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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두산 호랑이 공개후 관람객 3배 증가(은방울)

    ○…김영삼대통령의 중국방문때 기증받은 백두산호랑이가 서울대공원에서 일반에 공개된 이후 지난 1일부터 10일까지 공원관람객은 모두 6만5천8백56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2만7천7백82명의 2백37%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 1일 백두산호랑이가 일반에 공개된뒤 야행적인 백두산호랑이를 보고싶어하는 관람객을 위해 관람시간을 2시간 연장한데 따른것. 한편 서울대공원측은 15일 『백두산호랑이를 산림청과의 위탁관리협약에 따라 오는 11월30일까지만 사육전시하고 12월1일부로 이전사육 하도록 넘길 계획』이라고 밝혔다.
  • 민주당 계파별 단합나들이 부산/내년초 전당대회대비 집안단속 겨냥

    ◎주류­비주류 오늘 각각 마니산­중국행 민주당 각 계파의 움직임이 활발해 지고 있다.국회가 끝나기가 무섭게 모두들 짐을 싸들고 「단합」을 위한 여정에 나선다. 계파결속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 사람은 없지만 이를 부인하는 사람도 없다.멀게는 내년 초에 있을 전당대회를 겨냥한 각 계파의 집안단속이라는 점에서 이같은 움직임은 당안팎의 눈길을 끌고 있다. 비주류측이 7박8일 일정으로 15일 중국행 비행기에 오를 예정인 가운데 주류인 내외문제연구소 측도 이에 질세라 같은 날 강화도 마니산으로 산행을 떠난다. 김상현고문이 이끌고 있는 「민주대학」과 정대철고문이 이사장인 「통일시대준비위원회」가 주최하는 비주류측의 외유에는 현역의원 7명을 비롯,무려 2백명의 당관계자가 참가한다.두 고문과 신순범 박실 김종완 김말용 박정훈의원및 시·도지부와 지구당 위원장,지방의원 등으로 구성된 이 「역사탐방단」은 북경과 연길,백두산 등을 돌며 관광을 곁들여 세미나등 학술활동도 할 예정이다. 비행기를 전세내야 할 정도의 엄청난 규모여서행사비용만 2억5천여만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주최측은 대부분 회원들의 회비(1백15만원)로 충당한다고 밝혔지만 두 고문이 상당한 뒷돈을 대고 있다는 후문이다.이에 대해 김고문은 『두 단체가 오래전부터 추진해 온 순수 학술행사』라고 계파결속과는 무관함을 주장하고 있다.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주류측의 표정이 느긋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권로갑 김명규 김봉호 김영진 김옥두 김옥천 김대식 박광태 신계륜 이협 이경재 이희천 임복진 최욱철 최재승 한광옥 한화갑 허경만의원 등 「내외연」 소속의원 20여명은 이날 강화도 마니산에 모인다.역사유적지 탐방이다.최근 전국 시·도지부 결성을 마친 연구소측은 앞으로도 매주 금요일마다 조찬토론회를 가질 계획이다.계파결속 활동을 본격적으로 벌이겠다는 방침인 것이다.지난달 원내총무 경선과 국회부의장 선출과정에서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잇따라 패배한 것이 주류측을 이처럼 단속하게 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밖에 이부영·임채정·제정구의원등 개혁모임소속 의원 20여명도 14일 숭실대에서 정기이사회를 열어 「조문방북」발언에 대한 방침을 정리하고 모임의 활성화방안을 논의했다. 한편 당의 한 관계자는 비주류측의 전국 지구당 방문활동이 활발해지고 있음을 들어 『내년 전당대회를 앞두고 이미 당권경쟁이 수면위로 떠오른 인상』이라고 말했다.그러나 정작 이기택대표쪽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는 것이 당내의 분석이다.그도 15일 김고문처럼 김포공항에 나가기는 한다.그러나 행선지는 보궐선거가 열리는 대구이다.
  • 북한 주체예술/세습 정당화 도구로 이용

    ◎60년대 김정일이 사회주의리얼리즘에 속도전 이론 접목/혁명가극­집단창작 통해 김일성 신격화/김정일 직접지도… 후계자능력 인정받아 김정일은 지난 60년대 후반부터 김일성 주체사상을 선전·선동하는 방편으로서 북한의 문예활동을 선도해 왔다. 73년 9월 북한의 당 중앙위원회 제5기 7차 전원회의에서 조직 및 선전·선동 담당 비서로 선출되면서 그는 김일성의 후계자로 부각됐으나 이미 67년 당 중앙위원회 제4기 15차 전원회의를 계기로 각종 문화분야에서 이른바 「지도」를 본격화했다. 특히 김정일은 김일성이 내세우는 마르크스·레닌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예관을 북한 특유의 주체문예관으로 변경시켜 김일성의 신격화운동을 직접주도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먼저 연극분야에서 1970년대초 김정일은 『연극혁명을 일으켜 낡은 연극에 종지부를 찍고 혁명연극의 새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혁명가극의 시대를 개척했다. 항일 유격대원의 이야기를 다룬 가극 「피바다」를 71년 초연하기위해 김정일의 지도가 있었다. 김일성을 비롯한 빨치산 출신의 당시 북한 권력층 원로들이 이 「피바다」 공연을 보고 김정일의 능력을 크게 평가,후계자로 정하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영화로도 제작되어 김일성 신격화 작업의 상징으로 평가되고 있다. 김정일은 1980년 혁명연극 「혈분만국회」를 직접 제작할 정도로 열의를 보였다. 미술 부문은 1970년대에 김정일의 지도에 따라 주체미술의 대전성기를 맞았다고 북한은 선전해 왔다. 그때까지 역사적 사실 속의 한 인물로 형상화되던 김일성이 70년대 북한의 회화에서는 현실적이며 인민에게 친근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또 혁명적 기념비 미술은 거의 김정일의 업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조선 노동당 창립 30주년 기념으로 1975년부터 5년에 걸쳐 만들어진 「왕재산대기념비」의 경우 김정일이 비행기까지 동원하는 관심 속에 진행되었다. 70년대의 「평양 지하철 벽화」,「삼지연 대기념비」등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주체사상탑」,「개선문」등 80년대의 혁명적 기념비 미술로 이어진다. 음악의경우 혁명가극 「피바다」가 혁명의 무기로 생산 현장에서 공연됐다. 김정일의 음악관이 비교적 늦게 정립된 탓인지 87년 「행복의 노래」와 88∼89년 평양예술단이 창조한 민족가극 「춘향전」등이 김정일의 지도에 따라 무대공연 형식으로 발표됐다. 김은 오케스트라연주중 연주자의 반음 착오까지 지적할 정도로 조예가 깊다. 김정일은 또 4.15창작단,왕재산창작단,백두산창작단등을 만들어 문학분야에 집단창작제를 제도화시켜 「조선의 별」등의 대하소설을 기획하게 했다. 그는 『우리가 건설해야할 새로운 혁명문학은 명실공히 수령을 형상화한 문학을 말한다』고 역설했다. 무용에서도 「피바다식 가극무용」이 보통명사로 사용될 만큼 가극 「피바다」에서 구사된 수법이 정형으로 자리잡았다. 북한에서 4대 명무용의 하나로 꼽는 「키춤」은 원래 「피바다」의 3장 2경에서 물방아간 가무로 나오는 것을 떼어 내 72년에 군무로 개작한 작품이다. 이처럼 북한의 각종 예술활동을 지도해온 김정일은 특히 김일성의 주체사상에 입각한 속도전이론등을 가미한 새로운 문예이론을 만들어 부자 세습에 대비한 신격화운동에 문화 예술을 적극 활용했다.
  • 김성애 “담담” 김경희 “오열” 대조적/상중의 북한 이모저모

