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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반체제인사 9명 체포

    [베이징 김규환특파원 외신종합] 중국 정부는 톈안먼(天安門) 사건 11주년인 4일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행사를 가진 혐의로 최소한 9명의 민주인사를체포하는 등 강경진압에 나섰다고 인권단체들과 목격자들이 전했다.또 추모행사를 사전 봉쇄하기 위해 반체제인사들에 대한 감시와 일반인들에 대한 검문검색을 강화,베이징 시내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중국 경찰은 이날 오전 베이징시내 한 민가에서 희생자 추도모임을 가지려던 기독교 인사 3명을 체포했다고 현지 인권단체인 인권 및 민주주의정보센터가 밝혔다.베이징과 북동부 랴오닝(遼寧)성의 또다른 인사 3명도 이날 정부 지도자들에게 톈안먼사태 재평가를 요구하는 편지를 발송한 혐의로 당국에 구금됐다고 이 단체는 덧붙였다. 그러나 정부의 강경진압에도 불구하고 전국 4개 도시에서 반체제인사 50명이 6·4사건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하며 24시간 단식농성에 돌입했다고 홍콩의 한 인권단체가 말했다. 반체제인사들 집 주변에는 사복경찰들이 며칠 전부터 배치돼 동태를 감시했으며 일부 인사들의 경우통신시설이 두절되기도 했다.이들 대부분은 집에서 조촐한 추모행사를 가졌다. 공안당국은 각 대학에 경계강화 지시를 내리고 파룬궁(法輪功) 수련자들과인터넷 사이트에 대한 특별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공안당국은 또 인터넷서비스 제공업체에게 반동적인 내용을 담은 외국 인터넷 사이트 목록의 작성을 지시하는 등 가상공간을 통한 반체제활동에도 대비했다.그러나 공안당국의 경계강화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에는 유혈진압을 비난하는 글과 반체제 인사 및 희생자 유가족을 중심으로 유혈진압 책임자 규명요구가 계속 올라오고 있다.뉴욕의 인권단체 ‘중국인권’은 이날 유가족 단체인 ‘톈안먼어머니 운동’의 이름을 딴 영·중문 웹사이트(www.fillthesquare.org)를 정식 개설,전세계 네티즌들을 상대로 지지 서명작업에 돌입했다.
  • 6월4일 中 天安門 사태 11주년/ 현주소

    6 ·4 톈안먼(天安門) 사태 11주년을 이틀 앞두고 재평가와 책임자 처벌을요구하는 목소리가 다시 높아지고 있다. 왕훙쉐 등 반체제인사들은 톈안먼사태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하는 공개 탄원서를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 겸 공산당 총서기 등 중국 지도층에게 보냈다.톈안먼의 어머니 ‘딩즈린(丁子霖)전 중국인민대 교수를 비롯한 6·4 유족108명이 리펑(李鵬)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장에 대한 형사고발안 신속처리를 촉구하는 공개서한은 보내 중국 사법당국의 대응이 주목된다. 하지만 이같은 연례적인 재평가 요구운동 이외에 올해에는 사회 곳곳에서예년과는 다른 분위기가 감지된다.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이 임박하면서 사회·경제·정치개혁을 기대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진 것.중국 관료 출신으로 현재 연구소를 운용하는 리판은 “WTO 가입은 개혁과 개방을 의미하며 이는 언론의 자유를 확대시킬 것이다.더 많은 자유는 민주주의의 가속화로 이어진다”고 분석했다.이는 중국 지도부가 가장 경계하는 것이다. 중국 지도부는 경제개혁은 가속화시키되 정치개혁에는 난색을 표하며 정경분리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중국 당국은 지난달 말부터 사회주의 이념을재무장하기 위한 대대적 캠페인을 전개하는 등 이미 정치·사회 민주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나섰다.또 지식인층에 대한 ‘옥죄이기’에도 들어갔다. 장쩌민 주석은 지난달 말 상하이와 장쑤,저장성 등 동부지역을 순시하면서서서히 밀려오는 서구화 물결을 경계하는 연설을 했다.그는 “민간사업 부문을 위한 당 대책기구 구성은 전혀 새로운 일”이라며 서구문명의 창구 역할을 하는 민간 부문에 대한 통제를 강조했다. 중국 당국은 또 정치·사회 민주화를 지지하는 지식인들의 블랙리스트를 작성,배포하면서 이들에 대한 감시도 강화했다.외신에 따르면 현재 민영화와민주적 개혁을 지지하는 8명의 지식인들 명단이 돌고 있고 최근에 17명의 이름이 추가돼 출판사와 언론사에 배포돼고 있다고 전했다.이들의 책이나 글이일반인들에게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이다. 중국 당국이 언론과 지식인층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면서 민주화를 요구하는목소리가 다소 잦아들기는 했다.그러나 국제 전문가들은 중국 당국이 정보화와 시장개방이 가속화되면 언제까지 이같은 방법으로 중국인들의 민주화 요구를 잠재울 수 있을 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현재 중국에는 6·4사태와 관련 213명이 복역중이다. 김균미기자 kmkim@. * 텐안먼(天安門) 사태 당시의 주역들 어디서 무얼하나. 89년6월4일 텐안먼(天安門) 시위를 이끌었던 반체제 주역들의 현주소는 11년이 지난 지금 다양한 편차를 보이고 있다. 아직도 반혁명분자의 꼬리표를 달고 수감중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외국으로망명해 유학하거나 첨단산업에 종사하면서 행복한 생활을 하는 이들도 있다. 중국이 사태 진압 직후 수배령을 내린 21명의 학생지도자중 서방에 망명한인사는 류강(劉剛·38)을 비롯해 12명.중국에 남은 9명중 2명은 수감중이며나머지 7명은 당국의 감시 속에 장사 등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거나 행방이 불확실한 상태다. ‘수배 1호’였던 베이징대 역사학과생 왕단(王丹·31)은 6년5개월간의 복역 끝에98년5월 병보석으로 풀려나 미국으로 건너갔다. 매년 6월이면 민주화와 인권보장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벌여온 그는 96,97년 연속 노벨 평화상 후보에 추천됐다.지난달 천수이볜(陳水扁) 타이완 총통의 취임식 참석 여부를 놓고 중국을 긴장시켰으나 모습을 나타내지는 않았다. ‘수배 2호’였던 시위대 대표 우얼카이시(吾爾開希·32)는 중국을 탈출한뒤 미국의 한 중국어 방송사에서 일하다 타이완 여자와 결혼,미국과 타이완을 오가며 사업을 하고 있다. 96년5월 홍콩으로 탈출한 뒤 미국에 망명,중미관계를 불편하게 했던 류강(劉剛)은 뉴욕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여학생 지도자 차이링(紫玲·33)은 미국에서 프린스턴대를 졸업한 뒤 하버드대에서 경영학 석사과정을 밟으며 보스턴 금융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 남은 학생지도자중 왕여우차이(王有才·34) 등 2명은 현재도수감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강충식기자 chungsik@
  • 中재야 ‘天安門’재평가 탄원

    중국 반체제인사들은 28일 유혈진압됐던 89년 6월의 톈안먼(天安門) 민주화요구 항의운동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하는 공개 탄원서를 중앙정부에 보냄으로써 연례적인 재평가 요구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반체제인사인 왕훙쉐 등 불법화된 중국민주당 당원들은 톈안먼 유혈사태 11주년을 1주일 앞두고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 겸 공산당 총서기 등 중국 지도자들에게 보낸 공개 탄원서에서 “당시 당국에 의해 ‘반혁명 폭란’으로규정됐던 6·4 민주화운동에 대한 재평가는 모든 중국인의 공통된 염원이며미래를 위해 필요한 역사적 선택”이라고 강조했다. 이들은 또 강주석에게 정치개혁을 추진하고 중국인들의 정당한 민주적 권리를 존중할 것을 촉구하면서 6·4 민주화운동을 재평가하고 관련 반체제인사들을 사면해줄 것을 요청했다. 베이징·홍콩 AFP AP 연합
  • [외언내언] ‘난민 1호’

