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배설
    2026-02-21
    검색기록 지우기
  • 여진
    2026-02-21
    검색기록 지우기
  • 체조
    2026-02-21
    검색기록 지우기
  • 상생
    2026-02-21
    검색기록 지우기
  • 식당
    2026-02-21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329
  • 서양화가 홍성담 ‘1999 탈옥’전

    ‘오월(五月)화가’‘통일화가’‘인권화가’….서양화가 홍성담(45)에게는 늘 이런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그러나 그는 정작 80년대 민중미술계의 대표적인 작가이자 활동가로 불리는 것을 부담스러워 한다.이제는 돌아와 거울앞에 선 심정이랄까.요즘 그는 한 단계 성숙한 의식과 명상을 통한 자아의해방을 꿈꾼다.12일부터 29일까지 서울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는 ‘1999 탈옥(脫獄)’전은 저항에서 명상으로 나아가려는 작가의 의식의 현주소를 확인할 수 있는 자리다. 1980년 5월 광주는 군사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운동의 요람이었다.이런 배경 아래서 모순된 현실에 저항하는 민중미술이 태동한 것은 당연한 시대적요구였다.홍성담은 변혁운동의 중심부에서 민중적 사실주의 미술운동을 펼쳤다.89년에는 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사건으로 투옥돼 3년간 감옥생활을 하기도 했다.그 감옥의 기억은 지금도 작가의 의식을 옥죄는 심리적 올무다.이번 전시에서는 일련의 ‘감옥’ 연작을 통해 감옥으로부터의 진정한 탈출을 시도한다.고문과 감옥이라는 소재를명상으로 승화시킴으로써 ‘홍성담의 탈옥’은 무한한 상상의 지평을 얻는다.특히 그의 근작들은 민중미술의 새로운 얼굴을 보여줘 관심을 모은다. 전시 작품은 크게 옥중체험을 토대로 한 ‘식구통(食口通)’연작과 ‘밥’연작,물고문 명상시리즈,92년 출소 이후의 대표작들로 나눠 볼 수 있다.옥중장면 그림 가운데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정사각형 캔버스 화판에 흙으로 만든 안료로 그린 ‘밥’연작이다.‘밥’ 사상을 형상화한 이 작품은 수십개의 화판이 하나의 작품을 이루는 독특한 구조를 띠고 있다.또 저항과 명상이라는 주제를 차분히 소화해낸 ‘물속에서스무날’도 주목할만한 작품.작가의 물그림 시리즈는 유화 ‘욕조-어머니 고향의 푸른 바다가 보여요’(1996)와 같은 직설적인 배설(排泄)의 작품에서부터 연꽃이 피어오르고 물고기 뱃속에서 사람이 잠을 자는 상생(相生)의 경지를 다룬 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다.그 그림들은 선(禪)을 닦아 마음을 수련하는 과정을 표현한 ‘십우도(十牛圖)’를 보는 것 같은느낌을 준다.나아가 작가가 대립과 갈등의 터널을 빠져나와 화해와 상생의밝은 세계로 들어서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번 전시는 내용뿐 아니라 양식적인 면에서도 특색이 있다.작가는 자신의사회적 이념과 내면세계를 도상학적인 형태로 보여준다.부적문양과 물결문양 등 민화나 전통회화의 도상양식이 등장한다.그의 작업은 캔버스에 종이찰흙으로 부조형태의 도상(圖像)을 만들고 그 위에 다시 20여가지의 흙과 안료를 발라 색을 내는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감옥이나 고문 등 강한 주제를 부드러운 흙색으로 녹여내고 있어 색다른 기분이 들게 한다. ‘1999 탈옥’전은 작가가 서울에서 갖는 첫 개인전이다.지난 20년동안 우리 역사의 현장을 뜨겁게 지켜온 ‘저항화가’로서 이른바 제도권 미술계에공식 데뷔하는 셈이다.그런 만큼 그의 각오는 새롭다.“멕시코 혁명기의 3총사 화가였던 시케이로스와 오로스코,리베라는 만만찮은 성과를 남겼음에도항상 제3세계 작가로 폄하되곤 합니다.저항성에 치중하다 보니 직관에 의한명상이 부족했던 것도 그 한 원인이죠.저항과 명상이 보다 높은 차원에서 통합되는 진정한 리얼리즘 작품을 남기고 싶어요”김종면기자 jmkim@
  • 정진석교수 ‘언론유사’ 출간

    언론학계의 중진인 정진석(鄭晋錫)외국어대 신문방송학과 교수가 최근 ‘언론유사’를 출간했다.‘체험적 언론사 연구의 뒷이야기’라는 부제가 말하듯 이 책은 정 교수가 30여년간 한국언론사를 연구해 오는 과정에서 건져낸 한국 언론사의 야사(野史)랄 수 있다. 정 교수는 그동안 ‘대한매일신보와 배설’,‘한국언론사 연구’‘일제하한국언론투쟁사’ 등의 저서는 물론이고 신문 영인·해제,언론관계 문헌색인 등 ‘언론학계의 사서(司書)’로서도 큰 성과를 남겼다. 이번에 출간한 ‘언론유사’는 정 교수가 언론사 관련자료를 섭렵하는 과정에서 체험적으로 겪은 이야기들을 언론연구원(현 한국언론재단) 발행 ‘신문과 방송’에 26회 연재한 것을 보완,재구성한 것이다.‘내가 만난 언론계 거목들’,‘배설(裵說)과의 만남’ 등은 새로 추가된 내용이다.커뮤니케이션북스 1만8,000원
  • 하루10분 사랑의 터치 아기가 튼튼해져요

    아기가 배가 아프다고 칭얼댈 때 손으로 배를 살살 쓰다듬거나 주물러 주면 놀랍게도 증상이 멎는 현상을 흔히 목격하게 된다.옛날부터 ‘엄마손은 약손’이라는 말로 설명돼 온 현상이다. 하지만 ‘엄마손’의 효과는 우연한 것은 아니다. 최근 ‘라효정의 베이비마사지’(아선미디어)를 펴낸 마사지 전문가 라효정씨는 하루 10분씩만 아기몸을 꾸준히 마사지 해주면 아기의 성장발달과 심리적 안정은 물론 부모의 사랑을 전달하는 데도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라씨는 베이비마사지가 좋은 이유는 뇌속 호르몬인 ‘세로토닌’(Serotonin)분비를 촉진시켜 심리적인 안정은 물론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해 줘 질병에대한 면역능력을 높여주고 건강한 성장을 돕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베이비마사지는 아기의 컨디션이 좋을때 10∼15분 정도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같은 동작을 3회 정도 반복하는데 아기가 특별하게 좋아하면 6회,또는 9회 정도 해 준다.할 때마다 ‘엄마가 지금 마사지를 해줄께’라고 말을 해준다.그러면 말할 시기가 되었을때 자연스럽게 아기가 마사지를 해달라는 의사표현을 할 수 있다. 생후 2개월 미만일 경우에는 목욕할때 팔다리를 구부렸다 펴 주거나 몸을쓰다듬어 주는 정도로 간단하게 해준다.생후 2개월 이후에는 우유나 젖을 먹고 나서 30분정도 지난 다음,4개월 이후부터는 목욕 후 한다.이때 사용하는오일은 순하고 부드러운 천연 오일을 사용한다.광물성 오일은 몸에 흡수가잘 되지 않으므로 마사지용으로는 부적절하다. 그러나 열이 높거나 심하게 우는 등 거부반응을 보일 때,그리고 예방접종을한지 48시간 이내는 피한다.각부위별로 마사지효과는 다음과 같다. ▲다리-관절의 힘과 유연성을 길러준다.▲발-혈액순환 및 신진대사를 좋게한다.▲배-소화기관 및 배설기관의 활동을 원활하게 한다.▲가슴과 어깨-심장,폐의 기능을 증진시킨다.▲팔과 손-근육과 뇌·신경 계통의 발달을 촉진시킨다.▲등-척추를 곧게하고 성장을 돕는다.▲머리와 얼굴-얼굴 근육을 단련시키고 긴장을 풀어준다.▲스트레칭-근육을 이완시켜 뼈의 고른 성장을 돕는다. 강선임기자
  • 생명공학硏,불용성 인산 분해 효소 개발

    환경오염의 주원인으로 작용하는 불용성 인(燐) 성분을 분해하는 효능이 뛰어난 사료첨가용 효소가 개발됐다. 생명공학연구소 오태광(吳太廣)박사팀과 ㈜대성미생물은 과학기술부 G7 신기능 생물소재 기술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우리나라 토양에서 찾아낸 세균으로부터 인산분해효과가 탁월한 새 ‘파이타아제’효소를 생산하는 기술을 개발했다고 20일 밝혔다. 세균으로부터 개발된 파이타아제는 동물의 사료용 곡물에 존재하는 불용성인을 분해,사료의 영양효율을 높여줄 뿐 아니라 동물의 배설물로 배출되는환경오염원(불용성 인)을 제거함으로써 수질오염을 줄이는 효과를 갖는다는것이 연구팀의 설명이다. 함혜리기자 lotus@
  • [사설] 公益우선의 민족정론지로

