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백기완
    2025-12-31
    검색기록 지우기
  • 파스타
    2025-12-31
    검색기록 지우기
  • 크루즈
    2025-12-31
    검색기록 지우기
  • 윤미향
    2025-12-31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302
  • 임을 위한 행진곡 주인공은 누구?...윤상원과 박기순

    임을 위한 행진곡 주인공은 누구?...윤상원과 박기순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9년만에 제창된다. 9년만에 제창되는 이 노래와 노랫말에 얽힌 사연이 다사 주목받고 있다. 광주에 대한 무력 ‘침공’이 시작된 1980년 5월 27일 새벽 3시쯤. 31살의 청년 윤상원이 광주 전남도청에서 피맺힌 연설을 한다. 그는 시민투쟁위원회 대변인으로 활동하다 전남도청에서 사망했다고 ‘윤상원 평전’ 등이 전한다.이후 그는 ‘임을 위한 행진곡’에서 ‘임’으로 돌아온다. 이 ‘임’ 에는 윤씨를 포함해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다 1978년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한 박기순씨도 있다. 박씨의 장례식에서 소설가 황석영씨가 조사를 읽고 가수 김민기가 “상록수를 부르면서 추모했다. 윤씨는 당시 박씨의 권유로 들불야학 교사로 참여했다가 광주민주화운동에 투신했다. 1981년 소설가 황석영씨는 전두환 정권의 감시를 피해 자택에서 김종률, 전용호, 오정묵 등 광주지역 문화예술인 10여 명과 함께 윤씨와 박씨의 영혼을 기리고, 오월 항쟁을 추모하는 노래를 만들 것을 제안한다. 이후 황씨는 시민사회운동가 백기완씨의 옥중 시 ‘묏비나리’의 일부를 차용해 가사를 썼고, 당시 전남대 학생이던 김종률씨가 작곡해 완성했다. 이듬해 2월 20일 광주 망월동 묘지에서 윤씨와 박씨의 영혼결혼식이 열린다. 이들은 ‘넋풀이’ (노래굿)로 그동안 숨죽여 만들고 녹음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그후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0년대 대학가를 통해 널리 퍼졌다. 임을 위한 행진곡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씨줄날줄] 임을 위한 행진곡/최용규 논설위원

    [씨줄날줄] 임을 위한 행진곡/최용규 논설위원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이라면 최루탄이 난무하는 교정 안팎에서 수없이 불렀거나 들었던 노래가 있다. 생면부지인 사람과 거리낌 없이 어깨를 걸게 했고, 강의실이나 도서관에 앉아 있으면 마음 편치 않게 했던 그 노래.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젊은이들이 목청껏 불렀던 1분짜리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이처럼 임을 위한 행진곡은 당시 군부독재정권의 탄압과 억압에 저항하는 운동가요의 상징이었으나 출발은 슬픈 진혼곡이었다. 1982년 2월 20일 광주 옛 망월동 5·18 묘역에서는 신랑과 신부가 죽고 없는 영혼 결혼식이 열린다. 신부는 1978년 광주에 들불야학을 창립하고 낮엔 노동자로, 밤엔 야학교사로 활동하다가 그해 12월 연탄가스에 짧은 생을 마감한 박기순(당시 23세)씨. 신랑은 박씨의 권유로 들불야학 교사로 참여했다가 1980년 5월 계엄군의 광주 유린 때 시민투쟁위원회 대변인으로 활동하다가 5월 17일 새벽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의 총에 맞아 숨진 윤상원(당시 30세)씨. 박씨의 황망한 죽음을 접한 윤씨는 안타까운 심정을 절절한 시 한 편에 담아 일기장에 고이 간직했다. “불꽃처럼 살다간 누이여/왜 말없이 눈을 감고만 있는가/훨훨 타는 그 불꽃 속에 기순이의 넋은 한 송이 꽃이 되어/늘 서럽도록 아름다웠지” 1981년 윤상원과 박기순의 영혼 결혼식 소문이 돌자 그해 4월 소설가 황석영씨 집에 광주 지역 문화운동패 10여명이 모여 이 둘의 넋을 풀어 줄 노래를 만든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980년 말 서대문형무소 투옥 당시 썼던 ‘묏미나리’를 차용해 황석영씨가 가사를 썼고, 당시 전남대 학생이던 김종률씨가 곡을 붙였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30분짜리 노래극 ‘넋풀이-빛의 결혼식’에 마지막으로 삽입된 합창곡이다. 이후 이 노래는 민주화운동 진영에 빠르게 전파됐고, 1997년 5·18이 국가기념일로 승격되면서 5·18 넋풀이 노래로 채택돼 제창됐다. 좌파의 대표곡쯤 되고 우파가 싫어하는 이 노래를 둘러싸고 갈등도 심했다. 2009년 국가보훈처는 5?18 기념식에서 제창을 금하고 합창만 허가했다. 합창은 합창단만 부르면 되지만 제창은 참석자들이 다 불러야 한다. 오늘 역대 최대 규모의 5·18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지시로 이 노래가 제창된다. 제창을 통해 보수가 진보에 손을 내밀고 진보가 보수를 껴안는 대통합의 모습을 보고 싶다. 최용규 논설위원
  • [문화마당] 오늘도 5월 18일입니다/김민정 시인

