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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델라 본격 정치활동/ANC 부의장 피선/남아공 정치범 석방촉구

    【루사카(잠비아) AP AFP 연합 특약】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민권운동 지도자인 넬슨 만델라는 2일 아프리카민족회의(ANC) 부의장으로 선출됨으로써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ANC는 이날 열린 집행위원회에서 또 남아공정부와 ANC 대표단간의 협상일자 및 장소를 논의하기 위해 즉각 접촉을 갖기로 했다. ANC 본부는 지난달 2일 남아공정부의 ANC 합법화조치에 따라 30년간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지체없이 요하네스버그로 이동하게 될 것이라고 한 참석자가 전했다. 27년간의 감옥생활 끝에 지난달 11일 석방된 만델라는 이날 회의가 끝난 뒤 『남아공정부와의 협상을 위해 비상사태 해제 및 정치범 석방조치가 사전에 취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만델라는 남아공정부와의 협상에서 ANC 대표단을 이끌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올리버 탐보 ANC 의장은 스웨덴에서 뇌일혈치료를 받고 있기 때문에 ANC는 사실상 만델라의 지도하에 놓이게 됐다. 이에 앞서 만델라는 ANC 본부를 방문한 미 의회대표단과 만난 자리에서 『남아공에 대한 미국의 제제조치를 계속유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 1천1백명 어제 가석방/서승씨도 포함

    3ㆍ1절 특별가석방조치에 따라 서승씨(45) 등 장기복역좌익수 22명을 포함,모두 1천1백11명의 재소자가 28일 상오 전국 각교도소와 구치소에서 일제히 풀려났다. 지난 71년3월 재일교포 모국유학생사건으로 구속기소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됐던 서씨는 이날 대전 교도소에서 풀려나 상오10시쯤 서울 은평구 응암4동 우성아파트 103동 907호 동생 서준식씨(41)집에 도착,가족들과 만났다.
  • 동경산업 분신사건 관련자 8명에 실형

    【인천】 인천지법 형사합의2부(재판장 이기현부장판사)는 27일 인천 경동산업 근로자 집단 분신ㆍ방화사건 관련,자살방조와 업무방해혐의선고공판에서 박선태피고인(26)에게 징역4년을 선고하는 등 관련 피고인 8명에게 각각 징역4년에서 징역1년6월을 선고했다.
  • “산디니스타 정권타도”미 지원 결실/장기간 내전에 국민도 변화선택

    투표전날까지도 산디니스타의 패배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자신하던 오르테가에게 패배를 안겨준 차모로 후보의 승리는 그녀의 완승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지난 8년간 우익콘트라 반군을 통해 산디니스타 정권 타도를 시도해온 미국의 승리로 평가되고 있다. 미국은 이번 선거기간중 야당세력들을 집중 지원,오르테가 거세를 통한 니카라과의 친미세력화를 기도했다. 또 유엔ㆍ미주기구(OAS)ㆍ카터 전 미대통령이 이끄는 대규모 국제선거 참관단이 니카라과 현지에서 선거 감시활동에 나선 것도 산디니스타정부의 선거부정을 봉쇄,결과적으로 야당측이 승리하는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번 차모로 후보가 거둔 승리의 보다 큰 의미는 장기간의 내전과 경제난에 지친 니카라과 국민들이 「변화」를 선택했다는 사실에서 찾아야할 것 같다. 지난 79년 독재자 소모사 정권을 몰아내고 집권한 산디니스타 정권은 사회주의 이념을 내걸고 토지개혁을 통한 부의 균배등 사회개혁을 단행,초기에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었다. 그러나 미국은 니카라과의「제2의 쿠바」화를 저지하기 위해 82년부터 콘트라 반군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에 나섰다. 이와함께 대니카라과 경제봉쇄 정책까지 단행,니카라과는 장기 내전으로 인한 각종 폐해와 함께 경제사정은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다. 지난 8년간 계속된 대콘트라전서 공식 사망자수는 3만명을 넘어섰고 지난 한햇동안 연1천7백%의 인플레와 실업률25%를 기록했으며 78년 이후 국민들의 실질임금이 90%가 감소하는등 니카라과의 경제는 최악의 상태였다. 오르테가 정권은 최근 국민들의 이러한 불만을 인식해 사회주의 노선을 완화시킨 혼합경제체제로의 전환을 약속하고 사유재산 몰수금지와 정치범 석방조치 등을 단행했다. 그러나 이같은 유화정책은 타이밍을 놓쳐 등을 돌린 민심을 회유하는데 실패했다. 앞으로 차모로 정부가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할 과제는 역시 장기 내전으로 갈라진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합치는 것과 경제를 되살리는 일이다. 이를 위해 차모로 정권은 이미 공약한대로 미국과의 관계정상화와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추구할 것으로 전망된다. 오르테가 현대통령이 선거결과에 승복할 뜻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는 정부 이양작업이 과연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냐에 대해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산디니스타 정권에 철저히 복종해온 군경조직 내부의 움직임에 대한 우려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그러나 현정부의 협조와 여론의 압력,미국의 경제제재조치 해제등 적극적인 경제부흥 방안이 마련될 경우 정권이양기의 혼란은 극복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선거의 결과로 79년 이후 미소 두강대국의 대리전화한 니카라과 내전의 명분은 사실상 사라지게 된 셈이다. 앞으로 미국이 니카라과에 대해 경제적인 지원을 본격화하고 내전종식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면 그동안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경제문제의 악순환으로 대변돼온 중남미문제 전체가 탈이념화의 새 전기를 맞게될 것으로 보인다. ◎차모로는 누구/반체제 남편 피살뒤에 정계 등장/중산층 지지 두터운 「민주화 여인」 25일 실시된 니카라과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전국 야당연합(UNO)의 비올레타 바리오스 드 차모로(60)후보는 지난 10여년간에 걸친 좌익 산디니스타 통치에 반기를 든 중산층 저항세력의 상징적인 존재로 부상한 인물. 지난 78년 암살을 당함으로써 좌익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주도의 니카라과 혁명의 영웅이 된 라 프렌사지의 전편집장 고페드로 요아킴 차모로의 미망인으로 니카라과인들의 존경을 받아온 그녀는 지지자들로부터 「민주주의의 여인」으로 불리고 있다. 지난 79년 니카라과 혁명후 산디니스타 군사혁명 정권에 참여했으나 신 정부노선이 너무나 좌익으로 경도돼 있다고 판단,18개월만에 FSLN을 떠난 차모로 여사는 정치적 무경험이 흠으로 지적되기도 하나 과거의 정적들이 뒤섞여 있는 니카라과 야당세력을 단합시킬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평가되어 알력이 심한 13개 야당연합세력인 니카라과 전국야당연합도 지난 9월 그녀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 「3ㆍ1절 석방」 확대/미전향자 특별사면은 부정적/정부 고위당국자