    대한매일이 18일로 창간 95년을 맞는다.잘 알려져 있듯 한말인 1904년 7월18일 애국지사 양기탁(梁起鐸)선생과 영국인 배설(裵說·Bethell)에 의해 창간된 대한매일신보는 암울했던 시기에 민족자존의 한줄기 빛을 비춰 준 국내 최초의 구국항일(救國抗日) 민족지였다.이러한 국권수호와 민족혼의 창간정신을 이어받아 지난해 11월11일 종전 서울신문 제호는‘대한매일’로,회사명은‘대한매일신보’로 회복됐고 이제 한여름 푸른 하늘이 열리는 내일 아침95돌 새 역사의 장(章)을 펼치게 된 것이다. 때문에 대한매일은 국내 최고(最古) 민족정론지로서의 가슴 뿌듯한 자긍심과 더불어 막중한 역사적 사명감을 느끼며 선진조국을 이끄는 공익(公益) 우선의 책무를 이행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할 것임을 굳게 다짐한다.제호 회복으로 다시 태어난 이후 8개월여 동안 대한매일은 우리 사회정의와 가치관을일그러뜨린 친일(親日)의 군상(群像)을 재조명하는 장편의 기획기사로 왜곡된 민족사를 바로잡는 등 일제식민통치의 잔재 청산에 힘썼다.또 뒤늦은 자괴감이 있기는 하지만 김구(金九)선생 암살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모두 12권의 역작 ‘白凡金九全集’을 발간했고 국난극복의 구국정신을 고취하는 등민족정론지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열(熱)과 성(誠)을 기울여 왔다. 이제 앞으로 우리는 새로운 천년을 여는 21세기의 문턱에서 끊임없는 변화와 개혁의 활기찬 발걸음으로 국가·민족의 힘찬 도약을 위한 견인차 역할에충실할 것이다.공익을 앞세우는 정론지로서 자기 혁신과 계발(啓發)의 채찍질로 긍정적이고 전향적인 자세를 가다듬고 역동적(力動的)인 미래가 열리게끔 지역화합과 남북화해를 바탕으로 한 민족적 에너지 결집을 뒷받침할 것이다. 특히 그릇된 특권의식에 젖어 직업윤리를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각고의자정(自淨)노력과 함께 부패언론 추방에 힘쓰는 등 언론개혁을 선도해 나갈것임을 강조한다. 우리나라가 국민적 합의에 의한 개혁 추진으로 새로운 세기의 중심국가로 우뚝 서려면 여론을 형성하고 이끌어 나가는 중책을 맡은 언론이 무엇보다 앞서 개혁돼야 하기 때문이다.특정 사안의 부정적 측면을 드러내며 독자들을오도(誤導)하고 인기 영합만을 추구하는 상업적 센세이셔널리즘도 우리의 경계 대상임을 밝힌다.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 이후 1년 반이 넘는 지금까지 우리는 대내외적으로 국난극복의 쓰라린 고통과 국제환경 변화의 혼돈을 경험하며 살아가고있다.국내 경제는 경기회복세에 힘입어 다행스럽게도 안정성장 궤도를 향하고 있어 많은 우려를 덜어 준다.그러나 위기극복과정에서 심화된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현상과 이에 따른 부유층의 거액 탈세 및 사치성 과소비,불법적인 부의 세습화는 중산·저소득층에 상대적 박탈감을 안겨주고 일할의욕을 잃게 하고 있다.그러잖아도 최근의 부분적인 소비과열은 구조조정 지연의 빌미를 주면서 “샴페인을 일찍 터뜨리려 한다”는 비난과 함께 진정한 의미의 경제회생을 멀리하는 부작용을 빚는 것으로 분석된다.게다가 일부고위공직자 거액 수뢰 등 국민화합을 저해하는 사건들과 그침이 없는 소모적 정쟁(政爭) 등으로 대다수 국민들은 허탈한 감정을 떨치지 못하는 실정이다.따라서 우리는 특히 소외된 중산·저소득계층의 권익옹호에 힘쓰는 한편 재벌개혁 등 경제정의 실현과 경쟁력 제고를 위한 정부정책의 시급함을 지적한다. 대외적으로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 위협에 따른 한반도 및 동북아 긴장상태지속 등으로 우리 정부의 포용정책이 적잖이 시련을 겪고 있기도 하다.또 국경없는 무한경쟁시대의 개막으로 경쟁력 우위의 강자만이 생존할 수 있는 국제경제의 새로운 환경변화가 진행중이다. 대한매일은 우리 국민 모두가 이러한 나라 안팎의 곤경을 슬기롭게 헤쳐 나감으로써 성숙한 민주산업사회를 이룰 수 있도록 합리적 이성(理性)과 보편타당성의 기반 위에서 공익을 앞세우는 올바른 비판의 시각을 꿋꿋하게 견지해 나갈 것이다.그리고 우리 한민족이 새로운 세기의 멀지 않은 장래에 하나로 뭉친 활력에 찬 모습을 갖추고 새롭게 세계무대에서 웅비(雄飛)할 수 있도록 민족정론지로서의 맡은바 임무를 수행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임을 거듭 다짐한다.
  • 대한매일신보 직원출신 임치정·이교담 선생 사진 첫공개

    한말 항일민족지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직원출신 임치정(林蚩正)· 이교담(李交담)선생의 활동 당시 사진이 후손에 의해 처음 공개됐다. 15일 이교담 선생의 손자 이정원(李貞園·50)씨는 본지 창간 95년을 맞아언론학자인 정진석(鄭晋錫·신문방송학)한국외국어대 교수를 통해 이 사진을본지에 공개했다. 사진 오른쪽에 앉은 사람이 임치정 선생으로 임선생은 1904년 미국에 건너가 도산 안창호 등과 함께 교포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조직하였으며 1907년 귀국하여 대한매일신보의 부총무 겸 회계사무 책임자를 지냈다.이교담 선생 역시 도산과 함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의 기관지 ‘공립신보(共立新報)’의 인쇄인으로 활동하였으며 귀국해서는 대한매일신보의 업무직 사원으로 근무하였다.정진석 교수는 “흔히 대한매일신보라고 하면 발행인 배설(裵說)과한국인 논객 양기탁·박은식·신채호 선생 같은 분들만 떠올리기 쉬우나 임·이 두 선생은 이 분들을 도와 신보의 운영을 이끌어온 행동파였다”며 “이들은 일찍이 서구의 신학문을 공부하거나 외국에 다녀온 경험이 있어 진보적인 사상을 지닌 지식인이자 애국지사”라고 설명했다. 한편 이번에 공개된 사진은 두 사람의 복장과 사진 하단에 기록된 내용으로 봐 1907년 8월 이후에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사진 하단의 ‘한국경성(京城) 천연당사진사(天然堂寫眞師) 김규진(金圭鎭)’이라는 기록은 천연당 소속사진사 김규진이 촬영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20일자 광고란에는 천연당의 개업광고가 실려있다.또 두 사람의 복장은 1906년에 개정된 대한제국 장교의 정장차림으로 앉은 사람(임치정)의 계급은 정령(正領·현 대령),서있는 사람(이교담)의 계급은 부위(副尉·현 중위).군대경력이 없는 두 사람이 어떤 연유로 장교복장을 하고 사진을 찍었는지는 정확히알 수 없다.그동안 이 사진을 소장해온 이교담 선생의 손자 이정원씨는 “할아버지께서 미국서 찍은 다른 사진과 함께 이 사진을 보관해 왔으나 할아버지의 군대경력에 대해서는 할머니로부터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정진석 교수는 “군대해산(1907.8.1) 직후 구 한국군을 기념해 사진관에서 복장을 빌려 촬영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추측했다. 두 사람은 언론활동 이외에 항일투쟁사에서도 이름을 남겼다.임선생은 1907년 신민회(新民會)가 결성되자 총감독(당수) 양기탁 선생 밑에서 재정간사를 지냈으며,‘안명근(安明根) 사건’,‘105인 사건’ 등에 연루돼 수년간 옥고를 치렀는데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이 추서됐다. 또 이선생은 1910년 1월 매국노 이완용(李完用)암살미수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으며 양기탁 선생 등과 함께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이선생은 후손이 보훈당국에 서훈을 신청해 놓은 상태다. 정운현기자 jwh59@
  • [대한매일 95년] 연표

