS는 6·25때 헤어진 어머니에게 50년간 매일 편지를 써온 이창남씨의 사연 등을 다룬 ‘만남’(14일 오전11시)을 방송한다. 장택동기자
  • [대한광장] 백범의 은인 강화사람 김주경

    우리는 독립운동사에서 뚜렷한 발자국을 남긴 많은 인물들을 기억하고 있다.그러나 이들 활약의 이면에는 이름없는 이들의 도움이 있었다. 이런 인물로 백범 김구 선생이 평생의 은인으로 생각하였던 강화의 의인 김주경을 들 수 있다.김주경은 자는 경득으로 원래 강화관아의 서리였다.1866년 병인양요 이후 대원군이 강화에 3,000명의 별무사를 양성하고 섬 주위에석루를 쌓고,진무영을 세우던 때,김주경은 군수품 창고지기 일을 맡고 있었다.김주경은 어릴 때부터 사람됨이 호방하여 독서는 아니하고 도박을 일삼았는데,강화 포구의 고깃배들을 돌아다니면서 투전을 하여 수십만냥을 벌었다. 그 돈으로 각 관청의 하급관속들을 매수하여 전부 자신의 지휘명령을 받도록 해놓고,원근에서 용기와 지략이 있다는 사람은 모두 식구로 만들었다.그는 양반이라 해도 비리를 저지르면 가차없이 혼을 내주었다. 김주경은 백범 김구가 치하포에서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인 쓰치다를 처단하고,인천 감옥에 갇히자 김창수(김구의 본명)의 구명을 위해 전 재산을 탕진하게 된다.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의거한 김구의 가상한 뜻에 동감하여김구를 살려내기 위하여 한규설(당시 외무대신)을 찾아갔고,7,8개월 동안 김구의 석방을 위한 소송비용으로 그의 전 재산이 바닥이 났다. 그는 재산이 다 탕진되자 동지를 규합하여 관용선을 탈취하여 해적질을 계획하였다.이것이 강화군수에게 알려지자 노령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방면으로 도주하였다.김주경은 김구를 탈옥시키기 위해 지하조직을 만들기도 했다.여기에 가담했던 인물들은 후에 모두 노령 서북간도 상해 등지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한편 인천감영 감옥에서 탈출에 성공한 김구는 강화 김주경의 집에 찾아가석달 동안 서당을 열고 그를 기다렸으나 만나지 못했다.일설에 의하면 김주경은 강화를 떠난 후 10여년 동안 붓파는 행상을 하면서 수만금을 모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하려 하였으나 불행히도 성사치 못하고 객사하였다고 한다.김구의 독립운동에는 김주경과 같은 실천적인 협력자가 있었다.1947년 상해에서 귀국한 김구는 강화 남운통에 있는 김주경의 셋째 동생 진경의 집을방문하여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그 집이 바로 46년 전 김구가 변성명하고 그의 사랑에서 석달 동안 사숙을 열었던 곳이었다.이날 한말 이동휘가 세운 합일학교 운동장에서 김구선생 환영회와 강연이 있었는데,김구는 김주경을 그리워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8월은 광복절이 있는 달이며,민족을 생각해볼 달이다.독립운동을 하는 데는3가지가 있어야 한다.이념과 지도부 형성과 조직,인적·물적 후원 등이다. 김주경은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백범 김구를 도와 자기가 할 수 있는 독립운동의 방략을 찾아 매진한 인물이라고 생각된다.백범은 김주경을 평하기를 “강화에는 두 사람의 인물이 있는데,양반 중에는 이건창이요, 상놈 중에는 김주경”이라 했다. 강화에는 우리가 찾아볼 유적지가 여러 곳이 있다.광성보,초지진,덕진진 같은 전적지와 함께 강화학파의 이건창의 생가나 또한 민중으로 의인의 삶을산 김주경의 집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서굉일 한신대교수·국사학
  • 尤史연구회, 전집 5권 발간

    임시정부의 초대 외무총장과 부주석을 지낸 우사(尤史) 김규식(1881∼1950)의 생애와 사상이 5권의 전집에 담겨 나왔다.도서출판 한울. 우사연구회(회장 송남헌)가 2년 동안의 준비 끝에 내놓은 김규식 전집은 ‘항일독립투쟁과 좌우합작’‘남북협상-김규식의 길ㆍ김구의 길’‘몸으로 쓴통일독립운동사’등 우사의 삶과 사상을 다룬 3권과 영문시집 ‘양자유경(揚子幽景,The Lure of the Yangtze)’, 그리고 우사의 비서를 지낸 경심(耕心)송남헌(86)의 일대기를 담은 ‘송남헌 회고록-김규식과 함께한 길’로 이뤄졌다. 1권은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와 심지연 경남대 교수가 썼고 2권은 서중석성균관대 교수가 집필을 맡았다.3권에는 송남헌 우사연구회장을 비롯해 김우종 전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당사(黨史)연구소장,김낙중 전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사무국장,김재철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 한국협회 농업전문위원,장은기 우사연구회 사무국장 등이 필자로 참여했다. ‘양자유경’은 황건 4월혁명연구소장이 편역했고,‘송남헌 회고록’은 심지연 교수가 송남헌의 구술과 자료를 토대로 적었다. 