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배후
    2026-07-26
    검색기록 지우기
  • 역 수
    2026-07-26
    검색기록 지우기
  • 독립
    2026-07-26
    검색기록 지우기
  • 발표
    2026-07-26
    검색기록 지우기
  • 4기
    2026-07-26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2,185
  • 정부 해양개발 장기기본계획 확정 배경

    ◎해양국 선언… 21세기 청사진 제시/분기별 개발위 개최… 「해양엑스포」 열기로 9일 해양개발위원회에서 의결된 「해양개발 기본계획」은 우리나라가 「해양국가」임을 공식 선언하면서 이에 상응하는 국가적인 해양정책의 근간을 처음으로 구체화 했다는데 의미가 있다.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며 관할가능 해역이 육지면적의 4.5배,해안선이 1만1천5백42㎞,섬이 3천2백여개이다.이런 점을 감안할 때 해양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음에도 이에 대한 인식부족으로 해양개발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해 왔었다. 더욱이 유엔 해양법협약이 발효되고 리우환경회의서 의제21이 채택되는등 신해양 질서가 형성되면서 해양력이 국가의 생존과 위상에 직결되는 상황이 전개됨에 따라 해양개발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의지가 요청돼 왔다. 이번 계획은 이같은 필요성을 인식한 향후 10년간의 장기 국가계획으로 의미가 있을뿐 아니라 13개 관련부처 및 청으로 구성된 해양개발위원회를 분기별로 개최토록 하고 매년 실천계획 추진사항을 점검,국회에 보고토록 함으로써 행정적 실효성을 높였다는 특징도 갖고 있다. 부문별 8대 주요시책을 정리하면. ▲국가해양관리체제 확립=유엔해양법 협약발효에 대응키 위해 주변국가와 해양경계획정 협의를 수행할수 있도록 영해기점 조사·측량사업을 벌이고 관할해역 경찰력을 보강한다. ▲해양 생물자원 개발=보호수면 종합관리계획을 수립하고 인공어초를 94년 9만㏊ 수준에서 2005년 36만㏊ 수준으로 대폭 확충하고 수산종묘배양장도 94년 11곳에서 2005년 30곳으로 늘려 고급 어종을 양산해 방류토록 한다.「기르는 어업」육성을 위해 어촌계 공동어장을 양식장으로 조성하고 재래식 어로장비를 현대화하며 어종별 해역별 특성에 맞는 경제성 표준어선을 개발·보급한다. ▲해양광물 및 에너지 개발=국내외 대륙붕 석유탐사 및 심해저 망간단괴 개발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한다.해양에너지를 실용화하기 위해 40∼48만㎾급 조력발전과 파력발전시스템 및 해양온도차 발전시스템 개발에 나선다.바다골재 염분제거대책을 연구한다. ▲해양공간의이용 및 개발=해양국가로서 긍지를 높이기 위해 「해양 엑스포」개최를 검토하고 연안 임해도시의 해양산업발전을 지원,첨단기술복합단지 조성을 유도한다. ▲해양오염 관리와 해양생태계 보호=해상 기름유출사고를 막기위해 해상교통안전시스템을 구축하고 사고에 대비한 국가긴급계획을 수립한다.해양오염 방제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정유회사가 공동출자한 민간 방제회사를 설립한다. 해양생태계 보호지역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고 해양생물종 및 유전자보호를 위한 장기계획을 수립한다.주변해역 오염관리를 위해 북한 일본 중국 러시아등과 국제협력체제를 구축하고 「푸른바다 가꾸기운동」과 「바다의 날」을 제정,해양환경에 대한 국민관심을 높인다. ▲연안역 통합관리=해면부와 배후 육지부를 일체로 하는 지역을 특별관리지역으로 설정하고 연안역 관리법을 제정하는등 무분별한 개발을 억제한다. ▲해양과학 기술개발을 통한 국제경쟁력 제고=인공위성 원격탐사,유전공학을 이용한 고급어종 개발,이어도 해양과학기지 건설등 종합적인 기술개발을 추진한다.북한등 주변국과 해양과학조사 협력체제를 구축한다. ▲해양개발 안전체제 확립=신속한 해난구조를 위해 해상수색·구조(SAR)체제를 구축하고 인천 목포 부산 동해 제주등 5개 구조조정본부를 설치,범국가적 구조체제를 구축한다.
  • 암으로 숨진 미테랑/고려인삼 추출물로 생명 연장했다

    ◎「아답타겐」 효능 듣고 한국에 “SOS”/“3개월 시한” 예상깨고 7개월 버텨 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대통령의 투병생활 배후에는 아답타겐이라는 한국의 인삼제품이 결정적인 역할이 있었다. 프랑스 외무성의 외빈접대담당인 아티에여사는 지난해 프랑스정부 초청으로 파리에 온 S대 곽모교수에게 『미테랑 대통령은 한국의 인삼제품 때문에 살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아티에여사는 암전문의인 자신의 남편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으며 프랑스 암전문의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는 표현도 덧붙였다. 미테랑은 지난해 1월 『6개월이상 살기 어렵다』는 판정을 받았으며 퇴임당시인 5월경에는 『3개월이상 살아도 기적』이라는 선고를 받았다.김영삼대통령의 지난해 3월 프랑스방문을 앞두고는 정상회담 성사가 불투명했을 정도로 암세포는 번식했다. 그러던중 미테랑 전 대통령측은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미테랑의 주치의인 필립 드 퀴페르 박사는 프랑스주재 한국대사관의 한 고위외교소식통과 만나 아답타겐의 효능에 대해 설명을 듣고관심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미테랑 전 대통령은 엘리제궁을 떠난 뒤에는 퇴임의 공허감을 이기지 못해 정신적 안정을 찾지 못하고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고 퀴페르박사가 밝힌 것으로 소식통은 전한다.더욱이 미테랑은 퇴임 직후 측근들과 함께 등산을 갔다가 털썩 주저앉은 뒤에 증세가 심해졌다는 것이다. 이에 퀴페르 박사는 한국 외교소식통에게 아답타겐을 구해줄 것을 요청했고 소식통은 아답타겐 유럽판매총본부장인 하정명사장을 통해 서울에서 항공속달편으로 급히 아답타겐을 공수했다. 미테랑은 하루에 4봉지씩 복용했으며 그동안 60개 봉지들이 16박스 정도의 아답타겐을 사용했다.미테랑이 지난 6월부터 7개월동안 복용한 아답타겐의 비용은 1만달러(약 7백50만원) 정도이지만 하사장은 외교소식통을 통해 무료로 제공했다. 하사장은 이에 대해 『위대한 미테랑 전대통령은 하루라도 오래 살아 인류에 조금이라도 더 공헌할 수 있는데 그 정도의 비용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아답타겐」 이란/방사능 치료때 건상세포 파괴 막아야 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대통령의 전립선암 투병에 도움을 준 아답타겐은 인삼에서 추출된 면역성향상제. 아답타겐은 암환자가 방사능치료를 받을 때 일반건강세포가 파괴되는 현상을 막아준다.또 방사능으로 이미 손상된 건강세포가 복원할 수 있도록 해준다. 미테랑 전 대통령이 예상보다 오래 살 수 있었던 것도 이처럼 아답타겐이 세포의 복원을 도왔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아답타겐은 독일어로 적응이라는 뜻의 「아답타」와 물질이라는 의미의 「겐」의 합성어. 다시 말해 적응물질이다.모든 식물에는 자신을 지키려는 적응물질이 있으며 아답타겐은 인삼에서 추출된 적응물질의 고유명칭이다.
  • “간척지 논·밭 겸용으로 개발”(공직자의 소리)

