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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녹색공간] 정몽주는 누가 죽였는가/이현주 목사

    통일되면 가보고 싶은 곳이 몇 군데 있는데 그중 한 곳이 개성 선죽교다. 선죽교는 이방원의 지시로 조영규가 정몽주를 쇠몽둥이로 쳐죽였다는 곳이다. 정몽주가 이성계를 문병갔을 때 이방원이 술상을 차려 대접하면서 그의 속셈을 떠보려고 읊었다는 시조는 이렇다.“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긔 어떠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이에 화답하여 읊은 정몽주의 시조는 ‘단심가’ 라는 제목까지 붙을 만큼 널리 알려져 있다.“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방원의 노래에 담겨진 뜻은 말 그대로,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떠냐, 형편 닿는 대로 시절의 변화에 적당히 응하면서 이럭저럭 살자는 것이다. 세상에는 이런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없잖아 있다. 그런 사람들을 일컬어 (이방원)이라고 불러 보자. 그들에게는 남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이루어야 할 무슨 뜻이 없다. 반면에 정몽주의 단심가에는 말 그대로 붉은 핏발이 서려 있는 느낌이다. 내 뜻과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 백번을 죽여도 내 뜻을 빼앗거나 꺾지는 못할 것이다. 세상에는 이런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없잖아 있다. 필요할 경우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 남을 죽일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을 일컬어 (정몽주)라고 불러 보자. 그날, 선죽교에서는 누가 누구를 죽였던 것일까? 역사는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였다고 말한다. 그 사건 이후로 정몽주의 모습은 사라지고 이방원이 나중에 임금까지 된 것을 보면 틀린 기록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인 것은 아니다.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떠냐, 형편 닿는 대로 한 백년 살다가 죽지. 이런 노래를 부른 (이방원)에게 누구를 죽이면서까지 이루어야 할 계획이나, 반드시 관철해야 할 뜻이 있었겠는가? 그랬다면 그 사람은 (이방원)이 아니라 (정몽주)다. 그러니까 그날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죽인 자는 (이방원)이 아니라 이방원의 얼굴을 한 (정몽주)였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피바람이 불었을 리 없다. 정몽주의 얼굴을 한 (정몽주)를 이방원의 얼굴을 한 (정몽주)가 죽였다.(이방원)은 남을 죽여서라도 반드시 이루어야 할 무엇이 없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남의 목숨을 없애면서까지 관철시켜야 할 뜻이나 계획이 없다.‘논어’에 보면 공자가 그런 분이었다는 기록이 있다(제9,‘자한’편). 실제로 그날 선죽교에서 공자가 정몽주를 만났다고 상상해 보자. 그가 과연 부하를 시켜 쇠몽둥이로 정몽주를 쳐죽였겠는가? “그릇된 확신이야말로 모든 미망 가운데서도 가장 사람을 황폐케 하는 것이다. 아돌프 히틀러도 폴 포트도 자기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에 찬 사람들이었다.”(소걀 린포체). 이것은 반드시 이래야 한다고 확신하여 그 확신을 관철코자 하는 사람들과 그것은 결코 그럴 수 없다고 확신하여 그 확신을 목숨 걸고 지키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들이 만나면 (정몽주)가 (정몽주)를 죽이는 살벌한 선죽교의 역사가 되풀이될 수밖에 없을 터인데…. 세계가 당장 오늘 밤에 끝장난다 하더라도,“네 뜻이 그러냐? 내 뜻은 다르지만 네가 없어지면 나도 없어져야 하니 내 뜻을 꺾으마. 어디 한번 네 뜻대로 해보자.”고 말하는 사람 좀 보고 싶다. 이현주 목사
  • 징용자유골 100여명 일본서 쓰레기처럼 관리

    “엄마는 매일 걱정한다. 무사히 돌아올 때까지 몸 건강히 잘 있거라.” 60여년전 일제에 강제 징용된 아들의 생환(生還)을 염원하는 한 어머니가 애달픈 심정을 담아 일본어로 써보낸 엽서의 일부분이다. 이 어머니는 경남 사천지역에서 일본으로 끌려간 아들 구모(당시 17세)씨에게 엽서를 보냈다. 엽서는 “내년 7월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마음으로 빌고 있다. 요전에 보낸 편지는 받았는지, 엄마는 매일 걱정한다. 자주 편지 보내거라.”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과 애절한 사연은 아들 구씨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아들은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무로란시(室蘭市)의 제철소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1944년 7월15일 숨졌지만 엽서의 소인은 5개월이 지난 12월25일로 돼 있었다. 아들은 엽서를 보내기 5개월 전에 이미 사망했는데도 일제는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은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일제강제 동원의 피해를 조사하기 위해 지난 16일부터 22일까지 일본을 다녀온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전기호)의 현지 조사과정에서 확인됐다. 위원회는 홋카이도 무로란시 고쇼지(光昭寺)에 안치된 신원확인이 가능한 3명의 동포 유골을 확인한 결과 이들이 경남 사천·하동지역 출신임을 밝혀냈다. 이중 1명의 유품에서 이 엽서가 발견됐다. 함께 유골이 발견된 정모씨는 경남 하동 출신으로 형을 대신해 노역에 나갔다가 숨진 것으로 확인됐다. 현지를 다녀온 최봉태 사무국장은 25일 기자회견에서 “숯과 나무,200여명의 유골이 섞여서 쓰레기처럼 관리되고 있었다.”고 분노를 터뜨렸다. 그는 사이타마현(埼玉縣) 곤조인(金乘院)과 홋카이도 혼간지(本願寺) 삿포로 별원(別院) 등 2곳에 각각 101개와 103개의 유골이 화장된 뒤 항아리에 합사(合祀)되고 있다고 실태를 털어놨다. 그는 “이번에 확인된 유골은 억울하게 동원된 우리 조상들이 일본 땅에서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시즈오카현(靜岡縣) 시미즈시(淸水市) 시립화장장 입구에 ‘이역만리 남의 땅, 남의 나라에서 억울하게 희생되어 무주고혼이 된 당신들이여, 당신들의 백골도 영혼도 주인이 있고, 조국이 있다. 머지않은 장래에 당신들을 데리러 올 그날까지 고이 잠드시라.’고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이들은 찾는데 60년이란 시간이 걸렸다.”고 답답해했다. 이날 기자회견은 일본의 NHK도 취재했다. 조덕현기자 hyoun@seoul.co.kr
  • “부활 확인” 신도가 교주 감금 살해

    경기지방경찰청은 ‘종교단체 신도들이 전 지도자를 지하실에 감금, 숨지게 한 뒤 지하실 출입문을 콘크리트로 밀폐시켰다.’는 첩보에 따라 확인작업에 들어가 이날 오후 2시50분쯤 용인시 양지면의 A사회복지법인 지하실에서 모 종교단체 전 지도자 송모(54·기치료사)씨의 사체를 발굴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이날 오후 1시부터 경찰 150명을 동원해 발굴작업을 벌였으며, 발굴 당시 송씨의 사체는 종교활동 장소로 사용된 지하실의 침대 위에 반듯한 자세로 누운 채 백골상태로 남아 있었다. 경찰은 외상 흔적이 없는 점 등으로 미뤄 송씨가 감금된 상태에서 굶어 죽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찰은 이 종교단체 현 지도자(56)로 알려진 50대 남자와 신도 등 4명이 지난 97년 용인 양지면 A사회복지법인에서 불치병 환자를 상대로 기치료를 해주던 송씨를 지도자로 추종해 오다 ‘영생’과 ‘부활’이라는 것을 체험하기 위해 송씨를 지하실에 감금, 사망케 한 뒤 지하실 출입문을 콘크리트로 밀폐시켜 유기한 것으로 파악된다고 밝혔다. 경찰은 이에 따라 이 사건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이 법인 직원 이모(56)씨 등 4명을 상해치사 혐의로 긴급체포, 자세한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수원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 [씨줄날줄] 白骨兵團 /손성진 논설위원

