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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양숙 여사, 민주당 신임 지도부에 “꽃 예쁘게 피울 때 오셨다”

    권양숙 여사, 민주당 신임 지도부에 “꽃 예쁘게 피울 때 오셨다”

    더불어민주당 신임 지도부가 6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하고 권양숙 여사를 방문했다. 송영길 대표와 5명의 최고위원(김용민 강병원 백혜련 김영배 전혜숙)은 이날 오전 봉하마을을 방문, 노 전 대통령 묘소에 헌화하고 분향했다. 송 대표는 방명록에 “大鵬逆風飛 生魚逆水泳(대붕역풍비 생어역수영).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날고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을 거슬러 오른다”라고 적고는 “대통령님의 말씀을 새겨 민주당을 살아있는 당으로 발전시키겠다”고 적었다. ‘대붕역풍비 생어역수영’은 백범 김구 선생의 어록 중 하나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1992년 14대 총선 당시 부산에 출마하며 사용한 선거 구호다.송 대표는 최고위원 시절 “함께 꿈을 꾸면 꿈이 현실이 됩니다”라고 적은 박석 앞에서 무릎을 꿇은 뒤 자신이 과거에 자주 쓰던 문구라고 회상했다. 당 지도부는 참배를 마친 뒤 권양숙 여사를 예방했다. 이 자리에는 김경수 경남지사도 참석했다. 권양숙 여사는 “꽃이 예쁘게 피웠을 때 지도부가 방문해줬다”는 말로 신임 지도부에 당선 축하 인사를 건넸다고 고용진 수석대변인이 전했다.이에 송 대표는 “2008년 정세균 대표 시절, 수석 최고위원으로서 김민석 차석 최고위원, 안희정 전 충남지사 등과 대통령 내외를 뵀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김 지사는 “송영길 대표가 대한민국 전통대로 삼세판에 당 대표가 됐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봉하마을 방문에는 윤관석 사무총장, 이용빈 대변인 등 신임 당직자와 이 지역 국회의원인 김정호 의원도 동행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한국은 내 고향”… 200번째 특별귀화자 탄생

    “한국은 내 고향”… 200번째 특별귀화자 탄생

    “형제의 나라인 터키와 한국의 경제 교류를 위해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저의 조국이고 고향인 한국 발전에 기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1일 오전 정부과천청사 법무부 대강당 단상에 새롭게 한국 국적을 취득한 9명의 특별귀화자들이 올랐다. 이들은 저마다의 영역에서 뛰어난 능력으로 활약 중인 ‘외국인’으로, 정부가 시행 중인 ‘우수인재 특별귀화제도’를 통해 이날부터 ‘한국인’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제도 시행 10년 만에 200번째 특별귀화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LG CNS에서 근무하는 토프락 웨이스(45·터키)씨는 “21년간 한국에 살면서 한국과 터키와의 협력, 투자유치에 노력했다”며 “앞으로도 에너지·환경 분야 발전에 더욱 기여하고 싶다”고 한국 국적 획득 소감을 밝혔다. 팜득두옹(46·베트남) 울산대 의대 교수는 “2008년 유학생으로 입국해 현재까지 한국에 살면서 한국과 베트남 의학 발전에 기여했다”며 “앞으로도 한국 국민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모범이 되는 삶을 살겠다”고 말했다. 이 밖에 바이오헬스 분야에서 민성춘(39·중국) 이화여대 연구교수, 물리화학 분야에서 에브라힘 나저드(42·이란) 서울대 연구교수 등도 국적심의위원회 심의 등을 거쳐 특별귀화를 허가받았다. 국적회복허가자 중 특별귀화 대상자 5명도 국적증서를 받았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은 “백범 김구 선생이 ‘산고를 겪어야 새 생명이 태어나고 꽃샘추위를 겪어야 봄이 오며 어둠이 지나야 새벽이 온다’고 했던 것처럼 외국인 신분으로 낯선 대한민국 땅에서 각고의 노력으로 탁월한 성과를 인정받아 국적을 취득한 것을 축하한다”고 격려했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 “김원웅 회장, 정치 편향 안 돼” 멱살잡이한 독립운동가 손자

    “김원웅 회장, 정치 편향 안 돼” 멱살잡이한 독립운동가 손자

    김원웅 광복회장이 11일 제102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식에서 한 광복회원에게 멱살잡이를 당하며 항의를 받는 소동이 벌어졌다. 국가보훈처 관계자에 따르면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 야외광장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기념사 이후 기념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김임용 회원이 갑자기 김 회장에게 다가가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옆에 있던 황기철 보훈처장 등이 말리고 김 회원이 끌려 나가면서 상황은 종료됐다. 김 회원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장 등을 역임한 김붕준(1888~1950) 선생의 손자다. 이날 기념식에서 사용된 임시의정원 태극기는 김 선생이 부인 노영재 선생과 함께 제작한 것이다. 노 선생 역시 독립운동을 지원한 공로로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김 회원은 김 회장이 정치적으로 편향됐다는 이유로 불만을 품은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김 회장은 지난해 광복절 축사에서 ‘친일 청산’, ‘친일파 국립현충원 파묘’ 등을 주장해 보혁 갈등을 불러온 바 있다. 또한 김 회장은 지난 1월 추미애 당시 법무부 장관에게 ‘독립운동가 최재형상’을 수여했는데, 최재형 선생 기념사업회와 협의를 하지 않아 논란을 일으켰다. 이처럼 김 회장의 정치적 발언과 행보에 일부 회원이 반발하면서 광복회의 내홍도 이어지는 모습이다. 지난 6일에는 일부 회원이 김 회장 집무실을 항의 방문하기도 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서울포토] 독립지사 유족에게 멱살잡힌 김원웅 광복회장

    [서울포토] 독립지사 유족에게 멱살잡힌 김원웅 광복회장

    11일 오전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 야외광장에서 열린 제102주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기념식에서 김원웅 광복회장의 멱살을 잡는 등 거친 항의를 하는 김임용 광복회 회원을 관계자들이 저지하고 있다. 2021. 4. 11 국회사진기자단
  • [서울포토] 김원웅 광복회장 멱살 잡은 독립지사 유족

    [서울포토] 김원웅 광복회장 멱살 잡은 독립지사 유족

    11일 오전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 야외광장에서 열린 제102주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기념식에서 김원웅 광복회장의 멱살을 잡는 등 거친 항의를 하는 김임용 광복회 회원을 관계자들이 저지하고 있다. 2021. 4. 11 국회사진기자단
  • [서울포토] 임정수립 기념식서 ‘멱살잡이’

    [서울포토] 임정수립 기념식서 ‘멱살잡이’

    11일 오전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 야외광장에서 열린 제102주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기념식에서 관계자들이 김원웅 광복회장(왼쪽 한복)의 멱살을 잡은 독립지사 유족인 김임용씨(오른쪽 선글라스)를 제지하고 있다. 2021. 4. 11 국회사진기자단
  • ‘불멸의 위훈’ 유관순 추도 백범 친필 복원

