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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섶에서] 아빠의 시간/박록삼 논설위원

    말이 좋아 등교 개학이지 실상은 변형된 온라인 수업이다. 중1 아이는 학년별로 한 주씩, 초4 둘째는 일주일에 딱 하루 학교에 간다. ‘드디어 학교 간다’며 좋아했던 아내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세 끼 밥 차리랴, 간식 챙기랴, 온라인 등교 체크나 숙제는 잘 제출했는지 확인하랴 눈코 뜰 새 없다. 아이들 역시 친구들과 어울릴 시간은 여전히 없고, 엄마와 씨름하기는 마찬가지다. 퇴근하면 아내는 반쯤 뚜껑이 열린 채로 붉으락푸르락하고 있고, 아이 역시 반쯤 얼이 나가 있어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이기 일쑤다. 아이의 허술한 학습 상황을 일러바치는 아내 앞에서 혼내는 시늉을 하다가 아이방에서 살살 달래주는 게 일찍 귀가하는 날의 일과 중 하나다. 다들 할 말이 많다. 양쪽을 왔다 갔다 하며 아빠로서 하는 말은 결국 하나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봐라, 아이(혹은 엄마)가 얼마나 힘들겠냐, 상대방을 이해한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거다 등등. 뻔하거나 허망한 말이다. 그래도 아빠가 있는 시간에는 뭔가 집안의 평화가 지켜지고, 이해충돌자 간의 조정이 이뤄진다 생각하니 내 존재의 이유가 있는 듯싶다. 아버지의 반도 못 따라가지만, 위엄 있으면서도 따뜻했던 그 모습이 자꾸 생각나는 시절이다.
  • “빨갱이 가족이란 낙인 두려워…금정굴 쪽은 쳐다도 안 봤어요”

    “빨갱이 가족이란 낙인 두려워…금정굴 쪽은 쳐다도 안 봤어요”

    “어려서는 내가 금정굴을 하루이틀 걸러 다니면서 무섭지도 않은지 거길(굴 위를) 건너뛰고 그랬지요. 그런데 아버지 죽고 나서 한 20여년 동안 한 번도 가지를 않았어요. 그쪽은 쳐다도 안 보고 얼씬도 안 하고 싶더라고요.”(이병순 금정굴유족회 고문) 경기 고양시 일산서구 일산동 황룡산 자락에 있는 18m 깊이의 수직 폐광 ‘금정굴’. 한때 ‘금구뎅이’라고 불렸던 영광의 기억도, 동네 꼬마들이 폴짝폴짝 뛰놀던 추억도 온데간데없다. 금정굴은 이제 ‘무덤’이다. 1950년 10월 9일부터 25일까지 고양·파주 지역의 민간인 160여명이 ‘빨갱이’로 낙인찍혀 재판 한 번 받지 못하고 학살당한 채 금정굴에 버려졌다. 70년이 지났지만 희생자들은 한 몸 온전히 누일 곳 없이 떠돌이 신세다. 1995년 유족들이 발굴 작업을 벌여 153구 이상의 유해가 세상에 나왔다.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만 76명이다. 유해를 모실 곳이 마땅치 않아 지금까지 납골당만 세 차례 옮겼다.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금정굴 민간인 학살 사건을 “경찰에 의한 불법적인 집단학살”로 결론 내렸지만, 희생자들의 넋은 위로받지 못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권고했던 평화공원 설립도, 영구적인 유해 안치소 설치도 아직 이뤄지지 못했다. 유족들은 애가 끓는다. 부역 혐의자 가족이라는 낙인이 두려워 문민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금정굴 쪽은 애써 외면했다. 억울한 죽음을 애도할 권리마저 박탈당한 채 살아온 세월이 수십 년이다. 서울신문은 24일 채봉화(74) 금정굴유족회장과 이병순(87) 고문을 만났다. 1950년 10월 9일. 당시 열일곱 소년이었던 이 고문의 뇌리에는 70년 전 모습이 스틸사진처럼 남아 있다. 집 앞에서 두 사람씩 삐삐선(군용통신선)에 묶인 채 이동하는 행렬을 목격했다. 맨 뒤에 아버지 이봉린이 있었다.보리밭 갈다 끌려간 아버지… 유해안치소도 없이 ‘떠돌이 신세’ 한국전쟁이 터지고 3일 만에 수도를 빼앗긴 국군이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무렵 이봉린은 능곡국민학교에서 열린 유엔군 환영대회에 나갔다가 치안대에 끌려갔다. 인민군이 마을을 점령한 시기 ‘농촌위원장’을 맡아 공출량을 계산하는 부역을 했다는 이유였다. “우리 아버지가 일산리 구장(區長)을 했었거든. 동네에서 추켜세우는 사람이잖아. 주변에서 ‘형님이 일 봐야지’ 하니까 맡게 된 건데….” 어머니와 7남매는 잡혀간 아비의 끼니 걱정에 매일 번갈아 수십 킬로 걸어 밥을 날랐다. 그러던 어느 날 고양경찰서에서 “(부역 혐의자들이) 문산으로 좌익 심사를 받으러 가서 오늘은 밥을 안 받는다”고 했다. 이 고문은 “문산을 가는 줄 알았지 금정굴로 가는 줄 누가 알았겠느냐”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행렬을 몰래 뒤따랐던 다른 희생자 유족을 통해 이 고문 가족은 진실을 알게 됐다. “아이고, 심사가 뭡니까. 그 구뎅이로 가서 다 쏴죽였어요!” 장남이었던 이 고문은 그 길로 작은아버지, 마을 어른들과 함께 사다리와 밧줄을 챙겨 금정굴로 향했다. 시신이라도 수습하자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시신은 찾지 못했고 피투성이가 된 채 금정굴에 떨어져 “살려 달라”고 외치는 한 사람을 구했다. 총알을 빗맞은 덕에 목숨을 건진 동네 주민 이경선이었다. 금정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이씨는 이후 죽을 때까지 고향 땅을 밟지 않았다. 금정굴에서 학살이 처음 벌어진 이날 이봉린을 포함해 46명이 희생됐다.희생자 가족은 공포에 사로잡혀 침묵해야 했다. 그날 밤 이 고문의 집에 들이닥친 경찰은 “시체 가져왔느냐”, “빨갱이 찾으려고 금정굴에 갔다 왔느냐”고 화를 내며 장작 더미며 아궁이 구멍이며 죄다 창으로 쑤셔 댔다. “그날 금정굴에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누가 고발을 했는지 자전거를 탄 태극단 놈들이 서넛 올라오고 있더라고. 길이 엇갈려서 망정이지 거기서 마주쳤다면 우리도 다 죽는 거야. 일곱 사람이 갔었는데…. 그래서 잠자코 살았던 거지.” “이제는 시대가 달라져 말이라도 하지, 예전에는 아버지가 ‘빨갱이’로 돌아가셨다고 어디 가서 말도 못해….” 채 회장은 45년의 세월 동안 아버지의 죽음을 가슴에 묻고 살았다. 아버지 채기동은 보리밭을 갈다가 총을 멘 치안대 3명에게 끌려간 뒤 소식이 끊겼다. 그때 고작 네 살이었던 채 회장은 아버지와의 기억이 없다. 그는 졸지에 과부가 된 어머니와 금쪽같은 외아들을 잃은 할머니의 넋두리로 부친을 기억한다. “우리 엄마가 맨날 그러셨지. 봉화야, 네 아버지 금정구뎅이 가서 죽었다. 남들이 그런다.”채 회장은 금정굴과 가까운 파주에서 평생을 살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고 45년이 지난 1995년에서야 처음으로 금정굴을 찾았다. 뉴스로 유해 발굴 소식을 전해 듣고 동생과 함께 갔다. 채기동은 6년 동안 강제징용을 당했다가 해방 이후 돌아왔다. 채 회장은 “9척 장신에 원체 기운이 장사라 인근에서 아버지를 당해 낼 사람이 없었다더라”고 했다. “총을 멘 치안대가 당신을 찾으니 도망가라”는 말에도 채기동은 “잘못한 것이 없다”며 당당했다. ‘부역자 가족’의 삶은 매 순간 고통으로 점철돼 있었다. 채 회장은 “어머니가 생계를 위해 봇짐 장사를 하려면 도민증이 필요했는데 우리한테는 도민증 허가를 안 내줘서 어머니가 ‘꼼짝없이 죽겠다’며 우셨다”며 “핍박받으면서 세 딸을 키운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부터 난다”고 했다. 채 회장이 끝까지 파주를 떠나지 않은 건 어머니의 유언 때문이다. 채 회장 가족은 시간이 흘러 아버지에게 부역 혐의자라는 누명을 씌운 마을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됐다. 어머니는 “내가 죽어도 넌 반드시 이 동네에 살면서 남의 눈에 피눈물 흘리게 한 사람들이 어떻게 사나 두고 보라”는 말을 남겼다.“신도시 주민들은/발 밑이 저승인 사실은 모른 채/오래전 이 마을을 휩쓸고 간/역병보다도 더 고약한 숙청은 모른 채/두개골 정강뼈 쇄골 잘근잘근 밟으며/황솥밭 샛길을 오갈 뿐이다”(손세실리아, ‘뼈무덤’) 용기를 내 세상에 나온 유족들은 긴 싸움을 했다. 승리도 수차례 맛봤다.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진실 규명을 결정하면서 “최종 책임은 국가에 있고 희생자 상당수는 도피한 부역 혐의자 가족이거나 이와 무관한 지역 주민이었다”고 했다. 2012년에는 국가 배상 소송에서 승소해 “희생자 2억원, 배우자 1억원, 부모·자식 각 5000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확정됐다. 수차례 무산됐던 ‘6·25전쟁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 조례안’도 2018년 고양시의회에서 통과됐다.그럼에도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희생자가 제대로 된 위령시설 없이 떠돌고 있고 유족이 겪는 고통도 여전하다. 일부 보훈단체 회원들은 아직도 희생자를 ‘토착 빨갱이’라고 부른다. 보수 정당 시의원은 조례 제정을 반대하며 “(희생자들은) 김일성 앞잡이 노릇을 했다”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금정굴 현장에 조성될 계획인 평화공원은 “납골시설이 들어오면 집값 떨어진다”는 일부 주민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채 회장은 “지금 희생자들을 임시 안치한 세종추모공원은 너무 멀다. 가까운 곳에 희생자들을 모시고 자주 왔다 갔다 하는 게 유족들의 소원”이라고 말했다. 이어 “죄도 없이 잡혀가 죽고, 설령 죄가 있다고 해도 재판 한 번 열지 않고 죽은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고문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게 한 전쟁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진선민 기자 jsm@seoul.co.kr
  • “‘빨갱이’ 가족이란 낙인 두려워 금정굴 쪽은 쳐다도 안 봤어요”

    “‘빨갱이’ 가족이란 낙인 두려워 금정굴 쪽은 쳐다도 안 봤어요”

