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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 건너가는 日王 방한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는 올해 일왕의 한국 방문이 사실상 무산되는 분위기다. 외교통상부 고위 관계자는 12일 “건강문제와 한국 내 반대여론으로 일왕 방한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올해 77세인 아키히토 일왕은 전립선암 수술을 받은 바 있다. 지난 9일 권철현 주일대사도 “(일왕 방한은) 현재로선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오카다 가쓰야 일본 외상도 11일 한·일 외교장관 공동 기자회견에서 이 문제와 관련, “여러 사정을 감안해 신중하게 검토해 나가고자 한다.”고 원론적 입장을 견지했다. 일왕 방한은 노태우 정부 이후 이명박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우리 정부가 일본 측에 꾸준히 초청해 놓고 있는 사안이다. 공이 일본에 넘어가 있는 셈이다. 아키히토 일왕은 개인적으로는 한국에 오고 싶어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간무(桓武·재위 781~806년) 일왕의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라는 말을 권 대사에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왕의 해외 방문은 ‘국사(國事) 행위’로 정부가 최종 결정하는 사안이다. 때문에 일왕은 우리 정부 관계자를 만날 때 “해외 방문은 일본 정부가 결정하는 문제”라며 즉답을 피한다고 한다. 패전(敗戰) 전까지만 해도 일본 국민들에 의해 신처럼 받들어졌던 일왕의 해외 방문은 극히 민감한 문제라 일본 정부는 매우 조심스러워한다. 만에 하나 불상사가 일어난다면 그 부담은 정부가 고스란히 져야 하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일왕이 한국 땅을 밟았을 때 시위대와 맞닥뜨리는 상황을 가장 우려한다. 한국에 주재하는 한 일본 언론인은 “(일왕에게) 계란 한 개만 날아들어도 엄청난 사태라는 정서가 일본인들 사이에 있다.”고 했다. 아키히토 일왕은 지난 1992년 중국 난징(南京)을 방문했다. 난징은 일제가 중국인 30만명(중국 측 추산)을 학살한 곳으로 반일감정이 우리 못지않은 곳이다. 그런 험지(?)에 일왕이 발을 디딜 수 있었던 것은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이 시민들을 완벽하게 통제했기 때문이다. 반면 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에서는 시위를 100% 막기가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일본 정부가 갖고 있다고 한다. 실제 지난 7일 한국 내 시민단체들은 안중근 의사 유해 반환과 역사교과서 왜곡 시정, 독도 망언 근절 등의 문제가 선결될 때까지 일왕 방한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권 대사는 “일왕이 방한하려면 결정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뭔가가 있지 않고서는 힘들 것”이라고 했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한복입고 코리아 참맛 느껴보세요”

    “한복의 고운 선과 맵시에 빠져 보세요.” 서울 강남구는 민족의 명절인 설을 맞아 3일과 10일 이틀간 강남시티투어에 참여하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복 입기 체험행사를 연다. 구는 비영리단체인 ‘한국의 정신과 문화’(대표 송혜경)와 공동으로 강남시티투어 참여 외국인 30명을 대상으로 투어코스의 하나인 강남구청에서 1시간가량 한복 입기와 세배하기 체험행사를 실시한다고 2일 밝혔다. 이번 행사에 참가하는 외국인들은 구가 초청한 유치원생 2명과 함께 한국의 예절, 한복 설명, 한복입어보기 및 세배하기, 한복입고 기념사진 찍기 등의 프로그램을 체험하게 된다. 수정과와 다식 등 한국 전통음식을 나눠 먹는 즐거운 시간도 마련해 참가 외국인들이 우리 고유의 민속예법과 전통문화를 체험하는 뜻 깊은 추억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강남시티투어버스’는 올해부터 주2회 정기투어를 주3회(매주 화·수·금)로 늘렸다. 관광코스도 오전엔 코엑스~선정릉~강남구청~봉은사~국기원~U스트리트~코엑스, 오후엔 코엑스~한국문화재보호재단~청담화랑거리~은마종합상가~김치박물관~코엑스로 다양화해 운영한다. 특히 태권도(국기원), 전통다도 및 발우공양(봉은사), 김치담그기(대장금), 봉산탈 만들기(한국문화재보호재단) 등 체험코스는 외국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2008년 9월부터 운행을 개시한 강남시티투어버스는 영어, 일어, 중국어 등 전문 통역가이드가 탑승해 강남명소의 역사 등을 자세히 설명해 준다. 이용금액은 선정릉과 김치박물관 등의 입장료를 포함해 반일권은 1만원, 전일권은 2만원이다. 전광삼기자 hisam@seoul.co.kr
  • 전북 동부권 발전구역지정 추진

    전북도내 동부 산악지역이 농식품과 관광산업이 특화된 ‘신발전지역 종합발전구역’으로 개발된다. 도는 26일 남원, 무주, 장수, 진안, 임실, 순창 등 동부지역 6개 시·군을 신발전지역 종합발전구역으로 지정해 낙후지역 개발을 촉진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를 위해 전북발전연구원은 관광·식품을 양대 축으로 지속 가능한 휴양·레저 체험형 관광도시 조성과 신성장 녹색산업 개발계획을 수립 중이다. 전발연은 최근 ‘동부권 신발전지역 종합개발계획’ 중간보고회에서 적합한 개발 모델로 농식품산업과 관광산업을 제시했다. 전발연은 오는 4월 이전에 어느 곳에 종합발전구역을 지정하고 특화하며 투자자는 어떻게 유치할 것인지 등 세부 추진계획을 확정할 계획이다. 신발전지역 지정 대상은 동부 6개 시·군 3800㎢ 중 개발규제지역(수변, 백두대간, 상수원 보호지역)을 제외한 1740㎢다. 이 가운데 무주군은 적상산 일원, 진안군은 운일암 반일암 일대, 장수군은 승마레저타운 등이 지정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다. 임실군은 성수산, 남원시는 연수관광단지, 순창군은 강천산 일대가 신발전지역 적지로 꼽혔다. 도는 신발전지역 지정을 위해 시·군별 투자유치방안을 마련한 후 4월에 국토해양부에 구역지정을 신청할 예정이다. 신발전지역 지정은 낙후지역(성장촉진지역)의 민간자본 투자활성화를 촉진시키기 위한 것으로 개발 인·허가 기업의 세제 감면, 기업 지원 등의 각종 혜택을 준다. 이곳에 투자하는 민간기업은 법인세, 소득세, 농지보전부담금, 개발부담금 등 12종의 조세와 부담금이 감면된다. 또 34개 법률에 의한 66종의 각종 개발규제도 개발계획 수립만으로 풀리게 된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 [한·일 100년 대기획]일제시대 경제사적 평가 팽팽

    일제시대에 대한 평가는 잣대에 따라 다양하지만, 경제사 영역에서는 ‘식민지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이 팽팽히 대립한다. 자본주의 경제 발전이란 결과에 일제시대가 어떤 공과(功過)를 남겼는지를 두고 양 진영의 학자들은 여전히 날카롭게 각을 세운다. 1990년대 전까지는 일제시대를 ‘침략과 수탈의 시간’으로 보는 수탈론이 지배적이었다. 수탈론은 한국 자본주의의 맹아는 이미 조선시대에 싹 트기 시작했다는 ‘내재적 발전론’을 따른다. 그러면서 활발한 민족운동 등으로 자주적 근대화가 꽃피려 했으나 일제의 침략으로 그 가능성이 말살됐다고 주장한다. 고등학교 교과서도 기본적으로 수탈론을 바탕으로 한다. 그 역사적 사례로 드는 것이 토지조사사업·회사령·광업령·어업령 등이다. 정책의 옷을 입었지만 이는 결국 약탈의 방법이며, 일본 경제는 발전시키고 조선 경제는 몰락으로 내몰았다는 게 수탈론의 시각이다. 수탈론은 기본적으로 민족주의 지향의 성격이 있지만 단순히 반일 정서에 기대는 것은 아니다. 수탈론 이전 학계에는 일본 학자들이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든 ‘식민사관’이 팽배했었다. 이 역사를 왜곡하는 정체성론·타율성론·당파성론 등을 타파하고 바른 역사관 수립을 유도한 것이 바로 수탈론이었다. 이러한 수탈론에 다시 반발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일제시대를 평가하자며 나선 것이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1980년대 중반 일본 학계에서 ‘중진(中進) 자본주의’ 개념을 가져온 안병직 서울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중진에서 선진(先進)으로 가기 위한 사회경제적 구조 마련이 일제시대에 이뤄졌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는 선진 자본주의로 가기 위한 필수 조건인 ‘개방 체제’가 일본과의 각종 조약으로 마련됐으며, 이로써 조선으로의 자본과 기술 유입이 자유로워졌다고 주장한다. 또 후발 자본주의 사회일수록 정부 주도의 개혁이 필요한데 그 역할을 일본이 했다면서, 토지조사사업, 산미증식계획, 식민지공업화정책 등을 예로 든다. 이런 근대화론이 제시되자 학계는 비판을 쏟아냈다. 신용하 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등은 토지조사사업을 포함해 일제 정책은 애초 본질이 ‘수탈’에 있었다면서 반발했다. 그후 수탈론과 근대화론의 논쟁은 지루하게 이어졌으나, 각자 자기 입장을 재확인하는 것 외에 발전적 결론은 내놓지 못했다. 2년 전에는 이 논란이 학계를 넘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기도 했다. 2008년 뉴라이트 계열 단체인 ‘교과서 포럼’은 금성출판사의 근현대사 교과서가 친북·좌경이라면서 근대화론에 입각한 대안교과서를 펴냈다. 안 교수와 이 교수가 그 중심에 있었다. 대안교과서가 출간되자 학계는 물론, 정치·사회 전반의 논란을 불러왔다. 교과서 포럼의 예도 그렇지만 최근 수탈론-근대화론 논쟁은 경제사 영역을 넘어 정치·사회적으로 확산되는 양상이다. 해방 후 경제개발에 대한 평가와도 맞물리면서 친일·반공·독재·좌경·종북·진보·보수 등 이념색 강한 용어들이 섞여들게 됐다. 그러는 사이 두 주장에 대한 합의점이나 발전적 대안을 찾기가 전보다 더 어려워졌음은 물론이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한·일 100년 대기획] 민족종교, 항일독립운동 구심점

