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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년 칸영화제 개막작 ‘할리우드 엔딩’

    지난 2002년 칸국제영화제 개막작이었던 우디 앨런의 영화 ‘할리우드 엔딩’(Hollywood Ending·30일 개봉)은 숨은 재주로 속이 꽉 들어찬 코미디이다. 백발의 노장 감독이 직접 주인공으로 뛰는데도 코미디의 선도(鮮度)는 아찔할 만큼 높고, 기대하지 않았던 달착지근한 로맨틱 정취까지 간간이 뿌려놓는다는 대목 등이 그렇다. 한때 세상이 알아주는 명감독이었으나 지금은 볼품없는 CF광고나 찍으며 근근이 살아가는 발 왁스만(우디 앨런). 그런 그에게 재기의 기회가 찾아온다. 로스앤젤레스의 거대 영화사에서 뉴요커의 삶을 소재로 한 블록버스터 드라마를 찍어달라는 제의가 들어온 것. 옛 명성을 되찾고픈 욕심에 수락은 했으나, 남은 문제가 간단치 않다. 투자사 대표의 애인 엘리(테아 레오니)는 다름아닌 자신을 버리고 떠났던 전 부인! 아내를 훔쳐간 예거(트리트 윌리엄스)를 향한 적개심은 사그라지지 않고, 엘리를 향한 미련 역시 아무래도 떨쳐지지가 않는데…. 할리우드에 진 빚이 없다는 듯 스크린을 통해 거침없이 내뱉는 감독의 발언은 기대 이상으로 신선하다. 이해관계로 움직이는 남녀의 연애담을 기술껏 꼬아놓은 코미디에서 은근슬쩍 감독은 ‘할리우드’(제작시스템 안팎의 허상 등)를 조롱하는 절묘한 엎어치기 기술을 구사했다. 신경불안 증세가 심해져 촬영 도중 갑자기 발의 눈이 멀어버리자, 엘리의 도움으로 스태프들조차 감쪽같이 속인 채 온갖 해프닝을 엮으며 영화촬영을 마무리하는 발. 장님 코끼리 만지듯 얼렁뚱땅 6000만달러짜리 대형영화를 만드는 발의 에피소드는 그대로 할리우드를 향해 날리는 통렬한 조소의 펀치인 셈이다. 각본까지 직접 쓴 감독은 직설화법으로 비판의 어조를 높여간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 속 상황은 갈수록 가관이다.‘쓰레기’라는 혹평으로 만신창이가 된 영화에 프랑스 평단은 극찬을 쏟아놓으니 말이다. 맥락없이 속사포처럼 웅얼웅얼 쏟아내는 발의 대사를 꼼꼼히 뜯어듣는 재미도 쏠쏠하다. 감독의 의도가 읽히는 보석같은 은유들을 낚을 수가 있다.15세 이상 관람가.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족상보는 미모의 전직여교사

    족상보는 미모의 전직여교사

      확대경을 손에 쥔 손이 창백하리만큼 새하얗다. 곱상한 얼굴, 미인형이다. 서울 서대문구 한구석의 담뱃갑만한 골상소(骨相所) 내실. 젊은 여류역학자는 골상도 수상도 아닌, 바로 족상(足相)에 심취해 있다.『구정 원단(元旦)엔 족상을 봅시다』신종 족상소의 열띤 개점사(開店辭) - . 대학나온 젊고 예쁜 미망인이 냄새나는 발도 주무르며 『발은 나무에 있어 뿌리와 같은 것입니다. 몸을 받치고 또 걸어다닐 수 있도록 버팀으로써 막중한 소임을 맡고 있죠. 골상(骨相)과 수상(手相)에 못지 않게 발의 형태는 그 삶의 운명을 점치는 하나의 예시적, 영감적 존재로서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습니다』임경산(林景山)(여·35) 족상가는 열을 올린다. 미모 - 서른 다섯의 젊은 미망인. 대학 출신에다 전직이 여학교 교사라는 좀 별난 이력서가 이 여자「관상장이」를 감싸고 있다. 전문이 골상과 수상인데 이번에 업종을 하나 더 추가, 족상업을 차렸다. 서대문에서 아현동으로 이르는 큰 길목, 옛「코리어·호텔」옆 후미진 자리에 자리잡은 임경산 골상소. 손님이 많다. 양말을 벗고 알몸뚱이(?)가 된 발을 내맡긴다. 확대경이 발의 구석구석을 답사하고 나면 미녀 족상가는 이윽고 발을 주무르기 시작한다. 발의 경도(硬度), 두께, 전체 모양 등을 샅샅이 검열하는 것이다. 『수상이나 족상은 허망한 미신이 아닙니다. 확고한 통계적 학문이에요. 파란만장한 인생항로에 있어 시기의 성쇠라든지, 직업의 적부, 또는 선천적 능력의 대소 같은 게 없을 수 없잖아요? 여기에 태국,「프랑스」, 독일, 일본 같은 데서 오히려 성행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족상을「통계적 학문」에다 얽어 맨다. 수상이 초·중·말의 유년법(流年法)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반해 족상은 영구불멸의「대활(大活)」이 제1의. 수상이「가변(可變)」이라면 족상은「불변(不變)」인데 그 기저(基底)가 있다고 했다. 임경산씨가 역학을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남편과 사별하고 나서부터였다. 향리인 충북의 D시에 사숙하던 스님이 한 분 있었는데 자신의 운명이 스님의 예언과 너무나 일치되어 버린데 감명, 재혼 대신 역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0년. 이제는 사주·골상·수상에다 족상까지 섭렵하여 명실공히 역학계의「명인좌(名人座)」에 올랐다고 자부할 정도. 발바닥에 털 있으면 귀인상이요 사마귀 있으면 큰 무사감 사람의 발엔 방향(芳香)이 있다. 특히 도시 남성의 그것은 말할 수없이 썩은 향내를 종횡무진 풍기고 있다. 그 냄새나는 발에 내밀히 감춰져 있는 운명과 신비의 의미를 발굴해내는 작업이 족상이란 이름의 역술(易術). 옛날 중국의 안녹산(安祿山)은 두 발바닥에 사마귀가 있었다. 얼마 전에 작고한 국군 창설의 유공자인 K장군 발바닥에도 큰 사마귀가 있었다. 족상에서 사마귀는 무장(武將)운. 발바닥에 털이 나면 대귀(大貴)상인데 중국 한문제(漢文帝)가 그랬다. 족상에서 옛 중국의 실존인물들이 예거되는 것을 보니 그것의 역사는 수상과 함께 꽤 오래된 모양. 임경산씨는 69년을「족상보는 해」로 스스로 설정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골상과 수상만이 일반에 광범히 뿌리박고 있었는데 골상은 기실 족상이 뒤따라야 진면목이라는 것. 『발금은 거짓이 없어요. 있는 그대로의 운명과 성질을 무언중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족상이야 말로 진실의 학문이지요』 족상은 보통 족형(足形)과 족문(足紋)으로 이루어진다. 수상이 생명, 두뇌, 감정, 운명, 태양, 재운, 건강, 방종, 인기, 수경(手頸), 총애, 피로, 장해, 화성(火星), 영향, 희망, 원조, 금성(金星), 자녀, 직감 등 21선의 수장(手掌)선에서 출발하고 있는데 비하면 족상은 그「폼」이 간단한 셈. 발은 방정하게 생기고 두터우며 길고 보드라운 것이 길상(吉相)이다. 무늬가 글자 모양으로 된 것, 사마귀가 있는 것, 빛깔이 윤택한 것 등은 모두 좋은 상이며 반대로 짧고 작은 것, 얇거나 거친 것, 단단한 것, 무늬가 없는 것 등이 천상(賤相)으로 평가되고 있다. 『옛날 이태백은 발바닥에 거북무늬가 있었다고 합니다. 거북무늬나 비단무늬 같은 것은 다 길상이지요. 탐스러운 꽃무늬도 좋은 것으로 판단되고 있습니다』 골상소 개업 10년 만에 족상소를 개설한 이「여류」의「족상관」은 자신과 신념으로 싸여 있다. 자신의 족상은 백발백중이라고 기염. 입시「시즌」과 구정을 맞아 임경산 골상소는 그야말로 초만원, 족상의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금년은 천대만 받던 발이 햇빛을 보게 되는「족권신장의 해」가 될지도 모르겠다. 발의 두께 4치 넘으면 거부(巨富)상이요 발가락이 길면 어진 사람 ◇ 족형의 판단 ① 발의 두께가 네 치(4寸)를 넘으면 거부의 격이다. ② 발가락이 가늘고 길면 충량하고 어질다. ③ 발가락이 고르고 단정한 것은 호걸이며 현인의 상. ④ 남자가 오리다리 같으면 평생 어리석고 천하며 여자가 오리다리이면 남의 첩이나 종노릇을 한다. ⑤ 발이 커도 얇거나 발바닥이 평평한 것은 비천하다. ⑥ 귀인의 발은 작아도 두텁고 비천한 사람의 발은 커도 얇다. ⑦ 발바닥 아래로 거북이 들어갈만하면 부귀를 얻는다. ◇ 족문의 판단 ① 발바닥에 꽃무늬가 있으면 재산을 많이 모은다. ② 발바닥에 거북무늬나 비단에 수놓은 무늬 같은 것이 있으면 다 좋은 상이다. ③ 열 발가락이 모두 둥근 무늬면 성격이 야비하다. ④ 발바닥에 무늬가 많으면 크게 자손이 번창한다. 무늬가 전혀 없으면 가난하다. ⑤ 발바닥의 십자(十字)문, 금(禽)문, 인형(人形)문, 도형(刀形)문은 모두 고관대부의 격이다. ⑥ 열 발가락에 모두 무늬가 없으면 파재(破財)가 많다. ⑦ 발가락 여덟 개에 소라무늬가 있는 것은 부귀할 격이다. 그러나 열 발가락이 모두 소라무늬면 오히려 성품이 야비할 상이다. [ 선데이서울 69년 2/16 제2권 7호 통권 제21호 ]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연기인생 30년 배우겸 교수 장미희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연기인생 30년 배우겸 교수 장미희