    ◎기계영농 가능하도록 필지도 대규모화 우리나라에 있어서 간척사업은 대체로 개화기 이전의 농촌사회에서의 자급영농지의 조성 및 군량미 확보를 위한 사업추진 단계를 거쳐 일제시대에서의 식량수탈 정책의 일환으로 사업을 추진하던 단계를 지나,지난 60년대 이후부터는 경제개발계획에 부응하고 식량자급기반 달성을 위해 정부와 민간에 의해 의욕적으로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사업의 추진으로 국토의 확장뿐만 아니라 주곡의 자급기반을 조성하고 농어촌의 소득증대와 고용기회의 확충으로 농어촌의 경제발전과 농어촌의 생활환경개선에 적극 기여하여 왔었다. 우리나라 국토면적은 1994년 현재 9백9십3만9천ha로서 절대면적이 협소하며,이중 경제적 이용이 어려운 산지가 6백4십5만6천ha로서 전국토의 65%에 달하는 등 국토자원이 빈약하고,또한 기계화,규모화 영농이 가능한 평지 면적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이다. 또한 산업화·도시화 등으로 지속적으로 농지가 타용도로 전용되는 등 농경지의 절대면적은 90년이후 지난 5년간 연평균 1만5천ha씩감소되고 있으며,1차 산업 종사인력이 2·3차 산업으로 흡수되면서 발생하는 이농현상으로 인해 농업인구감소와 함께 농업 노동력이 노령화·부녀화되고,기계화 영농이 불가능한 한계농지도 94년말 현재 6만3천ha에 달하고 있는 등 농업환경이 악화되고 있는 바,농업구조개선을 위한 농지 규모화와 과학영농이 가능한 신규 우량농지의 확대개발이 더욱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특히,간척지의 개발은 지력이 높아 쌀 품질이 우수할 뿐만 아니라,광활한 면적에 대해 원격조정에 의한 자동 물관리,항공기를 이용한 파종 및 농약살포 등이 가능하게 되어 쌀생산비를 낮춤으로써 경쟁력을 높일 수 있고,수자원 확보와 수질의 합리적 관리로 용수를 효율적으로 공급,연안역 일대의 부족한 용수 해결과 연안역 주민들의 생활여건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한 간척사업은 토지이용측면에서 볼 때 98% 정도가 농업진흥지역으로서 집단화된 우량농경지로 조성될 뿐만 아니라 택지조성,경지정리,배후지 저지대의 배수개선,육운·유통 구조개선,관광·항만 개발여건 조성 및 수자원의 조성 등 타산업 발전효과도 매우 크기 때문에 농업은 물론 국가경제 전체의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러므로 간척지 개발은 인구증가,경제 및 사회발전 등으로 인하여 급증하는 토지수요에 적극 대처함은 물론,주곡인 쌀의 자급유지와 향후 남북통일에 대비하여 식량의 안정적 공급을 위한 우량농경지의 절대면적을 확보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또한 어장의 오염 및 퇴적 등으로 효용가치가 상실 또는 저하된 간척지의 효율적인 이용으로 농어촌정주생활권 조성 등 개방화에 대응하는 농업경쟁력 강화를 위해 간척지의 개발·확보는 매우 의미있는 중요한 사업이다. 그러나 농림수산부에서는 최근 생활의 질이 향상되고 환경 및 수산자원 보전에 대한 인식이 강화되고 간척사업 시행에 따른 어업피해보상 규모가 확대되는 등 간척농지 개발사업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대두됨에 따라 그 동안의 간척지의 개발위주정책에서 탈피하여 수산·환경보전 등 비경제적 요인까지 고려하여 지금까지 기술적으로 가능한 간척농지개발대상지40만2천ha를 장기적인 계획아래 20만8천ha로 대폭 축소·조정하여 19만4천ha를 제외하여 시행키로 하였으며,간척농지개발사업을 시행함에 있어 단순한 논위주의 개발을 지양하고 논·밭 겸용으로 이용이 가능하도록 개발하여 농지 이용률을 높일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여 내연적인 농지확대도 도모하기로 하는 한편,대형농기계에 의한 기계화 영농이 가능하도록 필지 규모도 대구획으로 개발해 나가기로 하였다.
  • 북,우성호 선원 세뇌… 선전에 이용/납치·송환과정서 드러난 속셈

    ◎우리 정부 배제… 유엔사에 일방 통보/「판문점 송환」 정전체제 무력화 겨냥 「86우성호」의 선원과 유해가 7개월만에 돌아왔다는 흥분이 점차 가라앉으면서,정부내에서는 우성호의 납치와 송환과정에서 드러난 북한측의 저의에 대한 불신과 의구심이 커져가고 있다. 쉽게 말해 북한이 순진한 우리 선원들을 잡아가 북한내부와 남한,국제사회에 대한 선전의 도구로 철저하게 이용했다는 것이 당국자들의 판단이다.때문에 선원들의 송환이 대북 쌀지원 대화의 속개로 연결되기는 힘들다는 시각이다. 우선 북한은 김부곤 선장 등 생존선원 5명을 억류하는 동안 북한의 방송에 출연시켜,김영삼 대통령과 남한의 체제를 비판하도록 강요했다.방송내용을 입수한 우리측 기관이 놀랄 정도로 억류선원들의 대남 비판은 격렬했다. 어느 나라나 선원들의 생활은 대체로 어렵고 힘든 것이 실정이다.따라서 사회에 대한 불만이 많을 수 있다.북은 이러한 점을 이용,이들을 북한주민용 선전도구로 사용한 것이다.특히 『남측이 사과만하면 당신들을 돌려보내려 했는데 남측이 이를 거부,당신들을 버렸다』고 이간질하는 교묘한 심리전을 펴기도 했다. 북한은 또 선원들이 언젠가는 남한으로 돌아가게 되는 상황까지도 치밀하게 계산한듯 하다.그 때를 대비해 선원들에게 북한에서 좀처럼 보기힘든 융숭한 대접을 한 것으로 보인다.북한측은 이들을 처음 3개월동안 억류했던 남포에서도 융숭한 대접을 했고 또한 평양과 원산·묘향산등 「대외 선전용 장소」를 보여주기도 했다.귀환당시 선원들은 북한의 일반인들에게는 대단히 귀한 옷인 양복차림에 점퍼와 여행가방등을 소지하고 있었다. 실제로 이들은 26일 군사분계선을 넘어 귀환한 직후 북한쪽을 향해 『남포만세,평양만세』등을 외치며 두팔을 치켜올려 보는이들의 눈쌀을 찌푸리게 하기도 했다.7개월여에 걸친 협박과 회유,그리고 처절한 세뇌의 강도를 그대로 나타내주는 장면이었다. 송환과정에서도 북한은 일방적인 선전술을 이용했다.지난 22일 별안간 방송을 통해 송환사실을 일방적으로 알렸다.판문점에 상주하는 우리측 연락관에게는 송환절차와 월경루트를 알리지 않았다.유엔사 정전위측에 월경루트만을 일방통보했을 뿐이다.북한이 판문점 송환을 선택한 것은 국제사회에 대한 선전에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또 북에서 남으로 판문점을 일방통행하는 것을 관례화함으로써 정전체제가 유명무실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다.그러한 암시의 배후에는 미국과의 새로운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는 그들의 상투적인 주장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 PLO 28년만의 베들레헴 성탄절/지구촌 크리스마스 표정

    ◎교황 심한 독감으로 성탄아침미사 집전 못해/클린턴 예배후 쇼핑… 시민들 정부폐쇄에 푸념/사라예보 거리엔 젊은이들 쏟아져 나와 활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독감으로 열이 높아 25일 아침(한국시간) 성 베드로 성당에서 열린 성탄절 미사를 집전하지 못했다. 바오로 교황의 대변인 요아퀸 나바로­발스는 『교황이 열이 너무 높아 2시간이나 서 있는 것은 무리다.의사들이 미사를 집전하지 말도록 권고했다』고 전했다. 바오로 교황이 성탄절 미사를 집전하지 않은 것은 78년 즉위이래 이번이 처음이다. ○…예수의 출생지인 베들레헴에선 24일 28년만에 자치를 확보한 팔레스타인인 수천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환호하는 모습을 보여 예년의 가라앉은 성탄절 분위기와는 큰 대조를 보였다. 미셴 사바 카톨릭 주교는 예수탄생교회의 자정미사를 통해 『팔레스타인 자유의 시작은 유태인과 팔레스타인인들간 화해의 시작』이라고 강조했다.이 미사는 회교도인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장도 귀빈석에 앉아 지켜봤다. ○…지난92년이후 처음으로 평화속에 성탄절을 맞은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에서는 24일 자정 카톨릭 신도들이 미사에 대거 참석,사라예보 대성당이 오랜만에 가득찼으며 거리도 젊은이들로 넘실댔다. 신도들은 이날 사라예보 성당을 가득 메운 채 빈코 풀지치 추기경의 강론을 들었으며 수백명은 날씨가 평소보다 따뜻해 성당밖에서 스피커 시설을 통해 강론을 경청했다. 또 성탄시즌동안 사라예보 거리에서 통금이 해제되자 수천명의 젊은이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으며 카페와 레스토랑,디스코테크 등도 손님으로 가득 찼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24일 예배를 마친뒤 의사당에서 근처의 상가지역으로 딸 첼시아와 함께 쇼핑에 나서 시민들과 성탄인사를 교환. 그러나 연방정부 일부 폐쇄가 이어지고 있는 탓인지 한 시민은 『대통령이 크리스마스 쇼핑에 나선 것은 좋으나 공무원들의 일시해고는 어떻게 되는거냐』고 푸념.
  • “정총장 연행”전·노씨 회동서 결정/검찰 공소장에 나타난 새사실