    19세기 후반 이 땅에는 대종교·동학·천도교 등 새로운 민족종교들이 발흥했다. 그러나 이들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세력이 급감했다. 일본 정부가 1915년 10월 종교 통제안을 공포, 민족성을 일깨우는 민족종교를 노골적으로 탄압한 결과였다. 당시 민족종교는 단순히 종교 차원을 떠나 민족을 지탱한 구심점으로서 큰 역할을 했다. 1920년을 전후한 4년은 민족종교의 항일 독립운동사에서 절정기에 속한다. 대종교의 경우 1대 교주 나철이 비밀결사조직인 유신회를 조직, 기울어지는 국권을 일으키고자 일본으로 건너가 ‘한·일·청 3국은 상호친선동맹을 맺고 한국에 대해서는 선린의 교의를 부조하라.’는 내용의 의견서를 일본정계에 전달했다. 이어 일본궁성 앞에서 사흘간 단식투쟁한 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귀국, 이완용·권중현 등 을사오적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다. 1918년에는 대종교 신도 및 독립운동 지도자 39명이 만주 동삼성에서 무오 독립선언서를 작성해 발표했고, 비밀결사단체인 중광단을 조직해 북로군정서로 발전시킴으로써 무장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시켰다. 특히 1920년 10월 북로군정서의 김좌진 장군은 일본군 1개 연대를 섬멸하는 청산리대첩을 이끌었다. 이에 일본 정부는 경신 대토벌작전을 전개, 대종교 교도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1919년에는 천도교가 주축이 돼 3·1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천도교는 3·1운동 직후 ‘특별 성미’로 교인 1명당 3~10원씩 모두 30만원을 모아 독립군의 군자금이나 임시정부의 활동비로 조달했다. 천도교는 개신교 신자가 불과 20만명에 불과했던 1920년에 300만명의 신도를 거느릴 만큼 이 땅의 대표 종교였다. 3·1운동 이후 일제는 최린 등 일본 유학생 출신 요인들을 포섭해 천도교를 분열시켰다. 또한 혁신세력을 통해 종교단체에서 사회개혁운동 단체로 전향하도록 유도해 종교로서의 권위를 잃도록 했다. 동학과 단군신앙을 결합한 민족종교인 청림교는 1920년대 무장조직 ‘야단’을 조직, 직접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다 대종교의 북로군정서와 합병해 북간도 지역의 반일무장투쟁단체들의 연합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청림교도들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 승리를 위해 군자금을 모으고 군수품을 제공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청림교를 ‘가장 극심한 민족독립운동단체’로 규정하고 1944년 청림교 사건을 조작, 120여명의 교인들을 체포하고 이 가운데 50~60명을 살해했다. 일본의 강도 높은 탄압에 결국 청림교는 소멸했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한·일 100년 대기획] 출렁이는 과거사·인적 청산 문제

    [한·일 100년 대기획] 출렁이는 과거사·인적 청산 문제

    지난해 11월8일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계기로 그동안 잠복해 있던 친일파 논쟁이 다시 불거졌다. 특히 기존에 독립유공자로 분류됐던 장지연 등 20여명의 이름이 이 사전에 올랐지만, 국가보훈처가 이에 대한 입장표명을 보류하면서 논란은 더 커졌다. 보훈처 관계자는 19일 “친일인명사전의 관련 내용을 검토하고 공적 자료 등과 비교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기본적으로 보훈처는 보훈대상 후보의 공적 사항만을 검토하는 곳이어서 친일행위를 평가할 권한이 없다.”고 말해, 논란에 휩싸이고 싶지 않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강점기역사 체계적 극복 실패 친일파 처벌을 둘러싼 최근의 논란은 ‘친일’에 대한 명확한 기준점을 제시하지 못한 광복 이후 우리 역사의 한계 때문이다. 우리 역사는 1910년 한·일병탄 이후 36년간의 암흑기를 체계적으로 극복해내는 데 실패했다. 일제는 한·일병탄 후 한국인의 동화를 표방하며 ‘내선일체’를 강조했다. 내지(일본)인과 반도인을 차별하면서도 황국신민으로서 국민적 일체감을 강조했다. 근대화라는 미명 아래 교육률이 급등하면서 동화도 가속화됐다. 1930년대 후반부터는 한국인 출신 교사, 보통문관시험을 거친 하급행정관료·경찰의 비율도 급격하게 올라갔다. 지원병·징병 형태로 군국주의 침략전쟁에 참전한 한국인만도 20만명이었다. 참전을 독려해 친일파로 지목된 춘원 이광수도 “조선 민족을 멸망에서 구하기 위한 행위였다.”라고 했다. 이런 현실은 광복 이후 민족주의자가 주도한 인적 청산에 장애가 됐다. 친일파·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반민족행위자 등을 인적 청산의 대상으로 개념화했지만, 객관적인 잣대를 들이대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더구나 친일청산 문제는 미군정 지배와 근대화 시대를 거치며 경제성장에 떠밀려 제대로 된 논의나 통합과정을 거치지 못했다. 간간이 학계를 중심으로 친일청산 문제가 거론됐지만, 민족주의 관점에서 시작된 인적청산 과정은 “역사학적 영역에 속한 부분을 정치적 논리로 재단할 수 없다.”는 반대 논리에 부닥쳤다. 최근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이나 박정희 전 대통령 등의 친일인명사전 등재 문제도 이런 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한 측면이 있다. 양승함 연세대 정치외교학 교수는 “광복 직후 객관적 사실에 따라 어떤 수준까지를 친일로 할 것인지 하는 잣대를 마련하지 못한 한계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면서 “시대상황을 감안하지 못한 엄격한 잣대가 민족을 둘로 갈라놓을 수 있다.”고 했다. ●“인적청산 정치논리로 재단 안돼” 친일청산의 한계는 정권마다 출렁인 한·일 관계에도 원인이 있다. 제헌국회는 1948년 10월 친일파 처벌에 대한 의지를 최초의 특별검사로 불리는 반민특위 조직으로 구체화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동안 사회 주류층을 형성해온 친일파를 흡수한 이승만 정권이 그들을 처벌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반민특위는 출범 1년만에 공소시효 단축과 특위 폐지의 외압에 시달렸다. 친일세력의 특위위원 암살 음모, 김구 선생 암살 등으로 특위는 사실상 와해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조사대상 7000여건 중 221건만 기소하고 12건에 대해 유죄판결을 이끌어냈지만, 그나마도 모두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5·16을 통해 장기집권에 돌입한 박정희 정권은 민족적인 반일 감정을 토대로 1965년 6월22일 한·일기본조약(한·일협정)을 이끌어내며, 한·일병탄의 무효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일본의 진정성이 담기지 않은 조약 문구로 ‘실패작’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박정희 정권은 반공과 미국의 지원을 정권 유지의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해 미국에 의해 동북아시아의 중심으로 지목된 일본과의 친선이 필요했다. 군 출신인 전두환·노태우 정권 역시 과거사 청산에는 큰 결실을 맺지 못했다. 각각 일본 역사교과서,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한·일관계의 최대 이슈로 떠올랐지만 과거사 청산, 한·일 관계 개선보다는 경제 개발 자금 조달 창구인 일본을 압박하는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됐다. 방일을 통해 아키히토 일왕에게서 각각 “진심으로 유감”, “통석의 염(念)”이라는 사과를 받아냈지만 외교적 수사에 불과했다는 비판이 따랐다. ●“한·일 미래지향적 신뢰구축을”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부는 한·일 간 최대 이슈였던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 1993년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에게서 처음으로 식민지배 인정과 과거사에 대한 반성의 뜻을 받아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과거사 청산 문제에서 새로운 물줄기를 열었다. 시민 중심의 과거사 청산 운동에 불을 댕겼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가 발족하면서 군사정권을 거치며 정치·경제 논리에 파묻혔던 친일반민족 행위에 대한 도덕적 평가와 논쟁이 벌어졌다. 이명박 정부는 54년만에 정권교체에 성공한 하토야마 내각의 전향적인 과거사 인식 전향에 기대를 걸고 있다. 하지만 과거사 청산문제가 보·혁 갈등으로 비화하면서 또다른 한계에 직면해 있다. 양 교수는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선 과거사에 결부해 미래에 영향을 끼치는 사이가 되어선 안 되고, 그렇다고 과거를 잊어버리고 진실을 왜곡한 채 이뤄지는 것도 옳지 않다.”면서 “양국 모두 대내외적으로 진실된 인식을 바탕으로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말했다. 홍성규 김정은기자 cool@seoul.co.kr
  • Car~리스마 중형차 한·일전