    와인은 숙성이 오래될수록 맑아진다고 한다. 꼭 30년이 됐다. 그만큼 맑음이 더해진다. 한 여인이 있다. 우선 영화 ‘겨울여자’에서 ‘이화’로 생생히 추억된다. 스치는 바람, 야리야리하다. 울음 머금은 가냘픈 목소리, 애틋함으로 버무려진 ‘공주과’의 청순가련한 여인, 수많은 청춘이 그 앞에서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또 있다.‘이화’가 노래한다.‘가을에도 우린 겨울 얘기를 했죠/우리들의 겨울은 가을에 벌써 다가왔다고/겨울엔 우린 겨울을 모르죠/우리들의 겨울은 너무나 추운 생각 뿐이죠/가을에도 우린 겨울 얘기를 했죠/우리들의 겨울은 가을에 벌써 다가왔다고’ ‘겨울여자’(조해일 원작 김호선 감독)는 서울의 인구가 600만이던 지난 1977년 당시, 단성사 극장에서만 58만 6000명의 관객을 불러들인 공전의 히트작. 주인공 ‘이화’가 여인으로 성장하면서 만나는 여러 남자들을 통해 한국사회의 갈등과 대립을 투시해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이 기록은 90년 ‘장군의 아들’이 개봉되기 전까지 전무후무했다. 교수이자 중견 여배우 장미희. 어느날 ‘겨울여자’의 ‘이화’로 대스타가 됐다. 때문에 40대 이후의 팬들에겐 늘 ‘이화’처럼 고고하면서 지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다. 맞다. 배우 장미희는 분명 70∼80년대의 흥행 메이커로 한국 영화를 대표했다. 오는 백발 어떻게 막고, 가는 세월 어찌 잡을 수 있으랴. 하지만 이런 말이 무색해진다. 장씨는 올해로 연기인생 30년을 맞는다. 얼핏 40대 중반쯤으로 판단되지만 여전히 청순가련의 이미지와 소녀같은 맑은 목소리를 간직하고 있었다. 정확한 나이를 물었더니 “남자 배우들의 나이는 잘 안 밝히면서 왜 여배우들한테만 민감하느냐, 만으로 적어주지도 않고. 여자 나이를 무슨 생리적 한계로 판단하려는 습성이 있다.”며 쏘아붙인다. 장씨는 열일곱 살에 TBC 탤런트로 데뷔했으며,76년 영화 ‘성춘향’으로 스크린에 첫발을 내디뎠다. 연기자로서 30년이 되기도 하지만 17년째 대학강단에서 열심히 후학들을 길러내고 있다. 요즘들어 영화출연이 뜸해졌지만 가끔 TV드라마에 출연해 여전히 존재의 이유를 알리고 있다. 내년에는 오랜 만에 스크린에서 팬들과 만난다.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에 위치한 명지전문대의 ‘장미희교수 연구실’에서 만났다. 때마침 10일간의 유럽 나들이에서 막 돌아온 직후였다.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연구실 청소를 하고 있었다. 외유에 대해 궁금한 표정을 짓자 “베니스영화제에도 잠깐 들렀고, 자료 수집 등을 위해 몇군데 겸사겸사 다녔다.”고 설명했다. 장씨는 까만 남방셔츠에다 청바지 차림이었다. 나이 서른아홉일 정도로 젊게 보인다고 하자 “감사합니다. 기사 쓸 때에도 꼭 그렇게 써주세요.”라며 수줍게 웃는다. 먼저 근황을 물었다. 얼마전 명지전문대의 연극영상학과 학과장을 그만 두고 일주일에 9시간 강의에 몰두하고 있다고 했다. 과목은 영상연기. 그러는 한편 자신의 공부에도 열중해 최근 동국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거의 마무리했다. 또한 문화관광부의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을 맡아 관련 회의와 기타 행사에도 자주 참석한다. 이래저래 일주일이 후딱 지나간다고 했다. 애제자가 몇명쯤 되느냐고 하자 “여제자들은 시집가고 그런지 남자 제자들로부터 연락이 자주 온다.”면서 “다들 연극·영화·방송국 스태프 등으로 맡은 역할을 하고 있다. 기업체 홍보팀에도 여럿 근무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씨는 제자들에게 인성교육을 강조한다고 했다. 자신의 존재와 장래의 꿈, 이를 위한 여러가지 마음 가짐 등등. 아울러 제자들은 자신을 연기자로 보지 않고 그냥 교수님으로 인식한다고 했다. 가끔 아버지가, 어머니가 그랬다며 사인을 요청하는 제자들이 있을 경우 “내가 왕년의 배우인가.”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 최근에 드라마에 출연했더니 제자들로부터 “교수님의 연기력에 새삼 감동했어요.”라는 얘기를 전해 들어 모처럼 연기자로서의 즐거움을 느낀다고 했다. 평소 독서량이 풍부해 한번 얘기하기 시작하면 동서고금을 휘젓는 달변으로 통한다. 이런 얘기를 하자 “송구스럽습니다. 요즘에는 철학이 없어요, 인문학이 죽어가고 있지요. 영상시대입니다. 알기 쉽게 풀어서 제자들에게 전달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라며 자신의 강의철학을 피력했다. 이어 요즘 영화의 흐름에 대해 나름대로의 비판을 토해낸다.“사랑이 무슨 종교처럼 신봉되고 있어요. 그러다보니 사랑을 할 수 있는 나이, 즉 20대에서 30대 초반정도로 국한돼요. 성숙된 사회란 40∼50대의 사랑도 그려져야 해요. 왜 40대만 되면 사랑도 없고 그저 생계에만 매달려야 하는 사람으로, 밥 먹었니, 학교에 가라, 공부는 왜 안하니 등등의 얄미운 역할만 해야 합니까.20대의 욕망과 야망 앞에 늘 피곤한 들러리 존재라고나 할까요. 40대 이상에도 야망이 있고 관능이 있어요. 영화계에서 어느새 중견배우라는 말도 사라졌어요.” 또한 사랑은 20대의 전유물로 그려지고 있으며 40대 이상은 욕망을 가져서도, 일탈해서도 안되는 것처럼 늘 제외돼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영화 ‘타인의 취향’(아네스 자우이 감독)인 경우 중년의 사랑과 관능, 자존심 등을 아주 담담하게 그렸지만 명화로 널리 대접받는 것을 예로 들었다. 그러면서 “40대를 포옹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영화 출연 제의가 오느냐고 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현재도 시나리오를 받아 놓고 고민 중이라고 했다. 역할도 중요하지만 관객들의 호응과 극장의 배급망 등을 계산하다보니 자꾸 망설여진다고 고백했다. 특히 ‘배우 장미희’를 사랑하는 팬들에게 실망을 주면 안된다는 강박관념도 뒤따라 쉽게 결정을 못하는 측면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내년에는 영화 한두편정도에 출연해 팬들에게 보답할 예정이라고 했다. 최근 프랑스에 갔을 때 60년대 후반에 선보인 영화 ‘남과 여’의 주인공 아누크 에메가 ‘남과 여’ 포스터를 아직도 그대로 붙여놓고 극장에서 연극을 하는 것을 보고 적지 않은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어떤 역할을 맡고 싶느냐는 질문에 “병적으로 따라다니는 스토커나, 이승과 저승을 경험하는 진지한 연기, 아름다운 중년의 모습, 또 기회가 주어지면 자객이나 검객역도 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영화배우로서 정년은 관객이 찾아주지 않을 때가 아니냐면서 사랑해주는 팬들이 있는 한 연기를 계속할 것이라고 의욕을 보였다. 연기생활을 하면서 가장 아끼는 작품을 꼽아달라고 하자 ‘사의 찬미’‘황진이’‘적도의 꽃’‘겨울여자’ 등을 열거했다. 독신으로 사는 이유를 물었다.“혼자 살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까지 왔다. 이성과 만나면서도 둘이 되려고 노력을 하지 않았고 솔직히 배려도 못했다. 스캔들도 부담스러웠다. 이제와서 생각이지만 결혼을 하든 안하든 배려를 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좋은 친구, 즉 지혜로운 친구, 와인을 같이 마실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심경을 고백했다. 집에는 일흔 다섯 살의 어머니, 그리고 고양이(미미)와 삽살개(양배추) 등이 함께 산다.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에 대해 “채식 위주의 소식, 요가를 자주 하며 가끔 산책과 헬스클럽에 나가 가벼운 운동을 한다.”면서 한달에 한번 주치의를 만나고 6개월에 한번 건강검진을 받는다고 귀띔했다. 어릴 적부터 선생님이 꿈이었다는 장씨. 배우로서 회의를 느껴본 적이 있지만 교수가 된 이후에는 한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꿈을 이루어 행복과 정신적 안정감을 만끽하고 있다는 것. 연기란 무엇인가라는 다소 생뚱맞은 질문에 지체없이 “자기자신을 알아라, 인간이 어디에서 나와 어디로 가는지, 여러 체험을 통해 겸허해지는 것.”이라고 답했다. 가을을 타느냐고 하자 “작년까지는 계절을 안 탔는데 올해들어서 느낌이 약간 달라지고 있다.”고 솔직한 속내를 드러냈다. 아울러 “오래 숙성된 와인일수록 더욱 맑아지고 찌꺼기는 가라앉는 법”이라며 집에서 와인을 마실 때가 가장 즐겁다며 활짝 웃었다.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부산 출생 ▲동국대 불교학과 졸업 ▲1975년 TBC탤런트 데뷔. ▲76년 영화 ‘성춘향’ 데뷔 ▲77년 영화 ‘겨울여자’에서 이화역을 맡아 대스타가 됨. ▲82년 조계사 합창단 단장 ▲89년 명지 전문대 출강 ▲99년 영상물등급위원회 영화심의위원, 명지전문대 연극영상과 전임교수 ▲2005년 문화관광부 제3기 영화진흥위원(임기3년) ■ 주요 출연작품 영화와 드라마를 합쳐 80여편 출연. ▲영화 애인(82년), 사의 찬미(87년), 불의 나라(89년), 애니깽(94년), 아버지(97년), 보리울의 여름(2002년), ▲드라마 타인(87년), 잠들지 않은 나무(89년), 엄마야 누나야(2000년), 흥부네 박터졌네(03년), 황태자의 첫사랑(04년), 그 여름의 태풍(05년). ■ 저서 내 삶은 아름다워질 권리가 있다(98년) 외. ■ 상훈 신인상 제11회 핑크리본상(76년), 여우주연상 은곰상(77년), 최우수 여자연기상(79년), 제37회 아시아태평양영화제 여우주연상(92년), 대종상 여우주연상(92년), 제12회 청룡상 여우주연상(92년) 등.
  • [어떻게 지내세요] 전 대표팀 감독 경원대 교수

    [어떻게 지내세요] 전 대표팀 감독 경원대 교수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한 외국계 보험회사의 신입사원 130여명이 지난 8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파크텔에서 열린 강의에 몰입해 있었다. 연단에 선 백발의 강사는 ‘팀워크와 프로정신’을 주제로 2시간동안 쉼없이 얘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이 낯익은 얼굴은 1970∼80년대 농구코트의 카리스마로 명성을 떨친 방열(64) 경원대 사회체육대학원장이었다. ●강단에 선 코트의 카리스마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코트를 호령하던 모습이 선했지만, 사회 초년병들이 하품 한번 할 틈을 안 주고 휘어잡는 것을 보니 영락없는 베테랑 강사. 지난 92년 경원대 교수로 강단에 선 뒤, 벌써 14년째이니 그럴 법도 했다. “농구 데뷔전때 림이 안 보이더니, 첫 강의 때도 학생들이 하나도 안 들어오더라.”며 방열 교수는 기억을 더듬었다. 처음엔 교양과목만을 가르쳤던 그는 학교측과 교육부를 집요하게 설득해 95년 사회체육학과 인가를 받아냈고, 내친김에 2003년 사회체육대학원을 만들었다. 어디서든 새 판을 벌이는 버릇은 계속된 셈. 감독을 맡았던 조흥은행(여자)과 현대, 기아차 모두 신생팀이었다.“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으면 재미없잖아. 내 손으로 장도 보고 요리도 해야지.”란 설명을 듣고 나니 그의 숙명이란 생각이 들었다. 6년 동안의 화려했던 국가대표 생활을 뒤로하고 67년 은퇴한 그는 교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미국 유학을 준비했다. 명문 노스캐롤라이나대로부터 전액장학금을 조건으로 입학허가를 받고 기다리던 그는 신생팀 조흥은행의 ‘러브콜’을 받았고, 고심 끝에 방향을 틀었다. 덕분에 한국농구는 ‘큰 지도자’를 얻었지만 ‘교수 방열’의 꿈은 25년이나 미뤄졌다. 지도자 시절 가장 깊은 인상을 준 이는 ‘농구광’으로 소문난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26살의 나이로 조흥은행 사령탑을 맡은 뒤 71년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 우승을 비롯, 국내외에서 ‘우승제조기’로 명성을 떨치던 그는 78년 창단팀 현대 감독을 맡으며 ‘왕회장’과 인연을 맺었다. 하루는 고려대-현대의 연습경기를 보러온 정 회장이 “방 감독, 슛 잘하는 얘들 뽑지 말고, 안 들어간 공 건져올리는 녀석들을 스카우트해봐.”라고 툭 던졌다. 슈터만 눈여겨보는 일반인들과는 안목이 달랐다. 리바운드의 중요성을 간파한 셈.86년 기아로 옮길 때의 모습은 지금도 선하다. 서운할 법도 했건만 왕회장은 “힘들면 언제든 돌아오라.”며 손을 꼭 잡아줬던 것. ●인생의 4쿼터를 준비한다 대학에서 1주일에 8시간씩 강의를 하고 방학 때면 해외 코치클리닉과 외부특강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방 교수. 그러면서도 요즘 ‘인생의 4쿼터’를 준비하느라 하루가 짧기만 하단다. 그의 마지막 꿈은 풀뿌리 농구의 저변을 확대하고, 농구인들의 재교육을 담당하는 ‘농구아카데미’를 설립하는 일.2007년 퇴임 이후 박차를 가할 생각으로 준비하고 있다. ‘농구아카데미’에서는 청소년들이 작은 공간에서도 농구를 즐길 수 있도록 방 교수가 특허출원한 4대4 경기용 ‘O2존 코트’(15mX15.65m)를 보급하고, 상대적으로 낙후된 심판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한 전문 과정을 개설할 계획이다. 농구에 대한 그의 열정이 고스란히 담긴 ‘농구아카데미’가 한국농구 발전의 ‘인큐베이터’가 되길 기대해 본다. 글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사진 안주영기자 jya@seoul.co.kr
  • [길섶에서] 아버지 성묘/진경호 논설위원

    상가(喪家) 찾는 일이 부쩍 늘었다.“계절이 바뀌는 때잖아…. 노인들한텐 제일 위험하지.” 동료의 알은체를 끄덕끄덕 고갯짓으로 받으며 상가에 들어섰다. 대학병원 영안실에 마련된 빈소는 낯이 익었다.2년 전 한번 찾았던 곳이다. 영정 또한 낯이 익었다. 이태 전 이곳에 서 계셨던, 선배의 부친이었다. 부인을 먼저 보내면서 빈소 앞을 무겁게 서성이던 백발의 야윈 몸피가 눈에 선했다. “그때만 해도 정정하셨는데….”“여든하나이셨다며?” 분향을 마치고 물러나 둘러앉은 자리에서 고인 얘기가 두런두런 오갔다.“부인 돌아가시고 얼마 안돼 발병했다죠?”“그러게 노인들은 몰라….” 소주잔을 건네는 손길들이 빨라진다 싶더니 화제가 이내 고인의 병 수발을 들던 선배로 넘어갔다.“병이 악화돼 약을 못 넘기실 때 가장 마음이 아팠다는 거야. 마음이 찡하더라고.” 가슴이 알싸해졌다. 약조차 못 드시는 아버지를 뵐 때의 고통을 8년전 겪어보지 않았던가. 그건 희망을 내려 놓아야 한다는 뜻이었고, 아버지를 불러볼 날이 얼마 안 남았음을 알리는 시그널이었다. 서른다섯부터 아버지 성묘를 다닌 불효자식이다 보니 아버지와 성묘가는 분들이 그저 부러운, 그 추석이 또 오고 있다. 진경호 논설위원 jade@seoul.co.kr
  • “로젤은 내안에 있는 또 다른 나”

    “로젤은 내안에 있는 또 다른 나”

