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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의 눈] 심평원장과 전재희 장관 내정자/오상도 미래생활부 기자

    [오늘의 눈] 심평원장과 전재희 장관 내정자/오상도 미래생활부 기자

    지난 24일 서울 서초동의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작달비가 퍼붓는 가운데 50대 여성 노조위원장이 9층 외벽에서 한 가닥 밧줄에 매달린 채 6시간 동안 고공시위를 벌였다. 장종호 신임 원장의 퇴진을 외치기 위해서다. 이번 사태는 지난 6월17일 정부가 장종호 전 강동가톨릭병원 이사장을 심평원장에 임명하면서부터 예고됐다. 병원 소유주로 또 서울시 의사회 법제이사로 의료공급자 이익을 대변했다는 노조의 지적에 이어 건보료·국민연금 체납,1회용 주사기·붕대 재사용에 따른 검찰의 구속수사 전력, 세금 체납 등이 속속 드러났다. 본지 단독보도<7월18일자 10면>처럼 건보급여 실사를 맡은 심평원장으로 근무하면서도 열흘간이나 건보료와 연금을 체납했다. 체납액은 노조가 이를 문제 삼은 당일 완납됐다. 빈번한 체납기록도 드러나 ‘상습적’이란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이전 같으면 청와대로부터 득달같이 문책이 내려왔겠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왜일까.“의료용품 재사용은 관례”라는 장 원장의 해명이 타당해서가 아니다. 전문가들은 “‘강·부·자’논란 뒤 산하 공공기관장 임명을 둘러싸고 정부와 민노총이 심평원에서 첫 격돌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밀리면 끝’이란 생각에 노조의 줄기찬 퇴진 요구에도 정부가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해법은 없을까.‘열쇠’는 전재희 복지부장관 내정자(국회의원)가 쥐고 있다. 여성 최초의 행시 패스, 민·관선 시장 등 화려한 타이틀 외에도 그는 원칙론자로 유명하다. 여당에서 민간의료보험 활성화를 논할 때도 득달같이 “건보 당연지정제 완화에 반대한다.”고 목소리를 냈다.2006년 유시민 전 장관 인사청문회에선 “일본 관방장관도 연금 미납 때문에 사임했다.”고 추궁해 “죄송하다.”는 사과를 받아냈다. 조만간 전 내정자의 인사청문회가 열린다. 산하공단 기관장의 거취에 대해 ‘원칙에 충실한 답변’이 나와야 할 것이다. 오상도 미래생활부 기자 sdoh@seoul.co.kr
  • [아름다운 간판 2008] 美來路 가는 남해군

    [아름다운 간판 2008] 美來路 가는 남해군

    느슨한 규제와 나태한 관리는 불법 간판을 양산하는 주범으로 꼽힌다. 따라서 아름다운 간판을 만들기 위해서는 제도 정비도 필수적이다. 주민·점포주·건물주 등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데다, 추구하는 간판의 이상적 형태도 중구난방이기 때문이다. 원칙이 바르게 서고, 명문화돼 있어야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또 현재 간판을 달려면 중앙정부에서 관리하는 ‘옥외광고물 등 관리법’과 대통령령인 시행령 등의 적용을 받는다. 여기에 시시콜콜한 내용을 담게 되면 획일적 규제가 될 수 있다. 지역 사정에 밝은 각 지방자치단체의 역할이 제도를 바로 세우기 위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름다운 간판을 만들기 위한 제도, 이를 뒷받침하는 지자체의 관리 노력 등을 살펴본다. 지방자치단체들은 조례 등을 통해 주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풀뿌리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경남 남해군은 간판 문화를 개선하기 위해 잘 갖춰진 제도와 관리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증명하고 있다. ●실용성과 아름다움 동시 추구 시원스레 뻗은 남해고속도로를 따라오다 남해읍 시가지로 접어들면 800m에 이르는 간판 시범거리가 나온다. 이곳은 구간별로 각각 명승·호국·유배·문화란 명칭이 붙여진 남해의 ‘명물거리’다. 남해군은 우선 ‘남해군 옥외광고물 등 관리 조례’를 만들어 거리의 특성에 맞춰 간판의 서체·크기·형태·색상은 물론 상징 로고까지 일일이 근거 규정을 마련했다. 남해군은 조례를 통해 간판이 난립하는 현상을 막기 위해 가로형 간판과 돌출형 간판 각 1개씩만 달도록 했다. 또 창문 이용 간판의 크기를 대폭 축소했다.1층 창문 면적의 10분의1 범위 안에서 창문 이용 간판을 달 수 있다. 옥외광고물 관리법에는 창문 크기의 4분의1로 느슨하다. 이와 함께 땅에 기둥을 세운 지주형 간판은 전면 금지했고, 네온·점멸등도 사용할 수 없도록 제한했다. 김승겸 남해군 건축행정계장은 “거리별 특성에 맞춰 간판 재료와 색상 등을 다양화시켰다.”면서 “돌출형 간판의 경우 안경·세탁 등 깨끗한 느낌이 필요한 업소는 유리 장식을 하는 등 간판의 실용성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줄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차별성과 통일성의 조화 최대 번화가인 ‘유배거리’는 간판 정비가 막바지에 접어들었다.‘구운몽’을 썼던 조선 후기 대문호인 서포 김만중이 이곳으로 유배를 와서 붙여진 이름이다. 유배거리에 있는 가로형 간판에는 밧줄 등을 연상시키는 문양이 들어간다. 그동안 간판을 가렸던 기존 키 큰 은행나무 대신 남해에서 많이 나는 수종인 낮은 키의 소나무 등으로 도로 주변을 장식하고 있다. ‘문화거리’는 유리와 아크릴 재료를 이용해 남해의 밝고 활기찬 축제거리를 연상케 만들었다. 간판에 형형색색 보석이 박히고, 조약돌로 상큼 발랄한 이미지를 더했다. ‘명승거리’는 남해의 아름다운 자연을 주제로 푸른 잔디와 목재의 느낌을 간판에 연출했다. 노량해전의 이순신과 왜구를 무찌른 최영 장군 등 충신들의 충절을 표방한 ‘호국거리’ 간판은 강한 금속의 느낌으로 중후한 느낌을 강조했다. 다양성 못지않게 통일된 이미지도 부여했다. 예컨대 미용실의 돌출형 간판에는 멀리서도 ‘가위’ 모양만 보면 알 수 있도록 디자인과 모양을 구체화했다. 또 병원·약국 등은 쉽게 눈에 띌 수 있도록 규격이 큰 간판을 쓸 수 있도록 융통성도 발휘했다. 간판 디자인을 기획한 하현주씨는 “노년층의 경우 병원 글씨가 안 보여 큼직하게 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면서 “수차례 공청회를 거쳐 편의성과 만족도를 높였다.”고 강조했다. ●악순환 막는 사후관리 절차와 규정을 까다롭게 하다보니, 처음에는 업체들의 반발도 거셌다. 특히 많은 비용을 들여 간판을 제작한 SK텔레콤·파리바게뜨 등 전국적인 망을 갖춘 대기업들은 브랜드 가치의 훼손을 우려해 간판 정비를 반대했다. 이들 대기업 영업점들은 통일된 디자인의 판류형 간판을 활용하고 있어 간판 공해의 주범으로 꼽힌다. 때문에 판류형은 배제한 채 글짜만 새겨넣는 입체형 간판만 달도록 규제했기 때문에 설득에 어려움이 컸다는 것. 20년째 가게를 운영하는 A침대업체 정모 사장은 “‘남이 하는 대로 따라한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간판 개선을 저해하는 요인”이라면서 “처음에는 배경색도 빼고 간판 크기도 작아져 회사에서 반대했지만, 고급스럽고 미관상 깨끗한 이미지를 주는 것 같아 회사를 설득했다.”고 말했다. 간판 정비가 일회성 행사에 그치지 않기 위해 사후관리 부문도 제도화했다. 이는 예산 낭비를 막기 위한 조치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향후 250여 업소 주민들이 자율 관리할 수 있도록 거리를 ‘옥외광고물 특정구역’으로 지정, 광고물 표시를 제한하는 것이다. 또 특정구역 내 건축허가를 낼 때 광고물 설치계획서와 원색도안, 설계도 등을 제출하도록 해 담당부서의 확인작업을 거치게 했다. 건물주가 건물을 분양·임대할 때도 특정구역 고시내용을 반드시 명시하도록 했다. 남해 강주리기자 jurik@seoul.co.kr
  • [15일 TV 하이라이트]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SBS 오후 6시30분) 평소에는 마냥 깜찍하고 사랑스러운 3살배기지만 외출만 하려고 하면 180도로 돌변하는 아이. 집 밖을 나가지 않겠다고 생떼를 부리는 ‘방콕 공주’는 엄마가 외출복만 입어도 울고불고 난리법석을 떤다. 외출이 싫다고 필사 저항하는 독특한 3살배기를 엿보고 해결방법을 모색해 본다.   ●러브 인 아시아(KBS1 오후 7시30분) 3년 전, 남편 정용씨와 나영, 재호를 가슴으로 품게 된 엠마씨. 다문화 재혼가정이기에 어색함을 이겨내기는 첫 만남에서부터 쉽지만은 않았다. 그런 그녀가 다문화 인형극을 통해 달라졌다. 남편의 배려와 함께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연 아이들. 날마다 웃음꽃 피어가는 엠마 가족의 행복한 오늘을 들여다본다.   ●세계 세계인(YTN 오전 10시40분) 단체생활과 협동심을 중요시 여기는 일본의 유치원. 일본의 어린이들이 유치원에서 배운 연극을 부모님과 선생님 앞에서 선보인다. 해마다 열리는 연극축제일이 가까워지면서 아이들은 연습에 한창이다. 축제는 크게 뮤지컬과 연극으로 나뉘는데 일본 민간설화가 가장 인기가 있다.   ●클래식 오디세이(KBS2 밤 12시45분) 현악 4중주단 ‘노부스 콰르텟’. 멤버 전원이 국내외 다양한 입상 경력과 해외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등 실력을 갖추고 있다. 각자는 또 솔리스트로도 큰 활약을 하고 있다. 이들은 실내악 활성화에 자극제가 되고 싶다는 희망을 내비친다. 네 명이 하나의 스타일을 만들어 가는 ‘노부스 콰르텟’의 음악이야기를 들어본다.   ●춘자네 경사났네(MBC 오후 8시20분) 태삼의 생일잔치에 초대를 받은 주혁은 결국 참석하지 못한다. 미안하다며 참석 못하게 된 이유를 나중에 밝히겠다는 주혁에게서 정연은 석연치 않음을 느낀다. 한편, 복심을 비롯한 식구들은 태삼의 생일잔치에 온 대팔에게 호의적으로 대한다. 태삼이 대팔에게 삼숙과 진지하게 교제해 볼 것을 권유하는데….   ●세계테마기행(EBS 오후 8시50분) 마다가스카르 서부의 조용한 해안가 마을 모론다바. 마을엔 바오밥 나무를 그리는 화가와 바오밥 나무로 표현하는 조각가가 있다. 주민들은 바오밥 열매로 음료와 기름을 만들고 줄기로는 밧줄을 만든다. 주민들에게 바오밥은 단지 기이한 모양의 일개 나무가 아니라, 삶을 지탱해주는 커다란 존재와 다름없다.
  • ‘놈놈놈’을 보는 두가지 시선

