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반일
    2026-06-14
    검색기록 지우기
  • 체첸
    2026-06-14
    검색기록 지우기
  • 묵인
    2026-06-14
    검색기록 지우기
  • 올리
    2026-06-14
    검색기록 지우기
  • AIS
    2026-06-14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095
  • [정직한 역사 되찾기](33)재일 친일파 거두 박춘금

    일제강점기 친일파는 조선내는 물론 일제의 영향력이 미치는 전 지역에서 활동하였다.만주사변 이듬해인 1932년 수립된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이나 일본 본토도 그들의 주요 활동무대였다.이들은 대개 군부나 행정기관 등 일제의 권력기관에서 일제통치의 수족으로 활동하였다.만주군관학교나 일본 육사를 나와 고급장교로 활동한 친일 군인들이 이에 속하며 또 일본이나 만주국의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고급엘리트 관료로 활동한 자들을 들 수 있다.한 단계 낮은 직급에서는 밀정이나 행동대원 등 앞잡이로 활동한 자들을 거론할수 있겠다. 일본 본토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친일파로 박춘금(朴春琴·1891∼1973)을 들수 있다.그는 조선인으로서 일제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두 번씩이나 대의사(代議士·국회의원)에 당선된 사람이다.그의 친일성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극력 친일파 가운데 일제말기 일제가 임명한 귀족원 의원을 제외하면 일제통치 전 기간을 통해 일본 국회에 진출한 사람은 그가 유일하다. 박춘금은 여러 형태의 친일파 가운데서상당히 드문 유형에 속한다.친일파 가운데는 지식을 팔아 일제에 아부한 집단이 있는가하면,경제적 기반을 일제통치에 제공한 대가로 기득권을 보전하고 일제와 유착관계를 형성해온 부류도 있다.그러나 박춘금은 그도저도 없는 자였다.그는 오직 몸뚱이 하나로친일대열에서 성공한 자였다.그는 수하에 폭력조직을 거느린 소위 ‘정치깡패’ 집단의 우두머리였다.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하수인으로 폭력집단이 존재해 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나 식민지시절에도 이같은 집단이 존재했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주먹으로 친일배의 정상에 오른 그의인생역정을 더듬어 보자. 박춘금은 1891년 경남 밀양 태생으로 본관도 밀양이다.부 박금득(朴今得)과 모 박차연(朴且連)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자세한 가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청년시절 그는 일본인 술집에서 심부름을 하며 일본말을 배운 것을 밑천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막노동판에 뛰어든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가 일본으로건너간 시기 등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도 자세하지가 않다.다만 그가 한 연설에서 토로한 말에 따르면,일본에 도착할 당시 수중에 가진 돈은 1원 49전뿐이었으며 당시 일본에는 관비유학생 50명인가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했다. 1920년경 그가 이기동(李起東) 등과 함께 도쿄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을 모아 ‘상구회(相救會)’라는 단체를 조직한 사실은 확인된다.이기동은 오랫동안 그와 함께 활동한 대표적인 재일 친일파다.상구회는 1921년말 ‘상애회(相愛會)’라는 사회사업단체로 개편되는데 23년 요코하마·나고야·오사카 등에 지부를 조직,조직을 확대하였다.그럴듯한 이름의 간판을 내건 이 ‘상애회’가 바로 박춘금 일당의 일본내 친일활동의 모태가 된다. 막노동판의 주먹패 박춘금이 일제로부터 인정을 받아 재일 조선인 사회에서 두각을 드러내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1923년 9월 1일 도쿄 인근 지역을 강타한 ‘관동(關東)대지진’이었다.수 십만 명의 인명피해는 물론 재산피해도 엄청났던 이 천재(天災)를 맞아 일제는 동요한 민심을 수습하고 조선인을탄압할 목적으로 당국의 개입하에 유언비어를 유포하였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거나 방화를 일삼는다는 것이 그것이다(여기에는 미즈노(水野鍊太郞) 당시 내무상의 조선인에 대한 개인감정이 개입됐다는 지적도 있다.미즈노는 1919년 9월 사이토(齋藤實)총독을 따라 정무총감으로 조선에 부임하기 위해 서울역에 첫 발을 디뎠다가 강우규(姜宇奎)의사의폭탄세례를 받은 인물). 이에 일본인들은 자경단을 조직,관헌과 함께 조선인에 대한 무자비한 체포와 학살을 자행하였는데 최소 6,000명이 이때 희생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바로 이때 박춘금은 상애회 회원 300여명을 동원,‘노동봉사대’를 조직하여 조선인 희생자 시체처리와 복구작업을 자청하였다.이 무렵 박춘금 일당은이미 일제당국의 비호를 받고 있어서 상호 자연스레 교감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일을 계기로 박춘금은 일제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상애회 본부 사무실을 마련하는 등 입지를 넓혀갔다.28년 박춘금은 상애회를 재단법인으로 만들고는 이사장에 총독부 경무총감 출신의 마루야마(丸山鶴吉)를 영입했다.회장에는 이기동을 앉히고 자신은 부회장으로 있으면서 사실상 실권을 행사하였다.이 무렵 상애회는 일본내 주요도시에 지방본부를 설치하였고 회원수도 2만명을 헤아렸다.이듬해 29년 상애회관을 지어 사무실도 독립하였고 마루야마 취임 1주년때는 사이토를 기념식 행사장에 초청하는 등 그 위세를 과시하였다. 재일조선인 사회에서 세력가로 부상한 그는 상애회 조직을 바탕으로 정계진출을 추진하였다.32년 2월 실시된 제18회 총선때 그는 도쿄 5구(區)에 출마,처음으로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놀라운 것은 조선인 유권자가 1,236명뿐인 이곳에서 6,966표를 얻었다는 점이다.그의 열렬한 친일성이 일본인 유권자들을 설득시킨 점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일본정계 실력자들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거직후인 2월 23일자로 그가 사이토 전 조선총독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불초 이번에 중의원 의원에 당선의 영관(榮冠)을 얻게 된 것은 모름지기 귀대(貴台,손위사람의 높임말)의 두터운 정과 성원을 입은 것이라 여기며 깊이 감사드립니다…”라고 한데서 이같은 점을 엿볼 수 있다.이후 그는 한 차례 낙선했다가 40년 제20회 총선에서 재선하였으나 그의 정치인생은 여기서 막을 내렸다.이후 그는 활동무대를 조선으로 옮겨 친일대열의 선봉장을자처했는데 이 시기가 바로 그의 친일활동이 절정을 이룬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인 학생들에 대한 학도병 징집이 시작되자 그는 매일신보 주최 학병격려대연설회에 참석하여 “고이소(小磯)총독이 (조선)군사령관 시절 군사령부를 방문,내선일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도인에 대한 병역의무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고 밝히고는 “(학도병)4천이나 5천이 죽어 2천5백만 민중이 잘 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또 있겠는가”고 외쳤다(매일신보 1943.11.19). 당시 일제가 학도병을 전선으로 내몬 것은 그 이면에는 조선의 미래의 지식분자를 제거하려는 의도가 숨겨진 것이었다.그가 이같은 일제의 의도를 대변한 것인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는 없으나 그에게는 그런 혐의를 둘만한 사건이 하나 있다. 8·15 해방을 불과 50일 앞둔 1945년 6월 25일.그는 경성부민관(현 서울시의회 청사)에서 당대의 내로라하는 친일파들을 동원,대의당(大義黨)을 결성하고 그 자신이 당수에 취임하였다.당시 전세는 이미 기울어 일본은 패퇴를거듭하였고 미군의 일본 본토공격이 임박한 시기였다.대의당은 바로 이 때‘최후결전’의 자세로 결성된 것이다. 대의당은 ‘강령’에서 “모든 비(非)결전적 사상(事象)에 대해서는 단연이를 분쇄한다”고 밝혔는데 여기서 ‘비결전적 사상’이란 ‘반전·반일’의 총칭이다.해방후 친일파들의 죄상을 조사,폭로한 ‘민족정기의 심판’에따르면 대의당은 항일·반전 조선민중 30만명을 학살하려 했던 ‘살인단체’였던 것으로 드러났다.이는 당시 총독부 경무국이 세운 ‘요시찰인에 대한조치계획’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해방후 그는 살길을 찾기 위해 수하를 시켜 건국준비위원회 등에 돈봉투를보내기도 했으나 여의치 않자 일본으로 밀항하였다.이 때문에 그는 반민특위의 체포,조사를 피할 수 있었다.특위에서는 여러 경로를 통해 그를 송환하려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모두 3번 결혼했는데 첫째,둘째 부인은일본여자였고 66년 75세때 세번째로 결혼한 여자는 당시 60세의 한국여자(82년 사망)였다.두번째 일본인부인과 사이에서 태어난 그의 장남 박춘남(朴春男·89년 일본에서 사망)은일본 릿교(立敎)대학 3학년 재학중 자진하여 학도병에 출진했었다. 일제당시 일본에서 박춘금과 교류한 적이 있다는 한 일본군 장교출신 제보자의 증언에 따르면,그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은 마약중독으로 거의 폐인이돼버렸다고 한다.73년 3월 31일 박춘금은 일본 게이오대학 병원에서 사망,현지에 묻혔다.친일 반민족자 박춘금의 일생은 그제서야 막을 내렸다.죽어서도 그는 고국보다 일본을 택한 것인가,아니면 죽어서도 고국으로 올 수가 없었던 탓일까. 정운현기자 jwh59@
  • 「오늘 ‘4·19’ 39돌」4·19세대-대학생 좌담

    4·19는 민주와 자유를 열망하는 지식인과 민중들의 힘이 폭발적으로 분출된 혁명이었다.하지만 39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4·19는 ‘미완(未完)의 혁명’으로 남아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정치·사회·문화적 갈등구조와 맞물려4·19정신이 우리 사회에 제대로 구현되지 못해 왔다는 것이다.4·19세대인이영일(李榮一) 국민회의 의원과 한영우(韓永愚) 서울대 인문대학장,고려대대학원 이준복(李準馥·신방과 석사 과정)씨와 연세대 손수진(孫秀眞·여·신방과 4년)씨의 좌담을 통해 4·19의 의미를 되새기고 4·19정신의 완성을위한 과제와 방안을 짚어본다. 이영일 4·19가 우리 정치사에 준 교훈은 4·19를 계기로 주권재민(主權在民)의식이 국민의 가슴 속에 자리잡았다는 사실입니다.또 우리가 미래에 구현해야 할 비전을 민주주의 형태로 완성했다는 것입니다.4·19가 ‘미완의혁명’이라고 불리는 것은 1년 만에 군사정권에 의해 붕괴됐기 때문입니다.4·19 이후 25년 동안 개발독재를 거치면서 4·19는 맥을 추지 못했습니다.국민이 국회의원을 바꿀 힘은 가지게 됐지만 정권을 바꿀 만한 힘은 갖지 못했습니다.그러다가 97년 12월18일 비로소 국민의 손에 의해 정권까지 바꾸게됐습니다.국민의 정부 탄생으로 비로소 4·19의 이념이 구현된 것이지요.그래서 4·19의 지향성이 국민의 정부에서 꽃피웠다고 봅니다. 손수진 ‘4.19세대는 없다’는 주장이 있습니다.4·19세대는 사회적으로영향력 있는 위치를 점하면서도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는 지지를 보내지 않았습니다.그래서 4·19세대가 변절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영일 4·19때 반독재투쟁에 앞장섰다는 사실만으로 평생 투사로 살다 죽으라는 논리는 맞지 않습니다.백이(白夷) 숙제(叔齊)처럼 살 수는 없는 것이지요.물론 4.19때 불의에 저항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비판받아 마땅합니다.4·19가 민족 대 반민족의 투쟁이라면 불타협의 투쟁을 계속해야 하겠지요.4·19세대에 대한 평가는 당시 어떤 위치에 있었느냐를 기준으로 이루어져야합니다.4.19때의 활약상을 소개하겠습니다.나는 당시 서울대 문리대 수학과에 다니던 김치호라는 친구와함께 남산합창단 단원이었습니다.종로 5가에서 곤봉을 맞고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문리대 앞 쌍과부집에서 우동을한 그릇 먹은 뒤 그 친구에게 시위하러 다시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그랬더니 그 친구는 도서관에 가방을 가지러 간다고 하면서 경무대로 달려가 죽음을택했습니다.해마다 4·19묘소에 가면 그 친구의 묘에 꼭 들립니다. 한영우 나는 당시 서울대 사학과 4학년으로 후배들을 인솔해 시위를 했습니다.태평로에 있는 옛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할 때 외칠 구호가 없어옆에 있는 조선일보사에서 몇사람이 구수회의를 해 즉석에서 구호를 만든 일이 있습니다. 4·19는 준비된 혁명이 아닙니다.그래서 ‘미완의 혁명’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프랑스혁명은 계몽사상가들이 이념적 토대를 제공했고 지지세력도 있어 폭발적 힘을 발휘했습니다.하지만 4·19는 혁명 뒤에 이념이 만들어져 왔습니다.당시에는 합의된 이념이 없었습니다.막연한 애국심을 가지고 시작된뒤 나중에 학문적이고 이론적으로 다듬어지기 시작했습니다.그리고 그 과정에서 여당,야당,재야,혁신에 이르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분화됐습니다.군사정권에 협조한 사람도 있고,군사정권에 대항해 옥살이를 한 사람도 있습니다. 4·19는 작게 보면 3·15 부정선거에 대한 저항이 도화선이 됐습니다.그러나 거시적으로 보면 선비들이 개혁의 선두에 나섰던 역사의 전통이 반복된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영일 우리는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시대에 살고 있습니다.4·19때 87달러에 비하면 엄청난 차이가 있지요.시민·사회단체,정당,이익집단,언론 등많은 집단이 더 이상 학생들의 신세를 지지 않고도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가능하게 하고 있습니다.학생은 이제 국민의 울분을 대변하는 유일한 집단이 아닙니다.21세기는 정보화시대입니다.정보화에 관한 지식이 가장 중요한 재산입니다.후배 대학생들에게 경쟁력을 갖춘 신지식인으로서 각자 맡은 바 소임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당부하고 싶습니다. 한영우 4·19때 군이 중립을 지켰던 것은 연구 대상입니다.논문에 따르면부정선거와 발포책임자인 최인규 내무부장관 등이 김정렬 국방부 장관에게협력을 요청해 계엄을 선포했는데 국방부 자체가 협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한 것은 미국이었습니다.미국이하야를 요구한 것은 이승만이 서구식 민주주의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승만정권은 한반도를 민주주의 진열장으로 만들려는 미국의 의도에 맞지않았습니다.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한·미·일 연합방위체제를 구축하려는 구상에 맞지 않았습니다.이승만은 강력한 반일(反日)주의자였기 때문에일본과 손을 잡기를 꺼렸습니다. 이준복 현재 전체 대학사회에는 다양성이 이데올로기로 자리잡고 있습니다.학생운동에 대한 관심과 사회문제에 대한 참여도가 과거에 비해 현저하게떨어집니다.이같은 변화는 93년 들어,특히 93학번부터 뚜렷합니다.90·91·92학번은 87년 6월항쟁의 경험이 있는 87·88학번이 군 복무 뒤 복학했을 때학교를 같이 다녀 80년대 학번들의 영향력 속에서 80년대의 정서를 지니고있습니다.그러나 93학번부터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합니다.이는 고교생 때부터 약자를 배려하는 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정의감은 정권을 가진 사람에게 억압당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고민입니다.그런데 이른바 ‘왕따’문화가 약자에 대한 배려를 없앴습니다.또 자기 자식만 생각하는 부모세대들의그릇된 생각과 모 재벌의 광고처럼 1등만 강조하는 분위기가 약자에 대한 배려를 약화시켰습니다.지금의 대학사회는 4·19와 70·80년대의 정신을 구현하려는 노력이 부족합니다. 손수진 4·19가 ‘미완의 혁명’이라는 의견에 동의합니다.혁명은 진보세력이 혁명을 통해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비로소 혁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4·19는 완성된 혁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지식인은 자기 만족에 빠져 자기들만의 우리에 갇혀 있었으며,민주화와 자립경제를 시급하게 수립해야 한다는 문제를 인식했으면 민중과 함께 제목소리를 낼 수 있는 세력을 형성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한영우 4·19를 완전 성공으로도,완전 실패로도 보지 않습니다.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4·19는 미성숙 상태에서 일어났으며 지금도 풀어가는 과정입니다.4·19에 0점을 주는 것은 너무지나칩니다.역사는 단번에 100점으로 갈 수 없습니다.현재는 100점으로 가고 있는데 60∼70점에 도달한 상태입니다.지나치게 허무주의적으로 보면 도그마(dogma)에 빠지게 됩니다.도그마에 빠지면 현실에 입각한 생존논리를 주체적으로 만들지 못하고 외래논리를 도식적으로 적용하는 일이 반복됩니다. 이준복 해방 뒤 우리는 친일파와 변절자에 대한 청산 과정을 거치지 못했습니다.좌·우 이념대립이 반공주의로 나타나면서 청산의 문제가 흐지부지됐습니다.4·19 뒤 부정부패와 비리 청산이 다시 문제로 떠올랐지만 장면(張勉) 정부에서 청산이 되지 않았으며,군사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청산의 문제는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손수진 저는 4·19가 부패로 점철된 이승만정권을 물러나게 하고 사회운동이 조직화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합니다.한 교수께서는 4·19등 우리나라의 중요한 사건에서 지식인의 노력이 컸는데 지금의 지식인과 학생 역할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한영우 4·19를 바탕으로 1년 앞으로 닥친 21세기의 우리 모습을 그려 나가야 합니다.앞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방적 민족주의입니다.우리 정서에 맞는 민주주의를 해야 합니다.신자유주의 경쟁원리도 적당한 수준에서 받아들여야 하지만 민족주의를 도외시해서는 안됩니다. 이준복 언론은 학생운동의 이념성을 걱정합니다.그러나 그 이념성은 4·19를 촉발한 정의감과 다르지 않습니다.다만 이념이 더 선명해졌을 뿐입니다. 저는 학생운동의 이념이 불순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손수진 학생운동은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폐쇄적인 면을 띠고 있습니다.운동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학생운동이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설득력을 잃어가는 이념을 고집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한영우 21세기가 문화의 세기라는 말에 동의합니다.21세기에는 사회과학적 이념보다 전통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이 중요합니다.자애(自愛)의식을 기른 뒤 세계와 협력해야 합니다.그리고 전통문화를 정치·경제·사회 등모든 분야를이끄는 견인차로 승화시켜야 합니다.20세기 우리 전통문화를 무너뜨렸던 서양문명과 전통문화를 용해시켜 새 문명을 탄생시켜야 합니다. 이준복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사상적 스펙트럼이 보다 다양화돼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나는 사회주의자”라고 공공연히 언급할 수 있는 분위기가조성돼 있지 못합니다.하지만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을 포괄하지 못하면 4·19는 영원히 진행형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손수진 자라나는 세대들이 통일 후 ‘우리 민족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생각하면 회의가 듭니다.교육을 통해 인도주의와 민족 동질성을 가르치고,통일이 앞으로 실현해야 할 미완의 과제라는 의식을 갖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리 조현석 김미경기자 hyun68@
  • 일본차의 국내진출

