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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lubmed Kabira Beach 三無 리조트 이야기

    Clubmed Kabira Beach 三無 리조트 이야기

    클럽메드에는 3가지가 없다. 그 三無는 완벽한 휴가를 즐기기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 일본 열도 가장 끝에 있는 오키나와 이시가키 카비라 비치에서 직접 경험해 봤다. 클럽메드 해변에 파랑색 깃발이 걸렸다. 파랑색 깃발은 지금 비치에서 해양스포츠를 즐기기 안성맞춤이란 사인이다 클럽메드는 ‘리조트’가 아니다? 휴양을 목적으로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클럽메드는 꽤 우선순위가 높은 리조트다. 입소문만으로 클럽메드를 선택하는 이가 적지 않은데, 소문이 전부인 줄 알고 무턱대고 선택했다가는 진정한 재미를 놓칠 수도 있다. 클럽메드는 ‘리조트’라고 부르기에는 그 뒤에 붙여야 할 수식어들이 너무 많은, 독특한 콘셉트를 지녔다. 다른 리조트에는 있지만, 클럽메드에는 없는 3가지 때문에 클럽메드에서의 휴가는 더욱 즐겁다. 첫째, 넓은 객실, 개인 수영장, 커다란 욕조 등 동남아의 고급 리조트가 자랑하는 특급시설이 클럽메드에는 없다. 물론 2012년에 개보수를 마친 스위트룸과 디럭스 가든 테라스 룸 같은 객실은 수준급이지만 일반 수준의 객실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그럼에도 휴양 목적의 리조트로 클럽메드가 사랑받는 이유는 진정한 클럽메드의 진가는 객실 안이 아닌 객실 밖에 있기 때문이다. 객실이 너무 좋아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여행자에게도, 다양한 공연과 체험 프로그램을 마련한 클럽메드 모두에게도 손해다. 둘째, 클럽메드에는 허례허식이 없다. 리조트의 총책임자인 ‘촌장Chef de Village’의 하루 일과를 보면 알 수 있다. 클럽메드 카비라 비치의 촌장은 50세를 훌쩍 넘긴 나이지만 매일 밤 공연장에서 열리는 각종 쇼를 직접 진행하고, 최신 유행가에 맞춰 춤을 추고 방문객의 호응을 이끈다. 식사 시간에는 리조트 방문객들과 격 없이 식사도 한다. 근엄하고 격식을 차리는 고급 리조트의 총지배인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다. 클럽메드의 최고 책임자가 가식을 털어내고 방문객에게 다가가니 투숙객들도 처음 해보는 각종 프로그램을 즐기는 데 거리낌이 없다. 셋째, 클럽메드에는 추가 비용이 없다. 어렵게 짬을 내 떠난 여행에서, 각종 추가 비용 때문에 쉽사리 도전하지 못했던 경험이 있다면 클럽메드에서는 안심해도 된다. 클럽메드는 특별한 요리, 스파 등 일부 품목, 서비스를 제외하고는 식사, 음료, 객실 이용료, 팁은 물론 항공료, 유류할증료, 세금까지 모조리 상품요금에 포함돼 있다. ‘무엇이든 할 자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며칠간 얻는 비용에 더해, 뭔가 추가로 지불해야 하는 ‘숨은 비용’은 애초부터 없다. 다시 아이가 되다 클럽메드 카비라 비치에서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이시가키 공항으로 향할 때 온몸이 뻐근했다. 군 훈련소에 입소한 다음날, 힘든 산행을 마친 다음날 느끼는 바로 그것. 오랜만에 만나는 ‘알’이었다. 허리를 굽혀 옷을 입을 때, 여행가방을 들 때 온몸을 엄습하는 찌릿함. 간만에 땀에 흠뻑 젖을 만큼 즐겁게 뛰어 놀았던 후유증이다. 그만큼 체력을 불사를 활동이 많았기 때문이다. 클럽메드 카비라 비치에서의 지난 며칠은 어렸을 적 흙을 먹으며 친구들과 공을 차던 그때와 흡사했다. 클럽메드를 찾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아이를 동반하는 가족이다. 클럽메드에는 만 2세에서 3세의 유아를 동반하는 가족여행자를 위해 쁘띠클럽을 운영한다. 자녀를 맡기고 나면 부모는 비로소 자유를 만끽한다. 어린이를 돌보는 데 특성화 된 G.O가 어린이들을 밀착 보호하기 때문에 부모들은 몸은 물론 마음까지 자유로울 수 있다. 이제부터 격렬한 스쿼시로 ‘알’을 영접할지, 누구의 방해 없이 산책에 나설지, 잔잔한 파도에 몸을 맡길지! 클럽메드 카비라 비치가 제공하는 프로그램 중 기호에 맞는 것을 골라 체험하면 된다. 단 스케줄표와 유의사항을 충분히 숙지하고 참여하자. ▶travie info 클럽메드 쁘띠클럽 쁘띠클럽은 사전 예약이 필요하며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쁘띠클럽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이의 건강진단서를 준비해야 하며, 기저귀, 물티슈, 갈아입을 옷, 모자, 선글라스, 운동화, 수영복 등도 미리 챙겨야 한다. 클럽메드 카비라 비치에는 만 4세에서 10세까지의 아동들이 이용할 수 있는 미니클럽도 설치돼 있다. ‘퍼펙트골드’를 쏴라 한국에서 서양식 양궁을 체험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클럽메드 카비라 비치에서는 담당 G.O와 함께 안전하게 양궁을 즐길 수 있다. 손끝에서 활이 떠날 때 전해지는 묘한 떨림은 나름 중독성이 있어 방문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활 쏘기는 의외로 어렵지 않다. 양궁장에 활시위의 탄도와 강도가 각각 다른 활이 준비돼 있어, 자신에 맞는 것을 선택하면 된다. 양궁은 여러 사람들과 함께할 때 가장 즐겁다. 그룹을 나눠 활을 쏜 뒤 그 점수를 합해 승부를 겨루기 좋다. 10점 중의 10점인 ‘퍼펙트골드’도 노려볼 만하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치유의 30분 클럽메드 카비라 비치의 산책로는 낙원으로 가는 길이다. 리조트 정문에서 시내 반대 쪽으로 걷다 보면 잘 가꿔진 산책로가 나온다. 산책 시간은 넉넉히 잡아도 1시간을 넘지 않는다. 리조트가 카비라만 한 켠에 덩그러니 자리잡았기 때문에 사람의 이동도 많지 않다. 그러나 산책로는 잘 정돈돼 있어 대저택의 정원 같은 느낌이다. 산책로 자체도 부침이 거의 없고,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잘 닦여 있어 남녀노소 산책하기 딱 좋다. 동반할 아이가 없는 사람은 산악자전거를 빌려 주변 산책로를 일주해도 된다. 단 12세 이상이나, 자전거에 앉은 상태에서 발이 땅에 닿는 사람만 산악자전거를 이용할 수 있다. 반갑다 ‘알’ 오랜만에 ‘알’을 만나게 해준 것은 다름 아닌 스쿼시였다. 클럽메드 카비라 비치에는 3개의 스쿼시 코트가 있다. 클럽메드에서 스쿼시를 치려면 운동화와 객실 카드키를 꼭 챙겨야 한다. 스쿼시는 가로 6.4m, 세로 9.75m 넓이의 작은 공간에서 격렬하게 이뤄지는 스포츠다. 때문에 방향을 바꾸다 자칫 발목이 삐는 부상을 당할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파도에 몸을 맡겨라! 리조트에서 바다를 조망하면 수평선 끝까지 넓게 펼쳐진 산호초 지역이 눈에 들어온다. 잘 보존된 산호초 지역은 파도를 잔잔하게 하는 방파제 역할도 하기 때문에 태풍 불 때를 빼고 리조트 앞 바다는 언제나 잔잔하다. 클럽메드 카비라 비치에서 즐길 수 있는 해양스포츠는 투명 카야킹과 윈드서핑, 스노클링 등이다. 투명 카야킹은 바닥이 투명한 바나나 모양의 카약을 타고 리조트 인근 바다를 유영하는 것으로 만 8세 이상(어린이는 부모동반)이라면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다. 윈드서핑은 사전에 교육을 받은 사람만이 체험할 수 있다. 윈드서핑 교육은 리조트에서 윈드서핑 담당 G.O가 진행한다. 스노클링도 할 수 있는데 만 8세 이상 어린이 대상의 강습도 있다. 팔짱은 금물 매일 밤, 수영장 옆 공연장에서는 흥겨운 공연이 펼쳐진다. 공연장에 들어서면 단 두 가지만 지키면 된다. 첫 번째는 ‘팔짱끼지 않기’와 ‘주머니에 손 넣지 않기’다. 이 두 가지는, 행동의 문제이기보다는 즐기겠다는 마음의 준비와 관련이 있다. 팔짱 끼고 공연의 품질을 평가하는 것은 클럽메드 공연장에서는 금물이다. 클럽메드의 G.O들은 매일 공연을 준비하지만 전문 배우들이 만드는 공연이 아닌 탓에 완성도는 높지 않다. 그러나 G.O들이 공연 내내 내뿜는 ‘행복 에너지’는 무대를 가득 채우고도 남는다. 공연이 종료될 때 즈음이면 관객들도 거리낌 없이 무대 앞으로 나와 G.O와 함께 덩실덩실 춤을 춘다. G.O들이 준비한 공연은 공연장 앞에 있는 바까지 이어진다. 요일에 따라 다채로운 이벤트가 끊임없이 펼쳐진다. 바에서는 오키나와 지역 맥주인 ‘오리온’도 무제한으로 공급된다. 1 이시가키 야아마무라 민속촌에 살고 있는 원숭이 무리 2 맹그로브는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지역에 서식하는 관목이다 3 커다란 물소가 끄는 대형 달구지. 이리오모테섬과 유부섬 사이를 매일 왕복한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일본과 타이완이 편애하는 섬 클럽메드는 스스로 도시와 격리된 삶을 선택한다. 이번에 다녀온 클럽메드 카비라 비치의 경우에도 그러했다. 도쿄에서 오키나와 본섬 나하那覇국제공항까지 비행시간은 2시간 정도. 클럽메드 카비라 비치는 오키나와 본섬에서 1시간은 더 날아가야 하는 이시가키섬 안에서도, 공항에서 차량으로 50분은 더 들어가야 하는 카비라만灣에 자리하고 있다.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카비라 비치는 주변에 인공 불빛이 없어 밤에는 별이 더욱 눈부시고, 도시의 소음이 없으니 바다의 파도 소리는 청연하다. 때묻지 않은 자연을 품은 이시가키를 포함한 오키나와 지역은 최근 일본 본토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휴가는 물론이고 이주도 부쩍 늘었다고 한다. 이유는 일본 동북부 지진으로 정신적 충격을 입은 사람들이 청정한 자연 속에서 치유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다. 게다가 비교적 지진으로부터 자유롭고, 원전에서도 까마득히 멀다. 실제로 오키나와 본섬에서 이시가키까지 거리는 400km 정도이지만, 타이베이에서 이시가키까지는 300km에도 못 미칠 정도로 일본 본토보다 타이완에 더 가깝다. 그래서 이시가키는 타이완 사람들 사이에서도 인기다. 매해 여름이면 타이베이와 이시가키 사이를 운항하는 전세기가 있을 정도로 타이완 사람들은 이시가키를 사랑한다. 타이완 사람들과 일본 본토에서 오는 사람들은 이시가키섬을 기점으로 이리오모테섬, 타케도미섬 등 점점이 박힌 보석 같은 섬들을 관광한다. 이리오모테섬은 이시가키섬에서 뱃길(타이완 방향)로 1시간 정도 거리에 있다. 이리오모테섬은 광활한 맹그로브 숲과 커다란 물소가 있는 유부섬 등이 주요 관광지다. 특히 이리오모테섬의 맹그로브는 지구상 가장 서쪽에 있는 맹그로브숲 중 하나여서 생물학, 지리학적으로도 가치가 있다. 유부섬은 이리오모테섬에 달린 작은 육계도로 섬 사이는 1km도 안 되는 거리인데, 그 사이를 연결해 주는 커다란 달구지가 특히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달구지를 끄는 검은 물소는 발걸음이 느려 둔해 보이지만, 힘이 좋고 성실해 이 지역 사람들에게 귀한 대접을 받는다. 이시가키섬에서 배로 20분 거리에 있는 다케도미섬에서는 낮에도 별을 볼 수 있다. 별모래 해변이라고 불리는 섬 북쪽의 백사장에는 별 모양의 산호가 산재해 있다. 얼핏 보면 좁쌀 크기의 모래 같지만 자세히 보면 반짝이는 별 모양을 하고 있다. 이시가키 주변 섬 관광은 클럽메드에서 운영하는 외부 관광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가능하다. 단 각 프로그램에 따라 가능한 시간과 날짜가 있으며,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글·사진 박우철 기자 취재협조 클럽메드 www.clubmed.co.kr, 오키나와 관광·컨벤션뷰로 www.visitokinawa.jp/kr, 아시아나항공 www.flyasiana.com 타케도미섬에서는 자전거를 타고 섬을 일주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travie info 클럽메드 카비라 비치와 다양한 매력을 지닌 이시가키가 오는 3월, 조금 더 가까워진다. 아시아나항공은 이시가키 신공항 개항에 맞춰 인천국제공항과 이시가키를 연결하는 직항 전세기를 3월7일과 3월10일 단 2회 운항한다. 2월 현재까지 이시가키공항은 대형 비행기가 이착륙하기에는 너무 짧은 활주로를 갖고 있지만 3월이면 보잉사의 747 점보 기종도 이착륙할 수 있게 된다. 아시아나항공의 직항 전세기를 이용하면, 대기 시간을 포함해 4시간 이상 걸리는 기존 여정이 2시간 정도 단축된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여행신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여행신문에 있습니다.
  • 낯선 터키의 중심 ②카라만 Karaman, 카파도키아 Kapadokya

    낯선 터키의 중심 ②카라만 Karaman, 카파도키아 Kapadokya

    풍요로운 도시 카라만 Karaman 여행자들에게 콘야는 안탈랴와 카파도키아 사이의 경유 도시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그런 탓에 가이드북에서도 콘야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얻기가 어렵다. 콘야에서 남쪽으로 100km 거리인 카라만은 콘야보다도 더 소외된 도시다. 콘야에서 차로 1시간 정도 거리임에도 카라만을 들러 여정을 잇는 이들은 흔치 않다. 한국인 여행자들도 마찬가지라 카라만의 존재는 그 흔한 블로그에서도 검색하기가 힘들다. 여행자들이 외면한 카라만이긴 하지만 시대를 아우른 보물을 간직한 풍요로운 도시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카라만 성’에서는 예로부터 위풍당당했던 카라만의 면모를 볼 수 있다. 12세기 셀주크제국 당시 세 겹으로 겹겹이 지은 카라만 성은 요새와도 같았다. 무려 3km 바깥에 자리했었다는 해자와 외성外城은 카라만의 위상과 권위를 짐작하게 한다. 최근까지도 복원 중인 카라만 성은 현재 내성內城만 남은 상태. 아찔한 계단을 따라 성루에 오르면 작지도 크지도 않은 카라만 도심이 한눈에 담긴다. 200년 전의 오스만 전통 가옥인 ‘타르탄랄의 집’에서는 카라만에서 나아가 터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나무로 지은 집은 아래층과 위층에 각각 네 개의 방을 두었는데 아래층은 겨울에만, 위층은 여름에만 사용했다. 붙박이장과 샤워실 등은 각 층에 공통적으로 배치했지만 벽난로는 아래층에만 설치하는 식이다. 2007년에 복원한 2층은 배, 블루 모스크 등을 그려 놓은 천장 장식이 볼 만하다. 이슬람과 크리스트교를 넘나드는 카라만의 종교 유적지는 카라만에 풍요로운 볼거리를 더한다. 메블라나의 어머니를 모신 ‘아크테케 모스크’는 카라만의 자랑이다. 메블라나와 그의 아버지가 묻힌 콘야의 메블라나 박물관에 비해 너무나도 소박하지만 사원 앞에 자리한 커다란 나무는 1370년부터 이어온 사원의 유구한 역사를 속삭이듯 전한다. 아크테케 모스크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비잔틴 당시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체쉬멜리 교회’가 남아 있다. 교회 내부 천장에는 프레스코화의 흔적이 아련하지만 크리스트교인들이 제 나라로 돌아간 후 교회는 문을 닫았다. 여행자들의 발길 또한 뜸해 교회 내부를 돌아보기는 쉽지 않은 일. 대신 체쉬멜리 교회 분수 유적은 카라만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카라만 박물관’은 선사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유물을 전시한 박물관이다. 동전, 의복, 도자기 등 다양한 생활양식이 깃든 전시품은 기본. 조명을 밝힌 유리관 안에는 섬뜩하지만 눈길을 앗아가는 미라가 누워 있다. 이 미라는 카라만 도심에서 40km 떨어진 타쉬칼레 마나잔 동굴 5층에서 발견됐다. 타쉬칼레의 마나잔 동굴은 6~7세기 비잔틴 시대에 사람들이 살아가던 공간이다. 겉으로는 깎아지른 암벽으로만 보이지만 암벽 안에는 5층에 걸친 주거 공간이 오밀조밀하게 놓여 있다. 수백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당시의 입구는 찾을 수 없다. 암벽의 전면부가 무너져 내려 날개를 가진 새들만이 자유롭게 동굴을 드나든다. 사람들은 길이 아닌 환기구로 마나잔 동굴을 찾는다. 가느다란 손전등 빛에 의지해 허리를 굽혀 좁은 굴을 통과하고 환기구에 설치된 수직의 사다리를 기어오른다. 길은 또한 외길이다. 내려오는 데에도 팔과 다리의 근력이 만만찮게 요구돼 적절한 힘의 배분이 필요하다. 악조건을 딛고 찾은 동굴 자체는 그리 큰 볼거리가 아니지만 여행자들의 호기심을 채우기에는 손색이 없다. 두 눈이 번쩍 뜨이는 타쉬칼레의 또 다른 볼거리는 마나잔 동굴에서 멀지 않은 타쉬 암발라에 자리한다. 타쉬 암발라는 비잔틴 시대, 사암의 무른 바위를 파 만든 350여 개의 곡물 창고다. 대형 비둘기장을 연상케 할 정도로 거대한 바위를 질서정연하게 쌓아 만든 창고는 비록 필요에 의해 조성됐지만 놀랍도록 아름답다. 내부 온도가 13도 이하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창고는 50~60톤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양의 곡물을 보관할 수 있는 규모. 사람들이 바위를 기어다닐 수 있도록 홈을 파 놓았으며, 도르레를 사용한 흔적도 보인다. 곡물 창고 한 켠에 마련된 타쉬 메스짓 사원에서는 곡물 창고의 내부를 짐작해 보는 일이 가능하다. 사원은 나무 계단을 통해 편하게 드나들 수 있어 기도 시간이면 사람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travie info 타르탄랄의 집┃관람시간 오전 8시~오후 5시 카라만 박물관┃관람시간 오전 8시30분~오후 12시30분, 오후 1시30분~오후 5시, 월요일 휴무 아름답고도 슬픈 땅 카파도키아 Kapadokya 페르시아어로 아름다운 말馬이라는 뜻의 카파도키아는 박해를 피해 살던 많은 크리스트교인들이 정착한 땅이다. 60~70년대부터 400년대까지 3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크리스트교인들은 카파도키아의 어딘가에 숨어 피폐한 삶을 살아왔다. 지하 혹은 바위 동굴에 숨어 살던 그들에게는 크리스트교의 공인도 소용이 없었다. 교인들을 꾀어 내기 위한 술수라 여긴 그들은 크리스트교가 공인된 이후 더욱 깊은 곳으로 숨어 들었다. ‘데린쿠유’와 ‘카이마클르’와 같은 지하 도시는 애초에 히타이트인들이 파 놓은 곳이다. 박해를 피해 온 크리스트교인들은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방어를 하기 위해 지하를 오가며 살았다. 지하 도시의 규모는 생각보다 무척 크다. 침실과 부엌, 원형 극장에 교도소까지 갖추고 있을 정도. 가장 많을 때에는 2만~2만5,000명의 인구를 수용했다니 그 규모를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크리스트교인들이 정착한 땅에는 수도원 또한 많다. 카파도키아의 기괴한 지형은 그리하여 바위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은밀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괴뢰메 야외 박물관’은 매일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라는 의미로 365개의 암굴을 파 수도원을 지었다는 곳이다. 기암괴석과 더불어 프레스코화의 상태가 좋은 동굴 교회가 꽤 있어 오디오 가이드를 빌려 돌아보면 도움이 된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198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젤베 야외 박물관’도 괴뢰메 야외 박물관의 일부다. 젤베는 물이 흘러 만든 계곡으로 가장 깊은 골로 접어들면 물을 만나게 된다고 한다. 계곡 높은 곳에는 수도원이 지어졌고 성상파괴가 성행하던 8~9세기경 이곳 동굴은 은신처로 사용됐다. 크리스트교인들과 더불어 이슬람교인들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며, 이슬람 사원의 미나레와 유사한 구조물이 아직까지도 보존돼 있다. 스머프 마을이라는 명성답게 ‘파샤바’에는 버섯 모양의 바위가 줄지어 서 있다. 송이버섯처럼 몸통은 하얗고 갓은 거무튀튀한 모양새가 재미있다. 어떤 곳의 바위는 눈처럼 하얘 화이트 샌드 혹은 소금 사막과 같은 느낌이 든다. 지하 도시와 괴뢰메 박물관 등 여행자들이 걸어서 닿을 수 있는 카파도키아는 사실 일부에 불과하다. 수많은 기암괴석과 계곡이 이룬 이곳 땅은 길보다는 길이 아닌 곳이 더 많다. 이런 카파도키아를 가장 잘 감상할 수 있는 방법은 열기구를 타는 것이다. 해가 뜨기도 전인 이른 아침, 여행자들을 가득 실은 열기구는 카파도키아의 하늘을 점점이 수놓는다. 열기구는 기암괴석에 가까이 가기도, 아주 높게 떠오르기도 하며 1시간 가량의 여정을 잇는다. 열기구를 타기 전에 잔뜩 겁을 먹었던 이들도 이내 적응해 하늘 아래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고, 과도하게 흥분된 마음으로 과도하게 많은 사진을 찍고 나서야 지상에 발을 내디딘다. 열기구 투어는 단언컨대 상상보다 황홀하다. 무섭다는 이유로, 비싸다는 이유로 절대 망설이지 말 일이다. Travel to Turkey ▶항공 터키항공(서울 사무소 02-3789-7054 www.turkishairlines.com)에서 인천-이스탄불 직항편을 매일 운항한다. 인천 출발 23:55, 이스탄불 도착 05:00, 이스탄불 출발 00:45, 인천 도착 16:55. 기내 서비스도 만족스러운 편이다. 이스탄불-콘야, 이스탄불-카파도키아 등 이스탄불 국내선도 터키항공으로 이용 가능하다. ▶시차 터키가 한국보다 7시간 느리다. ▶화폐 터키시 리라Turkish Lira를 사용하며 TL로 표기한다. 2012년 12월 기준, 1TL이 0.556미국달러, 0422유로 가량. 대략 1TL에 600원을 곱하면 원화로 쉽게 계산이 가능하다. ▶레스토랑 소마치(0332-351-6696 www.somatci.com)는 셀주크투르크의 음식을 전문적으로 선보이는 레스토랑. 800년 전 요리법에 따라 메블라나의 책자에 나오는 음식을 선보인다. 토마토 소스나 해바라기 오일, 마가린 등 당시 콘야에 없던 재료는 일절 사용하지 않는 게 특징. 100년 된 가정집의 방과 정원을 레스토랑으로 활용하고 있어 분위기도 그만이다. 하브잔(0332-324-1100 www.havzanetliekmek.com.tr)은 터키식 피자인 피데 전문점이다. 1m 가량 되는 기다란 에뜰리엑멕 피데를 자르지 않고 내어 와 보는 즐거움도 크다. 두 명은 족히 먹고도 남을 만한 피데가 6TL로 가격도 저렴한 편. 2m가 넘는 피데도 만든 적이 있다는 게 주인장의 전언이다. 피데를 먹고 나올 때 레몬향의 스킨도 뿌려 준다. 타카(0332-237-8802 www.takarestaurant.com.tr)는 흑해에서 잡은 생선요리를 선보이는 집이다. 육류가 대부분의 밥상을 지배하는 중앙 아나톨리아에서 생선요리는 반가운 메뉴. 여러 종류의 생선 중에서 선택을 하면 튀김옷을 입혀 맛있게 내어 온다. 레스토랑 분위기도 매우 고급스럽다. 야카마나스트르(0544-601-1312)는 30cm는 족히 넘는 잉어를 통째로 튀겨 선보이는 집. 잉어가 많이 잡히기로 유명한 베이쉐히르 호수에서 잡은 잉어를 요리의 재료로 사용한다. ▶카페 아이딘차부쉬(0332-325-2343, www.aydincavus.com)에서는 소박하지만 정겨운 콘야의 야경을 감상할 수 있다. 진한 터키식 커피가 일품이다. 시니(0332-237-5853)는 세련된 분위기 속에서 도심을 360도 전망할 수 있는 레스토랑이자 카페다. 콘야 시내의 쿠레플라자 42층에 자리한다. 실레(0332-244-9028)는 터키전통의 물담배를 경험할 수 있는 커피숍이다. 성헬레나교회가 자리한 실레에서도 분위기가 꽤 괜찮은 곳으로 손꼽힌다.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여행신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여행신문에 있습니다.
  • 대둔산·화암사의 아름다운 설경