    ‘놈놈놈’을 보는 두가지 시선

    하반기 영화계 최대 기대작인 ‘놈놈놈’이 17일 개봉을 앞두고 베일을 벗었다. 다양한 인종이 뒤엉키고 총칼이 난무하는 1930년대 중국 만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영화는 200억원에 이르는 제작비, 올해 칸 국제영화제 비경쟁부문 진출 등으로 숱한 화제를 뿌렸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로 말하는 법. 감독의 연출과 배우의 연기, 두가지 관람포인트를 짚어가며 ‘놈놈놈’을 전격 해부한다. ●최신 감각에 아날로그 감수성 더한 ‘김치 웨스턴’ ‘놈놈놈’의 김지운 감독은 삭풍이 몰아치는 황야를 배경으로 긴장감 넘치는 총잡이들의 서부극에 매료됐고, 이를 이른바 ‘김치 웨스턴’으로 불리는 한국형 서부극이라는 독특한 장르로 구현해 냈다. ‘장화, 홍련’‘달콤한 인생’ 등 충무로에서 스타일을 강조한 영화로 일가를 이룬 김 감독은 중국 사막을 무대로 펼쳐지는 장대한 스케일과 시원한 영상미로 한국영화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영화적 감각으로는 최첨단을 달리면서도 감독은 제작과정에서는 아날로그적 감성을 견지했다. 서양에선 잊혀지고, 국내에선 1960∼70년대 유행했던 만주 웨스턴을 부활시킨 것은 물론 외화 ‘인디아나 존스’처럼 컴퓨터그래픽(CG)보다는 배우들의 실제 액션과 거친 카메라 워킹으로 생생한 느낌을 살렸다. 정체불명의 보물지도를 놓고 세명의 조선인과 일본군, 마적단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은 꿈을 좇아 끊임없이 질주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을 반영한다. 김 감독은 “잊혀졌던 아날로그의 생생한 힘과 원시적인 기운에서 나오는 박진감을 표현하려고 애썼다.”고 말했다. 단 스타일의 강조로 인한 상대적인 서사의 부재는 이 영화 성패의 최대 걸림돌이다. 국내 개봉판은 지난 5월 칸 영화제 출품 버전의 도입부와 엔딩을 수정하고, 시대적인 배경과 캐릭터에 대한 설명을 늘려 대중성을 높였다. 영화적 메시지냐, 순수 오락영화의 미덕이냐는 이제 온전히 관객의 선택에 달렸다. ●송강호+이병헌+정우성=? 이 영화의 제작자인 바른손의 최재원 대표는 “앞으로 주연급 톱스타 세명이 한 영화에 다시 모이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놈놈놈’은 최근 한국 영화에서 보기 드문 스리톱 주연의 영화다. 세르지오 레오네의 ‘석양의 무법자’(The Good,The Bad And The Ugly)에서 제목을 빌려 왔지만, 세 인물 사이에 뚜렷한 선악의 기준은 없다. 대신 인물 캐릭터는 영화속에서 새롭게 구성됐다. 이 가운데 중심축이 되는 것은 단연 ‘이상한 놈’ 윤태구 역의 송강호. 헬멧을 쓰고 오토바이를 타고 황야를 질주하는 모습부터 웃음을 자아내는 그는 코믹과 정극 연기를 오가며 자칫 무겁게 흐를 수 있는 극의 균형을 잡는다.‘스타일’의 진수를 보여주는 이 영화의 최대 수혜자는 정우성이다. 카우보이 복장을 한 채 한줄로 밧줄을 타거나, 후반 추격신에서 말을 타고 장총을 쏘는 장면은 압권이다. “솔직히 영화 출연을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고 밝힌 이병헌은 손가락을 서슴지 않고 자르는 등 카리스마 넘치는 악역으로 남성팬들을 사로잡는다.“촬영현장이 열악해 경쟁의식보단 동지의식이 생겼다.”고 말하는 세 배우. 하지만 각자 맡은 캐릭터의 개성이 너무나 뚜렷해 오히려 산만한 느낌을 주는 것은 단점이다. 이들의 의기투합이 의미있는 시너지 효과를 낼지,‘부적절한 조합’으로 주저앉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주말탐방] 40대 수용자 이태규씨

    [주말탐방] 40대 수용자 이태규씨

    꽃동네 ‘아나빔(성서에서 ‘가난한 자’라는 뜻)의 집’에서 수용자로 살고 있는 이태규(44)씨는 “자살을 세차례 실패한 뒤 이곳으로 들어왔다.”고 말했다. 이씨의 초년 인생을 망친 것은 알코올 중독 때문이다. 그러나 2006년 11월 꽃동네로 온 뒤 10개월째 술을 끊었다. 충북 제천에서 고교를 졸업하고 신문 배달을 하고, 택시 운전을 했지만 중학교 시절부터 맛들인 술을 끊지 못했다. 그는 “일을 하다가도 일주일에 2∼3일은 여관 방을 전전하면서 술을 마셔야 했다.”고 회고했다. 김씨는 중학생 때 불량배들과 패싸움을 벌여 소년원에 다녀왔다. 어른이 돼서도 교도소 신세를 졌다. “늘 술에 찌들다보니 일도 못하고 폐인이 되더라고요.”김씨는 1993년에 수면제로,98년 농약 탄 막걸리로,2001년 서울 아차산에서 나무에 밧줄을 매달아 목을 거는 등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질긴 목숨이었다. 수면제, 농약 먹었을 때는 3일 동안 심하게 토하다 깨어났고, 세 번째 때에는 밧줄이 끊어졌다는 것이다. 수원역 근처에서 노숙도 했다. 김씨는 어느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경찰의 소개로 꽃동네에 왔다. 요즘에는 오전 5시에 눈을 떠 청소를 하고, 주방과 논밭 일을 거든다. 그는 “마음이 안정됐지만 언제 다시 술에 손을 댈까봐 겁이 난다.”고 심경을 털어놓았다.
  •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25) 길 떠나는 상단(商團)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25) 길 떠나는 상단(商團)

