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배웅
    2026-06-29
    검색기록 지우기
  • 25명
    2026-06-29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753
  • [진우석의 걷기좋은 산길] (12) 남해 금산 상주리~상사바위

    [진우석의 걷기좋은 산길] (12) 남해 금산 상주리~상사바위

    지리산의 옆구리를 스쳐 바다를 향해 숨가쁘게 달려가던 섬진강이 잠시 쉬었다 가는 곳이 있다. 남쪽 바다에 문을 여는 섬, 그래서 이름도 그냥 남해다. 남해를 한 바퀴 돈 섬진강은 금산의 배웅을 받고서야 비로소 망망대해로 떠나간다. 남해 금산은 먼바다를 바라보며 그렇게 우뚝 서 있다. 이름에서부터 바다 냄새가 풀풀 나는 남해 금산을 오르는 길은 19번 국도가 지나가는 상주리 금산탐방안내소 쪽이 좋다. 금산 북쪽 복곡탐방안내소 쪽은 보리암 근처까지 도로가 나 있어 걷는 맛이 없기 때문이다. 금산탐방안내소에서 보리암까지는 거친 돌길이지만, 뒤를 돌아보면 눈부신 바다를 만날 수 있다. 보리암부터는 순한 길을 따라 느긋하게 기암괴석과 봄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을 만끽해 보자. ●칡차 파는 행상도 써붙인 시 ‘남해 금산’ 남해에서 두 번째로 높은 금산(錦山·681m)은 대부분 사람들이 금산이라 부르지 않고 꼭 ‘남해 금산’으로 부른다. ‘남해’라는 발음에서 눈부신 바다가 떠오르고, ‘금산’이란 말에서 느닷없이 솟구친 산을 그려보기 때문이다. 물론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로 시작하는 이성복의 시 ‘남해 금산’의 유명세도 그 이름이 굳어지는 데에 한몫을 했다. 이 시는 한때 금산에서 칡차를 파는 젊은 행상이 가판에 써 붙였을 정도로 유명했다. 산행은 상주 매표소 앞에서 금산을 올려다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산마루에는 바위들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는데, 하나같이 고개를 들어 먼바다를 바라보는 듯하다. 휘파람 절로 나는 호젓한 숲길이 돌계단으로 바뀌면서 숨이 가쁘다. 뒤를 돌아보니 일렁이는 미조 앞바다가 금산의 발목을 적시고 있다. 그렇게 바다를 바라보며 두어 번 쉬다 보면 거대한 바위가 길을 가로막는다. 꼭 손기정 옹이 마라톤으로 올림픽을 제패하고 받았던 그리스 투구처럼 생겼다. 이름은 쌍홍문, 길은 왼쪽 구멍 안으로 나 있다. 바위굴이 뿜어내는 서늘한 기운에 마음을 다잡고 통과하니 보리암이다. 보리암은 동해의 낙산사 홍련암과 서해 강화도 보문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이다. 금산의 본래 이름은 이 암자에서 나왔다. 683년 원효대사가 보리암 자리에 보광사(寶光寺)를 지으며 산 이름도 보광산이 되었다.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중생을 구하는 관세음보살이 있는 보광궁의 뜻을 담은 것이다. ●먼바다 굽어보는 관세음보살의 미소 “이 땅의 왕이 되겠습니다.” 그 옛날 이성계 역시 이곳에서 간절한 백일기도를 올렸다. 자신이 왕이 된다면 그 보답으로 산을 비단으로 두르겠다고 굳게 약속한다. 조선이 건국되자 이성계는 정말로 산을 비단으로 덮으라는 명을 내린다. 하지만 신하들이 도저히 그렇게는 할 수 없으니 차라리 이름을 바꾸자는 상소문을 올린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산 이름이 보광산에서 금산으로 바뀌었다.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들이 보리암 앞마당의 해수 관세음보살상에 연방 절을 올린다. 그들의 간절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관세음보살은 입가에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남해 먼바다를 굽어보고 있다. 보리암을 지나 돌계단을 좀 더 오르면 금산 정상이다. 봉수대가 있는 정상의 조망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정상에서 내려와 저두암과 코끼리바위 아래 있는 금산산장을 지나면 가장 풍광이 빼어난 상사바위다. 이곳은 아찔한 낭떠러지다. 상사병으로 죽은 머슴의 혼백이 뱀이 되어 주인집 딸의 몸을 칭칭 동여맸다가 이곳에서 한을 풀고 벼랑 아래로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내려오는 곳이다. 어쩌면 이성복은 상사바위에서 시의 모티브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이성복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남해 금산은 실연의 산이다. 그는 금산의 아름다운 기암괴석에 슬픈 염원이 담겨 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상상의 날개를 펼치고 그것을 사랑 노래로 신비롭게 풀어낸 것이다. 금산에서 남해를 바라보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자신만의 염원을 품게 마련이다. 아련하게 일렁거리는 먼바다는 그 염원을 반드시 들어줄 것 같다. 상사바위의 벼랑 쪽으로 한 발짝 나아가자 환하고 눈부신 봄바다가 울컥 밀려온다. 금산탐방안내소를 들머리로 쌍홍문~보리암~정상~상사바위~제석봉을 거쳐 원점회귀하는 코스는 약 5㎞, 3시간가량 걸린다. ●가는 길과 맛집 승용차는 대전통영고속도로 진주인터체인지(IC)에서 남해고속도로로 갈아타고 사천IC에서 빠져나온 뒤 3번 국도를 따라가면 창선~삼천포대교와 만난다. 남해대교로 가려면 진교IC로 나와 19번 국도를 따라가면 된다. 서울 남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오전 8시부터 하루 6차례 고속버스가 운행되며 소요시간은 4시간30분 정도. 남해의 먹거리는 미조항의 갈치회와 멸치회가 유명하다. 삼현식당(055-867-6498)과 공주식당(055-86 7 -6728)은 단골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산행 중에는 금산산장(055-862-6060)에서 산채정식을 맛볼 수 있다. 산악전문작가
  • 李대통령 ‘취임식 넥타이’ 매고 새출발

    李대통령 ‘취임식 넥타이’ 매고 새출발

    이명박 대통령은 25일 “지난 1년을 교훈삼아 심기일전의 자세로 일하자.”며 “지난 1년에 묶여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5년 국정 운영의 결과로 평가받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취임 1주년을 맞은 이날 확대비서관 회의를 주재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지난 1년의 소회와 앞으로의 다짐을 밝힌 셈이다. 이 대통령은 “지난 1년은 소중한 한 해였고 정말 열심히 일했지만 실수도 있었고 시행착오도 있었다.”면서 “중요한 것은 같은 실수를 두번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비판은 겸허하게 수용하고 다양한 여론을 경청하되 일희일비하거나 좌고우면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추진해야 할 일은 일부의 반대가 있더라도 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날 고흥길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장은 미디어법을 직권 상정했다. 이 대통령은 “3~4년 후 다른 국가들로부터 대한민국이 여러 악조건을 뚫고 선진 일류국가로 도약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돼야 한다.”면서 “그것이 나의 꿈이며 동시에 여러분이 꿈꾸는 것이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대통령 취임 1주년인 이날 청와대는 하루종일 차분한 분위기였다. 비상경제 시기임을 감안해 특별한 자축 이벤트도 없었다. 이 대통령은 이날 평소보다 다소 늦은 오전 8시10분쯤 청와대 경내 관저에서 부인 김윤옥 여사의 배웅을 받으며 본관으로 출근했다. 정확히 1년 전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취임식 때 맸던 옅은 색 옥색 넥타이를 착용했다. 취임 당시의 ‘초심’으로 돌아가 새 출발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대통령은 오전 10시쯤 집무실이 있는 여민관으로 이동, 확대비서관 회의를 주재했다. 이 대통령은 참석자들과 구내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함께 하는 것으로 조촐한 1주년 기념행사를 대신했다. 이종락기자 jrlee@seoul.co.kr
  • 軍 기피? 김태우처럼 헹가래 받아라!