    정부는 3ㆍ1절을 맞아 형행성적이 우수하고 형기가 확정된 기결수를 최대한 석방시킨다는 방침아래 가석방요건을 대폭 완화할 예정이다. 정부의 한 고위당국자는 23일 『이번 3ㆍ1절을 맞아 정계개편 이후 국민사이에 조성되기 시작한 화합분위기를 고취시키기 위해 대규모 가석방조치가 단행될 것으로 안다』고 밝히고 『과거에는 형기의 90% 이상을 복역하고 형행성적이 1ㆍ2급인 기결수만 가석방대상이 됐으나 이번에는 형기의 75%이상,형행성적 3급까지 가석방대상이 확대될 것』이라고 말했다. 당국자는 일부에서 거론되고 있는 사면복권 문제와 관련,『이번 3ㆍ1절 특사조치에는 사면 복권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특히 정치권 일각에서 거론되고 있는 미전향 장기수의 경우 전향서도 쓰지 않은 상태에서 무조건 석방하게 되면 국가안보에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고 밝혀 장기수 석방문제에 대해선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 경찰 강력사건 은폐 잦다/연쇄방화ㆍ미장원 강도 이어

    ◎응급실 살인범 놓치고 “쉬쉬”/공조수사 커녕 “도주 방조”/방범비상령 외면 문책모면 급급/“허탕 출동”알려지자 14시간뒤 보고 잇따른 방화사건,미장원ㆍ대낮 강도 등으로 민생치안이 극도로 불안한데도 경찰이 범인검거나 범행예방보다 사건을 감추는데만 급급해 국민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특히 연이은 강력사건으로 방범총비상령까지 내려져 있는 최근들어서도 경찰의 이같은 사건은폐행위가 계속돼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22일 상오 지방공사 강남병원 응급실에서 발생한 조직폭력배들의 칼부림 살인사건의 경우 사건직후 신고를 받은 서울 강남경찰서는 현장에 출동,범인들을 잡지못하자 사건을 숨기고 있다가 사건발생 14시간뒤인 이날 하오9시쯤에야 서울시경에 보고했다. 경찰서에서 불과 1백여m 밖에 떨어지지 않은 큰 병원응급실에서 조직폭력배들이 일본도를 휘두르며 수술준비중인 당직의사와 환자,보호자들을 위협하며 내쫓고 중상을 입은 라이벌 폭력배를 난자한 뒤 유유히 달아났는데도 경찰은 사건발생 자체를 은페,결과적으로 범인들의 도주를 방조한 셈이 되고 말았다. 경찰의 뒤늦은 보고도 제보를 받은 기자들이 취재를 시작하자 어쩔수 없이 한 것이었다. 서울시내에서 10여건 이상 연달아 발생했던 사건의 경우에도 지난달 6일 하오 서울 종로구 종로2가 서울미용실에서 사건이 발생하기 전 관할 중부경찰서 관내에서 2건,관악경찰서 관내에서 5건 등 서울시내 곳곳에서 11건이나 같은 사건이 발생했으나 경찰이 이를 모두 숨겨,범인들이 마음놓고 범행을 계속할수 있도록 해주었고 그후의 수사도 어렵게 만들었다. 또 연쇄방화사건의 경우도 지난해 12월20일 서울 노원구 상계동에서 첫 방화사건이 있은 뒤 지난달 1월7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서 발생한 방화사건이 공개되기까지 10여건의 같은 범죄가 있었음에도 관할 경찰서는 모두 이 사실을 숨겨 방화범들이 마구 날뛰게 했음은 물론 사건의 실마리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밖에 지난16일 상오 발생한 서울 중구 남대문로5가 힐튼호텔의 기흥수화백 여인상 유화(시가 1억2천만원상당)도난 사건도 관할 남대문경찰서가 신고를 받고도 이를 시경에 보고하지 않은채 감추고 있다가 23일 이 사실이 알려지자 뒤늦게 「보도예상보고서」를 올리면서 피해액도 5백여만원으로 축소했다. 지난달 11일 상오7시30분쯤 마포구 서교동 466의9 부림양행(대표 최재익ㆍ38) 창고에서 주사용 항생제에피신 등 의약품 12종 7천4백만원어치가 도난 당했던 사건도 마포경찰서가 숨기고 있다가 같은달 15일 상오 마포구 합정동 우리약업에서 또 항생제 8천9백만원어치 도난사건이 발생하자 뒤늦게 사건내용을 발표했다. 서울 구로경찰서도 지난달 10일 상오7시쯤 서울 영등포구 대림2동 993의3 안국약품 5층 건물의 1ㆍ2ㆍ3층에서 연쇄적으로 금고털이 사건이 발생,가계수표ㆍ유가증권ㆍ현금 등 3억7백여만원이 도난 당했으나 이 사실을 감추었다. 최근들어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경찰의 이같은 은폐행위에 대해 시민들은 『경찰이 민생치안 확립이라는 본분을 망각하고 상부의 문책이나 처벌을 모면하는데만 급급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경찰이 이같은 행위를 계속하는 한 어떻게 안심하고 살수있을 정도의 치안이 확보되겠느냐』고 걱정하고 있다.
  • 지자제법 심의는 신중히 하라(사설)

    지방자치제관련선거법이 이번 임시국회에서 어떻게 심의될 것인가에 대해 많은 국민들은 주시하고 있다. 우리는 가능한 한 여야의 정략이 배제되고 풀뿌리 민주주의의 구현이라는 지방자치 본연의 뜻에 알맞는 선거법과 관련법안이 보다 신중한 심의속에서 제정 또는 개정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미 광역및 기초자치단체 의회 의원정수와 선거구에 관한 민자당의 안이 20일 확정ㆍ발표되어 국회심의를 기다리고 있다. 평민당이 마련중인 지자제선거법안보다는 의원정수와 선거구수 모두가 다소 적은 것이지만 심의과정에서 충분히 조정될 수 있는 내용이다. 이 보다는 지방의원 후보자의 정당추천제를 채택할 것인가 아닌가가 가장 핵심적인 쟁점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평민당은 이미 광역이나 기초자치단체를 막론하고 정당추천제를 반드시 도입해야 한다는 입장을 확실히 하고 있다. 민주정치가 정당정치라는 명분과 아울러 여당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인 지방조직을 정당추천제를 통해 굳건히 하고 뿌리 내릴 수 있게 한다는 실리를 얻을 수 있기에 이같은 주장은 당연하다. 민자당은 아직 최종적인 당론을 발표하지는 않았으나 정당추천제를 배제시키기로 내부적인 방침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초에는 기초단체의 의회선거에만 정당공천을 막도록 의견을 모았으나 광역까지도 어느 시기까지는 정당배제가 필요하다고 의견을 조정함으로써 앞으로 평민당과의 본격적인 대결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우리는 여야가 이 문제를 놓고 국민들에게 내놓는 명분론이나 감성적 호소 등에 모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평민당은 정당추천제가 지난해 정기국회 막판에서 4당이 합의한 것이고 외국의 선례도 많다고 역설하는 한편 이를 배제하는 것은 과거의 통대선거처럼 지방유지나 끌어 모으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민자당측도 추전배제의 논리로 지역발전이나 이익이 주민들의 의사에 맞게 이루어져야지 정당의 이익이나 의사에 좌우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또 영ㆍ호남 등 지역감정이 첨예한 상황에서 정당추천제가 실시되면 망국적 지역감정이 확산ㆍ고착될 가능성이 크고 공천과 관련한 금품수수 등으로많은 역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정반대의 상황을 놓고 나오는 얘기들이 다 그럴 듯한 것은 그 논리 뒤에 숨어 있는 당략 때문이다. 국민들은 달콤한 말 뒤에 어떤 책략이 숨어 있나를 가리고 이같은 당략의 냄새를 줄이도록 정치권에 압력을 가해야 한다. 이와관련하여 올 상반기중 실시예정인 지방의회선거를 연기해달라는 경제 6단체의 건의를 주목한다. 경기침체 상황에서 전국적 선거가 있을 경우 통화증발과 물가앙등으로 경제가 더욱 위축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돈 안드는 선거풍토를 조성해달라는 건의와 아울러 정치권이 귀를 기울일 만하다고 생각된다. 지자제는 수년전부터 여야간의 합의로 『곧 실시된다,된다』면서도 지금까지 미뤄져왔다. 국가현실로 보아 준비가 덜 되었거나 정략의 씨름 때문이었으리라. 그렇다면 지자제가 본래의 뜻에 맞게 시행되기 위해서는 보다 준비가 갖춰지고 당리당략이 줄어들어야 한다. 정치권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신사고를 해야 할 것이다.
  • TV뉴스 「방화」 흉내/국교생,세차례 불 질러