    대둔산·화암사의 아름다운 설경

    대체 얼마를 겨눴는지 모릅니다. 겨울철 빼어난 설경으로 입소문이 ‘자자’한 곳, 대둔산 말입니다. 도회지의 월급쟁이가 자연의 시계를 따라잡기가 어디 쉬운가요. 대둔산에 눈이 내리면 일상이 몸을 붙잡고, 모처럼 시간이 나면 눈이 사라져 버리기 일쑤였지요. 그렇게 마주한 대둔산의 설경은 감동적이었습니다. 폭설이 내리고 이틀 뒤 찾았으니 필경 절정의 자태는 아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마저 눈물겹게 고마웠습니다. 대둔산 눈꽃 너머엔 ‘꽃바위’ 같은 절집, 화암사(花巖寺)가 있었습니다. 안내 책자의 소개글 하나 보고 찾아간 절집은 몇 구절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빼어난 풍모를 하고 있었지요. 배티재에 선다. 전북 완주와 충남 금산을 가르는 고개다. 사내의 알통을 닮은 암릉들이 전방의 시야를 꽉 채운다. 선인들은 저 모습에서 새싹을 보았던 게다. 대둔산의 둔(芚) 자는 싹이 나온다는 뜻. 짐작컨대 산의 이름을 대둔산이라 정한 것도, 최고봉인 마천대(878m) 등의 봉우리들이 봉긋봉긋 솟은 모양새가 봄의 새싹을 닮았다는 걸 비유하려는 뜻이지 싶다. 대둔산은 충남 금산과 논산, 전북 완주 등에 걸쳐 있다. 오르는 방법도 여러 가지. 가장 일반적인 건 완주의 대둔산도립공원을 출발해 금강구름다리와 삼선계단을 거쳐 마천대에 오르는 코스다. 하산은 낙조대와 용문굴 등을 돌아 다시 동심바위로 내려선다. 산행거리는 5㎞, 4~5시간쯤 걸린다. 케이블카를 이용해도 좋겠다. 대둔산 중턱인 금강구름다리 아래까지 단박에 오를 수 있다. 그 덕에 마천대까지 오가는 시간도 2시간 이내로 확 줄어든다. 케이블카 상부역사 위 정자가 산행 기점이다. 거인이 힘 주어 뽑아 올린 듯한 암벽 사이로 철계단이 나 있다. 암벽을 비집고 나서면 금강구름다리다. 임금바위와 입석대를 잇는 빨간 철계단이다. 80m 높이에 50m 길이로 쭉 뻗은 구름다리에 서면 누구든 비명을 지르기 마련이다. 아래를 보자니 다리가 후들거리고, 머리 들어 위를 보니 거대한 암봉들이 위압적인 자태로 서 있다. 오금 바짝 당겨 버텨봐도 입술 사이로 찬탄 섞인 비명이 새 나가는 건 막을 도리가 없다. 삼선계단은 더하다. 삼선봉으로 향하는 36m짜리 ‘수직’ 계단이다. 경사가 51도에 달하는 것에 견줘, 폭은 0.5m밖에 되지 않는다. 127계단을 오르는 내내 계단 틈에 코를 박고 납작 엎드려야 할 만큼 공포스럽다. 장난은 금물이려니와 혹시라도 계단 중턱에서 쉬게 될 경우 절대 뒤돌아보지 말길 권한다. 허공에 매달린 듯한 공포감에 모골이 송연해진다. 삼선계단에서 마천대로 향하는 길도 가파르긴 마찬가지다. 숨이 턱에 닿을 때쯤 만나는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마천대다. 정상에는 대둔산 개척 기념탑이 솟아 있다. 1972년 세웠다니 꼬박 31년 동안 마천대를 짓누르고 있었던 셈이다. 마천대에 오르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집산연봉과 마주한다. 그 자태가 꼭 파도를 닮았다. 전북과 그 아랫녘의 산자락들이 일망무제로 내달리고, 눈꽃 핀 숲은 밀가루를 뒤집어 쓴 듯하다. 손에 잡힐 듯한 덕유산은 물론, 멀리 마이산과 지리산까지 죄다 두 눈에 담긴다. 마천대에서 마주 보이는 왕관바위까지는 다녀오는 게 좋겠다. 마천대의 암릉들이 얼마나 기골이 장대한지, 어깨를 맞댄 주변의 산들은 또 얼마나 늠름한지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완주 여정에서 화암사를 ‘발견’한 건 행운이었다. 자투리 시간에 노느니 독 깬다는 생각으로 돌아본 절집에서 뜻밖에 고즈넉한 풍경을 ‘캐냈’으니 말이다. 화암사는 꽃바위에 걸터앉은 절집이란 뜻이다. 오래전, 병마와 싸우던 공주가 용이 기르는 복수초를 먹은 뒤 씻은 듯 나았는데, 그 꽃이 핀 자리가 바로 화암사가 터를 잡은 바위벼랑이었다는 설화에서 이름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불명산(佛明山)으로 방향을 잡는다. 화암사가 깃든 산이다. 들머리는 경천면 가천리 요동마을이다. 마을 초입에 내걸린 짚신 두어 켤레가 예사롭지 않다. 마을 안내판에 따르면 예전 남도의 선비들이 한양 갈 때면 이 마을에서 헤진 짚신을 갈아신었단다. ‘싱그랭이 마을’이란 별칭으로 불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화암사로 드는 산길은 싱그랭이 마을을 지나야 나온다. 판근과 불퉁한 바위들이 차량의 진입을 막고 있다. 우수를 앞둔 계곡에선 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싱그럽다. 길은 계곡과 공간을 나눠 쓴다. 닦여진 길은 없고, 계곡물을 피해 발걸음 놓은 자리가 곧 길이 된다. 절집엔 그 흔한 일주문이 없다. 오래전 선인들이 걸었을 이 길, 절집으로 향하는 마음을 스스로 추스르게 만든 산길이 바로 일주문이었던 게다. 살풍경한, 그러나 바위벼랑을 오르기에 더없이 유용한 철제 계단을 오르면 누런 빛의 목재 건물이 객을 맞는다. ‘우화루’(雨花樓·보물 제662호)다. 애초 단청이란 없었겠다 싶을 만큼, 곱게 늙은 나뭇결을 온전히 드러낸 건물이다. 꽃바위에 걸터앉은 절집에 꽃비가 내리는 건 수미상응일 터. 행여 누각의 이름에서 신선에 이르는 ‘우화’(羽化)를 연상하지는 마시라. 절집은 소박하다. 민낯이다. 그리고 묵직하다. 건물을 이고 선, 빛바랜 나무들이 주는 세월의 무게감 때문이겠다. 절집으로 드는 문은 달랑 하나다. 우화루와 문간채 사이로 난 쪽문이다. 허리 굽혀 쪽문으로 들어도 본전인 극락전은 온전히 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자칫 극락전에 고정될 뻔했던 시선 속에 주변의 소소한 것들까지 담을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가람 배치 덕일 게다. 극락전은 우화루와 숨결이 맞닿을 거리에 서 있다. 지난 2011년 국보(제316호)로 승격된 절집의 본전이다. 극락전은 하앙식(下昻式) 구조로 유명하다. 처마를 좀 더 밖으로 빼기 위해 기둥과 처마 사이에 부재를 끼운 건축양식이다. 이 같은 공법의 건물은 국내에서 화암사가 유일하다. 절집은 극락전과 우화루, 그리고 요사채인 적묵당과 불명당이 마주 보는 구조다. 네 건물이 모여 네모난 작은 마당을 만들었다. 그러니 거기서 보는 하늘이라고 다르랴. 하늘도 땅도 죄다 네모다. 글 사진 완주 손원천 여행전문기자 angler@seoul.co.kr ■ 여행수첩 (지역번호 063) →가는 길 대전~통영고속도로 추부 나들목으로 나와 추부면 소재지를 지나 배티재를 넘어가면 대둔산이다. 천안~논산고속도로 논산 나들목을 나와 679번 지방도로→양촌·운주 방향 17번 국도→배티재→대둔산 순으로 가도 된다. 대둔산 케이블카는 2월까지 오전 9시~오후 5시, 20분 간격으로 운행된다. 왕복 기준 어른 8500원, 어린이 5500원. →맛집 화산면엔 붕어찜으로 유명한 집들이, 대아저수지 인근엔 민물고기 매운탕집이 많다. 대아댐에서 10여분 거리의 고산면 소재지엔 한우 전문 식당들이 늘어서 있다. →잘 곳 봉동읍 소재지와 대아저수지, 대둔산 인근에 깔끔한 모텔들이 몰려 있다. 완주군 문화관광 홈페이지(tour.wanju.go.kr) 참조.
  • [주말 인사이드] 자산 387조 ‘슈퍼갑’ 마음만 먹는다면…

    [주말 인사이드] 자산 387조 ‘슈퍼갑’ 마음만 먹는다면…

    #1 지난해 11월 전광우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미국 뉴욕에서 예정된 골드만삭스 고위 관계자들과의 점심 약속을 취소했다. 예고 없는 골드만삭스의 한국 자산운용부문 철수 소식을 들은 직후 심기가 불편해진 탓이었다. 골드만삭스 측은 급히 ‘사절단’을 보냈다. 마이클 에반스 부회장이 직접 한국으로 날아와 전 이사장을 면담, ‘파워 고객 달래기’에 나선 것이다. 에반스 부회장은 한국 시장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한 것이 아니라 글로벌 전략 차원의 일환이었다고 해명한 뒤 향후 투자은행(IB) 부문을 강화할 것이라고 거듭 설명했다. #2 시간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 지난해 6월. 유럽 금융계 최고경영자(CEO)와 정·관계 인사 150여명이 영국 런던에 총집결했다. 더글러스 플린트 에이치에스비씨(HSBC) 회장, 디디에 발레 소시에테 제너럴 회장, 데이비드 루빈스타인 칼라일그룹 회장 등 웬만해선 만나기 힘든 거물들이었다. 이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큰 손’인 국민연금의 첫 해외사무소 개소를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국민연금이 국제 금융시장에서 굴리는 돈은 62조 4000억원이다. 세계 금융계 거물들이 만사 제치고 ‘눈도장’을 찍으러 개소식에 온 이유다. 국민연금은 이렇듯 국제무대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영향력이 막강하다. 국민연금이 지난달 24일 동아제약의 지주사 전환과 관련해 ‘반대’ 입장을 밝히자 당일 동아제약 주가는 전날보다 4.5%나 급락했다. 동아제약이 우호지분을 끌어들여 지주회사 전환을 주주총회에서 관철시키기는 했지만 이를 계기로 국민연금이 단순 의결권 행사를 넘어 사외이사 추천, 대표소송 제기 등 좀 더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다시 높아지고 있다. 1일 금융권과 재계 등에 따르면 국민연금의 자산 규모는 지난해 11월 말 현재 387조 4000억원이다. GPIF(일본 공적연금), GPFG(노르웨이 글로벌펀드연금), ABP(네덜란드 공적연금)에 이어 세계 4위다. 이 가운데 국내 주식시장에 투자한 돈만 70조원이다. 막강한 자금력을 무기로 국민연금은 금융시장과 주총장에서 세를 키워가고 있다. 국민연금이 지분을 9% 이상 갖고 있는 기업 수는 지난해 11월 말 현재 삼성엔지니어링 등 67개다. 1년 전에 40개였던 것과 비교하면 67%나 늘었다. 5% 이상 지분을 가진 기업도 2011년 말 174개에서 1년 새 222개로 늘었다. 통상 지분율이 10%를 넘어서면 주요 주주로 분류되기 때문에 국민연금은 10%선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기업 경영성과 평가 사이트인 CEO스코어가 발표한 ‘10대 그룹 상장사에 대한 국민연금 주식 보유 현황’에 따르면 10대 그룹 상장사 중 국민연금이 실질적인 최대 주주인 곳은 4곳이나 된다. 삼성물산 9.68%, 호텔신라 9.48%, 제일모직 9.80%, 포스코 5.94%이다. 국민연금이 2대 주주인 곳은 삼성전자(7%), 현대차(6.75%), SK하이닉스(9.10%), SKC(9.48%) 등이다. 하나금융(9.35%), KB금융(8.24%), 신한금융(7.34%), 우리금융(4.04%) 등 4대 금융지주에도 상당한 지분을 갖고 있다. 국민연금이 ‘작심하고’ 달려들면 이들 기업의 의사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난해 3월 포스코는 주총에 올리려던 정관 변경안을 자진 철회했다. 당시 지분 6.44%를 갖고 있는 최대 주주인 국민연금의 부정적 기류가 포착됐기 때문이었다. 국민연금이 주총에서 반대표를 던지기 전에 ‘알아서’ 눈치를 본 셈이다. 포스코처럼 지분이 분산돼 있는 상장사는 주주 권익을 앞세운 국민연금의 의견을 거부할 수 없는 처지다. 오너가 있는 상장사들도 예외는 아니다. 대림산업의 경우 국민연금과 외국인 지분율을 합하면 오너 대주주 지분율의 두 배에 가깝다. 이 때문에 대림산업도 포스코처럼 주총 전에 국민연금이 반대하는 안건을 철회했다. 류동완 국민연금 홍보실장은 “일부러 어깃장을 놓은 것은 절대 아니다”라며 “금융시장 투자규모나 소유 지분율이 높다 보니 시장에 대한 책임과 관심이 높아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국민연금은 지난해부터 주주로서의 권리 행사에 적극 나서고 있다. 지난해 의결권을 행사한 2565건 중 반대표를 던진 안건이 436건(17%)이나 된다. 2010년 8%, 2011년 7% 등과 비교하면 반대 비중이 두 배 이상 늘었다. 주로 정관 변경이나 임원 선임 등 경영 현안에 관해 제동을 걸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경제 민주화를 위해 국민연금 등 공적 연기금의 의결권 행사를 강화하겠다”고 발언한 이후 국민연금에 더욱 힘이 실리는 모양새다. 금융권 관계자들은 “국민연금은 그야말로 슈퍼갑”이라면서 “말하기가 조심스럽다”며 국민연금에 관한 언급 자체를 극도로 피했다.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파워는 갈수록 막강해지고 있는데 국민연금이 기업의 중장기 투자와 의사결정에 대해 얼마나 전문성을 갖고 고민하는지 의문이라는 점에서다. 기업의 정상적인 경영행위까지 간섭하고 침해하려 들면 기업들의 고심이 커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관계자는 “국민연금 측은 지침에 따라 의결권을 행사한다고 강변하지만 지침 자체가 굉장히 추상적”이라면서 “때문에 모든 사안에 주주가치 훼손이라고 주장하면 어쩔 도리가 없다”고 털어놓았다. 이렇게 되면 총수의 결단을 요구하는 그룹 차원의 의사 결정을 내리기가 힘들다는 하소연이다. 국내 재벌 그룹은 상당수가 순환출자 등으로 얽혀 있고 경영권 승계도 이뤄지지 않은 상태라 국민연금이 주주 권리를 내세우기 시작하면 그룹 지배구조에 상당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인 고충도 나온다. 반대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가 제한적이라는 분석도 있다. 국민연금의 반대표 행사가 실제 안건 부결로 이어진 사례는 한섬, 삼천리, 키움증권 등 3건에 불과해서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안건 부결까지 끌어내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기업의 투명성을 끌어올린 효과는 크다”면서 “상당수 기업들이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기준을 미리 공부해 경영에 참조한다”고 전했다. 백민경 기자 white@seoul.co.kr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 말레이시아-말라카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말레이시아-말라카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말라카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평일 낮, 말라카 거리는 왁자지껄한 아이들 무리로 활기에 차 있다. 우리가 경주에 가서 역사를 배우듯,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말라카에서 자신의 뿌리를 찾는다. 물론 수학여행 온 아이들에게는 수백년 전의 역사유적도 그저 오래된 놀이터일 뿐이지만 말이다. 말라카 강변에 펼쳐진 책 한 권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에서 남쪽으로 두 시간 정도 달리면 말라카에 도착한다. 지도상에서 이 도시는 말레이반도 왼편에서 인도양을 향하고 있다. 거대한 함선과 포탄을 앞세운 14세기 정복자들도 말라카를 거쳐, 말레이반도와 수마트라섬 사이 좁은 물길을 지나야만 더 깊숙한 동쪽에 닿을 수 있었다. 말라카는 그들이 처음 발을 디딘 동양의 땅이었고 동양과 서양, 거대하고 상이한 두 세계가 만나는 지점이었다. 과거 수백년간 말라카는 아시아에서 제일가는 무역항이었다. 무역량으로 따지면 수에즈 운하에 비견됐을 정도다. 하지만 지금은 수심이 너무 낮아져 항구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했다. 여행객들도 간척개발이 한창인 해변보다 오래된 가옥이 늘어선 말라카 강변의 분위기를 더 선호한다. 말라카강 리버크루즈는 40여 분 동안 9km에 이르는 물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잘 꾸민 액세서리 상점, 한적한 노천 카페들 사이사이 중국풍 홍등을 매단 집들이 보이고 화려한 원색의 벽화가 펼쳐진다. 먹음직스런 열대 과일과 음식부터 말레이시아에 살고 있는 인도, 중국, 아랍계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까지, 움직이는 배 안에서 보면 그 자체가 한 권의 그림책이다. 그 뒤로 이어지는 건 나무로 지은 붉은 지붕의 전통가옥촌 ‘캄풍모텐Kampung Morten’이다. 우리나라 한옥에 해당하는 것이 캄풍인데 바닥이 지상에서 1~2m 높이에 있고, 천장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하면 비가 많이 와도 물에 잠기지 않고, 통풍이 잘돼 위생적이라고 한다. 1922년 지은 빌라 센토사Villa Sentosa는 그중 가장 오래된 집인데 말레이시아 국기를 내걸고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개인 가옥이지만 집주인이 평생 동안 공들여 모은 골동품과 개인 소장품을 전시해 박물관으로 개방하고 있다. 저녁에는 불을 밝힌 노천 카페에서 분위기에 취해 보는 것도 좋겠다. 한차례 소나기 후, 불어난 강물이 일렁이는 모습도 여기선 한없이 매력적이다. 강변에는 맹그로브 나무가 울창하다. 운이 좋은 날에는 반딧불이나 월광욕을 하고 있는 도마뱀도 볼 수 있다. 강변의 카페와 연결되는 존커 스트리트Jonker Street와 히런 스트리트Heeren Street는 꼭 들러 보길 권한다. 존커 스트리트에는 골동품점과 작은 미술관, 특색 있는 식당들이 많다. 매주 금토일 저녁 6시부터 자정까지는 벼룩시장도 열린다. 존커 워크 스트리트 바로 옆 골목이 히런 스트리트다. 저렴한 호텔과 예쁜 네덜란드풍 건물이 많다. 네덜란드어로 ‘존커’는 하인을, ‘히런’은 주인을 뜻한다. 존커 거리는 히런 거리의 부자들을 위해 일하던 사람들이 살던 곳이라고 한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1 메나라 타밍 사리 전망대에서 보는 말라카 해협의 모습. 시가지와 항구가 한눈에 보인다 2 존커 워크 스트리트는 골동품점, 기념품점, 카페와 술집이 늘어선 전형적인 여행자들의 거리다 3 말라카 리버크루즈 는 9km에 이르는 말라카 강줄기를 따라간다. 노천카페와 전통가옥, 벽화가 말라카의 분위기를 전한다 4 비오는 늦은 밤, 조명을 밝힌 말라카 강은 한없이 매력적이다 5 재즈가 흘러나오는 존커 워크 스트리트의 라이브 카 ▶travie info 말라카 리버크루즈Melaka River Cruise 매일 오전 9시부터 저녁 11시30분까지 운항한다. 어른 기준 15RM으로 저렴한 편이며, 왕복 40분 정도 소요된다. 크루즈 선상 공연이 포함된 티켓(Bot VIP/ 매주 일요일 오후 8시~오후 1시/어른 기준 30RM), 하루 동안 자유롭게 타고 내릴 수 있는 프리패스 티켓(Ho-Ho Service/ 오전 9시~밤 11시30분/어른 기준 30RM)도 판매한다. 해양박물관 앞에서 승선하면 된다. www.ppspm.gov.my 메나라 타밍 사리Menara Taming Sari 전망대 80m 높이까지 올라가는 메나라 타밍 사리 전망대에서는 말라카 시가지와 항구의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360도 회전식이라 가만히 앉아 있어도 사방의 정경을 볼 수 있다. 푸른 말라카강과 붉은 지붕 가옥, 세인트 폴 언덕의 옛 유적지들로 대표되는 육지 모습과 달리 바닷가는 부산하게 변화 중이다. 연륙도에는 마리나 리조트가 들어섰고, 갯벌에는 간척공사가 한창이다. 낮은 곳에선 볼 수 없던 말라카의 현재진행형 모습이다. 개장시간 오전 10시~밤 10시 입장료 어른 기준 RM20 홈페이지 www.menaratamingsari.com 1 15세기 말라카 왕궁의 모습. 바닥이 지면에서 1~2m 떨어져 있고, 나무로만 지어진 점이 전통적인 말레이시아 건축 구조를 보여 준다 2 도시 이름의 어원이 된 말라카 나무 3 네덜란드 통치 시기 공관으로 쓰였던 스태이더스 빌딩은 현재 말라카 민족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4, 5 포르투갈의 흔적은 볼 수 있는 세인트 폴 성당. 벽채만 남은 모습에서 역사와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6 말라카는 한때 세계적인 무역항으로 동서양을 잇는 관문 역할을 했다. 당시 교역량은 수에즈 운하와 비견됐을 정도다 7 말라카에서 꼭 경험해 봐야 할 인력거 ‘트라이쇼’. 화려한 꽃과 음악으로 장식하는 게 특징이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가 있는 언덕 말라카는 아시아에서 가톨릭의 세례를 받은 첫번째 도시이며, 400년간의 식민 지배 속에서도 독특한 문화를 꽃피운 생명력의 땅이다. 말레이시아 사람들에게는 최초의 왕조가 탄생한 곳이라 더욱 의미가 크다. 말라카가 유명해지기 시작한 건 200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부터다. 말레이,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흔적이 한 덩어리를 이룬 도시는 전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 것이다. 여기에 이주 중국인들이 말레이 사람들과 결혼해 낳은 ‘페라나칸’의 문화까지 더해져 이색적이다. 본격적인 말라카 시간 여행은 독립기념관 앞에 있는 한 그루의 나무에서부터 시작된다. 수마트라섬 스리비자야 왕국에서 건너온 파라메시바라Paramesvara왕자가 자신의 나라를 세우기로 결심한 곳이 바로 이 나무 아래 서였다. 그는 이곳에서 궁지에 몰린 아기 사슴이 자신의 사냥개를 물리치는 것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작은 힘으로도 용맹하게 맞서면 큰 힘을 이길 수 있다는 것. 나무의 이름을 딴 말라카왕국이 건국된 것이 1402년인데, 역사학자들은 이때를 말레이시아 역사의 시작점으로 본다. 독립기념관 앞 말라카 나무 주변에는 포르투갈의 요새와 15세기 말라카왕궁The Melaka Sultanate Palace이 있어 여러모로 역사 여행의 시작점이라 할 만하다. 파라메시바라 왕의 바람대로 작은 왕국 말라카는 전세계의 큰 도시들을 상대하며 세계적인 항구도시로 성장했다. 말라카 사람들은 해상 교역 활동에 관련된 ‘말라카법’을 만들어 교역 기반을 다졌으며, 앞다퉈 이슬람교로 개종해 멀리서 온 아랍 상인들의 호감을 샀다. 하지만 말라카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건국 백여 년 만인 1511년 포르투갈에 의해 멸망했고 뒤이어 1641년 네덜란드, 1795년부터는 말라카를 포함한 말레이시아 전역이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포르투갈은 당시 황금보다 더 귀했던 향료를 독점하기 위해 동남아시아로 왔는데,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항로를 발견한 지 겨우 9년 만의 일이다. 그들은 말라카를 시작으로 아시아 침략의 포문을 열었다. 말라카를 점령한 포르투갈 사람들이 처음 한 일은 안전한 거주지 겸 요새 ‘에이 파모사A’Famosa’를 짓는 것이었다. 원주민 노예를 동원해 술탄의 왕궁과 왕릉, 모스크를 철거하고, 성벽 두께가 3m나 되는 요새와 다양한 용도의 건물을 세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 형체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뒤이은 네덜란드와 영국의 포화 속에 살아남은 것은 성문Porta de Santiago과 성당St.PaulChruch 한 채뿐이다. 성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언덕 위로 벽채만 남은 세인트폴성당이 보인다. 이 성당은 가톨릭을 처음 포교한 성 자비에르와 관련된 일화로 유명하다. 자비에르는 말레이반도와 일본, 중국을 오가며 가톨릭을 알리는 데 힘쓰다 1552년 중국 광저우에서 사망했다. 시신은 말라카에서 6개월간 안치된 후 그의 첫 해외 포교지였던 인도 고아로 가게 됐는데, 관을 열어 보니 전혀 썩지 않았다고 한다. 또 자비에르가 바다에 십자가를 던지자 사나운 풍랑이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는 일화도 있다. 얼마 후 어부가 같은 자리에서 게를 건져올렸는데 신기하게도 자비에르의 십자가를 쥐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말라카에서는 등에 십자 모양의 무늬가 있는 게는 성스럽게 여겨 잡지 않는다. 에이파모사 요새는 전체적으로 붉고, 거칠게 풍화된 듯 보인다. 가까이서 보면 마치 녹이 슨 듯 보이는데, 철성분이 함유된 홍토 벽돌로 만들어서 그렇다. 이 벽돌은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 쓰인 것과 같은 종류로 수백년이 지나도 변화가 없을 정도로 단단하다. 요새 아래쪽에는 멀리서도 붉은 벽이 눈에 띄는 스태이더스The Stadthuys 빌딩이 있다. 원래 네덜란드 총독의 공관이었는데, 현재는 말라카 민족박물관이자 랜드마크로 사랑받고 있다. 말라카 이전부터 식민시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유물과 옷차림을 전시하고 있다. 네덜란드식 거실과 당시 사용했던 생활용품들도 볼 수 있다. 베이커리에서는 갈색빵을 파는데 네덜란드 점령 당시 가난한 사람들에게 탄 빵을 나눠주었던 데서 유래됐다고 한다. 주말에는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 다양한 군복 코스프레도 볼 수 있다. 스태이더스와 맞붙어 있는 크라이스트 처치는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로 18세기에 세워졌다. 거대한 대들보와 시계탑에서 네덜란드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다. ▶travie info 트라이쇼Trishaw 스태이더스 앞에는 말레이시아와 페낭에서만 볼 수 있는 인력거 ‘트라이쇼’가 줄지어 서 있다. 평범한 인력거가 아니다. 오디오에서는 ‘강남스타일’을 비롯해 최신 유행가가 흘러나오고, 지붕이며 좌석을 각종 꽃과 인형, 깃발로 치장하고 있다. 잘나가는 트라이쇼는 광고판까지 달고 성업 중이다. 트라이쇼를 타고 말라카의 골목골목을 돌아보다 보면, 아직 그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은 보석 같은 장소를 발견하게 될지 모른다. 트라이쇼┃이용요금 시간당 40RM(30분 25RM), 어른 2인까지 탑승 가능 에이파모사┃입장료 무료 말라카왕궁┃개장시간 오전 9시~오후 5시30분 입장료 어른 기준 2RM 스태이더스┃개장시간 오전 9시~ 오후 3시30분(금~일요일은 오후 9시까지) 입장료 어른 기준 5RM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이 나라가 사는 법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말레이시아에서 진한 친근감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이 나라에선 한국인의 영어가 유독 잘 통한다. 우리나라 콩글리시 버금가는 게 바로 말레이시아의 ‘맹글리쉬’. 다양한 민족이 어울려 사는 말레이시아에서는 한 가지 언어로 이뤄지는 완벽한 의사소통보다 다양한 언어로 이뤄지는 유연한 의사소통이 더 일반적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도 이와 비슷한 것 같다. 한 가지를 고집하기보다 여러가지를 포용한다. 가장 전통적인 것을 가장 현대적인 것으로 재구성하고, 감추고 싶은 역사를 가장 매력적인 역사로 소개한다. 에펠탑, 자유의 여신상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쿠알라룸푸르의 페트로나스 타워는 이슬람 사원의 첨탑을 본떴고, 쇼핑몰을 활보하는 여자들은 검정색 대신 온갖 화려한 색깔과 무늬로 치장한 차도르를 둘렀다. 이곳에서 이슬람 전통은 속박의 족쇄가 아니라, 가장 세련되고 감각적인 디자인이 된다. 거리를 걷다 보면 건물이나 광장 이름에서 독립을 뜻하는 ‘메르데카’라는 단어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말레이시아는 195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는데 매년 8월31일 독립기념일에 성대한 축제를 치를 정도로 독립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반면 쿠알라룸푸르와 말라카 곳곳에서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식민 통치 유적들이 버젓이 관광상품화 돼 있다.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이국적인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 부러 이런 곳들을 찾기도 한다. 식민 역사에 대해 예민한 우리로서는 이런 모습이 양면적으로 느껴지는 게 당연하다. 그런 모습이 너무 양면적이지 않은지 묻자 나이 지긋한 관광가이드 노마가 적절하게 설명을 해줬다.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용서에 관대한 편이예요. 아마 종교의 영향도 크겠죠. 무엇보다 우리는 이제 식민시대에 아무런 악감정도 없어요. 역사 그대로의 과거에 얽매어 있기보다 새롭게 보고, 발전시키는 게 중요한 거지요.” 오랫동안 하나의 영토를 다양한 무리의 사람들과 공유하며 살아온 역사 속에서,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포용을 배웠을 것이다. 그들은 다른 종교와 다른 피부색, 다른 언어, 다른 가치관을 인정하는 데 가장 뛰어난 국민이다. 그리고 그런 관용적인 태도 속에는 다양한 삶의 어떤 형태든 받아들이는 긍정적인 강인함이 있다. “나는 10년 동안 트라이쇼 운전을 해왔어요. 운전 기술로 치면 말라카에서 나를 따라올 사람이 없을 거예요. 그거 알아요? 말라카 최고의 직업이 바로 트라이쇼 운전사라는 거. 난 매일 ‘이녀석’과 함께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새로운 곳에 대해 알아 가죠. 난 정말 이 일이 좋아요.” 적도 부근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매일 12시간씩 인력거 운전을 하는 만MAN 씨의 얼굴은 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말라카에서 트라이쇼를 타며 만씨와 함께한 시간은 유쾌함으로 가득했다. 처음 만나는 말라카의 신선한 풍경 때문이기도 했고, 비온 뒤 씻은 듯 갠 하늘 때문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 많은 자전거 운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룩한 그의 배와 넉넉한 웃음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어쩌면 화려하게 뽐낸 ‘이녀석’의 아늑한 품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자전거와 만씨 자신의 이름에서 따온 ‘베크만BECHMAN’. 그것은 어느새 만씨 자신이 돼 버린 녀석에게 썩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에디터 트래비 글 Travie writer 도선미 사진 Travie photographer 지성진 취재협조 말레이시아관광청 www.mtpb.co.kr ★MALAY FOOD & SWEET DESERT MALAY FOOD 말라카의 음식 계보는 복잡 다단하다. 인도, 포르투갈, 네덜란드, 중국의 조리법이 말레이시아 특유의 향신료와 만나 새로운 퓨전 요리로 탄생했다. 달콤한 ‘자연주의’ 디저트도 말라카에선 꼭 맛봐야 한다. 단맛을 내는 데 코코넛 우유와 팜나무 수액으로 만든 흑설탕 ‘굴라Gula’을 주로 이용하기 때문에 인공적이지 않고 몸에 좋다. 입 안에 감도는 두 가지 맛 ‘뇨냐푸드NONYA FOOD’ 중국인과 말레이인이 결혼해서 낳은 2세를 남자는 바바, 여자는 뇨냐라고 한다. 뇨냐음식은 말레이시아와 중국음식의 특징을 모두 갖고 있는데, 아마 혼혈 가정 내 다양한 입맛을 충족시키기 위해서였으리라. 주로 중국 조미료에 코코넛 우유, 말레이 향료를 함께 넣어 조리한다. 태생이 가정식 요리기 때문에 겉보기에 매우 단출하다. 레스토랑에서 먹더라도 휴대용 찬합에 담겨 나온다. 튀김요리인 바이띠Baidee, 중국식 야채볶음인 찹차이Chap Chye, 커리잎을 넣어 구운 치킨IncheKabin 등이 대표적이다. 뇨냐 음식은 중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말라카와 페낭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데, 말라카식은 코코넛 우유를 많이 사용해 달달한 반면, 페낭식은 태국의 영향으로 매운 고추가 사용되는 점이 다르다. 뇨냐 식당은 존커 스트리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고향에서 맛보는 원조 ‘아쌈페다스ASAM PEDAS’ 말라카는 말레이시아인들이 즐겨 먹는 아쌈페다스의 고향이다. 아쌈은 타마린드 열매즙을, 페다스는 ‘매운’을 뜻한다. 파인애플, 스타프루트 등 열대과일, 아쌈, 토마토, 절인 갓으로 만든 소스에 생선과 채소를 넣고 조리하는데, 겉보기엔 생선찌개에 가깝다. 맛은 전혀 비리지 않고 깔끔해 카레처럼 국물을 밥에 얹어 먹으면 맛있다. 아쌈페다스를 맛보고 싶다면 카페 루마말라카KafeRumah Melaka를 추천한다. 다양한 말레이, 말라카 전통 음식으로 유명하며, 20년 된 캄풍의 풍취도 느낄 수 있다. 영업시간 오전 8시~오후 7시, 일요일 제외(영업시간 이후는 사전 예약 필수) 홈페이지 www.keferumahmelaka.com SWEET DESERT 코코넛밀크의 감미로운 맛 ‘사고Sago’ 바바 뇨냐들이 어렸을 때부터 즐겨먹는 간식이다. 사고팜 나무에서 나오는 전분을 하루동안 물에 담그면 젤리처럼 되는데, 이걸 동그랗게 뭉쳐서 은단만한 알갱이로 만들고, 코코넛 우유에 넣어 먹는다. 여기에 과일과 팜나무 설탕인 ‘굴라Gula’를 넣으면 매우 고소하고 달콤하다. 굴라는 메이플 시럽과 같은 방법으로 팜나무에서 추출한 설탕으로, 디저트에 주로 사용된다. 말레이시아식 팥빙수 ‘첸돌Cendol’ 첸돌은 말라카의 대표적인 디저트다. 얼음에 팥을 올리는 것이 전체적으로 우리나라 팥빙수와 흡사하다. 다른 점은 연유 대신 코코넛 밀크를, 시럽 대신 굴라를 사용한 자연식이라는 것. 특히 향료의 하나인 판단잎 즙으로 만든 녹색 젤리를 짧게 채썰어서 넣는 게 특징이다. 이 젤리는 해독 성분이 있어 몸에도 좋다. 독특한 향을 지닌 두리안을 좋아하는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첸돌에 두리안을 토핑해서 먹기도 한다. 존커 스트리트 입구에 있는 ‘산슈공San Shu Gong’의 첸돌이 유명하다. ▶travie info 말라카 가는 방법 인천에서 말레이시아항공, 에어아시아항공, 싱가포르항공 등을 이용해 쿠알라룸푸르, 싱가포르까지 이동한 후 현지에서 버스, 기차를 타면 편하다. 1 쿠알라룸푸르 버스터미널 TBSTerminal Bersepadu Selatan에서 말라카행 버스 이용. 1시간45분 소요되며 매일 7:00~23:00 사이 15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12.3RM. www.tbsbts.com.my 2 쿠알라룸푸르 기차역KL Central에서 싱가포르 우드랜드Woodland행 열차South Line를 이용하면 된다. 반대도 가능하다. 하지만 하루에 1대만 운행하기 때문에 다소 불편하다. 쿠알라룸푸르발 말라카행은 오전 9시 출발, 2시간 30분 소요, 23RM. 싱가포르발 말라카행은 오후 1시45분 출발, 4시간 소요, 38RM. www.ktmb.com.my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여행신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여행신문에 있습니다.
  • [TREKKING YAKUSHIMA] 초록 융단 위에 서다

