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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4년 北사단장 생포·귀순시켜”

    ‘북파공작원의 대부’로 알려진 김동석(82) 예비역 육군 대령이 6·25전쟁 당시의 첩보활동을 기록한 회고록 ‘This man 전쟁영웅 김동석’을 발간해 군은 물론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김씨는 23일 “‘북파공작원은 비밀을 무덤까지 가져간다.’는 불문율이 있으나 영화 ‘실미도’로 북파공작원 실상이 공개됐고 보상법률이 제정돼 회고록을 발간하게 됐다.”며 집필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오는 26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중견 가수인 딸 진미령(본명 김미령)씨와 김성은 전 국방부장관 및 북파공작원 출신들이 모인 가운데 출판기념회를 가질 예정이다.●김동석은 누구인가 그는 한국전쟁 당시 육군첩보부대(HID)와 동해안 지역을 담당한 제36지구대를 이끌며 숨가쁜 첩보전쟁을 진두지휘한 ‘전쟁영웅’이지만 첩보부대의 특성상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다. 미국 정부는 1953년 7월27일 체결된 정전협정 50주년을 앞둔 지난 1998년부터 2003년까지 5년여 동안 한국전쟁 기념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김씨를 맥아더·리지웨이 유엔군 총사령관, 백선엽 육군 대장 등과 함께 ‘한국전쟁 4대 영웅’으로 선정할 만큼 그의 활약상을 높이 평가했다. 한국 주둔 미 제2보병사단은 2002년 5월7일 경기도 의정부시 소재 캠프 ‘레드 클라우드’내 전쟁박물관에 ‘김동석 영웅실’을 마련하고 ‘전쟁영웅’ 칭호를 부여했다. 1923년 8월 함경북도 명천 칠보산 기슭에서 태어난 김씨는 일본의 압제 하에서 중국 광저우의 황푸군관학교를 거쳐 중국 국민당 애국의용대 부대장과 백범 김구 선생 경호원 등을 지냈다. 귀국해서는 육군사관학교(8기)를 졸업했고 육군 제17연대 11중대장으로 한국전쟁에 참여했다. 전쟁 발발 초기 중대장으로 재임하면서 낙동강 전선에서 박성철이 지휘한 북한군 15사단을 전멸시킨 뒤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소속 미군 연락장교로 발령받아 첩보세계에 입문해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작전에서 결정적 첩보를 수집하는 전과를 올렸다.특히 서울에 최초로 진주한 북한군 105전차사단 1대대장 김영 소좌가 포로로 잡히자 끈질긴 설득작업을 벌여 평양 입성의 결정적 정보를 캐내기도 했다. 이후 육군첩보부대 1사단 지구대장을 거쳐 1952년부터 1961년 5·16 쿠데타가 발생할 때까지 동해안 첩보업무를 담당한 제36지구대를 이끌었다.5·16 쿠데타에 협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1961년 육군 대령으로 예편한 뒤 삼척·강릉·속초·목포·수원시장 등을 거쳐 함경북도지사 등 행정가로서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월 2~3회 침투 공작” 김씨가 회고록을 통해 밝힌 내용 가운데 가장 큰 관심을 끄는 대목은 정전 직후인 1954년 2월 인민군 사단장 이영희를 납치한 부분이다. 그는 회고록에서 “휴전 직후인 1954년 2월8일 적진에 잠입한 육군첩보부대 제36지구대 공작대원들이 강원도 통천 부근에서 인민군 사단장 이영희를 매복 중 생포해 귀순하게 했다.”며 생존자인 H·J·K씨의 실명을 소개했다. 북파공작과 관련해서는 “제36지구대는 휴전 전까지 원산 남방 고성에 제1지대, 원산만 능도와 여도에 제2지대, 명천 앞 양도에 제3지대를 배치해 기상 조건에 따라 월 2∼3회 침투공작을 했다.”면서 “휴전 후에는 강원도 모 해변으로 철수해 공작 임무를 계속 수행했다.”고 털어놨다.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남다른 인연도 관심거리다.그는 “박정희와 정일권이 일본군으로 만주에 근무하다 무장해제당한 다음 귀국을 서두르다 (1945년 10월) 일본 육사 교육을 받은 ‘친일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소련군에 체포됐다.”면서 “이송 도중 화물기차에서 뛰어내려 인근 산 속으로 도주한 두 사람을 조선애국의용대 대장으로서 안전하게 국경선을 넘어 남한으로 가도록 도와줬다.”고 회고했다.전광삼기자 hisam@seoul.co.kr
  • [학술플러스] ‘임시정부·백범’ 연구 발표회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는 7일 백범기념관 대회의실에서 광복 60주년 기념 ‘일본 군국주의의 패망과 대한민국임시정부·백범 김구’를 주제로 연구발표회를 개최한다.
  • 김구 친필서간 28일 경매

    백범 김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인 1930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국민회 총회장인 백일규에게 보낸 친필서간이 28일 경매에 부쳐진다. 이 서간 머리에는 ‘대한민국 12년 4월 2일 임시정부 재무장 김구’라고 적혀있으며 미주교포들이 보내준 임정 지원 자금에 대해 뒤늦게 영수증을 발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추정가는 400만∼600만원. 백범이 1931년 5월 송의자에게 서명하고 증정한 백범일지(추정가 100만∼200만원)도 함께 출품된다.연합뉴스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한화(2)-동생 김호연 빙그레회장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한화(2)-동생 김호연 빙그레회장家

