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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효창공원‘백범성지’로

    백범 金九선생을 기념하는 ‘백범기념관’이 그의 묘소가 있는 서울 효창공원에 세워진다고 백범기념사업회 李壽成회장이 5일 밝혔다. 李회장은 이날 기념사업회 정기총회에서 “그동안 부지선정 문제로 다소 논란이 있었으나 효창공원으로 최종 확정했다”며 “효창운동장 일대를 정비해 ‘민족의 성지’로 가꿀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이같은 내용을 金大中대통령에게 보고,金대통령으로부터 지원약속과 함께 기념관건립 명예위원장직 수락을 받았다”고 공개하고 “빠르면금년 백범 서거 50주기 때 기공식을 가질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업회측이 구상하고 있는 기본계획안은 백범묘소와 삼의사(三義士) 묘소등 선열묘역을 중심으로 1만8,000평 규모의 효창운동장과 철거될 인근 체육시설 부지를 통합해 그위에 백범기념관과 문화체육센터를 건립하겠다는 것이다. 총예산은 900억원 규모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며 재원조달은 전국민을 대상으로 모금운동을 벌이면서 정부예산도 지원받을 계획이다. 용산구의회는 지난해 12월21일 정기회 2차본회의에서효창공원 자리에 백범기념관과 옥내외 체육시설 및 문화예술공간을 조성한다는 내용의 ‘백범기념사업관 및 문화체육관건립추진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바 있다. 한편 사업회측은 기념관 건립과 관련,별도 조직으로 백범기념관건립위원회를 곧 발족시킬 계획인데 위원장은 李회장이 맡게 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효창공원에는 백범 金九선생을 비롯해 임시정부 요인 李東寧·曺成煥·車利錫선생과 3의사(李奉昌·尹奉吉·白貞基) 등 순국선열 7위의 묘소와安重根의사의 가묘(假墓)가 있다.이번에 마련되는 백범기념관은 안중근의사기념관(70년 준공)·윤봉길의사기념관(88년 준공)에 이어 독립운동가 개인기념관으로는 세번째다. 鄭雲鉉 jwh59@
  • ■‘해방전후사의 인식’

    ▒8·15의 민족사적 인식=송건호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직책은 모두 당시의직책임)▒미군정의 정치사적 인식=진덕규 이대 교수▒분단의 배경과 고정화 과정=김학준 서울대 교수▒반민특위의 활동과 와해=오익환 경향신문 기자▒일제말 친일군상의 실태=임종국 저술가▒8·15직전의 독립운동과 그 시련=조동걸 안동대 교수▒김구의 사상과 행동의 재조명=백기완 백범사상연구소장▒이승만 노선의 재검토=김도현 영남일보 편집부장▒8·15를 전후한 여운형의 정치활동=이동화 성균관대 교수▒해방후 농지개혁의 전개과정과 성격=유인호 중앙대 교수▒미군정 경제의 역사적 성격=이종훈 중앙대 교수▒소설을 통해 본 해방 직후의 사회상=염무웅 문학평론가
  • 백범 41년 7월 2차대전 미국 참전 예견

    “박신애 누이 보시요.그간에 편지를 하랴고 하였지만 년전에 알튼 각기가발작이 되여서 고생을 하고 둘제(둘째)로는 중경에 공습이 심하여서 방공동(방공호)으로 피란하러 다니고 또는 더위가 백여도까지 더워서 잇때까지 집필을 못하였소…” 백범 金九 선생 서거 50주기를 앞두고 선생이 중경(重慶)임시정부 시절 하와이 거주 재미동포에게 보낸 편지 한 통이 처음 공개됐다.‘박신애 누이 보시오…’로 시작하여 ‘오라비 金九’로 맺고 있는 이 편지는 백범이 평소 남매간처럼 가깝게 지낸 지인에게 보낸 사신(私信).그러나 이 편지에는 당시 중경의 전황(戰況)과 재미교포사회의 이야기 등도 담고 있어 사료적 가치도 우수하다. 1941년 7월 25일자로 작성된 이 편지에서 백범은 “지난 유월 오일 중경에서 큰 불행한 사건으로 숨이 막혀죽은 수 천명의 송장뎅이를 친히 봤소”라고 적고는 “이제 미국이 참전하는 날이면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나는 날이니 세계낙원 하와이 동포들도 우리와 같이 방공동 생활을 하시리라 생각하오”라며 “공습 피난명령이 내리면 명령대로 꼭 피하시오”라는 ‘오래비’의 당부의 말도 잊지않고 있다.편지에서 백범이 언급한 ‘불행한 사건’은 일본군이 41년 6월초 ‘중원(中原)작전’이란 이름하에 일본해군 항공대가 중경을 8차례나 맹폭한 것
  • 백범·단재 장손 정부기관에 특채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의 후손 두 명이 당국의 배려로 정부기관에 특채된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화제다.주인공은 백범 김구선생의 장손金振씨(50)와 단재 신채호선생의 장손 申尙原씨(28).金씨는 지난해 11월초주택공사 상임감사(차관급)로,申씨는 이달 18일 국가정보원 8급 직원으로 각각 특임(特任)된 것으로 확인됐다. 金씨의 경우 金大中대통령의 특별한 배려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金대통령은 백범가(家)와 남다른 사연을 갖고 있다.7대 총선때 목포에서 출마한 金대통령은 선거직전 상대후보가 백범암살사건 관련자라는 사실을 폭로,선거를 승리로 이끈 적이 있다.이를 계기로 金대통령은 해마다 백범 묘소를 참배해 왔으며 한동안 백범기념사업회 이사를 지냈다.14대 국회때 ‘백범시해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되자 위원회 사무실 운영비를 수차례 지원하기도 했다.특히 8대 총선때는 金대통령측에서 백범의 아들 金信씨(77·전교통부장관)를 야당후보로 영입하려 한 적도 있다.현정권 출범초기 여권 일각에서는 백범가에 대한 ‘배려’가 논의됐던 것으로 알려졌다.金振씨는 미국 남가주대학·대학원 졸업 후 귀국,국제종합건설 감사실장·부속실장과 외국인회사 국내지사장을 역임하고 최근까지 개인사업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단재의 손자 申尙原씨는 李鍾贊 국정원장이 특별히 배려한 케이스.李원장은 작년 8월 안기부의 개명작업을 추진하면서 집무실내에 백범과 단재선생의 사진을 내걸었다.이는 국정원의 연원을 단재의 의혈단,백범의 한인애국단에서 찾겠다는 취지였다.작년말 李원장은 사석에서 단재의 손자가 국정원에 원서를 냈다는 얘기를 듣고 申씨의 채용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는 것.李원장의 조부인 우당 李會榮선생과 단재 선생은 독립운동 동지이자 같은 무정부주의자(아나키스트)로 각별한 사이였다.지난해 성균관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申씨는 국정원 산하 국가정보연수원에 배치돼 국가관교육프로그램 제작 분야에 근무하고 있다.
  • 광복회 14대 회장 尹慶彬씨