    ■1904년 7월18일 창간(영문판 4면,국문판 2면).초대 편집인 겸 발행인 배설,총무 양기탁 취임. ■1907년 1월16일 을사조약 무효를 선언하는 고종의 칙서 공개. ■1907년 2월21일 국채 1,300만원 보상운동 제창. ■1907년 5월23일 국문판 대한매일신보 별도 발간. ■1907년 10월 배설,영사 재판정에서 6개월 근신처분 받음.1908년 6월에도반일 보도로 3주간 금고형,6개월 근신처분 받음. ■1908년 5월 말 기준 부수 1만3,400부. ■1908년 7월12일 일제 통감부,양기탁을 국채보상의연금 횡령으로 몰아 구속. ■1909년 5월1일 배설 사망.영문판 중단. ■1910년 5월21일 통감부,대한매일신보사 탈취. ■1910년 8월29일 한일합방으로 대한매일신보 종간.(국한문판 1,461호,국문판 938호)■1910년 8월30일 경성일보에 흡수시켜 매일신보(每日申報)로 제호 바꿈(지령은 대한매일신보 계승). ■1938년 4월29일 경성일보에서 분리,매일신보(每日新報)로 제호 바꿔 발행(지령은 每日申報 계승). ■1945년 11월10일 미군정에 의해 정간. ■1945년 11월23일 서울신문으로 제호 바꿔 발행(지령은 每日新報 계승).사장에 오세창 취임. ■1959년 3월23일 옛 지령을 버리고 서울신문 첫 호를 1호로 기산,지령 변경. ■1998년 11월11일 서울신문의 뿌리인 대한매일신보의 애국정신을 되살려 제호를 대한매일로 바꿔 재창간(지령은 대한매일신보 당시의 지령인 1,651호와서울신문 지령 16,852호를 합산한 18,508호로 출발). ■1998년 11월11일 편집권 독립을 위한 노사공동선언문 발표.
  • [대한매일 95년] 대한매일신보와 배설

    나라가 어려울 때 우리를 도와준 몇명의 외국인 중에는 본보 대한매일신보(대한매일)를 창간하여 항일구국 언론의 선봉이 된 영국인 배설(裵說·영국명 베델)과 일제 침략기에 언론인으로 한국에 특파되어 ‘대한제국의 비극’을 쓴 캐나다 출신의 매켄지(Mckenzie)그리고 고종황제의 밀령을 갖고 헤이그를 찾는 등 국권수호에 큰 역할을 하고 ‘대한제국멸망사’를 쓴 미국인 헐버트(Hulbert)를 빼놓을 수 없다. 잊을 수 없는 외국 벗들“나는 죽더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영생케하여 한국민족을 구하라”는 유언을남기면서 ‘대한매일’을 키우다가 이 땅에 묻힌 배설에 대해 매켄지는 이렇게 썼다. “일본인들은 갖은 수단을 다 부려 그의 생활을 위협했으며, 그의 사업을 방해하기 위해 온갖 수작을 부렸다. 그의 우편물은 하나도 거르지 않고 검열을 받았으며, 그가 거느리고 있는 하인들은 여러가지 구실로 위협을 받거나 체포되었으며, 그의 집 주위에는 첩자들이 그림자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그는놀라운 끈기를 보여주었으며 세월이 흘러도 굴복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대한제국의 비극’·신복룡 역주) 헐버트는 ‘대한제국멸망사’의 헌사에서 “지금은 자신의 역사가 그 종말을 고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지만 장차 이 민족의 정기(精氣)가 어둠에서깨어나면 ‘잠이란 죽음의 가상(假像)이기는 하나’죽음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대한제국의 국민에게 이 책을 드립니다”란 애정과 국권회복의 희망을 기대하였다.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는 “이 이토의 백마디 말보다 신문(대한매일)의 일필이 한국인을 감동케 하는 힘이 크다”는 개탄을 남겼다. 외국인 중에서 우리를 돕거나 해치는 입장이 이토록 달랐다.‘잊고 있는’잊어서는 안될 인물’배설이 우리 애국지사들과 손을 잡고 본보를 창간한 지 18일로 95주년이 된다. 20세기 마지막 생일을 맞아 배설의 일화와 유족 관계를 추적해본다. 배설생일과 한일 기념일 배설은 친한배일(親韓排日)을 ‘운명적’으로 하여 태어난 듯하다. 그의 생일 11월3일은 그가 그토록 증오한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과 같은 날이고 후일 한국에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던 날과 더불어 같은 날이다. 배설의 한국 사랑은 남달랐다. 일제의 농간으로 상해에서 3주간의 옥살이를 마치고 후일 그의 비문을 쓴 장지연과 통음을 한 다음날 서둘러 한국으로돌아와서 다시 항일의 붓을 들었다. 그리고 심장병을 얻어 한살 아래인 부인 모드게일(Maude Gale)과 와아들 허버트 오웬을 남긴 채 37세의 짧은 생애를 접었다. 모드 게일은 남편이 죽은 뒤에도 “나는 결코 망부(亡夫)의 사업을 계속 하겠다”면서 사재를 털어 ‘대한매일’의 경영에 바쳤으며, 어린 아들에게 부친의 뜻을 잇도록 하겠다면서 한복을 입히고 한글과 한문을 가르치는 열정을 보였다. 그러나 일제가 ‘대한매일’을 탈취하고 강제합병에 이르자 오웬을 데리고영국으로 건너갔다. 그녀는 영국에서 90세까지 살다가 1965년 7월2일에 사망하고, 아들은 어머니가 죽기 전에 런던에서 사망했다. 한국정부는 1968년 3월1일 배설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오웬은 첫 부인과 사별하고 도로시 여사와 재혼하여 딸 수잔과 아들 토미를낳고 1965년 사망하였다. 1968년 7월 주영 한국대사관이 배설 유족찾기에 나서 런던타임스의 도움으로 도로시 여사를 만났을 때 그녀는 시아버지가 ‘대한매일’사옥에 걸었던 낡은 태극기 등을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다. 그녀는 1995년 정부수립 50주년 기념 정부 초청으로 한국을 다녀갔다. 당대 최고의 논객 참여 국운이 풍전등화일 때에‘대한매일’에는 외국인 배설과 함께 양기탁·박은식·신채호·장도빈 등 당대 최고의 논객이자 항일 우국지사들이 모여 피끓는 항일논조를 펼쳤다.한국병탄 과정에서 ‘눈엣가시’와 같은 ‘대한매일’에 일제는 배설과 양기탁을 재판에 회부하는 등 온갖 탄압을 자행했지만, 열혈지사들은 이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기우는 국운을 지사 몇 사람이 버티기에는 힘이 겨웠다. 배설의 죽음에 양기탁의 조시는 지금도 후학들의 심금을 울린다. 대영(大英)남자가 대한에 와서 한 신문으로 깜깜한 밤중을 밝게 비추었네 온 것도 우연이 아니건만 어찌도 급히 빼앗아갔나 하늘에 이 뜻을 묻고자 하노라. 정명(正名)을 회복한 대한매일신보사는 금세기마지막 창간일을 맞아 삼가배설·양기탁·박은식·신채호·장도빈 선생 등 선각들의 애국혼을 기리며거듭 바른 글 정신을 다진다. 김삼웅 주필kimsu @
  • [대한매일 95년] 역사성과 그 정신계승의 의미

    대한매일신보(이하 대한매일)는 구국 필봉으로 일본 침략을 규탄한 민족언론의 본산이었다.국운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기울던 시기에 항일운동의 구심점이 되었고,민족진영의 길잡이 구실을 했다.비극적 역사의 현장을 지켜본 증인이면서 나라의 운명을 바꾸어보려고 분투한 역사의 주체였다. 일본은 네 분야에서 한국 침략정책을 추진하였다.무력침략,외교침략,경제침략,언론침략이 그것이다. 대한매일은 이 네 가지 일본의 침략에 맞서 투쟁하였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치르면서 중국과 러시아를 물리치고 한반도에서의 독점적인 지배권을 확보하였다.국내의 무장항일 투쟁을 무력으로 제압하였으며 한일의정서와 을사조약 등의 국권 탈취도 무력을 앞세운 강압으로체결했다. 대한매일은 일본의 무력을 앞세운 침략을 신랄히 비판하고 항일 의병투쟁을고무,격려하였다.대한매일의 기사와 논설에 감동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벌인의병들이 많았다.일본은 이 신문의 선동으로 항일 무장투쟁이 격렬하여 많은 인명피해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영국에 발행인 배설(裵說·Ernest Thomas Bethell)을 추방하라고 요구하였던 것이다. 외교침략에 대해서도 대한매일은 그 실상과 일본의 야욕을 폭로하고 강력히저항하였다.일본은 한국의 외교권을 탈취하였고,형식상의 조약 또는 협약을강제하여 국권을 단계적으로 강탈하였다. 국제적으로는 미국과 맺은 태프트(Taft)­가쯔라(桂太郞)협약,제2차 영일동맹,러시아와의 포츠머스조약과 같은 조약 또는 협약으로 한반도에서의 우월적인 지위를 확보하고,열강으로부터 한국 강점의 동의를 얻어내었다. 대한매일은 이때마다 부당함을 역설하였으며 고종이 영국 특파원 더글러스스토리에게 전달한 밀서를 보도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일본은 경제침략으로 한국 경제를 파탄상태에 이르게 하였다.이에 저항하여 거족적인 민중운동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매일은 국채보상의연금 총합소가 되었다. 일제는 이를 와해하기 위해서 신문 제작을 실질적으로 총괄하는 양기탁을 투옥하여 영·일 간에 외교마찰을 빚기까지 했다.통감부는 침략을 선전하고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신문을 활용하였다.일제는 친일지 지원과 민족지 탄압이라는 양면정책을 쓰면서 일인들이 직접 한국에서 한국어로 신문을 발행하여친일선전을 일삼도록 하였다. 그러나 국민의 지지를 받는 대한매일의 위력을 당할 수는 없었다. 역사적 격동 속에서 대한매일이 창간된 지 95년의 세월이 흘렀다.서울신문은 대한매일의 구국정신을 계승하겠다는 결의를 천명하면서 제호를 대한매일로 바꾸었다. 대한매일의 역사적 사명은 막중하다.우리의 지정학적 위치는 구한말 대한매일이 창간되던 때나 근 1세기의 세월이 흐른 오늘이나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다.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강국은 이해관계를 교차하면서 더욱 복잡미묘한 역학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당시와 비교하면 일본이라는 하나의 침략자가 아니라 더욱 복잡한 도전을 받는 것이 현실이다.군사적으로는 분단의 고통과 동족상잔의 큰 전쟁을 치른후유증이 아직도 청산되지 않았으며 북한의 군사적 위협은 상존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도 IMF가 끝나지 않았고 앞날도 결코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다.외교적으로는 더욱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국익의 증대와 통일을 위한 외교력의 강화는 절실하다. 이같은 상황에서 언론의 사명은 막중하다.사회적 위화감과 지역간·계층간갈등이 해소되지 않은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슬기롭게 해소하고 밝은 미래를 향해서 전진할 것인가. 대한매일은 해답을 제시하고 이를 해결하는 노력을 기울일 책무가 있다.언론사상 가장 빛나는 민족지의 정신을 계승하는 길이 그것이다. 95년 전 창간한 대한매일의 정신을 거울삼아 민족 번영과 화합을 선도하고역사를 긍정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철학과 비전을 제시하여야 한다.한국 언론의 자랑스러운 역사,이에 따른 각오가 새로워야 한다. 정보양 한국외대 교수·언론학
  • 시판 코카콜라서 방부제…식약청 수거검사 결과