    [TREKKING YAKUSHIMA] 초록 융단 위에 서다

    초록 융단 위에 서다 ‘365일 중 366일 비가 온다’ 혹은 ‘한 달 동안 35일 비가 내린다’는 야쿠시마屋久島. 그 풍부한 수량이 수령 1,000년이 넘는 나무들을 키워냈다. 애니메이션 <원령공주>의 배경이 된 야쿠시마의 속살은 비에 젖은 푸르름 그 이상이었다. ■야쿠시마 트레킹 추천코스 1 요도가와 등산로 입구 - 요도가와 산길 - 하나노에고 - 나게이시타이라 - 다카츠카 산장 - 타이라이시 - 미야노우라다케 아쿠시마, 1박2일로 훑다 야쿠시마는 바람이 많고 비도 많아서 나무들은 1년에 6cm 정도밖에 자라지 않는다. 그래서 크기가 어마어마한 나무들을 보면 수령을 짐작하기도 어렵다. 야쿠시마에서 가장 유명한 나무는 조몬스기다. 일본의 선사시대를 뜻하는 ‘조몬’이라는 단어가 붙었을 만큼 오래됐으며, 야쿠시마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조몬스기를 만나길 원한다. 트레킹의 주요 루트는 조몬스기 이외에도 일본 100대 명산 중 하나인 미야노우라다케宮之浦岳, 300년 전에 채벌돼 흔적만 남은 윌슨그루터기, 애니메이션 <원령공주>의 배경이 된 이끼의 숲 등을 둘러보는 것이다. 야쿠시마 트레킹에서 요도가와 등산로 입구1,365m를 출발해 하나노에고 습지대1,600m를 거쳐 미야노우라다케1,936m 정상까지는 표고차가 600m도 안 되기 때문에 쉽다고 얕볼 수 있다. 그러나 8~10시간에 가까이 걸어야 해서 평소 운동을 게을리 했다면 체력 문제가 심하게 느껴질 것이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도중에 만나는 하나노에고는 일본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는 고원습지로 비와 안개가 많아 빗물로만 이뤄진 습지다. 선 채로 하얗게 말라 버린 고목들이 주변에 널려 있는데 나무에 수지樹脂가 많아 몇백년이나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자연이 만든 천연 정원의 느낌과 함께 지친 다리를 쉬기에도 좋다. 여기서 3시간 정도 더 걸어가면 미야노우라다케 정상에 오를 수 있다. 도중에 만나는 여러 봉우리들 중 눈에 띄는 것은 일명 두부바위로 불리는 화강암이다. 산꼭대기에 놓인 이 커다란 바위는 높이가 약 20m, 길이가 100m 정도 크기임에도, 검의 고수가 두부를 썰듯 잘려 있어 신기하기만 하다. 산 정상에 오르면 주변 경관이 시원하게 눈에 들어온다. 정상 주변에서는 둥글둥글하게 생긴 바위를 많이 볼 수 있다. 어지러이 널려 있는 돌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미야노우라다케라는 거친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신들이 한 판 바둑을 둔 듯하다. 여기서 조금 더 내려가면 숙박이 가능한 다카츠카 산장이 나온다. 10월 기준으로 6시가 되기 전에 해가 떨어지므로 서둘러 도착해야 하지만 경치 감상에 취해 잠시 멈춘 발길이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다. 무인 산장에서 많은 등반자들은 식사와 휴식을 취하며 야쿠시마 트레킹의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조몬스기를 그리며 단꿈에 빠진다. 미야노우라다케 전경. 바둑알 같은 돌들이 흩어져 있다 다카츠카 산장. 여름에도 밤의 산장은 춥기만 하다/ 야쿠시마 트레킹 현지 가이드. 산이 깊은 만큼 초보자는 가이드가 필수다 4 하나노에고 주변의 하얗게 마른 고목들 5 해가 지기 전 바쁜 걸음을 오르는 등산객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야쿠시마 트레킹 추천코스 2 다카츠카 산장 - 조몬스기 - 윌슨 그루터기 - 오오카부보도 - 구스가와와카레 - 시라타니 운수계곡 - 미야노우라항 높이 25.3m, 수령 2,170년에 달하는 조몬스기 윌슨 그루터기 안으로 들어가면 하늘에 하트 모양 구멍이 있다 3 섬의 비경이 펼쳐지다 하루짜리 트레킹으로는 미야노우라항에서 약 12km 떨어진 시라타니운수계곡을 다녀오거나 조몬스기까지 다녀오는 코스가 유명하다.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조몬스기는 물론, 하트무늬 구멍이 있는 윌슨그루터기, 두 나무가 손을 잡은 듯한 부부삼 등 독특한 나무를 끊임없이 만날 수 있다. 또한 <원령공주>의 배경지 등을 모두 섭렵할 수 있어 관광객이 가장 즐겨 찾는다. 조몬스기 수령 2,170년의 조몬스기는 가히 산의 정령이라 불릴 만한 아우라를 내뿜고 있다. 웬만한 광각 카메라로는 한 화면에 담아낼 수 없을 정도의 크기가 위압적인데 높이 25.3m, 몸통 둘레 16.4m에 달하는 거대한 위용을 뽐낸다. 1966년 이와카와 테이지라는 이가 발견한 이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나무가 얼마나 큰지 2005년 눈이 쌓여 조몬스기 가지 일부가 부러져 떨어졌을 때 잰 길이가 5m, 직경 1m, 무게가 1톤에 달했고 가지의 수령만 해도 1,300년이었다. 일본인들은 그것을 ‘생명의 가지’라고 이름 붙이고 현재 야쿠스기 자연관에 전시하고 있다. 조몬스기의 수령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크기만으로는 수령이 최대 7,200년일 것이라고 생각됐지만 나무줄기를 통한 탄소측정법으로는 2,170년인 것으로 밝혀졌다. 봄과 겨울을 2,000번이 넘게 겪었을 나무. 주변의 생명들이 스러지고 다시 나는 것을 수천년간 지켜봤을 조몬스기는 왠지 모르게 친숙한 느낌이었다. 혹시 과거 언젠가 같은 자리에 서서 마주하지는 않았는지. 대답 없이 묵묵히 서 있는 나무는 자신을 찾은 이들을 향해 큰 팔을 반가이 흔들어 댔다. 윌슨그루터기 조몬스기가 아니라도 야쿠시마에는 수령 1,000년 이상의 고목들이 늘어서 있다. 그중 윌슨그루터기는 사람이 들어갈 정도로 거대하다. 베지 않고 그냥 뒀더라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 지금부터 약 300년 전에 베어져 그루터기만 남은 것으로 보이는 이 나무는 1914년경 미국 식물학자 아네스트 헨리 윌슨 박사가 연구를 위해 야쿠시마를 찾아와 숲속을 헤매던 중 비를 피하다 우연히 이 그루터기를 발견했다. 그런 이유로 윌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추정 수령은 약 2,000년이고 둘레는 13.8m인 것을 감안할 때 높이는 약 20m에 달했을 것으로 보인다. 텅 비어 있는 그루터기 안에는 작은 신주가 놓여져 있고 하늘에는 하트 모양의 구멍이 뚫려 있어 로맨틱한 신혼방을 연상케 한다. 오오카부보도 윌슨그루터기를 지나면 좁은 열차 궤도가 뻗은 오오카부보도大株步道를 걷게 된다. 궤도 위에는 발이 빠지지 않도록 보행용 판이 설치돼 걷기 쉽도록 되어 있지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철로 옆의 벼랑으로 떨어질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워낙 커다란 나무를 옮겨야 해서 운반의 편리를 위해 이러한 철길을 놓았겠지만 야쿠시마 사람들에게는 약탈의 수단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철길 주변의 삼나무들은 자신을 베고 운반하기 위한 철로 옆에서 이끼를 덮은 채 하나로 어우러져 자라나고 있었다. 시라타니운수계곡 <원령공주>의 숲의 실제 모델이 된 풍경은 시라타니운수白谷雲水계곡에 고스란히 자리하고 있다. 제작기간 4년, 제작비 240억원이 투자된 <원령공주>는 일본에서 1,420만명의 관객을 불러모으는 큰 인기를 누렸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1995년 5월 시라타니운수계곡을 지나 조몬스기를 살펴보는 등 실사를 다녀왔고 이 경험은 그대로 애니메이션에 녹아났다. 특별한 표지판도 없지만 관광객들은 <원령공주>에 등장했던 배경과 흡사한 곳 앞에서 사진을 찍고 휴식을 취한다. 가만히 바라보노라면 당장이라도 영화 속 주인공이 저 이끼의 숲 너머에서 사슴과 늑대를 타고 나타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사람이 들어갈 정도로 큰 윌슨 그루터기 입구 / 산에서는 사슴이나 원숭이를 흔히 볼 수 있다 커다란 나무 그루터기는 벌채의 흔적이다 / 철로가 놓인 오오카부보도 글·사진 김명상 기자 취재협조 JT투어 02-732-1950 ▶travie info 항공편 대한항공이 가고시마까지 주 3회 직항 운항 중이다. 가고시마에서 야쿠시마까지는 비행기로 35분, 고속선은 1시간45분~3시간, 페리 4시간이 소요된다. 비행기 비용이 만만치 않아서 대부분 저렴한 고속선을 타고 이동한다. 가고시마항에서 Toppy, 코스모라인 2개의 배를 이용할 수 있고 인터넷에서 미리 예약도 가능하다. 이것저것 귀찮을 때는 한 번에 정리해 주는 국내 여행사를 이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 JAL 국내선 예약 0120-25-5971 가고시마-야쿠시마 고속선 정보 Toppy www.tykousoku.jp/, 코스모라인 www.cosmoline.jp/ 야쿠시마 국내여행사 JT투어 02-732-1950 트레킹 시기 야쿠시마는 연중 비가 온다고 봐도 무방하다. 연간 강수량이 평지는 약 4,500mm로 도쿄의 3배에 달하며, 산악지대는 약 7,500mm의 엄청난 비가 내린다. 따라서 비교적 비가 적은 3~5월과 10~12월 중순이 걷기에 좋고 날씨가 맑을 확률도 높다. 연간 평균기온은 19.5도 정도이며, 12월 중순의 경우 최저기온은 8도에서 최고 13도 수준이다. 유의사항 8월 한여름에도 산장에서 숙박할 경우 추위에 단단히 대비해야 한다. 침낭과 두툼한 옷은 필수품. 부족한 장비는 야쿠시마 현지 렌탈숍에서 빌릴 수 있다. 침낭 1,000엔, 매트 500엔, 헤드랜턴 500엔, 기능성 비옷 1,500엔, 스틱 500엔 수준이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여행신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여행신문에 있습니다.
  • [주말 인사이드] ‘죄악산업’ 면피경제학