    ‘한번 들어서면 뒤를 볼 수도, 뒤로 돌아갈 수도 없다.’는 김호연(50) 회장의 경영 ‘일방 통행론’이 진행된지 횟수로 13년째.1992년 ‘미운오리 새끼’였던 빙그레는 2005년 확실한 ‘백조’가 됐다. 당시 부채 비율 4000%대는 50%대로,230억원대의 시가 총액은 무려 20배 가까이 늘어난 4300억원대로 껑충 뛰었다.10년간 누적적자 100억원은 놀랍게도 2004년에 순이익 350억원으로 바뀌었다. 이같은 변신은 빙그레와 김 회장이 처했던 극한의 조건들이 이뤄낸 절묘한 조화 덕분이다. 그룹 신규 투자에서 항상 ‘찬밥 신세’였던 빙그레는 김 회장이 취임한 이후부터 한화와의 단절을 통해 자력 갱생의 계기를 만들었고, 한때 경영능력에 대한 오해를 뒤집어쓴 김 회장은 처절한 구조조정으로 수익성과 성장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았다. 특히 빙그레의 뛰어난 경영 성적표는 일방적으로 제기됐던 김 회장의 ‘자질 오해’를 깨끗이 불식시켰다. 내성적이며 말수가 적은 ‘충청도 양반’ 스타일인 김 회장에게 10년 이상의 기나긴 구조조정을 성공케 한 원동력은 뭘까. 불명예를 안고 무너지기엔 너무나 억울해서였을까. 아니면 성공해서 반드시 보여줘야만 했던 오기였을까. ●형제 분가 김승연-호연 형제의 분가 과정에서 적지 않은 진통이 있었다.92년 빙그레가 한화그룹에서 분리될 당시 시작된 형제간의 재산권 분할과 관련된 소송은 여론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사건의 발단은 당시 한양유통(현 한화유통)의 사장인 김호연 회장을 ‘경영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불명예 퇴진시킨 것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됐다. 김 회장으로서는 공격적으로 유통업을 확장시키려는 순간에 경영 감사에서 이런 사실을 통보받자 너무나 어이없어했다고 한다. 한양유통은 인수 시절부터 재무구조가 좋지 않은 데다 증자가 없어 한층 악화됐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경영 능력이 부족하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회사에서 저를 밀어낸 것은 사실상 해서는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김 회장은 이 사건 이후 6개월 가량 두문불출했다.‘경영능력이 부족하다.’는 낙인 때문에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어서였다. 이 때문에 그는 2004년 4월에 수상한 ‘한국의 경영자상’에 유독 애착이 간다고 했다. 김 회장은 일련의 사태 이후 재산권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부당함에 대한 저항이자, 약자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지루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3년 6개월의 법정 공방을 거치면서 김 회장은 모친인 강태영(78) 여사를 비롯한 가족과 지인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마침 강 여사의 칠순을 맞아 대학 은사인 박홍 전 서강대 총장이 형제간 화해를 권유하자 김 회장은 이를 받아들여 소송을 취하했다. 강 여사는 당시 “칠순 잔치보다 가족들의 화합이 더 중요하며, 형제들의 잔치 비용을 무의탁 노인들을 위해 사용해달라.”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김 회장은 “당시 좀 서먹해진 것도 있지만 과거 형님과의 갈등은 해소됐다.”면서 “집안 행사가 있을 때마다 형제간 모임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의 10년 구조조정 92년 빙그레가 한화그룹에서 분리될 때 빙그레의 부채 비율은 4183%,10년간 누적적자가 100억원이나 되는 자본잠식 상태였다. 당시 기업 평균 부채비율이 420%대였던 점과 비교하면 무려 10배나 높은 수치였다. 한때 한화그룹의 ‘캐시카우’로서 그룹의 투자 자금을 조달했던 옛 위용은 사라지고,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았다. 생존을 위한 구조조정을 시작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수익성이다. 시장 점유율 1위는 의미가 없다. 수익성을 개선시킬 여지가 없는 사업은 과감히 잘라야 한다.”는 김 회장의 경영판단 아래 강도높은 사업 구조조정이 진행됐다. 김 회장은 우선 가지치기를 시작했다.‘썬메리’ 베이커리 사업을 삼립식품에 매각했으며, 냉동식품과 초코케이크 등 비주력 사업은 시장 철수를 단행했다. 특히 초코케이크 사업 철수로 인해 유휴 상태였던 생산라인을 가동시키기 위해 아이스크림 경쟁사인 롯데제과의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도 받는 ‘적과의 동침’도 서슴지 않았다. 빙그레 구조조정의 핵심은 주력 사업인 라면과 스낵사업 부문이었다.80년대 중반 겨울철 비수기 주력 사업으로 시작한 라면과 스낵사업은 매년 30억∼40억원씩의 적자를 기록하는 빙그레의 ‘두통거리’였다. 김 회장은 2003년 3월 라면사업 철수와 스낵사업의 국내 영업권 위탁이라는 고강도 처방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적자를 감수하면서까지 매수자를 찾을 이유가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김 회장의 이같은 구조조정과 현금 흐름의 개선 노력은 92년 부채비율 4183%에서 외환위기 당시인 98년 360%,2004년에는 53.7%로 줄어든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뤘다. ●학구파에서 몽골 인연까지 김 회장은 재계의 학구파로 유명하다. 경기고와 서강대 무역학과를 나온 김 회장은 일본 히도쓰바시(一橋)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연세대 행정대학원에서 외교안보 석사 학위도 땄다. 또 지금은 서강대에서 경영학과 박사 학위를 밟고 있다. 그의 독서량은 경영인들 중에서도 다독으로 손꼽힌다. 하루에 한 권 이상을 읽는 편이니 그야말로 ‘독서광’이다. 또 빙그레의 구조조정이 만들어준 김 회장과 몽골의 인연은 각별하다. 서울 압구정동 사옥을 매각하고 남양주시 도농동으로 본사를 옮긴 빙그레는 남양주가 몽골 수도인 울란바토르와 자매결연을 맺은 덕분에 자연스럽게 몽골 정부 관계자와 정치인 등의 잦은 방문이 이어졌다. 이를 계기로 김 회장은 김구재단을 통해 몽골 유학생들을 지원했고, 몽골 정부는 2001년 김 회장을 명예영사로 임명했다. 김 회장은 또 ‘몽골 사랑의 집짓기 운동’을 후원했으며, 특히 최근에는 차남 동만의 아이디어로 몽골 수흐바토르 테뮤렐 종합학교에 어학실습실 설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여기에 김 회장은 바가반디 몽골 전 대통령의 딸인 바야르마씨와 서강대 동문이기도 하다. 김 회장은 2005년 3월 한국과 몽골의 우호 협력 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몽골 최고 훈장인 ‘북극성 훈장’을 받았다. 북극성 훈장은 몽골 국가 발전에 기여한 공이 큰 외국인에게 수여하는 훈장이다. ●‘러브 레터로 결혼하다.’ 김 회장과 김미(48)씨는 떠들썩한(?) 연애 결혼으로 유명하다.‘끼리 문화’가 지배적인 재벌가에선 이례적이다. 보통 정략 결혼의 냄새를 지우기 위해 더러 연애 결혼으로 포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이 커플은 정말 뜨거운 사이였다. 한화 김종희가(家)의 2세 가운데 유일한 연애 결혼 케이스다. 김 회장과 김미씨의 인연은 대학 시절로 거슬러간다. 서강대를 다니던 김 회장과 이화여대를 다니던 김미씨는 명문가의 자제로서 서로 얼굴은 알고 있었던 사이. 호감을 갖고 데이트를 즐기다가 김 회장의 공군장교 입소 훈련으로 한층 각별해진 사이로 발전했다. 김미씨의 ‘러브 레터’로 김 회장은 당시 연애편지를 가장 많이 받는 훈련생으로 부대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 편지와 함께 김미씨가 곱게 접어 보낸 종이학은 김 회장의 군 생활 내내 함께 했다고 한다. 이들은 5년 넘게 연애를 했다. 김 회장의 군 생활이 길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형인 김승연(53) 회장의 ‘싱글’도 이들 연애를 길게 했다. 김 회장의 얘기다.“훈련소에서 저의 연애 스토리는 꽤 유명했습니다. 아내에게 답장을 쓰는 것도 중요한 하루 일과였죠. 지금도 우리가 주고받은 편지나 종이학들은 아내가 추억으로 잘 보관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엔 형님 결혼이 어서 이뤄지기를 기다린 적이 많았습니다.” 김승연 회장이 백두진 전 국회의장의 부인인 허숙자 여사의 중매로 1982년 10월 서영민(44)씨와 결혼식을 올리자, 김 회장도 그 다음해 2월 김미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김 회장과 김미씨는 장남 동환(22)-장녀 정화(21)-차남 동만(18) 등 2남1녀를 뒀다. 모두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다. ●처가는 독립운동가(家) 산실 김 회장의 처가는 국내 독립운동가(家)를 대표할 만한 명문가다. 김미 여사의 조부가 민족 지도자인 백범 김구 선생이며, 큰어머니가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고 안미생 여사다. 김 여사의 부친은 교통부 장관과 타이완 대사, 공군 참모총장, 국회의원 등을 지낸 김신(83)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 회장이다. 김신 회장은 임윤연(작고) 여사 사이에 김진­김양-김휘-김미 등 3남1녀를 뒀다. 김진(56)씨는 동서통상과 글로볼씨스텍 대표이사를 거쳐 DJ정권 시절인 98년 대한주택공사 감사를 역임했다. 또 참여정부 들어서는 대한주택공사 사장에 임명되기도 했다. 미국 남가주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했으며, 행정학 석사 학위를 땄다. 차남 김양(52)씨는 최근 주중국 상하이 총영사에 임명됐다. 이로써 그의 집안은 4대째 상하이와 인연을 맺게 됐다. 김구 선생은 1919년 독립운동을 위해 상하이로 건너갔으며, 이듬해는 선생의 모친인 고 곽낙원 여사와 부인인 최준례 여사가 상하이로 갔다. 김 총영사의 부친 김신 백범 기념사업협회 회장 역시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김 총영사는 영어와 중국어에 능통하고, 외국계 회사 근무와 기업체 운영 등으로 경제 경험이 풍부한 데다 상하이가 갖는 독립운동의 상징성을 감안해 발탁했다는 후문이다. 그는 젖소 사료를 제조·판매하는 코스닥 등록기업인 EBT 네트웍스의 대표이사로 활동했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조지워싱턴대에서 국제관계학을 공부했다. 시티뱅크 서울지점 부장과 컴퓨터 코리아 부사장 등을 거쳤다. 3남 김휘(50)씨는 광고인으로 나라기획 이사와 멕켄 에릭슨 상무를 거쳐 지금은 광고대행사 ㈜에이블리 대표를 맡고 있다. 그는 한국관광공사 비상임 이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연세대 경영학과와 미국 샌프란시스코 대학원을 나왔다. 김 회장은 김구 선생의 손녀사위라는 인연으로 독립운동가 추모사업에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 회장은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이사로 활동하며 서울 효창동에 위치한 백범기념관 건립에 큰 역할을 했으며, 현재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 부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백범 사상의 학술연구과 관련 출판물 발간도 지원하고 있다. 김 회장은 또 후손 없이 서거한 이봉창 의사의 기념사업회도 후원하고 있다. 그는 이봉창 의사의 업적을 알리고,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10월9일 ‘광복 60주년 기념 이봉창의사 마라톤 대회’를 연다. 이밖에 김 회장은 사재를 출연해 설립한 김구재단을 통해 매년 150여명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천재보다 따뜻한 사람으로 커라.”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은 다 같지 않겠습니까. 좋은 것을 주고 싶고,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고…. 하지만 저는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줘야 할 가장 큰 자산은 균형 잡힌 가치관이라고 생각합니다. 똑똑한 천재로 키우기보다 평범하지만 주위를 둘러볼 줄 아는 따뜻한 사람으로 키워야 하지 않을까요.”(김호연 회장) 김 회장과 김 여사는 자식들에게 유난히 사회봉사 활동을 강조한다.‘우리’라는 단어의 참 의미를 깨우쳐주기 위해서다. 독립운동가(家)의 후손다운 자녀 교육법이다. 큰 아들 동환군이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을 보낼 때다. 김 여사가 아들 손을 잡고 찾은 곳은 서울 방배동에 위치한 한 맹인교회. 설거지나 청소 등 맹인들이 하기 어려운 일들을 도우며 ‘더불어 사는 세상’이 어떤 것인지를 아들에게 가르쳤다. 모자(母子)는 동환군이 중3이 될 때까지 6년간 매년 여름을 맹인교회에서 봉사하며 지냈다. 또 외환위기가 한창인 98년에는 성공회 ‘푸드뱅크’ 주관의 노숙자 돕기 자원봉사에 김 여사와 3남매가 함께 참가해 서울역 광장에서 석달간 식사 배식과 설거지 등을 하기도 했다. 김 회장도 해비탯(사랑의 집짓기) 운동에 자녀들을 참여시켜 함께 집을 짓기도 했다. golders@seoul.co.kr ■ 김구선생 손녀 김미 여사 “평범한 가정주부입니다. 사치 안 하고, 겸손하고, 얘들 교육에 관심 많고요. 또 독립운동가 후손답게 사회봉사 활동에 적극 나서는데, 일은 조용히 하려고 해요.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을 굉장히 쑥스러워하고 꺼려합니다.” 김호연 회장이 보는 부인 김미 여사의 평이다. 김 여사도 국내 여느 재벌가의 며느리처럼 공식적인 바깥 활동을 거의 안한다. 김 여사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봉사 활동도 ‘왼손이 하는 일, 오른 손도 모르게’ 하는 식이다. 그만큼 조심스럽게 대외 활동을 한다.6년간 맹인교회의 도우미로서 활동했고, 여전히 어린이 교육사업에 앞장서고 있지만 남들 눈에 띄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김 여사의 이런 배경에는 국내 대표적인 독립운동가(家)로서 사회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것과 조부 백범 김구 선생의 명예에 혹시나 흠집이 생기지 않도록 몸가짐을 조신하게 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또 김 회장과 자녀들이 사회봉사 활동에 적극 나서는 것도 김 여사의 영향이 크다. 특히 김 여사의 봉사 활동은 살아있는 자녀 교육이 됐다. 김 여사는 자녀들에게 명문가의 사회적 책임을 가르치며, 균형 잡힌 가치관을 지녀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 여사를 오랫동안 지켜본 한 지인의 설명이다.“김 여사의 모친인 임윤연 여사가 일찍 돌아가신 탓에 김 여사는 중2 때부터 집안 살림을 챙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상 어린 시절부터 주부 역할을 해오신 거죠. 그래서 그런지 차분하고, 조용할 뿐 아니라 일처리도 깔끔합니다.” 김 여사는 현재 국내·외 아동의 건강과 교육을 비롯해 결손·빈곤 가정 어린이 지원사업 등을 펼치는 국제 어린이 보호재단인 ‘세이브 더 칠드런’(Save The Children)의 이사를 역임하고 있다. 한편 백범 김구 선생은 서울신문 전신인 대한매일신보의 지사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1905년 11월부터 1907년 2월까지 황해도 장연에서 대한매일신보 지사장으로 민족신문 보급에 애썼다. golders@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역세권 아파트 탐방] 마포 공덕동 삼성래미안

