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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성씨 집성촌(압록강 2천리:19)

    ◎봉성­본계현일대 서·문씨들 “오순도순”/이주후 300여년 걸려 서가보·박보촌 등 형성/동성동본 혼인기피… 다른민족 아내로 맞아/조상숭배 대단… 혼례전 선조묘소 절하고 예식치러 요령성은 한반도와 중국 대륙을 왕래하자면 반드시 지나가야하는 회랑이다.그래서 오가는 길에 주저앉아 눌러살기도 하고 일부러 찾아와 자리를 잡기도 했다.동아시아 역사와 무관치 않은 요령성 이유민은 대를 두고 많은 후손을 남겼다.오늘의 조선족과 크게 구별되는 이유민의 역사는 꽤 오래되어 요령성에는 조선 성씨를 가진 유명한 집성촌이 더러 있다. 서씨와 문씨가 많이 사는 요령성 봉성현의 서가보,박씨의 못자리판인 본계현 산성자향의 박보촌이 대표적 집성촌이다.박씨의 경우는 박보촌 말고도 개현 진둔향의 박가구가 또 있다.이들이 집성촌을 이룬 것은 약 3백∼3백50여년이 된다고 한다.그러니까 이유민으로 들어온 선조로부터 약10∼11대손이 조선 성씨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봉성현 서가보의 문씨 선조가 요령성에 첫발을 들여놓은 시기는 17세기 중엽이었다.서가보의 문씨가 현재 보존하고 있는 「문가씨보서」의 머릿말을 보면 내력을 잘 밝혔다.시조는 문서였는데 본래 조선인이었다는 것과 압록강에서 1백20리 떨어진 옥상좌동(평안북도 땅)에서 세세대대를 살았다고 기록했다.그리고 문씨 시조 문서가 청나라 순치연간(1644∼61년)에 시험을 치러 역관이 되었다는 사실을 적었다. ○청나라 역관신분 정착 문서는 역관이 되었을 때 나이는 30살이었고 조선에서 중국으로 들어오는 첫 관문인 요령성 봉성현 봉황성에 배치받았다.6품 통역관 직책으로 조선사절의 신분을 조사하는 일을 담당했던 그는 늘 후덕한 인상을 풍겼다.그리고 김씨와 나씨,박씨 등 세 부인 사이에서 아들 셋을 두었다.그 후손들은 1911년 신해혁명까지 한 자리에서 세습 통역관의 대를 이었다.이들이 봉성일대에 여러 문가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봉성현에서 진장을 지낸 윤희봉(35)씨 이야기에 의하면 문씨와 서씨 말고도 여러 조선 성씨를 가진 만족(만주)이 요령성에 많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현재 단동시 조선족문화관장인 그는 조선 성씨를 가진 민족의 생활상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만족들 중에는 최씨와 김씨,백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디요.집성촌은 아닙네다만,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습네다.술자리에서 더러 자리를 같이 하면 자기 조상이 아무개 누구라면서 조선족 만난 것이 반갑다고 난리를 칩데다.그들 조상도 대개 문씨네 조상과 같은 시기에 건너온 사람들이디요.그러나 문씨와 서씨네 만큼은 조선의 냄새가 덜 합네다.문씨네는 초상을 당하면 흰상복에 삼띠를 두르고 여자들은 머리를 풀어 흰댕기를 매더란 말입네다』 그리고 본계현 삼성자향 박보촌에는 40가구가 박씨들이었는데 전체주민의 40%를 차지했다.박보촌은 만족어로 쌍하스마후다.17 25년부터 그렇게 불렀으니 3백년의 이주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청나라 초에 박대와 박오가 땅을 부친 것이 동기가 되어 지금까지 그 후손들이 박보촌의 맥을 잇고 있다.지금 박보촌에 자리잡은 박씨네는 박오의 후손이라고 한다. 청나라 가경연간(1796∼1821년)에 만든 「박씨족보」는 박씨 자신들이 조상신을 모신다는 사실을 기록했다.이는 한족이나 만족이 모시는 신보다 하나가 더 많은 것이다.이 마을 박문수(89)노인은 어렸을 때 자신이 실제로 본 조상신을 기억해냈다. 흰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통 넓은 바지차림을 한 노인이었다고 했다.노인이 기억한 조상신상이라는 것은 아마도 영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보촌 박씨네들의 조상숭배 의식은 혼인풍속에도 나타났다.그들은 혼례를 올리기 이전에 먼저 고구려 고분에 재배분향하고 이어 박씨 조상묘소에 절을 올리고 내려와 예식을 치른다.혼례 전에 찾는 고구려 고분은 박보촌에서 3백여m 떨어진 산성유적 꼬우리광즈(고려방자)안에 있다.박씨의 조상들이 이주해온 이역타국에서 민족의 뿌리를 찾고자 노력한 흔적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최·김·백씨 만족도많아 박보촌 박씨들은 장례식 축문에서도 고구려를 떠받들었다.첫 구절에 「당나라 백만 대군이 침입하매 연개소문이 이를 무찔러 쫓아버렸도다」(당국백만대군입침 연개소문격이지퇴)라는 말이 나온다.고구려의 영광을 예찬한 이 글은 후손들에게어떤 긍지와 자신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이들의 족보에는 동성동본끼리의 혼인 흔적이 전혀 없다.한족과 만족의 잡거지역에 살았던 터라 다른 민족을 아내로 맞았다.그럼에도 조선족 전통음식인 된장과 간장을 집집마다 담갔다.또 옷과 이불 호청에 풀을 빳빳하게 먹이는 습속도 그대로 간직했다.어른을 공경하는 전통예절 역시 철저히 지켜 집안 어른의 밥상은 작은 소반에 따로 차렸다. 조선의 성씨인 박씨가 많기로는 개현 진둔향 박가구가 단연 으뜸이다. 박씨 성을 가진 사람이 89가구 2백87명을 헤아렸다.심양∼대련을 잇는 일망무애한 요동평원에 자리한 이 마을 이웃에도 고려산성과 같은 고구려유적이 있다.조선의 글과 그림이 있는 옹기와 조선의 낫과 호미,3백근짜리 동종이 마을에 전해내려왔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말았다.지금은 돌절구 방아확 하나가 남아있다.그 절구마저도 깨진채 절반쯤 땅속에 묻혔는데,무심한 빗물이 확을 가득 채웠다. 마을 어귀에는 화강함 비석 하나가 서 있다.청나라 연호로 가경14년(1809년)에 박씨 가문의 6대손 박동국을 기리기 위해 아들 4형제가 세운 것이다.박경청이 보존하고 있는 족보를 훑어보았더니 모계도 4대까지는 조선족 이름을 적었다.그후로는 한족이나 만족의 이름이 섞여 나왔다.마을 사람들을 길에서 만나면 한어로 『나도 조선족』이라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을어귀에 박씨 비석 중화민국시기에 이 마을에 사는 형씨들이 마을 이름을 박가구 대신 형가구로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인 적이 있다.박씨들은 현에 진정하는 등 반대운동을 벌여 마을 이름을 지켰다는 것이다.한번은 좀 떨어진 다른 조선족 마을에서 안노인 둘이서 고사리를 꺾으러 박가구까지 갔는데 마을 박씨들이 집으로 불러들여 융숭한 대접을 해주었다.그리고 조선족 안노인들이 꺾어온 고사리나물 보따리를 10여리나 되는 정거장까지 등짐으로 날라다 주는 따뜻한 인정을 베풀었다. 요령성 조선 성씨들의 집성촌에서는 지난 1982년 중국 총인구조사 당시 조선족으로 돌아가는 운동을 벌였다.그 결과 서가보,박보촌,박가구에 사는 조선 성씨를 가진 사람들 모두가 정부의 비준으로 조선족 대열로 들어왔다.피는 물보다 진한 것이어서 그들에게 무한한 연민의 정이 우러났다.
  • 사하공화국 툰드라(시베리아 대탐방:57)