    “어려서는 내가 금정굴을 하루이틀 걸러 다니면서 무섭지도 않은지 거길(굴 위를) 건너뛰고 그랬지요. 그런데 아버지 죽고 나서 한 20여년 동안 한 번도 가지를 않았어요. 그쪽은 쳐다도 안 보고 얼씬도 안 하고 싶더라고요.”(이병순 금정굴유족회 고문) 경기 고양시 일산서구 일산동 고봉산 자락에 있는 18m 깊이의 수직 폐광 ‘금정굴’. 한때 ‘금구뎅이’라고 불렸던 영광의 기억도, 동네 꼬마들이 폴짝폴짝 뛰놀던 추억도 온데간데없다. 금정굴은 이제 ‘무덤’이다. 1950년 10월 9일부터 25일까지 고양·파주 지역의 민간인 160여명이 ‘빨갱이’로 낙인찍혀 재판 한 번 받지 못하고 학살당한 채 금정굴에 버려졌다. 70년이 지났지만 희생자들은 한 몸 온전히 누일 곳 없이 떠돌이 신세다. 1995년 유족들이 발굴 작업을 벌여 153구 이상의 유해가 세상에 나왔다.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만 76명이다. 유해를 모실 곳이 마땅치 않아 지금까지 납골당만 세 차례 옮겼다.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금정굴 민간인 학살 사건을 “경찰에 의한 불법적인 집단학살”로 결론 내렸지만, 희생자들의 넋은 위로받지 못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권고했던 평화공원 설립도, 영구적인 유해 안치소 설치도 아직 이뤄지지 못했다. 유족들은 애가 끓는다. 부역 혐의자 가족이라는 낙인이 두려워 문민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금정굴 쪽은 애써 외면했다. 억울한 죽음을 애도할 권리마저 박탈당한 채 살아온 세월이 수십 년이다. 서울신문은 24일 채봉화(74) 금정굴유족회장과 이병순(87) 고문을 만났다. ●“묶여서 끌려가던 행렬 속 아버지, 금정굴 저승 가는 길이었네” 1950년 10월 9일. 당시 열일곱 소년이었던 이 고문의 뇌리에는 70년 전 모습이 스틸사진처럼 남아 있다. 집 앞에서 두 사람씩 삐삐선(군용통신선)에 묶인 채 이동하는 행렬을 목격했다. 맨 뒤에 아버지 이봉린이 있었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3일 만에 수도를 빼앗긴 국군이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무렵 이봉린은 능곡국민학교에서 열린 유엔군 환영대회에 나갔다가 치안대에 끌려갔다. 인민군이 마을을 점령한 시기 ‘농촌위원장’을 맡아 공출량을 계산하는 부역을 했다는 이유였다. “우리 아버지가 일산리 구장(區長)을 했었거든. 동네에서 추켜세우는 사람이잖아. 주변에서 ‘형님이 일 봐야지’ 하니까 맡게 된 건데….” 어머니와 7남매는 잡혀간 아비의 끼니 걱정에 매일 번갈아 수십 킬로 걸어 밥을 날랐다. 그러던 어느 날 고양경찰서에서 “(부역 혐의자들이) 문산으로 좌익 심사를 받으러 가서 오늘은 밥을 안 받는다”고 했다. 이 고문은 “문산을 가는 줄 알았지 금정굴로 가는 줄 누가 알았겠느냐”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행렬을 몰래 뒤따랐던 다른 희생자 유족을 통해 이 고문 가족은 진실을 알게 됐다. “아이고, 심사가 뭡니까. 그 구뎅이로 가서 다 쏴죽였어요!” 장남이었던 이 고문은 그 길로 작은아버지, 마을 어른들과 함께 사다리와 밧줄을 챙겨 금정굴로 향했다. 시신이라도 수습하자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시신은 찾지 못했고 피투성이가 된 채 금정굴에 떨어져 “살려 달라”고 외치는 한 사람을 구했다. 총알을 빗맞은 덕에 목숨을 건진 동네 주민 이경선이었다. 금정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이씨는 이후 죽을 때까지 고향 땅을 밟지 않았다. 금정굴에서 학살이 처음 벌어진 이날 이봉린을 포함해 46명이 희생됐다. 희생자 가족은 공포에 사로잡혀 침묵해야 했다. 그날 밤 이 고문의 집에 들이닥친 경찰은 “시체 가져왔느냐”, “빨갱이 찾으려고 금정굴에 갔다 왔느냐”고 화를 내며 장작 더미며 아궁이 구멍이며 죄다 창으로 쑤셔 댔다. “그날 금정굴에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누가 고발을 했는지 자전거를 탄 태극단 놈들이 서넛 올라오고 있더라고. 길이 엇갈려서 망정이지 거기서 마주쳤다면 우리도 다 죽는 거야. 일곱 사람이 갔었는데…. 그래서 잠자코 살았던 거지.”●“유해 발굴’ 뉴스 보고 45년 만에야 금정굴을 찾았어.” “이제는 시대가 달라져 말이라도 하지, 예전에는 아버지가 ‘빨갱이’로 돌아가셨다고 어디 가서 말도 못해….” 채 회장은 45년의 세월 동안 아버지의 죽음을 가슴에 묻고 살았다. 아버지 채기동은 보리밭을 갈다가 총을 멘 치안대 3명에게 끌려간 뒤 소식이 끊겼다. 그때 고작 네 살이었던 채 회장은 아버지와의 기억이 없다. 그는 졸지에 과부가 된 어머니와 금쪽같은 외아들을 잃은 할머니의 넋두리로 부친을 기억한다. “우리 엄마가 맨날 그러셨지. 봉화야, 네 아버지 금정구뎅이 가서 죽었다. 남들이 그런다.” 채 회장은 금정굴과 가까운 파주에서 평생을 살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고 45년이 지난 1995년에서야 처음으로 금정굴을 찾았다. 뉴스로 유해 발굴 소식을 전해 듣고 동생과 함께 갔다. 채기동은 6년 동안 강제징용을 당했다가 해방 이후 돌아왔다. 채 회장은 “9척 장신에 원체 기운이 장사라 인근에서 아버지를 당해 낼 사람이 없었다더라”고 했다. “총을 멘 치안대가 당신을 찾으니 도망가라”는 말에도 채기동은 “잘못한 것이 없다”며 당당했다. ‘부역자 가족’의 삶은 매 순간 고통으로 점철돼 있었다. 채 회장은 “어머니가 생계를 위해 봇짐 장사를 하려면 도민증이 필요했는데 우리한테는 도민증 허가를 안 내줘서 어머니가 ‘꼼짝없이 죽겠다’며 우셨다”며 “핍박받으면서 세 딸을 키운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부터 난다”고 했다. 채 회장이 끝까지 파주를 떠나지 않은 건 어머니의 유언 때문이다. 채 회장 가족은 시간이 흘러 아버지에게 부역 혐의자라는 누명을 씌운 마을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됐다. 어머니는 “내가 죽어도 넌 반드시 이 동네에 살면서 남의 눈에 피눈물 흘리게 한 사람들이 어떻게 사나 두고 보라”는 말을 남겼다.●아직 끝나지 않은 금정굴 사건 “신도시 주민들은/발 밑이 저승인 사실은 모른 채/오래전 이 마을을 휩쓸고 간/역병보다도 더 고약한 숙청은 모른 채/두개골 정강뼈 쇄골 잘근잘근 밟으며/황솥밭 샛길을 오갈 뿐이다”(손세실리아, ‘뼈무덤’) 용기를 내 세상에 나온 유족들은 긴 싸움을 했다. 승리도 수차례 맛봤다.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진실 규명을 결정하면서 “최종 책임은 국가에 있고 희생자 상당수는 도피한 부역 혐의자 가족이거나 이와 무관한 지역 주민이었다”고 했다. 2012년에는 국가 배상 소송에서 승소해 “희생자 2억원, 배우자 1억원, 부모·자식 각 5000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확정됐다. 수차례 무산됐던 ‘6·25전쟁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 조례안’도 2018년 고양시의회에서 통과됐다. 그럼에도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희생자가 제대로 된 위령시설 없이 떠돌고 있고 유족이 겪는 고통도 여전하다. 일부 보훈단체 회원들은 아직도 희생자를 ‘토착 빨갱이’라고 부른다. 보수 정당 시의원은 조례 제정을 반대하며 “(희생자들은) 김일성 앞잡이 노릇을 했다”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금정굴 현장에 조성될 계획인 평화공원은 “납골시설이 들어오면 집값 떨어진다”는 일부 주민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채 회장은 “지금 희생자들을 임시 안치한 세종추모공원은 너무 멀다. 가까운 곳에 희생자들을 모시고 자주 왔다 갔다 하는 게 유족들의 소원”이라고 말했다. 이어 “죄도 없이 잡혀가 죽고, 설령 죄가 있다고 해도 재판 한 번 열지 않고 죽은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고문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게 한 전쟁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진선민 기자 jsm@seoul.co.kr
  • “아이 꼭 안고 죽은 엄마들… 전쟁 비참함 알리는 게 마지막 임무”

    “아이 꼭 안고 죽은 엄마들… 전쟁 비참함 알리는 게 마지막 임무”

    “전투가 끝나고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는데 오빠가 보이지 않았어. 여기저기 찾아보니 오빠가 헌 옷을 입고 죽어 있었지. 시신을 수습할 겨를도 없이 모래로 대충 덮어 주고 올 수밖에 없었어.” 지난 22일 서울 마포구 마포보훈회관에서 만난 여군 참전용사 박순애(83)씨는 처참했던 전투 상황을 설명하던 중 오빠의 죽음을 떠올리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옆에서 박씨의 설명을 듣던 남편 김우춘(83)씨도 “요즘 사람에게 그때의 일을 설명하면 잘 믿지 못한다”며 거들었다. 이들은 한국에 얼마 남지 않은 참전유공자 부부다. 부부는 1951년 봄 황해도 인근에서 활동한 8240부대 ‘구월산 민간인 유격대’ 소속이었다. 박씨는 황해도 인근 곰념섬에서 활약하며 북한군 침투를 저지했다. 김씨는 북한군의 기지를 기습하는 상륙작전에 참여했다. 15살에 참여한 전쟁이란 말 그대로 ‘아픔’이었다. 황해도가 고향인 박씨는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은율군 염천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소년단 회장을 할 정도로 총기가 넘치는 학생이었다. 순탄했던 학교 생활은 전쟁으로 끝이 났다. 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폭격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박씨는 “누군가가 집 대문을 두드려 나가 보니 코가 큰 외국 사람이 서 있었다”며 “어머니가 미군 30명분의 밥을 해 줬던 것이 내가 기억하는 전쟁의 첫 모습”이라고 회상했다. 1·4 후퇴를 앞두고 그는 피란길에 올랐다. 맨발로 나룻배를 타고 도착한 곳은 은율군 인근에 있는 곰념섬이었다. 무사히 피란처에 도착했지만 굶주렸다. 입대하면 굶지 않을 거란 생각에 당시 여대장인 이정숙의 권유로 1951년 봄부터 유격대 활동을 시작했다. 200명 남짓한 유격대의 생활은 열악했다. 허름한 초가집 한방에 40여명이 모여 누웠다. 8~10채의 초가집을 막사로 사용했다. 전염병으로 죽어 나가는 이들이 속출했다.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북한군 눈을 피해 뭍으로 나가야만 했다. 길목에 설치된 지뢰도 피해야 했다. 박씨는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기 일쑤였고, 미군이 먹다 남긴 닭다리를 먹는 게 그나마 잘 먹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남편 김씨는 서해 최북단에서 활동했다. 연평도·백령도 등 현재의 ‘서해 5도’를 기점으로 황해도 인근 섬인 초도 등을 기습하는 상륙작전에 주로 참여했다. 빗발치는 총알 속에서도 작은 배에서 내려 적진을 향해 뛰었다. 요즘 김씨의 기억은 하루가 다르게 희미해진다. “이젠 드문드문 떠오르는 게 전부야.” 박씨의 임무는 물골을 따라 침투하는 북한군을 막아내는 것이었다. 그는 대원들과 함께 섬 바로 앞 물속에 몸을 숨겼다. 북한군은 총이 물에 젖을까 양팔을 위로 들고 걸어왔는데 그 순간 돌멩이와 몽둥이로 기습했다. 전투의 결말은 늘 비극이었다. 김씨가 목격한 장면은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길가에는 어머니들이 웅크린 자세로 죽어 있었다. 아이를 꼭 안고 죽음을 맞은 것이다. 이들이 숨기 위해 파놓은 굴에는 어머니를 잃은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박씨는 “우리 어머니도 박격포 공격이 시작되면 나와 동생을 끌어안기부터 했다”고 말했다. 전쟁이 끝났지만 곤궁한 삶은 그대로였다. 부부는 황폐화된 전국을 돌아다니며 어려운 생활을 이어 갔다. 바구니를 들고 다니며 음식을 구걸하기도 했다. 부부는 각자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살다가 21살이 되던 해 지인의 소개로 만났다. 김씨는 처음에는 아내가 참전유공자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 우연히 그로부터 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도 황해도에서 비슷한 시기 피란을 내려온 같은 실향민이자 전쟁을 같이 치른 전우애로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인생의 황혼기를 보내고 있다. 부부는 코로나19가 오기 전 일주일에 세 번은 함께 청소년을 대상으로 안보교육을 했다. 청소년들이 부부의 얘기에 큰 관심을 가져 주기 때문에 보람을 느꼈다. 하지만 이들은 인터뷰 내내 걱정이 많은 표정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씨는 “5년 전만 해도 부부 참전용사 5쌍 정도가 모임을 했다”며 “이제는 소식도 다 끊겨 몇 명이 살아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정부는 부부 참전용사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파악하고 있지 않다. 김씨는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우리 부부에겐 이번 6·25 70주년이 마지막 기념일이 될 수도 있어. 80주년을 맞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 젊은 세대에게 전쟁의 비참함을 알려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게 우리의 마지막 임무야.”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코로나19, 마스크 가림막 혼밥이 무기

    코로나19, 마스크 가림막 혼밥이 무기

    코로나19 감염에 취약한 집단시설이라도 마스크 착용, 근무시 가림막 설치, 지그재그 좌석배치, 혼밥 식사 등 거리두기를 실천한 시설에서는 추가 피해가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중앙방역대책본부는 23일 각종 취약집단시설에서 코로나19로 인한 추가 피해가 최소화한 우수 사례를 소개했다. 서울 강서구 영렘브란트 학원에서는 강사가 확진돼 원생들의 집단 감염이 우려됐으나 추가 확진환자는 원생 1명에 그쳤다. 이 강사는 원생 35명에게 미술 수업을 하고 같은 학원 강사 3명과 접촉했으나 항상 마스크를 착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그 결과 발병률은 2.6%에 그쳤다. 송파구 마켓컬리 물류센터에서는 일용직 근로자 1명이 확진 판정을 받았으나 추가 확진환자가 없었다. 방역당국은 “출퇴근 명부를 작성하고 다른 작업장과의 접촉이나 직장내 동선을 최소화하는 등 생활방역수칙이 잘 이뤄졌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금천구 현대홈쇼핑 콜센터에서는 직원들에게 식사 시 다른 사람과 거리를 두고 혼자 밥을 먹는 ‘혼밥’을 권장하고 근무자 책상에 가림막을 설치하는 한편 좌석도 지그재그로 배치했다. 그 결과 콜센터 내 나머지 종사자 69명 가운데 5명만 추가로 감염돼 발병률이 7.2%에 그쳤다. 권준욱 중앙방역대책본부 부본부장은 “마스크 착용 등 생활방역수칙을 철저히 지키고 시설 내 근무환경을 개선하고 직장 내 불필요한 접촉이나 동선을 최소화하면 같은 유형의 시설이라도 코로나19가 침입했을 때 피해 규모가 매우 적다는 점을 시사한다”고 밝혔다. 권 부본장은 “불가피하게 모임을 할 때는 QR코드로 출입을 관리하고 실내에서도 마스크를 쓰라고 이야기하는 그런 장소에서 모임을 해달라”고 덧붙였다. 세종 박찬구 선임기자 ckpark@seoul.co.kr
  • 하리수 “미키정과 결혼 후 자궁이식까지 생각”