    [역세권 아파트 탐방] 마포 공덕동 삼성래미안

    “교통요지+뉴타운 호재’오는 11월 3차 인근에 4차 입주가 예정된 서울 마포구 공덕동 삼성 래미안 단지는 향후 발전 가능성과 교통 요충지라는 장점을 두루 갖춘 도심속 아파트다. 인접한 신공덕동 래미안(신공덕동 1·2·3차 총 2137가구) 단지와 함께 거대한 타운을 형성하고 있다. 공덕동 래미안타운은 주택재개발 사업으로 만들어졌다.25층 규모의 1단지(877가구)는 99년 말,2단지(20층 규모·683가구)는 2002년 5월,20층 규모 10개동의 3단지(616가구)는 같은 해 11월에 입주했다. 특히 1·3·4단지는 아현뉴타운 구역안에 있어 향후 주변 환경이 좋아질 전망이다. 한강이나 산을 조망할 수 없기 때문에 동에 따라 가격 차이가 나는 일이 없다.10층을 기준으로 가격차가 있다.8월 현재 3단지내 32평형 13층은 4억 6000만원이지만 3층은 5억 3000만원이다. ●조망권 없어도 교통은 편리 교통이 가장 큰 장점이다. 광화문과 여의도 중간에 있고 지하철 5호선과 6호선의 환승역인 공덕역이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1차는 공덕역과 도보로 3분,2차는 애오개역과 5분,3차는 공덕역과 5분 거리다.4차도 공덕역을 걸어서 1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 마포로와 만리재길, 백범로 등과 인접해 도심 진출입이 쉽고 강변북로 이용도 편리하다. 그러나 주변에 편의 시설이 부족한 것은 단점이다. 오는 2009년 2월까지 공덕역에 지어질 롯데캐슬 지하에 대형 할인점인 롯데마트 입주가 검토되고 있다. 빌딩숲에 갇혀 있어 공기가 탁한 것도 흠이다. 학군으로는 서울여중·고, 동도중·고 등이 있다. 대부분 공덕초를 다닌다. ●아현 뉴타운 개발 수혜 특히 공덕동은 아현뉴타운(아현동, 염리동, 공덕동, 대흥동, 노고산동 등)내에 있어 향후 주변 개발 가능성이 크다. 오는 2009년 용산∼공덕∼수색∼국제공항으로 이어지는 인천공항철도 개통과 경의선 복선 전철화 사업의 이중 수혜지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경의선 복선전철 지하화 사업에 따라 지상 철로가 철거되면 각종 휴게시설과 테마공원이 들어설 예정이어서 신흥 주거타운으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 특히 주변 일대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대거 들어선다. 아현 3구역에 3500가구 단지, 공덕 5구역에 500가구 단지, 아현2동에 1200가구 단지, 염리 A·B구에 1500가구 단지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특히 마포구 아현동 614-1번지에 총 120가구 규모의 주상복합 삼성 트라팰리스가 오는 2008년 7월 입주하고, 마포구 공덕동에 주상복합 롯데캐슬 프레지던트가 2009년 2월 입주한다. 내집마련정보사 김정용 팀장은 “공덕 삼성 래미안 1차와 공덕역 사이에 위치한 롯데캐슬 프레지던트의 분양가는 1900만원을 웃돌 전망”이라면서 “이는 아현 뉴타운 호재를 만난 래미안 타운의 가격 상승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주현진기자 jhj@seoul.co.kr ■ 도움말 내집마련정보사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한화(1)-김승연회장가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한화(1)-김승연회장가