    軍 기피? 김태우처럼 헹가래 받아라!

    god 출신 가수 김태우(28)의 전역 현장에는 이제껏 어떤 연예인의 선례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이색적인 진풍경이 펼쳐졌다. 25일 오전 9시경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에 위치한 27사단 이기자부대 수색대대에서 현역병으로 만기 전역한 김태우에 대한 환송식은 현장의 취재진들을 놀라게 할 정도였다. [ 배웅하는 슬픔과 마중나온 기쁨이 교차된 현장] 지금껏 역대 연예인들의 전역 사례 중 100여명의 부대원들이 자진 소집돼 작별 행렬을 이룬 사례는 없었다. 또 군생활을 함께한 부대원들이 일제히 나와 멋진 헹가래를 치뤄준 일도 전무했다. 한결 같이 그를 기다린 팬들의 사랑도 대단했다. 군부대 위치가 강원도 깊숙한 산자락에 위치해 있음에도 불구, 오전 일찍 총 3대의 대형 버스를 동원해 군부대를 찾은 팬클럽 회원들은 ‘곰의 귀환’이라는 현수막을 들고 그를 연호했다. 현장의 열기가 지난 2년간 누구보다 성실했던 그의 군생활을 입증해 주는 듯 했다. 이 같이 김태우가 헹가래 받고 군부대를 떠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전역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그가 남긴 인상적인 발언을 통해 그 진짜 이유를 엿볼 수 있었다. ◆ 겸손한 태우씨 “연예사병과 일반병사, 똑같이 힘들다” 연예 사병이 아닌 일반병사로 자원해 화제가 됐던 부분에 대해 김태우는 되려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을 보였다. 직무에만 차이가 있을 뿐 군인이라면 누구나 똑같이 힘들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는 “연예사병들도 국방홍보대사로서 최선을 다하며 똑같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힘들어 하고 있다. 절대 그분들이 편하게 군생활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고 전했다. “수색대 전역, 특별한 일 아닌데…” 김태우는 자신의 평범했던 군생활이 단지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부풀려 보도되는 것에 대한 우려를 드러냈다. 그는 “특별히 잘난 것도 없어 그저 열심히 했다. 특별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군생활을 한 것 뿐인데 지휘관들이 예쁘게 보셔서 상까지 주시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멋쩍어 했다. ◆ 재치 넘치는 태우씨 “우리 수색대는 외모도 본다” 김태우를 응원온 ‘소울 트레인(Soul Train) 팬클럽이 다른 장병들에게 응원의 환호를 보내자 “팬들과 현역병들의 미팅을 주선해 보는 것이 어떠냐?”는 질문에 “사실 우리 수색대는 외모도 본다.”며 “미팅에 나가면 인기가 많을 것”이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나도 꽃남과 소녀시대를 좋아한다.” 김태우는 군생활에서 TV 시청을 하면서 KBS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애청자가 됐으며 걸그룹인 소녀시대의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봤다고 고백했다. 그는 “드라마는 군대에 와서 보게 됐는데 특히 ‘꽃보다 남자’를 잘 보고 있으며 ‘소녀시대’가 군 생활에 큰 힘이 됐다.”고 말해 현 연예계 트렌드를 놓치지 않고 있는 모습을 보였다. ◆ 믿음직한 태우씨 “군대 특이한 집단, 많은 점 배울 수 있다.” 김태우가 군대를 일컬어 ‘특이한 집단’이라고 정의하며 “입대 전 사회에서 무얼 했던 간에 상관없이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처음에는 나이가 많아서 다를 꺼라 예상했지만 나 역시 다를 병사들과 똑같이 각 계급마다 같은 생각을 하게 됐다. 많은 경험을 하면서 많은 점을 배울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병역기피?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전역 현장에서 김태우가 남긴 최고의 명언이었다. 연예인들의 병역기피가 공공연한 사회적 현상의 하나로 자리잡아 가는 가운데 이를 정통으로 꼬집은 김태우의 뼈 있는 한마디에 박수가 터져 나왔다. 김태우는 “긍정적인 생각의 전환으로 군생활의 많은 점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배웠다.”며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라는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병역을 기피하기 보다 보다 떳떳하게 군생활에 임하며 인생에 있어 좋은 계기를 얻어 가셨으면 좋겠다.”는 조언을 건넸다. 한편 지난 2007년 3월20일 입대 후 약 2년 만에 군복을 벗은 김태우는 전역 당일인 오늘(25일) 오후 5시 청담아트홀에서 팬들과 첫 만남을 가진 후 미니콘서트를 열어 변치 않은 노래 실력을 과시할 계획이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소속사 측은 “4월 두 곡을 담은 디지털 싱글을 발표하고 오는 7월에는 정규 음반으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서울신문NTN(강원 화천) 최정주 기자 joojoo@seoulntn.com / 사진=한윤종 기자@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굿바이’, 아카데미 외국어상…국내 재개봉 준비

    ‘굿바이’, 아카데미 외국어상…국내 재개봉 준비

    초보 납관 도우미의 마지막 배웅에 대한 스토리를 그린 일본 영화 ‘굿’바이: Good&Bye’(이하 굿바이)가 제 81회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다. 일본 영화계 뿐만 아니라 국내 극장가에도 큰 감동을 선사했던 ‘굿바이’가 지난 22일(현지시간)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해 다시 한 번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이번 외국어 영화상에는 ‘바더 마인호프 콤플렉스’(독일) ‘더 클래스’(프랑스) ‘복수’(오스트리아) ‘바시르와 왈츠를’(이스라엘) 등 총 67편의 쟁쟁한 출품작들이 경합을 벌였다. 이 영화는 이미 제 32회 몬트리올 영화제에서 최고 영예인 그랑프리 수상은 물론 2008년 제 17회 중국 금계백화 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 최우수 감독상, 남우 주연상을 거머쥐는 등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메가폰을 잡은 다키타 요지로 감독은 “영화를 도와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다. 내게 새로운 출발이다. 아카데미에 다시 돌아오길 바란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고인(故人)의 마지막 순간을 가장 아름답게 배웅하는 ‘납관’이라는 신선한 소재를 통해 영원한 이별을 밝고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내 웃음과 감동을 선사한 ‘굿바이’. 아카데미 수상의 쾌거와 함께 재개봉도 준비하고 있어 국내 관객들에게 다시 한 번 진한 감동을 선사할 것으로 기대된다. 서울신문NTN 이현경 기자 steady101@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우리들의 바보’ 잠들다] 이명박 대통령 추도사

    오늘 우리는 이 나라를 지탱해 온 큰 기둥이셨고, 우리의 나아갈 길을 가르쳐 주신 큰 어른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하려고 합니다. 추기경님의 선종을 온 국민과 함께 깊이 애도합니다. 작년 성탄절 날 저희 부부가 찾아뵙고 여러 말씀을 나눌 수 있었는데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 몰랐습니다. 힘들어 찾아뵐 때마다 기도해 주시고 용기와 격려를 불어넣어 주신 추기경님의 숨결을 지금도 느낄 수 있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가톨릭계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지도자로서 항상 병든 자, 가난한 자, 약한 자와 함께하셨습니다. 산업화 시대에는 소외된 노동자들 편에서 불의와 부정에 맞서 정의를 말씀하고 행동하셨고, 민주화시대에는 국민의 편에서 권위주의에 맞서 정권의 압박을 온몸으로 막아내셨습니다. ‘네 편 아니면 내 편’이라는 이분법이 팽배한 요즘에는 타인을 존중하고 마음을 열고 대화할 것을 가르치셨고, 그러면서도 원칙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권력이 오만해지거나 부패할 때에는 준엄히 꾸짖으셨고, 시류에 휩쓸려 흔들릴 때에는 가야 할 바른 길을 일러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서 소중한 분을 데려가시면서 우리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변화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추기경님이 남기고 간 뜻을 받들어 서로 사랑합시다. 추기경님은 우리 곁을 떠나지만 우리 마음 속에 영원히 함께할 것입니다.
  • “그래도 이땅에 계십니다”