    초가을 밤 클래식 기타 선율에 흠뻑 빠져보자. 클래식 기타계의 왕족으로 불리는 스페인 로메로가(家)의 페페 로메로와 앙헬 로메로의 콘서트와 미국 출신의 천재 기타리스트 크리스토퍼 파크닝의 연주회가 이달 잇달아 열린다. 이들의 감미로우면서도 정열적이고 힘 넘치는 연주는 세계 최고 수준인 만큼 클래식 기타 음악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카푸치노로 주세요.” 지난 2일 오후 서울 강남의 한 카페. 메뉴를 보며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커피를 주문하더니 말끝을 흐린다.“요즘 통 잠이 안 와서요. 카페인 마시면 백발백중인데…”. 연기 인생 30년을 앞둔 관록의 배우 김지숙. 지금까지 한번도 공연 때문에 불면증에 시달린 적이 없다는 그녀를 이렇듯 긴장하게 만든 작품은 16일 서울 우림청담시어터에서 막올리는 모노드라마 ‘로젤’이다.‘로젤’은 1991년 초연 이후 10년 간 3100회 공연,1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그녀의 대표작. 분신과도 같은 연극인데 새삼 뭐가 두려울까. “그러게 말이에요. 내안에 또다른 내가 있나봐요.(웃음)사실 두렵다기보다는 무척 설레요.‘로젤’은 관객이 절반을 채워주는 작품인데 이번 공연에선 어떤 관객들과 호흡을 맞출까 하는 기대가 큽니다.” 독일 작가 하롤트 뮐러의 1인극 ‘로젤’은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꾸던 여성이 고교시절 친구들에게 자신의 불행한 삶을 들려주는 이야기. 억압적인 아버지로 인해 꿈을 접어야 했던 로젤은 순탄치 못한 결혼생활, 계획적으로 접근한 연하남의 배신 등으로 심신이 피폐해져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탈출한 뒤 이야기를 들어줄 친구들을 찾아다닌다. “초연때는 사회의 약자이자 소외계층인 여성을 대변한다는 심정으로 ‘독립운동’하듯 맹렬하게 연기했어요. 그런데 연기할수록 ‘여성 수난사’보다는 각박한 세상에서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고통이 더 절실하게 다가오더군요.”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 가슴속 이야기를 친구에게 시시콜콜 털어놓은 로젤은 “친구야, 나에겐 너같은 친구가 필요했어!”라며 눈물을 흘린다. 어떤 기막힌 상황을 얘기할 때도 침착하던 김지숙은 매번 이 대목에 이르면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폭발한다고 했다. 1시간20분 동안 혼자 무대에 서지만 연극을 완성하는 건 혼자가 아니다. 로젤은 수시로 관객에게 말을 걸고, 극에 몰입한 관객은 마치 친구처럼 로젤을 위로한다. 교도소 무료공연때는 여자 재소자들이 ‘우리도 사는데 힘내’라며 격려하고, 오지마을 공연때는 할머니들이 ‘아이구, 어쩌냐’며 친자식 일인 양 마음 아파한다고. 그녀는 “로젤의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 공연을 피하고 싶다가도 각계각층의 절절한 반응을 접하면 어느새 또 무대에 서게 된다.”며 웃었다. 그녀는 이번 공연을 찾는 관객도 오래 못 만났던 고교 친구를 만나는 심정으로 극장에 와주길 바랐다. 평생 타인에게 휘둘려 살아온 나약한 ‘로젤’과 달리 김지숙은 연기 이외에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배우로 유명하다. 성폭력상담소, 주한미군범죄근절을 위한 운동본부, 참여연대 기금마련 공연, 어린이공부방 모금공연 등 소외된 계층에 남다른 애정을 기울였다. 최근 2∼3년간 기초예술연대 공동상임위원장과 한국연극협회 부이사장으로 활동하느라 2002년 ‘두 여자’이후 연극에도 출연하지 못했다. 이번 공연은 대한민국 대표 여배우 6명을 초청한 PMC프로덕션의 ‘여배우 시리즈’중 네번째 무대. 윤석화, 김성녀, 손숙 등 이미 공연을 끝냈거나 진행중인 다른 배우들과의 경쟁이 부담스럽지 않을까.“연기자는 누구나 ‘내가 제일 잘한다’는 자부심이 있을 거예요. 저도 물론 그렇고요.(웃음)배우마다 개성과 향기가 다르니까 우열을 가리기보다는 각자의 향기를 음미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어요.” 11월13일까지.3만∼5만원.(02)569-0696.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맑은 바람이 불듯 호랑이가 뛰어 놀듯

    ‘백세청풍’(百世淸風·백대를 이어갈 맑은 바람) 산정(山丁) 서세옥(76) 화백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가훈과 화백 자신은 닮은꼴이다. 세월의 흔적이라곤 백발에서 겨우 찾을 수 있을 뿐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꼿꼿한 선비의 풍모가 진하게 풍겨 나온다.# 나의 길은 외롭게 가는 길 다만 소중하게 스스로를 사랑하여 꺼뻑 엎어지면서 알아주는 이를 기다리는 것 그가 직접 지은 한시(漢詩). 한문에 약한 기자를 위해 그는 기꺼이 쉽고도 명쾌하게 해석해 줬다. 현대 동양화의 대가로 명성 높은 그는 그림뿐 아니라 한시에도 자유자재하다.“만권의 책을 읽어 철학가, 비평가로도 손색이 없다.”고 미술평론가 정병관씨는 말한다. 그가 ‘마지막 문인화가’라고 불리는 것도 이 때문. 서울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리는 ‘서세옥전’. 국립현대미술관으로부터 올해의 작가로 뽑히면서 그의 50년 화업 인생을 펼쳐 보이고 있다.# 한잎 나뭇잎 위에 허리가 돌돌 말린 새 한마리 졸고 있고, 그 위로 푸른 달이 훤히 밤을 밝힌다. 작품 ‘황혼’(1977)을 보면서 그는 “그림은 자기 삶의 기록”이라고 말했다.“그리고 싶고, 생각했던 대상을 이런 방법으로 그리며 지난 40∼50년의 세월을 보냈구나 싶어 애틋한 생각이 듭니다.” 전시장을 쭉 돌며 하나하나 자신의 작품을 설명한 그가 가장 많이 한 말은 “이게 무슨 그림이야!”다.1950∼70년대 세상 사람들이 “미쳤어.”라는 말과 함께 그에게 던졌던 이 말을 그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남들이 세부 묘사에 몰두할 때 그는 점과 선 하나로 이 세상을 표현, 점추상(点抽象)의 세계에 접어 드는 ‘혁명가’였다. 한지에서 탈피, 무명천에 그림을 그리는 실험정신을 그는 60년대에 일찌감치 실천했다. ‘선의 변주’(1959)‘장생’(1970)은 지금 봐도 유행 지난 옷이 아니라 너무나 모던하다. 지금도 통하는 미니멀 추상의 길을 동양화가로서는 처음 연 시공을 초월하는 작품들이다. 서세옥 하면 떠오르는 ‘춤추는 사람들’시리즈와 같은 대작을 그리기 위해 그는 사람 키높이의 큰 붓을 사용한다. 그러면서도 마치 호랑이를 타고 놀듯 자유롭게 선을 휘두른다.“하루 작업을 하면 보통 3∼4일의 에너지를 쏟아붓지요. 반바지 입고 웃통 벗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보면 땀이 납니다. 평생 운동하지 않고 그림만 그려도 건강합니다.” 활달하면서도 힘 넘치는 그의 붓질과 간결한 구도는 세련된 느낌.“한번 지나간 자리에는 두번 붓질을 하지 않아요. 물을 쏟을 때는 간단하지만 부은 물을 담지 못하는 것이 인생입니다.”다음달 30일까지.(02)2022-0613.최광숙기자 bori@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타악과 재즈의 달인 류복성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타악과 재즈의 달인 류복성

    한 거장이 있다. 짧은 백발, 까만 반팔 티셔츠에 공수특전단 군복바지를 늘 입고 다닌다. 얼핏 악동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눈을 지그시 감는다. 양미간을 찡그리더니 하얀 이를 살짝 드러낸다. 오른손 왼손, 어깨가 절로 흔들린다.‘두르르타타 두르르타타’ 봉고와 콩가, 그의 무릎앞에 놓인 원초적 ‘타악’을 인정사정없이 불러낸다. 심장이 박동한다. 다들 생명의 날개를 달고 춤을 춘다. 한바탕 신명과 환희에 빠져들게 한다. 류복성(64)씨.1970년대 TV화면에 봉고라는 작은 타악기를 들고나와 미친 듯 두드리던 사내. 암울하고 가난했던 시절, 그의 열정적 연주를 보고 어깨를 들썩이며 잠시나마 위안을 받기도 했다. 또 있다.71∼89년까지 최장수 인기프로였던 TV드라마 ‘수사반장’의 타이틀곡을 제작한 추억의 주인공이다. 얼마전에도 영화 ‘살인의 추억’ 오프닝곡에서도 스릴넘치는 봉고연주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평론가들은 류씨를 “심장으로 연주하는 타악기의 거장”이라고 곧잘 표현한다. 또한 한국 재즈계의 살아 있는 역사, 봉고와 드럼 연주의 1인자라는 자리매김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 어떤 즉흥연주에도 생명력과 아름다운 선율로 혼을 빼는 감동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류씨 자신도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태초의 음악은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라는 일념으로 47년 재즈인생을 살고 있음을 자부한다. 지난 24일 밤 9시. 서울 종로구 동숭동 대학로의 재즈카페 ‘천년동안도’ 2층.20∼30대 연인들, 단체 입장한 회사원, 그리고 외국인 남녀 등 약 300명의 관객들로 꽉 차 있었다. 이들은 ‘류복성과 재즈 올스타즈’의 연주에 맞춰 테이블에 앉아 몸을 흔들고 있었다. 특히 류씨가 박진감 넘치는 드럼과 봉고 연주를 할 때면 무아지경에 빠진 듯 환호한다.‘수사반장2’를 새로 선보이자 한동안 박수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류씨는 이날도 여전히 까만 티셔츠에 군복바지 차림. 연주 도중 갑자기 음악을 멈추는가 하면 기상천외의 물건(?)을 흔들며 코믹한 연기를 자주 펼쳐 많은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입장객들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시선을 무대에 고정시켜 온몸으로 흔들흔들 즐긴다.‘혼자걷는 명동길’ 등 추억의 노래와 ‘수비두비돔’이라는 즉흥곡이 나올 땐 더욱 그랬다.“우리는 만났지 재즈클럽에서/처음 본 순간 너무 좋았지/열받는 사람 신나는 사람/여기 다 모여 노래를 부르자.” 그렇게 2시간 동안 류씨 연주에 흠뻑 빠진 관객들은 좀처럼 떠나줄 몰랐다. 한 종업원은 “요즘 날씨가 선선해지고 가을이 다가와서 그런지 재즈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면서 “류복성씨 공연때에는 추억의 재즈팬들이 많이 찾는다.”고 귀띔했다. 류씨는 매주 목요일 저녁 이곳에서 관객들과 만난다. 공연이 끝난 이튿날 서울 광진구 구의동 ‘류복성 드럼&퍼커션 스쿨’(www.mrbongo.co.kr 02-3435-7827)에서 별도의 인터뷰를 가졌다. 류씨는 만나자마자 음악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 매스컴에서 각광받는 요즘 세태를 보노라면 정말로 한심하다고 쏘아붙인다. 상업성만 좇는 매스컴 관계자들도 문제라고 지적한다. 아울러 재즈는 전세계에 팬들을 확보한 지구촌 최상급 음악임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대우를 받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전설적인 재즈 가수 루이 암스트롱의 불멸의 히트곡 ‘What a wonderful world’의 가사를 보더라도 “이 세상보다 더 아름다운 세상은 없다.”고 노래하고 있지 않으냐며 재즈 선율의 감미로움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하루 이틀에 해결될 문제도 아니니 어쨌든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묵묵히 살아갈 뿐”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어쩌면 재즈계의 거장으로서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혜안과 고달픔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뒤 제자 몇명이 왔다. 이들은 류씨에게 깍듯이 인사를 한 뒤 각자 악기 앞에서 곧바로 연습에 몰입했다. 가끔 귀에 들리는 소리가 거슬렸던지 류씨는 “그게 아니야, 이거야. 두리두리 바라밤, 오케이.”하면서 지적해 준다. ‘류복성의 드럼&퍼커션스쿨’은 류씨의 타악인생 45년을 기념해 2년전 문을 열었다.5개의 드럼부스와 합주공간에서 취미반 입시반 프로반 등을 마련,1대1 레슨을 시키는 사실상 국내 유일의 곳. 류씨는 “그동안 배우고자 하는 요청이 많았지만 제대로 보답하지 못했다.”면서 이제 여생에 좋은 후배들을 많이 양성하는 일에 더욱 신경을 쓸 생각이라고 재즈사랑과 고생담을 회고했다. 류씨는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부터 부모가 아무리 말려도 동네에 찾아온 풍물패를 쫓아다닐 정도의 음악에 미쳤다. 타고난 끼 덕에 꽹과리와 징소리는 그에겐 늘 즐거움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우연히 미8군 방송(AFKN) 라디오를 통해 ‘스바라두바 스두비디바라’라는 음악을 접했다. 듣는 순간 리듬에 맞춰 몸이 절로 움직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마일즈 데이비스 퀸텟’이 캐논볼 애덜리(알토 색소폰), 존 콜트레인(테너 색소폰) 등과 함께 연주한 ‘Straight no chaser(58년)’라는 곡이었다. 이 노래로 인생이 확 바뀐다. 바로 저런 음악, 재즈연주자의 길을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재즈를 배울 만한 곳이 없었다.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큰집이 있는 창신동으로 갔다. 때마침 동북고등학교에서 밴드부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는 한 달음에 달려갔다. 오디션에 거뜬히 합격했다. 공부에는 조금도 흥미가 없었고, 늘 학교건물 지하에 있는 밴드부에서 살았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맨날 행진곡풍 음악만 연주해 밴드부를 뛰쳐 나왔다. 며칠뒤 우연히 종로 거리를 지나는 길에 미8군 쇼를 보게 됐다. 그 길로 미8군 쇼단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단장을 쫓아다니며 짐도 날라주고 허드렛일을 많이 했다. 하지만 좀처럼 드럼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하루는 단장이 ‘버디 리치’라는 드러머가 쓴 드럼 교본을 빌려 줬다. 곧바로 문방구에 달려가 오선지 공책을 하나 사서는 통째로 옮겨 적었다. 이때부터 하루 20시간을 연습했다. 그후 악단을 여기저기 찾아 다니면서 드럼을 쳐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경험부족이란 이유로 받아 주지 않았다. 얼마뒤 전국 드럼경연대회에 우연히 출전했다. 여기에서 많은 박수갈채를 받게 됐고, 이때 고 이봉조 선생과 만나 프로 악단에 입문하게 됐다. 그러던 중 67년 워커힐호텔에서 재즈 드러머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호텔 ‘힐탑바’라는 재즈클럽이었다. 여기에서 색소폰 연주자 정성조씨를 만났다. 둘은 곧 ‘류복성과 재즈 메신저스’라는 팀을 만들어 재즈 전도에 나섰다. 또한 이태원의 재즈클럽 ‘올 댓 재즈’에도 자주 나갔다. 당시 이곳은 재즈음악의 산실로 재즈를 한다는 사람들은 죄다 모이곤 했다. 류씨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인근 미군부대 앞 중고품 가게에서 월급을 몽땅 털어 재즈 LP판을 샀던 기억 등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이후 70년대 들어 나미의 ‘영원한 친구’, 송대관의 ‘해뜰날’ 등 수많은 대중음악 타악기 연주자로 참여해 돈을 벌었다. 그러나 사운드 엔지니어나 편곡자들과 마찰이 자주 생겨 나중에는 때려 치우고 말았다. 90년대 들어 나이 쉰을 넘긴 뒤에도 ‘재즈 알리기’를 멈추지 않았다.92년의 ‘대한민국 재즈 페스티벌’을 시작으로 97년 ‘서머 재즈 페스티벌’,99년 ‘아듀 재즈 콘서트’에 이르기까지 굵직굵직한 공연을 기획, 국내의 재즈 뮤지션들을 한 곳에 불러모으는 성과를 거둔다. 잠시 창밖을 응시하던 류씨는 “이제 그만하자.”고 했다. 나이를 의식한 듯 자신의 재즈사랑을 이어줄, 거장의 바통을 이어갈 후배를 그리워하는 눈치였다. “지난 세월, 정말 미친 듯이 살았습니다. 세상은 갈수록 각박해지고 있습니다. 왜 그래요?(침묵) 가슴을 뻥뚫는 음악, 필요해요 안해요?”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41년 용인 출생 ▲1958년 미8군 쇼단 입단 ▲61년 이봉조 악단 입단 5년간 연주 ▲66년 길옥윤 재즈올스타즈와 연주활동 ▲67년 류복성과 재즈메신저스, 정성조씨와 창단 ▲68년 세계적인 타악인 아기콜론(미국)에게 사사 ▲71∼89년 MBC 수사드라마 수사반장 타이틀곡 봉고연주 ▲78년 류복성과 신호등(라틴코리아나)창단 및 출반 ▲87년 서울시립교향악단과 류복성 재즈올스타즈 협연 ▲88년 한강 국제재즈페스티벌 출연 ▲92년 제1회 대한민국 재즈페스티벌 연출기획 ▲97년 여름재즈페스티벌 연출기획 ▲2000년 각 대학 특강 및 군악대 특강 ▲03년 재즈인생 45주년 기념 류복성 재즈콘서트 ▲05년 현재 류복성 라틴재즈 올스타즈 활동
  • [길섶에서] 내 생애 가장 젊은 순간/우득정 논설위원