    ◎세계최대 가스전 발견… 각국서 탐사 1827년 여름.당시 합동으로 시베리아 지역 석유·가스탐사에 나섰던 러시아 탐사팀과 미국의 쉘사팀은 현재 사하공화국의 수도인 야쿠츠크시 외곽지역의 한 곳을 파내려갔다.바이칼지역 출신 탐사전문가이자 탐사대장 쉐르코는 땅을 지하로 아무리 파내려가도 물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겼다.그가 당시에 판 곳은 지름이 2m,깊이는 29m였다. 페테르부르크연구원들이 이후 10년동안 1백16m까지 파들어갔다.그래도 땅은 평균 섭씨 영하12도를 유지하는 얼음이었다.탐사대원들은 결론을 내렸다.지구상에서 육지에 영원히 녹지않는 층이 있다는 결론이었다.툰드라지역을 발견해낸 것이다.이후 탐사기관과 야쿠츠크 동토연구소가 확인한 영구동토층은 지하 1천5백m까지로 잠정결론을 내렸다. ○한반도의 14배 면적 야쿠츠크를 수도로 하는 사하공화국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땅이 영구동토층이다.사하공화국의 면적은 3백10만㎦.러시아땅의 5분의 1이자 한반도의 14배에 해당하는 큰 지역이다.동·서지역의 시차가 3시간이나 되는 이 지역은 동·서의 길이가 2천5백㎞,남·북의 길이가 2천㎞나 된다. 취재팀이 만난 주라블예프 빅토르 이바노비치 사하대통령보좌관의 경험이다.그는 62년 이곳으로 이주해와 행정가로 일했다.주택을 스스로 지어 살았던 그는 해마다 여름철만 되면 지은 집이 무너져버렸다.여름철의 기온이 섭씨 30∼40도.겨울철 기온이 영하 40∼60도를 오르내리는 곳이 사하공화국이다.연교차 1백도를 견디는 기초공사가 필요했지만 그는 여느 주택의 기초공사처럼 집을 지은 것이다. 취재팀이 야쿠츠크 지역을 탐방하는 동안 주택들이 비스듬히 쓰러져 있는 곳이 많이 목격됐다.도로 옆의 전봇대도 기울어진 곳이 여기 저기 방치돼 있었다.주라블예프씨는 이같은 상황이 영구동토층인 이곳의 땅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2년만에야 알았다. 『여름엔 지하3m까지 녹습니다.땅이 녹으면서 집이 기울기 시작하지요.겨울에 땅이 얼기 시작하면 집의 기초가 심한 비틀림현상을 보이기도 하구요』 그는 이곳 동토연구소가 개발한 「고상주택」기법을 나중에야 알고 집을다시 지었다.고상주택은 동토연구소가 지난 48년 세계최초로 개발한 건축기법.즉 지름 60∼90㎝정도의 콘크리트기둥 수십개를 만들어 먼저 건축물을 세우고자하는 대지위에 박은 뒤 이 기초위에 아파트나 다른 건축물을 짓는 방식이다.여름에는 지하3m까지 녹기 때문에 콘크리트 기둥은 최소한 6m이상 박아야 하고 콘크리트 배합도 동토의 특성에 맞게 잘 배합되어야 한다. 주택이나 다른 건축물이 모두 「밥상처럼」 위에 놓여져 있는 방식,이것이 고상주택이다.야쿠츠크의 건축물들은 거의 1백%가 고상건축물이다. 이런 식으로 집을 지으면 여름철 일부 땅이 녹을 때 건축물은 1∼1.5m위로 치솟는다.겨울철 기초가 수축작용을 일으키면 다시 건축물은 기초기둥을 따라 그만큼 가라앉는다는 것이다.러시아에서 처음 이같은 고상주택 기법을 개발한 이후 캐나다와 중국·아프리카 일부 동토지역에서도 이같은 건축기법을 동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주라블예프씨의 얘기다. ○여름철 디프테리아 극성 주택가의 전봇대도 이같은 기법을 응용했다.콘크리트기둥 「심지」를 깊숙이 박아놓은 뒤 이 기둥에 별도로 전봇대를 잇는 방식이었다. 야쿠츠크 서북쪽 5백㎞ 지점에는 바로 지구상에서 가장 추운 곳인 「오미야콘」이라는 지역이 있다.가장 추울 때의 기온이 영하 71∼72도.이곳보다 더 추운 곳이 남극에 있기는 하지만 「사람이 거주하는 지역으로서」가장 추운 곳이 바로 오미야콘이다.하지만 이 지역은 지상최대의 가스전이 발견돼 독일등 서구 여러나라에서 한창 탐사활동중이다. 취재팀은 야쿠츠크를 취재중 한 가스개발 예비탐사팀을 이곳에서 만났다.이들은 바로 한국에서온 예비탐사팀이었다.우리나라와 러시아는 최근 「한·러 사하지역 천연가스 개발협정」을 맺고 양국이 이 지역에 대한 천연가스 공동개발에 착수한 사실은 이미 알려진대로다.21세기 사업이랄 수 있는 이 개발은 사하지역의 가스전을 개발,가스파이프를 야쿠츠크∼블라디보스토크∼북한∼한국까지 매설하는 21세기 대형프로젝트의 하나다.한국에너지연구소 소속 연구원들인 이들 예비탐사팀은 이미 2개월을 이곳에 머무르고 있었다.이들 가운데 한대원은 『팀 가운데 한 연구원이 한달동안 디프테리아에 걸려 죽다 살아났으며 취재팀들도 디프테리아를 조심하라』고 충고했다.그들은 『나머지 다른 대원도 병원을 찾아 병원균 감염검사를 했다』면서 『이곳 디프테리아는 걸리면 일단 90%는 사망하며 나아도 다시 60%는 심장마비등 후유증으로 고생한다』고 말했다.빨리 병원을 찾아 백신을 맞으라는 주문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이미 10년전에 자취를 감춘 전염병이지만 이곳에는 여름철마다 환자가 많이 발생한다는 것이다.디프테리아가 이곳에 만연하는 것은 바로 사하지역의 섭씨 1백도에 이르는 연교차 때문이다.또 곳곳의 많은 늪지대가 여름철이면 전염병균의 서식처라는 것이다. ○미주 야생밀렵꾼 몰려와 이와 관련,사하병원의 한 관계자는 『러시아에서 가장 큰 병은 바로 디프테리아』라면서 『러시아 거의 모든 도시 사람들은 여름철이 되기전 예방백신을 맞는 것이 생활화돼있으나 백신은 크게 부족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사하의 이같은 생활조건에도 불구,여름철 외국인의 발길은 여객기 티켓을구하지 못할 정도로 붐빈다.사하공화국은 석유·가스 뿐만 아니라 멘델예프가 만든 화학원소기호에 나오는 모든 금속이 생산되기 때문이다.한편으로 멀리 미국·캐나다 등지에서는 야생밀렵꾼들이 야생조류나 곰·순록등을 사냥하기 위해 모여든다.이곳에서만 서식하는 북극여우털을 「채집」하기 위해 모피산업 관계자의 발길도 부산한 곳이 사하공화국이다.
  • 땅밑 탈것 속에서 보는 일들은(박갑천 칼럼)

    땅밑교통 이용하는 일이 많아졌다.서울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느끼겠지만 믿을건 땅밑.얼른 타기 편하다고 땅위교통 이용하다가 황그리는 일은 적지않다.짬짜미시간 제대로 못대고서 뒤통수 긁적인 연인들도 많으렷다. 출근시간에 땅밑탈것 타면서 볼일 못볼일 다본다.물론 지금은 김유정의 수필 「전차가 희극을 낳아」의 전차안같이 한가로운 풍경일 수는 없다.우선 글을 써붙여 노약자와 장애자가 앉게 돼있는 자리부터 보자.대체로 젊은이가 차지하고 있다.글소경 아닌가 생각되는.더러 그앞에는 늙은이가 손잡이에 매달려 서있기도 한다.가끔씩 방송도 나온다.그자리는 노약자·장애자에게 양보해야 한다는.하지만 말귀(마이)에 부는 샛바람(동풍)이다. 가만히 훑어보노라면 앉은 사람은 거의라 할만큼 졸고들 있다.끄덕끄덕 꾸벅꾸벅.일본사람들이 말하는 너구리잠인지 아니면 여우잠인지.무슨 연유로 엊저녁잠을 설친 것일까.아니더라도 흔들거리는 탈것은 졸음을 불러들이는 법이긴 하다.한데 역에 닿으면 영락없이 벌떡 일어난다.눈만 감고 있었든지 수잠들어 있었든지의 어느쪽일 게다. 어떤 역에서 중늙은이 여성이 탄다.그는 일반석 여학생 앞으로 간다.『아이고고!』 물탄꾀 비명을 연발하면서.일어서는 여학생.두말없이 그자리에 털썩 앉는다.권리라도 찾은듯 사뭇 당당하다.고맙다는 말한마디 안나오는 것일까.그 나이또래의 한 남성은 숫제 자리를 「강탈」한다.요즘 젊은것들 도무지 예의범절이 없다고 엄펑소니치면서.자기가 앉지않고 남을 앉혔다면 듣기 민망한 「고담준론」이 그래도 나을 뻔했다. 성인은 희미한 조짐만 보고도 그것이 이르게될 결과를 안다고 했다(「한비자」설림편).그래서 기자는 주왕이 상아로 젓가락 만드는걸 보면서 천하의 앙화를 미루어 알았다.상아젓가락에 어울리는 밥그릇·밥상을 만들어야 하고 또 그에 걸맞을 산해진미하며 미주·미녀가 뒤따를 것이라는 데서였다.땅밑탈것 속의 이런저런 풍경은 오늘의 우리 의식구조 민모습을 그림그리고 있는것.우리의 내일이 어떻게 펼쳐질지 짐작케한다. 어른이 어른답지 못하면 젊은이도 젊은이답지 못해진다.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군군신신부부자자:「논어」안연편).하건만 스스로는 답지 못하면서 남만을 탓하는게 과연 옳은 자세일까.제각기의 자리에서 다워질수 있는 길을 찾아야겠다.
  • 효도 휴가비(외언내언)

    우리 조상에게 효행의 전형이 되었던 것은 「삼국유사」에 소개되고 있는 손순부부의 얘기다.신라 흥덕왕때 너무나 가난하던 이 부부에게 어린 자식이 노모의 밥상에서 맛있는 음식을 가로채는 게 큰 고민거리였다.부부는 참다 못해 아이를 죽여서 묻어버릴 생각으로 산속으로 간다.한밤중에 땅을 파는데 괭이끝에 걸려 나온 것이 있었다.진기한 석종.청아한 소리를 내는 돌종 때문에 효성스러운 부부는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됐다는 얘기다. 손순부부의 얘기 말고도 지극한 효행에 관련된 설화는 많다.부모 3년상을 산소옆 초막에서 보낸 효자가 호랑이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왔다는 효행담도 전해온다.부모님 병환에 자신의 허벅지살을 베어 간병했다는 일화는 흔한 얘기.충과 효가 사회를 지탱하는 양대가치이던 시대에 있을 법한 일들이다. 그러나 산업화·핵가족화가 이루어진 요즘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기행이자 비상식이다.효의 실천을 위해 자식을 죽인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 아닌가. 시대에 따라 효의 개념은 그만치 달라진 것이다.그렇다 해서 효자체가 윤리적 덕목에서 제외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패륜이 횡행하고 있는 오늘의 사회지만 도처에서 효의 복원과 부활을 외치고 있는 것은 그러한 배경을 말해준다.노부모를 모신 자녀에게는 아파트추첨의 특전도 주고 어버이 생신날에 효친휴가를 주기도 한다.신입생과 학부형이 어울리는 「효도캠프」를 개설한 대학도 있다. 총무처는 올 추석부터 공무원의 「효도휴가비」를 대폭 인상키로 했다.효도휴가비는 설에도 지급된다.추석이나 설명절에 효도휴가비 받아 고향에 계신 부모님 뵈오러 가는 길은 얼마나 흐뭇하고 가슴벅찰 것인가.열흘 뒤엔 추석이고 2천6백만의 귀성·귀경 대이동이 시작된다.이렇듯 치열한 귀향전쟁도 그 바닥에는 훈훈한 효심이 깔려 있는 것이다.
  • 장백현의 아침(압록강 2천리:1)