    ◎장성 등 10여명 30경비단 제지없이 집결/신군부,뛰어난 통신·지휘설비 사전 장악 12·12 및 5·18사건 특별수사본부가 21일 12·12군사반란에 대해 새로이 밝힌 주요 내용은 다음 4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정승화 총장의 강제연행을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직접 지시했다는 사실이다. 검찰은 12·12 당일 상오 국군보안사령관실에서 『실탄과 총기를 준비하여 강제적 방법으로 연행하라』고 지시한 사실을 전씨의 진술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와함께 전씨가 정총장 연행,조사에 대한 대통령 재가를 얻기 위해 출발하기 전에 이미 『재가가 없더라도 하오 7시 연행작전을 개시하라』고 지시한 것도 밝혀내 군 지휘계통을 무시한 반란의 결정적 증거를 확보했다. 두번째로 검찰은 그동안 항간에서 떠돌던 반란모의의 시발점이 전·노 두 전직대통령으로부터 비롯된 사실을 확인했다. 12·12사건 5일전인 12월7일 노태우 9사단장이 전보안사령관의 초청으로 보안사를 방문했으며 이 자리에서 10·26사건수사 브리핑을 받은 뒤 12월12일 정총장을 연행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이 결정 이후 정총장 연행 지지를 위한 하나회 회원들의 모임을 경복궁에서 갖기로 하고 노사단장은 황영시 1군단장에게,나머지는 전씨의 지시로 보안사 허화평 비서실장이 연락하는 역할을 분담한 것으로 밝혀졌다. 세번째로 드러난 흥미로운 사실은 신군부측이 지휘본부로 사용했던 경복궁내 30경비단이 당시 군내에서는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불릴 정도로 방어와 통신시설이 뛰어난 곳이었다는 것이다. 30경비단은 본래 청와대 경호실 직할로 박정희 전대통령 집권후반기에 차지철 경호실장이 유사시 전군에 대한 지휘가 가능토록 만든 곳으로,수도권 방위 최고책임자인 수도경비사령관도 경호실의 허가를 받아야 출입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런 30경비단에 신군부측 인사 10여명이 아무런 제지없이 1시간여만에 모인 것이 우연이 아닌,군사행동에 대비한 치밀한 사전계획에 따른 것이었음을 방증한다. 마지막으로 군내에서 통신 및 지휘시설이 가장 뛰어난 30경비단과 보안사 상황실을 사전에 장악했기에 거사를 성공시킬 수 있었다는 전·노씨의 진술도 반란의 사전계획을 엿볼수 있는 새로운 대목이라고 검찰은 밝히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과 함께 검찰이 이번 공소장에서 「하나회」라는 군내 사조직을 반란의 배후로 명시한 것도 지난 번 수사와 다른 점이다. 지난 번 수사발표에서는 12·12사건의 동기를 「소장 군부세력의 입지를 보전할 목적으로」라고 애매하게 표현했었으나 이번에는 「군인사에서 정규육사 출신이 중심이 된 하나회 소속 장교들이 배제되자 위기의식에서」라고 적시하고 있다. 이는 사조직의 군 지휘계통 장악을 인정하고 나아가 조직적 내란행위를 규명하기 위한 것으로 12·12직전 전씨가 일방적 차관회의 주재 등 월권행위로 정총장측과 잦은 갈등을 빚은 점과 함께 주목된다. 이밖에도 검찰은 10·26 직후 1차 수사를 맡았던 백동림 당시 보안사 수사국장으로부터 정총장이 무혐의였음을 확인한 것도 지난 번 수사때와 다른 점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검찰은 이번 수사에서도 지난 번 조사 때처럼 최규하 전대통령에 대한 재가시 강압여부는 밝혀내지 못했다.
  • 4남매 잇단 고시합격 “만세”/주부 송경희씨.세오빠 뛰따라

    ◎포철서 2년 근무… 도전 2년만에 영광/막내오빠는 80년대 학생운동으로 유명 한가족 4남매가 모두 고시에 합격,화제가 되고 있다. 15일 발표된 제39회 행정고시 일반행정직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가정주부 송경희(29·관악구 신림2동)씨와 그 오빠들이 주인공이다. 송씨의 합격으로 「고시가족」4남매로 불리게 됐다.오빠 3명은 이보다 앞서 사시·행시에 합격했다.송씨 가족중 가장 널리 알려진 유명인사는 막내 오빠인 영길(32)씨. 84년 연세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영길씨는 이정우(33)전서울대 총학생회장,김영춘(34)전고려대 총학생회장과 함께 80년대 학생운동을 이끈 「3인방」으로 명성을 날렸다.영길씨는 84년 대학 총학생회 부활의 주역이며 「민정당사 점거농성」의 배후로 지목돼 투옥된 경험도 갖고 있다. 영길씨는 지난해 36회 사법시험에 합격,현재 인천지법 판사시보로 수련을 쌓고 있다. 경희씨의 고시도전은 「운동권」에서 「제도권」으로 변신한 막내오빠의 조언이 큰 영향을 미쳤다. 90년 2월 전남대 영문과를 졸업한 경희씨는 포철에입사한 뒤 2년남짓 근무하다 퇴사,93년 11월부터 본격적으로 고시를 준비해왔다.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집근처 서울대 도서관에서 공부해왔고 지난해 1차합격후 2차시험을 준비하면서부터는 인근 고시학원에서 혼자 공부했다. 92년 결혼한 경희씨는 합격소식을 듣고 『주위사람을 실망시키지 않았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제일 먼저 들었다』면서 『특히 아버지가 제일 기뻐하실것』이라고 소감을 털어놨다.경희씨의 2차시험성적은 5등인 것으로 알려졌다. 경희씨는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80년대 상황에서는 고시를 준비하는 것이 죄를 짓는 것 같아 대학때는 시험을 치지 않았다』면서 『여성의 세밀함이 필요한 기획분야나 환경분야에서 일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성균관대 경제과를 졸업한 큰 오빠 하성(41)씨는 78년 22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청와대 경제비서실 총괄과장을 거쳐 올해부터 공정거래위원회 국제업무2과장으로 재직하고 있다.소르본대 경제학박사 출신의 하성씨는 촉망받는 「국제통상전문가」로 서울대와 연세대에 시간강사로도 출강하고 있다.단국대 법대를 장학생으로 나온 둘째오빠 영천(38)씨는 81년 23회 사법시험에 합격,현재 서울고등법원 판사로 재직중이다.
  • 「항룡」 최규화(송정숙 칼럼)

