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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범 김구
    2026-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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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플 하나가 생명 살리고 나라 구합니다”

    “선플 하나가 생명 살리고 나라 구합니다”

    “선플(선한 댓글) 하나가 생명을 구하고 나라를 구합니다. 저 혼자 받는 훈장이 아니고 선플 달기에 동참했던 초등학생, 중학생, 대학생과 젊은이들이 다같이 받는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선플 SNS’ 기자단 새달 9일 발대 14일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열린 제24회 정보문화의 달 기념식에서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은 민병철(건국대 교수) ㈔선플달기운동본부 이사장은 자신의 공로를 애써 낮췄다. 정보문화의 달인 6월을 맞아 행정안전부와 한국정보화진흥원이 주최한 기념식에서 시민실천 캠페인 공로를 인정받은 그는 훈장 주인공 네 명 중 한 명이었다. 민 이사장은 “인터넷은 이제 별세계가 아니고 젊은이들에겐 일상과 똑같은 세상”이라면서 “악성댓글이 소중한 생명을 잃게 할 수도 있지만 선플은 생명을 살리고 나아가 나라도 살린다.”고 강조했다. 그는 2007년 악성 댓글에 시달리다 자살한 가수 유니의 일을 계기로 운동본부를 꾸려 인터넷 문화 바로잡기 전도사로 나섰다. 최근 그는 선플달기 업그레이드판인 ‘선플 SNS’ 기자단을 준비 중이다. 발대식은 다음달 9일 열린다. 민 이사장은 “송지선 아나운서 자살을 계기로 트위터 같은 소셜 네트워크에서의 선플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부각되고 있다.”고 기자단 출범 배경을 설명했다. 전국에서 학생 300여명이 자원한 가운데 1만명까지 늘려갈 계획이다. 선플운동 홈페이지(http://www.sunfull.or.kr)의 게시판글과 선플문자 보내기로 달린 ‘착한 댓글’도 13일 현재 132만 2000건을 기록했다. 그는 “올해 안에 200만개 돌파가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면서 “이를 넘어서 대한민국에서 1000만개의 선플, 아시아 전체에서 1억개의 선플을 다는 게 제 목표”라고 덧붙였다. ●‘선플기부 캠페인’ 적립금 4000만원 넘어 선플을 달 때마다 10원씩 모아 선플을 많이 다는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는 ‘선플기부 캠페인’ 적립금도 4000만원을 넘어섰다. 캠페인 덕에 가족 간 우애도 더 돈독해졌다고 한다. 그는 “SBS 아나운서인 며느리와 하루에도 몇 번씩 주고받는 휴대전화 문자, 손녀 사진도 선플이 주는 기쁨”이라며 자랑을 잊지 않았다. “며느리가 ‘아버님, 오늘 방송에서 옷이 잘 어울리셨다’고 문자를 보내면 저도 ‘너도 멋지다’고 답해준다.”며 웃음 지었다. 민 이사장은 “건전한 비판을 담은 선플이 악성 댓글을 대체하는 그날까지 운동을 계속하겠다.”고 다짐했다. 한편 행정안전부는 이날부터 용산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정보소외계층을 위한 정보화 제전을 개최하는 등 한 달간 다양한 정보문화 행사를 개최한다. 이재연기자 oscal@seoul.co.kr
  • “시대의 지성 김준엽 선생의 영면 기원”

    “시대의 지성 김준엽 선생의 영면 기원”

    “영원한 ‘시대의 지성’ 고(故) 김준엽 선생의 영면을 기원합니다.” 8일 광복군 출신으로 고려대 총장을 지낸 김준엽 사회과학원 이사장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안암동 고대안암병원 장례식장에는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각계각층 주요 인사들의 발길이 이틀째 끊이지 않았다. 고인의 광복회 시절 사진들이 놓여 있는 빈소에는 이명박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등 각계 단체와 인사들이 조화를 보내 고인의 업적을 기렸다. 빈소에는 아침 일찍부터 이홍구 전 국무총리와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김신 백범김구기념사업회장 등 김 전 총장과 생전 각별했던 인사들이 찾아와 고인의 마지막 자리를 지켰다. 이 전 총리는 고인을 ‘존경스러운 광복군 출신 리더’로 돌이켰다. 그는 김 전 총장에 대해 “해방 후 한국 내에 일제의 영향이 남아 있던 시절 후배들이 우리나라의 독자적 발전 방안을 고민하도록 독려하셨다.”면서 “학자로서 민족적 긍지를 갖고 매사 주도적으로 나서신 분”이라고 평가했다. 이 전 총리는 “김준엽 선생 덕분에 한국에서 사회과학의 기틀을 제대로 다질 수 있었으며 70년대 북한에 대한 연구가 쉽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공산권연구회를 만드는 등 통일문제에 일찍이 눈뜬 선구자였다.”면서 “90년대와 2000년대에는 중국통에 머물지 않고 직접 중국 주요 각지에 한국학 연구를 널리 전파하신 분”이라고 덧붙였다. 강 교수는 “김 전 총장은 우리나라 최고의 중국통으로 중국에서도 존경받는 분”이라면서 “학문적으로뿐 아니라 국제관계에도 큰 공적을 쌓은 분인데 뒤를 이을 후학이 어서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전날 밤에는 현인택 통일부 장관, 한승수 전 국무총리, 임종인 전 국회의원, 어윤대 KB금융지주 회장, 장호권 사상계 대표이사 등이 빈소를 다녀갔다. 김 전 총장의 장례는 가족장으로 4일간 치러진다. 영결식은 10일 오전 8시, 발인은 오전 9시이다.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이다. 김소라기자 sora@seoul.co.kr
  • “종교간 벽 허물어야 진정한 화합”

    “종교간 벽 허물어야 진정한 화합”

    사회통합위원회는 17일 기독교와 천주교, 원불교, 유교, 천도교, 민족 종교 등 우리나라 7대 종단의 대표 인사들을 초청한 가운데 ‘상생을 위한 7대 종교 간 대화’ 토론회를 열었다. 현 정부 들어 각종 국책사업 추진 과정에서 종교계와의 마찰로 소통 부재의 문제가 지적돼 온 점을 감안해 사회 갈등을 해소하고 종교 간 화합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토론회에 참석한 종단 대표 인사들은 현대의 다종교 사회에서 폐쇄성과 벽을 허물어야 진정한 대화와 화합이 이뤄진다는 점을 강조했다. 길희성 서강대 명예교수는 기조 강연을 통해 “다종교 사회의 종교 간 대화는 종교 사이의 대화뿐 아니라 민주사회를 떠받치는 근본 정신과 대화가 돼야 한다.”면서 “일부 개신교 신자들이 보인 몰지각한 행위는 바로 이러한 덕목이 아직 내면화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정배 감리교신학대 교수는 “백범 김구 선생은 유교인이었으나 동학의 접주가 됐고, 불교 승려로 살기도 했지만 기독교인이 돼 신학문적으로 애국의 길을 도모했다.”면서 “한 종교만 알았던 백범 당시의 지도자뿐 아니라 오늘 우리의 지도자와 견줘 볼 때도 크기와 정당성에 있어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동국대 불교대학원 교수인 정각 스님은 최근 한 기독교 행사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무릎을 꿇도록 한 것과 기독교의 ‘이슬람 채권법’ 반대를 언급하며 “종교와 정치가 밀착해 사회 통합 내지 종교 화해에 부정적 역할을 했다.”고 비판했다. 김성수기자 sskim@seoul.co.kr
  • ‘백범 손자’ 김양 전 보훈처장 이트레이드證 감사위원으로