    ‘불멸의 위훈’ 유관순 추도 백범 친필 복원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일인 4월 1일을 앞두고 유관순 열사의 의거와 죽음을 ‘불멸의 위훈’으로 기리며 백범 김구가 썼던 친필 추도사를 국가기록원이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국가기록원은 1947년 11월 27일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기념비 제막 때 헌정된 추도사 3건과 유관순 열사 기념관에서 소장하고 있던 자료 등 희귀 기록 4건(99매)을 복원했다고 31일 밝혔다. 이 가운데 김구 친필 추도사에는 “유관순 열사의 거룩한 의거와 숭고한 죽음은 일월같이 빛나고 빛나 천고 불멸의 위훈을 세운 것이다.…순국선열의 독립정신을 이어받아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달성하자”는 내용이 담겼다. 복원은 지난해 5월 유관순열사기념관에서 국가기록원에 지원을 요청해 지난 1~2월 2개월간 이뤄졌다.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 “K반도체 핵심축 부상…시민들과 ‘용인 백년대계’ 그릴 것”

    “K반도체 핵심축 부상…시민들과 ‘용인 백년대계’ 그릴 것”

    126만평 반도체 클러스터 국내 첫 조성일자리 1만 7000여개 창출 2024년 준공 내년부터 인구 100만 이상 특례시 지위 민원인 시각에서 보게 ‘현장 행정’ 강조‘신갈오거리 도시재생’ 균형발전에 도움난개발 오명 벗으려 ‘센트럴파크’ 추진백군기 경기 용인시장의 지난 3년은 숨 가쁘게 달려온 시간의 연속이었다. 2018년 민선 7기 시장으로 선택받은 이후 시민이 시정의 근본이 되는 새로운 변화의 큰 틀을 만들기 위해 매진했다. 특히 환경 및 경제 분야에서 적지 않은 성과를 냈다. 자연과 공존하는 조화로운 발전 기준을 정립하는 등 친환경 생태도시로 안착할 수 있는 토대를 다졌다. 난개발 도시라는 오명을 씻고 친환경 생태도시를 만들어 가기 위한 기반이 구축돼 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경제 분야에선 용인 반도체클러스터의 성공적 유치를 꼽을 수 있다. 국내 산업 지도를 바꿀 메가톤급 사업이 용인 원삼에 자리잡은 것이다. 백 시장은 “단순히 수도권 베드타운이 아닌 경제적 자립성을 갖춘 도시로 한 단계 성장하기 위해 꼭 필요한 기반시설이었다”고 강조한다. 이와 함께 백 시장은 기흥구 보정·마북 일대에 용인 플랫폼시티 건설을 본격 추진하는 등 시의 백년대계를 빈틈없이 그려 왔다. 31일 백 시장을 만나 그동안 이룬 성과와 앞으로 역점을 두고 추진할 사업이 무엇인지 들었다.-용인시가 K반도체 핵심축으로 떠오른다.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일원에 약 415만㎡(약 126만평) 규모의 용인 반도체클러스터가 조성된다. 국내 최초의 반도체 클러스터 산업단지로 용인시 100년 먹거리를 준비하는 대규모 사업이다. 2024년 준공을 목표로 행정 절차를 진행하고 있으며 10년간 무려 120조원이 투자된다. 주요 행정 절차를 마무리하고 토지 보상 절차에 착수해 이르면 하반기에 착공할 계획이다. 용인 반도체클러스터는 지난 23일 정부로부터 소부장 특화단지로 지정됐으며, 이에 발맞춰 ‘소부장 산업 생태계 육성 전략’을 추진 중이다. 반도체클러스터에는 2025년부터 4년 단위로 4개의 팹(Fab)이 건설되는데 총 1만 7000여개의 일자리가 창출될 것으로 예상한다. 이 모든 것들이 완성되면 용인시는 이천~용인~수원~평택~안성을 잇는 ‘K반도체 벨트’의 중심지로서 우리나라 경제를 견인하는 핵심축이 될 것으로 자부한다.” ●반도체 클러스터 120조 투자 하반기 착공 -내년부터 용인시 등 인구 100만명 이상 대도시에 특례시 지위를 준다. “지방자치법 전부 개정안이 32년 만에 개정되면서 용인시가 시 승격 25년 만에 특례시로 격상된다. 이제야 110만 대도시 체급에 걸맞은 옷을 입게 된다. 시 차원의 노력과 4개 특례시 공동 대응으로 110만 도시 규모에 걸맞은 재량권을 확보하는 게 최우선 과제다.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시민들과 소통하면서 광역시에 준하는 행정, 재정 권한을 확보해 나가고자 한다. 그동안 시는 인구가 광역시급으로 성장했음에도 인구 5만 이상의 기초자치단체와 같은 제도를 적용받는 역차별을 받고 있었다. 이를 없애고 행정·상하수도·복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구 규모에 걸맞은 행정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특례시로 가기 위한 로드맵은. “지난 1월부터 특례 사무 발굴과 권한 확보에 공동 대응하기 위한 ‘특례시 출범 공동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정기회의를 갖고 있다. 지난 2월에는 4개 특례시의 시장, 국회의원, 시의회 의장들이 한자리에 모여 논의하는 자리를 갖기도 했다. 늦어도 4월에는 전국특례시시장협의회를 출범할 예정이다. 특례시 출범 TF는 용인, 수원, 고양, 창원시 등 4개 특례시의 로드맵을 공유하고 특례 발굴을 위한 공동 추진 방법, 간담회 개최 등을 논의하고 있다. 특례시시장협의회는 특례시 관련 권한 확보와 대정부 교섭 활동의 지렛대가 될 것이다.”●코로나로 무너진 민생경제 474억원 지원 -직원들에게 현장 행정을 강조하는 이유는. “모든 민원의 답은 현장에 있다. 단순하게 ‘민원인이 생겼구나’가 아닌 ‘민원인이 왜 이러한 민원을 제기했는지, 당사자가 얼마나 오랜 시간 불편함을 느껴 민원을 제기하는지’ 생각해 달라고 공직자들에게 당부해 왔다. 서면으로 보고를 받는 것과 현장에서 직접 확인하고, 현장의 어려움을 청취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듣고 느껴야 시민들이 겪는 어려움과 시민들에게 필요한 부분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고 찾지 못했던 대안도 모색할 수 있다. 앞으로도 시민들이 불편하다고 말씀하신 곳은 언제 어디든 수시로 방문해 불편을 예방하고 해결해 나가겠다.” -코로나19라는 유례없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성과를 기대하거나 집중하는 부문이 있다면. “올해 최대 현안이자 가장 집중하는 것은 민생경제다. 코로나19로 무너진 일상을 회복하고 지역 경제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어 시민들의 삶에 숨통을 트이게 하는 것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없다. 이를 위해 코로나 극복을 위한 제3차 용인시 경제 지원 대책을 마련해 474억원을 별도로 편성해 지원했다. 올해 예산안도 일자리를 창출하고 골목상권, 중소기업 지원을 강화해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고 시민들이 피부로 직접 느낄 수 있는 민생경제 회복을 목표로 편성했다. 일자리는 하반기에 입주하는 기흥 ICT밸리, 용인테크노밸리에서 1700개 등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될 것으로 예상한다. 공공부문 일자리도 용인형 일자리 사업을 비롯해 2만 72개를 계획한다.” -그동안 신구도심 균형 발전에 힘을 쏟았는데 신구도심 발전 전략은. “시민들 삶의 질 개선은 물론 원도심 활성화와 지역의 균형 발전을 위해 도시재생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는 시민 모두가 잘사는 용인시를 만들기 위한 필수 과제다. 가장 대표적인 사업이 신갈오거리 도시재생사업이다. 과거 신갈오거리는 ‘용인의 명동’으로 불릴 정도로 지역 상권의 중심지였으나 주요 관청의 이전과 인근 대규모 개발사업 등으로 인구와 기업이 빠져나가면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지난해 국토교통부 도시재생 뉴딜사업 대상지로 선정되면서 확보한 114억원의 국·도비를 포함해 총 484억원의 예산이 투입된다.”●‘110만 시민 모두가 시장’이 시정 원칙 -친환경 생태도시를 지향하고 공원 조성에 중점을 두는 이유는. “그동안 용인시는 ‘난개발 도시’라는 오명을 쓰고 있었다. 오명을 벗는 게 시민들의 간절한 염원이다. 취임 직후부터 무분별한 난개발로 인해 자연환경이 훼손되지 않도록 각종 조례나 규제 등을 정비해 제도적 기반을 마련한 것도 시민들의 바람에 전적으로 공감했기 때문이다. ‘친환경 생태도시’ 조성은 난개발을 방지하는 것과 동시에 개발로 인해 훼손된 자연을 시민의 품으로 돌려드리기 위해 추진하는 시의 핵심 사업이다. 57만 1253㎡ 규모로 구축하는 (가칭)용인센트럴파크는 마평동 종합운동장 부지의 평지형 도시공원, 포곡 경안천 도시숲, 모현 갈담 생태숲, 유방동 시민녹색쉼터 등을 모두 아우르는 대규모 녹지축이 될 것이다. 경안천을 따라 17㎞나 이어지는 이 녹지축은 자연스럽게 처인구의 도심으로 연결돼 시민들의 휴식 공간이 될 것이다.” -끝으로 시민들이게 한마디 한다면. “용인시민이 힘을 모아 주신 덕분에 지난해 전대미문의 코로나 팬데믹에도 많은 성과를 이뤄 냈다.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날고, 살아 있는 물고기는 물살을 거슬러 오른다’는 백범 김구 선생의 말씀처럼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열정으로 바람을 거스르고 물살을 거슬러 큰 결실을 맺었다. 혼자서는 불가능한 꿈이었겠지만, 시민 여러분이 함께해 주셨기에 가능했다. 이제 또 한번 거친 바람과 물살을 헤쳐 나가야 한다. ‘110만 시민 모두가 시장’이라는 시정 원칙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기고 현장에서 시민 한분 한분의 생생한 목소리에 귀 기울여 나가겠다.”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 스타벅스, 김구 선생 친필 휘호 기증