    최규하 전대통령의 검찰조사가 또 실패했다.시정에는 『나 말 안 할 거야』라는 말이 유행한다고 한다.최전대통령 흉내인 것이다.정국이 요동치면서 입있는 사람 모두가 있는말 없는말을 쏟아놓는데,눈치만 보던 사람도 표변해서 더러는 자신에 유리하게 조금씩 과장도 하며 쏟아놓는데,그래도 의연히 막무가내로 고집불통처럼 말을 하지않는 최규하씨. 저 격동의 시기 「5·18」「12·12」를 통해서 그가 보인 면모는 이렇게 단단하고 요지부동인 질긴 힘을 느끼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오히려 정치반란이나 쿠데타를 하기에 전혀 방해가 되지않는 소심함과 물렁물렁함만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친지 ㅇ씨가 직접 겪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ㅇ씨는 최씨가 대통령이던 해 연초휴가를 수안보온천에서 보낸 일이 있다.그때 일이다.그들 가족이 수안보의 호텔에 도착했을 때 예약한 방은 먼저 투숙객이 미처 비우지 않은 상태였다.호텔측은 그 투숙객이 곧 떠날 것이라며 기다릴 동안을 위해 우선 옆방에 들여보내주었다.그런데 ㅇ씨네는 아이들이 넷이나 된다.기다리는 동안을 못참고 뛰고 떠들었다.그러자 호텔측은 아주 정중하게 『미안하지만 좀 조용히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ㅇ씨는 늦도록 방을 비워주지 않는 앞투숙객이 대체 누구냐고 볼멘 소리로 물어보았다.했더니 대답인즉 『최규하 대통령이십니다』라는 것. 그러면서 묻지도 않는데 박정희 대통령때만 해도 「행차」가 있으면 소방차가 몇대씩 호텔을 에워싸고,다른 객실을 몽땅 비워야했는데 『이분은 영 다르다』고 덧붙였다.아닌게 아니라 대통령이 아직 떠나지도 않았는데 다음 투숙객을 옆방에 「모셔놓고」 아이들이 떠들게 하는 따위는 전같으면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ㅇ씨는 그 「민주화스러움」이 반가우면서도 한편 허전하고 맥풀리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그렇게 문문한 최대통령이 「5·18」 「12·12」의 핵심참고인으로 집요하게 증언을 요구하는 검찰에게 오불관언으로 버티고 있다.그를 대리한다는 법률고문은 『현직 대통령의 생각이 바뀌었다고 해서 전직 대통령의 「소신」을 바꿀 수는 없다』고 아주 당돌한 말도 하고있다.이런 도전적일 수 있는 말은 「최씨적」이지 않아 놀랍다. 최전대통령은 도무지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지가 오래 되었다.일렬로 주욱 늘어선 사진이 실리는 언론의 동정란에서도 그는 발견되지 않은지가 오래 되었다.왕조시대,두문동에 들어가 풀뿌리로 연명하고 살았던 망조의 충신도 아닌 그가 오늘같은 시절에 그렇게 흔적없이 지내는 일이 신기할 지경이다. 전씨나 노씨의 문제가 되살아난 원인중에는 그들의 삶의 궤적이 사람들의 빈축과 비난을 산것도 빌미가 되었다고 할수 있다.골프장에서 어쨌다느니 어딘가 공석에서 적절치 못한 수사학을 늘어놓은 따위가 국민의 노여움을 산 것이다. 그런데 최씨는 「꿈쩍」한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다.최고위직을 지낸 인사가 그렇게 추적되지 않는 생활을 하는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다.행적만 아니라 그에게서는 육성도 들리지 않고 충성도가 비교되며 병풍처럼 배후를 두르는 세도 거느리지 않는다.최근을 말고는 카메라를 대놓고 잠복하는 언론도 보이지 않았었다.미약했던 그의 권력때문일까. 그런 최전대통령이 지금와서 이렇게 완강하게 「말안하기」의 말뚝을 붙잡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여러시간동안 버티다가 승인한 정승화 참모총장의 체포나 계엄확대,5공화국 출발에 얽힌 비화같은 것은 그자신을 위해 「활용」할 수도 있을텐데,마침내는 불명예스런 소문까지 떠돌고 언론들이 협박하듯 다그치는데도 흡사 부재자처럼 응답이 없다. 그가 「입다물기」로 지키려는 것이 명예인지 도리인지 또는 「수치심」인지 알 수는 없다.다만 그가 말대신 눈이라도 껌뻑여야 끝낼수 있는 역사적 증언들을 앞에 놓고 검찰은 지금 속수무책이다. 아이러니처럼 「12·12」 바로 그날 찾아간 방문조사팀에게 그는 『항룡은 말을 하지않는 법』이라며 여전히 진술을 거부했다.「말안하기 전술」만으로 「천룡의 자리」를 지키려는 그를 여전히 이상한 옹고집으로만 비웃어야 하는 것인지 이제는 사람들 모두가 곤혹을 느끼게 되었다.
  • 검찰수사 「5·18」로 확대 안팎

    ◎「12·12 군사반란」 규명 마무리 정면/피의자 대부분 조사… 「상당한 진척」 관측/두 사건 연계… 핵심 주모자 구속 불가피 12·12수사가 마무리 국면으로 접어든 느낌이다.검찰은 11일부터 5·18당시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소환했다.12·12사건의 수사를 5·18로 확대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검찰은 지난 3일 전두환씨를 구속하면서 지금까지 소환조사한 12·12사건 관련자는 전두환·노태우씨를 포함해 모두 37명이다. 이 가운데 20명은 12·12사건과 관련한 피고소·고발인이며 2명은 5·18사건의 피의자다.나머지 15명은 참고인이다. 12·12사건의 남은 조사 대상자인 장세동 수경사 30경비단장은 12일 소환될 예정이다.당시 공수여단장으로 국외 체류중인 박희도·장기오씨와 연락이 되지 않고 있는 최세창씨의 출두는 당분간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이지만 전체적인 수사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않을 전망이다. 또 아직 출두하지 않는 최규하 전대통령도 5·18사건과 병합조사가 불가피하기 때문에 당분간 절충이 더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검찰은12·12사건의 16년째이자 전씨의 첫번째 구속만기일인 12일까지 12·12사건 관련자를 대부분 소환·조사한 셈이다. 이러한 수사진척에 따라 검찰은 5·18수사를 진행하는 한편 소환조사의 결과를 분류·분석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에 따라 검찰이 피의자들을 어떻게 사법처리할 것인지가 가장 큰 관심사의 하나다. 검찰의 당초 의지대로라면 피의자들은 대부분 반란죄 이외에도 내란죄의 적용을 받을 것은 분명하다. 12·12사건과 5·18사건을 하나의 사건으로 처리한다는 것이 검찰의 수사방향이기 때문이다. 현재 수사의 강도로 미루어볼 때 12·12사건의 핵심 주모자인 「경복궁 모임」 참가자와 「보안사팀」은 반란죄와 내란죄의 각 죄목을 적용받아 구속될 것이 불가피해보인다. 또 총장공관 점거,직속 상관 체포등을 주도한 피의자들도 구속을 면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관련자 모두를 구속할 지 선별처리할 지 등의 사법처리 수위를 예상하는 것은 쉽지않다.아직 5·18수사와 관련지어 최종 윤곽이 드러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또 두 사건이 동일한 사안이라면 구속자수도 함께 고려해야 하고 이는 정치적 조율도 필요로 하는 대목이다. 검찰은 공소시효 논란이 없는 전씨에 대해서는 구속만기일인 22일쯤 반란·내란죄를 적용해 기소한다는 방침이다.노씨도 이때 같은 죄목으로 추가기소될 것으로 보인다. 전씨 측근들이 법정에서 대결한다는 계획아래 검찰의 소환에 의외로 순순히 응하고 있어 22일쯤까지는 내란죄가 핵심사안인 5·18수사도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힐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대대로라면 전씨를 기소할 때 핵심주모자들도 함께 구속기소될 가능성도 많다. ◎12·12 관련 소환자의 당시 역할/정 총장 연행계획 수립 주도­이학봉씨/「비상계엄 확대」 군회의 주재­정영복씨/총리공관 경호대 무장해제­정동호씨/5·18때 광주에 군출동 지시­이희성씨 12·12 및 5·18사건과 관련,11일 검찰에 소환된 이학봉 당시 보안사 대공2과장 겸 합수부 수사1국장 등 6명은 군사반란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거나 「거사」에 적극 협력한 대가로 5공 때 출세가도를 달렸던 인물들이다. 이씨는 12·12사건 당일 전두환 합수본부장의 명령을 받아 허삼수보안사 인사처장과 함께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연행계획 수립을 주도,군사반란을 성공으로 이끈 1등 공신이다.그는 80년 5·17 당시에도 정치인·재야인사·학생 등 소요 배후조종 혐의자와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자의 검거대상 선정 및 검거까지 담당,신군부세력의 「집권 시나리오」를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5공 때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안기부 2차장 등을 역임하고 13대 민정당 공천으로 당선됐으나 89년 5공청산 때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가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정동호 당시 청와대경호실장 직무대리는 12·12 당시 최규하 대통령의 집무실인 총리공관을 경비하던 육군 특별경호대의 무장을 강제로 해제하고 청와대경호실병력으로 대체,최대통령과 군수뇌부와의 접촉을 차단시킴으로써 역사의 방향을 바꾸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그는 86년 육군 참모차장 때 「국회 국방위 회식사건」으로 예편한 뒤 한국도로공사 사장을 거쳐 국회에 진출했으나 지난 93년 공직자 재산공개 때 부동산 투기혐의 등으로 민자당에서 제명처분을 받았다. 주영복 전국방장관은 12·12가 신군부측의 승리로 끝난 직후인 12월15일 공군참모총장에서 예편한 지 8개월만에 국방장관에 기용됐다.그는 5·17당시 소집된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를 주재하면서 비상계엄 확대조치를 통과시킨 후 이의 재가를 최전대통령에게 건의했다.내무장관·평통자문회의 수석부의장 등을 역임했다. 이희성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는 신군부측에 회유돼 12·12직후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임명됐다.그는 5·17비상계엄 확대조치와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압당시 병력출동 지시를 내렸다.교통부장관·주택공사이사장 등을 지냈다. 윤성민 당시 육군참모차장은 13일 새벽 신군부에 의해 군수뇌부들과 함께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으나 곧바로 신군부측으로 전향했다.합참의장·국방장관·한국석유개발공사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김윤호 당시 육군보병학교장은 12일 밤 신군부측의 연락을 받고 급거 상경,신군부 대변인자격으로 13일 상오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 등 미국 관리들과 접촉하고 다음 날 전합수본부장과 글라이스틴대사와의 회동을 주선했다.그는 12·12 직후 1군단장을 거쳐 1군사령관·합참의장·석탄공사 이사장·한국가스공사 이사장 등을 지냈다.
  • 사상최대 법정공방 예고/「비자금」재판 어떻게 펼쳐질까