    - 수입선다변화 해제 업계에 미치는 영향 '당장은 쾌청,장기적으로는 구름 오락가락’ 7월 수입선다변화 해제에 따른 일본차의 국내진출이 우리 업계에 미칠 영향에 대한 전문가들의 기상도다.일본차가 들어오더라도 당장은 큰 영향이 없겠지만 2∼3년 뒤에는 적잖은 타격도 예상된다는 뜻이다. 현재 일본 자동차업계는 도요타가 한국 직판체제를 준비하는 정도를 빼고는 적극적인 ‘한반도 상륙’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투자액만큼 이익을뽑을 수 있을지 의문스러운 상황이기 때문이다.한때 연간 150만대에 이르던우리나라 내수가 지난해 80만대에 이어 올해도 90만대 수준에 불과할 것으로 보이는데다 뿌리깊은 반일(反日)정서도 꺼림칙하다. 또한 고급차의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수요층이 적은 대형차 시장에 먼저 뛰어들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소형·중형차는 가격경쟁력에서 국내업체에 많이 뒤떨어진다.급속한 시장잠식이 어려울 것으로 보이는 이유들이다. 하지만 우리경제가 안정기조에 접어들어 소비가 활성화되면 무서운 기세로파고들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특히 일본업체들이 파격적인 저가(低價)정책을 펴거나 연합전선을 구축할 경우,상황은 예측하기 힘들어진다.한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부품공급이 용이하고 미국·유럽업체들보다 탄력있는 시장정책을 펼수 있다는 점도 이같은 우려를 뒷받침한다.때문에 현재 국내시장의 1%도 채 장악하지 못한 미국·유럽업체와 달리 최고 10%까지 시장을 확보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최종렬(崔鍾烈)대우자동차판매 마케팅팀장은 “2년 이상 쓰는 내구재인 자동차의 특성상 애프터서비스나 고객관리면에서 우리업체와 대등한 상황이 된다면 이 부분에 철저하게 단련돼 있는 일본업체들이 좀더 유리해질 수도 있다”면서 “특히 일본이 초기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80년대 중반 미국시장에들어갈때 했던 것처럼 덤핑식 출혈판매에 나설 경우,시장잠식이 더 빨라질수도 있다”고 말했다.그러나 그는 “연간 시장규모가 1,000만대가 넘는 미국과 달리 국내시장은 규모가 작아 섣불리 저가공세를 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자동차공업협회김성익(金成翼)통상협력팀장은 “현재 자동차 시장이살아나고 있다고는 하지만 호황이 아니기 때문에 한꺼번에 유입되지는 않을것”이라면서 “적어도 2∼3년 가량은 국내업체들이 큰 위협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 우리 자동차업계 대응전략 오히려 우리가 간다. 수입선다변화에 막혀 그동안 시기만을 노려오던 일본 자동차가 7월 이 제도의 완전 해제로 전자제품과 함께 한국에 상륙한다.이에맞서 현대·기아 자동차와 대우자동차등 국내 업체들은 일본진출을 적극 검토하는 등 공격적인 전략으로 맞설 태세다.자신이 있다는 증거다. 한 가족이 된 현대와 기아는 최고의 수비는 공격이라는 전략을 세웠다.이미 시장조사는 끝낸 상태로 조용히 출진준비를 하고 있다.내년말을 D-데이로잡았다.비슷한 성능일 경우 동급의 일본차보다 15%이상 싸다면 해볼만한 게임이라는게 현대의 분석이다. 일본내 외국차 시장 점유율은 8%정도.현대 이유일(李裕一)사장은 “일본은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시장”이라면서 값싸고 질좋은 차라는 인식만 심어주면 승산이 있다고 말했다. 공략은 소형차로 할 생각이다.5월 출시예정인 엑센트 후속모델을 선봉에 세울 계획이다.대신 일본이 집중공략할 국내 대형차시장 방어의 최일선에는 빠르면 이달말 내놓는 4,500㏄급 초대형 승용차 에쿠스를 내세운다.중대형은방어,소형은 공격이다. 기아는 일본업체들이 1단계로 레저용 차(RV)를 갖고 공략해 올 것이지만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카니발과 곧 나올 카렌스 카스타로 맞선다면 일본 RV들이 발 붙이기 힘들 것으로 본다.일본진출도 노린다. 대우도 마찬가지다.성능면에서 벤츠E시리즈보다 낫다는 평가까지 받은 체어맨이 있는 한 대형차 시장 잠식 걱정은 하지 않는다.일본차 진출로 대형차시장이 커진다면 오히려 득이 될 것으로 본다.여건만 된다면 소형차 중심으로 일본진출도 고려해 보겠다는 심산이다. - 韓·日자동차 7월 '정면충돌' 7월이면 국내에서 국산차와 일본차가 맞붙는다.격돌 가능성이 높은 중·대형급을 중심으로 국내차들과 일본차들의 대결현장을 미리 가본다. [체어맨-렉서스] 일본 대형차중에서는 세계적인 명성의 도요타 렉서스가 최대 강적.대우의체어맨은 벤츠 E시리즈를 벤치마킹했지만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평가마저 듣고 있어 멋진 승부가 예상된다. 스포츠카처럼 날렵한 이미지를 갖고있고 국내 동급차중 최대의 전장 전폭전고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충돌시 충격이 탑승자의 상하 좌우로 분산 흡수되도록 하는 피라미드 구조의 프레임을 벤츠에 이어 세계 두번째로 채택,안전성은 물론이고 완벽한 주행성을 갖췄다. 렉서스는 도요타가 세계고급 시장 석권을 위해 만든 야심작.지난 94년 첫선을 보인 4,000㏄급 LS400은 벤츠를 제치고 미국 소비자 만족도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EF쏘나타-캄리] 국내 중형차의 대표주자인 EF쏘나타는 이미 미국 언론으로 부터 잇따라 찬사를 받으며 한국차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을 바꿔놓은 차.최근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즈에서 특집으로 다뤄진데 이어 미국 최대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USA투데이’와 유력 자동차 전문지들로부터도 극찬을 받았다. ‘카 앤드 드라이버’는 “현대가 드디어 일본 도요타의 캠리나 어코드와대적할 수 있을 만한 차를 내 놓았다”고 썼다.그렇다고 일본 중형차의 자존심인 캠리가 쏘나타보다 성능면에서 못하다고 단정짓는 것은 실례다.캠리는미국에서도 한등급이 위인 차로 보는 이들이 많다.소비자만족도에서도 항상1∼2위를 차지해왔다.따라서 국내에서 쏘나타와 경쟁은 불발 가능성이 높다. 체어맨,다이너스티 등과 경쟁할 것 같다. [카니발-일본밴] 기아 카니발은 국내 레저용 차량(RV)의 자존심.매달 4,000대 이상이 팔리는 등 소형차보다 많이 나간다.9인승과 7인승 두종류.IMF(국제통화기금)한파에 경기 침체와 RV에 대한 소비자들의 관심 고조 등 시판시기가 적절했던 점도 있지만 자체 경쟁력으로 베스트셀러카 반열에 올랐다. 국내상륙을 예상할 수있는 일본 미니밴들은 모두 7종.이가운데 일본의 베스트셀러카인 혼다 스텝왜건·오딧세이,미쓰비시 샤리오등이 더 높은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스타일이나 성능면에서 카니발을 앞선다.그러나 가격면에서는비교조차 안돼 승부는 뻔하다.일본내 시판가격만도 카니발의 10배 수준.대개1,900만∼2,400만엔이다.카니발은 1,190만∼2,048만원. 김병헌기자
  • 3·1운동-臨政 수립 80돌/역사적 정신 재조명

    - '3·1의거'는 독립운동의 사상적 모태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세력들은 항일운동의 역사적 당위성과 활동의 논거로 ‘3·1의거’를 주목하였다는 분석이 나왔다.또 3·1의거는 근대적 의미의 민족해방운동이자 중국 등과의 국제연대에서도 고리역할을 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이는 3·1의거가 일회성 ‘거사’로 그치지 않고 일제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대표되는 독립진영의 정신적 구심체로 작용하였음을 입증한 것으로 평가된다. 지난 2월19일 독립기념관부설 독립운동사연구소가 개최한 제144회 월례발표회에서 韓相燾씨(경기대 강사)는 ‘독립운동세력의 3·1운동 인식과 계승인식’이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독립운동 세력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3·1의거의 역사적 소산으로 인식하고 임정이 3·1의거의 계승체임을 자부하였다”고 주장했다. 韓씨는 임정이 1942년 제23주년 3·1절을 맞아 “본 정부의 정권은 3·1혁명에서 세워졌다”고 언급한 사실,또 한국광복군이 3·1의거를 “한국민족 5천년 고유문화와 역사를 배경으로 하여 분투한 독립·자존정신”이라고 평가한 사실을 들어 이후의 6·10만세의거·광주학생의거·원산(元山)대파업 등 항일투쟁의 모태를 ‘3·1의거’에서 찾고 있다.1930년 화요파(火曜派)조선공산당 및 조선공산청년동맹도 ‘3·1운동 11주년을 기념하여 전조선 노력대중에게 격(檄)함’이란 문건을 통해 3월1일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 주요한계기로 설정하고 있는데 이는 좌파 민족진영에서도 ‘3·1의거’를 활동의중심추로 삼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결국 독립운동세력들은 3·1의거를 민족해방과 조국광복을 향한 진군의 ‘이정표’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韓씨는“임시정부가 상해 조계(租界)의 골목길이나 피난길에서도 3·1절 기념식을소홀히 하지 않은 것은 이를 통해 독립운동세력의 정통성을 확인하고 세력간 대단결을 도모하기 위한 용광로로 활용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한편 ‘3·1의거’는 근대 민족운동의 결정체이자 동시에 반제(反帝)민족해방운동의 주요한 모멘트로 작용하였다.임시정부의 金九주석은 3·1의거가 “단순한 반일운동에 그치지 않고민족정기와 민주의식이 3·1의거 과정에서거듭 발양됨으로써 민족부흥과 국가재생의 기초를 마련하였다”고 평가하였다.또 金枓奉은 “3·1운동을 분기점으로 조선혁명의 대상은 부패한 통치자에서 피압박민족의 독립쟁취로 전환하였다”고 평가하였다.결국 이들은 3·1의거가 형식상으로는 반제·반봉건 투쟁이었으나 내부적으로는 자유주의·민주주의 정치를 요구한 ‘시대적 소산’이었다고 파악하고 있다. 또 3·1의거는 각 독립세력간의 일체감 조성은 물론 한·중간 공동 항일전선구축의 주요한 매개로도 작용하였다.이는 3·1의거와 중국의 ‘5·4운동’이 동일한 연장선상에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것으로,형식상으로는 청년운동이자 군중·민중해방운동,내용상으로는 신문화·민주운동이었다는 점에서서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임정의 趙素昻외무부장은 “3·1의거는 세계제1차대전의 폐막을 알리는 소리였으며 동시에 제2차대전의 개막사였다.한국은일본의 침략전쟁에 수혈관이자 일본 심장속에서 폭발하지 않은 폭탄이었다”며 국제적 연대의 중심축으로서의 3·1의거의 의미를 들었다. /정운현
  • 정직한 역사되찾기-친일의 군상(20회)