    “그래도 이땅에 계십니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 목자 김수환 추기경이 세상의 삶을 마무리하고 하느님 앞의 영원한 삶을 시작했다. 20일 오전 9시 서울 명동성당. 어제 내린 눈, 비는 흔적이 없고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환히 밝히기라도 하듯 성당을 감싼 하늘이 청정하기만 하다. 이른 아침부터 모여든 신자와 시민이 성당 정문부터 들머리, 대성당 입구를 가득 메워 발디딜 틈이 없다. 밤사이 손이 시릴 만큼 쌀쌀했던 날씨마저도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려는 정성의 물결엔 주눅이 들었다. 입당 성가로 시작된 장례미사에서 김 추기경은 신자석을 향해 누운 채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소박하게 치러달라.’는 김추기경의 뜻을 따라 일상 그대로 진행되는 미사의 의식들. 하느님이 고인을 평화와 빛으로 불러주시기를 청하는 기도와 말씀전례. 그리고 이어진 ‘가장 보잘 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베푸는 사랑이 곧 하느님께 드리는 사랑이 된다.’는 복음은 김 추기경이 생전 즐겨 읽고 인용한 말씀. 성당 곳곳에 흐느낌의 파도가 인다. 성찬전례에 이어 주교단과 유족이 일일이 김 추기경을 돌아 올리는 영성체 예식, 그리고 고별사가 이어졌다. “세상살이가 어려운 시기에 추기경님의 떠나심이 더욱 안타깝고 우리 모두를 불안하게 합니다.”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바보 웃음의 향기에 취하게 하소서.” 떠난 님의 사랑과 나눔의 큰 뜻을 잊지 않겠다는, 남겨진 사람들의 마지막 인사들을 고인은 듣고 있을까. 두 시간 만에 미사가 끝나고 성당 북쪽 문을 통해 서울대교구의 가장 젊은 사제 8명이 운구를 시작하자 구름처럼 모여 있던 신자와 수녀들이 일제히 성호를 긋고 기도를 올린다. 운구차량이 서서히 성당을 벗어나자 아쉬운 듯 뒤를 따르며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는 울음이 명동을 뒤덮는다. 때마침 성당에서 울려퍼지는 33번의 종소리. 추기경은 이제 더 이상 이 종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용인공원 성직자 묘역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1시간20분가량. 남산1호터널과 한남대교를 지나 경부고속도로에 들기까지 길가 곳곳에서 손을 흔들거나 성호를 긋는 시민들을 그저 무심하게 지나치는 운구차량 행렬이 매몰차게 느껴진다. 묘역에 다다라 가파른 언덕을 오르자니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과 성모 마리아상 사이, 첫 한국인 주교이자 서울교구장인 노기남 대주교의 묘 바로 옆에 준비된 추기경의 자리가 눈에 든다. 기다리던 신도들의 찬송과 기도, 산에서 울려퍼지는 정진석 추기경의 축복에 이어 하관이 있자 울음과 기도가 바람에 섞인다. 이제 정말로 추기경을 보내야 한다. 주교단과 수도자, 유족 대표가 관 위에 흙을 덮자 참례자들이 입을 모아 위령 성가를 부른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목마른 사람은 내게 오라. 무거운 짐진 자 멍에 벗겨주고 영원한 생명을 네게 주리.’ 김 추기경의 영원한 삶은 그렇게 시작됐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우리들의 바보’ 잠들다] “아! 스테파노님” 1만8000여 추모객 하늘길 배웅

    [‘우리들의 바보’ 잠들다] “아! 스테파노님” 1만8000여 추모객 하늘길 배웅

    “추기경님 사랑합니다. 잘 가세요.” 흐느낌은 통곡으로 변했다. 안타까운 조문객들은 운구차라도 만져보려 손을 뻗었다.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식이 치러진 20일 오전 11시40분. 장례미사를 마치고 김 추기경을 실은 관이 대성전을 빠져나왔다. 앞장선 십자가에 영정이 뒤따랐다. 서울대교구의 가장 젊은 사제 8명이 관을 들었다. 명동성당 하늘 위로 조종(弔鐘)이 울려퍼졌다. 김수환 추기경은 그렇게 떠났다. 오전 10시부터 명동성당 대성전에서 진행된 장례미사에는 1만여명이 참석했다. 성당 안에 들어가지 못한 8000여명의 시민들은 대형 스크린을 통해 생중계되는 미사를 바라봤다. 정진석 추기경이 교황 특사 자격으로 집전한 장례미사는 기도 후 성수를 세 번 뿌리는 의식으로 시작됐다. 정 추기경은 “‘고맙습니다, 사랑하십시오.’라는 김 추기경의 유언처럼 감사와 사랑과 용서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전 10시50분쯤 참석자들이 줄지어 영성체를 받는 성찬전례가 고요하고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이뤄졌다. 오전 11시5분부터는 교황 베네딕토 16세, 강우일 주교, 이명박 대통령 등 각계의 고별사가 이어졌다. 고별사 낭독이 시작되자 고요했던 대성전 안팎에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김 추기경의 관이 성당을 빠져나오자 흐느낌은 절정을 이뤘다. 신부들이 관을 들고 대성전을 나와 운구차가 대기해 있는 성당 앞 마당으로 이동하자 추모객들은 “추기경님, 사랑합니다.”라고 울먹이며 고개를 숙였다. 일부 신자들은 성호를 긋고 하얀 미사포를 벗어 흔들며 김 추기경의 마지막 가는 길을 아쉬워했다. 운구 차량은 오후 1시15분쯤 경기 용인 성직자묘지에 도착했다. 2000여명의 추도객이 운집한 가운데 하관예식이 진행됐다. 정 추기경이 기도를 한 뒤 관에 성수를 뿌렸고, 묘지관리원 6명이 광목 천으로 관을 내렸다. 추도객들의 입에서는 가톨릭 성가가 흘러나왔고,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관이 끝난 뒤 정 추기경이 다시 성수를 뿌렸고, 사회자의 선창에 따라 추도객들은 묵주기도를 올렸다. 흙을 덮는 순간이 되자 봉분 주변으로 주교들이 도열했다. 정 추기경이 성수를 뿌린 뒤 주교와 유족들, 김 추기경의 비서신부와 비서수녀가 성수를 이어 뿌렸다. 삽으로 흙을 뿌리는 의식도 같은 순서로 진행됐다. 유족들의 표정에서는 진한 슬픔이 배어나왔다. 오후 2시쯤 관은 흙속에 완전히 파묻혔다. 무덤 위에 놓여진 하얀 국화 몇 송이가 김 추기경의 하늘길을 마지막으로 배웅했다. 김민희 조은지기자 haru@seoul.co.kr
  • ‘우리들의 바보’ 영면하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 목자 김수환 추기경이 세상의 삶을 마무리하고 하느님 앞의 영원한 삶을 시작했다. 20일 오전 9시 서울 명동성당. 어제 내린 눈, 비는 흔적이 없고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환히 밝히기라도 하듯 성당을 감싼 하늘이 청정하기만 하다. 이른 아침부터 모여든 신자와 시민이 성당 정문부터 들머리, 대성당 입구를 가득 메워 발디딜 틈이 없다. 밤사이 손이 시릴 만큼 쌀쌀했던 날씨마저도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려는 정성의 물결엔 주눅이 들었다. 입당 성가로 시작된 장례미사에서 김 추기경은 신자석을 향해 누운 채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소박하게 치러달라.’는 김추기경의 뜻을 따라 일상 그대로 진행되는 미사의 의식들. 하느님이 고인을 평화와 빛으로 불러주시기를 청하는 기도와 말씀전례. 그리고 이어진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베푸는 사랑이 곧 하느님께 드리는 사랑이 된다.’는 복음은 김 추기경이 생전 즐겨 읽고 인용한 말씀. 성당 곳곳에 흐느낌의 파도가 인다. 성찬전례에 이어 주교단과 유족이 일일이 김 추기경을 돌아 올리는 영성체 예식, 그리고 고별사가 이어졌다. “세상살이가 어려운 시기에 추기경님의 떠나심이 더욱 안타깝고 우리 모두를 불안하게 합니다.”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바보 웃음의 향기에 취하게 하소서.” 떠난 님의 사랑과 나눔의 큰 뜻을 잊지 않겠다는, 남겨진 사람들의 마지막 인사들을 고인은 듣고 있을까. 두 시간 만에 미사가 끝나고 성당 북쪽 문을 통해 서울대교구의 가장 젊은 사제 8명이 운구를 시작하자 구름처럼 모여 있던 신자와 수녀들이 일제히 성호를 긋고 기도를 올린다. 운구차량이 서서히 성당을 벗어나자 아쉬운 듯 뒤를 따르며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는 울음이 명동을 뒤덮는다. 때마침 성당에서 울려퍼지는 33번의 종소리. 추기경은 이제 더 이상 이 종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용인공원 성직자 묘역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1시간20분가량. 남산1호터널과 한남대교를 지나 경부고속도로에 들기까지 길가 곳곳에서 손을 흔들거나 성호를 긋는 시민들을 그저 무심하게 지나치는 운구차량 행렬이 매몰차게 느껴진다. 묘역에 다다라 가파른 언덕을 오르자니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과 성모 마리아상 사이, 첫 한국인 주교이자 서울교구장인 노기남 대주교의 묘 바로 옆에 준비된 추기경의 자리가 눈에 든다. 기다리던 신도들의 찬송과 기도, 산에서 울려퍼지는 정진석 추기경의 축복에 이어 하관이 있자 울음과 기도가 바람에 섞인다. 이제 정말로 추기경을 보내야 한다. 주교단과 수도자, 유족 대표가 관 위에 흙을 덮자 참례자들이 입을 모아 위령 성가를 부른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목마른 사람은 내게 오라. 무거운 짐진 자 멍에 벗겨주고 영원한 생명을 네게 주리.’ 김 추기경의 영원한 삶은 그렇게 시작됐다. 글 / 서울신문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영상 / 서울신문 나우뉴스TV 손진호기자 nasturu@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낮은 곳 임하신 추기경님 따라 바보 되렵니다”