    ‘백범 손자’ 김양 전 보훈처장 이트레이드證 감사위원으로

    백범 김구의 손자인 김양(58) 전 국가보훈처장이 비리로 얼룩진 금융권의 감사위원으로 발탁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트레이드증권은 13일 감사 업무의 독립성을 강화하고자 상근감사직을 폐지하고 김양 전 보훈처장 등 3명의 사외이사로 구성된 감사위원회를 설치한다고 밝혔다. 이는 부산저축은행 사태 이후 금감원 출신 감사의 ‘낙하산 관행’을 차단하려는 조치로 증권업계에서는 처음이다. 이트레이드증권 측은 “감사 업무의 독립성을 유지하고자 감사위원회를 처음으로 구성했다.”며 “금융권 회계 감사 등에 전문능력을 갖춘 김 위원이 기업의 투명성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판단해 영입했다.”고 밝혔다. 오달란기자 dallan@seoul.co.kr
  • [5·16 50년] 한국현대사학회 ‘좌파학자’ 도진순·김명섭 교수 인터뷰

    [5·16 50년] 한국현대사학회 ‘좌파학자’ 도진순·김명섭 교수 인터뷰

    출범을 앞둔 한국현대사학회가 자랑거리로 내세우는 특징 중 하나가 ‘외연 확장’이다. 우익뿐 아니라 중도, 좌파 학자까지 참여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내세우는 학자가 도진순(왼쪽·52) 창원대 역사학과 교수와 김명섭(오른쪽·49)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다. 도 교수는 백범 김구의 입장에서 현대사를 조망하는 한국 현대사 1호 박사이고, 김 교수는 ‘해방전후사의 인식’(‘해전사’) 필진 중 한 사람이다. 이승만 정권 재평가를 시도하는 우익 진영은 대척점에 놓인 백범 중심의 역사관을 불편하게 여긴다. 이들 눈에 비친 백범은 ‘해방 직후 국제 정세를 제대로 보지 못한 이상주의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대학가에서 널리 읽힌 ‘해전사’는 우익 진영이 오늘날 역사 교과서의 좌편향을 초래한 주범이라고 집중 성토한 대상이다. 반박 성격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을 내놓기까지 했다. 그 중심에 있는 두 사람이 현대사학회에 이름을 올렸으니 시선이 쏠릴 만하다. 도 교수와 김 교수는 서울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다양한 시각에서 입체적으로 한국사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고 국사학계 중심의 동종 교배적인 연구 틀에서 벗어날 필요성은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학회 성격이나 활동 내용에 대해서는 명백히 선을 그었다. 중국 베이징에 교환교수로 나가 있는 도 교수는 “(좌나 우) 경향성 없는 연구를 하겠다며 내 이름을 (발기인 명단에) 올리겠다고 해 수락한 것인데 일부 보수 언론의 기사 등을 보면 특정 방향성을 띤 것 같아 다소 경계되고 언짢다.”고 털어놓았다. 도 교수는 중국 체류 뒤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강의와 연구를 병행할 예정이라고 했다. 귀국은 1년 반 뒤에나 가능하다는 것. 따라서 “(현대사)학회 활동을 전면에 나서서 할 처지가 못 된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도 “한국의 현대사를 연구하는 학회가 아니라 현대사를 연구하는 한국의 학회라고 봤기 때문에 참여한 것”이라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역사 교과서 제작과 관련해서는 “아직 거기까지는 (참여를) 생각하지 않고 있다.”면서 “일단 (20일) 창립대회 때 주제 발표에 충실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의 발표 주제는 ‘한국 현대사 인식의 새로운 진보를 위한 성찰’이다. 제2의 교과서포럼으로 변질될지 모른다는 우려와 관련해 김 교수는 “학자들이 모인 단체라 그렇게 일방적으로 (방향성을) 몰아갈 순 없을 것”이라면서 “만약 그런 시도가 일어난다면 내부 토론이 치열하게 전개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홍보전문가 권오용씨 외교부 특강

    ‘홍보의 달인’ 권오용 SK그룹 PR어드바이저 사장이 15일 서울 도렴동 외교통상부 청사를 방문, 직원들을 상대로 문화 외교의 필요성과 국민과의 소통 강화를 주제로 특강을 했다. 외교부가 지난해 특채 파동에 이어 최근 ‘상하이 스캔들’, 자유무역협정(FTA) 번역 오류 등으로 실추된 이미지를 개선하고 홍보를 강화하려는 취지다. 그는 “그동안 세일즈 외교, 비즈니스 외교가 중심이 됐다면 이제는 품격을 높여 가치 외교로 나아가야 한다.”며 “백범 김구 선생이 주창했던 문화강국론의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외교부의 이미지 개선을 위해 국민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주문했다.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27) 공주 마곡사 ‘김구 향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27) 공주 마곡사 ‘김구 향나무’