    ◎“김정일과 불화설” 김영주 공개참배/북방송,“김사망에 백두산천지 요동” 북한이 11일밤 TV방송을 통해 공개한 김일성 시신과 김정일의 공개참배 광경은 남측을 비롯한 외부세계의 촉각을 모으기에 충분했다.그동안 김일성의 사인이 베일에 가려졌던데다 김정일이 모습을 전혀 나타내지 않은 가운데 권력의 향배가 어떻게 될지 많은 궁금증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사망(8일)한지 93시간만인 이날 하오 9시 평양 금수산 의사당(주석궁)지하에서 진행된 이 행사는 조곡이 은은히 울려퍼지고 실내조명이 어둑하게 비치는 가운데 김일성의 시신이 안치된 수정관에만 밝은 조명을 집중적으로 비쳐 자못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 ○…「김일성화」로 보이는 조화로 둘러싸인 수정관속의 김일성은 얼굴에 특별한 상처가 없이 머리를 짧게 깎은 모습.인민복 차림으로 붉은 자주색 모포를 가슴까지 덮고 있었으며 잠을 자듯 둥근 베개가 베어져 있기도. 김일성의 얼굴은 사망 나흘째임에도 변색흔적등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사망 즉시 영구보존 처리에 들어간것으로 추측되기도. 또 수정관앞에는 공화국영웅및 노력영웅 메달과 각종 훈장들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으며 국방위원회 위원장 군최고사령관 명의의 김정일 화환과 노동당·당중앙군사위원회·국방위원회·중앙인민위원회·정무원 명의의 화환이 시신 주위를 장식. ○…고위 당정간부 1백여명을 대동한 채 인민복 차림으로 참배장소에 도착한 김정일은 평소 알려진 모습과는 달리 초췌한 모습. 입장직후 무엇인가를 묻는듯 손가락으로 김일성의 시신쪽을 가리킨 김정일은 옆사람에게 잠시 말을 건네는듯 했으나 시종 굳게 입을 다문채 침통한 표정. 시신을 향해 머리 숙여 참배한 뒤 수정관 주위를 둘러보던 김정일은 간간이 손수건을 꺼내 안경을 벗어 눈물을 훔치기도. ○…이날 첫 공식참배행사에서 가장 주목을 끈것은 참배 서열이 어떻게 되는가와 이른바 김정일과 반목관계에 있다는 가족들의 참석 여부가 주목. 김정일 좌측에는 각각 서열 2·3위인 오진우 인민무력부장,강성산 정무원총리,우측에는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최광이 서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고 이을설 호위총국장이 김정일 주변을 분주히 오가는 것이 목격됐다. 오진우등은 김일성과 함께 북한 정권 40여년을 이끌어온 「혁명1세대」로 김정일을 「업어키웠다」는 말이 있는 원로들.이들 역시 시신앞에 머리를 숙인채 눈물. ○…김정일은 자신의 참배가 끝난 뒤 군장성및 북한 주재 외교관의 조문을 받는 순서를 마련. 김정일은 조문객들의 인사말에 꼿꼿히 선채 한손으로 악수만하며 묵묵부답. 평양에 요양차 체류중이던 올해 87세의 한덕수 조총련의장은 지팡이를 짚은채 특히 울먹이며 김정일을 위로.김정일은 다른 조문객들에 대한 태도와 달리 이례적으로 두손으로 한덕수의 위로에 응답,대조를 보였다. ○…가족중 입장때부터 김정일의 바로 뒤 오른쪽에 따라 나온 친 여동생 김경희(48·노동당 경공업위원장)는 참배행사중 내내 오열.김일성과 김의 전처 김정숙의 소생으로 김정일이 가장 신임하는 것으로 알려진 그녀는 검은 상복차림으로 자그마한 체구.이와함께 실력자로 부각되고 있는 남편 장성택도 처남인 김정일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주목을 받기도. ○…한편 김일성의 후처인 김성애와 친동생이자 김정일의 숙부인 김영주부주석등 유가족들이 김정일의 뒤쪽에 위치.확실치는 않으나 지난 3월 핀란드 대사에서 소환된뒤 행적에 관심이 모아졌던 이복동생 김평일도 일단 참석한 것으로 보이나 확인되지는 않았다.경희의 오열하는 모습과 달리 김성애는 비교적 담담한 표정. ○…북한은 12일 김일성의 사망직후 백두산에서 격렬한 기상변화가 있었다고 전하면서 『백두산과 천지도 비분을 삭이지 못해 몸부림치고 있다』고 주장,눈길을 끌었다. 북한의 중앙방송은 이날 상오 뉴스를 통해 김일성이 사망한 8일 새벽 백두산에서는 『짙은 안개의 장막속에서 깊이 잠든 듯 조용하던 천지가 갑자기 격랑을 일으키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또한 이와 때를 같이하여 초속 50m이상의 회오리바람이 불면서 대줄기같은 비가 쏟아져 내렸는데 이날 시작된 비는 잠시도 그치지 않고 3일동안 3백㎜나 내렸다고 이 방송은 강조했다.
  • 김정일 「호칭」/「당중앙」→지도자동지→위대한 수령 격상

    ◎64년이래 총30여개… 「화려한 수사」 일색 「우리 당과 인민의 영명한 수령이시며 우리 모두의 운명이시고 자애로운 스승이신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자주시대의 위대한 태양」「인류가 낳은 걸출한 영웅」…. 자신의 아버지 김일성에 이어 북한 정권 두번째 수장이 될 것으로 보이는 김정일.그에게 그동안 주어진 숨가쁠 정도의 길고 화려한 수사로 다듬어진 숭배의 호칭들이다. 세습후계자 김정일을 떠받쳐온 호칭은 30여개.김일성이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자신에게 붙인 그것을 시차를 두고 물려받거나 재가공해 덧입힌 호칭의 변화과정은 64년 김정일이 김일성 대학을 졸업하면서 시작된 후계작업 30년 역사 그자체로,권력이양의 독도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최근 2∼3년간 등장하기 시작한 「아버지」「수령」등의 호칭은 김정일에 대한 권력승계가 최종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시사하는 것이었고 특히 김일성 사망 이틀째인 10일 북한 중앙방송에서 나온 「위대한 수령」이란 칭호는 현재까지 「별 무리없이」 북한 정권의 정점에 김정일이안착하고 있음을 내외에 보여주는 증거인 것이다. 김일성대 졸업후 비공식적으로 후계자수업을 받은 김의 첫 직책은 당 조직사업부 지도원.이후 과장 부부장 부장을 거쳐 당 비서직을 맡게되며 이 직책에 맞게 73년까지 불리게 된다.별다른 수식어가 붙었다는 보고는 없다.62년 김일성이 어느덧 남한에서도 익숙한 「경애하는 수령」이라는 개인 우상화차원의 호칭을 처음 붙인 것에 비추어 볼때 당연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의 권력정지 작업이 한창이었던 70년대의 대표적 호칭은 「당중앙」.김정일이 노동당의 양대 기둥인 조직및 선전선동 비서국을 장악한 73년 9월 당중앙위 제5기 전원회의 직후 처음 사용됐고 이후 80년대까지 가장 흔히 쓰인 호칭이다.그의 생일 2월16일을 공휴일로 지정한 75년에는 「유일한 지도자」가,77년에는 「당중앙」이 우세한 속에 「영명하신 지도자」「경애하는 지도자」등이 등장했다. 김정일에 대한 호칭이 질적으로 변화한 것은 80년대 들어서다.80년의 10월 제6차 당대회서 당정치국 상무위원과 당군사위 위원에 오른 3년뒤인 83년 2월 41회 생일을 계기로 「당중앙」대신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가 자리잡았다.현재까지 보편적으로 쓰이는 이 호칭은 북한 주민들사이에 「친지동」이란 비꼬는 말로 쓰인다. 실제 김정일은 91년 12월 군 최고사령관에 취임했음에도 8년전인 83년 5월 「최고사령관」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군의 영향력 강화를 의도한 것으로 풀이된다. 호칭을 통한 미화는 「언어창작」을 넘어서 항일빨치산이 백두산의 나무에 새겨놓았다는 「구호나무」의 역사날조에 까지 이어진다.북한은 87년 「백두산에 광명성이 떴다.광명성(김정일 지칭)미래로 민족 존엄 떨치자」라고 새겨져 있다며 「위대한 영도자」라는 호칭을 썼다. 90년대에는 김일성에 버금가는 호칭이 등장한다.90년 12월 「인민의 운명을 책임진 혁명의 지도자」(노동신문)에 이어 91년 김일성과 동격임을 드러내는 「수령」호칭이 등장하나 미래의 수령이란 의미로 사용됐다.93년조선기자동맹 제7차 대회서 현재를 나타내는 「영명한 수령」으로 표현됐고 올해 3월에는 조선대남방송에서 「주석」으로,5월에는 평양방송에서 「두분의 수령」「탁월한 수령」으로 나와 곧 명실상부한 권력이양이 이루어지리라는 추측을 불러일으켰었다. 「수령」과 같은 카리스마조작 비중을 갖는 「어버이」도 최근 2∼3년전부터 두드러진 호칭. 「오늘은 오실까 우리어버이/내일은 오실까 김정일 동지/우리를 키워준 어버이모습/한해가 다르게 그립습니다」 92년 북한이 보급한 「기다렸습니다」라는 노래의 가사 일부이다.그토록 기다려 왔다는 올해 52세 「어버이」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북한 인민에게 다가갈 것인지 궁금하다.
  • 김일성,「후계자 정일」 의도적 찬양

    ◎“강한 배짱·신념 소유자” 공사석서 자주 칭찬/「지도력」에 만족… 세습체제에 대한 지지 강조 김일성은 마음 편히 눈을 감았을까.그는 생전에 아들이자 후계자인 김정일의 능력을 얼마나 신뢰했을까. 김일성은 김정일을 후계자로 정한 뒤 아들의 통치능력과 성품을 높이 인정하고 후계체제를 낙관하는 발언들을 기회가 있을때마다 해왔다.아들에 대해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것처럼 공사석을 통해 얘기해 온 것이다. 그는 올해 초 『김정일 조직비서만큼 신념이 강하고 배짱이 센 사람은 처음 보았다(평양방송 94·3·10)』고 말해 김정일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감을 표시했다.3일 뒤 노동신문은 김일성이 『항상 수수한 잠바 차림으로 다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 온다』며 아들의 검소한 생활을 본받을 것을 강조했다고 보도했다. 또 지난 해 3월에는 『김정일 동지가 혁명 사업을 훌륭히 계승해 나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지금도 모든 일이 잘 돼 나가고 있지만 앞으로도 계속 잘 돼 나갈 것』이라며 김정일이 주도할 북한의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를 밝혔다. 지난 92년 2월 김정일의 50회 생일을 맞아 김일성이 직접 지었다는 「광명성 찬가」라는 한시에서 후계자에 대한 평가는 극치를 이룬다.이 시에서 김일성은 『김정일이 백두산의 정기를 받아 태어났으며 만민이 그를 칭송하고 있다』고 주장,김정일에 대한 더 할 수 없는 신뢰와 애정을 표현했다. 그러나 김정일에 대한 이 같은 평가가 김일성의 진심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문란한 사생활과 돌출적인 행동에 대해 수차례 질타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더욱이 지난 해 18년만에 동생인 김영주를 부주석으로 복권시켜 김정일의 후견인 역활을 맡긴 것은 그가 김정일의 지도력과 권력 계승능력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분석이다. 따라서 김일성이 아들을 자랑하는 「팔불출」역을 자임했던 이유는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사후에 있을 반발과 혼란을 막고 안정적인 세습체제 구축하기 위한 「의도성 칭찬」으로 볼 수 있다. 이 밖에 북한 언론이 틈나는대로 보도한 김일성의 김정일에 대한 찬사를 소개한다. 『김정일 동지와 같이 권위있는 철학가,이론가가 있는데 대해 크나큰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특히 올해 유난히 김정일에 대해 자주 언급해 김일성이 후계체제를 비롯한 통치권 인계작업과 신병정리에 어느 때보다도 높은 관심을 보였음을 엿볼 수 있다.
  • 북주민 원초적 공격본능 분출 우려/심리학자의 집단히스테리 분석