    광복회는 지난 16일 광복회관 대강당에서 전국 대의원 임시 총회를 열고 앞으로 4년간 광복회를 이끌어 갈 제14대 회장에 尹慶彬 애국지사(79)를 만장일치로 선출했다. 신임 尹회장은 1919년 평남 중화에서 태어났으며 44년 일본 메이지 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뒤 일제에 의해 학도병으로 징집돼 중국으로 끌려갔으나 故張俊河선생과 함께 탈출,重慶 임시정부의 광복군에 입대,항일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광복군 간부 훈련반을 졸업한 뒤 임시정부 경위대장,광복군 총사령관 부관등을 역임하며 임시정부 金九주석을 보좌했다. 45년 광복 후 金九선생을 수행,환국했으며 이후 대한민국대표 민주의원 비서,흥화공업소 부사장,백범 金九선생기념사업회 이사,독립유공자협회 회장등을 역임했다.80년에 건국포장,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부인 權恩愛여사와의 사이에 2남1녀를 두고 있다.金仁哲 ickim@
  • 潘炳律 외국어대 교수 ‘誠齋일대기’ 펴내

    ◎독립운동사의 거인 李東輝 ‘제모습 찾기’/신민회 활동·상해臨政 초대총리 활약/사회주의 접목 독립운동 새바람 꾀해/이념의 족쇄벗고 균형잡힌 재평가 시도 한 시대나 인물에 대한 역사의 평가가 제때,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다. 또 시대가 바뀌면서 역사의 평가가 엇갈리는 경우도 있다. 영웅이 쿠데타의 주역으로,또 반대로 반역자가 시대의 선각자로 등등.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다. 우리 근현대사에서도 그런 예는 허다하다. 최근 한국외국어대 潘炳律 교수(한국사)가 출간한 ‘성재 이동휘 일대기’(범우사)는 이같은 ‘역사의 평가’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다. 반 교수는 한·일·중·러·미 등에 산재한 관련자료를 수집,이동휘 선생의 ‘제모습찾기’를 본격적으로 시도한 것으로 평가된다. 성재(誠齋) 李東輝(1873∼1935) 선생은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결코 홀대할 수 없는 큰 별이다. 더러 백범 金九,우남 李承晩,도산 安昌浩 반열에 놓기도 한다. 구한국 정부에서 강화도 진위대장(鎭衛隊長)을 지낸 선생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을사오적 처단후 자결할 것을 결심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일제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자 신민회 핵심멤버로 활동하다가 나라가 망하자 1913년 만주로 망명,북간도와 러시아령(領)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지도하였다. 3·1만세의거 후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한편 이 무렵 선생은 당시 풍미하던 사회·공산주의 사상을 한국독립운동 선상에 접목시키는 한편,선생 자신이 ‘고려공산당’을 창당하여 독립운동 진영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키고자 했다. 그러나 선생의 이같은 사회주의 혁명노선은 선생을 해방후 반세기 동안이나 ‘이념의 창고’에 가둬두는 족쇄로 작용하였다. 한동안 학계에서조차 선생의 이름을 거명하는 자체가 금기시되던 시절이 있었다. 반공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시절 역대 남한정권은 선생의 사상성향을 이유로 독립운동 공적마저 덮어버렸다. 극도의 왜곡과 폄하 그 자체였다. 정부는 1962년부터 독립운동가에 대해 포상을 실시해왔는데 ‘광복50주년’인 95년에야 겨우 선생에게 훈장을 추서하였다. 친일경력자·가짜독립운동가 목에도 훈장을 걸어준 우리 정부가 진짜 독립운동가인 선생 앞에서는 ‘이념타령’만한 셈이다. 반 교수는 선생을 두고 “독립운동 공적은 물론,조국광복을 향한 사심없는 열정·희생정신·혁명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매력적인 인물”이라며 ‘이동휘 예찬론’을 편다. 전기출판과 때맞춰 지난 21일 학계·종교계 인사 500여명을 주축으로 ‘이동휘기념사업회’가 조직됐다. 뒤늦었지만 선생에 대한 재평가 작업과 기념사업이 본격 시작될 모양이다. 선생의 자료집 ‘성재 이동휘 전서’(전2권·독립기념관 간행)을 곧 출간예정인 인하대 尹炳奭 명예교수(한국사)는 “민족운동사의 거인 이동휘를 균형잡힌 시각에서 새롭게 조명,이해해야한다”고 밝혔다. 만주·연해주 일대를 제집 앞마당처럼 내달리며 항일운동을 하던 선생.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혁명 후 레닌정부가 약소민족 독립운동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자 멀리 인도양·지중해·알프스산맥을 넘어 모스크바로 레닌을 찾아가 만나기도 했던 선생. 저자의 서문 가운데한 귀절이 가슴을 친다. “‘2∼3년 내로 광복군을 이끌고 되돌아오겠다’며 압록강을 건넌 후 한시도 쉬지않고 뜨겁고 진실하게 살다간 선생의 삶과 꿈에 조금의 티라도 남기지 않았는지 죄책감마저 든다”. 어디 저자만의 ‘죄책감’일까. 선생 가신 후 60년이 지나도록 아직 유해조차 찾지 못한 우리 후손들인 것을. 범우사 20,000원.
  • “臨政 유적 찾아 보수·보존 추진”/金 대통령 임정 청사 방문