    ◎노씨측 “통치자금­관행” 들어 뇌물희석 초점/재벌측 “권력앞 어쩔수 없었다” 선처 구할듯 노태우 전대통령 비자금사건이 47일에 걸친 검찰수사를 끝내고 법정으로 무대를 옮겨 마침내 사법적 단죄의 도마위에 올랐다. 서울지법은 6일 노씨와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대우그룹 김우중 회장등 재벌총수 8명을 포함,이 사건에 관련한 피고인 15명에 대한 첫 공판을 오는 18일 열기로 했다고 밝혔다.담당재판부는 형사 수석부인 합의30부(재판장 김영일 부장판사). 전직대통령과 「재계의 대통령」이라할 국내 유수의 재벌총수등 등장인물의 면면과 이들이 한꺼번에 피고인석에 앉아야만 하는 상황등은 이 사건이 역사상 전무후무한 「세기의 재판」이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여기에다 92년 대통령 선거자금 잔여분과 취임 성금 1천1백억원을 제외하더라도 뇌물액수가 2천8백38억원에 이르고 지금까지 검찰에서 조사를 받은 대상자가 4백여명이나 되는등 사건의 규모도 워낙 방대해 복잡다기한 사상초유의 법정드라마가 펼쳐질 것으로 보인다. 향후 재판의 백미는 검찰과 변호인과의 치열한 법적공방.검찰수사 단계에서는 피의자의 신분으로 일방적으로 검찰의 공세에 「당하기만」 했던 피고인측이 법정이라는 공개된 장소에서 사력을 다한 역공에 나설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노씨측 변호인으로는 김유후 전청와대사정수석과 한영석 전청와대민정수석이 이미 포진,검찰과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다.김유후 전수석은 이현우 전청와대경호실장의 변호인으로도 선임돼 있다.노씨측은 당초 사선변호인 선임을 포기하고 정치적 해법을 모색한다는 대책을 세웠으나 노씨 기소후 적극적 공세를 펼치기로 방향을 튼 것으로 알려졌다.정해창 전법무장관과 서동권 전검찰총장등 율사출신의 6공 측근도 배후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을 전망이다. 법리논쟁의 초점은 노씨가 받은 돈의 법적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느냐는 것.노씨가 재벌총수들로부터 받은 돈 2천8백38억원 전액을 뇌물로 규정한 검찰에 맞서 노씨의 변호인측은 이른바 「통치자금」과 「정치관행」의 논리로 무장할 것으로 보인다.즉 대통령으로서 국정수행에 필요한 통치경비를 재벌들로부터 헌납받은 것이며 이는 우리나라 역대 정권의 오랜 관행이었다는 점을 부각시켜 대통령이 가지는 직무와 관련해 특혜성 돈을 받았다는 검찰측의 주장을 반박한다는 것이다.노씨도 지금까지 일관되게 뇌물이 아님을 항변해 오고 있다. 따라서 검찰이 공소장에서 포괄적으로 설명한 대통령의 직무관련성을 재판부가 하나하나의 구체적 사안에서 어느정도 인정해 줄지가 유무죄 판단의 관건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그러나 법조계 일부에서는 일본의 판례를 들어 직무관련성에 관한 공방이 의외로 「싱겁게」 결론날 것으로 보고있다.1심에서만 6년9개월을 끌다 피고인의 사후에 최종 확정판결이 난 다나카 전일본총리의 「록히드사건」 재판에서 「총리의 권한」과 항공기 도입결정사이의 상관관계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전개됐지만 결국 유죄판결이 난 일본판례가 있기 때문이다. 재벌총수들의 법적 대응방안도 관심거리다.삼성 이건희 회장,대우 김우중 회장 등 재벌총수들은 아직 변호인 선임계를 제출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의 관례에 비춰 초거물급 변호사를 선임,총력전을 펼칠 것이 분명하다.그러나 이들은 재벌이 권력과의 관계에서 열세에 처할수 밖에 없었던 점을 들어 재판부의 선처를 구하는데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관련,이형구 전노동부장관의 수뢰사건 재판당시 재판부가 일부 총수들에게 검찰의 구형보다 놓은 형을 선고한 바 있어 이번 사건에서도 재판부의 엄벌이 재연될지도 관심거리다.
  • 역사의 심판 순응이 현명한 선택/전두환씨의 잘못된 도전(사설)

    전두환 전 대통령이 검찰의 소환에 불응한채 자신의 집앞 골목에서 「대국민 담화」라는 것을 발표하고 고향으로 가버렸다.이 온당치 못한 행동에 많은 국민들은 어이없어 하고 있다. 일단의 옛세력을 배후에 즐비하게 거느리고 현정권을 일갈하듯한 성명 한 토막을 낭독하고 검찰의 소환을 묵살한채 고향으로 떠나버린 행동은 당돌하기 짝이 없는 안하무인의 짓이다.게다가 그 성명은,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국민의 여망을 실현하려는 통치적 명분을 괴변적 수사학으로 몰아 도전을 하고 있다. ○안하무인의 당돌한 태도 헌정질서를 파괴하며 내란으로 일으킨 독재적 군사정권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고 그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야 할 책임이,운신이 자유로운 문민정권에 있음은 역사적 당위이다.그 당위의 실현에 따르는 개인적 고통에 반발하여 3당통합을 「야합」으로 폄칭하며 자신의 국권찬탈행위를 정당화하려드는 것을 국민들이 용인하지는 않는다. 이 과정에서 제일 수권정당임을 자처하는 제일 야당의 이중적인 반응은 매우 실망스럽다.특히 『전씨의 발언은 국민에게는 통하지 않으나 김대통령에게는 할 말을 한 것으로 본다』는 말은 해괴하다.12·12와 5·18로 이어지는 내란의 주인공을 특별법으로 다스려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 국민의 여망이므로 그것을 관철하기 위해 온갖 극단적 대응도 불사한다는 것이 야당의 입장이다. ○그릇된 역사시정은 당위 전두환씨는 그 피의자로 검찰에 소환되었다.그것에 불복하는 논거를 일방 긍정하는 논평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피의자의 난폭한 언행을 내심 반기는 것같은 이런 반응은 너무 얄팍한 손익계산적 작태다. 전씨의 도전적 수사학은 헌정파괴의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기 위한 특별법제정을 「좌파적 논리」에 의한 부당성으로 몰아붙이고 있다.이런 논리가 「김대통령에게 할 말을 한 것」이라는 뜻이라면 특별검사제를 주장하며 전가지보처럼 「장외카드」를 휘두르려 하는 야당의 행동과 역력하게 모순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제일야당 반응에 실망 김대중 총재도 함께 겨뤄 국민의 직선에 의해 탄생한 김영삼정권에는 이른바 태생적 모순이 없다.자신의 다급한 입지를 타개하기 위해 『현정부의 이념적 투명성』운운하는 전씨의 말이 옳게 한 말이라는 뜻이라면 평소에 투명성을 의심받아온 야당총재의 입지도 전씨에게서 의심받아 마땅하다는 뜻으로 원격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이 야당이 전씨에게는 이렇게 특별히 우호적이어야 할 어떤 내밀한 이유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국민간에 일더라도 변명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똑같은 사안이라도 마치 자신들이 주도하지 않으면 정의가 아니라는듯한 논리가 이번에도 드러나고 있는 일은 유감스럽다.거듭 말하지만 「5·18특별법 정국」은 김대통령의 역사와의 대화를 통한 결단이다.당대의 통치자는 국민적 여망에 부응하기 위해 큰 희생도 과감히 감수하는 용기가 필요하다.바로잡을 것은 바로잡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진로를 개척하는 것이 민족을 위한 길이면 그 길을 가야 한다. ○통치자 민주위한 길 가야 전직대통령인 전두환씨도 통치권자만이 들을 수 있는 이 역사의 음성을 들어보았을 것이다.그리고 국가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일이 민족을 배신하는 일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지난 날의 수하를 등등하게 거느리고 안하무인해 보이는 대응을 한 것은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태도가 아니다.당당하게 소환에 응해 법의 심판을 기다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훗날 역사의 평가에 순응할 자세를 갖추는 것만이 현명한 선택이라는 것을 하루 빨리 깨닫기를 당부한다.
  • 방산로비(외언내언)