    스타벅스, 김구 선생 친필 휘호 기증

    스타벅스커피 코리아는 3·1절을 기념해 지난 5일 백범 김구 선생의 친필 휘호 ‘천하위공’(天下爲公)을 문화유산국민신탁에 기증했다고 7일 밝혔다. 김구 선생이 1948년 쓴 이 휘호는 ‘천하가 개인의 사사로운 소유물이 아니라 모든 이의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스타벅스는 이날 덕수궁 중명전에서 열린 휘호 전달식에서 3·1절과 광복절 기념상품 수익금으로 조성한 독립문화유산보호기금 1억원도 문화재청과 문화유산국민신탁에 기부했다. 송호섭 스타벅스 대표이사는 “대한민국 문화유산을 지키는 활동은 스타벅스의 사명을 실천하는 것”이라며 “모든 고객과 함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문화유산 보호를 위해 노력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스타벅스, 백범 김구 친필 휘호 기증…‘천하위공’ 의미

    스타벅스, 백범 김구 친필 휘호 기증…‘천하위공’ 의미

    스타벅스커피 코리아는 3·1절을 기념해 지난 5일 백범 김구 선생의 친필 휘호 ‘천하위공’(天下爲公)을 문화유산국민신탁에 기증했다고 7일 밝혔다. 이 휘호는 김구 선생이 1948년 쓴 것으로, ‘천하가 개인의 사사로운 소유물이 아니라 모든 이의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스타벅스는 3·1절과 광복절 기념상품 수익금으로 조성한 독립문화유산보호기금 1억원도 문화재청과 문화유산국민신탁에 기부했다. 문화재청과 스타벅스는 2009년 문화재 지킴이 협약을 맺고 다양한 문화재 보호 활동을 펼쳐왔다. 스타벅스는 앞서 백범 김구 선생과 도산 안창호 선생의 친필 휘호 유물을 기증한 바 있다. 송호섭 스타벅스 대표이사는 “대한민국 문화유산을 지키는 활동은 스타벅스의 사명을 실천하는 것”이라며 “모든 고객과 함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문화유산 보호를 위해 지속해서 노력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임정의 놓지못한 꿈 공군 건설… K전투기 ‘기술 독립’ 이끌다