    김홍도의 작품 ‘길 떠나는 상단(商團)’이다. 먼저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복색을 보자. 차림새를 보아하니, 모두 양반은 아니다.9명의 사내가 등장하는데, 맨 오른 쪽의 사내만 대우가 작은 갓을 썼을 뿐, 나머지 8명 중 두 사람은 방갓을 썼고, 두 사람은 건을 썼다. 네 사람은 맨머리다. 맨머리의 사내는 상투가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오른 쪽 부분의 긴 담뱃대를 물고 있는 맨머리의 총각은 어린 기색이 완연하다. 행색으로 보아 이들은 양반이 아니다. 맨 오른쪽 갓을 쓴 사람도 나이가 들었다 뿐이지 짧은 곰방대를 가진 품이나, 복색이 도포가 아닌 점으로 미루어 보나 양반은 분명 아니다. ●말·소 등에는 모두 ‘길마´가 얹혀 있어 이 그림의 원래 제목은 ‘장터길’이다. 내가 정한 것이 아니고, 그렇게 전해져 온 것이다. 단원이 원래 취한 제재가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모른다. 하지만 장터와 상관이 없는 것은 물론 아닐 터이다. 이들은 한 패거리이거나 아니면 두 세 패거리로 짐작이 된다. 먼저 오른쪽의 네 사람을 보자. 네 사람이 네 필의 말을 타고 있다. 중간의 머리를 천으로 싸맨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곰방대를 물고 있다. 갓을 쓴 사내는 한창 곰방대를 손으로 누르는 참이다. 담뱃불을 세게 댕기려 압력을 가하고 있는 참이다. 아래의 더벅머리 총각은 이제 막 담배를 배우는 것인지 얌전하게 담배를 빨고 있다. 그 왼쪽의 돌아보는 자세의 사내는 담뱃불을 댕기려고 부싯돌을 치고 있다. 이 네 사람이 한 패로 보인다. 왼쪽의 세 사람은 세 필의 말을 타고 한 필은 끌고 간다. 상호간 거리가 좁은 것으로 보아 이들 역시 한 패로 보인다. 그리고 왼쪽 위의 언덕 건너편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더벅머리 총각으로 말을 타고 있고, 뒤를 따르는 사내는 걸어서 소를 몰고 가고 있다. 이들이 모두 한 패인지, 아니면 세 패인지는 단원이 다시 살아나거나 그림 속의 누가 그림 밖으로 나오기 전에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이들이 같은 목적으로 같은 길을 가고 있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무엇으로 아느냐고? 이 그림에는 말이 9마리, 소가 1마리 등장한다. 그런데 유심히 보면, 맨 오른쪽 갓 쓴 사내가 타고 있는 말만 제외하면, 나머지 말과 소의 등에는 모두 길마가 얹혀 있다.(길마 아래 얹은 것이 언치다). 길마는 안장이 아니다. 안장이란 사람이 말에 올라탔을 때 쾌적함을 누리기 위해 만든 장치다. 한데 위에 등장하는 것은 원래 말에 얹는 안장이 아니라, 주로 소 등에 얹는 길마다. 길마의 용도는 물건을 나르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위의 말들은 사람이 타는 승용마가 아니라, 물건을 나르기 위한 말인 것이다. 더욱이 승용의 말은 오직 양반만이 타는 것이었다. 따라서 위에 등장하는 양반 아닌 상것들이 말을 타고 다닐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인가. 맨 왼쪽의 더벅머리 총각을 보자. 오른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채찍이다. 채찍은 말을 몰고 가는 데 쓰이는 것이다. 이 총각은 원래 말을 몰고 가는 사람이다. 사람이 타는 승용마의 경우 양반네를 태우고 앞에서 말을 끌고 간다. 이 경우 그는 말구종이 된다. 말구종은 한자로 쓰면 견마부(牽馬夫)가 되고 ‘견마’가 입에 익으면 ‘경마’가 된다.‘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는 속담은 사실 말을 타면, 말을 끌고 가는 견마잡이를 두고 싶다는 말이다. 그림의 견마잡이는 물건을 싣지 않은 말을 타고 가는 참인 것이다. 또 그림 중간의 사람을 태우지 않은 말을 끌고 가는 데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하나 같이 승용마를 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짐을 싣기 위한 빈 말을 타고 가는 중이다. 즉 어딘가로 짐을 싣기 위해 가고 있는 것이며, 아직 짐을 싣기 전이기 때문에 길마를 얹은 빈 말을 임시로 타고 있는 것이다. 이 길마를 얹은 8마리의 말과 한 마리의 소가 짐을 싣기 위한 운반용이라는 것은, 담배에 불을 댕기려고 부시를 치는 사내가 앉은 길마에 밧줄이 묶여 있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이 밧줄은 길마에 짐을 싣고 동여매기 위한 것이다. ●더벅머리 총각들은 견마부로 보여 등장인물 9명 중 더벅머리 어린 총각이 4명이다. 총각들은 모두 견마부로 보이고, 나머지 다섯 사람은 어른이다. 어른들 중 맨 오른쪽의 갓을 쓴 사내가 아마도 이 패의 우두머리로 보인다. 갓을 차려 쓴 것이라든지 또 이 사내만은 길마 위에 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고려하건대(사내가 타고 있는 것은 길마가 아닌 것은 확실하지만, 안장이라고 단언할 수도 없다. 안장이라면 앞에 손으로 잡을 수 있는 튀어나온 부분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다. 단지 언치를 얹고 그 위에 앉기 편한 무엇, 예컨대 덕석 같은 것을 놓은 것이 아닌가 한다), 그는 이 패거리 중에서는 제법 행세를 하는 사람인 것이다. 아마도 이들은 시장을 오가는 상인일 것이며, 이 사내는 상단(商團)의 행수가 아닐까 한다. 따라서 장터길이라는 제목도 썩 불합한 것은 아니다. 물론 상단이 아니라, 어떤 시골 사람들이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사려고 시장에 가는 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조선후기에 말이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음을 상기한다면,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평범한 시골 농민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상단을 그린 그림은 이형록(1808∼?)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눈길을 걷는 상단’도 있다. 소를 앞세우고, 말에 짐을 지우고, 아니면 어깨에 지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어디론가 가고 있다. 이 역시 상단을 그린 귀중한 그림이다. 조선이란 나라는 유교가 국가의 이데올로기다. 유교는 상업을 원래 가장 낮은 직업으로 본다. 사·농·공·상! 즉 지식인, 농민, 수공업자, 상인의 순서다.‘맹자-등문공’에 농가(農家)인 허자(許子)의 제자 진상(陳相)과 맹자의 논변이 나온다. 진상이 전하는 허자의 논리는 이렇다. 유가들은 왜 노동을 하지 않고 정치를 한다고 들면서 호의호식하는가. 이것이 허자의 문제 제기다. 이 말에 맹자는 허자가 농사를 지을 때 사용하는 쇠쟁기는 허자가 직접 만든 것인가, 허자가 쓰는 그릇은 허자가 직접 만든 것인가. 이에 진상은 이렇게 답한다. 아니다. 허자가 생산한 곡식과 바꾼 것이다. 그렇다. 허자는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생산할 수 없다. 이 사회에는 사람마다 각각 역할이 있다. 곧 지금으로 말하자면 사회적 분업의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맹자는 자신의 역할을 정치라고 말하고, 허자가 대장장이 일을 농사짓는 일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처럼, 정치 역시 다른 일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라 말한다. 허자는 맹자의 사회적 분업을 말하는 논리에 패배하고 만다. 맹자의 논리가 맞는 것이라면, 상업이야말로 교환을 가능케 하는 가장 기초적인 수단이 아닌가. 하지만 맹자는 ‘공손추’에서 지역에 따른 가격차를 이용하여 이익을 보는 상인을 통렬하게 비난하고 있다. 맹자의 눈에는 상인의 활동이야말로 구체적 생산물을 생산하지 않는 무용한 행위로 보였을 것이다. 그가 허자에게 말한 교환이란 이익이 없는 단순한 교환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황당한 생각임은 여기서 굳이 변파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맹자의 말이 전적으로 타당하지 않다고 말할 수도 없다. 왜냐? 상업은 자본의 축적을 가져오고, 자본의 축적 규모가 커진다면, 그 자본은 필연적으로 생산자를 구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개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금융자본의 위력을 직접 경험하고 있지 아니한가. ●조선 후기 私商 활동 부쩍 활발해져 유가의 상인에 대한 이런 정의 때문에 유교를 국가이데올로기로 삼은 조선은 상업과 상인을 적극 장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장이 없을 수는 없다. 조선을 세우고 수도를 개성에서 서울로 옮긴 뒤, 궁궐과 종묘, 관청을 지었다. 아울러 지은 것이 관영 시장인 시전(市廛)이었다. 조선후기가 되면, 이 관영 시장의 상인 외에 개성상인을 위시한 사상(私商)의 활동이 부쩍 활발해진다. 이들은 국가의 감시를 뚫고 밀무역 루트까지 뚫는다. 이익이 나는 곳에 상인이 있었던 것이다. 또 역관이 주축이 된 북경과 한양, 동래와 일본을 잇는 국제무역이 제법 발달한다. 이번에 소개한 그림들은 아마도 이런 상업의 발달과 유관한 상단(商團)을 그린 것이 아닐까.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포크레인으로 구조된 황소사진 中서 화제

    진흙더미에 빠진 황소가 포크레인으로 구조되는 사진이 중국 네티즌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지난 15일 중국 닝보(波)시 하이슈(海曙)구를 지나던 한 시민은 우연히 공사장 진흙탕에 빠져 얼굴만 내민 채 숨을 헐떡이고 있는 황소 한 마리를 발견하고 신고했다. 이 황소는 경사면에 자라고 있는 풀을 뜯어먹기 위해 언덕을 내려오다 미끄러진 것으로 추정됐다. 소 주인인 펑(馮)씨는 “소가 임신한지 8개월 째”라면서 “송아지를 가진 후부터는 자유롭게 풀어두고 풀을 찾아먹게 했다. 구덩이에 빠질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황소가 빠진 구덩이는 진흙과 시멘트로 가득 차 있어 나오려고 발버둥칠수록 소는 깊이 빠져들었다. 펑씨 및 주민들은 소를 끌어올리려 3시간 동안 애썼지만 진전이 없자 구조대에 도움을 요청했다. 현장에 도착한 구조대원들은 소 주변을 메우고 있던 흙을 모두 걷어내고 밧줄로 묶은 뒤 포크레인을 이용해 진흙더미에서 꺼냈다. 펑씨는 “황소 뿐 아니라 뱃속의 송아지까지 잃을까 걱정했었다.”면서 “위험 안내표지판도 없이 공사판을 방치해 관계자들을 찾아 항의할 생각”이라고 전했다. 한편 이 황소와 뱃속의 송아지는 약간 놀란 것 외에 큰 부상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열린세상] 토목보다 우선 제도를 건설하자/강효백 경희대 중국법 교수