전집 내용 가운데 먼저 눈에 띄는 것은 2권에 나오는 우사와 백범 김구에대한 평가다.글을 쓴 서중석 교수는 1945년 이전 중국 관내(만주지역이 아닌산해관 안쪽)에서 활동한 것이나 1945년에서 1947년까지의 활동상을 놓고 볼때 민족 전체의 입장에서 우사와 백범중 누가 더 평가를 받아야 하느냐고 묻는다.서교수는 “해방 직후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해 친일파 처단을 역 설한 사람도,소작농 위주의 토지개혁을 촉구한 것도 우사였다”며 “백범은1947년 말까지만 놓고 보면 우사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강조한다. ‘전승을 기념하여’라는 부제가 달린 우사의 장문영시 ‘양자유경’은 한세계주의자의 애국적 정열을 읽기에 충분하다.중국 중칭(重慶)에서 임시정부부주석으로 해방을 맞은 뒤 양쯔장(揚子江)을 따라 여행하며 전승의 기쁨을노래한 내용으로 91년 출간됐던 것을 손질해 다시 냈다. 중국 상하이 윌리엄즈대학 등에서 영어교수로 재직하며 셰익스피어 권위자로명성을 얻었던 우사의 영어 솜씨와 중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엿볼 수 있다. ‘송남헌 회고록’은 또 다른 창으로 들여다본 우사의 전기이자 우리 현대사의 축소판이다.우사의 비서실장으로 평양의 남북 요인회담에도 참석했던송남헌은 ‘살아있는 정치사전’으로 불리는 인물.민족의 자주와 통일을 위해 헌신해왔으며 혁신계 정치인으로 활약하며 고초를 겪기도 했다. 우사 서거 50주년을 앞두고 출간된 이 전집은 그동안 정치적 또는 이념적인이유로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우사의 사상을 재정립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자못 크다. 김종면기자 jmkim@
  • 백범기념관 건립위 윤경빈 위원장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민족혼을 일깨우는 일은 ‘제2의 광복운동’입니다” 2일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된 윤경빈(尹慶彬·81) 대한광복회장은 “김구(金九) 선생의 업적을 기림으로써 국민들의 애국애족 정신을고취시키고 나라 발전의 정신적 밑거름으로 삼게 돼 남다른 감회를 느낀다”고 말하고 선생의 기념관건립 조성 사업이 서거 51주기를 기려 의미가 크다고 설명했다. “모처럼 찾아든 남북간의 대화분위기가 결실을 맺고 있는 길목에서 선생의 기념관 건립이 추진돼 더욱 뜻이 깊다”고 전제한 윤 위원장은 “이는 곧나라의 독립과 국민통합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백범사상을 구현하는 길”이라고 말했다.윤 위원장은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모든 국민들이 한 마음으로뛰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개인의 꿈을 꾸준히 살리며 당당한 자세로 살아가는 요즈음의 세대를 볼때 민족의 장래는 더 한층 밝아졌다”고 윤위원장은 활짝 웃는다. 백범기념관은 서울 효창공원 테니스장 일대 3,500평 부지에 150억원을 들여 연면적 1,600평 규모의 3층짜리 건물로 2002년 12월 완공될 예정이다. 평안남도 중화 출신인 윤 위원장은 일본 메이지대 법학부 재학 중 학도병에 징집됐으나 고 장준하(張俊河) 선생과 함께 탈출해 중경 임시정부의 광복군에 입대,항일독립운동에 투신했다.임시정부에서는 경위대장,광복군 총사령관 부관 등을 역임하며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백범선생을 보좌하다 광복 후김구 선생을 수행,환국했으며 독립유공자협회장 등을 거쳐 지난해 1월 임기4년의 광복회장에 임명됐다. 송한수기자 onekor@
  • [김삼웅 칼럼] 박정희기념관 아닌 국가자료관을