    임정의 놓지못한 꿈 공군 건설… K전투기 ‘기술 독립’ 이끌다

    안창호·김구, 독립운동 위한 공군 추진노백린 장군, 美서 한인 비행학교 설립열악한 재정 등으로 1년 만에 문 닫아 ‘백의종군’ 최용덕, 광복 후 공군 창설변변한 전투기 1대 없이 치른 6·25전쟁 조종사 4인의 희생 후 첫 전투부대 꾸려백범 김구와 도산 안창호. 그리고 최용덕 장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광복을 꿈꾸던 그들에겐 하나의 소망이 있었습니다. 바로 ‘공군 건설’이었습니다. 임정은 공군의 힘으로 독립을 앞당길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꿈을 이루진 못했습니다. 공군 창군은 독립 뒤인 1949년 10월 1일 이뤄졌습니다. 또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변변한 전투기 1대 없이 6·25전쟁을 겪었습니다. 그런 고난이 밑거름이 돼 한국은 직접 전투기를 생산하는 공군 강국이 됐습니다. 4일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학술연구팀장으로 활동했던 홍선표 박사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군 건설 계획과 추진’ 논문에 따르면 상하이 임정에서 공군을 가장 먼저 거론한 이는 안창호 선생이었습니다.●안창호 “비행기로 선전물 뿌려 독립운동” 1919년 3·1운동 직후 수립된 임정은 이듬해부터 ‘독립전쟁’을 선언하며 본격적인 군사정책을 수립하게 됩니다. 임정 내무총장이었던 안창호는 1920년 일제 치하에 있던 조국과 해외에 독립운동을 널리 알리기 위한 ‘선전대’를 꾸렸습니다. 그는 선전활동에 ‘비행기’가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반도 상공에서 선전물을 뿌려 독립운동의 기운이 들끓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어렵게 중국 비행기계창에서 일하는 미국인 비행사도 확보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상하이와 서울까지의 직선거리만 885㎞인데, 미국으로부터 구할 수 있는 비행기의 비행 가능 거리는 최대 240㎞였습니다. 임정의 재정도 좋지 않았습니다. 결국 안창호는 비행대 건설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임정 군무총장이었던 노백린 장군은 1920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윌로스에 한인 비행학교를 설립했습니다. 그는 육군 무관 출신이었지만 한인 비행사를 적극 육성하면 독립전쟁에서 더 유리한 고지에 오를 수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비행기 2대를 마련하고 레드우드 비행학교 교관을 초빙하는 등 훈련에 착수했습니다. 노 장군은 그해 7월 학교를 ‘대한인 비행가 양성소’로 이름 붙이고 성대한 개소식을 한 뒤 상하이 임정으로 복귀했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난관이 닥칩니다. 같은 해 캘리포니아주 북부의 대홍수로 한인들의 쌀농사에 재앙이 닥칩니다. 후원자들은 더이상 비용을 지원할 수 없게 됐고, 안타깝게 비행학교도 1년 만에 문을 닫게 됩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공군 건설이 실패로 돌아가자 임정 주석이었던 김구 선생이 직접 나섰습니다. 그는 1930년대 초 중국 국민당 정부의 도움을 받아 비행사를 양성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비록 실현하진 못했지만 이후 광복군 조직에 공군 편제를 마련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충칭에 자리잡은 임정은 일본의 패색이 짙어진 1943년 참모처장이었던 최용덕 장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공군설계위원회’를 구성합니다. 김 주석과 조소앙 외무부장은 1945년 충칭의 미군 총사령부를 방문, 한국의 완전 독립과 대일전 최종 승리 방안을 담은 제안서를 전달했습니다. 당시 광복군은 ‘독수리작전’으로 명명된 한미연합 한반도 진공작전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엔 공군 창군과 관련한 내용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김구 “한국인들로 공군 조직해야 한다” 김 주석은 제안서에 “현재 미군이나 중국 공군에서 복무 중인 한국인들로 공군이 조직돼야 한다”고 썼습니다. 외세가 아닌 한국인 중심으로 공군 창군이 이뤄져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앞당겨진 일본의 항복으로 공군 창군 계획은 다시 미뤄지게 됩니다. 결국 그들의 꿈은 최용덕 장군에 의해 이뤄졌습니다. 최 장군은 의열단 단원으로 김상옥 의사의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의거를 지원하는 등 무장독립운동을 주도했고 중국 국민당 정부의 공군 창설을 주도해 ‘상교’(대령)까지 오른 최고위급 무관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광복 후에는 공군 창군을 위해 ‘백의종군’했습니다. 미군정이 ‘장교가 되려면 조선경비대 보병학교에서 기본 군사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하자, 실제로 훈련을 받고 ‘소위’로 임관한 겁니다. 1948년 초대 국방부 차관에 올라 당시 육군 소속이었던 공군 독립을 주도했고, 1949년 10월 1일 염원이었던 공군 창군이 이뤄집니다. 최 장군은 공군사관학교장, 공군참모총장, 체신부 장관을 지냈습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제1전투비행단 창설 과정을 논문으로 쓴 이지원 공군사관학교 부교수에 따르면 당시 공군이 보유한 항공기는 연락기와 훈련기 22대뿐이었습니다. ‘바우트 원’으로 이름 붙여진 한국 전투비행단이 대구공항에 마련됐습니다. 그리고 7월에 10대의 ‘F51D 머스탱’ 전투기를 원조받아 바로 출격시켰지만 11일 만에 3대가 희생됐습니다. ●6·25전쟁 발발… 훈련 대신 ‘실전’으로 미 공군은 9명의 조종사를 훈련교관으로 지원했습니다. 한국인 조종사들이 편대기로 출격해 임무를 함께 수행하면서 훈련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북한군의 남하로 전황이 워낙 급박해 훈련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의 격한 임무가 계속됐습니다. 부대가 대구에서 사천으로, 다시 진해로 이동하면서 제대로 훈련받을 시간도 없었습니다. 60여시간이 필요한 기체 적응훈련은 불과 15~20시간 만에 끝냈습니다. 1950년 9월 머스탱 전투기 조종사는 8명이었습니다. 다음해 4월 새로 조종사 5명이 합류했습니다. 그러나 13명 가운데 4명이 희생돼 전체 조종사는 10명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특히 순직자 중 2명은 극심한 훈련 부족에 합류 한 달 만에 안타깝게 산화했습니다. 1951년 10월 1일 이런 조종사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제1전투비행단이 꾸려졌습니다. 드디어 독립적으로 작전을 할 수 있는 한국인 전투부대가 마련된 것입니다. 12월 말까지 비행단은 708회나 출격해 적의 보급로 차단과 근접지원에 기여했습니다.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한국형 전투기’(KFX) 시제기 1호기 출고를 눈앞에 뒀습니다. 파생형으로 스텔스기 개발을 염두에 둬 모양은 F35A를 닮았습니다. 능동형 전자주사식 위상배열(AESA), 적외선 탐색·추적장비(IRST) 등 미국이 전수하지 않은 기술을 독자 개발했습니다. 공군의 꿈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밀리터리 인사이드] 포기 몰랐던 ‘공군 건설’의 꿈…잊지 않겠습니다