    [주말 인사이드] ‘죄악산업’ 면피경제학

    경마·복권 등 도박과 담배, 술. 사회적으로 장려되기보다는 폐지나 금지 논란에 시달리는 품목들이다. 그러나 경기침체 등 사는 것이 힘들 때 사람들은 여기에 기대는 경향이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 해당 업종의 매출이 증가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하지만 이들 기업은 매출액 증가 등 업황이 좋아졌다는 언급을 꺼린다. 대신 기부 등 선(善)한 활동을 늘린다. 악(惡)을 판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다. 이른바 ‘죄악주’로 불리는 이들 기업의 생존 경제학을 짚어 본다. 18일 KT&G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담배 매출액은 1조 8956억원으로 전년(1조 7923억원)보다 5.8% 늘었다. 금연 열풍이 불면서 2008년 2조 127억원이었던 매출액이 2009년 1조 9193억원, 2010년 1조 7565억원 등으로 줄어든 것과 대비된다. 담배 매출액은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의 재정위기가 불거진 2011년 오름세로 돌아서 1조 7923억원을 기록했다. 복권 판매액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로또복권 발행이 시작된 다음 해인 2003년 총 복권 판매액은 4조 2342억원을 기록했다. 지금까지의 최고 기록이다. 2004년에는 3조 4595억원으로 줄더니 2005년 2조 8438억원으로 2조원대로 떨어졌다. 새 상품이 나오면 매출액이 늘어났다가 일정 기간이 지나면 흥미나 기대감이 사라져 판매가 부진해지는 ‘복권 피로’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다 연금복권이 발매된 2011년 3조원대로 올라섰다. 2012년 들어 연금복권의 인기는 시들었지만 복권 판매액은 3조 1859억원으로 늘어났다. 미국에서는 실업률이 높아질수록 복권 판매액이 늘어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경마도 그렇다. 2002년 7조 6491억원으로 7조원을 넘었던 마권 매출액은 2007년까지 5조~6조원대에 머물렀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진 2008년(7조 4219억원)에는 7조원대를 회복했다. 지난해는 7조 8397억원을 기록했다. 역대 최대 규모다. 양윤 이화여대 심리학과 교수는 “경기 침체로 생활이 어려워지면 그걸 잊고 싶어서 도박이나 다른 수단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고 진단했다. 양 교수는 “도박의 경우 손실이 발생하면 그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일확천금을 노리는 경우가 많아 증가폭이 더 커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죄악산업이지만 술은 다소 다른 모양새다. 소주나 맥주의 매출은 2008년 최고를 기록한 뒤 그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그 여파가 계속되는 모양이다. 하이트맥주 매출액은 2008년 1조 444억원을 기록한 뒤 2009년 1조 175억원, 2010년 1조 223억원 등으로 줄었다. 2008년 34억 8422만병이 출고됐던 소주는 2009년부터 32억병 수준을 맴돌고 있다. 반면 2009년 미국계 사모펀드인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에 인수된 OB맥주는 매출액이 꾸준히 늘고 있다. 주류시장에서는 재매각을 위한 몸집 불리기 차원으로 보고 있다. 백운목 KDB대우증권 연구원은 “소주는 워낙 값이 싸 맥주보다 경기 불황 영향을 적게 받는 편”이라며 “경기 침체기에는 매출액이 줄어드는 것이 주류업의 전반적인 경향”이라고 설명했다. 주류업계 관계자는 “2012년 매출 집계가 끝나지 않아 추이를 좀 더 지켜봐야 한다”고 전했다. 주가는 일단 긍정적이다. 2011년 말 2만 5150원이었던 하이트진로 주가는 지난해 말 3만 400원으로 20.9% 올랐다. 지난해 코스피 평균 수익률(9.38%)의 두 배가 넘는 수준이다. 상대적으로 죄악주들은 경기 영향을 덜 타 불황기에 주가가 강세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고 대놓고 좋아할 처지는 못 된다. 주가가 오르고 이익이 늘면 이들 기업은 ‘표정관리’에 들어간다. 정부의 인허가 사업인지라 사회 여론에 민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복권은 아예 수익금을 중소기업진흥기금, 보훈복지의료공단 등 법정배분 사업은 물론 소외계층 복지, 서민주거안정 등 공익사업에 쓰도록 법으로 정해 놓고 있다. 지난해 지원된 복권기금은 1조 2699억원으로 2011년(1조 2022억원)보다 5.6% 늘었다. 올해는 1조 4604억원을 쓸 예정이다. 복권위원회는 2008년부터 아예 봉사단을 구성해 자체적인 봉사활동도 벌이고 있다. 복권기금의 경우 쓰임새가 더 다양해질 전망이다. 정부 부처가 공익사업을 진행할 때 재원으로 가장 먼저 공략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통일재원 마련 대상으로 논의된 것도 이 같은 까닭에서다. 한국마사회는 승마힐링센터를 열어 말을 이용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송동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소아정신과 교수와 발달장애 1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연구 결과 승마 강습 후 장애 아동들의 우울 및 불안 등이 뚜렷한 호전을 보였다는 분석에 따른 것이다. 지난해 인천, 경기 시흥 두 곳에 승마힐링센터가 마련됐다. 2020년까지 1000억원을 투자해 30개를 세울 계획이다. 저소득층에게는 무료 개방이다. 일반 이용객에게도 실비(3만원)만 받을 작정이다. 마사회 관계자는 “30곳이 지어지면 6만명가량이 동시에 치료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KT&G는 ‘상상펀드’를 가동했다. 임직원들이 월급 가운데 1만원 미만의 짜투리돈에 고정기부금을 얹어 기부하면 회사가 같은 금액을 기부하는 방식이다. 임직원 봉사활동 1시간을 1만원으로 바꾼 금액도 회사에서 더 얹어 낸다. 2011년 출범한 이 펀드에 임직원 98%가 참여하고 있다. 운영 규모만 연간 24억원이다. 이를 통해 희귀질병을 앓고 있는 어린이의 치료비를 전액 지원하고 있다. 지난해 9월에는 선천적으로 심장에 구멍이 생기는 병인 심실중격결손증 소아환자의 수술비와 치료비를 전액 지원하기도 했다. 새터민(탈북자)인 아이의 어머니는 “한국에 살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며 고마워했다. KT&G 관계자는 “우리가 파는 것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면서 “그래도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사회가) 알아줬으면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전경하 기자 lark3@seoul.co.kr
  • 입시현장 대혼란… ‘선택형 수능’ 논란 원인 및 전망

    입시현장 대혼란… ‘선택형 수능’ 논란 원인 및 전망

    한창 겨울방학을 보내고 있는 고2 예비 수험생과 학부모들의 불안감이 높아지고 있다. 연초부터 터져나온 ‘선택형 수능 폐지 논란’ 때문이다. 지난 10일 9개 주요 사립대 입학처장들이 올 11월에 치를 2014학년도 수능을 유보해야한다는 성명서를 내놓은 게 도화선이 됐다. 일부 진학지도 교사들이 이에 가세한 가운데 한국대학교육협의회와 교원단체총연합회는 유보 반대를 표명하는 등 수능 10개월을 남겨두고 학교 현장의 혼란만 가중되는 모양새다. 선택형 수능 논란의 원인과 전망을 정리했다. 2010년 교육과학기술부는 ‘2014학년도 수능시험 개편방안’을 발표했다. 2009년 구성한 중장기 대입선진화 연구회가 내놓은 결론이었다. 2009년 개정 교정과정에 맞춰 구상한 당시 방안은 올해 치르게 될 수능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수능을 두 차례로 늘려 과목별로 좋은 성적을 제출하도록 해 수험생의 압박감을 해소하겠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수능 출제 난이도를 매년 균일하게 맞추기 힘들어 매년 ‘물수능’이니 ‘불수능’이니 하는 논란이 반복되는 데에 대한 교육당국의 부담을 해소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응시영역의 이름을 과목 중심으로 바꾸고, 국어·수학·영어 등 주요과목은 난이도에 따라 A형과 B형으로 나누기로 했다. 수험생이 자신의 학력수준과 진학할 대학의 계열 등에 따라 난이도를 선택하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탐구영역은 유사 분야끼리 통합하는 방식으로 응시과목수를 대폭 줄이는 방안도 포함됐다. 이에 따라 사회와 과학탐구 영역에서는 한 과목씩만 선택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 개편안은 2011년 1월 대폭 변경됐다. 수험생 부담을 크게 줄이겠다며 야심 차게 추진했지만 학계와 교육계 안팎의 반발이 예상 외로 거세자 교과부가 입장을 바꾼 것이다. 선택형 수능안이 유지된 것을 제외하면 사실상 모든 방안이 폐지됐다. 수능을 11월에만 두 차례 치르는 데에 대한 사회적 부담 문제와 탐구과목 축소에 따른 교단의 반발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서열화 및 교육과정 문제 등으로 당시 함께 도마에 올랐지만 선택형 수능 기조는 살아남았다. 수준이 다른 학생들이 같은 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사교육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먹혔기 때문이다. 교과부와 대교협 주도로 대학들도 차분히 준비하는 듯 보였다. 지난해에는 각 대학이 대략적인 입시요강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10일 9개 대학 입학처장단의 성명서를 계기로 수면 아래 숨어있던 불만이 물밀 듯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현직 고교 교사들도 이들의 입장에 동조하는 쪽이 많다. 전국진학지도협의회 소속 교사들은 현재 가동중인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선택형 수능 유보’를 건의하겠다는 입장이다. 대학은 대학대로, 고등학교는 고등학교대로 선택형 수능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안 그래도 복잡한 대입 전형에 수능까지 두 가지로 나뉘면서 경우의 수가 두 배 이상으로 많아졌다는 의견이 많다. 고교 현장은 선택형 수능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조차 잡기 어렵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서울의 한 고등학교 교장은 “학교 단위에서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서 학년별로 학생을 가르치지 않다 보니 2013학년도 입시가 마무리된 후에야 선택형 수능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학교 교과과정 운영이 가장 큰 문제로 꼽힌다. 국어의 경우 A형과 B형의 교과범위가 서로 다르다. 국어 A형은 문학1, 독서와 문법1, 화법과 작문1을 출제범위로 하지만, B형은 문학2, 독서와 문법2, 화법과 작문2를 범위로 한다. 학생들을 애당초 A형과 B형 지망자로 나누지 않는 이상 정상적인 수업이 될 리 없고, 결국 이동식 수업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영어 역시 같은 문제가 있다. 대학과 교단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선택형 수능이 재검토되거나 유보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대입전형은 시행 3년 전에 고시하도록 돼 있는데 2014학년도 수능은 이미 2011년부터 확정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만약 대입간소화를 공약으로 내세운 차기 정부가 최근의 논란을 감안, 현행 수능체제를 유지하는 결단을 내릴 경우에도 선의의 피해자가 발생할 수 있다. 정부 발표만 믿고 쉬운 국어 A를 이미 준비해온 이공계 수험생의 피해가 불가피하다. 짧은 시간에 현행 수능 수준을 다시 공부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사교육을 막는다는 입시정책 기조와는 전혀 다른 결과로 이어져 현장의 대혼란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교육계에서는 이번 기회에 학생과 학부모들을 실험대상으로 삼는 입시체제 개편을 끝내기 위해 머리를 모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새 정부에서 오랫동안 변함없이 유지될 수 있는 입시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과부 관계자는 “2011년 수능체제 개편안 마무리 단계에서 수능 두차례 실시 등 중장기 과제를 설정했지만, 이후에는 차기 정부의 영역이라는 이유 등으로 거의 논의가 되지 않았다”면서 “일부 전문가들의 의견이 아닌 모두의 의견을 수렴한 입시제도를 새 정부가 고민해 수립해야 한다는 점에 모두 공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건형 기자 kitsch@seoul.co.kr
  • [씨줄날줄] 입양 수출 강국/박정현 논설위원

    러시아는 올해부터 러시아 아동들의 미국 입양을 법으로 금지했다. 러시아의 조치는 아동들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양국 간 외교분쟁에 따른 보복 차원에서 나왔다. 미국이 러시아인 인권변호사 세르게이 마그니츠키 피살사건에 연루된 관련자의 미국 입국을 거부하자 러시아는 입양금지로 맞대응한 것이다. 러시아 고아 46명이 오기를 기다리던 미국인 부부들의 희망은 좌절됐다. 러시아는 아동 입양을 미국에 대한 외교적 압박 무기로 사용한 셈이다. 미국에 입양된 러시아 아동은 모두 4만 5000명으로 지난해에만 970명이 입양됐다. 러시아의 미국 입양 아동은 중국 2589명, 에티오피아 1727명에 이어 세번째다. 해외 입양이 까다로워지는 게 국제적인 추세인 모양이다. ‘아동 수출 대국’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는 우리나라도 아동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해외 입양을 제한하고 있다. 6·25전쟁이 끝난 뒤 1955년 해리 홀트 부부에 의해 시작된 우리나라 해외 입양의 역사는 1980년대 한 해 9000명으로 피크를 이뤘다. 2000년대에도 1000명을 넘었지만 2007년 해외입양쿼터제를 도입한 뒤 크게 감소했다. 그럼에도 미국 입양은 지난해에는 734명으로 러시아에 이어 네번째다. 우리나라는 작년 8월부터 해외 입양을 까다롭게 한 입양특례법을 시행하고 있다. 해외 입양아동 인권 보호를 위해 ‘헤이그 국제아동 입양협약’ 가입도 추진 중이다. 전체 해외입양자가 16만명이 넘는 나라로서 만시지탄이 아닐 수 없다. 특례법은 입양을 신고제에서 허가제로 바꾸고 입양 전에 먼저 출생신고를 하도록 했다. 출생정보와 관련한 입양아동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다. 입양아동이 성장한 뒤 친부모를 찾으려 해도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는 등 안타까운 사정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막상 법이 시행되자 한 달 평균 60명을 넘던 해외 입양은 절반으로 줄었다. 입양을 보내기 전에 반드시 자신의 호적에 아이를 올려야 하는 조건을 충족시키기 어려운 미혼모들이 공개 해외 입양을 꺼리기 때문이다. 대신에 종교단체 등에 몰래 아이를 갖다 버리는 ‘베이비박스’ 아이들이 한 달 새 2배 이상 늘었다고 한다. 일종의 풍선효과다. 미국의 워싱턴포스트는 엊그제 1면에 생후 18개월 된 한국계 입양아 ‘해나’의 사진과 함께 입양 절차가 엄격해지면서 미국 가정에서 입양을 하기가 한결 어려워졌다고 보도했다.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이다. 영문도 모른 채 해외로 떠나는 ‘슬픈 어린이’들을 방치한 채 국격을 논할 수는 없다. 진정한 선진국의 조건을 생각해 본다. 박정현 논설위원 jhpark@seoul.co.kr
  • [사설] 복무기간 단축 늦추고 저소득층 지원 힘써야

    국방부가 내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업무보고에 앞서 사병의 군 복무기간 단축을 놓고 고민 중이라고 한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공약이지만 이를 이행하려면 예산 확충과 병력운용에 문제가 적지 않아서다. 그렇다고 현실성이 떨어지는 공약을 드러내놓고 반박할 수는 없고, 부사관 충원과 예산 확보 등 향후 5년간의 설계를 신중하게 제시하기로 한 모양이다. 선거 직전에 급조한 공약 탓에 국방이 흔들릴 정도이니 큰 걱정이다. 군의 병력 운용과 무기체계의 현대화는 국방의 기본이다. 더구나 남북의 오랜 군사적 대치 상황에서 국민 개병제를 통한 적정 병력 유지와 전술적으로 숙련된 전투력 확보를 위한 적절한 군 복무기간은 중요한 요소다. 그런데도 박 당선인은 선거일을 불과 나흘 앞두고 복무기간을 현행 21개월에서 18개월로 줄이겠다고 했다. 젊은 표심이 아무리 아쉬웠더라도 신중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약속 지키는 박근혜’의 이미지를 위해 이제는 번복도 쉽지 않을 듯하다. 그렇다면 임기 중 공약 이행을 가급적 늦추면서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게 최선일 것이다. 복무기간을 3개월 단축하면 병역자원의 부족과 전투력의 약화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국방부에 따르면 병역자원은 올해부터 2030년까지 연평균 2만 7000명씩 부족해진다고 한다. 더구나 저출산의 영향으로 2020년 이후 2029년까지는 부족 병력이 해마다 6만~6만 9000명에 이를 것이란 예상이다. 인수위 측은 올해부터 5년 동안 부사관을 해마다 2000명씩 1만명을 늘리면 공약 이행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국방부는 그러나 부사관을 3만명 정도는 확보해야 하며, 이들의 인건비와 숙소 증축비 등에 1조원이 넘게 든다고 한다. 국방연구원은 병사가 숙련되려면 보병 16개월, 포병 17개월, 기갑 21개월, 통신은 18개월이 걸린다는 보고서를 낸 바 있다. 복무기간이 18개월이면 병사들이 숙련돼서 써먹을 틈도 없이 제대하는 셈이다. 전투력을 거론할 계제가 못 된다. 게다가 사병 봉급을 두 배로 올리는 데 드는 연간예산 5000억원, 제대병사 연간 25만명에게 줄 ‘희망준비금’ 등 돈 들어갈 구멍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사병 복무단축 공약은 새 대통령의 임기 마지막 해인 2017년까지 여유를 갖고 추진해도 늦지 않다고 본다. 북한의 움직임과 2015년 전시작전권 환원, 동북아 정세 등 국내외 안보상황을 충분히 검토한 뒤 결정하라는 뜻이다. 그 대신 복무단축 공약의 조기 이행으로 유발하는 막대한 예산을 저소득층 지원으로 돌려 안보와 민생을 동시에 탄탄히 다지는 게 효과적이지 않겠는가. 현실과 미래를 생각하지 않은 ‘급조 공약’은 이렇듯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점도 임기 내내 새겨야 할 대목이다.
  • [시론] 아버지의 밥그릇과 국가/손택수 실천문학 대표

    [시론] 아버지의 밥그릇과 국가/손택수 실천문학 대표

    눈이 지붕을 덮는 소리가 사각사각 들려오던 겨울밤 장판이 까맣게 눌어붙은 아랫목에 배를 대고 나는 방학숙제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날따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 고구마를 간식으로 내오셨는데, 그 좋아하는 찐 고구마가 식어가는 줄도 모르고 열중하고 있던 숙제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매사에 틈만 나면 덜렁거리길 좋아하던 나의 모든 신경을 초점화한 것은 태극기였다. 그랬다. 저녁 무렵 옆집 아이가 ‘오징어달구지’ 놀이를 하자고 제안하였지만 나는 그 강력한 유혹마저도 태극기를 앞세워 물리쳤다. 옆집 친구를 따라온 강아지가 갸우뚱할 만한 노릇이었다. 태극기 숙제에 그리 열중이었다고 하면 반공웅변대회 같은 데서 주먹을 불끈 쥐고 ‘이 연사 소리 높여 외칩니다’ 하고 부르짖던 애국소년의 이미지가 떠오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시라. 아이에게 놀이 이상 가는 지고지선의 애국이 어디 있겠는가. 모든 숙제는 개학을 며칠 앞두고 몰아서 하던 버릇을 갖고 있던 내가 유독 태극기 그리기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은 미술과목을 좋아하시는 담임선생님께 칭찬을 받고 싶어서였다. 한 해 내내 말썽을 부렸던 나도 새 학년이 되기 전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으로 각인되고 싶었던 것이다. 조숙했던 나는 아마도 담임선생님의 연인이 되고 싶었나 보다. 하지만 태극기 그리기는 도무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리송한 건곤이감 4괘의 위치가 시종일관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 그뿐인가. 태극문양을 위해 그려 넣어야 할 원부터가 만만치 않았다. 학교에서 본 태극기의 원은 대보름달처럼 탱탱하고 꽉 찬 충만감을 자랑하고 있건만 어찌된 영문인지 내가 그리는 원은 번번이 한쪽이 찌그러지거나 일그러져 있기 일쑤였다.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 컴퍼스 같은 제도용 도구 없이 완벽한 원을 그린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꾸만 일그러지는 원이 암만해도 속이 차질 않아 끙끙대고 있는 아들놈이 보기 딱했던 모양이다. 막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쉬고 계시던 아버지가 직접 나선 것이 그때였다. 아버지는 대뜸 어머니에게 밥그릇을 들고 오게 했다. 태극기 그리는 데 웬 밥그릇? 영문을 몰라 뚱하게 바라보는 아들의 조막손을 잡고 아버지는 사뭇 진지하게 도화지 한가운데에 엎어놓은 밥그릇 둘레를 따라 원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내 눈이 어느새 동그래졌다. 도화지 위에 순식간에 떠오른 대보름달! 세상에나, 이렇게 완벽한 원이 어디 있을까. 밥그릇이 국기가 되다니, 그려지지 않는 국기를 밥그릇으로 그릴 수 있다니! 어린 소년에게 그것은 콜럼버스의 달걀과 같은 경이였다. 방학이 끝난 아쉬움을 뒤로한 채 아버지의 밥그릇으로 그린 태극기를 품고 의기양양하게 교문을 들어서던 소년이 가끔씩 생각난다. 그때 선생님은 송아지를 핥는 어미소처럼 다정하게 몇 번씩이나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던 것 같다. 아버지의 밥그릇으로 태극의 원을 그렸다는 말을 듣고 살짝 미소를 머금어 주었던 것 같기도 하다. 상을 받은 기억은 없지만 그날의 충만감만은 지금도 똑똑히 기억난다. 평생을 노동자로 살다 떠나신 아버지의 밥그릇은 지금 내게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던져주고 있다. 노동자의 밥그릇과 국가의 관계가 그것이다. 노동자의 밥그릇이 바로 자랑스러운 국기가 되는 세상은 불가능한 것일까.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체감 온도 20도를 오르내린다는 혹한 속에서 15만V 고압전류가 흐르는 송전탑에 올라 시위를 벌이고 있는 노동자들의 겨울은 우리들의 방학숙제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일그러진 밥그릇으로 제대로 된 태극기를 그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일그러진 밥그릇으로 그리는 태극기 또한 일그러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득 아버지와 함께 뿌듯한 마음으로 태극기를 그리던 그해 겨울밤이 그립다.
  • 서울은 매일이 장날이다 ③그리운; 그 시절, 그때의 향기

    서울은 매일이 장날이다 ③그리운; 그 시절, 그때의 향기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시장이란 그저 오래된 것만이 아니라 그 구석구석에 특별함이 진득하게 배어 그 언젠가 어떤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운; 그 시절, 그때의 향기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시장이란 그저 오래된 것만이 아니라 그 구석구석에 특별함이 진득하게 배어 그 언젠가 어떤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5. 서울약령市 주소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1126-5 찾아가기 1호선 제기동역 2번 출구 영업시간 월~토요일 오전 9시~ 오후 7시, 일요일 휴무 홈페이지 www.seoulya.com 서울약령시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깜빡 넋을 놓고 있다가 지하철 문이 열리는 순간 이내 ‘도착했구나’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하철 안은 살짝 과장일지 모르겠지만 지하철에서 내려 개찰구를 향해 계단을 오를 땐 더더욱 분명했다. 한 계단 한 계단 발걸음을 뗄 때마다 특유의 한약 냄새가 진해졌다. 조선 건국 초기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던 백성들의 구휼기관이었던 보제원이 자리한 제기골의 역사가 오늘로 이어지는 제기동 일대의 서울약령시는 전국 각지의 약재들이 한데 모이는 한약재 전문시장이다. 한약재를 취급하는 도소매점을 비롯하여 한의원, 한약방, 제분소, 탕제원 등 한약과 관련한 업체와 노점상들이 밀집해 있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한약재를 사지 않더라도 집에서 차로 끓여 먹을 수 있는 말린 국화, 녹차, 구기자 같은 한방차나 요거트나 계란 등에 섞어 미용 팩으로 사용할 수 있게 각종 약재를 곱게 가루로 빻아 소량씩 판매하는 상점도 있어 남녀노소 구분 없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약령시 골목을 누비다 한참 약을 달이고 있는 한약방 앞에 섰다. 조금 더 가까이서 보고 싶은 마음에 “할아버지 구경 좀 하면 안 돼요?” 물으니 퉁명스러운 할아버지의 대답은 이랬다. “왜 안 돼?” 표정은 무뚝뚝했지만 왜 안 되냐고 되묻는 할아버지의 마음은 뽀얀 김을 올리는 약탕기처럼 훈훈하기만 하다. 제분소 아저씨들은 환을 만들기 바쁘다. 찰흙 반죽처럼 생긴 덩어리를 기계에 넣으니 국수 가락마냥 모양이 잡히는데 이 가느다란 가닥들을 다시 기계에 넣으니 똥글똥글 환으로 굴러 떨어진다. “아저씨, 이거 공진단이에요?” 물었더니 아가씨가 공진단을 어떻게 아냐는 아저씨. 드라마에서 봤다는 말에 헛웃음을 내더니 “공진단은 만드는 방법이 좀 다르고 이건 그냥 소화제야” 한다. 약령시에서 대로를 건너면 한의약 관련 유물을 전시하고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 ‘한의약박물관’이 있다. 약령시가 초행이라면 한의약박물관을 먼저 둘러보고 시장으로 나서는 것도 좋겠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약령시의 구석구석을 더욱 알차게 누빌 수 있으리라. 1 일렬로 늘어선 약탕기. 약령시에는 ‘약 달이는 집’이 따로 있다 2 노점 아주머니의 구성진 목소리. 전문가 못지않은 말솜씨가 청산유수다 3 한의약박물관 4 포대마다 가득한 약재들 5 차로 우려먹을 수 있는 말린 국화는 5,000원이면 한 봉지 가득이다 6 질 좋은 국산 녹차도 필요한 만큼 구매할 수 있다 7 가래떡처럼 뽑아져 나오는 소화제. 제분소 아저씨의 손놀림이 바쁘다 에디터 트래비 글·사진 Travie writer 서진영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여행신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여행신문에 있습니다.
  • 엽기·충격 그 자체…‘아기머리 초콜릿’ 인기