    “낮은 곳 임하신 추기경님 따라 바보 되렵니다”

    “이 세상 누구도 존중받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제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주목한 이유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고 싶어한 유명인사는 많았지만 정작 김 추기경이 만나려고 했던 사람은 다른 데 있었다. 철거민, 장애인, 이주노동자, 사형수 등 사회에서 소외된 ‘어린 양’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것도 항상 우선순위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자신들의 벗이었던 김 추기경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는 이들의 소회는 남다르다. ●철거민 김진홍(63·서울 도봉구)씨 “1987년 서울 상계동에서 강제철거를 당했다. 추기경님이 직접 오셔서 미사를 집전해 주시겠다고 했다. 그 사실을 안 조합 사람들이 그날 밤 미사 드릴 마당을 포클레인으로 파버렸다. 다음날 오전 도착한 추기경님은 ‘이대로 미사를 드리자.’고 하셨다. ‘가난한 철거민들의 삶은 하루하루가 급박하고 고달프다.’며 눈물을 보이시고는 우리를 불러 직접 발을 씻겨 주셨다.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노숙인 보호 활동가 서정기(62)씨 “경기 화성 바오로의 집에서 일하고 있다. 김 추기경은 1990년 크리스마스 이래 4년 동안 성탄 미사를 직접 집전해 주셨다. 그때 주변에 있는 노숙인들이 겨울에 많이 얼어 죽었다. 우리가 무료 급식소를 만들고 싶어 많이 노력했는데 추기경님이 당시 서울시장인 고건 전 국무총리에게 말씀해 주셔서 급식소를 만들 수 있었다. 우리는 추기경님이 좋은 곳으로 가셨다고 믿고 있다. 하늘에서도 우리들이 좋은 일을 할 수 있도록 계속 도와 주실 거다.” ●택시기사 이계천(64·서울 도봉구)씨 “어려운 사람이 더 어려운 사람을 돕자는 취지에서 1984년 택시기사들이 ‘가톨릭 운전기사 사도회’를 만들었다. 장애인을 위해 차량봉사도 하고, 집수리와 도배 봉사를 주로 했다. 그해 김 추기경님이 우리를 찾아 오셨다. ‘훌륭한 일을 한다.’면서 우리에게 ‘핸들 잡는 예수’라는 별명도 지어 주셨다. 1998년 내 아버지가 돌아 가시기 전 추기경님이 직접 찾아 와서 기도를 해 주셨다. ‘사람은 누구나 운명을 맞는다. 아버님은 고통없이 지금보다 더 좋은 곳으로 가 계실 것’이라는 얘기가 큰 위로가 됐다. ” ●지체장애자 김덕임(79·경기 파주)씨 “나는 1991년부터 ‘애덕의 집’이라는 지체장애인을 위한 시설에 살고 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지능이 낮아 말도 어눌하고 행동도 굼뜨다. 우리같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위해 추기경님은 1981년 이 시설이 생긴 이후부터 계속 방문해 주셨다. 맛있는 음식도 싸 오시고 우리와 스스럼없이 농담도 하셨다. 2005년에는 우리가 보고 싶다고 파주 근처까지 왔다가 도저히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차를 돌리신 적도 있다. 지금도 매달 후원금을 주신다. ‘항상 착하게 살아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을 항상 새기며 살고 있다.” 최재헌 박성국기자 goseoul@seoul.co.kr
  • [오바마정부 출범] 민간인 부시… 8년만의 귀거래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20일(현지시간) 8년 동안의 보금자리였던 백악관을 떠나 텍사스로 낙향했다.이날 부시 전 대통령 부부는 새 대통령 취임식이 끝난 뒤 워싱턴 의사당 옆에서 대통령 전용헬기 ‘머린 원’에 올랐다. 버락 오바마 신임 대통령 부부는 오랜 전통대로 떠나는 대통령 부부를 헬기까지 배웅했다.이어 워싱턴 근교의 앤드루스 공군기지에 도착한 부시는 간단한 환송식을 마치고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포스 원’에 올라 고향 텍사스 주의 미들랜드 시로 향했다. 8년 전 부시의 워싱턴행을 축하했던 미들랜드 시는 돌아온 부시 부부를 열렬히 환영했다고 뉴욕타임스(NYT) 등 미 언론들은 전했다. 부시의 새 거처는 텍사스 주 노스 댈러스 프레스턴 할로. 부시의 개인별장인 크로퍼드 목장에서 차로 2시간쯤 떨어진 부촌이다. 앞서 부시는 백악관을 떠나기 전에 전통에 따라 집무실인 오벌오피스에 오바마 신임 대통령의 행운을 기원하는 자필 편지를 남기기도 했다. 헌법이 보장하는 대통령 권한이 이날 정오까지였던 만큼 백악관을 떠나기 직전까지 부시는 분주했다. 출근 뒤 자신을 측근에서 보좌해준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 스티븐 해들리 국가안보보좌관, 앤드루 카드 전 백악관 비서실장 등에게 백악관에서 마지막 전화를 걸었다. 백악관 남쪽 뜰을 혼자 거닐며 짧은 상념에 잠기기도 했다.고향으로 돌아간 부시는 한동안 바쁜 일상을 보낼 듯하다. 일단 댈러스에 들어설, 자신의 이름을 딴 기념도서관 설립 및 도서관에 입주할 정책연구소 창립을 주도할 계획이다. 회고록, 자서전 등의 출간 의지도 최근 인터뷰에서 직접 밝힌 적이 있다. 퇴임 이후의 작업들을 도와줄 개인 비서실장으로 텍사스 주지사 시절 호흡을 맞췄던 마이크 미시를 일찌감치 선임했다.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깔깔깔]

    ●장난감다섯살 난 꼬마가 엄마를 따라 산부인과에 갔다. 대기실에 나란히 앉아 있는데 엄마가 갑자기 배를 움켜쥐면서 신음 소리를 냈다.“엄마 왜 그래? 어디 아파?”엄마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뱃속에 있는 네 동생이 심심한가봐. 자꾸 발길질을 하네.”그러자 꼬마가 엄마에게 말했다. “그럼 가지고 놀게 장난감을 삼켜 봐.”●남편과 새 차자동차로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고 난 부인이 이웃집 여자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남편 연봉이 또 오른 모양이죠?”“왜요?”“자동차가 새 고급차로 바뀌었으니 말이에요.”“아, 차요. 차가 아니라 남편을 바꿨을 뿐이에요.”
  • [오풍연 대기자 법조의 窓] 그곳에도 師表는 있다