    [열린세상] 토목보다 우선 제도를 건설하자/강효백 경희대 중국법 교수

    중국 역사상 모두 245명의 황제가 군림하였다. 사람들은 그 중에서 최고의 명군은 당태종 이세민을, 최악의 폭군은 수양제 양광을 꼽는다. 당태종은 평소 백성은 물이고 군주는 배라고 말했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뒤엎기도 한다. 배를 무사히 저어가고 싶다면 항상 물을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이다. 백성을 섬기는 위민정신이 배어 나오는 현군의 어록이다. 하지만 그가 베스트 황제로 숭앙받는 진짜 이유는 민본주의 치국이상을 현란한 언사로만 표현한 데 그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제도화하여 실천한 데 있다. 당태종은 갖은 악법을 폐지하고 3성6부제, 주현제, 과거제 정비와 함께 조세·군역의 감면 등 민생을 위한 좋은 법제를 많이 창제하였다. 특히 그의 재위시절에 확립된 당률(唐律)은 후대황조들의 기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 등 동양사회의 제도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수양제는 즉위하자마자 대대적인 토목건설을 일으켰다. 그는 연인원 1억 5000만여명의 백성을 동원하여 만리장성을 새로이 쌓게 하였으며, 수문제가 중단시킨 대운하 공사를 재개시켰다. 황제 전용의 거대한 용주(龍舟)를 대운하 양안에서 8만여명의 백성들이 밧줄로 끌고 다니게 하는 패악을 저질렀다. 그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정치경제적 기반을 자기과시용 토목공사와 대외원정에 탕진해 버려 결국 부하에게 교살당하고 수나라도 단명하고 말았다. 수양제의 무덤은 장쩌민 전 주석의 고향인 양저우(揚州) 교외 후미진 숲속에 ‘양광지묘’라 쓰여진 초라한 빗돌 하나를 앞세우고 쪼그리고 앉아 있다. 능이 아닌 묘로 불리는 유일한 황제의 무덤이라는 사실에서 그의 악정에 후세가 얼마나 몸서리를 쳐왔는지 알 듯하다. 중국 최고와 최악 황제 둘 다 ‘건설’에 힘썼으나 최고명군은 ‘제도건설’에, 최악폭군은 ‘토목건설’에 몰두하였다. 둘 다 ‘배’와 ‘물’의 키워드로 함축되지만 당태종호는 물(민심)을 항상 보살펴 중국사의 바다에 빛나는 항해를 하였고 수양제호는 물을 업신여겨 분노한 민심의 파도에 침몰하고 말았다. 현재 중국은 당태종 치세시의 영광의 재현을 위하여 경제건설 제일주의에서 제도건설, 즉 법과 제도에 의한 의법치국(依法治國)의 국가로의 전환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과거 최고지도층이 이공계출신 일색이었던 것과는 달리, 후진타오 주석의 양팔이자 차기 최고지도자로 손꼽히는 시진핑, 리커창은 모두 법학박사 출신이라는 변화는 눈여겨볼 대목이다. 국민의 압도적 지지로 출범한 이명박호는 지금 성난 민심의 노도에 흔들리고 있다. 초·중·고 어린학생들조차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서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명박호가 겸허히 국민의 소리를 수렴하여 회생의 전기를 마련할 것을 믿는다. 새 대통령이 중국의 베스트 황제, 당태종처럼 대한민국 역사에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기록되길 소망하면서 국정어젠다를 ‘토목건설’에서 ‘제도건설’로,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을 할 것을 제언한다. 버려야 구한다. 대운하 등 국민 다수가 반대하는 토목건설에 대한 집착을 과감히 던져버리고 헌법의 리모델링(개헌)을 비롯한 민생을 안정시키는 제도건설에 힘쓰자. 현행 헌법은 20여년 전 중남미 정치후진국에서 운용되던 대통령단임제 통치프레임을 기초로 하여 가건물 세우듯 3개월 만에 뚝딱 만들어진 것이다. 개헌은 지난 대선 당시 후보들의 다짐을 받은 바 있으며 이미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영원한 명예는 40번의 승전이 아니라 자신의 법전이라고 말했듯 그의 정치군사적 업적은 덧없으나 나폴레옹법전은 여전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세계 최고수준의 첨단빌딩을 건설하듯 우리도 각계각층의 지혜를 민주적으로 수렴하여 새로운 시대정신을 담은 참 좋은 헌법,‘이명박 헌법’을 건설하자. 강효백 경희대 중국법 교수
  • [주말탐방] “6시간만에 200상자 잡았어라우”

    [주말탐방] “6시간만에 200상자 잡았어라우”

    “그물에 걸린 병어가 꿈틀꿈틀 몸부림치면 은빛 비늘이 얼굴, 손, 옷에 묻어 은빛 인간으로 빛나부러라우.” 9.7t급 진영호 김인석(51·목포시 보광동) 선장은 병어잡이 이야기에 신바람이 났다.“6시간만에 그물 3개를 털었는디 자그마치 200상자를 잡았어라우. 마릿수로는 5000마리도 넘는디 환장하겠더랑께요.” 바닷물 흐름은 6시간마다 밀물과 썰물로 바뀐다. 물이 바뀔 때 조류가 빨라지면 병어가 움직인다. 쳐 놓은 그물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선원들은 물때(4번)마다 그물을 들어올린다. 병어잡이 그물은 폭 3.6m, 길이 300m나 된다. “물 흐름과는 직각으로 가로질러 그물을 쳐요.” 그물 양쪽에는 쇠말뚝을 박아 단단하게 맨다. 이런 식으로 한꺼번에 그물 4∼5개를 친다. 물이 들때(사리)는 물속 5∼6m에, 물이 빠지면(조금) 7∼8m 지점에 설치한다. 김 선장은 “그물을 치는 깊이는 선장의 오랜 노하우인데 이 게 고기를 많이 잡는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병어가 주렁주렁 매달린 그물 1개를 터는 데는 2시간이 걸린다. 그물 밑을 따라 배가 옆으로 움직인다. 선수 갑판에 있는 사이드 롤러의 밧줄을 감으면서 작업을 한다. 선원 2∼3명이 달려들어 고기 그물을 들어 비스듬히 선 채 옆으로 탁탁 털어내면 병어가 빠져나온다. “그물에는 병어가 많고 갑오징어·아귀·꽃게·장어·우럭·복어·삼치 등이 줄줄이 걸려들지. 뱃사람은 이 손맛을 못 잊어. 그래서 바다가 좋다고….” 신안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 머리카락으로 35톤 기차를 끈 印남자

    “머리카락을 헬리콥터에 매달고 날아다니는 게 꿈이에요.” 인도의 한 남자가 최근 머리카락을 기차에 연결해 끌고 가는 묘기를 선보여 이목을 집중시켰다. 영국의 BBC는 “‘무적의 머리카락’을 가진 인도의 ‘샤일런드라 로이(Shailendra Roy)’라는 사람이 머리카락으로 35톤짜리 다즐링(Dajeeling)기차를 10미터 정도 끌고 갔다.”고 지난 2일 보도했다. 머리로 기차를 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지난 달 26일 인도 실리구리(Siliguri)에는 수천 명의 구경꾼들이 모여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로이는 “원래는 300미터를 가려고 했었지만 철도청 측에서 허락해주지 않았다.”고 아쉬워했다. 이 묘기를 성공하기 위해 그는 “머리카락으로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는 연습을 1년 넘게 했다.”고 밝혔다. 또 “머리카락을 튼튼하게 관리하기 위해 머스타드 오일을 발라 문질렀다”고 덧붙였다. 현재 44살인 로이는 1991년부터 턱수염으로 물건을 들어올리고 머리카락으로 버스를 끄는 등의 묘기를 해왔다. 지난해에는 밧줄에 머리카락을 매달아 스파이더맨처럼 건물과 건물 사이를 날아다니는 모습이 TV로 중계되기도 했다. 로이는 “머리카락으로 기차를 끈 것은 내 꿈을 실현한 것” 이라며 “8월에는 머리카락을 헬리콥터에 매달고 양 손에 인도국기를 흔들며 날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김지아 기자 skybabe8@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한전 ‘활선공법’ 아시아 첫 개발

    한전 ‘활선공법’ 아시아 첫 개발

    한국전력이 전기 작업에 새 장을 열었다. 70만V 이상의 초고압 전류가 흐르는 상태에서 헬기를 동원해 각종 작업을 하는 활선(活線)공법 개발에 성공했다. 지금까지는 감전 등의 위험 때문에 전기를 끊고 작업해야 했다. 연간 30억원의 비용절감 효과가 기대된다. 신흥 개발국 등에 기술을 수출할 수 있는 길도 열렸다. 한전은 15일 전북 고창 전력시험센터에서 활선공법을 처음 시도했다. 전기를 끊지 않고 살려놓은 상태에서 작업한다고 해서 ‘활선’이란 이름이 붙었다. 헬리콥터를 이용해 기술자가 초고압 전류가 흐르는 송전탑에 접근해 작업하는 공법이다. 이원걸 한전 사장과 고창군민 등 시연행사를 지켜본 120여명은 허공에서 펼쳐지는 아찔한 모습에 가슴을 졸여야 했다. 고도로 훈련받은 전문 기술자들은 안전밧줄에 기댄 채 고장난 ‘스페이서 댐퍼’(전선 간격을 유지시켜주는 장치)를 교체했다. 철탑과 전선을 분리시켜주는 애자(碍子)도 바꿔 끼웠다. 헬기에 설치된 특수 세척장비로 애자를 청소하기도 했다. 애자가 낙뢰 등으로 파손되거나 먼지 등이 많이 끼면 전기 성능 저하를 초래하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보수, 청소해야 한다. 이 모든 작업이 이뤄지는 동안 전깃줄에는 76만 5000V의 전류가 흐르고 있었다. 한전측은 “70만V 이상의 초고압 선로에서 활선공법을 시행하는 나라는 미국, 캐나다, 러시아 등 세계에서 7개국에 불과하다.”며 “아시아에서는 우리나라가 처음”이라고 밝혔다. 76만 5000V의 송전선은 대개 발전소와 연결돼 있다. 따라서 정기점검이나 보수작업이 이뤄질 때면 전기 공급이 중단돼 가스 등 발전단가가 더 높은 에너지원으로 발전소를 돌려야 했다. 여기에 드는 추가비용만 하루 1억 5000만원이다. 하지만 이번에 한전이 활선공법 적용에 성공함으로써 이런 불편과 비용 낭비가 줄게 됐다. 이원걸 사장은 “인력과 장비 이동이 곤란한 산악지역 등에도 적용 가능하다.”며 “기술 수출도 적극 모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안미현기자 hyun@seoul.co.kr
  • [열린세상] 시간강사는 투명인간인가요?/이성형 중남미 정치학 전문가