    엽기·충격 그 자체…‘아기머리 초콜릿’ 인기

    아무리 초콜릿을 좋아해도 이건… 최근 영국에서 실제 아기 머리 와 같은 크기 와 모양의 ‘엽기 초콜릿’이 인기를 끌고 있다. 화이트 초콜릿으로 만든 이 ‘아기머리 초콜릿’는 무게 약 1㎏, 열량은 5000㎈에 달한다. 이는 성인 1일 권장 열량의 2배에 달하는 수치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이 초콜릿이 아기의 눈과 코, 입을 ‘무서우리만치’ 리얼하게 닮았다는 점이다.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작품을 만든 이는 영국의 예술가 애나벨 드 베턴이다. 그녀는 아기의 얼굴을 본 따 만든 주형에 화이트 초콜릿을 녹여 부은 뒤 이를 천천히 식혀 ‘서프라이징 초콜릿’을 만들었다. 그녀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작품을 만들어달라는 특별 주문을 받고 생각해 낸 아이디어”라면서 “‘머리 전체’를 먹을 수 있도록 모두 식용 초콜릿을 사용했다.”고 밝혔다. 이어 “많은 사람들이 보자마자 충격을 느꼈지만 난 ‘사람들을 놀라게 할 작품’을 만들어 달라는 의뢰를 받았으며 이에 충실했을 뿐”이라면서 “최근에는 ‘아기 머리 초콜릿’ 주문이 꾸준히 들어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초콜릿의 가격은 개당 35파운드(약 6만원)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서울은 매일이 장날이다 ①정겨운;골목골목, 사람 사는 이야기가 가득

    서울은 매일이 장날이다 ①정겨운;골목골목, 사람 사는 이야기가 가득

    발길 닿는 곳마다 대형마트가 들어선 서울이지만 골목을 사이에 두고 상점과 난전이 오밀조밀 마주보며 들어찬 동네 언저리 마을시장의 역사는 오늘도 계속된다. 서울은 매일이 장날이다 멋들어진 쇼윈도에, 높다란 쇼핑공간이 즐비한 서울에서 전통시장은 다소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가만 떠올려 보면 사대문 안팎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도매시장과 골목골목 가지를 뻗은 크고 작은 시장들이 서울 전역에 똬리를 틀고 있다. 추운 겨울, 서울의 구석구석 훈훈한 정을 느낄 수 있는 시장 구경에 나섰다. 정겨운; 골목골목, 사람 사는 이야기가 가득 발길 닿는 곳마다 대형마트가 들어선 서울이지만 골목을 사이에 두고 상점과 난전이 오밀조밀 마주보며 들어찬 동네 언저리 마을시장의 역사는 오늘도 계속된다. 1. 통인市場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인동 10-3 찾아가기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에서 500m 도보 이동 영업시간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도시락 카페는 오전 11시~오후 4시), 셋째 일요일 휴무 홈페이지 tonginmarket.co.kr 유니폼을 입거나 넥타이 반듯하게 맨 양복 차림의 회사원들이 하나둘 시장통으로 들어간다. 점심시간이긴 한데 시장통에 유명 맛집이라도 있나 뒤따라가 보니 플라스틱 도시락을 들고 골목 이 끝에서 저 끝을 오가며 반찬을 담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입소문을 타고 통인동 명물이 된 통인시장 도시락카페 ‘통通’ 덕분이다. 이 골목시장에는 반찬, 떡, 분식 등 유독 먹을거리 가게가 많다. 이러한 시장의 특성과 경복궁역 인근에 오피스타운이 형성되었다는 지역적인 특성을 두루 살펴 상인들이 힘을 모아 마을기업을 일군 것이다. 시장 골목 한가운데 위치한 고객만족센터 2층에 위치한 도시락카페에서 500원 단위의 통인시장 엽전을 구입하면 빈 도시락을 주는데 이 도시락을 들고 도시락카페 가맹점에서 가면 먹고 싶은 음식을 엽전으로 구매할 수 있다. 포장해서 가져갈 수도 있고 카페에서 먹을 수도 있다. “어머, 여기 떡갈비가 맛있던데 오늘은 없나 봐요.” 도시락카페 단골들의 훈수를 귀동냥하여 맛있는 반찬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줄도 생겨난다. 밥과 국 그리고 후식은 도시락카페에서 별도로 구매할 수 있다. 점심값 아끼려는 알뜰족은 물론 데이트 나온 연인들, 마침 장보러 나왔다 사람들이 맛있는 반찬을 골라 담는 모습에 마음이 동한 동네 주민들까지 여럿이 담아 온 도시락을 한곳에 펼치니 진수성찬 잔칫상이 따로 없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도시락카페 가맹점은 아니지만 통인시장의 명물 기름떡볶이도 빼놓을 수 없다. 국물 없이 볶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떡볶이라고 말하는 원조 기름떡볶이 가게 아주머니는 “시중에 떡볶이는 떡볶이가 아니야. 떡 찌개나 떡 전골쯤 되려나? 이게 진정한 떡볶이지”라며 신나게 떡을 볶아댄다. 각각의 개성과 이야기를 담아 상점들을 꾸미고 있는 공공미술 작품들도 눈길을 끈다. 통인시장만이 가지는 특별함을 새로이 디자인하여 멋을 낸 것인데 버리는 포장지를 모아 예쁜 모양으로 오려 만든 오브제와 채소가게 옆에 덩그러니 세워진 가스통에 배추 모양의 간판을 단 것이 재미있다. 속옷가게 문 앞에는 편안한 내복 차림의 사람 오브제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저절로 카메라 셔터를 누르게 되는 장면들이 계속되니 이 끝에서 저 끝까지 200m 남짓의 작은 시장이지만 몇 번을 오가며 숨어 있는 재미를 숨바꼭질하듯 찾게 된다. 1 누가 봐도 속옷 가게. 상호보다 그림 간판이 더 인상적이다 2 시장 사람들의 푸근한 표정이 그 손맛을 짐작케 한다 3 통인시장 도시락 투어! 무엇을 담아야 할지 즐거운 고민이 계속된다 4 맛있고 푸짐한 통인시장 스타일 점심식사 5 가스통 위에 배추 아가씨. 채소가게의 마스코트다 6 김이 모락모락, 갓 쪄낸 호박시루떡이 먹음직스럽다 2. 수유마을 市場 주소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54-5 찾아가기 4호선 미아역 8번 출구에서 400m 도보 이동 영업시간 이른 아침부터 밤 10시까지 홈페이지 www.suyumarket.com “이모, 멸치 여기 쌓은 것만큼 다 주시는 거예요?” 정량보다 훨씬 더 높이 쌓아 담은 건어물을 보며 주인아주머니께 묻는다. 아주머니는 “말이라고. 예쁘니까 한 주먹 더 줄까?” 그럼 남는 게 뭐 있냐는 말에 그저 웃기만 한다. 대형마트의 쿠폰, 1+1, 마감세일 등의 마케팅 전략이 모두 전통시장의 에누리, 덤, 떨이와 같은 정과 흥의 문화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두말하면 잔소리. 강북구 수유마을시장은 전통시장 본래의 인심을 팍팍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시장이 꽤 크다 싶은데 공산품을 취급하는 상가형의 수유시장과 골목시장인 수유전통시장과 수유재래시장 등 3개 시장이 어우러져 크게 하나의 마을시장을 이루고 있다. 정신없이 시장 구경을 하다 보면 배에서 꼬르륵꼬르륵 신호를 보내 온다. 배고플 시간이 아님에도 군침 도는 먹을거리에 배꼽시계가 제멋대로 돌아가는 탓이다. 매콤한 홍어무침, 쫀득한 족발, 고소한 빈대떡, 든든한 호박죽 등등 맛보라며 한 입 권하는 시장 아주머니들의 유혹은 그래서 더더욱 물리치기 어렵다. 맛보고 사들이고 그러다 보면 두 손이 모자랄 정도로 많은 봉지를 들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부른 배를 소화시키겠다는 핑계로 시장구경은 더 길어지는데 수유마을시장 한가운데 노란색 간판이 눈길을 끈다. 수유마을 작은 도서관이다. 시장 한가운데 도서관이라니.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일이 바쁜 상인들과 마을 주민들이 잠시나마 마음의 여유를 가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만든 공간이다. 이 좋은 취지에 공감한 분들의 기부와 상인들의 노력으로 제법 많은 책이 모였다. 누구나 들어와 책도 읽고 쉬었다 갈 수 있는 시장 속 문화공간으로 독서동아리, 북콘서트 등의 모임도 꾸려 가고 있다. 이 밖에 시장 곳곳에 상인과 주민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다양한 워크숍을 진행하는 카페 다락방, 생생클럽 등의 공간도 열어두고 있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생활형 시장인 수유마을시장의 소통은 말뿐인 소통과는 차원이 다르다. 핵가족과 독신들도 제대로 된 식문화를 꾸릴 수 있도록 제철 갈무리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산지에서 가져온 싱싱한 재료를 시장에서 공동구매하고 함께 만들어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프로그램이다. 지난 11월 김장을 시작으로 12월에는 고추장, 간장, 딸기쨈, 쑥버무리, 매실청, 열무김치, 오미자청, 엿 만들기가 이어진다. 시간의 흐름에 둔감한 도시인들에게 제철의 기쁨을 선물하는 시장은 참으로 정답다. 1 바야흐로 김장의 계절. 속이 알찬 배추가 층층이 대기 중이다 2 수북이 쌓인 건어물. 시장 인심이 이렇게 넉넉하다 3 어디서 이렇게 향긋한 냄새가 날까. 자연스럽게 코를 대고 과일향을 들이마시게 된다 4 갓 빼낸 가래떡. 떡국용으로 썰려면 꾸덕꾸덕하게 말려야 한다 5 매콤한 양념에 군침이 돈다. 지글지글 족발이 맛있게 익어 간다 6 기름에 바삭 튀기고 설탕에 도르르 굴린 찹쌀도너츠는 먹어도 먹어도 질리는 법이 없다 7 군데군데 쉬어 갈 수 있는 공간이 있어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는 수유마을시장 에디터 트래비 글·사진 Travie writer 서진영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여행신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여행신문에 있습니다.
  • [명사가 걸어온 길] 1.바람의 시인, 시대를 말하다(상) 고은

    [명사가 걸어온 길] 1.바람의 시인, 시대를 말하다(상) 고은

    “프랑코가 곧 죽을 모양이다. 사르트르가 그자를 ‘라틴의 돼지’라고 부르고 그놈이 어서 죽기만 기다리노라고 말한 것이 통쾌하다. 거리의 사람들. 독재를 견디어내는 이 인내의 일상 체념과 방관의 일상이야말로 독재의 온상이다. 의병의 역사, 봉기의 역사가 있었으나 그것의 분출 자체가 타자 의존적인 경우도 적지 않다. 저항보다 순응과 피동의 역사가 더 길다. 혁명, 영구혁명은 관념인가. 창조는 어떤 경우도 혁명적이지 않으면 창조가 아니다.” 1975년 11월 15일 고은(당시 42세)은 청소년기 이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써온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독재를 견디어내는 이 인내의 일상 체념과 방관의 일상이야말로 독재의 온상이다’는 대목에서는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1974년 11월 18일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로서 ‘문학인 101선언’을 주도했던 침묵을 깨야 한다는 결단이 느껴진다. ‘창조는 어떤 경우도 혁명적이지 않으면 창조가 아니다’에는 문학이 현실과 동떨어지면 안 된다는 철학이 강하게 배어 있다. 함박눈이 쏟아진 지난 연말 경기도 안성 자택에서 만난 고은은 책으로 벽을 쌓아 지은 고분 같은 서재에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한쪽 창으로 햇빛이 쏟아져 서재는 어두운 듯하면서 환했다. 미닫이문을 터서 만든 10평 안팎의 장방형 서재는 시인에게 어머니 자궁 같은 안온함을 준다고 했다. 짙은 감색 셔츠에 같은 색 실크 머플러를 목에 두른 고은은 고요했다. 전설처럼 떠돌던 술에 전 낭만의 시인이나, 열정의 시인, 독재에 저항하는 시인의 모습은 사라지고, 팔순의 성찰하는 고은이 보였다. 어쩌면 이것이 본래의 고은일지도 모르겠다. 전쟁은 고흐를 열망한 내 소년기를 부쉈다 ‘한국의 고흐’가 되고 싶었던 17살 예술지상주의자였던 소년의 운명을 맨처음 뒤틀어 놓은 것은 한국전쟁이었다. 외삼촌 집에서 본 고흐의 화보집을 보며 꿈을 키우던 고은에게 한국전쟁은 감당할 수 없는 참극이었다. “좌익이 점령했을 때는 우익이 죽었고, 우익이 돌아오자 좌익이 죽었죠. 내 고향에서만도 이 죽음의 재앙이 세 번 되풀이됐다. 군인들이 와 시체를 파내서 옮기라고 했는데, 그 작업을 하고 나면 보름 동안 씻고 또 씻어도 시체 냄새가 몸에서 없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인간 하면 서로 죽이는 행위, 고향 하면 핏줄끼리도 이데올로기 때문에 싸우는 그런 것만 연상됐다. 죽음에 대해 아무 준비도 없던 10대 어린애가 그것을 만난 것이다. 소년 자체가 부서져버렸다.” 고아의 의식이 투철하다는 고은은 한국전쟁으로 조상과 끈이 끊겼다고 생각했다. 고향도 무섭고, 핏줄도 무서웠다. 극한 상황에서 인간이 얼마나 피에 주려 있는가를 본 소년의 정신은 온전해지지 못했다. 정신착란으로 집을 뛰쳐나갔고, 자살도 여러 차례 시도했다. 전쟁통에 군산고를 중퇴했는데, 전쟁 중에 그는 모교인 군산북중학교 국어교사를 맡기도 했다. 하지만 견딜 수 없는 혐오들이 밀려오던 터에 1952년 출가를 했다. 1957년에 전등사 주지를 지냈고, 1958년 ‘불교신문’을 창간해 주필을 맡았던 그는 1962년 환속했다. 등단은 1958년, 26살 때다. 시인협회 조지훈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폐결핵’이 실렸다. 현대시인이 100명 정도에 불과하던 시절이라 그는 현대문학 2세대 정도되는데도 1세대로 평가받는다고 했다. 김동리, 오상순, 김수영 등과 어울리며 살았다. 유미주의자였던 그의 예술관과 삶의 방식을 전복시킨 것은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의 분신자살이었다. 잊어버린 과거가 된 전태일의 죽음이 술에 절어 나른했던 시인의 삶을 바꿔 놓았다. “지금은 서울 무교동에 현란한 고층건물들이 서 있는데, 당시에는 바라크였다. 낮은 건물뿐이었다. 통행금지 시절이었는데, 술을 마시고 돌아갈 수가 없으니 주모에게 사정하고 아첨해서 술집 탁자 같은 데서 자곤 했다. 그날도 아마 그런 날이었다. 먼동이 틀 무렵인데 신문 쪼가리들이 바람에 굴러다니더라. 묵은 신문이었는데, 사회면과 사설면에 ‘노동자 분신자살!’이라고 써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죽음이 워낙 육친화되어 있다 보니 죽음이라는 말에 눈이 번쩍 떠지더라. 어, 이것 봐라! 일종의 죽음의 비교라고 할까. 그런데 이런 죽음이 있었던 것이다. 풀빵 10개로 점심을 때우고,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우이동 판잣집까지 버스비가 없어 한밤중까지 걸어가고, 그런 인간의 삶이 나오더라. 가슴이 서늘해졌다. 이게 뭔가. 현실을 깨달았다. 거대한 착취와 비인간화, 허리도 제대로 펼 수 없는 다락방 지옥의 밀실 같은 곳에서 소녀들이 가혹한 노동을 하고, 폐결핵으로 피를 토하고.” 민주화 전위? 뒤늦게, 엉거주춤 서 있었다 현실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던 그를 두고 사람들이 ‘초개’라고 했는데, 그는 밀물처럼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에 각성이 됐다.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1970년대 봉제공장의 노동현실을 설명하던 그는 다시 평온한 얼굴로 돌아와 “사람들은 내가 민주화 운동의 전위에 섰다고 하는데, 사실 뒤늦게 뒤꽁댕이를 따라다니면서 한 것이다. 뒤늦게 엉거주춤하게 거기에 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때 전태일의 죽음에 나만 충격받은 것이 아니다. 서울대 법대생들도 다 깨쳤다. 나중에 감옥에서 만난 조영래, 장기표, 걔네들도 다 깨쳤더라. 나는 지식인이랄 것도 없고 예술인이었는데 전태일의 죽음의 폭풍이 나까지 몰아세웠다. 그래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우리 작가들도 뭔가 해야겠다. 그때 자기 몸을 던지는 행복이 생겼다.” 동료 작가들은 물론 선후배 작가들까지 뭉치도록 앞장서서 나갔다. ‘나를 빼고 몰래 하면 안 된다’는 작가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가 설득하면 다소 보수적인 현대문학 1세대 선배들도 동참했단다. 1974년 자유실천문인협회 대표간사가 된 배경이다. 당시 자유실천문인협회의 주장은 5가지였다. 구속자를 석방하라,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라, 자유민주주의 정신의 절차에 따른 새로운 헌법을 마련하라 등이었다. 당시 세종로에서 시위하고 그와 조해일, 윤흥길, 박태순 등 7명이 연행됐다. 고은의 본격적인 빵살이(감옥살이)는 그로부터 3년이 지난 뒤부터 시작됐다. 1977년, 1979년이 자유실천문입협회 건이었다. 1980년에는 김대중내란음모죄에 연루됐다. 죽음이 목젖까지 찾아왔던 때다. 1988년 정부가 월북·납북작가 작품들을 해금하자, 고은은 더 나아가 한국작가회의와 함께 북한의 작가동맹 소속 작가들과 ‘남북작가회담’을 추진한다. 이것이 문제가 돼 1989년 다시 투옥됐다. 국가가 달아준 ’별’이 4개다. 1980년대 중반 민주화운동이 본격화될 때 그는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1987년)를 맡았다. 국가와의 갈등이 완화된 건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였다. 그의 나이 60세 때다. 1993년 처음으로 여권이 나왔다. 그전까지는 임시여권만 발급됐다. 시인 고은이 ‘세계의 시인 고은’이 된 시점도 그때부터다. 1970년부터 1993년까지 23년간 그는 1960~70년대 산업화 과정의 각종 폐해를 해소하고,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거리의 시인’으로 살았다. 한국전쟁으로 상처받은 그는 이제 통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나에게는 독특한 통일 이론이 있다. 다연방 통일제를 주장한다. 북한의 언어는 문화어(표준어)-평양중심의 언어로 통합된다. 남한은 표준어는 서울 종로에 사는 중산층의 언어다. 마포에서 쓰는 언어도 아니다. 그런데 표준이나 통합은 말살이다. 시인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사투리, 지역어는 다 신성한데 다 말살되고 있다. 이것은 나쁜 단일화다. 그래서 나는 사투리와 지역어가 존중될 수 있도록 제주도, 경상도, 전라도, 함경도 등 20여개 연방으로 만들어서, 수상최고회의를 국가최고의사결정기구로 하는 남북한 통일된 국가를 꿈꾼다. 스위스, 말레이시아, 미합중국, 넓게 보면 중국도 다 연방 아니냐.” 그는 100년 안에 아시아에도 유럽연합(EU)과 같은 국가연합이 탄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구상이 한낱 백일몽에 그치지는 않을 것으로 확신한다. 올해로 80세인 고은의 삶은 파란만장하다는 표현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에 태어나 식민지와 1945년 해방과 분단, 1948년 대한민국 건국, 1950년 한국전쟁, 1960년 4·19민주화혁명, 1961년 5·16군사쿠데타, 1979년 박정희 정권의 몰락, 1980년 서울의 봄과 5·18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10민주화운동, 1997년 외환위기와 극복까지. 롤러코스터보다 더 다이내믹한 인생이다. 침묵할 수 없던 시대, 그것은 선물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시대는 조용할 수 없는 시대였지만, 남들보다 더 격렬하게 부딪치며 살아온 측면이 있다. 시대가 나에게 준 것도 있고, 내가 시대에 준 것도 있다. 이것이 맞물려서 심상치 않은, 비일상적인 삶의 연대기를 갖게 됐다”며 허허롭게 웃은 뒤 “사람들은 나를 ‘풍운아’라고도 부르지만, 돌아보면 시대가 나에게 준 선물과 같은 것이 많다”고 회고했다. 마지막으로 고은은 역사와 사회에 대한 고언을 잊지 않았다. “우리는 역사의 유산을 정리해본 적이 없다. 민족끼리 싸우는 삼국시대, 후삼국시대를 고스란히 복제하고 있다. 그런 바보 같은 땅이 어디 있나. 치유되지 않은 삶을 자손들에게 넘겨줘야 할 판이다. 피의 흔적을 닦아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물론 당대의 정당성이 있겠지만, 이대로 가면 역사라고 할 수도 없다. 길들여져 있는 체제에 의해 쉽게 변경될 수 없는 관행, 제도가 있으니 현안을 다루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당대에 손가락질당하고, 역적이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미래에 대한 불온한 꿈을 꾸고 확산해야 한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1월의 오키나와, 눈 시린 쪽빛 풍경화