    【상하이 梁承賢 특파원】 金大中 대통령은 15일 오전 상하이(上海)임시정부 청사를 둘러봤다.金대통령은 먼저 백범 金九 선생 등이 사용하던 청사 1층 회의실에 들러 베이민디앙(貝民强)청사관리소장으로부터 청사 복원배경 에관해 설명을 듣고 백범 선생이 사용한 탁자에 앉아 방명록에 서명했다. 金대통령은 ‘불석신명 유방만세(不惜身命 遺芳萬世)’라고 쓴 뒤 “애국지사·선열들이 신명을 바쳐 이룩하려 했던 것이 향기가 돼 만세에 남을 것”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이말 뒤에 ‘한중우의(韓中友宜)’도 추가했다. 회의실엔 장방형 테이블과 의자,대형 태극기 2개,찻잔,주전자 등이 옛 모양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金대통령은 청사관리소로 옮기는 도중 기념품판매대에서 백범선생의 ‘독립정신(獨立精神)’ 친필이 담긴 기념품을 샀다. 金대통령은 “상하이 임시정부는 중국내 여러곳으로 옮겨다녔으므로 앞으로 그 유적도 찾아 보수·보존하는 일을 추진하겠다”고 밝히고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의 보존·개선에 협력해준 중국정부와 상하이시에 감사드린다”고 사의를 표시했다. 한편 관리소측은 김대통령이 지난 94년11월 이곳을 방문했을 때 서명한 방명록과 金대통령 가족 사진을 전시해놓는 등 세심한 준비를 했다.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개관(사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5일 개관했다. 우리 근·현대사 격동기의 수난과 민족의 한이 서린 현장이 역사의 배움터로 단장하고 문을 연 것이다. 감개무량한 일이다. 서대문형무소는 대한제국 말기 1908년 일제의 강압으로 경성감옥이란 이름으로 문을 연 뒤 일제 강점기 서대문감옥,서대문형무소로 이름이 바뀌어 광복을 맞기까지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투옥돼 혹독한 고문을 받으며 처형되거나 옥사했던 곳이다. 해방 후에는 서울형무소,서울교도소,서울구치소 등으로 이름을 달리해 수형시설로 사용되다가 지난 87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옮겨간 후 88년 사적으로 지정되고 92년 독립공원으로 꾸며졌다. 일제는 이곳에 의병장에서부터 독립운동가·항일투사를 무수히 투옥하여 한민족의 혼을 짓밟았다. 해방 후에도 이곳은 파란곡절의 현대사와 함께 수많은 반독재 민주인사·학생·통일운동가들이 고난의 세월을 보낸 곳이었다. 물론 흉악범·경제사범·보안사범 등도 거쳐갔으나 서대문형무소는 우리 민족수난의 현장이자 민족정기의 발원지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백범 金九 선생은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우려다 이곳에 수감돼 “우리나라가 독립하여 정부가 생기거든 그 청사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는 일을 하여 보고 죽게 하소서”라고 기원했다. 柳寬順 열사는 이곳 지하감방에서 매일 아침 저녁으로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영양실조로 숨졌다. 사이토(齊藤) 일본총독을 사살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姜宇奎 의사도 이곳에서 처형당했다. 일제때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감옥과 사형장,망루 등과 역사전시관으로 이루어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우리 애국선열들의 민족정신과 꿋꿋한 기상을 느끼게 해준다. 일제때 고문과 취조장소로 악명을 떨쳤던 옛 보안과 건물을 최근 보수한 역사전시관은 서대문형무소의 설립배경과 변천과정,일제때 전국 형무소 현황,항일저항사,옥중시설,고문실 등을 영상과 밀랍인형 및 각종 모형으로 생생하게 보여준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애국선열의 넋을 후손들이 기리는 한편 우리 역사의 암울했던 시절을 되새겨 보며 다시는 불행한 과거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다짐하는 산 교육장이다. 국민 모두 순례의 발걸음을 디디고 애국심을 다지는 성지로 계속 가꾸어 가야 겠다. 나아가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웅변으로 증언하는 역사 유적으로 전세계인들에게 엄숙한 교훈을 주고 있듯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도 일제의 만행을 우리 민족은 물론 전세계에 증언하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바란다.
  • 백범 전집 편찬위원회 모임/어제 본사회의실서

    ◎내년초 1∼3권 편찬 등 논의 서울신문사가 백범 金九 선생 서거 50주기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하고 있는 백범전집 발간을 위한 편찬위원회 모임이 16일 서울신문사 회의실에서 열렸다. 편찬위원들은 전집 발간 주체의 이름을 ‘백범김구선생전집편찬위원회’로 정하고,관련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국내외 기관 단체 등에 협조공문을 보내 연말까지 자료수집 작업을 끝내기로 했다. 편찬위원들은 또 전집의 전체 규모를 20권 정도로 정하고 백범일지 도예실기 등 백범 저작물과 그 번역본 및 동학 활동 때의 백범 모습을 담을 1∼3권 편찬 작업을 우선 내년 초까지 마무리하기로 했다. 발간은 원칙적으로 백범 서거 50주기인 내년 6월에 하기로 하되 시간이 부족할 경우는 2회로 나누어 하기로 했다. 이날 모임에는 尹炳奭 인하대·趙東杰 국민대 명예교수,愼鏞廈 서울대·李萬烈 숙명여대·金喜坤 안동대·韓詩俊 단국대·尹慶老 한성대·都珍淳 창원대 교수,崔起榮 서강대 강사,金三雄 서울신문 주필 등 편찬위원 전원이 참석했다.
  • 司正을 政爭으로 왜곡말라/金三雄 주필(時論)