    ◎백두산 병사봉 아래서 압록강 발원…/백두산 자락 오솔길엔 아픔드리 나무숲/상류에 163개 작은 섬… 92개는 북한 소유 서울신문은 광복 50주년을 맞아 압록강유역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 민족의 삶을 진솔하게 그린 「압록강 2천리」를 중국 연변 조선족 작가 유연산씨의 집필로 주 1회씩 연재합니다.서울신문 사진부 김명국기자와 동행한 작가는 민족의 개척정신이 면면히 이어진 이른바 서간도땅 압록강유역을 굽이굽이 누비면서 소수민족으로 살아온 동포들의 애환을 소설보다 흥미롭게 엮어나갈 것입니다.그리고 압록강의 대안북한땅을 예의주시하는 가운데 가지 못하는 산하의 모습과 북녘 사람들의 근황을 듣고 본대로 전할 예정입니다.특히 압록강유역은 고구려가 발흥한데 이어 발해가 기상을 떨친 우리 고대국가의 강역이었다는 점에서 역사기행 성격도 지닌 시리즈가 될 것입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정부 소재지 연길에서 장백현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중국 동북의 대지를 박차고 막 솟아오른 8월의 태양과 동행한 버스가 백두산 자락이 드리우기 시작한 안도현 이도백하에 이르자 벌써 한낮이 기울었다.갑자기 해를 가린 아름드리 나무그늘로 하여 길은 저녁나절 처럼 어둠침침했다.백두산의 그 많은 나무 가운데 미인이라는 홍송과 백송,사시나무가 어우러진 산자락에는 만화방초가 피어났다. 여름날 백두산 숲길은 참으로 아름다웠다.얼마를 달렸을까,종종걸음을 치듯 골짜기를 흘러내려온 물이 신작로 곁을 따라 철철 넘치듯 모여들었다.압록강 윗물을 만난 것이다.불타는 석양이 미인송의 아름다운 자태를 그림자로 만들어 버린 해거름녘이었다.터덜거리는 버스가 달려 내려갈수록 물빛깔은 푸르름을 더했다.녹음이 짙을대로 한창 짙게 물들어버린 나무 그림자가 수면과 기묘하게 조화되었다. ○홍·백송 어우러 장관 그제서야 압록이라는 의미를 깊이 깨달았다.압록강의 물빛이 오리머리 빛과 같이 푸른 색깔을 하고 있다(수색여압연)란 말을….「동국여지승람」에 나온다.그리고 「사기」나 「한서를 보면 압록강을 패수,염난수,청수라고 불렀다.고구려에서는 청하라고도 했고 중국에선 얄루장으로 부른다.어떻든 이 국경의 강은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다. 장백조선족자치현의 현정부 소재지 장백진에는 좀 늦은 저녁시간에 도착했다.여관에서 저녁밥상을 물리고 미리 약속한 김학현(60)선생을 만났다.그는 길림성 장백조선족자치현 문화관장으로 근무중인데 변계조사조의 일원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그러니까 김선생은 중국과 북한 사이에 체결한 변계조약(변계조약·국경조약)에 따라 1963년에 실시한 경계조사에 참여했던 것이다. 국경에 관한 이야기를 밤이 늦도록 나누었다.그러나 백두산 천지 아래서부터 시작된 국경조사와 거기에 얽힌 사연은 다음기회로 미룰 수 밖에 없다.그 이유는 김선생의 말을 들어보면 납득이 갈 것이다. ○여름 장마로 길 끊겨 『백두산 국경비는 천지서남쪽 바로 아래에 있디요.맨 위에서 부터 일련번호를 매겨 내려오는데,1호가 3개,2호가 2개고 나머지 5호까지는 각각 1개씩을 세웠댔습니다.그러니끼리 모두 8개의 국경비가 있다 이 말입네다.그 국경비가 있는 백두산을 가자면 중국쪽 초소는 물론 조선(북한)쪽 초소도 지나가야 하디요.그런데 올 여름 장마에 길이 다가 떠내려가서리 지금은 도저히 올라갈 수가 없이요.도로가 복구되면 안내할테니 좀 기다리시라요.실사구시라고 현장을 안보고 백두산 국경을 어떻게 쓰겠습네까?』 그래서 백두산 국경선 답사는 일단 뒤로 미루었다.자동차를 타지않고 높디높은 백두산,그것도 국경 고산지대를 도보로 등반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김선생에게 뒷날 백두산 국경비답사에 동행해줄 것을 부탁하고 마음을 고쳐먹었다.물길이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장백진에 기왕 도착했으니 이곳에 우선 관심을 두기로 작정을 댄 것이다.올라가지 못할 나무 바라보지도 말라고 했던가.길이 떠내려가 못 오를 산을 포기하고 우선 이곳의 압록강 답사에 신경을 쏟기로 했다. 압록강은 널리 알려진대로 백두산 최고봉인 병사봉아래 남동쪽에서 발원한다.처음에는 작은 시냇물을 형성하여 흐르다가 가림천과 오시천이 합수하면서 물길이 넓어진다.그러니까 장백진은 물길이 넓어진 압록강변에 자리했다.압록강은 장백진을 지나면 서쪽으로 흐름을 바꾸어버린다.그러면서 얼마를 흐르면 수력발전으로 유명한 장진강과 허천강을 만나는 것이다. ○강넘어 북한땅 함남 장백진을 지나가는 압록강 길이는 2백57㎞에 이른다.6백리가 좀 넘는 길이인데,압록강 전체 길이의 3분의1에 약간 못미친다.변계조사에 참여한 김선생에 따르면 장백현을 통과하는 압록강 상류 수계에는 섬과 사주가 1백63개나 된다고 한다.그 가운데 중국에 들어온 것이 71개이고 나머지 92개는 북한에 귀속되었다는 것이다.이렇듯 수계를 통한 국경개념이 뚜렷해지면서 웃어넘길 수 없는 일들도 일어난다는 것이 김선생의 귀띔이다. 『강에 있는 섬들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 때가 더러 있습네다.자기 나라 땅이거니 하고 무심히 발을 디뎠다가 기절초풍을 하는 수가 있디요.내 한족 친구 한 사람은 일생에 딱 한번 외국땅을 밟았는데 그것이 압록강 조선(북한)수계에 들어간 섬이었댔습니다.무심히 섬에 올랐더니 옥수수를 따던 조선사람들이 어서 돌아가라고 손짓발짓을 해서 도망쳐 나왔다고 합데다.국경은 그만큼 무서울 때가 있고,자칫 잘못하면 죄인이 되기도 하디요』 김선생과 밤 늦도록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그런데도 새벽에 해발 2백80m가 되는 탑산에 오를 요량으로 일찍 일어났다.탑산에 오르고 나서 장백현에서,아니 좀 더 시야를 넓히면 백두산에서 뜨는 아침해를 맞았다.새벽 어스름이 걷힌 압록강이 확연하게 시야로 들어왔다.그리고 강 건너로 옛 함경남도 땅인 북한의 양강도 혜산진시가지와 그 뒷산 멀리에 펼쳐진 개마고원의 옹기종기한 묏부리들이 보였다.
  • 비엔날레초/신경호 화가·전남대교수(굄돌)

    속절없이 또 오월이 지나갔다.우리는 그대로 무위인채,세월은 강이다.그리고 아직도 광주는 떠도는 섬이다.얼마나 많은 허언끝에 그대들은 화해의 올가미를 덫놓고 정치한 부아만 돋우고 자빠졌는가,이녁의 입으로 무엇을 왜 용서하자든가 말하여 주시게. 미륵정토 세상이 오면 긴긴 잠 깨시고 벌떡 일어난다는 돌부처 한 쌍 그 천불천탑의 운주사에서 「대갈통이 없는 아득한 포시」를 밑고 끝도 없이 그려대다가 아,이도 부처님 뜻인갑다.그 한 삭아내리더니 외로운 섬은 내 안에서 화엄이 되어버렸다.그리고 무애의 빈 터가 뻥 뚫렸다.세상 돌아가는 것과는 무관하게 그렇게 돼버린 것을 그대들이야 어찌 알랴만은,온통 지자제선거판에 넋빠져 있는데 느닷없이 작년말부터 광주비엔날레를 한다고 정신없다.아뿔사 그것도 비엔날레 개막일 코앞에서 「5·18」공소시효가 끝장나는,역사에 맡기자던 선견지명이로구나.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격이니 오얏나무 아래에서 갓끈 고쳐 매지않는다는 것이 괜한 소리가 아님을 알겠다.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초유의 국제적미술제가 진행되는 바람에 개최지의 프리미엄 딱지까지 붙여 영락없이 미운놈 떡 하나 더 준 꼴로 정녕 팔자에 없을 비엔날레 출품작가로 선정되었다.고맙기도 해라.이렇게 쉽게 순치되는 것이구나.어찌되었거나 나는 부끄럽고 미안하고 내 밥상이 아닌듯 하여 챙피하다.그러므로 이 뜨거운 후안무치를 배반의 칼로 벗기려한다.우리시대의 삶을 관통해온 역천의 칼로 싹둑 썰어버리고자 한다.그러므로 올 가을에는 그대들 모두 광주비엔날레로 오라.낯짝 생긴대로 오라,그러나 빛으로 오라! 화엄 광주는 빛이 모이는 곳,광주사람들은 전부가 하나하나 형형색색의 발광하는 빛이거니와 더럽고 냄새나는 어둠의 빛은 정재식칼로 단죄하리라.일찍이 광주는 빛이 모이는 마을이었으므로.
  • 이농현상/개방바람 타고 돈벌이 찾아 도시로(두만강 7백리:14)

    ◎문혁이후 젊은이 떠나고 부녀자만 남아/7백가구 부동촌엔 농사꾼 한사람도 없어 연변의 조선족들은 지금 식생활에는 걱정이 없다.해방전 대지주들 보다 더 잘 먹고 산다.옛날의 지주집이래야 호주만 이밥을 먹어대고 다른 식구들은 조밥에 된장국이 고작이었다.그러나 요즘은 웬만하면 모두가 이밥을 밥상에 올려놓는다. ○옛 지주보다 더 잘살아 농촌의 소득도 높아졌다.용정시 백금향의 1인당 연간수입은 1천6백원으로 조사되었다.화룡시 숭선진은 1천3백원,두만강 연안 산골의 향진지역도 1천2백원을 웃돌았다.문화대혁명 시기 뙤약볕에서 동이땀을 이틀은 흘려야 10원을 벌었던 때에 비하면 천양지판이다.당시 편지 한통 부치는데 8원이었으니 기가 막힌 노임이었다.그래서 문화대혁명 이야기만 나오면 목청 안 높이는 사람이 없다. 『사시사철 뼈 빠지게 일하고도 굶기는 밥먹듯 했수다.쑥에 소나무 껍질에 안먹어 본 별식이 없드랬시요.그런 주제에 밭고랑 타고 앉아서 세계 혁명에 관심을 가지라고 족쳐댑데다.미친 광대놀음을 한 거디요.등소평동지 개혁개방 안했더라면 모두 굶어죽었을 겁네다』 연변지역 신문에는 농촌소식들이 왕왕 실린다.예전같이 해방전 살림에 비교하는 잠꼬대는 없어졌으나 농촌수입이 해마다 올라간다는 기사가 많아졌다.그런데 물가가 오른 것을 생각하면 농촌소득 높아진 것 만을 자랑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한다.이러한 사실은 농가와 인구가 함께 줄어드는 것을 보아도 알수 있다.화룡시 숭선진의 경우 지난 1990년 1천25가구의 농가가 지금은 9백90가구로 줄었다.호적만 숭선진에 두고 도시로 빠져나간 사람만도 6백20명이나 된다. ○초가집 한채에 1천원 두만강 연안에 임자를 잃은 밭들은 풀이 무성하고 마을마다 주인없는 집들이 쓸쓸히 서 있다.화룡시 노과진 호곡촌은 무산과 마주한 오붓한 17호 인가를 가진 마을이었는데 지금은 3개의 굴뚝에서만 연기가 날뿐이다.그리고 화룡시 덕화진 부동촌은 독립군 안무 일가가 자리잡고 항일을 해온 유서깊은 마을로서 광복후 7백여호였다.그런데 이제는 황폐해져 농사꾼은 한 집도 없다.두만강 언덕에 자리 잡은 초가들은 문짝이 떨어져나가고 대머리 모양으로 볏짚이엉이 훌렁 벗겨져 귀신 살기 알맞는 마을이 되었다.그같이 을씨년스러운 마을에 유독 한 집만이 앞마당에 닭 몇마리가 구구구 모이를 쪼고 개가 행인을 보고 콩콩 짖는다. 지나가던 걸음에 그 집을 들렀다.늙은 양주가 따뜻한 온돌에 앉아서 이불을 꿰매고 있다가 내가 들어서니 대단히 반가워했다.아이들 소꿉장난 모양으로 개와 닭 하고 동무하며 적적하게 살아가던 양주는 낯도 성도 모르는 길손이지만 찾아온 것이 무척 기뻤던 모양이다.인간무리에서 살면 인간이 혐오스럽다가도 인간이 없는 곳에 살면 오히려 그리워 한시도 인간을 떠나 살수 없는 것이 사람인가 보다. 주인의 이름은 이성국(60)인데 화룡시에 거주하는 퇴직 노동자였다.지난해 8월 4백원에 버린 집을 사서 들었다고 한다.오랜 간염환자라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으로 휴양삼아 와 있다는 것이었다.화룡시에 있는 자식들이 쌀이며 채소며를 날라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영감이 운동삼아 자전거를 타고 십리 밖 남평에 가서 사오기도 한다는 것이다.농사꾼들이 삶을찾아 버리고 간 산수 좋은 이 땅은 서서히 주인이 바뀌고 있다.텃밭이나 가꾸면서 여생을 즐기려는 사람들의 휴양지로 변해가고 있다. ○도시인 「별장」 구입 늘어 도문시 위자구진 하남촌은 20여호의 마을인데 2∼3년 사이에 절반정도의 초가를 도시에서 퇴직한 노인들이 차지했다.연길에서 40리 거리라 집값이 꽤나 비싸다고 하는데 한채의 초가가 1천원 내외다.마을을 통째로 산다고 해도 3만원이면 남는다.한국을 드나들면서 현대 문명에 머리가 튼 젊은 사람들은 초가를 사서 주말 별장삼아 쓰고 있다. 화룡시 덕화진 용현촌 박서양(69)노인은 일제때 울릉도에서 속아 이민을 온 사람이지만 연변의 농촌을 지키고 있다.일본인들이 만주로 가면 들판에서 해가 뜨고 지는데 감자가 하도 커서 둘이서 하나를 다 못먹는 복지라고 하는 말을 듣고 19 38년 고향을 등졌다.그런데 웬걸,무산에서 두만강을 건넜더니 하늘만 보이는 산골이었다.아름드리 나무를 베어 부지런히 농토를 개간,그런대로 배불리 먹었다. 그러다 해방에 이어 문화대혁명을 맞았다.문화혁명 시기에는 겨우 감자톨을 구워먹으면서도 거지로 빌어먹고 산다는 고향(한국)으로 돌아가지 안은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모른다.고향에서 연변땅 밀림지대로 함께 이주했던 24가구가 해방 이후 거의 귀국해버린 뒤였다.혼자 남은 그는 그저 공산당 은덕에 감사했다. 『일본놈한테 속고 공산당에 속아 살다가 이 나이가 됐제.지난 90년에 고향 울릉도에 갔더니 없는게 없이 살데.나도 밥술이나 먹어 잘 사는줄 알았더니 그게 아이데.그래도 여기 살수 밖에 없제.땅파먹고 사는 사람은 땅 떠나면 몬 산다구…』 노인은 「농자천하지대본」이 다시 올 날을 기다렸다.고지식한 땅을 믿는 노인 역시 고지식한 마음으로 또 한해 농사철을 맞고 있다.
  • “흑판을 화폭으로… 밥상을 오브제로”