    [밀리터리 인사이드] 포기 몰랐던 ‘공군 건설’의 꿈…잊지 않겠습니다

    상해 임정에서부터 ‘공군 건설’ 추진美 캘리포니아에선 훈련학교 창설재정부족 등으로 실현되진 못해최용덕 장군 ‘백의종군’하며 공군 창군6·25 전쟁 통해 제1전투비행단 마련백범 김구와 도산 안창호. 그리고 최용덕 장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광복을 꿈꾸던 그들에겐 하나의 소망이 있었습니다. 바로 ‘공군 건설’이었습니다. 임정은 공군의 힘으로 독립을 앞당길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꿈은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공군 창군은 독립 뒤인 1949년 10월 1일 이뤄졌습니다. 그리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변변한 전투기 1대 없이 6·25 전쟁을 겪었고, 지금의 강군에 이르게 됩니다. 저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그들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1일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학술연구팀장으로 활동했던 홍선표 박사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군 건설 계획과 추진’ 논문에 따르면 상하이 임정에서 공군을 가장 먼저 거론한 이는 안창호 선생이었습니다. ●안창호 “비행기로 선전물 뿌려 독립운동” 1919년 3·1운동 직후 수립된 임정은 이듬해부터 ‘독립전쟁’을 선언하며 본격적인 군사정책을 수립하게 됩니다. 임정 내무총장이었던 안창호는 1920년 일제 치하에 있던 조국과 해외에 독립운동을 널리 알리기 위한 ‘선전대’를 꾸렸습니다.그는 선전활동에 ‘비행기’가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비행기로 한반도에 직접 선전물을 뿌려 독립운동의 기운이 들끓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어렵게 중국 비행기계창에서 일하는 미국인을 비행사로 확보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상해와 서울까지의 직선거리만 885㎞인데, 미국으로부터 구할 수 있는 비행기의 비행 가능거리는 최대 240㎞였습니다. 임정의 재정 상태도 좋지 않았습니다. 결국 안창호 선생은 비행대 건설 꿈을 접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임정 군무총장이었던 노백린 선생은 1920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윌로스에 한인 비행학교를 설립했습니다. 그는 육군 무관 출신이었지만, 한인 비행사를 적극 육성하면 독립전쟁에서 더 유리한 고지에 오를 수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비행기 2대를 마련하고 레드우드 비행학교 교관을 초빙하는 등 훈련에 착수했습니다. 선생은 그 해 7월 비행학교를 ‘대한인 비행가 양성소’로 이름붙이고 성대한 개소식을 한 뒤 상해 임정으로 복귀했습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난관이 닥칩니다. 같은 해 캘리포니아주 북부의 대홍수로 한인들의 쌀농사에 재앙이 닥칩니다. 후원자들은 더 이상 비용을 지원할 수 없게 됐고, 안타깝게 비행학교도 1년 만에 문을 닫게 됩니다.이런저런 이유로 공군 건설이 실패로 돌아가자 임정 주석이었던 김구 선생이 직접 나섰습니다. 그는 1930년대 초 중국 국민당 정부의 도움을 받아 비행사를 양성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비록 실현시키진 못했지만 이후 광복군 조직에 공군 편제를 마련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940년 충칭에 자리잡은 임정은 일본의 패색이 짙어진 1943년 참모처장이었던 최용덕 장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공군설계위원회’를 구성합니다.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무부장은 1945년 충칭의 미군 총사령부를 방문, 한국의 완전 독립과 대일전 최종승리를 담은 제안서를 전달했습니다. 당시 광복군은 ‘독수리작전’으로 명명된 한미연합 한반도 진공작전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엔 공군 창군과 관련한 내용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김구 “한국인들로 공군 조직해야 한다” 김구 선생은 제안서에 “현재 미군이나 중국 공군에서 복무 중인 한국인들로 공군이 조직돼야 한다”고 썼습니다. 외세가 아닌 한국인 중심으로 공군 창군이 이뤄져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앞당겨진 일본의 항복으로 공군 창군 계획은 다시 미뤄지게 됩니다. 결국 공군 창군의 꿈은 최용덕 장군에 의해 이뤄졌습니다. 최 장군은 의열단 단원으로 김상옥 의사의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의거를 지원하는 등 무장독립운동을 주도했고, 중국 국민당 정부의 공군 창설을 주도해 ‘상교’(대령)까지 오른 최고위급 무관이었습니다. 임정에선 참모처장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광복 후 공군 창군이라는 목표를 위해 ‘백의종군’했습니다. 미군정이 ‘장교가 되려면 조선경비대 보병학교에서 기본 군사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하자, 실제로 훈련을 받고 소위로 임관한 겁니다. 1948년 초대 국방부 차관에 올라 당시 육군 소속이었던 공군 독립을 주도했고, 1949년 10월 1일 염원이었던 공군 창군이 이뤄집니다. 최 장군은 공군사관학교장, 공군참모총장, 체신부 장관을 지냈습니다.공군이 첫걸음을 뗀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제1전투비행단 창설과정을 논문으로 쓴 이지원 공군사관학교 부교수에 따르면 당시 공군이 보유한 항공기는 연락기와 훈련기 22대뿐이었습니다. ‘바우트 원’으로 이름붙여진 한국 전투비행단이 대구공항에 마련됐습니다. 그리고 7월에 10대의 F51D 머스탱 전투기를 원조받아 바로 출격시켰지만 11일 만에 3대가 희생됐습니다. ●6·25 전쟁 발발…훈련 대신 ‘실전’으로 미 공군은 9명의 조종사를 훈련교관으로 지원했습니다. 한국인 조종사들이 편대기로 출격해 임무를 함께 수행하면서 훈련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북한군의 남하로 전황이 워낙 급박해 훈련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의 격한 임무가 계속됐습니다. 부대가 대구에서 사천으로, 다시 진해로 이동하면서 제대로 훈련받을 시간도 없었습니다. 60여시간이 필요한 기체 적응훈련은 불과 15~20시간만에 끝냈습니다.1950년 9월 머스탱 전투기 조종사는 8명이었습니다. 1951년 4월 새로 조종사 5명이 합류했습니다. 그러나 13명 가운데 4명이 희생돼 실제 조종사는 10명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특히 순직자 중 2명은 극심한 훈련 부족에 합류 한 달만에 안타깝게 산화했습니다. 1951년 10월 1일 이런 조종사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제1전투비행단이 꾸려졌습니다. 드디어 독립적으로 작전을 할 수 있는 한국인 전투부대가 마련된 것입니다. 12월말까지 비행단은 708회나 출격해 적의 보급로 차단과 근접지원에 기여했습니다.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한국형 전투기’(KFX) 시제기 1호기 출고를 눈앞에 뒀습니다. 파생형으로 스텔스기 개발을 염두에 둬 모양은 F35A를 닮았습니다. 능동형 전자주사식 위상배열(AESA), 적외선 탐색·추적장비(IRST) 등 미국이 전수하지 않은 기술을 독자 개발했습니다. 공군의 꿈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독립 헌신한 열사들… 후대가 그려낸 애국

    독립 헌신한 열사들… 후대가 그려낸 애국

    “할아버지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의 역사이기도 해요.”(심산 김창숙 선생 손녀) 1919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어느덧 100년을 훌쩍 넘겼고 당시 독립운동을 했던 생존자는 이제 20여명에 불과하다. 이제 남은 것은 기억뿐. 그들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고 가장 오래 생각해 온 후손들은 애국열사들의 핏줄인 동시에 입과 귀로 대대로 역사를 옮기는 기억전달자이기도 하다. EBS ‘다큐프라임’은 1~2일 밤 9시 50분 3·1절 특집 다큐멘터리 ‘후손’에서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독립운동의 순간들을 밀도 있게 전달한다. 1부 ‘그날 이후’에서는 백범 김구 선생, 심산 김창숙 선생, 백암 박은식 선생, 나석주 지사 등의 후손 9명을 만나 독립운동을 하나의 사진처럼 생생하게 그려낸다.역사 속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던 애국열사들이 각자 다른 시기와 현장에서 독립을 위해 싸우고 목숨을 바친 ‘그날’을 가족의 눈으로 전달한다. 3·1운동에 참여했다 갖은 고초를 겪은 할아버지와 한국전쟁에서 실종된 아버지를 둔 가수 송대관부터,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나석주 지사를 잃고 아홉 살부터 아버지 없이 자란 딸, 다시 그 아래서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자라온 나 지사의 손자 이야기 등이 이어진다. 독립운동에 방해가 된다며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한 한지성 광복군 대장은 그 조카들이 유지를 잇고 있다. 그래도 후손들은 “아비 없는 설움보다 나라 잃은 설움이 컸다”고 말한다. 2부 ‘애국가족’은 애국지사 손녀이자 다큐멘터리 프로듀서인 엄정화 감독이 광복군 임시정부 경위대를 지낸 할아버지의 시간들을 기록하기 위해 5년 넘게 카메라에 담은 자기 반영적 다큐멘터리로 풀어 간다. 99세 나이로 생존해 있는 애국지사 오상근 선생의 역사와 함께 4대 가족들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기억하는 모습들이 담겼다. 엄 감독이 화면에 담은 가족들 중엔 이른바 ‘태극기 부대’로 불리는 보수 성향도 있고 그와 반대로 진보주의를 지향하는 가족도 있다. 일본에 유학 가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고 대학교수가 된 이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 모두 서로의 갈림과 다름을 이해하면서 공존한다. 올해 설날 아침, 오상근 선생 앞에 화상으로 모인 수십명의 가족들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나누는 듯하면서도 결국엔 ‘애국’이라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 같다. 이들의 모습은 서로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반목하며 갈등을 겪는 대한민국 현실에서도 다름을 넘어 따뜻하게 공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는 우리의 자화상이자 바람이기도 하다. 김지예 기자 jiy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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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토] 서울시장 경선후보 ‘맞수토론’