    백발이 성성한 선배 한 분이 소주 몇잔을 연거푸 털어넣더니 갑자기 정색을 하고 말한다.“60을 넘긴 나이에 깨달은 건데,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젊다는 사실이야.”그동안 책에서는 이 순간이 가장 소중하다든가, 인생의 남은 날을 후회없이 살아야 한다는 등 공자 같은 말씀을 숱하게 봤지만 그냥 스쳐가는 말로 치부했단다. 하지만 어느 날 아침 문득 ‘이 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젊다.’는 사실이 가슴 따갑게 와닿으면서 하루하루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느 날부터인가 앞으로 남은 날을 꿈꾸기보다 지나간 날을 뒤돌아보기 시작한 것 같다. 꿈꾸기에는 이젠 늦은 나이라고 체념하면서 저녁 산책로를 떠돌아 다녔다. 특히 지난 달 10년 전에 살던 아파트 단지로 이사하면서 옛 상념에 빠져드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담고 있는 아파트 단지 뒷길 벤치에 앉아 기억속에 남은 10년 전 흑백사진과 눈 앞을 내닫는 꼬마들을 비교하며 혼자 쓸쓸한 미소를 지었었다. 선배의 소중한 한 마디가 잠자던 영혼을 뒤흔든다. 내 인생에서 가장 젊은 이 순간에 할 수 없는 일이라면 내일은 더더욱 불가능할 게 아닌가. 우득정 논설위원 djwootk@seoul.co.kr
  • 39년간 동고동락 아내위한 ‘공로비’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의 한 농업인이 39년 동안 동고동락해온 아내에게 바치는 공로비를 세웠다. 지난 1979년 전국 최초로 관광농원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 박경남(65)씨는 지난 4일 아내 김옥순(59)씨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공로비를 농원 앞에 설치했다.비문에는 ‘당신의 예쁜 모습은 어디로 가고 주름지고 백발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며, 당신의 고귀한 손이 얼마나 혹사당했고 우리 가족을 위해 얼마나 큰 역할을 하였는지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오’라는 내용을 담았다. 지난 1966년 결혼 당시 박씨 부부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달랑 낡은 손수레 하나뿐이었다.이 손수레를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면서 함께 오늘날의 관광농원을 가꿔 지금은 연간 4만여명이 다녀가는 양주시의 명물이 됐다.한때 아내의 우울증으로 동반자살까지 생각한 적도 있었다는 박씨는 “비석 앞에서 환하게 웃는 아내의 모습이 그렇게 예쁠 수 없었다.”며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양주 한만교기자 mghanni@seoul.co.kr
  • [일본을 다시본다] (7) 노벨상의 산실 교토대

    [일본을 다시본다] (7) 노벨상의 산실 교토대

    |교토 특별취재팀|2003년 10월 스웨덴 한림원이 각 부문별 노벨상 수상자를 발표하자 일본인들은 한숨을 내쉬었다.2000년부터 2002년까지 3년 연속 노벨화학상 수상자를 냈고 2002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까지 배출한 기세를 이어갈 것이라는 기대가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4년 연속 노벨상 수상’이라는 기록 달성 여부와 관계없이 ‘잃어버린 10년’의 경기 침체가 노벨상 수상을 가로막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미 3년 동안 입증된 다음이었다. 지금까지 일본인 노벨상 수상자는 모두 12명. 문학상과 평화상을 받은 3명을 제외한 자연과학계열 수상자 9명을 배출한 일본 학계의 저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궁금증을 풀기 위해 자연과학계열 9명의 수상자 가운데 1949년 일본인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한 유카와 히데키 교수를 비롯,5명을 배출한 교토대를 찾았다. ●방치에 가까운 연구풍토… 사회공헌 의식도 한몫 일본 최고 명문대 교토대와 도쿄대는 곧잘 비교되지만 규모 면에선 상당한 차이가 있다. 지난해 5월 현재 교토대의 학생 수는 학부와 석·박사 과정 통틀어 2만 2103명이지만, 도쿄대는 2만 8350명이다. 석·박사 과정만 놓고 보면 교토대 학생 수는 8828명으로 1만 2676명인 도쿄대보다 3326명이 적다. 졸업생 숫자로 보면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격차는 더 벌어진다. 하지만 자연과학계열 노벨상 수상자에 관한 한 교토대는 도쿄대를 5대 2로 한참 앞질러 가고 있다. “수도인 도쿄에서 떨어져 있어 국가 분위기와 상관없이 학문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됐다는 점과, 자유를 중시하는 학풍이 노벨상의 비결이라면 비결인 것 같다.”는 것이 교토대 기초물리학연구소 사사키 미사오(우주물리학) 교수의 말이다. 오이케 가즈오 교토대 총장과 석·박사 과정 학생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오이케 총장은 “자유로운 학풍과 산책하기 좋은 지형, 학문의 사회적 공헌을 중시하는 전통”을 ‘노벨상의 비결’로 꼽았다. 박사과정(우주물리학)의 히키다 와타루는 “어찌 보면 방치라는 느낌이 들 만큼 학생 개인의 자유에 맡겨두지만 책임은 철저하게 묻는다.”고 말했다. 대학원생들의 경우에도 지도교수가 논문 방향을 제시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자유와 학문의 사회 공헌을 강조하는 이같은 정신은 유카와 교수의 일본인 최초 노벨상 수상을 기념,1952년 교토대에 설립된 기초물리학연구소(유카와연구소)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초대 연구소장을 지낸 유카와 교수는 연구자들이 경제 문제를 걱정하지 않고 연구에 매진할 수 있게 지원하는 기관으로 만들 것을 강조했다고 한다. ●일본 물리학의 중심, 유카와연구소 유카와연구소의 특징은 교토대 외부의 연구자들에게 열린 공간이라는 점이다. 현재 연구소의 박사후과정(PostDoc) 23명의 과반수가 교토대 졸업생이 아니며 그 중 6명은 외국대학 출신 이방인이다.3∼4개월가량 머무는 방문연구원은 현재 16명으로 그 중 2명만이 일본 학자들이다. 이렇게 일본 각지와 외국에서 모인 물리학자들은 분야별로 우주, 소립자, 물성(物性), 원자핵 등 4개로 나뉘어 연구한다. 연구소측은 서로 다른 분야의 학자들을 같은 연구실에 배정, 분야간 교류가 쉽도록 배려하고 있다. ●서로 다른 분야 한 연구실 배정 교류 유도 오사카대에서 핵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박사후과정으로 유카와연구소에서 공부하고 있는 다카하시 도루는 “서로 다른 전공의 학자 4명과 같은 연구실에서 공부하기 때문에 사고의 폭을 넓힐 수 있다.”면서 “유카와연구소는 교토대 내에서도 특별한 자유가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유카와연구소에는 일본의 물리학자들이 수시로 모여든다. 물리학계의 사랑방인 셈이다. 기자가 찾은 날에도 인근 나고야대와 오사카대 등에서 온 학자들이 연구소에서 동료 학자들과 전공 관련 논의를 하고 있었다. 오사카대 박사후과정(우주물리학)에 있는 사고 노리치카는 “세미나와 같은 특별한 행사가 없어도 전국에서 관련 분야 학자들이 찾아와 1주일씩 머물며 논의하다 가기도 한다.”며 연구소를 찾은 이유를 설명했다. 일본의 유력한 차기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로 손꼽히는 물리학자 2명도 외부에서 유카와연구소를 찾아왔던 학자들이다. 교토산업대 이학부 마스카와 도시에 교수와 쓰쿠바 고에너지가속기연구기구 소립자원자핵연구소 고바야시 마코토 교수는 1960년대 유카와연구소에서 만나 공동 연구를 시작했다. 두 학자는 이어 73년 2월 연구소에서 ‘고바야시·마스카와 이론’이라는 소립자물리학 이론을 학계에 발표했고 노벨상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해 노벨상 발표일에도 두 사람의 연구실과 집 앞에는 기자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국비지원 중단… ‘기초학문 중시´ 풍토 흔들 하지만 현재 교토대와 유카와연구소는 법인화 후폭풍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지난해 4월 정부가 국립대 법인화를 선언하고 국비지원을 중단하자 학문의 사회 공헌을 강조하며 기초학문을 중시하는 전통을 이어가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오이케 총장은 “노벨상을 받은 유카와 교수는 ‘대학마저 기초학문을 등한시하면 결코 안된다.’고 강조했다.”면서 “이런 교토대의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어떻게든 경제적 지원을 하려고 한다.”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사키 교수는 “생산성을 중시하는 것은 세계적인 경향”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없었다면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을 이용하는 자동차 네비게이션(자동항법장치)은 존재할 수 없었다.”며 기초학문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촉구했다. surono@seoul.co.kr ■ 오이케 총장이 말하는 ‘유연한 학풍’ |교토 특별취재팀| “자네 아직도 교토대에 있나? 그러니까 노벨상을 못 받는 것 아닌가. 하고 싶은 연구는 찾아다니면서 해야지.” 허연 수염에 백발이 인상적인 오이케 가즈오 교토대 총장. 올해 예순다섯인 그는 교토대가 노벨상의 산실이 된 비결을 묻자 1987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대학 친구이자 현재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인 도네가와 스스무 박사의 일화를 소개했다. 지난 59년 교토대에 입학한 오이케 총장과 도네가와 교수는 1학년 때 같은 학부 같은 반이었다. “(1학년을 마친 뒤) 저는 지구물리학으로 전공을 결정했고 그 사람은 화학과로 갔습니다. 그런데 화학과로 간 사람이 생물학 연구에 푹 빠져 4학년이 됐는데도 졸업 논문도 안 쓰고 이학부에 가서 바이러스 연구를 했지 뭡니까. 논문을 제출하지 않으면 졸업을 할 수 없었지만 학교에서는 그의 학구열을 높이 평가해 졸업을 시켜줬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그 친구가 미국과 스위스로 가서 연구를 할 수 있었던 건 교토대의 자유롭고 유연한 학풍 덕분이기도 했지요.”지난해 벳푸에서 열린 동창회에서 만난 도네가와 교수는 그에게 “자넨 교토대에만 있으니까 노벨상을 못 받는 거야.”라며 농담을 건넸다고 한다. 오이케 총장은 교토대 출신으로 지난 81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후쿠이 겐이치 교수가 밝힌 ‘노벨상을 받게 해준 두가지 습관’도 소개했다. 후쿠이 교수가 소개한 습관은 ‘아침에 눈을 떴을 때나 산책하면서 드는 생각들을 메모하라.’는 것과 ‘사색하기 좋은, 경사가 약간 있는 곳을 걸어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오이케 총장은 후쿠이 교수가 걸었다는 ‘철학의 길’이란 이름의 교토대 산책로를 언급하면서 “교토가 지형적으로 동쪽이 조금 높아 산책하기에 좋은 환경이라는 점도 노벨상 수상에 기여했다.”며 지구물리학자다운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그는 지난 72년 교토대에서 지구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교수와 부총장 등을 거쳐 2년 전 총장에 취임했다. 그는 역대 노벨상 수상자들의 업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기초학문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노벨상 수상은 사람들에게 기초학문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교토대가 올해부터 중학생과 고등학생 대상 특별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것도 기초학문에 대한 중·고교생의 관심을 높이기 위해서다. 오는 9월부터 실시할 계획인 ‘주니어캠퍼스프로그램’은 일요일마다 교토대 교수들이 중학생들에게 기초학문을 강의하는 프로그램이다. 또 오사카대와 도쿄공대 등 5개 대학과 함께 공동으로 올해 내에 시작할 계획인 ‘오픈코스웨어(OCW·강의정보공개)’는 고등학생 대상 웹사이트 무료 공개강의다. 이 역시 기초학문 중심이다. 오이케 총장은 “노벨상의 비결이라고 한다면 자유와 여유를 강조하는 교토대의 연구 풍토와 사회에 대한 공헌을 강조하는 학풍이 아닐까 싶다.”는 말로 인터뷰를 끝맺었다. surono@seoul.co.kr ●특별취재팀 한종태 국제부장(팀장), 황성기 사회부장, 이춘규 도쿄특파원, 주병철(경제부)·손원천·이언탁(사진부)차장, 안미현(산업부)·김상연(정치부)·황장석(국제부)·유지혜(사회부)·정연호(사진부)기자
  • 체리나무/클로드 마르탱게 글