    결론부터 말해서 정부의 박정희기념관 건립 지원문제는 유보하는 것이 옳다.일반 정치사안이나 정책문제는 때에 따라 정부의 입장과 일관성 때문에 강행이 불가피한 경우도 없지 않겠지만 박정희기념관건립문제와 같은 역사적사안은 국민여론과 먼 미래를 내다보면서 신중하게 결정하고 일단 결정했더라도 국민의 뜻이 아니라면 재고하거나 취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박전대통령기념관 건립문제는 현안이나 정책문제가 아니다.이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적 관점에서 100년 200년을 내다보고 결정해야 하는 역사문제다.정부의 발표와 함께 찬반론이 활발하고 다수의견은 불가쪽으로 잡힌 것같다.찬반론의 쟁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먼저 찬성론이다. 1)국민화합론-영호남의 지역주의가 갈수록 심각해지는 상태에서 영남을 상징하는 박정희기념관을 호남을 상징하는 김대중대통령정부가 건립함으로써 국민 화합을 모색할 수 있다. 2)민주화·근대화세력의 접합-박전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화세력과 김대통령을 핵심으로 하는 민주화세력이, 남북화해 협력시대가본격적으로 열리는 시점에서 기념관건립을 계기로 새로운 통일시대에 대처하게 된다. 3)보복정치의 단절-박전대통령으로부터 온갖 정치적 보복과 탄압을 받아온김대통령이 이를 용서하고 화해하는, 정치보복 단절의 계기가 된다. 4)정치적인 억압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근대화정책의 성공으로 국민에게 ‘잘살아보자”는 의욕을 고취시키고 산업화를 일으켜 근대국가로 도약한 박전대통령의 각종 자료를 모아 기념할 만하다.또 후발 국가들의 교육기관으로도활용가치는 충분하다. 다음에는 반대론을 들어보자. 1)일본군으로 복역하면서 항일군에게 총질을 하는 민족반역의 전력은 결코용납될 수 없다. 2)군사쿠데타로 합법정권을 타도하고 장기군사정권을 수립하여 정보정치·폭압통치로 민주주의를 짓밟은 독재자다. 3)지역차별을 통해 지역갈등을 조성하고 지역주의를 심화시켰다. 4)영구집권을 위해 유신체제를 만들고 장준하, 최종길, 인혁당사건 등 수많은 사람을 살해·처형했다.아직 유신피해자의 진상규명도 배상도 안된 상태이다. 5)백범김구선생 기념관 건립에 100억원을 지원하면서 박정희기념관 건립에 200억원을 지원한다는 것은 비중이나 국민정서에 역행된다. 6)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월드컵경기장주변에 조성되는 공원에 특정인의 기념관을 세우겠다는 것은 과학과 미래를 상징하는 그 지역의 특성상 부합되지않는다. 7)경제발전이라는 결과 때문에 독재자의 기념관을 세운다면 국민의 가치관이나 2세교육의 목표와도 모순된다. 8)역사적 문제를 동서화합 차원에서 접근해서는 안된다.역사문제는 역사차원에서 다뤄야 한다. 9)개혁과 민주주의 인권 그리고 남북화해협력을 국정의 기조로 하는 ‘국민의 정부’의 정체성에도 위배된다. 이처럼 찬반론이 치열하고 각기 주장에 있어서 명분과 논리가 충분하다. 때문에 접합점을 찾기도 쉽지 않다.그렇다면 이를 유보하고 대안을 찾는 방법이 나을 것이다. 우리는 일제시대 임시정부를 지키면서 온생애를 항일독립운동에 바치고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헌신하다가 암살된 백범김구선생의 기념관을 이제야 시작했다.사후 50년 만의 일이다.그런데 그와 크게 대칭되는 박전대통령의 기념관을 사후 20여년밖에 안되는 시점에서 정부가 조급하게 서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아직 의병기념관도, 민주화운동기념관 하나도 짓지 못한 실정이다. 어려운 국가예산 관계로 선후를 가려 역사적 안목으로 기념관이나 자료관을지어야 할 것이다.박정희기념관은 좀더 역사적 평가를 지켜보면서 국민의 공감대가 넓어질 때 지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정부는 박정희 기념관건립을 유보하고 대신 역대 대통령의 자료관을 지어그 안에 박전대통령의 각종 자료와 기록을 보존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다른 전직대통령과의 형평성과도 부합된다. 파리에 있는 나폴레옹의 묘비가 백면(白面)인 채 무명(無銘)인 것은 최대의찬사와 극악의 저주를 똑같이 용납할 수 있는 프랑스인들의 양식이다.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없을까. 김삼웅 주필 kim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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