    법원과 검찰을 처음 출입한 지 21년만에 현장으로 돌아왔다.5공화국 말기인 1987년 가을부터 법조와 인연을 맺었다.그 당시 기자와 가깝게 지냈던 판·검사들은 대부분 법조를 떠났다.법무장관,대법관,검찰총장,헌법재판관 등 수뇌부를 지낸 분들이 많다.지금도 변호사를 하고 있는 그들과의 인연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밖에서 본 친정 법조는 그다지 아름다운 모습으로 비쳐지지 않았다.그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정권이 바뀔 때마다 흔들렸다.사회정의를 바로잡아야 할 그들이 과거사에 대해 반성하고 머리를 숙이는 모습도 보았다.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당연히 해야 할 일을 늦게 했을 뿐이다. 왜 그럴까.그 원인을 찾아봤다.겸손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법조가 대중의 눈에는 ‘권부’로 비쳐진 게 사실이다.법원도,검찰도 마찬가지다.아니라고 주장할 이도 있겠지만 자업자득 측면이 강하다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20여년간 안에서,밖에서 줄곧 보아왔던 까닭이다.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부족한 느낌을 받았다.최근 서울지방변호사회가 ‘법관평가제’를 추진키로 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사우나에서 만난 김용준 전 헌법재판소장으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전직 헌법재판관이 대법원 재판연구관한테 모욕을 당했습니다.아는 대법관과 연락을 했다고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따지더랍니다.이제는 동문도,선·후배도 없습니다.”삭막해진 법조의 한 단면이다. 그래서 선배 법조인 3명을 모델로 추천한다.김승진(69·고시 13회) 전 사법연수원장,하철용(59·사시 14회) 헌법재판소 사무처장,정진규(62·사시 15회) 전 법무연수원장이다.이들을 겪어본 사람은 기자와 공감하는 대목이 많을 것이다.김 전 원장이 1988년 무렵 서울고법 부장판사로 있을 때다.법조 신참내기인 기자가 그의 방에 들렀다.셔츠 바람으로 기록을 보고 있던 그가 벌떡 일어섰다.그러곤 양복 상의를 갖춰 입었다.반갑게 맞이하며 차를 대접했다.사무실을 나올 땐 문앞까지 배웅을 했다.기자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 뒤로도 여러 번 같은 장면을 목격했다.그는 모두에게 그랬다. 하 처장과 정 전 원장은 각각 제물포고와 경기고를 나왔다.둘 다 인격적으로 모자람이 없고 따르는 후배들이 많다.하 처장은 일찍이 대법관감으로 지목됐으나 변호사 개업 후 현업으로 돌아왔다.특히 아랫사람들을 잘 보살핀다.“제가 고교 3년 후배였는데 공석에서든,사석에서든 한 번도 반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그렇게 만류해도 너무나 정중히 예의를 차렸습니다.”검찰 고위직을 역임한 변호사의 정 전 원장에 대한 회고담이다.기자가 본 것도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법조인에게 가장 요구되는 덕목은 겸손이다.그러잖아도 선망의 대상인 그들이 자세를 낮추면 더욱 많은 게 돌아온다.국민의 존경과 신뢰 회복이다.더 이상 ‘뻣뻣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게 구성원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 poongynn@seoul.co.kr
  • 경찰 위문편지에 담긴 ‘멍든 동심’

    경찰 위문편지에 담긴 ‘멍든 동심’

    연말이면 공익을 위해 헌신하는 이들에게 전해지는 초등학생들의 위문편지에 오히려 비난하는 내용이 담겨 논란이 일고 있다. 지난 23일 서울 청운초등학교는 서울시교육청의 지시에 따라 2~5학년 학생들에게 인근 종로경찰서 지구대·교통·전의경 등 경찰관들에게 보낼 위문편지를 쓰게 했다.시교육청에 따르면 경찰에게 위문편지를 보내는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서울지방경찰청의 협조요청에 따라 실시됐다. 하지만 이 학교 교사들에 따르면 일부 학생들이 위문편지 쓰기의 원래 목적과 달리 “절대 믿지 못 할 경찰”,“국민을 공격하지 마세요.” 등 경찰을 비판하는 내용을 썼다. 또 “우리 선생님 돌려 주세요.”라는 내용의 편지도 있었다.교사들은 경찰을 비판하는 내용의 편지를 솎아 내고,감사의 마음을 담은 편지만 따로 골라 종로경찰서로 보내기로 했다. 학생들이 경찰을 비판하게 된 사연은 이렇다.서울시교육청은 지난 10일 청운초교 6학년 4반 담임 김윤주(34·여) 교사에게 해임을 통보했다.김 교사가 학생들이 일제고사 대신 체험학습 및 대체수업을 할 수 있게 허락했다는 이유에서다.김 교사는 지난 12일 마지막 수업을 하고 학교를 떠났다.<서울신문 12월15일자 8면 보도> 이날 학교는 학생들이 마지막 수업을 하고 떠나는 김 교사를 배웅하려는 것을 경찰을 동원해 막았다.또 지난 17일부터 19일까지 김 교사의 출근을 막기 위해 교문에 방패를 든 경찰을 배치했다.이를 지켜본 학생들이 ‘경찰이 우리 선생님을 못 오게 막는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학교측은 지난 24일 “학생들의 위문편지를 모아 놨으니 가져 가라.”고 알렸지만,종로경찰서는 바쁘다는 이유로 26일까지도 편지를 찾아가지 않았다. 장형우기자 zangzak@seoul.co.kr
  • 故박광정 발인식, 뜨거웠던 ‘연기혼’을 남기고…

    故박광정 발인식, 뜨거웠던 ‘연기혼’을 남기고…

    지난 15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故 박광정(46)의 유해가 동료 및 가족들의 배웅 속에 장례식장을 떠났다. 지난 3월 폐암 말기 판정을 받은 후 9개월간의 투병 끝 세상을 떠난 배우 겸 연극 연출가 故 박광정의 발인식이 17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비공개로 진행됐다. 유족인 부인 최선영씨와 주노, 휘노 두 아들과 권해효, 안내상, 임하룡, 홍석천, 박철민 등 생전 절친했던 100여명이 지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치뤄진 이날 발인식은 비교적 차분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 고인의 마지막 배웅을 위해 전날 새벽부터 병원을 지키던 조문 행렬은 고인의 유해가 운구차로 옮겨지자 억누르던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 바다를 이뤘다. 폐암 판정을 받고도 끝까지 연극 무대에서 생을 마감하려 했던 생전 고인의 뜻을 기리며 故 박광정을 싣은 운구차는 대학로를 도는 의식을 치뤘다. 고인의 이승길을 끝까지 함께 하려는 가족 및 동료들의 버스 2대도 그 뒤를 따랐다. 故 박광정은 말기 암 투병생활에도 불구, 마지막까지 연기에 대한 의지를 굽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더욱 주변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1962년생인 박광정은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했다. 1992년 연극 ‘마술기계’의 연출하며 연출자로서 이름을 먼저 알린 박광정은 1994년 차인표, 신애라 주연의 MBC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 안에’에 출연하며 연기자로 영역을 넓히기 시작했다. 당시 권해효와 함께 재치 넘치는 조연 연기로 호평을 받았던 박광정은 드라마의 윤활유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개성있는 조연 전문 배우로 자리매김 했다. 영화에서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영화 ‘넘버3’에서 시인 랭보 역으로 방은희와 함께 호흡을 맞췄던 박광정은 영화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으며 지난해 개봉한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에서는 생애 첫 주연을 맡아 제1회 국제이머징탤런트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올해 2월 말 인기리에 종영한 MBC 드라마 ‘뉴하트’에서 방사선과 김영희 의사 역을 열연했다. 주인공 이은성(지성 분)의 후원자이자 최강국(조재현 분)의 진심어린 친구로서 드라마에 온기를 불어넣은 그의 연기는 시청자들에게 훈훈함을 선사했다. 이밖에 최근에는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의 산부인과 의사 역을 비롯, 케이블채널 미니시리즈 ‘대박인생’에서 40대 가장 오대박 역을 맡으며 마지막 까지 연기 투혼을 발휘했다. 지난 3월 심한 두통으로 병원을 찾은 박광정은 갑작스런 폐암 선고를 받고 항암 치료에 들어갔다. 故 박광정은 병원의 만류에도 불구, 연극 ‘서울노트’의 연출 활동을 계속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한결 같았던 연기 인생, 그리고 9개월 간의 투병 속 연기 열정…. ‘우리시대의 소시민’의 모습을 가장 잘 그려냈던 배우 박광정은 마지막까지 ‘연기자’로 눈을 감기를 바랬다. 빈소가 치뤄졌던 서울대병원을 출발한 고인을 싣은 운구차는 생전 고인의 터전이였던 대학로 정보소극장, 학전극장 등 연극 공연장을 지나 화장터인 성남영생관리사업소로 향했다. 이렇게 생전 고인이 ‘가장 사랑했던 이승’인 대학로 공연장 일대을 돌아보는 것으로 15년간 그 누구보다 열정 적이었던 고인의 ‘연기 혼’을 달랬다. 서울신문NTN 최정주 기자 joojoo@seoulntn.co.kr / 사진 = 한윤종 기자@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4년만의 첫 직장 석달만에 쫓겨나