    ◎김정일,경외대상으로는 김일성에 못미쳐/초자아 상실 따른 심리적 황폐화 계속될듯 반세기 동안 「유일신」으로 숭배되어온 김일성의 급사로 정신적 지주를 잃은 북한 주민들의 향후 정서는 어떻게 바뀔까. 「김일성 정신분석」「한반도 통일에 대한 정신분석 처방」등을 저술,북한체제의 심리분석에 정통한 인물로 평가받는 정신과전문의 백상창박사(60·사회병리연구소장)는 북한주민의 정서가 초기 허탈감·우울증등을 보이다 반사회적인 행동을 보이는 과정을 거쳐 결국 연쇄적 욕구분출단계로 이행할 것으로 내다봤다.백박사는 또 주민들이 정신·육체·사회적인 면에서 어느것 하나 김일성보다 나은게 없는 김정일을 경외의 대상으로 삼기 어려울 것으로 진단했다. 김일성의 통치행태는 모택동이나 스탈린과 달리 매우 독특하면서도 지능적이었다.50년대 남로당파,연안파등 정적을 차례로 제거한 그는 한편으로 사상의 주체성과 자위국방등 「주체」의 기반을 쌓기 시작했다.그리고 14세부터 만주에서 게릴라생활을 하며 몸에 밴 불신풍조 때문에 60년대 초반들어선 잠재적인 정적까지 완전히 거세하고 모든 인민들이 자신의 명령만 따르게 했다.모든 집에는 자기 초상화를 걸고 외교관에게는 초상배지를 달도록 했으며 자신의 흉상 2천개를 이북 곳곳에 세웠다.한마디로 주민들로 하여금 자나 깨나 자기 생각만 하도록 만들었다.주민을 온통 조건반사적으로 만들어 입만 열면 『김일성수령』이 나오도록 했던 것이다.이 조건반사과정은 모택동이나 스탈린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강도 높은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곧 주민의 사유까지 지배했다. 그 결과 북한 주민은 어릴적부터 인격의 최고가치이자 양심인 초자아(Super Ego)를 김일성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 형성하게 됐다. 보통 자유세계의 어린이들은 아버지와의 동일시를 통해 초자아를 만들어 간다.즉 아버지의 사고방식이 가치형성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데 비해 북한 주민들의 경우 생부가 아닌 김일성의 항일투쟁 경력및 사상이 초자아를 형성했다.다시 말하면 그들에게 김일성은 초자아의 거울이자 신앙인 셈이었다. 그러나 김일성의 급사는 주민들로부터 초자아,즉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시계추를 일시에 앗아갔다.갑자기 눈이 먼것처럼 방향감각을 상실하게 만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초기 허탈감·우울증·절망감·자살등의 「자기학대」로 나타나 2∼6개월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이 때는 밥맛이나 성욕이 없고 불면에 시달리는등 한마디로 살맛을 잃게 된다.외신이 전하는 북한 주민의 집단충격 히스테리는 초기의 전형적인 증세다.그러고 나서 점차 환상과 우울증에서 벗어나 「타인학대」로 변화·발전하게 될 것이다.이 과정에서는 김일성을 원망하고 체제에 적개심을 갖는다.또 반사회적인 분위기가 고조되어 약탈,뇌물수수,성문란등의 부정·부패가 만연할 것이다.과거 수령에 대한 환상에 젖어 억눌렀던 원시본능과 공격적 행위가 일시에 분출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당연히 과거에 비해 더 가혹한 철권통치가 등장하겠지만 김정일의 능력으로는 이미 깨져 버린 주민들의 초자아를 메워주기란 역부족.그는 교주로서의 신화가 없는데다 이미지까지 좋지 않기 때문이다.그가 백두산 정기를 받아 태어 났다고믿는 사람은 없으며 주벽과 기쁨조에 관련된 기괴한 행태는 공공연한 사실이 된지 오래다. 결국 교주와 초자아를 한꺼번에 잃은 북한 주민들은 새 통치권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러한 정서변화 과정을 거치며 평양체제에 큰 부담으로 남을 것이 분명하다.
  • 김일성 건강관리 어떻게 했나/몸 3천곳 세분… 부위마다 전문의

    ◎5백년 산삼죽·만병초버섯 즐겨 북한주석 김일성이지난 70년대초부터 심장질환 등 10여가지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사망 10여일전까지 왕성한 활동을 보인데는 식이요법에서 운동·정신건강 등에 이르기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써온 때문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자신의 건강관리를 위해 지난 75년 「장수문제연구소」를 설립했다.이곳은 김의 신체부위를 3천개로 세분화,부위마다 전문의나 생물학자 1명을 두고 그의 건강이나 체질변화에 따라 식단과 운동량 등을 조절해온 것으로 알려졌다.그는 특히 이곳에서 마련해주는 5백년근 산삼죽과 백두산산 만병초와 버섯을 교배해 만든 만병초버섯을 즐겨 끓여 마신 것으로 전해진다. 공식석상에서는 메추리알탕과 김치 등 전통 우리음식도 자주 먹었다.좋아하는 육류는 꿩·노루·멧돼지 등 산짐승요리,어류는 농어·송어·철갑상어알 등.또 해외에 파견된 호위총국(경호실) 요원들이 진상하는 인도 거북알,앙골라 상어간,남미 해구신,잠비아 코뿔소뿔 등을 이따금 정력제로 먹었다는 것. 술은 식사와 곁들여 인삼주나과실주 등을 하루에 소주잔으로 한잔정도 마셨으나 최근들어서는 이마저 입에 대는 시늉만 해왔으며 담배는 75년부터 끊었다.물은 북한을 방문한 시아누크가 세계최고라고 극찬한 바 있는 평남신덕산 샘물만 마셨다고 한다. 운동은 75세까지 테니스를 즐겼고 산림욕이나 낚시·사냥·휴양 등을 통해 기분전환을 자주 했다.80년대말부터는 허리가 아파 실내사이클로 체력을 관리해왔으며 요추에 무리가 가는 비행기여행이나 승용차로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것을 삼갔다. 그러나 그가 『나의 건강비결은 낙관주의자이기 때문』이라고 자주 말했듯이 정신적인 면이 건강을 유지시켜준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90년초 「만담조」를 만들어 웃음을 선사한다든지 20세전후의 건강한 「기쁨조」처녀와 함께 온탕(호르몬목욕)을 즐겼고 18세미만 처녀로부터 수혈하는 등 해괴한 건강법을 쓴 것도 소문만은 아닌 것 같다.
  • 83년 이후 「서열 2위」… 당·정·군 장악