    나무를 심는 데에는 까닭이 있다. 대개는 미래의 가치를 내다보며 나무를 심는다. 나무를 심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 나무의 물리적·정신적 혜택을 얻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빠르게 자라는 속성수(速成樹)도 최소한 한 세대는 넘겨야 사람의 소용에 닿을 만큼 자라게 마련이다. 열매나 목재를 쓰기 위한 실용적 이유가 아니라, 오래도록 기념해야 할 일이 있을 때에도 사람들은 나무를 심었다. 사람보다 더 오래 살아남아 사람의 뜻을 널리 전해 달라는 마음이 담긴 것이다. 옛날에만 그랬던 건 아니다. 여전히 삶의 중요한 고비 때 사람들은 나무를 심는다. 이른바 기념식수다. ●광복 직후 마곡사에 찾아와 손수 심어 민족의 미래를 위해 평생을 바친 백범 김구 선생도 채 이루지 못한 민족의 염원을 담아 나무를 심었다. 조국 해방을 위해 이역 타향을 떠돌던 그는 일제가 물러간 뒤 고국에 돌아와 충남 공주 마곡사를 찾았다. 마곡사는 선생이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일본군 장교를 살해하고 수감됐던 인천 감옥에서 탈옥해 숨어들었던 곳이다. 선생은 마곡사에서 원종이라는 법명으로 승려 생활을 했다. 광복 직후 마곡사를 찾았을 때의 느낌을 선생은 ‘백범일지’에 “48년 전에 중이 되어 굴갓 쓰고 염주 걸고 바랑 지고 출입하던 길로 좌우를 살펴보며 천천히 들어가니, 의구한 산천은 나를 반겨 주는 듯하다.”라고 썼다. 하룻밤을 마곡사에서 묵은 선생은 이튿날 아침 “영원히 잊지 않는다는 기념으로 무궁화 한 그루와 향나무 한 그루를 심고 마곡사를 떠났다.”(‘백범일지’ 하권에서) 1946년의 일이다. 27년 만에 조국에 돌아온 선생은 고향인 황해도 해주 땅을 찾지 못하는 아쉬움을 안고 ‘38선 이남 지방 순회’를 시작했다. 사형수로, 장기수로 두 차례 수감되었던 인천에 이어 찾아온 곳이 바로 마곡사였다. 그만큼 마곡사는 선생에게 의미가 깊은 곳이었다. 선생은 ‘영원히 잊지 않는다.’는 뜻으로 나무를 심었다고 했다. 조국 해방을 위해 싸워 온 그가 ‘영원히 잊지 않는다.’고 한 그것은 민족의 무궁한 번영과 평화가 아닌 다른 무엇일 수 없다. 그가 심은 한 그루의 무궁화는 지금 찾아볼 수 없다. 수명을 다하고 스러진 게다. 그러나 향나무 한 그루는 마곡사 대광보전과 응진전 사이의 양지바른 자리에서 도담도담 자라고 있다. 향나무를 처음 심은 1946년에는 이미 서너 해를 넘긴 묘목이었을 테니, 이 향나무의 나이는 올해로 65세를 조금 넘긴 셈이다. ●백범 명상길에서 체험 프로그램까지 개발 사람의 뜻을 향기에 실어 하늘 멀리까지 전한다는 향나무에 선생은 우리 모두가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할 민족 번영의 뜻을 담았다. 1000년을 사는 향나무라는 걸 감안하면, 아직 어린 향나무이지만 바라보는 느낌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일본과의 관계가 여전히 불편하기만 한 이즈음이어서 더 그렇다. 나이에 맞춤하게 나무는 경내의 여느 큰 나무에 비해 싱싱하다. 겨우 사람 키를 조금 넘은 2.5m 정도밖에 안 되는 아담한 크기이지만, 김구 선생의 손길을 닮아서인지 줄기는 옹골찬 기세로 뻗어 올랐다. 1m가 조금 넘는 곳까지 곧게 솟아오른 뒤, 나무는 사방으로 널찍이 가지를 펼치며 늘 푸른 잎을 돋아냈다. 70년이 채 안 되는 세월이지만, 이 어린 나무에게도 아픔이 없었던 건 아니다. 자리도 옮겼다. 선생이 처음 나무를 심은 자리는 마곡사 천왕문을 지나 큰법당으로 들어서기 위해 극락교를 건너 마주치는 범종각 맞은편이었다. “물이 많은 자리여서인지, 나무의 상태가 그리 안 좋았어요. 해마다 영양 주사를 놓으면서 보호해야 했지요. 그러다가 4년 전에 이 향나무를 더 잘 살리기 위해 좋은 자리를 골라 옮겼어요. 마침 김구 선생께서 우리 절에서 ‘원종’이라는 법명의 승려로 계실 때 머무르시던 요사채 옆이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던 거죠.” 남태규(43) 종무실장의 이야기다. 나무에만 정성을 들인 건 아니지 싶다. 2009년 가을부터 주석하는 주지 원혜 스님은 특히 승려로서 혹은 민족 지도자로서의 김구 선생이 남긴 자취를 살려 내고 민족혼을 고양하기 위해 적잖은 기획 행사를 진행했다. “우리 절에서 승려이셨던 김구 선생의 정신과 혼을 되살리는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죠. 이태 전 가을부터 원혜 스님께서 백범 기념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셨어요.” 마곡사 주변의 산책로에 ‘백범 명상길’이라고 이름 붙여 ‘충청의 올레길’로 널리 알리는 한편 백범 선생이 삭발례를 치르던 냇가 바위 주변에 알림판과 전망대를 설치하기도 했다. 올해에도 몇 가지 백범 관련 체험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뜻으로 살아남아 ‘춘마곡 추갑사’라 했다. 공주시 동남쪽의 계룡산 갑사가 가을에 아름다운 절이라면, 북서쪽의 마곡사는 봄볕 따스할 때에 더 좋다는 표현이다. 아직 마곡사의 봄은 무르익지 않았다. 봄이 더 깊어지면 마곡사 경내에는 하얀 목련이 줄지어 꽃을 피워 올릴 것이고, 법당 주위로는 벚나무·박태기나무·철쭉 등 온갖 꽃들이 화려하게 솟아오를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마곡사를 품어 안은 태화산 부근의 신록은 더 싱그러워질 것이다. 우리 강산에 찾아오는 봄의 아름다움을 더 오래 더 소중하게 지켜내야 하는 건 우리 모두의 의무일 뿐 아니라 60여년 전 백범 김구 선생이 ‘영원히 잊지 않겠다.’며 한 그루의 나무를 심은 뜻이기도 하다. 백범, 그는 갔지만 그가 심은 향나무 한 그루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이 자리를 지키며 당당하게 살아남을 것이다. 어린 나무 앞에 이리 오래 서서 눈을 맞추는 건 그래서 1000년 향나무를 바라보는 어떤 일보다 뜻깊을 수밖에 없다. 마침 지난 13일은 일제에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 위해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운 날이었다. 나무 앞에 서서 가만히 어제의 각오를 되새겨 본다. 글 사진 공주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567. 당진~상주 고속도로 마곡사 나들목을 이용하면 빠르게 갈 수 있다. 마곡사 나들목에서 1㎞를 채 못 간 곳에 사곡교차로가 있다. 우회전해 300m 가서 좌회전한다. 유구천을 건너 7㎞ 가면 마곡사 주차장이 나온다. 여기에서 1㎞ 남짓한 오솔길을 걸어가면 마곡사다. 나무는 조사전 앞에 있다.
  • 3·1운동 민족대표 김창준 목사 육필 회고록

    3·1운동 민족대표 김창준 목사 육필 회고록

    3·1 민족운동의 지도자이자 광복 뒤 북한에서 최고인민위원회 부의장을 지낸 김창준(1890~1959) 목사의 육필 회고록이 출간됐다.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은 1일 기독교사회주의자인 김 목사의 증언이 담긴 ‘기독교민족사회주의자 김창준 유고’를 출간했다고 밝혔다. 김 목사는 기독교계 대표로 3·1운동에 참가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명. 김 목사는 3·1운동 당시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평안도 지역에 이를 배포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맡았다. 이 때문에 수감된 뒤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한 김 목사는 기독교 사회주의자로 활동하다 광복을 맞았다. 이후 1948년 백범 김구 선생을 따라 남북협상을 위해 북한으로 건너간 뒤 북한에 남았고, 조선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부의장 등을 역임한 뒤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이 때문에 1919~1921년 수감기간 동안 옥중에서 보낸 29통의 각종 편지에는 독립운동에 대한 신념과 식모살이를 하면서 옥중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었던 아내 김창숙에 대한 미안함 등이 묻어나 있다. 또 3·1운동 기념사를 위해 1946년 2월에 작성한 46장 분량의 원고 ‘기미운동 후 금일까지의 경위’에는 광복 이후 자신의 정치적 견해가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민족대표 33인의 글 가운데 당시를 회고하는 내용을 담은 것은 이 글이 유일하다. 특히 이 원고에는 3·1운동 뒤 연행된 총독부 취조실에서 하루 세 차례씩 고문당하고 물도 없이 하루에 주먹밥 1개만 주는 바람에 10일 만에 18㎏이 빠져 버렸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경교장 복원, 내년 광복절 이전 완료