    4년만의 첫 직장 석달만에 쫓겨나

    “내가 뭐 잘못했노.시험은 만날 2점차로 떨어지고,마음 고쳐먹고 눈 높이 낮춰 힘들게 취직해서 죽도록 일했는데 3개월만에 짤리고….이게 뭐꼬.” 4일 그는 끝내 눈물을 떨궜다.2004년 2월 지방 사립 K대 토목과를 평점 4.0으로 졸업한 설찬희(30·무직)씨.졸업과 동시에 갑자기 들이닥친 취업대란에 9급 지방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그 해 졸업한 50명의 토목과 동기 중 40명이 공무원 시험에 뛰어들었다. 택시운전을 하면서도 “아들,어디 가서 ‘꿀리면’ 안 된다.’고 비싼 등록금에 용돈까지 대준 아버지에게 설씨는 더 이상 손 내밀 염치가 없었다.그래서 독서실 총무 아르바이트,주말에는 ‘전공을 살려’ 건설현장에 인부로 나가 생활비를 벌었다. ●공시 도전 8회 실패 수험생활을 시작한 2004년.경남 창원시 공무원시험의 합격선에 단 2점이 모자라 떨어진 설씨는 ‘창원은 경쟁률이 높다.’는 생각에 이듬해인 2005년 경남 거제시에 지원했다. 또 2점차 낙방.거제시도 만만치 않았다.그 해에는 서울에 올라와 중앙 정부직에도 도전했다.너무 긴장한 나머지 배가 아파 시간 조절에 실패했다.이번엔 1점차. 수험생활 3년째인 2006년.창원시 시험을 치고 나서 ‘이번엔 확실하다.’고 믿었는데 또 2점차.포기하고 싶었다.설씨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신세한탄을 늘어놨다.그래도 ‘남자’라서 울지는 않았다.마음을 다잡고 경북도 시험에 임했다.또 2점차.머릿속에는 ‘설찬희 2점,설찬희 2점….’이라는 자학만 가득했다. 2007년.창원과 경북 둘 다 2점이 모자랐다.‘진짜 마지막’는 생각에 올해 경북 시험을 쳤지만 또 2점차.오는 2009년에는 공무원 신규채용을 줄인다는 소문이 돌았다.어느새 서른인 설씨는 ‘더 이상 이러면 안된다.’는 생각에 공무원에 미련을 버리고 눈높이를 낮춰 취직에 도전했다. 100곳이 넘는 중소제조업체·건설업체에 원서를 넣었고 수십번 면접을 봤다.천신만고 끝에 지난 9월 콘크리트 블록을 생산하는 공장에 취직했다. 비록 수습사원이지만 판로를 뚫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자존심 구겨가며 20여명의 공무원 친구들에게 전화까지 했다.졸업 후 4년 7개월.첫 직장에서 첫 월급으로 140만원을 받았다.너무 기뻤다. ● “눈 낮춰도 일자리 없어” 10월부터 들이닥친 불황에 거래는 끊기고 재고는 쌓였다.3개월의 수습기간이 끝나갈 무렵인 지난 11월28일 설씨는 결국 회사에서 ‘잘렸다’. 고용보험,실업급여의 혜택도 못 받은 설씨는 “그래도 사장 안 밉다.아들 같은 수습사원 손잡으며 미안하다며 고개숙인 채 내쫓아야 하는 사장은 얼마나 부끄럽겠노.”라고 말했다.설씨는 ‘스낵카를 끌어봐야겠다.’는 생각에 자재가격을 알아보기 위해 지난 3일 서울에 올라왔다. 하지만 만만찮은 스낵카 가격과 노점 펼 자리마저 구하기 힘든 현실만 확인했다.“4년제 대학 나오고 노점 끄는 거 부끄럽지 않다.”고 당당하게 말하던 그는 “도대체 어디까지 눈을 낮춰야 하노.”라며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마주 앉은 친구도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설씨는 대기업 건설사 지방본부의 면접을 봐야 한다며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배웅하는 친구를 돌아보며 말했다. “지방대 나오고 나이도 많은 나를 대기업이 뽑아주겠나? 기대는 없다.그래도 희망은 안 버린다.너무 걱정마라 친구야.” 장형우기자 zangzak@seoul.co.kr
  • 포스코 이미지 타격 ‘노심초사’

    이구택 포스코 회장은 4일 대구지방국세청의 압수수색과 관련해 ‘노코멘트’로 일관했다. 이날 오후 포스텍 대강당에서 열린 포스코 직원 혁신역량 강화 행사 ‘IF(Innovation Festival·이노베이션 페스티벌) 2008’에 참석한 이 회장은 이주성 전 국세청장과의 관계,2005년 정기세무조사 당시 상황 등에 대한 질문에 “오늘은 회사 축제날이다.좋은 날 그런 이야기 하고 싶지 않다.”며 대답을 회피했다.이날 행사에 참석한 이 회장의 표정은 다소 어두웠다. 포스코 직원들은 이 회장의 언론 접촉을 막기 위해 행사장 입구에서 ‘인의 장막’을 쳤으며 인터뷰를 시도하자 직원 5~6명이 몸으로 막았다.이 과정에서 기자와 가벼운 몸싸움이 벌어지고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행사가 끝난 뒤 이 회장은 배웅나온 회사 관계자들과 인사도 나누지 않은 채 곧바로 대기 중인 승용차를 타고 행사장을 떠났다. 포스코는 이날 하루 내내 무거운 분위기였다.직원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번 압수수색으로 회사의 글로벌 이미지에 타격을 입지 않을까 걱정했다. 포스코 관계자는 “포스코는 기업의 투명성을 생명으로 여겨왔다고 자부한다.”며 “검찰의 대구지방국세청 압수수색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수 없다.”고 밝혔다.또 다른 회사 관계자는 “어제 검찰이 대구지방국세청의 자료를 가져갔을 뿐,포스코의 혐의가 입증된 것이 없지 않으냐.”며 “아직 회사 내부에서도 이번 사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논의된 것이 없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 3일 서울서부지검 형사5부가 대구지방국세청에서 압수수색한 자료는 2005년 7월부터 12월까지 포스코에 대해 정기 세무조사한 것이다. 항목별 검토조사서와 세금탈루추징액 등이 포함된 법인세 결정 결의서로 사과 상자 1박스 분량이다.당시 세무조사는 2000년 포스코 민영화 이후 처음으로 이뤄진 것이었다.대구지방국세청 장승우 조사1국장은 2500억원을 추징했다고 말하고 있으나 실제로 포스코가 세무추징에 반발해 국세심판원에 심판 청구한 액수는 1797억원이다. 대구 한찬규·포항 김상화기자 cghan@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읽기] (98) 인조, 백성에 사죄하다