    ■친일 고문경찰 盧德述 지난 8월 정부기록보존소가 건국 50주년을 맞아 공개한 ‘이승만관계 문서 철’(1949년 1월분) 가운데는 이런 내용의 기록이 있다. ‘반민특위(反民特委)의 무분별한 난동은 치안과 민심에 중대한 영향을 주 는 터이므로 헌법 범위 내에서 단호한 대책을 강구하신다는 유시(諭示)에 대 하여 법무장관은 노덕술을 반민특위 조사관 2명이 반민특위 사무실내 금고에 2일간 수감하였다는 보고가 유(有)하고 대통령 각하는 차(此) 불법 조사관 2명과 그 지휘자를 체포하여 의법처리하며 계속 감시하라 지령하시다’(‘시 정 일반에 관한 유시의 건’중에서) 위 내용은 이승만 대통령이 49년 2월 12일 국무회의에서 일제때 고등계 형 사 출신이자 수도청(서울시경 전신) 수사과장을 지낸 노덕술을 체포한 반민 특위 조사관들을 체포,감시하라고 지시한 내용이다.그동안 이 대통령이 반민 특위의 활동을 못마땅해 했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 대통령이 친일경찰 출신인 노덕술을 체포한 반민특위 조사관과 그 지휘관을 체포하라고 직접지시한 사실은 처음 밝혀진 내용이다.즉 이 대 통령이 친일파를 비호했다는 주장이 문서로 공식 확인된 셈이다.전 국민이 친일파 처단을 부르짖던 그 시절,대통령까지 나서 비호한 노덕술은 대체 어 떤 인물인가? ▲제1사단 헌병대장 시절의 노덕술(당시 계급은 소령임) 盧德述(1899∼?·창씨명 松浦鴻)은 일제때 대표적인 친일경찰 가운데 한 사 람이다.해방무렵 그는 조선인으로서는 불과 수 명에 불과한 경시(警視·현 총경계급에 해당)까지 승진한 극소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특히 그는 일제하 27년간 사상관계 사건,즉 독립운동 관련 사건만 취급한 고등경찰 출 신으로 일제로부터 훈7등 종6위의 훈장까지 받았다.그의 친일성을 보여주는 몇 가지 사례들이다. 1949년 1월 9일 화신백화점 사장 朴興植에 대한 검거를 시작으로 반민족행 위자 검거에 돌입한 반민특위는 보름만인 1월 25일 새벽 2시경 마침내 노덕 술을 검거하였다.그를 체포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반민특위는 1월초 부터 ‘노덕술 체포대’를 편성,그의 행방을 수소문했으나 좀처럼그의 은신 처를 찾을 수가 없었다.이유는 간단했다.경찰이 그의 신변을 보호해주면서 비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중 특위는 노덕술이 그의 애첩 金花玉의 집(관훈동 29번지)을 들락거 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곳을 급습,그의 은신처를 알아냈다.체포대는 곧바 로 그가 은신해 있던 李斗喆(당시 동화백화점 사장)의 집(효창동 소재)을 덮 쳐 그를 체포하였다.체포 당시 노덕술은 권총 여섯 자루와 도피자금 34만 1 천원이 든 가방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체포후 서울형무소에 수감중이던 그는 3월 30일 특별검찰부 徐成達 검찰관에 의해 정식 기소돼 재판에 회부됐다. 이로써 친일경찰에 대한 단죄가 시작된 것이다. 노덕술은 경남 울산출생으로 울산보통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일본인이 경영 하던 잡화상의 고용인 노릇을 하기도 했다.1920년 경남 순사교습소를 졸업한 후 경남 경찰부 보안과 근무를 시작으로 친일경찰의 길에 들어섰다.20년대 에 그는 주로 경남지방의 여러 경찰서에 근무하였는데 당시 그의 직책은 사 법경찰이었다.그러나 그는 고등계 경찰의 소관업무인 사상사건(독립운동 관 련사건)을 자발적으로 취급하면서 일제에 충성을 과시하였다. 1929년 金圭直이 회장으로 있던 비밀결사조직 ‘혁조회(革潮會)’를 탄압, 김규직 외 1명을 사망케 하고 그 관계자들을 2∼3년간 복역케 하였으며 동래 경찰서 사법주임 시절에는 ‘동래고보 맹휴(盟休)사건’에 관련된 학생들의 사찰과 검거에 앞장선 것으로 밝혀졌다.또 1929·30년 여름 조선인 일본유학 생들이 하계휴가를 이용,귀국하여 강연회를 개최하자 이들이 일본정치를 비 난했다는 구실을 들어 강연자 수 명을 검거,취조하였다. 1932년 통영경찰서 사법주임 시절에는 반일단체인 M·L당(黨) 조직원 金載 學이 메이데이 시위행렬에 참가하였다는 이유로 그를 직접 검거하여 혹독한 고문 끝에 송국(送局),벌금형을 받게 하였다.이같은 공로로 그는 1934년 평 남 보안과장으로 승진,출세가도를 달렸다.일제말기인 1944년 평남 경찰부 보 안과장 재직시에는 화물자동차 다수를 직권으로 징발하여 군수품 수송에 제 공케 하는 등 일본의 침략전쟁 수행에 협력한사실도 있다.조선인이라는 신 분과 빈약한 학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고위직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일제 에 대한 그의 남다른 충성심 때문이었다. 한편 반민특위가 그를 체포할 당시 그의 죄목은 ‘반민법 위반’ 하나만이 아니었다.그는 이미 ‘수도청 고문치사사건’의 피의자였으며 체포후에는 다 시 ‘반민특위요원 암살음모사건’ 피의자 죄목이 추가되었다.소위 ‘수도청 고문치사사건’은 張澤相 저격용의자 林和가 수사도중 사망하자 경찰은 임 화가 조사도중 도망했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경무부 수사국장 趙炳^^이 담당경찰관을 조사한 결과 고 문치사로 밝혀졌고 그 배후에는 노덕술과 崔雲霞 두 사람이 있었다.그러나 당시에는 장택상이 수도청장으로 있으면서 노덕술 일파를 비호하고 있어 수 사를 못하고 있다가 48년 9월 金泰善이 새 수도청장으로 부임하면서 노덕술 에 대한 체포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김태선 역시 “당시 공산당 타도에 공이 많은 선배를 경찰의 손으로 체포할 수 없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어서 그의 신변보호를 위해경찰관 4명을 그의 궁정동 자택에 파견했다”고 밝힌 바 있다.(‘국립경찰 창설’ 51회, 중앙일보·74.12.11) 한편 노덕술이 반민특위에 검거된 직후 극우 테러리스트 白民泰(일명 鄭民 泰로 해방전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했다는 주장도 있음)가 놀랄만한 사실 하 나를 폭로하였다.구속된 노덕술이 주동이 돼 서울시 경찰국 수사과장 崔蘭洙 ·부과장 洪宅喜 등이 자신에게 반민특위의 중견요원인 盧鎰煥·李文源 등 간부 7∼8명에 대한 암살을 부탁했다는 것.노덕술 등은 백민태에게 이들을 시외 모처로 납치해 강제로 ‘우리는 이남에서 살 수 없으니 이북으로 가겠 다’는 내용의 유서를 받은 후 암살해버리면 뒷처리는 경찰이 알아서 하겠다 고 했다는 것이다. 특위요원들에 대한 암살음모가 공개되면서 특위와 친일경찰 진영은 극한대 립으로 치달았다.당시 친일경찰 세력을 정권의 한 축으로 삼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노덕술의 석방을 요청하지만 반민특위는 이를 묵살하였다.49년 6월 6일 발생한 친일경찰들의 반민특위습격사건(소위 ‘6·6사건’)은 이때부터예견된 사건이었다. 노덕술을 비롯해 이 사건 관련자 4명은 검찰에 구속돼 재판에 회부됐다.49 년 5월 29일 열린 제7차 공판에서 “피고인들이 수사의 권위자로 많은 공로 가 있으나 증거가 충분한 만큼 만행을 묵과할 수 없다”고 하여 각각 징역 4 년을 구형받았다.그러나 반민특위 습격사건 후 특위가 무력해진 가운데 열린 선고공판에서 노덕술은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인정받았고 최난수·홍택희 등은 각각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노덕술은 당장 석방되지는 않았다.‘반민법위반’ 사건처리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이 역시 그리 오래 끌지 않았다.반민법 개정으로 공소시효가 8월 31일로 단축돼 반민특위는 껍데기만 남은 형국이었다.반민피 의자로 기소된 자 가운데 극소수만 재판을 받았으며 이들도 대부분 공민권 정지나 집행유예·병보석 등으로 풀려났다.또 실형선고를 받은 자들도 재심 청구를 통해 대부분 석방되었다.김태선의 증언에 의하면,노덕술 역시 병보석 으로 출감돼(일자 미상)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반민특위가 해체되면 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한다. ‘한국헌병사’에 따르면 그는 9·28수복 당시 제1사단 헌병대장(소령)을 지냈다.이후 부산CID(육군범죄수사단)와 서울 15CID 대장을 역임한 그는 金 昌龍 특무대장이 모종의 비리사건 관련자로 그를 구속시키면서 역사의 무대 에서 사라지고 말았다.경찰청 조회결과 그의 생사에 대해서는 아무 기록도 남아있지 않았다.흔적도 없이 사라질 한 생애를 그는 악행(惡行)만 쌓다가 간 것이다.
  • 대한매일 秘史(12회)-통감부 기관지와의 싸움

    서울 프레스의 발행인으로 이토 히로부미는 즈모토(頭本元貞)를 서울로 불 러왔다. 즈모토는 이토의 영어 공보비서였고,1896년에 일본 내각의 기관지로 창간된 재팬 타임스의 초대 사장을 맡았던 사람이다.이토는 대한매일과 영문판 코 리아 데일리 뉴스를 무력화하기 위해서는 즈모토가 가장 적절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던 것이다. 즈모토는 이토가 수상이었을 때에 그의 개인비서로 임명되었다가 1897년에 는 재팬 타임스를 창간하여 그 초대 사장이 되었다.재팬 타임스는 일본인들 이 발행한 최초의 영어 일간지로서 이토의 지원으로 발행되었다.즈모토는 한 국에 오기 전 러일전쟁 기간 중에는 영국 스탠더드(Standard)지 특별 통신원 을 맡았었다.그의 영어실력은 영국사람들도 ‘뛰어나다’고 칭찬할 정도였으 며,주일 영국대사관과도 관계가 매우 좋았다. 즈모토는 한국에 온 뒤에 처음에는 주로 통감부의 해외홍보 업무를 맡았다. 1906년 7월 26일에는 그의 주최로 신문 기자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었고, 그 직후에 발행된 코리아 리뷰 7월호에 주한 일본헌병대가 고종 측근 5명을 체포하여 심한 고문을 가했다는 기사가 실리자 이에 항의하는 공개 편지를 헐버트에게 보낸 적도 있다. 이토는 일찍부터 서구 열강의 여론에 신경을 썼고,해외홍보의 중요성을 깊 이 인식한 사람이었다.재팬 타임스의 창간도 이토의 그와 같은 생각을 반영 한 것이었다.특히 일본의 한국 침략정책은 열강국들과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 었으므로 대외홍보에 큰 비중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즈모토가 서울 프레스를 일간으로 발행하기 시작한 것은 1906년 12월 5일자 부터였다.즈모토는 서울 프레스를 통해 대한매일과 헐버트의 코리아 리뷰를 사사건건 비난하고 일본의 침략을 선전하였다. 즈모토는 한국에서 외국인들이 발행하는 출판물들을 향하여 독(毒)기를 품 고 모략중상만 일삼는 구역질 나는 것들이라고 비난하고,선정적이고 사기협 잡꾼이라는 등으로 인신공격을 가하였다.서울 프레스는 또 헐버트를 향해 국 가 정책과 이익에 배치되는 반대운동에 자신을 팔아넘김으로써 자신들이 태 어난 나라까지 망각할 수도 있는 가련한 인간들이라는 등의 갖은 욕설을 퍼 부어 대었다.헐버트는 즈모토의 이러한 공격을 조목을 들어 맹렬히 반박했다 .헐버트는 1906년 12월호 코리아 리뷰에서도 서울 프레스 12월 26일자 논설 「안정을 위한 호소」(Plea for Peace) 등을 신랄히 비판하고 있다. 당시에 발행된 대한매일과 코리아 리뷰를 보면 서울 프레스가 어떤 논조로 발행되었는가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이 신문은 일본의 한국침략 정책을 적극적으로 선전하고 홍보하는 한편으로 일본의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독기 서린 공격을 퍼부었던 것이다. 서울 프레스는 지면을 확장하는 동시에 일본의 재팬 타임스와 편집·경영 양면에서 긴밀한 협조관계를 강화했다.서울 프레스는 1907년 3월 8일자 사설 「오도된 애국심」(Misguided Patriotism)은 당시 국내에서 불붙기 시작한 국채보상운동까지도 비난하면서,마지막으로는 ‘펜과 혀를 놀려’ 이 운동을 격려하고 돕는 한국의 ‘친구들’을 공격했다.서울 프레스는 또다시 9일자 사설 ‘한국의 친구들’(Korea‘s Friends)에서 한국에와 있는 반일적인 외 국인들을 헐뜯었다.이들 논설에서 구체적으로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 펜과 혀를 졸리는 한국의 친구들’이란 대한매일(배설)과 코리아 리뷰(헐버 트)임을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서울 프레스와 공동보조를 취한 신문은 도쿄에서 발행되는 재팬 타임스였다. 서울 프레스의 3월 8일자 논설을 받아 재팬 타임스는 ‘한국의 적들’(Korea ’s Enemies)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3월 15일자로 실었다.이 사설은 서울 프 레스를 그대로 인용하면서 “어떤 경우건 反日的인 한국의 십자군들이 한국 의 敵이라는 사실을 세계는 지켜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鄭普錫 외대교수·언론사 ] '대한매일 秘史'를 오늘로 접습니다.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
  • 시일야방성대곡 전재(대한매일 秘史:8)