    국내 시판중인 코카콜라 라이트에서 방부제가 검출됐다. 27일 식품의약품안전청에 따르면 코카콜라,코카콜라 라이트,환타,킨사이다등 제품 19건을 수거해 검사한 결과 코카콜라 라이트에서 ㎏당 0.2g의 안식향산(방부제)이 나왔다.다른 음료에서는 검출되지 않았다. 안식향산은 탄산음료에 첨가가 허가된 방부제로 기준치가 ㎏당 0.6g 이하지만 과다섭취할 경우 구토,복통,설사 등을 일으킨다.안식향산이 인체에 섭취되면 대부분 배설되지만 일부는 체내에 축적된다. 식약청 및 한국코카콜라사는 “다이어트 음료인 코카콜라 라이트는 설탕대신 아스파탐(설탕의 수백배 단맛을 내는 감미료)을 쓰기 때문에 방부제의 일종인 안식향산을 첨가한 것”이라며 검출된 안식향산은 기준치 이하여서 음료로 적합하다고 밝혔다. 노주석기자 joo@
  • 대한매일신보 초대사장 배설 삶 영화화

    국운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구한말 국권수호와 민족정기 고양의 기치를높이 들고 항일구국 운동에 나선 대한매일신보의 초대사장 배설(裴說·영국명 베델)의 활약상이 영화화된다.한맥영화사 김형준사장은 “외국인으로서항일운동에 목숨을 바친 배설의 삶은 해외에서도 충분히 관심을 끌 수 있는소재”라면서 “우리나라는 아직 구한말의 항일운동을 다룬 영화가 없어 새천년을 앞둔 시점에서 그같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그는 “배설이 영국인인 만큼 영국 영화인으로서 ‘마지막 황제’를 제작한 제레미 토머스와 이 문제를 협의중”이라면서 “미국 할리우드의 쿠쉬너 락사도 영국의 제작이 확정되면 참여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고 말했다. 그는 이 영화는 영국인이 시나리오를 쓰고 한국,영국,미국 등 3국이 합작하는 대작이 되도록 추진 중이라고 덧붙였다.이 작품에는 대략 360억원정도가투입될 것으로 예상된다.이는 구한말의 풍경이 대부분 사라진 탓에 많은 세트를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이 작품은 이르면 2001년제작완료될 전망이다. 한맥영화사는 현재 상영중인 ‘링’을 제작했으며 ‘가슴달린 남자’‘피아노맨’‘죽이는 이야기’‘사랑하기 좋은 날’등을 만들었다. 배설은 1904년 국내최초의 민족정론지인 대한매일신보의 창간때부터 1908년 일제의 술책으로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옥살이를 하기 전까지 사장을 맡았다.대한매일신보는 배설사장 시절 일본제국에 진 빚을 갚는 국채보상운동을주도했고 의병활동을 집중보도해 일제의 갖은 탄압을 겪었다.당시 대한매일신보에는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장도빈 선생등이 포진,우국의 기개를 떨쳤다. 배설은 옥고를 치른뒤 건강이 극도로 악화돼 1909년 36세를 일기로 세상을떠났다.그는 “한국을 위해 위험을 피하지 않는 것이 나의 직책인 만큼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신명을 돌아보지 않겠다”고 다짐한 대로 신명을 한국에바친 영원한 한국인의 벗으로 남아있다. 그는 현재 서울 마포구 합정동 외국인묘지에 안장돼있다.대한매일신보는 한일합방 이튿날인 1910년 8월30일 매일신보로 개제돼 일제의 기관지(매일신보)로전락하는 운명을 맞았다. 박재범기자 ja
  • 다한증환자 ‘땀과의 전쟁’ 시작 됐다

    ‘조금만 긴장해도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히 젖는다’‘음식을 먹을 때마다얼굴에 흘러내리는 땀을 주체하기 어렵다’ 다한증(多汗症) 환자들은 이상고온으로 성큼 다가온 더위를 맞아 앞으로 치러야할 ‘땀과의 전쟁’이 걱정스럽기만 하다. 다한증이란 신체의 특정 부위에서 땀이 비정상적으로 많이 나와 생활에 지장을 주는 병이다.땀이 나는 부위에 따라 손바닥,겨드랑이,발바닥,얼굴다한증으로 나뉜다.원인에 따라서는 일차성과 이차성 다한증으로 구분된다. 일차성 다한증 다한증의 대부분을 차지한다.특별한 원인질환 없이 자율신경인 교감신경이이상 흥분으로 땀샘을 자극해 나타난다.원인이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한 예방법도 없다.정신적 긴장이나 스트레스,특정 음식물에 대한 과민반응등으로 많이 생긴다.대개 유년기에 발생해 나이가 들수록 증상이 심해진다. 환자들은 악수 등 손을 쓰는 일에 어려움을 겪고,발이 항상 젖어 있어 하루에도 여러번 양말을 갈아신어야 한다.포천 중문의대 이헌재교수(분당차병원흉부외과)는 “다한증을 치료하지 않으면 대인관계에 곤란을 겪게되고,심하면 정신적 장애를 일으키기도 한다”고 말한다. 일차성 다한증은 약물요법이나 수술을 통해 치료한다.약물요법에는 신경안정제 등으로 정신적 긴장을 완화시키거나 땀이 나는 부위에 염화알루미늄을바르는 방법 등이 있다.치료는 간편하지만 효과가 일시적이다.수술은 특정교감신경을 차단,땀샘에 전달되는 신경자극을 끊어버리는 ‘교감신경차단술’이 많이 쓰인다. 미세흉강경(微細胸綱鏡)을 이용한 이 수술은 효과가 빠르고 재발이 없으며,흉터가 작다(약 2mm)는 것이 장점.그러나 특정부위의 땀은 줄지만 땀이 전혀 나지 않거나 그 땀이 몸통 등 다른 곳에 몰려 나오는 것이 흠이다.고대안암병원 흉부외과 김광택 교수는 “지금까지는 외국에서 도입한 이론대로 2번교감신경을 주로 차단했는데 최근에는 3번 교감신경 차단술로 이러한 부작용도 크게 줄였다”고 말한다. 이차성 다한증 비만이나 갑상선기능항진증,당뇨,정신질환,폐경기증,뇌종양 등 질환에 의해 땀이 과다하게 분비되는 증상이다.땀을 흘리고 난 뒤 옷이 누렇게 변색되면 간질환에 의한 황달을 의심해볼 수 있다.이차성 다한증은 이러한 원인질환을 없애야만 치료될 수 있다. 한방요법 한의학에서는 다한증이 몸안에 소모성 열이나 영양과 배설 장애로 생긴 열이 많을 때 주로 생기는 것으로 본다.또 손발에 식은땀이 많이 나는 것은 기혈(氣穴)이 허약하기 때문.따라서 우선 체질을 진단해 인체의 한열허실(寒熱虛實)을 감별한 뒤 몸의 기운을 북돋아주고,불필요한 열을 제거해주는 약물요법 등을 쓴다.인체 경락(經絡)과 심리적 부조화를 조절하는 침과 뜸 등으로 치료하기도 한다.경희대한의대 정승기 교수는 “땀이 나는 부위와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이러한 요법을 적절히 쓰면 80% 정도는 효과를 보게 된다”고 말한다. 임창용기자 sd
  • 엘리자베스 英여왕 訪韓-”裵說 한·영 우호 주춧돌 놓았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20일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 내외를 환영하기 위한 청와대 국빈만찬에서 두나라의 오랜 역사적 유대관계를 얘기했다.그러면서 양국 우호관계에 주춧돌을 세운 한사람,한사람에게 경의의 뜻을 표시했다.누구보다도 외세에 밀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였던 19세기말 한국의 자주독립을 대변하던 대한매일신보(대한매일의 전신)를 창간한 어네스트 베델(한국명 배설)을 으뜸으로 꼽았다. 김대통령 만찬사는 지난해 11월11일 대한매일의 재탄생으로 더욱 의미가 깊었다는 지적이다.엘리자베스여왕의 방한에 앞서 한·영관계를 검토하면서 대한매일신보의 탄생과 영국인 베델과의 인연을 미리 파악했다는 후문이다. 엘리자베스 여왕도 만찬답사를 통해 “양국을 함께 묶는 것들 가운데 우리가 역사를 함께했던 시절”이라며 이에 화답했다.과거에 맺은 좋은 인연이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상기시켜 최초의 근대언론이었던 대한매일신보와 영국과의 인연을 더욱 뜻깊게 만들었다.
  • 물의‘일생’·’물사랑’ 실천수칙