    연쇄방화사건을 보도하는 TV뉴스를 보고 장난삼아 3차례나 불을 지른 한모군(11ㆍ서울 D국민교5년)이 17일 서울 중부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은뒤 형사미성년자라는 이유로 훈방조치됐다. 한군은 지난16일 하오5시40분쯤 서울 중구 삼각동 34 기림개발 공사장에서 헌책상과 의자 등에 라이터로 불을 지르고 하오9시10분쯤에는 공사장 이웃 싸리집 식당(주인 박주희ㆍ50)창문에 설치된 에어컨 덮개에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한군은 경찰에서 『TV를 보고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장난을 해봤다』고 말했다.
  • 인권불모지 흑인운동에 새전기/만델라 석방과 남아공의 앞날

    ◎3천여 재야단체 통합땐 현정권 위기/흑백조화 못이루면 내전 가능성 높아 남아공 흑인 인권지도자인 넬슨 만델라(71)가 11일(현지시각)27년간의 옥중생활 끝에 석방됨으로써 이 나라의 흑백문제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됐다. 클레르크 남아공대통령은 흑인의 제한적인 참정권 인정과 집회를 허용한데 이어 지난 2일에는 ▲만델라석방 ▲아프리카민족회의(ANC)등 재야단체의 합법화조치를 발표,남아공정부에 대한 국제적인 시각 교정작업을 추진해 왔다. 클레르크가 일련의 개혁조치를 시행하고 ANC등이 정부와의 신헌법 협상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제시된 사항들을 대부분 수락함으로써 종전의 대결일변도의 입장에서 일보양보를 한 것은 그동안 인종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으로 인해 받은 불이익 즉 전세계적인 비난 및 경제제재조치,흑인들의 점증하는 시위 등이 흑백인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의 공감대가 이뤄진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번 만델라의 석방조치로 흑인들의 대정부투쟁이 진정 국면에 들어설지 모른다는 조심스런 낙관론에도 불구하고 많은 국제정치 전문가들은 남아공의 미래는 여전히 수많은 난관과 분쟁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고 말한다. 남아공이 앞으로 풀어가야 할 가장 어려운 과제는 다수인 흑인과 소수인 백인간의 인종갈등이다. 클레르크는 온건노선의 만델라가 남아공정부와 흑인재야 단체와의 중재역할을 해 줄것을 바라고 있으나 만델라의 통제력은 미지수. 만델라가 고령인데다 30년가까이 현실과 격리돼 있었던 탓으로 과연 강ㆍ온으로 나뉘어있는 3천여 재야단체를 강력히 통솔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많은 정치분석가들은 회의를 표명하고 있다. 흑인들을 3백50년간 지배해온 백인들은 앞으로도 그들의 특별한 지위가 보장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반면 흑인들은 이를 반대하고 1인1표의 완전한 참정권을 요구,흑인재야단체와 백인정부와의 골은 너무 깊게 패여있다. 따라서 기득권을 주장하는 백인과 수의 우세로 높은 기대감에 휩싸여 있는 흑인과의 첨예한 대립이 평화로운 협상에 이르지 못할 경우 개혁을 추구하고 있는 남아공의 사태가 역전될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인종차별정책을 고수하는 보수당이 지난해 9월 의원선거에서 지지기반을 넓힌데 이어 지난 7일 흑백인이 권력을 공유하겠다는 클레르크대통령을 몰아내기 위한 농성ㆍ파업등 극한투쟁을 불사하겠다고 밝힌점,그리고 군의 쿠데타설등은 이를 대변해 주는 조짐이라 하겠다. 동시에 온건노선을 추구하면서 특정 인종의 권력독점을 반대하는 클레르크와 만델라가 타협을 이루지 못할 경우 그들의 입지가 흔들리는 것은 물론 무력충돌 내지 극우세력의 집권 등도 예상할 수 있는 변수의 하나다. 남아공이 오랫동안 계속된 인종분리정책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국가건설에 성공하느냐 못하느냐는 이제 백인들과 흑인들이 자신들의 견해차이를 이성적으로 극복,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공존하는 방안을 찾는데 달려 있다고 하겠다. 주사위는 여전히 그들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이다.
  • 지방자치제 실시의 참뜻(사설)