    ◎73년 김영주축출… 공적활동 전면등장/반대세력 반발불구 통치권확보 성공/성격 독선적·일부선 “통 크다”… 영화·연극에 큰 관심,직접 제작도 김정일이 사망한 북한주석 김일성에 대한 장례위원 가운데 서열 1위로 발표됨으로써 차기 권력승계작업이 일단은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공산정권의 전례로 비추어 볼 때 숨진 최고지도자의 장례위원장을 맡은 인사가 예외 없이 차기 통치권을 맡아 왔기 때문이다. 이날 그에 대해 북한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이 혁명의 계승을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김정일은 20여년동안 끈질기게 권력승계 작업을 해온 결과 지난 83년 공식서열 2위에 오른 뒤부터 김일성 사망 직전까지 김일성에 이어 2인자의 위치를 굳혀왔다.군최고 사령관,원수,국방위원장,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중앙군사위원등 그의 맡아온 직책이 이를 입증한다.이복동생 김평일과의 불화설등 반대세력과의 권력투쟁설이 끊임없이 나돌기도 했지만 통치권 장악에 거의 성공한 것으로 관측돼 왔다. ○92년부터 승계완료그는 당·정·군등 북한내 3대 기본권력구조 가운데 형식적인 통수권은 국방위원장직으로 군에 대해서만 갖고 있다.그러나 김일성이 국가주석으로 정을,당 총비서로 당을 이끌어 오면서 형식적인 통수권자였지만 김정일은 사실상 이들 기관도 통치해 왔다는 것이 북한전문가의 대체적인 의견이다.이들 전문가들은 이미 권력승계작업은 지난 92년 김일성의 80회 생일부터 이 문제가 거론되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완료됐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와 관련해 김영남외교부장은 같은해 9월 제47차 유엔총회 참석차 뉴욕에 들렀다가 우리 기자들과의 회견에서 김정일이 사실상 북한의 통치자라고 밝혔었다.앞서 같은해 4월1일 김일성생일행사의 하나로 개최됐던 주체사상토론회에서 김정일이 「당·국가·군대의 수위」로 지칭되고,김부자의 생일을 전후해 오진우인민무력부장,이종옥부주석,연형묵정무원총리등 당시의 당·정·군 간부들이 김정일에 대한 대를 이은 충성을 다짐하기도 했다.이때부터 김일성은 점차 일선에서 물러나는 듯한 움직임을 보여 이같은 관측을 뒷받침했다.김정일은 지난 92년 인민무력부장 오진우원수와 8명의 차솔진급자에게 계급장을 달아 줘 군통수권에 대한 첫 공식행사를 가짐으로써 이를 대내외에 천명했다.이어 지난해 4월에는 군 최고통수권자인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됐으며 3개월뒤 장성 99명에 대한 승진인사를 단행,혁명1세대를 퇴진시킴으로써 군을 완전 장악했다. 김정일이 후계자로 부각된 것은 지난 73년.사상·기술·문화 3대혁명소조운동과 3대혁명 붉은기쟁취운동의 실무지도자로 공적활동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같은해 9월 삼촌 김영주를 밀어내고 조직·사상담당 비서로,74년 2월 노동당 정치국 정치위원으로 추대됐다.그는 74년 2월 노동당 제5기 8차 전원대회에서 후계자로 결정됐으나 70년대까지만 해도 「당중앙」으로 모호하게 불려졌다.그러나 80년대부터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로 표현되기 시작했다.83년 4월이후 오진우인민무력부장을 제치고 당서열 제2위로 부상하면서 명실상부한 후계자의 위치를 굳혔다. 85년 4월에는 「당·국가수위」로 지칭됐다.85년 7월 북한언론으로부터 「김정일시대」라는 용어가 등장하고,91년에는 인민경제대학총장 김국훈이 김정일을 「미래의 위대한 수령」으로 후계구도를 공식적으로 가시화했다.이어 91년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추대된뒤 92년 4월20일 원수칭호,93년 4월 최고인민회의 9기5차회의에서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됨으로써 군을 장악한 명실상부한 실권자로 등장했다. ○원래 이름은 「정일」 김정일은 김일성과 그의 첫부인인 김정숙 사이에서 태어난 2남1녀중 장남으로 지난 41년 2월16일생이고,원래 이름도 정일이라고 한다.그러나 뒤늦게 그를 우상화하는 편법으로 정일로 바꿨고 2년뒤 그의 출생연도도 1년 낮췄다는 설도 있다.82년은 이른바 「조선의 어머니」인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의 출생 90돌이자 김일성의 70돌이며,김일성이 창건했다는 조선인민혁명군의 50돌이었는데 그의 이름도 이에 맞춰 변조했다는 것이다.그의 이복동생 평일,성일에서 보듯 원래 항렬이 일자였다는 것이다. 어릴때 이름이 「슈라」인 것으로 미루어 출생지는 옛 소련이었음을 알 수 있으나 구체적인 지명은 사마르칸트,오케얀 스카야,하바로프스크등으로 엇갈린다.그러나 그를 우상화하는 과정에서 「백두미령」에서 출생해 『혁명의 준엄한 시련을 체험하면서 성장했다』고 미화됐다.북한은 이를 위해 김일성이 빨치산 활동을 할 때 백두산의 한 귀틀집에서 『백두산의 정기를 한몸에 받고 태어났다』는 이른바 「백두산정기설」을 뒷받침하는 각종 흔적들을 조작하기 시작했다.백두산의 「정일봉」,김정일의 탄생을 칭송하는 이른바 「구호나무」등이 그 흔적이다. ○3세대 평양 들어와 김정일은 세살때 광복과 함께 부모를 따라 소련함정을 타고 평양에 처음 들어왔다.43년 소련에서 태어난 남동생 「유라」(소련명)가 있었으나 2년뒤 김일성 관저 연못에 빠져 죽었다.7살때인 49년 9월 생모 김정숙이 출산중 사망하면서 여동생 김경희(46년생)와 함께 김일성의 외6촌동생 강연실에 의해 키워졌다.그의 성격은 생모와 사별후 난폭해지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성격은 괄괄하고 과격하며 독선적이나 통이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김일성앞에서도호주머니에 손을 넣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그는 아버지가 너무 바빠 홀로 어린시절을 보내온 것을 자주 불평했다고 한다.66년 홍일천과 연애결혼해 딸 하나를 낳고 69년 이혼한 뒤 73년 김혜숙과 재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일은 평양의 남산유치원을 나와 49년 간부 자녀들이 다니던 남산 제 4인민학교를 다녔으며 57년 8월 평양제1중학교,60년 8월 평양 제1고급중학교,64년 김일성대학 정치경제학과를 각각 졸업한뒤 노동당에 입당했다.70년 당 문화예술부장,71년 선전선동부 부장으로 진출하면서 영화촬영및 연극공연작업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온 것으로 전해진다.「피바다」「한 자위대원의 운명」「꽃파는 처녀」등 주요 영화와 가극을 직접 제작하는등 일년에 1백50∼2백편의 영화를 만들어 올만큼 북한영화계의 최고권위자로 꼽힌다.이같은 영화에 대한 애정때문에 신상옥씨 부부를 납치한 것이 깊숙이 베일에 가려져 있던 정체가 상세히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연표◁ △1941.2.16 소련 사마르칸트 출생(북한측,백두산 출생주장) △1953.2 만경대혁명학원(인민반)수학 △1960.8 남산고급중학교 졸업 △1964.3 김일성대학교 졸업(정치경제학과) △1964 노동당 조직지도부 지도원 △1971 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 △1973.11 노동당 정치위원회 후보위원 △1974.2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 △1974.2 「후계자」로 결정(노동당 제5기 8차전원회의) △1980.10 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6차 당대회) △1980.10 노동당 비서국 비서 △1980.10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1990.5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1991.12.24 인민군 최고사령관(노동당 제6기 19차 전원 회의) △1992.4.20 원솔 칭호 △1993.4 국방위원회 위원장(최고인민회의 9기 5차회의)
  • 비정한 권력투쟁가… 유례없는 반세기 독재/김일성 82년의 인생역정