    [문화마당] 오늘도 5월 18일입니다/김민정 시인

    오늘은 5월 18일입니다.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입니다. 1980년 봄의 일입니다. 그런데 어쩜 이렇게나 모를 수가 있었을까, 고등학교 1학년 때인 1992년 대학가 풍물패에 끼어 장구를 배우다가 대학생 오빠가 보여 준 몇 장의 흑백사진에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사람끼리인데 사람이 사람에게 맞는 사진이었기 때문입니다. 전우의 시체도 아닌데 사람이 시신으로 줄줄이 누워 있던 사진이었기 때문입니다. 육이오도 아닌데 군복 입은 사람들과 탱크에 탄 사람들이 총을 들고 있는 사진이었기 때문입니다. 아 이게 다 뭔가요. 그리고 이어지는 진실. 연이어 배우게 된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 “5·18 광주민주화운동 중 희생된 윤상원과 노동운동가 박기순의 영혼 결혼식을 위하여 1981년 작곡된 노래. 가사의 원작자는 백기완, 작곡자는 김종률. 가사의 원작자인 백기완은 1998년 나는 이 노래에 대한 소유권도 저작권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미 이 땅에서 새날을 기원하는 모든 민중의 소유가 됐기 때문이라며 저작권 불행사 입장을 밝힘.” 2017년 위키백과가 정의해 주는 이 노래.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3집 카세트테이프에 담겨 있던 이 노래를 고등학교 정문 맞은편 버스 정류장 뒤에 자리했던 레코드 가게에서 샀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 그때는 ‘임’이 아니라 ‘님’이었고, 들을수록 가락에 한이 서린 듯해 절로 외워지는 데다 비통을 호소하고 복수를 다짐하게 만드는 듯해 입시 지옥의 자율학습 시간 내내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들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대학에 들어가 선배들과 술자리에서 자주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손에 박자를 담아 단단한 망치질 같은 허공중의 호소로 그들이 선창할 때 나는 이상하게도 노래는 되는데 손이 따라지지 않아 어색한 상황을 몇 번이고 맞닥뜨리고 말았습니다. 이 순간에 나는 왜 쭈뼛거리는가, 나는 왜 전두환의 턱주가리를 쳐올리는 심정으로 굳세게 주먹을 내지르라는 선배들의 말에 망설이는가, 나는 왜 볼이 빨개져서는 소심하게 오므려 쥔 손으로 시늉이나 하다 팔을 내려 버리는가. 그에 대한 해답을 근 20년 만에 얻게 된 것은 바로 이 한 권의 기록으로 말미암아서였습니다. 광주에서 에세이스트이자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문선희씨의 ‘묻고, 묻지 못하는 이야기’라는 책에서 그날의 총알 자국을 여전히 간직한 광주 곳곳의 벽 사진과 더불어 이런 증언을 여러 번 듣게 된 연유에서였습니다. 무엇보다 어린이의 말, 짠다고 해도 짤 수가 없는 진실의 말. “날이 더운데 할머니가 어디선가 솜이불을 해 오셨어요. 총알이 솜이불을 못 뚫는다고요. 옛날 집들은 담이 낮아서 총알이 집 안으로 쉽게 들어올 수 있었거든요.”(김이강, 1980년, 12세) 골목골목 총알이 스쳐 간 그날의 진실을 품고 있는 갈라진 벽. 그 총알을 피하기 위해 집집마다 다급하게 못으로 박아 걸었을 솜이불. 그러니까 내가 5월 광주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겁니다. 내가 다 알지 못하니까 자신이 없으니까 움츠러들었던 겁니다. 깊이 알면 적극적이었을 몸이 얕게 안다 싶으니까 소극적으로 반응하고 말았던 겁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한 물줄기로 흐르는 것이 역사입니다. 역사를 다룬 드라마의 리바이벌이 왜 계속되는가 하면 죽어도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방증이 아닐까요. 전두환 전 대통령님, 5월 18일인데 오늘밤 잠 좀 주무실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저는 오늘밤 꿈자리가 편치는 마시라 주술을 건 주문이나 외워 볼 참입니다만.
  • [문재인 대통령 시대] “사랑도 명예도~” 9년 만에 다시 ‘떼창’한다

    백기완 시에 황석영 가사 ‘대표 민중가요’…2009년 제청서 빠졌다가 이번에 ‘재복권’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교정에서건 거리에서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사랑도~’를 선창하면 이내 모든 이들이 떼창(제창)으로 화답하며 어깨를 걸던 시절이 있었다. 노래의 기원은 애절하다 못해 슬프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동하다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에 사살된 고 윤상원씨와 광주의 노동 현장에서 ‘들불야학’을 운영하다 사망한 노동운동가 고 박기순씨의 영혼결혼식에 헌정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백기완씨의 옥중 장편시 ‘묏비나리’의 일부를 차용해 소설가 황석영씨가 가사를 완성했고, 전남대 학생이던 음악인 김종률씨가 곡을 붙여 1981년 노래극 ‘넋풀이-빛의 결혼식’에 삽입됐다. 일반에는 1982년 2월 윤씨와 박씨의 유해를 광주 망월동 공동묘지(현 국립5·18민주묘지)에 합장하면서 영혼결혼식을 거행할 때 처음 공개됐다. 이후 대표적인 민중가요, 운동가요로 자리잡았다. 매년 5·18 추모행사에서 유족과 시민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했다. 1차 ‘복권’은 5·18이 국가기념일로 승격돼 정부 주관으로 첫 기념식이 열린 1997년 이뤄졌다. 이때부터 2008년까지 정부 주관 기념식에서 공식 식순에 포함돼 제창됐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9년 기념식부터 제창 식순이 빠졌다. 반발이 이어지자 2011년 기념식부터는 합창단이 부르고 원하는 참석자가 따라부르는 합창 방식으로 바뀌었다. 2013년 박승춘 당시 국가보훈처장은 별도의 기념곡 제정을 추진한다고 밝혀 거센 반발을 자초하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2호 업무지시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9년 만에 이번 5·18 기념식부터 또다시 모든 이들이 제창할 수 있게 됐다. 박홍환 전문기자 stinger@seoul.co.kr
  • ‘임을 위한 행진곡’ 작곡가 “이제야 역사가 순리대로”

    ‘임을 위한 행진곡’ 작곡가 “이제야 역사가 순리대로”

    문재인 대통령이 오는 18일 열리는 제37주년 5·18 기념식에서 ‘님(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님을 위한 행진곡’ 작곡가인 김종률(59)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은 12일 “이제야 역사가 순리대로 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고위층도 이 노래가 어떻게 만들어졌을지 잘 알 것”이라며 “기념식 제창을 막으며 5·18 정신 자체를 덮으려 한 것 같다”고 전했다. 김 사무처장은 “정부가 지난 9년간 공식 기념식 제창을 배제함으로써 5·18 정신이 담긴 곡을 부인하고 억압하다가 다시 인정했다”며 “법적인 손질을 거쳐 공식 기념곡 지정도 곧 될 것”이라는 기대를 표했다.님을 위한 행진곡은 5·18 기념일이 정부 기념일로 지정된 1997년부터 기념식에서 제창됐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 2년차였던 2009년 국가보훈처는 국론분열 우려를 이유로 합창단의 공연에 맞춰 원하는 참석자만 따라 부르는 합창 형식으로 부르게 했다. 김 사무처장은 “당시 정부가 박승춘 전 보훈처장을 앞세워 ‘님’이 김일성이고 ‘새날’은 북한 주도로 적화통일되는 날이라는 일부 극우보수논객의 주장을 상당수 여론인 양 호도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작사가 황석영씨의 방북 이력과 이 노래가 북한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의 배경음악으로 쓰인 점을 토대로 이 노래를 북한 및 반정권 단체 관련 곡으로 치부하려 했다고 말했다. ‘님을 위한 행진곡’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980년 서빙고 보안사에서 고문당할 때 쓴 시 ‘묏비나리’에서 유래했다. 소설가 황석영씨가 ‘묏비나리’를 개작해 만든 가사에 당시 전남대생이던 김종률 사무처장이 곡을 붙였고 1982년 완성됐다. 김 사무처장은 “노래를 만들고 9∼10년 지나 황석영씨가 북한에 갔고 윤희상씨가 제 곡을 허락 없이 북한 영화에 차용했던 모양”이라며 “북한에서 마음대로 노래를 사용한 것을 놓고 북한 찬양곡이라고 하면 ‘아리랑’, ‘우리의 소원’도 종북 노래인가”라고 꼬집었다. 그는 “곡을 직접 작곡한 사람으로서 ‘님을 위한 행진곡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노래이자 5·18 희생자들을 기리는 노래”라고 강조했다.김 사무처장은 앞으로 ‘님을 위한 행진곡’이 박제된 예술로 그치지 않고 살아 있는 생활 속 예술로 자리 잡도록 여러 장르로 발전시켜나가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님을 위한 행진곡’을 클래식 교향곡으로 만들고 몇 년 전부터 기획 중인 ‘님을 위한 행진곡’을 주제로 한 뮤지컬의 전 세계 공연도 준비 중이다. 김 사무처장은 “지난 정권 때부터 계획을 세워 추진 중이다. 예산 2억∼3억원을 투입해 내년 기념식 또는 그 이전에 클래식 교향곡 초연 공연을 하는 것이 1차 목표”라며 “프랑스 혁명을 주제로 한 레미제라블과 같은 뮤지컬도 만들어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많은 시민과 공유하고 싶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기고] 2018 평창 겨울올림픽 ‘아리아리’/이건범 사단법인 한글문화연대 대표