    세계의 무기거래업계에 널리알려진 인물로 유타지몬이란 사람이 있다.독일계 여성으로 그 실력이 대단해서 항상 업계의 주목을 받고있다. 유타지몬이 지난 93년 영국의 BBC­TV와 가진회견에서 이런 증언을 했다.『무기거래에서 중개상인이 차지하는 수수료는 대략 25%정도다.최고기록으로는 45%까지 있었다.그러나 이 돈을 중개인이 다먹는게 아니다.수수료의 상당부분은 다시 구매국의 정부고관·왕족·배후실력자들의 주머니로 들어간다』 무기거래에서 검은뒷돈이 오간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유타지몬의 증언이 화제가 됐던 것은 수수료의 규모와 거래관계자를 구체적으로 밝힌 부분. 미국의 방산업계가 외국정부들에게 미제무기를 사도록 거액의 뇌물을 제공하고 있다고 미국의 군축민주프로젝트(PDD)가 최근 폭로했다.이 폭로가 뉴스가 된 것은 미국의 최대방산기업인 제너럴 일렉트릭,록히드사등이 이를 공개적으로 시인했기 때문이다.더욱 관심을 모으는 부분은 미국정부가 이를 잘알고 있었다는 사실.지금은 까맣게 잊혀졌지만 지난 85년 미국 휴즈사의헬리콥터가 북한으로 불법수출된 사실이 밝혀져 우리를 놀라게 한 일이 있다.그때도 미국의 세관은 그것이 불법임을 알면서도 묵인했었다. 냉전종식이후 무기거래업계에는 미국지배체제가 확고하게 다져져있다.91년에 미국의 세계무기시장 점유율이 이미 37%를 차지했고 93년 미국의 대외 무기판매량은 1백억달러를 넘어섰다.이들 무기가 주로 흘러들어가는 곳은 동아시아와 중동지역. 문제는 이들 검은돈이 후진국들의 부패구조를 더욱 조장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국내의 검은돈 거래에 거의 결벽성을 유지하는 미국이 대외거래,특히 무기거래에서 뒷거래를 공공연히 방조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얘기다. 노태우 정부가 미국에서 도입키로 기왕에 결정됐던 차세대 전투기 F­18을 F­16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모종의 뇌물거래가 있지않았느냐는 혐의가 있던터라 이런 보도가 새삼 눈길을 끈다.
  • 쌍용 달성 자동차공단 착공/총 82만평… 98년까지 2조 투입

    ◎연산 35만대 규모… 주행시험장 등 갖춰 쌍용자동차는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의 구지공단을 자동차공장과 주행시험장,부품단지와 배후주거단지까지 있는 대규모 자동차공단으로 건설키로 하고 20일 공사현장에서 기공식을 가졌다. 오는 98년까지 2조7백억원이 투입될 구지공단은 82만평 규모로 쌍용자동차가 지난 91년 사업시행자로 지정받고 지난 3월 환경영향평가를 거쳐 지난달 말 대구시로부터 실시계획 승인을 받았다. 82만평중 69만평에는 연건평 41만평 크기의 제2자동차 공장및 20만평규모의 주행시험장을 짓는다.공장 바로옆 8만평에 부품단지를 조성,엔진·트랜스엑슬등의 핵심부품을 만드는 30여개 부품업체가 입주하게 된다. 자동차 제2공장은 연간생산 35만대이상의 규모로 98년 10월 착공돼 99년까지 건설된다.따라서 99년부터는 기존 평택의 20만대와 해외생산 10만대를 포함,연간 65만대이상의 생산체제를 갖추게 됐다. 나머지 13만평에는 공단의 배후도시기능을 할 수 있는 주거단지를 조성하며 자동차 수출전용 부두 및 물류단지도 만들 계획이다. 쌍용측은 구지공장에서 생산될 차종과 차종별 생산계획은 기술제휴선인 벤츠와의 중소형승용차 공동 생산 등 장기사업계획이 확정되는대로 결정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날 기공식에는 김석준쌍용그룹 회장을 비롯한 임·직원과 문희갑 대구시장등 정·관계 인사,지역주민 등 2천여명이 참석했다.
  • “이스라엘 야당 지도자 네탄야휴도 살해 위협”

    ◎리쿠드당 대변인 주장 【예루살렘 로이터 연합】 이스라엘의 야당인 리쿠드당의 지도자 벤야민 네탄야후가 이츠하크 라빈 총리의 피살후 살해위협을 받았다고 그의 대변인인 샤이 바자크가 9일 말했다. 바자크 대변인은 『좌익 운동가들이 리쿠드당 본부에 전화를 걸어 「다음 차례는 네탄야후로 그는 자신의 관을 준비해야 할 것」이라고 협박했으며 당 사무실 몇곳이 파괴당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그는 「위협의 배후에 누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가」라고 묻자 『스스로 폭력에 반대한다고 주장하는 좌파들의 짓』이라고 단언하고 『그들외에 누가 있겠는가』라고 덧붙였다.
  • 무장조직원 4명 체포/이스라엘 경찰,우익단체수사

    【예루살렘 AP 로이터 연합】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총리 암살의 배후로 이스라엘 우익과격단체가 지목되고 있는 가운데 이스라엘경찰은 7일 유태인 무장조직원 4명을 체포했다.
  • 수서비리 「노씨 배후설」 다시 부각

    ◎한보 정 회장,청와대 업고 서울시에 압력/“거액 뇌물 수수자는 결국 노씨” 추론 가능 노태우 전대통령의 비자금 3백69억원을 한보그룹이 불법 실명전환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6공 최대비리인 91년 서울 수서택지 특혜분양사건의 배후가 누구인지에 새삼 관심이 쏠리고 있다.수서비리는 서울의 마지막 남은 노른자위 땅인 수서 택지개발예정지구의 3만5천5백평을 농협 등 26개 연합주택조합에 공급하는 과정에서 정태수한보그룹회장이 국회의원 등과 장병조당시 청와대비서관에게 거액의 뇌물을 제공한 사건으로 정회장과 장씨,국회의원 5명 등 모두 9명이 구속된 사건이다. 엄청난 비리가 발생할 수 있는 배경에는 막강한 배후 인물이 분명 있을 것으로 추측하면서도 당시 수사에서 그가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었다. 청와대와 서울시,한보그룹 등이 얽혀 빚어진 수서비리의 배후인물로 지목을 받게 된 이유는 서울시가 특혜분양 허가를 내주는 데 장비서관의 압력이 작용했고 장씨와 노대통령,한보 정회장은 뗄 수 없는 끈끈한 인연을 맺고 있는 관계였기 때문이다. 결국은 정회장이 장비서관과 나아가 노대통령을 등에 업고 국회의원들의 힘을 빌려 서울시에 압력을 넣어 수서택지를 특혜분양받았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같은 시각의 또다른 근거로 택지를 특별분양하기로 결정하게 된 과정을 들 수 있다.91년 1월19일 박세직 당시 서울시장은 부임 19일만에 수서택지 공급에 대한 회의를 주재,윤백영부시장,이동종합건설본부장,김학재도시계획국장,강창구도시개발과장 등 서울시 간부들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내가 정치적으로 결심하겠다』며 결재서류에 사인했다. 당시 서울시의 회의에는 업무와 무관한 청와대 문화체육비서관인 장병조씨가 참석해 책상을 치는 등 분양불가 논리를 펴는 서울시 간부들에게 거의 윽박지르는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결국 「노씨 배후설」은 한보의 거액 뇌물의 최종 수수자는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었던 노씨일 수 밖에 없다는 상황논리가 뒷받침하고 있다. 91년은 노씨가 한창 검은 돈을 끌어 모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장병조 전비서관을 매개로 한 정회장과의 인연은 특혜분양을 미끼로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하기 좋은 기회였다는 것이다. 수서사건으로 단단히 맺어진 노·정커넥션은 수감기간중 노씨 관련부분을 정씨가 끝까지 함구하고 이런 「의리있는」 정씨를 노씨가 신뢰하면서 정씨 출감 이후 한보가 재기하는 데 음양으로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 빨치산의 최후(새로 쓰는 한국현대사:41)