    우리나라가 92년 세계난민협약에 가입한 지 8년만에 처음으로 카메룬 국적의 반체제인사 타크위씨(33)가 난민 지위를 인정받게 됐다.‘난민 1호’를기록하게 된 타크위씨는 카메룬의 야당 사회주의민주전선당의 홍보·재정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여섯차례 체포된 경력이 있으며 반정부 시위 주도와 관련,지명수배를 받고 있는 가운데 98년 2월 카메룬을 탈출해서 99년 3월 국내에들어왔다고 한다. 난민제도는 정치적으로 박해를 받고 있는 사람이 본국으로 송환돼 다시 박해를 받지 않도록 보호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인도주의적 장치다.현재 세계난민협약에 가입한 나라는 138개국.지금까지 우리 정부에 난민신청을 낸 사람은 12개국 75명으로 이 가운데 41명은 불허 판정을 받았고 10명은 신청을취하했으며 현재 3명이 심사를 기다리는 중이다.최근 미얀마 반체제인사 샤린이 강제퇴거 명령을 받아 본국으로 송환될 뻔했다가 이의 제기가 받아들여져 난민 문제가 새롭게 주목을 받기도 했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당국의 박해를 피해 해외로 탈출해서 몇년씩이나 ‘난민’으로 지낸 한국인들도 몇 있다.‘광주 5·18 마지막 수배자’로 미국으로 탈출해서 난민지위를 인정받은 윤한봉씨와 ‘파리의택시운전사’로 널리 알려진 ‘남민전’ 관련 진보적 지식인 홍세화씨 등이그들이다. 난민 문제와는 다소 성격이 다르지만 과거 우리 민주화운동은 외국 양심세력의 격려와 지원에 큰 빚을 지고 있다.그럼에도 우리는 외국의 민주화운동을 격려하고 지원하는 데 인색했던 게 사실이다.세계난민협약에 가입하고도 무려 8년이 흘러서야 ‘난민 1호’가 나왔다는 사실이 그것을 말해준다 하겠다. 국민의 정부에 와서야 난민을 처음 인정한 것은 인권국가를 지향하는 이 정부의 의지를 대내외에 명시적으로 천명한 것으로 이해된다.그동안 민주화와인권존중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표명해왔던 우리는 정부의 이번 조처를 당연히 높게 평가한다. 또한 우리는 정부에 대해 몇가지 당부할 말이 있다.외국인의 인권도 존중하겠다는 뜻을 명시적으로 천명한 이상 내국인의 인권존중에 가시적인 후속조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인권위 설치와 국가보안법 개정을 서둘러야 한다.최근 광주항쟁 관련 국제학술회의에 참석하려던 독일 뮌스터대 송두율 교수가 ‘준법서약서’ 시비로 귀국을 포기했다.아직도 준법서약서 타령인가. 장윤환 논설고문
  • 인물 포커스/ 서유진 광주시민연대 상임자문위원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동티모르의 벨로 주교,요한 갈퉁 교수(유럽평화대 교수) 등 해외 인권 운동가들의 광주 방문이 줄을 잇고 있다. 5·18민주화운동이 20주년을 맞아 세계사적인 이벤트로 자리잡게 됐음을 보여주는 것이다.이같은 해외 인사들의 광주 방문을 막후에서 추진한 사람이있어 화제다.주인공은 서유진(徐裕鎭·58) 광주시민연대 상임자문위원. 홍콩 아시아인권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서씨가 광주시민연대와인연을 맺게 된 것은 94년.시민연대는 5·18의 국제화를 위해 아르헨티나 ‘5월 광장 어머니회’ 등 해외 민주단체와 연대를 추진하고 국제청년캠프와각종 국제학술대회를 준비중이었다. “시민연대가 비정부기구(NGO)로서 5·18 정신의 확산을 위해 힘쓰는 것을보고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자 참여했다”는 서씨는 그동안 시민연대의 국제교류사업을 도맡다시피했다. 그는 스리랑카·태국·캄보디아·베트남·동티모르 등 분쟁지역을 돌며 각국의 인권상황을 출판물 등을 통해 세계에 알려 왔다.이같은 활동으로 이번5·18 20주년을 맞아 광주를 방문한 동티모르 벨로 대주교와 제1회 광주인권상 수상자로 결정된 동티모르 지도자인 사나나 알렉산더 구스마오 등과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그는 “현재의 인권상황이 5·18 당시와 비슷한 국가들의 인권 지도자들이5·18에서 희망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70년 미국으로 건너가 한때 문동환 목사가 이끌었던 ‘북미 한국민주회복통일연합’ 사무총장 등으로 활동,군사정부로부터 ‘반체제 인사’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
  • 새 영화/ 베르톨루치 감독 ‘하나의 선택’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마지막 황제’ 등으로 잘 알려진 거장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이 만든 불륜영화는 어떨까.‘하나의 선택’(원제 Besieged)은 남녀의 불륜을 소재로 잡았으되 결코 통속적이지도 아슬아슬하지도않은 영화다. 금지된 사랑의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거기엔 번다한 감정이 끼어들 여지없이담백하다. 반체제 인사인 남편이 붙잡혀간 뒤 로마로 옮겨와 어렵게 살아가는 아프리카여인 샨두레이. 가정부로 일하며 거처하는 집 주인이자 피아니스트인 킨스키의 간절한 구애를 냉담하게 물리친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남편의 석방뿐.그러나 그런 내면에 조금씩 균열이 생긴다.청혼을 거절당한 이후로도 킨스키는 순수한 사랑의 열정 하나로그녀를 향한 애틋함을 키워나간다.어느새 그의 피아노는 모차르트가 아니라여자가 즐겨 흥얼거리던 파파웸바 아프리카 민속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순간순간 음악영화를 보고 있는 듯 착각할 정도다.대사는 극도로 절제됐고피아노 선율이 시종 물결을 이루는 영화 곳곳에는 암시가 많다. 현실에 얽매여 멈칫거리기만 하던 샨두레이의 감정은 끝내 선택의 고비에 선다. 남편의 석방 전날 밤,마음을 더는 속일 수 없었던 샨두레이는 킨스키의 방을 찾는다. 킨스키 역에는 ‘토탈 이클립스’로 얼굴이 익은 데이비드 튤리스, 샨듀레이역에는 ‘미션 임파서블 2’에 나온 흑인 여배우 텐디 뉴튼.13일 개봉. 황수정기자
  • 후세인 이라크대통령 장남, 자국서 ‘세기의 언론인’에

    [카이로 연합] 지난 달 총선에서 99.99%의 득표율로 의회의원에 당선된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의 장남 우다이(35)가 이번엔 이라크 언론인들에 의해 ‘세기의 언론인’으로 선정됐다. 우다이는 이라크 언론인 연맹이 최근 실시한 투표에서 전체 회원 702명중 698명의 지지로 “세기의 언론인”에 선정됐다고 이라크 신문들이 보도했다. 우다이는 이번주 초 실시된 이라크 언론인연맹 회장 선거에도 단독 후보로출마해 재선됐다.이라크 언론인 연맹 회원들은 우다이가 “정직하고 헌신적인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인물”이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우다이를 잘 아는 이라크 반체제 인사들은 우다이가 글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무식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이라크 명문인 바그다드 청소년학교를 우다이와 같이 다닌 라티프 야히아는 우다이가 포르셰 스포츠카를 타고학교에 나타나 선생님들과 거의 놀다시피 했으며 한번도 숙제를 해온 적이없다고 말했다. 이라크 망명자인 야히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반 동료였던 우다이는늘 최고점수를 받았다고 설명했다.포악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진 우다이는이라크내 최대 일간지 ‘바벨’을 비롯해 7개 주간지를 발행하고 있으며 TV와 라디오 방송국도 운영하고 있다. 바벨지는 2년 전 ‘21세기에는 미국의 독점적 우위가 상실될 것’이라는 내용의 논문을 우다이의 박사학위 논문이라며 300쪽짜리 부록으로 발간했다.
  • 남북 정상회담/ 이산가족문제 어떻게

    남북간에 정상회담을 갖기로 했다는 보도가 나오자 실향민들은 이산가족 상봉의 꿈에 한껏 부풀어 있다. 이산가족문제 해결은 50년만의 ‘민족 화해’란 회담의 상징적 의미를 감안할때 어떤 형태로든 성과를 이뤄낼 것으로 기대된다.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11일 국무회의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4대 과제의 하나로 제시한 베를린 선언을 정상회담의 주요 의제로 상정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산가족상봉 방안은 ▲고향방문단운영 ▲고령자의 생사확인 및 상호방문▲판문점 및 제3국 지역의 면회소 설치 등으로 요약된다. 고향방문단의 운영은 북한측으로선 가장 손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방안이다.상황에 따라 일회성 이벤트로 마감할 수도 있다는 유연성때문에 북측에겐‘매력’이다.과거에 운영해본 경험도 있다. 또 고령자의 생사확인이나 제한된 상호 방문허용은 북측에겐 충격이 적다는점에서 실현 가능성이 높다. 판문점이나 금강산지역 또는 중국의 단둥(丹東)∼신의주 등의 면회소 설치도 여러 방안중 하나로 꼽힌다.이 안은 당국자회담에서도 여러 차례논의된 바 있다.실질상봉의 전단계로 화상 전화를 통한상봉및 생사확인도 고려할 수 있다. 북한은 이산가족 교류가 대대적으로 이뤄졌을 경우 체제동요가 따를 것으로우려해왔다. 예민한 정치 문제라는 시각이다.‘북한체제를 반대하고 탈출한반체제 성향 인사들’의 고향방문이나 이들 친족들의 서울방문은 북한체제의동요를 가속화 할 수 있다는게 북측의 판단이다. 이점에서 대규모 이산가족 교류는 고도의 정치적 결단이 필요하다. 북측이이같은 결단을 내릴 수 있을지는 남북관계의 발전 방향을 함축한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정부는 실향민 2·3세대를 포함한 이산가족을 767만명 가량으로 추산하고있다.이중 52세 이상의 이산가족 1세대는 123만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석우기자
  • 러시아 대선 이모저모/

    이번 러시아 대통령선거의 주관심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직무 대행이 과연 1차 투표에서 과반수를 확보할 수 있느냐에 모아지고 있는 양상이다. 푸틴 직무 대행이 50% 이상의 표를 얻을 경우 다음 달 16일로 예정된 결선 투표를 피할 수 있으나 유권자들의 무관심으로 투표율이저조할 경우 이같은 구상에 차질이 생길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동안 실시된 대부분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푸틴 대행은 50%내외의 지지를,라이벌인 겐나디 주가노프 공산당 당수는 20%의 득표에 그칠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투표율이 저조할 경우 조직표가 많은 주가노프 당수의 득표율이 다소올라갈 것으로 예상되고 있기도 하다. ●러시아 대선은 각지역에서 오전 8시에 투표에 들어가 오후 8시에 완료되지만 11시간대에 걸친 광대한 영토로 인해 지방에서 투표가 정확히 언제 시작돼 언제 끝나지는 중앙에서 집게가 불가능한 실정.우연의 일치로 26일은 러시아 전역에서 ‘서머 타임’제가 시작되는 날이기 때문에 투표시간을 둘러싼 혼란은 더 심해졌다.푸틴 대행은 25일 대국민성명을 통해 “서머타임으로 새시간이 시작되듯 이번 선거는 러시아의 옛시대를 마감하고 새시대를 여는 중대한 선거”라며 지지를 호소.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은 푸틴 직무대행이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 사회 전반에 만연돼 있는 부패,범죄와 경제 혼란 등 ‘러시아병’을 특유의 추진력으로 치유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그러나 지식층에서는 푸틴의 카리스마에 우려와 경계의 목소리를 내는 등 그에 대한 평가와 기대가 다소 엇갈리고 있다. 일부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KGB 출신인 푸틴이 집권할 경우 반체제 인사 탄입 등 옛 공산주의 시절의 철권 통치가 재연될 수도 있을 것으로 우려하고있다. ●이번 선거에서는 유권자들이 푸틴의 당선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기때문에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이 주가노프 공산당 당수의 거센 도전에 직면했던 지난 96년 대선때와 같은 열기와 긴장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지적.특히러시아 유권자들은 그동안 선거를 많이 치러본 탓인지 이번 대선 투표를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이 역력하다. ●이번 대선에서는 유럽안보협력기구(OSCE)를 비롯,56개국 및 82개 국제기구에서 1,000여명의 참관인단이 투표를 지켜보게 되며 50개국 2,000명 이상의기자들이 취재경쟁을 벌이고 있다. 러시아 내무부는 교전중인 체첸측의 테러 등에 대비,지난 20일부터 투표가치러지는 모든 건물에 대한 24시간 감시체제에 들어갔다. 러시아 전역의 투표소에는 군인들이 배치돼 체첸 반군들의 테러에 대비하는모습.군인들은 체첸 반군들이 선거를 방해할지 모른다는 정보에 따라 투표소 주변에서 폭발물을 수색하는 등 삼엄한 경비를 폈다.러시아 당국은 체첸공화국 국경을 봉쇄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날 러시아에서 가장 일찍 투표한 사람들은 가장 동쪽에 위치해 시차상투표시간이 가장 이른 베링해협 인근 극지방 추코트카 반도 유권자들.이타르-타스 통신은 이날 정오경 추코트카와 극동지방인 연해주의 투표율이 50%를넘어 투표가 유효한 것으로 선포됐다고 보도. ●모스크바에서 투표한 보리스 옐친 전대통령은 푸틴대행이 당선되면 90년대이래 자신이 걸어온 개혁노선을 계속 견지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옐친대통령은 “모두가 변화를 갈망한다.앞으로 약간의 변화는 있을 것이다.하지만 개혁의 기본 노선은 유지될 것이다.나는 그것을 확신한다”고 주장. 옐친대통령은 지난해 12월 31일 갑자기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러시아의 민주주의와 주권을 지킬 가장 확실한 사람”이라며 푸틴을 대통령 대행으로 임명했다. 모스크바 외신종합
  • [타이완 51년만의 정권교체]”모든 당 참여 초당적 연정구성”