    [기고] 2018 평창 겨울올림픽 ‘아리아리’/이건범 사단법인 한글문화연대 대표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조직위원회에서 서로 힘을 북돋우며 주고받을 인사말로 “아리아리”를 골랐다. ‘파이팅’이라는 정체 모를 영어 구호 대신에 이 아리땁고 여운이 길게 남는 우리말을 쓰겠단다. 멋진 결정이다. 국립국어원에서 2004년에 ‘파이팅’의 순화어로 ‘아자’를 권장해 방송에서 제법 사용되는 편이지만, 최근 젊은이들 사이에서 빠르게 힘을 얻어 가는 ‘아리아리’가 ‘아자아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외국인들에게 적대감을 부추기는 ‘파이팅’ 말고 다른 말을 쓰자는 이야기가 나온 지는 꽤 오래된 일. 그 가운데서도 통일문제연구소 백기완 소장이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제안한 ‘아리아리’는 단연 돋보였다. 그는 ‘아리아리’가 ‘없는 길을 찾아가거나, 길이 없을 때는 길을 낸다’는 뜻의 우리말이라며, “정선 아리랑 등 각종 아리랑에 ‘아리아리’의 길 찾아간다는 의미가 녹아 있다”고 말했다. 세상의 굽이굽이 온갖 위험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긴 안목으로 호방하게 길 나서는 느낌이 물씬 묻어난다. 시인 성기완 교수의 풀이는 조금 더 자세하다. 광개토대왕비에서 한강을 이르는 ‘아리수’의 ‘아리’는 ‘크다’는 뜻의 옛 우리말이고, 박혁거세 신화에서 보듯이 ‘알’은 ‘기원, 생기다’라는 뜻이니, ‘아리’는 기원이 되는 큰 존재인 셈이다. 그래서 깨끗하고 성스럽고 큰 기원에서 비롯한 됨됨이를 ‘아리따움’이라고 한단다. 크고 아름다운 태양을 보면 눈이 아린데, ‘으리으리하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여기서 ‘아리다’는 ‘눈이 아프다, 눈이 부시도록 휘황찬란하다’는 뜻을 함께 가지고 있다. 결국 ‘아리아리’는 아픔 속에서도 크고 아름다운 나의 비롯됨을 찾아가는 신명의 표현인 것이다. 잊혀져 가는 옛말을 되살리거나 새말을 만들어 사용하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낯설고 새로운 것은 과거의 권위와 주위의 눈치 때문에 쉽사리 매력을 드러내기 어려워서다. 그래서 외국의 힘을 등에 업은 영어, 전통의 권위를 누리는 어려운 한자어가 손쉽게 우리 말살이를 지배한다. 하지만 이런 말살이에서는 소통과 문화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영어 낱말은 자신이 전 세계에서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뽐내려 할 때, 빈약한 내용과 성능에 화장발을 내고자 할 때 자주 쓰인다. 뒤처지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려면 울며 겨자 먹기로 영어 낱말을 써야 한다. 공공 영역에서는 국민의 알 권리를 침해하고 학력이나 외국어 능력의 차이에 따라 국민을 차별하기까지 한다. 최근 대선 후보들 사이에서 논란이 된 ‘3D 프린터’와 같은 전문용어를 먼저 쉬운 말로 바꾸지 않으니 사정이 더 나빠진다. 이에 비해 기성세대가 세대 사이 소통을 가로막는다고 걱정하는 ‘새말 홍수’ 속에는 ‘아리아리’처럼 비옥한 땅을 약속하는 양분도 섞여 있다. 잘 만든 새말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쓸데없이 외국어를 쓰는 세태와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하나 된 열정’을 구호로 내건 평창이 ‘아리아리’를 고른 것이야말로 열정의 속살에 용기가 배어 있음을 보여 준다. 평창, 아리아리!
  • [서울포토] 고 백남기 농민 빈소

    [서울포토] 고 백남기 농민 빈소

    26일 오전 고 백남기 농민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에서 백기완선생이 조문을 한 후 유가족을 위로 하고 있다. 2016. 09. 26 최해국 선임기자 seaworld@seoul.co.kr
  • [서울포토] ‘손에 손 잡고’… 제1243차 정기 수요 시위

    [서울포토] ‘손에 손 잡고’… 제1243차 정기 수요 시위

    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4차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세계연대집회 및 제1243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수요시위에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양향자 더불어민주당 광주서을 지역위원장이 참석해 김복동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있다. 박윤슬 기자 seul@seoul.co.kr
  • [포토 다큐] 거리 나온 비정규직의 ‘꿀잠’을 위하여 ‘지붕이 될게요 그늘이 될게요’

    [포토 다큐] 거리 나온 비정규직의 ‘꿀잠’을 위하여 ‘지붕이 될게요 그늘이 될게요’

