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방탕
    2026-07-12
    검색기록 지우기
  • 천세
    2026-07-12
    검색기록 지우기
  • 여사
    2026-07-12
    검색기록 지우기
  • 007
    2026-07-12
    검색기록 지우기
  • RM
    2026-07-12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374
  • 푸주간 진열대를 그린 16세기 ‘먹방’ 그림에 담긴 의미 [으른들의 미술사]

    푸주간 진열대를 그린 16세기 ‘먹방’ 그림에 담긴 의미 [으른들의 미술사]

    9월 한 달 동안 ‘으른들의 미술사’는 음식을 그린 명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절 먹고 싶은 간절한 소망에서 나온 음식 그림도 있고 경제적, 종교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음식 그림도 있다. 한 그릇의 음식에는 그 시대의 사회, 정치, 종교, 문화가 녹아있다.  16세기 그림의 떡 판매대에 많은 음식물이 전시된 그림은 16세기 네덜란드에서 유행한 정물화 유형이었다. 이 작품은 피테르 아르첸(Pieter Aertsen·1508~1575)의 작품으로 최초의 시장 그림으로 평가받고 있다.  판매대에는 소와 돼지머리, 돼지와 양 다리, 내장, 햄, 라드(돼지 기름), 훈제 생선, 버터, 밀크, 치즈, 프레첼, 소시지, 가금류 등 육류, 낙농업, 수산물, 밀가루 제품 등 없는 게 없다.  조작된 그림 사실 이 풍요로운 판매대 식재료들은 조작된 그림이다. 19세기 이전에는 이처럼 육류를 신선하게 보존하는 기술도 없었을 뿐 아니라 식재료들을 운반할 교통 수준이 열악했다. 더욱이 일반 서민들은 이 많은 육류를 끼니마다 구입할 수도 없었다. 이 작품은 그저 음식을 쌓아놓고 배불리 먹고 싶은 간절한 소망에서 나온 그림이다.  그림 속 그림 사실 이 작품은 언뜻 보면 시장 그림이지만 사실은 종교적 특성을 내포한 그림이다. 오병이어를 연상시키는 생선 두 마리가 접시 위에 십자가 모양으로 교차되어 있다. 생선 뒤로 성가족이 보인다. 나귀를 타고 이집트로 피신하는 성 가족은 뒤에 따라오는 가난한 자들에게 빵을 나눠주고 있다. 성모가 빵을 기꺼이 나누는 장면은 단순히 육체를 위한 음식과 영혼을 위한 음식 중 어느 것을 택해야 할지 말해 준다. 또 하나의 숨은 그림 한편 그림 속 그림은 오른편에 하나 더 있다. 선술집으로 보이는 곳에 한 사내가 우물에서 물을 길어 병에 물을 붓고 있다. 뒤에 자리한 테이블에는 이미 거나하게 취한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들의 방탕한 생활은 바닥에 널부러진 굴과 홍합 껍질을 보면 알 수 있다. 굴은 정력의 상징으로서 술과 굴의 만남은 그 자체로 방탕함을 상징한다.  탐욕을 경계한 그림 이 작품은 성 가족과 선술집을 대비시켜 올바른 삶을 성찰하려는 의도로 읽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나눔의 실천과 부질없는 욕심을 경계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요즘 방송과 먹방 유튜브 프로그램을 보면 많은 음식을 쌓아놓고 먹는 것이 유행하고 있다. 인기 있는 유튜버 중엔 공중파 방송에 출연해 셀럽 못지 않은 인기를 누리기도 한다. 먹방에서 프로그램 출연자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만으로도 우리의 배가 부를 때가 있다. 먹방의 인기 요인 중 하나가 대리 먹방이란 점이다. 자발적으로 굶주림을 택한 다이어터들에게 많은 음식을 쌓아놓고 먹는 먹방은 21세기형 그림의 떡인 셈이다.
  • 성범죄는 여학생의 ‘요염한 행동’ 때문?…이상한 성교육 논란 [여기는 중국]

    성범죄는 여학생의 ‘요염한 행동’ 때문?…이상한 성교육 논란 [여기는 중국]

    중국의 한 중학교에서 담당 초빙 교사가 성범죄가 피해 여성의 ‘요염한 행동’이라고 발언해 논란이다.  10일 중국 샤오샹천바오 등 현지 매체에 따르면, 지난해 4월 광둥성 광저우 서쪽의 상공업 도시인 자오칭에 소재한 화이지현 제1중학교에서 여중생들을 대상으로 성교육을 진행하던 여성 교사는 위 발언으로 논란을 빚었다.  보도에 따르면, 지난해 4월 실시한 ‘마음건강교육’ 강의에 초빙된 교사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상당수 10대 여학생 성희롱 피해 사건은 피해자인 미성년자의 속임수 때문이며 행실이 방탕해 초래된 것”이라고 발언했다.  당시 강의 현장에 있었던 여학생들 다수가 강의 내용에 항의하며 여러 차례 수정을 요구했으나, 해당 여성 교사는 오히려 피해 호소 여학생들이 오염한 행동이 성범죄의 주요 원인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거듭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이 더 큰 논란이 된 것은 사건이 발생한 지 16개월 만에 문제의 학교와 관할 교육청이 늑장 대응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 학생들은 문제의 강의 내용 시정을 즉각적으로 요구했으나, 모르쇠로 일관하던 학교 측이 현지 소셜미디어와 매체 등을 통해 사건이 보도된 이후에야 조사를 시작했다.  실제로 강의 현장에 있었던 학생들 중 상당수가 문제의 강의 내용이 담긴 PPT를 증거로 SNS에 공유, 문제를 공론화해 네티즌들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됐다.  그러자 지난 9일 화이지현 관할 교육국은 공식 위챗 계정인 ‘화이지 교육호’를 통해 이 사건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 ‘교육국이 문제의 사건을 신속하게 처리할 것’이라는 짧은 입장문을 공개했다.  한편, 앞서 지난 7일 문제의 중학교 한 관계자 “학교에서도 이 사건을 주시하고 있다”면서도 “이 일이 왜 전국적으로 화제가 된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모르겠다”고 현지 매체 취재에 입장을 밝혀 비판을 받은 바 있다. 
  • 화사 ‘외설 논란’ 중인데… 이효리 “스트립쇼 하고 싶다고”

    화사 ‘외설 논란’ 중인데… 이효리 “스트립쇼 하고 싶다고”

    최근 한 대학축제 무대에서 자극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여 외설 논란인 마마무 화사가 tvN ‘댄스가수 유랑단’에서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갔다. 지난 18일 ‘댄스가수 유랑단’ 공식 인스타그램에는 오는 25일 첫 방송 예고 영상이 올라왔다. 공개된 영상에서 화사는 지각하는 이효리를 두고 “선배님 주인공병”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선배님 뭐 하시는 거냐”라고 물었다. 또 선배들이 골반춤을 요구하자 “집에 보내달라”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이효리는 “화사가 스트립쇼 하고 싶다고 그랬다”라고 폭로했고, 이에 화사는 “저희는 방탕해질 거다. 그동안 부리지 못한 끼들을 여기서”라며 남다른 각오를 드러냈다. 앞서 지난 12일 성균관대 축제의 화사 무대 영상이 직캠을 통해 온라인상에 퍼지면서 ‘외설 논란’이 불거졌다. 당시 허벅지 라인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숏팬츠를 입고 무대에 선 화사는 춤을 추던 중 손을 혀에 갖다 대 침을 바르는 듯한 동작을 하더니 이내 손을 다리 사이로 옮겨 특정 부위를 쓸어올리는 듯한 행동을 했다. 이후 온라인상에는 “눈살이 찌푸려진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했는지 궁금하다” 등 부정적인 네티즌 반응이 쇄도했다.
  • 자녀 상속분쟁 걱정된다면… 은행에 ‘유언’ 맡겨 보시죠 [정문영 PB의 생활 속 재테크]

    모든 인간은 다 똑같이 알몸으로 태어나 각자 다른 인생을 살다가 다시 알몸으로 돌아갑니다. 금융자산과 부동산 등 재산도 가지고 갈 수 없기에 생전에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가족들 간에 상속 재산 다툼이 없기를 바라고, 가족 중 특정인에게 더 큰 금액을 물려주길 바라며, 가족이 아닌 제삼자에게 주길 바라기도 합니다. 경제관념이 없는 방탕한 자녀에게 재산을 물려주게 된다면 더 큰 고민이 생길 것입니다. 이럴 때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유언’입니다. 유언이란 본인의 사망으로 효력이 나타납니다. 유언의 방식으로는 자필증서, 공정증서, 구수증서, 녹음, 비밀증서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유언장은 생전에 본인이 재산관리를 해야 해 불편한 데다 사후 상속 재산을 둘러싸고 유류분 청구로 다툼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대신 안전하고 신속하며 본인의 의사가 잘 반영되는 ‘유언대용신탁’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유언대용신탁이란 위탁자가 생전 또는 사후에 재산을 물려받을 수익자를 지정하는 동시에 재산을 수탁자에게 신탁하면 수탁자가 이를 맡아 운용·관리하는 계약입니다. 수탁자는 위탁자 재산을 운용·관리하다가 위탁자가 사망하면 계약 조건에 따라 신탁 재산을 수익자에게 내주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자녀 B와 C를 둔 A(위탁자)가 모든 재산을 B(수익자)에게만 물려주기 위해 은행(수탁자)과 유언대용신탁계약을 체결했다면 은행은 A의 생전에 부동산과 예금을 관리하고 A 사망 시 부동산 소유권과 예금을 B에게 이전하는 절차를 진행합니다. 만약 C가 유류분 반환청구소송을 하더라도 신탁계약 체결 후 1년이 지난 후부터는 신탁재산이 유류분 청구 대상 재산에서 배제된다는 1심 판례가 있어 C의 유류분 소송에 방어할 수 있습니다. 유언대용신탁은 복잡한 상속 절차를 생략할 수 있고 위탁자 생전 의도에 따른 사후 재산 분배가 가능합니다. 여러 세대에 걸친 수증자 지정도 가능하며 미성년자나 장애가 있는 상속인의 상속 재산 보존도 가능합니다. 자녀들 사이 상속 분쟁이 염려되거나 본인에게 잘해 주는 자녀에게 더 많이 상속해 주고 싶은 분, 노환이나 치매로 재산 관리가 걱정인 분, 현명한 자산 관리와 상속을 원하는 분은 은행을 찾아가 유언대용신탁을 상담받아 보세요. 신한PWM압구정센터 팀장
  • 英 엘리자베스 여왕 1조원 재산…찰스 3세 혼자 전액 상속