    오는 22일은 UN이 정한 제7회 세계 물의 날.‘물의 날’을 맞아 물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이 소중한 물을 제대로 관리,이용하고 있는지,정부의 물관리에 대한 중장기 종합대책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 특집으로 꾸며본다. ◆물과 지구 지구상에 존재하는 물의 양은 약 13억 8,600만k㎥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이 중 바닷물이 96.5%인 13억3,800만k㎥이고,지하염수가 0.94%,염호수가 0.006%이며,나머지 2.53%인 3,500만k㎥만이 민물로 존재한다. 민물 가운데 68.7% 정도인 2,400만k㎥은 빙산·빙하 형태이고,지하수는 30. 15%인 1,000만k㎥ 정도며,나머지 1.15%인 100만k㎥가 민물호수나 늪,강,하천등의 지표수와 대기층에 분포하고 있다. ◆물의 탄생 과학자들은 약 46억년 전에 태양을 감싸고 있던 가스구름 속에서 지구를 비롯한 태양계의 별들이 생겨났고,최초의 지구는 뜨거운 가스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오랜 세월 동안 이 가스가 냉각되면서 수소와 산소원자가 안개처럼 한 덩어리로 만났고,여기에서 생긴 수증기 안개가 수백년동안 끊임없이 비를 뿌려지표면이 식어가면서 단단한 층을 이루었다. 태초의 바다인 민물바다가 생겨났고 산들이 깎여 평야가 되고 이 평야는 다시 바다로 씻겨 들어가며 지각 변동으로 바다속에서 새로운 산이 솟구쳐 오르기도 했다. 태초의 바다가 만들어지는 동안 생명체의 바탕이 되는 유기물이 만들어졌다.이 유기물은 진화를 거치면서 최초의 가장 간단한 생명체의 탄생으로 이어졌다.이처럼 지구와 생명체의 탄생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물이었고,이 모든 과정을 되풀이 한 것도 물이었다.물은 모든 생명체의 어머니이고,지금도 여전히 모든 생명을 낳고 기르는 생명의 젖줄인 것이다. ◆물의 순환 지구탄생의 역사에서 물은 최초로 생긴 물질 중의 하나이다.과학자들은 지구가 생겨났을 때의 물이 한 방울도 더 늘거나 줄어들지 않았다고 믿고 있다.그러나 물은 계속 움직이고 있다.지구의 물은 바다,대기,육지 사이에서 증발하고 비가 되어 다시 내려 대부분은 하천이나 강으로 흐르기도 하고 곧바로 증발하는 등 ‘물의 순환’을 되풀이 하면서 이동한다.지구에 1년간 떨어지는 물의 양은 총 11만3,000㎦ 정도다.얼음을 뺀 전체민물양의 1/4에 이르는 양이 매년 새 물로 바뀌는 셈이다. 대기중의 수분 모두(1만2,900㎦)가 한꺼번에 비가 되어 내린다면 지구의 표면은 25mm의 물로 덮이게 될 것이다.하지만 공기중 물의 총량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다.대기중의 수증기가 증가하면 증가한 양만큼 비,눈 또는 우박이 되어 반드시 지상으로 돌아온다.물이 이렇게 순환하고 있기 때문에 물을 영구순환자원으로 부른다. ◆물과 사람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그 생명의 원천을 물에 두고 있다.사람도 마찬가지이다.몸속의 수분함량은 사람과 체질에 따라 다르지만 몸의 약 70%정도가 물이다.어린이 몸속에는 물이 더 많지만 나이가 들수록 적어진다.보통 사람은몸 속에 약 45ℓ의 물을 지니고 있다.그 중 약 2.75ℓ의 물을 날마다 갈아넣고 있다.몸 속의 물이 1∼2% 부족하게 되면 심한 갈증을 느끼게 되고,5%정도가 부족해지면 혼수상태에 빠지며,12% 정도가 부족하면 생명을 잃게 된다. 물은 이산화탄소,산소,염분과 같은 생명에필요한 물질을 용해하고 분배하는 일을 한다.특히 인체에서는 혈액 순환,배설물 처리,근육 운동 등에 물은 필수불가결한 존재이다.사람들이 물없이는 눈 한번 제대로 깜박일 수도 없을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물이 사람에게 얼마나 소중한 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될 것이다. - '물사랑' 실천 25가지 수칙 1.화장실 변기의 누수를 막기 위해 수시로 물감 등을 이용해 테스트한다. 2.변기에 담배꽁초나 이물질을 넣지 않는다. 3.변기물통에 모래나 자갈을 채운 플라스틱 물병을 넣어 둔다. 4.샤워시간을 줄인다. 5.절약형 샤워꼭지나 유량 조절기가 달린 꼭지를 설치한다. 6.목욕시 욕조에 물을 받아 놓고 하지 말고 샤워기를 틀어 적당량만 사용한다. 7.양치질 때에는 물을 틀어 놓고 하지 말고 칫솔에 물을 적신 뒤 컵을 이용한다. 8.면도 때에도 물을 틀어 놓고 하지 말고 세면기에 약간만 받아 놓고 면도기를 씻는다. 9.수도꼭지나 수도관의 누수를 철저히 점검한다.수도꼭지가 조금만 낡아도하루 최고 수백ℓ의 물이 새어 나간다. 10.자동식기 세척기는그릇을 많이 모아서 한꺼번에 가동한다. 11.세탁기도 빨래를 많이 모아서 한꺼번에 한다. 12.설거지를 할 때 물을 틀어 놓지 말고 받아서 한다. 13.채소나 과일을 씻을 때에도 물을 틀어 놓지 말고 받아서 한다. 14.먹는 물은 냉장고에 넣어둔다.수돗물을 받아 먹는 것보다 훨씬 절약된다. 15.누수는 24시간 쉬지 않고 이뤄지므로 수도꼭지 등의 누수여부를 수시로점검한다. 16.잔디 물주기는 정확한 시기를 맞춰서 한다. 17.물주기는 뿌리까지 적실 수 있도록 한번에 충분히 한다. 18.물주기는 날씨가 시원할 때 한다.이른 아침에 물을 주면 증발 방지는 물론 곰팡이균 번식도 막을 수 있다. 19.물주기를 할 때는 정확한 위치에 물을 주고 도랑 등으로 물이 새지 않도록 한다.특히 바람 부는 날에는 물을 주지 말아야 한다. 20.나무를 심을 때는 물을 너무 많이 주지 않는다. 21.나무나 큰 식물에 물을 줄 때는 윗 덮개를 하여 수분의 증발을 막는다. 덮개를 하면 잡초 번식도 막을 수 있다. 22.보도 등은 물청소 대신 비로 쓰는 게 좋다. 23.세차 때에도 될 수 있으면 물을 쓰지 말고 비누로 닦아낸 뒤 마지막에만물로 헹군다. 24.아이들이 호스나 스프링쿨러 등으로 장난치지 못하게 한다. 25.실외의 호스관,꼭지,연결부 등의 누수를 철저히 막는다.
  • 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연출가 임진택씨