    [열린세상] 시간강사는 투명인간인가요?/이성형 중남미 정치학 전문가

    그들은 투명인간입니다. 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간혹 한 명이 자살하면 언론이 측은한 듯 그들의 실체를 드러내 보입니다. 최근 들어 벌써 세 명의 투명인간이 자살했다고 합니다. 명문 대학을 졸업하고 외국 또는 국내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대학교육의 40%가량을 담당한다는 시간강사들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투명인간 숫자는 5만∼6만명 정도랍니다. 전임 교원 숫자가 6만 6000명 수준이니 비슷하다고 하겠지요. 사회는 그들이 이슬만 먹고 사는 천사들로 대접합니다. 시간당 평균임금이 3만∼4만원꼴이니 주당 3학점 과목 4개,12시간을 강의하면 한달에 120만원 정도 벌 수 있겠지요. 하지만 네과목을 강의하자면 서울의 경계를 넘어 인천, 수원 등지로 원정경기를 나가야 합니다. 당연히 기름 값과 점심 값을 빼야겠지요. 그러니 넉넉잡아서 월소득 100만원이라고 보면 됩니다. 게다가 연중 넉 달은 계절적 실업자로 분류됩니다.3인 가구 최저생계비가 월 150만원이라지요. 가정을 꾸린 남성이라면 일단 아내 보기가 민망합니다. 아이도 쑥쑥 커가는데 한숨만 쉬는 자신을 바라봅니다. 애꿎은 담배만 푹푹 피워댑니다.“여보!이 일 집어치우고 학원으로 나갈까?”“에이, 공부가 다 뭐야!” 학위를 받은 지 5년 정도는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자신에게는 틀림없이 구원의 밧줄이 내려올 것이라고 믿지요. 열심히 학계의 모임에도 나가고, 선배와 동료들의 술자리에도 얼굴을 내밉니다. 궂은 일도 도맡아 처리하지요.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구원의 손길이 멀어져 감을 느낍니다. 슬그머니 화가 치밉니다. 우울증이 도집니다. 맨 정신으로 살아가자면 교회에 나가든지 아니면 참선 수행을 해야 합니다. 아니, 왜 똑같이 대학에서 강의하는데, 우리가 받는 임금은 기아임금 수준이야. 하루종일 이 대학 저 대학 이동하면서 파김치가 된 몸을 이끌고 소주잔을 기울이다 집에 들어오면 아이 학원비 타령하는 아내가 기다립니다. 잦은 부부 싸움은 정해진 코스입니다. 이혼한 커플도 많습니다. 이들에겐 올라가서 시위할 골리앗 크레인도 없습니다. 집단행동을 한다면 틀림없이 손가락질을 받을 것입니다. 한국 사회에 부르주아 통과증이라 불리는 박사학위가 있는 학자님이기에 집단행동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강의와 연구 활동에서 선배나 동료교수들에게 어떤 불이익을 당해도 조용히 삼킵니다. 체면을 중시하는 학인 사회이기에 배는 고파도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가벼운 우울증이 점차 중증으로 발전할 수밖에요. 주변에 자주 화를 내고, 말도 거칠어집니다. 내성적인 사람은 점점 안으로 움츠러듭니다. 학문에 뜻을 세운 20∼30대에 꿈꾸었던 자신의 모습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나가 버린 현실에 화들짝 놀라기도 합니다. 이 불쌍한 투명인간들의 오랜 민생고를 조금이나마 완화하기 위해, 뜻있는 국회의원들이 ‘고등교육법 일부 개정법률안’을 만들었습니다.‘계절적 일용잡급직’에게 최소한의 자존심과 생계유지가 가능하도록 ‘강사’에게 법적 지위를 부여하고, 전업 강사의 임금을 국공립대 전임강사 임금의 절반 수준 정도라도 보장하자는 취지입니다. 사립대학교도 매칭펀드 형식으로 동참하게끔 국고에서 인건비의 절반 정도를 지원하자는 제안도 있더군요. 저는 이 대목에서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하지만 존경의 염이 곧 실망으로 변하려고 합니다. 이 안을 발의한 한나라당 이주호 의원은 청와대로 들어가고, 국회는 공천 홍역에서 선거정국으로 이행하면서 법안이 공중 분해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존경하는 국회 교육위원회 위원 여러분들, 제발 이번 회기 내에 법안의 심사를 종결시켜 주십시오. 투명인간들의 애꿎은 희생이 더 나오지 않도록 말입니다. 이성형 중남미 정치학 전문가
  • [거리 미술관 속으로] (55) 절두산 성지

    [거리 미술관 속으로] (55) 절두산 성지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순교박물관’에는 개화기 때의 천주교 역사를 담은 다양한 조형물이 놓여있다. 최종태 전 서울대 교수, 전뢰진 홍익대 명예교수 등 국내 원로 조각가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최초의 한국인 신부인 김대건 신부 탄생 150주년을 맞아 전 교수가 제작한 ‘김대건 동상’이 처음 자리한 곳이 바로 절두산 성지이다. 받침 높이 5.8m, 본상 높이 4.35m에 이르는 거대한 조형물로, 원형은 가톨릭대학으로 옮겨졌다.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은 1972년 최 교수가 제작했다. 첫 순교자 가족으로 기록된 이의송(프란치스코)의 가족을 형상화한 것으로 알려진 이 작품은 두 어른과 한 아이의 몸통 위에 목이 겨우 얹어있는 모습이다. 아빠, 엄마, 아이의 다정한 모습 같아 보이지만 아이 손에 묶인 밧줄을 보는 순간 당시의 처절함이 생생하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여유가 느껴지는 성모상이 곳곳에 놓여있다. 특히 조영동 성신여대 명예교수와 고(故) 이남규 전 공주사대 교수가 공동 제작한 ‘안수 성모상’은 위안을 받기에 충분하다. 앞으로 뻗은 두 손이 보통 키의 성인 머리 높이와 딱 맞아떨어져 마치 얼굴을 보듬어주기 위해 존재하는 듯하다. 최 교수의 ‘성모상’이나 1978년에 만들어진 ‘성모동굴’도 편안한 마음의 휴식을 가져다 준다. 역사적 가치를 가진 유물도 곳곳에 서있다. 한국 천주교회의 발상지인 천진암 주어사를 순례하다가 발견한 ‘해운당대사의징지비(海雲堂大師義澄之碑)’나, 모조품이긴 하지만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의 근거가 된 ‘척화비’가 그것이다. 1866년에 순교한 다섯명의 성인이 충남 보령 갈매못 형장으로 끌러갈 때 쉬었다 간 바위라는 ‘오성바위’와 다블뤼 안 주교가 21년간 숨어 살던 방을 드나들 때 밟고 다녔다는 문지방 돌도 고스란히 보관해 놓았다. 1만여명의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데서 붙어진 ‘절두산’이라는 으스스한 이름만큼 살벌한 유물도 많다. 병인박해 당시 교수형틀인 ‘형구돌’을 비롯해 성당 앞 형구 전시장에는 순교자를 고문했던 형구들이 전시돼 있다. 종교색을 내세워 외면하기엔 역사적 깊이와 한강을 내려다보는 전망이 너무 좋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서울대공원 동물원에 가보았지] (50) 동물원 이사 대소동

    [서울대공원 동물원에 가보았지] (50) 동물원 이사 대소동

    지난 24일 서울 대공원에서 태국동물원으로 이사를 갈 예정이었던 동물 63마리의 반출이 현지사정으로 한 달 후로 연기됐다. 덕분에 상자 속에서 태국행을 기다렸던 동물들은 우리로 복귀,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동물들을 어르고 달래 어렵사리 이삿짐을 싼 사육사의 입장에서 보면 황망해지는 순간이다. ●소쿠리로 새잡던 방법 응용 현실은 ‘문을 열고, 코끼리 넣고, 냉장고 문을 닫는 것’처럼 명료하지도 단순하지도 않았다. 운송상자에 동물을 넣는 작업은 동물원 전역에서 이사 사흘 전인 21일부터 일제히 시작됐다. 몸무게 1t인 유럽들소는 3일간 밤낮 없이 매달렸지만 결국 상자에 가두는 데 실패했다. 녀석을 잡기 위해 예전 시골에서 소쿠리를 이용해 새를 잡던 방법이 동원됐다. 며칠간 굶긴 유럽들소 앞에 먹이가 든 운송상자를 놓아둔 후 그 안으로 놈을 유인한 것이다. 먼저 사육사들은 녀석이 낌새를 차리지 못하도록 은폐·엄폐를 한 후 들소의 움직임을 계속 주시했다. 상자 안에 들어가면 당겼던 밧줄을 ‘확’풀어 가둘 작정으로 24시간 교대근무에 들어갔다. 하지만 녀석은 사육사들을 놀리기로 한듯 변죽만 울리더니 결국 상자만 부숴버렸다. 결국 유럽들소의 태국행은 연기된 일정과는 상관없이 자체적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암컷의 직감은 뭔가 달라 1년 7개월 된 어린 퓨마 퓨리스(♂·2006년 6월생)와 퓨리티(♀·〃)를 잡는 일도 난관에 봉착했다.1년 반이 넘도록 인공포육장에서 사육사를 제 어미처럼 여기고 자라 비교적 쉬울 것이라 예상했지만 암놈 특유의 직감이 문제였다. 먹이를 보고 아무 의심 없이 상자에 들어가는 수컷과는 달리 암컷은 상자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주위만 뱅뱅 돌았다. 밀고당기는 씨름을 만 하루 동안 한 뒤에야 상자에 넣을 수 있었다. 겁이 많기로 1등인 바바리양 우리엔 수십 명의 사육사들이 동원됐다. 천막 뒤에 숨은 사육사들이 높다란 인공 담을 친후, 이 담을 점점 줄여 상자로 모는 방식이 적용됐다.9마리를 상자에 넣는 데 걸린 시간은 무려 6시간. 반면 눈치 빠르기로 소문난 원숭이와 사육사들의 투쟁은 비밀병기가 투입되면서 허무하게 끝났다. 원숭이가 좋아하는 사료에 신경안정제를 넣은 것이다. 신경안정제를 먹은 원숭이들은 움직임이 둔해졌고 덕분에 사육사들은 손쉽게 포획할 수 있었다. 한 달 후 동물원엔 또다시 사람과 동물간의 줄다리기가 재연될 전망이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50)자멸의 길로 들어서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50)자멸의 길로 들어서다