    ‘꿀잠’ 어학사전에 “아주 달게 자는 잠”이라 정의돼 있다. 맛 중 가장 매력적인 단맛을 빌려 표현할 정도로 사람이 포기하기 어려운 삶의 조건이다. 이런 꿀잠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비정규 노동자.’ 어학사전에 비정규 노동자는 정의돼 있지 않다. 검색창에 ‘비정규노동자’라고 입력하면 ‘비정규’와 ‘노동자’ 두 단어가 각각 따로 나온다. ‘비정규’는 “정식으로 규정되지 않은 것”이라 정의돼 있다. 정리하면 노동자로 정식 규정돼 있지 않은 사람들이 비정규 노동자다. 이들은 정식으로 규정돼 있지 않다는 이유로 기본적 노동권조차 쉽게 침해받고 존중받지 못한다. 노동권을 지키자면 다른 방법이 없다. 어쩔 수 없이 ‘꿀잠’을 포기하고 거리에서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낮에는 지나는 이들의 어색한 눈길을 견디고 밤에는 추위와 더위 그리고 도시의 소음을 견디며 간신히 거리에서 버티고 있다. 서울 광화문에서 멀지 않은 대기업 빌딩 앞에 작은 비닐 움집이 있다. 걸쳐 있는 낡은 현수막이 지난한 시간을 말해 주고 있다. 위장도급 판정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해고된 삼척 동양시멘트 노동자의 500일 된 길거리 집이다. 2명이 눕기도 어려운 공간에 모기장, 빨래 등 살림살이가 어지럽게 있다. 늦은 밤 어두운 움집 안에서 휴대전화 속 가족사진을 보며 잠을 청하던 노동자는 “노숙 투쟁을 하려면 어쩔 수 없이 새벽과 늦은 밤 사람이 없을 때 근처 공중화장실에서 아주 살짝 씻어요. 그때는 정말로 외롭고 힘들고 서러워 많이 웁니다”라며 허탈하게 웃는다.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일하는 비정규 노동자도 있다. 시간에 쫓겨 사발면을 가방에 넣고 다니며 일하다 지하철 안전문에 끼여 허무하게 짧은 삶을 마감한 청춘, 운전석에 앉아 김밥으로 끼니를 때울 수밖에 없는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다 해고당한 늙은 노동자가 그들이다. 이들은 고통의 일터에서도 인간적 품위를 지키기 어렵지만 그 처지를 알리려는 거리에서도 어렵다. 찬 바닥에서, 굴뚝 위에서 비정규 노동자들이 간신히 버티고 있다. 잠시 몸을 누일 곳, 깨끗이 몸을 씻을 곳, 따뜻한 밥 한 끼 나눌 곳, 아픈 데 치료받을 곳, 법률 지원과 인권 상담을 받으며 사람으로서의 품위를 지킬 수 있는 집 한 채가 절실하다. 그래서 비정규 노동자의 집 ‘꿀잠’을 짓기 위해 사람들이 모였다. 지난해 여름 시작한 모금에 시민, 학생, 노동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여기에 벽돌 한 장 보탠다는 마음으로 붓글씨와 새김판(서각)을 내놓은 백기완 선생과 문정현 신부의 ‘두 어른’ 전도 열리고 있다. 그러나 서울의 비싼 집값을 감당하기엔 아직 갈 길이 멀다. “함께 올바르게 잘사는 노나메기 세상을 향한 몸짓으로 많은 사람들이 힘을 모으고 있지만 겨우 목표액 30% 정도 달성했습니다. 연말까지 집을 지을 수 있도록 뛰어다녀야죠”라며 건립추진위 활동가는 모금 계좌가 적힌 선전물을 챙긴다 강성남 선임기자 snk@seoul.co.kr
  • 유홍준이 말한 ‘한국의 체 게바라’ 시인 김남주에 얽힌 실화

    유홍준이 말한 ‘한국의 체 게바라’ 시인 김남주에 얽힌 실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작가이자 소설가 황석영, 방동규(방배추), 백기완을 ‘한국 3대 구라’로 알린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특유의 구수한 목소리로 지난 5일 광주아시아문화전당에서 지인들에게 ‘가장 광주다운 사람 중 시인 김남주’(1946~1994)와 얽힌 실화를 짧게 소개해 박수를 받았다. 이날 광주에는 최열 환경운동재단 이사장과 이미경 전 국회의원, 화가 임옥상 등 10여명이 방문했다. 다음은 강연 내용을 최소한의 수정을 거쳐 옮겨 놓은 것이다.  ●김남주 ‘해방둥이’ 주장과 ‘좆 돼 버렸네’에 얽힌 일화  “광주일고를 나온 김남주 그 자식이 자기가 ‘해방둥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자식이 해방둥이일 수가 없다. 해방둥이가 멋있어서 해방둥이라고 하고 다녔다. 이 김남주가 가장 많이 쓴 문장이 ‘좆 돼 버렸어’다.  남주가 ‘동물농장’에 나올 법한 친구들과 영화 ‘닥터 지바고’(1965년 개봉)를 보러 갔다. ‘닥터 지바고’에 소냐와 라라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지바고가 아주 고결하게 사는 것 같으면서 갑자기 라라하고의 베드신이 확 나온다고, 그래서 (주변에서) 한번 가 보라고 해서 간 거다. 화면이 확 바뀌니까 김남주가 ‘얼레!’ 했다. 극장 안이 웃음바다가 됐다. 닥터 지바고 코에 고드름이 막열리는데 사랑의 테마가 막 나오니까 김남주가 “좆 돼 버렸네’ 했다가 극장에서 쫓겨났다.  나중에 남주가 ‘남민전’ 한다고 하다가 징역 7년을 살았다. 그때 법정에서 최후 진술을 하는데, ‘한마디로 좆 돼 버렸어야’라고 했다. 진짜다.”  ●‘김남주 귀신’ 떼내려고 김금화 큰무당 굿한 시인 이시영  “내가 답사기 한창 잘나가고 있고 시인 이시영이 창비 주간을 하고 있을 때다. 이시영이 잠을 못 자서 얼굴이 반쪽이 됐다. 매일 꿈 속에 남주가 나타나서 ‘어이 남주’ 하면 없어지고 해서 일어나면 식은땀이 나 잠에서 깨고 했단다.  당시 소설가 송기원(1947년 생))하고 김남주(1946년 생)하고 이시영(1949년 생)하고 다들 나이 차가 있어도 다 반말을 하는데 남도 작가들의 그 끈끈함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이시영이 송기원한테 ‘남주가 너한테는 찾아오지 않느냐’고 했더니, 송기원이가 ‘나한테 오면 먹을 것이 없어서’라고 했단다.  일주일 뒤에 소설가 윤정모가 이시영을 보면서 ‘왜 이렇게 반쪽이 됐냐”라고 물었다. 이시영이가 ‘그 남주란 놈이 죽고 나서 매일 밤 찾아온다’고 했다. 윤정모가 ‘너, 그거 귀신 씐 거다. 귀신 쫓는 데는 김금화(인간문화재) 할머니가 최고인데, 이경자가 김금화 할머니 자서전을 쓰니까 이경자에게 이야기해서 굿해야 한다’고 하더라.  그때 굿하면 밴드 쓰고 해서 1000만원 드는데, ‘너는 민주 인사니까 재료비하고 인건비하고 50만원에 하자’고 했단다. 올 때 일주일간 벗지 않는 빤스 러닝 가지고 오라고 주문했다.  이시영은 죄인으로 엎드려 있고, ‘네 귀신이 어느 귀신이냐 ’고 김금화 선생이 춤추고 빤스 가지고 막 휘두르고 하면서 굿하는데 어느 순간에 ‘시영아~’ 하는데 남주 목소리더란다.”  ●“어이 남주, 송기원이나 만나고 가지”  “남주가 ‘나 때문에 고생했지’ 하고 옆에서 윤정모가 이시영에게 잘못했다고 절하라고 하고 하는 거다. 남주가 ‘내가 떠나면서 연락처를 놓고 와서 매일 밤 너를 찾아갔다. 연락이 됐다가 또 안되고 해서’ 그렇다고 했단다.  남주가 ‘나 아직 저승에 안 갔다. 나 민족 통일될 때까지 안갈라고 한다’하니까 이시영이 ‘죽겠다. 민족통일이 언제 되는데” 그랬다’ 남주가 부탁도 했다. ‘내 묘소를 옮겨 달라. 내 밑에 둘이 있다. 미안해 죽겠다’고 했단다. 남주가 5.18묘소에 비집고 들어갔는데, 그리 됐다. 나중에 그 부인 등이 옮기려고 했는데 결국 못 옮겼다.  김금화 선생이 또 춤추자 남주가 말하길 ‘시영아 고맙다. 너뿐이 없다. 네가 차려 줘서 잘 먹고 간다. 나 춥고 굶주렸는데 너라도 있어서 먹고 간다’고 했다. 여기서 윤정모가 ‘간대잖아. 붙들어서 노잣돈 줘야지’ 했단다.  그런데 이시영이 생각에는 ‘간다고 하면 빨리 가면 좋은데, 왜 붙잡아’라고 생각이 들었단다. 그러다가 ‘어이 남주 그러지 말고 송기원이나 만나고 가지 그래’라고 했단다. 그날 창비에서 송기원을 만난 이시영이 ‘어이, 남주가 안 찾아왔댜?’라고 물었다.  이렇게 끈끈한 남도 작가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다큐멘터리로 남길까 생각하고 있다. 이거 실화다.”  ●굿한 뒤로 김남주는 왜 ‘개띠’로 확정됐나  “그 뒤에 꿈에 남주가 나타나더니 ‘고맙다. 네가 차려 줘 잘 먹고 간다’고 했다. 그러더니 남주가 사라지니까 개 한 마리가 확 지나가더랜다. 이시영이가 ‘거봐, 그 새끼 개띠라고. 46년 개띠인데 45년 닭띠라고 했다고. 늘 해방둥이라고 했다’고 했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5·18은 국민행사인데… 정통성 논란 노래로 국론 분열 안된다”