    ‘적진 800리의 혈투’에는 최초의 유격부대 ‘백골병단’의 6·25 참전 실화가 담겨있다.이 책을 엮은 전인식씨는 작전참모로 참전했으며 종전후 전우회장을 맡아 백골병단의 명예를 찾기 위해 애써왔다.부대가 창설된 것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황이 급박해진 1951년 1월초 1·4후퇴 무렵이었다.대원들은 대구에서 단 3주간 교육을 받고 전선에 투입됐다.중사∼대위의 계급이 주어졌지만 정식 군번은 없었다. 그해 1월30일 인민군 복장에 2주일분의 미숫가루와 고추장만 갖고 혹한의 영월 전선에 투입된 대원들은 대관령 너머 적후방으로 침투해 교란작전을 벌였다.폭설 속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대원들이 백골병단이란 이름으로 재정비된 것은 1951년 2월20일 강원도 명주 퇴곡리에서였다.사령관은 초대 주월한국군사령관을 지낸 당시 채명신 중령이었다.대원들은 2월28일 인민군 군관 등 3명을 생포하고 1급 기밀문서를 노획하는 첫 전과를 올렸다.이 정보는 인민군 제69여단을 격멸하는데 크게 기여했다.3월10일부터 이들은 강원도 인제에 진출,최대의 전과를 거두었다.필례마을을 정찰하던 대원들은 인민군 중장이자 빨치산 총사령관인 길원팔의 은거지를 찾아내 길을 포함해 군관 13명을 체포했다.그러나 인제 군량밭과 설악산 백담사에서 연이어 벌인 전투에서 100명 넘는 전우를 잃었다. 최대의 비극은 인제 단목령에서 일어났다.고개로 행군하다 인민군의 공격을 받은 것이다.많은 대원들이 총탄에 맞아 숨졌고 단목령으로 뿔뿔이 피신한 대원들은 영하 30도의 추위에 얼어 죽고 굶어 죽었다.이곳에서만 120명이 희생됐다.악전고투 끝에 1951년 4월2일 강릉으로 귀환했을 때 살아남은 병력은 647명중 283명밖에 되지 않았다.그러나 돌아온 이들에게는 무공훈장은 고사하고 보급품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전씨 등 생존대원들이 동분서주한 끝에 1990년에야 전적비를 강원도 인제 용대리에 세울 수 있었지만 공식적인 보상은 얻어내지 못했다. 백골병단이 해체된 지 53년만에 국방부가 대원들에게 병적을 주고 1000여만원씩의 보상금을 지급키로 했다고 한다.늦게나마 그들의 공을 인정함으로써 아직도 유해를 확인하지 못한 대원 303명을 비롯한 영령들의 넋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을 것 같다. 손성진 논설위원 sonsj@seoul.co.kr
  • 6·25 첫 유격대 ‘백골병단’ 53년만에 계급·군번 인정

    한국 최초의 유격부대로 6·25전쟁때 큰 전공을 세운 ‘백골병단’ 대원들이 전쟁때 임시로 부여받은 계급과 군번을 53년 만에 인정받게 됐다. 30일 국방부에 따르면 백골병단 대원들에게 병적을 부여하고 보상금을 지급하기 위해 최근 ‘6·25전쟁 중 적 후방지역 작전수행 공로자에 대한 군복무 인정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시행령’을 제정,입법예고했다. 시행령에 따르면 특수작전 공로자에 대해 전쟁때 국방장관으로부터 임시로 부여받은 계급과 군번이 인정된다.병적도 육군에서 관리하고 보상금과 공로금도 지급된다. 백골병단은 육군본부가 대구로 옮겨간 1951년 1월 적의 후방을 교란하고 적군을 분산시키며 아군의 반격시에는 정규군의 작전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창설된 11,12,13연대를 통합한 부대로,부대 창설 당시 병력 규모는 800여명이었다. 조승진기자 redtrain@seoul.co.kr
  • [우리署 명물] 양영용 강력3반장

    “가정과 자녀,남편 밖에 모르던 한 주부가 무참히 살해당했습니다.반드시 억울한 원혼을 풀어줄 겁니다.” 서울 성북경찰서 강력3반 양영용(41) 반장은 관내 30대 주부살인사건 수사에 한창이다.지난달 말 성북구 정릉2동 한 가정집에서 주부 이모(37)씨가 날카로운 흉기에 목을 찔려 숨졌다.이후 한달간 밤샘과 잠복,탐문 수사가 계속됐다.새우잠을 자기 일쑤다.그는 “미궁에 빠질 듯했던 사건 수사는 최근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면서 막바지에 치닫고 있다.”고 귀띔했다. 12년차인 양 반장은 대부분을 기피부서인 강력반 형사로 지냈다.동료들 사이에서 그는 영화 ‘살인의 추억’에 나오는 ‘송강호’로 통한다.영화 속 시골형사처럼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수사 스타일이지만,“미치도록 잡고 싶다.”는 ‘송강호’의 열정을 그대로 닮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양 반장은 스스로를 ‘전라도 촌놈’이라고 소개했다.전남 광양 출신인 그는 “기울어진 집안을 살려보겠다.”며 지난 1986년 무작정 상경했다.“서울 가서 성공하겠다.”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읍내 농약가게에 3돈짜리 금반지를 맡기고 빌린 10만원을 쥐어주었다.“10만원이 든 누런 봉투를 부여안고 서울행 비둘기 열차 안에서 내내 울었다.”고 양 반장은 말했다. 생전 처음인 서울에서 노량진 수산시장 막일부터 학원청소,보일러공까지 닥치는 대로 일했지만 혼자 힘으로 공부를 하기도,돈을 벌기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그러던 중 1989년 우연히 형사기동대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시험에 응시,그해 8월 경찰관이 됐다.처음 배치된 곳은 시위진압부대인 이른바 ‘백골단’. 그는 “시위대의 화염병 보다 시민의 경멸과 원망스런 눈빛이 더 무서웠던 시기였다.”고 당시를 회고했다.아내가 출산할 때도 진압봉으로 땅바닥에 딸 아이의 이름을 지어야 할 정도로 정국은 긴박했다. 그는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에 사표를 쓰고 싶은 마음도 굴뚝 같았지만,언젠가는 경찰도 존경받는 시기가 올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참았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에 비하면 지금의 경찰은 시민의 사랑을 받는 조직”이라면서 “시민의 기대에 제대로 부응하고 있는지 항상 미안한 마음으로 일한다.”고 말했다.이제와서 보니 경찰이 된 건 ‘운명’인 듯하다고 했다. 양 반장은 “주부살인범의 윤곽이 잡히던 날,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면서 “마치 죽은 여인이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우리署 명물] 양영용 강력3반장

    [우리署 명물] 양영용 강력3반장

    “가정과 자녀,남편 밖에 모르던 한 주부가 무참히 살해당했습니다.반드시 억울한 원혼을 풀어줄 겁니다.” 서울 성북경찰서 강력3반 양영용(41) 반장은 관내 30대 주부살인사건 수사에 한창이다.지난달 말 성북구 정릉2동 한 가정집에서 주부 이모(37)씨가 날카로운 흉기에 목을 찔려 숨졌다.이후 한달간 밤샘과 잠복,탐문 수사가 계속됐다.새우잠을 자기 일쑤다.그는 “미궁에 빠질 듯했던 사건 수사는 최근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면서 막바지에 치닫고 있다.”고 귀띔했다. 12년차인 양 반장은 대부분을 기피부서인 강력반 형사로 지냈다.동료들 사이에서 그는 영화 ‘살인의 추억’에 나오는 ‘송강호’로 통한다.영화 속 시골형사처럼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수사 스타일이지만,“미치도록 잡고 싶다.”는 ‘송강호’의 열정을 그대로 닮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양 반장은 스스로를 ‘전라도 촌놈’이라고 소개했다.전남 광양 출신인 그는 “기울어진 집안을 살려보겠다.”며 지난 1986년 무작정 상경했다.“서울 가서 성공하겠다.”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읍내 농약가게에 3돈짜리 금반지를 맡기고 빌린 10만원을 쥐어주었다.“10만원이 든 누런 봉투를 부여안고 서울행 비둘기 열차 안에서 내내 울었다.”고 양 반장은 말했다. 생전 처음인 서울에서 노량진 수산시장 막일부터 학원청소,보일러공까지 닥치는 대로 일했지만 혼자 힘으로 공부를 하기도,돈을 벌기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그러던 중 1989년 우연히 형사기동대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시험에 응시,그해 8월 경찰관이 됐다.처음 배치된 곳은 시위진압부대인 이른바 ‘백골단’. 그는 “시위대의 화염병 보다 시민의 경멸과 원망스런 눈빛이 더 무서웠던 시기였다.”고 당시를 회고했다.아내가 출산할 때도 진압봉으로 땅바닥에 딸 아이의 이름을 지어야 할 정도로 정국은 긴박했다. 그는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에 사표를 쓰고 싶은 마음도 굴뚝 같았지만,언젠가는 경찰도 존경받는 시기가 올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참았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에 비하면 지금의 경찰은 시민의 사랑을 받는 조직”이라면서 “시민의 기대에 제대로 부응하고 있는지 항상 미안한 마음으로 일한다.”고 말했다.이제와서 보니 경찰이 된 건 ‘운명’인 듯하다고 했다. 양 반장은 “주부살인범의 윤곽이 잡히던 날,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면서 “마치 죽은 여인이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이사람] 최초 파월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예비역 중장