    “억울한 욕을 당할 때는 낮잠만 자고 있다가 옳은 일을 해보려면 밤잠을 자지 않고 반대한다”­ 백범 김구 선생이 남북협상을 위해 북행(北行)을 떠나려 할 때 이를 한사코 반대하며 비방하는 사람들에게 남긴 쓸쓸한 독백이다. 여기서 ‘억울한 욕을 당할 때’란 송진우씨 암살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법정에 서게 된 일을 말한다. 결국 ‘밤잠을 자지 않고 반대’한 세력에 의해 백범의 통일정부 수립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정부의 정치권 사정과 관련하여 일부 언론이 훼방을 놓기 시작했다. 이유인 즉 경제를 살려야 할 때에 맨날 사정만 하느냐는 것이다. 정부의 사정을 정쟁으로 치부하면서 개혁에 제동을 걸고 있다. 얼마전까지도 정치부패를 척결하고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어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열을 올렸던 언론이다. 부패정치인을 ‘퇴출’시키라고 얼마나 촉구했던가. 그런 언론이 막상 부패정치인에 대해 사정이 본격화되자 엉뚱한 이유를 들어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부패의 ‘몸통’을 보호하려는 정치적 배경인지, 정치개혁을 좌절시키려는 의도인지는 모르지만, 이 기회에 부패정치를 청산하라는 국민의 뜻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주장이다. 엄격히 말해서 경제살리기와 정치인 사정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경제회생은 급선무이고, 사정은 후선책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부패척결이 선행되어야 한다. ○부패구조를 개혁해야 국난의 근본원인이 김영삼정부의 무능과 정경유착, 정치부패에서 기인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그런데도 불구하고 정치부패를 그대로 둔채 경제회생부터 하라는 것은 모래 위에 가건물부터 짓자는 주장에 다름아니다. 온몸에 퍼진 암세포를 그대로 두고 영양제나 계속 투여하자는 논리와 진배없다. 우리는 과거 몇차례 개혁의 기회를 잃었다. 오랜 일을 그만두고 13대 국회에서 5공청산 작업이 진행될 때도 일부 언론이 “언제까지 5공청산이냐”고 여론을 조성하여 ‘5공청산’이 중단된 적이 있었다. 그때라도 정경유착의 부패구조를 제대로 척결했었다면 오늘의 국난은 예방되었을 것이다. 분명히 말해서 나라를 이 꼴로 만든부패정치의 구조악을 그대로 두고 경제회생은 불가능하다. 구린내 나는 부패의 하수구를 묻어둔채 새로 시작하자는 논리는 구조개혁을 하지 말자는 것이며,이는 미래의 부패도 용인하자는 주장과 다름없다. 부패척결은 정치개혁의 전단계이며,이는 바로 깨끗한 정치를 통해 경제회생과 제2건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오늘 비록 수술의 아픔이 따르더라도 종양을 제거하지 않으면 생명을 지키기 어렵다. 일부 언론이 사정과 정쟁을 등식화시키면서 정부가 경제회생을 팽개치고 사정에만 매달리는 것처럼 비판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인식에서 출발한 단선적 사고의 전형이다. 정직한 언론이라면 국난의 책임을 묻고 부패척결과 정치개혁을 통해 새롭게 출발하자고 써야 한다. ○부패혐의 있으면 측근부터 비록 오늘의 아픔이 따르더라도 참고 견디면서 다시는 부실 국가가 되지 않도록 일부 성급한 국민을 위로하고 여론을 조성하면서 사정(司正)을 지원하고 개혁을 선도해야 옳다. 그리고 따져야 할 일이라면 편파적인 사정은 없는가,왜 거물급을 제쳐두느냐,결코온정주의가 작용해서는 안된다고 촉구해야 할 것이다. 정부는 결코 좌고우면해서는 안된다. 일부 기득권층의 여론이 마치 국민의 여론인 것으로 착각해서도 안된다. 이번에 정경유착의 고리를 단절하지 않으면 우리 정치,나아가서 국가의 희망을 찾기는 어렵다. 정부에 당부하고자 한다. 결코 사정에 여야 차별을 두거나 표적수사,정치보복이어서는 안된다. 공정무사하게,부패혐의가 있으면 측근부터 척결하는 단호함을 보여야 한다. ‘옳은 일을 해보려면 밤잠을 자지 않고 반대’하는 백범의 독백과 좌절이 두번다시 되풀이되어선 안되겠다.
  • 臨政 대통령의 초라한 生家/李炫熙 성신여대 교수(기고)

    “선생은 재덕이 출중하나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들을 도와서 선두에 내어 세우며 타(他)의 부족을 보(補)하고 부족을 개도(改導)함이 선생의 일생의 미덕인데 선생의 최후 일각까지 애호를 받은 사람은 나 한사람이었다” 이 글은 불후의 명작 ‘백범일지’에 나오는 임정 주석 석오 李東寧 선생 서거에 대한 백범 金九 선생의 애도의 한 단면이다. 백범은 李東寧 선생이 1940년 3월 13일 중국 기강에서 서거하시자 우리 독립운동계의 대손실이라고 아쉬워하며 추모하는 가운데 이같은 솔직한 심정을 나타냈다. ○백범과 20여년 동거동락 백범이 석오를 처음 만난 것은 전덕기 목사의 소개로 상동교회를 다닐 때였다. 그뒤 신민회를 같이 조직하였으며 1919년 4월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뒤 상하이에서 다시 합류하였다. 두 분은 임정시대부터 李東寧 선생이 서거할 때까지 20여년간을 같은 집에서 지내며 가난 속에서도 독립운동을 지속했던 선후배 사이였다. 석오가 백범보다 7년 연장이었다. 공교롭게도 석오가 주요 직책을 맡은 뒤는 곧백범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거나 적극 추천해서 그 임무를 빛내게 독려하였다. 중국에 있던 임정(1919∼45)은 27년동안 합법적으로 5차례나 개헌을 해서 지도체제,원리를 변경했는데 2차 개헌때인 1925년 이후에는 백범을 대통령격인 국무령에 강력 천거해서 ‘임정의 문지기’만 되어도 족하다던 백범이 최고 직책을 맡게 된 것이다. 민주공화제를 실시한 임시정부였으나 그때까지도 동지들은 봉건의식이 남아 있어 지체가 높지 못한 ‘백범 국무령 추대론’에 많은 반대가 있었다. 그러나 석오가 “백범은 내가 책임지겠으니 그리 알고 국무령을 삼읍시다”라며 그를 적극 추천,백범이 주석직에까지 올라 최고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석오는 행정부에서 내무·법무총장 국무총리 대통령대리 주석을,입법부에서는 초대 의정원 의장(국회의장)을 맡은 이후 여러번 의장을 역임했다. 이런 자리가 자신에게 돌아올 때마다 석오는 늘 양보하고 출중한 동료 지사를 천거했었다. 그러나 많은 동지가 합의해서 그를 수장의 자리에 추대했다. “난국을 지혜롭게 이끌어가고 분열·파벌을 잠재울 수 있는 분은 인격적으로나 학덕으로 보나 석오만한 인물이 없다”고 그를 국난극복의 구심점,대표자로 지목한 것이다. 개화민권운동가,독립협회 간사,제국신문 논설위원,신민회 조직,신흥무관학교 설립,임정 수립,이봉창·윤봉길 의사의 배후지도,한국독립당 조직 등 그의 보람찬 70평생은 나라를 위한 고귀한 공인의 생애일뿐 개인 생활은 전혀 누릴 수 없었다. 그는 임정을 수립하면서 “지금으로부터 우리는 대한제국 국민이 아니고 민간이 주인이 되는 대한민국이란 민주공화국의 국민입니다”라고 말했다.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내 좁은 건물에서 그는 50대 초 입법부의 의장으로 3권분립을 통한 자유민주주의를 소리높여 외친 것이다. 석오는 곧 우리나라 자유민주주의의 아버지인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의 아버지 그가 출생한(1869년) 곳은 지금 독립기념관이 지척인 충절의 고장,천안시 목천면 동리였다. 지금 그의 생가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임정의 법통을 이은 대한민국임에도 임정의 대통령이던 석오의 생가를 가보면 너무 초라하고 누추하여 볼품이 없다. 이곳이 과연 큰 어른이 태어난 곳인가 하고 의심해 놀랄 지경이다. 별것 아닌 어떤 대통령의 생가가 번쩍 빛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독립기념관에는 하루에도 몇백명이 찾아와 감탄,열복하고 가지만 바로 코닿을 곳인 李東寧 주석(대통령)의 생가는 늘 쓸쓸하고 초라한 모습이다. 이곳이 50년된 대한민국 건국의 법통성이 발원한 성지요,돌봐야 할 터인데도 잡초만 무성하게 바람결에 흩날리고 있다. “민주의 시초요,대동화합,단결의 실천자인 李東寧 선생이 탄생한 곳인줄 그 누가 알랴”
  • 백범사상 실천운동연합,복원운동 전개