    경교장 복원, 내년 광복절 이전 완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인 경교장(조감도·사적 465호)에 대한 복원 공사는 내년 광복절 이전에 끝마칠 것으로 보인다. 서울시는 28일 사료와 지적도, 사진, 증언 등 고증을 거쳐 경교장을 원래 모습으로 복원하고 임시정부와 백범 김구 선생의 활동상 등을 보여 주는 전시공간으로 조성한다고 밝혔다. 1993년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청사 복원과 2001년 중칭, 2007년 항저우 청사 복원에 이은 마지막 복원 작업이다. 1939년 지상 2층 규모로 지어진 경교장은 백범이 광복 이후인 1945년 11월부터 암살당한 1949년 6월까지 집무실 겸 숙소로 쓰던 곳으로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로 사용됐다. 1967년 삼성재단에 팔려 강북삼성병원 건물로 사용된 뒤 2005년 2층의 백범 집무실이 기념실로 단장됐지만 1층 등 나머지 공간이 병원 약국이나 창고 등으로 쓰였다. 이 과정에서 건물의 많은 부분이 변형되거나 훼손되고 말았다. 서울시는 경교장의 원래 모습을 모형으로 제작, 효창동 백범기념관에 전시하기로 했다. ‘정부수반유적 블로그’(blog.daum.net/nationsuban)를 개설해 온라인으로 경교장에 대한 각종 문헌과 기사 등 자료를 검색하고 복원 과정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올해 광복절과 임시정부 환국일(11월 23일)에는 경교장 복원 현장을 시민들에게 공개하는 행사도 연다. 안건기 서울시 문화재과장은 “역사적 가치가 큰 소중한 문화자산을 살아 있는 역사교육의 장으로 만들겠다.”면서 “시민들의 다양한 제안을 복원 과정에 반영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김구 선생 증손자 김용만 씨 “4대째 나라위한 봉사는 당연”

    김구 선생 증손자 김용만 씨 “4대째 나라위한 봉사는 당연”

    194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에 선임된 백범 김구(1876∼1949) 선생은 일본으로부터 나라의 독립을 찾아오는 데 일생을 바쳤다. 하지만 남북한 통일의 꿈은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둘째 아들 김신 前공참총장 지내 그의 둘째 아들 김신(88) 전 공군참모총장은 우리 군의 공군 조종사로 6·25전쟁에 참전해 자유를 지켜냈다. 그는 1960년 8월 38살의 젊은 나이로 제6대 공군참모총장에 올라 우리 공군의 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김구 선생의 손자이자 김신 장군의 아들인 김양 국가보훈처장은 6·25전쟁이 끝날 무렵 태어났다. 그는 1979년 9월 공군 중위로 전역했다. 이후 방위산업에 몰두했다가 2005년 상하이 총영사를 시작으로 다시 국가에 봉사하는 삶을 시작했다. 2008년 국가보훈처장에 임명돼 우리 나라 독립역사를 쓴 분들과 6·25전쟁에서 자유를 지켜낸 영웅들, 국가를 위해 헌신한 이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위한 보훈정책의 최고 책임자로 근무하고 있다. 그리고 김구 선생이 세상을 떠난지 61년이 지나 그의 증손자도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길에 오른다. 김 처장의 아들 용만(24)씨가 그 주인공. 용만씨는 29일 공군 장교후보생 125기 임관식에서 소위로 첫 발을 내딛게 된다. 용만씨는 올해 5월 미국 조지워싱턴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귀국해 9월 공군 장교후보생으로 입대했다. 공군 교육사령부에서 3개월간의 교육을 끝내고 29일부터 3년간 정보장교로 근무하게 된다. 용만씨가 공군 장교로 임관하게 됨에 따라 할아버지 김신 장군과 아버지 김처장의 뒤를 이어 3대째 공군 장교의 길에 들어서게 됐다. 증조 할아버지 김구 선생과 함께 4대가 모두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셈이다. 진정한 위국헌신(爲國獻身) 명문가의 탄생이다. ●손자 김양 국가보훈처장 역임 방배중학교 2학년 시절 미국으로 유학길에 오른 용만씨는 2005년 미국 하와이 주 미드퍼시픽 중고교(Mid-Pacific Institute)를 졸업하며 거의 모든 과목에서 A학점을 받았다. 빈민층 지역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봉사활동에도 적극 참여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최우수 학생 표창장(Outstanding Academic Excellence Awards)을 받기도 했다. 용만 씨는 당시 “대학을 졸업한 뒤 공군 참모총장을 지낸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공군장교로 복무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앞으로 열심히 공부해 증조부께서 염원하셨던 민족 통일에 이바지하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19세 청년이 자신이 증조부에게 다짐한 약속을 모두 지킨 셈이다. 보훈처 관계자는 “대한민국의 큰 어른 김구 선생의 증손자이지만 나라를 위한 봉사가 너무나 당연하다는 가족들의 생각에 홍보계획조차 잡지 않았다.”고 전했다. 29일 임관식에는 김신 전 공군참모총장과 김 처장 등 가족들이 모두 참석할 예정이다.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충남 내년 ‘솔바람길’ 6곳 만든다

    내년에 충남에 트레킹코스 ‘솔바람길’이 6개 생긴다. 충남도는 제주 올레길 형태로 만드는 도내 트레킹코스 이름을 ‘솔바람길’로 통일했다. 도는 13일 모두 9억 6000만원을 들여 천안시 유량·안서동 태조산의 ‘태조산 솔바람길’ 5.2㎞와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의 ‘아라메 솔바람길’ 11.3㎞ 등 트레킹코스 6곳을 조성한다고 밝혔다. 논산시 부적면 충곡·신풍리 ‘계백의 혼이 살아 숨 쉬는 솔바람길’ 6㎞, 부여군 임천·세도면 ‘성흥산성 솔바람길’ 5.8㎞, 홍성군 구항면 내현리 ‘거북이마을 솔바람길’ 5.8㎞, 예산군 덕산면 사동·신평리 ‘온천과 함께하는 솔바람길’ 5.5㎞도 있다. 이곳에는 산책로가 깔끔히 정비되고, 벤치와 간이화장실, 관광안내판 등이 설치된다. 도는 지난 8월 도내 16개 시·군으로부터 솔바람길 개설 대상 코스를 신청받은 뒤 심사를 거쳐 6개 코스를 선정했다. 솔바람길을 확대한 것은 지난 5월 조계종 제6 교구 본사인 공주 사곡면 마곡사 뒷산 태화산(해발 423m) 기슭에 개설한 ‘마곡사 솔바람길’이 좋은 반응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백범 명상길’로 불리는 이곳은 김구 선생이 일본 장교를 척살하고 숨었던 곳으로, 김구 선생이 머리를 깎은 삭발터와 등산로 등이 개발돼 불교문화와 송림욕을 접할 수 있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관광객이 이전보다 30~40% 늘었다. 코스는 마곡사~김구 선생 토굴~군왕대 3㎞이다. 황대욱 도 관광산업과장은 “역사적 인물, 전설과 연관 있는 테마 길로 만드는 것이 특징으로 ‘솔바람길’ 이름을 특허청에 상표출원했다.”면서 “앞으로 시·군별로 1개 이상 솔바람길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대전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권력 앞 독야청청했던 리영희의 삶과 글