    국민의힘 오신환, 나경원, 오세훈, 조은희 서울시장 경선후보가 23일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3차 맞수토론에 앞서 기념촬영하고 있다. 2021.2.23 국회사진기자단=연합뉴스
  • 한인애국단 핵심 3인방 중 ‘여전사’… 윤봉길·이봉창 의거 숨은 조력

    한인애국단 핵심 3인방 중 ‘여전사’… 윤봉길·이봉창 의거 숨은 조력

    1919년 14살 나이에 평양 3·1운동 참여상하이 김구 찾아가 ‘밀정’ 처단 등 앞장윤봉길 의거 이후 김구와 이념 갈등 심화‘백범일지’에도 독립운동 전혀 언급 없어 김원봉 창건 조선의용군 ‘부녀대장’ 맡아6·25땐 인민군으로 참전해 남한서 외면이화림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독립운동가가 있다. 이화림은 윤봉길· 이봉창 의사와 함께 백범 김구 선생이 만든 한인애국단의 핵심 3인방 중 한 사람이었다. 두 의사를 도와 의거를 성공으로 이끈 이화림은 공식적으로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화림의 역할이 조역(助役)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상적으로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이화림은 님 웨일스의 ‘아리랑’ 주인공이자 동갑내기인 김산과 자주 비교된다. 1932년 4월 29일 아침 중국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 기념행사 겸 일본의 상하이 침공 승리 기념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봄 코트를 입은 남자와 양장 차림을 한 젊은 여인이 식장 입구에 나타났다. 도시락과 물통을 든 남자가 행사장 안으로 무사히 들어가는 것을 100m 떨어진 곳에서 확인한 여인은 골목으로 사라졌다. 남자는 윤봉길 의사였고 윤봉길이 삼엄한 검문검색을 통과하도록 도운 27세의 여성이 바로 이화림이었다. 기념식이 시작되자마자 요인들이 늘어선 단상으로 윤 의사가 던진 물병 폭탄으로 식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상하이 일본인 거류민단장과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가 즉사했다. 중장 노무라는 눈을 잃었다. 일본 패전 후 미주리함에서 일본 외무대신 자격으로 항복문서에 조인했던 시미게쓰 당시 주중 공사 등 수십명은 중상을 입었다.●윤봉길 의사 훙커우공원 검문검색 통과 도와 거사 직전 이화림은 세 살 적은 윤봉길과 김구 앞에서 애국단 단원으로서 선서를 했다. 원래 윤봉길과 이화림은 부부로 변장해 식장에 들어가기로 했었다. 두 사람은 사전답사를 하며 거사 지점까지 잡아 놓았다. 그러나 둘이 함께 움직이면 발각될 염려가 있다는 김구의 의견에 따라 윤 의사 혼자 거사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이화림은 훗날 회고록에서 “추풍낙엽이 지듯이 일본놈들이 우수수 떨어졌다”고 썼다. 석 달 전 이화림은 이봉창 의사의 의거도 도왔다. 이봉창은 일왕을 폭탄으로 죽일 계획을 세웠는데 문제는 폭탄을 일본으로 몰래 갖고 갈 방법이었다. 김구와 이봉창, 이화림이 밤새 고민한 끝에 생각해 낸 방법이 이봉창의 속옷(훈도시)에 숨겨 가는 것이었다. 이봉창의 속옷에 비밀 주머니를 달아 준 이가 이화림이었다. 그 덕에 이봉창은 삼엄한 감시를 뚫고 대한해협을 건널 수 있었다. 이봉창이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화림은 오열했다.이화림은 1905년 1월 6일 평양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명은 이춘실이며 두 오빠도 일찍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화림도 14세의 나이에 3·1운동에 참여하며 항일운동에 뜻을 두었다. 중학교를 거쳐 평양 유치원교원학교를 나와 유치원 교사로 잠시 일하며 조선공산당에 가입해 활동하던 이화림이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몸을 던진 것은 1930년이었다. 망명을 앞둔 막내딸 이화림에게 어머니는 눈물을 감추고 정몽주를 떠올리는 시를 선물로 주며 격려했다. “나는 죽을지언정 굴복하지 않고 영원히 앞으로 나아가리라. 비록 내가 죽을지라도 나의 영혼은 영원히 인간 세상에 존재할 것이다.” 상하이로 간 이화림은 김구가 만든 한인애국단에 가입해 김구와 함께 조선인 밀정을 죽이기도 했다. 그러고는 거사를 벌일 기회를 엿보았다. 두 의사의 의거 후 이화림은 김구를 떠났다. 테러가 아닌 조직적인 무장 투쟁만이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당시 사회주의자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우파인 김구도 코뮤니스트인 이화림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화림은 김원봉이 이끌던 의열단의 추천으로 광저우 중산대학에 입학했다. 법대에 들어갔다가 몇 년 후 신분을 감추기 용이한 의대로 바꾸었다. 1935년 의열단을 포함한 좌익 계열의 조선민족혁명당이 결성됐고 윤세주의 연설에 감동한 이화림은 1937년 1월 민혁당에 가입했다. 1938년 10월 김원봉이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를 창건하자 이화림은 부녀대(부녀복무단) 부대장을 맡았다. 대장은 김원봉의 부인 박차정이었다. 조선의용군은 좌파 연합인 조선민족전선 산하의 한인 군사조직이었다. 조선의용군은 적을 상대로 한 선전 활동, 포로 신문 활동을 했을 뿐만 아니라 전투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중국 국민당에 배속된 선전대여서 대원들은 국민당의 소극적인 항일 투쟁에 불만이 많았다. 그런 이유 등으로 조선의용군은 1939년 10월 화베이행을 결정한다. 의용군은 모택동의 팔로군 지휘 아래 타이항산맥에서 일본군과 싸웠다.●“이화림은 혁명에 충직했던 여류혁명가” 이화림은 일본군 바로 앞에서도 두려움이 없었고 적진 깊숙이 쳐들어가 선전과 삐라 살포에 앞장섰다. 체구는 작았지만 남자보다 용감했다. 중산대학 시절 친하게 지내던 진광화의 소개로 간부훈련반을 마친 이화림은 부녀대장이 됐다. 진광화는 타이항산맥 전투에서 윤세주와 함께 전사했다. 당돌한 이화림이 남자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조선의용군 출신 최후의 분대장이자 옌볜 작가였던 김학철의 책에 쓰여 있다. 이화림을 곁에서 지켜봤던 김학철은 이화림을 혁명에 충직했던 여전사이며 여류혁명가라고 평가했다. 중산대학 법대생 김창국과 결혼했다 이혼한 이화림은 이집중(본명 이종희)과 재혼했다. 이집중은 조선총독부의 밀정이며 김활란의 형부인 김달하를 중국에서 처단한 인물이다. 공산주의자라기보다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던 이집중은 화북행을 거부하고 김원봉과 함께 한국 광복군으로 편입됐다. 이런 이념적 차이 등이 원인이 돼 이화림은 또 이혼했다. 이후 이화림은 조선의용군 병원에서도 일했고 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945년 1월에는 혁명사업의 일환으로 의학 공부를 해야 한다는 명을 받아 중국의과대학에 들어갔다. 의대 재학 중에 종전이 됐고 이화림은 학업을 계속해 의대를 마쳤다. 중국에 있던 한인 항일운동가들이 광복 후 남북으로 갈라진 조국의 한 곳을 택해 귀국했지만 이화림은 중국에 남았다. 이화림은 옌볜의학원에서 근무하기도 했고 하얼빈에서 의사로 활동했다. 그럴 즈음 6·25가 터지자 조선인민군 제6군단 위생소 소장으로 참전했다. 그러나 폭격으로 부상을 당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선양의사학교 부교장, 중국 교통부 위생기술과 간부, 옌볜 조선족 자치주 위생국 부국장 등 주로 만주의 공공 의료 분야에서 조선족을 위해 일했다. 중국의 극좌 사회주의 운동인 문화혁명을 이화림도 피해 가지 못했다. 이화림은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혀 고초를 겪었다. 마오쩌둥 사후 이화림은 명예를 회복했지만 건강이 악화됐다. 말년을 다롄에서 요양하던 이화림은 1999년 2월 10일 세상을 떠났다.●中 문화혁명 때 ‘반혁명분자’ 낙인찍혀 고초 이화림의 조선족 사랑은 지극했다. 검소하게 살며 모은 돈으로 조선족들의 생활 향상을 위해 거금을 기부했고 조선족 아동문학작가들을 위한 기금을 조성하기도 했다. 임종 직전에도 자신의 전 재산 5만 위안을 다롄시 조선족학교에 기부했다. 김구는 이화림의 투쟁 정신은 높이 샀지만 그의 사상은 싫어했다. 이화림은 백범일지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념적 차이로 김구가 고의로 언급을 회피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화림에게는 인민군 간호장교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주홍글씨 같은 전력이 있어 남한에서는 철저히 외면받았다. 이화림 외에도 일본군과 싸우던 수많은 조선의용군 출신들이 인민군의 일원이 돼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인민군 보병부대원의 47%가 조선의용군 출신이라고 한다. 그러나 김일성은 권력투쟁을 일으켜 옌안파를 숙청했듯이 조선의용군을 내팽개쳤다. 조선의용군은 남북에서 모두 버림받은 것이다. 중국에서만 중국 옌볜작가협회가 ‘화림문학상’을 제정해 시상하는 등 이화림을 기리고 있다.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친일 작가의 ‘전봉준 동상’ 철거… 이순신 동상도?