    ◎‘시일야…’ 영문 번역 호외 발행/을사조약 전말도 폭로… 日 침략 서방에 알려/황성·제국신문 정간 횡포/일제 언론 탄압 날로 기승/장지연 구속·신문과정 보도/대한매일 항일 강도 더해 한국주차 일본군 사령관 하라구치(原口兼濟)가 ‘군사경찰훈령’을 공포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1904년 7월20일에 공포된 이 ‘훈령’은 “집회나 신문이 치안을 방해한다고 인정할 때에는 그 정지를 명하고 관계자를 처벌”함은 물론 “신문은 발행 전에 미리 군사령부의 검열을 받게 하도록”(제2항) 하였다.8월20일에는 황성신문과 뎨국신문의 대표를 불러 검열을 통보하였고,10월9일에는 ‘군정시행에 관한 내훈(內訓)’을 시달하여 집회 신문 잡지 광고 등이 치안을 방해한다고 인정될 때에는 이를 해산·정지 또는 금지시킬 수 있도록 했다.바로 이튿날인 10월10일 헌병사령부는 뎨국신문에 무기정간 명령을 내렸다.이는 한국언론사상 처음 내려진 강제 정간이었고,일본군이 한국 신문에 정간을 명령한 첫 탄압이기도 하였다. 이듬해 1월8일에는 한국주둔 사령관하세가와(長谷川好道)가 ‘고시군령(告示軍令)’19개항을 공포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집회 결사 신문 잡지 광고 등 언론에 관한 규제를 강력하게 실시하도록 돼있었다.또한 군령을 위반하는 경우에는 사형 구금 추방 과료(過料) 또는 태형에 처하도록 하는 엄격한 벌칙이 마련되어 있었다. 장지연은 이와같이 엄중한 일본의 군령을 어기고 시일야방성대곡을 게재한 황성신문을 검열받지 않은 채 아침 일찍 배포한 다음에 일본 순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아침 5시가 되자 일본 순시(巡視)와 순사가 신문사로 와서 장지연을 체포하고 신문은 정간시켰다.따라서 이제 그에 대한 후속기사는 대한매일신보가 알리게 되었다. 대한매일은 11월21일자 1면 머리에 ‘황성의무’라는 제목의 논설을 싣고 장지연의 용기를 극찬하였다.“실로 대한 전국 사회신민의 대표가 되어 광명정직한 의리를 세계에 발현(發顯)하리로다.오호라 황성기자의 붓은 가히 해와 달과 더불어 그 빛을 서로 다투리로다.”고 찬양했다.같은 날짜에 ‘사장피착(社長被捉)’이라는 기사를 실어 장지연의 구속과 황성신문의 정간 사실을 보도하였다. 22일자에 실린 논설 ‘위재한일관계(危哉韓日關係)’는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한국의 국권을 탈취하고 가옥과 토지를 강탈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인명을 참살하고 재정을 고갈케 하며 학무를 감축하여 교육이 날로 쇠퇴하도록 만든다고 비판하였다.을사조약의 체결도 황제를 비롯,정부관리들과 국민이 모두 반대하자 일본은 병사를 궁궐에 끌고 들어와서 이의 체결을 강요하였다고 논평했다.한국은 비록 작은 나라지만 인구가 2천만인데 2천만이 모두 이에 복종하지 않으면 군대를 가지고 국민을 모두 도륙할 것인가.이날부터 대한매일은 정간 당한 황성신문에 실렸던 「오건조약 청체전말」을 3회에 걸쳐 다시 전재했다. 23일자에는 장지연이 경무청에 구속된 후 일인 경무고문의 심문에 의연히 맞서서 항변한 내용을 게재하였다.일인 경무고문이 “무슨 이유로 검열을 받지 않고 멋대로 신문을 배포하여 치안을 방해하였는가.”라고 심문하니 장지연은 “이른바 치안방해는 내가 알 바 아니다.대저 나라가 있은후에야 치안 여부가 있는 것인데 지금 나라가 없으니 치안을 논할 수 있겠는가.내가 붓을 잡은지 7∼8년에 세상의 공론을 주장하다가 오늘 국가가 없어지게 된 사실을 국민들에게 알린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이에 경무고문이 할 말을 잃었다고 보도했다.(1905.11.23,‘사장항변’) 대한매일은 25일자 논설 ‘황성긍린(皇城矜隣)’에서도 정간 당한 황성신문을 속간시키라고 촉구하였고,26일자에는 장지연은 무죄인데도 법률을 어겨가며 구류 중이라고 경무청을 비난했다.법률에 따르면 장지연을 24시간 이내에 평리원이나 한성재판소로 이송하도록 되어있는 데도 이와같이 여러날 동안 가두어 두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1905.11.26,‘시하율법(是何法律)’,또 1906.1.12,‘탄(歎 ),황성구폐(皇城久閉)’에서도 황성신문의 복간을 촉구했다.) 대한매일의 반일 논조는 날이 갈수록 더욱 날카롭고 강도를 더해갔다.11월27일자에 순한문과 영문으로 된 호외를 발행하여 을사보호조약의 부당함을 폭로하였다.이 호외는 한쪽 면에는 한문으로 ‘한일신조약청체전말(韓日新條約請締顚末)’을,다른 한 면은 영문으로 ‘시일야방성대곡’을 번역하고 이등박문의 강요로 을사조약이 체결된 전말도 실었다. 이렇게되자 일본에서 영국인이 발행하던 재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은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가 영문으로 번역한 시일야방성대곡 전문을 게재,일본의 한국침략 사실을 일본에 거주하는 서양사람들과 서방 여러나라에 알렸다.
  • 사장 배설의 재판(대한매일 秘史:5)

    ◎변호사·검사 ‘무죄’·‘처벌’ 뜨거운 설전/증인들 “반일감정·의병봉기 일본침략때문” 증언 1908년 6월16일 열린 이틀째 공판에는 배설과 양기탁이 출두하였다.오전에는 배설에 대한 검사와 변호인 신문이 있었고,오후에는 양기탁이 나왔다.그밖에 피고 측에서 신청한 한국인 증인들을 불렀으나 그들은 재판정에 나타나기를 두려워했고 겨우 출두한 증인도 자유로이 증언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영국인 재판장이나 검사,변호사도 증인들의 이같은 사정은 모두 알고 있었다.재판장은 증인들이 후환을 두려워할 것 같은 질문은 삼가라고 검사에게 주의까지 할 정도였다.그런데도 증인들은 한결같이 반일감정과 의병봉기는 대한매일신보의 선동 때문이 아니라 일본의 한국 침략과 탄압에 근본 원인이 있다고 증언하면서 일본경찰의 고문 사실까지 폭로하였다.재판정에는 엄숙한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도 기지(機智)에 넘치는 질문과 답변이 나올 때면 청중들은 때로는 조소를,때로는 공감의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였다. ○의병장 출두 소문에 방청객 몰려 3일째 재판은 6월17일 오전 10시부터 시작되었다.증인으로는 의병장 민종식(閔宗植)과 궁내부 전무과 기사 김철영이 출석했다.의병장 출두 소문이 퍼졌기 때문인지 재판정 바깥에는 전날 보다 더 많은 한국인 방청객이 몰려들었다.어제처럼 극소수만이 법정 안에 들어왔고,대다수는 법정 문밖에 몰려 서서 재판을 지켜보았다. 귀족 출신으로 신수가 좋은 민종식은 갓쓰고 도포 입은 한복 차림으로 증언대에 섰다.그는 을사조약에 반대,1906년 3월17일 340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충남 정산(定山)에서 홍주로 진격했으나 일본 헌병대의 기습으로 일단 피신했다.5월14일 다시 봉기,19일에는 의병 250명을 지휘하여 마침내 홍주성을 점령했다.그러나 그의 휘하 의병이 500여명으로 늘어나자 일본군이 출동,30일 치열한 격전 끝에 일본군에 함락되었다.의병 82명이 전사하고 145명이 포로가 되는 큰 전투였다.민종식은 그해 11월 체포되어 사형언도를 받았으나 감형되어 전남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2월 특사로 석방되었다. 변호사는 민종식에게 왜 항일 의병의 주동인물이 되었는지를 물었다.의병활동과 대한매일과는 관련이 없음을 밝히기 위해서였다.민종식은 을사조약 체결 이후 황실의 위엄과 정부의 권리가 박탈당하고 있으므로 일인을 축출하고 빼앗긴 본국의 독립권을 회복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일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의병을 일으켰다고 대답했다.의병을 일으킨 것은 일본을 반대한 것이지 대한제국에 반대한 것은 아니라 함을 명확히 밝힌 것이다. 이어서 김철영(金澈榮)이 증인으로 나왔다.그는 1887년 조선전보총국의 위원으로 임명된 후 공무아문 주사,통신원 체신과장 등을 역임하면서 구한국 체신업무를 개척한 사람의 하나였다.그는 궁중과 의병들의 연락을 취해주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고문당하고 진도로 유배되었다고 증언했다. 또 하나의 증인으로 채택된 심우택(沈雨澤)은 피신해 끝내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그도 전무과 기사였는데 고종이 배설에게 하사한 신문사 운영경비를 전달하였다는 혐의로 김철영과 함께 체포되어 고문당했다.그는 배설에게 고종의 양위사실 등 궁중 동정을 알려준 혐의로 체포,진도로 귀양 경험이 있었다.심우택의 심문조서를 보면 고종은 손탁호텔을 경영하던 손탁의 권유로 매월 1천원 정도씩 대한매일에 운영자금을 대주었으나 주변의 감시가 심해서 전달이 어려웠다고 진술했었다. 그밖에도 김택훈(金澤薰:학생),김두해(金斗海:한문교사),김창한(金彰翰:전직 순검) 등 세사람이 차례로 나와서 자신들은 대한매일을 구독하고 있지만 폭동을 선동하는 내용은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이로써 증언은 모두 종결되었다. ○증인들 한결같이 ‘대한매일 무죄’ 주장 변호인 크로스는 의병봉기 책임은 일본에 있다고 주장했다.일본이 한국인을 학대하고 침략했기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고 있는 것이며 대한매일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따라서 배설에게는 무죄를 선고해야 한다고 변론했다.그러나 검사는 배설에게 무죄를 선언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한국은 현재 치안이 불안한 상황에 처해 있는데 이는 대한매일의 선동 때문이므로 비록 “가혹한 것은 사실이지만” 배설은 처벌을 면할 수는 없다고 논고했다.이로써 3일간에 걸친 재판 절차는 모두 끝이 났다.
  • 대한매일에 거는 기대/姜萬吉 고려대 교수(특별기고)

    ◎“민주발전­평화통일 이끌라” 서울신문사가 대한매일신보사로 바뀌고 서울신문이 대한매일로 바뀌는 것은 100년 전 그 본래의 위상을 되찾으려는 속뜻이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세상이 다 알다시피 서울신문의 연원을 찾아가면 20세기 초엽 대한제국 시대의 반일 민족지 대한매일신보사까지 올라간다.따라서 21세기를 눈앞에 둔 지금에 와서 서울신문이 대한매일로 되는 것은 단순히 제 옛 이름을 되찾는 일만이 아니다. 그것은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지는 일이라 말할 수 있다.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를 강점하게 되면서 대한매일신보가 조선총독부에 강제 인수되어 그 기관지 매일신보가 되는 치욕의 역사를 겪었다. 해방후에는 서울신문으로 되면서 한 때 좌경·진보적 경향으로 나아갔다가 이승만 반공독재정권의 기관지로 됨으로써 4·19때 수난을 당했고,5·16 후에는 다시 군사독재정권의 기관지가 되었다. 30년간의 군사정권이 끝나고 金泳三 문민정부가 들어섰지만,서울신문은 그대로 정부기관지의 위치를 유지했다.그러나 이제 金大中 국민정부 아래서 그 이름을 대한매일로 바꾸게 된 것이다. 서울신문이 대한매일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는 사실은 치욕적인 35년간의 매일신보 시대와 부끄러운 서울신문시대 50여년간의 역사를 청산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일이라고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그리고 그런 생각이 나올 수 있고 또 그것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이 땅의 민주주의가 이제 그만큼 전진하고 있음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서울신문이 대한매일로 바뀐다고 해서 매일신보 시대와 서울신문 시대를 넘어서 군주주권의 대한매일신보 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은 물론 아니며 또 그럴 수도 없다. 그러나 대한매일신보가 일본의 통감통치에 대항하면서 한반도 주민들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그 정신이,90년이 지나고 한반도가 분단된 지금 제2,제3의 신채호 박은식 등에 의해 전체 한반도 주민의 역사적 주체성을 확립하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며 평화통일에 이바지하려는 정신으로 되살아나는 일이 중요하다.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평화통일 정책이 적극화하는 시대에는 어느 신문도 정부의 기관지 노릇을 할 이유가 없으며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할 이유가 없다.바로 그 점이 서울신문으로 하여금 대한매일로 거듭나게 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서울신문이 대한매일로 부활하는 사실은 후세의 사가들에게 金大中 국민정부 언론정책의 상징적 업적으로 기록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대한매일의 거듭남을 축하하면서 다시는 치욕스러웠던 일제시대의 매일신보나 부끄러웠던 독재정권시대의 서울신문이 되는 일 없이,대한매일신보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영원히 계승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과제(다시 태어난 ‘대한매일’:19·끝)

    ◎민족정론지 체계적 해석 필요/언론·정신사적 측면서 새 연구 첫발 디딜때/창간∼15호 찾기 급선무/北韓도 ‘대한매일’ 평가 남북 공동연구 가능할듯 대한매일신보는 대한제국 말기 국운이 풍전등화이던 1904년 7월18일 창간,두차례의 휴간에 이어 1910년 8월29일 한일합방과 함께 강제 폐간됐다. 모두 6년1개월10일을 존속,전체 지령 1,651호를 발간해오면서 매 지면 구성을 항일구국의 정신으로 일관했다. ‘저항’‘구국(救國)’‘우국(憂國)’‘개화’의 4대정신으로 요약되는 보도내용은 물론 대한매일은 근대적 신문의 모든 요소를 완벽히 갖춘 상업지의 성격을 분명히 해왔다. 논설 뉴스 외신 소설 등의 지면 형태를 비롯,월정 구독료 징수,광고비 안내및 광고게재,전국적인 지사운영 등. 이같은 측면에서 볼때 대한매일은 대한제국 말기의 귀중한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 연구의 1,2차적 사료가 됨은 물론 한일합방 과정 연구에 있어서도 필수적인 사료가 된다. 그동안 대한매일에 실린 600여편의 가사(歌辭)와 16편의 연재소설은 우리 국문학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그밖에 신문학적 연구에 있어서도 근대신문의 형태를 거의 완벽하게 갖추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특히 대한매일 발행인 배설의 재판을 둘러싼 영국과 일본,그리고 대한제국의 국제법적 논쟁에 대한 상세한 보도는 20세기초 근대외교사 연구의 자료로서의 가치도 높여주고 있다. 그러나 대한매일의 이같은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연구는 매우 미미하다. 단행본 3권과 학위논문 20여편이 고작이다. 단행본은 ‘대한매일신보연구’(이광린 유재천 김학동 공저 1986)‘제국주의와 언론­배설·대한매일 신보 및 한·영·일 관계’(구대열 1986)‘대한매일신보와 배설’(정진석 1987)이 있다. 학위논문도 대부분이 석사학위 논문으로 국문학적 측면에서의 연구이고,의병·자주의식·산업진흥·광고 등에 관한 것들도 있다. 이제 대한매일의 재탄생을 계기로 민족정론지로서의 대한매일에 대한 체계적이고 새로운 연구가 요청되고 있다. 이는 단지 언론학적인 측면에서가 아니라 민족정신사적 측면에서도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이같은 대한매일에 대한 새로운 연구작업에 북한과의 공동작업이 기대된다는 사실이다. 물론 남북한 간의 언론에 대한 관점과 역사해석이 다르기 때문에 남북한의 언론 100년사는 상호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그러나 대한매일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는 대부분 남북한이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북한측의 해석은 북한 김일성종합대학 부교수 리용필이 1985년 펴낸 ‘조선신문 100년사’(정진석 해제,나남 1993)에 잘 정리돼 있다. 이 책 제1편 ‘우리나라 근대및 일제통치하의 부르죠아’의 제2장 ‘애국문화운동의 전개와 근대 부르죠아신문의 발전’편 40여 페이지에 걸쳐 상세하게 기술돼 있다. 독립신문이 창간된 1896년부터 1910년 한일합방까지의 시기를 포함하고 있는 이 장에서 대한매일을 ‘애국적 정론가들의 주동적인 참가 밑에 창간’,‘일제침략자들과 그 앞잡이 매국도배들을 반대배격하는 데서 비교적 예리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인민의 반일애국투쟁이 더욱앙양되고 있었던 력사적 시기를 배경으로하여 발간됐기 때문’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대한매일의 출현으로 하여 이 시기 우리나라 신문발전 력사는 정론적 수준의 가일층 제고로서 특징지어지게 됐다”고 평가하며 많은 논설과 가사 등을 소개하고 있다. 결국 대한매일에 대한 남북한의 이같은 일치된 해석은 언론학 또는 항일투쟁사의 해석에 있어 남북한 간의 공통분모를 형성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대한매일의 공동연구는 남북한 간 언론학 뿐 아니라 일반 학문교류에 있어서의 단초 역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매일에 대한 남북한 공동과제는 아직 찾지못한 1904년 7월18일 첫 창간호부터 15호까지의 신문을 찾는 일이다. (현재 영인본은 16호부터 돼있으며 1905년 8월11일 재창간호를 대외적인 창간호로 하고 있음) 북한이 그 신문들을 보관하고 있다면 우리와 영인본을 교환할 수도 있으며 또 대한매일신보사의 당시 50여개 지사 가운데 북한에도 상당수가 있었기 때문에 북한땅 어디엔가 대한매일의 귀중한 자료들이 흩어져 있을지도모른다. ‘다시 태어난 대한매일’연재를 마치며 이같은 민족 공통분모찾기에 북한측의 적극적인 동참을 촉구한다.
  • 막바지 투쟁과 폐간(다시 태어난 ‘대한매일’:18)