    권력 앞 독야청청했던 리영희의 삶과 글

    기자로서 펜을 빼앗겼지만, 그럴수록 진실을 토하는 사자후는 더욱 커져갔던 참언론인이었고, 강단 바깥으로 내쳐짐으로써 비로소 만인의 스승이 될 수 있었던 이였다. 야만과 광기가 몰아치던 시대의 한 줄기 등불 역할을 했던 이였다. 불이면서 또한 얼음이었고, 엄혹한 시절 많은 이들의 전위면서 또한 후방이었던 이였다. 무릇 평전이라는 것이 흔히 빠지는 오류가 ‘주례사식 찬사’다. 하지만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이 쓴 ‘리영희 평전’(책보세 펴냄)은 이러한 것들과 본질적으로 궤를 달리한다. 리영희라는 인물 자체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의 삶에서 흠결을 찾아내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엄혹한 시절이었기에, 오히려 조금만 타협했다면 남부럽지 않은 권력과 부를 누리는 삶도 가능했겠지만 그는 언론사와 대학에서 네 차례나 내쫓기는 삶을 회피하지 않았다. 또한 세계사적인 대변화의 시기, 외로운 섬처럼 고립된 한국사회의 미숙한 이성들에게 명징한 시대정신의 이정표를 제시했다. 펜을 앞세운 이성의 목소리는 물론 투쟁의 거리와 감옥도 그는 기꺼이 마주했다. 1989년 한국기자협회보에 남긴 그의 글은 당시에나 지금이나 후배 기자들의 얼굴을 새삼 홧홧거리게 만든다. ‘내게 신문지는 있어도 신문은 없었다. 신문지의 소식들은 하나같이 권력을 두둔하는 낡은 내용, 권력에 아부하는 구린내 나는 내용’이라면서 ‘그따위 신문종이를 만들어내는 신문인들이 감히 언론인을 참칭할 때 나는 그들을 언롱인(言弄人)이라는 호칭으로 경멸해 왔다.’고 호되게 질타한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도 마찬가지다. ‘모든 정부의 결정, 정책, 행동을 국가의 이름으로 대치해 놓고 그런 것에 대한 외부의 비판을 반박하는 것이 애국심이라고 직결해 버리는 사고방식이 과연 애국심이겠는가를 생각해 본다.’ 1970년 리영희 명예교수가 언론계를 향해 토해낸 사자후는 40년이 지난 지금의 기자들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한반도에 전쟁의 기운이 감돌고, 초강대국과 굴욕적인 외교 협상을 맺어도, 진실 찾기는 애써 외면한 채 그저 정부의 발표 중심으로 판단하고 그것을 국익으로 생각하는 기자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것이 리영희의 모습 전부는 아니다. 차가운 이성의 소유자인 듯싶은 이미지로 비쳐지지만 기자 시절 동료들과 놀러 가서 배갈을 잔뜩 마시고 보트를 타려다 물에 빠지거나 코트를 잃어버리고 돌아온 이야기며, 백범 김구의 암살범 안두희를 테러했던 생면부지의 의혈청년을 불러 저녁밥과 술을 사주며 의기를 칭찬했다는 일화 등은 그의 인간적 면모를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리영희의 정신을 일찌감치 몸으로 받아 실천한 후배 언론인이자 역사의 뒤안길에 묻힌 인물의 현재적 의미를 되살려내는 평전 작업에 매진해 오고 있는 김삼웅이기에 명쾌하고 엄정한 펜끝은 절로 리영희를 닮았다. 지난 8월 27일. 1시간 30분에 걸쳐 생애 마지막 인터뷰를 가진 것을 포함해 모두 150시간에 이르는 인터뷰를 진행했다. 또한 자서전 ‘역정’, ‘대화’ 등 그의 십수권에 이르는 저서를 모두 아울렀고, 그동안 리영희에 대해 각계각층에서 남긴 짧고 긴 글을 모두 모아 정리했다. 김삼웅은 리영희의 81세 생일이자 병세가 완연했던 지난 2일 서울 면목동 녹색병원을 찾아 책을 바쳤다. 김삼웅은 “평전을 쓰면서 솔직히 후회했다. 그의 청렬한 생애와 넓고 깊은 사유·지식의 세계를 가늠하는데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고 밝혔다. 리영희에 대한 김삼웅의 존경심이 뚝뚝 묻어난다. 하지만 필체는 이성을 가뜩 갖춘 ‘리영희체’다. 2만 8000원.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눈길 잡아끄는 문단·언론계 ‘인물론’

    글은 제 주인을 닮아간다. 그리고 글은 주인의 삶을 다 안다는 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찧고 까불며 혼자 노닌다. 그렇다면 글의 주인은? 그저 흐뭇한 웃음으로 제 글 노는 광경을 지켜볼 따름이다. 노(老)작가 최일남(78)이 내놓은 에세이집 ‘풍경의 깊이 사람의 깊이’(문학의문학 펴냄)는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넉넉한 시선을 느끼게 해주는 글로 채워져 있다. 여든을 앞둔 작가의 원숙한 시선이 느껴지는가 하면 젊은이 못지않은 재기발랄한 문체가 지면 위를 통통 튕겨 다닌다. 말 그대로 잡문(雜文)이다. 영어를 배우느라 절절맸던 유년의 추억, 유행가부터 가곡, 샹송, 팝송, 재즈, 민중가요까지 섭렵했던 노래와 얽힌 인연, 일본 문학사에 대한 일람 등이 느긋하면서도 해박하게 펼쳐진다. 하지만 박람강기를 천연덕스럽게 늘여놓는 와중에도 주제를 한줄로 꿰는 부분은 따로 있다. 바로 사람이다. 그와 수십년의 시간을 함께했던 이들에 대한 새삼스럽지만 정연한 인물론이 곁들여졌다. 언론계와 문단에서 자신과 인생의 굴곡을 직접 나눴던 최정호·김중배·조세형·김소운·하근찬·정운영·이규태·이시영·김윤식에 대한 것이다. 이 밖에도 자신의 결혼식 주례를 서줬던 일석 이희승 선생은 물론, 스스로 사숙했고 장례식 먼 발치에서나마 봤던 백범 김구의 두 가지 선비론에 대한 기억 등이 보태졌다. 최일남은 “애초에 작심한 건 아닌데 이번에는 사람들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역사가 공공의 재산이라면 개개인의 삶은 필경 사람에 대한 기억과 사연으로 점철되는 것이 아닐까.”라고 말했다. 후생가외(後生可畏)라 했지만 여든을 앞둔 노작가이자 원로 언론인인 그의 글은 젊은 후배들이 부끄러워할 정도로 여전히 해학이 넘쳐난다. 재기와 해학이 넘치다 못해 아예 발랄하다. 시인 곽효환의 헌시 ‘그리운 청년, 최일남’은 글과 삶 사이에 있는 최일남을 넌지시 내비쳐 절로 흐뭇한 웃음을 머금게 한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하버드대 이어 두번째