    친일 작가의 ‘전봉준 동상’ 철거… 이순신 동상도?

    전북 정읍시 덕천면 황토현 전적지(사적 제195호)에 있는 친일 작가가 만든 전봉준 장군 동상 철거가 논란 끝에 결정되면서 같은 작가가 제작한 다른 동상의 존립 여부에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정읍시는 1987년 10월 1일 황토현 전적지에 세워진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전봉준 장군의 동상을 철거하고 재건립을 추진한다고 22일 밝혔다. 전봉준 장군 동상은 친일 인명사전에 수록된 조각가 김경승(1915~1992)의 작품이다. 이 때문에 반봉건, 반외세를 외쳤던 동학농민혁명의 의미가 친일 작가가 만든 조각상으로 인해 퇴색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이에 따라 정읍시는 올 예산에 12억원을 확보해 전봉준 장군의 동상을 철거하고 새로운 방식의 기념물을 설치하기로 했다. 유진섭 정읍시장은 “동학농민혁명 정신 선양에 어긋나는 기념사업에 대해 앞으로 철저한 역사적 고증을 통해 바로잡아 나갈 것”이라며 “동상 재건립을 추진해 동학농민혁명과 함께 전봉준 장군이 정읍을 대표하는 역사 인물로 기억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친일 작가 작품이라도 기념물인 동시에 예술품이라는 점에서 철거는 부당하다는 지적도 있다. 김경승은 한국 현대미술계에 손꼽히는 인물로 그의 작품이 전국에 분포돼 있다. 주요 작품으로 부산 용두산공원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1955)을 비롯해 인천자유공원 맥아더 장군상(1957), 서울 남산공원 백범 김구 선생상(1969) 등이 있다. 세종대왕상(1968), 김유신 장군 기마상(1969), 정몽주 선생상(1970), 전주 덕진공원 녹두장군 전봉준 선생상도 그의 작품이다. 정읍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친일작가가 만들면 모두 철거 대상?…전북, 전봉준 동상 철거 논란

    친일작가가 만들면 모두 철거 대상?…전북, 전봉준 동상 철거 논란

    전북 정읍시 덕천면 황토현 전적지(사적 제195호)에 있는 전봉준 장군 동상이 친일 작가가 만든 작품이라는 논란 끝에 철거가 결정되면서 같은 작가가 제작한 다른 동상의 존립 여부에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정읍시는 1987년 10월 1일 황토현 전적지에 세워진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전봉준 장군의 동상을 철거하고 재건립을 추진한다고 22일 밝혔다. 전봉준 장군 동상은 친일 인명사전에 수록된 조각가 김경승(1915~1992)의 작품으로 반봉건, 반외세를 외쳤던 동학농민혁명의 의미가 친일 작가가 만든 조각상으로 인해 퇴색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실제로 동상의 뒷면과 배경 부조 뒤면에는 김경승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에따라 정읍시는 2021년 예산에 12억 원을 확보해 논란을 빚었던 전봉준 장군의 동상을 철거하고 새로운 방식의 기념물을 설치하기로 했다. 유진섭 시장은 “정읍은 동학농민혁명 정신 선양에 어긋나는 기념사업에 대해 앞으로 철저한 역사적 고증을 통해 바로잡아 나갈 것”이라며 “동상 재 건립 추진으로 동학농민혁명과 함께 전봉준 장군이 정읍을 대표하는 역사 인물로 기억되기를 기대 한다”고 말했다.그러나 김경승 조각가는 한국 현대미술계에 손꼽히는 인물로 그의 작품이 전국적으로 분포돼 있는 실정이다. 그가 만든 중요 인물 동상은 부산 용두산 공원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1955), 인천자유공원 맥아더 장군상(1957), 서울 남산공원 백범 김구 선생상(1969) 등이다. 세종대왕상(1968), 김유신장군 기마상(1969), 정몽주선생상(1970) 전주 덕진공원 녹두장군 전봉준선생상 역시 그의 작품이다. 이때문에 친일 작가가 만든 동상이라고 해서 무조건 철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친일 작가 작품이라도 기념물인 동시에 예술품이라는 점에서 철거는 부당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편, 조각가 김경승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이다. 친일인명사전에서는 김경승이 “1942년 6월3일자 <매일신보>에 ‘더 중대한 문제는 재래 구라파의 작품의 영향과 감상의 각도를 버리고 일본인의 의기와 신념을 표현하는 데 새 생명을 개척하는 대동아전쟁 하에 조각계의 새 길을 개척하는 것일 것입니다. 나는 이같이 중대한 사명을 위해 미력이나마 다하여 보겠습니다’라는 기고문을 게재할 정도로 친일행적이 뚜렷”하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는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1934년 일본의 도쿄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해 재학 중이던 1937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였다. 1939년 졸업 후에도 여러 차례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특선했다. 1943년에는 추천작가가 되었고 친일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에서 조각부 평의원을 맡기도 했다. 광복 이후에는 홍익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역사인물상과 기념동상 제작에 많은 실적을 남겼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등을 역임했다. 1964년 3·1문화상, 1982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서울포토] 오세훈·나경원 서울시장 예비후보의 악수