    英 엘리자베스 여왕 1조원 재산…찰스 3세 혼자 전액 상속

    서거한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전 재산이 찰스 3세에게 이전되면서 사실상 앤드류 왕자와 에드워드 왕자, 앤 공주는 단 한 푼의 유산도 상속받지 못하게 됐다고 미국 폭스뉴스는 14일 보도했다. 이 매체는 복수의 익명 제보자 발언을 보도한 영국 매체를 인용해 ‘여왕이 소유했던 전 재산은 찰스 3세에게 이전돼 찰스 국왕이 여왕 재산의 유일한 수혜자가 됐으며, 1993년 제정된 왕실 특혜 규정에 따라 유산 상속분에 대한 상속세는 일절 부과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찰스 3세 국왕이 받은 여왕의 재산은 약 8억 달러(약 1조 48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의 상속세율이 40%인 점을 고려하면 ‘국왕은 상속세를 면제받는다’는 특혜 규정이 없을 시 찰스 국왕은 수천억 원대의 세금을 지불해야 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역시 2002년 어머니가 서거했을 당시 남긴 재산 7000만 달러(약 915억 원)를 물려받으면서 상속세 전액을 면제받는 특혜를 누렸다. 반면 여왕의 천문학적인 재산을 100% 상속받은 찰스 3세의 형편과는 다르게 여왕의 자녀이자 찰스 3세의 동생들인 앤드류 왕자와 에드워드 왕자, 앤 공주에게는 단 한 푼도 상속이 배분되지 않을 전망이라고 이 매체는 예측했다. 베스트셀러 ‘더 킹’의 저자 크리스토퍼 안데르센은 앤드류 왕자는 최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재산과 관련해 “어머니가 남긴 재산을 기대할 이유가 전혀 없다”면서 “왕실 재산 상속과 관련한 과정과 내용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발언했다고 전했다. 안데르센은 또 “앤드류 왕자는 이와 유사한 사례로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2세가 그의 모친이 사망했을 당시 다른 형제들을 제외하고 모친의 재산 전액을 상속받은 사실을 잘 알고 있다”면서 “여왕의 모친은 서거 직전 특정인을 지목해 고가의 보석과 개인 재산을 상속하라는 구체적인 내용의 유언을 남겼지만 사실상 법적 구속력이 없었던 탓에 재산 전액은 엘리자베스 2세가 수령한 바 있다”고 설명했다. 여왕의 재산 상속분에 대한 소유권에서는 제외됐지만, 에드워드 왕자와 앤 공주는 여전히 로열 패밀리를 위한 영국 왕실 보조금 명목의 수당을 지급 받아오고 있다. 하지만 앤드류 왕자는 사정이 다르다. 그는 지난 2001년 미성년자 성폭행 스캔들에 휘말린 직후 왕실 직무에서 공식적으로 제명됐고, 이후 로열패밀리를 위한 수당 지급자 목록에서도 제외됐기 때문이다. 그는 2001년 무렵, 미국의 억만장자 제프리 엡스타인과 당시 17세 미성년자였던 미국 여성 버지니아 주프레를 성폭행했다는 스캔들에 연루돼 왕족 및 군대 직함을 박탈당했다. 이 때문에 앤드류 왕자가 보유한 것으로 알려진 개인 재산은 1800만 파운드 상당의 스키 샬레가 유일하다. 이 매체는 그의 현 상황과 관련해 “앤드류 왕자는 어둠 속에 남겨져 있는 상태다. 그는 매우 절망적이다”고 전했다. 작가 안데르센 역시 “찰스 3세 국왕이 앤드류 왕자를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닐 것이지만, 영국 왕실은 분명하게 앤드류에게 과거 그의 방탕했던 생활 방식을 바꾸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기를 요구하고 있는 분위기”라면서 “과거 여왕이 생존했을 당시 앤드류 왕자는 여왕에게 의지할 수 있었지만, 여왕이 서거하면서 그런 생활은 더 이상 허락되지 않게 됐다”고 했다. 
  • 양자역학보다 더 돋보이지…괴짜천재 유쾌한 파인먼씨

    양자역학보다 더 돋보이지…괴짜천재 유쾌한 파인먼씨

    노벨상 받은 세기의 물리학자위대한 이론보다 인간미 유명누드화 그리고 마야문자 해독핵 연구하다 금고털이 마스터절절한 첫사랑 이야기도 감동 보통 ‘위대한’이란 수식어가 붙은 과학자들은 대체로 그들의 이름 못지않게 그들이 주창했거나 일궈 낸 학문의 이름으로 기억된다. 상대성이론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역학의 아이작 뉴턴, 진화론의 찰스 다윈처럼 말이다. 한데 이름으로 더 잘 기억되는 과학자가 있다. 리처드 파인먼(1918~1988)이 그런 예다. 너무 찬란해 하얗게 타 버린 천재 과학자. 그를 ‘학자’보다 ‘한 인간’으로 더 자주 떠올리는 건 아마 노벨상을 받은 세기적 물리학자라는 것 못지않게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여유와 농담을 잃지 않으며 사람을 사랑했던 따스한 인간미 때문이지 싶다.‘파인먼 평전’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등장, 핵폭탄 제조, 핵보다 더 작은 입자의 발견, 베타 붕괴 등 현대 과학이 거쳐 온 모든 이정표마다 빠짐없이 이름을 새긴 파인먼의 생애를 그린다. 미국 뉴욕의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매사추세츠공대(MIT), 프린스턴대, 코넬대, 캘리포니아공대(칼텍) 등에서 후학들을 길러 낸 그의 학문과 삶의 이야기들을 연대기 형식으로 버무렸다.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뉴욕타임스 기자 생활을 거친 쟁쟁한 과학 저술가인 저자는 파인먼의 삶과 난해한 그의 이론들을 쉽지만 결코 가볍지 않게 전한다.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로 확정됐을 때의 일화가 책의 성격을 설명하는 좋은 예가 될 듯하다. 한 신문사의 사진기자가 파인먼에게 이론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기자 양반, 내 이론을 1분 이내로 설명할 수 있다면 노벨상을 받을 가치도 없었을 거요.” 아무리 쉽게 설명해도 학문적 영역에서 그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거꾸로 그의 인간적 면모를 들여다보며 그가 남긴 공적의 얼개를 복기하는 것이 책을 소화하는 빠른 길일 수 있겠다. 파인먼이 선연한 발자취를 남긴 분야는 양자역학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함께 현대물리학을 지탱하는 두 기둥 중 하나다. 그는 반도체 기술의 기반이 됐다고 평가받는 양자전기역학으로 1965년 동료 두 명과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고전물리학과 현대 양자역학을 모순 없이 통합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입자들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알기 쉽게(물론 전문가 수준에서) 표현한 ‘파인먼 다이어그램(도형)’도 그가 고안한 것이다. ‘나노 기술’이라는 용어도 그가 최초로 썼다. 훗날 현재의 슈퍼컴퓨터를 계산기 수준으로 격하시킨 양자컴퓨터가 본격 상용화된다면 최초 발견자의 자리에 파인먼의 이름이 오를 가능성이 높다.걸출한 학문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장삼이사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건 그의 인생 이야기다. 라디오를 수리하고, 누드화를 그리고, 마야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그의 모습에서 괴짜 천재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난다. 타악기 봉고를 연주할 때는 ‘거장’ 소리를 들었고, 핵폭탄 연구에 몰두하던 미국의 비밀연구소 로스앨러모스에 근무했던 시절엔 난데없이 금고털이 전문가가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저릿한 건 사랑 이야기다. 그는 한때 과학계의 카사노바로 불리며 방탕한 삶을 살았는데, 그 이면엔 고교 시절 첫사랑의 순애보가 묻혀 있다. 시한부의 삶이란 걸 알면서도, 결혼식장에서조차 감염이 우려돼 입에 키스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첫사랑과의 결혼을 강행한 그의 이야기가 영화처럼 그려진다.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풍자화에 대처하는 방법/미술평론가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풍자화에 대처하는 방법/미술평론가

    만취해 쓰러진 조지 4세 앞에 그의 증조부 윌리엄 공작의 유령이 나타난다. 손에 모래시계를 든 공작은 손자에게 경고한다. 그렇게 폭음을 하고 비만에 신경 쓰지 않다가는 죽을 날이 가깝도다. 캐리커처라고도 하는 풍자화는 대상의 특징을 과장되게 표현해 부정적인 현실이나 유명인의 결점을 폭로하고 조롱하는 장르다. 18세기 후반 영국에는 정치풍자화가 범람했다. 17세기를 거치면서 시민의 힘은 세졌고 왕권은 약화됐다. 산업의 발달은 판화 같은 인쇄물을 값싸고 흔하게 만들었다. 정치인, 사회 명사, 국왕 부부 할 것 없이 조롱의 대상이 됐다. 폭식, 폭음에다 애인을 툭하면 갈아 치웠던 조지 4세는 풍자화가들에게 맞춤한 소재였다. 런던 번화가의 판화 가게 진열창에는 조지 4세를 조롱하는 그림들이 내걸려 오가는 시민들을 낄낄거리게 만들고, 런던을 방문한 외국인들을 놀라게 했다. 풍자화는 조지 4세의 이미지를 뚱뚱하고 게으르고 방탕한 사람으로 굳어지게 만들었다. 왕은 약이 올랐으나 풍자화를 막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왕이 아무나 잡아다 벌을 주던 시대는 지났고 법에 의지해야 했는데 법적 수단이 불충분했다. 18세기 법은 글로 된 명예훼손에는 대비가 돼 있었지만 모호하고 해석의 여지가 많은 그림에는 대비가 돼 있지 않았다. 게다가 제재를 가하면 화가를 더 띄워 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이 사실이든 아니든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시키는 부작용이 있었다. 모르쇠로 일관해 보았으나 풍자화는 갈수록 극성을 부렸다. 왕은 풍자화를 나오는 족족 몽땅 사들이거나 화가에게 돈을 주고 풍자화를 그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내는 방법을 썼다. 하지만 풍자화는 없어지지 않았다. 돈이 되는데 왜 안 그리겠는가. 19세기 중반 풍자화의 열풍은 수그러들었다. 법의 허점도 보완됐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왕 스스로 몸가짐을 단속하게 된 것이다. 조지 4세는 판화 같은 매체가 대중 사회에서 발휘할 수 있는 영향력을 깨닫지 못했다. 이후의 왕들은 몸가짐을 조심하고 이미지를 연출하는 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한 줄 요약하면 몸가짐을 단속하는 게 상책, 풍자화가와 싸우는 건 하책.
  • 에이즈 숨긴채 700명과 성생활…찰리쉰 ‘충격’

    에이즈 숨긴채 700명과 성생활…찰리쉰 ‘충격’

    영화 ‘플래툰’ 등에 출연해 1980년대 할리우드 스타 반열에 올랐던 찰리 쉰의 방탕한 사생활이 화제다. 12일 방송된 채널S ‘김구라의 라떼9’에서는 찰리 쉰의 난잡했던 성생활이 재조명됐다. 찰리 쉰은 유명배우 마틴 쉰의 아들로 당시 ‘터미널 스피드’, ‘네이비 실’, ‘영건’ 등 액션물부터 기업물·코미디물까지 다양한 장르에서 톰 크루즈, 브래드 피트와 견줄 만큼 신들린 연기력으로 인기를 구가했다. 하지만 방탕한 사생활 탓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찰리 쉰은 1995년 첫 결혼을 시작했지만 외도와 마약, 가정폭력으로 3번의 이혼을 했다. 그가 2013년 성매수에 무려 18억원 이상을 탕진했다. 게다가 에이즈(AIDS·후천성 면역 결핍 증후군)에 감염된 것을 숨긴 채 무차별 성관계를 맺어 네 번째 약혼녀와 성매매 여성 등 총 76명에게 고소를 당했다. 이 과정에서 그의 성매매 파트너 수가 무려 700명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져 세간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 [정종수의 풍속 엿보기] 잦은 침수로 나 홀로 묻힌 중종의 정릉/전 국립고궁박물관장