    “한국정부는 월남정부의 요청에 의해서 전투부대를 파병하게 됐고,본관이 주월한국군 부대를 지휘하게 되었음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앞으로 우리는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는 훌륭한 자유 월남국민과 군인들에게 최상의 경의를 표하면서 상호의 이해와 유대친선을 위한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며,여하한 희생이라도 무릅쓰고 끝까지 싸울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1965년 8월21일.건군이후 최초의 파월 한국군 사령관인 채명신 소장은 베트남 사이공의 탄손누트공항에 첫발을 내디뎠다.40살의 채 사령관은 떨리는 목소리로 도착성명을 낭독했다.동시에 영어로 번역돼 세계 각국에 타전됐다.우리나라에도 시골 구석구석까지 생생하게 전달됐다. 이 역사적인 도착성명으로 파병논란은 가라앉는 분위기였다.전장으로 나간 ‘한국의 아들들’의 안전이 최우선 관심사였다.대부분 농촌의 아들이었기에 부모들은 논밭에 나갈 때마다 고물 라디오라도 꼭 챙겼다.땡볕에서 김을 매다가도 뉴스시간만 되면 나무 그늘로 잠시 옮겨 행여나 정글의 소식이 나올까봐 귀를 기울였다.그뿐이랴.밤마다 그 어머니들은 정한수를 떠놓고 아들의 안전과 무사귀국을 빌었다. 이후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오는 8월 초 자이툰부대장인 황의돈 소장이 이라크의 북부 아르빌 현지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도착성명서를 낭독할 것이다.채 전 사령관이 그랬던 것처럼…. 백전노장 채 전 사령관은 최근 자이툰부대를 몇차례 방문,아들 손자뻘의 파병 장병들에게 애정어린 주문을 했다.그는 베트남과 동티모르 등에 파견됐던 여러 선배들을 예로 들면서 자긍심을 갖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이라크에 가면 현지 어린이들을 친절하게 대해줘야 한다는 충고까지 했다.축구공과 캔디 등의 과자,노트와 볼펜 등을 선물하면서 아이들과 가까이 지내라고 했다.또 시간이 날 때마다 축구경기도 함께 하고 태권도를 가르켜주면 자연스럽게 어른들과도 친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라크 파병은 한·미동맹의 약속” 지난 17일 비가 오는 날이었다.채 전 사령관이 살고 있는 서울 동부이촌동의 자택을 찾았다.작년 여름 40년 동안 정들었던 후암동 자택을 처분하고 이곳으로 이사왔단다. 그의 나이가 팔순에 가까웠지만 우리나라의 군사(軍史)를 훤히 꿸 정도로 기억력이 넘쳐났다.요즘에는 스스로가 젊어지려고 가끔씩 면바지와 남방 등 캐주얼차림으로 외출한다.그는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회장’과 ‘베트남참전전우회 회장’을 맡아 일주일에 3,4일은 재향군인회관으로 출근한다. 그는 ‘이라크파병’과 ‘주한미군철수’ 등 최근 안보상황의 변화와 관련,“모든 것을 ‘전쟁억지’라는 대전제를 밑바탕에 깔고 나머지 일들을 결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미동맹이 깨져서는 결코 안 됩니다.전현직 미군 장성들을 만날 때마다 신뢰성이 그전보다 떨어진다는 느낌을 자주 접합니다.동맹을 지키는 약속 때문에 이라크에 파병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신의에 금이 가지 시작하면 동맹관계도 소원해집니다.” ●“6·25 전야 군 지휘부의 댄스파티” 채 전 사령관은 “최근 일부 젊은이들 사이에 6·25는 미군의 북침으로 시작됐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다.”면서 “참으로 한심하다.미군은 이미 1년전에 장비 하나 남기지 않고 다들 철수해버린 상황이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그러면서 6.25전야에 있었던 우리 군 지휘부의 댄스파티 상황을 잠시 전했다. (…서울 용산의 육본 장교클럽.토요일 저녁을 맞아 서울 지역 각군 사령부의 고급장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전방의 연대장과 사단장도 초청됐다.댄스파티가 시작되고 다들 거나하게 술을 마셨다.파티는 25일 새벽 2시까지 계속됐다.다들 곯아 떨어졌다.전선은 추풍낙엽으로 계속 무너졌으나 명령을 받고 내릴 지휘관이 없었다.채병덕 육군총장의 공관에도 북한의 남침을 보고하려는 벨이 울렸지만 부관은 ‘총장 각하가 술에 많이 취해 깨울 수가 없다.’는 대답만 반복했다.신성모 국방장관 공관도 마찬가지였다.보좌관은 ‘일요일에는 어떤 전화도 받지 못한다.’는 대답만 되풀이했다.적 탱크가 25일 아침 11시 포천까지 들어와서야 다들 실감했을 정도였다.) 6.25때 그는 한국군 최초의 유격대 대장을 맡았다.인민군복을 입고 적 후방에 투입,고급 정보를 캐는 일이었다.그가 이끈 요원은 363명으로 80년대 후반 공개된 이른바 ‘백골병단’을 말한다.그는 이때 빨치산의 거물 길원팔 중장과 육박전 끝에 생포하기도 했다.길원팔은 김일성이 허리춤에 찼던 ‘떼떼권총’까지 직접 선물을 줄 정도의 인물이었다.길원팔은 채 전 사령관이 건네준 권총으로 자결했다. ●“박정희이어 박근혜도 정치유혹” ‘채명신 장군’하면 영원한 무인으로 평가받는다.6.25와 월남전에서의 활약상이 우선 그렇다.특히 그는 5·16때 이른바 혁명주체세력으로 급부상했다.5사단장 시절 휘하 병력을 이끌고 동대문 근처까지 진출,박정희 소장을 도왔다. 이때 그는 박정희 소장에게 “개인의 군대가 아니다.국가를 구한다는 일념으로 다들 뭉쳐 이렇게 출동했다.”고 말했다.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그에게 3차례에 걸쳐 자신을 도와 정치를 같이 하자고 했지만 군복이 더 좋다면서 과감히 돌아섰다.주월사령관으로 떠난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세월이 지난 뒤인 얼마전 박근혜씨가 찾아와 당의 주요 직책을 맡아달라고 했을 때에도 그는 무인으로 남고 싶다며 거절했다. 그는 황해도 곡산에서 태어났다.평양사범을 나와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1947년 월남했다.48년 육사를 졸업한 뒤 5·16때 잠시 외도한 것 외에는 평생 군인의 길을 걸었다.그는 예편과 동시 외교관의 길을 걷다가 미국 하버드대와 버클리대,일본의 게이오대(慶應大) 등에서 연구원으로도 활동했다.“6월이면 기억조차 하기 힘든 일들이 무척 많습니다.” 김문기자 km@seoul.co.kr˝
  • [정인학 칼럼]이해찬 총리 지명자의 굴레

    이해찬 총리 지명자는 요즘 세상 인심이 야속할 것이다.국무총리에 지명되자 백골이 진토되어 넋조차 없어진 줄 알았던 6년전 ‘교육부 악몽’이 되살아 활개치니 말이다.이해찬 장관이 바꿔 놓은 대학입시제가 처음 적용된 이른바 ‘이해찬 세대’부터 학생들의 학력이 떨어졌다고 한다.주먹구구식 교원 정년 단축으로 교단이 붕괴되면서 공교육이 황폐화했다는 것이다.그뿐인가.BK21이며 교원성과금제며 하나같이 문제투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해찬 지명자에 대한 세간의 혹평은 다분히 억지성이다.이해찬 세대의 학력 저하론만 해도 그렇다.발단은 이해찬 입시제인 2002학년도 수능에서 평균이 66.5점이나 폭락하면서 비롯됐다.하지만 이는 학생들의 실력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문제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2002학년도 직전의 2001학년도 수능에서 무려 66명이 만점을 받을 만큼 문제가 너무 쉬워 사회적 물의를 빚자 조금 어렵게 낸다는 게 그만 도를 넘어섰던 것이다. 초·중등 교원 정년 단축문제도 그렇다.62세로 정년을 낮추는 과정에서 교원 파동은 사실 정년과는 관련이 없다는 분석이 유력하다.때마침 연금 고갈설과 함께 연금 산정방법이 달라져 수령액이 줄어 들 것이라는 소문이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다만 명퇴를 신청하면서 연금은 제쳐 두고 정년 문제를 앞세우다 보니 잘못 알려졌다는 것이다.또 교원 단체들이야 극력 부인하겠지만 정년 단축은 교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어,교원의 경쟁력을 추스르는 자극제가 되었다는 대목도 결코 간과되어선 안 될 것이다. ‘이해찬 정책’이 싸잡아 매도되는 데는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들이 있다.정책마다 통찰력이 결여되었고 전문성이 뒷받침되지 못했다.시행의 완급도 제대로 조절되지 못했다. 공부 말고도 한 가지만 잘하면 대학에 갈 수 있게 하겠다며 19개의 특별전형 유형을 무려 99개로 늘렸다.순간 전국은 갖가지 경진·경시대회로 넘쳐났다.2002년의 경우 1131개의 갖가지 대회가 열렸다.하루 평균 3.1개꼴이다.교육부는 요즘 경시대회 인증제를 도입하겠다며 법석을 떨고 있다. 대학 진학의 길은 다양해야 한다.고교 졸업생의 79.6%가 대학엘 가는 판에 공부만으로 당락을 결정하는 것은 난센스다.문제는 특기 진학을 허용하려면 경시대회 남발과 같은 독소에 대한 대책도 마련했어야 했다.또 당시 교육부는 중·고교의 보충수업을 사실상 폐지시켰다.그러나 6년이 지난 지금은 보충수업을 강권하는 것은 물론 교육방송까지 동원하고 있다.정책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없었고 교육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했다. 이해찬 지명자는 기획력이 뛰어나며 열정이 있고 소신이 강한 인물이라고 한다.대통령을 보좌해 국정을 감당할 국무총리로서의 자질을 두루 갖춘 것 같다.그러나 기획력과 열정,그리고 소신은 극약(劇藥)과 같아서 필요한 증상에 적정량을 사용하지 않으면 오히려 목숨도 앗아 갈 수 있다.열정이 있으니 모든 분야에 간여하려 할 것이요,소신이 강하니 다른 의견을 묵살하기 십상이며,기획력이 뛰어나니 통찰력이 간과되기 쉬울 것이다. 국정의 혼선은 부메랑이 되어 고스란히 국민적 피해로 돌아 온다.국민적 설득을 얻지 못한 정책은 분란을 일으켜 국력만 소진시킨다.세상에선 ‘이해찬 총리’를 놓고 극단적인 의견이 맞부딪치고 있다.오는 24일부터 인사청문회가 열린다고 한다.세상에서 쏟아내고 있는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는 무엇을 제시해야 한다.죄송하다는 식의 감성적 접근이 아니라 차가운 머리로 자초지종을 짚어야 한다.그리고 ‘앞으로’를 말해야 한다. 교육담당 대기자 chung@seoul.co.kr ●정인학 교육담당 대기자의 칼럼을 오늘부터 3주마다 싣습니다.˝