    Car~리스마 중형차 한·일전

    일본차 업체들이 올해 한국의 중형차시장을 단단히 벼르는 것 같다. 한국차의 장점인 ‘가격경쟁력’을 자신들의 무기로 삼았다. 반면 현대기아차는 ‘신차 효과’로 일본차의 공세를 잠재우겠다는 계산이다. 성능이 업그레이드된 신차는 일본의 ‘베스트 셀링카’에도 뒤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깔려 있다.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동시에 가격 파괴에 나선 일본차에 품질로 ‘맞불’을 놓은 현대기아차의 승부가 어떻게 전개될지 사뭇 흥미진진하다. ●2000만원대 중형 수입차 등장 8일 업계에 따르면 중형 세단에서 첫 2000만원대 일본차가 출시됐다. 미쓰비시모터스는 2010년형 ‘랜서(2.0)’ 모델을 국내에 출시했다. 놀라운 점은 무릎 에어백 등 다양한 편의사양을 확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가격이 360만~600만원 낮아졌다. 뉴 랜서의 가격은 부가세를 포함해 다이내믹트림의 경우 2990만원, 스페셜트림은 2750만원이다. 2000㏄급 4기통 가솔린엔진과 6단 자동변속기를 탑재했다. 현대차의 YF쏘나타와 르노삼성차 ‘뉴SM5’의 최고급 모델 가격이 각각 2700만원대, 2600만원대인 점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파격적이다. 한국닛산도 가격 파괴를 선도하고 있다. 지난 5일부터 4세대 ‘뉴 알티마’를 300만원가량 낮춰 판매하고 있다. 뉴 알티마는 프런트 후드 등 내부와 외부 디자인을 대폭 바꾸고, 성능과 편의장치도 개선했다. 6단 수동모드가 지원되는 최첨단 ‘엑스트로닉 무단자동변속기’를 장착한 뉴 알티마의 3.5, 2.5모델 연비는 각각 10.3㎞/ℓ, 11.6㎞/ℓ로 동급 최고 수준이다. 가격(부가세 포함)은 2.5모델 3390만원, 3.5모델은 3690만원이다. 업계에서는 현대기아차 뿐만 아니라 도요타 캠리, 혼다 어코드 등을 겨냥한 닛산의 승부수라는 분석이다. 그렉 필립스 한국닛산 대표는 “지난 한달 간 사전예약 물량이 500대를 넘고 있다.”면서 “올해 2500대의 뉴 알티마를 판매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도요타도 지난해 10월 캠리 2.5를 3490만원에 출시해 일본차의 가격인하 바람을 일으켰다. 혼다는 주력 모델인 어코드의 가격을 최대 10%(2.4모델 3590만, 3.5모델 4090만원) 내렸다. 그 결과 지난해 수입차시장에서 판매 1위를 차지했다. ●성능·연비·친환경 업그레이드 일본차의 가격 공세에 맞서 수성에 들어간 국내 업체들도 분주해졌다. 현대차는 오는 18일부터 YF쏘나타 2.4 모델을 출시한다. 현대차의 차세대 2.4ℓ급 가솔린 엔진인 ‘세타 직분사(GDI) 엔진’을 탑재해 성능과 연비, 친환경성을 업그레이드했다. 최고 출력은 201마력, 연비는 13.0㎞/ℓ로 동급 수입차보다 앞선다. 가격은 고급형이 2866만원, 최고급형은 2992만원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구형 쏘나타 2.4 모델보다 최고 출력은 12% 이상, 연비는 13% 이상 향상시켰다.”고 설명했다. 르노삼성차도 뉴SM5를 출시하며 시장점유율 확대에 나선다. 사전계약 물량으로 1만대를 돌파한 뉴SM5는 가격 대비 뛰어난 성능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기아차도 지난해 최고급 사양을 장착한 신차 ‘K7’를 출시하며 도요타 캠리에 맞불을 놓고 있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기계산업팀장은 “국산차의 가격 인상에 대한 역풍과 반일 감정의 약화 등으로 대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차의 판매 증가가 예상된다.”면서 “특히 일본차의 가격 인하가 심리적으로 현대기아차를 압박하는 요인은 클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요일제 車보험료 할인 문답

    금융당국은 10일 차내자가진단시스템(On-Board Diagnostics·OBD) 단자를 설치한 요일제 승용차에 대한 자동차보험료 인하 방안을 내놨다. 구체적인 내용을 문답으로 알아본다. →한해 40만~50만원의 보험료를 낼 경우 8.7% 할인하면 3만~4만원 정도에 불과하다. -보험개발원에서 요일제 차량과 일반 차량의 사고율을 비교해 보니 비슷해지는 추세를 보였다. 이를 감안해 8.7% 정도의 할인율이 적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요일제가 정착돼 요일제 차량 사고율이 낮다는 사실이 입증되면 할인폭은 더 커질 수 있다. →OBD단자 가격만 해도 2만~3만원인데. -단자 수명이 대략 10년 정도 된다. 한해만 따지면 할인폭이 작을지 몰라도 10년 정도 되면 30만~40만원 정도의 혜택이 생긴다. 단일 할인 혜택 가운데 8.7% 수준은 가장 높다. 혜택이 결코 적지 않다. →OBD단자는 모든 차량에 부착 가능한가. -전자시스템이라 10년 이상된 노후 차량은 부착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대수로는 105만대 수준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들도 혜택을 받고 싶다면 OBD단자 대신 간단한 차량용 블랙박스나 내비게이션 가운데 운행 기록을 남기는 기능이 있는 것을 설치하면 인정해 준다. →운행 기록 조작도 있는데 OBD단자의 조작 가능성은 없나. -OBD단자는 3중 보안장치가 있기 때문에 해킹 가능성은 극히 낮은 것으로 알고 있다. OBD단자나 블랙박스, 내비게이션 등에 대해서는 보험개발원 자동차기술연구소에서 인증위원회를 만들어 인증받은 제품을 쓸 경우에만 할인해 준다. 인증기준도 보험개발원 홈페이지에 공시할 예정이다. →OBD단자에는 모든 운행 정보가 담기는데, 사생활 침해 걱정은 없나. -요일제 준수 여부를 확인하는 최소한의 항목만 저장하도록 했고, 운행 기록도 보험사에서 열어보는 것이 아니라 운전자 본인이 USB 등을 이용해 보험사에 직접 전송하도록 했다. →주차 문제 등으로 차량을 잠시 이동하는 경우는 어떤가. -약관상 하루 1㎞ 이하 운행에 대해서는 요일제 위반이 아니다. 주차 문제 등으로 잠깐 운행하는 것은 문제없다. 차량 정비 때문에 OBD단자를 잠깐 뗐다가 다시 설치할 수 있는데 이 경우도 운행하지 않았다는 사실만 증명하면 된다. →올해 요일제 위반이 이틀이었는데 이 가운데 하루에 사고가 났다면. -예전에는 요일제 위반일에 사고를 내면 할인 혜택을 주지 않았다. 지금은 할인 혜택을 인정한다. 3일을 넘지 않았고 그 중 하루 사고를 냈다면 요일제 준수에 따른 혜택은 혜택대로 주고, 사고로 인한 보험료 할증은 할증대로 부여된다는 뜻이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일본은 ‘현대車 무덤’

    일본은 ‘현대車 무덤’