    ◎“민족의 얼 서린 경교장 살리자”/김구 선생 만년 자취 밴 곳/국가문화재 지정 요구/국회서 새달 안건으로 다뤄 백범(白凡) 金九 선생의 얼이 서린 경교장(京橋莊)을 복원하자는 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경교장은 선생이 해방 직후인 45년 11월 환국한 뒤 安斗熙에게 암살당한 49년 6월까지 3년7개월 동안 집무실 겸 거처로 썼던 곳.해방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민족 단결을 위해 고뇌하던 선생의 만년(晩年) 자취가 배어 있는 곳이다.이곳에서 임시정부 포고령을 선포하고 신탁통치 반대성명을 발표했으며 수백명의 대학생들이 선생의 북한 방문을 막기 위해 시위를 하기도 했다.선생이 흉탄에 쓰러진 곳도 이곳이다. 일제 때 광산 갑부였던 崔창학이 35년 2층 석조 건물로 지어 무상 임대한 경교장은 선생이 암살된 뒤 자유중국 대사관,미군 주둔지,베트남 대사관으로 쓰이다 68년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의 소유가 됐다.1층은 병원 사무실로,피살 현장인 2층은 의사 휴게실 등으로 쓰이고 있다. 백범사상 실천운동연합(상임대표 金仁壽)은 96년부터 대국민 서명,국회 청원 등을 통해 복원운동을 꾸준히 펼치고 국가문화재로 지정해줄 것을 요구해 왔다.한때 병원측이 철거하려는 사실을 알고 철회시키기도 했다. 지난 29일 뜻을 같이하는 시민단체·학계 인사와 일반시민 등 100여명이 방치된 경교장을 둘러보았다.이 단체를 중심으로 한 복원 요구를 받아들여 국회 문화예술소위원회는 다음달 정식 안건으로 다룬다. 金상임대표는 “겨레의 사표(師表)인 선생이 돌아가신 지 50년이 다 되도록 경교장이 방치되고 있는 것은 후손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라며 안타까워 했다.
  • 백범기념사업협회 李壽成 회장/“국민정성 모아 백범기념관 건립”

    ◎서울신문사의 전집 발간 적극 협력 李壽成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은 28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백범기념관 건립을 위한 범국민 모금운동을 연내에 시작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인터뷰 내용. ­백범기념관 건립 계획은. ▲백범기념관은 국민의 이름으로 건립돼야 한다. 사회 각 분야의 덕망있는 인사로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구체적인 방안을 논의할 생각이다. 건립 자금은 국민들의 모금운동으로 충당되는 것이 좋다고 본다. 민족의 중요한 자산인 金九 선생의 민족사랑과 애국심을 널리 전파하고 되새기기 위해서도 많은 사람들의 참여가 바람직하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지만 모금운동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돈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지금과 같이 어려운 때일수록 진정한 애국심이 필요하다. 백범은 민족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가졌던 지도자로 모든 국민이 그의 애국심에 공감할 것으로 믿는다. 기념사업협회는 연내에 모금운동을 시작하여 서거 50주기인 내년에 기념관이 준공되기를 바라고 있다. 장소는 金九 선생과 관련이 있는 곳으로 기념사업협회,전문가 등과 협의하여 결정할 예정이다. ○민족사랑·애국심 전파 ­백범기념사업협회 활성화 방안은. ▲과거의 정권이 백범을 견제했기 때문에 기념사업협회의 활동도 위축됐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백범 사상을 널리 전파하고 金九 선생의 올바른 평가 등을 위해 보다 적극적인 활동이 필요하다. 재정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협회 회원을 늘릴 예정이다. 현재의 회원은 140여명에 지나지 않는다. 청소년들에 대한 백범사상 교육도 보다 활성화할 방침이다. ○학술상 제정 반가운 일 ­서울신문사는 50주기를 맞아 백범 학술상을 제정하며 백범전집을 발간하기 위해 자료수집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서울신문사와 기념협회와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데. ▲백범이 서거한지 반세기나 지났는 데도 그의 전집이 발간되지 않은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서울신문사가 이번에 전집을 발간하고 학술상을 제정하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며 감사하게 생각한다. 전집 발간과 학술상 제정은백범사상,순수한 애국심,민족사랑 등을 국민들에게 전파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며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다. 협회는 전집발간을 위한 자료수집 등에 적극 협력할 것이다. 발간과 배포 등에도 가능한 최대의 지원을 하겠다.
  • 白凡전집 편찬위 첫 모임

    ◎李壽成 기념사업회장·車一錫 본사사장 등 참석 백범 金九 선생의 민족사랑과 애국정신을 담아낼 백범전집 발간을 위한 백범전집 편찬위원회 첫 모임이 25일 서울에서 열려 자료수집과 편찬 방향 및 준비작업 등이 논의됐다. 프레스센터 18층 외신기자클럽에서 열린 이날 모임에는 백범 金九선생 기념사업협회 李壽成 회장,백범 아들인 金信 전 교통부장관,車一錫 서울신문 사장과 朴仁成 편찬위원회 사무총장 및 10명의 편찬위원 등이 참석했다. 편찬위원은 尹炳奭 인하대 趙東杰 국민대 명예교수,愼鏞廈 서울대 李萬烈 숙명여대 金喜坤 안동대 韓詩俊 단국대 尹慶老 한성대 都珍淳 창원대 교수,崔起榮 서강대 강사,金三雄 서울신문 주필 등이다. 李회장은 “백범의 우국정신만 본받는 다면 아무리 어려운 시대를 맞아도 이루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라며 “백범전집 발간사업은 올바른 역사정립을 통한 국가발전의 초석이 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車사장은 인사말에서 “金九선생 50주기를 맞아 백범전집이 발간되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며 “이는일그러진 현대사를 바로잡고 사회정의를 세우는데 크게 공헌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서울신문사는 독립투쟁과 민족통일에 헌신한 金九 선생의 위업과 사상을 민족지표로 승화시키기 위한 50주기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백범전집 발간을 추진하고 있다. 방대한 편찬작업의 준비를 위해 ‘백범자료 수집 범국민 캠페인’이 8월부터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다.서울신문사는 백범전집 발간과 함께 ‘백범학술상’을 제정한다.
  • 親日의 군상:2/국립묘지에 묻힌 日帝경력자(정직한 역사 되찾기)