    ◎유년 평양·만주 전전… 20세에 빨치산 활동/해방후 구소점령군 배경업고 권력장악/도전세력 가치없이 제거… 1인체제 구축/민족통일 빙자 6·25남침… 「전범」 낙인/67년 주체사상 만들어 사회주의 통치도구로 활용하기도 김일성.현대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장기집권을 누린 독재자이다.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난 45년 소련군을 등에 업고 한반도의 절반인 북한땅의 통치자가 된 뒤 거의 반세기동안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휘둘러왔다.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주석과 당총비서라는 사회주의 체제 특유의 어마어마한 권력집중적 직책도 모자라 북한주민들에게 「위대한 수령」,「민족의 태양」으로 부르기를 강요한 전제군주적 독재자였다. 김은 어찌보면 사이비 종교집단의 교주처럼 전지전능하고 무오류의 존재로 인식되도록 주민들을 세뇌시켜왔다고 할 수 있다.먹을 것이 모자라 하루 두끼 먹기운동을 벌이면서도 철저한 사상무장과 외부 정보통제로 주민들로 하여금 지상낙원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믿도록 만드는능력을 갖춘 인물이 바로 김일성이기 때문이다. 김은 1912년 4월15일 평양의 한 농가에서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을 부모로 하여 철주와 영주를 동생으로 둔 삼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본명은 성주였으나 만주에서 빨치산활동을 할 때 일성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에 대한 기록은 우상화과정에서 지나치게 미화되거나 엄청나게 날조되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그의 출생지가 평남 대동군 룡산면 하리 칠골에 있는 외가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이름도 성주에서 일성을 거쳐 다시 일성으로 바뀌었다는 얘기도 있다. 어쨌든 김일성의 「공식」생가는 평양 대동강변 언덕에 자리잡은 지금의 만경대이며 이른바 「혁명의 요람」으로 북한의 모든 주민들에게는 참배의 대상이 되어왔다. 김은 어린 시절 한때 외할아버지가 개신교 장로를 지내는 등 독실한 기독교 집안인 외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 강반석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다니기도 했다. 그는 만경대에서 짧은 유년시절을 보낸 뒤 가족과 함께 만주로 이주했다.그후 김은 만주의 중국계 소학교인 모예산소학교,팔도구소학교와 평양근교 외가인 칠골에 있는 외조부 강돈욱이 교감으로 있던 창덕학교 등을 전전하며 파란많은 소년기를 보내다 26년 역시 중국계인 무송소학교를 졸업한다. 이후 32년 유격대활동에 적극 가담하기까지의 기간은 뚜렷한 활동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다만 북한에서 나온 그의 전기들은 이 기간중 장춘과 길림 사이에 있는 가륜에서 한인농민들에게 사상교화작업을 했다고 쓰고 있다. 그는 31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32년 중순부터 중국 공산당 산하의 항일 빨치산집단에 참여한다.이때 이름도 성주에서 일성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김의 항일투쟁경력은 그가 북한정권을 장악한뒤 유일체제를 강화하면서 그에 대한 우상화를 합리화하기 위해 터무니없이 과장·미화되었다.북한의 선전용 김일성 전기들은 만주사변이 일어난 32년 그가 조선공산당을 창설했다고 하지만 당시 불과 19세였던 그는 당시 그럴만한 힘이 없었다. 그는 2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양세봉이라는 한인이 이끄는 유격조직에 들어감으로써 항일빨치산 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후 그는 중국공산당 산하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에 사병으로 들어가 활동하다 우수한 중국어 실력을 인정받아 나중에 대대장급으로 승진했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만주 일대에서 소규모 유격활동을 벌이던 김은 37년 유격대원 2백명을 이끌고 국경 마을인 함남 보천보를 습격했다.일본경찰지서와 우체국 등을 방화하고 추격해오는 경찰서장을 비롯한 일경 7명을 살해한 이른바 「보천보전투」를 벌여 순식간에 유명해졌다. 김은 이 전투가 자신이 참여한 빨치산 전투중 가장 성공적인 전투였다고 자랑하며 보천보에 자신의 동상과 혁명박물관까지 세우고 북한 주민들에개 참관을 강요했다.하지만 보천보사건을 일으킨 사람이 김일성이 아니라는 소수 의견을 내는 학자들도 있다.즉 보천보사건의 김일성은 그해 11월 죽었으며 그의 부하였던 사람이 소련으로 도피한 뒤 그의 이름을 도용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보천보사건 이후 일본이 중국 본토 침략의 전초전으로 만주의 빨친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전에나서는 바람에 동북항일연군은 급속히 와해되기 시작했다.때문에 김도 41년 8월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 서쪽으로 피신해야 했다. 소련은 이 무렵 만주에서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중국인과 한인유격대원들을 모아 블라디보스토크 근교 등지에 「88독립저격여단」이라는 부대를 창설했다.김도 김책,최용건,이동화 등 빨치산 동료들과 함께 이 부대에 들어가 43년에는 대위급으로 진급한다. 김은 여기서 만주에서 함께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김정숙과 결혼했다.그녀는 16세 때인 35년에 김일성의 빨치산부대에 가담해 주방일 등 잡일을 보았던 여자였다. 김은 42년 그녀와의 사이에 첫아들인 정일(소련명 유라)을 낳았다.하지만 그녀는 49년 평양에서 사산아를 낳다가 사망했다. 해방과 함께 무명의 소련군 장교로 평양에 입성한 그는 이후 소련의 절대적 후원과 타고난 권모술수로 재빨리 권력을 장악한다.소련 점령군은 친소세력에 의한 공산정권 수립의 필요성에 따라 자신들의 협조자들 가운데 하나를 북한지도자로 만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고 김이 바로 그같은소련의 의도를 기민하게 포착한 것이다. 소련점령군이 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들어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지명하면서 정치지도자로서의 그의 기반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1949년 3월에서 4월까지 한달동안 자신을 도와준 소련에 감사를 표시하기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인 6월 24일 북로당과 남로당 중앙위원회연석회의를 열어 당 위원장자리를 차지했다.이 회의에서 당의 명칭도 북조선노동당에서 조선노동당으로 바꾸었다. 당과 정부기관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김일성은 자신에게 도전하는 세력을 가차없이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아무도 넘볼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그는 자신에게 협력했던 인사도 자신에 도전할 정도로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숙청 또는 암살이라는 수단을 동원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는데 심지어 자신과 유격대활동을 함께했던 빨치산대원들까지 가차없이 제거하기도 했다. 그는 조만식과 같은 민족주의자뿐 아니라 박헌영,김두봉등과 같이 자신에게 협력했던 수많은 인물들을 한국전쟁에 대한패전책임을 덮어씌우거나 종파주의를 부추키고 있다는등의 갖가지 죄목을 걸어 제거함으로써 결국 북한정권을 족벌체제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소련의 힘을 빌려 48년 북한정권의 초대수상에,49년 조선노동당 초대위원장에 오른뒤 도전세력들을 가차없이 제거하기 시작했다.그는 조만식 등 민족주의자는 물론 현준혁 등 국내파,박헌영 등 남로당계,김두봉을 위시한 연안파,허가이 등 소련파를 차례로 숙청해 결국 아무도 넘볼 수 없는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김은 자신의 권좌가 어느 정도 다져진 50년 6월25일 한반도의 적화통일이라는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마침내 무력 남침을 감행한다. 그 자신이 식은죽먹기라고 여겼던 적화통일이 유엔의 개입으로 실패로 끝났음에도 그는 전혀 책임을 느끼지 않았다. 김일성이 무력 적화통일이라는 야욕을 공공연히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47년부터였다.그는 신년사를 통해 『단합된 민주조선의 건설은 남한에 있는 반동적인 매국노들에 대한 궁극적인 승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인민군과 보안대를 강화시켜야한다』고 역설했다. 김일성은 모든 상황이 유리하다고 판단,밤도둑처럼 새벽야음을 틈타 남침을 했으나 유엔군이 참전하고 중국의용군이 자신을 도와주러 왔을때는 이미 전쟁이 자신의 관리능력 밖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되었다.국제정세를 너무 단순하게 보았던 판단착오의 결과였다. 김일성은 자신의 실수로 엄청난 결과가 빚어지자 동료들을 숙청했다.그는 1950년 12월 21일 강계에서 열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에서 그의 빨치산 동료들을 비롯한 거의 모든 사람들을 공격했으며 그 가운데서 김일,최광,임춘추,김열,무정등은 당에서 축출해버렸다. 김일성은 뒤이어 당의 재조직문제를 놓고 자신과 이견을 보인 소련파의 거두 허가이를 숙청했으며 박헌영을 비롯한 국내파들도 정부전복을 기도하고 미국을 위해 스파이활동을 했다는등의 죄목으로 체포해 사형에 처하는등 자신에게 도전하거나 더이상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는 세력은 여지없이 제거하는 비정함을 보였다. 김일성은 50년대 중반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도전하는 세력들을 숙청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이래 67년에 「주체사상」을 만들어 냈으며 72년에 와서 북한의 사회주의헌법에 통치이념으로 명문화시켜 통치의 도구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같은 주체사상과 김일성에 대한 극단적인 우상화가 맞물리면서 북한정권이 안에서부터 서서히 허물어지는 요인이 됐다. 북한의 선전매체들이 김일성에 대해 『가랑잎을 띄우고 대하를 건너가는 만고의 영웅이며 그가 한번 노려보기만 하면 원쑤도 가을 풀같이 쓰러진다』고 보도할 정도로 북한은 이후 유사종교집단적 사회구조를 띠면서 경직적인 김일성 1인체제가 굳어지기 시작했다. 70년대 이후 김일성은 남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완전히 밀리면서 철저한 폐쇄체제로 주민들을 통제하면서 다른 한편 아들인 김정일에게로 후계세습작업을 가시화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나름대로의 준비과정을 거쳐 지난 72년 12월 비공개리에 당중앙위 전원회의를 거쳐 김정일을 자신의 후계자로 내부적으로 결정했다.그도 소련의 스탈린 등의 전례를 보고 자신의 사후에 대해 대비를 시작한 것이다.다시 말해 스탈린 사망후 대대적인 격하운동에 충격을 받은 김이 사후 안전판으로 세계사에 유례없는 부자간 권력승계라는 희화적 구도를 상정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그는 자신에 대한 우상화 이상으로 김정일에 대한 상징조작을 단계적으로 확대해나가면서 권력을 하나씩 아들에게 이양하기 시작했다.김정일에 대한 호칭을 「당중앙」에서부터 「경애하는 지도자 동지」,「향도의 별」 등으로 격상시켜나가면서 노동당 조직비서(73년),노동당 정치 상무위원회 위원(80년),인민군 최고사령관(91년),국방위원장(93년) 등 핵심요직을 하나하나 물려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북한주민들에게 「살아있는 신」으로 우상화작업을 펴온 김일성도 끝내 죽음을 거부할 수 없는,한 평범한 인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그 자신도 70년대 이후 각종 질병에 시달리면서 건강유지에 발버둥쳐온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김일성의 질환은 지난 73년께부터 확인된 뒷머리의 혹에서부터 고혈압·당뇨·난청·신경통·뇌일혈을 비롯해 그를 8일 새벽 마침내 죽음으로 몰고간 심근경색 등 10여가지에 이르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어쨌든 그는 분단 반세기만에 초유의 역사적 사건인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급사했다.그를 갑작스런 죽음으로 몰고간 원인이 그의 일생일대의 도박이라고 할 수 있는 정상회담에 대한 준비과정에서의 과로 때문인지,아니면 경제난과 대외적 고립에 따른 누적된 스트레스 탓인지는 아무도 모른다.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북한주민들에게 영생불사의 존재로 신격화된 그도 죽음 앞에 아무도 예외일 수가 없다는 철리를 그의 맹목적인 추종세력들에게 마침내 일께워 준것이다. 그의 공과는 후세의 사가가 엄정하게 평가해줄 것이다.그가 역사의 장에 어떻게 기록되든 과대망상에 빠진 권력의 화신이었다는 사실은 동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이미 뚜렷이 각인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일성 연표◁ △1912.4.15 평남 대동군 고평면 남리 만경대출생(본명은 김성주) △1923 만주 장백현 팔도구 소학교 졸업 △1926 만주 길림 육문중학 중퇴,재학중 공청 가입 △1930 김성주를 김일성으로 개명 △1931 중국공산당 입당 △1932 중국공산당 조선인부대 지대장 △1935 김일성으로 재개명 △1936 조국광복회 조직 △1937.6 함남 보천보 습격 △1937.9 함남 증평리 습격 △1940말 소련으로 망명 △1945.8 소련군 소좌 △1945.9 소련점령군 비호하 입북 △1945.10 조선공산당 서북5도당책임자 및 열성자대회 참석 △1945.10 「김일성장군」환영 평양시군중대회에 등장 △1945.12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 △1946.2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1946.7 북조선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의장단 의장 △1946.8 북조선노동당 부위원장 △1947.2 북조선 인민위원회 위원장 △1948.8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1948.9 수상(제1차 내각) △1949.3 경제문화 협정체결차 소련방문 △1949.6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1950.6 군사위원회 위원장 △1950.7 인민군 최고사령관 △1953.2 원솔칭호 △1953.7 영웅칭호 △1956.4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1957.9 수상(제2차 내각) △1957.11 당 및 정부 대표단장으로 소련 10월혁명 40주년 기념식 참석 △1959.1 소련 제21차 공산당대회 참석 △1959.9 중국 정권창건 10주년 기념식 참석 △1961.7 우호협조 및 상호 원조조약 체결차 소련 중국 방문 △1961.9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및 정치위원회 위원장 △1961.10 소련공산당 제22차대회 참석 △1962.10 수상(제3차 내각) △1966.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1967.1 소련방문 △1967.12 수상(제4차 내각) △1970.11 노동당 총비서 겸 정치위원 △1972.12국가주석 △1972.12중앙인민위원회 위원겸 국방위원회 위원장 △1975.4중국방문 △1975.5루마니아·알제리·모리타니·불가리아·유고 순방 △1977.11국방위원회 위원장 △1977.11인민군 최고사령관(원수) △1977.12 국가주석 △1980.5 유고 티토대통령 장례식 참석 및 루마니아 방문 △1980.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1980.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총비서·군사위원장 △1982.4 국가주석 △1982.9 중국 방문 △1984.5 소련등 동구권 8개국(소련·폴란드·동독·체코·헝가리·유고·불가리아·루마니아)순방 △1986.10 소련 방문 △1986.12 국가주석 △1988.6 몽골 방문(중국·소련 경유) △1989.11 중국 방문 △1990.5 국가주석 △1991.10 중국 방문 △1992.4 대원솔 칭호 △1993.4 「전민족 대단결 10대강령」발표 △1994.4.8 사망
  • “평화정착 위해 평양 간다”/김 대통령