    정계개편과 관련하여 지방자치제 실시일정과 그 내용의 변화여부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 정기국회 막바지에 개정된 지방자치법에 따라 올해 상반기중 지방의회선거가 있다고 보고 지방정가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음에 비한다면 아직 불확실한 것이 너무도 많다. 우리는 이번 임시국회를 거치는 동안 지방자치의 내용이 보다 알차게 되고 일정과 방향등이 명확해지기를 기대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련법안들이 막전막후를 통해 신중히 논의ㆍ처리되고 그 과정에서 지방자치의 본뜻에 보다 맞는 법안을 만들어내는 노력과 지혜가 요청된다. 따라서 현재 제기되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들을 차분히 검토해보는 것도 바람직한 태도일 것이다. 최근 지자제실시를 놓고 변화를 모색하는 보도들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특히 금년상반기의 지방의회선거는 늦추고 내년상반기 중으로 예정된 자치단체장의 선거를 앞당겨 연말께 동시 실시한다는 내용이나 시ㆍ군ㆍ구 등 기초자치단체 의원선거에 정당추천을 배제하는 문제를 검토한다는 내용등은 나름대로그럴듯한 명분을 갖고 제기되어 주목된다. 전자의 경우 현행법에 따르면 올해 지방의회,내년 자치단체장의 선거가 있고 92년에 국회의원 총선거,93년 대통령선거,94년 지방의회,95년 자치단체장 등 해마다 선거가 있게됨에 따른 여러가지 부작용이 주로 지적되고 있다. 평민당측도 지방자치를 연기시키려는 속셈이 아닌가에는 의구심을 표하면서 동시선거 문제는 검토할 용의가 있음을 비치고 있어 협상 결과가 주목된다. 기초자치단체에 정당공천을 배제하는 내용 역시 우리 정치현실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된 지역색의 심화를 막아야 된다는 점에서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또 지방의회는 그 지방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 발전을 도모하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장이 되어야지 정쟁의 연장선상에서 운영되어서는 안된다는 명분론도 그럴듯하다. 여야합의에 따라 지자제의 실시시기 같이 이미 법에 규정된 것도 있고 합의정신만 남아있는 것도 있지만 지방의회와 단체장 선거법이 아직도 미결인 상황에서 이같이 이론이 속출하는 것은 정계개편이라는 계기와 아울러지금까지의 합의자체가 너무 정략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음에 있다고 믿는다. 지방자치법이 12ㆍ15 4당총재 합의후 국민적 공감대를 얻는 노력은 전혀없이 국회폐회일까지 나흘만에 전격적으로 개정된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정치지도자들 마저 정당의 지방조직을 확충하는 차원에서 지방자치를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생길 정도였다. 지방자치제의 기반을 확대할 지방재정의 확충이나 권한의 하부이양등 진정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아무런 법적 뒷받침이나 조치도 요구하지 않음에 비춰볼때 진정한 지방자치를 바라는 것인지 의아스러운 것이다. 이런 여러가지 문제를 생각하고 반성하는 토대위에서 이번 임시국회에서는 선거법 뿐만 아니라 지방자치의 올바른 정착과 관련된 법안과 정책사안을 광범위하게 심의해 줄 것을 바란다. 심의의 초점은 건전한 지방자치제의 착근과 발전에 두어야 하며 정략의 요소는 최소화시켜야 할 것이다. 올바른 시작이 중요하다.
  • 「시국사범 석방」 심사 착수/법무부

    ◎가석방ㆍ형 집행정지 등 다각 검토 법무부와 검찰은 3일 노태우대통령과 김영삼 민주당총재 김종필 공화당총재가 국민대화합의 차원에서 구속자 석방의 폭을 가능한 한 넓히기로 합의함에 따라 시국및 공안사건을 포함한 석방대상자의 분류작업에 들어갔다. 이와관련,법무부 관계자는 이날 『현재까지는 사면조치가 고려된 적이 없다』고 전하고 『그러나 청와대 합의사항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사면을 비롯 가석방조치 등 최대한 관용을 베푸는 방안이 다각도로 검토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따라 법무부는 형기의 3분의1 이상을 마친 기결수를 대상으로 가석방 대상자의 분류작업을 하고 있으며 미결수의 경우에는 사면및 감형,형집행 정지를,1심에 계류중인 피고인에 대해서는 검찰이 공소취소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검찰은 김대중 평민당총재의 국가보안법 위반사건 공소취하문제에 대해 『불고지 혐의를 처벌하도록 규정한 현행 국가보안법 테두리안에서는 전혀 검토대상이 될 수 없다』고 말해 이를 위해서는 국가보안법의 개정이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지적됐다.
  • 남아공,인종차별로 국제고립 우려/만델라 석방결정의 배경

    ◎대외 이미지 쇄신… 흑인 불만도 무마 클레르크 남아공 대통령이 2일 그동안 세계적인 관심사였던 남아공의 인권운동가 넬슨 만델라의 무조건적인 석방과 함께 아프리카민족회의(ANC)가 줄기차게 요구해왔던 ▲ANC등 30여 재야단체의 합법화 ▲정치범 처형금지 ▲비상조치 기간동안 실시돼온 각종 제재조치 폐지 등을 포함하는 획기적인 정치개혁 카드를 내놓아 남아공의 정정이 안정을 찾을 것으로 보인다. 만델라는 지난 62년 정부 전복혐의로 체포된 뒤 2년후 종신형을 선고받고 지금까지 27년간 외로운 감옥에서 「조용한 투쟁」을 전개해온 남아공 흑인들의 정신적인 지주. 이번 만델라의 석방조치는 지난해 9월 집권한 클레르크가 추진해온 일련의 개혁정책 맥락에서 이뤄진 전향적 결정으로 보인다. 만델라는 지난 1918년 케이프타운에서 출생,포트하레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뒤 흑인 인권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60년 남아공 정부가 흑인들의 통행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폐지를 주장하는 흑인들을 무차별 살상하자 비폭력 투쟁에서 벗어나 강경노선으로 선회,대정부 투쟁에 나섰다. 클레르크가 만델라를 석방키로 한 것은 그동안 인종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으로 받아온 전세계적인 비난을 불식,대외적인 이미지를 쇄신하는 동시에 대내적으로는 전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흑인들의 불만을 무마시켜 최근들어 확대조짐을 보이고 있는 흑인시위를 막아보려 한 의도에서 내려진 결단으로 보인다. 현재 남아공은 인종차별정책으로 서방세계의 경제제재조치와 동구국가들로 부터의 외교단절등 국제적인 고립에 직면해 있다. 따라서 제한적인 흑인 참정권 인정ㆍ집회 허용ㆍ인종간 직업차별 폐지 등의 개혁조치에 이어 클레르크가 내린 만델라의 석방 결정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있다. 만델라등 반정부 인사들이 정부와의 대화 전제조건으로 내세웠던 요구사항들이 대부분 수용된 남아공 정부의 이번 양보조치로 흑백간의 충돌은 줄어들 것으로 보이지만 클레르크 정권이 기대하는 정치ㆍ사회적 긴장상태가 완전히 해소될 것 같지는 않다. 현재 흑인들은 1인1표제의 완전한 참정권 평등을 주장하고 있으나 3백50연간 흑인들을 지배하고 있는 백인정권이 이를 수용할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다 만델라가 정부와 재야와의 중재역할을 해야할 입장이지만 고령인데다 오랫동안 현실과 떨어져 있었던 관계로 강온으로 분리되어 있는 3천여 인권단체에 대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는지도 의문이다.
  • 시국사범 20여명 가석방/허 법무/3ㆍ1절에… 대화합 분위기 조성

    법무부는 오는 3ㆍ1절을 맞아 시국관련사범및 간첩혐의 장기복역수 20여명을 가석방으로 풀어줄 방침이다. 허형구법무부장관은 1일 『최근 정치권이 신당창설을 계기로 전반적인 대화합분위기를 조성해나가고 있는 데 따라 자유민주주의의 기틀을 크게 해치지 않을 것으로 여겨지는 시국공안관련 장기복역수들에게 전폭적인 석방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밝히고 『그 대상은 20여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허장관은 『그러나 이번 조치는 최근 민주당의 김영삼총재가 제시한 대사면보다는 특별가석방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덧붙였다. 법무부는 이에 따라 이날부터 시국공안사건 관련 장기수들을 석방하는 데 필요한 실무작업에 들어갔다. 법무부는 지난해 12월에도 간첩사건 관련 장기복역수 27명을 석방했었다.
  • 대기업,지방영업망 대폭 확충/지자제 따른 내수기반 확보 서둘러