    1981년 ‘걱정 반 기대 반’속에 등장한 20대의 젊은 총수가 사반세기를 거치면서 이제는 중년의 관록이 물씬 풍기는 회장이 됐다. 재벌가(家)의 어린 도련님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경영자로 바뀌었으며, 패기만만하고 저돌적인 성격은 다소 무뎌진 대신 기다림의 여유를 알게 됐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경영 전면에 나선 지 25년째. 당시 국내 최연소 10대그룹 총수로, 풋내 나는 젊은이로 알려진 김 회장의 이미지는 싹 가시고, 어느덧 성공한 2세 경영인, 구조조정의 마술사, 의리파 총수 등의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김 회장은 재계에서 2세 경영의 성공적인 착근을 넘어 제2의 창업을 했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뛰어난 경영 수완을 보여줬다. 선친인 고 김종희 창업주 때보다 규모면에서 20배 이상의 성장을 이뤘으니 세간의 평가가 그리 터무니없지는 않아 보인다. 그러나 시행착오와 시련도 적지 않았다. 또 그의 성공을 시대상황의 결과로 보는 시각도 없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검찰과 악연이 있기도 했으며, 생존을 위해 선친의 손길이 잔뜩 묻은 우량 계열사들을 매각해야 했다. 또 한화의 부활을 알리는 대한생명 인수 때에는 로비 의혹에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환위기 시절에 ‘필사즉생(必死則生)’의 각오로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왔던 김 회장의 성공 스토리는 2세 경영인의 실패가 다반사인 요즘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이너마이트 김’ “몇십 배가 남는다고 해도 난 설탕이나 페인트를 들여올 달러가 있으면 단 얼마라도 화약을 더 들여올 겁니다. 나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는 송충이이며, 화약쟁이가 어떻게 설탕을 들여옵니까? 난 갈잎이 아무리 맛있어도 솔잎이나 먹고 살거요.”(실록 김종희) 한화그룹(옛 한국화약그룹) 김종희 창업주가 얼마나 다이너마이트 국산화에 집착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남들이 선뜻 하려 하지 않는 사업이었지만 나라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사업이 화약업이라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는 이름보다 ‘다이너마이트 김’으로 통했다. 그가 다이너마이트를 독점 생산하는 기업인이라는 점도 있었지만, 그의 외곬 성격과 경영 방식이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정확히 터져야 하는 다이너마이트의 속성과 닮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리역 폭발사고.“이리역 폭발사고는 창업 이후 가장 심각한 경영위기에 봉착한 상황이었습니다. 선친은 모든 책임을 지고 그룹 전체를 내놓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정부가 당시 이리시 재건에 총예산 130억원을 잡았는데, 한화가 내놓은 돈이 91억원이었으니 선친의 책임감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김승연 회장) 김 창업주는 1922년 충남 천안에서 부친 김재민(작고)옹과 모친 오명철(작고) 여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원산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조선화약공판에 입사, 화약과 첫 인연을 맺었다.1952년 부산 피란 시절에 한국화약을 창업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무역과 건설, 정유, 기계 등 기간산업으로 영역을 넓혔다. 김 창업주가 손을 댄 회사 가운데 성격이 다른 유일한 기업은 대일유업(현 빙그레)이다. 여기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대일유업의 거듭된 적자로 골치를 썩던 정부는 한국화약(현 한화)에 대일유업 인수를 요청했지만 김 창업주는 기간산업이 아닌 탓에 인수를 꺼려했다. 그러나 축산농가가 쓰러지고 있다는 정부의 집요한 설득에 못 이겨 그는 대일유업을 떠안았다. ●김 회장의 뚝심경영 패기만만한 김승연 회장의 뚝심 경영은 1982년 한양화학(현 한화석유화학) 인수와 합작사인 경인에너지(현 인천정유)의 경영권 확보에서 시작됐다. 모든 임원들이 당시 한양화학 인수에 반대했지만 김 회장은 혼자서 밀어붙였다. 이 때문에 ‘젊은 혈기로 무리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김 회장은 대주주인 다우케미칼의 한양화학 철수는 본사의 재무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방편이지, 석유화학 업계의 불황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여기에 가계약으로 협박하던 다우케미칼측을 ‘편지’ 한장으로 저지한 김 회장의 놀라운 협상 전략이 더해지면서 한화는 당초보다 싼값에 한양화학을 인수하게 됐다. 이는 불안하게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을 잠재우며 ‘김승연 체제’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했다. 또 미국 유니언오일사와 합작해 설립한 경인에너지의 경영권 확보에서도 김 회장의 ‘뚝심’은 잘 드러난다. 한화측에 불리한 계약서를 고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김 회장은 유니언오일의 한국 경영진을 대상으로 ‘을사보호조약 같은….’이라는 격한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김 회장의 성공 스토리는 5공 시절에 더욱 화려해진다. 명성그룹 5개사를 인수해 콘도를 비롯한 레저산업에 진출했다. 또 한양유통(현 한화유통)을 인수, 유통 분야로의 사업 확장도 꾀했다. 전광석화와 같은 공격경영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장인인 서정화 전 내무부 장관이 전두환 정권의 실세인 탓에 김 회장의 이같은 공격경영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도 일부 있었다. 서 전 장관이 사위인 김 회장의 사업에 도움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관측에서다. 91년에는 빙그레와 제일화재가 계열 분리되면서 2세들의 분가도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형제간 재산 분쟁으로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기도 했다. ●“나는 가정 파괴범”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김 회장도 외환위기 파고는 쉽게 넘지 못했다. 생존을 위해서는 계열사를 팔아야만 했다. 그는 매각 금액을 줄이더라도 고용은 100% 승계를 원칙으로 했지만 모든 것이 뜻대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김 회장은 구조조정으로 50∼60명의 직원이 일터를 잃게 되자 사내 방송에서 “선대 김종희 회장이 한화를 창업한 이래 이런 대규모 구조조정은 없었다.”면서 “나는 그들의 가정에 많은 고통을 준 가정파괴범이며, 만일 내가 경영을 잘 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며 비참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김 회장은 당시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집에 러닝머신을 설치해서 발에 물집이 생겨 터질 정도로 뛰어보기도 했다.”면서 “스트레스로 인한 고통 때문에 체중이 5㎏ 이상 빠졌다.”고 밝혔다. 이어 “그때는 정말 회장직에서 물러날 각오로 경영에 임했다.”고 설명했다. 성공적인 구조조정이 끝나면서 그에게 ‘구조조정 마술사’라는 애칭이 붙었지만 그는 이에 대해 가슴 아픈 별명이라고 했다. 한화는 2000년 동양백화점 인수를 시작으로 2001년 대덕테크노밸리 설립,2002년 대한생명을 인수했다. 외환위기 시절 위축됐던 사세를 크게 확장시킨 것이다. 이로써 한화는 석유화학을 중심으로 한 제조업과 대한생명의 금융, 한화국토개발과 한화유통이 포진한 유통·레저산업을 3대 축으로 하는 성장엔진을 마련하게 됐다. ●강태영 여사의 외유내강 강태영(78) 여사를 옆에서 지켜본 이들은 ‘조용하지만 강단있다.’고 평한다. 지난해 4월 김호연 빙그레 회장이 ‘한국의 경영자상’을 수상할 때다. 김호연 회장은 이 상에 자부심이 유독 컸다고 한다. 한때 ‘경영자로서 자질이 의심된다.’는 비난에 마음 고생이 심했던 탓이었다. 강 여사는 작은아들의 수상 소식에 들떠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시상식장을 직접 찾아 격려할 정도였다. 강 여사는 특히 90년대 초 형제간 재산 분쟁으로 우의가 상했던 탓에 형제가 화목하게 지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주변에선 전한다. 강 여사는 또 남편인 김 창업주와 사별한 이후 한번도 생일 잔치를 벌인 적이 없다고 한다. 김 회장의 설명이다.“2003년 어머니가 희수를 맞을 때 온 가족이 뜻을 모아 잔치를 해드리려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내 생일 잔치는 하지 않겠다.’는 모친의 뜻을 꺾지 못했습니다.” 뜻을 굽히지 않는 강 여사도 김 창업주 생전에 큰 목소리 한번 내는 일 없이 묵묵히 내조를 했다고 한다. 두 아들의 평은 한결같다.“어머니는 유교적인 태도를 간직한 전형적인 현모양처 스타일”이라고. 김 창업주와 강 여사는 1946년 장남인 김종철 전 국민당 총재가 결혼을 차일피일 미룬 덕분에 인연을 맺었다. 차남인 김 창업주가 부친의 강요에 못 이겨 집안간 혼처가 결정난 곳으로 먼저 상투를 틀었기 때문이다. ●백두진 국회의장 부인의 중매로 김 창업주 생전에 치른 혼사는 맏딸 영혜(57)씨밖에 없다. 영혜씨의 남편은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 부장의 차남인 이동훈(57) 전 제일화재 회장이다. 김 회장은 부친 타계 1년 후인 1982년 서정화 당시 내무부장관의 장녀 영민(44)씨를 배필로 맞았다. 영민씨는 당시 김 회장보다 아홉 살이나 어린 신부로, 서울대 약대 3학년 재학중인 학생이었다. 김 회장과 영민씨의 만남은 국회의장을 역임했던 백두진씨 부인인 허숙자 여사의 중매로 맺어졌다. 서 전 장관과 김 회장 양가를 잘 알고 있는 백의장쪽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연결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김 회장과 영민씨는 교제를 시작했고,82년 10월에 식을 올렸다. 동생인 김호연(50) 회장도 형이 결혼하자 곧 백범 김구 선생의 손녀인 김미(48)씨를 배필로 맞아 혼례식을 치렀다. 영민씨는 결혼 후에도 공부를 계속해 약대를 수석 졸업했다. 현모양처 스타일로 자식 뒷바라지에 애쓰며, 바깥 활동은 거의 없는 편이다. 영민씨 친가도 만만치 않은 유력 가문이다. 부친인 서 전 장관은 29세 때 군수를 지냈으며, 중앙정보부 차장을 거쳐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또 민정당과 신한국당, 한나라당에서 국회의원을 지냈다. 서정신 전 대검찰청 차장은 서 전 장관의 친동생이며, 고 서정귀 호남석유 사장은 6촌형이다. 영민씨의 조부는 이승만 정권 시절에 법무부 장관을 역임한 고 서상환 장관이다. ●천안의 명문가 김 회장의 방계도 화려하다. 백부인 고 김종철 의원은 전 국민당 총재로 천안에서 6선 의원을 지냈다. 한화 계열사인 한국베어링(현 파그베어링)과 태평물산(현 한화무역) 회장을 맡기도 했지만 경영엔 관여치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부인 유성은(83) 여사 사이에 요섭-신연-수연-진연-규연-광연 등 5남1녀를 뒀다. 둘째숙부인 김종식(70) 전의원은 큰형인 김종철 전 총재가 작고하자 선거구인 천안을 물려받아 국회의원을 지냈다. 부인 문영숙(59) 여사 사이에 정연-서연-도연-원필 등 3남1녀를 뒀다. 고모인 김종숙(64) 여사는 미국에서 UC미클릭에서 지형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김영일(70)씨와 결혼했다. 김씨는 한화에너지(현 인천정유) 부사장을 맡는 등 그룹 경영에 참여했지만, 김 회장 취임 이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친인척 가운데 현재 한화 계열사 경영에 참여하는 인사는 김신연 한화폴리드리머 대표가 유일하다. 김 대표는 김종철 전 국민당 총재의 차남이다. ●‘한화호’를 이끄는 전문경영인 총자산 37조원의 ‘거함’ 대한생명을 이끄는 신은철(58) 부회장은 보험업에 30년을 몸담아온 생명보험업계의 대표적인 전문경영인이다. 사내에서는 ‘따뜻한 카리스마’로 통한다. 취임 직후 대전 영업현장을 방문, 처음 만나는 지점장 20여명의 이름을 외우고, 친근한 선배처럼 대화를 나눠 참석자들이 헹가래를 쳐주기도 했다. 신 부회장은 평소 ‘3선(先) 경영’(선견, 선수, 선제)을 강조한다. 사전에 미리 예측하고 준비해, 신속하게 실행하는 조직만이 경쟁에서 앞설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서울 출신으로 삼선고와 한국외대 독일어과를 나왔다. 진영욱(54) 신동아화재 사장은 경남 고성 출신으로 23세의 나이로 행정고시에 합격한 수재다. 재무부와 재정경제원에서 잔뼈가 굵었다.99년 한화증권 사장으로 전격 발탁돼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에서 한화증권을 우량 금융기관으로 탈바꿈시켰다.2002년 대한생명과 함께 한화 계열사로 편입된 신동아화재를 만성적 적자 구조에서 흑자로 전환시켰다. 경기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허원준(59) 한화석유화학 대표이사는 68년 한화석유화학의 전신인 한국프라스틱㈜에 입사한 이후 줄곧 석유화학 한 분야에 매진한 전문가이다. 엔지니어와 연구실장 등 다양한 분야를 거쳤다. 외환위기 이후 한화석유화학의 구조조정 실무 책임자로서 비핵심사업을 과감하게 정리했으며, 해외 자본을 유치해 재무구조를 향상시켰다. 경남 출신으로 부산고와 연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했다. 김관수(54) 한화국토개발㈜ 사장은 79년 태평양건설 입사 이후 제일화재 총무부장, 한화종합화학 기획실장, 한화석유화학 관리담당 임원, 여천 NCC 관리 임원, 한화건설 기획담당 임원 등 다양한 직무를 수행했다. 그는 변화와 혁신을 추구할 뿐 아니라 스킨십 경영을 중시한다. 서울 출신으로 경기고와 한양대 전기공학과를 나왔다. 김현중(55) ㈜한화건설 사장은 건축 기사에서 최고경영자(CEO)에 오른 ‘실전형 경영인’이다.2000년 개발사업 전문가로서 한화건설로 스카우트된 김 사장은 아파트 브랜드 ‘꿈에그린’과 주상복합 브랜드 ‘오벨리스크’를 내놓아 화제를 불러일으켰다.4년만에 회사 규모를 4배로 키워냈다. 인천 태생으로 서울고와 서울대 공업교육학과를 나왔다. 남영선(52) ㈜한화 사장은 78년 한국프라스틱에 입사해 인사와 총무, 기획 등 관리업무를 두루 거쳤다. 또 그룹 홍보팀장으로 재직할 때에는 폭넓은 대외 활동과 원만한 관리능력을 인정받았다. 충남 출신으로 배재고와 연세대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golders@seoul.co.kr ■ 김승연회장의 자식교육관 “눈에 꿈이 담겨 있지 않으면 산 너머가 보이지 않고, 그 곳에 도도히 흐르는 강을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이 평소 저의 생각입니다. 아이에게 꿈과 희망을 갖도록 하는 것이 부모로서 갖춰야 할 최고의 미덕이라고 여깁니다.”(김승연 회장) 김 회장은 동관(22)-동원(20)-동선(16) 등 3세에게 공부하라는 말을 안 한다. 다양한 경험과 문화, 체육활동을 오히려 권한다. 이는 선친에게서 받은 자식 교육에서 비롯된다. 김종희 창업주는 평소에 “남자는 술도 먹고, 담배도 피워보고 그래야 해. 어차피 될 놈은 무엇을 하든 간에 나중에 제대로 되니까. 남자의 과정은 여자와 다르지.”라고 했다고 한다. 선친의 기대 때문일까. 자식들 모두 수재인 데다 성공한 기업인이 됐다. 김 회장은 경기고를 다니다가 미국으로 유학, 드폴대에서 국제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김호연 회장도 경기고와 서강대, 일본 히도쓰바시 대학원을 나왔다. 김 회장은 또 전인교육을 강조한다.“교육 문제는 집사람이 더 큰 관심을 갖고 있어 저는 큰 방향만 잡아줄 뿐 간섭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닙니다. 그래도 공부뿐 아니라 지·덕·체를 고루 갖췄으면 하는 것이 아버지의 바람입니다.” 3형제도 김 회장의 기대대로 공부뿐 아니라 체육과 문화 활동에 관심이 크다. 특히 막내 동선은 취미로 시작했던 승마에 본격적으로 매달려 지금은 국가대표 선수가 되는 것이 꿈이다. 장남 동관은 미국 하버드에 재학 중이며, 차남 동원은 예일대, 막내 동선은 미국에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golders@seoul.co.kr ■ 재계에서 손꼽히는 2대째 미국통 고(故) 김종희 한화 창업주와 김승연(53) 한화 회장은 국내에서 손꼽히는 ‘미국의 마당발’이다. 그룹 모체인 화약부문이 방위산업과 연관이 많은 데다 창업주 특유의 친화력으로 주한미군 및 미국 대사관 관계자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이다. 또 김 회장은 한·미교류협회 회장으로서 선친의 인맥을 미국 정계로 더욱 발전시켰다. 부자는 자연스럽게 ‘다이너마이트 김과 다이너마이트 주니어’로 불렸다. 리처드 워커 전 주한 미국 대사와의 2대(代)에 걸친 약속은 한화 김씨 부자의 미국 인맥 관리를 잘 보여준다. 창업주는 워커 전 대사의 60세 생일 잔치를 한국식 환갑 잔치로 열어주기로 했지만 1981년 지병으로 타계하면서 이를 지키지 못했다. 그러나 아들인 김 회장이 82년에 환갑 잔치를 열어줌으로써 선친의 약속을 지켰을 뿐 아니라 워커 전 대사의 팔순 잔치도 2002년 서울에서 열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20년 이상의 약속을 대를 이어 지킨 셈이다. 김 회장의 설명이다.“선친은 1960년 말부터 워커 전 대사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워커 전 대사가 두세달 빨리 태어나 워커 대사는 한국의 미풍양속에 따라 자신이 형님이라고 말하곤 했다고 합니다. 선친은 또 리처드 스틸웰 전 주한 미군사령관과도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세 사람은 자주 만났고, 만남의 횟수만큼 우정도 깊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워커 전 대사의 아내였던 세니도 모친(강태영 여사)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김 회장은 또 한·미교류협회를 만들어 미국 인맥을 더욱 넓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키신저 전 국무장관을 비롯해 에드윈 퓰너 헤리티지재단 이사장, 데니스 헤스터트 하원 의장, 톰 대슐 민주당 상원 원내총무, 딕 체니 부통령, 얼 포머로이 민주당 의원, 클린턴 전 대통령 등과 꾸준히 친분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인연은 2002년 미국 하원에서 한·일월드컵 성공 개최를 기원하는 결의서가 통과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golders@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행정플러스] 현충시설,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과 충남 천안의 독립기념관 등 국내외 현충시설이 국민과 함께하는 친숙한 복합문화시설로 거듭난다. 국가보훈처는 18일 이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는 국내외 현충시설 활성화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이 대책에 따르면 보훈처는 내년부터 2009년까지 총 746억원을 투입해 효창공원을 민족정기가 서린 대표적인 독립공원으로 새롭게 조성한다. 또 독립기념관은 시민들이 독립운동 역사를 문화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국가 상징시설로 육성할 계획이다. 효창공원의 경우 공원내 효창운동장 관중석을 허물고 ‘백범광장’을 조성해 시민들을 위한 열린 공간으로 조성키로 했다. 효창공원의 명칭을 ‘독립공원’으로 개칭하는 문제도 적극 검토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함께 보훈처는 중국과 일본, 유럽, 멕시코, 쿠바 등 해외 독립운동 사적지 669곳에 대해서도 체계적으로 관리해 나가기로 했다. 현재 국내외에는 총 2149개소(국내 1480, 해외 669개소)의 현충시설이 있다.
  • 백범손자 김양씨 상하이 총영사로