    *천수이볜 총통당선자 인터뷰. 천수이볜(陳水扁) 타이완 총통 당선자는 18일 “홍콩이나 마카오처럼 하나의 국가 속에 다른 체체를 유지하는 ‘일국양제(一國兩制)’ 방식에 의한 중국의 통일방안을 거부한다”고 밝혔다. 또 빠른 시일 안에 모든 당이 참여하는 초당적 연합내각을 구성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당선이 확정된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 나라를 확고하게 지키는것은 우리의 단순한 과제가 아닌 의무”라며 “이같은 결심은 결코 흔들리지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천 총통 당선자는 그러나 타이완이 독립을 추진할 경우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중국측 위협을 의식,“타이완해협의 안정과 평화는 양안 국민들의 공통된 소망”이라며 중국과의 대화를 적극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양안문제의 우호적 해결과 상호협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이나 주룽지(朱鎔基) 총리,왕다오한(王道涵) 해협양안관계협회장등 중국측 고위대표의 타이완 방문을 환영하며 자신도 아무 전제조건 없이중국을 방문할 용의가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타임지와의 단독회견에서 “5월20일 취임 전에라도 당과 출신 지역을 초월한 초당적인 연합내각을 가능한 한 빨리 구성해 양안문제 등 현안을해결해나갈 계획”이라며 국민당 등과의 연합 의사를 밝혔다. 천 총통 당선자는 “미국과 일본,가능하다면 싱가포르 등을 방문해 안보 문제를 논의하고 싶다”고 말했다.천 총통 당선자는 “이번 선거는 51년간의국민당 일당지배에 종지부를 찍고 타이완의 새로운 미래를 선택한 국민들의역사적 결정이었다”며 “용감한 타이완 국민들이 사랑과 희망으로 두려움과악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켜냈다”고 선거의 의미를 부여했다. “이제는 개혁을 신속히 추진하고 1년여 동안 치열하게 벌어진 선거전 과정에서 빚어진 국론분열을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리덩후이(李登煇) 총통을 만나 국내 및 국제적인 현안들에 대해 조언을 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리 총통은 타이완의 민주주의 발전과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며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타이베이(臺北) 김규환특파원·김균미기자. *천수이볜은 누구.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루며 타이완에 새 시대를 연 천수이볜(陳水扁·49)은민주화를 향한 지치지 않는 결의와 뛰어난 머리를 바탕으로 한 효율적 행정처리로 국민당 일당독재를 끝낼 인물로 일찍부터 꼽혔다.여기에 그의 부인위수전(禹淑珍·46) 여사가 정치적 테러로 하반신마비가 돼 국민들 사이에정치적 신념을 위해 큰 희생을 치른 비극적 인물로 각인됐다. 51년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사탕수수농장 일용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으나초등학교과 국립타이완대를 수석졸업하는 등 명석한 두뇌로 빈곤을 벗어나대학 4학년때부터 변호사로 활동했다. 그의 정치 입문은 79년 민주화시위를 주동한 반체제잡지 ‘포모사’ 발행인의 변호를 맡은 것이 계기가 됐다. 81년 타이베이 시의회 의원에 뽑혀 야심만만한 변호사에서 정치인으로 탈바꿈했으나 85년 펑라이다오(蓬萊島)라는 반체제잡지 제작에 참여한 혐의로 8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출소 후 활동을 재개,89년과 92년 입법의원 선거에 연속 당선됨으로써 정치적 기반을 다졌다.94년12월타이베이 시장에 당선돼 차세대 지도자로 부상하면서 그해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21세기의 젊은 지도자 100명’에 선정됐다. 타이베이 시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타이베이의 윤락산업에 철퇴를 가하는가하면 만성적인 교통체증을 해소하고 범죄율을 크게 낮추는 등 큰 인기를 끌었다.그러나 그의 타협할줄 모르는 강경한 자세는 동지들로 하여금 그에게등을 돌리게 만드는 한편 많은 적을 만들어 98년 재선에 실패하는 또한번의좌절을 맛봤다. 지난해 홍콩의 ‘아시아위크’가 선정한 ‘차세대의 아시아 정치인 20인’에 오르기도 한 그는 98년의 실패를 자신의 외곬수적인 단점을 고치는 교훈으로 삼아 최대 약점으로 지적되는 타이완 독립문제에 있어서도 자신이 중국과의 전쟁을 부르는 말썽꾼이 아니라 평화주의자임을 내세우는 타협안을 들고나와 마침내 첫 정권교체라는 새 역사를 만들어냈다. 76년 부유한 의사의 딸이었던 위 여사와 결혼해 1남1녀를 두고 있다. 유세진기자 yujin@. *뤼슈롄 부총통 당선자. 타이완의 첫 여성 부총통뤼슈롄(呂秀蓮·56)은 타이완 민주운동과 여권운동을 최일선에서 이끌어온 강성(强性) 여성투사. 천수이볜(陳水扁)의 국립타이완대 선배로 대학을 수석졸업한 뒤 미 하버드대에서 법학석사 학위를 받았다.귀국 후 타이완의 야당 결성 운동에 참여,과격 민중노선을 대표하는 잡지인 메이리다오(美麗島)의 발간에 참여하면서 타이완 민주화 및 여성운동에 뛰어들었다.79년12월 ‘메이리다오 사건’에 연루돼 계엄통치 시절이던 이듬해 1월 군법재판소에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고복역하다가 85년 병 보석으로 석방됐다.독신인 그는 석방 후에도 85년 민진당 창당에 관여하고 메이리다오지 부사장직을 역임하면서 민주화운동에 적극참여했으며 페미니즘 문학을 전문으로 하는 출판사를 이끌어왔다. 98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는 타오웬 현장에 당선됐으며 총통부 국정 고문직도 맡고 있다.영어와 타이완 현지어에 능통하며 부패 일소와 외교 문제에 큰 관심을 보였다. 타이완의 유엔 재가입 및 중국의 타이완 침공시 독립 선포를 주장하는 한편“타이완은 부패 공직자들의 천국이 되서는 아니다”는 일갈로 국민당의 오랜 부패에 싫증을 느낀 국민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유세진기자. *51년 통치 끝난 국민당. 19일 오후 타이베이시의 국민당 중앙당사 앞에는 이틀째 총통선거 패배에격분한 지지자들이 몰려들어 당간부들의 차량 유리창을 부수고 경찰과 몸싸움을 하는 등 격렬한 항의시위를 벌였다. 국민당의 롄잔(連戰) 후보가 참패하고 민진당의 천수이볜(陳水扁) 후보가 총통에 당선, 1949년 중국대륙에서타이완(臺灣)으로 밀려난 이후 처음으로 야당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51년만에 야당으로 밀려난 국민당은 중국 현대사의 영욕(榮辱)을 대변하고있다.49년 중국대륙의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장제스(蔣介石)가 휘하 군대와국민당 정부관료,200여만명의 피란민들을 이끌고 타이완섬으로 옮겨온 이후타이완은 그와 그의 후계자가 통치해 왔다. 1912년 쑨원(孫文)에 의해 중국본토에서 창당된 국민당은 삼민(민족·민주·민생)주의를 바탕으로 청나라 제정(帝政)을 무너뜨리기 위한 혁명조직으로출발했다. 25년 쑨이 사망하고통치권을 물려받은 장은 각 지역을 분할 통치하던 군벌에 대한 북벌(北伐)을 개시했다.28년 대륙의 대부분을 지배했으나,30년대 이후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공산당과 대적했고,45년 일제가 패망하면서 치열한 국공내전을 벌였다. 49년 12월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국민당 정부는 타이완섬으로 넘어와 계엄령을 선포하고 행정·입법·사법부 3권을 장악, ‘일당 독재’정치를 폈다.철저한 반공주의를 내걸고 54년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에 서명,미국으로부터 군사·경제원조를 받아 경제발전에 주력해 고도성장을 이뤘다.경제는 성장했지만 타이완인들의 기본권과 언론자유는 보장받지 못하고 크게 제한돼 왔다. 급기야 71년 10월 유엔 안정보장이사회(안보리) 상임이사국 지위를 중국에뺏기고 유엔에서 축출되는 외교적 수모를 맞본데 이어,세계 각국이 중국과외교관계를 수립하면서 국제사회의 ‘고아’신세가 됐다. 75년 장 총통이 사망하자 아들인 장징궈(蔣經國)가 총통에 올랐다가 88년 1월 숨지자,내성인(內省人) 출신의 리덩후이(李登輝)가 총통에 취임했다.리총통은 복수정당 허용 등 민주화 작업을 추진했으며,탄탄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아시아 금융위기에서 비껴나는 업적을 쌓았다.리 총통은 타이완성 주석직의 롄을 행정원장(총리)에 발탁하고 99년 3월 당내 최대 라이벌이던 쑹을 축출,국민당 총통후보로 그를 선출했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의 참패로 ‘양지에서만 자라온’ 국민당은 피할 수없는 분열 위기를 맞게 됐다.중국시보(中國時報)·연합보(聯合報) 등 현지언론들은 “쑹 후보가 이날 신당 창당을 선언함으로써 국민당내 쑹 지지자의신당 이동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이는 데다,천 당선자도 안정의석 확보를 위해 국민당·건국당 등과의 연정을 모색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타이베이(臺北) 김규환특파원 hay@. *타이완 주요 정치사건일지. □1945년 일본의 50년 식민통치 종식. □47년 타이완인 봉기를 국민당 군대가 무력진압,수천명 희생. □49년 12월 장제스(蔣介石) 총통 국민당 국공내전서 패하자 망명정부 수립. □55년 미국과 상호방위조약 체결. □71년 유엔이 유엔대표권을 박탈하고 중국을 인정. □75년 장제스 총통 사망. □79년 미국,중국과 외교관계수립.미 의회는 타이완에 방위용 무기공급 약속. □88년 장징궈(蔣經國) 총통 사망으로 타이완 출신 리덩후이 총통 승계. □93년 중국과 싱가포르서 첫 대화.유엔 가입 시도. □94년 총통 직선제 도입. □95년 리 총통 미국 방문.중국이 보복으로 수차례 군사훈련 실시,양안 긴장 고조. □96년 3월 리 총통의 재선을 막기 위해 중국이 타이완을 겨냥해 한차례 미사일 발사,두차례 모의 전쟁연습.미국은 인디펜던스호와 니미츠호 등 항모 2척 타이완 해역에 급파. □2000년 3월18일 제10대 총통선거.민진당 천수이볜 후보 당선. □2000년 5월20일 천수이볜 당선자 취임.
  • [타이완 51년만의 정권교체]