    ◎‘1910년 國恥’로 끝내 스러져/재판·옥고 등 일제 탄압 裵說 36살나이로 타계/꿋꿋이 필봉지킨 梁起鐸 소유권 통감부이전되자 통한의 광고 낸뒤 퇴사 1904년 창간이후 일제배척과 국권회복에 앞장선 대한매일도 역사의 격랑에 휩쓸려 6년여만에 결국 스러진다. 대한매일이 강제 폐간되기까지 일제는 사장인 裴說을 두차례 재판받게 하고,지면을 실질적으로 이끈 梁起鐸을 구속·기소했으며,배설의 후임사장에게서 신문을 매수하는 등 온갖 수단을 부렸다. 그럼에도 대한매일은 양기탁이 떠나는 그날까지 결코 붓을 휘거나 붓끝을 돌리지 않았다. 배설은 1907년 10월 서울주재 영국총영사관에서 열린 영사재판정에서 ‘대한매일의 논설이 공안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6개월간의 근신처분을 받았다. 그렇지만 대한매일의 논조는 강경해지기만 했다. 1908년 4월29일 일제가 신문지법을 개정,외국인 발행의 신문이라도 발매금지·압수할 수 있도록 하자 그날 ‘百梅特捏(백매특날)이 不足以壓(부족이압) 一伊太利(일이태리)’논설을 실었다. 민족주의운동을 탄압한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매특날)가 100명 있더라도 이탈리아 하나를 억압하지 못한다는 이 논설은,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었다. 일제의 음모는 거듭됐다. 1908년 6월 배설을 두번째로 법정에 세웠다. 그 근거로 내세운 게 ‘스티븐스 포살사건’을 비롯한 반일 보도였다. 중국 상하이(上海)에 설치한 영국 고등법원의 판검사가 서울에 와 열린 재판에서 배설은 ‘3주간의 금고형과 6개월의 근신’을 언도받았다. 배설은 상하이에서 복역하지 않을수 없었다. 논조를 주도하는 양기탁에게도 ‘국채보상 의연금 횡령’이라는 어처구니없는 혐의를 씌워 구속·기소했다. 이 재판은 양기탁의 무죄로 끝났다. 그는 대한매일에서 일한 뒤로 치외법권지역인 사옥에서 생활함으로써 일제의 검속을 피할 정도로 철저한 인물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의 의연금을 총괄처리하면서 일제에게 꼬투리 잡힐 일을 할 리 없었다. 또 배설­양기탁으로 이어지는 지나친 탄압에 대한 영국측 반발도 한몫을 했다. 그후 대한매일에는 어려움이 잇따랐다.창간이후 울타리 노릇을 한 배설이 1909년 5월1일 타계한 것이다. 일제에 맞서 싸우느라 심신을 소모했고 상하이에서 옥고까지 치른 그는 ‘심장확장’이 원인이 돼 서른여섯 나이로 눈을 감았다. 배설은 숨지기 전날 “나는 죽을지라도 대한매일은 영원케 해 한국인을 구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많은 한국인이 그의 죽음을 슬퍼했고 그를 기렸다. 그 가운데 5월5일자 대한매일 1면에 실린 박은식의 추모시를 소개한다. ‘天遣公來又奪公(하늘이 보내 공이 오더니 다시 빼앗아갔네) 歐洲義血灑溟東(유럽의 의혈인이 조선의 어둠을 씻고자) 翩翩壹紙三千里(삼천리 곳곳에 신문을 뿌렸네) 留得芳名照不窮(꽃다운 이름 남아 끝없이 비추리)’ 배설은 가도 양기탁은 남았다. 대한매일의 필봉은 배설 사후에도 꿋꿋함을 지켰다. 1909년 10월26일 安重根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포살해 이듬해 3월 순국할 때까지,대한매일은 거사·체포·재판·처형의 과정을 자세히 보도했다. 安의사가 밝힌 ‘저격 이유 15가지’를 그대로 실은 것은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배설 사후신문사 소유권은 영국인 萬咸(Alfred W. Marnham)에게 넘어갔다. 배설은 2차재판을 앞둔 1908년 5월27일자로 발행인 명의를 만함으로 바꾼 바 있다. 배설이 타계하자 그가 소유권을 승계했고 일제의 압력에 못견딘 그는 1910년 5월1일 통감부에 신문사를 넘겼다. 일제는 이를 비밀에 부쳤다가 6월14일 발행인과 편집인 명의를 李章薰으로 바꾸었다. 이날 양기탁은 대한매일에 광고를 싣고 퇴사했다. 기자들 대부분이 그 뒤를 따랐다. 대한매일은 두달여 연명하다가 1910년 8월29일 한일합병이라는 국치(國恥)를 맞아 종간한다.
  • 스티븐스 砲殺사건(다시 태어난 ‘대한매일’:17)

    ◎張仁煥·田明雲 의사 의거 추적/“국권회복 활동” 보도 한달뒤 1면톱 게재/“애국지사” 내외 알려 安重根 의사에 영향 1908년 3월23일 일본 통감부의 외교고문 스티븐스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張仁煥·田明雲 두 애국지사의 총에 피살된다. 총격은,‘일본의 한국 보호’가 한국인의 바람인듯 공공연히 떠들어댄 그의 망언에서 비롯됐다. 대한매일은 이 사건을 끊이지 않고,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당시의 열악한 통신체계에도 불구하고 이역만리에서 벌어진 의거를 대한 백성이 자세히 알게됐다. 미국측에 의해 ‘단순살인’쯤으로 치부될 뻔한 사건을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의거로 자리매김,세계만방에 알린 것들은 순전히 대한매일의 공이었다. 스티븐스는 일본의 한국 지배가 정당함을 홍보하고 미국인의 반일감정을 무마하라는 지시를 받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3월21일 기자회견을 가져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으로 삼아 한국에 유익한 바가 많다” “한국민은 일본의 보호정치를 환영한다”는 따위의 망언을 거듭했다. 대한매일에 ‘스티븐스 포살(砲殺)사건’이 처음 등장한 것은 3월25일자 뉴욕발 기사였다.‘한국 전 고문 須知分(수지분=스티븐스)씨가 일전에 桑港(상항=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는데,24일(사실은 23일)에 그 여관 앞 마차에서 내릴 때 돌연히 사격하였는데,그 사격자는 상항에 체류하는 한국인이라. 수지분씨가 이 조난 전에 신문기자를 만나 일본의 대한정책을 찬양하되,미국이 필리핀에서 하듯 같은 형태의 귀중사업을 일본이 한국에서 시작한다고 말한 때문이라더라.’ 대한매일의 초기 보도는 전적으로 외신에 의존해야 했으므로 짤막짤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흐름을 보면 결코 이 사건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27일에는 ‘수지분이 큰 상처를 입지 않은 반면 부상한 한인(전명운)은 빈사 상태’이며 ‘저격 이유는 수지분이 휴대한 서류가 미국 대통령과 주미 일본대사에게 넘어가면 한국에 절망이 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이어 28일에는 국내발로 ‘수지분이 죽어 통감부 관리 일동이 조전을 보냈다’는 부음기사를,29일과 31일에는 뉴욕발로 ‘병상의 한인은 점차 쾌유하며 수지분 사망 소식에 환희하였다’ ‘암살자(장인환)가 기소되었는데 그 변호사는 애국적 광란상태에서 무지각적으로 벌인 범죄라고 변호하였다’는 속보가 잇따랐다. 사건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외신만을 전하는 데 답답했을 대한매일은 드디어 4월17일자 1면 톱으로 상세한 내용을 보도한다. 미국에서 발행된 공동회의 호외를 긴급 입수한 것이다. ‘별보(別報)’라 이름 붙은 이 기사는 평상시와는 달리 ‘수지분 포살 상보’‘질문 수지분’‘전명운·장인환 양씨가 수지분을 포격’‘경고 첨(僉=모든)동포’ 등의 제목을 중간중간 큰 활자로 집어넣었다. 그 내용은, ‘수지분이가 23일 상오 華盛頓(화성돈=워싱턴)으로 향하려고 옥란시 정거장에 당도하며 애국지사 양씨는 뒤쫓아왔던지 일찌감치 대기중이라. 수지분이가 일본 영사와 동반하여 자동차에서 내려올 때 좌우 공격하여 연 3차 포성이 울리는 때에 수지분이가 총에 맞아 쓰러지니 경찰관리가 급히 모여들어 마차에 싣고 병원으로 가더라’는 것이었다. 이어진 ‘경고 첨동포’에서는 ‘우리가 양씨와 함께 죽을 지경에는 미달하였으나 그 애국열성이야 어찌 위로하지 못하리오. 한국독립도 이제 오늘부터요,한국자유도 오늘부터’라고 찬양한 뒤 ‘우리가 각각 주머니를 빌어 독립을 위하여 재판하기를 불가불 전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티븐스 포살 사건’ 보도는 대한매일이 거둔 또하나의 승리였다. 장인환·전명운 의사의 쾌거가 국내에 널리 알려지면서 이 사건은 1년7개월 후 安重根이 이토 히로부미를 응징하는 데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편 일제는 이 보도를 대한매일 사장 배설을 고소하는 빌미로 삼았다.
  • 고종 퇴위(다시 태어난 ‘대한매일’:12)

    ◎순종 승계 강제성 통렬히 고발/황제대리조칙 반박/수차례 논설로 따져/고종 도쿄친행 거부/헤이그밀사 자결 등 호외로 대내외 알려 1907년 7월19일 고종이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황태자에게 양위하는 형식이었지만 실제는 일제와 이에 빌붙은 친일파 내각에 의해 축출당한 것이었다.창간 때부터 고종 황제와 각별한 관계였던 대한매일신보는 고종 퇴위의 강제성을 정면으로 지적하며 이의 부당함을 거세게 따졌다. 을사늑약(勒約)후 2년도 안돼 이뤄진 고종 퇴위는 고종의 헤이그(海牙) 밀사 파견과 관련이 깊다.고종은 일제의 한국 침탈 실상과 조약의 무효함을 세계 만방에 알리고자 李相卨 李儁 李瑋鍾 등 3인의 밀사를 네덜란드 헤이그의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보냈다.고종의 친서를 휴대한 밀사들은 6월25일 헤이그에 도착했으나 일본,영국 등의 방해로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했으며 밀사 이준은 울분 끝에 현지에서 분사(憤死)했다. 고종은 대한제국 제위에 오르면서 강한 배일주의 성향을 보여왔다.일본은 밀사 파견을 고종 퇴위의 호기로 보고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 대신들을 앞세워 고종을 핍박했다.7월18일 고종은 내각의 섭정추천 요청을 거부했으나 19일 황태자 대리 조칙을 내린 뒤 20일 양위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한일신협약(7월24일),군대해산(8월1일)으로 이어지는 1907년 7월의 급박한 정세 속에서 대한매일은 그간 높이 쳐들어온 반일의 기치에 한 가닥의 동요도 보이지 않고 매섭게 필봉을 휘둘렀다. 7월4일 논설을 통해 “해아 평화회담에서 일본인의 잔학을 호소하려는 한국의 제의가 배척됐지만 한국인은 실망하지 말고 자주독립의 대목적을 이루기 위해 한층 힘써야 한다”고 격려했고 7월9일에는 “한국이 자국의 명운을 국제 중재에 위탁하기에는 열강의 태도로 보아 시기가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면서 “이번에 한국 파견인이 거절된 것을 길조로 여길 수 있다”고 국민들을 위무했다. 이완용의 잦은 통감부 방문을 주시하면서도 일제의 고종 퇴위 속내를 알아채지 못했던 대한매일은 16일 일본報知신문 기사를 전재해 처음으로 이에 대한 경각심을 높인다.이 일본 신문은 “한일협약을근저에서 짓밟은 한국 황제를 폐하든지,일본으로 불러 사죄케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었다.이에 대한매일은 18일 ‘일본 신문의 무례를 반박한다’라는 장문의 논설로 강경하게 맞섰다. “일본 신문이 논하는 구절구절이 해괴하고 통탄스럽기 짝이 없다”면서 “한국에 대해 일본 사회와 언론의 마음 속에는 병탄 외에는 어떤 생각도 없다”고 갈파했다.그런데 이같은 논설을 내보낸 대한매일은 같은 날 몇시간 후 “황제가 대신들의 섭정추천,동경친행 사과 요구를 거절했으며”“해아밀사 이준이 忠憤을 이기지 못해 자결,만국 사신들 앞에 뜨거운 피를 뿌렸다”는 내용의 호외를 뿌리게 된다. 만 하루가 지난 19일 낮 대한매일은 다시 호외를 냈는데 ‘황제께서 황태자에게 대리를 명하는 조칙을 내렸다’는 소식이었다.황제가 하룻만에 굴복하고 만 것이다.이 호외에서 주목되는 사실은 대한매일이 조칙에 바로 잇대어 “이 조칙 반포가 황제의 뜻에 따른 것인지 아닌지 일반의 주목거리이나 이 사건이 외인의 강핍과 대신들의 위협으로 된 것은 세상 사람이다 알 바”라고 쓴 점이다. 조금도 곁눈질하지 않고 즉각 고종 퇴위의 강제성을 적시한 것이다.대한매일은 20일 ‘이등후’,21일 ‘대리역사’,25일 ‘禪位’,28일 ‘선위속론’등의 논설을 잇따라 써내면서 퇴위가 외부의 강박에 의해 이뤄졌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다. 이 와중에서도 대한매일은 만국회의 기자회견에서 ‘한국을 위한 호소’라는 연설로 큰 갈채를 받은 밀사 이위종을 한국에 희망을 주는 청년으로 극찬했다(19일).또 한일신협약으로 “한국의 독립이 흔적도 없어졌다”고 한탄하면서도 “한국인이 한국의 이익을 위해 자치하는 일이 생겨날 수도 있다”는 희망 또한 피력해 마지 않았다.(27일). ◎사설 ‘선위속록’/“왕실의 대리와 선위… 핍박과 위협으로…” 대한매일은 고종 퇴위에 관해 여러 차례 사설을 썼다.이 중 7월28일자 ‘선위속론’의 주요 부분을 발췌한다. 무릇 황위의 전해짐과 물려줌은 천하대사라 동서고금 역사가 이에 관해서는 한층 근엄한 필법으로 사실에 준거해 곧게 쓰는 것을 공리로 하고 있고 이것이 역사가의 정당한 의무로다. 한국 황실의 대리와 선위라는 큰 사건이 일주일도 안되는 사이에 이뤄졌다.외인의 강한 핍박과 내각 제대신의 위협적인 요청에 의한 것은 일반 세상 사람들이 다 잘 알고 있는 바이다.특히 선위에 있어 내각 대신의 한층 괴이하고 해괴한 행동에 관한 소문이 흘러나오고 있으니 모든 세계 인사와 대한 신민은 이로부터 눈을 돌리지 말고 가슴에 새겨 잊지 말지어다. 선위가 논해질 무렵 아직 조칙이 내려지지 않아 실시할 수 없다고 어느 원로 대신이 지적하자 농공상대신 송병준은 이렇게 하면 어떻고 저렇게 하면 어떻단 말이냐며 벌컥 화를 내면서 그 원로를 포박하려 하니 그 사람이 황겁공포하여 신도 신지 못하고 도망쳤다고 한다. 또 박영효가 이완용 총리를 면전에서 격렬하게 반박하자 다음날 그를 포박했으며 내관 이병정이 이총리에게 30년 동안 임금을 섬긴 대감은 군신의 의리가 있고 부자와 같은 은공을 입었는데 오늘 이같은 짓이 대감의 성공이라 할 수 있겠느냐고 꾸짖자 그 역시 경무청으로 끌고가 가두었다더라. 이런 사실은 모두 너무 잘 드러나서 숨길 수도 없어 세계 사람의 주목을 받게 되고 붓을 든 사가가 대서특필하지 않을 수 없다.
  • 국채보상운동 앞장(다시 태어난 ‘대한매일’:11)