    “5·18은 국민행사인데… 정통성 논란 노래로 국론 분열 안된다”

    보수단체 ‘임’ ‘새날’ 가사 北과 연결… 野·시민단체 “종북 논란은 어불성설” 보훈처 “기념일·노래명 다르면 합창 관례”… 일각 “유가족 배려 부족한 소극 대응” 16일 국가보훈처는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의 합창 방식을 고수한 근거로 이 노래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한다는 논란이 남아 있고 모두가 부르도록 강요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입장을 제시했다. 5·18이 광주 시민만의 행사가 아니라 전 국민을 대표하는 정부의 기념행사이기 때문에 국민적 갈등 소지를 차단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라는 뜻이다. 5·18 기념식이 1997년 정부 기념일로 지정된 이후 이명박 정부 임기 첫해인 2008년까지 모든 참석자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는 방식이 유지됐다. 하지만 2008년 기념식 직후 보수적인 보훈·안보단체에서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노래”라며 문제를 제기해 2009년부터 합창단이 부르는 합창으로 대체됐다. 광복회, 6·25 참전자회, 재향군인회 등 12개 단체들은 현재까지도 제창에 반대하고 있다. 이들 단체는 북한이 1991년 5·18을 소재로 제작한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의 배경음악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사용했고 노래 제목과 가사 내용에 나오는 ‘임’과 ‘새날’이 각각 김일성과 사회주의 혁명을 의미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야당과 찬성 측 시민 단체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이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시를 원작으로 하며, 1980년 5·18 당시 광주시민군의 일원으로 활동하던 윤상원과 노동운동가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위해 1982년부터 불려진 노래이기 때문에 종북 논란은 어불성설이라는 입장이다. 무엇보다 5·18 민주화 운동의 정신과 역사를 담은 상징적 노래이기 때문에 ‘국민 통합 저해’라는 논리는 5·18 정신을 폄훼하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합창단이 부르는 합창(合唱)과 참석자 모두가 노래하는 제창(齊唱)은 미묘한 차이가 있다. 합창단이 부를 때 참석자들이 따라 부르지 않는다 해도 어색할 것은 없다. 반면 제창을 하게 되면 따라부르지 않는 게 이상하게 된다. 2004년 5·18 기념식 때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이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유족들과 제창한 모습이 전국에 생중계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최정식 보훈처 홍보팀장은 “정부 기념행사는 국민 통합을 위해 각계각층이 참석해 원만하게 행사가 진행될 수 있도록 추진하는 것이 보훈처의 역할”이라고 했다. 이어 “대통령께서 국론 분열을 막을 수 있는 좋은 방안을 논의해보라고 하셨고 이에 따라 지난 3일 동안 수많은 논의를 거친 것”이라고 이번 결정에 청와대의 지침이 있었다는 일각의 의혹을 부인했다. 또한 보훈처는 정부 기념식에서는 기념일과 동일한 제목의 노래는 제창하고 동일한 제목이 아닌 노래는 합창한다는 것이 관례라고도 했다. 하지만 이 같은 결정은 가장 큰 희생자인 유가족들의 입장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소극적 대응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보훈처 관계자는 이에 대해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고 정치권에서 제시하면 적극 지원하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씨줄날줄] ‘임을 위한 행진곡’과 윤상원/임창용 논설위원