    ◎정상회담 성공 국민성원이 필수 김영삼대통령은 5일 평양남북정상회담의 목적을 평화정착과 신뢰구축이라고 규정했다. 김대통령은 이날 상오 청와대에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수석부의장 김명윤)운영위원들을 접견한 자리에서 『이번에 평양에 가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키고 남북간에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평통의 의장이기도 한 김대통령은 『이번 회담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아는 만큼 생각도 많고 정부도 여러가지로 최대한 준비하고 있다』면서 『평화를 위한 신뢰구축을 통해 통일을 지향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김대통령은 『정상회담을 성공시키는 힘은 국민의 단합과 성원에서 나온다』고 전제,『국민이 성원할 때 성과를 거둘 것으로 믿는 만큼 마음으로부터 성원해달라』고 당부했다. 이 자리에서 민주평통은 평양정상회담 의제로 ▲상호 체제인정·긴장완화를 통한 한반도 평화보장 ▲3단계 민주평화통일대원칙 천명 ▲고향방문·판문점면회소 설치등 이산가족 및 인도적 문제 해결 ▲남북대화재개 및 기본합의서 이행 ▲한반도 비핵화천명 ▲백두산및 금강산의 공동개발등 관광개발과 경제협력등 7개항을 건의했다.
  • 김 대통령·평통위원 「방북」 대화록

    ◎「정예화」 이뤄지면 정상회담 의미 배가/경협약속하면 좋은성과 있을것/이산가족 고향방문 성사를 기대/국민기대 의식,「지나친 양보」 없길 김영삼대통령은 5일 민주평통 운영위원들을 접견,남북정상회담과 관련된 의견을 나눴다.다음은 대화요지다. ▲김대통령=반세기만에 남북정상회담이 열린다.민주평통은 이와 관련해 헌법상 가장 중요한 조직이다.활동상황을 설명해달라. ▲유경현사무총장=민주평통은 이번 정상회담이 남북관계의 새지평을 여는 만남인 만큼 성사자체의 상징성과 역사성에 큰의미를 두고 있다.오늘 아침 운영위원회를 열어 ▲상호체제인정·긴장완화를 통한 한반도 평화보장 ▲민주평화통일 대원칙 천명 ▲고향방문·판문점면회소 설치등 이산가족및 인도적문제 해결 ▲남북대화재개및 기본합의서 이행 ▲비핵화천명 ▲백두산과 금강산의 공동개발등 관광개발과 경제협력등 7가지를 의제로 건의드리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상옥정책심의분과위장(전외무부장관)=정부에서 일했던 사람으로 정상회담실현에 감회가 크다.이번에 북측이 종전과 달리 조건없이 대통령의 결단에 의해 회담이 성사된 것은 의미가 크다.이번 회담으로 남북정상회담이 정례화된다면 의미는 더욱 커질 것이다.이번 회담에서는 이왕에 합의는 됐으나 이행이 중단된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선언에 대한 남북정상의 실천의지를 재확인하고 각종위원회도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안병준이념제도분과위장=대학의 분위기는 희망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이 병존한다.사상 첫 정상회담 성사가 긴장완화에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희망적이고 현실적으로는 역시 핵문제의 해결책이 나와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절대 허용할 수 없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해야 한다.특히 미­북회담과 남북정상회담에서의 입장이 같아야 할 것이다. ▲박상하경북부의장=과거정권은 국내상황이 어려울 때 마다 정상회담을 추진했으나 별 성과없이 끝났다.이번만큼은 성과가 있어야 한다.우리 민주평통에서 몇사람 만이라도 수행하게 해달라. ▲정●주광주시의회의장=김일성주석은 주도면밀하고 암수도 잘 쓰는 사람이다.김대통령이 이런 점을 감안해 회담의 주도권을 확보해야 한다.특히 남한의 경제발전과 국력신장은 북한을 침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민족의 공동번영을 위한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또 남북불가침과 평화공존을 위한 각서를 교환하도록 노력해달라. ▲최순영신동아그룹회장(직능대표)=북한이 핵문제로 시간을 끄는 목적은 궁극적으로 남한과 미국의 도움을 받아 곤경에 처한 북한경제를 살려보자는 것이다.우리가 북한보다 강하고 여유도 있으므로 다소 무리가 있더라도 북한경제를 도와주면 회담도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이관옥운영위원=북한이 핵을 보유하지 못하도록 강력하게 대처해야 한다.유엔의 경제제재를 통해 북한의 핵개발을 저지하고 북한이 핵개발을 포기하면 단계적으로 제재를 풀어줘야 한다.북한의 현실정으로는 제재를 하면 전쟁을 할 수도 없다. ▲김삼용원광대총장=국민의 기대를 의식해 김대통령이 혹시 너무 많이 양보할까봐 걱정이다.이번 회담이 김대통령의 주도로 이뤄진 만큼 원칙적이고 강력하게 대처하면 통일의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김대통령=이번에 평양에 가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키고 남북간에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다.취임 때도 선서를 했지만 평화를 지키는 것 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평화를 위한 신뢰구축을 통해 통일을 지향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정상회담을 성공시키는 힘은 국민의 단합과 성원에서 나온다.국민이 성원할때 성과를 거둘 것으로 믿는다.나는 남한의 대통령이지만 7천만 민족의 생명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최선을 다할 것을 거듭 다짐한다.
  • 백두산 호랑이 관람시간 두시간 연장(은방울)

    ○…서울대공원은 지난 1일 공개한 백두산호랑이가 낮에는 활동을 않고 저녁에만 활동이 왕성하자 4일부터 관람시간을 2시간 연장해 하오8시까지 일반에 공개. 대공원측은 장마철임에도 불구,휴일의 경우 하루 2만여명이 동물사를 찾아 백두산호랑이의 기상을 보기 위해 몰려들고 있으나 야행성인 호랑이가 거의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고 설명. 이에따라 오는 10월31일까지 백두산호랑이를 비롯,서울대공원의 동물 관람을 상오9시부터 하오8시까지 허용되나 동물들의 건강들을 우려해 야간개장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 백두산 호랑이/오늘부터 공개/서울대공원

    중국에서 온 백두산 호랑이가 1일부터 과천 서울대공원에서 일반에 공개된다. 백두산 호랑이는 오는 11월 말까지 5개월 동안 일반에게 공개된 뒤 종번식과 시험연구를 위해 광릉 야생동물원에 옮겨져 사육되게 된다.
  • 백두산 호랑이 새달부터 공개(은방울)

    ○…과천 서울대공원측은 지난 9일 한국으로 건너온 백두산 호랑이 암수한쌍을 오는 7월초부터 일반에 공개하기로 했다고. 대공원관계자는 27일 『입국이후 먹지도 않고 낯가리기를 심하게 해온 호랑이가 보름전부터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해 나가고 있다』면서 『갑작스런 일이 발생하지 않는한 다음달부터 시민들에게 공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백두산호랑이는 현재 11평 남짓한 내실에서 암수가 따로 생활하고 있는데 이는 일부다처하는 사자와는 달리 군거생활을 하지 않고 혼자 살아가는 호랑이 속성때문이라고. 대공원측은 90년생으로 몸무게가 1백52㎏인 수컷은 하루 토끼 2마리와 닭3마리씩을 먹는 왕성한 식욕을 보이고 있으며 순할 것으로 예상한 96㎏짜리 암컷은 도리어 식성이 까다로워 쇠고기를 주는 등 특별배려를 하고 있지만 이따금 선제공격자세를 취하는 등 까탈이 심하다고 귀뜀.
  • 대륙연,「안중근 기념농장」 새달 5일 기공