    하리수 “미키정과 결혼 후 자궁이식까지 생각”

    하리수가 미키정과의 결혼, 이혼 등 루머에 대해 해명했다. 지난 22일 방송된 SBS플러스 ‘밥은 먹고 다니냐?’에는 가수 겸 배우 하리수가 출연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하리수는 지난 2007년 미키정과 결혼해 10년의 결혼생활을 했지만 지난 2017년 이혼했다. 이날 하리수는 전 남편 미키정에 대해 “남자들과의 스킨십을 정말 싫어한다. 내가 트랜스젠더라고 해서 ‘하리수 남편은 게이냐, 여자에서 남자가 된 거냐’ 루머가 있었다. 계속 인신공격을 받고 비하를 당했다. 그런 걸 듣고도 의연하게 나를 지켜줬던 게 고마웠다”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그러면서 하리수는 “아이를 낳고 싶은 게 사람의 욕심이더라. 그래서 사실 성전환자에게서 나온 자궁을 이식받으려는 생각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의학적으로 가능하지만 이식하려면 면역억제제를 최소 1년 복용해야 하고 시험관 아기처럼 해야 했다. 남편이 원한 건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하리수는 미키 정과 이혼 후 새로운 사람을 만나 2년째 열애 중이라는 소식도 전했다.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조영학의 번역과 반역] ‘꽃며느리밥풀’에 대한 보고서

    [조영학의 번역과 반역] ‘꽃며느리밥풀’에 대한 보고서

    한국 야생화에 재미있는 이름이 많다. 열매가 갈고리처럼 달라붙어서 ‘도둑놈의갈고리’, 지린내가 나니까 ‘쥐오줌풀’, 열매가 개의 성기를 닮았다고 ‘개불알풀’…. 그 밖에 ‘광릉요강꽃’, ‘도둑놈의지팡이’, ‘개털이슬’, ‘족도리풀’들도 특이한 모양이나 특성을 따라 이름을 붙인 경우다. 사연을 담은 이름도 적지 않다. 사위질빵은 사위를 향한 장모의 사랑이 담뿍 담겨 있다. 사위가 처가에 와서 나무를 하러 가는데 너무 많이 지면 힘들다며 장모가 이 덩굴식물로 질빵을 만들어 주었다. 사위질빵은 쉽게 끊어지는 특성이 있다. 아름다운 미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며느리밑씻개는 잎과 줄기에 작고 딱딱한 가시가 촘촘히 나 있는 풀이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미워해서, 볼일을 본 뒤 휴지 대신 밑을 닦으라고 이 풀을 내주었단다. 이름만으로도 며느리에 대한 증오가 배어나오는 듯하다. 이현세의 만화, ‘며느리밥풀꽃에 대한 보고서’에 등장하는 꽃도 며느리밑씻개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옛날에 며느리가 밥이 잘 됐나 보려고 밥풀 몇 알을 입에 넣다가 시어머니한테 들켰다.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밥을 훔쳐 먹는다며 때려 죽였는데 그 후 며느리 무덤가에 밥풀을 닮은 꽃이 피었다. 실제로 꽃을 보면 피처럼 붉은 꽃잎 한가운데 밥풀 무늬 두 개가 선명하다. 유형은 비슷하건만, 사위질빵은 장모의 사랑을, 며느리밑씻개 등은 시어머니의 서슬 푸른 증오를 담고 있다. 백년손님 사위는 씨암탉까지 잡아 고이 모시고, 며느리는 몸종 정도로 여기던 풍습을 꽃 이름에서까지 확인하는 듯해 늘 씁쓸한 기분이다. 얼마 전 태백산에서 기생꽃을 보았다. 기생꽃은 멸종위기 2급의 희귀식물이다. 이 꽃 역시 모양 때문에 이름을 얻었는데, 희고 고운 꽃이 기생의 고운 얼굴이나 장신구를 닮았다는 것이다. 나는 귀한 꽃을 만난 기쁨에 SNS에 꽃 사진을 올리고 이름까지 달아 주었다. 얼마 후 한 여성이 댓글을 달았는데 창피하게도 난 그 댓글을 읽고 나서야 기생꽃이라는 이름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름 성차별이나 여성비하 언어에 민감한 편이라 여겼건만 나 역시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댓글은 “꽃 이름에 꼭 이렇게 여성비하 개념이 들어가야 할까요?”였다. 꽃 이름 갖고 웬 호들갑이냐 할지 몰라도, 호칭은 부르거나 불리는 대상의 존재를 규정하므로 모든 차별의 기본이라 할 수 있다. 며느리가 남편 식구들을 서방님,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게 온당치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노예제 시대에 흑인들을 학대하고 죽이고 강간하고 매매하는 게 가능했던 이유도, 노예를 사람이 아니라 가축으로 분류했기 때문이라 들었다. 꽃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기 위해서라지만 그 이름이 “잔치나 술자리에서 노래나 춤, 풍류로 남성의 흥을 돋우는 일이 직업인 여성”을 뜻한다면 여성 입장에서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며느리밑씻개의 어원은 일본 이름 “마마코노시리누구아”에서 비롯했다. 마마코는 의붓자식이란 뜻이고 시리누구아는 밑씻개를 뜻한다. 일본에서 왜 “의붓자식”이 미움의 대상인지 모르겠으나, 그걸 우리말화하면서 작명자가 굳이 며느리로 바꾸었다면 그 “남자”가 평소 여성을 어떤 존재로 여겼는지 짐작할 만하다. 우리 삶 속에는 여전히 며느리밥풀꽃, 며느리밑씻개 같은 차별의 언어들이 차고도 넘친다. 낙엽을 화냥기에 비유하고 ‘인어상 찌찌’ 운운하는 글을 쓰거나 읽고도 아무렇지 않고 심지어 박수갈채를 보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기생꽃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아름다움을 칭송했는데 무슨 문제냐는 투다.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는 퍼포먼스가 유행인가 보다. 거대담론에 대한 문제제기도 좋지만 내 주변에, 내 생활에, 내 의식ㆍ무의식 속에 남아있는 차별의 잔재도 한번쯤 돌아볼 일이다. 그런데 이현세는 며느리밥풀꽃이라는 이름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그 꽃의 정확한 이름은 꽃며느리밥풀이다.
  • 냉엄한 분단의 현실… 그래도 평화가 밥이고 통일이 밥이다

    냉엄한 분단의 현실… 그래도 평화가 밥이고 통일이 밥이다

    대한민국의 국시는 굳건한 민주주의를 토대로 한반도에서 평화와 통일을 실현하는 것이어야 한다. 문득 ‘유성환 의원의 통일국시 발언 사건’이 떠오른다. 1986년 10월 14일 오전,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야당 소속 유성환 의원이 국무총리를 상대로 “우리나라의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어야 한다고 보는데 총리의 의견은 무엇이냐”고 질문한 것이 화근이 돼 논란 끝에 유 의원이 구속돼 국회의원직을 박탈당한 사건이다. 이것은 한반도 분단의 한 장면이다. 이런 장면이 수천수만 가지나 된다. 우리는 그 속에서 어쩔 수 없는 분단의 노예가 돼서 분단의 삶을 살고 있다. 분단의 역사에 장면 하나가 추가됐다. 북한이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해 버린 장면이다. 폐쇄나 철거나 아니라 전격적인 폭파였다. 북한은 남북연락사무소 건물을 폭파했지만 기실 남북연락사무소의 토대가 된 판문점선언과 평양선언에 대한 폭파이자 남북 관계 전반에 대한 폭파로 간주된다. 남북 관계를 둘러싸고 일상적으로 벌어졌던 크고 작은 밀당을 넘어서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우리는 평화와 통일의 꿈을 꾸다가 갑자기 현실과 마주했다. 그것은 냉정하고 날카로운 데다 추호의 자비심도 없는 분단이라는 현실이다. ●北 김여정 주도·사무소 폭파·종결어법 ‘특이’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기에 남북 관계가 후퇴하면서 분단의 날카로움을 경험했다. 그 최악의 상황이 박근혜 정부 말기에 북한의 거침없는 핵개발과 핵실험으로 표출돼 일촉즉발의 유사 전시상황이 조성됐다. 그러다가 문재인 정부 출범과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남북 관계가 화해 국면으로 급반전됐고 짧은 시기에 세 번의 남북 정상회담과 두 번의 북미 정상회담을 만들어 내는 기록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통일 의지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독특한 스타일이 결합된 성과였다. 트럼프는 워싱턴 정가의 전통적인 문법을 벗어나서 북미 정상회담을 추진했다. 이런 점에서 평창동계올림픽에서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에 이르는 약 1년간의 긴박한 대화 국면은 트럼프 스타일에 의존한 바 크다. 격식을 따지지 않고 현장의 정무적 결단을 즐겨 하는 트럼프의 행동방식이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를 순식간에 급진전시켰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바로 그 방식이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에서 북한 핵문제의 해결에 중대한 장애를 야기했다. 핵무기와 경제회복의 빅딜을 기대하며 평양에서 하노이까지 장거리 기차여행을 감내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주어진 선물은 ‘하노이 노딜’이었다. 세계는 놀랐고 북한은 반발했다. 그리고 1년 이상의 시간이 흐름 시점에서 남북연락사무소가 폭파됐다. 북한은 왜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했을까. 북한이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앞으로 남북 관계는 어떻게 전개될까. 수많은 질문이 꼬리를 물고 있다. 그러나 대답과 관련된 특이한 상황이 있다. 첫째, 이 국면을 김여정이 이끌고 있다. 3년 전 남북 관계에서 평화의 메신저로 화려하게 등장했던 김여정이 강경 노선의 선봉장으로 변신했다. 둘째,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하는 방식으로 의사를 표시했다. 비난도 가능하고 비판도 가능하고 단절도 가능한데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뜻이다. 셋째, 북한은 남한에 대해서 하등의 여지를 제공하지 않는 종결어법을 구사하고 있다. 바늘 들어갈 틈도 없다는 태도다. 외교 관계를 무시하고 남한의 대북특사 제안도 전격 공개해 버렸다. 지금으로서는 북한 외에는 누구도 답을 줄 수 없을 것 같다. 북한 스스로 순차적인 행동으로 답을 주겠지만 북한의 힘겨운 내부 상황과 남북 관계의 장기 정체가 근본 배경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한반도의 남북 관계가 지극히 비정상적이고 불안정한 관계라는 사실을 우리가 다시 한번 뼈저리게 확인하게 되는 상황이 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한국전쟁 직후나 독재 시절도 아니고 분단 1세기에 근접한 이 시점에도 남북 관계의 비정상적인 특성이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여기에는 북한의 특성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 북한 변수가 남북 관계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데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을 비판하자는 것이 아니라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인식하자는 것이고, 이에 기초해 대안을 모색하자는 것이다.●北변수 탓 남북 불안… 사실 인식 속 대안 모색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는 마치니처럼 뜨거운 가슴이 필요하다. 그러나 남북 관계의 정상화를 위해서는 가리발디처럼 ‘뜨거운 가슴과 냉정한 머리’도 필요하다. 오랫동안 남북 관계가 파행됐고 독재정권에 의해 악용됐다는 점 때문에 우리 시대에는 유독 ‘뜨거운 가슴’이 강조됐지만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뜨겁되 분단의 현실을 직시하는 냉정함이 함께 필요하다. ‘뜨거운 가슴’을 더욱 뜨겁게 하기 위해서라도 냉정해야 한다. 세 가지 요건이 있다. 첫째,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라도 국민통일이 필요하다. 전쟁이나 흡수통일은 군사력이나 경제력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지만 평화와 통일은 국민통일을 먼저 요구한다. 국민통일이 없이는 평화도 없고 통일도 없다. 둘째, 중용과 균형의 국제적 감각이 필요하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은 미국과 중국의 협력과 지원을 바탕으로 진행될 것이므로 양국의 동시적 협력을 이끌어 내기 위한 노력이 동반돼야 한다. 미국만으로도 안 되고 중국만으로도 안 된다. 셋째, 북한은 우리 민족의 일부이되 우리와는 다른 체제를 가진 이중적인 존재이다. 민족만 강조하거나 체제만 강조하는 반쪽짜리 시각으로는 해답을 찾을 수 없다. 온갖 난관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대화하려는 노력은 민족적 관점이다. 그러나 북한은 우리와 매우 다른 체제라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최고의 냉정·긴 안목 속 남북관계 진전시켜야 우리가 냉정해져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평화와 통일의 구체적인 이득을 발견해야 하기 때문이다. 남북 분단과 대결로 인한 손실이 과연 얼마인가. 대결 없는 평화의 상태가 되거나 통일의 상태가 될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어마어마한 규모라는 사실을 냉정하게 직시할 필요가 있다. 북한이 좋거나 북한 체제가 훌륭해서 북한과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분단과 대결의 비용을 생각하고 종국적으로 분단 없고 대결 없는 상태가 우리에게 제공할 천문학적인 이득을 생각해야 한다. 유라시아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통일된 한반도의 찬란한 미래상은 결코 불가능한 꿈이 아니며, 우리는 그 꿈을 포기할 만큼 배부르지 않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통일만큼 우리를 등 따시고 배부르게 만들어 줄 희망이 또 어디에 있는가. 그러므로 평화가 밥이고 통일이 밥이다. 진보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경제와 노동 등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현재형 진보가 있다. 과거사를 바로잡는 등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는 진보는 과거형 진보라 부르자. 우주 개발이나 해양 개발 등 미래의 이익을 추구하는 미래형 진보도 가능하다. 이 관점에서 바라보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은 왜곡된 분단사를 바로잡는 과거형 진보이자, 분단이 강요하는 현실의 고통을 해결하는 현재형 진보이며, 미래 한반도의 웅비를 열어 가는 미래형 진보가 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로 통합되는 이 과제를 누가 소홀히 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감정이 앞설 이유가 없다. 미국과 중국에 서운할 것도 없고 북한에 분노할 일도 아니다. 북한도 계산에 계산을 거듭하면서 행동한다. 우리도 철저하게 계산하면 된다. 평화와 통일은 반드시 오는 것이므로 일회의 사건과 드러난 현상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최고의 냉정을 유지하면서 긴 안목에서 꾸준히 남북 관계를 관리하고 진전시키는 자세가 필요하다. 북한의 잘못된 행동은 엄히 비판하되 남북 관계의 진전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최근 상황을 기화로 남북 관계를 무위로 돌리려는 반민족 세력의 무책임한 준동에 대해서는 엄히 꾸짖어야 한다. 상지대 총장
  • 라이브 ‘TV 쿡방’… 신선과 산만의 애매한 맛