    *현지표정. 타이완(臺灣) 총통선거 막바지까지도 계속 됐던 타이완에 대한 중국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휴일인 19일 양안에는 특별한 움직임이 없었다. 그러나 양측군부는 비상경계령을 풀지 않은채 팽팽한 긴장을 이어갔다. □타이완 해협 중국 군부는 총통 선거후 타이완의 독립 움직임 가능성에 대비,고도의 경계태세에 들어갔다고 홍콩의 중국계 신문 문회보(文匯報)가 18일 보도.이 신문은 군 소식통을 인용,독립지지 후보가 총통에 선출되면 타이완이 ‘시끄러워질’ 가능성을 중국이 배제하지 않고 있다면서 인민해방군이군사행동으로 막을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타이완 군도 17일 전군에 내린 최고경계태세를 당초 19일 오전 해제할 예정이었으나 무기한 연장키로 결정. 이같은 긴장감 속에 일부 주민들은 식료품을 사재기 하는가 하면 부유층에선 타이완 탈출을 위한 항공권 구입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타이완 언론들은보도. □중국 달래기 천수이볜(陳水扁) 당선자는 투표전 “총통에 당선된다 해도독립을 선언하거나 헌법에 ‘2국론’을 집어넣지는 않을 것”이라며 중국 달래기에 나섰다.이는 또 타이완의 장래를 결정짓는 국민투표 가능성을 배제했다.천 당선자는 “타이완인들은 독립을 위한 투표를 할 기본적 권리를 갖고있으나 반드시 이 권리를 행사할 필요는 없다”고 강조. □정계개편 31만표차로 낙선한 무소속 쑹추위(宋楚瑜) 후보는 18일 총통선거출마를 위해 탈당했던 국민당에 복귀하지 않고 신당 창당을 선언. 국민당 당원 1,000여명은 이날 저녁 총통 관저에서 2㎞ 떨어진 국민당 본부에 집결,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이 당 분열과 이로 인한 선거패배에 책임이있다고 비난하면서 총재직 사임을 요구. 전문가들은 야당으로 전락한 국민당개편과 국민당 인사의 민진당,쑹의 신당참여 등으로 대대적 정계개편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 □당선자 진영 천 당선자는 19일 아침 민주화운동 지도자 묘역을 찾아 참배하는 등 당선자로서의 첫 일정을 시작. 앞서 천 당선자 진영의 대변인 비 킴 치아오는 “타이완 국민들이 말문을열었고 우리의 꿈이 실현됐다”고 기뻐했다.타이완 독립지지운동을 벌이던반체제 인사들이 86년 창당한 민진당은 15년만에 여당으로 변신하는데 성공. 타이베이(臺北) 김규환특파원 khkim@. *각국 반응. 타이완 총통선거에서 천수이볜(陳水扁) 후보가 당선된데 대해 세계는 중국을 의식, 조심스러운 환영을 나타내며 한결같이 중국-타이완간 긴장이 고조되어서는 안된다면서 대화를 촉구 말했다. □중국 거듭된 무력위협에도 불구하고 타이완의 독립을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진 천 후보가 당선된데 대해 충격을 받은 듯 비교적 조용하면서도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반응을 보였다. 18일밤 당-정부 공동명의로 발표된 성명은 “타이완의 지도자 선거와 그 결과가 타이완이 중국 영토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고 강조하면서 “우리는 천 당선자의 말과 행동을 관찰하고 그가 양안관계를 어떤 방향으로 이끄는지 지켜볼 것이다”고 밝혔다.이 성명은 이어 “평화통일은 ‘하나의 중국’ 원칙이 전제조건으로 천 당선자가 이를 인정한다면 기꺼이 대화에 나설 준비가 돼 있다.그러나 어떤 형식이든 타이완의 독립은 결코허용되지 않을 것이다”고 밝혀 천 당선자와 민진당에게 경고를 보냈다.이같은성명 내용은 종전과 같은 무력 위협은 가하지 않아 천 당선자와의 대화 가능성은 남겨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홍콩 중국사회과학원의 양안관계 전문가인 리지아콴 연구원은 천 당선자가5월 총통에 취임한 뒤 양안 간에 ‘대결과 긴장’ 국면이 조성될 것이라고경고했다. □미국 천 후보가 당선된 것은 타이완 민주주의의 저력과 활력을 보여준 것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중국이 주장해온 ‘하나의 중국’ 정책을 계속 지지할것이라고 다짐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18일 “천 후보의 승리를 축하한다”면서 “이번 선거는 타이완 민주주의의 힘과 활력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번 선거로 타이완과 중국 양측이 서로 접촉해 대화를 통해 이견을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생겼다고 본다”고 밝힌 뒤 “미국은 양측의 대화를 강력히 지지하며 이 지역의 평화와 안정,번영을 촉진할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중국과 타이완이 직접대화를 통해 긴장을해소할 것을 기대하는 한편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의 퇴임 후 일본 방문 계획으로 일본이 중-타이완 긴장관계에 말려들 것을 우려했다.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총리는 19일 “중국을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한 1972년의 공동성명을 바탕으로 한 일본의 중국정책에는 아무 변화도 없을 것이다.타이완과 관련,일본은 중국과 타이완간에 조속히 대화가 재개돼양자간 문제들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동북아 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한편 일본언론들은 19일 민진당의 천 후보가 당선돼 50여년만에 최초로 정권교체가 이뤄졌다는 기사를 일제히 1면 머릿기사로 보도했다. □동남아 싱가포르 동아시아 연구소의 중국-타이완관계 전문가인 쳉용니안연구원은 천 후보의 당선으로 양안간 긴장이 고조돼 동남아시아 정국이 불안해질 것으로 우려된다고 말했다. 베이징·워싱턴·도쿄·싱가포르 외신 종합
  • “한국 女警, ‘최루탄 퇴출’ 일등공신”

    시위에서 폭력을 잠재운 우리나라 여자 경찰의 활약상이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에 크게 소개됐다.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은 지난 23일자 ‘한국의 질서 유지,미인이 무력보다 훨씬 나아’라는 제목의 기획 기사에서 우리나라 여경 기동대를 ‘한국경찰의 새로운 시위 진압 무기’라고 소개했다.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은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의 거리에는 백골단과최루탄으로 무장한 검은 트럭,쇠파이프,최루가스가 등장했지만 그것은 이미오래 전 한국의 모습일 뿐”이라면서 “변모한 시위 문화는 예전에 반체제인사로 몰려 고통을 경험한 김대중 대통령이 2년 전 취임할 당시 깨끗한 공기를 만들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루탄 사용을 중지할 것을 지시했기때문”이라고 배경을 전했다. 아시안 월스트리스 저널은 이어 시위 진압에 여경 배치를 하게 된 계기와관련,이무영 당시 서울경찰청장이 충북 옥천경찰서 순시에서 김강자 서장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뒷얘기도 소개했다. 한편 경찰은 지난 98년 12월31일 최루탄을 사용한 이후 지금까지 1년2개월동안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김재천기자 patrick@
  • 北 ‘급변’ 발생 가능성 상존

    [워싱턴 최철호특파원] 조지 테닛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2일 북한 내부에서 “갑작스럽고 어쩌면 위험스러운” 급격한 변화가 발생할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다고 말했다. 테닛 국장은 이날 상원 정보위원회가 개최한 청문회 증언을 통해 이같이 말하고 “북한은 심각한 경제난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이제는 아마도 엘리트까지 포함한 전체 국민이 체제에 대한 신뢰를 상실했다”고 말했다. 테넷 국장은 ▲북한의 산업활동이 저조한 상태에 머물고 있고 ▲금년의 곡물수확량은 최소한의 수요량보다 100만t 이상 부족하며 ▲주요 교역국인 일본 및 중국과의 무역이 감소하는 등 경제적 궁핍이 계속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테닛 국장은 북한 지도자 김정일(金正日)이 이러한 경제난을 반전시키기 위한 효과적인 장기 전략을 갖고 있는 것 같지 않다고 말하고 “주민들의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그의 무능과 강압통치로 인해 반체제 행동이 확대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테닛 국장은 그러나 “평양측의 운신의 여지는 개방이 자신의통제력을 위협한다는 김정일의 생각과 그의 전반적인 전략에 잠재된 모순 때문에 제한될것”이라고 전망했다.
  • 칠레대통령 좌파 라고스 당선