    중국 최고 명문 베이징대에 애국지사 백범 김구 선생의 이름을 내건 ‘김구포럼’이 개설됐다. 김구재단(이사장 김호연 한나라당 의원)은 베이징대 국제전략연구센터(명예 이사장 리자오싱 전 중국 외교부장)와 함께 베이징대에 김구포럼을 개설하고, 28일 첫번째 포럼을 열었다. 외국 유명대학에 김구포럼이 개설된 것은 2005년 미국 하버드대에 이어 두번째이다. 베이징대 김구포럼은 향후 동아시아 국제정치와 역사, 국제협력,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를 초청해 정례 세미나를 개최할 계획이다. 베이징 박홍환특파원 stinger@seoul.co.kr
  • [기고] 백범과 대한민국 경찰/홍원식 국립 경찰보안연수원 외래교수

    [기고] 백범과 대한민국 경찰/홍원식 국립 경찰보안연수원 외래교수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말지어다.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뒤에 오는 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산 역사인 백범 김구 주석은 서산대사가 지은 이 시를 친필 휘호로 써서 소중한 지인들에게 전하곤 하였다. 위기에 처한 국가 지도자로서, 짧고 간결하되 확고부동하게 함축된 공직관 또는 국가관을 이 시를 통해서 자각하고 전파하기 위함이었으리라. 경찰의 날인 오늘(21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경찰청장이었던 백범 선생의 경찰관(觀)을 본보기 삼아 살펴보고자 한다. 백범은 일본군 현역 장교를 명성황후 시해범으로 간주하고 맨손으로 처단하며 일약 전국적 명사가 되었다.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고종의 특사로 구사일생하여 안창호 선생 등과 교육계몽운동에 동참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게 된 백범은 학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창호 선생을 위시한 임정요인들은 백범을 임시정부 초대 행정자치부장관에 기용하고자 뜻을 모았으나 백범의 완강한 고사로 허사가 되었다. 백범이 끝내 고사한 행정자치부장관직은 안창호 선생 몫. 대신 백범은 자신보다 두살이나 아래인 안창호 선생의 강권에 의해 초대 경찰청장(경무국장)직을 맡았던 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경찰행정은 각별한 신뢰 속에서 구축된 안창호-김구 라인으로 임시정부의 대들보 역할을 해야 했다. 눈 덮인 광야를 걷듯 공직수행을 하며 백범이 가슴에 새겼던 좌우명은 선공후사(先公後私)! 산후조리를 못해 사랑하는 조강지처가 죽어가는 순간과 조금만 타협하면 얼마든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던 해방 후에는 물론, 안두희의 흉탄에 암살되는 최후의 순간까지 백범은 이 화두를 놓지 않았다. 국가 지도자로서 백범이 푯대로 삼았던 다른 하나는 ‘내가 곧 대한민국이다.’라는 국가관이었다. 국민은 자신이 처한 현안과 관련하여 마주하는 공직자를 통해서 국가의 실존을 확인하는 법이다. 개개 국민을 민원 현장에서 대하는 공직자들은 ‘내가 곧 대한민국이다.’라는 국가관을 가지고 민원인을 대해야 한다는 것이 백범의 확고한 공직관이었다. 그 덕분일까? 백범은 남북을 넘어 세계 한인 동포들의 가슴에 영원한 사표로 남아 있다. 묵묵히 소임을 다하고 있는 지배적 다수의 경찰관들에게 허탈감과 분노를 안겨주는 경찰관 비리 관련 기사가 끊이지 않고 있다. 경찰은 ‘국민의 존엄하고 행복한 삶과 재산 보호’라는 국가 기능을 그 어떤 공조직보다 맨 앞에서 수행하는 조직이다. 범인을 잡기 위해 출동하는 경찰관들은 물론 번화가에서 교통 수신호를 보내고 있는 교통경찰 한 사람 한 사람이 곧 ‘대한민국’인 것이다. 그러한 만큼 경찰에 대한 불신 또는 신뢰는 곧 국가에 대한 것으로 귀결된다. 이 시점에서 경찰 조직 수뇌부가 김구 선생의 공직관에 대한 창조적 재조명 작업과 온-오프라인 교육을 병행함으로써 경찰 조직 내부의 자존감과 국민적 신뢰를 함께 끌어올리는 계기로 삼으면 어떨까? 이러한 가운데서 경찰에 대한 처우 증진과 양질의 인력 확보를 위한 경찰관 채용 제도의 개편이 뒤따른다면 더 좋을 것임은 물론이다.
  • [보고 듣고 즐기세요] 미술·전시

    ●책을 건네다 -저자 서명본전 2 12월31일까지 서울 구기동 삼성출판박물관. 백범 김구 선생이 윤봉길 의사 장남에게 증정한 ‘백범일지’ 등 역사적 의미가 있는 서명본을 비롯, 김종규 삼성출판박물관장이 각계의 저자에게 받은 서명본 101권 전시. (02)394-6544. ●김소라 개인전 12월5일까지 서울 신사동 아뜰리에 에르메스. 2005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참여하는 등 국제 무대에서 주목받아온 작가가 숫자, 나무, 부표 같은 오브제를 통해 익숙하지만 낯선 풍경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02)544-7722. ●이은주·최시내 사진전 15~23일 경기 분당 성남아트센터미술관 별관. 여성 사진작가 이은주가 찍은 백남준의 사진과 이씨의 딸이자 사진가인 최시내가 찍은 발레리나 강수진의 사진 전시. (031)783-8000.
  • 박 前대통령 사저 새달초 복원

    박 前대통령 사저 새달초 복원

    서울시는 다음달부터 고(故) 박정희·최규하 전 대통령 가옥과 김구 선생의 집무실 겸 숙소였던 경교장 등 정부수반 유적의 복원공사를 시작한다고 4일 밝혔다. 서울 중구 신당동 62의43 박 전 대통령 가옥(등록문화재 412호)은 박 전 대통령이 육군 소장 시절인 1958~61년 가족과 함께 살았던 곳으로 대지 341㎡, 건물 139㎡의 단층건물이다. 이곳에서 5·16군사 쿠데타 당시 혁명공약과 각계에 보내는 호소문, 포고령 등이 작성됐다. 박 전 대통령이 장도영 당시 육군참모총장에게 군사정변을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는 친필서한이 걸려 있다. 시는 일부 훼손된 가옥 전체를 당시와 같은 모습으로 복원하고, 박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등이 썼던 책상·재봉틀 등 가구들도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재현할 방침이다. 마포구 서교동 467의5에 1972년 지어진 최 전 대통령 가옥(등록문화재 413호)도 고인의 생활 모습을 담은 전시공간으로 꾸밀 계획이다. 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마지막 청사인 종로구 평동 108의1 ‘경교장(사적 465호)’도 문화재청의 현상변경심의가 통과되는 대로 사업자를 선정해 다음달 초 공사를 시작할 방침이다. 경교장은 백범 김구 선생이 광복 이후인 1945년 11월부터 암살당한 1949년 6월까지 집무실 겸 숙소로 쓰던 곳으로 유명하다. 서울시 관계자는 “우리 격동의 현대사를 다음 세대에 알려줄 소중한 역사유산들”이라면서 “앞으로도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소중함을 알려 줄 역사적 현장들을 보존하는 데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책꽂이]