    라이브 ‘TV 쿡방’… 신선과 산만의 애매한 맛

    백종원·이연복 요리하며 비법 전수 시청자 즉문즉답·중간광고 기부 진행 미숙·시간분배 실패 등 과제로유튜브 등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익숙한 라이브 ‘쿡방’(요리하는 방송)이 TV로 옮겨갔다. MBC ‘백파더:요리를 멈추지 마!’와 올리브 ‘집쿡라이브’가 생방송으로 전파를 탔다. 코로나19로 ‘집콕’ 중인 안방 시청자들에게 유명 요리사들의 비법을 실시간으로 전수한다는 목표다. 즉석 질문 해결과 광고 수익 기부 등 새로운 기획도 엿보였지만, 시간 분배 실패와 산만함은 해결 과제로 남았다. 지난 20일 방송한 ‘백파더’는 요식업계의 대부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가 5년 만에 MBC와 의기투합한 프로그램이다. 쉬우면서도 맛있는 조리법을 알려주는 백 대표의 장기에 맞게 요리 초보자인 ‘요린이’(요리와 어린이의 합성어)들을 위한 밥 짓기부터 달걀 프라이 만드는 법을 알려주는 모습이 담겼다. 우선 기존 쿡방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시도가 눈길을 잡았다. 앞치마를 두른 시청자 48명이 대형 스크린에 등장해 같이 요리하며 궁금증을 직접 묻는 등 소통했다. 밥물 맞추기, 노른자 살려 달걀 깨기 등 백 대표의 상세한 설명도 곁들였다. 출연자들이 중간광고(PCM) 수익을 기부해 공익성도 더했다. 앞서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2015)이 보는 것과 댓글 참여에 치중했다면 ‘백파더’는 같이하는 방송에 가까웠다. 그러나 진행의 미숙함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초보자들이 예상치 못한 질문을 쏟아내다 보니 말소리가 겹치고, 답을 하기에 시간도 부족했다. 중간에는 그룹 노라조가 달걀에 관한 노래와 퍼포먼스를 선보이면서 시선이 흐트러지기도 했다. 결국 90분 방송은 밥을 담아 달걀 프라이를 덮으며 황급히 마무리됐다. 시청자들은 “생중계 인원이 너무 많다”, “시도는 좋았는데 연습이 더 필요할 것 같다”는 반응이 나왔다. 다음날 방송된 ‘집쿡라이브’는 비교적 안정적 진행을 보여 줬다. 스타 셰프의 쿠킹 클래스를 무료로 보며 완성까지 하도록 만든다는 의도로, 첫 회는 60분간 이연복 셰프가 자신의 노하우가 담긴 바지락 짬뽕과 볶음밥을 가르쳤다. ‘중식의 대가’도 중간중간 다급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지만, 두 진행자까지 요리를 완성하고 시식하는 장면까지 방송에 담았다. 실시간 영상 참여자를 9명으로 줄이고 질문을 채팅으로 받는 등 요리에 더 집중한 점이 달랐다. 광고 시간과 미리 준비된 영상도 생방송 준비에 활용됐다. 신상호 PD는 “출연진과 제작진, 이연복 셰프님 등 모두가 긴장한 채 시작했지만 즐기면서 마무리했다”며 “2회에는 송훈 셰프가 출연한다”고 밝혔다. 김지예 기자 jiye@seoul.co.kr
  • 김경수 2심 쟁점은 ‘닭갈비 논쟁’…“안 먹었다” 증언 번복까지

    김경수 2심 쟁점은 ‘닭갈비 논쟁’…“안 먹었다” 증언 번복까지

    ‘경공모 회원과 식사’ 재판 중요 쟁점‘닭갈비 식사’ 둘러싼 증언 엇갈려김경수 측 “위증 아니면 특검 조작”불법 여론조작을 벌인 혐의로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김경수 경남도지사의 항소심에서 ‘닭갈비 식사’ 여부를 놓고 법정 공방이 벌어졌다. 증인들의 진술이 수사 단계나 1심 재판 때와 반대로 뒤바뀌면서 재판부가 직접 ‘위증’을 경고하는 등 혼란이 이어졌다. 서울고법 형사2부(함상훈 김민기 하태한 부장판사)는 22일 김 지사의 항소심 속행 공판을 열고 ‘드루킹’ 김동원씨가 이끈 ‘경제적 공진화 모임’ 회원 등을 증인으로 불러 신문했다. 증인신문의 쟁점은 2016년 11월 9일 경공모의 경기도 파주 사무실을 찾아온 김 지사가 경공모 회원들과 식사를 했는지였다. 특검은 이날 김 지사가 댓글 조작 프로그램인 ‘킹크랩’ 시연을 본 뒤 개발을 승인해 댓글 조작에 가담했다고 보고 있다. 반면 김 지사 측은 이날 브리핑에 앞서 김 지사와 회원들이 저녁 식사를 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1심에서 시연이 있었다고 인정된 시간대에 시연을 보는 것은 불가능했다는 ‘알리바이’를 주장하고 있다. 이날 증인으로 출석한 경공모 회원 조모씨는 특검 수사와 1심 재판에서 “분명히 그날 김 지사와 저녁 식사를 했다”고 진술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이날 돌연 “여러 번 생각해봤는데, 그날 저녁을 먹지는 않았던 것 같다”며 “그날 닭갈비를 먹었다는데, 먹은 기억이 없다”고 증언을 뒤집었다. 조씨의 진술 번복에 재판부는 “기억이 나는데 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위증임을 염두에 두라”며 의구심을 드러냈다. 재판부는 조씨가 먼저 구체적으로 ‘닭갈비’를 거론한 점, 증언을 앞두고 드루킹의 측근이기도 했던 경공모 회원 윤모 변호사를 선임한 점 등을 직접 추궁하기도 했다. 조씨에 이어 증인으로 나온 인근 닭갈빗집 사장 홍모씨는 특검 수사 내용을 정면으로 뒤집는 진술을 했다. 이날 변호인이 제시한 특검의 수사기록에는 홍씨가 ‘식당에서 15인분을 식사한 것 같다고 진술했다’고 기재됐다.이 내용대로면 경공모 회원들이 김 지사가 방문하기 전에 미리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한 만큼, 함께 밥을 먹었다는 김 지사의 주장이 인정받을 수 없다. 그러나 홍씨는 “저는 당시 포장한 것이 맞다고 했다”며 특검의 수사기록 내용을 전면 부인했다. 그는 영수증에 찍혀 있는 ‘25번 테이블’은 포장 주문에 사용하는 ‘가상의 테이블’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김 지사 측 변호인은 “사장이 위증을 했거나, 특검이 허위공문서를 작성한 것”이라며 “실체적 진실을 찾기보다는 한쪽으로 몰고 가려고 무리한 수사 보고서를 작성한 것 아니냐”고 주장했다. 반면 이날 조씨와 홍씨에 앞서 증인으로 출석한 드루킹의 동생 김모씨는 당시 상황을 대부분 기억하지 못한다면서도 “(김 지사와) 닭갈비를 같이 먹었다고 들은 적 없다”는 취지로 증언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TV로 들어온 ‘라이브 쿡방’, 신선과 산만의 애매한 맛

    TV로 들어온 ‘라이브 쿡방’, 신선과 산만의 애매한 맛

    ‘백파더’·‘집쿡라이브’ 새 형식 도입백종원·스타셰프 요리하며 비법 전수생방송 즉문 즉답·중간광고 기부진행 미숙·시간 분배 실패 등 과제로유튜브 등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익숙한 라이브 ‘쿡방’(요리하는 방송)이 TV로 옮겨갔다. MBC ‘백파더:요리를 멈추지 마!’와 올리브 ‘집쿡라이브’가 생방송으로 전파를 탔다. 코로나19로 ‘집콕’ 중인 안방 시청자들에게 유명 요리사들의 비법을 실시간으로 전수한다는 목표다. 즉석 질문 해결과 광고 수익 기부 등 새로운 기획도 엿보였지만, 시간 분배 실패와 산만함은 해결 과제로 남았다. 지난 20일 방송한 ‘백파더’는 요식업계의 대부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가 5년 만에 MBC와 의기투합한 프로그램이다. 쉬우면서도 맛있는 조리법을 알려주는 백 대표의 장기에 맞게 요리 초보자인 ‘요린이’(요리와 어린이의 합성어)들을 위한 밥 짓기부터 달걀 프라이 만드는 법을 알려주는 모습이 담겼다. 우선 기존 쿡방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시도가 눈길을 잡았다. 앞치마를 두른 시청자 48명이 대형 스크린에 등장해 같이 요리하며 궁금증을 직접 묻는 등 소통했다. 밥물 맞추기, 노른자 살려 달걀 깨기 등 백 대표의 상세한 설명도 곁들였다. 출연자들이 중간광고(PCM) 수익을 기부해 공익성도 더했다. 앞서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2015)이 보는 것과 댓글 참여에 치중했다면 ‘백파더’는 같이하는 방송에 가까웠다. 그러나 진행의 미숙함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초보자들이 예상치 못한 질문을 쏟아내다 보니 말소리가 겹치고, 답을 하기에 시간도 부족했다. 중간에는 그룹 노라조가 달걀에 관한 노래와 퍼포먼스를 선보이면서 시선이 흐트러지기도 했다. 결국 90분 방송은 밥을 담아 달걀 프라이를 덮으며 황급히 마무리됐다. 시청자들은 “생중계 인원이 너무 많다”, “시도는 좋았는데 연습이 더 필요할 것 같다”는 반응을 보였다. 다음날 방송된 ‘집쿡 라이브’는 비교적 안정적 진행을 보여 줬다. 스타 셰프의 쿠킹 클래스를 무료로 보며 완성까지 하도록 만든다는 의도로, 첫 회는 60분 동안 이연복 셰프가 자신의 노하우가 담긴 바지락 짬뽕과 볶음밥을 가르쳤다. ‘중식의 대가‘도 중간중간 다급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지만, 두 진행자까지 요리를 완성하고 시식하는 장면까지 방송에 담았다. 실시간 영상 참여자를 9명으로 줄이고 질문을 채팅으로 받는 등 요리에 더 집중한 점이 달랐다. 광고 시간과 미리 준비된 영상도 생방송 준비에 활용됐다. 신상호 PD는 “출연진과 제작진, 이연복 셰프님 등 모두가 긴장한 채 시작했지만 즐기면서 마무리했다”며 “2회에는 송훈 셰프가 출연한다”고 밝혔다. 김지예 기자 jiye@seoul.co.kr
  • [르포] 남북관계 악화 속 서해5도, 안보 넘어 평화를 꿈꾼다