    16일(현지시각) 치러진 칠레 대통령선거 결선투표 결과 집권 중도좌파연정의 리카르도 라고스 후보(62)가 당선됐다.라고스는 유효투표수의 51.7%를 득표,48.3%를 얻은 보수우파연합 야당 칠레동맹의 호아킨 라빈 후보(46)를 간발의 차로 제쳤다.그는 오는 3월11일 임기 6년의 차기 대통령에 취임한다. 라고스의 당선에 따라 칠레는 73년 아옌데정권 붕괴 이후 27년만에 사회주의자 수반을 맞게 됐다.라고스는 80년대 피노체트 치하에서 반독재투쟁에 앞장선 인물이기도 해 피노체트 처리를 비롯한 향후 칠레정국에 어떤 변화를몰고올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결론부터 말해 칠레 정정에 격변은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한때 쿠바혁명 및 산업국유화 등을 지지하는 급진 사회주의자 시절이 있었지만 80∼90년대 미국유학,장관직 경력 등을 거치며 온건좌파로 선회했다는 것이 라고스에 대한 중평.선거유세 과정에서도 이 점이 작용,양진영은 이념적 차별성을 거의 드러내지 않은 채 범죄 해결,실업 감소,빈부격차 해소 등 대동소이한 공약을 내세웠다.때문에 라고스정권이 출범해도 기존의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기조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이보다는 경제침체,사회불안 해소 등 현안을 어떻게 풀어나가느냐가 라고스정권의 성패를 가를 것으로 보인다.저인플레-고도성장을 거듭,남미의 모범생으로 꼽혀온 칠레경제는 90년대 말 불어닥친 아시아 및 남미 경제위기 여파로 20년만에최악의 경제침체에 처한 상황.라고스 정부는 11%에 이르는 실업률 해소,급증한 생계형 범죄 퇴치 등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라고스의 당선으로 피노체트 처리 향방이 새삼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피노체트의 칠레 귀환이 기정사실화한 뒤 라고스는 그에 대한 원론적 사법처리 입장을 피력했을 뿐 ‘뜨거운 감자’에 대한 구체적 언급을 회피해왔다.그러나 대표적 반군정인사로 피노체트 치하에서 투옥당한 경험도 있는 라고스가 취임 후 강도높은 사법처리에 나설 가능성은 상존한다.라빈 후보에대한 득표율이 말해주듯 피노체트를 지지하는 군부와 기득권층의 영향력이아직도 만만찮은 칠레에서라고스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느냐에 따라향후 정국안정 여부가 가늠될 것이다. 손정숙기자 jssohn@ *리카르도 라고스는 누구인가 라고스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17년 군정에 맞서 반체제 투쟁을 벌인 칠레의 대표적 좌익 지식인으로 꼽힌다. 칠레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는 젊은 시절 아옌데 정권에서 당시 소련대사 후보로 꼽히기도 했으나 73년 피노체트 쿠데타로 유학길에 올라 미국 듀크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칠레로 돌아온 그는 피노체트 독재가 맹위를 떨치던 80년대초 야당인민주연맹 총재,89년 상원의원을 지냈다.86년 좌익게릴라들의 피노체트 암살기도에 연루된 혐의로 잠시 투옥된 일은 그의 반독재 투쟁에 가속도를 붙인계기가 됐다. 아옌데 노선의 추종자로 급진 사회주의자이던 그는 당시 피노체트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도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으나 민선정부 등장 이후 이를 수정,90년대 제도권에서 교육장관,공공장관 등을 지냈다.이번 총선에서도 ‘중도 좌익’을 표방,지나친 급진성을 우려해온 유권자들을 끌어안았다.재혼한 부인 루이사 두란 여사와의 사이에 세 아들이 있다. 손정숙기자
  • 이국땅서 길어올린 사색의 편린들…러 망명시인 리진

    리진(70)은 러시아 볼가강변 추프리야노프라는 농촌에서 살고 있는 망명시인이다.함경남도 함흥 출신으로 김일성종합대학 영문과에 다니다 6·25전쟁이 터지자 인민군에 입대하여 참전했다.이후 소련에 유학하여 소련국립 영화예술대학 극작과를 졸업했고,57년 반체제 운동에 참가하다 망명했다. 최근 그의 시를 묶은 ‘하늘은 나에게 언제나 너그러웠다’(창작과 비평사)가 나왔다.지난 96년 나온 ‘리진서정시집’에 이어 국내에서 나온 두번째시집이다.지난 49년부터 95년까지 일기처럼 써온 2,000여편의 시 가운데 가려 뽑은 것이라고 한다. 이 시집에 실린 대부분의 작품은 자연과 농촌을 그린 서경시다.시인이 망명생활을 하던 숲속의 농촌마을에서 접했던 자연과 농민의 생활,사냥,낚시,꽃등을 노래하고 있다.남북한의 문학적 환경과는 동떨어진 채 형성되어 남한식도 북한식도 아닌 그의 시는 파란 많은 그의 삶 만큼이나 독특하다. 그러나 새 시집이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참전시 두편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이들 시에는 6·25 당시 ‘인민군’으로 남쪽군대와 싸웠던 때의 체험이 담겨 있다.인민군 출신이 쓴 참전시를 읽는 일은 매우 희귀한 경험이 아닐 수없다. 바삐파서/반신도 감출 수 없는/후툇길의 참호들이 뒤집히었다.//반시간을 탄우와 파편,폭풍이/온갖 생을 앗아가려/발악하였다. 초연이 걷혀가는 구덩이들 사이를/난데없는 까투리가 빠져나갔다.//그런데도,동무야,/암만 불러도/너는 입을 열지 않았다,/숨이 없었다.(1950)다급한 후툇길의 짧은 휴식시간에 씌어졌을 이 시는 전쟁의 참혹한 모습을그리고 있을 뿐 ‘적’에 대한 분노는 보이지 않는다.또 이념이 아니라 전쟁이 갖는 보편적 의미의 비극을 그렸다는 데서 남쪽의 문학도 출신 학도병이쓴 것과의 구별도 불가능하다.나아가 모스크바에 유학하는 동안 썼을 다음시에 이르면 실존의 위기에 대한 내면의 갈등이 더욱 선명하다. 바로 곁에서/열일곱살의 총각들이/피를 토하며 쓰러졌다.//나보다 단 세살이라도 덜 살아/이 세상의 티끌이 그만큼 덜 묻었을 너희의/어린 넋은 지금/어디서 떠도는지?운명은 나에게/죽음보다 더 무서운 시련을/업보로 마련해두고 있다는/예감이 나에게 있다.…(1953)그는 마치 소설의 주인공 처럼,냉전과 분단에 휩쓸려 조국과 가족을 등진 채살고 있다. ‘동상’이라는 제목의 다음 시는 그가 왜 그런 운명을 선택했는지,참혹한 역사의 책임을 누구에게 묻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청동의 폭군이/…/물 맑은 대동강의/언덕 위에 솟아 있다.…무수한 이런 동상 중/한 개만은 남겨두어라!…얼마나 못난 자가/얼마나 오래/새 세상을 망칠 수 있는지/경고로 되게!(1965∼1966)서동철기자 dcsuh@
  • [베를린 장벽 붕괴10돌] (하) 축하행사 이모저모