    ◎「이색재료」 자유롭게 사용 “눈길”/중견화가 김명희씨­신예 홍지윤씨 개인전/김명희/폐교된 교실 포스터통해 시간의 흔적 묘사/홍지윤씨/전통성에서 현대성 탐색… 다양한 조형작업 「캔버스에 유채」「한지에 채색」이라는 전통적인 재료개념에 구애받지 않고 작가 자신이 좋아하는 재료를 자유롭게 사용한 두 작가의 개인전이 잇달아 열리고 있다. 중견화가 김명희씨는 9년만에 갖는 개인전(원갤러리·12∼25일)에서 학교에서 수업용으로 쓰이던 흑판에 그린 근작들을 내놓았다. 또 공평아트센터에서 16일까지 첫 개인전을 열고 있는 신예작가 홍지윤씨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가장 자주 대하는 밥상을 오브제로 사용해 눈길을 끈다. 김명희씨가 흑판을 화폭으로 선택한 것은 그의 작업환경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서울대 미대 회화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한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맨해튼에서 20년 가까이 살았던 그는 5년전부터 화가인 남편 김차섭씨와 강원도 내평리의 교실 네개짜리 국민학교 분교를 가정집과 화실로 꾸미고 은거하고 있다.교실 2개는공동의 공간이고 각자 교실 1개씩을 화실로 쓴다. 사실주의 화법으로 시간의 흔적을 묘사하고 생활속의 느낌을 심도있게 추적해왔던 그는 폐교된 국민학교 교실에 남겨진 태극기,칠판,각종 표어와 포스터를 통해 느꼈던 아이들의 에너지를 구체적인 기억의 장면들로 하나하나 재현해 냈다. 추억과 형상을 다룸에 있어 기록자로서의 치밀한 묘사와 목격자로서의 객관적 태도를 견지하려는 그는 「칠판」이라는 관념화되고 인지된 사회적 기호를 이용했다. 홍지윤씨는 하고 많은 재료중에서 「밥상」을 택한 것은 『단순한 조형적 실험에서 착상한 것이라기보다 삶의 실체적인 의미에서 밥상이 인간의 삶과 함께하는 오브제로 받아 들여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밥상외에 한지와 삼베 등 새로운 오브제들을 전통적 안료인 분채와 석채와 병용하면서 다양한 조형작업을 시도한다. 홍익대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그는 『동양화를 단순한 수묵채색에 한정하기보다 재료를 마음대로 써가면서 자유로운 분위기로 전통성에서 현대성을 찾는 작업을 계속하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쓰여질 것을 기다리는 칠판이 아닌 칠판,먹을 것을 올려놓는 밥상이 아닌 밥상.미술평론가 오광수씨는 이에 대해 『재료에 대한 작가의 자유로운 태도의 좋은 반영』이라고 평했다.
  • 평범한 할머니들/생활지혜 나누기 “붐”

    ◎저술·방송통해 살림체험 신세대에 전파/장선용씨/「며느리에게 주는 요리책」 큰 인기/강봉수씨/미용·건강 위한 자연식이요법 펴내 한 가정의 안주인으로,남편과 자녀들을 위해 따뜻한 가정이라는 성쌓기에 전념해온 평범한 할머니들의 몸으로 터득한 생활지혜 나누기가 붐을 이루고 있다. 올해 65세인 한숙자씨와 장선용(55),강봉수(70),이자혜씨(61)등이 선두격 「할머니군단」.특출난 사회생활을 하지도 않았고 요리나 미용전문가도,대학에서 가정생활 관련 학과를 전공한 것도 아니다.단지 평생동안 각자의 생활전선에서 갈고 닦은 삶의 지혜를 버리지 않고 정리한뒤 저술과 방송활동,기고 등을 통해 원기 왕성하게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생활지혜를 나누고자 하는 여성은 물론 신세대 여성들이다.남성들과 똑같이 공부를 하고 직장생활을 하거나 하기를 원하는,그래서 어느정도는 정통적인 가정주부에 낙제생인 그들에게 굳이 인스턴트식품이나 외식,파출부고용만이 능사가 아님을 보여준다. 여성학자이자 방송인인 오숙희씨의 어머니로도 유명한한숙자씨는 이들중 가장 뒤늦게 데뷔한 경우.한국소비자보호원이 발간하는 월간정보지 「소비자시대」에 지난 9월부터 고정칼럼란을 맡았다.제목은 「신세대 주부에게 들려주는 한숙자 할머니의 살림지혜」.당근 부추등 채소와 잡곡을 싫어하는 어린자녀들에게 이를 섭취케 하는 묘책에서부터 환절기 건강을 유지하는 신토불이 요리법등에 이르기까지 한할머니가 제시하는 살림지혜는 「구세대」특유의 구수하면서도 산뜻한 것들이다. 최근 호에서는 명절때마다 주부들의 다리품만을 팔게 하는 명절 밥상차림 개혁론을 내놓기도 했다.차례상물린 상은 어른들에 올리고 나머지 젊은 사람들은 여분음식을 한곳에 두고 뷔페식으로 하자는 것이 내용이다. 「며느리에게 주는 요리책」을 펴낸 장선용씨는 미국에 사는 두 아들 며느리에게 편지에 써 보낸 요리법을 모아 책을 낸 경우다.결혼직후 신접살림을 하면서 음식준비에 스트레스 받는 며느리들을 위해 꼼꼼히 적어 보낸 생활지혜들이 수필과도 같은 잔잔함을 주는 편지글에 더해져 많은 인기를 모았다. 70세라고는 보기 힘든 뽀얀 피부의 할머니 강봉수씨는 미용과 건강을 위한 자연식이요법으로 「강봉수할머니의 자연식이요법」책을 펴낸 것을 비롯,방송강의를 통해 젊은세대에 가장 근접한 할머니.투병중 체질개선을 위해 자연식이요법을 공부하며 「피부는 내장의 거울」이라는 명제를 깨달았다고 한다.강할머니의 책은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채소 등의 흔한 재료로 비누 로션 스킨 팩제를 직접 만드는 법이 미용에 관심이 많은 신세대에 인기를 끌어 93년 7월 초쇄이후 10쇄까지 간행했다.
  • 일 거대야당 신진당 출범/가이후당수,총선 촉구

    ◎9개당파 의원 2백5명/원내 제2세력으로 부상 【도쿄=강석진특파원】 공산당을 제외한 일본의 야당 9개 당파가 결집한 신진당이 10일 하오 요코하마에서 창당대회를 갖고 자민당에 이은 제2당으로 공식 출범했다. 신진당의 출범으로 일본은 보수양당제로 개편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아졌으며 신진당은 자민당에 이은 원내 제2세력으로 향후 정계 재개편을 앞두고 적지않은 영향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신진당 창당대회는 앞서 양원 의원총회에서 선출한 가이후 도시키(해부준수) 당수와 오자와 이치로(소택일랑) 간사장을 정식으로 승인하는 한편 신당 준비위원회가 결정한 부당수 임명도 추인했다. 가이후 당수와 오자와 간사장은 창당대회에 앞서 열린 준비위원회에서 당수 선거에서 패배한 하타 쓰토무(우전자) 전총리와 요네자와 다카시(미택륭) 전민사당위원장 및 이시다 고시로(석전행사랑) 전공명당위원장을 각각 부당수로 임명하기로 결정했다. 정책심의회장에는 나카노 간세이(중야관성) 전민사당서기장,정무회장에는 이치카와 유이치(시천웅일) 전공명당서기장이 각각 임명됐다. 가이후 당수는 이날 연설을 통해 『정권탈환에 전력을 기울일 것』이라면서 당의 단합을 호소했다. 창당대회는 또한 「자유,공정,우애,공생」을 표방한 당강령과 국제화,규제완화등 행정개혁을 주요 내용으로 「당면의 중점정책」을 공식 결정한뒤 「제3의 개국」을 향한 결당선언을 채택하고 폐회했다. 신진당에는 신생당과 공명당,일본신당,민사당,자유당,고지회,신당 미래,구개혁회,리버럴회 등 9개 당파와 참의원 무소속의원 2명이 참여해 중의원 1백79명,참의원 36명의 세력을 이루고 있다. 한편 가이후 당수는 이에 앞서 9일 기자회견을 갖고 현재 자민·사회·신당 사키가케로 구성된 연립정권은 국민의 심판을 받지 않은 만큼 빠른 시일안에 국회를 해산하고 총선거를 실시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민·사회당 재편 촉진제/신진당 출범의 파장/내년 소선거구제 실험거쳐 정계 정비/좌파 분열땐 보수양당제 구도 가시화 일본 공산당을 제외한 야당세력이 10일 신진당을 출범시키면서 일본 정국이 과연 어디로 나아갈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신진당은 정권을 탈환할 수 있을 것인가.사회당은 제3극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자민당은 단독정권을 세울 만큼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내년봄 치러지는 통일지방선거와 8월의 참의원 선거 결과는 어떻게 나올 것인가.신진당이 창당되고 소선거구제 법이 성립됐는데 과연 중의원 선거는 언제 치러질 것인가 등등.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시나리오들이 나오고 있다.특히 선거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도 자신있게 전망하지 못한다.다만 몇차례의 선거를 통해 차츰 보수 양당제로 정리돼 나갈 것이라는 시나리오의 실현 가능성이 높다는데는 의견이 모아진다.사회당이 내분을 극복하고 신임을 회복한다면 물론 3당 정립의 가능성도 남아 있기는 하다. 일본 정치사에 등장한 정치슬로건이 많지만 지난 89년부터는 「정치개혁」이 대표적 정치슬로건이었다.금권·파벌정치 때문이었다.이제 일본 정치는 금세기의 마지막 10년동안 변화의 시기를 거쳐 21세기를 맞이하려는 출발점에 서게 된 것이다.이러한 대계기를 앞두고 각당의 사정은 복잡하다. 정계 개편의 최대 관심은 사회당의 운명.당의 발전적 해체 후 민주리버럴 신당을 만들자는 우파와 무라야마(촌산부시)정권 유지와 자민당과의 선거협력을 원하는 좌파의 싸움이 당 분열 일보직전까지 가 있다.만약 분열된다면 순식간에 지리멸렬할 전망이고 신당을 만들면 어느 정도 생명을 부지할 가능성이 높다.하지만 여론조사는 민주리버럴 신당에 대한 관심조차 10%를 밑도는 것으로 나타나 여전히 어려운 국면이다.일부에서는 몇차례 선거를 거쳐 사라질 것으로 예측하기도 한다. 자민당은 요즘 자신을 회복하고 다음 선거 준비를 가장 착실하게 진행시키고 있다.탈당 예비군이 없지 않지만 정권 복귀 후 구심력을 회복했다.내년도 예산을 한번 더 짤 수 있다면 신진당의 생명력을 상당히 잠식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무라야마정권 유지를 위해 애쓰고 있다.중의원 선거는 내년 가을 이후 치르겠다는 구도다.고노(하야양평)자민당총재 등은 9일 무라야마 총리와의 회담에서 내년 예산에 무라야마정권의 색채를 많이 반영키로 양보하면서정권유지에 의욕을 보였다. 신진당은 창당에도 불구하고 기세가 오르지 않고 있다.지난해 호소카와(세천호희)정권 탄생 때 같은 흥분은 찾아 볼 수 없다.몇차례 밥상에 올랐던 반찬(얼굴)들 뿐이다.신진당은 창당 일성으로 조기총선을 주장하고 나섰다.자·사연합을 흔들기 위한 것이다.또 사회당 우파의 분리를 통해 자·사연합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사회당 우파에 계속 바람을 집어넣고 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고 나오고 있다.그러나 오우치 전민사당위원장이 신진당 합류를 거부한데서 보듯이 지역구 사정에 따른 탈당예비군이 적지 않다.오자와에 대한 반감도 당내에는 꽤 번져 있다. 결국 정계 재개편을 가져올 중의원 선거는 내년 가을 이후 치러질 전망이 우세하다.그에 앞서 치러지는 참의원선거에서 자·사 연립정권이 크게 패배할 경우 총선은 당겨질 것이다.소선거구제로 치러지는 중의원 선거를 통해 일본 정치인은 걸러져 나가고 정당들의 위상도 정리돼 나갈 것이다.합종연형의 가능성도 폭넓게 열려 있다.신진당의 창당은 정계개편의 종결이 아니라 보다 큰 개편을 향한 시작이다.
  • 대구시 동인1가/「온돌방 식당」(맛을 찾아)