    [르포] 남북관계 악화 속 서해5도, 안보 넘어 평화를 꿈꾼다

    인천에서 대청도로 가는 쾌속선을 탄 17일은 개성연락사무소 폭파 다음날이었다. 서해5도 중에서도 북한과 가장 가까이 붙어 있는 남북 긴장의 최전선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정작 대청도와 백령도는 외지인들의 값싼 호기심을 철저히 ‘배신’했다. 주민들은 여느때와 다름없이 고기를 잡으러 다니고 식당은 정상영업이다. 백령도에서 방문한 한 치킨집은 밀려드는 배달 주문으로 눈코뜰새 없었다. 정작 불안에 떠는건 외지인들이었다. 이경주 인하대 ‘평화와 법 센터’ 소장은 “남북긴장이 높아질 때마다 외신에서 ‘서울이 불안하다’는 뉴스를 내보낼때 우리가 느끼는 황당함과 하나도 다를게 없는 모습 아니겠느냐”고 지적했다. 서해5도만의 위험 감지법...중국어선의 역설 당초 인하대 평화와 법 센터와 함께 2박3일 일정으로 대청도·백령도를 방문하기로 한 건 한국전쟁 70년을 맞아 서해5도를 평화의 바다로 만들기 위한 다양한 상상력을 모색해 보자는 취지였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남북간 긴장이 이렇게 높아질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방문 며칠 전부터 상황이 급변했다. 2010년 연평도 포격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일행 가운데 4명은 출발 하루전에 일정을 취소했다. 대청도와 백령도 어민들과 대화를 나눠보면 “긴장 속 서해5도”에서 더 멀어졌다. 대청도 어민들이 계속 강조한건 4년째 꽃게가 제대로 안잡혀 힘들다, 어장확대가 필요하다, 중국어선 불법조업을 막아달라, 그리고 8월 시행을 앞둔 어선안전조업법에 대한 분노였다. 김영호 대청도 어촌계장은 “당장 꽃게잡이가 안되어 빌어먹게 생겼는데 개성공단 얘기는 먼 얘기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백령도 어민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얼핏 무심한듯 둔감한듯 보이는 건 주민들이 자포자기했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갖가지 전쟁위기와 불안 속에서도 묵묵히 버티며 살아온 주민들은 외지인들은 쉽게 느끼기 힘든 그들만의 위험수준 평가법이 있다. 허선규 인천해양도서연구소장은 “남북간에 뭔가 큰 일이 일어난다 싶을때는 어김없이 중국 어선이 사라진다”면서 “서해5도 주민들은 중국어선에 불만이 많으면서도 막상 중국어선이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 한다”고 설명했다. 이들에게 중국어선은 원흉인 동시에 경고등 구실도 하는 역설적인 존재인 셈이다. 대청도에서 만난 김형도 옹진군의원은 “주민들이 불안해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내색은 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접경지역에서 살아온 영향이 있다”고 귀띔했다. 남편을 따라 대청도로 이사온지 22년차라는 류석자씨는 “서해5도 주민들은 총알받이 비슷하게 살아가고 있다”면서 “개성연락사무소 폭파 뉴스가 나오자 시아버지가 ‘애미야 언제 피난갈지 모르니까 밥 많이 해놔라’ 그러시더라”고 밝혔다. 서해5도 주민들은 지난 70년간 외풍에 시달렸다. 북쪽에서 불어오기도 하지만 서울과 인천시, 때론 옹진군에서 불어오는 일도 다반사다. 2007년 10·4공동선언이 서해 평화협력지대를 합의하고, 2018년 4월 판문점선언에서 “서해 북방한계선 일대를 평화수역으로 만들어 우발적인 군사적 충돌을 방지하고 안전한 어로활동을 보장하기 위한 실제적인 대책”을 세우기로 했다지만 훈풍보단 삭풍이 더 많았다. 2010년 11월 연평도 포격과 2012년 대선 당시 ‘NLL포기 논란’은 외풍에 시달리는 서해5도를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연평도 포격은 백령도와 대청도에도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대청도 농여해변은 바위와 자갈만 남아있었다. 대청도에서 문화해설사로 활동하는 김옥자씨는 “농여해변은 우리 대청도에서도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곳이었다”면서 “해변에 군사시설 공사를 하고 나서부터 그 많던 모래가 다 쓸려나갔다”고 안타까워했다. 백령도는 산봉우리보다 높게 솟은 군사시설과 콘크리트로 섬을 둘러친 참호가 눈살을 찌뿌리게 한다. 안보 불안은 곧 생계 걱정  주민들에게 ‘안보’란 정확히 ’생계’와 반비례 관계다. 안보가 사람들 입에서 오르내리면 당장 생업에 제약을 받는다. 특히 NLL과 중국어선 문제만큼 평화가 곧 경제라는 걸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도 없다. 남과 북이 긴장과 갈등 속에 시간만 보내는 사이 황금어장은 20여년 전부터 중국어선에 거덜 나고 있었다. 특히 4년째 꽃게가 제대로 안잡히는 대청도 어민들은 “중국어선이 꽃게 싹쓸이하고 갖가지 쓰레기를 무단투기하니 꽃게가 남아나겠느냐”고 호소했다.  박삼용 인천해경 대청파출소장은 “중국어선이 한창 몰려올 때는 섬 하나가 바다를 떠다니는 것 같았다”면서 “중국어선 한 척에서 홍어만 10톤을 압수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신현일 인천해경 백령파출소장은 “우리가 출동하면 NLL 북쪽으로, 북측에서 출동하면 NLL 남쪽으로 도망가기 때문에 단속 자체가 쉽지 않다”면서 “중국어선들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하는 어민들로선 불만이 안 생길 수가 없다”고 설명했다. 평화와 생계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방법은 없을까. 일각에서는 남북 간 긴장 완화뿐 아니라 중국어선의 남획을 막을 수 있다는 차원에서 남북 공동어로구역을 고민하고 있다. 이석우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홍해(요르단-이스라엘), 통킹만(베트남-중국), 북해(아일랜드-영국) 등 국가간 합의를 통해 평화수역을 만든 사례가 여럿 있다”면서 “지금 같은 때일수록 과감한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장태헌 백령도 선주협회장은 “백령도와 장산곶 사이에 남북공동어로구역이 생기면 중국어선이 들어오는 길목을 막을 수다. 현재 백령도 북쪽으로는 해안에서 800m 바깥으론 조업을 못하도록 돼 있는데 어장이 확대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 대청도 어민 역시 “야간조업을 못하는 바람에 손해를 많이 본다”면서 “남북간에 사이가 좋아지면 어장확대도 가능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백령도에서 인천으로 가는 여객선을 타기 전에 짬을 내서 두무진을 방문했다. 기암괴석으로 유명한 이 곳에선 한반도에서 중국과 가장 가깝다는 장산곶이 보인다. 두무진에서 장산곶은 16㎞밖에 안된다. 그에 비해 대청도와 인천은 직선거리로 170㎞나 된다. 육지까지 거리만 놓고 보면 제주도나 울릉도보다도 더 멀다. 얄궂게도 인천시 옹진군에 속한 대청도와 30㎞밖에 안되는 북한땅은 황해남도 옹진군이다. 70년을 안보에 포획된 이 섬이 평화를 위한 전진기지로 거듭날 수 있을까. 판문점선언 자체가 2년만에 폐기될지 모른다는 불안이 흐르는 와중에 해경 관계자한테서 들었던 “오늘도 중국 어선이 보여서 다행”이라는 역설을 곱씹는다. 대청도·백령도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 야근인데, 아이 저녁 밥 어떡하죠?… 동네 키움센터가 있잖아요!

    야근인데, 아이 저녁 밥 어떡하죠?… 동네 키움센터가 있잖아요!

    저소득층 아니어도 자유로운 시간 이용 친환경 농산물 음식 제공… 부모들 호응 한 달 2만원으로 돌봄·교육·식사 한번에 올해 202개·내년 340개까지 확대 운영“초등학교 저학년 자녀를 둔 맞벌이 부부의 가장 큰 고민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공부요? 물론 중요하죠. 그런데 가장 큰 걱정은 아이들 저녁 밥이에요. 학교가 끝난 다음에 학원을 돌리며 시간을 보내게 할 수 있지만 저녁 밥은 챙겨주는 사람이 없거든요. 우리동네 키움센터에 부모들이 열광하는 이유죠.”(노원구 상계두산아파트 융합형 우리동네키움센터 관계자)아이가 초등학교를 입학하는 순간 맞벌이 부부는 고민에 빠진다. 만 0세부터 6세까지는 어린이집을 중심으로 돌봄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순간 아이들에 대한 돌봄 지원 프로그램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때문에 맞벌이 가정의 아이들은 이른바 ‘학원 뺑뺑이’를 돌며 부모가 돌아올 때까지를 기다린다. 아이들도 곤욕이지만 부모들의 마음은 더 애가 탄다. 초등학교 2학년 자녀를 둔 서울 성동구에 사는 맞벌이 여성 강모(42)씨는 “칼퇴를 할 때 주변 눈초리가 곱지 않지만 퇴근이 10분, 20분 늦어지면 집에는 30~40분 늦게 도착한다”면서 “혼자 집에서 밥도 굶고 있는 아이를 생각하면 빨리 나갈 수밖에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실제 지난해 KB금융경영연구소가 발표한 ‘2019 한국 워킹맘 보고서’에 따르면 고등학생 이하의 자녀를 둔 직장 여성 2000명 중 95%가 퇴사를 고민한 경험이 적이 있다고 대답했고, 이 중 50.5%(1·2순위 합계)가 자녀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최근 초등생 돌봄에 작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진원지는 서울시가 올해 본격적으로 운영을 시작한 ‘우리동네 키움센터’다. 21일 이응창 서울시 아이돌봄정책팀장은 “0세부터 만 6세까지는 보육이라는 개념이 확립되면서 다양한 보육지원 프로그램 시스템이 마련됐지만, 초등학생 특히 저학년의 경우에는 교육과 함께 돌봄 지원이 필요함에도 정부나 지자체 차원에서 완전히 손을 놓고 있었던 상황”이라면서 “우리동네 키움센터의 경우 이런 비어 있는 돌봄의 공간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우리동네 키움센터의 목표와 기능은 보육과 교육의 중간쯤에 있는 초등학생들에 대한 돌봄 지원이다. 대표 주자는 노원구 상계동의 상계두산아파트 우리동네 키움센터다. 6월 현재 36명의 아이들이 이용하고 있는 이 우리동네 키움센터는 초등학교 저학년을 대상으로 한 돌봄 서비스와 함께 간식과 저녁까지 제공한다. 심지어 제공되는 간식과 저녁은 친환경 농산물이다. 참고로 상계두산아파트 키움센터의 지향점은 아이들이 ‘잘 먹고, 잘 놀고, 잘 쉬는’ 것이다. 그렇다면 키움센터에 오면 아이들은 어떻게 지낼까. 아이들은 학교를 마치고 키움센터에 와서 간식을 먹고 자신이 다니는 학원을 갔다가 다시 센터로 와서 친구들과 놀거나, 센터에서 제공하는 체험·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기존의 지역아동센터와 다른 점은 저소득층 아동이 아니라도 이용할 수 있고, 초등학교에서 제공하는 돌봄 프로그램과 달리 하루에도 몇 번씩 들락거려도 된다는 점이다. 송파구의 한 학부모는 “초등학교에서 제공하는 돌봄서비스는 관리 문제 때문에 한번 아이가 학원을 가면 그날에는 다시 돌봄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다”면서 “하지만 우리동네 키움센터는 아이들이 센터를 본부로 삼고 몇 번씩 드나들어도 된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설명했다.저렴한 비용과 알찬 교육프로그램도 매력이다. 상계두산 키움센터 관계자는 “한 달에 2만원만 내면 자녀들에 대한 돌봄 서비스는 물론 저녁밥까지 해결할 수 있다”면서 “공공 돌봄 서비스라 아이들을 방치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청년·지역 단체들과 연계해 아이들에게 다양한 교육 기회도 제공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구로구 천왕동 우리동네 키움센터의 경우 우리나라의 24절기에 맞춰 아이들에게 세시 풍속은 물론 이와 관련된 과학·인문학 교육까지 하고 있다. 김성례 구로구 천왕동 센터장은 “지금은 코로나19로 학교를 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EBS와 온라인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돕고 있다”면서 “하지만 평소에는 국영수가 아닌 다양한 분야의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예를 들어 단오가 되면 씨름 등 체육활동을 하는 것은 물론 우리 선조들의 풍습에 어떤 과학적 이론과 법칙이 숨어 있는지 찾는 것”이라고 말했다. 천왕동 센터에서 아이들이 간식을 먹고 교육을 받는 데 드는 비용은 하루 2500원 수준이다. 시 관계자는 “자치구와 서울시 지원을 통해 학부모들의 부담을 최소화 하려고 하고 있다”고 말했다.그래서일까. 최근에는 우리동네 키움센터를 더 늘려달라는 시민들의 요구도 늘고 있다. 이 팀장은 “송파구의 경우 어머니 한 분이 서울시에 키움센터를 설립해 달라고 청원을 넣은 경우도 있다”면서 “서울시도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초등학교 저학년의 돌봄 문제를 해결하는 원동력이라고 보고 적극 지원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서울시는 2018년 4개에 불과했던 우리동네 키움센터를 현재 80개로 늘려놨다. 또 센터를 이용 가능한 아동 정원도 1200여명 증가했다. 서울시는 이를 올해 202개, 내년 340개, 2022년 400개로 확대할 계획이다. 또 센터를 ▲아이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며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일반형 키움센터 ▲긴급 주말 돌봄과 급식이 가능한 융합형 키움센터 ▲지역 특화 돌봄 및 문화·예술·부모교육 등이 가능한 거점형 키움센터 등으로 세분화해 육성한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광진, 성북, 구로, 동작, 송파 등 5개 구를 집중 지원할 계획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키움센터는 현재 시스템에서 비어 있는 보육과 교육의 중간 지대에 있는 아이들을 돌보는 방안을 지방정부와 시민이 함께 찾는 것”이라면서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결국 키움센터를 키우는 원동력이 된다”고 말했다. 김동현 기자 moses@seoul.co.kr
  • 지적장애인 ‘개목줄’ 묶고 숨지게 한 활동지원사…엄마도 공범