    [정종수의 풍속 엿보기] 잦은 침수로 나 홀로 묻힌 중종의 정릉/전 국립고궁박물관장

    이달 초순 1907년 관측 이래 115년 만에 내린 폭우로 강남 일대가 쑥대밭이 됐다. 이 지역의 잦은 침수는 조선시대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선릉역으로 잘 알려진 강남에는 성종과 왕비 정현왕후의 선릉과 성종의 둘째 아들 중종의 정릉이 있다. 중종은 3명의 왕비와 7명의 후궁을 두었는데 모두 나 홀로 묻혔다. 중종이 쓸쓸히 홀로 묻힌 결정적인 이유가 잦은 침수 때문이라면 믿을까. 중종은 신하들이 임금(연산군)을 강제로 끌어내린 최초의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다. 연산군의 폭정과 방탕을 간언했다가 판서에서 졸지에 종9품 말단직으로 밀려난 성희안은 1506년(연산 12년) 9월 영의정 유순정, 박원종 등과 반정을 모의했다. 연산군을 폐위하고 진성대군(중종)을 옹립하기 위해 박원종은 우의정 강구손을 통해 연산군의 매부요 중종의 장인 신수근의 마음을 떠보았다. “좌상은 대감 누이와 딸 중 누구를 더 중히 여기십니까?” 신수근은 “임금은 비록 포악하나 세자가 총명하니 그를 믿고 살 뿐입니다”라며 넌지시 누이 편에 서 임금을 폐하고 사위 진성대군을 세우는 일을 반대했다가 처형됐다. 중종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단경왕후는 죄인 신수근의 딸이라 왕비로 부적격하다는 이유로 책봉 7일 만에 폐위돼 쫓겨났다. 후사 없이 1557년(명종 12년) 12월 71세로 승하한 단경왕후는 양주 신씨 문중 묘역에 안장됐다가 1739년(영조 15년) 복위돼 능호를 온릉이라 했다. 중종은 단경왕후 신씨가 폐위된 이듬해 장경왕후를 둘째 왕비로 맞아들였다. 하지만 1515년 3월 원자(인종)를 낳고 산후병으로 7일 만에 25세로 경복궁에서 죽었다. 온순하고 외모가 단정하며, 밤낮으로 조심한다고 해 시호를 장경, 능호를 희릉이라 했다. 원래 5개월 장을 치러야 하나 나루를 여러 개 건너야 하고 여름철 장마로 강물이 불어날 것을 염려해 두 달 만에 태종의 헌릉 옆 능선에 안장했다. 당시 왕비의 관을 실은 큰 상여는 배 500척으로 부교를 설치한 뒤 한강을 건넜다. 장경왕후의 희릉은 22년 후 정적을 치기 위해 김안로에 의해 1537년(중종 32년) 9월 지금의 서삼릉으로 이장됐다. 풍수지리적으로 돌이 광중 밑에 깔리면 불길한데도 이를 파내지 않고 그대로 묻었다는 것이 이유다. 산후병으로 장경왕후가 요절하자 중종은 문정왕후 윤씨를 세 번째 왕비로 맞아들였다. 중종이 1544년 11월 15일 창경궁에서 왕위에 있은 지 39년, 보령 57세로 승하하자 이듬해 2월 서삼릉 내 둘째 왕비 장경왕후의 희릉 오른쪽 능선에 안장했다. 한 달 뒤 왕비의 문패 아래 왕이 있을 수 없다 하여 능호를 희릉에서 정릉으로 바꾸었다. 장경왕후의 아들 인종이 왕위에 오른 지 8개월 만에 죽자 문정왕후는 자신의 소생을 왕(명종)으로 즉위시키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문정왕후는 강남 봉은사 주지 보우와 짜고 중종을 장사 지낸 지 7년 만인 1562년 9월 멀쩡하게 잘 있는 중종의 정릉을 지금의 강남 선릉 옆으로 옮겼다. 풍수적으로 불길한 땅이라 선왕을 모실 수 없다는 이유였지만, 중종이 둘째 부인 장경왕후와 함께 있는 것을 시기해 사후 자신이 남편과 함께 묻히고자 한 것이다. 막상 옮기고 보니 지대가 낮아 조금만 비가 와도 재실까지 강물이 들어 아무리 흙을 파다 메워도 소용이 없었다. ‘선조실록’은 “정자각 앞의 지세가 낮아 장마가 질 때마다 강물이 불어 홍살문까지 잠겨 배를 타고 다녔다”고 했다. 1565년(명종 20년) 4월 65세로 세상을 뜬 문정왕후는 생전에 남편 중종의 옆에 묻히려고 이장까지 했지만, 끝내 잦은 침수로 남편과 멀리 떨어져 지금의 태릉에 홀로 묻혔다.
  • 당대 세계미술 흐름 앞선 ‘실천가’… 지난 10년 가장 핫한 여성작가[이지윤 큐레이터의 은밀한 미술인생]

    당대 세계미술 흐름 앞선 ‘실천가’… 지난 10년 가장 핫한 여성작가[이지윤 큐레이터의 은밀한 미술인생]

    현재 살아 있는 동시대(컨템퍼러리) 작가 중 동서양을 통틀어 가장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고, 동시대의 아이콘인 여성 작가는 구사마 야요이다. 아마 이름은 몰라도, ‘루이비통 작가’ 또는 ‘호박 작가’ 정도는 많은 사람이 알 듯하다. 하지만 그녀의 유명세와 달리 그녀의 ‘화려한’ 작품에 대한 설명과 내용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대단해 보이는 성공이 사실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다. 93세로 지난 10년간 세계 미술시장에서 가장 뜨겁게 주목받은 구사마 야요이의 삶은 어떠했을까. 아직도, 정신병원에서 그림을 그린다. ‘고통, 불안, 공포와 매일같이 싸우고 있는 내게, 예술을 계속하는 것만이 그 병으로부터 나를 회복시키는 유일한 수단이었다.’(작가노트, 테이트모던, 전시카탈로그 2012) 구사마 야요이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생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녀의 가족사와 정신병력은 작품의 시작 지점으로, 작품 세계의 근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1929년 100년 넘게 종묘업을 가업으로 삼아 온 일본 마쓰모토시의 유서 있는 가문에서 막내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러나 방탕한 생활을 이어 가던 아버지와 강압적이고 히스테릭한 어머니 아래에서, 그녀는 다소 암울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10살 전부터 심각한 환청과 환각에 시달렸다. 어린 구사마는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환청과 환각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신에게 보이고 들리는 것을 정신없이 그렸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 놀라고 두려운 마음이 조금씩 진정되는 것을 경험했다. 구사마에게 그림이란 현실과 환영 사이 공포의 체험 속에서, 이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됐다. 이런 이유로 구사마는 교토의 시립미술공예학교(현 교토예대) 일본화과 입학을 결심했다. 그러나 곧 전통적 방식, 세밀 묘사를 강요하는 등의 정형화된 화법의 교육과 보수적인 화단이 자신에게 맞지 않음을 느끼고는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리고는 자유와 더 넓은 세계를 찾아 1957년 미국으로 떠났으며, 그곳에서 그녀만의 독자적인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93세 여전히 정신병원에서 그림 그려 뉴욕 도착 당시 그녀는 처음에는 추상표현주의 영향을 받아 평면회화 작업을 진행하였으나 점차 도널드 저드, 자신의 연인이였던 조지프 코넬의 영향을 받아 조각, 설치미술까지 영역을 넓혀 가며 왕성한 활동을 이어 나갔다. 뉴욕에 정착한 지 18개월 만에, 그녀는 브라타 갤러리에서 ‘무한 그물’ 시리즈로 첫 개인전을 가졌다. 5점의 그물(Net) 시리즈는 거미줄 모양으로 뒤덮인 거대한 흰색의 캔버스로, 그물망은 정교하게 조직되어 퍼져 나가는 것처럼 끝없는 공간을 만들어 낸다. ‘무한 그물’은 구사마가 미국에 정착한 후 잭슨 폴록의 ‘뿌리는(dripping) 회화’뿐만 아니라 단색(모노크롬) 회화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 준다. 또한 이 시리즈는 이후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등 유럽에도 소개되며 그녀의 서구권 진입을 성공적으로 알리는 작품이 되었다. 그녀가 아시아 작가로서 서구 현대미술계에서 인정받은 첫 작가라는 점은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 이후, 구사마는 작품의 주요 주제인 ‘무한’을 설치작업으로 제시해 회화 공간을 어떠한 신체적 경험으로 확장시키기 시작했다. 이 작품이 1965년 처음 공개되어 6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대표작 중 하나로 자리잡은 ‘무한 거울 방’ 시리즈이다.‘무한 거울 방’은 방 안에 설치된 거울들이 서로를 비추며 방 안에 있는 조명, 사물, 사람 등을 포함한 모든 것을 반사시켜 무한히 뻗어 나가는 환경을 만들어 낸다. 방 안으로 초대된 관람객들은, 자신의 반사된 이미지들에 둘러싸이는데, 이 생소한 경험이 작가에게는 여전히 진행 중인 자기 소멸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당시 매우 도전적이고, 21세기에나 나올 법한 설치미술 영역을 이미 1965년에 혁신적인 미술로 제안했다. 더 나아가, 그녀는 회화나 설치 등 특정 장르에 구속되지 않고, 미술과 사회 규범에 갇히지 않은 채 ‘예술적 실천’을 행했다. 대표적 예로, 1960년대 이후 그녀는 전위 예술 퍼포먼스인 일종의 ‘구사마 해프닝’을 시도한다. 파격적인 누드 퍼포먼스와 해프닝은 뉴욕의 공공장소인 월스트리트, 센트럴파크, 자유의 여신상 등에서 행해졌다. 남녀의 몸 위에 물방울 무늬를 그려 넣는다든지, 베트남 전쟁에 항의하며 성조기를 태우는 등 사회적·정치적 운동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구사마는 미국에서 작품활동을 하는 동안에 회화에서 시작해 조각, 설치, 해프닝에 이르는 등 장르의 영역을 확장하고, 장르 간 경계를 허물어 갔다는 점에서 당대 세계미술 흐름과 함께하기도, 때로는 그 흐름을 앞서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미국 화단에서 구사마의 화려한 성공은 길게 유지되지 못했다. 이렇게 실험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쳤던 것에 비해,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며 그녀의 작품은 점점 좋지 못한 평가를 받게 되었고 1970년대 들어서면서 미국 화단에서 그녀의 입지는 거의 사라졌다. 약 10여년간의 뉴욕 생활을 마친 그때쯤 구사마는 아버지와 연인의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정신질환 치료를 위해 1972년 일본으로 돌아간다. 일본으로 돌아온 구사마는 귀국 직전 뉴욕에서 보인 전위적인 퍼포먼스 ‘해프닝’ 활동으로 인해 보수적인 일본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했으며, 정신질환 치료를 위해 정신 요양 시설에 들어감으로써 미술 활동은 이전만큼이나 활발하게 지속하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귀국한 구사마는 초기엔 거의 무명에 가까운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미술계보다 덜 보수적인 태도를 보였던 문학계에서 주로 활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사마는 미술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으며, 현재 그녀를 대표하는 작품인 ‘호박’ 시리즈는 이 시기에 제작됐다. 구사마에게 유명한 이 ‘호박’은 어린 시절 교감하던 자연을 상징하며 순수함을 의미한다. 이는 종묘상을 운영하는 부모가 외출하면 주로 비닐하우스에서 시간을 보내며 꽃이나 호박을 관찰하면서 시간을 보낸 것과도 연관된다.●장르의 영역 확장… 경계도 허물어 구사마가 1972년 일본으로 귀국한 후, 첫 회고전을 갖게 된 것은 1987년이다. 도쿄도 아닌, 지방 미술관인 기타큐슈 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이 전시는 냉담했던 일본 내에서 구사마에 대한 ‘예술적’ 평가를 새롭게 다지게 된 전환점이 되었다. 또한 국제 미술계에서 점차 잊혀져 가던 구사마는 1989년 뉴욕의 국제현대미술센터에서 주최된 ‘구사마 야요이 회고전’을 통해 주목을 받게 된다. 이 전시를 통해 ‘무한 그물’이 전후 미술사 공백을 메우는 귀중한 작품이자, 미국의 팝아트, 페미니즘, 히피 문화 등에도 영감을 주었던 것이 실증적으로 주목받았으며 국제적으로 재평가받게 됐다. 이를 계기로 작가는 1993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일본 대표작가로 선택됐다. 당시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한국관을 백남준이 나간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멋진 1993년이다. 그 이후, 일본인 첫 여성작가로서 로스앤젤레스, 뉴욕, 도쿄 등 여러 나라를 순회하면서 국제 미술계의 최전선으로 복귀했다. 어찌 보면, 사실상 2006년 런던의 빅토리아 미로 갤러리가 구사마를 소개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대세는 달라졌다. 런던에서의 2008년 대규모 회고전 이후, 같은 해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작품이 500만 달러 이상으로 팔리며 살아 있는 여성 예술가의 경매 최고가를 기록했다. 2013년에는 일본인 작가 중 거래량, 거래 총액 1위였다. 이로써 구사마는 더이상 동양의 여성 예술가가 아닌 보편적인 현대미술사적 계보에서 논의되게 된 것이다. 구사마의 회고전들을 살펴보면 언제나 기록적인 수식어가 뒤따르는 작가일지라도, 그 이면에는 여러 번의 좌절의 순간에도 끊임없는 도전과 일관된 실천을 통해 인고의 시간을 견뎌 온 순간들이 있었음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시간이다. 숨 프로젝트 대표
  • [정종수의 풍속 엿보기] 왜 양녕대군의 사당을 지덕이라 했나/전 국립고궁박물관장