    [베를린 남정호 김규환특파원] 장벽붕괴 10주년을 맞은 9일, 베를린에서는장벽붕괴 및 독일 통일과 관련된 각종 기념행사와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열려21세기 통일독일의 새비젼과 희망찬 미래를 기약하는 축제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켰다.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냉전 종식의 주역들인 콜 전 총리와 부시 전 미대통령,고르바초프 전 옛소련 대통령이 행한 기념 연설.베를린 장벽 붕괴 및독일 통일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이들 ‘3인방’이 차례로 연방하원에등장,‘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의 상황’의 회고 및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념 연설을 하자 연방하원 의원들은 물론 독일 시민들이 일제히 열렬한박수로 환영. ●장벽 붕괴 10주년 행사와 관련 최고의 인기는 고르바초프 전대통령.그가브란덴부르크문 인근 아들론 호텔에서 묵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시민들이 몰려가 ‘고르비’‘고르비’를 연호.이때 고르바초프가 딸 이리나와 손녀 아나스탸사와 함께 밖으로 나오자 악수를 하려는 사람들로 운더텐린번대로의 교통이 한때 마비되기도.그는 또베를린의 유명 보석상 옌스 로렌츠씨로부터 독일 통일에 이바지한 공로로 ‘평화의 시계’로 명명된 최고급 시계를 선물 받았다. ●전날 베를린 명예시민증을 받은 부시 대통령은 이날 연합군 박물관에서 열린 ‘베를린의 해방-조지 부시와 독일 통일’이라는 주제의 특별전시회에 참석하는 등 비교적 조용한 행보. ●베를린 시청에서는 부대행사로 장벽 붕괴일인 지난 89년 11월9일 출생한어린이들을 초청,‘독일 통일의 꿈나무’ 행사를 열어 이들이 베를린 장벽붕괴와 독일 통일의 정신을 이어가도록 격려. ●요시카 피셔 독일 외무장관과 게메르크 폴란드 외무장관은 베를린 시청에서 베를린 장벽 붕괴에 일조한 겐셔 전 서독 외무장관과 추쿠비스 츠브스키전 폴란드 외무장관에게 ‘독일·폴란드’상을 수여. ●브란덴부르크문 앞에 설치된 야외 특설 음악당에서는 3만명의 청중들이 운집한 가운데 ‘베를린 장벽 붕괴 10주년 기념 대연주회’가 열렸다. 이 연주회에서 첼리스트 무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 등 세계적 거장들의연주에 이어,팝그룹 스콜피온스우도 라덴베르크가 각각 ‘변화의 바람’‘베를린을 환영합니다’를 열창.축제 분위기가 무르익었을때 수십발의 기념폭죽이 터져 하늘을 수놓자 시민들은 일제히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기도. * 베를린 장벽 붕괴후의 동유럽 변화상 ‘동구 국가들의 새 세기 시작은 2000년 1월1일이 아니다.10년 전인 1989년11월9일 이미 시작됐다’ 2차대전 종전과 함께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철의 장막 음지에 있다 지난10년간 숨가쁜 변화를 겪어온 동구(지리적으로는 발트해에서 발칸반도)국가들에게 베를린 장벽붕괴가 갖는 의미를 설명한 말이다. 지난 91년 구 공산권국가들의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유럽부흥개발은행(EBRD)은 9일 연례보고서에서 중부 유럽국가들과 발트국가들이 내년에는 올해 경제성장 전망치인 1.6%의 두배에 해당하는 3.2%까지 성장할 것으로 추정했다. 동구 발전의 선두그룹은 유럽 최대 경제대국 독일과 접경,유로리전(Euro Region)등의 실험적인 경제및 환경협력 모델을 운영하고 있는 폴란드 헝가리체크 등 ‘동구 3룡(龍)’.지난3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가입한데 이어 정치·경제 안정의 척도라할 유럽연합(EU) 가입을 눈앞에 두고 유럽 옛공산권 국가들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89년 동독인들에게 오스트리아 국경을 개방,철의 장막을 처음 깨뜨린 헝가리는 이 지역에서 외국인 투자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나라.10년전 2,000달러이던 1인당 GDP는 지난해 4,500달러가 됐다. 붕괴 이전부터 동구지역의 반공산혁명 선봉장 역할을 했던 폴란드는 지금도4,000만에 가까운 인구와 경제력으로 중부유럽 최대의 국가로 인정받고 있다. 10년전 3,200달러이던 1인당 GDP가 5,000달러로 증가했다. 지난 93년 체코슬로바키아는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결별했다.체코는 옛 반체제 인사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의 지도아래 꾸준한 경제성장을 이루어왔다.그러나 슬로바키아는 90년대 내내 권위주의적 정부의 영향으로 유럽 최대 빈국으로 간주돼온 저성장국.그러나 지난해 친 EU성향 새정부 출범으로 장족의발전을 거듭하고 있다.옛 유고연방 국가들 가운데는 슬로베니아가 1인당 GDP1만달러를 넘기며성공, EU 가입 최우선 대상국 대열에 합류했으며 90∼91년각각 독립을 선언한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발트3국도 이웃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도움으로 놀라운 경제변신을 이룩했다. 그러나 개혁이 오래 지체됐던 루마니아와 불가리아,그리고 계속된 분리 전쟁과 내전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마케도니아,유고등은 불안정한 정치,절름발이 경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공산 종주국이었던러시아는 지난 97년 금융위기 이후 성장률이 0%에 머물고 절대 빈곤층이 7,400만명으로 증가하는 등 경제,정치,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벗어나지못하고 있다. 김수정기자 crystal@ [인터뷰] 구동독 마지막 국가원수 에곤 크렌츠 [베를린 남정호 특파원] “지난 89년 11월9일부터 11일까지의 사흘동안은 내 생애에 가장 길고도 어려웠던 시간이었습니다” 8일 장벽붕괴 10주년을 맞아 베를린 개인사무실에서 기자와 만난 에곤 크렌츠 전 동독 공산당 서기장(62)은 당시 심경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현재 각종 강연과 집필로 생활하고 있는 그는 최연소 정치국원으로 그해 10월18일 실각한 에리히 호네커의 후계자로 선출된 후,한달도 채 안된 11월9일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맞은 비운의 동독 마지막 국가원수이다. “브란덴부르크문 앞 장벽 위로 수천명의 서베를린 시민들이 기어올라와 장벽이 무너지고 국경이 뚫릴 상황이었습니다.이때 우리가 가장 우려한 것은유혈 이었습니다.소련이 어떻게든 대응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9일밤 동독 공산당 정치국회의에서 동서독 국경선 개방 공표는 ‘피 대신 샴페인’을 터뜨리게한 결정이었습니다.” 동·서 베를린 국경개방은 당시 양측의 적대상황을 고려하면 기적에 가까운것이었다는 그는 그때만 해도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독일통일을 원치 않았다고 밝혔다. “89년 11월1일 고르바초프와 4시간동안 회담했을 때 독일통일은 의제에도없었습니다.당시 바르샤바조약기구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을 해체하고자한 정치가는 동서진영 어디에도 없었고 고르바초프 입장도 그랬습니다.” 그는 “그러나 장벽이 무너진뒤 12월2∼3일 지중해 몰타에서 열린 부시 미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간의 정상회담에서 갑자기 통일이 결정됐다”며 “89년 당시 소련은 ‘이미 임종을 앞둔 상태’였기 때문에 소련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온 동독의 몰락은 어찌보면 당연했다”고 말했다. 80년대 초 호네커와 슈미트 서독 총리간의 회담 이후 호네커와 소련 공산당지도부 사이에는 상호불신이 팽배해 있었다는 크렌츠는 89년 11월9일밤 동서독 국경개방 결정도 소련의 군사적 개입으로 유혈사태가 벌어지기 전 미리 내린 결정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날 오후 내려진 연방대법원의 동서독 국경탈주자 사살명령 혐의에대한 상고기각 판결에 대해 “동서독 장벽은 옛소련의 전략적 방위선으로 탈출자에 대한 발포 결정은 군사적 성격의 결정이었습니다.그러므로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수는 없습니다.”고 강조하며 연방헌법재판소에 심판을 요청할 예정이라고 밝혔다.크렌츠는 97년 8월 베를린 지방법원에서 6년6개월형을 선고받았으나 무죄를 주장하며 상고했었다. * 베를린장벽 붕괴 관련어록 [파리 AFP 연합] 유럽 분단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붕괴는 기억할 만한 발언들을 많이 남겼다. ●미스터 고르바초프,이 장벽을 부숴 버리십시오.(로널드 레이건 전 미대통령,89년 6월12일 브란덴부르크문에서)●장벽은 그것이 세워진 여건들이 변하지 않는 한 남아 있을 것이다.장벽은앞으로도 50년,아니 100년 동안도 존재할 것이다.(에리히 호네커 구동독 공산당 서기장,89년 1월19일)●소련은 동유럽 이웃들의 문제에 개입할 도덕적,정치적 권리가 없다.그들은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한을 갖고 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소련대통령,89년 10월 핀란드 방문시)●동독인들은 가고자 하는 어느 곳이든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다.이 조치는즉각 발효된다.(귄터 샤보브스키 옛동독 공산당 정치국 대변인,89년 11월9일기자회견에서)●우리는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슬픈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매우 슬픈 일들을.(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89년 11월9일)●나는 방금 베를린으로부터 도착했다.엄청난 사건을 목격하는 것 같았다.(헬무트 콜 서독 총리,89년 11월10일)●베를린 장벽에 처음 금이 간 것은 80년 8월 폴란드 전역에 걸쳐 일어난 대규모 파업사태 당시였다.(아담 미흐닉 폴란드 반체제 인사,99년 11월)●나는 내 결정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미하일 고르바초프,99년 11월)
  • [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 (42)‘민중교육’지 사건

    이철국 교사는 ‘한국 교육운동의 실천적 고찰’에서 우리나라에서 교원 노조운동이 1958년부터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추진되었지만 법무부의 불허방침으로 중단되었다가,4.19혁명 직후인 1960년 4월29일 60여 교사가 모여 대구시 교원조합 결성 준비위원회를 개최한 것을 계기로 1961년 초에는 약 4만명의 회원이 가입했다고 실증적인 통계자료를 제시하면서 교육운동의 깊이와넓이를 더하기 위한 필요한 요소임을 강조했다. 시인 이재무는 ‘교원 임용 이대로 좋은가’에서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아래와 같은 사실을 폭로했다. “공공연히 거래되고 있는 교사 채용 금액은 다음과 같다. ①시 단위 700∼1,000만원 ②읍 단위 250∼500만원 ③면 단위 150∼500만원전국에 있는 모든 사립 중고등학교가 다 이런 것은 아니다.”이 사실을 뒷받침하듯이 강병철의 단편소설 ‘비늘눈’은 은사 교수의 추천으로 이사장의 아들과 만나 운 좋게도 150만원만 만들어 오면 교사로 채용하겠다는 제의를 거절하는 청년상을 형상화시키고 있다. 시인 조재도는 ‘너희들에게’란 시에서 “싹수 있는 놈은 아닐지라도/공부잘 하고 말 잘 듣는 모범생은 아닐지라도/나는 너희들에게 희망을 갖는다”고 교육의 평준화 이념을 노래한다. ‘민중교육’이 투옥과 해직으로 치닫는 가운데서 이 잡지에 ‘야학 일지’를 썼던 송대헌 교사는 파면 즉시 단신으로 법정 투쟁을 전개하여 1987년 12월11일 대구 고등법원으로 부터 “잡지 전체의 성격이 피고 주장과 같이 자유 민주적 기본질서를 부정하는 반체제적인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어 승소판결을 받아냈다.그는 1988년 10월1일자로 복직하여 그간 못받았던 봉급까지도 모두 받아 ‘민중교육’의 명예를 되찾기도 했지만 다른 교사들은 긴 세월을 고통으로 보내야만 되었다. 실질적으로 이 잡지를 주도했던 김진경은 출옥 후 계속 교육운동에 투신하여이 사건이 있었던 만 2년뒤인 1987년 4월 실천문학사에서 교육시선집‘내 무거운 책가방’을 펴내어 다시 문단과 교육계의 주목을 받았다. 학생·학부모·전 현직 교사 43인의 작품을 모운 이 시선집이 나왔을 때는박종철 고문치사(1.14) 사건으로 반독재투쟁이 극한으로 치닫던 시기였다. “문학이 당대 사회에 대한 총체적 인식을 목표로 한다면 그 총체성은 어떤초점을 통해 포착될 수 있을 것이다”고 본 김진경은 “우리사회의 이념적향방을 결정짓는 인텔리겐차 70만 중 30만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교사집단을 대상으로 개혁의 대상으로 부각시켰다.그는 “가르친다는 것은/싸우는 것이다”(‘교과서 속에서’)고 80년대 교육의 어려움을 털어 놓는다. 이 시선집에는 “난 1등 같은 것은 싫은데…/앉아서 공부만 하는 그런 학생은 싫은데,/난 꿈이 따로 있는데,난 친구가 필요한데…/이 모든 것은 우리엄마가 싫어하는 것이지”로 시작되는 유명한 ‘O양의 유서-H에게’란 시도실려 있다. 분단 이데올로기와 통일,민족 민주주의 문제,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중산층학생 학부모,지식인 문제 등 5부로 나뉘어진 이 시집은 발간 즉시 판금 당했지만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任軒永·문학평론가]
  • [20세기 문명기행] 6. 사회주의의 도전과 실패