    지적장애인 ‘개목줄’ 묶고 숨지게 한 활동지원사…엄마도 공범

    개목줄 묶고 화장실에 감금…밥도 안 줘지적장애 3급 피해자 ‘훈육’ 빌미로 학대빨랫방망이로 구타…심정지 상태로 발견“친모, 수동적으로 따른 점 양형 반영”지적장애 청년을 개목줄로 묶어 화장실에 가두는 등 수시로 학대하다 결국 빨랫방망이로 때려 숨지게 한 장애인 활동지원사와 친모가 모두 중형을 선고 받았다. 대전지법 형사11부(김용찬 부장판사)는 18일 상해치사 등 혐의로 기소된 장애인 활동지원사 A(51)씨에게 징역 17년을, 피해자 친모 B(46)씨에게 징역 10년을 각각 선고했다. B씨 아들 C(20)씨는 지난해 12월 17일 저녁 대전시 중구 집에서 심정지 상태로 발견돼 병원에 옮겨졌으나 숨졌다. 검찰 수사 결과 지적장애 3급이었던 C씨의 얼굴에는 멍이 있었고, 팔과 다리 등에서도 상처가 발견됐다. 검찰에 따르면 C씨는 개목줄이나 목욕 타월 등으로 손을 뒤로 묶인 채 화장실에 갇혀 밥도 먹지 못했다. 빨랫방망이까지 사용된 구타는 지난해 상반기부터 반복됐는데, 이들은 폭행을 ‘훈육’이라고 불렀다. 심지어 ‘소리가 크고 아픈 거로 사라’는 A씨 말을 들은 B씨가 직접 방망이를 산 것으로 확인됐다. C씨는 숨지기 엿새 전부터는 자주 다니던 장애인 복지시설에도 나가지 못했다. 이 시기에 폭행과 학대가 집중된 것으로 검찰은 판단했다.검찰은 지적장애 기질을 보인 친모 B씨가 A씨에게 과도하게 의존한 점이나 A씨가 피해자 일상에 적잖게 관여했던 정황이 있어 두 사람이 공동범행을 한 것으로 결론 지었다. 재판부는 공소사실을 대부분 유죄로 인정했다. 재판부는 “활동 지원사인 피고인은 피해자를 보호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데도 이번 범행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며 “화장실에 가두고, 피해자를 묶고, 빨랫방망이로 때리는 등 반인륜적 범죄를 저질렀다”고 말했다. 친모 B씨에 대해선 “피해자가 피고인으로부터 받은 정신적 고통과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며 “(A씨 지시에) 수동적으로 따른 점을 양형에 고려했다”고 덧붙였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한발 떨어져 찾는 ‘은밀한 일상’ 한발 앞서 찾아온 ‘따뜻한 위로’

    한발 떨어져 찾는 ‘은밀한 일상’ 한발 앞서 찾아온 ‘따뜻한 위로’

    빼앗긴 봄에도 꽃은 피듯이 코로나19 시대에도 여름은 왔다. 6월 초, 기온이 27도까지 올라가자 베를리너들은 성급히 옷을 벗고 공원에 드러누웠다. 꽁꽁 싸맸던 마음을 꺼내 햇빛에 널고 ‘코로나 블루’(코로나19로 인한 우울감)에 멍든 몸을 뜨거운 햇살에 지졌다. 남자들은 웃통을 벗고, 여자들은 비키니 차림이었다.7월의 수영장이나 해변이 아닌, 5월부터(!) 공원에서 저러고들 있으니 계절의 경계가 무색했다. 절로 눈길이 갔지만 동네이웃처럼 자주 보다 보니 어느새 익숙한 풍경이 됐다. 하루는 나도 비키니를 챙겨 입고 태닝족에 합류했다. 반듯이 누워 배와 등을 태웠다. 두 시간 남짓 누워 있었는데 벌겋게 살이 익었다. 베를린에선 이미 여름이 시작된 느낌이다.베를린에서 가장 좋은 계절을 꼽으라면 역시 여름이다. 베를린뿐만 아니라 유럽 도시 전체가 여름에 활기를 띤다. 오전 5시가 되기도 전에 날이 밝고(서머타임 때문에), 해는 밤 9시가 넘어야 진다.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나오면 하늘은 그제서야 짙은 푸른 색으로 어두워지고 석양의 끝을 지운다. 유럽으로 출장을 올 때마다 놀라던 초여름의 늦은 일몰, 잊고 있던 유럽의 긴 해가 매일 떠오르는 요즘이다. 여름에만 할 수 있는 일도 하나둘 늘어난다. 늦은 밤에 보는 오픈에어 시네마도 며칠 전부터 시작했다. 베를린에 있는 35곳의 야외 영화관이 문을 연 것이다. 야외 영화관은 여름 한철 반짝 문을 열고 9월 초면 문을 닫는다. 오픈에어 시네마가 문을 닫는 건 베를린의 여름이 끝났다는 신호다.●‘한여름 밤의 꿈’ 같은 오픈에어 시네마 지난해 여름엔 거의 매주 야외 영화관에 갔다. 이 좋은 걸 베를린 다닌 지 12년 만에, 남자친구가 생겨서 처음 해봤다. 야외 영화관은 동네마다 몇 군데씩 있다. 큰 공원 안에 있기도 하고 슈프레 강변의 바 안에 있기도 하고 클럽 옆에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곳은 크로이츠베르크의 마리아난 플라츠에 있는 프라이루프트 키노다. 영화관 뒤로는 1800년대에 지어진 멋진 문화공간이 있고, 사방은 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처음 가는 사람이라면 시골 숲속이나 인적 드문 공원에 들어가는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자연적이고 평온한 바람이 분다. 오픈에어 시네마의 자리는 일찍 온 순서대로 앉는다. 맨 앞자리 몇 줄은 천으로 된 비치의자를 놓을 수 있다. 자리를 사수하려면 한 시간 정도 일찍 가는 것이 좋다. 줄을 서 있다가 30분 전에 문이 열리면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비치의자를 들고 좋은 자리를 찾는다. 영화관 안에는 생맥주와 팝콘, 커리 부어스트(소시지) 등을 먹을 수 있는 야외 매점도 (당연히) 있다. 매점의 불빛이 서커스장 조명처럼 발랄하다. 야외 영화는 보통 밤 9시가 넘어야 시작한다. 싱그러운 나무의 냄새를 맡고 맥주를 마시며 영화를 보는 건 여름이라서 할 수 있는 일이다. 다른 계절엔 아예 즐길 수 없으니까. 커다란 스크린이 야외에 있으니 코로나19의 일상에서도 상대적으로 안심이 된다. 앉는 사람들 간의 거리는 조정을 하겠지만, 춤도 출 수 없고 디제이도 없이 문을 여는 베를린의 클럽보다는 상황이 훨씬 낫다. 베를린에서 야외 영화관을 고를 때 주의할 점이 하나 있다. 독일어로 더빙된 영화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일이다. 독일에선 극장뿐 아니라 TV에서 보여 주는 모든 해외 영화에 더빙이 돼 있다. 자막이 익숙한 우리에겐 구식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어릴 때부터 오디오 북을 듣고 자는 독일인들에게 더빙은 친숙하고 일상적인 문화다. 더빙 문화의 역사도 길어서, 유명 할리우드 배우들의 목소리는 보통 정해져 있는 성우가 있다. 예를 들어 브루스 윌리스는 30년 넘게 한 목소리다. 야외 영화관을 고를 때는 원어에 영어 자막이 있는 영화를 선택해야 한다. 안 그러면 이해도 못 하는 독일어를 두 시간 내내 듣게 될 수도 있다. ●베를린의 편의점 ‘슈페티’ 앞에서 맥주 한 잔 베를린의 여름이 뜨거워지는 건 슈페티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수로 알 수 있다. 슈페티는 베를린의 편의점 같은 곳. 동네마다 있고 대부분 24시간 문을 연다. 없는 것 없이 다 파는 우리나라의 편의점과는 달리 간단한 식료품과 과자, 음료, 담배류, 술을 주로 판다. 종류마다 다 있는 건 역시 맥주. 밤 10시면 슈퍼마켓까지 다 닫는 베를린에서 유일하게 술을 살 수 있는 곳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밤마다 슈페티 앞으로 모이는 건 당연하다. 술을 사서 가게 앞 인도나 벤치, 길가에 아무렇게나 앉아 마신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슈페티 앞에는 늘 사람들이 맥주병을 들고 서 있다. 하지만 여름엔 그 열기의 농도 자체가 달라진다. 가게 앞의 긴 테이블과 의자를 가득 메우고 앉아 있는 사람들의 바이브가 짜릿하게 전해진달까. “여긴 뭔데 이렇게 사람이 많아?” 하고 쳐다보면 힙한 바가 아니라 슈페티 앞일 때도 많다. 베를린의 슈페티는 술 취한 아저씨나 돈 없는 어린애들만 가는 곳이 아니다. 온 몸에 문신을 한 힙스터들, 소문 듣고 찾아온 관광객, 클럽 가기 전에 취하러 온 젊은 애들, 집 앞에 한 잔 하려고 나온 동네 주민까지 한데 어울려 같이 마시고 같이 취한다. 동네 사랑방이자 여름엔 펍보다 붐비는 ‘가맥집’이다.그 도시에서 꼭 가 봐야 하는 바 순위가 있는 것처럼 베를린에는 유명한 슈페티 명소가 있을 정도다. 미테의 로젠탈러플라츠 역 바로 앞 슈페티가 그렇다. 밤새도록 사람들이 앉아 술을 마시는 다국적 만남의 장소다. 이곳은 워낙 유명해서 슈페티답지 않게 안에 어엿한 화장실도 갖추고 있다. 서울의 ‘편맥’처럼 베를린에는 ‘슈맥’이 있다. 슈페티 앞에 사람이 꽉 차 있는 밤을 만나면 베를린의 여름밤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것이다.●히피들의 은신처, 크룽커크라니히 옥상 바 날이 좋으면 더 각광받는 곳, 바로 루프톱 바다. 베를린에도 내로라하는 야외 옥상 바가 많다. 대부분은 호텔 꼭대기에 있다. 25아워스 호텔 꼭대기에 있는 몽키바는 그중에서도 특히 유명하다. 베를린 동물원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때문에 유독 사랑받는다. 베를린을 놀러 오는 여행자들의 인기 리스트에 항상 꼽히는 곳이기도 하다. 미테의 아마노 호텔 꼭대기에도, 베를린에서 가장 핫한 부티크 호텔, 소호에도 루프톱 바가 있다. 모두 세련되고 힙한 분위기가 넘친다. 하지만 우리가 매번 호텔 바를 가지는 않듯이, 여기서도 그렇다. 호텔 바보다는 오래돼 보여도 자연적이고 자유가 넘치는 곳을 좋아한다. 그런 옥상 바가 한 군데 있다. 히피들의 아지트처럼 대접받는 크룽커크라니히 바다. 노이쾰른의 쇼핑몰 꼭대기에 숨어 있는 이곳에는 삐걱대는 나무 의자와 테이블이 제멋대로 놓여 있다. 사람들은 바에서 맥주 한 잔을 사서 아무 데나 털썩 앉는다. 유일하게 이들이 신경을 쓰는 건 아름다운 노을. 그것만큼은 놓치지 않으려고 집요하게 쳐다본다. 이곳에서 내다보이는 베를린의 도시 풍경 또한 최고다. 시야를 막는 고층빌딩 하나 없이 고만고만하게 낮고 많은 지붕 너머로 베를린의 상징인 TV타워가 내다보인다. 이 낮은 지평선 도시와 석양을 즐기기 위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 노이쾰른의 아카덴 쇼핑몰 꼭대기로, 한 번에 찾기는 힘든 길을 헤매면서 올라간다. 가는 길이 쉽지 않아 관광객의 레이더에서는 여전히 조금 벗어나 있다. ●야외 사우나서 꿈꾸는 ‘이열치열’ 베를린의 여름이 매일 뜨겁고 쨍쨍한 것만은 아니다. 30도까지 치솟다가도 갑자기 13도로 뚝 떨어질 때가 있다. 그러면 7월 말이어도 조용히 가죽재킷을 꺼내 입어야 한다. 전기장판만큼은 켜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이렇게 으스스한 날엔 목욕가운을 챙겨 바발리로 향한다. 인도네시아 발리에 있는 스파 단지처럼 넓은 정원과 실내외 수영장, 마사지실, 레스토랑 그리고 사우나가 13개나 있는 곳이다. 카운터에서 밴드를 차고 들어가고, 나올 때 쓴 비용을 결제한다. 바발리 안에서는 모두 가운을 입고 돌아다닌다. 그러다 사우나에 들어갈 때는 고이 가운을 걸어두고 알몸으로 들어간다. 사우나 안에 남자 여자가 ‘깨벗고 같이’ 들어가는 것이다. 아는 사람은 알다시피 독일의 사우나는 혼욕 문화다. 안에 들어가면 계단식 나무의자에 줄줄이 발가벗은 사람들이 앉아 있다. 매 시간마다 열리는 사우나 프로그램에 맞춰 온 사람들이다. 처음엔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몰라 허공을 쳐다보고 일부러 자연스러운 척도 한다. 하지만 알몸이라는 부끄러움도 잠시, 모두가 똑같이 알몸인 그곳에서 뭔가 원초의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누구 하나 똑같은 체형 없이, 늘어진 배와 제각각으로 생긴 허벅지, 어깨, 가슴, 성기까지 늘어뜨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그냥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바발리의 사우나에는 특별한 점이 또 있다. 필링 프로그램이 시작될 때, 팬티만 걸친 전문 마스터가 들어와 프로그램 소개를 하고 커다란 부채질을 한다. 사람들이 앉아 있는 뒤쪽 끝까지 골고루 뜨거운 바람을 보내 주는 것이다. 종교 의식을 치르듯 강하고 경건하게 부채질을 하는 마스터의 몸놀림 또한 이곳 사우나의 관전 포인트다. 야외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수도 있고 2층 벽난로 앞에서 와인을 마실 수도 있다. 바발리는 베를린에서 단연 최고의 경험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다. 다만 코로나19 상황으로 현재 사우나는 이용이 중단된 상태다. 그래도 야외 수영장에서 나체로 수영하고 정원에 누워 마사지를 받거나 휴식을 취하는 건 여전히 가능하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바발리는 가장 먼저 가고 싶은 곳이다. 뜨거운 사우나에서 땀을 쫙 뺀 후 뻥 뚫린 샤워실에서 샤워하며 이열치열 여름을 나고 싶다. ●공원처럼 산책하는 베를린만의 ‘묘지피서 ’ 베를린에서 공원만큼 산책하기 좋은 곳이 묘지다. 동네마다 크고 작은 묘지가 있다. 제각각 다른 크기의 비석과 그 앞에 놓인 꽃들, 울창한 나무들이 많아 평화롭다. 대부분 숲처럼 나무가 많아서 공원인 줄 알고 들어갔다가 나중에 묘지인 걸 안 적도 많다. 아주 춥고 우중충한 날씨가 아니라면 음산한 기분도 들지 않는다. 햇볕 좋은 여름이라면? 18세기의 멋진 비석도 구경하고 책 읽고 빈둥거리기 좋다. 베를린 사람들은 묘지에서도 공원처럼 산책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풀어놓고 놀게 한다. 누군가의 묘지가 이토록 가깝고 친근하게 있다면 추모하는 일도 서글프지만은 않을 것 같다. 보다 가벼운 걸음으로 찾아와 마음을 나누다 갈 듯하다.베를린에 사는 친구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묘지가 있었다. 그 묘지 안에는 장례식을 치르던 작은 교회가 있었는데, 나중에 카페로 오픈을 했다. 카페 스트라우스. 내부는 아치형의 천장이 그대로 있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장례식 홀로 쓰이던 공간이 나온다. 반투명 유리로 돼 있는 지붕과 빈티지한 카키색의 창문, 스테인드글라스 유리, 그 안으로 따사롭게 들어오던 햇살에 낮은 탄성이 나올 정도다. 누군가의 죽음이 거쳐 갔고 누군가의 눈물이 흘렀던 공간이라고 하기엔 더없이 평온하고 조용하다. 어느 해 8월, 이 묘지 교회의 작은 정원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따뜻한 카푸치노 한 잔을 마시며 오전 내내 책을 읽던 아침이 생각난다. 베를린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이라 더 그랬을 것이다. 작년 여름엔 남자친구와 함께 노트북을 싸 들고 자주 묘지로 갔다. 프란즐러베르크의 오래된 묘지 안에 있는 라이제파크에 가기 위해서다. 검은 비석과 잡풀, 큰 나무들이 울창한 묘지 안쪽으로 죽 걸어 들어가면 공원이 나온다. ‘볼륨을 줄인’, ‘거의 들릴 듯 말 듯한’, ‘나즈막한 목소리’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라이제파크는 이름처럼 뭔가 신비로운 분위기가 있다. 공원에는 짧은 풀들이 잔디처럼 자라 있고 그 뒤로 무릎까지 오는 잡풀이, 그 뒤로 중간 키의 나무들이, 그 뒤로 가장 큰 나무들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다. 풀숲이 무성해 바로 앞까지 와서야 인기척이 느껴진다. 풀밭에 누워 있으면 도심 한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잊게 된다. 푹푹 찌는 한여름, 살갗이 타 들어갈 것처럼 덥다가도 이 공원 나무 아래에만 누우면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에어컨 있는 집이 거의 없고 지하철에도 에어컨이 없는 베를린에서 호수로 피신을 못 갈 땐 이 공원이 제일 만만하면서도 은밀한 피서지다. 여행작가 dongmi01@gmail.com
  • 누구나 캄캄한 물속 떠올라 날숨 내쉴 날을 꿈꾼다, 영화 ‘부력’