    [서울포토] 오세훈·나경원 서울시장 예비후보의 악수

    16일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국민의힘 ‘서울을 바꾸는힘 제1차 맞수토론’에서 오세훈 예비후보(왼쪽)와 나경원 서울시장 예비후보가 악수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 주인공…백기완 별세 눈물로 추모(종합)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 주인공…백기완 별세 눈물로 추모(종합)

    15일 영면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1932∼2021)에 정치인들의 애도가 이어졌다. 독재 정권과 싸운 ‘투사’이자 한국 민주·민족·민중운동의 ‘큰 어른’이었던 백 소장은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피신하던 백범 김구 선생을을 돌보았고, 이후 백 소장은 백범을 스승처럼 따랐다. 민중운동 진영은 그를 2차례에 걸쳐 대통령 선거 후보로 추대했다. 군사정권 종식이란 국민적 염원 속에 치러졌던 1987년 대선에는 김영삼·김대중 ‘양김’의 단일화를 호소하며 후보직을 내려놨으나, 1992년 대선에선 독자 민중후보로서 일명 ‘백선본’과 함께 완주했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는 자신이 설립한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면서 통일운동에 헌신했다. 하지만 2011년 부산 한진중공업, 2013년 울산 현대자동차와 경남 밀양 송전탑 반대 현장, 2014년 충북 옥천 유성기업 등으로 가는 ‘희망버스’에 빠지지 않고 올라 백발에 한복 차림 투사는 힘을 보탰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백 소장에 대해 “내 청춘 시절의 큰 별”이셨다며 “박종철 추모식때 내 손을 꼭 잡아주셨던 두툼한 손을 언제나 기억할 것”이라고 슬퍼했다. 강기정 전 민주당 의원은 이날 백 소장과의 추억을 회고했다. 강 전 의원은 백 소장이 직접 노랫말을 쓴 ‘임을 위한 행진곡’에 대해 “내 청춘의 노래이자 험난한 시대를 넘어서야 했던 동지들의 노래. 그리고 끝내 국회 본회의장에서 불렀던 노래”라고 밝혔다.이어 ‘임을 위한 행진곡’은 백 소장의 시 ‘묏비나리- 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 전 의원은 ‘재야’란 단어도 백 소장이 처음 썼으며 그 뜻에 대해 “인권이 침해당하고 자유가 박탈당하는 거친들에 곡식과 나무를 심는 사람들”이라 풀이했다고 덧붙였다. 우상호 민주당 의원도 “돌이켜보면, 선생님께서는 항상 앞에 서 계셨던 것 같습니다”라며 “그 그림자를 좇아가기에도 벅찼던 분. 시대의 등불을 이렇게, 또 잃었습니다”라고 애도했다. 한상균 전 민주노총 위원장은 “평생을 노동자 민중이 주인되는 통일세상을 위해 투쟁해오신 백기완 선생님이 첫 새벽에 운명하셨습니다”라며 “함께했던 소중한 시간, 소중한 가르침 잊지않겠습니다”라고 부고를 전했다. 그는 “파렴치한 권력에 맞서는 길은, 모든걸 걸고 제대로 싸우는것이 왕도다. 우리가 힘들면 기득권 간나새끼들도 힘드니 더 힘을 내라”라고 했던 백 소장의 생전 말씀을 눈물로 새겼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고문으로 몸이 반쪽이 돼도…통일운동가 백기완 선생 별세(종합)

    고문으로 몸이 반쪽이 돼도…통일운동가 백기완 선생 별세(종합)

    고문으로 몸이 반쪽이 될지언정 일제와 싸우고 독재 정치에 맞섰던 민주화운동의 큰 어른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이 15일 투병 끝에 영면했다. 그는 통일운동가이자 민주화운동가, 시인, 작가 그리고 민중정치인이었다. 백기완 선생은 1932년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리에서 아버지 백홍렬과 어머니 홍억재 사이에 4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인 백태주는 천석꾼의 부자로 장련면의 유지로 있으면서 3.1 운동 당시 수천장의 태극기를 제작하여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는 등 민족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아버지 백홍렬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재직했고, 청년운동에도 나섰다. 두 부자는 각각 1923년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에 수해와 지진피해가 있었을 때와 1934년 삼남지방 수재 당시에 의연금을 기부하고 구휼에 힘쓰는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지만 조부 백태주가 독립군에 군자금을 대어주다가 발각돼 고문 끝에 옥사당한 이후 가계가 급격히 몰락했다. 백기완 선생은 백범 김구 선생과 깊은 인연이 있다. 조부가 백범을 자신의 집으로 피신시키고 극진히 돌보았고, 이후 백기완 선생 역시 백범을 따랐다.백기완 선생은 1960년대 한일협정 반대투쟁을 계기로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다. 3선 개헌 반대와 유신 철폐등 민주화 운동에 많은 활동을 했으며 1974년 유신헌법철폐 100만인 선언 운동을 주도하여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12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75년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되었다. 1979년 ‘YMCA 위장결혼 사건’과 1986년 ‘부천 권인숙양 성고문 폭로 대회’를 주도한 혐의로도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40대까지 거구였지만 혹독한 고문으로 그의 몸은 반쪽이 되었다. 1987년 대선에서는 독자 민중후보로 출마했다가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했고, 1992년 대선에도 독자 후보로 출마했다. 이후에는 자신이 설립한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해왔다. 열렬한 국어순화론자로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되도록 순우리말을 썼다고 한다. 그의 노력에 힘입어 ‘달동네, 새내기, 동아리’ 등의 같은 순우리말이 성공적으로 사회에 안착했다. ‘장산곶매 이야기’ 등 소설과 수필집을 낸 문필가이자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 원작자이기도 하다. 지난해 1월 폐렴 증상으로 입원해 투병생활을 해왔고 2021년 2월 15일 새벽 4시 88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정숙씨와 딸 백원담(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백미담·백현담, 아들 백일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2호실에 차려졌다. 발인은 19일 오전 7시다.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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