    ◎양념 없이 숯불에 구운 한우등심 담백/촌두부·비지찌개 등 토속반찬도 별미 계절이 오고가는 환절기에는 토속반찬에 담백한 방자구이(등심구이)가 제격이다. 양념없이 숯불에 구어 먹는 대구·경북지방 특유의 방자구이는 조선조때 지방관아에서 방자가 가장 맛있는 쇠고기 등심부위만을 골라 수령의 밥상에 올렸다는데서 유래한다. 대구시 중구 동인1가 대구시청옆 온돌방식당(주인 하용덕·47)은 방자구이를 맛볼수 있는 이지역의 대표적인 명가이다. 우선 온돌방식당의 방자구이는 등심의 선별과정에서부터 시작된다.주인 하씨는 매일 이른아침 경북 청도 한우단지를 직접 찾아 노련한 「노하우」로 방자구이에 적합한 등심만을 골라 쓴다. 주인 하씨가 힘겹게 입수한 방자구이용 등심은 지방질이 고기 사이사이로 거미줄처럼 고르게 분포돼 있다.이를 1백원짜리 동전 4∼5개 정도의 크기로 고르게 자르다보면 하나의 꽃무늬를 연상케 한다. 방자구이의 미각을 한층 돋워주는 것은 이 식당 특유의 토속반찬과 열무김치비빔밥.냉면그릇 크기의 투박한 자기그릇에 보리쌀과 쌀이 반반 섞인 밥,그리고 무채·고사리·열무김치·된장국·가지나물·촌두부·비지찌개등 10여종의 토속반찬은 산딸기라도 입안에 넣은 것처럼 담백한 맛을 느끼게 해준다.준비한 반찬에 열무를 적당히 각자의 식성에 맞게 밥그릇에 넣은후 고추장과 된장을 넣어 비비면 특이한 맛의 비빔밥이 된다. 「음식맛을 음식재료를 고르고 요리하는 사람의 정성의 바로미터」라는 주인 하씨는 국내산 콩만을 특별히 사들여 직접 만든 두부와 주변의 농민들과 계약재배로 키운 채소류만을 식단에 올리는 정성을 쏟는다. 식사후 가마솥의 누릉지로 끓인 숭늉 또한 음식맛과 별도로 짙은 향토색을 물씬 풍겨줘 식도락가의 호평을 받기에 충분하다. 방자구이는 1인분(2백g)에 8천원이고 열무김치비빔밥은 2천원이다. 연락처(053)423­7222.
  • 대통령직 수행의 필요열량(청와대)

    대통령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열량(칼로리)은 얼마나 될까. 열량은 나이에 따라 다르고,업무의 성격에 따라 다르다.정부가 권장하는 한국인 성인의 1일 평균 영양권장량은 2천4백∼2천5백Cal다.육체노동자들은 이보다 높아야 하고 정신노동자들은 평균보다 낮아도 된다. 청와대가 김영삼대통령의 업무난이도와 활동시간,아침 조깅을 고려해 제공하는 영양량은 1일 2천2백Cal다.정확하게 이를 맞출 방법은 없지만 청와대주방은 이 수치에 가능한 근접한 식사를 제공하려 하고 있다.청와대가 목표로 하는 이 수치는 65세 남자의 영양권장량 2천Cal보다는 10% 더 많은 것이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대통령의 아침 조깅과 격무,대통령 신체의 신진대사정도를 고려할 때 평균보다 10%가량 높이는 것이 맞다고 본다』고 말했다.김대통령의 몸은 50대 초반정도의 신진대사능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여기에 30분동안의 아침조깅과 11시 잠자리에 들 때까지의 업무를 고려해 65세의 평균열량보다 약간 많게 설정했다는 설명이다. 현재까지 청와대주방의목표는 잘 설정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김대통령이 유지하려는 몸무게는 69㎏이다.몇차례를 제외하고는 김대통령은 이 몸무게를 지키고 있다.업무를 충분히 소화하면서 몸무게를 적정선에서 유지하고 있다면 제공되는 열량도 적정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통령의 적정 몸무게 유지를 위한 노력은 대단하다. 청와대에 있는 동안은 몸무게 유지에 그다지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일상적인 활동과 일상적인 열량 제공으로 균형이 맞춰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해외여행 때다.대통령의 정상외교는 조찬·오찬·만찬등 대부분이 방문국가의 공식행사로 짜여지게 마련이다.음식도 대통령보다는 행사의 성격에 맞추게 된다.그렇다고 공식만찬등에서 절식을 위해 음식을 남기기도 어렵다.이런 탓으로 해외여행을 한번 하고 나면 대통령의 체중은 1∼2㎏쯤 늘어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대통령은 해외여행이 끝나고 난 다음날부터 몸무게 줄이기에 들어간다.우선 아침밥상의 우거지국을 젖혀둔다고 한다.된장을 풀어넣은 우거지국의 칼로리는 생각보다 높은 모양이다.몸무게가 과도하게 늘었다 싶을 때는 칼국수의 양을 줄인다.대통령이 오찬행사에서 칼국수를 다른 그릇에 덜어놓고 나머지만 먹을 때가 더러 있다.이때는 대통령이 체중을 조절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대통령의 식단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아침은 우거지국과 밥,점심은 칼국수다.여름을 지나면서 칼국수 대신 도토리냉면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저녁은 차이가 많지만 설렁탕일 때가 많다.물론 관저에서 식사할 때는 백반이겠지만 관저에서 저녁을 먹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개혁칼국수로 널리 알려진 청와대칼국수 한그릇의 열량은 6백60∼6백70Cal정도다.대통령이 매일이다시피 칼국수로 점심을 때우게 되자 청와대측이 농림수산부 산하 농촌영양개선연구원에 의뢰해 칼국수의 열량을 뽑아본 결과다.도토리냉면은 아직 열량분석을 해보지 않았지만 칼국수보다는 약간 떨어질 것이란 게 청와대의 생각이다. 김대통령은 간식을 하지 않는다.순수하게 3끼로 필요열량을 얻고 있는 셈이다. 다만 저녁에 가끔씩 마주앙 안주로 먹는 멸치는 중요한 영양공급원 가운데 하나가 되고 있다.
  • 농가의 소득증대방안 모색/보리짚·밀짚 특별전

    ◎내년 3월까지… 「생활사 박물관」서/깔방석·삼태기·밥상보등 100여점 선보여 탈곡하고 남은 보리와 밀짚대등을 이용,맥간(맥간)공예품으로 활용했던 조상들의 지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보릿짚·밀짚 특별전」이 5일부터 내년 3월말까지 매주 수·목요일 서울 강남의 짚·풀 생활사박물관(관장 인병선)에서 열린다. 전시될 작품은 보릿짚과 밀짚으로 만든 거적 깔방석 삼태기 쌀독 도롱이 등의 생활용품과 보릿대에 알록달록 물들여 꾸민 베갯모 밥상보 인두판 실패 상자 탈 부채 등 1백여점. 전시회를 기획준비한 인병선관장은 『우리 조상들은 예부터 탈곡하고 남은 보릿짚 등을 쌓아둔채 여러가지로 활용했다』며 그결과 19 90년까지만해도 전국 농가의 보릿짚·밀짚 생산고가 3백억원에 달했다고 밝힌다.그러나 91년부터 값싼 중국제 밀짚원단과 모자·가방 등의 완제품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보릿짚과 밀짚산업은 거의 전멸상태가 됐다며 이번 전시회가 위기에 처한 농가의 소득증대 방안 마련 차원에서도 의미가 깊다고 말한다. 보릿짚이나밀짚은 부드러움이나 탄력이 없어 새끼를 꼬거나 망태기를 엮을 수는 없지만 반들반들한 속대는 각종 귀물스럽고 실용적인 공예품들을 만들수 있다.특히 곱게 물들인 보릿대를 이용한 조각공예는 흡사 명주실로 수 놓은것처럼 아름다워 개발여지가 많은 것.전시회에는 관람객들의 이해를 위해 원단땋기,여치집짓기,인형만들기 과정을 그림으로 소개하며 보릿짚을 꼬아 만든 재료들을 1천5백∼2천원에 판매한다.
  • 현대정유 정몽혁부사장은 어떤 사람