    삶이 뜻하지 않은 쪽으로 겉잡을 수 없이 흘러갈 때 ‘팔자’란 단어를 떠올린다.70년대 이후 줄곧 우리 놀이판을 지켜온 광대 임진택의 세상살이도이 ‘운명’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집안의 기대 속에 경기 중·고를 거쳐 서울대 문리대를 들어갔을 때만해도그저 수업시간에 교실을 웃음바다로 만들거나 오락시간을 주도하던 괴짜 모범생에 불과했다.어디에서도 부당한 정치권력에 맞서 학생운동을 하다 감옥살이를 하거나 불법·불순(?)공연을 주도할 싹은 보이지 않았다. “인생항로를 바꾼 발단은 낭만과 저항이 함께 녹아있던 문리대 정신이었고 불씨를 지핀 건 유신정권때 반항의 요람이던 연극반이었죠”. 연극반 시절 ‘오적’의 김지하와 ‘빠리의 택시운전사’홍상화 등과 만나면서 임진택의 세계관은 현실로 내려온다.점화된 정치의식은 당국의 감시와싸우며 연극운동으로 이어진다.그러나 합법적인 장에선 대부분 불발되었다.공연의 자유가 보장되었던 제일교회(박형규·권호경목사가 주도)나 이화여대 큰 마당에서 현실을 풍자했다. “살벌한 분위기였죠.예를 들어 이근삼의 ‘대왕이 죽었다’라는 공연도 내용과는 상관없이 제목이 이상하다며 금지할 정도였으니까요”. 당국과 술래잡기 하듯 벌이던 연극은 마당극의 단초를 발견하면서 더 넓은판으로 도약한다.‘교내공연 X’판정을 받은 김지하의 두 단막극 ‘구리 이순신’‘나폴레옹 꼬냑’을 71년 교련반대시위 도중 밤샘농성장(강의실)에서 시험공연한 것.무대도 없고 설비도 없는 공간에서 관중과 호흡하고 교감하는 장면을 목도한 것이다. “연습 수준의 공연이었지만 일방적으로 감동을 주는 게 아니라 관객과 주고받으며 상승하는 역동성을 발견했죠.마당극의 단초를 보았습니다”. 얼핏 보인 가능성은 70년대 중반 활기를 띤 탈춤과 접목되면서 맘껏 꽃핀다.옛날 것이란 이유로 당국에서도 권장한 탈춤에서 임진택은 역설적으로 열린 공간과 기동성이란 장점을 보았던 것. “연극의 내용과 탈춤의 형식을 결합한 거죠.날카로운 주제를 무대·대사에 의존하는 연극 형식보다는 관중과 어우러지며 신명을 우려내는 마당판의 역동성이 더 진보적으로 다가왔죠”. 물을 만난 광대는 73년 원주에서 김지하가 추진하던 ‘농촌협업운동’홍보를 위해 탈춤과 판소리가 섞인 ‘진오귀’순회공연을 계획한다.운동의 무산으로 공연은 빛을 보지 못했으나 제일교회에서 ‘청산별곡(哭)’이란 제목으로 결실을 맺었다. 이어 탈춤의 재창조에 나선다.74년 소리굿 ‘아구’를 국립극장 소극장에올렸다.‘이종구 신곡 발표회’라는 합법적 이름을 빌렸다.긴급조치1호 위반으로 도피중이던 김지하가 연습장에 몰래 찾아와 많은 도움을 주었다.이종구 이애주 김민기 김영동 채희완 김석만이 참가했다. “4월 긴급조치 2호 직전의 살벌한 상황에서 합법공간을 빌려 터트린 쾌거였습니다.공연이 시작된 뒤 지하형은 조명실에서 몰래 구경했죠”. 임진택은 가부키 분장으로 ‘마라데쓰’란 노래를 불러 화제를 일으켰다.이 곡은 이후 80년대 초반까지 대학가 탈춤공연의 단골노래로 자리잡았다. 숨가쁜 ‘금지 인생’에도 휴식기간이 있었다.긴급조치로 인한 감옥살이뒤홀어머니를 모신 ‘무능한 가장’은 교수추천으로 대한항공에 들어간 것.반골의 몸짓은 멈추지 않고 ‘유신헌법 찬반투표’에 대한 시민 불복종운동의한 방법으로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공연을 준비했다.공연 3일전 전원이 연행되면서 거사는 무산되었다.이 일로 당국의 눈총을 의식한 회사와 마찰을 빚고 6개월만에 사표를 던진다. 이어진 TBC의 PD생활에서도 한직으로 내몰리자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보성소리’ 승계자 정권진선생을 사사한 것도 이 무렵이다. 세번째 전환점인 판소리 시대를 열면서 ‘금지’행로는 되살아난다.85년 올린 ‘똥바다’는 공연윤리심의위원회의는 반대했지만 대학가에선 불티났다. “저지선을 뚫고 두루마기 입고 철조망을 넘어가 공연하면 1,000∼2,000명이 몰렸죠.민중성이란 알맹이를 대중화하는 길을 보았죠.소수의 강경노선 목소리만 크고 다수의 민주운동진영이 소진상태에 있던 터라 대중화가 시급했죠.예술적 흡인력으로 대중성이란 힘을 담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직생활에서 막혔던 ‘끼’를 본인의 말 그대로 ‘포효’하기 시작한 것이다.판소리의 자진모리 장단이 퍼붓는 통쾌함에 한국의 부패세력을 비꼬는 사설은 5공화국의 질식할듯한 시대상황을 배설해준 활로였다.빨라진 걸음은 90년 ‘5월광주’를 낳는다.광주민주화 항쟁 10주년 기념으로 항쟁의 상징인윤상원에 대한 기념비적 소리를 남기고 싶었다. “상원이완 이전에 두번 만난 적이 있어요.황석영 형의 제의로 광주에서 모임이 있었는데 상원이가 독학한 저의 ‘소리내력’을 외워서 부르더라구요”.월계동 아파트에 칩거하면서 윤상원에 대한 기억을 보듬으며 연습에 몰두하던 시절을 “상원이가 나오는 마지막 날 밤 얘기를 푸는데 눈물이 줄줄 납디다”라고 회상한다.사회와 예술을 아우르는 행보는 93년 절창 ‘오적’으로이어진다.정권진선생을 찾아가 두루마리에 적힌 담시 ‘오적’을 보여주며‘선생님 이것을 소리로 한번 담고 싶습니다’라고 배움을 청했던 소망이 풀리던 순간이었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전국민족극협의회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다가 97년,98년 ‘과천세계마당극큰잔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임진택의 문화실천이 갖는 미덕은 과거의 공간에서 박제화되지 않고 현재형으로 살아있다는 데 있다.‘금지’와 친화력이 생긴걸까,최근엔 마당극잔치를 주관하려는 과천시의 ‘얼굴을 달리한 금지문화’와 싸우느라 바쁘다.李鍾壽 vielee@
  • 대한매일 秘史(12회)-통감부 기관지와의 싸움

    서울 프레스의 발행인으로 이토 히로부미는 즈모토(頭本元貞)를 서울로 불 러왔다. 즈모토는 이토의 영어 공보비서였고,1896년에 일본 내각의 기관지로 창간된 재팬 타임스의 초대 사장을 맡았던 사람이다.이토는 대한매일과 영문판 코 리아 데일리 뉴스를 무력화하기 위해서는 즈모토가 가장 적절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던 것이다. 즈모토는 이토가 수상이었을 때에 그의 개인비서로 임명되었다가 1897년에 는 재팬 타임스를 창간하여 그 초대 사장이 되었다.재팬 타임스는 일본인들 이 발행한 최초의 영어 일간지로서 이토의 지원으로 발행되었다.즈모토는 한 국에 오기 전 러일전쟁 기간 중에는 영국 스탠더드(Standard)지 특별 통신원 을 맡았었다.그의 영어실력은 영국사람들도 ‘뛰어나다’고 칭찬할 정도였으 며,주일 영국대사관과도 관계가 매우 좋았다. 즈모토는 한국에 온 뒤에 처음에는 주로 통감부의 해외홍보 업무를 맡았다. 1906년 7월 26일에는 그의 주최로 신문 기자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었고, 그 직후에 발행된 코리아 리뷰 7월호에 주한 일본헌병대가 고종 측근 5명을 체포하여 심한 고문을 가했다는 기사가 실리자 이에 항의하는 공개 편지를 헐버트에게 보낸 적도 있다. 이토는 일찍부터 서구 열강의 여론에 신경을 썼고,해외홍보의 중요성을 깊 이 인식한 사람이었다.재팬 타임스의 창간도 이토의 그와 같은 생각을 반영 한 것이었다.특히 일본의 한국 침략정책은 열강국들과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 었으므로 대외홍보에 큰 비중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즈모토가 서울 프레스를 일간으로 발행하기 시작한 것은 1906년 12월 5일자 부터였다.즈모토는 서울 프레스를 통해 대한매일과 헐버트의 코리아 리뷰를 사사건건 비난하고 일본의 침략을 선전하였다. 즈모토는 한국에서 외국인들이 발행하는 출판물들을 향하여 독(毒)기를 품 고 모략중상만 일삼는 구역질 나는 것들이라고 비난하고,선정적이고 사기협 잡꾼이라는 등으로 인신공격을 가하였다.서울 프레스는 또 헐버트를 향해 국 가 정책과 이익에 배치되는 반대운동에 자신을 팔아넘김으로써 자신들이 태 어난 나라까지 망각할 수도 있는 가련한 인간들이라는 등의 갖은 욕설을 퍼 부어 대었다.헐버트는 즈모토의 이러한 공격을 조목을 들어 맹렬히 반박했다 .헐버트는 1906년 12월호 코리아 리뷰에서도 서울 프레스 12월 26일자 논설 「안정을 위한 호소」(Plea for Peace) 등을 신랄히 비판하고 있다. 당시에 발행된 대한매일과 코리아 리뷰를 보면 서울 프레스가 어떤 논조로 발행되었는가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이 신문은 일본의 한국침략 정책을 적극적으로 선전하고 홍보하는 한편으로 일본의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독기 서린 공격을 퍼부었던 것이다. 서울 프레스는 지면을 확장하는 동시에 일본의 재팬 타임스와 편집·경영 양면에서 긴밀한 협조관계를 강화했다.서울 프레스는 1907년 3월 8일자 사설 「오도된 애국심」(Misguided Patriotism)은 당시 국내에서 불붙기 시작한 국채보상운동까지도 비난하면서,마지막으로는 ‘펜과 혀를 놀려’ 이 운동을 격려하고 돕는 한국의 ‘친구들’을 공격했다.서울 프레스는 또다시 9일자 사설 ‘한국의 친구들’(Korea‘s Friends)에서 한국에와 있는 반일적인 외 국인들을 헐뜯었다.이들 논설에서 구체적으로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 펜과 혀를 졸리는 한국의 친구들’이란 대한매일(배설)과 코리아 리뷰(헐버 트)임을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서울 프레스와 공동보조를 취한 신문은 도쿄에서 발행되는 재팬 타임스였다. 서울 프레스의 3월 8일자 논설을 받아 재팬 타임스는 ‘한국의 적들’(Korea ’s Enemies)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3월 15일자로 실었다.이 사설은 서울 프 레스를 그대로 인용하면서 “어떤 경우건 反日的인 한국의 십자군들이 한국 의 敵이라는 사실을 세계는 지켜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鄭普錫 외대교수·언론사 ] '대한매일 秘史'를 오늘로 접습니다.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
  • 황무지 개간권과 항일논조(대한매일 秘史:9)