    ◎‘빚 갚아 나라지키기’ 불씨 지펴/희사자 명단 게재 등 국민적 호응 유도/의연금 접수 주도… 사회公器역할 충실/日帝,양기탁 선생 횡령혐의 씌워 구속 일본이 한국 병탄의 전진기지로 통감부를 설치한 1년 후인 1907년 초 대한의 백성들은 열렬한 국채보상운동을 펼쳤다. 당시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신문이었던 대한매일신보는 자연스레 이 전국적 운동의 가장 힘찬 엔진이 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은 대한제국이 그때까지 일본에게 빌린 돈 1,300만원을 국민성금으로 갚아 국권을 수호하자는 자발적인 민중운동이었다. 한일의정서에 따라 일본인을 재정고문으로 두면서부터 대일 차관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자도 비쌌고 100원 빌릴 때 10원을 구문(口文)으로 또 일본에 뜯기는 악조건이었다. 당시 대일 차관 1,300만원은 대한제국 1년 예산과 맞먹는 규모였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2월 대구에서 출판사 광문사를 경영하는 金光濟 徐相敦이 주창,곧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에 퍼져갔다. 이들은 취지서를 통해 대일 국채를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은필연적 사실이라면서 국채보상의 실천방안으로 금연운동을 부르짖었다. 이 운동은 단시일에 전국 규모로 확산되었는데 여기에는 신문의 역할이 대단히 컸다. 특히 이때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많은 부수를 발행하던 대한매일은 취지 전파와 의연금 접수에서 첫째가는 큰 공을 세웠다. 대한매일은 2월21일 김광제 등이 공개서한으로 발표한 국채보상 취지서를 게재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경향 각지에서 이 운동에 동참하는 지역단체들이 속속 결성됐으며 대한매일은 이 단체들이 보내온 결사 취지문을 빠짐없이 실었다. 이와 함께 개인들의 의연금 희사에 관한 기사가 지면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한매일은 황성신문 제국신문 등과는 달리 운동 초기였던 이때 의연금을 접수하지 않는다는 방침이었으며 2월28일을 시발로 이를 사고로 밝혔다. 의연금을 거두는 기관이 공식 결정되기 전에는 돈을 함부로 받을 수 없다는 신중한 판단이었다. 3월 들어 ‘이같이 중대한 일에 선후책을 확실히 정하기 전에는 보상금을 영수하기 어렵다’는 사고가 매일 나갔다. 그럼에도 의연금 접수요청이 빗발치자 3월16일 이때까지 국채보상 期成會에 의연금을 낸 명단을 부록으로 발행한 뒤 3월31일 특별사고를 통해 직접 의연금을 접수하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국채보상 의연금이 대한매일에 봇물처럼 쏟아졌다. 광고면이었던 대한매일의 맨 뒤 4면은 매일 보상금 출연자 명단으로 몽땅 뒤덮였다. 이름이 넘쳐 가끔 부록을 내기도 했다. 또 4월 초 경향 각 조직들이 제각각 거두는 국채보상 의연금을 통합된 조직에 일원화해 적립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 국채보상 지원금 總合所가 설립됐는데 이 총합소 임시사무소를 대한매일에 두기로 했다. 더불어 양기탁이 재무를 담당,대한매일이 이 운동의 실질적인 본부가 된 셈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을 반일운동의 일환으로 예의주시하고 있던 통감부는 1908년 7월 총합소 재무담당인 양기탁을 의연금 횡령혐의를 씌워 전격 구속했다. 이때까지 대한매일에 기탁된 의연금은 6만1,000여원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은 사회적 공기로서의 대한매일 성가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지만 운동 자체는 성공하지 못했다. 1910년 합방 때까지 모아진 의연금은 18만원(일본 헌병대 자료)∼16만원(黃玹 매천야록) 사이에 머물렀다. 반면 대일 국채는 4,400만원까지 불어났다. ◎당시 紙面을 보면/“12살 女兒 은반지 내고… 황제 담배 끊어…” 대한매일은 운동기간중 거의 매일 감동어린 의연금 희사 기사를 게재했다. 1907년 3∼5월에 난 몇몇 기사를 풀어본다. □전비서 송인회씨의 부인 박씨는 ‘無國이면 無民’이란 신문기사를 보고 1원을 부인회 사무소에 냈으며 그 집의 12세 되는 여아 또한 6전5푼중 은지환을 냈다하니 국가사상이야 남녀노소가 없으며 여자의 애국성심이 더욱 희한하다는 칭송이 자자하더라. □재령군 우리방 성황촌에 사는 양성옥씨는 빈한농민으로 읍 장날 쌀을 팔아 일년치 피울 연초 40봉지를 샀으나 마침 민국 형편과 국채보상 연설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 국채는 국민이 갚아야만 하며 게다가 대황제께서도 연초를 끊었는데 어찌 감히 피우거나 딴 사람에게 팔겠느냐며 다 불사른 뒤 2원을 출연했다하니 벽촌농민이 이같으니 우리 대한의 앞길이 영원무궁하리라. □일본인 제광길씨도 만국통의로 5원을 국채보상에 기부하면서 다른 이에게도 의연을 권고하겠다니 국민의 의무는 한국과 일본이 매일반이로다. □남녘사람 소문에 제주군 건입리의 신서봉 처 홍씨는 과부로 살림이 여유롭지 못함에도 국채보상 소식을 듣고 애국성심이 솟아 돈은 없고 하여 수의를 짓기 위해 고이 간직한 비단 명주를 팔아 12원을 의연하여 모두가 칭찬해 마지 않다더라. □평북 강계군 여학도 여교사 조덕순씨가 보내온 편지에 의하면 학도들이 국민된 의무로 애국성금을 표한바 여학도 천일신씨는 가난해 납채받은 비단상의를 의연했고 리순덕씨는 15세로 “내 나라를 사랑하는 데 어찌 단발을 두려워하랴”면서 구름같은 머리채를 잘라 의연했다더라.
  • 高宗 밀서사건(다시 태어난 ‘대한매일’:10)

    ◎을사조약 강제성 낱낱이 들춰/영지게재 6개 조항 1면 논설통해 소개/일제 정정요구 거부/밀서 사진으로 전재 “고종 진의 확인” 공개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뒤 발생한 ‘고종 밀서사건’은 언론을 통해 을사조약의 강제성과 대한제국의 주권을 세계에 알린 역사적인 것이다.한국침탈을 강행한 일제는 이 사건으로 이미지를 크게 손상받았고 한반도 정책에서 더욱 강경책을 시도하게 된다. 특히 이 사건은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국내에 대대적으로 알려지면서 반일감정을 급속히 확산시켰고 결국 일제가 대한매일 등 민족지를 탄압하고 노골적인 침략정책을 진전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던 것이다. 고종 밀서사건은 대한제국 황실과 영국의 런던트리뷴 특파원인 더글러스 스토리 간에 극비리에 진행된 일종의 작전이었다.스토리가 일본 요코하마에서 주한 미국공사 모건을 만나 을사조약 체결전말을 들은 뒤 고베에서 통감부 총무장관으로 새로 임명된 스루하라 일행과 함께 한국에 온 것은 1906년 초. 서울의 지인들과 두루 접촉한 끝에 고종을 만난 스토리는1906년 1월29일 고종의 밀서를 전달받는다.밀서는 모두 6개 조항으로 고종이 ▲조약에 조인·동의하지 않았고 ▲조약을 일본이 반포하는 데 반대했고 ▲독립권을 한치도 타국에 양여할 수 없고 ▲이 조약의 외교권도 근거가 없으므로 내치상 한건도 인준할 수 없고 ▲통감의 주둔을 허락하지 않는 동시에 황실권도 외국인에 허가하지 않고 ▲세계열강이 한국을 집단보호통치하되 그 기한은 5년이 넘지 않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고종의 붉은 옥쇄가 찍힌 이 밀서는 고종의 측근들이 일본측 정탐꾼들 눈을 피해 바짓가랑이 속에 감추고 나온 것이다. 스토리는 이 밀서를 대한매일 사주 裵說에게 보여준 뒤 일본군의 경계망을 뚫고 제물포에서 노르웨이 배에 올라 2월7일 중국 지부에 도착한다.영국영사 오브라이언 버틀러를 찾아가 고종의 밀서사실을 알리고 밀서내용 기사를 런던트리뷴 본사로 송고했다. 다음날 트리뷴 3면 머리에 이 기사가 실렸다.“을사조약은 고종의 재가를 받지 않았고 고종은 실질적으로 포로의 신세”라는 내용이었다.을사조약 체결 경위와밀서 6개항이 영문으로 함께 번역 게재됐다. 일본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주영 일본대사관은 트리뷴의 보도가 전혀 사실무근임을 주장하고 나섰다.또 고종이 보호조약에 날인하지 않은 것은 일반적인 외교관계로 오히려 고종이 이 조약에 동의했다고 억지를 부렸다.그러자 스토리는 2월10일자 또 다른 기사로 일본의 주장을 반박했다.일본이 한국 황제와 대신들을 협박해 보호조약을 체결하게 된 상세한 전말을 고종 측근의 말을 인용해 썼다. 이 기사는 트리뷴에 실린 뒤 로이터 통신을 타고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갔다.대한매일은 2월28일자 1면 논설 ‘保護’에 트리뷴의 기사를 소개했고 코리아 리뷰도 일본에서 발행된 신문을 인용,한국황제가 을사조약의 신빙성을 공개적으로 부인했다고 보도했다. 이처럼 고종 밀서사건은 영국·일본·중국·한국 신문에 계속 보도됐고 1907년 1월부터 한국의 분위기를 확 바꿔놓는다.스토리는 1906년 10월부터 트리뷴에 ‘동양의 장래’란 시리즈를 연재했는데 다섯번째로 12월1일자에 문제의 밀서를 크게 실었고 대한매일은 이 밀서 사진을 1907년 1월16일자에 그대로 올렸던 것이다. 이때부터 통감부가 적극 나서기 시작한다.밀서가 근거없는 것이라는 주장이 무색해졌고 고종의 진의를 한국민들이 확실하게 알게 됐기 때문이다.통감부는 “고종이 밀서를 준 일이 없다”고 강력 부인한 뒤 대한매일에 제동을 걸었다.裵說 추방책을 영국정부와 타진하기 시작했다.먼저 “밀서는 불순한 자들이 한일 양국의 친의(親誼)를 해치려고 날조한 것”이라는 내용을 1월21일자 관보에 실었다.또 한국정부 외사국장 李建春을 시켜 “대한매일에 실린 밀서기사는 사실무근이니 이를 정정하라”는 공문을 裵說에게 보냈다. 몇몇 친일계열 신문이 관보에 실린 내용을 게재했지만 대한매일은 오히려 밀서가 진짜라는 주장으로 맞섰다.1907년 1월23일자에 “이 밀서가 거짓이 아님을 믿을 수 있는 증거까지 갖고 있으나 그 증거를 제시하면 관련 한국인들에게 보복이 떨어질 것이므로 이를 내놓을 수 없다”는 기사를 싣고 기사정정 요구를 무시했다. ◎고종 밀서 전말/한국의 중립화 목표/미·러 협조 실현안돼/외지에 일 음모 고발 고종의 밀서사건은 국내 반일감정 악화에 따른 통감부의 여론통제 방침을 더욱 강경하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다.통감부는 밀서사건 뒤 곧바로 대한매일 등 항일 민족지의 논조를 희석시키고 통감부의 정책을 그대로 대변할 수 있는 친일지들을 만들어 갔다. 그러면 이처럼 일제를 자극한 고종의 친서는 어떻게 해서 나온 것일까.외세 강점기 이 밀서가 나오기까지 고종의 생각은 한국이 시종일관 중립화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고종은 일제 강점을 막기 위해 이미 오래전부터 여러 방향으로 열강의 협조를 구했고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세계 각국에 이를 알리기 위한 비밀문서까지 만들어주게 된 것이다. 밀서사건 때까지 고종의 이같은 노력은 수차례에 걸쳐 추진됐었다.1900년 주일 한국공사 李夏榮이 처음 제기한 ‘한국의 중립화’안은 러일간에 고조된 긴장상태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던 것이 사실.그리고 4년 뒤인 1904년 1월21일 고종의 명을 받은 외부대신 李址鎔이 한국의 엄정중립을 명기한 성명을 냈다.각국 주재대표 11명이 각국 정부에 이 선언서를 알렸지만 결국 2월23일 한일의정서가 체결됐고 이같은 중립화 정책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여기서부터 고종은 열강의 힘을 본격적으로 빌리기 시작한다.1905년 2월 고종은 러시아 육군소장 데시노를 통해 러시아 황제에게 원조를 요청하는 밀서를 보냈다.이 밀서는 주한 러시아 공사였던 파블로프를 통해 러시아로 전달됐다.또 을사조약 직전인 그해 10월에는 헐버트를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냈다. 프랑스 주재 한국공사 閔泳瓚을 미국에 보내 미국의 개입을 요청한 것도 유명한 사건이다.민영찬은 12월초 현지에 도착해 미 국무장관 루트에게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했으나 미국은 무심한 입장표명을 했다. 결국 고종은 이같은 노력들이 실패로 돌아가자 국내에 와있던 외국기자를 통해 만국에 알리는 방안으로 밀서를 쓰게 됐던 것이다.
  • 고종의 자금 지원(다시 태어난 ‘대한매일’:9)