    일본차의 국내 시장 잠식이 무섭다. 반면 일본 시장은 여전히 ‘현대 자동차의 무덤’이다. 9일 자동차업계에 따르면 현대차는 올 들어 지난달까지 일본에서 786대를 파는 데 그쳤다. 지난해 연간 판매량 5 01대와 비교하면 늘었으나 현지 수입차 시장점유율은 0.54%에 불과하다. 게다가 올해 일본 수출량 523대를 뺀 나머지 263대는 지난해 재고분이 소진된 것이다. 이런 추세라면 올해도 1000대 팔기가 버겁다. 반면 일본차는 야금야금 뿌리를 내리고 있다. 도요타 브랜드는 론칭 3주 만에 5200여대의 계약판매고를 올리며 질주하고 있다. 현대차는 2001년 일본에 진출했다. 같은 해 일본 도요타도 렉서스라는 브랜드를 앞세워 한국행 배를 탔다. 9년이 흐른 지금 두 회사의 희비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현대차는 2002년 월드컵 특수를 바탕으로 일본에서 몇 년간 연간 2000대 안팎 팔았으나 이후 철처히 외면당했다. 전문가들은 “경소형차 비중이 3분의2를 넘고 주차장이 협소한 일본의 특성에 맞춘 현지 전략 차종 개발에 실패했다.”고 지적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일본차는 현지화에 성공하고 있다. 렉서스(도요타), 혼다, 닛산 등 일본차는 2001년 국내 진출 첫해 반일감정 등에 밀려 841대밖에 팔지 못했다. 그러나 2006년 1만대를 넘기더니 지난해에는 2만 1912대를 팔았다. 지난해 국내 수입차 시장점유율도 35.5%까지 끌어올렸다. 올해도 지난달까지 1만 2229대를 팔았다. 특히 지난달 21일 국내 진출한 도요타 브랜드는 누적 계약대수 5200대를 넘었다. 캠리는 지난달 열흘 만에 529대를 팔아치웠다. ‘일본차 바람’은 경쟁 모델인 현대차의 쏘나타, 그랜저 등이 상대적으로 ‘가격 대비 품질’에서 미흡하다는 소비자 판단이 개입된 결과로 업계는 분석한다. 쏘나타는 98년 EF쏘나타 출시 이후 가격이 72%(최고급 트림 기준) 뛰었다. 같은 기간 물가상승률(37.5%)의 두 배에 가깝다. 반면 일본차들은 같은 기간 가격이 크게 오르지 않았다. 김필수 대림대학 자동차학과 교수는 “현대·기아차가 내수 점유율 85%의 보호망 속에서 소홀히 해 온 차량 가격 합리화, 품질 개선, 애프터서비스 강화에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 [시론] 정부가 없으면 공무원노조도 없다/이창원 한성대 행정학과 교수·조직학박사

    [시론] 정부가 없으면 공무원노조도 없다/이창원 한성대 행정학과 교수·조직학박사

    요즘 많은 분들이 공무원들의 사용자인 국민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야 할 공직사회가 뭔가 어수선하고 안정감을 잃고 있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아마 전공노·민공노·법원노조 등 3개 노조가 통합해 거대 공무원노조가 나타났고, 이 노조가 바로 민노총 가입을 결정하면서 나온 우려 때문일 게다. 우려의 핵심은 통합노조의 민노총 가입이 공무원과 공무원노조의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헌법과 관련 법률의 위반일 수도 있다는 주장이 점점 설득력을 얻고 있다는 데 있다. 헌법에 규정돼 있는 바와 같이, 국민 전체의 봉사자로서 특정 정당에 관계없이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공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공무원들의 정치적 중립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만일 공무원들이 조직적으로 특정 정치세력을 지지한다고 상상해 보라. 우리 사회에서 막강한 파워를 행사하는 관료들이 특정 정파의 이익을 위해 뛴다면 그 폐해는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결국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이라는 것은 부여된 직무를 공평무사하게 수행하고, 특정 정파의 이익을 위한 정치활동을 금지하며, 오로지 헌법의 근본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수호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필자는 공무원 노조의 민노총 가입 자체가 불법은 아니라고 본다. 민노총이 곧 정당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민노총이 민노당 창당의 중요한 모태가 되었고, 민노당 당원 중 가장 큰 비율이 민노총의 조합원들이라는 사실, 이미 여러 번 과시된 민노총과 민노당의 특별한 관계에 있다. 물론 일부의 주장이지만, 만일 민노총과 민노당이 실제로는 하나의 단체나 다름없고, 그런 측면에서 민노총은 정당적 노동단체라고 볼 수 있다면, 민노총 가입은 민노당에 가입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 경우 결국 공무원 노조의 민노총 가입은 공무원노조법 제4조의 정치활동금지 원칙에 위배된다는 해석까지 가능할 것이다. 조합원의 의사보다는 정치투쟁 위주의 민노총, 여기에 대안세력이 못 되는 한노총, 또 위법논쟁을 일으키면서까지 민노총에 가입하는 공무원노조, 몇 달 전부터 가시화됐던 공무원노조의 민노총 가입 움직임에 사실상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한 정부 등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거의 모든 참여자들은 국민의 사랑에서 멀어지고 있다. 공무원노조가 민노총에 가입하는 것은 노조의 투쟁력을 높이는 데는 도움이 될 게다. 하지만 국민은 사실상 실직 위험도 없는 공공기관 노조원들의 임금 및 복지수준을 수많은 비정규직 근로자 및 사회 취약계층과 비교할 수밖에 없고, 이런 상황에서도 ‘이중의 보호막’을 치고야 마는 공무원노조의 행태에 실망하게 된다. 지난 9월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2009년 국가경쟁력 평가결과’를 보면, 우리나라의 국가경쟁력은 노사협력 부문이 131위, 고용·해고 관행에 대한 평가가 108위를 기록하는 등 투쟁적 노사관계가 그대로 반영됐다. 공무원노조가 국가경쟁력 하락과 사회적 비용을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가지 않기 위해선 노조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라는 미망에서 벗어나야 한다. 공무원 노조는 자신들의 민노총 가입으로 민노총을 기사회생시키는 것에 감동할 국민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공무원노조는 “공무원이 먼저냐, 노조원이 먼저냐?” 하는 질문에 먼저 답해야 한다. 당연히 공무원이 먼저일 수밖에 없다. 정부라는 조직 없이는 그들이 우선 공무원 노조원이 될 수 없다. 정부가 없으면 공무원도 없고, 공무원노조도 없다. 이창원 한성대 행정학과 교수·조직학박사
  • 역대 日王 방한 추진사례

    이명박 대통령이 15일 연합뉴스, 일본 교도통신과의 공동인터뷰에서 아키히토 일왕의 방한문제에 대해 긍정적인 의사를 밝힘으로써 내년 일왕의 방한이 급물살을 탈지 주목된다. 일왕의 방한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거론된 것은 고(故) 김대중(DJ) 전 대통령 재임시절이다. DJ는 대통령 후보시절부터 한·일 과거사 문제를 종결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일왕의 방한 문제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그러나 대통령 당선 직후인 지난 1998년 1월 일본이 일방적으로 한·일 어업협정을 파기하자 DJ는 일본 정부의 방침을 비난하면서 “일본과의 관계를 다시 세우려는 목적으로 일왕의 방한을 위한 여건을 만들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유감스럽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일왕 방한 추진을 포기하는 듯했다. 하지만 취임 이후 DJ는 당시 하시모토 류타로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일왕의 방한 문제를 다시 거론하며 긍정적 입장을 밝혔다. 일왕의 방한 문제가 기존의 한·일 정상회담에선 단 한 번도 논의된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특히 DJ는 지난 1999년 한·일 각료 간담회 참석차 제주도를 방문한 오부치 게이조 당시 일본 총리에게 “앞으로 오부치 총리와 협력해 아키히토 일왕 방한과 월드컵의 성공적인 공동개최를 이루고 싶다.”고 밝혀 일왕 방한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협력을 당부했다. 이에 따라 2002년 한·일 월드컵 개막식에 아키히토 일왕의 방한 가능성이 높게 점쳐졌으나 결국 일본 정부의 반대로 성사되지는 않았다. 앞서 김영삼(YS) 전 대통령도 취임 이후 군사정부와 문민정부와의 차별성을 위해 일왕 방한을 추진했으나 국내 종군위안부 등 반일 여론에 의해 성사시키지 못했다. 이와 관련, 외교부 관계자는 “과거 대통령들은 대부분 일왕의 방한을 추진했기 때문에 정부가 일왕의 방한을 계속 초청해 놓은 상태라고 보면 된다.”면서 “그동안 일본측에서 일왕의 방한에 대해 이렇다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김대중 前대통령 서거] 사선 다섯번 넘어… 민주주의 유토피아 꿈꿨다