    [정종수의 풍속 엿보기] 왜 양녕대군의 사당을 지덕이라 했나/전 국립고궁박물관장

    얼마 전 TV 드라마 ‘태종 이방원’이 종영됐다. 갈등과 긴장감을 위해 과장된 면도 있었지만 흥미롭게 보았다. 1462년 ‘세조실록’은 양녕의 죽음에 대해 “양녕대군 이제가 졸하였다. 태종의 맏아들로 태종 4년 세자로 봉해지고 4년 뒤 명나라에 다녀왔다. 태종 18년 죄로 인하여 양녕대군으로 강봉되어 이천에서 살다 세종 18년 과천으로 갔고, 이듬해 서울로 돌아왔다. 병으로 졸하니 69세다. 세조는 3일 동안 조회를 폐하고, 시호를 강정으로, 굳세고 과감함을 강, 너그럽고 즐겁게 명대로 편히 살다 죽은 것을 정이라 한다”고 했다. 세자로, 임금의 형으로 일생을 풍미했던 양녕의 졸기는 너무 간략하다. 세자의 자리를 양보해 여생을 편안히 보내라는 의미의 양녕이란 군호는 왕이 될 사람에서 오히려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로 바뀌어 생존을 위협당했다. “성품이 어리석고 곧으며, 살림을 다스리지 아니하고 활쏘기와 사냥으로 오락을 삼았다. 세종의 우애가 지극했고 양녕 또한 다른 마음을 갖지 않아 끝까지 보전함을 얻었다”는 사관의 촌평이 파란만장했던 양녕의 삶을 함축적으로 보여 준다. 양녕대군의 사당 지덕사는 묘소와 함께 서울 동작구 상도동에 있다. 사당은 양녕의 외손 우의정 허목의 주청으로, 1675년 숙종이 대군의 덕망을 기리기 위해 서울역 앞 병무청 뒤에 세우고 지덕사라 했다. 지덕사는 일제의 횡포로 1912년 1월 상도동 양녕의 묘소 아래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지덕사란 이름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논어 “태백은 가히 지덕이라고 할 수 있다”(泰伯其可謂至德也)에서 따온 것이다. 공자는 지덕이란 지극한 덕을 실천한 가장 위대한 사람에게 내리는 최고의 찬사라 했다. 양녕이 세종에게 왕위를 양보한 행적이 주나라의 태백과 같다 해 사당의 이름을 지덕이라 한 것이다. 주나라 태왕이 장남 태백과 둘째 우중을 제치고 셋째 계력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태백과 우중이 삼천리 밖 형만으로 도망가 버렸다. 계력이 왕위를 물려받아 그의 장남 문왕이 천하의 절반 이상을 얻고, 둘째 무왕이 천하를 얻은 공이 태백과 우중 형제의 양보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양녕은 방탕함으로 세자 자리를 박탈당한 것인가. 아니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미친 척한 것인가. 역사적인 평가는 양면적이다. 임란 전에는 부정적이었지만, 임란 후에는 권력을 버리고 쾌락을 택해 세종에게 왕위를 양보한 지혜롭고 덕이 넘치는 인물로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이긍익도 ‘연려실기술’에서 양녕대군이 뛰어난 문장가였지만 스스로 미친 척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여 아무도 그의 진심을 아는 이가 없었다고 칭송했다. 1789년 정조는 양녕의 세자 자리 양보는 주나라의 태백보다 어려운 일이라며 지덕이란 칭호를 받을 사람이 양녕 말고 누가 있으며, 태백과 같이 숨긴 대군의 덕을 밝혀 줄 사람이 없음을 탄식해 손수 ‘지덕사기’를 짓고 치제(致祭·국가를 위해 죽은 사람에게 지내 주는 제사)했다. 정조는 양녕과 효령이 충녕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자 방탕과 탁불한 것을 태백과 우중 형제의 고사와 비교해 양녕의 사당을 지덕사, 효령의 사당을 청권사로 사액했다. 양녕은 명 황제 영락제로부터 “나의 아들이나 다름없다”고 신뢰받을 만큼 천성이 어질고 효심이 강했다. 경희루와 숭례문 현판을 쓴 명필로, 익살과 해학에도 능한 양녕이 절에서 개고기를 굽자 효령이 “형님은 지옥에 갈 것”이라 하니 양녕은 “살아서는 임금의 형이요, 죽어서는 보살의 형으로 극락에 갈 것이다. 지옥에 떨어질 리 있겠느냐”며 파안대소했다. 누가 이런 양녕을 어리석다 하겠는가.
  • 비장함 대신 환한 미소로… 조국 독립의 ‘영원한 쾌락’을 선택했다[김별아의 도시 기행문 서울을 걷는 시간]

    비장함 대신 환한 미소로… 조국 독립의 ‘영원한 쾌락’을 선택했다[김별아의 도시 기행문 서울을 걷는 시간]

    한 사내가 있었다. 잔인한 20세기가 시작되던 해 유달리 덥던 여름에 세상에 났다. 아버지는 소실을 둘씩이나 거느린 한량이었다. 어머니는 사랑을 잃고 의기소침한 여인이었다. 배다른 형제까지 6남 1녀, 아무도 병약한 둘째 아들을 귀애하지 않았다. 바람과 함께 컸다. 먼지덩이처럼 구르며 자랐다. 귀 얇은 아버지가 교활한 일본인에게 사기를 당하면서 집안은 몰락했다.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일자리를 찾았다. 열다섯 살에 몰씬한 단내를 좇아 일본과자점에 취직했다. 화과자와 찹쌀모찌는 먹기 아까울 정도로 예뻤지만 가난한 점원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열일곱 살의 생일은 말라리아와 함께 왔다. 열병 끝에 관절염이 생겼다. 이후로 계절이 바뀔 때마다 뼈마디부터 저리고 아팠다. 짧은 생애가 삐걱거렸다.(졸저 ‘백범’ 중에서)역사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은 후대의 일이다. 민족 혹은 국가, 어떤 공동체가 역사의 인물을 기념하는 것은 과거보다 현재의 의미 때문이다. 냉소적으로 말하면 선양 사업은 잘난 자손의 가업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자손이 없거나 한미하면 같은 일을 하고도 역사의 어둠에 묻혀버리기 일쑤다. 고향의 지자체에서 자손의 역할을 하는 경우도 왕왕 있지만 그조차 복불복이다.그래서 더 마음이 쓰였다. 우당 이회영 같은 명문거족 출신은 아니더라도 백범처럼 부모의 총애를 담뿍 받았다면 괜찮았을 것이다. 윤봉길처럼 고향의 뿌리와 월진회를 조직해 함께 활동한 동지들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이복형제까지 더해 7남매 중의 둘째 아들, 용산에서도 일본 오사카에서도 정착하지 못한 떠돌이, 안팎 어디서나 누구라도 그에게 특별한 시선을 주지 않았을 게다. 세상으로부터 받은 것이 없으니 빚도 없었다. 그 고독한 바람의 사내 이봉창이 여기 있었다. ‘이봉창 집터: 독립운동가 이봉창(1901~1932)이 살던 집터이다. 이봉창은 1932년 1월 8일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명중시키지 못하였고, 그해 10월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하였다.’ 효창공원역 1번 출구 귀퉁이 화단에 더부살이했던 부정확한 표석은 철거됐고, 새로운 표석이 2018년 사용 승인된 용산KCC스위첸아파트 102동 3·4호 라인 현관 맞은편 화단에 자리잡았다. 이봉창 의사는 경성부 용산방 원정2정목(현 원효로2가)에서 태어나 경성부 금정(현 효창동) 118번지에서 열한 살부터 스물네 살까지 살았다. 일대가 재개발되면서 번지수가 불명확해진 탓인지 일부 인터넷 지도에는 집터와 생가터의 표기가 혼동돼 있다. ‘이봉창 집터’ 표석이 있는 102동 앞에서 후문으로 빠져나와 경사진 언덕길을 내려오면 ‘이봉창 역사울림관’이 있다. 거리로는 멀지 않은데 아파트 벽으로 막혀 있으니 아쉽다. 효창공원역 1번 출구에서 접근하면 역사울림관을 먼저 보고 표석을 찾는 동선이 자연스러울 듯하다. 역사울림관이 12시부터 13시까지 점심시간에 문을 닫는 걸 모르고 갔다가 1시간을 꼬박 밖에서 기다리게 됐다. 기념관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기에 그냥 돌아갈까 망설였다. 다 아는 역사적 사실을 적은 패널과 사진, 기념품 몇 점을 전시한 재미없는 공간이 내가 기억하는 기념관의 전부였다. 그래도 2021년 10월에 개관했다니 뭐라도 다를까 궁금하고, 작은 뜰 앞 툇마루에 놓인 푹신한 방석이 마음에 들어서 기다려 보기로 했다. 햇살은 따스하고 사위는 고즈넉하다. 거리를 향해 놓인 벤치에는 두 사람의 실루엣으로 조각이 앉아 있는데, 버튼을 누르니 녹음이 흘러나온다.“군은 무엇인가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사건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앞으로 다시 31년을 더 산다 해도 과거 반생에서 맛본 방랑 생활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하여 우리 독립 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묻는 사람은 백범이고 답하는 사람은 이봉창이다. 쾌락을 말하는 이봉창의 말에는 허무가 묻어 있다. 허랑하고도 방탕하게, 분진으로 가득한 누항을 떠돈 자의 지독한 피로다. 이봉창의 모습은 전형적인 운동가의 그것이 아니었다. 조직은커녕 소개인이나 소개장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청사를 찾아와 일본인들이 부르는 ‘가정부’(假政府)라는 이름으로 임시정부를 찾았다. 일본말과 조선말을 섞어 쓰는가 하면 엔카를 멋들어지게 불러서 ‘일본영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오리 바람에 게다짝을 끌고 청사에 들어오려다 중국인 문지기에게 쫓겨나기까지 했다. 모두가 오해했다. 많은 이가 의심했다. 하지만 백정선이라는 가명을 쓰던 한 사람, 백범만은 그의 진실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비장한 태도와 결기 있는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마지막 자리를 스스로 선택하겠다는 의지는 굳건했다. 그는 누구와도 같지 않았다. 단순하고, 선명하고,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자유로운 이봉창만의 방식이 있었다. 백범의 매서운 눈빛을 어린아이처럼 맞받으며 반달눈으로 빙긋이 웃던 이봉창은 그렇게 한인애국단 1호 단원이 됐다.‘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않고, 의심하면 일을 맡기지 않는다!’ 백범의 원칙은 명확했다. 미주와 하와이, 멕시코와 쿠바에 사는 동포들이 보내준 피 같은 돈을 일체의 망설임 없이 이봉창에게 건넸다. 돈은 정직하지만 사람에 대한 믿음은 모험이다. 그러나 그만큼 의미 있는 모험이었다. 이봉창은 난생처음 진정한 믿음을 얻었다. “엊그제 선생께서 속주머니를 뒤집어 천여 원의 거액을 제게 주셨지요. 그 돈을 받고 돌아가서는 온밤을 잠들지 못하였습니다. 눈물이 절로 흐르더이다. 누더기 단벌 장삼에 굶기를 밥 먹듯 하는 형편을 뻔히 아는데, 대관절 저를 어떻게 믿고 이같이 큰돈을 털컥 맡기십니까? 프랑스 조계에서 한 걸음도 나서지 못하는 선생께서는 제가 이 돈을 가지고 달아나 마음대로 써버려도 찾으러 오지 못하실 테지요. 과연 영웅의 도량이로소이다! 제 평생에 누가 저를 이토록 믿어 주었겠습니까? 이토록 두터운 신임을 받은 것은 선생께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기다리길 잘했다. 두 칸짜리 한옥 크기의 이봉창 역사울림관은 평면적이고 지루하다는 기존 기념관에 대한 편견을 깬 작지만 새로운 공간이었다. 바닥에 그려진 발 모양에 맞춰 의사의 흉상을 마주 보고 서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겠다’는 선서문이 들린다. 한인애국단 단원이 돼 사진을 찍는 증강현실(AR) 체험과 1932년 1월 8일 일왕의 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지는 현장에 함께하는 가상현실(VR) 체험(VR은 기술적 측면에서 조금 더 개선할 여지가 있어 보인다)을 할 수 있다. 이봉창 의거와 사형 집행, 해방 후 삼의사 묘역에 안장되기까지의 신문 기사들을 여닫이창을 화면 삼아 띄워 볼 수도 있다. 직접 가보지 못한다면 인터넷을 통한 3D 체험도 가능하다(https://my.matterport.com/show/?m=T9Wk7zuBySz). 오롯이 이봉창 의사를 기리는 공간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마음이 홀가분하다. 이제는 그 사내도 영원한 쾌락 속에서 편히 쉬리라. 바람 끝이 많이 따뜻해졌다. 바야흐로 봄인가 보다. 소설가
  • 조국 혼란 뒤로하고…태국 국왕, 후궁과 개 30마리 안고 초호화 외유