    ◎유통ㆍ건설등 지역업체와 연계강화/전담반 편성,중장기 계획마련 기업들의 지방화 전략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29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국민소득 수준의 전반적인 향상과 지방자치제의 실시등에 따라 지방경제 규모가 대폭 확대될 전망인데다 내수기반 확충이 시급하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기업들의 지방화 전략이 올들어 구체화되고 있다. 종합상사와 제조업체들은 물류기능강화와 함께 영업 및 서비스기능 강화에,금융업체들은 지방 영업망 확대에,건설업체들은 지방자치단체 등이 주도할 각종 개발사업참여 등을 위한 개발모형의 마련과 지역업체들과의 연계강화에 역점을 두고 있다. 종합상사의 경우 전체매출 가운데 수출과 내수의 비중이 대부분 8대2 또는 7대3정도로 돼있는 것을 오는 95년을 전후해 이를 5대5의 비율로 내수부분을 확대한다는 중ㆍ장기계획을 마련해 놓고 올해부터 지방 거점도시에 대한 조직확대 물류기능강화 등의 움직임을 구체화하고 있다. 삼성물산은 지방자치제 실시에 대비해 국내사업팀을 신설하는 한편 부산지사와 대구지점외에 올해중으로 인천ㆍ광주에 지사를 설치할 예정이다. 선경은 내수기능 강화방안의 하나로 올해 단독으로 5백억원을 투입,선경유통을 설립하여 전국 슈퍼마켓연합회와 연계하는 새로운 형태로 국내 유통업계에 진출했으며 이밖에 올해중으로 광주와 대전에 지사를 새로 설치,호남 및 중부지역 상권확보에 주력할 방침이다. 럭키금성상사도 지난해 11월 이미 대구와 부산지점을 영남지역본부로 승격시키는등 지방조직 확대에 착수하는 한편 올해중으로 부산,대구,안양등 세곳에 대규모 물류센터를 설치할 계획이고 효성물산은 강원도 지역까지 사무소를 확대,수산물가공사업에 진출키로 하는등 지방화전략을 마련해 놓고 있다. 종합상사외에 전자ㆍ건설ㆍ금융 등 주요업종들도 지방상권 선점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무공도 지방산업에 대한 무역활성화를 적극 추진하는 것을 올해의 중점사업으로 선정,지방의 수출유망 중소기업을 적극 개발하는 한편 5개도시에 국제급 규모의 전시장을 마련할 계획이다.
  • 남아공 만델라 석방 임박 시사/법무장관 밝혀

    【케이프타운 로이터 연합】 코비에 코에트시 남아프리카공화국 법무장관은 23일 수감중인 아프리카민족기구(ANC)지도자 넬슨 만델라의 석방이 임박했음을 시사했다. 남아공 국영라디오방송은 코비에장관이 『그의 석방이 임박했다는 것이 공정한 판단일 것』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남아공정부는 그러나 최근 몇년동안 단순히 평화적 개혁만을 강조함으로써 석방조건을 완화해 왔으며 만델라 스스로도 이달초 자신은 몇개월이 아니라 몇주내에 풀려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었다.
  • 정계개편 움직임 본격화/지자제 대비/정책ㆍ정당제휴 막후협상 활발

    ◎청와대ㆍ3야총재 개별회담 추진 민정 정치권은 5공청산 작업이 사실상 일단락됨에 따라 연초부터 새 정국분위기 조성과 함께 정계개편 움직임을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여야 각 정당은 금년 5∼6월경에 실시될 것으로 보이는 지방의회의원선거에서의 연합공천에 대비,정당간의 제휴를 위한 막후 협상에 박차를 가할 방침이며 3∼4월경 지자제를 앞둔 각당의 지방조직정비 과정에서 그 윤곽이 구체화될 것 같다. 여권은 3일 하오 노태우대통령의 5공청산 종결 특별담화를 계기로 신년정국을 대화와 타협으로 이끌고 과거문제에 매달렸던 정치를 미래지향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노대통령과 야3당 총재들간의 청와대 개별회담을 추진할 방침이다. 야권은 민주당 김영삼총재가 곧 범민주통합구상등과 함께 공화당과의 제휴를 적극 모색하고 있고 평민당의 김대중총재는 정계개편에 다소 소극적인 입장을 보이면서도 지방의회선거시 정당간 또는 지역별 연합공천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민정당은 일단 평민ㆍ민주ㆍ공화 등 기존 모든 야당과의 정책제휴및 정당연합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입장아래 여소야대의 현 4당구조의 정치질서 개편을 위해 당력을 집중할 방침이다. 이와 관련,남재희대표위원권한대행은 3일 시무식에서 『여당 국회의원의 과반수 미달이라는 현상을 타파하고 정치적인 안정세력의 확보를 위해 연합정치를 추구해야 한다』면서 『6ㆍ29정신및 정강정책을 실천해 국정을 주도하는 것과 연합정책을 추구하는 것은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남대표대행은 『금년 상반기중 시행 예정인 지방의회선거는 연합정치의 중요한 실험무대가 될 것』이라며 『선거결과가 중앙당 차원에까지 파급,수렴되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평민당 김대중총재는 이날 단배식에서 『다가올 지방자치선거에서 승리를 위해 연합공천 제도를 적극 활용하겠다』고 말하고 『연합공천은 중앙당의 당대 당 차원 연합도 가능하며 지방 특성에 따라 지역별로 독자적 연합공천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총재는 『지방자치단체장선거에서 우리가 약한 곳은 후보를 내지않고 유력정당후보를 지원,제2여당의 역할을 하는 한편 우리가 강한 지역에서는 제1여당 역할을 맡고 제2여당을 둘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민주당의 김영삼총재는 곧 기자회견을 통해 온건보수연합을 기초로 한 정계개편을 위한 복안을 밝힐 것으로 알려졌으며 공화당의 김종필총재도 내각제개헌을 염두에 둔 정계개편안을 제시할 것으로 전해졌다. 여권의 한 고위소식통은 이날 노대통령과 야3당 총재회담에 대해 『노대통령이 오는 13일께 동구방문을 위해 출국하는 민주당 김영삼총재의 초당외교를 위해 출국에 앞서 김총재를 청와대로 초청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고 『노­김영삼회동이 이뤄지면 이를 필두로 나머지 두 김총재와의 개별회동도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 전두환 전 대통령 국회증언 속기록