    [씨줄날줄] ‘임을 위한 행진곡’과 윤상원/임창용 논설위원

    노동운동이나 민주화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임을 위한 행진곡’은 성가(聖歌)에 가깝다. 특히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세대에겐 더 각별할 듯싶다. 집회 현장에서 따라 부르다 보면 비장함과 결연함이 고조되면서 뭔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될 듯한 분위기에 사로잡히곤 했다. 이 때문에 수많은 민중가요 중에서도 독보적일 정도로 자주 불렸고 소리도 가장 우렁찼다. 5·18광주민주화운동과 임을 위한 행진곡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통하는 윤상원 열사의 영혼결혼식을 위한 노래이기 때문이다. 윤상원은 1980년 5월 항쟁 당시 마지막까지 총을 들고 싸우다 27일 새벽 계엄군에 의해 사살됐다. 당시 국내 언론이 눈감고 있을 때 광주의 학살극 현장이 외신을 탄 데는 시민군 대변인이던 그의 역할이 컸다. 미국 일간지 ‘볼티모어 선’ 마틴 브래들리 기자는 그해 5월 28일자 기사에서 26일 밤 마지막 그의 모습을 인상 깊게 묘사했다. 윤상원은 계엄군 진입이 임박한 가운데 총을 달라는 고등학생들에게 “우리들이 싸울 테니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들은 역사의 증인이 돼야 한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브래들리 기자는 ‘세계 어느 무장조직에서도 볼 수 없었던 생명을 귀중히 여기는 진정한 투사의 진면목을 보았다’고 회고한 바 있다. 윤상원은 전남대 졸업 후 서울에서 은행원이 됐으나 그만두고 광주로 내려가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광주 광천공단 야학인 ‘들불야학’에 참여했고, 그때 만난 이가 영혼결혼식 상대인 박기순이다. 전남대 휴학 중이었던 그녀는 광주 지역 노동운동의 토대를 닦겠다며 공단에 위장 취업해 들불야학을 연 당찬 여학생이었다. 하지만 연탄가스 중독으로 78년 12월 세상을 뜬다. 당시 윤상원은 일기장에 “불꽃처럼 살다 간 누이여…아무리 쳐다보아도 넌 아직 살아 있을 뿐이다…”라며 애끓는 추모의 마음을 표현했다. 5·18 당시 살아남은 후배들과 유족들은 2년 뒤 민주화를 향한 두 사람의 애타는 마음을 기리고자 혼례의 예식을 마련했다. 이때 영혼결혼식을 위한 노래굿 ‘넋풀이’가 만들어졌고, 그 마지막 소품에 소설가 황석영씨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옥중 시 ‘묏비나리’의 일부를 차용해 노랫말을 붙였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그렇게 탄생했고, 80년대 이후 노도와 같은 민주화투쟁 현장에 항상 있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모레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장에서 제창될지 관심이 모이고 있다. 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이 3당 원내대표들과 만나 “국론 분열이 되지 않는 좋은 방안을 찾도록 하겠다”고 말한 뒤부터다. 국가보훈처가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라고 한다. 이 노래는 1997년 광주민주화운동이 정부의 공식 기념일로 지정된 이후 기념식에서 제창되다가 2009년 이명박 정부 출범 뒤 식순에서 빠졌다. 올해부터라도 제자리를 찾았으면 한다. 임창용 논설위원 sdragon@seoul.co.kr
  • 교육부 “국정화 찬반 의견 행정고시 후 공개”

    교육부 “국정화 찬반 의견 행정고시 후 공개”

    한국사 국정교과서 전환을 규정한 ‘중등교과용 도서 국·검·인정 구분고시’를 앞두고 각계 의견을 수렴하고 있는 교육부가 다음달 5일 이를 고시하기 전에는 찬반 의견을 외부에 밝히지 않기로 했다.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 전환이라는 최종 결과가 바뀌지 않을 것으로 예측되는 가운데 진보 진영과 보수 진영은 이날도 찬반 목소리를 높였다.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27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행정예고 기간 중 들어온 찬반 의견은 소중히 모아 담아내려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으나 개별 의견에 대한 집계 결과와 공개 여부에 대해서는 “제출자에게만 알려주는 것이 원칙”이라며 행정고시 이전에는 공개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김동원 교육부 학교정책실장도 “2일까지 의견 수렴을 할 예정이며, 찬반 의견에 대해 정리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교육부가 찬반 의견을 어떻게 결정했는지에 대해서는 고시에 담겠다”고 했다. 다만, 교육부는 행정고시 이후에는 어떤 의견들이 있었는지, 찬반 의견이 각각 몇 건 정도였는지에 대해 공개할 방침이다. 이런 가운데 진보 진영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의 시정연설을 두고 강한 비판을 쏟아냈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변성호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위원장 등 한국사국정화저지네트워크 연계 단체 30여곳의 대표들은 이날 종로구 대학로 흥사단 강당에 모여 기자회견을 열고 “국정교과서는 헌법이 보장하는 교육의 자주성,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을 부정한다”고 지적했다. 보수단체들의 국정교과서 찬성 집회도 이어졌다. 대한민국재향군인회는 이날 오후 세종로 KT 광화문 지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좌편향된 지금의 교과서는 유물론적 역사관에 기초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한민국어버이연합도 이날 종로구 일민미술관 앞에서 집회를 열고 올바른 교과서 지지를 선언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 [씨줄날줄] 임을 위한 행진곡/문소영 논설위원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2년 공개된 노래극 ‘넋풀이’의 삽입곡이다. 이 노래극은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중 전남도청을 점거하다 계엄군에게 사살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과 1979년 노동 현장에서 ‘들불야학’을 운영하다 사망한 박기순의 영혼 결혼식에 헌정됐다. 당시 전남대 학생이던 김종률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이 곡을 쓰고 소설가 황석영씨가 가사를 썼는데,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쓴 장편시 ‘묏비나리’ 일부를 빌렸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반복)”라는 가사가 평이하다. 그 때문에 100년쯤 뒤 이 노래를 ‘386세대의 반정부 투쟁가였다’고 한다면 고개를 갸웃할지도 모른다. 1894~95년 동학 농민혁명을 주동한 전봉준과 동학 농민들이 공주 우금치에서 조선의 관군과 일본군의 합동작전으로 거의 전멸하자 그 패배를 슬퍼한 백성이 널리 불렸다는 민요,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와 ‘임을 위한 행진곡’은 평이함에서 닮았다. 고종에게 반부패 개혁과 외세 배격을 요청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떼죽음을 당한 동학 농민들을 애도할 만한 과격함이 없다. ‘새야 새야’보다 100여년 전인 1792년 프랑스 공병장교 루제 드 릴이 쓴 프랑스의 국가 라 마르세예즈 가사의 호전성과 선동성이 비교될 정도다. 가사 1절에는 “시민들이여, 무기를 들고, 전투 대열을 구성하라/앞으로, 앞으로 전진하라/불순분자들의 피로 길고랑을 물들여라”는 구절이 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을 앞두고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여부가 또 논란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97년 정부가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한 후 정부 주관 첫 기념식이 열린 2003년부터 이명박 정부 첫해인 2008년까지 기념식 본행사에서 기념곡으로 제창됐다. 관행이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2009년 국가보훈처가 공식 행사에서 이 노래를 빼고 공식 기념곡을 공모하겠다거나, 2010년에는 기념식 식순에서 이 노래를 빼고 그 자리에 경기도 민요 ‘방아타령’을 넣어 물의를 빚었다. 올해도 공식 기념곡 지정 등을 요구했지만 무산되자 5·18 유족회와 광주시민단체 등이 기념식에 불참하기로 해 반쪽짜리 관변 행사처럼 쪼그라들 것 같다. 노래 한 곡에 목숨 걸 일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같은 논리로 본행사에서 기념곡으로 제창하던 노래를 유가족들이 원하는데 목숨 걸고 못 부르게 할 이유도 없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민주화를 열망했던 시민과 젊은이들의 노래다. 그러니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인 도시, 광주의 시민에게 이번 5·18에는 꼭 돌려주길 바란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민주주의의 퇴보 계속된다면 문인들은 거리로 나가 지킬 것”