    조국 혼란 뒤로하고…태국 국왕, 후궁과 개 30마리 안고 초호화 외유

    반정부 시위로 혼란에 빠진 조국을 뒤로하고, 군주는 다시 초호화 외유길에 올랐다. 10일 독일 빌트지는 마하 와치랄롱꼰(69,라마 10세) 태국 국왕이 수행단 250명과 푸들 30마리를 데리고 독일로 재입국했다고 보도했다. 빌트지는 이날 뮌헨 힐튼 에어포트 호텔에서 운동복 차림의 와치랄롱꼰 국왕을 포착했다고 전했다. 국왕은 젊은 여성 수행원과 남성 경호원의 호위를 받으며 호텔 수영장으로 향하는 중이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갑자기 국왕 경호원과 호텔 책임자가 다가와 취재진에게 사진 삭제를 요구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독일 언론자유를 침해하는 요구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찰에 신고했다고 덧붙였다. 와치랄롱꼰 국왕 일행은 11일 숙박 일정으로 호텔 4층 전체를 통째로 빌린 것으로 알려졌다.와치랄롱꼰 국왕은 지난해 태국에 코로나19 비상사태가 선포된 와중에도 줄곧 독일에 체류하며 방탕한 생활을 영위했다. 잠시 태국을 찾았다가도 하루를 넘기지 않고 다시 독일로 향했다. 그는 주로 2016년 독일 바이에른주 슈타른베르크 투칭 지역에 마련한 별장과 근처 고급 호텔에서 휴양을 즐겼다. 지난해 와치랄롱꼰 국왕 일행이 머문 바이에른 알프스 지역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소재 4성급 호텔은 코로나19 상황에도 국왕 일행을 위해 특별 영업 허가까지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와치랄롱꼰 국왕은 지난해 10월 선친인 푸미폰 아둔야뎃 전 국왕 4주기 추모식 참석차 태국으로 건너갔다가 8일 후궁이 포함된 수행원 수백 명을 거느리고 다시 독일을 찾았다. 수행단에는 후궁 수십 명과 푸들 30마리도 포함됐다.와치랄롱꼰 국왕은 2016년 즉위 당시부터 복잡한 결혼 생활과 기행으로 구설에 올랐다. 거듭된 이혼과 결혼, 후궁 축출, 나체 파티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집착에 가까운 반려견 사랑도 논란이었다. 와치랄롱꼰 국왕 2015년 키우던 푸들종 ‘푸푸’가 죽었을 때 태국 군대 공군대장 직위를 부여하고 나흘간 성대한 장례식을 여는 기이한 행동을 보인 바 있다. 온갖 추문으로 땅에 떨어진 그의 권위는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국민 불만이 터지면서 더 큰 위기를 맞았다. 이른바 ‘레드불 스캔들’로 불거진 유전무죄 파문에 코로나19 경제난까지 겹치자 분노한 태국 국민은 거리로 나왔다. 민생은 내팽겨치고 400억 달러(한화 약 45조8000억원)에 달하는 왕실 재산과 군대를 사유화한 채 해외에서 호화 생활을 즐기는 국왕에 대한 성토를 쏟아냈다. ‘우리는 왕이 왜 필요한가’(#whydoweneedaking)라는 SNS 해시태그 운동도 전개했다. 특히 왕실 모독죄 폐지 요구가 확산했다.입헌군주제로 국왕을 신격화하는 태국은 ‘군주는 숭배받아야 하고 권위가 훼손되어선 안 된다’고 헌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또 왕과 왕비 등 왕실 구성원이나 왕가의 업적을 모독하거나 왕실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를 하는 경우 왕실모독죄로 최고 15년의 징역에 처할 수 있다. 시민단체와 야당은 왕실모독죄를 폐지하거나 최소한 형량을 대폭 줄이는 등의 방식으로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 왕실 정서가 들불처럼 번지자 태국 정부는 강력 대응에 나섰다. 현지 인권단체인 ‘인권을 위한 태국 변호사들’(TLHR)에 따르면 지난해 반정부 시위가 시작된 이후 왕실모독죄로 처벌된 이는 미성년자 12명을 포함해 최소 150여 명에 달했다. 이 같은 정부 강력 대응과 코로나19로 잠잠했던 태국 반정부 시위는 국왕의 독일행과 맞물려 다시금 확산하는 모양새다. 14일 방콕 도심에 모인 시민들은 군주제 개혁을 촉구하며 거리 행진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부상자도 발생했다. 현지 언론은 시위 도중 2명이 경찰이 쏜 총기에 맞았다고 보도했으며, AFP통신은 시위대 2명이 고무탄에 가슴을 맞아 구급차에 실려 갔다고 전했다.
  • “여성 4000명이랑 잤다” 19살에 180억 복권 당첨자 결국 [이슈픽]

    “여성 4000명이랑 잤다” 19살에 180억 복권 당첨자 결국 [이슈픽]

    2002년 19살에 970만 파운드 복권 당첨마약, 술, 매춘, 사치에 빠져 2008년 이혼2013년 파산…노숙자 전락, 실업수당 받아도축장, 석탄 공장서 주 7일 근무하기도최근 전처와 재혼…“후회 없어, 최고의 10년”10대 때 한국 돈으로 160억원의 복권 당첨금을 받았던 영국 남성의 근황이 공개됐다. 그는 11년 만에 전 재산을 매춘과 술, 마약으로 탕진하고 노숙자로도 생활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거액의 당첨금을 펑펑 쓰면서 “4000명의 여성과 잠자리를 했다”며 여성 편력을 호기롭게 말하고 다니기도 했던 이 남성은 마약에 손을 대면서 범죄에 연루돼 30번 넘게 법정에도 들락거린 것으로 파악됐다. 10일(현지시간) 더선, 데일리메일 등 영국 현지 언론은 2002년 970만 파운드(당시 환율 약 180억원) 복권 당첨자로 유명세를 치른 마이클 캐롤(38)이 과거 자신이 매춘부와 바람을 피워 이혼 당했던 전처와 재혼했다고 보도했다. 더선에 따르면 두 사람은 지난 주말 재혼해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조용히 지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캐롤의 친구는 “캐롤은 많이 진정됐고 열심히 일하며 꽤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고 전했다. 또 “두 사람은 화해했고 다시 사랑에 빠져 과거를 잊고 행복하게 산다”고 말했다. 캐롤은 19살이던 2002년 1파운드를 주고 산 복권이 당첨됐다. 당시 영국 동부 노퍽주에서 청소부로 일하던 캐롤은 복권 당첨을 계기로 180억원의 거금을 손에 쥐면서 유흥에 빠졌다. 그는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며 술에 마시고 마약과 난교 파티에 벌이며 돈을 물 쓰듯 썼다.아내 산드라 에이켄(38)은 캐롤의 낭비벽과 매춘부와의 바람 피우는 것을 참지 못하고 2008년 그를 떠나버렸다. 캐롤은 2013년 결국 파산했다. 에이켄은 과거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술과 마약 중독으로 1000만 파운드를 낭비하고, 매춘부와 바람을 피워 그를 떠났다”고 말했다. 캐롤은 에이켄과 헤어진 이후에도 명품 보석으로 몸을 휘감고 다니는 등 사치로운 생활을 이어갔다. 늘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면서 술도 마셨다. 마약 소지와 폭력 등 각종 범죄를 저지르면서 30번 넘게 법정에도 들락거렸다. 캐롤은 “4000명의 여성과 잠자리를 했다”며 자신의 여성 편력도 거침없이 자랑하기도 했다. 통제가 되지 않은 방탕한 생활이 계속되자 캐롤의 통장 잔고도 빠르게 비어 갔다. 캐롤의 회계사는 복권 당첨 3년 만인 2005년 당시 “잔고가 100만 파운드(약 16억원) 밖에 안 남았다”고 경고했다.2012년 캐롤의 금고는 바닥을 드러냈다. 캐롤은 이후 파산한 뒤 6개월 간 실업 수당을 받으며 지냈다. 노숙자들을 위한 숙박시설을 전전하며 일자리를 찾기 위해 힘겨운 나날을 보냈다. 생계비를 벌기 위해 과자 공장과 도축장 등에서 일했고 2019년에는 스코틀랜드에서 석탄 광부로 주말도 없이 주 7일간 일하기도 했다. 캐롤은 그러면서도 인터뷰에서 “잘못된 것이 아니다”라면서 “1파운드에 내 인생 최고의 10년이었다. 내가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고 말했다. 캐롤은 “시계를 되돌리고 싶지 않다”면서 “하지만 난 지금 좋고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고, 제 삶을 되찾았기 때문에 더 행복하다”고 강조했다.네티즌들 “멘탈갑, 후회 없으면 됐지” 캐롤의 소식을 들은 네티즌들은 “저 재산을 다 잃고도 멘탈갑이다”, “폐인 안되고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는 게 다행” 등의 반응을 보였다. 또 “범죄자나 죄 지어 놓고 죄책감도 없나. 1파운드로 산 화려한 10년은 후회 안하겠지만 그걸로 잘 살았다면 남은 50년 그후 100년, 1000년 후손까지도 잘 살 수 있는 기반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 네티즌은 “이런 아내 만난 것이 너에게는 최고의 행운”이라고 꼬집었다. 일부 네티즌들은 당첨금을 전액 탕진하고도 후회 안 하는 캐롤의 행동에 대해 옹호하기도 했다. 포털에는 “솔직히 다 해보고 후회는 없지 않겠나. 못 쓰고 손에 쥐고 벌벌 떨다가 죽는 게 더 어리석다”, “죽을 때 싸들고 갈 수도 없는게 돈이니 자신의 판타지를 위해 저렇게 흥청망청 다 쓰고 후회 없다면 그걸로 된 거지만 대신 노년이 많이 힘들고 고달플 뿐”, “후회 없이 살았으면 됐다” 등의 댓글이 줄을 이었다.코로나 속 복권 판매액 5조 돌파 역대 최대…주인이 안 찾은 돈 592억 한편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 속에서 국내 연간 복권 판매액은 5조원을 돌파하며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경기 침체 속에 복권으로 한 방에 인생 역전을 바라는 사람들이 늘었다는 방증이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양경숙 의원이 지난달 기획재정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복권 판매액은 5조 4200억원이었다. 2019년의 4조 7900억원보다 6300억원 늘어난 규모다. 장수로 따지면 53억 5900만장이다. 로또복권 47억 3700만장, 연금복권 2억 2500만장씩이다. 복권 판매액이 5조원을 넘어선 것은 처음으로, 2002년 로또복권(온라인 복권)이 팔리기 시작한 이후로도 최대 규모다. 코로나19로 경기가 어려워진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기한 내 찾아가지 않은 당첨금인 ‘미수령금’은 지난해 592억 3000만원으로 집계됐다. 로또 당첨금은 추첨일로부터 1년 안에 은행을 찾아 가 받아야 하며 수령하지 못할 경우 모두 국고로 들어가게 된다. 지난해 6월에는 ‘로또 1등’ 당첨금 48억원의 주인이 나타나지 않아 결국 국고로 환수되기도 했다.
  • [김기중 기자의 책 골라주는 남자] 그림으로 만나는 이색적인 옛 도시