    ◎“강경진압ㆍ과격시위가 광주사태 도화선”/합수부 설치 보안사령관 취임 직후 계획/정 총장,「김재규 관련조서」 4차례 고쳐/광주특위 ▷6ㆍ29선언◁ 어느 시대,어느 정치사회를 막론하고 이면사는 있기 마련이지만 그때 그때 속속들이 알려지는 사례는 거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6ㆍ29선언은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이 그동안 어떻게 실현되었으며 또 지금 어떻게 추진되어 정치발전과 국가이익에 기여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지,그 경위나 배경을 새삼스럽게 들추어내는 일은 결코 바람직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이면의 얘기들은 현실정치에 민감한 영향을 주지 않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서는 훗날 회고록 등을 통하여 국민 여러분에게 소상히 밝힐 것을 약속하는 것으로 국민 여러분의 양해를 간곡히 당부드리는 바입니다. ▷간첩조작사건등◁ 선두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한 나라의 대통령은 무한책임을 지게 마련입니다. 실무진에 의해 이뤄진 일인 경우 대통령에게 보고될 수도 안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전임대통령으로서 답변할 수있는 부분을 총괄적으로 얘기한 것입니다. 간첩조작사건 등은 실무진들이 조작했는지 않았는지 제가 답변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또 물리적으로 답변준비시간이 짧아서 거기에 대한 자료를 구할 수가 없으므로 답변하지 못한 점을 양해바랍니다. ▷10ㆍ26에서 12ㆍ12까지◁ 1979년 국내 정국은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과 반발로 정치ㆍ사회적으로 매우 어수선하고 경제도 여러가지 난관에 봉착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박 대통령시해사건으로 18년간이나 지속되어온 절대권력이 일시에 무너져 국가가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정치적 공백상태와 행정체제의 마비는 국민들의 충격과 정치ㆍ사회적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더구나 대통령시해사건이 권력의 핵심적 위치에 있었던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지절러졌다는 점에서 상황은 매우 복잡하고 심각한 양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사건 직후 정부는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여 10월27일 0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으며,예상되는 북한의 군사적 책동에 대비하여 전군이 비상경계태세에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비상계엄선포와 동시에 계엄지역내에서의 수사업무를 일원화하고 그 효율성을 높이기 위하여 구 계엄법 제11조와 비상계엄업무의 구체적인 시행지침인 「육군계엄시행계획」과 계엄공고 제5호에 따라 계엄사령관 직속하에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를 설치 운용하게 되었습니다. ▷합수부설치 배경◁ 본인은 1979년 3월 국군 보안사령관이 된 뒤 을지연습을 실시해본 결과 전쟁 발발시의 보안사령부의 역할 및 임무수행과 관련,여러가지 미비점이 발견되어 보완책의 강구를 각급 참모에게 지시한 바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전시 전국계엄상황하에서는 정부의 모든 조직이 실제상 군의 통제하에 들어오게 되는 바,이러한 상황을 가정하여 각급 정보수사기관을 조정 통제해야 할 비상계획수립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비상계획의 일부로서 합수부안이 평소에 마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10ㆍ26사건 직후 실시된 계엄은 지역계엄이었으므로 정부조직은 군의 통제하에 있지는 않았으나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 시해범으로 체포되고 주요 간부들도 조사를 받게 되어 중앙정보부의 기능은 거의 마비된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인이 보안사령관 취임 직후 준비했던 합수부계획이 비상계엄선포와 함께 계엄사령관을 경유하여 국방장관에 의해 결정된 것입니다. 합동수사본부는 기존의 수사기관과 전혀 별개의 새로운 기구로 구성한 것이 아니고,당시에 군과 검찰 그리고 경찰로 나누어져 있던 수사업무를 조정 통제하여 계엄하에서 수사기능과 활동의 효율적인 운영을 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전례는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1962 당시 김재춘방첩부대장이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되어 공화당 사전조직 및 4대 의혹사건 등 중요한 사건들을 조사한 바 있습니다. ▷김재규 체포 경위◁ 대통령시해사건 발생 직후 국방부에 국무위원 및 군수뇌들이 모인 자리에서 당시 청와대비서실장이며 사건현장을 목격한 김계원씨가 먼저 노재현국방장관과 정승화참모총장에게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노 국방장관은 곧 저를불러서 김재규를 체포하라는 지시를 하며 정승화총장을 만나 세부사항에 대한 지침을 받으라고 지시를 했습니다. 정 총장실에 가보니 정승화총장은 본인에게 『김재규를 보안사 안가에 보호하라』는 지시를 했습니다. 나는 당시 헌병감 김진기장군과 협의하여 김 장군으로 하여금 김재규를 국방장관실로부터 참모총장실로 유인해 나오도록 하여 그곳에서 보안사수사관을 시켜 김재규를 체포토록 하여 보안사 안가로 이송,보호 조치케 했습니다. 그때가 바로 10월26일 24시경이었습니다. 얼마 후 안가의 수사관들로부터 김재규가 틀림없는 범인이라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안가에 보호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김재규를 보안사 수사분실로 이송하여 수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때가 27일 새벽 02시30분경이었습니다. 그 당시 김재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몇가지 중요한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김재규의 진술에 의하면 『정승화는 내가 육군참모총장을 시킨 사람이다. 당시 국방장관은 3군사령관을 참모총장으로 밀고 있었으나 내가 1군사령관인 정 장군을박 대통령께 강력히 추천해서 총장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지시하는 대로 하게 되어 있다』고 말하고 김재규 자신의 지시에 따라 정승화총장을 범행장소에서 36m 떨어져 있는 궁정동 안가에 대기시켰다는 것입니다. 김재규의 계획은 박 대통령을 암살하고 비상계엄을 선포케 한 다음 군사혁명으로 유도해 정 총장을 비롯해 군고위층을 조종하여 정권을 탈취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김재규의 진술에 의거하여 수사관들은 정승화총장이 김재규의 공범 내지 방조범 아니면 배후의 인물이라는 심증을 굳히고 10월27일 11시께 본인에게 정 총장을 연행 수사해야겠다는 건의를 해왔습니다. 만일 이 시기를 놓치면 증거를 인멸시켜 버릴 우려가 있고,수사 진행을 방해하도록 상황을 만들어 버릴 염려마저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사실 수사관들로서는 정승화에 대해 많은 의혹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수사통제ㆍ조정 필요◁ 어째서 하필이면 육군참모총장이 할일없이 김재규가 대통령을 시해하는 현장 근처에 두시간 가량이나 머물러 있었느냐는 것이고,근접한 위치에서 수십발의 총성이 들려왔는데도 대통령이 근처에 있는 줄 알면서 당장 진상을 알아보려고 안한 것은 30여년 군에 복무하여 군의 최고직위까지 오른 사람의 습성으로 보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고 피묻은 셔츠바람에 맨발로 달려온 김재규를 목격했으면서도 경위도 알아보기도 전에 같은 자동차를 탔다는 것,김재규는 여섯발을 장전한 권총으로 다섯발을 쏘고 한발이 남은 권총을 허리춤에 꽂고 있었으니 김재규의 몸에서 화약냄새가 났을 것임에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고,차 안에서 김재규가 수행원의 상의와 구두를 빌려 입고 신고하는 동작이 있었는데도 그냥 넘겨버렸고,육군본부에 도착하고서도 별다른 조치없이 김재규가 하자는 대로 군 이동을 한 것 등으로 하여 그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수사관들의 의견이었고 당시 저 자신의 의견이기도 합니다. 