  • 儒林(116)-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노랑나비였다. 이른 봄에 노랑나비를 보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데,노랑나비를 한 마리 잡기까지 했으니,이것은 길조인가.나는 소리를 내어 춘향전의 판소리 한 구절을 흥얼거려 보았다. “그러면 너 죽어 될 것이 있다/너는 죽어 명사십리 해당화 되고/나는 죽어 나비 되어/나는 네 꽃송이 물고/너는 내 수염물고/춘풍 선듯 불거든/너울너울 춤을 추며 놀아보자.” 나는 손가락을 펼쳤다.그러자 잠시 멈칫거리던 나비는 너울너울 날갯짓하며 춤을 추며 사라졌다. 그래 조광조는 이곳에 묻혀 있다. 공자의 유교사상으로 정치개혁을 꿈꾸다가 실패하고 죽임을 당해 이곳에 묻혀 있는 것이다. 순간 내 머릿속으로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양팽손에게 했던 조광조의 유언이 떠올랐다. 조광조는 양팽손의 손을 잡고 ‘양공,안녕히 계십시오.신이 먼저 갑니다.’라고 위로한 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야사는 전하고 있지 아니한가. “부탁이 있소이다.양공,나 죽은 후에 반드시 걸망 속에 들어 있는 태사혜를 신겨 주시오.내 두 발에 신발을 신긴 채 매장시켜 주시오.” 조광조가 남긴 수수께끼의 유언은 그대로 지켜졌을 것이다.양팽손은 손수레에 조광조의 시신을 실어 자신의 고향인 쌍봉계곡에 가매장하였으며,이때 가죽으로 만든 태사혜를 조광조의 두 발에 신겨 주었을 것이다.이듬해 봄 조광조의 시신이 이곳으로 반장될 때에도 조광조의 시신은 아직 썩지 아니하고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이고,또한 그 짝짝이 가죽신도 남아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500년이 흐르는 동안 무덤 속 조광조의 백골도 진토되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니,하물며 그 가죽신이야 일러 무엇하겠는가.그러나 조광조의 육신이 썩어 진토가 되었을지언정 갖바치가 남기고 간 참위만큼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으니. “천년 세월도 검은 신을 희게 하지는 못하는구나.” 수수께끼의 갖바치가 직접 만든 가죽신과 더불어 바쳐 올린 조광조의 운명을 암시하는 수수께끼의 참언.이 참언의 비밀은 50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5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여전히 한 짝은 검고,한 짝은 흰 짝짝이 가죽신을 족쇄처럼 신고 있는 조광조. 그때였다. 문득 내 머릿속으로 등소평의 목소리가 천둥소리가 되어 들려왔다.죽의 장막 중국이 개방정책을 실시하려 하였을 때 위대한 개혁가 등소평은 이렇게 말하였다.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어느 고양이든 상관없다.쥐를 잘 잡는 고양이야말로 좋은 고양이인 것이다.” 중국이 정부 주도 체제에서 시장경제체제로 바뀔 무렵 등소평은 ‘부유할 수 있는 사람부터 먼저 부유해져라.’라는 선부론(先富論)을 주창한 후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간에 돈을 잘 벌 수 있는 체제가 좋은 체제인 것이다.’라는 뜻으로 그 유명한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을 슬로건으로 내세운 것이다. 등소평의 개혁정신에 의해서 중국의 개방은 급속도로 진전된다.그 어떤 이념이나 그 어떤 이데올로기에 구애되는 것은 마치 고양이의 색깔을 구분 짓는 무의미한 일이다.오직 필요한 것은 고양이의 빛깔이 아니라 쥐를 잘 잡느냐 못 잡느냐의 실용주의인 것이다. 그렇다면 조광조는 어떠한가. 개혁가 조광조는 여전히 죽은 지 50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한 짝은 검은 신을,한 짝은 흰 신을 신고 있지 아니한가.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자신의 이념에 의해 조광조가 검은 신을 신은 검은 사람이라고 단정짓는가 하면 조광조가 흰 신을 신은 흰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지 않은가. 분명히 말해서 흰 빛깔과 검은 빛깔은 쥐를 잘 잡는 고양이와는 전혀 상관이 없고,흰 가죽신과 검은 가죽신은 조광조와 전혀 상관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조광조의 짝짝이 신발,그 빛깔만을 문제 삼고 있지 않은가.˝
  • 儒林(116)-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儒林(116)-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노랑나비였다. 이른 봄에 노랑나비를 보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데,노랑나비를 한 마리 잡기까지 했으니,이것은 길조인가.나는 소리를 내어 춘향전의 판소리 한 구절을 흥얼거려 보았다. “그러면 너 죽어 될 것이 있다/너는 죽어 명사십리 해당화 되고/나는 죽어 나비 되어/나는 네 꽃송이 물고/너는 내 수염물고/춘풍 선듯 불거든/너울너울 춤을 추며 놀아보자.” 나는 손가락을 펼쳤다.그러자 잠시 멈칫거리던 나비는 너울너울 날갯짓하며 춤을 추며 사라졌다. 그래 조광조는 이곳에 묻혀 있다. 공자의 유교사상으로 정치개혁을 꿈꾸다가 실패하고 죽임을 당해 이곳에 묻혀 있는 것이다. 순간 내 머릿속으로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양팽손에게 했던 조광조의 유언이 떠올랐다. 조광조는 양팽손의 손을 잡고 ‘양공,안녕히 계십시오.신이 먼저 갑니다.’라고 위로한 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야사는 전하고 있지 아니한가. “부탁이 있소이다.양공,나 죽은 후에 반드시 걸망 속에 들어 있는 태사혜를 신겨 주시오.내 두 발에 신발을 신긴 채 매장시켜 주시오.” 조광조가 남긴 수수께끼의 유언은 그대로 지켜졌을 것이다.양팽손은 손수레에 조광조의 시신을 실어 자신의 고향인 쌍봉계곡에 가매장하였으며,이때 가죽으로 만든 태사혜를 조광조의 두 발에 신겨 주었을 것이다.이듬해 봄 조광조의 시신이 이곳으로 반장될 때에도 조광조의 시신은 아직 썩지 아니하고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이고,또한 그 짝짝이 가죽신도 남아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500년이 흐르는 동안 무덤 속 조광조의 백골도 진토되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니,하물며 그 가죽신이야 일러 무엇하겠는가.그러나 조광조의 육신이 썩어 진토가 되었을지언정 갖바치가 남기고 간 참위만큼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으니. “천년 세월도 검은 신을 희게 하지는 못하는구나.” 수수께끼의 갖바치가 직접 만든 가죽신과 더불어 바쳐 올린 조광조의 운명을 암시하는 수수께끼의 참언.이 참언의 비밀은 50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5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여전히 한 짝은 검고,한 짝은 흰 짝짝이 가죽신을 족쇄처럼 신고 있는 조광조. 그때였다. 문득 내 머릿속으로 등소평의 목소리가 천둥소리가 되어 들려왔다.죽의 장막 중국이 개방정책을 실시하려 하였을 때 위대한 개혁가 등소평은 이렇게 말하였다.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어느 고양이든 상관없다.쥐를 잘 잡는 고양이야말로 좋은 고양이인 것이다.” 중국이 정부 주도 체제에서 시장경제체제로 바뀔 무렵 등소평은 ‘부유할 수 있는 사람부터 먼저 부유해져라.’라는 선부론(先富論)을 주창한 후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간에 돈을 잘 벌 수 있는 체제가 좋은 체제인 것이다.’라는 뜻으로 그 유명한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을 슬로건으로 내세운 것이다. 등소평의 개혁정신에 의해서 중국의 개방은 급속도로 진전된다.그 어떤 이념이나 그 어떤 이데올로기에 구애되는 것은 마치 고양이의 색깔을 구분 짓는 무의미한 일이다.오직 필요한 것은 고양이의 빛깔이 아니라 쥐를 잘 잡느냐 못 잡느냐의 실용주의인 것이다. 그렇다면 조광조는 어떠한가. 개혁가 조광조는 여전히 죽은 지 50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한 짝은 검은 신을,한 짝은 흰 신을 신고 있지 아니한가.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자신의 이념에 의해 조광조가 검은 신을 신은 검은 사람이라고 단정짓는가 하면 조광조가 흰 신을 신은 흰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지 않은가. 분명히 말해서 흰 빛깔과 검은 빛깔은 쥐를 잘 잡는 고양이와는 전혀 상관이 없고,흰 가죽신과 검은 가죽신은 조광조와 전혀 상관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조광조의 짝짝이 신발,그 빛깔만을 문제 삼고 있지 않은가.