    [김기중 기자의 책 골라주는 남자] 그림으로 만나는 이색적인 옛 도시

    제가 읽는 책 대부분은 글만 가득합니다. 그림에 특히 신경 쓴 책을 마주하면 왠지 반갑습니다. 옛 도시를 아름답게 그려 낸 책 두 권을 골라 봤습니다. ‘로마 시티’(책과함께)는 300여장에 이르는 삽화로 570여쪽에 걸쳐 2700년 로마의 역사를 재현합니다. 화려한 색감으로 되살린 고대 로마 유적과 역동적으로 재현한 역사를 살려 낸 그림에 우선 눈이 갑니다. 2세기, 15세기, 그리고 오늘날의 콜로세움을 비교한 그림이라든가 성 베드로 대성당, 포룸 로마눔 전경, 스페인 광장과 트레비 분수 등의 그림에는 그저 입이 떡 벌어집니다. 저자는 네이버와 넥슨 등 IT 업계에서 일러스트레이터, 게임 콘셉트 아티스트로 활동 중입니다. 20대 때 로마 여행에서 특별한 감흥을 느끼지 못한 저자는 로마의 역사와 문화 관련 서적을 읽고 뒤늦게 빠져 버렸습니다. 이후 여러 차례 여행을 다녀왔고 인상적인 곳을 포착해 15년 만에 책을 완성했습니다. 그림뿐 아니라 글도 탄탄합니다. 일반 여행 서적과 달리 대중의 눈높이에서 재미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로마가 강한 군사력으로 통제한 사회였다든가 나태와 방탕 때문에 멸망했다는 속설을 바로잡습니다.이번에는 1930년대 경성으로 가 봅니다. ‘1930 경성 모던라이프’(이야기나무)는 그 시절 경성의 일상을 그림과 글로 엮은 책입니다. 화가인 저자는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충돌하는 경성에 매력을 느꼈고, 당시 사건 사고를 다룬 잡지 ‘별건곤’에 실린 실제 이야기들을 수집했습니다. 소파 방정환 선생의 세태비평 소설 ‘은파리’를 표방한 ‘금파리’를 내세워 경성의 곳곳을 다니며 묘사합니다. 서울 구경 온 이들과 기차 통학하는 학생, 활기 넘치는 경성역의 모습, 경성역 앞 동양호텔 11호실에서 발생한 살인사건과 경성재판소에서의 재판, 녹음이 짙은 남산공원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신가정 부인과 하이카라 청년 등을 묘사합니다. 계절마다 색조를 달리하고 단순화해 그린 그림이 독특합니다. 그러나 당시 이야기와 함께 읽으면 그림이 뜻밖에 정교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로마든 경성이든, 이색적인 여행이 될 법합니다.
  • 여성들에 인터넷으로 돈버는법 말한 이집트 여대생, 징역 10년형

    여성들에 인터넷으로 돈버는법 말한 이집트 여대생, 징역 10년형

    이집트에서 여성 틱톡 스타에게 22일 징역 10년형을 내렸다고 더 텔래그래프가 전했다. 하닌 호삼(20)이란 이름의 이집트 카이로 대학에 다니는 여대생은 동영상 공유 애플리케이션 틱톡을 통해 인기를 끌었다. 호삼과 함께 재판을 받은 이들은 모두 네 명으로 여성에게 소셜 미디어를 장려하고, 이를 통해 돈을 벌라고 유도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호삼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은 2000이집트 파운드(약 1400만원)의 벌금형을 받았지만, 호삼에게는 징역형이 선고됐다. 이집트 당국은 여성들이 인터넷에 동영상을 올려서 돈을 벌라고 하는 것을 인신매매나 성매매와 마찬가지로 취급한다. 호삼은 틱톡을 통해 관대한 처벌을 촉구하며, 누구도 해하려는 의도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엄격한 무슬림 사회인 이집트에서 검사들은 호삼을 포함한 인터넷 스타들이 방탕한 동영상을 올려 사회적 규범을 어겼다고 주장했다. 특히 호삼은 여성들이 온라인에 동영상을 올려 어떻게 돈을 벌 수 있는지 설명하는 동영상을 올렸는데, 이집트 사법 당국은 이에 대해 온라인 매춘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호삼은 영상에서 “사람들과 상호 존중하며 우정을 쌓을 수 있다”고 말했다.호삼은 지난 7월 처음 기소됐는데, 같이 기소됐던 또 다른 인스타그램 스타는 100만명의 팔로어를 거느린 마와다 알 아드함이다. 그녀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부적절한 사진과 영상을 공유한 혐의였고 그외 세 명은 두 여성을 도왔다는 혐의를 받은 남성들이었다. 호삼과 아드함이 틱톡과 인스타그램에 올린 내용은 서구에서는 시시하다고 치부할 수 있는 것들로 춤을 추거나 패션 모델같은 자세로 찍은 사진들이었다. 호삼은 여성이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라이브 방송을 하는 것만으로도 돈을 벌 수 있다고 말했다. 2013년 쿠데타로 국방부 장관이었던 압델 파타 엘시시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여성 소셜 미디어 스타, 가수, 댄수 등은 보수적인 정부의 타깃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집트 정부는 개인 소셜 미디어를 감시하거나 웹사이트를 차단하는 엄격한 인터넷 규제정책을 도입했다. 인권단체인 ‘휴먼 라이트 워치’에서는 이집트 정부의 판결에 대해 온라인상의 자유로운 발언권을 침해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호삼은 자비를 구하는 동영상을 통해 “10년이라니! 난 어떤 부도덕한 일도 하지 않았다. 지난 10개월 동안 감옥에 있었는데 왜 나를 또 감옥에 넣으려 하는가”라고 호소했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파키스탄 총리 “성폭행? 여성 노출이 남성 유혹한다는 건 상식”

    파키스탄 총리 “성폭행? 여성 노출이 남성 유혹한다는 건 상식”

    여성의 부적절한 옷차림이 성폭행을 야기한다고 말해온 파키스탄 총리가 비슷한 발언으로 또 한 번 도마 위에 올랐다. 21일 ‘악시오스 온 HBO’에 출연한 임란 칸(68) 파키스탄 총리는 여성의 노출이 남성을 유혹한다는 것은 상식이라고 말해 빈축을 샀다. 칸 총리는 파키스탄이 서구와 완전히 다른 사회이고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다면서 “만약 여러분이 사회 내 유혹을 야기하고, 갈 곳 없는 젊은이들이 그 유혹에 사로잡힌다면 분명 모종의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성의 옷차림이 그런 유혹의 일부라고 생각하느냐”고 거듭 묻자 “여성이 옷을 거의 입지 않고 있다면 로봇이 아닌 이상 남성은 영향을 받는다. 그것은 상식”이라고 답했다.인터뷰 진행자가 해당 발언과 크리켓 스타로서의 과거를 결부시키려 하자 “이것은 나에 관한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 관한 것”이라면서 “내 우선순위는 우리 사회를 어떻게 잘 굴러가게 하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급증하는 성범죄를 어떻게 제어할지 의논하고 있다”고 선을 그었다. 이에 대해 칸 총리의 전 부인 레함 칸(48)은 “표심을 얻기 위해 꾸며낸 발언”이라고 비난했다. BBC 기상캐스터 출신인 그녀는 2015년 1월 20살 연상의 칸 총리와 재혼했다가 9개월 만에 문자메시지로 이혼 통보를 받았다.레함 칸은 “사석에서 그의 견해와 다르다. 다소 자유로운 생활을 하는 그이기에 나는 그가 의도적으로 그런 말을 한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여성 문제에 관심도 없는 칸 총리가 보수적인 파키스탄에서 표를 얻기 위해 그 같은 발언을 하는 것이라 짐작했다. 칸 총리는 4월에도 비슷한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당시 칸 총리는 ‘성폭력 방지를 위해 정부는 무슨 조치를 했느냐’는 시민 질문에 “모두가 의지력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유혹을 없애려면 여성들이 옷을 얌전하게 입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성폭력 증가의 원인은 방탕함에 있다”면서 인도와 서구, 할리우드 영화 등 음란물이 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했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파키스탄에서는 매일 최소 11건의 성폭행 사례가 보고된다. 지난 6년 동안 2만2000건 이상의 성폭행 사건이 경찰에 접수됐다. 하지만 가해자들이 유죄 판결을 받은 건 전체의 0.3%에 해당하는 77건에 불과했다. 급증하는 성폭력 사건에 대한 법적 처벌이 미미하다는 비판에 파키스탄 정부는 지난해 12월 화학적 거세법을 도입하고, 성범죄 전담 특별법원 신설을 통해 중범죄의 경우 사건 발생 후 4개월 이내에 신속하게 재판을 마무리하게 하도록 했다.한편 크리켓 국가대표로 1992년 크리켓 월드컵 우승을 견인, 국민적 영우 반열에 오른 칸 총리는 영국 명문 옥스퍼드대학교 출신으로 지적인 이미지까지 갖췄다. 정계 입문 후 반정부 시위를 이끌며 지지를 얻었고, 20018년 8월 제22대 파키스탄 총리에 취임했다. 1995년 사교계 유명인사 제미마 골드스미스와 결혼, 두 아이를 낳고 살다 2004년 이혼했으며 2015년 레함 칸과 결혼했다가 9개월 만에 이혼했다. 당시 칸 총리는 이슬람권에서 여성 억압의 관행으로 여겨지는 ‘트리플 탈라크’ 방식을 사용해 주목을 받았다. ‘트리플 탈라크’는 이슬람 사회에서 남자가 “너와 이혼하겠다”는 의미의 ‘탈라크’를 3번 외치는 즉시 이혼이 성립되는 제도로, 칸 총리는 레함 칸에게 ‘탈라크’를 문자메시지로 3번 보내 이혼을 통보했다. 권윤희 기자 heeya@seoul.co.kr
  • ‘죽을 만큼 아팠을 때 결혼을 결심했죠’ 보호종료아동 6년차 허진이씨