    ◎공격적 경영… 재벌가의 “젊은 강골”/정명예회장 조카… 「주유소 분쟁」 주인공/과감한 인사단행… “후광업은 독주” 비판도 젊은 사람의 특징은 패기이다.젊은 경영자의 과감한 공격적 경영도 패기에서 나온다. 현대정유의 정몽혁 대표이사 부사장(33).지난 해 6월 경영난에 허덕이던 극동정유의 경영권을 장악,부사장에 취임하며 상호를 현대정유로 바꾼 그는 최근 설립 이후 32년간 유공과만 거래하던 미륭상사와 전격적으로 대리점 계약을 체결,40여개 주유소를 쟁취함으로써 정유업계를 경악시켰다. 정부사장은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4째 동생인 고 정신영씨의 유복자로,정명예회장의 조카이다.명예회장은 5명의 동생 중 특히 신영씨를 아꼈던지라,유복자인 그에 대한 애정이 유별나다.오래 전부터 그를 청운동 자택으로 불러,늘 아침을 같이 하며 밥상머리 교육을 시켰을 정도다. 경복국민학교와 청운중학교를 거쳐 80년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89년 UCLA 수리경제학과를 마쳤다. 고교 졸업과 함께 연세대학교에 체육(승마)특기생으로 원서를 냈으나 재벌의 가족이 특혜 입학을 노린다는 중앙일보 보도로 좌절됐다.특기자 자격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었다.당시 명예회장은 『애비 없이 자란 녀석이 큰 아버지 때문에 학교도 마음대로 못 간다』며 가슴 아파했다. 정 명예 회장이 대노하자 현대그룹은 중앙일보의 모그룹인 삼성에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중앙일보는 연이어 현대의 사업을 비판하는 사태로까지 진전됐다.국내 정상 재벌의 싸움은 재계에서 고 이병철 회장과 정 명예회장의 화해를 주선한 끝에 진정됐다.정부사장에 대한 명예회장의 애정을 말해주는 일화이다. 주변에선 그의 성격이 무척 강하다고 말한다.현대정유의 경영권을 장악한 뒤 기존의 인원 상당수를 정리한 것이 이를 입증한다는 것이다.현대정유의 전오너는 그의 어머니 장정자 여사의 동생 장홍선씨로,그의 외삼촌이다. 명예회장은 일찍이 정부사장을 현대정유의 전신인 극동정유의 이사로 임명,경영수업을 시켰으나 장사장 등 당시의 경영진이 그를 의도적으로 따돌린 것으로 전해진다. 최근 문제가 되는 미륭상사의 박승주 사장(32)과는 동네 친구이다.정부사장의 집은 성북동 330의344이고,박사장은 한 집 건너인 297의2이다.이들은 오래 전부터 알고 지냈으며,미국에서도 자주 만났다.박사장이 포틀랜드에 있는 루이스 & 클라크 대학을 다녀 LA와 상당히 멀었음에도 교류가 잦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부사장은 미륭상사와의 전격 계약과 관련,『단순한 상거래를 너무 확대 보도한다』며 『상도의나 기업윤리 문제만 지나치게 부각시킨다』고 불만을 표시했다.하지만 그는 지난 달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회사 이미지 개선 차원에서 주유소 확보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유통시장의 질서는 흩뜨리지 않겠다』고 밝혔었다.식언인 셈이다. 현대정유의 경영은 자금이나 주유소 확보 등에서 현대그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정유는 증설을 위해 미국 휴스턴에 있는 일산 20만배럴 정도의 중고 정제설비를 들여올 계획이다.새 공장 대신 기존 설비를 도입하려는 것은 경제성 때문이란 설명이다.하지만 하나 하나 단계적으로 쌓기보다는 이미 만들어진것을 쉽게 가지려는 성향이 드러난다.미륭상사 파문도 비슷한 것 같다. 정유업계에선 젊은 그의 패기를 높게 평가하지만,계열사의 지원이나 명예 회장의 후광 없이 독자적으로 회사를 이끌 수 있을 지에 대해선 아직 확답을 유보한다.
  • 최일도목사의 「다일공동체」(훈훈한 우리가정:3)

    ◎「거리의 사람들」 2백명이 한가족/청량리역 주변 소외된이웃 돌보기 5년/“하느님 앞에선 한핏줄”… 후원자들에 감사/비바람 피할수있는 식당·무료병원 건립이 최대 소망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다일교회의 최일도목사(38).그는 아내와 두자녀 외에도 책임지고 먹여살려야 할 가족의 수가 무려 2백여명에 달하는 대가족의 가장이다. 서울 청량리역 주변의 행려병자와 무의탁노인·떠돌아 다니는 노숙자·외면받는 장애인들이 모두 그가 돌봐야 할 가족들이다. 어머니 현순옥권사와 아내 김연수씨를 주축으로 자신의 뜻을 이해하는 10여명의 교우들과 함께 89년7월 다일공동체를 구성한후 거리의 사람들을 가족삼아 돌보고 있는 그는 『인간은 부자나 가난한자나 모두 하느님앞에 한가족으로 반드시 핏줄을 나눈 사람들만 가족이 되는것은 아니다』고 가정의 해를 맞아 현대인들의 가족 이기주의를 비판한다. 최목사가 이끄는 다일공동체 가족들은 매일 어김없이 하오 1시면 소외된 거리의 2백여 가족들을위해 청량리 쌍굴다리 아래서 「길거리 점심밥상」을펼친다.또 밤에는 하루 1천∼2천원도 없어 쪽방 신세조차 어려운 사람들에게 라면을 끓여주고 잠자리를 살펴주는가하면 병든이들은 데려다 살피고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을 찾게한다. 『그들은 누군가 돌보아주지 않으면 자생적으로 삶을 이어갈 수가 없어요.』최목사는 요즘처럼 각박한 시대에 자신이 이들을 먹여살릴 수 있는것을 현대판 「오병이어의기적」이라고 표현한다. 우연한 기회에 청량리역 앞에서 이틀을 굶고 갈곳도 없이 떨고있는 한 노인을 만나 돌봐주기 시작한것을 계기로 아무 연고도 없던 청량리에 뿌리를 내리게 됐다는 최목사.그는 당시 대학원에 다니며 아내와 함께 독일 유학을 준비중이었다고 밝힌다. 그러나 한 노인을 통해 거리를 배회하는 소외된 이웃에 눈을 뜨게됐고 목회자인 자신이 해야 할 진정한 사명이 무엇인가를 깨달은바가 있어 유학도 포기한채 다일공동체란 이름아래 불우한 이웃의 대부가 돼 버린것. 최목사는 자신이 다일공동체 삶을 주저없이 추진할 수 있었던데는 자신의 뜻을 거부하지 않고 전폭 도와준 아내의 격려가 무엇보다도 가장 큰 힘이 됐다며 감사한다. 최목사의 아내 김연수씨는 남편이 선택한 험한 길을 원망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발벗고 나서 공동체 가족들과 길거리 가족들을 위해 밥을짓고 병든이들을 데려다 돌보아 준다.지금은 다일공동체의 일이 주변에 많이 알려져 후원자들도 많아지고 자원봉사자들도 늘어 김연수씨는 길거리 가족의 젖줄인 후원자들을 관리하는 일로 다일공동체에서 중요한 몫을 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쌀과 라면 배추등의 양식이 보내는이의 이름도 없이 다일공동체 식구가 거처하는 나눔의 집앞에 놓여 있습니다.그렇지 않은날은 후원자로부터 후원비가 오고….그래서 우리 공동체 가족들은 한달 수입이 얼마인지,연간 얼마나 남았는지를 계산하며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최목사를 비롯한 다일공동체 가족들은 앞으로 길거리 가족들이 비바람을 피하며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을 하나쯤 마련하고 병든 가족들이 부담없이 치료받을 수 있는 무료병원「천사의 집」을 건립하는것이 꿈이다.또 그 소망이 이뤄지면 갈곳없이 떠도는 도시빈민들을 불러모아 농촌으로 이주,자활촌을 꾸미고 또다른 공동체 삶을 펼치기 위해 기도중이다.
  • 밥상공동체/이재정 성공회 신학대학장(굄돌)

    마침내 쌀시장이 개방되어 내후년부터는 태평양을 건너 미국 쌀이 우리의 식탁에 오를 판이다.그동안 그토록 쌀시장만큼은 막아내겠다고 장담을 하던 정부도 슬그머니 「국제화」의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냐고 불가피론을 내세우고 있다.반면에 농민들을 중심으로 여러 단체에서 쌀 개방 결사반대를 외치면서 거센 항의를 하고 있다.이런 성토가 좀처럼 가셔지지 않을 기세이다.당연한 일이다.이나라 백성 치고 그 누가 이번 협상에 동의하겠는가. 쌀은 우리의 문화이고 정신이다.그것은 결코 상품이 아니고,시장에 내놓고 팔고 사는 것이 아니다.오랜 세월 쌀이 재산이나 가치의 기준이 되어 온 것은 단순히 쌀이 우리의 주식이기 때문만은 아니다.이런 의미에서 쌀시장의 개방은 단순히 쌀의 수입이 아니다.우리의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되는 것이며,우리의 정신을 빼앗기는 것이 아닌가.우리는 여기에서 미국이라는 나라가 본래 국익을 최우선으로 내세워 어떤 일도 서슴지 않아 왔지만,일본식 표기로 미국이 아니라 미국임을 실감치 않을 수 없다.그러한 미국에 섭섭한 감정이 들지만 우리 정부에게도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쌀의 개방이 국제화의 추세여서 불가피한 것이라면 온 국민이 힘을 모아서 그 대책을 세우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나갔어야 했다.정부가 진지하게 농업의 장래를 위한 정책이나 농민을 살려내기 위한 계획을 국민과 더불어 추진했어야 마땅하다.한솥밥을 먹으며 밥상공동체의 이웃과 가족이 되어 온 우리들이 이제 그 솥을 깨뜨리고 어디에서 역사를 이어갈 것인가.손님이 오시면 밥상부터 차려 올리던 우리의 뜨거운 마음이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가. 이제는 누구를 탓하고 원망하기 보다는 머리를 맞대고 앉아서 지혜를 짜내야 할 때가 되었다.그리고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마땅히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특히 거짓말한 사람부터.
  • 강원 양양군 해발1천m두메 “우편 애독자” 황강연씨