    80년대 후반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동유럽의 자유화 바람이 불어닥칠 때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가 일컬어진 바 있다.이는 정치적으로는 공산당 일당독재,경제적으로는 계획·통제방식의 경제정책을 골자로 한 종래의 ‘이론공산주의’에서 인간의 창조력과 생산성을 가미한 ‘수정공산주의’로의 변화모색을 지칭한 것이었다.그러나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말처럼 공산주의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20세기 초엽에 등장해 20세기 말에 종말을 고한 공산주의.소련이 사회주의이념을 국가의 통치원칙과 경제운용방식으로 채택한 것은 1917년 볼셰비키혁명에 성공한 데 힘입은 것이며 동구권 등 다른 공산국가들은 2차대전 이후사회주의 이념을 따랐다.승전국의 하나였던 소련은 전리품으로 할당받은 동유럽 국가들에서 해방군으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하며 공산주의를 심는 데 성공하였다. 이같은 현상은 2차대전 기간중 독일점령군에 저항,독립을 쟁취했던 유고슬라비아와 내전을 통해 공산화한 중국을 제외하고는 동유럽 모든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다.따라서 동유럽 국가들의 공산화는 국민들의 희망과는 별개로 외세에 의하여 불가항력적으로 채택된 것이다. 소련공산당의 붕괴 이후 이 지역에서 몰아친 민주화 추세는 반소(反蘇)사상에서 기인한 것인 동시에 공산화 이전의 상황으로 되돌아가는 순리였다고 할 수 있다. 전세계 공산국가들의 원조인 소련의 붕괴는 1987년 11월 볼셰비키혁명 70주년 기념연설에서 고르바초프가 “소련공산당은 동맹국의 정책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힘으로써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이는 소련과 여타 공산주의 위성국간의 수평적인 관계를 거론한 것으로,이듬해 12월 유엔총회에서 그가 “공산주의 국가들이 각자 자기나라의 사정에 맞는 노선을 채택할 수 있다”고 언급한데서 거듭 확인되었다.결국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은 동유럽 동맹국들이 다당제와 시장경제를 채택하도록 길을 열어준 셈이었다.이같은 노력의 중심에 섰던 고르바초프는 서방진영에서는 긴장완화의 산파로,동유럽에서는 개혁의 물꼬를 터준 공로자로 찬사를 받았다. 공산주의 사상의 이론적근거를 제공한 독일의 철학자 칼 마르크스는 ‘역사적 유물론’을 통하여 사회주의·공산주의 등장을 역사의 법칙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그러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실현을 위해 정당(공산당)이 국가 위에 군림하는 정치체제와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채택한 계획·통제방식의 경제체제는 국가가 국민을 책임지고 돌보아준다는 긍정적인 주장에도 불구하고 결국 ‘실패한 모델’임이 역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다시말해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의 공산주의는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라기보다는 인간의 얼굴,인간의 체온이 배제된 한낱 ‘공산주의운동’에불과했다는 설명이 된다.따라서 과거 1세기에 걸친 공산주의는 이론과 현실간의 괴리속에서 ‘인류의 재앙’이었다는 혹평까지도 나오고 있다.동유럽을 비롯해 아프리카,아시아 지역 등에 건설됐던 대부분의 공산주의 국가들이소련의 붕괴와 함께 동반퇴진 또는 복수정당제 도입 등의 노선수정으로 ‘변신’을 꾀한 것이 이같은 평가를 뒷받침하고 있다. 소련공산당의 몰락은 세계사적으로도 한 획을 그은 일대사건으로 기록되고있다.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은 지난 한 세기동안 세계인류의 절반을 혁명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으며 이를 둘러싼 논쟁도 끊이지 않았다.마르크스사상의 토대는 19세기 중반 그가 파리에서 어렵게 생활하던 시절에 형성된 것으로 당시 유럽은 초기자본주의의 모순이 극대화된 시기였다. 당시 노동자들은 비참한 생활에 허덕이고 있었고 자유로운 사상에 대한 탄압은 날로 가중돼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던 시기였다.48년 그는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바로 그것이다’로 시작하는 ‘공산당선언’을 발표,역사의 전면에 나섰다. 런던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에 있는 마르크스의 무덤에는 요즘도 방문객이 줄을 잇고 있다.이는 소련공산당의 몰락이 곧 ‘이데올로기로서의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으로 보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것을 의미한다.마르크스주의는 아직도 중국,쿠바 등의 국가에서는 국가이념으로,반체제세력이나 게릴라단체에서는 혁명이념으로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정운현기자 jwh59@ * 사회주의 붕괴… 분단국 통일 촉매제로 남북 예멘,동서독,베트남-.서로 이데올로기가 달라 분단상태에 있다 하나가 된 나라들이다.예멘과 독일은 사회주의의 붕괴,베트남은 사회주의체제 구축으로 끝이 나 대조적인 양상을 보이긴 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국가들에선 모두 사회주의가 기반을 잃었거나 자본주의의 물결이 힘차게 일고 있다. 남북 예멘과 동·서독의 통일은 사회주의의 붕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예멘의 경우 사회주의 국가인 남예멘과 정통회교국 북예멘이 서로 깊은불신의 골에 빠져 있었다.72년 9월과 79년 2월,두 차례나 전쟁을 치렀을 정도다.그러나 사회주의체제를 고수하던 남예멘은 구 소련이 붕괴한 뒤 원조중단에 부닥쳐 결국 북예멘에 통일을 제의하고 나섰다.이후 72년 11월 26일 트리폴리에서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가진 뒤 18년만인 90년 마침내 23년간의 분단상황에 종지부를 찍었다. 45년 8월 연합국에 통치권을 이양,분단됐던 동서독의 통일과정 역시 사회주의 붕괴와 분리될 수 없다.구 소련의 강력한 통제를 받아온 동독은 사회주의의 맏형격인 소련의 와해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물론 독일 통일은 데탕트에 편승해 상호주의에 따른 동서왕복,경제교류,여행자유 등쌍방향 협상의 산물이었음을 무시할 수 없다.그러나 직접적인 계기는 사회주의의 몰락이었고 독일 통일은 다른 동유럽 국가들의 탈공산화와 민주화에 촉진제로 작용했다. 베트남은 무력을 사용해 일단 사회주의체제로 통일을 이루어냈다.그러나 지금 베트남은 공산권국가중 어느 곳 보다도 서방의 투자 등 시장경제가 활기를 띠고 있다.월남과 월맹 분단체제 속의 경직된 모습은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이같은 시대적인 상황에서 아직까지도 이데올로기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분단 형태로 남아있는 유일한 나라인 남북한은 어떤가. 남북한의 분단은 미소 대립의 산물이란 점에서 독일과 비슷하다.여기에 3년간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러 상호 불신이 극심하다.어쨌든 북한은 지금 경제난으로 인해 체제에 상당한 변화를 맞고 있다.따라서 중앙계획경제 체제의이완은 불가피하다.자본주의 시장경제 논리가 이미 북한을 파고들었고 남북간의 교류도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굳이 예멘 독일 베트남 등의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역사의 시계추는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보이고 있다. 김성호기자 kimus@
  • 아르헨 군부독재 98명 체포영장

    [마드리드 AP 연합] 스페인의 발타사르 가르손 판사는 2일 지난 76∼83년아르헨티나를 군사통치했던 호르헤 비델라,에두아르도 비엘라,레오폴드 갈티에리 등 3명의 전직 대통령과 당시 군사평의회 위원 12명 등 모두 98명에 대해 테러와 학살,고문 등의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지난해 칠레의 전 독재자 아우그스토 피노체트 체포영장을 발부해 영국에서 체포되게 했던 가르손 판사가 이번에 영장을 발부한 군 장성중에는 에밀리오 마세라 전 해군사령관,도밍고 바시 전 투쿠만 주지사와 기예르모 수아레스 마손 전 육군제1군단장 등이 포함돼 있다. 비델라 등 3명의 전직 대통령은 76년 이사벨 페론 전 대통령을 축출한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뒤 차례로 대통령에 취임,히틀러의 나치정권 때와 같은 철권통치를 펼쳤다.이 기간중 9,000명 이상의 반체제 인사들이살해되거나 실종된 것으로 공식 발표됐으나 인권단체들은 희생자가 최고 3만명에 이른다고 주장하고 있다.가르손 판사는 아르헨티나 군부독재 기간중 아르헨티나에서 발생한 스페인인 600명의 실종 및 납치사건에 이들의 책임이있다고 주장했다.피노체트 사건때와 마찬가지로 아르헨티나 독재자들을 스페인 법정에 기소하려는 노력이 당사국간 외교분쟁을 야기할 우려도 있다. 그러나 체포영장이 발부됐다고 해도 이들이 곧바로 체포돼 스페인법정으로인도될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83년 민주주의로 복귀한 뒤 비델라 등을 재판에 회부해 징역형을 선고했으며 5년후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이 이들에 대해 사면조치를 발표하는 등 군부독재를 경험했던 다른 남미 국가들과 달리 나름대로의 과거청산작업을 펼쳤었다. 퇴임을 앞두고 있는 메넴대통령은 이후에도 가르손 판사의 수사협조 요청을 거부해 왔는데 차기 대통령 당선자인 페르난도 데 라 루아가 이 문제에 어떤 대응을 보일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인권단체들은 가르손 판사의 체포영장 발부를 일제히 환영했다.실종된 민간인들의 어머니들로 구성된 아르헨티나의 인권단체 ‘오월 광장 어머니회’의 알바 란질로토 간사는 군부독재시절의 납치범과 강간범,고문범들이 아직도거리를 활보하고 있다며 “우리를 대신해 외국에서 정의가 추구되고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 [박정희 전대통령 서거 20주년](상) 집권 18년의 功·過