    ‘죽을 만큼 아팠을 때 결혼을 결심했죠’ 보호종료아동 6년차 허진이씨

    어떤 분들은 “스무살이면 어른 아니야 사실은. 너무 많은 지원을 하고 있는 거 아니야”라고 하시더라고요. 하지만 어른이 없다라는 거 내가 어떤 마음의 위로와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존재가 없다라는 거, 그쵸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는 사막을 걷고 있는 기분이라는 거를 많은 분들이 당사자 얘기를 통해서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올해로 보호종료 된 지 6년 차를 맞이한 허진이 씨(26). 그는 아름다운재단 ‘열여덟 어른 캠페인’을 통해 허진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자신과 같은 아픔을 가진 아이들에게 그가 받았던 여러 혜택과 기회들을 그들도 받을 수 있도록 여러 현장에서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시설을 퇴소했을 당시, 말 그대로 보호가 ‘종료’된 허씨는 시설뿐만 아니라 동생들과의 연락도 스스로 끊었다. ‘난 이제 시설 사람이 아니다. 이제 정말 자유인이다’란 선포였다. 자립정착금 500만 원도 두 달 만에 탕진했다. 사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가고 싶은 곳에 대해 억눌렸던 욕구를 너무 빨리 해소하려 했던 결과였다. ‘이렇게 행복해도 될 일인가’라고 늘 친구들에게 말하고 다녔던 그 행복은 돈이 바닥나는 순간 잔인한 삶으로 그녀에게 돌아왔고 자신의 선택과 결정에 책임을 지울 수밖에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깨닫게 했다. 죽을 만큼 아팠을 때 결혼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고 지금은 한 남자를 만나 결혼한 지 3년이 됐다. 그는 시설 퇴소 후의 자유로움에서 느꼈던 ‘이렇게 행복해도 될 일’이 또다시 찾아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더 이상 두 번의 실패는 없다. 시설에서 충분히 받지 못했던 사랑도 이젠 한 남자의 아내로서 온전히 받을 수 있게 됐고, 혼자 있을 때 느꼈던 어떤 무기력과 무책임했던 삶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시설에서 강연할 때, 수줍지만 진심으로 자신의 주변을 계속 맴돌며 관심을 받고자 했던 아이들이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그 아이들이 자신들의 삶을 정말 잘 살고 싶어하는 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돕고 싶은 이유기도 하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Q) 처음 입소한 시설에 대한 기억 제 기억은 시설에서부터 시작해요. 시설에서 많은 친구들과 서로 의지하고 재밌게 놀았던 기억이 많아요. 그들 안에서 위로와 힘을 얻고 좋은 마음을 느끼며 자랐고 제 상황에 대해 불안하거나 무서운 마음은 없었던 거 같아요.  (Q) 가정의 진짜 의미를 어떻게 알았나 시설에서 단체로 놀이공원을 갔어요. 주변에 제 또래 친구들이 다들 솜사탕 하나 들고 양손에 엄마, 아빠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을 보고 ‘왜 나는 다른 삶을 살고 있지’라는 질문을 던지고 ‘아, 저 모습이 원래 가정의 모습일 수 있겠구나’라는 걸 알게 된 거 같아요. 너무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혼란스럽다기보다는 그 친구들은 내가 가지지 못한 걸 가진 거에 대해 그냥 부러운 마음이었던 거 같아요. (Q) 왜 나의 엄마는 바뀔까?라는 의문 유치원 때 저를 돌봐주셨던 ‘엄마’가 초등학교 올라가면서 보이지 않게 됐죠. 양육자가 바뀌게 된 거였거든요. 그래서 유치원 때까지 돌봐주셨던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컸죠. 그래서 ‘엄마, 빨리 돌아와 달라, 보고 싶다’고 손편지를 쓰기 시작한 거죠. 언젠가는 볼 수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물론 그 편지들은 보낼 곳이 없었고 그냥 쌓여만 간 거죠. 그분을 진짜 엄마라고 생각한 거죠. 물론 나를 낳아주었겠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내가 생각하는 나의 엄마인데 ‘어디로 갔을까’ 하는 배신감, 외로움 그리고 보고 싶은 마음에 편지를 썼던 거 같아요. 하지만 양육자가 계속 바뀌게 되면서 ‘아, 내 엄마가 아니었구나’라는 걸 깨닫는 순간 그 편지가 의미 없어졌죠.(Q) 시설 안에서 친구들과의 관계 친구들과의 관계는 좋을 수밖에 없었어요. 저희끼리는 친구라는 표현보다는 가족이라는 말을 굉장히 많이 했어요. 슬픈 일을 당하면, 내가 느끼는 감정을 친구도 똑같이 느껴봤기 때문에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끼면서 19년을 살아왔기 때문에 정말 끈끈했던 거 같아요. (Q) 시설 너머의 사회에서 느낀 첫 편견 시설이 워낙 컸어요. 학교는 물론 생활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갖춰져 있었어요. 그래서 외부활동할 수 있는 경험은 많지 않았던 거 같아요. 유일하게 학교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는 학교끼리 체육대회를 할 경우였죠. 줄넘기 대회를 해서 우승했는데 정작 돌아오는 건 ‘저 친구들은 부모님이 안 계시는 아이들이라 맨날 할 수 있는 게 줄넘기 연습밖에 없어서 이건 거겠지’라는 말이었어요. 물론 질투심으로 한 말이었을 텐데 저희한테는 큰 상처였죠. 그런 편견을 듣게 되니깐 ‘아, 나는 이 울타리 안에서만 안전할 수 있구나’라는 마음이 굳어지게 되는 거죠. (Q) 퇴소가 다가올수록 심정은 어땠는지 주변에서 응원해주고 격려해주는 분들이 많았어요. 새로운 시작을 잘 할 수 있도록 물질적인 도움을 주시는 분들도 많았고요. 사실 저는 다른 친구들보다 물질적, 정서적인 지원을 많이 받는 편이었어요. 운이 좋은 편이었죠. 그래서 조금은 희생적이고 배려를 많이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죠. 그 상황을 잘 알고 계신 한 선생님께서 곧 퇴소할 저를 불러놓고 ‘이젠, 너 답게 살아라. 너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라’라고 말씀하셨죠. 그때 굉장히 눈물이 많이 났어요. 왜냐면 제가 양보, 배려하면서 느꼈었던 외로움을 당시엔 아무도 못 알아주는 걸로 알았는데 그 선생님께선 항상 저를 바라봐 주셨던 거죠. 너무 큰 위로가 됐었어요. (Q) 캐리어 하나의 공간이 남을 정도로 적은 짐 보통 시설에서는 자기 게 없어요. 교복, 체육복, 생활복, 운동화나 양말 같은 것도 다 물려서 입고 신었죠. 제가 곰돌이 그려져 있는 양말을 신고 싶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깐요. 그러다보니 막상 시설에서 나올 땐 앨범, 챙겨주신 이불, 겨울 코트 그리고 당장 생활에 필요한 것들만 챙겨서 나오니깐 굉장히 큰 캐리어를 주셨는데도 그 안에서 소리가 날 정도로 짐이 적었어요. (Q) 정착지원금 500만 원이란 돈… 500만 원이란 돈이 많고 적음을 논의하기 전에 이 돈이 자립에 정착하는 데 잘 쓰이고 있는가가 더 중요한 본질인 거 같아요. 저는 그 돈을 ‘꽁돈’처럼 정말 두 달 만에 탕진했어요. 사고 싶은 거 다 사고,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가고 싶은 거 다 갔죠. 시설에서는 그러지 못했던 걸 ‘자유’를 만끽하게 되니깐 통제가 안 됐던 거죠. 근데 사실은 그러라고 준 돈은 아니잖아요. 친구들한테 이 돈은 앞으로의 삶을 살아가면서 자립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주는 돈이란 인식을 잘 심어줄 필요가 있을 거 같아요. (Q) 퇴소 후의 생활은 학업은 뒷전이었죠. 학교 안 가는 걸 친구들한테 자랑할 정도였으니깐요. 그런 일탈이 굉장히 기분 좋았어요. 그러나보니 성적관리도 안 돼 장학금도 못 받고 기숙사에서도 쫓겨나고 고난이 시작된 거죠. 그렇게 해보고 싶은 거 다 해보며 엉망진창의 삶을 느꼈지만 그 시간은 정말 짧았어요. 수중에 돈이 떨어지면서 내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했던 방탕한 삶의 결과는 잔인하고 가혹함으로 완전히 뒤바뀌게 된 거죠. 고시원 생활도 하고, 친구들한테 돈 빌리면서 욕도 얻어먹고 그러면서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스스로 배우게 됐던 거 같아요. 그때부터 적금도 시작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면서 지금의 이런 순간이 온 거 같아요. (Q) 자립 후 가장 서러웠을 때는 제 선택에 대해 어느 누구에게도 조언을 구할 수도, 같이 책임을 져 줄 수 있는 사람도 없다는 걸 느꼈을 때가 가장 서러웠던 거 같아요. 부모님이 계셨으면 이 고통을 같이 나눌 수 있었을 텐데 나에겐 그런 존재가 없네, 라며 많이 슬퍼했죠. 정말 죽고 싶을 만큼 아플 때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고 연락처를 훑어봐도 연락할 사람이 없을 때도 그랬죠. 그래서 그때 빨리 결혼해서 가정을 이뤄야겠다고 결심한 거 같아요. 지금은 결혼한 지 3년이 다 돼가는 데 너무 좋아요.(Q) 퇴소와 동시에 시설과 연을 끊은 경우가 많은지 저도 그랬어요. 난 시설 사람이 아니다. 난 이제 자유인이다, 라는 표시로 연락을 끊었어요. 열심히 놀고 싶은 이 마음을 누구에게도 방해나 간섭받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기 때문이었죠. 아무래도 시설 선생님과 관계가 계속돼 있으면 ‘공부는 잘하니, 성적은 어떻니’라는 연락이 계속 오게 되잖아요. 또 하나는 시설에 있는 동생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어야 한다,라는 선생님들의 얘기가 저에게 부담스러웠던 거 같아요. 제가 봐도 잘 사는 거 같지 않았거든요. 그러다보니깐 후배들한테 제 모습을 전해주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에서 제가 스스로 연락을 거부하게 된 거죠. (Q) 동기생 중 극단적 선택한 친구들... 같은 해에 3명의 친구를 떠나보냈어요. 한 친구는 교통사고로 두 친구는 자립이 좀 힘들었나봐요. 저도 유목민처럼 생활하다 보니깐 제 짐들이 여기저기 분산돼 있었거든요. 극단적인 선택을 한 친구 집에도 제 짐이 있었죠. 그 친구로부터 짐을 가져가 달라는 연락이 왔지만 저는 제 사정만 그 친구한테 이해시키려고 하고 짐을 찾아가지 않고 다음에 찾아가겠다고 말하고 연락을 끊었죠. 그러고 나서 일주일 뒤에 전화 세 통이 와 있더라고요. 또 짐 찾아가 달라는 거라 가볍게 생각하고 말았는데 그 다음날 그 친구 소식을 듣게 된 건죠. 나중에 이 친구가 다른 이유로 그런 안타까운 선택을 하게 된 걸 알았지만, 내가 이 친구의 짐을 더 무겁게 한 게 아닌가 하는 마음에 굉장한 죄책감을 느꼈었어요. (Q) 자신이 사회에 잘 적응하게 된 원동력은 저한테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좋은 분들이 주위에 많았고 운도 좋았던 거 같아요. 정부나 민간지원에서 성적이나, 아르바이트 수입, 부양의무 등 애매한 기준 미달로 지원에서 소외되는 친구들이 굉장히 많거든요. 저는 그 친구들과 좀 달라 지원을 많이 받게 됐고 제 삶을 계획하고 더 좋은 목표를 향해 갈 수 있었지만 그런 기회를 얻지 못하는 친구들도 많거든요. 내가 지금 이렇게 웃을 수 있고, 사람들에게 내 얘기를 당당하게 할 수 있었던 건 제가 받았던 좋은 기회들과 운이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죠. 그래서 제가 받았던 좋은 기회들이 그런 친구들한테 뻗어나갈 수 있게 내가 목소리를 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고 어떤 역할을 해야겠다라는 생각에 ‘열여덟 프로젝트’ 캠페인을 하게 된 거죠.(Q)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렸는데 너무 행복해요. 학생 때 선생님이 꿈이 뭐냐고 물으면 결혼하는 거라고 했어요. 빨리 가정을 이뤄야만 제 속에 있는 에너지를 더 잘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계속 남 탓만 하는 무기력한 삶이 싫었고 그런 여지를 없애고 싶었죠. 왜냐면 결혼 전에는 내가 잘 안 될 때마다 ‘나는 부모가 없기 때문이야’, ‘시설에서 자랐기 때문이야’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 걸 끊어내기 위해선 가정이 있으면 된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가정을 이루고 제2의 삶을 살게 되니깐 정말 제 삶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게 되고 힘든 것도 잘 견뎌낼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된 거 같아요. 또 시설에서는 한 선생님의 사랑을 스무 명의 아이들이 나눠 가져야 했어요. 하지만 선생님이 아무리 노력을 한다 해도 스무명 이 한 사람이 주는 사랑을 나눠 가져야 하잖아요. 그런 거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어요. 나를 좀 더 봐줬으면 좋겠고 다른 아이한테 가는 시선을 질투하고 했어요. 그래서 친구를 미워하게 됐었고요. 지금은 신랑이 저한테만 모든 사랑을 쏟아줘서 그 사랑을 온전히 저만 가질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Q) 자립 준비하는 보호종료아동에게 하고 싶은 말 ‘열여덟 어른 캠페인’을 통해서 자립에 필요한 정보와 ‘너희는 혼자가 아니야’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어요. 물론 상황이 비슷한 친구들이 있다, 라는 의미도 있지만 공공적인 측면에서 친구들의 자립을 위해 정부나 민간에서 지원받을 수 있는 사업들이 많이 있다라는 걸 알려줌으로써 ‘자립은 혼자 하는 게 아니다’라는 걸 말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자립을 하게 됐을 땐, 모든 어려움과 그것에 대한 책임을 제 자신이 온전히 짊어져야만 했고 자립의 적응 여부가 개인의 역량이나 의지문제라고만 생각했었죠. (Q) 정부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정부에서든, 민간에서든 많은 관심을 가져 주시고 있어요. 몇 주 전엔 국무총리님과 보호종료아동의 현실에 대해 얘기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거든요. 그만큼 많은 관심을 받고 지원사업들이 생겨나고 있죠. 하지만 문제는 경제적인 지원에만 집중되고 있어요. 경제적인 지원을 아무리 많이 해도 정서적인 부분이 채워지지 않으면 결국은 또 어떤 공허함을 채우는 데 그 돈이 쓰여지겠죠. 친구들이 겪은 어려음에 대해 심도 있는 관찰을 해주고 단순히 돈으로 그런 친구들이 겪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구나,라는 것을 많은 분들이 공감해 줬으면 좋겠어요. (Q) 꿈과 소망이 있다면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란 속담처럼 제가 어려웠을 때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처럼 그 시절을 계속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현재의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저와 같은 아이들과 친구들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글 박홍규 기자 gophk@seoul.co.kr 영상 박홍규, 문성호, 김형우 기자 sungho@seoul.co.kr
  • [근대광고 엿보기]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 광고