  • 儒林(106)-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조광조를 동방사현이라고 불렀던 이율곡은 평생 조광조를 존경하여 자신이 세운 은병정사내의 주자사(朱子祠)에 조광조의 석상을 세워놓았을 정도였다.그는 또한 조광조의 묘지명을 직접 썼으며 그 묘지명에서 이율곡은 ‘저 울창한 용인땅 산 서리고,물굽이 긴대,빛나는 그 덕업 영원토록 잊지 못하리’라는 감탄사로 조광조를 기리고 있는 것이다. 그뿐인가. 선조 원년에는 당시 백인걸을 비롯하여 태학생 홍인헌 등은 조광조를 문묘에 배향할 것을,부제학이던 박대립은 관작을 증수하고 시호를 내릴 것을 주장하자,선조는 경연에서 퇴계 이황에게 조광조의 학문과 행적에 관해 물었다.이에 이황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는 성품이 빼어났으며 일찍 학문에 뜻을 두어 집에서는 효도와 우애를 조정에서는 충직을 다하였으며,동시 여러 사람과 협력하고 옳은 정치를 다하였습니다만 그를 둘러싼 젊은 사람들이 너무 과격하여 남곤·심정 등을 모함하고 구신들을 물리치려함으로써 화를 입게 된 것입니다.” 조광조에 대한 수많은 평가 중 우리나라가 낳은 세계적인 사상가인 이퇴계가 내린 조광조에 대한 평가야말로 단연 최고봉일 것이다.이퇴계는 자신이 직접 조광조의 행장기(行狀記)를 썼으며,이 행장기에서도 이퇴계는 조광조의 실수를 다음과 같이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러나 공의 뜻이 너무 속히 하고자 하는 데에 잘못됨을 면치 못하여 무릇 건의하고 시행하는데 조급하게 굴어서 장황하고 과격하며 또는 나아가 젊고 이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유행에 뜻이 맞아 함부로 날뛰는 자가 그 사이에 많이 끼어 있었고,늙은 신하들이 새 시의(時議)에 배척당하여 이에 따라 공박(攻駁)을 당한 자의 원망이 골수에 사무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퇴계는 자신이 조광조의 행장기를 짓는 이유를 ‘황(滉)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비록 선생의 문하에 공경히 배우지는 못하였으나 선생으로부터 받은 것이 적지 않게 많은데,이미 비명(碑銘)을 사양한 데다가 또 행장마저 짓지 않으면 더 어찌 정(情)이 지극하니 일(事)이 따른다고 하겠는가.’라고 표현함으로써 자신이 조광조에게 학문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지대한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천천히 조광조의 무덤 쪽으로 걸어갔다.원래는 깊은 심산유곡이었는데 산기슭까지 아파트 단지들이 건설되고 중턱으로는 도시고속도로가 건설되어 묘역은 야산으로 변해있었다. 묘역으로 들어간 산자락에는 소나무와 잡목으로 이루어진 숲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고,그 나뭇가지에도 용인 땅의 수원편입을 결사반대한다는 붉은 페인트로 칠해진 현수막이 내걸려 있었다.언덕으로 오르는 가장자리에는 거대한 표석이 세워져 있었다.그 곳에는 다음과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漢陽趙公靜菴趙光祖先生墓域” 그 표석을 보자 나는 마침내 조광조의 무덤를 찾아왔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는 ‘악의 꽃’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던가. “이승은 짧다.무덤은 기다린다.무덤은 배고프다.” 배고픈 무덤.보들레르의 절창처럼 누군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는 배고픈 조광조의 무덤.옛말에 무덤을 ‘백골청태(白骨靑苔)’라 하였다.죽은 후 500년이 흘렀으므로 이미 흰 뼈와 푸른 이끼로만 남아서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어지러운 난세를 살고 있는 우리를 기다리는 조광조의 무덤을 마침내 오늘 내가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 儒林(106)-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儒林(106)-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조광조를 동방사현이라고 불렀던 이율곡은 평생 조광조를 존경하여 자신이 세운 은병정사내의 주자사(朱子祠)에 조광조의 석상을 세워놓았을 정도였다.그는 또한 조광조의 묘지명을 직접 썼으며 그 묘지명에서 이율곡은 ‘저 울창한 용인땅 산 서리고,물굽이 긴대,빛나는 그 덕업 영원토록 잊지 못하리’라는 감탄사로 조광조를 기리고 있는 것이다. 그뿐인가. 선조 원년에는 당시 백인걸을 비롯하여 태학생 홍인헌 등은 조광조를 문묘에 배향할 것을,부제학이던 박대립은 관작을 증수하고 시호를 내릴 것을 주장하자,선조는 경연에서 퇴계 이황에게 조광조의 학문과 행적에 관해 물었다.이에 이황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는 성품이 빼어났으며 일찍 학문에 뜻을 두어 집에서는 효도와 우애를 조정에서는 충직을 다하였으며,동시 여러 사람과 협력하고 옳은 정치를 다하였습니다만 그를 둘러싼 젊은 사람들이 너무 과격하여 남곤·심정 등을 모함하고 구신들을 물리치려함으로써 화를 입게 된 것입니다.” 조광조에 대한 수많은 평가 중 우리나라가 낳은 세계적인 사상가인 이퇴계가 내린 조광조에 대한 평가야말로 단연 최고봉일 것이다.이퇴계는 자신이 직접 조광조의 행장기(行狀記)를 썼으며,이 행장기에서도 이퇴계는 조광조의 실수를 다음과 같이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러나 공의 뜻이 너무 속히 하고자 하는 데에 잘못됨을 면치 못하여 무릇 건의하고 시행하는데 조급하게 굴어서 장황하고 과격하며 또는 나아가 젊고 이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유행에 뜻이 맞아 함부로 날뛰는 자가 그 사이에 많이 끼어 있었고,늙은 신하들이 새 시의(時議)에 배척당하여 이에 따라 공박(攻駁)을 당한 자의 원망이 골수에 사무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퇴계는 자신이 조광조의 행장기를 짓는 이유를 ‘황(滉)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비록 선생의 문하에 공경히 배우지는 못하였으나 선생으로부터 받은 것이 적지 않게 많은데,이미 비명(碑銘)을 사양한 데다가 또 행장마저 짓지 않으면 더 어찌 정(情)이 지극하니 일(事)이 따른다고 하겠는가.’라고 표현함으로써 자신이 조광조에게 학문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지대한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천천히 조광조의 무덤 쪽으로 걸어갔다.원래는 깊은 심산유곡이었는데 산기슭까지 아파트 단지들이 건설되고 중턱으로는 도시고속도로가 건설되어 묘역은 야산으로 변해있었다. 묘역으로 들어간 산자락에는 소나무와 잡목으로 이루어진 숲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고,그 나뭇가지에도 용인 땅의 수원편입을 결사반대한다는 붉은 페인트로 칠해진 현수막이 내걸려 있었다.언덕으로 오르는 가장자리에는 거대한 표석이 세워져 있었다.그 곳에는 다음과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漢陽趙公靜菴趙光祖先生墓域” 그 표석을 보자 나는 마침내 조광조의 무덤를 찾아왔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는 ‘악의 꽃’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던가. “이승은 짧다.무덤은 기다린다.무덤은 배고프다.” 배고픈 무덤.보들레르의 절창처럼 누군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는 배고픈 조광조의 무덤.옛말에 무덤을 ‘백골청태(白骨靑苔)’라 하였다.죽은 후 500년이 흘렀으므로 이미 흰 뼈와 푸른 이끼로만 남아서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어지러운 난세를 살고 있는 우리를 기다리는 조광조의 무덤을 마침내 오늘 내가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 [길섶에서] 면죄부/심재억 문화부 차장

    돈을 내면 현세의 죄를 씻을 수 있다는 면죄부는 중세의 악습이었다.악습이었지만,당시의 로마교회는 그 단맛에 빠져 헤어날 줄 몰랐다.마치 우리 역사의 암흑기에 있었던 백골징포(白骨徵布)처럼 교황 식스토 4세는 이미 죽은 사람들의 면죄부까지 만들어 팔아 종교개혁의 빌미를 제공했다. 너무 먼 나라,먼 시대의 얘기라면 이런 사례도 있다.한때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라는 서글픈 조롱이 우리사회를 풍미했다.지난 88년,탈옥수 지강헌 일당이 남긴 이 말은 범죄자의 자기변명 이상의 반향을 우리 사회에 불러있으켰다.반향은 공명(共鳴)이고,공감(共感)이다. 최근 시치미를 뗀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를 지켜보면서 중세의 면죄부나 한 탈옥수의 절규를 생각하는 건 결코 ‘이상(異常)감각’이 아니다.수백억원 대의 불법 정치자금을 제공해 법을 범한 재벌 총수들을 불러 조사 한번 하지 않은 처사를 두고 검찰은 국가경제를 위한 배려(?)라고 말할지 모르나,그 실상은 너무나 ‘면죄부적’이다.그래서 많은 국민들이 그들의 뒤통수에 대고 삐죽거리지 않는가.“저들이 개혁의 끝”이라고. 심재억 문화부 차장 jeshim@˝