    ◎창간부터 각별한 후원… 항일 필봉 독려/배설에 특허장 하사 등 감시속 유일하게 지원/통감부 보고서 등 기록/자금지급 사실 뒷받침/이토 ‘궁금령’으로 훼방/돈끊겨 힘겨운 싸움 대한제국 황실과 대한매일의 관계는 각별한 것이었다. 고종 황제는 대한매일 창간 때부터 裵說 등 그 주역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졌고 은밀한 후원을 통해 독려,신문 논조가 지속적으로 강한 항일 색채를 갖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일제 강점기 거센 언론탄압 속에서 유독 대한매일이 황실 지원을 받았음은 당시 그 위상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다.고종은 발간 지원의 방편으로 배설에게 특허장을 써주기도 했으며,일제가 이같은 지원을 막고자 궁금령(宮禁令)까지 내린 것은 유명한 일화다. 황실이 창간 때부터 대한매일을 지원했음은 여러 기록에서 추측할 수 있다.토마스 코웬은 배설이 러일전쟁을 취재하려고 입국했을 때 동행한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지의 동료기자였다.그와 배설이 함께 해임된 뒤 두 사람은 영자신문을 공동창간하려고 했다. 코웬이 대한매일 창간 며칠 전인 1904년 7월10일 일본 저팬타임스 사장인 즈모에게 보낸 편지는 고종의 지원의사를 보여주는 자료다.“코리아타임스라는 신문을 창간해달라는 중요한 주문을 받고 있다.이 신문은 한국 궁정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을 것이고,반일적인 것이 돼야 한다”는 내용이다. 또 대한매일 창간 후인 그해 10월3일 주한 영국공사 조단이 본국에 보낸 보고서는 “이 신문이 孫澤이라는 독일 여인을 통해서 황제의 지원금을 쓰고 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를 갖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인쇄시설조차 갖추지 못해 인쇄소에서 신문을 찍고,불과 200여호를 발행한 뒤 휴간한 사정을 보면 창간부터 1905년 초까지는 고종으로부터 거의 지원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배설이 외부 도움 없이 신문을 계속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특히 1905년 8월11일부터 국문판과 영문판을 각각 4면으로 별도 발행했는데,이같은 확장과 인쇄시설 마련이 고종에게서 보조금을 받았기 때문임을 보여주는 자료가 많다. 1905년 10월11일 주한 일본군 헌병대가 한국 주둔군 참모장에게 보낸 보고서는 “白時鏞이 고종과 배설 사이에 중개를 주선한다는 사실을 확실한 소식통에게서 들었다”고 밝히고 있다.백시용은 당시 예식원의 회계과장으로 황제의 신임이 두터웠다.또 1907년 1월18일 경무고문 마루야마가 통감대리인 하세가와에게 보낸 보고서에서는 “대한매일이 한국 황실로부터 매월 500원을 지급받고 있다”고 액수까지 밝혔다. 1907년 8월27일 통감부의 경무 와타나베가 마루야마에게 보낸,궁내부 전무과 기사 沈雨澤에 대한 심문조서는 고종의 보조금지급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작년 손탁은 폐하에게 ‘대한매일은 유독 한국 및 황실에게 이익되는 것을 기재해 왔으나 유지곤란으로 이번에 일본에 매도한다는 소문이 있으니 폐하의 일고를 바란다’고 주상했다.폐하는 출판을 계속할 것을 희망하여 어느 정도의 금액을 지출하고 또 매월 1,000원 정도를 하사해왔다.” 대한매일 한글판이 재창간된 것은 이해 음력 4월이므로 고종은 대한매일 한글판 창간에 특별자금을 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또 신문발간에 편의를제공받도록 고종이 배설에게 특허장을 준 것이 1906년 2월10일자였으므로 고종이 재정지원을 적극적으로 해준 것도 이 무렵부터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고종이 끝까지 보조금을 지급하기는 어려웠다.이토 히로부미는 1906년 7월2일 고종을 만나 ‘궁중의 위엄과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드나드는 사람들을 통제할 특별병력이 궁중에 주둔해야 한다’고 강요했고 7월6일자로 궁금령을 공포했다.당시 각지에서 일어나는 의병들이 고종에게서 내밀하게 고무받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토가 고종을 고립시켜 두려는 속셈이었다.특히 반일적인 배설이 고종과 내통하는 것을 막기 위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결국 궁금령 공포와 엄격한 출입통제로 고종은 포로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1년 후 고종이 퇴위하고는 재량껏 쓸 수 있는 내탕금도 제한됐고,일본측 감시도 철저해졌다.이때부터 지원이 끊겨 대한매일은 더욱 힘겨운 싸움에 나서야 했다. ◎황실과 대한매일신보/극도보안속 재정지원 타언론 비해 자금난 덜해/헤이그·을사조약생생한 보도/강경한 항일노조 유지 큰 힘 고종 황제의 경제적 지원은 대한매일이 일관된 논조를 유지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 되었다.당시 대부분의 민족지들은 일제의 집요한 탄압 탓에 경영난에 허덕였고 논조도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이에 비해 대한매일은 황실 지원에 힘입어 상대적으로 재정 곤란을 덜 겪었다. 대한매일의 굽히지 않는 필봉의 원천은 물론 배설이라는 영국 발행인에게 있다.그가 치외법권을 인정받아 직접적인 탄압을 비켜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나 대한매일도 어려운 경영상태에 빠져 대중적인 지원을 호소하는 사태가 있었음을 감안하면 황실의 지원이 큰 힘이 됐음을 부인키 어렵다. 황실과 대한매일의 관계는 철저하게 베일에 쌓여 있었다.당시 일제가 정부 구석구석까지 완전히 장악한 사실을 볼 때 황실의 지원은 사적으로,극도의 비밀을 유지한 채 이루어졌을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대한매일의 고종 관련기사는 항상 강경하고 직접적인 상황을 여과없이 부각하는 생생한 것들이다.1905년 을사늑약(勒約)체결과이에 대한 고종의 완강한 거부를 공개한 1905년 11월18일자의 ‘칙어엄정(勅語嚴正)’,을사조약의 부당성을 만국에 알린 고종 친서를 전문게재하고 이와 관련해 쓴 1907년 1월23·24일자 논설,그해 6월 헤이그밀사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것 등 끝이 없다. 이는 고종의 대한매일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다른 신문들이 보도한 기사와는 큰 차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선 ‘칙어엄정’만 하더라도 을사조약 체결 과정을 일반에게 알린 최초 보도였다.또 고종친서사건과 헤이그밀사사건은 각각 고종의 입지를 좁히고 결국 폐위로 연결된 직접적 사건이었다.초기부터 황실과 대한매일의 관계를 끈질기게 추적해온 일제 입장에선 양쪽 관계를 더 이상 유지케 할 수 없다고 결정하는 데 결정적인 단초로 작용한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 황성신문과 동지적 관계(다시 태어난 ‘대한매일’:7)

    ◎일제 강점기 민족 이끈 ‘두바퀴’/친일비판·을사조약 반대 등 배일 역설/애국계몽·국채보상운동도 함께 주도/1910년 폐간때까지 항일의 구심점역 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흔히 을사조약이란 비극적 상황의 대명사로 통하는 황성신문의 논설이다.그러나 정작 ‘시일야방성대곡’에 얽힌 비참한 사연을 적나라하게 파헤쳐 국민의 반일 감정을 자극한 신문은 대한매일신보였음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이처럼 대한매일과 황성신문은 일제 강점기 험한 가시밭길을 함께 헤쳐간 민족의 양바퀴였다. 1905년 을사조약을 전후해 발간된 당시 신문들은 각각 뚜렷한 색채를 갖고 나름대로 목소리를 냈다고 할 수 있다.대한매일과 황성신문,그리고 제국신문 만세보 대한민보 국민신보 대한신문 경향신문 등이 그 대표적 매체들이다.신문 성격만큼이나 을사조약과 일제 침탈을 둘러싼 논조에선 극명하게 대립했다.또 의병활동과 애국계몽운동에 대해서도 현격한 논조 차이를 보였다.그러나 이 가운데 대한매일과 황성신문은 처음부터 일관되게 반일 논조를 확연하게드러낸 양대 산맥이었으며 공동운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1905년 11월3일 유신회와 진보회가 합동한 친일 단체 일진회가 발표한 이른바 ‘일진회선언서’에 대한 공박에서부터 같은 논조를 벌인 두 신문은 을사조약에 대한 무효화 투쟁에선 그야말로 하나가 됐다.조약 체결의 속사정과 강점 과정을 앞다투어 파헤쳐 격변기 상황을 객관적으로 읽어냈다고 평가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을사조약을 앞둔 시점에서 일진회 준동에 대한 공동보조는 그 시초랄 수 있다.일진회가 일본 침략 행동을 찬동·지지하고 이를 반대하는 여론을 공격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내자 두 신문은 이를 통렬히 반박하는 논설을 일제히 실었다.당시 정부에서도 선언서에 현혹되지 말 것을 훈령으로 고시할 정도였으나 일제의 득세에 따라 국민신보 대한신문 등 친일지들이 나타나고 언론도 완전한 대립 상태에 빠진다. 을사조약에 반대한 황성신문이 위기에 빠졌을 때는 대한매일이 유독 황성신문의 논조를 적극 지지했다.그해 11월20일 ‘시일야방성대곡’이 나간 뒤 張志淵 사장이 붙잡혀가고 정간 조치가 내려졌을 때였다.대한매일은 ‘황성의무’란 논설을 통해 저간 사정을 통렬히 비난하고 황성신문을 적극 찬양하고 나서 일반인에게 진실을 알렸다.조약 체결의 속사정을 파헤친 황성신문의 ‘신조약청체전말’을 호외로 발간해 세세하게 다시 싣고 무효화선언을 하기도 했다. 당시 제국신문이 을사조약에 대해 ‘한때 분함을 참으면 백년 화근을 면함이라’는 글을 싣고 대한일보가 황성신문의 ‘시일야방성대곡’ 논설을 ‘경거망동’으로 비난한 것을 보면 당시 대한매일의 강경한 논조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의병운동에 대한 관점에선 다소 차이를 보인 게 사실이다.대한매일이 강한 논조를 편 데 비해 황성신문을 비롯한 나머지 신문들은 민중의 혁명적 변혁과 대중투쟁을 간과한 것으로 학계는 평가한다.대한매일이 지방소식란에 매일 의병투쟁 소식을 실은 데 비해 타지들은 ‘무익한 폭거’‘부질없는 행동’으로 돌렸다.황성신문조차도 1906년 5월20일자 논설 ‘의병들의 소요는 마땅히 빨리 진압돼야 한다’는 논설을 실을 정도였다.그나마 황성신문은 일본군의 의병 진압과 민간인 학대까지 찬성하지는 않았다. 애국계몽운동과 경제사정에 관해서는 두 신문이 한 길을 택했다.특히 교육발전과 일제의 경제적 침투에 반대하는 자주적 산업건설 대목에선 철저하게 같은 논조를 폈다.황성신문이 먼저 1906년 2월13일자 논설 ‘경고동포’에서 지식 보급,대중계몽의 의의와 그 절박함을 지적했다.대한매일도 이어 8월3일자 논설 ‘한국의 실업’에서 실업국민(實業國民)이 되기 위해 △자국 비용품은 자국에서 공급할 것과 △국산품 수출자가 될 것을 역설한 것은 그 대표적 예다.이같은 계몽운동은 두 신문이 국채보상운동의 최일선에 나서는 것으로 연결된다. 황성신문과 대한매일 두 신문은 1910년 폐간될 때까지 나라의 운명과 사회흐름을 예리하게 감지해 운동력을 키운 시대의 견인차인 것이다. ◎당시 親日紙 행각/을사조약이후 제국신문 등 변절 일제옹호 앞장 대한매일과 황성신문이 을사조약 무효화선언 등 항일투쟁의 기치를 올린 것과는 달리 친일 신문들은이같은 민족지들에 결사코 반대하며 일제를 옹호하고 나서 대조를 보인다. 일본인 경영의 국문지인 대한일보는 황성신문의 ‘시일야방성대곡’ 게재를 경거망동이라고 비난한 대표적 신문.張志淵이 구속에서 풀려나고 황성신문이 복간되자 ‘황성기자패론’과 ‘여장지연군’이란 제목의 글로 오히려 장지연의 논조가 그릇되며 고쳐야 한다고 강조하고 나섰다. 제국신문의 경우 자주독립을 주장한 민족지 성격이 강했으면서도 이때는 논조의 일관성을 잃은 것으로 비쳐진다.이 신문은 1904년 2월 강압적으로 체결된 한일의정서에 대해 “시정개정의 충고권이란 결국 침략의 제일보”라고 비판했다.그러나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에는 태도를 바꿔 11월22∼23일 이틀에 걸쳐 ‘한때 분함을 참으면 백년 화근을 면함이라’는 글을 실었다.황성신문 정간사태에 대해서도 “과격한 논조로 나가면 탄압을 받아 신문 없는 사회가 될 것”이라는 논조를 폈다. 1906년 1월 친일파의 영수 宋秉畯 李容九 등이 일진회 기관지로 발행한 국민신보는 처음부터 열렬한 친일로 나섰다.1906년 9월2일자 2면에 게재한 ‘궁문파엄’(宮門把嚴)이란 글은 단적인 예다.이 글은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을 힘써 수행해야 한다.혹시 협잡배가 각종 수단을 부려 군주의 총명을 막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대궐을 지키는 일본군에게 을사조약을 반대하는 신료의 침입을 막아 고종황제의 뜻이 외부로 퍼져나가지 못하도록 경계하라고 촉구한 것이다. 민족지의 하나인 천도교계의 만세보는 경영난으로 친일 진영에 넘어가 대한신문으로 탈바꿈한 다음엔 입장을 바꾸었다.이 신문은 언론기관의 필요성을 인식한 李完用이 인수해 李人稙에게 발행을 맡긴 것으로 친일 내각의 옹호와 그 선전에 적극 나섰다.
  • 을사조약 반대운동(다시 태어난 ‘대한매일’:6)