    우여곡절 속에 조선이 후금과의 관계를 힘겹게 이어가고 있을 무렵 명의 정세는 어떠했는가? 후금의 위협이라는 커다란 외환(外患)을 앞에 두고 명은 이런저런 내우(內憂)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극복은커녕 망하는 길로 확실히 접어들고 있었다.1630년 9월, 원숭환(袁崇煥)이 북경의 저잣거리에서 처형된 것은 명이 자멸의 길로 들어섰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홍타이지, 명의 허를 찌르다 1629년 10월2일, 홍타이지는 몽골의 코르친(科爾沁) 부족을 길잡이로 앞세워 북경 공략에 나섰다. 홍타이지는 원숭환이 굳게 지키고 있던 영원성과 산해관을 우회하여, 영평(永平) 관할의 용정관(龍井關)과 준화(遵化) 관할의 대안구(大安口), 희봉구(喜峰口)를 통해 직접 북경으로 들어가는 길을 택했다. 산해관에서 영원성으로 이어지는 주공로(主攻路) 방어에 집중하고 있던 명군은 허를 찔리고 말았다. 일찍부터 혼인 정책 등을 통해 몽골 부족을 회유하여, 산해관 동북의 장성 외곽을 돌파하려 했던 후금의 시도가 성공했던 것이다. 그 같은 사태는 원숭환이 이미 예견했던 것이다. 그는 일찍이 황제에게 올린 상소에서 산해관을 제외한 장성 외곽지역의 방어 태세가 몹시 취약하다는 것, 후금이 몽골을 회유하여 쳐들어 올 경우 심각한 사태가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하지만 대책은 마련되지 않았다.10월26일, 후금군은 황성(皇城) 코앞의 경기(京畿) 지역까지 들이닥쳤다. 영원성에 머물던 중에 홍타이지의 공격 소식을 접한 원숭환은 당황했다. 그는 병력을 끌어 모아 그야말로 미친 듯이 북경을 향해 달려갔다. 원숭환은 산해관에 도착한 직후 참장(參將) 조솔교(趙率敎)에게 병력 4000을 주어 준화를 구원하도록 명령했다.11월4일, 후금군은 준화성 공격에 나섰다. 왕원아(王元雅)가 이끄는 명군은 힘껏 저항했지만 곧 무너지고 말았다. 성안에서 후금군에게 내응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준화를 향해 달려오던 조솔교는 중간에 복병을 만나 전사하고 말았다. 성 함락 후 준화에서는 후금군에 의해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준화 함락과 대학살 소식에 북경은 전율했다. 11월17일,90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밤낮으로 달려온 원숭환은 북경 광거문(廣渠門) 앞에 이르렀다. 병사와 말 모두 굶주림도 잊고 휴식도 없이 달려온 길이었다. 부총병 주문욱(周文旭)은 일단 휴식을 취하고 상황을 보아 북경으로 들어가자고 했지만 원숭환은 듣지 않았다. 황성이 포위되려는 마당에 휴식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윽고 11월20일, 원숭환의 명군은 광거문 앞에서 후금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6시간 이상 벌어진 10여차례의 사투 끝에 후금군은 뒤로 물러났다. 무리한 행군과 굶주림 속에서도 정신력으로 버틴 끝에 얻은 승리였다. ●홍타이지 원숭환에 패해 후퇴하다 11월23일, 후금군을 물리친 뒤 원숭환은 숭정제에게 장거리 행군과 전투, 그리고 노숙에 지친 병사들이 성안으로 들어가 휴식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했다. 숭정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원숭환이 분전 끝에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숭정제는 이미 원숭환에게 노여움을 품고 있었다. 후금군이 북경에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이 원숭환의 책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원숭환 휘하의 병력은 엄동에 다시 노숙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 11월27일 좌안문(左安門)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원숭환은 후금군을 격파했다. 원숭환이 있는 한 북경을 도모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홍타이지는 병력을 북경 외곽의 남해자(南海子)란 곳으로 철수시켰다. 그는 북경에서 물러나면서 숭정제에게 서신을 보내 화친을 맺자고 요구했다. 일종의 양동작전이었다. 홍타이지는 이후 북경의 상황을 관망하면서 북경 주변의 여러 지역에 병력을 풀어놓았다. 후금군은 영평(永平), 준화, 난주( 州), 천안(遷安) 등지의 성과 촌들을 마구잡이로 겁략했다. 그들은 도처에서 사람과 가축, 각종 물자를 약탈하고 저항하는 인원들을 도륙했다. 황성 방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던 명군은, 후금군이 외곽 지역에서 벌이고 있던 약탈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후금군은 통주(通州) 등지에서 1000척 가까운 조운선(漕運船)을 불태웠다. 수만 명의 포로를 획득하고, 후금군 병사 한 사람에게 1필씩 돌아갈 만큼의 우마를 획득했다. 잔혹한 학살과 방화, 그리고 약탈 속에서 북경 주변은 초토화되었다. 비록 황성은 어렵사리 지켜냈지만 명은 심장부가 유린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홍타이지는 원정을 통해 또 다른 명의 장성(長城)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무너뜨리게 된다. 그 ‘장성’이란 다름 아닌 원숭환이다. 후금군은 광거문 전투에서 원숭환에게 패했지만 귀중한 포로 두 사람을 사로잡았다. 마방태감(馬房太監) 양춘(楊春)과 왕성덕(王成德)이 그들이었다. 홍타이지는 이 두 사람의 포로를 활용하여 원숭환과 숭정제를 이간시킬 수 있는 반간계를 구상했다. 양춘과 왕성덕을 감금해 놓은 방 바로 옆에서 홍타이지의 부하 고홍중(高鴻中)과 포승선(鮑承先)이 밀담을 나누었다. 밀담은 ‘원숭환이 이미 홍타이지와 몰래 약속하여 북경을 공취(攻取)하기로 했고 곧 함락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겨우 벽 하나로 나뉘어진 옆 방에서 환관 두 사람은 고홍중과 포승선의 밀담 내용을 모두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홍타이지와 후금군 지휘부가 의도적으로 그 같은 상황을 연출했음은 물론이다. 11월29일, 홍타이지의 명을 받은 고홍중과 포승선은 태감 두 사람을 고의로 풀어주었다. 자금성으로 달려온 두 환관은 숭정제에게 그 사실을 고했다. 홍타이지가 북경을 기습한 직후부터 명 조정에 있던 엄당(奄黨)의 잔당들은 원숭환을 제거할 함정을 이미 만들어 놓고 있었다.‘원숭환이 오랑캐를 일부러 사주하여 북경으로 끌어들였다.’는 참소가 주된 내용이었다. 또 ‘원숭환이 병력을 이끌고 북경 옆의 통주에 다다를 때까지 후금군과 한번도 접전하지 않았다.’는 등의 이야기도 떠돌고 있었다. ●원숭환, 하옥되다 당시 19세에 불과한 데다, 대국(大局)을 볼 수 있는 역량이 없었던 숭정제는 홍타이지가 던진 ‘미끼’를 덥석 물었다.1629년 12월1일, 황제는 원숭환을 황성으로 불렀다. 명목은 ‘군량 문제를 의논하자.’는 것이었다. 이미 ‘원숭환이 오랑캐와 내통하고 있다.’고 믿었던 숭정제는 혹시라도 원숭환이 낌새를 채고 오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에 ‘군량 문제’를 운운했던 것이다. 원숭환이 황성 앞에 도착했을 때 문지기들은 성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오랑캐’에게 북경 주변이 포위된 계엄 상태였기 때문이다. 문이 열리는 대신 성 위에서 밧줄에 달린 바구니가 내려왔다. 당시 계요총독(遼總督)이자 병부상서 직책을 갖고 있던 원숭환은 바구니에 실린 채 황성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것 자체가 치욕이었다. 황성으로 들어선 직후 원숭환은 금의위(錦衣衛)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반면에 그와 동행했던 총병 만계(滿桂)와 흑운룡(黑雲龍) 등은 황제로부터 칭찬을 듣고 승진했다. 내각 대학사 성기명(成基命)이 원숭환을 구명하기 위해 애써 숭정제에게 호소했지만 황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동림당(東林黨)에게 복수하기로 작심했던 엄당의 신료들은 원숭환을 죽이라고 아우성이었다. 원숭환은 동림당 계열의 대학사 전용석(錢龍錫)의 문인이었기 때문에, 원숭환의 ‘죄’를 물고 늘어지면 동림당 계열을 일망타진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홍타이지의 반간계는 완벽하게 성공했다.1618년 누르하치가 무순성을 공격하여 선전포고했던 이래 후금군은 승승장구했다. 그런데 그 승승장구에 제동을 걸고 끝내 누르하치를 비명횡사시킨 장본인이 바로 원숭환이었다. 그가 영원성과 산해관을 막아서는 한, 아니 그가 존재하는 한 중원 정복이라는 목표는 실현될 수 없었다. 원숭환은 바로 명의 장성이었다. 그런데 그 ‘장성’이 반간계 한 방으로 무너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요컨대 홍타이지는 탁월했고, 숭정제는 암우(暗愚)했다. 지도자의 차이가 후금과 명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회고록 ‘고백’ 출간 원로배우 최은희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회고록 ‘고백’ 출간 원로배우 최은희