    ◎지리산 본거지로 군사시설 파괴·후방 교란/휴전협정뒤 숙청·토벌로 조직 “지리멸렬” 1953년 7월27일 유엔군과 공산군 대표가 휴전협정에 서명함으로써 한국전쟁은 일단 마무리 됐다.그러나 남한 곳곳에서는 총성이 끊이지 않았다.흔히 빨치산 또는 유격대로 알려진 대한민국에서는 「공비」라 부른 공산주의자 무장집단과의 전투가 끝나지 않은 것이다.이 「전선없는 전쟁」은 1956년까지 계속됐다. 남한에서 빨치산은 한국전쟁 전부터 활동 했다.처음에는 남로당 출신이 주축을 이뤘지만 1949년 3월 북한이 간부들을 파견,빨치산부대를 직접 지휘케 하면서 빨치산은 정규군에 버금가는 체계를 갖추게 됐다.이는 물론 전쟁을 일으키기에 앞서 남한내 공산당 조직을 재가동,전쟁 때 국군의 배후를 공격하기 위한 조치였다. ○「남한 민중봉기」 염두 이어 전쟁 직전인 50년 6월 북한은 남한 각 도에 「정치공작대」5∼6명씩과 일부 무장병력을 다시 침투시켰다.6월10일 김달삼이 이끄는 유격대 2백50여명이 경북 청도 운문산에 유격구를 마련하는 임무를 띠고남하했다.24일에는 남도부를 사령관으로 한 766군부대(7백66명으로 구성)가 해군 함정을 이용,포항 쪽으로 상륙했다.같은 날 또 다른 유격대 2백50여명이 강원도 동해안으로 침투했다.이 부대들은 뒷날 북한 정규군과 합류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다. 개전 다음날인 6월26일 김일성 군사위원회 위원장은 평양방송을 통해 「해방전쟁」승리를 위해 남한 주민들은 총궐기해야 한다고 호소했다.특히 「남반부 남녀 빨치산」에는 더욱 강력한 주문을 했다.곧 『해방구를 확대·창설해 적의 배후를 공격,소탕하라』고 촉구했다.구체적으로는 『적의 참모부를 습격하고 철도·도로·교량과 전신·전화선등을 절단,파괴하고 도처에서 반역자를 처단하며 인민위원회를 복구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민중봉기」를 염두에 둔 김일성의 이같은 요구는 당시 남한실정을 전혀 모르는 데서 나온 것이었다.김일성의 기대에 찬 독촉이 쉴새없이 방송됐지만 어느 곳에서도 민중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전쟁이 일어나면 남한에서 20만 지하당원들이 민중을 이끌고 호응할 것』이라는 박헌영의 호언장담은 무산됐다. 물론 일부 지방에서는 빨치산의 파괴활동이 벌어졌다.가장 널리 알려진 빨치산부대인 지리산 이현상부대는 8월10일 대구 주변인 달성군 가창면에 있는 미군통신부대를 기습,미군 20여명을 살상하고 무전기 14대,소총 20정을 빼앗아갔다.이들은 8월25일에는 경남 거창 미군사령부를 습격,1백여명의 인명피해를 낸 뒤 탱크 3대,화물차 30여대를 부쉈다.9월6일에는 경북 청도에서 북한군과 합동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밖에 경남 백운산유격대,경북의 배철이 지휘한 유격대,전남 빨치산,남해안유격대들이 미 공군기지를 점령하거나 경찰과 전투를 벌였고 마을 청년들을 끌고가 빨치산에 편입시키기도 했다.또 북한군 점령지역에 인민위원회를 조직할 때는 적극 나서 북에서 내려온 공산당원들을 도왔다. 하지만 이같은 활동은 전쟁 흐름에 영향을 미치기에는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다.박헌영·김일성의 기대와는 달리 빨치산은 민중과 괴리돼 있어 힘을 쓰지 못했다.게다가 전쟁전 한국정부가 꾸준히 소탕작전을 벌여 기본조직을무너뜨린 것이 빨치산 세력약화에 결정적 요소가 됐다. 빨치산은 유엔군의 총반격으로 북한군이 밀리면서 뿌리잘린 풀잎처럼 역사의 틈바구니를 떠돈다.북한군이 38선 이북으로 쫓겨간 10월 8일 북한 노동당 정치국 군사위원회는 남한 각 지방당 조직에 『(북한군의)조직적인 후퇴를 보장하기 위해 각 도당이 책임지고 유격대를 조직하라』고 지시했다.김일성도 이틀 뒤 방송에서 전세가 불리해 「전략적으로」후퇴하니 빨치산은 뒤에서 유엔군의 발목을 잡아 북진 속도를 늦추라고 강조했다.이를 위해 ▲당을 지하당으로 개편할 것 ▲유엔군이 이용할만한 요소를 모두 제거하고 군사시설은 파괴할 것 ▲입산경험자와 입산이 가능한 자는 산으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남강원도로 후퇴할 것등을 명령했다. 이에 따라 빨치산은 지역별로 유격대를 재편성,산악지대에 들어갔다.이들은 나중에 완전 소탕될 때까지 산을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남기 위한」처절한 투쟁을 벌여야만 했다.당시 입산자들은 민청원·자위대원등 남로당 계열과 북에서 파견한 내무서원·정치보위부원·정치공작대원이 대부분이고 후퇴하지 못한 북한군도 적잖게 끼어 있었다. ○이승엽 당정 총 지휘 북한군이 후퇴하자 지리산 이현상 부대는 잠시 지리산으로 돌아왔다 달아나는 북한군을 따라 북으로 갔다.1950년 11월 강원도 평강군 후평리에는 이현상부대를 비롯해 다른 곳에서 도망해온 빨치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이곳에는 당시 남한내 당·정을 총지휘한 이승엽이 기다리고 있었다.이승엽은 이곳에 모인 빨치산으로 「남조선인민유격대」를 조직해 이현상을 부대장으로,여운철을 정치위원으로 삼았다.이때 새로 편성된 이현상부대는 직속부대원 1백50여명 말고도 승리사단 4백여명,혁명지대 1백여명,인민여단 1백50여명등으로 구성됐다. 이현상 부대는 지리산을 본거지로 정하고 남하했다.먼저 태백산맥을 타고 1950년 12월 말쯤 충북 단양에 이르러 문경경찰서를 기습하는등 유격전을 벌였다.다시 속리산을 거쳐 덕유산에 이르러서는 남한내 6개 도당 대표자회의를 소집했다.이 자리에서 빨치산은남부군을 결성,통일된 지휘체제를 구성했다.이현상이 총사령관을,이영회가 부사령관을 맡았다. 이후 빨치산은 북한 노동당의 지시에 따라 남부군을 해체하고 6개 유격지대 체제로 바꾸는등 여러차례 조직개편을 했다.또 북한에서 지도부와 북한군을 남파하는등 안간힘을 썼고 가끔 경찰서·열차를 습격하지만 큰 성과는 올리지 못했다. 38선 일대에서 전선이 고착된 1951년 11월 말 한국 정부는 토벌전투사령부를 전북 남원에 설치,빨치산 소탕에 적극 나서 영호남 일대 빨치산은 치명타를 입고 지리산으로 모여들었다.이후 거듭되는 토벌작전에 몰린 빨치산은 「보급투쟁」이란 명목으로 산간마을에서 생필품을 약탈하는 것으로 겨우 명맥을 이어갔다. ○지도자 대부분 피살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체결된 것은 남한내 빨치산에겐 사형선고와 같았다.박헌영·이승엽을 비롯한 남로당계 간부들이 대부분 숙청되면서 빨치산은 북한정권에서 버림받게 된다.휴전협정에서도 빨치산의 지위에 관한 규정은 전혀 없어 이들에게는 북으로 돌아갈 길마저 막혔다. 1953년 4월 북한 노동당의 남로당계 숙청계획에 따라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은 평당원으로 강등됐다.8월에는 이현상이 지리산 빗장골에서 토벌대에 사살됐다.54년 초 김지회·이영회부대가 각각 전멸당하고 빨치산의 마지막 지도자 남도부가 대구에서 체포돼 남한 빨치산은 사실상 소멸됐다.한국정부의 기록에는 1954∼5년에도 「공비 출현,소탕」사실이 가끔 등장한다. 1956년 7월13일 전북 정읍에서 「공비 1명 사살,2명 생포」를 끝으로 빨치산은 정부기록에서 사라졌다. 빨치산은 조선노동당의 혁명전략 계획에 따라 조직돼 활동한 집단이었다.이들의 투쟁은 민족사에 아무런 의미도 남기지 못했다.결국 빨치산은 공산주의가 이 땅에 남긴 역사적 범죄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그러나 빨치산이 남긴 상처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 여러 형태로 잠복해 남아 있다. ◎「빨치산 신문」 한국전중 10여종 발행/남부군 「승리의 길」 등 타블로이드판 지면 대부분 전투원 선동­선무 할애 우리 학계의 빨치산 연구는 매우 미약하다.그동안 「빨치산」이란 말조차 금기처럼 여겨온 사회 분위기에 비추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따라서 현재 남아 있는 관련자료는 이우태씨(필명 이태)의 「남부군」을 비롯한 수기 3∼4종에 불과하다. 이같은 현실에서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워싱턴 미국립공문서 보존관리국(NARA)에서 빨치산이 한국전쟁 발발이후 간행한 신문 10여종을 찾아냈다.국내 처음으로 공개되는 이 빨치산신문들은 그들의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따라서 학계는 이 신문들이 빨치산연구에 큰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이 1951년 5월5일자로 발행한 「승리의 길」10호는 타블로이드판 한장에 양면으로 기사를 실었다.앞면 머리기사는 「총사령관 로명선」이 쓴 「5·1절을 맞으면서」란 논설.『5월1일은 전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력량과 국제적 단결을 시위하는 날』이란 의미 부여와 함께 그 내력을 소개하고 『남부군 전체 군무자 동무들』의 분발을 촉구했다.또 신문 사고의 형태로 『남부군 산하 각부대들이 3월21일부터 4월14일까지 수안보·칠성·청천·봉화·립석을 공격하여 이를 해방시켰다』고 전했다.아울러 「적 사살 1백25명,부상 30명,포로 48명,각종 무기 37정,탄약 2천2백37발」등의 전과를 올렸다고 보도했다. 1951년 11월23일자 「승리의 길」27호에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4차 전원회의에서 진술한 김일성의 보고를 실었다. 이밖에 빨치산 신문들은 많은 지면을 전투원 선동에 할애 했다.즉 『용감하고 귀중한 빨치산들이여,적들의 지휘처와 참모부를 기습 소탕하며 기동력을 마비시키는 투쟁을 더욱 과감히 전개하라』『리승만의 반동적 지방의회선거를 철저히 파탄 분쇄하자』는 등으로 채웠다.이따금 이명제의 서사시 「정복되지 않은 사람들」(29호)따위 문학작품이나 감상문,외신,전투실기,정찰기,여순병란 회고기등도 실었다.
  • 수단­에티오피아 무력충돌 조짐