  • 儒林(88)-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조광조가 남긴 수수께끼의 유언은 양팽손에 의해서 그대로 지켜진다.유언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 사약을 들이켰으나 쉽게 숨이 끊어지지 않았으므로 보다 못한 군졸이 밧줄을 들고 조광조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목 졸라 교살시키려 하자 조광조는 ‘무엇을 하려 드느냐.네놈은 내 몸에 손끝하나 대지 못한다.성상께서 나의 몸을 보존하고자 사사의 명을 내리셨는데 어찌하여 감히 내 몸에 손을 대려 하느냐.’하고 호통을 치고는 남은 사약을 단숨에 들이켠 후 마침내 숨을 거뒀다고 한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조광조의 얼굴에는 이승에서의 한을 차마 끊지 못하겠다는 듯 부릅뜬 눈이 활짝 열려져 있었는데,이 눈을 감겨준 사람이 바로 양팽손. 그러고 나서 양팽손은 우차에 조광조의 시신을 실어 자신의 고향인 쌍봉마을 골짜기에 가매장하였는데,조광조가 남긴 유언대로 갖바치가 준 태사혜를 시신의 발에 신겨주었으며,초라한 시신이었지만 가죽으로 만든 태사혜만은 어울리지 않게 화려하고 호사스러웠다고 한다. 지금도 조광조의 시신이 한겨울 동안 가매장되었던 자리에는 ‘靜庵趙先生書院遺址追慕碑’란 작은 비석이 서 있다.송시열이 쓴 명필인데,조광조의 사후 그의 무덤자리에 세워졌던 서원의 흔적도 사라져 버리고 한겨울 그곳에서 가매장되었던 조광조의 시신은 이듬해 봄 오늘날 경기도 용인시 수지읍 상현리의 심곡리로 이장되는 것이다. 확인된 바는 없지만 한겨울이었으므로 양팽손이 신긴 태사혜도 아직 썩지 아니하고 생생하게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따라서 지난 5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무덤 속 조광조의 시신은 모든 것이 썩어 백골만이 남아 있을 터인데,하면 조광조가 신었던 한 짝은 검고,한 짝은 흰,의미를 알 수 없는 짝짝이의 가죽신 역시 썩어 진토가 되어버렸을까. 그러나 아직 500년의 세월에도 썩지 아니하고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것은 갖바치가 남기고 간 두 줄의 문장 중 마지막 문장인 것이다. “천년 세월에도 검은 신을 희게 하지는 못하는구나.” 그 문장의 수수께끼는 조광조의 생전에도,조광조의 사후에도 풀리지 아니하였다.아니 5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갖바치가 남기고 간 참언의 내용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것이다.갖바치의 참언이 정확하다면 아직 500년의 세월이 더 필요한 것일까.500년의 세월이 더 흘러 마침내 100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독특하고,가장 강력한 정치력을 발휘하였던 조광조의 역사적 평가는 올바르게 내려질 수 있을 것인가. 어쨌든 조광조는 1519년 12월 16일,34세의 젊은 나이로 정쟁에 휘말려 아까운 목숨을 잃는다.알성시에 2등으로 합격하여 사헌부 감찰로 임명됨으로써 정식으로 관직에 진출한 이래 불과 4년 만에 일찍이 전제 왕조체제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강력한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던 한국의 마키아벨리,조광조는 이렇게 비참하게 최후를 맞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조광조는 누구인가. 실패한 정치가인가.권력투쟁에 패배함으로써 목숨을 잃은 권력의 희생양인가,아니면 이율곡이 내린 ‘아깝다,공은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를 다스리는 재주를 가졌음에도 학문이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로 나아가 위로는 임금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을 막지 못하였다.’라는 평가처럼 현실정치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단순히 이상정치를 구현하려 하였던 아마추어 정치가였던가. 조광조가 실패한 정치가이든 아마추어 정치가이든 500년이 지난 오늘날의 현실에도 조광조는 여전히 부활하여 살아 있는 정치적 모델이니,그렇다면 ‘천년의 세월도 검은 신을 희게 하지는 못하는구나.’라는 갖바치의 예언은 도대체 조광조의 무엇을 암시하고 있는 것일까.˝
  • 儒林(88)-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儒林(88)-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조광조가 남긴 수수께끼의 유언은 양팽손에 의해서 그대로 지켜진다.유언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 사약을 들이켰으나 쉽게 숨이 끊어지지 않았으므로 보다 못한 군졸이 밧줄을 들고 조광조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목 졸라 교살시키려 하자 조광조는 ‘무엇을 하려 드느냐.네놈은 내 몸에 손끝하나 대지 못한다.성상께서 나의 몸을 보존하고자 사사의 명을 내리셨는데 어찌하여 감히 내 몸에 손을 대려 하느냐.’하고 호통을 치고는 남은 사약을 단숨에 들이켠 후 마침내 숨을 거뒀다고 한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조광조의 얼굴에는 이승에서의 한을 차마 끊지 못하겠다는 듯 부릅뜬 눈이 활짝 열려져 있었는데,이 눈을 감겨준 사람이 바로 양팽손. 그러고 나서 양팽손은 우차에 조광조의 시신을 실어 자신의 고향인 쌍봉마을 골짜기에 가매장하였는데,조광조가 남긴 유언대로 갖바치가 준 태사혜를 시신의 발에 신겨주었으며,초라한 시신이었지만 가죽으로 만든 태사혜만은 어울리지 않게 화려하고 호사스러웠다고 한다. 지금도 조광조의 시신이 한겨울 동안 가매장되었던 자리에는 ‘靜庵趙先生書院遺址追慕碑’란 작은 비석이 서 있다.송시열이 쓴 명필인데,조광조의 사후 그의 무덤자리에 세워졌던 서원의 흔적도 사라져 버리고 한겨울 그곳에서 가매장되었던 조광조의 시신은 이듬해 봄 오늘날 경기도 용인시 수지읍 상현리의 심곡리로 이장되는 것이다. 확인된 바는 없지만 한겨울이었으므로 양팽손이 신긴 태사혜도 아직 썩지 아니하고 생생하게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따라서 지난 5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무덤 속 조광조의 시신은 모든 것이 썩어 백골만이 남아 있을 터인데,하면 조광조가 신었던 한 짝은 검고,한 짝은 흰,의미를 알 수 없는 짝짝이의 가죽신 역시 썩어 진토가 되어버렸을까. 그러나 아직 500년의 세월에도 썩지 아니하고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것은 갖바치가 남기고 간 두 줄의 문장 중 마지막 문장인 것이다. “천년 세월에도 검은 신을 희게 하지는 못하는구나.” 그 문장의 수수께끼는 조광조의 생전에도,조광조의 사후에도 풀리지 아니하였다.아니 5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갖바치가 남기고 간 참언의 내용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것이다.갖바치의 참언이 정확하다면 아직 500년의 세월이 더 필요한 것일까.500년의 세월이 더 흘러 마침내 100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독특하고,가장 강력한 정치력을 발휘하였던 조광조의 역사적 평가는 올바르게 내려질 수 있을 것인가. 어쨌든 조광조는 1519년 12월 16일,34세의 젊은 나이로 정쟁에 휘말려 아까운 목숨을 잃는다.알성시에 2등으로 합격하여 사헌부 감찰로 임명됨으로써 정식으로 관직에 진출한 이래 불과 4년 만에 일찍이 전제 왕조체제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강력한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던 한국의 마키아벨리,조광조는 이렇게 비참하게 최후를 맞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조광조는 누구인가. 실패한 정치가인가.권력투쟁에 패배함으로써 목숨을 잃은 권력의 희생양인가,아니면 이율곡이 내린 ‘아깝다,공은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를 다스리는 재주를 가졌음에도 학문이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로 나아가 위로는 임금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을 막지 못하였다.’라는 평가처럼 현실정치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단순히 이상정치를 구현하려 하였던 아마추어 정치가였던가. 조광조가 실패한 정치가이든 아마추어 정치가이든 500년이 지난 오늘날의 현실에도 조광조는 여전히 부활하여 살아 있는 정치적 모델이니,그렇다면 ‘천년의 세월도 검은 신을 희게 하지는 못하는구나.’라는 갖바치의 예언은 도대체 조광조의 무엇을 암시하고 있는 것일까.