    백발의 할아버지와,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모두 궁금해 할 꼬마 손자가 이야기를 나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뭐든지 다 알지요?” “얘야, 나는 나이가 들수록 아는 것이 점점 없어진다는 느낌이 든단다.” “말도 안 돼요!” “난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걸.” 인생이란 무엇을까. 이 거창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소담스러운 체리나무에 기대어 찾아내는 그림동화가 서가에 새로 꽂혔다. 스위스 작가 클로드 마르탱게가 쓴 ‘체리나무’(알폰소 루아노 그림, 이진경 옮김, 달리 펴냄)는 철부지 독자를 부쩍 철들게 만들어줄 철학동화이다. 사물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꼬마 주인공은 할아버지에게서 듣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다.“할아버지가 나만 한 아이였을 때보다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이 더 많은 건 맞지요?” 나이가 들수록 아는 것을 자꾸 잃어버린다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는 꼬마. 할아버지는 손자의 손을 이끌고 가만히 정원으로 나간다. 한여름 햇볕에 주렁주렁 열매를 매달고 선 체리나무 그늘 아래 가만히 앉은 두 사람. 짧은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두 사람이 목소리를 높이는 일은 없다. 귀가 간지럽도록 나지막하게 소근소근. 그런데 신통하게도 메시지의 울림은 책장을 넘길수록 커진다. “이 아름드리 나무도 처음부터 큰 나무는 아니었다.”며, 씨앗 하나가 해마다 쑥쑥 자라 잎이 무성해지고 하얀꽃을 피우고 마침내 검붉은 열매를 맺는다는 생의 섭리를 일러주시는 할아버지. 탐스러운 흰 꽃송이를 매단 체리나무 앞에서 조용히 팔짱을 낀 할아버지가 “내가 살아오면서 배운 것은 체리나무 잎사귀, 내가 네 할머니에게 했던 다정한 말들은 꽃”이라고 말을 이어가는 대목 즈음. 웬일일까, 가슴 한편이 뭉클해지고 마는 것은. 그렇다면 빨갛게 익는 체리 열매는 무엇일까.“분명히 존재하는 것이지만, 익기 전에는 아무 쓸모없는 것”이라고 뚱겨주는 할아버지의 깊은 뜻을 아이는 넘겨짚을 수 있을까. 어린 독자들도 그 뜻을 헤아리기가 당장은 쉽지 않을 것 같다. 인생의 섭리와 질서를 체리나무에 빗대어 귀띔하던 할아버지는,‘인식의 세계’를 익어야 제 구실을 하는 열매로 은유한 셈이다. 책 속의 주인공 눈빛에 고민이 그득해 보인다. 독자들도 따라 생각이 많아질 것 같다. 거듭거듭 읽을수록 머릿속에 생각의 켜가 쌓일, 웅숭깊은 책이다. 초등생.8500원.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재계 인사이드] 구본무회장 ‘못말리는 대학생사랑’

    [재계 인사이드] 구본무회장 ‘못말리는 대학생사랑’

    23일 오전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 대강당에서 열린 ‘LG 글로벌 챌린저 발대식’.300여명의 대학생들이 구본무 LG 회장이 소개될 때마다 ‘괴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백발이 듬성듬성한 구 회장은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채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구 회장은 대학생들에게 임명장과 ‘지혜의 열쇠’를 직접 수여하고 챌린저 남녀 대표와 함께 대형 ‘챌린저 깃발’을 힘차게 휘둘렀다.LG글로벌 챌린저는 구 회장이 지난 95년 회장 취임과 함께 시작한 국내 최대 대학생 탐방프로그램으로 380개팀,1380명을 배출했다. ‘젊은 인재’에 대한 사랑이 남다른 구 회장은 챌린저 발대식과 탐방활동 결과를 평가하는 시상식 등 관련 행사에 11년째 단 한차례도 빠짐없이 참석하고 있다. 글로벌 챌린저 행사는 매년 말 새해 주요 일정을 세울 때 ‘연구개발 성과보고회’,‘전자부문 전략회의’ 등 그룹의 주요 일정과 같은 비중으로 최우선으로 반영된다. 구 회장은 또 매년 선발된 주제를 보고받으며 방대한 분량의 탐방활동 연구보고서도 꼼꼼히 읽고 있다. 지난해 90명이던 선발 인원을 120명으로 늘리고 대상·최우수상 수상자에게 LG 입사자격을 부여한 것도 구 회장의 지시였다. 구 회장은 격려사에서 “치열한 글로벌 경쟁에서 진정한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창의적인 사고를 통해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고 강인한 도전정신으로 미래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면서 “젊음만이 가질 수 있는 새로운 생각으로 과감히 도전해 나가는 젊은이가 LG가 원하는 인재”라고 강조했다. 발대식에는 구 회장을 비롯, 강유식 ㈜LG 부회장, 정병철 LG CNS 사장, 노기호 LG화학 사장, 조영환 LG마이크론 사장, 양흥준 LG생명과학 사장 등 LG의 최고경영진과 각 계열사의 인사담당 임원들이 총출동했다. 25대1의 경쟁을 뚫고 올해 LG 글로벌 챌린저로 선발된 30개팀 120명의 대학생들은 7∼8월 약 2주일에 걸쳐 ‘초소형 위성’,‘수소에너지’,‘나노의학’,‘중소기업의 경쟁력 강화전략’ 등을 주제로 미국, 유럽, 일본, 중국, 동남아 등 전 세계를 누비며 탐방활동을 벌인다. 대상과 최우수상 수상 6개팀 24명에게는 LG 입사 자격이 부여된다.LG계열사에는 현재 글로벌 챌린저 출신 20여명이 일하고 있다. 류길상기자 ukelvin@seoul.co.kr
  • [어떻게 지내세요] 위암·심장병 투병생활 ‘산장의 여인’ 권혜경씨

    ‘산장의 여인’이라는 추억의 노래가 있다.‘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단풍잎만 채곡채곡 떨어져 쌓여 있네/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몸/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나 홀로 재생의 길 찾으며 외로이 살아가네’ 누가 불렀을까. 권혜경(75)씨. 충북 청원군 남이면 외천리.‘산장의 여인’을 부른 업보 때문인지 노랫말처럼 아무도 찾는 이 없이 홀로 지내고 있었다. 수소문 끝에 권씨의 집을 찾았다. 가요평론가인 박성서씨와 ‘잘 있거라 나는 간다’로 시작되는 ‘대전부르스’의 안정애(70)씨가 동행했다. 병마와 싸운다는 권씨에게 잠시나마 위로를 하겠다는 마음에서였다. 서울에서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두시간여 지나 청원 톨케이트를 빠져나왔다. 남이 파출소에 들러 권씨의 집을 물었더니 “아, 산장의 여인 그 분요.”하면서 친절하게 안내해준다. 꼬불꼬불 시골길을 걸어 막다른 산골짜기 외딴집에 도착했다. 앞마당에는 5월의 풀이 무성했다.“권 선생님” 하면서 대문을 두들겼다. 두번째 소리를 듣고서야 “누구요?”하면서 문을 열었다. 백발이었다. 이윽고 “나 이렇게 살아, 어여 들어와.”라고 했다. 그러면서 사진을 찍지 말라고 몇번 당부했다. 집안에는 달마대사 그림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권씨는 “밤에는 부처와 예수가 찾아오지.”하면서 득도의 경지에 이른 사람처럼 툭 뱉었다. 권씨는 지난 1994년 5월에 이곳으로 이사왔다고 했다. 시장기를 느꼈는지 “동네 자장면집에 가자.”고 했다. 대문밖으로 나왔다.10여평의 마당 한 쪽에 움푹 팬 구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권씨는 “저긴 직접 내가 팠지, 나중에 누워야 할 곳이거든.”이라고 했다. 이어 중식당. 마침 비가 쏟아졌다.‘배갈’ 술잔이 오고 갔다. 옆에 앉은 안씨가 권씨에게 “언니는 그때 은행원 출신으로 가요계에 데뷔해 여러가지로 품격을 높였지.”라고 했다. 권씨는 “야, 그러지 마라. 요즘 젊은 사람들 우쭐대면 안돼, 함께 살면서 좋은 분위기 만들어야 해.”라고 했다. 권씨는 또 “나 많이 아팠거든, 하지만 이렇게 멀쩡해 걱정하지 마.”라는 말로 안심을 시켰다. 권씨는 강원도 삼척 출생. 세무서장을 지낸 부친을 따라 어릴 적 경기도 의정부에서 자랐다. 서울대 성악과를 나온 그녀는 조흥은행에 입사했다. 하지만 타고난 끼는 못 속였다.26세때 KBS라디오 전속가수 모집에 ‘대니보이’를 불러 뽑혔다. 이른바 오페라 가수에서 ‘딴따라’로 변신했던 것. 워낙 목소리가 좋아 작곡가 이재호씨가 ‘산장의 여인’을 권씨에게 선물했다. 이 때가 56년 6월. 이 노래를 부른 지 6일 만에 권씨는 일약 스타가 됐다. 이어 ‘호반의 벤치’ ‘동심초’ ‘물새 우는 해변’ 등으로 60년대를 주름잡았다. 노래인생 50년. 흔한 연애 한번도 하지 않았다. 두시간여 얘기를 나눴다. 권씨는 “공기 좋은 곳에 살다 보니 위암과 심장병도 다 나았어.”라고 거듭 말했다.‘산장의 여인’을 듣고 싶다고 했더니 기꺼이 목청을 돋운다.75세의 원로였지만 목소리는 20대였다. 박수소리가 끝나자 “서울 가거든 소식 전하지 말라.”고 했다. 청원 김문기자 km@seoul.co.kr
  • [길섶에서] 효도 관광/이용원 논설위원

    내년이면 어머니가 팔순이 되신다. 팔순 생신을 어떻게 치를지 형제들이 그동안 의논해 왔다. 그 계획 가운데 하나가 ‘성지 순례’를 보내드리는 거였다. 어머니는 신앙심이 두터운 분이어서,‘신앙의 동지’인 맏며느리와 함께 성지순례를 하는 게 소원이었다. 지난 어버이날 다 모인 자리에서 성지 순례를 다녀오시는 게 어떤지 여쭤 보았다. 의외로 “싫다.”는 말씀이 쉽사리 나왔다. 그동안 논의에 끼지 않은 여동생과 형수도 어머니의 성지 순례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강조했다. 연세가 높아 장기간 해외여행을 하시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것이다. 아들·사위들은, 어머니가 연배에 비해 활동적이신 것만 생각했지 그 연세의 활동력이 일정 기준을 넘어섰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앙코르 와트를 취재하던 때가 생각났다. 평원 지대인 앙코르 와트의 중심부에는 그리 높지 않은 언덕이 하나 있다. 그런데도 백발의 서양인 부부는 현지 어린이에게 팁을 주고 등을 밀게 하며 그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효도관광에도 때가 있다. 부모님께서 너무 연세가 드셔 해외여행을 가기 어렵게 되면 그도 후회로 남을 것이다. 이용원 논설위원 ywyi@seoul.co.kr
  • [방현석교수의 테마로 읽는 호찌민] ③ 호찌민의 친구들