    누구나 캄캄한 물속 떠올라 날숨 내쉴 날을 꿈꾼다, 영화 ‘부력’

    힘든 하루였다. 낮 12시부터 오후 3시 40분까지 귀를 쫑긋 세워야 하는 인터뷰를 진행하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상황이었다. 영화 ‘부력’(Buoyancy) 시사회를 가야 하나 망설여졌다. 뻔히 아는 얘기였다. 얼마 전 인도네시아 선원들이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승선한 중국 어선 위에서 병 들어 죽으면 그냥 바다로 던져진다는 끔찍한 현실을 훨씬 어린 캄보디아 소년이 태국 어선 위에서 겪는 트라우마로 바꿨을 뿐이기 때문이었다. 그 빤한 얘기를 어떻게 그렸는지 가서 보자! 개인적으로 넉 달 만에 들어간 영화관 컴컴한 구석에 흰 마스크 두른 채 보자니 정말 영화의 초반 30분은 숨이 턱턱 막혔다. 영화 포스터의 주인공마냥 밖에 나가 마스크 집어 던지고 날숨을 내쉬고 싶어졌다.화가 나기도 했다. 차크라(삼 행)가 입은 축구 유니폼(왜 하필 스트라이커를 의미하는 11번이란 말이던가?)을 입고 땀에 절은 채 걷는 첫 장면부터 짜증이 밀려왔다. 터벅터벅 발자국 소리는 끝도 없이 이어지고, 난 왜 시사회에 왔지? 이 수입사는 무슨 배짱으로 이런 영화를 수입한다는 말인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형 대신 집안 일이나 하라는 아버지와 “왜 이렇게 대책 없이 아이들을 퍼질러 낳았냐”고 차크라가 대드는 장면부터 새벽에 집을 등지고 걸어 나가는 장면, 불법 이민을 희망하는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이의 오토바이 뒤에 타고 가며 자유의 날갯짓을 하는 장면, 브로커에게 첫 월급 타면 갚겠다며 돈을 건네지 않아 보내진 배에서 갈아 타며 첫눈에 봐도 사람 잡아먹을 것 같은 롬란(타나웃 카스로)과 첫 대면하는 장면 등을 보며 정말 수면 위로 박차고 올라가고 싶어졌다. 잠시 뒤 어떤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무자비한 폭행, 폭언 이런 것보다 사람들이 맞부딪치는 갈등과 긴장을 처리하는 데 감독의 역량이 살아난다. 그리고 첫 장면을 떠올리며 마지막 장면이 혹시 차크라의 어떤 표정을 정면에서 잡아내는 것이 아닐까 상상하게 됐다. 그리고 통통 거리는 배, 그 위에서 카메라가 담을 것이라곤 그물을 걷어올려 푼 다음 비릿한 생선과 게들을 정리하는 인부들의 작업, 밥과 썩어가는 물로만 이뤄진 식사(같은 노예 신세인데 남의 것마저 남기지 않고 싹 긁어 담는 인간도 있다), 나중에 살육의 장으로 변하는 기관실과 조타실에서 세상 흉악한 인간들과 차크라가 대치하는 모습과 눈동자들, 기관실 바닥 좁디좁은 공간에서 살갗을 부비며 고단한 잠자리를 이루는 젊은 남정네들의 모습 등 뿐인데 이렇게 아름답게, 이렇게 감정 선을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촬영하고 편집하고 음악으로 색깔을 입힐 수 있겠는가 찬탄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열네 살 아이가 감당하기 어려운 아픔을 견뎌내는 과정이 아름답고, 기이한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살육 드라마 끝에 그동안 못 받아낸 보상을 한껏 챙겨 돌아가 고향 들녘 먼발치에서 아버지와 가족들의 일하는 모습을 보며 떨구는 눈물 한 방울 장면은 대단했다. 가슴이 벅차 올랐다. 예서 끝인가 했는데, 감독은 또하나의 반전을 준비했다. 그 반전의 의미를 집에 돌아오는 내내 되새기게 했다. 지금도 이 지구촌 바다 어느 곳에서는 저렇듯 끔찍한 일들이 아무렇지 않은 듯 행해지는데 우리는 이렇게 스스로의 호흡을 마스크 안에 가두고, 상대적으로 한없이 안락한 바닷속에서 떠올라 날숨을 내쉴 순간을 꿈꾸며 살아가는구나 생각하니 한없이 슬퍼졌다. 제69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에큐메니컬 심사위원상 수상작, 뭐 그런 얘기는 하나마나한 얘기고, 누구라도 제풀에 나가떨어질 만큼 아프고 쓰라린 얘기를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하게 91분의 러닝타임에 담아낸 로드 라스젠(호주) 감독의 연출력과 삼 행의 뛰어난 연기를 꼭 보라고 권하고 싶다. 25일 개봉.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내 어깨 위 고양이, 밥’ 주연 고양이, 무지개다리 건넜다

    ‘내 어깨 위 고양이, 밥’ 주연 고양이, 무지개다리 건넜다

    한 마약 중독자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로 변신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준 길고양이 출신 ‘밥’이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16일(현지시간) 영국 BBC뉴스 등 현지매체에 따르면, 작가 제임스 보웬(41)의 베스트셀러 ‘내 어깨 위 고양이, 밥’(A Street Cat Named Bob)을 펴낸 출판사 호더 앤드 스토턴은 이날 책의 주연 ‘밥’이 하루 전인 15일 1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출판사는 또 “제임스와 밥이 계속해서 전 세계 팬들과 만났을 때 밥은 책 사인회에서 지지자들을 만나고 세계를 여행하며 그 명성에 걸맞은 놀라운 삶을 살았다”면서 “밥은 매우 그리울 특별한 고양이였다”고 말했다. 제임스 보웬은 2007년 봄 토트넘에 있는 자신의 지원주택 건물 복도에서 쓰러져 있던 고양이 밥을 만났을 때 한창 치료를 받고 있던 마약 중독자였다. 거리에서 버스킹을 하던 그는 밥의 다리에 감염된 상처를 보고 수의사에게 데려가 치료를 해주고 이 고양이가 집을 잘 찾아가길 바라며 다시 거리로 돌려보냈다.그런데 밥은 코벤트 가든과 피카딜리 서커스라는 이름의 두 광장으로 버스킹을 하러 가는 보웬을 따라 버스에 올라탔다. 그 후 보웬은 이 고양이가 달리 갈 곳이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돌보기로 하고 밥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이 이름은 보웬이 미국 호러 드라마 ‘트윈 픽스’에 나오는 가장 좋아하는 인물 킬러 밥에게서 따온 것이다.보웬과 밥의 이런 만남은 치료 중이던 이 마약 중독자의 삶을 뒤바꾼 관계의 시작이었다. 밥은 보웬이 런던 거리에서 공연할 때는 물론 빅이슈 잡지를 팔 때도 동행했다. 그리고 이들이 만난 지 5년 뒤 호더 앤드 스토턴은 보웬과 그의 고양이 밥에 관한 네 권의 책 중 첫 번째 책인 ‘내 어깨 위 고양이, 밥’을 출판했다. 그 후 ‘고양이 밥이 보는 세상’(The World According to Bob)과 ‘고양이 밥이 준 선물(A Gift from Bob) 그리고 ‘고양이 밥을 위한 작은 책’(The Little Book of Bob)이 더 출판됐고, 이들 책은 전 세계에서 4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돼 지금까지 800만 권 이상 팔렸다.보웬의 첫 번째 책은 2016년 영화로도 제작됐다. 보웬의 역할은 영화배우 루크 트레더웨이가 맡았고 고양이는 밥이 직접 출연했다. 2016년 11월 런던 시사회에서 밥은 케이트 미들턴 왕세손빈을 만났는데 다음날 그녀가 손에 석고붕대를 한 모습이 목격됐다. 이 때문에 밥은 사람들에게 그녀를 다치게 했다는 비난까지 받았었다.보웬은 밥의 죽음에 대해 “밥은 내 목숨을 구했다. 그것은 지극히 간단한 사실”이라면서 “그는 내게 우정 그 이상의 것을 줬다”고 회상했다. 이와 함께 “그를 내 곁에 둬, 난 내가 놓치고 있던 삶의 방향과 목적을 찾았다. 우리가 책과 영화를 통해 함께 이룬 성공은 기적적이었다”면서 “그는 몇천 명의 사람을 만났고 몇백만 명의 사람들 삶에 감동을 줬다”고 말했다. 이어 “밥 같은 고양이는 처음이고 다시는 그런 고양이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내 삶에서 빛이 꺼진 것 같다”면서 “난 절대로 그를 잊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밥의 죽음을 둘러싸고 전 세계에서 많은 팬은 애도를 보이고 있다. 폴 맥네임 빅이슈 영국판 편집장은 “첫째로 밥은 제임스 보웬의 삶을 바꿨고 그다음으로 세상을 바꿨다. 그는 두 번째 기회와 희망을 대표했으며 누군가를 포기하지 않았다”면서 “우리는 밥의 충실한 동행자인 제임스에게 조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약물중독자의 삶 바꿔놓은 ‘길냥이 밥’ 무지개다리 건너

    약물중독자의 삶 바꿔놓은 ‘길냥이 밥’ 무지개다리 건너

    어느날 만난 약물중독자의 삶을 바꿔놓아 여섯 권의 책 시리즈를 나오게 했고, 영화 두 편으로도 만들어져 직접 출연하기도 했던 ‘길냥이 밥’이 14년 삶을 마쳤다. 제임스 보웬은 2007년 처음 밥을 만났다. 약물중독에 빠져 있었던 그는 버려져 다친 진저캣 밥을 만나자마자 돌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길거리 즉석 공연(버스킹)을 할 때나 노숙인들의 재활을 돕는 잡지 ‘빅 이슈’를 팔 때도 늘 품에 밥을 안고 있었다. 보웬은 그 길냥이가 준 희망의 빛을 2012년 책 ‘밥이라 불리는 길냥이-그리고 그가 어떻게 내 목숨을 구했나’로 엮어내 공전의 히트를 쳤고, 2016년 밥이 직접 출연한 영화로도 제작됐다. 그 뒤 다섯 권이 더 나왔다. 40개 언어로도 번역됐다. 영화 속편 ‘밥으로부터의 선물’에도 역시 이 고양이가 출연했는데 연내 개봉할 예정이다. 보웬은 책 이름으로 등록된 페이스북 계정에 올린 성명을 통해 밥이 자신의 목숨을 구했다고 털어놓았다. “아주 간단한 것이다. 그는 내게 단순한 동반 이상의 것들을 줬다. 내 곁에 그가 머물러 있어 내가 잃어버렸던 방향과 목표를 찾았다. 그는 수많은 사람을 만나 수만명의 인생에 영향을 미쳤다. 그런 고양이는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내 삶에 빛 하나가 사라지는 기분이다. 난 그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이호준의 시간여행] 인력거꾼을 아시나요