    ◎‘민족성지’에 일제고관·황군장교까지/‘과거’ 검증 안된채 안장… 끝없는 논란/백강 선생 “나는 국립묘지 싫다” 유언 “내가 죽거든 국립묘지에 묻지말고 생사를 같이한 임정요인들이 누워있는 효창원 묘역에 묻어달라.” 지난 93년 1월 타계한 마지막 임정요인 백강 趙擎韓 선생의 유언이다. 백강 선생은 왜 남들이 다 묻히기를 원하는 국립묘지 안장을 굳이 거부한 것일까? 그 이유는 단 하나. 일제 식민통치에 협력한 의혹을 받고 있는 사람들과 같이 국립묘지에 누워있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국립묘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들을 모신 민족의 성지다. 그러나 국립묘지에 안장된 인사 중에는 일제의 식민정책에 협력한 인사들도 일부 포함돼 있다는 주장과 함께 이들의 국립묘지 안장을 두고 논란이 있어왔다. 국립묘지 내에서 친일단체나 일제 통치기관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이 묻혀 있는 묘역은 국가유공자묘역,애국지사묘역,장군묘역 등 세 곳.국가유공자묘역에는 제1묘역의 白樂濬·陳懿鍾·白斗鎭·嚴敏永·黃鍾律·李殷相·李瑄根 등 7명,제2묘역의 趙鎭滿 등 모두 8명이 묻혀 있다. 문교장관과 참의원 의장을 지낸 白樂濬은 1942년 4월 창간된 친일 ‘기독교신문’의 산파겸 편집위원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국무총리를 지낸 陳懿鍾은 경성제대를 나와 일본고등문관 행정과에 합격,일본 홋카이도(北海道) 도청에서 농무과장을 지냈다. 白斗鎭 전 국무총리는 도쿄제대 상대 출신으로 조선은행에 근무했다. 3공때 장관을 지낸 嚴敏永과 黃鍾律은 모두 일본 규슈(九州)제대 출신으로 嚴씨는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에 합격하여 군수를,黃씨는 만주 고등문관 행정과에 합격한 후 만주국 재정국에서 관리를 지냈다. ‘민족시인’으로 일컬어지는 李殷相은 만주에서 발행되던 친일신문 ‘만선(滿鮮)일보’에 몸담은 경력이 있으며 문교장관,초대 정신문화연구원장을 지낸 李瑄根은 만주국의 국회격인 협화회(協和會) 간부를 지낸 기록이 있다. 3·4대 대법원장을 지낸 趙鎭滿은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에 합격,해주지법 판사와 대구지법 부장판사를 지냈다. 이들이 해방후 국가에 공로가 있다고 하지만 일제 당시의 행적을 무시하고 국립묘지에 안장된 데는 논란의 소지가 있다. 애국지사묘역은 일제하 항일투쟁 공로로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수여(추서포함)받은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모신 곳이다. 따라서 이곳은 친일의 ‘흠’이 있는 인물은 근처에도 가서는 안되는 ‘성역(聖域)’이다. 그런데 이곳에도 친일단체 등에서 활동한 기록이 있는 사람들이 묻혀 있다. 金鴻亮(77년 독립장),崔昌植(83년 독립장),李鍾郁(77년 독립장),尹益善(62년 독립장),李甲成(62년 대통령장) 등이 그들이다. 친일파 연구에 일생을 바친 고(故) 林鍾國씨의 조사결과에 따르면,金鴻亮은 황해도 도의원과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을 지냈고,崔昌植은 그의 아내 金元慶(63년 대통령표창)과 함께 중국 상하이에서 친일 교민단체인 계림회에 소속돼 친일활동을 한 의혹을 받고 있다. 승려로서 3·1운동에 가담했던 李鍾郁은 국민총력연맹 위원으로 불교계 친일에 가담한 일이 있으며 尹益善은 경성부(현 서울시) 원서정(苑西町) 총대(總代·지금의 동장에 해당)와 경성부 북부정회 총대회 간사를 지냈다.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해방 후 초대 광복회장을 지낸 李甲成은 상하이에서 이와모토(岩本正一)라는 창씨명으로 밀정노릇을 했다는 주장(임정 서무국장 林義鐸,유관순 열사의 오빠 柳愚錫씨 등의 증언)이 그의 생전에도 끊이지 않았었다. 장군묘역에는 1,2,3묘역 모두에 구 일본군 장교 출신들이 누워 있다. 제2묘역의 육군중장 李應俊,제3묘역의 육군중장 李鍾贊과 육군대장 출신으로 국무총리·국회의장을 지낸 丁一權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한국군 ‘창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李應俊은 일본육사 26기 출신으로 해방당시 일본군 대좌(대령)였다.한국군 재임시 군의 정치개입을 반대,‘참장군’으로 불리는 李鍾贊 역시 일본 육사출신(49기)으로 일본군 공병소좌(소령)로 남방전선에서 해방을 맞았다.3공 당시 국무총리와 국회의장을 지낸 丁一權은 만주 봉천군관학교 5기 출신으로 朴正熙 전 대통령(신경군관학교 2기 출신·국가원수묘역 안장)과 같이 만주군에서 장교를 지냈다.지난 2월 대전국립묘지(장군묘역)로 이장한金昌龍(사후 중장 추서) 전 특무부대장은 만주 관동군 헌병대에서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다. 장군묘역에 있는 사람들은 건국후 창군과 6·25및 그 이후의 공로로 국립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일제 당시 자발적으로 일본군에 입대하여 ‘황군(皇軍)’의 장교를 지낸 인물이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지적이 있어 왔다. ◎애국지사 묘역에 묻힌 선열들/일제 항거 애국열사 등 1,341위 모셔/임정묘역엔 박단식·양기탁 선생도 국립묘지내에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모신 곳은 애국지사묘역(대전분소 포함)과 임정묘역 두 곳이다.이곳에는 한말 국운이 기울던 시기에 의분을 참지 못해 자결한 순국선열을 비롯해 일제에 항거해 독립운동을 전개한 애국열사들이 안장돼 있다. 98년 8월 현재 현재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에는 총 1,341위(대전분소 1,136위 포함),임정묘역에는 최근에 유해를 봉환한 양기탁(梁起鐸) 선생 등 16위의 애국선열이 안장돼 있다.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된 애국지사들을 활동분야별로 보면,申乭石·李仁榮 등 의병장,李鍾一·洪秉箕 등 3·1운동 관련자,의거 당시 64세의 나이로 사이토(齋藤)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姜宇奎 의사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金相玉 열사등 의열투쟁가,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다 순국한 朱基徹 목사,외국인으로서 3·1운동에 참여하고 제암리학살사건의 진상을 전세계에 공개한 스코필드(한국명 石虎弼) 박사,여류독립운동가 南慈賢 여사,‘독립신문’을 창간한 徐載弼 박사 등 항일 독립운동계의 상징적인 인물들이 총망라돼 있다. 93년에 조성된 임정요인묘역은 임정관계자중 국무위원급 이상의 요인들을 별도로 모신 묘역. 이곳에는 임시정부의 대통령을 지낸 朴殷植 선생을 비롯해 국무령을 지낸 李相龍·洪震·梁起鐸 선생과 임시정부 의정원(국회에 해당) 의장을 지낸 金仁全 선생·孫貞道 목사,임정 국무총리를 지낸 盧伯麟 선생,국무총리 대리겸 외무총장을 지낸 申圭植 선생,국무원 통위부 총장 金東三 선생,그리고 임정 국무위원과 비서장을 지낸 趙擎韓(94년 3월 애국지사묘역에서 이장함) 등이 안장돼있다. 임정의 주석을 지낸 백범 金九 선생과 尹奉吉·李奉昌 의사 등은 효창원묘역에,임정 내무총장을 지낸 申翼熙 선생 등은 수유리 묘소에 안장돼 있다. 현재 동작동 국립묘지가 만원이어서 최근에 작고한 애국지사는 대전 분소에 안장되고 있다. 柳寬順 열사와 같이 후손이 없는 무후(無後)선열들은 무후선열제단에 위패를 봉안해 놓고 있다. ◎‘친일의 군상’ 자문위원 12명 위촉/객관·공정성 검증… 반론권 보장합니다 서울신문사는 미래지향적 차원에서 친일파 청산을 위해 기획한 ‘친일의 군상’시리즈를 보다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보도하기 위해 12명의 자문위원을 위촉했습니다. 자문위원은 역사학자·변호사·종교가·언론인 등 관계분야의 저명한 인사들로 구성됐습니다. 모든 글은 자문위원들의 검증과 명예훼손 등 법적인 검토를 거쳐 게재됩니다. 자문위원은 인물 선정에도 참여하며 정기적으로 만나 시리즈의 내용을 종합 평가하고 앞으로의 방향 등에 대해 조언할 것입니다. 서울신문사는 특히 보도된 내용에 대한 반론권을 보장합니다. 자문위원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金祐銓 전 광복회 부회장 ▲姜萬吉 고려대 교수(한국사) ▲韓相範 동국대 교수(법학) ▲李炫熙 성신여대 교수(한국사) ▲朴鍾淳 충신교회 담임목사(한국기독 교총연합회 공동회장) ▲李泰鎭 서울대 교수(한국사) ▲姜昌一 배재대 교수(한일관계사) ▲朴元淳 변호사(참여연대 사무처장) ▲박은경 광운대 강사(정치학) ▲林大植 외국어대 강사(한국사) ▲金三雄 서울신문 주필(친일문제연구 가) ▲崔光一 서울신문 제작이사
  • 창무악 ‘백범 김구’ 작창 정철호 선생