    [병자호란 다시읽기] (98) 인조, 백성에 사죄하다

    전란은 끝났지만 인조 정권 앞에는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당장 도성 안팎에 버려져 있는 시신들을 치우고, 하나 둘씩 모여드는 생존자들을 구휼(救恤)하는 문제가 시급했다. 또 전쟁을 불러오고, 임금으로 하여금 일찍이 없던 치욕을 겪게 만들었던 책임 소재를 규명하는 것도 현안으로 떠올랐다. 당장 척화신들의 ‘경거망동’이 도마 위에 올랐다. 하지만 척화신들을 처벌하는 것만으로 흉흉한 민심을 달랠 수는 없었다. 백성들은 청군에게 죽고, 붙잡혀 끌려가고, 삶의 터전까지 잃어버렸다. 그들의 아픔과 분노를 다독이려면 결국 인조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화약이 맺어지고 인조가 환궁한 직후 조정의 분위기는 미묘했다. 우선 무신들의 기세가 등등해졌다. 병조판서 신경진(申景 )은 회의석상에서 문관들을 매도했다.“쥐새끼 같은 자들이 나라를 이 지경에 이르게 했다.”며 목청을 높였다.‘쥐새끼 같은 자들’이란 문관들, 그 가운데서도 척화신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구굉(具宏) 또한 척화신들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인조의 인척이자 반정공신이기도 했던 그는 “윤황(尹煌)이 척화(斥和)를 주장하여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그의 목을 베어야만 한다”고 일갈했다. 일찍이 정묘호란 당시부터 후금(청)과의 화친 시도를 ‘적에게 항복하는 것’이라며 맹렬히 비난했던 윤황을 정조준했던 것이다. 나만갑은 ‘기세가 오른 무인들이 문신들을 종이나 하인들처럼 여기고, 남한산성에서 내려온 것이 마치 무슨 중흥의 계기나 된 것처럼 여긴다.’고 귀경 직후의 조정 분위기를 적었다. ●벼랑 끝으로 몰린 척화신들 호전될 기미가 도무지 보이지 않는 위기 상황이 지속되면 사람들은 점차 답답한 현실에 짜증을 내게 되고 편안한 것을 찾기 마련이다. 더욱이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던 병사들을 이끌고 산성의 방어를 담당했던 무신들이 보기에 문신들, 그 가운데서도 척화신들은 목소리만 컸을 뿐, 성을 방어하거나 나라를 지키는 데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존재라고 생각할 만도 했다. 이미 1637년 1월, 지친 병사들 사이에서 ‘척화신을 묶어 보내라.’는 시위가 일어난 바 있었다. 추위와 기아에 시달리던 그들에게는 거창한 대의명분보다는 당장 따뜻한 밥 한 그릇과 편안한 잠자리가 더 절실했다. 그럼에도 ‘전원 옥쇄(玉碎)를 각오하고 결사 항전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던 척화신들의 주장이야말로 비현실적이고 우활(迂闊)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항복이 다만 ‘시간 문제’가 되고, 청이 전쟁의 책임을 척화신들에게 돌리고 그들을 묶어 보내지 않으면 항복을 받아줄 수 없다고 주장하는 판에 척화신들의 결사 항전 주장은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조가 항복했던 직후, 도성의 민심은 척화파에게 부정적이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도성으로 돌아온 백성들 앞에 보이는 것은 시체가 나뒹굴고 모든 것이 불타버린 처참한 모습뿐이었다. 절망 속에 눈에 핏발이 설 수밖에 없었던 그들은 자신들을 유린한 청군에 대한 적개심과 아울러 대의명분을 앞세운 척화신들의 ‘경거망동’ 때문에 자신들의 삶이 망가졌다는 원망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 2월19일 김류, 홍서봉, 이성구, 신경진, 최명길 등 대신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나라를 그르친 사람들의 죄를 따지는’ 자리였다. 윤황, 이일상(李一相), 유황(兪榥), 홍전(洪 ), 조경(趙絅), 유계(兪棨) 등 척화신들의 ‘과오’가 도마 위에 올랐다. 논의 결과를 보고받은 뒤, 인조는 이들 모두의 관작을 삭탈하라고 지시했다. 결국 조경은 문외출송(門外黜送), 윤황·유황·홍전·유계 등은 유배, 이일상은 가장 무거운 절도(絶島) 정배의 명령을 받았다. 척화신 대부분을 조정에서 쫓아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바야흐로 척화신들이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었다. ●인조, 백성 원성에 위기감 척화신들을 처벌했지만 인조 또한 마음이 편할 수는 없었다.2월8일, 심양으로 끌려가는 소현세자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서 인조는 한 노파의 원망 섞인 통곡 소리를 들었다.‘여러 해를 두고 강화도를 수리하여 백성들을 의지하게 했는데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더냐. 나라의 책임을 맡은 자들이 날마다 술 마시는 것을 일삼아 백성들을 모두 죽게 했으니 이것이 누구 탓인가? 자식 넷과 남편이 모두 죽고 다만 이 몸만 남았다. 하늘이여, 하늘이여. 어찌 이런 원통한 일이 있단 말인가.’ 가족을 모두 잃은 노파의 한탄은 사실 인조를 향한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이번 전란 때문에 삶이 망가진 모든 백성들의 원망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인조는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2월19일 인조는 내외의 군인과 백성들에게 내리는 교유문(敎諭文)을 발표했다. ‘덕이 부족한 내가 대위(大位)에 있은 지 15년에 오직 대의(大義)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뜻밖의 화를 만나 외로운 성에서 포위 당한 채 봄을 맞았다. 나는 지금 해진 갖옷을 입고 거친 밥을 먹는 것이 일반 천민과 다름이 없고, 자식을 사랑하고 돌보는 마음은 천성인데 나는 지금 두 아들과 두 며느리를 모두 북쪽으로 떠나보냈다. 돌아보건대 백성을 기르는 자리에 있으면서 나 한 사람의 죄 때문에 모든 백성에게 화를 끼쳤다. 군사들은 전장의 원혼(魂)이 되게 했고, 죄 없는 백성들은 모두 포로가 되게 하여, 아비는 자식을 보호하지 못하고 지아비는 지어미를 보호하지 못하게 하여 가슴을 치고 하늘에 호소하게 하였다. 백성의 부모가 되어 이 책임을 누구에게 돌릴 것인가. 이 때문에 고통과 괴로움을 머금고 오장이 에는 듯하여 뜬눈으로 밤을 새운다.’ 솔직하고 처절한 내용이다.‘나의 죄’ 운운하면서 전란 발생과 백성들의 고통이 모두 자신 때문에 빚어진 것임을 고백하고 있다. 이렇게 스스로를 낮추고 백성들에게 머리를 숙인 국왕은 일찍이 없었다. 인조는 그러면서 백성들에게 다짐했다.‘이제 묵은 폐단과 가혹한 정치를 모두 없애며, 사당(私黨)을 없애고 공도(公道)를 회복하며, 농사에 힘써 남은 백성들을 보전하려 한다. 그대 팔도의 신민들은 지난날의 잘못 때문에 나를 버리지 말고, 상하 합심하여 어려움을 널리 구제할지어다.’ 이제 잘 해보겠으니 도와달라는 당부이자 호소였다. ●의심받는 인조의 진정성 처절해 보이기까지 하는 ‘사과 성명’을 읽으면 인조는 분명 병자호란을 계기로 대오각성한 듯이 보인다. 하지만 성명 발표 전후 인조가 취한 조처들을 보면 그리 믿음이 가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으로부터 강화도로 들어갈 수 있는 시간 여유를 빼앗고, 엄청난 수의 백성들을 죽거나 포로가 되게 했던 장수들에게 군율 적용을 기피하려 했던 태도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1637년 2월 삼사 신료들은, 특히 죄가 무거운 김자점·김경징·장신 등에게 엄격한 군율을 적용하라고 촉구했다. 종사를 위태롭게 하고 수많은 생령들을 죽거나 끌려가게 만들었느니 복주(伏誅)해야만 한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인조는 김경징과 장신에게 극형을 내리는 것을 꺼려했다. 신료들의 채근에 ‘김경징이 거느린 군사는 매우 적었고, 장신은 조수(潮水) 때문에 배를 통제할 수 없었다.’며 두 사람을 비호했다. 강화도를 방어할 준비를 내팽개쳤고, 함께 싸우자는 부하들의 호소도 묵살하고 달아났던 두 사람의 실제 행적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현실과 동떨어진 상황 인식이었다. 인조는,‘제대로 정죄(定罪)하지 않으면 종묘사직의 영혼을 위로할 수 없고 신인(神人)의 분노를 풀 수 없다.’는 신료들의 거듭된 요청에 밀려 마지못해 두 사람을 사형에 처했다. 하지만 김자점은 끝내 유배형에 그치고 말았다. 김경징과 김자점이 모두 인조를 왕위에 올려놓는 데 앞장섰던 공신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인조의 태도가 이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을 비호하려 했던 인조의 자세는 ‘사당을 없애고 공도를 회복하겠다.’던 교유문의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나왔다는 점에서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것이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김동완 일문일답 “충성! 늦은만큼 열심히”

    김동완 일문일답 “충성! 늦은만큼 열심히”