    [방현석교수의 테마로 읽는 호찌민] ③ 호찌민의 친구들

    1931년, 호찌민은 영국 식민지였던 홍콩에서 체포됐다. 베트남의 빈 지방법원이 궐석재판으로 호찌민에게 이미 사형을 선고했기에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영국 식민지 당국이 그를 프랑스에 넘기지 않고 추방조치만 취해도 호찌민은 대기 중인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총독부로 넘어가게 되어 있었다. 일단 인도차이나 총독부 손에 넘어가면 살아남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때 호찌민에게 행운의 밧줄을 던진 사람은 영국인 변호사 프랭크 로스비였다. 변론을 맡은 그는 호찌민을 빅토리아 감옥에서 빼내 보원로드 병원으로 옮겼다. 호찌민이 병원에서 결핵으로 사망했다는 소문을 퍼뜨린 다음, 영국 식민지 당국과 협상을 통해 호찌민이 싱가포르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수완을 발휘한 것도 로스비였다. 그러나 싱가포르에 도착한 호찌민은 세관 관리들에 의해 체포되어 곧바로 홍콩으로 되돌려 보내졌다. 프랑스의 정보망을 따돌리고 호찌민을 탈출시키기 위해 이번에는 로스비의 부인까지 나섰다. 그녀는 친구인 라벤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홍콩 부총독의 부인으로 시인이기도 했던 라벤스는 지적이고 당당하며, 예의바른 식민지 청년에게 깊은 호감을 느꼈다. 호찌민이 영국 당국자의 호위를 받으며 몰래 상하이로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은 로스비와 라벤스 덕분이었다. 이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그러나 우연한 행운이 아니었다. 호찌민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강한 매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적들조차도 그를 직접 겪었던 사람은 거의 예외 없이 그의 옹호자가 되었다.1945년 베트민의 근거지 떤자오에서 호찌민과 함께 지냈던 미국 공군 필런 중위는 훗날 호찌민을 아주 ‘온화하고 착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군 정보관으로 인도차이나에서 일했던 장 라쿠튀는 ‘이 시대의 혁명가로서 이 정도 강한 인내로, 감히 힘의 질서에 도전할 수 있었던 사람이 달리 있었느냐.’고 되물었다. 1955년부터 1963년까지 호찌민을 수행하며 기록영화를 찍었던 안선(An Son) 감독은 1957년 호찌민의 해외순방 시절을 잊지 못한다.11개국을 연쇄방문 중이던 호찌민이 어느 날 아침 수행하고 있던 일행들에게 어려운 일이 없느냐고 물었다. 모두 없다고 대답했는데 26세로 막내였던 안선이 당돌하게 손을 들었다. “아저씨가 너무 빨리 걸어서 찍기가 너무 힘듭니다.” 호찌민은 유난히 걸음이 빨랐다. 더구나 안선은 좋은 그림을 얻기 위해 덩치가 큰 외국 기자들과 몸싸움을 벌이며 뛰어야 했다. “신문 기자들은 수첩 하나, 사진 기자들은 사진기 한 대만 들고 다니지만 전 카메라에 녹음기, 배터리까지 하면 10㎏을 넘게 메고 뛰어야 합니다.” 다른 수행원들이 모두 나무라는 눈길로 안선을 흘겨보고 호찌민의 눈치를 살폈다. 안선도 아차 싶었는데 정작 호찌민은 환하게 웃으며 알았다고 했다. 그날 호찌민은 자주 안선의 위치를 확인하고 걸음을 늦추어 주었다. 그래도 쉬지 않고 매일 밤 11시까지 계속되는 일정은 안선을 녹초로 만들었다.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죠. 그런데 잠결에 누군가 이불을 덮어주는 것이 느껴지는 거예요. 잠결에 얼핏 눈을 뜬 저는 깜짝 놀랐어요.” 벌떡 일어나려는 안선의 어깨를 호찌민은 지그시 눌렀다. 그리고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 덮어주고는 가만히 손을 흔들며 방을 나갔다. “정작 나는 그리고 나서 한숨도 자지 못했어요. 나는 일행 중에서 가장 어린, 아무 배경도 없는 촬영기사, 그것도 남부에서 올라온 사람일 뿐이었어요. 밤새 생각해보았는데 친아버지도 내게 그래 준 적이 없었어요.” 안선이 결혼해 아이를 얻은 다음이었다. 라오스국왕이 베트남을 방문해서 환영 연회가 열렸다. 연회가 끝난 다음 촬영장비를 챙기고 있는데 배웅을 나갔던 호찌민이 되돌아왔다. 그리고는 테이블 위에 남아 있던 사탕을 집어서 그의 주머니에 슬그머니 넣어주었다. 안선이 돌아보자 호찌민은 빙긋이 웃었다. “‘깜 험’ 가져다 줘.” 호찌민은 안선의 3살 난 딸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지도자가 호 아저씨였어요. 아저씨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 누구나 이런 비슷한 기억을 가지고 있어요. 내가 죽기 전에는 내 심장 속에서 아저씨를 빼낼 수 없을 거예요.” 올해 일흔 넷의 백발 노인이 되었는데도 호찌민을 회상하는 안선의 상기된 얼굴은 소년처럼 해맑았다. 호찌민 주변의 인물들을 만나면서 가장 의외였던 것은 혁명 운동의 전 기간을 통해서 호찌민이 다수파였던 적이 별로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인맥과 세력을 형성해서 정치를 했던 지도자가 아니었다. 권력을 앞세워 인맥을 구축하고 명분을 내세워 다수파가 되려고 하지 않은 드문 정치가가 호찌민이었다. 그렇다고 호찌민이 카리스마가 없는 지도자는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그는 아주 강력한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였고, 그의 곁에 포진한 매우 충성스럽고 유능한 인물들에 의해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훼손되지 않고 지켜질 수 있었다. 호찌민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호위하며 베트남을 이끌어온 사람들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셋 있다. 쯩 찐과 팜 반 동, 보 응우옌 잡이 그들이다. 쯩 찐은 1941년 호찌민이 베트남에 돌아와 주재한 제8차 당 전체회의에서 총서기장을 맡은 인물이다. 호찌민은 그 자리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정중하게 사양하고 쯩 진에게 그 자리가 돌아가도록 했다.1920년대에 혁명청년회에 가담해 일찍 감옥생활을 한 그는 사교적이지 않았지만 원칙에 아주 충실한 사람이었다. 팜 반 동은 행정과 재정에 관한 능력이 탁월한 인물로 호찌민이 주석과 겸직하던 총리 자리를 넘겨주었다. 그는 베트남 정부를 수립하고 체계를 잡아가는 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특히 그의 ‘청렴’은 호찌민 정권의 위신을 높이고 대중의 신뢰를 얻는 데 기여했다. 보 응우옌 잡은 호찌민의 진영의 가장 출중한 군사 전략가였다.1944년 12월22일,34명의 대원으로 ‘베트남해방무장선전대’를 창설한 그는 1975년 사이공 함락작전을 성공시킬 때까지 무려 30년간의 저항 전쟁을 총지휘했다. 이 세 사람과 호찌민의 관계를 베트남 사람들은 ‘한 다리로 서 있는 학의 세 발가락’이라고 불렀다. 학이 베트남이라면 그 학을 받치고 선 한 다리는 호찌민이다. 그리고 그 다리를 견고하게 지탱하고 있는 세 발가락이 쯩 찐과 팜 반 동, 보 응우옌 잡이다. 그 중에서도 보 응우옌 잡은 호찌민의 가장 충실한 동지이자 제자였다.1940년 신혼이었던 잡은 호찌민의 호출을 받고 아내와 태어난 지 몇 달 되지 않은 첫 딸을 남겨두고 중국으로 갔다. 그가 떠난 다음 아내 우옌 티 꽝 따이는 프랑스 당국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아내의 언니인, 우옌 티 민 카이도 사이공의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형을 당했다. 잡의 아버지도 훼에서 프랑스군에 체포되어 이빨이 다 뽑히는 고문을 당한 끝에 죽었다. 호찌민은 악명 높은 꼰다오 감옥에서 갓 출감한 팜 반 동과 함께 쿤밍으로 온 잡에게 옌안으로 가서 군사과학을 공부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여행허가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다.1940년 6월22일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자 호찌민은 두 사람에게 베트남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우리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고국으로 돌아가서 이 상황을 이용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군사학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베트남으로 돌아와 무장투쟁의 책임자가 된 잡의 활약은 눈부신 것이었다.34명의 대원으로 베트남해방무장선전대를 창설한 그는 이틀만에 프랑스군 초소를 공격하여 완승을 거두었다. 그 공격을 통해 무장선전대는 프랑스군의 무기로 무장하고 다음 공격에 나서, 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잡은 군대를 눈덩이처럼 불리며 북부 국경지대에 해방구를 확보해나갔다. 프랑스를 내쫓고 베트남을 삼킨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을 선언한 이튿날인 1945년 8월16일, 잡은 5000명으로 늘어난 해방군을 이끌고 하노이를 향해 진격했다. 하노이를 접수하고 1954년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를 궤멸시키면서 잡은 세계적인 전략가로 명성을 얻었다. 군사전문가도 아닌, 일개 역사교사 출신에 불과한 잡에게 군대를 맡긴 이유를 묻는 외국기자들에게 호찌민은 대답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졸업장이나 증명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실재일 뿐이다.” 그래도 군단급 병력도 없는데 대장 계급은 지나치지 않으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호찌민은 명쾌하게 대답했다. “우리 베트남에서는 소장과 싸워 이기면 소장을 주고, 중장과 싸워 이기면 중장을 준다. 웨스트모어랜드 장군도 대장 아니었나. 이긴 잡도 당연히 대장이다.” 잡이 진정한 호찌민의 제자라는 사실은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에서가 아니라 전술 변경 과정에서 확인됐다. 잡이 디엔비엔푸 전선에 간 것은 전투개시가 임박해서였다. 전선을 직접 확인한 잡은 ‘조기공격, 신속승리’ 전술이 중대한 오류임을 금방 발견했다. 프랑스군의 화력, 장비가 베트남을 압도하고 있었고, 포병과 공군까지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격개시는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고, 병사들은 결사항전의 결의로 불타고 있었다. 작전을 연기할 경우 최고조로 끌어올려 놓은 병사들의 사기가 땅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었고 또 우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잡은 중국 군사고문이 지지하는 ‘조기공격, 신속승리’ 전술을 ‘완벽한 준비, 완전한 승리’ 전술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반발이 없을 수 없었다. 잡은 사령관이었지만 무조건 명령하지 않고 토론에 붙였다. 토론에서는 언제나 선명한 명분이 힘을 발휘한다. 잡은 인내심을 가지고 반대의견을 설득하고 공격을 연기했다. 그런 다음 병력을 대거 충원하고, 야포를 맨손으로 산꼭대기까지 끌어올렸다. 이 ‘조기공격, 신속승리’ 작전수립에 참여했던 32사단장 레쫑똔은 만약 그 때 잡이 와서 전술 변경을 결단하지 않았으면 베트남은 결코 프랑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고백했다. 전선의 정치위원이던 팜 응옥 목의 의견도 다르지 않았다. “잡이 일단 멈추고 준비하자고 말했을 때 나는 옷을 벗어던지고 싶을 만큼 속으로 기뻤다.‘조기공격, 신속승리’ 전술에 따르면 자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겁쟁이로 평가받을까봐 입을 열지 못했다. 아무도 하지 못하는 말을 잡이 했다.” 보 응우옌 잡은 디엔비엔푸의 전술 변경이 자신의 ‘지휘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고 최근에야 밝혔다. 명분 때문에 진실을 외면하고, 개인의 영예를 위해 인민을 희생시키지 않는 호찌민의 노선을 그는 언제나 견지했다. 호찌민이 운명한 다음 살아있는 지도자들 중에서 베트남인의 가장 큰 존경을 받는 그는 지난 4월30일에 열린 승전30주년 기념행사에서도 직접 연설을 하고, 전쟁 희생자들을 챙겼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자신의 스승이자 동지인 호찌민을 가리려고 하지 않았다.1975년 4월30일, 사이공의 대통령궁을 접수하고 가장 먼저 잠든 호찌민에게 찾아가 그 사실을 보고했던 잡. 자신의 공적에 대한 질문을 받은 그의 대답은 올해도 변함이 없다. “나는 호 아저씨의 노선과 방침을 직접 적용하고 실행해온 지휘관이었을 뿐이다.” 1983년 그가 ‘국가출산계획위원회’ 위원장에 내정됐을 때 거절할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 일본과 프랑스, 미국, 중국과 싸워 베트남을 지킨 전쟁영웅에게 그 자리는 모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태연히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받아들였고, 지금도 그것에 대해 말이 없다. 베트남이 지금까지 권력의 암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잡과 같은 호찌민의 사람들이 호찌민 정신을 자신의 삶으로서 지켜내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방현석 교수 bang80@jowoo.co.kr ●자료 사진을 협조해주신 주한베트남대사관과 베트남통신사(VNA)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애써주신 베트남통신사 부 주이 흥 서울지국장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마주 달리는 北美…예상되는 4대 시나리오

    마주 달리는 北美…예상되는 4대 시나리오

    |워싱턴 이도운특파원|북한이 함경북도 길주에서 지하 핵폭발 실험을 준비 중이라는 뉴욕타임스 보도가 나오는 등 위기 상황이 고조되면서 북핵 문제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지난 2002년 말 북핵 위기가 재현된 이후 미국의 각종 연구소와 전문가들이 제시한 북핵 시나리오를 보면 향후 진행 방향을 어느 정도 예측해 볼 수 있다. 물론 대부분의 시나리오는 최선(외교적 해결)부터 최악(전쟁)의 상황을 모두 나열하고 있기 때문에 상반되거나 모순된 예측도 담고 있다. 그러나 시나리오가 제시한 큰 흐름에서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북한의 핵 실험이나 북·미간 무력충돌 가능성 등을 짚어볼 수 있다. 또 지금까지의 북핵 위기 상황도 대부분이 기존의 시나리오 내에서 진행되고 있다. ●“북한은 핵 실험을 할 것이다” 미국기업연구소(AEI)의 니컬러스 에버스타트 선임연구원은 지난해 아시아정책연구소(NBR)의 특별 연구과제로 발표한 ‘6개의 북핵 시나리오’에서 북한의 핵 실험을 하나의 가정으로 제시했다. 에버스타트 연구원은 북한이 지하 핵 실험에 성공할 경우 ▲한국 정부는 그동안의 대북 유화정책 실패로 국민의 불신에 직면할 것이며 ▲북한 핵 실험에 대한 대응 조치를 놓고 한·미간에 갈등이 생겨 동맹이 붕괴될 가능성이 있다고 예측했다. 또 주변국들은 북한의 비핵화와 정권교체를 위해 봉쇄와 고립정책을 협력적으로 추진할 것으로 에버스타트는 전망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의 동아시아 책임자를 지낸 아서 브라운 위기관리그룹(CRG) 선임 부회장은 북한이 1년 안에 동굴이나 광산 갱도에서 핵 실험을 한 뒤 이를 발표할 가능성이 크다고 예측했다. 브라운 부회장은 주요 기업 고객들을 상대로 이같은 내용의 북한 핵 시나리오를 브리핑했다고 워싱턴포스트가 전했다. 브라운은 핵 실험장에서 새어 나온 소량의 방사능 낙진이 일본쪽으로 흘러가면 “서울과 도쿄의 금융시장이 요동을 치고, 한국내 외국계 기업들은 철수나 사업 축소를 저울질하게 될 것이며, 미국은 대북 봉쇄조치를 취할지 아니면 다른 조치를 취할지를 놓고 논쟁을 벌이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과 북한, 서로 선제공격한다? 에버스타트 연구원은 6개의 시나리오에서 미국과 북한 모두 상대를 선제공격할 가능성이 있다고 예측했다. 미국의 대북 선제공격은 북한이 작은 핵 장비를 국제 테러단체에 비밀리에 판매하기로 했다는 신뢰성 높은 정보를 수집하면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고 에버스타트는 가정했다. 그는 미국이 공격을 개시하기 불과 몇분 전에야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과 일본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공격사실을 통보할 것으로 예측했다. 이어 미군은 핵 장비를 실은 선박과 항구를 파괴하고, 북한은 서울과 주한·주일 미군기지에 보복포격을 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에버스타트는 한국 정부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심지어는 제대로 알리지도 않고 감행된 미국의 대북공격은 한·미 동맹의 종결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으로 지적했다. 또 미·일 동맹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면 미국은 고립무원의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본의 교도통신은 미국이 북한과 이란 등 이른바 불량국과 테러조직이 ▲미국이나 동맹국에 대량살상 무기를 사용하거나 사용을 계획할 때 ▲생물무기 공격을 기도할 때 ▲대량살상 무기가 저장된 지하거점을 공격할 때 선제 핵 공격이 가능하다는 방침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최신 미군 문서에서 확인했다고 지난 1일 보도했다. 반면 북한이 선제공격에 나설 것이라는 시나리오도 적지 않다. 에버스타트 연구원은 북한이 “영변이 미군의 공격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서울의 용산 미8군 기지에 수백발의 포탄을 집중 투하할 수 있다는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이에 대해 미국이 보복을 하면 한반도에서 전면적인 전쟁이 발생할 것으로 에버스타트는 예측했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비공식 대변인으로 알려진 김명철(일본 조·미평화센터 소장) 박사는 최근 저서에서 “미군이 선제공격을 독점하는 시기는 이미 지났다.”면서 “김정일은 미국이 대북 선제 핵 공격을 고려하는 징후가 보이면 미 본토에 대해 선제 핵공격을 가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협상과 현상유지 가능성도 에버스타트 연구원은 북핵 위기를 해결하는 최선의 시나리오로 ▲미국은 북한에 경제·외교·안보적 혜택이라는 대가를 제공하고 ▲북한은 핵무기를 신뢰할 수 있는 방식으로 영구히 제거하는 ‘윈·윈’ 방안을 제시했다. 몬테레이 국제연구소의 핵비확산센터는 지난 2003년 발표한 ‘북한의 핵 의도 평가’ 보고서에서 제시한 4개의 시나리오를 통해 북한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은 정권내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북한 내부의 문제 때문에 결정적인 대결이나 협상이 이뤄지지 못한 채 만성화된 위기 상황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한편 마르커스 놀란드 국제경제연구소(IIE)의 선임연구원은 지난해 발표한 저서 ‘김정일 이후의 한반도’에서 북한이 붕괴할 경우 남한이 부담해야 할 비용은 10년간 6000억달러(약 600조원)에 이른다고 밝혔다. dawn@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현대家 ⑤- 현대중공업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현대家 ⑤- 현대중공업