    역사적 인물의 평가는 시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특히 시간이 지나도 영향력이 줄지 않는 지도자 일수록 평가의 스펙트럼은 폭넓고 다양하다.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역사적 평가도 현재진행형이다.객관적이고 엄정한 공(功)·과(過)의 분석 토대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26일 박 전대통령 서거 20주기를 맞아 역사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상을 상·하로 나눠 살펴본다. 【 功 】 ‘박정희(朴正熙) 시대’가 우리 현대사에 남긴 긍정적 의미는 ‘한강의 기적’으로 요약된다.‘하면 된다’라는 자신감으로 유례없는 경제성장의 업적을 이룩했다는 평가다.초고속 성장의 잔영으로 사회 곳곳에 부작용을 남겼다는 지적도 있지만 박 전 대통령이 근대화에 기여한 통치자라는 사실에 물음표를 던지는 시각은 드물다.일부 ‘박정희 옹호론자’는 “위로부터의 경제개발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면서 “박 전 대통령이야말로 대한민국의운명을 바꿔 놓은,존경받아 마땅한 통치자”라고 찬사를 보낸다.이른바 ‘개발독재 불가피론’이다.박 전 대통령의 독재적 리더십은 경제 근대화의 동력(動力)을 제공한 ‘필요악’이었다는 시각이다. 특히 62년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전후(戰後) 복구에 치중한 50년대를 극복하고 60년대 성장의 물꼬를 튼 경제개발 모델로 기록된다.이는 가난과 실의에 빠진 국민에게 미래의 희망과 도약의 의지를 심어준 계기였다.국가가 주도한 수출위주 공업화 정책은 이후 여러 개발도상국과 후진국의 발전 모델로 ‘차용’됐다.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이후 우리 사회에 ‘박정희 붐’이 일고 있는 현상도 ‘박정희 시대’의 ‘경제 신화(神話)’에 기대려는 향수 때문이다. ‘박정희 시대’의 결집된 국가적 에너지는 70년대 새마을운동이란 이름으로 더욱 고조됐다.대중동원식 개발 프로그램은 일제 치하의 1930년대 조선농촌진흥운동이나 일본의 농촌경제갱생운동 등을 비롯,2차세계대전을 전후해사회주의나 자본주의 진영 곳곳에서 전개됐지만 ‘박정희 시대’의 새마을운동이 보기 드문 성공사례로 꼽힌다. 남북관계에서 ‘박정희 시대’는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이라는 조국통일3대원칙에 합의한 72년의 ‘7·4남북공동성명’을 통해 새로운 전기를 만든 것으로 기억된다.‘7·4남북공동성명’은 유신체제를 유도하기 위한 정치 수단으로 활용되는 한계를 드러냈지만 6·25 이후 처음으로 남북한간 공식대화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측면에서 분단 이후 통일운동사에서 간과할 수 없는 사건이다. 【 過 】 ‘박정희(朴正熙)정권’이 우리 사회에 드리운 암영(暗影)은 그의 공적(功績)을 무색케 할 정도로 짙고 투박하다.민주주의와 인권,분배 정의 등의 가치를 부정한 폐해가 ‘보릿고개의 극복’과 ‘초가지붕의 개량’이라는 ‘박정희 옹호론’을 일축하는 근거로 제시된다.박 전 대통령과 무원칙한 화해를 시도하면 자칫 민주주의의 가치와 역사의식의 왜곡을 부를 수 있다는 우려도 같은 맥락이다. 헌법을 무시한 쿠데타로 막을 올린 박정권은 영구집권을 위한 3선개헌과 유신체제,연고주의와 지역감정을 조장한 지역패권주의 등으로 우리 정치사에씻기 어려운 오점을 남겼다.경제성장 지상주의로 인한 물질만능 풍토와 정경유착 등 왜곡된경제구조도 박정권이 후세에 남긴 부채(負債)로 꼽힌다. 이를 두고 일부 ‘박정희 비판론자’는 “쿠데타로라도 정권만 잡으면 되고,돈이면 다 되는 관행을 만든 장본인이 박정희”라면서 박정권의 민중억압성과 냉전적 권위주의,비합리적 정치행태 등을 비판한다.최근 ‘박정희기념관건립과 국고지원’문제와 관련,강만길(姜萬吉)고려대·조동걸(趙東杰)국민대 명예교수 등 일부 역사학자가 토론회와 각종 모임을 통해 부당성을 강조하는 등 ‘박정희 비판론’은 우리 사회에 여전히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박정권의 국가중심 발전지상주의적 산업화가 90년대 말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의 주요 요인이라는 분석도 만만찮다.선단식 경영 위주의 재벌경제를기본축으로 하는 ‘박정희식(式)’ 권위주의 발전모델이 역사적 한계를 보이면서 한보부도,기아부도 등 IMF 위기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새마을운동도 ‘박정희 비판론자’에게는 비난의 대상이다.농민운동가나 비판적 지식인들은 새마을운동을 전시행정이라고 폄하한다.이들은 “박정권이장기집권체제를꾀하면서 사회적 저항을 희석시키기 위해 새마을운동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고 주장한다.유신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정적(政敵)을 무자비하게 처형하거나 의문의 주검으로 몰아 넣은 대목에서는 ‘자연인 박정희’를 옹호하는 주장이 설득력을 잃는다는 지적이다. 박찬구기자 *朴정권 탄압사 ‘제3공화국’은 오랜 통치기간 만큼이나 많은 반체제인사를 만들어냈다.현대사의 한획을 그을 만한 굵직굵직한 ‘사건’과 ‘파동’,‘의혹’이 잇따랐고 그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박해와 탄압을 받았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그 대표적인 표본이다.71년 7대 국회의원 선거를앞두고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했고,73년 납치사건을 겪는 등 죽을 고비를 수차례를 넘겼다. 잡지 ‘사상계’를 이끌면서 정권비판에 앞장선 장준하(張俊河)선생도 마찬가지다.한·일회담과 월남파병문제 등 계속되는 비판으로 정권의 미움을 샀다.이로 인해 여러차례 구속됐고 세무사찰로 생활고를 겪어야 했다.75년 장선생은 결국 의문의 추락사로 생을 마감했다.최종길 서울대교수도 비슷한 경우다. 김영삼(金泳三)전 대통령도 ‘유신체제의 위험인물’로 꼽히면서 수난을 겪었다. 72년 유신체제 등장은 이른바 ‘민주인사’를 대량으로 양산하는 계기가 됐다.정계 뿐 아니라 학계,종교계,언론계,문인계 등 사회 각 분야에서 반민주·반독재 항거가 일어났다.74년 ‘긴급조치1호’는 이에 대한 탄압의 신호탄이었다.장준하·백기완씨를 시작으로 함석헌·안병무·문동환·계훈제씨 등수백여명의 재야인사와 교수들이 기소됐다.그해 ‘긴급조치4호’를 발동시킨 ‘민청학련사건’으로는 253명의 민주인사,학생들이 구속됐다.이철,유인태씨 등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대부분 무기징역 등 중형을 선고받았다.배후조종자로 김동길교수,박형규목사,지학순주교,김지하시인 등이 기소됐다.75년 긴급조치9호가 선포되기까지 구속자는 수천명이나 됐다. 정치인들은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혹독한 고문에 시달렸다.이세규·조윤형·조연하·이종남·강근호·최형우·김상현씨 등이 대표적인 피해자들이다. 이지운기자 jj@. [특별기고] 朴正熙 리더십의‘이중성’정치인의 행위나 업적을 평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시대적 상황에대한 인식이 다를 수 있고 나타난 결과의 중요성을 보는 각도도 다를 수 있는 까닭이다.특히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 통치를 경험했던 우리 세대는지극히 주관적·감정적으로 그를 평가할 개연성이 높다. 개인을 상황과 연계시켜 구분해볼 때 정치 리더십은 이상주의자,현실주의자,그리고 창조적 지도자로 나누어진다.현실주의 리더십은 목적을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기에 미사여구로 그 사회가 지향하는 목표를 제시할지언정실제 행동은 다분히 이에 부합하지 않는 형을 지칭한다. 반대로 이상주의 리더십은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낮은,경우에 따라서는 불가능한 이념에 집착하여 추구하는 목표에 근접하지도 못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 보통이다.창조적 리더십은 역사의 흐름에 부합하는 목표를 설정하고 현실적 제약을 극복하면서 이를 단계적으로 성취해 가는 유형이다. 이러한 리더십 유형에 비추어 박정희 전 대통령은 현실주의 지도자였음이분명하나 창조적 리더십의 특성도 부분적으로 갖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가 내걸었던 국정목표는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로 상징화된 조국 근대화였다.경제성장 지상주의 정책은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행하는 계기를마련했고 경제의 양적 성장을 이루었다는 점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물론 ‘선(先)성장 후(後)분배’정책에서 나타난 심각한 경제불평등과 재벌에 집중된 자본,그리고 다원화되어 가는 시민사회의 강압적 통제는 문제로지적할 수 있다. 60년대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관 주도의 경제정책과 선성장 후분배정책이최선의 것이었는가는 먼 훗날 역사가 평가할 몫이다. 그의 ‘근대화’정책이 가진 본질적 문제는 정치영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산업화가 진행될수록 다원적인 사회로 이행되고 좀더 제한적·분권적권력구조가 성립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권위주의 체제로 역행했기 때문이다. 3선개헌은 ‘나 아니면 안된다’는 오만의 상징이다.공작정치는 야권을 회유하거나 분열시켜 정권을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자행되었다.시민사회의 자율성 신장에 관한 요구는 공권력을 동원하여 제도적으로,그리고 실질적으로 억압되었다. 권위주의의 제도화를 기도했던 유신체제는 결국 권력 엘리트들의 균열로 비극적 종말을 맞이하고 말았다. 거대한 민주화의 흐름이 70년대 중반 포르투갈을 시발로 나타나기 시작했으나 자유민주주의가 시대의 보편적 흐름이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 그의 정치행보는 잘못된 것이었다.분명히 그는 정치적인 측면에서 정권의 유지와 재창출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은 현실주의자였다. 그러나 ‘조국근대화’를 경제적 측면에서 국한시켜 볼 때 그는 어느 정도창조적 역할을 했었다.여기서 박정희 리더십의 이중적 성격을 찾아볼 수 있다.나는 그가 만일 3선개헌으로 정권을 연장하고 유신을 통해 권력의 영속화를 시도하지 않았다면 아마 위대한 대통령으로 남았을 것으로 본다. 사회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정치도 변해야 하고 역사 흐름에 부응한 현실의변화도 아울러 추구해야 정치가 안정적으로 발전한다는 점을 우리는 박정희통치가 남긴 역사적 교훈으로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柳勝男 국민대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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