    [근대광고 엿보기]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 광고

    “마치 어느 의열단원이 서울 한구석에 폭탄을 던진 듯한 설렘을 느끼게 했다.” 1926년 10월 1일 나운규가 각본, 감독, 주연을 맡은 영화 ‘아리랑’이 단성사에서 개봉된 당시를 영화감독이자 배우인 고 이경손은 이렇게 회고했다. 만세운동에 가담했다가 미치광이가 된 주인공을 그린 아리랑은 마치 항일투쟁과 같은 영화였다. 일제강점기를 대표하는 영화인인 나운규는 3·1운동에 참여하고 만주에서 독립군 단체인 도판부에 가입했던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2년 동안 청진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한 나운규에게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고 2016년에는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나운규는 1923년 3월 출소해 함북 회령에서 머물다 배우가 되는 인생의 전환기를 맞는다. 이듬해 1월 극단 예림회가 공연차 회령을 방문하자 예림회에 가입한 것이다. 영화를 상영하는 도중에 관객들은 “청천 하늘에 별도 많고 이내 가슴에 수심도 많다”라는 아리랑 4절을 합창해 객석을 눈물바다로 만들어 놓았다. 아리랑을 개봉한 첫날 단성사에는 구름 같은 관객이 몰려들어 경찰 기마대까지 동원되는 등 일대가 아수라장을 이루었다. 영화가 끝나고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아리랑을 합창하면 밖에 있던 사람들도 함께 노래를 부르며 조선독립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조희문, ‘나운규’, 한길사). 아리랑의 감독·각본은 김창선이라는 한국명을 갖고 있던 일본인 스모리 슈이치를 내세웠다. 광고에도 그렇게 나와 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스모리가 감독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광고를 보면 원작 각색은 나운규의 호인 ‘춘사’(春史)라고 돼 있고 출연자에는 나운규의 이름이 나온다. 아리랑은 2년 넘게 상영됐고 15만명이 관람했다. 100만명 정도였던 당시 서울 인구를 감안하면 대단한 숫자다. 1927년에는 일본에서도 개봉됐다. 나운규는 큰돈을 벌었다. 이후 나운규는 여러 영화에서 주연을 맡아 조선 영화계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고 나운규 프로덕션을 만들어 직접 영화 제작에도 뛰어들었다. 그가 감독·각본·주연을 맡은 ‘벙어리 삼룡’(1929)이 대구 만경관에서 개봉했을 때에는 너무 많은 관객이 몰려 극장 2층이 붕괴될 정도로 나운규는 큰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방탕한 생활로 회사는 적자를 면치 못했다. 1935년 무렵 나운규는 아리랑을 유성영화로 만들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1937년 폐병으로 죽을 때까지 나운규는 영화 제작과 연기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의 장례식은 아리랑이 상영됐던 단성사에서 치러졌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박수홍 방탕 생활의 8할은 손헌수…클럽서 ‘방자’ 역할”

    “박수홍 방탕 생활의 8할은 손헌수…클럽서 ‘방자’ 역할”

    방송인 박수홍과 그의 친형 부부가 금전적 갈등을 둘러싼 진실공방을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가로세로연구소’가 박수홍과 절친한 후배로 알려진 손헌수를 비판하고 나섰다. 유튜브 채널 가로세로연구소(이하 가세연)는 최근 ‘박수홍 손헌수 간장게장(클럽, 도박, 사채)’라는 제목의 영상을 올렸다. 해당 영상에서 김용호는 “손헌수가 과거 한 방송에서 ‘사업하다 사채 빚이 생겨 한 달 이자만 800만원을 냈다’라고 했는데 이것만 놓고보면 나쁜 사채업자에게 당해서 손헌수가 고생을 했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여론몰이이자 감성팔이, 거짓말이다”며 관련 판결문이라고 주장하는 문서를 공개했다. 문서에는 ‘피고는 원고에게 1억1000만원과 이에 대해 2020년 12월26일부터 다 갚는 날까지 연 12%의 비율로 계산한 돈을 지급하라’고 적혀 있다. 이를 읽은 강용석은 “이건 그냥 돈을 빌려서 안 갚은 것 아니냐”라고 말했고, 김용호는 “이게 사채냐. 법정이자 자체가 원래 높다. 저게 사채 이자가 아니다”며 “투자를 받았다가 안 갚아서 소송을 걸어서 저렇게 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사건의 본질에 대해 “손헌수가 자기 지인에게 투자를 2억5000만원 정도를 받아놓고 사업은 안 하고 그후 몇 년 후엔 연락을 끊었다”고 말했다. 더불어 “투자자가 손헌수에 돈을 갚으라고 하니 손헌수가 ‘빌린 게 아니라 투자를 받은 것이고 열심히 해봤지만 사업이 잘 안됐다. 그래서 돈을 날렸다’고 한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김용호는 “손헌수가 투자를 잘못한 것이니 반만 갚겠다고 투자자에게 말해서 투자자가 받아들였는데 결국 원래 투자금의 반 정도인 1억2000만원을 한달에 300만원씩 갚기로 했다는 각서를 썼고 결국 그마저도 갚지 않아 소송으로 이어졌고 법원의 판결까지 받은 것이다”라며 투자자에게 쓴 각서까지 공개했다. 김용호는 “손헌수가 그런데 자꾸 본질을 호도한다. 그래도 그를 여기까지만 다루겠다. 하지만 어디가서 또 쓸데 없는 소리를 하면 모든 것을 다 공개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박수홍의 방탕한 생활의 8할은 손헌수다”라고 밝혔다. 이어 “박수홍이 클럽 등 에서 헌팅을 하고 다닐 때 방자 역할을 했다. 얼굴마담 박수홍, 물주 역할을 했던 A씨, 또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이 필요 했다. 이 셋이 팀을 이뤄 클럽에서 엄청나게 놀고 다녔다”고 다시 한번 주장했다. 또한 “물주였던 A씨는 현재 도박빚을 피해 도망갔다는 말이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한편 지난 3월 유튜브의 한 댓글을 통해 박수홍이 친형 부부로부터 30년 동안 출연료 및 계약금을 받지 못했다는 내용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박수홍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형 부부로부터 횡령 피해를 입은 사실을 밝히며 부모님에 대한 비난과 억측을 삼가해 달라고 당부했다. 박수홍의 친형 측은 입시 준비를 하고 있는 고2 딸이 현재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을 정도로 정상적인 학교 생활을 못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여기에 형제 간 갈등은 박수홍의 1993년생 여자친구 문제 때문에 시작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후 박수홍은 법률대리인 노종언 변호사를 통해 지난 5일 오후 친형과 형수를 횡령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또한 법률대리인 측은 사태의 본질은 ‘횡령’이라며 친형 측이 제기한 여자친구와 관련한 주장에 대해서는 “박수홍은 일방적인 사생활 폭로 및 흠집내기 행위 등에 대해 일체 대응 없이 법의 잣대로 이번 사태에 대한 객관적 판단을 받고 이에 응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가세연은 박수홍과 친형의 갈등에 대해 “박수홍이 여론전을 하고 있다”며 박수홍의 사생활 문제를 짚었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