    ◎삼강평원 개발 “대역사 시동”/1억1천만평… 여의도의 1백30배/96년 완공,중국과 백40년 공동경영/연간 콩7만t·밀 13만t 생산… 국내도 반입 중국의 흑룡강성 삼강평원에 여의도 면적의 1백30배나 되는 대규모 농장이 우리나라와 중국의 합작에 의해 개발된다.조국의 광복을 꿈꾸며 우리의 독립투사들이 「말 달리던」 대평원에 중국 사람들과 손잡고 농사를 짓게 되는 것이다. 대륙연구소 및 대륙종합개발주식회사 장덕진 회장은 25일 기자회견을 갖고 『흑룡강성 농업개발건설 총공사와 합작으로 삼강평원에 농장을 개발하기로 합의하고 오는 7월5일 현지에서 기공식을 갖는다』고 밝혔다. 삼강평원은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한 송화강과 중국이 발원지인 흑룡강 및 우수리강 등 3개의 강이 만나 이뤄진 평원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10㎞를 달려도 지면의 높낮이 차이가 1m 밖에 안되는 대평원으로,과거 일본도 이 곳을 왕도락토라 부르며 개발을 추진하다 포기한 세계 3대 흑토지대에 속하는 비옥한 땅이다. 오는 96년 완공을 목표로 하는 삼강평원 농장의 면적은 3만8천㏊(1억1천4백만평)로 우리나라의 해외 농업투자 중 가장 큰 규모다.올해에는 1만3천㏊를 개발한다. 대륙종합개발과 흑룡강성 농업개발건설 총공사가 절반씩 투자하며 총 투자규모는 2천8백54만달러(2백28억원)다.총 투자액 중 1천8백76만달러는 차관으로 조달한다. 농장의 이름은 「안중근 기념농장」으로 정했으며,개발이 끝날 무렵엔 흑룡강성이 제공하는 대지에 안중근 기념관도 세운다. 합작기간은 중국법에 따라 우선 70년으로 하되,양측은 최소한 1백40년 이상을 공동으로 경영하기로 했다.평당 개발비는 1백67원으로 우리나라의 평당 농지 개발비인 1만5백90원의 50분의 1 정도다. 농장에는 10∼20m의 폭으로 1천4백96㎞의 배수로와 대당 25만평에 물을 줄 수 있는 최신식 원형 스프링클러가 설치된다.농장 안의 교통 및 수송을 위해 총 연장 2백41㎞의 도로와 1백20회선의 유선 및 무선 최첨단 통신설비,1천㎾ 용량의 변전소도 건설된다. 노동력은 흑룡강성에 사는 동포 45만여명과 흑룡강성 부금시 관내의 42만 인구 및 삼강평원 내 54개 기존 농장의 인력을 활용할 계획이다. 개발이 끝나면 우리나라가 거의 수입에 의존하는 콩과 밀을 재배하는데,대륙종합개발은 연간 생산량을 콩 7만t과 밀 3백93만t으로 추산하고 있다.우리나라의 수입량(92년)은 콩의 경우 1백23만1천t,밀 3백92만6천t이다. 생산량의 50%는 우리나라나 제 3국에 수출할 수 있고,농기계·비료·농약·비닐 등의 소요 자재도 우리나라에서 우선 구매한다. 대륙종합개발은 농사를 본격적으로 짓기 시작하면 차관의 원리금 상환기간(20년)에는 연간 3백2만달러,상환이 끝난 뒤에는 5백52만달러의 수익을 올릴 것으로 보고 있다.수익금은 흑룡강성 농업개발건설 총공사와 절반씩 나눈다. 이밖에도 우리 기업이 흑룡강성·요령성·길림성 등 중국의 동북 3성에 진출하는 교두보 역할을 하고,한·중간의 협력 증진에도 큰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 ◎장덕진 대육연구소회장 인터뷰/동북아경제권 형성 주춧돌역할 확신/여생바쳐 개발… 죽으면 농장에 묻힐터 『선조들의 숨결이 어려있고 삶의 터전이었던 광활한 땅이라 감회가 큽니다』대륙연구소 장덕진회장(전 농림수산부장관)은 『농장이 10년안에 동북아 경제권을 형성하는 데 주춧돌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남의 나라인데 잘 될까요. ▲가장 중요한 점은 농작물이 계획대로 생산되느냐 하는 것이고,그 다음은 중국에서의 행정적인 문제입니다.우리농장 바로 옆에 중국에서 가장 큰 「우의농장」이 있는데,지난 56년에 흐루시초프가 중국의 식량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건설한 것입니다.40년 뒤에 개발하는 우리 농장은 각종 첨단시설을 도입하는 데다 인원도 5백여명으로 훨씬 적기 때문에 생산성이 훨씬 높습니다. 또 중국은 모든 것이 법과 제도만으로 해결되는 나라가 아니지만,제가 흑룡강성 부금시의 명예시장과 경제고문을 맡고 있기 때문에 추진 과정의 문제점은 수시로 협의가 가능합니다. ­투자는 얼마나 이뤄졌습니까. ▲우리와 흑룡강성 농업개발건설 총공사가 이미 5백만달러씩 1천만달러를 출자했습니다.나머지 투자액 중 75%는 우리가 차관으로 조달하는데,이 중 1천2백만달러는 수출입은행에서 경협자금으로 5년거치 10년상환에 연리5%로 제공합니다. ­중국의 또 다른 지역에 개발할 구상은 없습니까. ▲농작물의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 흑룡강성 부금시에 오는 96년까지 대두박과 사료 및 제분공장을 세울 계획입니다.여생을 농장을 가꾸는 일에 몰두하다,죽으면 삼강평원 농장 뒤편에 마련해 둔 자리에 묻힐 생각입니다.
  • 정상회담 「7월­평양」개최 유력/언제 어디서 열릴까

    ◎남 시기­북 장소 선택 가능성/미­북 3단계회담 결과 고려,중·하순 희망/남/백두­금강산도 물망… 제3국 현실성 없어/북 역사적인 남북한 정상회담이 곧 이뤄질 것 같은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 김영삼대통령의 판단이 신속,정확한데다 북한쪽의 호응이 기대이상이기 때문이다.남은 것은 예비접촉에서 장소와 시기,그리고 의제를 정하는 일 뿐이라고도 할 수 있다.이 가운데 의제는 김일성이 아무 조건없이 만나자고 했으므로 논의의 대상이 아닌 셈이다.문제는 장소와 시기다. 오는 28일 예비접촉이 상호주의에 충실한 만남이 된다면 장소와 시기는 남북한 양쪽이 하나씩 선택하는 방향으로 절충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크다.그리고 그 절충은 시기는 우리,장소는 북한이 정하는 형식이 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정부는 장소는 북한이 정하는 어떤 곳이 되더라도 7월중 개최를 관철한다는 방침을 내부적으로 정리해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회담장소는 결국 북한의 한 곳으로 낙착될 공산이 크다.서울 판문점 한라산 제3국등은 그다지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그렇게 된다면 후보지로 얼른 떠오르는 곳은 단연 평양이다.정부는 예비접촉에서 일단 「7월·서울」을 내놓되 북한이 평양을 고집한다면 굳이 반대하지는 않는다는 방침인 것으로 전해졌다.이같은 생각의 이면에는 일단 평양에서 회담이 열리면 다음엔 서울에서 회담을 열자고 제의할 명분이 생긴다는 판단이 깔려있는 것같다.우리측의 복안은 「7월 평양,가을 서울」인 것으로 여겨진다.상호주의에 입각한 회담의 교환이다.정부는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서는 자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그래서 국가원수가 적대적인(?) 집단의 심장부를 방문하는 일이 꺼림칙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에게 전적으로 손해나는 일만도 아니다. 평양외의 후보지로는 백두산 금강산 묘향산을 생각할 수 있다.백두산은 민족의 영산이라는 상징이 크다.만남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백두산에 비해 격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금강산과 묘향산도 마찬가지다.백두산 금강산 묘향산에는 김일성의 별장이 있다.김영삼대통령은 지난달 옐친러시아대통령과의 다차정상회담처럼 평상복 차림의 자유스러운 회담 분위기를 좋아하는 스타일.편안하게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눈다는 면에서는 평양보다는 북한의 휴양지를 회담장소로 택할지 모른다.이밖에 서울과의 거리를 감안할 때 개성도 고려의 대상이지만 분단의 비극이 서려있는 곳이라 가능하면 피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장소에 비해 시기는 28일 말고도 한차례쯤 예비접촉을 더 가져야 할지도 모를 형편이어서 벌써부터 이견을 보이고 있는 부분이다.정부는 북한쪽에서 간접적으로 흘린 8월중순설에 극히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다.북한이 해마다 개최하는 이른바 「범민족대회」와 겹쳐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또 아무 조건없이 만나자고 해놓고 7월을 건너뛰어 8월까지 갈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다.회담이 8월로 늦어진다면 북한의 진실성도 의심받지 않을 수 없다.정부는 예비접촉에서 7월 중순,아무리 늦어도 7월 하순에는 회담이 개최돼야 한다는 뜻을 전달할 예정이다.7월에 회담을 열어야 가을쯤 우리쪽 장소에서 두번째 회담을 열자고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7월 초순을 피한 이유는 그때 열리는 미국과 북한의 고위급회담 결과를 참고하자는 의도다. 정부는 정상회담이 열리면 6·25문제를 우선적으로 거론할 가능성이 크다.의제에 제한이 없으므로 북한핵문제 이산가족문제등 폭넓은 현안이 논의될 것으로 보이지만 넉넉하지 못한 시간 때문에 깊이있는 대화는 어려울 전망이다.
  • 냉면육수 살균기 「크린쿨」(새상품)

    백두산업은 냉면육수 전용의 자외선 살균기 「크린쿨」을 개발,시판한다. 자외선으로 대장균 등 해로운 균을 죽이며 기존의 육수통에 붙여서 쓸 수 있다. 가격 57만원,(02)203­3286.
  • “저의 없는지”… 기대·회의 엇갈려/“남북정상회담” 정가 움직임