    ◎“서울신문은 세상 내다보는 창”/“바깥소식 갈증 해소에 유일한 청량제”/5년전 간경변 진단받고 홀연히 도시 떠나/라디오도 안들리는 곳… 우체부권유로 인연/“우리집 4번째 식구… 새인생 동반자” 「매일 이 험한 1백30리길을 오토바이로 우편물(서울신문)을 배달해주는 우체부아저씨를 기다리는 마음은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렵다.오늘의 새소식과 도시에 있는 친구들의 근황,가족들의 안부,세상의 변화등을 날마다 기다리게 한다.」오지 산간마을에 5년째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 신예 작가 황강연씨(35).그는 최근 출간한 수상집 「산속의 피아니스트」(도서출판 한가람)에서 「하루늦게 보는 우편배달 신문의 재미」라는 소제목으로 매일 매일 서울신문을 기다리는 마음을 이렇게 털어놨다. 불꽃처럼 타올랐던 「세상사」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결국은 자연속에 묻혀버린 그에게 서울신문은 바깥세상을 내다보는 유일무이한 「문구멍」이다. 작가라기 보다는 차라리 자연운동가이고 싶어하는 그가 보금자리를 마련한 곳은 강원도 양양군 서면 갈천리 갈천약수터마을. 『서울신문은 「새로운」 인생살이의 전부이며 영원한 동반자입니다』 숨어살기를 자처했던 황씨가 서울신문과 이같이 진한 인연을 맺기 시작한것은 31살때인 지난 89년 11월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경기도 평택에서 큼직한 농장을 운영하던 황씨는 그해 봄 걸핏하면 감기증세를 보여 망설임끝에 병원을 찾았고,결과는 간경변증이었다.삶의 종말을 예고하는 어두운 그림자를 끌며 황씨는 어느날 홀연히 심신산골을 찾았다.만삭의 부인 김순옥씨(32)와 함께 서로 끌어주며 밀어주며 몇개인가 고개를 넘어 해질녘 걸음을 멈춘곳이 바로 갈천마을이었다. 그러나 갈천리는 단절된 공간­. 해발 1천m가 훨씬넘는 준령들에 빼곡히 둘러 싸여 그 흔해빠진 TV는 커녕 라디오전파조차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해 11월 중순,그러니까 서울신문 44번째 창간기념일 무렵이었다.가뭄에 콩나듯 산골을 찾아주는 유일한 외지인인 우체부아저씨를 만나 세상소식에 대한 타는듯한 목마름을 털어놨다.집배원 김수환씨(55·양양군 수상우체국)는 즉석에서 서울신문정기구독을 권유했고 황씨도 귀가 솔깃했다. 신문배달이 늦을 수 밖에 없는 오지마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뒤부터 김씨는 오토바이를 타고 매일 비슷한 시각,다른 산촌·어촌의 집배원과 마찬가지로 세상소식을 담은 서울신문을 날라다 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비록 하루 늦기는 하지만 어김없이 배달되는 서울신문은 시한부 인생의 마지막 즐거움이었고 정신적인 치료제였습니다』 유폐지같은 산골마을에서 부인의 정성어린 간호와 식이요법으로 투병생활을 한지 1년여­남몰래 병원을 찾은 황씨는 기적적인 쾌차를 보이고 있다는 진단을 받게 됐다.예비 사형선고의 악몽에서 깨어나 새로운 삶의 지평을 찾은 황씨는 임시로 머물던 그곳에 아담한 집을 짓고 2천여평의 밭을 일궈 감자심고 수수를 심었다.그리고 토종벌도 치며 대학시절부터 틈틈이 갈고 닦아온 문학수업도 계속했다. 서울신문을 길잡이 삼아 신문사·잡지사에 투병생활·전원생활,서울신문을 통해 새삼 깨달은 세상사에 대한 연민등을 투고 해왔다.그렇게 써온 글들을 모아 「산속의 피아니스트」라는 제목으로 한권의 책을 펴냈으며 그 인연으로 「제법 알려진 작가」가 됐다. 『저와 제 아내 그리고 여기서 태어난 아들과 함께 서울신문은 어느새 우리집 네번째식구가 됐지요.서울신문은 우리가족에게 기쁨이요 희망이요 사랑입니다』 너그러운 대지가 오순도순 다가앉은 식구끼리의 밥상을 채워준다면 전국 구석 구석까지 배달되는 서울신문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그득히 해주는 마음의 양식이라고 표현하는 황씨는 『서울신문만큼 정론지로서의 사명을 다하려는 매체가 어디에 또 있겠느냐』고 건강한 웃음을 터뜨렸다.
  • 영주 귀국의 꿈(사할린 한인 망향의 한 50년:1)

    ◎“단하루 살다 죽어도 고국에서…”/“일제에 의한 강제 타국생활 청산” 갈망/1세대 등 1만3천명 고향이주 고대 사할린 땅에는 지금도 일제의 강제징용으로 끌려간뒤 50여년을 타의에 의해 타향살이를 해온 4만여명의 우리 동포가 살고 있다.망국의 한과 이데올로기의 장벽이 만든 고통을 온몸으로 겪은 이들의 이야기야말로 어쩌면 우리 민족이 겪은 가장 서글픈 역사의 한토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지난 89년이래 다행이 많은 사할린 한인들이 모국땅을 밟고 가족들과 꿈같은 재회의 기쁨을 누렸지만 이들의 가슴에 맺힌 한이 풀어지기엔 아직도 숱한 과제들이 남아 있다.본사 이기동 모스크바특파원이 사할린 동포들을 찾아 요즘 그들의 살아가는 이야기와 문제점들을 취재,4회에 걸쳐 보도한다. 『이기 사람 사는 기가.일찍 죽으마 억울한끼네 악으로 사는 기지.죽은 몸띵이라도 고향땅에 묻힐라꼬』 임판개(68세)옹의 이 절규의 밑바닥에 깔린 한을 이해하지 못하면 일제때 징용으로 끌려온 소위 사할린한인 1세노인들이 왜 그토록 기를 쓰고고향땅으로 돌아가려 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사할린한인들 사이엔 지금 너도나도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영주귀국의 「열병」이 돌고 있다.영주귀국을 신청한 노인들은 『왜놈들한테 강제로 끌려와 자나 깨나 고향하늘 쳐다보며 부모형제 만날 날만 기다리며 한평생을 보냈다.이제 돌아갈 길이 열렸는데 왜 안가.단 하루라도 고향땅에 가서 살다가 묻힐 수만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고 한결같은 대답을 한다. 지난 89년 9월 25일 역사적인 첫 모국방문이 이루어진 이래 많은 사할린 동포들이 그동안 고향을 찾아 일가친척들과 꿈같은 재회의 감격을 맛보았다.지금까지 대한적십자사가 주선한 전세기를 타고 모국을 찾은 사람은 4천6백명.사할린한인들을 돕고있는 일본변호사 다카키 겐이치씨의 도움으로 일본을 경유,모국을 찾은 사람이 1천2백명 그리고 개별친척 초청에 의한 5백여명 등 총 7천명에 가까운 사할린한인들이 고향산천을 다시 보는 꿈을 이루었다. 5백여명으로 집계된 70세이상 노인들중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모국을 한번씩은 다녀왔다.이에따라 모국방문과 영주귀국을 주선하는 사할린주 이산가족회와 노인회에서는 1세의 범위를 해방된 해인 45년 출생자까지로 확대,1세의 수는 총8천5백명으로 늘어났다.이 경우에도 1천여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모국방문을 한번씩 한 셈이다. 현재 2세,3세까지를 모두 합친 사할린한인총수는 4만3천여명.이들에게 골고루 모국방문의 기회를 준다는 취지아래 대한적십자사가 실시하는 공식 모국방문은 1인 1회로 국한돼 있다.그러나 단한번의 모국방문으로 타의에 의해 평생을 타국땅에서 보낸 1세노인들의 한이 풀어질 수는 없었다.그래서 생겨난 것이 영주귀국이다. 고향인 경남 산청군에서 18살때 잡혀온 임판개씨의 사연을 들으면 그가 왜 「막무가내로」 모국땅에 묻히고 싶어하는지 조금은 이해가 된다.그는 1943년 11월 어느날 아침밥상을 받아놓고 숟가락을 드는데 왜놈순사가 들이닥쳐 숟가락을 든채로 잡혀왔다.14살 위인 그의 형님앞으로 징용장이 나왔는데 형님은 형수와 아이들 둘이 있고 장자라서 도저히 보낼 수가 없어 피신을 시켰다.『왜놈순사가 나를 보더니「네가 임영식이냐」고 하데요.「아닙니다.형님은 읍내 일보러 갔습니다」했더니 「물론 도망갔겠지」하면서 나를 아래 위로 훑어보더니 「그럼 네가 대신 가자」해서 그길로 끌려왔다』는 것이다. 산청군에서 함께 끌려온 사람이 1백명이었다고 한다.그길로 징용복으로 갈아입고 「가라후토(사할린)보국대」란 완장을 차고는 부산,시모노세키,홋카이도,하쿠다테를 거쳐 사할린에 도착했다.그는 당시 한인들이 대거 투입된 유즈노사할린스크시 북서쪽 「한많은」브이코브탄광에 투입돼 해방될때까지 「죽을 고생」을 했다. 식사라고는 보리쌀이 보일락말락 섞인 콩밥 한공기씩.그걸 먹고 하루 11∼12시간의 중노동을 했다.『갱내에서 1시간 일하고 바지를 잡으면 땀이 물같이 주루룩 흘렀다』고 한다.같은 조원 5명중 1명이 일주일도 안돼 작업도중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허기때문에 조금이라도 일손이 느려지면 사정없이 왜놈들의 발길질이 날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해방이 되고 고향에 돌아갈줄 알았던 그는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귀환의 꿈이 좌절된채 또다시 50여년을 이국땅에서 보냈다.그는 90년 2월에 적십자사의 전세기로 고향땅을 다시 밟았다.그러나 부모와 그의 형님 내외는 이미 세상을 뜬 뒤였다. 그뒤에도 고향에 대한 그의 그리움은 더욱 깊어져 사할린에서의 생활은 하루가 지루하게만 느껴졌다.그는 지금 영주귀국 신청을 해놓고 돌아갈 날만 기다리고 있다.주노인회가 집계한 바로는 이렇게 영주귀국을 희망한 사람의 수가 2,3세를 합쳐 모두 1만3천4백84명에 이른다.
  • 여류명창 성창순씨(이세기의 인물탐구:35)