    “민주주의의 퇴보 계속된다면 문인들은 거리로 나가 지킬 것”

    “세월호 참사가 보여준 안전불감증, 군 일색의 인사, 극우단체를 내세워 종북·친북 딱지 붙이기…. 현 정부 들어 민주주의가 급속도로 후퇴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1970년대로 현저하게 후퇴한다면 문인들은 다시 거리로 나가 민주주의를 지킬 것이다.” 이시영(65)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은 25일 작가회의 모태인 ‘거리의 결사체’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올해로 작가회의 출범 40돌을 맞지만 민주주의는 40년 전의 상황으로 퇴보하고 있다고 판단해서다. 작가회의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협의회)가 전신이다. 자실협의회는 1974년 11월 18일 고은, 염무웅, 박태순, 황석영 등의 문인들이 서울 광화문 거리에서 옥중 김지하 시인 석방과 표현의 자유 보장을 요구하는 ‘자유실천 문학인 101인 선언’을 발표하며 결성됐다. 자발적으로 출범한 거리의 결사체였다. 이 이사장도 스물여섯의 나이로 참가했다. 자실협의회는 1980년대 6월 항쟁을 거치며 대중 조직인 민족문학작가회의로 확대됐고 지금의 작가회 면모를 갖추게 됐다. “억압적인 정권 아래에서 김지하 시인을 필두로 세계에 저항하는 문인상을 제시했다. 카뮈나 사르트르처럼 개개인의 저항은 있었지만 결사체를 만들어 저항하는 문인들의 상을 보여준 건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억압이 있을 땐 언제든 침묵하지 않고 작가의 양심을 걸고 사회적인 발언을 할 것이다.” 이 이사장은 작가회의 출범 배경이 된 것은 새로운 문학이었다고 설명했다.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4·19 세대들이 문단 전면에 등장했다. 최인훈 ‘광장’, 황석영 ‘객지’, 신경림 ‘농무’ 등 남북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거나 노동 현실을 반영하는 새로운 문학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조직을 요구했다. 1950년대 반공·순수문학과의 결별을 선언한 것이다.” 40년간 작가회의를 지탱해 온 힘도 문학이다. 이 이사장은 “작가들이 생산하는 새로운 문학, 그 시대 현실을 담고 있는 문학, 독자들로부터 인정받고 독자들과 함께 호흡한 문학”이라며 “훌륭한 작품을 통해 사회적인 발언을 하고 독자들에게 영향력을 미친 것이 조직을 지금껏 생동감 넘치게 했다”고 말했다. 이 이사장은 1978년 4월 고은, 백기완 등 문인들의 주도로 서울 성공회 본당에서 열린 ‘민족문학의 밤’과 2005년 7월 남북 문인들이 평양, 백두산, 묘향산에서 개최한 제1회 남북민족작가대회를 잊지 못한다. “긴급조치 9호까지 발효된 억압적인 상황인데도 수많은 사람이 모여 저항을 담은 시들을 낭독했던 그때 문학은 단순히 종이 책으로만 전달되는 게 아니라 대중과 현장에서 호흡하는 것이라는 걸 절감했다. 민족작가대회는 남북 문인들이 개성, 금강산에서 편집회의도 하고 잡지도 발간하는 등 민주화 이후 가장 큰 성과를 거뒀다.” 젊은 작가들을 향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요즘 젊은 작가들은 현실 문제를 치열하게 다루지 않는다. 가상공간이나 사적 세계에 빠져 있다. 무조건 거리로 나오라는 게 아니다. 작가는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감성노동자인 만큼 기본적으로 타자의 고통에 동참하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서 ‘세월호 참사’가 젊은 작가들의 변화를 이끌어낼 것이라고 내다봤다. “세월호 참사가 젊은 작가들에게 준 트라우마는 엄청난 것 같다. 어른들의 무능을 그대로 보여준 세월호 참사 전후로 문학이 완전히 달라질 것 같다.” 작가회의 수장인 이 이사장의 꿈은 역설적이다. 역설적이어서 울림이 더 크다. “이 땅에 글자 그대로 민주사회가 구현돼 작가회의가 필요 없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문인들은 자유로운 영혼들이다. 단체에 소속되기보단 자기만의 영역에서 글을 써야 한다. 작가회의가 현실에서 역사로 돌아갔으면 한다. 역사 속의 작가회의가 될 날이 오길 바란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국보법 철폐 1000번이나 외쳤지만…”

    “국보법 철폐 1000번이나 외쳤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서울에서 울산까지 와서 수감 중인 내 아들을 격려해준 고마운 분들이야.” 16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정문 앞. 1987년 민주노총 탄생의 주역이자 초대 사무총장을 지낸 고 권용목씨의 아버지 권처흥(86)씨는 보랏빛 손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공원 앞에 모인 어머니들에게 감사인사를 거듭해서 했다. 권씨는 “어머니들이 아들이 있던 교도소까지 와서 ‘기죽거나 굴복하지 말고 노동권 보장을 위한 운동을 계속하라’는 격려를 하고 갔다”며 “전국 교도소를 돌아다니며 민주화·노동 운동을 하다가 잡힌 사람들을 직접 만나면서 보살폈던 어머니들”이라고 소개했다.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폐지’를 내걸고 지난 21년간 한 주도 빠짐 없이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회원들이 벌여온 ‘목요집회’가 이날로 1000회째를 맞았다. 민가협은 1970~80년대 민청학련 사건과 재일교포간첩단 사건, 미국 문화원 점거 사건 등 유신독재와 전두환 군사정권에 저항하다가 고문을 당하고 장기 구금된 이들의 가족들이 1985년 결성했다. 그동안 목요집회에서는 양심수나 보안법 문제는 물론 비정규직 차별, 군 인권, 공권력에 의한 인권 침해, 밀양송전탑 갈등 등 다양한 사회 현안에 대한 목소리가 나왔다. 목요집회처럼 20년 넘게 매주 열리는 집회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수요일마다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여는 수요집회(1148회)가 유일하다. 1000번째 목요집회에는 조순덕 민가협 상임의장 및 회원들을 비롯해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등 시민사회단체 관계자와 시민 등 400여명(경찰 추산)이 참석했다. 회원들은 ‘고난 속 희망’을 상징하는 보라색 손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보라색 풍선을 손에 든 채 같은 뜻을 표시했다. 민가협에 따르면 10월 1일 현재까지도 모두 39명의 ‘양심수’가 전국 각 교도소 및 구치소에 수감돼 있다. 21명은 형이 확정돼 복역 중이며 18명은 재판을 받고 있다. 조 상임의장은 “목요집회를 처음 시작하던 1993년 12월만 하더라도 오래지 않아 국보법이 철폐되고 양심수들이 전원 석방될 줄 알았지 이렇게 21년 동안 집회가 이어질 줄은 몰랐다”며 “국보법이 사라지고 양심수가 전원 석방돼 우리나라가 진정한 민주 사회가 될 때까지 다른 민가협 어머니들과 함께 노력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백범 65주기… 추모의 합창