    정부는 17일 중국 상하이 총영사에 백범 김구 선생의 손자인 김양 EBT 네트웍스 대표이사를 임명하는 것을 비롯,4명의 총영사 인사를 단행했다. 주 토론토 총영사에는 김성철 외교통상부 부대변인이, 주 호놀룰루 총영사에는 강대현 전 국회통일외교통상위원회 전문위원, 그리고 주 요코하마 총영사에는 국가정보원 출신의 박종철 전 주일공사가 임명됐다. 광복 60주년 이틀 후 발표된 이번 인사의 핵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 평생 광복운동에 매진한 김구 선생의 손자인 김양(52)씨의 발탁. 상하이가 임시정부 청사가 있던 자리이자, 항일 투쟁의 총본산이란 점에서 의미가 크다. 김 총영사는 공군참모총장과 교통부 장관을 지낸 김신씨의 3형제 중 2남이다. 김 총영사는 이날 인터뷰에서 “우리나라와 집안의 정통성을 찾는 뿌리인 상하이로 가게 돼 정말 영광”이라는 소감을 밝혔다. 그는 “증조할머니, 할아버지, 부모님에 이어 4대째 상하이와 인연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1919년 그의 할아버지인 백범 선생이 독립투쟁을 위해 상하이로 건너갔고 그 이듬해 백범 선생의 어머니와 부인인 증조할머니와 할머니가, 이어 김 총영사의 큰아버지가 상하이로 건너갔다. 김 총영사의 부모도 이곳에서 났다. 초등학교 시절인 1962년부터 10여년을 아버지를 따라 타이완에서 자란 김 총영사는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으며, 미 조지워싱턴대학에서 국제관계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외국계 기업의 간부를 거쳤다.김수정기자 crystal@seoul.co.kr
  • 혼을 담은 무대… 시민들 감동 물결

    혼을 담은 무대… 시민들 감동 물결

    ‘역시 마에스트로 정명훈’ 광복절을 맞아 15일 서울시가 주최한 ‘광복 60주년 기념음악회’에서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씨가 혼을 담은 열정적인 무대를 선보였다. 지난 1월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영입된 정씨의 데뷔 무대였다. 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열린 이날 음악회는 오후 7시30분에 시작됐지만, 미리 입장하려는 시민들로 오후 3∼4시부터 북새통을 이뤘다. 시는 1만 2000명 남짓 참석하리라 예상했지만, 이날 행사장에는 2만 5000여명이 몰려들었다. 외국대사·국회의원 등 귀빈 300여명도 행사장을 찾았다. 입장하지 못한 시민들은 차량통행이 통제된 덕수궁앞 차로에 앉아 공연을 감상했다. 시민들의 박수 갈채 속에 무대에 오른 정씨는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으로 막을 올렸다. 서울시향이 1945년 창단 때 처음 연주했던 곡이다. 아리랑·사물놀이협주곡 등 국악과 접목된 색다른 음악도 선보였다. 이어 애국가 작곡가 고(故) 안익태 선생의 ‘한국환상곡’으로 막을 내렸다. 옥빛 한복을 입은 정씨가 백범 김구 선생 등 독립운동가의 영상과 함께 곡을 연주, 감동을 더했다. 숭례문 광장에서 열린 행정자치부 주최 경축음악제가 빨리 끝나 폭죽을 터뜨리자 공연이 잠시 중단되기도 했다. 가족과 함께 공연장을 찾은 주부 이정숙(38)씨는 “누구나 알고 있는 쉬운 곡들로 열정적인 무대를 만들어 즐거웠다.”고 말했다. 고금석기자 kskoh@seoul.co.kr
  • 北대표단, 서대문형무소 둘러봐

    ‘8·15 민족대축전’에 참석한 북측 대표단이 분단 이후 ‘최초’라는 수식어를 붙여가며 파격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지난 14일 국립현충원 참배에 이어 광복 60주년인 15일에는 서대문 형무소와 백범기념관을 방문했다.16일엔 국회를 방문하고, 입원 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도 방문할 예정이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이날 오후 서울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남북 당국 공동행사에서 “평화를 통해 번영을 누리고 번영을 통해 평화를 공고히 해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 가자.”고 제의했다.●“김구 선생과 김일성 주석 인연” 북측 대표단은 서울 백범기념관에 도착, 김신 백범기념사업회장 등 김구 선생의 아들·손자와 환담했다. 북측 단장인 김기남 노동당 비서는 “북측대표단이 온 걸 알면 선친이 기뻐하실 것”이라는 김 회장 말에 “김 주석의 보천보 무장투쟁에 감격한 김구 선생이 사절을 김일성 장군께 보냈고 이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최성익 조선적십자위 중앙부위원장은 백범기념관에서 행한 연설에서 “쌍방사이 실질 화해와 신뢰의 확고한 구축을 위해 귀측의 국립현충원에 대한 참관도 진행했다.”면서 “체제·이념 대결에서 벗어나 우리 민족끼리 이념에 토대해 풀어나가자는 확고한 입장”이라고 말했다. 최 부위원장의 연설은 사전에 준비돼 배포된 것이다. 통일부 관계자는 “북한 사전에 참배란 말은 주술적 의미가 깃든 것이라 잘 쓰지 않고, 김일성 주석의 시신이 있는 금수산기념궁전을 ‘참관’했다고 표현한 사례들이 있다.”고 말했다.●“김주석님의 삼촌도 옥사하셨다” 오전 10시50분쯤 정동영 통일부 장관, 김기남 단장 등 남북 당국 70여명은 민간 대표단보다 30여분 앞서 도착, 일제 독립투쟁의 상징인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을 둘러봤다. 김기남 단장은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참관 소감을 나누며 “(일제 때)처형된 선열 중에는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이 다 포함돼 있고 그중에서 김일성 주석님의 삼촌되는 분, 사랑했던 친위군사들도 몇명 있다.”고 밝혔다.●임동옥 부부장 오찬서 자작시 임동옥 북측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은 15일 정 통일장관 주최 환영오찬에서 자작시를 소개했다. 정 장관이 “북에서 대남사업을 총괄하고 계시는 ‘무서운 분’인데 이번에 대표단에 포함돼 깜짝 놀랐다.”고 임 부부장을 소개하자, 작은 수첩을 꺼내 “우리는 서울을 보았다/이국의 도시가 아니었다…중략…평양과 서울은/똑같은 우리것/우리 민족의 것이로구나/쭈욱해도(술잔을 들이켜는 것)단번에 너무도 쉽게 통하는/우리는 정말 통일로 살아야 할 하나로구나.”란 시를 낭독했다. 김 단장은 박재규 전 통일부 장관이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서대문 형무소를 다녀갔다고 하자 “짐승이 아닌 이상 느끼는 바가 있었겠지요.”라고 말하기도 했다.김수정 나길회기자 crystal@seoul.co.kr
  • 약산 김원봉/이원규 지음

    약산 김원봉(1898∼1958). 약관의 나이에 의열단을 창단하고, 조선의용대를 창설해 치열한 한일투쟁을 벌였던 인물이다.1920년대 일제 강점기 한국인들은 임시정부의 존재는 몰라도 김약산과 의열단은 알고 있을 정도로 그는 항일투쟁의 ‘스타’였다. 그러나 이같은 화려한 이력과 업적에도 불구하고 약산은 해방 후 남과 북 양쪽 모두에서 거의 잊혀진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북이 분단되면서 북쪽을 선택했던 그는 북한 정권에서 국가 검열상, 노동상 등을 지냈으나, 결국 숙청되었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선택을 떠나 일제 강점기에서 치열했던 항일 투쟁 업적과 삶의 모습은 제대로 조명되어야 하지 않을까? 소설가 이원규가 쓴 ‘약산 김원봉’(실천문학사 펴냄)은 약산의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선택을 넘어 일제 강점기에서 치열했던 그의 항일운동에 초점을 맞추어 삶을 재조명한 책이다. 김원봉과 의열단원들이 국내외에서 벌였던 수많은 거사를 소설적 상상력을 덧붙여 재구성했다. 책엔 약산뿐만 아니라 의열단선언문을 작성해준 단재 신채호, 약산을 라이벌로 인식하면서 임정을 이끌어간 백범 김구, 남경 금릉대학 선배로서 그를 격려해 주었던 몽양 여운형 등 한국근대사와 독립운동사에 등장하는 무수한 실존인물들이 살아 숨쉬고 있다.1만 5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발언대] ‘광복60돌’ 민족문화운동 벌이자/오창수 익산보훈지청