    ◎접경지역 병력 집결… 최고 경계령 선포 【카이로 연합】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암살미수 사건을 계기로 악화돼온 에티오피아·수단관계가 양국간 무력충돌 위기로까지 비화되고 있다고 이집트 언론들이 21일 보도했다. 이집트 관영 중동통신(MENA)은 이날 아디스아바바의 외교 소식통들을 인용,수단이 최근 에티오피아 접경지역에 대규모 기계화 보병부대를 배치했으며 에티오피아는 이에맞서 중화기부대에 최고 경계령을 내렸다고 전했다. 이들 소식통은 또 양국 국경지대에서 병력이동이 관측됐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다. 이와관련,에티오피아에서 발행되는 「엑스프레스」지는 한 서방 관리를 인용,수단이 현재의 역내 균형을 깨기위한 계획의 일환으로 에티오피아 반군에 군사기지를 제공하고 있다고 전했다. 반면 에티오피아는 수단의 현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우간다·에리트리아와 공동전선을 구성,긴밀히 협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함께 에티오피아측은 수단정부 전복활동을 재개할수 있도록 수단 반군 지도자 존 가랑이 이끄는수단인민해방군 고위간부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고 서방 관리들이 말했다. 에티오피아는 지난 6월26일 발생한 무바라크 이집트대통령 암살 미수사건이 수단정부의 배후조종에 의한 것이라고 판단,범행 가담자 3명의 인도를 요구하며 수단외교관들에 대한 추방결정을 내림에 따라 양국관계가 급속히 냉각돼왔다.
  • 이우근씨 등 6명 밤샘조사/검찰

    ◎「3백억 차명계좌」 개설경위·전주 추궁/신한은 등 7곳 압수수색/입출금 내역·수표발행­배서인 추적/“전주 확인 다소 시간 걸릴듯”­안 중수부장 신한은행에 예치된 3백억원의 차명계좌 확인에 나선 대검중수부(안강민 검사장)는 21일 이우근 전신한은행 서소문지점장(53·현 이사대우 융자지원 부장)과 우일양행 전대표 하범수씨(67),하씨의 아들인 우일종합물류대표 종욱씨(41),이화구 전 서소문지점 차장(현 역촌동 출장소장),김신섭 경기 용인 수지지점차장 등 6명을 불러 밤샘조사를 벌였다. 검찰은 이전지점장 등을 상대로 3백여억원의 차명계좌를 개설한 경위및 이 돈을 맡긴 40대 남자,실제 전주 등에 대해 집중추궁했다. 이전지점장은 검찰에서 『92년 11월부터 93년 2월까지 40대 남자가 찾아와 3백억원을 맡기며 차명계좌 3개를 마련해달라고 부탁해 차명계좌를 만들어 돈을 예치했으나 이 남자가 자신의 신분노출을 한사코 거부하는 바람에 이 사람이 누구인지,배후에 누가 있는지 모른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범수씨도 『본인이 경영하던 우일양행 명의로 거액이 입금됐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다』고 말했다. 안중수부장은 『전주를 확인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말해 수사의 장기화 가능성도 내비쳤다. 또 다른 검찰관계자는 『문제의 3백억원은 노태우 전대통령의 돈과는 무관한 것 같다』고 말했다. 검찰은 이날 신한은행 본점 전산부와 서소문지점,동화은행 본점 영업부와 전산부,상업은행 본점 전산부와 효자동지점 등 모두 7곳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신한은행 서소문지점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92년 11월부터 93년2월사이 90억∼1백10억원씩 각각 입금된 3개 차명계좌와 관련된 마이크로필름과 입출금 내역등이 담긴 관련 자료 일체를 확보해 정밀분석하고 있다. 검찰은 이전지점장등 3명을 고발한 나응찬 신한은행장도 고발인이나 참고인자격으로 불러 조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검찰은 이날 은행등에서 압수한 차명계좌 관련자료를 토대로 입금당시 1억∼10억원짜리 자기앞수표의 발행은행 및 배서인등에 대한 추적작업도 벌이고 있다. 한편 검찰은 이날 김 수지지점차장 등 4명도 출국금지시켜 출국금지자는 전날 출국금지한 이전지점장을 포함,모두 7명으로 늘어났다. ◎탈세혐의 드러나면 세무조사 실시키로/국세청 국세청은 신한은행 서소문 지점의 3백억원 차명계좌와 관련,『검찰의 조사가 진행중인 만큼 당장 세무조사를 실시할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국세청은 그러나 3백억원의 차명계좌 등에 대한 검찰의 조사가 마무리 되고 탈세혐의가 드러나면 그때 세무조사에 착수할 방침이라고 덧붙였다. 국세청 고위 관계자는 21일 『전직 대통령의 거액 비자금보유설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진행 중이어서 현재로서는 수사진행 상황을 지켜보며 관련자들에 대한 기초자료를 모으고 있는 단계』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검찰수사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세무조사를 병행하지 않는 것은 국세청의 오랜 관행』이라면서 『그러나 검찰에서 자금추적 등과 관련해 협조를 의뢰해오면 업무협조 차원에서 직원들을 파견할 수는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계좌공개 3명 고발/신한은 은행감독원은 신한은행 서소문지점에 개설된 (주)우일양행 명의의 계좌가 공개된 것과 관련,신한은행의 이우근 이사대우 융자지원부장(전 서소문지점장)과 김신섭 수지지점 차장(전 서소문지점 대리),하종욱 우일종합물류(주) 대표 등 3명을 금융실명제 긴급명령 위반혐의로 검찰에 고발토록 신한은행에 지시했다. 김무길 은행감독원 검사6국장은 21일 기자회견을 갖고 『20일 하오 7시부터 21일 상오 5시까지 신한은행 서소문지점과 본점 전산실,수지지점 및 이이사대우와 김차장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이들과 하씨가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 재정경제명령을 위반한 것으로 확인돼 고발했다』고 발표했다. 김차장은 지난 92년 3월∼94년 12월 서소문지점에 근무할 때 알고 지내던 하씨의 요청에 따라 지난 17일 명의인인 (주)우일양행의 서면 요구나 동의없이 「보통·저축·자유저축 예금 조회표」를 빼내 하씨에게 건네 준 것으로 밝혀졌다. 또 이이사는 92년 11월부터 93년 2월까지 3차례에 걸쳐 40대 남자로부터 3백억원을 받아 차명계좌로 입금한 뒤 이 계좌가 지난 7월까지 실명전환되지 않은 채 서소문지점에 예치돼 있으며 최광문씨 계좌에는 일부가 인출돼 현재 잔고가 30억∼40억원정도라는 사실을 공개해 역시 긴급명령의 금융거래 비밀조항을 위반했다.
  • DJ 민중봉기 조종/5·18은 그 대응조치/전두환씨 주장

    전두환 전대통령은 지난 7월 검찰에 제출한 5·18 답변서에서 『5·18은 김대중씨가 조종한 민중봉기에 대한 대응조치였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19일 발행된 월간조선 11월호에 따르면 전전대통령은 비공개 답변서에서 『김대중씨가 당시 공동의장으로 있던 국민연합에 복학생등을 중용하는등 학생시위를 배후조종,정부 전복을 기도했기 때문에 최규하대통령이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내렸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전씨측은 『월간지 보도내용이 답변내용의 전부는 아니다』라고 밝혔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