    문득 ‘여자의 일생’이 떠오른다. 이미자가 불렀다.‘참을 수가 없도록 이 가슴이 아파도, 헤아릴 수 없는 설움 혼자 지닌 채, 고달픈 인생길을 허덕이면서, 아∼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여자의 일생’ 산전수전을 다 겪은 70대 어머니들이 좋아하는 노래다. 그랬다. 슬퍼도 여자이기 때문에 스스로 달래어가며 살아왔다.1950년대 간통죄 1호라는 비난 속에 이혼과 재혼을 거듭하면서 두 아이의 입양과 남편 외도로 낳은 자식 둘을 키웠다. 그리고 목숨을 건 두번의 납북과 탈출, 망명생활…. 정말이지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삶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멸의 영화배우라고 한다. 영원한 은막의 스타 최은희씨. # 장면1 1978년 1월 어느날, 최은희가 홍콩 여행 중 바닷가를 구경하려고 항구에 정박 중인 보트에 탔다. 이때였다. 보트의 주인이라는 건장한 남자가 시동을 걸더니 “최선생, 지금 우리는 김일성 장군님의 품으로 갑니다.”고 했다. 몸부림치는 최은희를 밧줄로 묶고 항구밖에 정박 중인 화물선에 강제로 옮겨졌다. 8일 후, 최은희를 실은 배가 남포항에 도착했다. 안경을 낀 한 남자가 마중을 나왔다. 그는 “오시느라 수고했습네다, 내레 김정일입네다.”고 했다. 이어 김정일과 최은희는 리무진에 나란히 동승했다. # 장면2 1983년 3월 어느날. 최은희는 김정일이 베푸는 연회에 초대를 받았다. 이때였다. 회색양복을 입고 머리를 짧게 깎은, 아! 전 남편인 신상옥 감독이었다. 꿈인가 생시인가 망설이는 순간,“포옹 좀 하지, 왜 그러고만 서 있소.” 김정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동무들, 신 선생은 이제부터 내 영화 고문이오. 최 선생은 조선의 어머니요. 이번 4·15 위대한 수령님의 생신을 기해서 두분의 결혼식을 여기서 올립시다.”라고 했다. # 장면3 1986년 3월13일. 베를린 영화제에 참석했던 신상옥·최은희 부부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외신기자들과 기자회견을 앞두고 일본 교도통신의 에노키 기자에게 ‘미국대사관으로 망명을 하려 하니 협조바람´이라는 쪽지를 슬쩍 건넸다. 다음날 이들 부부는 에노키와 함께 호텔에서 택시를 타고 미 대사관으로 향했다.3명의 남자가 탄 또다른 택시가 뒤를 쫓았지만 따돌리고 미국 대사관으로 진입했다. 이때 대사관 직원은 연분홍 장미 한송이를 불쑥 내밀며 “Welcom to the west”라고 했다. 이 밖에도 영화같은 장면은 수없이 많다. 최씨는 ‘고백’이라는 제목으로 최근 자서전을 펴냈다. 화려한 인기여배우로서뿐 아니라 한 여자로서의 치부와 평탄치 않았던 인생길 등을 솔직하게 털어놔 눈길을 끌고 있다.6·25때 헌병대장에게 겁탈당했던 아픔 등을 비롯해 광복과 전쟁, 분단, 군사정권 등 격동의 세월속에 온몸이 던져졌던 생활을 담담하게 고백했다. 파란만장한 현대사를 집약한 한편의 다큐멘터리 그 자체였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서강대교 인근의 한 오피스텔에서 최씨를 만났다.“노년이 된다는 것은 많은 굴레로부터 자유를 얻었다는 걸 의미하는지도 모른다.”면서 “여자의 치부까지 드러내기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고해성사하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고 자서전 발간소감을 피력했다. 직접 쓴 육필원고냐고 했더니 “글쓰는 전문가에게 일부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대부분 내가 직접 썼다.”고 대답했다. 아울러 “글쓰는 사람들은 겨울에는 따뜻한 온돌에서, 여름에는 시원한 수박을 먹으며 편하게 쓰는 줄 알았는데 직접 써보니까 정말 힘든 작업이었다.”며 웃는다. ●고해성사 하는 마음으로 자서전 집필 “북한에는 9년 동안 있었는데 5년 동안 연금상태에서 혼자 지내다가 신 감독과 재결합하면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지요. 탈출하기 직전까지 2년 3개월 동안 모두 17편의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북한영화에 출연자와 해설자막을 넣은 것이 우리가 처음이었지요.‘불가사리’나 ‘임꺽정’은 최근에도 TV에 나온다고 전해들었어요.” 최씨는 이어 납북됐을 당시에는 겁이 나고 북한당국이 미웠지만 나중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침체된 북한의 영화산업을 잘 부흥시켜달라는 진심어린 주문을 받았을 땐 기분 나쁘지마는 않았다고 술회했다. 또한 연회에 초대될 때마다 자신이 기쁨조에 동원되는 것이 아닌가 두려웠지만 김 위원장은 그런 기색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건강을 묻는 등 예우에 신경을 써줬다고 부연했다. 하루는 김 위원장 생일에 초대를 받았을 때 아들 김정남과 부인을 직접 소개했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매주 금요일에 연회가 자주 열리는데 여러번 참석하면서 김 위원장 여동생 김경희·장성택 부부, 당시 김영남 외교부장 등과도 합석했다. 연회 참석때에는 입구에 코냑잔을 쭉 늘어놓는데 빈속에 두어잔씩 들이키도록 해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시작됐다고 회고했다. “신 감독은 매사에 치밀하고 형식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북한에 있는 동안 하루 2∼3시간 자면서 영화제작에 몰두했지요. 탈출 시나리오도 전적으로 신 감독이 짰지요.” 이래저래 최씨의 삶은 굴곡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그는 경기도 광주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전화국에 다니는 공무원이었다. 고달픈 그의 인생길은 1947년 ‘새로운 맹세’로 영화계에 데뷔하면서 시작됐다. 미모와 연기력으로 이름이 점차 알려지면서 구애하는 남자가 많았다. 결국 18세때 영화촬영기사와 결혼했다. 하지만 가난과 성격차이 등으로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그러던 6·25때 최씨는 정훈공작단원으로 전장에 참가했으며, 인민군에 의해 강제 납북됐다가 가까스로 탈출했다. 최씨는 이같은 일로 부역혐의를 받았고 헌병대장에게 조사받던 중 권총협박으로 겁탈까지 당하는 일생일대의 수모를 겪는다. 악몽같았던 전쟁은 끝났지만 평화는 오지 않았다. 남편의 잦은 폭력 등으로 별거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던 1954년 3월, 신상옥 감독한테 “우리 평생, 영화를 같이 합시다.”는 거듭된 프러포즈를 받고 서울시내의 허름한 여인숙에서 둘만의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전 남편이 간통혐의로 고소하게 되자 언론매체에서는 ‘간통죄 1호’라는 기사를 대문짝만하게 다뤘다. 최씨는 신 감독과의 결혼생활에서 아이가 생기지 않자 아이 둘을 입양해 키운다. 그러던 1977년 어느날, 신 감독이 후배 영화배우 오수미와 사이에 아이 둘을 낳았다는 청천벽력같은 사실을 확인하고는 결혼 23년 만에 이혼도장을 찍었다. 최씨 부부는 미국 망명생활 때 이들 네 아이들과 함께 지내다가 1992년 오수미씨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마지막 가는 길까지 지켜주었다. 이들 부부는 1999년 영구귀국하면서 국내에서 재기를 하는 듯 했으나 C형 간염을 앓아오던 신 감독이 병석에 드러눕자 최씨는 병간호에만 전념했다. 안타깝게도 신 감독은 2006년 4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여생 신감독이 못 다한 일에 바칠 것” 최씨는 요즘 신 감독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더욱 절절하다. 재혼때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서로 교환한 18K금반지를 자꾸 만지작거린다. 그의 가운데 손가락에는 신 감독의 반지까지 나란히 끼워져 있다. 현재 최씨에게는 비록 배아파 낳지는 않았지만 자식 넷이 있다. 큰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화계에서 일하고 있고 둘째아들은 미국에서 경찰이 됐다. 큰딸은 네 아이의 엄마로, 둘째딸은 연극활동을 하다가 지금은 평범한 주부가 됐다. “여생을 신 감독이 못다한 것에 바쳐야죠. 기념사업회도 만들고, 또 신 감독이 오랜 세월 간직해 왔던 대본이 있으니 누군가 영화제작을 해줬으면 좋겠고요….”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30년 경기도 광주 출생 ▲43년 경성기예학교 다니던 중 극단 ‘아랑’입단 ▲47년 ‘새로운 맹세’로 영화계 데뷔 ▲51∼53년 극단 ‘신협’ 배우로 ‘마의태자’‘햄릿’ 등 다수 출연 ▲53∼76년 신상옥 감독과 ‘신필름’설립, 영화 ‘무영탑’‘여자의 일생’ 등 130여편 출연 ▲64∼66년 영화 ‘민며느리’ 등 다수 감독 ▲69년 안양예술학교 교장 ▲78년 납북 ▲83∼86년 북한에서 영화 ‘돌아오지 않는 밀사’‘소금’ 등 17편의 영화제작에 참여 ▲86년 북한탈출 및 미국망명 ▲2001년 극단 신협대표 취임 ▲02년 뮤지컬 ‘크레이지 포유’ 제작
  • ‘중국판 개벽이’ 구출작전 ‘대략 난감’

    중국판 ‘개벽이’가 나타났다. 지난 28일 중국 쿤밍(昆明)시에 사는 한 소녀는 집 앞을 청소하다 옥상 부근에서 나는 개 울음소리를 들었다. 6층 높이의 옥상에 올라가보니 어찌된 영문인지 개 한 마리가 건물과 건물 틈에 끼인 채 20m 공중에 떠 있었던 것. 개는 두 다리로 양 벽을 짚은 채 공중에 뜬 상태로 떨고 있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대원을 비롯한 주민들은 건물 창문을 통해 약 4시간동안 구조에 힘썼으나 개와 구조대와의 거리가 5m가량 떨어져 큰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소방 대원들은 밧줄을 개의 앞다리에 걸쳐 고정시킨 후 힘으로 당겨 건물 사이에서 빼내는 방법을 택했다. 사람들이 힘을 합쳐 가장 가까운 창문가에서 단숨에 밧줄을 잡아 끌자 개는 5m 거리를 날아 창문을 통해 구조되었다. 소방 대원들은 “높이 뿐 아니라 거리도 꽤 멀어 개가 떨어지지 않을까 염려했다.”며 “호기심에 옥상주변을 기웃거리다 건물과 건물 벽 사이에 떨어진 것 같다.”고 전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김석의 갯바위 통신] 움직이는 ‘에기’ 따라 무늬오징어가 졸졸~