본인은 처음엔 수사관들의 건의에 구두승인을 내렸다가 나라의 전반적 정세에 생각이 미쳐 그 승인을 일단 보류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당분간은 계엄령의 질서하에 국내 치안확립이 시급한 일이었고,북한 남침의 위협에 대처하는 것이 급선무인데,계엄사령관에 임명된 지 일곱시간밖에 안된 정 총장을 연행하는 사태가 생기면 혼란을 더욱 격화시키게 될지 모른다는 판단이었습니다. 도피의 우려도 희박하고 증거인멸을 한다 해도 그 범위는 뻔할 것이니 정세가 안정된 후에 수사를 전개해도 무방하리라는 생각도 있어 그대로 수사관을 타일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외신보도와 국내언론을 통해 시해사건에 정 총장이 관련되지 않았는가 하는 설이 나돌게 되자 정 총장은 자신이 스스로 조사를 받겠다고 간청했습니다. 그 자청에 따라 10월29일부터 11월1일까지 4일간 합수부 조사관들이 육군참모총장실에 출두하여 매일 두시간 정도 정 총장을 참고인으로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수산관들은 계엄사령관으로서의 직위를 이용하여 위압감을 조성함으로써 순리적인 조사가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보고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다 정 총장은 수사관들이 작성한 조서내용이 사실과 다르다 하여 전후 4차례에 걸쳐 수정시키기도 했습니다.심지어 그는 조서를 총장실로 가져오라고 해서 자신이 조서내용을 직접 고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정승화총장의 10ㆍ26시해사건관련 의혹이 짙어만 갔습니다. 많은 억측이 유언비어가 되어 항간에 범람했습니다. ▷10ㆍ26,쿠데타로 판단◁ 이런 상황에서 저는 수사의 총책임자로서 중대한 결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합수본부장으로서 대통령시해사건이야말로 중대한 사건인 만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수사에 성역이 없다는 신념하에 정확한 전모를 신명을 걸고 밝혀야 한다는 강한 사명감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남은 작업은 정 총장의 혐의를 조사하여 그 의혹을 말끔히 없애는 일이었습니다. 만일 이에 대한 흑백이 가려지지 않는다면 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물론 군 자체의 기강이 흔들리는 동시 마침내는 군이 분열될 수도 있다는 우려까지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11월께 본인은 모든 상황을 노 국방장관에게 보고하고 정승화총장의 연행조사를 건의하였더니 「좀 더 두고보자」고 했고 그후 최 대통령에게 건의드렸더니 『국방장관과 상의하라』고 말씀하셔 본인으로서는 더욱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정 총장은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며 계엄사령관으로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군내부에 강력한 지지세력을 구축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를 조사한다는 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무모한 노릇이었습니다. 목숨을 걸어도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었으며 그야말로 구국적인 소신없이는 불가능했던 일입니다. 평상시 본인은 미국의 케네디대통령 암살사건이 영원한 미궁에 빠져버린 것을 미국의 수치라고 생각해왔습니다. 본인이 운명적으로 시해사건수사의 최고책임자가 되었을 때에 저 개인의 신상에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기필코 이 사건의 전모를 국민 앞에 밝히고 말겠다고 굳게 다짐하였던 것입니다. 본인은 김재규의 수사과정에서의 진술이 미국이 개입되었다는 통설,군부의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육군참모총장이 범행현장 근처에 있었다는 사실 등을 취합해서 쿠데타가 아니면 쿠데타에 준하는 사건이라고 당시로서는 판단할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정 총장 자신의 말대로 오비이락격으로 그가 시해 현장 근처에 있었던 것이라면 그건 그분의 불운이라면 불운일 것입니다. 불운이라 해서 수사의 객관성과 냉정성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중요한 용의자를 제외하고 수사를 마무리지었다간 의혹은 의혹대로 영원히 남을 것이며 그 결과는 결국 수사책임자의 직무태만이란 원성으로 될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본인은 직무태만이란 비난이 겁나서가 아니라 정 총장에 대한 완벽한 조사가 국민의 의혹을 해소시키는 동시,정 총장 개인의 명예를 위해서도 필요불가결한 조치라는 것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뜻에서 본인은 정 총장을 수사할 적기를 포착하기 위해 정국의 추이를 주시하는 한편 군부내의 여론을 수집하였습니다. 11월 중순경부터 중진 장성들과 접촉을 계속하였는데 그 가운데 정 총장과 개인적으로 친밀한 장군도 끼여있었습니다. 당시 황영시 1군단장,차규헌수도군단장,유학성국방부군수차관보,노태우9사단장 등을 한분한분 찾아 의견을 물었습니다. 그런데그분들은 하나같이 10ㆍ26사태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선 어떤 고위층도 예외일 수 없으며 빨리 흑백을 가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육군 최고책임자의 관련혐의는 군의 단결과 신뢰회복을 위해서는 하루속히 결판을 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인은 본인의 신념과 군전체의 총화가 일치된 것으로 느끼고,12월 초순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내각이 새로 발족한 후 김재규재판과의 관련으로 보아 정 총장에 대한 수사를 연기할 수가 없다고 판단하여 12월12일 임무를 결행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12월12일로 날짜를 잡은 것은 그날이 토요일이어서 휴일 동안 수사를 하고 조용히 마무리지을 작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본인은 총리공관으로 최규하대통령을 찾아뵙고 정승화총장을 연행하여 조사하겠다고 보고를 드린 바 있습니다. 그 이유는 혐의만으로도 정총장이 계엄사령관과 참모총장직에 부당하다는 것을 설명드리고 정 총장을 조사한 결과 그가 계엄사령관 및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나게 될 경우,그 공백을 대통령께서 처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시해사건에 대한 수사권은 대통령의 사전결재를 받지 않아도 되는 합수부장의 포괄적인 고유권한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본인은 합수부 수사요원을 총장공관으로 보내 정 총장에게 수사에 협조하도록 전한 후 모셔오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런데 정 총장이 이를 거부함으로써 강제연행을 하게 되었고 정 총장이 총장공관을 경비하고 있던 헌병에게 발포명령을 내림으로써 수사요원이 희생되고 총격전이 벌어지는 불상사가 야기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본인은 그날 밤 18시30분 경복궁에 있는 30단으로 평소 정 총장과 가까운 관계인 군의 중진 장성들과 그밖의 몇몇 장성들을 초청해 놓고 있었습니다. 정 총장이 시해사건과 고의이건 아니건 관련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니 군내부의 분위기를 쇄신하는 뜻으로 군 지휘계통에서 물러나는 용단을 내리도록 허심탄회하게 건의토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수사결과 예편 정도로 사건을 마무리지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30단에 모인 장성들이 총장공관에까지 따라가서 조용히 예편하도록 권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신중을 기한 것은 정 총장이 일단 예편하기로 결심하였다가 혹시 울컥하는 감정으로 군을 동원하여 보안사를 공격하고 수사요원을 체포하여 하극상 사건으로 몰아 오히려 죄를 뒤집어씌우려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사전조치를 취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장소를 보안사가 아닌 30단으로 정한 것은 본인이 정 총장의 감시하에 있다는 정보보고에 따라 보안 유지를 위해 저의 사무실이 아닌 바로 인접한 30단의 단장실을 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예상했던 대로 연행과 관련된 무력충돌 직후 전군에 비상이 발령되면서 수도권의 병력을 장악하고 있던 정 총장 측근의 수경사령관과 특전사령관 등이 탱크를 포함한 중무장부대를 동원하여 청와대 지역을 포위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합수부는 수사기관으로서 전투병력이 없는 상태이고 부대간에 충돌이 발생하면 국가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봉착될 것이므로 주요부대 지휘관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자제를 당부하는 등 충돌을 피하도록 적극 설득했습니다. 