    1월의 오키나와, 눈 시린 쪽빛 풍경화

    노인들은 여전히 일본인이길 거부한다. 대신 이곳 사람임을 뜻하는 ‘우치난추’라는 말로 정체성을 세운다. 450년간 독립 왕국이었다가 일본의 침략을 받았고 또 30년 가까이 미 군정을 겪은 뒤 다시 일본에 반환된 곳. 원주민들과 무관한 미군과 일본군의 전투로 20만명이 죽은 서글픈 역사가 서려 있다. 그러나 비극은 역사라는 이름으로 희석되고 있다. 우치난추뿐 아니라 한국인 위안부와 징용자들의 슬픈 넋까지 에메랄드 바다 빛에 가려진 땅 ‘아시아의 하와이’ 오키나와다. 오키나와는 1976년 일본의 한 현(縣)으로 편입됐지만 거리상으로는 한국이나 중국에 더 가깝다. 인천공항에서 2시간 10분이면 겨울철 평균 최저기온이 섭씨 17.2도인 아열대 해양성 기후의 섬으로 피한(避寒) 여행을 떠날 수 있다. 한겨울에도 10도 이하로 떨어지는 경우가 없어 북방의 관광객들은 가벼운 차림에 카디건이나 바람막이 정도면 충분하다. 하지만 현지인들은 20도를 넘나드는 기온에도 오리털 파카를 입는다. 오키나와의 관문인 나하 공항에 내리면서부터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키 작은 소철나무와 파인애플을 닮은 아당나무다. 현지 가이드에 따르면 미 군정에서 일본으로 반환된 후 오키나와의 농업이 환금성 높은 사탕수수 경작으로 치우치면서 식량까지 바닥나자 현지인들은 ‘보릿고개’를 겪게 됐다. 그때 우치난추들의 배를 채워 준 것이 아무 맛도 나지 않는 아당 열매와 3일간 물에 담가 독을 뺀 뒤 삶은 소철나무 잎이었다. 독을 빼는 3일을 기다리지 못하고 먹었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부지기수라고 한다. 나하공항이 있는 나하섬은 오키나와의 본섬으로 제주도의 4분의3 크기다. 여기에 슈리성, 추라우미 수족관, 오키나와 월드, 국제거리 등 주요 관광지가 밀집해 있다. 하지만 자신만의 절경을 품은 나하섬 주변의 크고 작은 섬 160개(유인도 40여개)를 모두 합하면 제주도의 1.5배에 이른다. 그중 도카시키 섬은 오키나와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해변과 투명한 코발트 블루 물빛을 자랑한다. 특히 도카시키 섬 내 ‘아하렌 비치’는 세계적인 수준의 투명도를 갖고 있다. 배를 타면 수심 20m 아래까지도 훤히 보인다. 인근의 ‘도카시쿠 비치’도 투명한 물빛과 밀가루처럼 부드러운 모래로 유명하다. 도카시키 섬은 오키나와 해양스포츠의 메카다. 아하렌 비치와 도카시쿠 비치 모두 해변 가까이에 산호초가 넓게 자라고 있다. 산호초 사이로는 색색의 물고기들이 오가며 전 세계 스노클러들을 유혹하고 있다. 도카시키 섬 곳곳엔 전흔(戰痕)도 숨어 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은 본섬에 상륙하려는 미군을 기습 공격하기 위해 도카시키 섬을 포함한 게라마제도에 함선을 주둔시켰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미군이 대규모 선단으로 게라마제도를 공격했고, 궁지에 몰린 일본군은 주민들과 함께 도카시키 섬 최북단으로 도망친다. 여기서 일본군은 민간인들에게 명예로운 자살을 종용한다. 이날의 아픈 기억은 도카시키 섬 북부 ‘집단자결지’에 새겨져 있다. 본섬에서 오키나와의 독특한 색채를 느낄 수 있는 곳은 과거 류쿠왕국의 고도(古都) 슈리성이다. 2000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슈리성은 1429년 쇼하시(尙巴志) 왕이 오키나와 본토를 통일하고 류쿠왕국을 세운 이후 450년간 역대 왕이 머물렀던 곳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대부분 파괴됐지만 성곽과 전각을 복원해 1992년 슈리성공원으로 재탄생했다. 중국과 류쿠의 문화가 융합된 독자적인 양식은 일본 본토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1975년 세워진 추라우미수족관도 오키나와 관광에서 건너뛸 수 없는 곳이다. 7500t의 수압을 기둥 하나 없이 견뎌내는 세계 최대 수준의 수족관이 자랑이다. 대형 고래상어와 쥐가오리, 특이한 모양의 산호, 열대어들이 몽환적인 풍경을 만들어 낸다. 오키짱극장에서는 돌고래 쇼를 감상할 수도 있다. 오키나와의 해양성 기후는 남다른 야생미가 물씬 풍기는 자연풍경을 소성해 냈다. 이를 즐기는 방법은 다양하다. ‘포레스트 어드벤처’(www.forest-adventure.jp)는 일종의 익스트림 스포츠다. 안전장치를 건 채 와이어를 타고 그물 다리를 건너 숲속을 탐험한다. 울창한 고사리 나무 숲을 걸으며 힐링을 하는 방법도 있다. 북부 ‘얌바루 이코이노 모리’ 휴양림에서는 ‘히카게헤고’라는 원시 고사리 나무 3000그루와 각종 식물을 감상할 수 있다. 오키나와의 상처가 더 궁금하다면 평화기념공원을 찾아보자. 태평양전쟁 때 희생된 한국인들을 기리는 위령탑이 서 있다. 대한민국 각지에서 가져온 돌을 위령탑 앞에 쌓아 뒀다. 탑 앞에 선 비석은 충청도에서 가져온 돌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글씨를 쓴 것이다. 한국, 한국인의 흔적도 여기저기 숨어 있다. 미야코지마에는 조선시대 홍길동 후손의 것으로 알려진 무덤이 있다. 슈리성 한켠에서는 고려대장경을 ‘모셔둔’ 장경각도 만날 수 있다. 고려시대 삼별초가 이곳까지 유입됐다는 얘기도 전한다. 국제거리와 마키시 공설시장에 가면 오키나와 사람들이 뭘 즐기고 먹는지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본토 일본인과 묘하게 외모가 다른 우치난추들의 생김생김을 슬쩍슬쩍 훔쳐보는 것도 재미다. 글 사진 오키나와(일본) 강병철 기자 bckang@seoul.co.kr ●여행수첩 →진에어가 저비용 항공사로는 처음으로 지난달 24일 인천~오키나와 정기편을 취항했다. 좀 더 합리적인 가격으로 오키나와를 다녀올 수 있게 됐다. 주 7회 운항하며 매일 오전 10시 35분 인천을 출발한다. 홈페이지(www.jinair.com) 참조. 1600-6200. →자유여행이라면 렌터카를 빌리는 게 편하다. 12시간 기준 5000엔 수준. 오키나와 중심부는 나하공항에서 슈리성까지 설치된 모노레일로 돌아볼 수 있다. →쇼핑은 오모로마치에 있는 DFS갤러리아 오키나와점과 대형 아웃렛몰인 아시비나가 유명하다. 특산물은 자색고구마로 만든 ‘베니이모타르트’다. →전통요리는 오이과의 채소 ‘고야’를 두부, 계란과 함께 볶은 ‘고야찬푸르’다. 해초의 일종인 ‘모즈쿠’도 일본 전역에서 소비될 정도로 유명하다. ‘오키나와 소바’는 강한 양념에 익숙한 사람들의 입맛에는 잘 맞지 않는다. 오키나와 전통주인 아와모리와 오키나와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오리온 맥주, 오키나와 사탕수수 흑설탕을 이용한 도넛 ‘사타안다기’ 등도 맛있다. 일본 요리 뷔페인 ‘다이콘노 하나’ 등에 가면 다양한 오키나와 요리를 한자리에서 즐길 수 있다.
  • [2013 신춘문예-소설 당선작] 젤리피시/조수경

    [2013 신춘문예-소설 당선작] 젤리피시/조수경

    분홍빛 바다가 출렁인다. 수심이 가장 깊은 곳에 토막 난 엉덩이가 바짝 엎드려 있다. 둥근 엉덩이 사이로 크기와 모양이 서로 다른 페니스들이 서 있다. 페니스들은 물살이 지나갈 때마다 일제히 부드럽게 흔들린다. 한쪽에서는 실리콘 가슴이 유두를 꼿꼿하게 세운 채 먹잇감을 찾고 있다. 위험을 감지한 듯, 무지개빛깔 콘돔 무리가 빠르게 헤엄쳐 지나간다. 나는 눈을 감는다. 바다 깊은 곳까지 파고든 햇빛을 향해 고개를 든다. 눈꺼풀을 투과한 빛이 안구를 따스하게 감싼다. 빛은 피부 속으로 스며들어 온몸에 뿌리내리고 있는 뼈마디를 녹인다. 몸이 점점 더 가벼워진다. 나는 분홍빛 바다를 부유한다. 나는 휠체어 바퀴를 탄력 있게 밀었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휠체어를 미는 손에는 조금의 망설임이 없었다. 방향을 틀 때마다 짧고 가느다란 두 다리가 하늘거렸다. 출입문이 열리며 사십대 남자가 들어왔다. 남자의 얼굴 위로 분홍빛 조명이 물결처럼 흘러갔다. 나는 카운터 위에 달린 회전 조명등을 껐다. - 천천히 돌아보세요. 휠체어를 밀고 카운터 안으로 들어가는 나를 남자의 시선이 뒤쫓았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남자의 시선이 진열대 쪽으로 튕겨 나갔다. 남자의 눈동자는 진열대에 놓인 성인 잡지와 DVD, 콘돔 상자와 딜도를 빠르게 훑으며 한 칸씩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줄리’ 앞에서 멈췄다. ‘줄리’는 가장 인기 있는 상품이었다. 그것은 유명한 포르노 여배우가 자신의 성기를 직접 본떠 만든 것이었다. 남자는 ‘줄리’의 우윳빛 허리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허리부터 허벅지까지, 토막 난 몸뚱이를 쓰다듬던 남자는 여배우의 그곳을 구석구석 살피며 촉감을 확인했다. 남자의 턱관절이 점점 느슨해지며 입이 벌어졌다. 모니터 앞에서 바지를 내리고 앉아 있을 때도 남자는 저런 얼굴을 하고 있을까. 삼 개월 할부로 몸값을 치르고, 남자는 토막 난 연인을 끌어안은 채 가게 밖으로 사라졌다. 비록 신체 일부분이긴 하지만 남자는 매일 밤 포르노 스타와 밀애를 즐기게 될 것이었다. 이곳에 있는 상품 중 완전한 것은 없었다. 모두 분절된 신체기구뿐이었다. 발기된 페니스를 본뜬 고가의 바이브레이터, 살짝 벌어진 여자의 성기, 둥글고 탐스러운 엉덩이, 가슴 사이에 질이 달린 기형적인 기구까지 온통 토막 난 몸뚱이뿐이었다. 토막 난 몸뚱이들은 나와 제법 어울렸다. 아이처럼 작은 몸에 달린 성숙한 여자의 젖가슴, 근육이 잘 발달된 짧은 팔, 제 기능을 상실한 채 붙어 있는 가늘고 휘어진 다리는 몸통을 중심으로 하나로 이어져 있으나 각각 떨어져 있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법했다. 내 몸뚱이는 버려진 재료를 모아다가 아무렇게나 조립해 만든 결과물 같기도 했다. 나는 가끔 가게 안에 분해된 채로 진열된 내 몸뚱이를 상상해 보곤 했다. 오후 두 시. 노인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노인의 손에는 쟁반이 들려 있었다. 나는 카운터 뒤쪽에 있는 방문을 열었다. 노인은 방 안에 쟁반을 밀어 넣은 뒤 내 몸을 들어 올렸다. 가느다란 두 다리가 아무 의지도 없이 덜렁거렸다. 노인은 나를 방 안에 내려놓은 뒤 문지방에 걸터앉아 천천히 신발을 벗었다. - 오늘은 유난히 바빴어. 공영주차장 공사가 시작됐거든. 그쪽 인부들이 다 왔지 뭐야. 한동안 바쁘겠어. 노인은 안주인과 함께 1층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동네 이름을 따서 지은 평범한 상호에, 따로 메뉴도 없이 그날그날 안주인이 만든 국과 반찬을 내는 식이었다. 그럼에도 주변에서 일하는 공업사 사람들 대부분이 노인의 식당을 찾았다. 젊은 시절, 노인은 이 근방에서 기계 다루는 일을 했다. 안주인은 노인이 일하는 곳 근처에 세를 얻어 식당을 열었다. 공업사와 공구상가가 밀집된 지역이었다. 식당은 벌이가 꽤 괜찮았다. 노인은 일을 그만두고 식당에서 안주인을 거들거나 상가로 배달을 다니곤 했다. 세를 얻어 식당을 차린 노인 부부는 이제 식당이 딸린 3층짜리 건물의 주인이 되었다. 내가 노인의 건물 2층에 세를 얻어 산 것도 벌써 6년째 접어들었다. 노인은 내가 생활하는 데 지장이 없게끔 화장실을 개조해 주었다. 노인이 아니었다면 가게를 시작할 엄두도 못 냈을 것이었다. 끼니때가 되면 노인은 식당에서 밥과 반찬을 챙겨다 주었다. 때로는 나를 안고 식당에 내려가기도 했다. 한창 바쁘게 손님을 치르고 난 안주인까지 함께 둘러앉아 늦은 점심을 먹을 때면 ‘가족’이라는 단어가 저절로 떠올랐다. 공업사 사람들은 노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밥알을 씹으며 노인 같은 사람이야말로 선행상을 받아야 하는 거라고 말했다. 그때마다 노인은 쑥스럽게 웃으며 “딸자식 같아서…”라고 겸손하게 말하곤 했다. -갈치조림이야. 손님상에 내려고 만든 건 아니고… 며느리가 보낸 걸 내가 몇 토막 졸여 달라고 했지. 방으로 들어온 노인이 쟁반을 덮고 있던 신문지를 걷어냈다. 매콤한 갈치조림 냄새가 침샘을 자극했다. 노인은 손으로 갈치 한 토막을 집어 들고 몸통 양 옆에 박혀 있는 가시를 빼냈다. -이렇게 가시를 미리 빼두면 먹기 좋지. 갈비처럼 손에 들고 뜯어 먹기도 좋고. 양념장이 묻은 손가락을 입으로 빨며 노인이 말했다. 나는 젓가락을 들고 갈치 살을 발라냈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갈치는 꽤 먹음직스러웠다. 발라낸 살을 입안에 넣자마자 연약한 살점이 부서졌다. 그제야 허기가 밀려왔다. 자작자작한 국물에 뜨거운 밥을 비벼 입에 넣고, 큼지막하게 썰어 넣은 무를 베어 먹었다. 노인은 남은 갈치 토막을 집어 들고 가시를 제거한 뒤 살점을 발라내 밥 위에 얹어 주었다. 살점을 씹고, 국물을 삼키는 나를 보며 노인은 기름으로 번들번들해진 손가락을 자꾸만 빨았다. 밥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나는 밥그릇 가장자리에 들러붙은 밥알을 떼어 냈다. 손톱으로 접시에 말라붙어 있는 갈치 비늘을 긁어냈다. 손톱 사이로 은빛 비늘이 반짝였다. 나는 신문지로 빈 그릇을 덮었다. 노인은 쟁반을 방 한쪽으로 밀어 놓았다. 나는 갈치 기름으로 얼룩진 신문지 귀퉁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손님이 올 거예요. -그래, 그래.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문지방에 걸터앉아 신발을 꿰신었다. -저녁 올려다 주마. 노인이 쟁반을 들고 일어서며 말했다. 나는 방 한쪽에 쌓아 놓은 상자더미 쪽으로 기어갔다. 어제 들어온 상품 몇 개를 새로 진열해 놓을 생각이었다. 상자더미 옆에는 계단식으로 만든 나무받침대가 있었다. 노인이 만들어 준 것이었다. 나는 받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가 보였다. 몸집이 큰 그는 사람들과 섞여 있어도 쉽게 눈에 띄었다. 식당에 내려가 밥을 먹을 때 그와 몇 번인가 눈이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선한 눈을 갖고 있었다. 그는 마치 바다 속 포유류 같았다. 그가 맞은편에 위치한 자동차 공업사에서 일한다는 것을 얼마 전에 알았다. 그리고 공업사 2층에 딸린, 내 방에서 마주 보이는 방에 살고 있다는 사실도 곧 알게 되었다. 그 후로는 받침대에 올라갈 때마다 창밖을 내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작업을 마친 그는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툭툭 털어내고 동료들과 함께 공업사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맨 위에 올려져 있던 상자에서 ‘투 러버스’를 꺼냈다. 페니스 모형 두 개가 하나로 이어진 상품인데, 한쪽은 딱딱하고 다른 한쪽은 부드러운 질감을 하고 있는 기구였다. 이것은 마치 머리가 둘 달린 뱀처럼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튜브 걸’도 꺼냈다. 여체를 본뜬 비닐 튜브에 바람을 주입한 뒤, 성기 부분에 실리콘으로 제작한 질 모형을 끼워 넣고 사용하는 상품이었다. 모양이나 촉감은 ‘리얼 돌’에 못 미치지만 저렴한 가격이 ‘튜브 걸’의 장점이었다. 나는 두 개의 상품을 들고 가게로 나갔다. ‘투 러버스’를 딜도 옆에 나란히 진열해 놓은 뒤, 납작하게 눌린 ‘튜브 걸’의 몸에 숨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밋밋한 얼굴과 유두 없는 가슴이 조금씩 부풀어 올랐다. 흐느적거리던 비닐 다리에도 팽팽하게 공기가 차올랐다. 나는 살이 통통하게 오른 ‘튜브 걸’의 다리를 벌리고 핑크빛 질을 끼워 넣은 뒤 무릎 위에 앉혔다. 공기처럼 가벼운 여인을 한 팔로 끌어안고 가게 중앙으로 휠체어를 밀었다. 나는 춤을 청하듯 정중하게 ‘튜브 걸’에게 손을 내밀었다. ‘튜브 걸’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나는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동그란 원을 그리듯 휠체어를 밀었다. 멀어질 듯 밀착되고, 흐느끼듯 가라앉다 이내 경쾌하게 튀어 오르던 춤. 오래전 영화에서 본 장면이 떠올랐다. 그때 흘러나왔던 연주곡을 흥얼거리며 나는 ‘튜브 걸’과 함께 가게 안을 빙글빙글 돌며 춤을 췄다. 누군가의 웃음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춤추기를 멈췄다. -제법인데. P공업사 사장 최 씨였다. 최 씨는 일주일에 한 번꼴로 가게를 찾아왔다. 최 씨는 나에게서 ‘튜브 걸’을 빼앗아간 뒤, 춤을 추는 시늉을 했다. 나는 ‘튜브 걸’을 거칠게 낚아채 한쪽에 세워 두고 가게 문을 잠갔다. -이쪽으로 오세요. 최 씨가 나를 따라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알코올로 기구를 닦아 내는 동안 최 씨는 양말과 바지, 그리고 팬티를 차례로 벗었다. 나는 최 씨 쪽으로 기구를 밀었다. 무릎을 세운 채 다리를 한껏 벌리고 있는, 여자의 하반신을 본뜬 기구였다. 최 씨는 내가 건넨 윤활제를 자신의 성기에 발랐다. -거기 있어. 네가 보고 있으면 더 흥분이 되거든. 이곳에 찾아오는 남자들 대부분이 내게 자신들의 행위를 지켜봐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나에게 섹스를 요구한 사람은 없었다. 기구가 아닌 진짜 여자와의 섹스를 원했다면 그들은 다른 곳에 갔을 것이었다. 대신 그들은 내가 여자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궁금해했다. 나는 남자들이 기구 안에 사정을 할 때까지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그들을 지켜보곤 했다. 때로는 기구에서 여자의 상반신이 자라나는 상상을 하거나, 기구처럼 남자들의 상반신이 사라지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일을 마친 최 씨가 기구에서 몸을 빼냈다. 나는 전기주전자의 전원 버튼을 누르고 커피 잔에 인스턴트커피를 쏟아부었다. 황갈색 커피 알갱이가 잔 위로 우박처럼 떨어졌다. 하얀 프림이 쏟아지며 커피 알갱이 사이를 파고들었다. 입자가 고운 프림은 카리브 해의 모래를 닮았다. 카리브 해에는 영원히 죽지 않는 해파리가 산다고 했다. 투리토프시스 누트리큘라. 언젠가 TV에서 본 그 해파리의 이름을 천천히 발음해보았다. 투리토프시스 누트리큘라는 성장과 퇴행을 무한히 반복한다고 했다. 생체 시계를 거꾸로 돌릴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 1cm도 안 되는 이 작은 해파리는 죽지 않고 끊임없이 번식하며 전 세계 바다로 퍼져 나가 생태계를 위협한다고 했다. 지구상에서 모든 생명체가 사라진다 해도 투리토프시스 누트리큘라는 태고로부터 멀고 먼 미래까지, 끝없이 헤엄쳐 갈 것이었다. 바다를 가득 메운 영생불사의 생명체들이 나를 향해 일제히 헤엄쳐 오는 환영. 나는 몸을 떨었다. 아주 오래전, 나는 해파리였다. 뇌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흐물흐물한 두 다리는 내가 해파리의 삶을 살았다는 흔적기관으로 남아 있었다. 분출하는 법은 잊었지만, 여전히 분비되고 있는 독이 동맥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며 현기증이 일 때도 종종 있었다. 물이 끓었다. 나는 최 씨에게 커피를 건넸다. 뜨거운 커피를 후루룩 마시고 최 씨는 커피값을 기구 옆에 내려놓았다. 나는 해변에 누워 바다를 바라본다. 수평선 끝에 태양이 반쯤 걸려 있다. 태양은 바다 위로 황금빛 길을 만들고 있다. 황금빛 길을 따라 무언가 해변을 향해 헤엄쳐 오고 있다. 그것은 수면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로 계속해서 헤엄쳐 온다. 물살이 점점 거세진다. 하지만 나는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해변에 가까워지면서 그것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것은 검은 고래다. 고래와 나는 서로 마주 본다. 나는 고래의 등 위로 기어 올라간다. 고래의 등은 생각처럼 미끄럽지 않다. 그리고 따뜻하다. 나를 태우고 고래는 다시 바다로 헤엄친다. 내가 물에 잠기지 않도록 고래는 수면 가까이에서 헤엄친다. 물살에 발등이 간지럽다. 낯설다. 나는 내 다리를 내려다본다. 길고 튼튼한 다리가 쭉 뻗어 있다. 나는 다리를 한껏 뻗어 물살을 가른다. 잠결에 쇠가 또 다른 쇠붙이 안으로 파고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떴다. 철컥, 하고 가게 출입문이 열린 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다시 출입문이 슬며시 닫히는 소리, 쇠붙이가 돌아가며 문이 잠기는 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어둠 속에서 눈을 뜬 채로 허공을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는 귀가 예민해지는 법이었다.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방문이 천천히 열렸다. -벌써 잠이 든 게냐? 노인이었다. 나는 대답을 하는 대신 방문을 등지고 돌아누웠다. -저녁상 봐왔다. 불을 켜지도 않은 채, 노인은 방 한쪽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저녁은 먹고 자야지. 노인은 문지방에 걸터앉아 신발을 벗었다. -갈치찌개다. 남은 갈치 넣고 끓였는데 맛이 아주 개운하다. 노인이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오며 말했다. 노인이 등 뒤에서 나를 끌어 안았다. 노인의 손이 티셔츠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노인의 피부는 차갑고 거칠었다. 노인은 내 가슴을 성급하게 움켜쥐었다. 노인은 내 등 뒤에 바싹 붙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물을 벗고 있는 커다란 곤충이 등 뒤에 매달려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멀리,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간간이 쇠를 자르는 날카로운 소리도 들려왔다. 공업사에서는 종종 야간까지 작업을 하곤 했다. 잠이 오지 않을 때면, 나는 어두운 방 안에 누워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쇠가 잘리는 소리는 비명소리 같았다. 그것이 쇠붙이에서 피 맛이 느껴지는 이유일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이불로 온몸을 꽁꽁 감싸고 누워 기계가 규칙적으로 돌아가는 소리를 듣다 잠이 들곤 했다. 노인이 긴 숨을 토해냈다. 허물처럼 노인의 몸이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만 같았다. -입맛 없으면 뒀다가 아침에 데워 먹어라. 방문을 닫기 전, 노인이 말했다. 가게 문이 열리고 다시 닫힐 때까지 나는 어둠 속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노인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난 뒤, 나는 기구를 소독하듯 내 몸 구석구석을 닦아 냈다.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배고픈 아기마냥 희미하게 울다가도 이내 앙칼진 비명을 질러댔다. 안주인은 또 잠에서 깨어났을 것이었다. 그녀는 평소에 전화벨이 울려도 못 들을 만큼 깊은 잠에 빠지는 편인데, 고양이 울음소리만 들리면 이상하게 잠에서 깨어난다며 투덜거리곤 했다. 고양이 울음소리를 듣다 보면 단순히 교미를 하고 있는 짐승이 아닌, 이제 막 성의 유희를 알게 된 계집 같다며 몸서리치기도 했다. 나는 노인이 두고 간 쟁반을 끌어당겼다. 밥공기를 거꾸로 들고 흔들었다. 차갑게 식은 밥덩이가 갈치찌개 위로 떨어졌다. 나는 그것을 비닐봉지 안에 담은 뒤 나무받침대 맨 위까지 기어 올라갔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응시했다. 캄캄한 골목길에서 몸집이 작은 고양이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나는 비닐봉지를 아래로 떨어뜨리고 비린내를 맡은 고양이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곧 생명을 잉태할 어미 고양이에게는 충분한 영양 공급이 필요할 것이었다. 전봇대 아래 둥그런 물체가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쓰레기더미일 것이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고양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맞은편, 그가 살고 있는 방을 바라봤다. 불이 꺼져 있었다. 창문은 밤하늘보다 더 어두운 빛깔을 하고 있어 안쪽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낮에 본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자동차 보닛을 열고 부품을 교체하던 중이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육중한 부품들을 그는 날렵한 동작으로 들어내고 또 갈아 끼웠다. 그의 손을 거치고 나면 자동차는 매끄러운 엔진 소리를 냈다. 그는 무엇이든 고칠 수 있을 것이었다. 어쩌면 그는 내 몸을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괴한 모양으로 붙어 있는 팔과 다리를 몸통에서 분해한 뒤 정상적인 팔과 다리를 다시 이어 붙이고 조립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때, 그의 집 창가에 커다란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나는 재빨리 몸을 숨기며 받침대에서 기어 내려왔다. 안주인이 자꾸만 하품을 했다. 고양이 울음소리 때문에 지난밤 잠을 설친 탓이었다. 투덜거리면서도 그녀는 손으로 열무를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다. 노인이 두부조림을 반으로 잘라 내 밥 위에 얹어 주었다. -양념장이 간간하니 입맛이 돌 게다. 나는 노인이 얹어 준 두부를 입안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두부에 배어 있던 물기가 밥알 사이로 스며들었다. 노인은 배추김치를 손으로 찢어 밥 위에 올려 주고 코다리찜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주었다. 안주인이 열무를 집어 먹던 손을 앞치마에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을 먹으면서도 식당 출입문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은 안주인의 오랜 습관이었다. 곧 식당 문을 밀고 남자 몇몇이 들어왔다. 늦은 점심을 먹으러 온 사람들 중에 그가 있었다. 빈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는 나와 마주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안주인이 부엌에 들어가 국을 데우는 동안, 노인은 밑반찬을 가져다 날랐다. 나는 밥알을 씹으며 그를 바라봤다. 그는 코다리찜을 한입에 넣고 씹다가 입을 우물거리며 가시를 뱉어냈다. 그의 젓가락은 계란말이를 자주 집어 들었다. 그는 국그릇을 한 손으로 들고 후루룩 국물을 삼켰다. 콧등에 땀이 맺히자 손등으로 스윽 닦아냈다. 숟가락질 서너 번 만에 그는 밥 한 공기를 비웠다.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물로 입가심을 하던 그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노인이 맞은편 자리로 와 앉았다. -다 먹은 게냐? 노인이 물었다. 노인 뒤로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노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이 나를 안으려는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올려다 줄게요. 그가 노인에게 말했다. 노인 옆에 서자 그의 몸집은 더 커보였다. 노인은 그와 내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섰다. 그가 나를 번쩍 들어올렸다. 그는 나를 안은 채로 식당 문을 열고 2층으로 가는 계단을 올랐다. 그의 새끼손가락이 내 가슴에 아슬아슬하게 닿아 있었다. 나는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콧날에서 인중으로, 인중에서 다시 윗입술로 이어지는 선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윗입술에 비해 아랫입술이 들어가 있고 아래턱이 짧아 그는 고집 있어 보이기도 했다. 그는 휠체어에 나를 내려놓았다. 그의 목덜미가 내 얼굴에 닿을 듯했다. 그는 후, 하고 숨을 짧게 내뱉었다. 그는 물건을 사러 온 손님처럼 가게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나는 휠체어를 밀고 카운터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나를 돌아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뭐 좀 마실래요? 내가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에게 들어오라는 시늉을 하고 방문을 열었다. 방바닥에는 포장하려고 꺼내 놓은 상품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인터넷 쇼핑몰 주문량이 나날이 늘고 있었다. 나는 상품들을 한쪽으로 밀어내고 그가 앉을 자리를 만들었다. 방에 들어온 그는 바지주머니에 손을 반쯤 찔러 넣고 머뭇거렸다. 방바닥에 앉아서 바라보니 그는 더욱 커 보였다. 엉거주춤하게 선 자세로 방안을 휘휘 둘러보던 그가 갑자기 창가로 걸어갔다. -내 방이 마주보이는군요. 나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는 정말 모르고 있었던 걸까. -저기가, 그가 손을 쭉 뻗으며 맞은편을 가리켰다. -내 방이거든요. 그가 천진하게 웃었다. 방바닥에 앉아 있는 나는 창문 너머 그의 집을 볼 수가 없었다. 그제야 눈치 챈 듯, 순식간에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는 창문 앞에 놓인 나무받침대를 흘끗 쳐다보고 내 옆에 와 앉았다. 나는 전기주전자 쪽으로 몸을 끌었다. 양손으로 바닥을 짚고, 손을 짚은 곳까지 엉덩이를 끌어당겼다. 작고 가느다란 두 다리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꼬리처럼 흐물흐물 따라왔다. 그가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몸이 더 무거워졌다. 전기주전자에 물이 끓는 동안 그는 주문 목록을 집어 들고 천천히 훑어봤다. 상품명을 일일이 소리 내어 읽다가 그는 중간중간 주변을 돌아보며 해당 상품을 찾아보기도 했다. 이름만으로는 도무지 어떤 상품인지 상상이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내가 커피를 건네고 나서야 그는 주문 목록이 적힌 종이를 내려놓았다. 나는 바닥에 늘어놓은 상품들 중 딜도를 손에 쥐었다. 나는 익숙한 솜씨로 딜도를 포장해 상자에 넣었다. 사은품으로 지급하는 콘돔 두 개도 빠뜨리지 않았다. 상자를 테이프로 봉한 뒤 나는 ‘식스팩맨’을 끌어당겼다. 탄탄한 복근부터 허벅지까지 만들어놓은 것으로 ‘초콜릿 복근’이라는 말이 유행하면서 출시된 상품이었다. ‘식스팩맨’을 개발한 회사에서 상품을 광고할 때 내건 문구는 ‘지금은 여성 상위시대’라는 말이었다. 광고 문구를 읽을 때마다 나는 구시대의 사람이 되는 기분이 들곤 했다. 나는 레즈비언 커플을 위한 기구를 포장했다. 벨트를 허리에 두르면 여자도 남자의 성기를 몸에 지닐 수 있었다. 내가 상품을 포장하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던 그가 여자의 엉덩이를 본뜬 상품을 집어 들었다. 그는 내 손놀림을 곁눈질해가며 여자의 엉덩이를 포장했다. 엉덩이를 움켜쥐는 그의 손등 위로 핏줄이 일어섰다. 나는 페니스 모형을 말아 쥐었다. 불끈 튀어나온 핏줄까지 정교하게 만들어 놓은 상품이었다. 그의 시선이 느껴져 손의 감각이 예민해졌다. 나는 페니스를 더욱 세게 말아 쥐었다. 그는 포장한 엉덩이를 상자에 넣고, 이번에는 실리콘 가슴 모형을 끌어당겼다. 그의 커다란 손 안에 한쪽 가슴이 가득 찼다. 그의 시선이 내 가슴 쪽으로 옮겨 왔다. 순간, 아랫도리에 더운 피가 고여 들었다. 나는 실리콘 가슴을 움켜쥐고 있는 그의 손을 끌어다 내 가슴에 가져다댔다. 잠시 멈칫했던 그의 손이 이내 옷 속을 파고 들었다. 나는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두 개의 다리가 공중으로 솟아올랐다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옷 속을 파고든 그의 손이 몸의 굴곡을 따라 느리게 움직였다. 온기가 지나간 자리에 소름이 돋아났다. 가슴과 배꼽 위에 차례로 머물던 따스한 기운이 순간 사라졌다. 그가 치마를 거칠게 잡아끌었다. 나는 그의 손을 다급하게 막았다. -일 끝내고, 나는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빛이 한창 쏟아지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짧고 가느다란 다리가 여과 없이 보일 터였다. 다리를 보게 되면 햇볕에 말라죽은 강장동물의 사체라도 발견한 듯, 그의 눈은 경멸로 가득해질 것이었다. -밤에 다시 와줄래요? 그가 내게서 몸을 뗐다. 그는 몸의 열기를 빼내듯, 숨을 길게 내뱉고 일어났다. 포장이 끝난 상자 몇 개를 한쪽에 쌓아 두고 그는 방에서 나갔다. 오후 일곱 시. 나는 딜도를 크기별로 보기 좋게 정리했다. DVD를 진열해 놓은 선반을 손바닥으로 쓸어 보니 먼지가 묻어났다. 물티슈를 뽑아 선반에 쌓인 먼지를 닦아냈다. 내친김에 다른 진열장에 쌓여 있는 먼지도 닦았다. 출입문 손잡이 부분은 늘 손님들의 지문으로 얼룩져 있었다. 나는 물티슈를 한 장 더 뽑아서 손잡이 부분을 닦았다. 휠체어를 뒤로 밀어 얼룩이 남은 곳이 없는지 꼼꼼하게 살펴봤다. 카운터 주변까지 정리를 마치고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택배기사가 상자를 수거해 가고 난 뒤에 방안을 쓸고 걸레질까지 했지만, 나는 물티슈로 방바닥을 한 번 더 훔쳐 냈다. 가지런히 개어 놓은 이불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다. 노인의 냄새가 남아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불 귀퉁이에 향수를 살짝 뿌려두고 나서야 나는 안심했다. 욕실 문을 열고 쓰윽 훑어봤다. 거울도, 세면대도, 바닥도 모두 말끔했다. 세면대 옆에 걸어둔 수건이 낡아 보였다. 나는 서랍장을 열고 비교적 깨끗해 보이는 수건을 찾아 욕실에 새로 걸어 두었다. 그가 퇴근할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카운터 서랍을 열고 화장품을 꺼냈다. 파우더 퍼프를 두드려 이마와 콧등의 기름기를 지웠다. 턱을 살며시 들고 마스카라를 덧발랐다. 손거울 안에 들어있는 여자의 얼굴이 제법 도도해 보였다. 나는 턱을 든 채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움직여 보기도 하고 입 꼬리를 올려 웃어 보기도 하다가 키스를 기다리는 여자처럼 입술에 긴장을 풀었다. 거울을 끌어당기고 살짝 벌어진 입술 안을 들여다보았다. 세상을 향해 처음 속살을 내보인 패류(貝類)처럼 나는 재빨리 입술을 닫았다. 계단을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카운터 서랍을 급히 닫고 미리 띄워 놓은 인터넷 쇼핑몰 창을 들여다보며 주문량을 확인했다. 문이 열리며 발자국 소리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그제야 모니터 너머로 고개를 빼고 출입문 쪽을 바라봤다. 노인이었다. -문 닫고 내려가서 저녁 먹자. 일곱 시 사십 분. 평소대로라면 벌써 가게 문을 닫았을 시간이었다. -손님이 올 거예요. 나는 다시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노인은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다 출입문 밖으로 나갔다. 노인의 발자국 소리가 희미해지자 나는 가게에 불을 켜둔 채 방문을 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이미 어두웠다. 아직 일이 끝나지 않은 걸까. 나는 상체를 숙여 손으로 방바닥을 짚고 엉덩이를 끌어내렸다. 쿵, 소리가 났지만 이 정도 충격에는 이미 단련되어 있었다. 나는 어두운 방안을 기어갔다. 방바닥에 가로등 불빛이 창문 모양으로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 나는 계단식으로 만들어 놓은 나무받침대를 한 칸씩 올라갔다. 팔 근육은 웬만한 성인 남자보다 더 굵고 튼튼했다. 창밖으로 그의 방 창문이 보였다. 불이 꺼져 있었다. 공업사에는 불이 켜져 있었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빠른 속도로 나무받침대를 내려왔다. 휠체어에 올라타고 카운터로 나갔다. 모니터에 인터넷 쇼핑몰 창을 띄워 놓은 채, 나는 가끔씩 출입문 쪽을 바라봤다. 배송해야 할 상품목록을 정리하고, 제조사에서 보낸 신상품 카탈로그를 살펴봤다. 나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어느덧 아홉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두운 방안을 기어 나무받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의 방 창문이 보였다. 불이 켜져 있었다. 나는 창가에 바짝 붙어 그의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나무 책상이 보였고 침대 모서리가 보였다. 멀리서 자동차가 사이렌을 요란하게 울리며 지나갔다. 소리는 점점 멀어지다 사라졌다. 침대 모서리 밖으로 하얀 다리가 튀어나왔다. 창틀에 가려져 다리의 일부만 보였지만 그의 것은 아니었다. 나는 황급히 몸을 돌려 벽에 등을 기댔다. 나는 침을 삼켰다. 나는 다시 몸을 낮추고 창밖을 내다봤다. 하얀 다리 사이로 그의 커다란 몸뚱이가 보였다. 하얀 다리가 그의 허리를 감쌌다. 곧은 뼈와 그것을 감싸고 있는 탄력 넘치는 근육. 근육이 움직이며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곡선. 관절의 거칠고도 부드러운 움직임. 실리콘도, 비닐 튜브도 아닌 살아 있는 다리. 만져 보고 싶었다. 나는 카운터 위에 달린 회전 조명등을 켰다. 꼿꼿이 서 있는 딜도와 납작하게 웅크리고 있는 엉덩이 위로 분홍빛이 내려앉았다. 휠체어를 밀고 가게 안을 둘러봤다. 나는 포르노 스타의 토막 난 몸뚱이 앞에서 멈췄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질을 가지고 있는 포르노 스타 옆에는 실리콘 가슴이 누워 있었다. 나는 계속 가게 안을 둘러봤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여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성인 잡지에서 종종 봤으나 이름이 기억나지는 않았다. 나는 잡지를 집어 들고 휠체어를 밀었다. 나는 여자의 얼굴이 크게 인쇄된 면을 찾아 방바닥 한가운데에 잡지를 펼쳐 놓았다. 그 아래로 실리콘 가슴을 가져다 놓았다. 나는 다시 포르노 스타의 토막 난 은밀한 부위, 그리고 여자의 다리를 본뜬 쿠션을 차례로 가져다 놓았다. 나는 내가 창조해 낸 여자 옆에 나란히 누웠다. 카리브 해의 바닷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여자와 나는 백사장에 누워 하늘을 바라본다. 분홍빛 파도가 밀려와 여자와 내 몸을 적신다. 여자의 분절된 몸이 하나로 이어진다. 여자는 몸을 천천히 일으켜 세운다. 한 걸음씩 발을 내딛다 여자는 춤을 추기 시작한다. 전라의 아름다운 육신이 부드럽게 출렁인다. 여자는 춤을 추며 내게 다가온다. -투리토프시스 누트리큘라. 여자는 주문을 외우고 섬세한 손길로 내 다리를 쓰다듬는다. 숨을 불어넣은 ‘튜브 걸’처럼 가늘고 휘어진 두 다리가 조금씩 부풀어 오르며 감각이 되살아난다. 탐스럽게 살이 오른 두 다리가 공중으로 뜨기 시작한다. 다리와 함께 내 몸도 붕 떠오른다. 내 몸은 분홍빛 바다 위를 떠다닌다. 따스한 물결이 몸을 부드럽게 감싼다. 투명한 몸에서 빛을 발하는 해파리들이 바다 깊은 곳에서 하나둘씩 떠올라 해면을 부유한다. 해파리들이 헤엄쳐와 내 몸을 핥듯이 뒤덮는다. 목을 감싸고 가슴 위로 미끄러지고 내 몸 안을 깊숙이 파고든다. 태양과 바다가 맞닿은 곳을 향해 나는 해파리들과 함께 헤엄친다. [당선소감] 연인이 세상 떠난 벼랑끝, 거짓말 같은 일이… 거짓말 같은 일이었다. 삼류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일들이 쏟아졌고, 나의 연인은 세상을 떠났다. 감당이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이쪽이 아닌, 저쪽 세상을 바라보던 시간이었다. ‘나’도 잃고 ‘언어’도 잃은 시간이었다. 두려웠다. 벼랑 끝에서, 당선 소식을 알리는 전화를 받았다. 정말, 거짓말 같은 일이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빠르게 달려가며 세상을 편리하게 만드는 사람들과 느리게 걸으며 주변을 돌아보고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사람들. 나는 후자 쪽을 꿈꾼다. 어릴 때부터 꿈은 하나였고, 내가 살고 싶은 삶은 언제나 명확했다. 내 시선이 머무는 곳은 언제나 삶의 사각지대였고, 나는 그것을 문장으로 만들고 싶었다. 이제, 간신히 ‘입장권’을 받은 기분이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임을 잘 알고 있다. 글. 그림. 여행. 세상 구경 실컷 하고, 아이들, 동물들과 사랑을 나누는 삶.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글’의 힘을, 나는 믿는다. 늦게 출발한 만큼 더 열심히 쓸 것이다. 제게 ‘숨’인 소중한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좌뇌를 물려주신 아빠, 우뇌를 물려주신 엄마, 가장 소중한 우리 가족, 사랑합니다. 등단하면 찾아뵙겠다며 지금껏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어요. 조해룡 교수님, 곧 찾아뵐게요. 대모님을 비롯해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신 많은 분, 믿고 응원해 준 친구들, 특히 집 밖에 나가지 않는 나를 위해 식량과 각종 영양제를 배달해 준 재경양, 모두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나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던 모습 그대로, 내 안에 영원히 방부 보존되어 있을 당신, 그곳에서 늘 지켜봐 주세요. ■약력 ▲1980년생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 현재 SBS 라디오 작가 [심사평] 인간의 깊은 내부세계 들여다보는 문제작 서울신문 신춘문예는 전통적으로 좋은 작품, 좋은 작가를 새롭게 배출하는 자리로 알려져 왔다. 최근 이은선, 차현지, 김가경과 같은 재능 있는 작가들을 문단에 새로 내놓았고 이들은 이미 활발한 문단활동을 펼치고 있다. 올해 ‘힘센’ 서울신문 신춘문예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본심을 맡으면서 우리는 비상한 관심과 기대를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들은 모두 열두 작품 정도. 생각보다 많은 예심 통과작은 심사위원들로 하여금 시간적으로도, 마음 씀씀이로도 쉽지 않은 일을 하도록 했다. 두 사람이 미리 배송해 받은 예심 통과작을 읽고 그 가운데 몇 편을 추려 꺼내 놓은 후보작은, 한 사람은 두 편, 다른 한 사람은 네 편. 공교롭게도 한 사람의 네 편 가운데 다른 사람의 두 편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그 두 편의 제목은 조수경의 ‘젤리피시’와 이완의 ‘아빠의 네트워크’. 두 작품 모두 나무랄 데 없는 수작이라는 데 이견이 없었다. ‘아빠의 네트워크’는 아들의 시선으로 아버지의 세계를 조명한 독특한 작품이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작중 화자의 시각이나 생각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녹록지 않은 생활을 이어 가는 인물들 모두의 삶에 흐르는 생기나 활력은 이 소설의 작가가 성숙한 세계인식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조수경의 ‘젤리피시’는 어떻게 보면 더 독특하면서도 문제적인 생각을 전달하는 것 같다. 성인용품 판매점에서 일하는 고독한 장애 여성의 시점을 취한 것은 이 작품을 쓴 사람이 세태와 시류를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한 유행감각의 소산이 아니다. 이 작가는 인간의 깊은 내부 세계를 들여다보는 안목을 갖추었다. 또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묘사 능력도 탁월했다. 심사위원들은 고심 끝에 조수경의 ‘젤리피시’를 당선작으로 올렸다. 문제작을 당선작으로 올린 것에 만족한다. 조수경에게 축하드리며 정진을 당부한다. 이완은 이것으로 낙심하지 말고 힘내시길.
  • 엉뚱한 발상… 싱거운 결말 ‘솔로대첩’