    [이호준의 시간여행] 인력거꾼을 아시나요

    외국, 특히 조금 가난한 나라의 여행지에서 난감한 상황과 마주칠 때가 있다. 소위 관광용 인력거꾼들의 호객 때문이다. 말(馬)도 아니고 어찌 사람이 끄는 수레에 탈 수 있을까. 게다가 인력거꾼은 약속이라도 한 듯 늙거나 나뭇가지처럼 마른 사람들이 많다. 안 타면 그만이지만 그들의 간절한 눈빛을 보면 마음이 흔들리고는 한다. 내가 저걸 타야 저 사람 가족이 한 끼 밥을 먹을 수 있는 건 아닐까. 그러다가 문득 내 나라에도 인력거꾼이 거리를 누비던 시절이 있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면 마음이 더 무거워지고는 한다. 인력거는 말 그대로 사람을 태우고 사람이 끌어서 움직이는 1~2인승 수레를 말한다. 구조는 비교적 간단하다. 자전거바퀴처럼 생긴 큰 바퀴 2개, 한두 사람이 앉을 만한 공간, 비나 햇볕을 가릴 정도의 포장…. 바퀴는 처음에 철제였다가 점차 통고무 소재로 바뀌었고 1910년대에는 압축공기를 넣은 타이어가 등장했다. 인력거가 이 땅에 첫선을 보인 건 고종 31년(1894년)이었다. 처음 도입될 때는 사람의 힘으로 끈다고 하여 완차(腕車) 또는 만차(挽車)라고 불렀다. 인력거는 돈 좀 있는 사람들의 교통수단으로 서울은 물론 부산·평양·대구 등 지방까지 급속히 보급됐다. 이런 토양 속에서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1924년ㆍ개벽)이 태어나게 된다. 바늘 하나 꽂을 땅이 없는 농투성이들이 소작하던 땅까지 떼이고 도시로 흘러들어와 할 수 있는 일은 뻔했다. 인력거꾼 역시 산 입에 거미줄을 치지 않도록 해 주는 수단 중 하나였을 것이다. 처음에는 고위관리들이 인력거를 많이 이용했다고 한다. 기차역에서도 인기가 있었고 기생들도 단골손님이었다. 요릿집에서 손님이 종업원에게 기생을 지명하게 되면, 즉시 기생조합에 연락이 돼 인력거를 타고 왔다고 한다. 인력거를 부르는 방법은 요즘의 콜택시와 비슷해서 타려는 사람이 인력거조합에 전화를 걸면 보내 주는 방식이었다. 물론 부르지 않아도 길거리에서 빈 인력거를 탈 수 있었고, 역 앞이나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는 인력거꾼들이 진을 치기도 했다. ‘운수 좋은 날’을 읽으면서 궁금했던 분들도 있었을 것이다. 김 첨지는 인력거가 있는데 왜 그렇게 가난했던 걸까. 하지만 지금의 영업용 택시가 그렇듯이 대부분은 ‘회사 인력거’였다고 한다. 인력거꾼들은 차주의 횡포로 비참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요금은 서울에서 인천을 가는 데 쌀 반 가마니 값이 넘는다. 1922년에는 승객이 줄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인력거요금을 내렸던 모양이다. 거기에 보면 ‘종래 10리(里)에 80전 하던 것을 60전으로, 하루에 5원 하던 것을 4원으로 인하한다’고 돼 있다. 하지만 인력거 시대는 그리 길지 못했다.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각종 교통수단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12년에는 임대승용차(택시)라는 게 등장했고 전차, 버스 등이 거리를 누비기 시작했다. 물론 한참동안은 인력거와 신문물의 공조가 가능했겠지만 영세한 자본과 절대 수송량의 빈곤을 이길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결국 인력거도, 거기에 기대서 입에 풀칠이나마 하던 인력거꾼도 서서히 사라지게 됐다. 1923년에 전국적으로 4647대였던 인력거는 1931년에 2631대로 줄었고 반대로 자동차는 4331대로 늘었다. 해방 무렵에는 서울에서 구경조차 어렵게 됐다. 그 뒤 70~80년이 지난 지금, 교통수단으로서의 인력거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불볕더위에 팥죽 같은 땀을 흘리며 누군가의 다리가 돼야 했던 인력거꾼의 고된 삶도 이제 소설에서나 읽을 수 있을 뿐이다.
  • 기적 일군 ‘코디 리’처럼… 공기업, 변해야 산다

    기적 일군 ‘코디 리’처럼… 공기업, 변해야 산다

    “광란의 아리아,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가에타노 도니체티(1797~1848)는 사랑의 묘약처럼 희극적인 오페라를 많이, 그것도 매우 빨리 작곡하는 것으로 유명세를 탔던 음악가입니다. 그런데 이제까지와는 달리 어린 신부가 초야에 남편을 살해하고 정신이 나간 상태로 피투성이가 된 옷을 입은 채 하객들 앞에 나타나 광란의 아리아를 부른다는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를 만든 것이지요.”지난 6일 한 ‘페부커’(페이스북 사용자)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도니체티의 오페라 중 가장 유명한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를 소개한 글이다. “사실 도니체티는 스코틀랜드의 사연을 담은 이 스토리에 매료돼 자신이 좋아하는 테너 가수를 염두에 두고 오페라를 만들었는데, 페르시아니라는 소프라노가 초절기교를 요구하는 광란의 아리아 콜로라투라(오페라에서 기교적으로 장식된 선율) 부분을 완벽하게 소화하면서 이 아리아가 프리마돈나를 위한 오페라로 바뀌게 됩니다.” 웬만한 애호가도 알기 어려운 뒷이야기까지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솜씨에서 깊은 ‘내공’이 느껴진다. 페부커는 정재훈(60)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 사장이다. 국내 원전과 수력발전을 총괄하는 공기업 사장과 오페라 해설가. 잘 와닿지 않는 조합이지만 정 사장은 1인 2역이 어색하지 않다. 하루도 거르지 않는 그의 페이스북은 일기장과 마찬가지인데, 토요일엔 항상 음악 이야기를 한다. 클래식과 오페라, 현대 음악까지 시대와 장르를 가리지 않고 해박한 지식을 과시한다. 정 사장이 들려주는 음악 이야기가 눈길을 끄는 건 이 시대 사회상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3일 소개한 음악은 시각장애인이면서 자폐증을 앓고 있는 한국계 청년 코디 리가 지난해 미국의 유명 오디션 프로그램 ‘아메리카 갓 탤런트’ 예선에서 부른 레온 러셀의 ‘어 송 포 유’(A Song for You). 어머니의 안내를 받아 피아노 앞에 앉은 리는 심사위원은 물론 세계 곳곳에 감동을 안겼고, 결승까지 올라 최종 우승을 차지해 화제를 모았다. “흑인이든 한국인이든 백인이든, 누구든지 이 세상에 태어난 데는 이유가 있고 부모님의 사랑으로 존재하는 겁니다. 어머니의 사랑처럼 인류의 보편적 감정과 가치, 그리고 따뜻한 공동체를 가능하게 해주는 배려와 나눔으로 우리 모두가 어디에 있든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미국 전역으로 확산된 인종차별 반대 시위에 대한 안타까움을 우회적으로 내비친 것이다. 정 사장이 특히 조예가 깊은 분야는 클래식이다. 서희태 지휘자가 2013년 창단한 ‘놀라온 오케스트라’의 명예단장이기도 하다. 서 지휘자는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2008년)의 주인공 ‘강마에’의 실제 모델. 정 사장의 클래식 소양에 감탄한 서 지휘자가 직접 명예단장을 제안해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 가고 있다. ‘놀자’의 앞글자 ‘놀’과 ‘즐거운’을 뜻하는 순우리말 ‘라온’의 합성어인 놀라온 오케스트라는 클래식이 어려운 음악이라는 편견을 깨고 관객과 함께 연주하는 걸 추구한다. 페이스북에서 클래식 전도사 역할을 하는 정 사장과 잘 어울린다. 산업통상자원부 등에서 30년간의 관료 생활을 거쳐 공기업 사장이 된 그는 어떻게 클래식에 입문했을까. “대학생 때 미팅 나가면 잘 보이려고 클래식 몇 곡을 억지로 외웠죠. (예술가) 아내와 결혼하니 얕은 지식이 금방 들통나더라고요. 아내에게 핀잔을 들으면서 조금씩 관심을 가졌는데, 젊은 시절엔 밥 먹듯이 하는 야근 탓에 시간이 없었어요. 그러다 고위 공무원으로 승진해 사무실에 제 방이 생기고 나서 본격적으로 듣기 시작했죠. 매일 아침 가장 먼저 출근해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잔잔하게 클래식을 틀던 게 어느덧 취미가 됐어요. 지금은 카페나 라디오에서 클래식이 나오면 아내와 먼저 제목 맞히기 내기를 합니다.”서 지휘자와의 인연은 우연히 시작됐다. 하루는 지인으로부터 “아는 지휘자가 공연을 하는데 표가 안 팔려 고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비를 털어 10장의 티켓을 샀다. 평소 고생한 후배 공무원에게 나눠주고도 2장이 남아 아내와 직접 공연을 보러 갔는데, 지휘자가 바로 서희태였다. 정 사장은 “음악은 배경 지식을 쌓고 들으면 훨씬 즐겁고 숨겨진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며 “한 사람에게라도 더 클래식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기로 서 지휘자와 약속했다”고 했다. 정 사장은 매주 토요일 페이스북에 음악 해설을 올리는 걸 2010년부터 한 주도 거르지 않고 계속하고 있다. 음악 해설에도 시사와 교훈을 녹이는 정 사장은 코로나19 시대를 맞아 공기업의 사회적 책무를 강조한다. 한수원 본사가 위치한 경북 경주는 신라의 천년 문화가 잠들어 있는 곳이지만, 코로나19로 관광객이 급감하며 지역경제가 직격탄을 맞았다. 이에 정 사장은 노조와 협의해 지역사회 소비 활성화를 위한 ‘한수원 노사합동 1339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질병관리본부 콜센터 번호(1339)에서 이름을 딴 이 캠페인은 일종의 릴레이 챌린지다. ‘1’명이 ‘3’군데 이상의 전통시장이나 소상공인 가게에서 소비를 하고 다음 챌린저 ‘3’명을 지명한다. 지명받은 챌린저는 2주 이내에 다시 세 군데 이상의 전통시장이나 소상공인 가게를 찾는다. 이렇게 한 명이 ‘9’배의 소비를 이끌어 내겠다는 의미를 담았다. 지난달부터 진행 중인 이 캠페인은 오는 19일까지 7주간 진행된다. 한수원은 또 정 사장을 비롯한 본부장급 임원이 4개월간 월급여의 30%, 다른 직원은 자율적으로 일정액을 반납하는 캠페인도 펼치고 있다. 이렇게 마련한 재원을 지역경제 살리기와 취약계층 지원에 활용할 계획이다. “코로나19가 한창 심각했을 땐 소상공인 매출이 최대 90%까지 줄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년과 마찬가지로 월급을 받고 있어요. 공기업으로서 혜택을 누린 만큼 당연히 고통 분담에 동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신 직원 개개인이 얼마를 반납하는지는 제게 일절 보고하지 말라고 했어요. 각자 개인 사정이 있는데 사장 눈치를 보며 월급을 내놓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진심을 담아 동참하길 원했어요.”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못지않은 고용 한파가 계속되고 있는 만큼 일자리 창출 방안도 연구 중이다. 디지털 경제 기반 마련을 위한 데이터와 콘텐츠 구축, 비대면 행정서비스 분야에서 한수원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일자리를 만들 계획이다. 이를 위해 지난 1일부터 전 직원을 대상으로 아이디어 공모전을 진행 중이다. 코로나19로 지연됐던 신입사원 채용도 재개했다. 실물경기 침체로 원전업계 기업들은 발주처 물량 축소와 원자재 조달 등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에 한수원은 자사 협력기업뿐 아니라 두산중공업 원전부문 협력기업에도 긴급자금을 지원하고, 선금 지급 상한을 70%에서 80%로 높였다. 지급 시기도 14일에서 5일로 단축했다. 국제 입찰 대상이었던 품목을 국내 입찰로 전환해 총 6171억원(94건) 상당을 국내에서 조달하는 등 상생 체계를 구축했다. “공기업 수장을 맡아 조직을 이끌어 보니 변화를 싫어하는 문화가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하지만 세상은 코로나19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 정도로 급격히 바뀔 것이고, 공기업도 이제 변해야 합니다. 우리부터 먼저 정부의 실물경제 활성화에 적극 동참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보상받는 업무 시스템과 조직 문화를 정립하겠습니다. 코디 리가 장애를 딛고 ‘아메리카 갓 탤런트’ 우승이란 기적을 연출했듯이 우리도 역경을 이겨 내고 한 단계 높이 도약할 것이라 믿습니다.” 임주형 기자 herme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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