    [김대중 前대통령 서거] 사선 다섯번 넘어… 민주주의 유토피아 꿈꿨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인동초’, ‘행동하는 양심’으로 불리며 반세기 한국 정치사를 풍미했다. 한국 정치사에서 ‘3김(金)시대’의 한 축이었던 고인(故人)은 1997년 겨울, 반세기만에 ‘선거혁명’을 통한 정권교체를 이뤘다. 3전4기로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는 외환위기를 극복했고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켜 한반도 정세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5차례의 죽을 고비와 5년여의 감옥생활, 6년여의 가택연금, 3년의 망명생활 등 고인의 삶은 견디기 어려운 시련으로 점철됐다. 가톨릭 세례명인 ‘토마스 모어’처럼 고행하는 구도자의 삶을 이어온 셈이다. “정이 많은 분이다.” 영원한 비서실장인 민주당 박지원 의원은 김 전 대통령을 이같이 묘사했다. 말년에도 거의 매일 서울 동교동 자택을 드나든 박 의원은 “지난 1월 민주당 정세균 대표가 방문해 용산참사에 대해 말을 꺼내자 이내 김 전 대통령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면서 “평소에도 드라마 속 (비참한) 사람들을 보며 눈시울을 붉힐 만큼 평소 인정도 많으셨다.”고 전했다. 말년에는 미국의 버락 오바마 행정부 등장과 맞물려 케네디 전 대통령과 관련된 책을 탐독하고 여론주도층을 만나 서민과 비정규직을 위한 사회 안전망, 생산적 복지를 강조했다고 한다. 전남 목포에서 뱃길로 150리. 김 전 대통령은 1924년 매서운 바닷바람을 등진 하의도라는 작은 섬에서 3남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는 지금도 생가터가 남아 있다. ‘후광’(後廣)이라는 호(號)도 여기서 따왔다. 중농의 아들이었던 그는 목포상고(현 전남제일고)에 수석 입학한 수재였지만 반일운동으로 학적부에 ‘시찰계요’라고 적힐 만큼 반골기질을 드러냈다. 1945년 약관의 나이에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 신민당에 입당했지만 8개월 만에 탈당한다. 이어 3단계 통일방안(1972년)과 광주 민주화운동(1980년) 등을 거치면서 색깔론에 휘말렸다. 고인은 1946년 첫 부인 차용애 여사와 가정을 꾸리고 해운회사를 경영, 큰돈을 모은다. 뛰어난 상술로 목포일보를 인수한 뒤 주필을 겸하기도 했다. 자금을 끌어대고 경쟁상대를 꺾으며 사람의 마음을 낚는 장사와 정치는 닮은꼴이다. 1950년 한국전쟁 때는 우익단체 참여를 빌미로 인민군에게 처형될 위기에 몰렸지만 이송 중 극적으로 탈출, 첫 죽음의 고비를 넘긴다.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에서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며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들었다. 3대를 포함, 4차례 낙선의 쓴잔을 연거푸 마셨다. 1958년 강원도 인제군 민의원 선거 때는 후보등록이 취소됐고, 1959년 보궐선거에선 색깔론에 휘말렸다. 4·19혁명이 일어난 1960년 선거에서도 낙선했다. 1961년 인제군 보궐선거에서 당선의 첫 기쁨을 누린 김 전 대통령. 하지만 사흘 만에 5·16을 맞아 반혁명사건에 연루돼 교도소로 직행한다. 토머스 모어의 교훈은 오히려 고난 극복의 힘이 됐다. “늦어도 100년 뒤면 (토머스 모어처럼) 역사에서 재평가받을 것”이라며 고통을 이겨냈다. 1962년 이희호 여사와 재혼한 고인은 이듬해 목포에서 민주당 후보로 공화당 후보를 제치고 당선됐다. 1964년 5시간20분간 행한 ‘필리버스터’ 발언과 6개월간 13차례 본회의 발언 등은 지금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1971년 7대 대선은 기회이자 시련의 계기였다. 1970년 45세의 나이에 ‘40대 기수론’의 라이벌 김영삼(YS) 전 대통령을 물리치고 신민당 후보로 나섰지만 이듬해 선거에선 94만표 차로 패배했다. 이후 20년간 혹독한 시련이 밀려왔다. 일본 망명 중인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을 시작으로 전두환 군사정권까지 55차례의 연금생활, 5년반 동안의 감옥생활, 2차례의 망명생활을 겪었다. 1976년 명동 3·1구국선언으로 구속(긴급조치 9호 위반)됐고, 1981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훗날 고인은 “솔직히 죽는 것이 두려웠지만 영원히 사는 길을 택했다.”고 회고했다. 가톨릭계의 구명운동 덕에 목숨을 건진 고인은 1982년 도미, 두 번째 망명길에 오른다. 한국인권문제연구소와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이끌며 민주화 운동의 외로운 무게중심이 됐고, ‘인동초’란 별칭도 얻게 된다. 1985년 12대 총선을 앞두고 전격 귀국한 고인은 김포공항에서 연행돼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하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만든 신한민주당이 2·12총선에서 109석을 확보, 1987년 6월 항쟁의 기틀을 마련한다. 사면복권 뒤 1987년 13대 대선에 출사표를 던졌지만 3위에 머무르며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후보 단일화 실패에 따른 비난에 휩싸였다. 1988년 총선의 평민당 ‘황색 돌풍’으로 일선에 복귀했지만 1992년 12월 대선에서 패배한 뒤 정계은퇴를 선언한다. 고인은 “40여 년의 파란 많았던 정치생활에 사실상 종막을 고한다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다.”며 대선 낙선의 소회를 곱씹었다. 막을 내릴 것 같던 정치인생은 영국으로 건너간 지 6개월만에 다시 불꽃을 살렸다. 1993년 귀국해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했고, 빗발치는 비판 여론을 무릅쓰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이듬해 총선에서 제1야당으로 올라서자 대선 4번째 출마를 선언한다. ‘대통령병 환자’라는 비난이 일었지만 단 1.6%포인트의 표차이로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색깔론과 지역감정의 벽을 넘었다. 보수세력인 자민련과의 DJP연합이 힘이 됐지만, 역설적으로 색깔과 지역의 부조화스러운 조합이기도 했다. 고인의 대표 브랜드는 ‘햇볕정책’이다. 반세기 동안 닫혔던 북쪽의 문을 열게 하는 열쇠로, 서독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과 궤를 같이한다. 이를 바탕으로 이뤄진 역사적 남북정상회담은 한반도가 ‘레드 콤플렉스’를 벗어던지고 탈냉전체제로 진입하는 촉매제가 됐다. 고인을 한반도 유일의 노벨상 수상자로 만든 일대 사건이었고, 퇴임 뒤에도 논쟁이 있는 사안에 대해 비중있게 언급할 수 있는 유일한 지위를 부여했다. 고인은 대통령 임기말 측근들의 비리가 뒤늦게 터진 데다 아들들이 구속되는 등 마음고생도 적지 않았다. 6·15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북한과 밀거래한 사실은 안타까운 기록으로 남게 됐다. 또 완벽주의와 제왕학적 리더십은 권위주의적 통치라는 오명도 남겼다. 오상도 허백윤기자 sdoh@seoul.co.kr
  • “안중근 의거 中의 반일 애국주의 교과서”

    “안중근 의거 中의 반일 애국주의 교과서”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26일 하얼빈역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하얼빈 의거는 조선의 독립 의지와 일본의 침략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올해 100주년을 맞아 안중근 의거가 한·중·일 등 국제사회에 미친 영향을 재조명하는 자리가 마련된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7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안중근 의거의 국제적 영향’을 주제로 학술심포지엄을 연다. 손염홍 건국대 교수가 미리 배포한 발표문 ‘안중근 의거와 중국의 반제 민주운동’에 따르면 안중근 의거 직후 중국 혁명파와 입헌파의 평가는 엇갈렸다. 그러나 5·4운동이 끝나고 신민주주의 혁명기에 들어가면서 안중근 의거는 반일 애국주의 교육의 상징으로 부상하고 교과서로 활용돼 다양한 방식으로 중국 혁명에 계속 영향을 미쳤다. 특히 박은식이 1914년에 발간한 ‘안중근’ 전기는 안중근 의거가 단순히 한국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동양의 평화를 위한 것임을 강조함으로써 한·중이 연대해 반제 항일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사상적 기초가 됐다고 손 교수는 분석했다. 안중근은 1907년 가을부터 1909년 10월까지 러시아 한인사회를 두차례 순방하며 동의회와 동의단지회를 결성하는 등 러시아지역 항일운동을 주도했다. 반병률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러시아에서의 안중근의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재해석’에서 “안중근의 거사는 한인단체들이나 한민학교의 연설회, 연극 등의 행사에 단골 주제로 등장해 러시아 지역 한인들의 항일의식과 독립의지를 고취시켰다.”고 했다. 안중근 의거에 대해 일본 사회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이규수 순천향대 교수는 “일본 언론계는 안중근에 대해 ‘미친 개’라는 표현을 주저하지 않았고, 안중근으로 상징되는 조선인의 저항에 대해서도 ‘괴물’ ‘마물’이라는 극단적인 멸시감을 유포했다.”면서 “이토 공을 죽인 한국을 멸망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언론의 비호를 받으면서 더욱 확산되었고, 이후 한국 강점을 주장하는 논리로 발전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안중근 의사의 업적에서 그가 주창한 ‘동양평화론’을 빼놓을 수 없다.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서 자서전을 탈고한 뒤 ‘동양평화론’ 집필을 시작했으나 끝맺지 못했다. ‘안중근 의거와 동양평화론의 현대사적 의의’를 주제로 발표하는 윤경로 한성대 교수는 ▲뤼순의 개방 ▲한·중·일 3국 평화회의 구상 ▲공동은행 설립 ▲공동 군단 설립, 교육 ▲상공업 발전 ▲로마 교황으로부터 3국 독립보장 등을 동양평화론의 핵심으로 요약했다. 윤 교수는 “오늘의 유럽공동체(EU)와 같은 아시아 경제공동체를 100년 전에 이미 구상했던 것은 참으로 놀라운 탁견이자 예지”라면서 “안중근 의거와 동양평화론은 진정한 의미의 세계화를 위한 평화운동이며, 이 점이 안중근 의거의 현대사적 메시지”라고 말했다. 심포지엄에서는 이 외에 윤병석 인하대 명예교수가 ‘안중근 의거의 역사적 의의’에 대해 기조연설하고, 장석흥 국민대 교수가 ‘안중근 의거의 국제성과 그 영향’을 주제로 발표한다. 한시준 단국대 교수, 방광석 고려대 교수, 윤선자 전남대 교수 등이 토론자로 참여하고, 신용하 이화여대 석좌교수의 주도로 종합토론이 이어진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2030] 직장인들이 말하는 아부의 기술