    엉뚱한 발상… 싱거운 결말 ‘솔로대첩’

    ‘크리스마스의 기적’은 없었지만…. 싱글 남녀들의 초대형 애인 만들기 프로젝트 ‘솔로대첩’이 가능성만 확인한 채 싱겁게 막을 내렸다. 24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 16곳에서 동시다발로 행사가 치러질 예정이었지만 열기는 당초 기대에 못 미쳤다. 인천, 대전, 충남 등 5곳에서는 인원이 적어 행사 자체가 취소됐다. 서울, 부산, 광주 등 9곳에 모인 사람은 관중을 포함해 6400여명(경찰 추산)에 그쳤다. 당초 전국적으로 참가 의사를 밝힌 사람은 2만 1000명에 달했다. 인원 수도 적었지만 참가자들이 대놓고 이성에 구애를 하는 데 따른 수줍음과 어색함을 극복하지 못했다. 이날 오후 3시 서울 여의도공원에는 영하의 날씨 속에 관중 포함해 남녀 3500여명이 모습을 나타냈다. 남녀 비율이 8대2 정도로 남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얼굴 공개를 피하기 위해 말, 프랑켄슈타인 등 가면을 쓰고 나타난 참가자도 있었다. 공원 인근에는 범죄 예방을 위해 경찰 230여명이 출동했으며, 성추행·소매치기 등 불미스러운 사건은 접수되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 커플을 이룬 남녀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남녀의 비율이 맞지 않고 사람들끼리 다닥다닥 붙어 서로 눈치만 봤다. 여성 참가자들에게 말을 거는 남자들은 대부분 취재진뿐. 데이트 신청을 뜻하는 암호인 “저랑 산책하실래요.”라는 말을 주고받는 남녀가 나오면 취재진부터 일반 참가자까지 우르르 몰려들어 구경해 어색함을 더했다. 빨간 코트를 차려입고 친구 2명과 여의도공원을 찾은 신모(22·여)씨는 “취지는 괜찮은데 현장 분위기가 썰렁해서 실망했다.”면서 “남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너무 신경 쓰는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온라인 생중계를 지켜본 누리꾼들은 “여기 혹시 논산(충남)인가요? 군대 입소식 보는 것 같네요.”, “경찰이 제일 많고 다음으로 남자, 비둘기 순이네요.”라고 심한 남초(男超) 현상에 아쉬움을 나타냈다. 이번 행사는 지난달 3일 페이스북의 ‘님연시’(님이 연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운영자 유태형(24)씨가 “솔로들끼리 크리스마스 이브에 모여 대규모 미팅 한 번 할까.”라고 올린 글이 시초가 됐다. 누리꾼들의 폭발적인 호응이 이어졌고, 자원봉사단이 조직되면서 모양새를 갖췄다. 온라인 속 엉뚱한 호기심이 SNS를 타고 도심 축제로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전문가들은 ‘단 한 줄의 SNS 제안’이 대규모 축제를 만들어 냈다는 자체에 사회학적 의미를 부여했다. 강태규 대중문화평론가는 “대중이 주인이 돼서 만드는 진정한 의미의 대중문화가 출현했다.”면서 “일반인이 SNS의 날개를 달고 얼마만큼 파급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 증명한 장”이라고 평가했다. 조은지 기자 zone4@seoul.co.kr 배경헌 기자baenim@seoul.co.kr
  • SURFING HAWAII 인간의 온도 하와이