    ◎“신뢰못할 늑약” 무효화 투쟁 앞장/“고종 불윤에 이토 강압” 등 부당성 지적/한규설·민영환 자결­분노함성 대서특필/격렬한 항일논설 민족구국정신 일깨워 1905년 11월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대한매일신보는 발빠르게 반대 투쟁에 나선다. 조약에 반대하는 상소가 잇따르고 대신의 자결사태까지 발생하는 상황에서 국내 언론들은 조약의 침략성을 일제히 규탄하고 나섰다.이 가운데 대한매일의 반대투쟁은 그 어느 매체보다도 빠르고 강경한 논조로 일관했다. 조약 체결 당시 고종과 韓圭卨 참정대신을 비롯한 각료들의 반대가 거셌지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군사력을 앞세운채 강압,마침내 일방적으로 이 조약체결을 결정하고 말았다. 이에 맞선 대한매일의 논조는 조약의 부당성 지적과 무효화에 초점을 맞추고 일관된 투쟁양상을 보였다.후에 통감부는 결국 이같은 반일논조를 잠재우기 위해 고종 퇴위와 대한매일 사주인 배설 추방쪽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만다. 대한매일의 투쟁은 조약 무효선언으로 시작됐다.조약 체결 다음날인 18일자 2면 잡보란에 속보형식으로 내보낸 ‘칙어엄정’(勅語嚴正)이 그 시초다.“한국 황제께서는 한국독립을 중념(重念)하시와 정대한 의리로써 거절하신즉 伊藤(이등박문) 대사가 재삼 강청하되 강경하신 칙어로 불윤(不允)하셨다더라.” 일본이 강제로 만들고 체결을 강행한 을사조약에 대한 고종의 반대의사가 확고했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기사다. 이와함께 조약 체결 당일 각의의 분위기를 살펴볼 수 있는 기사도 같은 날 잡보란에 실려있다.‘칙어엄정’ 아래 ‘대사관 각의’와 ‘殉國意決’ 제하의 글이 그것이다.‘대사관 각의’ 기사는 “어제 오전 11시에 참정대신 이하 각부 대신들이 이등 대사관으로 모여 중대사건을 각의하였다더라”라고 쓰고 있다. 또 ‘순국의결’에선 “참정대신 韓圭卨씨와 外大 朴齊純씨와 農大 權重顯씨가 이 중대한 요구건에 대하야 죽음으로 맹세코 굴복하지 않기로 상부통곡(相扶痛哭)하고 韓참정은 영결(永訣)까지 하였다니 삼대신의 순국하는 충의에 감읍하지 않은 자가 없다더라”라고 게재돼 있다.한규설은 내각 조직 당사자로 조약 체결과정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각료들에게 개별적으로 찬부를 물을 때 끝까지 반대,파면됐다. 다음날도 무효화 논조는 계속됐다.19일자 2면 상단 잡보란에 또다시 ‘신조약성립’(新條約成立)이란 제목의 글을 실었다.냉정한 필치로 조약이 체결된 경위를 자세히 보도했다.기사 마지막에 “황제폐하의 성의(聖意)는 이 조약을 결사코 불허하시기로 확정하신 거일진대 각 대신의 황겁으로 성의를 공동하여 차경(此境)에 이르렀는데 韓皇폐하께서 눈물을 흘리고 종사생령(宗社生靈)을 위해 상천(上天)에 기도하셨다더라”라는 글을 붙였다. 21일에는 전국 십삼도의 유약소(儒約所)에서 상소한 전문을 소개하고는 거리풍경을 싣는 것도 잊지 않았다.‘회조위소’(回眺爲笑) 제하의 글이 그것이다.“어떤 이가 주현을 지나다가 춤추는 사람이 있어 그 이유를 물은즉 신조약설을 듣고 실성해 밤새도록 통곡하더니 황상폐하와 참정 한규설씨는 처음부터 거절반대하셨다기로 기쁨을 이기지 못해 춤을 춘다 하매 사람들이 몰려들어 함께 춤을 추었다더라”고 적고 있다. 12월 1일자에서는 시종무관장 閔泳煥이 신조약에 통분해 순국한 소식을 2면 머리기사로 크게 다루면서 이와 관련한 ‘늑약무효’(勒約=강제로 맺은 조약)란 격렬한 논설기사를 실었다.이 글은 결론으로 “한일신조약은 신뢰가 없고 효과가 없음을 단언하건대 이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모든 세상사람들의 공론이니 이렇게 적어 후일의 증거로 삼고자 하노라”고 못박았으니 당시 대한매일의 논조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대한매일은 일제와 일본군의 강압을 일절 무시하고 날이 갈수록 강경한 논진을 펴서 당시 흥분과 격분에 찬 겨레의 심정을 그대로 반영했던 것이다.을사조약 무효화 투쟁으로 시작된 대한매일의 반일운동과 극일논조는 1910년 문을 닫을 때까지 숱한 압박과 시련에도 굽히지 않은채 더해만 갔던 것이다. ◎대한매일신보 논조/시종일관된 ‘배일’/황성신문 정간 등 주저없이 보도/‘이날에 또 목놓아…’ 명논설문 을사조약이 체결된 다음날부터 각종 기사를 통해 조약 무효화투쟁에 나선 대한매일은 애국지사들의 순국 사실과 진전상황 등을 끊임없이 실어 항일의 선봉에 나섰다. 특히 을사조약의 체결과정에 있어서 일제의 억압과 진행과정 보도에 있어선 당시 다른 언론보도에 비해 훨씬 빠른 것이었다.황성신문의 정간과 사장 구금사실을 주저하지 않고 다룬 11월27일자 ‘황성의무’(皇城義務)와 같은날 ‘한일신조약청체전말’(韓日新條約請締顚末)이란 표제로 발행한 호외,그리고 다음날 28일 게재한 논설 ‘시일에 우(又)방성대곡’(이날에 또 다시 목놓아 크게 우노라)은 당시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대표적인 글들이다. 을사보호조약과 관련해 황성신문과 논조를 같이했던 대한매일은 ‘시일야 방성대곡’으로 비롯된 황성신문의 정간과 張志淵 구속에 눈감지 않았다.‘황성의무’는 대한매일과 함께 진보적 대표신문이었던 황성신문의 논조를 극구 칭찬한 글로 눈길을 끈다. ‘시일에 우 방성대곡’은 “한일신조약을 체결한 날에 한국경성내외의 일반 신사인민이 모두 방성대곡하였고 민조 두 충신이 순국한 날에남녀노유가 일제 곡하여 친척과 같이 슬퍼하였고 오호라 대한동포여 금일 슬픈 지경 진실로 가련하고 애석하오…”라고 적고 있다.
  • 金 대통령 訪日 경제 외교/金都亨 산업연구원 연구위원(특별기고)

    최근 한·일 경제관계는 국교 정상화 이후 최대의 위기상황을 맞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동안 양국 교류에 주축이 되어온 기업인들은 자국 경제의 장기침체속에서 과잉 설비인원 조정에 눈코 뜰새 없다. 이런 사이에 양국간 무역과 투자가 동반추락하고 있다. 내 코가 석자라 상대방을 돌아볼 여유가 없는 탓인지 지금까지 제대로 상호 협력체제를 구축하지 못했다. 그뿐인가. 두 나라는 아시아 금융위기와 함께 여태까지 동북아 경제발전의 원동력으로 칭송되어온 아시아적 가치가 전면부정되는데도 시원한 반론조차 제기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金大中 대통령은 취임후 미국 방문에 이어 두번째로 방일을 추진,정상회담을 통해 일본이 미국과 함께 우리의 맹방임을 세계에 확인시켰다. 특히 양국이 과거보다 미래에 비중을 두고 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협력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현재의 아시아권 경제위기를 감안하다면 더할 나위없이 큰 의미를 지닌다. 과거사 문제는 경제교류에도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쳐온 것이 사실이다. 이번에 대통령은역사의 두려움을 직시하는 용기와 서로의 변화된 모습을 올바르게 인식하면서 미래의 가능성에 희망을 걸자고 역설했다. 과거의 오랜 응어리를 걷어내는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으로서 세계가 이를 주시했다. ‘보통국가’를 지향해온 경제대국 일본으로서도 국제사회에서 체면을 세울 수 있게 된 만큼 큰 외교적 성과인 셈이다. 공동선언문 작성은 최근의 국제적 유행같지만 일본은 이번에 과거사에 대해 반성,이를 문서화했다. 필자는 일본기업이 경제적 이유 말고 반일감정 때문에 한국진출이 어렵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이제 우리가 좀더 관용을 베풀고 그들 스스로 말을 아끼고 행동을 자제한다면 한·일협력기업의 경영진 상호간 그리고 노사간 신뢰에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그리고 일본의 30억달러 자금협력은 지난번 단기외채 연장협력에 이어 신용경색과 수출용 원자재난 해소,한·일합작기업 자금난 해소는 물론 일본의 대(對)개도국 지원의 큰 틀을 짜는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과거엔 ‘일본자금’하면 모두가 자기들 기계를 팔아먹으려는 것이거니 했었다. 모두 여유가 없었고 제대로 쓸 줄 몰랐던데서 온 오해와 불신 때문이었다. 그동안 양국협력 실무자들의 인내와 노력으로 비연계성 융자비중을 늘렸고 한·일 합작업체가 4억달러 정도라도 자금지원을 받게 된 것은 다행한 일이다. 이들의 한국 영업실적이 개선되면 우리의 대외신용도가 개선되고 해외 잠재투자가를 유인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지금 아시아전역이 신용공황에 휩싸여 ‘일본 자금’을 애타게 기다리는데 유독 한국에만 지원해야 하느냐는 소위 ‘특정성’ 문제도 있었다. 그래서 일본내애서 급거 아시아개도국 300억달러 지원 기금안이 등장했던 것이다. 따라서 따지고 보면 그러한 일본의 국제적 공헌의 일부는 우리가 유도한 셈이다. 일본의 무역수지 흑자를 활용하는 방안을 유도한다는 방일의 큰 목표는 달성됐다고 볼 수 있다. 우리에 대한 제2선 자금협력도 이런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 내년 하반기 이후 수입선 다변화 제도 폐지와 함께 일제 고급 소비재와 대중문화가 서서히 우리 안방을 차지할 염려도 있다. 지나칠 때는 사전제어할 수 있도록 이번 합의를 기초로 정부간 또는 민간 협의 채널을 가동하고 이에 필요한 인력을 확보해야 할 것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기초체력을 키우는 일이다.
  • 金 대통령 訪日 결산­전문가 특별 대담

    ◎“과거사 종결,미래 협력체제 구축을”/戰後 차세대 지도자 인적교류 시급/‘구조조정’ 日 역할 위해 ‘장벽’없애야/日 문화 자정능력 키워야 개방땐 유익 金大中 대통령의 국빈 방일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됨에 따라 21세기를 새롭게 열어갈 ‘신(新)한·일 공동협력 방안’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지난 한세기 동안 ‘가깝고도 먼 이웃’으로 머물렀던 한·일 두나라 관계의 바람직한 미래상을 吳淇坪 서강대 교수(국제정치학)와 金兌基 단국대 교수(경제학)의 특별대담으로 짚어본다. ▲吳淇坪 교수=외교라는 것은 ‘얻을 수 있는 최대한’을 얻어내는 것이다. 이번 金대통령의 방일 외교는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기대했던 것 만큼 얻었다고 볼 수 있다.한·일 공동선언의 가장 큰 의미는 양국간 과거청산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것이다.하지만 일본은 기본적으로 다원주의 사회다.과거와 같은 망언·돌출발언도 나올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제 한국이 정치력과 지도력을 갖고 대처해야 한다.방일을 계기로 과거사 문제는 이번에 완전히 종결을 짓고 미래지향적으로,21세기적 발상으로 협력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시급하다. ○‘미래 포럼’ 설립 절실 ▲金兌基 교수=이번 방일이 미래지향적 관계설정에 상당한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일부 분야에서 ‘말 잔치’와 ‘수사 외교’라는 과거 외교관행을 극복하지 못한 것 같다.실무진들의 준비부족으로 대통령의 의지와 비전을 뒷받침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미래가 없을 땐 과거가 발목을 잡게되지만 미래에 초점을 맞추면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해결방법이 다양해진다.이러한 의미에서 ‘한일 미래포럼’의 설립은 절실하다.앞으로 경제 문화 협력 방안 등 ‘21세기 동반자 관계구축’을 위해선 한·일 미래포럼 등의 상설기구가 주축이 돼야 한다. ▲吳교수=일본의 이번 사과는 한국 국민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과 문건으로 명문화시켰다는 점에서 상당한 진전을 이뤘다.앞으로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에 유익할 것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과거사 청산은 양국 협력의 기초를 마련한 것에 불과하다.더욱이 한·일 양국 모두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만큼 공동협력 관계가더욱 절실한 상태다. 하지만 현정권이 미국이나 일본 등 어느 일방으로 기우는 외교정책을 펴서는 안된다.내심 일본은 정권출범 이후 현정권이 미국에 편향되고 있지 않나하는 우려감도 표시했다.이번 방일이 일본의 이런 기우를 확실하게 잠재운 효과가 있다.앞으로 한국­미국­일본의 3국협력 체제를 큰 틀로 일본과의 협력방안을 공고히 해야 할 것이다. ▲金교수=과거사 해결을 위해선 진정으로 반성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하지만 다원 사회인 일본의 국민들이 한마음으로 사죄할 것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많은 일본 국민들은 지난 65년 국교정상화 협상에서 과거사 문제가 일단락됐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일본이 이번에 과거사 사죄를 명문화한 것은 큰 진전으로 받아들이고 과거의 늪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금까지 양국 정치인들이 과거사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측면이 많았다.일본 극우파는 ‘혐한(嫌韓) 의식’을,일부 한국 정치인들은 ‘반일(反日)감정’을 정치적 목적을 위해 ‘침소봉대(針小棒大)한 측면이 있다.이번 방일을 계기로 양국 지도층들이보다 성숙된 리더십을 키워야 할 것이다. ○對北 동북아 공동대처를 한·일 양국관계는 전후세대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방향이 돼야 한다.전후세대들이 양국의 중추세력으로 성장한 만큼 차세대 정치·경제 지도자와의 끊임없는 인적교류가 시급하다. ▲吳교수=최근 타결된 어업협정에 다소 불만이 있을 수는 있지만 우리도 적지않은 실익을 챙겼기 때문에 국민적 설득력을 갖는다.하지만 어업협정의 실효성은 앞으로 두나라 관계가 어떻게 진전될 것인지에 달려 있다. 북한 미사일 발사대응은 양국만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중국과 일본 미국 러시아 등 동북아 관련국들의 공동협력 차원에서 대응해야 하며 이런 기조의 연장선상에서 양국의 공동대응이 이뤄져야 한다.다만 이번 북한 미사일 발사가 일본의 극우파들을 상당히 자극했다.이런 측면에서 金대통령이 우리의 대북정책 등 햇볕정책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은 것은 잘한 것이다. ▲金교수=최근 타결된 한·일 어업협정은 시간적으로 대통령의 방일 일정에 맞췄기 때문에 실익 측면에서 적지않은 손해가 있었다.수년간 끌어왔던 협상치고는 실망스런 측면이 있다. 대북 대응은 무엇보다 동북아 국가들의 공동대처가 선행돼야 한다.앞으로 있을 일본과의 정상회담에서 북한의 도발을 강력히 경고하는 메시지를 담아 양국의 의지를 천명해야 할 것이다. ▲吳교수=이번 30억달러의 차관 등 경협 보따리는 우리에게도 유리한 조건들이다.과거처럼 옵션이 적기 때문에 IMF체제 극복을 위해서 유용하게 사용될 것으로 보인다. ▲金교수=이번 방일에서 일본이 풀어낸 ‘경제 보따리’는 사실 기대 이상의 선물은 아니다.오히려 한국의 경제 구조조정과 경기부양을 위해 앞으로 일본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기대되고 있다.일본이 한국의 제조업체 인수 등 구조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각종 투자장벽을 허물어야 한다. ▲吳교수=일본 문화개방은 단기적으로 문제점도 일어날 수 있다.하지만 폐쇄·고립된 상태에서 살 수 없는 것이 현재의 국제사회다.자정능력을 능동적으로 키우면서 일본문화를 소화할 경우 문화개방은 결과적으로 문화발전에 유리하게 작용될 수도있다. ▲金교수=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를 전환기로 삼아야 한다.단순히 행사에만 초점을 맞추는 실무 교류·협력이 아니라 스포츠와 문화교류 등 양국 국민들이 참여하는 이벤트를 계속해서 만들어야 한다. ○안보리문제 실익 얻도록 ▲吳교수=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일본이 한때 제의했던 ‘거부권 없는 상임이사국’ 정도는 오히려 환영할 수 있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金교수=‘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편협된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일본이 유엔 안보리에 진출하도록 돕고 우리도 이에 상응하는 실익을 얻으면 된다.이것이 ‘윈­윈 전략’이다.한국은 세계 강대국을 꿈꾸는 중국과 일본의 조정역할을 수행하면서 양자의 이해관계를 조절해야 동북아 전체의 균형을 이룰 수 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