    [2030] 직장인들이 말하는 아부의 기술

    “아이 선배님~ 선배님 없으면 제가 어떻게 살았겠어요~.” 분장실에서 벌어지는 선후배 사이의 권력관계를 적나라하게 그린 한 방송 프로그램이 요즘 인기다. 그 중에서도 후배에겐 윽박지르고 선배에겐 아양떠는 캐릭터가 폭소를 자아낸다. 선배의 말이라면 “무조건 맞다.”며 온갖 아부를 서슴지 않는 모습은 마치 ‘아부의 기술’이 현대사회에서 꼭 필요하다는 걸 방증하는 것 같아 씁쓸함마저 자아낸다. 2030들이 생각하는 ‘아부의 기술’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아부의 현실과 한계는 무엇인지 들어 봤다. 아부를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은 없을 터. 단지 “사회생활을 하는데 유용하기 때문에” 하는 경우가 태반일 것이다. 2030세대들은 ‘회사 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상사와의 인간관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아부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서울의 한 동사무소에서 복지 업무를 3년째 맡아 하고 있는 강모(28)씨는 ‘앓는 소리’의 귀재다. 민원인들과 하루종일 씨름을 하고 나면 선배들에게 달려가 하소연하는 것이 강씨의 하루 일과다. 동사무소에 있다 보면 가끔 난감한 민원인을 만날 때가 있다. 술 마시고 매일 같이 동사무소에 찾아와 “이번 달 보조금이 5만원이나 빈다.”며 강씨를 사기꾼으로 몰아가는 할아버지도 있고, 5분마다 한 번씩 전화를 걸어 ‘인감을 떼어 와라, 몸이 아파 꼼짝도 못하겠으니 밥을 시켜 달라.’며 괴롭히는 할머니도 있다. 이런 민원인들을 오랫동안 숙련되게 다뤄온 선배들의 노하우를 얻는 것이 강씨에겐 꼭 필요한 일이다. 노하우를 얻기 위해 강씨가 쓰는 방법은 자신의 무능력을 한탄하는 것. “선배들이 딱하다며 혀를 끌끌 찰 정도로 제 자신을 비참하게 만든 뒤 ‘난감한 민원인을 훌륭하게 처리해온’ 선배들을 치켜 세우죠. 그럼 선배들은 제게 노하우를 털어 놓기 시작해요.”라고 강씨는 말했다. 선배들은 “지금은 동사무소에서 민원인 치다꺼리를 하면서 고생해도 열심히 하면 시청으로 발령날 수도 있고 승진도 바라볼 수 있다.”며 진심어린 충고도 잊지 않는다. 강씨는 “아부가 목적인 아부는 의미가 없어요. 아부를 통해서 나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직장생활 노하우를 얻는 게 더 현명하죠.”라고 말했다. 효과 만점 ‘아부의 기술”에 대해 많은 2030들이 고민을 하고 있었다. 대놓고 아부를 하는 것과 은근슬쩍 아부를 하는 것을 놓고 어떤 방법이 더 효과가 있을지 결정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로 보였다. 해운회사 늦깎이 신입사원인 임모(31)씨는 ‘정공법’을 선택한 케이스다. 자신을 망가뜨리면서 회사내의 귀염둥이가 되는 것. 이런 방법으로 임씨는 입사 반년 만에 상사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임씨가 말하는 비결은 “선배들이 시키면 무조건 하고 능력을 120% 발휘하면 된다.”는 것. 임씨는 신입사원 연수 때부터 동기 30여명 가운데 가장 눈에 띄었다. 뛰어난 언변과 유머감각으로 과제수행 프레젠테이션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의 주무기는 뒤풀이 때 빛을 발했다. 술은 주는 대로 마셨고 노래는 트로트부터 랩까지 소화하면서 코믹 댄스까지 곁들였다. 과장, 부장은 물론 이사급 이상 임원진도 임씨를 보며 배꼽을 잡고 웃었다. 마케팅 부서에 배치된 임씨는 첫주부터 거래처 고객의 술자리에 불려 나갔다. 매주 두차례 이상 같은 부서의 김모 과장을 따라 술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노래와 춤 실력을 선보였다. 분위기 메이커인 임씨를 ‘영업에 최대한 활용하라.’는 임원진의 주문이 있었다면서 김 과장은 임씨에게 미안해 했다. 물론 매번 과음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과격하게 몸을 흔들고 난 뒤 온 몸이 쑤시는 아픔도 있다. 그러나 임씨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게 제 능력이죠. 그 능력으로 상사들에게 인정받는다면 회사에서 입지를 굳히는데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라고 되물었다. 그는 “기쁨조가 되어서 상사를 즐겁게 하는 게 아부의 정공법”이라고 정의내렸다. 올해 초부터 서울 한 중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일하기 시작한 김모(26)씨는 요즘 ‘포인트 아부’에 대해 배우고 있다. 같은 대학 출신의 선배 교사 A씨에게서다. 김씨는 A씨에게 업무처리법부터 시작해 교무실의 다른 선생님들의 성향까지 크고 작은 정보를 얻어 왔다. 사회생활이 처음인 김씨는 A씨의 업무처리 능력과 대인관계 조절능력에 큰 감명을 받았다. 당연히 A씨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며 지내게 됐다. 그러던 어느날 A씨와 저녁식사를 함께 하던 김씨는 ‘놀라운 비밀’ 한 가지를 듣게 됐다. “내가 학교 생활 잘 하는 비결 하나 가르쳐 줄까?”라며 A씨는 자신의 ‘처세술’ 강의를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윗사람에게 잘 아부하는 방법’이었다. “드러내 놓고 아부하는 것처럼 바보 같은 짓이 없어요. 가장 최고급 아부는 하는 듯 안하는 듯 은은하게 하는 거야.”라고 설명하는 A씨의 ‘아부 병기’는 ‘포인트 아부’였다. 우선 아부가 잘 먹힐 만한 상사를 몇 사람 정해 놓는다. 대학 선배라든가 고향 선배, 혹은 지인의 지인 등등이 좋은 예다. 그런 뒤 정말로 ‘응원의 한 마디’가 필요한 시점에 한 마디를 툭 던지고 지나간다. 예를 들어 상사가 내놓은 의견이 교무회의에서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을 때 회의 직후 “그 아이디어 좋았는데 왜 그렇게 됐을까요.”라며 심정적 지지를 하는 식이다. 어려울 때 지원을 받은 상사들은 A씨를 잊지 않고 꼭 챙기게 된다는 것이다. 김씨는 A씨의 얘기를 들으며 “아부 고수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란 생각을 하게 됐다. 은행원 박모(28)씨도 ‘은은한 아부’의 예찬자다. 박씨는 “아부 덕분에 5년 전 군생활을 편하게 했다.”고 당당히 말한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아부의 달인’이었는데, 박씨가 세운 아부의 두 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원칙은 ‘남에게 들은 말을 활용해 아부하라.’는 것. 다른 사람이 칭찬한 것을 전해 주는 식으로 선임병에게 아부하라는 원칙이었다. 예컨대 부대의 한 장교가 ”김 병장이 평소보다 일찍 나왔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이등병이었던 박씨는 “아무개 장교가 김 병장님이 너무 성실해 일을 맡기는 게 가장 미더운 사병이라고 하더라.”라고 전하는 식이었다. 남의 의견을 포장해 전하면 자신의 의견인 양 말할 때보다 아부의 효력이 배가된다는 게 박씨의 설명이다. 두 번째 원칙은 ‘구체적으로 하라.’였다. “많은 후배들이 든든한 김 병장님을 믿고 따른다.”고 추상적으로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김 병장님은 아침저녁 내무반 쓰레기통을 손수 비우실 정도로 사소한 일에도 모범을 보여 후배들이 믿고 따른다.”며 콕 집어 아부하는 것이다. 박씨는 “아부의 다른 말은 칭찬”이라면서 “적절한 아부 덕분에 내가 실수를 해도 선임들이 크게 혼내지 않고 웃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털어 놓았다. 과유불급이라는 말도 있듯이 지나친 아부는 자신을 해친다. “이렇게까지 해서 사회생활을 해야 하나.”라는 자괴감에 빠지기 십상이다. 또 지나친 아부는 ‘역효과’를 불러와 왕따를 자초하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 2년차 직장인인 심모(29)씨는 요즘 자괴감에 빠져 있다. “나도 닳고 닳은 사람이 다 됐구나.” 하는 생각에서다. 공대를 나온 심씨는 대학 때만 해도 ‘아부’가 무엇인지조차 몰랐다. 남자들이 많은 공대의 특성상 ‘아부’는 그저 ‘낯 간지러운 소리’로 치부됐기 때문이다. 심씨가 본격적으로 ‘아부’를 배운 곳은 군대였다. 행정병으로 일한 심씨는 사무실에서 난무하는 은근한 아부를 목격하며 충격을 받았다. 선임병 치켜 세우기는 기본이고 초코파이를 건네는 등 물량 공세도 서슴없이 진행됐다. 군대에서 아부의 ‘기본기’를 익혔다면, 회사에서는 ‘응용편’을 써야 했다. 마케팅 업무를 맡고 있는 심씨는 ‘라인’을 만들기 위해 온갖 아부를 서슴지 않는 동료와 선배들을 보면서 “나도 가만히 있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심씨가 보기엔 기발하지도 않은 상사의 아이디어에 “그것 괜찮겠네요.”라고 공치사를 하는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하다 보니 ‘추진력’이 붙었다. 이제 “팀장님 요새 아이디어가 샘솟으시나 봅니다.” 같이 낯뜨거운 말도 익숙해졌다. 심씨는 “사회생활을 하려면 어느 정도의 아부는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속마음과 다른 말을 일상적으로 하려니 스트레스가 밀려 온다.”며 씁쓸해 했다. 2년차 회사원인 김모(27)씨는 지나친 아부로 역풍을 맞은 케이스. 김씨는 요즘 점심을 혼자 먹는 ‘대굴욕’을 감당하고 있다. 2개월 전 새로 부임해온 팀장에게 지나치게 아부를 했다가 주위 동료들의 견제를 당한 것. “처음에는 팀장님 몰래 책상에 꽃을 갖다 놓거나, 음료수를 살짝 놓거나 하는 방법으로 관심을 끌려 했어요. 그러다가 팀장님 집이 저희 집과 같은 방향이라는 걸 알고 아침에 제 차로 모시러 가겠다고 팀장님께 귀띔을 드렸어요. 그렇게 일주일 동안 눈도장을 열심히 찍었죠.” 문제는 김씨가 팀장과 함께 출근을 하는 사실이 일주일 만에 들통난 것. 동료들은 “김씨가 너무 튀려 한다.”며 견제를 하기 시작했다. 결국 김씨는 동료들에게 ‘왕따’를 당하고야 말았다. 김민희 유대근 오달란기자 haru@seoul.co.kr
  • [고미영씨 사고로 본 한국 고봉등정] 대책은 없나