    문화국민운동을 벌이자고 하면 느닷없이 무슨 소리냐고 반문할 것이다. 광복 60주년을 맞아 내가 소원하는 그림을, 생각을, 그려보고자 한다. 문화국민운동이란 백범 선생께서 주창한 대한민국이 지향해야 할 지표다. 백범 선생은 문화민족으로 계승해온 우리의 문화를 국민들이 마음껏 향유하고 세계 만방에 문화대국의 위상을 떨치기를 소원했다. 백범일지에는 선생이 삼남지방을 순회하는 가운데 김제 만경들에서 신명나게 농악을 하며 논에서 공동으로 김매기를 하는 ‘두레’를 보며 나라 잃은 설움 속에서도 감명받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잃었던 나라를 되찾은 지 60년이 지난 지금 우리 농악문화의 현 주소는 어떠한가. 도시 외곽의 다리 밑에 ‘○○동 풍물놀이 연습장’식으로 내걸린 플래카드 문구에서 비애와 서글픔이 먼저 다가온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붉은악마가 앞장선 가운데 온 국민의 결집된 힘과 함성은 전 세계에 감동을 주었다. 경이로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이처럼 우리 국민은 누군가가 마음을 조금만 들썩거려 주기만 하면 바로 신명이 나는 문화권에서 살아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렇지 못한 현실이 아쉽기만 하다. 국민들의 신명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청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일자리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일자리를 만들기 어렵다면 일자리 배분이라도 잘 해야 한다. 청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지 못하는 것은 국민 모두의 신명을 빼앗아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문화국민운동은 어떻게 해야 할까. 충효를 배우기 위해서는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목민관으로서 국민들을 어떻게 대하는가를 배우기 위해서는 다산의 ‘목민심서’를, 나라 사랑의 본보기를 배우기 위해서는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를 온 국민이 읽고, 알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들의 가르침 속에는 대통령에서부터 장관, 정치인, 법조인, 언론인, 교육자, 기업인, 근로자, 농어업인, 자영업자, 학생, 군인, 공무원 등 모든 계층의 국민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이 들어 있다. 다시 말하지만 올해는 광복 60주년을 맞는 뜻 깊은 해다. 우리 국민 모두 헛된 네탓 타령을 하기보다 저마다의 터전을 올곧게 닦고 이를 통해 나라를 바로 세우도록 하자. 참된 대한민국을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문화국민으로 거듭나도록 하자. 오창수 익산보훈지청
  • 박물관에서 만나는 역사·예술

    ‘작품도 보고 체험도 하고’ 백범기념관, 충무아트홀갤러리, 전쟁기념관 등 서울시내 문화 전시 시설에서 방학을 맞아 학생들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을 다채롭게 마련했다. 중구 충무아트홀 갤러리는 다음달 28일까지 ‘견우와 직녀’,‘금도끼 은도끼’ 등 전래동화의 장면을 퀼트 작품으로 만들어 전시한 ‘윤퀼트 동화놀이터’를 연다. 바늘과 솜을 이용해 퀼트 모빌이나 얼굴 모양 등을 직접 만들어 볼 수 있다. 효창동 백범기념관은 다음달 26일까지 청소년들이 김구 선생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설명을 듣고 효창원 묘지를 방문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세종대왕기념관, 윤봉길기념관, 도산 안창호기념관 등에서도 역사 인물에 대해 배우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어 인물과 함께 질곡의 현대사를 되돌아볼 수 있다. 자신의 체질을 직접 알아볼 수 있는 프로그램도 있다. 강서구 허준박물관은 오는 26일부터 다음달 14일까지 자신의 사상의학(四象醫學) 체질과 그에 맞는 음식을 진단해보고 어린이 성장보약인 소건중탕이나 두뇌발달을 돕는다는 총명환 등 보약도 직접 만들어보는 ‘한방체험교실’을 운영한다. 용산구 전쟁기념관은 초등학생만을 위한 프로그램을 준비했다.31일까지 국악, 서양음악 연주를 들을 수 있는 ‘시리동동 거미동동’ 콘서트를 열며,23일부터 다음달 27일까지는 도자기를 직접 만들어 보는 ‘도예체험학습’ 교실도 운영한다. 도봉구 옹기민속박물관에서는 25일 옹기 산지인 경기도 여주군에서 옹기를 만들어보는 ‘옹기가마 탐방’을 마련했다. 삼성미술관 리움(용산구 한남동)에서는 저렴한 가격에 저명한 예술가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학생들은 다음달 28일까지 ‘그리움의 편린들’이란 테마의 이중섭 드로잉 작품을 3000원만 내면 볼 수 있고, 매주 목요일 오후 7시 국립오페라단 단장 소프라노 정은숙 등의 공연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서재희기자 s123@seoul.co.kr
  • [지금 그곳은] 종로 경교장

    [지금 그곳은] 종로 경교장

    백범 김구(1876∼1949) 선생의 집무실이 위치했던 서울 종로구 평동 경교장(京橋莊). 지상 2층, 지하 1층, 연건평 264평 규모의 경교장은 일제시대에 지어진 서양식 건물로 현재 강북삼성병원의 건물로 쓰이고 있다. 경교장 2층 서쪽에 위치한 20.5평 규모의 집무실은 원래 의료진의 휴게실로 쓰였으나 지난 6월24일 암살현장을 그대로 복원해 처음으로 일반인에 공개됐다. 문을 연 지 얼마되지 않아서인지 사람들의 발길은 아직 드물었다. ●현재 강북삼성병원 건물로 쓰여 백범 집무실은 암살현장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유리창에는 구멍이 뚫린 총알 자국이 있었다. 암살 직전 백범이 책을 읽고 있던 나무 책상·의자도 그대로 놓여져 있었고 방바닥에는 암살범 안두희가 백범을 겨냥한 발자국이 그려져 있다. 물론 깨진 유리창과 가구들은 병원측에서 재현한 것이다. 하지만 책상·의자도 어린이용 정도로 크기가 작은 데다 그밖에 백범을 떠올릴 만한 가구나 생활용품들이 없어 집무실이라고 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백범의 집무실을 제외한 경교장 건물도 병원 시설물로 그대로 쓰이고 있다.1층에는 원무과, 응급환자 대기실이,2층 경교장 옆에는 통증클리닉, 의료복창고, 남·여 화장실 등이 있다. 일부에서는 경교장 건물 전체를 백범의 기념관으로 보존하자는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병원측은 집무실만 복원하겠다는 입장이다. 강북삼성병원 홍보팀 김명수 과장은 “병원 공간이 비좁아 경교장을 복원하지 못하다가 지난해 본관 리노베이션 공사로 일부 공간이 확보되자 복원작업을 하게 된 것이며 나머지 공간은 당분간 복원할 계획이 없다.”면서 “아직 갖춰지지 않은 일부 시설물들은 차차 보완해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원래는 ‘금광 재벌´이 지은 초호화저택 원래 경교장은 1938년 금광 재벌인 최창학이 본인이 살 집으로 지은 건물이었다. 당시 최창학의 부(富)는 전국에서 손꼽힐 정도여서 건물에 응접실, 당구실, 식당, 이발실, 서재 등은 물론 온수난방시설까지 갖춰진 ‘초호화저택’이었다. 그러나 1945년 해방이 되자 최창학은 친일파로 몰리게 될 것을 우려해 백범에게 경교장을 내주었다. 백범은 이 곳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회의를 주관했고 반탁운동과 자주통일운동을 펼쳤지만 1949년 끝내 암살당했다. 이후 경교장은 격동의 세월을 거치면서 자유중국대사관, 미군 특수부대, 베트남 대사관저 등으로 쓰이다가 1968년 고려병원이 인수했다. ●자주독립정신 되새기는 기회로 자녀를 데리고 경교장을 둘러본 양현(46·경기도 안성시)씨는 “경교장에 꼭 한번 와보고 싶었으나 마침 아이가 병원에 올 일이 있어서 들르게 됐다.”면서 “우리 민족의 큰 스승인 백범이 암살되지 않고 대한민국 정부를 계속 이끌었다면 우리나라의 민주화가 더욱 진척됐을 텐데, 안타까움이 든다.”고 말했다. 이어 “경교장 복원에 맞춰 백범의 자주독립 정신도 되새기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경교장은 2001년 4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29호로 지정됐으며 2005년 6월 국가문화재 사적 제465호로 지정됐다. 관람시간은 평일 오전 10시∼오후 5시, 토요일 오전 10∼낮 12시. 관람료는 무료. (02)2001-2781. 김유영기자 carilips@seoul.co.kr
  • [기고] “콘텐츠 시대, 단체장부터 혁신을”/이의근 경북지사