    SURFING HAWAII 인간의 온도 하와이

    그 섬에서는 중력을 느낄 수 없었다. 편서풍에 실려 어디든 날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물 위를 걷는 것쯤은 손쉬워 보였다. 그것이 하와이 서핑에 도전한 변이다. 그 바람을 살 수 있다면 애스톤 와이키키 리조트 23층 21호. 19시간의 시차는 하와이의 밤에서 한국의 늦은 오후 사이를 운항하는 모호한 타임머신에서 몇 번 멀미를 하고 나서야 적응한 것이었다. 습관처럼 발코니로 향했다. 거기 놓인 1인용 플라스틱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서 하는 일은 항상 뻔했다. 한 5분 동안 별이 총총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감탄하다가 조금 지겨워지면 저 멀리 활처럼 휘어 있는 와이키키 해변으로 시선을 옮기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어둠 속을 달려오는 거품만 보이지만 일단 눈이 적응하고 나면 아직도 바다를 애무하는 섹시한 실루엣을 발견하게 되기도 했다. 그러다 지루해지면 이번에는 청각이 슬슬 깨어나서 해변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소음을 감지하고, 후각은 비린내 없는 바다냄새를 분석하기도 한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은 불평 아닌 불평을 늘어놓은 촉각이다. 이 섬의 공기는 너무 비현실적으로 쾌적하지 않느냐 볼멘소리. 이것이 하루도 빠짐없이 하와이에서 치렀던 밤의 의식이었다. 바람. 이 모든 것은 순전히 바람 때문인 것 같았다. 파도가 높은 것도, 하늘이 맑은 것도, 별이 빛나는 것도, 무지개가 뜨는 것도, 내가 이곳에 다시 온 것도. 밤마다 와이키키를 내려다보며 내가 생각한 부질없는 소망은 ‘이 바람을 살 수 있다면’이었다. 그 바람으로 나는 매일 매일 서울의 매연을 날려 보내고, 예쁜 구름들을 뭉치고, 그 사이에 무지개를 띄우고 있는 나를 상상했다. 바람을 타고 훨훨 날아가는 상상을 했었다. 1 해안 가까이 방파제를 쌓아서 천연의 수영장을 만든 와이키키 해변 2 서퍼들에게는 밀려오는 파도 하나하나가 모두 의미 있다 3 스탠드 업 패들링을 하는 청년의 등에는 작은 봇짐과 운동화가 매달려 있었다. 항상 붐비는 와이키키 해변에서 바다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그 바다를 걷지 않는다면 낮이 되어 관광객으로 붐비는 와이키키 해안 도로를 걷다 보면 라스베이거스가 생각나곤 했다. 바닷가에 늘어선 대형 호텔이 커다란 장막을 치고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크고 작은 쇼핑점들이 자리잡고 있는 풍경 때문인 것 같았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또다시 수많은 삼정들이 블록마다 꽉꽉 들어차 있다. 단, 카지노의 바다 대신 진짜 바다가 있다는 것만 다를 뿐. 라스베이거스를 여행하는 방법이 다양하듯, 와이키키 지역을 여행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다. 여행자들이 처음 하는 일은 대부분 짐을 풀자마자 와이키키 해변에서 가장 가까운 칼라카우아 도로로 쏟아져 나오는 일이다. 양복 입은 사람들과 비키니 입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섞여 흘러가는 그 길의 양쪽에는 호텔과 쇼핑센터, 레스토랑들이 가득하다. 유명한 오믈렛 레스토랑 ‘에그 포 낫싱’과 ‘치즈케이크 팩토리’도 그 대로변에 있다. 소란을 조금 벗어나고 싶다면 두 번째 방법, 모래사장을 걷는 방법이 있다. 누워 있는 사람들을 밟고 지나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와이키키의 바다 위에는 교통정리가 필요할 만큼 많은 서퍼들이 하루 종일 정체를 이루고 모래사장도 붐비기는 마찬가지다. 처음 시도해 본 세 번째 방법은 물속으로 산책하는 일이었다. 바닷물에 몸을 반쯤 담그고 바라본 세상의 풍경과 감각은 낯설다고 느껴질 만큼 새로웠다. 허리춤을 간질이는 파도, 발을 부드럽게 핥아 주는 고운 모래, 멀리서 들려오는 ‘쏴아’ 물거품 소리와 별안간 나타나 떼를 지어 지나가는 물고기떼들. 그런 감각들로 충만한 채 수킬로미터씩 이어졌던 와이키키의 바다속길 산책은 내게 신항로 개척보다 의미 있는 루트 개척이었다. 그리고 급기야 지금까지 고수하던 ‘구경꾼’의 자세를 버리고 파도와 맞서 보기로, 서핑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interview KITV 뉴스앵커 케니 최 Kenny Choi “서핑은 조깅이다” 낯선 사람들이 함께 둘러앉은 원탁. 어색하게 밥먹기에만 열중하게 되기가 쉬운 그 테이블에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중계하기 시작한 것은 케니였다. 질문을 던지고 주제를 이어가면서도 좌중을 고루 배려하는 세련된 매너는 ‘앵커’라는 그의 직업과 관련이 있어 보였다. 하와이 지역방송사의 메인 뉴스 앵커이자 한인 2세라는 사실에 어디를 가도 집중을 받는 케니를 다시 바라보게 된 순간은 그의 입에서 ‘매일 아침마다 서핑을 한다’라는 말이 나왔을 때였다. 누군가가 매일 조깅처럼 즐기는 서핑이 내게는 태어나서 한번도 접해 보지 못한 스포츠였다는 사실이 갑자기 머리를 강타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그를 다시 만난 것은 토요일 아침, 듀크 카하나모크Duke Kahanamoku동상 앞에서였다. 며칠 전 보았던 정장의 앵커맨은 온데간데없고 맨발에 검은 티셔츠와 헐렁한 반바지, 서핑 보드를 옆구리에 낀 청년은 검게 그을린 얼굴로 하얗게 웃고 있었다. 뉴욕에서 왔다고 들었다. 서핑 때문에 하와이로 온 것인가? 하하. 그렇지는 않다. 2년 전에 메인 뉴스 앵커로 발탁되면서 이주했으니 직장 때문이다. 코네티컷 출신이지만 대학을 UCLA로 가면서 서핑을 종종 즐겼다가 하와이에 오면서 실력이 많이 늘었다. 원래 나는 스포츠 리포터로 시작해서 스포츠 앵커로 일했을 만큼 스포츠라면 분야를 가리지 않고 좋아했었다. 지금은 9시 뉴스의 앵커라서 매일 2시부터 11시까지 일하니까 오전에 혼자서도 즐길 수 있는 서핑이 가장 좋다. 와이프도 지금 저 앞바다에서 서핑을 하고 있다. 하와이에서 일상인으로 산다는 것은 좀 다를 것도 같은데. 하와이에 와서 놀란 점은 사람들이 일을 매우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 보통 하와이 사람들은 유유자적 즐기며 살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그래도 뉴욕에서 스포츠나이트 쇼, 스포츠 네트워크 뉴욕, 폭스 등의 스포츠 뉴스 앵커를 하면서 치열하게 살다가 하와이에 와서 ‘릴렉스’하는 법을 좀 배운 것 같다. 유전적으로 ‘알로하 정신’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할 만큼 친절한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서핑의 매력은 무엇인가? 뭐랄까…, 말로 설명하기가 좀 어려운데, 공기 속을 나는 느낌, 바다와 연결된 느낌이 든다. 마치 자연의 일부가 된 것 같은 그런 느낌말이다. 처음 서핑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이 있다면 한번 해보고 나서 어렵다고 포기하지 말고 최소한 2~3번은 계속 도전해 보라고 말해 주고 싶다. 그래야만 서핑의 진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남성 서퍼들이 훨씬 많은 것 같다. 서핑은 남성적인 스포츠인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남자들이 많기는 한데 그렇다고 남자의 스포츠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나도 이제 서핑을 좀 해보려고 하는데 좋은 장소를 추천해 달라. 이런. 서퍼들 사이에서 불문율은 장소를 누설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게 있는 줄 몰랐다. 여러 해변을 찾아가서 서핑을 해 보면서 나만의 비밀장소를 찾는 것도 서핑의 재미이기 때문이다. 여기 와이키키는 항상 사람들이 많아서 나는 좀더 동쪽의 한적한 해변을 찾는 편인데 며칠 전에 그곳에서 좋은 파도를 만나서 아주 기뻤다. 어딘지는 말할 수 없지만. ▶197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을 온 한국인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난 케니 최는 하와이 KITV의 밤 10시 뉴스 앵커를 맡고 있다. 내년이면 한인 이민 110주년을 맞이하는 하와이에서는 이미 유명인이다. 그가 진행하고 있는 뉴스를 보고 싶다면 미국 예일대와 한국 연세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그의 부모님들처럼 KITV 사이트(www.kitv.com)를 열면 된다. ■Chun’s Reef 서핑 체험기 바람 반, 물 반의 자유 이틀 후 이른 아침, 눈을 뜨자 팔이 잘 올라가지 않을 정도로 온몸이 뻐근했다. 어제보다 무겁게 느껴지는 커튼을 젖히고 발코니로 나가서 점점 밝아지는 바다를 향해 심호흡을 했다. 새벽 6시에도 이미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 조깅을 즐기는 사람들로 어제와 다름없는 풍경들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전까지 보이지 않던 전혀 새로운 것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파도들’이라고 불렀던 그 물결들이 하나하나 달라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다음번에 나도 타 볼 수 있을 것 같은 파도, 그렇지 않은 파도, 너무 낮아서 그냥 흘려 보내야 하는 파도, 무섭지만 황홀하게 힘이 넘치는 파도 등등. 나는 각각의 파도를 구분해 내고 있었다. 그저 하나의 레포츠 경험으로 생각했던 서핑이 앞으로의 내 삶에서 파도를 향한 태도 전체를 바꾸어 놓을 수도 있겠다는 깨달음은 소름끼치는 기쁨이었다. 하지만 시계를 돌려 전날 오전, 오아후 섬의 북쪽으로 올라가는 서핑 버스 안의 나는 심각하게 망설이고 있었다. 언제든 마음이 바뀌면 취소해도 된다는 여행사의 안내가 있기도 했고, 15여 명 정도의 여행자 중에서도 서핑 레슨을 받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서핑을 배우게 될 장소의 이름이 Chun’s Reef가 아니었다면, 내 이름의 영문 스펠링이 Chun이 아니었다면 예약을 취소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름이 같다는 우연의 일치에 운명이라는 망상을 덧댄 끝에 나는 일행의 응원을 받으며 홀로 버스에서 내렸다. 올 겨울 서핑 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지난 3월부터 이곳에 와서 훈련을 하고 있다는 캘리포니아 출신 프로 서퍼 제이크가 나의 선생님이었다. 피부와 보드의 마찰을 줄여 준다는 서핑티셔츠를 입고 나니 준비는 끝이라고 했다. 낡은 트럭에서 보드를 하나 꺼낸 그는 말했다. “단 한 가지만 기억하면 됩니다. ‘나무’요. 나무만 바라보면 됩니다.” 물론 그때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지 못했다. 다른 수강생이 없어서 개인 교습이 되어 버린 레슨은 빠르게 진행됐다. 보드 위에 배를 깔고 엎드려 있다가 파도가 오는 타이밍에 맞춰 제이크가 보드를 빠르게 밀어 주면 그 순간 재빠른 동작으로 일어서서 균형을 잡는 것이다. 절대로 손으로 보드를 붙잡지 말아야 한다거나(그러면 보드의 균형이 깨진다),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스키나 보드를 타는 요령과 비슷하다) 것보다 가장 중요한 요령은 아래를 쳐다보지 않는 것, 즉 해안의 ‘나무’에 시선을 고정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두 시간 동안 내가 한 일은 수없이 물속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순간이나마 완벽한 자세를 유지했다는 제이크의 과장된 칭찬을 듣기도 했지만 그런 순간은 두 시간 동안 다 합쳐 30초도 되지 않았던 것 같다. 하나의 파도를 넘으면 다음 파도가 넘어오듯이 서핑은 그런 것이었다. 파도가 좋다 싶어도 너무 늦게 일어서면 꽝이고, 제때 일어났다 싶으면 다리 위치가 틀렸고, 다리 위치가 맞았다 싶으면 상체가 기울고….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트리는 내게 제이크가 말했다. “서핑의 재미는 수없이 작은, 그리고 수없이 많은 장애물들을 하나씩 극복해 나가는 것이랍니다.” 서핑은 상상 이상으로 어려웠다. 제이크는 수영을 못해도 서핑이 가능하다고 했지만, 발이 닿지 않는 물이 두려운 사람이라면 감히 엄두를 내지 말아야 할 일이었다. 큰 파도야 타 본 적이 없지만 서핑의 리스크는 파도에 휩쓸려 바위나 산호에 부딪치게 되는 일이다. 발밑이 온통 날카로운 산호라서 그 위에 발을 딛었다가는 ‘나처럼’ 살을 베이는 일이 다반사라고 했다. 체력고갈로 지쳐 버린 나는 제이크의 사진 한 장을 찍을 생각조차 못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발뒤꿈치의 상처가 다 아문 지금까지도 서핑의 여운은 길게 남아 있다. 그것은 내가 극복하지 못한 채 남기고 돌아온 ‘수없이 많고, 작은 장애물’들에 대한 아쉬움이기도 했고 물속으로 계속 곤두박질치게 했던 바다에 대한 앙심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그리움이었다. 하와이의 바람을 내 소유로 만든 것 같았던 그 30초. 바람 반, 물 반으로 만들어진 파도를 밟고 섰던 그 기적적인 순간으로 자꾸만, 자꾸만 다시 돌아가고 싶다. 1 11월이면 큰 바람이 불어오는 오아후 북쪽 해안가. 반자이 파이프라인의 굵고 튼튼한 파도는 도전의 대상이다 2 환경단체 NGO들의 보살핌으로 자연 생태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하와이안 그린 터틀.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만날 확률이 높은 편이다 3 해변의 명예의 전당이라고 할 만큼 유명한 비치들이 이웃하고 있는 노스 쇼어에서 자전거는 가장 유용한 이동 수단이었다 4 울창한 원시림이 가득한 와이메아 계곡은 해변 못지않은 비경이다 Oahu North Shore ‘첫 서핑’을 위한 그곳 해변에도 셀러브리티가 있다면 오아후 노스 쇼어는 명예의 전당이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서핑과 스노클링 명소들이 이곳에 모여 있다는 뜻이다. 와이메아 폭포에서 흘러내린 물이 바다와 만나는 와이메아 베이Waimea Bay, 파도가 높기로 유명한 반자이 파이프라인, 최고의 해안 다이빙 장소이자 천연 수족관으로 꼽히는 더 코브The Cove, 하와이 그린 바다거북이 살고 있는 터틀 비치, 눈부신 모래사장이 펼쳐진 선셋 비치Sunset Beach까지, 어느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전거를 빌렸다. 하지만 노스 쇼어의 자전거 대여점에 도착했을 때 살짝 당황했던 이유는 고물상에 온 것이 아닌가 싶은 낡은 자전거들이 때문이었다. 다 고만고만한 녀석들 중에서 크기가 작은 것을 잡아타고 도로를 50m쯤 달렸을 때 두 번째 당황의 순간이 찾아왔다. 기어가 없는 것이야 그렇다 쳐도 브레이크가 없다니! 혹시나 하고 페달에 힘을 줘 보니 페달 브레이크 방식이었다. 익숙지 않은 자전거에 잔뜩 겁을 먹고 돌아가서 핸드 브레이크 자전거를 찾았지만 주인은 태연한 표정으로 없다고 대답하며 한마디를 보탰다. ‘우린 어려서부터 그런 자전거를 타고 자랐는 걸. 브레이크 잡을 때 발의 위치를 주의해야 한다는 걸 잊지 마. 다리가 일직선이 되면 버티기가 어려우니까.’ 그리하여 노스 쇼어 여행은 시속 10km 이하였다. 브레이크 때문만은 아니고 1~2km 간격으로 이웃하고 있는 해변들이 하나같이 절경이라 자주 멈춰 서야만 했기 때문이다. 노스 쇼어 파도의 명성은 이미 버스가 반자이 파이프라인Banzai Pipeline에 잠시 멈춰 섰을 때 확인한 터였다. 오죽 파도가 높고 단단하게 휘어지면 이름부터 파이프라인이겠는가. 게다가 그 파도가 가장 높아지기 시작하는 시즌은 큰 바람이 찾아오는 11월부터다. 두 시간은 이 매혹적인 해변에 들러 사진만 찍기에도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막상 하와이 그린 거북이를 만났을 때는 아주 빠른 속도로 사진만 찍고 돌아서야 했는데, 그때의 심정은 경주에서 지고 있는 토끼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해변을 독서실 삼아 일광욕과 독서를 겸하는 사람들을 발견했을 때도 ‘루저’의 심정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할레이바 타운Haleiwa Town의 그 유명한 빙수를 버스가 떠나기 전에 가까스로 구입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탕수수 농장이 흥했던 시절의 가옥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할레이바는 이제 서퍼들이 주둔하는 마을이다. 더위와 갈증을 한번에 날려 버리는 빙수가 유명해진 것도,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하면서도 단백질을 공급하는 새우라이스 트럭이 유명해진 것도 서퍼들과 관련이 있다. 글·사진 천소현 기자 취재협조 트래블프레스 02-2264-8494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travie info 노스 쇼어 서핑 버스 해변과 서핑으로 유명한 오아후 북쪽을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 원데이 투어 프로그램이다. 오전 오후의 자유 시간 동안 해변을 옮겨가면서 폭포 수영, 스노클링, 자전거 타기, 서핑, 바디보드, 카약, 스탠드 업 패들링, 서핑 등 1~2가지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다. 필요한 장비와 왕복 교통편을 제공하며 식사는 포함되지 않는다. 해변뿐 아니라 할레이바 마을, 와이메아 폭포에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바다거북이도 구경할 수 있다. 와이키키에서 노스 쇼어까지는 전용차량으로 50분 정도 소요되며 서핑, 카약 등의 레슨에는 추가 요금이 붙는다. 투어시간 오전 8시~오후 5시 비용 76달러(액티비티 1가지 기준), 89달러(액티비티 2가지 기준), 2시간 서핑 교습 145달러(호텔 픽업 및 왕복 교통, 장비 대여 포함, 세금 별도) 문의 (808)226-7299 www.northshoresurfbus.com ▶Travel to Hawaii Hawaii 사랑을 부르는 섬, 하와이 하와이는 1778년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으며 1959년 알래스카에 이어 미국의 50번째 주가 되었다. 하와이 제도는 오아후, 마우이, 하와이(빅 아일랜드), 카우아이, 몰로카이, 라나이, 니하우, 카홀라웨 등 8개의 큰 섬과 130여 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개인 소유와 군항기지로 이용되는 니하우와 카홀라웨를 제외한 6개의 큰 섬에 관광객이 들어간다. 이중 하와이의 주도인 오아후섬이 정치, 경제, 문화, 교육, 관광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8개 섬 중 규모로는 3번째 해당하지만 전체 주민의 78% 정도가 이 오아후섬에 거주하고 있다. 항공 찬스는 하루 4번! 최근 2년 사이에 인천-호놀룰루 사이에 신규 취항과 증편 등이 활발했다. 현재 아시아나항공(오후 8시 인천 출발)과 하와이안항공(오후 10시 인천 출발)이 매일 취항하고 있으며 대한항공은 매일 2편(오후 7시, 오후 9시10분 인천 출발)을 운항하고 있다. 비행시간은 하와이로 갈 때 8시간 40분이 소요되며 인천으로 돌아 올 때는 10시간 정도가 걸린다. 비자 허가를 받으시오! 까다로웠던 미국 비자발급이 2008년 11월17일부터 전자여행허가제Electronic System for Travel Authorization로 변경됐다. 여행 전에 미리 ESTA 사이트(www.estausa.co.kr)를 통해 입국 허가를 신청한 뒤 서류를 프린트해 미국 입국시 제출하면 된다. 일주일 정도 여유를 두고 신청하는 것이 좋다. 수수료는 4만4,000원. 날씨 이토록 쾌적한 맑음 아열대에 속하는 하와이는 평균기온은 23.8도로 아주 쾌적하다. 하와이가 북위 19~22도의 열대권에 들면서도 이런 날씨를 유지하는 것은 여름에 동북무역풍이 불고 한류인 캘리포니아 해류가 섬을 지나기 때문. 겨울에는 무역풍 대신 남풍이 비를 몰고 오지만 한바탕 내리고 나면 금방 맑아져 다시 상쾌하다. surfing season 지금 하와이는 서핑 중 서핑이야 일년 내내 즐기는 스포츠지만 한겨울에 파도가 가장 높아지는 오아후의 북쪽, 노스 쇼어에는 전세계 최정상급의 서퍼들이 모여든다. 매년 11월12일부터 12월20일까지 펼쳐지는 밴스 트리플 크라운 서핑 대회는 리프 하와이안 프로, 밴스 월드컵 오브 서핑, 빌라봉 파이프 마스터스로 이어지는데, 이들 대회에 걸린 상금만 총 80여만 달러다. 하와이관광청 홈페이지 www.gohawaii.com 음료 얼음빙수 한 방! 달궈진 몸, 아직 식지 않은 열정을 살짝 식히기로는 얼음빙수shave ice만한 것이 없다. 단팥도, 떡도, 우유도 없이 그냥 얼음을 갈아 수북이 담고 그 위에 커피맛, 레몬맛, 메론맛 등등의 다양한 액체를 부었을 뿐인 심심한 빙수지만 할레이바타운에서는 최고의 간식이다. 언제 가도 줄 서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팥빙수처럼 단팥을 넣은 메뉴도 있다. 재료와 크기에 따라 빙수 가격은 2.5~3.5달러 사이. 마츠모토 빙수집이 가장 유명하지만 90년 전에 지어진 고풍스러운 건물이 멋진 아오키스Aokis도 용호상박이다. resort 애스톤 와이키키 비치 호텔 방문을 열면 커다란 통창으로 바다가 쏟아진다. 25개 층에 있는 644개 객실 중 열에 여덟은 환상적인 오션뷰를 누릴 수 있는 애스톤 와이키키 비치 호텔Aston Waikiki Beach Hotel. 호텔 로비에서 몇 발자국만 걸어나가면 펄떡거리며 살아 숨쉬는 와이키키를 만나게 된다. 하와이의 5개 섬 중에 호놀룰루가 위치한 오아후에는 수많은 호텔과 리조트가 있지만 코앞에서 와이키키 해변을 즐길 수 있는 애스톤 와이키키 비치 호텔이 특별한 이유다. 1948년 태평양에서 난파된 프랑스인이 하와이 원주민과 결혼해 조그만 숙박업소로 출발한 애스톤은 현재 오아후에 9개, 마우이 9개, 카우아이 5개, 빅아일랜드 3개의 숙박시설을 보유한 하와이 최대 규모의 호텔 그룹으로 발전했다. 일반 호텔 스타일부터 부티크 스타일, 콘도미니엄, 빌라형까지 다양한 객실 타입을 갖췄다. 특유의 환대정신인 ‘알로하 스피릿Aloha Spirit’으로 무장해 한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호텔로 선정되기도 했다. 애스톤 와이키키 비치 호텔 역시 2010년 개보수를 마치고 재개장을 하면서 하와이를 찾는 많은 신혼부부를 위한 호텔로 손님에게 차별화된 허니문을 제공하고자 고심했다. 일례로 아기자기한 허니문을 위해 호텔은 작은 장치를 이용했다. 그중 하나가 소꿉놀이 같은 애스톤 라이프를 상징하는 물건인 ‘쿨러백’. 객실에 비치된 쿨러백에 호텔에서 제공하는 조식을 차곡차곡 담아 바닷가로, 야자수 밑으로, 해변의 벤치로 자리를 옮겨 야외 식사를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허니문에서 점잖게 멋을 부린 저녁식사는 필수! 호텔 내에는 하와이안 퀴진을 맛볼 수 있는 ‘틱스 그릴 앤 바Tik’s Grill and Bar’가 있어 멀리 가지 않아도 파인 다이닝이 가능하다. 식사를 하면서 즐기는 훌라쇼도 빠질 수 없는 즐거움이다. 호텔에 묵는 손님 모두에게 제공되는 ‘알로하북Aloha book’도 애스톤에서만 제공받을 수 있는 잔재미 중 하나! 알로하북에는 쇼핑, 레스토랑, 투어어트랙션 등을 할인받을 수 있는 쿠폰이 모두 들어 있다. 수영장과 로비에서는 무료로 와이파이 이용이 가능하다는 점도 기억해 두자. 주소 2570 Kalakaua Avenue, Honolulu, HI 96815 문의 866-77-774-2924 www.astonhotels.co.kr(한국어) place 폴리네시안 문화센터 수천년 전 머나먼 섬에 사는 폴리네시안Polynesian들이 하와이에 도착했다. 그들은 수개월에 걸쳐 해와 달 그리고 별의 길을 읽으며 바다를 항해했다. 파도의 방향을 읽고, 새들의 비행을 관찰하며 망망대해를 건너온 그들이 바로 하와이안들의 조상들이다. 자고 나면 땅의 모양이 바뀌어 있는 화산섬에 정착해 ‘알로하 정신’을 가꾸어 왔다. 와이키키 해변에서 북쪽으로 1시간 거리에 있는 폴리네시안문화센터PCC, Polynesian Cultural Center에서는 7개의 폴리네시안 부족을 만날 수 있다. 피지, 타히티, 사모아, 하와이, 뉴질랜드(마오리), 파파누이(이스터섬), 통가의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보여 준다. 방문객들이 잘 신경 쓰지 않는 사실 하나는 PCC가 몰몬교단이 운영하는 비영리단체라는 것. 수익의 대부분을 장학금 등 교육사업에 사용하고 있으며 입장료 외에 기부금도 받고 있다. ‘민속촌’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원주민들의 실제 삶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곳이기에 PCC는 지금까지 3,300만명 이상이 방문한 하와이의 대표적인 명소로 자리잡았다. 하와이 토속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루아우’ 뷔페식을 마치고 나면 느린 카누 여행이 기다리고 있다. 가이드의 재담에 웃다 보면 어느덧 반대편 종착지에 도착하게 되고, 그때부터 각 부족 마을의 방문이 시작된다. 부족마다 매일 3~5회씩 공연이 반복되므로 시간표를 잘 짜는 지혜가 필요하다. 오후 2시30분에 진행되는 카누 선상 쇼 관람을 위해 응달에 자리를 잡는 민첩함도 필요하다. 저녁에 펼쳐지는 쇼 <HA: Breath of Life>까지 관람할 예정이라면 입장료(49.95달러), 저녁 식사(35달러), 쇼(49.95달러)를 포함하는 패키지 티켓(성인 91.95달러부터, 소인 67.95달러)을 구입하는 것이 현명하다. 폴리네시안문화센터┃주소 55-370 Kamehameha Highway in Laie, Hawaii 96762 운영시간 매일 낮 12시~오후 6시(매주 일요일 휴무) 문의 800-367-7060 www.polynesia.com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여행신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여행신문에 있습니다.
  • [길섶에서] 봄동의 추억/정기홍 논설위원

    재종 형은 봄동 뿌리를 좋아했다. 봄동을 캐 오면 어린 나에게 용돈을 주곤 했다. 봄동은 겨울을 보낸 노지 배추로 알고 있지만, 주로 겨울철에 용돈을 받았다. 겨울철 형의 입이 꽤 심심했던 모양이다. 겨울 밭의 봄동은 볏짚으로 덮여 있었다. 볏짚의 온기로 겨울을 보낸 뒤 봄 밥상에 오른다. 하지만 김장용 배추를 수확한 늦가을 밭에도 봄동은 많았다. 성년이 된 뒤 “왜 좋으냐.”고 물었더니 “향이 고소하고 달짝지근한 맛이 입 안에 꽉 찬다.”고 극찬했다. 마땅한 요깃거리가 없던 40여년 전의 일이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봄동 뿌리 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용돈과 바꾸던 그 뿌리가 상품성을 잃은 건가? 시골 친구에게 전화로 알아봤더니 비싸게 팔린다고 한다. 운 좋아야 장날에 볼 수 있단다. 봄동엔 항암·항노화 성분인 베타카로틴이 일반 배추보다 30배 많다. 요즘 채소 뿌리를 통째로 넣은 ‘매크로비오틱(Macrobiotic) 음식’이 인기다.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지내던 어린 시절 ‘봄동의 추억’이 그리워지는 한겨울이다. 정기홍 논설위원 hong@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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