  • [씨줄날줄] 국군포로 유골 귀국/강석진 논설위원

    꽃다운 나이 스물셋에 포로가 됐던 한 국군이 53년 만인 2004년 5월1일 백골이 되어 귀국했다.그의 이름은 대한민국 육군 제5사단 일병 백종규.살아서 이 땅을 다시 밟은 국군 포로는 다수로되 유골로 돌아온 것은 그가 처음이다. 아버지의 유골을 들고 2002년 4월 북한을 떠나 2년여 만에 겨우 귀국하게 된 딸 영숙씨는 “고향인 경북 청도에 내 뼈를 묻어 달라.”고 아버지가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무엇이 그토록 그리웠길래 백골이 되어 넋이라도 고향땅을 밟으려 하였을까.아내를 얻고 딸을 낳은 함경북도 그곳은 제2의 고향이 아니 되던가.아마 ‘나’를 영영 잊어버린 것 같아 더욱,오고 갈 수 없기에 더더욱 고향이 그리웠을 것이다.그래서 이북 용천의 큰 사고로 비탄에 잠긴 북녘 동포를 돕기 위해 대한항공 화물기가 떠난 공항으로 노병은 딸의 가슴에 안겨 돌아온 것이다. 그가 무엇을 알아 총에 탄알을 장전하고,무엇을 이루려고 옷만 다르게 입은 형제를 향해 돌격해 갔을까.그가 모든 것을 이해하면서 철모를 썼을지,단지 명령이라서 캄캄한 밤 앞으로 앞으로 행군해 나아갔을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그러나 포로가 된 이후 남쪽에서 훈풍이 불어오면 고향을 그리고,산기슭에 진달래 붉게 물들면 동네 뒷산에서 같이 놀던 동무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의 귀환은 그런 수많은 국군 포로와 유골이 아직도 북녘땅에 점재함을 짐작케 한다.그의 귀환은 애써 눈을 돌리고 귀를 막았던 나라와 정부와 우리 모두에게 뇌성벽력처럼 존재의 신호를 보낸다.아울러 북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 땅의 산 자와 죽은 자에 대해서도 따스한 배려가 이젠 필요하다고 우리는 깨닫는다. 유전자 감식 등 확인 절차가 남아 있기에 그는 공식 안장까지 잠시 더 기다려야 한다.53년의 기다림에 덤까지 얹혀 있다는 게 께끄름하지만,죽고 다치고 끌려간 모든 이들의 귀환이 1차적으로 셀프 서비스가 아니면 안되는 세상이기에 그 정도 기다림은 오히려 행운에 속한다고 생각하자.유골로 돌아오는 국군 포로에 대한 보상 규정이 없다는 말도 흘려 듣자.조국을 위해 희생한 자의 뜻을 기리는 데 더 이상 방해가 되지 않도록 규정이 바뀔 것을 믿기 때문이다.진혼곡 나팔 소리와 함께 고향 땅에서 그의 혼백이 편히 쉬기를 기원한다. 강석진 논설위원 sckang@seoul.co.kr˝
  • 儒林(56)-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儒林(56)-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실제로 조광조와 정몽주는 각별한 인연을 맺게 된다. 중종 12년,8월7일. 권진(權嗔)이라는 성균관의 유생이 비교적 긴 분량의 상소문을 중종에게 올렸는데,그 내용은 정몽주와 김굉필을 성균관의 문묘에 종사(從祀)하자는 것이었다. 학문과 덕이 있는 인물들의 신주를 문묘에 모시자는 것인데,정몽주는 성리학에 밝을 뿐 아니라 충효와 예절에 뛰어났으며,교육을 일으켜 후세에 끼친 공로가 크고,김굉필은 바른 행실과 교육으로 선비들의 귀감이 되었으니,문묘종사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 권진의 주장이었던 것이다. 물론 조광조는 이에 전적으로 찬성하였다.평소 조광조의 신념대로 정몽주는 정신적 스승이고,김굉필은 실제적 스승이었으니 마땅히 억울하게 죽은 김굉필에게 작록과 시호를 내리고 정몽주와 함께 문묘에 종사케 하는 것이 올바른 도리라고 이를 중종에게 청하였던 것이었다.그러나 조광조의 청은 받아들여지지 아니하였다.정몽주를 종사토록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김굉필은 신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으므로 그의 연고지에 사당을 세우고 자손을 우대하는 정도로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 중종의 견해였던 것이다. 그 이유는 단 하나. 김굉필이 조광조의 스승이라는 점 때문이었다.만약 김굉필을 문묘종사케 한다면 이는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림들의 세력을 한층 강화시켜 주는 계기가 될지 모른다는 것을 염려한 훈구파의 반대에 부딪혔던 것이었다. 조광조는 그 막강한 권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를 관철시키지 못하였고 이것이 마음 속에서 한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정몽주의 무덤 앞에서 ‘백골이 진토된 들 임향한 마음이야 변할 수 있겠는가’라는 노래를 읊는 것으로 임금에 대한 변함없는 단심을 노래한 조광조는 마침내 이자와 헤어지며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충의는 본래 없어질 수 없는 것/평소부터 닦아온 사람 그 또한 없었던가/모진 바람에 견디는 풀 더욱 보기 어렵더니/이제야 고려의 한 충신을 내 알겠구나.” 조광조가 읊은 이 노래는 훗날 왕위에 오른 태종이 자신이 죽인 정몽주를 기려 문충이란 시호를 내리며 지은 노래였다. 태종은 정몽주를 기리며 또 하나의 시조를 짓는데,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려가 쇠망함에 이조(李朝) 문득 일어나니/현명한 인사들이 떼 지어 붙었구나/조용히 죽음을 택한 오천(烏川)의 선비/조선 땅에 절의(節義)의 길 열어주었네.” 조광조는 이자와 마지막으로 헤어지면서 태종이 노래하였던 시를 통해 모진 바람에 견디는 풀 같은 자신의 처지를 은유하여 나타내 보였던 것이다.이자와 작별을 고한 조광조는 다시 머나먼 유배 길을 떠나게 되는데 용인을 지난 수레행렬이 남강에 이르렀을 무렵이었다.이미 구름처럼 모였던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날이 저무는 강물 위로는 붉은 노을이 핏빛으로 물들고 있었는데,바로 그 때 어디선가 기골이 장대한 사람 하나가 홀연히 나타나 조광조의 행렬을 따르고 있었다. “물럿거라.” 압송하던 나장 하나가 따르는 사람을 향해 쫓아내려 하였으나 그 사내는 오히려 크게 소리 지르며 바짝 다가서고 있었다. “나으리,대사헌 나으리.” 마침내 나졸이 손에 든 주장을 휘둘러 사내의 몸을 세차게 후려치며 말하였다. “썩 물러서지 못하겠느냐.” 분명히 쓰러질 만큼의 충격을 받았으나 사내는 꿈쩍도 하지 않고 무서운 눈빛으로 나졸을 노려본 후 낮은 소리로 말하였다. “네 이놈,내가 개상에 얹은 곡식단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어디서 함부로 태질이란 말이냐.”