    ●iWAR(손영동 지음, 황금부엉이 펴냄) 지난해 겪은 디도스 대란은 사이버 테러의 심각성과 철저한 보안대책 마련의 필요성을 새삼 확인시켜 줬다. 책은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사이버전이 될 것이라고 단언하며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물론 기업과 개인이 준비해야 할 미래 사업의 방법, 인재 육성 방법 등을 제시한다. 가상 사례를 구체적으로 들어 광범위한 사이버 보안 이슈들을 풀어냈다. 1만 8000원. ●김구 전태일 박종철이 들려주는 현대사 이야기(함규진 지음, 철수와영희 펴냄) ‘역돌이’가 백범 할아버지, 태일이형, 종철이형과 가상 채팅과 이메일을 나누며 일제강점기부터 시작해 해방 전후, 분단과 전쟁 등 현대사까지 짚어 본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지내온 오욕의 세월, 아빠와 엄마가 지내온 격동의 과정들을 한국전쟁, 4·19, 5·18, 6월항쟁 등 주요 쟁점 중심으로 쉽고 일목요연하게 보여 준다. 1만원. ●중국사유(마르셀 그라네 지음, 유병태 옮김, 한길사 펴냄) 1934년에 씌어진 책이다. 인간과 우주의 연계를 도모함으로써 인간과 사회, 사회와 자연을 분리하지 않는 ‘중국사유’는 이성적 추론에 입각한 서구의 인식론적 비평체계와 다르다고 얘기한다. 서구에서 중국 연구의 대가로 꼽히는 그라네가 내놓았던 저서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문화에 드러난 문자와 언어, 숫자, 사상의 주개념들을 포괄적이며 유기적으로 정리했다. 3만 2000원. ●청소년을 위한 사랑과 성의 역사(루츠 판 다이크 지음, 전은경 옮김, 비룡소 펴냄) 사랑과 성. 쉬쉬하던 옛 시절과 달라져 온갖 정보와 자료들이 돌아다니고 있는 세상이 됐건만 여전히 대를 이어 가는 호기심, 시인·소설가의 깊이 있는 성찰과 탐구는 계속되고 있다. 폭력과 범죄의 수단으로 쓰이고 있음 또한 물론이다. 저자는 사랑과 성의 역사는 인간성의 역사라고 얘기하며 동서고금에 드러나 있는 사랑과 성의 역사를 인문학적으로 성찰하고 있다. 책의 결론은? 솔직한 드러냄 이상은 없다. 1만 6000원.
  • [경술국치 100년] 한·일 시민단체 의기투합 ‘미래 100년’ 물꼬 트다

    [경술국치 100년] 한·일 시민단체 의기투합 ‘미래 100년’ 물꼬 트다

    #장면1 지난 5월10일 오전 11시30분 한국의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와 일본 도쿄 일본교육회관은 각각 취재기자들과 방송 카메라로 북적댔다. 한국과 일본의 지식인 대표들은 “100년 전 한국과 일본이 맺은 병합조약은 불의부당한 만큼 무효다.”라는 내용의 공동선언문을 낭독했다. 한국에서 109명, 일본에서 105명이 서명에 참여했다. 이후 서명에 참여한 두 나라 지식인 숫자는 1000명을 훌쩍 넘어섰다. ‘불법’이라는 표현 앞에 망설이던 일본 지식인들도 적극 동참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무효 선언과 사과 담화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간 나오토 일본 총리에게 전달했다. #장면2 지식인 공동선언문이 나오기 몇 달 전, 언론에서는 크게 주목하지는 않았지만 무척 의미심장한 시민단체가 만들어졌다. ‘강제병합 100년 공동행동 한·일 실행위원회’다. 결성은 일본 시민들이 먼저였다. 올 1월31일 도쿄 와세다 봉사원에서 창립행사를 가졌다. 이들은 일본 사회의 왜곡된 과거사 인식, 식민주의 극복을 위한 일본 시민들의 역할 등을 둘러싸고 뜨거운 토론을 벌였다. 이후 ‘일본 실행위원회’는 일본 정부를 향해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수차례 벌였다. 그로부터 두 달 뒤인 3월 ‘한국 실행위원회’가 꾸려졌다. 부끄러운 과거’ 100년을 반성하고 ‘발전적인 미래’ 100년을 모색하기 위한 한·일 두 나라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지식인들이 주로 전자(前者)를 책임지고 있다면 후자를 위해서는 시민단체들이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다. 시민단체의 대표 격인 한·일 실행위원회는 을사늑약 체결일인 지난 22일부터 선포일인 29일까지를 ‘강제병합 100년 한·일 시민대회’ 기간으로 정했다. 22일 도쿄에서 개막식을 가졌고, 29일 서울에서 폐막식을 갖는다. 박한용 ‘강제병합 100년 공동행동 한·일 실행위원회’ 공동운영위원장은 “폐막식에서 식민지배 자체가 반인륜적 범죄임을 국제적으로 천명할 방침”이라며 “한·일 시민 공동선언문 외에 부속문서로서 한·일 시민행동 계획도 발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내년에는 한·일 시민 공동선언을 기초로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 공동선언을 끌어내는 한편 국제행동프로그램을 만들어 동아시아 시민연대조직도 구성할 작정이다. 해외에서도 동참한다. 일본이 벌인 전쟁에 강제 동원된 러시아 사할린 한인의 후예들은 29일 사할린에 모여 강제병합 100년의 의미를 되새기는 집회를 갖는다. 전쟁 뒤 방치한 일본의 법적·역사적 책임을 묻고 강제 동원에 대한 사과와 배상도 요구할 계획이다. 시민대회 기간 국내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 시위와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고찰하는 국제학술대회 등이 열렸다. 백범 김구 선생 유적지를 좇아 전국 1470㎞를 자전거로 순례하기도 했다. 국내 시민단체들로 구성된 ‘진실과 미래, 국치 100년사업 공동추진위원회’(이하 100추위)는 아시아 차세대 평화 리더들을 위한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100추위는 지난해 4월 30여개 단체로 출발해 116개 단체로 세를 불렸다. 12주 과정의 강좌는 두 나라 역사에 대한 실체적 접근과 함께 역사 속 평화의 의미, 시민들의 역할을 조명한다. 청소년들과의 공유도 모색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얼마 전에는 ‘100년 전의 한국사’라는 책도 펴냈다. ‘일본이 조선의 개혁을 원했다는데 사실일까?’ ‘갑오개혁 주인공들이 돌에 맞아 죽은 까닭은?’ ‘일본에 병합을 요청한 조선인은 누구인가?’ 등 지난 100년의 역사를 쉽고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문답식으로 풀어 썼다. 일반인은 물론 청소년들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교육현장의 역사 교사와 역사학자, 대학 교수 등이 함께 중요 질문을 발췌해 만들었다. 100추위는 지난해 8월 일본·타이완 등의 시민단체와 국제 합동워크숍을 가진 이래 ‘전쟁 없는 평화로운 국제관계’를 주제로 순회 전시회를 열고 있다. 서울, 도쿄, 오사카, 교토를 거쳐 중국 난징, 미국 워싱턴, 뉴욕, LA, 독일 베를린 등에서 전시를 가졌다. 원로 역사학자 이이화씨는 “지식인들의 학문적 연구와 더불어 한국과 일본, 두 나라 시민들부터 진정한 역사적 화해를 통해 국가 간 화해, 나아가 새로운 동아시아 공동체 질서의 출발점을 만들어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경술국치 100년]뮤지컬·특별전·순례로 부활한 3人의 우국충정