    가수 김동완(29)이 에릭에 이어 신화에서 두번째로 입소했다. 검은 잠바에 청바지의 수수한 차림으로 훈련소에 도착한 김동완은 도착하자 마자 “충성” 인사를 건네며 자신을 배웅 온 200여명의 팬들과 50여명의 취재진에게 앞에 서 입소 전 소감을 밝혔다. 17일 오후 1시 충남 공주에 위치한 32사단 신병훈련소로 입소해 4주간의 기초군사훈련을 받게 되는 김동완은 입소 전 짧게 자른 머리를 매만지며 비교적 담담하고 환한 표정으로 취재진의 질문에 답했다. 다음은 입소 전 김동완과 가진 일문일답 - 지금 심정이 어떤가? 좋습니다. - 표정이 밝다. 어제 꿈을 꿨는가? 꿈은 안꿨습니다. - 직접 배웅 온 팬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감사합니다. 4주동안 훈련 잘 받고 오겠습니다. 다들 기다릴 거라고 생각합니다. - 신화 멤버들이 입소 전에 뭐라고 했는가? 오늘 아침에 에릭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에릭이 로션을 챙겨가라고 하더군요. - (에릭이 로션은 챙겨주지 않고) 말 뿐이였는가? 말이라도 어딥니까? 고맙죠.(웃음) - 마지막 앨범 ‘약속’을 발매하고 가는데 아쉬움은 없는가? 워낙 늦게 가는 거라 열심히 하겠다는 생각 뿐입니다. - 군대를 다녀온 후 미래의 김동완의 모습을 그려봤는가? 신화 10집 발매 후 다시 신화로 돌아와서 팬들 앞에 서고 싶습니다. -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인사를 남긴다면? 늦게 가는 군대지만 열심히 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에릭과 제가 입소했지만 신화 및 나머지 멤버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 부탁드립니다. 한편 4주간의 기초훈련을 마친 이후 김동완은 서울 서대문구청에서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할 예정이다. 이로써 김동완은 지난 10월 9일 입소했던 에릭(본명 문정혁·29)에 이어 두 번째로 군에 입소하는 멤버가 됐다. 현재 에릭은 4주간 군사훈련을 마치고 11월 6일 퇴소해 현재 서울메트로에서 근무 중이다. 한편 그룹 신화는 지난달 9일 에릭의 군입대를 필두로 오늘(17일) 김동완, 내년에는 전진과 이민우의 군입대가 예정돼 있어 당분간 긴 휴식기를 갖게 될 전망이다. 서울신문NTN(공주) 최정주 기자 joojoo@seoulntn.co.kr / 사진 = 조민우 기자@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새영화] 액션 스릴러물 ‘커넥트’

    누구나 그런 기억이 있다. 중요한 통화인데 휴대전화 배터리가 바닥난 기억. 만약에 그 상황이 누군가의 생사가 걸려 있고, 촌각을 다투는 지경이라면 어떨까.20일 개봉하는 영화 ‘커넥트’는 이처럼 상상조차 싫은 상황을 소재로 한 액션 스릴러다. 원작은 ‘폰 부스’의 래리 코헨이 각본을 쓴 2004년 영화 ‘셀룰러’. 하지만 ‘잘해야 본전’ 등 리메이크 영화에 가졌던 선입견은 잠시 내려놓아도 좋겠다.‘천장지구’,‘BB프로젝트’의 천무성 감독은 2년여에 걸친 시나리오 각색으로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빚어냈다. 할리우드 원작과 아시아적 감수성, 오리지널 스토리와 현실의 트렌드가 어우러지며 상승작용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아들을 배웅하기 위해 공항으로 차를 몰던 밥(구톈러)의 휴대전화에 갑자기 전화 한통이 걸려온다. 모르는 여자다. 끊으려 하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다급하다.“납치됐어요. 살려주세요.” 그녀는 공학 디자이너 그레이스(쉬시위안)다. 딸을 학교에 바래다 주고 오는 길에 납치당했다. 정체불명의 납치범들은 남동생이 있는 곳을 가르쳐주지 않으면 딸을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혼자 남겨졌을 때 부서진 전화기의 전화선을 연결해 가까스로 전화를 걸게 된다. 수신자는 밥이라는 사람이다. 무조건 구해달라고 소리친다. 이야기를 극단적으로 몰아가긴 하지만, 뭇 일반인들도 휴대전화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다는 점에서 공감의 진폭이 클 듯하다. 그레이스를 돕기로 마음먹은 밥은 전화통화에만 의지해 그녀의 가족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 와중에 휴대전화를 분실하고 배터리가 닳기도 하는 등 계속해서 위기를 맞닥뜨리게 된다. 홍콩 도심에서의 차량 추격신은,65억원가량이 투입되고 파손된 차량 수만 80여대가 넘는다는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화려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홍콩의 장동건으로 불리는 구톈러,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서 남성들의 로망으로 등극한 쉬시위안 등 출연 배우들의 몸을 사리지 않는 열연도 강한 인상을 남긴다. 물론 상투적이고 개연성이 떨어지는 대목들이 억지스럽긴 하다. 생면부지의 여성을 돕기 위해 온갖 위험을 무릅쓴다든지, 주변 인물은 죽어나가는 상황에서도 주인공과 그 가족은 끝까지 살아남는다든지 하는 설정들이 그에 해당된다. 하지만 부패세력과 지배권력의 유착에 대한 풍자 등 사회 비판적인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번쯤은 일견할 만한 작품임은 틀림없다.15세 이상 관람가.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부시·오바마 첫 회동 “정말 좋은 집무실”

    당선 6일 만에 이뤄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당선인과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10일 오후(현지시간) 백악관 회동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2시간가량 진행됐다. AP, 워싱턴포스트(WP) 등 외신에 따르면 당선 후 줄곧 시카고에 머문 오바마 당선인은 이날 부인 미셸과 함께 비행기로 워싱턴에 도착, 전용 캐딜락 리무진을 타고 백악관으로 이동했다. 각각 검은색 양복과 빨간색 원피스를 입은 두 사람을 반기듯 날씨는 화창했다. 백악관 근처에는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의 역사적인 백악관 방문을 가까이서 지켜 보려는 인파로 붐볐다. 부시 대통령 내외는 백악관 건물 남쪽 현관인 ‘사우스 포티코’에서 예정보다 11분가량 일찍 도착한 당선인 부부를 따뜻하게 맞았다. 오바마는 대통령 집무실(오벌 오피스)로 향하는 길에 왼손으로 부시 대통령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는 등 친근한 행동을 보여 눈길을 끌었다. 오바마는 그의 저서 ‘담대한 희망’에서 2005년 상원의원 당선 후 백악관에서 부시 대통령을 처음 만난 일화를 소개하며 ‘호감이 가는 인물’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당시 부시 대통령은 오바마에게 “당신의 미래는 아주 밝다. 하지만 쉽지 않을 거다. 모두가 당신이 미끄러지길 바라며 지켜 볼 것이다.”고 충고했다. 부시 대통령과 오바마 당선인은 집무실에서 1시간가량 비공개 면담을 가졌다. 오바마가 대통령 집무실에 간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그는 미 권력의 심장부인 이 곳을 “정말 좋은 집무실(a really nice office)”이라고 표현했다. 이 자리에서 오바마는 부시에게 자동차 산업에 대한 지원을 촉구한 것으로 알려지는 등 이날 첫 대면 때와 달리 두 사람의 단독 회동 분위기가 심각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통령과 당선인 회동이 진행되는 동안 로라 여사는 미래의 영부인인 미셸이 내년 1월부터 살게 될 ‘이그저큐티브 맨션’을 안내했다. 로라 여사는 방을 하나하나 다 보여 줬고 오바마 부부의 두 딸이 지낼 가능성이 높은 방에서 주로 얘기를 나눴다. 쌍둥이 딸을 백악관에서 키운 로라 여사는 역시 이곳에서 딸 둘을 키워야 할 미셸에게 사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백악관에서의 자녀 양육 문제에 대해 조언했다. 회동 후 부시 대통령은 오바마를 캐딜락 리무진까지 직접 안내하면서 배웅했다. 오바마는 오후 항공편으로 다시 시카고로 돌아갔다. 자녀 학교 문제로 고민 중인 미셸은 이날 아침 남편 없이 워싱턴 지역 사립학교를 방문한 데 이어 로라 여사와 환담 뒤에도 오바마와 따로 백악관을 나섰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