    ◎“임방울류 적벽가 문화재 지정됐으면”/국창 임방울 선생의 유일한 생존 제자/신판소리·신창극·신민요 2만곡 작곡 “전통예술의 꽃이라 불리는 판소리의 모든 유파가 그 가치를 인정받고 보존 혜택을 받고 있는 데 비해 명창 임방울 선생의 소리는 상대적으로 ‘홀대’를 받아온 것 같습니다. 지금이라도 선생의 소리정신을 계승하고 득음(得音)의 세계를 널리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면 합니다” 국창(國唱) 임방울 선생의 제자로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국악인 정철호씨(75·전남 도립남도국악단장).그는 임방울 선생의 판소리 유파를 계승·보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우리나라에서 무형문화재 지정제도가 처음 생긴 것이 1964년이기 때문에 61년 작고한 임방울 선생은 거기에 포함될 수 없었다.이런 현실에서 정씨는 스승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임방울류 적벽가를 완창,테이프를 내기도 했다. 국내 최고의 판소리 작창가이자 아쟁산조의 창시자로 중요 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고법(鼓法) 예능보유자인 정씨는 14세가 되던 해 목포에 공연온 임방울 선생을 처음 만났다. “선생의 소리를 듣다가 다른 사람의 소리는 못 듣는다고들 했습니다.선생의 목은 원래 ‘떡목’으로,십년을 하루같이 수련해 얻은 것이지요.선생은 소리하는 사람의 4대 요건이라 할 인물치레,사설치레,득음,너름새를 고루 갖추었습니다” 정씨는 판소리 명창이지만 그의 업적은 작곡 쪽에서 한층 빛난다 신창극·신판소리·신민요 등을 포함해 줄잡아 2만여개에 달한다.그 중 대표곡으로 꼽히는 것이 신작 판소리 ‘열사가’. “오늘날 회자되는 판소리 다섯 마당은 내용이 추상적일뿐 아니라 소재 또한 중국 것입니다.옛 것을 지키는 것도 좋지만 오늘의 조국이 있게 한 애국선열들의 이야기를 통해 민족정기를 일깨우는 것은 더욱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작창한 창무악 ‘백범 김구’도 그런 배경에서 나온 작품이다.그는 지금은 신작 판소리 ‘세종대왕’ 작창과 창무악 ‘춘하추동’ 개창(改唱)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소리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흥부가 아나? 춘향가 아는가? 심청가 아시는가? 적벽가 아십니까?”라는 말이 있다.적벽가는 부르기 힘들고,또 그런 어려운 곡을 부르는 소리꾼을 대접한다는 의미에서 생긴 말이다.적벽가는 임방울 선생의 대표창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정씨의 소망은 그 임방울류 판소리 적벽가가 널리 불리고 하루 빨리 문화재로 보호받는 것이다. “어떤 분야든 문화재로 지정이 안되면 제자로 입문해 배우려는 사람이 없어요.임방울 소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제대로 보존하지 못하는 인간문화재 제도라면 차라리 없느니만 못합니다.” 국창 임방울의 법통이 끊어져선 안된다는 것은 비단 그만의 생각은 아니다.
  • 長江日記/정정화 지음(화제의 책)