    [기고] “콘텐츠 시대, 단체장부터 혁신을”/이의근 경북지사

    민선자치 10년, 단체장부터 혁신을. 지난해 경북도는 작지만 의미있는 성과를 하나 이뤄냈다. 경주세계문화엑스포의 주제 영상인 ‘화랑영웅 기파랑전’을 외국에 수출한 것이다.3D 애니메이션으로는 우리나라 최초라고 한다. 기파랑전의 배급권을 사간 미국의 시맥스&아이워크스사는 한국의 우수한 IT 기술도 놀랍지만 무엇보다도 기파랑과 선화낭자의 사랑, 호국의 피리 만파식적에 얽힌 전설 등이 충분히 세계인들을 사로잡을 수 있을 거라 믿는다고 했다. 그 같은 말을 들으니 콘텐츠시대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똑같은 외양을 가지고 있는 제품이라도 그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가 또는 사람들의 감성을 얼마나 만족시키는가에 따라 가치는 천차만별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콘텐츠의 중요성이 비단 유형의 제품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개인의 브랜드화 경향이나 유연한 조직문화가 강조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 지방자치도 마찬가지다. 틀을 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속에 어떤 내용을 채워왔는지에 보다 큰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민선 단체장으로 일한 지 10년을 맞아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 지방자치는 20세기말과 21세기초, 숨 가빴던 역사의 변곡점을 통과해 왔다. 그리고 비교적 짧은 기간에 틀은 그런대로 갖추어진 것 같다.24번에 걸친 지방자치법 개정이 말해 주듯 필요한 제도의 보완은 조금씩 이루어졌다. 특히 참여정부 출범 이후 총액인건비제 도입이나 예산편성지침 폐지 등 가시적 성과가 빨라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미흡한 부분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흔히 2할 자치라고 표현하듯 권한과 재정은 여전히 중앙에 더 많으며, 교육자치·자치경찰 등의 영역에서 보다 획기적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또한 선거나 감사제도 등에도 개선의 여지가 있는 듯싶다. 제도 외적 측면에도 명암이 있다. 자율과 경쟁 가치의 신장, 지역 실정에 맞는 정책의 추진, 복지수준의 향상 등은 지방자치를 실시하지 않으면 기대하기 어려운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자치단체의 재정자립도는 오히려 하락했고 선심 행정에 대한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비교적 명확한 것 같다. 중앙정부에 대해서는 최소한 5할 자치가 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 줄 것을 끊임없이 요구해야 한다. 그리고 제도 이외의 부분, 즉 양질의 콘텐츠를 만들어가는 것은 온전히 지방의 몫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이것이 더 중요하다. 이를 위해 ‘혁신’은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시민사회의 역량이 급속도로 높아지고 있는 환경에서 혁신하지 않고 어떻게 주민들에게 감동적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겠는가. 또한 혁신의 선두에 단체장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지난 6월18일 서울의 백범기념관에 모인 전국 자치단체장들의 생각도 이와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그 자리에서 주제발표를 통해 단체장은 항상 위기의식을 가지고 혁신비전의 제시자로서, 솔선수범자로서의 역할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는 10년의 경험을 강조하여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옴파로스 증후군 즉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함을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은 의사소통의 단절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통의 막힘은 곧 조직의 동맥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에는 모두 250명의 자치단체장이 있다. 그 권한은 크고 책임은 무겁다. 그런 만큼 단체장 모두가 거버넌스적 혁신 리더십을 발휘할 때 우리는 좋은 콘텐츠가 풍부한 지방자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선진한국으로 가는 지름길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신뢰와 통합을 바탕으로 혁신을 주도해 나가는 단체장 250명이 내뿜는 에너지의 합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단순히 1×250=250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무한대일지도 모른다. 이의근 경북지사
  • 백범 김구 56주기 추모식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을 지내고, 평생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백범 김구 선생 56주기 추모식이 26일 오전 10시 서울 용산 효창공원내 백범기념관에서 열린다. 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회장 김신) 주관으로 열리는 이날 추모식에는 김원기 국회의장과 박유철 국가보훈처장, 김국주 광복회장 등 30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 [수도권플러스] 강북삼성병원 ‘백범기념실’ 개설

    강북삼성병원은 백범 김구 선생이 집무실로 사용하던 경교장 2층에 ‘백범 기념실’을 개설,24일부터 일반인들에게 선보인다. 규모는 20평 정도로 당시의 집무실 원형을 복원하고 흉탄에 맞은 창문, 안두희의 발자국 등 서거 당시의 모습을 재현했다. 경교장은 1945년부터 1949년까지 백범 김구 선생이 거주하다 서거한 곳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회의, 신탁통치반대운동, 남북정치지도자회담 등이 열렸던 역사젓인 장소다.
  • [쪽지 통신]

    ●제10회 통일 글짓기 대회 오는 11일 경기 파주시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통일부가 주최하는 통일글짓기 대회가 열린다. 초·중·고생 400여명이 참가해 운문과 산문으로 나눠 글짓기 솜씨를 겨룬다. 운문 부문과 산문 부문에서 초등과 중·고등학생이 각각 최우수상과 우수상, 장려상을 받는다. 입상자는 7월 중순에 발표한다. ●중계평생학습관 오는 13일부터 7월 초 개강일까지 2005년 하반기 평생학습교실 회원을 모집한다. 모두 66개 강좌에 1554명을 뽑는다. 개강일과 모집인원은 강좌마다 각각 다르다. 강좌는 꽃꽂이와 사진촬영 등 취미·교양부문과 홈페이지 만들기, 포토샵 등 컴퓨터 부문, 영어회화와 토익 등 영어부문, 종이접기와 글짓기 등 유치·초·중등 강좌 부문으로 나뉜다. 접수는 평생학습지원과 2층에서 선착순으로 한다. ●한국산업기술재단 오는 30일까지 ‘2005 청소년산업기술체험캠프’ 아이디어 공모전 참가 신청을 받는다. 참가 방식은 개인 또는 교사 1명에 학생 4∼5명이 한 것이 되는 것도 가능하다.7월에 개인과 팀을 포함해 30건을 선정, 발표한다. 이들은 8월9∼12일 서울대 호암교수회관에서 캠프를 갖는다. 그 후 각자 대학산업기술지원단의 이공계 교수를 배정받아 함께 12월까지 아이디어를 제품으로 제작한다. ●제22회 한국정보올림피아드 오는 15일까지 정보통신부는 제22회 한국 정보올림피아드 원서를 받는다. 접수 장소는 서울 강서구 등촌동 한국정보문화진흥원이다. 대상은 각 시·도 대회에서 본선을 통과한 학생들이다. 참가자는 다음달 15일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대회를 치른다. ●경기영어마을 경기도영어문화원은 10일까지 경기영어마을 참가자를 모집한다. 이들은 7월25일부터 8월19일까지 4주 동안 안산시 ‘경기영어마을’에서 영어 체험학습 프로그램인 ‘4주 방학 집중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 프로그램은 도내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의 학생 200명을 대상으로 운영된다. 컴퓨터 공개 추첨자 160명과 경기도 교육청이 추천하는 저소득층 가정 자녀 34명, 위스타트 시범마을 내 기초생활수급 대상 자녀 6명 등이다. 학생들은 4주 동안 원어민 강사 38명, 한국인 강사 19명과 숙식을 함께하며 영어로만 대화하고 생활한다. 경기영어마을 홈페이지(www.english-village.or.kr)를 통해 10일까지 신청할 수 있다. 컴퓨터 추첨으로 선발된 참가자 명단은 15일 홈페이지에 게시된다. ●천재교육 교육출판기업 ㈜천재교육(대표 최용준·www.chunjae.co.kr)은 초등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와 교사들을 대상으로 ‘해법고객 평가단’을 운영한다. 해법고객 평가단은 천재교육 제품 평가 및 새 제품 반응 조사, 제품 아이디어 제안, 설문조사 등의 활동을 한다. 학부모의 경우 학습 교재를 사고, 직접 지도한 경험이 있어야 참여할 수 있다.(02)3282-1704.fi●경기도교육청 오는 8월3일 실시하는 제2회 고입·고졸 검정고시 응시원서를 오는 9∼17일 도 및 시·군교육청을 통해 교부한 뒤 13∼17일 접수한다. 접수장소는 북부지역의 경우 의정부시 가릉동 의정부중학교, 남부지역은 수원시 우만동 동성중학교이다.(031)249-0237.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3)진해와 포르투갈인 세스페데스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3)진해와 포르투갈인 세스페데스