    ◎일 50년간 토지사용 요구 강력 비판/영구 식민지화 속셈 폭로에 유생들도 궐기/개간권 확보 실패하자 대한매일 탄압 시작 대한매일은 창간직후부터 강력한 항일민족지로 발행되었다.그러나 항일논조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비판하면서 부터였다.일본이 한국의 황무지 개간권을 얻어내어 이를 영구적인 식민지로 만들려는 공작에 착수한 것은 러일전쟁 직전인 1904년 1월부터였다.일본은 처음에는 태국(Siam)의 땅을 얻어내려 했다가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한국으로 눈을 돌렸다.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한 표면상의 인물은 일본 대장성의 관방장을 역임한 나가모리(長森藤吉郞)였다.나가모리는 개인 자격으로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하는 듯이 가장했지만 사실은 일본 정부의 치밀한 계획 아래 진행된 것이었다. ○전국토 3분의 2가 넘어갈판 일본이 요구한 내용은 한국에서 명백하게 이용,경작하고 있는 토지 이외의 국토를 모두 개간하고 정리·개량·척식하는 권리와 그를 이용하고 이익을 거두는 모든 경영권을 우선 50년 동안나가모리에게 위임하라는 것이었다.일본은 한국에서 현재 경작하고 있지 않은 땅에 대한 사용권을 얻어서 50년 동안 이를 개간하여 경영하되 50년이 지난 뒤에는 사용기간을 또다시 연장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이러한 계약이 체결되는 경우에 일본측이 차지할 수 있는 ‘황무지’가 얼마나 될것인지 정확한 넓이가 계산된 것은 아니었지만 외부협판 윤치호는 전 국토의 3분의 2가 일본측에 넘어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일본의 입장에 호의적이었던 주한 영국공사 조단은 적어도 경작 가능한 토지의 3분의 1은 될 것으로 추산된다고 본국에 보고했을 정도였다.일본이 황무지 개간권을 차지한다면 한국의 광대한 토지는 영구히 일본의 점령하에 놓이게 될 것이며 한국은 자연스럽게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 운명이었다. 이같은 사태에 직면하여 당시 양대 일간지였던 황성신문과 뎨국신문 등이 이를 폭로하였고 주로 유생(儒生)들이 중심이 되어 격렬한 반대운동이 일어났다.황성신문은 7월6일자 논설을 비롯하여 7월7일부터는 3회에 걸친 연속논설을 게재하여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의 부당함을 비판했다.대한매일이 창간된 것은 러일전쟁 직후의 불안한 사회 분위기에 일본의 부당한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반대하는 운동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인 7월18일 이었다.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반대하는 국민적인 운동을 대한매일이 외면할 수는 없었다. 대한매일은 창간 4일후인 22일자에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반대하는 윤치호의 글을 게재하였다.이때부터 대한매일은 일본의 부당한 요구를 비난하기 시작하였다.황무지 개간권 문제는 일본에서 발행되는 일본어 신문과 영어신문에도 논란이 일어났으므로 대한매일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는 일본에서 발행되는 친일논조의 영어신문 재팬 메일과 고베 해럴드와는 논전을 벌이면서 한국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대한매일의 일본에 대한 비판은 9월2일부터 5회에 걸쳐 연재된 「한국에 일본위력이라」는 논설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났다.이 논설은 1895년의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래 한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정책을 낱낱이 들춰내면서 실례를 들어 일본을 공격하였다.특히 마지막부분에서는 주한 일본 공사관의 대리공사였고 침략외교의 선봉장이었던 하기와라(萩原守一)를 신랄하게 비난했다.하기와라는 주한 일본 공사 하야시(林權助)와 함께 을사조약 체결을 강요했던 일본 공사관의 제2인자였다.하기와라는 동경제대 출신으로 외교관의 경력이 화려했으며 본국에서는 정치적인 배경도 튼튼한 야심에 넘치는 젊은 외교관이었다.그는 하야시와 함께 한국침략 정책에 있어서는 늘 강경파였다. ○배설추방… 신문발행 중단 공작 대한매일을 비롯한 민족진영의 반대로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는 실패로 돌아갔다.그러나 하기와라는 대한매일에 직접적인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하기와라는 배설의 일본 공사관 출입을 금지시키고 배설을 한국에서 추방하고 신문발행을 중단하도록 하는 공작을 시작한 것이다.대한매일은 더한층 항일적인 논조를 강화하였고 고종을 비롯한 민족진영은 대한매일을 더욱 뜨겁게 후원하였다.
  • 통풍은 엄지발가락으로부터 온다/송영욱(전문의 건강칼럼)

    통풍이 관절염의 한 종류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의외로 드물다.통풍성 관절염은 염증때문에 관절이 붓고,열이 나고,빨갛게 되며 심한 통증이 오는데 대부분 엄지 발가락에서 시작한다. 통풍은 체내에 요산이란 물질이 과다하게 축적하면 발병하는데,요산은 음식물 섭취에 따라 얻어지는 퓨린이란 물질이 붕괴하면서 생기는 찌꺼기다.요산은 보통 혈액에 녹아 있다가 신장을 통해 오줌으로 배설된다.통풍환자는 거의 모두 혈액 내에 요산의 농도가 높은 이른바 고요산혈증을 보이고,요산이 결정화해 관절이나 그밖의 조직에 침착된다.이를 통풍결절이라 부른다. 고요산혈증과 통풍은 유전으로 발생할 수도 있으며 이뇨제나 아스피린 등을 장기복용했을 때도 생긴다.갑작스런 통풍은 음주,과식,외과적 수술,다이어트 또는 관절의 부상 등이 원인이 된다.환자 가운데 남성이 80∼90%를 차지하고 첫 증상을 보이는 시기는 대부분 40∼50세. 통풍은 보통 엄지 발가락에서 처음 발생하고 무릎,발목,발,손,손목 그리고 팔꿈치에서 발병한다.관절부위의 피부가 팽팽하게당겨지고 윤이 나며,피부색이 붉은색 또는 자주색을 띠게 된다.초기엔 관절 부위에 이불만 살짝 닿아도 고통을 느낄만큼 통증이 심하다가 1∼2주일 지나면 서서히 사라진다. 그러나 약물치료를 하지 않으면 더 자주 발생하고,증세가 길게 간다.통풍결절은 마치 피부 바로 밑에 있는 덩어리처럼 보이며,관절 내부 또는 그 부근이나 요관 또는 방광에서 결석을 형성하거나 신장을 손상시킨다.통풍인지 의심나면 혈청 요산을 검사하고,관절액을 뽑아서 요산 결정의 유무를 검사한다. 통풍 치료는 주로 약물로 하는데 콜치신 혹은 비스테로이드성 항염제 등을 사용하여 급작스런 발병에 따른 염증을 억제하고,요산배설약이나 알로퓨리놀(자이로릭)을 사용하여 혈중 요산농도를 낮추어야 한다.통풍환자에겐 일반적으로 음식제한을 두지않고 술도 맥주 한병이나 와인 한잔까지 허용한다.그러나 지나친 알코올 섭취는 고요산혈증을 동반하여 증세를 악화시킬 수 있다.(02)760­3198
  • 배설과 장지연(대한매일 秘史:7)