    백범 65주기… 추모의 합창

    26일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백범 김구 선생 65주기 추모식’에서 숙명여대 합창단이 추모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날 행사에는 김구 선생의 경호차장이었던 유평파 선생의 손자 김인수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대표, 백기완 민족통일문제연구소장 등 50여명이 참석했다.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 낙하산 이사장 논란… 반쪽 된 6·10 민주항쟁 기념식

    낙하산 이사장 논란… 반쪽 된 6·10 민주항쟁 기념식

    1980년대 민주화에 불을 댕겼던 6·10 민주항쟁의 27주년 기념식이 ‘반쪽’ 행사로 치러졌다. 안전행정부는 10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시청에서 강병규 안행부 장관과 박상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등 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6·10 민주항쟁 기념식을 개최했다. 기념식에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진과 정부 관계자 위주로 참석했으며 동원된 안행부 공무원들이 방청석을 채웠다.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사회 원로 등이 박 이사장 등 기념사업회의 이사진 구성을 문제 삼아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서 진보진영의 시민사회단체들은 지난 대선 때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를 공개지지했던 박 이사장을 ‘친박 낙하산 인사’로 규정하고 반대했으나 안행부는 선임을 강행했다. 박 이사장은 기념식에서 “6·10항쟁 기념식이 따로 열려 안타깝다”면서도 이사장직 사퇴 의사를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박 이사장에 반대해 온 사회 원로 등은 이날 오후 서울 중구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에서 ‘6월 민주항쟁 기념 국민대회’를 따로 열었다. 이 자리에는 박원순 서울시장과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등 6·4 지방선거 때 당선된 진보 인사들과 함세웅 신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등 민주화운동 주역들이 참여했다. 야권도 정부 행사와 별도로 6·10 민주항쟁 기념식을 열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김한길·안철수 공동대표 등 지도부와 소속 의원들은 경기 남양주의 모란공원에서 가진 자체 기념식에서 민주항쟁 당시 숨진 열사의 묘에 헌화했다.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공약 발표… 기자회견… 캠프 오픈

    지방선거 후보 등록 마감을 사흘 앞둔 13일 서울시교육감 후보들이 잇따라 선거 사무소 개소식을 하는 등 본격적인 선거 채비에 나섰다. 이날 예비 후보였던 이현청 상명대 전 총장이 불출마를 선언했지만 여전히 최소 5명의 후보가 난립하는 국면이 이어지고 있다. 현직이자 전날 ‘대한민국 올바른 교육감 추대 전국회의’에서 보수 단일화 후보로 추대된 문용린 예비 후보는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 캠프에서 학교 안전에 관련된 공약을 발표했다. 그는 “유아 교육 단계에서부터 교육의 힘으로 ‘생애 단계별 실천안전교육 커리큘럼’을 실시하고, 안전한 학교를 만들기 위해 ‘환경개선 특별회계’를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정통 보수 후보임을 자칭한 고승덕 예비 후보는 서울시교육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번 교육감 선거에서는 보수든 진보든 ‘단일 후보’라는 명칭을 쓰지 않는 게 옳다”면서 “보수와 진보 진영을 내세우는 것은 교육의 정치 중립성을 해치고, 이번 선거에서는 실제로 진영별로 다수 후보가 나오고 있기 때문에 사실과 맞지 않는다”고 밝혔다. 고 예비 후보는 “자율형사립고와 혁신학교 등에 대한 공식 평가가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폐지를 운운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혁신학교 폐지를 선언한 문 예비 후보를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이상면 예비 후보도 “지난 교육감 선거에서 문 예비 후보가 다음 선거를 양보하기로 했었다”며 문 예비 후보를 비난하는 상황이다. 진보 측 조희연 예비 후보는 종로구 새문안로에 캠프를 마련하고 개소식을 했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정동영·손학규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 유기홍 새정치연합 의원, 김정훈 전국교직원노조 위원장, 신승철 민주노총 위원장 등이 참석했다. 또 다른 진보 측 후보인 윤덕홍 예비 후보는 자신의 트위터에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며 봉하마을 방문 일정을 밝혔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 [부고] 민중 미술계 마당발 김용태 前민예총 이사장

    [부고] 민중 미술계 마당발 김용태 前민예총 이사장

    ‘민중 미술계의 마당발’ 김용태 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이사장이 4일 오전 별세했다. 68세. 고인은 1970년대 화가이자 작가로 활동했고 1980년대부터 미술을 통해 문화와 사회 문제를 연결시키며 민중미술 운동을 이끌었다. 미술동인 ‘현실과 발언’의 창립 동인이자 민족미술협의회 초대 사무국장과 민예총 초대 사무처장 등을 지냈다. 1993년 북한 정영만 조선미술가동맹 위원장 등을 만나 ‘코리아통일미술’전을 치르며 남북 문화교류의 물꼬를 텄다. 이후에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2002년), 6·15 공동선언 남측위원회 공동대표(2005년) 등을 역임했다. 문화예술의 현장이면 어디서나 모습을 드러냈던 그는 2011년 위암 수술을 하고 지난해 여름 간암 판정을 받으면서 문화계에 발길을 끊고 투병생활을 해 왔다. 그를 ‘용태형’이라고 부르던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신경림 시인, 구중서 문학평론가 등 문화예술인 40여명은 ‘김용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만들어 그의 쾌유를 비는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박영애씨와 딸 보영씨가 있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 병원에 마련됐다. 장례는 ‘민족예술인장’으로 치러지며 장례위원장은 김정헌 서울문화재단 이사장과 이애주 전 서울대 교수가 맡았다. 발인은 8일 오전 8시. (02)2227-7580. 최여경 기자 cyk@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