    ◎실무협의 시기·형식·의제 논의/정부/“경협·이산가족 교류 실현 기대”/민자/“전폭적 환영… 통일 분수령으로”/민주 ▷청와대◁ ○…김영삼대통령과 카터 전미국대통령의 오찬회동에서는 카터전대통령의 방북결과를 비롯,여러가지 의견을 교환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주돈식대변인은 남북정상회담 관련사항만 발표. 주대변인은 『북한의 김일성주석이 카터 전대통령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조건없이 김대통령을 빠른 시일안에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으며 김대통령은 즉각 이를 수락했다』고 발표. 주수석은 김대통령의 수락의사를 김주석에게 어떻게 전달할 것이냐는 질문에 『카터 전대통령이 메시지를 갖고 온 만큼 어떤 식으로든 김대통령의 확답을 전달하지 않겠느냐』면서 구체적인 언급은 회피. 주수석은 또 정상회담의 추진방법에 대해서도 『일단 김주석이 조건 없는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해 김대통령이 이를 수락한 것이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어떤 식으로 추진할지 아무런 시나리오가 없다』고 설명. 그는 남북정상회담 수락이 핵문제와 관련한북한제재에 영향을 미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대북제재는 유엔과 국제사회의 문제인 만큼 이것과는 별개의 문제로 본다』면서 『그러나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면 북한핵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않겠느냐』고 전망. 주수석은 남북정상회담 실현가능성에 대해 『속단할 수는 없지만 남북한간에 구체적인 인물이(중재자) 나서는등 지금까지의 남북정상회담 추진방법과는 다르지 않겠느냐』고 말해 남북정상회담의 실현가능성이 높음을 시사. ▷통일원◁ ○…통일원은 김일성이 카터전미대통령을 통해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북한의 종전행태로 보아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니냐』는 등 성사가능성에 대해서 대체로 회의적 반응. 통일원의 한 관계자는 이와 관련,『북한은 지난해 정상회담을 위한 특사교환을 먼저 제안하고도 나중에 갖가지 핑계를 대면서 이를 위한 실무접촉 자체를 스스로 깼다』고 상기시킨 뒤 『북한은 평화적 이미지를 과시하기 위해 대화제의를 해오다 막상 우리측이 이를 받아들이면 터무니없는 전제조건들로 장애물을 만드는 행태를 보여 왔다』면서 김일성의 정상회담 제안의 의미를 평가절하. 특히 정상회담 성사를 위한 실무접촉 전망과 관련,통일원측은 『북한측이 우리측에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과 이에 반드시 수반되는 주한미군 철수 등 이른바 4개항의 전제조건을 들고 나올 경우 현안인 정상회담 개최나 핵문제는 뒷전으로 내밀리고 공허한 입씨름만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언급. ▷외무부◁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면 대화와 제재국면의 반복으로 이어지고 있는 북한핵문제 해결의 획기적인 전기가 될 것으로 평가하고 일단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도 북한의 계산된 전략일 수도 있다고 우려. 한승주외무부장관은 이날 상오 주한미국대사관저에서 이 메시지를 가지고 온 카터 전미국대통령과 면담을 갖고 이에 대해 어렴풋이 전해들었다는 후문. 한장관은 이 자리에서 북한 김일성주석의 정상회담 제의에 대해 「이미 우리측이 제의해 놓은 상태」임을 상기시킨 뒤 『핵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면 언제 어디에서 만나도 좋다』는게 우리 정부의 방침이라고 소개했다고. 외무부는 이날 하오 한장관 주재로 간부회의를 갖고 정상회담이 성사되려면 먼저 실무협의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고 외무부 차원에서 북측에 대한 협의제의 방식,시기,정상회담의 의제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기도. 한 당국자는 『정상회담과 관련한 실무차원의 얘기들이 아이디어 차원에서 오고갔다』고 밝히고 『그러나 주된 논의내용은 제재국면에 들어서자 북한이 느닷없이 정상회담을 제의한 의도와 속셈에 대한 것이었다』고 강조. ▷민자당◁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지게 되면 그동안 지지부진하던 핵문제뿐만 아니라 경제협력,이산가족 교류등 남북간의 현안을 폭넓게 논의,남북 관계에 극적인 변화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 문정수사무총장은 『김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전향적으로 수락한 것은 지지부진한 핵문제를 포함,남북현안의 해결에 중요한 진전계기가 될 것』이라고 평가하고 『두 정상의 만남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공존체제가 이룩되어야 할 것』이라고 기대. 국회 외무통일위원장을 지낸 박정수의원은 『사교적인 만남이 아니라 문제해결을 위한 실질회담이 돼야 할 것』이라고 지적하고 『핵문제는 미국과 우리의 국가이익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과거의 핵투명성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 ▷민주당◁ ○…이기택대표는 이날 광주에서 열린 정치관계법 설명회에 참석,『남북정상회담은 민주당이 바라던 것으로 전폭 환영한다』고 밝히고 『이를 계기로 핵문제가 해결되고 더이상의 소모적인 군사대결을 탈피해 민족숙원인 통일의 분수령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 김대중아태재단이사장은 『남북정상회담을 충심으로 환영한다』면서 『남북정상이 만나면 50년동안 맺힌 과거가 청산되고 민족의 자주와 단결·통일을 위한 대로가 열릴 것으로 믿는다』고 기대감을 표시. 박지원민주당대변인도 성명을 통해 『진일보된 역사적 합의이며 새로운 대화국면의 전개』라고 규정짓고 『빠른 시일안에 남북정상회담이 실현돼 핵문제는 물론 모든 현안이 해결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적극 환영. ◎정상회담 관련 김대통령 발언록 ▲대통령취임사(93·2·25)=다른 민족과 국가사이에도 다양한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그러나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습니다.어떤 이념이나 사상도 민족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김주석이 참으로 민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그리고 남북한 동포의 진정한 화해와 통일을 원한다면,이를 논의하기 위해 우리는 언제 어디서라도 만날 수 있습니다. 따뜻한 봄날 한라산 기슭에서도 좋고,여름날 백두산 천지 못가에서도 좋습니다.거기서 가슴을 터놓고 민족의 장래를 의논해 봅시다. 그때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는 원점에 서서 모든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취임1백일기자회견(93·6·3)=우리는 핵무기를 갖고 있는 상대와는 결코 악수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두고자 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남북간의 문제는 신뢰의 회복이라고 생각합니다.이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남북간의 신뢰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핵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기 전에는 신뢰가 절대 회복될 수 없습니다.이런 문제들이 우선적으로 해결된 연후에 모든것이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취임1주년회견(94·2·25)=핵개발을 저지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이 될 때 김일성주석과의 정상회담을 추진하도록 하겠습니다. 정상회담을 하게 되면 한가지만 가지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니까요.핵문제는 물론이요 모든 문제를 다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이제 말하는 것처럼 남북한의 공존공영을 위해서,또 우리 생존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경제적인 협력문제는 물론 모든 문제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있는 많은 이야기를 할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통일에 관한 이야기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주평통다과(94·5·4)=북한이 지금이라도 핵투명성 보장을 위한 국제적인 사찰을 조건없이 수용한다면 북한 당국과 언제든지 핵문제를 포함한 남북현안문제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대화할 용의가 있다.
  • 백두산호랑이 한쌍/3시간 비행… 서울 안착

    ◎항공사,「VIP」 모셔오기 작전/수익사낀 운송팀 쾌적여행에 만전/“체력소모 할라” 먹이도 특별식 준비 9일 하오 김포공항을 통해 우리나라에 도착한 백두산 호랑이의 수송작전이 성공리에 끝났다. 55년과 77년 백두산에서 생포된 호랑이의 3∼4세로 알려진 이 호랑이들은 그동안 중국 흑룡강성 목단강시 동물원에서 사육되다 고향으로 돌아왔다. 호랑이 수송을 맡은 아시아나항공측은 백두산 호랑이가 멸종위기에 놓인 희귀동물인데다 대통령의 중국방문기념선물이라는 점을 감안,특별수송작전을 펼쳤다. 아시아나 운송부 김철성과장(37)과 산림청 직원 2명은 지난 5일 미리 중국으로 가 중국 사육사 3명과 합류해 호랑이를 천진비행장에서 태워 김포공항에 내릴때까지 세심하게 보살폈다. 호랑이들을 수송하기 위해 특수 철제우리가 제작됐고 장시간의 비행기 여행에 따른 체력소모에 대비해 특별히 준비한 먹이도 주어졌다. 수송요원들이 가장 신경을 썼던 부분은 셰퍼드개 두세마리와 맞먹을 정도로 산소소모량이 많은 호랑이가 질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를 위해 호랑이들을 앞쪽보다 공기순환이 잘되는 기체 뒤쪽 화물실에 싣고 이륙직전까지 화물실문을 열어두어 공기공급시간을 늘렸다. 또 호랑이가 탄 화물실에는 다른 화물은 싣지 않았다. 호랑이머리는 항공기가 날아가는 방향을 향하도록 했고 기생충과 벌레가 생기지 않도록 우리에 볏짚을 까는 것도 금지했다. 이와 함께 화물실 조명을 어둡게 했으며 온도를 18도로 유지되게 하는등 호랑이의 「쾌적한 환경」을 위해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썼다. 수컷이 3년9개월,암컷이 2년7개월된 호랑이들은 서울대공원에서 우리 사육사와 함께 내한한 중국사육사 3명에 의해 건강상태점검과 적응훈련을 받게된다. 호랑이들은 서울대공원에서 오는 7월초부터 11월말까지 일반에 공개된뒤 경기도 광릉수목원내 야생동물원에 보금자리를 꾸미고 후손들을 낳아 기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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