    [경술국치 100년]뮤지컬·특별전·순례로 부활한 3人의 우국충정

    한·일강제합병조약 체결 100주년인 올해는 일본의 식민통치를 거부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국민들에게 항일정신을 일깨운 수많은 우국지사의 100주기이기도 하다. 경북 안동·영양 일대는 어느 지역보다 많은 자정(自靖·자결)순국자를 배출했다.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아 단식으로 순사한 향산 이만도 선생과 그의 조카 이중언 선생, 또 향산의 제자로 동해 바다에 스스로 걸어들어가 도해(蹈海) 순국한 벽산 김도현 선생 등 세 분 의병장의 역사 현장을 찾아가 본다. 지금 안동은 향산과 이중언 선생을 기리는 분위기가 가득하다. 향산의 우국충정은 ‘락’이라는 뮤지컬로 만들어져 안동댐 민속촌의 동산서원에서 오는 10월까지 공연된다. 때 맞춰 한국고전번역원은 ‘향산집’ 7권 가운데 1권을 먼저 번역해 내놓았다. 이중언 선생은 국가보훈처가 주관하는 ‘8월의 독립운동가’로도 선정됐다.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는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안동선비’라는 주제로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보여주는 특별기획전을 새달 30일까지 갖는다. 1842년에 태어난 향산은 퇴계 이황의 후손이다. 1866년 대과에 장원급제한 그는 ‘선비로 나라에 일신을 바친 자는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부친의 당부를 실천에 옮겼다. 향산은 1876년 병자수호조약 체결을 반대하며 상소를 올린 면암 최익현 선생을 변호하다 파직됐고,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 1905년에는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합병조약이 맺어지자 단식 24일 만에 순국했다. 퇴계종가와 묘소가 있는 안동시 도산면 토계동에 있던 향산의 종가는 안동댐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이르자 1975년 안동시 안막동으로 옮겨졌다. 선생의 순국을 기리는 가장 중요한 기념물이라고 할 수 있는 유허비는 시내에서 자동차로 40분 남짓 걸리는 예안면 인계리 청구마을 앞에 자리잡았다. 유허비각 주변에는 자그마한 크기의 향산공원이 조성됐다. 1949년 세워졌다는 유허비의 앞면 글씨는 백범 김구가 썼고 뒷면의 추도사는 위당 정인보가 지었다. 향산과 한 마을에서 1850년 태어난 이중언 선생은 1879년 대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 등을 지냈으나 외세의 발호를 목격하고는 낙향했다.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예안의진(義陣)의 전방장으로 함창의 태봉전투를 이끌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외교권이 박탈되자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려 을사오적의 목을 베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향산과 다르지 않은 궤적이다. 그는 향산의 부음을 들은 10월10일 선조의 사당에 참배하고 단식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수많은 친지와 제자가 중단할 것을 권유했지만 선생은 ‘모두 부질없는 소리’라며 들으려 하지 않았다. 11월5일에는 순사가 찾아와 단식을 중단시키려 하자 “쫓아내지 않으면 내가 칼로 베겠다.”며 물리친 뒤 옷매무새를 정돈하고는 숨을 거두었다. 단식 27일 만이었다. 그는 가족들에게 봉서를 하나 남겼는데 ‘나의 갈 길은 사생취의(捨生取義), 목숨을 던져 의로움을 택하는 것뿐이다. 동포들이여 오직 힘쓰고 또 힘쓰라.’는 ‘경고문’이었다. 향산의 흔적을 찾는 것도 그랬지만, 영양유생 벽산의 자취를 찾아가는 길도 쉽지 않았다. 전국 곳곳의 작은 음식점까지 친절하게 안내해 주는 자동차 내비게이션도 순국지사의 유적은 철저히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벽산은 1852년 현재의 영양군 청기면 상청리에서 태어났다. 마을에선 1580년 처음 지어진 벽산의 생가와 1958년 세워진 유허비를 비롯하여 그의 흔적을 여럿 찾아볼 수 있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마을 뒷산의 검산성(劍山城)이다. 벽산이 사재를 털어 쌓은 것이다. 길이 200m 남짓에 불과하고 높이도 2m가 채 되지 않는다. 하지만 뒷편으로는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하천이 흘러 자연해자의 역할을 한다. 결코 간단치 않은 방어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벽산은 실천적이고 전투적이었다는 점에서 의병사에 특별한 족적을 남겼다. 그는 1896년 청량산에서 모병하여 8개월 동안 항쟁했고, 1906년에는 고종의 비밀명령을 받아 활동했으나 이듬해 2월 일본군에 체포되어 6개월 동안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의 구국활동은 무력항쟁에 그치지 않고 상소운동을 벌이거나 서양 각국의 공사관이 만국공법론에 의거해 포고문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는 등 외교론적 방법을 병행했다. 벽산은 병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상례가 모두 마무리되기를 기다려 1914년 영덕군 영해읍 대진 앞바다에서 순국한다. 동포들에게 충의로서 일제에 복수할 것을 강조하고 자신은 죽어서라도 기어이 왜를 멸망시키겠다는 내용의 글 ‘우리동포에게(與國內同胞)’는 순사 전날인 11월6일 새벽 반송정에서 남긴 것이다. 죽어서도 왜적으로부터 나라를 보호하겠다며 경주 감포 앞바다에 대왕암 수중릉에 묻혔다는 신라 문무왕의 염원과 닮은꼴이다. 벽산이 순국한 대진 산수암(汕水巖)에는 1971년 도해단(蹈海壇)이 세워졌고, 해마다 선생의 생일인 음력 7월14일 기념행사가 열린다. 산수암의 북쪽에는 대진해수욕장, 남쪽에는 대진항이 자리잡고 있다. 도해단을 찾아간 지난 23일에는 벽산의 96주기를 기념하는 ‘도해단 전례’가 있었다. 폭염경보가 내려진 35~36도의 뙤약볕 속에서 대구와 안동, 영양 등지에서 승용차며 전세버스를 타고 온 100여명의 사람들이 선생의 우국정신을 기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글 사진 안동·영양·영덕 서동철부국장 dcsu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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