    #1982년 5월 19일 ‘기업인’ 정몽준씨에게 생애 최고의 날일 것 같다. 부친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이날 현대그룹 계열사 가운데 가장 덩치가 크고, 세계 최대의 조선업체인 현대중공업 사장에 그를 앉히는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이때가 그의 나이 31세. 현대그룹 후계구도에서 형들보다 한발 늦게 출발한 몽준씨가 가장 먼저 부친에게 인정받은 비결은 뭘까. 고 정 명예회장은 현대그룹 창립 25주년 행사에서 그 배경을 자세하게 풀어놓았다.“어떻게 보면 파격적이지만 길게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저서 ‘기업경영이념’을 읽어보면 우리나라의 어떤 젊은 경영진보다 확실히, 모든 것을 잘 분별해서 회사를 끌고 나갈 겁니다. 우리 아이들간에도 서열이 굉장히 낮기 때문에 가족회의를 열어 몽준 사장이 충분히 직책을 수행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결정을 했습니다.” 고 정 명예회장은 이에 앞서 몽준씨가 미국 MIT 석사학위 논문을 보완한 경영서적 ‘기업경영이념’ 서문을 읽고 “정말 잘 썼다.”며 “사장 자리에 앉아도 될 것 같다.”고 밝히기도 했다. 몽준씨는 훗날 가장 아끼는 그의 저서로 ‘기업경영이념’을 꼽으면서 “서문만 읽어도 충분하다.”고 곁들이기도 했다. 그가 이 책을 통해 부친에게 기업가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았던 점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2002년 12월 18일 ‘정치인’ 정몽준씨에게 생애 최악의 날일지 모른다. 그는 이날 민주당 노무현 대통령 후보와의 공조 파기를 선언, 사실상 ‘백의종군’의 첫 발을 내디뎠다. 정권의 공동 주인으로 향후 5년간 막강한 정치적 실세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스스로 마다한 셈이다. 이 때가 ‘하늘의 뜻을 알수 있다’는 지천명(知天命)을 갓 지난 나이(51)였다. ●아버지에게 바가지 씌운 아들 정몽준(54). 현대가(家)의 여섯번째 아들.5선의 중진 의원. 대한축구협회 회장. 자산규모 재계 9위(지난해·공기업 제외)인 현대중공업의 대주주(지분 10.80%). 국내 재벌가에서 정 의원만큼이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이도 드물다. 일각에서는 “잘난 집안에 태어나 순탄하게 성장한 대가”라고 폄훼하기도 하지만 그는 스스로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정 의원은 195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산에서 3년 가량 살다가 서울로 올라와 장충초등학교와 중앙중·고교를 거쳐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그의 초등학교 동기 동창이다. 그는 초·중학교 시절 놀기를 좋아하고, 장난이 심했다고 한다. 중학교 담임 선생이었던 임환씨는 “몽준이는 놀기를 좋아해 친구들과 수업을 빼먹고 야외로 놀러갔다가 종아리를 맞기도 했다.”면서 “전혀 부잣집 티를 내지 않았으며, 학교 도서관을 지을 때 시멘트 1만포대를 지원받은 뒤에야 비로소 아버지가 고 정 명예회장임을 알게 됐다.”고 술회했다. 정 의원의 학생시절 별명은 ‘꺼벙이’다. 큰 키에 소탈하고, 겸손하지만 우유부단하다는 뜻에서다. 그러나 부친한테는 다른 형제처럼 어려워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대하곤 했다. 부친에게 ‘바가지’ 씌운 일화 한 토막.1970년대 초반 어느 날. 정 의원은 아버지에게 한잔 쏘겠다며 명동 생맥주 골목으로 모시고 갔다. 고 정 명예회장은 오랜만에 접하는 생음악과 젊은이들의 웃음소리에 흥에 겨워했다. 자리가 파할 무렵, 정 의원은 아버지에게 “1차는 제가 샀으니,2차는 아버지가 사시라.”고 제안했다. 고 정 명예회장도 유쾌한 기분으로 흔쾌히 응했다.2차 행선지는 정 의원이 정한 강남의 한 술집. 그러나 2차가 끝나고 계산서를 받은 정 명예회장은 술값에 놀랐다. 먹은 것에 비해 족히 여섯배의 술값이 청구됐기 때문. 그렇다고 재벌 회장이 술값을 놓고 시비를 걸기도 뭐했지만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하는 성격 탓에 종업원에게 물었다. 돌아온 답은 “아드님이 전에 드셨던 외상 술값까지 계산하라고 해서 그렇게 됐습니다.”“허허 이것 참….”고 정 명예회장은 아들에게 된통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 의원은 형제들 가운데 유일하게 서울대에 진학했다. 고 정 명예회장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울산으로 변형윤, 이현재 교수 등 당시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를 초청해 크게 ‘한턱’을 냈다. 고 정 명예회장은 “우리 몽준이가 혹시 사무착오로 합격한 것 아니냐.”고 농담을 하면서 우리 아들을 잘 지도해 달라고 수차례 부탁했다고 한다. 현대 고위 관계자가 밝힌 허물없는 부자관계를 엿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일화는 이렇다.“한번은 고 정 명예회장이 아들들과 골프를 치는데 티샷을 하고는 먼저 그냥 걸어갔습니다. 다른 아들들은 머뭇거리다 채를 들고 뒤따라 가는데 유독 정 의원만 얼른 공을 놓고 티샷을 했죠. 그러자 고 정 명예회장이 ‘저놈∼.’하면서도 싫지 않은 표정을 짓더라고요.” ●아내 자랑하는 ‘팔불출’ “나는 나의 아내가 고맙고, 때로는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친구들은 종종 내가 대통령 감이라기보다 내 아내가 ‘퍼스트 레이디’ 감이라고 웃으면서 이야기한다. 아내는 바쁜 나의 생활을 잘 이해해 주고, 조용히 내조를 하는 스타일이다. 아내는 얼굴이 알려지는 것을 싫어한다. 밖으로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정 의원이 그의 저서 ‘꿈은 이루어진다’에서 밝힌 부인 김영명(49)씨에 대한 평이다. 정 의원은 1978년 여름 넷째 형수(이행자·고 정몽우 현대알루미늄 회장 부인)의 중매로 영명씨를 미국에서 만났다. 당시 두 사람의 첫 인상은 이랬다. 영명씨는 “우선 키(정몽준 182㎝·김영명 174㎝)가 커서 좋았어요. 제 키가 큰 편이라 어머니가 ‘너는 키 큰 신랑감이 없으면 시집도 못 갈거다.’고 곧잘 농담을 하곤 했어요. 첫 인상은 나이 차이가 다섯살이나 나서 그런지 듬직했어요. 믿고 의지할 수 있겠더라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재벌가 사람답지 않게 소탈한 것도 좋았고요.” 정 의원은 “약속 장소에 나갔는 데 키 큰 여자들이 쭉 지나가기에 미국 사람들인가 했습니다. 그런데 모두 나에게 오더라고요.”고 당시 상황을 이렇게 술회했다. 이들은 틈틈히 테니스를 치며 1년 가량 연애끝에 잠시 귀국해 서울 정동교회에서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영명씨는 김동조 전 외무부장관의 2남4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부친의 외교관 활동 덕분에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17년간 일본과 미국에서 살았다. 미국 웨슬리대학에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했고, 부전공으로 미술사를 공부했다. 웨슬리대학은 힐러리 클린턴 미국 상원의원과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이 나온 전통의 명문 대학이다. 영명씨는 외교관인 부친을 닮아 사교성이 뛰어나다.‘88 서울올림픽’ 유치전에서는 고 정 명예회장을 현장에서 보좌했고,1992년 대선 때는 변중석 여사를 대신해 시아버지의 파트너 역할을 했다.‘2002 월드컵’ 유치 과정에서는 국제축구연맹(FIFA) 집행위원 부인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행사장에서는 미소와 화술로 친분을 쌓기도 했다.‘미스 스마일월드컵’이라는 애칭은 이 때 얻었다. 이 때문인지 정 의원의 부인 자랑은 유별나다.‘김영명이 없으면 오늘의 정몽준도 없다.’는 우스갯말이 떠돌 정도다. 그의 저서 ‘꿈은 이루어진다’에서 계속되는 자랑 하나.“아내는 나보다 영어를 훨씬 잘한다. 유머를 곁들인 자연스러운 영어는 외국에서 처음 만나는 손님들과 이야기를 할 때 곧잘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주곤 한다. 그동안 4남매를 키우느라 정신이 없었던 아내는 아이들이 크자, 뜻있는 분들과 함께 우리의 ‘옛’것을 ‘올’바로 알자라는 의미를 가진 ‘예올회’를 만들어 문화재 보존사업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영명씨가 밝힌 애처가 해프닝은 이렇다.“첫 아이를 가졌을 때였어요. 입덧이 심했던 제가 걱정스러웠던지 남편은 며느리들만 모인 자리에 와서는 제게 ‘밥 먹었니.’하고 묻는 거예요. 좀처럼 없는 일이라 모두들 눈이 휘둥그레졌고, 그 한마디 때문에 남편은 ‘애처가’라는 별명을 얻었죠. 그 꼬리표는 지금까지 따라 다닙니다.” 그도 신혼 초에 시아버지인 고 정 명예회장에게 혼이 났다고 한다.“철부지 며느리 시절, 저는 식사 중에도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데 불쑥 끼어들어 참견을 하곤 했어요. 아버님이 어느 날 저에게 ‘밥 먹을 때 말을 많이 안하는 게 좋은 거다.’며 조용히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어요.” 자녀는 2남2녀. 장남인 기선(23)씨는 연세대를 졸업하고, 올 초 아버지의 뒤를 이어 ROTC 장교로 임관했다. 장녀 남이(22)씨는 연세대를 휴학하고, 현재 미국 서던 캘리포니아 유니버시티에 유학 중이다. 차녀 선이(19)씨도 미국 디어필드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다. 막내 예선(9)군은 경기초등학교를 다니고 있다. 영명씨는 늦둥이인 막내 임신과 관련해 병원에서 무안당한 경험을 털어놓기도 했다.“임신해서 병원에 가면 의사가 초음파 검사를 하잖아요. 한번은 의사가 ‘아들이 없으세요. 왜 이렇게 애를 많이 낳으세요.’라고 물어 난감한 적이 있었어요.” 시중에는 예선이가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축구 예선전이 한창일 때 태어나서 이름을 예선이라고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 의원은 최근 ‘예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의미와 돌림자 ‘선’을 합쳐 예선으로 지었다고 밝혔다. ●정치인 정몽준 “내가 처음 국회의원이 되고자 한 것은 11대 국회의원 선거 때였고,1984년 12대 국회의원 선거 때도 출마하려고 했다. 그런데 전두환 전 대통령이 내가 나가면 여당 의원이 떨어진다고 나가지 말라고 했다. 결국 나는 그 선거에 출마하는 것을 단념해야 했다. 하지만 공적 서비스를 하기 위해 정치에 입문했다는 생각은 내가 지금까지 흔들림없이 지켜온 가장 기본적인 정치철학이다.”정 의원이 밝힌 정치 입문의 배경이다. 정 의원은 1988년 울산 동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 뒤, 지금은 5선의 중진 의원으로 확실한 입지를 구축했다. 한때는 2002년 한·일월드컵의 성공적인 개최를 기반으로 대통령 선거에 나서기도 했다. 정몽구 현대차 회장이 본 정치인 정 의원은 어떨까. 지난 대선기간 내내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던 정 회장도 ‘피’는 어쩔 수 없었던지 그 속내를 내보인 적이 있었다.“몽준 의원은 우리 형제들 가운데 제일 똑똑하고 잘 생겼다. 미국 MIT 대학원도 졸업하고, 월드컵도 성공적으로 잘 치렀다.” 그러나 정 회장은 이 발언 이후 정치권으로부터 호된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정치인 정 의원의 평판은 극과 극을 달린다. 일각에서는 직선적이고 엄격하다고 지적한다. 그를 보좌했던 비서관의 얘기다.“정 의원은 성격이 급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말을 함부로 하는 경향이 있다.”정 의원은 이에 대해 “지금까지 자신을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쪽에서는 합리적이고 매너가 깨끗하다는 평이다.“정 의원은 서구식 매너가 몸에 배어 있다. 직원들이 떠나는 차에 인사를 하면 ‘왜 차에다 대고 절을 하느냐. 하지 말라.’고 말린다. 또 비서를 시키지 않고 직접 자신이 동료 의원에게 전화를 한다.”며 다른 전직 비서관이 전했다. ●현대중공업의 핵심 브레인 민계식(63) 현대중공업 부회장은 가장 부지런한 CEO, 백발의 마라토너 CEO로 불린다. 아침 6시 출근, 새벽 2시 퇴근하는 일과를 20년째 이어오고 있다. 비서를 퇴근시키고 저녁 6시부터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새벽까지 사업구상이나 신제품 개발 계획에 열중한다. 그의 이런 노력은 국내외 학술지 및 학술대회에 150편의 논문을 발표토록 했으며,48건의 국내 및 국제특허를 보유토록 했다. 우주항공학 및 조선공학(석사), 해양공학(박사) 등을 넘나드는 그의 해박한 전문지식은 현대중공업의 연구개발(R&D) 부문을 업그레이드시켜 놓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민 부회장은 또 60대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는 건강을 과시하고 있다. 그의 최고기록은 2시간 23분 48초. 비록 20대 초반 시절에 일궈낸 기록이지만 지금도 2시간대의 기록을 내고 있다.42.195㎞의 완주기록도 100회를 넘었다. 유관홍(60) 현대중공업 사장은 그룹내에서 경영 합리화의 귀재로 통한다.1999년 침체에 빠진 현대중공업 건설장비부문의 사업본부장을 맡아 세계 각지를 직접 뛰는 영업활동을 전개, 직원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활력을 불어넣기도 했다. 그 결과 만성적자였던 건설장비 부문을 2001년 국내 시장의 40% 이상을 점유하는 국내 1위의 건설장비 업체로 탈바꿈시켰고, 중국시장 점유율 25%를 기록하는 중국 최대의 건설장비 공장으로 성장시켰다. 그의 이런 경영능력을 두고 지난해 6월 미국의 권위있는 경제주간지 ‘비즈니스위크’는 유 사장을 ‘기업회생 전문가’라고 평했다. 이연재(63) 현대삼호중공업 사장은 1976년 현대중공업 간부로 입사한 이래 30년간 조선과 해양플랜트의 해외영업 부문에서 일해 왔다.1999년 부도 위기에 처했던 옛 한라중공업을 현대중공업이 위탁경영하면서 대표이사로 선임돼 흐트러진 조직을 안정시켰다. 단기간에 70여척의 선박을 수주했으며, 중단된 사원 복지향상에도 노력을 기울여 사원아파트와 스포츠문화센터 등을 조성했다. 파산 직전까지 이르렀던 회사를 2001년부터 4년 연속 흑자경영을 실현하고 있다. 최길선(59) 현대미포조선 사장은 평사원으로 입사해 최고경영자에 올랐다. 최 사장은 설계·생산·기획 등의 업무를 수행하면서 조선 현장에서 33년을 보낸 최고의 조선전문 경영인이다.‘항상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원칙아래 내실을 강조한다. 최 사장은 올해 슬로건을 ‘창사 30주년, 새로운 도약의 해’로 선포하고, 선박 60척 생산체제 구축을 마련하는 등 제 2도약을 위한 전략 마련에 골몰하고 있다. golders@seoul.co.kr ■ 현대중공업 탄생 일화 ‘옥스퍼드 박사가 낳은 현대중공업’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평소에 즐겨 썼던 “이봐, 해봤어.”라는 말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보여준 곳이 현대중공업의 설립 신화다. 그야말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고 정 명예회장의 ‘원맨쇼’였다. 고 정 명예회장은 1971년 조선소 차관 도입을 위해 영국 런던의 바클레이즈 은행을 찾았다. 그러나 ‘듣도 보지도 못한 한국의 작은 회사가 언감생심 어딜 넘보는 것이냐.’는 바클레이즈 은행의 태도에 기가 질렸다. 그렇다고 포기 할 수는 없었다. 그가 기댄 곳은 당시 기술협조 계약을 맺은 영국의 A&P 애플도어 엔지니어링사. 그는 500원짜리 지폐로 애플도어사의 롱바톰 회장을 감동시켰다.“이것은 한국 지폐입니다. 여기 그려진 것이 거북선이죠. 한국은 이미 1500년대에 이런 철갑선을 만든 실적과 잠재력을 갖고 있습니다. 영국의 조선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게 1800년대이니 한국은 무려 300년이나 앞선 셈입니다.” 그는 롱바톰 회장의 도움으로 바클레이즈 은행 부총재를 만났다. 그러나 콧대 높은 영국 은행의 부총재를 설득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옥스퍼드 박사’ 일화는 여기서 나왔다. 고 정 명예회장은 ‘전공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임기응변으로 “어제 제가 이 사업계획서를 들고 옥스퍼드대학에 갔더니 한번 들쳐보고 바로 그 자리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주더군요.”라고 말했다. ‘옥스퍼드 유머’에 부총재는 껄껄 웃으며 “옥스퍼드대 경영학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도 이런 사업계획서는 못 만들거요. 당신은 그들보다 훨씬 더 훌륭합니다. 당신의 전공은 유머 같소. 우리 은행은 당신의 유머와 함께 이 사업계획서를 수출보증국으로 보내겠소.” 고 정 명예회장은 ‘거북선 지폐’와 ‘옥스퍼드 박사’로 바클레이즈 은행 벽을 넘었지만, 아직 영국 수출보증기구(ECGD) 총재의 보증을 받아야 하는 마지막 관문이 남았다. 그러나 이것도 울산의 초라한 백사장 사진 한장 들고 그리스 선사인 ‘선 엔터프라이즈’사의 리바노스 회장을 설득, 선박을 수주 계약함으로써 무사히 통과했다. 이로써 세계 조선 역사상 최초로 조선소 건설과 선박 건조가 동시에 진행하는 신화가 나오게 됐다. 고 정 명예회장과 리바노스 회장이 당시 맺은 인연은 지금도 대(代)를 이어 지속되고 있다. golders@seoul.co.kr ■ MJ 처가의 ‘화려한 혼맥’ 정몽준 의원의 처가인 고 김동조 전 외무장관의 가계도를 보면 한국 상류사회의 ‘족보’를 엿볼 수 있다. 슬하에 2남 4녀를 둔 고 김 장관과 송두만(83) 여사는 자식교육 뿐 아니라 혼사까지 성공한 케이스. 자녀 모두 외교관 출신인 부친의 영향으로 영어와 일어 등을 유창하게 구사하며, 외국의 명문대를 졸업했다. 특히 장녀인 영애(60)씨와 차녀인 영숙(59)씨는 일본 최고의 여성 사립명문인 세이신대학을 졸업했다. 장남인 대영(57)씨는 미국의 암허스트대학을 졸업했으며, 차남인 민영(51)씨는 펜실베이니아 와튼스쿨을 졸업한 뒤 컬럼비아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땄다. 자녀 가운데 재계 가문으로 시집간 이는 삼녀인 영자(55)씨와 막내인 영명(49)씨. 영자씨는 GS그룹의 허씨가인 허광수(59) 삼양인터내셔널 회장과 결혼했다. 허 회장의 형제로는 허남각(67) 삼양통상 회장과 허동수(62) GS칼텍스 회장이 있다. 또 허창수(57) GS그룹 회장과는 사촌간이다. 허 회장의 부친인 고 허정구 삼양통상 명예회장은 LG그룹 경영의 한 축을 맡았던 고 허준구 LG건설 명예회장의 맏형이다. 고 허 명예회장은 일찌감치 삼성물산의 창립멤버로 참여,LG 구씨가와 손잡은 고 허준구 명예회장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영명씨는 정몽준 의원과 1979년 결혼, 현대가의 일원이 됐다. 이로써 고 김 장관의 집안은 국내 대재벌인 삼성과 현대,LG,GS가와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 차녀인 영숙씨는 초대 해군참모총장과 국방부장관을 지낸 손원일 제독의 장남인 손명원(64)씨와 결혼했다. 손씨는 30대 초반에 ‘손컨설팅 엔지니어링’이라는 회사를 설립했으며 현대미포조선과 쌍용자동차, 맥슨전자에서 CEO(최고경영자)를 역임했다. 그는 현재 스카이웍스솔루션 코리아 고문이다. 장녀인 영애씨는 자수성가한 국제 금융계의 거물급 인사로 미국 모건스탠리의 부사장이다. 남편인 최융호(62)씨는 해양 관련 비즈니스를 하는 제너럴 마리타임 사장이다. 장남인 대영씨는 부친인 고 김 전 장관의 아호(海吾)를 딴 해오실업을 경영하고 있으며, 차남인 민영씨는 한국외국어대 무역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의 부인인 정다미(44)씨도 명지대 교수다. 김 전 장관의 집안은 또 언론계와도 각별하다. 손녀 사위들이 언론계에 몸담고 있다. 셋째 사위인 허 회장의 장녀인 유정(31)씨는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의 아들인 준오(31)씨와 결혼했다. 둘째 사위인 손 고문의 차녀인 정희(31)씨는 1999년 헤럴드미디어 사장인 홍정욱(35)씨와 화촉을 밝혔다. golders@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최광숙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儒林(316)-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儒林(316)-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비교적 늦은 나이인 21세 때 진사였던 허찬(許瓚)의 딸과 혼인하였던 것은 퇴계의 노모 박씨의 성화 때문이었다. 퇴계는 공부에 전념하느라 세상사에 관심이 없었는데, 박씨는 아들 퇴계가 빨리 혼인하여 후손을 잇는 것을 보고 싶어 하였으며, 또한 과거를 보아 벼슬길에 오를 것을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퇴계는 비록 6년 동안밖에 함께 살지 못하였으나 첫 아내 허씨를 사랑했던 것처럼 보인다. 지금도 퇴계의 첫 부인 허씨의 무덤은 의령에 보존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퇴계가 직접 쓴 ‘가례동천(嘉禮洞天)’이란 유필이 남아 있을 정도인 것이다. 퇴계는 아내 허씨가 죽은 후에도 장모 문씨 부인을 지극히 봉양하였다.‘하루에도 열두 번씩이나 백발이신 장모님 생각 때문에 한양 벼슬길을 향해 차마 발을 못 옮긴다.’라는 말을 문집 속에 남길 정도로 처가에 대한 상념이 지극하였다. 지금도 ‘가례동천’의 기념문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새겨져 있다. “…가례동천은 우리나라 성리학의 태두요, 동국부자(東國夫子)로 추앙 받고 있는 퇴계 이황 선생의 유묵 금속문이며, 유서 깊은 유허지이다. 가례동은 선생의 처가가 있는 곳이다. 문무사백들과 시문 강론으로 소요하시는 한편 후진양성에 전념하신 사적과 더불어 향당의 표준이 되고, 국가문화유적으로서 소중한 곳이다.” 이러한 퇴계의 마음은 손자가 장가갈 때 보낸 퇴계의 편지 속에 자세히 드러나고 있다. “부부는 남녀가 처음 만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친밀한 관계를 이룬다. 또 한편 가장 바르게 해야 하고, 가장 조심해야 하는 처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의 도가 부부에서 발단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모두 예와 존경함을 잊어 버리고 서로 버릇없이 칭하여 마침내 모욕하고 거만하고 인격을 멸시해 버린다. 이런 일은 서로 손님처럼 공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정을 바르게 다스리려면 처음부터 조심해야 한다.” 이 편지는 퇴계의 부부간의 근본이념을 요약한 가르침이다. 부부는 지극히 친밀하기 때문에 지극히 조심하고 정직해야 한다는 말은 부부 사이의 예절을 가리키는 말이고, 가정을 바로잡고자 하면 출발부터 조심해야 한다는 말은 근신이 치가의 법도임을 가리키는 말인 것이다. 그러나 손님처럼 공경하였던 첫 번째 부인 허씨는 퇴계의 나이 27세 때 병사해 버리고 만다. 아내가 죽은 후 퇴계는 향시에 응시하여 2위에 합격하고, 진사에도 합격하는 등 승승장구하였으나 그 후 3년 동안 줄곧 광부(曠夫)로 지냈다. 3년 후 퇴계는 권씨 부인과 재혼하였는데, 이 결혼은 불행한 비극의 시작이었다. 권씨 부인과 16년간의 결혼생활을 퇴계 자신도 ‘참으로 불행했었다.’고 고백하고 있음인 것이다. 이는 권씨 부인이 칠거지악을 일삼던 악처이기 때문이 아니라 정신이 맑지 않은 실성한 여인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어릴 적 충격으로 인해 미쳐 버린 여인이었던 것이다. 권씨 부인은 본래 신라 왕족의 후손이었다. 그런데 나말여초(羅末麗初), 안동을 지키던 김행(金行)이 후백제 왕 견훤에게 몰린 왕건을 패망의 순간에 도와 고려 건국을 튼튼히 하자 김행을 태사로 모시고 안동을 식읍으로 내렸다. 그리고 김행에게는 집권에 따라 판단을 잘하였다고 해서 권(權)씨를 성으로 쓰게 하는 사성개명(賜姓改名)을 내렸던 안동에서 대대로 살아온 명문가의 집안이었던 것이다.
  • [여담여담] 보상은 다음 순서다/구혜영 정치부 기자