    산악 전문가들은 히말라야에서 유명을 달리한 고미영(42) 대장의 사고에 대해 “불확실성에 대한 탐험가의 무한도전도 좋지만 기록경쟁에 휘둘리는 상황을 사실상 방관하는 시스템에도 문제가 있다.”고 꼬집는다. A씨는 13일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가도록 분위기를 만드는 게 고난도 등반엔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이를 간과할 경우 불상사의 우려를 안고 등반하게 된다는 얘기다. 짧게는 대학 때부터 고봉(高峰)을 오르는 데 기초적인 경험을 쌓아야 최고 난이도의 산악을 오를 수 있는 근력과 기술을 익힐 수 있다. 예컨대 8000m가 넘는 최고봉 등정을 위해서는 대규모 원정대에 연습생 신분으로 거리별 경험을 차례로 해야 한다고 A씨는 덧붙였다. 반면 고씨는 클라이밍 분야에서 세계적인 선수였지만 고산 등반에선 2006년 히말라야 6위 봉우리인 초오유(8210m) 등정으로 단박에 첫발을 내디뎠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외국의 경우 한번 등정에 짧아도 50일 이상, 길면 3개월이 걸릴 정도로 충분한 시간을 두는 것도 곱씹어 볼 만하다. 해발 2500m 정도부터 산소 부족으로 생기는 고산 증세는 베테랑 산악인에게도 위협적이기 때문. 그래서 하루 400∼500m씩 고도를 높여 베이스캠프까지 걸어가고, 6000∼7000m까지 올라가 고산 적응을 충분히 한 뒤 정상 공격에 나선다. 지난 3월에 출국한 오씨와 고씨도 이같은 방법으로 5월에서야 정상에 섰다. 그러나 한 번 정상에 선 뒤에는 별도의 고산 적응이 필요 없다. 이 때문에 이들은 첫 등정 성공 뒤 베이스캠프로 내려와 다음 목표의 베이스캠프까지 헬리콥터로 이동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단축했다. 김남일(47) 서울산악연맹 청소년위원장 겸 구조대장은 “고씨가 올해 안에 14좌를 모두 오르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안다.”면서 “뒤늦게 시작했지만 경쟁자들을 따라잡으려고 어려운 일을 꿈꾼 것 같다.”고 말했다. 대한산악연맹 이의재 사무국장은 “히말라야 등 고봉에 도전하는 연간 150~160명을 지원하기는 벅찬 현실”이라면서 “고씨나 오씨와 같이 최고 난이도의 기술과 장비를 동반하는 경우 안전에 유의하라는 당부 말고는 딱히 할 수 없다.”고 털어놨다. “천천히 음미하며 등반을 해야 하는데 스포츠처럼 경쟁하다 보면 무리가 따른다.”는 산악인 허영호(55)씨의 말은 자연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진리를 되돌아보게 한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톈안먼 아닌 농촌으로 가라”

    │베이징 박홍환특파원│중국 현대사의 기념비적 사건인 ‘5·4운동’ 90번째 기념일인 4일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광장에는 당시 울려퍼졌던 학생들의 함성은 들리지 않았다. 대신 ‘우이제(5·1節) 휴가’를 맞아 중국 각지에서 올라온 관광객들만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광장 주변에는 베이징시 공안(경찰)의 삼엄한 경계가 여전했다. 이 같은 ‘풍경’은 10월1일 중국 건국 60주년 기념일까지 계속될 전망이다. 중국의 양대 지도자인 후진타오(胡錦濤) 주석과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는 ‘5·4운동’ 기념일을 앞두고 각각 베이징 시내 대학을 찾아 학생들을 만났다. 후 주석은 2일 중국농업대학, 원 총리는 3일 칭화(淸華)대를 방문, 5·4운동의 주역인 대학생들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들이 건넨 대화의 요지는 “톈안먼이 아닌 농촌과 변방을 파고들어 이상을 키우라.”는 것. 후 주석 등은 ‘톈안먼’을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21세기 중국이 젊은 대학생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애국주의’이며 애국의 뿌리를 키우기 위해서는 ‘농촌과 변방’에서의 경험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원 총리는 곧 농촌과 서부 변경지역 등으로 떠날 칭화대 졸업생들에게 “조국의 서부와 기층민중에 뿌리내리는 견실한 씨앗이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며 “그것이 (지금의 대학생들이) 국가에 봉사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말했다. 후 주석도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갖고 근면하게 일해 조국의 부흥에 기여하라.”며 “자발적으로 기층조직에서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중국의 두 지도자가 5·4운동 기념일에 대학을 찾아 농촌과 기층, 변경 등을 거론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대목으로 해석된다. 한 달 뒤(6월4일)로 다가온 톈안먼 사태 20주년과 무관치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 5·4운동이나 톈안먼 사태나 모두 대학생들의 톈안먼광장 시위로 시작됐다. 5·4운동은 반제국주의, 반일, 반군벌의 기치를 내세운 반면 톈안먼 사태는 중국 공산당 개혁이 테마였다. 비록 목적과 주장이 달랐지만 70년 시차로 발생한 중국내 양대 학생운동의 동기는 같았다. 베이징의 한 외교소식통은 “중국 정부는 5·4운동을 기점으로 하는 중국 학생운동이 더 이상 반정부 시위로 번지지 않길 바라고 있다.”며 “서부와 농촌 진출을 독려하는 것도 애국주의 고취와 함께 이런 희망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stinger@seoul.co.kr
  • 한국 폄하 만화 ‘혐한류 4’ 출간 논란

    한국 폄하 만화 ‘혐한류 4’ 출간 논란

    한일 양국에서 논란을 불러 일으킨 일본 만화 ‘혐한류’(マンガ嫌韓流) 시리즈 4편이 오는 30일 출간된다. 이 시리즈의 저자인 우익작가 야마노 샤린(山野車輪)은 지난 24일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4편의 내용은 ‘재일한국인 특집’이라고 밝혔다. 일본에서 ‘혐한류’ 시리즈를 출판하는 ‘신유샤’(晋遊舎)는 자사 홈페이지(shinyusha.co.jp)에 특집 사이트를 만들어 “몇 년 안에 재일한국인은 내정간섭을 할 수 있는 ‘외국인참정권’과 언론탄압을 합법화하는 ‘인권옹호법’을 손에 넣어 일본을 탈취하는 최종단계에 돌입한다.”는 자극적인 광고 문구를 내세워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지난 2007년 출간된 3편에 이어 2년 만에 등장한 이번 4편도 “재일한국인의 일본침략”, “재일 한국인이 일본에 강제 연행됐다는 주장은 특권과 돈을 받아내기 위한 사기도구”, “외국인참정권과 인권옹호법은 일본을 망치는 무기”라는 자극적인 타이틀이 실려 있다. 또 한국을 “성범죄대국”으로 칭하며 “강간민족의 기원”, “슬픈 속국의 역사”라는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지난 2005년 1편이 처음 출간된 ‘혐한류’ 시리즈는 재일한국인 차별문제, 반일문제 등을 다루며 한국사를 왜곡해 큰 논란을 일으켰다. 출판사 측은 이 시리즈가 총 9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현지에서 큰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고 전했다. 사진=amazon.co.jp 문설주기자 spirit0104@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박홍환 특파원 베이징은 지금] 후야오방 20주기 앞두고 초긴장