    ◎독립운동에 몸바친 할머니 일대기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각계에서 조명작업이 활발하다.대개 시대의 어려움을 극복하자는 캠페인을 담고 있다.앞으로의 결의를 다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묻혀있는 과거의 올곧은 삶을 조명하는 작업도 중요하다. 이 책은 백범 선생이 ‘한국의 잔 다르크’라 부른 정정화 할머니의 일대기를 다루었다.저자의 삶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상해 임시정부의 역사이자 우리 독립운동사에 대한 증언이다.1900년 태어나 독립운동가 집에 시집온 뒤, 20살 되던 해 시아버지와 남편의 뒤를 따라 중국 상해로 가면서 맺게된 임시정부와의 인연.독립운동 자금모집의 밀령을 띠고 여섯 차례에 걸쳐 국경을 넘나들었고,32년 윤봉길 의사 폭탄 투척 사건이후 상해를 탈출한뒤 김구·이동녕 선생등을 뒷바라지 하면서 10년간 망명정부의 궂은 일을 도맡은 과정 등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이 책의 내용은 23일까지 연강홀에서 ‘아,정민화’라는 연극으로 공연되고 있다.학민사.1만원.
  • 안기부 뿌리 抗日독립운동서 찾는다/청사내에 丹齋·白凡 존영 걸어

    ◎광개토대왕비 제막 “통일 주도”/어두웠던 과거 정리… 긍지 심기 안기부는 14일 서울 내곡동 청사에서 李鍾贊 부장을 포함한 전부원이 참석한 가운데 광개토왕비 제막식을 가졌다. ‘뿌리 찾기’에 나선 것이다. 지난날의 어두웠던 부사(部史)를 정리하고 움츠러든 부원들에게 긍지를 심기 위한 노력의 하나다. 이날 제막식은 95년 청사 이전 때 건립됐던 스테인리스 조형물이 안기부를 제대로 상징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내부의견에 따른 것이다. 안기부는 기존 스테인리스 조형물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이 자리에 높이 6.4m의 광개토왕비 모형을 세웠다. 李안기부장은 제막식사에서 “한국인의 기상을 세계에 알리고 민족통일이라는 민족사적 과제를 성취하자는 취지에서 안기부의 광개토시대를 선언한다”고 말했다. 이와함께 안기부는 이날 청사내에 단재(丹齋) 申采浩 선생과 백범(白凡) 金九 선생의 존영을 걸었다. 안기부의 뿌리를 대일(對日) 항쟁을 주도한 이들 독립운동가에게서 찾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단재는 의열단(義烈團), 白凡은 한인애국단이란 독립운동 비밀결사단체를 이끈 바 있다.
  • 정부수립 50돌에 보는 태극기 옛모습

    ◎박영효 가옥·광주 등 3곳서 전시/김구 선생 서명 태극기 등 선보여 정부수립 50년을 기념하는 태극기 전시회가 남산골 한옥마을과 전쟁기념관 등 서울 2곳과 광주에서 열리고 있다.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한옥마을 내의 구한말 정치인 박영효 가옥(266­6937)에서 20일까지 계속되는 ‘태극기 옛모습전’에는 구한말,임정시대 독립운동,한국전쟁 등 중요한 역사의 고비 때 활용한 태극기 36점의 사진을 공개한다. 선열들이 품 속 깊이 간직하거나 목숨을 걸고 지킨 것들로 실물은 독립기념관에 보관돼 있다. 전시품 가운데 ‘김구 서명 태극기’는 백범선생이 1941년 도산 안창호의 딸 안수산에게 기증한 것이다.‘태극기 목각판’은 1919년 3·1만세운동 때 태극기를 대량으로 찍느라 만든 것이고,‘미국시위 태극기’는 같은 해 4월16일 재미교포들이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시위행진을 할 때 사용했다. 또 ‘박영효 태극기’는 1882년 당시 특명전권대신으로 임명된 박영효가 제3차 수신사로서 메이지마루호를 타고 일본으로 가던 중 만든 것이다. 대한민국 국기선양회가 전쟁기념관 2층 중앙홀에 마련한 ‘태극기 변천사전시회’는 15일까지 열린다. 갖가지 태극기 실물 35점을 전시했으며 기념관 입장료는 어른 2,000원,학생은 1,000∼1,500원 이다. 광주광역시 동구문화원에서는 30여명의 화가가 참여한 ‘제1회 우리 태극기 무궁화 대전’을 25일까지 연다.
  • 국립창극단 ‘백범 김구’ 무대에/창극으로 되새기는 백범 일대기

    ◎개인사·가족사 생생하게 재현/인간적 면모 보여주는데 역점 백범 김구 선생의 일대기를 다룬 대형 창극이 마련된다. 국립창극단은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창과 무용,관현악 등이 어우러진 가무악극 ‘백범 김구’(김병준 극본,김명곤 연출)를 14일부터 16일까지 국립극장 대극장 무대에 올린다. 14일 하오 7시30분,15·16일 하오 4시. 백범은 ‘행복을 가져다주는’ 문화의 힘을 유달리 강조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존을 풍족히 할 만하고,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이번에 공연되는 ‘백범 김구’는 백범의 일생을 우리 고유의 전통공연예술인 창극으로 재현,한국 문화의 힘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또한 김구의 개인사와 가족사를 예술무대를 통해 다시 한번 읽어볼 기회를 제공한다. 1막은 소년 김구가 일제의 탄압과 추적을 피해 길을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18세에 오응선을 찾아가 동학에 입도,이름을 김창수로 바꾼다. 따르는 무리가 수천명에 달해 ‘아기접주’별명을 얻은 그는 이듬해 최시형에게서 접주첩지를 정식으로 받는다. 황해도 15명의 접주가 모여 거사를 결정하고 백범은 팔봉접주로 선봉에 선다. 그러나 해주성 공격에 실패하자 신천,중국,만주 등을 떠돌게 된다. 2막은 23세의 백범이 인천감옥을 탈옥하면서부터 마침내 광복의 기쁨을 맛본 뒤 정적에게 암살당하기까지의 자취를 그린다. 연출자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백범의 내면과 개인사다. 연출자 김명곤씨는 “백범의 가족,특히 아내와 어머니의 관계를 보여주는 에피소드를 많이 삽입하는 등 백범의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는 데 역점을 뒀다”고 밝힌다. 이 작품은 기존의 창극 무대와는 여러 면에서 구분된다. 집단무 등에 마당극적인 요소를 도입한 것이나,극의 전개상황을 일러주는 도창(導唱)을 집단창화한 것 등이 대표적인 예다. 이번 공연에는 국립극장 소속 국립창극단,국립국악관현악단,국립극단,국립무용단,국립발레단 등 5개 단체가 참여한다. 작창은 정철호씨가,작곡은 박범훈씨가 각각 맡았다. 국립창극단원 왕기석씨가 김구로,국립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 안숙선씨가 김구 어머니로 나온다. 공연시간은 2시간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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