  • 儒林(56)-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실제로 조광조와 정몽주는 각별한 인연을 맺게 된다. 중종 12년,8월7일. 권진(權嗔)이라는 성균관의 유생이 비교적 긴 분량의 상소문을 중종에게 올렸는데,그 내용은 정몽주와 김굉필을 성균관의 문묘에 종사(從祀)하자는 것이었다. 학문과 덕이 있는 인물들의 신주를 문묘에 모시자는 것인데,정몽주는 성리학에 밝을 뿐 아니라 충효와 예절에 뛰어났으며,교육을 일으켜 후세에 끼친 공로가 크고,김굉필은 바른 행실과 교육으로 선비들의 귀감이 되었으니,문묘종사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 권진의 주장이었던 것이다. 물론 조광조는 이에 전적으로 찬성하였다.평소 조광조의 신념대로 정몽주는 정신적 스승이고,김굉필은 실제적 스승이었으니 마땅히 억울하게 죽은 김굉필에게 작록과 시호를 내리고 정몽주와 함께 문묘에 종사케 하는 것이 올바른 도리라고 이를 중종에게 청하였던 것이었다.그러나 조광조의 청은 받아들여지지 아니하였다.정몽주를 종사토록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김굉필은 신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으므로 그의 연고지에 사당을 세우고 자손을 우대하는 정도로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 중종의 견해였던 것이다. 그 이유는 단 하나. 김굉필이 조광조의 스승이라는 점 때문이었다.만약 김굉필을 문묘종사케 한다면 이는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림들의 세력을 한층 강화시켜 주는 계기가 될지 모른다는 것을 염려한 훈구파의 반대에 부딪혔던 것이었다. 조광조는 그 막강한 권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를 관철시키지 못하였고 이것이 마음 속에서 한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정몽주의 무덤 앞에서 ‘백골이 진토된 들 임향한 마음이야 변할 수 있겠는가’라는 노래를 읊는 것으로 임금에 대한 변함없는 단심을 노래한 조광조는 마침내 이자와 헤어지며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충의는 본래 없어질 수 없는 것/평소부터 닦아온 사람 그 또한 없었던가/모진 바람에 견디는 풀 더욱 보기 어렵더니/이제야 고려의 한 충신을 내 알겠구나.” 조광조가 읊은 이 노래는 훗날 왕위에 오른 태종이 자신이 죽인 정몽주를 기려 문충이란 시호를 내리며 지은 노래였다. 태종은 정몽주를 기리며 또 하나의 시조를 짓는데,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려가 쇠망함에 이조(李朝) 문득 일어나니/현명한 인사들이 떼 지어 붙었구나/조용히 죽음을 택한 오천(烏川)의 선비/조선 땅에 절의(節義)의 길 열어주었네.” 조광조는 이자와 마지막으로 헤어지면서 태종이 노래하였던 시를 통해 모진 바람에 견디는 풀 같은 자신의 처지를 은유하여 나타내 보였던 것이다.이자와 작별을 고한 조광조는 다시 머나먼 유배 길을 떠나게 되는데 용인을 지난 수레행렬이 남강에 이르렀을 무렵이었다.이미 구름처럼 모였던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날이 저무는 강물 위로는 붉은 노을이 핏빛으로 물들고 있었는데,바로 그 때 어디선가 기골이 장대한 사람 하나가 홀연히 나타나 조광조의 행렬을 따르고 있었다. “물럿거라.” 압송하던 나장 하나가 따르는 사람을 향해 쫓아내려 하였으나 그 사내는 오히려 크게 소리 지르며 바짝 다가서고 있었다. “나으리,대사헌 나으리.” 마침내 나졸이 손에 든 주장을 휘둘러 사내의 몸을 세차게 후려치며 말하였다. “썩 물러서지 못하겠느냐.” 분명히 쓰러질 만큼의 충격을 받았으나 사내는 꿈쩍도 하지 않고 무서운 눈빛으로 나졸을 노려본 후 낮은 소리로 말하였다. “네 이놈,내가 개상에 얹은 곡식단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어디서 함부로 태질이란 말이냐.”˝
  • 儒林(55)-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조광조는 17세 되던 해 그의 부친 조원강이 어천도(魚川道)의 역참(驛站) 찰방의 관리로 임명받아 평안도로 부임하자 부친을 따라 그곳으로 갔다가 마침 그곳 희천에 정치적 이유로 유배와 있던 김굉필을 찾아가 스승으로 섬기고 사제의 인연을 맺었던 것이다.나란히 배를 올리고 나서 이자는 제단 위에 올렸던 술을 조광조에게 권하며 말하였다. “오늘의 풍색이 이처럼 나쁘니 세월이 하수상하나이까.” 조광조는 이자가 따라주는 술을 음복하며 웃으며 말하였다. “하오면 내가 잔을 들고 한바탕 춤이라도 추오리까.” 두 사람은 서로 술을 나누어 마시면서 크게 한바탕 웃었다.이 모습을 바라보던 나장들은 호방하게 웃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어리둥절하였다.먼저 단숨에 술을 들이켠 이자가 이렇게 노래하였다. “오늘의 풍색이 매우 나쁘다 해도/잔 들고 춤을 추니 그 또한 기쁘리라/무장한 사나이가 말을 지쳐 지나간다/족쳐서 묻지마라/제 어찌하건 오백년의 나라강상(綱常)이/내 한 몸에 맡겼구나.” 먼저 이자가 노래하자 조광조도 단숨에 잔을 비우고 질세라 노래하였다. “백골이 진토된들 임향한 마음 변할쏘냐/상공의 한번 죽음 분수에 당연하나/저 녹사(錄事)는 누구 집 자제던가/살아서 상공 따랐고 죽어서도 상공 따랐네/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성조(이성계)가 개국하여 책봉한 공신들이 고려조에 녹을 먹던 사람들이로세.” 두 사람이 의기투합하여 읊은 노래는 정몽주의 문집인 ‘포은집(圃隱集)’에 나오는 노래로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그때 성조(이성계)의 공업(公業)이 날이 갈수록 성해감에 모든 관리들이 마음을 돌려 따라 붙었다.태종(이방원)이 태조께 고하기를 ‘정몽주가 어찌 우리 집을 배반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그러자 태조가 말하였다.‘내가 애매한 참소를 만나면 정몽주가 죽기로써 나를 변명해 주었지만 만일 나라를 일으키려 한다면 그 마음을 알 수 없다.’ 차츰 문충공의 심사가 알려지매 태종이 잔치를 차려 청하고서 술을 권하며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성황당 뒷담이야 무너진들 어떠하리/우리도 이렇게 해서 죽지 않은들 또 어떠하리.’ 이 노래를 들은 문충공이 술을 보내며 노래를 지어 불렀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죽어/백골이 진토되어 넋이야 있든 없든/임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리오.’ 문충공의 노래를 들은 태종이 그 마음이 변치 않을 것을 알고 드디어 없애기로 결심했다.문충공이 문병차 태조의 집에 가서 겸하여 기색을 살펴보았다.돌아오는 길에 옛 술친구의 집을 지나더니 주인은 출타하고 뜰에는 꽃만 만발했다.이내 옆길로 들어가서 술을 부르고 꽃 속에서 춤을 추며 노래하였다. ‘오늘 풍색이 나쁘구나.매우 나쁘구나.’ 연거푸 술을 들이켜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활을 멘 무사(조영규)가 앞질러 지나갔다.낯빛을 변하면서 따라 오는 녹사를 돌아보고 문충공이 이르기를 ‘너는 뒤에 처지거라’하였다.그러나 녹사가 대답하기를 ‘쇤네가 대감을 모시고 왔는데 어찌 딴 곳으로 갈 수 있사옵니까’라고 하였다.두 번 세 번 꾸짖어도 듣지 않다가 마침내 문충공이 죽음을 당함에 함께 부둥켜안고 죽었다.그때의 일이 너무 갑작스러워 아무도 그 이름을 기억한 이가 없어서 뒷세상에 전하지 못하였다….” ‘포은집’에 실린 이 기록은 훗날 심광세(沈光世)에 의해서 정리되었으나 정몽주의 단심가와 정몽주를 위해 죽음을 바친 이름 없는 녹사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널리 회자되고 있었던 것이었다.그러므로 조광조와 이자 둘이서 읊은 이 노래는 이처럼 ‘임향한 일편단심은 백골이 진토되어도 변할 수 없다’는 정몽주의 충정을 통해 자신들의 단심을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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