    최근 베이징에서 친목 모임을 가지려던 한 외국인 단체는 베이징시 공안 당국으로부터 집회불허 통보를 받았다. 지난해까지는 아무런 제재도 없이 모임을 가졌던 터라 여러차례 재고를 요청했지만 공안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이 단체는 베이징시 경계를 벗어난 허베이(河北)성의 한 소도시로 장소를 옮겨 모임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티베트 봉기 50년(3월10일)을 무사히 넘긴 중국이 이번엔 톈안먼(天安門) 사태 20년(6월4일)이 가까워짐에 따라 또다시 긴장 상태에 돌입했다. 특히 15일은 톈안먼 사태를 촉발시킨 계기가 된 후야오방(胡耀邦)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의 20주기여서 중국 공안 당국은 긴장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후야오방은 중국의 혁명 1세대 가운데 대표적인 개혁주의자. 1981년 6월 공산당 제11기 6중전회(제6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마오쩌둥(毛澤東)의 오류를 비판하면서 총서기에 선임됐으나 87년 1월 반일시위에서 비롯된 대학생들의 민주화 시위에 온건하게 대처했다는 이유로 덩샤오핑(鄧小平)에 의해 실각했다. 그로부터 2년여 뒤인 1989년 4월15일 후야오방이 사망하자 대학생들은 잇따라 애도 집회를 가지면서 정부에 대대적인 민주개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사흘 뒤 대학생 1000여명은 최고 권부인 중난하이(中南海)로 몰려가 후야오방의 복권을 요구했고, 장례식이 치러진 4월21일 대학생 20만명이 톈안먼 광장에 운집, 사태는 더욱 확대됐다. 톈안먼 광장에서의 대학생 단식투쟁 등에 대한 동조여론이 확산되는 등 사태가 심상치 않게 전개되자 중국 지도부는 결국 강제진압을 결정, 6월4일 인민해방군을 톈안먼 광장에 투입했다.중국 정부가 그의 20주기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그의 개혁정신에 대한 복권 요구가 가져올 폭발력 때문이다. 그의 탄생 90주년인 2005년 일부 복권 시도가 있었고, 그를 기리는 홈페이지(www.hybsl.cn)도 개설됐지만 중국에서는 아직도 톈안먼 사태와 관련된 부분은 이야기하는 것이 금기시돼 있다. 중국 정부는 지난 13일 사상 처음으로 참정권의 확대와 인권개선 방안 등을 담은 인권행동계획을 발표했다. 톈안먼 사태 20주년을 앞둔 시점이라는 점에서 ‘민심 달래기’가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stinger@seoul.co.kr
  • [김문 전문기자 인물 프리즘] 네팔에 초등학교 짓는 산악인 엄홍길

    [김문 전문기자 인물 프리즘] 네팔에 초등학교 짓는 산악인 엄홍길

    그것은 한 사나이가 히말라야 산신(山神)과 주고 받은 숙명의 약속이었다. “제발 나를 (산에서)살려 보내주신다면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키우는 데 일생을 바치겠나이다.”라고 20년 동안 간절히 빌고 빌었다. 마침내 사나이는 신의 가호 아래 2007년 5월 히말라야 16좌를 세계 최초로 완등했다. 그리고 이제 네팔의 어린이들을 가슴으로 품기 시작했다. ●교실·강당 갖춘 현대식 건물… 내년초 완공 영원한 산악인 엄홍길(49·㈜ 에델바이스)씨. 지난해 12월 ‘불멸의 도전’ 사진집을 출간할 때였다. 20년 산악인의 인생을 회고하면서 환경파괴와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기후변화 현장 탐험가’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고 천명했다. 아울러 자연사랑, 인간사랑, 꿈과 희망의 전도사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이런 취지에서 지난해 ‘엄홍길 휴먼재단’(이사장 김앤장 대표변호사 이재후)이 설립됐다. 그 첫번째 프로젝트가 바로 네팔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를 짓는 것. 이달 말 엄씨는 휴먼재단 일행 30여명과 함께 출국해 다음달 5일 어린이날을 맞아 네팔의 쿰푸히말라야 팡보체 마을에서 기공식을 갖는다. 규모는 2개의 교실과 강당이 있는 현대식 건물로 내년 초 완공된다. 이에 앞서 4일부터 한 달동안 서울 종로구 구기동 ‘시우터 아트 무한스페이스’에서 ‘희망, 그 새로운 도전’이라는 엄씨의 에베레스트 사진전이 열린다. 히말라야 16좌의 아름답고 고요한 정상의 모습, 등반일지 속에 담긴 성공과 실패를 통해 아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기 위해 마련됐다. 수익금은 네팔 어린이들의 배움터를 만들어주는 데 쓰인다. 서울 중구 태평로 프레스센터 지하 전통찻집에서 엄씨를 만나 악수를 했더니 역시 히말라야 산 사나이의 기(氣)가 강한 전율로 다가왔다. 먼저 네팔에 초등학교를 짓게 된 동기부터 물었다. “1985년부터 히말라야 등정에 나섰지요. 첫번째도 실패했고 이듬해 등정할 때도 실패했습니다. 두번째에는 네팔 팡보체 마을에 살고 있던 셰르파와 동행했는데 기상악화로 불행하게도 추락사를 당해 시신도 못 찾았습니다. 당시 그는 결혼한 지 3개월밖에 안 됐지요. 1988년 세번째 등정에 성공한 뒤 팡보체 마을에서 유가족인 부인과 어머니, 여동생과 자녀도 만났습니다. 그때 제가 학교를 짓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곳에는 어린이가 50여명이 사는데, 초등학교 시설이 열악해 제대로 배우질 못하는 상황이었지요. 결국 제가 목표를 이루고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도 히말라야 신의 보살핌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산간오지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 주고 싶어 팡보체 마을이 어떤 곳이냐고 했더니 “수도 카트만두에서 소형 비행기를 이용해 해발 2700m 지역에 내린 다음 3박4일 동안 걸어가야 하는 네팔 북부의 산간오지”라고 하면서, 작년 연말에도 치과의료 봉사단원들과 다녀왔으며 이번에도 의료봉사도 하고 문구용품 전달식도 가질 예정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이어 자신의 청춘 대부분을 히말라야에서 무사히 보낸 만큼 앞으로는 그 보답을 하는 삶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당시 사망한 셰르파 부인은 여전히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그동안 등정을 하면서 동료도 잃고... 살아남은 자로서 유가족을 지키고... 현지 어린들에게 희망과 꿈을 주는 일을 해야지요.” 상명대 석좌교수로 일주일에 6시간 강의를 한다는 그에게 어떻게 하면 주말 산행에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느냐고 했다. 무작정 오르지 말고 산을 사랑하고 속삭이라고 하면서 “알파인 스틱 두 개를 사용해 오를 때는 짧게, 내려올 때는 조금 길게 하면 덜 힘들고 안전하다.”고 조언했다. 슬하에 1남1녀를 둔 그는 주말을 이용해 지인들과 함께 도봉산과 북한산 등을 산행한다. km@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 日언론 “김연아 방해 발언, 일방적이다”

    日언론 “김연아 방해 발언, 일방적이다”

    일본 언론이 김연아 선수에 대한 일본 선수들의 고의적인 연습방해 지적에 대해 “세계선수권대회를 앞둔 라이벌 견제”라며 반박하고 나섰다. 지난 14일 김연아 선수가 SBS와의 인터뷰에서 지난달 캐나다에서 열린 4대륙피겨스케이팅선수권대회 때 연습방해를 받았다고 밝힌 뒤 인터넷 상에 이와 관련된 동영상이 유포되면서 많은 한국 팬들이 분노했다. 이에 일본 ‘스포츠호치’는 16일 “한국 TV방송국이 김연아 선수가 일본 선수에게 방해를 받았다고 보도했다.”며 “이 영상이 각종 인터넷 게시판에 퍼져 반일 감정이 폭발하는 등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일본 스케이트 관계자들이 김연아 선수의 발언에 곤혹스러운 기색”이라며 일본 스케이트 연맹 이토 히데히토 피겨 위원장의 해명을 함께 소개했다. 이토 위원장은 일단 김연아 선수의 발언에 대해 몰랐다는 반응이다. 그는 “현재 한국 스케이트 연맹이나 선수 측에서 항의를 받은 적은 없다.”며 “지난 4대륙선수권대회 현지에서도 항의는 없었다. 의도적으로 방해를 하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축했다. 신문은 “이번 김연아 선수의 발언은 일방적이고, 갑작스러운 느낌도 부정할 수 없다.”며 “심리적 압박감 때문에 예민해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리고 한 피겨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이번같은 갑작스러운 ‘일본 때리기’는 3월 말에 세계선수권대회가 있기 때문에 일본을 견제한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한편 이 소식을 접한 일본 네티즌들은 “올림픽을 앞두고 일본 선수들을 견제하려는 심리전”이라며 “반일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발언”이라고 비난의 수위를 높였다. 문설주기자 spirit0104@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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