그런데도 정 총장측근에서 계속 위협을 가해왔기 때문에 안보상 필요한 조치를 취한 가운데 제한된 규모의 예비병력을 동원하여 사태를 수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불가피한 상황이었지만 이것은 긴급대응의 조치로서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사회일각에서 또는 미국측에서 이 사태를 계획적인 거사가 아니었느냐 하는 의견이 있었습니다만 이것은 당시 상황에 대한 시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사태는 돌발적이었습니다. 당시 30단에 모였던 장성들이 병력을 출동시킬 계획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사태를 수습하는 데 시간이 걸린 것입니다. 또한 본인에게 대한 전보발령설이 이 사건과 관련이 있지 않는가 하는 의문도 있는 모양이지만,본인은 그 당시에는 일체 그와 같은 일은 들안 바가 없습니다. 본인은 명예를 걸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12ㆍ12사태는 시해사건의 수사도중에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이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사전에 준비된 병력출동 계획도 없는 쿠데타가 어디 있겠으며 만약 쿠데타였다면 왜 본인이 그 직후 바로 권력을장악하지 않았겠습니까? 본인은 그 당시로서는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습니다. 저는 과거 고 박대통령으로부터 정치입문 권유를 몇차례 받은 바 있었으나 굳이 사양하고 군인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12ㆍ12사태는 당시 시해사건에 대한 최고 수사책임자인 본인이 주도한 것이며 따라서 그로 인해 야기된 사건의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본인에게 있는 것입니다. ▷광주사태 발생◁ 광주사태는 10ㆍ26 이후 지속된 극심한 사회혼란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지극히 불행한 사태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태발생 당시 정보의 총체적 책임자로서 초기 단계에는 쌍방간에 경미한 충돌이 있었으며 상황이 점차 악화되어 계엄사령부에서 무력진압을 계획중이라는 정보보고를 들은 바 있었으나 이처럼 엄청난 비극으로 확대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읍니다. ▷광주참극 상상 못해◁ 당시 광주 일대는 중앙정보부 보안사 경찰 등의 정보기관들이 모두 시외곽으로 철수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정보책임자였던 본인도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갖지 못하였고 현지 주둔부대인 광주계엄분소에서 계엄사에 보내는 보고를 통해 파악할 수밖에 없었던 극히 혼미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정보부재의 상황을 보완하기 위해 보안사에서는 서울에 있던 광주출신의 한 장교가 자진해서 현지에 잠입,단편적 정보를 계엄사를 통해 보내오기도 하고 또 당시 보안사의 간부를 현지로 실정 파악을 위해 파견하기도 하였으나 여러가지로 정확한 상황판단에는 미흡한 점이 많았습니다. 이처럼 제한된 정보에 기초하여 본인은 무력진압에는 신중을 기하는 것이 좋겠으며,시민을 상대로 한 사태수습을 군 작전개념으로 한다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는 정보책임자로서의 의견을 계엄사의 지휘관들에게 전달한 바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커다란 인명피해를 낸 이 비극적 사태의 원인에 대하여 본인은 무어라 한두마디로 단정지어 말씀드리기는 매우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당시 계엄하에서 광주사태 이전에 서울 등지에서도 각종의 시위가 있었으나 평온을 되찾은 반면 유독 광주에서만 그러한 비극이 발생했던 이유는 정확한 분석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다만 본인은 당시의 정보책임자로서 이 사태가 초동 진압단계에 있어서의 계엄군의 강경진압과 일부 출처를 알 수 없는 악의에 찬 유언비어에 자극받은 일부 시민들의 과격시위가 그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군부대 파견ㆍ작전◁ 당시 광주사태와 관련된 계엄업무는 전국적인 계엄업무의 일환으로서 계엄사령관이 주재하는 계엄관계관 일일회의에서 보고되고 논의되어 추진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중앙정보부장서리인 본인은 그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 어떤 군지휘계통상의 간섭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은 본인은 군의 배치이동 등 작전문제에 대해 관여한 사실이 없으며 당시의 계엄사령관 이희성장군은 그분의 강직한 개인적 성품으로 보아도 지휘선상에 있지 않은 본인이 군작전에 개입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에 본인이 파악한 바로는 공수부대는 5ㆍ18계엄확대조치의 일환으로서 광주뿐만 아니라 서울 대전 전주 지역에도 파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전북 익산군 금마면에주둔하고 있던 제7공수여단병력을 광주 전주 대전에 각각 3백여명 규모의 일개 대대씩 파견하였고 서울지역 8개 대학에도 6개 여단병력 9천6백여명을 배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계엄군의 증강은 광주지역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며 광주지역에 특별한 상황을 예상하여 투입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왜 현지 지휘관의 요청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대를 파견 배속했느냐 하는 의문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군지휘의 이해부족에서 제기된 의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또한 당시 지휘체제가 이원화되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제기된 것으로 압니다만 이 또한 일반적 군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어떠한 부대라 하더라도 일단 타부대에 작전 배속이되면 그 배속을 받은 지휘관은 즉각적으로 그 부대를 장악해서 지휘할 책임이 있으며 그 이후의 모든 작전상 승패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당시의 현지 지휘관이 군 경력상 특수부대에 대한 지휘경험이 전무하여 원활한 작전수행에는 차질이 있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는 이해가 갑니다만 배속된 부대가 현지 지휘관의 지휘통제에 불응했다는 주장은 군문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본인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자위권행사문제◁ 자위권의 행사문제는 초기에는 군인 복무규율에 따라 불가피한 상황하에서 행사된 것으로 판단이 되며 현지상황이 더욱 악화됨에 따라 5월22일 자위권 발동도 가능하다는 계엄사령부의 작전지침이 지휘계통을 통해 하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위권의 발동은 최악의 상황에서만 현지 지휘관의 사태판단에 따라 제한적으로 발동할 수 있는 것이며 당시 위급한 상황에 처한 현지 지휘관들이 자위권 행사의 불가피성을 강조했으나 상급사령부나 계엄사령부 등의 군 고위층에서는 신중론이 우세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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