    ◎동·서편제 통달한 판소리의 달인/혼신 다한 소리인생 40년… “한 서린 득음” 정평/빼어난 성조·변화무쌍한 음색에 관객 매료/서예·국악기에도 깊은 조예… 「심청가」로 인간문화재에 성창순은 본래 강산제 「심청가」로 인간문화재가 된 여류명창의 한사람이다.음이 낮고 처절한 「심청가」는 전곡이 지나치게 구성지고 구슬퍼서 극장공연 첫날에는 소리하는 이들이 기피하는 곡이기도 하다.그러나 일명 서편제로 불리는 성창순 「심청가」는 4시간반의 완창을 변화무쌍하고도 맛갈지게 구사하여 지루감을 없앤 것이 특징이다. 부친 심봉사를 그리워하며 심황후가 기러기편에 편지쓰는 대목에서 「한자쓰고 눈물짓고 두자쓰고 한숨쉴제 눈물이 먼저 떨어져 글자마다 수묵이 되어」는 이조가곡과도 같은 우아미와 품격을 지녀 독특한 성음이 빼어난 것으로 손꼽힌다. 애절한 계면조뿐아니라 흥부가중에서 「놀부심술타령」 「제비로정기」 「왼갖비단타령」등 숨막히게 전개되는 자진몰이 휘몰이 속에다 우람지고 담대한 가락을 얹어 「달기가 승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흥·청의 심맥 고수 그는 판소리는 넘어가는 가락과 내뽑는 목청에 흥과 청을 담아 판소리의 심맥인 「흥청거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정신을 지키고 있다.그래서 그의 무대는 언제 어디서나 흥취가 넘치고 그의 연희는 유유하고 자적하다. 최근 몇년간은 남도락에 심취하여 지난봄 국악대공연에서는 느린 육자배기에다 잦은 중몰이장단,개구리타령으로 절정을 이루더니 흥타령에서 축 늘어진 후 진도아리랑으로 활기를 되찾는 신명나는 한마당을 펼쳤었다. 「사람이 살면은 몇백년을 살드란 말이냐 죽음에 들어서 남녀노소가 있느냐 살아생전에 객기로 맘대로 놀아볼거나」 가사의 끝이 「거나」나 「구나」로 끝나는 육자배기는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는 곡이면서도 잘 부르려면 가장 어려운 곡으로 「그의 육자배기는 늦은 진양조장단에 한이 듬뿍 배어 멋으로 일렁이는 유장한 가락이 일품」이라는 것이 황병익교수(이대)의 말이다. 지난 6월에는 KBS홀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관현악과 판소리 「춘향가」의 협연을 갖기도 했다. 이「춘향가」관현악곡은 작곡가 김희조씨가 성창순명창과의 협연을 위해 8개월간에 걸쳐 재구성하여 편곡한 것으로 생소한 관현악연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황하거나 머뭇거리는 기색없이 마치 수만군을 거느린 여중호걸처럼 2시간30분의 완창을 당당한 풍모로 이끌어나갔다. 한복차림에 쥘부채,고수 한사람의 북장단에 의존하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 판소리의 색다른 멋과 음악적 변화를 보인 역시 돋보인 무대로 지적된다. 북반주에 맞춘 판소리공연에서는 즉흥적인 「아니리」와 「발림」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지만 엄격한 제한을 받게 되는 관현악연주에도 그는 대로를 가로지르는 곧고 시원한 통큰소리,익살과 애조와 애원의 성음치레로 관객의 흥겨움을 흥청망청 당겨주었다. 타고난 재능과 기량이 번뜩이는 재인과는 달리 그는 끈질긴 노력과 집념으로 자신을 발전시키고 운명을 개척해온 입지전적인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한번 마음먹은 것은 반드시 해내고야 말며 「죽으면 죽었지 2등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오기와 배짱이 그것이다. ○예향 광주서 출생 그의 판소리 입문부터가 말못할 우여곡절과 파란만장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는 지나가는 길손도 단가 한마디씩은 부른다는 전남의 예향 광주에서 태어났다.부친은 권번에서 북을 가르치던 명고수 성원목씨.어릴때부터 북장단을 즐기고 동네 굿구경에 날저무는 줄 모를만큼 예살(예살)이 거센 편이었으나 부친은 이를 극구 말려 걸핏하면 매맞기 일쑤,집안에 갇히기가 일쑤였다.그렇다고 해서 중간에 포기하거나 기죽을 그가 아니었다.오히려 부친에게 『나는 소리를 배우겠소,그렇지 않으면 집을 나가든지.어쨌든 시집이나 가서 고생하는 여자는 되지 않을 거요』하고 맞섰다.그리고 몇날을 울며불며 밥을 굶고 몸져눕자 「딸자식 하나 없는 셈치고」 부친이 져주었고 광주 북동에 있는 소리선생에게 소리를 배우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번엔 선생이 『저아이는 소리에는 소질이 없으니 잘 키워서 시집이나 보내라』고 했다.대경실색을 할 일이었으나 그는 내색없이 『소질이 없기는 왜 없어.두고보라지,내가 못해낼 줄 알고?』 이러고 학교를 때려치우고는김연수창극단에 입단해버렸다.그때 나이 15세.그러나 여기서도 소질을 인정받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그시절에 만난 오정숙·박옥진은 스승으로부터 장래성을 인정받고 있는 유망주로 죽어도 남에게 뒤질 수 없는 그의 심경은 못내 참담하기만 했다. 『두고보자.지금은 너희가 나보다 나은 줄 알지만 여기서 물러날 내가 아니다』 그들의 소리연습을 엿보면서 그는 한편으로는 악기를 배우기 시작했다.악기라면 다소 자신이 있었다.어릴때부터 부친의 북장단이 귀에 익어 어떤 악기도 낯설거나 불편하지 않았다.가야금·거문고·칠현금을 배우는 동안에도 그는 소리한번 제대로 배우고 말겠다는 집념을 떨치지 못했다.그렇게 4년을 보내고 5·16직후 국극단이 해산해버리자 서울로 올라왔다. 단성사근처 와룡동에 정착하여 박초월씨에게 거문고를 배우다가 소문으로만 듣고 있던 만정 김소희씨의 문하에서 동편제소리인 강산풍월과 심청가 바디를 넘겨받는 과정에서 생전처음 『갈고 닦으면 좀더 좋은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칭찬을 들었다.그후 김소희씨의 권유로 보성소리를 배우기 위해 전남 보성군 회천면 도강재에 있는 정응민선생을 찾아나섰다.보성소리는 판소리 서편제중 전남 보성을 중심으로 연고를 맺고 있는 소리꾼들만의 소리제로 우조·평조·덜렁제·경두름제의 다양한 음색과 감칠맛이 특색이었다. 율포해수욕장에서 인적없는 여우고개를 넘어야 하는 30리길 산골,밥상을 갖다놓으면 물이 줄줄 흘러내릴만큼 바닥이 기울어지는 누추한 단칸방에서 그는 그를 구제하는 소리의 진수에 빠져 모진 고생을 감내하는 뼈저린 과정을 거쳤다.하루 15시간에서 어느때는 18시간,삭신이 늘어지고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듯했으나 불에 구운 왕소금으로 부운 목을 달래면서 그는 오로지 소리에만 매달렸다. 눈속에 발이 푹푹 빠지는 혹독한 겨울,여름내내 4개월동안 긴장마가 계속되는 궂은 날씨에도 기울어진 방에 앉아 목청을 뽑던 고된 수련과 공력은 이제는 그의 일생일대 아름다운 추억일 수밖에 없다.그로 인해 박유전∼정응민∼그의 아드님인 정권진으로 이어지는 보성소리계보에 4대째로 「소리호적」을 올리게 되었고 그는 부친이 소리를 배우지 못하게 했을 때처럼 또다시 두다리를 뻗고 대성통곡 했다.이번엔 남들이 듣고 있는 명인·명창 칭호가 그에게도 무관하지 않다는 감동과 기쁨의 눈물이었다. 보성에서 서울에 올라왔을 때는 대꼬챙이처럼 말라서 이번엔 하성이 나오지 않았다.숨돌릴 사이도 없이 그는 곧바로 환갑이 다된 박록주선생을 모시고 안양에 있는 삼막사로 들어갔다.쇠약해질대로 쇠약해 있었으나 몸속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오히려 힘이 되었다. 스승은 『명랑하게 불러라.소리는 미련해야만 한다.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가르쳤다.그리고 인분을 먹어야만 낼 수 있다는 소리를 너는 네 집념과 오기로 백일만에 끌어냈다고 말했다.그는 마침내 한스럽고도 깊고 장려한 그러나 구슬처럼 청명한 소리를 얻어내고야 만 것이다.진양조 여섯박자를 능란하게 엮어낼 수 있게 되자 그는 「적벽가」에 나오는 한문의 뜻을 알기 위해 이번엔 우전 신호렬선생에게 서예와 한문을 배웠다.마음이 밝아지자 눈도 밝아지는 듯했다. ○청명한 소리 얻어 68년부터 명창대회에 나가기 시작하여 수많은 해외공연,75년 남원 춘향제때는 우산을 쓴 관중들이 빽빽이 늘어선 마당 한가운데로 나가 심청가를 부르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소리에 자신이 취해 빗소리도 관중의 술렁거림도 들리지 않았었다.그리고 내게서 빠져나간 소리가 관객의 가슴속에 전달됐다가 다시 내몸속으로 들어오는 자유자재로운 차원을 경험할 수 있었다.이른바 「소리가 앵기면서」 솟구치는 환희가 분류처럼 가슴 한복판을 꿰뚫듯이 흘러내렸다. 이제 동편제 서편제의 갈래를 성큼 뛰어넘어 모든 난관을 딛고 일어선 초월의 경지,요즘은 소리속에 온자한 깊이가 배어들고 있는 시기다.더구나 지난해 4월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결혼한 부군 양명환씨가 모든 뒷바라지를 책임지고 있어 마음 편하게 「소리」만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그가 이루고 싶은대로 모든 소원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듯 그는 명창 칭호에 손색이 없는 반듯한 예술가의 단행을 평생 지키고 싶은 또하나의 소원을 지니고 있다. ▷연보◁ ▲1934년 1월10일 전남 광주출생 ▲1950년 광주여고1년때 김연수 창극단입단,조선국극단등 여성국극단에서 창극 활동 ▲1955년 공기남선생에게 「심청가」2년 사사,한만갑제 거문고 김난주씨에게 사사,강태홍제 가야금 원옥화씨에게 사사,춤광대 김영철씨에게 칠현금 사사 ▲1961년 만정 김소희씨에게 「심청가」「흥보가」3년간 사사 ▲1964년 전남 보성 정응민씨에게 강산제 판소리(박유전판)「심청가」「춘향가」「수궁가」사사 ▲1965년 박록주씨에게 안양 삼막사에서 백일공부 ▲1965년부터 우전 신호렬씨에게 한문과 서예 사사 ▲1968년 신인서예전 서예부 특선,제17회 국전 서예부 입선,국악협회 주최 명창대회 「춘향가」로 세종상 ▲1969년 김소희씨와 일본 교포위문공연 ▲1975년 일본 오사카에서 판소리「흥보가」「민요」공연,유럽지역 순회공연(파리∼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 ▲1977년 「심청가」완창(4시간30분) 서울시민회관별관 ▲1979년 「춘향가」완창(5시간30분) 세종문화회관대강당 ▲1980년 일본 와세다대학서 「심청가」공연 ▲1981년 제1회 대한민국 국악제에서 「심청가」완창공연 ▲1984년 신재효100주년기념공연 「춘향가」공연(국립극장 대극장) ▲1985년 「춘향가」전판공연(국립극장대극장),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보유자 후보자 지정·국악협회 이사 ▲1988년 「심청가」 서독 쾰른음대 초청공연 ▲1990년이후 해마다 국악대공연 ▲1991년 강산제 판소리「심청가」로 인간문화재 지정,미국 카네기홀에서 「심청가」「춘향가」공연 ▲1992년 「심청가」완창(국립극장)과 예술의 전당 야외음악당 공연,일본 도쿄서「심청가」공연,대한민국 국악제 독창,사단법인 새한전통예술보존회 설립·이사장취임 ▲1993년5월 호주 브리즈번 세계음악제에 한국대표로 출연,6월 KBS국악관현악단과 「춘향가」완창공연,부산문화극장에서 판소리 5마당 큰잔치 「심청가」공연,7월 새한전통예술 보존회 설립기념 「민족예술국악대공연」 ▲1977년부터 국악고·추계예술대·단국대·전남대 출강 KBS 제1회 국악대상 수상·국악부문 방송대상 수상 「춘향가」「심청가」「흥보가」(오아시스레코드사 출반)
  • 부부싸움 1년에 48회꼴/8·7%는 “날마다 한번씩”

    ◎서울리서치연 조사 우리나라 부부들은 1년에 평균 48번 부부싸움을 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최근 서울 리서치연구소가 결혼한 남녀 1백4명을 대상으로 면접조사를 실시한 결과에 따르면 조사대상자 가운데 8.7%는 매일 싸운다고 응답했고 25%는 한달에 한번씩 싸운다고 대답했다. 이와는 반대로 20.2%는 한번도 싸우지 않는다고 응답한 반면 11.5%는 1년에 한번정도 싸운다고 답했다. 부부싸움을 한 시기는 ▲결혼하자 마자 20.2% ▲1개월 26.9% ▲1년 11.5%로 각각 응답했으며 평균 13개월이 지난후 시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성의 경우 부부싸움에 사용하는 도구로는 가까이 있는 모든 것과 밥상이 각각 12.5%를 차지했으며,베개는 10%,두들겨팬다도 10%를 차지해 부부싸움에서 폭행이 적지않음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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