    [김석의 갯바위 통신] 움직이는 ‘에기’ 따라 무늬오징어가 졸졸~

    ‘오징어낚시’ 하면 흔히 마른 오징어 산지인 울릉도를 떠올린다. 하지만 최근 남해안 곳곳에서 울릉도와 같은 동해안에서 흔하게 잡히는 물오징어가 아닌 ‘무늬오징어’낚시가 가족낚시의 한 장르로 단단히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중이다. 무늬오징어는 몸통에 큼직한 통뼈를 지니고 있어서 일반적인 물오징어와는 구분이 뚜렷한 종(種). 갑오징어를 연상하면 알기 쉽다. 무늬오징어의 맛도 물오징어와 확연한 차이가 난다. 두텁게 살이 오른 몸통의 쫄깃한 맛도 일품이지만, 물오징어처럼 길지 않고 짧은 다리를 초장에 묻혀 씹어 먹는 맛은 물오징어와 비교할 바가 아니다. 물오징어를 육우에 비한다면, 무늬오징어는 한우 트리플A급이라 해도 무리가 아닐 정도다. 한달 전부터 무늬오징어가 남해안 방파제 곳곳에서 비치기 시작하더니, 최근 절정을 이루고 있다. 이런 호조황은 보통 11월 말까지 이어진다. 초보자도 채 반나절이 못돼 여러 수 낚을 만큼 쉬운 낚시란 것이 장점. 하늘도 푸르고 바람도 선선한데, 무늬오징어 낚시를 떠나보자. 낚싯대는 오징어 전용대를 준비해야 한다. 무늬오징어가 좋아하는 새우와 비슷하게 생긴 ‘에기’란 인조미끼를 물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연출해야 하기 때문. 볼락 루어대처럼 연질대나, 농어 루어대처럼 경질대를 사용하면 다양한 액션을 끌어 내는 데 무리가 따른다. 한번 장만해 놓으면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어 5만∼10만원 정도,3m 내외의 오징어 전용대를 구입하는 게 효율적이다. 릴은 가벼운 것을 사용하는게 좋다. 보통 원줄이 1.5∼2호 정도가 150m 정도 감기는 스피닝 릴이면 된다. 에기를 자주 흔들어 오징어의 입질을 유도하기 위해서 릴을 낚싯대에 달았을 때 릴 시트에 꼭맞는 제품을 사용해야 한다. 낚시 도중 스풀이나 릴 손잡이가 덜그럭 거리면 여간 불편하지 않다. 원줄은 나일론이나 카본이 아닌 합사를 사용해야 한다. 일반적인 루어낚시보다 더 자주, 큰 액션으로 낚싯대를 흔들어 줘야 하기 때문이다. 원줄의 장력이 거의 없어 낚싯대를 흔들었을 때 원줄의 액션이 그대로 에기까지 전달되는 합사줄이 유리하다는 얘기다. 인조미끼인 에기는 어느 낚시점에서나 구입이 가능하다.3000원 내외 싼 것과 1만원 내외의 비싼 것 두 가지 모두 구입하는 게 좋다. 값이 싼 에기는 바닥상황을 모르는 곳에서 먼저 사용하기 위함이다. 바닥에 밧줄, 암초가 있는 곳은 첫 캐스팅에 떨어져 나갈 수도 있다. 어느 정도 바닥지형에 자신이 생기면 비싼 에기로 교체해서 사용하면 된다. 한 가지 팁! 에기를 바닥에 가라앉히며 저킹(낚싯대를 위아래로 흔들어 주며 미끼를 띄웠다가 가라앉히는 반복 동작)을 해줘야만 오징어의 빠른 입질을 받아낼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여수권 무늬오징어낚시 문의는 여수포인트 24 출조점.011-9624-0049.
  • [아프간 피랍자 석방 그후 한달(상)] 탈레반 지지자로 변신한 피랍자들

    아프간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외국인 피랍자들도 악몽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죽음의 문턱을 넘은 사람이 흔히 그렇듯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 등 후유증도 우려된다.억류생활 중 접한 이질적인 이슬람문화에 영향을 받아 아예 이슬람교로 개종한 사람까지 생겨났다. 지난 2001년 9월 탈레반에 10일간 억류되었다가 풀려난 영국 선데이 익스프레스 여기자 이본 리들리. 그녀는 파키스탄 신문 ‘Dawn(돈)’에 기재한 피랍 일기를 통해 당시 억류상황을 상세히 소개했었다. 그녀는 석방 이후 탈레반이 여성들을 왜 억압하는지가 궁금해 코란을 공부했고 이후 코란에 매료돼 이슬람으로 개종, 지금은 아랍 위성방송인 알 자지라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4월 아프간 남서쪽 님로즈 지방에서 탈레반에 납치된 프랑스 구호요원 에릭 담프레빌은 석방 당시 건강이 무척 나빠진 상태였다. 납치기간 내내 밧줄에 묶여 있었고 입에 재갈을 물려 지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석방 직후 그는 “탈레반은 나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며 오히려 우호적인 발언을 했다. 2005년 6월 카불에서 무장세력에 붙잡혔다 24일만에 풀려난 이탈리아 구호활동가 클레멘티나 칸토니도 “납치자들은 나를 매우 잘 대해줬다.”고 증언했었다. 지난 3월 납치돼 2주만에 석방됐던 이탈리아 신문기자 다니엘 마스트로자코모는 석방 직후 BBC와의 인터뷰에서 “사막 한가운데 양 우리만큼 작은 은신처를 15차례나 옮겨다녀야 했다.”면서 악몽 같던 억류생활을 회고했다. 하지만 협상 교섭이 성사되는 순간 탈레반 사령관이 자신을 껴안으며 영어로 “신의 뜻이라면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며 격려했다고 전했다. 한편 7월18일 카불 남서부 와르다크주에서 다른 기술자 1명과 함께 납치된 독일인 루돌프 블레히슈미트는 아직 석방되지 않고 있다. 이는 테러단체와는 협상하지 않겠다는 독일 정부의 강경한 입장 때문이다. 구동회기자 kugija@seoul.co.kr
  • [서울광장] 북·일 외교의 진화 보고 싶다/황성기 논설위원

    [서울광장] 북·일 외교의 진화 보고 싶다/황성기 논설위원

    외교란 게 처음도 끝도 명분과 실리를 좇는 생물체다. 그제 제네바에서 끝난 북한과 미국의 관계정상화 실무회의도 그렇다.1년 전만 해도 소망만 했지, 상상은 못했던 핵불능화 합의를 이끌어냈다. 퇴행과 진화를 반복하는 생물체처럼 양국은 핵이란 밧줄을 밀고당기다가 종국에는 비핵화와 수교라는 목표점에 도달할 것이다. 제네바 회의는 그런 점에서 6자회담의 앞날, 북·미관계의 진전에 낙관적 믿음을 던진다. 5일부터 북한과 일본이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같은 회의를 가진다. 지난 3월 베트남 하노이 1차 회의는 납치문제로 고성만 주고받았다.2차 회의도 비슷하지 말란 법은 없다. 그렇지만 이전과 비교해 여건과 징후가 좋다. 먼저 북·미 관계 순항이란 여건의 변화가 있다. 언제까지 “납치문제 해결 없이는 국교정상화는 없다.”고 외치기엔 일본이 디딜 수 있는 지형은 갈수록 좁아진다. 미국의 잰 발걸음을 따라가거나 늦추기엔 일본의 힘이 달린다. 국제정세란 엄혹하고 카멜레온처럼 자주 색깔을 바꾼다.5년 전만 해도 북한에 접근하려는 일본의 발목을 미국이 잡아채지 않았는가.2002년 10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북·일 수교협상이 열렸다. 그해 9월 김정일·고이즈미 두 정상이 합의한 평양선언 1항의 실천이었다. 협상은 아무런 성과없이 끝났다. 북·일 협상 직전 미국은 제임스 켈리 차관보를 평양에 보낸다. 그가 귀환길에 들른 도쿄에서 풀어놓은 보따리는 북한의 고농축우라늄(H EU)개발 의혹이었다. 전세계가 깜짝 놀라고 2차 핵위기가 시작됐다. 테이블에 재를 뿌린 협상이 잘될 리 없었다. 혹시 제지당할까 봐 북·일 정상회담을 합의해 놓고 발표 며칠 전에서야 미국에 통보한 일본이다. 당시 고이즈미의 국교정상화 의지는 강했다. 그런 고이즈미도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의 대북 강경책에는 두 손 들었다. 납치문제까지 엉기면서 미국의 의도대로 북·일관계는 빙하기에 접어든다.2·13합의는 해빙기로 가는 전환점이었다. 북한을 대하는 미국이 변했고, 북한도 미국을 믿기 시작했다. 지금 부시의 핵해결 의지는 어느 때보다 강하다. 마치무라 노부타카 외상이 대북 수해 지원의 운을 떼었다. 좋은 징조다.2004년 8월 이후 제재의 끈을 조이기만 했던 일본으로선 주목할 만한 변화다. 그렇다고 아베 신조 총리의 강경책이 뿌리부터 바뀌었다고 보기에는 이르다. 그것을 판단할 첫 무대가 울란바토르 회의다.6자회담의 5개 워킹그룹 중 유일하게 진도가 나가지 않는 게 북·일 실무그룹이다. 이번 회의조차 진전이 없으면 북한보다는 일본쪽이 욕을 먹기 십상이다. 아베 총리가 지난 5년간 주도한 ‘북조선 봉쇄작전’으로 얻은 것은 별달리 없다. 일부 납치피해자와 그 가족을 데리고 온 공은 고이즈미 총리의 몫이다. 목줄 죄기로 끄떡할 북한이 아니라는 사실은 북·미관계의 역사에서 학습해야 한다. 핵을 제거하자는 6자회담 내 워킹그룹에서 납치문제를 해결하긴 어렵다. 울란바토르에선 허물어진 양국의 신뢰를 쌓는 게 급선무다. 납치는 별도의 협상 테이블을 만들고 교섭대표도 격상해 풀어야 할 문제다. 북한과 긴장관계를 유지해 아베 총리가 지지도를 높이겠다는 전략이 아니라면 국교정상화의 조건으로 내건 납치해결이란 외통수도 물리는 게 좋을 것이다. 안보와 납치해결이란 명분과 실리를 챙길 만한 이니셔티브가 아직도 아베 총리에겐 있다. 황성기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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