    요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으로 치자면 서울 신문로 새문안교회 맞은편에 있는 ‘세안빌딩’건물이 으뜸일 것 같다. 이곳 8층에는 일제하 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가 있다. 평생 ‘과거사’의 한(恨)을 지니고 살아온 사람들이 이제야 빗장을 풀기 시작한 정부를 원망하며 이곳을 찾는다.“호적에 있는 이름과 집에서 부르던 이름이 다른데 어떡하냐.”,“접수번호는 받았지만 어디로 끌려가신지 모르는데….” 백발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많은 사연들을 두서없이, 눈물과 함께 쏟아냈다. 유족으로 보이는 한 60대 할머니가 눈에 띄었다. 할머니는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보낸 어린 시절만 해도 가슴 아픈데 돈 받을지 모르니까 여기저기서 연락온다.”며 담당자를 붙잡고 하소연을 했다. 아버지가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뒤 연락이 없자 외갓집 식구들이 나서서 어머니를 재혼시키자는 소리를 듣고 어머니가 도망갈까 봐 자기 전 몰래 어머니의 고쟁이에 끈을 묶어놨다는 할머니. 그러나 눈떠보니 끈만 풀어진 채 어머니는 없어지고 할머니는 고모집에서 쇠주걱으로 맞아가며 눈치꾸러기로 컸다고 한다. 다른 한 할머니도 내 얘기 좀 들어보라며 자리를 뜰 줄 몰랐다.30년 전 정부가 일제 피해 사망자들에게 준 30만원도 시댁에서 챙겨갔다며, 어린 자식 출생신고를 못해 학교에도 못 보냈다며 눈물을 흘렸다. 이제 정부가 나서서 일제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보상해줄 것처럼 알려지자 그 시절 친척들이, 시댁 식구들이 연락을 해온다는 것이다.“그래도 친척이 거기밖에 없어서…”라며 잊고 싶은 기억을 다시 떠올려야 하는 슬픔은 또 고스란히 할머니들의 몫이다. 상처받은 이들에게는 ‘보상’보다 더 급한 게 있지 않을까 싶다.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할머니가 손자손녀들을 데리고 와서 “이 분이 너희 조상”이라며 같이 향을 피우고, 영정 앞에서 수십년 동안 하지 못했던 얘기를 밤새도록 털어놓을 수 있는 추도·기념관이라도 좋다. 하루종일 살풀이춤을 출 수 있는 추모제를 마련하는 것은 또 어떨까. 가슴 밑바닥에 쌓인 상처를 달래는 너른 마당부터 마련해야 할 것 같다. 구혜영 정치부 기자 koohy@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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