    ◎배설 출옥 기념 상해파티서 조우/장지연 ‘시일야방성대곡’으로 구속/대한매일 용기 찬양·석방 요구 인연 배설이 출옥하자 상해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그의 출옥을 축하하는 파티를 열었다.우연하게도 이 자리에는 황성신문 사장이었던 장지연(張志淵)이 참석했다.장지연과 배설은 3년전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때에 잊을 수 없는 인연이 있었다.장지연은 1905년 11월20일자 황성신문에 일본이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였음을 통렬히 비판하는 명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썼다가 구속되자,대한매일신보는 그 용기를 크게 찬양하면서 석방을 요구하였고,문제가 된 논설을 영역하여 호외로 발행하여 국내외에 이를 알린 일도 있었다.이같은 인연의 배설과 장지연은 멀고 먼 이국땅 상해에서 우연히 만나 밤새 통음(痛飮)하며 나라의 운명을 걱정했던 것이다. ○두사람 나라 걱정하며 통음 장지연은 1909년 5월1일 배설이 서울에서 사망한후 그의 공적을 기리는 사람들이 세운 묘비의 비문을 지었는데 비문에 이때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내 일찍이 상해에서 그를 만나 날이 새도록 함께 통음할 적에 비분강개 하야 그 뜻이 매우 격렬하더니 이제 공의 묘를 위하여 글을 쓰게되매 허망한 느낌을 이기지 못하겠도다.이제 명(銘)하여 가로되 드높도다 그 기개여 귀하도다 그 마음씨여,아! 이 조각돌은 후세를 비추어 꺼지지 않을 지로다.” 1905년 11월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된 소식을 들은 장지연은 20일자 황성신문에 우리 언론사에 가장 빛나는 논설로 손꼽히는 유명한 ‘이 날에 목놓아 통곡하노라(是日也放聲大哭)’를 실어서 그 통분함을 천하에 토로하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이 논설에서 장지연은 보호조약의 체결로 동양 3국의 평화가 깨어지게 될 것임을 지적하고 조약 체결의 부당함을 비판하였다.또한 일본의 강압에 굴복하여 조약에 서명한 대신들을 개돼지만도 못한 자들이라고 힐책하였다.그 일부를 현대문으로 바꾸면 다음과 같다. ○장지연 배설 사망후 묘비문 작성 “…우리 대황제 폐하의 강경하신 뜻으로 거절해 마지않으셨으니 이 조약이 성립되지 못할 것은 이등박문 스스로가 알아 파기할것으로 생각했는데 아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이 사사로운 영화를 바라 머뭇거리고 으름장에 겁먹어 떨면서 매국의 역적 됨을 달갑게 여겨서 사천년 강토와 오백년 종묘사직을 남의 나라에게 바치고 이천만 동포를 몰아 남의 노예로 만드니 저 개돼지만도 못한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과 각부 대신은 깊이 나무랄 것도 없지만 명색이 참정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수상으로 단지 부(否) 자(字)로 책임만 때우고서 명예를 구하는 밑천으로 삼을 계획이었던가.김청음(金淸陰)처럼 항서를 찢고 통곡하지도 못하고 정동계(鄭桐溪)처럼 칼로 배를 가르지도 못하고서 뻔뻔스럽게 살아남아 세상에 다시 섰으니 무슨 낯으로 강경하실 황상 폐하를 다시 뵈올 것이며 무슨 낯으로 이천만 동포를 다시 대할 것인가.아 원통하고 분하도다. 남의 노예된 우리 이천만 동포여,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단군 기자이래 사천년을 이어온 국민정신이 하루 밤사이에 갑자기 멸망하고 말 것인가.원통하고 원통하도다 동포여 동포여.” 인용문 가운데 고딕체는 본문(4호) 보다 한 호가 더 큰 활자인 2호 활자를 사용하여 강조하는 편집기법을 활용하였다.위기에 처한 나라의 운명을 독자들에게 시각적인 효과를 더하여 강조한 것이다.장지연은 이 논설과 함께 ‘오건조약(五件條約)청체전말(請締顚末)’이라는 기사를 실었다.역시 4호 본문에 2호 활자로 중요한 부분을 강조한 편집이었다.이등박문이 11월10일 경부철도편으로 서울에 도착하여 을사조약 체결을 강요한 전말을 소상히 폭로한 내용이었다.이날짜 신문의 시일야방성대곡과 을사조약 체결에 관한 기사는 검열 당국의 손에 들어갔다면 도저히 용인될 수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장지연은 일본군의 검열을 받지 않은 채 이 신문을 배포하였다. 주한 일본헌병사령부는 1904년 2월 러일전쟁 직후부터 한국 언론에 사전검열을 실시하고 있었다.일본은 이해 7월 군사경찰 실시를 한국에 통고하였다. 작전상 한국의 치안유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일본의 군과 경찰이 한국의 치안을 담당하겠다는 것이 이유였다.한국은 이를 거절했으나,일본은 군사경찰 실시를 일방적으로 강행하였다.
  • 배설의 상해 복역(대한매일 秘史:6)

    ◎더위·모기떼 시달리며 3주간 혹독한 옥고 치러/판사 “한국민 선동” 판결.英 군함으로 상해 이소/한국인들 연일 몰려오자 형무소 면회 아예 금지/영어 공판기록 번역 대한매일 한달반 연재 4일째인 6월18일(1908년) 판사 보온은 배설에게 3주일간의 금고(禁錮)형을 선고했다.또한 복역 후 6개월간 근신을 서약해야 하며 350파운드의 보증금(피고 200파운드,보증인 150파운드) 납부를 판결했다.판사는 문제된 논설 3건은 한국민들로 하여금 일본에 대항한 봉기를 선동한 것이 의심할 나위가 없다고 단정했다.그러므로 앞으로 계속 반란을 선동한다면 추방령을 내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판결 결과가 알려지자 재판정 밖의 많은 한국인들은 실망하고 격분했다.어떤 사람은 돈 4천환을 가지고 와서 배설의 금고형을 돈으로 대신 면제받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내놓겠다고 말했고,변호인 크로스의 노고를 치하하는 연회를 제의하는 사람도 있었다.주일 영국대사 맥도날드는 한국인들의 절대적인 신뢰와 지지를 받고 있는 배설의 처벌로 그들의 감정이 악화될 것을 우려,서울의 영국 총영사관이 습격당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미국의 한국교포들이 친일 외교고문 스티븐스를 저격한 것을 보더라도 그런 위험성은 충분히 있다고 보고 영국 총영사관 부근에 경찰관을 순회시키는 등의 예방조치를 취해달라는 편지를 일본측에 보냈다. 배설을 어디에 수감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주한 영국 총영사관이 해결해야할 문제였다.서울에는 영국인을 구금할 수 있는 형무소 시설이 없었다.편법으로 호텔이나 집을 세내어서 감금할 수도 있겠지만 일본 당국이 불만을 제기할 것이다.그렇다고 일본인 관할 하의 형무소에서 복역케 한다면 영국이 배설을 적의 손에 넘겨주었다는 인상을 주게 될 것이었다.마지막으로는 배설을 상해로 호송,그곳의 형무소에서 복역케하는 방법을 고려할 수 있었다.그러나 배설을 어떻게 상해까지 보내느냐 하는 것이 난관이었다.당시 인천­상해간 정기 배편이 없고 일본을 경유하도록 되어 있었다.그러나 배설이 일본을 거쳐 상해로 가는 경우에는 일시적으로 일본의 사법권 관할하에 놓이게 된다는 문제점이 있었다.코번은 이런 문제점들을 지적하면서 배설을 인천에서 상해로 직접 싣고 갈수 있도록 요코하마에 정박중인 영국 군함을 보내달라고 본국 정부에 건의했다.외무성은 이를 받아들여 요코하마에 있던 영국 군함 클리오(Clio)호를 단 한 사람의 죄인 배설을 상해로 호송하기 위해 급히 인천으로 파견했다.배설에게는 6월18일 오후에 금고형을 언도하였으나 상해로 싣고 갈 군함이 올때까지 일단 석방,이틀 뒤인 6월20일에 출두하도록 명령하였다.이에 따라 배설은 20일 오후 4시 총영사관에 출두,곧장 서울역으로 가서 5시20분 발 인천행 기차를 타라는 지시를 받았다.배설이 서울역을 떠난다는 소문이 퍼지면 많은 군중들이 서울역에 몰려올 것이고 그러면 소란이 일어날 것임을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상해로 가는 낡은 군함을 탄 이후부터 배설의 고생은 시작되었다.배 안의 생활은 이미 복역 기간이었다.더욱이 상해 형무소에 들어간 후에는 밤이면 더위와 모기에 시달리느라 잠을 잘 수 없었다.팔다리를 격렬하에 휘저어대며 방안을 거니는 것으로 겨우 모기떼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배설은 자신을 「온정적으로 처리」한다면서 상해로 이송,복역하도록 결정한 판사가 원망스러웠다.판사가 감옥의 혹독한 상황을 직접 겪어보기를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른다고 출옥 후 일본의 영국인 발행 영어신문 재팬 크로니클에 실은 옥중기에서 밝혔다. 배설의 상해도착 소식을 들은 상해거주 한국인들은 연일 면회를 왔다.형무소 당국은 면회를 허락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재소자들의 면회마저 금지시켰다.감옥의 3주간은 납덩이처럼 무겁게 한없이 느리게 갔다.그가 출옥한 날은 7월11일이었다. 한편 서울의 대한매일은 국한문판과 한글판에 배설이 상해로 떠나던 바로 그날인 6월20일부터 공판의 상세한 내용을 연재하기 시작,무려 한 달 반이 넘도록 연재되어 배설이 돌아온 뒤인 8월7일까지 실렸다.영어로 진행된 공판 내용을 번역하여 거의 완벽하게 게재하였다.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일본이 한국을 억압했기 때문이라는 피고의 주장과 변호인 크로스의 변론,증인들의 증언 을 알리려 했던 것이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