    진해는 일본인들이 붙인 지명이다. 원래 웅천읍성이 자리했던 곳으로, 그 웅천 바닷가에는 ‘세스페데스 방한 400주년(1553~1993)기념’이란 설명문이 붙은 조각상이 서 있다. 그의 고향인 포르투갈 톨레도의 니야누에다 데알카르데테 시민들이 우정의 정표로 기증한 것이다. 그는 1593년 12월27일에 웅천포에 도착해 1년여를 이곳 왜성에서 묵었다. 그 34년 뒤인 인조 6년(1628)에 네덜란드인 벨테브레가 부산 근처에 표착했고, 그로부터 59년 뒤인 1653년에는 하멜이 표류해 왔다. 그러고 보면 그는 표류가 아닌, 자의로 이 땅에 온 최초의 서양인이다. 그가 머물렀던 웅천 남산왜성을 올랐다. 돌들이 웅장하다. 틀림없는 왜성인데 옛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1593년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축성했고 정유재란때 재침해 수축한 것이다. 경상도에는 유난히도 왜성이 많다. 웅천 안골포 양산 영등포 마산 고성 사천 남해왜성 등등 아예 장기 주둔을 염두에 두고 진을 쳤던 흔적들이다. 진해에는 웅천왜성 바로 건너편 안골포에도 왜성이 있다. 사면이 두루 보여 그만한 요새가 없다. 세스페데스가 웅천까지 온 이유를 알자면 조금의 설명이 필요하다. 임진왜란때 평양성을 공격했던 고니시 고니시는 포르투갈 예수회에 의탁한 천주교도였다. 고니시의 딸 마리아는 당시 19대 대마도주 소오 요시토시(宗義智)의 아내였는데, 소오는 임란 직전까지 대마도 병마사로 조선의 녹봉을 받았다. 그 역시 천주교 신자였다. 소오는 조선의 지리를 꿰뚫고 조선말에도 능통해 왜군의 앞잡이로 선봉에 섰다. 세스페데스는 이때 일종의 종군 신부로 온 것이다. 그의 수기에 의하면 조선의 훌륭한 문화재는 모두 고니시와 소오가 소장하고 있다고 했다.‘임진왜란은 문화전쟁이었다.’는 말이 실감나는 대목이다. 그들은 문화재 약탈뿐 아니라 사람들도 엄청 붙잡아 갔다. 오죽했으면 강항이 ‘간양록’에서 ‘배 600∼700척이 몇 리에 걸쳐 바다를 메우고 있는데, 배마다 조선 남녀의 통곡소리가 바다와 산을 진동시킬 정도’라고 기록했을까. 고니시도 평양성 전투에서 6살 난 전쟁고아 소녀를 데려가 ‘오타’란 이름을 지어주고 길러 ‘줄리아’라는 세례명까지 얻게 했다. 도요토미가 죽은 뒤 천하의 패권을 두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벌인 대격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고니시는 패하여 처형된다. 줄리아도 이때 외딴 섬으로 귀양가 신앙을 지키며 헌신적인 삶을 살다가 죽음으로써 하나의 ‘신화’가 됐다. 한편 고니시의 사위인 대마도주 소오는 마리아와 이혼하고 도쿠가와의 가신으로 들어간다. 세스페데스는 1597년 3월에 다시 내한했다가 도쿠가와의 선교사 추방령으로 수박골에 피신해 있다 두달 후 일본으로 되돌아간다. 임진왜란이라는 한·일간의 유쾌하지 못한 전쟁통에 묻어 오기는 했지만 서양인의 첫 방문은 역사적인 일임에 틀림없다. 왜성이 위치한 안골포는 임란 전승지로 유명한 곳.1952년 7월 왜 수군의 주력부대가 한산도에서 참패를 당하자 그를 따르던 가토 기요마사의 42척 제2 주력부대가 당황한 나머지 안골포에 옮겨 정박한 것을 이순신이 추격, 격파한다. 한산도해전과 더불어 안골포해전은 왜 수군 주력부대를 격멸한 큰 전공지였다. 이듬해인 1593년 2월부터 한달동안 이순신 함대는 웅포에 무려 7차례나 출격해 해전을 치렀는데, 이때 웅포 남산왜성의 왜 육군이 엄호하여 많은 고초를 겪었다. 세스페데스는 그 해 겨울 웅천으로 들어왔다. 안골포에는 굴강(掘江)이 남아 있다. 방파제와 선착장 역할을 하는 곳이다. 전남 여천에 선소(船所)와 굴강이 남아 있을 뿐 거의 사라진 지금 이곳의 해양문화사적 의미는 크다. 이순신의 대격전지에 이같은 해양 유적이 전해지고 있어 감회가 새로운데 머잖아 간척될 계획이라 운명이 풍전등화다. 매립하여 공원을 조성하고 바닷물을 끌어들여도 굴강만은 살릴 계획이라지만 이 희귀한 문화유산이 전해지는 임진왜란 대첩지를 매립해 땅을 얻어 써야겠다는 문화적 반달리즘을 두고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진해는 대마도를 거쳐서 규슈로 들어가는 지름길이다. 마산에서 여몽연합군이 후쿠오카쪽으로 진격해 들어갔듯 최단거리에 있는 곳이다. 그래서 조선 초기에는 본디 최초의 왜관이 자리잡은 곳도 또한 이곳 웅천이다. 왜관은 모두 세 군데에 있었으나 삼포왜란 이후에 변란을 걱정해 웅천왜성은 폐지되어 부산의 초량 왜관으로 통합됐다. 이같이 일본과의 관계를 끊을 수 없는 진해에 다시 왜인들이 나타난다. 근 300여년 만에 이번에는 왜가 아니라 일본제국주의로 변신해 나타났으니, 그들은 지형·정서적으로 가장 잘 아는 곳부터 점령을 시작한 것이다. 일본은 진해만을 동양 제일의 대군항으로 키우기 위해 한반도 최초로 조직적·계획적 도시계획을 입안한다. 진해라는 말부터가 일인에 의해 처음 쓰여졌고, 옛 웅천읍성과 무관하게 신도시로 재탄생했으니 식민지 항구도시 건설의 전형이라고 할 만하다. 당시 비동 현동 좌천 등 여러 마을을 합해 진해라 부르고 진해만 군항지를 편의상 진해만이라 칭한 것이다. 군항지 경영에 당시로서는 대단히 큰 돈인 800만원을 퍼부어 10개년 사업으로 공사를 시작했다. 바닷가 염습지와 황무지를 매립하여 땅을 얻고 농민들의 땅을 강제수용했다. 러일전쟁 직전인 1904년 1월12일에는 해군 함정을 거제도 송진포 연안에 대놓고 주민들을 강제로 쫓아내기도 했다. 송진포에 ‘일본제국 해군 가근거지 방비대’를 설치하고 러시아와의 전쟁준비에 돌입한다. 일제는 1905년 러일전쟁의 여세를 몰아 웅천지역의 토지를 강탈하기에 이른다. 당시 시가지는 12만평이었으며, 계획도시답게 모범적 시가를 만들기 위해 도로는 방사형으로 설계했다. 그래서 오늘날 진해의 중원로터리 등을 보면 사방팔통으로 도로가 교체하는데, 여타 도시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모습이다. 미관을 엄격히 고려하고 토지를 1∼3등으로 3분하여 건축을 제한했다. 건물은 2∼3층을 원칙으로 하고 4층 이상은 허가를 받아 짓도록 했다. 이곳 토지를 불하받은 일인은 히로시마 후쿠오카 도쿄 사세보 사가 조슈 나가사키 출신이 주류를 이뤘다. 한국에 오래 전에 나와있던 용산, 마산, 부산 등지의 일본인들도 이곳으로 몰려 왔다. 이로써 ‘일본인에 의한, 일본인을 위한, 일본인의 신도시’가 탄생한 것이다. 여기에는 그 어떤 조선인도 참여할 수 없었으며, 목포나 군산처럼 본래의 조선인촌과 병존하게 하지도 않은 식민도시였다. 그리하여 일제 해군본부가 들어서고, 한국뿐 아니라 극동의 군항으로 자리잡아 오늘날까지 한국 해군의 본거지로 자리매김했다. 진해에서 몇 가지 재미있는 풍경을 읽는다. 방사선으로 뻗어나간 로터리 모퉁이에 고색창연한 진해우체국이 서있어 식민지 시대를 전하고 있다. 도로들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영락없는 일장기 모습이다. 그런데 그런 곳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충무공 동상으로는 전국 최초인 1951년에 창원 통영 고성 김해 마산 등에서 갹출해 북원광장에 조성한 것이다. 일장기형 도로와 이순신의 동상이 주는 이중창이 묘한 갈등으로 다가온다. 자고로 벚꽃이 유명하여 4월 초순에는 군항제가 열린다. 충무공의 구국의 얼을 추모하고 벚꽃도 즐기는 최대의 행사인데, 일본 사무라이를 상징하는 벚꽃이 휘날리는 풍경 속에 서 있는 충무공 동상의 이미지는 왠지 좀 거북한 느낌이었다. 제황산정에는 웅장하게 솟은 탑이 있다. 일인들이 세운 러일전쟁 기념탑을 광복 후 철거하고 1967년 해군의 기함사령탑을 상징하는 이 탑으로 교체했다. 시내 로터리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진해를 방문했을 때 남긴 기념휘호를 각인한 비석이 있는데 가장자리가 깨져 있다. 의도적으로 훼손한 것을 땜질해 붙여놓았다. 로터리 중심의 나무에 가려져 있어 외부인은 그런 비석이 있는 줄도 모른다. 반면에 진해 바닷가에는 도지정 무형문화재인 이승만 전 대통령의 별장과 전용 낚시터, 장제스를 만났다는 육각정 등이 잘 보존돼 있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본디 일본군 통신대가 쓰던 건물이다. 진해 사람들도 나름대로 불만이 많다. 해군기지와 해군사관학교가 있다 보니 도시의 주요 토지들은 모두 군용으로 묶여 발전이 없다. 군사도시인 탓에 규제가 심해 발족 당시의 인구에서 별반 늘어난 게 없다. 게다가 부산시와의 갈등도 내연 상태다. 신항만 건설부지의 80%를 내놓았지만 명칭이 부산신항만으로 결정되는 분위기여서 폭발 일보 직전이다. 부산신항인지, 부산·진해신항인지를 놓고 대격돌을 벌이는 중이라 이래저래 군사도시의 고충이 깊은 요즘이다. 스스로 성장하지 못하고 군항에 의지해 살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 게다가 이웃 거대도시 부산의 밀어붙이기식 행정에 진해 사람들의 시름이 깊어가고 있다. 어찌보면 가장 쾌적하고 맞춤한 인구, 공장이 적은 대신 맑은 숲과 바다를 지닌 천혜의 미항 진해이건만 미래가 투명하게 결정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벚꽃 펄펄 날리는 조건에서도 소작쟁의는 물론 동양제사 노동자들의 대투쟁, 그리고 각종 학생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주기철 목사같이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한 진정한 종교인을 배출한 곳이 진해 아닌가(황정덕의 ‘진해 항일독립운동사’ 참조). 진해예술촌장을 맡아 군사도시 속에서 문화를 가꾸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박차생 진해문화원장이 망산도로 안내하면서 간절하게 전한 말은 이랬다.“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왕비인 아유타국 허왕옥 공주가 처음 내린 망산도도 진해지요. 역사적으로 손꼽히는 국제 항구도시였으니 부산·진해신항으로 결정돼 사람들 시름 좀 덜었으면 합니다.”
  • “한민족 위해 일한 배설 기억해야”

    “나의 수백마디 말보다 대한매일신보의 한줄 글이 더 위력있다.”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기 대한매일신보를 두고 탄식하며 한 말이다. 이토가 탄식한 데는 이유가 있다. 을사늑약 체결 뒤 고종황제의 직인이 없다는 점을 제일 먼저 지적한 신문이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박은식·양기탁 선생 같은 민족주의 필진은 날카로운 붓을 휘둘렀다. 물론 대한매일신보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고종의 은밀한 지원과 창간자 어니스트 베델(한국명 배설)이 영국인이어서 마음대로 건드릴 수 없었다는 점이 작용했다. 이런 배설 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27일 오전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 성지공원’에서는 서거 96주년 기념행사가 마련된다. 이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배설선생기념사업회 진채호(77) 회장을 만났다. 기념사업회는 올해 사업으로 베델·박은식·양기탁 선생의 동상과 기념관을 짓고, 내년에는 ‘세계언론평화상’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러나 엷어져가는 관심 때문에 속이 상한다고 했다.“백범 김구 선생 기념에는 국가가 이런 저런 지원을 합니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박은식 선생 같은 분은 백범 이전에 국무령 등을 지내셨습니다.‘법통’을 제대로 생각한다면 이분들도 기념해야죠.” 그래도 조금씩 변화의 기미를 보이는 것이 힘이 된단다.27일 행사에는 김원기 국회의장의 기념사도 낭독된다. 대통령 화환도 처음으로 올 예정이다. “잘 몰랐는데 대통령 화환이란게 받기 어려운 것이더군요. 아마도 정부쪽에서도 기념관 건립 등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배설은 알려져 있다시피 영국 크로니컬지 기자로 러일전쟁 취재차 한국에 들렀다. 당시 부동항을 얻으려는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일본과 영국은 동맹을 맺은 상황. 배설은 당연히 일본 편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한반도의 상황을 보고서는 1904년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다. 진 회장이 배설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비록 외국인일지라도 한국에 공헌한 사람에 대해서는 오랜 시간이 흘러도 기억 해준다는 게 우리의 자존심과 위상을 드높이는 일입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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